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깝다 기설학인 북치는 재사 예형
허도로 돌아간 유대와 왕충은 승상부로 가 조조를 배알하고 아뢰었다.
"현덕에게는 아무런 야심이 없는 듯하였사옵니다. 오로지 조정을 공경하고 승상께 대해서도 거스르기는커녕 은혜 갚을 일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와 왕충은 입을 모아 유비의 허물 없음을 변호했다. 그들의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갚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들이 싸움에 진 것에 대한 변명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조는 그들의 말을 듣자 대번에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얼굴에 노기가 충만하여 소리쳤다.
"닥쳐라, 네놈들은 조조의 휘하냐 현덕의 신하이냐? 나의 승상기를 앞세우고 또한 나의 군사를 거느리고 무엇 때문에 서주에 갔었더냐?"
그는 다시 좌우를 둘러보았다.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나의 이름을 욕되게 한 자는 일벌백계의 뜻으로 각 영문으로 끌고 다닌 후에 목을 베어야 한다."
조조의 명령은 추상같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공융이 조조의 노기를 달래며 말했다.
"본디 유대와 왕충은 유비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를 두 사람의 죄로만 돌려서 이들의 목을 베신다면 다른 장수들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까 두렵습니다. 이는 결코 인심을 얻는 일이 아닙니다."
공융의 말에 조조는 치솟던 노기를 가라앉혔다. 조조는 두 사람을 살려 주는 대신 그 관직을 빼앗고 내쫓았다. 조조는 유비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유비는 자신을 거슬러 차주를 죽이고 서주성을 취하지 않았던가. 거기다가 원소와 손을 잡고 공공연히 자기에게 반기를 들고도 어리석은 유대와 왕충을 슬쩍 놓아 주어 발뺌을 하려 들었다. 조조는 유비가 세력을 더 키우기 전에 싹을 자르리라 작정하였다. 조조가 유비 토벌을 입에 담자 공융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엄동설한이어서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시기가 아닙니다. 내년 봄을 기다려서 출진하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먼저 나라 안을 더욱 공고히 다져 두어야 할 것입니다. 살피건대 형주의 유표와 양성의 장수는 몰래 제휴하여 조정에 대해서도 불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승상께서 먼저 사람을 보내시어 그들을 끌어들이십시오. 형주. 양성을 승상의 세력하에 거두어들이신다면 천하의 제후들도 승상의 위세에 머리를 굽힐 것입니다. 유비의 토벌은 그 이후에 도모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조조가 공융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장수와 유표가 근거지로 삼고 있는 양성과 형주는 서주와는 가까운 거리였다. 만약 공융의 말대로 그들을 자기 휘하에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서주를 취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엄동설한에 위험을 무릅쓰고 군사를 이끌 필요가 없지 않은가. 조조는 공융의 말을 좇기로 하고 유엽을 양양으로 보내 장수를 달래 보도록 했다. 유엽은 장수를 만나기에 앞서 그의 모사 가후를 먼저 찾아갔다. 가후는 유엽을 보낸 조조의 뜻을 헤아려 보면서 반가이 맞았다. 유엽은 양양으로 오게 된 목적을 말하기 전에 우선 조조의 위세와 그가 천하에서 제일가는 영웅임을 말했다. 가후는 당세의 뛰어난 모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유엽의 말을 듣지 않아도 천하를 헤아리는 식견이 높았으므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유 공께서는 일단 제집에 머무르십시오. 때를 보아 공의 말대로 이 일을 승상께서 바라시는 방향으로 이루어 보겠소."
가후는 유엽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한 뒤 장수에게 그 일을 의논하며 조조에게 투항하기를 권했다.
"조 공이 이렇게 사람까지 보냈으니 그에게 투항하는 것이 좋은 방책일 것입니다."
가후가 이렇게 권했으나 장수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조조와 팽팽히 맞서고 있던 터에 불쑥 투항하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더구나 조조의 아들 앙과 조카 안민, 대장 전위까지 죽인 것을 생각하니 더욱 망설여지는 장수였다. 이때, 공교롭게도 원소로부터 같은 목적을 지닌 사자가 와서 원소의 서한을 내놓았다. 장수가 글을 읽어 보니 원소의 서한 역시 자기와 힘을 합해 조조를 치자는 것이었다. 한꺼번에 두 곳에서 사자가 왔으므로 장수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러자 가후가 원소의 사자를 보고 그에게 물었다.
"원소 공께서는 근자에 군사를 일으켜 조조와 싸웠다는 소문을 들었소이다만, 그 결과를 알지 못하고 있소이다. 승패는 어찌 되었소이까?"
"엄동설한이라 잠시 싸움을 중지했습니다. 주공 원소께서는 항상 형주의 유표 장군과 양성의 장수 장군 두 분을 모두 현인이라고 일컬어 오셨는데, 이번에 두 분께 청을 드리러 온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저의 주공과 힘을 합해 역적 조조를 치시는 것이 어떠실런지요."
가후가 원소의 사자 말에 차디차게 웃었다.
"그대는 가서 원본처에게 자신의 골육인 원술도 용납하지 못했는데 어찌 천하의 선비를 용납할 수 있겠느냐고 전하시오."
가후는 사자가 보는 앞에서 원소의 서한을 찢어 버린 후 원소의 사자를 쫓듯이 내몰았다. 장수가 안색이 달라지며 물었다.
"조조보다는 원소의 세력이 강하오. 그의 서한을 찢고 사자를 쫓아 보냈으니, 만약 그가 쳐들어오면 어찌하겠소?"
그러자 가후가 태연히 대답했다.
"어차피 남의 밑에 들 것이라면 원소보다는 조조를 택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그러나 장수는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을 것이오. 그대는 지난날 나와 조조와의 싸움을 잊었소? 아직도 그 응어리가 남아 있을 것이오. 지금 만약 조조의 권유에 따른다면 후일에는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오."
"하하, 대망을 품고 있는 조조가 어찌 과거의 패전 따위에 원한을 갖겠습니까? 조조를 따라야만 하는 까닭이 셋이 있습니다."
"조조를 따라야 하는 세 가지 이유라니, 그게 무엇이오?"
"첫째는 조조가 천자를 모시고 천자의 조서를 받들어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는 터이니, 그에게는 대의명분이 있습니다. 둘째는 원소는 강성하고 우리는 약하니, 우리가 적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따르더라도 필시 후대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조조는 약하여 우리가 그를 따른다면 반드시 후대할 것입니다. 셋째, 조조는 천하를 얻겠다는 큰 뜻을 품고 있는 까닭에, 반드시 사사로운 원한을 버리고 덕을 세상에 널리 밝히려 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장군께서 조조를 따라야 할 이유입니다. 장군께서는 조금도 주저하지 마십시오."
가후의 명쾌한 대답에 장수는 더 이상 반론의 여지를 찾지 못했다. 장수는 가후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유엽을 불러들였다. 유엽은 조조의 덕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고 나서 장수의 기우를 풀어주었다.
"승상께서 만일 지난날의 원수진 일만을 생각하고 계신다면 무엇하러 저를 보내어 장군과 정리를 맺으려 하시겠습니까? 승상께서는 보다 큰뜻을 도모하시는 영걸이십니다. 그런 사사로운 원한은 잊으신 지 이미 오래입니다."
유엽의 말에 마침내 뜻을 정한 장수는 곧 그의 말을 좇아 다음 날 가후 등을 데리고 허도로 가 조조 앞에 나아갔다. 장수가 계하에 엎드려 절을 하자 조조는 황망히 장수를 부축해 일으키며 손을 잡아 이끌었다.
"지난날 나의 작은 과실을 마음에 품어 두지 마시오."
조조는 큰 잔치를 베풀어 장수를 극진히 환대한 후 그를 양무장군에 봉하고, 가후를 집금오(황실 경비대장)로 삼았다. 장수가 귀순하자 조조는 유표에게 손을 뻗칠 계획을 세웠다. 형주의 유표는 각처에 할거하는 군웅 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는 양자강 기슭의 비옥하고 광활한 땅을 다스리고 있었으며 군마도 강대했다. 지난날 강동의 손견과 같은 걸출한 인물도 그 영토에 침입했다가 패한 후 비명횡사 당했던 터였다. 귀순한 장수가 공을 세워 보기 위한 생각에서였는지 조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경승(유표의 자)에게는 제가 글을 쓰겠습니다. 그와는 다년간 친교가 있는 터입니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장수에게 글을 쓰게 했다.
"유경승은 이름난 선비들과 사귀기를 좋아합니다. 문명이 높은 분을 골라 보내시면 말을 들을 것입니다."
가후의 말에 조조는 순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소?"
"공문거(공융의 자)가 좋을 듯싶습니다."
조조는 순유를 공융에게 보냈다. 순유가 공융을 만나 조조의 명을 전하자 공융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이라면 나보다 열 배나 재주가 많은 인물이 있소. 바로 내 친구 예형이 바로 그요. 이 사람은 마땅히 천자를 보필해야 할 인물이오. 예형이라면 특사로 보내도 상대방을 능히 감당할 수 있으며 승상의 이름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형이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오?"
"재주와 학문이 높고 말재간 또한 대단합니다만, 타고난 성품이 까다롭고 괴벽스럽습니다. 또한 가세마저 가난하여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천자께 표문을 올려 그를 천거하겠소."
공융은 헌제에게 표를 올려 예형을 천거하였다. 예형은 평원 사람으로, 자는 정평이라 했다. 책을 보면 금방 깊은 뜻을 알아내며, 한 번 눈여겨본 문장은 곧 외웠으며, 한 번 들은 것은 결코 잊는 법이 없었다. 그의 본성은 도와 합치하고 묘안을 짜는 것이 흡사 신기에 가까워 이미 젊은 나이에도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던 터였다. 공융이 천자께 그를 천거하는 표를 올렸을 때 나이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그러나 예형으로서는 평소에 조조를 별로 훌륭한 인물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 대한 비판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조조 또한 예형의 이런 태도를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공융의 표문이 올라오자 헌제는 그 표문을 조조에게 넘겨주었다. 조조는 헌제로 하여금 그를 불러들이게 하니 예형은 천자의 명이라 거역할 수 없어 승상부에 나타났다. 그런데 나타난 예형의 몰골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봉두난발에 집에서 입고 지내던 때 묻은 옷을 그대로 걸쳐, 그의 곁에 있으면 역겨운 냄새가 풍겨 나왔다. 예형이 조조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다는 소문을 들었던 터라 그를 보는 조조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꼿꼿한 태도와 잔뜩 쏘아보는 듯한 눈길이 조조의 마음을 더욱 뒤틀리게 했다. 예형이 승상부에 들어온 이후에 자리도 권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고 있는데 예형이 불쑥 한마디 내뱉았다.
"아아 사람이 없구나. 천지가 넓고 넓은데 어찌 이리 사람이 없다는 말인가!"
예형은 조조와 문무백관이 늘어앉은 좌중을 훑어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조조가 그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내 수하의 수십 인이 모두 당대의 영웅들인데 어찌하여 너는 사람이 없다고 하느냐?"
"하하하."
예형은 조조의 물음에 박장대소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인물이 많습니까? 바라건대 대체 당대의 영웅들이 누구누구인지 알고 싶군요."
"재미있는 위인이군. 그러면 오른쪽 줄부터 차례차례로 일러 줄 터이니 잘 보고, 잘 들어서 기억해 두라. 먼저 순욱. 순유. 정욱. 곽가는 지모가 깊고 용병이 뛰어나 옛날의 소하도 미치지 못하는 인재이다. 그다음의 장료. 허저. 악진. 이전은 그 용맹을 당할 사람이 없다. 무제 때의 명장 잠팽이나 광무제 때의 명장 마무도 그들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 저기 우금과 서황은 선봉장으로 특히 뛰어나며 하후돈은 천하의 기재이다. 여건. 만총은 종사로서 따를 사람이 없고, 조자효는 세상이 다 아는 상장이다. 이래도 인물이 없다고 하겠는가?"
"하하하, 하하하."
예형은 조조의 말에 안하무인격으로 소리내어 웃었다.
"승상께서는 잘못 보셔도 크게 잘못 보시었소."
"내가 잘못 보았다니 그 이유를 자세히 말해보아라."
"그들은 나도 알고 있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순욱에게 쓸 만한 것은 얼굴뿐이니 조문이나 문병을 다니게 할 사람이오, 순유는 묘지기나 시킬 사람이외다. 정욱은 문지기를 시키는 것이 제격일 것이며, 곽가는 글이나 읽고 풍월이나 읊게 할 사람이요, 장료는 북이나 치고 징이나 치게 한다면 잘할 거요. 허저는 소와 말, 돼지 따위를 치게 하면 되겠고, 이전은 서한이나 전하고 격문을 나르게 하면 제격일 것이며, 만총은 술이나 마시거나 술찌기나 먹게 하고 술통이나 두들기게 하면 걸맞을게요. 서황은 개백정감이고, 우금은 널판때기나 지고 담이나 쌓게 할 인물이며 하후돈은 애꾸눈이므로 안질을 고치는 의사의 약통이나 들고 다니게 하면 그런대로 쓸 만할 거요. 그 밖의 사람에 대하여 말을 하자면 입만 아프지만, 옷을 입기 위한 옷걸이와 같고 밥을 먹기 위한 밥통과 같으며 술을 마시기 위한 술 단지, 고기를 먹기 위한 고깃주머니와 같을 뿐이외다. 때로 손과 발을 움직이고 가끔 입으로 소리를 낸다고 해서 인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소. 버마재비도 수족을 움직이고 지렁이도 소리를 내는데 그들을 어찌 모두 사람이라 하겠소."
예형은 말을 마친 후 혼자 손뼉을 치며 웃었다. 너무나 지나친 독설에 좌중은 노여움을 삭이느라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관후대도를 내세우던 조조도 속으로는 끓어오르는 노기 때문에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조조가 쓴 약이라도 삼킨 듯한 얼굴로 노기를 달래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면 그대는 대체 무슨 재능이 있는가?"
예형은 히죽 웃더니 턱을 치켜올리고 한두 번 숨을 쉬고 난 다음 자못 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천문 지리에 통하지 않음이 없고 삼교 구류에 걸쳐 깨우치지 않은 것이 없소이다. 위로는 임금을 섬기면 가히 요. 순에 이르게 할 수 있으며, 아래로는 공자와 안자에 짝할 만하오. 가슴 속에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경륜이 꽉 차 있어서 사사로운 욕심은 더 담을 여지가 없소. 그러니 나를 어찌 속된 무리들과 함께 섞어 말할 수 있겠소?"
울화를 참지 못하고 장료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멋대로 지껄이게 내버려 두었더니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입만 살아 있는 썩은 선비 놈아, 내 칼 한번 받아라."
그러나 조조가 그를 만류했다.
"마침 조정에는 고수 하나가 빠졌으니, 아침저녁 하례 때와 향연에 고수 노릇을 하도록 하라."
조조는 뜻밖에 예형에게 북치는 일을 맡겼다. 예형을 웃음거리로 만들겠다는 조조의 속셈이었다. 그러나 예형은 사양하지 않고 북 치는 일을 쾌히 응낙하고 승상부를 물러났다. 그날 예형을 천거한 공융은 언제 자리를 떴는지 보이지 않았다. 공융도 일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후회와 걱정으로 자리를 지키다 홀연히 승상부를 빠져나왔다. 예형이 사라진 뒤 좌중에서는 그를 욕하고 비난하는 소리가 일시에 쏟아졌다. 그중에서도 장료는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조조에게 되물었다.
"왜 그놈을 살려서 보내셨습니까?"
"그자의 허명은 일찍이 천하에 알려져 있다. 그런 자를 이 자리에서 죽인다면 세상 사람들은 내가 도량이 좁은 사람이라며 욕할 것이 아닌가. 그놈이 못 하는 게 없다고 큰소리쳤으니 북이나 치게 하여 욕이나 뵈줄 것이네."
조조의 말에 장료도 그 말뜻을 알아듣고 입을 다물었다.
다음 날 궁중의 성대에서 조하의 연회가 베풀어졌다. 조조는 고수들을 불러 북 치기를 명했다. 조조의 명에 의해 악사와 고수들이 줄줄이 당상에 나타나 춤을 추고 북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예형도 그들 중에 끼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고수들은 모두 연주자의 예복인 두건을 쓰고 깨끗한 노란색 옷을 입었으나 예형만은 누추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북을 치게 되자 '어양삼과'를 쳤다. 그 음절이 어찌나 절묘하고 손놀림 또한 신묘하던지 만좌한 백관들은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무곡이 끝날 즈음에 제정신을 차린 여러 무장은 이구동성으로 예형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거기 있는 고수는 듣거라. 궁궐의 하례에는 다들 연주복을 입게 되어 있거늘, 너는 어찌하여 더러운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느냐?"
이 소리에 예형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할 줄 알았으나 태연히 일어나 허리띠를 풀면서 중얼거렸다.
"옷이 더럽다면 벗어야지."
예형은 그 자리에서 옷을 훌훌 벗어 던지니 알몸이 되고 말았다. 백관들은 어이가 없는 가운데도 민망하여 고개를 돌렸다. 알몸이 된 예형이 천천히 다시 바지를 주워 입었다. 참다못하여 조조가 호통을 쳤다.
"묘당에서 어찌 그처럼 무례할 수 있느냐!"
예형은 북을 바닥에 내려놓고 장승처럼 서서 조조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답했다.
"임금을 속이는 무례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이 몸을 그대로 드러내는 무례, 어느 쪽이 더 무례한지 생각해 보시오. 나는 겉도 없고 속도 없는 정직한 사람임을 드러냈을 뿐이외다."
"닥쳐라 이놈!"
조조는 마침내 그가 자기를 빗대어 말하자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어 큰 소리로 말했다.
"너는 입을 열면 자신만이 맑고 깨끗하다 하는데, 그럼 누가 혼탁하며 결백하지 않다는 말이냐?"
조조의 노기를 보고도 예형은 동요의 기색이라곤 없었다. 오히려 조조를 보고 언성을 높였다.
"승상이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분간하지 못하니 이는 눈이 흐린 것이요, 충성된 말을 따르지 않으니 이는 귀가 흐린 것이요, 옛날과 지금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매 이는 몸이 흐린 것이요, 제후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이는 뱃속이 흐린 것이요, 항상 찬탈할 마음을 품고 있으니 이는 마음이 흐린 것이요, 나와 같은 천하의 명사를 북을 치게 만드니 이는 지난날 양화가 공자를 업신여기고 장창이 맹자를 헐뜯는 것과 같소. 이 모두는 곧 천하를 취하려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 같소."
예형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뱉는 호담한 혹평에 조조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문무백관은 숨을 죽인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공융 또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조조가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예형의 목을 칠 것 같았다. 공융은 조조에게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예형의 지병이 또 발작한 것 같습니다. 그 죄가 무거우나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나 뜻밖이었다. 조조는 공융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손을 들어 예형을 가리키며 조용히 말했다.
"너는 형주의 유표와 교분이 있는가?"
"다년간의 사귐이 있긴 있소이다."
"그렇다면 형주를 다녀오도록 하라."
예형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싫소이다."
"왜 싫은가?"
"무슨 일로 나를 보내려는지 이미 알기 때문이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오."
"아직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형주의 유표를 설복시켜 승상의 문전에 말고삐를 매게 한다면 승상은 몹시 기뻐할 것 아니오?"
"그렇다. 유표와 만나 이해를 따져 설득한 후 이 조조에게 귀순시킨다면 그대에게 높은 관직을 주리라."
"하하하, 쥐가 관목을 입고 갓을 쓴다면 꼴이 볼 만하겠군."
"나는 그대의 목숨을 잠시 더 빌려 주겠느니라, 즉시 출발하라."
이어 조조는 무관을 불러 일렀다.
"이 자에게 좋은 말을 주고 그를 호위토록 하라."
예형은 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조조는 말 세 필을 준비시키고 사람을 둘이나 붙여 좌우에서 붙들어 가게 했다. 또한 문무백관들로 하여금 동문 밖에 술상을 차려 놓고 그를 전송하게 했다. 조조는 이렇게 하여 귀찮기만 한 예형을 유표에게 보내 버렸다. 한편 동문에서 술상을 차려 놓고 예형을 기다리고 있던 문무백관 중 순욱이 백관들에게 타일렀다.
"예형이란 놈이 동문에 오더라도 모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말고 잠자코 있도록 합시다."
이윽고 예형이 동문에 이르렀다. 순욱이 미리 당부하였으므로 순욱을 비롯한 문무백관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예형이 소리 내어 통곡하기 시작했다. 예형이 통곡하자 순욱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곡을 하는가?"
"송장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어찌 곳을 하지 않고 지나가겠소?"
예형의 응수에 모두 입을 모아 공박했다.
"우리들이 송장이라면 그대는 머리가 없는 미치광이가 아니오?"
"나는 한조의 신하이고 그대들은 조조의 신하가 아닌가. 어찌하여 나를 보고 머리가 없다 하는가?"
"당신만 한조의 신하라는 말이오? 우리도 한조의 신하요."
"하하하. 조조는 한을 거스르는 반역자다. 그대들이야말로 반역자들 편에 있으므로 그 머리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예형과 순욱의 말을 듣고 있던 장수들이 창과 칼을 번뜩이며 외쳤다.
"왜 그놈을 살려 두시오? 그놈을 이리 넘기시오. 능지처참하겠소."
순욱도 그를 단칼에 베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조조도 참고 그를 형주로 보내는데 그가 함부로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쥐 같은 놈 때문에 어찌 칼을 더럽히겠소."
그 말을 듣자 예형의 독설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쥐라도 오히려 사람의 성정을 가졌거니와, 그대들은 똥통 속에서 꾸물거리는 구더기가 아니더냐?"
여러 장수들이 분함을 못 이겨 이를 갈았다.
며칠 후 예형은 형주에 당도하였다. 그의 재주와 평판을 알고 있는 유표는 융숭하게 그를 대접했다. 허도에 비하여 형주는 좁은 시골이어서 삽시간에 예형의 재주는 알려졌다. 어느 날, 유표가 많은 선비들을 모아 놓고 천자에게 올리는 문장을 지어 보도록 했다. 그때 그곳에 도착한 예형은 다른 사람들이 지어 놓은 문장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어안이 벙벙한 유표를 본척만척, 예형은 보란 듯이 붓을 들어 달필로 문장을 써 내려갔다. 유표는 예형의 문장을 보자 무릎을 치며 탄복하였다.
"실로 문장과 언론이 형(예형)을 빼놓고는 이뤄지지 않도다. 명불허전(명성이 헛되지 않음)이로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의 버릇인 기괴한 언동이 또 시작되었다. 예형이 번번이 유표의 결점만을 끄집어내니 예형을 극찬했던 유표도 드디어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강하태수 황조, 그는 남달리 성미가 고약하지. 그렇다, 그 자에게 이놈은 보내 버려야지.'
유표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를 황조에게 보내기 위해 구슬렸다.
"황조도 만나면 반가워할 것이오. 강하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므로 며칠 노닐다 오시지오."
예형이 강하로 떠난 후 누군가가 유표에게 물었다.
"예형이 주공을 비꼬고 놀렸는데도 어찌하여 죽이지 않고 황조에게 보내는 것입니까?"
유표는 웃으면서 그 물음에 대답했다.
"예형이 여러 차례나 조조를 희롱하였지만 조조가 죽이지 않은 것은 인망을 잃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예형을 죽이면 그만 높여 주고 자기는 그만큼 욕만 먹게 된다. 그래서 그를 내게 보내어 내 손을 빌어 그를 죽이게 하고, 나로 하여금 뛰어난 선비를 죽였다는 누명을 씌우려 함이었다. 그리고 내가 다시 그를 황조에게로 보낸 것은 조조에게 나도 지혜가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하하하."
유표의 말에 듣고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식견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예형이 강하에 가 있는 동안 조조의 적인 원소 쪽에서도 유표에게 사자를 보내 우호관계를 맺자고 제의해 왔다. 형주는 졸지에 조조와 원소, 양쪽에서 끌고 당기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유표는 여러 모사들을 모아 놓고 이 일을 의논했다.
"조맹덕의 편에 서는 게 좋겠소, 아니면 원본초의 뜻에 따르는 것이 좋겠소?"
종사중랑장인 한숭이 일어나 말했다.
"지금 두 영웅이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만약 장군께서 큰일을 도모하실 의향이 있으시면 이 시기를 이용하여 적을 무너뜨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 대사에 뜻이 없으시다면 어느 편이건 주군께 이로운 편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두 사람 중에 택해야 된다면 어는 쪽을 택해야 하겠소?"
"조조는 군사를 잘 부릴 뿐만 아니라 천자를 받든다는 대의명분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많은 인재가 있습니다."
"그러나 원소는 조조에 비해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 않소?"
"원소를 따르게 되면 그는 자기의 강한 군세만 믿고 있기 때문에 장군을 중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조는 반드시 장군을 중하게 여겨 소홀히 대하지 않을 것이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싸움에 패하여 승상의 자리를 잃게 되었을 때 장군께서는 그를 대신할 기회도 잡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표는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이튿날 다시 한숭을 불러 말했다.
"우선 그대가 허도로 가 그곳의 실정을 알아본 후 결정하였으면 하오."
유표가 이렇게 말하자 한숭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장군께서 천자에게 순종할 뜻을 가지고 계시어 조조와 제휴해 나가실 의향이시라면 모르겠으되, 그렇지 않으시다면 소생은 매우 어려운 지경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어려운 지경에 빠진다 함은 무슨 소리요?"
"소생이 허도로 가면 조조는 반드시 소생을 자기의 휘하로 끌어들이려 할 것입니다. 만약 천자께 고해 소생에게 관직이라도 내리신다면 저는 천자의 명이므로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천자의 신하가 되므로 장군을 따를 수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숭이 유표를 깨우쳤으나 유표는 듣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생각이 있으니 그대는 허도에 가 살펴보도록 하시오."
한숭은 내키지 않았으나 유표의 명을 받들어 형주의 토산물과 많은 보화를 수레에 싣고 허도로 떠났다. 조조는 한숭을 반가이 맞아들이며 그에게 시중의 벼슬을 내리고 영릉태수에 봉했다. 한숭이 우려했던 대로 조조는 그에게 높은 벼슬을 내려 자기 쪽으로 마음을 기울게 했다. 조조는 한숭을 융숭히 대접하면서도 형주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입에 담지 않고 그대로 형주로 돌려보내 유표를 달래게 했다. 그가 떠나간 후 순욱이 의하해 여겨 조조에게 물었다.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한숭을 그대로 보내셨습니까? 그는 필시 허도의 사정을 염탐하러 왔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벼슬까지 내리셨습니다. 또한 유표에게 보낸 예형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는데도 어찌하여 그 일을 그에게 묻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조조는 조용히 웃으며 순욱에게 말했다.
"한숭이 허도를 염탐해 간 것은 오히려 잘된 일이오. 우리의 가볍지 않은 형세를 알고 갔으니 오히려 환영할 만한 첩객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또 예형은 유표의 손을 빌어 그를 죽이고자 함이었소. 무엇을 더 물어볼 필요가 있었겠소?"
순욱은 머리를 끄덕이며 조조의 생각에 감탄했다.
한편 형주로 돌아간 한숭은 유표에게 나아가 허도의 활기찬 모습을 전하며 조조의 편에 들기를 권했다.
"생각하옵건대 주군의 자제분 중 한 분을 조정으로 내보내시어 벼슬길에 오르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조조도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며 장래 주군의 가세도 더욱 번성하실 것입니다."
한숭이 조조의 덕을 칭송한 뒤 이런 말까지 덧붙이자 유표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의 아들을 조정에 내보내라는 말은 기실 인질로 보내라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유표가 한숭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네놈은 두 마음을 갖고 있구나. 이놈을 묶어 당장 목을 베라!"
그러자 한숭도 유표에게 할 말이 있다는 듯 당당히 말했다.
"장군께서 저를 저버리셨지 제가 장군을 저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옆에 있던 모사 괴량도 한숭을 거들었다.
"그가 허도에 가기 앞서 미리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게다가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았으므로 한숭의 목을 벤다면 조정에서도 이를 좋지 않게 볼 것입니다."
유표는 그제야 한숭이 떠나기 전에 한 말이 생각났다. 유표는 가까스로 노기를 가라앉히고 한숭을 용서했다. 그때 강하에서 사람이 와서 소식을 전했다.
"예형이 황조에게 주살되었습니다."
"어떤 연유로 죽임을 당하였는가?"
유표는 예상한 일이었지만 그 경위가 궁금하여 물었다. 강하에서 온 사자가 전하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예형이 황조에게 갔을 때도 처음에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예형도 그에 보답하기 위해 재주를 부리고 붓을 휘둘러 훌륭한 시문을 지었다. 그가 쓰는 시문은 강조할 것은 강조하고, 생략할 것은 생략해서 조금도 빈틈이 없는 글이었다.
"참으로 잘 쓰시었소. 이것이야말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오.
그때마다 황조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예형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 칭찬도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황조가 예형과 더불어 술을 마시던 중 술이 몹시 취했을 무렵이었다. 황조가 예형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랫동안 허도에 계셨다는데, 허도에서는 지금 누구 누구를 참다운 영웅이라 생각하고 있소?"
그러자 예형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어른으로는 공문거(공융)와 양덕조란 작은아이를 빼면 다른 인물은 없소."
황조가 조바심에서 다시 예형에게 물었다.
"그럼 나는 어떻소. 이 황조 말이오."
그러자 예형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대 말인가? 그대야 사당 안에 있는 귀신 같은 이요."
"사당 안의 귀신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
"제사를 받아먹지만 별로 영험이 없는 귀신이란 말이오."
"뭣이?"
"하하하. 제삿상이나 넘보는 허수아비 주제에 화를 내다니. . ."
황조는 발끈해서 칼을 뽑자마자 예형을 쳤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황조는 그의 시체를 내다 버리게 했다.
유표는 막상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새삼 그의 아까운 재주가 생각나 탄식해 마지않았다. 유표는 가신들을 시켜 그를 앵무주에 후히 장사지내도록 했다. 조조도 예형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썩은 선비놈이 자기의 칼날 같은 세치 혀로 스스로를 찔러 죽였구나. 마땅히 후일의 귀감이 되었으리라. . ."
조조는 예형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아깝게 여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형의 죽음을 기화로 유표가 항복해 오지 않음을 트집 잡았다. 어쨌든 자기가 파견한 사신이 형주 땅에서 유표의 부하 손에 죽었다는 것을 빌미삼아 그를 치려 했다. 조조가 형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이끌려 하자 순욱이 말렸다.
"원소와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고, 서주에는 현덕이 건재합니다. 이때 다시 형주를 치는 것은 뱃속의 병은 그냥 두고 손가락이나 발가락 끝을 먼저 치료하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병의 근원인 원소부터 정벌하고 다음에 현덕을 제거해야 합니다. 강한(형주)의 유표는 그 뒤에 도모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유표가 항복해 오지 않은 것에 울컥했던 조조는 순욱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꾸었다. 순욱의 말대로 다시 강하로 원정을 가면 원소가 그 틈을 노려 허도로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조는 순욱의 말을 좇아 군사를 내는 일을 뒤로 미루었다.
그즈음 조조의 순욱에 대한 신뢰는 컸다. 그 옛날, 아직 낙양 황궁의 한낱 경리에서 몸을 일으켜 불과 십수년 만에 오늘날의 조조가 되기까지에는 그를 둘러싼 모사 양장의 힘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순욱은 특히 탁월한 공적을 쌓고 있었다.
