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사랑은 용광로처럼
명기인가, 시인인가, 송도삼절인가 - 황진이
개성 병부교 다리 밑.
때는 마침 초여름이어서 다리 밑에서는 빨래하는 처녀 두셋이 부지런히 방망이를 내리치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할 무렵, 빨래터에는 진현금만이 남아 몇 가지 남지 않은 빨래를 헹구고 있었다.
그때 병부령 다리 위를 지나가던 청년 묘랑이 다리 밑의 현금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가뜩이나 녹작지근한 날씨에 훌훌 옷을 벗고 목물이라도 끼얹고 싶던 현금은 청년의 눈웃음에 짜릿한 흥분이 일었다.
일단 나귀를 타고 사라졌던 청년은 이튿날 그 시가에 다시 나타나 또다시 눈웃음을 던졌다.
현금은 청년의 유혹을 받고 가슴이 뛰었다.
청년은 나귀를 다리 난간에 메어 두고 아래로 내려와서 현금의 앞에 마주 섰다.
한동안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청년은,
"나 물 한 바가지 마시세."
하고 말문을 열었다.
현금은 우물로 가서 물을 떠서 청년에게 살며시 내밀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바가지를 돌려주며 청년은,
"어, 시원하구나!"
하고 뇌까렸다.
양반집 자제 같은 풍모와 그 서글서글한 외모에 반해 현금은 청년을 사모하게 되었다.
'다리 밑의 인연'은 두 사람 사이를 더욱 가깝게 하였다.
청년은 개성에서도 유명한 황진사였다.
두 사람의 사랑은 무르익어갔다.
이와 같이 다리 밑의 밀애를 거쳐 태어난 아기가 바로 황진이였다.
황진이나 그의 어머니 현금은 그러나 이미 그들 생애에 슬픈 숙명을 안고 태어난 여인들이었다.
그것은 진이의 아버지 황진사처럼 그들 신분은 양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현금은 곧 황진사의 첩이었고, 황진이는 이를테면 첩의 딸이었다.
현금 -- .
진이의 어미 현금은 다리 밑의 인연으로 얻은 딸을 그나마 양반의 씨라고 애지중지하여 키웠다.
어미는 딸에게 글을 가르쳤다.
진이는 여덟 살에 천자문을 떼었고, 열 살에는 열녀전을 읽었다.
사서삼경을 익혔고 시서화의 오묘한 경지에 이르러 지식과 정서 양면을 두루 갖추었다.
게다가 거문고 가락에 흥을 돋우어 감성의 폭을 넓혀 나갔다.
나이가 들수록 황진이의 재주는 인근 마을에 널리 알려져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천부적인 문장 실력을 찬탄하다 못해 흠모하는 남자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 진이가 사는 마을의 한 총각은 먼 발치로 진이의 아름다운 용모를 한 번 보고는 그만 상사병이 나서 죽어 버렸다.
죽은 청년을 실은 상여는 마을 젊은이들에 의하여 운구되었다.
그러나 상두꾼의 구슬픈 만가 소리에 의해 운구되던 상여는 진이의 집 앞에서 멈추어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진이는 옷장 속에 곱게 접어 둔 적삼과 치마를 꺼내어 청년의 관곽 위에 얹어 주었다.
그제서야 상여는 땅에서 떨어져 그 슬픈 만가를 남기고 멀어져 갔다.
그때부터 황진이는 인생을 깨달았고, 사랑의 번뇌를 알았다.
그녀는 마치 죽은 마을 청년의 아내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였다.
진이는 자기로 말미암아 청년이 죽었으니 그것은 자기가 그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내 아름다움 때문에 청년이 죽었으니 나의 미모가 그를 죽인 셈이다. 내가 이 미모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가는 또 다른 젊은이가 죽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진이는 그 같은 생각 끝에 집을 뛰쳐나가 기생이 되었다.
그 뒤부터 세상 사람들은, 황진이의 이름만 들어도 그녀를 사랑하게 이르렀다.
그 당시 엄수란 사람은 나이 칠십이 되도록 악단에서 늙었는데 그만치 당대의 "미모도 많이 보았고 음률도 잘 알지만 황진이를 보고서 인간 세계에 선녀가 내려왔다." 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황진이의 노래를 듣고 "세상에 이런 절조가 또 어디 있겠느냐"라고 경탄했다는 것이다.
날씬한 몸매에 개성적인 미모, 온몸에 젊음과 정열이 한창 무르익은 방년의 여인이 기계에 나타나자 진이는 송도 화류계의 꽃이 되었다.
뭇사내들은 진이 앞에 나타나 술과 시와 거문고 놀이하기를 다시없는 영광으로 알았으나 진이 마음에 꼭 들어 그녀의 사랑과 예술을 깡그리 바칠 만한 멋쟁이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진이는 오만하고 도도해져 갔다.
세상의 내로라하는 남성들이 그녀 앞에서는 쪽을 못 쓰고 빌빌거렸다.
그녀는 남성들을 마음껏 시험하고 싶어졌다.
때로는 농락도 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미모와 무르익은 육신, 빼어난 문장력에도 굽히지 않는 남성이 나타나면 마음껏 그와 함께 타오르는 정열을 불태우고 싶기도 하였다.
남성 시험 첫 상대로 그녀는 지족 선사를 택하였다.
지족 선사, 30년 동안 불도를 닦아 생불이라 불리는 스님이었다.
진이는 천마산 청량봉 아래에 있는 지족암으로 스님을 찾아갔다.
그녀는 이 생불을 어떻게든지 유혹해 볼 계획이었다.
"스님 계시옵니까?"
"......"
조용한 산골의 암자에서 만 가지 상념을 떨쳐 버리고 수도에만 정진하던 지족 선사는 미모의 젊은 여인이 나타나자 몹시 당황해하면서 안으로 안내하였다.
"스님, 스님께선 득도하신 분이니까 중생의 번민을 풀어 주실 수 있으신지요?"
황진이는 요염한 얼굴에 우정 수심이 가득하여 지족 선사의 두 눈을 핥듯이 바라보았다.
"......"
지족 선사는 선뜻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진이의 뜨거운 시선을 피했다.
"스님, 인간사는 허무한 것 같습니다. 스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바로 느끼셨소. 인간사는 허무하오."
진이는 다시 남자 이야기를 꺼내었다.
"스님, 이 몹쓸 계집 때문에 상사병이 나서 죽은 총각이 있었나이다. 나마들은 예쁜 여자를 못 잊어 하다 죽는 수도 있나이까?"
"예, 어흠. 나무 관세음보살!"
지족 선사는 황진이의 요염한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과연 저런 미모면 상사병이 나서 죽는 총각도 있으리라 싶었다.
지족 선사는 설법을 들으러 온 진이를 향햐 가까스로 합장을 하고 설법을 시작했다.
그러나 밤이 되어 젊고 아름다운 여자와 마주 앉아 있자니까 혀를 깨물고 참으려 하여도 자꾸만 고개를 드는 정염을 어쩌지 못했다.
지족 선사는 참다못해,
"진이!"
하고 그녀의 팔목을 잡고 떨리는 가슴에 그녀를 안았다.
그날 밤 30년 수도승 지족 선사를 함락시킨 진이는 암자를 내려오며 쓴웃음을 지었다.
30년의 수도가 황진이의 아름다움 앞에서 여지없이 허물어져 스님은 하룻밤 사이에 파계승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세상 남자란 별 게 아니었다.
황진이는 지족 선사 이외에 그녀가 시인이었으므로 같은 시인인 판서 소양곡의 사랑을 받았고, 그녀가 가인이었으므로 같은 가인인 송순과 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녀가 풍취객이었으므로 당대의 풍류인 이사종과 6년 동안 달콤한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지족 선사를 파계승으로 만들어 버린 뒤 황진이의 눈길은 화담 서경덕에게 쏠려 갔다.
말하자면 대학자 화담 선생이야말로 진이가 한 번 시험해 볼 만한 대상이어서 바짝 욕망의 불길이 일었다.
진이는 어느 날 서사정으로 화담을 찾아갔다.
시정 잡사를 멀리하고 초연히 초당에 앉아 학문에 몰두하고 있는 화담 선생을 진이는 뭇사내가 자기의 미모에 무릎을 꿇듯 그렇게 정복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선생님, 선생님의 고매한 정신을 배우려고 이렇게 찾아왔나이다."
진이는 화담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어, 편히 앉으시게."
화담은 대수롭지 앉게 그녀를 건너다보고 어버이 같은 얼굴로 그녀의 질문에 자상하게 대답해 주었다.
진이의 미모 따위는 화담에게는 아무런 이성적 자극이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학문을 이야기하였고, 시와 문학을 겨루었다.
진이는 술과 노래와 춤으로 화담을 유혹하려 했으나, 화담은 진이를 한낱 어린애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며칠 밤 며칠 낮을 시험해 보았으나 화담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어느 비 오는 날 해질녘이었다.
진이는 초당을 나와 일부러 비에 함빡 젖어들었다.
진이의 엷은 옷은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 아름답고 요염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특히 그녀의 탐스런 젖무덤과 허리며 둔부가 엷은 옷을 비집고 나오기라도 할 듯이 그대로 그러났다.
진이는 그렇게 살이 드러나 보이는 몸매로 화담 서경덕 앞에 나타났다.
"선생님......"
추위에 와들와들 떨면서 진이는 화담 선생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어허, 이런! 몸이 온통 비에 젖었구먼."
"네, 선생님. 왜 그런지 자주 외롭고 쓸쓸해서...... 바람을 쏘이러 나갔다가 비를 만났어요, 선생님."
"옷을 벗으시게.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으면 감기든다니까."
진이는 속으로 옳다구나 싶었다.
화담 선생이 옷을 벗으라고 했겠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려면 내 이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난 아름다운 몸매를 보고 그냥 앉아 있을 돌부처가 어디 있을라구......
그러나 진이가 비에 젖은 옷을 훌훌 벗고 알몸이 되어도 화담은 그녀를 끌어당겨 남녀의 인연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진이 옷을 말려 줄 터이니 너는 이불속에 들어가 있거라, 알았느냐?"
화담은 알몸이 된 진이에게 이불을 덮어씌우고 젖은 옷을 말려주었다.
그날 밤에도 화담은 진이의 유혹을 육탄 공세로 마치 어린애 달래듯 잠재우고 저만치 돌아누워 코를 고는 것이었다.
진이는 화담 서경덕에게서 난생처음 남자를 느꼈다.
천하의 뭇 남성을 젖혀 놓고 화담은 남성 중의 남성이라 여겨졌다.
이튿날 스승 앞에 무릎을 꿇은 황진이는, "선생님, 송도의 삼절을 아시나이까?" 하고 존경의 눈으로 화담을 우러러보았다.
화담은 고개를 저었다.
"송도 삼절. 글쎄다......."
"제가 말씀드려 볼게요, 선생님. 하나는 박연이요, 또 하나는 화담이며, 다른 또 하나는 황진이 이 몸인가 하나이다."
그 말에 화담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를 지었다.
자연에서는 박연 폭포요, 남자의 세계에서는 화담, 여자의 세계에서는 황진이 자기가 송도에서 으뜸이라는 이 자신감.
어쩌면 그 같은 자신과 오만한 성격이 그녀의 인생과 예술을 돋보이게 했는지도 몰랐다.
