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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3

3부 개화와 항쟁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최용신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모델이 되었던 여성 농촌 운동가 최용신은 멸사봉공의 한 표상으로 이 땅의 여성사에 기념비적인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19098월 함경남도 원산의 두남리에서 태어난 용신은 최창희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원산의 명사십리 어귀, 포플러 숲이 울창한 두남리에서 그녀는 한 폭 그림 속의 꿈많은 소녀처럼 유년 시절을 보내었지만 집안 사림이 기울 대로 기울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할아버지 대만 하여도 용신의 집안 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할아버지는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하여 사재를 털어 덕원에다 학교를 세우고 후학을 길러내었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과 경영의 어려움은 급기야 학교 문을 닫게 하였고, 그 여파로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끼니를 잇기조차 힘들었다.

용신은 집에서 10여 리나 떨어진 학교를 점심 도시락도 없이 걸어서 다녀야 했다. 명사십리와 해당화로 에워싸인 아름다운 고장에서 소녀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본다거나 부푼 꿈을 펼쳐 본다기보다 의식주의 어려움을 안고 오로지 학교 공부에 매달려야만 하였다.

용신은 그런 가운데서도 학교 안의 도서관 일을 보아 주고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고, 마침내 1928년 봄에 누씨 여자 고등 보통 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학교 성적 가운데서 성경은 매 학기 만점이었다. 용신의 꿈은 누씨 학교 시절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담임 선생이 졸업 후의 희망을 물어볼 때마다 "농촌 계몽에 일생을 바치겠다"라는 것이 그녀의 확고한 대답이었다.

누씨 학교를 거쳐 용신은 서울에 있는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에 입학한다. 신학교의 황애덕 선생은 농촌 사업장을 개척하기 위한 실습지를 황해도 수안에다 마련했다.

용신은 김노득과 함께 장한 뜻을 품고 황해도로 내려갔다. 그 길은 용신이 농촌에 첫발을 옮겨 놓은 신념의 길이었고 봉사의 길이었으나, 결과는 그녀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지한 농민들은 학교 교육을 받은 기독교 신자의 조건 없는 봉사를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첫 무대에서 고배를 마신 최용신은 탈진된 상태로 서울에 돌아왔다.

그녀가 두 번째로 택한 무대는 경상북도 포항이었다. 비록 단기간이기는 하였으나 포항 옥마동에서 농민을 상대로 한 실습 계목은 성공적이었다.

용신은 차츰 자신을 얻어 갔다.

193110, 용신이 YWCA 농촌부 사업지로 경기도 수원 샘골로 파견되었을 때 그녀의 가슴은 전에 없이 뛰었다.

샘골은 가난했지만 오래 전부터 기독교가 들어와 있다는 점이 그녀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는지도 몰랐다.

가을날의 샘골은 모든 농작물이 여물어 있듯 풍성하게만 보였다.

수인선 일리 역에서 차를 내려 수원 쪽으로 철도를 끼고 한 5리쯤 되돌아가면 조그마한 동산 아래 20호 남짓한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 가난한 마을이 용신이 찾아간 봉사의 땅이었다.

샘골 주위로는 구룡동, 오목동, 이동, 각골 등 올망졸망한 마을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샘골은 그 중에서도 가장 빈한한 마을이었다. 한 가지 색다르게 보이는 게 있다면 오래 전부터 기독교가 들어와서 예배당이 하나 서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이 샘골 예배당은 감리 교회 미국 선교사 밀러 목사의 담당 구역 이었는데,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순회 강사를 시켜 교육을 시켜 본 결과 성적이 매우 양호했으므로, YWCA에서 농촌부 사업부로 결정을 본 것이었다.

용신은 샘골에 닿자마자 이곳에다 자기의 온 정열을 쏟아 넣으리라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비록 협성 여자 신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서울을 떠나온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그도 잠시, 샘골에 닿은 이튿날부터 활동을 개시하였다.

용신의 대상은 물론 농민들이었으나, 먼저 그녀는 샘골의 자연 형태와 민심을 살폈고, 농민들의 생화 형편이며 인근 마을 유지들의 움직임도 함께 살폈다. 유지들을 찾아가 앞으로 자기가 해나갈 계획을 설명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용신이 유지들을 잡고 자기 계획에 찬동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유지들은 대개 그녀의 이야기를 귀밖으로 들었다. 그런 가운데서 용신은 항상 민죽의 장래를 염려하고 있는 염석주를 만나게 된 것을 무엇보다도 기쁘게 생각했다. 용신은 염석주 한 사람한테서 격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농촌 계몽의 보람을 느꼈다.

19311011일은 용신이 샘골 예배당을 빌려 아동의 초보 교육을 실시한 날이었다.

처음에는 한글과 산술, 성경, 노래 등을 가르쳤고, 얼마 뒤에는 도화와 습자, 수예 등을 가르쳤다.

용신은 자신이 생겼다. 늘어나는 아이들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없어서 오전반. 오후반. 야간반 3부로 나누어 가르쳐야 했을 때 그녀는 자기의 헌신이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야간반에는 마을의 머슴과 나이든 총각들을 비롯하여 아낙네와 노파들까지 한 반이 도어 용신의 가르침을 받았다. 실상 그들은 처음에 구경 반 비웃음 반으로 모여든 사람이었는데, 그 비웃음과 구경꾼의 자세는 시일이 지나면서 진지한 자세로 바뀌어져 갔다.

용신이 미신 타파를 들고 나오거나 생활 개선을 주장할 때면 새파랗게 젊은 처녀가 무엇을 알겠느냐는 표정들이었고, 조상 대대로 구습에 젖어 살아왔어도 아무 탈이 없었다는 투로 소극적이었으나, 이러한 변화는 열정과 농촌을 개화시키려는 집요한 신념으로 이루어진 셈이었다.

원래 농민이란 배운 것이 없는 무식꾼이지만 그들이 지니고 있는 마음은 착한 법이어서 완고할 때는 완고하더라도 무너질 때는 또 쉽게 무너지고는 했다. 그리고 그들은 감동할 줄 아는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최용신의 조건 없는 봉사 정신과 소박하고 성실한 노력에 그들은 끝내 감동하고 말았다.

이제 최용신은 구경거리로서의 계몽꾼이 아니었다. 시일이 지날수록 그녀는 마을에서 필요 불가결의 존재로 부각되어 갔다.

용신은 상냥한 처녀였다. 그런가 하면 그녀는 함부로 범하기 어려운 엄격한 일면이 있었다. 대민 관계에 있어서도 그처럼 부드러운 여성은 없을 정도였으나 웬걸, 그 부드러운 성품 속에는 칼날처럼 예리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의 모든 힘은 용신의 주위로 집결되었다. 세력이 있는 사람들은 용신이 농민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데 시샘을 하였으나 결국에 가서는 용신의 봉사 정신을 이해하고 그녀에게 굴복해 왔다. 사심 없이 일하는 용신이 그들 세력 있는 자들의 적수일 수는 없었고, 그 지방의 개화를 위해 헌신하는 용신에게 끝내는 협력하고 동조하였다.

이듬해 19325, 용신은 강습소 창설 인가를 받았다. 그녀가 가르치는 학동의 수가 수용 인원보다 60여 명이나 초과하여 결국 새 학원을 지어야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다.

한가위를 맞는 농촌은 풍성하기만 했다. 용신은 한가위 날을 기해 '어린이 놀이 학부형 위로회'를 열었다.

농민들은 하루의 일손을 놓고 샘골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독창, 합창, 무용, 연극, 연설 등 순서대로 어른들 앞에서 자기들의 기량을 한껏 발휘했다. 어른들은 재주가 없어 보이던 자기 아들 딸들이 춤을 추고 노래하고 연설하는 모습을 보며 '배움'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누구든지 배우면 저렇게 할 수 있다'라는 교훈. 그 같은 깨달음을 주기 위하여 용신은 한가위의 놀이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날의 위로회는 밤이 늦어서야 끝이 났다.

최용신은 그날 아이들의 재롱 순서를 마치고 학부형들 앞에 나와 이렇게 설파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제는 진흙 속에 파묻힌 옥과 같습니다. 두뇌와 재질이 세계 어느 나라 어린이들보다 결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일찍부터 배우고 가르치지 못한 탓으로 지금 우리 겨레가 남다른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제의 앞날의 행복을 열어 줄 사람은 여러분 자신이올시다. 요즘에도 60여 명의 어린이가 달려온 것을 수용할 수가 없어 되돌려 보내면서 전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제는 학원의 인가도 나왔으므로 여러분이 힘만 합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닌고로 배움의 터전을 세워 주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 샘골에다 자기의 뼈를 묻겠다는 결심을 털어놓았다.

그 고장 태생이 아닌 처녀의 몸이(비록 정혼한 자리는 있는 몸이라지만) 마을의 번영과 2세 교육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데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으로 천곡 학원 건축을 의한 발기회가 구성되었다.

제일 먼저 부인 저축 계원들이 기금을 내겠다고 나섰다.

"우리가 푼푼이 모은 돈 300원을 모두 천곡 학원 짓는 데 기부하겠어요."

용신은 반가운 정성을 절반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부인들의 사업 발전을 위하여 저축금의 절반인 150원을 따로 남겨 두기로 한 것이다. 이튿날부터 발기인들의 활동이 개시되었다.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학원을 세우는 기금을 모으기란 그렇게 수월한 편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150원 정도의 기금이 모아져서 결국 300원의 기금을 가지고 용신은 일을 벌이기로 하였다.

기금을 마련하기 시작한 지 닷새 만인 820일부터 샘골 뒷동산 솔밭에서는 학원의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다. 지경을 다지는 마을 사람들의 구령 소지가 마을 밖으로 멀리멀리 메아리쳐 갔다.

부인제들도, 어린이들도, 마을의 남정네와 노인들도 모두 한 마음 한 덩어리가 되어 밤이 깊은 줄고 모르고 작업에 매달렸다. 장정들은 가을 곡식을 거둬들이기에 여념이 없었으나, 밤이 되면 어김없이 작업장으로 나와서 기둥도 세우고 지붕을 덮는 등 공사의 진척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이듬해인 1933115, 마침내 용신과 샘골 주민들의 땀의 결정체인 천곡 학원 낙성식을 갖게 되었을 때 이웃 마을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새 학원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어린이들의 춤과 노래로 자축연이 베풀어지고 학원을 완성하는데 짊어진 빚이 즉석에서 거출되었다.

학원은 용신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샘골 주민의 것이 되어 사랑스런 어린이들의 교육을 맡아 갈 것이었다. 용신은 학원의 완성과 함께 샘골의 여왕으로 떠받들어졌다. 그녀의 말에는 귄위가 섰고, 누구나 신임했다. 마을 주민들은 자기 집에서 색다른 음식을 마련하여도 용신을 불렀고, 어려울 때나 궂은 일이 있을 때에도 용신을 찾게끔 되었다. 농사에 필요한 것은 소를 기르는 일이었으나, 소를 기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을 기르는 일이라는 것을 주민들은 깨달았다.