"공은 나의 장량이오."
조조가 특히 순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었다. 조조가 오늘날의 성공을 거둔 중대한 기략의 근본은 헌제의 신변을 재빨리 허도로 옮긴 사실에 있었다. 그것도 순욱이 때를 놓치지 않고 조조에게 권한 때문이었다.
"천자를 받들어 인망을 좇는 대순이야말로 주군의 운명을 개척하는 대도입니다. 다른 사람이 앞지르기 전에 속히 결행하십시오."
순욱이 조조에게 간곡히 건의하자 조조는 그의 말이 옳음을 알고 허도행을 결심했던 것이었다. 당시는 다른 군웅들이 서로 다투기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첫째로 천자를 선점하는 데 착안한 젊은 순문약의 혜안은 그만큼 탁월한 것이었다. 원소의 모신들도 그 계책을 권유한 바 있으나 원소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원소가 한의 명문일 뿐만 아니라 강대한 세력을 지녔으면서도 지금 한낱 한 외방의 군주로 머물고 있는 것은 그때 그 기회를 놓친 탓이었다. 순욱은 내치에 있어서도 눈부신 공적을 쌓고 있었다. 허도를 중심으로 둔전 정책을 채택한 것도 그랬다. 지방 양민 중에서 인망 있는 사람을 뽑아 호장으로 두어 농경을 장려하게 했다. 전란 중에 있으면서도 산업을 진흥하여 오곡의 증산량만 하여도 해마다 1백만 석을 넘을 정도였다. 이처럼 허도는 군사. 경제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허도의 번창에 비해 조정은 날로 그 기운이 쇠약해져 갔다. 조조의 무권정치가 상부라는 형태로 그 위세가 더해가면 갈수록 헌제는 점점 실권을 잃어 갔다. 헌제가 이렇게 이름만의 천자로 위상이 흐려짐은 곧 한의 몰락을 뜻하고 있었다.
상노와 애첩 의기 높은 태의 길평
한편, 조정이 돌아가는 모양을 침통하게 여기고 있던 국구 동승은 밤낮으로 애를 태우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조조를 죽이고 황실의 권위를 옛날과 같이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동승은 침식을 잊은 채 궁리를 거듭해 보았으나 별다른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왕자복 등의 동지들과도 밤을 새우며 의논해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동승은 건안 5년(A. D. 200년) 정월 초하루, 조정에서의 신년 하례 때 매우 교만스런 조조의 횡포를 보고는 분통이 터져 그만 병이 들어 눕게 되었다. 헌제는 동승이 몸져누웠다는 말을 듣자 태의 길평으로 하여금 치료하게 했다. 길평은 원래 낙양 사람으로 이름은 태, 자가 칭평이었는데 사람들은 흔히 '길평'으로 불렀다. 한의학을 깊이 깨달아 당시 제일의 명의로 알려져 있었다. 길평은 어명을 받들어 동승의 집에 들어선 후 잠시도 동승의 곁을 떠나지 않고 약을 지어 병을 치료했는데 그 정성이 지극했다. 길평이 지어 주는 약을 먹은 동승은 하루하루 건강이 회복되었으나 선뜻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는 못했다. 동승의 병은 원래 마음의 병이라 약만으로 쾌유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동승은 길평의 치료를 받는 중에도 속으로 다 삭이지 못하고 가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길평은 동승을 괴이쩍게 여겼으나 감히 내색하지 못하고 까닭도 묻지 못한 채 그저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동승의 몸이 쇠약해진 것만은 틀림없으나 단순히 쇠약하여 생긴 병도 아니며, 그렇다고 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나 명절인 대보름이 되었다. 길평이 집에 돌아가고자 동승에게 하직을 고하니 동승은 불편한 몸으로 술을 내어 그동안 길평의 극진한 치료에 감사를 표했다. 동승은 길평과 작별의 정을 나누며 겨우 몇 잔의 술을 마셨건만 마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느새 피곤해져 오는 잠을 주체 못 하고 깜박 졸음에 빠져들게 되었다. 아무리 마음의 병이라고는 하나 아직 병이 다 낫지 않은 터에 마신 몇 잔의 술은 그동안의 노심초사로 쌓였던 피로와 함께 동승의 늙은 몸을 가누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때였다. 왕자복을 비롯한 동지 네 사람이 얼굴 가득히 기쁜 빛을 띠고 큰소리로 웃고 떠들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국구, 기뻐하십시오. 이제 우리 일을 성취할 때가 왔습니다."
그 말에 동승이 맨발로 달려나가 그들을 맞아들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어디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시오."
"형주의 유표와 하북의 원소가 동맹하여 50만 대군을 일으켜 열 갈래로 길을 나누어 허도를 향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또 서량의 마등은 병주의 한수와 연결하여 서량군 72만을 일으켜 북쪽으로부터 짓쳐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자 조조가 당황하여 이쪽저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보냈습니다. 이로 인해 허도의 방비가 허술해져 상부의 경비병을 합쳐도 1천 명에 지나지 않는다 합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우리들 다섯 집안의 사람들만 동원해도 1천여 명은 훨씬 넘을 것입니다. 때마침 오늘은 대보름이라 상부에서도 잔치를 벌여 지금쯤은 술에 만취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제야 하늘이 내리신 기회가 온 것입니다. 어서 진두에 서서 일거에 조조를 칩시다."
왕자복은 동승을 병실에서 이끌었다. 동승이 밖으로 나가 보니 어느새 그들이 거느리고 왔는지 많은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본 동승은 힘이 솟아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보검을 들고 질풍처럼 상부를 향해 쳐들어갔다. 동승은 칼을 들고 곧바로 조조가 잔치를 벌이고 있는 후당으로 들어갔다.
"역적 조조는 내 칼을 받아라!"
동승은 대갈일성, 조조의 목을 칼로 힘껏 내리쳤다. 동승이 자기의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동승이 밤낮으로 조조 죽일 일만 생각하다 보니 그 일이 꿈속에 나타난 것이다. 동승은 꿈에서 깨어나면서도 '역적 조조'란 말을 헛소리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난감한 일은 태의 길평이 그런 동승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야 국구께서 어찌하여 병을 얻었는지 알겠습니다. 국구의 병은 조조 때문이었군요."
동승은 깜짝 놀라 말문을 열지 못했다. 길평이 그런 동승을 바라보며 조용히 거들었다.
"국구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제가 비록 한 사람의 의원에 불과 하나 저 역시 한나라의 백성입니다. 국구께서 탄식하시는 걸 보고 까닭은 묻지 않았으나, 이제 꿈을 꾸며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그 연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참다운 의원은 나라의 병도 고친다고 합니다. 제게는 그런 힘이 없으나 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습니다. 부디 숨기지 말고 말씀해 주시면 이 길평이 반드시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비록 구족이 멸함을 당한다 하더라도 기꺼이 국구 어른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동승은 그런 길평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길평은 동승이 아직 그의 진심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손가락을 깨물어 맹세의 뜻을 보였다. 동승은 그제야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는 그에게 혈서로 된 황제의 밀조를 보이며 말했다.
"아직 거사하지 못한 것은 유현덕과 마등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길평은 밀조를 받들더니 이윽고 옷매무새를 고치며 흐느껴 울었다.
"역적 조조를 하루 아침에 제거할 묘책이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제 손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시오."
동승이 반색을 하며 길평에게 물었다.
"조조는 건강하나 단지 하나 두풍이라는 지병이 있습니다. 그 지병이 발작하면 골수에 고통이 스미게 됩니다. 그럴 때 약을 지어주는 사람은 저 이외에는 없습니다. 기다리면 두풍이 도져 그가 나를 부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두풍약에 독을 타서 먹게 하면 모든 일이 끝납니다.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실로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칼 한 번 쓰지 않고 조조를 죽일 수 있다니 이보다 더 감격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그 일은 천자는 물론, 한나라의 사직을 구하는 일이 될 것이오."
두 사람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때 방 휘장 밖에서 바람도 없는데 무슨 기척이 들리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으나 그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길평은 동승에게 그 말을 남긴 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겨울이 지나 매화나무 꽃봉오리가 벌어질 무렵이 되자 동승의 집에도 봄을 맞은 생기가 감돌았다. 길평과 조조를 제거할 모의를 한 후 요즈음 들어 동승의 몸이 쾌차하였는지 아직 이른 봄의 후원을 산책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동승의 피부는 윤기가 흘렀으며, 얼굴에는 다시 화색이 완연했다. 그날 밤도 동승은 식사 후 후원에 나와 매화나무 위에 걸려 있는 초저녁달을 바라보며 길평이 한 말을 곱씹고 있었다. 훈훈한 미풍이 매화나무 사이를 감돌았다. 그때 동승은 문득 후당 쪽에서 얼핏 들려 오는 인기척을 들었다. 동승은 괴이쩍게 여겨 발소리를 죽이며 후당 쪽으로 향했다. 시첩들이 기거하는 후당 한곳에서 한 쌍의 남녀가 정을 나누고 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동숭이 다가가 보니 어둡고 으슥한 곳에서 하인 진경동과 젊은 애첩 운영이 한 몸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동승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 노기가 끓어올랐다.
"이 고약한 것들!"
자기가 병들어 누워있는 동안 두 사람이 이렇게 놀아났다고 짐작하니 눈에 불똥이라도 튈 듯했다. 주인 동승의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 두 사람이 떨어졌다. 동승은 경동의 목덜미를 움켜잡으며 외쳐댔다.
"게 누구 없느냐? 당장 이것들을 끌어내어 죽여라!"
동승의 외침에 놀라 그의 부인도 달려 나왔다. 그의 부인이 극구 동승을 말렸다.
"그런 일로 그들을 죽인다면 우리만 부끄러워질 뿐입니다."
동승도 그 일이 밖으로 알려지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동승은 그들에게 각기 매 40대씩을 때리게 한 후 그들을 후각의 방 안에 가두어 놓도록 했다. 그런데 그날 밤, 진경동은 힘을 다해 문고리를 비튼 후 갇힌 방에서 벗어나 도망을 쳤다. 그는 높은 돌담을 뛰어넘자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뛰어갔다.
"어디 두고 보자, 이 늙은이야."
그는 미동답지 않은 대담한 눈초리로 주인집을 뒤돌아보며 이런 말을 내뱉았다. 경동은 원래 동승의 집에 돈 때문에 팔려온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타고난 용모가 준수하여 동승도 가까이하며 귀여워해 주었고, 가족들도 모두 그를 아꼈다. 그러나 경동은 지난날 주인집에서 베푼 은덕을 생각하기에 앞서 애첩에게 빠져 둘 사이를 갈라 놓은 동승에 대한 원한만을 품게 되었다. 거기에다 매맞은 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무서운 보복을 다짐하며 달려간 곳은 승상부였다. 밤중에 상부의 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관원들이 뛰어든 진경동의 소리에 귀를 의심했다.
"승상을 뵈옵게 해 주십시오. 천하의 변고를 아뢰러 왔습니다. 승상을 해치려고 모의를 꾸미는 자가 있습니다."
파수 보는 군사는 곧 이 일을 조조에게 알렸다. 조조가 조용한 방으로 경동을 불러들인 후 물었다.
"너는 누구이며 어인 일로 이 한밤중에 나를 찾아왔느냐?"
"저는 동 국구댁의 가노 진경동이라 하옵니다. 근일, 왕자복. 충집. 오자란. 오석. 마등 등이 저의 주인집에 자주 모여 흰 비단을 꺼내놓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무엇인가 의논들을 하는 때가 많은데 필시 이는 승상을 해치고자 하는 음모인 듯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그런 주인의 중대사를 자세히 알고 있느냐? 너도 그 한 패거리가 아니냐?"
조조가 짐짓 겁을 주며 묻자 경동은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고개를 저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소생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다만 며칠 전 태의 길평님의 심부름을 하던 중 어느 날 승상님께 독약을 드시도록 한다는 말을 얼핏 듣게 되어 귀를 기울였을 뿐입니다. 놀라운 나머지 몸이 떨려 그로부터는 주인의 얼굴을 바로 보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조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좌우에게 엄중 단속했다.
"일이 명백히 드러날 때까지 저 아이를 부중에 숨겨 두도록 하라. 또 오늘 밤의 일은 일체 입밖에 내지 말라."
생각하면 하늘의 도움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진경동이 이 일을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틀림없이 길평의 약을 마시고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을 터였다. 조조는 서늘해지는 간담을 달래며 모반을 캐낼 준비를 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승상부에는 싸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조조는 며칠째 입을 다물고 방 안에서만 지내며, 밖에서는 대신들을 만나지도 않았다. 그런 어느 날 새벽녘이었다. 길평의 집으로 조조의 사자가 말을 달려와 명을 전했다.
"지난밤부터 승상께서 두풍이 일어나 매우 고통스러워하십니다. 곧 내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경동이 조조에게 고자질한 사실을 길평이 알 리 없었다. 다만 길평은 속으로 '역적놈이 이젠 죽을 때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준비해 둔 독약을 감춘 채 종자 한 사람과 함께 나귀를 타고 승상부로 향했다. 조조는 길평을 보자 병상에 누운 채 약을 달여 달라고 명했다. 옆방으로 물러간 길평은 이윽고 쟁반에 뜨거운 탕약을 받쳐 들고 왔다. 길평이 독약을 넣은 탕기를 들고 와, 조조가 누워있는 침상 아래 무릎을 꿇고 말했다.
"약을 드십시오."
이미 약에 독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조조는 얼른 약을 마시지 않았다. 초조해진 길평이 조조에게 약을 재차 권했다.
"약은 뜨거울 때 드시고 땀을 내야 약효가 있습니다. 식기 전에 어서 드십시오."
그러자 조조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태연스레 말했다.
"그대도 책을 읽었을 테니 예절을 알고 있을 것이오. 임금이 병이 나서 약을 마실 때는 신하가 먼저 맛을 보고 아비가 병이 나서 약을 먹을 때는 그 자식이 먼저 맛을 보는 것이 예절이라 하였소. 그대는 나의 가까운 신하인데 어찌 한 모금 마신 다음에 권하지 않는가?"
조조의 말에 길평은 가슴이 섬뜩했다. 일이 잘못되어 조조가 이미 이 일을 눈치채고 있음을 알았다. 조조가 무섭게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았다.
"약은 병을 고치는 것이므로 환자가 먹어야 할 것이지, 다른 사람이 먹을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길평이 이렇게 말하며 한 손으로 약탕기를 들고, 한 손으로는 조조의 귀를 잡고 입에다 약을 부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마음속으로 단단히 준비하고 있던 조조였다. 조조는 손으로 탕기를 밀쳐 내며 발을 쳐들어 길평의 턱을 걷어차니 약탕기가 방바닥에 떨어져 약이 쏟아졌다. 그러자 얼마나 독이 강한지 약물이 방바닥에 깔아 놓은 천에 스며들어 천의 색이 금세 변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무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길평을 꽁꽁 묶어버렸다.
"두풍이란 말은 거짓이었다. 내가 네놈을 시험하기 위해 부른 것이었다. 네놈이 날 죽이려 한 것이 틀림없구나."
조조는 정자로 나와 앉아 이윽고 계하에 결박된 길평을 꿇어앉히도록 했다.
"힘센 옥졸 스물을 뽑아 형틀 위에 저놈을 묶고 문초할 준비를 하라!"
조조는 이렇게 명한 뒤 길평을 독기 서린 눈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는 일개 의원의 신분으로, 네놈 혼자서 나에게 독약을 먹이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를 부추긴 배후의 인물을 대라. 그러면 네 한 목숨만은 살려 줄 것이니라."
그러나 길평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태연했다. 오히려 조조의 말에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천자를 능멸하는 가증스런 역적놈아! 너를 죽이려 원하는 사람은 천하에 넘칠 만큼 많다. 내 어찌 일일이 그런 사람의 이름을 다 댈 수 있겠는가?"
조조는 길평에게 다시 물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너에게 독약을 넣도록 부추긴 자가 누구인가?"
"내가 너를 죽이고자 한 것인데, 누가 나에게 시켰다고 하는가? 죽는 것만이 소원이다. 단칼에 죽여라."
조조가 화를 참지 못하고 옥졸들에게 명했다.
"이 늙은 놈이 입을 열 때까지 매를 치고 주리를 틀어라."
명령을 받은 옥졸들은 번갈아 가며 길평을 내리치고 주리를 틀었다. 살갗이 찢겨 나가고 뼈가 드러나 그의 온몸은 피범벅이 되었다. 그 흐르는 피가 계단 아래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보고 있는 사람들이 처참한 광경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길평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만해 두고 그를 옥에 가두어라."
조조는 이미 반송장이 된 길평을 옥에 가두게 했다.
이튿날이 되자 조조는 후강에 연회를 펼치고 여러 대신들을 초대하였다. 왕자복 등 네 사람은 조조가 의심할까 봐 불안한 가슴을 어루만지며 참석하였으나 동승만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조조가 일어나 여러 대신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 무인들은 가무만으로는 흥이 일어나지 않으실 테니, 흥을 돋우기 위해 색다른 것을 보여 드리겠소."
조조는 옆에 있는 시신에게 귀엣말로 명을 내렸다. 조조의 말에 무슨 재미있는 여흥이라도 있을 걸로 기대하고 있던 대신들이었다. 이윽고 연회장에 나타난 것은 옥졸들에게 이끌려 나오는 큰 칼을 쓴 길평이었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일순간 무덤 속처럼 음산한 분위기로 돌변했다. 계하에 끌어다 놓은 길평은 얼른 보아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처참했다. 만조백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조가 그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경들은 알지 못할 것이오만, 이 자는 나라를 거스르고 나를 해치려 한 자요. 그러나 천벌이 내려 실패했는데 이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시오."
조조는 옥졸들에게 명해 매를 치게 했다. 길평은 어제의 매로 사지가 성한 데가 없는 지경이라 옥졸들이 몇 대를 치자 기절했다. 옥졸들은 그에게 물을 끼얹었다. 정신이 든 길평은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며 조조를 꾸짖었다.
"역적 조조놈아, 어째서 나를 빨리 죽이지 않느냐?"
"듣자하니 너와 공모한 놈이 여섯이라 하니, 네놈까지 합하면 일곱 놈이 된다는 말이냐?"
"이 역적놈아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너를 죽이고자 하는 이가 어찌 일곱뿐이겠느냐?"
"감옥살이가 괴로워 빨리 죽고 싶거든 그 일곱의 이름을 대라!"
"너의 간악함은 동탁보다 더하다. 이제 두고 봐라. 온 천하가 너의 고기를 씹고자 할 것이다."
길평은 의식이 있는 동안은 조조에게 욕만 퍼부었다. 다음 순간 살이 찢어지고 뼈가 바스러지는 곤장 소리만 요란했다. 길평의 몸뚱이는 금세 터진 살로 흐물흐물해졌다. 길평이 매에 못 이겨 혼절하면 물을 끼얹었고, 다시 정신이 들면 매질이 이어졌다. 그래도 길평은 입을 열지 않았다. 조조는 끝내 길평이 실토를 하지 않자 그를 다시 옥에 가두게 했다. 그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왕자복과 나머지 세 사람은 짐짓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마음은 더없이 괴롭고 두려웠다. 만좌한 대신들은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술이 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조조가 비록 길평으로부터 이름을 듣지 못했으나 자기를 거역한 자에 대해 내린 경고의 뜻은 이루었다고 여겼다. 대신들이 천천히 자리를 떠나자 조조는 왕조복을 비롯한 네 사람을 불러 앉혔다. 왕자복. 오자란. 충집. 오석은 몸을 떨며 그 자리에 눌러앉았다. 그들 네 사람 뒤로는 이미 많은 무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조조는 차디찬 냉소를 지으며 그들 앞에 다가갔다.
"공들은 그리 서둘러 갈 필요가 없지 않겠소? 이제부터 자리를 옮겨 주연을 벌이도록 할 것이오. 여봐라! 빈객을 저쪽 각으로 모시도록 하라!"
무사들이 그들을 안내하여 조조가 가리킨 각문으로 들어갔다. 네 사람의 발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이 자리에 앉자 조조가 성큼성큼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근자에 공들은 국구의 집에서 대체 무슨 일을 의논하고 있었소?"
떨고 있던 왕자복이 마음을 가다듬고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특별히 의논한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평상시의 교제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조조가 냉소를 머금고 다시 물었다.
"평상시의 교제인데, 어찌 흰 비단에 웬 글씨를 썼으며, 또 무엇을 읽어 보고 있었소?"
왕자복 등 네 사람은 그 말에 가슴이 섬뜩해져 머뭇거렸다. 조조가 천자께서 내리신 밀서까지 알고 있다면 일은 이미 심상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진경동을 불러들여라!"
조조는 밖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경동이 방으로 들어오자 그들은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승의 집에 자주 드나들다 보니 그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충집이 그런 가운에서도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너는 대체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그러자 조조가 충집의 말을 가로막았다.
"여기 증인이 있는데도 시치미를 뗄 작정이오?"
왕자복이 진경동을 보고 또다시 물었다.
"네가 무엇을 보았다는 말이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여섯 사람이 모여 비단에다 글을 쓰시지 않았습니까?"
왕자복은 진경동이 나타날 때부터 그가 이 일을 밀고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순순히 실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왕자복은 동승에게서 진경동이 자신의 애첩과 놀아나다 도망쳤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그 일을 경동에게 뒤집어씌웠다.
"이놈은 국구의 가노로 시첩과 정을 통한 놈입니다. 주인의 추궁을 피하려고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니 그 말을 믿으시면 아니 됩니다."
"그렇다면 길평이 나를 독살하여 한 것이 동승의 사주를 받고 한 일이 아니라면 누가 시켰다는 말이냐?"
조조가 그들에게 추궁했으나 왕자복 일행은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뗐다. 조조가 그런 그들에게 다시 엄포를 놓았다.
"사실 그대로를 자백하면 지금이라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뒤에 이 일이 밝혀지면 그 화가 일문 삼족에 미칠 것이다."
조조는 그들을 어르고 달랬으나 왕자복 일행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끝까지 부인하는 그들을 조조는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튿날, 조조는 여러 대신들과 무사들을 이끌고 국구 동승의 집으로 향했다. 동승이 몸소 문밖에 나가 조조를 맞아들였다. 조조는 동승을 보자 대뜸 따져 물었다.
"국구에게는 내가 보낸 초대장이 오지 않았소이까?"
"초대장은 받았지만 몸이 불편해 즉시 불참하겠다는 뜻을 서면으로 알렸소이다만. . ."
"지난밤, 백관이 모두 연회에 모였는데, 국구 한 사람만 얼굴이 보이지 않았소. 어떠한 연유로 불참하였소?"
"작년부터 도진 고질병이 낫지 않아 거동이 불편하여 그만 결례를 했소이다."
조조는 성난 눈으로 동승을 매섭게 쏘아봤다.
"경의 고질병은 아마 길평을 시켜 나에게 독약을 먹이면 낫는 병이었겠지요."
조조가 집으로 불쑥 찾아올 때부터 내심 마음을 조이고 있던 동승이었다. 조조의 입에서 길평이란 말이 나오자 가슴이 뜨끔했으나 황망히 고개를 저었다.
"옛?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조는 동승을 힐끗 쳐다보며 비꼬는 투로 말했다.
"국구께서 그 일을 모른다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어서 바른대로 말해 보시오."
"그 일이라니요? 늙고 병들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노인이 무엇을 안다는 말씀입니까?"
국구가 강력히 부인하자 조조는 좌우에게 명하여 데리고 온 길평을 대면케 했다. 길평은 30여 명의 옥리와 군사들에게 끌려 나와 객당의 계단 아래에 꿇어앉았다. 동승은 길평의 처참한 몰골을 보자 가슴이 에이는 듯했다. 그러나 길평은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더니 매섭게 조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하늘을 속이는 역적놈아, 언젠가 천벌을 받을 줄 알아라! 이 이상 나를 문초해서 무엇을 얻겠다는 거냐?"
조조가 다시 동승을 노려봤다.
"왕자복. 오자란. 오석. 충집 네 사람은 이미 붙잡아 하옥하였으나 다른 한 사람을 잡지 못하였소. 국구께선 마음에 짚이는 데가 없으시오?"
동승은 정신이 아찔할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가로 저었다. 조조는 다시 길평을 다그쳤다.
"나에게 독약을 먹이도록 사주한 자가 누구냐?"
"조정을 파괴한 적인 네놈을 하늘을 대신해서 처단하려 했을 뿐이다."
"이 혓바닥이 긴 흉물아, 그렇다면 너의 한 손가락 끝이 잘린 것은 무슨 까닭이냐?"
"바로 이 손가락을 깨물어 역적 조조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천지신명께 맹세한 것이다."
조조가 노기를 띠고 그를 노려보더니 옥졸들에게 명했다.
"저놈의 나머지 아홉 손가락을 모조리 잘라 버려라!"
길평의 손은 피범벅이 되었다. 잘린 손가락이 계단 아래 떨어졌다.
"자, 아직도 손가락을 깨물어 맹세하고 싶은가. 할 테면 얼마든지 해 보아라."
그래도 길평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손가락은 잘렸어도 나의 입은 아직 있다. 입으로는 도적을 삼킬 수도 있고 혀가 있느니 네놈의 죄를 꾸짖을 수도 있다."
길평이 조조를 바라보며 외쳤다. 조조가 그 소리를 듣자 호통을 치며 명했다.
"네 이놈! 그래도 바른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여봐라, 저 자의 혀를 뽑아 버려라!"
조조가 악귀처럼 대갈하자 옥졸들은 길평을 땅바닥에 눕혔다. 혀를 자르기 위함이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려는 찰나였다. 문득 길평이 옥졸들을 향해 말했다.
"기다려라. 혀를 뽑아서는 나도 견딜 수가 없다. 이 오랏줄을 풀어 다오. 그러면 내 모든 것을 자백하겠다."
길평의 말에 조조는 의아했다. 그가 갑작스럽게 자백하겠다는 것이 이상했으나 그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원하는 대로 풀어 줘라!"
수십 명의 옥졸들이 길평을 둘러싸고 있었고 반 송장이 된 그 몸으로 무엇을 하랴 싶었다. 조조의 명에 옥졸들은 밧줄을 풀어 주었다. 밧줄이 풀리자 길평은 대궐 쪽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길평이 대궐 쪽을 향해 절을 올리자 조조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행동이 수상쩍었기 때문이었다. 길평이 눈물을 흘리며 대궐 쪽을 향한 채 통곡했다.
"신 불행히도 여기서 생을 마칩니다. 참으로 통분스럽기 그지없사오나 천운이 어찌 악역에 폐하겠습니까? 이 몸이 비록 귀신이 되더라도 금문을 수호하고 있겠사오니 때가 오기를 넓으신 마음으로 기다려 주십시오."
"쳐라! 그놈의 목을 쳐라!"
조조가 갑자기 벽력같이 소리쳤다. 그러나 조조가 길평에게 속았음을 알고 소리칠 때였다. 길평은 옥졸들이 내리치는 칼에 앞서 곁에 있는 돌계단을 향해 힘껏 몸을 던져 머리를 부딪쳤다. 죽기를 작정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던져 부딪치니 길평의 머리는 으깨어지고 말았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한순간 그 끔찍한 모습에 호흡이 멈춰졌다. 조조는 길평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길거리에 내팽개쳤다. 건안 5년의 일이었다. 그의 기개를 기리고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시가 있다.
한나라 기울어 일어나지 못하니
마침내 길평이 나타났네.
간사한 역적 없애고자 한 맹약
손가락 깨물어 했네.
참혹한 형벌 매워도 바른말 쉬지 않고
스스로 머리 찍어 죽었어도 혼백은 살아
열 손가락 잘려 나가 흐르는 피 속에
천 년이 흘러가도 그 이름 되새기네.
길평이 돌계단에 머리를 찧어 자결하자 주위에는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을 깨뜨리고 조조가 옥졸들을 향해 소리쳤다.
"진경동을 끌어 내라!"
경동이 끌려오자 조조는 동승을 노려보며 물었다.
"국구는 이 사람을 알고 계시지요?"
동승이 진경동을 보자 눈에 핏발을 세우며 꾸짖었다.
"저놈은 도망친 종놈이오. 그의 목을 베어야겠으니 넘겨주시오."
동승의 말에 조조가 차갑에 웃으며 말했다.
"그는 나에게 모반을 알려 준 자요. 소중한 증인인 그를 어찌 죽이려 하시오? 당치않은 말이오."
동승은 경동을 보고서야 일의 경위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동승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 보자는 생각이었다.
"승상께서는 어찌 몹쓸 죄를 짓고 도망친 종놈의 말만 믿으려 하시오?"
"왕자복과 그 일당들이 사로잡혔고, 그들이 이미 고백을 하였거늘 국구께서는 어찌 어리석게도 끝까지 거짓말을 하려 드시오?"
조조의 질타는 더욱 세차지기만 했다. 티끌만한 인정이나 한 방울의 눈물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그 얼굴은 그야말로 악귀 바로 그것이었다. 경동과 대면시켜 동승을 심문하는 단계에 이르자, 그의 모습은 불덩이인지 사람인지를 분간 못할 만큼 열화와 같았다. 매서운 다그침과 내장을 후벼내는 듯한 말과 몸짓은 그 부하들도 차마 그를 바로 보지 못할 정도로 혹독했다. 끝까지 조조의 매서운 문초를 피하는 동승을 조조는 더 이상 내버려 두지 않았다. 동승을 결박한 후 그를 난간 기둥에 묶도록 했다. 조조는 이어 옥졸들을 시켜 서원, 거실을 비롯하여 집 안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옥졸들은 서원에서 드디어 천자의 혈조와 옥대를 찾아냈고, 연서한 혈판의장도 찾아냈다.
"흥! 쥐 같은 무리들이 감히 이따위 짓을 하다니. . ."
조조가 혈조와 의장을 본 후 소리내어 웃었다. 조조는 부하들에게 명했다.
"동승의 일가는 물론, 하인까지 한 놈도 남김없이 옥에 가두도록 하라."
조조의 부하들이 동승의 가솔과 하인들을 개 끌듯 끌고 가니 통곡과 울부짖음이 애절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조조는 다음 날 부중으로 모사들을 불러 모은 후 그들에게 이 일의 앞뒤를 얘기하고 그 증거물을 보게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놀라며 조조의 안색을 살폈다. 조조가 모사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천자가 오늘날까지 무사함은 오로지 이 조조의 공로가 아니겠소? 지난날 이각. 곽사의 난을 진압하고 새 도읍을 건설하여 황실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얼마나 분골쇄신하였소? 그런 내게 감히 칼을 대려는 무리가 있으며, 더욱이 천자 또한 나를 제거하려고 혈조를 내렸으니, 이게 될 말이오? 이는 그냥 좌시하고 넘길 수만은 없는 일이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금의 천자를 폐하고 덕망이 높은 새 천자를 옹립할까 하오."
조조가 말을 마치고 모사들을 살펴보았다. 동승의 역모를 꾀함으로써 천자의 폐위를 자신이 공공연히 입에 담을 수 있게 된 점은 조조로서는 어떤 의미로는 전화위복이었다. 조조가 폐위를 말한 후 모사들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펴본 것은 그들의 반응을 엿보기 위함이었다. 정욱이 일어나 조조의 뜻에 반대하고 나섰다.
"허도의 중흥은 명공의 공훈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명공께서 천하에 그 위세를 떨칠 수 있게 되신 것은 한실을 받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명공의 깃발 위에 천자로 상징되는 조위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명공의 오늘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직 천하가 평정되지 않은 이때 명공께서 천자를 폐위하신다면, 그날부터 명공의 부군에는 이미 대의명분이 사라집니다. 그와 함께 천하가 명공을 보는 눈은 돌변하여 버릴 것입니다."
