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
강(江)가로 가자
고향을 지나며
구 월 이십 일
길
깃발을 내리자
나는 못 믿겠노라
나의 눈은 핏발이 서서 감을 수가 없다
낮
내 청춘에 바치노라
너 하나 때문에
네거리의 순이
높은 산 봉우리마다
눈물의 해협
다시 네거리에서
다시 인젠 천공에 성좌가
담(曇)
들
바다의 찬가
발자국 – 붉은 군대를 환영하기 위하여
밤 갑판 위
벌레
삼 월 일 일이 온다
새 옷을 갈아입으며
세월
소녀가
안개 속
암흑의 정신
여행자 속
양말 속의 편지
어린 태양이 말하되
옛 책
오늘 밤 아버지는 퍼렁 이불을 덮고
우리 오빠와 화로
우리들의 전구(戰區)
우산 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일 년
자고 새면
적(敵)
주유(侏儒)의 노래
지구와 박테리아
지도(地圖)
지상의 시
차중(車中) - 추풍령
초혼(招魂)
최후의 염원(念願)
통곡
하늘
학병(學兵) 돌아오다
한 잔 포도주를
해상(海上)에서
해협의 로맨티시즘
향수(鄕愁)
헌시(獻詩)
현해탄
홍수 뒤
화가의 시(詩)
황무지
9월 12일 1945년, 또다시 네거리서
가을바람
임화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데,
무어라고 네 마음은 종이 풍지처럼 떨고 있니?
나는 서글프구나! 해맑은 유리창아!
그렇게 단단하고 차디찬 네 몸,
어느 구석에 우리 누나처럼 슬픈 마음이 들어 있니?
참말로 누가 오라고나 했나?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달아와서,
그리 마다는 나무 잎새를 훑어 놓고,
내 아끼는 유리창을 울리며 인사를 하게.
너는 그렇게 정말 매몰하냐?
그렇지만 나는,
영리한 바람아, 네가 정답다.
재작년, 그리고 더 그 전해에도, 가을이 올 적마다,
곁눈 하나 안 떠 보고, 내가 청년의 길에 충성되었을 때,
내 머리칼을 날리던 너는, 우렁찬 전진의 음악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누구가 퇴각이란 것을 꿈에나 생각했던가?
눈보라가 하늘에 닿은 거칠은 벌판도 승리에의 꽃밭이었다.
오늘……
오래된 집은 허물어져 옛 동간들은 찬 마루판 위에 얽매여 있고,
비열한들은 이상과 진리를 죽그릇과 바꾸어,
가을비가 낙엽 위에 찬데,
부지런한 너는 다시 그때와 같이 내게로 왔구나!
정답고 영리한 바람아!
너는 내 마음이 속삭이는 말귀를 들을 줄 아니, 왜 말이 없느냐?
필연코 길가에서 비열한들의 군색한 푸념을 듣고 온 게로구나!
입이 없는 유리창이라도 두드리니깐 울지 않니?
마음 없는 낙엽조차 떨어지면서, 제 슬픔을 속이지는 않는다.
짓밟히고 걷어채이면서도, 웃으며 아첨할 것을 잊지 않는 비열한들을,
보아라! 영리한 바람아, 저 참말로 미운 인간들이,
땅에 내던지는 한 그릇 죽을 주린 개처럼 쫓지 않니?
불어라, 바람아! 모질고 싸늘한 서릿바람아, 무엇을 거리끼고 생각할까?
너는 내 가슴에 괴어 있는 슬픈 생각에도 대답지 말아라.
곧장 이 평양성(平壤城)의 자욱한 집들의 용마루를 넘어,
숲들이 흐득이고 강물이 추위에 우[鳴]는 겨울 벌판으로……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았으니까……
강(江)가로 가자
임화
얼음이 다 녹고 진달래 잎이 푸르러도,
강물은 그 모양은커녕 숨소리도 안 들려준다.
제법 어른답게 왜버들가지가 장마철을 가리키는데,
빗발은 오락가락 실없게만 구니 언제 대하(大河)를 만나 볼까?
그러나 어느덧 창밖에 용구새가 골창이 난 지 10여일,
함석 홈통이 병사(病舍) 앞 좁은 마당에 딩구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침대를 일어나 발돋움을 하고 들창을 열었다.
답답어라, 고성 같은 백씨기념관(白氏紀念館)만이 비어져서 묵묵하다.
오늘도 파도를 이루고 거품을 내뿜으며 대동강은 흐르겠지?
일찍이 고무의 아이들이 낡은 것을 향하여 내닫던 그 때와 같이
흐르는 강물이여! 나는 너를 부(富)보다 사랑한다.
`우리들의 슬픔'을 싣고 대해로 달음질하는 네 위대한 범람을!
얼마나 나는 너를 보고 싶었고 그리웠는가?
그러나 오늘도 너는 모르는 척 저 뒤에 숨어 있다, 누운 나를 비웃으며.
정말 나는 다시 이곳에서 일지를 못할 것인가?
무거운 생각과 깊은 병의 아픔이 너무나 무겁다.
오오, 만일 내가 눈을 비비고 저 문을 박차지 않으면,
정말 강물은 책 속에 진리와 같이 영원히 우리들의 생활로부터
인연 없이 흐를지도 모르리라.
누구나 역사의 거센 물가로 다가서지 않으면,
영원히 진리의 방랑자로 죽어 버릴지 누가 알 것일까?
청년의 누가 과연 이것을 참겠는가? 두 말 말고 강가로 가자,
넓고 자유로운 바다로 소리쳐 흘러가는 저 강가로!
고향(故鄕)을 지나며
임화
당신의 마을은 이미 잠들었습니까?
등불 하나이 없이 캄캄하니 답답습니다.
여기 그대 아들이 있습니다.
부산을 떠난 막차가 환하니 달리지 않습니까?
개 소리 한 마디 들림직하건만 하늘과 땅이 소리도 없습니다.
두렵습니다. 누런 수캐란 놈도 혹여 양식이 되지나 않았습니까?
인젠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림도 속절없다.
주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집도 다하고,
기름도 마르고, 기운도 지쳐,
아아, 마음 아픕니다. 죽은 듯 마당에 쓰러지지나 않았습니까?
기적이 우니 차가 굴 속에 드나봅니다.
안타깝습니다, 이제 고향은 눈 앞에 스러지렵니다.
어머님 묻힌 건너 산 위 별들이 눈물이 어렸습니다.
인제 내 하나가 있고, 벼락 맞은 수양이 섰고,
그대가 늘 소를 매어 여름이면 파리가 왕왕 끓었습니다.
아들이 마을 전설과 옛노래를 익힌 곳도 게 아닙니까?
오늘 새벽 비가 내리면, 그대는 또 괭이를 잡고, 논 가운데 섭니까?
당신의 굽은 등골의 아픔이 아들의 온몸에 사무칩니다.
아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대 슬픔은 너무나 큽니다.
그대 정숙한 안해도 이 속에 죽었고,
당신의 청승궂은 자장가로 자란 누이도 이 속에 죽고,
그만 떨치고 일어나, 당신을 받들 먼 날을 그리어 내지로 간 아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오는 아들의 손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 흙방 위에 꼬부리고 누운 그대를 헛되이 눈감아 생각할 뿐.
한되는 일입니다. 그대 이름 부를 자유도 없습니다.
곧장 내일 아침 지정받은 어느 곳에 닿아야 합니다.
하나밖에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은 준엄한 길입니다.
그대여! 당신은 아들의 길을 축복합니까?
그대 무릎 아래 다시 엎드려 볼 기약도 막막한,
슬픈 길이 북쪽으로 뻔하니 뚫렸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압니까, 아들의 길이 눈물보다도 영광이 어린 것을……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호올로 흐르는 그대의 눈물이
아들의 타는 마음 속에 기름을 붓는 비밀을.
아아!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구월이십일(九月二十日)
임화
조선 근로자의
위대한 수령의 연설이
유행가처럼 흘러 나오는
마이크를 높이 달고
부끄러운
나의 생애의
쓰라린 기억이
포석(鋪石)마다 널린
서울 거리는
비에 젖어
아득한 산도
가차운 들창도
현기(眩氣)로워 바라볼 수 없는
종로 거리
저 사람의 이름 부르며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
개아미 마냥 모여드는
천만(千萬)의 사람
어디선가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굴
찬 옥방(獄房)에 숨지운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 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리라
노래 부르던 깃발
자꾸만 바라보며
자랑도 재물도 없는
두 아이와
가난한 아내여
가을비 차거운
길가에
노래처럼
죽는 생애의
마지막을 그리워
눈물짓는
한 사람을 위하여
원컨대 용기이어라.
길 - 지금은 없는 전사 김치정(金致程) 동무에게
임화
호올로 돌아가는
길가에 밤비는 차거워
걸음 멈추고 돌아보니
회관 불빛 멀리 스러지고
집집 문은 굳이 잠겨
길이 멀어 외로운가
생각하니 말 실행할
의무 무거워
공복과 더불어 곤함이
등골에 사모친다.
말 두렵지 않고
말 믿지 아니할 것을
나에게 익혀 준 그대는
기인 침묵에 살아
어려운 행동에 죽고
진정 외로운
몇 밤과 날이 달과 해가
불행과 더불어 흘러간
지리한 밤이 새인 뒤
가는 손을 저으며 나는
소란 가운데
제각기 내어두르는
각색 깃발 가운데
분명 들릴 그대 소리를
정녕 타오를 깃발을
지치도록 찾아
거리거리에 있었다
아아 깃발 타는 깃발
열 스물 또 더 많이 나부끼고
민중의 깃발
붉은 깃발은……
이렇게 시작하는 노랫소리는
모두 다 그대의 음성
누구가 그대인지
누구가 그대 아닌지
오직 큰 눈과 넓은 어깨
긴 머리칼을 날리는 그대는
아아 자욱한 사람 속에
있지 않았다.
그대는 역시 분주한 게다
적이 또 머리를 드는 때문일 게다
다시 전투 준비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기(旗)도 내리우고
노래도 잦고
연설도 끝난
밤길에
호올로 나는
비에 젖은 낙엽을 밟으며
저기서 걸어오는 그대를
내 곁을 스치는 그대를
가다가 돌아보는 그대를
종시 말없이 이야기하는 눈을
내가 걸어가는 길 위
밤 사이 기도(企圖)하는 적의
비열한 음모 가운데
별처럼 빛나는 눈을
아아 그대의 남긴 길 위
먼 하늘에 보며
하룻밤 평안히 쉬일
용기를 줌이 그대임을
온몸으로 느낀다
아아 우리의 안식과 근면의
영원한 별이여
깃발을 내리자
임화
노름꾼과 강도를
잡던 손이
위대한 혁명가의
소매를 쥐려는
욕된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가난한 동포의
주머니를 노리는
외국 상관의
늙은 종들이
광목과 통조림의
밀매를 의논하는
폐(廢) 왕궁(王宮)의
상표를 위하여
우리의 머리 위에
국기를 날릴
필요가 없다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살인의 자유와
약탈의 신성(神聖)이
주야로 방송되는
남부조선
더러운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나는 못 믿겠노라
임화
지금 나는 멀리 남쪽 시골서 온 자네의 봉함 편지를 접어 머리맡에 놓고,
눈을 감아 생각하려 잠을 멈추고 자리에 누웠다.
풋내의 밀물이
짙어 가는 여름 드높은 하늘의 깊은 어둠을 헤여,
고기떼처럼 춤출 듯 꼬리를 접어 이슬발을 끊어 던지고,
내 마음의 작은 배가 어젯날의 거칠은 바다 항로에서
풍파가 준 깊다란 상처를 다스리려,
헌 뱃등을 비스듬히 언덕에 누이고 있는 내 아늑한 굴강인 좁은 방으로
얼싸안는 듯 덮치는 듯 듬뿍이 스며든다.
밤.
지나간 황혼의 포구(浦口)와의 별리가 오래되어 낡아갈수록
산악의 푸른 눈썹은 기억의 쓰라림에 젖어,
하늘을 나는 새들도 날개를 접고,
젊은 식물들이 네 활개 저으며 가쁘게 호흡하는 저 위
눈동자 맑은 밤하늘이 호올로 어둠에 슬픈 옷자락을 길게 끄을면서,
정강이 허리가 묻혀 곧 머리까지도 보이지 않을
시커먼 수렁으로 비척비척 걸어간다.
어둠
오랜 사공인 별들조차 갈 길을 잃어 구름 속에 헤매는 어둠,
돌 바위의 굳은 마음이나 산악의 큰 정신도
이 속에서는 넋을 잃고 쓰러질 무겁고 진한 풋내,
아무리 길고 억센 생명도 재 되어 쓰러질 흙의 독한 냄새,
영원히 건강한 태양도 지금엔 다리를 절어 멀리 산 뒤에 숨은
이 두렵고 미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구렁 속에서,
밤의 몸집은 한없이 크고 넓게 성장하며,
나는 새벽 항구를 멀리 남긴 채 나이 먹고 늙어서 죽어갈 것일까?
우뢰의 큰 소리로 부름도 아니련만,
썰물의 굳센 손이 이끌음도 아니련만,
무엇이 부르는 듯, 이끄는 듯,
내 몸과 마음은 밤의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아마도 밤은
이 두텁고 무거운 이불을 덮어
주검의 검은 자리 위에 나를 누이지 않고는
이곳으로부터 내내 물러가지 않으려나 보다.
마치 내 즐기는 산이나 들의 고운 색깔을 걷지 않고는
이놈의 여름철이 달아올 수 없는 것처럼, 정말로 밤은
외상 없는 심술사나운 악령인가 보다.
그러나 밤
이 두렵고 고단한 오늘날의 긴 밤을 헛되이 달려 보고,
허위대는 어리석음이라든가
내일을 옳게 살으려 고요히 잠자는 것의 중(重)함이라든가를,
이 사람, 낸들 어찌 분간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겠는가?
말없이 움직임 없이 오직
죽은 듯 하룻밤을 꿀꺽 참아
선뜻 개는 아침,
두 팔을 걷어 어지러운 들길을 열어 나갈 오늘날의 용사일 나는,
대망의 아득한 잠자리의 값을
나는 허덕이는 가슴 위에 두 손길을 얹고 눈을 감아 금쳐 본다.
`밤의 굳은 손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 누일 때,
그저 운명에 종용(從容)함이 오는 아침을 위하여 가장 현명할 것이다.'
어째 자네뿐이겠는가!
일찍이 선배인 어느 비평가의 논문도
이 `냉정한 이성의 지혜로운 길'을
우리들이 걸어갈 유일의 길이라고 지시했음을,
나는 다시 한 번 새롭게 기억한다.
정말로 가시덤불은 무성하여 좁은 앞길을 덮고,
깊은 밤 날씨는 언짢아, 두터운 암흑이
그 위에 자욱 누르고 있다.
이미
자네는 부상한 채 사로잡히고, 나는 병들어 누워,
벌써 몇 사람의 진실로 존귀한 목숨이
고난에 찬 그 험한 길 위에 넘어졌는가?
이제 우리들의 긴 대오는 허물어지고 `전선'은 어지럽다.
그러나 이 사람!
