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 전운 속에 뜨는 태양
위나라의 기반을 닦은 조조는 조정을 손아귀에 거머쥐고. . .
여포는 동탁의 잔당인 이각,곽사가 장안을 점령하자 달아나고, 다시 천하는 곳곳에서 군웅들이 할거하기 시작한다. 조조는 산동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서주를 침공하나 북해의 공융과 유비 등이 발병하여 서주를 구한다. 조조와 여포는 복양성에서 맞대결하는데 야습을 기하던 조조의 목숨이 오히려 위태로워진다. 이때 사경을 해매는 조조를 전위가 달려와 구하고, 여포는 자기 꾀에 속아 조조군에게 목숨만 간신히 구한 채 쫒겨 달아난다. 한편 서주태수 도겸은 유비에게 서주를 맡기고 숨을 거둔다. 사지에서 벗어난 조조는 천하호걸 전위와 허저를 얻고 여남과 영주 땅을 차지한다. 이에 이각과 곽사의 폭정에 시달리던 황제는 조조를 불러들여 반군을 평정시키고 조정을 맡긴다. 조조는 허물어진 낙양을 보수하느니보다 허창(허도)으로 서울을 옮기고 위나라의 기반을 마련한다. 조정을 손아귀에 거머쥔 조조는 유비와 여포를 충동질해 서로의 싸움을 부추기나 실패하고 유비로 하여금 원술과 싸우도록 부채질한다. 이때 장비는 술주정으로 하룻밤 사이 여포에게 서주성을 잃고 유비를 뒤따른다. 강동 손견의 아들 손책은 원술 밑에서 보살핌을 받다 전국의 옥새를 담보로 군사를 얻고 장강을 건너 천하대망을 펼친다. 강동을 편정한 손책은 회계 지방까지 점령하여 동쪽을 장악한다. 그 사이 도적 떼에 금창이 터진 주태는 명의 화타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원술은 여포와 사돈을 맷어 유비를 공략하기로 하나 진대부가 진언하자 신행길을 되돌린다. 조조는 장수를 공격하고 장수는 이에 항복하나 조조가 호궁 부인에 푹 빠져있는 동안 조조 진영을 공략하여 대승을 거둔다. 이에 조조는 장남과 조카, 명장 전위까지 잃고 허도로 회군한다.
원술은 전국옥쇄를 가진 것을 기화로 황제 위에 오르고 여포에게 사절 한윤을 보낸다. 그러나 여포는 조조가 베푼 인뒤웅이로 인해 혼인을 파기하고 한윤을 조조에게 보내 참수당하게 한다. 이에 화가 난 원술은 여포를 공격하고 여포는 진대부를 사절로 보내 화해를 모색한다. 한편 여포를 치라는 밀서를 받은 유비는 조조에게 답서를 보내다 그만 여포에게 들킨다. 이에 여포는 군을 대동하고 소패성으로 달려오나 유. 관. 장. 삼형제는 성문을 닫고 일체 싸움에 응하지 않는다.
충신 왕윤도 죽고 전운 속에 커가는 영웅들
여포의 무용과 왕윤의 사면 거절로 두려움에 떨던 동탁의 잔당들은 죽기 살기로 공략하여 장안을 점령한다. 여포는 패해 달아나고 왕윤이 처형되자 조정은 다시 반란군 손에 들어간다. 이에 각지의 영웅들이 저마다 분노 속에 할거하기 시작한다.
동탁의 무리였던 이각, 곽사, 장제, 번주 등 네 장수는 비옹군 3천과 그동안 몰려든 졸개들을 이끌고 서량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장안에서 모든 죄인에게 특별 사령을 내렸다는 소문을 든고, 사자를 왕윤에게 보내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왕윤이 그걸 받아들일 리 없었다.
"동탁을 등에 업고 세상을 어지럽힌 너희들이 무슨 낯짝으로 찾아왔는가. 지금 천하에 대사면을 내린다 하나, 그들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왕윤은 불호령을 내어 사자를 쫒아 보낸 후 그날로 동탁의 잔당에 대한 토벌령을 내렸다. 양주의 패잔병들은 이에 크게 놀라며 대책을 의논했다. 모사 가후가 근심에 잠겨있는 네 장수에게 결연히 다짐해 두었다.
"동요해서는 아니 되오. 이럴 때일수록 뭉쳐야 하오. 만일 뿔뿔이 흩어진다면 그만큼 힘이 약해져 일개 장수라도 당신을 묶을 수 있을거요.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는 단결하여 힘을 합쳐야 하오. 힘을 합쳐 동 태사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세워 장안으로 다시금 쳐들어가야 하오. 만일 일이 잘되면 천하를 우리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힌 실패하게 되면 그때 도망가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오."
네 장수가 들으니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어차피 사면을 받지 못할 바에야 이대로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릴 수 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장안으로 밀고 들어간다 하더라도 한 가지 문제는 있었다. 네 장수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장안으로 쳐들어간다 해도 어떻게 군사를 모을 것이오?"
그러자 괴량이 미리 준비해 둔 계책이 있는 듯 선뜻 입을 열었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소. 이 지방은 원래 동태사의 근거지요. 또한 왕윤이 도량이 넓지 몾하고 편협하니, 왕윤이 양주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려 한다고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함께 싸우자고 하면 백성들이 뒤따르지 않겠소?"
"과연 명안이오."
이각을 미롯한 장수들이 괴량의 말에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네 장수는 즉시 군사를 풀어 소믄을 퍼뜨렸다.
"동탁을 죽인 왕윤이 백성들을 모조리 주살하려고 한다."
"장안에서 대군이 몰려와 이곳을 쑥대밭을 만들 것이다."
이런 소문이 양주 일대에 나돌자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이왕 죽을 바에야 싸우다 죽겠다는 작정으로 모두 군대에 자원하였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이들의 병력은 잡군을 포함해서 10만이라는 대군으로 불어났다. 우선 그들을 조련하여 그럴듯한 대오를 갖추었다.
그즈음 동탁의 사위인 중랑장 우보가 장인의 원수를 갚겠다며 군사 5천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이각의 무리는 사기가 충천하여 대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밀물처럼 나아갔다. 동탁의 잔당들이 대군을 이끌고 밀려온다는 소식을 듣자 장안에서도 급히 대책을 협의했다.
왕윤은 여포를 불렀다.
"왕 사도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쥐 같은 무리를 단숨에 쳐 없애겠소."
다음 날, 여포는 급히 군사 몇만을 수습하여 이숙을 데리고 출진하였다. 이각의 선봉장이 된 동탁의 사위 우보는 여포 여포 휘하의 이숙과 맞닥뜨려 첫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우보군은 이숙을 당해 내지 못하고 군사를 물려 달아났다. 그러자 모사 가후는 우보에게 전했다.
"여포군과 정면으로 무딪치면 승산이 없으니 되도록 기습을 감행해야 하오."
한편 첫 싸움에서 이긴 이숙의 군대는 그닐 밤 승리감에 도취되어 아무런 방비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밤이 깊어갈 무렵이었다. 요란한 함성과 함께 우보군이 불의의 기습을 감행하였다. 방비 없이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이숙의 군사들은 서로 짓밟히며 이리저리 흩어져 30리 밖으로 패주하였다. 패주한 군사들을 점고해 보니 절반으로 줄어있었다. 이숙은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여포가 있는 본진으로 돌아가 원병을 요청했다. 여포는 이숙이 패주하여 오는 걸 보자 크게 노했다.
"이 무슨 추태냐. 군사의 예기를 꺾은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여포는 한칼에 이숙의 목을 베어 버렸다. 여포는 이숙의 목을 군문에 매달게 하였다. 여포와는 고향 친구요, 동탁에게 여포를 이끌었으며, 동탁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이숙은 결국 여포의 손에 목이 잘리운 셈이었다. 다음 날, 여포는 스스로 진두에 서서 군사를 이끄고 우보군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우보는 여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천하의 여포가 군사들을 이끌고 온다는 말을 듣자 우보군의 군졸들은 싸우기도 전에 겁에 질려 있었다. 우보는 군사를 물린 뒤, 심복인 호적아를 불러서 의논했다.
"여포는 용맹이 뛰어나고 날래니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어차피 승산 없는 싸움에 개죽음당하느니 금은보화라도 챙겨 달아나는 것이 어떻겠나?"
"좋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호적아 역시 여포의 용맹을 모를 리 없었다. 우보가 그렇게 말하자 그날 밤중에 야음을 틈타 이각의 진중으로 들어가 보물을 훔쳤다. 우보와 호적아는 가까운 휘하 몇 명을 데리고 이각의 진영을 벗어나 달아났다. 얼마를 가니 냇물이 가로 놓여 있었다. 냇물을 건너기 위해 짐을 꾸릴 때 호적아는 엉뚱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저놈 우보란 놈을 죽인다면 금은보화는 모두 내 차지가 된다. 그리고 우보의 목을 가지고 여포에게 간다면 상도 듬뿍 받으리라. . .'
이렇게 생각한 호적아는 정신없이 보물더미를 묶고 있는 무보의 곁으로 가 무조건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으흑. . ."
외마디 소리와 함께 우보의 목이 떨어졌다. 호적아는 벤머리를 들고 여포의 진영으로 찾아갔다. 우보를 죽임으로써 보물 훔친 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울 수도 있었다. 여포의 진영으로 찾아간 호적아는 여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우보의 목을 바치겠사오니 저를 휘하에 거두어주십시오."
여포는 그런 호적아를 노려보며 투항해 온 까닭을 물었다. 그때 호적아가 이끌고 온 몇 명의 군졸들 중 우보의 심복이었던 부하 하나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호적아는 재물과 출세에 눈이 어두워 우보의 목을 베었습니다."
여포는 그 말에 크게 노했다.
"우보의 머리만으로 부족하다. 너 같은 놈을 살려두면 세상이 더러워질 것이다. 의리 없는 네놈의 목도 내놔라!"
여포는 호적아에게 호통을 친후 그 자라에서 목을 베어 버렸다. 우보가 죽고 또 그를 죽인 호적아도 여포에게 참살되었다는 소문은 이각의 진영에도 전해졌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죽느냐 사느냐로 싸우는 길밖에 없다."
이각은 군사를 수습하여 각오를 다지며 다른 장수들에게 말했다.
"여포에게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승산이 없음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소. 그는 용맹스럽기는 하나 지모가 모자라므로 이점을 노려 계책을 세워야 하오. 나는 군사를 이끌고 계곡을 지키며 그를 유인하겠소. 곽 장군께서는 군사를 이끌고 징과 북을 울리며 후방을 교란시키시오. 장제와 번주 두 장군께서는 군사를 나누어 장안으로 쳐들어가시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여포라도 맥을 추지 못할 거요."
이각의 무리는 즉시 그 계책에 따라 여포를 산속으로 유인했다. 그 사이 장제, 번주 두 장수는 양대로 나누어 장안으로 진격하자, 장안은 불난 집처럼 어수선해졌다.
"장안이 위급하다. 빨리 돌아와 장안을 방비하라."
왕윤은 여포에게 명했다. 한편 여포는 호적아의 목을 베고 이각의 군사가 있는 산 아래에 당도했다. 그러나 이각은 맞서 싸우지 않고 자꾸만 산속으로 군사를 물렸다. 여포가 뒤쫓으면 산봉우리나 계곡에 숨어 있던 군사가 달려 나왔다. 이각은 산 위에서 활을 쏘아 적을 맞으니 여포는 곤경에 처했다. 군사를 물리려하면 이번에는 곽사군이 후방에서 몰려나왔다. 달갑지 않은 싸움이었지만 맞싸우지 않으면 전멸할 위기에 처할 판이었다. 치나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싸움터에서 며칠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여포였다. 이때 장안을 향해 거센 진격을 감행한 장제, 번주의 근사는 밀물같이 몰려들어 도성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안에는 철벽같은 외성이 있었다. 제 아무리 용감한 군사라도 이 철옹성을 뚫지는 못했다. 장안의 사람들도 이 철옹성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장안에는 동탁의 잔당들이 아직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숨소리를 죽이며 지내 오던 이몽, 왕방이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가 왔다!"
잔당들이 외치며 일시에 성문을 여니 장제,먼주의 군사들은 노도와 같이 성안으로 밀려들었다. 마치 둑을 무너뜨린 탁류처럼 밀려들자 장안은 아비규환 바로 그것이었다. 장제, 번주의 군사들은 급히 모병한, 잡군이 많이 섞인 군사였다. 일단 성안에 들어오자 그들은 순식간에 폭도로 돌변했다. 자앙늬 군사들이 자기들을 몰살시키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믿고 있는 이들이었던지라 폭도들은 그 양심까지 뒤섞여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술잔을 기울이며 태평스런 나날을 구가했던 장안의 백성들이었다. 일시에 들이닥친 폭도들은 닥치는 대로 목을 베고 찌려 죽였다. 아녀자나 소녀들은 겁탈을 당한 후 목이 떨어졌다. 집집마다 불을 지르니 그 검은 연기는 해를 가리고 땅을 가려 세상은 암흑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 여포는 장안이 위급하다는 급사의 파발을 받고 군사를 수습하여 장안을 향해 진군하였다. 말을 달리는 여포의 눈에는 초선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후방의 곽사군이 북과 징을 치며 여포군을 맞았으나 여포가 몸소 선두에서 방천화극을 들어 그들을 헤쳐나갔다. 여포는 곽사군과 싸울 뜻이 없었으므로 일단은 퇴로가 뚫리자 곧장 장안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그가 성 밖 수십 리 지점에 이르자 이미 장안의 밤하늘은 붉은빛으로 물든 채 불길에 휘싸여 있었다.
". . . 아뿔사!"
여포는 길게 탄식했다. 성안의 초선이도 구하지 못한 채 불빛이 가득한 하늘을 우러러보며 망연자실하였다. 장안성을 단념한 여포는 말을 몰아 좌충우돌, 닥치는 대로 반란군을 치며 청쇄문으로 달려갔다. 청쇄문은 왕윤이 지키고 있는 곳이었다.
"형세가 위급합니다. 저외 함께 관을 벗어나 따로 계책을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여포의 다급한 언성에 비해 왕윤은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만약 이 한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 계신다면 이 나라를 구해 주실 것이요. 그렇지 않고 이 나라가 무너진다면 나고 함께 하겠소. 장군은 부디 나를 대신하여 쓰러져 가는 사직을 바로잡도록 힘써 주시오."
그럴 동안 모든 성문이 불길에 휩싸이고, 백성들의 아우성이 장안을 가득 메웠다. 여포는 가솔들을 이끌 틈도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갈 길이 막연했던 여포의 머리에 원술이 떠올랐다.
'원술이라도 찾아가 뒷일을 의논하자.'
여포는 마음을 정하고 군대를 해산한 후 1백여 기를 이끌고 남양을 향해 말을 몰았다. 여포마저 떠나 버린 장안성에서 이각,곽는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여포만을 의지하고 있던 태상경, 충불, 태복, 노규 등을 비롯한 여러 백관들이 죽임을 당하고 수많은 군사들도 목숨을 잃었다. 반란군은 천자가 있는 내정까지 밀려들었다. 헌제는 창백한 얼굴로 꼼짝 않고 있었다. 장안 이거리 저거리에 날뛰는 화마가 훤히 모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황궁이 위급해졌습니다."
헌제는 괴로운 탄식만 토해낼 뿐이었다. 조신들 중 한 사람이 그런 천자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아무리 분별이 없는 잡군이라 하더라도 천자의 자리가 얼마나 지엄한 것인가는 분간할 것입니다. 원컨대 천자께서 몸소 선평문의 누대에 이르시어 저들을 달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폐하의 명을 거스리지는 않을 듯하옵니다."
이에 헌제는 중신들의 말을 좇아 선편문의 누대에 올랐다. 이각과 곽사는 선평문의 누대에 잇는 황금색 거개를 바라보고 군사들을 멈추게 한 뒤 천자가 나타나자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
"천자다!"
헌제는 누대 위에서 튼 소리로 꾸짖었다.
"듣거라! 너희들은 어찌하여 짐의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마음대로 이 장안으로 들이닥쳤는가!"
그러자 이각. 곽사가 무릎을 꿇어 절을 올리며 말했다.
"폐하! 동 태사는 폐하께 첫째가는 공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무고하게도 왕윤 등의 도당에게 모살되었으며, 그 시긴은 장터에 효시되는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신들은 오직 동 태사의 원수를 갚으며 할 뿐입니다. 지금 폐하의 소매 뒤에 숨어 있는 왕윤의 몸뚱이만 신들에게 넘겨주신다면 신들은 즉시 금문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때 왕윤은 헌제 옆에 시립해 있었다. 왕윤이 황제에게 간하였다.
"신은 원래 사직을 위해 애석히 여겨 사직을 그르쳐서는 아니 됩니다. 신이 나아가 저들을 맞게 해 주옵소서."
천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자 왕윤이 문루 위에 오르더니,
"역적의 무리들아, 왕윤이 여기 있다!"
하고 외치며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각. 곽사가 칼을 빼 들고 왕윤에게 다가갔다.
"동 태사께 무슨 죄가 있다고 네놈이 모살하였느냐?"
"동탁의 죄는 하늘을 채우고 땅을 덮을 지경이었다. 그가 죽던 날은 장안의 백성들이 춤을 추었거늘 어찌 너희들만 그일을 알지 못했더란 말이냐?"
"태사의 죄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무슨 죄로 사면을 허락지 않았느냐?"
왕윤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백배수를 흩날리며 꼬장꼬장 이각과 곽사를 꾸짖었다.
"이 역적들아,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이 왕윤에겐 오로지 죽음이 있을 뿐이다."
왕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각. 곽사는 그의 목을 쳤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그 가족까지도 몰살시켰다. 지난날 왕윤이 채옹을 죽일 때 마일제가 '왕윤의 명이 길지 못하리라'고 한 예언이 그대로 들어맞은 셈이었다. 역적 동탁을 죽이고 이제 새로운 천하를 세우기도 전에, 그 또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뒷날 사람들은 왕윤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왕윤의 계교로
간신 동탁을 죽였도다!
가슴에는 평화로운 나라에 대한 한이 서리고
얼굴에는 조정에 대한 근심이 차 있네.
하늘에 이어진 영기
충성심은 북두칠성에까지 뻗치네.
그 혼백은 지금도
변함없이 봉황후에 머물러 있네.
이각. 곽사의 군대는 왕윤을 참살한 후에더 물러가지 않았다. 무리 중엔 이 기회에 천자까지 죽여 버리고 천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는 말도 떠돌았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한 번주와 장제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지금 천자를 죽인다면 이 천하를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이오. 그러니 이전처럼 천자의 세력을 서서히 제거한 뒤에 그때 가서 대사를 도모하는 것이 현명한 방책이 될 것이오."
이각. 곽사는 두 장수의 말을 듣고 마음을 진정시킨 후 칼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각의 무리는 그래도 물러나지 않았다. 헌제가 망루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옥음을 내렸다.
"이제 왕윤이 죽었는데 그대들은 어찌하여 군사를 거두지 않느냐?"
"황실에 공을 세운 우리들에게 아직 논공행상도 베풀지 않았소. 그러니 훈작이라도 내리셔야 할 것이오."
천자는 그들이 물러나지 않고 이 같은 요구를 하자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바라는 벼슬은 무엇이냐?"
이각. 곽사. 장제. 번조 등 각기 원하는 벼슬을 적어 올리자 천자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벼슬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각은 거기장군 지양휴에 봉하고 가례교위에 명한 대원수의 표상인 기와 무기를 내렸다. 그렇게 벼슬을 높인 후 이각. 곽사는 모두 조정에서 정사를 논할 때 참석도록 했다. 그리고 장제는 표기장군 평양후에 번주는 우장군 만년후에 봉해 홍농에 진을 치고 군사를 주둔케했다. 거기다가 이몽과 왕방을 교위에 명하자 그제서야 그들의 군사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하루아침에 필부들은 위관을 차리고 일약 묘당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제 천하의 대권을 동탁의 손에서 농락당하다 다시 동탁의 잔당 네 사람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의심이 많은 것은 벼락감투를 쓴 자들의 특성이다. 그들은 헌제 주의에 빈틈없이 밀정을 세워 두고 조정의 대신들을 감시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권일수록 백성들이 바라는 질서와 평화와는 거리가 먼 화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었다. 헌제는 늘상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했다. 조정의 모든 문무백관들은 이각과 곽사의 마음대로 움직였다. 이각과 곽사는 덕망이 높은 원로인 주전을 청해 태복의 자리에 앉혀두고 뒤에서 조정의 권세를 마음대로 주물렀다. 조정이 이렇게 어지러워지자 천하 곳곳에서는 군웅들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서량태수 마등과 병조자사 한수 두 사람이 10만 대군을 일으켰다.
"조정을 침범한 적도들을 토벌해야 한다!"
그들은 이렇게 외치며 장안으로 진격해 왔다. 마등과 한수는 이미 군사를 이끌고 오기 전에 장안으로 사람을 보낸 적이 있었다. 시중인 마우, 간의대무인 충소, 좌중랑장인 유범과 내통하여 역적을 치기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헌제는 이들 세 사람의 말을 좇아 마등을 정서 장군, 한수를 진서 장군에 봉하여 역적을 토벌토록 밀조를 내렸던 것이었다. 이각. 곽사는 이들이 장안으로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사 가후를 불렀다.
"마등과 한수가 군사를 일으켰다니 어찌하면 좋은가?"
가후가 한 가지 방책을 내놓았다.
"장안을 둘러싼 외성을 더 높이고 성 밖의 둘레를 깊이 판 후 성문을 굳게 닫아야 할 것이오. 그들은 먼 곳에서 군사를 이끌고 오는 중이니, 얼마 되지 않아 양초가 바닥이 날 것이오. 그들이 군사를 물릴 때 성문을 열고 기습을 감행하면 적을 손쉽게 섬멸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있던 이몽과 왕방이 반대하며 나섰다.
"그건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저희에게 군사 1만 명만 주신다면 두 사람의 목을 베어 장군들게 바치겠습니다."
그러자 가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됩니다. 지금 그들 앞에 나선다면 페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입니다."
가후가 그들의 말을 가로막자, 왕방과 이몽이 질세라 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우리가 나아가 싸워 패한다면 목을 쳐도 좋소. 그러나 우리가 두 사람의 목을 베어 온다면 우리가 공의 목을 벨 것이오."
왕방과 이몽이 그토록 결연히 나서나 가후도 더 이상 반대 의견을 펴지 않으며 이각과 곽사에게 말했다.
"굳이 싸우겠다면 서편 2백여 리 밖에 있는 험한 주절산이 있습니다. 장제와 번주 두 장군에게 명하여 거기에 군사를 매복케 하시고, 이몽. 왕방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적군을 맞아 싸우게 하십시오."
이각과 과사는 가후의 말에 따라 군사 1만 5천을 이몽과 왕방에게 주었다. 두 사람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장안에서 2백 5십 리쯤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서량태수 마등과 병주자사 한수가 군사를 이끌어 그곳에 당도했다. 이몽과 왕방이 그들을 맞았다.
"역적 이몽과 왕방, 두 놈을 사로잡을 자는 누구냐?"
마등. 한수가 선두에 나서며 좌우를 둘러보자 나이 어린 장수 한 사람이 말을 달려 앞으로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얼굴은 관옥처럼 휘고 윤이 났으며, 눈은 별빛처럼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체구는 호랑이처럼 듬직하고 팔은 원숭이같이 길었다. 표범의 배에 이리처럼 날래 보이는 허리였다. 그는 손에 긴 창을 비껴들고 준마를 박차며 달려나갔다. 그는 바로 서량태수 마등의 아들 마초로 자를 맹기라 했다. 아직 열일곱의 어린 나이이나 용맹은 그를 당할 자가 없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어린 마초가 적진에서 달려 나오자 왕방은 제법 큰소리까지 쳐 가며 달려 나왔다.
"그다지도 사람이 없어 애송이를 보내느냐!"
그러나 두 사람이 칼과 창을 부딪친 지 수 합이 되지 읺아 왕방은 마초의 장창에 찔려 맥없이 나뒹굴고 말았다. 마초가 왕방을 말에서 떨어뜨린 뒤 유유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마초를 지켜 보고 있던 이몽이 급히 말을 내몰아 마초의 뒤를 쫓았다. 마초의 맞은편에서 이 모양을 보고 있던 마등이 황급히 외쳤다.
"조심하라. 네 뒤에 적이 온다!"
마등의 고함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마초가 홱 몸을 돌려 이몽을 사로 잡았다. 마초는 그때 이미 이몽이 뒤따라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른 체하며 달려오는 이몽을 급히 서둘게 하여 허점을 만들게 한 뒤 그 허를 노려 그를 사로잡을 욕심이었던 것이다. 이몽이 마초의 등을 향해 창을 찌르자 번개같이 피하니 순간적으로 당황한 것은 이몽이었다. 그러나 이몽이 잠시 허둥대며 자세를 고치려는 순간 마초는 침착하게도 긴 팔을 내뻗어 그를 사로잡았다. 이몽의 군사들은 대장 두 사람을 장난감 다루듯 하는 적장을 모자 벌써 기가 질렸다. 모두 달아날 길을 찾으며 사방으로 흩어지자 마등과 한수가 이들을 뒤쫓았다. 그들은 일사천리로 이각과 곽사가 진을 치고 있는 성벽에 다가와 이몽의 머리를 군문 위에 높이 매달아 기세를 올렸다. 이몽과 왕방이 마등의 아들 마초에 의해 목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각과 곽사는 그때서야 가후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가후의 말을 좇아 성벽의 방비를 단단히 한 채 성문을 굳게 닫고 진중에 깊이 박혀 싸움을 피했다. 서량군에서는 예측대로 두 달이 채 못 가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벌써 양초가 떨어지고 오랫동안 싸움터에서 시달린 군사들의 전의가 나날이 허물어져 갔다. 마등. 한수는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물릴 것을 의논하기로 했다. 이때 마등. 한수는 은밀히 성안으로 사람을 보내어, 내통하고 있던 마우와 충소. 유범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일은 엉뚱한 곳에서 뒤틀리고 말았다. 마우의 시종 하나가 주인 마우에게 심한 욕설과 꾸중을 들은 데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마우가 형 밖의 군사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던 시종은 주인에 대한 앙심으로 이 사실을 밀고했다. 이각과 과사는 치를 떨며 마우. 충소. 유범을 참수하고 그들의 가족까지 모조리 죽인 후 세 사람의 목을 서문 위에 효수했다. 성안의 내통자들에게 한 가닥 기대를 걸었던 마등과 한수는 그들이 효수되자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물리고 말았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이각의 군사들은 일제히 네 곳의 성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다. 이각에게 명을 받은 장제. 번조 두 장수는 마등과 한수를 뒤쫓았다. 서량군은 이미 전의마저 상실한 군사라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흩어져 도망치기에 바빴다. 마등을 뒤쫓는 장제를 마초가 매복하고 있다가 가까스로 물리쳤다. 그러나 병주사자 한수는 적장 번주의 추격에 목숨이 경각에 다다를 지경이 되었다. 한수와 번주는 원래 같은 고향 사람이었다. 한수가 쫓겨 진창 부근에 이르렀을 때 그는 말머리를 돌려 번주에게 호소했
다.
"번주, 공과 나는 동향인으로서, 어찌 이리 무정하게 쫓으시오?"
한수는 마지막 수단으로 동향인의 엤 우정에 호소했다. 번주는 그 말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바 아니었으나 곧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여기는 싸움터요. 사사로운 우정이나 인정이 있을 수 있겠소?"
"그렇다면 내가 싸움터에 나온 것도 오직 국가를 위함이오. 귀공이 국사라면 국사의 마음을 알고 있을 것이오. 나는 공에게 죽어도 좋으나 이제 추격을 좀 늦추어 주오."
번주는 한수의 간곡한 호소에 그만 인정에 끌려 차마 그를 베지 못한 채 말머리를 돌려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이 광경이 이각의 조카 이별의 눈에 띄었다. 이별이 이 사실을 가만히 전하니 이각은 노발대발하며 곧 번주를 베려 하였으나 가후가 말리며 귓속말을 했다.
"아직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휘하의 장수를 처단하여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전공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여 그 자리에서 번주의 목을 베십시오.
이각은 가후의 말을 좇기로 했다. 이튿날, 장안성안에는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가 벌어졌다. 잔치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어 갈 무렵, 이각은 칼을 빼 들고 번주의 뒤에 섰다.
"번주, 네놈은 한수와 내통했지? 감히 나를 거스리려 하다니!"
이각은 번주가 발을 할 사이도 없이 한칼에 목을 쳤다. 번주의 목이 떨어지자 동료인 장제는 까닭도 모른 채 두려움에 떨벼 바닥에 엎드려 대죄했다. 그러나 이각은 그런 장제를 붙들어 일으켰다.
"공은 아무런 잘못이 없소. 번주는 어제 싸움터에서 병주작사 안수를 살려 주었기 때문에 목을 벤 거요. 공은 나의 심복이니 마음 편히 술이나 드시오."
이각은 번주가 이끌던 군사들도 장제 휘하에 들게 했다. 장제는 백배 사례하면서 본부 군마와 번주의 근사까지 거느리고 홍농으로 돌아갔다.
떠오르는 태양 조조 서주의 도겸과 북해의 공융
조조는 산동 일대를 중심으로 천하의 영웅호걸과 당대의 인재를 모아 천하를 꿈꾼다. 또한 부모형제를 모시고자 하나 도겸의 호위군들에게 살해되어 원수를 갚고자 발병한다. 도겸은 북해와 청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유비에게도 사산을 보낸다. 이각. 곽사의 서량의 마등과 한수를 꺾자, 제후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그와 맞서려는 자가 없었다. 모사 가후도 이각과 곽사에게 민심을 얻기 위해 백성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권했으므로 조정에서는 차츰 생기가 돌아 한동안은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무렵, 청주에서는 황건적이 또다시 일어났다. 중앙이 흔들리면 그 흔들림에 대답하듯이 이렇다 할 두목도 없는 초적들이 떼지어 다니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그러다 그 수가 수십만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약탈과 살생을 일삼았다. 이각과 곽사는 황건적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자 백관을 불러모아 의견을 물었다. 태복 주전이 먼저 말했다.
"산동에서 일어난 황건적을 토벌하려면 그곳 가까이에 있는 조조를 등용하여아 할 것입니다."
이각과 곽사는 즉시 산동 동군태수로 있는 조조를 천자에게 천거하였다. 그리하여 조조에게 제북상 포신과 힘을 합해 '황건적을 토벌하라'는 천자의 영이 내려졌다.
조조가 동군으로 오게 된 것은 그 당시 황건적 난을 틈타 일어난 각처의 도적 떼들 때문이었다. 그들 도적 떼들은 전국 각처에서 일어나 서로 연대를 맺고 있었는데 이들을 흑산적이라 불렀다. 괴수는 장연이란 자였는데, 흩어져 있는 도적의 수가 무려 1백만에 가까웠다. 하북의 여러 고을들이 이들의 근거지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들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그러다가 괴수 장연이 표문을 올려 조정에 투항하자, 그로 하여금 도적의 잔당들을 진압케 했다. 흑산적은 이렇게 하여 진정되었으나 그 이후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할 무렵, 어지러운 세상을 틈타 다시 무리를 지어 일어났던 것이다. 그들 무리 중 우독과 백요 등이 수심반을 이끌고 위군과 동군에 출몰했다. 이에 동구태수 왕굉이 구원을 요청한 장수가 바로 조조였다. 관도의 여러 제후들이 불화와 반목으로 제각기 근거지로 돌아간 후의 일이었다. 조조가 형양에서 참담한 패전을 겼은 후 위병을 이끌며 떠돌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조조는 태수 왕굉의 청을 받아들여 위병들을 이끌고 복양에서 백요의 군사들과 맞닥뜨려 이겼다. 이후부터 도적 떼들은 감히 동군을 넘보지 못하니 동군은 예전처럼 평온해졌다. 이로 인해 조조는 동군에 있어 실질적인 태수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때 원소는 조정에 표를 올려 도적 떼들을 물리친 조조의 공을 들어 그를 동군태수로 천거했다. 그때 원소는 기주태수 한복의 원병 요청을 기화로 기주를 뺏어 힘을 기르고 있었다. 이럴 때 조조를 도와주면 그와 다시 맺어질 뿐만 아니라 필요하면 그의 힘을 빌 수 있다는 생각에서 표를 올린 것이었다.