정욱의 말을 들은 조조는 그 말이 옳다고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동승의 일로 분노에 차 앞뒤를 가리지 않았음을 깨닫고 천자를 폐하는 일은 뒤로 미루기로 하였다. 조조는 천자를 폐하는 일을 뒤로 미룬 대신 그날로 동승의 일가일문, 그 밖에 왕자복. 오자란. 충집. 오석 등의 가솔들을 모두 참형에 처하니 이를 지켜본 백성들은 끔찍한 조조의 잔인함에 한결같이 몸을 떨었다. 그날 죽은 사람은 모두 7백여 명이나 되었다. 동승을 비롯한 다섯 사람은 물론 그들과 끈이 닿은 사람 모두를 죽였으나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한 조조는, 동승의 딸인 동귀비를 죽이기 위해 큰 칼을 찬 채 궁중으로 갔다. 동귀비는 황실에 들어오기 전 규수로 있을 때부터 빼어난 미인으로 소문나 있었다. 궁궐의 부름을 받아, 입궁한 이래 천자의 총애를 받으며 이윽고 회임(아기를 가짐)되는 기쁨을 안고 있었다. 자기에게 미구에 닥칠 불행에 대한 육감이었던지 그날 동귀비는 어쩐지 마음이 뒤숭숭하고 안정되지 않았다. 대궐의 후원은 아직 이른 봄이라서 휘장 안 화병의 꽃은 단단한 봉오리를 터뜨리지 않고 있었다.
"귀비, 안색이 좋지 않은데,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시오?"
헌제가 때마침 복 황후와 함께 그녀의 후궁을 방문하였다. 헌제는 복 황후와 함께 동승에게 내린 밀조 이야기를 하다 동귀비를 찾은 것이었다.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한 동귀비의 배와, 얼굴을 번갈아 보며 헌제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묻자 동귀비는 얼굴을 붉혔다.
"말씀해 보시오. 어디 불편한 데는 없소?"
헌제가 다시 한번 묻자 동귀비는 마지못한 듯 작은 입을 열어 나직이 말했다.
"이상하게 이틀 밤이나 연이어 아버님 꿈을 꾸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헌제와 복 황후는 문득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동귀비의 친정 아비인 동승으로부터 소식이 없어 걱정을 하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후궁의 벽문을 박차고 돌연히 모습을 나타낸 조조와 무사들이 옥랑(옥으로 만든 복도)을 지나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헌제는 조조와 무사들을 보자 어쩐지 섬뜩해져 안색이 달라졌다.
"폐하, 동승이 모반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조조가 우뚝 선 채로 물었다. 헌제는 얼른 입을 열지 못했다.
"동탁은 이미 죽지 않았소."
헌제가 기지를 발휘해 죽은 동탁을 끌어대었다. 헌제가 능청스럽게 죽은 동탁을 끌어대며 우물거리자 조조는 더욱 노기가 치솟아 매섭게 천자를 쏘아보며 말했다.
"동탁이 아닙니다. 거기장군 동승의 일입니다."
헌제는 기어이 일이 잘못되고 말았음을 깨달았다. 떨려 오는 다리를 가까스로 지탱하며 시치미를 뗐다.
"동 국구가 어쨌다는 말이오? 짐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소."
"폐하께서는 몸소 손가락을 깨물어 옥대에 혈조를 써서 그에게 내린 일을 벌써 잊으셨단 말입니까?"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였다. 그 일까지 알고 있는 조조에게 다른 말을 할 수도 없는 헌제였다. 헌제는 현기증이 일며 용안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조조가 그런 천자를 노려보다가 무사들에게 명했다.
"모반을 하면 구족을 멸한다 하였다. 그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조정의 법도이다. 여봐라! 동귀비를 끌어내라."
천자와 복 황후는 그저 몸을 떨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도 헌제는 신하인 조조에게 간곡히 애원했다.
"동귀비는 지금 잉태한 지 다섯 달이나 되었소.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그의 무거운 몸을 보아서라도 불쌍히 여겨주시오."
그러나 조조는 천자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하늘의 도움으로 동승의 음모가 사전에 알려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저 여인을 살려 두어 후환을 남기란 말씀입니까?"
복 황후도 천자를 거들며 조조에게 간청했다.
"나는 잉태를 하지 못하는 몸입니다. 천자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디 너그러이 보살피시어 동귀비를 냉궁(가두는 방)에 가두었다가 분만한 후에 죽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조조는 복 황후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아기를 낳게 하여 그 아기로 하여금 에미의 원수라도 갚도록 하자는 말씀입니까?"
이를 지켜 보고 있던 동귀비는 이미 모든 걸 체념한 듯 눈물을 흘리며 조조에게 말했다.
"중한 죄를 지었다면 죽음을 기꺼이 받겠습니다. 다만 죽이더라도 살이 드러나지 않게 시신만은 온전히 보존토록 해 주십시오."
동귀비의 말에 조조는 무사들에게 명해 흰 비단을 가져오게 하여 스스로 목을 매 자결하도록 했다. 헌제가 이를 보고 동귀비에게 말했다.
"그대는 죽어 비록 구천에 가더라도 부디 짐을 원망하지 말아주오."
헌제의 두 눈에서는 참고 참았던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복 황후도 목을 놓아 울었다. 헌제의 그런 모양을 보고 있던 조조가 못마땅한 듯,
"어찌하여 아녀자나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립니까?"
하고 소리치더니 이어 무사들에게 잔뜩 성난 목소리로 명했다.
"동귀비를 궁문 밖으로 끌어내라."
무사들은 조조의 영에 동귀비를 끌어낸 뒤 흰 비단으로 목을 졸라 죽였다. 뒷날 이 슬픈 광경을 한탄한 시가 있다.
봄날의 궁궐에 천자의 사랑도 두텁더니
슬프도다, 태자를 잉태한 채 죽음을 맞는구나.
천하의 황제도 그를 구하지 못하니
용안을 숙여 눈물만 흘리네.
그날 동승과 평소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환관 몇십 명을 가려냈는데, 그들은 붙들리는 대로 칼에 맞았다. 조조는 동귀비를 죽인 후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감궁관을 불러 영을 내렸다.
"지금부터 황실의 외척, 종친을 가리지 말고 내 허락 없이는 궁궐 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 만약 이 말을 어기거나 외척, 종친의 출입을 허락한 자도 똑같이 목을 베리라."
조조는 즉시 그의 수하 군사 3천여 명을 어림군으로 삼아 궁문을 지키게 하고, 조흥을 그 대장으로 임명했다. 조조가 이토록 철저히 궁중을 방비하니 그로부터 천자는 외부와는 차단된 채 철저히 감금당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유비의 참패 다시 서주에서 기주로
피비린내 나는 회오리바람이 허도를 휩쓸고 지나가자 우선 한숨 돌린 것은 조조보다도 문무백관과 궁궐에 기거하는 사람들이었다. 허도에 표면적으로는 한동안 고요가 감돌기 시작하자 조조는 동승의 일로 미루었던 마등과 유비의 일을 거론했다. 두 사람이 다 동승과 함께 모의에 가담한 사실이 조조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조는 정욱을 불러 그 일에 대해 의논했다.
"아직 동승과 함께 모의했던 유비와 마등이 살아 있으니 그들을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현책이 없겠는가?"
정욱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마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량에 주둔하고 있는데 군사들은 용맹스럽기로 이름나 있습니다. 현덕 또한 서주의 요지를 차지하여 하비, 소패의 성에 군사를 나누어 협공을 취할 수 있도록 의각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력이 크지는 않으나 가벼이 볼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오."
"하북의 원소가 문제입니다. 원소는 얼마 전부터 관도에 군사를 더욱 증강시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지금 승상의 가장 큰 적은 누가 뭐라 해도 원소입니다."
"그 수족인 현덕을 먼저 치는 것은 그 한 팔을 꺾는 것과 다름없소."
"아닙니다. 결코 허도를 비워서는 아니 됩니다. 그보다는 좋은 말로 글을 써서 서량의 마등을 안심시킨 후 그를 허도로 불러들여 죽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 현덕에게도 계책을 써서 그의 예기를 꺾은 다음 유언비어를 퍼뜨려 현덕과 원소 사이를 이간시켜야 합니다."
정욱의 말에 조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오. 유비는 마등과 달리 인걸이오. 그를 치지 않고 두면 인재들이 모여들어 날개를 달게 될 거요. 그렇게 되면 때는 이미 늦소. 지금이 그를 쳐야 할 때요. 원소의 세력이 강대하다 하나 그는 마음이 우유부단하여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할 거요. 나는 그를 걱정하고 싶지는 않소."
조조는 유비를 먼저 치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정욱과 그 일에 대한 의논을 주고받고 있는데 마침 곽가가 들어왔다. 조조는 곽가를 보자 그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마침 잘 와 주었소. 나는 유비가 있는 동쪽으로 군사를 내어 치고 싶은데 원소가 있으니 걱정이오. 그대 생각을 듣고 싶소."
"우선 현덕을 정벌해야 합니다. 현덕은 서주를 다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군사들의 마음을 잡지 못한 상태입니다. 한편 원소는 기세를 올리고는 있으나 휘하 장수들이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자중지란이 일고 있습니다. 또한 원소 자신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신속히 군사를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승상께서 군사를 일으키신다면 유비의 서주를 일격에 평정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의 말이 바로 나의 뜻이오.
곽가의 말에 조조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조조는 즉각 뜻을 정하고 모든 장수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군령을 내렸다.
"20만 군사를 일으켜 다섯 길로 나누어 서주를 공격하라!"
조조군의 진병은 바람처럼 전차되어 서주에도 전해졌다.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것은 손건이었다. 그는 수하로 하여금 하비성에 있는 관우에게 이 사실을 먼저 알리게 하고 자신은 소패성의 유비에게 달려갔다.
"혈조의 비밀이 탄로나 국구 동승 이하 일족들이 무참하게 최후를 마쳤다는 소식을 들었소. 따라서 언젠가는 조조가 군사를 일으킬 줄 짐작하고 있었소. 그러나 이렇게 빨리 닥칠 줄은 몰랐소. 어찌했으면 좋겠소?"
유비가 근심하며 말하자 손건은 유비를 재촉했다.
"원소에게 보낼 글을 급히 써 주십시오. 그에게 구원을 청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책이 없습니다."
유비가 생각해 봐도 지금으로선 그 방책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손건은 유비의 서찰을 받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북을 향해 달렸다. 손건은 하북에 이르러 먼저 원소의 중신인 전풍을 만나 함께 원소에게 가서 유비의 서찰을 전했다. 원소는 어찌된 셈인지 몹시 초췌한 얼굴로 의관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 전풍이 원소의 이런 몰골에 걱정스런 기색으로 물었다.
"주공께서는 어디가 편치 않으십니까?"
원소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오래 살 것 같지가 않구려."
"주공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전풍이 놀라 다시 물었다.
"그럴 이유가 있소. 내게는 다섯 아들이 있는데 그중 막내가 가장 나를 기쁘게 해 주는 아들이었소. 그런데 지금 그 막내놈이 창병을 앓아 다 죽게 되었으니. . . , 다른 일이 감히 손에 잡히지가 않는구려."
타국의 사자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원소는 자식놈의 병 한탄만 하고 있었다. 전풍이 그에게 유비의 서찰을 전했으나 그는 읽어 볼 생각도 않고 있었다. 전풍이 기다리다 못해 다시 간했다.
"지금 유현덕의 사신이 전해 온 사실입니다만 조조가 지금 대군을 이끌고 서주로 진군하고 있다 합니다. 조조가 군사를 이끌었으니 지금 허도는 빈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주공께서 이때를 틈타 허도를 공격하시면 위로는 천자를 모실 수 있으며 아래로는 만민을 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기회입니다. 주공께서는 밝은 헤아리심으로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전풍이 간곡히 원소에게 간했으나 원소의 반응은 어정쩡하기만 했다.
"그렇긴 하오. 그러나 내가 말 한 바와 같이 지금 내 아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오. 그 아들은 내 생명과도 같소. 어찌 다른 곳에 마음을 쓸 수 있겠소?"
전풍이 다시 원소에게 다그쳤다.
"속담에도 하늘이 내리는 것을 취하지 않으면 오히려 하늘의 벌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천하는 지금 제 발로 주공의 수중으로 굴러들어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원소는 고개를 저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구슬을 잃은 뒤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겠소? 내 아들 중 막내가 가장 영특한데, 그 애한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쩌겠소? 내 마음이 편치 않으면 싸운다 해도 별로 이로운 일이 없을게요."
전풍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손건은 서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원소에게 애타게 호소하던 전풍의 호의에 고마움을 느꼈을 뿐이었다. 손건은 원소라는 인물의 됨됨이를 보고 나자 더 이상 구원을 청해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손건이 전풍에게 눈짓을 하고 물러나자 원소도 미안하였는지 손건에게 당부했다.
"돌아가거든 유 공에게 내가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는 연유를 잘 말씀드려 주시오. 만약 서주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경우라면 언제라도 이곳으로 오라고 하시오. 그때는 이곳에서 힘을 합칠 수 있도록 조처하겠소."
전풍과 손건은 별수없이 원소의 방을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전풍이 발걸음을 옮기다 손에 든 지팡이로 땅을 치며 한탄했다.
"분하도다! 분해. 어린아이의 병 따위로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다니. . . 이러다가 언제 큰 일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애석하구나."
잠시도 머무를 여유가 없는 손건은 그길로 다시 말을 몰아 서주로 돌아갔다. 서주에 돌아온 손건은 그가 보고 들은 대로 유비에게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비는 원소마저 구원병을 보낼 수 없음을 알자 침통한 마음으로 대책을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걱정이구려. 어찌했으면 좋겠소?"
장비가 그런 유비를 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그렇게 침울하게 계실 것이 아닙니다. 기왕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오로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뿐입니다."
"자네 말도 맞네만, 이 작은 성을 향해 20만의 대군이 몰려온다지 않는가?"
"20만이거나 1백만이거나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병마는 모두 허도에서 먼길을 쉬지 않고 달여왔을 것입니다. 이곳에 와 진을 펼치더라도 한 며칠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가. 그들은 이 성을 몇 겹으로 에워싸고 장기전을 펼 것이다."
"그러니까 그 준비를 하기 전에 기습을 하여야 합니다. 먼길을 달려온 여독이 풀리기 전에 제가 정병을 이끌고 가 기습을 감행하겠습니다."
유비는 장비의 말을 듣자 귀가 솔깃했다. 지금으로선 조조의 군사를 앉아서 맞는 것보다 장비의 말대로 피로한 조조군에게 기습을 가함으로써 군세에 크게 손상을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유비는 장비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우선 그의 의기부터 북돋웠다.
"정말 탄복했네. 자네는 용맹 하나만 뛰어나지 다른 재주는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 않네그려. 요전에는 계책을 써 유대를 생포하더니, 이제 또 말을 들이니 병법에도 맞는 말을 하네그려. 자, 그럼 익덕의 말을 따르기로 하세."
유비는 조조군에게 기습을 가하기로 하고 성을 나섰다. 이때 조조의 군사는 소패에 당도하기 직전이었다. 행군을 서둘러 소패에 다다를 즈음 불현듯 광풍이 일며 아기 두 개가 부러져 나갔다. 적군을 눈앞에 두고 결전을 벌이려는 때에 아기가 둘씩이나 부러지자 조조는 행군을 멈추었다.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들어 순욱을 불러 논했다.
"이것은 길조인가, 흉조인가?"
"바람은 어느 쪽에서 불어 왔으며 부러진 아기의 색깔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람은 동남쪽에서 불어 왔으며 진홍빛 깃발이었네."
"동남풍에 진홍빛, 그렇다면 염려하실 일이 못 됩니다. 이것은 병법의 한 대목에 있듯이 적으로부터 야습이 있을 징조입니다."
그때 선봉장인 모개가 말을 달려와 조조에게 고했다.
"조금 전 동남풍이 강하게 불어와 진홍빛 깃발을 부러뜨렸습니다. 주공께서는 무슨 징조라 생각하십니까?"
"공은 무슨 징조라 여기오?"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분홍 깃발이 동남풍에 부러짐은 적군이 밤을 기다려 기습을 가할 징조로 여겨집니다. 여기에 대비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늘이 나를 돕는 것이오. 진을 펴 기습에 대비하도록 해야겠소."
순욱과 모개가 한결같이 그 같은 말을 하자 조조는 기습에 대비한 포진을 펴게 했다. 군사의 수가 적은 유비군이라 앉아서만 기다리지 않고 능히 기습을 감행할 수도 있다고 여긴 조조였다. 조조는 군사를 아홉 부대로 나누고 한 대를 진영에 두고 나머지 여덟 부대는 8편으로 그 진을 둘러싸게 하여 매복시켰다. 한편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유비는 장비를 내보낼까 하다 조조군이 워낙 대군이라 군사를 2대로 나누기로 했다. 유비 자신은 왼쪽을, 장비는 오른쪽을 맡게 하여 행군했다. 손건은 그들이 떠난 소패성을 지키기로 했다. 유비군은 교교한 달빛 아래 하무를 입에 문 채 발소리를 죽이며 적진에 접근했다.
"적군의 동태는 어떻더냐?"
척후병을 풀어 정찰하게 했던 군사가 돌아오자 장비가 물었다.
"보초병까지 곯아떨어졌습니다."
"음, 그렇던가? 그러면 공격을 서둘러야겠다."
자기의 계책이 맞아떨어진 줄 알고 장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장비는 먼저 기병으로 하여금 조조군의 진을 덮치게 했다. 생각대로 진은 방비도 허술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적의 진지에는 중군도 보이지 않았으며 조조의 진영도 보이지 않았다. 군막과 기치와 화톳불만 보일 뿐 군사가 보이지 않자 장비도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급히 군사를 물리려 했다. 그러나 그때 홀연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는가 했더니 함성이 여기저기에서 일었다. 사방팔방에서 조조의 군사들이 밀려 나왔다. 장비가 시도한 기습작전은 반대로 기습을 당하는 꼴이 되었다. 장비군의 대오는 분열되고 군사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장비는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적을 거꾸러뜨렸다. 그러나 한두 곳에서 쏟아지는 적군이 아니었다. 동쪽에서는 장료, 서쪽에서는 허저, 남쪽에서는 우금이, 북쪽에서는 이전이 달려나왔다. 또 동남쪽에선 서황의 기마대가, 서남쪽에서는 악진의 노궁대, 동북쪽에서는 하후돈의 무도대, 서북쪽에서는 하후연의 비창대가 달려나왔다. 이렇게 8면에서 유비. 장비군을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 왔다.
'이제는 이 한목숨 바쳐 이들과 부딪칠 뿐이다.'
장비는 이렇게 결심하고 좌충우돌, 이리 부딪고 저리 부딪쳤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적에 비해 워낙 군사가 적었다. 거기다가 유비군은 원래가 조조의 군사가 아닌가. 부하들 가운데 목숨을 잃지 않은 자는 도망을 가거나 무기를 버리고 적에게 투항했다. 장비도 여러 곳에 부상을 입어 피투성이가 되었다. 장비는 닥치는 대로 적을 베던 중 서황이 앞을 가로막자 그와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그러자 뒤쪽에서 악진이 다가왔다. 장비는 불 같은 숨을 거칠게 내쉬며 간신히 한 가닥 혈로를 뚫었다. 그런 중에서도 장비는 말을 달리며 부하들을 둘러보고 통탄을 금치 못했다. 그를 뒤따르는 부하들은 겨우 20기도 못 되었다. 장비는 소패로 돌아가려 했으나 조조군이 그 길을 끊었다. 서주나 하비로 돌아가려 하나 이미 조조군이 그 길도 가로막고 있을 것이 뻔했다. 장비는 하는 수 없이 망탕산 방면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유비 또한 장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장비보다 늦게 조조의 진에 이르자 홀연히 등 뒤쪽에서 함성이 일며 한 떼의 군마가 달려나왔다. 기습을 당한 유비군은 크게 흔들렸다. 앞쪽에서는 하후돈이 공격해 왔다. 유비는 닥치는 대로 그들과 싸웠으나 싸울수록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인지라 혈로를 뚫기에 바빴다. 그러는 동안 이끌었던 군사의 태반을 잃었다. 유비가 간신히 한 고비를 넘기며 말을 달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하후연이 공격해왔다. 유비는 말을 달려 소패성으로 향했다. 그때쯤 그를 뒤따르는 군사는 불과 30여 기밖에 되지 않았다. 유비는 강 건너에 있는 소패성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말을 세우고 말았다. 소패성 쪽에서 새빨간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패성도 이미 조조에게 떨어졌음을 알고 유비는 말머리를 돌렸다. 관우가 있는 하비로 향했으나 그곳 또한 조조군이 길을 막고 있었고, 서주 역시 그와 다름없었다. 유비는 갈 길을 잃고 망연자실했다. 어느새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산과 들에는 이곳저곳 할 것 없이 뭉게뭉게 연기가 자욱했다. 그리고 그곳은 조조의 군사로 메워져 있었으며, 그들은 아침밥을 짓고 있었다. 유비는 당장 몸을 의탁할 곳을 찾아야 했다.
'그렇군. 우선 기주로 가 원소와 앞일을 도모하자.'
지난번 원소에게 보냈던 손건이 찾아오면 언제든지 받아주겠다고 했다던 원소의 말을 문득 생각해 냈다. 그로부터 들에도 눕고, 산에서 눈을 붙이면서 들쥐 고기를 먹고 풀뿌리를 씹으션서 간신히 청주부에 당도했다. 성 아래에 이르자 유비는 성 위를 보고 소리쳤다. 수문장이 그가 유비임을 청주자사 원담에게 알렸다. 청주자사 원담은 원소의 장남으로 평소부터 유비를 공경해 오고 있던 터라 유비가 왔다는 말에 성문을 열어 몸소 나아가 맞았다.
"이미 부친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제 마음을 푹 놓으십시오."
유비는 지금까지의 경위를 얘기하고 원소에게 의지하러 왔다는 뜻을 밝혔다. 원담은 유비에게 숙소를 마련해 준 뒤 곧 부친 원소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미 약속한 바이니 주저하지 말고 유현덕을 이리로 모시도록 하라."
원소에게서 바로 회신이 오자 원담은 군사를 내어 유비를 호위토록 하였다. 원소는 즉시 유비를 마중할 군사를 보내어 그를 맞아들였다. 원소도 몸소 기주성 밖 30여 리 지점인 평원까지 나와 유비를 맞았다. 원소가 몸소 마중까지 나오자 유비는 황황히 말에서 내려 절을 하며 예를 올렸다.
"유랑하는 패장이 무슨 공이 있다고 예까지 친히 나오셨습니까? 너무나 과분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유비는 말에 오르지도 않고 그대로 걸어서 성안으로 들었다. 성안에 들자 원소는 다시 자리를 마련하여 유비에게 지난날의 일을 사과하며 변명했다.
"자식 사랑에 너무 빠져 있다고 웃으시겠지만 그 무렵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그 뒤로 그 일이 마음에 걸리더니 오늘 이렇게 뵙게 되어 실로 마음이 가벼워짐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곳은 하북 여러 주의 부중입니다. 마음을 놓으시고 편안히 지내시기 바랍니다."
유비가 예를 올리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전부터 찾아뵙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제 외롭고 궁한 몸이 되어 문하에 투항하고자 합니다. 조조의 공격으로 처자까지 버리게 되었으나 원공께서는 항상 선비를 물리치지 않으신다 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왔습니다. 바라건대 이 몸을 물리치지 않으신다면 은혜는 언제까지나 잊지 않겠습니다."
원소는 유비에게 깍듯이 대하며 후한 대접을 해 주었다. 원소가 유비를 두텁게 대한 것은 자신이 적으로 여기고 있는 조조에게 서슴없이 반기를 든 유비가 그만큼 반가웠고, 조조가 끝내 거느리지 못한 유비를 자신의 휘하에 거느리고 수족처럼 부리고 있음을 천하에 보여주려 함이었다. 소패. 서주 두 성을 단판 싸움으로 점령한 조조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듯했다. 서주제는 유비 휘하의 간옹. 미축 두 사람이 지키고 있었으나 조조의 대군 앞에 성을 지켜내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끝내 성을 버리고 달아나니 진대부. 진등 부자가 남아 성문을 열어 조조를 맞았다.
'이전에는 나에게 은작을 받더니 다시 현덕을 섬기지 않았는가. 이제 다시 성문을 열어 나를 맞다니. . .'
조조가 이런 생각으로 진대부. 진등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곳 서주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면 백성들을 안정시켜야 했다. 진대부. 진등을 문책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판단 아래 조조는 그 일을 뒤로 미루었다. 조조는 힘들이지 않고 서주를 손에 넣게 된 것이 그들에게도 공이 있음을 상기하고 진대부. 진등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힘을 다해 영내의 백성들을 선무(점령지의 주민에게 정부의 뜻을 이해시켜 안심시킴)하도록 하시오."
진대부. 진등은 조조의 명에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분부, 어김없이 받들겠습니다."
그날로부터 두 사람은 성안의 백성들을 달래고 안심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유비를 깊이 따르던 백성들은 갑작스런 변고로 불안에 떨었으나 조조의 정령과 진대부. 진등의 선무로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 갔다. 서주가 안정을 되찾자 조조는 하비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모사들을 불러모아 의논했다. 조조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일단 이 지방의 정세에 밝은 진등에게 하비성의 사정을 물어보았다.
"하비성은 승상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관운장이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이미 현덕은 이러한 경우를 예상했음인지 두 부인과 노소 일족을 관운장에게 맡겼습니다. 하비성이 원래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것은 승상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관운장이 그 성에서 유현덕의 가족을 돌보고 죽기로 싸울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조조가 진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비성은 나에게는 인연이 많은 성이오. 그러나 지난날 여포와 싸웠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장기전을 치를 수가 없을 것이오. 원소가 이미 북쪽에서 대군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오. 이번 싸움은 속전속결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조조는 순욱을 돌아보며 물었다.
"하비성을 하루빨리 떨어뜨릴 방책이 없겠소?"
순욱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관우를 성안에 두고는 백 번을 공격해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관우를 어떻게 하여 성 밖으로 유인해 내느냐가 문제입니다."
"관우를 성 밖으로 끌어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공격을 가해 포위망을 좁혔다가 후퇴하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관우가 지금까지 많이 보아 온 이 계략에 넘어가지 않을 우려가 있으나 싸움을 되풀이하다 보면 걸려들지도 모릅니다."
조조는 순욱의 의견에 좇아 군사 배치를 정한 다음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오래 전부터 관운장의 무예와 의리를 높이 보아 왔소. 도량이 넓은 군자의 풍모를 지녔으되 무예는 그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오. 그를 어떻게 해서든지 내 수하로 만들고 싶소. 이번 싸움이야말로 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호기가 될 것이오. 싸워서 성을 무너뜨리기보다는 그에게 항복을 권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조조의 말에 모사들은 서로 얼굴만 마주 바라보았다. 관우를 죽이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를 사로잡으라니 어려운 명이 아닐 수 없었다. 곽가가 조조에게 불가함을 아뢰었다.
"관운장은 충절과 신의가 두터운 사람입니다. 그가 성을 버리고 항복한다는 것은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섣불리 설득하려 들었다가는 도리어 그에게 죽임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이때 장료가 앞으로 나섰다.
"그 일은 제가 한번 나서 보겠습니다. 저는 일찍이 관 공과 사귄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정욱이 그런 장료을 지켜 보더니 입을 열었다.
"문원이 비록 운장과 사귄 적이 있다고는 하나, 그는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는 투항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그보다는 계책을 써 그를 궁지에 빠뜨린 뒤 문원이 가서 달래도록 하면 그때는 그도 하는 수 없이 승상께 투항하게 될 것입니다."
"음-. 범을 함정에 빠뜨린 뒤 달래자는 말이구려. 그래, 그 계책이란 무엇이오?"
조조가 반색을 하며 정욱에게 물었다.
"관운장을 사로잡으려면 1만 병의 군사를 풀어도 어려운 일입니다. 지혜와 모략을 쓰지 않고는 그를 당해 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유비의 군사 중에서 항복한 군사들을 하비성으로 보내십시오. 그들을 보내되 여기서 도망쳐간 것처럼 꾸미는 것입니다. 그들을 우리의 첩자로 이용하여 내응토록 하고, 이번에는 군사를 보내 하비성을 공격했다가 패하는 척하며 도망가도록 합니다. 운장이 뒤쫓아오면 성에서 될수록 멀리 떨어지도록 유인하되 날랜 기병을 보내 돌아갈 길을 완전히 끊도록 합니다.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관운장에게 그때 사람을 보내 달랜다면 그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들고 말 것입니다."
조조는 정욱의 말에 무릎을 치며 말했다.
"그야말로 적을 함정에 가둘 수 있는 계략이오.
조조는 곧 항복한 군사들 중 이미 충성스런 아군이 된 군사 수십 명을 가려 뽑아 그들을 하비성으로 들여보냈다. 그들이 관우에게 조조군으로부터 도망쳐온 자초지종을 그럴듯하게 부풀려 말하니 관우는 지난날 서주에 있던 군사들이 돌아왔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성안에 그대로 머물게 했다.
충의를 내세운 관우의 3조약
조조의 계략으로 함정에 빠진 관우는 세 가지 조건을 내세우고 항복한다. 조조는 관우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자 온갖 호의를 베풀지만 관우는 두 형수님 모시기에 정성을 쏟는다. 이에 조조는 관우에 대한 공경과 숭배의 정을 더욱 깊게 한다. 한편, 관우는 성안에서 심란히 있는 가운데 흩어졌던 수하 군사 10여 명이 돌아오자,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가 그들 중의 하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여 달아났는가?"
"서주성에 들어온 조조군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크게 잔치를 벌였습니다. 술에 취한 군사들은 그 동안의 강행군에 지쳤는지 모두 인사불성이 되어 쓰려졌습니다. 그 틈을 타 몸을 빼낼 수 있었습니다."
"너희들을 추격한 군대는 없었느냐?"
"하후돈이 이끄는 군사 중 일부가 뒤쫓았으나 그들도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관우는 그의 말을 듣고는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이었다. 하후돈이 군사 5천여를 거느리고 하비성 아래에 나타났다. 하후돈은 성 가까이까지 다가와 싸움을 걸었으나 관우는 좀처럼 싸움에 응하려 들지 않았다. 성안에 있는 유비의 가족들을 보호하고 있는 관우인지라 함부로 성문을 열고 나가 응전할 리 없었다. 하후돈은 군사들을 시켜 관우의 화를 돋우기 위해 욕설을 퍼부으라고 명했다. 이에 군사들이 성 아래에서 욕설을 퍼부어댔다.
"야, 이 수염이 긴 시골뜨기야, 너는 어찌 그리도 겁이 많으냐? 장수가 싸움을 겁내다니 고향에나 돌아가 시골 아이들 콧물이나 닦아 줘라!"
"너의 주인 현덕도, 장비도 우리 승상의 위풍에 넋이 빠져 도망쳤는데 너는 빈둥빈둥 성안에 죽치고 앉아 무얼 어쩌겠다는 거냐? 어서 나와 항복하는 게 어떠냐?"
하후돈의 군사들이 별별 욕설로 관우의 화를 돋우자 굳게 입을 다물고 형형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관우도 그만 노기가 뻗쳤다.
