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철학사 3
제3부 교파적 철학
제18장 한정불이론적 베단타철학
1. 한정불이론의 종교적 배경
샹카라의 불이론적 베단타철학은 베다의 지식편 즉, 우파니샤드의 철학을 일관성있는 체계로 해석한 것으로 그 후 인도 철학의 가장 정통적인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샹카라의 철학은 종교적인 면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인격적 신에 대한 신애는 샹카라의 철학에 의할 것 같으면 궁극적 진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속제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종교적 신앙을 구원의 최고의 길로 간주하는 많은 힌두교 신자들에게는 샹카라의 철학은 매우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그의 불이론적 철학의 원리에 의할 것 같으면 인격적인 신과 개인적인 영혼이라는 것은 무지나 환술에 의한 브라흐만의 환상적 나타남에 지나지 않으며, 영혼의 고통과 속박과 윤회라는 것도 결국 환술이며 해탈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샹카라의 지식의 길이란 결국 이 모든 종교적 노력과 추구를 궁극적으로 무의미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이미 후기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 기타"의 철학사상에서 쉬바신과 비슈누신에 대한 신앙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보았거니와 이 두 신을 중심으로한 대중적 신앙운동 그 후 점점 더 확대되어 중세인도의 종교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서력기원 후 약 200년경에 대체로 완성되었다고 보여지는 "마하발타"와 "라마야나"와 같은 서사시에도 이러한 신앙운동은 반영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푸라나라고 불리는 새로운 문헌들 속에서 본격적인 표현을 보게 되었다. 본래 푸라나란 서사시처럼, 베다를 연구하는 학파들 밖에서 음문체, 신들과 성인들의 계보등 "고사"를 다루고 있는 문헌이었다.
그러나 쉬바신 비슈누신의 숭배자들은 이 문헌들에다가 각각 그들의 신앙적 내용을 부가하여 약 1000년경까지 많은 교파적인 푸라나들을 산출하였다. 그리고 이들 푸라나들은 실제상에 있어서 베다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대부분의 힌두교도들의 종교적 생활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특히 비슈누신의 숭배는 비슈누신의 화신으로 간주되는 목동 크리슈나의 이야기를 담고 그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북돋우는 "비슈누 푸라나"와 "바가바타 푸라나"등을 통하여 더욱더 대중화되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굽타 왕조의 지배자들은 비슈누와 그의 화신들에 대한 신앙을 공식적으로 지원하여 많은 석조신전과 신상들을 만들어서 비슈누신앙을 보급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비슈누와 쉬바의 숭배자들은 번거로운 베다적인 제사 대신에 가정이나 신전에서 간단하게 그들의 신상을 모시고 신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대중적인 푸자의식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교파적 푸라나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비슈누 푸라나"의 내용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푸라나에 나타나 있는 세계관은 후세에 라마누자를 비롯한 많은 비슈누파의 베단타사상가들의 철학에 종교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슈나 푸라나"는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언급되고 있는 판차라트라라고 불리는 비슈누신앙의 일파에 의하여 산출된 문헌으로서 이 판차라트라파는 "마하바라타"의 "해탈법품" 중의 나라연천장이라는 비슈누파의 문헌도 산출했다고 여겨진다.
"비슈누 푸라나"에서 철학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 것은 세계의 창조와 주기적 변화에 관한 설화와 목동 크리슈나의 이야기이다. "비슈누 푸라하"에 의할 것 같으면 비슈누신은 브라흐만으로서 자기 자신 안에 온 우주를 포함하고 있다. 그는 정신과 물질과 이 양자를 결합시키고 분리시키는 시간의 형태로 존재하며 이 삼자를 갖고서 창조의 행위를 하나의 유희로서 영위한다. 창조의 과정은 대체로 상키야철학에서 논하는 물질의 전개과정을 따르나 단지 이 물질의 원초적인 균형상태를 깨뜨리는 것은 세계의 정해진 주기에 따라서 신이 정신과 물질을 자극함에 의해서라고 한다.
물질로부터 일차적인 세계의 진화가 이루어지면 물질로부터 전개된 제요소들은 결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알과 같은 덩어리를 형성하여 물위에 떠 있게 된다. 이 때에 비슈누는 창조신 브라흐마의 형태로 이 우주적 알 속으로 들어가서 하늘과 땅과 공중권을 창조하며 제신과 생명들을 거하게 한다. 다음에 그는 세계의 유지자인 비슈누신으로서 세계를 유지하다가 때가 오면 세계의 파괴자 루드라로서 세계를 불로써 파괴하고 비를 내려 온 우주를 하나의 대양으로 만든다. 그리고 비슈누는 이 대양위에 있는 쉐사라고 부르는 큰 뱀위에서 밤의 수면과 휴식의 상태로 들어간다.
브라흐마 신의 세계창조로부터 파괴에 이르는 기간을 일거라 부르며 브라흐마신의 하루의 낮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일거동안에 세계는 대유가라 불리는 주기들을 경과하며 각 대유가는 또한 4개의 소유가로 되어 있다. 대유가의 길이는 인간에게는 4320000년이며 신들에게는 12000년에 해당한다. 4개의 소유가는 크리타 유가 4800년(신들의), 트레타 유가 3600년, 드바파라 유가 2400년, 그리고 칼리 유가 1200년으로 되어있으며, 이 소유가들이 경과하는 동안 인간사회에 온갖 불법은 점점 더 증가하며 인간의 수명은 점점 더 단축된다고 한다.
이러한 사기의 소유가들로 된 대유가가 1000번 반복되는 것이 일겁이며 이것이 브라흐마신의 한 낮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하루의 낮이 지나면 이 낮과 같은 길이의 브라흐마신의 밤이 오며 이 때에는 비슈누신은 잠들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의 밤이 끝나면 비슈누는 깨어나서 브라흐마신으로서 세계를 다시 창조하고 브파흐마신의 낮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브라흐마신의 낮과 밤은 360일 100년간이나 계속되어 반복되며 이 기간이 끝나면 시간과 물질과 정신은 무한한 비슈누신 안으로 흡수되어 비슈누신만이 홀로 남게 되며, 그가 다시 유희를 시작하면 전과정이 다시 되풀이 되는 것이다.
