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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향한 의지

행복을 향한 의지

Thomas mann

 

() 호프만은 남아메리카에서 식민 농장으로 돈을 벌었다. 거기서 그는 좋은 집안 출신의 토착민 여자와 결혼했고 곧이어 그녀와 함께 고향인 북독일로 돌아왔다. 그들은 내 고향 도시에 생활의 터전을 잡았는데 그곳은 또한 그의 집 안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파올로는 거기서 태어났다.

파올로의 부모님을 나는 가까이 알지는 못했다. 어쨌든 파올로는 어머니를 꼭 빼닮았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다시 말해 우리의 아버지들이 우리를 처음 학교에 데려갔을 때, 파올로는 마른 체구에 노란색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곱슬 거리는 검은 머리는 세일러 양복의 칼라까지 길게 내려와 갸름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집에서 부족한 것 없이 아주 잘 지냈기 때문에 새로운 환경, 황량한 교실, 특히 우리에게 그저 ABC만 가르치려고 하는 붉은 수염의 초라한 남자 선생님에게 도저히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가려고 하자 나는 울면서 아버지의 양복 웃저고리를 잡고 늘어졌고 그에 반해 파올로는 아주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벽에 기대어 얇은 입술을 꼭 깨물고는 눈물이 그득한 커다란 눈으로 희망에 부풀어 있는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애들은 서로 몸을 부딪쳐 옆으로 밀어내고는 심술궂게 입을 비죽이며 웃고 있었다.

이렇게 도깨비 같은 무리에 둘러싸인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 마음이 끌려서 붉은 수염의 선생님이 우리 둘을 나란히 앉도록 했을 때 아주 좋아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줄곧 붙어 다니며 함께 공부의 기초를 다졌고 도시락도 날마다 바꾸어 먹었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그는 그때 이미 몸이 좋지 않았다. 이따금 학교를 오랫동안 결석했으며 다시 나타났을 때는 관자놀이와 뺨에 보통 때보다 더욱 선명하게, 연약한 갈색 피부의 사람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창백한 푸른 핏줄이 드러났다. 그는 항상 그걸 지니고 다녔다. 우리가 여기 뮌헨에서, 그리고 나중에 로마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도 역시 그 선명한 핏줄이었다.

학교 다니는 동안 내내 우리의 우정은 처음 생겼을 때와 비슷한 이유에서 계속 유지 되었다. 그건 대부분의 동급생들에 대한 거리두기라는 격정’(니체의 선악의 피안에서 인용한 구절이다)으로서 열다섯의 나이로 몰래 하이네를 읽고 인문계 고등학교 4학년생으로서 세계와 인간에 대해 결정적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학생이라면 다 아는 것이었다.

내 기억에 우리가 열여섯이 됐을 때의 일인데 이때도 우리는 함께 춤을 배우러 다녔고 이어서 똑같이 첫사랑을 경험했다.

그의 마음에 들었던 작은 여학생은 금발 머리에 아주 명랑한 성격으로 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뜨겁게 불타는 우울한 마음으로 그녀를 숭배해서 때때로 나에게 섬뜩한 생각이 들 게 만들었다.

특히 한 댄스파티에서의 일이 기억난다. 그 여학생은 번갈아 가며 짝을 만나는 카운터 댄스에서 어떤 남학생에게 연달아 두 개의 선물을 주면서 그에게는 하나도 주지 않았다. 나는 걱정이 되어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벽에 기대어 내 옆에 서 있었는데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자기의 에나멜 구두만 응시하더니 갑자기 기절해서 쓰러져 버렸다. 사람들은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갔고 그는 일주일이나 아파서 누워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의 심장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었던 것 같다.

이 일이 있기 전부터 그는 이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뛰어난 소질을 발전시켜 나갔다. 나는 이때 그린 그의 그림을 한 장 갖고 있는데 그것은 데생 연필로 그 여학생의 특징을 잡아서 정말 그녀와 똑같이 그린 것으로 거기에는 <너는 한 송이 꽃! 파올로 호프만>이라는 사인이 들어 있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의 부모님이 우리 도시를 떠나 그의 아버지와 연고가 있는 칼스루에에 정착하게 됐을 때 우리는 이미 상급반 학생이었다. 파올로는 학교를 바꾸면 안 된다고 해서 어떤 노교수 집에 하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다음의 사건이 파올로가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을 따라 칼스루에로 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된 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거기에 일조를 한 것만은 틀림없다.

종교 시간에 담당 선생님이 갑자기 꼼짝 못하게 파올로를 쏘아보며 그에게로 다가가서 앞에 놓인 구약성서 아래에서 종이 한 장을 끄집어냈던 것이다. 거기에는 왼쪽 발까지 완성된 아주 여자답게 생긴 아름다운 여성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람들의 시선 앞에 노출되어 있었다.

