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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철학사 1

   제1부 인도 철학의 형성

 

   제1장 인도 철학의 성격

 

  1. 인도 철학의 이해

 철학은 경이감에서 출발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철학이란 단순히 인간의 순수한 지적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영위되는 것은 아니다. 철학적 사유의 배후와 근거를 살펴볼 것 같으면, 철학이란 삶의 궁극적인 문제들과 근본적인 관심사들의 해결을 위한 인간의 끊임없는 모색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추구해 온 삶의 문제들과 관심사란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이 처해 있는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상황에 따라 많은 차이와 다양성을 보여준다.

 인도 철학도 물론 인도인의 전통적 사회와 문화, 그리고 그들이 추구해 온 삶의 가치와 이상을 떠나서 이해될 수 없다. 인도인들은 전통적으로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4가지 가치(purusartha)를 말해 왔다. 즉 욕망(kama), 부(artha), 의무(dharma), 그리고 해탈(moksa)이다, 이들 네 가지 가치는 모두 인간존재 자체가 필연적으로 지니고 요구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욕망이란 인간의 본능적인 성적 즐거움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며, 부란 행복한 삶의 조건이 되는 물질적인 풍요를 의미하며, 의무란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유한한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윤리적인 질서를 가르키며, 해탈이란 인간이 유한한 삶을 향유하려는 종교적 갈망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인도 철학을 연구하는 거의 모든 학자들은 인도 철학의 지배적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해탈의 추구에 있다고 의견을 모으고 있다. 즉, 어떻게 하면 인간이 고통스럽고 유한하고 속박된 삶을 초월하여 절대적이고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인도인의 철학적 사유의 배후에 깔려 있는 최대의 관심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도 철학은 강한 종교적 색채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 종교적이라고 하는 말은, 서양의 전통에서처럼 어떤 초월적인 신에 의하여 주어지는 초이성적인 계시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활동을 하는 궁극적 목표가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조화하는 바와 같이 서양에 있어서는 철학은 희랍의 문화전통에서 유래하였으며, 종교는 히브리적 성서적 전통에 기본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철학과 종교 사이에 항시 긴장관계가 존속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전통의 근본적 이중성을 지니지 않는 인도에서는 철학과 종교 사이에 그러한 대립관계가 성립하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도의 종교는 그 근본성격상 어떤 초이성적 신의 계시에 근거를 둔 신앙의 종교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지혜와 신비적 체험에 바탕을 둔 경향이 강하므로, 서양에서 말하는 소위 신앙과 이성 faith and reason의 대립이라는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할 것 같으면 인도의 종교는 철학적 종교요, 인도의 철학은 종교적 철학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인도인의 해탈에 대한 갈망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인간의 삶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고사함이 중요하다.

 인도인은 인간의 삶을 윤회(samsara)하는 삶이라고 이해했다. 인생은 지금의 삶이 아니라 식물의 세계와 같이 계속해서 생사의 과정을 되풀이하며 여러 형태의 삶을 영위하게끔 되어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행한 행위 karma는 뿌려진 씨(bija)와 같아서 반드시 그 열매(phala), 즉 결과를 보고야 말며, 우리가 행한 무수한 행위는 그 결과가 현세에서 다 얻어지기는 어렵기 때문에 또 하나의, 혹은 하나 이상의 내세에서 그 결실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도인의 인생관에 의할 것 같으면, 삶과 죽음은 두 개의 반대 현상이 될 수 없으며 단지 죽음으로써 생 자체나 혹은 생에 대한 책임이 회피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의 반대는 또 하나의 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서양의 전통적 인간관은 대체로 이분법적 인간관이었다. 즉 사람은 영혼과 육체(soul and body)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인도의 인간관은 무아설(anatman)을 주장하는 불교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인간은 세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삼분법적인 인간관을 보여주고 있다. 인도인은 "우파니샤드(Upanisad)" 이래로 인간에게는 불생불멸의 영원한 자아(atman)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 왔다. 이 참자아는 윤회의 세계에서 고통을 당하는 현상적 자아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이 참자아를 현상적 자아로부터 명확하게 구별하여 혼동하지 않고 인식하는 것이 인도인에 있어서 최고의 철학적 지혜로 간주되어 왔다. 한편 현상적 자아라는 것은 몸과 마음 manas 복합체로서 우리들의 상식적. 경험적 세계의 자아를 의미한다. 인도 철학은 몸과 마음 사이의 어떤 본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서양에서와 같은 이원론적 인간관은 발달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참자아인 본질적 자아와 현상적 자아, 혹은 형이상학적 자아와 형이하학적 자아와의 구별이 결정적으로 중시되게 된 것이다. 인간이 윤회의 세계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자기의 참자아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를 현상적인 자아, 즉 거짓된 자아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참자아의 성격, 그리고 참자아와 현상적 자아와의 관계에 관해서는 인도의 철학들이 각기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기는 하나, 이 두 가지 자아의 혼동된 상태를 인생의 최대의 문제로 삼고 있음에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참자아가 현상적 자아의 영향으로부터 해방되어 영원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인도 철학의 근본적인 종교적 관심사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를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실재의 세계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적 사유는 인도 철학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이다.

 

 

  2. 인도 형이상학의 성격

 럿셀 Russel은 그의 '서양철학사'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고 있다.

 

  세계의 성격과 구조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가설들이 가능하다. 형이상학에 있어서 발전이라고 할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러한 가설들이 점진적으로 다듬어지고 그 함축되었던 바가 전개되어 나오고, 경쟁이 되는 가설들의 추종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반대들에 응수하기 위하여 그 가설들이 각각 재구성되는 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들의 하나 하나에 따라서 우주를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상상적인 즐거움이며 독단주의에 대한 해독제이다. 더우기 이들 가설들이 하나도 증명될 수 없다 하여도 각자의 가설들을 그 자체와, 또한 다른 알려진 가설 등과 모순 없이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발견하는 것은 진정한 지식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형이상학에 대한 럿셀의 견해를 인도 철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형이상학이란 우주의 궁극적 실재 내지 세계 전체에 대한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해석이며, 이 해석은 하나의 가설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이런 해석의 체계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서 이이비과학과 같은 역할을 해왔지만, 오늘날 형이상학 체계를 과학적 진리나 인식으로 인정하기는 어렵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어떤 철학자들처럼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도 엄격히 따지면 형이상학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는 문자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소치인 것이다. 과학적 지식이란 어디까지나 경험적으로 실증되는 세계 내지 세계의 부분적 이식에만 국한되는 것이며, 형이상학은 근본적으로 이와는 의도가 다른 것이다. 형이상학은 인간이 삶의 궁극적 의미를 찾으며 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세계 전체에 대한 지적 파악 내지 실재의 이해를 제공하는 데 그 근본 관심이 있는 것이다.

 인도인의 형이상학적 사고는 전에 언급한 대로 절대적 자유와 해탈이라는 이상을 앞에 놓고서, 이간존재와 세계의 모습이 어떠하기에, 혹은 실재란 것이 무엇이기에 이러한 절대적 자유가 가능할 수 있는가라는 종교적 관심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1) 앞으로 우리가 고사하겠거니와 인도의 철학들은 이러한 관심하에서 세계의 궁극적인 실재, 이 궁극적 실재와 현상세계와의 관계, 현상세계에 얽매여 있는 이간의 모습, 또 어떻게 하면 이 현상세계를 극복하고 영원한 실재의 세계에 접하게 될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각기 제나름대로의 견해를 전개하는 것이다.

 

 3 인식론과 논리학

 인도 철학이 이러한 강한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 형이상학적 이론을 전개했다 하여 비판적인 인식론적 성찰을 무시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사실 그와는 반대로 인도의 대부분의 철학파들은 자기들의 형이상학적 세계해석을 뒷받침시키기 위해 그것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지닌 인식의 문제를 항시 다루어 왔으며 올바른 논리의 전개에 대해서도 서양철학 못지않게 관심을 지녀 왔다. 그리하여 무엇이 인식의 타당한 방법 pramana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하여 각 학파들은 제나름대로 학설을 제시하였다. 대체로 감각 기관을 통한 직접경험 pratyaksa과 이에 근거한 추론 anumana, 그리고 믿을 만한 타인의 증언 sabda, 특히 베다 Veda의 계시적 권위 등을 주요한 인식의 방법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는 중요한 문제로서 흔히 인도의 철학은 그것을 인정하는 경건한 정통 철학과 astika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예를 들면 불교와 쟈이나 Jaina교와 같은, 비정통학파 nastika로 구분되기도 한다. 타당한 인식의 방법이 무엇이냐에 따라 어떤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실재에 대한 견해를 달리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각 학파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한 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인도 철학은 한편으로는 종교적 관심에 입각한 형이상학적 사변의 깊이를 지녔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인식론과 논리학의 엄격하고 비판적인 논증을 통하여 형이상학적 사변에 객관적 진리성을 뒷받침시키고자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

 

 4. 인도 철학의 발전과 시대적 구분

 인도 철학은 크게 보아 4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B.C.약 1500년부터 B.C.200년경에 이르는 형성기이다. 이 시기는 우선 인도의 최고성전인 베다가 형성된 시기이다. 특히 베다의 가장 철학적 부분인 우파니샤드 Upanisad는 후세의 체계적인 철학파들에게서 발견되는 중요한 사상들이 거의 모두 담겨진 문헌으로서 베다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고대 인도 문화의 총집합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Mahabharata>도 대체로 B.C.200년경에는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 안에서도 우리는 여러 가지 철학적 사상들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마하바라타'의 일부분인 '바가바드 기타 Bhagavad Gita'는 힌두교의 바이블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유명한 성전으로서, 비록 어떤 체계화된 질서있는 논리에 의거한 철학적 저서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중요한 철학적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 시기는 또한 불교나 쟈이나교와 같은, 베다와 바라문 Brahmana 계급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비바라문적 철학이 등장하여 정통 바라문교를 위협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인도의 최초의 통일왕조인 마우리왕조(약 320~183 BC) 때에는 불교는 아쇼카 왕(269~232 BC)의 귀의를 받아 인도 전성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까지 퍼지는 하나의 세계종교로 성장하게 되었다.

 인도 철학의 제2기는 B.C. 200년경부터 시작하여 A.D. 1000년경에 이르는 체계적 발전기이

다.

 불타의 교리적 이해의 차이들은 철학적으로 다양화되고 심화되어 마침내 20여 개의 부파 불교들의 대립을 보게 되었으며, 그 중의 유력한 부파들은 자기의 철학적 입장을 "논 abhidharma"의 형식으로 체계화시키게 되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상좌부Theravada와 설일체유부 Sarvastivada의 논들이다.

 이러한 불교의 철학적 활동에 자극을 받아 바라문교내에서도 다양한 사상들이 각기 독립적으로 체계화되어 표현되게 되었다. 이들은 각기 자기의 철학적 입장을 "경 sutra"의 형식으로 간략하게 기술했다. 미맘사 Mimamsa 학파의 "미맘사경 Mimamsa-sutra", 베단타 Vedanata 학파의 "브라흐마경 Brahma-sutra", 나야 Nyaya 학파의 "나야경 Nyaya-sutra". 바이셰시카 Vaisika 학파의 "바이셰시카경 Vaisesika-sutra", 샹키야 Samkhya 학파의 "상키야송 Samkhyakarika", 요가 Yoga 학파의 "요가경 Yoga-sutra" 등은 모두 이 체계화 시대의 전반기에 씌어진 문헌들로서 소위 정통 육파철학의 근본 경전들인 것이다. 이들 철학적 경전들은 그 내용이 지극히 간략하고 함축적이어서 그 자체로서는 쉽사리 이해하기가 어려우므로 자연히 그들에 대한 주석서들이 씌어지게 되었으며, 이들 주석서들은 또한 다른 많은 복주를 산출하게 되었다. 인도 철학의 이론적인 발전은 이러한 주석적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철학이 다분히 개인중심적으로 이루어진 것과 좋은 대조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도의 전통적 철학자들은 아무리 자기가 새로운 사상을 전개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자기가 속한 학파를 중심으로 하여 그 학파에서 권위로 여기고 있는 경전이나 주석을 해석하는 형식을 취하였던 것이다. 인도인은 본래부터 역사의식이 약하다고 흔히 말하거니와 이와 같이 전통을 중시하는 학파중심적인 철학활동은 인도의 철학적 사상들의 무명성과 비역사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인도 철학사에 있어서 대부분의 중요한 철학자들과 그들의 저서들의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도 철학의 제2기에는 또한 대승불교가 흥기하여 많은 대승 경전들을 낳았고 이와 더불어 대승수학도 발달되어 중관 Madhyamika, 요가행 Yogacara과 같은 학파들이 성립되었다. 이들 대승불교의 철학들은 파라문의 정통 철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인도 철학의 제3기는 11세기부터 18세기 처에 이르는 기간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이 시기는 인도가 이슬람교도들의 침공을 받아 그들의 정치적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때이다. 불교는 이미 인도의 본토에서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으며 베다 종교와 사성계급제도를 기반으로 한 정통바라문교는 토착적인 여러 종족들의 종교적 관습과 신앙에 습합되어 현재 우리가 "힌두교 Hinduism"라고 부를 수 있는 포용적이고 대중적인 종교로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비슈누 Visou신과 쉬바 Siva신의 신앙운동이 인도의 전역에 성행하게 되었으며, 철학도 자연히 그 영향을 받아 다분히 교파적인 신학적 구원론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도 제2기 체계적 발전기의 각 학파들이 계속해서 철학적 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주석서와 입문서 내지 개론서들을 산출했으나, 인도 철학의 창조적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18세기부터 본격화된 영국의 인도지배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인도 철학의 제4기로 잡을 수 있다. 이 시기는 인도의 지성인들이 서구라파의 사상과 학문에 접하여 그들 자신의 종교적, 철학적, 문화적 전통을 새로이 발견하게 된 시기로서, 이에 힘입어 힌두교의 개혁운동도 활발히 진행되었고 인도 철학의 세계관을 외부세계에 소개하는 운동도 전개되었다. 그러나 철학적으로는 아직 뚜렷하게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지 못하고 있다.

 

  * 참고문헌

 1. 힌두교 및 인도문화 전반에 관한 책들

 Basham, A.L., The Wonder that was India. New York, 1954. 이슬람 지배 이전의 인도문화 전반에 관한 정평있는 개설서.

 de Bary, W.T. ed., Sources of Indian Tradition. New York, 1958. 인도의 문화, 종교 전통에 관한 고전적 자료들의 영역편집.

 Bechert, H. und von Simson, G., Einfuhrung in die Indologie, Stand, Methoden, Aufgaben, Darmstadt, 1979. 인도학 전반에 관한 연구방법, 문헌 등의 소개.

 Embree, A.T. ed., The Hindu Tradition. New York, 1966. Sources of Indian Tradition과 같은 종류의 책.

 Eliot, C., Hinduism and Buddhism. 3 vols, London, 1922. 힌두교와 불교에 대한 개설서

 Farquhar, J.N., an outline of the Religious Literature of india. Oxford, 1920. 인도의 종교문헌들에 대한 해설서.

 Hopkins, T.J., The Hindu Religious Tradition. California, 1971. 힌두교에 대한 간략한 사적개설서.

 Heimann, B., Facets of Indian Thought. London, 1964. 인도문화의 사상적 특징들에 관한 통찰력 있는 연구.

 Maajumder, R.C., H.C. Raychaudhuri, and K. Datta, An Advanced Histroy of  India. London, 1950. 선사시대로부터 독립에 이르기까지의 인도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사.

 Renou, L.,Religions of Ancient India. London, 1953. 힌두교에 대한 간략한 입문서.

 La Civilisation de l'Inde ancienne. Paris, 1950. 인도학 대가에 의한 인도 고전 문화의 개설서.

 Thapa, R. A Histroy of India. Vol. I. Baltimore, 1966. 16세기 초 무굴제국 이전까지의 인도사개설.

 Winternit, M. Geschichte der indischen Literatur. 3vols. Leipzing, 1909~1920. 인도문학사의 권위 있는 저서. S. Ketkar의 영역, History of Indian Literature. 2vols. Calcutta, 1927~1933.

 

  2. 인도 철학 전반에 관한 종합적인 책들

 Bhattacharyya, H., ed., The Cultural Heritage of India. Vol.3: The Philosophies. Calcutta, 1953. 인도 철학자들에 의한 각 철학학파들에 대한 개설.

 Chatterjee, S, and D. Datta, An Introduction to Indian Philosophy. 인도 철학에 관한 명쾌한 입문서.

 Cowell, E.B. and A.E. Gough, trans. The Sarva-Darsana-Samgraha, London. 1914. 14세기의 인도 철학자 Madhava의 "전 철학 체계 강요"의 영역.