"비슈누 푸라나"에 있어서 후세의 철학적 영감을 불러 일으킨 또 하나의 설화는 비슈누신의 화신으로 간주되는 크리슈나의 어린 시절과 목동으로서의 이야기들이다. 특별히 브린다바나라는 숲에서 전개되는 목동 크리슈나와 목동들의 아내들과의 열렬한 연애의 이야기는 인간의 영혼과 신과의 사랑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비슈누파의 철학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비슈누와 쉬바의 신앙운동은 서력기원 약 6세기경에 이르러 남인도의 타밀지방에서 출현한 여러 시인성자들에 의하여 새로운 경지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들은 종래의 베다, 서사시, 푸라나 등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대신 그들의 지방어인 타밀어로 시와 노래를 지어 비슈누신과 쉬바신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헌신을 노래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종전보다도 훨씬 더 감정적이고 개인적인 신앙을 거침없이 표현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종교적 갈망은 어떤 비인격적인 절대적 존재로서의 브라흐만과의 합일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섬기는 인격적인 신과의 강렬한 사랑의 교제를 체험하는 것이었다. 이들 타밀지방의 시인성자들이 지은 많은 종교적 시와 노래들은 자연히 성전으로 수집되게 되었으며 이들 성전들은 비슈누파와 쉬바파의 교리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쉬바파에서는 10세기경에 나야나르라고 불리는 역대의 시인성자들의 찬가를 모아서 12성전을 편찬하였으며, 이것은 샤이바 싯단타파의 중요한 성전을 이루었다. 샤이바 싯단타는 13세기에 일어난 쉬바파의 하나로서 신과 인간의 차이, 인간의 죄와 신의 은총을 강조하며, 쉬바신앙에 하나의 신학적,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 한편 비슈누파는 11세기에 알바르라 불리는 그들의 시인성자들의 노래를 수집하여 4000성시를 편찬했다.
이 성시의 편찬은 나타무니에 의하여 비롯되었다고 하며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 성시들을 비슈누신전에서 정기적으로 노래하며 그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알바르들의 시는 특히 목동 크리슈나와 목동들의 아내들과의 강렬한 사랑의 기쁨과 고통을 인간과 신과의 이상적인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찬미했다. 나타무니와 그의 후계자들은 슈리 바이쉬나바라는 유력한 교파를 형성했다.
슈리 바이쉬나바파는 샤이바 싯단타파와는 달리 베다전통의 연구를 통하여 자기들의 신앙과 종교적 사상을 뒷받침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산스크리트어로 철학적 저술들을 산출하여 타밀지방을 넘어서서 인도 전역에 사상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러한 슈리 바이니쉬나바파의 종교적 사상을 철학적으로 가장 잘 대표하는 사람은 라마누자였다.
그는 남인도 타밀지방에서 태어난 슈리 바이쉬나바파의 사제로서, 비슈누신에 대한 신앙의 정통성과 신앙을 통한 구원의 길을 옹호하기 위하여 "브라흐마 경"과 "바가바드 기타"의 주석서를 써서 샹카라의 불이론적 철학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독자적인 베단타철학의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그후로부터 샹카라의 불이론적 베단타철학은 많은 이와 비슷한 노력들에 의하여 도전을 받게 되었다.
라마누자의 사상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그가 속해 있던 슈릴 바이쉬나바파의 신앙적 전통에 있으며 그의 철학의 골격은 그가 존경하던 슈리 바이쉬나바파의 학자 야무나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다. 야무나는 나타무니의 손자이며 후계자로서 "바가바드 기타"의 해석서인 "기타의강요"를 썼으며 라마누자의 "기타" 해석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야무나는 또한 "싯디트라야"라는 그의 저서에서 상키야와 냐야철학을 빌어서 개인아와 현상세계가 최고신과는 별개의 실재들임을 논하고 있다. 라마누자는 바로 이러한 야무나의 사상을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완성시킨 철학자이다. 그는 또한 "브라흐마경"의 주석서인 "성소"에서 자기가 보다야나라는 사람의 "브라흐마경"의 해석을 따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2. 라마누자의 형이상학
라마누자의 형이상학적 입장은 단적으로 말해서 샹카라의 불이론적 철학과 샹키야의 이원론적 철학의 절충적 혹은 중간적인 철학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샹카라철학의 근본적 입장인 브라흐만의 유일한 실재성를 말하면서도 그 안에 상키야철학의 불이론적 세계관 즉, 푸루샤와 프라크를티의 두 원리를 포섭하려고 한다. 라마누자에 의하면 브라흐만이 유일한 실재이다. 그러나 이 브라흐만은 샹카라의 불이론적 베단타에서처럼 아무런 속성도 없는 순수한 비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속성과 차별성을 지닌 인격적인 신이다.
따라서 라마누자철학을 한정불이론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서 브라흐만은 다양성과 속성을 지닌 일자이다. 그의 속성은 혹은 양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물질과 영혼이다. 물질과 영혼은 브라흐만을 떠나서 독립적인 존재로 존재하지 못하며, 언제나 브라흐만에 의존하고 브라흐만은 그들의 실체이다. 영혼과 물질은 비록 브라흐만의 속성이기는 하지만 샹카라철학에서처럼 환술이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들로 간주된다. 라마누자에 있어서 "마야"란 무지를 의미하지 않고 신의 창조적 힘을 말한다. 따라서 라마누자는 상카라의 이체설이나, 이에 근거한 "높은 브라흐만"과 "낮은 브라흐만"의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마누자는 브라흐만과 세계, 즉 영혼들과 물질과의 관계를 영혼과 육체와의 관계에 준하여 설명한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나 육체는 영혼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영혼은 육체를 재배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은 개인의 영혼들과 물질세계의 내제자이며 이들은 신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은 라마누자는 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전체와 부분의 관계로서 설명하기도 한다. 물질과 영혼들은 신의 부분들과 같다는 것이다.
샹카라와 라마누자는 모두 세계가 브라흐만에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상카라에 의할 것 같으면 세계는 브라흐만의 가현인 반면에 라마누자에 있어서는 세계는 이미 브라흐만 안에 내재하여 있다가 그로부터 전변하여 나온 실재인 것이다. 라마누자에 의하면 브라흐만에는 두 가지 상태가 있다. 하나는 세계가 아직 브라흐만으로부터 전개되어 나오지 않은 상태이거나 혹은 세계가 해체되어 브라흐만에 흡수되어 있는 상태로서, 이것을 브라흐만의 원인적 상태라 한다. 다른 하나는 세계가 브라흐만으로부터 전개되어 왔을 때의 상태로서, 이것을 브라흐만의 결과적 상태라고 부른다.