이 괴로운 밤이 다시 우리들을 찬란한 들판으로 나르는 대신
이름도 없는 세월의 헛된 제물로
번쩍 잡초 우거진 엉구렁 아래 메어치고 달아나지나 않을지?
나는 벌레 먹어 무너져 가는 내 가슴이 맞이할 운명과 더불어
몇 번 고단한 몸을 뒤척이고,
몇 번 괘종의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시커먼 파도 가운데서 대답을 찾으며 생각하였을까?
내 수척한 육신은 기름땀내 잠기고,
돌멩이처럼 머리는 침묵의 괴로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순간
나는 주위를 둘러싼 두터운 침묵이 무너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비로소 보이지도 않게 방안 가득 진친 셀 수도 없는 모기떼의
무수한 입추리 가운데
참담히 누워 있는 내 육신의 전모를
나는 모진 아픔과 몸서리를 같이 발견했다.
오오, 이 밤의 어두운 꿀이
그들의 온갖 활동에 얼마나 크고 넓은 자유를 주는 것일까?
암석까지도 진땀을 내뿜는 이 계절의 진한 입김이
그들의 엷은 두 날개를 얼마나 가볍고 굳세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이 가운데서 보고 아는 모든 자유를 죽여 가고,
`습격자'를 향하여 몸을 일으킬 육신의 적은 힘까지도 잃어간다.
앵! 아우성 소리 치며 눈 위를 감돌고,
소리개처럼 탁 귓전을 후려,
이 밤의 아픔의 가장 혹독한 전초들은 꽉 뒷다리를 버티고,
우리들의 몸에 입추리를 꽂아,
밤이 주고 그들이 탐내는 모든 것을
우리들의 전신에서 약탈한 참혹한 자유를 향락하고 있다.
오, 지금은 육촉(六燭) 전등 흐릿한 좁다란 마루판자,
굵은 창살이 네모진 하늘을 두부같이 저며 놓은 높다란 들창 아래,
내 자네의 여윈 몸은
고된 일에 넘어진 마소처럼 쓰러져 있지 않은가?
얼마나 이 밤의 죄악의 통렬한 집행자들은
무참하고 아프게 그 입추리를 박았을까?
비비어 죽여도, 눌러 죽여도,
벗아, 내 분함이 어찌 풀리겠는가?
자네, 이 모진 아픔에 잠들 수 있겠는가?
자네, 이 무거운 더위에 숨쉴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직도
오는 아침 우리는 정말 건전할 수 있겠는가?
오오, 몸을 일으키어 두 팔을 걷어라.
그리하여 네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잡아,
이 졸음과 생각을 다 한데 깨치고,
바로 우리 병들고 수척한 육신을 쥐어 뜯는
밤의 미운 초병단(哨兵團)을 향하여,
주검으로써 야격(夜擊)에 일어서라.
만일 우리가
자네와 그 아류들이 말하는 거룩한 철리(哲里)를 좇는다면,
닭이 홰를 치고 바자 밑에 울며
이놈의 일족(一族)이 밤과 더불어 숲 속에 물러갈 그때,
우리들은 두엄이 되어 굴욕의 들판에 넘어졌을 것이다.
나는
우리들의 육신을 뜯기지도 않고
우리들을 헛되이 늙히지도 않는
그렇게 착한 여름밤이 있다는 신화와 함께
내일을 위하여 맘의 아픔에 종용(從容)하라는
그 거룩한 철리(哲里)를 믿을 수는 없다.
나의 눈은 핏발이 서서 감을 수가 없다
임화
눈이 부시게 푸른 나뭇잎 사이로
이따금 구름이 흘러가는 풀밭 위
행복한 짐승처럼 누웠으면
미풍은 조을 듯 불어 오고
아아 나의 눈은 핏발이 서서 감을 수가 없다
저 아아(峨峨)한 산들과 보리밭과
점점(點點)한 마을과 도시와
끝없이 불행하였던 동포들의
피에 젖은 가지가지의 추억
희망밖엔 아무것도 아니 가진
소년들의 빛나는 눈과 작은 손과 가는 다리와
주절거리며 뛰어가는 걸음걸이를
아아 너희는 또다시 가져가려 한다
우리들의 어버이가 미어진 잔등에 짐짝과 더불어
우리를 업고 고향을 떠날 때
너희들은 어디에 있었느냐
우리들의 어린것이 낯선 도시에 와서
호올로 눈물 지으며 외로이 잠자던 공장에서
너희들은 어떻게 살았느냐
우리들의 동무가 주림과 박해에 못 이겨
성난 이리처럼 싸움에 일어났을 때
너희들은 무엇을 하였느냐
너희들은 국외에서 싸우지 않고 승리를 기다리었고
너희들은 우리의 교만한 주인으로 행복하였고
너희들은 능히 일본군경의 양우(良友)이었다
아아 모처럼 돌아오려는 자유를 찾아 깃발을 날리는 메이데이
오늘에 또다시 이빨을 갈며 달려드는 너희는 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냐
꾀꼬리 우는 시냇가에 발을 잠그고 해마다 조국에 향그런
오월일일(五月一日)이 오면
휘파람 불며 불행한 동포의 지나간 이야기를
사랑하는 우리 어린것들에게 들려 줄 메이데이를 위하여
대한의 병든 가축을 치는
너희들의 운명을 파멸로 인도해야겠다
아아 나의 눈은 핏발이 서서 감을 수가 없다.
낮
임화
내가 자동차에 실려 유리창으로 내다보던 저 건너 동산도
벌써 분홍빛 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넓다란 푸른 이파리가 물고기처럼 흰 뱃바디를 보이면서,
제법 살았소 하는 듯이 너울거린다.
어느새 여름도 짙었는가 보다.
그러기에 내가 이 절에 올 때엔,
겨우 터를 닦고 재목을 깎던 집들이
벌써 기둥이 서고 지붕이 덮이어,
영을 깔고 용마름을 펴는 일꾼이 밀짚모자를 썼지.
두드러지게 잘된 장다리밭 머리를
곱게 다린 황라 적삼을 떨쳐 입고,
꽁지가 빨간 잠자리란 놈이 의젓이 날고 있다.
밭 머리에 서 있는 싱거운 포풀러 나무가
헙수룩한 제 그림자를 동그란히 접어 안고,
산 너머 방적 회사의 목멘 고동이
서울 온 촌 아기들을 식당으로 부를 때,
아주 소리개 모양으로 떠돌아도 보고,
물을 차는 제비나 된 듯 내달으며 넘놀아도 보던,
잠자리 녀석들도 꼬리를 오그리고 죽지를 끌며,
장다리가 세로 가로 쓰러져 있는 밭 가운데로,
졸린 듯 내려앉는다.
정말 요새 뙤약볕이란 돌도 녹일가 보다.
후꾼한 바람이 진한 거름내를 풍기며,
나무 끝을 건드리고 밭 위를 지나간다.
벌떼가 몇 개 안 남은 무색한 보랏빛 꽃수염을
물었다 놓고, 놓았다 물며,
왕 왕 날개를 울리면서 해갈을 한다.
호랑나비는 들어가면 눈이 먼다는 독한 가루를 잔뜩 싣고 아롱거린다.
꼬리를 건드리고 머리를 만져도
저 잠자리란 녀석은 다시 일지를 않으니,
졸고 있나, 그렇지 않으면 인제 벌써 죽었나?
거미줄채를 손에 든 선머슴아이들이
신발을 벗어 들고 성큼 발소리를 죽여 가며,
한 걸음 두 걸음 곧 손이 그 곳에 미칠 텐데,
오 저런 망할 녀석들의 심술궂은 눈 좀 보게.
어쩌면……
고렇게 꼿꼿하고 고운 두 날개,
빨간 빛깔이 기름칠한 것처럼 윤택 나는 날씬한 체구가
어찌 될지!
어째 맵기 당추 같은 고추짱아의 마음도 모르고 있을까?
앵두꽃 진 지가 얼마나 된다고 요만한 뙤약볕에,
쨍이야, 벌써 `호박'처럼 맑던 네 눈도 어두워졌니?
녹음의 짙은 물결이 들 가득 밀려오고 밀려간다.
동산은 어른처럼 말없이 잠잠하다.
아마 연연한 봄의 고운 배는 벌써 엎어졌나 보다.
정말 이 따가운 뙤약볕의 소나기통에,
굳은 날개도 두터운 비름 이파리도 다 또 일수 없이 풀이 죽고 말았을까?
골짜기 속에서 낮잠을 자던 게으른 풀숲에,
젊은 꾀꼬리가 한 마리 푸드득 나뭇잎을 걷어 차고,
고요한 침묵의 망사를 찢고 하늘로 날아갔다.
오오, 고마와라, 얼마나 고마울까!
문득 나는 이 조그만 꿈을 깨여,
단장을 의지하여 허리를 펴서 뒷산을 보았다.
숲 사이에 원추리가 한 떨기 재나 넘은 보름달처럼,
음전히 머리를 쳐들고,
꾀꼬리가 남긴 노래 곡조의 여음을 듣고 있지 않은가!
나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어 산비탈을 올라가면서,
`꿈꾸지 말고 시대의 한가운데로 들어오라'는 식물들의 흔드는 손을 보았다.
`너는 아직도 죽지 않았었구나'하고,
원추리가 다정스러이 웃는 얼굴을 보았다.
나는 잠깐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숙였다가
다시 고운 나비와 무성한 식물들의 겨우살이를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때 나는 아직 살아 있는 행복이 물결처럼 가슴에 복받침을 느끼었다.
내 청춘에 바치노라
임화
그들은 하나도
어디 태생인질 몰랐다.
아무도 서로 묻지 않고,
이야기하려고도 안 했다.
나라와 말과 부모의 다름은
그들의 우정의 한 자랑일 뿐.
사람들을 갈라 놓는 장벽이,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얽어 매듯 한데 모아,
경멸과 질투와 시기와
미움으로밖엔,
서로 대할 수 없게 만든 하늘 아래,
그들은 밤바람에 항거하는
작고 큰 파도들이
한 대양에 어울리듯,
그것과 맞서는 정열을 가지고,
한 머리 아래 손발처럼 화목하였다.
일찍이 어떤 피일지라도
그들과 같은 우정을 낳지는 못했으리라.
높은 예지, 새 시대의 총명만이,
비로소 낡은 피로 흐릴
정열을 씻은 것이다.
오로지 수정 모양으로 맑은 태양이,
환하니 밝은 들판 위를
경주하는 아이들처럼, 그들은
곧장 앞을 향하여 뛰어가면 그만이다.
어미를 팔아 동무를 사러 간다는 둥,
낡은 고향은 그들의 잔등 위에
온갖 추잡한 낙인을 찍었으나,
온전히 다른 말들이 부르는
단 한 줄기 곡조는,
얼마나 아름다웠느냐?
미어진 구두와 헌옷 아래
서릿발처럼 매운 고난 속에
아, 슬픔까지가
자랑스러운 즐거움이었던
그들 청년의 행복이 있었다.
너 하나 때문에
임화
오직 있는 것은
광영 하나뿐이고,
정녕 굴욕이란 없는가?
있어도 없는 것인가?
만일 싸움만 없다면……
그러나 싸움이 없다면,
둘이 다 없는 것,
싸움이야말로
광영과 굴욕의 어머니,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
패배의 피가
승리의 포도주를 빚는 것도,
굴욕이
광영의 향료를 끌어 내는 것도,
모두 다 싸움의 넓은 바다.
바다는
넓이도 깊이도 없어,
승리가 실컷
제 즐거움의 진주를 떠 내고,
패배(敗北)이 죽도록
제 아픔의 고귀한 값을 알아 내는 곳.
회복될 수 없는
굴욕의
- 제군은 이 말의 의미를 아는가?
아프고 아픈 상처가,
붉은 피가
장미 떨기처럼 피어나는 곳.
아아! 너 하나, 너 하나 때문에,
나는 굴욕마저를 사랑한다.
네거리의 순이
임화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 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 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었지!
그리하여 너는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 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콧노래와
언 눈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청년과 너의 따듯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청춘은 참말로 꽃다웠고,
언 밥이 주림보다도 쓰리게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날,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따듯한 품속에 안아 주던 것은
오직 하나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골목 뒤에서 중얼대고 일터에서 충성되던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정열 그것이었다.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났더냐?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 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쌍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 보아라, 이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 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남은 것이라고는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트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 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
높은 산 봉우리마다
임화
밤중이면
짐승들 요란히 울고
낮이래야 이따금 기러기
그 위를 건너가는
산마루
우리 모두
한 자루 낫을 갈아
허리에 차고
정정(丁丁)한 소리
나무를 베어 불을 지르면
타오르는 불길
걷잡을 수 없어
읍으로 읍으로
고함치며 몰려가던 밤
더운 피 흘리며 죽은
동무의 소름끼치는 비명
잠결에도 귀에 쟁쟁하여
아아 원수보다도
잔인한 마음을 지니고
농군의 두터운 가슴
골짝마다에 있고
번개처럼 빛나는
인민항쟁대(人民抗爭隊)의 눈이
남조선 높은 산
봉우리 봉우리에 있구나
눈물의 해협
임화
아기야, 너는 자장가도 없이 혼곤히 잔다.
너는 인제서야 잠이 들었다만,
너무나 오랫동안 보채어,
좁은 목이 칼칼하니 쉬었다.
너는 오늘밤
이 해협 위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일의 단 한 가지 의미도 깨닫지 못하고 잔다.
바람이 지금 바다 위에서 무엇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너는 모른다.
물결이 갑판 위에서 무엇을 쓸어가고 있는지도 너는 모른다.
물 밑의 어족들이 무엇을 탐내고 있는지도 너는 모른다.
이따금,
동그란 유리창을 들여다보는 것이 정녕 주검의 깊은 그림자인 것도 너는 모른다.
아마 우리를 실은 큰 배가,
수평선 아래로 영원히 가라앉는 비창한 통곡의 순간이 온다 해도,
너의 고운 잠은 깨이지 않으리라.
아기야, 너는 오늘밤,
이 바다 위에 기적의 손길이 미쳐 있는 줄 아느냐?
눈물이 흐른다.
현해탄 넓은 바다 위
지금 젖꼭지를 물고 누워
뒹굴을 듯 흔들리는 네 두 볼 위에,
하염없이 눈물만이 흐른다.
아기야, 네 젊은 어머니의 눈물 속엔,
무엇이 들어 있는 줄 아느냐?
한 방울 눈물 속엔
일찍이 네가 알고 보지 못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자라난 요람의 옛 노래가 들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뜯던 봄나물과 꽃의 맑은 향기가 들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꿈꾸던 청춘의 공상이 들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갈아 붙인 땅의 흙내가 들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어루만지던 푸른 보리밭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안아 보던 누른 볏단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걸어가던 촌(村) 눈길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나무를 베던 산의 그윽한 냄새가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죽이던 도야지의 비명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듣던 외방 욕설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받았던 집행 표지가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작별한 멀리 간 동기의 추억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떠나 온 고향의 매운 정경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이따금 생각했던 다툼의 뜨거운 불길도 있다.
참말로 한 방울 눈물 속은 이 모든 것이 들어 있기엔 너무나 좁다.
그러므로 눈물은 떨어지면 이내 물처럼 흘러가지 않느냐?