용신은 새로 지은 학원에서 110여 명의 학생들과 고락을 함께하였다. 이제는 주민들이 그녀를 우러러보고 자식들의 장래를 맡겼으나, 그녀는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용신은 학교 뒷산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쳤다. 수원 고농에서 과실 나무 묘목을 구해다가 그 재배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뿌린 깨밭에서 김을 매다 그녀는 내리쬐는 폭양을 이기지 못해 쓰러지기도 하였다.

깨를 판 돈으로 회를 사다가 용신은 손수 떨어진 학교 벽을 바르기도 했다.

마을의 공동답에 들어가 모를 심다가 거머리떼에게 물리는 일은 이제 예사였다.

용신의 헌신적인 봉사로 학원은 번창해 갔다. 그러나 110여 명의 학생은 학원의 규모에 비하여 너무 많은 숫자였다. 당국은 이를 묵인하지 않았다. 학원이 좁고 설비가 부족하니 60명 이상은 받지 말라는 게 당국의 지시였다. 교사와 아이들은 서로 붙들고 통곡했다. 50명의 아이들은 부득이 학원을 떠나야 할 형편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오전, 오후반을 가르친 뒤 가정을 순회하며 학습 지도를 해야 했다.

그 같은 고난의 연속은 비단 샘골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용신에게는 일찍부터 원산 두남리 고향에서 정혼한 김학준이란 약혼자가 있었는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약혼자한테서는 소식이 끊겨 버리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병환과 오빠의 이혼 문제가 계속 샘골의 용신에게 날아들었다. 신앙과 신념으로 결합된 약혼자.

"흙으로 돌아가자!"라는 동지애로 결합된 약혼자로부터 소식이 끊기자 그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934년 새봄이 돌아왔다. 용신은 농촌 운동을 위하여 새로운 지식과 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일본의 고베 여자 신학교 사회 사업과에 학적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용신의 일본행은 그녀에게 불행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용신은 일본에서 각기병에 걸리고 말았다. 다리가 붓고 전신이 마비되는 등 중태였다.

귀국을 서두른 용신은 원산으로 내려가 병 치료를 계속했다.

용신이 샘골을 떠난 사이 학원에서는 교사의 이동이 잦았고, 주민들은 한결같이 용신의 귀향을 바랐다.

"드러누워 있어도 좋으니 샘골로 오라."는 성화같은 재촉에 못 이겨 용신은 샘골로 돌아왔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한 용신이었으나 그녀가 샘골에 다시 돌아오자 마을은 생기가 돌았다. 학원을 지원하던 YWCA 원조가 절반으로 삭감되었으나 그녀는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했다.

급기야 과로는 용신을 쓰러뜨리고야 말았다. 장에 이상이 있어 수원 도립 병원에 입원했으나 용신은 두 번이나 수술을 받고도 회복하지 못했다. 1935123일 오전 020분이 그녀의 임종 시간이었다. 용신의 유해는 그녀의 유언대로 학교가 잘 보이는 샘골 뒷산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죽어서도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용신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27년 만에 샘골의 양지바른 언덕에 눕게 되었지만, 그녀는 죽어서 영원히 산 상록의 나무가 돈 것이었다.

196242.

그해는 최용신이 스물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27년이 되는 해였다.

용신의 정신이 스며 있는 샘골에서는 그녀를 위한 첫 추도식이 열렸다.

그 자리에는 수원 고등 농립 학교 시절에 용신의 농초 계몽 사업을 후원하던 유달영 교수, 옛날의 약혼자이던 김학준 교수 부처, 심훈의 원작 소설 <상록수>를 영화화한 신상옥 감독, 채영신 역의 최은희 등 많은 인사가 참석하여 용신의 명복을 빌었다.

용신의 넋을 위로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에 그치지 않는다.

김학준의 아내 길금복은 해마다 세모가 되면 제물을 차려 가지고 와서 용신의 묘소를 찾았다고 하며, 용신의 유지를 받들어 남편은 천곡 고등 농민 학교의 재단 이사장을, 그리고 아내는 재단 이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멋쟁이 문학사 -하란사

 

"나의 본래의 성은 김해 김씨이옵니다. 그러나 남편의 성을 따라 하씨라 부르기로 하였나이다. 이러한 나의 정신적인 변모를 두고 개화한 여성이라 부르는지도 모르옵니다만....."

어떻든 그녀는 하란사란 이름으로 우리 개화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1875년 평양 태생.

얼굴이 남달리 아름답고 신체 조건이 뛰어난 데다 성격은 활달하여 남의 이목을 집중케 하는 그런 여인이었다.

간혹 그녀를 두고 예가 출신이라는 말도 떠돌지만, 어쨌든 인천 감리 하상기가 아직 별감으로 있을 때 그녀는 나이 어린 소녀로 14녀를 가진 하상기의 후취가 되어 들어갔다.

남남 북녀라는 말에 어울리게 하란사는 용감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용감하다는 것은 14녀나 되는 전실 자식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정부인으로서의 용기가 아니었다.

남편의 벼슬이 올라가면서 생활에 여유가 생겼으나, 그녀는 호사스런 생활에 만족지 않고 담장 밖으로 흘러가는 개화의 물결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거듭 용감했다.

'미래를 개척하여 선도자가 되리라. 이 시대의 문명의 선도자가. 그러기 위하여 나는 이 가정을 뛰쳐나가야 한다.'

가정을 뛰쳐나간다는 의미가 가정을 버리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14녀의 전실 자식을 남겨 두고 어디를....... 그녀의 용기란 한국적인 부도의 울타리를 벗어나 가지는 만용이 아니었다.

배움.

하란사의 머리는 배움의 욕망으로 가득 찼다.

'이화 학당에 들어가 나도 남들처럼 배우고 싶어.'

그녀는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화 학당의 첫 학생이 중전 민비의 영어 통역을 하여 세도를 잡아 보려고 스크랜턴 부인에게 영어를 배우러 왔던 무슨 벼슬아치의 소실 김씨라는 것을. 그리고 그 뒤에도 몇 사람 뜨내기처럼 다녀간 기혼 여성이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1890년대부터 이화 학당의 규칙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결심을 했다.

'프라이 학당장을 찾아가 담판을 내자.'

어느 날 밤, 사방등에 촛불을 켜서 하인에게 들게 하고 그녀는 프라이 학당장을 찾아 나섰다.

학당장과 마주앉아 하란사는 들고 있던 등불을 훅 꺼 버렸다.

"아니, 왜 등불을 끄시오?"

학당장이 어리둥절해 하자 하란사는 사이를 두지 않고 말했다.

"학당장님, 우리가 캄캄하기가 이 등불 꺼진 것과 같으니 우리에게 학문의 밝은 빛을 주세요."

학당장은 결혼을 한 이 젊은 여성을 다시 바라보았다.

하란사는 프라이 학당장을 잡고 애원했다. 애원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좋소. 부인, 입학하시오!"

프라이 학당장은 그녀가 암흑의 한국 땅에서 선각자가 될 자질이 충분히 있음을 깨닫고 입학을 허락했던 것이다.

이화 학당 재학중에 하란사는 첫 딸을 낳았다.

남편은 관리이고 부자였지만 인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당돌하리만치 대화 감각에 예민한 어린 아내를 후원해 주었다. 깊은 이해와 끝없는 사랑으로.......

하란사는 어린 딸 자옥을 전실 아들 구룡의 새 아내인 며느리에게 맡기고 학교에 가는 날이 많았다. 구룡의 첫 번째 아내는 매사에 게으르고 잠꾸러기여서 그는 게으른 아내와 이혼해 버리고 바지런하고 집안일에 열심인 새 아내와 재혼해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남편이 자청하여 학비 부담을 하고 이해와 사랑으로 아내의 학교 생활을 돕기란 드문 노릇이어서 하란사는 말하자면 그만큼 선택받은 여성인 셈이었다.

남편은 학교에 간 젊은 아내가 학교 일로 식사 시간에 귀가하지 못하면 하녀를 불러 분부했다.

"냉큼 학교로 밥을 날라다 마님 잡수시도록 하여라!"

분부가 떨어지면 하녀는 따끈한 음식을 차려 큰 목판에 담아 시기를 덮고 보자기에 싸서 이고는 학교로 간다. 어린 딸도 집안에서 보살펴 주었고, 남편이 이처럼 마음을 써 주었으니 그녀는 남편과 가족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다.

하란사는 멋쟁이였다.

양장에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하란사는 어찌 보면 법도에 어둡고 사치스러운 것 같았으나 사실 그렇지 않았다. 집안에서는 남편, 자식들 모두가 하란사에게 대접을 극진히 하였다. 엄하고, 화목하고, 법도 있게, 그것이 그녀의 생활신조였다.

1896년 하란사가 이화 학당을 떠나 외국 유학 길에 오른 기록은 그녀를 뒷날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B.A 학위 수여자로 만들어 놓는데, 1896년 하란사는 박 에스터와 함께 이화를 나온다. 이화에서는 초창기의 학생들에게 학년 구별 없이 영어에 힘을 기울였고, 산술과 국문, 성경 창가, 한문, 먹글씨, 지리 등을 가르쳤는데 혼인할 나이가 되면 학교에서 주선하여 독실한 신자 중에서 적당한 배우자를 골라 부모의 협의를 거쳐 결혼시키는 것이 예사였다. 혼인식을 올린 다음 졸업장 대신 혼인 증서를 교부하면 그것이 곧 졸업이 되었던 것이다.

이미 혼인을 하여 가정을 가지고 있던 하란사에게는 그러한 과정도 이제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기에 앞서 1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친다.

그녀가 유학을 떠날 때 자옥은 새문안 교회의 신자가 젖을 먹여 기르기로 되어 있었고, 전실 아들 구룡의 아내가 양육에 힘을 기울였다.

남편의 헌신적인 외조, 며느리의 이해, 집안 사람들의 협조가 그녀를 무사히 미국으로 건너가게 하여 1900년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서 하란사는 마침내 B.A 학위를 받는다. 이 사실은 앞서 말한 대로 하란사를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학위 수여자로 기록하는 쾌거이기도 하려니와, 그녀가 국내 여성에게 끼친 영향을 개화의 선각자로서 영구 불멸의 별이 되게 한 점이기도 했다.

귀국 후 하란사는 양장에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정동 예배당에 나타났다.

검정 갓에 기다란 검정 새털 깃을 꽂고 검정 원피스를 입은 지적인 부인--.

하 부인이라면 이제 서울 장안에서 몰라보는 이가 없었다.