브라흐만은 그 안에 부분과 차별성을 지녔으며 세계의 내적 지배자이며 세계의 질료인도 되고 능동인도 되지만, 브라흐만 자체는 변화하거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속성과 양태들만이 변화할 뿐이다. 신은 세계를 초월하는 존재이다. 그는 무수히 많은 완전한 성품들을 지니고 바이쿤타라는 천계에서 다른 신들과 성자들과 해방된 영혼들과 함께 거하고 있다.그는 세계라는 육체를 지녔지만 그의 육체는 그를 속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속박이란 업의 결과인 반면에 신은 바로 업의 주재자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해체될 때에는 물질을 미세하고 무구분적인 잠재적 상태로 있으나 신은 이러한 물질로부터 영혼들의 업에 따라서 그들의 몸과 감각기관들과 대상들의 세계를 전개시킨다고 한다. 신의 전능한 의지에 따라서 미세한 상태의 물질은 우선 화.수.지의 미세한 요소들로 바뀌고 이들이 섞여서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현상세계를 이루는 것이다. 화.수.지.의 삼요소는 사트바와 라자스와 타마스라는 물질의 삼성질을 각각 나타낸다고 한다.
상키야철학과는 달리 라마누자는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를 물질의 삼요소가 아니라 삼성질으로 본다. 라마누자에 의하면 라자스와 타마스의 성질을 전혀 갖고 있지 않고 순수히 사트바만의 성질로 된 특수한 성질도 존재한다. 이물질은 따라서 비정신계 보다는 정신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신이나 해방된 자들의 몸과 그들이 거하는 곳에 있는 사물들은 이러한 특수한 물질로 되어 있다고 한다.
영혼 지바들은 비록 브라흐만의 양태요 그의 몸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영원히 실재하는 존재라고 한다.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신의 양태인 고로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영혼은 원자의 크기만한 개별적 단자들로서, 그들은 어디까지나 신의 양태인고로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영혼은 원자의 크기만한 개별적 단자들로서, 그들은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고 한다.
세계의 창조의 상태에서는 영혼들은 각각 그 업에 따라서 육체를 입고 있으나 세계의 해체상태에서나 혹은 해방된 영혼은 육체로부터 벗어나 존재한다. 영혼은 윤회의 세계에서 무지와 업으로 인하여 자신을 이들과 혼동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혼동에서 생기는 자아의식으로서의 아만은 영혼이 본래가지고 있는 자의식과는 다르다고 한다.
영혼은 앎과 행위와 경험의 주체이다. 영혼은 그 자체에 있어서 빛을 가진 자 의식적인 존재이다. 영혼은 자가 자신을 알기도 하고 대상을 알기도 하며 자기 자신을 드러내나, 대상을 드러내지는 못한다고 한다. 대상은 오직 지식(앎)을 통하여 영혼에 드러나는 것이다. 반면에 지식은 그 자체와 대상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그들을 알지는 못한다. 아는 것은 영혼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라마뉴자는 미맘사의 프라브하카라와는 달리 지식은 영혼의 본질적 성질이지 우연적인 성질은 아니라고 한다. 지식은 깊은 수면의 상태나 해방된 상태에서도 언제나 영혼에 존속한다는 것이다. 지식이 영혼의 본질적인 성질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라마누자는 샹카라처럼 영혼 그 자체가 지식 혹은 순수식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라마누자에 의하면 순수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식 이란 어디까지나 주체에 속하며 대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식은 언제나 한계되어져 있고 특수한 속성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나는 의식하고있다>라고 말하지 아무도 <나는 식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이 영원한 것처럼 지식도 영원하며 본래는 편재적이고 무한하고 전지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업의 제한과 방해를 받아 우리의 지식은 한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지식과 마찬가지로 영혼은 본질적으로 희열을 갖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상세계에서의 불완전함과 고통들은 영혼의 본질을 건드리는 것은 아니다. 해방된 영혼은 무한한 지식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3. 해탈론
라마누자에 의하면 영혼의 해방은 무지와 업의 제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라마누자는 샹카라와는 달리, 행위와 지식을 둘 다 필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그는 베다의 연구에 있어서도 행위편과 지식편 그리고 푸르바 미맘사와 웃타라 미맘사를 둘 다 강조한다. 즉 푸르바 미맘사의 연구는 베단타철학의 연구를 위한 준비로서 간주되며 행위는 순수한 마음으로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행하면 영혼의 정화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점에 있어서 행위에 대하여 지식의 절대적 우위를 강조하는 샹카라와 차이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라마누자에 의하면 해탈이란 궁극적으로 영혼은 물질과 다르다는 지식에 의하여서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라마누자가 말하는 지식이란 단순한 베단타철학에 대한 지적 이해가 아니라 요가적 명상을 통하여 얻어진 지식으로서, 이러한 지식은 영혼을 속박과 윤회의 세계로부터 해방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물질로부터 해방된 영혼은 육체를 떠나 순수하게 존속하기는 하나 아직도 신과 함께 거하는 행복에 참여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이러한 최고의 구원은 오직 신에 대한 사랑의 명상을 실천하는 신애의 요가를 통하여서만 가능한 것이다.
신애란 요가를 통하여서만 가능한 것이다. 신애란 신에 대한 끊임없는 기억과 명상을 의미하며, 이러한 신애를 행하는 자는 신에 대한 직접적인 직관적 지식을 얻으며 자기는 신의 잔여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서 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신애의 요가는 베다에 대한 명상을 필요로 하므로 슈드라 계급의 사람들은 이 길을 따를 수 없다. 따라서 라마누자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별도의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즉 누구든지 신을 믿는 마음으로 그를 향하여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귀의하며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자는 신의 은총에 의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라마누자는 생해탈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영혼이 업의 결과인 육체와의 교섭을 떠난 상태, 즉 사후라야만 비로서 해탈이 가능한 것이다.라마누자에 있어서는 개인적 영혼과 속박과 윤회가 단지 무지로 인해 나타나는 환술일 수는 없다. 따라서 라마누자는 생해탈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과 개인영혼과의 차이는 언제나 남아 있으며, 영혼은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 그 고유의 완전성을 회복하고, 순수한 사트바적인 몸을 갖고서 무한한 행복속에서 신과 사랑의 교제를 향유한다는 것이다.
라마누자의 사후 그의 추종자들은 벤카타나를 중심으로 하는 북쪽의 바다갈라이파와 로카차리야를 중심으로 하는 남쪽의 텐갈라이파로 분립하게 되었다. 이 양파는 신의 은총과 인간의 노력에 관하여 상이한 견해를 지녔다. 바다갈라이파에 의하면 신의 은총을 받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스스로를 정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치 어린 원숭이가 어머니의 목에 매달리려는 것과 같이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의 은총을 받기 위하여 신에게 매달리려는 개인적인 노력을 해야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텐갈라이파는 그러한 신의 은총을 받기 위하여 인간의 개인적인 노력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마치 고양이가 입으로 자기의 새끼를 물어올려서 안전한 곳으로 운반하듯이 신은 그의 은총을 죄인들에게도 선사하며 그들은 윤회의 세계로부터 구원한다는 것이다. 라마누자의 철학은 많은 후계자들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샹카라나 또 하나의 위대한 베단타철학자인 마드바의 문하생들과 같이 철학적 능력이 예리하고 뛰어난 사상가들을 배출하지는 못했다.