어쨌든 파올로는 칼스루에로 갔다. 그리고 우리는 가끔 엽서를 주고받다가 점차로 뜸해져 나중에는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내가 뮌헨에서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 대략 5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날씨가 좋은 어느 봄날 오전에 나는 아말리에 가()를 걸어 내려가다 누군가가 아카데미의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멀리서 봤을 때 이탈리아 사람 같은 인상을 주었다. 가까이 가보니 그는 파올로였다.

중키에 말랐고 숱이 많은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노란 피부에는 핏줄이 파랗게 드러나 있었다. 옷차림은 우아하기는 하지만 별로 신경 쓰지는 않은 것 같아서, 예를 들면 조끼 단추가 몇 개 채워져 있지 않았다. 짧은 콧수염은 약간 휘말려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그는 흔들거리는 무심한 걸음으로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아주 반갑게 인사를 했다. 우리가 카페 미네르바에서 지난 몇 해 동안을 어떻게 보냈는가에 대해 서로 번갈아 가며 물어보는 사이에 그는 기분이 들떠서 거의 흥분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 눈은 빛나고 있었고, 몸 움직임은 컸다. 그러면서도 몸이 좋아 보이지는 않아서 정말로 아픈 것 같았다. 지금은 물론 가벼운 얘기를 해야겠지만, 그러나 정말로 그게 눈에 띄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그대로 말했다.

그래, 여전히 그래 보여?”하고 그가 되받아 묻고는 말했다.

그래, 그렇겠군. 난 사실 많이 아팠어. 지난해까지만 해도 오랫동안 심하게 아팠어. 여기가 문제야.” 그는 왼손으로 가슴을 가리켰다.

심장 말이야. 그때부터 그냥 그 상태야.⎯⎯그렇지만 최근에는 아주 사태가 좋아, 최상의 컨디션이지. 아주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어. 이제 겨우 스물세 살이니⎯⎯그렇지 않다면 사실 슬픈 일이지.”

그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우리가 헤어지고 난 후의 생활에 대해서 활발하고 재미있게 이야기했다. 나랑 헤어지고 나서 그는 바로 부모님을 설득시켜서 화가가 돼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는 대략 6개월 전에 아카데미를 -방금 그가 거기 있었던 것은 그러니까 정말 우연이었다- 끝마쳤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얼마 동안 여행을 해서 특히 파리에 살기도 하다가 이제 대략 다섯 달 전부터 여기 뮌헨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오랫동안 여기 살게 될지도 몰라⎯⎯누가 알아? 혹시 영원히 살게 될지.”

그래?”하고 내가 물었다.

글쎄, 그렇다고 해야겠지. 그 말은⎯⎯안 될 이유가 없다는 말이야. 이 도시가 마음에 들어. 예외적으로 마음에 들어! 전체 분위기가 말이야⎯⎯분위기가 어떤데 그러냐구? 사람들이 좋아! 그리고 이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는데 화가로서의 사회적인 위치가, 비록 무명의 화가라고 하더라도, 아주 좋다는 거야. 여기보다 더 나은 데는 없어.”

좋은 사람들도 알게 됐어?”

그래. 몇 안 되지만 아주 좋은 사람들이야. 예를 들면 한 가족이 있는데 사육제에서 알게 됐지. 여기 사육제는 아주 매력이 있어! 슈타인 씨 댁이야. 바로 말하면 슈타인 남작 댁이지.”

어떤 귀족인데?”

사람들이 흔히 돈 주고 샀다고 말하는 귀족이지. 남작은 중개상인으로 전에는 빈에서 굉장한 역할을 하면서 군주를 비롯한 높은 사람들하고 왕래를 했다는군. 그러나 갑자기 몰락해서 대충 백만 정도를 가지고 이리로 옮겨왔대⎯⎯이제는 현역에서 벗어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품위 있게 살고 있어.”

그래 그 양반은 유대인인가?”

내 생각에 남작 쪽은 아닌 것 같아. 부인은 아마 그럴 거야. 하여튼 참 편안하고 세련된 사람들이라는 걸로 밖에 표현할 말이 없어.”

애들도 있어?”

아니, 애들이 아니라 열아홉 살 된 딸만 하나 있지. 그 부모님은 정말 정이 가는 분들이야.”

그는 순간적으로 난처해하는 것 같더니 덧붙여 말했다.

내가 진심에서 제안하는 건데, 자네를 그 집에 한 번 데리고 가겠네. 정말 그러고 싶어. 찬성하는 거지?”

그럼, 물론이지. 데리고 가주면야 고맙지. 그 열아홉 살 된 딸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말이야.”

그는 나를 슬쩍 곁눈질해 보면서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 오래 끌 거 없겠어. 괜찮다면 내가 내일 한 시나 한 시 반에 자네를 데리러 오겠네. 그 사람들은 테레지에 가() 25번지, 2층에 살고 있어. 학교 때 친구를 소개시키게 돼서 여간 기쁘지 않은걸. , 그럼 약속한 거야.”