"내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을 그냥 둘 수가 없구나.
관우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말 위에 올라 3천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달려나왔다.
"조무래기는 필요없다. 대장은 나와 내 칼을 받아라."
관우가 청룡언월도를 햇빛에 번쩍이며 말을 달려 나오자 하후돈이 마주 나왔다. 10여 합을 겨루고 하후돈이 슬그머니 말을 물리자 관우가 하후돈을 뒤쫓았다. 원래부터 관우를 꾀어 낼 셈이었던 하후돈은 그를 맞아 싸우는 척하다 다시 도망치기를 되풀이했다. 관우가 부하 3천을 질타하며 하후돈 군사를 뒤쫓다 보니 어느새 성 밖 20여 리나 달려 나왔다. 정신없이 하후돈을 쫓던 관우도 그제야 문득 정신을 차리고 말을 세웠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포향이 들렸다. 그와 함께 좌우에서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왔다. 서황과 허저가 이끄는 조조의 복병들이었다. 관우가 가운데 길로 말머리를 돌리자 이번에는 복병들이 화살을 쏘아댔다. 메뚜기 떼가 날아드는 것처럼 화살이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무예로 천하를 누른다는 관우였지만 화살이 그같이 어지럽게 날아드는 길을 뚫을 수는 없었다. 관우가 길을 다른 쪽으로 잡자 서황과 허저가 이를 보고 달려왔다. 관우는 그들을 맞아 싸웠다. 관우가 사력을 다해 그들을 공격하여 길을 뚫었으나 다시 하후돈이 기다리고 있었다. 관우가 싸우고 있는 동안, 조조의 대군이 그를 겹겹이 에워싸니 어느새 관우는 우리 안에 갇힌 격이 되고 말았다. 날도 이미 저물어 들판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관우가 문득 주위를 살펴보니 맞은편에 토산이 보였다. 관우는 군사를 이끌어 산 위에 군사를 머물게 했다. 관우가 산 위에 오르자 조조군은 그 산을 에워쌌다. 잠시 군사를 정돈하고 하비성을 바라보니 성에서는 거센 불길이 솟으며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앞서 성안에 들어갔던 조조군의 포로들이 성안에 불을 놓아 하후돈의 군사를 끌어들였던 것이었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하비성도 이렇게 하여 조조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계략에 빠졌구나. 이제 무슨 낯으로 주군을 뵐 수 있다는 말인가.'
관우는 이렇게 생각하고 날이 새면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 죽기로 작정했다. 말과 군사들에게는 최후의 일전을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날이 희뿌연히 밝아오자 관우는 산 아래를 살펴보았다. 긴 뱀이 산허리를 감듯 조조의 군사들이 산을 감고 있었다. 관우가 갑옷을 조여 맨 후 군사와 무기를 정돈하여 산 아래로 군사를 이끌려 할 때였다. 문득 말을 달려 산 위를 오르는 사람이 보였다. 관우가 눈을 부릅떠그를 살펴보니 바로 장료가 아닌가. 관우는 그를 보고 소리쳤다.
"문원이 나와 맞서겠다는 것인가?"
관우와 장료는 싸움터에서 만나 적이면서도 서로 경모의 마음을 갖고 있는 사이였다. 조조에게 사로잡혀 죽게 되었을 때도 관우가 조조에게 청해 그를 살려주었던 터였다. 그러나 관우는 그가 이미 조조 수하의 장수이므로 경계의 마음을 늦추지 않은 채 그를 노려보았고, 장료는 칼을 말 아래로 던지며 말했다.
"아닙니다. 지난날의 정을 생각하여 특별히 형을 뵈러 온 것입니다."
관우는 그가 칼을 던지며 조용히 말하자 굳었던 얼굴을 누그러뜨리며 그를 맞았다. 서로 예를 나누자 관우는 자리를 마련해 함께 앉았다.
"나에게 항복을 권하러 온 것이오?"
"아니오. 지난날 형께서 나를 구해 주셨는데 어찌 내가 형이 곤경에 처한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어찌하여 이곳으로 왔다는 말이오?"
관우가 언성을 높이며 그를 노려보자 장료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께서도 이미 아시겠지만 현덕 공도 익덕도 행방이 묘연한 채 생사를 알 길이 없습니다. 지난밤에 조 공께서 이미 하비성을 손에 넣으셨으나 군사나 백성들은 하나도 해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현덕 공의 가솔들에게는 호위병까지 붙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형께 이 일을 알려드려 형의 근심을 덜어 드리고자 이렇게 온 것입니다."
듣고 있던 관우가 문득 눈을 부릅뜨더니 언성을 높였다.
"그렇다면 역시 항복을 권유하려 온 셈이구나. 비록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다 하나 목숨을 아까워할 내가 아니다. 그대는 급히 이곳을 떠나라. 나는 내려가 죽기를 작정하고 조조와 싸우겠다."
그러자 관우의 부릅뜬 눈을 보고 장료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 형의 말대로 한다면 형은 세상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거요."
"충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찌하여 웃음거리가 된다는 말인가?"
"만일 여기서 싸우다 죽으면 형은 세 가지의 죄를 짓는 것이오."
"죄가 셋이나 된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관우는 노한 가운데에도 장료의 말을 되물었다. 장료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조용히 말을 이었다.
"형께서 싸우다 죽은 뒤 현덕 공이 아직 살아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그렇게 되면 형께서 도원의 결의를 어기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오. 형께서는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그 맹세를 어기는 죄가 첫번째 죄요, 둘째로 는 현덕 공의 가솔은 형께서 돌보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죽음을 맞는다면 현덕 공의 두 부인은 어찌 될 것입니까? 이는 현덕 공의 믿음을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두 번째가 될 것입니다. 또 하나는 형께서는 무예가 출중하고 경전과 사서에도 밝으십니다. 그런 무예와 학문을 지녔으면서도 현덕공을 도와 한실을 받들어 쓰러져 가는 사직을 바로잡고 조정의 위급함을 도우려 하지 않음입니다. 헛되이 필부처럼 자기 한 몸만을 생각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시려 하니 이를 어찌 충절이라 할 수 있으리오. 이 또한 죄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형께서 이와 같이 죄를 범하려 하시니 이 아우가 답답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관우는 머리를 숙인 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뜻밖에 그가 나타나 한 말을 되씹어 보니 모두 옳은 말이었다. 또한 그의 말 속에는 우정어린 진정이 차 있었다. 관우가 이윽고 장료를 보며 물었다.
"그대는 내게 세 가지의 죄를 말했소.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가 그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있겠소?"
"형께서 보시다시피 사방이 조 공의 군사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들과 싸운다면 죽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결코 의로운 죽음이 되지 못하니 차라리 항복하여 뒷날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면 세 가지 이로운 점이 있습니다. 일단 조 공에게 항복했다가 유현덕공의 소식을 알게 되거든 그리로 가십시오. 그것이 한 가지 이로움이요, 또한 두 부인도 무사히 보호할 수 있으며 삼형제의 맹세도 지킬 수 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이로움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 번째는 큰 일을 위해 몸을 바칠 수가 있으니 세 가지 이로운 점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장료의 말에 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관우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내게 세 가지 이로운 점을 말하니 그렇다면 나도 세 가지 조건을 내놓겠소. 승상이 이 세 가지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면 나는 갑옷을 벗고 항복하겠소. 그러나 이를 지키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세 가지 죄를 짓더라도 싸우다 죽겠소."
"승상께서는 도량이 넓으시니 기꺼이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 세 가지 조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장료는 관우가 세 가지 조건을 내걸자 밝은 얼굴로 물었다. 일단 관우의 입에서 그 정도의 말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된 것이 반가웠다.
"첫째, 나와 유황숙은 쓰러져 가는 한실을 바로잡기로 했으니, 나는 한나라의 황제에 항복하는 것이지 조조에게 하는 것이 아니오. 둘째는 두 부인에게 유황숙의 봉록을 그대로 내려야 하고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외부인의 출입을 삼가야 하오. 세 번째는 유황숙이 계시는 곳을 알게 되면 천리만리를 가리지 않고 즉시 그곳으로 달려갈 것이오. 이상 세 가지 중에서 단 한 가지라도 지킬 수가 없다면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오. 그대는 승상께 이 말을 전하고 그 회답을 내게 알려 주시오."
장료는 관우의 말을 듣자'그렇게 하겠노라'며 곧장 산 아래로 말을 달려 조조에게 관우의 말을 전했다.
"황제께 항복하는 것이지 승상께 항복하지 않는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었습니다."
조조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한의 승상이니, 내가 바로 한나라이다. 그 일은 어려울 것이 없다."
"두 부인에게 유황숙의 봉록을 내리고, 아무도 그 문앞을 출입하지 말라는 것이 두 번째 조건입니다."
"봉록은 내가 배를 더해 주겠다. 또 외부인의 출입은 지금도 엄히 막고 있으며 가법을 지키게 하고 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다음 세 번째 조건이 뭔지 말하라."
조조는 장료에게 세 번째 조건을 재촉했다.
"유현덕이 어디 있는지 알기만 하면 아무리 멀어도 반드시 그를 쫓아 가리라고 했습니다."
장료가 세 번째 조건을 말하자 조조는 금세 얼굴이 굳어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관운장을 내 곁에 두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조조가 이렇게 말하자 장료는 생각해 둔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
"승상께서는 옛날 진나라의 예양이 한 말을 잊으셨습니까? 그는 '주군이 나를 평범한 사람으로 대하면 나 또한 평소의 예로 대할 것이며 그렇지 않고 국사(나라에서 쓰는 선비)로 대하면 나 또한 국사가 되어 갚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유현덕이 관운장에게 대하는 것보다 승상께서 더 두터운 은의를 베푸시면 관운장이 어찌 승상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장료가 그렇게 조조를 설득하자 조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그대의 말이 옳소. 내 세 가지 조건을 다 들어 주겠다고 하시오."
장료는 조조의 승낙을 받자 곧 산으로 말을 달렸다. 장료는 관우에게 조조가 세 가지 약조를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관우는 그가 내세운 조건을 받아들인 조조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는커녕 다시 입을 열어 청했다.
"그러면 승상은 군사를 거느려 잠시 물러나라 하시오. 내가 가서 두 형수를 뵈옵고, 이 일을 고한 연후에 항복하겠소."
장료가 조조에게 돌아가 이 말을 전했다. 항복하는 자가 군사를 물리라고 하니 그건 마치 명령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무리한 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조조는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10리 밖으로 물러나도록 했다. 순욱이 이를 보자 조조에게 만류했다.
"아니 됩니다. 관운장이 우리에게 속임수라도 쓰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조조는 태연히 말했다.
"관운장은 의가 깊은 사람이니 결코 속임수를 써서 달아나지는 않을 것이오. 또 그럴 위인이라면 도망가도 아까울 게 없지 않소?"
조조는 군사를 10리 밖으로 퇴각시켰다. 조조가 군사를 물리자 관운장은 군사를 이끌고 하비성으로 들어갔다. 관우는 백성들이 동요 없이 안온한 것을 보자 곧장 부중으로 들어갔다. 감. 미 두 부인은 관운장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그를 맞이했다. 관우는 계단 아래에 엎드려 절했다.
"두 분 형수님을 놀라게 한 죄가 큽니다."
두 부인은 한동안 눈물을 짓더니 관우에게 물었다.
"황숙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송구스럽게도 아직 어디 계신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 큰아주버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관우는 두 형수에게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저는 성 밖으로 나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나 그들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작은 토산으로 몰려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던 중 적장 장료가 와서 항복을 권했습니다. 저는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조조는 그 조건을 전부 들어 주었고, 두 형수님을 만나겠다 하니 군사까지 물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두 형수님의 뜻을 듣지 않은 터라 조조에게 가기 전에 먼저 이렇게 뵈러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세 가지 조건은 무엇이었습니까?"
감. 미 부인이 관우에게 물었다. 관우가 조조에게 내걸었던 세 가지 조건과 나머지 일들을 자세히 전하자 감. 미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젯밤 조조의 군사들이 성안으로 들어왔을 때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 안으로 군사 하나 들지 않았으며 조금도 해하려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큰 아주버님이 앞뒤를 살피시어 하신 일을 저희에게 물을 것까진 없습니다. 다만 조조에게 몸을 맡기면 설령 황숙의 거처를 알게 된다 하더라도 따라갈 수 없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두 부인은 그것이 끝내 염려가 되는 듯 정색을 하며 걱정스런 얼굴로 관우를 바라보았다.
"그 일은 결코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때는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제가 두 분 형수님을 모시고 가서 황숙을 뵙게 해 드리겠으니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관우는 단호하게 말하며 두 부인을 안심시켰다. 그러자 두 부인은 관우의 지극한 정성에 감복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염려 마시고 알아서 처결하십시오. 우리 같은 아녀자에게 물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감 부인과 미 부인의 그 같은 말을 듣자 관우는 이윽고 잔병 10여 기를 거느리고 조조의 진문을 찾아갔다. 관우가 항복하기 위해 진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자 조조는 몸소 원문 밖으로 나와 그를 마중했다. 조조의 파격적인 후대에 관우가 당황할 정도였다. 관우는 말에서 내려 절하며 말했다.
"패군지장을 죽이지 않고 맞아 주시니 그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조조가 황망히 답례를 했다.
"평소부터 관 공의 충의를 흠모해 왔던 바요. 오늘 다행히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평생의 바람이 헛되지 않았소이다."
"문원이 대신하여 세 가지 약조를 당부하였고, 또한 승상이 쾌히 허락하셨다 하오니 승상께서는 약조를 지켜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관우는 조조에게 다시 세 가지 약조에 대해 언급했다. 직접 다짐을 받아 두기 위해서였다.
"내가 이미 승낙을 하였소. 어찌 신의를 저버릴 수 있겠소."
조조가 잘라 말했다.
"머지않아 황숙께서 계신 곳만 알게 되면 저는 즉시 떠나겠습니다. 불을 밟고 물을 건너는 한이 있더라도 그때는 승상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 뵙지 않고 떠나더라도 허물치 마십시오."
"유현덕이 살아 있다면 공을 보내 드리겠소. 다만 전란 중에 혹 목숨이라도 잃지 않았는지 걱정이오. 관 공은 마음을 넓게 먹고 천천히 수소문해 보도록 하오."
조조는 조용히 그렇게 말했으나 씁쓸한 감정은 감출 수 없는 듯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 씁쓸한 감정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인지 조조는 관우를 이끌며 힘차게 말했다.
"자, 저쪽 후원에 주연 준비가 되어 있소. 이리로 오시오."
조조는 앞장 서서 잔치 자리로 인도했다.
다음 날이 되자 서주지방을 평정한 조조는 허도 개선길에 올랐다. 관우는 두 형수를 수레에 모시고 자신이 거느렸던 사졸 20여 명과 함께 잠시도 수레 곁을 떠나지 않고 행렬을 뒤따랐다. 허도로 가는 도중 날이 저물면 역관에서 묵어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조조는 두 부인과 관우를 한방에서 자게 했다. 아직 젊고 아름다운 두 부인과 풍채가 좋은 관우가 한 방에서 기거하는 동안 남녀로서 어울리기를 은근히 고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유비와 관우는 군신의 예를 벗어나게 되고 그로 인해 둘 사이가 틀어지게 될 것을 바랐던 조조였다. 그러나 관우는 방 밖에다 촛불을 밝힌 다음 초저녁부터 이튿날 날이 밝을 때까지 문밖에 시립해 있었다. 밤을 새우고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조조는 관우의 그러한 성품에 감복하여 전보다 더욱 공경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허도로 오자 조조는 관우에게 저택을 주어 거처하게 했다. 관우는 그 저택을 두 집으로 나누어 안채에는 두 부인을 모셨고, 바깥채에는 자신과 사졸들이 기거하며 두 부인을 보호했다. 관우는 한가한 틈을 타 책을 읽으며 틈틈이 저택을 둘러보기도 했다. 조조는 허도로 돌아온 후 일단 그동안 밀려 있던 조정의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치에 대해서도 남다른 정열을 기울여 대처했다. 그즈음 허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화가 꽃피고 있었고 백성들의 생활도 점차 윤택해져 가고 있었다. 산업과 농정의 개혁으로 백성들의 복리가 현저하게 증진되고 있었다. 겨우 정무도 일단락을 짓고 틈이 생기자 조조는 시신을 불러 관우의 동정을 물었다.
"두 부인의 거처만 지키고 계십니다. 가끔 저택 밖을 지나는 사람이 들여다보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고 합니다."
시신이 관우의 근황을 말하자 조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중얼거렸다.
"영웅의 심정, 그 얼마나 번민이 많을 것인가."
조조가 관우의 근황을 물은 며칠 후였다. 조조는 관우에게 입궐하는 수레에 함께 타자고 권했다. 조정으로 들어간 조조는 관우에게 천자를 뵈옵게 했다. 관우는 계하에서 천자에게 엎드려 절을 올렸다. 천자도 관우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더욱이 항상 마음에 두고 있는 유황숙의 의제라고 아뢰니 각별히 눈여겨보면서 분부하였다.
"미더운 장수이오. 합당한 관직을 주도록 하오."
조조의 주선으로 관우는 그 자리에서 편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시종 묵묵히 천자의 은혜에 감사하며 물러 나왔다. 다음 날 조조는 관우가 편장군의 벼슬을 받은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잔치에 관우를 상빈의 자리에 앉히는 예를 갖추어 관우로 하여금 여러 장수와 모사들을 보게 했다. 잔치가 끝나자 조조는 일부러 근신 몇에게 분부했다.
"관 공을 모셔다드리게."
조조는 비단과 금은 그릇과 패물들을 관우에게 실어 보냈다. 그러나 관우는 그 어는 하나도 자기가 갖지 않고 모두 두 부인에게 바쳤다. 조조는 나중에 이 말을 듣고 더욱더 관우의 곧은 마음에 감복했다. 관우에 대한 그의 경애와 아끼는 마음은 날로 깊어 갔다. 사흘을 걸러 작은 잔치요, 닷새마다 큰 잔치, 이런 식으로 향응의 기회를 만들며 관우와 만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무장이 훌륭한 무인을 흠모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말로 '말을 타면 금을 주고 말에서 내리면 은을 선사한다'는 비유가 있다. 조조의 관우에 대한 흠모는 그에 비할 바 아니었다. 조조는 이어 허도 안에서 고르고 또 고른 미녀 10명에게 요염한 아양을 떨게 하며 은근히 얼렀다.
"관 공만 설복하면 너희들 소원을 모조리 들어주마."
관우도 싫지는 않은 듯 보기 드물게 대취하여 가가대소했으나 술이 깨자 곧 10명의 미인도 모두 두 부인의 시중을 들게 했다.
어느 날 관우가 불쑥 승상부에 나타났다. 두 부인이 기거하는 저택에 비가 새니 손 좀 봐 달라고 관리에게 부탁을 하러 온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곧 승상께 말씀드려서 수리해 드리지요."
관리에게 대답을 듣고 관우가 천천히 돌아가는 것을 조조는 흘깃 누대에서 보았다.
"관 공이 아닌가?"
조조는 근신에게 관우를 불러 오게 하여 손수 잔을 들어 술을 권했다. 조조는 관우가 입고 있는 전포가 닳아 해진 것을 보았던 터라 술자리에서 마련해 둔 전표를 그에게 주며 말했다.
"장군이 입고 계신 녹색 전포가 낡았소이다. 날씨가 화장해지니 남루한 것이 눈에 띕니다. 이것을 입도록 하십시오. 관 공의 치수에 맞게 맞추어 놓은 것이오."
조조가 준 전포는 화려한 비단 전포였다.
"허-, 이건 너무 호사스럽군요."
관우는 비단 전포를 받아 한 손으로 들고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 날 조조가 문득 관우의 옷을 보니 자기가 준 비단 전포는 안에다 입고 겉에는 여전히 넝마 같은 녹색 전포를 입고 있었다.
"새 옷을 아끼느라 헌 전포를 껴입으시다니 운장은 어찌 그리 검소하시오?"
조조가 웃으며 묻자 관우는 자기의 소매를 흘깃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이것은 일찍이 유황숙께서 주신 전포입니다. 비록 누더기가 되었지만 조석으로 이것을 입고 벗을 때마다 황숙과 친히 만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합니다. 승상께서 좋은 옷을 주셨으나 황숙이 주신 옷도 버릴 수가 없어 그래서 껴입고 있습니다."
관우의 말에 조조는 감탄했다.
"관 공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오."
조조는 입으로는 그렇게 칭찬을 했으나 마음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운장의 마음을 내게로 돌릴 수 있다는 말인가. 실로 의형제의 정이 두텁기가 끝이 없구나.'
조조는 속으로 이렇게 탄식하고 있었다. 그때 두 부인의 시중을 들고 있는 안채에서 사람이 와 아뢰었다.
"두 부인께서 슬피 울고 계십니다. 관 공께서 들어가 보셨으면 합니다."
"무슨 일이 생겼느냐?"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관우는 그 말을 듣자마자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던 조조에게 한 마디 인사도 없이 달려가 버렸다. 본디 이런 무례한 짓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조조가 아니었으나 혼자 앉아 망연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실로 충직한 충의지사이다. 아첨도 없고 가식도 없는 오로지 충의 그 일념뿐이로구나. 어떻게 해서든 저런 인물을 심복으로 만들고 싶다."
조조는 마음 속으로 자기와 유비를 비교해 보았다. 어느 점으로 봐도 유비보다 못한 것은 없었으나 다만 한 가지 관우만한 충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반문해보았다. 그러나 그것만은 유비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비에 대한 부러움보다 차라리 시샘과 미움이 까닭 없이 일었다.
'기어이 관우를 내 덕으로써 복종시키고야 말리라.'
한편, 두 부인의 부름을 받은 관우는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왔다. 안채로 드니 두 부인이 서로 얼싸안고 아직껏 울고 있었다.
"어인 일로 이렇게 슬피 우십니까?"
관우가 물으니 감 부인과 미 부인은 비로소 옷매무새를 고친 후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내가 간밤에 유황숙께서 깊은 함정 속에 빠져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잠을 깨어 미 부인과 얘기해 보니 아무래도 황숙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함정은 황숙께서 돌아간신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흐르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사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꿈을 꾸시고서 유황숙을 걱정하시는군요. 어떤 흉몽도 꿈은 어디까지나 꿈에 불과합니다. 이는 틀림없이 형수님께서 평소 지나치게 형님을 염려하신 나머지 꿈까지 꾸시게 된 것입니다.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관우는 두 부인의 슬픈 마음을 달래느라 짐짓 너털웃음까지 지어 가며 말했다. 아무리 정중하게 예우를 받으며 어떠한 속박도 없이 살고 있다지만 어쨌든 여기는 적국의 수도였다. 두 부인이 꿈을 꾸고 소스라쳐 운다고 그 어린 마음을 탓할 수가 없는 관우였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맹세코 머지않아 황숙을 만나실 수 있도록 이 관우가 힘쓰겠습니다. 그날까지만 고생하신다 생각하시고 아무쪼록 두 형수님께서는 몸조심하시기만 바랍니다."
관우는 좋은 말로 두 형수를 달래었다. 관우는 두 형수를 달래는 동안 스스로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끝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 뜰에 어느새 조조의 근신이 들어와 있었다. 관우가 안채로 황망히 들어갔고, 또 두 부인이 관우를 불렀으므로 조조도 의아하게 여겨 동정을 살피려 한 것이었다. 관우가 조조의 군신과 마주치자 근신은 당황해하며 절을 올리더니 말을 꺼냈다.
"볼일이 끝나시면 바로 오시라는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승상께서 술상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관우는 두 형수께 하직하고 다시 승상부의 관저로 돌아갔다.
"자리를 떠서 결례를 했었습니다."
"오늘은 장군과 함께 밤새도록 마시고 싶소."
"다시없는 영광입니다."
술을 마셔도 마음이 즐겁지 않고 조조를 대하고 있는 동안에도 유비를 잊지 못하는 관우였다. 그러나 여기서 조조의 기분을 더욱 상하게 했다가는 이롭지 못하리라 여겨 태연히 술잔을 받고 있는데 눈이 충혈되고 눈시울이 젖어 있는 걸 본 조조가 놀라 물었다.
"관 공께서는 눈물을 흘린 모양이구려."
"두 분 형수님께서 유황숙을 근심하여 슬퍼하시기에 저도 그만 슬픔이 일었나 봅니다."
감추지 않고 관우는 그렇게 솔직히 얘기했다. 조조는 관우에게 유비를 잊게 하기 위해 주연을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서 관우가 또 유비 얘기를 꺼내자 심사가 뒤틀렸다. 그러나 조조는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고 관우를 위로하며 연거푸 술을 권했다.
"관 공께선 이 술을 드시고 마음을 달래도록 하시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였다. 관우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탄식했다.
"살아서 나라를 위해 제대로 큰 일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이제 형님과 함께 죽기로 했던 맹세까지 저버렸구나. 어찌 얼굴을 들고 살아갈 수 있으리오."
관우는 술을 마실수록 시름이 커지고 울적해질 뿐이었다. 조조는 관우의 말에 더욱 불쾌해졌다. 처음부터 편치 않았던 마음을 억누르고 그를 위로해 주는데도 관우가 감사해하기는커녕 또 유비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조조는 다시 한번 화를 억누르며 짐짓 그 말을 못 들은 체하고 관우가 쓰다듬는 수염을 보며 말머리를 돌렸다.
"관 공의 수염은 정말 길고 아름답소. 운장의 수염은 몇 개나 되오?"
관우의 수염은 유명했다. 길고 아름다운 그의 턱수염은 이 허도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아마 이 허도에서 으뜸가는 멋들어진 수염일걸."
허도 사람들은 관우의 수염을 보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조조가 관우의 수염을 칭찬하자 그도 그 말에는 즐거운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허, 일어서면 수염끝이 허리를 덮으니, 잘은 몰라도 수백근은 되겠지요. 가을이 되면 대여섯 올씩 묵은 털이 빠집니다. 겨울이 되면 털의 윤기가 메마르는 듯합니다. 그래서 엄동설한에는 얼지 않도록 주머니에 넣고 지내다가 손님을 대할 때는 주머니를 풀어 놓습니다."
어색해질 뻔했던 분위기가 수염 이야기로 밝아지자 조조도 유쾌히 웃었다.
"관 공은 수염을 매우 소중히 가꾸시는구려. 공이 취하면 수염도 술로 씻은 듯이 윤기가 흐르오. 지금이 마침 겨울이니 내가 비단 수염 주머니를 하나 지어드리겠소."
다음 날, 입궐할 일이 있어 조조는 관우를 동반하였다. 조조는 어저께 약속한 비단 주머니를 그에게 선사하였다. 천자가 보니 관우가 비단 주머니를 가슴에 매달고 있으므로 이를 이상히 여겨 물었다.
"가슴의 주머니는 무엇인가?"
관우가 주머니를 끌러 보이며 아뢰었다.
"신의 수염이 너무 길어 승상께서 친히 비단 주머니를 내렸습니다."
헌제가 그 수염을 유심히 보았다. 남달리 장대한 대장부의 배 아래까지 내려온 칠흑처럼 검고 긴 수염을 보자 헌제도 미소지으며 감탄했다.
"실로 아름다운 수염이오. 그대는 미염공이오."
천자가 그렇게 말하자 그 후부터 뭇 사람들은 관우를 미염공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또 하루는 연회가 끝난 후 조조가 몸소 관우를 배웅했다. 그때 문득 조조가 관우의 늙고 야윈 말을 보고 그 까닭을 물었다.
"공의 말이 어찌하여 이렇게 야위었소?"
"워낙 제 몸이 무거워 말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윕니다."
조조가 그 말을 듣더니 시신을 시켜 말 한 필을 끌고 오게 했다. 온몸이 불길처럼 붉은 데다 체구가 크고 힘차 보이는 말이었다.
"미염공, 이 말을 본 기억이 있으시오?"
관우는 그 말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 이윽고 무릎을 쳤다.
"이 말은 여포가 타던 적토마가 아닙니까?"
"그렇소."
"아니 이 귀한 말을 제게 주시려 하십니까?"
조조가 말 안장과 고삐를 갖추어서 관우에게 주었다. 관우는 거듭 절하며 고마움을 표하였고, 얼굴에는 희색이 만면했다. 일찍이 그가 이처럼 기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조조였다. 조조가 웃으며 물었다.
"미녀 열을 보내고 금은보화를 보내도 이처럼 여러 번 절하며 사례한 적은 없었소. 그런데 어찌하여 사람도 아닌 한낱 짐승 한 마리에 그토록 기뻐하시오?"
그러자 관우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대답했다.
"저는 이 말이 하루에 천 리를 간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다행히 이 말을 얻었으니 형님의 거처를 알게 되었을 때는 단숨에 달려가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조조는 관우의 말에 놀라며 후회하였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그토록 두터이 대하며 정성을 베풀었는데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은가. 유유히 적토마를 이끌고 가는 관우의 뒷모습을 보며 조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어떠한 근심도 지나치게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조조였으나 그날만은 진종일 침울하였다. 뒷날 사람들이 관우의 충절을 시로 지어 기렸다.
기울어져 가는 3국에 영웅이 나타났네.
두 군데로 나뉘어졌어도 의기만은 드높아라.
간교한 승상과 장수는 거짓으로 대하는데
어찌 운장의 거짓 항복 조조가 알 수 있으랴.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조조는 장료를 불렀다.
"내가 운장을 그토록 후히 대접했는데, 그는 늘 현덕만을 생각하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장료는 관우를 달래 데려온 이래 조조가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어 송구스런 맘뿐이었다.
"제가 가서 그의 뜻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조조가 승낙하자 장료는 며칠 후 관 공을 찾아갔다.
"제가 형님을 승상께 천거했습니다만 이제 허도 생활도 어는 정도 안정이 되셨겠지요?"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장료는 슬며시 관우의 마음을 떠보았다. 그러자 관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공의 우정이나 승상의 호의는 마음 속에 깊이 새기고 있지만 마음은 항상 유황숙 곁에 있소. 여기 있는 이 관우는 매미의 허물일 뿐이오."
"허허. . . , 대장부는 무릇 사소한 일에 구애되지 말고 무겁고 가벼운 것을 가려 처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황숙께서도 결코 승상 이상으로 형을 대우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형께서는 떠날 생각만을 하고 계십니까?"
"승상의 높은 은혜는 잘 알고 있소. 그러나 그것은 모두 귀한 물건을 주는 형식으로밖에 나타나지 않았소. 이 관우와 유황숙의 맹세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소."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조 공 역시 마음에서 우러난 진정이었습니다. 형을 흠모하는 마음은 결코 현덕 공에게 견주어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황숙과 나는 생사를 맹세한 사이이며 또한 두터운 은의를 입었는데 어찌 저버릴 수가 있겠소. 그렇다고 승상의 은의를 저버리는 것도 무인의 도리가 아니오. 반드시 응분의 공을 세워 오늘의 은혜에 보답한 연후에 떠날 것이오."
"그럼. . . 만약 현덕 공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때에는 어떻게 하시겠소?"
"황천에라도 따라가겠소."
장료는 관우의 철석 같은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장료는 관우와 작별하고 돌아와 숨김없이 조조에게 고했다.
"승상의 높으신 은혜는 마음에 새기고 있으나 그렇다고 마음을 돌려 두 주군을 받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떠나더라도 반드시 승상께 공을 세워 은혜에 보답한 연후에 떠난다 하였습니다."
장료의 말을 들은 조조는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주인을 섬기되 그 근본을 잊지 않으니 그는 진실로 천하의 의사이다. 그가 떠나감을 막을 수 없음이 안타깝구나."