자연을 사랑하면서 그녀의 시심은 싹텄고, 그 자연 속에서 인생의 허무를 느껴 한 줄의 시를 써 보기도 하는 진이.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쏘냐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더이다
진이는 스스로를 송도삼절에 비유하고 다녔으나 이성이 그리울 때도 있었고 사랑을 불태우고 싶을 때도 있었다.
뭇 사내 앞에서 여왕처럼 군림해 온 진이였으나 그녀도 어쩔 수 없는 한 나약한 여성이었다.
자기 쪽에서 정을 느끼고 접근했다가 또 자기 쪽에서 보내버리고 나서 그녀는 그리움에 못잊어 시를 썼다.
어져 내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진이 앞에 또 왕가의 귀인 벽계수가 등장한다.
그는 황진이에게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한다.
과연 벽계수는 황진이의 요염한 구애를 거들떠보지 않고 그냥 도도히 스쳐가기만 했다.
진이는 그 벽계수를 생각하며 또다시 시심을 불태운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도도하고 오만한 진이는 밤마다 '임'을 그린다.
그녀는 여자다.
낭군을 모시고 싶은 여자다.
그녀의 '임'인 '어른'은 지금 어디쯤에 계실까.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둘에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어른님'을 만나 사랑의 밀어를 굽이굽이 펴지도 못한 황진이는 그녀의 인생을 화려하게 펴지도 못하고 40 전후하여 눈을 감았다.
죽을 때 진이는 한 여자로서 짖궃은 과거를 살아온 죄책감에 빠져 이런 유언을 남긴다.
"내가 생전에 내 몸을 자애하지 못하였으니 죽은 후에는 관에 넣어 매장하지 말고 동문 박 모래 틈에 시체를 버려 세상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하게 하라."
진이를 아껴 오던 이웃들은 차마 그녀의 유언대로 시체를 모래 틈에 버려 까마귀밥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시체를 장단 근교 구정 고개 남쪽 길가에 고이 묻어 주었다.
그 뒤 당대의 문장가 백호 임제는 공무로 송도에 왔다가 먼저 황진이의 소식부터 물어보았다.
그러나 황진이는 벌써 죽어서 흙 속에 묻힌 지 오래였다.
백호는 낙담이 되어 장단의 진이 묘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 주었다.
백호의 눈에서는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입에서 한숨 섞인 시구가 흘러나왔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을 어데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백호가 사림의 몸으로 일개 기생의 무덤에 들러 제사를 지냈다는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는 파면이 되고 말았다.
국록을 먹는 벼슬아치가 체신머리 없이 기생의 넋을 위로했다는 죄목이었다.
백호 임제는 그까짓 벼슬 따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말았지만, 어쩌면 죽어서 황진이를 만나 한잔 술에 흥을 돋우며 문장을 교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돌아올 기약 없는 가실이만을 기다린 -설씨녀
고도를 찾아나서는 나그네들은 으레 그 도시가 형성되던 때의 성터를 찾게 마련이다. 성터가 없는 고도는 별다른 역사가 없다.
옛날의 성은 견고했다.
오늘날에 와서 성은 고고학적 가치로만 따져지기가 일쑤여서 관광객의 발길이 잠시 멈춰서는 자리로밖에 환영받지 못하고 있으나 성을 쌓던 당시의 사정은 그렇지가 않았다.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다.
왕은 나면서부터 기이한 용모를 가졌고 신체가 장대하며, 의지와 식견이 심원하고 명철하다 하여 백성들의 기대가 컸다.
왕은 왕좌에 즉위(서기 579년)하자마자 왕비 마야 부인을 대동하고 부지런히 내을신궁에 나아가 제사를 지냈다.
왕의 즉위 3년에는 처음으로 위화부를 설치하여 이재 등용에 힘썼으며, 5년 정월에는 선부서를 설치하여 바다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디 위화부나 선부서 뿐이랴.
왕의 즉위 6년에는 조부를 두어 공부의 일을 맡아 보게 하였고, 승부를 두어 차승의 일을 맡아 보게 하였던 것이다.
왕의 즉위 13년에는 남산성(경주)을 축조하였는데 성의 주위가 자그마치 2,854보라고 하던가.
왕성의 축조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한가로운 작업이 아니었다.
서라벌에 도읍을 정하여 신라가 그 역사의 씨를 뿌리고 가꿔 온 뒤부터 내성(궁성)과 외성을 처음 쌓은 왕은 박혁거세로부터 시작되지만, 진평대왕에 축조한 성에다 비기면 모두 하잘것없는 것들이었다.
박혁거세 21년에 왕궁을 세우고 성을 쌓아 금성이라고 불렀던 것을 시초로 파사왕 22년에는 또다시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했지만 그 둘레는 기껏 1,023보에 지나지 않았었다. 새로 쌓은 월성 북쪽에 만월성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 둘레도 1,830보에 지나지 못한 것을 상기해보면, 진평왕이 서기 591년에 축조한 남산성은 내성으로서는 최대 규모의 것이었다.
진평왕은 남산성을 쌓기 전에 추상 같은 어명으로 다짐하였다.
"만약 남산성이 완공된 뒤 3년 안에 이 성이 무너지는 날이면 너희들의 목을 베리라."
1935년 경주 남산성터에서 발견된 '남산 신성비'는 진평왕의 그 같은 어명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좋은 기념비였다.
남산 신성비에는 서기 591년 왕명을 받고 성을 축조하던 관계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름뿐이 아니고 그들의 출생지와 벼슬 이름까지 기록된 것을 보면 남산성에 대한 진평왕의 집념은 알만하다 하겠다. 성에 대한 왕의 집념은 거의 운명적인 것이었다.
오늘날의 경주 인왕동 ->탑동 ->배반동 ->남산동 ->배동로 이어지는 2,954보의 궁성.
남산성을 쌓고도 왕은 두 다리를 뻗고 편히 잠들 수가 없었다.
서쪽에서는 백제의 노략질이 계속되었고, 북쪽에서는 강대국 고구려가 잠시도 침략의 마수를 거두려 하지 않았다. 이 상태로 나간다면 언제 서라벌이 적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게 될지 몰랐다. 왕은 불안했다.
2년의 세월이 불안 속에서 흘러갔다. 동해로부터 왜구의 침입이 왕의 잠을 앗아갔다.
안되겠다. 왕은 또다시 명하였다.
"명활산성을 개축하여 왜구의 침략을 막아라."
진평왕 15년 7월에 명활산성 개축 공사를 시작했는데 주위가 3,000보, 때를 같이하여 서형산에 성을 쌓으니 주위가 2,000보였다.
동서남북에 견고한 석성을 새로 축조.개축하고 수나라 황제로부터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굴욕적인 이름을 제수한 뒤부터 왕은 비로소 발을 뻗고 잠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방팔방으로 성을 쌓고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쳐도 액운은 쉽사리 물러나질 않았다.
진평왕 24년 여름. 찌는 듯한 8월이다.
이윽고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아막성을 향해 쳐들어왔다.
왕은 곧 백제 군사를 물리치기는 했으나 귀산과 같은 당대의 명장군을 잃어야 했고, 백제 군사의 내습이 있던 그다음 해 8월에는 고구려 군사가 북한산성으로 쳐들어오자 친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 이를 막아내기도 했다.
진평왕 25년(서기 603년) 8월, 고구려가 북한산성(서울 북방)으로 쳐들어왔을 때 왕은 병부를 통하여 온 나라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동원령의 골자인즉 한 집안에서 장정 한 사람씩을 뽑아내라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그러지 않아도 도성의 축성 공사로 나라 안이 뒤숭숭하던 때라 총동원령이 내자마자 변방의 방비를 맡기 위하여 병부로 몰려들었다.
이 무렵 서라벌 율리에 사는 늙은 설씨도 동원령을 받았다. 그는 변방의 수자리(국경을 지키는 일)로 떠나라는 명을 받고 어명을 어길 수 없어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나 늙고 병들어 쇠약한 설씨는 멀리 북방의 국경 지대는 커녕 자기 마을의 좀도둑을 지키기에도 힘에 겨울 지경이었다.
슬하에 아들이 없던 설 노인, 자식이라고는 다만 올해 열여섯 난 딸 하나가 가사를 돌보고 있을 뿐이었던 설 노인에게 수자리로 떠나라는 명령은 일종의 형벌이었다.
수자리로 떠나는 날이 하루하루 앞당겨 오자 설 노인은 고민 끝에 몸져눕게 되었다. 그때부터 늙은 설 노인의 딸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마을에서는 노인의 딸을 효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 사량부에 사는 소년 가실이 효녀의 집 문밖에 나타났다.
소년 가실은 비록 그의 집이 가나나고 누추하였으나 뜻이 곧은 남자였다.
가실은 웬일인지 설 노인의 딸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가실이 설 노인의 딸 효녀(편의상 이렇게밖에 부를 수 없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효녀의 아름다운 용모로 인해서였다.
효녀의 아름다움은 그의 가난에도 불구하고 이웃 젊은이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효녀는 이웃 젊은이들의 사랑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는 몸이었다. 사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에는 그녀의 가난이 너무 절박했던 것이다.
하나 소녀의 사랑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실은 알고 있었다. 가실은 효녀를 짝사랑 나머지 그녀의 사랑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기 위하여 그녀의 노예가 되기로 결심했다.
'효녀, 나는 네 종이 되고 싶구나. 사랑의 세계에서 노예는 굴욕이 아니잖는가.'
가실이 효녀를 그녀의 집 문 밖에서 만난 것은 효녀의 아버지 설 노인이 종군(수자리)으로 떠나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효녀, 나는 효녀를 돕고 싶소."
첫마디를 꺼내는 가실의 말소리가 소녀의 귀에 그럴싸하게 들려서 그런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효녀........"
"무슨 말씀이신지 찾아온 연유를 어서 말씀하세요."
그러나 효녀는 가실의 내방이 전혀 뜻밖이라는 듯 겁먹은 두 눈을 들어 가실의 행실을 찬찬히 살피는 것이었다. 가실은 그러한 소녀의 겁먹은 두 눈이 더없이 귀엽기만 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어서........"
"아버님이 편찮으시다지요........"
헛인사가 아니라 진정 가실은 설 노인의 안위가 염려스러웠다.
"아버님이....... 네, 중태랄 것은 없어도 기동이 여의치 못하시답니다."
그러면서도 효녀는 문득 집쪽을 건너다 보았다. 그러는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 금방 이슬이 맺히는 것이었다.
가실은 더 주저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효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땅 위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말하리라, 찾아온 사유를.'
그런데 이 무슨 마음의 변한인가. 가실의 입에서는 쉽사리 그 사유가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효녀가 얼마 뒤에,
"저를 찾으신 연유를......" 하고 재촉했을 때 비로소 그는 효녀의 두 눈방울에 멎어 있던 시선을 거두고 말을 꺼냈다.
"나, 가실은 효녀를 위하여 무슨 일이건 기꺼이 해드리고 싶으니 나에게 일을 맡겨 주시오. 내 비록 가난하고 쓰잘 나위 없는 위인이지만 일찍부터 스스로의 지기로서 살아온 사람, 원컨데 불초의 몸이나 엄부군의 행역을 대신하게 해 주시오."
효녀는 울면서 가실의 청을 받아들였다.
"가실이! 우리 아버님을 위하여 행역 종군을 대신하겠다 하니 이에서 더 고마울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곧 이 기쁜 소식을 아버님께 여쭙겠으니 함께 들어가 보시어요."
"그렇잖아도 병석에 계신 그대 아버님을 뵙고 인사 여쭈려던 참인데 잘 되었군요, 들어 가십시다."