그다음 날 점심 때쯤 해서 우리는 정말 테레지에 가에 있는 어느 근사한 집의 2층에서 초인종을 울리고 서 있었다. 초인종 옆에는 굵고 검은 글씨로 폰 슈타인 남작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집에 가는 도중에 파올로는 내내 흥분돼 있어서 거의 들떴다고 할 만큼 신이 나 보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나는 그의 태도가 이상하게 변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옆에 서 있는 동안에 그의 모든 것이, 눈꺼풀의 불안정한 떨림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착 가라앉아 보였다. 그것은 아주 강력한, 팽팽히 긴장된 차분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의 머리는 약간 앞으로 나와 있었고 이마는 바짝 당겨져 있었다. 그는 마치 귀를 쫑긋 세우고 모든 근육을 긴장시키며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우리 명함을 받아든 하인은 다시 돌아와, 남작 부인인 곧 나오실 테니 잠깐 자리에 앉아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방문을 열어 적당한 크기의, 어두운 가구로 꾸며진 어느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가 들어서자 거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베란다 쪽에서 밝은 봄옷 차림의 젊은 여성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살피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며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열아홉 살 된 딸이로군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무심결에 옆에 있는 친구에게 곁눈질을 보냈다.

남작 따님 아다 양이야!”하고 그가 나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우아한 자태에 나이 치고는 성숙해 보였다. 몸 움직임이 너무 부드러워 거의 느려 보일 정도여서 마치 어린 소녀 같은 인상을 주었다. 관자놀이 뒤로 넘겨서 이마로 두 줄 흘러내리도록 한 그녀의 머리는 검은색으로 윤기가 나면서 창백한 하얀 피부 색깔과 효과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둥글고 촉촉한 입술, 살집이 있는 코, 편도 열매 모양의 길쭉하고 검은 눈, 그리고 그 위로 부드러우면서 짙게 곡선을 그리고 있는 눈썹 등은 그녀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유대 혈통을 지녔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게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녀의 얼굴은 드물게 아름다웠다.

, 손님이 오셨나요?”하고 물으면서 그녀는 우리 쪽으로 몇 발자국 다가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꾸민 것처럼 들렸다. 그녀는 좀 더 잘 보기 위해서인 듯 한쪽 손을 이마에 갖다 댔고 다른 손으로는 벽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 위에 기댔다.

게다가 아주 반가운 손님이시네요.”하고 그녀는 같은 어조로 마치 내 친구를 이제 비로소 알아본 것처럼 덧붙였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나를 향해 누군지 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파올로는 그녀에게 다가가 거의 졸지 않나 생각될 만큼 느리게, 귀하게 얻은 즐거움을 음미하려는 듯, 말없이 그녀가 내민 손을 향해 몸을 굽혔다.

아가씨.”하고 그가 말을 꺼냈다.

제 학교 동창을 소개해드릴게요. 이 친구하고는 ABC를 같이 배웠지요.”

그녀는 내게도 손을 내밀었는데 마치 뼈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하얀 손에는 아무런 보석 치장도 없었다.

반갑습니다.”하고 말하면서 그녀는 검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원래 그런 듯, 두 눈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부모님께서도 좋아하실 거예요. 오셨다고 안에다 말씀드렸는지 모르겠네.”

그녀는 터키식의 안락의자에 앉았고 우리는 맞은편 의자에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았다. 하얗고 힘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두 손은 이야기하는 동안 가슴에 놓여져 있었다. 풍성한 소매는 팔꿈치를 덮으면서 간신히 바로 그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손목 부위의 연약함이 눈에 띄었다.

몇 분이나 지난 후에 옆방의 문이 열리며 그녀의 부모님이 들어왔다. 남작은 작은 키의 우아한 신사로 대머리에 끝이 뾰족한 회색 수염을 하고 있었다. 그는 흉내 낼 수 없는 특유의 방식으로 굵은 금팔찌를 소맷부리 안쪽으로 집어넣곤 했다. 그가 남작이 되므로 해서 그의 이름에서 음절 몇 개가 떨어져 나갔는지 어쨌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서 그의 부인은 한마디로 멋없는 회색 옷을 입은 작고 못생긴 유대 여자였다. 귀에는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내가 누구란 것이 소개되었고 그들은 아주 친절하게 나를 맞아주었으며 나를 데려온 파올로에게는 가까운 집안 친구에게 하듯 반갑게 악수했다.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오게 됐는지에 대한 몇 가지 질문과 대답이 있고 난 후, 우리는 어떤 전시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거기에는 여자 나체를 그린 파올로의 그림도 하나 들어 있었다.

정말 세련된 작품이야!”하고 남작이 말했다.

나는 최근에 그 앞에 반 시간 정도 서 있었다네 빨간 양탄자와 대조를 이룬 살 색의 톤은 굉장히 효과적이었어. 정말 그렇다니까. 호프만 군!”