 Deussen, P., Allgemeine Geschichte der Philosophie. Vol I, 1-3. Leipzig, 1894. 유명한 베단타철학 연구가에 의한 세계철학사의 일부로서의 인도 철학사.

 Dasgupts, S., A Histroy of Indian Philosophy. 5 vols. 인도 철학에 관한 종합적인 서술로서 가장 상세한 책.

 Frauwallner, E., Geschichte der indischen Philosophie. Salzburg, 1953. V.M. Bedekar의 영역, History of Indian Philosophy, 2 vols. Delhi, 1973. 미완성된 인도 철학사.

 Glasenapp, H. v., Entwicklungsstufen des indischen Denkens. Halle,1940. 독일의 인도 철학연구의 대가에 의한 인도 사상발전사.

 Die Philosophie der Inder. Stuttgart, 1974. 인도 철학의 간략한 역사와 학파별 개설.

 Hiriyanna, M., Outlines of Indian Philosophy. London, 1932. 널리 읽혀지는 인도 철학 개설서.

 Potter, K., Presuppositions of Indian Philosophy. Englewood Cliffs, 1963. 인도 철학의 이해를 위한 근본 전제들에 대한 새로운 고찰.

 ed., Bibligraphy of Indian Philosophy. 인도 철학의 연구를 위한 거의 완벽한 참고문헌들의 분류와 열거.

 Nakamura, H., aareligions and Philosophies of India: A Survey with Bibliographical Notes. 3 vols. Tokyo, 1973. 일본의 인도학 대가에 의한 인도종교. 철학 연구지침서.

 Radhakrishnan, S. Indian Philosophy. 2 vols. London, 1923, 1927. 현대 인도 지성의 대표자 중의 하나에 의한 인도 철학 전통의 상세한 해설.

 Radhakrishnan, S. and C.A. Moore, eds., A Sourcebook in Indian Philosophy. Princeton, 1957. 인도 철학의 제1차적 자료들(영역)을 발췌하여 편집한 독본.

 Ruben, W. Geschichte der indischen Philosophie. Berlin, 1954. 유물론적 관점에서 씌어진 인도 철학사.

 Sharma, C. Indian Philosophy: A critical survey. New York, 1962. 인도 철학파에 관한 명쾌한 해설서.

 Zummer, H. Philosophies of India. Princeton, 1951. 인도 철학 전반에 관한 심오한 해설서.

 

 

  제2장 베다의 철학사상

 

 1. 베다 문헌의 성격

 인도에 있어서 철학적 사유의 기원은 힌두교의 최고성전이며 대부분의 정통 철학학파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는 베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베다 문학을 산출한 사람들은 서력 기원전 약 1500년경부터 인도의 서북부를 침입하여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새로운 삶의 근거를 마련한 아리안 Aryan족들이었다. 그들은 원래 지금의 코카사스 지방의 북쪽 초원지대에서 살던 유목민으로서 소위 인도유럽 Indo-European 언어 계통의 종족들 중의 일부였다. 이들 인도 유럽 종족들은 서력 기원전 약 2000년경에 초원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서쪽으로 간 종족들은 지금의 유럽의 제민족을 형성하였으며 동쪽으로 이동한 아리안족들은 한편으로는 이란지방에 정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을 통하여 인도의 서북부를 침입하여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이륜마차를 타고 청동으로 만든 무기를 들고 싸우는 씩씩한 전사들로서 약 15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오하지방 Panjab을 점령하고 베다문화를 이룩한 것이다. 그들의 언어는 산스크리트 Sanskrit어로서 인도 유럽 계통의 언어에 속한다.

 베다는 물론 오랜 세월을 두고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대략 현재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A.D 약 200년 전후로 추정된다. 베다는 원래 고대 인도인들에 의하여 신에 대한 예배와 제사의식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신에 대한 제식들이 점점 복잡해짐에 따라 그 제식들을 주관하는 직분도 4그룹(hotr, udgatr, adhavaryu, brahman)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베다도 이 그룹들에 의해 사용되는 용도에 따라 "리그 베다 Rg Veda", "야주르 베다 Yajur Vwda", "아타르바 베다 Atharva Veda"의 4종으로 구별되어 집성되게 되었다. 이 중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또 어느 정도의 철학적 가치를 지닌 것은 "리그 베다"이며, "아타르바 베다"에서도 간혹 철학적 사변을 찾아볼 수 있다.

 각 베다는 오랜 세월을 두고 형성된 결과 자연히 그 안에 가기 시대의 추이를 반영하는 여러 층의 문헌이 누적되게 되었다. 따라서 상기 4종의 베다는 각기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주로 신들에 대한 찬가와 기도인 만트라 mantra를 수집한 본집 Samhita이고, 둘째는 제의의 방식과 의미들을 토의하고 설명하는 산문으로 된 브라흐마나 Brahmana이며, 이 브라흐마나의 끝에 소위 밀림서 Aranyaka와 철학적 내용이 가장 풍부한 우피니샤드 Upanisad가 부록처럼 담겨 있다. 바라문교의 전통에 의하면 앞의 두 부분은 주로 제의를 중심으로 한 인간의 행위와 의무가 주요 내용이므로 "행위편 Karma.kanda"이라고 불리며, 뒤의 두 부분은 철학적 내용이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다고 하여 "지식편 Jnana.kanda"이라고 부른다. 실제에 있어 우파니샤드는 인도의 철학사상의 원천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고전이며, 베다의 맨 끝에 있다고 하여 베단타 Vedanta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인도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본집은 시인들이 지었으며 브라흐마나는 사제들의 산물이며, 우파니샤드는 철학자들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각 부분의 특징을 잘 들어낸 말이라 하겠다. 아라냐카 Aranyaka는 브라흐마나의 제사 중심적 사상에서 우파니샤드의 철학적. 형이상학적 사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대표하는 문헌으로서 그 성격 역시 뚜렷하지 않았으며 종종 브라흐마나나 우피샤드와 구별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이제 각 부분에 나타난 철학적 사유를 고찰해 보자.2)

 

 

  2 "리그 베다"의 철학적 사유

 고대 인도인들은 자연의 세계에 대하여 무한한 신비감과 경이감을 가졌다. 그들은 자연현상을 현대인들이 보는 것처럼 엄격한 인과의 법칙에 의하여 지배되는 기계적인 체계로 본 것이 아니라 생동하는 신비스러운 힘에 의하여 지배되는 살아있는 존재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신비스러운 자연현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들은 각 현상의 배후에 어떤 살아있는 인격적인 힘이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기도와 찬양과 제사를 통해 이 힘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려 했다. 이러한 인격화된 자연의 힘들이 "리그 베다"의 1028개 송가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여러 신들인 것이다. 이 신들은 자연 세계에 있어서의 그들의 활동 영역에 따라 세 종류로 분류될 수 있다. 즉, 우주 질서의 보호자라고 불리우는 바루나, 하늘의 신 댜우스, 태양의 신 미트라와 수리야 등과 같은 하늘에 속하는 신들, 천둥과 폭풍의 신 인드라, 폭풍의 신 마루트, 바람의 신 바유와 같은 공중을 장악하는 신, 그리고 제사 때 없어서는 안 되는 불의 신 아그니, 제주 소마신, 땅의 신 프르티비와 같은 지상의 신들인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신들 이외에도 베다의 시인들은 인간의 삶속에서 신비한 현상으로 여겨지는 것들도 인격신화하여 찬양을 했다. 예를 들어 언어의 신 박이나 기도의 주 Brhaspati와 같은 존재들이다. 베다인들은 생물과 무생물, 인격과 사물, 정신과 물질, 실체와 속성이 확연히 구별되지 않는 세계관을 갖고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자연의 세계는 우발적이고 무질서한 세계가 아니라 일정한 규칙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베다의 시인들은 인식했으며 이 우주의 법칙성을 "르타"라는 개념으로 표시했다. "르타"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의 동사로 "간다"는 뜻을 지니는데, 사물들이 자연적으로 취하는 어떤 일정한 과정을 의미한다. 이는 중국의 도의 개념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미 언급한 바루나신은 바로 이 우주의 질서 및 인간 행위의 도덕적 질서를 관장하고 있는 신으로서 고대 인도인의 상당한 철학적 추상적 사고력을 나타내는 신이라 하겠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리그 베다"에서 바루나의 숭배는 그렇게 성했던 것 같지 않으며 오히려 아리안족들의 전쟁의 신으로 간주되는 폭풍의 신 인드라나 혹은 제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불의 신 아그니가 더욱 많은 베다인들의 종교적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베다에 있어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이와 같이 세계를 여러 힘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는 다신교적 사고방식 외에 이미 세계의 제현상 내지 힘들의 배후에 있는 어떤 통일적인 존재의 원리에 대한 의식도 있었다는 점이다. 이 통일적 원리는 프라쟈파티나 비슈바카르만과 같이 세계의 창조신으로서 이해되기도 하였고, 또는 아무런 인격적 신의 성격도 지니지 않은 추상적, 형이상학적 개념인 일자 'Tad Ekam' 즉 That One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프라쟈파티는 '생물의 주'라는 뜻을 지녔고, 원래는 다른 신들의 칭호로서 사용되다가 나중에는 독립적인 창조의 신으로서 널리 숭배되었으며, 비슈바카르만은 '모든 것을 만든 자'라는 뜨스오 역시 인드라나 태양신들과 같은 신들의 별칭이었던 것이 독립적으로 인격화되어 세계창조의 신으로 숭배되게 된 것이다.

 한편, "리그 베다"에 나타난 일원론적인 형이상학적인 사유의 가장 좋은 예는 '창조송 Hymn of creation'이라고 불리는 다음과 같은 철학적인 시이다.

 

 태초에 유도 없고 유가 아닌 것도 없었다. 공기도 없었고 그 위의 하늘도 없었다 - 사도 그때는 없었고 불사도 없었으며 밤이나 낮의 표징도 없었다. 한 사람만이 그 자체의 힘에 의하여 바람도 없이 숨쉬고 있었고, 그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에 어둠이 어둠에 가리워 있었고 어떠한 표징도 없이 이 모든 것이 물이었다. 처음에 그 일자 속으로 욕망이 들어갔다. 생각의 산물, 그 최초의 씨, 현인들이 마음에 지혜로서 찾으매 비유 속에 유의 연결을 발견했다 - 창조적 힘과 비옥한 힘이 있었고, 아래에는 에너지 위에는 충동이 있었다 - 제신도 이 세계의 창조후에 태어났다. 그러니 누가 이 세계가 어디로부터 생겼는지 알겠는가? - 가장 높은 하늘에서 세계를 살피는 자, 그만이 알겠지. 아니 그도 모를런지도 모른다.

 이 창조송은 그 내용과 표현에 있어서 불분명한 점들이 많이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일자란 어떤 인격적인 의지를 지닌 신이 아니며 이 세계도 신의 창조에 의했다기보다는 이 하나의 최초의 원리로부터 전개해 나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제신들은 이 세계의 창조 이후에 생겼다고 언급함으로써 다신교적 세계관을 분명히 초월하고 있다. 물론 이 일자라는 형이상학적 실재가 우파니샤드에서처럼 아직 완전히 비인격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음은 '숨','욕망' 등의 표현에 의하여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일자가 열에 의하여 발생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직도 일원론적 사고가 철저하지 못함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리그 베다"의 다른 한 곳에서는 말하기를 ' 하나의 실재를 시인들은 여러 가지로 부른다'라고 하여 제신들이 보다 더 궁극적인 실재의 다양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원론적인 자유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베다의 신들은 우주의 자연질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화복과 도덕질서까지 관장한다고 여겨졌다. 그들은 인간의 제사의 행위와 도덕적 행위의 선악에 따라 적당한 상벌을 내린다. 그러나 이 도덕의 질서는 어디까지나 신과의 관계에서 이해되며, 우파니샤드 이후에 있어서처럼 엄격한 비인격적인 인과율의 성격을 지닌 카르마의 법칙은 아니다. 인간은 그 행위의 결과를 사후의 세계에서 얻는다는 사상이 나타나 있으며, 선한 사람은 천상에서 신들과 함께, 혹은 조상들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린다고 베다인들은 믿었다. 한편, 인간은 죽으면 그의 눈은 태양, 숨은 바람, 말은 불, 귀는 사방, 마음은 달에로 돌아간다고 하는 인간을 하나의 소우주로 보는 사상도 찾아볼 수 있다. 영혼의 불멸을 믿은 것 같으나 영혼에 관한 분명한 개념을 찾아보기 어렵다. 인간이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끝없는 윤회의 세계에서 생사를 되풀이해야 한다는 사상이나 그에 수반되는 해탈의 이상은 아직 찾아볼 수 없다. 대체로 베다인들의 세계관은 낙천적이며 현세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3 브라흐마나의 철학적 의의

 브라흐마나는 본집을 설명하고 해석한 주해서로서, 주로 제사의 방식과 의미에 관한 것을 내용으로 하는 문집이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약 기원전 900년부터 700년 사이에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그중에서 양적으로 가장 방대하고 내용상 가장 중요한 것은 '야주르 베다'에 속해 있는 '샤타파타 브라흐마나'이다. 브라흐마나는 그 내용상, 제사의 방식와 규범을 취급하는 부분인 의궤 즉 Vidhi와, 본집의 여러 송가Mantra의 의미, 어원 및 제사의 기원과 전설 등을 말해 주는 부분인 석의로 구분된다.

 브라흐마의 사상 가운데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제사의 만능화이며, 이 제사가 모든 사상적 관심의 촛점이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강화되어 간 파라면, 즉 사제계급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본래 제사는 신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거나 혹은 신들의 후의를 소원하는, 어디까지나 신 중심의 행위였지만, 제사의식이 점점 전문화되고 정교해짐에 따라 제사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제사 자체의 효능을 믿는 나머지 신들조차도 제사 없이는 아무런 힘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신들이 아니라 바로 올바른 제사 행위 자체이며, 따라서 제사는 우주적 힘을 지녔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 우리가 고찰하겠지만 정통 철학학파 중의 하나인 푸르마 미맘사학파는 이러한 사상의 계승자로서, 신의 존재조차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제사를 우주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생각하는 사상은 '리그베다'에도 이미 나타나 있다. 예컨대 '리그베다' 10권 90송에는 신들에 의하여 한 우주적 인간이 제물로 드려짐으로써 온 세계 전체가 생겨났다고 한다. 즉 그의 눈으로부터 해, 마음으로부터 달, 입으로부터 안드라와 아그니신, 그리고 숨으로부터 바람의 신 바유, 그의 배꼽으로부터 공중권, 머리로부터 하늘, 발로부터 땅, 귀로부터 사방이 생겼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베다 자체와 사성 계급도 이 제사로 인하여 생겨났다고 한다. 즉 바라문은 그의 입이었고 크샤트리아는 그의 두 팔, 바이샤는 그의 두 넙적다리, 그리고 슈드라는 그의 발이었다고 한다. 이 송은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지만, 무엇보다도 최초의 제사행위 자체가 우주질서의 근본이 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브라흐마나에서는 이런 제사주의적 우주관이 더욱더 발전하여 제식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우주의 여러 신들이나 힘들과 상징적으로 상응시켜서, 제식이 우주질서 자체의 근본이 되며 제식의 힘이 우주의 힘 자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제식을 주관하는 바라문계급도 신들과 동등한 위치의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 '샤타파타 브라흐마나'는 말하기를, "신에 두 종류가 있다. 신은 신이며, 학식에 있어서 베다에 통효한 바라문은 인간적 신이다"라고까지 말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제사주의적 세계관으로부터 인도 철학에 있어서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게 되는 두 가지 사상이 싹트게 되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 브라흐만이라는 우주의 통일적 원리로서의 실제를 나타내는 개념의 전개이다. 이 개념은 베다에서 이미 발견되며, 송가나 기도 내지 주술의 말, 혹은 그 말에 들어 있는 신비한 힘을 뜻했다. 그러나 제식의 만능을 강조하는 브라흐마나에 와서는 제사에서 사제들이 사용하는 말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이 말은 제사의 핵심을 이루는 제사의 힘의 원천이기에 동시에 온 만유와 제신들의 배후에 있는 근원적인 실제 내지 힘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샤타파타 브라흐마나'는 말하기를, "참으로 최초의 이 세계는 브라흐만이었다. 그것이 신들을 창조했고, 그 후에 그 신들로 하여금 이 세계들에 오르게 했다. 즉, 아그니는 땅 위에, 바유는 공중에, 수리야 하늘에" 즉 브라흐만은 신들과 구별되며 그들의 힘의 근원이 되는 더 궁극적인 힘 내지 실재인 것이다. 그리고 이브라흐만은 동시에 제사를 주관하는 바라문계급에도 내재하고 있는 신비적인 힘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브라흐만의 개념은 우파니샤드에 와서 더욱더 심화되고 발전되어 인도 철학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제사주의적인 브라흐마나 사상에서 두 번째로 유의할 점은 엄격한 행위의 인과율에 대한 믿음이다. 브라흐마나에서 행위라 함은 주로 제사의 행위로서, 올바른 방법으로 행한 행위는 자연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신의 뜻에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그 결과를 초래하게끔 되어있다는 생각이다. '리그베다'에서 자연의 법칙을 의미하던 르타의 개념은 브라흐마나에 와서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제사의식과 그 제사 행위로 하여금 그에 합당한 결과를 필연적으로 초래하게끔 하는 행위의 법칙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인도 철학에 있어서 절대적인 대전제이다시피 한 카르마(업)의 법칙에 대한 믿음은 이런 브라흐마나의 제사주의적인 사고에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제사주의적인 사상 외에도 브라흐마나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철학적 사유가 발견된다. 예를 들면 세계를 성립시키고 있는 근본 오원소설의 시초를 볼 수 있으며, 인간의 본질에 관해서도 정신과 육체로 파악하여 구분하고 있으며 전자를 '아트만(자아)', '마나스(의근)', '프라나(숨)' 등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들 개념들에 대한 사유는 브라흐마나 이후에 더욱더 발전되어 각기 특수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지만, 그 시도가 브라흐마나에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아트만과 같이 중요한 개념이 숨과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은 매우 의미있는 일로서, 우파니샤드에도 아직 이와 같은 사상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제3장 우파니샤드의 철학

