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내몰아 이리를 삼키는 계교
장비는 유비의 호통에 그 자리를 물러났으나 부글거리는 마음을 달래지 못해 투덜거리고 있었다. 여포가 돌아갈 때도 유비가 몸소 성문 밖까지 배웅하는 모습을 보자 더욱 속이 끓었다.
'겸손한 것도 분수가 있지.'
유비가 여포를 배웅하고 오자 장비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불퉁거렸다.
"형님, 사람이 좋은 것도 지나치면 화를 당합니다. 왜 여포를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장비의 말에 여태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관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비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조조가 노리는 것은 여포와 내가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도록 만드는 것이네. 사람이 서로 싸우면 필경 두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 아니면 두 사람 다 힘이 약해지게 되네. 이를 이용한 어부지리를 얻자는 게 조조의 속셈이네. 그러니 그런 계교에 넘어가서야 되겠나?"
"왜 그런 계책을 꾸미는 것일까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자기를 칠까봐 두려운 것일세."
관우가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어리석음 이제야 깨우쳤소."
그러나 장비는 아직도 못마땅한 둣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여포란 놈은 뒤에 반드시 분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놈은 죽여 없애야 합니다."
"그건 장부가 취할 태도가 아니네."
유비가 장비를 달랬다.
다음 날 유비는 조조의 사자가 머물고 있는 역관을 찾았다.
"주공의 뜻은 언제든지 따르겠으나, 여포 또한 가벼운 인물이 아니므로 기회를 보아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자는 그날로 허창으로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유비는 사자편에 천자에게 감사하는 상주문을 올리고, 조조에게는 따로 사자에게 말한 내용으로 답장을 써보냈다. 사자는 허도로 돌아갔다. 그리고 유비가 제발로 찾아온 여포를 죽이지 않았음을 고했다.
조조는 순욱을 불러 의논했다.
"과연 유비는 다르오, 재치있게 슬쩍 그 책략을 패했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렇다면 또 하나의 계교가 있습니다. 즉 이리로 하여금 호랑이를 몰아내는 책략으로 '구호탄랑지계'가 그것입니다."
"어떻게 한다는 말이오?"
"은밀히 원술에게 사람을 보내'유비가 천자께 은밀히 표를 올려 남군을 빼앗고자 한다'고 전하게 합니다. 그러면 원술은 유비를 치려들 것입니다. 그럴 때 주공께서 유비에게 조서를 내려 원술을 치도록 하십시오. 천자의 명이라면 유비는 따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원수과 유비를 싸우도록 한다는 말인가?"
"두 사람이 싸우게 되면 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호랑이 굴인 서주성이 방비가 허술해져 빈 것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비어 있는 호랑이 굴을 이리가 그대로 놓아둘 리 있겠습니까? 여포는 본디 의리를 모르는 자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주성을 취할 것입니다."
"으음―, 과연 신묘한 계책이오. 하지만 원술과 공손찬이 동맹을 맺고 있지 않소. 또한 공손찬은 유비와'형님, 아우'의 사이인데 이들이 가만있을 리 없지 않소."
"원술과 공손찬이 동맹을 맺은 것은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의 근거지를 지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비 또한 서주태수가 된 이래 공손찬의 휘하에 머물고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따라서 공손찬은 쓸데없이 싸움에 끼어들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조는 순욱의 계교에 무릎을 치며 희색이 만면했다. 다음 날 조조는 원술이 있는 남양으로 급사를 보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주성에도 위조한 조서를 보냈다. 서주의 유비는 천자로부터 다시 사자가 왔다는 말을 듣고 성 밖에 나와 조서를 받들었다. 유비가 조서를 보니 '원술을 토벌하라'는 명이었다. 유비는 측근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미축이 조서를 보더니 말했다.
"이 또한 조조의 책략입니다. 이 책략에 넘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비록 조조의 책략이라곤 하나, 천자의 명으로 내려온 것이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순욱이 유비가 천자의 명이라면 물리치지 않으리라는 예견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유비는 천자의 명을 거역하지 않기 위해 내키지 않는 싸움 이었으나 곧 군마를 점고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 손건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뒷일에 대한 대비가 중요합니다. 누구에게 서주성을 지키도록 하시겠습니까?"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불렀다.
"두 아우 중에 누가 이 서주성을 지키겠느가?"
관우가 말했다.
"제가 성을 지키겠습니다."
"그야 아우라면 안심이긴 하지. 그러나 그대와는 조석으로 매사를 의논해야 할 터이니 내 곁에 있어야 하오."
유비가 그렇게 말하자 장비가 불쑥 나섰다.
"형님, 제가 남겠습니다. 안심하고 출진하십시오."
장비가 나서며 안심하라고 말했지만 유비는 선뜻 응락하지 않더니 걱정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우가 성을 지킨다면 내가 마음이 놓이지 않네. 아우의 불 같은 성미는 달려나가 적을 치는 데는 맞으나, 성안에서 성을 지키기에는 맞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네."
"두고 보십시도. 어느 누구도 근접 못 하도록 지키겠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네. 아우는 술에 취하면 혈기가 지나쳐 군졸들에게 매질을 하기 일쑤이니 걱정이네. 또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매사를 경솔히 처리하려 드니 어찌 마음이 놓이겠나?'
장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아우는 지금부터는 술을 끊겠습니다. 또한 매질도 하지 않을 것이며 남의 말을 들어 일을 처리해 나가겠습니다."
장비는 말을 마치자 늘 허리춤에 지니고 다니는 백옥 술잔을 꺼내 땅바닥에 팽개쳤다. 그 술잔은 장비가 어느 싸움터에서 노획한 전리품이었는데 야광주를 갈아서 만든 명품의 마상배였다.
"이건 하늘이 장비에게 내린 은상이다."
장비는 항상 그 술잔을 품에 지니고 다니며 자랑하던 술잔이었다. 장비가 술잔까지 깨뜨리며 결의에 찬 결심을 보이자 유비도 다소 마음을 누그려뜨렸다.
"장군께서 그렇게 말씀은 하시가, 그 주사는 뒤 귀처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오?"
미축이 그런 장비를 놀리는 것처럼 꾸며 장비의 다짐을 떠보았다. 그러자 장비는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이오. 나는 형님과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한 번도 형님의 신의를 거스른 적이 없소. 공은 어찌하여 나를 가볍게 보시오."
유비는 그래도 장비가 못미덥다는 둣 다시금 말했다.
"아우의 마음은 잘 알았네. 그렇다면 진원룡을 이곳에 머물게 할 테니 만사 그와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게."
유비는 진등에게도 단단히 일러 일이 그릇됨이 없도록 당부한 뒤 그를 머물게 했다. 이윽고 유비는 3만여의 마보군을 거느리고 서주를 떠나 남야으로 향했다. 그 무렵 원술은 하남 땅에서 착실히 그 세력을 키워 가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그 세가 커지니 명문인 원씨 일족 중에서도 가장 호방담대한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유비가 원술을 치기 위해 남양으로 향할 즈음, 원술도 조조가 보낸 사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원술은 조조가 보낸 서장을 읽어 보았다. 유비가 천자에게 상주하여 연래의 야망을 이루고자 남양 침략의 허락을 청하였소. 귀공과 나는 오랜 친구가 아니오. 어찌 이 사실을 모른 척하고 있을 수 있겠소. 비밀리에 급히 알리는 바이니, 바라건대 한 치의 방심도 없기를 바랄 뿐이외다. 읽기를 마친 원술은 대뜸 얼굴을 붉히며 입에 거품을 뿜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짚신이나 삼고, 돗자리나 짜던 필부가 아닌가. 근자에 멋대로 서주를 차지하고 태수를 자칭하며 제후들과 동렬에 서겠다는 것도 해괴한 일이거는, 내 이놈을 쳐서 버릇을 가르치려 했는데 제가 도리어 나를 치겠다는 말인가, 내 이놈을 짓밟아 천하에 본보기를 보이리라!"
원술은 크게 노하여 상장 기령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유비를 치게 하였다. 한편 유비의 군사도 남양을 향하다 두 군사는 임회군의 우이에서 서고 대하게 되었다. 원술군의 상장 기령은 산동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힘이 센 장사로 끝이 세 갈래 난 50근이 되는 날카로운 칼을 잘 쓰는 장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기령은 유비군을 맞아 진두에 나서며 소리쳤다.
"촌놈 유비는 듣거라! 제 분수도 모르고 무슨 연고로 우리 대국을 침범하는가?"
기령의 말에 유비도 지지 않고 외쳤다.
"나는 천자의 조서를 받들고 있거늘 네 어찌 자청하여 역적의 오명을 쓰려 하느냐. 감히 맞선다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기령의 부하 중에는 순정이라는 부장이 있었다. 그는 유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말을 박차며 달려나왔다.
"꼼짝 말고 게 섰거라!"
그러자 관우가 80근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그를 막았다.
"너 따위 졸개를 상대하실 우리 주군이 아니다.
순정은 느닷없이 나타난 관우를 맞아 칼과 칼을 맞부딪쳤다. 순정의 몸은 땀투성이가 되었다. 순정은 관우와 부딪다 점점 밀려 개울가에까지 밀렸다.
"에잇"
다음 순간 관우의 힘찬 기합 소리가 터져 나오는가 했더니 청룡도가 번쩍하고 빛을 발했다. 순정의 몸은 두 동강이 나'풍덩' 하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강물에 잠겼다. 그러자 기령이 번개같이 말을 몰아 관우를 맞았다.
"일개 이름없는 조무래기 장수야, 감히 어디라고 나서느냐!"
기령이 무게 50근이나 되는 삼첨도를 휘둘러 관우를 내리쳤다. 그러나 관우는 청룡도를 휘둘러 기령의 삼첨도를 가볍게 막아냈다.
"네놈에게 이 청룡도의 맛을 보여주마."
기령도 원술이 자랑하는 상장이었다. 관우와 맞싸운 지 30여 합이나 어우러졌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결국 기령은 말머리를 돌렸다. 유비가 일시에 군사를 몰아 달아나는 기령을 뒤쫓았다. 기령은 순정마저 죽고 없는 터라 군사를 물려 회음하구까지 물러나 진을 쳤다. 유비군을 만만히 보고 단숨에 쳐부수겠다고 나선 기령이었다. 그러나 관우에게 혼이 나 진을 굳게 지키고 화살만 날릴 뿐, 좀처럼 싸우려 들지 않았다. 원래 기령군보다 군사가 적은 유비군은 섣불리 총공격을 감행할 수도 없었다. 유비군과 원술군은 서로 적진의 형세만 관망하며 대치하고 있었다.
한편 유비가 출정하고 나자 장비는 모든 잡무를 진등에게 맡기고 자기는 군무에 관한 일만 보았다. 아침저녁 망루에 올라 경비 상태를 점고했다. 장형인 유비가 싸움터에서 고생한다 하여 자신은 갑옷도 벗지 않고 자리에 들었다. 장비는 매일 어김없이 성안을 두루 살폈다. 장비의 열성에 장졸들도 솔선수범했다. 성안에서의 군무였지만 야영을 하듯 땅 위에서 잠을 자고 조식을 하며 근무지를 떠나지 않았다.
"모두 수고들이 많구나."
장비는 흡족하여 장졸들을 칭찬하며 다녔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장비는 장졸들의 노고에 말로만 공치사나 뿌리고 다니는 것 같아 어쩐지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장비는 봉인해 둔 술창고에서 큰 술통 하나를 꺼내 장졸들이 있는 가운데 갖다 놓았다.
"활줄을 항상 팽팽하게 매어 놓으면 줄이 늘어진다. 때로는 활줄을 풀어 둘 때도 있어야 한다."
장비는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장졸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술잔을 돌리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장군, 마셔도 괜찮겠습니까?"
부장들은 장비의 기색을 살피며 모두들 선뜻 술통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들 마셔라. 그동안 밤낮없이 군무를 충실히 이행한 데 대한 상으로 베푸는 술이다. 오늘만은 술 마시는 걸 허락하겠다."
그러나 성안의 초소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여기도 한 통, 저기도 한 통, 이렇게 하여 성안은 온통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자 장졸들이 술을 한 사발 떠와 장비에게 내밀었다.
"장군님, 한 잔만 드십시오. 실은 장군님이 술을 드시지 않고 계시니까 저희들이 잔을 들 수 없습니다."
장비가 초소를 순시하는 동안 장졸들이 권유했다. 입맛을 쩝쩝 다시던 장비는 그 말에 그만 술잔을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 마셨다. '한 잔쯤이야 어떠랴?' 장비는 이렇게 자위하며 한 잔을 마셨으나, 일단 술이 입안으로 들어가자 참을 수가 없었다.
"그 큰 잔으로 넘치게 한 잔 다오."
술이란 처음 한 잔이 문제가 된다. 장비는 일단 술을 딥에 대자 벌컥벌컥 연거푸 두세 잔을 마셨다. 이렇게 되면 이제 끊어진 둑이었다.
"자, 술을 더 가져오너라"
술을 가지러 갔던 군사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창고지기가 이제 더 이상 술통을 내어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뭐야? 괘씸한 놈 같으니. 이 장비의 명령이라고 하라. 만약 안 된다고 하면 소대를 이끌고 가 술창고를 점령해 버려라, 하하하."
장비가 한참 흥을 돋우고 있는데 술 창고지기의 보고르 받고 부장 조표가 기겁을 하여 헐레벌떡 달려왔다. 조표는 이미 만취해 있는 장비를 보자 어이가 없어 멍하니 서 있었다. 장비는 그때 여러 관원들에게 큰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때마침 조표가 그 자리에 나타났으므로 그에게도 술잔을 돌리게 했다. 그러나 조표는 술을 거절했다. 장비는 벌컥 화를 냈다.
"어찌하여 네놈만 마시지 않겠다는 말이냐?"
장비는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조표를 노려보았다. 그 서슬에 조표는 마지못해 술잔을 들이켰다. 술을 마신 조표가 자리를 뜨려하자 장비가 이를 제지했다.
"어디고 가려느냐, 술좌석이 파하지도 않았는데 자리를 뜨려 하니 이 장비를어떻게 보고 그러느냐."
"저는 정말로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
"조금 전에는 마시지 않았느냐. 자 술잔을 받아라."
그러나 조표는 술잔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장비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더니 고리눈을 부릅떴다.
"이놈 명령을 어기려 드느냐? 저놈을 끌어내어 곤장 1백 대를 쳐라."
장비가 군사를 불러 조표를 끌어내리게 했다. 보다못해 진등이 급히 일어나 급히 일어나 장비한테 간했다.
"주공께서 떠나실 때 하신 말씀을 잊으셨소? 부하들에게 매질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그대는 문관이니, 문관 일이나 잘 돌보시오. 쓸데없이 아무 일에나 나서지 마시오."
장비가 진등에게까지 벌컥 화를 내자 조표는 더욱 안절부절이었다. 장비에게 용서를 빌어 이 자리를 모면할 생각으로 얼른 입을 열었다.
"익덕 공,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건 거짓이 아니오. 내 사위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이제 그만 용서해 주오."
"네놈의 사위가 누구길래 그러느나?"
"여포가 제 사위입니다."
조표가 그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여포란 말에 장비는 속이 뒤틀릴 대로 뒤틀려 고리눈을 다시 부릅뜨며 소리쳤다.
"막상 네놈에게 곤장을 칠 작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네놈이 여포를 믿고 이토록 방자하게 구니 이젠 용서치 못하겠다. 너를 치는 것이 바로 여포를 치는 것이다!"
장비는 군사들에게 명하여 다시 조표를 끌어내리니 군사들은 몸둘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장비가 곤장 쉰 대를 쳤을 때, 군사들은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간곡히 만류하자 그제야 곤장을 놓았다. 술자리가 파하기 전에 조표는 군사의 부축을 받고 돌아갔다. 조표의 마음속에는 장비에 대한 앙심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조표는 집에 돌아오자 서찰을 써 소패에 있는 여포에게 몰래 사람을 보냈다. 소패성까지는 불과 40여 리의 멀지 않은 거리였다. 때마침 여포는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심복인 진궁이 조표의 부하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뒤 서찰을 들고 여포의 침실로 들어갔다.
"장군, 하늘에서 온 희소식입니다."
여포는 조표의 서찰을 읽어 보았다. 지금 서주성은 장비 혼자 지키고 있으며, 오늘은 군사들과 함께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기 때문에 서주성을 칠 더없이 좋은 기회라는 내용이었다. 조표의 글을 보고 여포는 얼마 전 장비가 자기를 죽이려고 칼을 빼든 일이 생각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궁 또한 가만 있지 않았다.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이 서주를 빼앗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후에 크게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진궁의 재촉하는 둣한 말에 여포는 갑옷을 꿰입고 말에 올랐다. 적토마는 오랜만에 갑옷을 입고 방천화극을 비껴든 주인을 태우고 밤길을 달렸다. 여포의 뒤에는 그가 거느리는 군사 5백 기가 뒤따르고 있었으며, 고순에게 후군을 이끌게 했다. 여포는 삽시간에 서주성에 이르렀다. 여포는 성문 아래에 이르자 큰 소리로 외쳤다.
"문을 열라. 유 사군께서 급한 일로 사람을 보내셨다."
조표는 여포에게 서찰을 보낸 뒤 여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은 자기의 부하들로 비치해 놓고 있었다. 밖에서 성문을 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그가 곧 여포임을 알아차리고 성문을 활짝 열었다. 밤은 깊어 사경 무렵이었다. 그날따라 달이 휘영청 밝았는데 성 위에서는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장비는 그 후에도 상당히 많은 술을 마셨는지 코를 골로 있었다. 여포의 군사들은 봇물이 터지듯 성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여포군이 함성을 지르며 성내로 밀려들자 장비도 그 소란통에 그제서야 잠이 깨었다. 창칼이 어지럽게 부딪는 소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으나 이미 만취한 장비는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뿔사 큰일났구나!' 장비는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성안은 위아래 할 것 없이 혼란에 빠져 있었다. 발아래에 넘어져 있는 시체는 모두 자기편 군사들이었다. '음―, 여포로구나.' 그렇게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어 말 위에 뛰어올라 장팔사모창을 들고 성안의 광장으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조표의 부하들과 여포의 군사들이 한통속이 되어 날뛰고 있었다. 장비는 그들을 향해 나아가 사모창을 휘둘렀으나 어찌하랴,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장비가 비록 술에 취했다 하나 여포는 장비의 용맹을 알고 있는 터라 함부로 덤벼들 수 없었다. 그보다도 서주성을 점령하는 것이 더 급한 일이었다. 서주성의 군사는 술에 취한 데에다 기습까지 당해 지리멸렬이었다. 게다가 그들을 이끄는 장수마저 없으니 적에게 베이는 자보다 항복하는 자가 더 많았다.
"장군, 어서 피하십시오."
그럴 때 부장 18기가 장비를 혼란 속에서 호위하며 동문에 혈로를 열어 그곳을 빠져 나왔다. 조표는 장비가 동문을 향해 도망쳤다는 말을 듣고 군사 1백여 기를 이끌고 뒤쫓았다.
"이놈 장비, 네놈의 목을 쳐 원한을 풀겠다. 게 섰거라!"
"저건 조표가 아니냐?"
장비가 문득 목소리를 듣고 뒤쫓는 군사가 조표임을 알자 갑자기 말을 홱 되돌려 달려나갔다. 장비가 취했다고는 하나 조표는 그와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장비는 조표가 배반하여 여포를 성내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이를 부드득 갈며 미친 둣이 달려간 장비는 단 3합 만에 조표의 목을 쳐버렸다. 조표가 이끈 1백여 명의 군사들도 장비의 사모창 앞에 낙엽 구르듯이 뒹굴었다. 붉은 피가 여기저기서 튀어 달을 가리는 듯했다. 몸이 온통 땀과 피로 얼룩진 장비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아!"
장비는 혼자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장비는 성을 빠져나온 얼마 되지 않는 군사를 이끌고 쓸쓸히 유비가 있는 회남 땅으로 향했다. 이 무렵, 여포는 드디어 마수를 드러내어 서주성을 수중에 넣은 뒤,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곳곳에 방을 내 걸었다.
"나는 오랫동안 현덕 공의 은의를 받아왔다. 이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이는 유비 공을 거스른 거사가 아니라 성안의 사사로운 싸움을 진압하기 위함이었다. 이적의 무리를 쫓고 장차 있을 화근을 뽑기 위함이다. 모름지기 군민 모두 나의 다스림 속에 안심하고 조속히 평화로운 일상 생활에 전념해 주기 바란다."
여포는 또 친히 성의 후각에 나아가 장졸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부녀자나 포로들을 함부로 다루지 말라. 만약 군율을 어기면 목을 베리라."
여포는 군사 1백여 명을 풀어 유비의 집을 지키게 하여 아무도 근접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지난날 유비가 자기에게 베푼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보여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유비는 그날도 회음에 진을 편 채 대치하고 있었다. 해질 무렵이 되자 초병이 급보를 전했다.
"한 떼의 군마가 보입니다."
유비가 자세히 보니 땅거미 지는 광야 저쪽에서 석양을 등지고 터벅터벅 이쪽을 향해 오는 한 무리의 인마가 보였다.
"장 장군과 18기의 부장들이 오고 있습니다."
관우가 보낸 정찰병이 외쳤다.
"뭐야, 장비라고?"
유비와 관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현 듯 불길한 예감이 들기는 유비나 관우 다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장비와 그의 부장, 그리고 장졸들이 패잔병의 비참한 몰골을 하고 유비의 진문 앞에 도착했다. 장비는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며 조표와 여포가 서로 내통하여 서주를 야습한 경위를 고했다.
"살아서 얼굴을 뵈올 면목이 없습니다. 다만 죄를 빌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예까지 왔을 뿐입니다."
장비의 말을 듣고 있던 유비가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성을 얻었다고 기뻐할 것도 없고, 성을 잃었다고 근심할 것도 아닐터, 다만 천의가 우리에게 있다면 다시 그 모든 것이 돌아오리라."
"형님의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관우가 고개를 숙인 장비에게 물었다.
"모두 성안에 계실 것입니다.
장비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관우가 격노하여 발을 구르며 장비를 나무랐다.
"성을 떠나올 때 술을 삼가라고 그토록 간곡히 당부하지 않았더냐, 너 또한 그렇게 다짐하지 않았어냐. 그런데 어찌 장형의 가족까지 여포의 손에 맡기고 혼자서 도망쳤더란 말인가!"
관우의 고함 소리에 고개를 숙잍 채 눈물을 글썽이던 장비가 갑자기 칼을 빼들고 제 목을 찌르려 했다. 유바가 이를 보고 깜짝 놀라며 급히 칼을 빼앗았다.
"그 칼로 제 목을 쳐 주십시오. 제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유비는 장비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형제는 수족과 같고 처자는 의복과 같다'고 하였다. 옷은 해지면 다시 지을 수 있으나 손발이 끊어지면 어찌 이을 수가 있겠느냐? 잊었는가 장비, 우리 셋은 도원에서 의를 맺어, 형제의 서약을 하고 죽기를 같이하자고 하지 않았더냐. 비록 성과 가솔을 잃었다 하나, 그 일로 어찌 형제의 의를 끊겠느냐? 가솔이 갇혀 있다고 하나 여포가 죽이지는 않을 테니 그들을 구해 낼 희망은 있네. 방도를 찾아보기로 하세. 한때의 실수로 목숨까지 버릴 수야 없지 않은가?"
유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자 관우. 장비도 유비의 넓은 도량과 인자함에 감격하여 목이 메었다. 장비가 서주성을 여포에게 빼앗기고 회남으로 오자 그 소식은 원술에게도 전해졌다. 원술은 뛸 듯이 기뻐하며 여포에게 급히 사람을 보냈다.
"만일 공께서 현덕의 후진을 공격하여 남양군을 도와 현덕을 함께 물리친다면 양곡 5만 석, 군마 1백 필, 금은1만 냥, 비단 1천 필을 주겠소."
원술은 사자를 통해 여포에게 이 같은 제의를 하였다. 여포는 원술이 제시한 재물에 욕심이 났다. 원술의 제의에 두말없이 응하기로 하고 고순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유비의 후미를 치게 했다. 유비는 우이의 진영에서 그 소식을 듣고 급히 관우. 장비를 불러들였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설사 협공을 받는다 해도 기령이나 고순 따위의 무리야 죽기로 작정하고 싸운다면 두려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관우. 장비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으나 유비의 생각은 달랐다.
"아닐세, 이번만은 심사숙고해야 할 걸세. 아무래도 이번 출진은 앞뒤가 순조롭지 않았네. 지금 저들과 싸우는 것은 파손당한 배를 풍랑 속으로 내모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일세."
유비는 그렇게 말하고 퇴각을 명했다.
그날은 큰비가 내렸다. 회음강의 하구는 큰물이 넘쳐 기령군도 유비군을 뒤쫓지 못했다. 유비는 우이 진지를 떠나 광릉지방으로 퇴각했다. 고순의 군사가 우이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이었다. 우이는 강물이 범람할 뿐, 인마는커녕 진채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적은 이 고순의 이름만 듣고도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간 것이다.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고순은 어처구니없는 허세를 부리며 기령의 진지로 향했다. 유비군이 군사를 몰아 도망갔으므로 원술과의 약속은 지킨 셈이었다. 고순은 기령을 만나 약속한 물건을 내놓으라고 채근했다.
"우리 주군과 공의 주군과의 약속입니다. 제가 원술 장군을 만나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겠으니 공은 일단 군사를 이끌고 회군하십시오."
기령의 말에 고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회군한 후 여포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여포는 고순의 말을 듣자 은근히 원술의 태도가 미심쩍게 생각되었다.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
정히 의심하고 있을 때 원술이 보낸 서찰이 당도했다.
"비록 고순의 군사가 왔었다고는 하나 유현덕을 없애지는 못하였소. 현독은 지금 광릉에 숨어 있소. 그의 목숨을 벤다면 약속한 재물을 드리겠소.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어찌 재물을 재촉하시오."
서찰을 본 여포는 원술이 자기를 속였음을 알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여포는 군사를 일으켜 원술을 쳐야겠다고 펄펄 뛰었다.
"원술이란 놈이 나를 속였구나, 내 이놈을 당장에 징벌하리라!"
그러나 진궁이 나서며 그를 말렸다.
"고정하십시오. 원술이 자리 잡고 있는 수춘 지방은 양곡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병력 또한 많습니다. 그보다는 패주한 유비를 잘 구슬러 소패에 머물게 하여 이쪽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기회가 오면 군사를 일으켜 현덕을 선봉으로 삼아 원술을 치도록 하십시오. 원술을 친 다음 원씨 일족의 강자인 원소를 도모한다면 천하는 이미 주공의 손아귀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진궁의 말을 들으니 여포는 귀가 솔깃했다. 그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사람을 시켜 유비에게 서주로 돌아와 달라는 서찰을 보냈다.
이튿날, 여포의 사자는 광릉을 향해 떠났다. 유비는 그때 얼마 되지 않는 군사만을 거느리고 광릉의 산사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난세의 흔한 예지만, 한 발자국 발을 헛딛으면 그 전락은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법이다. 삼일제후라는 말은 당시의 흥망부침 속을 표류한 수많은 영웅들에게 그대로 들어맞는 말이었다.
유비는 광릉으로 가다 원술군의 기숩을 받아 군사의 절반을 잃었다. 군량도 부족하여 그나마 남아 있던 군사들도 자취를 감추고 있는 지경이었다. 그때 여포의 사자가 왔다. 유비는 여포가 보낸 글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관우. 장비는 여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자는 원래 표리부동한 자입니다.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유비는 두 아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가 모처럼 호의를 베풀어 나를 부르는 것인데 어찌 의심하려 드느냐?"
유비는 기어이 서주로 돌아갈 것을 고집하니 관우. 장비도 하는 수 없이 뒤따랐다. 유비가 서주에 이르자 여포는 유비가 내심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람을 딸려 그이 가족을 보내 주었다. 유비는 어머니와 아내 감 부인, 미 부인 그리고 자식들을 두 손으로 맞으며 반가워했다. 아내 감 부인은 유비를 맞으며 아뢰었다.
"여 장군은 군사들을 시켜 우리집을 호위케 했으며 시져들을 통해 필요한 물건을 부족함 없이 보내 주었습니다."
"그것 보게, 내가 말한 대로가 아닌가?"
유비는 관우 · 장비에게 말했다. 유비가 서주성으로 향하자 잔비는 여포와 마주하기 싫어서 한사코 유비의 가족들을 호위하며 소패로 갈 것을 고집했다. 유비는 하는 수 없이 관우와 함께 서주성으로 향했다. 여포는 성문 밖까지 나와 유비를 맞았다. 유비가 고마움을 표하자 여포가 입을 열어 변명부터 늘어놓았다.
"소생은 결코 서주를 탈취한 것은 아닙니다. 아우 되는 장비가 술에 취해 함부로 사람이 죽도록 매질을 하니 혹시라도 잘못될까 하여 잠시성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오."
"이 비는 일찍이 서주를 장군에게 양보한 바 있었습니다. 이제 마땅한 성주를 얻었으니 만족할 따름입니다."
여포는 본심과는 달리 짐짓 성을 사양하는 체하였으나, 유비는 그대로 물러나 소패로 돌아오고 말았다. 관우 · 장비는 불평이 대단하였으나 유비는 그들을 달랬다.
"몸을 굽혀 분수를 지키며 천시를 기다려야 하네. 즉 하늘이 내린 기회를 기다리는 걸세. 교룡이 연못에 잠겨 있음은 하늘에 오르기 위함이네. 결코 천명을 거슬러가며 무리를 해서는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네."
여포는 유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식량과 비단을 보내왔다. 이로 인해 유비와 여포는 한동안 화해가 이루어졌다.
한편, 원술은 여포를 이용해 유비를 크게 물리치자 수춘에서 수하 장수를 모아 놓고 잔치 자리를 벌이고 있는데 군사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강동의 손책이 여강태수 육강을 정벌하고 왔습니다."
원술은 그 소리에 크게 기뻐하며 손책을 물러들여 치하하고 자기 옆자리에 앉히고 연회에 참석시켰다. 이때 오의 장사태수 손견의 장남 손책도 어느덧 장성하여 스물한 살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는 강동의 맹장이었던 애비(손견)보다 낫다. 기린아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게다."
세상 사람들이나 아버지를 보좌하던 신하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며 그의 성장에 기대를 거는 사람이 많았다. 손책이 이렇게 성장한 것은 열일곱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 손견의 시신을 곡아의 벌판에 붇고 참담한 패군을 이끌고 돌아온 뒤부터였다. 그 후 널리 어진 이들을 모으고 군사를 양성하며 가문의 재기를 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역경을 헤쳐 나가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더 이상 장사 땅을 지킬 수 없게 되자 노모와 가족을 친척집에 맡기고 떠나아 했다.
"때가 되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얼마 동안 시골에 피신해 계십시오."
손책은 노모에게 작별을 고하고 제국을 떠돌아다녔다. 홀로 다짐한 큰 뜻을 가슴에 간직한 채 각 나라의 인정이나 지리, 군사들을 살피며 다녔다. 이른바 천하의 맹장이 되기 위한 수행의 고초를 샅샅이 겪으며 편력한 것이다. 그리고 2년쯤 전부터 회남의 수춘성에서 원술의 식객으로 머물고 있었다. 원술과 선친 손견은 원래 교분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손견이 유표와 싸우게 된 것도, 그리하여 끝내 곡아 땅에서 전사하게 된 것도 실은 원술의 사주가 그 동기였다. 그런 인연으로 하여 원술은 손책을 동정하여 아들처럼 돌보아주며 그를 회의교위로 삼았다. 회의교위가 된 손책은 원술의 명에 의해 군사를 이끌고 경현대수 조랑을 쳐 공을 세웠다. 손책의 용맹을 높이 한 원술은 다시 여강을 치게 하자, 여강의 태수 육강을 정벌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원술의 기쁨은 컸다. 원술은 지난날 동탁을 치기 위한 동맹군에서 빠져나와 손견의 도움으로 남양 태수 장자를 쳐 자기의 근거지를 삼았다. 이후 착실히 세력을 넓혀 이제 구강. 양주. 여강까지 그 휘하에 두게 되었다. 거기다가 손견이 이미 죽고 없어 이제 장강 남동에 까지 눈길을 주며 그 야망을 불태우고 있던 참이다. 장강은 광활한 중국 대륙을 양분하고 있는 동맥이었다. 그 두 갈래 흐름이 바로 북쪽의 황하와 남쪽의 양자강이다. 오는 그 장강의 흐름에 따라 나뉘어져 강동이라 불리워지고 있었다. 이날의 잔치에서도 원술은 이제 스스럼없이 천하를 논할 정도로 온갖 거드름을 다 피웠다. 손책은 잔치가 끝나기 전에 자기의 군영으로 돌아왔다. 원술의 오만스런 태도에 마음이 상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그가 지난날 선친의 땅이었던 강동을 넘보고 있다고 느끼자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아버지는 천하를 종횡하시던 불세출의 영웅이셨거늘, 나는 아직도 월술의 식객이 되어 그의 거드름이나 지켜 보고 지내야 한다는 말인가?'
손책은 앞일을 짚어보며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했다. 평소에는 책을 읽고 거동이 조용하며 사람들을 슬기로 대하여 그를 만난 사람들은 모구 그를 따랐다. 그런 가운데도 틈틈이 무예를 닦고 산야로 수렵을 나가 심신의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원래 병가의 상속자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무예 전반을 통하고 있던 손책이었다. 거기다가 7척이 넘는 거한으로 검술과 완력은 이미 아버지 손견을 뛰어넘고 있었다.