조정에서 조조를 동군태수로 봉하자 조조는 확고히 동군을 근거지로 발판을 다지기 시작했다. 세금으로 군자를 마련할 수 있게 되자 착실히 군사를 늘리며 조련시키는 한편 각지에서 많은 인걸들을 모았다. 특히 각 처의 현재들을 초빙하고 유능한 선비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했다. 그런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는 어진 선비와 무사들이 많았다. 한편으로 세작(첩자)을 장안에 보내어 동태를 파악케 했다.
"왕윤이 초선이란 가기를 내세워 연환계를 써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 하였다고 하옵니다."
"왕윤이 여포와 이숙을 끌어들여 동탁을 모살하였다는 소식이 옵니다."
"동탁의 잔당, 이각과 곽사의 무리들이 병권과 정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답니다."
이런 소식들이 쉴 새 없이 조조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럴 즈음 조정에서 조조에게 황건적을 토벌하라는 영이 내려온 것이었다. 조조는 애당초 이각 등 조정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새로은 조신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천자의 영으로 내려온 명령이니 복종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한편으로는 오랜 조련을 거친 자기의 병마를 움직일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조조는 수양에서 제북까지 쳐들어가며,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투항해 오는 황건적들을 다시 선봉으로 내세우고 몰아치니 도처에서 항복해 오는 적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조조가 출진한 지 불과 1백여 일 만에 30만에 이르는 포로를 잡고 황건적을 완전히 소탕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훈을 높이 여겨 진동장군에 명했다. 이로 인해 그의 위명은 날이 갈수록 천하에 퍼져 가니 실리는 조정에서 내린 그런 관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조조는 항복한 30만의 군사에다 백성들 가운데 힘센 장정들을 뽑아 모두 백만에 가까운 군대를 양성했다. 제북, 제남의 땅은 미옥하여 이들 군사를 기를 군량이나 재화도 넘칠 정도로 많았다.
때는 초평 3년 11월이었다. 조조는 휘하의 1백만 대군 중에서 정예병을 뽑아 '청주병'이라 칭한 뒤 다른 군사들은 모두 돌아가 농사를 짓도록 했다. 농민의 장정을 중핵으로 하여 특별히 훈련을 시킨 이 청주병을 조조는 휘하의 주력군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조조는 연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천하의 명사들을 초청하는 한편, 전국 방방곡곡에서 찾아드는 인재와 영웅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모여든 사람 가운데 영주 영음 사람 순욱과 그의 조카 순유가 있었다. 순욱의 자는 문약으로 그의 조부 순숙은 순 환제 때에 이름을 천하에 떨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순가팔용'으로 불리워지는 아들 중 둘째 곤과 여섯째 상이 뛰어났다. 순욱은 제남상을 지낸 곤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사람들은 그를 '왕좌지재'로 일컬었으며, 그가 성년이 되자 조정에서는 수궁령의 벼슬을 내렸다. 이후 동탁이 그를 향부령으로 삼았으나, 그는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 영주에 돌아온 순욱은 어느 날 부모에게 기주로 거처를 옮기도록 권했다.
"뒷날 천하에 난이 일어나면 군사들이 이곳에서 맞닥뜨리게 되니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권하였으나 대부분 순욱의 말을 듣지 않았다. 기주엔 이미 원소가 태수로 부임해 있었다. 원소는 극진한 예를 베풀며 그를 맞았다. 그러나 순욱은 원소가 그릇이 크지 않음을 알고 조조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조조는 그가 찾아오자 기뻐했다.
"그대는 나에게 한 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를 얻게 한 장자방과 같은 분이오."
조조는 그에게 행군사마의 벼슬을 주며 진심으로 자기를 도와 달라고 청했다. 또 그의 조카이며 황문시랑의 벼슬을 지낸 바 있는 순유에게는 행군교수의 직책을 주었다. 순유는 자가 공달인데 그 역시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런 어느 날 순욱이 조조에게 한 사람을 천거하며 말했다.
"연주에 한 인물이 있는데,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가 누구요?"
"동군 동아 사람으로 자는 중덕, 이름은 정욱이라 합니다."
"나도 그 이름은 들은 바 있소."
조조는 즉시 사람을 풀어 그를 찾도록 하니 정욱은 신 속에서 글만 읽으며 은거하고 있었다. 조조는 정중히 그를 청해 맞아들였다.
"나는 보고 들은 바가 좁고 재주 또한 얕습니다. 공과 동향인 곽가야말로 당대의 현사인데 어찌 그를 부르지 않습니까?"
정욱의 말에 조조도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내가 어찌 그를 잊고 있었던가?"
그리하여 정욱이 천거햐여 준 연주 사람 곽가를 초빙하고, 곽가의 천거로 광무 황제의 직손 회남 성덕사람 유엽을 맞았다. 유엽의 자는 자양이었다. 유엽은 또 두 사람의 현사를 천거했다. 산양 창읍에 사는 만총으로 자는 백령이라 했으며, 또 한 사람은 무성의 여건으로 자를 자각이라 했다. 이미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라 조조는 그들을 군중종사로 삼았다. 또한 그들 두 사람이 천거한 진류 평구사람이며 자가 효선인 모개를 맞으니 조조의 주위는 인재가 기라성처럼 모여들었다.
이들 못지않게 태산 거평 사람으로 자를 문칙이라고 하는 우근과 진류 사람 전위를 얻은 것은 조조의 군사를 강화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우금은 활쏘기, 말 달리기 등 무예가 출중한 장수로 그의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찾아왔다. 또한 전위는 체격이 장대한 장수로 무게 80근이나 되는 양지철극을 비껴들고도, 말 위에 올라 창을 쓸 때는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하다는 천하장사였다. 원래는 장막의 휘하에 있었으나, 장막의 다른 부하와 다툼이 생기자 전위는 한주먹으로 때려죽이고 몸을 피해 산속에 숨어 지내던 중 하후돈이 그를 조조에게 소개한 것이다.
"제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이 사람이 호랑이를 쫓아 냇물을 한달음에 건너뛰는 것을 보고 데려다가 군중에 두었는데 공께 특별히 추천하는 바입니다."
조조는 그에게 무예 시범을 청했다. 전위는 80근의 양지철극을 들고 가볍게 말 위에 올라 쏜살같이 달리더니, 허공을 가로지르며 양지철극을 나무막대기 휘두르듯 놀리며 춤을 추었다. 과연 천하장사의 기막힌 창솜씨였다. 때마침 거센 바람이 불어 홀연 영정의 장대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대장기가 바람에 휩쓸리며 넘어지려 했다. 부근에 있던 군사들이 몇십 명이 달려가 기를 붙들었으나 강풍을 이기지 못해 기가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전위가 이를 보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모두 물러서라!"
한소리 지르더니 한 손에 번쩍 기를 일으켜 세웠다. 한참 동안 세찬 바람이 깃발을 찢을 듯이 불어 왔으나 그는 결코 두 손을 쓰지 않았다. 조조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음-. 옛 악래보다 월등한 역사로다!"
조조는 그에게 백금란의 전포에 명마를 주고 장전도위에 명했다. 조조가 전위의 힘에 감탄하여 비유한 아래는 예날 은나라 주와의 신하로, 천하무적의 장사였다. 조조가 전위에게 그보다 월등하다 했다 해서 이후부터는 그의 별호가 악래가 되었다. 그 뒤로도 조조를 찾아오는 사람이 끊이질 않으니, 조조의 위세는 산동 일대를 떨쳐 울렸다. 조조는 휘하에 수십만의 군사와 수백을 헤아리는 모사와 장수를 거느리게 되자 시선을 천하로 돌렸다. 그러나 이때 순욱이 나서며 조조를 일깨웠다.
"주공깨서는 아직도 움직여선 아니 됩니다. 지금 이각과 곽사가 조정에 들어섰다고는 하나 그들은 조정에 뿌리박을 만한 무리가 되지 못합니다. 가벼이 군사를 움직이면 그들과 같은 무리로 오인받을 우려가 있습니다. 아직은 대국을 주재할 만한 인물이 나설 때가 아닙니다. 병마를 쉬게 하면서 형세를 살피시는 게 좋겠습니다. "
"문약의 말이 옳소. 나 또한 그 같은 생각이었으나 조정이 워낙 어지러워 잠시 울분이 치솟았을 뿐이오."
조조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날, 만총과 여건의 천거로 맏아들인 항장과 모개가 조조에게 진언했다.
"주공, 천하를 잡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필요합니다. 즉 첫째가 천자를 받들여 대의명분을 세움이요, 둘째가 농민 출신자를 군사로 써야 한다는 점입니다. 백성들의 대부분이 농민이며, 농민이야말로 강병의 근원입니다. 셋째가 영내의 농업을 진흥시켜야 할 것입니다. 농업을 진흥시킴으로서 경제력을 높이고 군비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윈칙을 지키신다면, 주공처럼 영명한 자질과 강대한 역량을 가지고 계신 분은 천하의 패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조조는 즉시 이 진언을 받아들였다. 원대한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어긋남이 없는 원칙이요, 정책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후 조조가 일생에 걸쳐 실시한 존왕봉제, 농업진흥, 둔전병제도, 경제력 중시, 부국강병 인재 등용 등의 여러 가지 정책은 이때부터 그 기초가 다져진 것이었다. 그런 조조는 어느 날 태산태수 응소를 불렀다.
"내 가친을 모셔 오라."
조조는 천하를 다투기 전에 일가권속을 자기의 근거지로 불러들일 작정이었다. 이제는 산동 일대에 기반을 굳히고 일신의 안정도 이루어지자 늙은 부친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언제 어니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대 세력으로부터 가솔들을 불러들여 후환을 없앤다는 뜻도 있었다. 조조의 부친 조숭은 진류에서 난을 피하여 낭야라는 벽촌에 은거하고 있었다. 조조는 서신을 응소에게 주어 낭야로 보내 부친을 모셔 오도록 했다. 조조가 보낸 사신을 맞은 부친 조숭의 기쁨은 컸다. 조숭은 주위 사람들에게 아들 자랑을 하며 말했다.
"그 애의 숙부인 귀도, 친척들도 조조가 소년 시절에는 장래가 염려스러운 부랑배라는 등 무던히 험담을 했었지. 그러나 나는 그 애의 장래를 믿고 있었다네. 역시 내 눈은 어긋남이 없지 않았는가."
조숭의 집안은 가세가 기울었다 하나 일가족 40여 명에, 하인도 1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가솔들과 가재도구를 1백여 대의 수레에 싣고 연주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이때 서주태수 도겸은 이전부터 조조와 친분을 맺고 싶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조조의 부친이 그곳을 지난다는 말을 듣고 성밖까지 나와 영접하며 이틀 동안 잔치를 열어 떠나는 길을 축하했다.
'한 고을의 태수가 하잘것없는 늙은 나를 이렇게 대할 아유가 있겠는가. 다만 아들 조조 때문일 것이다.'
조숭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즐거운 여행길에 올랐다. 도겸은 친히 성 밖까지 전송하며, 휘하의 도위 장개에게 5백의 군사를 주어 호송토록 했다.
'참 좋은 위인이다.'
조조의 부친 조숭은 도겸의 사람됨에 감복했다. 도겸은 온후한 군자라는 것은 그 일대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조숭은 환대에 고마움을 표하고 길을 떠났다.
계절은 때마침 중추가절이었다. 그런데 일행이 화비라는 산중에 당도하자, 변덕이 심한 가을 날씨가 갑자기 흐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굵은 빗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산봉우리도, 계곡도 안개 속에 휘감긴 사나운 날씨로 변했다.
"소나기다, 어디 비를 피할 만한 곳이 없을까?"
"저기 절이 있는가 보군. 산사의 문이 보이는데. . ."
일행은 비에 흠뻑 젖은 채 하룻밤을 절에서 묵어가기로 했다. 중들은 조숭 일행만 안으로 불러 편히 쉬게 하고 장개와 군사들은 바깥 회랑에 머물도록 했다. 차가운 가을비는 주룩주룩 한밤중까지 내라고 있었다. 어두운 복도에서 비에 젖은 채 잠을 청하는 군사들의 불평이 심했다. 그러자 장개가 부하 두목 몇을 부르더니 인적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 소곤거렸다.
"여보게, 저녁 무렵 군시들이 모두 불만이 가득 찬 얼굴들을 하고 있지 않던가?"
"요즈음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데다, 이런 쓸데없는 임무까지 떠맡아 비에 젖은 채 잠을 자야 하니. . . 연주까지 상전도 아닌 저런 늙은이를 호송해 간들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군사들을 탓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부하 두목이 장개의 꾸짖음을 각오하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 그러나 장개는 꾸짖기는커녕,
"그럴 테지. 무리도 아니지." 하더니 말을 이었다.
"여보게, 우리가 본시 황건 일당으로서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지낸 사람들이 아닌가. 지금은 하는 수 없이 도겸의 수하 노릇을 하고 있으나 이렇다 할 좋은 대접도 받지 못하네. 지금은 우리가 호위하는 조숭 일행의 짐이 1백여 대의 수레나 되니 아마도 금은 재화도 많이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네. 이것들을 가로챈다면 부귀도 누릴 수 있을 것 같네. 어떤가, 오늘 밤 이것들을 가로채서 산채에 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렇잖아도 불만에 차 있던 수하들이 장개의 말을 마다할 리 없었다. 이런 흉계가 꾸며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조숭은 방 안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밤 삼경이 가까이 올 무렵이었다. 갑자기 절간 주위에 소란스런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조조의 친동생 조덕이 놀라 칼을 차고 밖으로 나오며 물었다.
"누구냐, 무슨 일이냐?"
조덕이 속옷 바람에 방문을 열고 뛰쳐나가자 장개가 기다렸다는 듯이 단칼에 그를 베었다. 이어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물려 퍼져 조용하던 절간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장개 일당은 흉악한 비적으로 변해 닥치는 대로 살육을 자행했다. 조조의 부친 조숭은 황망히 첩과 함께 소란을 피해 뒷간에 숨어 있었으나 끝내 발각되어 난도질을 당하게 말았다. 그 밖에 가족과 하인 등 1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도 모조리 도륙당했다. 사신 응소는 이 흉변에 혼비백산하여 겨우 몇 명의 부하만을 데리고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조조의 부친 조숭이 참변을 당한 터라 후환이 두려워 조조에게는 돌아가지 못하고 원소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피비린내를 풍기던 밤이 밝았다. 아직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가을비 속에 산사는 불타고 있었다. 장개 일당은 재물과 가재도구를 실은 수레를 이끌고 사라졌다. 뒷날 사람들은 그때의 참혹한 광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천하가 다 아는 영웅 조조
지난날 여백사의 전 가족을 몰살하더니
이제 살해당함을 어찌 막지 못하는가
하늘의 이치, 인과응보는 잘못됨이 없구나.
응소의 졸개 중 살아남은 자가 이 소식을 조조에게 전했다. 조조는 이 흉변을 전해 듣자 땅을 치며 통곡하다가 혼절했다. 조조는 어디까지나 노부의 죽음이 도겸의 탓이라 여겼다. 젊었을 시절, 자기의 판단 잘못으로 여백사의 가족을 모조리 죽였던 조조였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흉변이 자기에게 일어나자 조조는 그 잔악함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도겸이란 놈이 부하를 시켜 내 아버님을 죽이다니, 아들로서 불구대천의 원수를 갚지 않고 어찌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당장 군사를 이끌고 서주에 풀 한 포기 나지 못하게 하리라."
조조는 그날로 대군 동원령을 내렸다. 순욱과 정욱에게 군사 3만을 주어 견성, 범현, 동아의 세 현을 방비케 하고, 조조는 스스로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서주를 향해 말을 몰았다. 선봉은 하후돈, 우금, 정위가 맡도록 했다. 조조는 '보수설한'이라고 쓴 깃발을 펄럭이고 말을 달리며 외쳤다. 원수를 갚고 한을 풀겠다는 뜻이었다.
"성을 빼앗거든 성안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불태워 나의 아버지 원수를 갚도록 하라!"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조조가 대군을 일으켜 소주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은 전국 방방곡곡에 퍼졌다. 이때 도겸과 교분이 두터운 구강태수 변냥이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도겸을 돕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이 말을 들은 조조가 격노하여 하후돈에게 영을 내렸다.
"구강태수 변양이 도겸을 구하러 온다 하니 너는 서주로 향하는 변양의 길을 끊어 그들을 쳐라!"
하후돈은 군사를 몰아 구강으로 내달렸다. 마침 구강의 동군종사로 진궁이란 사람이 있었다. 진궁은 이전에 조조가 동탁을 죽이려다 실패한 후, 도중에 붙잡히는 몸이 되었으나 그를 살려 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뜻을 함께 하기로 맹세한 사이였으나 여백사 일가족을 죽이는 잔인함에 조조에게 크게 실망하여 행방을 감춘 사람이었다. 진궁 역시 도겸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여서 조조를 만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와 조조 만나기를 청했다. 조조는 진궁을 보자 대뜸 그가 무엇 때문에 자기를 만나러 온 것인지를 짐작했다.
"공은 지금 무얼하며 지내고 있소?"
조조의 물음에 진궁은 다소 계면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동군의 종사라는 말직을 맡고 있습니다.
조조는 그 말에 냉소를 머금었다.
"그렇다면 서주의 도겸과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겠구려. 짐작건대 공은 그자를 위한 세객 같은데, 아마 공의 간청도 이 조조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을 것이오. 이왕 먼 길을 왔으니 쉬었다가 가시오."
"말씀하신 대로 그런 목적으로 찾아뵈었습니다. 소생이 아는 도겸은 세상에 어진 군자입니다. 춘부장께서 참혹한 변을 당한 것은 도겸과는 전혀 무관한, 장개의 소행입니다. 소생은 죄 없는 군자가 고통받으며, 장군의 성망에 흠이 생길까 하여 근심스럽습니다."
"그런 헛소리 마시오. 공께서 전에 나를 버리고 떠나시더니 이제 무슨 면목으로 나를 다시 찾으셨소!"
조조는 진궁의 간언에 지금까지의 미소가 호통으로 변했다.
"우리 일가족을 몰살시킨 원한을 씻는 일이 어째서 내 성망에 흠이 된다는 말이오?"
조조가 격앙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잇자 진궁은 더 말을 붙이지도 못하고 물러갔다. 그러나 조조를 설득시키지 못한 것을 도겸에게 알릴 면목도 없었다. 그리하여 진류태수 장막에게로 갔다.
'보수설한'이라는 커다란 깃발은 조조의 분노를 싣고 일사천리로 소주성을 향해 진격해 갔다. 조조의 군사는 가는 곳마다 무고한 백성을 죽였다. 적과 내통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심지어 백성들의 무덤까지 파헤치니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서주의 늙은 태수 도겸은 조조가 죄 없는 백성까지 씨를 말린다 하니 땅을 치고 하늘을 우러러 피눈물 지으며 한탄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두어 하늘을 거스렸기에 내가 다스리는 백성들이 무고하게 재앙을 당하는구나!"
도겸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았다.
"조조의 군사를 꺾을 수는 없다. 그의 원한을 산 것은 모두 내가 부덕한 소치이다. . . 나는 그의 결박을 받은 후 기꺼이 이 목을 바치려 한다. 그 대신 백성들이나 우리 군사들의 생명만은 보전토록 청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도겸의 말에 일제히 부복하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찌 태수님을 희생시키고 저희들만 살겠다고 하겠습니까!"
장수 중의 조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모자람이 많으나 태수님을 도와 조조를 물리칠까 하옵니다."
조표의 말에 도겸은 부득이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맞으러 나갔다. 조조의 군사들은 눈사태가 난 것처럼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본진이 세워진 깃발에 '보수설한'이란 글귀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펄럭이고 있었다. 전열을 가다듬은 군마는 그 위풍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조조는 흰 상복을 입고 진두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이에 도겸이 말을 달려 문기 앞으로 나와 조조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나 도겸은 이전부터 공과 교우를 맺고자 했던 사람이오. 그래서 장개로 하여금 공의 부친을 호위하라고 했었소. 그러나 장개란 놈이 도둑의 심보를 버리지 못해 그런 흉변이 일어났소. 결코 나의 본의가 아니니 공은 이 점을 밝게 헤아려 주기 바라오."
그러나 눈에 핏발이 선 조조의 귀에 그 말이 들어올 리 만무였다.
"이 늙은 놈아, 네놈이 우리 가친을 멸하고 이제 와서 무슨 망발을 하는 거냐. 누가 저 늙은 도적을 사로잡을 텐가!"
조조가 소라 지르자 하후돈이 말을 달려나갔다. 도겸은 급히 말을 몰아 성안으로 들어갔다. 하후돈이 그 뒤를 질풍처럼 달려오자, 조표가 나섰다. 두 사람이 부딪쳐 싸울 때였다. 때아닌 광풍이 불어닥쳐 모래가 흩날리고 돌이 굴러 눈을 뜰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양편은 싸울 수가 없어 각기 군사들을 물렸다. 도겸은 긴 함숨을 돌리며 성안의 장수들과 대책을 협의했다.
"조조의 대군을 막을 방책이 없으니 이제 내 발로 조조의 진영에 들어가 죄 없는 성 중의 백성들을 구하는 길밖에 없는 것 같소. 조조의 대군을 막을 방책이 없겠나들 말씀들 좀 해보십시오."
"아니 되옵니다. 오랫동안 선정을 베푸시어 서주의 백성들은 모두 태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았습니다. 조조의 군사가 아무리 대군이라 하나, 성은 쉽사리 함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한 가지 계책을 써 저들로 하여금 죽어도 묻힐 자리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보니 별가종사 미축으로, 자를 자중이라 했다. 미축의 계책이란 한꺼번에 두 군데에 응원군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은 북해의 공융에게 원병을 청하고, 또 하나는 청주의 전해에게 구원을 청하는 것이었다. 도겸은 그의 말에 따라 두 통의 서한을 써 진등으로 하여금 청주로 보내고 미축은 북해로 떠나게 했다. 도겸은 성문을 굳게 닫고 구원군이 올 때를 기다리며 조조군의 공격에 대비하기로 했다. 한편 미축의 친구이며 자를 문거라고 하는 공융은, 원래 노나라 곡부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이미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열 살 때의 일이었다. 하남윤 이응이란 사람을 만나러 갔는데 문지기가 못 들어가게 하자 공융은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집안과 이씨 집안은 옛부터 잘 아는 사이이니 문을 여시오."
문지기는 그 말에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이응이 공융을 맞으며 물었다.
"어찌하여 너의 집안과 우리 집안이 아는 사이냐?"
"옛날에 우리 조상 공자님께서 이씨이신 노자님께 예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셨지요."
이응은 공융의 대답을 듣고 감탄했다. 때마침 태중태부 진위가 이응을 방문했다. 이응이 공융을 가리키며 영특한 아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진위가 말했다.
"어려서 영리하다고 자라서도 반드시 크게 되는 법은 아니지요."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공융이 물었다.
"그럼 어르신네께서는 분명히 영리하셨던 모양이죠?"
그 말에 진위는 크게 웃으며 칭찬했다.
"이 아이는 자라서 큰그릇이 되겠구먼. . ."
소년 공융이 자라서 중랑장이 되더니, 점점 벼슬이 올라 북해군의 태수가 된 것이었다. 그는 항상 그를 찾는 사람을 반겨 맞았다.
"집에는 손님이 가득하고, 술통에는 술이 가득, 이것이 내가 가장 바라는 바이오."
그는 곧잘 이렇게 말했다. 북해에 부임한 지 6년, 그동안 이곳 백성들로부터 민심도 크게 얻고 있었다. 그런 공융에게 미축이 찾아오자 공융은 그를 반기며 온 까닭을 물었다. 미축은 전후 사정을 얘기하고 도겸의 서한을 꺼내 보였다. 공융이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말했다.
"나와 도겸과는 우의가 두터운 사이이며 또한 미축 공께서 친히 오셨으니 어찌 아니 가겠소. 그러나 조조와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먼저 서한을 보내 화해를 청해 보겠소. 만일 그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때 군사를 일으키도록 합시다."
"조조의 군사는 방대합니다. 그 군사를 믿고 결코 화해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미축이 다급한 목소리로 공융을 일깨웠다. 이에 공융운 진병을 준비하는 한편, 조조에게 서한을 보내 화평을 청하기로 했다. 그런데 공융에게 뜻하지 않았던 사태가 벌어졌다. 돌연 황건적 관해가 수만의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었다. 공융은 우선 급히 군사를 수습하여 성 밖으로 나아가 황건적을 맞아야 했다. 황건적의 괴수가 말을 달려 나오며 외쳤다.
"북해 땅은 넓고 기름져 양곡이 넘쳐 흐를 지경이라는 말을 듣고 왔다. 우리에게 양곡 1만 석만 달라. 그러면 즉시 물러나겠다. 만일 거절한다면 우리는 성을 짓밟고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겠다."
이 말에 공융은 크게 노하며 소리쳤다.
"나는 한나라의 신하로 한나라의 땅을 지키고 있다. 곡식이 있다 한들 어찌 너희 도적 떼에게 양곡을 주겠느냐?"
이에 관해는 칼을 높이 쳐들고 이를 갈며 쳐들어왔다. 공융의 휘하 장수 종보가 창을 치켜들고 맞섰다. 그러나 몇 합 싸우지도 못하고 관해의 칼에 쓰러졌다. 종보가 쓰러지자 공융의 군사는 성안으로 몰려들기에 바빴다. 군사들이 성안으로 물러가니 관해는 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공융은 우울하고 괴로운 마음으로 성루에 올라 황건적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갈 길이 바쁜 미축 또한 근심에 빠져있었다. 이때 성 밖으로부터 힌 장수가 나타나더니 황건적의 진을 헤집고 성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달려드는 도적의 무리를 향해 번개같이 창으로 후려치는가 하면, 찌르고 베며 무인지경을 달리듯이 다가왔다. 그는 곧장 성벽 아래로 와서 큰소리로 외쳤다.
"문을 열라, 성문을 열어라!"
공융은 선뜻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는 사이 적군 수십 명이 해자 가까이 그 무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무사는 훌쩍 말머리를 돌리더니 순식간에 10여 명을 찔러 넘어뜨렸다. 도둑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공융은 급히 성문을 열어 그를 맞아들였다. 그 젊은 무사는 말에서 내려 공융에게 예를 올렸다. 공융은 그제서야 누구냐고 물었다.
"성은 태사이며, 이름은 자입니다. 동래의 황현 사람으로 태사자, 자는 자의라고 합니다. 저의 노모께서 공의 은덕을 많이 입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어저께 요동에서 돌아와 이 난리를 당한신 것을 알았습니다. 노모께서 '빨리 가서 태수님을 도와 드리라'고 하시기에 말을 달려왔습니다."
공융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비록 그를 처음 대하나 이미 그의 용맹을 잔해 듣고 있던 터였다. 성문 밖 20여 리쯤에 태사자의 노모가 살고 있었다. 태사자는 항상 집을 떠나 있는 터라 늙은 노모의 생활이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이를 공융이 알고 식량과 의복을 보내 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노모는 그때의 도움을 받은 태수를 잊지 않고 아들을 보내 돕게 했던 것이다. 공윤은 갑옷과 주마, 안장을 태사자에게 내리며 후히 대접했다. 태사자가 고마움의 예를 표하며 공융에게 말했다.
"저에게 정예 군사 1천만 주시면 성 밖으로 나가 도적을 물리치겠습니다."
그러자 공융이 태사자를 만류했다.
"그대가 아무리 용맹스럽다 하더라도 지금은 도적들의 수가 너무 많으니, 섣불리 나서서는 안 되네."
"만일 제가 이들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노모를 다시 뵈올 수 있겠습니까. 설령 싸우다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좋으니 내보내 주십시오."
그러자 공융은 잠시 고개를 숙여 깊이 생각에 잠기다, 무겁게 입을 열어 태사자에게 청했다.
"나는 유현덕이란 분이 당대의 영웅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네. 만약 그가 와 준다면 이 도적은 능히 물리칠 수 있으리라 여겨지네. 그러나 도적들에게 둘러싸인 판국이라 마땅히 보낼 사람이 없네."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태사자는 주저하지 않고 선뜻 나섰다. 공융은 기뻐하며 유비에게 보내는 글을 써 주었다. 태사자는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랐다. 어깨에는 활을 메고 손에는 쇠창을 들었다. 성문이 열리고 태사자가 달려 나오자 성 밖 연못 둑에 있던 황건적 한 무리가 달려들었다. 태사자는 가까이 다가오는 도적들 몇 명을 창을 휘둘러 찔렀다. 순식간에 태사자의 창에 대여섯 명이 나뒹굴자 도적들은 잠시 주춤했다. 그 틈을 이용하여 태사자는 말을 달렸다. 적장 관해는 태사자가 혼자 말을 달리자 필시 구원병을 청하러 가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관해는 수백 기의 병마를 이끌고 뒤쫓았다. 그러나 태사자는 창을 활로 바꿔 잡고 화살을 쏘니, 하나도 빗나가는 화살이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수십 명이 그 화살에 쓰러지자 도적들도 더 이상 뒤쫓지 못했다. 태사자는 포위를 뚫고 그날 밤 안으로 말을 달려 평원현에 당도했다.
유현덕의 출진 도겸은 서주를 맡기려 하고
황건적과 조조의 침공으로 서주태수 도겸은 미축과 함께 북해의 공융에게 원병을 청하고, 공융은 유비에게 부탁하여 서주에 도착한다. 유비는 조조에게 화해의 사신을 보내나 조조는 이를 거절하고 여포가 연주를 침략했다는 소식에 급히 회군한다.
평원현에 당도한 태사자는 유비 앞으로 나아가 절을 올리고 공융이 황건적에게 포위되어 위급하다는 얘기를 전했다. 유비는 태사자가 전해 준 공융의 글을 읽어 본 후 태사자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시오?"
"예. 태사자라 하오며 동해에 사는 사람입니다. 공융 태수와는 혈연관계도 아니며, 동향도 아닙니다만 제 노모께서 입은 은혜를 갚고자 하여 달려온 것입니다. 묵해성이 황건적의 괴수 관해에게 짓밟힐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공융 태수는 인(인)과 의(의)를 중히 여기시는 장군의 의협심을 믿고 도움을 청하러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유비는 공융이 자기에게 구원을 청한 것이 흐뭇해 옷깃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북해의 공(공) 태수가 세상에 유비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는구나!"
공융의 서찰과 태사자의 말을 듣고 사정을 알게 되자 유비는 관우와 장비, 두 아우에게 출진을 서두르게 했다. 유비는 평원현을 청주자사 전해(전해)에게 부탁한 뒤 군사 3천을 이끌고 북해로 떠났다. 이때, 적장 관해는 멀리서 구원군이 달려오는 것을 보자 부하들을 이끌어 유비를 대적고자 나왔다. 그는 구원군의 수가 얼마 되지 않자 코웃음을 쳤다.
"구원군의 수가 겨우 몇천밖에 되지 않으니 단숨에 짓밟아 버려라."
유비는 관우, 장비, 태사자와 함께 진두에서 말을 나란히 하여 나섰다. 관해가 얕잡아보고 위세를 부리며 나왔다. 이에 태사자가 말을 몰아 달려나가려 했으나 한 발짝 먼저 관운장이 관해를 가로막았다. 양쪽 군사들은 관우와 관해가 양 진영 가운데에서 맞서자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관우의 청룡도와 관해의 긴 칼이 흰 무지개를 그리며 부딪쳤다. 그러나 관해는 관우의 적수가 아니었다. 수십 합을 어우르고 부딪는가 하더니 관우의 청룡도가 한 번 번뜩이자 관해의 머리채가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와아 와아!"