 

 1 우파니샤드의 성격

 베다와 브라흐마나에서 이미 보이기 시작한 고대 인도인에 의한 세계의 통일적 원리에 대한 사유는 우파니샤드에 와서 그 절정을 이룬다. 눈에 보이는 다양한 경험적 현상을 궁극적인 실제로 보지 않고 그 근저에 보이지 않는 통일적인 실제를 탐구하려는 형이상학적인 사유이다. 이 사유는 종교적으로는 인격화된 자연현상으로서의 제신들의 여러 형태나 성격을 초월하여 그들의 배우에 있는 보다 더 근본적인 하나의 신에 대한 추구로 나타난다. 여러 특수한 성격과 모습을 지닌 제신들은 아직도 현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유한한 존재들로서, 모든 존재의 궁극적 원리를 추구하는 우파니샤드 철인들의 마음을 더 이상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목표는 그것을 앎으로써 다른 모든 것들을 알게 되는 단 하나의 근원적인 실재 그 자체였던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이런 고대 인도인의 형이상학적 정열의 산물로서, 그 후의 인도 철학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베다의 끝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베단타(베다의 끝 혹은 목적)라고도 불리며, 육파철학의 하나인 베단타 철학의 기반을 이룰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학파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베다는 그 내용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 특히 제사의 의무와 규정을 다루는 행위편과, 형이상학적 지식을 다루는 지식편으로 구별되어왔다. 우파니샤드는 이 후자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우파니샤드에는 형이상학적 사유 이외에도 아직도 브라흐마나에서와 같이 제의에 관한 여러 가지 잡다한 사상들이 섞여 있지만, 그 독특한 철학적 의의는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형이상학적 사유는 결코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항시 변하는 유한하고 고통스러운 현상세계 자체를 초월하여 영원한 실재에 도달하려는 새로운 종교적 갈망에 입각한 것이었다. 우파니샤드에 와서는 고대 인도인들은 인간의 운명이란 카르마의 법칙에 의하여 윤회의 세계에서 끝없는 생사를 되풀이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마치 풀벌레가 한 잎사귀에서 다른 잎사귀로 옮겨가듯이 사람은 한 생이 끝나면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파니샤드 철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여야 이런 목적없는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생사의 되풀이에서부터 해방되어 절대적인 삶을 얻을 수 있는가에 촛점을 모으게 되었다. 이러한 끝없는 생사의 되풀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올바른 행위란 그것이 도덕적이거나 제사의 행위이거나 간에 이미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행위는 어떠한 것이든 간에 반드시 그 결과를 초래하게끔 되어 있어, 아무리 선한 행위라 할지라도 우리를 계속해서 윤회의 세계에 속박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따름이기 때문이다. 선한 업보를 받는다 해도 이 현상세계 자체를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의 철인들은 절대적인 삶의 발견을 위해서는 행위가 아니라 우주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실재 자체를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서 브라흐마나의 제사를 중심으로 한 행위주의적 철학이 극복되게 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지식이란 경험적인 현상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일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우주와 인생의 비밀을 아는 신비한 지식이었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의 철인들은 이 신비한 지식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전달하지 않았고, 스승과 제자의 특별한 관계 아래서 조심스럽게 성스러운 지식으로서 전수했던 것이다. '우파니샤드'란 말은 "가까이 앉는다"라는 뜻을 지닌 말로서, 선생과 제자가 가까이 앉아 대화를 통하여 비의적인 지식을 전수했다는 데서 주어진 이름이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의 진리탐구는 주로 대화의 형식으로 전개되며, 우리는 이 대화들을 통하여 우파니샤드 철인들이 세계의 궁극적 실재를 추구하는 철학적 정열과 영원한 삶을 바라는 종교적 갈망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에 참가하는 자들은 바라문계급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크샤트리아나 혹은 심지어 슈드라계급의 출신들과 여자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우파니샤드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형성된 다양하고 방대한 문헌으로서, 현재 우파니샤드라는 이름을 지닌 문헌은 약 150종 내지 200여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브라흐마나에 소속되어 있는 고전적인 주요 우파니샤드는 약 13편으로서, 시기적으로 보아 약 B.C 700년으로부터 A.D 200년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며, 따라서 그 안에서도 여러 가지 사상적 흐름들이 발견되고 결코 하나의 일관된 사상이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브르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와 '챤도기아 우파니샤드'로 대표되는 초기 우파니샤드의 중심사상을 고찰하기로 하자.

 

 

 2. 초기 우파니샤드의 철학

 우파니샤드의 궁극적인 지식은 브라흐만을 아는 지식이다. 브라흐만은 원래 브라흐마나에서 제사에 쓰이는 성스러운 말 혹은 이 말의 성스러운 힘 등을 나타내는 말이었음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우파니샤에 와서는 이 개념이 더욱더 형이상학적으로 발전하여, 제의와 관계된 의미는 거의 없어지고 우주의 궁극적 실체 내지 힘을 의미하는 말로 널리 쓰여지고 있다. 이는 모든 현상계의 근저 또는 핵심으로 이해되며, 보이는 다양한 세계의 배후에 있는 어떤 통일적인 실재이다. 만유가 그로부터 나왔고, 그에게로 다시 흡수되게 되는 만유의 근원이며 귀착지인 것이다.

 

 최초에는 이 세계는 둘도 없는 일자인 유만이 있었다. 어떻게 비유로부터 유가 생길 수 있겠는가? 이 일자가 다가 되고 싶어서 불을 방출했고 불은 물을 방출했고 물은 음식을 방출했다. 그다음 일자가 이들 셋 안으로 살아있는 내적 자아로서 들어가서 그 셋을 섞어서 각각 또 셋을 만들내어 만물의 이름과 형상을 산출시켰다. 불과 물과 음식의 색깔은 각각 빨강과 하얀색과 까만색이고 이들은 진리이고 그들로부터 나온 차별적인 것들은 말에 의하여 이름이 주어진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에 들어와서는 이 세 요소들의 가장 미세한 부분은 각각 마음과 숨과 말이 되었다.

 

 웃달라카의 이러한 우주론적 사변은 분명히 다양한 만물에 본질을 이루는 하나의 통일적 실체가 깔려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현상세계의 다양성을 세 가지 요소들의 혼합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나중에 상키야 학파에 의하여 물질계를 구성하는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의 삼요소설로 발전되게 되는 것이다. 웃달라카는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주론적 사변을 인간에 대한 고찰에 연결시켜 우주와 인간의 본질이 동일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에서는 만물의 모태와 같은 브라흐만으로부터 전개되어 나온 현상세계의 존재론적 질서를 인간존재를 중심으로 하여 다섯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브라흐만은 인간존재에 있어서 다섯 가지의 층을 가진 자아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그중 제일 낮은 층을 이루는 것은 음식, 즉 물질로 이루어진 자아, 동물 만에 공통된 지각 활동으로 구성된 자아, 인간만이 소유하고 있는 인식 활동으로 된 자아, 그리고 가장 높고 깊은 단계로서 희열로 이루어진 자아를 말하고 있다. 이 마지막의 희열로 된 자아란 곧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내재하는 브라흐만 자체인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과 브라흐만의 현현인 현상세계와의 관계를 여러 가지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거미와 거미로부터 나온 거미줄, 금과 금으로 만든 여러 가지 물건들, 불과 불꽃들, 진흙과 진흙으로 만든 그릇들, 혹은 악기와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와 같은 비유들이다. 이 비유들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일(1)과 다의 관계로서, 일을 알면 다를 알 수 있으며, 일은 불변하는 실재이며 다는 변화하는 현상세계로서 사실은 단지 이름과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명한 샹카라의 불이론적인 베단타 철학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현상세계를 단지 우리의 무지로 인한 환술로 보는 견해는 우파니샤드에는 아직 분명히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암시적으로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슈베타슈바타라'와 같은 후기의 우파니샤드는 브라흐만을 인격적 신인 이슈바라(주)로서 파악하며 이 세계는 마술사와 같은 신의 환술에 의하여 나타나 보여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잡다한 현상세계가 브라흐만으로부터 전개되어 나온 것이거나 혹은 그것의 변형인 만큼 어디까지나 환술일 수 없고 오히려 브라흐만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는 일종의 범신론적 사상도 다분히 발견되고 있다. 모든 것이 브라흐만의 현현이기 때문에 브라흐만이 모든 것의 배후에 혹은 그 속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우파니샤드에는 세계를 브라흐만의 전개로 보는 전변설과, 세계는 브라흐만이라는 유일의 실재를 근거로 하되 단순히 가상적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 즉 가현설이 둘 다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전자는 베다나 브라흐만에서 이미 발견되는 우주발생론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며, 후자는 우파니샤드 특유의 철학적 기여라고 볼 수 있다. 양자는 다 우주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실재인 브라흐만과 유한하고 변하는 현상세계와의 관계를 파악해보려는 노력인 것이다.

 우파니샤드 철학의 가장 중요한 통찰은 무엇보다도 브라흐만에 대한 우주론적인 사변을 넘어서서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를 주체적으로 파악했다는 데 있다. 즉,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은 곧 다름 아닌 인간의 실재라는 관점하에 우파니샤드의 철인들은 실재탐구의 방향으로 전환하여 자아의 탐색에 눈을 돌린 것이다. 이 방향전환은 종래의 외향적인 우주론적 사변으로부터 내향적인 인간의 자기 성찰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파니샤드의 불멸의 사상적 공헌이었다. 사회적으로는 이 전환은 제사의식을 관장하면서 성스러운 브라흐만의 힘을 거의 독차지 하다시피한 바라문계급의 종교적 권위에 대한 반발로서 이해될 수 있다. 우파니샤드에 바라문계급 출신이 아닌 많은 철인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종래의 바라문계급에 의한 제사를 매개로 하는 종교생활에 회의를 품고 자기 자신의 영원한 자아를 찾음으로써 우주의 궁극적인 실제에 직접적으로 접하고자 하는 노력을 한 것이다. (Deussen은 특히 Ksatriya 계급 가운데서 우파니샤드의 비의적인 진리가 처음에 전수되었다고 생각한다)

 우파니샤드는 인간의 참 자아를 아트만이라 불렀다. '아트만'이란 문자 그대로 '자아'라는 뜻으로, 문제는 무엇이 참으로 인간의 불변하는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우파니샤드 철인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종종의 사변들을 우파니샤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우선 인간존재의 근거로서 자주 숨이 거론되고 있는 것을 본다. 왜냐하면 숨은 인간의 다른 모든 감각 기관의 활동보다 더 긴요하고 잠시도 중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은 인간의 정신적 기능을 설명할 수 없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때로는 숨 대신 의근, 지 등이 인간의 본질적 자아로서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우파니샤드의 사변의 정점은 이 모든 것이 불충분한 것임을 깨닫고 인간의 참자아란 위에서 말한 육체나 정신적 요소와는 달리 그것보다 더 밑바닥에 깔려 있는 깊은 실재임을 이해하게 되는데 있다. 이러한 한층 심화된 사변은 소위 자아의 4가지 상태에 대한 이론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는 우리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자아이다. 즉, 우리의 감각 기관이 외계와의 접촉에 의하여 활동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는 자아는 우리의 몸과 동일시되며 자아가 가장 은폐된 상태이다. 둘째는 꿈을 꾸는 상태로서, 이때에는 우리의 감각 기관과 몸은 쉬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 즉 내적 감각 기관과 의식은 계속 활동하고 있으며 깨어 있을 때의 체험을 재료로 하여 미뉴(가늘 미, 가늘 뉴)한 대상의 세계를 임의로 만들어 내는 상태이다. 여기서도 역시 참자아는 발견되지 않고 마음이 자아와 혼동되고 있는 상태이다. 세 번째 자아의 상태는 이보다 더 깊은 상태로, 꿈도 없는 깊은 수면의 상태이다. 여기서는 어떤 감각 기관이나 의식작용도 없고 그에 해당하는 대상도 사라지게 된다. 즉, 주관과 객관의 대립과 교섭이 초월되고 다양성과 제한성이 사라진 행복하고 평화스러운 상태이다. 그렇다고 이것은 아주 무의식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변적이고 특정한 제한된 의식이 아닌 무한한 순수식만이 밑바닥에 깊이 깔려 있는 상태라고 한다. '챤도기야 우파니샤드'의 웃달라카는 이 깊은 수면의 상태를 곧 자아가 순수하게 그 자체를 되찾은 완전한 상태로 간주한다. 마치 한 마리의 새가 이리 저리 날아다니다가 마침내 자기의 보금자리에 돌아와서 쉬고 있는 상태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만두키야 우파니샤드'와 같은 후기 우파니샤드에서는 더 나아가서 제4의 상태를 완전한 상태로 말하고 있다. 이 4번째의 자아의 상태는 희열의 상태로서, 세 번째의 깊은 수면의 상태와 같이 주 객의 대립이 초월되며, 모든 유한한 정신적 활동이 그친 상태이다. 이 상태야말로 자아가 아무런 방해없이 순수하게 드러나는 지극한 희열의 상태인 것이다. 자아가 특정한 대상이 없이 순수의식으로서 스스로 밝게 존재하는 상태이다. 이 상태는 보통의 경험으로서는 주어지지 않고 요가와 같은 정신적 훈련을 통하여 주어지는 신비적 체험의 세계이다. 우파니샤드의 철인 야즈나발키야에 의하면 자아는 인간의 모든 인식행위나 정신적 활동의 배후에서 항시 그것을 지켜보는 증인과 같은 절대적 주체로서 결코 우리의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인식이요, 다른 모든 인식의 주체로서 그 자체는 결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직관에 의하여 자명한 것으로밖에 알려질 수 없는 실재이다. 따라서 설명이나 정의도 불가능하다. 오로지 부정적 방법으로, '무엇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다'라는 식으로밖에는 이야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야즈나발캬는 강조하고 있다.

 이 자아는 어떤 차별성이나 개별성을 용납하지 않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자아이다.

웃달라카는 그의 아들 슈베타켓투에게 이 진리를 여러 가지 비유로써 가르치고 있다. 꿀이 여러 나무들로부터 채취되지만 하나의 본질이듯이, 강물들이 동에서 오든 서에서 오든 하나의 바닷물을 이루듯이, 아트만에는 아무런 개별적 차별성이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아트만은 다름 아닌 브라흐만으로서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공통된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소금이 물에 녹으면 물의 어느 부분을 맛보나 소금의 맛이 있듯이 아트만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편재하는 공통된 본질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세계는 하나의 궁극적 실재에 참여하고 있으며 브라흐만은 우주의 아트만이요, 아트만은 인간에 내재하는 브라흐만인 것이다. 바로 이 범아일여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최고의 지식인 것이다. '네가 그것이다' 혹은 '내가 브라만이다'라는 우파니샤드의 유명한 구절들은 이 진리를 말해 주는 것이다. 베다나 브라흐마나 시대에 있어서도 이미 인간을 소우주로 보는 견해가 종종 발견되지만, 우파니샤드에 와서 이 사상은 더욱 철학적으로 승화되어 대우주의 실재가 다름 아닌 소우주로서의 인간의 실재로 파악되는 것이다. 브라흐만이 이렇게 인간에 있어서 주체적으로 파악된 결과, 브라흐만의 본성은 불변하는 존재, 순수식, 희열로서 파악되게 되었으며, 동시에 인간의 본질은 무한하고 영원한 우주의 본질과 동일시된 것이다.

