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幻影)
Thomas mann
내가 기계적으로 궐련을 하나 새로 말고 있는데. 섬세한 향내가 코를 찌르는 그 갈색 담뱃가루가 접이식 필기판의 연미색 압지 위로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린다. 그런데도 내가 아직 깨어 있다는 것이 사실같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내 옆 열려 있는 창에서 들어오는 따스하고 습한 저녁 공기가 담배 연기를 아주 기묘한 모양으로 만들어서, 녹색 갓을 씌운 램프의 불빛 영역으로부터 뿌연 어둠 속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내가 벌써 꿈을 꾸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상황은 이미 아주 고약하게 꼬이게 마련인데, 그런 생각 자체가 환상의 등줄기에다 고삐를 내리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내 뒤에서 의자 등받이가 아주 은밀하게 약을 올리며 삐걱거리는 통에 갑자기 소름이 확 끼쳐오면서 내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다. 그리하여 담배 연기가 내 주위를 맴돌면서 그려내는 기이한 문자들의 깊은 의미를 알아내고 그 문자들이 함유하는 어떤 고통의 모티브를 창안해 내고자 하던 나는 짜증스럽게도 방해를 받게 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 평온은 깨져 버렸다. 내 모든 감각이 미쳐 날뛰고 있다. 신열이 나는 듯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미칠 것만 같다. 날카로운 소리들이 들려온다. 이 모든 소리들과 뒤섞여서 잊고 있던 일이 떠오른다. 언젠가 나의 시각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던 것이 묘하게도 다시 그 당시 느꼈던 그 감정과 함께 떠오른다.
내 시선이 어둠 속의 그 지점에 꽂히자 시선의 각도가 탐욕스럽게 자꾸 넓어지는 것을 나는 얼마나 재미있게 보고 있는가! 그 지점에서 밝은 조각상 같은 것이 점점 뚜렷하게 보인다. 내 시선이 그것을 확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사실은 상상 속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그래서 내 시선은 점점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나는 점점 더 시선을 집중하고 점점 더 또렷하게 보게 되면서 점점 더 마법에 빠져든다······, 점점 더.
이제 그것은 거기에 있다. 아주 또렷하게, 그 당시처럼 아주 또렷한 형상으로, 우연의 예술 작품으로서 거기에 있다. 그 형상은 환상이라는 기막히게 재능 있는 예술가에 의해 망각으로부터 깨어나 다시 창조되고 조형되고 그려져서 거기에 있는 것이다.
크지 않다. 작다. 실은 완전한 형상도 아니다. 그렇긴 해도 그 당시처럼 완성된 작품이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무한히 사방으로 몽롱하게 퍼진다. 하나의 천체다. 하나의 세계다. ⎯그 속에서 빛이 아른거리고, 깊고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주위 세계의 웃어젖히는 소음은 전혀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아마도 지금의 주위 세계로부터는 아무 소음도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 당시에는 들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닥에 깔린 다마스쿠스 비단이 눈부시다. 비단에 수 놓인 잎들과 꽃 들은 끝부분에 비스듬하게 톱니 모양을 이루어 둥글게 마감되고 휘감겨 있다. 그 위로 호리호리하게 우뚝 솟은 투명한 크리스탈 잔은 반쯤 높이로 연한 금빛 칠이 되어 있다. 잔 앞으로 어떤 손 하나가 꿈을 꾸는 듯 내밀어져 있다. 잔에 달린 긴 다리 주변을 벌어진 손가락이 감싸고 있다. 그중 한 손가락에는 광택이 없는 은반지가 끼워져 있다. 반지에 박힌 루비가 피를 흘리는 듯 선홍색이다.
부드러운 관절에 이어 점차 형태가 굵어지며 팔이 되려고 하는 부분에서 이미 윤곽은 전반적으로 몽롱하게 풀어진다. 달콤한 수수께끼다. 그 소녀의 손은 꿈을 꾸는 듯 미동도 없다. 나른한 하얀 손 위로 담청색 혈관 하나가 고불고불 부드럽게 흐르고 있다. 그곳에서만 생명이 약동하고, 열정이 천천히 그러나 세차게 뛰고 있다. 나의 시선을 느끼자 그것은 점점 더 빨라지고 점점 더 거칠어지다가 급기야 애원하듯 떨린다. 그만 보세요······!
그러나 그 당시처럼 나의 시선은 지독한 관능적 쾌락을 만끽하며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내 시선은 사랑과의 전쟁이, 그리고 사랑의 승리가 떨면서 고동치고 있는 그 손 위에 머물고 있다······. 그 당시처럼······. 그 당시처럼······.
잔이 놓인 바닥으로부터 천천히 진주 한 알이 떨어져 나와 위쪽으로 둥실 떠 오른다. 루비가 발하는 빛의 영역으로 들어서자 진주는 피처럼 선홍빛으로 타오르고, 그러나 돌연 그 표면에서 불꽃이 사라져버린다. 그 순간 뭔가에 방해라도 받은 듯 모든 것이 사라지려 한다. 내가 그 부드러운 윤곽들을 새로이 그려보고자 아무리 내 시선에 힘을 주며 애를 써 봐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제 그것은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깊고 한숨을 쉰다. 그동안 내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도 역시 그랬듯이······.
피곤해서 몸을 뒤로 기대는데. 고통이 경련처럼 인다.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이제 나는 분명히 알 수 있다. ⎯네가 나를 정말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내가 지금 울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