두 사람은 설 노인이 누워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가실은 그 자리에서 좁전에 효녀한테 들려준 이야기를 반복했다.
노인은 늙은 안면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가실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가슴 위에 얹는다.
"가실이...... 가실이! 그대는 늙은 몸이 수자리로 떠나는 것을 대신하여 떠나겠다 하니 기쁘고 송구스러운 마음 이기지 못하겠구나. 그대의 소원이라면 내 기꺼이 은혜를 갚을 생각이네."
"은혜를 받자고 이 길을 택한 것은 아니옵니다."
가실은 노인의 뜻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노인은,
"만약 공이 어리석다고 버리지 않는다면 내 어린 딸을 아내로 맞아 줌이 어떠한가?" 하고 가실의 눈치를 살폈다.
가실은 노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꿈만 같았다. 평시에 흠모하던 설 노인의 딸을 아내로 맞아 달라니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온 기분이 아마 이렇겠거니 했다.
노인이 다시 말한다.
"공이 부족한 내 어린 딸을 아내로 맞아 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에게 베풀 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무엇으로 내 은혜를 갚을꼬......"
가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닙니다, 노인장. 노인장의 딸을 제 아내로 주신다면 감히 바라지 못할 일인 줄은 아나 기꺼이 맞이하겠습니다.
노인은 그제서야 가실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안심했는지 이번에는 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네 뜻은 어떠하냐?"
"아버님이 정하신 일인데 소녀가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효녀는 첫마디에 쾌히 응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마침 중천에 떠있는 달이 서라벌 넓은 장안을 밝혀 주고 있었는데 가실은 미래의 아내 효녀를 데리고 달 밝은 냇가로 밤놀이를 떠났다.
"내일모레면 전방 수자리로 떠나야 할 몸, 간략하나마 혼례를 치르고 떠나고 싶으니 허락해 주오."
가실은 효녀에게 그런 주문을 했다.
그러나 효녀는 달빛 아래서 밝게 웃어 보이고 고개를 젓는다.
"원래 혼인이란 인륜대사이므로 서둘러서 아무렇게나 치를 일이 못됩니다. 내 이미 그대에게 마음을 허락했는데 두 마음을 품을 리 있겠습니까?"
"그래두....."
"아니됩니다, 가실이. 그대가 변방으로 떠나 부정한 말로 설혹 어찌된다 하여도 나는 그대의 아내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일생을 혼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가실이......."
효녀의 마음이 그렇게 정해져 있다면 가실은 더 걱정할 것이 없었다. 효녀의 다음 말을 더 들어 보지 않더라도 이미 효녀는 가실의 아내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산다지 않는가.
"원컨데 가실이, 그대는 방어하는 곳으로 떠났다가 이다음에 수자리를 교대하고 돌아오거든 따로 날을 잡아서 혼례를 치릅시다. 어떻습니까, 내 뜻이?"
가실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과연 내 아내다운 말이오."
두 사람은 달빛 속에서 얼싸안고 헤어지는 아쉬움을 달래었다.
가실이 북한산성 수자리로 떠나는 날 효녀는 품속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내어 둘로 나누었다.
효녀는 깨어진 거울 반쪽을 자기가 갖고 나머지 반쪽을 가실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이는 헤어지는 신표로 드리는 것이니 뒷날에 가실이 수자리에서 돌아오는 날 두 조각을 합쳐 다시 하나로 만들겠습니다."
가실이도 효녀에게 말 한 필을 맡기면서,
"이는 천하의 양마로 뒷날에 반드시 쓸데가 있을 것이오. 어차피 내가 전지로 떠난 다음에는 이 말을 기를 사람이 없으니 바라건대 그대가 이 말을 맡아 길러 주시오." 하고 작별한 다음 곧 북으로 가는 종군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날부터 설 노인의 딸 효녀는 기다림에 마음 졸이는 여자의 그리움을 배우기 시작했다. 효녀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기다림의 연속이었고, 메아리 없는 그리움의 반추일 수밖에 없었다.
효녀는 가실의 그리운 얼굴이 떠오르면 문득 동강 난 거울을 꺼내어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앉아 있기가 일이었다. 깨어진 거울 한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거울 속에 가실의 얼굴도 나타났고, 먼 북한산성의 수자리 근처의 솔바람 소리도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한 기다림의 세월도 형벌처럼 지루한 것이었으며, 형벌과도 같은 그리움의 언저리에 여자의 지친 한숨 소리가 나직하게 방안을 울려 놓기도 하였다.
일 년의 세월이, 그야말로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흘렀다. 2년의 세월이 바람처럼, 3년의 세월이 번개같이 흘러갔다.
진평왕 25년(서기 603년) 8월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북한산성으로 쳐들어온 때부터 신라의 젊은이들은 다른 어느 변방에서보다 북쪽 고구려 국경 지대에서 더 많아 죽어 갔다.
가실이 북한산성 수자리로 떠난 지 5년.
진평왕 30년, 고구려가 번번이 변방을 침범해 오자 마음 약한 왕은 수나라 군사를 청해서 고구려를 칠 것을 결심하고 원광 법사에게 걸사표를 지어 보내도록 명했다.
원광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멸망시키는 것은 사문의 할 행실이 아니옵니다. 하오나 신이 대왕의 땅에 살고 대왕의 수초를 먹으면서 어찌 감히 어명을 좇자 어나하오리까."
하고 곧 걸사표를 지어 수나라에 보냈다. 그러나 수나라에서는 원병은커녕 걸사표에 대한 회답도 오지 않았다.
이윽고 6년.
가실이 북한산성으로 떠난 지 6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효녀의 아버지 설 노인은,
"처음에 가실은 3년을 기약하고 떠났는데 3년의 곱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더 기다릴 수 없구나. 마땅한 곳이 나섰으니 그곳으로 시집가는 게 어떠냐?"
"아버님께서는 6년 전에 소녀가 어떤 까닭으로 가실과 약혼하게 되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딸의 커다란 두 눈에서는 참으려 해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녀는 가실이와 헤어질 때 깨어진 거울을 서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가실은 거울의 신표를 밎고 6년의 세월을 전지에서 보내면서도 지루하다거나 고되다고 생각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내 나이 아흔이 내일모레라, 너 또한 과년한 여자로서 혼처가 나타나지 않을까 염려되니 아비가 정해 주는 사람하고 혼례를 치르자."
설 노인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버님!"
"글쎄 내 말대로 다른 데로 시집을 가라니까. 가실이는 벌써 죽은 몸이야."
"아버님! 소녀는 6년의 세월 속에서 하루도 가실이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적의 창끝이 코 끝에 보이는 그러한 국경 지대에서 손에서 무기를 놓은 사이도 없이 늘 호랑이 입 앞에 가까이 서 있는 것 같아 마음 놓을 수가 없는데, 그 신의를 저버리고 가실이와 언약을 잊어버리면 어찌 인정이라 하겠습니까? 소녀는 결단코 아버님 말씀에 순종치 못하겠습니다."
효녀의 결심이 바뀔 낌해가 보이지 않자 설 노인은 강제로라도 딸을 시집 보내기로 결심하고, 딸 몰래 마을 젊은이와 정혼을 하고 잔칫날까지 받아 두었다.
가실의 약혼자 효녀는 더 망설일 수가 없었다. 가실이를 기다린 6년의 세월이 허망하게 무너져내리는 아픔, 이 아픔은 분명 그리움이었고 사랑이었다.
가실이 처음으로 접근해 오던 때를 그녀는 생각했다. 가실의 용기가 없었던들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효녀는 결심했다. 가실이 그녀를 찾아와 아버지의 행역을 대신하겠다던 용기는 이제 그녀 스스로가 실천에 옮겨야 할 단계라고 단정한 것이다.
그녀는 마구간으로 갔다.
가실이 남겨 놓고 간 말 앞에서 그녀는 가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길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다. 이 말을 타고 북방으로 가리라...... 북방 국경 지대에 가서 가실을 만나자.'
그때였다.
형색이 걸인처럼 볼품없고 깡마른 사람이 효녀의 집앞에서 고개를 빼고 기웃거리는 게 보였다. 차림새로 보면 영락없는 걸인이었다. 해골처럼 삐쩍 마른 형상이 더욱 그랬다.
"설 노인...... 효녀." 걸인은 중얼거리면서 효녀를 찾았고, 설노인 찾았다.
설 노인과 딸이 밖으로 나왔으나 첫눈에 그 걸인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나, 가실이외다!"
가실이. 걸인은 스스로 가실이라고 말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
가실은 깨어진 거울을 품속에서 꺼내어 효녀에게 주었다.
'깨어진 거울....... 이별의 정표로서 둘이 나누어 가진 깨어진 거울........'
효녀는 가실의 거울을 받아들고 자기가 6년 동안 품에 지녀 온 거울을 꺼내어 맞춰 본다. 두 조각의 거울은 신기하게 들어맞았다.
"가실이, 으, 으흐흐......." 효녀의 입에서는 통곡과도 같은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고, 두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실이, 돌아왔구려. 여보!"
효녀는 그 걸이처럼 변모한 가실의 품에 안겨서 언제까지고 솟아 나오는 눈물을 거둘 생각도 않는 것이었다.
현해탄에 던져진 '사의 찬미' -윤심덕
1897년 평양의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난 윤심덕은 역시 같은 해 태어난 전라도 장성 군수의 목포 감리를 지낸 전라도 갑부 김성규의 아들 김우진과 운명적인 사랑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윤심덕의 가문은 개화기의 평양 선각자들이 그렇듯 기독교를 신봉하는 집안이었다. 평양 남산현 교회 윤효병 권사를 아버지로, 전도 부인을 어머니로 하고 태어난 윤심덕은 위로 언니가 되는 심성이 있었고, 아래로 성덕과 기성 두 동생을 두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이전을 나온 성덕을 음악적인 재질 면에서 심덕과 비슷한 소양을 갖춘 형제였다.
심덕이 숭의 여학교에 다닐 땐 남달리 큰 키와 어여쁜 용모로 장난기 있는 남학생들의 유혹이 많았다.
위로 언니 하나는 멀리 안동으로 출가하여 시집살이를 하고 있었으며, 부모들은 늙었고, 동생들은 어려서 그녀는 늙은 부모 대신 가정을 꾸려 나가야 할 몸이었다.
첫 취직은 강원도 원주 공립 보통 학교 교사 자리였으나 그것은 잠시, 그녀는 얼마 뒤 조선 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에 가서 동경 우에노 음악 학교 사범과에 유학, 숙원이던 음악을 전공하게 되었다.
우에노 음악 학교 졸업 기념 공연은 윤심덕의 음악적인 재질을 크게 펼쳐 보였던 첫 무대였다.
이 공연을 본 제국 극장 경영주는 매달 150원의 출연료로 전속 계약을 맺자고 나왔다. 그러나 윤심덕은 이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동경에서 사귄 애인 김우진을 따라 서울로 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우진--. 그는 일본 구마모토 현립 농업 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나온 연극 학도이며, 유학생들의 연극 단체인 동우회를 조직하여 구갠 순회 공연에 힘쓰던 이물. 말하자면 신극 운동을 전개하던 촉망받던 극작가였다.
