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철학사 2
제2부 인도 철학의 체계화
제7장 상키야 요가철학
1 인도 철학의 체계화
지금까지 우리는 서력 기원전 1500년경부터 기원전 2세기가량에 걸친 인도 철학의 형성기를 고찰해왔다. 이 기간을 인도 철학의 형성기라 부르는 것은 이 기간에 다양하고 창의적인 철학적 사상들이 형성되어 후세에 와서 체계화된 철학적 학파들의 근본성격을 결정지어 주는 밑바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다양한 사상들은 소승불교의 몇몇 학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아직도 질서있는 논리와 인식론적 비판을 통하여 수립된 체계적 이론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수행과 체험에 입각한 단편적인 철학적 통찰들이라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한 철학적 문헌들은 그 형식에 있어서도 우파니샤드나 불교경전들과 같이 주로 대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어떤 일정한 철학적 세계관을 일관성 있게 체계적으로 진술하거나 옹호하는 논문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약 200년부터는 종래의 바라문의 전통 내에서 여러 가지 흐름을 형성하여 오던 사상들이 각기 독자적인 학파를 이루게 되었으며 이들은 자기들의 철학적 견해들을 간략하게 집약하여 진술하는 경이라는 문헌을 산출하게 되었다.이 경들은 각 학파의 근본경전이 되었으며, 그 내용이 너무 간결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에 대한 주석서인 소와 이 소의 내용을 체계화하여 다루는 논이 씌여지게 되었다. 이러한 인도 철학의 학파적 체계적 발전은 아무래도 불교 내의 부파철학적 발전에 힘입은 듯하며, 이로부터는 인도 철학의 발전은 각 학파 간의 상호의식과 논쟁 가운데서 진행되게 되었다. 따라서 각 학파들은 그들의 형이상학적 견해만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서 그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인식론적으로 밑받침하려는 노력도 보이게 되었다. 이로써 인도 철학은 자기반성적인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상좌부, 설일체유부, 경량부와 같은 소승불교의 체계적 발전을 고찰했거니와 이제부터는 바라문의 정통 육파철학과 대승불교 철학의 체계를 그 철학적 내용에 중점을 두면서 학파별로 고찰하기로 한다.1)
2 상키야 요가철학의 전통
상키야 철학은 인도의 체계화된 철학파 가운데서 가장 먼저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2) 상키야 철학 사상은 우리가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카타우파니샤드'나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와 같은 후기 우파니샤드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또한 '마하바라타'의 제12권 '해탈법품'에도 여러 가지 초기 상키야 철학의 형태가 나타나 있음을 우리는 우리는 이미 보았다. 특히 '바가바드 기타'가 형성된 당시, 즉 서럭기원전 2~ 3세기경에는 상키야는 요가와 더불어 하나의 잘 확립된 사상으로서 존재한 듯 보이며, '기타'에 사상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대 문헌들에 나타나 있는 나타나 있는 상키야 철학은 어디까지나 아직도 충분히 발달되지 않은 초기의 것으로서 나중에 형성된 고전적 무신론적 상키야 철학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상키야 철학은 전통적으로 카필라라는 기원전 4세기경의 성현을 원조로 하며, 그의 제자 아슈리 판차쉬카 등에 의하여 대대로 전승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초기 상키야 사상가들의 저서는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카필라에 의해서 씌어졌다고 전해지는 '수론해탈경'은 학자들에 의하면 빨라야 9세기 정도에 씌여진 위작으로 여겨지고 있다.3) 17세기의 베단타 철학자인 비즈냐나빅슈는 이 경의 주석서를 썼으며, 그는 또한 상키야 철학에 대한 중요한 기본서로서 '수론정요'라는 책을 썼다.
현존하는 고전 상키야 철학서 가운데서 가장 오래되며 동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슈바라크리쉬나 자재흑의 '수론송'이다. 우리는 이 '수론송'에 와서야 수론철학이 분명히 이원론적, 무신론적 철학으로 정립되는 것을 보게 된다. '수론송'은 기원후 4세기경에 씌여진 것으로 추측되며4) 모두 70절로 되어 있어 '수론70'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인도의 고전 철학서 가운데서도 백미로 간주되는 명저이다. 8세기의 철학자 가우다파다의 주석서 '수론송소'와 9세기의 베단타 철학자 바차스파티미슈라의 주석서인 '진리월광'이 있다.
상키야 철학은 독자적인 학파로서 근세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지는 못했으나 상키야 철학의 여러 이론들은 베단타 철학 등 타 철학파들에 흡수되었으며5) 인도인의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어 왔다.
상키야 철학 연구의 또 하나의 중요한 자료는 요가학파의 문헌들이다. 요가는 상키야 철학의 세계관과 형이상학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동시에 실천 수행의 면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학파로서, '요가경'이라는 근본 경전을 갖고 있다. '요가경'은 전통적으로 파탄잘리라는 B.C. 2세기의 인물6)에 의한 저서로 알려져 왔으나, 사실상으로는 서력기원 후 4~5세기경에야 완성된 고전으로 간주된다.7) 그러나 물론 요가적인 수행의 전통은 이보다 훨신 이전으로 소급하여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요가의 기원은 아마도 이미 베다 시대부터 바라문들이 제사 때에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힘과 지혜를 얻기 위하여 행하던 고행의 행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이보다도 더 앞서, 인더스문명의 유적 가운데서 요가의 좌법을 한 신상이 발굴됨에 따라 요가는 아마도 베다나 아리안족의 풍습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라 비아리안적인 행법이 아니었는가라는 추측도 자아내고 있다. 여하튼 '카타 우파니샤드'에서는 '요가'라는 말은 감각 기관과 마음을 제어하여 절대자를 인식하는 방법을 뜻하고 있으며, 이러한 행위는 이미 불타나 혹은 그에게 선법을 가르쳐 주던 출가수행자들 가운데서 성행하였던 것이다.
'마하바라타'에 와서는 요가는 상키야와 더불어 두 개의 분명한 사상적 체계로서 인정되고 있다. 상키야는 해탈에 이르는 이론적인 접근으로, 그리고 요가는 같은 목적을 위한 실천적 수행적인 방법으로 구별되어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랜 실천적인 전통이 타 사상가들이 철학적인 체계로 성립됨에 따라서 '요가경'에 와서 다듬어지고 정리되게 된 것이다.
'요가경'의 주석서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바샤의 '요가경소'이다. 경과소가 모두 '수론의 해명'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씌어진 당시에8) 이미 상키야 철학과 요가는 동일한 사상으로 이해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요가 철학은 유신론적인 사상으로서 본래부터 상키야와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여하튼 9세기의 바차스파티미슈라는 뱌사의 소에 '진리통효'라는 복주를 썼으며 이에 의하여 요가철학의 학설은 고정되게 되었다. 16세기의 비즈냐나빅슈도 뱌사의 소에 '요가평전'이라는 주석서와 '요가정수강요''라는 요가철학의 강요서를 저술했다.
이제 이슈바라크리슈나의 '수론송'과 파탄잘리의 '요가경', 그리고 바차스파티미슈라의 주석을 중심으로 하여 상키야 요가 철학의 대강을 살펴보기로 하며, 때에 따라 두 사상의 중요한 차이점들을 언급하기로 한다.
3 물질
상키야 철학은 불교와 같이 세계를 고로 보며, 이 고를 극복하려는 데에 철학적 사유의 주목적이 있다. 또한 그 세계관에 있어서도 불교와 같이 요가의 체험에 기초한 심리학적인 세계관, 즉 인간의 심리 현상의 관찰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를 파악하려는 경향이 짙으며, 일원론적인 세계해석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상키야 철학은 불교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인간의 영원한 자아, 즉 푸루샤(정신:purusa)라는 실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불교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상키야 철학은 세계의 모든 존재를 정신 purusa과 물질 prakrti이라는 두 개의 형이상학적 원리로서 설명한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을 바로 이해하면 상키야 철학의 근본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프라크르티, 즉 물질이란 개념은 상키야 철학에서 특수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프라크르티는 푸루샤를 제외한 세계의 일체 현상이 그로부터 발전되어 나오는 모태와 같은 것으로서 미현현 avyakta이라 불린다. 즉, 경험의 세계에서 보는 바와 같은 한계를 지닌 현상들이 그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가능성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 자체는 어떤 원인도 가지고 있지 않으나, 그로부터는 모든 것이 발전되어 나오는 세계의 질료적 원인 upadana-karana, 혹은 제1원인 pradhana이 되며, 무한한 창조적 힘 sakti이 되는 것이다. 상키야 철학에 의하면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결과도 원인에 이미 내재하고 있어야 한다. 결과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잠재적으로 이미 원인에 존재하고 있던 것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인도 철학에서는 인중유과론 satkarya-vada이라 부른다. 즉 결과 karya가 원인 karana 속에 이미 존재 sat한다고 하는 견해이며, 설일체유부와 같은 소승불교나 나야-바이 쉐시카 철학이 대표하는 인중무과론 asatkaryavada과 대조를 이룬다. 인중유과론을 대표하는 철학 가운데서도 결과를 원인의 참다운 변형으로 보는 전변설 parinamavada이 있는가 하면, 결과를 원인의 환상적 나타남으로 보는 가현설 vivartavada의 인과론도 있다. 전자를 가장 잘 대표하는 것이 상키야 철학이고 후자는 불 이론적 베단타 철학에서 그 전형적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전변설에 의할 것 같으면 진흙 안에 이미 항아리가 보이지 않는 형태이지만 존재하고 있고, 항아리는 진흙의 참다운 변형인 것이다. 반면에 가현설에 의할 것 같으면 진흙만이 유일한 실재이고 항아리는 거짓 나타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키야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는 해체 pralaya와 진화 sarga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고 한다. 해체의 상태에는 만물이 프라크르티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발전되어 나타나지 않는 상태를 말하며, 진화란 프라크르티로부터 모든 현상이 순차적으로 발전되어 나오는 과정을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이 해체와 진화를 되풀이하게끔 하는가? 어찌하여 미현현인 프라크르티는 그 자체로서 해체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진화의 과정으로 넘어가는가? 이 문제에 대한 상키야 철학의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라크르티 자체의 성격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상키야에 의하면 프라크르티는 사트바 sattva, 라자스 rajas, 타마스 tamas라는 세 종류의 요소 guna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요소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그 결과들로부터 추리된 존재들로서, 사트바는 지성, 가벼움, 즐거움, 빛남 prakasaka, 흰 색깔의 성질을 갖고 있으며, 라자스는 힘과 끊임없는 운동, 고통, 빨간색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타마스는 질량, 무거움, 저지, 무지, 무감각과 까만색의 속성을 지녔다고 한다. 세계의 만물의 차이는 프라크르티의 이 세 가지 요소가 어떤 비율로 결합되어 그 중의 어떤 것이 지배적인가 하는 데데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이 세 요소는 서로서로에 영향을 주며, 한계와 형태가 없는 프라크르티의 상태로부터 점점 더 분명한 한계와 형태를 가진 현상세계를 산출시킨다. 만약에 이 세 요소가 꼭 같은 비율로 섞여 있어 완전한 평형 samyavastha을 이루고 있을 때에는 비록 이 요소들 자체는 바삐 운동을 계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요소의 성질도 지배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프라크르티는 아무런 변형도 없이 미현현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프라크르티의 이러한 평형 사태가 깨어지게 되는가? 상키야 철학의 이 문제에 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프라크르티는 단지 푸루샤의 곁에 있게 됨으로써 purusa-samnidhi-matra그 평형이 깨어진다고 한다. 마치 자석이 철을 당기듯이 양자의 접속 samyoga이 있어야만 비로소 세계는 프라크르티로부터 전개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 두개의 이질적인 존재는 접촉을 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상키야는 말하기를 푸루사와 프라크르티의 접촉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푸루샤는 해방 apavarga이나 향수 bhaga, enjoyment를 위하여 프라크르티를 필요로 하며, 프라크르티는 자신을 보고 알며 즐기는 자로서 푸루샤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혹은 장님과 걷지 못하는 절름발이가 서로 협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키야 철학의 설명은 설득력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만약에 상키야 철학에서 주장하는 대로 해설이란 푸루샤와 프라크르티의 분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푸루샤가 해방을 위하여 프라크르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려운 설명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키야 철학은 어떻게 하여 전혀 이질적인 두 개의 형이상학적 실재 사이에 처음부터 접촉이란 것이 가능한가라는 것을 설명해야만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상키야 철학은 그 접촉은 실제상의 접촉이 아니라 다만 그렇게 보일 뿐 이라는 설 samyogabhasa을 내세운다.
여하튼 상키야에 의할 것 같으면 푸루샤와 프라크르티의 접촉에 의하여 프라크르티의 내적 평형상태는 깨어지기 시작한다. 이 접촉에 의하여 제일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은 프라크르티의 삼요소 가운데서 운동의 성질을 갖고 있는 라자스 rajas이다. 이 라자스가 먼저 흔들리기 시작하면 샤트바와 타마스도 따라서 흔들리게 되며 진화의 과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일단 그 균형이 깨어진 프라크리티의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제일 먼저 특정한 성격을 갖고 나타나는 것은 사트바를 그 지배적인 성품으로 하는 붓디 buddhi이다. 붓디는 우주론적으로는 그로부터 다른 모든 물질적 세계가 전개되어 나오기 때문에 (위대한 것 mahat)이라고도 불리고, 심리적. 개인적으로는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기관으로서 붓디, 즉 지성이라고 불린다. 이 붓디는 그 속에 우주가 해체될 때 프라크르티 속으로 잠재해 버렸던 보든 개인적 붓디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붓디들은 과거의 무수한 전생을 통하여 얻은 기억들과 정신적 성향들 samskara, mental disposition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붓디는 어디까지나 프라크르티, 즉 물질의 산물로서 그 자체는 식 cit의 성품을 갖고 있지 않다. 붓디는 그것을 순수식인 푸루샤의 반사작용을 통하여 받는다고 한다. 붓디는 마치 거울과 같아서 푸루샤의 빛이 있을 때만 다른 물건들을 비추게 되어 우리의 정신활동, 인식, 경험 등이 가능하게 된다고 한다. 물론 붓디가 빛을 반사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아주 섬세한 물질, 즉 샤트바의 요소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붓디는 푸루샤와 가장 비슷한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푸루샤에 가장 가까운 존재로서 푸루샤와 프라크르티의 중개 역할을 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경험과 인식 활동은 식을 지닌 푸루샤와 대상과 관계를 맺은 붓디가 상호 협력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경험과 인식의 주체는 푸루샤만도 아니고 붓디만도 아니고 양자의 교섭상태인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상키야 철학의 인식론에 있어서 흥미로운 사실은, 미세한 사유물질인 붓디는 감각 기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사물의 형상 akara을 인지할 때나 혹은 사고행위를 할 때, 그 자신이 대상들의 각기 다른 형태들에 따라 수시로 변화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붓디는 단순히 거기에 들어오는 여러 대상들을 수동적으로 수납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상들에 따라 변모하여 인식과 경험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붓디로부터 아함카라 ahamkara(아만)라 불리는 개체화의 원리가 전개되어 나온다. 심리적으로는 아함카라의 기능은 무엇보다도 자아의식과 아집과 교만 abhimana이다. 푸루샤는 자신을 바로 이 아함카라로 착각하여 스스로를 행위의 자체로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아함카라는 붓디와 마찬가지로 우주적 존재론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의 지배적인 성품이 사트바냐 라자스냐 타마스냐에 따라서 세 가지 방향으로 아함카라는 발전하게 된다. 라자스는 주로 운동의 성품을 지녔으므로 그 자체로는 독립적인 발전을 하지 않고, 사트바와 타마스를 도와서 지배하도록 하는 일만 한다고 한다. 사트바의 힘이 지배적이 되면 아함카라는 내적 감각 기관인 의근 manas과 오지근 jnana-indriya, 즉,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맡는 능력과, 오작근 karma-indriya, 즉 말하고 손을 움직이고, 발을 옮기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능력들을 산출한다. 여기서 근 Indriya이란 말은 눈에 보이는 육체적 기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관을 통하여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힘 sakti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추론 anumana을 통하여 아는 것이지 지각 Pra-tyaksa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상의 프라크르티의 전개물 가운데서 붓디와 아함카라와 마나스 (의근)를 심리기관 antah-karana이라 부르며, 나머지 십근은 외적기관 bahya-karana이라 부른다. 숨 prana은 심리기관의 기능으로 간주된다. 외적 기관은 외부세계를 심리기관에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며, 심리기관의 기능을 위한 조건이 된다. 마나스는 심리기관과 외적 기관의 매개체와 같은 것으로서, 감각 기관을 통하여 들어온 무분별적 nirvikalpa 감각의 소여 sense data를 언어를 매개로 하여 분별하고 종합하고 해석하여 분별적인 savikalpa 판단적('이것은 돌이다', '저것은 빨갛다' 등) 지각으로 바꾸는 작용을 한다. 상키야 철학에 의할 것 같으면, 마나스는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 감각 기관들과 동시에 접촉을 할 수가 있다고 한다(이것은 뒤에 고찰하겠지만, 냐야-바이쉐시카 Nyaya-Vaisesika에서 말하는 마나스에 대한 견해와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마나스의 작용 다음에 아함카라는 지각활동을 '나'라는 개념에 연결시켜 자기 경험으로 만든 다음 붓디 buddhi에 전달한다. 붓디는 감각 기관과 마나스를 통해 들어온 형상들에 따라 변모한다. buddhi-vrtti.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도 인식이 성립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붓디는 어디까지나 프리크르티, 즉 물질의 발전된 상태이며 그 자체로는 식 cit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푸루샤의 빛을 반사하여서만 비로소 지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볼 것 같으면 프라크르티의 존재론적 전개 과정은 인간의 인식 과정과는 정반대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인식의 성립에 관한 관찰과 분석을 통하여 인식의 가능 근거를 이루는 존재요소들을 거꾸로 올라가며 찾는 것이 상키야 철학의 존재론적 사유과정인 것이다.
다른 한편, 중량의 성격을 지닌 타마스가 지배하는 아함카라로부터는 오유 tanmatra, 즉, 음.촉.색.미.향의 본질을 이루는 미세한 물질이 방출된다. 이 오유의 배합에 의하여 오대 bhuta가 산출된다. 즉, 음의 본질로부터는 공 akasa, 음과 촉의 결합으로 풍 vayu, 음.촉.색의 결합으로 화 tejas, 음.촉.색.미의 결합으로 수 ap, 그리고 음.촉.색.미.향의 결합으로 지 ksiti의 오대가 산출되는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오유의 존재는 눈에 보이는 오대의 성질들에 입각하여 그로부터 역으로 추리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오유의 존재를 설정하게 된 것 같다. 이렇게 하여 제1차적인 진화 sarga의 과정이 끝나고 오대의 여러가지 결합에 의하여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세계의 다양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프라크르티는 그 내적 균형이 깨어진 후 붓디로 발전한 다음, 한편으로는 아함카라에서부터 11개의 근으로 발전하는 내적 전개와, 오유를 거쳐 오대로 발전하는 외적 전개 과정을 거쳐 현상세계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아함카라와 오유는 더 특정 지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기 때문에 무결정자 avisesa라 하며, 십일근과 오대는 이미 특정지어져 있기 때문에 결정자 visesa라 부른다. 또한 붓디와 아함카라와 마나스는 오유와 함께 인간의 세신 linga-sarira, subtle body을 이룬다고 한다. 세신이란 우리의 육체가 파괴되는 때에도 계속해서 존속하여 또 다른 몸으로 태어나게 되는 윤회의 주제가 되는 몸이다. 이 세신은 그 안에 과거와 현세의 업을 통하여 형성된 우리의 정신적 성향 samskara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즉 덕 dharma과 악 adharma, 지혜 jnana와 무지 ajnana, 격정 vairagya, 무욕 avairagya, 초자연적 힘 aisvarya, 약함 anaisvarya의 8가지 성향들이다. 세신은 이러한 성향에 따라 그것에 알맞는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마치 연극배우가 여러가지 역할을 하듯이 이 세신은 여러형태의 몸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상키야 철학에 의하면 이상과 같은 프라크르티의 전개 과정은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어떤 목적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즉 푸루샤의 형수 bhoga나 해방 apavarga을 위한 목적론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푸루샤에 관한 상키야 철학의 이론을 검토해 보자.
4 정신
프라크르티는 세계의 질료적인 원인은 되나 결과는 아닌 존재인 반면에, 푸루샤는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닌 어떤 존재이다. 상키야 철학은 이 푸루샤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유물론적인 철학이 되지 않는 것이다.
푸루샤는 영원하고 무한하며 부분과 성질들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아트만이나 브라흐만과는 달리 상키야 철학은 푸루샤가 무한히 많은, 그러나 본질적 차이는 없는 개별자적 존재들이라고 한다. 이 푸루샤는 순수한 식, 혹은 방관자로서 결코 대상화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며, 우리의 모든 지식이 성립되는 근저에 깔려 있으나, 대상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지식에 의하여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붓디이지 푸루샤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키야에 의하면 푸루샤의 존재도 프라크르티처럼 추론 anumana에 의하여 알려지는 존재라고 한다. 상키야는 푸루샤의 존재에 관하여 여러 가지 증명을 한다. 물질적 세계는 앎이 없으므로 그것을 경험하는 어떤 원리를 필요로 한다. 즉, 대상은 주체를 필요로 하며, 이 주제는 푸루샤인 것이다. 또한 인간에게는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종교적 갈망이 있다. 그리고 이 벗어남은 벗어나고자 하는 것, 즉 물질의 세계와는 다른 어떤 존재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또한 프라크르티의 세계에 있는 모든 부분들로 구성된 사물들에게서 발견되는 목적과 수단의 일치는 어떤 의식적인 존재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상키야는 푸루샤를 이러한 자연질서의 계획자 designer로서 이해하는 것은 아니나, 이러한 의도적 질서의 혜택을 받는 의식적인 존재로 이해한다.
우리는 여기서 무신론적인 상키야 철학과 유신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요가 철학의 차이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키야와 요가는 둘 다 프라크르티가 전개되는 과정 속에 일정한 질서와 합목적성이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원래 지성을 갖고 있지 안은 맹목적인 프라크르티의 어디서 그런 질서와 조화가 생기게 되는 것인가이다. 이 점에 관하여 상키야는 프라크르티 자체가 푸루샤에게 봉사하려는 목적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그 전개 과정에 있어서 아무런 외부적 힘의 작용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요가철학은 프라크르티에는 지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런 목적성을 가질 수 없으며, 더군다나 그 전개 과정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가 행한 업에 합당한 업보를 받도록 전개할 수 있는 것은 프라크르티 자체만으로는 설명이 안된다고 한다. 따라서 요가철학은 전지전능한 신 이슈바라 Isvara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 신의 영원한 의지에 따라서 프라크르티의 전개 과정은 인도되며 푸루샤의 이익이 보호되고 실현된다는 것이다.
본래 '요가경' 자체 내에서는 신은 실제적인 기능과 활동은 하지 않고 다만 영원히 속박을 모르는 푸루샤로서 요가행자들의 명상의 대상이 되는 존재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주석가들에 와서는 이러한 비활동적인 신의 개념에 만족하지 않고 점점 더 그를 활동적인 존재로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뱌사 Vyasa는 신을 미세한 물질로 몸을 삼아 종교적 교훈도 주며 은총으로 신자들의 구원을 도우기도 하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으며, 바차스파티미슈라는 세계의 주기적인 진화와 해체, 그리고 우주의 도덕적 법칙을 관장하며 베다를 계시하는 자로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5 해탈론
그러면 푸루샤의 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문제를 살피기 위하여 우리는 우선 무엇이 상키야 철학에 있어서 속박의 상태인가를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미 프라크르티는 해체와 진화의 과정을 끓임없이 반복하고 있음을 얘기했다. 이 프라크르티의 전개의 시작은 프라크르티와 푸루샤의 접속 samyoga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특히 푸루샤는 프라크르티의 최초의 전개물인 붓디와 가장 가까와서, 그 양자의 교섭상태에서 경험과 인식이 가능해지며, 따라서 모든 욕망과 업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붓디는 푸루샤가 프라크르티에 혼입되게 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접촉 혹은 혼입은 실제상의 섞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푸루샤는 본성상 순수한 의식으로서 언제나 자유로우며 프라크르티의 방관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지로 인하여 푸루샤가 붓디로 착각되어 마치 붓디가 겪는 모든 마음의 상태들을 푸루샤가 체험하는 것으로 오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상키야 철학에 있어서의 속박이란 푸루샤와 붓대를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무지를 말하는 것이다. 붓디는 사트바의 성질을 지배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주 섬세한 물질이어서, 푸루샤의 빛을 반사하여 마치 그 자체가 의식이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붓디의 상태가 푸루샤가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키야 철학에서 말하는 무지인 것이다.
요가철학은 좀 더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를 우리가 붓디의 상태를 마치 푸루샤인 양 간주하는 것이 무지라 한다. 푸루샤는 본래 순수식으로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으며 변화를 겪지 않는 존재이다. 그러나 대상에 따라 변하는 붓디의 비추어진 상태들과 혼동되기 때문에 푸루샤가 자체가 인식과 경험의 주체로서 변화를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아무런 형태도 없는 철구의 불이 둥근 형태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가 하면, 차가운 쇳덩어리가 뜨겁게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혹은 달이 흔들리는 물결에 비치게 되면 마치 달 자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며 물 자체가 빛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고 한다. 따라서 푸루샤와 붓디를 분명히 구별하는 분별지 viveka-jnana가 해탈에 필수적인 요건이 되는 것이다.
상키야 철학에 의하면 이러한 분별지의 가능성은 붓디 자체 내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프라크르티는 푸루샤의 해방이라는 영적인 목적을 위하여 부단히 활동하고 있으며, 프라크르티는 본래 푸루샤를 속박하려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결국 해설과 속전은 모두 프라크르티 자체 내의 사건이며 붓디가 그 관련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붓디 내에 이러한 분별지가 생기게 되면, 붓디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인식과 행위도 그치게 되며 푸루샤도 그 본래의 모습인 순수한 독재 kaivalya의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수론송'의 저자 이슈바라크리쉬나 Isvarakrsna는 말하기를 프라크르티는 매우 수줍은 무희와도 같아서, 일단 푸루샤라는 방관자가 자기 춤을 쳐다보고 있다는 의식이 생기면 춤을 그치게 된다고 한다. 푸루샤는 프라크르티를 일단 보고 나면 모든 흥미를 잃어버리고 프라크르티는 푸루샤에 보여졌다고 생각하면 모든 행위를 그치게 된다는 것이다.