제19장 비슈누파의 베단타철학
1. 라마누자 이후의 인도 철학의 경향
베단타철학이 일단 라마누자에 의하여 샹카라의 불이론과는 달리 신앙적으로 해석될 수 있음이 보여짐에 따라, 그의 철학은 베단타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라마누자의 뒤를 이어 나타난 여러 비슈누파와 쉬바파의 철학자들은 모두 물질세계와 영혼을 주저없이 실재하는 것으로 보고, 이들과 최고신으로서의 브라흐만과의 관계를 각기 자기 나름대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라마누자만 하여도 영혼과 물질의 실재를 인정하면서도 아직도 불이론적 입장, 즉 브라흐만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사상을 견지하고 있는 반면에, 그들은 더욱더 영혼과 물질이 브라흐만과는 별개의 실재임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게 되었다.
또한 구원의 방법으로서도 라마누자는 지식과 신애와를 결부시켜 해석하는 반면에, 이들 신앙적 베단타 철학자들은 신애만이 유일한 길임과 신의 은총을 강조하여 중세 인도의 종교적 경향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라마누자를 전환점으로 하여 이들 신앙적 교파적 사상가들에 의하여 전개된 신학적 구원론으로서의 철학들은 인도 철학의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샹카라의 불이론적 철학은 어떤 특정한 신을 섬기는 종교적 입장을 초월한 것이었으나, 라마누자 이후의 베단타철학자들은 모두 특정한 종파적 입장에 서서 베단타 사상을 각각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샹카라의 철학은 어떤 특정한 신만을 섬기지 않고 제신을 의무로서 관습적으로 섬기는 많은 정통 바라문들에 의하여 지지를 받아오게 된 것이다.
2. 마드바의 이원적 베단타철학
마드바(Madhva, 1199-1278)는 서남인도의 우디피라는 곳에서 태어나서 일찍부터 베다를 공부하고 고행자가 되었다. 그는 원래 샹카라철학의 추종자였으나 그의 스승이며 샹카라철학의 신봉자인 아츄타프렉샤와의 논쟁을 통하여 샹카라의 철학을 버리고 이원적인 베단타철학을 전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비슈누신과 그의 화신 크리슈나를 지고의 신으로 섬기는 자로서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으며 자기의 고향인 우디피에다 크리슈나신을 위한 신전을 만들고 그의 활동의 본거지로 삼았다.
마드바는 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그는 '브라흐마경', '우파니샤드', '바가바드기타', '마하바라타', '바가바타 푸라나' 등에 해역서를 썼으며, 자기의 베단타철학을 옹호하는 '수해설'의 주석서인 '정리감로'를 썼다. 자야티르타의 저서들은 또한 뱌사티르타와 라가벤드라 야티 등과 같은 후계자들에 의하여 대대로 주석되었다. 마드바와 그의 추종자들은 특별히 샹카라의 불이원적 베단타철학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많은 논쟁을 벌였다.
마드바는 인식의 방법으로서 지각과 추론과 성전을 인정한다. 실재의 올바른 인식을 위하여는 증언에 의지하여야 하며, 성전에는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인간적인 것과 절대적 확실성을 가진 초인간적인 것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베다는 후자의 것으로서 어떤 인간적 저자를 갖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인식은 반드시 주체와 객체로서 구성되며 양자의 관계는 직접적이다. 인식에는 파악되는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명증성이 있다고 한다. 이 명증성은 직관의 주체로서의 자아가 갖는 명증성인 것이다. 마드바에 의하면 우리의 지식은 별다른 장애와 결함이 없는 한 자의식적인 직관적 주체에 의하여 그 타당성 혹은 자명성을 부여받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마드바의 지식의 본유적 타당성에 대한 견해이다.
뿐만 아니라 설령 우리의 인식에 결함이 있어서 그릇된 인식이 발생한다 하여도 그 인식도 어떤 객관적 대상의 근거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릇된 인식이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와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상세계는 순전히 망상일 수가 없으며 망상이란 실재하는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으로 나타나 보일 뿐이지 전혀 아무런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이 그릇된 것이라면 옳은 관념과 틀린 관념의 차이는 설명될 수 없으며, 사물의 객관적 차별이 없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들의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마드바에 의하면 실재에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독립적 실재요, 다른 하나는 의타적 실재이다. 신만이 독립적 실재이며 의타적 실재는 유와 무로 구분된다. 유에는 의식적인 영혼들과 무의식적인 물질이나 시간과 같은 존재들이 있다. 무의식적인 존재에는 베다처럼 영원한 것도 있고 시간, 공간, 물질처럼 영원하기도 하고 영원하지 않기도 한 존재도 있으며, 물질의 전개물들과 같은 영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마드바는 샹카라의 불이론적 철학을 불교의 공사상에 영향을 받은 거짓된 이론으로 신랄히 공격하며, 차별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세계관을 세웠다. 그는 라마누자와 같이 신과 영혼과 물질을 각각 영원한 실재로 간주하고 이 삼자간에 오종의 차별이 있음을 주장했다. 즉 영혼과 신, 영혼과 영혼, 영혼과 물질, 신과 물질, 그리고 물질로 된 사물들 사이의 차별이다.
신은 무한히 많은 성질들을 지니고 있으며, 삿트(존재)와 칫트(식)와 아난다(희열)를 그의 본질로 삼는다. 그는 세계의 창조자요 유지자요, 파괴자이다. 그는 자신을 여러 형태와 화신으로 나타내며 성스러운 신상들에 현존하고 있다. 신은 세계의 초월자이기도 하며 세계와 영혼들의 내적 지배자로서 내재하는 자이다. 물질과 영혼은 전적으로 신의 의지에 의존하고 있다. 마드바는 신의 의지와 활동을 강조한 나머지 영혼들이 비록 제한된 자유와 의지를 지니고 있기는 하나 그들의 구원이 신의 결정에 달렸다는 일종의 예정설과 같은 것을 주장한다.
그의 철학은 존재론적으로는 다원론적이지만 만유가 신의 의지와 힘에 종속되고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서 기능적 이원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마드바는 라마누자와 같이 신과 세계(즉 물질과 영혼들)와의 관계를 영혼과 몸의 관계로 보거나, 세계를 신의 속성이나 양태로 보지 않는다. 영혼들과 물질들은 비록 신에 의존하지만, 신과는 별개의 실체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신은 세계의 능동인이기는 하나 질료인은 아니다. 여기서 마드바는 결정적으로 '우파니샤드'나 '바가바드 기타'의 만유내신론인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드바의 철학적 입장을 이원적 베단타라 부르며, 샹카라의 불이론이나 라마누자의 한정불이론과 구별한다.