일본 동경에서 만난 윤심덕과 김우진의 관계는, 처음에 유망한 신진 여류 성악가와 젊고 유능한 극작가의 결합이라는 데에서 유학생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한편으로 지탄받는 대상이기도 했다. 그것은 김우진이 이미 고행에 처자를 둔 기혼자라는 데에 있었다. 처자 있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윤심덕은 몸이 달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랑을 독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의 부나비가 되어 자기 몸을 불태우기 위해서는 김우진을 그의 처자로부터 빼앗아 와야 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서둘러 귀국하고 만 것이다.
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윤심덕은 의무적으로 학교에 근무해야 했다. 경성 사범 학교 음악 교사가 윤심덕의 두 번째 직장이 되었다.
그녀의 귀국은 기실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윤심덕은 목포 고향집에 내려가 있는 김우진에게 사랑의 편지를 띄워 보내면서 김우진과의 사랑의 이력을 더듬어 보기도 하였다.
"지난번 목포 오빠하구 지방 순회공연을 하였을 땐 참으로 꿈만 같았어......"
동경에서 유학 중인 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는 회관건립 기금 모금을 위하여 하기 순회 연극단을 조직한 일이 있었다. 순회공연을 통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연극 운동을 실천에 옮겨 보는 것과 아울러 고학생 구제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실현하려 했었다.
공연 프로는 다채로웠다.
열극 이외에 음악도 곁들여졌다. 홍난파, 윤심덕, 한기주 등의 독주와 독창이 있었고, 1920년 봄 동경 유학생들의 조직인 '극예술 협회' 맴버 외에 송경 학우회의 마해송과 그 밖의 몇 사람을 더 참가시켰는데, 전용이 쟁쟁했다.
그때에 연출을 맡은 이가 김우진이었다.
김우진--. '목포 오빠'로 통하던 김우진과 윤심덕은 동갑이어서 그랬는지 쉽게 밀착되었다. 그것은 몹시 수줍고 말이 없는 김우진과 쾌활하고 적극적인 윤심덕의 성격 차이에도 더욱 열기를 더해 갔다.
1921년 7월 9일부터 8월 18일까지 약 한달 동안 동우회 간부 임세희의 인솔로 일행 22명은 부산, 김해, 마산, 경주, 대구, 목포, 서울, 평양, 진남포, 원산 등지에서 공연을 가졌다.
일행은 순연한 영업적 배우가 아니라 예술에 살고자 하는 신청년의 단체이므로 일행의 차림은 물론 화려치 아니하였다. 어디까지나 씩씩한 학교 정복을 입은 일행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각한 인상을 받게 하였으며.......
- 1921. 07. 27. <동아일보>
부산서부터 제 1막을 공개하여 이르는 곳마다 끓는 듯한 대환영을 받고....
- 1921. 9. 30. <동아일보>
환영을 받고 지방 공연을 하면서 '목포 오빠'로 부르던 김우진과의 사랑을 점점 무르익어 갔다.
처음부터 시인이 되려고 습작에 열중했던 김우진은 그만큼 다감한 젊은이였다. 우리말과 일문으로 된 시 40여 편과 희곡 작품으로 희극 "정오", "산돼지". "이영녀" 등을 썼던 김우진은 '극예술 협회'와 '동우회' 순회 연극단의 지도자였다. 이러한 지도자를 애인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 윤심덕으로서는 더없이 행복한 일이었다.
애초에는 김우진이 이끌던 '동우회' 순회공연에서 소프라노 가수로 찬조 출연했던 윤심덕이었으나 유교적 가정에서 조혼의 괴로움을 맛보며 살고 있던 김우진과는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급기야 두 사람은 헤어날 수 없는 사랑의 가시 울타리로 얽혀 버리고 만 셈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국민학교 교사 생활을 하고 있던 윤심덕이 목포 집에 묵고 있는 김우진에게 사랑의 편지를 띄웠으나, 그 정열적인 윤심덕의 편지는 번번이 중간에서 없어져 버린 채, 김우진한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 무렵 윤심덕은 평양집을 처분하여 서울 서대문정 1정목 73번지로 이사를 했다. 이 집에서는 과부가 되어 돌아온 언니와 동생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
윤심덕은 사랑의 포로가 되는 것보다 생활을 해결해야 하는 가정의 가장이어야 했고, 돈에 눈뜨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다. 음악회다, 레코드 취입이다, 방송 출연이다 하고 바삐 나돌았으나 그야말로 그깟 돈은 '새발의 피'였다.
사랑하는 김우진에게서는 계속 연락이 끊어진 채 소식이 없었다. 돈이 필요한 윤심덕은 짜증이 났다. 미모의 여가수에게 중매가 없을 수 없었다. 함경도 출신의 김홍기가 접근해 왔다. 그러나 윤심덕은 그를 마다하고 돈이 있는 이용문과 가까워졌다.
"돈이 있으면 이태리로 유학을 떠날 수 있겠지......."
그리고 동생들도 외국 유학을 보내야 한다. 돈, 돈. 동대문 갑부 이용문은 그녀의 그 같은 꿈을 실현시켜 주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600원이라는 거금이 이용문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소문은 윤심덕의 인기만큼 멀리 퍼져 나갔다. 윤심덕에게 이용문 외에 흥이다, 우다, 송이다, 하는 애인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였고 비난이 빗발쳤다. 일본 대학 문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박점식이란 젊은이는 윤심덕을 짝사랑한 끝에 정신 이상이 되었다던가......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은 이제 그녀 뒤통수를 따라 다니는 악담 때문에 더 이상 이 땅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윤심덕은 교육계의 비난과 악단의 잡음을 피해 북만주 지방 선교사 배형식 목사의 도움을 받아 하얼빈으로 몸을 숨겼다.
목포 집에 눌러 있던 김우진이 윤심덕의 행방을 찾아 나선 것은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지난 뒤였다. 그러나 윤심덕이 하얼빈을 떠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하얼빈으로 찾아온 김우진은 그만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서울로 내려온 윤심덕의 뒤를 따라 김우진은 급히 서울로 달려왔다. 두 사람의 오랜만의 해후는 그들을 또다시 사랑의 용광로 속으로 밀어 넣고 만다.
두 사람의 초동에 있는 어느 여관에 묵으면서 예술과 사랑의 재기를 꿈꾼다. 그것이 바로 '토월회' 가입이었다.
김우진의 권고로 토월회의 박승희에게 가입 편지를 띄우자 토월회에서는 즉각 그녀에게 주연의 기회를 안겨 주었다.
토월회의 특별 대공연..... 작년 겨울에 지방 순회를 마치고 그 후 휴연 중에 있는 토월회에서는 금 6일 밤부터 황금정 광무대에서 대공연을 할 터이라는데 이번에는 특히 조선 악단에서 자못 그 명성이 높은 성악가 윤심덕 양이 새로이 가입해 가지고 밤마다 포부를 다해 출연할 터이라 하며 금번 예제는 미국 <띄 떠불유 코리스티>과 <노코 나온 모자> 1막과 <밤손님> 1막을 상연할 터이라는데 전보다도 모든 설비를 새로이 하였으며, 배우들의 기술도 더욱 연마되었으므로 매우 재미있으리라더라.
- 1926. 2. 6. <동아일보>
그러나 윤심덕의 토월회 무대는 연극적으로 실패였다. "동도"와 "카르멘"의 여주인공이 되어 노래를 부렀다는 게 그녀의 인기를 얼마만큼 유지시켜 준 셈이었다.
윤심덕은 '토월회'에서 다시 '백조회'로 옮겼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뒤이어 단성사 맞은편 수은동 60번지로 보금자리를 옮겼으나 초라한 두 사람의 살림은 찌들 대로 찌들어 급기야 일본행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평소에는 말이 적고 냉혈한이라 할만큼 이성적이요 감정을 억제하고 표시하지 않던 김우진은 이때부터 죽음을 마련하고 있었다.
일본의 오사카 닛토 레코드 회사에서 윤심덕이 "사의 찬미" 등 10여 곡의 노래를 취입하기로 되었을 때 피아노 반주는 동생 성덕이 맡기로 하였다. 성덕은 언니 노래가 취입되면 곧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다.
사의 찬미 독창: 윤심덕 반주: 유성덕
1.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렴) 눈물로 되 이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서름
2. 우는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으니
생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갈 위에 춤추는 자로다
........
오사카 오카하루 여곤에 집을 푼 윤심덕과 성덕 자매는 닛토 레코드 회사 다우치와 교섭 끝에 10여 곡의 취입을 끝냈다. 7월의 무더위 속에서 윤심덕 자매는 그 길로 요코하마에 가서 이별을 가졌다.
미국으로 떠나는 동생 성덕은 윤심덕이 1921년 귀국했을 때 이화여전을 나왔고, 뒷날 이전 끌리 클럽의 지휘자로 명성을 떨친 사람이었다.
동생을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윤심덕은 동경에 머물러 있는 김우진 곁으로 달려갔다.
죽음--. 그들의 만남에서 죽음 은 비롯되었고, 사랑의 밀어에서 죽음은 구체화되었다. 그들 두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의 영원함이란 곧 죽음 그 자체였으므로 죽음을 피한 사랑이 영원이란 기대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사랑은 죽음에 이르는 길. 아, 그 길인가.
그 길이란 곧 신파조의 연극 대사만은 아니었다.
아니, 죽음 이전에 그들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사랑의 밀월 여행이었다.
"사의 찬미"등 10여 곡의 레코드 취입료는 말하자면 죽음행 열차와 배표를 사는 요금이 되었다.
"목포 오빠..... 도쿄서 시모노세키까지 해안선을 따라가며 해수욕도 하고 온천도 즐겨요. 이 돈이 바닥날 때까지........"
윤심덕이 속삭이면,
"조선으로 가는 배표는 사야잖아?" 하고 김우진은 부산행 배표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배표! 그건 배표가 아니에요."
"배표가 아니라며?"
"우리가 저세상으로 떠나는 데 필요한 여행비예요."
"여행비......"
그들은 30세의 젊음을 즐기고, 뉘우치고, 방황하면서, 시모노세키에 닿았다.
1926년 9월 3일.
부산으로 떠나는 연락선 도쿠슈마루 선객 명부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올랐다.
전남 목포시 북교동 김수산.
경성부 서대문정 2목정 173번지 윤수선.
배가 떠나는 시각은 11시.
"생각나?..... 서울 수은동 60번지 오전 사진관 뒷방에서 밥을 사먹던 일......."
김우진이 갑판 위에서 어둠 속의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진관 뒷방에서 그들은 윤심덕의 라디오 출연료와 노래 부른 사례비로 겨우 살았다.
8월 4일 새벽 4시. 죽음은 무릎 아래에까지 밀려와 있었다.
목포 갑부의 아들 김우진은 사진관 뒷방을 얻어 가지고 윤심덕이 벌어 온 돈으로 밥을 사먹던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저세상에도 그렇게 초라한 사진관 뒷방이 있을지 몰라. 우리 그런 방을 세 얻어서 한 천 년쯤 살아 보자."
어느새 한 몸이 된 두 남녀는 이 세상의 모든 기억을 밀어내고 있었다.
새롭게 열리는 두 사람만의 세계, 어둠 속에서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로 몸을 날렸다.
"풍덩!" 하고 현해탄 검은 바다가 두 사람을 안아 들였다. 그들이 이 세상에 남긴 돈은 총액 145원이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나이 30세.
두 사람의 정사는 신극사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보다 더 큰 메아리로 1920년 후반을 휩쓸어 갔다.