다음 날, 손책은 울적한 마음도 달랠 겸 몇몇 종자를 데리고 복우산에서 사냥으로 하루를 보냈다. 사냥이 끝나고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장엄한 석양의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술의 주부 수춘성에서 회남 일대의 도시와 마을이 눈앞에 내려다보였다. 굽이치는 강은 회하의 강줄기이다. 회하는 좁았다. 장강의 유역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손책은 곧 강동의 하늘을 생각하며 절로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 언제 장강의 물결 위에 나의 큰 뜻을 펼쳐 볼 날이 온단 말인가? 곡아의 어머님, 어느 때 부끄럼 없는 아들로서 아버님의 무덤에 가 벌초할 날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근처에서 쉬고 있던 한 사람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무슨 부질없는 한탄만 하고 계시로 그대는 앞길이 양양한 젊은이가 아니시오? 저 석양은 내일이 없는 석양이 아니오."
손책이 놀라 그를 보니, 단양 고장 사람 주치였다. 자를 군리라고 하며 이전에 아버지 손견 수하의 종사관이었다.
"오오. 주치공이시오? 오늘도 하루 해가 저물었소. 산야에서 사냥을 한들 무얼하겠소. 나는 날마다 이렇게 허송 시월하는 것이 하늘과 땅에 송구할 따름입니다."
주치는 손책의 의중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도 깊게 탄식했다.
"역시 그러셨군. 세월은 유수와 같소. 울분에 찬 탄식, 소생도 마땅히 그 뜻을 헤아리고 있소이다. 그토록 생각이 지극하시다면 사내대장부로 어찌 선친의 유업을 계승할 용단을 내리려하지 않으시오?"
"나는 일개 식객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원술이 나를 귀여워해 주고 사냥을 할 활을 준다고는 하나 대사를 일으킬 병마는 즈지 않소."
"그러하나…. 그 온상에 묻혀 계시면 아니 되오. 그대를 아껴 주며, 호의호식과 사치스러운 생활, 이런 것은 모두 그대를 약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나 원술의 극진한 정도 배신할 수는 없지 않소?"
"그런 우유부단을 스슷로 끊어 버리지 않으면 아니 되오. 팽배한 천하의 풍운을 보시오. 지금 이때 허약한 푸념으로만 지내신다면 앞으로 어찌 큰 뜻을 도모하실 수 있겠소이까?"
"그렇소, 나도 그것을 통감하고 있소. 어떻게 하면 지금의 이 편안한 온상을 박차고 남아의 기상을 펼 수 있는 길을 열겠소? 만약 그대가 그 길을 안다면 깨우쳐 주시오."
"그대의 숙부 중에 불운한 부이 계시지요? 지난날 단양의 태수였던…."
"예. 외삼촌 오경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오 공은 지금 단양 땅도 잃고 몰락했다는 소문을 들었소. 그 역경에 처한 숙부님을 구해야겠다는 핑계를 대고 원술에게 군사를 빌리십시오."
손책은 주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 저녁 하늘을 나르는 새 떼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근처 나무 밑을 서성이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열심히 엿듣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두 사람이 잠시 말을 멈추자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손책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 무엇을 주저하시오. 선친의 유업을 받들어 일어나시오. 나에게 1백 명 정도의 무사가 있으니 언제든지 그들을 데려가시오."
그는 원술의 모사인 여남 세양 땅 사람인 여범이었다. 자를 자형이라고 했으며, 손책과 함께 원술에게 투신해 온 사람이었다. '자형은 뛰어난 모사이다'라고 하며 그의 문중에서는 일찍부터 그의 재능을 칭송하고 있었다. 손책은 이 지기를 얻게 되어 대단히 기뻤다. 손책은 그를 한 자리에 청하여 물었다.
"그대도 나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소?"
여범은 손책의 불 같은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귀공은 장강을 건너야 하오."
"알겠소. 어찌 남의 땅 작은 연못에 갇혀 어합지졸들와 함께 무위도식으로 허송세월을 보내겠소?"
"그러나 손 공, 짐작견대 원술은 결코 군사를 빌려 주지 않을 것이오. 그때는 어찌하실 작정이오?"
"염려 마시오. 일단 뜻을 세운 이상, 이 손책에게도 생각이 있소."
손책이 결연히 말했다.
"원술에게서 어떻게 군사를 빌리시렵니까?"
여범과 주치는 손책의 흉중을 헤아릴 길이 없어 따지듯 물었다.
"나에게는 선친께서 물려주신 전국의 옥새가 있소. 그 옥새를 맡기고 군사를 빌려 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않을 거요."
"뭐요? 옥새?"
옥새라면 천자의 도장으로 국토를 전하고 대통을 계승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조정의 보기가 아닌가. 그런데 그 옥새는 낙양의 십상시란통에 분실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선친에게 물려받아 항상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데 어느 땐가 원술이 그것을 알고 몹시 탐이 나는 모양이었소."
"이제야 알겠군. 귀공을 친자식처럼 애지중지하는 연유를 …."
"그의 야심을 알면서 모르는 척했었소. 그렇지 않았으면 오늘날까지 무사히 그의 비호를 받을수 없었을는지도 모르오. 말하자면 이 몸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 옥새 덕이라 해도 좋소."
"하지만 원술은 워낙 교활나 사람이라 웨만큼 굳은 약속을 하지 않으면 돌려주지 않을 우려가 있습니다."
"나는 상자 안에 든 옥새보다 대지를 택하겠소. 나의 대망은 천하에 있소."
손책의 기개를 보고 두 사람은 마음이 흡족했다. 그날 세 사람은 앞으로의 일을 정한 후 헤어졌다.
손책과 태사자 두 호랑이가 다투다.
다음날, 손책은 원술을 찾아가 통곡을 하며 말했다.
"소자가 선친의 원수를 갚지 못해 한이 맺힌 터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외숙부 오경이 양주의 유요에게 침략을 받아 몸담을 곳도 없는 역경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또한 곡아에 두고 온 노모와 가솔들이 모두 비운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어느덧 3년이나 폐를 끼쳤고, 그 은혜도 갚지 못한 채 이런 소청을 드리는 것이 염치없는 일입니다만 바라건대 얼마간의 군사를 제게 빌려주십시오. 강을 건너가 숙부와 가솔들을 구하고 선친의 영을 위로한 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손책이 이렇게 말한 후 얼굴이 굳어져 있는 원술에게 전국의 옥새가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공손히 내밀었다. 원술이 그 상자를 보자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감출 수 없는 기쁨으로 만면에 희색을 띤 것이다.
"이 옥새를 담보로 맡겨 두고 가겠습니다. 제 소청을 들어주십시오."
그러나 원술은 끓어오르는 기쁨을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옥새까지 내놓고 간곡히 청하니 군사 3천과 말 5백 필을 주겠다. 곡부를 평정한 뒤에 속히 돌아오도록 하여라. 네가 돌아오면 옥새를 돌려줄 터이니 잠깐 내게 맡겨 두어라. 또한 너의 벼슬로는 대군을 지휘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표를 올려 너를 절충교위에 진구장군으로 삼을 터이니 곧 군사를 이끌어 출발하라."
원술은 손책이 청하지도 않은 벼슬까지 내렸다. 손책의 환심을 사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손책은 좋은 날을 택해 군사를 수습하여 강동으로 떠났다. 손책이 수춘성을 떠나 한나절을 달려갔을 때였다. 그의 뒤를 따르는 군마가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 때부터 그를 섬겼고, 손책이 떠돌이 시절 때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정보. 황개. 한당이었다. 그들은 손책이 군사를 빌려 강동 땅으로 향했다는 걸 알자 원술의 눈을 피해 말을 몰아 뒤따라온 것이었다. 손책은 원술에게 그들도 함께 가기를 청할까 했으나 원술의 의심을 살까 두려워 감히 말을 하지 못했던 터였다. 손책은 그들을 보자 새삼 죽은 선친이 생각나 한동안 목이 메었다. 세 사람도 감회가 새로워 눈물을 쏟고 있었다.
"대견스럽습니다. 이제 큰 주인의 대업을 이어받으셔야지오."
"고맙소. 이제 이 책의 마음은 한없이 든든하오."
그들은 한동안 벅찬 감회를 나눈 뒤 길을 재촉했다. 그들이 말을 달린 지 며칠이 지나서였다. 일행이 역양 땅에 이르자 저편에서 한 떼의 군마가 다가왔다. 선두의 한 젊은 무사가 손책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손 공!"
가까이 다가왔을 때 보니, 거동이 부드럽고 날래 보이는데가 용모가 수려하며 얼굴은 옥같이 희고 풍채도 당당하였다. 그는 손책과 같은 연배의 청년이었는데 가까이 다가올수록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니, 이건 공근이 아닌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가?"
손책이 그제서야 반색을 하며 그의 손은 잡았다. 그는 여강 서성 사람으로 이름은 주유였다. 자는 공근이라고 하며 손책과는 소년 시절부터 죽마고우일 뿐 아니라 형제의 의를 맺은 사이였다. 나이는 같으나 손책이 생일이 빨라 주유가 형이라 불렀다. 주유는 증조부, 종조와 그의 선친에 이르기까지 모두 벼슬을 지낸 세도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손책의 선친 손견이 동탁을 치기 위해 거병했을 때, 가솔을 서성에 머물게 했는데 그때 주유를 만나게 되었었다. 이후 손책이 원술에게 의지하여 서성을 떠나자 둘은 헤어졌다. 그러다가 이제 손책이 군사를 거느리고 강동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거느리던 군사 약간을 이끌고 온 것이었다.
"역시 친구가 좋군. 정말 잘 와 주었네. 힘껏 도와주게."
"이 유가 견마지로를 다해 형님과 함께 대업을 도모할까 합니다."
"내가 공근을 얻었으니 이제 대사는 이룬 것이나 다름없네."
두 사람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행군하였다.
손책이 주치와 여범을 소개했다. 주유는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 손책에게 물었다.
"형님께서는 강동에 두 장씨가 있다는 것을 아시오?"
"두 장씨라니 누구를 말함인가?"
"초야에 묻혀 있는 두 현인으로 한 사람은 장소라고 하고, 한 사람은 장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강동의 2장이라고도 합니다.
"그런 인물이 있었는가?"
"큰일을 성취하시려면 그 두 현인을 초빙하여 막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장소는 군서를 읽어 천문 지리에 밝습니다. 장굉으로 말하면 재지종횡하고 제경에 통하여 일단 입을 열면 강동, 강남의 백가라 하더라도 그를 능가할 사람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현인들을 모실 수 있겠는가?"
"권력으로도 안 되며 산더미 같은 재물에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의기상통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직접 형님이 가셔서 예를 갖추고 깊은 경외를 표하며, 형님이 품은 큰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혹시 일어날지 모를 것입니다."
손책은 기뻐했다. 강동에 이르자, 먼저 장소가 사는 시골로 가 그가 은거하는 집을 찾았다. 손책이 직접 찾아와 방바닥에 끓어 엎드리자 마침내 장소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컨대 철없는 저를 꾸짖으시고 선친의 대업을 이루게 해 주십시오."
좀처럼 바깥 세상으로 나오지 않으려던 은사 장소는 손책의 간곡한 말과 열의에 감동되어 손책의 사람이 되었다. 또 장소화 주유를 사자로 앞세워 장굉도 설득시켰다. 이렇게 하여 손책의 진중에는 원하던 두 현인이 가담하게 되었다. 손책은 장소를 무군 중랑장으로 삼고, 장굉을 참모 정의교위로 삼아 일군의 위용을 갖추었다. 손책은 숙부 오경을 괴롭힌 양주자사 유요부터 치기로 했다. 유요는 자를 정례라고 하며 동래현의 모평 사람이었다. 양자강 연안의 호족이며 명문으로 한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연주자사 유대는 그의 형이며, 태위 유총은 그의 백부였다. 그는 이전에는 양주자사로 수춘에 머물렀으나 원술에 쫓겨 가동에 와서 곡아를 점령하고 있었다. 손책이 군사를 이끌고 곡아로 온다는 소식은 유요에게도 전해졌다. 유요는 곧 장수들을 불러들여 의논했다. 부장인 장영이 나섰다.
"군사 약간을 주신다면 제가 우저에 진을 펼쳐 그가 대군을 이끌고 오더라도 감히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겠습니다."
우저는 양자강을 끼고 뒤로는 산악을 등져, 장강의 요해지라고 일러지는 요충지였다. 유요는 우저의 성채에 군량 수십만을 석을 보내고, 장영에게는 대군을 주어 방비를 맡기려 하였다. 그러자 돌연 끝자리에 있던 한 장수가 소리쳤다.
"저를 선봉으로 내보내 주십시오. 불초 소생이 반드시 적을 격파시키겠습니다."
모두 그 사람을 돌아보니 그는 동래 황현 사람 태사자였다. 지난날, 북해 싸움 때 황건적에 포위된 공융을 구한 후 지금은 유요의 휘하에 와 있었다. 유요는 선봉을 자원한 태사자를 보자 일언지하에 그의 청을 물리쳤다."
"그대는 아직 어리니 장수가 되기 어렵다. 내 곁에 머물러 달리 분부를 거행토록 하라."
태사자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직 갓 서른 살의 젊은이였다. 아직 유요의 휘하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요가 한마디로 거절하자 매우 무안해하는 기색이었다. 장영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저의 요새에 들어가 저각이라는 곳에 군량을 넉넉히 비축해 놓고 손책의 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손책은 군선 수십 척을 정비하여 장강으로 진주하여 뱃머리를 나란히 하고 강물을 거슬러 왔다. 손책이 배를 타고 진격해오자 장영은 궁노수들에게 명해 화살을 퍼붓도록 했다.
"날아오는 화살에 겁먹지 마라. 모든 군선은 저 강기슭에 바싹 대라."
손책을 비롯한 정보. 황개. 한당. 주유 등 여러 장수들은 각각 자기 선루 위에 올라 지휘하기 시작했다. 우저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햇빛을 가릴 정도로 새카맣게 덮쳐 왔다.
"모두 나를 따르라!"
군선이 강기슭에 닿자 손책은 배에서 육지로 날렵하게 뛰어내려 무리 진 적병 속으로 칼을 뽑고 달려들었다.
"주군을 엄호하라!"
다른 배에서도 속속 군사들이 뛰어내렸다. 아군의 시체를 넘어 한 자를 점령하고, 또 시체를 넘어 열 간의 땅을 점령하는 가운데 전군의 상륙이 이루어졌다. 그날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한 것은 노장 황개였다. 양군은 우저의 개울가에 진을 벌리고 맞부딪쳤다. 손책이 말을 달려 진두에 나서자 적장 장영이 손책을 큰 소리로 꾸짖으며 말을 달려나왔다.
"손책, 이 젖비린내 나는 아이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아직 모르느냐?"
그러자 손책의 장수 황개가 말을 몰아 나가 그를 맞았다.
"네 이놈, 누구한테 하룻강아지라 하느냐? 큰소리만 치지 말고 네 목이나 내어놓아라!"
황개의 분마(빨리 달리는 말)가 장영의 말에 부딪쳤다. 두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몇 차례 칼과 칼을 부딪쳤다. 장영이 유요가 믿어온 장수였다고는 하나 황개에게는 역부족이었다. 몇 차례의 칼부림이 있자 장영은 불리함을 깨닫고 말머리를 돌렸다.
"이놈 게 섰거라!"
황개의 고함 소리를 뒤로 하고 자영은 황급히 자기 군영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영의 전군은 둑이 무너진 꼴이었다. 손책이 그 기세를 틈타 군사를 이끌어 몰아붙였다. 그런데 장영이 우저의 요새로 도망쳐와 보니 성문 안 군량 창고 쪽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저, 저것이 무슨 연기냐?"
장영이 놀라 당황하며 소리쳤다.
"불이야!"
"어떤 놈이 우리 군량고에 불을 질렀다."
군사들이 제각기 한 마디씩 떠들어대며 검은 연기와 함께 창고에서 쏟아져 나왔다. 장영은 갈팡질팡하는 군사들을 이끌고 우저를 버리고 산기슭을 향해 달렸다. 이를 본 손책이 그들을 앞질러 기다리고 있다가 닥치는 대로 칼로 베었다. 장영은 간신히 손책의 칼을 피해 산속 깊이 몸을 숨겼다가 가까스로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곡아로 돌아갔다. 손책은 대승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날의 대승은 손책 자신이 생각해도 기적적인 것이었다.
'도대체 성내에서 누가 불을 질러 우리를 지원한 것일까?'
손책이 그 일을 기이하게 여기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돌연 손책의 뒤편 산길에서 약 3백 명은 됨직한 군사들이 북과 징을 울리며 나왔다. 선두에 두 사람의 선봉이 있었는데 그들이 손을 흔들며 외쳤다.
"이보시오. 활을 쏘지 마시오. 우리는 손 장군의 편입니다.
손책이 장수들에게 일러 공격을 멈추게 한 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선두의 두 장수 중 한 사람은 옻칠을 한 듯한 검은 얼굴이었다. 큼직하고 오뚝한 코, 수염은 누런데 날카로운 송곳니 한 개가 입을 벌릴 때마다 엿보였다. 보기만 해도 험상궂고 사나운 얼굴이었다. 또 한 장수는 밝은 눈동자에 눈썸이 짙으며, 키가 훤칠하고 사지가 쭉 뻗은 대장부였다. 두 사람은 손책 앞에 다가오자 예의를 갖추지도 않은 채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손 장군이 뉘시오?"
"그대들이야말로 대체 누구요?"
손책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되물었다. 그러자 코 큰 검은 얼굴의 사나이가 먼저 대답했다.
"아, 당신이 손 장군이오? 우리 둘은 구강 심양호에 사는 호적의 두목인데 나로 말하면 장흠, 자를 공혁이라 부르고, 여기 이 사람은 내 아우뻘 되는 주태, 자가 유평이라는 놈입죠."
"그렇다면 네놈들은 호적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호수에다 배를 띄우고 사는데, 양자강을 왕래하는 배를 습격해왔습죠."
"나는 양민 편이다. 양민을 괴롭히는 도적은 바로 내 적이다. 도대체 백주에 버젓이 내 앞에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날 난세를 당한 노력질로 살아왔습죠. 그러나 이제 손견 장군의 아들이 온다 하니 이참에 손을 씻고 참다운 무인으로 살아 보자고 아우 유평과 의논을 했습죠."
"음―."
손책은 그들의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무작정 병사가 되겠다면 그건 너무 염치없는 짓 같아 무슨 그럴듯한 공을 세우기로 했지요. 그래, 그저께 밤부터 우저 성채 뒷산에 기어 올라가 숨어 있다 성안에 군사들이 빠져나가자 안에서 불을 질렀죠. 성안에 불을 지른 뒤 우왕좌왕하는 장영군을 모조리 죽이고 이렇게 달려 나온 것입죠. 자, 대장님 우리들을 대장님 깃발 아래 넣어 주시겠습죠?"
손책은 장흠과 주태를 얻게 되어 크게 기뻐하며 그들을 거전교위로 삼았다. 허락을 받은 두 사람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춤을 추었다. 그들은 적의 군량 창고에서 군량을 탈취해 오고, 부근의 좀도둑이나 건달들을 불러모아 손책군의 휘하에 가담시켰다. 손책군의 군사는 항복한 장영의 부하들까지 가담하니 이제 4천을 헤아리는 병력이 되었다. 한편 철통같이 믿었던 방어선의 하나인 우저 성채가 불과 반나절 만에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유요는 아연실랙했다.
"대체 우리 군사들은 무얼 했다는 말이더냐?"
그럴 때 장영이 패잔병과 함께 유요의 진으로 도망쳐왔으니 그는 분노가 치밀어 대뜸 칼을 빼 들었다.
"무슨 낯으로 뻔뻔스럽게 살아 돌아왔는가? 내 손으로 죽여 본을 보이겠다."
모사인 책융. 설례가 급히 나서며 유요를 말렸다.
"아니 됩니다. 적을 눈앞에 두고 장수를 베면 이는 적을 이롭게 하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이번 일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유요는 제신들의 간곡한 만류로 장영에게 영릉성을 맡겨 수비를 견고히 하도록 하고 신정령 남쪽에 진을 쳤다. 손책도 군사를 휘동하여 신정사 북쪽에 영채를 세우고 그 고장 사람을 불러 물었다.
"이 근처 산에 후한 광무제를 모신 사당이 있다 하는데 지금도 그 사당이 있는가?"
"예, 사당은 있습니다만 아무도 돌보지 않아 황폐한 채로 벌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곳은 산의 꼭대기인가?"
"꼭대기에서 조금 내려온 중턱입지요. 그곳에 올라가면 파양호에서 양자강의 흐름을 내려다볼 수 있고, 강남. 강북도 한눈에 들어옵니다."
"내일 나를 그곳으로 안내하시오. 내가 가서 사당을 정히 하고 간소한 제라도 올릴 것이오."
그러자 장소가 손책을 말렸다.
"묘의 제를 올리는 것도 좋으나 싸움이 끝난 후에 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오. 급히 가 보고 싶어졌소."
"무슨 까닭이라도 있으십니까?"
"어젯밤 꿈을 꾸었소. 광무제가 내 머리맡에 서서 손짓을 하시는가 했더니, 솔바람 불 듯 시정 봉우리로 무지개빛을 그으며 사라지셨소."
"그러하오나 지금, 산 남쪽에는 유요가 본진을 치고 있습니다. 도중에 마일 복병이라도 만날까 걱정이 됩니다."
"아니오. 우리에게는 신명의 가호가 있을 것이오. 신의 부름에 따라 묘를 돌보러 가는 것이니 무엇이 두렵겠소."
다음날, 손책은 정보. 황개. 한당. 주태 등 장수 13명을 거느리고 신정 산 위로 올라갔다. 일행이 점점 산을 오름에 따라 팔방으로 시야가 넓어졌다. 구름에서 구름까지 잇닿은 대륙, 그리고 장강천리의 물은 시작도 끝도 없이 굽이굽이 흐르며 유구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물은 또 연안 도처에 있는 무수한 호수와 늪으로 잇닿아 있었다. 황토 대륙의 구석구석에 그 물줄기가 스며들고 있었으며, 그 주변에 옹기종기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이 조금 많이 운집한 곳이 형이요 성이었다. 이윽고 사당 앞에 이르렀다. 손책은 말에서 내려 주변의 낙엽을 쓸고 제물을 올린 후, 향을 피우고 사당 앞에 엎드려 빌었다.
"존엄하신 신령이여, 원컨대 저에게 망부의 유업을 잇게 하여 주소서. 불원간 강동 땅을 평정하오면 반드시 사당을 중수하고 춘하추동으로 시제를 올리겠나이다."
이렇게 축원을 끝낸 손책은 좌우를 보며 말했다.
"내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남쪽으로 가 적의 진지를 엿보고 오겠소."
그러자 장수들이 대경실색하며 말렸다.
"아니됩니다. 적에게 발각될 우려가 있습니다."
장수들이 놀라 말렸으나 손책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예까지 와서 이대로 진영으로 간다면 유감천만이 아닌가?"
"우리는, 겨우 13기에 지나지 않는 적은 병력입니다."
호담한 용장들이었지만 모두가 근심스런 얼굴빛이 되었다.
"은밀하게 접근하기에는 오히려 소수의 병력이 좋은 법이 아니오? 두렵고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돌아가도 좋을 것이오."
그런 말을 듣고 보니 돌아갈 사람도, 더 간할 사람도 있을 리 없었다. 손책이 계곡으로 재려와 말에게 물을 먹이고, 또 하나 재를 돌아 남쪽 평야가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 부근까지 나온 유요의 척후병이 손책 일행을 발견했다.
"손책으로 보이는 대장이 불과 10여 기를 델리고 바로 저 산중턱에까지 와 있습니다."
척후병은 급히 본진에 뛰어들며 급보를 전했다.
"그럴 리가 있는가?"
유요가 반신반의하고 있던 차에 또 다른 척후병이 뛰어 들어와 똑같은 급보를 전했다.
"그렇다면 그건 손책이 우리를 유인하려는 계략이다.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고 좀 더 지켜보자."
겁이 많은 유요가 이렇게 말하며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그러자 막장 중의 한 하급 장수가 뛰쳐나와 외쳤다.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이때 손책을 붙잡지 않으면 어느 때를 기다리려 하십니까?"
그는 지난번 선봉에 나설 것을 자청했다가 유요에게 꾸짖음만 들었던 태사자였다.
"태사자 또 그대가 나서는가?"
유요가 태사자를 홀깃 보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태사자는 유요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갑옷을 꿰입고 말 위에 앉아 외쳤다.
"누구든지 뜻이 있는 자는 나를 따르시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좌중에서 또 한 사람의 이름 없는 무장이 나서 말을 끌어내었다.
"태사자야말로 참다운 용장이십니다. 혼자 보내서는 아니 됩니다."
다른 장수들은 그가 가소롭다는 듯 모두 껄걸 웃기만 했다. 한편 손책은 마침 적진을 살피고 난 후 돌아가려고 말머리를 돌리고 있들 때였다.
"도망가지 마라, 손책!"
홀연 고갯마루 쪽에서 고함 소리가 나며 두 장수가 바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손책의 부장들은 그를 맞아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태사자가 다시 소리치며 달려왔다.
"누가 손책인가?"
그러자 손책이 대뜸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네놈은 누구냐?"
"동래의 태사자가 바로 나다. 손책을 사로잡으려고 왔다."
큰 소리로 얼러댔다.
"내가 바로 손책이다. 너희 두 놈이 함께 덤벼도 두려울 것이 없다. 내가 너희들을 두려워한다면 천하의 손백부가 아니다."
태사자도 지지 않고 맞받았다. 손책의 뒤에 있는 장수들을 안중에도 없다는 말투였다.
"뒤따르는 13기가 한꺼번에 덤벼도 좋다. 손책은 준비되었는가?"
그 말과 함께 태사자는 창을 비껴들고 손책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책도 창을 들고 그를 맞았다. 창과 창, 말과 말, 불꽃이 튀며 어우러졌다. 그러나 어느 한쪽도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그렇게 싸우기를 50여 합이 되었으나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다. 장수들은 모두 놀라 취한 둣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창솜씨가 이토록 절륜할 줄 몰랐던 태사자는 손책의 뒤에 있는 부하 장수들로부터 손책을 유인해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태사자는 슬쩍 말을 돌려 숲속으로 들어갔다. 손책은 그를 뒤쫓으며 그 등을 향해 창을 던졌다. 던진 창은 태사자의 몸을 살짝 스치고 땅에 꽂혔다. 태사자는 등골이 오싹했으나 말을 박차며 더욱 깊은 숲속으로 말을 몰았다.
'손책의 사람됨은 일찍이 들은 바 있지만 소문보다 훨씬 영민하고 용맹한 자다.'
태사자의 속셈을 알 리 없는 손책도 그를 뒤쫓으며 역시 마음속으로 크게 놀라고 있었다.
'이건 명금(고운 목소리로 우는 새와 뛰어난 무예의 비유)인걸. 사로잡아 내 새장 속에서 길러야겠다. 어떻게 이렇게 뛰어난 무사가 유요 따위를 섬기고 있었단 말인가?'
손책이 이렇게 생각하며 태사자를 뒤쫓으며 소리쳤다.
"동래의 태사자라고 우쭐대던 자가 꼴사납게 도망을 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손책이 그의 비위를 거슬려 격동시키려 했다. 손책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달러던 태사자는 이윽고 재를 돌아 뒷산 기슭에 이르자 말머리를 돌렸다. 손책을 뒤따르는 장수들이 없는 걸 확인한 태사자가 입을 열었다.
"손책! 예까지 쫓아오느라고 수고했네. 그 용기가 가상하여 이쯤해서 승부에 응해 주겠다. 그런데 내게 덤빌 용기가 있느냐?"
손책이 조금 전 자기를 쫓으며 말로 모욕을 준 데 대해 되받으며 태사자가 여유 있게 가슴을 폈다.
"또 도망이나 치지 말라!"
손책이 대검을 뽑아 그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태사자가 다짜고짜 차을 쑥 내밀어 손책의 양미간을 향해 팔을 뻗었다. 번개 같은 공격이었다. 이를 피한 손책의 몸놀림 또한 눈 깜짝할 사이였다. 손책은 순간적으로 말갈기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창은 투구의 덮개를 찰칵하고 소리를 내며 스쳤다. 보통 장수들 같았으면 칼에 맞았거나 아니면 손책의 양미간에 차이 꽂혔을 형세였다. 그러나 태사자의 창을 피한 손책이 이번에는 태사자의 가슴을 향해 칼로 찔렀다.
"야앗!"
"어엇!"
정적이 감돌던 산속에는 두 사람이 내뿜는 열기와 기합 소리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있었다. 기마전의 어려움은 말고삐를 익숙하게 다루어, 수시로 아래위로 조종하며, 적의 배후로 돌아야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태사자는 천하에 보기 드문 명기수로 불릴 만했다. 꼬리 쪽을 노리고 들어가려 하면 빙그르르 말을 돌리며 뛰어 오르게 하여 어느새 상대편의 말 뒤로 다가왔다. 그 모양은 마치 파도 위의 작은 배 위에서 칼부림을 하는 듯했다. 양쪽이 다 상대를 헤아려 싸울 뿐 아니라 무예 또한 백중세였다. 무려 1백여 합을 싸웠으나 승부는 나지 않고 쌍방이 비 오듯 하는 땀과 가쁜 숨소리만 내뿜을 뿐이었다.
"얏!"
기합 소리는 주변 숲에 메아리쳐 백수도 숨어 버릴 지경이었으며, 떨어지는 것은 펄펄 날리는 나뭇잎뿐이었다. 손책은 점점 용맹스러웠고, 태사자는 더욱더 사나워졌다. 양쪽 다 비길 데 없이 엄청난 체력의 소유자였다. 이때 손책의 나이 스물하나, 태사자의 나이 서른이었다. 실로 잘 어울리는 호적수였다.
'이제 결판을 내기 위해 정면으로 붙지 않으면 안 된다.'
손책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태사자도,
'싸움을 끄는 동안에 부하 장수들이 쫓아오면 위험하다.'
하고 생각하며 승부를 재촉했다. 그 순간이었다.
'탁!' 하고 양쪽 등자와 등자가 부딪친 것은 두 사람의 뜻이 우연찮게 일치된 때문이었다.
"얏!"
앞쪽으로 날아든 창을 손책은 날쌔게 피하며 자루를 껴안았고, 상대에게 내려친 손책의 칼을 태사자가 아슬아슬하게 피하여 그 손목을 잡았다. 그런 상태로 밀고 당기다 보니 두 사람은 요동하는 말 등에서 보기 좋게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주인을 땅바닥에 떨군 말들은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엎치락뒤치락 태사자와 손책은 맨주먹으로 맞붙어 뒹굴었다. 갑옷은 걸레 조각처럼 너덜거렸고 투구끈과 띠가 끊어졌다. 손책이 한순간 비틀거리면서 태사자의 등에 있는 단검을 빼어 찔렀다.
"그렇게는 안 될걸."
태사자는 손책의 투구를 얼른 벗겨 단검을 막았다. 한편 유요가 이때 군졸로부터 급보를 받았다.
"태사자께서는 손책과 싸우고 있는데 언제 승부가 날지 모릅니다. 빨리 가서 합세하면 생포할 수 있겠습니다."
유요는 보고를 듣자마자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급히 말을 몰았다. 태사자와 손책이 한참 혈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북소리와 함성이 일며 유요의 군사가 숲에까지 다다랐다. 손책이 싸우던 중에 얼른 보니 유요의 군사들이 몰려와 당황했다. 그러자 때맞춰 정보 · 황개 등의 부하 장수들도 말을 몰아왔다. 태사자가 손책의 투구를 던지며 구원군으로 온 군사의 말에 날쌔게 뛰어올랐다. 손책도 정보가 이끌고 온 그의 말에 뛰어올랐다. 손책과 13기의 장수들, 그리고 유요의 1천여 군사가 숲속에서 혼전을 벌였다. 그러나 손책군은 중과부적이었다. 점차 몰려 좁은 골짜기까지 밀려가는데 홀연히 신정묘 근처에서 함성이 일어났다.
"손 장군을 구하라!"
손책의 장수 주유가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이었다. 주유는 손책이 돌아오지 않자 부하 5백을 거느리고 찾아 나서다 유요의 군사와 싸우고 있는 손책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미 해도 기울고 있었다. 거기다가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억수 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이거야말로 하늘의 도우심이었는지 모른다. 양군은 억수 같은 빗줄기 때문에 제대로 싸울 수가 없어 군사를 물렸다. 양군이 물러나고 안마의 울부짖음도 사라진 후, 산골의 하늘에는 저녁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다음 날이 되자 손책은 좌우를 보며 외쳤다.
"오늘이야말로 유요의 목을 베고 태사자를 사로잡아야겠다!"
손책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군사를 이끌어 산을 넘어 적진 앞으로 진군하였다. 손책은 전날 태사자로부터 빼앗은 단검을 창끝에 높이 매달아 군사들에게 소리치게 하였다.
"이 칼을 보라. 태사자의 단검이다. 만약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네놈은 찔려 죽었을 것이다!"
태사자를 조롱하여 그를 격동시킬 속셈이었다. 그러나 유요의 군사들 중에도 깃대가 높이 세워졌다. 그 끝에는 손책의 투구가 매어있었다.
"봐라, 손책의 머리가 여기 있다! 무사가 되어 머리를 적에게 넘겨주는 자가 다 있느냐?"
태사자가 진두로 말을 몰고 나와 낭랑한 목소리로 받아넘겼다. 군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사자의 비웃움을 되돌려 받은 손책은 젊은 의기에 분을 참지 못해 말을 박차려고 했다. 정보가 옆에서 조용히 손책을 가로막았다.
"주공께서 나설 일이 아닙니다. 제가 나가 사로잡겠습니다."