그러면서 그는 아끼듯이 파올로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나 무리하게 일해서는 안 되네. 이 사람아! 절대로 안 돼! 자네는 무엇보다도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네. 그래, 건강 상태는 어떤가?”

내가 남작 부부에게 내 개인 신상에 대해서 이것저것 필요한 걸 알려주는 사이에 파올로는 남작 딸을 마주 보고 그 앞에 바짝 다가앉아 소리를 죽여가며 그녀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방금 전에 보았던 그 이상하게 긴장된 차분함은 아직 그에게서 하나도 가시지 않았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내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가운데 그는 마치 도약할 준비가 돼 있는 표범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노랗고 갸름한 얼굴 안의 검은 눈은 병적인 광채를 띠고 있어서 남작의 질문에 대해 그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을 때 나는 거의 섬뜩한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 아주 좋아요! 다 걱정해 주신 덕분입니다! 저는 정말 잘 지내고 있어요!”

대략 십오 분 정도 지나서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남작 부인은 내 친구에게 이틀 있으면 목요일이니까 5시의 차 모임을 잊지 말라고 상기시켰다. 그 기회에 부인은 나에게도 이날을 꼭 기억해 주면 고맙겠다고 청했다.

거리에 나오자 파올로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래, 어때?”하고 그가 물었다. “얘기해 봐.”

그래, 정말 편하고 좋은 사람들이야!”하고 나는 서둘러서 대답했다.

열아홉 살 된 아가씨한테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걸!”

경탄이라고?” 그는 짧게 웃으면서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래, 웃게나!”하고 내가 말했다.

저 위에서는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네. ‘자네의 눈동자에 비밀스러운 그리움이 어려 있는 것처럼’(하이네의 시 저승의 한 구절이다) 말일세.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그는 한순간 침묵했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가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고 싶어.”

됐네, 됐어! 내가 궁금한 건 다만 남작 따님 아다 양.”

그는 다시 잠깐 동안 아무 말 없이 자기 앞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낮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난 행복하게 되리라 생각하네.”

가슴속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진심에서 그의 손을 굳게 잡아주고 그와 헤어졌다.

그러고 나서 몇 주가 흐르는 동안 나는 가끔 파올로와 함께 남작댁의 살롱에서 가지는 오후의 차 모임에 참석했다. 작은 모임이긴 하지만 거기에는 정말 편하고 좋은 사람들이 모였다. 젊은 궁정 여배우, 의사, 장교 등등 지금 와서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기억할 수는 없다.

파올로의 태도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보통은 염려스러운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즐겁고 들떠 있었다. 그러다가 남작 딸의 옆에 가게 되면 매번, 처음에 내가 느꼈던 그 섬뜩한 차분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어쩌다 보니 파올로를 이틀이나 만나보지 못했는데- 루드비히 가에서 폰 슈타인 남작을 만났다. 그는 말을 타고 가다가 멈추어서 말안장에 앉아 내게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가우이. 내일 오후에 집에서 볼 수 있겠지?”

허락하신다면 여부가 있나요. 남작님. 내 친구 호프만이 목요일 저녁마다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저를 데리러 오는 것이 혹시 어렵다 하더라도.”

호프만? 아니 자네는 그 사람이 여행 떠난 걸 모른단 말인가! 난 그 사람이 당연히 자네에게 알렸을 줄 알았는데.”

금시초문인데요!”

그렇게도 완벽하게 갑자기 떠나다니 그런 걸 바로 예술가의 변덕이라고 하는 거라네. , 그럼 내일 오후에 보세나!”

그러고는 그는 말을 움직여 어리둥절해 있는 나를 남겨두고 가버렸다.

나는 서둘러 파올로의 집으로 갔다. 정말 그랬다. 유감스럽게도 호프만 씨는 여행을 떠나셨다는 것이었다. 그는 주소도 남겨놓지 않았다.

남작이 예술가의 변덕이상의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분명히 그럴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을 그의 딸이 직접 나에게 확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건 이자르탈로 놀러 갔을 때의 일이었다. 거기로 소풍 가기로 했나 본데 나도 또한 초대를 받았다. 사람들은 오후 늦게나 돼서야 출발을 했고 그러다 보니 저녁 늦게 돌아오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남작 딸과 나는 마지막 남은 한 쌍으로서 맨 뒤에서 모임을 뒤따라가게 되었다.

나는 파올로가 사라지고 난 후에 그녀에게서 어떤 변화된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완벽하게 평정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그때까지는 내 친구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의 갑작스러운 여행에 대해서 안됐다는 말을 하고는 했지만.

이제 우리는 나란히 서서 뮌헨 주변의 수려한 지역을 걷고 있었다.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은은하게 비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모임의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우리 옆에서 물보라 치며 콸콸 흐르는 물소리처럼 그것 역시 단조롭게 들렸다.

그때 그녀가 갑자기 파올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며 아주 차분하고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어릴 때부터 그이의 친구지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 아가씨.”

서로 비밀 이야기도 하나요?”