하 부인은 미국에서 돌아와 스키랜던 부인고 함께 달성 이궁에서 기거하며, 상동 예배당 건립에 힘을 기울였다.

예배당이 세워지자 그녀는 거기서 영어반을 개설, 여성 교육을 실시했는데, 하란사의 지도로 뒷날 이 땅의 교육 사업에 봉사하게 될 신 알버트, 손 메레, 양 우러더 등이 배출되었다.

그녀는 또 미국인 선교사 미스 알버슨과 함께 정동 이화 학당 옆에다 부인 성서 학원을 창설하고 3년 동안 경영한다.

그 후 부인 성서 학원은 후임을 정하여 일임하고 그녀는 자신을 이화 학당에 입학시켜 준 미스 프라이 선생에게 간다.

이화 학당 교사 겸 기숙사의 초대 사감이란 직함이 그녀의 이름 위에 붙게 된 것이 바로 이때이다.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서양 선교사들 틈에서 영어 회화를 가장 능숙하게 할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한국 선생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녀의 영어는 직원이나 학생들의 의견을 선교사들에게 전달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고, 오랫동안 이화 학당을 총감독하는 직책이 부여되어 '총교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총교사 하란사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학생들 간에 불려지고 있었다.

--호랑이 어머니.

엄격한 인상에 욕설을 잘 퍼붓기도 하는 총교사에게 학생들은 그같은 별명을 붙에 주었다. 그 당시 이화 학당 학생치고 하란사 선생의 꾸중을 듣지 않은 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그녀의 욕은 개화로 가는 과정과도 같아서 운동장에 나와 노는 것만 보아도 욕이었고, 치마 주름이 터진 것을 보아도 욕이었다. 댕기를 머리끝에 물려 드리웠어도 욕이었으며, 대답 소리를 크게 하거나 너무 작게 해도 욕이었다.

그러나 욕을 잘하는 버릇은 하 부인, 하 교사의 성격이었지 학생이 미워서 하는 소리가 물론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고 학교 규칙을 잘 지키며 옷맵시를 단정히 하고 다니는 학생이 있으면 하란사는 그 학생을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자기 수양딸 노릇을 해 달라는 말을 하여 친부모가 쏟는 애정을 부어 넣기도 했다.

이화 학당 재직 중 하 교사는 미국을 내왕하는 일이 잦았다. 그녀는 그때마다 한국을 소개하기도 하고, 연설을 하여 돈을 얻어내기도 하였는데, 그녀는 그 돈으로 오르간을 사서 모교에 보내기도 한다. 언젠가 시카고와 로스엔젤레스에서 교포들로부터 700달러의 찬조금을 받아 온 적도 있었다.

학교 사감이 해야 할 일 가운데 기숙사로 오는 편지를 일일이 검열하는 일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남자한테서 온 편지가 있으면 절대로 내어주지 않는다. 그 학생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품행 점수가 60점 이하가 되어 버린다. 하 교사는, 엽서에 먹칠을 하여 연필로 비밀스럽게 써보내는 연애 편지까지도 햇빛에 비춰 밝혀내고야 마는 극성이었다.

기숙사 학생들은 하 교사의 그 같은 완벽성이 늘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하 교사와 이성회 선생이 후원하고 육성하는 자치 학생 단체에 게으름을 피우는 학생은 없었다.

하란사는 또 전도사로도 한 시대를 기록할 만한 여성이었다.

서울 교외 아홉 개 교회를 돌아가며 주일 예배에 참석한 그녀는 몇 년 동안 1,426호를 호별 방문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1911, 250명의 새로운 교인을 얻게 되었다. 하 전도사는 각 교회 안에 세워진 이화 부속 보통 학교 단위로 '어머니 교실'이란 것을 설치하였다. 1주일에 1회쯤 어머니 교실에 나가서 육아법과 선진 외국의 문명 등 계몽 강연에 열을 오였다.

강연 기간 동안 어머니들은 그 학교 교직원들로부터 매일 밤 국문과 산수 등 야학 공부를 하였다. 하란사는 집안일보다 교회와 사회 일에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았다. 부지런한 그녀는 고종과 엄비의 자문에도 나섰으며, 19084월에는 고종의 분부와 사회 유지의 발기로 경희궁에서 관민 합동 환국 축하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 자리에는 한국 여성으로서는 제일 먼저 미국에서 현대 의학을 전공하고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박 에스터도 동석했다. 박 에스터와 하란사는 여러 가지 선각자로서의 공통점이 있는 여성이었다.

개화된 많은 여성들이 그러하듯 1920년 우리나라가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게 되자 하란사도 이른바 국권 회복이라는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1916년의 일이었다.

미국 뉴욕 사라토가에서 감리교 세계 총회가 개최되었다.

하란사는 이 자리에 신흥우와 함께 참석한다. 1개월간의 총회 일정이 끝나자 그녀는 미국에 남아 해외 동포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순회 강연을 통하여 일본이 강제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버린 사실을 널리 알려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그녀는 이화 학당 안에서 국내외의 모든 비밀 연락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석 식사를 거르는 일이 많았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가 발표되자 온 세계 약소국가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자유를 부르짖으며 민족 저항 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의 식민지로 압박을 당해 오던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내외의 애국 지사들이 서로 연락을 취하여 일을 성취시키기로 되어 있어 하란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 하상기는 어디를 가나 아내의 활동이 자랑스러워 전보다 더 큰 열성으로 아내의 일을 돕고 나섰다.

당시 고종은 거족적인 민족 저항 운동에 앞서 의친왕을 해외에 내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항간에는 일본인들 들을세라 엄청난 소문까지 나돌았다.

"전하하구 의친왕께서 일본인의 눈을 피해 변소에서 밀의 하셨다는구려."

"부자분이 변소에서 무슨 비밀 얘기를 하셨을까?"

"의친왕을 해외로 내보내어 독립 운동에 앞장서게 한다는 얘기라는군!"

고종은 깊이 숨겨 두었던 이른바 한일 의정서 등 굴욕적인 외교 문서 원문과 외국 의원들에게 보낼 호소문을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어 한국의 억울한 입장을 호소하려 했다.

그 중대한 임무에 하란사가 발탁되어 일은 추진되었다. 하 부인이 미국 유학 당시부터 의친왕과 교분이 있는 것을 알고 고종은 하 부인에게 궁중 패물을 군자금으로 주어 일을 착수시켰다.

하 부인은 용기가 솟았다.

"이번 일을 성사시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그녀의 가슴을 뛰었다.

일의 시작에서부터 운명은 하란사와 국운 쪽에 이로운 것 같았다. 그러나 운명은 끝내 돌아서고 말았다. 19191월 하순, 고종께서 갑작스럽게 승하하시고 만 것이다.

이화 학당에서 미스 프라이와 신홍우 박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하란사는 황제의 급보를 듣고 그 자리에 나타났다.

궁중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 하란사는 의친왕을 통하여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이 한 가지 점만 보더라도 그녀가 의친왕이나 궁중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나 짐작이 갈 만하다.

하란사의 그 같은 활약은 그녀를 국내에 머물러 있게 하기보다 국외로 나가 독립 운동을 하도록 요청해 오기에 이르렀다. 고종 황제가 승하한 지 얼마 안 되어 하란사는 북경을 향해 떠난다.

2월 중순, 동경 유학생 황 에스터는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여성 대표로 하란사를 출국시키려고 서울에 왔으나 하란사가 이미 북경으로 떠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동경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이미 하란사가 국가를 대표할 만한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북경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던 교포들의 환영이 대단했다. 하란사는 어느 교포가 개최하는 환영 만찬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이 만찬회가 생애에서 마지막 가져 보는 자리였음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만찬회에서 먹은 음식이 빌미가 되어 하란사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죽음의 세계를 향해 치달았다.

마침내 그녀는 폭약을 먹고 죽은 사람처럼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어 갔다. 그녀의 시체는 시커먼 색으로 변질되어 독살의 의혹을 짙게 했다. 장례에 참석했던 성서 공회 책임자 베커의 말이 독살당했으리란 심증을 굳게 하였다.

하란사의 남편 하상기도 북경을 다녀와서 아내가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친일배에게 독살당했으니라 단정했다. 일제의 스파이로 활약했던 배정자가 하란사의 뒤를 미행하여 독살시켰다는 소문을 남긴 채 그녀는 45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형 선고받은 여자 폭탄범 -안경신

 

!

새로 지은 청사의 바깥 벽과 유리창이 박살이 났다.

이어 또 한 개의 폭탄이 평양 경찰서에 던져졌다. 불발.

192083, 평안남도 경찰부 새 건물에 던져진 폭탄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대체 이 폭탄은 누가 던졌을까.

안경신. 그녀가 바로 이 폭탄 투척 사건의 주인공이다.

일제가 여자 폭탄범이라고 혀를 내두르던 안경신은 그 출생이나 사생활이나 만년의 생애가 미궁 속에 묻혀 있는 채 그녀의 활약상 중 극히 일부분만이 기록에 남아 여걸의 편린을 짚어 보게 한다.

안경신은 평안남도 순천 태생이라기도 하고, 본적을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 둔 예수교 신자라기도 하지만, 그녀가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때의 주소는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이었고, 1921년 현재 34세라는 기록이 있고 보면, 3.1 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안경신의 나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 2526세가 아니라 32세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안경신은 일찍이 평양 여자 고등 보통 학교 기예과를 졸업하고 결혼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사유로 곧 홀몸이 된다.

안경신은 그녀의 고독한 나날과 팔자를 원망하면서 교회 일에 매달린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에다 자기 한 몸의 불행이 겹쳐서 그녀는 교회를 찾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을 미워하는 감정이 남달랐던 그녀는 일제와 싸우려고 벌써부터 내심 칼을 갈고 있었는데 3.1 운동이 일어난 191910, 평양의 서문동에서 마침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었다.

서문동 거리는 군중으로 들끓었다.

안경신을 군중 속에 뛰어들어 선동 연설을 하였다. 그녀가 일제의 폭정과 무수한 백성들이 무참하게 살해된 사실을 폭로하면서 만세를 부르자 흥분한 군중들이 이에 합세, 만세를 불렀다. 이 사건으로 안경신은 20일 동안 경찰서에서 구류를 살았다.

경찰서에서 풀려나자 일제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굳어졌다. 그 무렵 평안남북도를 중심으로 예수교의 여자 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대한 애국 부인회의 지부를 결성하고 있었다. 안경신은 애국 부인회 강서 지회의 재무직을 맡았다.

그 이듬해 초여름의 일이었다.

애국 부인회 증산 지회에서 상해 임시 정부 연락원에게 자금을 전달한 것이 탐지되어 애국 부인회 연합 본부와 각 지회의 간부들이 일본 경찰에 쫒기게 되었다.