정보가 말을 달여 태사자에게 나아갔다. 태사자가 정보를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태사자는 자네 같은 소인배를 벨 칼을 갖지 않았다. 가서 손책더러 나오라고 일러라!"
"이 허풍선이 풋내기 놈이!"
정보는 화가 치솟아 창을 비껴들고 말을 거세게 몰았다. 두 장수의 싸움이 한바탕 불꽃을 튀기며 어우러졌다. 30여 합이나 치고 막으며 겨루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유요의 진영에서 별안가 퇴각하라는 북과 징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어리둥절한 태사자는 창을 거두고 급히 말머리를 돌렸으나 불만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유요를 보자 대뜸 항의부터 했다.
"참으로 분할 뿐입니다. 오늘이야말로 손책을 서로 잡을 작정이었는데. . .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유요가 낭패한 얼굴이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막 급보가 왔다. 주유가 곡아를 점령했다는 소식이다. 진무란 놈이 주유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성을 습격했다고 한다."
"옛? 본성이?"
태사자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태사자가 들어 보니 적은 일부 병력을 곡아로 향하게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주유와는 동향인 진무란 자가 강을 건너와 주유와 합세, 유요의 본진을 급습하였다고 한다. 근거지인 곡아를 잃은 유요가 당황하여 퇴각 신호를 보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는 말릉까지 후퇴하여 설례와 책융과 합쳐 막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말한 유요가 전군에게 명해 밤사이에 진지를 뽑아 철수하니 태사자도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손책이 그들을 뒤쫓으려 하자 장소가 간했다.
"지금 뒤쫓으면 적은 죽기를 다해 싸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군사의 피해도 적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오늘 밤에 야습을 가하면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손책도 그 말을 옳게 여겼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군사를 다섯 갈래로 나누어 유요의 군사를 들이쳤다. 도망가다 지쳐 야영을 하던 유요의 군사들은 때아닌 기습에 싸울 생각도 잃고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군사들은 손책군의 말발굽에 짓밟히니 유요군은 죽거나 상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태사자는 죽기를 작정하고 싸웠으나 혼자 힘으로 역부족이었다. 겨우 군사 10여 기를 이끌고 말을 몰아 경현으로 몸을 피했다. 유요를 물리치고 곡아성을 점령한 손책은 위풍도 당당히 성안으로 들었다. 손책은 곡아성을 함락하는 데 공훈을 세운 진무를 맞았다. 그를 보니 키가 7척이나 되었으며, 얼굴이 누렇고 붉은 눈알을 지녀 첫눈에도 그가 범상치 않음을 엿보게 했다. 그는 여강 송자 사람으로 자를 자열이라고 했다. 손책은 그를 높이 여겨 교위로 삼았다. 유요의 패잔병 일부는 설례가 지키고 있는 말릉성으로 도망쳤다. 손책은 진무를 선봉으로 삼아 말릉성을 치게 했다. 진무는 부하 10여 기를 이끌고 적진에 뛰어들어 단숨에 적병 50여 명을 목 베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성안으로 들어간 설례는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이때 유요가 책융과 함께 우저를 동격하러 떠났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손책은 그들을 한 번에 쳐 없앨 속셈으로 친히 대군을 이끌고 우저에 이르자 유요와 책융이 진두에 나와 손책과 맞섰다.
"패장 유요는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느냐?"
손책이 벽력 같은 소리를 내지르자, 한 장수가 창을 비껴들고 나왔다. 적의 부장 우미였다. 그러자 우미가 어찌 손책의 적수가 될 수 있으랴? 우미가 한껏 호기를 부려 창으로 손책을 찌르며 나왔으나 3합도 버티기 전에 손책이 번개같이 손을 내뻗어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으니 손책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손책은 우미를 겨드랑이에 꿰차고 유유히 진으로 돌아왔다. 이것을 본 유요 휘하의 부장 번능이 그를 구하고자 달려 나왔다. 번능이 자기 진을 향해 말을 몰아 돌아설 즈음, 손책의 등을 노려 창으로 찌르려 하였다.
"주공, 뒤를 살피십시오."
손책의 군사들이 황급히 소리쳤다. 손책은 고개를 홱 돌렸다.
"이놈 어디를 넘보느냐?"
손책은 목청을 돋우어 고함을 질렀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던지 마치 큰 우레 소리 같았다. 손책의 등을 찌르려고 숨을 죽이며 다가가던 번능이 깜짝 놀라 그만 말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번능은 두개골이 깨어져 그 자기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손책은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우미를 힘주어 옥죄이니 눈알이 튀어나왔다.
"의좋게 저승에나 가거라!"
손책은 우미의 가슴팍에 일격을 가하고는 그의 시체를 번능의 시체 위에 던졌다. 그 후 손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지로 들어가 버렸다. 과연 역발산기개세의 힘과 용맹이었다. 최후의 일전으로 시도했던 우저의 기습도 참패로 끝났을 뿐 아니라 믿었던 우미 · 번능 두 장수까지 손책에게 어이없는 죽임을 당하자, 유요는 넋이 나간 채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책융과 함께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고자 달아났다. 이날의 싸움에서 손책은 적을 목 벤 것만도 1만이 넘었다. 유요의 군사 태반이 항복해왔다. 한편 손책은 연안의 패잔병을 소탕해 가며 설례가 지키고 있는 말릉성으로 육박해갔다. 손책을 성 주위에 파놓은 해자까지 나가 설례에게 유요가 이미 형주로 달아났으니 항복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유요의 부하 중에는 아직 항복을 수치로 여기는 자도 많았다. 그들 중에 장영 · 진횡 등의 장수는 죽기를 마다하지 않고 싸우기를 맹세한 유요의 잔당들이었다. 장영이 성의 망루에서 적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데 손책이 다가와 항복을 권하자 장영은 황급히 활을 겨냥하여 화살을 날렸다. 워낙 가까운 거리였기에 몸을 피할 사이 없이 화살은 손책의 좌측 허벅지에 적중했다. 손책이 신음 소리를 내며 말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앗, 주공께서 화살에 맞았다."
손책군의 장수들이 일제히 달려가 손책을 부축하여 급히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손책은 진영을 5리쯤 물린 후 화살을 뽑고 상처에 금창약을 발랐다. 다행히 허벅지인지라 상처는 가벼웠다. 새벽이 되자 진영 곳곳에 조기가 내걸렸다.
"급소를 맞아 손 장군은 애석하게도 운명하셨다!"
손책의 진중에는 장졸들의 슬픈 통곡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졸들은 아직 발인은 정해지지 않았으나 불원간 가까운 산에 가장을 할 거라고 수군대고 있었다. 이 소식이 곧 장영의 귀에 들어갔다.
"그러면 그렇지. 내 화살을 맞고 살아남은 놈이 있을 리 없지."
장영은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이에 설례는 부하들을 풀어 알아보도록 했다. 군사들이 마을에 숨어들어 염탐했다. 그런데 그날 아침, 부근의 부락민들이 튼튼한 관 하나를 끙끙거리며 들고 진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틀림없습니다. 선책이 죽었음이 분명합니다. 관을 떠메고 진문으로 나갔습니다. 장사도 곧 임시로 지낼 모양으로 은밀히 준비하고 있다 하옵니다."
염탐한 군사가 달려가 보고 들은 대로 고했다. 그날 밤이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한 떼의 군마가 소리 없이 강물이 흐르듯 벌판을 누비듯이 지나가고 있었다. 피리를 불고 장례 때 북을 두드리며 징을 치니 그 소리가 애끊는 듯 슬프기 어둠 속을 흘렀다. 그 뒤에는 횃불을 밝힌 가운데 관을 운구하고 있었다. 관의 앞과 뒤를 호위하는 여러 장수들도 이따금 하늘을 우러르며 깊은 탄식을 토해내고 있었다. 죽은 손책의 유해를 암매장한다는 것을 미리 탐지한 설례는 장영. 진횡 두 장 수를 내보내 손책군을 치게 했다. 장영. 진횡은 군사를 이끌고 그날 밤에 느닷없이 장례 행렬을 기습했다. 손책군의 장례 행렬을 순식간에 뒤덮어 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설례가 군사를 이끌고 오자 장례 행렬은 급히 5열로 나눠져 질서정연한 전투 진용을 갖추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사로잡으라!"
손책의 진용에선 추상 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놀란 쪽은 설례였다.
"아차, 계략이었구나."
장영이 탄식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갑자기 손책의 복병들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이렇게 되자, 기습을 당한 건 오히려 장영의 군사들이었다. 이쪽 저쪽에서 어지럽게 밀려들어 공격을 하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 장영의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성안으로 물러가라!"
장영이 외치며 말머리를 돌려 황망히 성 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러자 숲속에서 한 장수가 부하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손랑이 예 있다. 말릉성은 이미 내 수중에 있거늘 네놈들은 어디로 갈 셈이냐?"
말릉성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말에 장영이 깜짝 놀라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손책이 거느린 군사가 몇 안 되는 걸 알고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섰다. 손책의 말이 어느 해 장영의 말 엉덩이를 들이받았다.
"이 어리석은 놈!"
손책이 호통과 함께 칼을 내리치니 장영의 몸은 붉은 피를 뿜으며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이때 진횡은 장영이 손책의 한칼에 두 동강이 나자 급히 말머리를 돌리는데 손책의 장수 장흠이 활에 화살을 메겨 당겼다. 이에 진횡이 등에 화살을 맞고 그대로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죽었다던 손책이 나타나 장영을 주살하고 진횡도 죽자 장영의 군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꿇어 엎드렸다. 군사들이 그 지경이니 모사인 설례가 살아남을 리가 없었다. 그도 난전 속에서 누구의 창엔가 찔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손책은 그 길로 말릉성으로 휘달으니 미리 성안에 들어가 있던 부하들이 성문을 열어 그를 맞아들였다. 손책은 승전고를 울리며 만세 삼창을 외치니 장강의 강물에 어둠이 걷히고 봉황산, 자금산 봉우리에 아침 해가 밝게 비치기 시작했다. 손책은 즉시 군사들을 엄하게 단속하여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방을 내걸어 질서를 회복하니 모든 백성들은 손책을 진심으로 흠모하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손책이 이처럼 용맹을 떨치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항우와 비견하여 '소패왕'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는 '강동의 손랑'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강동 소패왕의 출기불의
유요가 믿고 있던 장영 · 진횡 · 설례마저 손책군에게 목숨을 잃자 그 수하 군사들은 감히 손책에게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되니 강동의 기린아 손책은 가히 소패왕에 걸맞은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손책의 군세 앞에 꺾이지 않는 한 세력이 남아 있었으니 태사자가 바로 그였다. 그 무렵 태사자는 경현성에서 정병 2천여 명을 새로이 수습하고 복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섬기던 유요는 패주하여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했으나 그는 절개를 꺾지 않었던 것이다. 어제는 구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오늘은 말릉으로 내려오다가 날이 새자 다시 경현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는 손책은 강동의 남과 북을 종횡하며 말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비록 작은 성이긴 하나 북쪽 일대는 늪지대이며 뒤에는 산을 등지고 있다. 게다가 성안의 군사는 겨우 2천 명이라지만 끝까지 항복하지 않는 군사들이라면 아마 죽음까지도 각오한 사람들일 것이다.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
손책은 경현에 이르렀으나 결코 자기 편의 우세를 자만하지 않고, 그는 휘하 장수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또한 군사를 멀찍이 배치하고 신중하게 성안의 동정을 살폈다. 손책이 군사를 몰아 들이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태사자의 무용을 아껴 될 수 있는 한 사로잡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에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손책은 주유를 불러 성을 함락시킬 방책을 물었다.
"한 장수에게 날랜 장졸 열 명을 주어 성안으로 잠입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불에 잘 타는 나무와 기름먹힌 헝겊을 가져가게 하여 성안의 여러 곳에 불을 지르게 하는 것입니다."
"전 높은 성벽을 어떻게 기어오른다는 말인가?"
"방법을 강구하면 못 오를 것도 없습니다."
"누구를 보내면 좋겠는가?"
"진무가 적임인가 합니다."
"진무는 내 휘하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앞으로 큰일을 해낼 수 있는 대장인데 그를 사지에 보낸다는 것은 아까운 일이오. 그리고 그보다 더 아까운 것은 비록 적이긴 하나 태사자란 인물이오. 그를 사로잡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소만. . ."
"그러시다면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성안에서 불길이 보이기 시작하면 동시에 서·남·북 삼방에서 즉각 공격해 들어가되 동문만 병력을 허술히 배치하는 것입니다. 태사자는 분명 그 동문을 공격하며 나올 것입니다. 태사자가 성문을 빠져나오면 그 뒤를 추격케 합니다. 그리고 동문 밖 30여 리쯤에 미리 복병을 배치해 두어 그곳에 다다르면 뒤따르는 군사들을 죽이고 다시 20리쯤에 군사를 매복시켜 둔다면 반드시 태사자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손책이 들어보니 좋은 계교였다. 주유의 말을 좇아 진무가 거느릴 열 명의 결사대를 모집했다. 손책은 임무를 수행하고 살아 돌아오는 군사에게는 일약 1백 명을 거느리는 부장으로 승진시키고 많은 상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너도나도 결사대에 지원했다. 그 중에서 열 명의 날랜 군사를 뽑은 진무는 바람이 많이 부는 밤을 기다렸다. 마침내 기다리던 날이 왔다. 그날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뿐만 아니라 달도 먹구름에 가려 있었다. 기름에 ㅈ거신 헝겊, 불에 잘 타는 잡목을 군사 등에 지웠다. 진무는 홀가분한 차림으로 성벽 밑까지 기어 숨어들어 갔다. 성벽은 돌담이 아니라 뜨거운 열로 구운 전이라고 하는 일종의 기와로 쌓아 올린 것이었다. 성벽은 몇 백년의 세월을 거쳐서인지, 기와 틈 사이에는 잡초가 자라고 있었고 새들이 집을 짓는 등 황폐한 벽이 되어있었다.
"자, 다들 잘 들어라. 내가 먼저 올라가 밧줄을 내려 줄 테니 너희들은 거기 엎드린 채 감시를 하라."
진무는 부하에게 주의를 준 다음, 기와의 틈 사이에 단검을 박아 칼로 사닥다리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한 걸음 한 걸음 밟으며 단신으로 성벽을 기어 올라갔다. 무사히 성 위에 오른 진무는 밧줄을 내려 결사대가 오르게 했다. 진무와 결사대는 간신히 성안에 잠입하여 여기저기 흩어져 불을 질렀다.
"불이야!"
성을 지키던 문지기들이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비명을 질러댔다.
"진정하라, 적의 계략이다. 당황하지 말고 불을 꺼라."
원래 태사자의 군사들은 대부분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산과 들의 나무꾼이나 농군들이라 규율이 제대로 서지 않았고 군령도 먹혀들지 않았다. 때문에 태사자는 군사들을 질타하며 지휘하고 있었지만 성안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날따라 바람마저 거세게 불어 불길은 점점 드세게 타올랐다. 한쪽을 끄고 있는 동안 또 다른 쪽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은 삽시간에 성안 구석구석까지 번져갔다. 뿐만 아니라 성의 서 · 남 · 북쪽에서 적군이 들이닥쳤다. 모진 바람을 타고 고함 소리, 북소리, 징 소리가 한꺼번에 울려오니 성안의 군사들은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태사자의 군사들은 불을 끌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가마솥의 콩처럼 팔짝팔짝 뛰며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태사자는 성안의 형세를 살피다 외쳤다.
"동문을 열고 돌진하라!"
태사자는 급히 말을 타고 진두에 서더니 부하 장수들에게 소리쳤다.
"성 밖으로 나가 단번에 손책과 승부를 내겠다. 적은 성을 포위하려고 전군을 서 · 남 · 북 3면으로 나누었다. 동문이 허술하니 그곳으로 돌진하도록 하라!"
불길에 휩싸였던 군사들이 동문을 통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태사자가 성 밖으로 나와 30여 리쯤 달리다 보니 뜻밖에도 한 떼의 군사들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저기 태사자가 온다!"
손책의 군사들은 이 말을 신호로 태사자를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싸움에 별로 경험이 없는 태사자의 군사들은 매복군이 쏘아대는 화살에 맞아 죽거나 부상을 당하는 등 막심한 타격을 입었다.
"적의 중심부를 쳐라!"
태사자는 혼자 분전하며 외쳤으나 그를 따르는 군사는 이제 손으로 꼽을 지경이었다. 그는 더욱 말을 빨리 몰았다. 그가 20여 리를 더 달려 뒤를 보니 따르는 군사는 보이지 않고 추격군의 함성만 들렸다. 어느새 그는 혼자가 되었다.
"태사자를 놓치지 마라!"
태사자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를 듣고 다시 급히 말을 몰았다. 이 지방에는 원래 늪이나 호수, 작은 웅덩이가 많은 곳이었다. 장강의 물이 호수로 들어가고 그 호수의 물이 다시 벌판의 무수한 웅덩이로 흘러들기 때문이었다. 그 늪과 호수와 벌판에는 갈대가 무성했다. 그 때문에 태사자는 길을 잃고 말았다. 갈대숲을 맴돌던 태사자의 말은 발을 헛디디며 웅덩이에 빠졌고 태사자는 곤두박질하며 갈대밭에 나뒹굴었다. 그때였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태사자에게 복병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온몸을 꽁꽁 묶어 버렸다.
"분하다!"
손책의 본진으로 끌려가며 태사자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윽고 그는 손책의 본진으로 끌려와 참수를 기다리며 눈을 감고 있는데 누군가 군사들을 꾸짖는 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들은 어찌 이리도 무례하게 장군을 포박하였느냐?"
태사자가 놀라 눈을 떠보니 그는 다름아닌 손책이었다. 태사자는 다시 눈을 감으며 태연히 말했다.
"어서 내 목을 베시오."
"공은 왜 그토록 죽기를 서두르시오?"
"이렇게 된 바에야 잠시도 수치를 당하기 싫으니 부질없는 말은 그만 두고 어서 내 목을 쳐 주시오."
"나는 자의 충절을 익히 알고 있소. 공의 패전을 보고 쾌재를 부를 생각은 추호도 없소. 공은 자신을 패장으로 비하하나 그 패인은 그대가 초래한 것이 아니라 유요가 우둔한 탓이었소. 애석하게도 공은 좋은 주인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오. 구더기들 틈바구니에서 어찌 누에가 고치를 만들고 실을 뽑을 수 있겠소."
손책은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있는 태사자에게 다가와 친히 그의 결박을 풀어주면서 말했다.
"나는 공이 참된 대장부임을 알고 있소. 나는 공과 함께 큰 일을 도모하고자 하오."
손책은 자기의 전포를 벗어 태사자에게 입혀 주었다. 자기의 장하에 사로잡혀온 패장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적장이 아니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옛친구를 대하는 듯한 손책의 따뜻하고 정중한 태도에 태사자도 마침내 마음이 움직였다.
"높으신 이름 일찍부터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여러 차례 장군과 싸우다 보니 실로 당금의 영웅임을 알았습니다. 소인을 거두어 주신다면 힘을 다해 장군을 돕겠습니다."
손책은 태사자의 손을 덥석 잡고 자기의 장막 안으로 데리고 갔다.
"지난번 신정의 싸움에서는 피차 힘껏 싸웠는데 그때 좀 더 싸움이 계속되었더라면 공이 이 손책을 이겼으리라 생각하오?"
손책이 웃으며 묻자 태사자도 가볍게 웃으며 응수했다.
"글쎄요, 어찌 되었을까요?"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할 것이오. 내가 만일 졌다면 나는 그대의 오라를 받았을 거요."
"당연하지요."
"그랬다면 공은 나를 살려 주었을까요?"
"아닙니다. 공의 목은 없어졌을 것입니다. 설사 제게 그럴 마음이 있었더라도 유요가 살려 둘 리가 없지 않습니까?"
태사자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하하하, 그렇군요."
손책은 껄걸 웃으며 태사자를 상좌에 앉히고 주연을 베풀었다. 손책은 태사자에게 술을 권하여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여러 모로 공의 지략을 빌릴까 하는데 좋은 계책이 있으면 주저말고 말씀해 주시오."
"패군지장은 군사에 관한 일을 논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태사자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 않소. 옛날의 한신을 보시오. 한신도 항복한 장수 광무군에게 계교를 묻지 않았소?"
그 말에 태사자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대단찮은 계교이나 유막의 일원이 된 징표로 한 가지만 말씀드릴까 합니다. 유요의 휘하 군사들은 지난번 싸움에서 패한 이후 주군을 잃고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뛰어난 장수와 아까운 군사가 많습니다."
"음-. 그들을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오?"
"이 태사자를 사흘 동안만 자유롭게 놓아 주시면 제가 가서 그 남은 무리들을 달래 명공의 방패가 될 만한 정병 3천 명을 모아 돌아오겠습니다. 명공께서는 나를 믿어 주시겠습니까?"
어렵게 사로잡은 자기를 풀어 달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손책은 주저하지 않고 선뜻 허락했다.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요. 다만 오늘부터 사흘째 되는 날 오시까지는 반드시 돌아와야 하오."
그날 밤 손책은 태사자에게 한 필의 준마를 주어 진중에서 풀어주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여러 장수들이 그 사실을 알고 아연실색했다.
"아마, 태사자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안의 호랑이를 산속에 풀어 준 격이라며 장수들은 볼멘소리를 드높였다. 그러나 손책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태연히 말했다.
"두고 보시오, 자의는 신의가 있는 사람이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목숨을 아껴 살려 둔 것이오. 만일 신의를 저버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인물이라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아까울 게 없소."
손책이 이렇게 타일렀으나 장수들은 그래도 미심쩍은 기색들이었다. 사흘째가 되자, 손책은 영문 앞에 긴 막대를 세워놓고 군사들에게 해 그림자를 보게 했다. 이러한 해시계는 진의 시황제가 진중에서 사용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송사에는 하승천이 표후일영을 관장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명대에는 귀영대라는 것이 있었다. 모래땅 대신 마룻바닥을 쓰거나 또 벽에 비치는 그림자를 기록하는 방법도 있었다.
"오시입니다."
드디어 태사자와 약속한 시각이 되자 진막 안으로 해시계를 보던 군사가 들어와 큰 소리로 외쳤다.
"남쪽을 보라!"
손책이 손으로 가리켰다. 과연 태사자는 3천 명의 장병을 이끌고 촌각도 어기지 않고 저편 벌판 끝에서 흙먼지를 날리며 돌아오고 있었다. 손책의 밝은 헤아림과 태사자의 신의에 탄복한 장수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손을 들어 환호하며 그를 맞았다.
이제 강동은 손책의 세력하에 평정되었다. 손책의 군세는 날로 증강되어 거느리는 군사도 어느새 수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손책은 그 세력을 이끌고 선친의 영토였던 강동으로 내려가 백성들을 지켜 주니 민심은 자연히 안돈되었다. 손책의 기업은 이제 그 일 단계를 넘어섰다고 해도 좋았다. 그리하여 손책은 그의 모친을 비롯한 가솔들을 그의 근거지로 모셔 오기로 했다. 그의 노모와 일족은 하늘처럼 믿던 손견이 황조와의 싸움에서 죽은 후 오랫동안 곡아의 벽지에 틀어박혀 온갖 고생을 다하고 있었다. 손책은 많은 장수와 군사를 보내 주렴(구슬을 꿰어 만든 발) 가마에 비단 덮개를 씌운 수레를 호위하게 했다. 이윽고 손책은 오래간만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강동의 본성인 선성으로 모시었다.
"어머님! 이젠 안심하시고 이곳에서 여생을 편안히 보내십시오. 아들 책도 이젠 어른이 되었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노모는 웅대한 성안을 그저 두리번거리며 바라보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 ."
손책은 강동이 안돈되고 가솔들까지 옮겨오자 지체하지 않고 아우 손권에게 일렀다.
"네게 장수 주태를 딸려 주겠으니 선성을 지키며 나를 대신하여 어머님을 잘 모시도록 하라."
아우 손권에게 선성을 맡긴 손책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오군을 공격하기 위해 남으로 향했다. 그는 싸워서 얻은 땅에서는 즉시 치안을 회복하여 민심을 얻는 것을 첫째 과제로 삼았다. 법을 바로잡고 재난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호하며 산업을 진흥시키는 한편 양민을 괴롭히는 범법자들에겐 엄벌을 가했다.
"손랑이 온다!"
백성들은 이런 말만 들어도 황급히 길가에 엎드려 절하고, 불량민들은 간담이 서늘해져 자취를 감추었다.
"손랑은 백성을 사랑하고 신의 있는 인재를 잘 쓰는 장군이다."
지금까지 성을 버리고 벼슬도 마다하고 산과 들로 피했던 수많은 관리들도 이런 소문을 듣고 속속 고향으로 돌아와 벼슬하기를 원했다. 손책은 그들 중에서 인재를 골라 그 지방을 다스리게 했다. 이렇듯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자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백성들은 소를 잡고 술을 장만하여 성대하게 대접했다. 그 즈음 오군은 '동오의 덕왕'이라고 자칭하는 엄백호란 자가 점거하고 있었다. 그는 오군의 오성과 가흥에 그의 부장들을 보내 지키게 하던 중 손책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엄백호는 아우 엄여에게 명해 손책을 막게 했다. 엄여는 풍교까지 군사를 끌고 나와 손책을 맞기 위해 영채를 세웠다.
"하찮은 작은 성이니 단숨에 빼앗아 버리자!"
손책은 몸소 진두에 서서 일격에 성을 무너뜨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장굉이 선두에 나서는 손책을 만류했다.
"주공께선 삼군을 이끌고 계십니다. 저토록 보잘 것 없는 작은 성을 치는데 어찌 몸소 싸우려 하십니까? 부디 장군께서는 자중하소서."
장굉이 굳이 만류하자 손책도 그 말에 따라 대장 한당에게 선봉을 맡겼다. 한당은 그 길로 풍교 다리 위로 말을 몰아 정면에서 치고 진무와 장흠 두 장수는 작은 배를 타고 풍교 뒤쪽으로 돌아가 화살을 쏘며 닥치는 대로 적을 무찌르면서 협공을 가했다. 이에 엄여는 견디지 못하고 말을 돌려 도망쳤다. 손책은 숨돌릴 겨룰도 주지 않고 오성의 성문까지 급히 추격했다. 성안으로 들어간 적들은 성문을 닫고 싸우려 들지 않았다. 손책은 군사를 수·륙 앙면 두 갈래로 나누어 오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하루는 손책이 앞을 다투어 성을 공격하는 부하 장병들을 지휘하며 성문 앞까지 가서 큰 소리로 항복하라고 외쳤다. 그러자 성루에서 한 장수가 상반신을 내민 채 왼손으로는 기둥을 붙들고 오른 손으로 성 아래 손책을 가리키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손책의 등 뒤에서 이를 본 태사자가 화살을 뽑으며 말했다.
"저놈의 왼손등을 꿰뚫어 버리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윗소리가 났다. 번개처럼 날아간 화살은 보기 좋게 적장의 왼손을 맞추어 성루에 대롱대롱 매달았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서까래에 매달려 몸부림치는 그 장수를 보자 손책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참으로 훌륭한 솜씨로다!"
손책의 군사들도 태사자의 활 솜씨에 탄복해 일제히 함성을 지르니 그 함성은 오성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이 꼴을 본 엄백호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저토록 활을 잘 쏘는 장수가 있으니 어찌 대적할 수 있으리오."
엄백호는 혀를 내둘렀다. 손책군과 싸워봤자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는 부하들과 의논한 후 아우 엄여를 강화 사절로 손책군에게 보냈다. 손책은 엄여를 막사로 맞아들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은근히 물었다.
"이 책한테 어떤 조건으로 화해를 구한다는 말이오?"
"강동의 땅을 평등하게 반분하면 어떻겠습니까? 형님의 뜻은 그러한 듯합니다."
그 말을 듣자 손책은 대로하여 눈꾸리를 추켜 세우며,
"쥐새끼 같은 놈들이 어찌 감히 나와 똑같이 나라를 나누자고 하는가? 무엄하기 짝이 없구나. 이놈을 당장 끌어내 참하라."
하고 호령했다.
깜짝 놀란 엄여가 벌떡 일어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손책이 번개같이 칼을 번뜩여 엄여의 목을 한칼에 베어 버렸다. 손책은 한구석에서 와들와들 떨고 있는 엄여의 종자에게 엄여의 머리를 가리키며 일렀다.
"돌아가 엄백호에게 본 대로 말하라."
종자들은 주인의 머리를 안고 도망쳤다. 엄백호는 아우의 머리를 보자 손책의 서릿발 같은 기세에 두려움이 앞섰다. 아우의 복수는커녕 회계 땅으로 물러나 태수 왕랑에게 의지하여 계책을 세워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는 오성을 버리고 황망히 밤중에 성을 빠져나갔다. 손책은 군사를 몰아 엄백호를 쫓는데 황개는 가홍을, 태사자는 오성을 점령하니 그 밖의 여러 작은 고을은 저절로 평정되었다. 어제까지 '동오의 덕왕'이라 큰소리치던 엄백호는 초라한 꼴이 되어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다가 도중에 추격군에게 심한 타격을 받으며 간신히 회계 땅에 이르렀다. 회계태수 왕랑은 엄백호가 온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그를 도와주려고 했다. 그러자 신하 중에 우번, 자는 중상이라는 자가 왕랑에게 간했다.
"손책에게 때가 온 것입니다. 시운을 거스르는 어리석은 싸움은 이롭지 않습니다. 더욱이 손책은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 엄백호는 모질고 독하니 마땅히 엄백호를 사로잡아 손책에게 바치고 이 싸움은 피하셔야 합니다."
"그럼 손책이 와도 팔짱을 끼고 앉아 있으란 말인가?"
"손책과 화친을 맺어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십시오. 그것이 순리를 따르는 길입니다."
"쓸개 빠진 소리 말라. 손책 따위에게 회계의 왕랑이 어찌 몸을 굽힌단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손책은 의를 존중하고 인정을 베풀어 근래에 가는 곳마다 혁혁한 인망을 모으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엄백호는 포악무도할 뿐 선정을 베푼 적이 없습니다. 주군께서 도와 주셔도 언젠가는 망해 버릴 위인입니다."
"이놈, 네놈이 무얼 안다고 내 앞에서 이죽거리느냐? 꼴도 보기 싫다. 썩 물러가라."
왕랑이 우번에게 호통을 쳤다. 우번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우번이 성에서 나간 이후 대세의 흐름을 읽지 못한 왕랑은 군사를 일으켜 엄백호를 맞았다. 엄백호와 함께 산음현의 얕은 산기슭에 군사를 풀어 진을 치고 손책과 대치했다. 회계태수 왕랑은 몸소 말을 몰고 나왔다.
"이 애송이 손책아, 내 앞으로 썩 나오너라."
그러자 손책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끌어 진두에 나섰다.
"내가 의로운 군사를 이끌어 온 것은 절강 땅을 평안케 하려함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네놈은 도적을 감싸 주며 나에게 맞서려는가?"
왕랑도 질세라 손책을 향해 외쳤다.
"네 이놈,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였느냐? 오군을 빼앗고도 아직도 모자라 이 회계까지 넘보느냐? 내가 너를 맞아 싸우는 것은 특히 엄백호의 분을 풀고자 함이다."
왕랑의 말에 손책은 대로하여 즉시 창을 겨누며 달려가려 하자 태사자가 급히 나섰다.
"주공께서 나서실 일이 아닙니다."
태사자는 날쌔게 말을 달려 왕랑에게 창을 들이댔다. 왕랑이 태사자의 무용을 알 리 없어 함부로 칼을 휘두르며 달려나왔다. 그러나 태사자의 창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몇 번 부딪치자 이미 형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왕랑의 휘하 장수 주흔이 주군의 위기를 구하려 달려 나왔다. 그러자 손책군에서 황개가 나가 주흔에게 창을 겨누며 다가갔다. 양군은 천지가 떠나갈 듯한 북소리와 함성을 지르며 각자 자기들 장수의 사기를 돋구었다. 그때 돌연 왕랑의 진 뒤쪽에서 혼란이 일어나더니 한 떼의 군마가 달려 나왔다. 주유·정보가 거느린 군사가 어느 틈에 뒤로 돌아 협공을 가한 것이었다. 갑자기 왕랑군 전체에 어지러운 동요가 일어났다. 왕랑은 손책과 주유의 협공을 받자 사태가 불리함을 깨닫고 황급히 군사를 돌려 회계성으로 달아났다. 손책은 여세를 몰아 성문 아래까지 추격해 네 문을 일시에 공격하기 시작했다. 왕랑이 위급함을 느껴 죽기를 무릅쓰고 나가 싸우려 했으나 엄백호가 붙들었다.
"손책군이 강하다고는 하나 해자가 있으니 성벽 위까지 기어오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구덩이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성벽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싸우지 마십시오. 저들은 한 달 내에 군량이 떨어질 것인즉 그때는 스스로 퇴각할 것입니다. 그때 굶주려 달아나는 적들을 일시에 공격한다면 대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랑이 그 말을 들으니 이치에 닿는 말이었다. 왕랑은 더욱 축대를 높이 쌓고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성 밖으로는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왕랑이 성문을 닫고 꿈쩍도 하지 않으니 손책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거센 공격을 퍼부어도 성안의 군사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렇게 날짜만 흘러가니 며칠 내로 군량이 떨어질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손책이 휘하의 장수들을 불러모은 후 대책을 물었다. 그러자 손책의 숙부 손정이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왕랑이 지금 회계성이 견고한 것에 의지하여 성을 굳게 지키기만 하니 성을 빼앗기가 쉽지 않네. 듣건대 회계의 군량미 태반을 여기서 수십리밖에 안 되는 사독에 저장해 두고 있다 하네. 왕랑은 회계성을 지키기에 급급하여 사독의 방비를 허술히 할 터인즉 군사를 보내어 방비가 허술한 사독을 진다면 능히 점령할 수 있고 군량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꿈쩍도 않는 성안의 군사를 밖으로 끌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적이 방비하지 않고 있는 곳을 치고 뜻하지 않는 곳으로 나간다는 출기불의라는 계책일세."