나의 아기야, 그래도 이 속엔 아직 그들의 탄 배의 이름도 닿을 항구의 이름도 없고,
이 바다를 건너간 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조금도 똑똑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바람과 파도와 그 밖에 온갖 악천후에 대하여,
눈물은 다만 하염없을 따름이다.
밝은 날 아침 다행히 물결과 바람이 자서
우리의 배가 어느 항구에 들어간대도 이내 새 운명이 까마귀처럼 소리칠 게다.
나는 그 고이한 소리가 열어 놓는 너의 소년과 청춘의 긴 시절을 생각한다.
아기야, 해협의 밤은 너무나 두려웁다.
우리들이 탄 큰 배를 잡아 흔드는 것은 과연 바람이냐? 물결이냐?
아! 그것은 현해탄이란 바다의 이상한 운명이 아니냐?
너와 나는 한 줄에 묶여 나무토막처럼 이 바다 위를 떠 가고 있다.
아기야, 너는 어찌 이 바다를 헤어 가려느냐?
날씨는 사납고,
아직 너는 어리고,
어버이들은 이미 기운을 잃고,
내 손은 너무 희고 가늘고,
기적이란 오늘날까지 있어 본 일이 없고,
그러나, 아끼는 나의 아기야.
오늘밤 이 바다 위에 흐르는 눈물이,
내일 너의 젊은 가슴 속에 피워 놓을 한 떨기 붉은 장미의 이름을
아아! 나의 아기야, 나는 안다.
다시 네거리에서
임화
지금도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맞고 보내며,
전차도 자동차도
이루 어디를 가고 어디서 오는지,
심히 분주하다.
네거리 복판엔 문명의 신식 기계가
붉고 푸른 예전 깃발 대신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린다.
스텁 - 주의(注意) - 꼬 -
사람, 차, 동물이 똑 기예[敎鍊] 배우듯 한다.
거리엔 이것밖에 변함이 없는가?
낯선 건물들이 보신각을 저 위에서 굽어본다.
옛날의 점잖은 간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다지도 몹시 바람은 거리를 씻어갔는가?
붉고 푸른 `네온'이 지렁이처럼,
지붕 위 벽돌담에 기고 있구나.
오오, 그리운 내 고향의 거리여! 여기는 종로 네거리,
나는 왔다, 멀리 낙산(駱山) 밑 오막살이를 나와 오직 네가 네가
보고 싶은 마음에……
넓은 길이여, 단장한 집들이여!
높은 하늘 그 밑을 오고가는 허구한 내 행인들이여!
다 잘 있었는가?
오, 나는 이 가슴 그득 찬 반가움을 어찌 다 내토를 할까?
나는 손을 들어 몇 번을 인사했고 모든 것에게 웃어보였다.
번화로운 거리여! 내 고향의 종로여!
웬일인가? 너는 죽었는가, 모르는 사람에게 팔렸는가?
그렇지 않으면 다 잊었는가?
나를! 일찍이 뛰는 가슴으로 너를 노래하던 사내를,
그리고 네 가슴이 미어지도록 이 길을 흘러간 청년들의 거센 물결을,
그때 내 불쌍한 순이는 이곳에 엎더져 울었었다.
그리운 거리여! 그 뒤로는 누구 하나 네 위에서 청년을 빼앗긴 원한에 울지도 않고,
낯익은 행인은 하나도 지나지 않던가?
오늘밤에도 예전같이 네 섬돌 위엔 인생의 비극이 잠자겠지!
내일 그들은 네 바닥 위에 티끌을 주우며……
그리고 갈 곳도 일할 곳도 모르는 무거운 발들이
고개를 숙이고 타박타박 네 위를 걷겠지.
그러나 너는 이제 모두를 잊고,
단지 피로와 슬픔과 검은 절망만을 그들에게 안겨 보내지는 설마 않으리라.
비록 잠잠하고 희미하나마 내일에의 커다란 노래를
그들은 가만히 듣고 멀리 문 밖으로 돌아가겠지.
오오 정다웁고 그리운 고향의 거리여!
너는 내 귀한 동생 순이와 같이
그가 사랑한 용감한 이 나라 청년과 같이
노하고 즐기고 위하고 싸울 줄 알며 네 위를 덮은 검은 ××을 ×수처럼 ××하던
저 위대하고 아름다운 청년들의 발길을 대체 오늘날까지 몇 사람이나 맞고 보냈는가
고향의 거리여……나는 지금
네 우에서 한 사람의 낯익은 얼굴도 찾을 수가 없다.
간판이 죽 매어달렸던 낯익은 저 이계(二階) 지금은 신문사의 흰 기(旗)가 죽지를 늘인 너른 마당에,
장꾼같이 웅성대며, 확 불처럼 흩어지던 네 옛 친구들도
아마 대부분은 멀리 가 버렸을지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순이의 어린 딸이 죽어간 것처럼 쓰러져 갔을지도 모를 것이다.
허나, 일찍이 우리가 안 몇 사람의 위대한 청년들과 같이,
진실로 용감한 영웅의 단[熱한] 발자욱이 네 위에 끊인 적이 있었는가?
나는 이들 모든 새 세대의 얼굴을 하나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건재하라! 그대들의 쓰린 앞길에 광영이 있으라'고.
원컨대 거리여! 그들 모두에게 전하여 다오!
잘 있거라! 고향의 거리여!
그리고 그들 청년들에게 은혜로우라,
지금 돌아가 내 다시 일어나지를 못한 채 죽어 가도
불쌍한 도시! 종로 네거리여! 사랑하는 내 순이야!
나는 뉘우침도 부탁도 아무것도 유언장 위에 적지 않으리라.
다시 인젠 천공(天空)에 성좌(星座)가 있을 필요가 없다
임화
바다, 어둔 바다,
쭉 건너간 수평선 위,
다시 인젠
별들이 깜박일 필요는 없다.
파도 위 하늘 아래,
일찍이 용사이었던.
그러니라……
- 뱃머리를 돌려라,
돛을 꼬부리고.
남풍이다.
에헷! 그물 줄을 늦추고.
이마 위에 한 손을 얹고,
하늘을 우러러 얼굴을 들면,
별들은 꽃봉오리처럼
아름다왔다.
별들은 결코 속이지 않았다.
우리의 가슴은 바다인 듯,
고기들과 조개의 온갖 비밀을 알았고,
은하 오리온 먼 대웅(大熊)의
조그만 속삭임 하나,
우리의 귀는 빼 놓지 않았다.
우리의 몸은 새보다도
날래고 자유로워,
바람이나 파도는
얼른 우리 앞에 맞서지를 못했다.
거친 파도와 바람이,
우리들의 가슴 속에 묻어 놓은 것은,
자신과 굳은 신념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밤 얼굴의
깊은 주림과 꺼진 눈자위가
밤하늘보다 오히려 어두워,
타고 있는 조그만 배가
장차 닿을 항구의 이름조차 알 수가 없다.
살림의 물결, 가난의 바람은,
현해(玄海) 바다보다도 거세고 매웠던가?
마음과 얼굴에 함부로 파진,
깊고 어둔 골창들은
험한 생애의 풍우가 물어뜯은
지울 수 없는 상처들.
그 곳에서 흐른
아프고 붉은 이야기가,
고향의 온갖 들과 내 위에
노래가 되어 흐르고 있다.
푸른 잎, 붉은 꽃과, 누른 열매,
가없는 하늘 밑에 드러누운 대륙의
헤아리기 어려운 삼림을 기르랴
너무나 비싼 생명들은 녹아,
아아! 벌써 한 개 숙명인 얼굴에,
그 메마른 피부 위에
어둔 해협의 밤바람이 부딪친다.
앞에도 뒤에도 얼굴
아낙네, 아이, 어른, 한 줌의 얼굴들
- 눈들은 제각각 알지 못할 운명에 촛불처럼 떨고 있다.
대체 이런 똑같은 얼굴들이,
아아! 그대들은 다 형제인가……
통 통 통 통
국법을 어기는 명백한 음향이
현해 어둔 바다 하늘 위에 떨린다.
- 아아 북구주 해안엔
대체 무엇이 기다린단 말인가!
쳇 쓸데 없는 별들이다.
인젠 곱다란 연락선 갑판 위
성장한 손들 머리 위나 빛나거라.
- 너희는
그들의 사랑과 축복의 꽃다발이리라.
몇 번 너희들은 이러한 밤,
정말 몇 번
눈 밝은 경비선을 안내했는가?
듣거라, 하늘아!
다시 인젠
바다 위에 성좌가 있을 필요는 없다.
담(曇) - 1927
임화
부르죠아지의 ×× -
1918
이백만의 프롤레타리아를 웰탄 요새에서 ××한
그놈들의 ××행위는 악학(惡虐)한 수단은
스팔타키스트의 용감한 투사
우리들의 칼, 로사를 빼앗았다.
세계의 가장 위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동무를
혁명가의 묘지로 몰아 넣었다.
그러나 강철 같은 우리의 전열은
×인자(人者) - 그들의 포학(暴虐)도 궤멸케 하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그놈들은 완강하다
그놈들의 허구수단(虛構手段)과
××행위는 아직도 지구의 도처에서 범행되어 간다
1917 - 태양이 도망간 해
세계의 우리들은 8월 20일 지구발전보(地球發電報)를 작성하였다
제1의 동지는 뉴욕 사크라멘트 등지에서 수십 층 사탑(死塔)에 폭탄 세례를 주었으며
제2의 동지는 핀랜드에서 살인자 미국(米國)의 상품에 대한 비매동맹(非買同盟)을 조직하였고
제3의 동지는 코―펜하겐에 아메리카 범죄자의 대사관을 습격하였으며
제4의 동지는 암스텔담 궁전을 파괴하고 군대의 총 끝에 목숨을 던졌고
제5의 동지는 파리에서 수백 명 경관을 ××하고 다 달아났으며
제6의 동지는 모스크바에서 치열한 제3인터내쇼날의 명령 하에서 대 시위운동을 일으키었고
제7의 동지는 도―쿄에서 ××자(者)의 대사관에 협박장을 던지고 갔으며
제8의 동지는 스위스에서 지구의 강도 국제 연맹 본부를 습격하였다
(그때의 그놈들은 한 장에 이백냥(二百兩)짜리 유리창이 깨어진 것을 탄식하였다 - 눈물은 염가(廉價)다)
오오 지금 세계의 도처에서 우리들의 동지는 그놈들의 폭압과 ××에 얼마나 장렬히 싸워가고 있는가
그러나
인류의 범죄자
역사의 도살자인
아메리카 부르조아의 정부는
사랑하는 우리의 동지
세계 무산자의 최대의 동무
작코, 반제티의 목숨을 빼앗았다
전기로 -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發電)하는 전기로)
그러나
제2인터내쇼날은
드디어 양동지(兩同志) 구명(救命) 아메리카 위원회의 전세계 노동자의 제너럴 스트라익의 요망을 모반하였다.
그들은 이미 우리의 힘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의 조직이 아니다
룸펜 인테리겐차-의 허울 좋은 도피굴이다
우리들은 새로운 힘과 계획을 가지고 전장에로 가자
우리는 작코, 반제티를 죽인 전기의 발전자(發電者)가 아니냐
우리들은
세계의 일체(一切)를 파괴하고
세계의 일체(一切)를 건설한다
그놈들은 우리들에게 ××을 교사하였다
가장 미운 ××의 교사자
그놈들을 재판하여라
지구의 강도 인류의 범죄자에게 사형을 주어라
그러고 우리들은 발전(發電)을 하자
우리의 전열에 새로운 힘을 보내기 위하여
동무여 그놈들에게 생명을 도적맞은 우리들의 사랑하는 전위여
조금도 염려는 말아라
뒤에는 무수한 우리가 있지 않느냐
가장 위대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이
오오 우리는 안다
작코, 반제티군(君) 등이 죽지 않은 것을
거리[街里]마다 가득한 그대들의 시체를
태양을 물들인 그대들의 핏방울을
폭풍우다 ××이다
우리들의 진격하는 전열을 향하여 두 동지는 외어치지 않느냐
세계의 동지야 -
1927 - 리아
××에 대하기를 ××으로
우리들은 동무와 같이 용감하게 전장에로 가자
들
임화
눈알을 굴려 하늘을 쳐다보니,
참 높구나, 가을 하늘은
멀리서 둥그런 해가 네 까만 얼굴에 번쩍인다.
네가 손등을 대어 부신 눈을 문지를 새,
어느 틈에 재바른 참새놈들이
푸르르 깃을 치면서 먹을 콩이나 난 듯,
함빡 논 위로 내려앉는다.
휘어! 손뼉을 치고 네가 줄을 흔들면,
벙거지를 쓴 검은 허수아비 착하기도 하지,
언제 눈치를 챘는지, 으쓱 어깨짓을 하며 손을 젓는다.
우! 우! 건넛말 네 동무들이 풋콩을 구워 놓고,
산 모퉁이 모닥불 연기 속에 두 손을 벌려 너를 부르는구나!
얼싸안고 나는 네 볼에 입맞추고 싶다.
한 손을 젓고 말없이 웃어 대답하는
오오 착한 네 얼굴.
들로 불어오는 바람이라고 어찌 마음이 없겠니?
덥고 긴 여름 동안 여위어 온 네 두 볼을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철뚝에 선 나뭇잎들마저 흐드러져 웃는구나!
지금 네 눈앞에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오지게 찬 벼 이삭이 누렇게 여물어 가듯,
푸르고 넓은 하늘 아래 자유롭게 너희들은 자라겠지……
자라거라! 자라거라, 초목보다도 더 길길이,
오오! 그렇지만 내 목이 메인다.
바람이 불어 온다.
수수밭 콩밭을 지나 네 논두둑 위에로,
참새를 미워하는 네 마음아,
한 톨의 벼알을 뉘 때문에 아끼는고?
바다의 찬가
임화
장하게
날뛰는 것을 위하여,
찬가를 부르자.
바다여
너의 조용한 달밤일랑,
무덤길에 선
노인들의 추억 속으로,
고스란히 선사하고,
푸른 비석 위에
어루만지듯,
미풍을 즐기게 하자.
파도여!
유쾌하지 않은가!
하늘은 금시로,
돌멩이를 굴린
살얼음판처럼
뻐개질 듯하고,
장대 같은 빗줄기가
야……
두 발을 구르며,
동동걸음을 치고,
나는
번갯불에
놀라 날치는
고기 뱃바닥의
비늘을 세고
바다야!
너의
가슴에는
사상이 들었느냐
시인의 입에
마이크 대신
재갈이 물려질 때,
노래하는 열정이
침묵 가운데
최후를 의탁할 때,
바다야!
너는 몸부림치는
육체의 곡조를
반주해라.