열녀도 부정녀도 아닌 여자 -을부의 아내
백제의 열녀는 개루왕의 권력에 굴하지 않고 정조를 지킨 도미의 아내로 대표되고, 신라 열녀는 왜국에 건너간 남편 박제상을 기다려 마침내 치술신모가 된 그의 아내로 대표된다. '열'이란 이처럼 지아비를 기다려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정조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어떻게 보면 성을 한껏 즐기면서 열녀로 추앙받는 역설적인 열녀도 더러는 있다.
경상남도 창원군 진동에는 을부와 병부로 불리는 절친한 초부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한데 요 얼마 전에 맞아들인 을부의 아내는 어쩌자고 나무꾼의 아내답지 않게 천하절색이었다.
을부와 병부는 매일같이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르면서 입에 올리느니 그 미모의 아내 이야기였다.
"짜아식, 언제 보아도 네 마누라는 참말로 선녀 같더라."
병부가 침을 튀기면서 꺼내는 말에 을부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시시덕거렸다.
"헤헤. 참말로 내 마누라는 그만이여."
"잠자리 맛도 그만이겠다, 응?"
"말해 무엇하겠는가! 자네 같은 총각은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이. 아 고것이 백옥같이 흰 살결을 비비적거리면서 내 가슴팍을 파고들 때는, 어휴!"
병부가 침을 질질 흘러가며 을부의 바지춤이라도 잡을 듯이 바싹 다가서서 졸라대었으나 그 때마다 지난밤의 녹작지근한 순간순간을 돌이켜보느라 이야기를 더 잇지 못하는 것이었다.
병부는 친구 마누라를 머릿속에 떠올리느라고 나무를 하다 일쑤 손가락을 베기도 하고, 밤이면 밤마다 볼썽사납게 친구 마누라를 붙안고 몽설을 하기가 예사였다.
을부와 함께 산에 오르지 않는 날이면 먼발치에서라도 을부 마누라의 모습을 훔쳐보기 위하여 친구네 집 담장 밖에서 기웃거리기 일쑤였고, 별로 이렇다 할 볼일도 없는데 걸핏하면 무슨 핑계를 대어서 을부네 집에서 살기가 예사였다.
"어이고 그저 저 을부 마누라를 더도 말고 하룻밤만 내 것으로 만들어 보았으면 여한이 없겠다마는......"
병부는 날이 갈수록 을부 마누라를 사모하는 정이 더해 갔다. 이는 진정 큰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눈치를 챌 만큼 병부가 친구의 아내를 흠모하는 정도는 지나쳐서 술이라도 거나하게 취한 날이면 실로 엉뚱한 망상에 빠져 버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그 원수 놈의 을부란 놈만 없어지면 저 마누라를 내 마누라로 만들어 버리고 말 터인데......"
마침내 병부의 마음에 살의가 움트기 시작했다. 며칠 뒤 구체적인 살해 계획이 마련되자 두 사람은 여느 날처럼 산에 올랐다. 미모의 친구 아내를 소유하고 싶은 외줄기 욕망 앞에 몇십 년래의 우정도 윤리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악마로 변한 병부는 아무 생각 없이 나무를 하고 있는 친구 을부의 등 뒤로 다가가 기어이 을부의 목을 베어 죽이고 시체를 벼랑 아래로 굴려 버렸다. 을부가 마지막 죽어 갈 때 그의 입에서는 거품이 비죽비죽 비어져 나왔으나 병부로서는 그까짓게 문제 될 게 없었다.
마을에 돌아온 병부는 을부가 낫질을 잘못하여 몸을 다친 데다가 발밑에 있는 돌을 헛디뎌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고 알렸다.
애초의 각본대로 친구의 장례까지 서둘러 치러 준 다음 병부는 늑대의 탈을 쓰고 을부 마누라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을부 아내는 당장 그 고운 손으로 땔나무며 고된 농사일까지 혼자 해내야 했다.
"아주머니, 땔나무는 내가 해드릴 테니까 낫을 들고 산에 가는 일은 제발 그만두소."
병부는 일부러 호의를 가지고 바짝 접근했다. 무턱대고 그런 유의 호의를 받아들일 을부 아내도 아니었다. 문턱이 닳도록 뻔질나게 출입하는 병부에게 을부 아내는 제동을 걸고 나왔다.
"놓아 두소, 동네에 소문날까 두려우니 저희 집에 자주 드나드는 것 좀 삼가주세요."
"그게 무슨 소리랍디까? 나하고 함께 나무하러 갔다가 변을 당한 친구이니 불쌍하게 된 친구 아내 보살펴 주는 건 내 책임 아니오?"
이렇게 엉큼한 수작으로 맹리같이 접근해 오는 병부가 젊은 과부는 차츰 싫지가 않았다. 싫다기보다 나약한 여자 혼자의 힘으로 농사일을 거두랴, 나무를 하랴, 한 가정 일을 도맡아 보살펴 주는 병부에게 고마움을 갖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이 같은 낌새를 눈치챈 병부는 어느 날 밤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젊은 과부 혼자 거처하는 방으로 능구렁이처럼 스며들었다.
"에그머니..... 누, 누구예....."
"쉿! 나요, 병부."
어느결에 문고리에 안으로 걸어 잠그고 다가오는 병부의 가슴을 젊은 과부는 필사적으로 밀어내었다. 병부는 서두르지 않았다.
이미 마을에는 죽은 을부의 아내가 병부의 호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은 마음속으로 병부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는 소문이 날 대로 나 있는 터다.
"임자도 그런 소문 들은 적 있소?"
병부는 마치 여러 날 만에 아내의 곁으로 돌아온 남편처럼 능청스럽게 옷을 벗으면서 여인에게 접근했다.
"아니, 왜 자꾸 추근추근 기어 붙어요?"
여인은 기가 찬 듯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앉으며 앞가슴을 가렸다.
"어허, 소문에는 우리 두 사람이 그렇고 그렇다고 나 버렸는데 왜 이러시오?"
"난 소문이고 대문이고 들은 적 없어요!"
"아따,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알더라고, 그새 임자 남편 죽은 뒤로 독수공방 지키느라고 적적했지, 뭘 그러시오. 임자도 날 알고 보면 하루 만에 정이 쏘옥 들어 버리고 말걸!"
병부는 오늘 밤에 기어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을 하자면서 친구의 아내를 덥석 안아 버렸다.
"이이가 왜 이러시오! 이이가 왜 이러시오!" 하면서 앞가슴을 가린 채 뒷걸음을 치던 여인은 이내 벽이 가로막아 더 물러서지 못하고 우람한 병부의 가슴에 안기고 말았다.
마을에 소문이야 어떻게 나 있건 실상 이 여인도 이 같은 밤이 오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한 번 사내의 손길이 자기 몸에 닿자 제 쪽에서 몸이 달아 능동적으로 남자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요런 여우 같은.......'
병부는 연방 속으로 '계집이란 알 수 없는 요물이야.'하고 뇌까리면서 친구 마누라를 아주 녹여 없애 버릴 것처럼 점령해 들어갔다.
병부의 남성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여인은 폭풍우 같은 한순간이 지나자 다시금 사내 목을 휘어감고 코맹맹이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날 어쩌자고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소."
"어쩌긴 뭘 어찌. 마누라 삼아 버리고 말 텐데."
"맙소사. 당신 마누라 되는 건 기쁜 일이오만 행여 내 몸 먼저 빼앗아 먹고 마누라 삼았단 얘기는 하지 마소."
"고게 무슨 발뺌이라던가?"
"오늘 밤에 당신이 내 방에 들어와서 재미봤다는 얘기는 쏙 빼고 당신이 정 이 몹쓸 년을 아내로 데려갈 양이면 매파를 놓아 정식으로 청혼을 하라 이런 말이오."
"옳아, 그래야 임자가 정숙한 여자로 손가락질을 안 받는다 그런 말이렸다."
여인은 대꾸 대신 새삼스럽게 부끄러움이 고개를 드는지 사내의 땀에 젖은 가슴에다 얼굴을 묻었다.
이튿날 병부는 서둘러 매파를 놓아 정식 청혼을 하였다.
을부의 아내는 처음에 매파 말에 펄쩍 뛰며 수절할 것을 고집하다 못 이기는 체하고 청혼에 응했다.
자기의 계획대로 미모의 친구 마누라를 아내로 맞아들인 병부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얻은 것만큼이나 감격해하였다.
"임자가 내 아내가 되다니. 임자가 내 아내가 되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꿈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 진정 생시의 일이었다.
"여보 마누라, 방으로 들어가세."
대낮에도 병부는 아내를 끼고 있을 양으로 부엌에서 일하는 아내를 불러들였다.
"마누라, 우리 방아놀이 할까?"
"방아놀이라니오?"
"쿵덕쿵! 쿵덕쿵! 그 방아놀이 말일세."
아내는 그제야 병부의 말 뜻을 알아차리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아이,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산에 가서 나무나 한 짐 해 오시지 않구 대낮에 무슨 방아놀이예요?"
"아따, 평생 나무만 해 나르다 세월 다 보내란 말인가? 난 뭐니뭐니해도 그 방아놀이가 제일 좋더구먼."
그러면서 넌지시 아내 손을 끌어당겨 모로 넘어지는 것이었다.
일을 마치고 나자 병부는,
"임자, 내가 남편으로 보이는가, 남편의 친구로 보이는가?" 하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새삼스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내는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새 남편을 돌아다 보았다.
"글쎄,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요. 내가 남편으로 보여, 남편의 친구로 보여?"
"당신이야 제 남편 아니에요? 남편의 친구라니, 제가 아직도 죽은 전남편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아세요?"
"옳지, 말 잘 꺼냈다. 임자는 그전 남편 을부 생각을 아주 잊어버리고 사는가?"
"잊어버리다마다요. 지금 즐겁게 해주는 이도 당신밖에 더 있어요?"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건 아내는 전남편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것 같아 병부는 새로운 힘이 솟았다.
'그러면 그렇지. 주야로 임자를 즐겁게 해주는데 만에 하나라도 죽은 전남편을 생각해서야 되나.'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병부는 아내 곁을 떠나 지게를 지고 산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병부와 살을 섞고 살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여인은 첫아들을 낳는다. 병부는 이제 이 여자가 자기 대를 이을 자식까지 낳았으니 전남편은 까맣게 잊어버렸겠거니 하고 안심한다.
그다음 해 아내는 또다시 딸을 낳는다. 연년생으로 낳은 자식이 아들 셋에 딸 둘, 5남매를 낳게 된다.
5남매의 부모가 된 병부와 그의 아내는 그 사이 살림이 늘 만큼 늘어 다복한 가정으로 이웃 간에 부러움을 사게 된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병부는 마루에서 새끼를 꼬고 앉았다가 문득 처마에서 뜰 아래로 떨어지는 빗물에 눈이 갔다. 얼마 동안을 낙숫물만 바라보고 있던 병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이 나와 버렸다.
"허허헛."
윗방 쪽마루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잇던 아내가 새끼를 꼬다 말고 웃는 남편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허허허, 허허헛."
아내는 무엇이 짚이는지 재빨리 바느질 손을 놓고 물었다.
"여보, 무슨 생각이 나서 그렇게 웃으시우?"
"엉? 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네."
남편은 서둘러 생각을 거둬들이고 다시 새끼를 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내는 사이를 두지 않고 다그쳤다.
"당신이 낙숫물을 보고 두 번씩이나 웃는 데에는 따로 까닭이 있어서 웃으셨을 거예요."
"아, 아니래두. 그저 빗물이 떨어져서 빙그르르 돌아나가고, 돌아나가고 하는 꼴이 우스워서......"