영혼들은 영원하고 무수히 많으며, 크기에 있어서 원자적이라 한다. 마드바에 의하면 쟈이나교에서처럼 땅 위의 모든 존재들은 생명이 있는 유기체들이다. 영혼은 식을 갖고 있음으로 해서 그것이 속해 있는 물체에 편재해 있다. 이런 면에서 모든 사물에 편재해 있는 신과는 다른 것이다. 영혼은 본성상 식과 희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업의 결과인 물질적인 몸과 감각기관과의 연결 때문에 고통과 불완전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신이 비록 영혼들을 내적으로 지배하지만, 그들은 각기 행위와 지식과 경험의 주체이다. 마드바는 영혼의 인식기관을 증인이라 부른다. 이것을 통하여 영혼은 스스로를 의식하며 이것이 영혼의 개별성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마드바에 의하면 영혼들은 질적으로도 상이하다고 한다. 각각의 영혼들은 그 자체의 특수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방된 상태에서도 그들의 식과 희열에는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한다.
영혼에는 영원히 자유로운 영혼과 해방된 영혼과 속박된 영혼의 세 종류가 있다. 비슈누신의 창조적 힘의 인격화이며 그의 아내로 간주되는 락스미는 다른 신들과는 달리 본래부터 영원히 자유로운 존재라고 한다. 속박된 영혼들 가운데는 구원받을 수 있는 영혼과 그렇지 못한 영혼의 구분이 있으며, 후자는 영원히 윤회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존재들이다. 마드바에 의하면 아무리 순수한 영혼들이라 할지라도 신의 완전한 희열은 못느끼고 단지 부분적으로만 느낄 뿐이며, 신과 영혼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고 한다. 영혼은 결코 브라흐만과 같이 될 수는 없다.
물질은 신에 의하여 형태를 가진 현상세계로 전개되며 세계의 해체시에는 사물들은 다시 원초적인 물질로 되돌아간다. 전개 이전의 미세한 상태의 물질은 동질적인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상이한 원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마드바는 무명을 물질의 한 형태로 간주하며, 무명에는 영혼의 영적 능력을 은폐하는 것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마드바에 의하면 윤리적인 의무의 집착없는 순수한 실천은 영혼의 구원에 도움은 되지만, 구원은 무엇보다도 신을 아는 지식에 의하여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러한 지식을 위해서는 베다의 공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여자와 슈드라계급은 베다 대신 푸라나나 전승들을 통해서 그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신을 아는 지식이란 우리가 그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감정과 그에 대한 사랑을 가져온다. 이것이 곧 신애이며 신애는 신에 대한 깊은 명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러한 명상과 신이 은총을 통하여 그에 대한 직접지를 얻는다고 한다. 이 직접지는 바로 현세에 있어서도 우리를 세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해방된 영혼들은 사후에 비슈누신의 낙원에서 순수 사트바적인 몸을 입고서 각종의 유희와 찬미 속에서 무한한 행복을 누린다고 한다.
3. 님바르카의 이이불이론
님바르카는 텔루구어를 사용하는 남인도 출신의 바라문이었다. 그는 크리슈나신의 열렬한 숭배자로서 크리슈나파의 성지인 브닌다바나 즉 북인도의 마투라 지방에서 일생을 보냈다. 그의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2세기 내지는 13세기경의 인물로 추정된다.
님바르카도 역시 '브라흐마경'의 주석서인 '베단타 파리자타 사우라바'를 썼으며 또한 자기의 철학적 입장을 간략하게 주장하는 '십송'을 지었다. 그의 철학은 스리니바사(14세기), 케샤바카슈미린(16세기)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케샤바카슈미린은 '기타'의 주석인 '진리해명'에서 님바르카의 사상을 옹호했다.
님바르카는 라마누자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 입고 있으며 브하르트르프라판차, 브하스카라, 야다바와 같은 베단타철학자들에 의해 대표되었던 차별불차별론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즉 신은 세계의 능동인이며 질료인으로서 신과 세계와의 관계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는 견해이다. 그는 라마누자와는 달리 물질과 영혼들이 신의 속성이거나 혹은 신의 몸을 이룬다는 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속성이란 어떤 존재를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해 주는데, 신 외에 그로부터 구별되어질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고로 속성이란 무의미하다고 한다. 또한 만약 물질과 영혼들이 신의 몸을 이룬다고 하면, 신은 세계의 온갖 불행과 불완전함에 종속될 것이기 때문에 세계를 신의 몸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님바르카에게는 영혼과 물질은 신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의존성은 그들과 신과의 차별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물질과 영혼은 독립성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 독립성의 결여는 그들이 신과 동일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님바르카는 이이불이론을 주장한다. 마치 태양과 태양빛, 불과 불꽃, 대양과 파도의 관계처럼 신과 세계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는 것이다.
세계는 신의 본성 안에 이미 미세하게 존재하고 있던 것의 전변이지 가현이나 환술이 아니다. 신은 자기 안에 식과 무의식, 즉 영혼과 물질이라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이 힘이 창조 때에 전개되어 나오는 것이다. 신은 세계의 질료인인 것이다. 그는 또한 창조 때에 영혼들을 각기 그들의 업에 따라서 알맞는 업보를 받도록 하는 세계의 능동인이기도 하다. 님바르카에게 있어서는 신은 곧 크리슈나신을 말하며 크리슈나는 신의 화신이 아니라 그의 본질이라고 한다. 님바르카는 또한 크리슈나의 애인 라다를 신의 창조적 힘을 나타내는 원리로 삼았다.
무의식물에는 세 종류가 있다. 즉 시간과 물질과 물질로부터 나오지 않는 순수한 사트바이며, 이 후자로서 신의 지체나 거처는 되어 있다고 한다. 영혼은 무지의 결과인 업에 의하여 가리워진다. 영혼의 해방을 위해서는 지식과 신을 향한 자기포기와 신애, 그리고 그의 은총이 필요하다.
4. 발라바의 순정불이론
발라바(1479년에서 1531년)는 텔루구지방 출신 바라문의 아들로서 베나레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님바르카와 마찬가지로 마투라 부근에서 활약했으며 크리슈나교의 일파를 창시했다. '브라흐마경'의 주석 '아누브하시야'와 '바가바타 푸라나'의 주석인 '바가바타티카 수보디니'를 썼으며, '진리등화해역'이라는 저서, 그 외에도 수많은 작은 저술들을 했다. 그의 철학은 그의 아들 비탈라나타와 그밖에 기리다라 고스바민, 발라크리쉬나 밧타, 푸루숏타마 등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그의 철학적 입장은 브라흐만이 세계를 전개할 때에 환술과 같은 불순한 원리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하여 순정불이론이라 부른다. 또한 최고의 해탈의 상태는 신애를 통한 신의 은총의 길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하기 때문에 은총의 도라고도 부른다.