 자기가 곧 브라흐만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모든 욕망과 두려움에서부터 해방된다. 왜냐하면 자기자신 이외에 따로이 원하거나 두려워할 다른 아무 대상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은 모든 업으로부터 자유로와지며 사후에는 다시 환생하는 일이 없이 브라흐만 그 자체로서 절대적이고 영원한 삶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삶은 물론 어떤 개인적인 삶의 존속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해탈이란 결국 현세에서 이미 자신에 대한 올바른 통찰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생해탈의 사상을 우리는 이미 우파니샤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도 '리그베다'나 브라흐마나의 전통적인 사유에 따라서 해탈을 사후에 신들의 길을 따라서 브라흐만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3 중후기 우파니샤드의 철학

 이상에서 우리는 초기 우파니샤드의 주요 사상을 대략 살펴보았다. 이제는 '카타 우파니샤드',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 등과 같은 주기 우파니샤드의 사상을 검토해 본다(중기에 속하는 우파니샤드는 이 둘 외에도 이샤, 문다카 등이 있다. Mundaka Upanisad 는 Atharva Veda 에 소속되어 있고 나머지 셋은 모두 Yajur Veda에 속해 있다). 이들 중기 우파니샤드는 대체로 B C 500년에서 B C 200년경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서, 형식상으로 볼 때 산문 대신 주로 운문으로 쓰여진 것이 특징이다. 또한 그 부피에 있어서 '브르하드아라야냐카' 등과 같은 것에 비하면 훨씬 짧고 내용이 비교적 간단하다는 특색이 있다. 사상적으로는 초기 우파니샤드에서 아직도 많이 발견되고 있는 브라흐마나의 제사주의적 우주론적 사변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카타 우파니샤드'에 있어서 철학적으로 새롭고 중요한 것은 상키야나 요가 철학의 근원적 사상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카나 우파니샤드'는 아트만을 마차의 주인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의 몸은 마차이고, 우리의 지성은 마차를 모는 자, 마음은 고삐, 감각 기관은 말들, 그리고 감각 기관의 대상은 말이 달리는 길에 비유되고 있다. 지혜있는 자는 항시 마음의 고삐를 제어하고, 감각 기관의 말을 잘 몰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여 다시는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지만, 무지한 자는 그 반대로 생각과 감각 기관에 이끌리어 윤회의 세계에 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어한다'는 말은 요가와 같은 어원의 말로서 해탈을 위한 실천적 행위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의 방법과 동시에 이를 뒷받침해주는 형이상학적 원리들에 대한 사변도 '카타 우파니샤드'에 전개되고 있다. 세계 전체를 점차적으로 높은 존재론적 원리에 따라 해석하여 요가라는 정신통일의 훈련을 통하여 가장 높은 실재에 접하도록 이론적인 뒷받침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감각 기관보다는 대상 세계, 대상 세계보다는 의근, 의근보다는 지성, 지성보다는 대아, 대아보다는 미현현 그리고 미현현보다는 정신이 더 높은 실재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나중에 상키야 철학에서 하나의 정돈된 세계 전변의 이론으로 정립되게 되는 것으로서, 상세한 것은 후에 검토키로 한다.

 단지 여기서 한가지 언급되어야 할 점은 중기 우파니샤드에는 아직도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은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정신은 물질보다 높은, 그러나 그것과 존재론적으로 동일선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서, 신 혹은 브라흐만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신론적 이원론의 사상은 우파니샤드에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중기 우파니샤드의 또 하나의 중요한 문헌은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이다. '카타 우파니샤드'보다 좀 더 나중의 것으로, B C 2~ 3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우파니샤드에는 요가의 실천에 관하여 '카타 우파니샤드'보다도 더욱더 상세한 설명이 발견된다. 이를테면 요가를 행하는 장소, 정좌의 자세, 호흡의 조절, 요가의 실습에 따른 종종의 초자연적 능력 등을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요가의 궁극적 목표는 신의 인식에 있으며 신의 인식은 개인의 영혼들을 물질세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다고 한다. 신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유일자로서, 만유를 창조하고 그 안에 내재하며 마자막에는 만유를 다시 회수하는 대주재자이다. 우리는 그의 은총에 의해 신과 그의 위대함을 보며 그를 신애하는 자는 진리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본래 초기 우파니샤드에는 브라흐만이 대체로 비인격적인 형이상학적 실재로 이해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분명히 온 세계를 지배하는 인격신으로 간주되고 있다. 특히 그를 베다의 신 가운데 하나인 루드라로 부르고 있으며 이 루드라신은 나중에 쉬바 신과 동일시되는 신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슈베타슈바타라'의 강한 유일신적 사상과 신애의 사상은 서력 기원전 3~ 4세기경부터 대중의 신앙운동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쉬바 신과 비슈누신의 숭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며 이러한 경향은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 와서 더욱더 본격적인 자세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의 사상 가운데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신과 물질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신을 환술사로, 물질세계를 그에 의하여 조작된 환술로 비유하고 있으며 개인의 영혼은 이 환술에 홀려서 붙들려 있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 나중에 베단타 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의 하나인 '마야'라는 말이 여기에 비로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신과 개인 영혼과 물질세계와의 삼각관계는 후세의 유신론적 제 철학체계의 근본을 이루는 문제인 것이다.

 중기 우파니샤드의 인격적인 브라흐만의 이해와 더불어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카타'와 '문다카 우파니샤드'에 나타나 있는 아트만의 계시의 사상이다. 즉 아트만은 어떤 가르침이나 지적인 능력에 의하여 알려질 수 없는 실재로서 자기가 선택한 자에게만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하는 사상이다.

 지금까지 '카타'나 '슈베타슈바브라' 등과 같은 중기 우파니샤드 사상의 특징들을 살펴보았거니와 이들보다도 더 늦게 산출된 일군의 후기 우파니샤드들도 있다. '프라슈나', '마이트리', '만두기야'와 같은 우파니샤드들이 이에 속하며 대략 BC200에서 AD200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는 '마이트리 우파니샤드'의 사상만을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마이트리 우파니샤드'에는 대체로 '카타 우파니샤드' 등에 나타나 있는 상키야 철학의 씨가 더욱더 분명하게 개념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예를 들면 상키야 학파에서 말하는 개인아의 개념이 명확히 정립되어 물질로부터 성립된 원소아와 확실히 구별되고 있으며, 윤회의 주체로서의 세신의 개념도 발견된다. 또한 만유를 구성하고 있는 삼요소(sattva, rajas, tamas)의 이론도 발견되며, 요가 철학의 근본이 되는 요가 수행의 팔지설에 가깝게 그중의 6단계가 이미 언급되어 있다.

 이상에서 고찰한 중후기의 우파니샤드들을 통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상키야 철학은 아마도 체계적인 학파 가운데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철학적 사유라는 점이다. 그것은 해탈의 종교로서 실천적인 요소가 강한 불교의 영향 아래 이에 상응할 만한 해탈의 방법과 이론을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를 느낀 바라문 사상가들의 대응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제4장 비바라문계 철학의 발흥

 

 1. 역사적 배경

 인도의 서북부로부터 들어와서 인더스강과 쟘나강 사이에 자리를 잡고 발전했던 아바라문 계급의 주도하에 발전했던 아리안족의 베다문화는 동쪽으로 확대되어 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철기문화의 수입으로 여태껏 밀림지대였던 곳이 개간되어 농작지가 확대되어 생활이 윤택해짐에 따라 갠지스강의 중류 이동에는 여러 곳에 상공업을 중심으로 한 도시문화가 건설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종래에 촌락과 씨족적 유대관계를 기반으로 형성돼 왔던 바라문교의 지위도 자연히 흔들리게 되었다.더우기 아리안족의 동점에 따라서 원주민과의 인종적 혼합도 생기게 되어 전통적 바라문교의 약화는 더 한층 가속화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바라문의 사회적 특권이나 베다의 종교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나 쟈이나교와 같은 새로운 자유사상적 운동들이었다.

 이시기는 또한 인도가 정치적으로도 큰 변화를 겪는 때였다. 종래의 군소 부족국가들은 마가다나 코살라와 같은 강대한 군주국가들에 의하여 여지없이 정복당하였으며 이에 수반하는 이에 수반하는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불안이 극심한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도시문화의 발달에 따라서 안정된 종족적 유대관계를 도시의 상공인들은 한편으로는 새로이 주어진 개인적 자유와 세속적 향락의 기회를 누리는가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인생의 무상함과 무의미함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기도 한 것이다. 불교와 쟈이나교는 무엇보다도 바로 이러한 도시상공인들의 새로운 종교적 욕구에 부응하여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잡게 된 종교이다.

 불교와 쟈이나교는 물론 이러한 격변하는 시대에 발생한 대표적인 종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밖에도 많은 유사한 운동들이 있었음을 불교나 쟈이나교의 문헌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이들 자유 사상들은 종래의 바라문들과는 달리 사문이라는 새로운 형의 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사문이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촌락이나 도시에 유행하면서 걸식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면서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는 출가자들이었다. 그들의 주위에는 자연히 그들의 교설을 따르고 실천하는 무리들에 의하여 승가라는 생활공동체가 형성되게 되었다. 이들 공동체들은 사회적 계급적 신분의 차별 없이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는 개방적인 성격을 띤 집단이었다.

 불교나 쟈이나교를 제외하고는 이들 군소 종교운동들의 사상은 제대로 있지는 않으나 불교의 경전들을 통하여 우리는 그들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철학적 사유의 모습들을 엿볼 수 있다. 불교의 경전에는 소위 육사외도라 하여 불타 당시에 그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여섯 가지의 사상들이 유행되고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그중에서 쟈이나교는 나중에 항을 달리하여 고찰하기로 하고 나머지 다섯 가지의 교설들을 먼저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2. 육사외도

 팔리어로 된 소승경전의 하나인 사문경전(1)에 의하면 첫째, 푸라나 카사파라는 사람은 살생,도둑질,간음,망언 등의 행동을 스스로 하거나 남에게 하도록 가르쳐도 악이 아니며 악한 업보를 받지 않는다는 업의 법칙을 부정하는 무도덕설을 주장했다고 한다.

 마칼리 고살라라는 자는 인간의 도덕적 그리고 인격적 상태에는 아무런 원인이나 이유가 없으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중생의 상태는 단지 운명과 그들이 속한 종 그리고 그들의 천성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나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운명론 혹은 결정론을 주장했다. 그는 본성론적인 결정론자로서 인간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수회와 업을 인정했지만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꼭 같이 일정 기간 동안 생사의 세계에서 정해진 양의 고통과 즐거움을 맛보기 마련이며 아무도 이것에 영향을 주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해탈이란 이 주어진 기간이 끝나는 것을 말하고 그때에야 비로소 고의 종식이 가능한 것이다. 그는 운명과 천성의 절대적인 지배를 믿는 철저한 결정론자이나 동시에 이러한 요소들 이외에는 인간의 상황에 대하여 다른 아무런 원인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무인론자이기도 한 것이다. 마카리 고살라의 주장을 따르는 자들을 사명파라고 부른다. 그의 견해나 경력은 쟈이나경전에도 전하여지고 있으며, 쟈이나교의 조사인 니간타 나타풋다와 일시 수행을 같이 한 일도 있었다. 사명파는 제법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해 온 흔적이 남아 있다.3)

 세 번째의 외도로서 아지타 케사캄발라라는 자는 감각적 유물론을 내세웠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땅, 물, 불, 바람의 사대로부터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나 누구든지 죽으면 신체가 파멸되고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을 주장했다. 그는 감각만이 인식의 유일한 원천이며 업의 법칙을 부인하는 무업론(설무업)을 주장하고 사후의 세계를 부정했다.

 네 번째로, 파쿠다 카차야나는 세계는 땅, 물, 불, 바람, 고통, 즐거움, 운명은 불변하고 영원한 일곱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행위의 주체가 되는 존재란 없다고 하는 물질주의적이며 무인격적인 세계관을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예리한 칼로 남의 머리를 둘로 쪼개도 사실 아무도 그의 생명을 앗아간 자가 없으며 단지 칼이 일곱 가지 요소들의 큼 사이로 침투하여 들어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행위와 사건의 철저한 비인격적인 과정으로 설명하는 세계관인 것이다.

 다섯 번째로 산자야벨라티풋타라는 자는 내세와 업보에 대하여 인식적 회의론을 주장했다. 즉 업이란 것이 존재하는가고 물으면 그는 그렇다고도 안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그렇지 않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마가다의 수도인 왕사성에서 살았으며 불타의 유명한 제자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도 처음에는 그의 제자였다고 한다.

 이상의 5가지 이론들에서 우리가 특별히 유의해야 할 점은 그들이 대체로 말해서 물질주의적인 인간관을 지녔고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인간의 깊은 영적인 자아 즉 아트만이나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 등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회의적이고 심지어는 도덕적 가치 내지 법칙마저도 부인하게 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나중에 우리가 고찰하겠지만 불타의 교설은 한편으로는 이런 사상들과 류를 같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 회의주의나 형이상학적 단멸론과 같은 결론에는 빠지지 않는 소위 중도적인 입장을 표방한 가르침이었다. 이러한 비판적 자유주의적 사상의 전통을 후세에 좀 더 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한 학파가 다름 아닌 차르바카학파인 것이다.

 

 

  3. 챠르바카의 철학

 챠르바카란 말의 원래 의미는 분명치 않으나 여하튼 챠르바카는 인도 철학사에서 유물론과 회의주의 및 향락주의를 대표하는 학파로 알려져 있으며, 불교나 자이나교 등을 포함한 다른 모든 학파의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4) 세상 사람들의 천박하고 상식적인 견해를 따르는 철학이라 하여 순세파라고도 불린다.

 이 학파의 주장하는 바는 그 학파 자체의 문헌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비판자들의 저서를 통하여 알려져 있지 때문에 반드시 객관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철학적 입장을 내세웠음을 인도 철학사가들은 말하고 있다.5)

 #1 땅, 물, 불, 바람이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2 몸과 감각 기관과 감각의 대상들은 이 4요소들의 여러 가지 상이한 결합에 의한 결과이다.

 #3 의식이란 물질로부터 생긴 것이다. 마치 발효된 누룩으로부터 술의 최하는 성질이 생기는 것과 같다.

 #4 영혼이란 의식이 있는 몸에 지나지 않는다.

 #5 향락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다.

 #6 죽음만이 해방이다.

 챠르바카는 인식론에 있어서 직접적인 지각만이 타당한 인식의 수단이라고 주장하여 인도 철학의 제학파들이 대부분 인정하는 추론의 타당성을 부정한다. 추론이란 직접적인 경험에 의하여 알려진 것에서부터 모르는 것을 알려는 시도로서, 거기에는 확실성이 없다고 한다. 연역적

추론은 결론이 아직도 입증되지 않은 대전제로부터 추리되어 나오기 때문에 선결문제 해결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대전제, 예를 들어 (연기가 나는 곳에는 불이 있다) (혹은 모든 사람을 죽는다)라는 일반적 명제를 옳은 것으로 알 수 있는가이다. 챠르바카에

의하면 보편적인 진술의 타당성은 우리의 지각이 경험한 범위 내에서 타당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연기와 불 사이의 관계를 모든 경우에서 다 관찰한 사람은 없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귀납적 추리에 의한 결론에는 비약이 있다는 것이다. 대전제의 핵심은 두 현상 간의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주연 관계6)가 성립되어야 하는 것인데 귀납적 추리는 이러한 관계를 확립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불과 연기 사이의 인과관계를 논하는 것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바로 이 인과관계를 아는 것도 귀납적 추리이며 이 추리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증언에 의하여 이 보편적인 관계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타인의 증언의 타당성 자체가 추리에 의하여 알려지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챠르바카 철학의 추론에 대한 회의는 서양철학사에서 잘 알려진 흄의 귀납적 추리와 인과율에 대한 회의론과 매우 흡사한 것이다.

 챠르바카는 또한 권위있는 사람들의 증언도 인식의 타당한 방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선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들을 때 왜 그것을 믿는가를 밝힌다. 그러자면 자연히 추론이 들어가게 마련이며, 이 추론의 타당성은 이미 부인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직접 말을 들어서 무엇을 알 경우에는 그것은 직접적인 지각으로 간주하여 타당하다고 한다. 따라서 베다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음은 이러한 견해에서 두말할 여지가 없다.