병부는 딴전을 부렸으나 아내는 그냥 넘어가려 들지 않았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당신이 낙숫물을 보고 웃으시는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어서 그러셨을 거예요."
".........."
"여보, 5남매까지 낳고 사는 우리 부부 사인데 말 못 할 일이 뭐가 있나요? 말씀해 보세요, 여보."
딴엔 그랬다. 젊고 어여쁜 아내가 자기에게 온 뒤 자그만치 5남매를 낳고 살지 않는가? 그 하고많은 나날을 살아오는 동안 정이 붙을 대로 붙고 들 대로 들어 버린 아내에게 무슨 이야기인들 못하랴 싶었다.
"여보......."
"그래 알았소. 바로 임자 전남편 을부 얘긴데......."
"네, 제 전남편이 혹 지난밤 꿈에 나타나기라도 했답니까?"
아내는 짐짓 짙은 호기심을 누르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꿈에 나타난 건 아니고 실은, 임자 전남편 을부 녀석 말이야."
"갑자기 왜 전남편 얘기는 꺼내세요. 다 잊은 사람을....."
"아니야. 재미가 있어서 그래."
"재미라니오."
아내의 눈이 남편 몰래 빛난다.
남편 병부는 다시 한번 허허허 웃고 나서,
"그 녀석 내가 죽여 버렸거든." 하고 대수롭지 않게 뇌까렸다.
"어머, 그랬어여? 어떻게요?"
아내는 애써 본심을 누르고 옛이야기를 재촉하듯 되물었다.
"그거 뭐, 어렵지 않더구먼. 나무하는 녀석의 등 뒤로 다가가서 목을 쳐 죽이고는 벼랑 아래로 굴려 버렸으니까."
"..........."
"한데 녀석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입에 거품을 물고 죽었거든. 지금 저 뜰 아래 물거품을 보니까 그 때 녀석을 죽이던 일이 생각나서 웃었다네. 허허헛."
"그래요? 낙숫물 떨어질 때 생기는 물거품을 보고 제 전남편 죽이던 일이 생각나셨다구요?"
"응, 허허헛."
"에유, 그까짓 일이 뭐가 그리도 우스우세요?"
아내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고 손에서 바느질감을 놓았다. 그녀는 이웃에라도 가듯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비는 그치지 않고 내렸다. 아내는 서둘러 관아로 달렸다.
"사또! 살인자를 벌주소서. 사또마님!"
아내는 사또 앞에서 피눈물을 쏟아 놓았다.
"살인자라니, 누가?"
"지금 제 남편이 전날의 제 남편을 죽였소이다. 그자를 벌주소서."
사또를 비롯한 육방 관속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의아해하였다.
"지금 남편이 전날의 남편을 죽이다니?"
"예, 이는 사실이옵니다. 살인자가 눈치를 채고 도망가기 전에 어서 제 남편을 잡아 가두소서."
아내의 제보에 따라 그 남편은 관가로 잡혀갔다. 심문 결과 병부가 을부를 죽였다는 실토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 아내의 남편 병부는 사형을 선고받고 죽어 갔다. 말하자면 전 남편은 현재의 남편에게 죽어 갔고, 현재 남편은 아내의 고발로 죽어 간 셈이었다.
아내는 남편 병부가 사형 언도를 받고 죽었다는 소식에 접하자 미리 마련해 둔 극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는 죽어 갈 때 남달리 빼어난 자기의 자색을 미워했다.
'내 아름다움이 두 남편을 죽게 하였으니 어찌 혼자 살아남기를 바라겠는가.'
이것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세상에서는 이 여인을 두고 열녀라 말하기도 하고, 부정녀라 말하기도 했다. 전 남편의 한을 풀어 준 점은 열녀였으나, 5남매까지 낳고 어차피 정을 쏟고 살을 섞으며 살아온 지금의 남편 병부를 살인죄로 죽게 하였으니 지어미로서 그보다 더한 불렬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여인의 정은 전남편 을부에게 기울어 있었던 게 사실이었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던 것도 실은 이 자가 전 남편을 죽였으리란 심증을 굳힌 나머지 그 확증을 잡기 위해 재혼한 셈이었으니, '열. 불렬'의 열녀라기보다 끈질긴 '무서운 열녀'임에 틀림이 없다.
어린 기녀의 피맺힌 순절 -전계심
강원도 춘천의 봉의산 기슭에는 "춘기 계심 순절지분"이라 쓰인 낡은 돌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그 비석의 비명에 씌어 있는 "격기전성 계심명 소내모천 적교방......"이라는 내용과 그 고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애원 서린 사연을 더듬어 알 수가 있다.
계심은 조선 정조 때 여인으로 본성은 전씨요 춘천이 고향이다. 천성이 청결하고 유정한 그녀는 원래 미천한 가정에 태어난 탓으로 일찍이 기적에다 그 이름을 두게 되었다.
나이 어린 기녀 계심을 그러나 다른 '요사스럽고 앙큼한' 기녀나 '닳고 닳은' 기녀들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녀는 거의 매일 밤마다, "계심아, 네 나이 그렁저렁 열여섯이라, 혼자 베게나 끌어안고 잠자리를 어지럽히기에는 좀 딱한 나이구나. 어떠냐, 오늘 밤 내가 네 베게 노릇 좀 해주랴?"하고 추근거리는 사내를 대하게 마련이었으나, 웬걸 계심은 그럴 때마다 곱게 고개를 젓고는 했다.
"소녀는 낙적이 될 때까지 손님들 베개 시중은 들지 않을 거예요."
"베개 시중 아니면 곧바로 잠자리 시중은 어떠냐?"
"어머니, 손님께서 약주 한잔 잡숫더니 그 의젓하신 두상이 이리의 털로 곤두서시네요!"
"하하핫, 이 사람 계심이한테 또 한 번 당했수면, 하하핫."
좌중은 그렇게 매양 웃음으로 끝이 나게 마련이었지만, 그 숱한 유혹을 물리쳐 가며 고된 기방살이를 하는 동안 계심의 마음과 육신은 상할 대로 상한 채였다.
이러구러 나이 열일곱이 되자 계심은 낙적이 되었다. 다른 기녀들처럼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았던 계심이 항상 정절과 부덕을 고루 갖춘 사대부 집안의 아녀자처럼 칭송을 받아 오자, 실상 눈독을 들여 오는 관속들도 적지 않았다.
수년간의 기방살이를 마치고 다시금 허술한 자기 집으로 돌아온 첫날 밤에 계심은 뜻밖의 손님을 맞게 되었다.
"얘야! 손님 왔다, 나와 보렴."
계심의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어머니는 벌써부터 돈이 손안에 쥐어지기라도 한 듯 입이 벙그러졌다.
"손님이라뇨. 어머니, 여긴 기방이 아니에요."
"기방이 아니란 건 어미도 알고 있다. 허지만 이 고을 부사께서 찾아오셨는데 들이지 않을 수 있느냐?"
"이 고을 사또마님께서 행차하셨다구요?"
계심은 그제서야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김 부사를 방안으로 들였다.
눈치 빠른 어머니의 솜씨로 술상이 마련되어 오자, 계심은 부사 옆에 단정히 앉아 술병을 기울였다.
"사또마님께서 누추한 집에까지 납시다니 꿈만 같습니다."
김 부사는 아직도 보송보송한, 이마의 솜털이 앳되어 보이기만 하는 계심의 얼굴을 그린 듯이 바라보다 따라 놓은 술잔부터 입으로 가져가 단숨에 마셔 버린다. 김 부사는 남의 이목이 두려워서 일부러 변복까지 하고 찌그러진 계심의 사립문을 밀고 들어섰으나 기방에서 진작부터 김부사에게 가무를 들려준 적이 있는 계심은 갑작스런 사또의 내방이 그저 황송하기만 했다.
"계심아."
"네, 사또마님."
술 몇 잔이 들어가자 김 부사는 계심의 그 야드르르한 손목을 덥석 잡았다.
"계심아! 너 나하고 살지 않으련?"
별로 말주변이 없던 김 부사는 까짓것 말주변이야 유창하건 어눌하건 간에 본심부터 털어놓았다.
"네? 살다뇨? 사또마님."
"살림을 차려 줄 터이니 나하고 부부지정을 누리고 살아 보자, 그런 말이다."
"사또마님께서 미천한 이 몸을......"
갑작스런 구애를 받고 계심은 가슴이 뛰었다. 자기에게 혹하여 농이든 진심이든 구애를 해 오는 남자들은 수없이 많았으나 이렇듯 한 고을의 가장 높은 어른이 직접 자기를 요구해 온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어찌하겠느냐? 나하고 평생의 인연을 맺어 보겠느냐?"
"평생의 인연이라구요......?"
"내 비록 한성의 본가가 있는 몸이기는 하나 한 입으로 두 소리는 하기 싫은 사람이다. 진작부터 너에게 먼발치로 정을 기울여 온 나이니 이 진심을 뿌리치지 말아라."
"......"
계심은 손에 잡았던 술병을 놓고 김 부사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송구스럽고 황감한 마음이 그만 그녀를 울렸다. 자신의 무릎에 그 고운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먹이는 계심의 몸에 손을 얹고는, 오랜만에 소유하고 싶어 하던 보석을 손에 쥐고 매만지듯 김 부사는 정겨웁게 쓸어주었다.
마침내 계심의 방에 불이 꺼지고 밤은 깊어갔다.
김 부사에게 몸을 바친 계심은 며칠 뒤 부사가 마련해 준 조그마한 집에다 살림을 차리고 살면서 김 부사를 모셨다. 계심은 이를테면 김부사의 외처였다. 그 당시에는 관리들이 본가를 지키는 경처와 부임지에서 시중을 들게 마련인 외처를 두어 객수를 달래어 오던 일이 잦아서 낙적이 된 계심을 김 부사가 데려다 살림을 차려 준 일이 무엇 하나 괴이쩍다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 부사란 사람은 원래 위인이 시쳇말로 청렴결백했던 모양이어서 기대를 잔뜩 걸었던 계심의 부모를 적이 실망시켜 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사또의 사랑을 받게 된 딸 덕으로 늘그막에 호강 한 번 해보나 보다 하고 잔뜩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부모들은 얼마 못 가 기대가 허물어지자 딴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영감, 계심이를 언제까지 부사 수청이나 들게 내버려둘 작정이슈?"
계심의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번번이 선수를 썼다. 어미는 외처로 내준 딸이 그저 수청이나 들고 있는 꼴이거니 하고 못마땅해하였다.
"내버려두지 않음 어떡하나. 한 번 정을 준 사람인데."
"어휴, 딱도 해라. 계심이 나이 이제 겨우 열일곱인데 앞길이 구만리 같은 애를 주변머리도 쥐뿔도 없는 부사한테 맡겨 두었다가 비렁 거지를 만들 작정이슈? 난 그 꼴 두눈 멀겋게 뜨고 못 봐요!"
"못 보면 그만이지 뭐."
"뭐에요! 아이구 속 타는 소리 작작 씨부렁대세요......"
이래저래 비위가 뒤틀려 버린 계심 어미, 이튿날부터 부리나케 사립문 밖을 드나들더니 기어이 일을 저질러 놓고야 말았다.
"영감, 안 되겠소. 사또인지 비렁 거지인지 그 사람한테 우리 계심일 맡겨 놓았다간 우리 신세까지 거지가 되고 말겠소."
"허지만 이제 와서 별수가 있는 것도 아니잖나?"