유비의 대열에서는 천지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일었고, 관해의 부하들은 기가 죽어 머뭇거렸다. 그러자 유비, 장비, 태사자가 한꺼번에 적진으로 밀고 들어가니 마치 호랑이가 들판의 양 떼들 속에 뛰어든 듯했다. 유비의 쌍고검, 장비의 장팔사모, 태사자의 장창이 적진에서 춤을 출 때마다 수십 명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성문 위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공융은 급히 군사를 풀어 도적 떼들을 협공했다. 유비군에게 짓밟히던 도적 떼들은 공융에게 협공까지 당하자 무기를 놓고 항복하는 자가 태반이나 되었다. 관해의 부하들 중 극히 적은 수만이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났을 뿐이었다. 공융은 유비를 성안으로 맞아들여 예를 올린 후 성대하게 축하연을 베풀었다. 축하연이 무르익어 갈 무렵 공융은 미축(미축)을 불러 유비에게 소개했다.
"유 상공께 문후드리게 됨은 소인에게는 큰 기쁨이옵니다."
미축이 유비에게 정중히 절하며 예를 올렸다. 깨끗하고 수려한 용모를 지닌 미축을 보자 유비는 까닭 모를 따뜻한 정감을 맛보고 있었다. 이전에 한 번도 그를 대한 적은 없었으나 오랫동안 가깝게 대해 왔던 것처럼 친근감을 느꼈다. 미축은 동해 구현 사람으로, 자를 자중이라 했다. 그의 집은 대대로 이어온 큰 부호의 집이었다. 어느 날 일은 보고 수레를 타고 오는데 길에서 우연히 용모가 뛰어나게 아름다운 한 여인을 만났다. 그 여인은 수레에 태워 주기를 청하였다. 미축은 그 여인을 태우고 자신은 걸어갔다. 그러자 그 여인은 미축에게 수레에 타기를 간청했다. 수레 주인이 자기 때문에 걷고 있는 곳을 안쓰러워하던 여인의 권유에 미축도 마지못해 수레에 올랐다. 그러나 수레에 올라서도 미축은 아름다운 그 여인에게 곁눈질 한 번하지 않고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 여인은 수레에서 내리며 뜻밖의 말을 남겼다.
"저는 남방의 화덕진군(화덕진군 : 불을 관장하는 신)으로 옥황상제의 명을 받들어 그대의 집을 불태우러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예의가 깍듯하고 인품이 곧음에 감탄하여 이 사실을 알려 드립니다. 집으로 가는 즉시 재물을 건져내도록 하시오. 나는 오늘 밤중에 그대의 집에 이를 것이오."
말을 마친 여인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미축은 그 말을 듣곤 깜짝 놀라, 수레를 재촉하여 집에 이르자마자 재물들을 끄집어내었다. 한밤중이 되자 과연 부엌에서 불길이 일더니 온 집안으로 번졌다. 미축은 집이 모두 불탔으나 재물은 모두 건졌으므로 별 어려움 없이 다시 집을 지을 수 있었다. 미축은 그 후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전처럼 재물을 탐하지 않았으며, 재산을 풀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이 소식을 듣게된 태수 도겸은 미축을 불러들여 별가종사로 삼았던 것이었다. 그러다 조조의 대군이 몰려오자 친구인 공융에게 원병을 청하러 왔던 것이었다. 미축은 유비에게 서주태수 도겸이 조조의 대군에게 포위당하게 된 경위를 소상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유비는 미축을 위로했다.
"원래 도겸 공께서는 어진 군자이신 데 이토록 터무니 없는 누명을 쓰시다니 애석하기 짝이 없소."
옆에 있던 공융이 유비에게 물었다.
"유 공, 억울한 도겸 공과 백성들이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
그러나 유비는 공융의 말을 듣고서도 선뜻 도겸을 도우러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를 본 공융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공께서는 한실의 혈통을 이으신 분입니다. 조조가 죄 없는 백성을 죽이고, 강한 힘만 믿고 약한 자를 괴롭히는데도 어찌 이를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저와 함께 가서 서주 도겸을 구하지 않으시렵니까?"
유비는 그제서야 속마음을 밝혔다.
"거절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실은 거느린 군사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가볍게 움직였다간 서주를 구하지도 못하고 조조의 기세만 그 높이가 드높일까 그것이 염려됩니다."
"제가 도겸을 구하려 드는 것은 옛 친구의 정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대의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은 어찌 그 대의를 염두에 두지 않으십니까?"
공융이 안타까운 마음이 치받쳐 다소 격앙된 목소리가 되었다. 유비도 공융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더 이상은 주저하지 않았다.
"정히 그러시다면 태수께서 먼저 가십시오. 저는 공손찬에게 군사 몇천을 더 청해 뒤따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약속을 어겨서는 아니 됩니다."
공융이 유비에게 다짐했다. 그 말에 유비가 다소 불쾌한 마음을 누르며 말했다.
"공께서는 저를 어찌 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옛말에 이르되 '사람은 원래 죽게 마련이나, 신의가 없으면 인간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군사를 구하든 못 구하든 서주로 갈 것입니다."
유비의 말에 공융은 입을 다물었다. 공융은 이 사실을 도겸에게 알리기 위해 미축을 먼저 서주로 보내고, 자신도 출발 준비를 갖추었다. 그때 태사자가 작별을 고했다.
"어머니의 분부를 받들어 달려왔습니다만, 이제 걱정거리가 없어져 다행스럽습니다. 동향인 양주자사 유요(유요)가 저에게 서찰을 보내 부르니, 이제 그만 가보아야겠습니다. 훗날 다시 뵙기로 하겠습니다."
공융은 황금과 비단을 주며 공을 사례했으나 태사자는 굳이 사양한 후 돌아갔다. 아들 태사자가 돌아오자 노모는 몹시 기뻐했다.
"네가 공(공) 태수의 은혜를 갚았으니 이 어미가 실로 기쁘구나!"
태사자는 노모를 북해에 남겨두고 양주로 떠나갔다. 공융도 군사를 재촉해 서주로 향했다. 한편, 공융을 뒤따르기로 한 유비는 공손찬을 찾아가 서주를 구원하고 싶으니 군사 4, 5천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공손찬은 유비의 말에 달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를 말렸다.
"그만두는 게 어떻겠나. 공은 원래 조조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겸에게 은혜를 입은 바도 없지 않은가. 왜 남의 싸움에 말려들어 어려움을 자초하는가?"
"그러나 이미 약조를 한 바이니 어길 수는 없습니다."
공손찬은 유비의 말을 듣고 마지못한 듯 허락했다.
"정히 그렇다면 군마 2천을 빌려주겠네."
유비에게는 생각보다 못 미치는 군사였다. 불현듯 조운이 생각나 그를 딸려주기를 청했다. 공손찬이 선선히 허락하자 유비는 부족한 군마의 수효보다 조운과 함께 가게 된 것을 기뻐했다. 유비는 선발대로 3천의 군마를 관우와 장비에게 주고 조운에게 빌린 2천의 보졸로 뒤를 바치게 했다. 한편 미축은 서주에 당도하여 북해태수 공융과 유비가 그 뒤를 따라 구원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때마침 미축과 함께 청주로 구원을 청하러 갔던 진등도 돌아왔다. 그는 청주자사 전해(전해)가 구원을 오기로 했다고 알렸다. 전해도 공손찬이 세력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다. 미축과 진동이 이토록 생각지도 않았던 원병을 청해 오자 도겸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이윽고 공융과 전해의 군사가 서주에 이르자 일단 공격을 뒤로 미룬 채 멀리 산 중턱에 진영부터 마련했다. 조조군의 위세가 드세어 감히 먼저 공격을 펼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조군 또한 양쪽에서 구원병이 오자 서주성 공격을 중단하고 군사를 나누어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공융의 진으로 찾아왔다. 공융이 우선 조조군의 형세를 유비에게 전했다.
"조조의 군사는 강대하고 조조 또한 병법에 능하니 군사를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오. 먼저 그 움직임을 살핀 뒤에 군사를 내보냅시다."
유비가 공융을 대하고 보니 그는 이미 조조군의 위세에 기가 죽은 듯이 보였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군량이 없으면 싸움에도 승산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 관운장과 조자룡에게 군사 4천을 주어 공(공) 태수의 휘하에 힘을 합치고, 나는 군사 1천으로 조조의 진을 뚫겠습니다. 서주 성안으로 들어가 도겸과 다음 일을 상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융이 들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비록 구원을 왔다고는 하나 서주성과는 떨어져 있어 합동작전을 펴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유비가 그 일을 맡겠다고 하니 공융은 기꺼이 동의했다. 공융은 전해와 협의하여 군사를 좌우로 나누어 적과 맞서게 하고, 관우와 조운으로 하여금 양군을 오가며 가세하도록 했다. 군사 배치가 완료되자 유비는 군사 1천을 거느리고 장비와 함께 서주성을 향했다. 조조 진영의 한 곳을 택해 유비가 뛰어들자 조조군에서는 뜻하지 않는 기습에 일시 혼란이 일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기마병과 보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선두에 있던 우금이 나서며 말했다.
"이 미친놈들아,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돌진하느냐?"
우금이 말 위에서 소리치는 걸 보자 장비는 대꾸도 하지 않고 말을 박찼다. 장비가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달려나가자 우금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맞았다. 말과 말이 부딪고 병기가 불을 뿜었다.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쌍고검을 휘두 르며 치달았다. 우금은 처음부터 유비를 가벼이 보았다가 몹시 당황했다. 장비의 장팔사모도 의외로 무서운 기세여서 기가 꺾였다. 우금은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가까이 다가오자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유비는 달아나는 적을 베며 서주성을 향해 말을 달렸다. 장비가 먼저 서주성 아래로 다가갔다. 성에서는 '평원 유현덕'이라고 쓴 붉은 깃발을 보자 성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유비가 성안으로 들자 도겸은 친히 맞으며 예를 갖추었다.
"귀공 같은 의인이 지금 같은 세상에도 있었단 말입니까?"
도겸은 감격하며 유비의 손을 부여잡았다. 도겸은 유비 일행을 위해 크게 잔치를 베풀고 노고를 달랬다. 유비의 군졸들에게도 술과 안주를 내렸다. 유비군이 서주성으로 입성하자 서주군의 사기가 드높아졌다. 고립무원이 되어 전전긍긍하고 있던 성안의 병사들은 유비군을 보자 환호성을 울리며 기뻐했다. 도겸은 유비에게서 활달한 기상을 지닌 영웅의 풍모를 갖추었으면서도 온화한 가운데 폭이 넓은 대인(대인)의 품격을 엿보았다. 도겸은 그런 유비를 만나 내심 기뻐했다. 도겸은 원래 장수라기보다는 선비에 가까웠다. 이제 나이도 들어 지금처럼 천하의 군웅이 할거하는 시대에 그들과 맞서 이 땅을 지키기가 벅차다는 것을 느껴 오던 터였다.
도겸은 미축에게 서주자사의 패인(인뒤웅이)을 가져오게 했다. 미축이 패인을 가져오자 도겸은 유비에게 상좌를 권했다.
"오늘부터는 이 도겸을 대신하여 공(공)이 서주태수가 되시어 성주 자리를 맡아 주십시오."
도겸은 패인을 현덕에게 바치며 말했다. 도겸의 뜻밖의 행동에 유비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공께서는 무슨 뜻으로 이러십니까?"
그러자 도겸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지금 천하는 어지럽고, 조정의 기강이 무너진 지도 오래입니다. 내가 듣기로 공은 한의 종친으로 문란해진 왕통을 바로잡으며, 사직을 도와 만백성에게 군림할 자질을 지닌 분이시고, 이 늙은이는 이제 재능도 시들어 무능한 몸이라 근심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제 공을 만나서 제 마음이 흡족하기 이를 데 없소, 부디 공께서 이 서주를 맡아 다스려 주기를 바랄 뿐이오니, 원컨대 충정을 살피시어 청을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유 공을 천거하기 위해 조정에 표문을 상주하겠소."
도겸의 말에는 진정이 어려 있었다. 천하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배어 있는 음성이었다. 이에 유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번 절을 한 후 말했다.
"이 유비가 비록 한실의 후예라고 하나, 아직 공을 세운 바도 없고, 덕 또한 없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대의를 받들어 공을 도우러 온 것뿐입니다. 공께서 이처럼 말씀하시니 이는 제가 사사로운 욕심이라도 있는 것으로 여기심과 같습니다. 제가 만약 그릇된 생각을 품었다면 하늘의 보살핌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유비도 진심으로 사양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이 늙은이가 충정으로 공께 드린 말씀이오. 그러니 사양치 말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도겸이 다시 유비에게 청했다. 그러나 유비는 끝내 이를 사양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미축이 입을 열었다.
"이 문제는 후일 다시 상의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은 조조의 군사들이 성 밖에 와 있으니 먼저 그들을 물리칠 계책을 마련하는 것이 급합니다."
두 사람은 미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비가 조조군에 대한 대책을 말했다.
"우선 조조에게 글을 보내 화해를 권해 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만약 조조가 이를 듣지 않는다면 그때 군사를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유비의 말에 도겸과 미축도 동의했다. 유비는 아군의 진영에 명이 있을 동안 일체 군사를 움직이지 않도록 전한 뒤 서찰을 써 사람을 시켜 조조군 진영으로 보냈다.
관외에서 한 번 공의 얼굴을 뵈온 적이 있으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오래도록 뵙지 못했습니다. 이에 문안을 드림과 함께 한 가지를 청하고자 합니다. 지난번 공의 부친께서 뜻밖의 변을 당하신 것은 바로 이전에 황건적이었던 장개란 자가 흉악하여 저지른 일이 오며 결코 도겸의 잘못이 아닙니다. 바야흐로 밖으로는 황건적의 무리가 들끓고, 안에서는 동탁의 잔당들이 날뛰고 있는 이때입니다. 바라건대 사사로운 원한은 뒤로 물리시고 서주의 군사를 거두어 나라의 어려움을 먼저 구하신다면 천하를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유비의 서찰을 읽고 난 조조가 서찰을 북북 찢으며 노기등등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라고?. . . . 나의 복수를 뒤로 미루고 조정을 먼저 구하라고? 유비 따위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이 조조에게 얼마든지 생각이 있다. 건방진 놈 같으니 나를 비웃고 있구나."
조조는 화가 치솟아 좌우에게 명했다.
"그 사자의 목을 쳐라! 그리고 당장 서주성을 공격한다!"
그러자 곽가가 급히 나서며 말렸다.
"유비는 멀리 군사를 이끌고 왔음에도, 먼저 주공께 예를 갖춘 다음에 싸우려는 여유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공께서도 좋은 말로 답을 보내 그가 마음을 놓도록 만든 뒤, 일시에 군사를 몰아간다면 손쉽게 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곽가의 말을 들으니 그 또한 좋은 방책인 듯했다. 조조는 곽가의 말을 따라 사자에게 줄 답서를 마련하게 했다.
이때 파발마가 뛰어들며 급한 일을 아뢰었다.
"큰일 났습니다!"
전령이 숨 가쁘게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인가?"
"장군님이 계시지 않는 틈을 타 여포가 연주를 공격하여 빼앗은 뒤, 다시 복양으로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조조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포라면 천하의 맹장이었다. 그가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뛴다면 조조는 자칫 자신의 근거지조차 잃고 말 형편이었다.
"연주를 잃게 되면 내가 설 곳이 없어진다. 우선 연주부터 되찾고 볼 일이다."
그러자 곽가가 나서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유비의 청을 받아들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서찰을 써 보내십시오. 그러면 주공께서 현덕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됩니다."
조조는 곽가의 말이 그럴듯했다. 그의 말에 따라 유비에게 답신을 전한 후 군사를 물렸다. 사자가 서주성으로 돌아와 조조의 군사가 물러났다는 걸 알리며 서찰을 전하자 도겸은 크게 기뻐하였다.
한편 여포는 이각 · 곽사의 난이 일어나자 장안을 떠나 원술 에게 몸을 의탁하러 갔으나 원술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원을 목벤 후 동탁에게 갔으며 다시 동탁을 주살한 여포를 부하로 두는 것이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여포는 하는 수 없이 원소에게 가 그에게 의탁하였다. 원소는 그를 맞아 함께 상산 땅에서 장연을 쳤다. 원소 아래서 공을 세우자 여포는 오만해졌다. 같은 장수도 하찮게 보며 거드럼을 피우자 휘하 장수들의 미움을 사게 됐다. 원소가 이를 알고 그를 잡아죽이려 하자, 여포는 이를 눈치채고 도주했다. 여포는 다시 떠돌다 장양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때 방서라는 여포의 친구가 장안에서 여포의 가족을 숨겨 두었다가 여포에게 보냈다.
이각, 곽사가 이 일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방서를 죽이는 한편, 장양에게 밀서를 내려 여포를 처치하도록 명했다. 여포는 하는 수 없이 장양의 곁을 몰래 벗어나 장막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때가 바로 장막의 아우 장초가 막 진궁을 데리고 왔을 때였다. 진궁은 도겸을 구하려 조조에게 찾아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해 서주성으로 가지 못하고 장초를 찾아오자 장초가 형 장막을 뵙게 했다. 진궁이 장막을 보자 한 계책을 내었다.
"지금 천하가 무너져 곳곳에서 영웅들이 들고일어나 천하를 취하려 하고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광대한 영토와 수많은 백성들을 거느리시고 계시면서 어찌 이각, 곽사에게 몸을 굽혀 명을 받드십니까? 조조가 군사를 일으켜 서주로 향했습니다. 그의 근거지인 연주는 비어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호기를 살려 연주를 취하십시오, 장군의 휘하에는 천하의 맹장 여포가 있지 않습니까. 여포와 함께 군사를 이끄신다면 연주는 물론, 천하를 취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진궁의 말에 장막은 귀가 솔깃하여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곧 군사를 일으켜 연주로 향했다. 장막은 여포에게 군사를 주어 연주를 친 뒤 여세를 몰아 복양까지 진격했다. 불시에 여포군을 맞은 조조의 여러 고을은 손쉽게 무너졌다. 다만 견성, 동아, 범현만이 조조 휘하의 장수 순욱, 정욱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지켜졌다.
한편 우연의 일치이긴 했으나 유비의 화해 서찰에 의해 조조가 군사를 물리자 도겸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가 무르익자 도겸은 유비를 청하여 상좌에 권하고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부디 나를 대신하여 서주태수가 되어 주시오. 나에게도 두 아들이 있으나 그들은 나라의 중임을 맡을 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 이 늙은이는 쉬면서 병이나 고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유비는 끝내 도겸의 간청을 물리쳤다.
"북해의 공 태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낸 것은 오직 의를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제가 서주에 눌러앉아 태수 직을 받는다면 천하가 이 비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미축도 거들고 나섰다.
"지금 한나라의 황실은 기울대로 기울었고, 천하의 혼란은 극에 달했습니다.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뜻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물자가 풍부하고 호구가 백반이나 되니 부디 물리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에 진등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도 태수께서는 병환이 잦으시니 백성을 다스리는 데 힘이 듭니다. 유공께서 너무 사양하심은 도리가 아닙니다."
유비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원 공로(원술)는 사세 삼공을 지낸 명문의 후예로서 민심 또한 그에게 쏠려 있습니다. 거기다가 여기에서 가까운 수춘성(수춘성)에 있으므로 그에게 서주를 물려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비가 그렇게 말하자 공융이 대답했다.
"원술 그자는 무덤 속의 뼈다귀와 다름없소. 이 일은 하늘이 공께 내리시는 일입니다. 이 기회를 마다하시면 뒷날 크게 뉘우치시게 될 것입니다."
유비는 그래도 사양할 따름이었다. 도겸이 유비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유 공께서 끝내 뿌리치고 가신다면 나는 죽더라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오."
그때까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관우, 장비도 보다못해 거들었다.
"이토록 말씀하시니, 형님께서 거두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쪽에서 먼저 청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토록 굳이 받지 않으시고 사양하실 게 뭡니까?"
그러자 유비가 두 아우를 꾸짖었다.
"너희들은 나를 불 위에 빠뜨리려 드느냐?"
유비는 끝내 도겸의 청을 물리쳤다. 도겸은 유비가 기어이 패인을 받지 않자 가까운 소패라도 맡아, 서주를 지켜 달라고 청하였다. 유비는 그마저 거절할 수 없어 승낙했다. 축하잔치가 끝나자 조운은 군사를 이끌고 작별을 고했다. 유비와 조운은 눈물을 흘리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어 공융과 전해도 각기 군사를 거두러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조조는 대군을 이끌고 연주로 회군했다. 조조가 돌아오자 조인이 먼 곳까지 마중 나와 그동안의 전황을 상세히 설명하며 여포 군사의 위세가 강대함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조조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 없이 껄걸 웃으며 말했다.
"여포에게는 힘은 있으나 지모가 없다. 크게 염려할 바가 아니다."
조조는 진을 내린 후 여포를 칠 계책을 의논했다. 군사를 둘로 나누고 조인으로 하여금 연주를 에워싸게 하고 몸소 복양으로 진격하기로 했다. 여포가 복양성을 점령한 후, 그곳에 머물고 있을 것으로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조조는 군마를 이끌고 질풍처럼 복양으로 진군하였다. 복양이 가까워오자 군사를 일단 머물게 하여 군마에게 휴식을 취하게 했다. 조조는 붉은 석양이 기울어질 때까지 형세를 관망할 뿐 꼼짝하지 않았다. 한편 여포는 조조가 등현을 통과했다는 것을 알고 부장 설란과 이봉을 불러 영을 내렸다.
"나와 조조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한 번 싸워 보고 싶었다. 군사 1만을 줄 터이니 연주를 지켜라. 내가 직접 가 조조를 쳐 없애 버리겠다."
영을 내린 여포는 곧 출진을 서둘렀다. 이때 이를 알고 진궁이 여포를 만나러 왔다.
"연주를 두고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
"복양에서 조조군을 무너뜨릴 포진을 마련하겠소.
진궁은 서두르기만 하는 여포를 보고 말했다.
"설란에게 연주를 맡겨 두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보다 여기서 1백 80리쯤 가면 태산에 험한 길이 있으니 그곳에 군사 1만을 매복케 하십시오. 조조는 연주가 함락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필시 군사를 급히 내몰 것입니다. 그들의 군사가 태산을 지나갈 무렵, 그들을 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능히 조조를 사로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포는 진궁의 말에 귀를 귀울이지 않았다.
"복양으로 가 포진하자는 것은 달리 좋은 계책이 있기 때문이오."
여포의 말에 진궁도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여포는 나머지 군사를 이끌어 복양으로 향했다. 진궁의 예측은 어긋나지 않았다.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태산의 좁은 길목을 지나칠 때였다.
"이곳은 병사를 매복시키기 좋은 곳이니 조심하십시오."
곽가가 조조에게 말했으나 조조는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여포가 힘은 있되 꾀가 없음을 이르지 않았더냐. 무도한 여포가 설란에게 연주를 맡기고, 자신은 아마 복양으로 갔을 게다. 이곳에 복병을 베풀 만한 지혜가 없었을 테니 근심 말라."
조조는 여포가 복양으로 가는 걸 보자 이미 미루어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여포의 진영에서는 조조가 군사를 내몰아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궁이 여포에게 간했다.
"조조군이 먼 길을 급히 오느라 지쳐 있을 때, 기습을 가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기력을 되찾을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포는 이번에도 진궁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한 필의 말로 천하를 종횡한 사람이오. 어찌 조조 따위를 걱정하겠소. 그놈이 나타나면 단번에 사로잡을 테니 두고 보시오."
여포가 조조군을 가벼이 여겨 큰소리치고 있을 때 조조는 이미 복양에 당도하여 군사들을 쉬게 했던 것이다. 조조가 복양 들에 진을 치자, 여포는 다음날 군사를 이끌고 나와 조조군을 맞았다. 조조가 그들을 바라보니, 여덟 명의 장수가 여포를 가운데 두고 나란히 말을 세우고 북소리 등으로 천지를 진동시켰다. 여포룰 호위하는 장수로는 첫째가 장료인데 자가 문원이었고, 둘째가 장패로 자를 선고라고 했으며 태산 화음 사람이었다. 이 두 장수 외에 학맹, 조성, 성렴, 송헌, 후성의 다섯 장수가 여포의 좌우에 늘어서 있었다. 그 장수들의 뒤로는 5만의 군사가 북소리를 우렁차게 울리며 따르고 있어 그 위세가 당당한 듯 보였다.
조조가 여포에게 소리쳤다.
"내가 너와는 아무런 원한을 맺은 일도 없거늘, 어찌하여 내 땅을 침범하였는가?"
여포도 손가락으로 조조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을 받았다.
"모두 한나라 땅이다. 너만 차지할 땅이 아니지 않느냐. 어찌 네 땅이라고만 우기는가?"
여포는 원래 말솜씨가 좋은 장수가 아니다. 더 이상 길게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듯 휘하 장수 장패에게 나아가 싸우라고 명했다. 조조는 악진을 보냈다.
두 장수가 맞부딪쳐 한바탕 싸움이 일어 30여 합이나 찌르고 막았다. 그러나 어느 한쪽도 기우는 쪽이 없었다. 이에 조조 편에서 하후돈이 달려 나와 가세했다. 여포 쪽에서도 장료가 질세라 내달아 하후돈을 막았다. 네 장수가 서로 뒤엉키며 부딪치자 성미 급한 여포가 방천화극을 움켜쥐고 적토마를 박찼다. 여포가 방천화극을 들고 질풍처럼 달려 나오자 그 기세에 눌려 하후돈, 악진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여포가 두 장수를 뒤쫓으며 그 여세를 몰아 조조 군사를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었다. 과연 천하의 맹장다웠다. 여포가 광풍처럼 몰아치니 조조군은 3, 40여 리를 물러났다. 첫 싸움에서 여포군에게 대패한 조조는 그의 진영에서 여러 장수들에게 대책을 물었다.
우금이 먼저 조조 앞에 나와 계책을 말했다.
"제가 산 위에서 바라보니 복양 서쪽에 군사가 적은 진영이 하나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우리가 싸움에 젔으므로 그들은 방심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때 야습을 감행하여 그 진지를 빼앗는다면 우리 군사는 사기가 드높아지고 여포의 군사는 크게 두려워할 것입니다."
조조는 우금의 말을 좇아 장수 조홍, 이전, 모개, 여건, 우금, 전위 등 여섯 장수를 앞세우고, 어둡기를 기다려 마보군 2만을 이끌고 진격했다.
한편 여포는 승전을 축하하며 잔치를 열어 군사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이때 진궁이 무언가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여포에게 타일렀다.
"서쪽에 있는 진은 우리의 본영입니다. 오늘 싸우느라 많은 군사를 빼갔으므로 방비가 허술합니다. 조조군이 오늘 밤 야습이라도 감행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여포는 진궁의 말을 천연덕스럽게 받아넘겼다.
"조조는 군사를 능수능란하게 부리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방비가 허술한 곳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진궁의 간곡한 말에 여포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궁의 말이 어긋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일을 대비하여 진궁의 말에 따르기로 하였다. 여포는 고순, 위속, 후성 세 장수를 불러들여 영을 단단히 내렸다.
"서채의 방비가 너무 허술하다. 너희들은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조조의 야습에 대비하라!"
한편 조조는 어둠이 깔리자 군사를 내몰았다. 원래 많지 않은 군사에다 방심하고 있던 여포의 군사였다. 불의의 기습에 조조의 군사에게 짓밟히고 흩어지니, 조조는 쉽게 서쪽 진을 함락했다. 진궁의 진언에 따라 여포가 보냈던 고순의 군사가 당도하고 보니, 이미 서채는 적의 수중에 들어간 뒤였다. 고순의 군사는 빼앗긴 진영을 되찾기 위해 조조군에게 공격을 개시했다. 조조군은 야습을 하여 진을 빼앗자, 설마 다시 적군이 야습해 오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방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기습을 해오니 조조군에도 적지 않은 혼란이 일었다. 밤이 깊어 사경쯤 되었을 때, 싸움을 하는 가운데 어디가 적이고, 어디가 아군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혼전이었다. 그렇게 뒤엉켜 싸우다 보니 어느새 동이 훤히 터 오고 있었다. 그때 서쪽에서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한 떼의 군마가 짓쳐 들어오고 있었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
서채를 점령당했다는 급보를 받고 여포가 군사를 이끌고 달려온 것이었다.
"여포가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조조는 여포가 어느새 친히 군사를 이끌고 쫓아 들어오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태산의 험악한 산길을 넘어 기습을 감행했던 조조군은 그곳 지리에도 어두웠다. 조조는 여포군까지 가세하자 중과부적이라 급히 군사를 내몰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고순, 위성의 군사들이 도망가는 조조군을 뒤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포군이 조조군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우금과 악진이 나가 여포군을 맞아 싸우는 동안 조조는 황망히 북쪽으로 말을 몰아 달렸다. 조조가 산모퉁이를 돌 무렵이었다. 이번에는 장료와 장패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을 내몰았다. 조조는 다시 조홍과 여건에게 그들을 맞아 싸우게 했으나 이미 만반의 대비책을 갖춘 그들을 당할 수가 없었다. 조조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서쪽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그 순간 요란한 함성과 함께 학맹, 조성, 성렴, 송헌이 조조의 앞길을 막았다. 조조의 장수들이 그들을 맞아 필사적인 싸움을 벌이는 동안 조조도 활로를 찾아 칼을 휘두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딱딱'하는 군호를 신호 삼아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진퇴양난이었다. 조조는 다급했다. 좌우를 둘러보았으나 이미 뒤따르던 장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게 아무도 없느냐? 나를 구해다오!"
담이 큰 조조였지만 무의식중에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마군들 속에서 한 장수가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주공께서는 염려 마십시오."
양손에 무게 80근이나 되는 창을 휘두르며 길을 헤쳐 나온 장수는 다름 아닌 전위였다. 그가 쌍철극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니, 말도 사람도 피를 뒤집어써 마치 붉은 불덩이가 달려오는 듯했다.
"주공께서는 어서 말에서 내리십시오. 잠시 땅에 엎드려 화살을 피하십시오."
조조에게 화살이 쏟아지자 전위는 우선 화살부터 피하도록 조치했다.
"오, 전위인가."
조조는 전위의 말대로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땅에 엎드렸다. 그러자 전위도 말에서 몸을 날리더니 조조를 감싸며, 쌍철극 대신에 손에 창을 쥐고 풍차처럼 돌렸다. 날아오던 화살은 전위의 창에 부딪혀 꺾어지거나 튕겨나갔다.
"먼저 저놈부터 목을 베라!"
이를 본 여포군 중 한 무리가 활쏘기를 멈추고 전위에게 달려들었다. 전위는 조조 앞에 서서 날아오는 화살을 막으며 자신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전위는 10여 개의 단검을 손에 쥐더니 그를 따르는 부관에게 말했다.
"적군이 열 보 정도, 등 뒤로 달려들거던 나에게 말하라."
날아드는 화살을 막아 내느라 뒤돌아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전위는 쏟아지는 화살을 무릅쓰고 돌진했다. 여포의 군사 10여 명이 전위의 뒤를 쫓아 말을 몰았다. 그들이 열 걸음쯤 다가오자 부하가 소리쳤다.
"장군! 적이오!"
전위는 몸을 홱 돌이키며 단검 하나를 던졌다. 선두에서 말을 달려오던 기병 하나가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이번에는 다섯 발자국 안에 들거든 말하라!"
전위가 다시 부하에게 명했다. 그 사이 여포의 기마 몇 기가 전위의 등 뒤 다섯 발자국쯤 되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다섯 보요!"
부하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였다. 전위가 던지는 단검은 공간을 가르며 날았다. 순식간에 전위가 뿌린 단검에 10여 명의 기병이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뒤따르던 군졸들이 이를 보고 질겁을 하며 주춤하더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전위가 다시 쌍철극을 들고 말 위에 올랐다. 여포의 네 장수 학맹, 조성, 후성, 송헌이 거느린 군사를 향해 전위가 쌍철극을 휘두르며 돌진했다. 전위의 무서운 기세를 당하지 못한 네 장수는 말을 물렸다. 네 장수가 겁을 먹고 물러나자 앞을 가로막던 군사들도 겁을 집어먹고 흩어지니 마침내 전위가 길을 열었다. 이에 뿔뿔이 흩어졌던 조조의 장수들과 군사들도 다시 모여들어 조조를 호위하여 본진으로 돌아갈 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저물녘이 되자 함성이 일면서 등 뒤에서 한 무리의 군마가 나타났다. 여포가 군사를 이끌고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조조를 뒤쫓는 것이다.