파올로가 말하지 않아도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제가 당신을 믿어도 될까요?”

거기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가씨.”

그럼, 좋아요.”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결심했다는 듯이 머리를 쳐들었다.

그이가 저에게 청혼을 했었어요. 그리고 부모님께서는 그걸 거절하셨지요. 두 분이 제게 말씀하시길 그이가 몸이 안 좋다는 거예요. 아주 안 좋다는 거지요. 그러나 상관없어요. 저는 그이를 사랑해요. 당신에게 이런 얘기 해도 되는 거지요. ? 저는.”

그녀는 잠시 혼란스러워하더니 아까와 똑같은 결연한 태도로 다시 이어 나갔다.

저는 그이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그러나 당신이 그이를 다시 만나게 되면 내가 한 말을, 이미 그 사람이 제 입으로 말하는 걸 직접 듣긴 했지만, 반복해서 말해 주어도 좋아요. 그리고 그의 주소를 알게 되면 그이에게 편지로 전해 주세요. 저는 그이 말고는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는다고요. , 우리는 꼭 만나게 될 거예요.”

이 마지막 외침에는 고집과 굳은 결심 외에도 절망적인 고통이 들어 있어서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굳게 잡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곧 호프만의 부모님께 편지를 보내 아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남부 티롤의 주소를 받아내어 거기로 보낸 편지는 다시 나에게 반송되어왔다. 수신인이 여행의 목적지를 알리지 않은 채 이미 장소를 떠났다는 소식과 함께.

그는 어느 쪽으로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완전한 고독 속에 죽어버리려고 그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쳤다. 정말이지 죽기 위해서 그랬다. 모든 정황으로 봐서 그를 다시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은 마음 아프지만, 꼭 그럴 수밖에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절망적으로 병든 사람이 저 젊은 아가씨를 소리 없는 화산과 같은 이글거리는, 관능적 정열로써, 청소년 학창 시절의 첫사랑 비슷한 그런 정열로써 사랑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 아닌가? 병자의 이기적인 본능이 한창 피어오른 건강한 여성과의 합일에 대한 욕망을 부채질했던 것이다. 이 정염의 불꽃이 진정되지 못했으니 그의 마지막 남은 생명력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리지 않겠는가?

그리고 파올로로부터 살아 있다는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한 채 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 역시 없었다.

지난해에 나는 이탈리아에 가서 로마와 그 주변에 머물렀다. 더운 몇 개월을 산에서 살다가 9월 말쯤 시내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느 따뜻한 저녁, 나는 카페 아란조에서 차 한잔을 하며 앉아 있었다. 신문을 뒤적이다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넓은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동감있는 장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들이 들어왔다. 나가고 종업원들은 여기저기 서둘러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가끔 활짝 열려 있는 문을 통해 신문 파는 아이들의 길게 빼는 외침 소리가 홀 안으로 들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내 나이 정도 된 한 남자가 천천히 탁자들 사이를 지나 출구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저 걸음걸이는······?

그러자 그때 그도 벌써 내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하고 깜짝 놀라 반가워하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자네가 여기에 있다니?”

우리는 마치 한 입으로 말하는 것처럼 똑같이 외쳤고 그가 덧붙여 말했다.

우리 둘 다 아직 살아 있었군!”

그러면서 두 눈을 약간 굴리며 나를 보았다. 지난 5년 동안 그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단지 갸름한 얼굴이 더욱 좁아지고 눈이 더욱 깊게 움푹 들어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가끔 심호흡을 했다.

벌써 오랫동안 로마에 있었나?”

시내에 있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아. 몇 달 동안 시골에 있었다네 자넨 어떤가?”

나는 일주 전만 해도 바다에 있었지 자네, 내가 산보다 바다를 항상 더 좋아했다는 거 알고 있지. 그래, 우리가 만나지 못하는 사이에 난 이 세상의 많은 곳을 알게 됐다네.”

그리고 그는 내 옆에서 셔벗(sherbet) 한잔을 들이키면서 이 몇 해를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티롤의 산들을 섭렵했고 천천히 이탈리아 전체를 유람했으며 시칠리아에서 아프리카까지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알제리나, 튀니지, 이집트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 얼마 동안은 독일에 있었다네.”하고 그가 말했다.

칼스루에에 말일세. 부모님께서 절실하게 나를 보고 싶어 하셨거든. 내가 다시 나오는 걸 정말 마지못해 허락하셨지. 이제 3개월 전부터는 다시 이탈리아에 있다네. 난 남쪽 지방에 오면 고향처럼 느껴진단 말이야. 로마는 비할 바 없이 마음에 들어!”

나는 그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는 아직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았었다. 그제서야 나는 물었다.

모든 걸 봐서 자네의 건강이 현저하게 좋아졌다고 결론지어도 되겠지?”