요가철학에서는 이 붓디에다가 아함카라 ahamkara와 의근 manas을 포함시켜서 심 citta이라 부른다. 심은 그 안에 전생에서 경험한 경험들의 자취 samskara나 인상 vasana들, 혹은 업의 공과들을 지니고 있는 윤회의 주체로서, 이들 잠재적인 힘들이 현세나 내세에서 적당한 조건들을 만나면 환생하게 된다고 한다. 요가철학은 이 심의 잠재적인 힘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상키야 철학에서처럼 푸루샤의 해방을 단순히 분별지만으로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심 속에 잠재해 있는 모든 과거의 습관적인 힘들이 제거되어 심이 푸루샤처럼 순수한 상태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습관적인 힘과 업의 자취를 생성하고 있는 심의 모든 작용들이 그쳐야만 citta-vrtti-nirodha 해설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요가철학에 의하면 심은 다섯 가지의 습관적인 힘 혹은 번뇌 klesa에 의하여 침투되어 있다고 한다. 즉 무명 avidya, 아견 asmita, 탐 raga, 증 dvesa, 현탐(현탐이란 현세의 향락에 집착하여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말한다)인데, 이 중에서 무명이 힘이 가장 크며, 나머지 4가지 번뇌를 낳게 된다. 이들 번뇌에 의하여 우리는 업을 짓게 되며, 우리가 행한 업은 또 심 속에 그 자취와 영향을 남기게 되어 우리는 후에 그에 상응한 업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요가철학은 우리의 심작용을 5종류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정지 pramana, 부정지 viparyaya, 분별지 vikalpa, 수면 nidra, 기억 smrti이다. 정지는 지각 pratyaksa과 추론 anumana과 증언 sabda의 세 가지 타당한 인식의 방법으로부터 오는 지식이고 부정지는 적극적으로 틀린 지식을 말한다. 분별지는 대상이 존재함이 없이 순전히 말해 의해서만 아는 지식, 예를 들면 '토끼의 뿔'과 같은 것이고, 수면이란 인식의 부재를 뜻하는 것으로서 이것도 심작용의 하나로 간주된다. 마지막으로 기억은 남겨진 인상을 통하여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심작용들과 전에 축적되었던 습관적인 힘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요가철학은 구체적인 수행방법으로서 8가지 단계로 구성된 팔지 요가 astanga-yoga를 제시한다. 즉 금제 yama, 권제 niyama, 좌법 asana, 조식 pranayama, 제감 pratyahara, 집지 dharana, 정려 dhyana, 삼매 samadhi로서, 이 중에서 처음 다섯은 나머지 셋을 위한 준비 단계로 간주되며, 요가의 궁극목표는 모든 심작용이 그친 삼매 samadhi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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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승론학파의 철학
1. 승론철학의 전통
상키야와 요가철학이 같이 가듯이 승론 Vaisesika철학9)은 보통 정리 Nyaya학파의 철학과 함께 논의되어 왔다. 어느 때부터 이 두 학파가 같이 취급되게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두 학파는 처음부터 근본적인 세계관에 있어서 일치한다고 생각하여, 서로 상자 관계를 이루어 온 것으로 보아 왔다. 승론학파는 주로 세계의 형이상학적 구조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학파인 데 반하여, 정리학파는 이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논리학과 인식론을 통하여 뒷받침해 주는 학파이다. 인도의 다른 모든 정통학파들이 불교를 비판해 왔지만, 그중에서도 이 두 학파는 극단적인 실재론적 입장을 대표하는 철학으로서 불교의 철학적 입장과 정면으로 대립하여 왔다.
승론과 정리는 비록 바라문계의 정통 육파로서 간주되어 왔지만 실제상에 있어서 이 두 학파의 정통성은 오히려 다분히 명목적인 것이다. 베단타나 미맘사, 그리고 상키야.요가학파가 분명히 베다의 철학적 사상에 근거하고 있는 반면에 승론과 정리학파는 베다나 그 후의 종교적 문헌들인 서사시나 푸라나 Purana 같은 것에 분명히 그 기원을 찾기 어려운 철학이기 때문이다.10)
우선 승론학파의 주요 철학적 문헌들을 살펴볼 것 같으면, 카나다 Kanaka라고 하는 아마도 가공적 인물의 저서로 전해지고 있는 '승론경 Vaisesika-sutra'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서력기원 1-2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내용은 극히 간결한 격언조로 된 철학적 진술들을 모아놓은 것으로서 다른 학파의 근본 경전들처럼 주석이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있다. 승론철학의 결정적인 체계적 정립을 한 것은 서력기원 500년경에 씌어진 프라샤스타파다 Prasastapada의 '구의법강요 Padar-tha-dharma-samgraha'로서, 형식상으로는 '승론경'에 대한 주석으로 되어있지만 실제상에 있어서는 하나의 독자적인 논서이다.11)
프라샤스타파다의 논서에 관해서는 뵤마쉬바 Vyomasiva(900~960년경)의 '여허공 Vyomavati', 슈리다라 Sridhara(950-1000년경)의 '정리파초수 Nyayakandali' 그리고 우다야나 Udayana(1050-1100년경)의 '광휘연속 Kiranavali'와 같은 주석서들이 씌어졌다. 또한 이 무렵 승론과 정리철학을 함께 섞어서 취급하는 쉬바아디티야 Sivaditya의 '칠구의론 Saptapadarth'eh TmldjwuTek.12) 이제 '승론경'과 프라샤스타파다의 '수의법강요'를 중심으로 하여 승론철학의 대강을 샬펴보기로 한다.
2 육범주
승론철학은 세계를 여섯 가지 범주 padartha(구의)로 구별하여 분석한다. 여기서 범주라 함은 단순히 추상적인 관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관념들에 해당하는, 실제로 존재하며 언표할 수 있는 지식의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승론철학은 세계를 여섯 가지 측면으로 구성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첫째 범주는 실체 dravya다. 실체란 거기에 어떤 성질이나 행위가 속할 수 있는, 즉 성질이나 행위의 근저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이다. 또한 실체는 어떤 물건들의 질료적 원인이 되는 것이다. 승론에 의하면 실체에는 9가지가 있다. 즉 지 prthivi, 수 ap, 화 agni, 풍 vayu, 공 akasa, 시간 kala, 공간 dis, 의근 manas, 자아 atman이다. 지, 수, 화, 풍, 공은 5가지 물질적 요소 panca-bhuta로서, 5가지 외적 감각 기관에 의하여 각각 지각될 수 있는 고유의 특수성질 visesa-guna들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흙은 코에 의하여 지각되는 냄새의 성질을 지녔고, 공은 귀에 의하여 지각되는 소리의 성질을 지녔다고 본다. 지. 수. 화. 풍은 그것들을 구성하는 미세한 원자 paramanu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 원자들은 무수히 많으며 부분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나눌 수도 없고, 생성도 될 수 없고 파괴도 될 수 없는 영원한 nitya 존재들인 반면에, 이들로 구성된 지. 수. 화. 풍은 생성 소멸될 수 있기 때문에 영원하지 못하다 anitya. 승론에 의하면 원자에는 지.수.화.풍을 구성하는 이질절인 4가지 종류가 있고, 개개의 원자들도 각각 양과 질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고 한다. 공 akasa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승론에 의하면 실체가 외적으로 지각되려면 크기와 나타나는 색깔이 있어야 하는데, 공은 그렇지 않으므로 지각될 수 없다. 그러나 소리라는 성질이 속해야 하는 어떤 실체로서 그 존재가 추리되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간 kala과 공간 dis은 공과 마찬가지로 지각될 수 없고 추리로 아는 실체들로서, 각각 하나이며 영원하고 모든 것에 편재하는 것이다. 즉 시간은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 젊음. 늙음 등을 인식하는 근거로서, 추리된다. 공과 시간과 공간은 비록 눈으로 볼 수 없는 통일적 실체들이지만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주는 제한적 조건들 upadhi 때문에 다수의 부분적인 존재들인 것처럼 흔히 말하여진다고 한다. 예를 들면 방이라는 제한적 조건 때문에 방의 공간이라는 개념이 생겨, 원래는 하나인 공간이 마치 부분적인 존재들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자아 atman 혹은 영혼은 우리의 의식현상의 밑바닥을 이루는 실체로서 영원하고 편재적이다. 영혼에는 개인 영혼 jivatman과 최고 영혼 paratman, 즉 신 Isvara의 두 종류가 있다. 신은 하나이며 세계의 창조자로서 추리되는 존재이다(신의 존재증명은 정리철학에서 다룰 것임). 신은 전지한 영혼으로서 모든 고통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다. 개인 영혼은 하나가 아니라 많으며, 그들이 속한 몸에 따라 각각 다른 특수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개인 영혼은 의근 manas과 관계되어 있지만 않는다면 본래 신과 같이 고통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고 한다. 영혼은 의지, 욕망, 기쁨,
아픔 등의 여러 가지 정신적 상태들이 속하는 실체로서, '나는 안다', '나는 원한다' 등의 표현으로부터 우리는 자아가 의식이 속하게 되는 바의 실체인 것을 알 수 있다고 산다. 그러나 승론철학은 상키야나 베단타철학과는 달리 식 cit을 영혼의 본질적인 성격으로 보지 않고 우연적인 성질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깊은 수면의 상태에 빠질 때에는 우리의 영혼은 식의 성질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승론철학은 의근 manas이라는 것을 독립된 실체로 인정한다. 의근은 우리의 내적 감각 기관 antarindriya으로서, 승론에 의하면 우리의 외적 감각 기관들이 외적 대상들을 지각하듯이 영혼의 여러 상태들과 같은 내적 대상들을 지각하는 어떤 내적 감각 기관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근인 것이다. 즉 우리의 자아는 외적 감각 기관을 통하여 외계의 사물들과 상대하며 의근이라는 내적 감각 기관을 통하여는 자신의 상태들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외적 감각 기관들은 항시 그 대상들과 접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들이 동시에 다 지각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지각 활동을 한 번에 하나씩으로 제한하는 어떤 요인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것이 의근의 기능으로서, 지각이란 의근의 주의가 감각 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대상으로 향해져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의근은 감각 기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대상 세계와 자아와의 사이에 위치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통하여 자아는 세상과 접촉을 하며 인식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근은 일종의 미세한 원자와 같아서 아무런 부분을 갖고 있지 않은 영원하고 통일적인 존재라고 한다. 만약에 마나스가 부분을 갖고 있다면, 그것의 활동도 분화될 수 있으며 우리는 많은 대상을 동시에 지각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각 자아는 각자의 의근과 관계하고 있으며 이 의근이 우리의 자아에다 개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의근은 윤회의 과정을 통하여 자아를 동반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승론철학의 6범주 가운데서 실체 dravya의 개념을 살펴보았다. 승론철학의 둘째 범주는 성질 guna이다. 성질은 언제나 실체에 속하여서만 존재하며 그 자체는 아무런 성질이나 행위를 갖고 있지 않다. 성질은 어떤 사물의 성격이나 본성은 결정할 수 있으나, 그것의 존재와는 무관하다. 또한 행위와는 달리 성질은 실체의 움직이지 않는 수동적이고, 정적인 속성이다. 승론은 가장 기본적인 성질을 24종(색, 말, 수, 연장 등)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각종을 더욱 더 세분하여 고찰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승론은 세번째 범주로 행위, 혹은 연동 karma을 든다. 행위는 성질과 마찬가지로 실체를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나, 성질과는 달리한 실체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타 실체와 접하거나 떨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는 원리이다. 행위는 물론 어떤 성질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성질은 실체에만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 시간, 공간이나 영혼과 같은 편재적인 실체들은 운동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제한된 물체적 실체, 즉 지 수, 화, 풍, 의근에만 운동이 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런 무제한한 것은 위치를 바꾸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승론은 행위를 다섯 가지로 분류 하는데 상투 utksepana, 하투 avaksepana, 굴 akuncana, 신 prasarana, 행 gamana 등이다. 네 번째 범주는 보편 samanya이다. 즉, 한 사물을 다른 이름이 아닌 그 이름으로 부르게 하는 근거가 되는 공통적이고 본질적인 실재를 말한다. 유명론적인 견해와는 달리 승론에 의하면 보편은 단순히 우리 마음의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사물에 내재하는 실재이다. 보편은 개물에 내재하며 그들이 가지는 공통성에 대한 관념, 즉 류개념의 기반이 된다. 보편은 그 범위에 따라 가장 높은 보편, 즉 유성 satta의 5개념과 가장 낮은 보편,즉 고양이성 같이 일류의 사물 안에 국한된 보편, 그리고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보편, 예를 들면 실체성 dravyata과13) 같은 것으로 구분된다. 보편은 실체와 속성과 행위의 범주에만 내재한다.
보편이 사물의 공통성을 설명해 주는 것임에 반하여 승론의 5번째의 범주인 특수성은 부분을 갖지 않는 영원한 실체들 즉, 시간, 공간, 공, 의근, 영혼, 원자 등의 궁극적인 특수성 혹은 차이점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부분을 갖고 있는 사물들의 차이점은 부분들의 차이에 의하여 설명이 되지만, 부분이 없는 실체들의 차이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수성에 의하여야만 설명이 된다고 한다. 이 특수성은 영원한 실체들 속에 존재하므로 그 자체가 영원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승론철학은 내재 samavaya라는 범주의 실재성을 말한다. 승론에서는 사물과 사물간의 관계에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연결 samyoga, conjunction이고 다른 하나는 내재 samavaya, inherence이다. 연결이란 한 사물과 다른 사물 사이의 잠정적인 외적 관계로서 그것이 없어도 그 사물은 존재할 수 있다. 연결이란 따라서 두 실체들이 가지는 우연적 성질 혹은 속성으로 간주된다. 반면에 내재의 관계는 영구적이고 불가분리의 관계로서 전체와 부분, 실체와 성질들과 같이, 하나가 다른 하나 안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관계인 것이다. 내재는 승론에 의하면 지각될 수 없으나, 정리철학에서는 지각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상과 같은 여섯 가지 범주 외에도 '승론경'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10세기 이후의 승론철학의 저서들은 일곱번째의 범주 Padartha로서 부존 abhava을 들고 있다.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실재의 한 면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과 언어 pada는 대상 artha이 있게 마련이며 대상은 지식과는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므로 부존이라는 것도 부존을 아는 지식과는 별도의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승론철학은 네 가지 종류의 부존을 구별한다. 첫째는 전부존 pragabhava, 즉 어떤 사물의 생성 이전의 부존이다. 둘째는 후부존 pradhvamsabhava, 즉 사물의 파멸 후의 부존이며, 셋째는 상호부존 anyonyabhava, 즉 한 사물이 다른 어떤 사물로 존재하지 않음으로써의 부존이다. 넷째는 절대부존 atyantabhava, 즉 '토끼의 뿔', '허공의 꽃' 등과 같은 부존이다. 전부존이 없다면 모든 사물들이 시작이 없을 것이고, 후부존이 없다면 모든 사물이 영원할 것이고, 상호부존을 부인하면 사물들의 구별이 없어질 것이며 절대부존이 없다면 모든 사물들이 항상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게 된다는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승론철학은 이상과 같은 7가지의 범주들을 단지 알아야 하는 지식의 객관적인 대상 padartha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들은 실재의 7가지 측면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서, 승론철학은 이 범주론에 의하여 다양한 세계의 모습을 파악하고 있는 다원적 실재론의 철학이다. 상키야 철학의 이원론이나 베단타철학의 일원론적인 세계관과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3. 신 불가견력, 해탈
승론철학도 인도의 전통적 세계관인 세계의 주기적인 창조와 해체를 받아들인다. 원자들의 결합과 해체에 의하여 물질세계는 창조되고 해체되는 것이다. 초기의 승론사상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듯하나 후에 와서는 세계의 도덕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하여 신의 존재를 받아들였다.14) 즉 원자의 결합과 해체는 맹목적이고 우연적인 과정이 아니라 온 우주의 대주재자 Mahesvara인 신의 창조와 파괴 의지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 의지는 도덕적인 경륜을 배려하여 '불가견력 adrsta'이라고 불리는 개인 영혼들의 보이지 않는 도덕적 공과에 따라서 그들에게 합당한 경험을 하도록 원자들의 운동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신은 이 영원한 원자들을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지성을 결여한 맹목적인 원자들을 도덕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세계의 능동인이며 질료인은 아니다. 승론철학에 의할 것 같으면 원자는 그 자체로서는 운동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며, 오히려 개인의 영혼들 안에 존재하고 있는 불가견력에 의하여 운동이 전달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불가견력 그 자체도 지성이 없는 맹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지성적인 신이 있어서 원자들의 운동을 도덕법칙에 따라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원자론에 입각한 승론철학은 서양철학에서처럼 유물론적인 결론으로 가지 않고 인도인 일반이 가졌던 도덕적 세계관에 적응하는 유신론적 원자론을 전개한 것이다.
인도의 다른 모든 학파들과 마찬가지로 승론철학도 자아의 해방에 그 최종목표를 두고 있다. 자아의 해방이란 자아가 아무런 속성이나 성질들을 지니지 않고 순수하게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또한 그 안에 내세에서의 업보를 초래하는 어떠한 불가견력도 남아 있지 않게 된 상태를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승론철학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자아의 본성이나 원자의 이론 등을 바로 알면, 이러한 지식은 우리의 모든 이기적 욕망과 행위들을 제거하게 된다고 한다. 승론철학은 인간의 행위를 자발적인 것과 자발적이 아닌 것으로 구별하며, 자발적인 행위는 욕망과 염악 dvesa에 근거한 행위로서, 이것만이 도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해탈이란 이러한 자발적인 행위가 모두 그쳐서 새로운 도덕적 공과가 축적되지 않고 과거에 축적된 공과가 서서히 진하여 버린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아는 아무런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를 느끼지 않고 어떠한 의식도 없는 상태가 된다. 모든 속성을 떠나서 실체로서의 자아가 그 자체로서 존재할 따름인 것이다.
승론철학의 인식론은 현량, 즉 지각 pratyaksa과 비량, 즉 추론을 지식의 두 가지 타당한 방법으로 간주한다. 베다의 권위는 인정하지만 정리학파처럼 베다를 하나의 독립적인 타당한 지식의 방법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베다에 나타난 진술들의 타당성은 그 저자들의 권위적인 성격으로부터 추론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교량(성스러울 성, 가르칠교)은 추론의 일종인 것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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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정리학파의 철학
1 정리철학의 전통
정리 Nyaya학파의 철학체계는 전통적으로 가우타마 Gautama 혹은 안족 Aksapada이라는 사람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한다. 그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서력 기원전 1~2세기의 사람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정리경 Nyaya-sutra'은 기원후 2세기경에 편찬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정리경'에 대한 현존하는 중역서 가운데서 가장 오래되며 권위 있는 것은 밧샤야나 Vatsyayana(450~500년경)에 의한 '정리소 Nyaya-bhasya'이며, 이 소는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다른 주석서들을 낳았다. 비록 '정리경'은 2세기 전후에 씌어졌다고 하나, 올바른 사고의 형태와 논증의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이 학파의 연원은 훨씬 더 멀리 소급된다고 볼 수 있다. 정리 nyaya란 말은 아마도 원래는 베다시대 이후에 점차로 잃어버리게 되었던 제식의 올바른 규범을 추리해내고 논증하는 것을 의미했다. 천문, 문법, 법률 등과 같은 인도의 많은 학문들이 베다의 연구를 기초로 하여 발전된 것과 같이 정리학도 원래는 베다의 연구와 관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미맘사 Mimamsa학파가 제식의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룸에 따라 정리는 학문의 일반적인 논증 방법만을 추상적으로 다루는 형식논리학 쪽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정리는 다른 이름으로 사택 tarka 혹은 심구 anviksiki라고도 불리었다. 우리는 '가우타마법전 Gautamadharma-sutra', '마누법전 Manavadharma-sastra', 카우틸리야 Kautilya의 '실리론 Artha-sastra'과 같은 고대 문헌들에서 그러한 학문의 공부가 정치나 법의 수행을 위해서 권장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밧샤야나의 '정리소'에 대한 주석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6세기경의 웃됴다카라 Uddyotakara에 의해서 씌어진 '정리평역 Nyaya-varttika'으로서 웃됴다카라는 불교의 세친 Vasubandhu과 진나 Dignaga의 설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그들을 반박하고 있다. 이후 약 300여년간에는 정리학파의 저술로서 이렇다 할 만한 것이 별로 전해지는 것이 없으나 샨타락시타 Santaraksita나 카말라쉴라 Kamaasila와 같은 8세기의 불교철학자들의 저서를 통하여 이 동안의 정리학파 사람들의 견해를 엿볼 수도 있다. 다음으로 정리철학의 중요한 인물로는 인도서북부의 카쉬미르지방 출신인 브하사르바즈나 Bhasarvajna(850~920 AD)가 있다. 그의 저서 '정리정요 Nyayasara'는 정리철학을 간략히 요약해 주는 대표적인 저서이고 그의 '정리장사 Nyayabhusana'은 '정리정요'에 대한 주석으로서 정리학파 내에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던 대저이다. 최근에야 비로소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15) 정리철학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학파들의 철학에도 대표적인 저술들을 남긴 바차스파티미슈라 Vacaspatimisra(9세기)16)는 웃됴다카라의 '정리평역'에 대한 주석서인 '정리평역진의주 Nyayavarttika-tatparyatika'를 썼고, 우다야나 Udayana(1050-1100)는 이 주에 대한 복주로서 '정리평역진의주해명'을 썼다. 우다야나는 많은 현대의 학자들에 의하여 정리와 승론철학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서 간주되고 있다. 그의 다른 저서 '자아진리분별 Atmatattvaviveka'은 불교의 무아설에 대한 비판으로서 자아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으며, 그의 '정리 화속 Nyayakusumanjali'은 냐야-바이쉐시카 철학에 있어서 신의 존재의 증명에 대한 결정적인 저술로 여겨지고 있다. 우다야나의 철학은 그후 냐야-바이쉐시카 학파를 풍미하다가 14세기에 와서 간게샤 Gangesa가 출현하여 '진리여의주 Tattvacintamani'라는 논리학서를 써서 소위 신정리학 Navya-nyaya의 기초를 수립했다. 신정리학은 주로 까다롭고 기술적인 논리의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형식논리학파로서 여기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2 지식의 의미와 방법
'정리경'은 정리철학이 다루어야 할 문제들을 16가지로 분류하여 언급하고 있다.
참된 지식의 수단인 량 pramana, 지식의 대상인 소량 prameya, 불확실한 의심의 상태인 의혹 samsaya, 토의가 지향하거나 피하려는 목적 prayojana, 추리에 도움이 되는 적절한 예 drstanta, 옳다고 받아들이는 정설 siddhanta, 추리의 5가지 단계를 구성하는 명제들인 지분 avayava, 가설적 논법을 통한 논파 tarka, 정당한 논의를 통하여 도달한 확실한 지식으로서의 결정 Nirnaya, 인식의 수단과 논리의 전개를 통하여 진리에 도달하려는 논의 vada, 승리만을 일삼는 부정한 논쟁 jalpa, 상대방의 논파만을 목적으로 하는 논결 vitanda, 추리에 있어서 타당한 이유같이 보이나 사실은 틀린 이인 hetvabhasa, 상대방의 주장이나 논리를 왜곡시켜 비난하는 기변 chala, 상대방을 혼란시키는 부단한 논란인 오란 jati, 논쟁에 있어서 상대방을 패하게 만드는 약점 혹은 부처 nigraha-sthana등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정리철학의 주요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인식과 논리전개의 문제들임을 알 수 있다. 승론철학에서 말하는 7가지 범주는 모두 2번째의 것, 즉 수량 prameya에 포섭되며, 정리철학은 이 소량보다는 량 pramana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철학이다.
정리철학은 지식 jnana을 인지 upalabdhi(혹은 anubhava; apprehension)로 정의하며, 모든 지식은 대상의 계시나 나타남 arthaprakaso-buddhi이라고 한다. 지식은 자아가 자아가 아닌것, 즉 대상들과 접촉할 때 생기는 것으로서, 자아의 본질적인 성품은 아니다. 타당한 지식 prama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는 것 yathartha-anubhava이며, 진리란 대상과의 일치를 말한다. 올바른 인식은 성공적인 행위 pravrtti-samarthya로 이끌며, 그릇된 인식은 실패와 실망으로 이끈다고 한다. 정리철학에 의하면 인식의 옳고 그름은 자명한 것이거나 혹은 지식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성품이 아니라, 일단 지식이 생기고 난 후에 대상과의 일치와 불일치에 따라 별도로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진리의 내용은 대상과의 일치이고, 진리의 시험기준은 성공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정리의 인식론은 따라서 실재론적이고 실용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리철학은 타당한 지식 prama의 수단 pramana으로서 현량 혹은 지각 pratyaksa; perception, 비량 혹은 추론 anumana; inference, 경유량 혹은 비교 upamana; comparison, 그리고 성교량 혹은 증언 sabda; testimony을 인정한다. 이들을 통하여 얻은 지식은 대상에 관한 확실하고 충실한 오류가 없는 지식이며, 의심 samsaya, 오류 viparyaya, 가설적 논파 tarka나 혹은 기억 smrti에 의하여 얻은 타당치 못한 지식 aprama과 구별해야 한다. 의심이란 확실치 못한 지식으로서 타당한 지식이 못 되며, 오류란 확실한 지식이 될지언정 대상에 충실치 못한 지식이다. 가설적 논파란 예를 들면 '만약에 불이 없으면 연기가 안 났을 것이다'라는 형식의 가설적 논증으로서 자기가 이미 추론, 즉 '연기가 있으니까 불이 있다'라는 추리를 통하여 얻은 지식을 옹호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지식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다. '불이 있다'라는 사실은 추론을 통하여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설적 논파는 타당한 지식이 못 된다고 한다. 기억이란 대상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을 주지 않고 단지 과거에 가졌던 지식을 재현시켜 주기 때문에 타당한 지식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과거의 타당한 지식을 재현시켜 주느냐 혹은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서 그 자체가 타당한 기억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정리철학에서 말하는 타당한 지식이란 이미 언급한 대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지 anubhava하는 것으로서, 기억에 의한 재현적 지식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타당한 지식 prama이란 지각과 추론과 비교와 증언의 4방법 pramana을 통한 대상의 인지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4가지 방법을 하나하나 고찰해 보자.
3 지각의 이론
정리철학은 지각 pratyaksa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 보통 laukika 지각이요, 다른 하나는 특수 alaukika지각이다. 보통 지각은 우리의 감각 기관과 대상과의 접촉에서 생기는 참다운 지각을 말한다. 우리의 감각 기관에 여섯이 있으므로 보통 지각도 여섯 종류가 있다. 즉 안, 이, 비, 설, 신의 다섯가지 외적 감각 기관 bahyaindriya과 각각의 대상들과의 접촉에서부터 생기는 시각 caksusa, 청각 srauta, 후각ghranaja, 미각 rasana, 촉각 sparsana이 있고, 여섯 번째의 감각 기관으로서 마나스 manas;, 즉 의근이라는 내적 기관 antarindriya을 통하여 자아의 여러 상태들, 즉 욕망, 혐오, 쾌락, 고통, 지식 등을 지각하는 내적 manasa 지각이 있다. 외적 감각 기관들은 각각 그들에 의하여 지각되는 대상들의 물질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의근 manas은 물질적 요소 bhuta들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그 기능에 있어서 외적 기관들처럼 어떤 한 종류의 사물의 인식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모든 종류의 지식에 공통적이고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정리철학에 의할 것 같으면 우리의 외적 감각 기관이 대상과 접촉할 때면 반드시 의근이 먼저 그 감각 기관들과 접촉하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의근이 인식주체인 자아 atman와 접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여 의근은 자아와 감각 기관들 사이의 중개자와 같은 것으로서, 의근과 감각 기관을 통하여 외적 대상은 자아에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지각적 지식은 자아의 상태 혹은 속성인 것이다.
정리철학은 보통 지각의 두 단계 혹은 두 양태를 구별한다. 즉 무분별적 지각과 분별적 지각이다. 무분별적 지각이란 어떤 대상을 그 대상의 성격에 대한 아무런 의식이나 판단 없이 감지하는 지각인데 반하여, 분별적 지각은 대상을 그 성격에 대한 의식과 판단을 가지고 지각하는 것을 말한다. 분별적 지각은 무분별적 지각의 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라 한다. 정리철학은 재인식 re-cognition, 즉 어떤 대상을 전에 지각했던 무엇으로 인지하는 것도 또 한 종류의 지각으로 간주한다.
특수 alaukika 지각이란 그 대상이 특별한 것이어서 보통의 지각과는 달리 특별한 수단을 통하여만 감각 기관에 주어지는 것이다. 정리철학은 이러한 특수지각에 3종을 들고 있다. 첫째는 보편상의 지각이다. 보편상이란 한 류에 공통된 성질 혹은 보편적 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보편상의 지각을 통하여 우리는 한류에 속한 특수한 사물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성격을 지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정리철학에 의하면 보편은 특수 안에 내재하고 있는 실재이다.17) 따라서 사물의 지각에서 우리는 특수만을 지각할 뿐만 아니라 이와 더불어 특수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 성질인 보편상도 지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을 지각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특수한 모습이나 성품만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내재하여 있는 인간성 일반도 특수지각을 통하여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종류의 특수지각은 지상을 통한 지각이다. 우리가 흔히 '독이 무거워 보인다' 혹은 '얼음이 차가와 보인다'라고 말할 때 '무겁다', '차다'는 눈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나 그렇게 말한다. 이러한 지각은 과거에 가졌던 찬 얼음의 지식을 매개로 하여 현재의 얼음이 차다고 보는 것으로서 일종의 특수지각이라 한다. 세번째로 정리철학은 요가의 수련 yogabhyasa에 의하여 얻어진 신통력에 근거하여 과거와 미래의 사물들, 혹은 특징하거나 숨겨진 것들을 직관적으로 지각하는 지각을 특수지각으로 들고 있다. 요가에 의한 yogaja 지각인 것이다.