곁에 있던 순욱이 조조에게 꾀를 내어 아뢰었다.
"관 공은 승상께 공을 세워 은혜를 갚은 후에 떠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는 떠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조조는 순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의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조조였으나 관우를 휘하로 만드는 일만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천신 같은 관운장 안량. 문추의 목을 베다
유비와 관우가 서로의 행방을 모르는 채, 관우는 조조군의 출전 장수로 싸움터에 나와 원소군의 장수 안량. 문추의 목을 벤다. 이에 유비는 원소의 의심을 받지만 간신히 위기를 넘기고, 관우에게 보낼 서신을 쓰나 전달하기가 여의치 않다. 유비는 하북의 수도 기주성에 몸을 의탁한 후 상객의 예우를 받으며 불편 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심기는 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다.
'나의 처자는 어찌 되었을까? 나의 두 의제는 어떻게 되었는가?'
안부를 알 길 없는 의제와 가솔들에 대한 근심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위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이 한 몸만 편히 있다니. . . 참으로 부끄럽구나.'
유비는 등불 아래에서 쓰라린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밤을 새우는 날이 허다했다. 햇볕은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어 봄동산의 복숭아꽃과 오얏꽃은 붉은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있었다. 복숭아꽃이 핀 것을 보니 가슴은 더욱 무너지는 듯했다. 지난날 도원에서 맺었던 삼형제의 의맹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우러러보니 한 점의 봄 구름이 한가롭게 떠 있었다. 유비는 멍하니 무심한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어느새 그에게 다가왔는지 원소가 넋을 잃고 있는 유비를 향해 물었다.
"공은 어찌하여 얼굴에 그토록 수심이 가득하오?"
"의제들의 소식도 알 수 없으며 아내와 가솔들이 역적 조조에게 붙들려 있습니다.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내 집안조차 보호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근심이 없겠습니까?"
유비의 말에 원소가 입을 열었다.
"공께 의논할 일이 있는데 기탄없는 의견을 주시겠소?"
"예, 짧은 소견이지만 그렇게 하지요."
"실은 자식놈의 병도 나았고, 산과 들의 눈도 녹았으니 다년간 숙원하였던 허도로 군사를 일으켜 일거에 조조를 무찌를 결심을 했소. 그런데 신하인 전풍이 나에게 간하기를 지금은 공격보다 수비를 해야 할 시기라고 하오. 지금의 기주를 지키며 군마를 조련하고 산업을 권장하며 기다리라는 것이오. 그러면 조조는 2, 3년 사이에 반드시 파탄을 일으켜 자멸할 것이니 그때를 기다려 조조를 치자는 것이오. 공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원소는 자식의 병이 다 나았다는 말과 함께 쑥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때는 지금이라 믿습니다. 그 까닭은, 물론 조조의 군마는 날래고 그가 군사를 부리는 솜씨는 뛰어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도 자만에 넘쳐 조정의 중신들과는 소원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얼마 전에는 국구 동승 이하 수백 명을 허도의 거리 한복판에서 참수시킨 일도 있어 민심도 그에게서 떠나고 있습니다. 명공께서 그런 역적을 토벌하시지 않으면 대의를 잃게 될까 두렵습니다."
유비는 이렇게 말하며 전풍의 말에 귀가 솔깃해져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원소를 충동질했다. 원소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사이 유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유생(유교를 닦는 선비)의 의견에 솔깃하여 지금의 기회를 놓치신다면 그 후환은 백 년에 이어질 것입니다."
유비가 거듭 조조의 정벌을 부추기자 원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의 말씀이 옳소! 곧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겠소."
원소는 마침내 허도 정벌를 위한 군령을 내렸다. 그러나 전풍은 다시 원소를 만류했다.
"아니 됩니다. 조조의 병력이 점점 막강해지고 있는 이때 허도를 정벌한다면 이기기가 어렵습니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원소는 전풍의 말에 울컥 화를 내었다.
"공은 하북의 중신으로 있으면서 우리 하북의 군병을 그토록 빈약한 것으로 여기는가? 뿐만 아니라 그대들은 글줄이나 깨우쳤다고 군사일을 가벼이 보아 나로 하여금 천하의 대의를 저버리게 할 작정인가?"
원소가 노하여 전풍의 목을 베려 했다. 유비가 간곡히 만류하자 원소는 그를 죽이는 대신 옥에 가두었다. 원소는 마침내 조조와 대결할 것을 결심했다. 조조의 세력과 권력이 점차 커지니 이 정도에서 그 싹을 자르지 않으면 머지않아 터무니없이 큰 나무로 자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질투와 초조, 그리고 유비의 진병에 대한 권고가 그토록 우유부단한 원소를 궐기케 했다. 원소는 하북 4주 방방곡곡에 격문을 보내 조조의 죄목 열 가지를 열거하고 군사를 일으킬 것을 명했다.
각각 일족의 병마와 노궁을 총동원하여 백마의 벌판으로 모여라!
백마의 벌판이란 하북. 하남의 경계에 있는 광야를 가리킨다. 원소의 명을 받은 4주의 군사는 속속 싸움터로 집결했다. 이번 출진을 앞두고 여러 장수들은 자신이 무공을 세울 천재일우의 기회로 삼으니 그 기세가 사뭇 당당했다. 그러나 유독 저수만은 다른 장수들과 달랐다. 저수는 전풍과 평소에도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그 전풍이 원소의 출병을 만류하다 하옥되는 것을 보자 떠나기 전날 밤에 일가친척들을 불러모았다.
"이번 싸움은 천에 하나도 승산이 없다. 요행히 아군이 이기면 그야말로 일약 천하를 호령하겠지만 패하면 살아 돌아오기는 어려우리라."
저수는 이렇게 말하며 집안에 있는 재산 모두를 일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가친척들은 저수의 불길한 말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배웅했다. 그때 백마현의 국경에는 소수이지만 조조의 상비군이 있었다. 그러나 원소의 대군이 도착하니 그들은 상대가 되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원소군의 선봉장은 기주의 맹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안량이었다. 안량이 군사를 이끌어 여양 방면까지 돌입하자 저수가 진언했다.
"안량의 용맹은 가히 쓸 만하지만 성품이 편협하며 미덥지가 못합니다. 선봉을 두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소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안량은 내 상장이다. 공은 그의 뛰어난 용맹을 알 리 없으니 입을 다물라."
원소의 대군이 진격하여 여양에 이르자 동군 태수 유연이 위급한 사태를 허도에 알렸다. 조조는 급히 여러 모사와 장수들을 소집하여 원소를 물리칠 일을 의논했다. 이 소문은 관우의 귀에도 들어갔다. 관우는 유비가 원소의 휘하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터라 조조에게 나아가 말했다.
"평소의 후은을 보답고자 하오니 이번 싸움에 부디 저를 선봉으로 써 주십시오."
조조가 베푼 은혜에 보답할 좋은 기회라 여겨 관우는 이렇게 청했다. 조조가 잠시 기쁜 얼굴로 바라보았으나 웬일인지 황급히 그의 청을 물리쳤다.
"아직 장군에게까지 수고를 끼칠 일이 아니오. 더 큰 일이 있으면 장군을 불러 청하겠소."
조조는 관우에게 공을 세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공을 세우면 그가 자기를 떠날 것이므로 그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조조가 자신의 청을 딱 잘라 거절하므로 관우는 더 할 말이 없어 승상부를 나오고 말았다. 조조는 군사 15만을 세 갈래로 나누어 진군케 했다. 가는 도중 다시 동군태수 유연에게서 위급을 알리는 전갈이 왔다. 조조는 몸소 군사 5만을 이끌고 먼저 백마의 벌판으로 달렸다. 조조는 나지막한 토산을 등지고 진영을 세운 후 멀리 있는 적진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벌판에는 안량의 정병 10여 만이 철형으로 대형을 이룬 채 마치 들불을 놓은 듯 다가오고 있었다. 조조가 저으기 놀라며 문득 한 장수를 소리쳐 불렀다.
"송헌, 송헌은 어디 있는가?"
그는 지난날 여포를 사로잡아 조조에게 바쳤던 여포의 휘하 장수였다.
"그대는 이전에 여포의 휘하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라고 들었다. 지금 보니 안량이 제 세상 만난 듯이 달려오고 있으니 그대가 가서 저놈의 목을 베어 오라."
조조가 자신을 특별히 불러 명하므로 송헌은 공을 세울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조조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홀연히 말을 몰아 호기롭게 내달았다. 안량은 칼을 비껴들며 문기 아래에 잠시 말을 멈추고 적진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적진에서 한 장수가 내달아오자 안량은 벽력같이 소리치며 말에 박차를 가해 마주 달렸다. 송헌이 호기롭게 창으로 안량을 찌르며 부딪쳤다. 그러나 송헌은 안량의 상대가 못 되었다. 어우른 지 3합도 안 되어 안량의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송헌의 머리가 말 아래로 나뒹굴었다. 원래 안량은 이민족 출신의 무인이었다. 안량은 기마전에 능했으며 독특한 검술을 썼다. 민첩한 몽고말을 타고 달리면서 종횡무진 누비는 그는 재빠른 칼솜씨와 천하무적의 용맹을 떨치는 장수였다. 송헌이 안량의 한칼에 무너지자 조조가 소리쳤다.
"여봐라, 안량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래, 저놈을 무찌를 자가 없다는 말인가?"
"저에게 명해 주십시오. 친구 송헌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습니다."
위속이 나섰다. 그는 송헌과 함께 여포를 사라잡아 조조에게 투항했던 장수였다.
"위속인가? 그대가 친구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니 말릴 수가 없구나. 어서 가라!"
위속이 긴 창을 비껴잡고 곧장 내달았다. 안량의 진 앞에 이른 위속이 안량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어댔다.
"이 오랑캐놈아! 내가 친구의 원수를 갚으러 왔다. 썩 나와서 내 창을 받아라!"
안량이 곧바로 말을 달려나왔다. 누런 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7, 8합 만에 안량의 고함 소리가 일며 인마가 함께 칼을 맞고 쓰러졌다.
"참으로 무서운 장수로다!"
호담한 조조도 간담이 서늘한지 혀를 차며 탄식했다.
"이제는 누가 가서 겨루겠는가?"
조조의 물음에 서황이 나섰다.
"오, 서황인가?"
조조를 비롯한 여러 모사들이 그에게 기대를 걸었다. 서황은 흰털을 날리는 말을 타고 눈부신 은색 도끼를 들고 달려나왔다. 허도 제일의 용장으로 이름난 약관의 장수였다.
"서황이 나왔다!"
안량과 서황의 칼과 도끼가 맹렬히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2, 30여합 칼과 도끼가 부러져 나갈 듯 어우러졌으나 안량의 맹렬한 공격에 용맹 무쌍한 서황도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서황도 도끼를 적에게 내던지고 말을 물려 되돌아오고 말았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조조는 부득이 진을 20리쯤 물리고 그날의 어려운 고비를 간신히 모면하였다. 그러나 송헌. 위속 두 장수를 잃고 불명예를 안은 채 안량 한 사람의 이름만 떨치게 했으니 생각할 수록 어이없는 일이었다. 조조가 근심에 사로잡혀 있는데 정욱이 그에게 방책을 아뢰었다.
"안량을 능히 무찌를 사람은 관운장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때야말로 관운장을 진으로 부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렇지만 그가 공을 세우면 그는 그것을 기회로 내게서 떠날 것이오. 나도 그것을 생각지 않는 바가 아니었으나 그런 이유 때문에 그를 부르지 않고 있는 것이오."
조조는 못마땅스럽다는 듯이 말하며 정욱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유비가 살아 있다면 그는 반드시 원소에게 의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관운장을 시켜 안량을 무너뜨린다면 원소는 필시 유비를 의심하여 죽여 버릴 것입니다. 유비가 죽는다면 관운장은 승상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정욱의 말에 조조는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과연 기막힌 계교요."
조조는 즉시 사자를 보내 관우로 하여금 급히 오게 했다. 조조의 부름을 받은 관우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무장을 갖춘 후 두 형수에게 작별 인사를 드렸다.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만 듣고도 두 부인은 벌써 눈물을 글썽거리며 당부했다.
"큰 아주버니께서는 이번에 가시거든 부디 유황숙의 소식을 알아보도록 하십시오."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실은 그것입니다. 머잖아 상봉하실 수 있도록 하겠으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작별 인사를 마친 관우가 청룡언월도를 움켜잡고 일어서니 두 부인은 바깥문까지 나와 전송했다. 관우가 적토마에 올라타고 백마현을 향해 달렸다. 관우는 그날로 백마현에 이르자 조조는 기뻐하며 관우를 맞았다.
"부르심을 받고 승상께서 주신 이 적토마를 타고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관우가 조조에게 절하며 말했다. 조조는 관우를 맞아 요 며칠간 있었던 참패를 숨김없이 그에게 알린 후 말을 이었다.
"원소군의 선봉 안량의 용맹을 당할 자가 없어 이 일을 의논하려고 운장을 부른 것이오."
조조는 술상을 차려 관우에게 대접했다.
"제가 싸움터를 한 바퀴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관우가 이렇게 말하자 조조는 물론 여러 장수들이 토산 위로 올라갔다. 관우는 팔장을 끼고 싸움터를 두루 살펴보았다. 벌판에 가득찬 양군의 정예병은 마치 메밀 껍질을 가지런히 깔아 대지에 진형도를 그린 것처럼 보였다. 적진은 창. 검이 숲을 이루며 오색 기치가 수없이 펄럭이고 있어 그 위세가 엄청났다. 조조는 적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이 하북의 인마요. 그 군세가 대단하지 않소?"
조조의 말에 관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내 눈에는 흙으로 만든 닭이나 와륵으로 만든 개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조조가 또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시오. 저기 비단 일산 아래 황금 갑옷과 투구를 쓰고 칼을 찬 체 말 위에 앉은 자가 안량입니다. 안량이라는 말만 듣고도 아군 사졸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을 갑니다."
관우는 조조가 가리키는 곳을 일별하더니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안량도 자기 목을 팔려고 표식을 세워 놓은 어리석은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듣기에 어이가 없을 정도의 큰소리였다. 조조가 그런 관우에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아니오. 적군의 왕성한 사기를 가볍게 볼 처지가 아니오. 오늘은 장군께서 지나치게 호언을 하시는 것 같소. 평소의 장군과는 다르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는 싸움터입니다."
"그렇다라도 너무 적을 얕보시는 것이 아니오?"
그러자 관우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
"결코 호언이 아님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가 비록 재주는 대단치 않으나 적진으로 달려가 안량의 머리를 베어 승상께 바치겠습니다."
장료가 관우의 호언을 듣다못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군중에는 원래 농담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관 공께서는 적을 너무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관우는 장료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사졸을 시켜 적토마를 끌어오게 하더니 청룡언월도를 비껴들고 말 위에 올랐다. 말 위에 오른 관우는 질풍처럼 산비탈을 내달렸다. 부릅뜬 봉의 눈에 누에 같은 눈썹을 치켜세운 채 곧장 상대편 진으로 달려갔다. 오랫동안 전쟁터를 떠나 있었던 적토마는 오늘 비로소 제 주인을 만났다는 듯이 꼬리를 치며 우렁차게 울었다.
"물러나라! 길을 막아 아까운 목숨을 버리지 말라."
관우는 청룡도를 들어 좌우의 적병을 베며 말을 달렸다. 그 무서운 기세에 대군이 대항할 엄두도 못 내고 비켜서는 한가운데를 풀을 베듯 헤치며 달렸다. 안량이 대장기 곁에서 뛰쳐나오려 하자 관우가 그의 모습을 보고 번쩍 번개가 치듯 달려들었다.
"안량이란 놈이 바로 네놈이냐!"
관우가 소리쳤다.
"오냐, 네놈은. . ."
안량이 다음 말을 이을 겨를도 없었다. 눈앞에 적장이 보였는가 싶자 어느새 그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었다. 놀란 안량이 황급히 칼을 휘두를 찰나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안량을 향해 날아들었다. 안량은 칼 한번 써 보지 못한 채 번쩍이는 언월도에 의해 단번에 갑옷과 투구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몸에서 내뿜는 피가 10척이나 치솟는가 싶더니 안량의 몸뚱이는 철썩하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관우는 그 머리를 잘라 유유히 안장에 매달았다. 몸을 날려 적토마 위에 오른 관우는 비호같이 적진을 달리니 마치 무인지경을 달리듯 했다. 원소군은 군기도, 군고도 버린 채 혼란에 휩싸여 좌충우돌하기 시작했다. 조조가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다가 전군에게 총공격령을 내렸다.
"이때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주살하라."
조조의 군사가 달아나는 적을 마구 베며 뒤쫓으니, 하북의 군사는 대패한 채 싸움은 끝나고 말았다. 장료. 허저 등도 그동안의 참패를 분풀이라도 하듯 적진을 유린했다. 하북군은 죽은 자의 수가 부지기수요, 빼앗은 말과 무기가 엄청났다. 그럴 동안 관우는 유유히 말을 달려 이미 조조의 본진으로 돌아와 있었다. 조조가 진으로 돌아오자 안량의 머리를 그에게 바쳤다. 여러 장수들이 일제히 관우를 칭송하여 마지않는 가운데 조조도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장군의 용맹은 실로 인용이 아니라 신위(신의 위엄)이외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관우는 머리를 저으며 겸양의 말을 했다.
"아닙니다. 저 같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 의제인 연인 장비는 대군 속에 들어가서 적장의 목을 베어 오기를 마치 주머니 속에서 물건 꺼내기보다 수월하게 합니다."
관우가 무심중에 겸양의 뜻으로 그렇게 말했으나 조조는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이를 내색하지 않은 채 얼핏 웃음 띤 얼굴로 여러 장수들에게 경고해 두기를 잊지 않았다.
"자, 모두들 명심해 두오. 연인 장비라는 이름을 허리띠 끝이나 옷섶 안에라도 적어 두고 그를 만나거든 함부로 덤비지들 마오."
한편 안량이 쓰러지자 안량 휘하에 있던 군대는 지리멸렬 패주를 계속했다. 후진의 지원으로 간신히 어지러운 패잔병을 수습하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원소의 본진에도 적지 않은 동요가 일었다.
"대체 안량과 같은 호걸의 목을 베어 버린 자가 누구인가? 필시 범상치 않은 자일 것이다."
원소는 불안한 낯으로 좌우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저수가 대답했다.
"아마 그는 현덕의 의제 관우라는 자일 것입니다. 관우말고는 그리 쉽게 안량의 목을 벨 자가 없습니다."
원소는 저수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지금 현덕은 일신을 이 원소에게 의탁하고 이번 싸움에 종군하고 있거늘, 어찌 그의 의제가 우리의 장수를 친다는 말이오?"
원소가 믿지 않자 저수는 안량 휘하의 군사 하나를 불러 물었다.
"안량을 친 장수는 어떤 장수더냐? 본 대로 소상히 말해 보아라."
"얼굴이 붉고 수염이 긴 장수였습니다. 큰 언월도로 단칼에 안량 장군을 베고는 태연히 그 머리를 붉은 말 안장에 매달더니 나는 듯이 말을 달려갔습니다."
군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원소는 노발대발하여 좌우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현덕을 잡아 오라!"
원소의 명에 의해 군사들이 유비의 진지로 달려가 불문곡직하고 그의 두 팔을 비틀어 원소 앞으로 끌고 왔다. 원소는 그를 보자 길길이 뛰며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
"이 배은망덕한 놈! 엉큼하게도 조조와 내통하여 내 귀중한 용장을 자네 아우 관우의 손에 죽게 하다니. . . , 안량의 목숨은 이제 살릴 수 없으니 네 목이라도 베어 안량의 영혼이나마 위로해 주어야겠다. 여봐라! 이 배반자의 목을 내가 보는 앞에서 베어 버려라."
유비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 두려운 기색 없이 침착하게 일갈했다.
"진정하십시오. 평소에 사려 깊은 명공께서 어찌하여 오늘은 이토록 격분하십니까? 조조는 그전부터 이 비를 죽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어찌 그 조조를 도와 지금 몸을 의탁하고 있는 은인의 군에 불리한 짓을 하겠습니까? 또 얼굴이 붉고 수염이 길다고는 하지만 세상에 관운장을 닮은 장수가 없으란 법도 없습니다. 또한 조조는 이름난 병략가이므로 일부러 그런 자를 찾아내어 우리 쪽의 자중지란을 꾀했는지도 모릅니다. 명공께서는 어찌 일개 군졸의 말만을 듣고 저와의 정리를 끊으려 하십니까?"
무장으로서의 중요한 자격의 하나는 과단성이다. 그 과단성은 예리한 직감이 있어야 생긴다. 원소의 단점은 바로 이 직감이 무디다는 것이다. 유비는 자신의 말에 원소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고 말을 이었다.
"서주에서 패한 이래 외로운 몸을 장군의 비호에 맡긴 후 아직 처자는 물론 일족의 소식조차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렇거늘 어떻게 운장과 내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비의 일상 생활은 명공께서 항상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원소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오. 저수가 나를 미혹케 하여 이렇게 되었소. 현덕 공은 너그러이 살펴 주시오."
원소는 유비를 상좌에 청하고 저수로 하여금 사죄하게 한 후 그 자리에서 패전 만회의 작전을 상의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립한 여러 장수들 가운데 한 장수가 문득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형 안량을 대신할 다음 선봉은 아우인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를 보니 키가 8척이요, 얼굴은 해태 같고 송곳니가 허옇게 입술을 물고 있는데 머리카락과 수염이 붉은 험악하게 생긴 장수였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별로 말이 없는 하북의 명장 문추 그였다. 문추도 안량에 못지않은 맹장이었다. 안량처럼 기마전에 뛰어나고 특히 말 위에서 쏘는 화살은 백발백중이었다. 그는 항상 싸움터에서 반궁과 칼을 들고 다녔으나 칼은 거의 쓰지 않았다. 칼을 쓰기도 전에, 적은 반궁의 희생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원소가 크게 기뻐하며 그를 격려했다.
"아, 역시 문추인가. 그대가 아니고 누가 안량의 원수를 갚겠는가? 어서 가 역적 조조를 무찔러라!"
원소는 어병 10만을 주었다. 문추는 그날로 황하까지 나아갔다. 이때 조조는 진을 물려 하남에 포진하고 있었다. 문추는 조조가 진을 물리자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적은 별반 싸울 마음이 없다. 전전긍긍 그저 진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어서 공격하라."
문추는 병마 10만을 이끌어 수많은 배에 나누어 싣고 강을 건너 황하의 해안으로 진격했다. 문추의 거칠 것 없는 진격을 보자 저수가 걱정하며 원소에게 아뢰었다.
"아무래도 문추의 전법은 위태로워서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임기응변의 묘미도 없이 무턱대고 진격만 하면 이기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피건대, 우선 관도와 연진 양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승리하는 대로 서서히 밀고 나가는 것이 상책이 아닌가 합니다. 경솔히 황하를 건넜다가 만일 아군에게 불리한 전황이 생긴다면 몰살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원소는 저수의 충언에 벌컥 화를 내었다. 얼마 전 유비의 목을 베려 한 것도 그의 말을 듣다가 생긴 일이었다. 유비에게 사죄까지 시킨 이후라 그의 말이 미덥지 않게만 들렸다.
"듣지도 못했는가. 군사는 신속을 으뜸으로 삼는다고 하지 않는가? 함부로 혀끝을 놀려 아군의 사기를 미혹시키지 말라!"
원소가 꾸짖으며 그의 말을 일언지하에 물리치자 저수는 묵묵히 밖에 나와 탄식했다.
"윗사람은 제 뜻만 세우려 들고, 아랫사람은 공명심에만 들떠 있구나. 유유히 흐르는 황하여, 내 너를 건너야 하는가?"
저수는 그날부터 병을 핑계대고는 진무에도 나오지 않았다. 원소도 그에게 지나치게 말했음을 뉘우치고 있었으나 그를 달래고 싶지도 않았다. 원소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조조군을 향해 진격하자 유비가 청했다.
"평소에 크신 은혜를 입고 있으면서 보답할 길이 없었습니다. 바라건대 저를 문추 장군과 함께 출진케 해 주십시오. 명공의 은혜를 갚기 위함이 그 하나요, 두 번째는 안량을 벤 자가 운장인지 확실히 살펴 진위를 가리고 싶습니다."
"공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찌 말리겠소."
원소가 기뻐하며 유비의 출진을 선선히 응낙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문추가 홀로 말을 타고 중군으로 달려와 원소에게 말했다.
"선봉 대장으로 저 하나로는 염려되심이옵니까?"
"그럴 리가 있는가? 어찌하여 그 같은 말을 하는가?"
"현덕은 전부터 싸움에는 약하다고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에게 선봉을 명하신 까닭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현덕의 재주와 능력을 시험해 보자는 뜻일세."
"그럼 저의 군사 3만을 나누어 주고 2진에 그를 두어 뒤따르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원소는 문추가 말하는 대로 유비의 배치를 일임했다. 이런 경우에도 원소의 성격 한 단면이 드러난다. 전쟁에 대해서도 그 자신의 독창과 결단은 하나도 없이 우유부단 바로 그것이었다. 다만 그는 조상 대대로 명문이라는 유산과 그로 인한 자존심만을 앞세웠다. 그의 수려한 풍모는 평상시에 권위를 나타내기에는 그럴싸했으나 전쟁터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전쟁터에서는 지휘자의 현명한 판단과 선견지명이 실로 군의 운명을 좌우하지 않는가. 문추는 원소의 명이라 하여 유비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뒤따르게 하고, 자신은 우세한 병력 7만을 이끌어 전진을 개시했다. 한편 조조는 관우가 안량을 한칼에 베는 것을 본 후로부터 그를 더욱 중히 여겼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내 유막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조조는 관우의 훈공을 천자께 상주한후, 조정의 주공(주조공)을 시켜 제후로 봉한다는 도장을 새기게 했다. 봉후의 도장이 새겨지자 그는 장료에게 명해 관우에게 전하게 했다.
". . . 이것을 소생에게 전하라 하던가?"
관우는 먼저 조조의 은의에 감사하면서 무심코 도장에 새겨진 글자를 보았다. 수정후지인, 즉 수정후에 봉한다는 사령이었다. 그 글자를 보자 관우가 고개를 저었다.
"뜻은 고마우나 사양하겠소. 도로 가지고 가시오."
"받지 않겠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소."
장료가 간곡히 권했으나 관우는 끝내 사양했다. 하는 수 없이 장료는 봉인을 도로 가져와 조조에게 관우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조조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장료에게 물었다.
"도장을 보기 전부터 사양하던가, 아니면 새겨진 글자를 보고 사양하던가?"
"도장에 새겨진 글자를 한동안 보고 난 이후였습니다."
"그렇다면 내 잘못이었다."
조조는 무엇을 생각했음인지 즉시 주조공을 불러 도장을 다시 파도록 명했다. 새로 부어온 인문(도장에 새겨진 글씨)에는 한나라라는 한자가 더 붙어 있었다 즉, 한나라의 수정후지인이라고 여섯 글자를 새긴 것이었다. 다시 그것을 장료를 시켜 전달하니 관우는 이를 보고 파안대소했다.
"승상은 참으로 내 마음을 잘 짐작하시오. 만일 나와 같이 신하의 길을 실천하는 분이라면 우리들과도 좋은 의형제가 될 수 있었을 터이오."
관우는 그렇게 말하며 이번에는 쾌히 관인을 받들었다. 이때 일선에서 황급히 파발마가 달려와 급보를 전했다.
"원소의 대장인 문추가 황하를 건너 연진까지 진격해 진을 세웠습니다."
조조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영을 내려 연진의 백성들을 서하라는 땅으로 옮긴 후 군사를 이끌었다.
"마초, 군량, 짐을 실은 말을 앞세우고 군사들은 뒤쳐져 가도록 하라!"
행군 도중 조조는 뜻밖의 영을 내렸다. 영에 따라 선봉대를 뒤로 보내고 후군을 앞세운 이상한 행군이 시작되었다. 여건이 의아하게 여겨 조조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마초나 군량을 앞세우고 군사를 뒤따르게 하십니까?"
"군량과 마초를 뒤따르게 하면 적군에게 빼앗기는 일이 많아 앞에 세웠다네. 여건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만약 앞세운 군량과 마초가 적의 공격을 받으면 또한 빼앗기지 않겠습니까?"
조조가 그 물음에도 태연히 대답했다.
"그건 그때 적군이 와 보면 알게 될 걸세. 너무 걱정할 일이 아니네."
여건은 조조의 대답을 듣고도 궁금증을 지울 수가 없었으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군량과 마초를 실은 치중대(짐 실은 말)가 앞장서자 대열은 황하 언덕을 따라 연진으로 나아갔다. 조조가 치중대를 뒤쫓아 뒤따르고 있는데 저 멀리 앞쪽에서 돌연 함성이 일었다. 뒤이어 급보가 전해졌다.
"큰일났습니다. 하북의 대장 문추가 이끄는 군사가 밀어닥쳐 우리 군사는 마초와 군량을 모두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지며 달아났습니다. 후군과의 거리가 멀어 급히 구원할 수도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예상했던 대로였다. 전투 장비를 갖추지 않은 치중대이니 적의 공격을 받자 모두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자 조조가 태연히 말채찍을 들어 남쪽 언덕을 가리키며 후군에게 명했다.
"잠시 저 언덕에 올라가 적을 피하도록 하라."
조조의 명에 군사들은 급히 그 언덕으로 기어 올라갔다. 조조답지 않은 명령이었다. 적군이 진격해 오는데 싸워 보지도 않은 채 허둥지둥 피신부터 하는 조조가 아닌가. 군사들이 언덕 위에 오르자 조조는 또다시 뜻밖의 명을 내렸다.
"무거운 투구와 갑옷들을 벗고 잠시 쉬도록 하라. 말들도 풀을 뜯도록 모두 풀어 주어라."
군사들은 모두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조조가 내린 영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문추의 군사들이 점점 조조군 가까이 달려오고 있었다. 다급해진 건 조조 휘하의 장수들이었다.
"적군이 가까이 왔습니다. 급히 말을 거두어 백마현으로 군사를 물려야겠습니다."
그러자 순유가 장수들에게 말했다.
"적군에게 이미 미끼를 놓고도 어찌 도망칠 생각을 하는 거요."
순유의 말에 조조가 그에게 눈짓하며 조용히 웃었다. 조조의 웃음을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새긴 순유가 입을 다물었다. 문추의 군사는 이미 적의 군량과 마초를 빼앗은 터라 신이 났다. 그들은 대오도 갖추지 않은 채 일사천리로 앞으로만 진격해 왔다. 문추의 군사들이 보니 선봉부터가 군대랄 것도 없는 조조의 군사들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후진도 가까이 와서 보니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데 투구와 갑옷도 입지 않은 채였고, 군마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군량과 마초를 빼앗은 문추의 군사들은 흩어져 있는 군마를 획득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대와 대의 구별도 없이 제각기 흩어지고 뒤섞여 문추군은 저절로 어지러운 잡병들이 되고 말았다.
"자, 이때다. 전군은 모두 언덕을 내려가 적을 섬멸하라!"
조조가 명을 내렸다. 전군이 표범같이 언덕 밑으로 내려가 적을 치는 한편, 언덕 한구석에 놓인 봉화에 불을 올렸다. 패하여 도망치는 척하며 실은 들과 야산과 강가 숲속에 잠복하고 있던 조조군의 선봉대는 봉화를 보자 땅에서 솟아난 듯 삼면칠면에서 일제히 일어나 문추군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조조도 말을 몰아 벌판을 질주하면서 외쳤다.