발자욱 - 붉은 군대(軍隊)를 환영(歡迎)하기 위하여
임화
그대들은 정녕
붉은 군대(軍隊) 붉은 영웅(英雄)
방금 만주(滿洲) 국경(國境)을 넘어왔는가
약(弱)한 민족(民族)에 대(對)하여
이리 같었든 군국주의(軍國主義)
주린 만주(滿洲)사람과
유랑(流浪)하는 우리 동포(同胞)가
개같이 사역(使役)되던 벌판
오만한 장군(將軍)이 눈을 부릅뜨고
호령(呼令)하던 저 점점(點點)한 포루(砲壘)
우리의 피와 원한(怨恨)의 성곽(城郭)들이
낱낱이 티끌처럼 흩어졌는가
말을 타고 전차(戰車)를 타고
그대들은 빛나는 깃발 날리며
하이랄평원(平原) 북만(北滿)의 삼림(森林)
흑룡강(黑龍江) 송화강(松花江)을 건너
아아 피의 젖은 우리의 국토(國土)
함경도(咸鏡道) 평안도(平安道)로 들어오는가
즐거움도 반가움도 모르던 우리 동포(同胞)
그대들의 무거웁게 이끄는 군화(軍靴)를 바라보는 우리 동포(同胞)
파시즘을 짓밟은 힘찬 발길엔
서구(西歐)의 거먼 흙이 미처 털리지 않았고
찌들은 군복(軍服) 위 불똥처럼 밝은 별은
레-닌그라-드의 탄환(彈丸)자욱이냐
모스크바 교외(郊外)의 칼 흠집이냐
아아 승리(勝利)와 영광(榮光)에 빛나는 스타-린그라-드의 용사(勇士)도 왔구나
이름이 그대로 노래인 나라의 군대(軍隊)여
이름이 그대로 희망(希望)인 나라의 군대(軍隊)여
그대들이 가져오는 것은 우리의 영토(領土)인가
그대들이 들고 오는 것은 우리의 기(旗)ㅅ발인가
그대들이 부르고 오는 것은 우리의 노래인가
우리는 어느 것이 그대들의 것인지
어느 것이 우리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꽃다발을 한 아름 안은
어린아이처럼
손에 쥐인 깃대를
흔듦조차 잊고
저벅저벅 울려 오는
그대들의 발자욱 소리
멀리 북방(北方)에 드르며
영토(領土)보다도 깃발보다도 노래보다도
그대들의 것이면서 세계(世界)의 것이었던
큰 정신(精神)이 따뜻하게
우리 옆에 있음을 느끼고 있다
밤 갑판 위
임화
너른 바다 위엔 새 한 마리 없고,
검은 하늘이 바다를 덮었다.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배는 한곳에 머물러 흔들리기만 하느냐?
별들이 물결에 부딪쳐 알알이 부서지는 밤,
가는 길조차 헤아릴 수 없이 밤은 어둡구나!
그리운 이야 그대가 선 보리밭 위에 제비가 떴다.
깨끗한 눈가엔 이따금 향기론 머리칼이 날린다.
좁은 앙가슴이 비둘기처럼 부풀어올라,
동그란 눈물 속엔 설움이 사모쳤더라.
고향은 들도 좋고, 바다도 맑고, 하늘도 푸르고,
그대 마음씨는 생각할수록 아름답다만,
울음소리 들린다, 가을바람이 부나 보다.
낙동강가 구포벌 위 갈꽃 나부끼고,
깊은 밤 정거장 등잔이 껌벅인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누이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건넛마을 블들도 반짝이고, 느티나무도 거멓고, 앞내도 환하고,
벌레들도 울고, 사람들도 울고,
기어코 오늘밤 또 이민 열차가 떠나나 보다.
그리운 이야! 기약한 여름도 지나갔다.
밤바람이 서리보다도 얼굴에 차,
벌써 한 해 넘어 외방 볕 아래 옷깃은 찌들었다.
굶는가, 앓는가, 무사한가?
죽었는가 살았는가도 알 수 없는
청년의 길은 참말 가혹하다.
그대 소식 나는 알 길이 없구나!
어느 누군 사랑에 입맛도 잃는다더라만,
이 바다 위 그대를 생각함조차 부끄럽다.
물결이 출렁 밀려오고, 밀려가고,
그대는 고향에 자는가?
나는 다시 이 바다 뱃길에 올랐다.
현해(玄海) 바다 저쪽 큰 별 하나이 우리의 머리 위를 비출 뿐,
아무것도 우리의 마음을 모르는 않는다만,
아아, 우리는 스스로 명령에 순종하는 청년이다.
벌레
임화
사람들은 말하기를,
벌레는 하등동물이다.
참말로 이것은 의심할 수야 없는 것이다.
하룻날
가을 바람과 함께 오지게 익어가는 논배미 좁은 길을,
이슬진 풀잎을 걷어 차며 바닷가에 나아가니,
벌써 제철을 보낸 늙은 벌레가 하나,
새로 쌓아 올린 매축지(埋築地) 시멘트 벽을 기어가다,
나를 보고 놀래기나 한 듯,
소스라쳐 물 속으로 딩굴어 떨어진다.
텀벙…… 지극히 조그만 소리가 나면서 엷은 파문이
마치 못 이기어 인사치레나 하듯 스르르 퍼진다.
그러나 물결이 한 번 돌을 치고 물러갈 때,
바다는 아까와 다름 없이 아침 햇발을 눈부시게 반사한다.
아직 아무도 밟아본 듯 싶지 않은 정한 돈대 위에,
좁쌀 같은 새까만 똥알이 여나문 나란히 벌려 있었다.
이것은 충분히 늙은 벌레가 죽음으로 가던 길이면서,
그가 아직도 살았었노라 하던,
최후의 유물임을 누구가 의심할까.
내가 한 마리 이름 없는 벌레와 다른 게 무엇이냐.
고지식한 마음이 제출하는 질문의 대답을 찾으려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들었을 제,
심히 노한 태양의 표정에
두 손으로 나는 얼굴을 가리었다.
이 때 물결이 어머니처럼 이르기를,
사람은 봄에 났다 가을에 죽는 벌레는 아니니라.
벌레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도 이젠 소용이 없는가?
포구 저쪽으로 물결은 돌아갔다.
삼월일일(三月一日)이 온다
임화
언 살결에
한층
바람이 차고
눈을 떠도
눈을 떠도
티끌이
날려 오는 날
봄보다도
먼저
삼월일일(三月一日)이
온다
불행한
동포의
머리 위에
자유 대신
남조선(南朝鮮)
민주의원(民主議院)의
깃발이
늘어진
외국 관서의
지붕 위
조국의 하늘이
각각(刻刻)으로
내려앉는
서울
우리는
흘린 피의
더운 느낌과
가득하였던
만세 소리의
기억과 더불어
인민의 자유와
민주조선의 깃발을
가슴에 품고
눈을 떠도
눈을 떠도
티끌이
날려 오는 날
봄보다도
일찍 오는
삼월일일(三月一日) 앞에
섰다.
새 옷을 갈아입으며
임화
젊은 아내의
부드런 손길이 쥐어짠
신선한 냇물이 향그런가?
하늘이 높은 가을,
송아지떼가 참새를 쫓는
마을 언덕은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이냐만,
고혹적인 흙내가
나의 등골에 전류처럼
퍼붓고 지나간 것은,
어째서 고향의 불행한 노래뿐이냐?
언제부터 쌀찐 흙 속에 자라난
나무 가지엔 쓴 열매밖에,
붉은 꽃 한 송이 안 피었는가!
가끔 촌사람들이
목을 메고 늘어진 이튿날 아침,
숲 속을 울리던 통곡소리를
나는 잊지 않고 있다.
행복이란 꾀꼬리 울음이냐?
푸른 숲에서나, 누른 들에서나,
한 번 손에 잡히지 않았고,
아……
태양 아래 자유가 있다 하나,
땅 위엔 행복이 있지 않았다.
새 옷을 갈아 입으며,
들창 너머로 불현듯
자유에의 갈망을 느끼랴는
나의 마음아!
너는 한낱 철 없는 어린애가 아니냐?
세월
임화
시퍼렇게 흘러내리는 노들강,
나뭇가지를 후려꺾는 눈보라와 함께
얼어붙어 삼동 긴 겨울에 그것은
살결 센 손등처럼 몇 번 터지고 갈라지며,
또 그 위에 밀물이 넘쳐
얼음은 두 자 석 자 두터워졌다.
봄!
부드러운 바람결 옷깃으로 기어들 제,
얼음판은 풀리고 녹아서,
돈짝 구들장 같은 조각이 되어 황해 바다로 흘러간다.
이렇게 때는 흐르고 흘러서, 넓은 산 모서리를 스쳐 내리고, 굳은 바위를 깎아,
천리 길 노들강의 하상을 깔아 놓았나니,
세월이여! 흐르는 영원의 것이여!
모든 것을 쌓아 올리고, 모든 것을 허물어 내리는,
오오 흐르는 시간이여, 과거이고 미래인 것이여!
우리들은 이 붉은 산을, 시커먼 바위를,
그리고 흐르는 세월을, 닥쳐 오는 미래를,
존엄보다도 그것을 사랑한다.
몸과 마음, 그밖에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세월이여, 너는 꿈에도 한 번
사멸하는 것이 그 길에서 돌아서는 것을 허락한 일이 없고,
과거의 망령이 생탄하는 어린것의 울음 우는 목을 누르게 한 일은 없었다.
너는 언제나 얼음장같이 냉혹한 품안에
이 모든 것의 차례를 바꿈 없이
담뿍 기르며 흘러왔다.
우리들은
타는 가슴을 흥분에 두근거리면서 젊은 시대의 대오는
뜨거운 맥이 높이 뛰는 두 손을 쩍 벌리고,
모든 것을 그 아름에 끼고 닥쳐오는 세월! 미래!
그대를 이 지상에 굳건히 부여잡는다.
우리는 역사의 현실이 물결치는 대하 가운데서
썩어지며 무너져 가는 그것을 물리칠 확고한 계획과
그것을 향해갈 독수리와 같이 돌진할 만신의 용기를 가지고,
이 너른 지상의 모든 곳에서 너의 품 안으로 다가선다.
오오, 사랑하는 영원한 청춘 세월이여.
너의 그 아름다운 커다란 푸른빛 눈을 크게 뜨고,
오오, 대지의 세계를 둘러 보라!
누구가 정말 너의 계획의 계획자이며!
누구가 정말 너의 의지의 실행자인가?
오오, 한 초 한 분
온 세계 위에 긴 날개를 펼치고 날아드는 한 해여!
우리는 너에게 온 세계를 요구한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불닿는 말썽 가운데서
우리는 요구한다.
좋은 것을, 더 좋은 것을.
오직 우리들만이
세월이여! 이것은 미래인 너에게 요구할 수 있고
한 눈 깜박할 새 천만 리 달아나는 너의 팔을 잡고
즐거운 미래를 향하여 달음칠 수가 있다
네가 알듯이 오직 우리들만이―그리하여
우리들이 한 번 그 가슴을 푹 찌를 때
우리들이 한 번 돌부리를 차고 피를 흘리며 넘어질 때
우리들이 또 한 번 두 다리를 건너고 들쳐 일어나 앞을 향하여 고함을 지르고 내달을 제
세월이여! 너는 손뼉을 치며 우리들의 품으로 달려들어라!
오-ㄴ 세계를 네 품에 가득 부둥켜안고
오오! 감히 어떤 바람이 있어, 어떤 힘이 있어,
물결이여, 돌아서라! 하상이여, 일어나라!고 손짓할 것이며,
세월이여, 퇴거하라! 미래여, 물러가거라!고 소리치겠는가?
미래여! 사랑하는 영원이여!
세계의 모든 것과 함께 너는 영원히 젊은 우리들의 것이다.
소녀가
임화
눈길을 잣밝으며
등을 넘어 갈ㅱ에
망보던 벌바람은
내맘을 ㅱ려
젊은이 풋마음이
잔듸밧을 나갈 때
엿보든 도령네는
공연히우서.
안개 속
임화
하늘 땅 속속들이
먹 위에 먹을 갈아 부었다.
발뿌리조차 안 뵌다만,
나는 아직 외롭지 않다.
비가 흩뿌리더니,
우뢰가 요란하고,
번개가 날카롭고,
드디어 내 잠자는 마을,
뭇집 들창이 캄캄하다.
길가 불들도 꺼졌다.
별도, 달도,……
밀물처럼 네가 쓸어와,
다시는 불도
내일 낮도 없을 듯하더라만,
나의 마을 사람들은 대견하더라!
앞을 다투어 깜북깜북
여러 들창이 환하니
흐득임을 보아,
오무라졌다 펴는 불촉이 분명타.
길 가는 나그네들이
나비떼처럼 불 갓으로 찾아든다.
볼이 패이고 뼛골이 드러났다.
별빛보다 희미한 들창이
그들에 역력한 고난을 비친다.
정녕 몇 사람을
너는 험한 길 위에 죽였을 게다.
네 손은 아귀가 세고 끈끈하다.
붓석 힘을 주어 움키면,
아무것이고 다 부여잡히리라만,
모래알처럼
손가락 틈을 새는 것이 있으리라.
꼭 쥐면 쥘수록 틈이 번다.
안개 끼인 밤에는
호롱불이 보름달 같으니라.
물론 나그네들이야 집도 없고 길도 멀다.
그 대신 희망이 꽉 찼더라.
눈동자는 굴 속 같아야,
한 점 불이 별 같고,
가슴은 한층 밝아,
밤새도록 환히 아름답더라.
내야 눈마저 흐리다만,
아직 외롭지 않다.
암흑의 정신
임화
대양과 같이 푸른 잎새를,
그 젊은 수호졸(守護卒) 만산(滿山)의 초화(草花)를,
돌바위 굳은 땅 속에 파묻은 바람은,
이제 고아인 벌거벗은 가지 위에 소리치고 있다.
청춘에 빛나던 저 여름 저녁 하늘의 금빛 별들도
유명(幽冥)의 하늘 저쪽에 흩어지고,
손톱같이 여윈 단 한 개의 초생달,
그것조차 지금은 `레테'의 물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가?
동 서 남 북 네 곳에 어디를 둘러보아도,
두 활개를 쩍 벌려 대공(大空)을 휘저어 보아도,
목청을 돋워 소리 높이 외쳐 보아도,
오오, 오오,
암흑의 끝 없는 동혈(洞穴),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의 호읍(號泣),
뇌명(雷鳴)과 같은 폭풍, 거암(巨巖)을 뒤흔드는 노호(怒呼),
오오, 이제는 없는가? 암흑의 이외에!
오오, 드디어 폭풍이 우주의 지배자인가?
생명의 즐거움인 삼월의 꽃들이여,
청년의 정신인 무성한 풀숲이여,
진리의 의지인 아름드리 교목(喬木)이여,
그리고 거인인 삼림의 혼이여?
새싹 위에 나부끼던 보드러운 바람,
풍족한 샘[泉], 빛나는 태양,
그러고 불멸의 정신인 산악 창공은,
하늘에 떠도는 한 조각 시의(猜疑)의 구름과
사(死)의 암흑 멸망의 바람만을 남기고,
자취도 없이 터울도 없이 스러졌는가?
깊은 낙엽송의 밀림과 두터운 안개에 싸인
저 험한 계곡 아래,
지금 이 여윈 창백한 새는 날개를 퍼덕이며,
숨소리조차 죽은 미지근한 가슴 위에 두 손을 얹고,
어둠의 공포 절망의 탄식에 떨고 있다.
- 아무 곳으로도 길이 열리지 않는 암흑한 계곡에서.
우수수! 딱! 꽝! 우르르!