4 추론의 논리
정리철학은 두 번째의 인식의 방법으로서 추론 anumana을 들고 있다. 추론에 관한 이론은 정리철학의 인식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서 정리철학은 추론의 타당성을 옹호하기 위하여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추론이란 우리가 직접 지각하지는 못했지만 어떤 표징 linga을 보고서 그 표징과 보편적 주연 관계 vyapti를 갖고 있는 다른 어떤 것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산에 불이 나고 있다. 왜냐하면 연기가 나고 있기 때문이며; 연기가 있는 곳에는 불이 있기 때문이다'와 같은 것이다. 즉 연기라는 표징을 보고 불의 존재를 추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추리에 있어서 산을 소명사 불을 대명사, 표징되는 연기는 중명사 linga, middle term라 하며, 이 중명사는 소명사와 대명사를 연결시켜 주는 것으로서 이유 hetu라고도 부른다. 위에 든 예는 우리가 혼자서 추리할 때 생각하는 위자비량 svartha-anumana의 과정을 그대로 나타낸 것으로서, 타인을 위하여 정식으로 추론을 전개하는 위타비량 parartha-anumana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명제들을 갖추어야 한다(오지작법)
1 종, 즉 주장 -산에 불이 있다.
2 인, 즉 이유 -연기가 나기 때문이다.
3 ?, 즉 예 -연기가 나는 곳에는 모두 불이 있다; 예를 들면 아궁이에서처럼.
4 합, 즉 적용 -이 산에도 연기가 난다.
5 결, 즉 결론 -그런고로 이 산에는 불이 있다.18)
이러한 추리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연기가 나는 곳에는 불이 있다'라는 보편적 진리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성립 안 되면, '이 산에 불이 있다'라는 결론적인 추리는 타당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챠르바카 Carvaka의 회의론적 철학이 바로 이 점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추리를 인식의 방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았다. 정리철학은 이 점을 감안하여 추리의 근거와 추리가 증명하고자 하는 바와의 틀림없는 주연 관계를 입증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우선 정리철학에서 말하는 이 보편적 주연 관계의 개념을 좀 더 세밀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19) 주연 관계란 두 사물 간에 한 사물이 다른 사물에 의하여 포섭될 때 성립되는 상호관계를 말한다. 포섭된다는 말은 한 사물이 다른 사물에 의하여 언제나 동반된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불은 연기에 항시 동반하므로 불은 연기를 포섭하는 것 vyapaka이며 연기는 불에 의하여 포섭되는 것 vyapya이다. 그런데 연기는 반드시 불에 의하여 포섭되지만 불은 연기에 의하여 반드시 포섭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불덩어리의 철구는 연기가 없으며 마른 연료가 탈 때는 연기가 나지 않는다. 이 경우의 양자의 상호관계는 어떤 조건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주연 관계라 부르지 않는다. 오직 한 사물이 다른 사물을 항시 무조건적으로 포섭하는 경우만을 보편적 관계라 한다. 이와 같이 A는 B를 반드시 포섭하나 B는 A를 반드시 포섭하지는 않는 경우의 A와 B의 상관관계를 부등주연 관계라 부른다. 이에 반하여 양자가 반드시 서로 포섭하고 포섭되는 경우의 상관관계를 등가주연 관계라고 한다. 예를 들면, '모든 이름을 댈 수 있는 사물은 알 수 있는 사물이다'라고 할 때 '이름을 댈 수 있는 것'과 '알 수 있는 것'과는 등가주연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문제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보편적 주연 관계를 알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연기와 불과의 보편 관계는 물론 과거로부터 누적되어 온 경험들에 의거한 귀납추리에 근거하고 있다고 정리철학은 인정한다. 정리철학에 의할 것 같으면 귀납추리는 4가지 조건 혹은 절차를 만족시켜야만 한다. 첫째는 존재연관 anvaya이다. 존재연관이란 A(예:연기)가 있으면 반드시 B(예:불)가 있다는 동반관계를 확인 경험함으로써 세워지는 관계이다. 둘째는 부존연관 vyatireka이다. 즉 B가 없으면 반드시 A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경험에 의한 관계이다. 셋째는 부반례 vyabhicaragraha이다. 즉 A는 있는데 B가 없는 반증의 경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귀납추리의 넷째 절차는 주연 관계의 무조건성 upadhinirasa을 확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과 연기와의 관계를 다각적인 상황하에서 여러 번 관찰하여 연기가 발생하는 데 어떤 조건이 있지 않는가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4가지 절차를 다 걸쳐서 얻은 귀납적 결론이라 할지라도 의심의 여지는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정리철학은 인정한다. 챠르바카 Carvaka와 같은 회의주의는 바로 이 점을 의심하는 것이다. 즉 과거의 경험적 관찰에 따르면 A와 B 사이에 주연 관계가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나 미래에도 그러한 관계가 성립된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리철학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하여 귀남추리와 주연 관계 vyapti의 타당성, 따라서 추론 anumana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려고 한다. 첫째는 가설적 논파 tarka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주연 관계를 부인할 때 생기는 결론의 부합리성을 지적하여 주연 관계를 간접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만약에 '연기가 있으면 언제나 불이 있다'는 주연 관계를 부인한다면 불이 없어도 연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며 이것은 원인이 없어도 결과가 있을 수 있다는 불합리성에 빠지게 되므로 연기와 불 사이의 주연 관계는 인정되야만 한다는 논법이다. 주연 관계를 뒷받침하는 다른 하나의 이론은 정리학파에서 애기하는 특수한 지각 중의 하나인 보편상의 지각 samanyalaksana-pratyaksa에 근거하고 있다. 이 이론에 의할 것 같으면 귀납적 결론은 단순히 개별적 사례들을 관찰하여 이를 일반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물의 보편상 saman-yalaksana의 지각을 통하여 그 사물이 속한 유전체의 지각이 주어진다는 사실에 입각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기와 불과의 주연 관계는 여러 개의 구체적인 경우들을 보고서도 알지만 연기성이라는 보편상을 지각함으로도 모든 연기와 불과의 관계가 지각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연기의 본질을 지각하므로 연기가 언제나 불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수지각에 의하여 귀납적 결론은 보증된다고 한다. 따라서 귀납적 결론이란 단지 몇몇이 그러하니까 모두가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비약이 아니라, 개별적 사물에 내재하고 있는 보편상의 지각을 매개로 하여 구체적인 예로부터 일반적인 결론을 얻는 추리인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정리철학의 추리에 관한 이론을 고찰했다. 끝으로 추론의 삼종류를 언급한다. 우리가 이미 본대로 정리학파의 5단계 추론은 귀납과 연역을 둘 다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정리철학은 추론을 귀납법과 연역법으로 나누지 않고 대신 주연 관계 vyapti의 성격에 따라서 삼종류로 나눈다. 첫째는 보이는 원인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결과를 추리하는 원인적 purvavat 추리이고, 둘째는 보이는 결과로부터 보이지 않는 원인을 추리하는 결과적 sesavat추리이며, 셋째는 보편관계가 인과적 연관성을 지니지 않을 때의 추리이다. 예를 들어 뿔이 달린 동물을 보고 갈라진 발굽을 추리하는 것과 같이 단지 여러 경우를 관찰한 결과로 얻어지는 일반적 유이성에 입각한 유추적 analogical 추리를 말한다.
5 비교와 증언
온당한 지식의 세번째 방법으로 정리철학은 비유량 upamana, comparison이라는 것을 들고 있다. 비유량이란 한 이름과 그 이름을 가진 어떤 사물과의 관계를 알게 하는 지식의 방법으로서, 근본적으로 비교나 유추에 의거하고 있다. 과거에 본 일이 없지만 이름만 알고 있는 한 사물을 그 사물에 대한 묘사에 의거하여 알게 되는 것을 비유량이라고 한다. 불교철학은 이 비유량을 지각과 증언에 환원시키고, 수론과 승론철학은 추론에 환원시킴으로써 하나의 독립된 인식의 방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정리철학은 성교량, 혹은 증언 sabda, testimony을 인식의 방법으로 들고 있다. 'Sabda'란 소리라는 뜻이며 정리철학의 인식론에서는 주로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이나 증거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생기는 지식을 의미한다. 증언은 그 내용 혹은 대상에 따라서 가시적 대상 drstartha과 불가시적 대상 adrstartha에 대한 증언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혹은 주구의 증언이냐에 따라서 성전적 vaidika인 것, 즉 완전무결한 신의 말씀으로서의 베다와,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인간에 의한 세속적 laukika인 것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승론철학은 이 증언 역시 하나의 독립된 인식의 방법으로 인정하지 않고 추론의 한 형식으로 간주한다.
증언이란 다른 사람의 어떤 진술이나 문장의 의미를 이해함에서 오는 지식을 말하므로, 정리철학은 자연히 의미론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즉 말과 의미와의 관계, 문장의 성격 등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정리철학에 의하면 문장이란 낱말들 pada이 모여 어떤 일정한 양식으로 배열됨에서 성립한다고 하며, 낱말이란 글자들이 어떤 고정된 순서로 배열된 것이라 한다. 낱말의 본질은 그 의미, 즉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에 있으며 말과 대상과의 관계는 항시 고정되어 있어서 하나의 말은 반드시 일정한 대상을 의미하게끔 되어있다고 한다. 정리철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말들이 각각 그 고유의 대상들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어떤 힘 sakti, potency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힘은 세계의 질서의 궁극적 원인이며 최고의 존재인 신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을 통하여 정리철학은 언어의 기원에 관하여 단순한 사회관습론적인 설명을 배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어의 의미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말이란 개물을 지칭하는가, 아니면 보편적 속성 jati 자체를 가리키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정리철학은 대체로 이 문제에 관하여 말이란 개물들을 지칭하되 그 개물들이 보편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개념으로서 여러 개의 개물들을 지칭할 수 있다고 한다.20)
정리철학에 의하면 문장이란 낱말들이 어떤 의미를 갖도록 조합된 것이다. 문장이 의미를 가지려면 낱말들을 조합함에 있어서 4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된다고 한다. 첫째 조건은 낱말들이 서로 서로를 함축하거나 필요로 하는 기특성 akanksa을 지녀야 한다. 예를 들면, '가져오다' 라는 동사는 목적어로서 '무엇을'이라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둘째는 정합성 yogyata이다. 정합성이란 한 문장 안에 있는 낱말들 사이에 모순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불로 적시어라'라는 말은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인접성 samnidhi이다. 즉 한 문장 안에 들어 있는 낱말들은 시간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어느 정도 서로 인접해 있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말로 하는 문장은 낱말들이 시간적으로 인접해 있어야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그로 씌어진 문장에서는 공간적으로 인접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네 번째로, 동일한 낱말이라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 다른 뜻을 지니므로 문장이 이해되려면 말한 사람의 취지 tatparya가 알려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에 의한 보통의 문장인 경우에는 그 논제 prakarana로 보아서 의도를 알 수 있으며, 베다의 경우는 미맘사 Mimamsa학파에서 규정하는 해석의 규칙들에 의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의미론을 종합하여 정리철학은 증언 sabda에 의한 지식의 타당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증언에 의한 지식이란 증언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얻어지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네 가지 타당한 지식의 방법들에 의하여 정리철학은 세계나 인간이나 신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고 한다. 물리적 세계의 구조에 관해서는 정리철학은 승론철학과 대동소이한 견해를 따르므로 인간과 신에 대한 정리철학의 형이상학적 견해를 잠시 검토해 보기로 한다.
6 자아, 신, 해탈
정리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자아 atman는 개인아 jivatman로서 인식, 의식, 감정, 마음의 상태 등과 같은 정신적 현상들이 속하는바 영원한 실체이며, 몸이나 의근 manas이나 감각 기관들과는 다르다. 자아는 불교철학에서처럼 항시 생멸하는 정신적 현상들의 연속적 흐름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기억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부이론적 베단타철학에서 애기하는 것처럼 자아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svayamprakasaka 순수의식 cit도 아니라고 한다. 정리철학은 어떤 주체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대상에도 관계하지 않는 순수의식의 존재를 부인한다. 자아란 의식 자체가 아니라, 의식이라는 정신 현상을 속성으로 가지고 있는 실체이다. 자아는 모든 인식의 주체, 행위의 주체, 경험의 향수자 bhoktr이며 윤회의 세계에서 업보를 받게 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자아 그 자체는 아무런 인식 활동도 하지 않는다. 오직 의근 manas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한에서 인식이 가는한 것이다.
자아의 존재는 타인의 증언에 의하여 알든지 혹은 간접적인 추론에 의하여 알 수 있다고 한다. 즉 욕망, 인식 등과 같은 정신적 현상들은 모두 기억에 의존하고 있으며 기억이란 몸이나 의근이나 외적 감각 기관에 속할 수 없기 때문에 항구적인 영혼의 존재를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후기 정리철학자들은 또한 자아가 내적 감각 기관인 의근에 의하여 직적 지각될 수 있다고 한다. 즉, 의근은 자아를 대상으로 하여 순수한 자아의식을 가직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정리학자들은 이러한 자아 그 자체의 직접적인 지각가능성을 부인하고 자아는 항시 어떤 정신적 상태의 지각과 더불어 그러한 상태를 가진 주체로서만 인식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안다', '나는 행복하다'등의 지각적 판단에서 '나'에 해당하는 존재로서 인식된다는 것이다. 한편 타인의 자아는 그의 지성적 혹은 의도적인 육체적 행위로부터 추리하여 알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도적인 행위는 비지성적인 육체에 의하여서는 행하여질 수 없고 의식적인 자아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정리철학에 있어서 해탈의 개념은 이상과 같은 자아의 이해에 직결된다. 정리철학에서 말하는 해탈이란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apavarga을 의미하며, 이것은 자아가 아닌 것들, 즉 몸과 감각 기관들과의 관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때 가능하다고 한다. 몸과 감각 기관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자아의 상티는 정리철학에 의하면 고통뿐만 아니라 어떤 즐거움이나 행복도 느끼지 않는 상태이다. 아무런 감정이나 의식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자아는 그 자체에 차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기의 정리철학 사상가들은 해탈을 단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뿐만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의 성취로 이해했다. 아마도 베단타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해탈을 얻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자아가 몸이나 감각 기관이나 의근과는 다른 어떤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하여는 우선 자아에 대한 성전, 즉 베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sravana, 항상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며 manana, 요가 원리에 따라 명상해야 한다 nididhyasana. 그리고 자아에 대한 그릇된 지식 mithya-jnana이 사라지면 자아는 욕망과 충동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고 행위 karma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결국 윤회의 세계에 다시 태어남이 없다는 것이다.
정리철학은 인간의 영원한 자아 외에 세계의 창조와 유지와 파괴의 주가 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21) 신은 세계를 무에서 창조하거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방출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영원한 원자들과, 공, 시간, 공간, 의근들을 도덕적인 원리에 따라서 질서 있고 의미 있는 세계로 형성하고 유지하는 자이다. 즉 신은 세계의 질료인 upadana-karana이 아니라 능동인 nimitta-karana인 것이다. 그는 또한 세계를 도덕적인 필요가 있을 때에는 파괴하기도 하는 자이다. 신은 영원하고 무한하며 전지전능한 존재이다. 그는 영원한 의식을 갖고 있으나 의식은 그의 본질이 아니라 속성이라고 본다. 베단타철학의 견해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신은 세계의 능동인으로서 또한 모든 생명체들의 행위를 조정한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며 신의 인도하에 행하여지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행위의 능동적 수단인 instrumental cause이나 신은 인간행위의 능동적 지도인 prayojaka-kartr이다. 정리철학자들은 이러한 신의 존재에 대해서 여러 가지 증명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논증들은 신의 존재에 대한 전형적인 증명들이다. 즉 세계는 결과 karya로서 원인이 되는 창조자가 있다. 제 현상 간에 발견되는 질서와 목적과 조화 등은 지성적인 능동인으로서의 신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원자들은 근본적으로 맹목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들이나, 신이 원자들에게 운동을 제공하며 조정한다. 또한 최초로 말들이 각각 그 대상을 의미하도록 하는 용법을 가르쳐 준 자는 신이다. 신은 오류가 없는 완전무결한 베다의 지식의 원인이 되는 저자로서 베다는 신의 존재를 증거하고 있다. 우리의 행위로부터 불가견력이라고 불리는 도덕적 공거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이 불가견력 자체는 지성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최고의 지성을 가진 신의 인도가 있어야만 우리가 행한 행위는 그것에 합당한 결과를 거두게 된다는 등의 논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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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대승불교의 전개
1 대승불교의 흥기
대승불교 Mahayana의 역사적 기원에 대하여는 아직도 불분명한 점들이 많이 남아 있다. 대승불교가 발생한 시대와 지역, 대승불교와 소승 Hinayana 부파불교와의 관계, 대승불교의 교단적 성격 등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들이 아직도 학자들의 연구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력기원 2세기 후반에 쿠샤나 Kusana국으로부터 후한에 온 지루가참은 대승경전 중에서 '반주삼매경' '수능엄경' '도행반야경' '보적경' 등을 번역했다. 이로 보아 우리는 그때에 대승불교가 쿠샤나국에 성행되고 있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또한 이들 경전들이 형성되기까지의 시간을 생각하면 대승불교의 발생은 적어도 서력기원 1세기까지는 소급할 수 있을 것이다.
반야경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일컬어지는 도행반야경(소품반야) Astasahasrika-prajnapa-ramita-sutra에는 '마하연 Mahayana'이라는 말이 쓰여지고 있으며, 아촉불 Aksobhya Buddha에 대한 신앙도 나타나 있다. 또한 지루가참이 번역한 '반주삼매경'에는 아미타불 Amitabha Buddha의 정토신앙도 발견된다. 이런 사실들로부터 미루어 보아 우리는 불탑에 대한 신앙과 반야 prajna 사상을 기반으로하는 대승불교가 적어도 서력기원 전후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승 Mahayana'이란 말은 '큰 수레'라는 말로서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날라다 주는 큰 수레와 같다는 뜻이다. 반면에 대승불교의 운동을 전개한 자들은 종래의 불교를 '소승' 즉 '작은 수레'라 불러 그것이 출가승만을 위주로 한 편협한 불교임을 비난했다. 대승불교자들은 왕이나 부호들의 지원 아래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출가승들의 안일한 삶과, 신도들의 물질적 공양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들만의 정신적 평안만을 구하는 그들의 소극적이고 현세도피적인 경향에 반발하여, 일절중생의 제도할 것을 목표로 삼는 새로운 대승적 불교를 제창한 것이다.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은 성불 후에도 인도의 각 지방에 여행하면서 중생의 제도에 힘썼으며 원시불교의 출가승들도 그를 본받아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교화활동을 폈다.
바로 이러한 활동이 불교의 전파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승려 samgha의 생활이 점차 조직화되고 안정된 경제적인 기반을 갖춤에 따라 출가승들은 재가신자들의 삶과 종교적 관심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사원에 안주하며 명상과 수행의 과정만을 추구하는 고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한편 재가신자들은 그들에게 물질적 포시 dana를 하고 세속적인 공덕 punya을 얻는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던 것이다.
더우기 사원의 안정된 생활을 기반으로 하여 발달된 교학적 abhidharma 불교는 한가롭게 번거로운 이론적 논의을 일삼게 됨에 재가자들의 종교적 필요와 욕구로부터 점점 더 유리되게 된 것이다. 대승불교운동은 이러한 교단적 상황에 대한 재가자들의 종교적 각성에서 일어난 것이다. 대승불교자들은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이타행을 강조하는 행동주의적인 불교를 제창하고 나왔다.
2. 대승불교의 보살상
이러한 대승의 이상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것이 대승보살의 개념이다.
보살(菩薩)은 bodhisattva의 약어이며 bodhi, 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유정 ttva, 혹은 '깨달음을 본질로 하는 자'라는 뜻이다. 보살은 대승불교에서 지향하는 새로운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대승은 소승의 이상인 아라한 arhat을 자기의 이익만을 돌보는 이기적인 존재로 배척한다. 보살은 자신의 구원에 앞서 남부터 구원한다는 이타 karuna의 서원 pranidhana을 세워서 열반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생사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한다. 대승불교도는 재가자나 출가자를 막론하고 보리심을 발하고 bodhicittotpada 자비의 서원을 세운 자는 누구든지 다 실천할 수 있는 길이었다.
소승불교에서는 최고의 수행단계인 아라한과를 얻으려면 재가생활을 버리고 출가자로서 수도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보살은 원래 대승 경전들에 자주 나오는 '선남자'와 선여자'들과 같은 재가자들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출가한 보살도 생겼으나 출가보살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250의 구족계(具足戒) pratimoksa를 받아 승려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활동부대는 재가신자들이 많이 찾아오는 부처님의 사리나 유품을 봉안한 불탑이었다. 그들은 계 sila는 지켰으나 승단생활을 지배하는 율 vinaya은 없었던 것같이 보인다.
소승불교에서는 보살이란 무엇보다도 석가모니불의 성불 이전의 존재를 의미했으며 그의 전생의 행적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들이 산출되게 되었다. 소승경전의 본생경 Jataka은 바로 이러한 석가보살의 전생에서의 수많은 이타적인 행위와 업적들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이다. 그러나 소승불교에서는 보살이란 어디까지나 석가모니불과 같이 특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지위였고 불이든 보살이든 다 범부중생들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이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대승불교자들은 바로 이러한 보살의 이상을 보편화하여 누구든지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름 아닌 석가모니불이 이룩했던 것과 같은 성불 그 자체였던 것이다. 아마도 석가모니불의 전생담이나 전기 등에서 우리는 대승의 재가자들 자신이 추구하던 삶의 이상이 이미 반영된 것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대승의 보살들이 닦아야 하는 수행의 방법도 자연히 소승과는 달리 팔정도 대신 육바라밀다 paramita, 즉 6개의 '완성' 혹은 '도피안'을 닦는다.22) 즉 보시 dana, 지계 sila, 인욕 ksanti, 정진 virya, 선정 dhyana, 지혜 prajna이다. 바라밀다의 개념은 소승의 문헌들에 이미 발견된다. 유부의 '대지도론'은 사바라밀다설을 언급하고 있으며 본생경에는 십바라밀다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육바라밀다를 선정하여 확고한 수행의 원리로 세운 것은 대승불교자들에 의해서였다.
육바라밀다 중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보시 dana의 개념이다. 보시란 소승불교에서는 주로 재가자들이 출가승들에게 행하는 물질적인 공양을 의미했으나 대승불교는 그것을 보살들 자신이 실천해야 할 첫번째의 항목으로 삼은 것이다. 다음에 유의할 것은 반야바라밀다로서 대승에서 반야 prajna란 주로 제법의 '공', 즉 공성의 진리를 깨닫는 지혜를 의미한다. 이러한 지혜의 바탕에 근거하여야만 남은 다섯 바라밀다도 올바르게 닦아질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불교는 일찍부터 반야바라밀다를 주제로 한 많은 경들을 산출한 것이다.
대승불교의 또 하나의 특징은 보살에 대한 신앙이다. 대승불교에 의하면 보살은 수없이 많이 있으며 이 세상뿐만 아니라 십방세계의 곳곳에 살아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결코 스스로를 위하여 열반을 구하지 않고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을 당하는 중생들을 도우기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승불교에서는 해탈이란 어디까지나 개인이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이지 타력의 신앙은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보살의 무한한 자비심을 믿기 때문에 엄격한 영적인 개인주의를 넘어서서 신앙적 불교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관세음보살 Avalokitexvara, 대세지보살 Mahasthamaprapta, 문수보살 Manjusri, 보현보살 Samantabhadra등은 이러한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대표적인 보살들이다.
3. 대승불교의 불타관
대승불교는 불타관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초래했다. 보살이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었듯이 불타의 개념도 일반화되어 삼세십방에 수없이 많은 불타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소승불교에서는 불타라 하면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석가모니불을 의미했다. 물론 소승불교에서도 과거 칠불 혹은 이십오불, 또 미래불인 미륵불 Maitreya Buddha의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승에서처럼 불의 개념이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소승에서는 과거의 불들은 모두 열반에 들어가서 생사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는 존재들로 이해되는 반면에, 대승에서는 제불은 우주의 각방에서 보살들과 함께 상주하며 활동하고 있는 존재들로 간주된다.
대승불교의 사상가들은 이러한 불타관의 변화를 밑받침하기 위하여 불타의 삼신설 trikaya을 전개했다. 즉 불타에는 3가지 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화신 혹은 응신 nirmanakaya으로서 중생의 교화를 위해 지상에 태어난 역사적인 불타를 의미한다. 둘째는 보신 sambhogakaya으로서 보살이 현을 발한 후 오랜 수행을 하여 그 결과로서 얻은 초자연적인 몸을 말한다. 아미타불 Amitabha Buddha은 그 가장 좋은 예이다. 세째는 법신 dharmakaya으로서 어떤 보이는 형상도 초월하며 모든 불의 근거가 되는 진리의 깨달음 그 자체를 뜻한다.
제불과 보살들에 대한 신앙과 더불어 자연히 신도들 가운데는 그들을 형상화하여 숭배하려는 열망도 생기게 되어 많은 불상과 보살상들이 제작되게 되었다. 특별히 중앙인도의 마투라 Mathura라는 곳과 서북인도의 간다라 Gandhara지방은 이러한 불상제작의 중심지였다. 간다라지방의 불상은 불의 형상을 희랍의 신상들에서 발견되는 우아함을 가지고 표현하고 있어 알렉산더대왕 이후로부터 그 지방에 성행했던 희랍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대승불교는 재가자들의 종교적 요구에 부응하여 불보살의 숭배 이외에도 불타의 유골이나 유품을 봉안한 불탑 stupa의 참배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대승경전의 숭배도 행했다. 즉 보통의 재가자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진리를 담은 경전을 탑 안에 안치하고 분배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경전의 수지, 독송, 서사의 행위도 다른 어떤 것보다 많은 공덕 punya을 지닌 것으로 권장되었다.
사실 이것은 국왕이나 부호들만이 할 수 있는 사찰의 건립이나 장원의 기증과 같은 것에 비하면 비교적 큰 경제력이 없는 자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로서, 대승불교가 일어날 당시에 확고한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던 소승교단에 대한 대승의 대중적인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대승불교는 또한 이상과 같은 각종의 신앙적 행위를 통하여 얻어지는 공덕을 한 개인이 자기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모든 중생의 제도를 위하여 넘겨 준다는 소위 이타행 parinamana의 실행도 강조했다.
이것은 물론 업의 법칙에 대한 엄격한 개인주의적인 이해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대승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의 정신의 표현인 것이다. 실로 이상과 같은 대승의 종교적 운동은 종래의 불교에 비하면 훨씬 더 종교적으로 다채롭고 풍부하며, 한마디로 표현하면 대승의 종교세계는 소승불교처럼 외롭지 않은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전기의 대승경전들
대승불교의 지도자들은 자연히 그들의 종교적 이상을 담은 경전들을 산출하게 되었다.
대승경전들도 형식상으로는 '불설 Buddha-vacana'로 되어있으나 실제로 그들이 석가모니불의 설법으로부터 온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대승불교자들은 그들의 경전이 본래 언어를 초월한 불타의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낸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런 뜻에서 '불설'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주장에 의하면 불타의 참 가르침은 오직 하나의 진리뿐이나 ekayana (일승) 듣는 사람들 각각의 처지와 능력에 따라 다르게 설법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승경전들은 상근기의 사람들을 위한 설법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대승경전의 형성은 대체로 전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는 서력기원 1세기부터 대승의 최초의 논사인 용수 Nagarjuna의 때 까지이다. 용수의 년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초(150~250A.D.)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를 전기대승경전들의 종점으로 삼는 이유는 '대지도론'을 비롯하여 그의 저작들이 다수의 대승경전들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용수가 당시의 모든 대승경전들을 다 인용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에 의하여 인용된 것은 확실히 전기경전으로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전기의 대승경전들 가운데서 주요한 것만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1) '대무량수경 Sukhavativyuha-sutra'
아미타불 Amitabha (Amitayus) Buddha에 대한 신앙은 대승의 불.보살신앙 및 정토왕생 신앙의 가장 대표적인 표현으로서 많은 대승불교 신자들의 귀의처가 되어 왔다. '무량수'라는 말은 'Amitayus'를 번역한 말로 '무한한 수명'이란 뜻이고, '대무량수경'23)의 범명 'Sukhavativyuha'라는 말은 '극락의 장엄'이라는 뜻이다.