"어휴, 속 터지는 소리 작작 하슈. 이제라도 한성 교방에다 계심일 넘겨 주기만 하면 논마지기 값이나 톡톡히 준다는구랴."
"어느 쓸개 빠진 자가 몸 안에 아이까지 밴 애를 기적에 올리려구 그럴까?"
"아따 우리 애 몸 안에 사또 씨가 들었는지 아닌 말로 여우 새끼가 들었는지 배를 가르고 들여다보기 전에는 아는 재주 있답디까? 아무 소리 말고 내 말대로 계심일 한성 교방으로 내놓읍시다."
계심의 부모는 한성의 교방에 입적시키는 대가로 땅 몇 마지기 값을 준다는 바람에 딸을 덜컥 그리고 팔아먹고 만 것이다.
부모가 한 짓이라 원망도, 하소연도 할 수 없이 된 계심은 어미 말마따나 주변머리 없이 청렴결백하기만 한 김 부사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계심은 정이 들 대로 들어 버린 김 부사와 이별한다는 것이 그야말로 죽기보다 더 싫었다.
'교방에 몸을 던져 다시 뭇사내의 손길에 놀아나야 하다니, 화류계 여자로 어쩌면 평생을 수렁 속에서 살아가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당장 김 부사 앞에서 목숨을 끊어 버리고도 싶었으나 부모가 한성 교방에서 미리 받아 쓴 돈을 갚기 전에는 이 마당에 와서 무턱대고 거역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계심의 몸 안에는 사랑하는 낭군 김 부사의 씨가 꿈틀거리고 있는 처지였다.
그날 밤 마지막으로 김 부사 품에 안겨 온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운 계심은 이튿날 퉁퉁 부은 얼굴로 한성길에 올랐다.
안타깝고 쓰라린 이별이었으나 차마 그 같은 심정을 겉으로 내보일 수도 없었던 김 부사는 그저 고을 백성들이 눈에 띄지 않는 자기 처소 담장 안에서 멀리 사라져 가는 계심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돌아서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김 부사가 계심에게 베풀 수 있었던 마지막 인정이었다.
계심은 몇 달 만에 다시 기적에 올라 가무와 웃음소리에 몸을 섞어 술을 따르고 억지 교태를 부려 손님들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몸은 항상 청상청루 천한 자리에 섞여 있어도 그녀의 청결하고 유정한 마음은 향리에서 손님을 대하듯 사대부 집안의 아녀자처럼 단정하게 갖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에그머니나...... 이게 뭐야?"
어느 날 기방에서 옷을 갈아입다 같은 방을 쓰던 기녀가 방바닥에 떨어진 계심의 장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머, 이건 장도칼 아니냐?"
"응, 장도칼하고 약. 이리 줘, 언니."
"에게게, 이런 걸 가슴에 품고 다니는 걸 보니까 너 아주 예사 계집애가 아니로구나. 여차하면 이 칼로 사내놈을 찌르고 약을 마시고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말을 건넨 기녀는 그만 손가락으로 제 입을 가리고 놀랐다.
실상 계심은 제 몸에 어떤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그 약과 장도칼을 써먹을 작정이었다. 이 같은 계심의 단심은 곧 입에서 입으로 건너가 기방 기녀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계심은 자기의 몸을 늘상 경계하고 도사려 오는 만큼 짓궂은 사내들의 유혹에 시달려야 했고, 그때마다 지극한 사랑과 고매한 인품으로 그녀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던 김 부사와의 기나긴 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이마에 솜털이 보송보송 나 있는 앳된 계심을, 게다가 마음씨마저 남달리 곱기로 소문난 계심을 한성의 한량이나 불량배들이 가만히 놓아둘 턱이 없었다.
그들은 계심의 주위를 에워쌌다.
"옛다 돈. 나하고 하룻밤 정염이나 불태워 볼거나?"
숫제 동전 꾸러미를 쩔래쩔래 흔들어 보이기부터 하는 부류에서 시작하여 쇠도둑놈 같은 구릿빛 몸으로 접근해 오는 축, 아니면 골샌님처럼 의젓한 풍모를 앞세우고 슬며시 전담 문서를 치마폭에 싸주는 애송이에 이르기까지 계심을 소유해 보려는 사내들은 꼬리를 이었다.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니까 마침내 불량한 사내 몇 놈은 힘으로 어떻게 해볼 양으로 야심한 밤에 그녀의 방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들었다.
"버릇없고 콧대 높은 년! 얘들아, 저년의 사지를 강아지 새끼 네 다리 비끄러매듯 꼼짝 못 하게 비끄러쥐고 옷을 벗겨라!"
"예이!"
불량배들은 계심이 어찌할 사이도 없이 두 팔과 두 다리를 맡아 쥐고 옷을 벗겼다.
" 이놈들! 이 손, 이 다리 놓아라! 내 몸에 손대지 마라! 난 홀몸이 아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이 없었다. 두목인 듯한 자는 한 손으로 계심의 머리채를 잡고 한 손으로는 허옇게 드러난 유방을 주물러 대며 야욕을 채웠다.
두목이 물러나자 불량배들이 차례로 덤벼들었다. 계심은 이제 항거할 힘도 없이 몽롱한 의식 속에서 정조를 강탈당하고야 말았다.
야욕을 채우고 불량배들이 물러가자 계심은 흐트러진 머리를 추스르며 물에 빠진 귀신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일로 계심은 몸 안에 든 아기가 떨어지고, 김 부사에게 커다란 죄를 짓고 말았다는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윤간당했다는 이 부끄러운 마음과 씻을 길 없는 수치심, 게다가 김 부사와의 사이에 가진 뱃속의 아기까지 낙태되자 그녀는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죽어 버리자. 죽어서 이 씻을 길 없는 부끄러움을 씻어내자.'
계심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첫정을 주었던 춘천의 김 부사에게 유서를 써 놓고 그녀는 가지고 있던 손 장도를 꺼내었다.
'불량배들한테 잡혔던 머리칼, 그리고 이 젖가슴.'
그녀는 먼저 머리를 잘라내고 뒤이어 젖가슴을 차례로 도려내었다. 그리고 그녀는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 뒤 김 부사가 계심을 만난 것은 어느 날 밤의 꿈속이었다.
가뜩이나 계심이 떠난 뒤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던 김 부사는 흐트러진 산발의 미인이 꿈속에 나타나자 기겁을 하고 놀랐다.
'아! 너, 너는......'
'계심이옵니다, 사또마님.'
자세히 보니 계심은 벌거벗은 몸이었고 젖가슴이 칼로 도려져서 시뻘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계심아, 네 모습이 그게 무엇이냐? 어쩌다 머리가 잘리고 젖가슴이......'
'으흐으으, 사또마님. 폐일언하고 소첩을 고향으로 데려다주시어요. 네? 사또마님.'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애소하는 계심의 모습은 처절하다 못해 무슨 악귀와 같았다.
꿈에서 깨어난 김 부사는 그 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날이 밝기가 바쁘게 서둘러 한성으로 달려갔다.
계심의 머리가 잘리고 젖가슴이 도려져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 김 부사는 유서에 씌어 있는 내용대로 불량배들을 즉시 관가에 고발하고 계심의 시신을 거두어 춘천으로 운구, 봉의산 언덕에 묻어 주었다. 계심의 순절담은 곧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누구보다도 먼저 춘천 순찰사 이 사또의 심금을 울렸다.
"허, 계심의 절개가 가상쿠나, 내 이를 혼자 듣고만 있을 수 없으니 중앙에 알려 정문을 세우도록 하리라."
순찰사는 속으로 계심과 같은 어리고 절개 굳은 기녀를 외처로 차지하고 살아 보지 못한 것이 섭섭한 노릇이었으나 그 같은 얄팍한 생각을 접어두고 마음먹은 대로 중앙에 알려 계심의 집에 정문을 해 세웠다.
순찰사가 그런 식으로 계심의 영혼을 위로해 주자 이번에는 그 고을 군수가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군수는 고을 선비 몇몇과 회동하여 봉의산 언덕에 있는 계심의 무덤에다 비석을 해 세우라고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정조 21년 5월에 "춘기 계심 순절지분"이란 돌비석이 계심의 무덤 앞에 세워지게 되었다.
박종정이 비명을 짓고 유상륜이 글씨를 쓴 자그마한 이 기념비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어지러운 성 모럴에 커다란 교훈을 던져 주게 된 것이다.
아니, 실상 계심의 높은 정절담은 현대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게 사실이다.
언젠가 춘천의 제1회 개나리 문화제 때 계심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서 춘천 시내 접객 업소 여인들이 등불을 켜 들고 시가행진을 벌였던 일이 있었으니까 분명코 계심은 죽어서 영원히 살게 된 여인임에 틀림이 없다.
명기의 사랑법과 일본 유학생의 낭만 - 강명화
1923년 6월 15일자 <동아일보> 3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었다.
강명화의 자살.
내막은 매우 복잡.
가명을 명화라 하야 일시 경성 화류계에서 이름이 있다 하는 평양 태생의 강도천은 경북 재산가 장길상의 아들 장병천의 애첩이 되야 동경으로, 경성으로 그 남편과 같이 왕래하더니 최근 온양 온천에 그 남편과 함께 가서 유숙하던 중 12일 온천 여관에서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자살할 결심으로 독약을 먹었으므로 즉시 의사의 치료를 받았으나 회생치 못하고 인하야 절명하얐는데, 시체는 작일 경성으로 운반하야 매장할 터이며 자살한 원인은 장씨의 사정과 기타 복잡한 내막이 있다더라.
신문에 그와 같은 기사가 실리던 날 오전 10시, 강명화는 그녀의 유언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신문에는 25세로 되어 있었으나 한국 나이로 그녀는 23세였다. 그야말로 꽃다운 나이에 강명호는 스스로 목숨을 버린 셈이었다.
1901년(고종 38년) 6월 12일 평양 시외에서 태어난 강명화는 금점에 미친 아버지 강기독의 가산 탕진으로 소녀 시절을 가난과 불운 속에서 지내야 했다. 명화란 그녀의 기명이고 호적상 이름은 도천이었다.
아버지는 금점도 금점이려니와 노름판이다, 색주가다, 온갖 못된 자리는 다 찾아다니는 떠돌이요, 건달이었다.
어머니 윤씨 부인이 임신했을 때 아버지는 집안에 잠시 다녀간 일이 있었는데,
"아들을 낳거든 도천이라구 지어!" 하는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또다시 사라져 버렸다.
아들이 아닌 딸을 낳고도 윤씨 부인은 이름을 도천이라 지었다.
한데 두어 달에 한 차례씩 집을 다녀가는 아버지도 도천이의 성장을 예사로 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고것 참 에미는 잘 생기지도 안았는데 도천이는 이쁘단 말야!"
그런 말이 아니면,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던데 우리 집 밑천이 되겠는거!" 하고 귀여워하는 눈치였다.
어머니 윤씨 부인은 남편의 그 같은 부성애가 싫지 않았다.
"여보, 우리 도천이를 훌륭하게 키워 봅시다."
"암! 평양으로 데리고 나가서 키워 보자고."
남편은 어린 도천이를 데리고 아내 먼저 평양으로 나갔다.
세간을 처분하고 뒤따라 윤씨 부인도 평양으로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도천이 바로 밑에 남동생 도선이가 있었으나, 윤씨 부인은 맏딸 도천에게 정이 더 가는 터였다.