암벽이 무너지는 소리, 천세(千歲)의 거수(巨樹)가 허리를 꺾고 넘어지는 소리,
사멸의 하늘에 야수가 전율하는 소리,
끝 없는 어둠 침묵한 암흑,
오오! 만유로부터 질서는 물러가는가?
이 무변(無邊)의 대공(大空)을 흐르는 운명의 강 두 짝 기슭
생(生)과 사(死), 전진과 퇴각, 패배와 승리,
화해할 수 없는 양 언덕에 너는 두 다리를 걸치고,
회의의 흐득이는 심장으로 말미암아 전신을 떨고 있지 않으냐
그러나 빈사의 새여! 낡은 심장이여! 떨리는 사지여!
안 보이는가 안 들리는가
그렇지 않으면 이젠 아무것도 모르는가
불길은 바람의 멱살을 잡고
암흑인 하늘의 가슴을 한껏 두드리고 있지 않은가?
교목(喬木)들은 어깨를 비비며 불길을 일으키고,
시들은 풀숲은 불길에 그 몸을 던지며,
나뭇가지는 하늘 높이 오색의 불꽃을 내뽑지 않는가
그리고 삼림은!
커다란 불길의 날개로 거인인 산악을 그 품에 덤썩 끼고,
믿음직한 근육인 토양과 철의 골격인 암석을 시뻘겋게 달구면서
백척(百尺)의 장검인 화주(火柱)를 두르며, 고원(高遠)한 정신의 뇌명(雷鳴)과 함께 암흑의 세계와 격투하고 있다.
진실로 영웅인 작열한 전산(全山)을 그 가운데 태우면서……
오오! 새여! 그대 창백한 새여!
노래를 잊은 피리여!
너는 `햄렛트'냐? `파우스트'냐? `오네긴'이냐?
그렇지 않으면 유리제(製)의 양심이냐?
오오 이 미친 무질서의 광란 가운데서
주검의 운명을 우리들의 얼굴에 메다 치는 암흑 가운데서
너는 보는가? 못 보는가?
이 불길이 가져오는 생명의 향기를
이 장렬한 격투가 전하는 봄의 아름다움을
만산의 초화(草花)와 우거진 녹음, 그러고 황금색 실과(實果)의 단 그 맛[味]을
이 암흑, 폭풍, 뇌명(雷鳴)의 거대한 고통이
밀집한 교목(喬木)의 대오와 그 한 개 한 개의 영웅인 청년, 수목의 육체 가운데
굵고 검은 한 테의 연륜을 더 둘러 주고 가는 것을!
너는 두려워하느냐?
사는 것을……
너는 아파하느냐?
청년인 우리들이 생존하고 성장하는 도표(道標)인 `나이'가 하나 둘 늘어가는 것을!
영리한 새여―아직도 양심의 불씨가 꺼지지 않는 조그만 심장이여!
불룩 내민 그 귀여운 가슴을 두드리면서
이렇게 소리쳐라!
`오라! 어둠이여! 울어라! 폭풍이여!
노호하라! 사(死)와 암흑의 마르세이유여!'
그렇지 않은가!
누구가 대지로부터 스며오르는 생명인 봄의 수액을
누구가 청년의 가슴속에 자라나는 영웅의 정신을 죽음으로써 막겠는가
암흑인가? 폭풍인가? 뇌명(雷鳴)인가?
야행차(夜行車) 속
임화
사투리는 매우 알아듣기 어렵다.
하지만 젓가락으로 밥을 날라 가는 어색한 모양은,
그 까만 얼굴과 더불어 몹시 낯익다.
너는 내 방법으로 내어버린 벤또를 먹는구나.
`숟갈이나 걷어 가주올 게지……'
혀를 차는 네 늙은 아버지는
자리가 없어 일어선 채 부채질을 한다.
글쎄 옆에 앉은 점잖은 사람이 수건으로 코를 막는구나.
아직 멀었는가 추풍령은……
그믐밤이라 정거장 푯말도 안 보인다.
답답워라 산인지 들인지 대체 지금 어디를 지나는지?
나으리들뿐이라, 누구한테 엄두를 내어
물을 수도 없구나.
다시 한 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양복장이는 모를 말을 지저귄다.
아마 그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아나 보다.
되놈의 땅으로 농사 가는 줄을 누가 모르나.
면소(面所)에서 준 표지(紙)를 보지, 하도 지척도 안 뵈니까 그렇지!
차가 덜컹 소리를 치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필연코 어제 아이들이 돌멩이를 놓고 달아난 게다.
가뜩이나 무거운 짐에 너 그 사이다병은 집어 넣어 무얼 할래.
오호 착해라, 그래도 누이 시집갈 제 기름병을 할라고…….
노하지 마라 너의 아버지는 소 같구나.
빠가! 잠결에 기대인 늙은이의 머리를 밀쳐도,
엄마도 아빠도 말이 없고 허리만 굽히니……
오오, 물소리가 들린다 넓고 긴 낙동강에……
대체 어디를 가야 이 밤이 샐까?
얘들아, 서 있는 네 다리가 얼마나 아프겠니?
차는 한창 강가를 달리는지,
물소리가 몹시 정다웁다.
필연코 고향의 강물은 이 꼴을 보고 노했을 게다.
양말 속의 편지
임화
눈보라는 하루 종일 북쪽 철창을 때리고 갔다
우리들이 그날 - 회사 뒷문에서 `피케'를 모든 그 밤같이……
몇 번, 몇 번 그것은 왔다 팔 다리 콧구멍 손가락에―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아프고 쓰린 것보다도 그 뒤의 일이 알고 싶어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늙은 어머니들 굶은 아내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풀리게 하지나 않았는가 하고
그러나 모두들 다- 사나이 자식들이다
언제나 우리는 말하지 않았니
너만이 늙은 어메나 아베를 가진 게 아니고
나만이 사랑하는 계집을 가진 게 아니라고
어메 아베가 다 무에냐 계집 자식이 다 무에냐
세상의 사나이 자식이 어떻게 ××이 보기 좋게 패배하는 것을 눈깔로 보느냐
올해같이 몹시 오는 눈도 없었고 올해같이 추운 겨울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 계집애 어린애까지가
다 - 기계틀을 내던지고 일어나지 않았니
동해 바다를 거쳐오는 모질은 바람 회사의 뽐푸, 징박은 구둣발 휘몰아치는 눈보라―
그 속에서도 우리는 이십일이나 꿋꿋이 뻗대 오지를 않았니
해고가 다 무에냐 끌려가는 게 다 무에냐 그냥 그대로 황소같이 뻗대이고 나가자
보아라! 이 추운 날 이 바람 부는 날 - 비누궤짝 짚신짝을 싣고
우리들의 이것을 이기기 위하여
구루마를 끌고 나아가는 저 - 어린 행상대(行商隊)의 소년을……
그러고 기숙사란 문 잠근 방에서 밥도 안 먹고 이불도 못 덮고
이것을 이것을 이기려고 울고 부르짖는 저 - 귀여운 너희들의 계집애들을……
감방은 차다 바람과 함께 눈이 들이친다
그러나 감방이 찬 것이 지금 새삼스럽게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들의 선수들은 몇 번째나 몇 번째나 이 추운 이 어두운 속에서
다 - 그들의 쇠의 뜻을 달구었다
참자! 눈보라야 마음대로 미쳐라 나는 나대로 뻗대리라
기쁘다 ××도 ×××군도 아직 다 무사하다고?
그렇다 깊이 깊이 다 - 땅속에 들어들 박혀라
으-ㅇ 아무런 때 아무런 놈의 것이 와도 뻗대자-
나도 이냥 이대로 돌멩이 부처같이 뻗대리라
어린 태양(太陽)이 말하되
임화
아지 못할 새
조그만 태양이 된
나의 마음에
고향은
멀어 갈수록 커졌다.
누구 하나
남기고 오지 않았고,
못 잊을
꽃 한 포기 없건만
기적이 울고
대륙에 닿은 한 가닥 줄이
최후로 풀어지면,
그만 물새처럼
나는 외로워졌다.
잊어버리었던 고향의
어둔 현실의 무게가
떠오르려는 어린 태양을
바다 속으로 누를 듯
사납다만.
나무 하나 없는
하늘과 바다 사이
구름과 바람을 뚫고
하룻 저녁
너른 수평선 아래로,
아름다이 가라앉는
낙일(落日)이,
나의 가슴에
놀처럼 붉다.
이제는 먼 고향이요!
감당하기 어려운 괴로움으로
나를 내치고,
이내 아픈 신음소리로
나를 부르는
그대의 마음은,
너무나 진망궂은
청년들의 운명이구나!
참아야 할 고난은
나의 용기를 돋우고,
외로움은
나의 용기 위에
또 한 가지 광채를 더했으면……
아아, 나의 대륙아!
그대의 말 없는 운명 가운데
나는 우리의 무덤 앞에 설
비석의 글발을 읽는다.
옛 책
임화
무더운 여름 한밤의 깊은 어둠이
모색의 힘든 노동에 오래 시달린
내 노력의 전신을 지그시 누른다.
꺼칠한 눈썹 아래 푹 꺼진 두 눈,
한 끝이 먼 희망의 항구로 닿아 있어,
아이 때 쫓던 범나비 자취처럼
잡힐 듯 말듯 젊은 날의 긴 동안을 고달피던
꿈길 아득한 옛 기억의 맵고 쓴 나머지를
다시 그러모아 마음의 헌 누각을 중수(重修)하려
몇 번 힘을 내고 눈알을 굴려 방안의 좁은 하늘을 헤매었는가?
그러나
검은 눈썹은 또다시 피로에 떨면서,
길게 눈알을 덮고,
주검의 억센 품안에서 몸을 떨쳐 휘어나려
오늘도 어제와 같이 고된 격투에 시달린 육신은
푸근히 식은땀의 샘을 터치며
쭉 자리 위에 네 활개를 내어던진다.
그러면 벌써 나의 배는 파선하고 마는 것일까?
한 조각의 썩은 널조차 나를 돌보지 않고,
그것 없이는, 정말로 그것 없이는,
평탄한 뭍에서도 온전히 그 길을 찾을 수 없는
진리에로 향한 한 오리 가는 생명의 줄까지도
인제는 정말로 끊어져,
손을 들어 최후의 인사를 고하려는가?
오오, 한 줌의 초라한 내 머리를 실어 오랜동안,
한 마디 군소리도 없이 오직 나를 위하여 충실하던 내 조그만 베개
반딧불만한 희망의 빛깔에도 불길처럼 타오르고,
풀잎 하나 그 앞을 가리어도 천(千) 오리 머리털이 활줄같이 울던
청년의 마음을 실은 내 탐탁한 거루인 네가
이제는 저무는 가을의 지는 잎 되어 거친 파도 가운데 엎드러지면서,
그 최후의 인사에 공손히 대답하려는가?
나는 다시 한 번 온몸의 격렬한 전율을 느끼며,
춥고 바람 부는 삼동의 긴 겨울밤,
그렇게도 잘 새벽 나루로 나를 나르던,
내 착하고 충성된 거루의 긴 항행을 회상한다.
굴욕의 분함이 나를 땅바닥에 메다쳤을 제도,
너는 보복의 뜨거운 불길을 가지고 나를 일으키었고,
패퇴의 매운 바람결이
내 마음의 엷은 피부를 찢어,
절망의 깊은 골짝 아래 풀잎같이 쓰러뜨렸을 그때에도,
너는 어머니와 같이 나를 달래어 용기의 귀한 젖꼭지를 빨리면서,
아침해가 동쪽 산머리에 벙긋이 웃을 때,
일지도 않게 늦지도 않게 새벽 항구로 나를 날랐었다.
지금
우리들 청년의 세대의 괴롭고 긴 역사의 밤,
검은 구름이 비바람 몰고 노한 물결은 산더미 되어,
비극의 검은 바다 위를 달리는 오늘
그 미덥던 너도 돛을 버리고 닻줄을 끊어,
오직 하늘과 땅으로 소리도 없는 절망의 슬픈 노래를 뜯어,
가만히 내 귓전을 울린다.
오오, 이것이 청년인 내 주검의 자장가인가?
나는 참을 수 없는 침묵에서 몸을 빼어 뒤척일 때,
거칫 손에 닿는 조그만 옛 책자(冊子)를 머리맡에서 집었다.
책장은 예와 같이 활자의 종대(縱隊)를 이끌고,
비스듬히 내 손에서 땅을 향하여 넘어간다.
이곳 저곳에 굵게 내리그은 붉은 줄,
틈틈히 빈 곳을 메운 낯익은 내 서투른 글씨,
나는 방안 그득히 나를 사로잡은 침묵의 성(城)돌을 빼는,
그 귀여운 옛 책의 날개소리에 가만히 감사하면서,
프르륵 최후의 한 장을 헛되이 닫을 때,
나는 천지를 흔드는 포성에 귓전을 맞은 듯,
꽉 가슴에 놓인 영낭(永囊)을 부여잡고 베개의 깊은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N. L. 저(著) 『1905년의 의의』
1905년!
1905년!
베개는 노래의 속삭임이 아니라, 위대한 진군의 발자국 소리를,
어둠은 별빛의 실이 아니라, 태양의 타는 열과 눈부신 광채를,
고요한 내 병실에 허덕이는 내 가슴 속에 들어붓고 있다.
저 긴, 긴 북국(北國)의 어두운 밤,
얼마나 더럽고 편하게 그자들은 살고,
얼마나 깨끗하고 괴롭게 그들은 죽었는가?
밝은 것까지도 밤의 질서로 운행되어가는
이 괴롭고 긴 밤,
주검까지도 사는 즐거움으로 부둥켜안은 청년의 아픈 행복을,
나는 두 눈을 감아 아직도 손바닥 밑에 고요히 뛰고 있는,
내 정열의 옛 집에서 똑똑히 엿들었다.
오늘밤 아버지는 퍼렁 이불을 덮고
임화
오늘밤 아버지는 퍼렁 이불을 덮고
노들강 건너편 그 조그만 오막살이 속에 잠자는 네 등을 두드리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네가 일에 충성된 것을 생각하며 대님을 묶은 길다란 바지가 툭 터지는 줄도 모르고
첩첩이 닫힌 창살문 밖에 밝아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두 다리를 쭉 뻗고 있다.
아직도 내가 동무들과 같이
오도바이에 실려 `불'로 `×××'로 끌려다녔을 때 너는 어린 개미처럼 `사시이레'* 보퉁이 끼고 귀를 에이는 바람이 노들강 위를 불어 내리고
있는 집 자식들이 털에 묻혀 스케트 타는 얼음판을 건너
하루같이 영등포에서 서울로 아버지를 찾아왔다.
나는 네가 착한 아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만일 네가 그것 때문에 조금치라도 일을 게을렀다면은
네가 정성을 다하여 빨아 오는 그 양말짝이나마
어떻게 아버지는 마음 놓고 발에 신을 수 있었겠느냐
벌써 섣달!
동무들과 같이 아버지가 한데 묶여 ×무소로 넘어올 때
그때도 너는 울지 않고 너는 손을 흔들며 자동차를 따라왔다.
그러나 만일 네가 만일 네가
아버지 자식의 사이를 잡아 제친 온 동무들과 우리들 사이를 잡아 제친
이 일을 네가 새로운 사업을 위하여 생각하지 않았다면은
너를 잊어버리지 않고 너를 한껏 사랑하는 아버지는 마음놓고 ×밥을 입에다 넣지를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안다.