"낮에 버린 군량과 마초는 적을 큰 그물로 몰아넣기 위한 미끼였다. 그물을 죄어서 고기 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마라."
문추의 군사 사이에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이미 군령도 통하지 않는 난군이 된 데다 사면에서 일어난 조조군에 의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니 같은 군사들끼리 서로 밟고 밟히기까지 했다. 홀로 사력을 다해 싸우던 문추는 그때서야 조조의 계략에 빠진 것을 깨닫고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조조가 이를 보고 소리쳤다.
"하북의 명장 문추가 저기 있다. 그를 사로잡으면 안량을 무찌른 공과 다름없다."
조조가 이렇게 외치니 장료와 서황이 말을 달리며 크게 외쳤다.
"문추, 네가 가면 어딜 가겠느냐. 게 서지 못할까."
문추가 그 소리에 뒤를 힐끗 돌아보더니 말 위에서 쇠반궁 위의 굵은 화살을 쏘았다. 화살이 장료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자 장료는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화살은 투구의 끈을 끊었다.
"이놈 문추야, 게 섰거라!"
장료가 노기 충천하여 곧장 그에게로 달려가려는 찰나였다. 문추가 쏜 두 번째 화살이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날아와 그의 면상에 꽂혔다. 그와 동시에 달리던 말이 앞발을 꺾는 바람에 장료는 '쿵!'하고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문추는 재빨리 말머리를 돌리더니 장료를 향해 말을 달렸다. 장료의 목을 베어 갈 모양이었다.
"이 간덩이가 부은 원소의 개야!"
서황이 재빨리 말을 달려 문추의 앞을 가로막았다. 서황이 장기로 삼는 무기는 언제나 큰 도끼였다. 서황은 도끼를 수레바퀴처럼 휘두르며 문추를 향해 달려들었다. 문추는 몇 걸음 뒤로 물리며 철궁을 안장에 끼고 칼을 빼 들었다. 대검과 큰 도끼가 30여 합 불꽃을 튀겼다. 서로가 만만치 않음을 알자 서황은 말머리를 돌렸다. 장료를 구한 서황은 뒤이어 달려온 군사의 구원을 받으며 본진으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다. 힘이 난 문추가 기세를 돋우며 서황과 장료를 뒤쫓았다. 그런데 홀연 앞쪽에서 기병 10여 명이 기를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기에는 '한수정후 운장관우'라고 먹으로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그중에서 한 장수가 긴 수염을 휘날리며 말을 달려 나오는데 청룡언월도를 비껴들고 있었다.
"이놈, 게 섰거라!"
말은 준족으로 유명한 적토마이고, 그 말을 탄 사람은 틀림없는 관운장이었다.
"오냐, 바로 네놈이었구나. 전날 나의 형 안량을 친 놈이!"
문추도 관우를 보자 대검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번뜩이는 청룡언월도, 바람을 가르는 문추의 대검! 서로 접전하기를 수십 합이었다. 그 고함 소리에 청룡도와 대검이 부딪칠 때마다 튀는 불꽃은 황하의 파도를 일으킬 듯했다. 하늘의 마귀와 땅의 신이 하늘과 땅을 싸움터로 삼아 맞붙은 싸움이었다. 그러나 문추가 아무리 하북의 맹장이라 하나 관우와 더 이상 싸울 장수는 못 되었다. 위험을 느낀 문추가 슬며시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대검으로써는 그를 당할 수가 없다고 여긴 문추가 도망가는 척하다 쇠반궁으로 철궁을 쏠 작정이었다. 그러나 관우에게는 그 작전도 효과가 없었다. 그를 뒤쫓으며 둘째 화살, 셋째 화살을 피한 관우였다. 관우가 탄 말이 적토마인지라 네 번째 화살을 쇠반궁에 올려놓기 전에 관우는 이미 바싹 문추의 등 쪽으로 다가가 있었다. 관우의 청룡도가 번쩍하고 빛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문추의 목이 말 아래로 떨어졌다. 목 없는 주인을 등에 실은 채 한동안 문추의 말은 황하 하류로 달려갔다.
"적장 문추의 머리를 관운장이 떨어뜨렸다."
조조는 그 소식을 접하자 중군을 이끌어 문추의 군사를 덮쳤다. 조조군이 울리는 북소리, 징 소리, 뿔피리 소리에 문추군은 이미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관우에 의해 문추의 목이 떨어질 때부터 이미 겁에 질려 있던 군사들이라 제대로 싸움이 될 리 없었다. 창칼에 쓰러지는 자, 도망가다 황하에 떨어져 빠져 죽는 자. . . , 이렇게 새벽까지 하북군의 태반이 속절없이 조조군의 밥이 되고 말았다. 그때 유비는 출진 때부터 문추에게 따돌림을 받아 후진을 이끌고 있었다. 간신히 도망쳐온 선봉의 병사들부터 하북군 제 1진의 참패 소식을 전해 듣고 전군에 영을 내렸다.
"후진도 안심할 수 없다. 엄중히 진영을 지키도록 하라!"
유비는 목숨을 건져 도망쳐온 패주병들에게 물어 보았다.
"문 장군을 친 적장은 누구이더냐?"
"지난번 안량 장군을 친 수염이 길고 얼굴이 붉은 적장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비는 날이 새자 한 부대를 이끌고 전선 가까이까지 말을 몰았다. 황하의 지류는 넓은 평야에 작고 큰 호수를 무수히 매달고 있었다. 때마침 붉은 해가 떠오르자 짙은 안개가 걷히며 산도 호수도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조조군의 섬멸전은 아침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도 강 건너 저쪽에는 많은 군사들이 이리 쫓고 저리 쫓으며 포효하고 있었다.
"바로 저 흰 깃발을 꽂은 무리 중에 그놈이 있습니다."
길잡이로 데려온 패주병이 깃발이 펄럭이는 곳을 가리켰다. 깃발 아래에는 유난히 풍채가 좋은 한 장수가 있었다. 유비는 잠시 눈을 똑바로 뜨고 주시하였다. 그러자 글씨가 뚜렷이 보였다. 글씨 밑에 있는 관우의 이름을 보자 유비는 눈을 감고 천지신명께 감사했다.
'아!. . . 의제 운장이 살아 있었구나. 천지신명께 감사를 올리나이다.'
유비가 눈앞에 관우를 두고도 만날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급한 전갈이 왔다. 조조군이 후방의 호수를 건너 퇴로를 끊는다는 전갈이었다. 유비는 황급히 후진으로 돌아온 후 그 후진도 위태로움을 느껴 다시 20리쯤 퇴각했다. 그제야 원소의 원군이 겨우 강을 건너왔다. 유비는 원군과 합류하여 관도 땅으로 향했다. 그때 원소는 관도에 이르러 영채를 세우고 있었다. 유비가 그곳에 이르기 전에 관우에 의해 또 문추의 목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원소에게 전해졌다. 과도. 심배 두 대장이 그 소식을 듣자 분연히 원소 앞에 나아가 진언했다.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번에 문추를 친 놈도 역시 현덕의 의제 관우라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인가?"
"이번에는'한수정후 운장관우'란 기를 들고 싸움터에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당도했다. 원소는 유비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오게 하였다. 유비가 원소 앞에 이르자 거듭되는 아군의 참패에 속을 끓이고 있던 원소는 유비를 보자마자 외쳤다.
"대이(큰 귀) 공, 이번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오. 저자를 끌어내 목을 베라."
유비가 놀라 외쳤다.
"명공께서는 무슨 일로 이러십니까?"
원소가 노기등등하여 외쳤다.
"네 동생 놈을 시켜 이제 또 내가 아끼는 장수를 죽였다. 그러고도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유비는 이번에는 원소의 말에 가슴이 섬뜩하였다. 관우가 조조의 진영에 있음을 몸소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가만히 마음을 달래며 원소에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명공께선 스스로 조조의 술책에 넘어가시렵니까?"
"네 목을 자르는 것이거늘, 어찌 조조의 술책에 넘어간다 하는가?"
"조조가 운장을 시켜 안량. 문추를 치게 한 것은 오로지 명공의 심화를 돋우어 이 비를 죽이기 위함입니다. 이 비를 미워하는 조조가 명공의 손을 빌려 저를 죽이기 위한 계책입니다. 바라건대 명공께서는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유비가 짐짓 얼굴을 밝게 하여 조용히 말했다. 원소는 잠시 생각에 잠겨 드니 어느새 조금 전의 노기가 사라진 얼굴이 되었다.
"그 말을 들으니 나에게도 오해가 있었소. 만일 한때의 화풀이로 공을 죽였더라면 원소는 어진 이를 멀리한다 하여 천하의 비웃음을 받을 뻔하였소."
노기가 풀리자 원소는 정중히 유비를 좌상으로 청한 뒤 곽도. 심배를 꾸짖어 물리쳤다. 유비가 거듭 감사하며 입을 열었다.
"명공께 이토록 관대한 은혜를 입고도 갚을 길이 없으니 부끄러운 몸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유비가 감사의 말을 하자 원소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이렇게 패전을 거듭한 까닭은 귀공의 의제인 운장이 적군 솟에 있기 때문이오. 무슨 방도가 없겠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번 귀공의 힘으로 그를 이쪽으로 청할 수는 없겠소? 만약 그가 온다면 안량. 문추가 있는 것보다 열 배는 더 든든할 것이오."
"제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을 운장에게 알려 주기만 하면 그는 밤을 새워서라도 이리로 달려올 것입니다."
"어찌하여 공은 그런 묘계를 지금까지 헌책하지 않았소?"
"의제와 저 사이에 소식이 두절되어 있을 때도 의심을 받아 왔었습니다. 만일 은밀히 의제에게 서신이라도 보냈더라면 당장 화를 입지 않았겠습니까?"
"잘 알겠소. 이젠 의심치 않을 테니 즉시 그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하시오."
유비는 그날 밤 등불에 심지를 돋우고 붓을 들어 관우에게 보낼 글을 쓰고 있었다.
'아. . . 다시 만날 날이 가깝구나!'
유비의 가슴은 어느새 관우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젖어 있었다. 유비가 글을 썼으나 관우가 적진에 있는지라 그것을 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서신을 전할 마땅한 사람도 없었다. 이에 궁리를 거듭하는 가운데 며칠이 흘러갔다. 유비가 관우에게 보낼 서신을 전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는데 원소가 그런 유비를 달랬다.
"패전을 거듭한 후 싸움은 장기전의 양상을 띠고 있소. 잠시 군사를 물렸다가 다시 일전을 겨루는 것이 좋겠소. 그럴 동안 운장에게 보낼 사람을 구하도록 합시다."
유비는 하는 수 없이 원소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떠나가는 관운장 천리길을 닫다
관우 때문에 크게 패한 원소는 군사를 물려 무양의 요새로 진영을 옮겼다. 원소가 군사를 물리자 조조는 하후돈에게 관도 길목을 지키게 한 후 자신은 일단 허도로 돌아갔다. 조조는 그동안 싸움에 지친 군사들을 위로하며 잔치를 베풀었다. 조조는 여러 고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관우의 공훈을 특히 치하한 후 여건을 돌아보며 순유를 칭찬했다.
"연진 싸움에서 내가 짐짓 양초를 앞세우고 말을 풀어 놓은 것은 적을 끌어들이기 위해 계략을 쓴 것이었네. 그런데 순유가 이미 내 뜻을 알아채고 있더군."
조조의 말을 듣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새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흥이 오를 무렵이었다. 여남에서 파발마가 달려와 변을 알렸다. 여남에는 전부터 유벽과 공도라고 하는 두 비적이 있었다. 본래는 황건의 잔당들이었다. 일찍이 토벌을 위해 조홍을 보냈는데 비적의 기세가 강성하여 조홍은 큰 타격을 받고 계속 퇴각 중이라는 보고였다.
"급히 원군을 보내지 않으면 여남 지방은 그들의 손에 떨어지게 되므로 두고 두고 큰 화근을 남기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은 주연이 벌어지던 자리인지라 이 문제로 여러 고관들의 의견이 오고 갔다. 관우가 문득 일어나 조조에게 청했다.
"원컨대 저를 파견해 주십시오. 견마지로(개나 말이 하는 수고)를 다하여 그들을 물리치겠습니다."
"운장은 이번 싸움에서 지대한 공훈을 세웠소. 그런데 나는 아직 공에게 아무런 대접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또 노고를 끼치게 할 수가 있겠소?"
조조가 싸움을 자청하는 관우를 보며 의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관우는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은 채 태연히 말을 이었다.
"필부는 옥좌를 감당키 어렵다는 말처럼, 소생 또한 안일하면 병이 생기고 맙니다. 농부가 괭이를 손에서 놓으면 약해지듯이 소생에게도 무사안일은 몸을 해치는 것과 같습니다."
관우의 천연덕스런 말에 조조는 마음 한 구석에 의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쾌히 응낙했다. 이번 싸움의 공훈이 큰 그의 청을 들어줌으로써 또 한 번 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여 주자는 생각에서였다. 조조는 관우에게 5만의 군사를 붙였으며 우금. 악진을 부장으로 삼게 했다. 다음 날 관우가 여남으로 떠나자 순욱이 조조에게 관우를 보낸 것을 걱정하며 말했다.
"운장을 보낸 것이 염려됩니다. 그의 마음이 항상 유비에게 가 있으니 출정 중에라도 그의 소식을 듣게 되면 그리로 갈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를 출정토록 하셨습니까?"
순욱의 말에 조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것이 마음에 걸리오. 그러나 유비의 두 부인을 두고 그가 떠날 리는 없소. 그러나 이번에 한 번 더 공을 세우고 돌아오면 다시는 내보내지 않도록 하겠소."
여남 땅에 이른 관우는 오래 된 사찰에 본진을 세워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날 밤이 되자 보초소대가 첩자로 보이는 수상한 두 사람을 발견하고 그들을 붙잡아 왔다. 관우가 끌려온 두 사람을 보니 그중의 한 사람이 뜻밖에도 손건이었다.
"아니, 이게 누군가?"
깜짝 놀란 관우가 손수 그의 오라를 풀고 좌우의 군사를 물리친 다음, 둘은 마주 앉았다.
"공과 헤어진 후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만났구려. 그래 무슨 일로 이곳으로 오게 되었소?"
"서주를 떠난 이후 저도 이 여남으로 쫓겨와 떠돌아다니던 중 다행히 유벽이 거두어 주어 그에게 의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어쩌다가 조조에게 가게 되었습니까? 또 감. 미 두 부인께서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손건이 묻자 관우는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소상히 손건에게 들려주었다. 관우는 얘기를 끝낸 후 손건에게 다시 물었다.
"공은 혹시 가형 현덕의 행방을 알고 계시오? 지금 어디에 계시오?"
"근자에 소문을 듣자 하니 현덕 공은 하북의 원소에게 가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그리로 가고 싶었으나 아직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원소가 유벽에게 꽤 많은 물자와 재화를 보내 왔습니다. 그 대신 하북과 동맹을 맺고 조조군을 치라는 조건이었습니다. 내일 유벽과 공도 두 사람은 싸움터에 나가 짐짓 패한 체하여 달아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허도에서 급히 두 부인을 모시고 이곳으로 오십시오. 두 부인을 모시고 원소에게 투항하면 현덕 공을 뵈올 수 있을 것이오."
유비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은 관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격에 겨워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관우가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고 손건에게 물었다.
"유벽과 공도가 어찌하여 도망을 친다는 말이오?"
"비록 도적의 두목이긴 하나 유벽과 공도는 전부터 마음속으로 깊이 공을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운장께서 출정하였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원소와의 맹약도 있어 싸우지 않을 수 없을 테니, 공은 그들을 적당히 공격하십시오."
"알겠소. 이미 형님의 거처를 안 이상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갈 것이오. 그러나 내가 안량. 문추를 죽였으니 형님께서 그 일로 무슨 변이나 당하시지 않았을까 그것이 걱정이오."
"그럼, 이 손건이 먼저 하북으로 가서 미리 그 주위의 사정을 염탐해 보겠습니다. 공은 두 부인을 모시고 오십시오. 그러면 중간까지 마중을 나가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주군의 무사한 모습을 뵙고 싶소. 단 한 번 그 얼굴을 뵙는 것만으로도 관우가 소원을 이루는 것이오. 그 이후에는 죽어도 목숨이 아깝지 않을 것이오."
관우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날 밤이 되자 관우가 몰래 뒷문으로 손건과 또 한 사람을 내보냈다. 이튿날, 관우가 군사를 이끌어 나가자 유벽과 공도도 나란히 진두에 나타났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조정을 거스르려 하느냐?"
관우가 그들을 꾸짖었다.
"너는 주인을 배반하지 않았느냐? 네가 나를 책망하니 가소롭구나."
공도와 유벽도 관우의 말에 대꾸하며 화를 돋우었다. 거짓으로 관우와 공도가 험한 말을 주고받으며 화를 내지만 군사들은 알 리 없었다. 공도의 말에 관우가 다시 화를 내며 소리 높여 외쳤다.
"내가 언제 주인을 배반하였다는 말이냐?"
"유현덕이 지금 하북의 원본초에게 가 있는데, 너는 지금 조조의 휘하에서 굽신거리고 있지 않느냐?"
관우는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몹시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짓고는 청룡도를 휘두르며 말을 달렸다. 공도가 그런 관우를 보더니 두려움을 느낀 척하며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그렇게 한동안 쫓고 좇기며 달아나던 공도가 몸을 돌려 관우에게 가만히 말했다.
"옛 주인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이제 여남을 공에게 내드릴 것이니 급히 이곳을 평정하고 허도로 돌아가시오."
공도와 유벽은 그 말을 끝내자 말을 달려 달아났다. 관우는 뒤쫓아오는 군사들을 이끌며 그들을 추격했다. 관우가 군사를 거느려 맹추격을 하자 공도와 유벽군은 크게 두려워하는 것처럼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관우는 힘들이지 않고 여남을 평정하고 백성들을 위로하여 동요하지 않도록 한 다음 곧장 허도로 돌아왔다. 관우가 여남을 평정하고 돌아오자 조조는 성 밖에까지 나와 관우를 영접했다. 관우를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조조가 권하는 술잔을 사양하지 않고 마신 관우는 잔치가 끝나 집으로 돌아가자 문밖에서 두 형수에게 절하며 문안을 드렸다.
"방금 여남에서 개선하였습니다.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그러자 감 부인이 물었다.
"아주버님은 두 번이나 싸움터에 나갔다 오셨는데, 이번에는 황숙의 소식을 들으셨는지요?"
감 부인. 미 부인은 벌써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관우는 술기운을 토해내면서 망연한 표정이 되더니 대답했다.
"아직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좀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 말에 미 부인도 감 부인도 주렴 뒤에 엎드려 한동안 소리 내어 울면서 말을 이었다.
"필경 주인께서는 어디선가 싸우시다 돌아가신 게지요?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리 소식 한번 듣지 못한다는 말씀입니까? 큰아주버님께서는 우리 두 사람이 괴로워할까 봐 숨기고 계신 것일 테지요."
관우는 두 형수의 통곡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만은 없어 슬며시 절하며 물러나왔다. 그때 관우를 수행하여 여남을 다녀온 늙은 군사 하나가 안쪽의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 군사는 두 부인의 통곡 소리를 듣다못해 슬며시 다가가 아뢰었다.
"두 부인은 이제 울음을 거두십시오. 주인께선 지금 하북의 원소에게 가 계십니다."
이 말에 두 부인은 울음을 그치더니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감 부인이 그 군사에게 물었다.
"그대가 어찌하여 아느냐?"
"이번에 관 장군을 따라 여남에 갔을 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 두 부인은 급히 관우를 불러들이게 했다. 관우에게 이 사실을 숨긴 까닭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황숙께서는 아주버님을 저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주버님은 조조의 은혜에 얽매여 그 새 지난날의 의를 잊으셨다는 말입니까? 어찌하여 우리에게 황숙이 원소에게 가 계시다는 사실을 숨기십니까?"
관우는 누군가가 이 사실을 두 부인에게 얘기했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보기 전에 두 부인의 책망이 매서워 머리를 조아리며 사실을 밝혔다.
"형님이 원소에게 가 계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감히 두 형수분께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혹시라도 이 일이 새어나갈까 두려워서였습니다. 이런 일은 서서히 도모해야지 급히 서두르면 아니 됩니다."
두 부인은 관우의 말에 그제야 부드러운 얼굴이 되어 다시 궁금증이 이는 듯 물었다.
"아주버님은 그 일을 누구한테서 들으셨습니까?"
"손건을 만나 그의 입을 통해 들었습니다. 손건이 하북으로 가서 다시 그곳의 동정을 엿본 후 제가 두 형수분을 모시고 가면 마중 나오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이 허도를 탈출할 계획이신가요?"
그러자 관우는 황망히 고개를 돌려 뜰안을 살펴본 후 말문을 열었다.
"아직은 알 수가 없습니다. 형님을 만나는 날까지 잠자코 계십시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입니다.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마십시오."
관우가 이렇게 말하자 두 부인은 관우를 성급히 오해했다는 거에 몸 둘 바를 몰라하며 말했다.
"아주버님이 알아서 처결토록 하시오."
관우는 두 형수가 그렇게 말하자 안심하고 안채를 물러나왔다.
한편 관우의 부장이 되어 여남에 출정했던 우금도 유비가 원소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는 날 조조에게 나아가 이 사실을 조용히 알렸다. 이 말을 듣고 조조는 장료를 불러 물었다.
"근자에 운장의 동정은 어떤가?"
"술도 사양한 채 문간방에서 글만 읽고 있습니다."
며칠 후 장료가 이렇게 대답하자 조조는 관우의 속마음을 떠 보도록 일렀다. 장료가 관우에게 갔을 때 관우는 유비를 찾아갈 방도만 궁리하고 있었다.
"듣자하니 형이 이번 싸움터에서 현덕 공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기에 그 일을 축하하러 왔습니다."
장료의 말에 관우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관우는 더 숨길 필요가 없다고 여겨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비록 옛 주인이 계시는 곳을 알았다고는 하나, 아직 뵙지를 못하니 무엇이 기쁘겠소?"
그러자 장료가 넌지시 물으며 관우를 바라보았다.
"형과 현덕 공의 교우를 저와 형과의 교우에 비한다면 어떠합니까?"
"나와 공과의 사이는 친구의 교분이오. 그러나 황숙과 나는 친구의 교분에다 형제요, 또한 군과 신의 의를 더했으니 어찌 함께 비하겠소?"
관우가 주저없이 대답했다. 장료가 다시 물었다.
"이제 현덕 공이 하북에 있음을 알았으니 형은 그리로 가시겠소, 아니면 여기 계시겠소?"
"지난날의 약속이니 어찌 스스로를 배반하겠소. 마침 공이 찾아오셨으니 아무쪼록 공이 승상께 잘 말씀드려 내 뜻을 전해 주시오."
관우는 장료에게 이렇게 말하며 자기의 마음을 전하게 했다. 장료는 그의 철석 같은 마음에 감탄하는 한편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조조에게 돌아간 장료는 사실대로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마음은 벌써 하북의 유현덕에게 가 있습니다."
조조는 묵묵히 그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그를 끝내 붙들지 못한다는 말인가?"
조조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밝은 얼굴이 되어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렇지. 내게 그를 붙잡아 둘 계교가 한 가지 있다."
조조는 그날부터 부문 기둥에 패를 내걸었다. 함부로 출입하는 것을 엄금한다는 패였다.
한편 장료가 돌아가고 난 후 관우는 상부에서 조조의 연락이 있을까 하여 기다렸으나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어느 날 문간방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이었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다가왔다.
"우 장군께 이것을 전합니다. 나중에 보시기 바랍니다. 보신 후 답장을 준비해 두십시오."
그 사람은 한 통의 서찰을 슬쩍 손에 쥐어 주고는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 관우가 깜짝 놀란 가운데도 서찰을 품에 감춘 채 방까지 들어와 그제야 서찰을 꺼내 보았다. 놀랍게도 그 서찰은 유비가 쓴 것이었다. 관우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대와 나는 일찍이 도원에서 의를 맺은 형제 사이였네. 내가 본래 불초한 데다가 또한 때마저 이롭지 못한 탓인가. 이제는 맹세도 헛되고 옛 은의는 잊혀지고 끊어진 듯하네. 만일 그곳에서 그대로 부귀를 누리고 공명을 얻고자 한다면 그대에게 보답한 바 없는 나로서는 적으나마 이 비의 머리를 선물하여 그대로 하여금 큰 공을 이루도록 하겠네. 몇 자 글로써 어찌 할 말을 다 하겠나. 하남의 하늘을 바라보며 죽기를 각오하고 그대의 회신을 고대하겠네. >
관우로서는 실로 야속하고 원망스러운 유비의 글이었다. 부귀, 영달 그런 것 때문에 의를 저버릴 관우라고 여기다니,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관우는 통곡하며 탄식할 뿐이었다.
'형님을 찾지 않은 것은 계시는 곳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어찌 부귀를 탐하여 옛 맹세를 저버린다는 말입니까?'
그날 밤 관우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도 문간방에 홀로 앉아 있는데 집을 지키는 군사 하나가 와 알렸다.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관우가 그를 청해 맞고 보니 일전에 유비의 서찰을 전해 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관우는 좌우를 모두 물린 뒤 그에게 물었다.
"공은 뉘시오."
"원소의 가신 진진이라는 사람입니다. 형님께서 귀공을 기다리심이 간절하십니다. 공의 의향은 어떻습니까?"
"내 마음이야 조급하기 짝이 없소. 그러나 처음과 끝이 한결같지 않은 자는 군자라고 할 수 없소. 내가 처음 조조에게 올 때 나의 뜻을 뚜렷이 하였으니 떠날 때도 내 뜻을 분명히 알릴 것이오. 내가 써 둔 서찰을 귀공께서는 우선 형님께 전해 주시오. 나는 조조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두 형수분을 모시고 가겠소."
관우가 이렇게 말하자 진진이 물었다.
"만일 조조가 장군과의 작별을 허락하지 않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관우가 결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때는 육신을 버리고 혼백이 되어 형님에게로 갈 것이오."
관우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써 둔 글을 진진에게 펼쳐 보였다.
<듣기에 의로움은 진정을 저버리지 않으며, 충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관우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 예와 의를 익힌 바 있습니다. 저 양각애와 좌백도의 옛일(전국시대 사람, 친구 사이로 함께 벼슬길에 올라 초나라로 가다 큰 눈을 만나 동사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좌백도가 자신의 옷과 양식을 양각애에게 모두 주고 자신은 빈 나무 등걸 속에 들어가 죽었다)을 읽을 때는 세 번이나 감탄하며 울었습니다. 지난번 하비성을 지킬 때 안으로는 곡식이 바닥나고 밖으로는 구원 오는 군사가 없으므로 저는 오직 적을 베다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형수님이 곁에 계시므로 형님의 뜻을 저버리고 감히 제 한 몸만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고 형님과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근래 여남에 가서야 비로소 형님의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곧 조조를 만나 조조에게 작별을 고한 뒤 두 형수분을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 만약 이 관우가 딴마음을 품었다면 신령과 사람이 아울러 저를 죽임으로써 벌을 내릴 것입니다. 붓과 종이로는 마음속의 진정을 다 쓸 수가 없습니다. 형님을 우러러 뵈올 날이 이제 머지않았으니, 바라옵건대 이 관우의 참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
관우의 글을 받아든 진진은 급히 허도를 떠났다. 진진이 떠나자 관우는 두 형수에게 유비에게서 서찰이 왔음을 알리고 조조가 있는 승상부로 갔다. 그러나 조조는 관우가 하직을 청하러 올 줄을 알고 이미 문 앞에 '근사방객고문(방문객의 문 두드림을 삼가함)'이라고 쓴 피객패를 내걸고 있었다. 손님은 대문에 이 피객패가 붙어 있을 때는 어떤 볼일이 있어도 잠자코 돌아가는 것이 예의였다. 관우는 잠시 동안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다음 날도 아침 일찍이 와 보니 여전히 그 패가 그의 방문을 막고 있었다. 다음 날은 저녁때를 택하여 부문에 가 보았다. 그러나 문은 초저녁부터 닫혀 있었다. 관우는 집으로 돌아와 우선 하비성에서부터 자신을 따랐던 사람들 20여 명에게 명했다.
"일간 두 부인께서 이곳을 떠날 것이니 비밀히 출발 준비를 하라."
관우는 출발 준비를 할 때 두 형수에게는 물론 하인들에게도 엄명을 내렸다.
"이 집 안에 있는 가구는 물론, 전에 조조가 나에게 선물한 금은과 비단도 모두 봉하여 남겨 두되 한 가지도 가지고 가서는 안 된다."
출발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관우는 매일의 일과처럼 부문에 나가 보았다. 그렇게 헛걸음하기를 7, 8일이나 했다.
'도리가 없다. 장료를 찾아가 의논해 보자.'
그러나 장료도 병을 핑계로 만나 주지 않았다.
'이는 필시 조 승상이 나를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떠나기로 작정한 이상 내 어찌 이곳에 더 머물 수 있으랴.'
관우는 그날 밤 붓을 들어 조조에게 보내는 글 한 통을 썼다.
<관우는 일찍이 황숙을 섬겼으며 생과 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했으니 하늘과 땅이 이를 지켜 보았습니다. 지난날 하비성을 잃었을 때 승상께 새 가지 청을 드린 바, 승상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알고 보니 옛 주인은 원소의 군중에 의탁하고 있다 하니, 지난날의 맹세를 생각하건대 어찌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승상께서 베푸신 은혜가 긴하나 잊기 어려운 것이 옛 주인과의 은의입니다. 이에 특별히 글을 올려 하직을 고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다 갚지 못한 은혜는 후일로 기약하겠습니다. >
관우는 사람을 시켜 글을 승상부로 전하게 했다. 조조에게서 그 동안 받은 금은 보배를 일일이 봉하여 곳간에 넣은 다음, 방의 벽에는 한수정후의 인뒤웅이를 끌러 걸어두었다. 올 때 입었던 그 차림뿐, 가지고 가는 것이라고는 청룡언월도와 적토마, 그리고 그 동안 즐겨 읽던 <춘추> 책 한 권뿐이었다. 한 대의 수레가 집으로 오자 두 부인을 오르게 한 후, 종자 20여 명으로 하여금 수레 옆과 뒤를 호위하게 했다. 관우 자신은 적토마에 올라 청룡언월도를 들고 북쪽 성문으로 향했다. 북문에 이르자 성문의 파수병들이 수레를 가로막았다.
"수레에 손을 대는 자는 단칼에 목이 날아가리라!"
관우가 눈을 부릅뜨고 칼을 비껴들며 호령하자 파수병들은 기가 질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북문을 나오자 관우는 종자들에게 일렀다.
"필경 날이 새자마자 추격대가 올 것이니라. 뒤쫓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들을 모두 막을 테니, 부디 두 부인께서 놀라시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렇게 일러 놓고 관우는 뒤로 처졌다. 그리고 북대가의 관도(국도)를 유유히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한편 관우와 감. 미 부인이 머물렀던 저택에는 새벽녘이 되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시각마다 순찰을 도는 순라대원이 여느 때처럼 관아의 거리를 돌고 나서 감. 미 부인이 묵는 안채 앞에 이르렀다.
"이상한 일이로군. 중문이 열려 있는데 인기척이 없지 않은가?"