그는 한순간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활기 있게 사방을 휘젓고 다니니까 하는 소리지? , 이렇게 말하겠네. 그건 아주 자연적인 요구라고. 도대체 뭘 하겠나? , 담배, 사랑이 다 금지돼 있네······. 난 어떤 마취제 같은 것이 필요한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나는 일단 침묵했다가 덧붙여 말했다.

“5년 이래로는 -정말 절실하게-필요했겠지.”

이로써 우리는 그때까지 피했던 주제에 접하게 되었다. 잠깐 동안의 침묵 상태가 우리 두 사람 모두의 당황감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우단으로 된 소파에 기대앉아 샹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했다.

무엇보다도 우선 말하고 싶은 건······, 자네는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던 것을 용서해 주겠지. 이해해 주는 거지?”

물론이지.”

자네는 내가 뮌헨에서 겪은 일에 대해 들은 바가 있나 보지?” 그가 거의 딱딱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알만한 건 다 알고 있어. 자네에게 전해 주라는 말을 부탁받고 그동안 내가 죽 그 말을 품고 다닌 걸 알기 나 하나? 한 여성이 나한테 위임한 거라네.”

그의 피곤한 두 눈이 짧은 순간 반짝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전과 똑같이 건조하고 예리한 어조로 말했다.

새로운 것이라도 있다면 이야기해 보게나.”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어. 다만 자네가 이미 그녀 자신으로부터 들었던 것을 다시 강조하는 것뿐이라네.”

그리고 나는 갖가지 수다와 제스처를 섞어가며 그날 저녁에 남작 딸이 나에게 이야기했던 말들을 그에게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그는 귀 기울이며 들었고 그사이에 천천히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고 나서 아무런 동요의 조짐도 없이 말했다.

고맙네.”

그의 어조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 말이 있은 것은 이미 여러 해 전이네.”하고 나는 말했다.

“5년이나 지나갔단 말일세. 그동안 그녀와 자네, 둘 다 많은 일을 겪었겠지. 수천 가지의 새로운 인상, 느낌, 생각, 소망 등등.”

나는 하던 얘기를 중단했다. 그가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우더니, 내가 한때는 이미 꺼져버렸다고 생각했던 정열이 다시 꿈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말을 지키겠네!”

이 순간 나는 그의 얼굴과 그의 태도 전체에서, 남작 딸을 처음 만난 날 보았던 것과 똑같은 것이 다시 표출되는 것을 느꼈다. 달려들기 직전의 맹수가 보여주는, 강력한 경련을 일으킬 만큼 팽팽하게 긴장된 차분함 말이다.

나는 화제를 돌렸고 우리는 다시 여행과 여행 중에 그린 스케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렇게 많은 스케치들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거기 대해서는 상당히 무심하게 되는 대로 말했다.

자정이 조금 지나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제 자러 가든지 아니면 좀 혼자 있고 싶네. 내일 오전에 도리아 미술관에 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걸세. 사라체니를 복사하려고 해.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천사한테 반했거든. 시간 내서 와주게나. 자네가 거기 오면 난 아주 기쁠 거야. 잘 자게.”

그리고 그는 나갔다. 힘없이 축 늘어져서 천천히 차분하게 움직이며.

그다음 한 달 내내 나는 파올로와 함께 도시를 배회하며 돌아다녔다. 로마, 모든 예술을 넘칠 만큼 많이 가지고 있는 박물관이라고 할 남국의 이 현대적인 대도시는 요란하고 신속하며 뜨겁고 관능적인 삶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동방의 후텁지근한 나태함이 따뜻한 바람을 타고 이 도시로 실려오는 것이다.

파올로의 태도는 항상 그대로였다. 그는 대개는 진지했고 조용했으며 때로는 피곤함에 느긋하게 몸을 맡길 줄 알았지만 그러다가 눈에 불꽃이 튀면 갑자기 다시 몸을 곧추세워 열심히 차분한 대화를 계속했다.

어느 날의 일을 이야기해야겠다. 그는 그날 몇 마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올바른 의미를 나는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건 어느 일요일의 일이었다. 우리는 멋진 늦여름의 아침을 비아 아피아거리를 산책하는 데 바치고 나서 잠시 쉬고 있었다. 고대의 거리를 따라 계속 걸어 내려와 우리는 실측백나무로 둘러싸인 저 작은 언덕까지 와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 고대의 상수도 시설을 갖추고 햇빛을 받으며 펼쳐져 있는 캄파냐 지방의 멋진 경치와 아지랑이에 둘러싸여 있는 알바니아 산맥의 풍광을 즐길 수가 있었다.

파올로는 내 옆의 따뜻한 풀밭 위에서 턱을 손에 고이고 반쯤 누운 자세로 쉬면서 뭔가 감추고 있는 듯한 피곤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완전히 냉담하게 돌변해서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바람의 향내! 바람 냄새야말로 최고야!”

나는 뭔가 동조하는 말을 했고 우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뭔가 절박하게 나에게로 얼굴을 돌리며 아무런 중간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말했다.