 챠르바카의 형이상학은 이와 같은 인식론의 당연한 결과이다. 특 이 학파는 직접적 지각의 대상이 되지 않는 존재들의 실재를 모두 부인한다. 신의 존재, 영혼의 존재, 그리고 업의 법칙, 생전이나 사후의 존재 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챠르바카는 주장하기를 이런 것들은 사제계급이 무지한 사람들을 속여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 낸 이론들이라고 한다. 또한 챠르바카는 이러한 세계관에 들어맞는 윤리관을 서슴없이 정직하게 편다. 인생의 최고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육체의 고통을 최소한 줄이며 쾌락을 최대한 즐기는 데 있다고 한다. 이 이상 다른 도덕의 법칙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서 고통을 완전히 극복하려는 해탈의 이상은 불가능한 것이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쾌락과 고통은 반드시 섞여지게 마련이며, 그렇다고 그것이 두려워서 쾌락과 고통의 피안의 세계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껍데기 때문에 알맹이를 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네 가지 목표, 즉 욕망, 부, 의무, 해탈 가운데서 챠르바카는 첫번째인 욕망만을 인정한다. 부는 어디까지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므로 욕망만을 최고의 가치로 간주한다.

 챠르바카 철학은 놀랍게도 현대적인 면을 많이 지닌 과격한 사상으로서, 고대 인도인의 사유의 자유를 입증해 주는 좋은 예라 볼 수 있다. 여하튼 인도의 정통철학파들이 앞을 다투어 이

파의 견해를 논파하려고 한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의 제기와 해결에 있어서 너무나 과감하고 분명했기 때문이다. 비록 학파로서는 오래 존속하지 않았지만 챠르바카는 다른 학파의 철학적 사유를 항시 자극해 왔다는 데 있어서 인도 사상(印度史上) 사상의 특수한 기여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전통 인도 철학은 이 챠르바카가 제기한 문제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대답했는가에 그 사활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4. 원시 쟈이나교의 사상

 불타와 동시대에 쟈이나교의 창시자 바르다마나가 있었다. 그는 인도의 북부 바이샬리시 부근에서 B.C 549년에 한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30세에 출가하여 고행과 명상에 2년간 전념한 후, 모든 옷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고행자로서 12년간 심한 고행의 생활을 하였다. 드디어 한여름 밤에 완전한 앎을 얻어 독존위에 도달하였다. 그 후로는 마하비라, 즉 위대

한 영웅, 혹은 지나, 즉 승지라는 칭호를 얻어 여러 곳을 여행하며 포교생활을 하다 72세를 일기로 하여 파트나 부근에서 생을 마쳤다. 대체로 불타와 매우 비슷한 생을 보냈으나 고행을 철저히 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쟈이나교의 전통에 의할 것 같으면, 마하비라는 그의 이전에 있었던 많은 지나들(여울을 만드는 자라는 뜻의 사람들)의 후계자로서 그는 제24조에 해당한다. 이들 마하비라 이전의 지나들은 모두 전설적인 존재들로 간주된다. 단지 제23조인 파르슈바는 대략 기원전 8세기경에 있었던 역사적인 인물로 간주되며, 그는 4개조의 수행상의 계율을 가르쳤다고 한다. 즉 살생, 유도, 음행, 망언을 금했다고 한다. 마하비라는 거기에 수유를 금하는 5번째의 규칙을 더하여 소위 오대경이라는 자이나교의 근본 윤리강령을 제정하게 된 것이다.

 마하비라는 그가 생존했을 때 이미 유력한 교단을 형성하였으나, 전설에 의하면 그가 죽은 후 교단은 여러 번 분열을 거듭하였다. 그중에서 특히 백의파와 공의파의 분열은 유명하다. 서력 기원전 4세기 말경 챤드라굽타왕 때의 일로서, 마가다지방에 기근이 생기어 제6대 교단장 바드라바후는 일부의 수도승과 같이 갠지스 유역으로부터 데칸지방으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후에 돌아와 보니 그 지방에 남아 있던 스툴라바드라를 우두머리로 한 승려들이 독자적으로 성전의 편찬을 행할 뿐만 아니라 생활 규범에 있어서 타락상을 보였다고 한다. 즉, 휜 옷들 몸에 걸치고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한 오라기의 실도 몸에 걸치지 않는 공의파와 흰옷을 입는 백의파로 교단이 분열되게 되었다고 한다.7) 여하튼 백의파나 공의파 모두 바드라바후 이후로는 바르다마나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성전에 관한 완전한 지식이 산일되게 되었다고 한다. 바드라바후가 죽자 백의파의 지도자 스툴라바드라는 파탈리푸트라에서 큰 결집을 열어 성전을 12부문으로 재편성하고 백의파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공의파는 성전이 전멸되었다고 주장하여 그들 스스로가 만든 대체의 경전을 사용하게 되었다. 백의파는 서력기원 5~6세기에 발라비에서 다시 결집하여 그들의 경전을 최종적으로 정하고 성문화하였다. 이 쟈이나교의 성전은 반마가디어라는 일종의 용어로 씌어져 있으며 마하비라 이후 거의 1000년 후에 편찬되었으므로 순수한 마하비라의 가르침만을 전한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후세의 체계화된 쟈이나교리서들의 사상을 제외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원시 쟈이나교의 가르침을 서술할 수 있다.8)

 불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하비라의 최대 관심사는 고통스러운 윤회의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하비라는 윤회의 세계에 묶인 인간의 상황을 불타와는 달리 이해했다. 즉, 그는 세계에는 수없이 많은 영원한 명아들이 각각 그들을 내포하고 있는 물체나 몸들의 크기에 따라 한계지어진 크기를 가지고 존재한다고 한다. 쟈이나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돌이나 흙과 같은 것들도 살아있는 것으로서 그 안에 명아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명아는 우리의 모든 정신적인 작용들의 주체이며 행동의 주체이기도 하다. 명아는 본래적으로는 다 같으며, 무한한 지, 견, 력, 안의 성질들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 말, 의식의 업으로 인하여 이러한 성품들이 가리워져 있고 서로 간의 차이를 나타낸다고 한다. 마하비라는 업을 명아에 달라붙는 일종의 미세한 물질로 간주했으며, 이 물질 때문에 명아가 제 성품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이 업은 인간의 여려 다른 행위들의 원인이 되며, 새로 몸을 받아 여러가지 다른 환경하에 다시 태어남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현세에서의 생의 과정을 통하여 이 전생에 쌓인 업을 점점 진하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업이 명아로 유입되게 된다. 이렇게 유입된 업의 물질을 명아에 접착시켜서 그것의 속박을 가져오는 것은 사탁 즉, 분, 만, 기, 탕이라는 격정들로서 이들을 카사야(끈적끈적한 접착제라는 뜻)라 한다. 다시 말하면, 명아가 격정의 자극을 받아 업을 짓게 되면 이 업은 어떤 물질의 형태로 명아에 들러붙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명아는 업신이라는 업의 물질로 구성된 미세한 몸과 더불어 윤회를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상태로부터의 해탈은 어떻게 하여야 가능한가? 물론 명아가 업으로부터 자유로와져야만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우선 더 이상 새로운 업의 유입이 없도록 차단을 해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도덕적 행위와 감각 기관의 활동의 제어를 통하여 격정과 업을 줄여야 한다. 다음에는 이미 들어와 있는 업을 소멸해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방법은 고행이다. 의식적으로 행하는 고행을 통하여 이미 쌓여 있는 업이 자연적인 소멸보다도 더 빨리 소멸되어 버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명아가 업으로부터 정화되면 다시는 환생하는 일이 없으며, 쟈이나교의 우주관에 따라서 우주의 맨 꼭대기로 승천하여 거기서 영원하고 행복한 전지의 삶을 영위한다. 이것이 명아의 해탈인 것이다.

 

 

  5. 원시 불교사상

 원시불교의 철학적 사상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가장 완벽하게 전하여 오는 것은 팔리어로 씌어진 상좌부전통의 경, 율, 론 삼장이다. 그중에서도 불타의 설법을 내용으로 하는 경은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9) 불타의 교설이 구전 단계를 지나서 대체로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B. C. 1세기 경이라고 본다. 따라서 오랜 구전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부처님 자신이 말했다고 보기 어려운 후세의 여러가지 잡다한 종교적, 철학적 사상이 많이 혼입되어 전하게 된 것이다. 지금에 와서 진정한 불타 자신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가려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 경들을 통하여 공통적으로 거의 동일한 표현으로 거듭되어 강조되고 있는 사상들을 우리는 대체로 불타 자신에서부터 연유한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예를 들면 사성체, 팔정도, 오온, 십이지연기, 사념체 등과 같은 것으로서, 우리는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원시불교의 사상을 대략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불타는 히말라야 산록에 있는 조그마한 사키야족의 왕국의 왕자로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시의 일반적인 정치적 추세에 따라 사키야왕국도 인근의 강대국인 코살라국에 의하여 압박을 당하다가 결국 병합되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불타의 성은 고타마였고 그의 이름은 싯달타였다. 불타란 지나와 마찬가지로 수행 후에 얻어진 칭호이다. 그리하여 그는 고타마 불타 혹은 석가모니, 즉 사키야족의 성자라고 불리다.

 그는 29세 때에 당시의 사문들처럼 출가하여 걸식여행을 하면서 종교적 수행을 했다. 그는 주로 마가다국에서 6년간이나 유행하면서 당시의 여러 수행자들을 만나서 선정과 고행을 배우고 실천했으나 만족을 얻지 못했다. 어느 날 그는 가야라는 곳에 있는 한 보제수 밑에서 명상을 하다가 진리는 깨달아 불타, 즉 각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나이 35세 때의 일이었다. 도를 이룬 후 그는 전에 고행을 같이 했던 다섯비구들에게 설법을 하기 위하여 베나레스에 있는 녹야원에 가서 최초의 설법으로서 애용과 고행의 양극을 피하여야 한다는 중도 및 사성체와 팔정도를 가르쳤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초전법륜이다.

 불타는 그 후 45년에 걸쳐서 교화 활동을 벌이며 많은 귀의자를 얻었다. 그는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에서 보냈으며, 슈라바스티, 라자그르하, 바이샬리 등의 제 도시들을 활동무대로 삼았다. 그는 쿠시나라라는 곳에서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의 생의 마지막 부분을 자세히 전하여 주고 있는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그는 자기가 죽은 후 교단은 그가 가르친 법을, 그리고 각자는 자기 스스로만을 의지할 것을 권면했다. 그는 최후의 설법으로 모든 유위법은 멸하게 되어 있으므로 부지런히 목적을 달성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불타가 성도 후 최초로 녹야원에서 설했다고 하는 사성제의 첫번째 진리는 인생의 고통에 대한 진리다. 생, 노, 병, 사가 모두 고통이며, 싫어하는 자와 만나고 좋아하는 자와 헤어짐이 모두 고통이며,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함도 고통이다. 불타는 나아가서 인간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오온, 즉 다섯 가지의 그룹들이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한다. 불타에 의하면 인간이란 색이라는 물질적 요소들, 수라는 6가지 감각 기관들과 대상들과의 접촉에서 생기는 감정들, 상이라는 같은 방법으로 해서 생기는 지각들, 행이라는 업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의지적인 요소들, 그리고 식이라는 수와 사들에 의하여 주어지는 의식들이 한데 묶어진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오온이 모두 고통인 것은 그들이 잠시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으며 항시 변하는 무상한 것이기 때문이며, 이 무상한 오온을 취하여 어느 것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자아라 부를 것이 없다고 한다.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말하는 아트만이라고 부르는 자아의 개념은 영원불변하고 무한한 희열이 되는 것이었다. 불타는 이러한 개념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나, 그의 인간관은 우파니샤드의 철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즉, 오온의 어느 것도 그러한 영원한 기쁨이 되는 것은 없으며 인간에게는 오온의 화합이외에 따로, 혹은 이 오온을 소유하는 어떤 불변의 자아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단지 항시 변하고 잇는 제법들의 묶음 자체로서 오로지 현상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비단 인간의 존재뿐만 아니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법이라고 부르는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무수한 존재요소들의 결합으로서, 이 법들은 끊임없이 생멸을 계속하고 있으며, 그 어느 것도 상주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실재라는 것은 순간순간 작용하고 사라져버리는 법들뿐이며 인간과 세계란 이런 법들로 구성된 현상들로서 그 배후에 어떤 불변하는 실체나 본질이 없다는 하나의 현상주의적인 세계관을 불타는 가르친 것이다. 제법은 고통, 무상, 무아의 세가지 법인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불타의 두번째 진리는 이러한 고에는 고가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있다는 집체이다. 즉 다시 태어남을 초래하는 애욕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타가 발견한 매우 중요한 사상으로서 몇 가지 기본적인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고통으로서 인간 자재에는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다. 고통이란 아무 원인도 없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타는 무인론자가 아니었다. 둘째, 원인을 가진 것은 생성된 것이므로 유한한 것이며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이 제거되면 결과도 제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으로서의 인간존재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영원한 숙명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타는 숙명론을 거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연론과 숙명론을 거부하는 불타의 사상은 그의 연기설에 잘 나타나 있다. 연기설의 일반적인 구조는 A가 있으면 B가 있고, A가 생기면 B도 생기고 A가 없으면 B가 없고 A가 멸하면 B도 멸한다는 것이다. 불타는 이 진리를 고통으로서의 인간존재의 원인을 구명하는 데에 적용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천명한 십이지연기설인 것이다. 사성체에서는 불타는 고의 원인을 단순히 애욕이라고 들고 있지만 경전의 다른 여러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12개의 요소들을 가지고 생사에 유전하는 인간존재를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

 전통적으로 이 십이지연기설은 삼세(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인간의 유전을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왔다. 즉 무명과 행은 현세에 태어나기 이전에 과거세, 식으로부터 유까지는 현세, 그리고 생과 노사는 내세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불타의 이러한 연기설에 의할 것 같으면 인간존재의 여러 측면을 가리키고 있는 이들 제법은 우연적으로 무질서하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일정한 필연적 규칙성 내지 법칙성을 가지고 상호관계 속에서 생멸한다는 것이다. 또한 제법은 이렇게 상의상자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것도 독자성을 지니지 못하고 상대적, 조건적, 그리고 일시적인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제법이 상의상자하여 생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궁극적인 최초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불타의 연기설은 우파니샤드의 철학처럼 인간과 우주의 어떤 궁극적인 제일원인이 되는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무상한 제법의 상호작용에 의한 생멸만을 얘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무명으로부터 윤회의 과정이 시작할 필요는 없으며, 어디서 시작되든 꼭 같은 양상으로 생사의 과정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무상 자체도 조건적으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명으로 사의 순환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그것이 보다 근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제거해야만 다른 것들도 따라서 제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이지연기설에 있어서 또 한가지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불타에 의할 것 같으면 이러한 생사의 과정을 통하여 어떤 불변의 자아가 있음으로 해서 그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조건적으로 생기하는 제법의 연속으로서의 인간존재라는 현상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의 생으로 다시 태어남에 있어서 전후 양존재의 관계를 같은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어 불이 한 연료(오온이라는)를 다 태우면 다른 연료로 옮겨가나 그 옮겨진 불은 전의 불과 가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것이다. 같다고 생각하면 무아설에 배반되는 상주론에 빠지고, 다르다고 하면 인격의 연속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도덕적 인과율과 책임을 부정하는 단멸론에 빠지게 된다고 하여 불타는 이 두 견해를 배척하고 자기의 입장을 중도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당시의 우파니샤드적인 인간관이나 유물론적인 인간관, 또는 운명에 의한 결정론이나 우연에 의한 무결정론을 모두 배척하고 불타는 연기론에 입각한 인간관을 설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타는 연기관을 중시하여 말하기를 연기를 본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본 자는 연기를 본다고까지 말한 것이다.

 위에서 고찰한 십이지연기설에 의할 것 같으면 전생과 후생에 있어서 한 개인의 인격적 연속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식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조건적으로 성립되면 항시 변하고 있는 하나의 흐름일 뿐이며 어떤 영구불변의 영혼이나 자아는 아닌 것이다. 흐름이라 하여 식의 자기동일성이 완전히 상실되는 것은 아니며, 변하는 가운데서도 어느 정도의 연속성과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현세에 있어서나 혹은 현세에서 내세로 넘어갈 때나 마찬가지라 한다.