발라바에게는 브라흐만은 곧 크리슈나신으로서, 그의 본질은 존재와 식과 희열이다. 세계는 불에서 불꽃이 나오듯, 혹은 등불로부터 빛이 발하듯 신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영혼들과 물질은 신의 힘의 현현으로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처럼 신과 그들은 동일하다고 한다. 브라흐만은 그의 의지에 의하여 물질과 영혼들을 현현시키되 그들은 그의 세 가지 성품을 각각 다른 비율로 나타낸다고 한다.
즉 브라흐만의 존재로부터는 물질의 세계가 나오고, 그의 식으로부터는 원자와 같은 영혼들, 그리고 그의 희열로부터는 영혼을 지배하는 내적 지배자가 나온다고 한다. 따라서 물질세계에는 브라흐만의 식과 희열은 숨겨져 있고, 영혼에는 그의 희열만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신은 세계의 능동인이고 질료인이며 그 속에 보편적으로 내재하여 있는 내재인이다. 혹은 신은 온 우주의 최고의 내적 지배자라고 한다. 신은 세계의 실체이며 원인이다. 실체는 정말로 속성을 나타내며 원인은 정말로 결과로 나타나나 양자는 동일하다고 한다. 또한 내재라는 것도 발라바에게는 승론철학에서처럼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을 뜻한다고 한다. 발라바에 의하면 환술이나 무지는 신이 자기 자신을 다양한 세계로 나타내는 힘이며, 이렇게 나타난 세계는 결코 거짓이나 환상이 아니라 참 현현이라고 한다. 발라바는 세계를 브라흐만의 가현으로도 전변으로도 보지 않는다. 세계는 신의 자연스러운 발생으로서 이것을 발라바는 불변전변이라 한다.
발라바는 특이하게도 세계와 생사를 구별한다. 세계는 신의 실재적 현현이므로 언제나 존속하나, 생사는 우리가 영혼의 참 본성, 즉 그것이 곧 브라흐만 자체(희열만 감추어진)라는 것을 모르고 영혼을 육체와 동일시하는 무지 때문에 단지 상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무지가 사라지면 생사의 실재나 고통도 사라지는 것이다. 세계(물질과 영혼들)는 브라흐만의 현현으로서 실재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무지 가운데서 잘못 볼 것 같으면, 다시 말해 브라흐만과 다른 다양성의 세계로 볼 때는, 실재하지 않는 허구인 것이다. 라마누자와 같이 세계의 실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샹카라와 같이 생사의 세계를 무지의 산물로 보는 것이다.
무지에 의하여 묶여진 영혼은 신의 은총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 지식만으로는 낮은 구원만 얻을 수 있을 뿐이며 최고의 구원은 지식보다도 신애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한다. 신애는 모든 죄를 멸해 주는 신의 은총에 의하여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한다. 발라바는 따라서 구원을 위하여 육체에 대한 고행이나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신의 은총에 의하여 최고의 구원을 얻은 자는 해탈이라기보다는 크리슈나신과 함께 하늘의 낙원 브린다바나에서 그를 섬기며 영원히 그의 유희에 동참한다고 한다.
5. 차이타니야 계통의 베단타철학
발라바와 동시대에 동인도의 벵갈지방에 차이타니야(1485년에서 1533년까지)라는 성자가 나타나 열렬한 크리슈나신의 신앙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크리슈나의 화신으로 추앙한다. 차이타니야는 어떤 저서도 남기지 않았으나 그의 사상은 루파와 사나타나, 그리고 그의 조카인 지바에 의하여 계승되고 발전되었다. 지바는 특히 차이타니야파의 가장 좋은 교리서로 간주되는 '육편'을 저술했다. 18세기 초에 와서는 발라데바 바댜브후사나라는 철학자가 나와서 이 교파를 위한 '고빈다소'를 써서 철학적인 깊이를 제공했다.
이 학파에서는 브라흐만은 곧 세계의 주인인 크리슈나신이다. 신은 여러가지 힘을 통하여 작용하며 자기 자신을 물질과 영혼들로 나타낸다. 신의 힘 가운데는 우선 그의 내적, 본질적 힘 혹은 그의 식력이 있다. 이 힘은 그의 세 가지 성질, 즉 존재, 식, 희열에 따라서 세 가지 힘으로서 작용한다. 자신과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힘, 자신과 타존재들로 하여금 인식을 갖게 하는 힘, 그리고 자신과 타존재들로 하여금 희열을 느끼게 하는 힘이다.
신은 다음으로 내적, 외적인 중간적인 힘으로서 영혼력을 갖고 있다. 그는 이 힘에 의하여 자신을 개별적 영혼들로 나타낸다고 한다. 이렇게 나타난 영혼들은 자신의 신적인 본성을 망각하고 외계에다 자신을 잃어버리지만 때로는 신을 추구하기도 한다.
신은 또한 그의 외적인 힘 혹은 환술력에 의하여 자신을 물질적인 세계로 나타낸다고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신은 능동인이며 동시에 질료인이다. 뿐만 아니라 이 힘에 의하여 신은 자신을 시간, 업, 그리고 지와 무지 등을 일으키는 모든 것으로 나타낸다고 한다. 세계는 이러한 능력을 지닌 신의 영원한 유희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물질세계와 개인영혼은 신의 힘의 현현으로서 다 실재하는 것이나 동시에 신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과 그들과의 관계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신비한 관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챠이타니야 계통의 철학적 입장을 불가사의 차별무차별론이라 부른다.