한번 말해 봐,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게 실은 이상하지 않아?”

나는 한 방 얻어맞은 듯 침묵했고 그는 다시 생각한 듯한 표정을 담으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나한테는······, 그렇게 생각돼.”하고 그는 천천히 이어 나갔다.

나는 근본적으로는 매일 그것에 대해 놀라고 있어. 내 상태가 도대체 어떤 건지 자네 아나······? 알제리의 프랑스 의사가 나한테 말했다네. ‘당신이 도대체 어떻게 계속 여행하며 돌아다닐 수 있는지는 악마나 알 거요! 당신에게 충고하겠는데 곧장 집으로 가시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도록 하시오!’ 그는 항상 아주 솔직했는데 그건 우리가 매일 저녁, 같이 도미노 놀이를 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나는 아직도 살아 있어. 난 매일 거의 죽을 지경이야. 저녁이면 나는 어둠 속에 누워 있지 오른쪽으로 말이지, 잘 아는구먼!(그는 심장이 좋지 않아서 항상 오른쪽으로 눕는다)- 심장은 목까지 두근거리고 나는 어지러워서 공포의 식은땀을 흘리지, 그러면 갑자기 어떤 느낌, 마치 죽음이 나를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한순간 마치 모든 것이 나한테서 조용하게 정지하는 것 같아. 맥박이 끊어지고 숨은 멈추지. 그러면 나는 일어나서 불을 켜고 깊이 심호흡을 하고 내 주위를 돌아보며 대상들을 내 시선으로 휘감아버리는 거야. 그러고 나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드러눕지. 언제나 오른쪽으로 눕는 거야! 차츰차츰 나는 잠 속으로 빠져들지. 나는 아주 깊이 잠들고 오래 자. 난 사실 항상 피곤해서 죽겠어. 자네, 내가 그러려고만 하면 그냥 여기 드러누워서 죽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나? 난 지난 몇 년 동안 벌써 수천 번이나 얼굴을 맞대고 마주 서서 죽음을 보았다고 생각해. 난 죽지 않았어. 뭔가가 나를 지탱해 주고 있어. 나는 벌떡 일어나 뭔가를 생각하고 한 문장에 매달리는데 그건 벌써 내가 스무 번이나 반복한 것이라네. 그 동안 내 눈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빛과 삶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으며 실은 아무 대답도 기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말이 내게 남긴 강력한 인상을 나는 결코 잊어버릴 수가 없다.

그러고는 그날이 되었다. ······. 마치 그를 어저께 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건 가을이 처음 시작되는 날들 중의 하나였다. 우중충하면서 무지하게 따뜻한 그런 날들, 습하고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바람이 아프리카로부터 건너와서 거리로 불어대고 저녁에는 마른 번갯불 속에서 하늘이 끊임없이 번쩍대는 그런 날들 말이다.

아침에 나는 바람 쐬러 가자고 파올로를 부르러 그의 집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트렁크가 방 한가운데에 있었고 옷장과 서랍장은 활짝 열려져 있었다. 동방에서 가져온 그의 수채화 스케치와 바티칸 궁전의 주노(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머리를 본뜬 석고상은 아직 제자리에 있었다.

그 자신은 똑바로 창 앞에 서 있으면서 내가 놀라서 외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바깥을 응시할 뿐 태도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잠깐 몸을 돌리더니 나에게 편지 하나를 내밀며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읽어봐.”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열에 들뜬 검은 눈동자를 가진 이 갸름하고 노란 병자의 얼굴에는 오직 죽음만이 불러올 수 있는 그런 무시무시한 진지함이 들어 있어서 나는 방금 받은 편지로 눈을 내리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는 읽어 내려갔다.

 

경애하는 호프만 군!

자네 부모님께 수소문한 결과 존경하는 그분들 덕택으로 자네의 주소를 알게 되었으며 나는 이제 자네가 이 글을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주기만을 바랄 뿐이네.

내가 지난 5년간 끊임없이 우정어린 마음으로 자네를 생각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걸 허락해 주게. 자네와 나한테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날에 감행된 자네의 갑작스러운 여행이 나와 내 식구들에게 대한 분노를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에 대한 나의 우려는 정말이지 자네가 내게 딸을 달라고 했을 때 느꼈던 경악과 깊은 놀라움보다 더 큰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네.

나는 당시에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 자네에게 솔직하게, 잔인하게 보일지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점을 충분히 강조할 수 없는 게 안타깝네- 모든 관계에서 볼 때 그토록 높게 평가하는 남자에게 내 딸을 줄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말했던 것이네. 그리고 또한 나는 아버지로서 자네에게 말했던 것이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의 지속적인행복을 눈앞에 그려보며, 혹시라도 자네가 말한 대로 될 가능성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면 그런 소망의 싹을 양쪽에서 가차 없이 꺾어버려야 하는 그런 아버지로서 말일세!