손책은 숙부의 말에 무릎을 쳤다.
"실로 묘안이십니다."
손책은 숙부의 의견을 좇아 그날 밤 진중의 여기저기에 화톳불을 피우게 했다. 휘황한 불빛 아래 일부러 수많은 깃발을 늘어세웠다. 군사처럼 만든 수많은 허수아비까지 세워놓고 마치 당장이라도 많은 군사들이 회계성으로 쳐들어갈 채비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꾸몄다. 주유가 손책에게 다가와 고했다.
"사독을 치면 왕랑은 틀림없이 군사를 끌고 나올 것입니다. 그때 군사를 매복시켜 기습을 가하면 크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유의 말에 손책은 웃으며 말했다.
"이미 그 모든 계책과 채비를 갖추었으니 회계성은 오늘 밤 안으로 우리의 손안에 떨어질 걸세."
손책은 곧 군사를 남쪽으로 몰았다. 손책의 군사가 움직인다는 말을 듣고 왕랑은 망루에 올라가 적진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적진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곳곳에 화톳불이 타오르고 세워놓은 깃발들이 정연하게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왕랑은 내신 손책이 물러가는 척함으로써 자기를 성 밖으로 유인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흔이 왕랑의 마음을 엿본 듯 의혹을 일시에 날려버렸다.
"손책은 지금 물러간 것이 분명합니다. 적진에 불을 피우고 기를 세워 놓은 것은 우리를 속이기 위함입니다. 지금 성 밖으로 나가 저들을 쳐야 합니다."
주흔의 말에 엄백호가 거들어 한 마디 했다.
"놈들은 필시 사독을 치러 갔을 것입니다. 먼저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뒤쫓으면 나도 곧 뒤따르겠습니다."
그 말에 왕랑이 깜짝 놀랐다.
"사독은 우리의 금은보화는 물론, 군량을 보관해 둔 곳이요. 그곳을 적이 점령하면 우리는 싸우기도 전에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소. 공이 먼저 적군의 뒤를 추격하시오. 그러면 나도 곧 뒤따를 것이오."
왕랑이 엄백호를 재촉하니, 그는 주흔과 함께 군사 5천을 이끌고 손책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엄백호와 주흔이 말을 달리기 20여 리, 날은 이미 초저녁이 되었다. 그들이 말을 달려가니 앞쪽 숲속에서 돌연 북소리가 울리며, 수많은 횃불을 든 군사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사방을 대낮처럼 환히 밝혔다. 복병이 나오자 엄백호는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누군가 말을 몰아 나오며 앞을 가로막았다. 엄백호가 횃불에 비친 그 장수를 보니 바로 손책이 아닌가! 주흔이 먼저 칼을 겨누고 손책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어찌 주흔이 손책의 적수가 되랴. 주흔은 불과 2, 3합도 못 되어 손책의 창에 찔려 비명소리와 함께 말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손책이 그대로 여세를 몰아 적군을 시살하니 이미 손책의 군세 앞에 겁을 먹은 엄백호는 혈로를 뚫어 도망치기에 바빴다. 군사들은 대장이 그 모양이니 무기를 땅에 항복하며 한 목숨 살려 주기만을 애원했다. 엄백호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여항으로 도망쳤다. 한편 왕랑은 회계성에서 잠도 자지 않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 날이 새고 보니 적진에는 화톳불이 꺼진 채 적군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적의 계략이었구나!"
왕랑이 이렇게 탄식하고 있을 때 급보가 전해졌다.
"사독이 점령당했습니다.
왕랑은 급히 성을 뛰쳐나와 사독으로 향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 곳곳에서 손책군의 복병을 만나 마침내 왕랑의 군사는 여지없이 섬멸당하고 말았다. 왕랑은 구사일생으로 사지를 빠져 나와 해우로 달아났다. 왕랑 마저 도망쳐 이미 텅 비어 버린 회계성을 손책은 힘들이지 않고 점령한 후 항복하는 적은 살려 주고 방을 붙여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다음 날이었다. 한 장수가 찾아와 엄백호의 목을 바치며 손책을 만나길 청했다. 그 장수는 키가 8척이요, 네모난 얼굴에 입이 무척 컸다.
"그대는 뉘시오?"
"저는 회계 여요에 사는 사람으로 성명은 동습이라 하옵고, 자는 원대라 합니다."
그의 기상이 자못 당당했으므로 손책은 그를 별부사마로 삼고, 그의 공을 치하했다. 엄백호가 죽고 왕랑도 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니, 이제 동쪽 지방도 평정되었다. 손책은 숙부 손정에게 회계성을 맡기고, 주치를 오군의 태수로 삼아 그곳을 다스리게 한 후 군사를 거두어 강동으로 돌아왔다.
명의 화타 그리고 여포의 활 솜씨
손책의 아우 손권이 주태와 함께 선성을 지키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산적 떼들이 손책이 선성에 없는 틈을 타 사방에서 몰려들어 기습을 감행했다. 산적 떼에다 손책군에 패해 쫓겨다니던 패잔병들이 가세했던 터라 그 수가 엄청났다.
손권이 주태와 함께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밤중에 당한 기습이라 중과 부적이었다. 하는 수 없이 주태는 갑옷도 입지 못한 채 맨발로 손권이 탄 말을 옹위하며 덤벼드는 산적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나갔다.
주태의 무서운 기세를 두려워해 도적들이 주춤하는 사이 혈로를 뚫었으나 말 탄 도적 하나가 달려와 주태의 등을 찔렀다. 그러나 쓰러진 사람은 주태가 아니고 바로 그 도적이었다. 주태가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돌려 그 창을 거머쥐고 도적을 말에서 떨어뜨린 것이다. 주태가 재빨리 그 말을 빼앗아 타고 손권의 뒤를 따랐다. 도적들은 그 사이에도 창으로 주태를 공격해 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나 도적에게 빼앗은 창을 휘둘러 뒤쫓는 도적들을 쫓고 혈로를 뚫어 간신히 손권과 함께 선성을 빠져나왔다.
가까스로 손권을 구하기는 했으나 주태 자신은 온몸에 상처를 입었다. 급히 의원을 불러 상처를 돌보게 했으나 워낙 깊은 상처가 많아 목숨마저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급히 달려온 파발마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손책은 강동으로 말을 몰았다. 강동으로 돌아온 손책은 노모와 손책이 무사하여 다행이었으나 주태의 상처가 심한 것을 보자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주태의 상처가 저토록 심해 목숨마저 위태로운 지경이니, 그를 살릴 명약이라도 없겠소?"
그러자 엄백호의 몸을 베어 가지고 왔던 동습이 나서며 말했다.
"제가 지난날 해적들을 만나 싸우던 중 심한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회계의 우번이라는 군리가 한 명의를 데리고 와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보름 만에 완치된 일이 있습니다. 우번을 청해 의논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번이라면 자를 중상이라고 하는 사람을 말함이오?"
"알고 계십니까?"
"그 중상은 왕랑의 신하였는데 장사로 있는 장소가 내게 쓸 만한 인물이라며 권한 적이 있었소. 중상은 지금 어디에 있소?"
"왕랑에게 항복을 권유하다 쫓겨난 이후 지금은 초야에 묻혀 지낸다고 들었습니다."
손책은 장소와 동습을 보내 우번을 청해 오게 했다. 우번이 당도하자 손책은 예를 다해 그를 맞으며 공조(주·군의 벼슬아치)로 삼았다. 손책은 우번에게 주태의 위급함을 말하며 명의를 불러 주기를 청했다.
"주공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제가 곧 그 명의를 찾아 데려오겠습니다."
"도대체 그 명의가 누구요?"
"그 사람의 성명은 화타, 자는 원화라고 하는 패국, 초군 사람으로 실로 신의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가서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우번은 그날로 길을 떠나 하루를 넘기지 않고 화타와 함께 돌아왔다. 손책이 그를 보니 백발 동안의 모습이 참으로 청아하여 마치 신선을 대하는 듯했다. 손책은 화타를 극진히 대접하고 주태의 상처를 보게 했다.
"한 달쯤이면 완쾌되겠군. . ."
화타는 주태의 상처를 훑어보고 조용히 웃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화타가 곧 주태에게 약을 지어 주고 상처를 돌보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자 상처는 정말 깨끗이 나았다. 주태는 물론 손책도 화타의 신령스런 의술에 놀라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후한 상을 내려 보답했다.
화타는 일명 화부라고도 하는데 그의 신통한 의술에 대해서는 이미 정사에도 기록되어 있어 잠깐 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화타에게 특히 놀라운 것은 그가 마취약을 쓴 외과의학의 개조였다는 점이다. 그밖에도 그는 내과·산부인과 · 소아과 · 침구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또한 화타는 약의 처방에도 정통해 있었다. 병상에 따라 여러 가지 생약을 합쳐 달여 먹게 했다. 그리고 그 조제는 적당한 눈짐작일 뿐 저울 같은 건 전혀 쓰지 않았다. 약을 줄 때도 몇 마디 주의를 줄 뿐, 그 밖에는 아무런 주문도 없이 병을 낫게 하였다. 침이나 뜸에도 정통해 있어 몇 군데만 놓으면 그대로 병이 나았다. 환자의 병이 체내에 있어, 침이나 약으로 치료할 수 없을 경우에는 서슴없이 절개수술을 했다. 마불산이라는 마취약을 먹이고 난 후 칼로 환부를 도려내 치료를 하는 것이었다.
「위서」에는 그의 진단과 치료의 구체적인 임상례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세라는 관리가, 수족의 힘이 빠지고 입이 마르며 사람들과 말을 하려면 초조해지고 소변 보기가 힘들다고 호소해 왔다.
"뜨거운 음식을 드시오. 그때 땀이 나게 되면 병은 다 나은 거요. 그러나 만약 땀이 나지 않으면 앞으로 2, 3일밖에 살지 못할 거요."
화타가 이렇게 일러 주어 이세는 뜨거운 음식을 먹었으나 땀이 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3일 뒤에 죽고 말았다.
어느 해, 순시관인 돈자헌이라는 사람이 병에 걸렸다가 완쾌되었다. 그러나 다시 재발할까 우려하여 화타에게 진맥을 봐 달라고 했다.
"아직 완쾌되지 않았소. 무리하지 마시오. 특히 방사는 금물이오. 만약 방사를 하게 되면 혀가 빠져 죽게 될 것이오."
그런데 돈자헌의 아내가 남편의 병이 나았다는 말을 듣고 멀리서 그의 임지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잠자리를 함께 했다. 그랬더니 과연 3일 후에 돈자헌의 병이 재발하여 죽고 말았다. 어떤 군의 태수가 병이 들었다. 화타가 보기에 이 병은 환자가 화를 터트리기만 하면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태수에게 치료비만 듬뿍 받아 내고 별 치료도 없이 엉뚱하게 태수를 우롱하는 서신만 써놓고 갔다. 태수는 마침내 몹시 화를 냈다. 사람을 시켜 집으로 돌아가는 화타를 죽이려 했으나, 태수의 아들이 화타의 치료법을 귀띔받았으므로 자객을 몰래 불러 말렸다. 태수는 그것도 모르고 분통이 터져 새까만 피를 2, 3되나 토한 순간, 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아 버렸다.
화타는 병의 치료나 외과적 수술뿐 아니라 병에 대한 예방이나 건강증진에 대해서도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유명한 '오금놀이'가 그것이다. 그는 제자 오진에게 '오금놀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몸이란 언제나 움직여 주어야 한다. 지나친 운동은 피해야 하지만 적당한 운동은 소화력을 촉진시키고 혈액의 순환을 원활히 하여 병을 예방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문짝이 늘 움직임으로써 녹이 슬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도인술이나 유연한 체조를 하며 관절을 움직이고 언제까지나 젊음을 간직할 수 있도록 힘썼다. 나에게도 그와 비슷한 술이 있는데 그것을 '오금놀이'라고 한다. 즉 호랑이·사슴·곰·원숭이·새 등 다섯 동물의 동작을 흉내 내는 것인데, 이것을 하게되면 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다. 오진이 화타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한 결과 그는 아흔 살이 넘어도 귀나 눈이 어두워지지 않았고 이도 빠지지 않았다.
화타에게는 침을 잘 놓는 반아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이 제자가 어느 날 화타에게 건강 증진약을 지어달라고 하자 칠엽청점산을 지어 주었다. 이 약은 칠엽 부스러기 한 되, 청점 부스러기 열네 냥의 비율로 조절한 것이었다. 오장을 강화시키고 몸을 가볍게 하며 머리카락을 언제까지나 검게 유지하는데 특호가 있는 약이었다. 반아가 그 약을 계속 복용했던 바, 그는 백 살이 넘도록 장수했었다.
이 밖에도 화타의 의술과 일화에 대한 기록은 많다. 이로 미루어 보아 명의 화타는 심한 상처를 입고 중태에 빠진 주태도 능히 회복시킬 만큼 뛰어난 의술의 달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태의 상처가 완치되자 손책은 곧 군사를 일으켜 지난날 선성에 쳐들어왔던 강남 일대에 남아 있는 산적들을 모조리 섬멸했다. 강남 지방은 드디어 모두 손책에 의해 평온을 되찾았다. 이로써 강남 · 강동의 81주는 이제 모두 새 인물 손책의 통치하에 든 것이다. 군사는 강하고 땅은 비옥하여 양곡과 물산이 풍부하니 소패왕 손랑의 지반은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손책은 여러 장수들에게 각처의 오해지를 지키게 하는 한편 널리 어진 선비들을 모으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폈다. 이어 손책은 세 사람의 사자로 하여금 각기 길을 나누어 떠나도록 했는데 그중 한 명에게는 강동·강남을 모두 평정한 그 동안의 경과를 조정에 알리게 했다.
한편으로는 조조에게도 따로 사자를 보내 친교를 맺는 등 눈을 천하로 돌렸다. 또한 일찍이 몸을 의탁했던 회남의 원술에게도 사자를 보내 옥새를 돌려 달라는 서찰을 보냈다. 손책은 원술에게 많은 공물과 곁들여 전에 빌린 3천 명의 군사와 5백 마리의 말을 돌려보냈다.
그 무렵, 원술은 회남을 중심으로 강소, 안휘 일대에 걸쳐 더욱더 세력이 강대해졌다. 원술은 마음속 깊이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는 집요한 야망을 품고 군비와 세력 확장에 각별히 힘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때 손책으로부터 옥새를 돌려 달라는 사자가 도착한 것이었다. 원술은 손책의 사자에게 적당한 말로 구실을 대어 빈손으로 돌려 보낸 후 휘하의 참모들을 불러모았다. 원술의 주위에 장사 양대장, 도독 장훈 · 기령 · 교유를 비롯 상장 뇌박 · 진란 등 기라성 같은 중신 30여 명이 모였다.
"오늘 그대들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손책이 갑자기 전국의 옥새를 돌려달라고 하기 때문이다. 손책은 내게 군마를 빌려 오늘날 강동 땅을 모두 차지했다. 그러나 지난날의 신세를 갚기는커녕 거짓말을 하여 군사까지 빌려간 채 깜깜 무소식이더니 무례하게도 이제 와서 이같은 요구를 해 왔다. 내 그를 어떻게 처치하면 좋겠는가?"
문무백관들은 모두 원술의 야망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모름지기 군사를 일으켜 배은망덕한 손책을 응징해야 합니다."
그러자 장사 양대장이 나서며 그 말을 가로막았다.
"강동을 치자면 험한 장강을 건너야 합니다. 더구나 지금 손책의 군세는 강하고 군량 또한 넉넉합니다. 그러하니 지금은 자중하여 먼저 지난날 까닭없이 싸움을 걸어온 유비를 제거하고 아군의 부강을 도모한 후에 손책을 쳐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소패의 유비를?"
원술이 갑작스런 양대장의 말에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소패의 유비는 세력이 작으므로 무찌르기 어렵지 않습니다만 여포가 서주에 범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그 계책이란 무엇인가?"
"먼저 주공께서 지난날 여포에게 약속까지 하시고 작파하신 군량 5만 석, 금은 1만 냥, 말과 비단 등의 물건을 지금이라도 보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그 일로 틀어진 그의 마음을 우리 쪽으로 돌려 놓으십시오. 그렇게 되면 소패가 공격당하더라도 여포가 나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 되면 유비를 사로잡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소패를 취한 후에 다시 여포를 친다면 서주도 우리 손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양대장의 말에 원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여 소패와 서주가 내 밥상 위에 오르기만 한다면 군량미 5만 석쯤은 오히려 싼 대가가 아닌가? 마땅히 시행해야 함이로다."
원술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기꺼이 한윤을 사자로 하여 밀서와 양곡 등을 여포에게 보냈다. 양곡을 받은 여포는 크게 기뻐했다. 양곡과 금은보화를 받은 데다가 더욱이 유비를 원술이 대신 쳐 준다면 서주는 영영 자기의 손안에 들어온다는 생각에서였다. 여포는 한윤을 융숭하게 대접하며 원술의 뜻을 받아들였다. 한윤이 원술에게 돌아와 여포의 뜻을 전했다. 원술은 지체하지 않고 기령을 대장으로, 뇌박과 진란을 부장으로 삼아 대군을 일으켜 소패의 유비를 치게 했다.
한편 원술이 군사를 일으켜 소패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유비는 급히 장수들을 불러모아 회의를 열었다. 소패가 작은 고을이어서 전에 원술과 싸우다 잃은 군사들도 아직 다 회복하지 못하고 있던 유비였다. 유비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좌우를 살피며 대책을 묻자 장비가 나섰다.
"그깟놈 원술이 두려울 게 무엇이오? 제가 그놈을 사로잡아 오겠소."
자신의 술주정 때문에 서주성을 빼앗겼다고 자책해 오던 장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청했다. 그러자 손건이 조용히 입을 열어 장비를 제지하며 말했다.
"아니 되옵니다. 지금 소패에는 군량도 부족합니다. 군사 또한 보잘것없는 터에 그들을 맞아 싸운다면 패할 것이 분명합니다. 급히 여포에게 서신을 보내 위급함을 전하고 원병을 청하십시오."
여포라면 이를 가는 장비가 아닌가. 장비는 손건의 말에 버럭 성을 내며 소리쳤다.
"여포 그놈이 우리에게 원병을 보내 주리라고 생각하오? 그 도둑놈에게 원병을 청하느니 차라리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비가 생각에 잠기다 단안을 내렸다.
"손건의 말이 옳다."
유비는 곧 한 통의 서찰을 써 여포에게 보냈다.
이 비가 오늘날 소패에 머물게 된 것은 장군의 너그러운 은덕에 힘입은 덕분입니다. 그러나 원술이 이전의 사사로운 원한을 품고 군사를 이끌어 이 소패를 치겠다고 합니다. 이제 원술의 군사가 곧 소패에 다다르매, 장군의 구원이 없으면 온전히 지켜 내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군사 몇 천을 보내 주시어 이 비의 위급함을 면케 해 주신다면 그 은혜 또한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유비의 간곡한 서신을 받자 여포는 우선 진궁을 불러 의논해 보기로 했다. 원술의 예물을 받은 후 원술이 유비를 치더라도 개입하지 않기로 묵계한 여포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여포에게도 한 가닥 의심이 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여포가 이처럼 의문을 떨치지 못하고 있던 중에 유비의 간곡한 서신을 받게 된 것이었다.
"진궁! 이제 와서 내게 양곡을 보낸 원술의 숨은 속셈이 무었이라고 생각하오?"
"주공을 견제해 놓고 유비를 치자는 속셈입니다."
"나도 그렇게 보고 있소."
여포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유비가 소패에 있는 것은 주공에게 전부가 될망정 아무런 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원술이 소패를 취한다면 그는 북방 태산 호걸들과 결탁하여 서주성을 넘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찌 주공께서 안심하고 베개를 높이 하여 잠자리에 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유비를 도와 소패를 지키는 것이 상책입니다."
여포는 진궁의 생각도 그러함을 알자 곧 소패로 은밀히 구원병을 보내는 한편 자신도 몸소 군사를 거느려 양군의 중간에 출진했다.
한편 원술의 장수 기령은 군사를 노도와 같이 이끌어 와 소패의 동남 쪽에 이미 진영을 치고 있었다. 낮에는 수많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북을 울리니 군사들의 함성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했다. 가령이 진을 펴자 유비도 겨우 5천 남짓의 군사나마 성 밖으로 이끌고 나가 진을 쳤다. 한윤이 이미 대가를 치르고 여포의 약속을 받아 온 터라 기령은 괘념치 않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포가 유비를 도우러 출진했다는 소식을 듣자 여포의 배신에 깜짝 놀라 항의하는 사자를 여포에게 보냈다. 이때 여포는 양군의 틈바구니에 끼인 셈이 되었는데 조금도 걱정스러운 빛이 없이 유유자적했다. 기령이 보낸 사자가 여포에게 이르러 신의가 없음을 항의할 때에도 여포는 그저 껄걸 웃기만 하며,
"나의 한 가지 계책으로 원술과 유비를 다 좋게 해줄 터인즉 기령 장군은 안심하라고 하여라."
하고 사자에게 한 통의 서신을 주어 기령에게 전하게 했다. 여포는 또 한통의 글을 유비에게도 보내게 했다. 서신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자기의 진영으로 각각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초대의 서신을 받자 유비는 곧 떠날 채비를 했다. 관우와 장비가 한사코 만류했다.
"가지 마시지요. 필시 여포란 놈이 무슨 꿍꿍이 수작을 부리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비는 두 아우의 말을 듣지 않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는 오늘날까지 그에게 신의와 겸양을 다해 왔네. 의심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그가 나를 해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정히 가시겠다면 저희들만이라도 형님을 따르겠습니다."
유비가 말을 타고 출발하니 관우·장비가 그 뒤를 따랐다. 여포의 진에 당도하자 장비의 얼굴이 굳어지며 이따금 사나운 눈알만 좌우로 무섭게 굴릴 뿐이었다. 관우도 엄한 얼굴로 유비 뒤에 꼿꼿이 서 있었다. 이윽고 여포가 이미 마련해 둔 주안상 자리에 앉으며 유비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내 이번에 귀공의 위급을 구해 드리겠으니 훗날 그 은혜를 잊지 말기 바라오."
여포의 말에 관우와 장비의 얼굴이 노기로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고개를 숙이며 사례했다.
"장군의 높으신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그때 여포의 가신이 와 아뢰었다.
"회남의 기령 장군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유비가 놀라 급히 자리를 뜨려 하며 여포에게 말했다.
"손님이 오신 모양이니 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여포가 그런 유비를 보며 껄걸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일부러 귀공과 기령을 같은 자리에 초대한 것이오. 함꼐 상의할 일도 있으니 괘념치 말아 주시오."
그러나 기령은 적의 대장이며 지금 그와의 싸움을 앞두고 있는 유비로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마침 기령이 여포의 군영으로 들어오던 중 상좌에 앉아 있는 유비를 보자 그 또한 깜짝 놀랐다.
"아니?"
기령은 대경 실색을 하며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유비·관우·장비 적장 세 사람이 나란히 그 자리에 있지 않은가! 기령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기령은 몸을 돌려 부리나케 밖으로 내달으려 했다. 그 순간 여포가 일어나 그의 팔굽을 잡는가 하더니 어린아이를 끌어 안 듯 덥석 안았다.
"이게 무슨 짓이오? 장군께서는 이 기령을 죽이려 하십니까?"
기령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내 어찌 장군을 죽일 리 있겠소. 염려 마오."
"그럼 저 당나귀 같이 귀 큰 자를 죽이렵니까?"
여포가 고개를 흔들었다.
"현덕 공은 나 여포와 형제의 사이요, 그 형제가 위급함에 처해 있어 그를 구하러 왔을 뿐이오."
여포는 유유자적 여유 있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나는 원래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오. 그리하여 오늘은 양편 모두를 위해 화해를 시키려는 거요. 이 여포가 두 집 싸움을 말리려는데 귀공께선 내가 마땅치 않으시오?"
기령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르되 여포가 화해를 시키기 위해 스스로 중재를 맡고 나서다니 더 한층 의심스러워졌다.
"화해라고 하시는데. . . , 그래 어떻게 화해를 시키려는 겁니까?"
"하늘의 판결에 맡길 따름이오."
여포가 기령을 막사 안으로 이끌어 유비와 대면시켰다. 유비도 기령을 마지못해 아는 체하기는 했으나 여포의 속셈을 알 수 없어 의심스럽기는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유비와 기령은 서로 곁눈질을 하며 애써 의연한 태도를 취할 뿐이었다. 여포가 그런 두 사람을 좌우에 앉히고 술자리를 마련했다. 여포의 권유에 못 이겨 몇 순배의 술의 돌자 여포가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이 여포의 얼굴을 봐서라도 각기 군사를 물리심이 어떻겠소?"
아직 여포의 본심을 알 수 없어 유비는 여포의 황당한 말에 입을 다물고 가만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기령 또한 그 뜻밖의 말에 금방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듯한 기세였다.
"나는 주군의 명을 받들어 10만 대군을 이끌고 왔소. 저 유비를 사로잡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가지 않을 각오로 이 싸움터에 나온 몸이오. 어찌 그냥 군사를 물린단 말이오?"
"그건 나도 알고 있는 바요."
"그런데 어찌 화해를 권한다는 말씀이오. 내가 굲사를 돌리는 것은 유비를 사로잡거나 그의 머리를 창으로 꿰는 때뿐일 것이오."
유비는 기령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으나 관우와 장비의 눈은 이글이글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장비가 끝내 참지 못해 칼에 손을 얹으며 호통을 쳤다.
"가만히 듣자 하니 안하무인격으로 방자하게 지껄여대는구나. 비록 우리가 적은 군사이긴 하나 네놈들 같은 구더기나 메뚜기 따위와는 다르다. 일찍이 황건의 불한당 1백만을 불과 수백 명으로 무찌른 걸 네놈이 모르고 하는 소리냐?"
당장 칼을 빼어 덤벼들 듯하자 관우가 장비를 껴안으며 만류했다.
"여 장군이 우리를 청하였으니 장군의 말을 더 들어 보아야 하지 않겠나? 좀 더 두고 보다가 끝내 우리의 뜻에 맞지 않으면 그때 진으로 돌아가서 싸움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네."
관우의 말에 여포도 양쪽을 제지시키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양편을 초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화해를 시키기 위함이었소. 여기서 서로 다투라고 초대한 건 아니었소."
그러나 기령 또한 장비에게 욕을 먹고 나니 몹시 성이 나 씨근덕댔다. 장비 또한 고리눈을 부릅뜨며 수염을 거꾸로 곤두세웠다. 이를 본 여포도 크게 노해 장졸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내 화극을 이리 가져오라!"
여포가 수하로부터 화극을 받아 움켜잡자 유비나 기령 모두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무예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노하면 무슨 짓을 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관우·장비도 잠시 긴장한 채 그를 지켜보았다. 여포는 화극을 꽉 움켜쥐고 좌중을 노려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 내가 양편을 불러 싸우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그 명을 거스름은 곧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오."
여포는 갑자기 화극을 든 채 원문(군영의 문) 밖 멀리 떨어진 곳까지 단숨에 달려 땅에 큰 창을 거꾸로 꽂고 돌아왔다. 그런 다음 유비와 기령에게 엄숙하게 말했다.
"보시오. 예서 저 원문까지의 거리가 백오십 보는 넉넉히 될 것이오."
모두 여포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엇 때문에 저런 곳에 창을 세웠는지 의아해 할 따름이었다.
"이제 저 창의 가지를 겨누어 내가 활을 쏘겠소. 내가 맞추면 천명을 받으러 화해하고 돌아가시오. 맞추지 못하면 그건 싸우라는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오. 그렇게 되면 나도 깨끗이 손을 떼고 일체 간섭을 하지 않겠소. 만약 내 말을 거역한다면 내가 그에게 저 화극을 겨누겠소."
유비나 기령 모두 예상치도 못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기령은 속으로 생각했다.
'백오십 보가 넘는 거리에서 여포가 어떻게 창의 가지를 쏘아 맞힌다는 말일까? 맞히지 못하면 그때 싸워도 늦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여포의 말에 따르는 척하며 기령이 쾌히 응낙하니 유비 또한 마다할 수 없었다.
"그럼 하늘에 맹세하는 뜻으로 술을 한 잔씩 더 돌리도록 함이 어떻겠소?"
여포는 자리에 앉아 술 한 순배를 더 돌리고 자신도 한 잔을 든 다음 활을 가져오게 했다. 유비는 마음 속으로 여포가 쏜 화살이 창의 가지를 맞히기만을 가만히 빌었다. 활은 방궁형의 작은 활이었으나 나무에 얇은 쇠판을 붙이고 옻칠로 죄인 것이므로 활의 세기가 강하기로는 강궁에 못지않았다. 여포는 붉은 비단 전포 소매를 걷어 올리고 시위에 화살을 메긴 후 한쪽 무릎을 꿇고 성큼 활줄을 당겨 시위를 놓았다.
"퍽!"
화살은 일직선으로 선명한 미광을 그으며 날아가니 저쪽 창의 작은 곁가지에 '착!'하고 소리를 내며 꽂혔다.
"맞았다!"
막사 안팎에서 장수나 병졸할 것 없이 모두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러댔다. 후세 사람들이 여포의 신기를 시로 지어 칭송했다.
온후의 활 솜씨 세상에 드문 신기로세
원문을 향한 화살로 위기를 넘겼네.
해를 쏘아 떨어뜨린 후예도 감탄할 그 솜씨
원숭이도 울렸다는 유기를 꺾으려 하네.
호근현 시위 소리 힘차게 일자
떠난 화살 깃처럼 날아가네.
표범의 꼬리처럼 요동치며 창에 맞으니
10만의 웅병이 갑주를 벗네.
여포는 껄걸 웃으며 활을 던지고 기령과 유비의 손을 붙들며 말했다.
"자, 약속했으니 두 분은 하늘의 뜻에 따르도록 하시오. 이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시오."
여포는 군사들에게 명하여 다시 술을 가져오게 했다. 커다란 잔에다 술을 따른 후 두 사람에게 권했다. 유비로서는 당장의 승산 없는 싸움을 피하게 되어 여간 다행스러운 게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남의 도움에 의한 것이어서 심사가 편치는 않았으나 여포가 권하는 술잔을 받아 마셨다. 그러나 기령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여포의 귀신 같은 활 솜씨에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 장군의 말씀을 좇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원 장군께는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참으로 내 처지가 난감합니다."
"내가 글을 써서 공로에게 보낼 떼니 근심하지 마시오."
여포가 수하에게 명하여 서찰을 주니 기령은 하는 수 없이 여포의 서신을 갖고 먼저 떠나갔다. 그를 보낸 후 여포는 유비에게 거드름을 피우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만일 내가 구하지 않았더라면 공은 아무리 좌우에 훌륭한 아우가 있다 하나 위급을 면키 어려웠을 것이오."
여포가 그렇게 말하자 유비는 여포에게 절하여 고마움을 표한 후 관우 · 장비와 함께 소패로 돌아갔다.
소불간친지계 갈라지는 유비와 여포
기령이 하는 수 없이 회남으로 돌아가 원술에게 전후의 사정을 자세히 고하고 여포의 서신을 전했다. 원술은 펄펄 뛰며 여포의 서신을 찢어 버렸다.
"엉큼한 놈, 그 많은 양곡을 받고도 어린아이들 속이는 장난 같은 짓거리로 유비를 두둔하다니……. 오냐, 내 몸소 대군을 이끌어 서주고 소패고 한꺼번에 짓밟아 주리라!"
원술이 화가 복받쳐 발을 구르며 소리치자 면구스런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기령이 원술에게 조심스레 간했다.
"아니됩니다. 여포의 용맹은 천하에 정평이 나 있습니다. 용맹뿐인가 했더니 지모 또한 가볍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금 군사를 이끄신 서주 땅은 기름져 병마는 살찌고 백성은 편안하니 우리에게 불리한 점이 많아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병력의 손실이 클 것으로 여겨지오니 계책을 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유비가 소패에 뿌리박고 있는 한 이 원술은 남으로도 서쪽으로도 뻗어갈 수가 없지 않은가?"
원술이 여전히 노기에 찬 목소리로 반문했다.
"제게 한 계책이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여포에게 그의 처 엄씨와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는데 혼인할 나이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마침 주공께도 슬하에 배필을 맞아야 할 장성한 자제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주공의 아드님과 혼인 이야기를 건네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른바 가깝지 않은 이가 가까운 사이를 이간시킬 수 없다는'소불간친지계'를 써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약 여포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유비를 살려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원술이 여포의 사돈을 맺어, 유비와 여포를 갈라놓은 후 여포로 하여금 유비를 치게 하자는 뜻이었다. 원술은 기령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원술은 즉시 한윤에게 글을 써 주고 예물을 갖추어 여포에게 보냈다. 청혼의 사자로 서주에 이르른 한윤이 여포에게 찾아온 까닭을 밝혀 말했다.
"이번 장군께서 화해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심에 대해 주공께서는 진실로 경의와 감사를 드리고 계십니다. 이에 장군의 따님을 며느리로 맞아 길이길이 영화를 함께 나누며 '진진의 의(진, 진 두 나라 황제가 사돈을 맺어 화목하게 지냈던 일)'를 맺고자 하오니 부디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 어미와 의논한 후 회답을 드리겠으니 잠시 쉬며 기다리시오."