'무량수경'의 내용은 법장 Dharmakara이라는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48개의 서원을 세운 후 오랜 기간 동안의 수행을 거쳐 성불하여 서방에 있는 극락세계sukhavati의 정토를 이루었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48개의 서원으로서 이들은 장차 법장보살이 성취하고자 하는 정토의 모습과 중생들이 거기에 태어날 수 있는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제십팔현은 '설아득불 십방중생 지심신락 용생아국 아지십념 야불생자 불취정각'이라하여 중생들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조건을 말하고 있다.24)
정토신앙은 보살의 자비와 공덕에 힘입어서 이 혼탁한 세상에서 닥치는 고통과 죄와 유혹이 없는 안락한 곳에 왕생하여 거기서 성불하고자 하는 대승불교자들의 염원의 표현인 것이다.
2) 반야바라밀다 Prajnaparamita계통의 경전들
반야계통의 경에는 송 반야(32 음절의)의 수에 따라 길고 짧은 여러 개의 경들이 있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성립됐다고 간주되는 것은 '팔천송반야 Astasahasrika'(소품반야)이며 이것이 확대되어 25,000송의 '대품반야'가 성립되었으며 용수의 '대지도론'은 바로 이 '대품반야'의 주역서이다. 그 외에도 18,000송 반야, 100,000송 반야로 된 것도 있었으며 짧은 것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다경 Vajracchedika-prajna-paramita-sutra'의 500송 반야, '반야심경 Prajnaparamita-hrdaya-sutra'의 300송 반야와 같은 것이 있다.
반야경전의 주요 사상은 공사상으로서 제법은 자성 svabhava이 없이 공하여 이것이 제법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소승불교, 특히 설일체유부에서 법을 실체시하는 경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서 대승불교사상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다. 제법이 공함을 깨닫는 것이 반야, 즉 지혜 prajna이며, 이러한 지혜에 입각하여 보살은 보살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공관에 의거한 보살의 수행을 '금강경'은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 표현하고 있다. 제법이 공하고 모든 현상적 차별들이 허망한 것임을 깨달으면, 불타와 중생, 제도하는 자와 제도받는 자, 세간과 출세간, 열반과 생사의 차별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불타의 설법도 설법이 아니라는 것을 반야경전들은 거듭 강조하고 있다.
3) '유마힐소설경 Vimalakirtinirdesa-sutra'
위와 같은 공사상에 입각하여 '유마경'은 세속사회의 적극적인 참여와 재가불교의 이상을 가르친다. 이 경의 주인공은 유마힐 Vimalakirti이라는 거사로서 그는 지혜에 있어서 불타의 다른 출가한 제자들보다도 훨씬 뛰어나 그들을 무색하게 하고, 어디서나 자유자재하는 거침없는 삶의 지혜를 보여준다. 불이법문품에서는 실재는 모든 대립을 초월한 불이 advayatva의 절대평등한 경지로서 불가사의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상이 강조되고 있다. 경의 구성도 드라마틱한 면이 있는 흥미로운 경전이다.
정확한 명칭은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이며 줄여서 《유마힐경》 《유마경》이라 한다. 유마힐은 주인공인 거사로서 리차비족의 수도인 베살리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부호라고 하나 실존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경은 3회 14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유마거사가 병으로 앓아 눕자 부처는 지혜 제일인 사리불을 비롯하여 가섭·수보리 등을 병문안 가게 권하나 그들 모두 유마거사의 높은 법력이 두려워 문병가기를 꺼린다. 결국 문수보살이 가게 되는데 유마거사와의 대화에서 문수보살은 대승의 깊은 교리인 불이(不二)법문을 유마거사의 침묵을 통해 깨우치게 된다는 내용이다.
또한 유마가 본래 병이 없지만 중생들이 병을 앓기에 보살도 병을 앓는다고 설명하여 중생들과 동심일체가 된 보살의 경지를 나타내었으며, 유마거사 가족들의 소재를 묻자 지혜가 아버지이고 방편이 어머니라고 하여 유마거사가 이미 대승보살의 최상의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경전 성립 당시의 재가불자들의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이 경에 대한 한역은 7가지가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3가지로 지겸(支謙) 역의 《유마힐경》 2권, 구마라습 역의 《유마힐소설경》 3권, 현장(玄奘) 역의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6권이 있다.
4) '묘법연화경 Saddharmapundarika-sutra(법화경)'
'유마경'이 아직도 대승의 이상을 소승에 대립시켜 논하고 있는 반면에, '법화경'은 이러한 대립적 견해를 초월하여 불타의 여러 교설들은 결국 모두 중생의 교화를 위한 방편 upaya에 지나지 않고, 성문 Sravaka, 연각 Pratyekabuddha, 보살 Bodhisattva의 삼승은 결국 일승 ekayana혹은 일불승에 귀결한다는 대승불교의 포용적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이 일불승에 의하여 모든 중생은 성불하는 것이다.
불타관에 있어서도 '법화경'은 불타가 출생하여 출가하고 성불한 후 입멸한 것은 단지 중생의 교화를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고 실은 불타의 수량은 불가수량이고 그의 성도는 무량아승기겁의 전에 이룬 것이라고 한다. '법화경'은 이상과 같은 진리들을 여러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으며 문학적 가치가 높은 경전이다. 불탑신앙과 경전신앙도 이 경에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5) 화엄계통의 경전
'화엄경'에는 한역으로 40권본, 60권본, 80권본의 삼종이 있으나 중국에서는 5세기에 불타발타라 Buddhabhadra에 의하여 번역된 60권본의 '대방광불화엄경 Mahavaipulya-buddha-avatainsaka-sutra'이 가장 널리 사용되어왔다. '화엄경'은 매우 방대한 문헌으로서 본래는 독립적으로 유통되던 여러 경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원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한국 불교전문강원의 교과로 학습해 온 경전이기도 하다. 산스크리트 완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대승불교 초기의 중요한 경전으로 한역본은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60권본(418∼420), 실차난타(實叉難陀)역의 80권본(695∼699), 반야(般若)역의 40권본(795∼798)이 있는데, 상기 2본 중 최후의 장인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는 것이다. 티베트어역은 80권본과 유사한 완본이 있다. 본경은 <60화엄>이 34장, <80화엄>이 39장, 티베트어역이 45장이지만, 실은 처음부터 현재의 형태로 성립된 것이 아니고 각 장이 독립된 경전으로 유통되다가 후에 《화엄경》으로 만들어졌는데, 필경 중앙아시아에서 4세기경 집대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각 장에서 가장 일찍 성립된 것은 십지품(十地品)으로, 그 연대는 1~2세기경이라고 한다. 산스크리트 원전이 남아 있는 것은 이 십지품과 입법계품이다.
본경은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교주로 한다. 60권본은 7처(處) ·8회(會) ·34품(品)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제1 ·2품)와 2보광법당회(普光法堂會:제3∼8품)는 지상, 제3도리천회(忉利天會:제9∼14품) 제4야마천궁회(夜摩天宮會:제15∼18품) ·제5도솔천궁회(兜率天宮會:제19∼21품) ·제6타화자재천궁회(他化自在天宮會:제22∼32품)는 모두 천상이며, 설법이 진행됨에 따라 회좌의 장소도 점차 상승하고 있다. 제7은 다시 지상의 보광법당회(제33품), 제8도 지상의 서다림회(逝多林會, 즉 祇園精舍:제34품)이다.
제1회는 불타가 마가다국(國)의 깨달음을 완성한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때 불타는 비로자나불과 일체가 되어 있다. 따라서 많은 보살이 차례로 불타를 찬양하는 노래를 읊는다. 긴 찬양의 노래가 이어진 다음, 이 아름다운 세계가 불타의 신력(神力)으로 크게 진동하고, 향기롭고 보배로운 구름이 무수한 공양구(供養具)를 비오듯 뿌린다. 이러한 세계를 연화장 장엄세계해(蓮華藏莊嚴世界海)라고 한다.
제2회에서 불타는 적멸도량에서 멀지 않은 보광법당의 사자좌(師子座)에 앉아 있다. 문수(文殊)보살이 사제(四諦:苦 ·集 ·滅 〕의 네 진리)를 설하며, 또한 10인의 보살이 각각 10종의 심원한 법을 설한다.
제3회부터는 설법의 장소를 천상으로 옮기고 여기서는 십주(十住:보살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 ·생활방식, 즉 初發心住 ·治地住 ·修行住 ·生貴住 ·具足方便住 ·正心住 ·不退轉住 ○眞住 ·法王子住 ·灌頂住)의 법을 하며, 제4회에서는 십행(十行:보살이 행해야 할 열 가지 행위, 즉 歡喜行 ·饒益行 ·無恙恨行 ·無盡行 ·離癡亂行 ·善現行 ·無著行 ·尊重行 ·善法行 ·眞實行), 제5회에서는 십회향(十廻向:수행의 공덕을 중생에게 돌리는 보살의 열 가지 행위), 제6회에서는 십지(十地)를 설명하고 있는데, 십지는 보살의 수행단계를 10종으로 나누는 것으로 《화엄경》 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즉 제1은 환희지(歡喜地)로서 깨달음의 눈이 뜨여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경지, 제2는 이구지(離垢地)로서 기본적인 도덕으로 직심(直心)을 일으켜 나쁜 죄의 때를 떨쳐버리는 경지, 제3명지(明地)에서는 점차 지혜의 빛이 나타나, 제4염지(燄地)에서 그 지혜가 더욱 증대되고, 제5난승지(難勝地)에서는 어떤 것에도 지배되지 않는 평등한 마음을 가지며, 제6현전지(現前地)에서는 일체는 허망하여 오직 마음의 활동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으며, 제7원행지(遠行地)에서는 열반에도 생사에도 자유로 출입하고,
제8부동지(不動地)에서는 지혜가 다시는 파괴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다. 그리하여 목적에 사로잡히지 않고, 제9선혜지(善慧地)에서는 불타의 비밀의 법장(法藏)에 들어가 불가사의한 대력(大力)을 획득하고, 10법운지(法雲地)에서는 무수한 여래가 대법(大法)의 비를 뿌려도 이를 다 증득(證得)하며, 스스로 대자비심을 일으켜 중생의 무명 ·번뇌의 불길을 꺼버린다. 따라서 십지 전체를 통하여 보살은 자신을 위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한다는 이타행(利他行)을 닦는 것이 중요하다.
제7회에서는 지금까지의 설법이 요약되어 설명되고 있으며, 제8회에는 선재(善財)라는 소년이 차례로 53명을 찾아가서 법을 구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53명 중에는 보살만 아니고, 비구 ·비구니 ·소년 ·소녀 ·의사 ·뱃사공 ·신 ·선인 ·외도(外道) ·바라문 등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구도심에서는 계급도 종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정신이 담겨 있다. 사상적으로 《화엄경》은 현상세계는 상호 교섭 ·활동하여 무한한 연관관계를 갖는다는 사사무애(事事無礙)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근거한다.
이 《화엄경》을 전거로 하여 후에 중국에서는 화엄종이 성립되었으며, 그 주석서로는 60권본에 대한 현수(賢首)의 《탐현기(探玄記)》, 80권본에 대한 징관(澄觀)의 《대소초(大疏鈔)》가가장 유명하다. 또한 《탐현기》의 선구로서 지엄(智儼)의 《수현기(搜玄記)》 《공목장(孔目章)》 등이 있다. 인도에서는 《십지경》에 대한 세친(世親)의 《십지경론》 등이 있다.
'화엄경'은 주요 내용으로서 '십지품'에서 부처님께서 정각에 도달하기 위하여 십바라밀을 닦아가는 보살의 인행을 십지의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25) 또한 십지의 전단계로서 십주, 십행, 십회향도 논하고 있다. 다음에 '입법계품'에서는 보살의 수행과정을 선재 Sudhana 동자의 구도기로서 실감있게 그리고 있다. '법계'란 보살이 여래가 되기 위하여 깨달아 들어가야 하는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선재동자는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는 53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설법을 듣고 마지막으로 비로자나불을 만나서 법계를 증득한다.
'십지품'에는 '삼계허망' 항시일심작 십이인연분 계의심'이라는 유명한 유심사상 citta-matrata을 설하는 구절이 발견된다. 이것은 십이지인연분 가운데서 제삼지, 즉 식 VIJNANA, CITTA을 가장 중시하는 것으로서 유식사상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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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중관철학
1 용수와 중관철학의 전통
대승불교는 처음에는 소승불교의 번잡한 교리의 연구를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고 이에 반발하여 대중적인 종교운동으로 일어난 것이었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대승불교도 자연히 철학적으로 자신을 정립하고 옹호할 필요에 봉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승불교와 같이 많은 론 sastra 등을 쓰게 된 것이다. 대승의 론서들 중에서 제일 일찍 씌어진 것은 새승의 최고의 논사로 추앙되어 오는 용수 Nagarjuna의 것들이다.
용수는 서력기원 후 2~3세기경의 인물로 추정되며 남인도 출신의 사람으로 불교의 여러 사상뿐만 아니라 외도 사상에 입각하여 이에 어긋난 여러 실재론적 견해들을 논파하고 있다. 용수 당시에는 전에 언급한 초기의 대승경전들, 즉 반야경전, '화엄경', '법화경', 쟁사경전들이 비록 지금과 같은 형태는 아니겠지만 이미 성립되어 유통되고 있었음을 우리는 용수의 저서들을 통하여 알 수 있으며, 용수는 이들 제경전들을 해석하는 논들을 지은 것이다. 그의 저서들 가운데, 철학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반야경전 계통의 공사상에 입각하여 그릇된 실재론적인 견해들을 논파하는 저서들로서, '중론 Mulamadhyamaka-karika', '십이문론 Dvadasanikaya-sastra', '공칠십론 Sunyatasaptati'
2) 역시 공사상에 입각해 외도를 피하는 '회쟁론 Vigraha-vyavar-tani'
3) '대품반야'의 주역서로서, 용수사상의 여러가지 측면을 포괄적으로 보이는 저서인 '대지도론'
4) '화엄경'의 '대지품'의 주역서인 '십주비파소론'과 화엄의 유심사상을 논하는 '대승이십론'등이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용수의 교학은 상당히 포괄적인 것이었으며 단순히 반야경전의 공사상만을 전개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공사상에 있었으며 이 때문에 그의 '중론'을 중심으로 하여 중관철학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용수의 제자로서 제바 Aryadeva라는 사람이 있어서 '백론 Catuhsataka'을 저술했다. 이 '백론'은 용수의 '중론' 및 '십이문론'과 함께 중국 삼론종의 기본 논서를 이루었다.
서럭기원 350년경에는 청목 Pingala 이라는 자가 나와서 '중론'의 주석서를 썼으며, 구마라집 Kumarajiva에 의하여 한역되어 중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4세기부터는 유식철학이 인도불교에 풍미함에 따라 중관철학은 자연히 유식철학의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었다. 6세기에는 불호 Buddhapalita와 청변 Bhavaviveka이 나와서 '중론'의 주석서를 썼으며, '중론' 해석상의 차이를 보여 중관학파의 두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불호 계통으로 월칭 Candrakirti이 나와서 '명구론 Prasannapada'이라는 '중론'의 주석서와 중관철학의 입문서인 '입중론 Mudhyamakavatara'을 써서 티벳불교에 유행하게 되었다. 청변은 '반야증론 Prajnapradipa' 이라는 '중론'의 주석서를 썼으며 그는 의식적으로 유식철학자인 호법 Dharmapala의 유식설을 비판하여 중관과 유식 양파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불호의 중관학파를 프라상기카 Prasangika학파라 부르며, 자기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고 상대방의 견해만을 모순적인 것으로 논파하는 부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반면에, 청변의 중관학파를 스바탄트리카 Svatantrika라고 부르며, 자기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천명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청변의 계통으로 7세기의 지광 Jnanaprabha은 유가행철학에 대항하여 공사상의 우위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불타의 가르침을 삼시로 나누는 교판을 제시했다. 즉 소승은 사성제를 통하여 심경구유를, 유가행파는 만법유식설을 통하여 경공심유를, 그리고 중관철학은 제법계공의 이치를 통하여 심경구공을 진리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2. 중론의 철학
'중론'에 나타난 용수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중론'의 '중'의 개념을 먼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소승 경전에서 불타 자신이 인간존재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중도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즉 그는 인간에게 어떤 불변의 형이상학적 실재가 있다고 인정하는 유의 입장도 거부했으며, 동시에 인간은 죽음과 더불어 무로 돌아간다는 무의 입장도 거부했다.
'중론'의 '중'은 이와 같은 불타의 기본적 입장을 더욱 더 확대하여 세계 전체에 대한 존재론적 규명을 하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법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성 svabhava이 없기 때문에 공한 것이다. 그러나 공은 결코 무가 아니며, 다만 자성이 없이 조건적으로 생기하고 있는 현상세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공이란 비유.비무이며 중도 madhyama pratipad인 것이다. 비유.비무라는 것은 공이라는 말과 같이 실재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타파의 말이요, 중도는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현정의 말인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세계의 참 모습이 비유.비무이며, 중도란 말인가? 이것을 단적으로 지적해 주는 것이 '중론'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다: '인연소생법' '아설즉시공', '역위제가명', '역시중도의'. 인연에 의해 조건적으로 생기는 모든 법은 자성이 없이 공하다는 말이다. 즉 공은 연기 pratityasamutpada의 진리에 근거한 것이다.
용수는 연기설을 소승불교, 특히 유부에서처럼 제법의 존재를 일단 인정하고 나서 그들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기설의 참 철학적 의미는 어떤 법도 연기의 지배를 받는 조건적이며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자성을 결여하고 있는 무자성 nihsvabhava, 따라서 공 sunyata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제법의 실상이 공임을 알면, 그 제법이 아무것도 아닌 무인 것이 아니라 공한 그대로, 즉 있는 모습 그대로 여러 이름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말과 같이 '색즉시공'이요, '색즉시색'인 것이다. 이것을 용수는 가명 prajnapti이라 부른다. '가'란 말은 공즉시색', 혹은 '진공소유'의 현상 세계가 공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방편상으로 인정된다는 뜻으로서, 가명이란 자성을 결여한 공한 법들이 그런대로 이름을 가지고 존재하는 소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중도의 소유인 것이다.
문제는 모든 것이 가명이라는 진리를 모르고 현상적 차별의 세계를 절대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오인하여 유나 무의 견에 빠지며 고통을 받는 것이 보통사람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용수는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타파하여, 실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타파 그 자체가 다름 아닌 현정인 것이다.
용수에 의하면 사람들이 세계의 실제의 모습인 바 공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사회적으로 통용하고 있는 언어와 개념들의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사물을 실재론적으로 보게 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가 이 일상언어를 매개로 하여 세계를 보는 한 사물들이 각각 독립되고 고정된 본질을 갖고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색안경을 쓴 사람이 바깥세계가 모두 그 안경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따라서 용수는 '중론'의 초두에서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생. 멸. 상. 단. 일. 이. 래.출 등의 개념을 예로 들어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그들이 순전히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구성해낸 개념 vikalpa들로서 모두 허론 prapanca에 지나지 않음을 갈파한다. 여기서 용수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은 일종의 파사적인 변증법으로서 제개념들의 하나하나를 고찰하여 그것들이 결국 모순적이고 상대적이고 불합리한 것임을 드러내는 귀류법 prasanga, reductio ad absurdum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용수에 의하면 모두 우리가 공의 진리를 모르고 사물을 실재론적으로 보는 습관에서 유래하는 헛된 관념들인 것이다. '생'의 개념 하나만을 분석함으로써도 용수는 당시의 인도 철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일절의 형이상학적 인과론을 궁극적으로 불합리한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연기, 즉 공의 세계는 불생, 불멸, 불단, 불상, 불일, 불이, 불래, 불출(팔불)이며 모든 언어와 개념들이 타당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지이다. 언어는 진리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용수는 일상적 언어나 개념의 타당성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이제설에 접하게 된다. 용수에 의하면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높고 낮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관점에 따라서 진제 paramartha-satya와 속제 samvrtti-satya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진제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반야 prajna(지혜)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서 언어를 초월한 공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며, 속제란 세상 사람들의 상식적인 눈으로 보는 세계로서 진리가 가리워진 samvrtti 모습을 말한다. 용수는 이러한 일상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공의 입장에서 볼 것 같으면 모든 언어의 사용과 철학적 사유는 다름아닌 속제의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용수는 말하기를 속제를 떠나서는 진제를 깨달을 수 없다고 한다. 모든 불타의 교설들은 주로 우리의 일상적인 관념들에 근거하여 이루어졌으나 그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언어를 초월하는 공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누구든지 진제를 깨닫기 이전까지는 속제의 방편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진제인 공이라는 것 자체가 소유와 가명의 세계를 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깨달은 자의 관점에서 볼 것 같으면 속제란 진제의 자유로운 활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속제와 진제의 구별 자체가 하나의 방편상의 구분은 될지언정 어떤 궁극적인 대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제인 공의 세계는 모든 차별과 대립이 사라져 버린 불이의 advaya 세계로서 유와 무, 생사와 열반, 미와 오, 중생과 불사, 그리고 속제와 진제의 구별조차 부정되며 공마저도 공인 일절무소득 anupalabdhi의 세계이다. 그러나 공의 세계는 동시에 모든 차별의 상들이 그대로 살아 있는 다의 세계이기도 하다. 용수는 바로 이 다의 세계에 입각하여 속제를 건립하고 '중론'의 철학을 전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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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후기대승경전들의 사상
1 역사적 배경
불교는 바라문교 내의 한 분파적인 종교운동으로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분파들과는 달리 불교는 왕성한 포교활동을 통하여,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쇼카와 카니쉬카와 같은 숭불 군주들의 지원에 힘입어 인도 전역에 융성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결코 정통 바라문 종교를 제압하지는 못했다.
불교는 이미 인도인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베다의 권위나 제사주의적인 종교행사를 거부함으로써 언제나 이단적인 종교로 간주되어 온 것이다. 불교는 또한 바라문 계급의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이 세워 놓은 사성제도와 생의 단계 varna-asrama를 중심으로 한 사회윤리 질서, 즉 '다르마 dharma'의 체계에도 관심이 없었으며 따라서 일반 재가자들의 생활윤리는 어디까지나 바라문교의 전통에 의하여 지배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쇼카 Asoka왕의 마우리아 Maurya왕조가 망한 후 슝가 Sunga왕조는 불교를 억압하고 바라문교를 부흥시켰다.
또한 이민족에 의해 세워진 쿠샤냐 Kusana왕조 때에도 불교의 세력은 북부인도를 석권했지만 남쪽에는 순수 인도적인 샤타바하나 Satavahana, (Andhra)왕조가 일어나서 바라문교를 국교로 받들고 보호하는 정책을 썼다. 쿠샤나 왕조와 샤타바하나 왕조는 약 3세기부터는 세력을 잃기 시작하였으며 인도는 여러 소국가들이 대립한 가운데 정치적 혼란기로 들어갔다.
그러나 320년경에는 찬드라굽타 Candragupta1세가 굽타 Gupta왕조를 세우고 사무드라굽타왕 Samudragupta(330년경 즉위) 때에는 전인도를 통일함으로써 마우리아 Maurya왕조 이후 약 500년만에 비로소 통일국가를 다시 형성하게 되었다. 그 후 굽타 왕조는 6세기에 흉노족의 침입 등으로 망하기까지 안정된 사회질서 밑에 학문 예술 등 각 방면에서 찬란한 문화를 건설했다.
종교적으로는 바라문교가 국교로 인정되어 바라문의 윤리 질서가 전 인도 사회에 정착하게 되었다. 또한 굽타왕조 때에는 쉬바신과 비슈누신에 대한 대중적인 신앙도 널리 퍼져서 인도전역에 수많은 웅대한 신단들이 건축되었다.
바라문들에 의하여 전수되어 온 산스크리트 Sanskrit 언어와 문화는 전인도에 보급되었으며 고전산스크리트어가 전국적인 공용어로 사용되게 되었다. 인도의 세익스피어라 불리는 칼리다사 Kalidasa와 같은 시인도 굽타왕조의 초기에 활약한 사람이다. 이러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바라문의 정통철학파들은 각기 잘 다듬어지고 세련된 고전 산스크리트어로서 많은 체계적인 저술들을 산출하게 된 것이다. 실로 이 시기는 인도 고전 문화의 황금기라 할 수 있다.
굽타왕조는 바라문교를 국교로 삼기는 하였으나 불교를 압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굽타왕조는 종교적인 관용성을 보여 불교도 지원해 주었다. 이와 같은 지원에 힘입어 5세기초에는 불교의 옛 고장인 마가다지역에 유명한 나란다 Nalanda라는 대사원이 세워지고 그 후로부터 수백년 동안 불교 교학 연구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사상 면에 있어서도 불교는 자연히 이러한 정치적 문화적 추세에 영향을 받아 바라문의 교학에 대응하여 많은 체계적인 철학적 문헌들을 고전산스크리트어로 산출하게 되었다. 이들은 내용에 있어서도 정통바라문 사상의 영향을 받거나 그것에 대하여 변호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으며 동시에 바라문의 철학적 사유를 크게 자극시키기도 했다.
이 시기에 나타난 대승경전들의 중요한 것들을 든다면 우선 열반을 적극적으로 상.락.아.정으로 규정하며 법신상주를 설하는 '대반열반경',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여래가 될 가능성의 근거로서 여래장이라는 자성청정심이 있다는 사상을 설하는 '승만경 Srimalasutra'이나 '여래장경', 유식철학의 근본경전으로서 아라야식 연기사상과 만법유식을 설하는 '해심밀경 samdhinirmocana-sutra', 여래장사상과 아라야식사상과를 융화시켜 여래장 연기설을 발전시킨 '능가경 Lankavatara-sutra'등을 들 수 있다.
이들 후기 대승경전들은 모두 용수 이후 세친 Vasubandhu에 이르기까지 3-5세기초에 걸쳐서 형성된 것으로서 주로 여래장 tathagatagarbha 혹은 불성론적 사상과 유식사상 vijnapti-matrata에 기초하고 있다. 그들은 반야경전이나 중관철학의 공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실재에 대한 부정적 접근방식을 지양하여 불이나 열반을 상주불멸의 실재에 간주하며 인간에 있어서도 불이 될 수 있는 어떤 영원한 성품이 있음을 강조하여 우파니샤드적인 바라문사상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래의 무아설 anatman을 지키면서도 윤회의 주체로서 아뢰야식 alaya-vijnana이라는 존재를 설정하여 인격의 연속성을 보장하며 업보를 설명하려고 꾀했다. 이러한 새로운 사상들을 더욱 더 철학적으로 발전시키며 이론화한 사람들이 유가행파 Yogacara의 철학자들로서, 미륵존자 Maitreyanatha, 무착 Asanga, 세친 Vasubandhu의 사상은 대승교학의 극치를 이룬다. 우선 그들의 철학을 고찰하기 전에 이 시기에 형성된 조요 경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검토해 보자.
2. 유식사상 계통의 경전
1) '해심밀경 Samdhinirmocana-sutra'
이 경은 유식사상계통의 경전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해심밀경'은 매우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경전으로서 경이라기보다는 논에 가까운 경전이다. 이 경은 범어 원본은 남아 있지 않으나 티벳어역본이 있으며 한역본으로서 보리유지역(514)과 현장역(647)이 남아 있다. 이 경은 '승의제상품'은 반야경전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승의제, 즉 진제 paramartha-satya의 다섯가지 면을 설하고 있다.