"조조는 게 섰거라!"
조조의 군사는 모두 어젯밤부터 격전을 치른 터라 몹시 지쳐 있었다. 장수들도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면초가였다. 조조는 하는 수 없이 여포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조조는 영락없이 여포에게 사로잡힐 형세었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음인지 남쪽으로부터 한 떼의 인마가 달려왔다. 조조를 찾아 나선 본진의 하후돈이 수십 기의 병마를 이끌고 온 것이었다. 그는 여포를 맞아 성난 호랑이처럼 한바탕 격전을 벌였다. 양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때마침 소나기가 억수처럼 쏟아져 양군은 각기 군사를 거두어 진영으로 돌아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진영으로 돌아온 조조는 먼저 자기의 목숨을 구해 준 전위에게 큰 상을 내렸으며, 그를 영군도위에 명했다.
"그대가 없었던들 나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하고 불귀의 몸이 되었을 것이오."
조조는 전위에게 치하했다. 조조는 다른 장수들과 군사들에게도 각기 공에 따라 비단과 금을 내렸다.
한편 여포는 싸울 때마다 연전연승을 거두어 복양성의 주인이 되었다. 근거도 없이 떠돌던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인 셈이다. 군사들도 조조군을 통쾌하게 물리쳐 사기가 드높았다. 여포는 진으로 돌아오자 진궁을 불러 조조를 칠 작전을 의논했다. 진궁의 말을 좇아 서쪽 진영에 군사를 보내어 조조군을 크게 무찌르게 되자 여포는 이제 진궁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게 된 터였다. 여포가 자기에게 의견을 묻자 진궁은 생각해 둔 계책 하나를 얘기했다.
"복양성안에 전씨라는 가문이 있습니다. 알고 계시는지요?"
"전씨라. 이곳의 이름난 부호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은밀히 그 부호를 부르십시오."
"군자금 때문이오?"
"그런 하잘 것없는 일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부호들로부터 재화를 거둬들이는 것은 우리의 재산을 성급히 탕진해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일만 잘 이루어진다면 재화는 그쪽에서 먼저 싣고 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여포는 진궁의 속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진궁은 여포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진궁의 말을 듣자 여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종부로 보이는 한 허름한 사내가 장대 끝에 삶은 닭을 보자기에 싸서 매단 채 조조의 진문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문지기가 이것을 놓칠 리 없었다.
"웬 놈이냐?"
그를 붙들어 문초했다.
"이것을 장군님께 바치고 싶소."
그 농부는 보자기에 싼 닭을 내보였다. 문지기가 호통을 치며 그를 쫓으려 했으나 듣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문지기가 조조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기이하게 여긴 조조는 그를 들게 하여 호통을 쳤다.
"너 이놈, 이곳을 어슬렁거리며 밀정 노릇을 하자는 게 아니냐. 만약 그렇다면 네 목을 벨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그가 밀정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밀정 같으면 문지기에게 수작을 부릴 리가 없었다. 그러자 그 사내는 절을 하며 예를 올린 후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장군님, 주위의 사람을 물리쳐 주십시오. 저는 복양성의 이름 있는 분의 부탁을 받고 온 사자입니다."
조조는 복양성이란 말에 경계하면서도 귀가 솔깃했다. 주위에 가까운 장수들만 남겨 두고 모두 물리쳤다. 그 사내는 닭을 싼 보자기를 매단 대나무를 쪼개더니 그 속에서 한 장의 서찰을 꺼냈다. 서찰을 펼쳐 보니 복양성에서 첫손 꼽는 부호 전씨가 보낸 것이 아닌가. 전씨라면 조조도 잘 알고 있는 명문이었다. 서찰의 서두에는 여포의 횡포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이 적혀 있었다. 모두 여포의 악정을 벗어나 딴곳으로 떠나려 한다는 사연도 씌어 있었다. 또한 복양성의 동태도 낱낱이 적혀 있었다.
여포는 지금 여양으로 떠나고 없습니다. 성안에는 장졸 몇 사람이 지키고 있어, 텅 빈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때를 틈타 장군께서는 이 성을 취하십시오. 저희들은 기회를 보아 성안에서 소동을 일으키며'의'자를 쓴 흰 기를 성벽 위에 세우겠습니다. 장군님은 그것을 신호로 진격하십시오.
복양성의 맞대결 조조와 여포의 장계취계
조조는 서찰을 읽고 난 뒤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기회를 주시는 구나. 이제 복양성은 내 수중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조조는 사자라는 농군에게 상을 내리고 답서를 써 보냈다. 조조가 의심도 없이 그 밀서를 믿어 버린 데는 전씨를 알고 있었음에도 그 원인이 있지만, 여포의 사람 됨됨이를 잘 아는 탓도 있었다. 여포가 이런 계략까지 꾸밀 지모가 되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책사인 유엽이 조조에게 충고했다.
"만일을 생각해서 군을 셋으로 나누어 그중 한 대로만 진격하심이 어떨는지요? 여포가 비록 꾀가 없다 하나 진궁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조 또한 그 말이 옳다고 여겨졌다. 만약을 대비하여 유엽의 말대로 군대를 셋으로 나눈 후 복양성으로 향했다. 조조는 성으로 가까이 다가가면서 성벽 위를 살폈다.
"봐라, 저기 흰 기가 보인다."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적의 정기가 펄럭이고 있는 가운데, 한구석 서문 위쪽에 큰 백기가 꽂혀 있었다. 그 깃발에는 뚜렷이'의'자가 새겨져 있었다. 지난번 밀서에 씌어 있는 그대로였다. 거기다가 과연 여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조조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조조군이 복양성으로 오자, 성문이 열리더니 두 장수가 달려 나왔다. 전군은 후성이, 후군은 고순이 이끌고 있었다. 조조는 전위를 내보내 후성을 치게 했다. 후성은 전위를 맞아 부딪쳤으나 그의 상대는 아니었다. 몇 합 싸우지도 못한 채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전위는 내친김에 적교(성으로 통하는 올리고 내리는 다리)까지 뒤쫓아 고순과도 한바탕 접전을 벌였다. 고순 또한 전위의 기세에 눌린 듯 후성과 함께 성안으로 달아났다. 성안으로 후퇴하느라 혼란한 가운데 몇 명의 군사가 조조 진영으로 와 밀서를 전했다. 지난번에 조조 진영을 찾았던 농군이 군복을 입고 찾아온 것이었다. 조조가 펴보니 틀림없이 지난번의 필적과 같았다.
오늘 밤 초경의 별이 떠 있을 무렵, 성 위에서 징 소리가 울릴 것이오. 이를 신호로 군사를 움직이십시오. 안에서 성문을 열어 복양성을 장군께 바치겠소.
"됐다. 때는 왔다."
조조는 밤을 기다리며, 총공격을 위한 군사의 배치를 시작했다. 하후돈과 조인에게 군사를 주어 두 부대로 편성시킨 뒤 성문 앞에 대기토록 하였다. 선봉에는 하후연, 이전, 악진이 맡도록 하고 중군은 전위등 네 장수로 하여금 성을 에워싸게 했다. 밤이 되자 조조는 네 장수의 한가운데에서 기를 세운 채 성안으로 육박해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때 선봉의 이전은 성안의 공기가 너무나 조용하여 의아스럽게 여겼다.
"주공께서는 성 밖에 계십시오. 저희들이 먼저 성안에 들겠습니다."
조조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나무랐다.
"병기를 놓치면 승기를 잃게 된다."
그날 밤이 되자 조조는 앞장서 성을 향해 말을 몰았다. 초저녁이라 달은 떠오르지 않았으나 하늘에는 별빛이 더욱 찬연했다. 뿐만 아니라 조조를 뒤따르는 군마의 발굽 소리가 요란했다. 이때 성 위에서 은은히 징 소리가 들리더니 성문 위에 횃불이 훤히 밝혀지며 성문이 활짝 열리고 순식간에 적교도 내려졌다. 전씨가 전한 밀서의 내용과 어긋남이 없었다.
"성문이 열렸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쳐들어가라!"
조조가 좌우를 보며 외쳤다. 조조는 물론 다른 장수들도 앞다투어 문 안으로 몰려들었다. 조조가 말을 박차며 성문 안으로 달려가 곧장 관아 앞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기척 하나 없었다. 그때서야 조조는 급히 말을 세웠다. 조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맞으려 전씨나, 농군도 나와 있지 않았다. 조조는 급히 말머리를 돌리며 외쳤다.
"군사를 물려라, 적의 계략이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성안에서는 조조의 일성을 신호로 일시에 요란한 함성이 울려 퍼지는가 했더니 포성이 울렸다. 그와 함께 4 대문에서 홀연 불길이 치솟고 징 소리, 북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군사들의 함성이 강물을 뒤집고 바닷물이 들끓듯 요동쳤다.
"와아……!"
조조가 군사를 물리라고 소리쳤지만, 이미 노도처럼 안으로 밀려들던 군사들이라 갑자기 성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성벽 위에서는 밑 빠진 하늘에서 우박 떨어지듯 돌덩이가 쏟아져 내렸다. 이어 관아의 건물 뒤쪽에서 수천이 넘는 횃불이 날아왔다. 횃불은 군마와 투구 할 것 없이 사방으로 어지럽게 떨어졌다. 말과 군사들은 순식간에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드니 제대로 싸워 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서로 부딪고 짓밟으며 아우성쳤다. 돌덩어리와 횃불의 빗발이 멎었는가 싶자 이번에는 성안 네 개의 문이 일시에 열리면서 여포의 군대가 동문과 서문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한 놈도 살려서 보내지 말라!"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조조군은 그물속의 물고기처럼 어이없이 섬멸되었다. 죽는 자와 생포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조조는 황망히 북문을 향해 말을 몰았으나 그곳에선 다른 군대가 불쑥 나타나 가로막았다. 또다시 남문으로 말머리를 돌렸으나 남문은 이미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다시 서문으로 달려나가자 이번에도 양쪽에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나타났다. 그때 조조의 부장 전위는 다리를 건너 조조를 찾아 나섰다. 전위는 타오르는 불길을 헤집고 닥치는 대로 베고 찔렀다. 조조는 서문에 매복한 군사들이 나타나자 어찌할 줄 모르고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전위가 불길 속에서 조조를 찾아 헤메고 있을 때 말을 몰아 달려온 장수가 있었다.
"전위가 아니오."
"오, 이전이군요. 주공을 못 보셨소?"
"나도 지금 찾고 있는 중이오."
전위는 그때 적의 계략에 빠진 걸 알고 성 밖 적교까지 나갔다. 그러나 뒤돌아보니 조조가 보이지 않아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다 이전과 마주쳤던 것이다. 전위는 이전에게 성 밖에서 구원해 줄 것을 당부한 뒤 조조를 찾기 시작했다. 성안은 어디를 보아도 온통 적병이요, 불이요, 검은 연기뿐이었다. 조조 자신도 이제는 자기가 달리고 있는 곳이 남쪽인지 서쪽인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다만 보이는 것은 적병이요, 불길이었다. 그러자 저편 어두운 골목에서 한 무리의 횃불이 어둠을 밝히면서 나타났다. 보나마나 적군임이 분명했다.
'이제는 끝장이구나!'
그렇다고 몸을 되돌려 도망칠 수도 없었다. 눈앞에 적군을 두고 도망을 친다면 자기가 적이라는 걸 알려 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조조는 이를 악물고 얼굴을 숙이고 태연히 그들 옆을 스쳐 지나가려 하였다. 어찌 알았으랴, 군사들에게 횃불을 들리고 말을 몰아오는 사람은 적장 여포가 아닌가. 방천화극을 옆구리에 낀 채 왼손에는 적토마의 고삐를 잡고 유유히 다가오는 모습이 조조의 눈에 커다랗게 들어왔다. 조조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여포 옆으로 지나쳤다. 그러자 여포가 창을 내밀어 조조가 쓰고 있는 투구의 정수리를 '땅!'하고 가볍게 쳤다.
"조조가 어디로 달아났는지 모르느냐?"
여포는 조조가 자기의 부하 장수라고 여겼던 모양이었다. 조조는 가슴이 섬뜩하였으나 정신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달리하여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황색 말을 타고 가는 놈이 조조입니다."
여포는 그 말을 듣자 급히 황색 말을 향해 달려갔다. 조조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동문을 향해 말을 달렸다.
"어째, 저놈이 수상쩍다."
여포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중얼거렸을 때 조조의 모습은 자욱한 연기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조조는 혼비백산하여 말을 달렸다. 조조는 '호구를 벗어났다' 함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여기가 어디인가? 동쪽인지, 서쪽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때였다.
"주공!"
한 장수가 조조에게 다가와 헐떡이며 불렀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양손에 철극을 들고 있는 전위었다. 전위가 조조를 호위하여 길목마다 혈로를 열고 성문 부근까지 당도하였다. 그러나 성문은 맹렬한 불길 속에 휩싸여 있었다. 성 위에서 불붙은 마른 풀더미를 떨어뜨리니 땅바닥은 물론 성벽도 불길이 붙어 그 열기는 천지를 녹일 듯했다. 말은 열풍을 두려워하며 사납게 맴돌 뿐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투구에도 안장에도 불똥이 떨어져 내렸다. 조조는 절망에 찬 목소리로 탄식했다.
"이곳으로도 나갈 수가 없을 것 같구나."
그러자 전위가 불보다 더 붉어진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더니 결연히 말했다.
"주공, 돌아갈 길은 없습니다. 제가 앞서서 빠져나갈 것이오니 바짝 뒤따르십시오."
전위는 철극 끝으로 불붙은 나무며 짚단과 연기를 헤치며 달려나갔다. 그러나 살아날 길은 그곳밖에 없었다. 조조도 창을 움켜잡으며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다. 눈썹도, 투구 밖으로 나온 머리칼도 불에 타고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 조조와 그의 말은 성문 바깥쪽으로 거의 빠져나와 있었다. 이때였다. 성루의 한쪽 모퉁이가 불에 타서 허물어졌다. 커다란 들보가 불기를 내뿜으면서 떨어지더니 조조가 탄 말의 궁둥이를 때렸다. 말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조조는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어 나뒹군 조조의 몸 위로 불붙은 들보가 또 넘어졌다.
"앗!"
조조는 넘어진 그대로 들보를 손으로 막았다. 무예로 단련된 잽싼 움직임이 아니었더라면 영락없이 들보에 깔릴 순간이었다. 조조는 손바닥과 팔뚝에 큰 화상을 입었다. 갑옷에는 불이 옮겨붙었는지 몸에서도 연기가 솟았다. 조조는 그만 화염 속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전위가 말을 달리다 보니 조조가 화염 속에 쓰러져 있으므로 급히 달려가 조조를 일으켜 자기의 말 위에 태웠다. 이때 조조를 찾아 나선 하후연이 전위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그들은 말을 달려 가까스로 진영으로 돌아왔다.
악몽과 같은 싸움은 새벽녘까지 계속되었다. 장수들도 군사들도 하나씩 둘씩 진영으로 돌아왔다. 살아남은 장수나 군사들도 모두 피와 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나마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다행이었다. 군사의 반 이상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조조마저 전위와 하후연의 부축을 받으며 말안장 위에 실려서 돌아오자 전군의 사기는 무덤 속처럼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 여러 장수들이 조조의 진막으로 몰려들었다. 진막 안에 있던 장수들도 모두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치료를 하러 왔던 전의가 조용히 걸어나갔다. 전의의 얼굴도 수심에 싸여 있었다. 장수들은 전의의 얼굴을 보고는 모두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때였다. 돌연 진막 안에서 조조의 떠나갈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장수들은 그 뜻밖의 웃음소리에 놀라 조조가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달려갔다. 조조는 오른팔에서 어깨, 허벅지까지 모두 흰 천으로 감겨 있었다. 얼굴의 반쪽도 그랬다. 머리털도 불에 그을려 있었다. 장수들은 조조의 때아닌 웃음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모두들 걱정하지 말라!"
한쪽 눈으로 장수들을 둘러보며 조조는 여전히 껄껄 웃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적군이 강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나는 불에 졌을 뿐이다. 여포 따위의 계략에 빠졌으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놈에게 계교로서 보답할 생각이다. 두고 보아라."
조조가 생각해도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던지 절로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여포에게 지모가 없다는 것만 생각하고 가벼이 군사를 움직였던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다.
그때 곽가가 조조에게 말했다.
"급히 저들을 물리칠 방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러자 조조가 계책을 내었다.
"장계취계(적의 계략을 역이용함)를 베풀기로 하되, 내가 화상을 크게 입어 오늘밤에 죽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발상의 행차를 보여라. 그러면 여포는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이다. 그러면 일단 마릉산에 가매장을 한다며 장례를 치르는 척하면서 동편과 서편에 군사를 매복시킨 다음 여포 군이 그곳에 오면 반쯤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들이쳐서 두 토막으로 낸 뒤 급히 공격하여 섬멸토록 하라."
"실로 좋은 계책이십니다."
그제야 여러 장수들은 무릎을 치며 웃었다. 이에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발상을 하고 조조가 죽었다는 말을 퍼뜨리게 하였다. 장군의 깃대 끝에도 모두 주장을 매달았다. 조조가 죽었다는 소식은 세작에 의해 복양성에 있는 여포에게 어김없이 보고되었다. 어포는 조조가 성문을 빠져나가다 커다란 들보에 깔렸다는 부하 장수의 말을 들었던 터라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첨자를 풀어 알아보게 하니 조조의 군사들은 이미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마릉산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여포는 마음이 급해 앞뒤 헤아릴 겨를도 없이 즉시 휘하의 군마를 이끌어 마릉산으로 향했다. 이 기회에 조조의 세력을 송두리째 섬멸할 심산이었다. 여포가 마릉산 반쯤 지나 조조의 진영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돌연 산등성이와 계곡, 숲속에서 징 소리, 꽹과리 소리가 천지를 떠나갈 듯이 울리더니 사방에서 매복했던 군사들이 짓쳐 나왔다.
"아차, 계략이었구나."
복병의 기습에 휘말린 여포의 군사들은 조조의 협공에 우왕좌왕하다 쓰러져갔다. 여포는 가까스로 목숨만을 부지하여 복양성 안으로 달아났다. 전날의 대승도 보람없이 참담한 패전을 맛본 여포는 복양성을 굳게 지키기만 할 뿐 더 이상 성밖에 나오지 않았다. 조조는 갖은 방법을 다 써 복양성에 있는 여포를 성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조조의 책략에 질렸는지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군마들의 발굽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지방에 평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전쟁 이상으로 백성들을 슬프게 하고 전 농토를 폐허화시킨 대란이 일어났다. 어느 날, 한 조각의 구름도 없이 활짝 개인 하늘 한 켠에서부터 점점이 검은 솜을 띄워 놓은 듯한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검은 기운은 금세 온 하늘에 번졌다.
"메뚜기다, 메뚜기 떼다!"
하늘에 떠도는 검은 솜과 같은 무리를 보더니 농부들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외쳤다. 메뚜기 떼의 내습이었다. 메뚜기 떼는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있는 모래 알갱이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하늘을 가리고 땅을 덮은 메뚜기 떼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곡식은 물론 나뭇잎이나 풀잎조차 남기지 않았다. 메뚜기들은 이렇게 한 지방을 완전히 황무지로 만들고,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백성들도 굶주림에 시달렸다. 농부들은 유민이 되어 동으로 서로 무리 지어 떠돌았다. 산동 지방에는 곡가가 천정부지로 올라 쌀 한 섬(열 말에 해당됨)의 값이 50관(된 꿰미)이나 되었으며 종내에는 기아로 인해 사람을 잡아먹는 일까지 생겼다. 이런 지경인지라 군량이 바닥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조조도 여포도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조조는 하는 수 없이 군사를 거두고 잠시 견성으로 돌아가 메뚜기 떼로 인한 대기근을 넘기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니 이제 복양성의 싸움은 자연히 중단되고 소강 상태로 들어갔다.
이때 서주태수 도겸은 나이가 이미 예순세 살이었다. 거기다가 중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니, 누구에게 이 서주를 물려주어야 하는가 근심에 싸여 있었다.
'역시 유비 현덕밖에 마땅한 사람이 없구나.'
도겸은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휘하 장수 미축과 진 등을 불러 후사를 의논했다.
"지난날 조조가 서주에서 군사를 물린 까닭은 여포가 그의 근거지 연주를 침범하였기 때문이오. 또한 메뚜기 떼의 내습으로 복양성 싸움을 일시 중단했으나 다시 군사를 일으켜 서주를 또 침범할 것이오. 그때 여포가 또 조조를 치면 좋으련만 일이란 항상 우리 쪽으로 유리하게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겠소. 더욱이 이렇듯 중병이 들어 나의 목숨도 언제 끝날지 모르니 내 생전에 확실한 후계 자를 정해 놓고 싶소."
태수 도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미축이 주저치 않고 진언했다.
"생각컨대 조조는 반드시 내년 봄이 되면 또다시 쳐들어올 것이 분명 하온데 서주를 지킬 만한 사람은 역시 소패의 유비 공밖에 없을 듯합니다. 지난번에는 두 번씩이나 태수님의 청을 사양하였지만 그때는 태수께서 건강하셨기 때문으로 생각되옵니다. 그러나 지금은 태수께서 병환이 위중하시니 유비 공을 다시 불러 청하신다면 유 공도 더 이상 사양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미축의 말을 듣고 도겸은 매우 기뻐하며 즉시 사자를 유비한테 보내도록 하였다. 유비는 사자를 만난 직후 관우, 장비와 함께 서주로 달려와 태수 도겸을 문병하였다. 도겸은 마른나무처럼 여윈 손을 내밀어 유비의 손을 잡으며 청했다.
"오늘 현덕 공을 청한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이 늙은이의 병이 점점 깊어져 이제는 위독한 지경에 빠졌소. 유 공이 한실의 성지를 지키며, 천하를 위하여 이곳 성주의 패인(인뒤웅이)을 받아주신다면 내 지금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겠소."
그러나 유비는 변함없이 패인을 받지 않고 반문했다.
"태수께는 두분의 자제 분이 계십니다. 그러하거늘 어찌 저에게 물리시려 하옵니까?"
"장남 상, 차남 응이 있기는 하나, 둘 다 중임을 감당할 만한 그릇이 아니오. 내가 죽은 후에라도 이 아이들을 보살펴 주시기만을 바랄 따름입니다. 결코 태수의 자리에 앉혀서는 아니 되오."
유비는 도겸이 그렇게 말하자 그의 깊은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도겸의 말에는 이 난세에 백성들을 따뜻이 보호하고 두 아들을 위해서도 유비가 맡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제서야 유비도 거절하지 않은 채 되물었다.
"하오나 이 중임을 저 한 사람으로는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제가 공을 도울 수 있는 한 사람을 천거하겠소. 북해의 사람으로 성은 손씨요 이름은 건이며 자는 공우라고 하오. 그 사람이면 능히 공을 도울 수 있을 것이오."
말을 마친 도겸은 옆에 있는 미축을 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유 공은…당세의 영걸이니… 그대는 잘 보필하도록 하오."
그러나 유비는 패인을 받지 않았다. 도겸은 말을 마치자 답답하다는 듯 손을 들어 유비를 가리키더니 그만 숨을 거두었다. 모든 서주의 사람들은 도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도겸의 휘하 장수들은 도겸의 유언에 따라 관인을 바쳤으나 끝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자 서주의 백성들이 관아의 문전에 모여들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유비에게 진언하였다.
"태수께서 생전에 소원하시던 바이며 또한 저희 백성들의 소원입니다. 만일 유사군께서 서주를 다스려 주시지 않는다면 저희들은 마음 놓고 살지 못합니다.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관우와 장비도 재삼 유비에게 권하였다. 이에 유비는 해질녘에야 마지못해 잠시나마 서주를 다스릴 것을 허락하였다. 유비는 손건을 청해 미축과 함께 종사관으로 삼고 진 등을 참모에 명함과 동시에 그 동안 거느리고 있던 소패의 군사들을 서주 성안으로 불러들였다. 유비는 곳곳에 방을 붙여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한편, 도겸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도겸의 유표를 조정에 올렸다.
유비는 이제야 비로소 한 주의 태수가 되었다. 군사의 힘에 의한 것도 아니요, 책모를 써서 얻은 자리가 아니었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찾아온 운명으로 받아들인 자리였다. 탁현의 한 한촌에서 몸을 일으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끝내 절의를 지키고, 공을 서두르지 않았다. 관우, 장비가 답답하게 여길 정도로 처신해 온 유비였다. 그러나 이에 이르기까지 먼 길을 우회해 온 것 같지만 그의 이러한 처신은 오히려 지름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메뚜기 떼의 내습으로 산양의 연성에 들어가 있던 조조는 도겸이 죽고 유비가 태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했다.
"죽은 도겸이 나의 원수임을 유비도 알고 있는 터에 지난날에는 원군까지 끌고 와 도겸을 편들더니, 이제는 유비 그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앉아서 서주를 몽땅 차지했단 말이지? 내 반드시 유비를 먼저 죽인 후에 도겸의 시체를 육시하여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리라!"
조조에게 서주는 언젠가는 마땅히 자기가 취해야 할 땅이라고 믿고 있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유비가 가로채고 들어앉았으니 조조가 펄펄 뛸 만했다. 조조는 우선 서주 정벌부터 서둘렀다. 그러자 순욱이 간하였다.
"옛적에 고조께서는 관중을 보전하시었고, 광무제는 하내를 확보하여 근거를 굳건히 하였습니다. 이로써 천하를 완전히 바로잡자는 뜻에서였습니다. 때문에 나아가면 싸움에 이기고 물러가도 견고히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엔 비록 어려움이 많았으나 마침내 대업을 완성한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처음 연주에서 거사하셨습니다. 이 황하, 제수의 땅은 천하의 요새로서 참으로 옛날 관중, 하내와도 비교될 만한 곳입니다. 지금 만약 서주를 취하려 하실 때 작은 병력으로 임하면 성사되기 어려울 것이요, 그렇다고 많은 군사를 일으키면 이곳이 빌 것입니다. 또한 여포가 그 허를 노릴 것이므로 연주를 잃을 우려가 있습니다. 만일 주공께서 서주를 빼앗지 못하신다면 어디로 가시렵니까. 지금 도겸은 죽었으나 이미 유현덕이 지키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서주의 백성들이 모두 유현덕을 따르고 있으니, 반드시 그를 위해 죽음도 마다 않고 싸울 것입니다. 주공께서 연주를 버리고 서주를 취하시는 것은, 큰 것을 버리고 작은 것을 취하는 것이요, 또한 근본을 버리고 지엽을 구하는 것이요, 편안함을 버리고 위태로운 것을 택하는 격입니다. 두 번 세 번 헤아려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조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순욱의 말에 반문했다.
"공의 말도 일리는 있소. 그러나 올해는 이전에 없던 흉년이 들어서 군량도 부족한데 이런 곳을 지키고만 있는 것을 상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소?"
"저에게 하나의 방책이 있습니다. 우선 동쪽 지방인 여남에서 영주에 걸친 일대의 군마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그 지방에는 아직 황건적의 잔당이 적지 않게 남아 있습니다. 그 도적들을 쳐서 뺏은 양곡으로 우리 군사의 군량미로 삼는다면 조정에서는 이를 오히려 가상히 여길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이나 천하의 영주들도 우리들을 챙송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석이조가 아니겠습니까?"
조조의 말을 듣고 보니 순욱의 말이 그럴듯했다. 조조는 남의 의견이 좋으면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좋다. 여남으로 가자! 도둑도 쫓아 버리고 군량도 챙기자. 참말로 좋은 계책일세."
며칠 후 연주 땅을 하후돈, 조인에게 지키게 하고, 그이 병마는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 해의 12월에 먼저 진 땅을 치고 이어 여남과 영천으로 나아갔다. 황건적 잔당의 두목 하의와 황소는 양산을 중심으로 다년간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고 있었다.
"뭐야, 조조가 왔다고? 조조는 연주가 근거지가 아닌가. 이는 필시 조조의 이름을 파는 거짓 조조임이 분명하다. 숨돌릴 틈 없이 단번에 섬멸해 버려야 한다!"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오자 하의와 황소는 황건적들을 양산으로 집결시켰다. 조조는 그들과 일전을 벌이기 전에 먼저 전위에게 명했다.
"전위는 정찰을 하고 오라.
전위는 말을 달려가더니 금세 돌아와 보고를 하였다.
"적의 무리가 마치 메뚜기 떼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합지졸이라서 규율도 대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면에서 강궁(센 활)과 경노(굳세고 튼튼한 활)로 쏘게 하십시오. 제가 기회를 보아 옆쪽을 찔러 맹공을 가하겠습니다."
전위의 말에 따라 조조는 강궁과 경노를 쏘게 했다. 화살이 어지럽게 도적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자 그들의 대오는 더욱 산만해졌다. 전위가 이때를 틈타 군사를 이끌고 나가자 하의가 부장을 내보내 전위를 막도록 했다. 그러나 하의의 부장은 전위와 몇 번 부딪치지도 못한 채 전위의 창에 찔려 말 아래에 나뒹굴고 말았다. 전위가 여세를 몰아 군사를 내몰았다. 도적들은 무수한 시체를 버리고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조조는 단번에 양산을 빼앗아 진을 쳤다.
다음 날이 되자 황건적의 또 다른 우두머리 격인 황소가 한 떼의 군마를 이끌고 나타났다. 황소가 진을 치고 나자 진두에 나타난 한 장수가 있었다. 이 사나이는 말도 타지 않은 채였다. 키는 일곱 자가 실히 되어 보였고, 손에는 쇠몽둥이를 들었는데, 머리에는 황건을 두르고 칠흙 같은 수염을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이놈들아,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이 고장에서 소문이 자자한 절천야차 하만이 바로 나다. 조조란 놈은 어디 있느냐. 진짜 조조라면 썩 나와서 한판 붙자!"
하만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조홍이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조홍도 말에서 내려 칼을 뽑아 들고 하만에게 다가갔다.
"이 무식한 도둑놈아! 조 장군은 너 같은 시골 장수하고는 싸우시지 않는다. 내 칼이나 제대로 막아라."
조홍이 춤추듯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자 하만도 장검을 휘두르며 무섭게 돌진하였다. 하만의 무예는 가볍지 않았다. 조홍을 맞아 싸운 지 4, 50합이 되었다. 조홍이 점차 뒤로 밀리는 듯 형세가 되었다. 이에 조홍은 기운이 다한 듯한 소리를 크게 지르며 장검을 내리친 후 슬며시 몸을 빼어 달아났다. 하만이 씩씩대며 기세를 올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그 뒤를 쫓았다. 그러자 조홍이 갑자기 몸을 홱 돌리더니 몸을 훌쩍 솟구쳐 뒤집자마자 하만을 칼로 내리치고 이어 땅에 내려서 무릎을 꿇으며 칼을 후리니, 칼은 하만의 몸을 두 동강으로 가르고 말았다. 조홍이 타도배작계(칼을 끌며 도망하다 갑자기 돌아서 치는 검법)를 써 하만을 거꾸러뜨린 것이었다. 이 사이에 이전이 말을 달려 적진에 뛰어들었다. 믿었던 하만이 죽고 기습을 받아 허둥대던 적장 황소는 이전의 손에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조조의 군사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들이닥쳐 황건적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황건적들은 원래가 오합지졸인지라 달아나기에 바빴다. 노략질한 금은보화며 양곡을 고스란히 남겨 둔 채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전세가 이 지경이 되자 하의는 2, 3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채 갈파 방면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그가 정신없이 말을 달리고 있는데, 돌연 산모퉁이에서 깃발도 기치도 없는 한 무리의 군마가 우르르 달려 나왔다. 선두의 한 장사가 손에 장검을 들고 하의의 앞길을 막았다. 그 장사는 키가 여덟 자요, 허리통이 몇 아름이나 되어 보였다. 그 장사는 무턱대고 발길질을 하여 하의를 말에서 떨어뜨렸다. 땅바닥에 떨어져 구르던 하의가 장창에 몸을 의지하며 일어서는 순간, 그 장수가 비호같이 달려들어 꽁꽁 묶어 버렸다. 하의를 따르던 도둑의 무리들은 그 모양을 보자 부들부들 떨며 일제히 장사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 숙여 항복하였다. 장사가 부하 군졸과 항복한 도둑의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려고 서두를 때였다.