여포는 뜻밖의 청혼이라 얼른 입을 열지 못하다가 일단 한윤을 역관에 머물게 했다. 여포에게는 두 아내와 첩이 있었다. 엄씨는 정실이었다. 그 후 조표의 딸을 맞아 둘째 부인으로 삼았으나, 일찍 죽어 소생이 없었다. 셋째는 첩으로 이름을 초선이라고 하였다. 초선이라면 그가 장안에 있을 무렵부터 열렬히 짝사랑에 빠졌던 여인 이름이었다. 그로 인해 동탁을 죽이고 당시의 조정에 대란을 일으키게 한 도화선이 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첩이었던 셋째 부인 초선 왕윤의 양딸이었던 박명한 초선과 이름만 같았지 딴 사람이었다. 나이도 다르고 성품도 달랐다. 그러나 용모는 이전의 초선을 쏙 빼어 닮았다.
여포는 장안의 이각, 곽사의 반란 통에 죽어간 초선을 그 이후에도 못내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고을을 샅샅이 뒤져 용모를 빼닮은 지금의 여인을 찾아내었다. 이후로는 이름도 '초선'으로 부르며 못다 이룬 사랑을 쏟고 있었다. 그 초선에게는 소생이 없었으며 자녀라고는 정실인 엄씨가 낳은 딸뿐이었다.
여포가 아내 엄씨에게 원술의 청혼을 의논하자 엄씨가 입을 열었다.
"제가 귓결에 듣기로 원 공로는 회남에 머문 지 오래되어 군사도 많고 양식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조만간 천자가 될 분이라고 합니다."
"천자가 되다니……, 그 말은 누구에게 들었소?"
"누구랄 것도 없이… 시녀들끼리 그렇게 수군대는 걸 들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전국의 옥새가 있소. 그걸 두고 말하는 것이오."
"만일 원술이 천자가 되면 우리 딸아이는 장차 황후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에게는 아들이 몇이나 됩니까?"
"하나밖에 없소."
"그렇다면 더 생각할 것도 없지요. 만약 황후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와 사돈이 되면 우리 서주는 안전하게 되는 게 아니겠어요?"
여포는 원술의 청혼에 기뻐하고 있던 처에 아내 엄씨까지 찬동하고 나서자 이 혼약을 맺기로 작정했다. 여포는 한윤을 청해 극진히 대접하고 허혼의 뜻을 전했다. 사자 일행에게는 금은보화를 주어 노고를 치하하고 원술에게는 많은 예물까지 실어 보내도록 했다. 자기의 청혼을 승낙한다는 여포의 전갈을 받은 원술은 서둘러 혼인예물을 갖춰 한윤을 다시 서주로 보냈다. 여포는 혼인예물을 받고 한윤을 극진히 대접하여 역관에서 쉬게 했다.
다음 날이었다. 여포, 원술 양가의 혼사 관계로 한윤이 왔다는 말을 듣고 여포의 모사 진궁은 그를 만나기 위해 역관으로 갔다. 두 사람은 첫 대면의 예를 주고받은 뒤에 진궁이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친 후 한윤에게 은근히 물었다.
"도대체 누구시오? 원 장군에게 여 장군과 혼약을 맺으라고 가르쳐 준 이가 어느 분이시오? 이는 유비의 목을 노리고 한 계책이 아니오?"
진궁이 불문곡직하고 한윤게게 묻자 한윤은 깜짝 놀라 주위를 살펴보며 사정했다.
"공은 이미 헤아리고 계셨구려. 그러나 절대로 입 밖에는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야 입 밖에 낼 리 있겠소? 그러나 혼인이 늦어져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일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소?"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윤이 진궁의 옷깃이라도 붙들 듯이 다가가며 간곡히 물었다.
"내가 여 장군을 만나 따님을 빨리 보내 드리라고 말씀드리지요."
한윤이 가슴을 쓸어재리며 진궁에게 치하의 말을 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원 공께서도 귀공의 은덕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진궁은 한윤과 이런 얘기를 주고받은 후 여포를 만났다.
"제가 들으니 장군께서 원 공로와의 혼인을 허락하셨다는데 참으로 잘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혼례는 언제 치르실 예정이십니까?"
"아니, 아직 택일은 하지 않았소."
여포가 바쁠 것이 없다는 투로 느긋하게 말했다.
"세상의 관례로는 정혼된 날부터 혼인날까지의 기간을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각기 정해진 시기를 네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천자의 화촉 식전은 1년, 제후는 6개월, 무사, 대부라면 3개월, 서민은 1개월이지요."
"원 공로는 전국의 옥새를 가지고 있으니 조만간 천자가 될지도 모르오. 그러므로 천자의 예를 따르는 것이 좋지 않겠소?"
여포가 진궁의 말을 듣더니 넌지시 말했다.
"아니 됩니다."
"그럼 제후의 예를 따르라는 뜻이오?"
"그도 아니 됩니다."
"대부의 예호 해야 한다는 말이오?"
"그것도 아닙니다."
여포의 안색이 변했다.
"그럼 내 딸을 출가시키는 데 공은 나에게 서민의 예로 해야 한다는 말이오?"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일이로군. 그럼 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여포가 답답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집안의 사사로운 일이라고는 하나 천하의 용장 된 이는 항상, 만사에 풍운을 살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효용(사납고 날쌤)을 견줄 수 없는 주군과 전국의 옥새를 소유하고 부국 강병을 자랑하는 원가가 인척으로 결연되는 일입니다. 이 혼인을 시기하지 않을 제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일을 두려워했다가는 딸아이를 영영 출가시키지도 못하겠소."
"그러니까 만전을 기함이 좋을 듯합니다. 만일 혼례식을 늦추어 잡았다가 신행길을 노려 도중에 복병을 두어 신부를 납치라도 해 가는 일이 생기면 어찌하시렵니까?"
여포가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대 말이 옳은 듯하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길일을 기다릴 게 아닙니다. 게다가 지체도 관례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제후들이 알기 전에 하루 속히, 따님을 원가의 수춘까지 보내시되 따님을 그곳의 별관에 묵게 해놓고 좋은 날을 골라 천천히 혼례를 올리신다면 만에 하나라도 낭패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실로 공대의 말이 옳소. 내게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어찌 될 뻔했겠소? 그런데 원가의 사자에게 이 일을 알려야 되지 않겠소?"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실은 오늘 아침 저 혼자 생각으로 역관을 찾아가 은밀히 한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히 그와 의논해 두었습니다."
"그래, 공은 한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왔소?"
"신부의 신행을 세상의 관례대로 했다가는 혹 불미스런 일이 일어날까 염려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나도 주군께 권하겠으니 귀국에서도 즉각 혼인을 서두르라 이르고 돌아왔습니다."
여포는 진궁의 말을 듣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진궁에게 치하한 뒤 후각으로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여포는 부인 엄씨에게 재촉하여 그날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혼인 준비를 시켰다. 많은 장렴(세간)과 폐백을 준비하고 비단으로 옷을 지었으며 수레와 거개도 아름답게 장식했다. 마침내 신행날 아침이 되었다. 여포는 송헌과 위속 두 장수에게 군사를 주어 신부와 한윤을 배행하도록 했다. 먼동이 틀 무렵부터 서주 성안에서는 풍악 소리가 요란했다. 새들이 지저귀는 아침 햇빛과 함께 성문이 열렸다. 신부를 태운 호화로운 마차는 수많은 시녀, 시동과 무사의 대열에 호위되어 마치 한 줄기 구름이 피어오르듯 성 밖 10여 리에 걸쳐 잇대어 나왔다. 여포도 친히 성 밖까지 나와 시부와 한윤을 환송했다. 이 무렵, 진등의 아버지 진규는 늙어 벼슬을 버리고 아들의 집에서 노환으로 앓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길거리에세 요란한 풍악 소리가 들리자 계집종에게 물었다.
"웬 풍악 소리냐?"
"여 장군의 딸을 원술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는 신행의 행렬입니다."
계집종은 서주성을 나선 신부의 행렬이 먼 회남으로 떠나는 것을, 지금 성안의 사람들이 환호하며 전송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진규는 그 소리를 듣자 깜짝 놀랐다.
"음-. 이건 분명 원술이 여포와 사돈을 맺어 가까워진 다음 여포와 유비를 이간시켜 현덕을 치려는 소불간친지계로구나. 아아, 현덕 공이 위험하구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진규는 병든 뭄을 벌떡 일으켰다.
"나를 당나귀에 태워 서주성까지 데려다 다오."
진규는 병든 몸을 이끌고 서주성에 들어가 여포를 만났다. 뜻밖에 병들어 누워 있다던 진규가 찾아왔으므로 여포가 놀라 물었다.
"대부께서는 어인 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오셨습니까?"
"주군의 임종이 임박했으므로 오늘 미리 애도의 뜻을 표하려고 왔습니다."
진규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여포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군 스스로가 저승으로 자꾸만 걸음을 옮기고 계시다는 말씀이오."
여포는 진규의 말에 심상치 않은 곡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제서야 정색을 하고 물었다.
"이 경사스러운 날에 그런 말씀을 하시니 이 봉선이 까닭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부디 자세히 깨우쳐 주십시오."
여포가 한껏 예를 갖추며 말하자 진규는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원술이 금은보화를 보내며 유현덕을 죽이라고 했을 때 공을 활을 쏘아 화해시켰습니다. 그런데 원술이 이제 사돈을 맺자는 것은 따님을 인질로 삼은 다음, 유현덕을 쳐 소패를 수중에 넣겠다는 뜻입니다. 유현덕이 원술에게 공격당해도 이번엔 사돈지간이니 장군께서 유현덕을 도우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패가 원술의 땅이 되면 위험한 것은 이 서주입니다. 소패 땅을 차지한 원술은 군사를 빌려 달라, 군량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할 것입니다. 만일 원술의 부탁을 물리친다면 그때는 사돈간의 의를 저버린다하여 싸움을 일으킬 것이며 따님의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또한 원술의 청에 응한다면 장군은 지쳐 쓰러질 것이며 또한 사방에 원수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원술은 공이 빌려주는 군사와 군량으로 여러 성을 공격할 것이니 어찌 제후들이 공을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뿐이 아닙니다. 듣자하니 원술은 옥새를 가지고 황제를 참칭하려 든다고 하니 이는 분명 역적 행위입니다. 원술과 사돈이 되면 장군은 역적의 친척이 됩니다. 이로 인해 천하 사람들은 장군을 멀리하게 되며 용서하지 않으려 할 것 입니다. 이 어찌 살아 있는 목숨 에 죽음을 재촉하는 길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음-."
여포는 진규의 말을 듣고 정신이 아찔해옴을 느끼며 깊은 신음 소리를 삼켰다.
'진궁이란 놈의 말을 듣다 일을 크게 그르칠 뻔했구나.'
여포는 이렇게 생각하고 급히 장료를 불러 딸의 신행을 되돌리게 했다. 여포의 명을 받은 장료가 급히 기마 5백을 이끌어 30리나 달려서야 가마 행렬을 만날 수 있었다. 여포는 함께 되돌아온 사신 한윤을 감금했다. 그리고는 원술에게 따로 사신을 보내 '아직 혼수가 다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기다려 달라'는 서신을 전하게 했다. 진규는 그날 저녁까지 성안에 있다. 당나귀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중얼거렸다.
"아, 이제야 다행히 유현덕의 위급은 넘겼다만……."
다음 날 진규는 조용히 병상에 누워 눈앞에 일고 있는 원술과 여포의 전운을 생각하니, 유비의 위치가 위험천만하게 생각되었다.
'여포는 앞문의 범이요, 원술은 뒷문의 승냥이와 같구나. 그 두 틈바구니에 끼여 언젠가는 그 어느 한쪽에게 먹히고 말 것이 분명하다.'
진규는 이런 생각으로 근심하다 붓을 들어 서신을 쓴 후 여포에게 전하게 했다. 그 서신에는 여포에게 보내는 헌책이 적혀 있었다.
근자에 원술이 옥새를 손에 쥐고 있다 하여 천자의 자리를 넘보고 있음은 명백히 천조를 거스리는 일입니다. 이때 장군께서는 사로잡은 한윤을 허도의 조정에 바침으로써, 순역을 명백히 해두심이 옳지 않은가 합니다. 그렇게 되면 조조도 장군의 공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군은 관군이 되어 조조의 군사를 좌익으로 삼고 유현덕을 우익으로 삼아 대역의 적인 원술을 토벌하셔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광세의 영명을 떨치고 동시에 일대의 대계를 가름할 이 시기를 놓쳐서는 아니 됩니다.
여포는 진규의 서신을 받고 어쩔 줄을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부인 엄씨가 나타났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계시옵니까?"
여포가 들고 있던 진규이 서신을 엿본 엄씨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다 죽어가는 병자의 말에 흔들려 모처럼의 가연을 파가하실 작정이십니까?"
아직도 원술과의 사돈 맺는 일에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한 여포는 아내 엄씨의 말에 더욱 마음이 흔들려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정각을 향해 나갔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으나 관원들이 그곳에서 떠들고 있어 여포가 알아보게 했다. 시신이 다가와 아뢰었다.
"소패의 유현덕이 어디선가 말을 사들이고 있다 하옵니다."
그 소리에 여포는 웃었다.
"무장이 말을 사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뭘 그렇게 야단스럽게 떠들어대는가. 나도 좋은 말들을 사 모르려고 며칠 전에 송헌과 위속을 산동으로 보내지 않았는가?"
여포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 그러부터 사흘 후에 산동지방으로 군마를 사러 갔던 송헌 일행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송헌이 마치 패전 당한 장수처럼 갑주가 찢겨지고 몸에 상처까지 입고 있었다. 여포가 말을 사러 갔던 일에 대해 물었다.
"그래 군마는 많이 구해 왔는가? 어서 준마 대여섯 필을 이리 끌고 와 보도록 해라."
여포가 이렇게 명하자 송헌 등이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말했다.
"저희들이 명을 받들어 산동으로 말을 사러 가니 마침 좋은 말이 있어 3백 필을 구해 돌아오다 소패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이때 한 떼의 도적 떼가 나타나 그 중 2백여 필의 준마를 약탈해 갔습니다. 저희들은 어제도 오늘도 필사적으로 놈들의 행방을 찾았지만 도적 떼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나머지 말만 끌고 일단 돌아온 것입니다."
여포의 이마에는 어느새 핏발이 서 있었다.
"뻔뻔스러운 놈, 귀중한 군마를 빼앗기고 돌아왔다는 말이냐? 도적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잡아 와야 하거늘 말까지 빼앗기고 어찌하여 빈손으로 들어왔느냐?"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송헌은 노기 띤 여포의 목소리에 기가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도적 떼들은 여느 좀도적이나 산적이 아닌 듯했습니다. 하나같이 건장한 놈들 뿐인데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장대한 두목인 듯한 자는 저희들을 마치 어린애처럼 집어던지는 통에 감히 얼씬도 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모두 날렵하기 이를 데 없어 말을 빼앗아 타자마자 두목의 호령 한 마디에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비상하고 의심쩍어 알아보니 그 복면의 도적 떼는 실상 소패 유현덕의 의제 장비와 그 부하들이었습니다."
"무어야? 그놈이 장비였다고……?"
"틀림없이 장비였습니다.
여포는 송헌의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좌우에게 명을 내렸다.
"모든 군마는 소패로 진격할 준비를 하라!"
여포는 명을 내린 후 갑옷을 입고 적토마 위에 올라 군사를 이끌었다. 유비는 뜻밖에도 여포가 대군을 이끌고 소패로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가 군사를 이끌고 오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으나 그대로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유비도 성 밖에 나가 군사를 벌여 세우고 양군이 서로 마주 보며 포진한 가운데 유비가 말을 타고 나와 여포에게 물었다.
"여 장군은 어인 일로 출병하셨습니까?"
그러자 여포는 손가락으로 유비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지난날 이 여포가 원문의 창을 쏘아 위급한 궁지에서 네놈의 목숨을 구해 주었거늘, 그 보답이 이거냐? 내 군마 2백 필을 장비를 시켜 약탈케 하다니, 그러고도 네놈이 시치미를 뗄 작정이냐?"
유비로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장비라는 말이 나오자 뒤의 장비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여포를 향하여 은근하게 말했다.
"이 유비가 며칠 전 말이 모자라서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어 약간의 말을 사들인 적은 있습니다만 감히 장군의 말을 빼앗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자 장비가 창을 들고 나와 유비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그래, 내가 네 말을 뺏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장비가 한바탕 여포와의 싸움을 작정한 듯 으름장을 놓자 여포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이 고리눈을 가진 도적놈아, 네놈이 번번히 나에게 대들었다만 이번에야말로 네 목을 쳐 주마."
"고약한 놈, 군마 2백 필이 뭐 그리 대단하냐? 네놈은 우리 형님의 서주성을 송두리째 빼앗지 않았더냐?"
장비의 악담이 끝나자마자 여포는 분을 참지 못해 화극을 움켜잡고 달려나왔다. 장비 역시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달렸다. 여포는 장비를 향해 화극을 휘둘렀다. 장비는 말을 뒷발로 곧추세우더니 빗나간 상대방의 창끝을 쏘아보며 대거리하였다. 여포가 화극을 다시 바로잡고 말머리를 돌리자 장비도 쌍날 칼을 단 장창을 비껴들고 횃불같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여포의 가슴을 노려보며 달려들었다. 여포가 방천화극으로 장비의 장팔사모 창을 받아넘겼다. 과연 여포와 장비의 싸움은 당대 용장의 대결다웠다. 장비는 여포라는 사나이가 아주 싫었다. 여포에게 서주성을 빼앗겼던 원한까지 사무쳐 여포만 보면 아무 일 없는 평소에도 울컥울컥 화가 머리끝으로 치솟았다. 마찬가지로 여포 쪽에서도 늘 장비의 얼굴만 보면 구역질이 날 것처럼 불쾌했다. 이처럼 서로 미워하는 양 호걸이, 이제 싸움터에서 맞부딪쳤으니 그 싸움의 치열함은 말로 다 형언할 수가 없었다. 찌르면 막고 막으면 후비고 찔렀다. 그렇게 창을 맞대기를 1백여 합, 비 오듯 하는 땀은 말 등에 떨어지고, 쌍방의 외침은 구름에 메아리쳤다.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유비는 장비가 행여 실수할까 조바심이 나서 징을 쳐 일단 군사를 거두어 성안으로 들어가니 여포는 소패성을 단단히 에워쌌다.
"여포 이놈아! 내일 또 맞서자."
장비는 퇴각의 징 소리가 울리므로 말을 돌려 성안으로 돌아왔다. 장비가 소패성에 돌아오자 유비는 장비를 불러 나무랐다.
"또 아우가 일을 저질렀군. 대체 훔친 말은 어디다 두었나?"
"성 밖 앞의 사원에 매어 두었습니다."
"정당치 못한 수단으로 얻은 말을 나의 외양간에 매어 둘 수는 없네. 관우, 그 말을 전부 여포에게 돌려 보내고 전후 사정을 고하여 싸움을 그만두도록 청해보라. 지금은 여포와 싸울 때가 아니다."
유비의 명에 따라 관우는 2백 필의 말과 함께 사람을 여포의 진으로 보내 화해를 청했다. 여포도 막상 듣고 보니 유비가 시켜 말을 빼앗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말까지 되돌려 받았으므로 분을 가라앉히고 퇴각하려 하자 진궁이 옆에서 여포를 충동질했다.
"지금이야말로 유비를 죽일 때입니다.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서주의 인심은 날로 주공을 떠나 유비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를 없애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여포는 진궁의 말에 앞뒤를 가릴 여유도 없이 금세 마음이 바뀌었다. 서주성의 인심이 유비에게 쏠리고 있다는 진궁의 말에 불끈하여 그대로 숨돌릴 틈도 없이 소패성을 공격했다. 이튿날도 종일토록 거센 여포의 공격을 받자 소패성은 당장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마침내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유비는 손건, 미축 등과 의논했다. 맨 처음으로 손건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바에는 별도리가 없습니다. 일단 성을 버리고 허창으로 가 조조에게 의지했다가 때를 엿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조조는 여포에게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어 우리를 물리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비 역시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손건의 말에 따르기를 작정하고 좌우를 보며 말했다.
"누가 선봉이 되어 여포의 포위를 뚫겠느냐?"
"제가 죽기로 싸워 포위를 뚫겠습니다."
장비가 나섰다. 유비는 장비에게 선봉을 맡겨 길을 뚫게 했다. 관우에게는 뒤쫓는 여포군을 막도록 하고 자신은 중군이 되어 노약자와 가솔을 이끌기로 했다.
그날 밤 삼경이 되어 유비는 달이 뜨자마자 북문을 열고 말을 달렸다. 북문을 지키고 있던 여포의 부장 송헌, 위속이 장비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성을 여포에게 고스란히 내주게 된 원인이 자기에게 있으므로 죽기를 작정하고 싸우는 장비를 당할 수 없어 그들은 끝내 많은 군사를 잃고 길을 내 주고 말았다. 유비는 그 틈을 타 중군을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왔다. 그 뒤를 적장 장료가 급히 추격했으나 관우가 유비의 뒤에서 그들을 맞아 싸웠다.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한 번씩 바람을 가를 때마다 수십 명의 군사가 쓰러지니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그 틈을 타 유비는 가솔들을 이끌고 무사히 소패성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여포는 소패성을 버리고 유비가 이미 달아났으므로 더 이상 유비를 뒤쫓지 않았다. 그대로 소패성에 들어가 민심을 안정시키고, 고순에게 소패성을 지키게 한 후 군사를 거두어 서주성으로 돌아갔다.
호궁 부인과 조조의 호색 본심을 드러낸 진대부
소패성을 빠져나온 유비는 허창에 이르러 성 아래에 군사를 머물게 한 후, 먼저 손건을 조조에게 보냈다. 손건은 조조에게 유비가 여포에게 소패성을 빼앗기고 쫓겨오게 된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고 그의 수하로 들어가고 싶다는 유비의 뜻을 간곡하게 전했다.
조조는 지난날 황건적의 난 때부터 보아온 유비를 항상 경계해 오고 있었다. 언젠가는 천하를 향해 비상할 교룡의 면모를 가진 듯한 유비를 가슴에 새기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포에게 쫓겨 스스로 자기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닌가. 조조는 이를 좋은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유비 일행을 쾌히 맞아들이기로 했다.
"현덕은 나의 형제나 다름없소. 내 어찌 형제의 어려움을 모른 척할 수가 있겠소?"
조조는 손건에게 이렇게 말하며 사람을 딸려 보내 자기의 뜻을 유비에게 전하게 했다. 다음 날 유비는 관우, 장비와 군사들을 그대로 성 밖에 머물게 하고 손건, 미축만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조조는 그들을 빈객의 예로 맞아들인 후 상좌를 권하며 위로하였다. 유비는 그동안 서주성에서 있었던 일을 조조에게 설명했다.
"여포 그자는 원래 의를 모르는 놈입니다. 유 공과 힘을 합쳐 그자를 치면 될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시기 바랍니다."
조조는 잔치를 베풀어 유비를 극진히 대접했다. 유비는 호의에 감사하며 날이 저물 무렵 승상부를 물러 나왔다. 유비가 물러나자 조조와 함께 유비를 접대했던 순욱이 조조에게 은근히 권했다.
"저 사람이야말로 장차 두려운 영웅이 될 것입니다. 반드시 주공의 벅찬 상대가 될 것이니 세력을 더 키우기 전에 없애는 것이 좋겠습니다."
순욱은 유비를 보자 한눈에 그가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자기가 품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조조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순욱의 말에 그냥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순욱이 가자 때마침 곽가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조조가 곽가에게 의견을 물었다.
"순욱이 유비를 없애 버리라고 하는데 그대의 의견은 어떤가?"
곽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안 될 말입니다. 그가 아직 무명인 시절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의기, 인애의 인물로서 유현덕의 이름은 상당히 알려져 있습니다. 만일 지금 형세가 궁하여 주공께 의탁하러 온 현덕을 죽여 버린다면 어진 이를 해쳤다 하여 천하의 현재는 주공에 대한 존경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천하의 지모 있는 인재들이 그 소문을 듣고 의심을 품어 주공께 의지하지 않을 터인즉 그때는 누구와 더불어 평정하시렵니까? 한 사람의 현덕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해의 신망을 잃는다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되지 못합니다. 부디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조조는 곽가의 말에 얼굴이 밝아지며 입을 열었다.
"그대의 말이 실로 내 뜻에 맞는 바이오. 지금은 한 사람의 호걸이라도 내게 필요한 때이오. 나에게 의지하러 온 호걸을 죽였다간 천하의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소?"
다음 날이 되자 조조는 천자께 표를 올려 유비를 예주목(하남성)으로 주청하였다. 이때 정욱이 조조에게 간했다.
"유비는 여포나 원술과 같은 도배가 아닙니다. 그들은 내버려 두더라도 절로 망하겠지만 유비는 다릅니다. 지금 손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천하의 영웅들이 모여들게 해야 할 때요. 그를 죽여 천하의 민심을 잃어서는 아니 되오. 이에 대해서는 곽가와 뜻을 정했소."
조조는 정욱의 말도 물리치고 유비에게 군사 3천, 양식 1만 석을 주어 예주 임지로 떠나게 했다. 조조는 떠나는 유비에게, 소패로 군사를 보내 이전에 흩어진 옛 부하들을 불러모아 여포를 공격하기 위한 채비를 하도록 일렀다. 유비를 소패와 서주에서 멀지 않은 곳인 예주에 머물게 하여, 유비로 하여금 여포를 정벌케 하자는 것이 조조의 속셈이기도 했다. 예주에 다다른 유비는 여포에게 쫓길 때 흩어졌던 지난날 휘하의 군사들을 다시 불러모으고 조조에게서 얻은 군사와 합하니 적지 않은 군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혼자의 힘으로 아직 여포를 칠 정도는 아니어서 사람을 조조에게 보내 함께 여포를 칠 날을 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조조의 계획이었던 여포의 정벌이 실현되기도 전에, 뜻밖에도 엉뚱한 곳으로부터 허도에 전운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조조가 유비의 사자를 맞아 날짜를 정하고 여포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려 할 즈음 급보가 날아든 것이다.
"동탁의 옛 장수였던 장제가 관중에서 군사를 일으켜 남양을 공격하던 중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에, 그의 조카 장수가 세력을 계승하여 가후를 모사로 삼고 형주 태수 유표와 결탁하여 완성에 진을 쳤습니다. 그들은 장차 허도를 쳐 천자를 납치하고 천하를 넘보려 한다 합니다."
조조는 그 급보를 듣고 크게 노했다. 조조는 여포를 치려던 군사들을 이끌고 곧장 달려가 장수부터 치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그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서주의 여포였다.
'만일 내가 장수를 치러 가 장기전에라도 접어든다면 여포는 반드시 그 틈을 타 허도로 쳐들어올 것이다.'
그런 염려 때문에 조조가 출진을 망설이며 순욱을 불러 의논했다. 순욱은 주저 없이 아뢰었다.
"염려하실 일이 아닙니다. 여포는 지모에 어둡고 욕심이 많은 자입니다. 주공께서는 서주의 여포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의 관직을 올려 주고 은상을 주어 현덕과 화해하도록 권해 보십시오. 우선 눈앞의 이익에 기뻐하며 딴마음은 먹지 않을 것이옵니다."
"참으로 좋은 계책이오."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봉군도위 왕칙을 사자로 하여 그 뜻을 여포에게 전하게 했다. 여포를 평동장군에 봉하고 예물을 잔뜩 주며 유비와 화해하라는 글을 보낸 조조는 장수를 정벌하기 위해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완성으로 향했다. 조조가 이끈 대군의 깃발과 창검은 백 리나 이어졌고,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조조는 군사를 3대로 나누어 하후돈을 선봉장으로 삼아 육수에 이르러 진을 펼쳤다.
때는 이미 봄도 무르익어 가는 건안 2년의 5월이었다. 연록색 버드나무들은 그 간들간들한 가지를 늘어뜨리고, 육수의 강물엔 그림 같은 도화 꽃잎들이 가득히 떠 있었다. 장수는 막상 조조가 몸소 대군을 이끌고 오자 간담이 서늘해져 모사 가후에게 의견을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소, 승산이 있겠소?"
"없습니다. 조조의 군세가 워낙 강해 전력을 다해 공격해 온다면 당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소?"
"항복이 있을 뿐입니다. 항복하여 조조를 안심시킨 후 때를 보아 도모하는 길밖에 다른 방책이 없습니다."
명민한 가후는 역시 헤아림이 빨랐다. 장수도 조조의 대군을 대적할 수 없다고 여겨 하는 수 없이 가후의 말에 따랐다. 가후는 싸움도 하기 전에 백기를 앞세우고 자신이 사자가 되어 조조의 진으로 향했다. 조조가 가후를 만나 보니 항복하러 온 사자이지만 태도가 당당했으며, 청산유수와 같은 언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조는 가후의 인품과 재주에 탄복하여 그를 자기의 모사로 쓰고자 했다.
"공은 장수를 떠나 나와 함께 대의를 도모할 생각은 없으시오?"
조조가 목소리를 낮춰 정중히 그에게 말하자 가후가 공손히 대답했다.
"분에 넘치는 말씀입니다만, 장수가 제 의견이라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으니 어찌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저는 지난날 이각의 휘하에서 이미 천하에 죄를 지었기에 더욱 처신을 자중하고 있습니다. 승상의 두터운 정은 잊지 않겠습니다."
가후는 조조의 권유를 완곡히 물리친 후 장수에게 돌아갔다. 다음 날은 장수가 가후와 함께 직접 조조를 찾아와 항복했다. 힘들이지 않고 장수의 항복을 받게 되자 조조의 기쁨은 컸다. 조조는 두 사람을 후하게 대접한 뒤 군사 약간을 거느리고 완성으로 들었다. 나머지 군사들은 성 밖에 그대로 주둔케 했는데 워낙 대군이라 진지가 10여 리에 이르렀다.
장수는 날마다 조조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어느 날 밤 장수와 함께 밤늦게까지 주연을 즐기다가 침전으로 들어가던 중 따르는 사람에게 넌지시 물었다.
"성안에 혹시 기녀가 없느냐?"
이때 조카 조안민이 조조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조안민은 조조의 심중을 눈치채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조에게 고해바쳤다.
"지난 밤에 호궁 소리가 나 관사 옆을 살펴본즉 한 아리따운 부인이 호궁을 켜고 있었습니다. 알아보니 장수의 숙부 장제의 처로, 장제가 죽은 뒤에 이 성으로 옮겨 와 장수가 돌보고 있다고 합니다."
조조는 취한 척하고 몸을 비틀거리며 말했다.
"음-. 죽은 장제의 처라고? 그러면 과수댁이란 말이렷다. 그렇다면 네가 가서 빨리 데리고 오라."
조안민은 무사를 거느리고 가 장제의 처를 데리고 왔다. 조조가 보니 과연 빼어나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사람들을 물리고 그 여인을 방으로 들게 한 뒤 조조가 목소리를 낮춰 다정하게 물었다.
"그대의 성명은 어떻게 되시오?"
"첩은 돌아가신 장제의 아내로… 추씨라고 합니다."
우수에 찬 아름다움이었다. 난초꽃을 방불케 하는 눈이 긴 속눈썹으로 덮인 채 바르르 떨렸다. 추씨의 갸냘픈 대답에 조조는 어쩔 줄 몰랐다.
"부인은 내가 누구인지 알겠소?"
"승상의 크고 높은 명성은 일찍부터 듣고 있었사옵니다. 오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추씨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조조는 그 여인이 자기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짐작하며 허세를 떨기 시작했다.
"장수의 항복을 왜 선선히 받아들인 줄 아시오? 그건 부인 때문이었소. 그렇지 않았다면 내 마음 하나로 장수 일족을 멸할 수 있었다는 걸 아실거요."
부인은 어깨를 움츠리고 두 볼에 홍조를 띠며 아뢰었다.
"다시 목숨을 부지하게 된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추씨가 머리를 숙이며 사례했다.
"오늘 저녁 그대를 만난 건 하늘의 뜻인가 하오. 나의 이 열정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내 열정을 받아 준다면 내 반드시 그대에게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해 주겠소."
추씨가 가늘고 흰 목을 들어 조조를 쳐다봤다. 조조는 백옥같이 흰 살결과 수줍어하는 가운데도 입가에 맴도는 은은한 미소에 그만 넋 빠진 사람처럼 이끌려갔다. 그날 밤 그들 남녀는 밤이 새도록 뜨거운 정을 나누었다. 새벽이 되자 추씨는 조조의 품으로 기어들면서 소곤거렸다.
"이곳에서 제가 너무 오래도록 머물다보면 필시 시조카 장수의 의심을 사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문이 남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하, 쓸데없는 걱정 마시오. 내일이라도 성 밖에 있는 내 진지로 거처를 옮기겠소."
다음 날 조조는 추씨에게 약속했던 대로 거처를 성 밖의 진으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그의 장막 밖을 전위에게 지키게 하여, 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든 장막에 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조조는 장막 안에서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추씨의 몸을 탐했다. 이로 하여 조조는 허창으로 돌아갈 생각도 잊은 채 몇날 며칠이 흘러갔다. 그러나 추씨가 조조에게 이끌려간 지 여러 날이 되자, 그 일이 장수에게 알려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장수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며 울화통을 터뜨렸다.
"조조, 그놈이 내 얼굴에다 침을 뱉어도 유분수지……."
장수는 즉시 모사 가후를 불러 이 일을 의논했다.
"조조 그자가 무장한 군사를 시켜 숙모를 자기 진영으로 끌고 가 밤낮없이 희롱하고 있소. 세상 사람들이 이를 알면 나를 보고 뭐라고 하겠소? 이제 나는 조조에게 더 이상 몸을 굽히지 않겠소. 그대가 이 울분을 풀 계교를 세워 주시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가후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하오나 이런 일은 결코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아니 됩니다. 내일 조조가 장막에서 군무를 볼 때 은밀히 시행하십시오."