승의제는 유위무위의 이상이 없으며, 일절의 명언을 떠난 상, 이사를 초월하는 상, 제법과의 일이성을 초월한 상, 일절에 편재하는 일미상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 '일체법상품'과 '무자성상품'도 공사상에 입각하여 제법의 실상을 삼상 trilaksana과 삼무자성의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삼상이란 망망정에 의한 언설 vyavahara과 가명 prajnapti 때문에 제법의 명칭들을 설정하고 집착하는 변계소집상 parikalpita-laksana, 십이지연기에서 보여 주는 것과 같이 제법인연에 의하여 생기하는 의타기상 paratantra-laksana, 그리고 일체법의 평등한 진가의 모습인 바 원성실상 parinispanna-laksana을 말한다. 삼무자성이란 삼상에 각각 해당하는 진리로서 변계소집의 상은 자성 svabhava이 없다는 상무자성, 의타기성에 의하여 생기하는 것은 자성이 없다는 생무자성, 그리고 제법이 본래 무자성이라는 승의무자성을 말한다.
이상과 같은 이론은 모두 공, 즉 일절제법계무자성의 진리를 세 가지 측면에서 말한 것뿐이다. 그러나 '해심밀경'은 이렇게 공의 진리를 더 자세히 밝혔다고 하여 스스로를 불타의 가르침을 충분히 드러낸 요의경 nitartha 으로 간주하고 반야경전이나 소승경전은 불요의경 neyartha으로 본다. 따라서 '해심밀경'은 불타의 설법(전법)에 삼시가 있었음을 말한다.
첫번째 전법은 성문승을 위하여 사제의 상을 설하였고, 두번째는 대승에 나아가는 제들을 위하여 일절제법무자성에 근거하여 은밀의 상을, 그리고 세번째로 일체승에 나아가는 자를 위하여 같은 일체제법무자성에 의거하면서도 현료의 상을 설했다는 것이다. 현료의 상이란 반야경전과 같이 제법의 실상을 단지 공으로만 설하지 않고 이 공의 이면에 숨어 있는 상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심밀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법상종에서는 이와 같은 설에 근거하여 소승과 중관과 진가를 각각 유와 공과 중을 가르치는 철학으로 교상판역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식경전으로서의 '해심밀경'의 의의는 이러한 삼상이나 삼무자성 등의 이론뿐만 아니라 '심의식상품'이나 '분별유가품'과 같은 곳에 나타나 있는 식 vijnana의 이론에서 발견된다. '심의식상품'의 심은 일절종자식으로서 아뢰야식 alayavijnana이라 부른다.
이 식이 갖고 있는 종자의 발육에 의하여 양심환경의 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 식은 일절의 종자를 집특하고 있고 우리의 감각 기관과 몸 등 일절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집특식 adanavijnana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의 세계를 아뢰야식의 현현으로서 보는 것을 아뢰야식연기설이라 한다.
그러나 '해심밀경'에는 아직도 이 아뢰야식설이 유식무경의 사상, 즉 대상세계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이론과 분명하게 직결되어 있지는 않고, 업보에 의하여 현상세계를 설명하는 업감연기론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즉 아뢰야식의 개념은 무엇보다도 소승불교철학에서부터 계속적으로 문제되어 온 업의 소재와 윤회의 주체의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답으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심의식'의 '의식 mano vijnana'은 전신적인 현상을 대상으로 하여 분별작용을 하는 식으로서 유식철학의 팔식설에서 제육식에 해당한다. '해심밀경'에는 아직도 제칠식 즉 말나식 manas의 개념은 발견되지 않는다.
한편 '해심밀경'에서 만법유식의 사상이 분명히 나와 있는 곳은 '분별유가품'으로서 미륵보살과 불타와의 문답 가운데서 불타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설법을 한다. 즉 삼마지 samadhi(지, 삼매)와 위빠사나 vipasyana(관)를 행할 때 나타나는 영상은 심과 다를 바 없다. 왜냐하면 그 영상은 단지 식뿐이므로 vijnapti-matra; ideation-only 식 vijnana의 소연 alambana(대상)은 단지 식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뿐이다.
이와 같이 영상과 심이 다를 바 없다면 결국 심이 심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치 거울에 얼굴을 비추고서 얼굴의 영상을 본다고 말하지만 얼굴을 떠나 영상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과 마찬가지라 한다. 이상과 같은 영상의 유식에 관한 설법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유식사상은 본래 지관, 즉 요가 yoga의 수행과 체험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식철학을 유가행 yogacara의 철학이라 부르는 것이다.
2) '아비달마경 Abhidharma-sutra'
이 경은 현존하지는 않지만 유식계통의 경으로서 중요한 것이었음을 다른 문헌들을 통해서 알수 있다. 특히 무착의 '섭대승론'은 이 경의 '섭대승품'을 해석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경이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경의 제목 자체가 말해주듯이 매우 체계적이고 교학적인 경전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3. 여래장사상 계통의 경전
후기대승경전들 가운데서 유식사상을 설하는 경전들과 더불어 또 하나의 부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여래장 tathagatagarbha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경전들이다. 여래장사상의 근본은 일절의 중생들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누구나 다 수행을 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이러한 사상은 소승경전들 가운데서도 이미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우리가 이미 고찰한 대로 대중부는 이것을 하나의 근본적 교설로 내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대승불교에 의하여 계승되고 발전되어서 '열반경'과 같은 대승경전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는 불성의 사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래장사상은 이와 같은 사상적 흐름의 결정으로서 여래장 계통의 경전들은 이 여래장의 개념을 이론화하고 발전시킨 경전들인 것이다. '여래장'이란 말의 범어는 'tathagatagarbha', 즉 '여래의 모태'라는 뜻으로서 중생들은 그 안에 여래를 키우는 모태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래적인 의미가 나중에는 여러 가지로 확대되어 해석이 되었다. '불성론'에 의할 것 같으면 여래장의 '장'의 개념에 삼종의 뜻이 있다고 한다.
즉 소섭장과 음부장과 능섭장의 뜻을 말한다. 소섭장은 일체중생이 여래의 지에 의하여 함장된다는 뜻이고, 음부장은 가리우고 감추어졌다는 뜻의 '장'으로서 여래가 번뇌 때문에 중생 속에 가리워져 있다는 것을 말하여, 능섭장은 중생이 본래부터 불위에 도달했을 때에 얻어지는 모든 공덕을 함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제 고찰할 여래장사상 계통의 경전들은 주로 두번째와 세번째의 의미로서 여래장을 설하고 있으며 첫번째의 뜻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자유스러운 해석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1) '대방등여래장경'
여래장사상계통의 경전 가운데서 제일 먼저 형성된 것은 '대방등여래장경'이다. 이 경은 일절중생은 그 안에 여래를 장하고 있는 여래장 tathagatagarbha이라고 한다. 여래는 지혜와 여래의 눈을 갖고서 무량의 번뇌에 감싸여 있는 중생들의 내부에 자기와 똑 같은 지혜와 눈을 가진 여래가 좌신하고 있는 것을 본다고 말한다. 이와같은 진리를 듣고서 수행하는 보살은 번뇌로부터 해방되어 여래가 된다고 한다. 중생 안에 들어 있는 여래를 여래장경은 '여래지', '여래지견', '여래법성', '여래의 종성', '법장', '지장', '여래신'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이와 같이 여래를 장하고 있는 중생의 모습을 '시들은 연화 중의 불', '군봉 중의 미밀', 빈천한 여자가 임신한 전륜왕' 등의 9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든 비유는 인간은 누구나 다 여래가 될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2) '부증불감경'
이 경의 주요 내용은 중생계가 곧 법계이며 중생의 깨달음의 증감에 관계 없이 중생계와 법계는 증감이 없다는 것이다. 이 중생계, 즉 중생의 본질은 여래장이고 여래의 법신이다. 그리고 이 여래장이 무량의 번뇌에 감싸여 있는 것을 중생이라 부르며, 세간을 멀리 떠나서 보리행을 닦을 때에는 보살이라 부르고, 일절의 번뇌를 떠나 청정해질 때에는 여래라 부른다고 한다. '여래장경'이 여래장을 중생과 동일시하는 반면에 '부증불감경'은 여래장을 중생계, 즉 중생의 본질(성 dhatu)과 동일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때의 '여래장'의 뜻은 여래를 장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여래의 정?, 흑은 법신의 뜻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3) '승만경'
이 경의 주인공은 승만 Srimala부인으로서 '유마경'과 같이 재가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이다. '승만경'은 법신이 번뇌에 의하여 감싸여 있을 때를 여래장이라 부른다고 한다. 여래장은 고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보리심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래장에 불공여래장과 공가래장의 이의의 구별을 하고 있다. 전자는 여래의 지와 불가분적인 여러 덕성을 갖춘 여래장을 말하고 후자는 여래의 지와 거리가 먼 번뇌가 본래적으로 없는 여래장을 의미한다.
4) '열반경'
이 경의 주제는 불타가 입멸할 즈음에 임하여 열반에 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방사에 불과하며 사실 여래는 상주불변하는 법신이며 열반은 상락아정의 사바라밀을 갖추어 있다는 것이다. 일체중생이 여래장이라는 사상을 '열반경'은 일체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일체중생실유불성). 열반을 상, 락, 아, 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소승불교경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아트만 atman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무아 anatman설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으로서 분명히 불타의 본래의 가르침에 배치되는 사상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반경'은 대승의 법신사상과 불성론적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대담하게 열반을 '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파니샤드적 사상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5) 능가경과 대승기신론
'능가경'과 '대승기신론'은 후기대승경전들 가운데서도 가장 늦게 형성된 것으로 간주되는 것으로서 사상적으로도 이들은 아뢰야식연기설의 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을 조화시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능가경'은 443년의 안역본이 있으므로 늦어도 4세기 말경에는 성립되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능가경'도 역시 아비달마 abhidharma적인 경전으로서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제종의 대승사상들을 거의 다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경의 내용이 번잡하고 때로는 상호모순적이기도 하다.
'능가경'은 스스로의 중요한 내용을 오법, 삼자성, 팔식, 이무아로 규정하고 있다. '오법'이란 명 naman, 상 nimitta, 망상 vikalpa, 성지 samyag-jnana, 진여 tathata를 말하고, '삼자성'이란 망상자성, 연기자성, 성자성(분벌성, 의타성, 진실성)을 뜻한다. 오법 중에서 명과 상은 망상자성에 해당하고, 망상은 연기자성, 성지와 여여는 성자성에 상응한다. ''팔식'은 아라랴식, 의 manas, 의식 mano-vijnana 및 안, 이, 비, 설, 신의 오식을 말하고 '이무아'는 인무아와 법무아를 뜻한다.
'능가경'의 사상적인 의의는 무엇보다도 아뢰야식과 여래장 tathagatagarbha을 동일시하는 데에서 발견된다. 본래 아뢰야식은 생사의 세계를 현성하는 망식이었으나 '능가경'은 이것을 여래장과 동일시하므로 제법은 곧 여래장의 현현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즉 아뢰야식연기설이 여래장연기사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경의 비유적인 설명대로 깊은 바다와 그 위의 물결은 결국 같은 것으로서 생멸의 세계 자체가 곧 진여의 나타남이라는 사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능가경은 아뢰야식이 단순히 자성청정심이 여래장이 아니라 진망화합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음도 누차 설하고 있다.
위와 같은 '능가경'의 사상과 괘를 같이하여 여래장연기 혹은 진여연기를 논하고 있는 것이 '대승기신론'이다. '기신론'은 진여와 생멸을 같은 일심(중생심)의 양면으로 본다. 일심법계의 무차별상은 진여이며 일심법계의 차별상은 생멸의 세계인 것이다. 이 차별상으로서의 일심법계(심생멸)가 곧 여래장자성청정심이며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은 생멸과 불생멸이 화합하여 비일비이한 양상이며 정과 염, 각과 불각을 포함하는 진망화합의 식이라고 '기신론'은 말한다. 아뢰야식의 불각에 의하여 염연기인 수연유전의 생사의 세계가 전개되며, 아뢰야식의 각으로 인하여 정연기인 반유환멸의 열반의 세계가 가능한 것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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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motte, E., trans., Sandhinirmocanasutra, L'Explication des mysteres, Louvain and Paris, 1935.
Ruegg, D.S., La theorie du tathagatagarbha et du gotra. Paris, 1969.
Suzuki, D.T., Studies in the Lankavatara Sutra. London, 1930.
_____, trans., The Lnkavatara Sutra. London, 1932.
Wayman, Alex & Hideko, trans., The Lion's Roar of Queen Srimala: A Buddhist Scripture on the Tathagatagarbha Theory. New York, 1974.
_____, '유식사상', '강좌. 대승불교' 8.
제13장 유가행철학
1 유가행철학의 전통
유가행철학은 중관철학과 더불어 인도의 대승불교철학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철학이다. 유가행철학은 용수에 의하여 확립된 중관철학의 진리에 대한 부정적 접근방식에 만족하지 않고 공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론을 전개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물들이 자성이 없이 정녕 공이며 순전히 우리의 마음에 의하여 구상되거나 조작된 것이라면, 결국 이들 사물들은 우리의 식 vijnana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식을 떠나서 그들이 객관적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꿈에서와 같이 그들은 오히려 의식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아래 유가행철학은 존재를 인식으로 환원하는 철학을 전개한 것이다.
유가행철학의 근본사상은 우리가 전장에서 고찰한 경전들, 특히 '해심밀경'에 발견되지만, 그것이 조직적으로 체계화되어 학파를 이루게 된것은 서력기원 4세기 초의 인물로 추정되는 미륵 Maitreya(약 270-350년경) 존자로부터이다. 그는 '유가사지론 Yogacarabhumi', '대승장엄경론 Mahayanasutralamkara', '중변분별론 Madhyanta-vibhaga', '법법성판별론 Dharmadharmatavibhanga', '현관장엄론 samayalamkara', '금강반야경역론(칠십?) Karika-saptati' 등의 중요한 논서들을 저술했다.26)
'유가사지론'은 유가행철학의 기본서로서 '유가사지론'이라는 이름은 이 책의 처음의 '본지분'에서 요가행자가 수행해야 하는 17개의 명상단계를 설명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서 유가행 Yogacara이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27) '유가론'은 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에 입각해 요가의 수행에 철학적인 기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유식설은 요가의 수행이라는 실천적 기반을 가졌다는 점이다. '섭결역분'에는 아뢰야식의 존재의 증명과 그 성격을 규정하며 아뢰야식 연기석에 입각한 유식사상이 취급되고 있다. '대승장엄경론','중변분별론', '법법성변별론'은 유식사상을 조직적으로 설명하는 논서들이다.
미륵존자의 뒤를 이어 유식사상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은 무착 Asanga(310-390년)과 그의 동생 세친 Vasubandhu이다. 무착은 처음에 소승교단에 출가했으나 나중에 미륵존자를 만나서 대승불교로 전향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로는'순중론', '현양성교론', '대승아비달마집론', '섭대승론' 등이 있으나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것은 '섭대승론'이다. '섭대승론 Mahayana-samgraha'은 대승아비달마집론'이나 미륵의 '대승장엄경론'에 의거한 논서로서 유식철학에 입각하여 대승불교의 특성을 10개 항목으로 논하는 체계적인 저술이다.
첫째 항목은 '소지의분'으로서 앎의 대상, 즉 제법이 의특하는 바로서의 아뢰야식 alayavijnana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소지상분'으로서 제법의 실상인 삼성설 trisvabhava을 논하고 있다. 즉 변계소집성 parikalpita-svabhava, 의타기성 paratantra-svabhava, 원성실성 parinispanna-svabhava의 삼성이다. 셋째 항목은 '입소지상분'으로서 유식 vijnapti-matrata의 진리에 들어가는 실전을 다루며, 넷째 '피입인과분'은 들어감의 인과 과로서 보살의 육바라밀다에 관한 장이다. 다섯째 '피수차별분'은 위의 수행의 등급으로서 보살의 십지 dasabhumi를 논한다. 여섯째 '증상계학분'은 위의 수행 가운데서 보살의 계율에 관하여 논하며 일곱째 '증상심학분'은 보살의 신정을 다룬다.
여덟 번째 항목은 '증상혜학분'으로서 무분별지 nirvikalpa-jnana의 수행을 취급한다. 아홉째는 '과단분'으로서 이상의 수행의 결과로서 얻게 되는 보살의 무주처열반을 논한다. 무주처열반이란 소승의 열반과는 달리 보살들이 얻는 열반으로서, 모든 번뇌 klesa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기는 하나 생사의 세계와 절단되지 않고 자비 가운데서 모든 중생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상태의 열반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섭대승론'은 '피과지분'에서 불의 삼신 trikaya을 논하고 있다. 유식사상을 직접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소지의분'과 '소지상분'이며 나머지는 수행과 그 결과에 관한 것이다.
2. 세친의 유식철학
미륵존자와 무착의 유식사상을 더욱 더 발전시키고 완성시킨 사람은 무착의 동생 세친 Vasubandhu이었다. 그의 연대에 관하여는 논란이 많으나 대략 4~5세기의 인물로 추정된다.28) 세친도 역시 처음에는 소승을 공부하여 '구사론'과 같이 소승교학의 명저을 냈지만 그의 형 무착의 영향을 받아 대승으로 전향하였다고 한다. 그는 미륵과 무착의 대부분의 저서들에 주석을 썼으며 '법화경', '무량수경', '십지경' 등의 대승경전의 해석서도 썼다. 한편 독자적인 저술로서 '대승성업론', '불성론', '유식이십론', '유식삼십송' 등을 저술했으며, '유식이십론 Vimsatika'과 '유식삼십송 Trimsika'은 그의 유식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저서로서 유식철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저서들이다. 따라서 이 두 론을 중심으로 하여 유식철학의 근본을 살펴보기로 한다.
식 vijnana 혹은 심 Citta의 중요성은 처음부터 불교사상에서 인정되어 왔다. 식은 오온 가운데 하나이고, 십이지연기설에서 제삼의 요소로서 인간의 윤회과정 속에서 전생과 후생을 이어 주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아함경전에도 '심은 법의 근본이다'라고 말하는가 하면29) 또 '심이 더럽기 때문에 중생이 더럽고, 심이 깨끗하기 때문에 중생이 깨끗하다'라고 말하고 있다.30) 또한 상응부경전 Samyutta Nikaya에도 '세간은 마음에 의하여 이끌리고 마음에 의하여 뇌란되나니, 마음이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종속시킨다'31)라는 말을 찾아볼 수가 있다.
우리가 이미 고찰한 대로 경량부의 철학에서는 일미온이라 하여 일종의 미세한 식을 종자식으로 삼아 윤회의 주체로 간주하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뿐만 아니라 '화엄경'의 '십지품'가운데도 삼계유심의 사상, 즉 이 세계는 오로지 심 citta, vijnana(식)뿐이라는 사상이 발견되는 것도 언급했다. 유식철학은 이러한 깊은 뿌리를 가진 사상으로서 '해심밀경', 미륵, 무착, 등에 의한 이론적 발전을 거쳐서 세친에 와서 일단 그 절정을 이루게 된 것이다.
우선 세친의 학설을 논하기 전에 '유식'이라는 말부터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유식'에서 '식'이란 범어로 'vijnana'sk 'vijnapti'를 번역한 말이다. 'Vijnana'란 말은 주로 의식 혹은 인식의 작용 그 자체를 말하며 그것이 어느 감각기관에 의존하여 생기는가에 따라서 안식, 이식, 의식 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vijnana'란 말은 단지 식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대상을 내용으로 하는 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식'의 '식'을 'vijnana'로 이해하면 '유식'이란 말은 '삼계유심'이라고 할 때 처럼 삼계는 오로지 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뜻에서 유식 vijnna-matrata철학은 유심 citta-matrata의 철학이라 부른다. 물론 유식철학에서 말하는 유식이란 우파니샤드나 베단타철학에서 말하는 아트만 atman과 같은 식 cit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항시 변하고 있는 흐름 samtana으로서의 식을 뜻할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식은 'vijnapti'를 번역한 말로서 'Vijnapti' 란 인식되어진 것, 인식의 내용, 혹은 표상 Vorstellung; representation, ideation을 의미한다.
이때의 '유식 vijnapti-matrata'이란 유식무경, 즉 우리가 보통 인식의 대상(경)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마음에 나타난 표상뿐이라는 주관적 관념론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식'의 보다 일반적인 뜻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vijnana'와 'vijnapti'의 구별은 언제나 명확한 것은 아니다.
세친의 '유식이십론 Vimsatika'은 주로 해서 유식무경을 해명하는 논서이다. 만약에 사물들이 우리의 표상이나 관념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여 우리는 사물의 시간적 공간적 구별을 설명할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는 동일한 대상을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대상에 따라서 취하는 성공적인 행위들을 설명하겠는가라는 질문으로 '유식이십론'은 시작한다.
세친은 이 문제를 꿈의 현상에 비교하여 대답한다. 즉 꿈과 같이 깨어나고 보면 허망한 것에서도 우리는 위의 네 가지 현상을 다 경험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은 결코 외경의 실재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악업으로 인하여 지옥에 떨어진 자들은 거기서 지옥의 문지기들을 보는데 문지기들은 지옥의 고통을 체험하지 않는고로 객관적인 존재일 리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지옥에 가는 자들의 나쁜 업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데 업이 남긴 힘 혹은 습기 vasana란 식 안에 존재하는 것인 반면, 사람들은 업의 결과는 식 밖에 존재한다고 잘못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럴 수가 없으며 따라서 행위의 습기나 결과도 모두 식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세친은 주장한다. 불타가 마치 인식에 내적 근거가 있는 것처럼 얘기한 것은 중생의 교화를 위한 것이며 사실은 인식은 식 자체의 종자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서 주체(자아)와 객체는 다 식의 나타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식이십론'은 주로 유식무경에서 '무경'의 면에 역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이 론은 어떻게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가라는 유식 vijnapti-matrata의 구체적 메카니즘은 밝히지 않고 있다. 이 유식의 이론을 전개한 것이 세친의 '유식삼십송 Trimsika'이다.
이 논의 초두에서 세친은 유식설의 핵심을 일송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유가설아법 유종종상전
피의식소변 비능변유삼
atmadharmopacaro hi vividho yah pravartate
vijnanapariname sau parinamah sa ca trividha
이것을 번역하면: '아와 밥과 같은 종종의 가설은 식의 전변에 의하나니, 이 전변은 삼종이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아 atman와 법 dharma은 주체와 객체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순전히 가설 upacara, 즉 방편상 임시로 설정된 개념들로서 무지로 인한 망분별의 소산 parikalpita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와 법이라는 허구적인 존재는 식 vijnana의 전변 parinama에 의거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선 유식철학은 종종의 가설을 단지 허구나 공이라고만 하지 않고 그러한 비존재들이 식이라는 어떤 존재에 의거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능변의 식에는 삼종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유식의 팔식설에 접한다.
식의 제일전변에 의하여 제팔식인 아뢰야식 alayavijnana 혹은 이열식이 성립한다. '아라야 alaya'라는 말은 장, 즉 창고라는 말로서 이 식이 그 안에 업에 의하여 훈습된 습기 vasana, impressions들을 종자의 형태로 저장하고 있기 때문에 장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혹은 우리의 업의 결과(열 vipaka)라고 하여 이열식이라고도 불리며,32) 나머지 모든 식들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근본식이라고도 한다. 이로부터 다른 모든 식들이 마치 대해상의 파랑과도 같이 전변에 의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라야식의 전변이란 아라야식 안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들이 발아하고 성장하여 나타나게 되는 제식의 분별작용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다름아닌 우리의 일상적 경험의 세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에 내재해 있던 종자들이 현세화하여 나타나는 식들을 전식 pravrtti-vijnana이라 부르며 이와 더불어 현상세계가 나타나는 것을 현행이라 한다. 주체와 객체,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것, 자체와 환경, 이 모든 것이 아뢰야식의 전변에 의하여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현현된 세계에 근거하여 우리는 업을 짓고 업은 또다시 종자들을 훈습하여 아뢰야식에 저장되게 된다. 어떤 종자들은 현현되지 않고 종자로서 남아 있으면서 서로 자류상속을 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관계들을 말하여 유식학에서는 '종자생현행, 현행훈종자, 종자생종자'라 한다. 아뢰야식은 흐르는 물과 같이 항시 변천하면서 윤회의 주체를 이루는 존재이다. 아뢰야식은 항시 활동을 하고 있으나 아무런 구체적인 인식작용도 하지 않는다. 아뢰야식 자체는 번뇌에 덮여 있지도 않고(무부) 선과 악에 대하여 중성적인(무기) 존재이나, 아뢰야식 내에 있는 종자들은 선악의 구별이 있다고 한다.
아뢰야식의 활동과 함께 제칠식인 말나식 manaseh도 작동하게 된다. 이것이 식의 제이전이다. 말나식은 사량 manana을 위주로 하는 사량식으로서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하여 아집을 일으키며 항시 아견 atma-drsti, 아치 atma-moha, 아만 atma-mana, 아수 atma-sneha의 사번뇌를 동반한다고 한다. 상키야철학에 있어서 아함카라 ahamkara에 해당하는 개념인 것이다. 말나식은 아뢰야식과 같이 자나깨나 언제나 활동하고 있는 식으로서, 나머지 여섯 가지 식들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그들의 활동의 전제가 된다. 다른 여섯 가지 식들은 각각 개별적으로 활동하다가 중지하지만 말나식은 끊임없이 활동하면서 인간의 정신활동의 연속성을 유지시켜 주는 심층적인 식인 것이다.
제칠식의 활동에 따라서 아뢰야식의 전식인 나머지 육식도 작용을 하게 된다. 이것이 식의 제삼전변인 것이다. 육식은 안, 이, 비, 설, 신, 의의 육근에 의존하여 각각의 대상을 요별 visaya-vijnapti하기 때문에 요별경식이라 부른다. 이 가운데서 처음 오식은 오직 각각의 감각기관에 현존하는 대상들만을 아무런 사유나 분별도 없이 지각하는 데 비하여 제육식인 의식 mano-vijnana은 정신적 현상들(심소법들)뿐만 아니라 오식을 통하여 주어지는 대상들에 대하여도 분별과 집착을 한다. 그 뿐 아니라 의식은 현존하지 않는 대상에까지도 관여할 수 있다. 즉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고 회상하기도 하며 아무런 대상이든 상상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의식이 오식과 함께 생기할 때를 오구의식이라 부르며 의식이 그 자체만으로 단독으로 생기하는 경우를 독두의식이라 부른다.
이상과 같은 삼종의 식전변에 의하여 만법이 현현한다는 것이 유식 vijnapti-matrata의 이론이다. 그러나 이 유식의 진리를 모르고 사람들은 아와 제법에 대한 망분별 vikalpa을 하고 집착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물의 변계소집성 parikalpita-svabhava, 즉 망분별된 모습이라 부른다. 오직 식 vijnapti 뿐인 것을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망분별하는 식의 작용 자체들도 아라야식의 종자에 의존하는 의타적 존재인 것이다. 이것을 의타기성 paratantra-svabhava, 즉 타의 인연에 의존하는 모습이라 부른다.
그러나 바로 제식의 의타기성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식의 본성 그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차별성과 주객의 분별과 대립을 초월한 진여 tathata 그 자체를 보는 것이다. 이것을 원성실성 parinispanna-svabhava이라 부른다.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한다. 의타기성을 바로 깨달으면 원성실성을 깨닫는 것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변계소집성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 삼성 trisvabhava의 진리를 다른 각도에서 볼 것 같으면 삼무자성 trividha nihsvabhavata이 된다. 삼성의 개념이 중관파의 부정적 공사상을 넘어서서 실재관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삼무자성은 공의 다른 표현이 된다. 즉, 분별된 상들은 공하기 때문에 상무자성이요, 연기에 의하여 생기한 것은 공하기 때문에 생무자성이요, 제법의 실상이 본래 공이기 때문에 승의무자성인 것이다.
유가행철학도 설일체유부와 같이 제법을 오위로 분류한다. 그러나 유부의 75법 대신 100법을 든다. 물론 유가행철학은 유식사상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제법을 유부와 같이 실재적으로 보지 않고 식의 구상으로 볼 뿐이다. 그러나 수행의 목적을 위하여 제법의 구별과 분류는 의미있는 것이다. 100법은 심법의 8개(즉 8식), 심소법의 51개, 색법의 11개, 심부상응행법의 24개, 무위법의 6개로 되어있다.