개별적 영혼들과 신과의 관계는 태양빛과 태양 혹은 불꽃과 불과의 관계로서 이해되며 개인영혼들은 신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해탈이란 이 점을 깨닫고 신을 믿고 의지하는 신애에 의하여 주어진다. 신애는 인간이 신과 합일되어 신으로 충만하게 되는 황홀경을 가져오는 사랑의 극치로 이끈다. 차이타니야파에 있어서는 이러한 사랑의 극치는 '바가바타 푸라나'등에 그려져 있는 목동 크리슈나에 대한 목동들의 아내들, 특히 라다의 열렬한 사랑에 있어서 이상적으로 나타나 있다. 라다는 동시에 크리슈나의 창조력을 나타내는 원리로서 이해되며 크리슈나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불가사의 차별무차별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제20장 쉬바파의 철학
1. 쉬바파 철학의 종교적 배경
우리는 전장에서 라마누자의 이후에 전개된 비슈누파 계통의 베단타철학을 살펴보았으며 이미 그 종교적 배경도 서술한 일이 있다. 비록 쉬바파의 사상가들은 우파니샤드나 [브라흐마경]등의 해석을 통한 베단타 철학을 발전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들도 자연히 베단타사상의 영향을 받아 자기들의 신앙적 입장을 철학적으로 정리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6세기경에 남인도의 타밀지방에서 시인성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쉬파파의 신앙운동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지만 쉬바신을 숭배하는 자들이 베다적인 전통 밖에서 별도의 교파를 이룬 것은 이보다도 더 이전의 일이다. 우리는 [마하바라타]나 푸라나 등에서 이미 파슈파타라고 불리는 쉬파파의 일파가 존재했음을 알수 있다.
'파슈파타'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는 '가축의 주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가축의 주'란 쉬바신의 여러 이름중의 하나였다. 이 교파는 인간을 가축에, 그리고 신을 그 주인으로 비유하며, 인간을 무지한 집착의 근에 의하여 세계에 묶여 있는 존재로 이해한다. 인생의 목적은 신에 의하여 이 끈으로부터 해방되어 해설을 얻는 것이라 한다.
[바유 푸라나]나 [아타르바쉬라스 우파니샤드]라는 쉬파파에 의하여 만들어진 후기 우파니샤드에 의할 것 같으면 파슈파타들은 몸에다 재를 뿌리고 심한 고행을 하며 파슈파타 요가라는 묵상을 했다고 한다. 또한 파슈파타들 가운데는 쉬바신의 화신으로 간주되는 라쿠리라고 불리는 3세기 경의 인물의 가르침과 수행을 따르는 분파도 있었다. 이들은 라쿨리샤 파슈파타라고 불리었다.
파슈파타파와 그 밖의 쉬바파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교리와 수행 등을 규정하는 28개의 아가마라는 문헌들을 산출했으며, 이 아가마들은 비슈누파의 삼히타와 신의 창조적 능력을 별도의 여신으로 숭배하는 샥타의 탄드라와 더불어 중세인도의 교파적 철학들의 종교적 배경을 형성하는 문헌들이 되었다. 아가마들은 보통 지식부, 유가부, 제사부, 행작부의 사부로 구성되어 있으나 반드시 지켜지는 구분은 아니다.
특히 문제의 핵심이 되고 있는 바 신과 인간의 개별적 영혼과 세계와의 관계가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쉬바파의 학파들은 비슈누파의 베단타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결국 이 문제에 관해서 각기 이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쉬바파의 철학체계들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14세기의 베단타철학자 마다바의 [전철학강요]는 당시의 철학체계를 모두 16개로 다루고 있는 가운데서, 쉬파파의 철학체계로서 4개를 다루고 있다. 즉 나쿨리샤 파슈파타체계, 샤이바체계, 프라티아 비즈나 혹은 재인식 체계, 그리고 라세슈바라 혹은 수은파 체계이다. 이중에서 나쿨리샤 파슈파타파는 이미 언급한대로 파슈파타파의 일분파로서 고행과 요가의 실천을 주로 하는 교파였으며 철학적으로는 그리 활발했던 것 같지는 않다. 이 학파의 학설을 천명하는 저서로서는 10세기말의 브하사르바즈나의 [가나 카리카]라는 것이 전해지고 있다.
브하사르 바즈나는 정리철학의 저술들도 했으므로 이 교파와 정리철학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6-7세기의 정리철학자 웃됴다카라도 역시 파슈파타파의 지도자로 전해지고 있으며 승리철학의 프라샤스타파다도 쉬바신의 숭배자였다. 아마도 쉬바파의 학자들이 자기들의 신앙에 철학적인 근거를 마련함에 있어서 승론과 정리철학의 이론을 채용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수은파는 일종의 연금술 학파로서 최고신과의 합일을 추구함에 있어서 수은으로 만든 연금술액을 마심으로서 순수한 신적 육체를 얻어서 오가를 통한 해설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이 학파 역시 철학적인 사상에 있어서는 활발한 이론을 전개한 것 같지는 않다.
마다바가 언급하고 있는 나머지 두 학파, 즉 샤이바체계와 재인식체계는 반면에 상당한 체계적 이론을 지닌 학파로서 좀더 상세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2. 샤이바 싯단타의 철학
샤이바체계는 주로 아가마의 철학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남인도의 타밀어를 말하는 쉬바파인 샤이바 싯단타파에 의하여 교리적 체계를 이룩했다. 이 교단의 역사적 배경은 우리가 이미 고찰한 바가 있다. 샤이바 싯단타.라는 말은 '쉬바파의 완성된 교리체계'라는 뜻이며 이 파에다가 처음으로 교리적 체계를 제공해준 사람은 13세기의 마이칸다라는 슈드라계급 출신의 철학자였다. 타밀어로 된 그의 [쉬바지의 각성]은 12절로된 간략한 작품으로서 [라우라바 아가마]의 일부분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아룰난디, 우마파티(14세기)등에 의하여 발전됐다. 전자는 [쉬바즈나나 싯디], 후자는 [쉬바프라카샤]라는 저서를 썼다. 샤이바 싯단타는 3개의 영원한 실체로서 그들의 종교적 세계관을 설명한다.
즉 주인과 가축과 소구(파사)으로 상징되는 신과 개인영혼과 개인영혼을 속박하는 비정신물이다. 신은 여덟가지의 속성들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즉 자존, 청정, 지혜, 무한한 지성, 모든 속박들로부터의 자유, 무한한 은총, 권능, 그리고 무한한 희열이다. 그는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며 세계를 창조하고, 보호하고 파괴하는, 그리고 영혼들을 혼미하게 하며, 해방시키기도 하는 5가지의 활동을 한다고 한다. 그는 세계의 능동인으로서 그의 힘을 수단인으로 하여 위의 다섯가지 활동을 한다. 이 힘은 신의 본질적인 면으로서, 의식이 있고 불변하며 영원한 에너지이다. 또한 신은 세계의 질료인이 되는 마야라 부르는 물질적인 힘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마야는 그의 힘과는 달리 그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개인의 영혼들을 가축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축과 같이 무지의 끈에 의하여 이 세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영혼들은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존재들이다. 영혼은 순수식으로서 비록 세신이나 구신과 연합해 있지만 그들과는 다른 존재이다. 영혼은 욕망과 생각과 행위의 기능을 가지며 편재적이다. 영혼의 수는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고 한다.