너는 언제나 일에 충실하고 지금도 또한 충실한 것을
오늘도 그전에 아버지가 건너다니던 노들강 얼음판 위를
영등포에서 용산으로 용산에서 영등포로
아버지는 귀중한 명맥을 버선목 깊이 숨기고
너는 혼자서 탕탕 얼음을 구르며 건넜으리라
그러고 또 밝는 새벽일을 잊지 않고
풋솜같이 깊이 자는 네 등을 두드리며 아버지는 조그만 네 가슴에 손을 얹어 보고
네 가슴이 시계처럼 똑똑히 맥치는 것을 한껏 칭찬한다.
빠르지도 않게 느리지도 않게 언제나 틀림 없지
아버지나 너는 언제나 일에 한결같아야 한다
그것 하나만을 가슴 속 깊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한 번 폭풍에 짓밟힌 우리들의 사업은 언제 또 어그러질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언제이고 다 우리들이 맘이 한결같으면은 언제나 틀림없이 맥차는 염통이 가슴 속에서 움직이면
우리들 모두 다 가슴에 파묻힌 염통을 괭이로 한목에 푹 파내이기 전에는
아무 때이고 아무 ×에게이고 우리들의 가슴을 만져 보라고 내밀어 보자
무엇이 감히 우리들의 자라는 나무를 뿌리째 뽑을 수가 있겠는가
영리하고 귀여웁고 사랑스러운 아들아 아버지는 요전에도 네 연필로 쓴 편지를 생각하고
네 가슴이 똑똑히 뛰고 있는 것을 칭찬하고
퍼렁 이불 자락을 끄을어 어깨를 덮고 있다 일에 충실한 착한 너를 생각하며
* 일본어로 차입(差入)이라는 뜻
우리 오빠와 화로
임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 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南)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 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火)젓가락만이 불쌍한 영남(永男)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 -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신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 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永男)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칠은 구둣소리와 함께 - 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 그래서 저도 영남(永男)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에 일 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부러뜨리고
영남(永男)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封筒)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永男)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 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 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火)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永男)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永男)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슬ㅎ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永男)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 누이동생
우리들의 전구(戰區) - 용감한 기관구(機關區) 경비대의 영웅들에게 바치는 노래
임화
침입자를 방어하라
저항하거든 대항하라
그래도 들어오거든
생명이 있는 한 싸우라
전선(全線) 노동자는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고
투쟁 사령부는 우리에게 이것을 명령한다
승리냐 그렇지 않으면 패배냐
주림과 박해에 신음하는
남조선 인민의 운명이 걸려 있는 총파업
침략자와 매국노의 도량(跳梁)에 항(抗)하여 일어선
남조선 노동자의 승패를 결(決)하는 이 투쟁
우리는 실로 참을 수 없는 모욕에 대한 긴 인내와
야만스런 박해에 대한 오랜 수난 끝에 일어선 것이다
우리들이 사랑하는 철도로 하여금
자유의 나라의 대동맥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일제의 악한들이 남기고 간 파괴의 흔적과 영영(營營)히 싸우고 있을 때
인민의 원수들은 이 철도로 재빨리 친일파와 반역자를 실어다가
인민의 자유를 파괴할 온갖 밀의(密議)를 여는 데 분주하였다
우리들이 사랑하는 철도로 하여금
새로운 공화국에 문화와 과학을 실어 올 대로(大路)가 되게 하기 위하여
밤과 낮을 헤아리지 않고 근면하였을 때
인민의 원수들은 이 철도로 썩어 빠진 전제주의와 파시즘의 독소를 실어다가
평화로운 조국에 내란의 씨를 뿌리려고 음모하였다
우리들이 사랑하는 철도로 하여금
신생하는 조국의 부(富)가 집산(集散)하는 운하가 되게 하기 위하여
형언할 수 없는 기아의 고통과 싸우고 있을 때
인민의 원수들은 외방 물자와 호열자를 실어다가
고난한 동포 가운데 가난과 불행을 펼쳐 놓았다.
아아 인민의 영구한 원수들아
드디어 우리들이 사랑하는 철도는 온전히
조국의 새로운 불행과 동포에게 거듭하는 노예화를 위하여 움직이었고
우리들에겐 다시금 헤어날 수 없는 기아와 벗어날 수 없는 철쇄가
너희들이 사육한 저 폭력단의 야수들과 함께
이빨을 갈며 달려들었다
죽음이냐 그렇지 않으면 싸움이냐
물러설 길 없는 투쟁의 막다른 길 위
붉은 별 빛나는 철도노동조합의 깃발은 어느새 기관차(機關車)에 나부끼고
1946년 9월 24일 오전 0시 쩨네스트로 들어가라
준엄한 지령 제일호(第一號)는 벌써 전선(全線)에 내리었다
사랑하는 전우여 여기는 기관구(機關區)의 경비선(警備線)
남조선 철도파업 투쟁사령부가 있는 곳
전선(全線) 철도노동자의 온갖 명예가 걸려 있는
아아 적과 더불어 싸워서 죽을 영광이
가는 곳마다 흩어져 있는 우리들의 전구(戰區)여
침입하는 모든 적에게
잔인한 운명을 선사하고
발자욱마다를
야수들의 피의 또랑을 만들자
기관구(機關區)는 우리들의 불멸한 성곽이리라.
우산 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임화
항구의 계집애야! 이국(異國)의 계집애야!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독크'는 비에 젖었고
내 가슴은 떠나가는 서러움과 내어 쫓기는 분함에 불이 타는데
오오 사랑하는 항구 `요꼬하마'의 계집애야!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난간은 비에 젖어 있다
`그나마도 천기(天氣)가 좋은 날이었더라면?'……
아니다 아니다 그것은 소용 없는 너만의 불쌍한 말이다
너의 나라는 비가 와서 이 `독크'가 떠나가거나
불쌍한 네가 울고 울어서 좁다란 목이 미어지거나
이국(異國)의 반역 청년인 나를 머물러 두지 않으리라
불쌍한 항구의 계집애야 - 울지도 말아라
추방이란 표(標)를 등에다 지고 크나큰 이 부두를 나오는 너의 사나이도 모르지는 않는다
네가 지금 이 길로 돌아가면
용감한 사나이들의 웃음과 아지 못할 정열 속에서 그 날마다를 보내이던 조그만 그 집이
인제는 구둣발이 들어나간 흙자욱밖에는 아무것도 너를 맞을 것이 없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항구의 계집애야! - 너 모르진 않으리라
지금은 `새장 속'에 자는 그 사람들이 다 - 너의 나라의 사랑 속에 살았던 것도 아니었으며
귀여운 너의 마음속에 살았던 것도 아니었었다.
그렇지만-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여
그리고 그 사람들은 너를 위하고 너는 그 사람들을 위하여
어째서 목숨을 맹서하였으며
어째서 눈 오는 밤을 몇 번이나 거리 [街里]에 새웠던가
거기에는 아무 까닭도 없었으며
우리는 아무 인연도 없었다
더구나 너는 이국(異國)의 계집애 나는 식민지의 사나이
그러나 - 오직 한 가지 이유는
너와 나 - 우리들은 한낱 근로하는 형제이었던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만 한 일을 위하여
두 개 다른 나라의 목숨이 한 가지 밥을 먹었던 것이며
너와 나는 사랑에 살아 왔던 것이다
오오 사랑하는 `요꼬하마'의 계집애야
비는 바다 위에 나리며 물결은 바람에 이는데
나는 지금 이 땅에 남은 것을 다 두고
나의 어머니 아버지 나라로 돌아가려고
태평양 바다 위에 떠서 있다
바다에는 긴 날개의 갈매기도 올은 볼 수가 없으며
내 가슴에 날던 `요꼬하마'의 너도 오늘로 없어진다
그러나 `요꼬하마'의 새야 -
너는 쓸쓸하여서는 아니 된다 바람이 불지를 않느냐
하나뿐인 너의 종이 우산이 부서지면 어쩌느냐
이제는 너의 `게다' 소리도 빗소리 파도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가 보아라 가 보아라
내야 쫓기어 나가지마는 그 젊은 용감한 녀석들은
땀에 젖은 옷을 입고 쇠창살 밑에 앉아 있지를 않을 게며
네가 있는 공장엔 어머니 누나가 그리워 우는 북륙(北陸)의 유년공(幼年工)이 있지 않으냐
너는 그 녀석들의 옷을 빨아야 하고
너는 그 어린것들을 네 가슴에 안아 주어야 하지를 않겠느냐 -
`가요'야! `가요'야! 너는 들어가야 한다
벌써 `싸이렌'은 세 번이나 울고
검정 옷은 내 손을 몇 번이나 잡아다녔다
이제는 가야 한다 너도 가야 하고 나도 가야 한다
이국(異國)의 계집애야!
눈물은 흘리지 말아라
거리[街里]를 흘러가는 `데모' 속에 내가 없고 그 녀석들이 빠졌다고 -
섭섭해하지도 말아라
네가 공장을 나왔을 때 전주(電柱) 뒤에 기다리던 내가 없다고―
거기엔 또다시 젊은 노동자들의 물결로 네 마음을 굳세게 할 것이 있을 것이며
사랑의 주린 유년공(幼年工)들의 손이 너를 기다릴 것이다 -
그리고 다시 젊은 사람들의 입으로 하는 연설은
근로하는 사람들의 머리에 불같이 쏟아질 것이다
들어가거라! 어서 들어가거라
비는 `독크'에 나리우고 바람은 `덱기'에 부딪친다
우산이 부서질라―
오늘 - 쫓겨나는 이국(異國)의 청년을 보내 주던 그 우산으로 내일은 내일은 나오는 그 녀석들을 맞으러
`게다' 소리 높게 경빈가도(京濱街道)를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
오오 그러면 사랑하는 항구의 계집애야
너는 그냥 나를 떠나 보내는 서러움
사랑하는 사나이를 이별하는 작은 생각에 주저앉을 네가 아니다
네 사랑하는 나는 이 땅에서 쫓겨나지를 않는가
그 녀석들은 그것도 모르고 갇혀 있지를 않은가 이 생각으로 이 분한 사실로
비둘기같은 네 가슴에 발갛게 물들어라
그리하여 하얀 네 살이 뜨거서 못 견딜 때
그것을 그대로 그 얼굴에다 그 대가리에다 마음껏 메다쳐 버리어라
그러면 그때면 지금은 가는 나도 벌써 부산, 동경을 거쳐 동무와 같이 `요꼬하마'를 왔을 때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서러웁던 생각 분한 생각에
피곤한 네 귀여운 머리를
내 가슴에 파묻고 울어도 보아라 웃어도 보아라
항구의 나의 계집애야!
그만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비는 연한 네 등에 나리우고 바람은 네 우산에 불고 있다
일년(一年)
임화
나는 아끼지 않으련다.
낙엽이 저 눈발이 덮인
시골 능금나무의 청춘과 장년을……
언제나 너는 가고 오지 않는 것.
오늘도 들창에는 흰 구름이 지나가고,
참새들이 꾀꼬리처럼 지저귄다.
모란꽃이 붉던 작년 오월,
지금은 기억마저 구금되었는가?
나의 일년이여, 짧고 긴 세월이여!
노도에도, 달콤한 봄바람에도,
한결같이 묵묵하던 네 표정을 나는 안다.
허나 그렇게도 일년은 정말 평화로왔는가?
`피녀(彼女)'는 단지 희망하는 마음까지
범죄 그 사나운 눈알로 흘겨본다.
나의 삶이여! 너는 한바탕의 꿈이려느냐?
한 간 방은 오늘도 납처럼 무겁다.
재바른 가을 바람은 멀지 않아,
버들잎을 한 웅큼 저 창 틈으로,
지난해처럼 훑어 넣고 달아나겠지,
마치 올해도 세계는 이렇다는 듯이.
그러나 한 개 여윈 수인은 아직 살았고,
또다시 우리 집 능금이 익어 가을이 되리라.
눈 속을 스미는 가는 샘이 대해에 나가 노도를 이룰 때,
일년이여, 너는 그들을 위하여 군호를 불러라.
나는 아끼지 않으련다, 잊어진 시절을.
일년 평온무사한 바위 아래 생명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넓고 큰 대양의 앞날을 향하여,
지금 적막한 여로를 지키는 너에게 나는 정성껏 인사한다.
자고 새면 - 벗이여 나는 이즈음 자꾸만 하나의 운명이란 것을 생각고 있다.
임화
자고 새면
이변을 꿈꾸면서
나는 어느 날이나
무사하기를 바랐다
행복되려는 마음이
나를 여러 차례
죽음에서 구해 준 은혜를
잊지 않지만
행복도 즐거움도
무사한 그날 그날 가운데
찾아지지 아니할 때
나의 생활은
꽃 진 장미넝쿨이었다
푸른 잎을 즐기기엔
나의 나리가 너무 어리고
마른 가리를 사랑키엔
더구나 마음이 애띠어
그만 인젠
살려고 무사하려던 생각이
믿기 어려워 한이 되어
몸과 마음이 상할
자리를 비워 주는 운명이
애인처럼 그립다.
적(敵)
임화
(네 만일 너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이는 사랑이 아니니라. 너의 적을 사랑하고 너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라. 복음서)
1
너희들의 적을 사랑하라 -
나는 이 때 예수교도임을 자랑한다.
적이 나를 죽도록 미워했을 때,
나는 적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미움을 배웠다.
적이 내 벗을 죽음으로써 괴롭혔을 때,
나는 우정을 적에 대한 잔인으로 고치었다.
적이 드디어 내 벗의 한 사람을 죽였을 때,
나는 복수의 비싼 진리를 배웠다.
적이 우리들의 모두를 노리었을 때,
나는 곧 섬멸의 수학을 배웠다.
적이여! 너는 내 최대의 교사(敎師),
사랑스런 것! 너의 이름은 나의 적이다.
2
때로 내가 이 수학(數學) 공부에 게을렀을 때,
적이여! 너는 칼날을 가지고 나에게 근면을 가르치었다.
때로 내가 무모한 돌격을 시험했을 때,
적이여! 너는 아픈 타격으로 전진을 위한 퇴각을 가르치었다.
때로 내가 비겁하게도 진격을 주저했을 때,
적이여! 너는 뜻하지 않은 공격으로 나에게 전진을 가르치었다.
만일 네가 없으면 참말로 사칙법(四則法)도 모를 우리에게,
적이여! 너는 전진과 퇴각의 고등 수학을 가르치었다.
패배의 이슬이 찬 우리들의 잔등 위에 너의 참혹한 육박이 없었더면,
적이여! 어찌 우리들의 가슴 속에 사는 청춘의 정신이 불탔겠는가?
오오! 사랑스럽기 한이 없는 나의 필생의 동무
적이여! 정말 너는 우리들의 용기다.
너의 적을 사랑하라!
복음서는 나의 광영이다.
주유(侏儒)의 노래
임화
나의 마음은 괴롭노라……
제군은 나의 이런 탄식을 좋아한다.
어찌다 나의 노래가 울음이 될 양이면,
제군은 한층 더 나를 사랑한다.