그 무렵 안경신은 홀몸이 된 지 13년 만에 이성과의 교제를 갖게 된다. 그녀의 상대는 장사꾼을 가장한 독립 운동가 김행일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상해에 거주하다가 마침 평양에 나와 있었다.

일본 관헌의 눈길을 피해 그들 두 사람은 밀회를 가졌다.

"난 상해에 거주하는 동안 처자를 잃었소. 지금 홀몸인 내가 안 여사에게 구혼을 해도 욕이 되지 않는다면 내게로 와 주오, 서로 부부의 연을 맺어 봅시다."

김행일의 구혼에 소년 과수가 되어 오늘날까지 13년 동안 혼자 살아온 안경신의 가슴은 떨렸다.

안경신과 김행일은 장차 부부가 될 것을 약속하고 깊은 인연을 맺었다.

"검거의 손이 그대에게 뻗쳐 오기 전에 이곳을 떠납시다."

김행일은 상해로 떠날 것을 권해 왔다. 이미 부부가 된 것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은 행동을 함께 하여 국경을 넘어 만주로 갔다.

안경신은 그곳에서 대한 청년단 연합회에 가입했다. 안병찬이 이끄는 단체에서 그녀는 많은 동지들을 알게 되었다. 만주 관전현 쓰양거우에서 광복군 총영의 총영장 오동전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만주와 상해의 독립 운동가들은 그 무렵 미국 의원단의 도양 시찰을 계기로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미국 의원단이 조선을 통과할 때 일대 거사를 일으켜 한국이 얼마나 간절하게 독립을 열망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만주를 거쳐 상해에 닿은 안경신은 김행일과의 결혼 약속이 산산조각나는 바람에 한동안 실의에 빠져 버린다. 김행일의 말로는 자기는 상해에서 처와 자식들을 잃어 혼자 몸이라고 하였으나,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본처와 자식들이 엄연히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안경신은 낙심하여 돌아왔다. 김행일이 머물고 있는 상해에 더 눌러있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미 그녀의 몸은 홀몸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속에는 핏덩이가 자라고 있었다.

재혼의 꿈에 부풀어 있던 안경신이 결혼을 약속한 사람의 속임수로 가슴 아파하고 있을 때 그 아픔을 이기는 길은 무슨 일에든 몸을 던져 몰입하는 일이었다.

광복군 총영의 오동진 영장은 마침 국내외에 산재해 있는 일본기관 파괴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문일민, 김영철, 박태열을 폭탄 대장으로 하고, 장덕진을 비롯한 네 사람과 안경신 등 일행 5명에게 국내로 들어가 행동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

무장 독립 단원들은 권총과 폭탄을 몸에 숨겨 가지고 길을 나섰다.

문일민은 평안도를 맡고, 박태열은 황해도를, 그리고 김영철은 서울에서 일을 터뜨릴 계획이었는데, 일본 관헌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그들은 모두 변복을 하고 길을 나섰던 것이다. 박은 왜놈의 차림새를 하였고, 문은 노동자로 변장한 뒤 장덕진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숨어들었다. 당시 안경신의 몸에는 폭탄 심지가 숨겨져 있었다.

일행의 고초는 말이 아니었다.

행인의 눈을 피해 밤낮을 숨어서 산길을 타고 다니기란 그렇게 수월한 노릇이 아니었다. 게다가 안경신은 일행 중에서 홀로 여자였고, 몸이 무서운 임부였다.

갖은 고초 끝에 안주까지 왔을 때 그들 무장 독립단은 안경신에게,

"여기서부터는 왜놈 순사들의 수가 늘어날게요. 우린 그자들을 만나면 싸워야 하니까 안 동지는 먼저 가시오." 하고 먼저 가기를 권했다. 거기까지 오는 데에도 남자들이 심지어 안경신의 옷보따리까지 들어다 준 걸 생각하면 행동을 함께하는 것도 도리이겠으나, 자기가 끼어 있어서 일본 순사와 싸우는 데 지장이 된다면 또한 먼저 그곳을 떠나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안경신은 마침내 그들과 헤어져서 먼저 안주를 떠났다. 날이 저물자 그녀는 어파 정거장 부근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이튿날 평양 보퉁문 밖에까지 오니까 비가 쏟아졌다. 비는 사정없이 퍼부었다. 보통개 개울물이 쏟아지는 폭우에 불어나서 도무지 건너갈 수가 없었다.

안경신은 하는 수 없이 그곳에서 하룻밤을 밝히고 이튿날 평양 보통개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서 평양으로 들어왔다.

그사이 안주의 무장 독립단은 예상대로 일본 순사와 맞닥뜨렸다.

미야모토 경부라는 자가 순사 한 명을 데리고 검문을 하고 있었다. 어찌나 철저하게 검색을 하는지 무기를 품에 지니고 있었던 독립 단원들은 당장 해치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때였다. 미야모토 경부는 다시금 무장 독립단에게 접근해 왔다. 일행 중의 한 사람은 때를 놓치지 않고 권총을 뽑아 경부와 순사를 쏘아 넘어뜨렸다. 그 바람에 폭탄 한 개는 잘못하여 가까운 연못 속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감시망을 피해 평양 시내로 잠입한 무장 독립 단원 중 문일민은 숭현 여학교 석탄광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이틀동안 은신하여 지하실 유리창에 비치는 햇볕으로 비에 젖은 폭탄심지를 말렸다. 마침 방학 기간이라 폭탄 심지를 말리는 문일민의 거동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틀 동안 숭현 여학교 석탄광 속에 숨어 있을 때 소녀 권기옥은 참외를 사서 나르기도 하였고, 냉면 등 음식을 사서 나르기도 하였다.

83, 마침내 그들의 거사날은 저물었다. 장덕진, 문일민 등은 김예진, 김용구, 이춘성 등의 안내를 받아 평안남도 경찰부 신축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이 거사로 경찰부의 벽과 유리창이 박살 나고 경관 2명이 폭사하는 등 일제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안경신은 평안남도 경찰부 청사에 폭탄이 터질 때 법수머리 근처에서 참외를 사 먹고 있었다. 그녀는 그날 밤을 참외밭 원두막에서 새우고 미리 약속한 대로 이튿날 새벽 기자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안경신은 박태열을 만나 몸에 지니고 있던 폭탄 심지를 건네주었다. 박태열과 안경신은 그 폭탄을 가지고 평양 경찰서로 갔다. 그러나 그들이 던진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그들은 일경의 눈길을 피해 평양 시내를 벗어났다. 대동군 추을 미면 이천리 김웅봉의 집으로 숨어든 그들은 숭실 중학교 학생 김효록이 날라다 주는 밥을 먹으면서 멀리 탈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일본 관헌들은 평안남도 경찰부 건물과 평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독립 단원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김웅봉의 집에서도 오래 있지를 못하고 제각기 흩어져 있기로 하였다.

안경신은 남자 동지들과 헤어져 평양과 대동군 일원을 전전하다가 멀리 함흥으로, 원산으로 건너뛰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는 이이를 낳았다.

19213, 계속 안경신의 뒤를 추적하던 대동 경찰서원에 의하여 그녀는 체포되었다.

안경신은 젖먹이 어린 아기와 함께 경찰서의 썰렁한 마룻바닥에서 고문을 당해야 했고, 급기야 그녀는 평양 법원에 송치되어 재판을 받은 결과 한국 여자로 최초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안경신은 곧 복심 법원에 불복, 공소를 하였다. 때마침 상해 임시 정부로 무사히 건너간 문일민은 안경신의 사형 선고 소식을 듣고 '폭탄을 던진 사람은 여기 있다'는 내용의 행동 경로를 적어 평양 지방 법원으로 송달해 오기도 하였다.

안경신이 사형 언도를 받게 된 데에는 어제가 그녀 일행에게 밥을 날라다 준 적이 있는 숭실 중학교 학생 김효록의 증언이 치명적이었다. 평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을 때 여자가 끼었느냐, 끼지 않았느냐가 그녀를 죽이고 살리게 되었는데, 밥을 나르며 들은 얘기로는 안경신이 경찰서 폭파 사건 때 가담한 것으로 증언하여 결국 사형이 구형되었던 것이다.

김효록의 할아버지는 자기 손자가 1심에서 안경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려 손자를 데리고 당시 평양의 주요 인물이던 조만식을 찾아갔다. 김효록의 증언이 안경신의 생사를 결정짓게 되었다고 판단한 노인은 조만식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사건의 전후를 설명한 노인은,

"고당 선생, 이 사건에 관련된 남자들은 모두 몸을 피하고, 여자 한 사람만 남아서 사형을 구형받고 복심 법원에 상고 중인데, 어떻게 해야 그 안경신 여사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조만식이 말했다.

"다음 공판에 댁의 손자가 다시 증언을 하게 되었더라 이런 말이오?"

", 효록이의 말 한마디가 안 여사의 목숨을 죽이고 살리게 되었으니 어찌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조만식은 선뜻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는 법정에 가서 이렇게 증언해라."

"어떻게요?"

"그때 일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여자 목소리는 안 났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증언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평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을 때 '여자 목소리가 났다'라는 증언이 사형 선고를 받게 된 핵심이었다면 '여자 목소리는 나지 않았다'라는 증언으로 안경신의 운명은 바뀌어질 지도 몰랐다. 이 증언 내용은 김효록이 사건 현장에 있다가 들은 얘기가 아니라 무장 독립 단원들이 대동군 추을미면 이천리로 피신해 왔을 때 밥을 나르면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은 것이 골자였다.

19211118일 오전 11.

평양 복심 법원 2호 법정.

안경신은 다시금 보채는 아기를 달래며 증언을 듣고 있다.

"증인은 작년 8월 초에 이천리 김응봉의 집에서 안경신에게 밥을 가져다 먹인 일이 있는가?"

김효록은 초연한 태도로 말했다.

"저는 그때 방학 중이어서 저하고 가까운 김창린 등 두 사람이 와서 김응봉의 집에 온 사람들이 집에서 10여 보 떨어진 버드나무 아래에 있으니까 밥을 겨져다 주라고 하기에 그렇게 해준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증인 심문은 급기야,

"사건 현장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느냐?" 하고 핵심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김효록은 지난번의 진술을 뒤엎고,

"사건 현장에서 여자의 목소리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담당 검사는 화를 벌컥 냈다.

"! 너는 지난번 재판 때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위증을 하다니! 위증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검사는 김효록을 노려보았다.

이 학생이 틀림없이 누구의 지시를 받은 것 같아 유도 심문을 해보기로 했다.

"좋다, 증인은 평시에 누구를 존경하느냐?"

그러나 숭실 중학 4년생이던 김효록도 만만치는 않았다.