얼마 뒤 윤씨 부인은 남편과 도천이 먼저 나온 평양집으로 뒤따라 왔다.
그러나 응당 평양집에 있어야 할 남편은 그 집에 있질 않았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에게 적어 준 평양집 주소는 그들 가족이 살 집이 아니라 기생집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도천이를 데리고 있는 산호주라는 기생에게 물어보았으나, 남편의 소식은 모른다고 했다.
"우리 도천이를 내어주오!"
윤씨 부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다.
"무슨 소릴! 제 아비가 몸값 받아간 아이를 내어주다니 당치도 않소!"
"뭐예요? 그럼 우리 도천이가 동기가 되었단 말이오?"
"우리 도천이, 우리 도천이 하지 마오! 이젠 내 수양딸이니까!"
기생 산호주는 매몰차게 따돌리고 대문을 안으로 닫아걸었다.
양모 산호주는 도천이의 이름을 갈아 버렸다. '확실이'. 무엇이 그리고 확실하다는 뜻인가.
확실히 동기는 동기란 뜻인가.
도천이란 아명도 별스러웠지만 확실이란 동기 이름도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술 따르고 노래 부르는 나날이 어린 확실이의 세월이었고 보람이어야 했다. 장구치고, 춤추고, 노래 부르고....... 배우겠다는 부푼 희망이 한 가닥 꿈으로 멀리 사라져 버린 지도 오래였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조차 저주스러운 아버지 강기덕은 이따금 산호주 집에 나타나 기생충처럼 용돈을 뜯어가는 눈치였다.
세월이 흘렀다. 강확실은 한 사람의 여인을 성숙해 갔다.
아름다운 꽃에게는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법인가.
해가 바뀔수록 용모와 마음이 아름다워져 가는 확실이 주변에 평양의 명문 자제들이 벌과 나비처럼 모여들었다.
확실이는 그녀의 꽃을 꺾으려 드는 호색가들에게 다져진 결심이 하나 있었고, 그 결심을 언제나 서슴없이 펼쳐 보이고는 했다.
"난 정절을 굳게 지켜 뒷날 멋진 남자와 혼인할 테다."
말하자면 그것이 확실이의 바람이었고 꿈이었으며, 현실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확실이 아버지에게 돈을 주고 그녀를 사들인 기생 산호주는 생각이 달랐다.
"저것을 빨리 머리 얹어 주고 돈을 두둑하게 긁어 봐야 할 텥데........"
산호주의 생각은 정말이지 '엿장수 마음대로' 확실이를 어디엔가 팔아 보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웬걸 처녀 강확실의 지조는 그 아무도 꺾을 수도, 이용할 수도 없었다.
동기 생활 몇 년에 그녀는 세상을 알기 시작하였고, 돈을 알게 되었다.
기왕 이 길에 들어섰으니 불쌍한 어머니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호강시켜야겠다는 결심도 섰다.
돈을 벌기에는 평양이 너무 좁다고 판단되어 그녀는 서울(당시 경성) 쪽으로 눈을 돌렸다.
동기 강확실의 나이 열아홉 살로 접어든 봄, 그녀는 어머니 윤씨와 남동생 도선을 데리고 서울로 오고 말았다.
양모 산호주가 확실이를 놓지 않으려고 온갖 앙탈을 다 부리고 나왔으나 이제는 성장할 대로 성장한 그녀의 계획을 막을 수도 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울에 오자마자 그녀는 평양 시절의 동기 때를 씻어 버리고 이름을 갈아 새 출발을 하기로 했다. 밝을 명, 꽃 화 '밝은 꽃'이 그녀의 제2의 이름이었다.
강명화란 이름으로 기적에 오른 도천은 이제 한 사람의 직업여성으로 서울 사회에 몸을 던졌다. 그녀의 몸에는 예쁘고 깜찍한 명함도 들어 있었다. 손님이 그녀의 이름을 물어올 땐 허리춤에 손을 넣어 그 작은 명함을 꺼내 주게끔 되었다. 명함에는 이렇게 박혀 있었다.
조선 권번 강명화
경성부 다옥정 165, 전화. 강화문 2170
동경 유학생 장병천이 강명화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송별연 자리에서였다.
장병천은 영남 갑부의 외아들이요, 미남 청년에다 그 당시 서울에서 몇 명 안되는 동경 유학생 가운데 대학 배지를 달고 다니는 젊은이. 전문학교가 태반이던 시대에 그의 대학 목표는 그만큼 인기가 있었고, 1920년에 설립을 본 경일 은행은 그의 아버지 장길상이 주동이 되었다는 점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부잣집 자식이었나 짐작이 가는 일이다.
장병천은 여름 방학을 끝내고 도경으로 들어가기 전 명월관에서 친구들과 송별연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강명화를 처음 대하게 된 것이었다.
십여 명의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로 한 명월관에서 강명화의 인사를 받았을 때 장병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물론 장안의 인기 있는 명기 강명화란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나, 저렇게 아름답고 귀여울 줄이야.....'
짓궂은 친구들은 장병천을 강명화 곁에 앉도록 했다. 술이 거나해졌다. 한 손에는 술잔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명화의 손을 꼭 잡고 병천은 말했다.
"오늘 밤차로 나는 부산을 거쳐 동경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어쩐지 떠나고 싶지 않아......"
"그래두 떠나셔야죠."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음 겨울 방학 때 오시면 만날 수 있잖아요."
"겨울 방학까진 너무 길어, 그 안에 다시 만날 순 없을까......."
명화의 손을 쥔 병천의 손은 술기운 탓만도 아닌 듯 열기가 있었다.
"나 오늘 밤에 떠나고 싶지 않네."
"또 그 말씀. 술이 깨시면 곧 그 말씀은 잊어 버리실 거예요."
"무슨 소릴. 내가 취한 줄 알어?"
병천은 손에 든 술잔을 비워 내고 또다시 술을 받았다.
"약주가 과하신 것 같아요, 선생님."
"난 선생이 아니구 학생이야."
"아이, 대학생이니까 제겐 선생님 격이죠."
"그보다 내가 동경에 간다면 명환 나한테 편지하겠어?"
"그럼요, 선생님 공부에 방해가 안 된다면야."
"아니, 내가 먼저 편지할 테니깐 주소 하나 적어 주게."
명화는 명함을 꺼내어 병천의 손에 쥐어주었다.
"어? 기차 출발 시간이 임박했네, 일어서자고."
병천의 친구가 시계를 보더니 먼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강명화와 장병천은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져야 했다.
명화는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꾸만 병천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부잣집 외아들이라는 점에 내가 끌린 것일까?'
그게 아니었다. 몇 안 되는 동경의 대학생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쾌남아에 대학 사각모를 쓴 병천의 모습은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고 뻔질나게 찾아오는 한량들 속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머리를 얹고 들어앉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정말로 그이는 도쿄에 가서 나에게 편지를 할까. 편지가 오면 답장을 해주는 게 도릴까. 갑부의 외아들이 한 차례 술을 마시며 귀엣말을 한 걸 가지고 난 철썩같이 믿고 기다려야 하는 걸까.'
밤이 깊어갔다.
깊어가는 밤 속에서 그녀는 눈 뜬 정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이게 사랑이라는 것일까. 사랑은 이렇게 열리고 사랑하는 마음은 이렇게 성숙해 가는 것일까. 정병천을 머리 속에 접어두고 이것저것 곰곰이 생각하느라 그녀의 심신은 지쳐 있었다.
그때 대문 밖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인력거 닿는 소리였다.
"아씨, 손님이 찾는데요."
방문 밖에서 부리는 아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명화는 짜증이 났다.
"아씨, 손님이 보자는데요!"
"없다고 그래!"
취객이 일쑤 밤중에도 찾아오고는 하여 그때마다 명화는 없다는 말로 따돌리기 예사였다.
"만나 뵙구 가시더라도 가시겠다는데요, 아씨."
대문께로 나갔다 들어온 아이가 권하는 소리였다.
명화는 신경질적으로 신발을 끌고 대문께로 나갔다.
"대체 누구야........?"
"나, 정병천이오!"
"에엣? 아니......"
동경으로 떠난 장병천이 자기 앞에 서 있다니,
"어찌된 일이세요?"
"명화가 보고 싶어서..... 명화를 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
"믿어지지 않아요. 꿈만 같아요."
"꿈이 아닐세, 명화. 기차를 타고 가다 용산역에서 내려 버렸소. 명월관과 조선 권번에 전화를 걸어도 명화가 없다고 그러더군. 인력거꾼한테 물어서 가까스로 이 집을 찾았지."
"들어오세요......."
그날 밤부터 장병천은 강명화의 집에서 묵었다기보다, 강명화의 사랑 속에 파묻힌 것이다. 동경의 대학은 어떻게 하고 이렇게 명화의 집에 눌러앉아 있는 걸까.
"대학에는 1년간 휴학계를 내고 집에는 무사히 동경에 닿아서 공부하는 것처럼 편지를 내고...."
"그렇게 하셔두 되나요?"
"명화 곁에 있으려면 그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지."
정병천의 본가에서는 매월 동경으로 학비를 보냈는데 그 학비는 도로 명화의 집으로 우송되게끔 각본을 짜 놓고 살림은 시작되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권번에는 나가지 않고 장병천과 사랑의 밀어만을 속삭이는 명화는 비로소 생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오래갈 리 없었다. 누구보다도 어머니 윤씨 부인이 딸의 생활을 간섭하고 나섰다. 살림을 차릴 게 아니라 부잣집 외아들이니 돈을 뜯어내라는 것이었다. 다음엔 장병천의 본가에서 그만 알아 버렸다. 생활비와 학비가 끊겼고, 무엇보다 살길이 막막했다. 두 사람은 동경을 뛰었다. 이목이 없는 낯선 고장에 가서 막벌이라도 하면서 그들의 사랑을 이어 보자는 계산에서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부잣집 외아들이 막벌이에 수월할 리 없었고, 게다가 동료 유학생들의 질시가 몸에 따가웠다.
"이 새끼, 기생첩 데리구 살면서 공부를 한다구? 유학생 망신시키지 마 새끼야!"
동료 유학생들의 위협은 매질을 가하는 것보다도 더 아픈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도로 발길을 되돌린 그들은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장병천이 거부의 외아들이란 점이었다. 장의 집에서는 아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다 못해 한옥 한 채를 사주었다. 종로 6가 32번지. 그러나 그들의 보금자리는 또다시 깨어져 버렸다. 이번에는 명화 아버지 강기덕이 돈을 요구하기도 하고,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두 사람의 사랑과는 관계없이 명화 아버지와 병천의 본가는 완전히 남이 되어 버리고, 그들의 사랑도 그 이상 지속하기가 어려운 상태로 악화되어 갔다. 명화는 결심했다.
"선생님, 나 옥양목 치마저고리 한 벌 하고 백구두 한 컬레 사주세요."
"어디, 떠나게?"
"아뇨. 선생님하고 온천에 다녀오구 싶어요."
"........"
그들은 나란히 온양으로 떠났다.
1923년 6월 10일, 음력으로 4월 26일이 되는 이날은 명화의 생일이었다.
온천 여관에 투숙한 명화와 병천은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 길고 깊은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밤비가 요란한 여관에서 명화는 미리 준비해 간 약을 먹었다. 6월 12일의 일이었다.
얼마 뒤 장병천도 명화의 뒤를 따랐다. 유학생들과 사회와 그의 본가의 질시를 떠나 병천은 죽어서 명화 곁에 나란히 누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