가후는 그렇게 말한 후 장수에게 귀엣말로 계교를 일러 주었다. 다음 날이었다. 성 밖에 있는 조조의 중군으로 장수가 찾아와 근심스런 얼굴로 말했다.
"항복한 뒤라 그런지는 몰라도 군사들 중에 도망가는 자가 많아 걱정입니다."
장수는 짐짓 큰일이라도 벌어졌다는 듯이 엄살을 부렸다. 그러나 장수의 속셈을 알 리 없는 조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장수에게 말했다.
"그런 건 걱정할 일이 아니지 않소. 성 밖 네 문에 감시대를 세우고 성 안팎을 순시케 하여 도망병을 발견하면 즉각 목을 베시오. 그렇게 하면 도망병은 더 이상 생겨나지 않을 것이오."
"그렇게도 생각하였습니다만 항복한 군대라 승상의 허락도 받지 않고 순찰대를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일이고 하여……."
장수가 말끝을 흐리며 조조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조조는 장수가 무엇 때문에 자기를 찾았는지 그 이유를 헤아리고 선뜻 승낙했다.
"염려하지 말고 장 공의 군대를 움직이시오. 내가 부하들에게 일러두겠소."
추씨에게 흠뻑 빠져 있는 조조였다. 장수가 자기의 숙모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여겨 별생각 없이 이렇게 허락하니 장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돌아갔다. 장수는 지체하지 않고 조조의 진중에 군사를 4대로 나누어 주둔시켰다. 그런 후 그들은 가후의 계책에 따라 때를 기다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의 장막을 지키는 전위의 용맹이 두려워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장수는 성안에서 용맹스러움으로는 첫손 꼽히는 호거아를 불러 물었다. 호거아는 붉은 머리에 눈초리가 독수리처럼 매서운 데다 힘이 장사라 5백 근이 되는 짐을 지고 하루에 7백 리를 달린다는 장사였다. 그러나 그도 전위만은 어쩌지 못한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뢰었다.
"제가 전위를 두려워하는 까닭은 그가 가지고 있는 두 자루 철극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전위를 제거하지 않으면 조조를 칠 수 없네."
가후의 간곡한 말에 호거아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한 꾀를 냈다.
"장군께서 내일 그를 청하여 술을 대접하도록 하십시오. 그는 술을 좋아하니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위를 고주망태가 되도록 취하게 하면 제가 중군으로 숨어들어 그의 쌍철극을 훔쳐 내오겠습니다. 쌍철극만 없으면 그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장수는 호거아의 말에 기뻐하며 군사들에게 은밀히 명을 내려 활과 화살을 정비하고 갑옷을 입도록 했다. 이런 음모를 알지 못한 채 일찍이 조조에게 괴력을 과시하여 '은나라 주왕을 호위하던 악래'에 비유되던 전위는 조조의 장막 앞에서 무료하게 창을 들고 서 있었다. 이때 장수의 모사 가후로부터 정중히 청하는 전갈을 받았다.
다음 날 가후가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한 전위는 밤 이경 무렵까지 술을 마셨다. 조조의 군막을 지킨 뒤부터 술을 입에 대지 못했던 전위는 만취가 되어서야 자기의 장막으로 돌아왔다. 호거아는 수행하는 졸개들 속에 끼여 조조군 진영으로 몰래 들어갔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전위의 쌍철극이 쥐어져 있었다. 조조는 그날 져녁도 추씨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취한 귀에도 장막 밖에서 말발굽 소리와 어지럽게 수선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조는 시신을 불러 알아보게 했다.
"장수의 부대가 순찰을 돌고 있다 하옵니다."
조조는 마음놓고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이윽고 삼경쯤 되었을 때 갑자기 장막 밖에서 함성이 일었다. 조조는 다시 시신을 보내 알아보게 했다.
"군사의 실수로 말꼴을 실은 수레에 불이 붙어 여럿이 달려들어 불을 끄고 있다 하옵니다."
조조는 그 말을 듣자 안심하고 추씨와 더불어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조금 후에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고 함성 소리와 징 소리가 요란했다. 조조는 그제야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전위, 전위는 어디 있느냐?"
조조는 급히 옷을 꿰입으며 전위를 불렀으나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때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던 전위도 지독한 연기 냄새와 요란한 징소리, 고함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벌떡 일어나 취한 중에도 황망히 쌍철극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때 진영의 주위는 이미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전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장수의 군사들이 원문 부근까지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전위는 쌍철극을 찾지 못해 주위에 있는 졸개의 칼을 빼 들었다. 말 탄 군사들이 긴 창을 들고 진중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전위는 그들을 맞아 칼을 휘둘렀다. 때마침 늦은 봄이라 술에 취한 전위는 위통마저 벗어던지고 잠들었던 터이라 갑옷은커녕 옷도 걸칠 틈이 없었다. 전위는 칼을 휘두르며 달려나가, 순식간에 20여 명을 죽였다.
"전위다!"
"악래다!"
비록 쌍철극은 없다 하나 전위가 순식간에 기병 20여명을 찌르고 베니 장수의 군사들도 간담이 서늘해져 잠시 주춤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이번에는 보졸 부대가 밀어닥쳤다. 그들이 모두 긴 창을 들고 밀려드니 마치 창의 갈대숲을 이룬 듯했다. 전위가 그들을 맞아 싸우던 중 그의 칼이 부러지고 말았다. 칼이 부러지자 적군의 창을 빼앗아 휘둘렀다. 창마저 부러지자 이번에는 양 팔에 적병 하나씩을 잡고 빙글빙글 돌려대면서 싸우기 시작했다. 적병 몇이 나가떨어지자 전위의 무서운 용맹에 기가 질린 듯 감히 더 이상 접근하려 들지 않고 멀찌감치 물러났다. 그대신 전위를 빙 둘러싸고 활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반 벌거숭이가 된 전위의 몸에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래도 전위는 진문을 지키며 끄덕도 않고 서 있었다. 이미 전위의 몸에는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꽂혀 있었다. 적병 하나가 등뒤로 다가가 등에다 창을 내질렀다. 천하의 악래 전위도 그 창에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선혈을 내뿜으며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수문장 전위가 쓰러졌으나 겁에 질린 적병들은 얼른 진문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한편 전위가 결사적인 싸움을 벌이며 적군을 막고 있는 사이, 조조는 잽싸게 말 위에 올라 적진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를 뒤따르는 부하 한명 없이 단지 조카 조안민만이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쫓아가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조조가 진중을 빠져나간 걸 안 장수는 그를 뒤쫓았다. 추격대는 쉴 새 없이 화살을 쏘아댔다. 조조는 날아온 화살에 오른팔이 맞았고, 말에도 몇 대의 화살이 꽂혔다. 말은 화살을 맞았으나 다행히 조조의 채찍질을 받으며 쓰러지지 않고 달렸다. 그 말은 대완 지방에서 난 명마였다. 그들이 간신히 육수 강변까지 이르렀을 때 조카 조안민은 적의 추격대에 사로잡혀 갈갈이 찢겨지는 몸이 되고 말았다. 조조는 부상당한 말을 몰아 육수의 강물에 뛰어들었다. 사력을 다해 건너편 기슭에 당도한 조조가 강기슭에 오르려 할 때 날아온 화살 하나가 말의 눈을 꿰뚫었다. 조조는 넘어지는 말과 함께 나뒹굴고 말았다. 조조의 몸도 피로 얼룩졌고 쓰러진 말도 피투성이였다. 아무리 명마라 하지만 눈에 화살이 박힌 채로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조조가 간신히 강기슭을 기어올랐을 때였다. 강변 쪽에서 말을 달려오는 젊은이가 있었다. 조조가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버님, 이걸 타십시오."
어둠 속에서 큰아들 조앙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장남이라 이번의 출진 때 경험삼아 데리고 왔는데, 그도 구사일생으로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이었다.
"마침 잘 와 주었구나, 너는 어찌하겠느냐?"
"저는 염려하시지 마십시오. 아버님 목숨을 보전하시어 큰일을 이루십시오."
조조는 급히 말 위에 뛰어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다시 달렸다. 조조가 불과 백 보도 달리기 전에 무수한 적의 화살을 맞아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내가 죽으면 천하도 없고 우리 일족도 멸망할 뿐이다. 내 반드시 너의 복수를 해주마.'
조조는 말을 달리며 눈물을 흘렸다. 장남 조앙의 목숨을 대가로 겨우 사지에서 벗어난 조조는 그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하 장수들을 만났다. 조조는 장수들로 하여금 흩어진 군사들을 다시 수습하게 했다. 이때 하후돈 휘하의 청주병 한 무리가 찾아와 엎드려 울면서 조조에게 고해 바쳤다.
"우금이 반란을 일으켜 주공을 거스렸습니다."
"내 발등 에 불이 떨어진 틈을 타 반란을 도모하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구나. 내 이놈부터 징벌하리라."
조조는 격노하여 즉각 우금을 무찌르라고 군사를 보냈다. 청주병은 동탁이 죽은 이듬해, 조조가 산동에서 황건적 잔당을 토벌하여 잔당 수만을 흡수해 조련시킨 조조의 정예병이었다. 그러나 사실인즉, 하후돈이 이끌었던 청주병들은 장수군에게 쫓겨 도망가던 중 도적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혼란을 틈타 고을에 들러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한 것이었다. 그때 펑로교위 우금은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청주병들을 보자 자기의 군사를 이끌어 백성들을 구해 주었다. 이에 우금의 칼을 피해 도망친 청주병들은 조조에게 달려와 우금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모함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조조는 크게 노해 때마침 모여든 하후돈, 이전, 허저, 악진 등의 장수에게 우금을 막도록 한 것이다.
한편 자기가 의심을 받고 있는 지를 알지 못하는 우금은 조조의 진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뒤쫓는 장수군을 맞을 준비붙 했다. 군사들로 하여금 영채를 세우게 하고 노궁수들을 진 앞에 늘여 세운 후 명을 내렸다.
"참호를 파고 진을 굳게 지켜야 한다."
이때 우금의 진에 머물고 있던 순욱이 의아하게 여겨 물었다.
"청주병들이 먼저 승상에 이르렀으니 필시 장군이 모반했다고 말했을 것이오. 그런데 승상께 먼저 그 동안의 사정을 아뢰지 않고 왜 진지 설치부터 하시오?"
앞뒤 사정을 헤아린 순욱이 우금에게 이렇게 말했으나 우금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럴 틈이 없소. 적군이 곧 추격해 올 터인데 미리 대비하여 그들부터 물리쳐야 하지 않겠소? 설령 승상께서 나를 오해하고 계신다 할지라도 나에 대한 해명은 작은 일이요, 적을 물리치는 일은 큰일이니 먼저 큰일부터 한 후 작은 일을 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며 신하된 자의 도리일 것이오."
과연 얼마 있지 않아 우금의 말대로 장수의 군대가 들이닥쳤다. 이미 방비를 단단히 해 두고 적을 기다리고 있던 터라 기세 좋게 앞으로만 내닫던 장수군은 화살 세례를 받자 크게 동요되었다. 이를 본 우금이 말을 몰아 장수군을 치자 본진에 있던 다른 장수들도 여세를 몰아 적을 공격했다. 장수군이 어지럽게 흩어지는 가운데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1백여 리나 쫓겨나게 되었다. 가후의 계책에 따라 조조를 급습했으나 조조의 군대를 무찌르기에는 미약한 장수군이었다. 장수는 조조군에게 크게 패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군졸들을 이끌고 조조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유표에게 의지하기 위해 형주로 떠났다. 장수를 깨뜨린 조조가 군사를 수습하고 장수들을 점고했다. 우금은 그제야 조조에게 나아가 청주병을 죽인 연유를 고했다.
"청주병들이 함부로 양민을 괴롭히며 재물을 약탈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기에 제가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나한테는 말도 없이 진지를 만들었느냐?"
"소장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자기 몸 하나를 지키는 사사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적군인 장수를 대비함은 우리 군을 지키고 나아가 주군을 지키는 일입니다. 사태가 위급하므로 저를 위한 변호는 뒤로 미루었습니다."
우금이 주저없이 대답하니, 조조는 그제서야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장군은 그러한 혼란 속에서도 군사를 정비하고 영채를 세웠으며, 모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을 맞아 물리쳤소. 이야말로 명장의 풍모를 천하에 떨쳐 보인 것이오."
조조는 우금을 치하하며 금으로 만든 그릇 한 벌을 내리고 익수정후에 봉했다. 또 우금을 모함한 청주병들은 모두 처벌하고 거느린 군사를 단속 못 한 하후돈을 크게 꾸짖었다. 조조는 상벌을 분명히 하고 다시 한번 군율을 엄정히 강조했다. 그 연후에 조조는 자기 대신 죽은 전위 등을 위해 제단을 크게 만들어 그들의 넋을 위로했다.
"전위! 내 절을 받아 주오."
조조는 소리 내어 슬피 울며 손수 잔을 들어 제주를 따랐다.
"이번 싸움에서 맏아들과 조카를 잃었으나 그것만으로는 크게 상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 충성을 다 바친 전위를 죽게 한 것은 참으로 비통하고 원통하다."
그렇게 말한 조조는 다시 한번 슬피 울었다. 여러 장수들은 가족들의 죽음보다 전위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조조를 보고 감격하여 목이 메었다. 조조는 다음 날, 도읍인 허창으로 회군했다. 자신의 호색으로 큰아들 조앙과 조카 안민을 죽게 하고 명장 전위를 잃은 것을 생각할 때 조조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허창에 돌아오니 때마침 좋은 소식이 조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수를 치기 위해 서주의 여포를 달래느라 벼슬과 황금을 주어 왕칙을 사자로 보냈었는데 그 왕칙이 여포의 사자 진등을 대동하고 돌아와 있었다. 더욱이 원술이 여포와 혼인을 맺기 위해 여포에게 사자로 보냈던 원술의 신하 한윤까지 포박하여 왔으니 장수로 인해 답답했던 조조의 가슴이 확 트이는 듯했다. 진등은 조조에게 그가 한윤을 포로로 이끌고 온 경위를 아뢰었다.
"여 장군은 승상께서 베푸신 은혜를 입어 조정으로부터 평동장군의 인뒤옹이를 받들고 그지없이 감격하고 계십니다. 이에 원술과의 혼인을 파기하고 앞으로 승상과의 우의를 두텁게 하시겠다는 뜻으로 한윤을 묶어 보내신 것입니다."
조조는 여포가 원술의 청혼을 거절하고 한윤까지 묶어 보내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술과 여포를 갈라놓아 적으로 만들게 되었으니 조조로선 큰 짐을 덜게 된 셈이었다. 조조는 곧 형리에게 명하여 허도의 네거리에서 원술의 사자 한윤을 목 베게 했다.
여포가 보낸 서신의 내용은 지금은 자칭 서주목이지만 정식으로 이를 임명해달라는 것이었다. 조조는 쾌히 이를 응락했다. 이제 원술과의 혼인은 파기되었으므로, 여포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를 움직여 원술을 치자는 조조의 계획은 무르익고 있었다. 조조는 그날 밤 진등을 청해 잔치를 벌였다. 주연이 벌어지고 술이 몇 순배 돌아가며 그와 말을 나누게 되자 조조는 진등의 사람됨을 보고 내심 기뻐했다. 진등은 이미 여포와 천하를 논할 인물이 아님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었다. 진등이 조조에게 가만히 고했다.
"승상께서는 제가 여포의 사자이므로 소생을 믿지 않으시겠습니다만, 저와 부친께서는 서주성에 살고 있기 때문에 여포의 객신이 되었을 뿐입니다."
진등은 허도에 와 조조를 본 순간 마음이 그에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조조 또한 매사 헤아림에 밝은 진등에게 감탄하고 있던 중이었다.
"여포는 원래 늑대나 이리 같은 자로 무용은 뛰어나나 지모가 없으며, 경솔합니다. 그대로 두면 고양이를 키워 불별없는 표범을 만드는 셈이 되니 승상께선 하루라도 빨리 그를 도모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진등이 끝내 본심을 드러내자 조조 또한 더 망설일 것이 없었다.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오. 그를 오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오. 다행히 공과는 이제 지기가 되었으니 앞으로 공의 부자가 나를 도와 주어야 할 것이오. 공의 춘부장 진대부의 명성은 나도 이미 들은 바 있소. 잘 말씀드려 주시오."
조조도 속마음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후일 승상께서 여포를 치실 때 저희 부자는 서주에 있으면서 내응하겠습니다."
진등의 말에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진등에게 잔을 권했다. 진등 부자가 서주에서 호응해 준다면 여포를 사로잡는 것쯤은 어렵지 않는 일이라 여겨졌다. 조조는 이에 진등에게 관릉태수의 벼슬을 내리고, 그의 부친 진규에게는 2천 석의 녹을 내렸다. 진등이 서주로 떠나는 날, 조조는 친히 배웅하며 말했다.
"서주 일은 오직 공에게 의지하겠소."
진등은 조조에게 염려 말라며 허리를 굽혀 절한 뒤 서주로 돌아갔다. 진등이 서주로 돌아오자 여포는 진등에게 그간의 일을 물었다. 진등은 조조가 천자께 표를 올려 여포에게 정식으로 서주목의 벼슬을 내리게 하겠다고 약속했노라 전하고 아울러 그들 부자에게도 벼슬과 녹을 내렸노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포는 벽력같이 소리쳤다.
"네 이놈! 내가 서주목의 임명을 받아오라 했거늘, 너희 부자 벼슬과 봉록만 받아오지 않았느냐? 원술과 혼인을 파기하고 조조와 친교를 맺으라는 네 아비의 말을 따랐는데 이제 네놈들의 욕심만 차렸으니 너희 부자가 필시 나를 조조에게 팔아먹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여포가 화를 참지 못하고 칼을 빼 진등의 목을 치려 했다. 진등이 깜짝 놀랐으나 짐짓 태연한 척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하나만 알고 둘은 헤아리지를 않으십니까?"
"뭣이 어째? 그게 무슨 뜻인가?"
"조조를 만났을 때 저는 여 장군을 호랑이에 비유하였습니다. 즉 호랑이는 배가 고프면 사람을 물어뜯으니 고기를 넉넉히 주어 주리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었지요. 즉 장군께서 원하시는 바는 전부 들어 주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랬더니 조조가 무어라고 하던가?"
여포가 이 말에 대한 조조의 반응이 궁금한 듯 급히 되물었다.
"그러자 조조는 여 장군을 매에 비유하였습니다.'여우와 토끼를 잡기 위해선 매의 배를 굶주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매는 배가 고파야 부릴 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우와 토끼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래 그들은 누구라고 하던가?"
여포가 눈을 번쩍이며 물었다.
"기주의 원소, 회남의 원술, 강동의 손책, 형주의 유표, 익주의 유장, 한중의 장로가 바로 그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실로 놀라운 진등의 임기웅변이었다. 여포의 어리석음을 알고 있는 진등이 꾸며낸 말에 여포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껄걸 웃었다. 조조가 그들보다도 자신을 높여 본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여포는 칼집에 칼을 꽂으며 말했다.
"조 승상이 이 봉선을 알아보고 있구나."
여포는 그제서야 목을 베려 했던 진등에게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며 위로했다.
원술, 또 한 사람의 천자
한편 여포가 청혼을 거부하고 오히려 사자 한윤을 조조에게 보낸 걸 알게 된 원술은 그걸 지켜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즈음 회남 땅의 원술은 이미 한윤이 허도의 네거리에서 참수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승냥이 같은 자가 이토록 방자하게 굴다니. . . 내 이놈의 목을 베고 그 고기를 씹으리라."
원술은 노발대발하며 즉각 20여만의 대군을 동원하고 이를 7로로 나누어 진격하게 하였다. 제1로는 대장군 장훈이 중군을 거느려 서주대로로, 제2로는 상장 교유가 이끌어 소패로, 제3로는 상장 진기가 기도로 진격케 했다. 또 제4로는 부장 뇌박으로 하여금 낭야로, 제5로는 부장 진란을 갈석으로, 제6로는 항장 한섬을 하비로, 제7로는 역시 항장 양봉으로 하여금 준산으로 진격케 하고 전군을 좌, 우로 나누어 모두 서주를 향해 진격했다. 원술은 또 연주자사 김상을 태위로 심아 군량과 마초를 운반하며 전군을 뒷바라지 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김상은,
"나는 거짓 황제의 명을 받들 수 없소."
하고 그 일을 마다하자 원술은 그 자리에서 김상의 목을 벤후 기령으로 하여금 대신케 했다. 원술 자신은 이풍 양강,악취를 수하 장수로 삼아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형세에 따라 전군을 돕기로 했다. 원술은 여포의 전위군을 마치 나뭇잎을 밟듯하며 노도와 같이 밀어붙였다.
이에 여포는 사색이 되어 급히 중신들을 불러모았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누구든 서주성은 구할 수 있는 계교가 있으면 말해보시오!"
이에 진궁이 발끈 성을 내며 소리 높여 말했다.
"이제는 아셨을 것이오.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순전히 진규 부자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신의 벼슬과 봉록만 구하고 그들늬 말을 듣고 따른 여 장군에게는 오늘와 같은 화를 당하게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목을 베어 원술에게 바치고 전후 사정을 소상히 전한다면 그도 노여움을 풀 것입니다."
눈앞에 원술의 대굼을 두고 있는 여포였다. 황망한 중에 진궁의 말을 듣고 앞뒤 가릴 여유 없이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여포는 즉각 진규, 진등 부자를 옥에 가두게 했다. 그러나 이끌려 온 진등은 크게 소리내러 웃을 뿐이었다. 여포가 진 등의 뜻밖의 웃음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너의 목을 베려 하거늘, 무엇이 그토록 우습다는 말인가?"
"장군은 어찌 그다지도 겁이 많으십니까? 내가 보기엔 원술의 7로군은 마치 일곱 개의 썩은 풀더미와 같사온데 장군은 무엇을 그리 걱정하십니까?"
"날보고 겁쟁이라니, 그렇다면 그대에게 적을 물리칠 계책이라도 있단 말이냐?"
여포는 눈을 부릅뜨고 진등을 노려보았다. 여포의 말에 진등은 여전히 태연자약한 태도로 말했다.
"계책이 있사오나, 그 계책을 쓰고 안 쓰고는 장군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계책이라도 쓰지 않으면 한낱 공염불일 뿐입니다."
여포는 진등에게 계책이 있다고 하자 귀가 솔깃해졌다.
"말해보라, 만약 적을 물리칠 마땅한 계책이 있다면 목숨은 살려 주겠노라."
"듣자 하니 회남의 대군은 20만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술은 근자에 갑자기 제위에 오르고자 하는 야심으로 급히 군사를 긁어모았습니다. 더욱이 제6로의 한섬과 제7로의 양봉은 원래 한의 구신들로 천자의 어가를 모시거 낙양으로 돌아온 자로 공이 자못 컸습니다. 그러나 조조의 세력이 워낙 커지자 조조가 두려운 나머지 달아나 만두득이 원술에게 잠깐 몸을 의지하고 있을 뿐이외다."
"그건 그렇소만. . ."
"원술 또한 그들을 필시 가볍게 대접했을 것이므로, 이들 두 사람도 원술에게 충성을 바찰 생각은 없을 것입니다. 먼저 이로써 그들을 회유하여 내응의 밀약을 맺는 것입니다. 그들은 원술군의 내부에세 그 군사를 교란시키도록 하고 다시 사자를 예주목사로 가 있는 유현덕에게 보내어 그의 힘을 빌어 오는 일입니다. 현덕의 성품이 의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라 장군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모른 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정병으로 성을 굳게 지키고 기병을 내어 들이치는 한편 양봉, 한섬과의 내응지계를 펼친다면 원술을 사로잡을 수도 있습니다."
진등의 청산유수 같은 일장 연설을 취한 듯이 듣고 있던 여포는 금세 마음이 달라졌다. 곧 그들 부자의 목을 베는 대신 그 일을 맡겼다.
"그대는 한섬, 양봉과는 잘 아는 처지이니 밀서를 직접 전하라."
여포는 허도에 표를 올려 원술과의 싸움을 알리는 한편 유비에게도 서신을 띄워 구원군을 청했다.
그 무렵 원술이 다년간 가슴에 품에 왔던 야망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손책이 맡겨 둔 전국의 옥새까지 있으니 야심에 불탄 마음은 초조한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천자의 자리에 오르기로 작정하고 휘하를 불러모았다.
"옛날 한나라의 고조는 사상이란 작은 마을의 일개 정장이란 신분이었으나 4백 년의 제업을 창업하시었소. 그러나 이제 천운이 다하여 천하는 마치 가마솥의 물이 끓듯 소란하여 제후들이 다 제각각 날뛰는 꼴이 되고 말았소. 우리 가문은 4대에 걸쳐 삼공을 지내며 백성들의 공경을 받아왔소이다. 이제 나의 대에 이르러서는 천하의 인심이 쏠리고, 힘도 갖추었으므로 하늘의 명에 따라 구오(황제)의 자리에 오르려 하매 그대들의 뜻은 어떠하오."
주부 염상이 일어나 간했다.
"자고로 천도를 거역하여 번영을 누린 자는 없습니다. 옛날 주공은 후직에서 문왕에 이르기까지 덕을 쌓고 공을 쌓아 천하를 삼분할 때 그 둘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은의 주왕에게는 신하 노릇을 하였습니다. 아무리 원씨 가문이 수 대에 걸쳐 번성하였다 하나 그 미덕이 주나라의 성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한 한실이 마무리 미약하다 한 주왕과 같은 악역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찌 함부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
염상의 말이 이어질수록 원술의 낯빛은 점점 험악해져 같다. 원술은 점차 노기 띤 음성으로 변했다.
"우리 원씨 가문은 원래 진의 혈통이다. 진은 대순의 후예다. 목, 화, 토, 금, 수의 오행이 이어받는 순서로 치면 화에 속했던 한의 다음은 당연히 토가 아닌가. 그러니 토에 해당하는 순임금의 후예가 이어받아야 마땅하다. 또 옛말에 이르기를 '한을 대신할 자는 도고'라고 하였다. 도고의 도는 내 자인 공로의 로와 연결된 뜻이니 그 말에 들어맞는다. 뿐만 아니라 내게는 전국의 옥새가 있다. 이는 하늘이 내리신 것이라, 내가 천자가 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하늘을 거스르는 결과가 된다. 나는 마음을 이미 정한 바이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 만약 내 뜻을 거역하면 목을 베리라."
원술은 신하들 가우데 두 번 다시 이런 말을 하는 자가 나오지 않도록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다시는 입을 여는 신하는 없었다. 원술은 장수들의 입을 억지로 틀어막은 후, 날을 잡아 연호를 중씨라 정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천자가 타는 용봉련을 타고 남과 북 교외에 나가 천지신명께 천자가 된 제례를 올렸다. 그가 풍방의 딸을 황후로 삼고 그의 아들을 동궁으로 책봉한 후 여포의 딸을 동궁비로 삼으려 사신을 서주로 보냈던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원술이 이토록 천자가 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중에, 여포가 한윤을 죽인 것도 참을 수 없는 일인 데다 여포가 조조와 결탁한 것은 더욱더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여포가 척후를 보내니, 원술의 7로군은 하루 50리를 달려 서주로 진격해오며 마구 약탈을 일삼는다는 것이었다. 여포는 진둥이 말한 '내응지계'가 급히 이루어지기를 속 타게 기다렸다. 그때 진등은 여포의 서신을 지닌 채 하비에 이르러 한섬의 육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한섬이 군사를 이끌고 와 진을 치자 진등이 한섬을 보러 갔다. 한섬은 예기치 않은 진등의 방문에 깜짝 놀랐다.
"도대체 어쩐 일로 적장인 나를 찾아오셨소?"
이에 진등은 몸가짐을 바로 하며 명쾌히 대답했다.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이시오? 나는 여포의 신하가 아니라 조저의 신하입니다. 서주 땅에서 산다 하여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말하지만 서주 역시 한나라 황제의 영토가 아니오?"
그렇게 말을 꺼낸 진등은 청산유수 같은 달변으로 천하의 시국을 논하다 불현듯 탄식했다.
"귀공 같은 분은 참으로 애석한 바 있소."
진등이 불쑥 그렇 말하자 한섬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어찌하여 소생더러 애석하다 하십니까, 원컨대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귀공께서는 지난날 천자께서 관중에서 환행하실 때 어가를 모시고 충성을 다한 청덕한 국사가 아니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는 원술의 편에 섰으니, 불춘불의의 오명을 쓰려 청하고 있지 않소. 지난날의 충의가 이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오, 한두 해의 의식을 해결하기 위해 만세 이르는 악명을 서슴지 않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소. 더욱이 원술은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 사람이오. 훗일 언젠가는 장군을 해치고야 말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계책을 세워야지 뒷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사실은 소생도 그간 원술의 방자함에 진저리가 나 한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연줄이 없으니 실로 답답할 뿐입니다."
한섬은 본심을 진등에게 털어놓았다. 일이 이쯤 되면 제 한섬은 손아귀에 든 작은 새일 뿐이었다. 진등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그제서야 여포의 서신을 품속에서 꺼내 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7군의 양봉 장군과 귀공과는 일찍부터 두터운 교분을 나눈 사이가 아니오? 그와 행동을 같이하면 어떻겠소?"
한섬이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소, 양봉도 내 말을 따를 것이오."
"그럼 서주를 공격하는 날을 기해 귀공과 양봉 장군이 후방에서 봉화를 올려 반기를 드시오. 동시레 여 장군도 정예군을 이끌고 원술군을 단숨에 몰아칠 것이오. 그렇게 하면 원술의 목을 베는 것은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거요."
한섬과 말을 맞춘 진등은 여포에게 돌아와 이 사실을 알렸다.
"과연 그대는 하늘이 이 봉선에게 내린 은인이오.
여포는 진등 에게 이렇게 치하했다. 한섬과 양봉이 내응하기로 하자 여포는 절로 힘이 났다. 적장 다섯에 맞춰 군대를 5대로 나누어 그들에게 맞서게 했다. 제1군은 고순을 대장으로 삼아 소패로 가 적장 교유를 맞도록 하고 제2군은 진궁이 기도로 가 적장 진기를 맡게 했다. 제3군은 장료와 장패로 하여금 낭야로 가 적장 뇌박을, 제4대는 송헌, 위속으로 하여금 갈석으로 가 진란을 막게 했다. 여포 자신도 일군을 거는리고 큰길로 나가 원술의 대장군 장훈을 맡기로 했다. 각 대의 군사는 1만으로 하였으며 나머지 군사는 서주성을 지키게 했다.
여포는 성 밖 30리쯤에 진영을 펼치고 선봉인 적장 장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훈이 군사를 이끌고 오다 여포가 그를 맞아 기다리고 있는 걸 보자 덜컥 겁부터 났다. 그는 말머리를 돌려 20여 리나 군사를 물린 뒤에야 진을 쳤다. 서주성으로 향하던 한섬과 양봉의 군사들은 장훈이 이끈 군대를 만나 합류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이경 무렵이었다. 한섬과 양봉은 갑자기 장훈의 진영 여기저기에 불을 질렀고, 한순간에 장훈의 진영에는 대혼란이 일어났다. 이를 지켜 보고 있던 여포는 한섬이 약속대로 장훈을 협공한 것을 알았다.
"이때다!"
여포가 군사를 휘몰아가자 장훈의 군사는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럽던 터라 여지없이 무너졌다. 여포가 여기저기 흩어지는 적을 짓밟으며 패주하는 장훈을 추격했다. 새벽녘이 되어서 장훈을 구원하러 온 기령이 나타나자 장훈은 그들과 힘을 합해 여포군에 대항했다. 여포군과 기령군이 한동안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양봉과 한섬이 두 길로 나누어 여포군을 도와 기령군을 협공했다. 기령은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는데 여포는 기세를 올리며 무인지경 달리듯 그들을 뒤쫓았다. 그렇게 추격을 계속하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 산골짜기에서 한 무리의 군사가 달려 나오더니 잽싸게 앞장 선 깃발들이 좌우로 열렸다. 그와 동시에 가운데로 힌 떼의 군마가 달려 나왔다. 여포가 보니 사방에 요란한 정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일월기(해와 달을 그려 제왕의 기상을 나타낸 기), 용봉번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누런 비단과 황금으로 꾸민 황일산을 받쳐 쓰고 천자의 의장인 금과 은부와 황월백모를 든 근위병을 좌우에 거느리고 황금 갑주를 입은 원슬이 나타났다.
"주인을 배반한 배은망덕한 놈아!"
원술은 여포를 오만스럽게 내려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포는 원술의 천자 행세에 속이 뒤틀려 있던 참이었다. 그런 데다 원술이 욕설까지 퍼붓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여포는 입도 뻥긋하지 않고 화극을 움켜쥐고 말을 달렸다. 중군의 전부를 단숨에 뚫자 양기와 악취가 말을 달려 나왔다.
"너희들 쥐 같은 무리들이 감히 나설 때가 아니다."
여포는 그들을 꾸짖더니 말머리를 높이 세우고 악취의 말을 옆으로 피하면서 방천극을 내리쳤다. 그러자 사람과 말ㅇ이 함께 피투성이가 되어 뒤로 나가떨어졌다. 여포는 달아나는 양기를 쫓아 그의 등으로 다가갔다.
"여포야! 게 멈추어라!"
양기가 쫓기고 있자 원술의 대장 이풍이 창을 들고 제법 기세 좋게 달려 나왔다. 여포는 양기에게로 향했던 화극을 이풍에게로 돌렸다. 이풍은 겨우 3합을 어우르다 화극에 손을 찔리자 창을 팽개친 채 그대로 달아났다. 여포가 이를 놓치지 않고 군사를 이끌어 원술근을 무찔렀다. 이때 한섬, 양봉의 두 부대가 갑자기 산골짜기에서 나타나 원술의 중군을 협공했다. 양쪽에서 적을 맞게 된 원술의 군사들은 순식간에 쿤 혼란에 빠져 허둥대다 제대로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금은보화, 백모황월 등은 챙겨갈 겨를도 없었다.