영혼을 속박하는 소구와 같은 비정신물 혹은 부정물(말라)에는 삼종이 있다고 한다. 즉 무지와 업과 마야이다. 무지는 시작이 없고 모든 사람들에 공통된 것이다. 무지는 순수식으로서의 편재적인 영혼을 지식과 힘에 있어서 유한하고 육체에 제한되어 있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무지는 아나바말라 즉 미세한 부정물이라고 부른다. 영혼의 거짓된 세세성 혹은 원자성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지가 다름아닌 속박된 영혼의 속박성을 이룬다고 한다. 영혼을 속박하는 두번째 부정물인 업은 영혼의 행위에 의하여 산출된다. 업은 미세하므로 보이지 않고 영혼과 육체를 결합시키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업 자체가 자동적으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에 따라서 업보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세번째로, 마야라는 부정물은 세계의 질료인으로서 그것으로부터 물질세계가 전개되어 나온다.
이상과 같은 세가지 부정물 가운데서 어느 것에 의하여 묶였는가에 따라서 영혼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고 말한다. 어떤 영혼은 미세한 부정물만에 의하여, 어떤 것은 미세한 부정물과 업의 부정물에 의하여, 또 어떤 영혼은 세가지 부정물 모두에 의하여 속박되어 있다고 한다. 샤이바 싯단타에 의하면 세가지 속박의 원리들 자체는 상키야철학의 프라크르티처럼 영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영혼과의 관계는 잠정적이기에 영혼은 그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이 해방을 얻기 위하여는 이 세가지 부정물을 제거해야 하며, 그러기 위하여는 신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신은 모든 영혼이 그를 알기를 원하기 대문에, 그의 은총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질 수 있으며 , 우리가 단지 그것을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해방된 영혼들은 쉬바신과 하나가 되어 그이 영광과 위대함을 함께 한다. 영혼의 개체성은 남아 있지만, 희열 때문에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고 마치 소금이 물에 녹으면 물과 같이 편재하는 것처럼, 영혼들도 신과 같이 편재한다고 한다. 전에 언급한 세계의 창조활동 등과 같은 신의 다섯가지 기능은 쉬바신만의 것이지만, 영혼들은 신의 위치에 도달한 것이다. 영혼의 본래적 성품이란 자신을 대상과 동일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속박된 영혼은 자신을 물질과 동일시하며, 해방된 영혼은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샤이바 싯단타의 철학은 주로 타밀 시인성자들의 신앙적 전통과 아가마의 사상에 근거하여 형성된 철학이다. 그러나 쉬바파의 사상가들 가운데서도 이러한 교파적인 전통을 정통 베다의 전통에 연결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철학자로서 슈리칸타를 들 수 있다. 그의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4세기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는 쉬바신앙의 입장에 서서 [브라흐마경]의 주석서인 [샤이바소]를 썼으며 그의 주석은 16세기의 아파야 딕쉬타에 의하여 또다시 주석되었다. 이들의 베단타 해석은 대체로 샤이바 싯단타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으며 라마누자의 한정불이론과 매우 흡사하다.
3. 재인식파의 철학
샤이바 싯단타파가 남인도에 근거를 둔 쉬파파임에 반하여 재인식파는 북쪽 카쉬미르지방에서 전개된 쉬바파의 철학이었다. 14세기 초엽부터 카쉬미르지방이 이슬람교로 개종되게 됨에 따라서 재인식파도 일찌기 그 세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재인식파의 이름은 개인영혼이 자신을 쉬바신으로 다시 인식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는 교리에서 생긴 이름이다.
재인식파의 창시자는 9세기경의 인물로 추정되는 바스굽타로서, 전통에 의하면 그는 쉬바신에 의하여 꿈에 계시를 받아 히말라야산의 마하데바봉에 있는 돌 위에 새겨진 [쉬바경]을 발견하여 이 교파의 교설의 근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스판다 카리카]라는 저서를 썼다. 이 학파는 다른 이름으로는 [스판다론]이라고 불린다. 신의 진동에 의하여 다양한 현상세계가 나타난다는 이론에 근거한 이름인 것이다. 혹은 쉬바신과 그의 힘과 영혼의 세원리를 취한다 하여 삼체론이라고도 불린다. 바스굽타 이후 소마난다의 [쉬바지견]웃트팔라(10세기)의 [재인식경], 아비나바굽타(11세기)의 [최상의정요], 크세마라자(11세기)의 [쉬바경성찰]등에 의하여 재인식론의 철학은 완성되게 되었다.
샤이바 싯단타와는 달리 재인식파는 강한 일원론적인 철학을 전개했다. 그러나 불이론적 베단타와는 달리 이 학파는 다양성의 세계를 단지 우리의 주관적 무지의 소산으로 보지 않고 신의 사유의 객관화된 실재로 본다. 반복되는 세계의 주기적 변화는 신의 의식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신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깨어남, 깨어 있음, 잠들음, 잠의 네 상태를 순차적으로 경험하고 있으며 이것이 다름 아닌 우주의 생성, 지속, 소멸, 휴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세계의 능동인이며 질료인인 것이다. 그의 창조적 활동은 화폭이나 물감 등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창작적 활동과 비슷하다고 한다.
신은 그의 본질적인 여러 힘들을 통하여 활동한다. 식력, 희열력, 의지력, 지력, 행위력과 같은 힘들이다. 그는 또한 마야라는 힘으로서 무한한 정신인 자신을 유한하고 원자적인 개별적 정신으로 나타나게끔 한다. 이상과 같은 힘들에 의하여 개인영혼들과 다양한 현상세계, 주관과 객관의 세계가 나타나나 사실은 신만이 유일한 실재이며 다양성은 신의 사유로서 신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사물들이 거울에 나타나는 것처럼 신은 세계를 자신 안에 나타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재인식철학은 다양한 세계의 현현을 설명하기 위하여 상키야철학의 25원리에다 11원리를 추가하여 모두 36원리를 수립한다. 만물의 근원인 최고신 쉬바를 제일원리로 하여 36번째의 원리인 지(땅)가지의 전개를 논하는 것이다.
해설은 개인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을 독립적이고 개체적인 것으로 인식시키고 신과의 동일성을 은폐하는 무지를 제거해야만 가능하다. 무지의 제거를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신의 은총으로써 그의 특수한 힘이 신자에게 하강하여 그를 사로잡아야만 한다고 한다. 이러한 힘에 의하여 영혼은 신과 본질적으로 하나됨을 재인식하며 모든 제한성과 차별성은 사라지는 것이다. 재인식을 획득한 사람은 생존시에 이미 신과 동등해지는 해탈을 얻으며 사후에는 개인성을 영원히 초월하게 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