"저는 시골 학생이 되어서 그런 건 잘 모릅니다." 하고 딴청을 부렸다. 김효록의 거짓 증언으로 안경신은 사건의 공소 유지가 매우 어렵게 되어 감형 선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공판에서 징역 10년 언도에 미결 구류 180일을 통산했다. 그러나 김효록은 위증으로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조만식의 기지가 안경신을 죽음에서 살려내고 그 대신 죄 없는 애국 학생이 감옥살이를 하게 된 셈이었다.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소년 김효록은 그의 할아버지와 함께 고당 조만식 선생댁을 찾아갔다.

조만식은 소년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 참 잘했구나. 사람 하나를 살려내었으니 참으로 기특하구나. 단지 죄 없는 너를 감옥살이 시킨 내가 몹쓸 사람이 되었구나, 용서해다오."

조만식의 사과의 말에 마침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김효록은 뒷날 학업을 닦아 고려 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어린 아기와 함께 옥살이를 시작한 안경신은 만감이 서린 가운데 어두운 시절을 눈물과 한숨으로 메워 나갔다.

초혼에 실패한 안경신이 13년간 독수공방을 지키다 재혼의 꿈에 부풀어 사귀었던 남자는 그녀에게 아기 하나를 남겨 두고 떠나갔다. 일본의 식민지로 모든 것을 빼앗겨야 했던 시절에 그녀 자신도 조국의 운명처럼 모든 것을 빼앗기며 살아야 했다.

안경신은 감옥에서 나온 뒤 그녀의 이름을 초야에 묻고 숨어 살기로 하였다.

1920년대 초반, '여자 폭탄범'이란 너울을 쓰고 사회의 이목을 한몸에 받았던 안경신의 말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어느 가난한 농부에게 몸을 맡겨 살아가고 있다는 소문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19623.1절 날 안경신에게 정부가 주는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으나 그 훈장을 받을 사람도, 받아서 전할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신여성이 뿌린 이혼 고백서 -나혜석

 

나혜석을 말하는 어느 기록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김명순(탄실), 김원주(일엽), 나혜석(정월) 세 작가는 동시대에 처해 같은 경향의 시를 읊었으며, 실연의 고배를 마셨으며, 그들의 말기가 한결같이 아름답지 못하였다. 그래서 세상은 그들을 비웃었다. 조소하고 조소당하게 한 사람은 남성이었다.

 

나혜석. 근대 한국의 여류 서양화가로서 또는 염문으로서 이름이 알려진 나 여사는 너무도 유명하다. 일찍부터 미술의 천분을 타고난 여사는 서울에서 여학교를 나온 뒤 곧 동경으로 건너가 여자 미술 학교에 입학하였다. 미술 학교에 입학한 그는 공부도 열심히 하였지만 연애도 열심히 하여 소문이 자자하였다.

시인이며 여류 화가로서 개화기의 문단과 화단에 숱한 화제를 뿌리고 다녔던 정월 나혜석은 원래 경기도 수원 태생이었다.

1896418, 그녀는 용인과 시흥 군수를 역임한 아버지 나기정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세상에 태어났다.

수원의 나씨 일문은 '나부잣집' 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었고, 나혜석의 증조부는 호조참판을 지낸 명문으로 권세와 재력을 함께 과시하고 있었다.

위로 오빠 홍석과 경석은 모두 개화에 눈뜬 선각자들이었으며, 신교육을 받고 모두 일본에 유학한 개화 청년들이었다. 혜석은 말하자면 이들 두 오빠의 영향으로 일찍 개명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수원 삼일 여학교를 졸업한 14세의 나혜석은 그해 9월에 서울 진명 여학교에 입학한 재주꾼으로, 학교 성적은 늘 우수했고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혜석의 영광과 불운은 그녀가 진명을 졸업하고, 경석 오빠의 권유로 동경 여자 미술 전문 학교에 입학하여 서양 미술을 공부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그 때부터였다. 나혜석은 당시 조선의 여자들이 집안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온 전통적인 인습에 반기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동경 유학생들의 동인지 <학지광> 3호에다 근대적인 여권을 주장하는 글인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여권주장의 한 방법으로 나혜석은 또 동경에서 여성 유학생들의 단체인 '조선 여자 친목회'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나혜석은 이미 19세의 성숙한 처녀로 성장해 있었고, 그녀의 다정다감하고 적극적인 성격은 동경 게이오 대학 학생 최승구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혜석이 주동이 되었던 '조선 여자 친목회'1917년부터 동인지 <여자계>를 발간하지만, 이해에 그녀는 사랑하는, 장래에 결혼을 약속한 애인 최승구의 죽음을 맞는다. 최승구는 결핵 환자였는데, 그가 회복하지 못하고 나혜석 곁을 아주 떠나 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애인의 죽음은 사랑의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그 충격으로 잠시 살고 싶은 생의 의욕마저 잃어버렸으나 그녀는 강했다.

'머지않아 학교를 졸업하면 귀국해서 교단에 서리라. 발랄한 어린 학생들을 마주 대하다 보면 내 아픔도 가셔지겠지.........'

함흥의 영생 중학교와 서울의 정신 여학교 교단이 귀국 후 나혜석의 좌절되기 쉬운 사랑의 아픔을 씻어 주었다.

나혜석의 아픈 상처를 아물게 한 또 나의 계기는 191931일에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이었다. 그녀는 신여성이었으며 여학교 교사들이었던 신 마실라, 박인덕, 김활란, 황 에스더, 김 마리아 등과 이화 학당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회합을 갖고 거족적인 독립운동의 봉기에 신여성(지식인)들의 참가를 결의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비밀이 누설되어 신여성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받은 곤욕, 그녀는 그 곤욕과 사랑의 아픔을 맞바꾼 셈이었다.

첫사랑 최승구의 환상이 완전히 가셔지자 나혜석은 김우영과 자주 만나 제2의 사랑을 전개시켰다. 김우영은 나혜석이 동경 유학 시절부터 열렬하게 접근해 왔던 청년으로서, 뒷날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된다.

 

..... 그해 여름 방학에 나는 동경에서 귀향하였었나이다. 그때 우리 남형 오빠를 찾아, 또 나를 보러 겸사하여 우리집 사랑에 손님으로 온 이가 씨(김우영)였습니다. 씨는 그 때 상처한지 이미 2년이 되던 때라 매우 고독한 때였습니다....... 씨는 며칠 후 경성(서울)으로 가며 내게 장찰을 보내었습니다. 솔직하고 열정으로 써 있었습니다. 우선 자기 환경과 심신의 고독으로 취처(아내를 맞음)하여야겠고, 그 상대자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물론 답하지 아니했습니다.

 

김우영 쪽이 먼저 적극적이었고, 처음에 나혜석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답장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두 번째 편지가 왔다. 나혜석은 짝말한 답장을 써 보냈다.

김우영은 며칠 뒤 파인애플과 과일을 사가지고 수원 나혜석의 집을 찾아왔으나, 그녀는 만나 주지 않았다. 그러자 김우영은 고향 동래로 내려가면서 동경으로 들어갈 때 편지해 달라고 했다.

 

무대는 다시 일본 동경.

 

어느 날 밤, 돌아갈 때였습니다. 전차 정류장에서 내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씨는 뜨겁게 악수를 하고 인하여 가까운 수풀로 가자고 하더니 하느님께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리었습니다...... 나는 이 열을 받을 때마다 기뻤었습니다. 부지불각 중, 그 열 속에 녹아 들어가는 감이 생겼나이다.

 

두 사람의 애정은 실상 동경 유학 시절에 싹텄고, 그 애정은 급기야 결혼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양가 친척들의 권유와 택일을 해서 결혼할 때 나혜석은 이른바 결혼 조건이라는 것을 내세웠다.

 

첫째,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사랑해 주시오,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셋째,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김우영은 이 모든 조건을 무조건 응낙했다.

결혼----. 신혼여행은 나혜석이 요구하고 결정하였다.

"죽은 애인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가요!"

"신혼여행을?"

"그래요!"

남편이 된 김우영은 그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남편은 첫사랑의 무덤에 비석까지 세워 주어 아내 나혜석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던 것이다.

 

정월 나혜석의 나이 25.

그녀는 한국 화단에 새 기록을 남겼다.

첫 개인전은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열렸다. 이것이 이 땅의 여류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유화 개인전이었다.

화가로서의 위치가 굳혀지고,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되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떠나게 된 남편을 따라 나혜석의 마주 생활이 시작되었다.

 

경성(서울)3년간, 안동현에서 6년간, 동래에서 1년간, 구미에서 1년 반 동안 부부 생활을 하는 동안 딸 하나, 아들 셋의 소생 4남매를 얻게 되었습니다. 변호사로 외교관으로, 유람객으로 아들 공부로, 부로, 화가로 처로, 모로, 며느리로 저 생활에서 이 생활로 껑충껑충 뛰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었고, 하고자 하는 바를 다 해 왔고, 노력한 바가 다 성취되었습니다. 이만하면 행복스러운 생활이라고 한 만하였습니다. 씨의 성격은 어디까지든지 이지를 떠난 감정적이어서 일촌의 앞길을 예상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나혜석은 달랐다. 사회인으로, 주부로, 사람답게 잘살고 싶었다. 그러한 이상은 잦은 충돌을 가져왔다. 덤으로 부부간의 갈등이 생긴 뒤로는 반드시 아이가 하나씩 생겨났다.

31. 그녀는 남편 김우영과 함께 꿈에도 그리던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난다. 프랑스 파리에서 머문 8개월. 나혜석은 세계적인 미술의 조류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고, 또한 자기 자신의 미술 수련을 위해서도 뛰어다녔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 파리 체류 8개월간이 나혜석 생애의 비극적 사랑이 될 줄이야.

 

남편 김우영이 독일에 체류 중이고 나혜석 혼자 파리에서 있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숙소에서 요리를 만들고 있는데 최린이 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합쇼?"

", 어서 오세요. 최 선생님."

나혜석이 만들고 있는 요리도 실상 최린을 대접하려고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최린. 저분은 얼마나 유명한 분인가. 기미 독립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 아닌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분. 천도교의 도령, 대도정을 지냈고 장로를 지낸 명사가 아닌가.'

나혜석은 파리에서 최린을 만난 게 영광스러웠다. 그와 접근하고 싶었다. 민족 대표로 존경받는 최린과 깊이 사귀고 싶었다.

"나는 최 선생님을 사랑해요. 하지만 내 남편과 이혼은 하지 않을래요."

최린은 나혜석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과연 당신다운 말이오. 나는 당신 말에 만족하오."

나혜석의 생각은 이랬다.

'남자나 여자나 다른 사람과 좋아 지내면 반면으로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 더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최린과 나혜석은 파리의 식당과 극장을 두루 찾아다녔고, 혹은 뱃놀이를 즐기며 불륜의 사랑에 빠졌다. 그때의 최린과의 사랑을 뒷날 나혜석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결코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최린)를 사랑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이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지리라고 믿었사외다. 구미 일반 남녀 부부 사이에 이러한 공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혜석의 진보적인 생각과 행동은 결국 가정의 파탄을 가져오고야 말았다.