 사성제의 세 번째 진리는 고가 멸한 상태가 있다는 진리이다. 즉 열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후세에 만들어진 구별에 의하면 열반에는 과거의 업의 결과인 현재의 오온을 그대로 지닌 채로 경험하는 유여열반과 오온이 해체된 후 사후에 주어지는 무여열반이 있다. 유여열반은 생해설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무루성인 아라한이 체험하는 완전한 행복과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아라한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가이다. 즉 인간에게는 영원불멸의 자아가 없는데도 아라한은 어떤 형태로 존속하는 것인가? 도대체 누가 열반에 들어가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이미 불타 당시부터 많은 의혹과 논란이 있었음을 우리는 경전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이 문제는 불타가 대답하기를 거부한 소위 14무기의 하나였다.10) 문제는 왜 불타가 이 문제에 대하여 답하기를 꺼렸는가 하는 것에 대한 해석이다. 불타는 이 문제에 관해서 여러 가지 견해를 보이고 있다. 한 곳에서는 불타는 이런 문제는 사변적인 것으로서, 자기는 고의 원인을 알아서 고를 제거하려는 실제적인 관심을 떠난 문제에는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단상의 이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답을 하지 않았다고 밝힌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해탈한 자의 세계, 즉 열반이란 보통 인간들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대답을 회피한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즉 열반의 세계는 누구가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열반에 드는 아라한이란 마치 연료가 다하여 꺼진 불과 같아서 어떻게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오온을 떠나서 별도의 자아가 있어서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열반이란 오온의 불이 꺼진 아라한에게 주어진 어떤 상태인 것이다. 네번째 진리로 불타는 열반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다. 즉 오견, 오사, 오언, 오업, 오명, 오정진, 오념, 오정의 팔정도이다. 이 8가지 수행을 셋으로 분류하여 계(오언, 오업, 오명), 정(오념, 오정, 오정진), 혜(오견, 오사)의 삼학으로 나눌 수 있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이 삼학을 닦아나가는 수해의 종교이며, 부처의 가르침을 대부분이 이 팔정도의 내용을 여러가지로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고와 무상과 무아를 깨닫는 지혜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무명이 제거되어야 생사의 순환이 깨어지고 인간존재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제5장 소승부파 불교 철학의 발전

 

 1. 부파불교의 전개

 불타의 마지막 날들에 관하여 상세히 전하고 있는 소승경전의 "대반열반경"에 의할 것 같으면, 불타는 그의 입적을 앞두고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아난다여, 너희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스승의 가르침이 끝났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스승이 안 계신다'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난다여, 너희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고 제정한 법과 율을 나의 사후에 너희들의 스승으로 삼아라.

 

 그러나 문제는 불타의 입적 후 그의 법과 율에 대하여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서로 다른 해석과 전승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불타의 생존시에는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여러 의구심과 논란이 일어나도 그의 개인적인 높은 인격과 카리스마에 의하여 교단은 통일과 화합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입적한 후 불교교단은 그에 비견할 만한 정신적 지도자도 없었고 교단의 조직 또한 교단의 통일을 유지할만한 어떤 교권적 제도를 지니지 않았다. 따라서 불교는 지리적 양적 성장에 따라 불타의 가르침에 대하여 서로 다른 전통을 전수하게 되었고, 자연히 교단의 분열도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단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수차의 결집회의를 했으나 결국 교단은 분열되고 만 것이다.

 제일 처음의 공식적인 교단분열은 불타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표방하는 보수파의 장로들을 중심으로 한 상좌부와, 교리와 승단의 규율에 있어서 신축성을 허용하는 진보적인 대중부와의 분열이었다. 이 분열의 시기는 세일론의 남방불교전통에 의하면 불멸 후 약 100년 후에 소위 '십사'를 둘러싼 계율해석을 위하여 바이샬리에서 모인 제2차 결집 때였다고 하며, 북방불교의 전통에 따르면 아쇼카왕의 치세 때에 마하데바라는 사람이 소위 '오사' 즉, 아라한의 권위를 격하시키는 다섯 가지 항목을 주창한 것을 계기로 하여 분열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불멸 후 100년부터 아쇼카왕의 사이에 불교교단 내에 분열과 대립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왕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칙령을 내려 교단의 화합을 촉구하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교단의 분열은 아마도 왕의 불교 지원에 힘입어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더욱더 세분되어 급기야 대중부와 상좌부의 근본이부를 중심으로 하여 18개 혹은 20개의 부파가 파생하게 된 것이다. 세일론의 '도왕통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18부의 분파를 언급하고 있다.

 대중부에는 우가부, 일설부, 그리고 제다산부가 있고 다시 우가부에는 다문부가 있다. 상좌부에는 화지부와 발자자부가 있고 다시 화지부에는 설일체유부, 음광부, 설전부, 경부와 법장부가 있고 발자자부에는 법상부, 현위부, 밀림산부 그리고 정량부가 있다.

 한편 설일체유부의 전승을 전하고 있는 세우의 '이부종윤론'은 다음과 같은 20개 부파의 분열을 말하고 있다.

 대중부에는 일설부, 설출세부, 게윤부, 다문부, 설가부, 제다산부, 서산주부, 그리고 북산주부가 있고, 상좌부는 크게 설일체유부와 설산부(본상좌부)로 나뉘어지며 설일체유부는 다시 독자부, 화지부, 음광부 그리고 경량부로 되어 있다. 독자부는 법상부, 현위부, 정량부 그리고 밀림산주부로 되어 있다.

 이들 부파들은 현재 이름 정도만 남아 있는 것도 많고 실제에 있어서 인도 철학사에서 이렇다 할 학설을 내세운 것으로 알려진 것은 불과 몇 개뿐이다. 특히 대중부 계통의 문헌은 거의 다 산일되었고 상좌부 계통으로서 문헌이 보존되어 있거나 혹은 간접적으로 그들의 교설을 알 수 있는 학파들은 주로 세일론 계통의 상좌부, 설일체유부, 경량부, 독자부 등이다.

 이들 부파들은 대부분 자기들의 관점에 입각하여 전수한 경, 율, 논 삼장의 문헌을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현재 그 삼장이 비교적 완벽하게 남아 있는 것은 팔리어로 된 세일론 상좌부계통의 삼장과 범어에서부터 한역되어 보존되고 있는 설일체유부 계통의 삼장이다.

 경은 원래 불타의 설법을 모은 것이고 율은 불타가 정한 승려생활의 규범을 모은 것으로서, 일찍부터 경과 율은 구전으로 편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논은 이보다도 훨씬 후에 와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원래 불타의 가르침을 기억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삼계, 사념처, 오온, 칠각지 등과 같이 법수에 따라 정돈되어 전해졌던 것이다. 이런 법수를 논모라고 불렀으며 그것만을 전담하여 전수하던 사람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각 부파간의 대립이 심하게 됨에 따라 더욱더 두드러져서 각 부파는 자기들의 철학적 입장에 따라 독립적인 논장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세일론을 중심으로 한 상좌부에서는 '법집', '분별', '계론', '인시설', '논사', '쌍', '발취'의 7론을 논장에 가지게 되었다. 세일론의 전통에 의할 것 같으면 아쇼카왕은 어느날 친히 자기의 별장에서 목갈리풋다 팃사의 주재하에 당시의 승려들을 모두 모은 다음 불타의 참 교설을 물었다 한다. 이에 목갈리풋다는 불타의 교설을 분별설이라 규정하여 승단내의 여러 이단을 제거하고 제삼의 결집회의를 연 다음 거기서 '논사'를 설했다고 한다. 이제 이 상좌부의 철학을 먼저 고찰하여 보자.

 

 

 2. 상좌부의 철학

 상좌부는 스스로의 철학적 입장을 분별설이라 부른다. 여기서 '분별'이란 말이 뜻하는 것은 불타는 사물을 관찰함에 분석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미 불타가 인간존재를 오장의 모든 법이 결합된 것이라고 분석적으로 본 것을 고찰했다. 상좌부는 불타의 이러한 분석적인 정신을 충실하게 따른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상좌부는 현상세계를 법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존재요소들로 구성된 것으로 본다. 이 요소들은 서로 기능적으로 존재하여 생기하였다가 그 작용이 다하면 사라진다. 따라서 현존 작용을 하고 있는 것들만 존재하며 또한 과거의 법이라 할지라도 아직 그 작용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과거의 업으로서 아직 그 결과로서의 업보가 나타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상좌부는 수많은 법들 가운데서 인간존재를 설명하기에 필요한 법들을 중심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세 종류로 유위법, 즉 상호조건적으로 발생하는 법들을 분석한다. 첫째는 우리의 육체적인 면을 구성하는 색법으로서 28법을 든다. 둘째는 우리의 정신적 현상들로서 의식의 대상이 되는 심소법에 52법을 들며, 세 번째로 아무런 내용이 없는 순수한 의식의 작용 그 자체, 혹은 마음을 하나의 법으로 간주한다. 이 식(알 식자)은 실제에 있어서는 언제나 다른 법들과 함께 공존한다. 식은 감각 기관들에 의존하며 순간순간 이어지는 의식들의 흐름과 같은 것이다. 오온 가운데서 식에 해당하여 색법들은 색에 포섭되고 애, 상, 행은 심적인 법들을 포섭하는 것이다. 이들 유위법 가운데서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행 상 결정적 역할을 하는 52개의 심적인 요소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우리의 행위, 즉 업과 해탈의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좌부는 이 52개의 심소법을 해탈에 도움을 주는 25개의 선법, 방해하는 14개의 불선법, 그리고 13개의 중성적인 법들의 3범주로 분류한다. 상좌부는 이상과 같은 81개의 유위법 외에 열반이라는 한 개의 무위법만을 인정하여 모두 합쳐서 82개의 법으로서 인간존재와 인간의 체험세계를 분석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3. 설일체유부의 철학

 상좌부는 불타의 전통을 가장 충실히 전수한다고 자부했지만, 상좌부는 일찍부터 인도의 본토에서는 그 맥이 끊어졌고 단지 세일론도에서 그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인도본토에서 소승불교를 대표하다시피 하고 사상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한 부파는 오히려 설일체유부였다. 설일체유부가 상좌부로부터 언제 파생되어 나갔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논사'가 작성될 무렵, 즉 아쇼카왕의 때에는 이미 하나의 독립된 분파로서 존재한 것으로 간주된다. 설일체유부(간단히 '유부'라고 부름)는 특별히 인도서북부의 간다라나 카쉬미르 지방에 많은 추종자를 가지고 성행했으며, 서력기원 1-2세기 경에는 인도의 서북부와 중앙아시아에 걸쳐서 일대제국을 건설한 쿠샤나왕조의 카니쉬카왕의 지원을 받아 크게 세력을 떨쳤다.

 유부도 역시 상좌부의 7론에 비견되는 일곱 개의 논서로 구성된 논장을 산출했다. 이 논서들은 현재 한역으로만 전해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 가장 내용적으로 포괄적이며 중요한 것은 '발지론'이다.11)

 '발지론'에는 2세기 초반에 '대비파사론'이라는 200권의 방대한 주역서가 씌여지게 되었다. 이 주석서는 카니쉬카왕이 협존자라는 자에게 명하여 카쉬미르 지방에서 소위 제사의 결집회의를 열어 거기서 편찬하게 한 것이라 한다. 이 논은 단지 '발지론'의 주석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불교사상 및 수론이나 승논과 같은 외도의 철학까지 포함하여 다루면서 유부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하는 하나의 백과사전적인 저작이었다. '대비파사론'은 그후로 인도에서 소승불교를 대표하는 저서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유부의 학자들은 '비파사사'라 불리었다. 그러나 '비파사'라는 말(광어라는 뜻)이 나타내듯이 이 논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그후에는 그 요점만을 추린 강요서들이 유행하게 되었다. 3세기 초에 씌여진 법승의 '아비운심론'과 같은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요서들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세친의 '아비달마구사론'이다. 이 책은 문자 그대로 소승불교의 철학을 대표하는 명저로서, 인도뿐만 아니라 중국, 한국, 일본 등지에서도 소승교학의 입문서와 같이 연구되어 왔다. 세친은 대체로 4, 5세기 경의 인물로 간주된다. 그는 간다라지방에서 태어나 카쉬미르지방에 가서 '대비파사론'을 연구한 뒤 그 요점을 뽑아서 600송을 지은 후 거기에다 자신의 주석을 가하여 '구사론'을 저술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대체로 유부의 철학을 따르면서도 비판적인 안목을 잃지 않아 때로는 경량부등의 타철학의 관점에서 문제를 고찰하기도 한다. 나중에 그는 대승불교로 전향하여 많은 대승의 논서들을 남겼다. 이제 '구사론'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봄으로써 유부철학을 고찰하기로 한다.

 '구사론'은 계, 근, 세간, 업, 수면, 견성, 지, 정, 파아의 구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법의 본체와 작용을 밝히는 계품과 근품이며 파아품에서는 외도의 철학까지 포함하여 아견을 파하고 있다. 이 3품을 중심으로 하여 '구사론'의 근본적인 철학적 입장을 규정할 것 같으면 '인공법유'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인공이란 말은 인간은 영원불변의 자아가 없고 단지 물질적, 그리고 심적 요소들의 혼합체에 불과한 현상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을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오온의 화합으로 보는 불타의 인간관에 그대로 기초한 것이다. 다만 '구사회'에서는 오온 대신 75법을 들어 인간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상좌부에서 82개의 법으로 인간존재를 설명하는 것을 보았거니와 '구사론'의 75법도 이와 같은 류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유부의 철학자들은 법을 존재의 기본적 요소로 보는 관점이 점점 철저해짐에 따라 법을 실체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공법유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즉 사람은 공(빌 공)하나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항구적으로 존속한다는 이론이다. 유부는 이 점을 '삼세실유 법체항유'라고 표현하며 이것을 유부철학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즉 법의 나타남과 작용은 순간적인 현재뿐이나 법의 체성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통하여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유부가 법에 관하여 이런 실재론적 견해를 취하게 된 주요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행한 행위(업)의 효력과 작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에 과거에 지은 업이 어떤 지속적인 힘으로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순간적인 것뿐이라면 현재나 미래에 있어서 그 결과가 나타날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업의 법칙을 부정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따라서 유부는 업력의 소재로서 삼세를 통한 법의 실유를 상정하는 것이다. 유부에서는 또한 우리가 신체나 언어로 지은 업의 작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무표업 혹은 무표색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설정한다. 무표색이란 11개의 법 중의 하나로서 외부에 나타나는 우리의 신체적 언어적 행위가 그친 후에도 계속적으로 남아 있으면서 그 행위의 결과를 초래하도록 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미세한 물질을 말한다. 행위의 인과 과를 이어주는 일종의 색법인 것이다.

 '구사론'의 75법은 유위법과 3개의 무위법으로 구분되기도 하고 오위로 분류하기도 한다. 즉 색법 11개, 심법 1개, 심소법 46개, 심불상응행법 14개, 그리고 무위법 3개의 오위이다. 이것은 무위법 3개를 제외하고 모든 유위법을 오온에 준하여 분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다섯 가지의 법 가운데서 유부의 철학적 사고방식을 특징적으로 잘 나타내주는 것은 네 번째의 범주, 즉 14개의 심불상응행법들이다. 심불상응행이란 말은 의식의 흐름에 영향을 주면서도 심소법처럼 의식의 대상은 되지 않는 요소들을 의미한다. 즉 심에 상응하지 않는 행법이란 뜻이다. 여기서 행법이란 행, 즉 의지적 성향에 의거하여 발생하는 유의법을 말한다. 이러한 심불상응행법으로서 유위법을 말한다. 이러한 심불상응행법으로서 유부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든다.

 득과 무득 - 한 개인으로 하여금 업에 따라서 어떤 법을 얻거나 잃게 하는 힘들.

 동분 - 유정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들이 속하는 류의 공통적 특성을 유지하게 하는 법.

 명 - 명근으로서 개인의 수명을 결정하는 생명력.

 무상과, 무상정, 멸진정 - 이 셋은 모든 분별작용이 사라진 정신상태를 이루게 하는 힘들.

 상 - 모든 유위법의 특징인 생, 주, 이, 멸의 힘들.

 명신, 구신, 문신- 소리와 말과 문장에 그들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힘들.

 이상과 같은 14개의 심불상응행법들의 개념은 나중에 우리가 고찰하겠지만 승론 철학의 다원적 실재론의 사고방식과 매우 비슷한 것으로서 유부의 철학이 정립될 당시 승론철학이 이미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부에서 말하는 3개의 무위법이란 허공, 지혜에 의하여 얻어지는 열반인 택멸무위, 인연이 없어서 어떤 법도 생기함이 없는 비택멸무위로서 이들은 생, 주,

이, 멸의 사상을 여읜 절대적이고 영원한 법들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사론의 계, 근, 피아품을 중심하여 유부철학을 살펴보았다.

 구사론의 나무지 부분들 가운데서 세간품과 업품과 수안품은 생사의 과와 인과 연을 설명하여 현성품, 지품, 정품은 수행과 증오의 과와 인과 연을 설명하는 것이다. 구사론은 이렇게 매우 포괄적이며 짜임새 있는 논서로서 유부의 철학뿐만 아니라 불교사상 일반에 좋은 지침서이기도 하다. 세친 이후 안혜, 견혜, 진나, 세우 등의 논사들이 출현하여 구사론에 주석서를 썼다.

