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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幻影) 환영(幻影)Thomas mann 내가 기계적으로 궐련을 하나 새로 말고 있는데. 섬세한 향내가 코를 찌르는 그 갈색 담뱃가루가 접이식 필기판의 연미색 압지 위로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린다. 그런데도 내가 아직 깨어 있다는 것이 사실같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내 옆 열려 있는 창에서 들어오는 따스하고 습한 저녁 공기가 담배 연기를 아주 기묘한 모양으로 만들어서, 녹색 갓을 씌운 램프의 불빛 영역으로부터 뿌연 어둠 속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내가 벌써 꿈을 꾸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상황은 이미 아주 고약하게 꼬이게 마련인데, 그런 생각 자체가 환상의 등줄기에다 고삐를 내리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내 뒤에서 의자 등받이가 아주 은밀하게 약을 올..
환멸 환멸Thomas mann 고백하자면, 그 이상한 신사가 들려준 이야기는 나를 완전히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날 저녁 나 자신이 느꼈던 것과 같이 다른 사람들도 그와 비슷하게 느낄 수 있도록 내가 과연 그 신사의 이야기를 지금 다시 한번 되풀이해서 옮겨놓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쩌면 그 이야기의 효과는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이 내게 털어놓은 그 보기 드문 솔직한 태도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가을날 오전 전혀 알지 못하던 그 남자가 산 마르코 광장에서 처음 내 눈에 띄었던 것은 지금부터 약 두 달 전이다. 넓은 광장에는 단지 몇 안 되는 사람들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 경이로운 건축물, 즉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는 대성당 앞에는 가벼운 바닷바람에 여러 개의 깃발들이 펄럭거렸고, 대성..
행복을 향한 의지 행복을 향한 의지Thomas mann 노(老) 호프만은 남아메리카에서 식민 농장으로 돈을 벌었다. 거기서 그는 좋은 집안 출신의 토착민 여자와 결혼했고 곧이어 그녀와 함께 고향인 북독일로 돌아왔다. 그들은 내 고향 도시에 생활의 터전을 잡았는데 그곳은 또한 그의 집 안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파올로는 거기서 태어났다. 파올로의 부모님을 나는 가까이 알지는 못했다. 어쨌든 파올로는 어머니를 꼭 빼닮았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다시 말해 우리의 아버지들이 우리를 처음 학교에 데려갔을 때, 파올로는 마른 체구에 노란색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곱슬 거리는 검은 머리는 세일러 양복의 칼라까지 길게 내려와 갸름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집에서 부..
토비아스 민더니켈 토비아스 민더니켈Thomas mann 1‘부두 골목’에서부터 도시의 중심으로 상당히 가파르게 올라가는 여러 거리들 가운데 ‘회색 길’이라고 불리는 거리가 있다. 이 거리의 대략 중간쯤, 강 쪽으로부터 올라오자면 오른편에 47번지 집이 있는데, 폭이 좁고 우중충한 색깔의 건물로 이웃집들과 구별되는 점이 아무것도 없는 집이다. 고양이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안뜰을 내다보며 현관 복도를 지나가면, 폭이 좁고 닳고 닳은 나무 계단이 위층으로 연결되는데, 그 계단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퀴퀴하고 옹색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2층의 왼쪽에는 소목장이가 살고 있고, 오른쪽에는 산파가 산다. 3층의 왼쪽에는 구두 수선공이 살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여자가 혼자 살고 있는데, 그녀는 계단에서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
죽음 죽음Thomas mann 9월 10일이제 가을이다. 여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코 다시는 여름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잿빛 바다는 고요하다. 슬픔을 자아내는 이슬비가 내린다. 오늘 아침 그 풍경을 보면서 나는 여름과 작별하고 가을을 맞이했다. 이제 정말로 무자비하게 다가온 나의 마흔 번째 가을을. 그리고 이번 가을은 가차 없이 그날을 데려올 것이다. 나는 이따금 그 날짜를 혼자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경건하면서도 은근히 두려운 기분으로……. ​9월 12일나는 어린 아중시온(Asuncion. 포르투갈어로 승천昇天을 의미함)과 잠깐 산책을 했다. 이 아이는 좋은 길동무이다. 말 수 없는 이 아이는 이따금 그냥 눈을 크게 뜨고 다정하게 나를 올려다본다.우리는 크론스하펜으로 가는 해변 길을 걸..
응징 응징Thomas mann “아주 단순하고 또 너무나도 기본적인 진리를 입증하려고 말이야.” 꽤 늦은 밤 안젤름이 말했다. “우리네 삶은 쓸데없이 온갖 묘한 증거들을 갖다 대곤 하지.”두냐 슈테게만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고 지극히 어리석었다. 인생의 따끔한 맛을 보고 철이 들겠다고 꾸준히 노력하면서도 나는 이 과정을 완수하는 것과는 아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다.내 욕망들은 고삐가 풀려있었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욕망들을 충족시키는 데에 몰두했다. 나는 내 생활 태도에 내재 되어있는 이런 호기심 어린 방탕에다 이상주의를 아주 우아하게 결합시키고자 했다.여기서 이상주의라 함은 그 이름 밑에서 내가 이를테면 한 여인과의 순수하고 정신적인━정말 절대적인 정신적이기만 한━친숙한 관계를 간절하..
옷장 옷장Thomas mann 베를린과 로마 사이를 오가는 급행열차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한 기차역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날씨는 흐렸고 어둑어둑했으며 써늘했다. 플러시(plush) 천으로 만든 넓은 의자 위에 멋진 레이스 커버를 씌운 일등석 객실에서 혼자 여행하던 한 남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이름은 알브레히트 판 데어 크발렌이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입에서 맥빠진 듯한 맛을 느꼈다. 그의 육신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감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차가 꽤 오래 달리다가 정지했고, 리드미컬하게 반복해서 끊임없이 바퀴가 구르던 소리가 멈추고 정적이 찾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고요함은 바깥의 소음들, 외치는 소리들, 각종 신호들과 묘하게도 의미심장하게 대비되었다······. 이러한 상태는 어떤..
공동묘지로 가는 길 공동묘지로 가는 길Thomas mann 공동묘지로 가는 길은 넓은 큰길과 평행선을 이루며 그 목적지, 즉 공동묘지에 이를 때까지 줄곧 쭉 뻗어 있었다. 그 길의 다른 편에는 처음에는 인가들, 즉 아직 부분적으로 공사 중인 교외의 신축건물들이 있었지만, 조금 더 가면 들판이었다. 양쪽의 나무들, 즉 나이가 지긋하게 든 용이진 너도밤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큰길로 말할 것 같으면, 절반만 포장이 되어있었을 뿐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공동묘지로 가는 길에는 가볍게 자갈이 깔려 있었고 그 때문에 다니기 좋은 길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잔디와 들풀로 뒤덮여 있는, 물이 마른 좁다란 도랑 하나가 그 두 길 사이로 지나가고 있었다. 때는 봄, 벌써 거의 초여름이었다. 세계는 미소 짓고 있었다. 하느님이 주신 파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