남편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이혼을 제의했다. 만일 나혜석이 승낙하지 않으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고 위협했다.

"여보, 우리 이혼합시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별안간에."

"단신이 최린에게 편지하지 않았소?"

"했어요."

"내 평생을 바치겠소, 하고 편지 안 했소?"

"그렇게는 안 했어요."

"왜 거짓말을 해? 하여간 이혼해!"

마침내 4남매의 어머니로, 저명한 화가이자 여류 시인 나혜석은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고 말았다. 그녀의 나이 35세 때의 일이다.

나혜석은 이미 시와 소설과 유화를 함께 하는 여류 명사로서 사회적인 지위가 굳혀 있었으나 사회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남성 위주의 사회 제도가 싫었고, 도덕과 법률과 인습이 싫었다. 그녀는 이러한 것들에 도전하면서 그녀의 예술을 살찌워 갔다.

김우영은 곧 다른 여자와 재혼했다.

설마하고 남편이 자기를 다시 찾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던 나혜석으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이었다.

그때의 심정을 나혜석은 이렇게 술회한 적이 있었다.

 

황망한 사막에 선 외로운 섬이었나이다.

모성애를 고수해 보려고 갖은 애를 썼나이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나이다. 죽는 일은 쉽사이다...... 그러나 내 사명에 무엇이 있는 것 같사외다. 없는 길을 찾는 것이 내 힘이요, 없는 희망을 만드는 것이 내 힘이었나이다. 역경에 처한 자의 요령은 노력이외다. 근면이외다. 번민만 하고 있는 동안 타임(시간)은 가고, 그 타임은 절망과 파멸밖에 갖다 주는 것이었나이다.

 

우선 나혜석은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일본 정부 주최의 미술가 등 용문인 '제국 미술원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그간에 그려 두었던 그림을 팔고, 있는 물건을 전당포에 잡혀서 돈을 만든 다음 금강산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그린, 나혜석으로서는 스스로 걸작이라 자부한 작품 '정원'을 제전에 출품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하룻밤은 입선이 되리라 하여 기뻐서 잠을 못 자고, 하룻밤은 낙선이 되리라 하여 걱정이 되어서 잠을 못 잤다."

그런데 1,224점 출품에 당당히 입선이 되질 않았는가.

나혜석의 기쁨은 하늘에 닿은 것 같았다. 몸이 떨렸다. 신문 기자들이 밤중에 문을 두드리고, 라디오로 방송이 되고, 세상은 온통 나혜석 하나를 위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 몸으로 낳은 4남매를 전 남편에게 빼앗긴 나혜석은 걷잡을 수 없는 적막감 속에 빠져 눈물짓는 때가 많았다.

 

야밤에 눈을 뜨면 허고으이 구석으로부터 일진의 바람이 어디선지 모르게 불어옵니다. 그 때 고적이 가슴 속에 파고 펴지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느끼던 고적은 아픈 것은 있었으나 해될 것은 없었습니다.

지금 느끼는 고적은 독초 가시에 찔리는 자국의 아픔임을 깨달았습니다. 어디로부터 와서 가는지 모르는 가운데서 무엇을 하든지 그 뒤는 고적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허락할까? 한 사람에게도 허락지 말까?'

이성의 사랑은 무섭다. ! 무서운 것!

적막한 것이 사람입니다.

 

전 남편 김우영과 이혼하고 3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나혜석은 여권 부재의 사회 제도와 남성 위주의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통박하는 글을 <삼천리>지에 기고한다.

이름하여 "이혼 고백서".

2회에 걸친 이 장문의 글은 나혜석의 분노와 정한이 그대로 담겨진 것이었는데, 그 대담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의 사회 사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혼 고백서"를 발표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고, 이 땅의 여성 개화사에 일대 사건을 일으켰던 나혜석의 일거수일투족은 이제 모든 신문과 잡지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그녀는 저널리스트들의 시선이 자기 몸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추적해 오자 어디로든 도피해 가고 싶었다.

그녀의 좌절감은 그 이후 더욱 깊어갔다.

그림도 그려 보고 소설도 써 보았으나 그림이나 글이 그녀의 고독과 좌절감을 매워 주지는 못했다.

실의에 빠진 그녀는 41세 되는 해에, 이미 사랑에 실패하고 삭발 수도승이 되어 수덕사에 내려가 있는 김일엽을 찾아간다.

몸과 마음이 함께 시들어가기 시작한 나혜석은 어디서든 구원을 찾아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수덕사에서 가야산 해인사로 전전하며 방랑 생활을 되풀이하는 그녀의 몸에, 중풍이란 병마가 달려든다.

몸의 부자유, 고독감, 신경 쇠약이 그녀를 비극적인 종말로 이끌고 갔다. 말의 부자유, 육신의 불구, 마음의 고독, 마침내 정신 신경 장애.

그녀는 서울 인왕산 밑 청운 양로원에 수용된다.

48. 한창 활동할 나이에 양로원이라니........

50. 추위가 몰아치는 1946년 연말께, 나혜석은 서울 원효로의 자혜 병원(시립 남부 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천재 화가란 신분을 숨긴 채 홀로 눈을 감았다.

 

 

대중과 함께 산 무대의 여왕 - 배구자

 

'마술 극단 송욱제천승 일행 공연!'

시골 담벽에 붙은 극단 선전문을 보고, 한쪽 귀로는 목이 쉰 트럼펫 소리를 들으면서 자그마한 시골 바닥 젊은이들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덴카스라면 시골 바닥에서도 널리 알려진 마술 극단, 몇해 만에 찾아온 덴카스 일행의 마술과 춤과 연극을 보려고 사람들은 벌써부터 극장 주위를 맴돌았다.

극장이 문을 연 첫날부터, 마술과 무용과 노래가 흥겹게 진행되자 시골 사람들은 여전히 가슴을 울렁이면서 어서 다음 프로가 소개되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그날 황금 프로인 '소공자'에서 주연인 세시 역으로 나온 10대 소녀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마, 저 초롱초롱한 눈 좀 봐. 겨우 열한두 살이나 될까?"

"저 소녀가 오늘밤 연극 주연인가?"

"이런 맹추! '소공자'에서 세시로 나오면 주연 배우지 뭐야."

"이야기가 점점 무르익어 간다. 입 다물어."

소녀는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그럴듯하게 연기를 해내고 있었다. 소녀는 전체 연극 중에서도 어머니를 그리며 유랑하는 대목에 이르자 눈물을 쏟아가며 이야기를 청승맞게 엮어 나갔다.

소녀의 눈물을 보고 관객들도 모두 유랑 소녀의 비극이 자기들 주위에 있는 이야기만 같아 슬피 울었다.

연극이 끝났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극장 안을 떠메고 나갈 것처럼 울려 퍼졌다.

배구자의 이름을 부르며 관중들은 천재적인 어린 소녀 연기자에게 환호를 보내었다. '소공자'에서 세시 역을 해내었던 소녀, 그녀가 바로 배구자였다.

1907년 충청남도 대전에서 태어난 배구자가 이렇게 덴카스 일행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소녀 배우로 출발한 것은 순전히 그녀 삼촌의 덕이었다.

배구자가 덴카스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그녀의 나이 여덟 살도 안 된 어린 시절이었다. 그녀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로 소문이 나 있던 배정자의 조카딸이었다.

여덟 살 때 소녀 구자는 삼촌을 따라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역시 삼촌의 도움으로 그녀는 소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으나 삼촌이 워낙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배구자의 운명은 그 삼촌에 의하여 이미 결정이 나 있었다.

덴카스 일행과 친교가 있던 삼촌은 구자에게 학교를 집어치우게 하고 극단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아니, 그 같은 운명은 배구자 쪽에서 마련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린 구자는 덴카스 일행 앞에서 곧잘 노래를 불렀었고, 유희를 잘할 때마다 칭찬을 받아 오던 터였다.

"소질이 있어. 어떻게 키워 볼까?"

"소질 정도가 아니라 이건 대성할 수 있는 바탕이 있는 아이야."

덴카스 측의 관심은 마침내 소녀 구자를 극단 단원으로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13.

그녀는 덴카스 산하 극단인 유라쿠좌의 한 단원이 된다.

무대에 익숙하게 된 구자는 연기의 폭을 넓히기 위해 노래를 배우기 시작한다.

"노래를 본격적으로 부르려면 스승을 잘 만나야 해."

당시 악단의 제1인자로 꼽히던 세키야 도시코가 구자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용기를 내러 세키야를 찾아가 그 문하생이 된다.

천부적인 재질에다 무대를 향한 줄기찬 욕망, 배구자는 출세를 미리 약속받아 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덴카스 안에서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위치를 구축해 나갔다. 이제 덴카스 측에서도 배구자 없는 극단은 상상할 수조차 없이 되어 그녀는 관객과 극단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마침내 배구자는 덴카스 측으로부터 이름 하나를 선물로 받는다.

노모 가메코.

그녀가 펼쳐 나갈 제 2의 인생이 화려한 인기와 함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구자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이른바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다음 해의 일이다. 덴카스를 따라간 공동의 여행이었으나,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을 전전하는 사이 그녀는 백계 러시아인 아나 파브로바를 만나 무용을 배우기 시작한다. 무대를 익히고 음악을 배우고 본격적인 무용 수업을 마친 배구자는 그야말로 한 사람의 완벽한 연기자의 수련을 모두 거친 셈이었다.

3년 동안 본격적인 무용 수업을 끝내고 하와이에서 마지막 공연을 가졌을 때 덴카스의 인기는 미국인들을 매료시켰는데, 그 가운데서도 배구자에게 보내진 박수 갈채는 대단한 것이었다.

덴카스 측에서는 배구자를 그들 극단의 후계자로 꼽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인기가 날로 높아 갈수록 그녀가 무대를 향한 보이지 않는 숨은 노력은 미개지의 땅을 개간하는 개척자의 고난처럼 따르게 마련이었다. 예술이란 천부적인 재질만으로 대성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일본을 거쳐 덴카스가 평양의 해락관에서 공연하고 있을 때였다.

192664.

새벽녘에 눈을 뜬 덴카스 관계자는 밤사이에 배구자가 사라진 사실을 발견하고 기절할 듯이 놀랐다.

"아침 일찍 평양을 떠나 중국으로 가기로 되었는데 배구자가 어디로 사라진 거야?"

"도망간 게 분명합니다. 배구자 소지품이 보이지 않아요."

덴카스로서는 배구자의 도망으로 당장 내일의 공연이 문제였다.

11년 동안 몸담아 오던 덴카스 측에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떠나간 그녀를 두고 극단측에서는 배신자로 몰아세웠으나, 그녀의 이탈 뒤에 얽힌 내막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덴카스측에서는 일단 평양 경찰서에 의뢰하여 배구자의 행방을 찾도록 부탁하고 미리 짜여진 일정에 맞춰 만주로 떠나갔다.