 

 

  4. 경량부와 독자부

 설일절유부의 철학은 제법의 실체와 현상을 구별하여 제법의 현상은 순간적으로 변하나 실체는 영원한 것으로 간주하는 일종의 다원적이고 실재론적인 사상이다. 이것은 제법의 무아와 무상을 강조하는 원시불교의 현상주의적인 철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서, 변하는 것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인간의 또 하나의 갈망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유부의 실재론적인 경향에 반발하여 그들이 의거하고 있던 논들의 권위를 부정하고 순수히 불타가 설한 경만을 따를 것을 주장하고 나온 부파가 경량부였다. 경량부는 2세기에 구마라라타에 의하여 설일절유부로부터 분리해 나왔다. 그들의 저서들은 남아 있지 않으나 구사론이나 다른 문헌들을 통해서 그들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경량부는 법의 실체와 상을 구별하는 유부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법이란 오직 순간순간 변하는 상뿐이며 현재에만 존재할 뿐이다. 법은 순간적 존재들이기 때문에 생기자마자 없어진다. 따라서 경량부는 유위법의 사상인 생, 주, 이, 멸 가운데서 생과 별만을 인정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경량부는 유부의 근본적 입장인 삼세실유법체항유를 곧 바로 부정하고 현재유체과말미무체를 주장한다. 그들은 법의 분류에 있어서도 색법 가운데서 사대와 필법 하나만을 인정하며 나머지 모든 법은 인정하지 않는다. 열반이라는 것은 일체의 번뇌가 사라지고 제법이 적멸한 상태로서 유부에서처럼 어떤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열반뿐만 아니라 일체의 모든 법은 경량부에 의할 것 같으면 실체적인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단지 이름에 지나지 않는 가명적인 것뿐이다. 이와 같이 볼 때 경량부는 실로 불타의 무상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유부의 실재론적인 철학을 거부하고 유명론적인 입장을 철저히 고수한 것이다.

 경량부는 존재를 순간적인 법들의 연속으로 보기 때문에 지각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만약에 존지가 순간순간 변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어떤 사물을 지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지나간 것만을 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지각이 외계의 세계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하는 소박한 믿음은 깨어지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모든 지각은 간접적인 것이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대상 자체라기 보다는 지나간 대상에 관한 인상들뿐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상들로부터 단지 추리에 의하여 대상의 세계를 알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은 외계의 인식가능성에 대한 회의는 나중에 외계의 실재성까지도 부인하는 유식철학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무상의 세계관을 저버린 유부의 실재론적 철학에 반발했던 경량부도 무아설과 업보를 어떻게

조화시킬까 하는 문제에 와서는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지키기 어렵게 되었다. 만약에 인간존재가 단지 순간적으로 변하는 제법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는 업의 주체로서의 나와 업보를 받는 나 사이에 동일성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과거에 지은 업은 어떠한 형태로 어디에 존속하다가 과보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 경량부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답으로서 우선 인간존재의 밑바닥에 그 흐름이 의지하고 있는 바의 어떤 기체가 있음을 인정했다. 이것은 일미온 혹은 근본온이라 부르며, 이 일미온은 언제나 동일한 본질로서 계속해서 작용을 하고 있는 미세한 의식으로서 윤회의 주체가 되는 존재라고 한다. 이 식은 우리가 행한 좋고 나쁜 업의 결과로서의 종자들을 그 안에 지니고 있다. 이 종자들은 우리가 지은 업의 훈습에 의하여 우리 안에 남게 되는 습기와 같은 것으로서, 이 종자들이 나중에 현행되어 업보로서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종자설로써 경량부는 업보를 설명하며 유부에서 말하는 무표업의 이론에 대신하고자 한 것이다. 경량부에 의하면 종자들은 잠복기간 동안 불변하게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상속전변하며 있다가 결과로서 나타난다고 한다. 경량부의 이러한 사상은 자중에 대승불교의 유식철학에 직결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독자부12)는 또 하나의 독특한 이론을 내세웠다. 인간에게는 오온과는 다른, 그러나 오온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지도 않는, 비즉비이온으로서의 푸드갈가라는 것이 있어서, 이것이 업보를 받는 존재로서 윤회를 하거나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독자부는 이 푸드갈라와 오온과의 관계를 불과 연료와의 관계와 같다고 한다. 마치 불이 연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연료 자체는 아닌 것과 같다는 것이다. 만약에 푸드갈라가 오온 이외의 어떤 존재라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어떤 영원한 존재일 것이며 이것은 상견에 빠지는 것이며, 만약에 푸드갈라가 오온과 동일하다고 할 것 같으면 이것은 단견에 빠지는 오류를 범한다고 한다. 푸드갈라는 오온과 같은 유위법도 아니요 오온과 다른 무위법도 아닌 규정하기 어려운 독특한 존재라고 한다. 이 이론은 항시 변하는 현상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열반을 유부에서처럼 어떤 비인격적인 법으로 간과하지 않고 유위법과 무위법의 중간적 존재인 자아의 상태로서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상에서 고찰한 경량부와 독자부의 이론들은 원시불교의 근본적 세계관인 무아의 사상을 배반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문제점들, 특히 윤회와 업보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로서, 후의 대승불교의 아라야식 사상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상좌부, 설일절유부, 경량부, 독자부의 학설을 고찰함으로써 서력 기원전 약 3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에 이르는 동안에 발전된 상좌부 계통부파들의 철학을 살펴보았다.

 

 

  5. 대중부의 불교사상

 한편, 대중적 진보주의를 표방하면서 상좌부와 대립하여 자체 내에서 많은 부파을 파생시킨 대중부는 불교교리발달상에 있어서 많은 새로운 이론들을 발생시켰다. 이들은 후에 대승불교 발전의 기반이 된 것으로서 보인다. 우선 종교적으로 대중부는 새로운 불타관을 전개했다. 불타가 입멸한 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에 대한 한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기억이 희박하여지게 되고, 신도들 간에는 그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으로 인하여 그를 이상화하여 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삼는 경향도 보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타는 그 외모에 있어서 인도인들이 이상으로 하던 위대한 인간들이 갖추어야 하는 32상, 80종노를 갖추었고 그의 마음은 십력, 사무외와 같은 신비스러운 힘들을 지녔다고 한다. 또한 불타로서의 그의 생애의 위대한 업적은 도저히 한 생애의 짧은 기간의 수행만으로서의 성취될 수 없다는 생각에 근거하여 불타는 전생에서 수많은 훌륭한 공덕을 쌓았음에 틀림없다고 믿게 됐다. 이에 따라 그의 전생을 이야기하는 본생담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불타와 성자들을 추모한 나머지 그들의 유골이나 유품들의 숭배도 성행하게 되어 신도들은 탑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 안에 유골을 안치하고 탑 주위를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참배하며 헌화로서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불타에 대한 경애감과 신심은 대중부에서 더욱 더 두드러져, 불타를 완전히 초세간적 존재로 신격화해서까지 보게 된 것이다. 대중부에 의할 것 같으면 제불세존은 모두 출세간적이며 모든 여래는 유루법이 없으며, 그의 말은 모두 설법이고, 그의 몸과 위력과 수명은 끝이 없으며, 그는 물음에 답하되 생각이 필요 없으며 일찰나의 마음에 일절법을 안다고 한다. 대중부는 또한 불타가 되기를 희망하는 보살에 관하여도 말하기를 그들은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악취(동물이나 아귀와 같이 나쁜 존재)에 태어나기를 원하며 또 마음대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대중부는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중생의 심성은 본래 깨끗하나 객진과 같은 번뇌에 의하여 더럽혀질 뿐이라고 하여 모든 중생이 불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13) 유위법은 현재에만 존재한다고 하여 경량부와 같이 유부의 법체항유의 사상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중부는 무위법으로 9개를 인정했다. 즉 택멸, 비택멸, 허공,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연기지성, 성도지성이다. 이것은 유부의 3무위법 이외에 신정의 사단계, 연기법, 팔정도 같은 것을 영원한 실재나 진리로 간주한 것이다.

 

 

   제6장 바라문교의 재정비

 

  1. 바라문교의 불교

 불교나 쟈이나교와 같은 자유사상적 종교운동은 종래의 바라문교의 전통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바라문전토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베다의 제사의식과 이에 따르는 바라문계급의 종교적, 사회적 권위에 있었던 것이다. 불교나 쟈이나교의 강한 윤리적 합리성에 입각한 종교로서 반제사주의적 성격을 지졌고, 사회적으로도 또한 초세간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유리관으로 인하여

바라문계급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정신은 이미 바라문교의 내부에서도 일어나 우파니샤드 사상의 배경을 형성하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라문교의 전통에 가장 큰 위협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불교였다.

 불교는 특히 마우리야왕조의 아쇼카왕의 귀의를 받아 그의 지원 아래 크게 세력이 팽창하여 전인도적인 종교로서 성장하게 될 뿐만 아니라 주변의 제국들에까지 전파되게 되었다. 아쇼카왕은 마우리야왕조의 건설자인 챤드라굽타의 손자로서 B.C. 269년경에 왕조를 물려받았다. 챤드라굽타는 알렉산더대왕의 인도 서북부침입으로 인한 인도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서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마가다의 난다왕을 제거하고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장악하여 마우리야왕조를 수립했다(B.C. 320). 챤드라굽타는 그의 대신이며 유명한 실리론의 제자로 전해지는 카우틸리야의 보조를 받아 인도의 역사상 최초로 강력한 통일국가를 형성하는 위업을 이루게 된 것이다.

 아쇼카왕의 치적에 관하여는 다행히도 그가 남긴 바위와 석주에 새긴 속령들을 통하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칙령에 의할 것 같으면 그는 많은 정복활동을 통하여 그의 영토의 확장에 힘쓰던 중 인도 중동부의 카링가 지방의 정벌 후에 전재의 참상을 깨닫고 마음을 돌이켜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로부터 전쟁을 통한 영토의 확장정책을 포기하고 그 대신 법에 의한 승리를 추구하는 것을 그의 대의정책으로 삼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이와 같은 도덕적인 정책을 통하여 인접국가들로부터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정에 있어서도 그는 인정을 베풀어 여행자를 위하여 길가에 과실나무를 심고 휴게소를 만들고 우물을 파는 일, 약초의 재배와 요양원의 설치 등 사회복지사업에 힘썼다. 그는 특별히 음식과 제사를 위한 살생의 유적지에 순례를 행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법에 의한 통치를 위하여 법대관들을 지방에다 파견하여 감독하게까지 하였다.

 아쇼카왕은 당시의 모든 종교교단들에 관용을 베풀었지만 그 자신은 불, 법, 승의 삼보에 귀의한 불교신자였다. 그가 전파하려고 한 법이란 불타의 깊은 철학적 진리를 말한다기보다는 주로 선한 도덕적 행위를 뜻했지만, 여하튼 그것은 바라문의 사회윤리로서의 다르마가 아니라 불교의 보편주의적 평등사상에 입각한 윤리적 선을 의미했다는 데서 큰 의의를 지녔던 것이다.

 마우리야왕조는 아쇼카왕의 사후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고 인도는 다시 정치적 혼란기로 들어갔다. B.C. 183년경에는 바라문 출신의 장군 푸샤미트라 슝가라는 사람이 나타나 마지막 마우리야왕을 제거하고 슝가왕조를 수립했다. 그는 정통 바라문주의의 신봉자로서 베다의 동물제사를 부활시키며 불교를 탄압했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상황하에서 바라문교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전통을 재정비하며 불교와 같은 대중적 종교운동에 대항하여 그들의 사회적 저변을 확대할 필요에 봉착한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에 바라문교가 대체로 세 방면으로 새로운 지반을 구축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로 불교와 같이 해설을 위한 수행의 체계를 조직적으로 발전시키는 노력이다. 이것은 요가 사상의 체계적 발전으로 나아간다. 둘째로, 바라문교는 비아리안 계통의 인도의 원주민들에 깊은 뿌리를 박고 있는 토착적 신앙과의 습합을 통하여 대중적 신앙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셋째로는 불교에서 비교적 등한시해온 재가자들을 위한 생활 규범으로서의 사회윤리체계의 확립에 힘썼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하여 바라문교는 좀 더 포괄적인 종교로서 그 지반을 확대하면서 불교의 도전에 대처하였던 것이다. 바라문교의 이러한 새로운 추세를 잘 반영해 주고 있는 문헌은 서력 기원 약 200년경에 완성되었다고 여겨지는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와 같은 서사시들이다. 특히 마하바라타는 실로 인도 고전문화의 총화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그 내용이 다양하고 풍부하며 종교, 철학, 법률, 정치, 윤리, 신화, 역사 등의 백과사전적 보고와 같은 문헌이다. 이제 이 마하바라타를 중심으로 하여 바라문교의 새로운 모습을 검토하여 보자.

 

 

  2. 쉬바신과 비슈누신의 신앙

 본래 마하바라타는 베다시대의 아리안족들 중의 하나인 바라타족의 군담으로서, 현재의 델히부근인 쿠루크세트라라는 지방에서 벌어지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전재의 이야기를 그 중심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나 약 1000년 정도(B.C. 800~200 A.D.)의 오랜 세월을 두고 자라는 동안 바라문들의 손에 의하여 위에서 말한 여러가지 사상적 내용들이 혼입되어, 현재에는 약 10만송 가량의 방대한 서사시로서 18권으로 나뉘어져 있다. 종교적으로 보아 마하바라타는 많은 부분이 바라문의 베다적 전통을 그대로 전수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베다에서 찾기 어려운 점들도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것은 힌두교의 가장 대중적 신앙의 대상인 쉬바신과 비슈누신의 등장이다.

 쉬바신의 숭배는 하라파나 모헨조다로의 유적발굴에서 나온 인더스 문화의 유물들을 통하여 제시되었듯이, 아리안족의 이주 이전의 인도 원주민들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는 듯싶으나, 그 후 아리안족들의 베다전통에서는 거의 종적을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와 같은 후기 우파니샤드에 와서 쉬바는 베다의 신 루드라와 동일시되고 다름 아닌 브라만 자체로서 간주되게 된다. 이것은 그 동안에 쉬바신에 대한 신앙이 널리 발전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마하바라타에 와서는 그는 온 우주를 창조한 위대한 신으로 숭배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신화적 전통도 풍부하게 형성되어, 히말라야의 높은 카일라사 산 속에서 심한 고행을 통하여 이 세계는 유지되며 상투를 튼 그의 머리꼭대기에는 초생달이 걸려 있고 이로부터 성스러운 갠지스강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그의 몸은 고행자들처럼 재로 덮여 있고 그의 모과 팔은 뱀으로 휘감겨 있다. 그의 곁에는 그의 무기 삼지창과 그가 타고 다니는 황소 난디가 있으며 그의 아름다운 아내 파르바티 혹은 우마와 함께 히말라야 산 속에 거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쉬바신은 또한 세계의 창조적 힘으로서 남근의 상징을 통하여 숭배되기도 한다. 남근숭배는 이미 하라파문화의 유적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마하바라타에서 쉬바신보다도 더 큰 대중적 신앙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비슈누신이다. 비슈누신은 물론 베다와 브라흐마나에서도 이미 중요한 신으로 언급되지만, 그가 대중적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은 베다 전통의 밖에서 숭배되고 있던 바수데바나 크리슈나와 같

은 신, 혹은 바라문의 종교전통에 기원을 둔 또 하나의 신 나라야나와 동일시된 후로부터이다. 여하튼 마하바라타에는 비슈누, 나라야나, 하리, 바수데바, 크리슈나 등이 모두 같은 존재로 동일시되고 있으며, 바가바트, 즉 존귀한 자, 주라는 뜻의 칭호로서 불리어지고 있어 그에

대한 신앙과 전통이 널리 퍼지고 발전되어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비슈누신은 세계와 만물의 근원으로서, 유명한 신화에 의하면 그는 태고의 대양 가운데서 천수를 가진 뱀 쉐샤 위에서 잠을 자고 있는 동안 그의 배꼽으로부터 연꽃이 자라난다. 이 연꽃으로부터 우주 창조의 대행자 브라마신이 태어나서 세계를 창조한다. 세계가 창조되자 비슈누신은 잠엣 깨어나 최상천인 바이쿤타에서 세계를 다스린다고 한다. 그는 주로 네 개의 팔을 가진 어두운 색깔의 인간으로 묘사되며 큰 독수리 가루다를 타로 다닌다. 그의 아내 락스미 혹은 슈리도 행운의 여신으로서 널리 숭배되었다.