원술은 여포에게 쫓겨 고원의 20여 리 길은 목숨만 부지한 채 말을 달렸다. 그러자 고원의 저쪽에서 한덩이의 구름처럼 한 떼의 군마가 달려왔다. 그 군마의 선두를 달려오던 장수가 원술을 가로막았다. 대춧빛 어굴에 봉의눈을 가졌으며, 수염이 가슴을 덮은 채 손에는 80근의 청룡도를 비껴들고 있었다. 원술이 깜짝 놀라며 그를 보니 바로 관우가 아닌가.
"감히 황제를 참창하는 방자한 원술이 바로 네놈이냐! 이 관우의 칼을 받아라."
관우의 호통에 혼이 나간 원술은 다투어 도망가는 대장기 속에 감싸여 정신없이 말에 채찍을 가했다. 관우는 원술을 뒤쫓으며 가로막는 자들을 무 베듯 하며 원술의 등에 바짝 다가갔다. 관우가 청룡도를 휘둘렀으나 간발의 차이로 원술의 투구 끝을 스쳤다. 원술의 황제관은 이그러진 채 그의 머리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가까스로 복숨을 보전한 원술은 참담한 패배를 당한 채 가령을 후군으로 남기고 근거지인 회남으로 돌아갔다.
여포는 원술의 잔당을 소탕하고 의기양양하게 서주로 개선했다. 그리고 크게 잔치를 베풀어 관우와 양봉, 한섬을 대접하고 군사들에게도 술과 고기를 주고 상을 내렸다.
"이번 싸움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게 된 것은 첫째는 진규, 진등 부자의 공이요, 둘째는 한섬,양봉 공이 적 내부에서 호응해 줌 공이오. 그리고 셋째는 예주의 유현덕 공이 옛 우의를 저버리지 않고 원군을 보내 준 덕분이오."
여포는 이렇게 치하하며 승리를 자축하는 술잔을 들었다. 다음 날 관우는 여포에게 작별을 고하고 군사를 이끌어 예주로 돌아갔다. 여포는 한섬에게는 기도의 목사로, 양봉을 낭야의 복사로 명하며 그들을 서주에 머물게 하려 했으나 진대부가 만류했다.
"장군의 주위에는 인재가 많이 있습니다. 한 마리의 낯선 닭을 닭장에 넣으면 그 안의 닭들이 혼란을 일으키고, 싸움이 잦아지는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두 사람은 신동으로 보내십시오. 그리하여 산동 지방의 지반을 굳힌다면 한구해 사이에 산동에 있는 모든 성들이 장군의 손안에 들게 될 것입니다."
여포가 들으니 그 또힌 듣기 좋은 말인 데다 이번 싸움에 공이 많은 진등의 아비가 하는 말이라 두말없이 따랐다. 이리하여 두 사람을 기도와 나야로 보내 그곳에 머물도록 하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도록 했다. 진등은 그 일을 두고 불만스러웠는지 어느 날 조용히 아버지 진규의 의견을 물었다.
"왜 두 사람을 서주에 있게 하여 후에 여포를 칠 때 쓰도록 하지 않셨습니까?"
그러자 진대부가 말했다.
"그 방법은 상수가 아니다. 그들은 천성이 천하므로 우리 부자를 편들기보다는 날이 갈수록 여포에게 아첨하려 들 것이다. 그리하여 여포의 앞잡이가 된다면 그건 호랑이에게 뿔을 달아 주는 꼴이 되지 않겠느냐?"
진등은 그 말을 듣자 아버지 진대부의 현명한 헤아림에 감탄했다.
여름도 지나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동잎이 지기 시작하더니 회남의 강물에도 가을빛이 물들기 시작했다. 붉은 잠자리가 맑은 하늘에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원술은 날이 흐를수록 분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여포란 놈, 한섬, 양봉 그 배신자 놈들!'
원술은 어떻게 하면 지난번 패배를 설욕할까 궁리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가 생각해 낸 것이 손책이었다. 궁한 김에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난날 그가 손책에게 했던 행동을 생각하지 못한 원술이었다. 다만 어릴 적부터 그를 손아래에 두고 길러온 탓인지 아직도 그를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원술은 손책에게 사자를 보내 밀서를 전하게 했다.
강동에서의 그대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소. 그대 또한 나와의 옛정을 잊지 않으리라 믿소. 근자에 그대의 오나라는 점점 번창하여 문무의 영웅호걸도 많이 모여든 것으로 알고 있소. 이에 나와 힘을 합쳐 여포를 치고 그의 영토를 취하여 오의 위세를 다시 한번 떨침이 어떻겠소? 이는 그대를 위해서도 백년대계가 될 것이라 믿소.
원술의 밀서를 지닌 사자는 강을 건너 오나라에 가 손책을 만났다.
"여포에게 패한 원수를 갚으려 하니 군사를 빌려주십시오. 일찍이 장군께서도 우리 회남의 군사를 빌려 강동을 평정하지 않았습니까?"
사자의 말을 듣고 원술의 서신을 읽어본 손책은 크게 노했다.
"원술은 일찍이 내가 맡겨 놓은 나의 옥새만 맡고 황제를 참칭했으니 바로 대역부도한 역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치려 하거늘 어찌 역적을 도울 수 있겠는가?"
손책은 원술의 사자를 호통을 쳐 돌려보냈다. 원술은 손책의 답장을 받자 급히 펼쳐 보았다.
노군, 어찌하여 내 전국의 옥새는 돌려주지도 않고 제위를 참칭하며 세상을 어지럽히려 드는가. 어느 날엔가 반드시 나와 만날 것이니, 바라건대 복을 씻고 나를 기다리시오.
원술은 노기가 솟구쳐 답신을 발기발기 찢었다.
"애송이 놈이, 감히 짐을 능멸하다니. . . 내 이놈부터 쳐야겠다."
원술은 즉각 오나라로 출병한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사 양대장이 간곡해 만류하자, 가까스로 분을 참고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손책은 원술에게 도전장이나 다름없는 답신을 보낸 이후 그가 군사를 일으킬 경우를 대비하고 있었다. 실은 강동에 근거지를 삼아 세력을 키워 왔다고는 하나 아직 오래지 않은 터라 원술의 군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손책은 장강 연안 일대에 전선을 띄우로 강과 나루를 엄히 지키게 했다. 이때 허도의 조조로부터 사자가 와 천자의 조서를 전했다. 그를 회계 태수로 봉하는 동시에 즉각 회남에 진병하여 황제를 참칭하는 원술을 치라는 명이었다. 손책은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는 원술을 쳐 빼앗긴 옥새를 되찾을 작정이었다. 그런 판에 조정의 명까지 받았으니 이제 당당한 대의명분까지 얻게 된 셈이다. 이에 손책은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고 사자를 돌려 보낸 후 휘하의 참모를 불러모아 의논했다. 손책의 중신인 장사 장소가 아뢰었다.
"원술이 여포와의 싸움에서 패했다고는 하나 가벼이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회남은 풍요로운 땅인 데다 원씨 일족은 명망과 전통이 있는 가문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오나라는 이제 기업의 토대를 닦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재력과 군사에서 아직 부족합니다."
"이미 조칙을 받들겠다고 했는데 지금와서 명을 어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조조에게 급히 사자를 보내십시오. 우리는 강을 건너 원술의 측면을 칠 것이니, 허도에서 대군을 내려 원술의 정면을 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조조군에게 주력전을 하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원병이라는 입장을 취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원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설령 우리에게 위급한 일이 닥친다 해도 조조에게 원병을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헌책이오."
손책은 장소의 의견에 감탄하며 사자를 허도로 보내기로 했다. 한편 허도로 돌아와 있던 조조는 사당을 지어 장수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전위의 위패를 모시게 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전만을 중랑으로 등용 후 자기 부중에서 키우게 했다. 조조의 휘하 장수들은 이를 보고 감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제각기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 오나라의 손책으로부터 급사가 왔다. 조조는 손책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군사를 일으킬 채비를 하고 있는데 첩자로부터 원술이 양식이 떨어져 진류 땅으로 노략질하러 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조조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조조까지 그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게 되니, 원술은 사방에 적을 둔 셈이 되었다. 동북에서는 조조, 서북에서는 유비, 손책이 조조와 동맹을 맺고 남북에서 그를 공격할 참이었다. 세력이 커졌다고 오만해진 황제를 참칭하여 자초한 화였다.
때는 건안 2년의 9월이었다. 조조의 대군은 수도인 허도를 떠나 원술이 있는 회남 땅으로 향했다. 군량과 병장기를 실은 수레만도 1천여 채가 되었다. 허도를 떠나기 전 조조는 예주의 유비와 서주의 여포에게 서찰을 띄워 이 싸움에 끌어들였다. 조조의 격문을 받고 유비는 관우, 장비를 비롯한 정예병을 이끌고 예장의 경계까지 나아가 조조군을 맞았다. 조조는 유비를 보자 반색을 하며 반겼다.
"귀공의 두터운 신의와 이렇게 지체 없는 출동에 만족하는 바이오."
맹군의 기와 기를 교환하고 그 깃발 아래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유비는 사람 목 둘을 조조에게 바쳤다. 놀란 조조가 물었다.
"이게 누구의 목이오?"
유비가 조용히 답했다.
"하나는 한섬이고 하나는 양봉입니다."
이들 두 사람은 조조가 낙양에서 군사를 이끌고 황제를 모시러 갔을 때 반발하여 자신을 떠난 자들이었다.
"어떻게 이놈들의 목을 베었소?"
그들이 여포에게 내응하여 산동에 부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조조였다. 엉뚱하게도 유비가 그들의 목을 베어 왔으므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두 사람에게 여포가 각각 기도와 낭야 현을 맡겼는데 이 자들은 그곳에 당도하자마자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부녀자를 간음하는 등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이에 백성들의 원성을 무마하고, 이도를 바로잡고자 두 아우를 시켜 술자리에 유인해 술을 마시다가 술잔을 던지는 것을 신호로 목을 베었습니다. 그들의 군사들은 모두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승상의 명 없이 두 사람의 목을 벤 죄, 벌을 내려 주십시오."
"공이 이도를 바로잡고 양민에게 가한 폐해를 없애려 그들을 제거한 것인즉, 사사로운 싸움과는 다릅니다. 어찌 벌을 청하시오? 여포에게는 내가 잘 말해 두겠소."
조조는 유비를 좋은 말로 안심시켰다. 우비는 그들 두 사람의 목을 베어 조조를 기쁘게 했으며 투항해 온 부하들은 자기의 부하로 삼았다. 조조는 유비군과 함께 서주로 향했다. 서주의 경계에 다다르자 여포가 마중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조는 여포의 환대를 치하하며 그를 좌장군에 봉한 후, 허도에 돌아가는 즉시 인수를 보내 주기로 약속했다. 여포는 조조의 말에 흡족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되니 유비가 자기의 사람인 양봉, 한섬을 죽인 일 따위는 더 이상 염두에 두지 않았다. 조조는 이어 여포의 군사를 왼쪽에, 유비의 군사를 오른쪽에, 그리고 자신은 중군을 이끌기로 했다. 하후돈과 우금으로 하여금 선봉을 삼은 뒤 수춘성으로 향했다.
조조는 이어 여포의 군사를 왼쪽에, 유비의 군사를 오른쪽에, 그리고 자신은 중군을 이끌기로 했다. 하후돈과 우금으로 하여금 선봉을 삼은 뒤 수춘성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은 원술에게도 전해졌다. 뱃심이 두둑하다는 원술이었지만 그가 상대할 군사들이 워낙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적을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원술은 대장 교유를 선봉으로 삼아 군사 5만을 이끌고 조조의 선봉을 막게 했다. 두 군사는 수춘 경계에서 맞닥뜨렸다. 원술의 선봉장 교유가 먼저 말을 몰아 나왔다.
조조군에서도 선봉장인 하후돈이 교유를 맞아 말을 달려 나왔다. 그러나 불과 2, 3합을 겨우 버틴 교유는 하후돈의 창에 찔려 맥없이 나뒹굴고 말았다. 이미 대군 앞에 기가 질려 있던 교유의 장졸들은 교유가 단번에 적장의 창에 쓰러지자 뿔뿔이 흩어져 성안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싸움은커녕 '걸음아 날 살려라'며 도망가는 그들을 조조의 군사들이 시살하니 원술은 변변한 싸움도 못 해보고 대패하고 말았다. 원술은 하는 수 없이 중군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 수춘성 여덟 문을 굳게 닫고 말았다. 그러자 공격군은 숨통을 조이듯 차츰차츰 수춘성을 육박했다. 여포는 동쪽에서, 유비는 서쪽에서 공격하고 조조는 회남 평야를 눈 아래 바라보며 중군을 이끌고 있었다. 원술은 휘하의 참모들을 모아 대책을 협의했으나 별 다른 방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또다시 날벼락 같은 파발이 날아왔다. 오나라의 손책이 장강을 건너 수춘성으로 쳐들어온다는 급보였다. 원술은 이제 정신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조조의 17만 대군이 지르는 함성은 만산을 뒤엎는 듯했다. 원술은 문무의 여러 휘하들을 모아놓고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대책을 거듭 물었다. 그러자 장사의 양대장은 입을 열었다.
"수춘은 요 몇 해 동안 물난리와 한발로 백성들이 허기져 있습니다. 때문에 다시 군사를 일으키시면 백성들의 원망만 살뿐입니다. 군사를 수춘에 남겨 싸우지 말고 적군의 양식이 떨어질 때까지 지키기만 하십시오. 적군의 군량이 다하면 반드시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동안 폐하는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어림군을 이끌어 잠시 회수를 건너 피하심이 좋겠습니다. 먼저 그곳의 익은 곡식을 얻고, 또한 적의 날카로은 칼끝을 피했다가 뒷날을 도모하도록 하십시오. 원술에게 피신할 것을 권유하는 양대장의 말에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해 동안 가뭄과 물난리로 인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병자가 속출했으며 겨울철 군량도 걱정스러운 참이었다. 이럴 때 전쟁이 터졌으니 장졸들의 사기가 오를 리 없었다. 수춘성을 버리고 피신을 가자는 양대장의 말은 원술로서는 참을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사태가 너무나 위급했다. 원술은 긴 침묵 끝에 머리를 끄덕였다. 즉걱 대대적인 탈출 준비를 서둘렀다. 원술은 이풍, 악취, 양강, 진기의 네 장수에게 군사10만을 주어 수춘성을 지키게 했다. 원술은 궁궐창고에 있는 금은보화는 물론 군수 물자와 문서 등을 모두 싣고 나머지 군사들을 이끌고 회수를 건넜다. 조조의 군사가 수춘성 아래까지 진격해 온 것은 원술이 빠져나간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러나 이제 수춘성의 공격을 눈앞에 둔 조조에게도 큰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춘에 가까울수록 수해가 극심하여 새로운 군량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17만의 군사가 날마다 먹어대는 양식은 엄청났다. 허도를 떠나올 때 군량을 1천여 대의 수레에 실어 왔으나 워낙 대군이라 양식이 달렸다. 원래 원정군의 군량은 원정하는 적지에서 생산되는 양곡까지 계산에 넣고 가는 것이다. 그러나 수춘의 교외 1백 리 주위는 아직도 홍수의 흔적이 생생했다. 전답은 진흙으로 뒤덮였으며,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다.
"무슨 방법으로 이 대군의 군량을 충당해야 하는가?"
조조의 병참부는 고심하기 시작했다. 군량의 책임관인 와후는 이 지방 일대의 수해 상황을 살펴본 후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당장 성을 함락하라!"
초조해진 조조는 연신 싸움을 재촉했다. 그러나 성을 굳게 지키고 있는 원술 휘하의 이풍 등의 장수들은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싸우려 들지 않았다. 게다가 수춘성은 천자를 자칭했던 원술의 본성이었다. 성은 높고 견고해서 아무리 거센 공격을 퍼부어대도 끄덕도 하지 않았다. 성을 에워싼 지 한 달이 가까워오자 조조의 진중에는 군량이 바닥났다. 하는 수 없이 조조는 오나라의 손책에게 10만 석의 곡식을 빌렸지만 그것으로도 며칠을 견뎌낼 것 같지 않았다. 어느 날 관량관 임준 맡에서 창고 일을 맡고 있는 왕후가 조조를 찾아와 근심스런 얼굴로 아뢰었다.
"군사는 많은데 이제 님은 양곡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 물음에 조조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떼었다.
"오늘부터 군량미 배급하는 되를 바꾸도록 하라. 작은 되루 바꾸면 양이 많이 줄어들 것이 아닌가? 이른바 조삼모사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다."
조조가 말한 조삼모사는 고전에 나오는 옛이야기를 일컬어 한 말이었다. 옛날에 저공이라는 사람은 애완동물로서 원숭이를 많이 가르고 있었다. 그러다 먹이가 모자라서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씩 도토리를 주고 있었다. 원숭이들은 배가 차지 않는다고 낑낑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 가지 계책을 고안해 낸 저공은 이번에는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씩 도토리를 주기로 했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대우가 달라진 것으로 알고 온순해졌다고 한다. 조조는 이 이야기를 생각해 내고 왕후에게 일렀던 것이다. 잔재주로 속임수를 쓰는 일이지만 우선 어려운 때를 넘겨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랬다가는 군사들의 불평이 대단할 텐데요."
"그때는 나도 생각이 있다."
조조는 까닭 모를 웃음을 지으며 왕후에게 말했다. 왕후는 조조의 말에 따라 그날 저녁부터 작은 되로 군량미를 공급했다. 1인당 5홉씩 주던 군량미에서 1홉 5작씩을 줄였다. 그런데 풀뿌리까지 섞여 있는 비상시의 군량이니 군사들의 창자가 채워질 리 없었다. 자연히 여기저기서 불만 섞인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조는 그런 군사들의 말에 은밀히 귀를 기울였다.
"승상께서 이거 너무하지 않나, 우리를 속이며 양식을 줄이고 있다."
군사들 사이에서 이런 불만이 삽시간에 쏟아졌다. 군사들의 불만은 모두 조조에게 쏟아졌다. 그러자 조조는 조용히 왕후를 불렀다.
"군사들의 불평이 대단한가?"
"모두 다 승상께서 저희들을 속였다며 야단법석입니다."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를 빌려 그들을 진정시키려 하네."
"소생에게 무엇을 빌리시겠다는 것입니까?"
"이렇게 된 이상 자네의 목을 내게 빌려주게. 그대가 죽지 않으면 군사들을 수습할 길이 없네."
"옛? 저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알고 있네. 그러나 그대가 죽음을 마다하면 17만의 군사들을 달랠 길이 없으니 결국 그들은 난동을 일으킬 것이다. 천하를 위하는 일이니 그리 알게. 그대신 그대의 처자식은 이 조조가 평생을 돌보아 줄 것이니 조금도 걱정하지 말게. 살신성인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이네."
와후가 사색이 되어 다시 애원하려 하자 조조는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조수부에게 명하여 왕후를 군문 밖에 끌어 내에 여러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쳤다.
"그 목을 즉각 효수하라!"
왕후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려 진중에 걸렸다. 조조는 그 아래에 방문을 내걸게 했다.
군량 관리 책임자 왕후는 사복을 채우기 위해 고의로 작은 말을 써서 군량을 도적질했으므로 군법에 의해 처단한다. 우리 군의 급식 분배는 공평하게 지켜지고 있다. 모든 군사들은 동요하지 않도록 하라.
반문을 본 군사들은 그제야 와후에게 모든 원한을 돌렸다.
"그렇다면 작은 되를 사용한 것은 승상의 명이 아니었군. 나쁜 녀석 같이니라구."
"도적질은 제가 하고 승상을 팔았군. . ."
군사들은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군사들의 분위기가 금새 달라진 것을 본 조조는 즉각 휘하 장수들에게 명을 내렸다.
"오늘 밤부터 3일 내에 수춘성을 함락하라! 만일 성을 점령 못 할 경우에는 그대들의 목을 베겠다."
그날 밤 조조는 솔선햐여 성 아래 해자 앞에 나아가 군사들의 의기를 돋구었다.
"자, 모두들 한꺼번에 해자를 메우고 건너가라! 마른 풀을 쌓아 성문 망루를 불살라 버려라!"
조조군이 거세게 성을 공격하자 원술의 군사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돌을 떨어뜨리며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기 시작했다. 화살에 맞고 돌에 짓눌린 자의 시체로 해자가 메워질 듯했다. 원술군의 격렬한 반격에 조조군은 잠시 주춤거렸다. 그때 몸을 움추린 채 진격하지 않은 두 사람의 비장이 조조의 눈에 띄었다.
"비겁한 놈!"
조조는 큰 소리로 그들을 질타하며 목을 쳐버렸다.
"먼저 아군의 비겁한 자들부터 처치하겠다."
조조는 두 사람의 목을 근사들에게 쳐들어 보이며 외쳤다. 조조는 말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흙을 나르고 돌을 던져넣어 해자를 메웠다. 이를 본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물밀듯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한 무리의 군사들이 성벽을 타기 시작했다. 성에 의지하고 있던 원술군은 성을 에워싼 조조군의 목숨을 건 결사적인 공세를 끝내 견뎌내지 못했다. 성벽을 기어올라 성안으로 뛰어든 조조군이 마침내 성문을 열었다. 드디어 방죽의 한 귀퉁이가 무너진 것이었다. 공격군의 군마가 홍수처럼 흘러들기 시작했다. 이풍, 진기, 악취, 양강 등은 조조군에 의해 사로잡히고 원술의 많은 군사들이 항복하고 말았다.
"저자들은 천자를 참칭한 역적을 도운 자들이다. 모두 목을 쳐 저잣거리에 효수하라!"
사로잡은 적장 넷의 목을 모두 베고 원술이 세운 대궐과 전각에 모조리 불을 지르니 수춘성안은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더욱이 조조는 전과 달리 장졸들에게 약탈을 허용하여 한때 자칭 천자 원술의 거성으로 번창했던 수춘성은 거짓 천자의 일장춘몽과 함께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조조는 수춘성을 점령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회수를 건너 원술을 치려고 했다. 그러자 순욱이 조조에게 간했다.
"아직 우리에게 식량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더 진군하면 군사들도 피로하고 백성들의 원성도 커질 것이므로 반드시 이롭지 않을 것입니다. 짐시 허도로 군사를 돌리시어 보리가 익은 내년 봄에 다시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조는 순욱의 말도 옳다고 여겼으나 내친김에 원술을 요절내고 싶었다. 한동안 조조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허도로부터 뜻밖의 파발이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장수가 형주의 유표와 결탁하여 군세를 회복하고 남양과 강릉에서 난을 일으켜 조홍 장군이 이를 맞았으나 패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조조는 급보를 받고 깜짝 놀랐다. 장수와 유표가 허도를 넘본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조조는 허도로 회군하면서 손책에게 급사를 보내 서신을 전하게 했다.
공은 전선을 동원하여 장강을 가로막듯이 포진해, 상류에 있는 형주의 유표에게 암암리에 위협을 가해 주시오. 나는 장수를 치기 위해 회군하겠소.
조조는 형주의 유표를 손책으로 하여금 형주에서 꼼짝 못 하도록 묶어 두는 일을 잊지 않았다. 조조는 또 떠나기 전에 여포와 유비에게도 당부했다.
"이제까지의 교분을 생각하여 소패와 서주를 지키며 순치지교로서 새로이 결의를 하여 주시오."
조조는 두 사람에게 서맹의 잔을 나누게 하고 서로 싸우지 않도록 다짐을 해두었다. 조조는 손책에게 유표를 견제하게 한 다음 여포를 구슬려 유비로 하여금 소패에 머물도록 하게 한 것이었다. 조조에게 좌장군이란 벼슬까지 받은 여포였다. 이를 쾌히 승낙하고 서주로 돌아왔다. 조조는 여포가 서주로 돌아가자 유비를 가만히 불러 다음에 공격할 차례를 넌지시 일러 주었다.
"공을 소패에 머물게 한 것은 호랑이 사냥을 준비하기 위함이오. 이른바 '굴갱대호'의 계교를 말하는 것이오. 호랑이란 여포를 말함이오. 진대부와 진등 부자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함정을 파고 있소. 그들 부자와 상의하여 빈틈없이 일을 준비하여 주시오."
이렇게 조조는 뒤에 행할 계책까지 빈틈없이 주비를 해놓은 다음 허도로 돌아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단외와 오습이란 자가 이각과 곽사를 토벌하여 그 목을 베어 왔다. 그들은 하잘것없는 잡근의 야장이었으나 살병을 지휘하여 그들을 토벌하였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각의 일족 1백여 명을 모조리 생포하여 허도로 끌고 온 것이었다. 장안의 대란 이래 무리를 이끌고 몸을 피신한 이들이 깨끗이 제거되자 조조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공경 백관들도 뜻밖의 경사라 하여 기뻐했다. 조조는 생포한 역적의 목을 베어 각 문에 나누어 효수케 하니 백성들은 이를 보고 모두 기뻐하였다.
헌제는 지난날 자기를 괴롭히던 이각, 곽사가 효수되자 어전에 들어 문무백관들을 모아 태평연을 베풀었다. 또 그들의 목을 벤 단외는 탕구 장군에, 오습은 진로 장군으로 삼아 장안을 수비하게 했다. 단외 오습은 천자가 내린 관직을 받고 성은에 감사하며 장안으로 떠났다.
조조의 십승 원소의 십패
때는 바로 건안 3년 4월, 허도로 돌아온 조조는 장수 토벌을 서둘렀다.
조조는 헌제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장제의 조카였던 장수가 다시 힘을 길러 남양에세 형주 지방에 걸쳐 준동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이곳 허도 까지 넘본다 하니 마땅히 그를 토벌토자 하오니 윤허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조의 말에 헌제는 쾌히 승낙했다. 장수는 동탁의 잔당일 뿐아니라 허도까지 넘본다고 하니 헌제는 친히 어가에 올라 조조를 외문 밖 큰길까지 전송하였다. 조조는 순욱으로 하여금 허도를 지키게 하고 장도에 올랐다. 마침 때는 초여름이라 들에는 보리가 잘 여물고 있었다. 조조군이 시골길로 진군하자 보리밭에서 일하고 있던 농부들이 다투어 달아났기 때문에 보리를 베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편저편 가릴 것 없이 군사들에게 걸핏하면 약탈을 당해온 백성들이었다. 조조의 군사가 나타나자 역시 농군들은 뿔뿔이 달아났다.
"촌장과 촌로들을 부르라!"
조조는 이렇게 명하고 촌장과 촌로들을 불러모은 후 엄숙히 타일렀다.
"백성들이 애써 땀과 정성으로 가꾼 보리를 추수할 무렵, 내가 부득이 진병을 한 것은 천자의 명을 받들어 백성들을 괴롭히는 역적을 치기 위함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내가 이끈 모든 군사들에게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보리밭을 짓밟거나 양민의 재물을 약탈하거나 괴롭히는 자는 목을 베도록 군령을 내려놓았다. 그러니 안심하고 보리 수확을 계속하라."
조조의 말에 촌로들은 기뻐하고 그를 칭송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백성들은 조조군이 지나갈 때는 무릎을 꿇고 전송하였다. 군사들은 보리밭을 지나갈 때 반드시 말에서 내려 보리가 행여 상할세라 보리 이삭을 손으로 헤치며 말을 끌고 갔다. 말을 함부로 보리밭을 짓밟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조조가 말을 타고 보리밭을 옆을 지나갈 때였다. 말발굽 소리에 놀란 비둘기 한 마리가 푸드득 날개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이에 말이 놀라 길길이 날뛰며, 보리밭으로 뛰어들어 쑥대밭을 만들었다.
"전군 행군을 중지하라!"
조조가 갑자기 명을 내리고 행군주부를 불렀다.
"방금 나는 실수를 저질러 내가 내린 군령을 스스로 어렸다. 군법에 비추어 그 죄가 무엇에 해당하는가?"
행군주부는 난감하여 기어드는 목소리로 답했다.
"어찌 감히 승상의 죄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 내 입으로 내린 군령이다. 한번 정한 법은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내 스스로 어겼으니 어찌 아랫사람을 다스릴 수가 있겠느냐?"
조조는 칼을 빼어 자기 목을 찌르려 하였다. 장수들이 깜짝 놀라 급히 말렸다.
"승상께서 어찌하여 이러십니까?"
곽가가 나서 조조에게 간했다.
"춘추의 가르침에도'법이라 하여도 존귀한 데는 미치지 못한다.'하였습니다. 승상께서는 대군을 통솔하시는 존귀한 몸, 승상의 생사는 군사 전체의 사활과 이어집니다. 어찌 목숨을 끊으시려 하십니까?"
조조는 곽가의 말을 즞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춘추에 그러한 고례가 있었다는 말인가? 그러나 벌을 받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부모께서 주신 머리카락을 잘라 단죄의 뜻을 대신하여 법에 복종의 증표로 삼으리라."
조조는 자기의 머리카락을 단검으로 싹둑 잘라 행군부에 주어 3군에게 보이며 전하게 햇다.
"승상께서 말이 놀라 보리밭을 밟았기로 스스로 목을 베려 하셨으나 모든 장수들의 만류로 머리카락을 대신 자르셨다. 승상께서도 이러시거늘 그대들은 더 말하면 무엇하겠는가?"
이를 지켜본 부하들은 물론이요, 이말을 전해들은 장졸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감히 입을 여는 자가 없으니 대군이 지나가도 한 포기의 보리도 꺾이지 않았다. 뒷날 사람들은 시를 지어 그때의 일을 전하고 있다.
십만의 군사 마음 모두 십 만일세.
한 사람의 명령으로 다스리기 어려워
머리카락을 잘라 목 베는 죄 대신하니
보라, 조조의 놀라움 속임수를.
행군은 5월에서 6월로 이어졌다. 6월의 찌는 듯한 나날이었다. 특히 하남의 복우산맥을 넘는 일은 험난한 행군이었다. 햇볕에 바짝 달아오른 뜨거운 바윗길을 걸어서 산을 넘어야 하는 행군이었으나 수많은 군사들에게 먹일 물이 없었다.
"물, 물을 마시고 싶다!"
군사들의 하소연은 바로 신음 소리였다. 갈증과 피로로 쓰러지는 군사들도 많았다. 그러자 조조가 갑자기 말 위에서 채찍으로 산 뒤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조금만 참아라! 저 산만 넘어가면 매화나무 숲이 그득하다. 그곳에 가면 얼마든지 맛있는 매실을 따먹을 수 있으며 물 또한 거기에 있다. 걸음을 빨리하라!"
갈증에 허덕이고 있던 군사들은 매실 소리를 듣자 귀가 번쩍 띄었다. 군사들은 시디신 매실 맛을 연상하자 저절로 입 속에 침이 돌아 그것으로나마 목을 축일 수가 있었고 새로운 힘이 솟았다.
'매산은 갈증을 멎게 한다.'
고전에 밝은 조조가 읽은 책 중에서 문득 이런 귀절이 떠올라 이를 이용한 임기응변이었다. 놀라운 임기응변이 아닐 수 없었다. 후세의 병법가들은 그것을 조조 특유의 병법 중의 하나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갑옷을 태우는 듯한 무더위에 기발한 갈증 해소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이 매실이라는 과일이었다.
그 무렵 장수는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복우산맥을 뒤덮을 듯한, 조조군이 일으키는 흙먼지는 이미 남양의 완성에서도 보였다. 이에 장수는 유표레게 구원군을 청하는 사자를 보내는 한편 군사 가후에게 성을 맡기고 출진했다.
"먼 길을 오느라 적은 지쳐 있다. 대군이라고는 하나 지쳐 있는 적군이 어찌 힘을 쓸 수 있을까 보냐."
장수는 장선, 뇌서 두 장수를 거느리고 조조군을 맞았다.
"이 인의의 가면을 쓰고 검은 욕심만 채우는 놈아, 네놈이 바로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아니더냐?"
장수가 말을 몰고 나와 조조를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조조가 크게 노하며 허저를 내보냈다.
"저놈의 주둥아리를 놀리지 못하도록 냉큼 목을 쳐라!"
허저가 말을 달려나가니 장수는 부하 장선을 내보냈다. 그러나 장선은 애초부터 감히 허저의 상대가 돨 수 없었다. 2, 3합을 부딪치기도 전에 허저의 칼에 맞은 그의 몸뚱이는 말 아래로 그러 떨어졌다. 조조는 허저가 장선과 싸워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는 터였다. 두 사람의 싸움이 결말이 나기 전에 벌써 군사를 내몰았다. 군세에서도 조조군에게 미치지 못하는 장수군이었다.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그 기세에 장수의 근사는 조조군에게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았다. 장수는 패군을 이끌고 남양성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장수를 뒤쫓던 조조는 군사들로 하여금 성을 에워싼 채 해자의 물구덩이를 메우게 하고, 흙가마니, 나무, 짚단 등을 얹어 층계처럼 쌓게 했다. 그리고 그 위에다 높은 사닥다리를 걸쳐 성안을 넘보게 했다. 조조 역시 매일 말을 타고 성 주위를 살피며 둘러보았다. 조조가 성 주위를 둘러본 후 서문의 성벽 쪽에 병력의 태반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성을 둘러싼 해자가 너무 깊어 근사들이 해자를 메우는 데만 사흘이나 걸렸다. 모퉁이에 장작을 쌓고, 그것으로 층계를 삼아 군사들에게 올라가도록 명을 내렸다. 군사들은 서문의 장작 층계로 기어올라 성안으로 활을 쏘는 한편 섶나무에 불을 붙여 성안으로 던지며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장수는 당황했다. 가후를 불러 황급히 물었다.