"잠깐, 너희들도 황건적이냐?"
하의를 뒤쫓던 전위가 말을 달려오며 그 광경을 보고 쌍철극을 비껴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전위의 물음에 그 장사는 태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황건적 5, 6백여 명을 사로잡아 성채에 묶어 두었다. 왜 그러느냐?"
"그렇다면 빨리 황건적을 나에게 바쳐라."
"하하하, 별놈 다 보겠네. 만약 내 손에 있는 칼을 빼앗는다면 황건적을 네게 내어 주마. 그러나 그 전에 네놈의 목이 먼저 떨어진다는 걸 알아라."
장사가 전위에게 이렇게 빈정되자 전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오냐. 네놈이 무얼 믿고 분별없이 지껄이는지 어디 한번 해 보자!"
전위가 쌍철극을 휘두르며 장사에게 돌진했다. 장사 또한 큰 칼을 뽑아 들고 맞받아 싸웠다. 두 사람이 어우러져 싸우는 모습은 마치 두 마리의 용이 포효하며 뒤엉킨 것과 같았다. 쌍철극과 큰 칼이 불을 뿜으며 부딪친 지 반나절에 이르도록 승부가 나지 않았다. 전위가 먼저 말을 뒤로 물리면서 제의하였다.
"잠깐, 목이 마르구나. 한숨 돌리고 다시 싸우도록 하자,"
장사 또한 전위의 말에 동의했다.
잠시 물러서서 쉬고 난 후 장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이 쉬었으니 다시 시작하자!"
"나도 기다린 바이다."
두 사람은 다시 어울렸다. 고함 소리는 구름 속에 사무쳤고, 칼과 쌍철극은 수없이 맞부딪쳐 불꽃을 튕겼다.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 왔으나 두 사람은 일진일퇴를 거듭할 뿐 여전히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용장호투의 대결이었다. 싸우는 두 사람은 갈수록 불을 뿜는데 오히려 그들이 타고 있던 말이 지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싸움이 이토록 결말이 나지 않자, 전위의 부하 하나가 급히 조조의 본영으로 달려가 이 일을 알렸다.
'전위와 하루 종일을 싸우고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하는 장사가 있다는 말인가?'
전위는 악래라는 별호로 불릴 만큼 조조의 휘하에서는 으뜸가는 용사가 아닌가. 그와 일대 일로 종일토록 맞겨뤄 끄떡도 않는 장사가 나타났다니 조조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조조는 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급히 갈파로 달려갔다. 한편 전위와 장사는 타고 있는 말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뿐더러 날이 어두워 오므로 이번에는 장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날이 어두웠다. 오늘은 이만 싸우는 게 어떠나?"
"그렇다면 내일 결판을 내도록 하자."
전위 또한 바라던 바였다. 두 사람은 말을 돌려 돌아갔다. 다음 날이 되자 장사는 다시 나타나 전위에게 싸움을 걸어 왔다. 물론 전위도 흔쾌히 응해 싸웠다. 전위는 낯선 장수가 자기와 맞서 싸우고는 있으나 속으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적의 두목을 사로잡은 것으로 보아 황건적이 아님은 분명했다.
'이 장사는 도대체 누구일까?'
장사 또한 전위의 뛰어난 무예에 감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기와 싸워 무릎을 꿇지 않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싸우는 모습을 조조는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전위의 무용은 이미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장사 또한 평범한 무용이 아니었다. 조조는 내심 기뻐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어제처럼 쉽게 결말이 나지 않았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돌아온 전위에게 조조가 일렀다.
"오늘은 짐짓 패하여 달아나는 척하며 진으로 쫓겨오도록 하라."
조조의 말에 전위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조조의 명을 따랐다. 다시 싸우기를 30여 합, 전위는 슬며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사는 급히 전위를 추격하여 조조의 진문 앞까지 쫓아왔다. 이때 조조의 군사들은 활과 석궁을 쏘아 장사를 쫓아 보냈다. 조조는 급히 군사를 5리 밖으로 물렸다. 진문 앞에는 깊은 함정을 파놓고 쇠갈퀴를 가진 군사를 매복시켰다. 다음 날, 다시 전위에게 1백여 기를 주어 장사와 싸우게 하였다.
"못난 놈아, 오늘도 달아나려고 나왔느냐?"
장사는 빈정대며 껄껄 웃더니 말을 재우쳐 달려들었다. 전위는 힘을 다해 싸우지 않고 창으로 두어 번 찌르는 체하다가 다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사는 마음 놓고 뒤쫓기 시작했다. 어제는 뒤쫓으면서도 마음으로는 경계심을 품었던 장사였다. 조조의 진문에 이르기 전에 전위는 옆쪽으로 방향을 돌려 달렸다. 장사가 앞으로 달리면 금세 따라잡을 수가 있었다. 장사는 의기양양하게 곧장 달려갔다. 다음 순간 땅이 푹 꺼지며 장사는 말과 함께 함정에 빠져 나뒹굴었다. 매복하였던 군사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꽁꽁 묶은 뒤 쇠갈퀴로 그를 끌어 올렸다. 장사는 결박당한 채 조조 앞으로 끌려왔다. 조조는 재빨리 교의에서 내려서며, 짐짓 군사들을 나무랐다.
"천하의 호걸을 묶어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 공손히 예를 다해 모셔 와야 할 것이거늘……."
군사들을 물리친 조조는 친히 장사의 결박을 풀고 손을 잡아 일으킨 뒤, 의복을 가져오게 하여 갈아입도록 했다. 장사에게 조조는 친히 교의에 앉도록 권한 뒤 물었다.
"장사의 관향은 어디이며, 존함은 어떻게 되시오?"
조조의 은근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장사가 대답했다.
"저는 초국, 초현 사람으로, 성은 허 이며 이름은 저, 자는 중강이라 합니다."
"우리가 도적들을 뒤쫓고 있었는데 어찌하여 그들을 잡아갔소?"
"지난번 황건적이 난리를 일으켰을 때 나는 일족 수백 명과 함께 성을 방비하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황건적이 무리를 지어 우리 성을 넘보는 줄 알고 그들을 사로잡았을 뿐입니다."
"황건적의 출몰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늘, 어떻게 적은 인원으로 그 성을 지킬 수가 있었소?"
"전에 황건적 일당이 성을 침범해 와 나는 일족을 시켜 돌멩이를 모아 놓게 했습니다. 내가 돌팔매질로 그들을 한 놈씩 거꾸러뜨렸더니 도적들은 겁을 먹고 물러갔습니다. 또 하루는 도적들이 쳐들어왔을 때, 때마침 양곡이 떨어졌던 터라 그들과 잠시 화친하여 밭 갈던 소와 양곡을 교환하자고 하였지요. 도적들이 양곡을 가지고 와서 소를 몰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만 소를 놓쳐 버려 소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그 소들 중 두 마리의 꼬리를 양손으로 잡아 1백여 보 가까이 소를 끌어다 주었지요. 그런데 도적들은 이를 보더니 소도 내팽개친 채 달아났습니다. 그 이후 황건적들은 더 이상 우리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조조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매우 놀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다 신중한 자세로 고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바로 그 장사라면 나도 소문을 들은 지 오래되었소. 나는 그대 같은 장사가 필요하오. 공을 높여 쓸 터인즉 나와 함께 일해 보지 않겠소?"
허저로서도 뜻밖의 제의였다. 이미 사로잡힌 몸으로 조조의 권유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기꺼이 그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허저는 일족 수백 명을 거느리고 조조의 휘하에 들어왔다. 조조는 허저에게 도위 벼슬을 내리고 후한 상을 내렸다. 황건적의 두목 하의와 황소의 목을 베고 사로잡은 황건적의 잔당은 여남, 영주의 땅에서 농사를 짓도록 했다. 이로써 조조에 의해 여남고 영주 땅에는 다시는 황건적이 날뛰는 일이 없었다.
서주를 얻은 유비 현덕 천하 호걸 전위와 허저
조조는 본거지 견성으로 돌아갔다. 성을 지키고 있던 조인, 하후돈 등이 성 밖까지 나와 맞이하였다. 조인과 하후돈은 조조를 맞아 그곳의 형세를 전했다.
"근자에 염탐꾼들이 알려오는 말에 의하면 연주의 여포 휘하에 설란과 이봉이라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군사를 이끌고 연주성 밖으로 나가 노략질만을 일삼는다고 합니다. 또한 성안의 장수들도 가혹하게 조세를 징수하면서 횡포를 부려 왔다고 합니다. 이에 백성들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공께서 승전한 군사를 이끌어 연주성을 공격한다면 일격에 성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는 그 말을 듣자 쉽게 차지할 수 있는 연주성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조조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연주로 쇄도하였다. 설란, 이봉은 조조의 대군이 파죽지세로 몰려온다는 말을 듣고 몹시 당황하면서도 성 밖으로 나아가 진을 쳤다.
허저가 조조 앞으로 나아가 아뢰었다.
"제가 장수 두 놈을 사로잡아 주공께 처음으로 드리는 선물로 삼고자 합니다."
조조 휘하에 든 이래 아직 공을 세우지 못한 허저가 성큼 나서며 말했다.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
"그 말 장하도다. 어서 가서 싸워라."
허저가 큰 칼을 들고 말을 달려 나오자 이봉은 화극을 번뜩이며 달려나갔다. 허저와 이봉이 말머리를 맞대고 부딪쳤다. 이봉이 허저를 알 리 없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꼴이었다. 불과 2합을 넘기지 못하고 허저의 칼에 맞아 고꾸라졌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설란은 얼이 빠졌는지 말머리를 돌려 도망가다 적교에 이르렀을 때 이전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설란은 성으로도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거야로 향했다. 그러나 설란은 끝내 몸을 피하지 못했다. 조조의 장수 여건이 난군 속에서 달아나던 설란을 뒤쫓아가면서 쏜 화살이 설란의 목을 꿰뚫으니 주인 잃은 말만 달아날 뿐이었다. 뒤따르던 졸개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항복하고 말았다. 연주성은 이렇듯 별로 힘들이지 않고 조조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이 기세를 몰아 복양도 무너뜨리자!"
조조는 말을 몰아 여포가 있는 복양성으로 육박해 갔다. 조조는 허저를 선봉으로 하후돈과 하후연은 좌군, 이전, 악진은 우군으로 삼고 자신은 중군을 이끌었다. 조조가 위풍 당당히 복양으로 진병하자 여포가 나아가 조조를 맞으려 했다. 그러자 모사 진궁이 여포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가서 그들과 부딪치면 불리합니다. 성 밖에 나가 있는 여러 장수들과 군사들을 불러모은 다음에 움직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여포는 진궁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공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내가 그들을 두려워할 것 같소?"
여포는 단숨에 조조군을 격멸하여 연주를 되찾을 심산이었다. 여포는 곧 성안의 모든 군사를 대동하여 성 밖으로 나가 포진하였다. 과연 여포의 용맹은 조금도 달라진 데가 없었다. 해를 거듭함에 따라 기승분전(말 위에서 분전해 싸움)의 능력은 이제는 가히 입신의 경지여서 문자 그대로 만부부당(만사람이 당하지 못함)이었다. 그야말로 싸움을 하기 위해 신이 만들어낸 불사신의 사람 같았다.
"음-. 이제야말로 나의 적수가 나타났구나."
허저가 여포의 모습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이름만 들어온 여포를 직접 보니 그는 호기가 불끈 치솟았다. 허저는 여포를 향해 큰 칼을 춤추듯 내두르며 돌진하였다. 여포와 허저는 만나자마자 말 한마디 주고받을 사이도 없이 창과 칼이 허공에서 불꽃을 튕기며 맞부딪쳤다. 여포의 화극이 허저의 겨드랑이를 스치는가 싶으면 어느새 허저의 큰 칼이 여포의 앞가슴을 파고들었다. 말과 사람이 한데 어울려 20여 합을 겨루니 마치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오르는 듯하였다. 양편 군사는 서로 적이라는 것도 잠시 잊은 듯 숨을 죽이고 손에 땀을 쥔 채 이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이때 조조가 전위를 불러 허저를 돕도록 했다.
"허저 혼자서 여포를 잡지는 못할 것이니 허저를 도와주라."
이번에는 전위까지 가세했으나 여포의 방천화극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과연 여포로다 하후돈과 하후연도 나가 여포를 사로잡으라!"
일찍이 사수관 싸움에서부터 여포의 용맹을 보아 온 조조인지라 한두 장수로 여포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전과 악진도 나가라!"
조조가 명하자 이전, 악진도 달려나갔다. 허저와 전위는 정면에서, 하후돈과 하후연은 왼쪽에서, 이전과 악진은 오른쪽에서, 이렇게 조조의 여섯 장수가 여포 한 사람을 에워싸고 맹공을 가하였다. 아무리 여포가 천하의 맹장이라 하나, 한꺼번에 당대의 맹장 여섯이 숨돌릴 틈도 없이 공격을 해대는 데야 당할 도리가 없었다. 여포는 위험을 느꼈음인지 방천화극을 크게 휘둘러 틈이 나자 적토마를 돌려 복양성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가 복양성의 해자(성 밖으로 둘러 판 못) 앞에 이르자 성문 위 문루에서 싸움을 지켜 보고 있던 부호 전씨가 급히 적교를 올리게 하였다. 적교가 올라가면 그 앞으로 깊은 해자가 가로놓여 있어서 성안으로 들 수가 없었다.
전씨는 지난번 조조에게 거짓 밀서를 써서 조조가 참패하도록 만든 장본인이었다. 여포가 명하므로 어쩔 수 없이 밀서를 썼으나 조조가 이 싸움에서 이기면 일족의 참살을 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싸움의 형세를 보아 가며 살아날 궁리를 펴고 있던 차, 여포가 패하자 그를 성안으로 들지 못하게 할 계략을 꾸몄던 것이다. 비록 성안에 진궁이 있다 하나 전씨는 명문이요, 부호로서 그를 따르는 자의 수가 많았다. 여포가 군사를 이끌고 성을 비우자 일족들과 수족들을 동원해 성을 자기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문을 열어라. 빨리 적교를 내려라!"
여포는 성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전씨가 성루에 모습을 드러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렇게는 못 하겠네."
전씨는 여포를 내려다보며 비웃으며 말하였다.
"어제의 내 편이 오늘은 적이 된다네. 나는 처음부터 나에게 득이 되는 곳을 택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당신이 전에 나보고 조조에게 항복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이미 조 장군한테 진정으로 항복하였다네. 하하하."
여포는 그제서야 전씨가 자신을 배반한 것을 알고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제는 물밀 듯 밀려드는 조조의 군사들 때문에 성 밖에서 더 이상 머뭇거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여포는 하는 수 없이 정도 방면으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진궁은 이를 알고 깊이 탄식해 마지않았다.
"전씨를 믿도록 만든 것은 바로 나다. 이것이 나의 큰 실책이었구나."
그는 급히 성의 동문으로 가 성안의 여포 가족들을 이끌고 정도로 떠난 여포의 뒤를 따랐다. 복양성을 힘들이지 않고 되찾은 조조는 이번에 복양성을 되찾는 데 큰 공을 세운 전씨에게 지난날에 저질렀던 죄를 용서해 주었다. 복양성을 되찾아 조조가 한숨을 돌리자 모사 유엽이 다가와 진언했다.
"여포의 용맹은 천하가 다 아는 바와 같습니다. 그는 오래지 않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싸우려 들 것입니다. 여포가 힘을 추스리기 전에 먼저 쳐 후환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조조는 유엽의 말을 듣고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여포는 언젠가는 자기가 쳐 없애야 할 적이었다. 유엽에게 복양성을 방비케 한 후 자신은 정도현으로 여포를 뒤쫓았다. 정도에 이른 여포는 그때 장막, 장초 형제만을 데리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 여포의 다른 휘하인 고순, 장료, 후성, 장패 등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양곡을 구하러 나간 뒤였다. 정도에 당도한 조조는, 여포군에게 싸움을 걸었으나 응하지 않자 멀리 40리나 떨어진 산기슭에 진을 쳤다. 조조가 머물고 있는 제군은 당시 보리의 수확 철이었다. 조조는 보리를 추수하여 군량미로 쓰기 위해 군사들에게 보리를 베게 하였다. 여포가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조조의 진으로 갔다. 여포군도 식량에 어려움을 겪던 터라 조조에게 보리를 빼앗길 수 없는 처지였다. 40리나 되는 길을 급히 달려와 보니, 조조의 진 왼편에는 숲이 있었다. 복병을 숨기기 좋은 장소였다. 몇 번인가 조조의 계략에 넘어가 혼이 난 적이 있던 여포는 이번에도 틀림없이 숲속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있을 것으로 여겨 군사를 물리고 말았다. 조조는 여포가 군사를 물렸다는 것을 알고 장수들에게 명했다.
"여포는 숲속에 복병이 있다고 생각하고 되돌아갔을 것이니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계략을 써야겠다. 복병이 있는 듯이 보이도록 숲속에 더 많은 기를 세우라. 그리고 진의 서쪽에 있는 긴 둑에다 복병을 숨겨 두어라. 여포는 반드시 내일 다시 와 불을 지를 것이다. 그때 둑의 복병들이 퇴로를 끊으면 가히 여포를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본진에는 50여 고수와 부근에서 끌어들인 마을 사람들에게 여포군이 오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도록 하였다. 숲에는 수없이 많은 기치를 꽂게 하되, 군사들은 둑 뒤에 매복시킨 후 여포군이 오기만 기다리게 했다. 이때 여포는 진궁과 함께 조조군을 깨뜨릴 궁리를 짜고 있었다.
"조조는 책략에 능한 자입니다. 섣불리 군사를 모으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진궁의 말에 뜻밖에 여포가 계책을 내놓았다.
"화공을 쓰면 어렵지 않게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진궁도 여포의 말이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화공을 쓴다면 숲속의 복병도 어쩔 수 없으리란 생각에 진궁도 여포의 말에 찬동했다. 여포는 진궁, 고순에게 성을 지키도록 한 뒤 대군을 동원하여 조조의 영채 가까이로 갔다. 여포가 숲 쪽을 바라보니 숲에는 무수한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여포는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숲에 불을 지르게 했다. 그러나 불길에 놀라 숲에서 뛰쳐나오는 군사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여포는 순간 주춤하였으나 다시 군사를 물릴 수도 없었다. 조조의 본진으로 방향을 바꾸어 진격하자 갑자기 조조의 진지로부터 천지가 떠나갈 듯한 북소리가 들려 왔다. 여포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사이, 영채의 뒤쪽으로부터 한 떼의 군마가 달려 나왔다. 여포가 그들을 향해 말을 몰자 이번에는 포성이 울리더니 제방 뒤에서도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나왔다. 여포가 적이 놀라며 그들을 보니 선두에는 하후돈, 하후연, 허저, 전위, 이전, 악진 등의 장수들이었다. 며칠 전에 그들에게 쫓겨 달아난 여포는 때아닌 복병들과 그들이 함께 몰려오자 하는 수 없이 급히 말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여포의 부장 성렴은 이전이 쏜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여포가 달아나고 부장 성렴까지 목숨을 잃으니 부하 군사들은 지리멸렬하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개미 떼처럼 뿔뿔이 흩어지거나 목숨을 잃었다. 여포는 이곳에서 수많은 군사를 잃어 그를 따르는 자의 수는 헤아릴 정도였다. 군사들이 도망쳐 진궁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군사를 그렇게 많이 잃었다면 이 성도 지킬 수가 없다. 급히 떠나야겠다."
진궁은 이렇게 탄식하더니 여포의 가족을 이끌고 서둘러 정도성을 빠져 나갔다. 조조군은 여세를 몰아 일사천리로 성안으로 짓쳐 들어왔다. 성안에는 장막, 장초가 있었으나 이미 기울어 버린 대세였다. 장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장막은 허겁지겁 원술에게 달아나 구차한 목숨
을 의탁했다. 이제 정도성마저 조조의 수중에 들어오니 산동 일대가 모두 조조의 세력권에 머물게 되었다. 정도에서 크게 패한 여포는 도주하는 동안, 흩어졌던 장수들과 진궁을 만났다. 장수가 근거지를 잃으면 따르던 군사들도 가뭄에 강물 줄 듯 줄어든다. 여포의 군졸들은 제각기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또다시 애타는 심정을 안고 각지를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 여포였다.
"기주의 원소를 찾아가면 어떨까?"
여포는 그를 뒤따라온 진궁에게 물어보았다. 진궁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포가 천하의 역적 동탁을 죽인 공적을 지녔으며 뛰어난 명장이긴 하나 각지의 군벌이나 영주들은 그를 반겨 주지 않았다. 어제의 적도 오늘의 동지가 되는 것에는 난세에는 흔히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의부와 주군 등 두 사람이나 죽인 바 있는 무절제함은 야망에 불타고 있는 군벌들에게도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진궁 또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여포가 원소를 들먹였을 때도 자신 있게 입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한 번 교섭이나 해 보자고 하여 사람을 보내어 원소의 마음을 떠보았다. 원소는 모사 심배에게 의견을 물었다.
"아니 될 일입니다. 여포는 천하의 호걸이지만, 반면에 승냥이와 같은 성정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세력을 만회하여 연주를 탈환한다면 다음에는 이 기주를 노릴 것이 뻔합니다. 오히려 조조와 손을 잡고 여포와 같은 난적을 제거하는 편이 주공에게는 이로운 계책이 될 것입니다."
원소는 심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말이 그럴듯하다."
원소는 즉시 부하 장수 안량에게 5만여 명의 군사를 주어 조조군에 협력케 하는 한편, 조조에게 친선의 뜻을 담은 글을 보냈다. 이 소식은 여포에게도 전해졌다. 여포는 크게 당황하여 진궁에게 의견을 물었다.
"근자에 서주의 태수가 된 유현덕을 찾아가면 어떨까요? 유현덕은 서주의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거절하지 않는다면 서주보다 더 좋은 곳은 없지요."
여포는 진궁의 말을 좇아 유비에게 사람을 보냈다. 유비는 여포의 일족이 서주에 와 거두어 주기를 청한다는 말을 듣자 휘하의 장수들을 모은 후 말했다.
"당세의 영웅이 의지할 곳이 없다니 가여운 일이구나. 그를 맞도록 해야겠다."
유비는 관우, 장비를 데리고 몸소 나아가 맞으려 했다. 그러자 미축이 나서며 극력 만류했다.
"아니 됩니다. 여포가 어떤 인물인가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원소도 그를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 서주는 태수께서 다스린 이후 아래위가 일치하여 평온하게 국력을 기르고 있습니다. 무엇이 답답하여 승냥이와 같은 여포를 맞아들입니까?"
옆에 있던 관우, 장비도 미축의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비는 미축의 말에도 수긍하기는 했으나 다시 입을 열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미축의 말과 같이 여포의 사람됨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만약 여포가 조조의 연주를 치지 않았더라면 서주는 조조의 화를 면할 수 있었겠느냐? 설사 여포가 쫓기는 신세가 되어 나에게 구원을 청한 것도 하늘의 뜻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포의 궁박한 처지를 모른 척할 수는 없노라."
유비도 내심으로는 여포의 절도 없음을 몹시 못마땅히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의 맹장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고 여겼다. 미축은 유비가 이미 여포를 맞아들이기로 작정하였음을 알았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미축도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장비는 관우를 돌아보며 투덜댔다.
"앞으로 형님이 착하게 대할수록 그 교활한 놈은 그걸 약점으로 이용하려 할 거요. 그 여포 놈을 나가서 맞이하다니……."
그러나 장비도 이렇게 투덜거렸으나 하는 수 없이 유비를 따라 성 밖 30리까지 나가서 여포를 맞았다. 여포는 유비가 먼 곳까지 몸소 나와 맞자, 감격하였던지 황급히 말에서 내려 유비에게 예를 갖췄다. 유비와 여포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성으로 돌아왔다. 둘은 관아에 이르자 서로 예를 갖춰 인사를 나눈 후 자리에 앉자 여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본디 왕 사도와 함께 뜻을 같이하여 동탁을 없애고 사직을 바로잡으려 하였소. 그런데 뜻밖에 이각, 곽사의 변을 만나 관동을 정처 없이 떠돌았으나 아무도 나를 받아 주지 않았소. 때마침 조조가 까닭도 없이 서주를 침공하는 것을 유 공께서 구원하시었소. 그때 이 여포는 연주를 공격하여 조조의 힘을 분산시키려 하였으나, 도리어 간교한 책략에 넘어가 장수와 군사를 꺾인 패장이 되고 말았소. 이제 유 공께 몸을 던져 함께 조조를 치고자 하는데 유 공의 의향은 어떠신지요?"
여포의 물음에 유비가 대답하였다.
"도공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서주를 맡아 다스릴 사람이 없는 고로 이 비가 잠시 고을을 맡아 일을 보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제 장군께서 이곳으로 오셨으니 서주 이 땅을 넘겨 드리는 것이 합당하다 생각합니다."
유비는 이렇게 말하더니 태수의 패인과 관인을 가져오게 하여 여포 앞에 내밀었다. 여포는 얼른 손을 내밀어 집으려 했다. 그러다가 유비의 등 뒤에서 눈을 부릅뜨고 관우, 장비가 그를 지켜보자 움찔했다. 여포는 깜짝 놀라 억지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나는 한낱 용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한 주를 다스리는 주목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포는 손을 흔들며 사양하였다. 그러자 여포의 곁에 있던 진궁이 입을 열었다.
"손님이 어떻게 주인을 누를 수 있겠습니까. 부디 그런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진궁의 말에 유비는 더 이상은 권유하지 않았다. 주연을 베풀어 여포를 대접한 후에 숙소를 마련해 주고 가솔들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집을 마련해 주었다. 다음 날 여포는 답례로 유비를 자기의 숙소로 청하였다.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참석하였다. 술이 몇 순배 오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여포는 유비, 관우, 장비를 후당으로 안내하였다. 후당에 일동이 좌정하자 여포가 입을 열었다.
"유 공께 아내를 소개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내를 이리로 나오게 하겠소이다."
"아니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유비는 두 번 세 번 사양하였다. 그러다 여포가 말했다.
"현제(어진 아우)께서는 너무 사양 마시게. 우리는 이미 형제와 다름없지 않는가."
여포의 이 오만불손한 말에 성미 급한 장비가 불같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괘씸하구나. 네가 누구길래 감히 우리 형님을 뭐니 하고 부르느냐. 우리 형님은 황실의 후예로 금지옥엽(임금의 자손이나 집안)이시다. 자 나가자. 내 네놈과 더불어 3백 합을 싸워야겠다."
장비는 고리눈을 부릅뜨고 수염을 곤두세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비는 당황하여 장비를 꾸짖었고, 관우는 장비를 달래며 간신히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유비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여포에게 말했다.
"어리석은 아우가 술에 취하여 망발을 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
여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섣불리 입을 열수도 없는 일이었다. 유비의 너그러운 겸양이 아니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니 자연 주연이 길어질 리가 없었다. 곧 주연이 파하고 여포는 현덕을 대문 밖까지 전송하자,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장비가 장팔사모를 옆구리에 끼고 말을 달려 닥달치면서 고함을 쳤다.
"이놈, 여포야 어서 나오너라. 나와 싸워 보자!"
유비가 깜짝 놀라 장비를 크게 꾸짖었다.
"익덕, 이게 무슨 짓이냐? 어이하여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무례한 행동을 자행하느냐!"
관우는 사납게 날뛰는 장비가 탄 말의 재갈을 잡으며 가까스로 장비를 진정시켰다. 다음 날, 여포가 시무룩한 얼굴로 유비를 찾아왔다.
"유 공께서는 이 여포를 버리지 않으시나, 아우님들이 마땅치 않게 여기므로 이제 다른 데로 갈까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장군이 나를 버리고 가신다면 내 죄가 너무 큽니다. 못난 아우의 무례한 소행을 다른 날에 다시 사과하겠소이다. 이곳과 가까운 곳에 소패라는 소읍이 있습니다. 만약 장군께서 협소하게 여기시지만 않는다면 우선 그곳에라도 머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양곡과 마초는 제가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여포는 유비의 말에 반색을 하며 말했다.
"유 태수께서 베푼 고마움을 보답할 길이 없소이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더 이상 바람이 없겠소이다."
여포는 유비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거듭 남기고 가솔과 수하 군사를 데리고 소패로 갔다.
한편 자나깨나 서주 정벌만을 생각하고 있던 조조는 여포를 유비가 맞아 소패에 자리잡게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차 한발 늦었구나. 이는 유비가 필시 여포를 유사시에 써먹기 위함이리라.'
조조는 생각이 이에 미치자 곧 휘하 장수들을 모아 놓고 서주 칠 궁리를 의논했다. 그러나 곽가를 위시한 모사들은 한결같이 지금은 서주를 칠 때가 아니라고 만류했다.
"지금 서주를 친다면 유비와 여포는 필시 한마음이 되어 주공께 대항할 것입니다. 이는 곧 그 둘을 단결하게 만들 것이며 이는 결코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아직 이대로 버려둔다면 여포는 결코 유비의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임은 예전의 정원, 동탁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유비와 여포는 필연코 분란을 일으킬 것인즉 그때 상처 입고 갈라진 그들을 잡기가 어찌 어렵겠습니까?"
조조는 이치에 맞는 곽가의 진언에 따라 서주 공격을 잠시 뒤로 미루고 말았다. 그런 뒤 산동을 평정한 사실을 그럴 듯한 문장으로 꾸며 조정에 표문을 올렸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조조를 건덕장군 비정후로 봉하였다. 이에 조조는 드디어 산동을 확실한 기반으로 삼아 웅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장안의 정세는, 혼란스러운 조정은 이름뿐이고 실권은 동탁의 휘하에 있던 이각, 곽사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이각은 스스로 대사마가 되고, 곽사는 대장군이 되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동탁에 못지않은 폭정을 펴며 천자를 능멸하고 대신들을 업신여기며 백성들을 학대했다. 그래서 백성들 입에서는 '역적 하나가 죽으니 어느새 두 역적이 조정에 생겼구나'하는 한탄이 떠돌았다. 날이 거듭될수록 이각, 곽사 무리들의 행패가 이처럼 심해지자 그들을 제거할 생각을 품고 있던 태위 양표와 대사농 주전이 조조의 표문을 접한 후 은밀히 헌제를 배알했다. 두 백관은 이각, 곽사의 횡행이 심해지자 이전부터 그들을 제거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지금 조조는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있으며, 그 휘하에는 용맹이 뛰어난 무장과 지모가 특출한 모사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만약 이 사람을 얻어서 사직을 온전히 하고 이각, 곽사를 쳐없엔다면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헌제는 그들의 말에 울먹이며 대답했다.
"짐은 그 두 역적놈의 능멸을 받아온 지 오래이오. 만일 그 두 놈을 주살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소?"
양표가 부복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신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사옵니다. 먼저 두 역적을 이간시켜 서로 싸우게 한 후에 조조에게 조서를 내리시어 그를 장안으로 불러들이십시오. 두 역적이 싸워 힘이 약해졌을 때 조조로 하여금 그들을 평정시키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두 역적을 무슨 수로 싸우게 한다는 말이오?"
"염려 마십시오. 곽사의 아내는 본디 질투심이 강하다고 합니다. 사람을 시켜서 곽사의 아내에게 반간지계(이간시키는 계교)를 쓴다면 두 역적 사이에는 반드시 죽고 죽이는 분란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양표의 말에 헌제는 마침내 그 계책을 시행토록 하고 조조에게 밀조를 내렸다. 헌제의 내략을 받은 양표는 마음 속으로 반간지계를 위한 궁리를 짜며 집으로 돌아가 내실로 들어갔다.
"근자에도 곽사의 영부인과 가끔 만나고 있소?".
양표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문을 연 뒤 마음속의 계책을 털어놓았다. 다음 날, 양표의 아내는 대장군 곽사의 부중을 찾아가 곽사의 아내를 만났다.