그 시각에 배구자는 열차편으로 서울을 향하고 있었다. 미리 약속한 대로 황주에서 배정자의 마중을 받고 그 길로 서울에 온 배구자는 성북동 배정자의 집에 은신하게 된다. 배정자가 황주까지 마중나갔던 점으로 보거나 그 뒤의 배구자의 움직임으로 보아 배구자가 덴카스를 떠난 것은 뒤에 배정자의 조정이 있었던 것 같았다.

기실 배정자는 얼마 뒤 일본인 실업가 이치고리를 만나게 하였고, 그에 따라 배구자의 숙소도 조선 호텔로 옮겨졌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기만 하던 배구자의 인기였으므로, 배구자의 신상에 변화가 생겼다는 소문은 그만큼 빨리 온 서울 장안에 퍼져 나갔다.

배구자가 일본인 실업가와 만난 뒤 또 이러한 소문도 나돌았다. 배구자는 오래지 않아 신일좌라는 마술 극단을 하나 조직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또 다른 소문은 배구자와 장래를 약속한 어느 청년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아서 덴카스를 떠났다고도 하였다. 그 같은 소문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듯도 하였다.

본디 덴카스의 남편에게는 전처소생의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 아들과 배구자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소문의 전부였다.

세상 소문이야 어찌 돌아가건 배구자는 성북동 깊숙한 골짜기에 숨어 버린 채 세상과 담을 쌓고 살더니 급기야는 1926년 가을, 부모가 있는 김해 산골로 아주 낙향해 버리고 말았다.

김해의 배구자는 이미 "꾀꼬리 같은 목소리의 음악과, 무용과 기술로 온 사내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명성으로 화려한 무대 위의 인생을 보낸 예술가"가 아니었다. 촌부의 차림으로 물을 긷고 살림을 해 나가는 그녀는 아예 무대를 밟아 본 일조차 없는 산골 처녀 그대로였다.

그러나 배구자를 싸고 도는 소문은 시들 줄을 몰랐다.

"배구자가 아이를 배었다."

신문은 엉뚱하게도 그 같은 소문을 기사로 실어서 배구자의 해명을 촉구했다. 오늘날의 주간지 기사 같은 특종이 보도되었을 때 세상은 다시 한 번 부글거렸다.

 

돌연히 모 일간 신문에 그(배구자)가 아이를 배었다는 기사가 크게 발표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었기는 우리는 바라겠다. 배구자가 세류 같은 허리를 나부끼며 나서서 그 기사의 정오를 내기를 바라야 하겠다. 그러나 배구자야! 남산의 불빛을 보고 몸서리를 쳤다 하던 배구자야! 너에게 그럴 만한 용기와 자신이 있겠는가?

 

<매일신문> 기사의 그 같은 횡포는 오늘날에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 만인의 여왕이었던 배구자의 임신설은 그만큼 화제를 모을 만한 일대 사건이어서 신문이 해명을 요구할 정도로 앞장을 섰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효녀로서 시골스런 치마저고리에 시골 가시내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었지 소문대로 부정한 아이를 잉태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의 은둔 생활 2년여---.

흥행계에서 배구자를 다시 무대로 끌어내어 한몫 단단히 재미를 보려는 사람들이 배구자의 소재 파악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무대를 떠났을 무렵, 그러니까 1927113일자 <매일신문>에 태백산인이 배구자의 운명을 예언할 정도로 그녀는 아직도 일등 예술가요 만인의 여왕이었던 것이다.

 

배구자 양은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덴카스의 유일한 수제자로 연극과 마술을 아울러 잘하는 천재 여배우올시다.

일전 신문 지상에서 보니 죽어도 배우 노릇을 아니하고 부모가 보내는 대로 아무데나 가서 시집살이나 하겠다 하나, 내가 보아서는 역시 배구자 양의 신수는 만인의 흠양을 받을 곳에 길운이 트일 것 같습니다.

첫째, 그는 남방의 혹성의 정기를 타고 난 사람이니 밤에는 불빛을 좇아 지나지 않으면 그의 팔자는 거세어질 것이며,

둘째, 그는 나비의 혼령이 사람으로 탄생한 사람이니 날고 뛰고 하지 않으면 그의 몸에는 재앙이 있을 팔자이올시다.

적어도 태백산인의 예언은 여기까지 자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도저히 이 말이 맞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신변에 마성이 세 개가 빛나고 있으니, 이 마성을 치워 버리기 전에는 도저히 신수가 트일 수는 없습니다.

........ 그러하므로 내가 보는 운명 예언을 오직 그 자신의 심리와 태도로써 능히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니 나도 그 마성의 세밀한 정체는 모르나 배씨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여 마성 같은 것을 골라 제멸키를 도모하면 길운이 트일 것이올시다.

그리고 남편을 얻으면 화성을 가진 분이 좋고, 직업은 비료 회사나 운송이 좋겠죠...........

 

나비의 혼령이 사람으로 탄생할 사람 배구자.

날고 뛰고 하지 않으면 그녀의 몸에는 재앙이 있을 팔자라는 배구자.

태백산인의 예언이 맞은 것일까. 배구자는 악극의 개척자 이철의 끈덕진 회유와 설득으로 다시 무대에 서게 되었다.

이철이 배구자가 장차 미국으로 떠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녀에게 달려가,

"미국으로 떠나신다면 고별 공연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다시 무대에 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하고 애원한 것이 배구자의 승낙을 얻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1928421. 장곡천정 공회당.

백장미사 주최 음악.무용 대회에 참석한 관객은 배구자의 건재함을 다시 확인하였고, '유모레스크', '집시', '앵화', '수부', '인형', '아리랑', '사의 백조'를 춤추는 배구자의 가녀린 율동미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그날의 발표회를 시발점으로 배구자의 무대 활동은 재개되었다. 배구자 예술 연구소를 설립하여 제자들을 육성하기도 하고, 지방 순회 공연으로 전날의 인기를 바탕 삼아 화려한 무대의 여왕을 꿈꾸지만 그녀의 인기는 차츰 내리막길을 걷게 되어 객석에서는 간혹 찬바람이 이는 듯했다.

배구자의 인기에 도전이라도 하듯 그 무렵에 들장한 최승희의 신선한 매력은 배구자가 점유하고 있던 독무대를 조금씩 조금씩 침식해 들어갔다.

이미 홍순언의 아내가 된 배구자는 자기 개인의 인기가 사양길로 접어든 것을 절감하고 입체적인 대형 무대를 구상하게 된다. 남편의 후원으로 1935111일에는 서대문구 충정로에다 동양 극장을 개관한다. 동양 극장이란 이름은 윤백남이 짓고 독견 최상덕이 지배인을 맡아 획기적인 공연을 갖게 되었다.

개관을 이틀 앞둔 날 <매일신보>(1935. 10. 30.) 기사는 그 당시 배구자 악극단의 진용과 동양 극장의 규모를 소개하였는데 이를 보면 알만하겠다.

 

신축 낙성 개관 피로........ 111일부터 배구자 악극단의 향토방문 대공연과 대작 영화 동시 봉절을 감행하는 레뷰, 연극, 영화의 3중주적 특별 대흥행은 사계 만도인사의 절대 기대에 봉부할 것을 자신한다.

중요 순서.만국 '멍텅구리 제 2' 5, 촌극 '월급날' 1, 무용극 '급수부' 1, 그 외 20여 명으로 조직된 소녀 관현악단의 무대 연주(조선국) 수종, 무용(클래식. 재즈. 텁푸)5, 조선 무용 '아리랑' 창극, 합창, 뮤직 플레이.

 

객석 600의 회전 무대, 호리촌트 등을 갖춘 국내 유일의 연극 전문 극장은, 그러나 1주일 동안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나서 뜻밖에도 고별 공연을 갖게 되어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놓았다.

'배구자 악극단 석별 흥행 주간....... 118일부터 12일까지.'

이 공연을 마치고 그녀는 서울을 벗어나 일본으로 순회 공연을 떠난다.

국내 공연보다는 일본 공연을 주로 하던 배구자는 남편 홍순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실질적인 동양 극장의 주인이 되지만, 그때부터 배구자의 인생과 사업은 급전되어 불과 5년의 세월을 채우지 못하고 극장을 양도하는 사태로까지 악화되고 만다. 개관 이후 동양 극장은 전속 극단 청춘좌, 희극좌, 동극좌, 호화선 등 화려한 조직으로 장안의 인기를 독점하였었다.

기성 배우로 박제행, 서월영, 심영 등 토월회 출신과 황철, 연구생으로 김승호, 여자 배우로 김선초, 차홍녀, 지경순, 김선영, 신인으로 한은진, 유계선 등이 주축이 된 청춘좌, 변기종, 송해천, 하지만 등의 동극좌, 전경희, 석와불, 손일평, 김원호, 최영순 등의 희극좌, 게다가 전속 작가로 박진, 이서구, 이운방, 송영, 임선규, 김건, 최독견, 김영수 등의 활약은 배구자 내외를 돈방석 위에 올라 앉게 하였다. 지금도 가끔 입에 오르내리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검사와 사형수' 같은 프로가 동양 극장에서 막이 오랐고, '승방 비곡', '국경의 밤' 같은 작품이 모두 동양 극장 무대를 거쳐 소개되었다. 그러나 남편 홍수언이 죽자 배구자는 어찌된 셈인지 1년도 채 안 되어 김해의 미곡상 소사로 출발하여 거부가 된 동양 연료 회사의 김계조에게 재가하더니, 둘째 남편 김계조는 동양 극장을 팔아 버리고 마는 것이다.

19398, 신문에 오르내린 기사로 보면 동양 극장은 36명의 채권자에 빚이 16만 원이라 했다.

8세에 무대를 밟기 시작하여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배구자에게 인기의 하락은 물론 경제적인 파탄이 오는가 했더니 그녀는 홀연히 일본을 떠나 버리고 만다. 배정자의 조카딸로서, 최승희 이전의 당대 제일의 무영가 배구자의 소식은 그 뒤 단편적인 것들만 떠돌뿐 지금은 역사의 장 저쪽으로 아주 사라져가고 있을 뿐이다.

 

 

열일곱 살에 떨어진 구국의 별 -유관순

 

별은 떨어졌다.

그녀의 나이 17세였다.

관순은 구국의 별이었다.

계속된 일제의 악행, 꺾일 줄 모르는 애국심, 모진 고문과 굶주림으로 관순은 영양실조가 되어 있었다.

19201012, 별은 하늘이 아니라 감옥에서 떨어졌다.

관순이 죽은 지 이틀이 지났다.

관순의 모교인 이화 학당 당장 미스 프라이와 미스 월터 선생은 일본인 형무소 소장을 만나 관순의 시신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 시신........? , 가만히 계시오."