"형주의 구원병은 오지 않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성을 지켜 내지 못할 것 같소."
장수는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가후는 얼굴에 동요의 빛도 없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너무 심려 마십시오. 이 성은 지킬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조를 사로잡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장수로서는 얼른 맏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이 성은 엄마 있지 않아 적에게 떨어질 지경으로 위급한 상화에 놓여 있었다. 가후에게 꾀를 빌려 여러 번 위기를 넘겼던 장수였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가후가 가만히 장수에게 설명했다.
"이번 싸움을 망루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조조는 공격하기 앞서 이 성을 여러 번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주의를 많이 기울인 곳은 동남편입니다. 그곳은 방책도 낡았고, 수리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벽돌도 헌것과 새것이 뒤섞여있습니다. 말하자면 성루에 약점이 있는 곳입니다."
장수는 더욱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반대편인 서문을 공격하는 것이오?"
"그것은 음흉한 조조의 속임수입니다. 서문을 공격하는 척하여 방비의 주력을 그쪽으로 돌리게 해놓자는 것입니다. 즉 위격전살지계를 쓴 것으로 서문을 공격하는 체하다 갑자기 동남쪽을 돌파할 속셈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소?"
"크게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꾀는 꾀로 대하면 그뿐입니다. 내일 정예병을 뽑아 배불리 먹인 후 가벼운 차림으로 동남쪽 구석에 숨겨 놓겠습니다. 그런 한편 백성들을 군사로 위장하여 서문 쪽으로 보내 적의 계교에 빠진 듯이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밤이 되면 틀림없이 조조는 동남쪽을 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성안까지 조조군을 유인하여 기다리고 있던 복병들이 포 소리를 신호 삼아 일시에 나가 그들을 맞아 싸운다면 조조를 사로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후의 말에 장수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과연 하늘이 내린 계책이오."
한편, 높은 사닥다리에서 성안의 움직임을 엿보던 군사가 조조에게 은밀히 알렸다.
"지금 장수는 군사들을 모두 우리가 공격하는 서북편에 모으고 있습니다. 동남쪽은 텅텅 비어 있습니다."
가후의 계략을 알 리 없는 조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의 계략에 넘어간 것이다."
조조는 삽과 곡괭이, 갈고리, 그 밖에 성벽을 뚫고 넘는데 필요한 연장은 갖추어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낮에는 서북쪽을 더욱 맹렬히 공격하게 하니 성안의 군사들도 그쪽에만 왁자지껄하며 들끓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되었다. 군사를 은밀히 동남쪽으로 이동시킨 조조는 구덩이를 메운 곳을 건너 허술한 성벽을 허물고 녹각(나무를 뾰족이 깎아 만든 장애물)을 헤치니 성벽은 어렵지 않게 뚫을 수가 있었다. 그럴 동안에도 성안은 주위가 컴컴할 뿐 횃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조조가 말을 멈춰 주위를 휘돌아 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한 소리의 포향이 들려 왔다. 그러자 포향 소리를 신호로 삼아 사방에서 복병들이 손에 손에 횃불을 들고 쏟아져 나오며 외쳤다.
"조조는 어디 있느냐? 조조를 잡아라."
조조는 대경실색하였다.
"아뿔싸, 내가 속았구나. 복병이다. 퇴각하라!"
조조는 소리치며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장수가 몸소 날랜 군사만 이끌고 조조군을 덮쳐오니 싸움은 이미 결판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조는 황망히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성 밖으로 말을 달려 수십 리를 달아났다. 조조는 밤 오경 무렵까지 장수군에게 쫓겨 밤새 패주했다. 장수는 새벽녘에야 군사를 이끌고 성안으로 돌아왔다. 조조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군사를 점검해보니 전사한 군사가 5만이었다. 그 밖에 잃거나 빼앗긴 치중은 헤아릴 수 없었으며, 장수들 중 여건, 우금까지도 부상당한 정도이니 조조는 다시 장수를 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조조가 패주하자 가후가 장수에게 말했다.
"조조의 군세가 크게 꺾여 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유표에게 급히 서신을 보내고 퇴로응 끊게 하시면 이번에는 조조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가후의 말에 장수는 유표에게 사자를 보냈다. 유표는 서신을 받아 보고 조조를 사로잡을 더없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그러자 탐마가 급히 달려오더니 유표에게 고했다.
"손책이 강어귀에 군사를 출동시켰습니다."
모사 괴량이 그 말을 듣더니 유표에게 일렀다.
"손책이 강어귀에 군사를 낸 것도 필시 조조의 계략일 뿐입니다. 이제 조조가 다시 패했다 하니 이 기회에 그를 치지 않으면 후일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지금 바로 군사를 일으키십시오."
유표는 괴량의 말을 듣자 황조에게 형주를 지키게 한 뒤 군사를 이끌고 조조의 퇴로를 끊기 위해 안중현으로 말을 달렸다. 장수는 유표가 군사를 움직인 것을 알자 기세를 돋우어 가후와 함께 나와 조조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조조가 퇴각하던 도중 양성을 지나 육수를 지나게 되었다. 지난해 이곳 양성에서 장수와의 싸움에 대패하여 육수 강변으로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졌던 조조였다. 오늘 그가 다시 장수와의 싸움에서 등을 돌리고 퇴각하던 중 그 육수 강변에 이르자 조조는 갑자기 말 위에서 방성 통곡을 했다.
영문을 몰라 여러 장수들이 깜짝 놀라 까닭을 물었다.
"지난해 이 땅에서 장수를 치려다 이곳에서 전위를 잃었다. 그를 생각하면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조는 3군을 잠시 멈추게 하고 소와 말을 잡아 크게 제사를 지내며 전위의 혼백을 달랬다. 조조는 몸소 제단에 향을 사르며 끝내 소리높여 통곡했다. 3군의 여러 장수들도 조조의 애절한 곡소리에 감동하여 번갈아 배례했다. 전위의 제사가 끝나자 맏아들 조앙, 조카 조안만 뿐만 아니라 그때 전사한 여러 군사들의 제사도 지냈다. 또한 그때 화살에 맞아 죽은 대완마까지도 함께 향을 피워 주며 원혼을 달랬다. 초여름 보리밭을 밟으며 의기충전하여 정벌의 길에 올랐다가 가을이 되어 참담한 패배를 당항 채 사기가 꺾여 돌아가는 장졸들이었다. 그러나 조조가 이름 없는 군사들의 죽음까지 슬퍼하며 애도하는 것을 보자 장졸들은 의분이 일었다.
다음날이었다. 홀연 허도의 순욱이 보낸 사자가 달려와 조조에게 아뢰었다.
"형주의 유표가 장수를 도우려 안중현에 군사를 풀어 매복하고 있으니 경계하십시오."
조조는 그 사자에게 답서를 보내 주며 말했다.
"내가 행군을 서두르지 않는 것은 장수가 뒤따르기 좋으라고만 하는 짓이 아니다. 내게도 이미 생각이 있으니 그리 알라."
조조는 사자를 돌려보낸 뒤 궁사를 이끌어 안중현의 경계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과연 유표의 군대가 요해처를 차지하고 조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장수가 뒤를 바짝 추격해왔다.
"저들에게 지의 이가 있다면 우리도 지의 이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천천히 행군하는 것은 오히려 적의 추격을 끌어들일 심산이었다. 이미 계책이 마련되어 있으니 그대들은 과히 염려치 말라."
조조는 한쪽 산을 의지하며 진을 쳤다. 때마침 해질 무렵이었다. 조조는 군사들의 움직임이 적에게 드러나지 않을 밤을 기다려 산에 외줄기의 깊은 통로를 파게 하였다. 통로가 만들어지자 전군의 반 이상을 그 통로에 숨겨 두었다. 조조는 일부의 군사를 그곳에 남겨 둔 채 자신은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산모퉁이에 매복했다. 날이 새고 안개가 걷히자 조조의 진영을 살피고 있던 유표, 장수의 군사들은 조조군이 군사가 의외로 적은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럴 수밖에, 이미 많은 군사가 전사했고 고행이 거듭된 패잔병의 퇴각이 아닌가. 도중에 도망병이나 부상병 또한 많았을 테니 군세가 엄청나게 줄어든 것일게다."
유표의 장수들은 이렇게 짐작하며 진지를 나와 험한 산길로 뛰어들어 조조군을 덮쳤다. 그러자 홀연 조조가 산모퉁이에서 군사를 이끌고 달려 나왔다. 때를 같이하여 통로 속에 매복한 군사들도 갑자기 땅속에서 솟은 듯 튀어나왔다. 조조 스스로는 유표군의 뒤로 돌아 공격하고 매복병의 한 갈래는 장수군을 급습했다. 또 한 갈래는 마주 오는 유표군을 치니 장수와 유표군이 오히려 포위된 형국이 되고 말았다. 유표, 장수의 군사들은 며칠 전의 패전으로 퇴각하는 조조군을 가볍게만 여겼다. 장수군과 뒤늦게 가세한 유표군은 조조군의 군세가 적은 것만을 보고 산속 험지까지 추격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맞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조조군이 땅에서 솟고, 앞과 뒤에서 일시에 덮쳐드니 장수, 유표군은 마침내 조조군을 당해 내지 못해 패주하고 말았다. 조조는 패주하는 유표군을 뒤쫓으니 그들은 산을 넘어 달아나고 말았다. 조조는 산속의 험로를 벗어나 넓은 들판에 진을 쳤다. 장수도 패군을 수습하여 달아나던 중 유표와 만났다.
"조조의 간계에 도리어 우리가 당할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겠소?"
유표가 장수를 보자 한탄했다. 장수가 부함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들을 너무 가볍게 본 게 잘못이었습니다. 다시 공격하여 조조를 사로잡읍시다."
유표가 장수의 말에 동의하고 양 군사는 다시 안중현에 집결하여 조조의 동정을 살피기로 했다. 그때 조조는 이번에야말로 장수, 유표군을 섬멸할 작정으로 군사를 수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허도에서 순욱의 놀라운 급보가 전해졌다. 하북의 원소가 조조가 없는 허도의 빈틈을 노려 군사를 일으킨다는 소식이었다.
"원소가 허도를 넘본다고. . ."
조조는 이 소식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소라면 장수나 유표와는 달랐다. 원소는 명문의 후광을 업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주라는 비옥한 근거지를 차지하여 광대한 세력을 길러 외지 않았는가. 조조는 자신의 세력이 더욱 커질 때까지는 그와는 대적을 미루어 오던 터가 아니었던가. 그런 원소가 허도를 넘보고 군사를 일으킨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조는 유표,장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허도를 향해 행군을 서둘렀다.
한편 장수와 유표는 조조가 급히 허도로 향해 그 뒤를 추격하려 했으나 가후가 그들을 말렸다.
"아니 됩니다. 추격하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가후의 말을 유표가 가로막았다.
"지금 쫓지 않으면 기회만 잃을 뿐입니다."
유표가 장수를 부추겨 양 군사는 조조군을 추격했다. 그들이 말을 달려 10여 리쯤 갔을 때였다. 조조의 후미 군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유표, 장수의 군대를 거세게 몰아쳤다. 추겨겨에만 급급해 있던 유표와 장수는 조조군의 기습에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패주해 온 유표, 장수가 가후에게 힘없이 탄식했다.
"공의 말을 듣지 않다 끝내 낭패를 당하고 말았소."
그러자 이번에는 가후가 뜻밖의 말을 했다.
"이제야말로 추격할 때입니다. 반드시 대승을 거둘 것이오."
장수, 유표가 한결같이 놀라서 반문했다.
"지금 패하여 오는 길인데 어찌하여 다시 뒤쫓으라 하시오?"
장수와 유표는 의아하여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크게 이길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내 목을 베어도 좋습니다."
가후가 그렇게까지 권하므로 주저하고 있던 장수는 다시 조조군을 뒤쫓았다. 그러나 유표만은 가후의 말을 믿지 못해 조조를 뒤쫓지 않으려 했다. 조조의 군사는 뒤쫓는 장수군에게 크게 패해 군마와 수레, 짐짝들을 모두 버리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장수는 이때야말로 조조를 사로잡을 기회로 여겨 더욱 거세게 추격했다. 그때 홀연 산 뒤에서 한 떼의 군마가 달려 나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장수는 또 한 번 조조가 계략을 쓰는가 두려워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많은 적군을 죽이고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왔다.
유표가 이를 보자 가후에게 물었다.
"참으로 묘한 일이오. 앞서는 우리의 정예군을 이끌고 추격했는데도 패할 거라고 하였소. 그런데 이번에는 패주한 군사를 이끄는 데도 이길 거라고 했소. 그런데 둘 다 들어맞은 셈이오. 어째서 형세가 다른 데 이와 같은 두 번의 장담이 다 들어맞았는지 그 까닭을 헤아려 주시오."
유표의 물음에 가후가 까닭을 밝혀 주었다.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지요. 첫 번째의 추격은 적으로서도 반드시 날랜 군사를 뒤로 돌려 방비했을 것입니다. 추격에만 장신이 팔려있는 군사들이 미리 대비하고 있던 군사들을 당해 내기란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군사가 패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조조가 저토록 급히 허도로 회군하는 데는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단 추격군을 격퇴하고 나면 급히 돌아가느라 방비할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방비가 없는 틈을 타 공격하였으니 능히 이길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유표와 장수는 가후의 탁월한 식견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수와 유표는 가후에게 다시 고견을 물었다.
"그럼 앞일은 어떻게 도모하면 좋겠소?"
"유 장군께서는 형주로 돌아가시고 장 장군께서는 양성으로 돌아가시되 이와 입술의 사이가 되어 서로 도우며 후일을 도모하도록 하십시오."
가후의 말에 유표와 장수는 각기 군사를 이끌고 근거지로 돌아갔다.
한편 조조는 허도를 향해 급히 말을 모는 중에 후군이 공격을 받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추격군이 크게 패하고 돌아간 뒤라 유표, 장수군이 다시는 뒤쫓지 않을 것으로 여겼던 조조는 크게 당황했으나 급한 중에도 후군을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돌렸다. 그러나 조조가 당도해 보니 그때는 이미 장수가 군사를 거두어 간 뒤였다.
이때 후군에 속해 있는 한 군사가 조조에게 말했다.
"만약 그때 산 너머에서 저희들이 모르는 한 떼의 군사들이 나타나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희는 모두 사로잡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장수는 어디 있느냐?"
조조의 말에 대열의 맨 뒤쪽에서 호걸풍의 한 무장이 창을 옆구리에 끼고 앞으로 나왔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 무장은 조조에게 허리를 굽혀 절하며 말했다.
"한때는 진위중랑장을 지냈으며 그 후 고향인 여남에 돌아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이통, 자는 문달이라 하옵니다."
조조는 그의 얼굴은 처음으로 대하나 이름은 듣고 있었다.
"어찌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는가?"
"승상께서 장수, 유표와 싸우고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힘이 될까 하여 달려왔을 따름입니다."
조조는 큰 횡재라도 한 것처럼 기뻐했다. 회군하던 중 뜻하지 않은 좋은 장수를 얻고 곤경에 빠진 후군까지 무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조는 이통에게 치하의 말을 한 뒤 그를 건공후에 봉하고, 여남에서 유표, 장수를 막도록 했다. 이통은 조조에게 감사하며 절한 뒤 여남으로 물러갔다.
조조는 허도로 돌아온 뒤 이번에 구원병을 보내 준 손책을 위해 그의 공을 천자께 아뢰어 토역장군에 봉하고 오후의 작위를 내렸다. 손책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유표를 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조조는 강동으로 사자를 보내 손책에게 조서를 전하는 동시에 형주의 유표를 치라는 황제의 칙명을 별도로 내리게 했다.
조조가 장수와 유표에 대한 대비책을 세운 뒤 원소의 동태를 살폈으나 원소 쪽에서 별다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조조는 승상부에 출부하여 여러 대신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자 순욱이 들어와 조조에게 물었다.
"승상께서 지난번 안중까지 퇴각하셨을 때, 일부러 더디게 진군하면서 적을 두려워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때는 기진맥진한 상태에 빠져 있던 우리 군에 비해 장수는 필사의 대비를 하고 있었던 때이오. 왜냐하면 그들은 남양을 잃으면 갈 곳이 없기 때문이오. 비록 성을 공격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내게 그들을 공격할 힘이 남아 있었으나 공격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소. 그 대신 그들을 성 밖으로 멀리 유인해내어 사로잡을 계획으로 천천히 행군했던 것이오. 뒤에 유표가 가담하여 이번에는 우리 군사가 활로를 열지 못하면 막다른 길에 이를 지경이었소. 이것이 오히려 우리 군사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결사적인 싸움을 하게 만든 이유가 됐소. 따라서 나는 그들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었소."
순욱은 조조의 뛰어난 군략에 감탄했다.
"승상이야말로 참으로 병법가 손자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한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느새 제비가 돌아가고 기러기가 날아오는 계절이 되었다. 허도의 역관에는 사람과 물건이 붐볐다. 여러 고을에서 거둬진 햇곡식과 채소, 단맛이 물씬 니는 과일 등이 장터로 몰려들었다. 또한 외국 사신들이 조공으로 가져온 비단과 비마로 길은 북적거렸다. 그때 붐비는 인파와 비마 속에 한 떼의 호화로운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역관 앞에 당도했다.
"기주 원소 공의 사자로 온 대인들이다."
역관 사람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그들을 극진해 대했다.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원소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한 황실의 명문 후예에다 지금은 기주뿐 아니라 4주에 걸쳐 1백만이 넘는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원소였다. 백성들 사이에도 이미 그 위세가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막 대궐에서 퇴청한 조조가 승상부에 돌아와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모사 곽가가 들어와 한 통의 서신을 전했다.
"원소의 사자가 와 승상께 서신을 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조조는 원소의 서신이라는 말에 다소 긴장하며 그의 서신을 받아 읽었다. 서신의 내용은 뜻밖에도 공손찬을 치려 하니 군사와 양식을 빌려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그 문투가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듯 교만했다.
조조가 불쾌한 얼굴로 곽가에게 물었다.
"지난번 허도를 비웠을 때에는 엉큼하게 빈집을 노리는 도둑처럼 허도를 넘보지 않았소? 이제 내가 허도로 돌아오니 또 엉뚱한 소리를 하는구려. 내가 그를 쳤으면 좋겠으나 힘이 모자라니 장차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곽가는 조조의 격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조용히 아뢰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는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의 힘이 강대하거늘 어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인가?"
"옛날 한 고조가 항우를 이긴 것은 힘이 강해서가 아님은 주공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항우가 고조에게 멸망 당한 것은 힘을 믿고 지혜를 가벼이 여긴 탓입니다. 고조는 항상 은인자중해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그건 그렇소."
"원소란 인물과 승상을 견주어 볼 때 승상에게는 10승이 있고, 원소에게는 10패의 결점이 있습니다. 원소가 지금은 세력이 강하다 하나 승상께서는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열 가지의 이길 것과 열 가지의 패할 것이라는 결점은 무엇이오?"
"첫째로 원소는 필요 이상의 번거로운 예와 쓸데없는 허식을 좋아하지만 승상께서는 항상 실질적인 알맹이만 취하시고 그다음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시니 이는 도에서 원소를 이기심입니다."
"그 둘째는 무엇이오?"
"원소는 움직이면 천자를 거스르는 것이 되오나 승상께서 움직이심은 항상 천자의 명에 따르는 것이니 이는 순리, 곶 의로써 이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무엇이오?"
"셋째로 원소는 잘못에도 관대함만이 인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관용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승상께서는 엄격하게 상벌이 분명하니 백성들은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큰 기쁨을 갖는 것입니다. 이는 다스림에서 이기시는 것입니다. 넷째로 원소는 대범한 것 같지만 사실은 소심하고 시기심이 많으며 사람을 곧잘 의심합니다. 또 사람을 쓰는데도 친척을 너무 중용합니다. 그러나 승상께서는 멀고 가까움이 없이 스스럼없이 사람을 대하시며 관찰력이 예리하십니다. 때문에 사람을 의심하지 않고 오직 재주에 따라 사람을 씁니다. 이는 도량에서 원소를 이기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원소는 꾀함이 많은 반면 결단력이 없으나 승상께서는 계책을 정하면 망설임 없이 신속히 결행하십니다. 이는 '꾀함에서의 승리'입니다. 여섯째로 원소는 스스로 명문이라 하여 명사나 허명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승상께서는 참다운 인재를 오직 지성으로 대접하시니 이는 덕으로 이기심입니다. 일곱째로 원소는 가까운 이에게 다정히 대하나 먼 데 있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승상께서는 샅샅이 누구에게나 마음을 쓰십니다. 곧 어짊입니다. 여덟째는 '밝음의 승리'입니다. 원소는 모략 중상하는 말을 들으면 의혹을 일으켜 마음이 흔들리지만 승상께서는 모략을 믿지 않고 물리쳐 밝게 헤아려 행하시니 이는 명철함이 나으신 점입니다. 아홉째로 승상께서는 법을 펴심이 엄격하고 밝으시나 원소는 옳고 그름이 자신의 마음에 따라 변해 뒤죽박죽이 됩니다. 이는 문리에서의 이김입니다. 열 번째로 무의 승리입니다. 원소는 허세를 부리지만 병법에는 어둡습니다. 그러나 승상께서는 적은 근사로 많은 군사를 꺾으며, 군사를 부리는 용병술이 귀신 같으시나 원소는 거기에 따르지 못합니다. 승상께서는 이 10승의 승산이 있으니 원소를 무찌름에 어려움이 없으실 것입니다."
곽가의 말은 실로 청산유수와 같았다. 조조늬 면전이었건만 조조와 원소의 장단점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예리하게 분석한 말이었다.
"공의 말은 지나치오. 내게는 과분할 뿐이오."
조조는 겸양했으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옆에 있던 순욱도 입을 열어 말했다.
"곽봉효가 말씀드린 '10승 10패'설에는 저도 동감입니다. 원소의 군사가 많다 해도 두려워할 것이 못 됩니다."
"알았으니 공들은 물러가 계시오."
그날 밤 조조는 홀로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곽가가 자신을 원소에 비해 열 가지의 이김을 논하지 않았더라도, 조조 스스로도 원소에 대한 우월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조조의 우월감은 어디까지나 원소와 1대1로 비유했을 때의 우월감이었다. 일찍부터 조조는 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원씨 가문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원씨 일문의 벌족 중에는 회남의 원술도 있고, 또한 그의 근거지가 광대한 지역인 만큼 일찍부터 어진 선비를 길러 지모와 지용을 갖춘 현신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조조를 괴롭히는 것은 그것보다도 원소의 가문이었다. 그의 가문은 일개 궁내관의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가 일찍 낙향하여, 소년 시절부터 마을의 부랑아에 지나지 않았다. 원소가 낙양의 도성에서 준부의 중책에 있었을 때 조조는 겨우 성문을 순시하는 말직에 있었다. 이후 원소는 천하의 풍운에 밀려 지방으로 물러나고 조조는 그 풍운을 타고 약진을 거듭하여 승상까지 되었다. 그러나 원소는 아직도 은연중에 보수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었다. 반면 아직 신진세력인 조조는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직계 부하를 제외하고는 그를 향한 보이지 않는 질시와 반감 또한 만만치 않았다. 천하에는 아직 조조를 가리켜 '자천의 승상'이라는 수군거림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조조의 무력에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나, 그 권위에는 심복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 미묘한 민심에 어두운 조조가 아니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성공에 대해 다분히 충족되지 않은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적을 무력으로 무찌를 수는 있었으나 민심을 무력으로 얻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산동과 하남의 경계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여러 군벌과 대치하고 있는 지금이 아닌가. 그에게는 매일매일 전투와 정치 투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허도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형주, 양양의 유표와 장수가 있다. 또 동쪽으로는 원술, 북쪽에는 백만 대군이라고 호언하는 원소가 있다. 거의 사방팔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은 한 곳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품은 대망은 벌써부터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조조는 모사 순욱과 곽가를 물러 다시 의견을 물었다.
"원소의 무례함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원소를 치는 것은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은 사방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도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이 허도가 위험합니다."
곽가가 순욱의 말이 끝나자,
"여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지금은 주공의 말을 듣고 있다 하나 그 역시 항상 허도를 넘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소가 북으로 공손찬을 치러 간다고 하니 일단 원소의 요구를 들어주어 그가 공손찬을 치게 내버려 두십시오. 그럴 동안 우리는 여포를 쳐 동남을 평정한 뒤 원소를 치는 것이 상책입니다. 만약 지금 원소를 공격하게 되면 그 틈을 타 여포가 허도를 노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는 우리의 손실이 매우 클 것입니다."
순욱은 다시 입을 열었다.
"곽봉효의 말과 제 소견이 같습니다. 원솔 이용하여 여포를 먼저 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여포와 원소가 군사를 일으키고 있는 동안에는 달리 허도를 범할 만한 자가 없습니다."
곽가와 순욱 두 사람의 말을 듣자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순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포는 당대의 명장으로 기름진 서주를 근거지로 삼고 있으니 가볍게 보실 수 없습니다. 유비에게 미리 알려, 그의 답을 들으신 후에 군사를 일으키시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조조는 순욱의 말대로 유비에게 사자를 보내기로 했다. 지난번 회군 때 유비에게 일러둔 말도 있어 사자를 보내면 즉시 여포의 동태를 파악하리라 여겼다. 이튿날 조조는 원소의 사자를 승상부로 불러 후히 대접한 후 원소에게 공손찬을 칠 때 군사를 일으켜 돕겠다는 답서를 전하게 했다. 조조는 또 원소에게 군량미, 마필 그 밖에도 많은 군수품을 마련하여 보냈다. 뿐만 아니었다. 천자께 주청하여 원소를 대장군에 태위로 봉하고 기주, 청주, 유주, 병주의 4주를 함께 다스리게 했다. 조조의 답서를 사자로부터 받은 원소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장군께서 금번 북평 정벌을 결심하신 장도에 저도 필승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군량미와 마필 등 군수품을 가능한 한 후방에서 원조하겠습니다. 하남에 대해서는 조금도 심려 마시고, 바로 북평의 공손찬을 토벌하시어 만민의 안도를 도모하시기 바랍니다. 단지 한 가지, 불초 소생도 허도의 수호를 맡고 있어 병력이 필요하므로, 부득이 군사를 보내지 못함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원소는 조조의 답서를 읽은 후 크게 기뻐했다. 조조의 답서는 자기가 보낸 문투에 비해 마치 웟사람을 대하듯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거기다가 벼슬 또한 조조에게 비해 낮은 편이 아니었다. 조조가 많은 군수품을 보내오자 원소는 드디어 공손찬을 치기로 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조조가 천자를 끼고 세력을 키워가는 것이 늘상 못마땅하게 여겨 언젠가는 조조를 치리라 자정하고 있던 원소였으나, 이렇게 하여 한동안은 서남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한편, 여포는 서주에 있으면서 밤마다 미녀를 끼고 술에 젖으며 낮에는 진등 부자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여포는 무슨 일이든지 진등 부자에게 의논했고, 이들은 또 어디든지 여포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이 모양을 지켜보는 진궁은 항상 비위에 거슬려 어느 날 기회를 엿보아 여포를 일깨웠다.
"진등 부자가 장군 앞에서는 온갖 아첨을 다 떨고 있으나 그들의 속마음을 알 수 없으므로 장군께서는 경계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포가 못마땅한 표정이 되어 진궁을 꾸짖었다.
"어찌하여 어진 이들을 참소하는 그 같은 말을 하는가?"
"그들 부자를 현인이라 생각하고 계십니까?"
"이 봉선에게는 충성스런 신하라 할 수 있소."
여포가 그렇게 말하니, 진궁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그 앞을 조용히 물러났다.
'충성스런 말을 듣지 않으니, 필시 화가 미치리라.'
진궁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사저에 틀어박혔다. 진궁은 마음속으로는 여포를 떠나고 싶었으나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섬기던 주인을 버리면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그래, 사냥이나 하며 호연지기나 기르자.'
답답한 마음으로 나날을 보내던 진궁은 문득 이런 생각을 하며 군사 몇을 데리고 소패 근처로 사냥을 나갔다. 그때 홀연히 역마 한 필이 급히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 사자는 자기 일행을 보자 갑자기 허둥대기 시작했다. 문득 의심이 들었다. 진궁이 말을 몰아가니 그는 채찍을 가해 더욱 말을 재촉했다. 진궁은 달아나는 그를 향해 활을 당겼다. 화살은 그자의 발은 맞추고 그는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진궁은 할을 내동댕이치고 그 자에게 달려갔다.
"그대는 어디에서 오는 사자인가?"
진궁이 그 사자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진궁 일행이 여포의 수하임을 아는지 더욱 당황해하며 입을 열지 않았다. 진궁은 칼을 빼 들었다. 그제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허도에서 온 사자입니다."
"허도? 그래 누구에게 가는 사자이냐?"
"예주의 유현덕 공에게 왔다 가는 사자입니다. 진궁이 그자의 몸을 뒤지게 하였더니 뜻밖에도 유비로부터 조조에게로 가는 밀서 한 통이 나왔다. 진궁은 밀서와 함께 그 사자를 여포에게 데리고 갔다. 여포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밀서를 주었다. 여포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사자에게 조용히 따져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너를 보냈ㄴ냐?"
"조 승상님의 분부로 유 예주께 글을 보내라 하시기에 그 글을 전하고 답서를 받아가지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답서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 말에 여포는 밀서를 뜯어 보았다.
여포를 치라는 명공의 분부를 받들고 어찌 잠시라도 소홀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 비에게 군사가 적고 장수 또한 적에 가볍게 움직이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만약 승상께서 크게 군사를 일으키신다면 저 또한 기꺼이 선봉이 되겠습니다. 승상의 크신 면을 다시 기다리며 군사를 추스리고 단속하겠습니다.
여포가 밀서를 보고 크게 널라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조조, 유비, 이 자들이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여포는 그 자리에서 사자의 목을 벤 후 진궁에게 명을 내렸다.
"소패성을 단숨에 쳐부수고 현덕을 사로잡아 오라!"
진궁과 장패는 여포의 명을 받고 곧 소패를 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소패가 작은 성이라지만 곧바로 소패로 쳐들어갈 수는 없었다. 진궁은 먼저 부근 태산에 있는 손관, 오돈, 창희, 윤례 등의 도적 두목을 불러모았다. 그런 후 그들에게 이런 말로 선동했다.
"산동의 여러 주군을 쳐서 교란하라. 그리고 마음껏 약탈하라!"
그리고 고순과 장료를 소패로 보내어 유비를 치게 하였다. 또 송헌과 위속에게는 서쪽으로 나아가 여남과 영주의 각지를 공격하게 했다. 여포는 주력 부대를 거느리고 이들 전군에 호응키로 했다. 한편 유비는 여포가 군사를 이끌어 삼면을 밀물처럼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뿔사, 답신을 가지고 돌아가던 사자가 도중에서 여포군에게 사로잡혀 일이 탄로 나고 말았구나."
유비가 급히 무리를 모아놓고 의논했다. 손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조조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비의 생각 또한 그랬다.
"누가 급히 허도로 가겠소?"
그러자 계단 아래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의 유비와는 동향인 막빈(빈객으로 있는 모사) 간웅이었는데 자는 헌화였다. 유비는 즉시 조조에게 위급을 알리는 서신을 써서 간웅에게 주었다. 간웅이 허도로 말을 달려가자 유비는 성을 지킬 준비를 서둘렀다.
"관우는 서문을 지키고, 장비는 동문을, 손건은 북문을 맡아라!"
그리고 유비는 스스로는 남문을 맡기로 하고 미축과 그의 아우 미방에게 중군을 지켜 가솔을 보호하게 했다. 유비의 둘째 부인인 미부인은 바로 미축, 미방 형제의 동생이므로 그들에게 가솔을 보호하게 한 것이다.
여포군 중 소패성에 먼저 이른 것은 고순이 거느린 군대였다. 유비가 망루에 올라 소리쳤다.
"나와 봉선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장군은 어찌하여 이렇게 군대를 이끌고 왔는가?"
고순이 화를 내며 외쳤다.
"유현덕, 네놈이 조조와 손을 잡고 우리 주공을 해치려 하지 않았더냐? 이미 그 일은 발각되었으니 어서 포박을 받아라!"
고순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성을 공겨하기 시작했다. 유비는 성문을 닫은 채 성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다음 날이었다. 장료는 관우가 지키는 서문을 공격해 왔다. 관우가 성 위에서 장료를 보고 외쳤다.
"공은 장료가 아니시오? 어찌하여 장 공 같은 사람이 여포 같은 역적에게 몸을 맡겼소?"
관우의 말에 장료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관우는 그가 비록 적이기는 하나 충의의 기개가 있음을 알고 더 이상 욕설도 하지 않았으며 나가서 싸우지도 않고 오직 굳게 지키기만 하였다. 장료는 군사를 이끌고 동문으로 물러갔다. 그때였다. 별안간 장비가 달려 나와 장료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관우가 이를 보고 급히 그 뒤를 쫓아 장비를 성안으로 불러들였다.
"어째서 적을 눈앞에 두고도 추격하지 말라 하시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싸움을 걷어치우는 게 낫겠소."
모처럼 사모창을 꼬나쥐었던 장비인지라 싸움을 말리는 관우의 제지에 볼멘소리로 투덜댔다. 관우가 그런 장비를 달랬다.
"그는 비록 적이긴 하나 무예가 뛰어나고 인의의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네.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는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물러난 것일세. 그런 그를 구태여 뒤쫓는다는 것도 무장으로서의 자세가 아닐세."
관우의 말을 듣고 장비도 고개를 끄덕이며 성문을 닫아걸고 굳게 지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