유가행 yogacara'이라는 말이 나타내듯이 유식의 철학은 단순히 이론적 사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요가의 수행을 통한 경험에 의거한 것이다. 요가의 단계가 깊어짐에 따라 유가행자는 유식의 진리를 깨달아 주체도 객체도 사라져 버린 상태에 도달한다. 모든 집착과 미망으로부터 해방되며 그의 인격의 심층, 즉 아뢰야식 내에서 일종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고 한다. 이것을 전의 asraya-paravrtti라 부른다. 아뢰야식에 있은 유루종자는 무루의 종자로 바뀌게 되며 번뇌가 바뀌어 열반을 등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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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세친 이후의 유식철학
1 진나와 불교 인식론
유식무경을 주장하는 유식철학은 자연히 인식의 문제를 불교철학의 근본적인 관심사로 만들었다. 유식철학에서는 결국 존재론이 인식론이요, 인식론이 존재론인 것이다. 인식의 문제에 관한 관심은 세친의 철학을 계승한 진나(Dignaga; 5~6세기)에 와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 체계적인 불교인식론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진나의 저서로는 '관소연론 Alambanapariksa', '원집요의론 Prajnaparamita-pindartha-samgraha', '순중론 Hastavalaprakarana', '집량론 Pramana-samuccaya'이 있다.
'관소연론'은 유식의 입장에 서서 인식의 대상을(소연) 논하고 있고 '원집요의론'은 '소품반야경'의 공사상을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의 삼성에 의하여 해석하는 논서이다. '순중론'은 외경이란 식의 소현이며 삼계는 가명뿐이라는 것을 논한다. 마치 사람들이 밧줄을 보고서 뱀이라 착각하듯이 외계가 허망한 것을 모르고 실유로 망집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진나는 '순중론과 '집량론'에서 이와 같은 유식무경의 설을 뒷받침해 주는 특유의 인식론을 전개하고 있다.
진나 당시에는 이미 인도의 각 철학학파들의 형이상학적 견해들을 체계적으로 진술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입장을 인식론적 성찰에 의하여 더욱 공고히 다지는 작업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존재론을 인식의 문제로 대치한 유식철학이 인식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진나는 유식철학뿐만 아니라 불교의 근본적 세계관인 무아와 무상의 진리를 인식론적으로 옹호함과 동시에 정리학파와 미맘사 Mimamisa 철학의 이론들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이에 응하여 정리학파의 웃됴타카라 Uddyotakara는 그의 '정리평역 Nyaya-varttika'에서 정리철학의 입장을 옹호했으며 진나의 설을 반박했다.
불교 측에서는 법칭(Dharmakirti; 7세기)이 나와서 진나의 인식론 및 논리학을 더욱더 조직적으로 발전시킬 뿐 아니라 '집량론'의 주석서인 '양평역 Pramana-varttika'에서 웃됴타카라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또한 미맘사 학파의 이론도 공격하여 미맘사의 구마릴라 브핫따 Kumarila Bhatta는 그의 Sloka-vartlika에서 이에 응수했다. 한편 9세기의 바챠스파티미슈라 Vacaspatimisra는 그의 '정리평역해주'에서 진나와 법칭의 이론을 비판하며 정리철학의 입장을 옹호했다.
정리, 미맘사, 베단타 등의 정통학파들의 도전하에 불교인식론을 끝까지 옹호한 자는 8세기의 샨타락시타 Santaraksita 적호와 그의 제자 카말라쉴라 Kamalasila였다. 전자는 '진리강요 tattvasamgraha'를, 그리고 후자는 이에 대한 주석서를 써서 웃됴타카라와 구마릴라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학파들을 논파하려고 하였다. 결국 그들은 티벳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은 인도불교에 있어서 마지막 거물들이 되었던 것이다. 진나에 있어서 시작된 불교와 정통 바라문철학 학파들과의 논쟁은 인도 철학사에 있어서 가장 흥미있고 중요한 논쟁 중의 하나였다.33) 이제 진나와 법칭의 설을 중심으로 하여 불교 인식론의 대강을 살펴보기로 한다.
본래 불교는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불타 자신으로부터 비롯하여 오직 지각 Pratyaksa과 추론 anumana만을 인식의 정당한 방법으로 인정해 왔다. 이것은 진나와 법칭에 와서도 마찬가지로서 그들의 인식론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불교인식론은 지각에 관한 이론과 추론에 관한 이론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 추론에 관한 이론은 곧 인명학 Hetuvidya이라 불리는 불교논리학인 것이다. 우선 진나와 법칭에 있어서 지각에 관한 이론부터 먼저 고찰해 보자.
지각의 문제를 둘러싸고 인도 철학에는 두 가지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이론이 있다 하나는 무형상인식론 nirakara-vada이요, 다른 하나는 유형상인식론 sakara-vada이다. 무형상인식론이란 우리가 외계의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서 감각기관에 의하여 지각되는 형상 akara은 외부의 대상들 자체에 속한 것이며 지각활동은 그 형상을 반영하는 것뿐이라는 이론이다. 정리학파나 승론철학에서는 지각이란 자아 atman가 내적, 외적 감각기관을 통하여 대상 artha과 접촉하는 것을 의미하며, 설일체유부에서는 감각기관과 대상과의 접촉을 말한다.
이에 반하여 유형상인식론은 지각이란 객관적 세계를 직접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지각상만을 상대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즉 내부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표상들만에 관계한다는 이론이다. 경량부와 유식철학은 이러한 이론을 따른다. 그러나 경량부가 외적 대상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반면에 유식철학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경량부에 의할 것 같으면 우리의 지각은 대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다만 마음속에 주어지는 상들에만 관하지만, 이 상의 나타남의 근거로서 외부세계를 추리에 의하여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
진나을 중심으로 한 불교인식론자들은 한편으로는 유식무경의 사상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식이론을 전개함에 있어서는 경량부의 학설을 방편상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또한 경량부에서 강조하고 있는 제법의 순간성에 입각하여 지각과 추론의 구별을 더욱더 날카롭게 했다.
지각이란 진나에 의할 것 같으면 사물의 순간순간 부단히 변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자상 svalaksana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것으로서, 어떤 개념적 판단 vikalpa도 개입되지 않는 인식의 양태이다.
추론은 이와는 달리 추상적인 개념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간접적인 인식양태로서, 사물의 보편상 samanyalaksana을 내용으로 하여 오성의 개념적 구성 kalpana 혹은 판단작용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자상이란 직관상이고 보편상이란 마음에 의하여 구성되고 분별되는 관념 혹은 개념인 것이다. 직관상이란 순간순간 변하고 있는 사물의 실재의 모습을 순간적으로 드러내는 것임에 반하여 보편상이란 이러한 언표될 수 없는 유동적인 실재를 언어와 오성의 분별작용 vikalpa에 의하여 고정시킨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분별작용에 의하여 순간적인 것들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 사물들을 실체화하여 어떤 불변하고 안정된 것으로 착각하며, 그러한 인위적이고 거짓된 세계에 안주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순간순간 변하고 있는 불꽃의 양태들을 보면서 '불꽃'이라는 하나의 추상화된 개념으로서 그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지각이란 바로 이런 언어나 오성의 활동에 의한 구성 kalpana을 떠나서 순수하게 역동적인 실재에 순간적으로 접하는 인식행위이다.
불교인식론은 따라서 정리철학과는 달리 지각의 두 종류, 즉 무분별적 nirvikalpa 지각과 분별적 savikalpa 지각의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분별적 지각이란 이미 언어와 사고작용이 개입된 것으로서 역동적인 실재를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나는 이상과 같은 인식이론에 의하여 언어의 의미에 관한 독특한 견해를 폈다. 진나에 의하면 말이란 우리의 마음에 의하여 구성된 인위적인 것으로서 보편의 세계를 지칭하기 때문에 결코 순간적 특수들의 연속인 실재의 세계를 지칭할 수가 없다. 실재란 언어의 피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나에 의하면 언어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실재를 드러낸다고 한다. 즉 개념이나 이름은 상대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어떤 개념을 사용할 때는 그 개념은 그것과는 다른 모든 개념을 배제 apoha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한 특수한 사물을 지칭하게 된다는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을 '소'라고 할 때는 그것은 '말' 아닌 것, 혹은 소 아닌 어떤 것이 아닌 것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보편적인 개념을 특수한 사물의 지칭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의 용법은 결국 추론에 의거한 것이다.
진나는 이렇게 지각 pratyaksa과 오성적 구성 kalpana을 일단 확연하게 구별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감각적 소여와 오성적 구성과의 종합에서부터 오는 지식을 설명하기 위하여 양자 사이에 어떤 중간적 혹은 모계적인 존재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는 소위 정신적 지각 manasa-pratyaksa: mental sensation이라는 것을 말한다.
정신적 지각이란 내적 감각기관인 오근 manas에 의한 지각, 즉 의식 mano-vijnana의 활동으로서, 우리가 외적 감각기관을 통해서 어떤 순간적인 대상을 순간으로 접촉한 바로 다음 순간에 주어지는 지각이라 한다. 그러나 이 지각도 역시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지식 Pratyaksa의 일종으로 간주하며 개념적인 간접적 지식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진나와 법칭에 의하면 식전변에 의하여 일어나는 우리의 모든 인식은 자의식 svasamvedana을 수반한다. 모든 의식은 동시에 자의식이며 우리의 앎은 스스로를 비추는 자명성 svayamprakasa을 지니고 있다. 마치 등불이 그 자체를 비추기 위하여 다른 또 하나의 등불이 필요없듯이 자의식이란 스스로를 드러내는 성격을 지닌 것이다.
따라서 진나에 의하면 지각적인 지식에 있어서도 지각하는 주체(grahaka-akara; 견분, 능취, 능량)와 지각되는 마음의 대상(grahya-akara; 상분, 소취, 소량)과 더불어 인식의 자기인식이라는 제삼의 요소가 인식의 결과(pramana-phala, svasamvitti; 양과, 자증분)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진나가 주장하는 인식의 삼분설로서 식의 전변에 의하여 일어나는 인식의 구조를 밝히는 이론인 것이다. 인식의 활동에 있어서 하나의 식이 세 가지 양상을 띠게 된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이론에 있어서는 인식의 대상은 인식의 행위 안에 내재하여 있고, 인식의 행위는 인식의 결과와 일치하는 것이다. 인식의 결과, 곧 자증분을 떠나서는 어떤 인식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존재하는 것은, 인식의 결과 즉 자증분으로서의 인식의 현상뿐이고 별도로 인식의 주체와 객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자증분은 하나의 흐름으로서의 식일 뿐이며 영혼이나 자아 atman에 속한 속성이나 상태가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자증분의 인식론은 유식사상에 입각해서 존재를 하나의 비인격적인 인식현상으로 환원 내지 해제시켜 버리는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진나의 인식론은 정리나 미맘사 Mimamsa와 같은 실재론적인 철학의 인식론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령 정리철학의 인식론에 의하면 인식이란 자아 atman의 행위로서, 인식의 주체 atman와 대상과 수단(외적, 내적 감각기관)과 결과는 모두 별개의 요소들인 것이다. 그리고 인식의 자의식(자증분)이란 내적 감각기관인 의근 manas이 인식이라는 자아의 상태를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행위로서 그 자체가 또하나의 자아의 상태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진나는 세친의 유식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많은 유식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의 철학은 무성(5~6세기), 호법 Dharmapala(6세기 전반), 계현 Silabhadra(6-7세기)에 의하여 대대로 계승되었다. 무성은 '섭대승론역'을 저술했으며 진나의 인식의 삼분설을 계승했다. 호법은 '유식이십론' 및 '유식삼십송'에 주역을 썼으며, 그는 자증분 이외에도 그것을 의식하는 또 하나의 의식으로서 증자증분을 세워 사분설을 주장했다. 호법의 '유식삼십송'에 대한 해석은 그의 제자 계현을 통하여 당나라의 현장(600-664)에 소개되었다. 현장은 이에 근거하여 '성유식론'을 번역하여 동아시아 불교의 유식철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법상종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했다.
한편 진나의 계통과는 달리 그와 동시대의 유식학자로서 덕혜 Gunamati가 나와서 세친의 논에 주석을 썼으며 그의 제자 안혜 Sthiramati(6세기)는 '중론', '중변판별론', '구사론', 그리고 '유식삼십송'에 주석서를 썼다. 안혜는 인식론에 있어서 오로지 자증분 하나만을 일정하고 그것을 의타기성의 법으로 간주했으며 상분과 구분은 변계소집의 방법으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진나 호법은 삼분 혹은 사분을 모두 의타기성의 법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두 견해 모두 인식이란 심 자체, 즉 아라야식의 전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는 유식철학자들로서 의견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도 난사 Nanda(6세기)라는 유식학자는 상분, 견분만을 인정하는 이분설을 주장했다.
2. 법칭의 불교 논리학
지금까지 우리는 지각 pratyaksa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진나의 인식론을 고찰했다. 불교논리학은 인식의 다른 하나의 방법인 추론 anumana에 관한 이론으로서, 인명 hetuvidya이라 부른다. 인명은 소위 오명이라 부르는 인도의 전통적인 다섯 가지 학문의 하나이다.
오명이란 성명 sabdavidya 즉 문법학 내지 훈고학, 공교명 silpa-karma-sthana-vidya 즉 기술, 공예, 역수의 학문, 의방명 cikitsa-vidya 즉 의학과 약학, 인명 hetu-vidya 즉 논리학, 그리고 내명 adhyatma-vidya 즉 자기의 종교를 연구하는 학문(바라문교에서는 베다에 관한 학문을 말하며 불교에서는 물론 불교의 학문)을 말한다.
'인명'이란 말의 '인 hetu"이란 논증의 형식에서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이유를 가리키는 말로서, 그것이 논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므로 논리학을 인을 밝히는(명) 학문이라 하여 '인명'이라 부르는 것이다.
불교논리학의 전통을 살펴볼 것 같으면, 용수의 '방편심론', '해심밀경'의 제팔품인 '여래성소작 품', '유가사지론'의 '본지분', 무제의 '대승아비달마집론의 '론의품', 세친의 '여실론' 등에서 논증법에 대한 논의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통을 이어받음과 동시에 논증법의 새로운 경지를 수립한 자는 진나였다. 그는 '집량론'과 '인명정리문론'을 저술했으며 인의 삼상설, 구구인론 및 삼지작법 등의 이론을 통하여 소위 신인명의 전통을 수립했다.34)
진나 이전에는 추론의 논법으로 오분작법, 즉 다섯 가지의 명제(종, 인, 유, 합, 결)를 사용했으나 진나는 이중에서 '합'과 '결'을 불필요한 것으로 제거하고 삼지작법을 세운 것이다. 이것을 신인명이라 부르며 그 이전의 것을 구인명이라 부른다. 진나 이후 그의 문하에서 상갈라주 Sankarasvamin는 '인명입정리론'을 썼으며, 또한 7세기에는 법칭 Dharmakirti(650년경)이 출현하여 '집량론'의 주역서 '양평역 Pramanavarttika'과 '정리적론 Nyayabindu'이라는 논리학서를 저술하여 진나의 논리학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이제 불교논리학의 명제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법칭의 '정리적론'에 의거하여 불교논리학의 대강을 살펴보기로 한다.35) 법칭은 정리철학과 마찬가지로 추론을 자기자신을 위한 위자비량 svartha-anumana과 남을 위한 위타비량 parartha-anumana으로 구별하고 먼저 위자비량을 다룬다. 우리가 정리철학에서 이미 본 대로 추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추리의 근거가 되는 인 hetu, 즉 대명사 sadhya와 소명칭 paksa를 연결시켜 주는 중명사 혹은 표징 linga에 있다. 예를 들어,
종--'산에 불이 있다'(불=대명사; 산=소명사)
인--'연기가 나는고로'(연기=중명사)
유--'연기가 나는 곳에는 불이 있다', 아궁이에서처럼
라는 추론이 가능하고 타당한 것이 되려면 추론의 근거가 되는 인, 즉 '연기'를 바로 짚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칭은 인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조건을 먼저 제시한다. 이것을 인의 삼상이라 한다.36)
첫째 조건은 인(연기)이 결론의 주어, 즉 소명사(산)에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편시종법성). 거기에'만'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여하튼 거기에 존재해야만 결론이 타당하다는 얘기다. 둘째 조건은 인은 반드시 결론의 술어, 즉 대명사(불)와 동류의 것인 경우에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동품정유성). 인이 대명사와 함께 언제나 존재해야 할 필요는 없으나, 대명사에 한해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규칙이다. 인의 세번째 조건은 바로 이 점을 더욱 명확히 하는 것으로서 대명사와 이류적이 되는 것에는 인은 결코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법칙이다(이품편무성).
둘째와 세째 규칙은 인과 대명사와의 보편적 조연관계 vyapti를 알기 위하여 양자의 일치관계를 하나는 긍정적 anvaya으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vyatireka으로 확인해 보는 것이다. 동일한 조건을 두 가지로 표현한 것으로서 둘 중에 하나만이라도 예외 없이 들어맞으면 된다고 한다. 실용적인 이유로 해서 양자를 다 언급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법칭은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인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즉 부정과 동일성과 인과성이다. 만약에 추리된 술어(대명사, 불)가 부정적으로 표현되었을 때에는 인도 부정적인 성격을 지닌다. 반면에 결론이 긍적적으로 표현될 경우에는 인은 그 추리된 서술어와 동일성 아니면 인과성의 관계를 가진다고 한다.
동일성이란 인 자체로부터 서술어가 논리적으로 추리되어 나올 때, 혹은 인이 단순히 존재하기만 해도 이에 의존하여 결론적인 술어가 따라나올 때 svabhava-anumana 성립되는 인과 대명사와의 관계를 말한다. 예를 들면, '이것은 나무이다, 왜냐하면 은행나무(혹은 마로니에)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은행나무'로부터 '나무'라는 서술어는 논리적 필연성을 갖고 나오는 결론인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분석판단 analytical judgment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인과성이란 인과 대명사가 인과적 관계를 가질 때 성립하는 것이다. Karya-anumana. '산에 불이 있다, 연기가 나므로'라는 식의 추론이다. 즉 경험에 의존한 종합판단 synthetic judgment에 해당하는 개념인 것이다.
법칭에 의할 것 같으면 동일성이나 인과성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인과 대명사 사이에 필연적인 본질적 의존관계 svabhava-pratibandha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양자 사이에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불란의 관계 avina-bhava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경우에는 연역된 사실(대명사, '나무')에 그로부터 연역하고자 하는 바의 사실(인, '은행나무')이 본성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의존하여 있으며, 인과성의 경우에는 추리근거로서의 인('연기')이 추리결론으로서의 대명사('불')에 자연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인의 세 종류 가운데서 동일성과 인과성을 논한 다음 법칭은 부정의 문제와 관련하여 부정적 판단의 문제를 다룬다. 즉 부정적 판단의 원리와 11가지 형태들, 그리고 부정적 판단의 성격과 형이상학적 의의 등을 논의한다.
부정적 판단이란 법칭에 의하면 정리나 승론과 같은 실재론적 철학과는 달리 단순히 지각될 수 있는 것의 무지각 anupalabdhi에 근거하는 것이지 '부재 abhava'이라는 범주 padartha가 별개의 인식대상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미맘사학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부존을 인식하는 특별한 인식방법으로서 '부존량'이라는 것도 설정할 필요가 없다. 지각될 수 있는 것의 무지각이 그 사물의 부존에 대한 타당한 인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칭은 말하기를 온당한 인식의 방법 Pramana, 즉 지각이나 추론을 통하여 주어질 수 없는 대상의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은 의심의 원인 samsaya-hetu이 되는 것으로서 지식이 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어떤 사물에 대해서 전혀 인식의 방법이 없을 때에는 그 대상의 부존은 지식으로서 성립될 수 없다고 한다. 올바른 인식의 존재는 대상의 존재를 증명하지만 인식의 부존은 그 대상의 부존을 증명하지는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위자비량 svartha-anumana, 즉 혼자서 스스로를 위하여 추리하며 판단하는 과정에 대한 법칭의 이론을 고찰했다. 다음으로 그는 타인을 위하여 자기의 판단을 공식적으로 제시하는 위타비량 parartha-anumana의 논증과정을 다룬다.
위타비량이란 인의 삼상을 타인에게 전달시키는 데 있다고 법칭은 정의한다. 그 형식은 위자비량과는 달리 아리스토테레스 논리학의 삼단논법 syllogism과 같다. 즉 유와 더불어 대전제('연기가 나는 곳에는 불이있다: 아궁이에서처럼')를 먼저 세우고 그 다음 구체적인 경우로 들어가서 결론을 내리는 형식을 취한다. 다시 말하면 위자비량은 귀납적 성격을 띠고 위타비량은 연역적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법칭은 위타비량의 두 형태를 구별하고 있다. 이 둘은 의미상의 차이는 없고 형식상의 차이뿐이라고 한다. 하나는 소명사(결론의 주어)와 유(예가 인을 공통적인 성질로 지님에 따른 양자의 일치에 근거한 논증의 형식으로서 다음과 같은 형태를 취한다:
유-'모든 산물들은37) 무상하다', 병과 같이
인-'말소리는 그런 산물이다'
결-'말소리도 무상하다'
다른 하나는 불일치의 형식을 취한다:
유-'영원한 것들은 산물이 아니다', 허공38)처럼
인-'말소리는 산물이다'
결-'말소리는 무상하다'
법칭은 다음에 이들 두 형태의 위타비량에 대하여 여러가지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위자비량에서와 같이 부정과 동일성과 인과성에 근거한 추론의 양태들을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법칭은 삼단논법에서 결론은 반드시 내릴 필요가 없다고 한다. 결론은 유와 인과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법칭은 결론적 명제의 정의, 논리적 오진의 삼종, 즉 성립될 수 없는 asiddha 인, 불확실한 인, 반인, 그리고 논파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이상으로 우리는 법칭의 '정리적론'에 따라서 불교논리학(신인명)의 대강을 살펴보았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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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백수 '불교논리학.
제15장 쟈이나 철학체계
굽타왕조 시대에 들어와서 꽃이 피게 된 각 철학파의 왕성한 철학적 활동들은 불교철학뿐만 아니라 쟈이나교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어 이 시기에 우리는 쟈이나철학도 체계적으로 정립되는 것을 본다. 쟈이나 사상가들은 원시 쟈이나교의 해설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과 윤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타학파의 철학적 이론들을 의식하여 자신의 인식론과 존재론적 사유를 좀더 조직적으로 전개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러한 지적 추세에 응답하여 나온 쟈이나교의 대표적 철학자로서 공의파의 쿤다쿤다와 백의파의 우마스바티를 들 수 있다. 전자는 "오운리정요", "교의정요"와 같은 교의강요서를 썼으며, 후자는 "진리증득경"이라는 아주 조직적인 쟈이나교 강요서를 저술했다. 1)우마스바티 이후로도 쟈이나철학은 많은 사상가들을 배출했지만 큰 철학적인 변화는 없었고 다분히 인도 철학사에서 하나의 방계적인 흐름으로 존속해 왔다.
이제 상기 강요서들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쟈이나교의 체계화된 철학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자이나 인식론
쟈이나철학은 지식을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으로 나눈다. 간접적인 지식은 우리가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지식으로서, 의견과 청견의 두 종류가 있다. 의견이란 지각적인 인식이나 추론을 말한다. 지각적 지식은 타학파에서는 보통 직접적인 지식으로 분류되지만, 쟈이나에서는 순수한 감각만으로는 지식이 성립되지 못하고 사유의 행위가 개입하여야만 되기 때문에 지각적 지식은 간접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청견은 권위있는 자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지식을 말한다.
쟈이나철학이 인정하는 직접적인 지식이란 일종의 특수한 지각적 지식으로서, 제한지, 타심지, 완전지의 3종이 있다. 우선 완전지의 개념을 이해하려면 쟈이나교의 영혼관을 잠깐 고찰할 필요가 있다. 자이나교에 의하면 영혼은 마치 태양의 빛과 같이 의식이라는 것을 본질적으로 가졌다고 한다. 따라서 아무런 방해가 없는 한 영혼은 대상들을 직접적으로 완전히 드러내는 지식을 소유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영혼은 업이라는 장애물 때문에 그러한 완전지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업의 산물인 바 우리의 몸과 감각기관과 의근은 영혼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완전지를 제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느 정도 업을 제거한다면 우리는 보통 사람이 감각기관이나 마음을 통하여 얻을 수 없는 미세한 혹은 잘 보이지 않는 사물까지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이것을 완전지에 대하여 제한지라 부른다. 아직도 시, 공의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타심지는 문자 그대로 타인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아는 지식으로서, 영혼이 미움이나 시기와 같은 번뇌들을 제거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시, 공의 제약 아래 이루어진다. 제한지나 타인지는 감각기관이나 의근의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직접적인 지식에 속하는 것이다.
쟈이나 인식론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그들의 지식에 대한 상대성이론이다. 쟈이나교는 마하비라 당시 때부터 실재에 대한 어떤 독단적 견해를 주장하는 것을 반대하는 관용의 정신을 지녀왔다. 이 전통이 지식에 대한 상대성의 이론을 통하여 더욱더 분명한 인식론적 입장으로 발전된 것이다. 쟈이나에 의하면 실재나 혹은 하나의 사물조차 무수히 많은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우리들이 보통으로 가지는 지식은 한 사물의 여러 측면들을 다 인식할 수 없고 오로지 관찰자의 관점에 따라서 한 면만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제한된 부분적 지식과 이에 근거한 판단을 '나야'라 부른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적인 판단은 사물의 한 측면과 보는 입장에 따라서만 참이지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많은 논의와 논쟁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부분적인 지식을 무조건적 진리로 간주하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쟈이나철학은 주장하기를 불완전한 지식의 소유자인 우리의 모든 판단들은 '어떻게 보면' 혹은 '아마도'하는 조건적 표현을 수반해야 한다고 한다. 쟈이나의 이러한 이론을 조건주의라 부른다. 쟈이나철학은 이러한 조건적 명제들의 일곱 가지 형태를 구별한다. 즉 우리는 한 사물에 대하여 말할 때, 다음과 같은 7가지 관점을 갖고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 S는 어떻게 보면 P이다
2. S는 어떻게 보면 P가 아니다
3. S는 어떻게 보면 P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4. S는 어떻게 보면 말할 수 없다
5. S는 어떻게 보면 P이기도 하고, 말하기 어렵기도 하다
6. S는 어떻게 보면 P가 아니나, 말하기 어렵기도 하다
7. S는 어떻게 보면 P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나 말하기 어렵기도 하다
이상과 같은 진리의 상대성을 무시하고 오직 하나 입장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쟈이나철학은 독단주의라 부른다. 그러나 쟈이나의 인식적 상대주의는 회의주의나 불가지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제한된 조건하에서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판단을 확실하게 내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판단이 다른 각도에서 볼 때는 그릇된 것일 가능성도 갖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하면 된다는 것이다.
2. 쟈이나 형이상학
쟈이나의 인식적 상대주의는 쟈이나의 실재관에 근거하고 있다. 쟈이나에 의하면 한 사물은 수없이 많은 성격들을 지녔다고 한다. 즉 그것이 어떻다는 긍정적인 성격들과 그것이 어떠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성격들을 합쳐서 생각하면 하나의 사물이라 할지라도 무수한 측면을 지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개의 사물이라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오직 완전지를 소유한 자만이 가능한 것이다. 쟈이나에 의하면 이러한 수많은 성질들은 그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에 속하여 있다. 후자를 곧 실체라 부른다.
실체에 속한 성질 가운데는 없어서는 안될 본질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의식은 영혼의 본질적인 성질이며 욕망, 쾌락, 고통 등은 변하는 우연적인 성질들인 것이다. 실체가 변하는 것은 이들 우연적인 성질들 때문이며, 이 성질들은 실체의 양태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쟈이나철학은 실재란 변하지 않는 면과 변하는 양면을 다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며, 불교는 변하는 것만 강조하고 베단타철학은 불변하는 것만 강조하는 일방적 견해들이라고 비판한다.