"이토록 귀한 선물을 주시다니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양표의 아내는 곽사의 아내에게 선물을 주며 환심부터 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얘기를 주고받다가 문득 양표의 아내가 슬픈 기색을 하자 곽사의 아내가 의아해 물었다.
"부인, 왜 그토록 슬픈 얼굴을 하십니까?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 게로군요."
"미안합니다. 사실은…저, 부인을 뵈오니 부인께서만 까맣게 모르고 계시는 것 같아 그만……."
"예? 모르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어서 말씀하세요."
곽사의 아내는 양표 아내의 손목을 잡고 흔들면서 다음 말을 재촉했다. 곽사의 아내는 이미 입술의 덫에 걸려들고 있었다. 양표의 아내는 짐짓 동정을 금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부인께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계십니까?"
"무슨 말씀인지……, 어서 속시원히 말씀해 보시지요."
"예, 사실은 곽 장군께서 어여쁜 이사마(이각) 부인과 정분이 두텁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만약 이사마께서 그 일을 아시게 된다면 곽장군께서는 필시 해를 입게 될 것이옵니다."
"어쩐지 태도가 이상하다 여기고 있었습니다. 외박이 잦은 데다 늦게 귀가하기가 일쑤였습니다만 그런 부끄러움을 모르는 짓을 하고 다녔군요. 부인이 말씀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영영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낼 뻔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짓을 못 하게 해야지요."
곽사의 아내는 질투에 눈이 어두워서 사실 여부를 알아보기도 전에 눈물을 철철 흘리며 슬피 울었다. 양표의 아내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곽사의 부인은 그 이후 병든 사람처럼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며칠 후 곽사는 이각의 초대를 받아 집을 나서게 되었다. 곽사의 아내는 의심이 더럭 났다.
"어디를 가시려고 의관을 갖추십니까?"
"이사마가 청하는군. 연회가 있다 하오."
"가지 마십시오."
"아니, 친구의 초대인데 왜 못 가게 말리시는 거요?"
"이사마는 틀림없이 당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사마는 본디 성품이 음흉한 사람입니다. 무슨 흉계를 꾸밀지 어떻게 알아요. 더욱이 예로부터 두 영웅은 한자리에 설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음식에 독이라도 탄다면 소첩의 신세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곽사는 아내의 말에 코웃음 쳤다.
"말조심하오. 이사마는 내게 그럴 사람이 아니오."
곽사는 아내의 말을 가볍게 들어 넘기며 아내를 뿌리치려 하였다. 그러나 아내는 가슴에 매달리며 울음까지 터뜨렸다. 그런 아내를 뿌리치고 갈 수도 없어 머뭇거리는 동안 결국 정한 시간이 지나 그날 밤의 연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다음 날, 이각의 집에서는 하인을 시켜 연회에 오지 않아 섭섭했다는 전갈과 함께 술과 안주를 보내 왔다. 주방을 통하여 술과 안주를 받은 곽사의 아내는 불현듯 한 가지 계교가 떠올랐다. 음식에 독약을 넣은 후에 곽사에게 가져갔다.
"오, 맛있게 차렸군."
곽사가 수저를 들자 그의 아내가 황급히 말렸다.
"밖에서 들어온 음식을 어떻게 함부로 드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리고는 고기 한 점을 집어 마당에 있는 개에게 내던졌다. 마침 그곳에 엎드려 있던 개가 덥석 고기를 받아 삼켰다. 얼마 안 있어 개는 갑자기 깽깽거리며 길길이 날뛰다 사지를 쭉 뻗고 그만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에그머니나!"
곽사의 아내는 남편에게 매달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거 보세요. 소첩이 뭐라고 여쭈었습니까. 이각의 집에서 음식에 독을 넣어 보낸 거예요."
"음-."
곽사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방금 벌어진 사실에 신음만 토했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 곽사는 이각을 경계하게 되었다. 한 달쯤이 지난 어느 날, 조정에서 퇴궐하여 집으로 돌아가던 곽사는 이각과 마주치게 되었다.
"곽 장군, 지난번에는 청해도 오지 않아 매우 섭섭했소. 오늘은 우리 집으로 함께 갑시다."
이각은 곽사의 손을 잡아 끌 듯이 집으로 청했다. 곽사는 이러저런 구실을 대며 응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각이 워낙 완강히 이끄는지라 하는 수 없이 이각을 따라갔다. 객청에는 이윽고 정성스럽게 마련한 산해진미가 그득한 술상이 차려졌다. 곽사는 이각과 마주 앉아 내키지 않는 술을 억지로 들었다. 밤이 으슥하여 만취한 곽사가 집으로 돌아온 후 일은 묘하게 꼬여들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곽사가 복통을 심하게 일으킨 것이다. 곽사의 아내는 이각의 집에서 술과 요리를 먹었다는 말을 듣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빈정거렸다.
"참으로 딱하십니다. 그토록 조심하도록 말씀드렸는데도 이사마를 믿다가 이런 봉변을 당하십니까?"
곽사의 아내가 해독약을 가져오고 소금물을 먹이는 등 법석을 떨고 난 뒤에야 겨우 복통이 가라앉았다.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을 당한 곽사의 얼굴엔 마침내 살기등등한 노기를 띠었다.
"내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제놈과 대사를 도모했거늘 이제 아 까닭도 없이 나를 죽이려 들다니! 좋다. 이사마 이놈, 내가 네놈에게 당하고 있을 성싶으냐!"
창백해진 얼굴로 내뱉듯 외친 곽사는 곧장 수하의 갑병들을 거느리고 이각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지체없이 이각의 귀에 들어갔다. 이각으로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당장 곽사의 군사들이 들이닥칠 판이었다.
"뭐라고? 곽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를 치러 온다고? 이놈이 나를 없애고 저 혼자 권력을 잡을 욕심이구나. 그래서 근자에는 나를 멀리했구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이각도 지체하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곽사를 치러 나갔다. 두 장수가 거느린 군마는 수만 명이 넘었다. 이 수만 명이 장안의 밤거리에서 서로 죽이고 죽는 혼전을 벌이니 도성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변했다. 도성이 수라장이 되자 원래 기강이 제대로 서지 않았던 다 같은 동탁의 휘하 졸개들이었던 이각, 곽사의 군사들은 이때를 틈타 싸움보다 민가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했다. 이때 이각의 조카로 이섬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한 무리의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을 에워쌌다. 그는 이각과 곽사가 싸우고 있는 틈을 타 헌제가 있는 궁성으로 들어가 두 채의 수레를 끌어내었다. 한 채에는 황제를 태우고 또 한 채에는 복 황후를 태웠다. 그리고 가후와 좌령으로 하여금 수레를 돌보게 한 뒤 궁녀들은 걸려서 후재문으로 내몰았다.
"이사마의 조카가 천자를 수레에 싣고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습니다."
곽사는 이런 급보를 받고 몹시 당황하였다. 황제를 옹위하고 있는 편이 이런 싸움에서 유리하다는 것을 곽사가 모를 리 없었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하였구나. 빨리 가서 천자의 수레를 빼앗아라!"
곽사가 명하여 후재문 밖으로 군사들을 보냈으나 이미 늦었다. 그때쯤 이섬의 군사들에게 이끌려 나왔던 천자와 황후의 수레는 이미 성 밖을 빠져나와 큰길로 질주하고 있었다. 곽사의 군대들은 그 모습을 보자 마구 활을 쏘아대었다. 이섬 일행의 후비군들도 곽사의 군대를 향해 활을 쏘아대니 무수한 궁인들만 화살에 맞고 칼에 찔려 죽어 나갔다. 이섬은 혼란한 틈을 타 천자와 황후의 수레를 옹위하여 이각의 본진으로 들어갔다. 먼저 싸움을 걸었으나 황제를 이각에게 빼앗긴 곽사는 자칫하면 역적이라는 소리만 듣게 될 판이었다. 화가 치솟은 곽사는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갔다. 평소에 눈 밖에 있던 조신들을 베어 죽이기도 하고 궁녀들을 겁탈하기도 했다. 금은보화를 노략질한 곽사는 후궁의 궁녀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자기의 진지로 끌고 갔다. 곽사의 행패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이제는 주인 없는 빈집이 되어 버린 궁궐에 불을 질렀다. 화염은 충천하고 궁녀들이 울부짖는 소리는 장안 거리를 뒤흔들었다.
한편, 황제와 황후를 납치해 오기는 했으나 진중에 두기는 불안하다는 생각에 이각은 그들을 미오성으로 옮기게 했다. 황제와 복 황후는 미오성의 으슥한 방에 유폐되었다. 이섬이 항상 감시를 하고 있어 황제는 마음대로 바깥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외부와는 일체 왕래가 차단되어 이각이 식량을 대어 준다고는 하나 양이 모자라고 그마저 끊어지는 때가 많았다. 황제의 측근들은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파리해져 갔다. 황제는 하도 딱하여 사람을 보내어 이각에게 호소하였다.
"쌀 5휘와 쇠뼈 다섯 마리 분만 보내도록 하라. 측근들에게 먹이고자 한다."
황제의 전갈을 받고 이각은 버럭 소리부터 내질렀다.
"조석으로 밥을 대어 주는데, 뭐가 부족해 또 쌀과 쇠뼈를 보내란 말이냐."
이각은 일부러 썩은 고기와 상한 곡식을 보냈다. 이런 것들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니 썩고 상한 냄새가 코를 찔러 먹을 도리가 없었다.
"아아, 이 역적놈이 짐까지 능멸하는구나."
황제가 분이 나서 음성을 높이자 시중 양표가 급히 아뢰었다.
"이각은 잔인무도한 놈입니다. 사태가 이에 이르렀으니 폐하께서는 잠시 노여움을 참으십시오. 그놈의 비위를 건드려서는 아니 되옵니다."
황제는 아무 소리 없이 고개를 떨구고 눈물만 흘리니 쏟아지는 눈물이 용포 소매를 흥건히 적셨다. 주위의 신하들도 이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후세 사람들이 그 난세를 시로 지어 한탄했다.
광무제께서 다시 일으킨 한나라
위아래를 열두 황제가 이어갔네.
환, 영제 덕이 없어 나라가 기울고
환관이 권세를 잡으니 말세가 되었네.
어리석은 하진이 삼공이 되어
쥐 같은 내시 없애려고 간웅 들이고
승냥이와 수달 대신 범과 이리가 드네.
서주의 더벅머리 음란하고 흉포하네.
왕윤은 붉은 마음 미인에게 의탁하여
동탁 여포 서로 싸우게 하네.
괴수를 죽이면 천하태평이련만
이각, 곽사 울분 뉘 알았으랴.
서울은 가시덤불 다투어 나고
여섯 궁은 굶주림에 겹친 싸움 걱정
민심도 멀리 가고 천명 또한 떠나
영웅들은 제각기 산하를 나누어 갖네.
뒷날 왕은 이를 보고 행하고
나라 다스림을 등한히 하지 말라.
억울한 백성의 간과 뇌가 땅에 흩어지고
원한 맺힌 피 강과 산에 흐르는구나.
반간지계 승냥이와 이리 떼 소굴
양표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슬픔 속에 쌓여 있었다. 반간지계를 써 오늘날의 이 난리를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양표 자신이었다. 계책이 적중하여 곽사. 이각이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게 만든 것은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엉뚱한 화가 황제와 황후에게까지 미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터였다.
황제와 양표가 깊은 시름에 싸여 있는데 홀연 사방에서 군사들의 말발굽 소리와 함성이 일었다.
황제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소신이 살펴보고 오겠나이다."
시신 한 사람이 밖으로 나가더니 부리나케 돌아와 아뢰었다.
"큰일 났습니다. 곽사의 군대가 성문밖에 몰려와서 황제를 넘겨 달라며 북을 울리고 징을 치고 있사옵니다."
곽사는 이각이 황제를 겁박하여 간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어 뒤쫓아와 이각에게 싸움을 걸었다. 황제는 더욱 크게 놀라며 말했다.
"앞문에는 승냥이요, 뒷문에는 이리로구나. 두 역적은 짐의 몸을 가운데 놓고 서로 빼앗으며 으르렁거리고 있구나. 아아, 짐은 어디에 몸을 두어야 하는가?"
이 무렵, 성문 밖에서는 한바탕 싸움이 끝났는지 고함과 아우성이 멎었다. 문득 곽사의 군에서 한 장수가 말을 달려 나와 외쳤다.
"역적 이각에게 말한다. 천자는 천하의 천자이시니라. 무슨 까닭에 폐하를 겁박하여 이곳으로 옥좌를 옮겨 모셨느냐. 나 곽사는 천하 만민을 받았다."
"곽사 네놈은 어찌하여 망발을 하느냐? 폐하께서는 네놈이 변란을 일으키자 난을 피하시어 스스로 이곳으로 용가를 옮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 이각은 지금 폐하의 옥좌를 수호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그래도 폐하께 칼을 앞세우고 활을 겨누겠느냐?"
"닥쳐라! 너는 지금 감히 페하를 유폐하는 대역죄를 범하고 있다는 걸 모르겠느냐. 즉시 폐하의 옥체를 우리에게 넘기지 않으면 너의 목이 잘려 나갈 줄 알아라."
"닥치거라 이놈. 딴 소리 할 것 없이 우리 서로 칼로써 겨룰 따름이다. 기다려라, 내가 먼저 너의 목을 베어 주마!"
이각은 장창을 비껴들고 곽사에게로 말을 몰았다.
곽사도 이에 질세라 장검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나와 맞부딪쳤다. 칼날창이 번뜩이고 두 마리의 말, 여덟 개의 말굽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숨 가쁘게 움직였다. 창으로 찌르고, 칼로 치고 후리며 어지럽게 어우러졌지만 형세는 막상막하, 좀처럼 승패가 날 것 같지 않았다.
성안에서 황급히 말을 타고 뛰쳐 나와 두 사람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잠깐, 두 분 장군께서는 싸움을 멈추시오."
그는 태위 양표였다. 양표는 장창과 장검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두 분은 싸움을 멈추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시오. 어명이요, 어명을 거스리는 사람이 바로 역적이 아니겠소."
양표의 말에 이각. 곽사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서로 역적이라고 비방하던 차에 어명을 내리니 우선은 따르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곽사와 이각은 하는 수 없이 군사를 거두어 각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양표는 주전을 비롯한 조정 대신 60여명과 의논한 후 곽사와 이각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먼저 곽사의 진영을 찾았다. 양표가 곽사에게 화해를 종용하자 곽사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뭐요, 무조건 화해하라고? 허튼 소리 작작하시오.
곽사는 화를 벌컥 내며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양표를 따라온 주전 이하 60여 명의 대신들을 모조리 포박하였다.
"이게 무슨 짓이오? 좋은 뜻으로 두 장군을 화해시키러 온 대신들을 왜 묶는 거요."
양표가 펄쩍 뛰며 곽사에게 항의 했다.
"닥쳐라! 이각은 천자까지도 볼모로 잡고 큰소리치고 있으니 나도 또한 대신들을 볼모로 잡아 둘 생각이다."
곽사는 오히려 오만하게 양표에게 쏘아붙였다.
양표도 얼굴이 굳어지며 말했다.
"조정의 두 기둥인 장군들께서 한쪽은 천자를 감금하고, 또 한쪽은 대신들을 볼모로 잡고 있으니, 그렇게 하여 어찌하실 작정이오?"
"닥치지 못할까! 감히 나를 훈계하려 드느냐.
곽사가 노기로 얼굴이 붉어지며 허리에 찬칼을 뽑으려 했다. 중랑장 양밀이 황급히 곽사의 손을 잡았다. 양밀의 만류로 곽사는 칼을 거두기는 하였으나 결박한 조신들은 풀어주지 않았다. 다만 양표와 주전 두 사람만이 진영 밖으로 쫓겨나왔다. 늙은 대신 주전은 여러 차례 하늘을 우러러 한탄을 하더니 양표를 바라보고 울먹이며 말했다.
"양 태위나 나나 사직의 신하로서 임금을 보필하지 못하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가겠소."
그는 양표를 끌어안고 통곡하다가 길에서 혼절하여 쓰러져버렸다. 그 뒤 주전은 집에 돌아간 지 얼마 아니 되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양표가 전갈을 받고 달려가 보니 주전의 이마는 무참하게 깨져 있었다.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고 분사한 것이었다.
이날 이후 이각과 곡사의 양군은 50여 일에 걸쳐 매일같이 싸움을 계속하니 애매한 군사들과 백성들만이 죽어 나갔다. 그들에겐 전쟁이 직무요, 생활이었다. 의미도 없고 대의명분도 없이 매일매일 싸움만 일삼았다. 그러니 늘어나는 것은 길바닥을 즐비하게 메우는 시체뿐이었다.
어느 날 시중 양기가 헌제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각의 모신에 가후라는 자가 있사옵니다. 신이 엿보건대 그는 폐하를 잊지 않고 있는 듯하옵니다. 충이 무엇이며 무엇이 불충인지도 능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언제든 기회가 있으시면 은밀히 부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 며칠 후 가후가 용무가 있어 황제가 유폐되어있는 방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황제는 좋은 기회로 여겨 좌으를 물리치고 눈믈을 흘리며 가후에게 말했다.
"경은 한조를 불쌍히 여기어 짐의 목숨을 구해 줄 수 없는가?"
헌제가 뜻밖에 이렇게 말하자 가후는 깜짝 놀랐다. 이어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예를 올린 후 입을 열었다.
"그건 신이 행하고자 하던 바이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소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발설하지 마옵소서. 신이 방책을 마련하겠습니다."
가후는 눈을 빛내며 조용하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는 눈물을 거두고 그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가후가 자리에서 막 일어서려 할 때였다. 발소리도 요란하게 이각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허리에는 장검을 찬 채 황제의 용안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황제는 사색이 되었다. 이각은 황제의 얼굴을 보면서 한바탕 껄걸 웃더니 입을 열었다.
"곽사는 신하라고 할 수 없는 놈입니다. 그놈은 조신들을 감금하고 불측하게도 폐하의 옥체까지도 겁박하려 하였습니다. 아마도 신이 없었다면 폐하도 그놈에게 끌려가셨을 것입니다."
이각은 이섬을 시켜 천자를 유폐시켜 놓은 뒤 자신이 무슨 공훈이라도 세운 듯 자랑스럽게 말했다. 신하가 황제를 대하는 예의는 이미 안중에도 없는 오만불손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헌제는 지금 그걸 이각에게 내비칠 처지가 못 되었다. 오히려 그런 이각에게 고맙다고 치하할 수밖에 없었다.
"고마운 일이오. 내 경의 공을 잊지 않을 것이오."
이각이 한바탕 수선을 떨고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황보력이라는 인물이 황제를 알현하려 들어왔다. 그는 이각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이를 잘 알고 있는 터여서, 그에게 곽사. 이각을 찾아가 화해를 시켜보라고 분부했다.
"신이 힘껏 애써 보겠나이다."
칙지를 받든 황보력은 먼저 곽사의 영채로 갔다. 그가 간곡한 말로 곽사를 달래며 화해를 권하자 곽사는 못 이긴 체 말했다.
"만약, 이각이 폐하를 돌려보낸다면 나도 대신들을 놓아주겠소."
황보력은 곽사에게 다시 다짐을 둔 뒤 이번에는 이각을 찾았다. 이각은 원래 좌도와 사술을 즐겨했다. 평소에도 해괴하고 요망스런 술법을 펴 그의 진중에는 항상 무녀를 두었으며, 북을 치게 하고 신내림을 하게 하여 무녀들의 말을 따랐다. 황보력이 기각의 진중에 들어섰을 때도 굿판을 벌여놓은 듯 어디선가 북소리, 징소리가 요란하게 들여오고 있었다. 황보력은 이각과 마주 앉자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제가 서량 사람으로 장군과 동향이라 하여, 특히 저더러 두 분을 찾아뵙고 화해를 권하라고 하명하시었소. 곽 장군은 이미 칙지를 받들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공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각은 그 말을 듣자 못마땅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나에겐 여포를 쳐 물리친 큰 공이 있소. 또한 정사를 보살핀 지 4년여에 갖가지 공적이 많았던 것도 천하가 다 아는 바요. 그러나 곽아다로 말하면 한낱 말 도적에 불과했소. 그런 놈이 감히 공경들을 가두어 놓고 나에게 맞서 보겠다 하니, 내 그를 용서치 않을 것이오. 그대도 눈이 있거든 나의 주변을 둘러보시오. 나에겐 책사맹장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게 될 거요."
"그렇지 않소이다. 옛날 유궁국의 후예가 자신의 활재주만 믿으며 환난이 일어날 것을 생각지 못해 멸망했소. 근자에 이르러서도 동 태사의 권력과 세력이 얼마나 강성했는지는 공도 잘 아실 것이오. 그러나 여포가 그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를 배반하여 그 머리를 도성문에 효수하지 않았소. 비록 세가 강하다 하더라도 믿을 것이 못됨을 이로 미루어보더라도 알 수 있소. 강하고 센 것만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오. 장군은 나라의 상장으로서 임금님께서 내리신 절월을 쥐고 계시고, 이미 자손들과 일가친척들이 다 높은 벼슬에 있으니 나라의 은혜가 크다 아니할 수 없소. 그런데 지금 곽 장군은 조신들을 겁박하였고, 장군은 지존을 겁박하고 계시니 과연 누가 가볍고, 누가 무겁다 하겠소?"
황보력의 말에는 앞뒤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사리가 정연했다. 이각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칼을 빼 들었다.
"황보력 이놈. 천자가 나를 욕보이려고 네놈을 보낸 모양이구나. 내가 먼저 네놈의 목부터 베어 버리겠다."
이때 기도위 양봉이 급히 이각을 말렸다.
"고정하십시오. 곽사를 아직 없애지 못한 터에 천자의 칙사를 먼저 죽이면 곽사에게 군사를 일으킬 명분과 구실을 주게 될 뿐만 아니라 제후들도 모두 곽사를 도울 것입니다."
"그러하옵니다. 칙사를 죽이면 이는 우리 스스로 곽사를 돕게 되는 일이 됩니다."
옆에 있던 가후도 양봉을 거들어 달래자 이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가까스로 칼을 거두었다. 그 사이에 가후가 황보력의 소매를 잡아 밖으로 나가게 했다. 밖으로 나온 황보력은 분이 치솟아 큰소리로 외쳤다.
"이각이 임금의 조칙을 받들지 않으니, 그럼 임금을 죽이고 그 자리에라도 앉겠다는 심산인가!"
"큰일 날 소리, 말조심하시오. 화를 당할까 두렵소이다."
시중 호막이 그의 말을 막았으나 황보력은 더욱 큰 소리로 호막을 꾸짖었다.
"호경재! 그대 역시 조정의 신하가 아니던가. 어찌하여 적도에게 붙으려 하는가.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는 법이니라 하였거늘, 내 비록 이각의 손에 죽는다 해도 그것이 신하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황보력은 죽기라도 작정한 듯 이각에 대한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
"이각은 천자도 능히 시해할 놈이다. 하늘을 거스른 짐승 같은 놈은 죽어도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
황보력이 이렇게 떠들어대자 그 일은 신하를 통해 헌제에게 알려졌다. 헌제는 그가 이각에게 죽임을 당할까 봐 걱정이 되어 그에게 명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몸을 피하도록 했다. 하지만 황보력은 그냥 떠나지 않고 서량 출신 군사들을 선동하여 이끌고 고향인 서량으로 돌아갔다. 본디 이각이 거느린 군사는 태반이 서량 사람들이었고, 거기다가 강족(오랑캐)의 군사들도 가담하고 있었다. 황보력은 서량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공공연히 이각을 비난하며 욕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각은 모반을 꾀하고 있다. 그를 따르는 자는 후에 역적으로 몰려 큰 화를 면치 못하리라."
황보력의 욕설과 악담은 서량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자연 군사들의 마음에도 동요가 일었다. 많은 서량 군사들의 사기는 하룻밤 사이 눈에 띄게 저하되었다. 이각의 귀에 이러한 소문이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격노한 이각은 호분(조위) 왕창에게 황보력을 잡아 오도록 명했다. 그러나 왕창 또한 무도한 이각에게 반감을 다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황보력이 충의지사임을 알고 추적하는 시늉만 하고 돌아와 거짓 보고를 올렸다.
"황보력이 벌써 어디로 내뺐는지 행방을 알 길이 없사옵니다."
한편, 가후 또한 이각의 군세를 약화시킬 심산으로 강족 출신의 군사들을 꼬드기고 있었다.
"천자께서는 그대들의 충성심과 오래 싸움에서 겪은 신고를 헤아리시고, 그대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밀조를 내리셨다.'반드시 후한 상을 내리시리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
가후는 강족에게 이각이 아직 아무런 상도 내리지 않은 점을 이용하여 이 같은 말을 하고 다녔다. 이각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있던 강족들은 가후의 말에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후의 말을 듣자 많은 강족 추신 군사들이 무리지어 진지를 이탈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회심의 미소를 띠고 있던 가후는 어느 날 다시 황제에게 나아가 낮은 목소리로 아뢰었다.
"이각은 탐욕스럽기는 하나 지모가 얕은 자입니다. 이제 진영을 떠나 달아나는 군사들이 많아 그도 기가 꺽여 있을 것입니다. 이때 그에게 중한 작위를 내리시면 그도 흡족해할 것입니다. 그에게 작위를 내리시어 달래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가후의 말을 좇아 황제는 이각에게 대사마의 벼슬을 내렸다. 이각은 진영 내의 군사들이 날이 밝을 때마다 줄어드니, 근심이 커져갔다. 더욱 그를 안타깝게 만든 건 군사가 줄어드는 이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말해 보라. 어젯밤에도 있던 군사들이 왜 고향으로 갔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장수들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들도 신통한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럴 때 생각지도 않았던 은작이 황제로부터 내려온 것이었다. 대사마란 큰 벼슬을 받은 이각은 그 동안 무거웠던 얼굴이 활짝 펴지며 기쁨을 억누르지 못했다. 이미 스스로 대사마라고 칭하고 있었던 이각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칭한 것이라 아무래도 개운치 않았던 이각은 천자가 조칙을 내려 명실공히 대사마로 봉하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다 무당들이 그동안 나를 위해 기도를 올린 덕이다."
그는 무당에게 금은보화의 좋은 상금을 많이 내렸다. 그러나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던 수하 군사들에게는 아무런 상도 내리지 않았다. 기도위 양봉은 섭섭하다 못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는 송과라는 동료를 찾아가 울분을 털어놓았다.
"그동안 목숨을 바쳐 가며, 창칼과 돌덩이 속에서 싸웠는데 그 공로가 한낱 무당에게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송가 또한 양봉과 다를 바 없었다.
"이를 말인가. 이는 사리를 밝게 헤아리지 못함이 아닌가. 이토록 암우한 자에게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렇네. 후에 역모에 가담했다는 더러운 이름만 남기겠네."
이야기가 이에 이르자 송과가 격한 어조가 되어 말했다.
"차라리 우리가 저 역적을 죽이고 천자를 구출하세."
송과의 말에 양봉은 용기가 치솟았다.
"좋은 말일세. 그럼 자네는 진중에 불을 질러 신호를 하게. 내가 군사를 이끌고 밖에서 호응함세."
양봉과 송과 두 사람은 그날 밤 이경에 거사하기로 약속하고 각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사람의 거사 계획을 엿들은 군사 한 놈이 이각이 내릴 상금과 출세에 눈이 멀어 이 사실을 이각에게 알렸다.
"장군님. 양봉과 송과가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
뜻밖의 밀고에 까짝 놀란 이각이 분을 참지 못하고 우선 송과를 잡아들여 불분곡직하고 목을 쳤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양봉은 성 밖에서 군사를 이끌고 송과의 신호만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 이경이 지나고 삼경이 되어서 이각의 진영에서는 불길이 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기다리던 신호 대신 이각의 군마가 양봉의 진영으로 짓쳐 들어왔다. 당황한 건 양봉이었다. 양봉은 사경 무렵까지 이각군이게 결사적으로 항전했으나 만반의 대비를 하여 온 이각군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소수의 군사를 거두어 서안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각군은 양봉군을 물리친 후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강병도 떠나가고 부하들마저 흩어졌으니 기뻐할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군사는 줄어들고 세력은 약해졌을 뿐이었다.
한편 곽사의 군사들도 끝도 없는 지루한 싸움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이각은 어느 날 급보를 받게 되었다.
"섬서성의 장제가 대군을 이끌고 와 두 장군을 화해시키겠다고 합니다.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응하지 않는 쪽을 쳐 없애겠다고 하옵니다."
그동안 섬서 지방에서 군사를 길러 온 장제가 대군을 거느려 오니 진퇴양난에 처한 것은 이각이었다. 이각·각사가 함께 뭉쳐 있을 때의 군대가 아닌 쇠약해진 군대였다. 거기다가 양봉과 싸우느라 많은 군사들을 잃었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군사 또한 많았다. 이각은 하는 수 없이 자기 편에서 먼저 장제의 진중으로 사람들을 보내 화해할 것을 수락했다. 일이 이에 이르자 곽사 또한 화해를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이각 · 곽사의 싸움은 이렇게 끝이 났다. 볼모의 고통을 받던 조신들도, 유폐되었던 헌제도 풀려났다. 헌제는 장제에게 그 공을 치하하고 표기장군에 봉하였다.
"장안은 이제 황무지가 되었사오니 홍농으로 행차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장제가 황제에게 권유하였다. 헌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짐도 오래 전부터 동도(낙양) 땅을 그리워하였소. 이제 동도와 가까운 곳으로 가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이오."
계절은 가을도 끝나가는 무렵이라 찬바람이 소맷자락을 파고들었다. 황제와 황후가 탄 수레는 긴 창을 나란히 든 어림군의 경호를 받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광막한 들판 길을 따라 홍농을 향해 나아갔다. 신풍을 지나 패릉교에 이르러 황제의 어가가 막 패릉교 다리 위를 지날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함성이 울리더니 전방에 한 무리의 군마가 나타나 앞길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수레에는 누가 타고 있소?"
시중 양기가 수레 앞으로 말을 몰아나서며 소리쳤다.
"성상의 거도 행차신데 누가 감히 길을 막는가?"
상대편에서 두 장수가 나서며 대답했다.
"우리는 곽 장군의 영을 받들어 이 다리를 지키며, 간세(첩자)의 왕래를 막고 있소. 우리가 직접 폐하를 뵈어 확인해야 하겠소."
그 말에 양기가 수레의 주렴을 높이 걷어 올리자 헌제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꾸짖었다.
"짐이 여기에 있는데 그대들은 왜 물러가지 않는가."
황제를 직접 바라본 군사들은 즉시 만세를 부르며 양쪽으로 쭉 갈라섰다. 황제의 수레가 다리 위를 지나자 두 장수는 곽사에게로 급히 말을 달려 이 사실을 고했다.
"폐하의 수레가 패릉교를 지났습니다."
"이런 못난 놈들! 장제가 대군이라 어쩔 수 없어 그의 말을 들었거늘, 기회를 보아 다시 황제를 겁박하여 미오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너희들이 어째서 함부로 보냈단 말이냐."
노기가 뻗친 곽사는 즉시 두 장수를 참한 다음 군사를 회동하여 천자의 뒤를 쫓았다.
다음 날 황제의 수레가 화음현(서안부)에 이르렀을 때였다. 수레 뒤쪽에서 요란한 함성과 말발굽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 왔다. 뒤쫓는 군사들의 기치로 보아 곽사군임이 분명했다.
"어가는 잠시 멈추어라!"
곽사군은 황제의 수레를 뒤쭟으며 고함쳤다. 황제는 곽사가 또다시 군사를 거느려 뒤쫓는 것을 보자 몹시 실망하여 눈물을 흘리며 군신들에게 말했다.
"간신히 이리의 소굴에서 벗어났다 했는데, 이번에는 승냥이 굴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군신들은 황제의 탄식에 안색을 잃고 어찌할 바랄 모르고 있는데, 추격병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한 갈래 큰 북소리가 울리더니 앞쪽 산기슭에서 한 장수가 말을 달려 나왔다. 뒤따르는 군마는 약 1천 명이 됨직했다. 불현듯 나타난 장수는 큰 깃발을 세우고 있었는데 '대한양봉'이란 글자가 씌었었다.
"아니, 양봉이라면…."