뚜벅뚜벅 문 안으로 들어갔던 순라 대원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큰일 났네 그려. 텅 빈 집이야!"
순라 대원들은 출입이 금지된 안채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열 명의 아리따운 여인들이 벙어리처럼 우두커니 방을 지키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이오? 이곳에 기거하던 두 부인과 하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소?"
순라 대원이 묻자 그중 한 여인이 말없이 북쪽을 가리킬 뿐이었다. 이 열 명의 여인은 조조가 관우에게 보냈던 여인들이었다. 관우는 이들에게 두 부인의 시중을 들게 했는데 떠나면서 집에 남겨 둔 것이었다. 그날 아침 조조는 무슨 예감이라도 들었든지 여느 때보다 일찍 모사들을 불러 놓고 관우에 대해 의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수하 하나가 와서 관우가 써 놓고 간 서신을 바쳤다. 조조는 그 서신을 읽고 놀란 목소리로 탄식했다.
"운장이 기어이 떠나고 말았구나!"
이어 순라대의 보고가 들어왔다.
"수정후의 인뒤웅이, 금은보화와 비단 등속, 그리고 여인 열 명을 그대로 둔 채 관 공과 두 부인이 원래 데려왔던 자들과 짐만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또 얼마 있지 않아 북문을 지키던 수문장이 말을 달려와 고했다.
"관 공이 북문을 위협하여 빠져 나갔습니다. 수레와 기병 20여 명과 함께 북쪽으로 갔습니다."
연이어 들어오는 보고에 모여 있던 이들이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조조가 침통한 얼굴로 잠시 입을 다물고 있는데 한 장수가 나서며 아뢰었다.
"제게 철리 3천만 내려 주십시오. 관운장을 사로잡아 승상께 바치겠습니다.
조조가 그를 보니 원비장군 채양이었다. 조조의 장수들 중에 장료와 서황이 관우와 교분이 두터웠고 나머지 장수들도 모두 관우를 경복하는 터였다. 그러나 유독 채양만은 평소에 관우를 가벼이 여기고 있었으므로 그를 추격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채양을 꾸짖어 물리쳤다.
"나에게는 무정한 사람이나 관 공은 역시 대장부다. 옛 주인을 잊지 않으며 오고 감을 분명히 하지 않았느냐. 너희들은 마땅히 그를 본받아야 하리라."
그러나 정욱이 정색을 하고 나섰다.
"관 공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습니다. 승상께서 그토록 관대히 대하시면 우리 장수들의 사기가 저하될까 두렵습니다."
"관 공의 죄라는 것이 무어요?"
"첫째로 은혜를 잊은 죄요, 둘째로 하직 인사도 하지 않고 몰래 집을 빠져 나간 죄입니다. 다음으로 하북의 사자와 비밀리에 밀서를 주고받음이 그 죄입니다."
"그렇지 않소. 관 공은 처음부터 내게 떠나는 것을 허락받은 몸이었소. 약조를 해 놓고 굳이 그 이행을 회피해 온 것은 이 조조지 그가 아니었소."
"그러나 그가 원소에게 가는 것을 그냥 둔다면 그것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격입니다. 지금 죽여 화근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뒤따라가 그를 죽인다면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조조를 가리켜 신의가 없다고 할 것이오. 장부와 장부의 약속이니 그를 뒤쫓지는 마시오."
조조는 정욱의 말에 다시 한번 다짐을 둔 뒤 장료에게 탄식 섞인 분부를 내렸다.
"운장이 금은을 봉해 두고 인마저 두고 떠나니 재물이나 벼슬로도 그의 뜻을 돌릴 수가 없구나. 실로 공경할 만한 인물이오. 아직 떠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오. 떠나기 전에 내가 그를 피했다는 것이 부끄럽소. 내가 이 기회에 차라리 나의 참다운 정을 보이고 신의 있는 작별을 고하고 싶소. 그대가 뒤쫓아가 내가 전송하러 나오니 잠시 기다리라 이르시오. 떠나는 관 공에게 노자와 전포를 내려 오늘을 기념할까 하오."
장료는 명을 받들어 홀로 말을 달렸다. 이어 조조는 관우가 노자로 쓸 금은과 포의를 준비토록 한 후 수십 기만 거느리고 장료의 뒤를 따랐다. 관우의 적토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명마였다. 그러나 두 부인이 탄 수레와 함께 가기 때문에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장료가 홀로 말을 타고 뒤쫓으니 얼마 달리지 않아 관우를 만날 수 있었다.
"운장,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관우가 그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장료가 뒤쫓아오고 있었다. 관우는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터라 두 부인이 타고 있는 수레 옆으로 가 일렀다.
"너희들은 수레를 모시고 먼저 가거라."
관우는 두 부인이 놀라지 않게 부드럽게 이른 뒤 말머리를 돌렸다. 청룡도를 비껴든 관우가 마주 오는 장료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역시 문원이었구려. 그대는 나를 데려가려고 쫓아오는 길인가?"
장료는 관우의 물음에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승상께서 몸소 형을 전송코자 하시어 알리러 온 것이오. 형은 승상께서 오실 때까지 잠시 머물러 주시오."
"승상이 여기를?. . . 그러나 철기를 거느리고 오신다면 나는 죽기로 싸울 따름이오."
관우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리더니 패릉교 한가운데로 달려가 말머리를 돌려 세웠다. 그가 다리 위 한복판을 가로막고 서는 것은 많은 군사와 싸우더라도 다리 위에서는 사면으로부터 포위당할 염려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 조조가 철기 수십을 거느리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관우가 보니 조조의 뒤를 따라 허저. 서황. 우금. 이전 등의 장수들도 뒤따르고 있었다. 모두 갑옷을 입지 않고 패검 외에는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다. 조조는 관우가 말을 탄 채 다리 위에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장수들에게 명했다.
"그대들은 말을 멈추고 좌우로 늘어서도록 하라."
관우는 장수들의 손에 병장기가 없음을 보았는지라 경계하는 기색을 풀고 부드러운 얼굴로 조조를 대했다.
"운장은 어찌 그리 서둘러 떠나시오?"
관우는 말 위에 앉은 채 절을 하며 예를 표한 뒤 조조의 원망 섞인 물음에 답했다.
"일찍이 승상께 아뢰었던 대로, 옛 주인이 계신 곳을 알게 되었으니 급히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디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도 재상으로서 사람들로부터 신의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오. 약조한 일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소?"
"크신 은공 언제인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오나 옛 주인 계신 곳을 알고도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승상께 하직 인사를 하기 위해 여러 번 승상부로 갔으나 뵙지 못해 글로 인사를 대신하였습니다. 그동안 승상께서 내리신 금은은 모두 곳간에 봉해 두고 인수도 걸어두고 왔으니 바라건대 지난날의 약조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관 공의 방문이 있을 것으로 알고 미리 피객패를 걸어 둔 것이었소. 관 공을 붙들어두고자 하는 충정이었으니 과히 허물치 마시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장군이 먼길을 가는 데 불편이 있을까 염려되어 약간의 노자나 드리고 작별할까 함이오."
조조의 말이 끝나자 한 장수가 관우에게 황금이 가득 담긴 쟁반을 바쳤다. 그러나 관우는 선뜻 받으려 하지 않았다.
"머물러 있는 동안에 승상으로부터 과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아직 은혜를 다 갚지 못한 몸이니 이 황금은 부디 공 있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장군이 세운 큰 공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고자 하는 것이오. 어찌 이렇게 굳이 사양하려 하시오?"
"보잘것 없는 작은 수고입니다. 제발 잊어 주십시오."
관우는 끝내 조조가 주는 황금을 사양했다.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관 공 같은 천하의 장부를 내가 복이 없어 붙들어두지 못함이 한스럽소. 여기 비단 전포 한 벌을 가져왔소. 나의 정표로 여기고 사양하지 마시오."
한 장수가 말에서 내려 비단 전포를 두 손으로 들고 와 관우에게 바쳤다. 관우도 차마 그것까지는 사양하지 못했다. 관우는 만일을 경계하며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청룡도 끝으로 비단 전포를 걸어 어깨에 걸쳤다.
"승상께서 내리신 전포이니 고맙게 받겠습니다. 다음에 뵈올 날을 기약하며 오늘은 이만 길을 재촉하겠습니다."
관우는 이렇게 인사말을 남기고 적토마를 몰아 북쪽으로 떠나갔다. 관우가 유유히 말머리를 돌려 떠나는 걸 본 허저가 볼멘소리를 했다.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찌 떠나는 걸 보고만 계십니까?"
다른 장수들도 제각기 한 마디씩 불평을 늘어놓았다.
"은혜로운 전포를 칼끝으로 받다니. . ."
"승상께서 지나치게 관대하게 대하시니 그가 예의조차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를 왜 사로잡지 않으십니까?"
조조가 그들을 만류하며 타일렀다.
"그는 단기이고 우리는 수십 명이다. 어찌 그 정도의 경계도 하지 않겠느냐? 내 이미 그를 보내기로 하였으니 뒤쫓지 말라."
조조는 장수들을 거느리고 다시 허도로 향했다.
"적이건 아군이건 무인다운 정신을 접하는 것만큼 보람 있는 일도 없다. 그대들도 그와 같은 인물을 만났다는 것을 은덕으로 여기라. 그의 심지는 본받을 만한 것이리라."
조조는 관우를 떠나보낸 것이 못내 아쉬운 듯 탄식해 마지않았다. 관우 또한 조조와 같은 대인을 만났기에 의로운 무인으로서의 기개를 펴며 옛 주인 유비에게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관우는 조조가 뒤쫓아와 시각이 뜻밖에 지체되었으므로 서둘러 말을 몰았다. 그러나 20여 리를 뒤쫓았으나 수레가 보이지 않았다. 관우가 당황하여 이곳저곳을 말을 달리며 수레를 찾아 헤매고 있는데 문득 산 위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관 장군께서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관우가 흘낏 산 위를 바라보니 산 위에서 1백여 명쯤 되어 보이는 군졸들을 거느리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장수가 있었다. 그 장수는 아직 스물 안팎의 젊은 장수로 머리에는 누런 띠를 두르고 있었고 손에는 창을 들고 있었다. 관우는 청룡도를 치켜들며 마주 오는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젊은 장수는 관우 앞에 이르자 훌쩍 말에서 뛰어내려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더니 입을 열었다.
"소생은 양양 태생으로 이름은 요화, 자는 원검이라 하옵니다. 천하가 난리 속에 휩쓸리자 고향을 떠나 강호를 유랑하는 사이 5백여 명의 부랑자들을 모아 도적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패거리 중에 두원이란 자가 있는데 산을 내려갔다가 두 부인이 탄 수레를 이끌고 왔습니다."
"수레를 너희들의 산채로 끌어갔다는 말이냐?"
관우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당장이라도 산으로 말을 몰아갈 듯한 기세였다.
"잠깐만 기다려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수레를 호위하고 있는 자들에게 물으니 그 두 분은 뜻밖에도 한의 유황숙의 부인들이며, 또 장군께서 호송해 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자 곧 부인을 산 아래로 모시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원이 흉칙한 속셈까지 드러내며 반대하길래 제가 그놈을 죽였습니다. 그 목을 베어 장군께 바쳐 지은 죄를 빌고자 합니다."
요화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가지고 온 목 하나를 관우 앞에 내놓았다. 관우가 요하를 노려보며 물었다.
"산적의 두목인 그대가 어찌하여 한패거리의 목을 베어 나에게 갖다 바치는가?"
관우의 말에 요화가 다시 몸을 굽히며 대답했다.
"유황숙님과 관 장군님의 충절과 무용은 저도 이미 들은 바 있습니다. 아무리 도적질로 살아간다지만 아직 한 조각 밝은 마음을 지니고 싶기로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그렇다면 두 부인은 어디 계신가?"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곧 모시고 오겠습니다."
요화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말 위로 뛰어오르더니 산속으로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1백여 명의 졸개들에게 두 부인의 수레를 호위하게 한 채 요화가 앞장 서 산길을 내려왔다. 수레가 보이자 관우는 말을 달려갔다. 말에서 내린 관우가 수레 앞에 나아가 엎드려 절하며 문안을 드렸다.
"두 형수분을 놀라게 해 드려 죄스럽습니다. 이젠 안심하십시오."
두 부인은 아직도 두려운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요 장군이 없었다면 우리는 변을 당했을 것입니다. 요 장군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두 부인의 말을 들었으나 아직 그를 믿지 못하는 관우였다. 그러자 부인을 호위해 왔던 군사들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알렸다.
"한패거리인 두원이 두 부인을 서로 하나씩 차지하여 아내로 삼자고 하였습니다. 요화는 들은 척도 않고 저희들에게 부인은 어떤 분이며 어디로 가는 길인가 하고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저희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요화가 두 부인을 산 아래로 모셔다드리려 하니 두원이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요화가 그를 베어버렸습니다. 그 말을 듣고 관우는 요화에게 허리를 굽히며 감사를 표했다.
"두 부인이 무사함은 실로 그대의 공이오."
요화는 관우의 치하에 송구해하는 가운데도 조용히 청했다.
"바라옵건대, 소생도 언제까지나 산속에서 도적으로 살고 싶지 않으니 관 장군의 휘하로 거두어 주시기를 감히 청해 볼까 합니다. 여기 1백여 명의 보졸이 있으니 수레라도 호위하게 해 주십시오."
관우는 두 부인을 구해 준 것은 감사했으나 요화의 간곡한 청을 들어주는 것만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그들이 황건의 잔당이라는 것이 꺼림칙하기 때문이었다. 황건의 무리를 이끌고 다녔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자신은 물론 옛 주군인 유비의 명예도 더럽혀질까 걱정이 되었다. 관우는 그 청만은 거절했다. 요화는 또 노자에 보태 쓰라고 금은, 비단을 바쳤다. 관우는 이것도 사양했으나 그 뜻이 고마워 넌지시 이들에게 일러두었다.
"오늘 받는 고마움은 꼭 기억해 둘 것이오. 언젠가는 재회할 날이 있을 것이오. 이 관우이건, 현덕 공이건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문을 듣거든 꼭 찾아 주시오."
관우가 이렇게 말하니 요하는 거듭 송구해하며 절을 올린 다음, 부하들을 거느리고 산속으로 사라졌다. 관우는 다시 수레를 재촉하여 길을 떠났다. 길은 먼데 가을 해는 짧았다. 해가 기울자 일행은 어느 마을의 장원(벼슬아치가 소유한 땅)에 이르러 하룻밤 묵어가기로 하였다. 관우가 주인을 불러 청했다. 머리와 수염이 학처럼 흰 한 노인이 나와 관우를 맞으며 물었다.
"장군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오?"
관우는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저는 유황숙의 아우되는 관우라는 사람입니다."
"아니, 그럼 안량. 문추의 목을 벤 운장 공이란 말씀이오?"
노인은 놀라는 한편 기뻐하며 관우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럼 수레에는 누가 타고 있습니까?"
"유황숙의 두 부인께서 타고 계십니다.
노인은 더욱 놀라워하며 이들을 정중히 안으로 맞아들였다. 두 부인이 수레에서 내리자 노인은 딸과 손녀를 불러 부인의 시중을 들게 했다.
"귀빈이므로 잘 모셔야 한다."
노인은 딸과 손녀에게 일렀다. 노인은 옷을 갈아입은 후 두 부인이 있는 초당 위로 나와 인사를 했다. 관우는 두 부인의 옆에 손을 모은 채 시립해 있었다. 노인이 그런 관우를 보고 괴이쩍게 여기며 말했다.
"장군과 현덕 공과는 의형제 사이이니 두 부인은 형수가 되지 않소. 먼길에 피로하셨을 텐데 쉬지도 않고 왜 그렇게 예의만 지키고 있소?"
"세 사람이 결의형제를 맺었으나, 의와 예에 있어서는 군신의 관계여야 한다고 굳게 맹세했습니다. 아직까지 군신의 예를 어긴 적이 없습니다. 노인장에게는 그것이 이상하게 보이십니까?"
관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천만의 말씀이오. 이상하게 여긴 내가 잘못이오. 실로 드물게 보는 충절이오."
노인은 딸과 손녀를 불러 두 부인을 안으로 모셔 가 대접토록 한 후 자신은 초당에서 관우를 대접했다. 관우는 그제야 노인의 이름을 물었다.
"나는 성은 호, 이름은 화라고 합니다. 환제 때 의랑이라는 벼슬을 지냈습니다만, 지금은 벼슬길을 떠나 고향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노인은 이렇게 자기 소개를 하다 문득 생각난 듯 덧붙였다.
"내 자식은 호반이라고 하는데 지금 형양태수 왕식의 종사관으로 있습니다. 만약 장군께서 그곳을 지나시겠거든 내 아들에게 글 한 통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마침 그 부근을 지나야 하니 글을 써 주십시오."
노인과 밤새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날이 밝아 왔다.
여섯 장수의 못을 베며 오관을 돌파하다
다음 날이 되자 관우는 두 형수를 수레에 오르게 하고 호화 노인의 글을 받은 후 서둘러 길을 떠났다. 호화 노인의 집을 떠난 후 이제 덮개마저 찢겨진 수레는 서늘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낙양으로 향하니 이로부터 관우는 다섯 관문을 지나게 되었다. 이윽고 일행은 낙양에 이르는 한 관문에 당도했다. 그 관문은 동령관이라 불렸는데 공수라는 자가 군사 5백을 거느리고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관우는 관문 앞에서 수레를 멈추게 한 뒤 먼저 말을 달려 고갯마루에 이르자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하북으로 가는 나그네요. 이곳을 지나도록 해 주시오."
그러자 수비대장 공수가 나서며 관우에게 예를 올린 뒤 말했다.
"당신은 운장 관우 장군이 아니시오?"
"그렇소."
"수레를 모시고 어디로 가시오?"
"승상께 하직 인사를 고하고 하북에 계신다는 옛 주군 현덕 공을 찾아가는 길이오."
"하북의 원소와 승상과는 서로 적입니다. 그리로 가시려면 승상의 통행증이 있어야 합니다."
"급히 떠나느라 그만 잊어버리고 왔소."
"통행증이 없으면 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은 장군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떠나올 때 승상께서 친히 전송까지 해 주시었소이다."
"그러시다면 기다리십시오. 승상께 사람을 보내어 확인한 후에 보내 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이오? 급한 걸음인데 헛되이 시각을 지체하며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오."
"하오나 국법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럼 그대는 나는 보내 주지 않겠다는 말인가?"
관우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공수도 지지 않고 맞섰다.
"그대가 꼭 이곳을 지나가려거든 그대 외의 모든 사람을 여기 인질로 두고 가라!"
공수의 말에 관우는 마침내 격분하여 청룡도를 번쩍 쳐들었다. 유비의 두 부인을 인질로 두라는 말에 관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번에 그를 벨 듯했다. 공수도 그 기세에 눌려 급히 관문 안으로 들어가 북을 올려 군사를 부른 뒤 갑옷까지 받쳐 입고 관문으로 다시 나왔다.
'관우가 용맹스러운 장수라 하나 그는 혼자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에게는 5백여 명이나 되는 부하가 있다.'
공수는 이렇게 생각하고 관우에게 호통을 쳤다.
"네놈이 감히 어딜 지나가려 하느냐?"
그 소리에 관우는 수레를 뒤로 물리도록 일렀다. 수레가 멀리 물러난 것을 본 관우는 눈을 부릅뜨더니 곧바로 말을 달려 공수에게로 향했다. 공수도 졸개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창을 추켜세우고 마주 나왔다. 그러나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공수가 창으로 관우를 겨냥하여 돌진했으나 관우의 청룡도가 번뜩이자 단 1합 만에 두 토막 난 시체가 되어 말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공수를 뒤따라 나온 군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는 어안이 벙벙했다. 기가 질린 군사들이 이윽고 정신을 차려 달아나자 관우가 그들을 향해 외쳤다.
"너희들은 달아나지 말라. 내가 공수를 벤 것은 그가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너희들에겐 아무런 죄가 없다. 너희들은 승상께 내 말을 전하도록 하라."
군사들은 관우의 말을 듣고 꿇어 엎드릴 뿐이었다. 관우는 수레를 호위하여 관문을 지나 길을 재촉했다. 그날은 흰 진눈깨비가 내렸다. 이튿날도 또 다음 날도 관우 일행은 수레 자국을 길게 남기며 관도를 향해 달렸다. 이윽고 멀리 낙양의 성문이 보였다. 낙양도 물론 조조의 세력권이었다. 이곳은 낙양태수 한복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태수 한복은 관우가 동령관의 수비대장 공수를 죽이고 관문을 지나갔다는 급보를 받았다. 한복은 장수들을 불러 이 일을 의논했다.
"관운장이 승상의 통행증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이는 필시 몰래 몸을 빼내 가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그를 막지 못하면 처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아장 맹탄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자 한복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근심스런 얼굴로 말했다.
"관운장은 단번에 안량. 문추의 목을 벤 용맹스런 장수이다. 어찌 힘으로 그를 당할 수 있으랴. 마땅히 계교를 써 그를 사로잡아야 할 것이다."
"제게 한 계책이 있습니다."
맹탄이 생각해 둔 계책이라도 있는 듯 주저 없이 말했다.
"우선 논각(대나무로 얽어 만든 목주)으로 관 입구를 틀어막도록 하십시오. 관운장이 오면 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는 체하다 그를 유인하겠습니다. 태수께서는 녹각 뒤에 숨어 기다리다 궁수들로 하여금 그를 쏘게 하십시오. 관운장이 화살에 맞아 쓰러질 때 그를 사로잡아 하도로 보내면 반드시 태수께서 큰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한복은 맹탄의 말에 따르기로 하였다. 급히 녹각을 세우고 평상시의 경비병 외에 정병 1천과 궁수를 녹각 뒤에 매복케 했다. 낙양 성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줄도 모른 채 이윽고 관우가 낙양 성문 앞에 이르러 소리쳤다.
"나는 한수정후 관우요. 북쪽으로 가고자 하니 문을 열어 주시오."
한복이 나서며 물었다.
"그럼 승상의 증빙 문서를 보여 주시오."
"급히 떠나오느라 미처 얻지 못하고 왔소이다."
"내가 승상의 명을 받들어 이 성을 지키는 것은 간세(간첩 또는 범법자)들이 내왕하는 것을 살피기 위함이오. 만약 증빙하는 서류가 없다면 그대는 몰래 달아나는 것이 분명하오."
관우가 한복의 냉랭한 언성을 듣자 노하여 언성을 높였다.
"그대 또한 내 손에 죽고 싶으냐?"
관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징 소리가 요란히 일었다.
"이놈들 미리 계략이라도 꾸몄다는 말이냐?"
관우는 일단 말머리를 돌려 물러났다. 맹탄이 이를 보고 쌍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나왔다.
"저놈을 사로잡아라!"
관우는 다시 수레를 뒤로 물리게 한 후 뒤쫓아오는 맹탄을 맞았다. 맹탄도 한복의 부장으로 낙양에서는 이름을 떨친 장수였다. 그러나 관우에게는 도끼에 대드는 버마재비나 다름없었다. 맹탄이 3합을 겨루다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관우를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관우가 탄 말이 적토마인 걸 알 리 없는 맹탄이었다. 순식간에 뒤쫓아온 관우의 청룡도가 그의 등 뒤에서 번뜩이자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의 몸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관우는 그 기세를 타고 관문을 향해 말을 달렸다. 태수 한복은 관문 옆에 말을 세우고 있다가 참새 떼를 쫓는 독수리처럼 군사들을 뒤쫓아오는 관우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윙'하고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한복의 화살은 관우의 왼쪽 팔에 정확히 꽂혔다.
"이놈!"
관우는 화살이 날아온 쪽을 보며 고함을 질렀다. 관우와 시선이 마주친 한복은 찔끔하며 놀랐다. 관우는 말을 달리며 왼쪽 팔에 박힌 화살을 입으로 물어 뽑았다. 그 사이에 한복은 급히 말머리를 돌려 관문 안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적토마가 어느새 그의 등 뒤를 덮쳐들었다. 그와 동시에 관우의 청룡도가 번쩍하며 고함 소리와 함께 한복의 목이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주위에 있던 군사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적토마의 말발굽에서 벗어나기에 바빴다. 관우가 쉬지 않고 군사들을 베고 찌르니 군사들은 제각기 달아나거나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관우는 멀리 있는 수레를 불렀다. 관우가 수레를 호위하며 관문을 지나가는데 감히 앞을 가로막으려는 군사는 없었다. 관우는 낙양 시가를 지나 교외에 이르자 그때서야 헝겊을 찢어 왼팔을 동여맸다. 관우는 도중에 기습을 당할까 염려하여 밤잠도 자지 않고 수레를 호위하며 길을 재촉했다. 수레 안의 두 부인은 이 하루 밤낮을 고치 속의 누에처럼 서로 부둥켜안은 채 두려움에 질려 눈을 감고 있었다.
그로부터 닷새 동안 낮에는 깊은 숲이나 연못가에서 잠을 자고 밤을 틈타 수레를 이끌었다. 하북으로 가는 길목인 기수관에 이른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기수관은 이전에 황건적의 우두머리였다가 뒤에 조조에게 투항한 변희라는 자가 지키고 있었다. 그는 유성추(철퇴)를 잘 쓰는 장수였다. 변희는 관우가 관문마다 장수를 죽이며 온다는 보고를 받자 한 계책을 세웠다. 관문 앞에는 한나라 명제가 지었다는 진국사란 절이 있었다. 변희는 이 절에 도부수 2백여 명을 숨겨 놓고 관우를 절로 유인한 뒤 술잔을 던지는 것을 신호로 삼아 일제히 덤벼들도록 했다.
이날 밤, 관우는 산기슭에 있는 관문을 무사히 지났다. 날이 이미 어두웠으므로 하룻밤 묵어가기로 하고 진국사에 당도하니 돌연 종이 울리며 승려들이 몰려나왔다. 관우가 경계하는 눈초리로 그들을 보자 이 절의 주지가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먼 여행길에 얼마나 피로하시겠습니까! 하잘것없는 사사인지라 겨우 비바람을 피할 수 있을 뿐입니다만 마음 편히 쉬었다 가셨으면 합니다."
주지의 말과 함께 다른 중 하나가 수레에 타고 있는 두 부인에게 차를 바쳤다. 관우는 뜻밖의 환대에 오히려 의아심을 품었으나 그들이 중의 신분이고, 또 두 부인에게 차를 바치자 감사해하며 예를 표했다. 그런데 뜻밖인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관우와 같은 고향 사람으로 보정이란 승려가 있었다.
"장군께서는 고향인 포동을 떠난 지 몇 해나 되십니까?"
보정이 관우를 반기며 물었다.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소."
"장군의 고향 집과 저의 생가와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습니다."
관우도 오랜만에 고향 사람을 만나 감회에 젖으며 그를 반겼다. 그때 변희가 패검을 철거덕거리며 다가왔다. 보정과의 이야기를 가로막으며 변희는 관우에게 공손히 예를 표한 후 말했다.
"장군님의 높으신 이름을 누구인들 공경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렇게 뵙게 되니 실로 큰 영광이옵니다. 이제 장군께서 유황숙에게 돌아가신다니 놀라운 충의지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변희가 관우를 이렇게 칭송하자 관우는 공수. 한복을 부득이 목을 베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변희에게 은근히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관우의 말에 변희가 또 좋은 말로 관우의 비위를 맞추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그들은 죽어 마땅합니다. 제가 승상을 뵙거든 장군님의 부득이한 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변희가 그렇게 말하며 관우를 방으로 청했다. 보정이 방으로 관우를 안내하면서 문득 관우에게 손으로 자기가 찬 계도(승복을 재단하는 데 쓰이는 칼)를 가리키며 눈짓 손짓을 했다. 관우가 무심코 보정의 그 같은 행동을 보자 마음속에 짚이는 데가 있었다. 관우도 눈짓으로 알았다는 표시를 하고 입을 다물었다. 변희가 와 잔치를 벌이자 관우는 부하들을 불러 방 밖을 지키도록 일렀다. 그런 다음 변희가 술잔을 들어 권하자 관우가 대뜸 그에게 물었다.
"그대가 나를 청한 것은 나를 대접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어서인가?"
관우의 뜻밖의 질문에 변희가 당황하여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관우는 법당과 통해 있는 문 뒤에 늘어뜨려진 휘장 뒤에 도부수들이 숨어 있는 낌새를 엿보고 그에게 호통을 쳤다.
"나는 너를 좋은 사람으로 여겼는데, 네 어찌 감히 이런 무례한 짓을 할 수 있느냐?"
그제야 변희는 비밀이 탄로난 것을 알았다. 변희는 술잔을 내던지며 소리쳤다.
"속히 나와 이놈을 쳐라!"
변희의 외침과 함께 휘장 뒤에 숨어 있던 도부수들이 일제히 나와 관우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이럴 줄 알고 경계심을 품고 있던 관우가 어느새 칼을 뽑아 들고 그들을 베고 찔렀다. 방 안의 촛불은 피보라로 흐려졌다. 관우는 방문을 박차고 법당으로 뛰쳐나가며 벽력같이 소리쳤다.
"죽기를 서두르는 자들은 모두 나오라!"
변희는 그 틈을 타 법당을 빠져 나와 낭하로 달아나고 있었다. 관우가 그를 보자 이번에는 청룡도를 들고 뒤쫓았다. 관우가 뒤쫓자 변희는 소매 속에 감추었던 유성추를 꺼내며 몸을 홱 돌려 유성추를 날렸다. 유성추는 정확하게 관우의 면상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순간 관우는 청룡도로 유성추를 쳐 내고 곧장 변희를 뒤쫓아 단번에 그를 베고 말았다. 관우는 두 부인이 염려되어 수레 있는 쪽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변희의 군사들이 수레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청룡도를 들고 관우가 달려오는 것을 보자 그들은 간담이 서늘해져 뿔뿔이 흩어졌다. 변희의 군사들을 쫓은 후 관우는 보정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스님의 깨우침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물론 우리 모두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크신 은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보정이 합장하며 말했다.
"소승도 이제 이곳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변희의 부하들이 몰려올 테니 옷과 발을 수습하여 떠도는 구름이 될까 합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때가 있을 테니 장군께서는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관우는 보정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수레를 이끌어 형양을 향해 길을 떠났다. 승려들도 관우와 보정을 전송했다.
형양대수 왕식은 원래 한복과는 인척간이었다. 한복이 관우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관우를 암살하기로 작정했다. 왕식은 관우가 형양으로 온다는 말을 듣자 수하를 시켜 관문 입구를 지키게 했다. 이윽고 관우가 관문 가까이에 이르자 왕식은 수하의 연락을 받고 관 밖까지 친히 나와 반가이 맞았다.
"장군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왕식이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관우는 정중히 몸을 굽혀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하북에 계신 형님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이 관문을 지나가겠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관우가 청하며 왕식의 주위를 살폈다. 몰래 군사라도 숨겨 두고 기습하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그러나 왕식은 웃으며 선선히 허락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장군께서는 먼길을 달려오셨고, 두 부인께서도 수레를 타고 오시느라 피곤하실 것입니다. 우선 상 안에 드시어 역관에서 쉬신 다음 내일 떠나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왕식이 이렇게 말하자 관우도 마음이 움직였다. 모두 피곤하던 터였으로 관우는 두 형수를 모시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역관에는 이미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촐한 술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장군께서는 나오시라고 합니다."