오!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
제군은 벌써 열광하고 있다.
물론 나는 잘 안다.
제군들이 비극을 사랑하는 높은 취미를…….
막 끝이 되면 주인공은 병아리처럼 쓰러지고,
제군은 고조된 비극미(悲劇美)에 취할 듯하다.
하물며 비극의 종말을 가져오는 일장(一場)의 희극,
제군, 요컨대 나의 말로를 보고 싶다는 게지!
경애(敬愛)하는 제군, 만일 시저가, 결코 제군이 아니라, 시저가,
성병(聖餠)의 맛을 경계했다면, 파탄은 좀 더 연기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한 번, 아니, 얼마든지 말해 줄까?
제군, 실로 나의 마음은 괴롭노라.
지구와 박테리아
임화
기압이 저하하였다고 돌아가는 철필을
도수가 틀린 안경을 쓴 관측소원(觀測所員)은
깃대에다 쾌청이란 백색기(白色旗)를 내걸었다
그러나 제 눈을 가진 급사란 놈은
이삼분(二三分)이 지난 뒤 비가 쏟아지면 바꾸어 달
붉은 기를 찾느라고 비행기가 되어 날아다닌다
▶
아까 – 그 사무원(事務員)이 페쓰트로 즉사하였다는 소식은
버-ㄹ써 관측소(觀測所)를 새어나가
- 거리[街里]로
▶우주(宇宙)로 뚫고
- 산야(山野)로
질주한다 - 확대된다
그러나 아직도 급사란 놈은 기(旗)에다 목을 걸고 귓짝 속에서 난무한다
비 ● 바람
쏴 -
그것은 여지없이 급사를 사무실로 갖다붙였다
페쓰트 – 그것은 위대한 것인 줄 급사는 알았다
▶
저기압과 페쓰트 -
충실한 자(者) 사무원(事務員)은 창백한 관(棺) 속에서도……를
반드시 생각뿐만 아니라 반드시 찾을 것이다
그럼 그는 기(旗)를 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백색기(白色旗)를 관(棺) 속에 누운 그의 가슴에다 놓아주었다
- 가는 자(者)에게 한 줄기 안위(安慰)를 주기 위하여
*
하아! 사십년(四十年) 동안에 최초로 한 실수는
저기압과 `페쓰트'라고 급사란 놈은 창밖에서 웃었다
빡테리아 빡테리아
- 그 힘은 위대하다
- 그 힘은 위대하다
*
일분간(一分間)에 한 마리식(式) 잡아 삼키니
십육억분(十六億分)이면 – 시간환산(時間換算)은 성가시다
= 지구는 한(寒)이다
= 지구는 한(寒)이다
`빡테리아'는 지구를 포옹하고 홍소(哄笑)한다
크게 -
크게 -
(그 웃음은 흑색사변형(黑色四邊形)에 배수(培數)로 증대한다)―
지도(地圖)
임화
두 번 고치지 못할 운명은
이미 바다 저쪽에서 굳었겠다.
바라보이는 것은 한 가닥 길뿐,
나는 반도의 새 지도를 폈다.
나의 눈이 외국 사람처럼
서툴리 방황하는 지도 위에
몇 번 새 시대는 제 낙인을 찍었느냐?
꾸긴 지도를 밟았다 놓는
손발이 내 어깨를 누르는 무게가
분명히 심장 속에 파고든다.
이 새 문화의 촘촘한 그물 밑에
나는 전선줄을 끊고 철로길에 누웠던
옛날 어른들의 슬픈 미신을 추억한다.
비록 늙은 어버이들의 아픈 신음이나,
벗들의 괴로운 숨소리는,
두려운 침묵 속에 잠잠하여,
희망이란 큰 수부(首府)에 닿는 길이
경부철로(京釜鐵路)처럼 곱다 안 할지라도,
아! 벗들아, 나의 눈은
그대들이 별처럼 흩어져 있는,
남북 몇 곳 위에 불똥처럼 발가니 달고 있다.
산맥과 강과 평원과 구릉이여!
내일 나의 조그만 운명이 결정될
어느 한 곳을 집는 가는 손길이,
떨리며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이름도 없는 한 청년이 바야흐로
어떤 도시 위에 자기의 이름자를 붙여,
불멸한 기념을 삼으려는,
엄청난 생각을 품고 바다를 건너던,
어느 해 여름 밤을
너는 축복치 않으려느냐?
나는 대륙과 해양과 그리고 성신(星辰) 태양과,
나의 반도가 만들어진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우리들이 사는 세계의 도면이 만들어진
복잡하고 곤란한 내력을 안다.
그것은 무수한 인간의 존귀한 생명과,
크나 큰 역사의 구둣발이 지나간
너무나 뚜렷한 발자욱이 아니냐?
한 번도 뚜렷이 불려 보지 못한 채,
청년의 아름다운 이름이 땅 속에 묻힐지라도,
지금 우리가 일로부터 만들어질
새 지도의 젊은 화공의 한 사람이란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3등 선실 밑에 홀로,
별들이 찬란한 천공보다 아름다운
새 지도를 멍석처럼 쫙 펼쳐 보는,
한 여름 밤아, 광명이 있거라.
지상의 시(詩)
임화
태초에 말이 있느니라……
인간은 고약한 전통을 가진 동물이다.
행위하지 않는 말,
말을 말하는 말,
이브가 아담에게 따준 무화과의 비밀은,
실상 지혜의 온갖 수다 속에 있었다.
포만의 이야기로 기아를,
천상의 노래로 지옥의 고통을,
어리석게도 인간은 곧잘 바꾸었었다,
그러나 지상의 빵으로 배부른 사람은
과연 하나도 없었던가?
신성한 지혜여! 광영이 있으라.
온전히 운명이란, 말 이상이다.
단지 사람은 말할 수 있는 운명을 가진 것,
운명을 이야기할 수 있는 말을 가진 것이,
침묵한 행위자인 도야지보다 우월한 점이다.
말을 행위로,
행위를 말로,
자유로 번역할 수 있는 기능,
그것이 시(詩)의 최고의 원리.
지상의 시(詩)는
지혜의 허위를 깨뜨릴 뿐 아니라,
지혜의 비극을 구(救)한다.
분명히 태초의 행위가 있다……
차중(車中) - 추풍령
임화
돌아올 날을 기약코
길을 떠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찻간은 한숨도 곤하여
누군가 싸우듯
북방의 희망을 언쟁하던
시끄런 음성은 엊저녁 꿈이다
밤차가 달리는 먼 길 위에
발자국마다
꿈은 조약돌처럼 부스러져
고향의 제일 높다는 산도
인젠 병풍쪽처럼 뒤를 넘어가고
밤은
타관에 한창 깊어갔다
초혼(招魂)
임화
1946년 1월 19일 새벽에 서울 삼청동(三淸洞) 조선학병동맹회관(朝鮮學兵同盟會館) 전투(戰鬪)에서 사몰(死沒)한 세 용사(勇士)의 영령(英靈) 앞에 드리노라.
돌아오라
박 진 동(朴晋東)
김 성 익(金星翼)
이 달(李 達)
외로운 너희의 영혼(靈魂)은 어느 하늘 가에 있나뇨
밤 하늘 차운 길에 간단 말도 없이 호을로 나서
너희는 동무도 없이 어디로 어디로 걸어 가나뇨
어느 동족(同族)이 있어 너희를 죽이되 전사(戰士)로서 하지 아니하고
도적의 떼와 같이 어두운 밤 소리도 없이 하였나뇨
원수의 쫓임에 어린 사슴처럼 주검의 땅에 이르러서도
조국(祖國)의 하늘을 우러러보던 눈은 다시 어디메서 조국(祖國)을 바라보나뇨
너희의 영혼(靈魂)은 아직도 조국(祖國)의 하늘에 있느냐
돌아오라 가던 길 멈추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라.
최후(最後)의 염원(念願)
임화
얼마나 크고,
얼마나 두려운 힘이기에,
세월이여! 너는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 왔느냐?
밀치고, 또
박차고 하면,
급기야 나는
최후의 항구로 외로이
돌아오지 않는 손이 되리라만,
낙일(落日)이여! 나에겐
아직 한 마디 말이 있다.
참말 머리 위엔
별 하나이 없고,
어둔 하늘이
홍수처럼
산하를 덮어,
한 자욱 발길조차
나의 고향을
밟을 수가 없다면,
아아, 꺼지려는 눈아!
네 빛이 흐리기 전에,
차라리 나는
호화로이 밤 하늘에 흩어지는
오색 불꽃에,
아름다운 운명을
배우련다.
최후의 염원이여!
너는 나의
즐거움이냐? 슬픔이냐?
통곡(慟哭)
임화
이미 타 버려
꺼진
가슴 속에
빛나는 것은
진주 알이냐
별 알이냐
대체 소리가
우러나오는 곳을
나는 알 수가 없다
형제(兄弟)여
화원(花園)에서
떠나온 것은
어느 때 쯤이냐
흩어진 장미(薔薇)를
줏을려는 너의 손길이
찾는 것은
지내간 꿈이냐
아……
하늘 가득히
흩어진 것은
절망(絶望)의
독(毒)한 화분(花粉)이다
땅을 치면
우러나오는 소린
한낱 비탄(悲嘆)의
높은 음향(音響)이다
혼령(魂靈)도 죽고
기적(奇蹟)도 죽고
승리(勝利)한
적(敵)의 눈앞에서
너의 가슴이
탄주(彈奏)하는
장송(葬送)의 곡(曲)을 따라
걸어가는 앞길에는
무덤 이상(以上)의 운명(運命)이 있다
형제(兄弟)여
나는 이런 때
그대들의 가슴이
한숨에 붓지 않음을
감사(感謝)한다
미인(美人)일지라도, 비록
절세(絶世)의 미인(美人)일지라도
한숨을 쉰다는것은
난 싫어한다
차라리
마음의 수문(水門)을
탁 열어 놓고
횡일(橫溢)하는 분류(奔流) 속에
운명(運命)을 바라보고 싶다
머리채를 풀어 제치고
자기의 운명(運命)을
애인(愛人)처럼 끌어안는
여인(女人)의 마음은 얼마나
간절하고 아름다우냐
전율(戰慄)하는 운명(運命)의 등 뒤
도깨비처럼 우뚝 선 건
아…… 잊기 어려운 적(敵)
슬픈 소리가 부른 것은
바로 원수와의 해후(邂逅)가 아니었느냐
분노(憤怒)란 청년(靑年)의 명예(名譽)가 아니냐
보복(報復)이란 생명(生命)의 표적(標的)이 아니냐
무엇 때문에
통곡(慟哭)하는 마음이 있느냐
한숨에 어린 가슴 위에
흙더미가 내려앉을 때
통곡(慟哭)하는 마음은
그 위에 피는
한떨기 아네모네리라
어떤 놈이
통곡(慟哭)을
매장(埋葬)의 노래라
비웃느냐
나는 슬플 때마다
개고리처럼 아우성치며
울어 대는 반도인(半島人)의 자손(子孫)이다
나는 우러나오는
제 소리를
감추지 못하는
큰 소리로
우는 시인(詩人)이다
하늘
임화
감이 붉은 시골 가을이
아득히 푸른 하늘에 놀 같은
미결사의 가을 해가 밤보다도 길다.
갔다가 오고, 왔다가 가고,
한 간 좁은 방 벽은 두터워,
높은 들창 가에
하늘은 어린애처럼 찰락거리는 바다
나의 생각고 궁리하던 이것저것을,
다 너의 물결 위에 실어,
구름이 흐르는 곳으로 띄워 볼까!
동해 바닷가에 작은 촌은,
어머니가 있는 내 고향이고,
한강물이 숭얼대는
영등포 붉은 언덕은,
목숨을 바쳤던 나의 전장.
오늘도 연기는
구름보다 높고,
누구이고 청년이 몇,
너무나 좁은 하늘을
넓은 희망의 눈동자 속 깊이
호수처럼 담으리라.
벌리는 팔이 아무리 좁아도,
오오! 하늘보다 너른 나의 바다.
학병(學兵) 돌아오다
임화
무거운 걸음은
날마다 넓은
땅에 있었고
바라다보는
하늘의 방향(方向)은
밤마다 달랐다
오늘은 남(南)쪽
내일은 북(北)쪽
이르는 곳마다
고향(故鄕)의 위치(位置)는 바뀌어
정오(正午)면 해가
지내가는 천심(天心)엔
언제나 별이 가득하였다
외로움이
죽음보다 무서운 밤
그대들은 적(敵)과
적(敵)의 적이 널린
망망한 들가에
기적(奇蹟)처럼
위태로이 서서
절망(絶望) 가운데
용기(勇氣)를 깨닫는
조국(祖國)의 속삭임을
들었으리라
죽음도 삶도 없는
마음의 한가닥 길 위
죽은 사람도 없이
산 사람도 없이
고스란히 그대들은
어머니 아버지 나라로
돌아왔다
아아
어린 영혼(靈魂)들아
젊은 생명(生命)들아
그대들의 청춘(靑春)을
외로움과 죽음으로
내어 몰은
패망(敗亡)한 적(敵)과
부유(富裕)한 동포(同胞)에게
이젠
경건(敬虔)한 인사를
드려도 좋을
때가 왔다.
한 잔 포도주를
임화
찬란한 새 시대(時代)의 향연(饗宴) 가운데서
우리는 향그런 방초(芳草) 위에
화염(火焰)같이 붉은 한 잔 포도주를 요구한다
새벽 공격(攻擊)의 긴 의논이 끝난 뒤 야영(夜營)은
뼛속까지 취(醉)해야 하지 않느냐
명령일하(命令一下)!
승리(勝利)란 싸움이 부르는 영원(永遠)한 진리(眞理)다
그러나 나는 또한 패배(敗北)를 후회(後悔)하지 않는다
승패(勝敗)란 자고(自古)로 싸움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運命)이 아니냐
중요(重要)한 것은 우리가
피로(疲勞)하지 않는 것이다
적(敵)에 대(對)한 미움을 늦추지 않는 것이다
멸망(滅亡)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지혜(智慧) 때문에 용기(勇氣)를 잃지 않는 것이다
결별(訣別)에 임(臨)하여 무엇 때문에
한 그릇 냉수(冷水)로 흥분(興奮)을 식힐 필요가 있느냐
벗들아! 결(決)코 위로(慰勞)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서는 아니 된다
동백꽃은 희고 해당화(海棠花)는 붉고 애인(愛人)은 그보다도 아름답고
우리는 고향(故鄕)의 단란(團欒)과 고요한 안식(安息)을 얼마나 그리워하느냐
아 이러한 모든 속에서 떠나 온 슬픔을
나는 형언(形言)할 수가 없다
그러나 회한(悔恨)의 오솔길도
쓸쓸히 걸어간 인생(人生)을 돌아볼
부끄러운 먼 날을 위(爲)하느니보단
아! 차라리 내일(來日) 아침 깨어지는 꿈을 위(爲)해설지라도
꽃과 애인(愛人)과 승리(勝利)와 패배(敗北)와 원수까지를
한 정열(情熱)로 찬미(讚美)할 수 있는 우리 청춘(靑春)을 위(爲)하여
벗들아! 축복(祝福)의 붉은 술잔을 들자
해상(海上)에서
임화
가라앉듯 멀리
대마도 남단은 수평선 위에 스러졌다.