형무소장은 웬일인지 쩔쩔매었다.

두 사람은 거듭 재촉했다.

그다음 날에도 또 형무소로 찾아가서 끈질기게 재촉했다.

"보시오, 소장. 만일 관순의 시신을 내주지 않으면 이 사실을 내외에 알리겠소!"

"뭐라구?"

"이 사실을 미국에 보고하여 세계의 여론을 일으키겠단 말이오!"

", 가만 계시오......."

일본인 소장은 한참 만에 조건을 내세우고 시신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첫째, 시신에 관한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아니할 것.

둘째, 장례는 극히 소수인으로써 조용히 지낼 것.........

석유 궤짝에 낳은 유관순의 시신은 해가 진 뒤 월터 선생에게 인도되었다.

학교로 돌아온 월터 선생이 시신이 든 궤짝을 열었을 때 선생님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섰다. 관순의 시신은 머리, 몸체 할 것 없이 어느 한 곳 성한 곳이 없었다.

", 불쌍한 관순........"

선생들은 시신을 부여안고 마침내 통곡해 버렸다.

유관순은 1903년 음력 315, 충청남도 천안군 목천면 지령리에서 유증권의 4남매 중 들째 딸로 태어났다.

관순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다른 여자 아이들에 비하여 적극적이었고 감수성이 강했다. 그리고 또 봉사 정신이 강했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끝까지 제 의견을 굽히지 않고 관철시켰다.

관순은 또 장난이 심했고, 달리기에는 늘 첫째를 양보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유관순은 반일 사상이 투철했다.

어느 날 관순은 자기 아버지 어머니가 낯선 일본인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을 보았다.

관순의 아버지는 동지들과 힘을 합하여 홍호 학교를 세원 그 고을 유지였다. 지령리에 학교를 세우느라 장터의 고리 대금업자 고마다에게 원금 300냥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정한 기일에 이자를 갚지 못하여 원금의 열 곱인 3,000냥의 빛으로 늘어나 있었다.

"야 이 늙은이야....... 왜 남의 돈을 빌려가서 갚지도 않고 이자도 안 주는 거야, ?"

일본인 고리 대금업자 고마다는 매일같이 찾아와서 갖은 욕설과 행패를 늘어놓았다. 땅문서고 집문서고 모두 고마다에게 잡혀 있었으나, 원금을 갚지 못한 유증권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느 해 겨울날 관순의 아버지는 가까스로 원금 300냥을 마련하여 가지고 문서를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마다는 제 집 근처의 일인들을 불러와서 또다시 행패를 부렸다.

"이 유가를 우물에 거꾸로 처박자...."

"그럽시다, 우헤헤헷."

그자들은 거꾸로 처박힌 유씨에게 물을 끼얹고 매질을 했다. 그날의 사형벌로 관순의 아버지는 때때로 신열이 나고 중태로 앓아눕는 일이 많았다.

그때부터 유관순은 일본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

가난한 집안이라 여학교에 진학하고 싶어도 그 꿈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아버지의 연줄로 관순은 열네 살 나던 해 봄 이화 학당에 진학할 수 있었다. 교비생으로 이화학당 3학년에 입학한 관순은 서울에 올라와 프라이 당장에게 소개되었다. 이미 사촌 언니 유예도가 이화 학당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이화 학당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학문과 새 지식의 흡수욕이 강했던 관순은 이화에 편입학되자마자 기숙사에 들어갔다.

"관순아, 넌 나하고 이 방을 쓰는 거야."

사촌 언니 에더는 이층 기숙사에 넓은 방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언니하고 단 들이서만 쓰는 거야?"

"아니, 모두 여덟 명이 있게 돼."

에더는 그 방에 있는 학생들에게 관순을 소개했다. 모두들 관순을 반겼다.

학교생활은 즐거웠다.

기숙사에서 한 방에 있는 서명학과는 반도 같았다. 서명학은 학교 교육에 익숙지 못한 관순에게 친절을 아끼지 않았다. 서명학 외에도 주현숙, 김분옥, 김회자, 유점선과 친하게 지냈다.

관순은 쾌활한 학생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개방적이었다. 줄넘기는 관순을 따라갈 학생이 없었다.

기숙사 식대는 한달에 6원씩이었다. 대개 학생들은 교비생으로 기숙사에 수용되어 있었다. 관순은 고학하는 학생의 만두를 매일 팔아 주리만큼 동정심이 강했다.

또 한번은 기숙사생 가운데 식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이 있었다. 관순은 자기 앞으로 돌아오는 밥을 그 학생에게 먹이고 자기는 굶었다. 그리고 그 학생을 위해 열심히 기도만을 올렸던 것이다.

그 당시 세계는 민족 자결주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일본의 식민지로 온갖 박해를 받아 오던 우리나라도 온 민족의 힘을 모아 3.1운동을 일으켰다.

191933일 고종 황제의 인산을 앞두고 전국 각 고을에서는 흰 옷을 입은 백성들이 줄을 이어 서울로 몰려들었다. 민족 대표 33인은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이용하기로 했다. 191931일 정오,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가 낭독되고, 학생을 선두로 한 만세 시위가 온 장안을 휩쓸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학생들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거리에 나온 시민들도 합세하여 만세를 불렀다. 만세 소리는 흡사 노도와 같이 거리거리를 누볐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일본 관헌은 이들 민족의 함성을 제지하기 위하여 총칼을 들고 날뛰었다.

3.1운동 당시 유관순은 고등과 2년을 눈앞에 둔 16세의 꽃 같은 학생이었다.

이화 학당 학생들은 그날 일제히 만세 운동에 가담하려고 운동장에 모였다. 그러자 프라이 학당장은 학생들을 제지하고 나섰다.

"여러분! 내가 당장으로 있는 동안은 여러분을 일본 사람한테 끌려가게 할 수도 없고, 고생시킬 수도 없습니다.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시오!"

학당장은 이처럼 필사적으로 말렸다.

그 바람에 학생 전체가 교문 밖으로 나가려던 계획이 변경되어 30여 명밖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만세 운동 바로 전날 관순은 고등과 1년생 6명과 함께 시위 운동 특별 결사대를 조직했었다. 결사대 6명은 상급생들을 따라 학교 뒷담을 넘어서 만세 대열에 합세했다.

35일 학생들만의 시위 운동에도 참가하여 관순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우리 나라를 통치하고 있던 조선 총독부에서는 성난 파도처럼 일어나는 만세 운동을 막기 위해 310일 임시 휴교령을 내렸다.

관순을 비롯한 이화 학당의 기숙사 학생들은 모두 고행으로 내려가야 했다.

유관순은 3.1운동의 민족적 울분을 가슴 깊이 지니고 사촌 언니 에더와 함께 고향 지령리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내가 할 일이란 무엇인가? 일제의 압박을 그냥 받고만 있는 고향 사람들에게 항일 정신을 불어 넣어야 한다.'

유관순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서울에서 있었던 만세 운동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관순의 설득력 있는 웅변으로 마을 사람들은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다. 그리하여 관순은 아우내 장날인 음력 31일을 기하여 시골에서의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유관순과 에더 언니는 천안 고을뿐 아니라 인접해 있는 여기, 청주, 진천 등지로 찾아다니며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을 벌일 것을 종용하였다.

마침내 계획된 거사의 날은 왔다.

아우내 장터엔 아침부터 수천 명의 군중이 하얗게 모여들었다. 관순과 에더 언니는 비밀리에 만든 태극기를 구중들에게 나누어 주고, 관순이 짤막한 연설을 마치자 독립 선언식이 거행되었다.

먼저 조인원(조병옥 박사 아버지)의 선언서 낭독이 있었고 선창이 있었다.

병천의 진명 학교 교사 김구응이 선두에 서서 농기에 단 커다란 태극기를 휘둘렀다. 뒤따라 수천의 군중들은 손에 쥔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일본 관헌이 달려나와 시위 군중을 향해 총을 쏘고 칼을 내리쳤다. 하나오카란 자가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청년 김상헌이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늙은 조인원이 군중의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부르자 일본 관헌은 조옹을 향하여 총을 쏘았다. 조옹 역시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그 뒤를 이어 희생자는 늘어갔다.

일본 관헌은 계속 무차별 사격을 가해 왔다.

천안읍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지원하기 위해 합세하자 아우내 장터는 피로 물들어갔다.

"이놈이...... 왜 우리를 쏘느냐., 왜 죄 없는 대한 백성을 쏘느냐!"

항변하는 김구응의 가슴에 총알이 날아들었다. 쓰러진 김구응의 머리가 일본 헌병의 칼에 박살이 났다. 김구응의 늙은 어머니 채씨가 달려들어 아들의 죽음을 항변했다. 왜놈 헌병은 아들을 찌른 칼로 그 어머니를 또 찔렀다.

관순의 아버지 유증권이,

"너희 놈들은 부모도 없느냐....... 왜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이느냐......." 하고 대들자 이번에는 유증권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여보!"

쓰러진 남편을 부축하려던 관순의 어머니 등에도 왜놈 헌병의 칼이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관순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하고 말았다.

관순의 아버지는 중상을 입고 집으로 옮겨져서 치료를 받다가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날 유관순은 일본 관헌의 무차별 발포로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만세를 선동한 주모자를 대라. 주모자가 누구냐?"

일본 관헌은 관순을 심문하였다.

"주모자는 나다. 내가 주모자란 말이다!"

"뭣이! 바른대로 말 못 할까!"

고문이 시작되었다. 심한 고문에도 관순은 굽히지 않고 끝까지 자기가 주모자라고 버티었다. 실상 만세 운동의 주모자는 그녀였으니까........

"칙쇼! 만세 운동에 관계한 자가 누구인지 그걸 대라. 순순히 대기만 하면 너는 석방이다."

그들은 관순에게 회유책을 썼다. 그러나 그런 꼬임에 넘어갈 관순이 아니었다.

"사정없이...... 이 악독한 계집아이를 사정없이 내리쳐라!"

야만스런 고문이 거듭되었다.

관순은 천안 헌병대를 거쳐 공주 재판소로 이동되었다.

또다시 검사국에서의 고문.

검사국에서 감옥으로---.

관순은 곧 재판을 받았다. 3년 형---.

경성 복심원에 공소.

법정에서 관순은 걸상으로 검사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7년 형으로 가형---.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된 관순은 감옥 안에서도 계속 만세를 불렀다.

만세 뒤엔 으레 고문이 뒤따랐다.

일본인들은 고문을 하다 못해 관순이 먹는 밥에 쇳가루와 모래를 집어 넣었다.

계속된 관순의 만세와 고문, 고문, 고문!

관순은 그 고문을 이기다 못해 19201012일 아직 인생의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한 17세에 어린 나이로 한 많은 일생을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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