왕식이 사람을 시켜 관우를 청했다. 그러나 관우는 두 형수 곁을 떠날 수가 없어 사양하였다. 왕식은 사람을 시켜 술과 음식을 보내왔다. 관우는 내일 또 길을 재촉해야 했으므로 두 형수에게 저녁을 권했다. 호위하는 수하들도 모두 편히 쉬게 하고 말에 마초를 배불리 먹인 다음 자신도 방에 들어가 갑옷을 벗었다. 이때 왕식은 종사로 있는 호반을 불러들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관운장은 승상을 저버리고 달아났을 뿐만 아니라 오는 길을 막는 태수와 장수들을 죽였으니 그 죄가 무겁다. 그러나 그의 무례가 출중하여 맞서기가 어려우니 꾀를 써 그를 죽여야겠다. 그대는 오늘 밤 군사 1천을 이끌어 역관을 에워 싸우도록 하라. 그리고 군사 하나에 횃불 하나씩을 마련케 하였다가 삼경이 되거든 일제히 횃불을 던져 불을 지르도록 하라. 관우 일행은 누구든 상관없이 모조리 불태워 죽여야 한다. 집에 불이 붙으며 나도 군사를 이끌고 가 접응할 것이니라."
왕식의 명을 받들어 호반은 관우 일행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기름칠한 나무를 준비하고 마른 섶을 울타리 안팎에 운반해 두었다. 밤은 점점 깊어 갔다. 모두 잠에 곯아떨어졌는지 방 안의 불이 꺼졌으나 오직 한방에만 불이 밝혀져 있었다. 호반이 그 방에도 불이 꺼지기를 기다렸으나 좀처럼 방 안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호반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어 살금살금 다가가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는 촛불 아래 불그레한 얼굴에 칠흑 같은 수염을 길게 기른 풍채 좋은 한 사람이 책을 읽고 있었다. 멀고 험한 길을 가는 사람답지 않게 초연히 책을 읽고 있는 그 모습을 보자 호반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참으로 하늘이 내린 사람이로다!'
조금 전부터 인기척이 나 귀를 기울이고 있던 관우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방문을 열었다.
"거기 있는 자는 누구냐?"
관우의 위압적인 목소리에 호반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왕 태수의 종사관 호반이라고 합니다."
호반은 숨기지 않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호반의 말에 관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대는 허도 성 밖에 사는 호화 노인의 자제분이 아닌가?"
"그러합니다만. . . ."
관우는 짐 속에 들어 있는 한 통의 서한을 꺼내 호반에게 주었다. 호반이 받아 읽어 보니 분명 아버지가 보내신 글이었다. 집안의 안부를 전하며 관우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써 있었다. 이미 관우의 풍채와 높은 품격을 존경하게 된 호반이었다. 아버지의 서한을 읽고 난 호반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만약 가친의 서한을 보지 않았다면 소생은 천하의 충의지사를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호반의 말에 관우가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오?"
호반은 관우의 물음에 왕식의 계교를 소상히 밝혔다.
"왕식이 나쁜 맘을 품고 장군을 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몰래 사람을 시켜 이 역관을 에워싸게 하고 밤 삼경이 되면 일제히 불을 지르라 하였습니다. 제가 가서 성문을 열어 놓을 테니 장군께서는 급히 부리는 자들을 수습하시어 이곳을 떠나도록 하십시오."
관우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란 가운데도 황망히 갑옷을 꿰입은 후 청룡도를 들고 적토마를 탔다. 수하들을 조용히 깨우고 두 형수가 수레에 오르자 관우는 수레를 이끌어 역관을 빠져나왔다. 관우가 뒤돌아보니 과연 집 주위에는 군사들이 손에 횃불을 들고 명을 기다리는 듯 도열해 있었다. 관우가 수레를 재촉하여 성에 이르자 성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호반이 열어둔 것임에 틀림없었다. 일행은 숨 쉴 틈도 없이 성을 빠져나갔다. 호반은 관우 일행이 무사히 성문을 빠져나가자 집에 불을 지르게 했다. 관우가 수레를 호위하여 몇 리를 갔을 때였다. 홀연 등 뒤에서 수많은 횃불이 밤을 밝히며 관우를 뒤쫓는 한 떼의 기병이 있었다. 왕식이 거느리는 군사들이었다.
"관운장은 게 서지 못할까!"
관우는 그가 왕식임을 알고 말머리를 돌려세워 그를 꾸짖었다.
"이놈! 내 원래 너를 적으로 대한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나를 불에 태워 죽이려 했느냐?"
왕식은 관우의 물음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어 죽음을 재촉했다. 관우는 청룡도를 움켜쥐고 달려오는 그를 맞았다. 관우는 청룡도를 횃불에 번뜩이며 위로 치켜들더니 그대로 왕식을 향해 내려쳤다. 왕식은 제대로 한 번 부딪지도 못한 채 두 토막이 나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태수 왕식이 기세 좋게 달려가던 때와는 달리 맥없이 말 아래로 굴러떨어지자 뒤따르던 군사들은 겁에 질렸다. 관우가 그들을 향해 청룡도를 휘두르며 달려나가자 허둥지둥 달아나기에 바빴다. 관우는 그들을 뒤쫓지 않고 다시 수레를 호위하며 길을 재촉했다.
며칠 후, 관우 일행은 활주의 경계에 이르렀다. 활주 태수 유연은 지난번 원소군과 동군에서 싸울 때 위급한 처지에 놓여 관우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관우가 적장 안량을 죽임으로써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게 되었던 터였다. 유연은 군사를 거느리고 성곽 밖까지 나와 관우를 맞았다. 관우가 말 위에서 몸을 굽혀 인사를 했다.
"태수께서는 그간 별고 없으시었소?"
유연 또한 공손히 답례하며 물었다.
"공은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이오?"
"승상께 작별 인사를 나눈 뒤 형님을 찾아가는 길이외다."
"유현덕 공이 하북의 원소에게 몸을 의탁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원소는 승상과 칼을 맞대고 있는 적인데 승상께서 공을 보내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유연이 관우의 말에 이렇게 물었다. 그 역시 조조를 섬기는 사람이라 관우를 호락호락 보낼 수만은 없었다. 관우가 그런 유연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지난날 승상께로 가기 전에 미리 약조를 받은 바가 있소. 승상도 약조를 지키기 위해 친히 배웅까지 해 주시었소."
관우가 그같이 말하자 유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관우를 잘 알고 있는 유연이었다. 그의 인품으로 보아 거짓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관우가 세운 공으로 보더라도 조조도 능히 그를 보내 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유연은 길을 비켜 주며 일렀다.
"이 앞에는 큰 강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공은 어떻게 그 강을 건너려 하시오?"
그 말에 관우도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유연이 그런 관우를 보고 다시 말했다.
"황하 나룻가 길목을 하후돈의 부장 진기가 지키고 있습니다. 아무도 장군께서 그곳을 지나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관우가 유연에게 청했다.
"바라건대, 태수께서 배를 빌려 보시오."
유연은 관우의 청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배는 있습니다만 그 말씀만은 들어 드릴 수가 없소이다. 조 승상으로부터 받은 명도 없는데다가 후일 이 일이 알려지면 벌을 내리실 것이 분명하외다."
유연이 난감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관우는 화가 치밀었으나 수레에 있는 두 형수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지난 일까지 꺼내며 부탁했다.
"나는 전에 안량. 문추를 죽여 그대를 위기에서 구해 준 적이 있소. 그런데도 배 한 척 빌려주지 못하겠다는 말이오?"
"하후돈 장군이 이 일을 알면 나를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관우는 유연의 겁먹은 소리에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관우는 그의 목을 단칼에 쳐 배를 빼앗고 싶었으나 화를 억눌렀다. 그가 길을 막지 않은 것만도 고맙게 여기며 그대로 수레를 앞세워 진기의 진지로 향했다. 황하의 나루터에 이르자 좌우에 군사를 거느린 채 얼굴이 험상궂은 한 장수가 길을 막았다.
"멈춰라! 거기 오는 사람은 누구인가?"
"한수정후 관우외다."
진기는 관우의 대답을 듣고서도 동요하지 않고 재우쳐 물었다.
"어디로 가시오?"
"형님을 만나러 하북으로 가는 길이오."
"그렇다면 승상의 공문을 보여 주시오."
관우가 언성을 높여 대답했다.
"당신도 한나라의 신하요, 나 또한 한나라의 신하이거늘 어찌 조 승상의 지시를 받겠소."
진기도 관우의 말에 언성을 높였다.
"나는 하후돈 장군의 명을 받들어 이 나루터를 지키고 있소. 비록 그대에게 날개가 있다 하더라도 이곳을 지나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관우가 눈을 부릅뜨며 진기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길 막은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
그러나 진기도 관우의 말에 코방귀 뀌듯 대꾸했다.
"네가 감히 여기까지 오다 죽인 장수들은 이름도 없는 하찮은 장수들이었다. 감히 나까지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안량. 문추보다 세다는 말이냐? 헛되이 죽음을 자처하지 말고 길을 비켜라."
관우가 노하여 외쳤으나 진기는 원래 겁이 없는 장수였는지 느닷없이 칼부터 빼 들었다. 진기가 말을 달려 관우에게 덤벼들자 그의 좌우에 늘어섰던 군사들도 뒤따랐다. 두 필의 말이 한순간 어우러지는가 싶었다. 진기의 기세 하나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으나 그 칼이 관우를 향해 찔러 들어가기도 전에 관우의 청룡도가 번쩍이더니 목을 날리고 말았다. 이에 뒤따르던 군사들이 그 모양을 보자 주춤거렸다. 관우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 앞을 가로막는 자를 죽였을 뿐이다. 너희들은 아무런 죄가 없으니 달아날 것 없다. 급히 배를 내어 우리가 건널 수 있게 하라!"
관우의 말에 목숨만은 건지게 된 졸개들이 급히 배를 구해 왔다. 관우는 두 형수에게 배에 오르도록 한 뒤 무리를 이끌어 황하를 건넜다. 황하를 건너면 거기서부터는 원소의 땅이었다. 하남 강변에 이르른 관우는 한숨을 내쉬며 드넓은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돌이켜보면, 허도를 떠나온 후 다섯 관문을 지나며 여섯 수장의 목을 베지 않았는가. 허도를 떠나온 후 거쳐온 다섯 관문은 너무나 머나먼 대장정이었다. 먼저 양양을 거쳐 패릉교로, 이어 동령관으로 가는 도중에서 기수관으로, 그리고 활주(황하나루)에서 황하를 건넜던 것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다섯 관을 지나며 여섯 장수의 목을 벤 관우에 감탄해 시를 지었다.
인. 금을 봉하고 승상을 하직한 후
의형을 찾기 위해 먼길을 떠났네.
적토마를 타니 천리길이요
청룡도를 들어 다섯 관 지나니
장하도다 그 충의, 하늘을 찌르는구나.
영웅의 기상, 강산을 뒤흔드네.
혼자서 여섯 장수를 베는 그 무예
지필에 남겨 천추만대 전하리.
황하를 건너자 두 부인은 벌써 유현덕과의 재회를 마음속에 그리며 그리움에 가득 찬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관우는 황하를 건너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재촉했다. 아직도 유현덕을 만나기 위해 먼길을 가야 했다. 앞길에 어떤 험난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관우는 말 위에서 길게 탄식했다.
'오는 도중 만부득이 했으나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구나. 조 승상이 이를 알면 나를 은의도 저버린 자로 여기겠다.'
두 부인이 탄 수레에는 주렴이 드리워졌고, 수레는 다시 바람 부는 들판을 가르며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쪽 맞은편에서 홀연 한 사람이 말을 달려오며 외쳤다.
"운장께서는 잠시만 멈추시오!"
가까이 다가오는데 보니 이게 누군가 그는 바로 여남에서 헤어진 손건이었다. 서로 뜻밖의 만남을 기뻐하는 가운데 관우가 뒷일이 궁금하여 물었다.
"마중을 온다 하여 기다린 지 오래되었소. 이토록 늦게까지 소식이 없었던 것은 무슨 까닭이오?"
"실은 원소의 진영에 여러 가지 내분이 일어나 그 때문에 여남의 유벽. 공도의 뜻에 따라 하북으로 갔던 제 계획이 뒤틀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원소를 설복시켜 유황숙을 여남으로 가시게 한 후 저는 운장을 기다려 마중을 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형님께선 지금도 무사히 원소 밑에 계시오?"
"아닙니다. 지금은 하북에서 몸을 빼 여남으로 가셨습니다."
"그럼 형님께선 여남에 계시다는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장군께서 이런 사실을 모르고 원소한테 가셨다가 혹시 해를 입으실까 걱정하시어 황숙께서 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장군께선 여남으로 가시어 황숙을 뵙도록 하십시오."
지난번 관우가 문추를 베고 허도로 돌아간 뒤, 유벽과 공도는 패한 척하며 관우에게 내주었던 여남 땅을 도로 찾았다. 유벽과 공도는 손건으로 하여금 하북으로 가게 하여 원소와 동맹을 맺어 조조를 칠 계책을 세우려 했다. 그리하여 손건이 하북에 당도해 보니 장수와 모사들이 서로 시기와 질투로 반목을 일삼고 있었다. 뛰어난 모사인 전풍이 옥에 갇힌 채였고, 저수도 파직당했을 뿐만 아니라 곽도와 심배는 서로 세력 다툼만 일삼고 있었다. 원소는 의심이 많고 우유부단하여 주견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손건은 그가 천하를 도모할 인물이 아님을 알고 유비와 의논해 하북에서 몸을 빼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유비가 여남으로 떠나자 손건이 관우를 맞으러 나온 것이었다. 손건은 이어 유비가 원소 휘하에 있을 때 두 번이나 죽임을 당할 뻔했던 일도 이야기했다. 수레 안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두 부인은 소리내어 흐느꼈고 관우도 눈물지었다.
일행은 방향을 바꾸어 여남을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홀연 뒤쪽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한 떼의 인마가 뒤쫓아오고 있었다. 수레를 이끄는 길이라 군사의 추격을 따돌릴 수가 없었다. 관우는 손건으로 하여금 수레를 지키게 하고 홀로 뒤쫓는 군사를 맞으러 갔다. 그들은 하후돈이 이끄는 기병 2백여 명이었다. 하후돈은 조조의 장수들 중에서도 첫손 꼽히는 장수라 관우도 그들을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관우는 청룡도를 힘주어 잡고 대적할 태세를 갖추며 그를 얼렀다.
"그대가 나를 뒤쫓는 것은 승상께서 보이신 크나큰 도량을 그르치고 있다는 것을 아시오?"
하후돈은 관우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험한 기세로 고함을 쳤다.
"승상에게서 너를 보내 주라는 명이 내리지 않았으며, 또한 네가 예까지 오면서 했던 무례한 행동을 아신다면 마음이 달라지실 게다. 너는 다섯 관을 함부로 짓밟고 여섯 장수를 죽였으며, 더욱이 나의 부장 진기까지 죽였다. 어찌 이리 무례할 수가 있느냐. 내 특히 너를 잡아 승상께 바쳐 죄를 다스리고자 이렇게 달려온 것이다."
하후돈이 왼쪽 눈을 부릅뜨더니 곧장 그의 어골창을 내뻗으며 관우에게 달려들었다. 쨍그렁-. 하후돈의 어골창과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맞부딪치자 불꽃이 튀었다. 적토마가 크게 울음소리를 내며 하후돈의 말을 덮칠 듯이 나아가자 하후돈은 말머리를 돌리며 관우의 옆구리를 향해 어골창을 찔렀다. 호랑이를 보고 용이 노하고, 용을 보자 호랑이가 울부짖는 듯한 싸움이었다. 한동안 불꽃 튀는 병장기의 부딪침이 일었는데 말을 달려 뛰어들며 큰소리로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두 분은 잠시 싸움을 멈추시오."
그는 조조가 보낸 사자였다. 사자는 말 위에 앉은 채로 조조가 친필로 서명한 공문을 하후돈에게 주었다.
"승상께서는 관 장군의 충의심을 가상히 여기시어 관문이나 나루를 모두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셨습니다. 군사들이 길을 막지 않을까 염려하시어 특별히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후돈은 공문을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사자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승상께서는 여섯 장수를 죽이고 다섯 관을 짓밟은 사실을 알고 계시는가?"
"그것은 아직 모르고 계십니다."
공문은 그보다 앞서 승상부에서 내린 것이라고 사자가 덧붙여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저 자를 사로잡아 허도로 간 연후에 승상의 처분을 기다리도록 할 것이다."
하후돈이 기세등등하게 말하자 관우는 화가 치솟았다.
"내가 네놈을 두려워할 것 같으냐?"
그 말과 동시에 청룡도로 그를 내리찍었다. 하후돈도 창으로 청룡도를 막으며 관우를 맞았다. 또 한바탕 청룡도와 창이 어우러졌다. 그런데 또 한 필의 말이 나는 듯이 달려오더니 말 위의 사람이 소리쳤다.
"두 장군께서는 잠시 무기를 거두시오. 승상의 명이오."
두 사람은 병장기를 거두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후돈이 그 사람에게 물었다.
"승상께서 관우를 사로잡아 오라고 하시지 않던가?"
사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승상께서는 관문의 장수들이 관우 장군의 길을 끊을까 봐 염려하시어 공문을 내리신 것입니다."
"승상께선 저자가 여러 장수들의 목을 벤 사실을 알고 계시는가?"
"그것은 모르고 계십니다."
하후돈은 군사들로 하여금 관우를 에워싸게 했다.
"승상께서 아직 그 일을 모르고 계시니 그를 놓아줄 수 없다. 저자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후돈은 이번에야말로 관우를 사로잡을 기세로 관우에게 덤벼들었다. 두 사람이 다시 어우러져 싸우는데 또 한 사람이 질풍같이 말을 달려왔다. 그는 장료였다.
"운장과 원양(하후돈의 자)은 이제 싸움을 그치시오. 승상의 명을 거를 셈이시오?"
그 말에 두 사람은 제각기 말을 세워 장료를 바라보았다.
"승상께서는 동령관의 공수가 운장의 길을 막다가 참살되었다는 급보를 받고 다시 저를 보내셨소. 도중에 또 다른 곳에서 운장을 가로막고 길을 끊으실까 염려하시어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장수들의 목을 벤 일로 길 막는 일은 없도록 하고 각처의 관소에 이를 전하라 하시었소."
장료의 말에 하후돈도 관우를 포위했던 군사들을 물린 뒤 푸념을 늘어 놓았다.
"관우가 죽인 진기는 원비장군 채양의 조카로 그가 특히 나를 믿고 부탁한 부하요. 그런데 그가 관우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내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하후돈의 불평을 장료가 달랬다.
"채양 장군에게는 내가 잘 말씀드려 설득할 테니 너무 걱정마오. 승상께서 큰 도량을 베푸신 명이니 어기지 마시고 운장을 보내도록 하십시오."
장료가 그렇게 타이르자 하후돈도 하는 수 없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하후돈이 물러나자 장료가 관우에게 물었다.
"운장은 이제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소문을 들으니 형님께서는 원소의 곁을 떠나셨다 하오. 천하를 떠도는 한이 있더라도 형님을 찾을 작정이오."
관우는 장료에게 거짓으로 꾸며댔다. 행선지를 알려 주면 혹시 또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해서였다. 그 말에 장료가 넌지시 말했다.
"현덕 공이 있는 곳을 모른다면, 운장께서는 나와 함께 승상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소?"
그 말에 관우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장수가 길을 정하고 한 걸음을 내딛었소. 어찌 다시 발길을 돌릴 수가 있겠소. 그대는 돌아가서 승상께 내가 부득이하여 관을 지키는 장수를 죽였다고 말씀이나 잘 전해 주시오."
관우가 손을 모아 장료에게 작별 인사를 하자 장료도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는 사이 손건이 이끈 수레는 이미 멀리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적토마가 수레를 따라잡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관우는 손건에게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며 여남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며칠을 갔을 때였다. 이번에는 앞을 가로막는 관문도, 뒤쫓는 자도 없어 순탄했으나 큰비를 만나게 되었다. 비를 맞으니 수레 안으로도 빗물이 떨어졌다. 관우가 주위를 둘러보니 멀리 산 밑에 장원 한 채가 눈에 띄어 하룻밤 묵기를 청하려고 그곳으로 갔다. 주인을 부르니 한 노인이 나타났다. 관우가 자기 소개를 하고 하룻밤 묵기를 청하자 노인은 반갑게 맞으며 말했다.
"나는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곽상이란 사람입니다. 장군의 높으신 이름을 익히 듣더니 이렇게 뵙게 되었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곽상은 두 부인을 후당으로 청해 편히 쉬게 한 뒤 양을 잡고 술을 데워 극진히 대접했다. 곽상은 관우와 손건에게 술상을 따로 마련해 마주 앉았다. 군사들은 뜰에서 불을 피워 젖은 옷을 말리며 마필을 돌보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한 청년이 같은 또래의 젊은 친구 4, 5명을 데리고 오더니 초당으로 올라왔다. 곽상은 그 청년을 불러 일렀다.
"얘야, 장군께 절하고 뵙도록 해라."
곽상이 관우에게 그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변변치 않은 제 자식놈입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절도 하지 않은 채 관우를 쓱 훑어보더니 그냥 휙 나가 버렸다. 관우가 청년의 공손치 못한 태도를 보며 곽상에게 물었다.
"어디 갔다 오는 길입니까?"
곽상이 관우의 물음에 한탄하며 말했다.
"우리는 대대로 농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지내 오는 집안입니다. 자식이라곤 단 하나뿐인데, 농사일이나 글공부는 하지 않고 마냥 사냥만 하며 나다니고 있습니다. 이 늙은이의 근심이 있다면 그건 저 자식놈 때문입니다."
관우가 곽상을 위로했다.
"그렇게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무예를 잘 익히면 공명도 이룰 수 있습니다.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무예라도 지성으로 익힌다면 그래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 아이는 오로지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습니다. 어찌 이 늙은이가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곽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관우도 그런 노인을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곽상은 밤이 깊어서야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관우는 손건과 함께 잠자리에 들어 잠을 청했다. 그때 뒤뜰 마구간에서 적토마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떠들썩한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관우가 군사들을 불렀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어 관우가 손건과 함께 칼을 빼 들고 뒤뜰로 나가 보았다. 뒤뜰에는 곽상의 아들이 신음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군사들과 젊은이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웬일이냐?"
관우가 크게 꾸짖으며 노려보자 군사 하나가 달려와 대답했다.
"저 젊은이는 적토마를 훔치러 왔다가 말발굽에 채여 저 지경이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말의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오는데 이 젊은이들이 몰려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 말을 듣자 관우도 노했다.
"쥐새끼 같은 도적놈들이 감히 남의 말을 훔치려 들었다는 말이냐?"
적토마는 관우가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말이었다. 관우가 칼을 들어 그 말 도적을 베려 했다. 그러자 곽상이 황급히 관우의 발 아래에 엎드리며 용서를 구했다.
"어리석고 못난 자식이 장군께 저지른 죄,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식놈이라 늙은 처가 늘 걱정하며 어여삐 여깁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인자하신 마음으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곽상의 간곡한 애원에 관우는 차마 칼을 쓸 수가 없었다. 노기를 누르며 노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말씀대로 저 아이가 어르신네의 속을 많이 썩일 것 같습니다. 내 어르신의 낯을 보아 용서하겠소."
관우는 부하들에게 말을 잘 지키도록 이른 뒤, 젊은이들을 꾸짖어 보냈다. 다음 날이 되자 곽상은 늙은 아내와 함께 초당에 나와 관우에게 백배 사죄하며 아들을 살려 준 것에 사례했다.
"이렇게 좋은 부모가 계신데도 고마운 줄을 모르는 자식이로군. 이리 불러 주시오. 내가 훈계해 보리다."
관우의 말에 노부부는 기뻐하며 아들을 부르러 갔으나 그 망나니 아들은 벌써 집을 나가고 없었다. 하인들의 말로는 새벽녘에 그의 패거리들과 함께 집을 나갔다는 것이었다. 관우는 그런 망나니 아들을 둔 곽상 부부가 안 됐으나 그와 작별을 고하고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우는 손건과 함께 수레를 호위하며 길을 가다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러자 홀연 산에서 1백 여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졸개들을 이끌고 두 사람이 말을 달려왔다. 말을 탄 두 사람 중의 하나는 황건 띠를 머리에 두르고 전포를 입고 있었다. 또 하나는 바로 곽상의 아들이었다.
"나는 천공장군 장각의 부장 배원소이다. 이 산을 무사히 넘고 싶으면 그 적토마를 놓고 가라. 그러면 길을 비켜 줄 것이다."
머리에 황건 띠를 두른 자가 언성을 높여 말했다. 관우가 그 꼴을 보더니 껄껄 웃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참으로 무지하고 미친 도적놈이로구나. 네놈이 장각의 밑에서 도적질을 했다면서 어찌 유현덕. 관운장. 장비 삼 형제의 이름을 모르느냐?"
황건을 쓴 자가 관우의 말에 놀란 얼굴을 하더니 다시 물었다.
"나는 얼굴이 붉고 수염이 긴 자가 관운장이라는 소문은 들었으나 아직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
관우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청룡도를 세우고 말을 멈춘 후 턱의 비단 주머니를 끌러 긴 수염을 보여주었다. 황건을 쓴 자가 관우의 수염을 보더니 말에서 급히 몸을 내렸다. 다음 순간 곽상의 아들을 말에서 끌어 내린 후 덜미를 잡아 꿇어앉게 하고 그 자신은 관우의 말 앞에 엎드려 절했다.
"제 이름은 배원소라 하며 일찍이 황건의 무리에 가담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각이 죽은 이후에는 주인 없이 떠돌다가 무리를 모아 이 산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 이놈이 와서 자기 집에 천리마를 가진 나그네가 묵고 있으니 그 말을 빼앗자고 하였습니다. 이놈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 말을 빼앗고자 왔습니다만 설마 장군님을 뵙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배원소는 망나니의 목덜미를 잡아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망나니는 겁먹은 얼굴로 절을 꾸벅꾸벅해대며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관우는 눈을 부릅뜨며 그런 곽상의 아들을 노려보다 그를 타일렀다.
"네 아버님의 낯을 보아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앞으로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고 부모님께 순종하라."
곽상의 아들은 머리를 싸매고 쥐구멍이라도 찾는 듯 황급히 달아났다. 관우는 자기를 알아보는 배원소가 의아히 여겨져 부드러운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나를 본 일이 없다면서, 어찌 나를 알아보게 되었느냐?"
배원소가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대답했다.
"여기서 20리쯤 되는 곳에 와우산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관서 태생의 주창이란 자가 살고 있는데 덕 벌어진 어깨를 하고, 검붉은 얼굴에는 이무기처럼 휘어 오른 수염을 가진 자입니다. 기골이 장대한 그는 힘이 장사라 능히 천 근의 무게를 들어 올릴 수가 있습니다. 원래 황건적 장보의 부장이었는데 그가 죽은 후 부하들을 이끌어 산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가 장군의 높으신 이름을 제게 들려주어 항상 뵙고 싶었으나 길이 없어 장군을 뵙지 못함을 늘 한탄하였습니다."
"자고로 호걸은 산속에서 몸을 숨기며 지낼 것이 못 된다. 그대들은 이제 손을 씻고 바른길로 나서 스스로를 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관우가 배원소와 그 무리들에게 타일렀다. 배원소가 거듭 절하며 관우의 말에 따를 것을 맹세했다. 그때 한 무리의 인마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배원소가 그들을 보더니 관우에게 알렸다.
"저기 앞서 오는 사람은 필시 주창일 것입니다."
관우가 보니 과연 배원소의 말처럼 얼굴이 검고 키가 큰 자가 창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과연 관 장군님이 틀림없구나!"
주창은 관우를 보자 놀라는 한편 기쁨에 겨운 얼굴을 하더니 말에서 뛰어내려 엎드렸다.
"주창이 장군님께 절하며 뵙습니다."
"그대는 어디서 나를 보았는가?"
"지난날 황건의 장보를 따라다녔을 때 장군의 존안을 뵈었습니다. 그러나 도적의 무리에 가담해 있기에 감히 장군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습니다. 다행히 이 자리를 빌어 우러러 뵙게 되었으니 장군께서는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보졸이라도 시켜 주신다면 기꺼이 말고삐라도 이끌며 장군을 따르겠습니다. 장군을 모시다 죽는다면 더 이상 큰 기쁨이 없겠습니다."
주창의 간곡한 청에는 그의 진정이 어려 있었다. 관우도 그 정성에 마음이 움직여 부드럽게 물었다.
"만약 그대가 나를 따른다면 이끄는 무리들은 어떻게 할 셈인가?"
"모두 장군님의 위명을 듣고 있어 저처럼 장군님을 따르고자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 또한 그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주창의 말이 끝나자 그가 이끌고 온 무리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를 따르겠다고 외쳤다. 관우는 말에서 내려 수레 앞으로 가 두 형수에게 이 일을 의논했다.
"저들이 한결같이 나를 따르겠다고 하니 두 형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습니까?"
관우의 물음에 감 부인이 대답했다.
"아주버님께서는 허도로 떠난 후로 예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위험한 고비를 넘기셨지만, 아직 한 번도 군마가 아쉽다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지난번에는 요화가 따르겠다고 하였으나 거절하셨습니다. 그런데 주창의 무리만은 거두려 하시니 어인 일이십니까? 그러나 우리들은 여자들이라 아무것도 모르니 부디 아주버님이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감 부인은 이렇게 말하며 관우에게 넌지시 거절의 뜻을 바쳤다. 그들이 아무래도 산적들이라 꺼림칙하여 믿지 못하겠다는 뜻도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유황숙의 명예를 더럽힐까 염려해서였다. 관우는 감 부인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형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관우는 수레 앞을 물러 나온 뒤 주창에게 말했다.
"내가 무정한 것은 아니나 두 분 형수님께서 선뜻 허락을 않으시니 어쩔 수가 없구나. 그대들은 잠시 산속에 되돌아가 머물러 있도록 하라. 내가 형님을 찾아뵈온 후 곧 그대들을 부르러 올 것이니라."
"저는 지금까지 제 한 몸을 잘못 던져 녹림(산적)이 되었으나 이제 장군을 뵈오니 이는 마치 우물속에서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장군을 뵈온 후 다시 그릇된 길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만약 부하들과 함께 따르는 것이 여의치 않으시다면 그들을 모두 배원소로 하여 거둬들이도록 하겠습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주창이 그렇게까지 청하니 관우는 그 열성에 마음이 움직였다. 관우가 다시 부인에게 주창의 청을 전하고 의견을 물었다. 감 부인도 그 청까지는 거절하지 못했다.
"생각하는 것이 기특하니 데려가도록 하십시오."
관우가 주창에게 따를 것을 허락했다. 그런 후 그의 졸개에게 모두 배원소를 따라 산으로 돌아가 기다리도록 했다. 그러나 배원소 또한 관우를 뒤따르기를 원하던 터였다.
"저 또한 장군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주창이 그런 배원소를 달래며 타일렀다.
"자네가 이들을 맡아 주지 않는다면 모두 흩어져 또 무슨 악행을 저지를지 모르네. 내가 관 장군을 따라갔다가 있을 곳이 정해지면 곧 달려와 데려가겠네. 그러니 잠시만 머물러 주게."
주창이 그렇게 당부하자 배원소는 할 수 없이 졸개들을 이끌어 산으로 돌아갔다. 주창은 오랜 소원을 이루자 나는 듯이 가벼운 발걸음이 되어 앞장서서 여남으로 향했다. 일행이 며칠 동안 길을 가자 목적지인 여남의 경계가 눈앞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