그 깃발을 보자 군신들은 모두 놀라며 반가워하였다. 이각을 배반하고 그와 싸우다 장안에서 모습을 감춘 양봉이 아닌가. 양봉은 송과와 손을 잡고 이각을 치려다가 일이 탄로나 송과가 붙잡혀 죽는 바람에 이각에게 패하자 군사를 이끌고 서안으로 달아나던 중 종남산 아래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다 뜻밖에도 천자의 어가가 행차하신다는 소리를 듣고 군사를 이끌고 마중 나온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곽사의 무리와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홀연 뜻밖의 군사들이 나타나자 곽사도 새롭게 진용을 짜고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곽사의 부장 최용이 먼저 말은 달려 나오며 외쳤다.
"주인을 배반하고 쫓겨 간 양봉은 어디 있느냐? 어서 나오지 못할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양봉이 죄우를 둘러보며 외쳤다.
"공명, 어서 나가 저놈의 목을 베어 오너라!"
양봉의 부름을 받은 장수가 커다란 도끼를 들고 달려나오더니 나는 뜻이 말을 몰았다. 그는 최용을 맞자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며 단 1합에 최용의 목을 찍어 말 밑에 떨어뜨렸다. 실로 무서운 용맹이었다. 양봉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가가 꺾인 곽사의 군사를 휘몰아쳤다. 도끼를 든 그 장수는 선두에서 곽사군을 향해 도끼를 내리치고 휘두르며 달렸다. 그의 도끼가 움직일 때마다 붉은 피가 주위를 붉게 물들였다. 곽사의 군사들은 달아나기에 바빴다.
"어가를 겁박하여 도망치려는 곽사의 잔당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소탕하라!"
양봉은 공명에게 명했다.
그 장수는 피로 물단 붉은 도끼를 휘두르며 나는 뜻이 말을 몰아갔다. 어가를 방패 삼아 몸을 감추고 있던 곽사와 그의 부하들은 공명이 달려오자 겁에 질려 다투어 20여 리나 달아났다. 이윽고 차을 거둔 양봉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어가를 향해 배례하며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양봉은 투구를 벗어 손에 들고 천자의 어가 아래에 끊어 엎드렸다.
"폐하의 옥체를 괴롭혀 드려 죄송스럽기 그지없사옵니다."
천자는 어가에서 내려 친히 양봉의 손을 잡으며 치하했다.
"위급한 짐을 구해 준 공의 은혜,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황제가 다시 양봉에게 물었다.
"큰 도끼를 휘두르며 적장의 목을 벤 장수는 누구인고?"
양봉은 그 장수를 불렀다.
"예. 하동 양군출신으로 이름은 서황, 자는 공명이라 하옵니다."
황제는 공명에게 옥음을 내려 치하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날 밤, 천자의 어가는 화음의 영집에 있는 양봉의 진영에 가 그곳에서 머물렀다. 장군 단외가 황제께 음식과 의복을 올렸다. 실로 오랜만에 황제는 배불리 먹고 따뜻한 침상에서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곽사가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군사를 수습하여 쳐들어왔다. 곽사는 비록 패하기는 했으나 양봉의 군사가 많지 않음을 알고 있는 터라, 흩어졌던 군사들을 다시 모아 달려온 것이었다. 서황이 도끼를 휘두르며 그들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곽사의 대군이 그를 사 방면에서 에워싼 채 밀려들자 시시각각 위험한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양봉이 천자의 어가를 지키고 있었으나 대군 앞에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황제는 어제의 기쁨도 하루 만에 절망으로 바뀌어 한숨만 쉬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결코 천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홀연 동남쪽에서 뜻하지 아니한 함성이 일었다. 한 장수가 먼지를 일으키며 군사를 몰아 천자에게로 달려왔다. 막 천자의 어가를 향해 군사를 휘몰던 곽사는 때아닌 협공을 받고 흔들렸다. 양봉과 서황이 이에 힘을 얻어 결사적으로 대드니 곽사는 우왕좌왕하다 다시 군사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 위급에서 목숨을 구한 황제는 그 장수를 불러 치하했다. 그는 동 귀비의 아버지인 노장 동승이었다.
"폐하, 이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신은 양 장군과 힘을 합쳐 기필코 이각. 곽사의 무리를 치겠습니다."
동승이 그같이 말하자 헌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동도로 향할 것을 명하였다. 동승. 양봉도 우선 천자를 동도에 편히 모시는 일이 급선무였다. 어가를 양쪽에서 호위하며 홍농으로 향했다.
두 번째 싸움에서도 패한 곽사는 패주하던 도중에, 역시 황제의 어가를 탈취하기 위해 말을 몰던 이각을 만났다. 이각이 황제를 겁박하고 있던 때는 서로 팽팽히 맞섰으나, 지금은 같은 처지가 되자 둘은 무턱대고 으르렁댈 수만은 없었다. 또한 이각은 이각대로 황제의 어가를 뒤쫓던 곽사가 패주해 오자 경위가 궁금했다.
"황제의 어가는 어찌 되었소?"
이각은 우선 황제의 어가에 대한 행방부터 물었다.
"양봉과 동승이 황제의 수레를 이끌고 홍농으로 갔소. 만약 그것들이 산동에 이르러 자리를 잡으면 우리는 끝장이오. 필시 천하의 제후들에게 명해 우리 두 사람을 사로잡으라고 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우린 삼족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오."
곽사의 말을 듣고 보니 그건 자명한 이치였다. 이에 이각이 말했다.
"지금 장제가 군사를 거느려 장안에 머물러 있으나 가볍게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 틈을 이용해 우리가 홍농으로 진격하는 게 어떻겠소, 천자를 죽여 없앤 후 천하를 반분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곽사는 이각이 제의하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둘은 군사를 합쳐 천자를 뒤쫓기 시작했다. 급히 나온 군사라 양곡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을 리 없어 가는 도중 필요한 것은 모두 약탈하니 애꿎은 백성들의 피해만 컸다. 이각 · 곽사의 군사가 뒤쫓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양봉과 동승은 동간이란 곳에서 그들을 맞기로 했다.
이각 · 곽사가 이번에야말로 황제의 어가를 탈취하리라 굳게 마음먹고 계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이각은 왼쪽에서 군사를 몰아 쳐들어가고, 곽사는 오른쪽에서 군사를 지휘하여 산과 들에 수많은 군사를 풀어 진격하기로 했다.
"우린 저들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군사를 이끌었으니 일시에 밀어붙인다면 저들을 무너뜨릴 수 있소.”
양봉과 동승도 각기 한쪽씩을 맡아 싸웠으나 워낙 중과부적이었다. 양봉은 이각. 곽사의 순사 대부분이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잡군인 것을 깨닫고 그들을 혼란시킬 계책을 썼다.
"보물이나 재물을 모두 길에 버리십시오.”
양봉은 천자에게 간곡히 아뢰었다.
황후는 주옥. 관. 목걸이, 천자는 부책. 전적 등을 어가 밖으로 내던졌다. 궁인과 무장들은 옷과 금띠를 벗고 끌르고 하여 길에 뿌렸다. 어가를 뒤쫓던 군사들이 모두 주린 이리처럼 땅 위에 떨어진 재물에 정신이 팔려 군졸들은 줍느라고 수라장을 이루었다. 양봉은 이 틈을 타 가까스로 천자가 탄 수레를 보존하였다. 이각. 곽사는 군사를 홍농으로까지 이끌고 왔다. 군사를 풀어 부녀자를 겁탈하고 재물을 약탈하니 홍농은 때아닌 생지옥이 되고 말았다. 양봉. 동승은 그들과 싸움을 벌이며 황제의 어가를 섬북으로 향하게 했다. 섬서의 북부라면 아직 미개한 묘족들이 살고 있는 지방이었다.
"이제는 하는 수 없습니다. 백파수 일당에게 밀조를 내리시어 그들을 부르시옵소서. 그들을 시켜 이각. 곽사의 무리를 물리치는 것이 남은 단 하나의 계책입니다.”
양봉는 헌제에게 간하였다. 양봉과 동승은 뒤따르는 이각. 곽사에게 사람을 보내어 화평을 맺자고 제의했다. 한편으로 밀지를 하동으로 보내어 이전에 흑산적의 무리였던 백파의 두목 한섬. 이락. 호재 세 장수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 중 이락은 산중에서 무리를 모아 산적질을 일삼았던 자였으나, 위급한 사정이라 그에게라도 원병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세 장수는 황제가 지난날의 죄를 면해 주고 벼슬을 내린다고 하자 휘하의 무리를 이끌어 왔다. 황제의 어가는 급한 대로 산적들의 호위를 받으며 홍농으로 향했다. 도중에 곽사 · 이각의 연합군과 마주쳤다. 이각·곽사의 군대에도 토비산적이 많이 섞여 있었다. 양군 사이에 맹수와 맹수끼리 물고 늘어지듯 끝없는 싸움이 이어졌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태양도 피보라 때문에 검게 흐려지는 듯했다. 곽사는 양봉. 동승이 이끌고 온 군사들을 살폈다. 그들이 산적질이나 일삼던 도둑의 무리라는 것을 알자 곽사는 한 꾀가 떠올랐다. 얼마 전 어가에서 내던진 보물과 재화들을 사용하여 저들의 얼을 빼자는 생각이었다. 그때 병사들에게 몰수해 두었던 재물을 싸움터에 뿌렸다.
과연 이락 등의 부하들은 길 위에 내던져진 보물이나 재화를 보자 대오고 뭐고 소용이 없었다. 그걸 줍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각. 곽사는 계책이 맞아 들어가자 총공격령을 내렸다. 군사는 양편으로 나누어 들어가며 닥치는 대로 주살했다. 관군으로 급조된 산적들은 무수히 목숨을 버리거나 산 자는 허둥지둥 달아나기에 바빴다. 이 싸움에서 두목 호재는 목숨을 잃고 이락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도망가는 어가를 쫓아 겨우 목숨만을 보전하여 달려갔다.
천자의 어가는 길을 재촉하여 황하의 강기슭의 당도하였다. 이락은 벼랑을 타고 내려가 어렵게 배 한척을 구했다. 그러나 안벽은 병풍처럼 깎듯이 세워진 험한 지세였다. 천자는 밑을 내려다보기만 하고 절망에 가까운 신음 소리를 낼 뿐이었고 황후는 흑흑 흐느낄 뿐이었다. 양봉 등의 시신들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각. 곽사의 군사들은 추격을 멈추지 않고 뒤따르고 있었다. 거기다가 천자의 군대는 이제 헤아릴만치 그 수가 줄어있었다.
이때 황후의 오라버니 되는 복덕이 수십 필이나 되는 비단을 풀었다. 그 비단으로 천자와 황후를 칭칭 감아 묶고, 암벽 위와 아래에 비단 띠를 연결하여 그 위를 타고 내리도록 하였다. 이윽고 천자. 황후를 합해 겨우 대여섯이 작은 배에 올랐다. 그 밖의 군사와 늦게 뒤쫓아온 궁인들이 필사적으로 뱃전에 매달렸다. 그러자 이락이 칼을 빼 들었다.
"이러다간 모두 죽을 뿐이다."
이락은 그들의 손가락, 손목을 가리지 않고 무참히 잘라 버렸다. 뱃전에 일렁이는 물보라는 붉게 물들었고, 잘린 손가락이나 손목이 물결에 휩쓸려 다녔다. 천자를 따라 머나먼 길을 싸움터를 전전하며 여기까지 천자를 모시고 왔던 궁인들은 결국 황하의 물고기밥이 되고 말았다. 천자는 쏟아지는 눈물로 볼은 적시며 호곡하였다.
"애통한지고. 짐이 다시 조묘에 오르게 되는 날에는 반드시 그대들의 넋도 제사 지내주마."
황후도 이 참혹한 광경에 사색이 되어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다. 가까스로 강을 건너 뭍에 올랐을 때는 천자의 어의도 흠뻑 젖어있었다. 황후는 배멀미 때문인지 몸을 가누지도 못하여 오라버니 복덕이 업고 내렸다. 강을 건너고 보니 황제와 가까운 측근 10여 명뿐이 남지 않았다.
갈대숲에서 불어오는 늦가을 바람이 몹시 세찼다. 흐린 날씨여서 젖은 옷들은 좀처럼 마르지 않아 모두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거기다가 어가도 버리고 없어, 천자는 걸어서 거는 수밖에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발걸음이라 곧 발바닥이 부르터 피가 흘러내렸다. 이를 보다 못한 양봉이 어디선가 낡은 달구지 하나를 빌려 왔다. 멍석을 깔아 천자와 황후를 오르게 했다.
초저녁 무렵, 이을고 대양이란 마을에 당도하였다. 쫓기는 몸이라 조석을 마련할 길이 없는 일행은 어느 허름한 기와집에 자리를 정했다. 이를 본 한 노파가 조밥을 지어 바쳤으나 천자와 황후는 목구멍으로 넘기질 못했다.
다음 날이었다. 황제는 그동안 자기를 보호해 준 이락을 정북장군으로, 한섬을 정동장군으로 삼아 길을 나섰다. 이때 두 사감의 대신이 수레 앞에 나타나 엎드려 절한 후 통곡했다. 어지러운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뿔뿔이 흩어졌던 태위 양표와 태복 한융이었다. 두 사람은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천자 일행을 찾아 헤매다 여기에서 겨우 만난 것이었다. 그들을 다시 만난 황제와 황후는 재회의 반가움에 눈물을 지었다. 한동안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달래던 태목 한융이 천자 앞에 꿇어 엎드리며 말했다.
"이각이나 곽사 두 역적은 아직까지 제 말을 제법 듣는 편입니다. 그런 옛 인연에 의지하여, 이 길로 되돌아가 그들에게 군사를 거두어들이도록 권고해 볼까 합니다. 폐하께서는 너무 심려 마시고 옥체를 잘 보존하십시오.”
한융은 눈물을 흐리며 아뢴 후 혼자서 적진을 향하여 떠났다. 양표는 천자에게, 안읍현에 임시로 거처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안읍이라 해서 거처할 만한 마땅한 집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어느 초가집 한 채를 빌어 거처하는데, 문짝도 없어 가시덤불을 꺾어 사방을 두렀다. 장수와 군사들은 가시덤불 밖에서 야영을 했다.
그 무렵 이런 헌제를 더 괴롭힌 것은 바로 이락과 한섬이었다. 산적의 본성을 슬슬 드러내기 시작한 이락과 한섬의 무리가 행하는 방자함에, 헌제는 눈살을 찌푸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강을 건넌 후부터는 황제에 대한 예의도 아예 무시했다. 어느 날은 칼을 찬 채 뚜벅뚜벅 황제 앞에까지 나아가 황제에게 강요했다.
"폐하, 이놈의 졸개들도 저렇게 폐하를 위하여 고생해 온 놈들이니 마땅히 관직을 내려주십시오. 어사라거나 교위라거나 아무런 관직이라도 좋으니 하나씩 내려주십시오."
너무 어처구니 없는 오만불손에 시신들이 이를 가로막자 이락은 시신을에게 욕지저리를 했다. 그정도는 차라리 약과였다. 비위에 거슬리면 황제 앞에서 시신은 발로 차거나, 귀를 잡아당겨 밖으로 끌어내기 일쑤였다. 천자는 이락의 그런 행패를 알고 있었기에, 그가 하자는 대로 무엇이든지 들어 주었다. 관직을 하사할 때는 옥새가 있어야 했는데, 필묵이나 종이는 이럭저럭 갖출 수 있었으나 옥새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옥새를 마련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했으나 이락은 듣지 않았다.
"가시나무를 꺾어 오겠으니 그 나무에 옥새를 새기십시오."
이락이 이 같은 억지를 부리니 천자는 하는 수 없이 나무에다 송곳으로 그리다시피하여 손수 도장을 새겨 그의 졸개들에게 관직을 내렸다. 이락은 황제께 올리는 음식도 막걸리와 잡곡밥을 올렸다. 그러나 헌제는 이를 꾹 참았다. 한편 이각과 곽사를 찾아간 한융이 간곡히 그들을 달랬다.
"이미 황하를 건너간 황제를 뒤따라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황제께서 거느린 군사라고 하여도 이제 손가락으로 헤아릴 지경인데다, 그 참상은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지경이오. 두 장군이 뒤쫓게 되면 황제께서는 다시 피난길에 오르게 되실 것이고, 그러다 혹 잘못되어 병이라도 드시면 이는 두 장군의 이름을 욕되게 할 뿐이오. 그러니 여기서 추적을 멈추시면 황제께서 두 장군께 높은 벼슬을 내리시겠다고 약조하셨소이다."
한융이 갖은 말로 그들을 달래자 이각과 곽사는 마지못한 듯 군사를 물렸다. 한융의 말처럽 천자가 병이라도 얻는 날에는 그들에게 화살이 돌아올 것이 뻔했다. 게다가 그대로 물러나면 높은 벼슬을 내리겠다고 하니 굳이 뒤쫓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각. 곽사는 인질로 잡아 둔 백관과 궁녀들까지 모두 풀어주었다.
그해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크나큰 흉년까지 들었다. 백성들은 초근목피, 풀뿌리와 나뭇잎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으며, 길가에는 굶어 죽은 사람의 시체가 즐비했다. 그런 참에 하내태수 장양은 헌제에게 쌀과 고기를 보내 왔고, 하동태수 왕읍도 얼마 되지 않는 의복을 보내 왔다. 천자와 황후는 그로써 한동안 굶주림과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곳 황폐한 임시 행궁에도 이각. 곽사군에서 방면된 백관들과 궁인들이 찾아와 천자의 마음은 든든했다. 그러나 갑자기 늘어난 식구들 탓에 얼마 안 되던 식량이 금세 바닥이 났다.
"낙양으로 돌아갔으면 좋으련만…."
천자는 가끔 혼잣말로 이렇게 탄식했다.
그러나 이락은 그럴 때마다 반대하고 나섰다. 원래 비천한 신분이었던 이락은 천자가 낙양으로 옮겨 가면 그만큼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염려해서였다.
"낙양에 간다 한들 굷주리기는 마찬가지오."
이락이 그렇게 반대했으나 조신들은 모두 낙양으로 옮길 것을 청원하였다.
"이런 궁벽한 땅에 오래도록 어가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낙양은 예로부터 천자의 도읍입니다. 나양으로 되돌아가 사직의 체통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락이 끝내 반대하니 천자의 낙양행은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조신들은 몰래 의논하여 헌제를 낙양으로 모시기로 했다.
어느 날 밤, 이락이 졸개들을 이끌고 마을로 술과 여자를 찾아 나선 틈을 타, 양봉과 동승은 헌제를 호위하며 낙양으로 출발했다. 자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어가가 낙양으로 향하자 이락은 이각과 곽사에게 졸개를 보내 헌제를 납치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어가는 몇 날 몇 밤을 새워가며 험한 길을 숨차게 달려 이윽고 기산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이때는 이미 밤도 사경 무렵이 되었다. 어둠이 휩싸인 산속 여기저기에서 횃불이 나타나고 함성이 일었다.
"이각 · 곽사가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다. 수레를 멈추어라!"
양봉은 놀라는 천자를 달랬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찌 이각이나 곽사가 이런 곳에 나타나겠습니까. 헤아리건대 이락이 쫓아와 거짓으로 이각의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양봉은 뒤따르는 군사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서황은 어디 있느냐? 어서 저 무리들을 막아라!"
서황은 양봉의 명을 받자 큰 도끼를 휘두르며 말을 달려나갔다. 서황이 말을 달리며 소리쳤다.
"이 짐승들아, 게 섰거라. 여기서부터 앞길은 낙양의 도성문이다. 짐승 따위가 지나는 길이 아니다.
"네 이놈, 오늘날까지 불쌍히 여겨 살려 두었더니…."
이락이 이를 갈며 마주 나왔다.
서황은 이제까지 그들의 행패를 보고도 참아 왔던 분통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려는 듯 도끼를 번쩍 치켜들었다. 이락이 칼을 휘두르며 다가오자 서황의 도끼가 횃불에 번뜩였다. 그와 함께 이락의 몸뚱이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서황은 그런 이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졸개들을 향해 짓쳐 나갔다. 졸개들은 도끼에 맞아 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남은 무리들은 서황의 도끼를 피해 황급히 어둠 속으로 뿔뿔이 달아나기에 바빴다.
낙양에서 허창으로 조조의 이호경식지계
죽을 고비 벗어나기를 몇 차례, 황제를 모신 수레가 낙양에 이르는 길목인 기관에 이르자 태수 장양이 마중 나와 비단과 음식을 바쳤다. 황제는 장양에게 대사마의 벼슬을 내렸으나 장양은 굳이 사양하고 군사를 이끌어 야왕으로 떠났다.
황제를 모신 어가는 이윽고 낙양에 당도하였다. 수레는 무사히 낙양에 이르렀으나 시위한 백관들도 너무나 처참하게 변한 낙양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천자는 망연자실하여 눈물을 흘렸다. 궁전은 이미 잿더미가 되었고, 궁궐 담장은 허물어져 있었다. 그 융성했던 영화가 흔적도 없이 불에 타 버린 옛터는, 이제 잡초만이 우거진 끝 간데없는 허허벌판일 뿐이었다. 다만 돌이 나뒹굴면 그곳은 누대였고, 물이 있으면 주란의 다리나 수정의 옥지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관아도 민가도 무성한 잡초 속에 불에 그을린 나무나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가을도 지나 이미 겨울로 접어든 폐허 도읍지에는 닭이나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곳이 온덕전 터가 아닌가? 여기는 상금문이 세워졌던 곳이지. . ."
그래도 천자는 감회어린 옛 궁궐의 자취를 그리면서 반나절이 넘도록 성터를 거닐었다. 백관들은 불을 지피기 위해 땔나무를 하러 성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무너진 담과 우거진 잡초에는 죽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이 참담한 옛 궁터를 읊은 시가 있었다.
억새 뒤덮인 피 묻은 무덤가엔 흰 뱀이 죽었고
사방에 어지러이 널린 붉은 깃발들
진 사슴(지나라) 뒤엎어 일으킨 사직
초패왕의 추마(초나라) 넘어뜨려 영토 빼앗았다.
나약한 임금에는 간신,
사직 시들면 도적이 들끓네.
동도. 서도, 두 서울 난리 치른 곳에 도착하니
무쇠 같은 사람도 황폐한 그 모습에 눈물 흘리네.
천자는 황량한 낙야의 모습을 보며 너무나 허망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이곳에는 살고 있는 백성들도 없단 말인가?"
천자는 따르는 시종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중의 한 시신이 대답했다.
"옛 성문 밖에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수백 호가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도 연이은 흉년과 질병 때문에 몹시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사옵니다."
천자는 조서를 내려 흥평이란 연호를 건안 원년(A.D 186년)으로 고쳤다. 흉년은 이 해에도 이어져, 낙양 성안의 가호가 수백 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먹을 것을 찾아 성을 떠났다. 조신들은 우선 정사를 돌볼 보잘것없이 초라한 가궁을 폐허 위에 세웠다. 가궁이 세워졌으나 천자의 수라상에 올릴 양식을 걱정해야 했다. 상서랑 이하의 관리들은 모두 맨발이 되어 폐원의 기와와 돌을 가려내고 밭을 일궜다. 나무껍질을 벗겨 떡을 만들고, 풀뿌리를 끓여 국을 만들어 그날그날을 연명했다.
어느 날 태위 양표가 천자께 진언했다.
"이전에 폐하께서 명을 내리신 바 있었으나 난리 중이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근자에 산동에 있는 조조는 많은 양장모사를 휘하에 두고 있으며, 길러 놓은 군사도 20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때 천자께서 조칙을 내리시어 그에게 사직을 지키도록 하십시오."
'이미 조서를 내려 그를 부르지 아니했던가. 새삼 다시 물을 게 뭐 있겠느냐? 어서 사람을 보내도록 하라."
양표는 천자의 말에 따라 즉시 칙사를 산동에 보내 조조에게 조서를 전하도록 했다. 그 무렵 조조는 천자가 낙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천자가 폐허가 된 낙양에 귀환하여 궁박한 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의 마음에도 조용히 파문이 일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무언가 크게 움직이고 있다. 시시각각 쉼 없이 움직이는 천하가 아닌가. 대장부로 자처하는 자, 진실로 보람 있는 대의를 세워야 할 때가 아닌가."
조조는 하늘을 우러르며 중얼거렸다. 산동의 기온은 아직 만추였다. 성루 위를 뒤엎은 채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희뿌연 은하는, 천하에 풍운을 일으키고 있는 일군의 군마처럼 보였다. 조조, 그도 이제는 백면 강개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산동 일대를 평정한 후 일약 건덕장군 비정후에 봉해졌으며, 사십줄에 들어선 그가 거느린 양병만도 20만, 유막에 거느린 모사 용자의 수도 이제 그의 대망을 실행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이제부터다.'
그는 지금의 작은 성에서, 작은 영화와 인작에 만족하여 머무를,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군사는 지금의 안일보다는 끊임없이 진공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의 성은 지금의 안온함에 빠져드는 일락의 침상이 아니었으며, 내일을 향한 전진을 위한 발판이었다. 그의 포부는 바다보다도 더 넓었다.
다음 날 조조는 모사 순욱을 불렀다.
"소식을 들으니 천자께서 낙양으로 환궁하셨다 하오. 그러나 폐허가 된 낙양에서 천자를 지키는 군사도 변변히 갖추어지지 않은 형편이라 마치 황야에 버려진 미아와 같을 것이오. 이를 그대로 두고 방관할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니오. 어떻게 생각하시오?"
조조의 물음에 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분연히 입을 열었다.
"이전에 진나라 문공은 주의 양왕을 천자로 받들어 섬김으로써 여러 제후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또한 한 고조께서는 의제를 위해 장례를 치름으로써 천하의 민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 천자께서 궁박한 처지에 계실 때 장군께서 뜻있는 군사를 이끌어 천자를 받드신다면, 만인의 우러름 속에 큰일을 성취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치시면 다른 자가 나설까 염려되는 바입니다."
순욱은 춘추 시대의 패자인 진문공과 한 고조의 일을 일깨우며 진병할 것을 주장했다. 순욱의 말에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 순욱의 뜻이 자신과 같았기 때문 이었다. 그때 조조의 동생인 조인이 급한 걸음으로 조조에게 다가왔다.
"방금 현성에서 파발군이 왔습니다. 낙양에서 보낸 천자의 칙사가 오고 있답니다."
그러자 순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는 필시 천자께서 주공께 조서를 내리신 것임이 분명합니다. 지난번 산동 평정의 표문을 올려 주공께 건덕장군 비정후에 봉한 것을 기화로 주공께 낙양성을 옹위하고 천자를 받들라는 조서일 것입니다."
"음―."
조조는 내심 마음속에 그리던 천하가 저절로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조조는 군사를 일으킬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휘하 장수들에게 명했다. 천자의 조서가 아니더라도 이미 군사를 회동하기로 결심하고 있던 터였다.
칙사가 산동으로 내려간 지 한 달가량 지난 어느 날이었다. 낙양의 조신들은 예기치 못한 급보를 접하고 모두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각. 곽사의 연합군이 그 후 대군을 정비하여 다시 낙양으로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전해진 것이었다. 천자 역시 놀람은 조신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난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그들 무리들에게 쫓겨다니던 일들이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조조에게 보낸 사자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제 짐은 어디로 또 몸을 피해아 한단 말이오?"
천자는 저주스런 운명을 한탄하며, 대신들에게 대책을 물으니, 그 목소리는 어느덧 통곡으로 변했다. 동승이 머리를 조아리며 진언했다.
"하는 수 없는 일입니다. 이 가궁을 버리고 조조에게 의탁하여 몸을 피하심이 상책인가 하옵니다."
그러자 양봉과 한섬이 나섰다.
"조조에게 이지하신다 하나 조조 또한 아직은 진심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보다 신들이 죽기를 작정하고 그들과 싸워 이각의 무리들을 막아볼까 하옵니다."
그러자 동승이 거느린 군사가 얼마 되지 않음을 조심하여 말했다.
"그 기개는 가상하오만, 성곽은 무너져 방비할 만한 담장도 없고 병력도 얼마 되지 않는데 어떻게 그들을 막는다는 말이오? 만약 그들에게 패하는 날이면 어떻게 되겠고? 그보다는 어가를 모시고 조조가 있는 산동으로 가는 것이 어뗳겠소?"
그때 밖에서 몇 사람의 무신이 달려왔다.
"폐하 위급합니다. 이미 적의 선봉은 가까이 육박해 오고 있습니다. 우선 피하셔야 되겠습니다."
천자는 그 말에 놀러 옥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일이 이토록 위급한 지경에 이르니 이제 어가를 이끌고 피신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들이 급히 천자를 가궁의 뒷문으로 모신 후 어가에 몸을 싣게 했다. 가궁에서는 일시에 어가를 뒤따르는 자와 허둥지둥 보따리를 챙기는 자들로 해서 혼란에 빠져들었다.
어가는 남쪽으로 향해 정신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문무백관들은 탈 말이 없어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일행이 낙양성을 벗어날 무렵, 이각. 곽사의 군대는 이미 흙먼지를 일으키며 황제의 뒤를 바싹 뒤쫓고 있었다. 흙먼지와 비명에 휩싸인 채 천자의 어가는 앞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득 어가 앞쪽에 펼쳐진, 광야를 가로지른 언덕 끝쪽에서 홀연히 뭉게뭉게 흙먼지가 일며 수많은 군마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앞에도 적이?"
어가를 호송하던 궁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천자도 놀라움으로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실로 진퇴유곡이었다. 이제 갈 곳도 물러날 곳도 없엇다. 어가를 따르던 대신들은 모두 얼이 빠져 체념했고 더러는 살길을 찾아 달아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저편에서 무장이 아니 문관 차림의 한 사람이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숨을 몰아쉬며 말에서 뛰어내려 어가 앞에 꿇어 엎드렸다. 그는 바로 산동으로 조조에게 조서를 전하러 갔던 사신이었다.
"폐하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조조 장군은 어명을 받들어 군사를 거느리고 산동을 떠났습니다. 오는 도중 이각. 곽사의 무리가 조정을 침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하후돈을 선봉장으로 하여 10여 명의 장수들이 정병 5만을 거느리고 서둘러 당도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폐하께서는 심려하지 마십시오."
"아니, 그럼. 저건 우리를 도우러 온 산동의 군사란 말이지?"
"그러하옵니다."
어가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사자의 말을 듣자 지옥에서 부처라도 만난 듯 금세 활기를 되찾으며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이어 말굽 소리도 요란히 한 떼의 군마가 어가 앞으로 달려왔다. 하후돈. 허저. 전위 등을 선봉으로 한 산동의 맹장들이 어가를 보자 군견례를 올렸다. 하후돈이 10보 정도 앞으로 나와 황제께 고하였다.
"보시는 바와 같이 소신들은 먼길을 급히 달려오느라 갑주를 입고 칼을 차고 있어 삼가 폐하를 배알 할 옷차림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에 군기로써 직주함을 용서하옵소서."
과연 산동의 용장 하후돈은 그 명성에 걸맞게 말씨가 명석하고 태도 또한 훌륭했다. 천자는 믿음직스런 그의 용태를 흡족히 여겼다.
"먼 길 마상에서 시달리며 왔는데 어찌 옷차림을 묻겠소. 오늘 짐의 위급함을 구하느라 이렇게 달려와 준 노고와 충절에 대해서는 반드시 후한 상을 내려 보답할 것이오."
하후돈, 이하 장수들은 천자의 말에 삼가 재배했다. 어가를 에워싼 무신과 궁인들도 이구동성으로 '만세!'를 외쳤다. 그때 동편으로부터 또 한 떼의 군마가 몰려오고 있었다. 하후돈이 곧 말을 몰고 달려가 그들을 살피다가 다시 돌아왔다.
하후돈은 근심 어린 얼굴이 된 황제에게 아뢰었다.
"동편에서 오고 있는 군사는 조 장군의 보군들이옵니다. 조 장군의 아우님인 조홍을 대장으로, 이전 · 악진을 부장으로 한 후비군입니다. 이각. 곽사의 무리들을 당하기 어려울까 염려하여 길을 재촉하여 달려온 것입니다."
헌제는 더욱 기뻐하며 만면에 희색을 띠었다.