쟈이나철학은 실체를 연장을 지닌 것과 연장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대별한다. 전자는 다시 두 종류로 분류된다. 즉 영혼 혹은 생명과 영혼이 없는 비생명이다. 생명 혹은 영혼은 또다시 해방된 영혼과 속박된 영혼으로 구분되며 속박된 영혼은 가동적인 것과 고정된 것으로 나뉜다. 고정된 영혼은 지, 수, 화, 풍, 식물 등의 가장 불완전한 몸에 살고 있으며 촉각만을 가졌다고 한다. 반면에 가동적인 영혼은 이보다 더 높은 형태의 몸들을 가졌으며 감각기관도 두 개 이상 다섯 개까지 가졌다.
의식은 영혼의 본질적 성질로서 모든 영혼은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본질적으로는 같다. 단지 그들이 갖고 있는 업의 장애에 따라 의식의 정도에 차이가 생길 뿐이다. 영혼의 고유한 상태는 믿음, 무한한 앎, 무한한 행복,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영혼은 지식과 행위와 경험의 주체이다. 속박된 영혼은 그것이 태어난 육체에 편재하여 비추고 있으며 그 자체는 형태가 없으나 빛과 같이 그것이 속해 있는 육체의 크기와 같은 형태를 취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은 연장을 가진 실체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다. 영혼은 영원하나 유한한 것이라고 한다.
비생명체인 실체에는 물질, 시간, 공간, 운동, 정지가 있다. 물질적 실체는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나누어질 수도 있고 합쳐질 수도 있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가장 작은 부분을 원자라 부르며 그들의 결합에 의하여 물체들이 이루어진다. 쟈이나철학에서는 우리의 감각기관과 의근(뜻 의, 뿌리 근)과 숨까지도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물질은 원자들과는 달리 촉, 미, 향, 색의 네 성질을 갖고 있으며 성은 물질의 본래적 성격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공간은 연장을 가진 실체들에게 장소를 제공해 주며 연장의 필연적 조건으로서 그 존재가 추리되어 알 수 있다고 한다. 공간은 연장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연장의 장소인 것이다.
쟈이나철학은 두 가지 종류의 공간을 말한다. 영혼과 다른 실체들이 거하는 세간적 공간과 이것을 넘어서서 있는 초세간적 공간이다. 해방된 영혼들은 세간적 공간의 맨 꼭대기에 거한다고 쟈이나교는 생각한다. 쟈이나철학은 또한 시간을 실체로 인정한다. 시간은 연속, 변형, 운동, 새로움, 오래됨을 가능하게 하는 필연적 조건으로서, 공간과 같이 비록 보이지는 않으나 그 존재는 추리에 의해 알려진다고 한다. 시간은 다른 모든 실체들과는 달리 연장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간은 하나요, 나눌 수 없으며 꼭 같은 시간이 세계의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운동과 정지라는 실체도 역시 추리에 의하여 그 존재가 알려진다고 한다. 즉 움직임과 멎음이라는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조건으로서이다.
쟈이나철학은 주장하기를 물고기가 스스로 운동하기는 하나 물이라는 매개체가 없이는 운동이 불가능한 것처럼 영혼이나 물체들도 움직임의 필수조건으로서 운동이라는 실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운동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움직일 수는 없으나 움직임의 수동적인 필수조건이라는 것이다. 정지도 마찬가지이다. 운동과 정지는 영원하고 형태가 없으며 움직이지 않으며 온 세간적 공간에 편재해 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쟈이나교의 실체관 및 형이상학은 승론철학과 같은 다원적 실재론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쟈이나교의 윤리와 해탈의 방법에 대하여서는 이미 원시쟈이나교를 다룰 때 언급한 바가 있다. 쟈이나교에서 속박이란 영혼이 업의 물질과 붙어 있는 것을 말하므로 해방이란 우선 업의 물질이 영혼에 유입되어 달라붙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이미 붙어 있는 물질은 소모되어야 한다. 그런데 영혼에 물질을 달라붙게 만드는 것은 결국 무지에 근거한 산정(흩어질 산, 정 정)들이므로 쟈이나교의 수행은 실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 정지(바를 정, 지혜 지)를 강조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쟈이나교의 가르침에 대한 기초적 이해와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하므로 정신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신과 정지 후에는 정행을 필요로 한다. 우마스바티는 그의 "진리증득경"에서 이 셋을 해탈의 방법으로 강조한다.
정행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오철서이다. 또한 이미 영혼에 달라붙어 있는 업을 일찍 소모시키는 방법으로서 고행이 특별히 강조된다. 마치 망고열매가 더위를 더 많이 받으면 더 일찍 익듯이, 우리의 업도 고행을 통하여 더 빨리 소모되어 힘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해방된 영혼들은 자기의 본성을 되찾아 신들의 세계보다도 더 높이 있는 우주의 꼭대기에 상승하여 거기서 해탈의 영원한 안식과 행복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제16장 미맘사학파의 철학
1 미맘사철학의 전통
인도 철학에서 육파철학은 불교나 쟈이나교와는 달리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정통학파로 간주되어 왔지만 그 중에서도 미맘사와 베단타 학파는 가장 정통적인 학파라고 할 수 있다. 타 학파들의 베다와의 관계는 사실상에 있어서는 명목적인 것 이상을 넘어서지 않는 경우가 많으나 미맘사와 베단타는 본래부터 곧바로 베다의 충실한 연구와 해석을 주요 관심사로 하여 발전된 철학들이기 때문이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베다는 그 내용상 제신들에게 바치는 송가들을 모아 놓은 본집의 부분과 이것을 설명하고 제식의 규정들을 취급하는 브라흐마나로 구분된다.
그러나 브라흐마나의 나중 부분에는 제사의 관심을 벗어나 우주와 인간에 대한 철학적 지식의 문제를 다루는 우파니샤드가 포함되어 있다. 이 부분을 지식편이라 부르며 제사의 행위를 주로 하는 부분인 행위편과 구별되어 왔다. 미맘사와 베단타는 각기 이 두 부분을 탐구하고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파로서, 미맘사학파는 먼저 부분, 즉 행위편을 고찰한다 하여 푸르바미맘사라 부르며, 베단타학파는 나중 부분을 연구한다 하여 웃타라미맘사라 불러왔다. 혹은 그 연구 대상이 각각 행위와 브라흐만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에 카르마미맘사와 브라흐마미맘사라 부르기도 한다. 1) '미맘사'란 말은 '심구'라는 뜻을 지녔다. 통상적으로 미맘사라 하면 푸르바미맘사를 지칭하며 웃타라미맘사는 베단타라 부른다.
제식에 관한 전통은 원래 본집이나 브라흐마나를 통해서 완전하고 분명하게 전해진 것이 아니라, 구전에 의하여 보충되어 왔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 구전이 점점 불확실하게 됨에 따라 베다의 행위편으로부터 직접 추리와 논증을 통하여 제식의 올바른 규범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이 추리의 활동을 냐야라 불렀으며 이것이 나중에 가서는 제식의 문제와는 별도로, 올바른 사고의 규범을 다루는 독립적인 형식논리학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한편 제식의 규범과 명령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정돈하는 작업은 계속되어 이것이 미맘사학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미맘사학파의 창시자는 기원전 2세기경의 인물로 추정되는 자이미니로 전해지고 있으며, 근본경전은 "미맘사경"으로서 서력기원 1세기 전후에 현재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미맘사경"은 다른 학파의 경들과 마찬가지로 간결한 문장들로 되어 있어 그 자체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현존하는 주석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5세기 경에 샤바라스바아민에 의하여 씌어진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브르티카라라는 사람의 "미맘사경"에 대한 해석의 일부분이 인용되고 있는 것을 보며, 거기서 브르티카라는 불교의 철학적 견해를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아마도 미맘사철학에 상당한 깊이를 제공한 자로 간주된다.
샤바라스바민핫따라는 미맘사철학의 거장들이 출현하여 샤바라스바아민의 저서에 주석을 가하고 미맘사철학의 양대 학파인 구루파와 브핫따파를 각각 형성하게 되었다.
미맘사학파에다 철학적인 이론을 부여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이 둘의 공헌으로 간주되며 그들 이후에는 미맘사철학은 별로 이론적인 발전을 보지 못했다. 프라브하카라의 주석은 Brhati라 불리며 이 주석에 그의 제자 샬리카나타 미슈라는 Rjuvimala라는 복주를 썼다. 그는 또한 프라브하카라의 미맘사해석에 대한 강요서인 Prakaranapaancika도 썼다.
한편 쿠마릴라는 샤바라스바민의 주석에 3부의 해설서를 저술했다. 즉 Slokavaarttika, Tantravarttika, 그리고 Tuptika의 3부이다. 쿠마릴라의 문하에 만다나미슈라가 나와서 Vidhiviveka, Mimamsanukramani, Tanyravarttika를 저술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샹카라의 영향으로 베단타철학으로 전향했다. 그 외에도 쿠마릴라의 브핫따파에 많은 학자들이 출현하여 프라브하카라의 구루파를 압도하게 되었다.
쿠마릴라는 본래 불교를 공부했으나 나중에 바라문교로 전향했다고 하며, 그의 저서를 통하여 불교의 공사상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다. 쿠마릴라는 샹카라와 더불어 인도에서의 불교사상의 쇠퇴에 큰 역할을 한 철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이제 쿠마릴라와 프라브하카라를 중심으로 하여 미맘사철학의 대강을 살펴보며, 필요에 따라서 양론사의 차이점도 언급하도록 한다.
2. 미맘사 인식론
"미맘사경"은 베다가 명하는 제식의 행위를 올바로 행하도록 하는 해석의 원리들을 규정하는 것을 그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미맘사철학은 '미맘사',즉 심구의 방법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미맘사철학에서 규정한 론구의 이론은 타학파에서도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미맘사에 의하면 어떤 본문의 의미를 확정지으려면 다음 5가지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1. 주장의 대상의 확정
2. 이에 대한 의문의 토론
3. 반론, 즉 타주장의 검토
4. 정설, 즉 최종결론
5. 결론이 본문의 다른 부분에 대하여 갖는 관계
이러한 논리전개의 문제 외에, 미맘사학파의 근본 철학적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베다가 명하는 행위의 의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데 있다. 왜 그 의무를 수행해야 하며, 어떻게 하여 그 수행이 선한 업보를 거져오게 되는가 등의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다. 우리는 브라흐마나에서 이미 제사의 주관심이 제사의 대상인 신에서부터 제사의 행위 자체로 옮겨졌음을 보았거니와 이러한 경향은 그후 더욱더 발전하여 신의 존재여부와 무관하게 제사행위는 자동적으로 그 결과를 거져오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낳았다. 이러한 가운데서 미맘사철학은 행위의 결과를 보증하는 어떤 최고신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그 존재조차 부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베다 자체의 권위에만 의거하여 제사행위의 의무와 그 보이지 않는 결과에 대한 믿음이 받아들여질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베다의 권위는 어떻게 성립이 되는 것이며 베다에서 명하는 의무와 그 의무를 행하면 천상의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자연히 생기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미맘사의 인식이론에 접하게 된다.
미맘사는 올바른 지식의 수단으로서 현량, 비량, 경유량, 의준량, 부존량등을 인정한다. 현량, 즉 지각은 우리의 감각기관과 대상과의 접촉에 의하여 직접적인 지식을 얻는 인식방법으로서, 두 단계로 성립된다고 한다. 첫번째 단계로서 감각기관이 물체와 접할 때 자아에 무분별적 지각이 일어난다고 한다. 즉 사물의 성격에 대한 어떠한 의식이나 판단없이 대상의 존재만이 주어지는 인식단계이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분별적 지각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즉 대상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지각을 말한다.
그러나 미맘사철학은 말하기를 두번째 단계에서 분명히 알려지게 되는 것은 이미 첫번째 단계에서도 암시적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우리의 마음이 단지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현재의 대상을 분별하는 것뿐이지 어떤 새로운 내용이나 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동방의 인식론에서 말하고 있는 분별작용의 왜곡적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 우리가 직접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것은 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보편적 성격이 전혀 없는 사물의 순간적 특수상만 인식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베단타철학에서처럼 아무런 특수한 속성도 없는 순수존재만 의식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여 미맘사철학은 중간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경유량이란 현재에 경험한 것과 과거에 경험한 것을 기억에 의하여 비교하여 양자의 유사성을 아는 지식이다. 비량(추론)에 대한 이해는 정리철학에서와 마찬가지이다.
이상의 세 가지 인식방법은 모두 경험에 의거한 것으로서 미맘사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업보에 대한 보증을 해 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미맘사철학은 성량을 중요한 인식방법의 하나로 의거하고 있다. 성량에는 인격적인 것과 비인격적인 것의 두 가지가 있다. 구루파는 후자만 인정하고 브핫따파는 양자를 모두 인정한다. 베다는 미맘사철학에 의하면 비인격적인 성량이다. 베다는 신에 의하여 된 것도 아니고 믿을 만한 사람에 의하여 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미맘사철학은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가? 미맘사철학은 베다 그 자체가 영원한 권위를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언어에 관하여 많은 독특한 이론들을 전개하게 되었다.
미맘사철학에 의하면 말이란 단순히 발음과 함께 비로소 생기는 소리로서의 현상이 아니다. 말의 본질은 소리들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글자들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글자로서의 말은 여러 사람에 의하여 여러 가지로 발음되지만 그 자체는 언제나 동일하며 시공을 초월한 영속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말이란 소리로 표현이 안될 때에도 항시 가능적으로 잠재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말은 인간이나 신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닌 영원한 존재인 것이다. 미맘사는 이와 같은 언어 일반에 관한 이론을 통하여 결국 베다의 영원성을 보장하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맘사에 의하면 언어의 의미도 인간의 계약이나 관습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신의 뜻에 근거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자연적인 것이라 한다. 언어와 대상과의 관계는 본래적인 것이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맘사에 의하면 세계나 인간에는 시초가 없었으며, 따라서 어느 한때에 인간의 관습에 의하여 말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처음부터 사물들에 대하여 이미 말들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이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며, 때에 따라 여러 조건하에 표현될 따름이다. 말이 개물을 나타내는가, 아니면 류(종류 류)를 나타내는가에 대하여서도 미맘사철학은 말은 영원하기 때문에 변하는 개물들을 뜻하기보다는 변하지 않는 류를 뜻한다고 주장한다. 말이 보편성을 지녀야 베다의 여러 명령들이 보편성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미맘사철학에 의할 것 같으면, 말의 본질적인 성격은 사물의 표현에 있을 뿐만 아니라 행동을 명령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이것은 물론 미맘사철학의 제식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을 반영하는 이론이다. 우파니샤드를 제외하고는 베다 전체가 미맘사에 의하면 우리의 종교적 의무에 관한 것으로서, 베다의 모든 문장은 이러한 의무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식의 다섯번째 수단으로서 미맘사철학은 의준량이라는 것을 든다. 의준량이란 설명을 요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반드시 요청되는, 그러나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필연적인 유일한 가설로서 세우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가설은 진리로 받아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미맘사철학은 제물을 받고 복을 주는 것은 신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행위 그 자체이다. 이 행위는 전에 없던 어떤 보이지 않는 힘,즉 무전력이라는 것을 자아에 산출하며, 이 힘은 필연적으로 그 업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제사의 행위 자체는 잠깐동안에 끝나 버리는 고로 무전력의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행위가 결과를 가져온다는 베다의 진리는 설명이 안되고 거짓일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전력이란 것은 현재의 행위와 그 행위로 인하여 장차 내세에 천상에서 얻게 될 업보와의 연속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행위로 인하여 자동적으로 자아에 생기게 되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으로서 가정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맘사철학의 브핫따파는 부존량이라는 것을 독립적인 인식의 방법으로 인정한다. 즉 무엇이 존재 안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하나의 독립된 직접적인 인식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각을 통해서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자극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추론에 의하여 부존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추론이 가능하려면 우리는 이미 부지각과 부존과의 사이에 주연관계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존은 지각이나 추론에 의하여 인식될 수 없다.
그렇다고 경유량이나 성량에 의하여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존이란 비교해서 아는 것도 아니고 말에 근거해서 아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부지각 자체를 부존을 아는 독립된 인식의 방법으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존량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부지각이라고 해서 무조건 부존을 알려 주는 것은 아니다. 지각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지각되지 않는 경우에만 부존량은 성립되는 것이라고 한다. 미맘사는 지식의 타당성에 대하여 정리철학과는 아주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미맘사에 의할 것 같으면 모든 지식은 그 자체에 스스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 타당성에 대하여 다른 어떤 외적인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지식은 그것에 대한 믿음을 자연적으로 발생시킨다. 물론 나중에 의심을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추론에 의하여 그 지식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의 타당성은 일단은 자명하여 추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우리는 우선 그것을 믿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성량의 경우에 적용할 것 같으면 우리는 의심할 이유가 없는 한 베다의 말을 일단 믿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다의 권위는 자명하다. 따라서 미맘사학파는 베다를 의심할 만한 이유들을 논박하기만 하면 되지 베다의 진리를 적극적으로 증명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맘사의 학설을 인식의 본유적 타당성의 이론이라 부른다. 이에 따라서 미맘사학파는 오진에 관한 이론들도 전개했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인식의 본질적 타당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프라브하카라는 동방의 인식론과 비슷하게 인식의 3면을 말하고 있다. 즉 지식은 언제나 스스로를 드러내는 빛을 갖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그것의 주체와 객체를 드러낸다고 한다. 따라서 프라브하카리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자아의 인식, 대상의 인식, 그리고 인식의 인식이라는 세 가지 인식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자아는 모든 인식에 있어서 앎의 주체로서 알려질 뿐이지 결코 앎의 대상으로는 인식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자아는 지식과 같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자명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 베단타철학의 자아관과 다른 점의 하나다.
한편 쿠마릴라는 지식의 본유적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프라브하카라와는 달리 지식은 스스로의 인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지식은 스스로를 인식할 수 없다. 마치 손가락의 끝이 스스로를 건드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지식이란 자아의 변형상태로서 자아가 대상을 아는 행위나 작용이다. 지식은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으며 오로지 그 대상이 자아에 의하여 알려졌다는 사실로부터 간접적으로 추리되어서 알려질 뿐이다. 어떤 대상이 친숙하게 혹은 이미 아는 것으로 나타나면 우리는 이로부터 미루어서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이 있었음을 안다는 것이다.
3. 미맘사 형이상학
미맘사의 세계관에 의할 것 같으면 우선 영원하고 무한한 영혼들이 개인의 수만큼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물질적인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형성되는 데에는 업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는, 영혼이 과거의 업의 결과로서 태어나게 되는 생명체들과 업보를 감수하는 도구인 감각기관들과 감수되어야 할 업보로서의 대상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미맘사의 형이상학은 대체로 실재론적인 승론철학의 강한 영향을 받아 많은 공통점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차이는 승론철학에서는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결합과 재결합과 파괴, 그리고 원자와 영혼과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창조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미맘사는 그런 존재의 필요성을 부정한다.
힌두교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세계관인 세계의 주기적인 창조와 파괴와 반복과정도 인정하지 않는다. 세계가 항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영혼들의 주기적인 전개와 퇴전은 부인한다. 모든 생물들은 자연적으로 생성하며 신은 사람들의 공과를 알 수 없으며 감독할 수도 없다고 한다. 또한 원자들이 신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감독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은 영혼과 육체와의 관계에서 뿐이며, 영혼은 오직 자기의 업의 공과에 따라 육체를 차지하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쿠마릴라는 당시의 여러 가지 창조설들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다. 그는 물질의 창조 이전에 프라자파티와 같은 신이 존재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신이 몸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창조의 욕망을 낼 수도 없으며, 몸이 있었다면 그의 창조적 행위 이전에 이미 물질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또한 창조의 동기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도덕적 공과는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의 많은 고통과 죄악을 보아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은 용서하지 못할 일이라고 한다. 신이 단순히 자기 즐거움을 위하여 세계를 창조했다면 그는 완전한 행복을 누린다는 것과 모순되며 쓸데없이 그가 바쁜 일에 애쓰기만 하는 셈이 된다.
쿠마릴라는 불이론적 베단타철학의 입장도 반박하여 말하기를, 만약에 절대자가 절대적으로 순수하다면 세계도 순수해야 할 것이며 그런 상태에서는 무지도 있을 수 없는 고로 창조도 있을 수 없다. 만약 다른 어떤 것이 무지를 일으킨다면 브라흐만만이 유일한 존재라는 진리는 무너진다. 한편 만약 무지가 자연적인 것이라 할 것 같으면 절대로 제거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쿠마릴라는 상키야철학의 세계전변설도 비판한다. 그는 말하기를 세계의 창조가 세계의 구성요소의 평형상태가 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최초에는 과보를 초래하는 인간의 업이란 것이 없었는데 어떻게 그 평형이 깨어지기 시작했는가라고 반문한다.
미맘사철학은 최고신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무신론을 주장하지만 업보를 누리게 되는 자아의 불멸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미맘사철학은 자아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불교의 견해를 신랄하게 공격한다. 불교에 의하면 자아란 순간순간의 관념들의 연속적 나열에 지나지 않으며 먼저의 관념은 후의 관념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것과 나중 것의 근저에 어떤 공동의 실체가 없는 한 관념과 관념 사이의 어떤 연결이나 상호작용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행위를 한 사람이 자기가 행한 행동의 결과를 얻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행위의 합리적 기반이 무너진다고 비판한다. 또한 관념들이 어떻게 하여 한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옮겨질 수 있는가가 의심스럽기 때문에 윤회라는 것도 설명되기 어렵다고 한다. 쿠마릴라는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육체의 요소들은 지성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결합은 결코 지성을 산출하지 못한다. 육체가 하나의 유기체적인 전체라는 것도 그것이 그것을 다스리는 어떠한 타존재의 목적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한다. 우리가 '나의 몸'이 라는 말을 하는 것도 내가 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또한 기억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도 어떤 정신적인 실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미 본대로 미맘사철학에 의할 것 같으면 지식은 본유적 타당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프라브하카라는 지식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자명성까지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미맘사학파에 의하면 자아 자체는 그러한 빛이나 식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자아의 존재는 자명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정리철학에서처럼 직접적인 지각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고 한다.
프라브하카라에 의하면 자아는 우리의 모든 인식활동에 필연적으로 관여되며 이러한 인식활동들을 통하여서만 드러난다고 한다. 즉 대상을 아는 인식활동에 있어서 자아는 그 지식의 주체로서 항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인식이 '나의 인식'이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쿠마릴라는 자아의식이 대상의 의식을 항시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단지 우리가 가끔 자아에 대해서 생각할 때 생기는 자아의식 가운데의 대상으로서만 우리는 자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루파는 이 견해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자아의식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아가 의식의 주체와 객체가 동시에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의 기능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4. 해탈론
미맘사학파는 본래 제사의 행위와 이에 따른 업보를 궁극적인 관심사로 한 철학이다. 따라서 구원의 개념에 있어서도 본래는 올바른 제식의 행위를 함으로써 얻어지는 천상의 복락을 이상으로 하는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타학파의 영향을 받아 자아의 해탈, 즉 육체와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최고의 삶의 이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해탈이란 자아가 좋고 나쁜 행위와 육체를 떠나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자아의 상태에는 아무런 인식이나 경험도 있을 수 없다. 희열도 느끼지 않는다. 자아는 식이나 희열을 그 자체의 본질적인 성격으로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맘사학파는 해탈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자아를 아는 지식과 의무적인 행위를 이해심 없이 순수하게 행하는 것을 강조한다. 바가바드기타에서 말하는 karma-yoga의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미맘사철학은 베다의 명령 및 제식행위에 대한 의무와 해탈에 대한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이다.
제17장. 불이론의 베단타철학
1. 샹카라 이전의 베단타철학
베단타라는 말은 본래 베다veda의 끝anta 혹은 목적이라는 뜻으로 우파니샤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베단타는 우주의 궁극적이고 통일적인 원리를 탐구하는 우파니사드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해석하고 발전시킨 철학체계를 지칭한다. 베단타철학은 인도의 여러 철학 가운데서 가장 많은 추종자들을 가져왔고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으로서 과거 약 1000년을 통하여 다른 모든 학파들을 지적활동에 있어서 압도하게 된 철학이다. 베단타철학은 그 근본경전으로서 우파니샤드 자체는 물론이고, 우파니샤드 철학의 연장이나 다름없이 간주되는 바가바드기타와 또한 우파니샤드의 다양한 철학을 간략하게 체계적으로 단명하고자 하는 베단타경 혹은 브라흐마경에 기초하고 있다.
브라흐마경은 서력 기원전 1세기경의 인도 인물로 추정되는 바다라야나가 저자로 전해져 왔으나 그 내용상으로 보아 4-5세기경에 이르러 현재의 형태로 완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바라흐마경에 의하면 상층계급의 사람만이 절대자인 브라흐만을 알 자격이 있다. 브라흐만에 대한 지식은 베다성전에 근거하며 인간의 독립적인 사고나 이론도 베다성전과 더불어 지식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브라흐만은 최고자, 인격적 존재, 순수한 정신적 실체, 순수한 유(있음)로서 상주편재 무한불멸의 존재이다. 만유의 생기와 존속과 귀멸을 일으키는 존재로서 만유의 모태이다.
브라흐만은 세계의 질료인이기도 하며, 세계의 창조주이기도 하다. 브라흐만은 전변에 의하여 세계를 산출하며, 이렇게 전개돼 나온 현상세계는 세계의 원인으로서의 브라흐만과 다르지 않다. 세계가 브라흐만으로부터 전개돼 나올 때는 공(빈 것, 하늘), 풍(바람), 화(불), 수(물), 지(땅)의 순서로 전개되어 나오며, 이 다섯개의 원소가 다시 브라흐만으로 돌아갈 때는, 전개과정의 역순으로 소멸한다고 한다.
세계의 창조와 존속과 귀멸(돌아가 소멸됨)의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개인아(개개인이 가진 마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는 브라흐만의 부분이며 그것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으며 무시(시작점을 알 수 없는 아주 오래전)이래로 계속 되풀이 하고 있다. 업의 응보는 무전력(無前力)에 의한 것이 아니고 신의 재정에 의해 받는 것이다. 인생의 궁극 목적은 브라흐만과의 합일을 통한 해탈에 있다.
해탈을 얻는 방법으로서 브라흐만의 명상에 의한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브라흐만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자는 죽은 뒤 신들의 길을 따라서 최후에 브라흐만에 이르러 브라흐만과 합일한다. 이렇게 해탈을 얻은 자는 세계의 창조와 유지의 힘을 제외하고는 절대자와 꼭 같은 완성과 힘을 갖춘다고 한다.
우리는 이미 우파니샤드 철학이 후기에 가서, 다분히 상키야samkhya적으로 발전되었음을 보았거니와 상키야철학이 본격적으로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전개함에 따라, 우파니샤드의 연구가들 가운데서는 이에 반발하여 우파니샤드의 본래적인 일원론적 사상을 옹호하려는 운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브라흐마경은 이러한 상키야철학의 무신론적 이원론을 곳곳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브라흐마경은 내용이 지극히 함축적이고 간략해서 그 자체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후세의 많은 철학자들은 이 경전에 주석서를 썼으며, 이들 주석가들은 각기 서로 다른 철학적 해석과 견해들을 보이므로 자연히 베단타철학 자체내에서도 이 주석들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학파들이 성립되게 되었다.
모든 베단타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개의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실체들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려는 다원적인 견해를 배척하고 다양한 현상세계의 배후에 단 하나의 궁극적이고 통일적인 실재가 있다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따른다. 문제는 어떻게 이 궁극적인 실재와 현상세계, 즉 물질 및 개인의 영혼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베단타철학자들은 상호간에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인 실재(브라흐만이라 부르는)와 함께 서로 다른 실체들의 존재들도 인정하며 세계를 이 실체들의 상호 작용으로 설명하되 브라흐만은 그들을 초월하고 그들을 지배하고 조정하는 어떤 존재로 간주하는 견해가 있는가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유일한 존재인 브라흐만이 다양성의 세계로 자기를 전개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현현양태로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입장에서는 다양성의 세계는 유일무이한 실재인 브라흐만을 가리고 있는 베일과 같은, 그러나 알고 보면 단지 가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는 사상도 있는 것이다.