 마하바라타 가운데서 비슈누신앙을 가장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은 유명한 바가바드 기타이다. 기타는 힌두교의 바이블이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한 종교적 철학적 문헌으로서, 인도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애독되고 잇는 고전이다. 이제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3. 바가바드 기타의 사상

 바가바드 기타는 원래 바수데바라는 인격신을 숭배하던 중인도 서부의 바가바타파에 의하여 만들어진 독립적인 시편으로서, 나중에 마하바라타의 일부분으로 흡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가바드란 말은 숭배할 만한 자 혹은 지극히 존귀한 자라는 뜻이며, 기타는 이 지존의 노래 혹은 가르침이라는 듯이다. 이 바가바타파들이 거하던 지방에 크리슈나라는 영웅이 있었는데, 이 영웅은 신격화되어 지존과 동일시되게 되었으며, 바가바드신앙이 점차 퍼짐에 따라 바라문 문화의 중심지인 중인도 동부에까지 미쳐, 결국 바수데바-크리슈나신은 비슈누신과 동일시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가바드 기타의 교훈의 주가 되는 크리슈나는 비슈누신의 화신으로까지간주되게 된 것이다.

 마하바라타는 바라타족중에서 사촌간인 판다바 형제와 카우라바 형제들 간의 왕위계승을 위한 싸움의 이야기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이 서사시의 제 6권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 직접적인배경은 다음과 같다. 판다바 5형제 중의 셋째이며 크리슈나의 친구인 아르쥬나는 그의 사촌들인 카우라바 형제들과 전장에서 대결하여 살육전을 벌이려고 한다. 그 순간 그는 용기를 잃고

만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동족을 죽이지는 못하겠다고 고백을 하자, 아르쥬나의 수레잡이로서 그를 돕던 크리슈나가 그에게 무사로서의 의무인 싸움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설득시킨다. 이것이 바가바드 기타의 형식상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바가바드 기타는 그 실제 내용에 있어서 어떤 체계적인 철학논서라기보다는 여러가지 해탈의 방법을 제시한 실천적 성격이 강한 종교적 작품이다. 다시 말하면 바가바드 기타는 그 전체적 성격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요가의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가바드 기타는 3종의 요가를 말하고 있다. 즉 지의 요가, 행의 요가, 그리고 신애의 요가이다. 각기 인간의 시, 정, 의의 3면에 상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지의 요가는 지에 대한 전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기타에서 지란 상키야 철학에 있어서처럼 영원한 정신으로서의 참자아와 물질적, 현상적 자아와를 분명히 구별하는 지혜를 의미하며, 혹은 우파니사드적인 범아일여의 진리와 신을 아는 지혜를 의미하기도 한다. 신애의 요가는 신에게, 특히 비슈누신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고 그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헌신에 의하여 윤회의 세계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다는 사상이다. 신애의 사상은 이미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에도 나타나 있지만 바가바드 기타에 와서야 비로서 본격적인 자세를 보이게 되었으며, 그 후의 모든 대중적 신앙운동과 유신론적 철학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행의 요가는 기타에 있어서 가장 독특하고 창의적인 사상으로서, 바라문의 사회윤리 질서와 해탈의 길과의 긴장관계를 해소해 주는 데 그 사상적 의의가 있다. 바라문의 사회윤리에 의하면 사람이란 누구든지 자기가 속한 계급과 나이가 규정하는 올바른 행위 dharma를 하여야만 하며 그렇게 해야만 사회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올바른 행위를 할지라도 우리는 자연히 그 행위의 결과를 얻기 마련이며 따라서 윤회의 세계에 속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우파니샤드 이후에는 모든 행위를 부정하며 사회적 유대관계를 끊어 버리고 고행과 더불어 신비적 지식만을 추구하는 포기자의 이상이 성행하게 된 것이다. 특히 불교에 의하여 이러한 운동이 대폭적으로 확대됨에 사회윤리 및 질서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바라문 계급의 지도자들에게는 상당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바라문교 자체의 사회적 기반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바가바드 기타"의 행의 요가 사상은 사회윤리를 준수하는 행위 자체가 해탈의 이상에 비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기타"에 의하면 우리의 속박을 가져오는 것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는 욕망이라고 한다. 행위는 아무런 욕망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한 업보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행위자의 내면적인 태도를 강조한다. "기타"는 말하기를 사람은 자연의 본성상 잠시도 행위없이 존속할 수 없으며, 문제는 행위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니라, 어떠한 자세로 하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참다운 체념은 "행위를 전혀 하지 않는 체념"이 아니라, "행위 가운데서의 체념"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윤리와 해탈 간의 긴장 관계는 카르마 요가에 의하여 지양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행위를 하면서도 체념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여야 욕망이 없이 행위 아닌 행위를 할 수 있겠는가? "기타"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지혜의 필요성이다. 특별히 상키야 철학에서 말하는 영원한 두개의 형이상학적 원리가 되는 정신과 물질에 대한 혼동 없는 확실한 구별을 아는 지식을 말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우리의 물질적 자아가 하는 것이며, 우리의 참자아인 정신은 어떠한 행위에도 개입하지 않으며 언제나 자유로운 방관자 내지 관조자와 같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 때에는 우리는 아무 욕망 없이 우리가 지닌 프라크르티의 필연적 성품에 따라 자연스러운 행동을 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카르마 요가의 다른 한 방법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신에 대한 전적인 사랑과 헌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순수한 것으로서 업보를 초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의 은총에 의해 그와 사랑의 연합을 하는 구원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보면 결국 행의 요가란 지의 요가나 신애의 요가로부터 독립해서 있는 길이라기보다는 바로 지와 신애에 입각한 행위의 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기타"가 욕망 없는 행위라는 개념에 착안하여 사회윤리적 의무와 해탈이라는 초월적 이상을 동시에 살리는 적극적인 행동의 철학을 전개한 것은 인도 사상사상 특기할 만한 사상이다. "기타"는 행의 요가라는 사상을 통하여 한편으로는 사성계급에 근거한 전통적인 사회질서를 옹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애의 길을 통하여 여자나 슈드라 계급까지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대중적인 구원의 길을 터준 것이다. 참으로 포기한 자는 외형적으로 출가한 자가 아니라 마음의 집착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와진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타"의 사상을 자세히 살펴볼 것 같으면, 지와 신애를 둘 다 강조하고 있으며, 때로는 재에 가장 높은 수행의 목표를 두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최고의 길로 제시되고 있으며 지는 신애에 이르는 수단으로 간주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바가바드 기타"에는 우파니샤드적인 일원적인 사상과 상키야 철학의 이차론적 요소, 자각의 종교와 신앙의 종교와의 차이 등이 아직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후세의 베단타철학의 거장들인 샹카라와 라마누자가 각기 자기의 철학적 입장에 따라 이 양면 중의 한 면을 더 강조하는 "기타"의 해석을 하게 된 것도 그 근거가 이미 "기타"내에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4. "해탈법품"에 나타난 철학사상

 "바가바드 기타"와 더불어 "마하바라타"의 또 하나의 중요한 철학적 부분은 제12권 "해탈법품"이다. "해탈법품"의 철학사상도 결코 어떤 체계화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잡다한 사상들이 여러 모양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는가 하면 상호 모순적으로 서술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주로 상키야 요가철학의 사상이다.

 우리는 이미 후기 우파니샤드들에 상키야 철학의 사상이 나타나 있음을 언급했거니와 "마하바라타"의 "해탈법품"에는 이 원시 상키야 사상이 더욱 발전되어 체계화된 상키야 사상에 아주 가까운 형태로 전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해탈법품"의 인도 철학사적인 의의는 후기 우파니샤드와 마찬가지로 체계화된 상키야 철학 이전의 상키야 사상의 발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특히 상키야 철학의 25윈리 및 세계전변설의 기초가 이미 이루어져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우선 감각 기관의 수는 눈 귀 코 혀 몸의 5근으로 고정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여섯번째의 감각 기관이라 불리는 의근이 심리기관으로서 모든 감각 기관의 우두머리로 정립되어 있다. 또한 오원소설이 이론적 발전을 보아 오근에 해당하는 오대 혹은 오원소가 설정되게 된다. 종래에는 땅 물 불 바람의 사원소만을 말하던 것이 공이라는 소리의 성질을 지닌 원소가 추가되어 인도 철학의 일반적인 정설로 형성되었다. 이 오대와 더불어 그들이 각각 지니고 있는 지배적 성품으로서 향 미 색 촉 풍의 오경이 언급된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가 고찰하겠지만 고전 상키야 체계에서처럼 오경이 아직은 오유로 대체되어 있지 않으며, 오대도 오유로부터 전개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다섯 개의 감각 기관인 오지근과 오작근 및 의의 11근도 오대와 오경으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되어있어, 자의적으로부터 전개된 것으로 보는 고전 상키야의 설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외에도 정신적 원리인 푸루샤와 물질적 원리인 프라크르티의 개념은 물론, 상키야 철학의 세계설명의 중요한 이론이 되고 있는 3요소의 사상도찾아볼 수 있다.

 "해탈법품"에는 이론적인 상키야 철학뿐만 아니라 실천적 성격이 강한 요가의 사상이 아직도 상키야 철학과 밀접하게 연결되지 않은 채로 발견된다. "해탈법품"은 요가는 사회계급이 낮은 자나 여자들도 실천하여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상키야의 주지주의적 철학에 대하여 요가의 대중적, 실천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요가의 실천방법에는 여러 가지 상이한 견해들 발견되나, 그 핵심은 감각 기관을 대상의 세계로부터 퇴거하여 의근에 붙잡고 모든 생각의 활동을 멈추어서 우리의 참자아를 밝게 드러내는 것에 있다. 아트만을 아는 것은 아트만 자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지성이라 하기도 하나, 의근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의근이 아트만과 더불어 윤회의 주체가 된다는 사상도 우리의 주목을 끈다. 고전 상키야 철학에 있어서 부디가 차지하고 있는 지배적 역할과 대조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5. 파라문적 사회윤리의 확립

 불교가 아무리 왕성한 포교 활동과 자유롭고 평등 윤리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대중적 종교로서 바라문교를 위협하는 세력을 형성하였다 하더라도, 불교는 종교로서 한가지 결정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불교가 불타 당시부터 출가승들을 중심으로 한 사원 중심적인 종교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탈에 관한 적극적인 관심과 갈망이 없는 재가자들의 일상생활에 관한 한 불교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해 주는 윤리체계는 제공하지 못했다. 재가자들의 종교생활은 삼보에 귀의하여 오계를 지키며 승가에 필요한 물질적 포시를 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오히려 그들의 일상생활의 관습 속에 깊이 파고 들어가서 그들의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베다시대 이래로 계속해서 내려오는 제의적 행위의 전통이었다. 더우기 우파니샤드 시대 이래로 고대인도인들 가운데서 윤회와 업보에 대한 믿음이 보편화되면서 과연 구체적으로 어떠한 행동들이 선한 행위로서 좋은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재가자들은 자연히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같은 베다내에서도 브라흐마나와 같은 것은 제의를 주로 다루는 행위 편으로서 우파니샤드와 같은 지식편과 별도로 연구되어왔지만, 행위의 문제는 브라흐마나 이래로 계속해서 바라문 지도자들의 관심을 끌어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다적 의식들의 규범을 취급하는 "천계경", 재가자들의 사회생활의 의무를 더 폭넓게 규정해 주는 "가정경", 이나 "의무경"들이 편찬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의무"란 것은 우주의 법칙 그 자체에 근거하여 그것을 유지한다고 믿어지는 제사의 의무뿐만 아니라 사회적 의무까지 의미하게 되었다. "의무경"은 이러한 면에서 바라문교의 윤리 전통상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서 누구나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하는 사회적 의무와  의례적 규범들을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의무경"은 더욱 발전하여 서력 기원전 약 200년경부터 기원후 300년경 사이에는 고대 인도인의 생활 규범을 더욱더 완전하게 체계적으로 제정해 놓은 법전들이 편찬되게 된 것이다.이 법전들 가운데서 가장 권위 있는 것은 마누법전(200B.C~300 A.D)과 야즈나발키야법전(100~300) 같은 것으로서, 이들은 마우리야 왕조 이후 인종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점점 더 복잡해 가는 사회적 상황과 불교와 같은 비바라문계의 종교적, 사상적 위협에 대처한 바라문들의 대응으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법전들도 우파니샤드처럼 지식과 해탈을 인생의 최고의 목표로서 인정하고 있지만 이들의 실제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현세의 삶 속에서 지켜야 할 올바른 의무적 행위를 체계적으로 규정해 주는 데 있다. 이러한 의무적 행위체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소위 "마르나아슈라마" 제도, 즉 사성 계급의 사회적 의무와 인생의 사기에서 개인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제시해 주는 제도이다. 특히 생의 사기에 대한 이론은 현세에서 사회적 질서를 준수하며 사는 재가자의 삶과 초세간적 해탈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서 만들어 진 것이다. 즉, 생의 제1기는 범행자의 생활로서, 아동기를 마친다는 표식으로서 입문식을 한 다음 집을 떠나서 스승의 지도하에 베다 등의 학문을 배우며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 제2기에는 학습기간이 끝난 다음 재가자로서 결혼을 하고 신들과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일, 후계를 낳는 일 등을 하며 본능적 욕망과 부를 추구하는 생활을 한다. "마누법전"은 이 시기를 바라문적 사회질서의 핵심으로서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제3기는 제가자로서 성공적인 삶을 마치고 손자를 본 다음 숲속으로 들어가서 은거하면서 명상과 금욕의 생활을 한다. 이것이 임서자의 생활이다. 마지막으로 제4기에는 완전히 일체의 사회적 축대관계를 끊고서 현세의 삶을 "포기한 자"로서 오로지 해탈의 세계만을 추구한다.

 이와 같이 하여 바라문의 사회윤리체계는 인생이 추구해야 할 제가치들을 치우침 없이 균형 있게 추구할 수 있도록 규정함으로써 불교의 해탈 중심적인 경향을 제재하며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1) 인도 철학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시도한 저서로서 Karl H. Potter의 Presuppositions of india's Philosophies (Englewood Cliffs, New Jersey:Prentice-Hall,inc., 1963) 참조.

2) '베다'라는 말은 따라서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협의로 사용될 때에는 본집의 부분만을 의미하나 광의로는 브라흐마나와 우파니샤드를 모두 포함하여 일컫는 말이다. 우리는 우선 여기서 좁은 의미로 사용하기로 한다.

3) A. L. Basham, History and Doctrines of the Ajivikas: a vanished Indian Religion(London, 1951) 참조.

4) 일설에 의하면 챠르바카는 유물론적 철학을 가르친 어떤 철학자의 이름이라 하고, 어떤 견해에 의하면 유물론자들이 (먹고, 아시고, 즐기라 즉 먹는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는 철학을 가르치므로 그들에게 주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밖에 다른 견해들도 있음.

5) 불교나 쟈이나교의 경전을 제외하고 순세파의 철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요자료들이 남아 있다: 8세기의 쟈이나교의 학자 Haribhadra Suri가 편찬한 육파철학집성 : 14세기의 베단타 철학자 마다바의 전철학강요 : 7세기의 순세파의 철학자 쟈야라쉬 밧타의 진리재난의 왕.

6) 나중에 냐야철학을 소개할 때 설명됨.

7) 비판적 연구에 의하면 이 분열은 A. D. 1세기 말경에야 비로소 최종화된 것으로 간주된다. 양파의 교리상의 차이는 사실상 거의 없다. 그리고 공의파의 수도승들도 나중에 사람들 앞에서는 옷을 입었다.

8) 이 방법은 대체로 Frouwallner를 따른 것임. 그의 Geschichte der indischen Philosophie, Vol. 1 참조

9) 팔리어 경정에는 경장은 다섯 개의 부집으로 나뉘어 있다. 즉, 한역 장아함, 증일아함, 중아함, 잡아함.

10) 14무기 : 세계는 상(영원)인가 무상인가, 상이기도 하고 무상이기도 한가, 상도 무상도 아닌가, 세계는 유변(유한)인가 무변인가, 유변이기도 하고 무변이기도 한가, 유변도 무변도 아닌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지도 않는 것인가, 개인아는 육체와 같은가, 같지 않은 것인가라는 문제들이었다.

11) 이 논은 서력 기원전 약 1세기경의 인물로 추정되는 카탸챠니푸트라에 의하여 씌어진 저서로서 잡, 결, 지, 업, 대종, 근, 정, 견의 8항목으로 불교의 교리를 다루는 체계적인 저서이다.

12) 독자부란 이름의 뜻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고 있지 않다. 푸드갈라의 이론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pukgalavada라고도 부른다. 토마스의 전게서, 39쪽, 92~126쪽 참조.

13) 이상의 대중부의 교설은 기부종륜론, 대정신수대장경 49쪽, 15쪽에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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