나는 오늘도 또한 바로 그와 같은 입장에서 자네에게 말하는 것이네. 친구이자 아버지로서, 자네가 떠나간 후 5년이 흘렀네. 그리고 나는 그때까지 자네가 내 딸에게 흘려 넣은, 자네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 애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게 뿌리를 박았는가를 깨우칠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없었네. 그런데 최근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 이제 그것에 대해 내가 완전히 눈을 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네. 내가 그 일을 감출 이유가 뭐 있겠나? 우리 딸은 자네 생각 때문에 어떤 남자의 청혼을 거절했는데 그 남자는 아버지인 나로서는 그의 구혼을 당장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는 그런 훌륭한 남자였네.

우리 애의 감정과 소망에는 그 동안의 세월도 아무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네. 그리고 이건 정말 솔직하고 겸손하게 묻는 건데, 경애하는 호프만 군, 자네도 내 딸과 같은 경우라면, 나는 이 편지로써 부모 된 우리 두 사람은 우리 애의 행복에 앞으로는 절대로 방해가 되지 않겠다는 심경을 밝히는 바이네.

답장을 기다리겠네. 그 답장이 어떤 것이 되든 답장을 해주면 대단히 고맙겠네. 완전한 경애심 이외의 어떤 다른 표현도 더 덧붙이지 않고 이만 줄이네.

오스카 폰 슈타인 남작

나는 편지에서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뒷짐을 지고 다시 창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다만 한 가지만 물었다.

자네, 여행 떠나나?”

나를 바라보지 않고 그는 대답했다.

내일까지는 내 짐이 다 정리되어 있어야 하네.”

그날은 준비하고 짐 싸느라고 시간을 다 보냈다. 나는 그를 도와주었고 저녁에 우리는 내 제안에 따라 시내의 거리로 마지막 산책을 나갔다.

이제 날씨는 거의 견딜 수 없을 만큼 후텁지근했다. 그리고 하늘은 매초 마다 쏜살같은 번개의 인광 속에서 번쩍거렸다. 파올로는 차분하고 피곤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깊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또는 무심한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한 시간 정도 돌아다니다가 폰타나 트레비앞에 멈추어 섰다. 그건 아주 유명한 분수로서 서둘러 돌아가려는 바다 신의 마차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오랫동안 구경하면서 이 화려하고 풍성한 무리에 대해 감탄했다. 그것들은 새파란 불빛 속에서 끊임없이 조화를 부리며 거의 요술을 부리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내 친구가 말했다.

확실히 이 우물을 설계한 베르니니는 자기가 가르친 제자의 작품 속에서까지 나를 매혹 시키네. 난 그의 적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물론 최후의 심판이 그림으로 그려진 것보다는 조각된 것이 더 많다면 베르니니의 작품은 조각된 것보다는 그린 것이 더 많지. 그렇지만 그보다 더 위대한 장식가가 있을까?”

자네 아나,”하고 내가 물었다.

분수에 어떤 사연이 들어 있는지를? 로마와 이별할 때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로마로 돌아온다는 거야. 여기 내가 여행할 때 쓰는 잔이 있네.”

나는 물줄기 중의 하나에 잔을 갖다 대어 안을 채웠다.

자네의 로마를 다시 봐야지!”

그는 잔을 잡아서 입에 가져갔다. 이 순간 하늘이 온통 오랫동안 지속되는 현란한 불빛 속에서 환하게 빛났고 얇은 잔은 딸랑 소리를 내며 물통의 가장자리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파올로는 수건을 꺼내 옷에 묻은 물을 닦아냈다.

내가 초조해서 서투른 짓을 했구먼.”하고 그가 말했다.

계속 가세나. 아무려나 값비싼 잔이 아니었기를 바라네.”

다음 날 아침 날씨는 맑게 개어 있었다. 여름날의 청명한 푸른 하늘이 역으로 가는 우리에게 웃음을 보내주었다.

이별은 짧았다. 내가 그를 위해 행운을, 아주 커다란 행운을 빌자 파올로는 말없이 내 손을 잡고 흔들어주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 동안 그는 등을 곧게 세우고 전망이 좋은 넓은 창가에 서 있었다. 그의 눈에는 심각한 진지함과⎯⎯그리고 승리감이 깃들어 있었다.

더 말할 게 뭐가 있을까?⎯⎯그는 죽었다. 결혼식 다음 날 아침에 죽었다.⎯⎯거의 신혼 첫날밤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죽음을 눌러 놓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의지, 행복에의 의지, 오로지 그 힘 때문이 아니었을까? 행복에의 의지가 충족되었을 때 그는 투쟁도 저항도 할 수 없이 죽어야만 했다. 그는 더 이상 살아야 할 구실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잘못 행동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자기가 결혼한 그녀에게 의식적으로 나쁘게 행동한 것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나는 장례식에서 그녀가 관의 머리맡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도 역시 그에게서 발견했던 바로 그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거기에는 엄숙하면서도 강력한 진지함, 승리에 찬 진지함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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