현존하는 브라흐만경의 주석서 가운데서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유명한 것은 약 800년경에 씌어진 샹카라의 브라흐마경소로서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의 견해 가운데서 세번째 입장을 옹호한 해석서이다. 그러나 샹카라의 주석서를 통하여 우리는 그 전에도 브라흐마경에 대한 많은 해석과 주해가 가하여져 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샹카라의 철저한 불이론(不二論)인 철학적 입장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해석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미 본대로 브라흐마경 자체의 철학적 입장은 샹카라의 불이론적인 철학과는 상당히 다른 차이를 보여 주고 있으며 그의 불이론적 해석은 무엇보다도 그의 스승 고빈다파다 govindapada를 통하여, 혹은 직접적으로, 가우다파다 gaudapada라는 철학자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가우다파다는 만두키야카리카 mandukya-karika라는 만두키야 우파니샤드의 철학을 다루는 논서의 저자로서, 그곳에서 그는 우리가 아는 한 처음으로 철저한 불이론적 베단타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샹카라는 이 만두키야 카리카에 대한 주석서를 썼으며 거기서 샹카라는 베다의 불이론적인 철학이 가우다파다에 의하여 비로소 되찾아졌다고하여 가우다파다에 대한 상당한 존경심을 나타내고 있다.
가우다파다는 대승불교의 공관(空觀)사상이나 유식사상의 강한 영향을 받은 자로서, 그의 저서에서 우리는 이들 불교철학에서 사용하는 술어들이나 비유 등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우파니샤드의 철학이 불타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믿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일체의 생멸하는 현상세계는 실재인 신의 불가사의한 힘의 환술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며 실재의 세계는 어떤 다양성이나 이원성도 용납되지 않는다고 한다. 진제의 궁극적인 입장에서 볼 것 같으면 꿈의 세계와 '깨어 있는 세계는 마찬가지이며 외부의 세계나 마음속에 나타나는 세계나 모두 우리의 망상의 소산으로서 거짓 이라고 한다. 마치 어둠 속에서 밧줄을 뱀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실재의 세계에는 주객의 구별이나 상이한 주체들과 객체들도 사라지며, 생멸도 인과도 없으며, 속박된 존재도 없으며 해탈을 원하는 자도 없다. 오직 빛나는 하나의 아트만만이 존재할 뿐이다. 가우다파다는 아트만을 무한한 공간에 비유한다. 개인아는 병속의 공간과 같이 제한된 것같이 보이나 결국 하나의 아트만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현명한 자는 요가의 수행을 통하여 이와 같은 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가우다파다는 이렇게 만물을 브라흐만의 가현으로 보는 베단타철학을 전개한 것이다. '마야'의 개념은 이미 "슈베타 슈바타라 우파니 샤드"나 '바가바드 기타'에 나타나 있지만, 거기서는 마야란 어디까지나 신이 스스로를 다양성의 세계로 전개하는 창조적 힘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후 점차 마야는 인식주관의 무지, 혹은 우리를 속이는 신의 환술로서 이해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가우다파다에 와서 결정적으로 가현설 혹은 마야설로 성립되게 된 것이다. 샹카라의 불이론적 베단타 해석은 바로 이 입장을 대표하는 것이다.
2. 샹카라의 불이론적 베단타 철학
가우다파다의 철저한 일원론적인 실재관을 이어받아 불이론적 베단타 철학을 대성시킨 사람은 샹카라였다. 그는 "브르하드 아라니야카 우파니샤드"를 비롯한 주요 우파니샤드에 주석을 가했으며 또한 "바가바드 기타"에도 주석서를 썼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저서는 "브라흐마경"에 대한 주석서 "브라흐마경소"로서 여기서 그는 여러가지 타학설들을 비판해 가면서 불이론적인 베단타철학의 입장을 확고히 다진 것이다. 그는 남인도 출생으로서 인도 각 지방으로 여행하고 다니면서 자기의 학설을 전파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의 철학에 입각한 종교적 실천을 위하여 불교의 사원들처럼 많은 출가자들의 단체를 만들어 고행의 실천과 더불어 브라흐만의 지식을 추구하였다. 샹카라는 불교의 사상적 영향하에 베다의 사상을 재해석함으로서 바라문교의 부흥에 크게 기여함과 동시에 이미 쇠퇴해 가고 있던 불교에 큰 타격을 가하게 된 것이다.
샹카라에 의하면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모든 형상과 성질과 차별성과 다양성을 초월한 브라흐만이라는 절대적 존재뿐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실제이다. 브라흐만은 절대적으로 동질적이며 아무런 성질도 갖고 있지 않은 순수한 존재 그 자체이다. 이 브라흐만은 우파니샤드의 진리대로 인간의 참 자아로서 (tad tvam asi, aham brahma asmi) 스스로 빛을 발하는 자명성을 가진 순수한 식이다. 이 식은 브라흐만의 속성이 아니라 브라흐만 그 자체이다.
식으로서의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은 모든 존재의 내적 자아로서 그 존재는 결코 의심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부정하는 행위 자체가 이 자아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자아는 모든 인식의 주체이기 때문에 결코 대상화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아는 우리의 모든 정신적 작용 내지 인식활동을 통하여 그 배후에서 항시 빛을 비추어 주고 있는 증인과 같은 존재로서 그 자체는 결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
샹카라에 있어서 실재의 개념은 부정될래야 부정될 수 없는,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부정된다'는 말은 어떤 경험된 사실이 또 다른 어떤 경험에 의하여 거짓됨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꿈속의 실재는 꿈에서 깨어난 후에는 실재성을 부정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샹카라에 의하면 자아는 도저히 부정될 수 없는 실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고찰한 바 있는 자아의 네 가지 상태에 관한 우파니샤드 철인들의 사유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인 것이다. 즉 깨어 있는 상태에서나 꿈을 꾸고 있는 상태에서나, 깊은 수면에 빠져 있는 상태이거나 선정의 상태이거나를 막론하고 결코 부정당함이 없이 항존하고 있는 순수식으로서의 자아야말로 실재라는 것이다.
샹카라에 의하면 이러한 자아가 곧 다름 아닌 브라흐만이요, 브라흐만이 유일의 실재라 한다. 그렇다면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일상적 경험의 다양한 현상 세계를 샹카라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샹카라에 의하면 이 하나의 실제인 브라흐만은 우리의 무지나 환술의 힘 때문에 잡다한 이름과 현상을 가진 현상세계로 나타나 보이게 된다고 한다. 즉 세계는 브라흐만의 가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샹카라의 이러한 입장을 브라흐만 가현설이라 부른다. 세계를 브라흐만으로부터 전개돼 나온 것으로 보는 브라흐만 전변설과 구별되는 이론이다.
양자 다 브라흐만을 세계의 질료인으로 보는 것은 마찬가지이나 전자는 세계를 브라흐만의 가현으로 보고 후자는 세계를 브라흐만의 전변으로 보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양자 모두 결과가 원인에 이미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인중유과론으로 간주되나, 브라흐만 가현설은 원인만이 실재하고 결과는 원인의 가현이라고 보는 반면에, 브라흐만 전변설은 결과를 원인의 전변으로 보는 것이다.
샹카라에 의하면 무지는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브라흐만만이 유일한 실재이며 무지도 브라흐만에 근거해야 하는 고로 무지는 존재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 현상세계를 나타내게끔 하므로 비존재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지의 본질은 샹카라에 의하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사물을 오인하게끔 하며, 그 위에서 다른 사물을 보게끔 하는 가탁에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두울 때 길에서 밧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뿐인데 사람들이 무지로 인하여 잡다한 현상과 대상의 세계를 그 위에 뒤집어 씌워서 본다는 것이다.
샹카라에 의하면 이 무지의 영향으로 인하여 우리는 본래 아무런 속성도 없는 브라흐만을 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주재신으로서 인식한다고 한다. 이 신은 세계의 질료인과 능동인이며 성스러운 베다를 고취해 냈고 세계의 윤리적 질서를 보호하는 자이다. 따라서 샹카라는 브라흐만을, 아무런 속성도 없는 높은 브라흐만과 속성을 가지고 현상세계를 창조하는 힘을 가진 낮은 브라흐만의 두 가지로 구별한다.
전자는 어떤 현상이나 속성이나 제한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엄격히 얘기해서 우리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순수한 존재이다. 우파니샤드에 따라서 오직 "무엇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라는 부정적 표현밖에는 할 수 없는 실재인 것이다.
단지 명상을 통하여 순수 존재와 순수 식으로 체험되는 것일 뿐이다. 반면에 주재신은 인격적인 신으로서 수많은 훌륭한 속성과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동시에 제한된 존재인 것이다. 이 신은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에 들어갈 수 있으며 우리의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이 되는 존재이다. 샹카라는 이렇게 '높은 브라흐만'과 '낮은 브라흐만'을 구별하고 있지만 때로는 그의 저서들을 통하여 두 개념을 엄격히 구별함이 없이 혼용하기도 한다.
무지는 또한 브라흐만, 즉 우주의 궁극적 실제인 최고아를 수없이 많은 제한된 개인아로 나타내게끔 한다. 개인아란 다시 말해서 최고아가 무지의 영향 아래서 나타내게 되는 수많은 현상적 자아들인 것이다. 마치 해나 달이 하나이지만 많은 물통에 비칠 때 여럿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한다. 혹은 한없는 공간이 좁은 병 안에서 제한된 공간들로 나타나 보이는 것과도 마찬가지라 한다.
이렇게 절대아를 제한된 개인아로 나타나게끔 하는 것은 우리의 몸과 감각기관과 의근과 같은 한정적 부가물들의 영향 때문이며, 이 부가물들은 곧 무지의 소산인 것이다. 따라서 무지를 제거하는 순간 우리는 제한된 현상적 자아가 망상일 뿐이며 실제로는 절대적 자아 즉 브라흐만 자체임을 깨달아서 해탈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높은 브라흐만과 낮은 브라흐만, 최고아와 개인아의 구별은 높은 지식과 무지로 인한 낮은 지식, 혹은 궁극적 진리와 세속적 진리의 구별을 초래한다. 용수와 같이 샹카라도 철저한 일원론적인 존재론을 위하여 인식적 이체설을 주장해야만 한 것이다. 즉 궁극적 진리에 의할 것 같으면 개인아와 창조신은 어디까지나 모두 망상에 지나지 않으나 세속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볼 것 같으면 개인아와 창조신, 속전과 해탈, 윤회 등이 모두 실재하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샹카라는 이와 같은 지식의 이중성의 이론에 입각해서 베다와 '기타'와 '브라흐마경' 등을 철저히 일원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베다는 개인아, 업, 윤회, 해탈, 창조, 주재신 등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부분을 많이 갖고 있다. 정통 바라문교도로서의 샹카라는 이들도 다 베다의 성스러운 진리이므로 결코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이체설에 입각해서 이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즉, 세속적 진리는 궁극적 진리로 이끌기 위한 수단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서, 베다는 양자를 다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베다 자체도 다양성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 세계의 언어를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무지를 제거하고 참다운 인식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모든 현상세계의 차별성과 다양성을 부정하고 최고아만의 유일무이한 실재성을 주장하는 샹카라의 철학을 불이론적 베단타 철학이라 부른다.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 점은 궁극적 진리의 관점에 따라서 현상세계가 비록 망상이라 할지라도 세계는 결코 '공중의 꽃'이나 '토끼의 뿔'과 같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망상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세계는 어디까지나 브라흐만이라는 실재를 근거로 하여 나타난 가현이지 전혀 사실무근의 환상은 아닌 것이다. 샹카라는 또한 불교의 유식철학의 주관적 관념론을 배척한다. 샹카라에 의하면 외계가 비록 가상이기는 하나, 유식철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식의 전변으로서의 주관적 가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가상이라는 것이다. 세계는 단순히 관념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지각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생의 최고 목표는 지고선인 해탈에 있다. 샹카라에 의하면 해탈은 오직 지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선한 행위와 신에 대한 경배도 물론 해탈에 도움을 주지만 그들은 궁극적으로 무지에 근거한 것으로서 우리를 현상의 세계에 계속 얽매는 것이다.
높은 지식은 지각이나 추론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지식은 오로지 계시, 즉 베다의 공부로부터 얻어진다고 한다. 베다 가운데서도 특별히 지식편인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 중요하다. 샹카라에 의하면 베다는 전체가 다 신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영원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물론 세속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얘기되는 진리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을 통하여 샹카라철학의 전통성과 보수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높은 지식을 얻기 위하여 베다의 공부와 더불어 선한 행위와 명상, 특히 우파니샤드의 말들을 경건하게 숙고하고 반복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개인아가 곧 최고아라는 것을 아는 지식, 현상세계의 다양성과 윤회의 세계가 환상 뿐이라는 지식은 모든 업을 파괴한다고 한다. 지식을 얻은 자에게는 업도 존재하지 않고 업의 결과인 육체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는 또한 지켜야할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샹카라에 의하면 지식은 업의 씨를 태워버린다. 그러나 이미 그 씨가 발아하기 시작한 업, 즉 현세의 원인이 되고 있는 업은 파괴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완전한 지식을 획득한 자라 할지라도 현재의 몸은 당분간 존속한다고 한다. 마치 도공의 녹로가 그릇을 다 만든 후에도 얼마 동안 계속해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라 한다. 그러나 깨달은 자는 현재의 몸을 파괴할 수는 없으나 그것에 의하여 더이상 속임을 당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생해탈의 상태이며 사후에야 비로소 육체를 완전히 벗어버린 탈신해탈을 성취하는 것이다.
한편 낮은 지식의 소유자는 브라흐만을 자기의 자아로 깨닫지 못하고 창조신으로 믿고 숭배한다. 샹카라에 의하면 이러한 사람의 영혼은 사후에 신들의 길을 통하여 낮은 브라흐만과 연합한다. 이 상태는 아직 해탈은 아니지만 점차적인 해방을 통하여 완전한 지식과 해탈에 이른다고 한다. 이보다도 더 낮은 단계의 사람은 높은 지식도 낮은 지식도 없는 사람으로서 단지 선행을 행한 사람이며, 이들은 사후에 조상들의 길을 따라서 달에 도달하여 거기서 업의 보상을 누리고 난 후 또다시 지상에 태어난다고 한다.
이 때 윤회의 주체가 되는 것은 개인아이며, 이 개인아는 무지의 소산인 여러 부가물들을 동반하고 사후에 존속한다고 한다. 우리의 거친 육체는 사후에 물질적 요소들로 되돌아가지만 개인아는 다른 부가물들과 함께 존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가물들에는 의근과 감각기관들, 목숨, 세신이 있다.
여기서 감각기관이란 것은 육체적인 기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 혹은 씨를 말하며, 세신은 육체가 파멸한 후에도 남게 되는 '육체의 씨를 형성하는 미세한 요소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부가물들은 우리가 해탈을 얻기전까지는 영원히 개인아들에 부착되어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개인아는 미래의 생을 결정할 업의 소의를 변하는 부가물로 지니고 있다고 한다.
3. 샹카라 이후의 불이론적 베단타철학
샹카라의 불이론적 철학은 인도 철학사에 있어서 오늘날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으며 그는 인도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서 추앙받아 왔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수많은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에 의하여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그의 저술들에도 다시 많은 주석서들이 씌어지게 되었다.
샹카라의 제자인 파드마파다(9세기)는 "브라흐마경"의 처음 4절에 대한 샹카라의 주석의 복주인 "판차파디카"라는 중요한 저술을 했으며 이 주석은 프라카샤아트만(1100년경)의 "판차파디카주해"라는 또 하나의 복주를 낳았다. 한편 샹카라의 제자 수레슈바라는 샹카라철학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나이스카르미야싯디"와 샹카라의 "브르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의 주석에 대한 복주를 썼다. 샹카라의 또 하나의 제자인 아난다기리도 "브라흐마경소"에 대하여 "냐야니르나야"라는 복주를 저술했다. 한편 9세기의 바차스파티미슈라도 "브하마티"라는 유명한 주석을 써서 샹카라철학을 독자적으로 해석했다. 또한 싸르바나주나아트만은 샹카라의 경소에서 요점을 간추려 "쌈크셰파샤리라카'라는 강요서를 저술했다.
이들 샹카라의 추종자들에 있어서 논의된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는 무지, 또는 환술의 존재론적인 가치에 대한 문제였다. 이들은 대체로 무지나 환술을 상키야철학의 프라크르티와 같이 다양성의 세계를 산출시키는 어떤 창조적인 원리로 보았다.
샹카라에 있어서 무지가 단순히 그로 인해 현상세계가 나타나게 되는 망상적인 힘이었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샹카라의 추종자들은 무지를 좀더 실체화해서 보는 경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또한 무지는 모든 현상 세계를 나타나게끔 하므로 비존재라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존재라고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에 의하여 무지는 사라지게 되며 결국 브라흐만만이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불이론적 철학자들은 모두 무지를 구성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 무지가 누구에게, 혹은 어디에 속한 것인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를 둘러싼 여러 철학자들의 입장을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다. 단지 그 요지만을 말할 것 같으면 답은 두 가지 선택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무지는 브라흐만에 근거를 두고 브라흐만을 대상으로 하는 어떤 힘이라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무지는 개인아에 근거하며 브라흐만은 무지의 대상은 되지만 소의는 될 수 없다는 견해이다. 만다나미슈라와 바차스파티미슈라와 같은 베단타철학자는 후자를 택하고 있으며 바차스파티의 주석서의 이름에 따라 '브하미티'학파라 부른다.
반면에 수레슈바라, 파드마파다, 프라카샤아트만, 사르바쥬나아트만 등의 학자는 전자의 견해를 취하고 있으며 이들을 프라카샤아트만의 주석서의 이름에 따라 '비바라나'학파라 부른다. 브라흐만에 근거를 둔다고 하는 이론의 장점은 세계의 원인을 브라흐만 자체에서 찾는다는 것이나, 문제는 어떻게 무지가 순수식인 브라흐만에 근거할 수 있으며 어떻게 브라흐만 자체가 세계의 다양성에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이다.
반면에 무지의 소의가 개인아이며 브라흐만과는 무관하다고 할 것 같으면, 문제는 무지가 브라흐만을 떠나서 하나의 독립적인 힘으로 간주되는 것이며 논리적으로도 순환논법을 범한다는 것이다. 즉 개인아가 이미 무지의 산물인데 어떻게 무지가 개인아에 속하겠느냐는 것이다. 이 모든 문제는 결국 현상세계를 브라흐만의 가현으로 보는 브라흐마가현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난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샹카라의 불이론적 철학은 또한 슈리하르샤(A.D 1150년)와 그의 제자 칫츠카(A.D 1220)에 의하여 새롭게 계승 발전되었다. 전자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저서는 '논파의 미미'이고, 후자는 슈리하르샤의 저서에다가 주석을 썼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등'이라는 독자적인 저서도 썼다. 이들은 특별히 불이론적 입장에 서서 경험의 세계에서 주어지는 여러 범주들을 실재론적으로 해석한 정리철학을 공격했다.
슈리하르샤는 용수의 방법과 비슷하게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모든 사유의 범주들을 모순적인 것으로 떨어뜨리는 파괴적 변증법에 주력하였다. 결국 유일한 실재인 브라흐만은 모든 현상세계의 사유의 범주와 언어를 초월한 실재라는 것이다. 현상세계 또한 무지의 소산이므로 존재라고도 할 수 없고,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브라흐만을 근거로 하여 분명히 나타나 보이는 세계이므로 비존재라고도 규정할 수 없는, 규정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따라서 슈리하르샤에 의하면 이러한 모순적이고 불가사의한 세계에 대하여 어떤 범주를 채용하여 분석을 하고 한계를 짓고 하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며 자기 모순에 빠지는 행위라는 것이다.
슈리하르샤는 이 점에서 정리철학이 제시하는 여러 범주들의 정의와 설명이 공허하고 타당치 못함을 밝히고, 결국 그 범주들은 정의할 수 없고 따라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것은 현상세계 자체도 궁극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거짓 존재임을 말한다는 것이다. 슈리하르샤는 자신의 논의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철학적 논의가 결국 속체에 준한 것임을 말하며, 궁극적인 실재는 직접적으로 깨달아야 하고, 진체와 속체의 구별마저 현상세계에서만 타당한 것이라고 얘기한다.
슈리하르샤가 정리철학의 범주들을 비판함에 있어 주로 우다야나에 의한 정의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 정의들이 타당치 못함을 증명하려고 한 반면에, 그의 제자 칫추카는 좀더 나아가 범주들의 정의뿐만 아니라 범주들의 개념들 자체를 논파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파괴적인 논파뿐만 아니라 그의 '진리의 등'에서 불이론적 베단타의 여러 중요한 개념들에 대하여 자신의 해석을 가하고 있다.
그가 중관철학의 이체설을 미맘사학파의 쿠마릴라 브핫따의 비판으로부터 홍호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는 말하기를 이체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현상세계에서 활동하는 지성에 의해 하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는 비실재적이고 진리는 하나뿐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무지 속에 있는 한 우리는 이 구별을 할 수 밖에 없으며 속체를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현상세계가 토끼의 뿔이나 공중의 꽃과 같이 전혀 근거없는 비존재가 아니라, 비록 가상이기는 하나 브라흐만이라는 실재에 근거하여 나타나는 것이라는 불이론적 베단타철학의 실재관에 입각한 것이다.
1) 소승부파 불교의 철학은 시기적으로도 아쇼카왕을 전후로 하여 일찍 전개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서술의 편의상 1부(형성기)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설일체유부나 경량부 같은 학파는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도 2부(체계기)에서 다루어도 무방한 것임을 밝혀둔다.
2) 상키야 철학은 세계를 25원리(tattva)에 의하여 설명하므로 수를 중시한다 하여 수론이라 불려왔다. 'Samkhya'라는 말도 '계산하는 자'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3) 이 경은 Sankara에 의해서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9세기의 Vacaspatimisra는 이 경 대신에 '수론송'에 주석을 쓴 것으로 보아 상당히 나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4) '수론송'은 560년경에 진체에 의하여 주석과 함께 영역되었다.
5) 17세기의 비슈누파의 베단타 철학자인 비쥬냐나빅슈는 상키야 철학을 냐야-바이쉐시카 철학과 더불어 영원한 베단타 진리의 한 면으로 간주했다. 그는 상키야 철학을 신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자를 위하여, 그들이 물질과 영혼의 차이를 알지 못할까봐 주어진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다.
6) J. H. Woods는 그의 The Yoga System of Patanjali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14)에서 이 파탄잘리와 B.C. 2세기의 문법학자 파탄잘리와는 다른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Dasgupta는 양자를 동일인으로 본다. 그의 A History of Indian Philosophy, Vol. I, p. 238참조
7) 이 점에 관해서는 Woods의 견해에 따름
8) J. H. Woods는 경의 연대를 300~ 500년경, 소의 연대를 650~800년경으로 잡고 있다. 이에 관하여는 많은 이설들이 있어 확실하지는 않다.
9) 승론'Vaisesika'란 말은 '특수', '구분' 등을 의미하는 'visesa'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서 이 학파가 세계를 6범주로 구별하여 설명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그러나 중국의 불교전통에서는 'Vaisesika'란 말을 '뛰어나다(주승)'의 뜻으로 이해하여 이 학파를 승론이라고 불러왔다. 본서에서는 이 용법을 그대로 따른다.
10) 승론철학의 기원에 관하여는 쟈이나교, 순세파 Lokayata, 혹은 미맘사학파부터 유래되었을 것이라는 제학설 등이 있으나 모두 확실치 않다. H.v. Glasenapp, Die Philosophie der Inder (Strttgart: Alfred Kroner Verlag, 1974), pp.234-37 참조.
11) S. N. Dasgupta, A History of Indian Philosophy, Vol. I, p.306 각주 참조.
12) 이 외에도 동류의 저서로서 Kesavamisra의 Tarkobhasa, Annambhatta의 Tarkasaingraha 등이 그 후에 씌여졌다.
13) 마찬가지로 성질됨, 행위됨도 이런 부류의 유개념이다.
14) 프라샤스타파다의 '구의법강요'에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세계를 창조하고 파괴하는 대주행신 Mahesvara의 개념이 나타나 있으며, 그 후 우다야나와 슈리다라 등의 주석서 등에서 유신론적 사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15) Karl H.Potter, ed. Indian Metaphysics and Epistemology.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7), pp.6, 410-24 참조.
16) Vacaspatimisra의 년대에 관해서, 동상, pp.453-4 참조.
17) 정리철학은 보편적 속성 가운데 객관적으로 사물에 내재하여 실재하는 것 jati과 우리의 마음에 의하여 부가된 것 upadhi, 즉 실재하지 않는 것과를 구별한다.
18) Aristoteles의 3단논법에서는 3, 즉 대전제를 먼저 드나, Nyaya 철학에서는 결론부터 먼저 든다. 혹은 Aristoteles의 3단 논법은 1과 2를 생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9) 여기서 주연 관계란 논리학에서 보통 사용하는 대로 개념과 개념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사이의 관계를 자칭하는 개념으로서, 편충관계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20) 이 미묘한 문제에 관하여 B.K.Matilal의 Epistemology, Logic, and Grammar (The Hague: Mouton, 1971), pp. 62~77 참조.
21) 정리.승론철학의 초기사상에서는 신의 개념이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있으나 후기에 와서는 분명히 유신론적 경향을 띤다.
22) 'Paramita'란 단어는 'parama(최상, 완전의 뜻)'이라는 형용사의 여성형 parami+ta로 해석되기도 하며 혹은 param(??의 뜻)+i(간다는 뜻)+ta로서 이해되기도 한다. 한역 전통적으로는 후자를 사용해 왔다. '도피안', '도', 아니면 음역으로 '바라밀'이라고 번역되었다.
23) '대무량수경'은 '아미타경'과 '관무량수경'과 더불어 정토종의 소의경전으로서 정토삼부경이라 불린다.
24) '대정신수대장경' Vol. 12,, p.268a. 범본과 내용상 차이가 있다. Max Muller, trans., The Larger Sukhavati-vyuha, Buddhist Mahayana Tests, The Sacred Books of the East, Vol. XLIX, p.15 참조.
25) 십파나밀은 육파나밀에다 방편, 현, 력, 지의 파나밀을 더한 것이다.
26) Tibet 전통에 의하면 Maitreya는 '구경일승보성론 Mahayana-uttaratantra-sastra'도 썼다고 한다.
27) '유가사'란 말은 현장이 'yogacara'라는 말을 'Yogacarya'라고 오인하여 번역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28) 이 문제에 관하여 S. Dutt, Buddhist Monks and Monasteries of India(London, 1962) PP.280-85 참조. 문제의 핵심은 '구사론'의 저자 세친이 대승의 유식논사 세친과 동일인인가 아니면 동명이인인가이다. 여기서는 전자를 따른다.
29) '대정신수대장경' Vol. 1, p.827b, '심위법본'
30) '상동', p.69c, '심뇌고중생죄 심쟁고중생쟁'
31) Mrs. R. Davids, trans., The Book of the Kindred Sayings (Samyutta-Nikaya), Part 1, p.55: 'Its thoughts are that whereby the world is led, And by its thoughts it ever plagues itself, And thought it is above all other things That bringeth everthing beneath its sway.' 여기서 'thought'는 'citta(심)'를 번역한 말이다.
32) '이'란 말은 우리의 행위는 선.악의 구별이 있지만 과보로서의 아라야식 자체는 비선.비악의 무기로서 이류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33) 정리철학과 진나에 의하여 대표되는 불교철학과의 논쟁에 관하여 B.K.Matilal의 Epistemology, Logic, and Grammar in Indian Philosophical Analysis(The Hague, 1971) 참조.
34) 인의 삼상설과 구구인론은 후에 설명될 것임.
35) Th Stcherbatsky, trans., Buddhist Logic (New York: Dover Publications, Inc., 1962), Vol. 2에 근거함.
36) 인의 삼삼에 관한 이론은 진나와 법칭뿐만 아니라 세기의 승론철학자 프라샤스타파다에서도 발견된다.
37) '산물 krtaka"이란 불교에서 유위법 samskrta-dharma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38) 허공 akasa은 특별히 소승불교와 유가행철학에서 무위법 asamskrta-dharma으로 간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