동그란 해가 어느새 붉게 풀려,
남쪽으로 남쪽으로 흐르는 곳,
드문드문 검은 점들은 유구 열도(流球列島)인가?
물새들도 어느새 검은 옷을 입어,
눈선 나그네를 희롱틋 노니는구나!
아아! 불빛이 보인다.
어렴풋 관문해협(關門海峽)의 저녁 불들이
그 가운데는 붉고 푸른 불들도 있다.
연락선은 곤두설 듯 속력을 돋운다만,
인제 고향은 아득히 멀어졌고,
나는 저곳 산천의 이름도 못 들었다.
- 정녕 이곳에 고향으로 가지고 갈 보배가 있는가?
- 나는 학생으로부터 무엇이 되어 돌아갈 것인가?
가슴을 짚어 보아라,
하얗고 가는 손아,
누구가 이러한 저녁
청년들의 가슴 위에 얹힌
떨리는 손에 흐르는
더운 맥박을 짐작하겠는가.
태평양, 태평양 넓은 바다여!
일본 열도 저 위
지금 큰 별 하나이 번적였다.
내일 하늘엔 어떤 바람이 불 것인가?
배는 아직 바다 위에 떠 있고,
인제 겨우 동해도(東海道) 연선(沿線)의 긴 열차는 들어온 듯하나,
아아! 나는 두 손을 벌리어 하늘을 안고,
목적한 땅 위에 서 물결치는 태평양을 향하여
고함을 지른다.
해협의 로맨티시즘
임화
바다는 잘 육착한 몸을 뒤척인다.
해협 밑 잠자리는 꽤 거친 모양이다.
맑게 갠 새파란 하늘
높다란 해가 어느새 한낮의 카브를 꺾는다.
물새가 멀리 날아가는 곳,
부산 부두는 벌써 아득한 고향의 포구인가?
그의 발 밑,
하늘보다도 푸른 바다,
태양이 기름처럼 풀려,
뱃전을 치고 뒤로 흘러가니,
옷깃이 머리칼처럼 바람에 흩날린다.
아마 그는
일본 열도의 긴 그림자를 바라보는 게다.
흰 얼굴에는 분명히
가슴의 `로맨티시즘'이 물결치고 있다.
예술, 학문, 움직일 수 없는 진리……
그의 꿈꾸는 사상이 높다랗게 굽이치는 동경,
모든 것을 배워 모든 것을 익혀,
다시 이 바다 물결 위에 올랐을 때,
나는 슬픈 고향의 한밤,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
청년의 가슴은 바다보다 더 설레었다.
바람 잔 바다,
무더운 삼복의 고요한 대낮,
이천 오백 톤의 큰 기선이
앞으로 앞으로 내닫는 갑판 위,
흰 난간 가에 벗어 제친 가슴,
벌건 살결에 부딪치는 바람은 얼마나 시원한가!
그를 둘러싼 모든 것,
고깃배들을 피하면서 내뽑는 고동소리도,
희망의 항구로 들어가는 군호 같다.
내려앉았다 떴다 넘노니는 물새를 따라,
그의 눈은 몹시 한가로울 제
뱃머리가 삑! 오른편으로 틀어졌다.
훤히 트이는 수평선은 희망처럼 넓구나!
오오! 점점이 널린 검은 그림자,
그것은 벌써 나의 섬들인가?
물새들이 놀라 흩어지고 물결이 높다.
해협의 한낮은 꿈같이 허물어졌다.
몽롱한 연기,
희고 빛나는 은빛 날개,
우뢰 같은 음향,
바다의 왕자(王者)가 호랑이처럼 다가오는 그 앞을,
기웃거리며 지나는 흰 배는 정말 토끼 같다.
`반사이'! `반사이'! `다이닛'……
이등 캐빈이 떠나갈 듯한 아우성은,
감격인가? 협위인가?
깃발이 `마스트' 높이 기어올라갈 제,
청년의 가슴에는 굵은 돌이 내려앉았다.
어떠한 불덩이가,
과연 층계를 내려가는 그의 머리보다도
더 뜨거웠을까?
어머니를 부르는, 어린애를 부르는,
남도 사투리,
오오! 왜 그것은 눈물을 자아내는가?
정말로 무서운 것이……
불붙는 신념보다도 무서운 것이……
청년! 오오, 자랑스러운 이름아!
적이 클수록 승리도 크구나.
삼등 선실 밑
동그란 유리창을 내다보고 내다보고,
손가락을 입으로 깨물을 때,
깊은 바다의 검푸른 물결이 왈칵
해일처럼 그의 가슴에 넘쳤다.
오오, 해협의 낭만주의여!
향수
임화
고향은
이제 먼 반도에
뿌리치듯
버리고 나와,
기억마저
희미하고,
옛일은
생각할수록
쓰라리다만,
아아! 지금은 오월
한창때다.
종달새들이
팔매친 돌처럼
곧장
달아 올라가고,
이슬 방울들이
조으는,
초록빛 밀밭 위,
어루만지듯
미풍이 불면,
햇발들은
화분(花粉)처럼 흩어져.
두 손은 벌려,
호랑나비를 쫓던
또랑가의 꿈이,
아직도
어항 속에
붕어처럼
맑다만.
지금은 오월
한창 때
소낙비가 지나간
도회의 포도 위
한 줌 물 속에,
아아! 나는
오월의
푸른 하늘을 보며,
허위대듯
잊기 어려운
나비를 쫓고 있다.
헌시(獻詩) - 조선청년단체총동맹(朝鮮靑年團體總同盟) 결성(結成) 대회(大會)에
임화
죽어도
썩지 않을
하나를 지닌
가슴과 가슴은
공처럼 부풀어
드는 손
마디 마디 맺힌 피
발을 구르면
따뜻이 흘러내려
너른 회장(會場)은
온전히 한 심장(心臟)
여기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의
수도(首都)가 있다
노래에도
연설(演說)에도
이미
살길은 명백(明白)하고
우리는 단지
죽는 법을 배워
돌아가면 그만이다.
현해탄
임화
이 바다 물결은
예부터 높다.
그렇지만 우리 청년들은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다,
산불이
어린 사슴들을
거친 들로 내몰은 게다.
대마도를 지나면
한가닥 수평선 밖엔 티끌 한 점 안 보인다.
이곳에 태평양 바다 거센 물결과
남진(南進)해온 대륙의 북풍이 마주친다.
몬푸랑보다 더 높은 파도,
비와 바람과 안개와 구름과 번개와,
아세아(亞細亞)의 하늘엔 별빛마저 흐리고,
가끔 반도엔 붉은 신호등이 내어 걸린다.
아무러기로 청년들이
평안이나 행복을 구하여,
이 바다 험한 물결 위에 올랐겠는가?
첫번 항로에 담배를 배우고,
둘쨋번 항로에 연애를 배우고,
그 다음 항로에 돈맛을 익힌 것은,
하나도 우리 청년이 아니었다.
청년들은 늘
희망을 안고 건너가,
결의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은 느티나무 아래 전설과,
그윽한 시골 냇가 자장가 속에,
장다리 오르듯 자라났다.
그러나 인제
낯선 물과 바람과 빗발에
흰 얼굴은 찌들고,
무거운 임무는
곧은 잔등을 농군처럼 굽혔다.
나는 이 바다 위
꽃잎처럼 흩어진
몇 사람의 가여운 이름을 안다.
어떤 사람은 건너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돌아오자 죽어 갔다.
어떤 사람은 영영 생사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아픈 패배(敗北)에 울었다.
- 그 중엔 희망과 결의와 자랑을 욕되게도 내어 판 이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지금 기억코 싶지는 않다.
오로지
바다보다도 모진
대륙의 삭풍 가운데
한결같이 사내다웁던
모든 청년들의 명예와 더불어
이 바다를 노래하고 싶다.
비록 청춘의 즐거움과 희망을
모두 다 땅 속 깊이 파묻는
비통한 매장의 날일지라도,
한번 현해탄은 청년들의 눈앞에,
검은 상장(喪帳)을 내린 일은 없었다.
오늘도 또한 나 젊은 청년들은
부지런한 아이들처럼
끊임없이 이 바다를 건너가고, 돌아오고,
내일도 또한
현해탄은 청년들의 해협이리라.
영원히 현해탄은 우리들의 해협이다.
삼등 선실 밑 깊은 속
찌든 침상에도 어머니들 눈물이 배었고,
흐린 불빛에도 아버지들 한숨이 어리었다.
어버이를 잃은 어린아이들의
아프고 쓰린 울음에
대체 어떤 죄가 있었는가?
나는 울음소리를 무찌른
외방 말을 역력히 기억하고 있다.
오오! 현해탄은, 현해탄은,
우리들의 운명과 더불어
영구히 잊을 수 없는 바다이다.
청년들아!
그대들은 조약돌보다 가볍게
현해(玄海)의 물결을 걷어 찼다.
그러나 관문해협 저쪽
이른 봄바람은
과연 반도의 북풍보다 따사로웠는가?
정다운 부산 부두 위
대륙의 물결은,
정녕 현해탄보다도 얕았는가?
오오! 어느 날
먼먼 앞의 어느 날,
우리들의 괴로운 역사와 더불어
그대들의 불행한 생애와 숨은 이름이
커다랗게 기록될 것을 나는 안다.
1890년대(年代)의
1920년대(年代)의
1930년대(年代)의
1940년대(年代)의
19××년대(年代)의
…………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간
폐허의 거칠고 큰 비석 위
새벽별이 그대들의 이름을 비출 때,
현해탄의 물결은
우리들이 어려서
고기떼를 쫓던 실내[川]처럼
그대들의 일생을
아름다운 전설 가운데 속삭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 바다 높은 물결 위에 있다.
홍수 뒤
임화
하나도 아니었고,
둘도 아니었다.
활개를 젓고 건너가,
죽지를 늘이고 돌아온
이 항구의 추억은,
참말 열도 아니었다.
그러나 굳건하던
작고 큰 집들이
터문도 없이 휩쓸려간
홍수 뒤,
황무지의 밤바람은
너무도 맵고 거칠어.
언제인가 하루 아침,
맑은 희망의 나발이었던
고동소린 오늘밤,
청춘의 구슬픈 매장의 노래 같아야,
고향의 부두를 밟는
나의 무릎은 얼듯 차다.
긴 밤차가 닿는 곳,
나의 벗들을 사로잡은
차디 찬 운명 속에서도,
청년의 자랑은
꺼지지 않는 등촉처럼 밝았으면……
아아 이 하나로 나는
평생의 보배를 삼으련다.
화가의 시(詩)
임화
파열된 유리창 틈바구니엔
목 떨어진 노동자의 피비린내가 나고
은행소(銀行所) 벽돌담에는 처와 자식들의
말라붙었던 껍질 춘절(春節)의 미풍으로
구렁이 탈같이 흐느적거린다
춘절(春節)의 풍경화는 나의 `칸바―스' 위에서
이렇게 화려하고 양기(陽氣) 있게 되어간다
유위(有爲)한 청년 화가의 고린내 나는 권태와
육취(肉臭)가 코를 찌르는 `아트리에' 속에서
인간의 낡은 피와 다 삭은 뼈를 가지고
이 천재 예술가는 풍경화를 새긴다
그러나 `싸로 -'의 품작(品作)으로는
나의 생각은 너무나 상등(上等)인 것 같다
인형과 전차표 병정(兵丁) 구두로 그린 그림이
암만해도 나는 화가 이상(以上)이다
춘야(春野)를 걸어가는 장신의 청년
실연한 사나이 아니면 소매치기로 출세한 -
그는 별안간 돌아서 나의 이마를 후렸다
나의 화중(畵中)에 출장(出場)시킨 충실한 인형이 -
그리고 그는 도망을 하였기 때문에 화판(畵板)엔 큰 구멍이 뚫어져 버리었다
복수 – 나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을 맹서하고 이 그림을그린다
이것은 나의 출세할 그림 역사의 `스토리'이다
암만해도 나는 회화에서도 망한 예술가이다
미래파 – 공적(功的)이고 난조미(亂調美)의 추구
그것도 아니다 결코 나의 그림은 미술이 못 되니까 -
하마터면 또는 1917년 10월에 일어난 병정(兵丁)의 행렬과 동궁(冬宮) 오후(午後)삼 시(三時)와 구시(九時) 사이를 부조(浮彫)하고 있을지도 모를 것이다
사랑할만한 `아카데믹'의 유위(有爲)한 청년의 작품이 -
오오 나의 그림은 분명히 나를 반역했다
그리고 새로운 나를 강요하는 것이다
뺑기 – 냄새를 피우고 피냄새를 달랜다
그리할 것이다 나는 이후부터는 총과 마차로 그림을그 리리라
- 조형 예술가의 침언(寢言)
황무지(荒蕪地)
임화
도망해 나온 시골 어머니가
밤마다 머리맡에 울더라만,
끝내 나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늙고 병들어 벌써 땅에 묻혔다.
그래야 나는 산소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도, 고향도,
나에게는 소용없었다.
나는 젊은 청년이다…….
자랑이 가슴에 그뜩하여,
배가 부산 부두를 떠날 때도,
고동 소리가 나팔처럼 우렁만 찼다.
어느 한구석 눈물이 있을 리 없어,
그 자리에 내 좋아하는 누이나 연인이 죽는대도,
왼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강을 건너는 내 마음은,
웬일인지 소년처럼 흔들리고 있다.
차가 철교를 건너는 소리가 요란이야 하다,
그렇지만 엎어지려는 뱃간에서도,
나는 무릎 한 번 안 굽혔다.
대체 네가 무엇이기에,
아아! 메마른 들 헐벗은 산,
그다지도 너는 내게 가까왔던가!
벌써 강판은 얼어,
너른 구포벌엔 황토 한 점 안 보인다.
눈발이 부연 하늘 아래,
나는 기차를 타고 추풍령을 넘어,
서울로 간다.
서울은 나의 고향에서도 천리,
다만 나의 어깨의 짐을 풀 곳일 따름이다.
자꾸만 차창을 흔드는 바람 소린,
슬픈 자장가일까? 아픈 신음소릴까?
- 아이들을 기르고 어머니를 죽인,
아아! 오막들도 전보다 얕아지고,
인제 밤에는 호롱불 하나이 없이 산단구나.
황무지여! 황무지여!
너는 아는가?
청년들이 어떤 열차를 탔는가를…….
9월 12일 1945년, 또다시 네거리서
임화
조선 근로자의
위대한 수령의 연설이
유행가처럼 흘러나오는
마이크를 높이 달고
부끄러운
나의 생애의
쓰라린 기억이
포석(鋪石)마다 널린
서울 거리는
비에 젖어
아득한 산도
가차운 들창도
현기로워 바라볼 수 없는
종로 거리
저 사람의 이름 부르며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
개아미마냥 모여드는
천만의 사람
어데선가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굴
찬 옥방(獄房)에 숨지운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리라
노래부르던 깃발
자꾸만 바라보며
자랑도 재물도 없는
두 아이와
가난한 안해여
가을비 차거운
길가에
노래처럼
죽는 생애의
마지막을 그리워
눈물짓는
한 사람을 위하여
원컨대 용기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