이윽고 조홍의 후비군이 당도하고 조홍도 어가 앞에 나아가 배알했다.
"신의 형님 조조는 적군이 폐하 가가이 온 것을 알자 저로 하여금 선봉 하후돈을 돕도록 하여 이렇게 제가 한발 앞서 달려왔습니다."
"경의 형, 조조야말로 진정 짐의 사직지신이로다."
헌제는 조조를 치하하고 조홍으로 하여금 어가 앞에서 군사를 이끌도록 했다. 그리하여 낙양에서 이각. 곽사의 무리들에게 쫓겨가던 어가는 단번에 8만 대군의 호위를 받으며 위풍도 당당히 귀환길에 올랐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이각. 곽사의 군대는 전방에 생각지도 않은 대군이 몰려오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때쯤은 이미 헌제의 명을 받은 하후돈. 조홍의 마군과 보군이 공격 포진을 펼치며 짓쳐 오고 있었다. 하후돈. 조홍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일제히 이각. 곽사의 군을 덮쳤다. 조조의 산동군은 이미 오랫동안 조련을 거친 정예군이었다. 거기다가 조조의 상장들은 많은 싸움터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들이 아닌가. 황제를 사로잡기에만 급급하여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이각. 곽사의 잡군들은 여지없이 조조군에게 짓밟혔다. 1만여 명의 군사들을 시체로 만든 뒤 이각. 곽사는 황급히 군사를 돌려 달아났다.
그날 저녁이 되자 천자는 무사히 낙양에 입성하고, 하후돈의 군사는 성 주위에 화톳불을 피워 놓고 주둔했다. 다음 날, 조조도 대군을 이끌고 낙양에 당도하였다. 위풍당당한 그 위세만으로도 적은 운무(구름과 안개)가 흩어지듯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조 장군이 입성했다!"
하루아침에 인심은 태양을 우러러보듯, 조조에게 쏠렸다. 조조의 명성은 그 위세를 업고 구름 위로 오른 듯했다. 조조가 낙양에 입성하던 날, 그의 근위병은 모두 붉은 투구에다 붉은 실을 수 놓은 전포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가 붉은 자루의 창을 들고, 붉은 기치를 나란히 세운 채 팔괘의 길서를 본떠 대로를 지었다. 그 한가운데 대장 조조를 에워싸고 한 번의 북소리에 여섯 걸음씩 전지하니 그 장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위압감을 갖게 했다.
"과연 장수 중의 장수로군!"
대신들도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조조는 천자 앞에서는 신하의 예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았다. 입성하자마자 천자 앞에 나아갔으나 함부로 전상에 오르지 않았다. 천자의 허락이 내리기 전까지는 전계 아래에 최대한 꿇어 엎드려 황제를 뵈었다.
조조가 헌제에게 아뢰었다.
"신은 일찍이 국은을 입은 몸으로 목숨을 바쳐 이에 보답할 것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각. 곽사의 무리들이 하늘을 거스른 큰 죄를 짓고 있사오나 저들을 맞아 남김없이 쓸어없애겠습니다. 불초의 휘하 장병 20만은 모두 신의 뜻을 본받고 있는 충량들이오니 부디 마음 편안히 하시고 옥체를 잘 보존하소서."
조조의 말에 헌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오, 그대야말로 진정 사직을 위한 신하가 아니더냐."
헌제가 조조를 치하하자 주위에선 만세 소리가 드높이 울려 퍼졌다.
헌제는 조조를 사예교위의 가절월을 주고 녹상서사의 벼슬을 내렸다. 조조는 이제 당당한 정승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조조는 만세 소리에 휩싸인 채 퇴궐하고, 황궁도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한편 뜻하지 않은 조조의 출현으로 크게 패한 이각. 곽사군은 이제 적군으로 몰리게 될 판이었다. 일이 다급해진 이각. 곽사는 군사를 서둘러 수습했다.
"조조의 군사는 한낱 외방의 잡군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먼 길을 급히 오느라 군마가 모두 지쳐 있다."
이각. 곽사는 이렇게 의견을 모으고 조조군에게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모장 가후만은 이를 만류했다.
"그를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됩니다. 조조는 당대에 드문 효장(사납고 날랜 장수)일 뿐만 아니라, 그의 휘하에는 뛰어난 책사와 무장들이 많습니다. 군사들 역시 뛰어난 자들만 뽑은 정병들입니다. 차라리 역을 버리고 순리를 쫓아 항복함만은 못합니다."
가후의 말에 이각은 벌컥 화부터 냈다.
"싸우기도 전에 방자하게 불길한 말을 서슴지 않다니. 네놈이 우리의 예기를 끊으려고 작정이라도 했단 말이냐?"
이각은 그 말과 함께 칼을 빼 들었다. 주위에 있던 정수들이 그런 이각을 가까스로 말렸다. 목이 달아날 판이었으나 겨우 목숨을 건진 가후는 그날 밤 미련 없이 그들의 진을 빠져나와 행방을 감추어버렸다.
다음 날 이각은 이섬. 이별 두 조카를 선봉으로 하여 조조군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쪽에서 먼저 쳐들어갈 참이었던 조조는 오히려 제발로 찾아오자 즉시 허저를 불렀다.
"허저, 빨리 나아가 저놈들을 잡아오라!"
이에 허저가 말을 달려나가는데 그 빠르기가 주인의 손등을 떠난 매와 같았다. 이섬에게 다가간 허저는 2, 3합을 부딪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목을 떨어뜨렸다. 이별이 흠칫 놀려 말머리를 돌렸다.
"이놈 게 섰거라!"
허저의 외마디 호통과 함께 그마저 목이 떨어졌다. 허저는 떨어진 두 사람의 목을 들고 진으로 되돌아왔다. 허저의 용맹 무쌍하고 늠름한 모습에 가까이 있던 적들도 그를 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조는 허저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대야말로 나에게 살아 있는 번쾌일세."
번쾌는 유방이 한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맹장으로, 조조는 허저를 그에 비유하여 칭찬했다. 조조는 하후돈. 조인에게 각기 군사를 이끌게 하여 조우군으로 편성한 뒤 자신은 직접 중군을 이끌었다. 이각은 크게 호기를 부리며 내보낸 이섬. 이별이 제대로 한 번 싸우지도 못하고 넘어지니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조가 직접 보검을 빼 들고 총공세를 펴니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조조가 공세를 멈추지 않고 몇 날 몇 밤을 그렇게 추격하니, 죽고 상하는 자도 많았지만 항복하는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이각. 곽사는 살아남은 졸개들을 이끌고 병든 들개처럼 처량한 꼴이 되어 깊은 산중으로 숨고 말았다. 헌제는 조조가 이각. 곽사군을 대파하자 한층 더 조조를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정의 권세는 자연 조조의 것이 되고 말았다.
조조는 베어낸 적군의 우두머리들을 거리에 효수케 하고, 영을 내려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군사의 계율을 엄정히 하여 성 밖에 주둔시켰다. 조조가 이각. 곽사군을 무지르고 헌제의 신임을 한몸에 받아 조정의 권세를 오로지하게 되자 양봉이 어느 날 밤 한섬에게 조용히 말했다.
"조조가 이제 큰 공을 세우고 낙양성을 평온케 하니 앞으로 대권은 그의 손에 넘어갈 것이오. 이제 그의 세상이 되면 지난날 목숨을 걸고 우리가 어가를 보필한 보람을 어디서 찾겠소? 차라리 따로이 훗날을 기다려 도모함이 어떻겠소?"
"귀공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금문에 나가고 있는 한섬도 양봉과 같은 생각인 듯 맞장구를 쳤다.
"조조는 그들의 훈공을 첫 번째로 내세우고 우리들은 안중에도 없을 것이오."
두 사람은 이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서로 의견을 맞추고 천자 앞에 나가 아뢰었다.
"이각. 곽사군을 쳐부쉈지만 아직 그들 두 놈의 목을 친 것은 아닙니다. 살려두면 뒤에 또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르므로 이때 그들을 사로잡아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신 등이 그 뒤를 쫓아가 목을 잘라 오겠습니다."
헌제는 이각. 곽사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쫓겨다니며 갖은 고생을 다 한 터여서, 양봉. 하섬을 가상히 여기고 아무 생각 없이 선선히 허락하였다. 양봉. 한섬은 군사를 이끌고 대량(하남성)으로 말을 몰아 떠나버렸다. 그들이 떠난 다음 날 헌제는 조조에게 시신을 보냈다. 의논할 일이 있어 그를 어전에 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칙사는 조서를 받들고 조조의 진영으로 갔다. 조조는 헌제의 칙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예를 갖춰 맞이한 다음 자신의 군막으로 안내했다. 칙사는 미목이 수려하고 얼굴에 광채가 그득한 것이 예사 사람 같지 않았다.
'흉년과 변란 통에 백성들이나 벼슬아치를 가릴 것 없이 모두 궁기가 완연한데 어찌하여 이 사람 홀로 그런 기색이 없는가.'
조조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그에게 물었다.
"공의 얼굴에는 유난히 정기가 넘쳐 흐르고 있소. 어떤 음식을 먹기에 그렇소?"
"특별한 음식을 먹는 것은 아니옵고, 30년째 채식만 하고 있습니다."
조조는 칙사의 대답에 한동안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물었다.
"지금 어떤 관직을 받고 있소?"
"효렴(각 지방에서 추천을 받아 관리가 됨)에 오른 뒤 원소와 장양의 휘하에 있었습니다. 천자께서 낙양으로 환궁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찾아와 뵈었더니 정의랑의 벼슬을 주셨습니다. 저는 제음현 정도 사람으로 자는 공인이며, 이름은 동소라 합니다."
조조는 그의 이름을 듣자 반색을 하며 그를 반겼다.
"그대의 이름은 들은 바 있소. 다행히 여기서 이렇게 뵙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소."
조조는 동소를 위하여 흔쾌히 술자리를 마련하고 그 자리에 순욱도 불러들였다. 그런데 술이 몇 순배 돌기도 전에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조정의 명이라 하며 한 떼의 군사가 동쪽으로 갔다 하옵니다."
조조는 자신의 군사에게 그런 명을 내린 적이 없어 이상히 여겨, 그들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옆자리에 있던 동소가 그런 조조를 만류했다.
"그들은 아마 이각의 휘하였던 양봉과 산적 출신 한섬일 것입니다."
"그들이 왜 떠난다는 말입니까?"
조조가 까닭을 몰라 물었다.
"장군의 성망을 시샘하는 소인배들의 망동입니다. 대량으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이 조를 시샘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조조는 동소의 말이 에사롭지 않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물었다. 어쩌면 그들이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본 것이나 아닐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하잘것없는 소인배들입니다. 그들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동소가 주저 없이 말했다.
"이각. 곽사의 무리도 아직 소탕되지 않았는데, 장차 어찌 되겠습니까?"
동소가 조조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 또한 근심하실 일이 못 됩니다. 발톱없는 호랑이이며, 날개를 잃은 독수리일 따름입니다. 머지않아 그들은 장군의 손에 잡히는 몸이 될 것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조조는 동소의 시원스런 대답에 흡족했다. 술잔을 권하며 이번에는 조정에 대한 일로 화제를 바꾸었다.
동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장군께서는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어지럽히는 폭도들을 진압하여 천자를 보좌하고 게십니다. 이는 저 춘추 시대의 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 진나라 목공. 송나라 양왕. 초나라 자왕, 즉 다섯 패자에 버금가는 공적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전통이나 파벌이 있고, 소심한 관료들은 제각기 다른 눈, 다른 마음이 있어 모두 한 마음으로 장군을 따르지 않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군께서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에 오래 머물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우려됩니다."
동소의 뜻밖의 말에 조조가 물었다.
"그렇다고 당장 낙양을 떠날 수도 없는 일이 아닙니까?"
"낙양 땅은 정사를 개혁하는 데 적합한 장소가 못 됩니다. 따라서 천자가 계실 도읍을 허창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환도한 지 얼마되지 않아 다시 허창으로 옯긴다면 모두 불편을 느껴 기꺼이 따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이치입니다. 장군께선 이를 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동소가 조조에게 간했다.
조조는 동소의 말에 뛸 듯이 기뻐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실로 나도 그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소. 그러나 대량에서 양봉이 틈을 엿보고 있고, 백관들이 조정에만 있으니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걱정하실 일이 못 됩니다. 양봉에게는 글을 보내 그를 안심시켜 놓으십시오. 그리고 백관들에게는 도성에 양식이 없으니, 양곡이 풍부한 노양이 가까운 허창으로 천도한다고 설들하면 대신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조조는 동소의 거침없는 말이 하나도 사리에 어긋남이 없음에 놀랐다. 이윽고 동소가 작별을 고하자 조조는 다시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앞으로 내가 도모하는 일에 많은 깨우침을 주시오."
동소가 가고 난 뒤 조조는 그날로 휘하의 장수들을 불러 천도에 대한 의견을 물으며 의논하기 시작했다. 조정에는 시중 태사령에 왕립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천문에 밝았다. 어느 날 종정으로 있는 유애에게 왕립이 입을 열었다.
"천문을 보니, 지난 봄부터 태백성이 은하를 꿰뚫고 있으며, 형성(화성)의 운행도 그쪽으로 향해 천관에서 만나려 하고 있소. 이는 금과불이 뒤바뀌는 형상으로 반드시 새로운 천자가 출현함을 뜻하는 것이오."
"새로운 천자가 나타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유애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내 생각으로는 한의 천기와 운수는 다하고 새로운 기운이 진위 땅에서 일어나려는 것이라 여겨지오."
왕립은 천자에게도 은밀히 이 사실을 아뢰었다.
"천명에도 이르고 떠남이 있으며 오행에도 흥하고 쇠하는 이치가 있습니다. 화생토라 화를 대신하여 토가 흥할 것으로 보이니, 이는 곧 한을 대신하여 천하를 차지할 곳은 토를 대신한 위땅이 될 것이옵니다."
위 땅은 조조의 근거지인 중원 일대의 영토를 말한다. 왕립이 천자에게 고한 이 말은 곧 조조의 귀에도 들어갔다. 조조는 순욱을 데리고 누대에 올라가 은밀히 물었다.
"순욱. 왕립이라고 하는 자가 천문을 보고 천자에게 고한 말은 무슨 뜻인가?"
"이는 곧 하늘의 계시인지도 모릅니다. 한실은 화를 그 본바탕으로 천하를 이룩했습니다. 그런데 주공께선 토에 속해 있습니다. 허창의 방위는 바로 토성 땅이므로 도읍을 그리로 옮기시면 반드시 조씨 가문은 융성하실 것임을 뜻합니다. 이것은 바로 동소와 왕립의 말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으음―. 그런데 순욱. 그렇다면 왕립이라고 하는 자에게 사람을 보내 그 말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려야겠네."
조조는 왕립에게 가만히 사람을 보내 쐐기를 박아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정에 대한 그대의 충성은 내 모르는 바 아니나 천도는 깊고도 오묘한 것이니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천하에 용맹을 떨치고 내노라 하는 영웅호걸들도 끝없는 대륙, 높고 낮은 산과 들, 대자연의 위력 앞에서는 모두가 허약하기 이를 데 없고 하잘것없는 왜소한 미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황하나 대강(양자강)에 홍수가 난다거나, 몽고에서 부는 황진, 메뚜기 떼가 내습하여 한순간에 자연을 황폐화시키는 것을 보며 살아온 그들이었다. 큰 미와 눈, 그리고 엄청난 자연의 재해 앞에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것이 인간임을 체험하며 살아온 그런 문화 속의 영웅이었다. 그 체험을 바탕으로 자연히 뿌리깊이 박혀 온 사상은 인간은 오묘한, 보이지 않는 운명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었다. 운명은 인지로는 헤아릴 수 없으나, 그 섭리를 하늘은 알고 있으며, 자연은 이를 예언한다고 믿어 온 것이었다. 그 때문에 역리는 천문이나 당시에는 최고의 학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 · 병법 · 윤리에 이르기까지 음양의 이원과 천문지사의 학리는 그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조조는 한동안 모사들과 천도에 관한 이모저모를 헤아려 본 뒤에 드디어 마음을 굳혔다. 다음 날 조조는 대궐로 들어가 헌제에게 아뢰었다.
"신이 깊이 생각하옵건대 낙양은 이미 황폐하여 그 복구가 용이하지 않사옵니다. 게다가 양식도 옮겨 오기 힘듭니다. 거기에 비하면 하남의 허창은 땅이 기름지고 풍요로울 뿐 아니라 물산도 풍부합니다. 원하옵건대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헌제가 어떻게 조조의 말을 물리칠 수가 있겠는가. 여러 대신들은 조조가 천도를 거론하자 아연했으나, 조조의 위세에 눌려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드디어 날을 잡아 어가가 허창으로 출발하는 날이 되었다. 조조는 군사를 거느려 철통같이 천자를 호위했고, 그 뒤를 백관들이 따랐다. 그런데 출발하여 몇 리를 가지 않아 어느 능성에 이으렀을 때였다. 돌연 앞쪽 언덕 위에 크게 함성이 일더니 한 무리의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대량 땅으로 갔다던 양봉과 한섬의 군사였다. 조조를 가로막은 군사들 앞으로 한 장수가 문득 나서더니 큰 소리로 꾸짖었
다.
"게 섰거라 조조야. 황제를 탈취하여 어디로 가려느냐."
조조가 격노하여 말을 달려 가 보니 양보의 장수 서황이었다. 제법 위풍이 늠름해 비록 적이기는 하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서황을 대적하여 한번 겨뤄 보라!"
조조는 허저에게 명해 서황을 맞아 싸우게 했다. 허저가 기다렸다는 듯 독수리처럼 세차게 말을 몰아 그와 부딪쳤다. 허저는 조조가 '당대의 번쾌'라고 칭찬했던 장수였다. 그러나 서황도 무예가 절륜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나서느냐!"
허저가 외치자 서황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싸우다 등이나 돌리지 마라!"
두 용장이 싸우기를 50여 합에 이르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말은 땀으로 흠뻑 젖었으나 두 사람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얼마 동안 양 진영은 모두 숨소리를 죽이고 이들의 싸움을 지켜보기만 했다. 조조는 이 싸움을 지켜보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명을 내렸다.
"징을 울려라!"
고수는 일제히 퇴각의 징을 쳤다.
조조는 군사들을 물린 뒤 모사들을 불러모아 놓고 말했다.
"징을 쳐 군사를 거둔 것은 서황 때문이었소. 내가 양봉. 한섬 따위는 족히 말할 것도 못 되는 무리이나 서황은 참으로 비범한 장수이기에 내 차마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요. 내가 원하는 바는 힘으로써 항복받기 보다는 계교를 써서 그를 우리 사람으로 만들고자 함이오. 누구 서황을 내 사람으로 끌어올 만한 계책을 가진 사람은 없소?"
그러자 행군종사(행군중의 집사) 만총이 나섰다.
"주공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서황과 동향일 뿐 아니라 이전에 만난 적도 있습니다. 오늘 밤 군졸로 가장하여 그의 진으로 들어가 잘 타일러 서황의 마음을 사로잡아 보겠습니다."
조조는 기뻐하며 허락했다.
만총은 그날 밤, 군졸로 변장한 후 양봉의 군사들 틈에 끼어들어 서황의 진영을 엿보았다. 서황은 갑주도 벗지 않고 장막을 드리운 채 홀로 앉아 있었다. 만총은 다짜고짜 군막 안으로 들어서며 절을 했다.
"서 공, 그동안 평안하셨소?"
뜻밖에, 불쑥 군막 안에 들어선 낯선 사람을 서황이 한동안 지켜 보다 그가 만총임을 알아봤다.
"누군가 했더니, 그대는 산양 땅의 만백령이 아닌가?"
백령이란 만총의 자였다.
"옛정이 생각나서 내 불현 듯 이렇게 찾아왔네."
"그래 지금은 무얼 하고 지내기에 그런 행색으로 예까지 왔는가?"
"나는 조 장군을 모시고 있네. 오늘 뜻밖에도 싸움터에서 자네를 보고 한 마디 이르고 싶은 말이 있어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왔네."
"무슨 긴한 말이기에 이토록 위험한 길을 왔는가?"
서황은 만총에게 자리를 권하며 찾아온 연유를 물었다.
"사실은 오늘 조 장군께서 징을 쳐 군사를 물리신 것은 자네를 살리기 위해서였네. 자네의 용맹과 지략을 보고 마음 깊이 자네를 아끼고 있네. 조 장군은 당대의 영웅일세. 사람을 볼 줄 알고, 귀하게 여길 줄 아는 호걸일세."
"갑자기 울린 징 소리는 그 때문이었나?"
"그렇다네. 자네 같은 인물이 어찌하여 양봉. 한섬 같은 암우한 자들에게 몸을 굽히고 있나? 인생은 백 년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세월이네. 한 번 잘못으로 인한 오명은 천 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네. 자네는 어리석은 무리를 버리고 밝은 분을 찾아 우리와 함께 큰 일을 도모해 봄이 어떠한가?"
그 말에 서황은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기다 한숨을 내쉬면 말했다.
"양봉이 큰그릇이 못 된다는 건 나도 알고 있네. 또한 조 장군의 영매함도 익히 들어 알고 있네. 그러나 어찌 주종의 의리를 이제 와서 저버릴 수 있겠나?"
만총은 다시 서황을 어우르고 달랬다.
"옛말에 이르기를'지혜로운 새는 나물를 골라 둥지를 틀고, 현명한 신하는 주인을 가려 섬긴다'고 하지 않던가. 섬길 만한 주인을 만났고, 그 주인이 자네를 아껴 귀히 쓰려고 하는데도 사사로운 정분에 얽매여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어찌 남아 대장부가 할 일인가?"
서황이 잠시 생각에 잠기다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알았네. 자네 말에 따르겠네."
서황이 뜻대로 움직여 주자 만총은 슬며시 욕심이 생겼다.
"이왕이면 조 장군에게 가는 예물로 양봉. 한섬의 목을 베어 가면 어떨까? 조 장군의 기쁨이 더욱 클 걸세."
그러나 서황은 그 말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군으로 섬겨 왔던 사람의 목을 베어 적진에 갈 마음은 없네. 그것은 의가 아니니 나는 결코 그런 짓은 할 수 없네."
"자네야말로 참으로 의기 남아일세. 자, 그럼 지체할 것 없이 이대로 떠나세."
만총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서둘렀다. 서황은 수십 기의 졸개를 거느리고, 만총의 안내로 조조의 진영으로 향했다. 서황이 군사를 데리고 조조 진영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은 곧이어 양봉의 귀에 들어갔다. 양봉은 크게 노해 펄쩍 뛰며 곧 1천여 기를 이끌고 서황의 뒤를 쫓았다. 한 동안을 급히 뒤쫓으니 저만치 달려가는 서황이 보였다.
"주인을 배반한 서황, 게 섰거라!"
양봉이 크게 소리치며 말에 채찍을 가했다. 쫓고 쫓기며 그들이 어느 산비탈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펑!' 하고 산이 떠나갈 듯한 폭음이 울렸다. 이어 산 위아래에서 일제히 횃불이 오르더니 복병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네놈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꼼짝 말고 게 섰거라!"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며 양봉을 보고 외쳤다. 앞만 보고 치닫던 양봉이었다. 깜짝 놀라 군사를 돌려 조조의 협공을 헤쳐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때마침 한섬이 나타나 조조군과 어지러운 싸움을 벌이는 틈을 이용해 양봉은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날 수 있었다. 조조는 어둠 속을 헤매는 적군에게 세찬 공격응 가했다. 양봉. 한섬의 군사들은 태반이 항복하고 말았다. 양봉과 한섬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남양의 원술에게 의탁하기 위해 말을 달렸다. 조조가 군사를 이끌어 진영으로 돌아오니 만총이 서황을 데리고 당도해 있었다.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
"근자에 이르러 가장 큰 기쁨이다."
조조는 서황을 크게 반기며 그가 아끼는 장수와 똑같이 후대하였다. 이제 조조에게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천자의 어가를 이끌어 일사천리로 새로운 도읍 허창, 허도에 당도했다. 그곳에는 옛 궁문 전각 있었고, 성 아래쪽 시가지도 제법 정돈되어 있었다. 조조는 먼저 궁중을 정하고 종묘를 건조하는 한편, 성대(조정의 주요 관원들이 모이는 곳)와 사원 등 아문을 배치하고 성곽과 부고도 수축하여 허도의 면모를 일신시키고 동승 등 13인을 열후에 봉했다. 조조는 스스로 대장군 무평후가 되어 천도를 간한 동소를 낙양령에 등용하고, 서황을 이끌어 온 만총을 허도령으로 발탁하였다. 또한 순욱은 시중 상서령, 순유를 군사로 삼았고, 곽가는 나마제주로, 유엽은 사공 연조, 모개. 임준은 전농 중랑장을 삼아 돈과 양식을 독촉해 받는 직책을 맡게 하였다. 정욱은 동평상, 범서은 동소와 함께 낙양영으로 삼았다.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흥은 모두 장군의 칭호를 내리고, 여건. 이전. 악진. 우금. 서황 등이 교위에, 허저. 전위는 도위에 봉했다. 그 밖에 장졸들에게도 그 공과 재주에 따라 그에 합당한 벼슬을 내렸다. 조조가 몸소 이 일을 집행하니 조정은 모두 그의 휘하들로 메워졌고, 대권도 자연히 그의 손에 들게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조정의 중요한 일은 이제 그를 거쳐서야 헌제에게 상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조정을 출입할 때는 갑주를 입은 정병 3백이 활과 창을 번쩍이며 뒤따랐다. 천도에 이어 대권을 한 손 에 쥔 조조는 후당에다 크게 잔치를 베풀고 모사와 장수들을 불러모아 앞일을 의논했다. 조조는 항상 가슴 속의 우환거리로 여기고 있던 유비 문제부터 거론했다.
"유비는 서주에 군사를 머물게 한 뒤 서주태수가 되더니, 이제는 여포를 소패에 두고 돌봐 주고 있는 모양이오. 여포와 유비가 힘을 모아 쳐들어오면 이는 실로 큰 우환덩어리가 아닐 수 없소. 공들은 이에 대해 묘책이 있으면 말해주기 바라오."
허저가 선뜻 나서며 말했다.
"군사 5만만 주신다면, 제가 가서 여포의 목과 현덕의 목을 말안장 양쪽에 매달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러자 순욱이 허저의 말을 가로막았다.
"허 장군은 자신의 용맹만을 믿는 것 같으나 용맹만으로 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조조가 입을 열었다.
"상서령이 자세히 말해 보시오."
조조는 천도를 주장했던 순욱에게 일렀다. 순욱이 진병을 만류하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지금 도읍을 새롭게 정한 터에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동안 막대한 건축과 병비시설 등에 많은 재정을 투입했기 때문에 당장 대군을 이끄는 데는 무리가 따릅니다."
"으음―, 그래서?"
"제가 생각하고 있는 한 계책은 곧 두 호랑이가 한 먹이를 두고 서로 다투게 하여 잡아먹게 하는 '이호경식지계'입니다. 유비는 지금 서주에 있으나 아직 천자의 조명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주공께서는 천자께 아뢰어 유비에게 서주목의 벼슬을 내리되, 밀서를 동봉하여 유비로 하여금 여포를 죽이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일이 뜻대로 되면 유비는 자기 한팔을 스스로 자르는 격이 됩니다. 여포가 없다면 유비를 치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설령 일이 잘 안 되더라도 이번에는 유비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안 여포는 유비를 죽이려 들 것입니다. 이가 곧 서주란 먹이를 두고 두 범을 다투게 하는 이호경식지졔입니다."
조조는 순욱의 말에 크게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칼 한번 빼지 않고 서주를 우려낼 수 있는 계책이었다. 조조는 그날로 천자께 아뢰어 유비를 정동장군 의성정후로 봉하고 서주목으로 삼는다는 조서와 함께 따로 한 통의 밀서를 보냈다.
그 무렵 유비는 천자가 허창으로 천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이는 낙양으로 입성한 조조가 천도하도록 일을 꾸몄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천하는 조조의 손에 넘어간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원소와 원술, 그리고 공손찬, 또한 소패에 머물고 있는 여포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조조에게 천하의 대권을 고스란히 넘겨준 격이 되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유비는 일단 천도를 축하해 주기 위한, 표문을 올리기로 하고 사자를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천자에게서 사자가 온다는 전갈이 왔다. 유비는 군의 경계에까지 나가 칙사를 맞았다. 유비는 칙사를 성안으로 맞이해 들인 후 크게 잔치를 벌였다. 칙사는 술대접을 받는 자리에서 한껏 위세를 부리며 말했다.
"사군께서 이 같은 천자의 은혜로운 명을 받게 되신 것은, 실은 조 장군께서 천자께 천거하신 덕분입니다."
"고맙소이다. 조 장군의 덕을 잊을 수 없소이다."
유비는 사자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도겸으로부터 패인을 물려 받기는 했으나 조정으로부터 명을 받지 않아 꺼림칙했던 유비였다. 그런데 황제가 서주태수를 명하는 조서를 내리자 몹시 기뻤다. 유비는 사자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표했다. 잔치가 끝나가자 사자는 다시 유비에게 한 통의 밀서를 건네주었다. 유비는 사자가 준 조조의 개인적인 서신을 재빨리 펼쳐보았다.
"잠시 여유를 주십시오. 따로 상의를 하여 방책을 마련하겠습니다."
조조의 서신을 읽어 본 후 유비가 가만히 말했다.
"유 사군께서는 조 장군의 은의를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칙사는 유비한테 한 번 더 당부한 후에 숙소로 돌아갔다.
유비는 관우·장비에게 조조가 보낸 서신을 보여주었다. 서신을 보고 장비가 불쑥 입을 열었다.
"여포란 놈은 원래 의롭지 못한 놈이니, 이를 기화로 아예 죽여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그는 의지할 곳이 없어서 내게 의지해 왔네. 그를 죽인다면 나 역시 의롭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일세."
"그러나 의롭지 못한 자를 살려둔댔자 별로 좋은 일은 아닐 것입니다. 나라에 끼치는 해독은 누가 책임집니까?"
"차차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온정을 가지고 설득하겠네."
"그렇게 간단히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두고 보시오. 그자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테니…"
장비는 여포를 죽이자고 거듭 말했으나 유비는 끝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관우 또한 장비와 다름없는 생각이었으나 유비가 이미 마음을 정한 터라 더 이상 말은 꺼내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자 여포가 서주성으로 찾아왔다. 그는 유비가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서주목의 인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경하하러 온 것이었다.
"유 공께서 천자의 명을 받들어 서주목이 되셨다기에 축하의 말을 전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유비는 허리를 굽혀 고마움을 표했다. 그때 불쑥 장비가 칼을 빼 들고 여포를 죽이려 덤벼들었다. 유비가 깜짝 놀라 장비를 꾸짖으며 말렸다.
"익덕, 어찌하여 나만 보면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느냐?"
여포도 놀라 소리쳤다.
"너같이 의리부동한 놈은 죽여 없애야 한다고 조조가 우리 형님에게 부탁해왔다."
장비가 씨근덕대며 대뜸 여포에게 퍼부어댔다. 유비는 다시 장비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장비는 칼을 거두지 못하겠느냐?"
유비가 장비의 칼을 뺏으며 호령을 거듭하자 그제야 장비는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발을 쿵쿵거리며 나가 버렸다. 유비는 여포를 청해 들였다. 장비의 무례한 행동을 거듭 사과한후, 유비는 조조에게 온 서신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장비가 한 말은 사실이오. 그러나 나는 그런 마음을 추호도 갖고 있지 않으니 공은 노여움을 푸시오."
"고맙소이다. 진정 고맙소이다."
여포는 유비가 서신까지 보여 주자 눈물을 흘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살피건대, 이는 분명히 조조가 사군과 나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간교인가 합니다."
"그렇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맹세코 이 비는 그런 불의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비가 여포를 안심시키가 여포는 다른 때보다 더 유비의 넓은 도량에 감격하며 물러갔다. 그 모양을 가만히 엿보고 있던 조조의 사자는 씁쓸한 얼굴이 되어 중얼거렸다.
"실패로군. 이래 가지고는 이호경식지계도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