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가을 변주곡
감기
강가에서
겨울의 비
구식여수(舊式旅愁)
구식 철도
귀로(歸路)
그대
그해 겨울의 눈
기적
길
나무
나무 위에 사는 물고기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의 물고기
나의 시(詩)
나의 집
낙타
낙화
낮달
노년환각(老年幻覺)
놀이의 기하학
눈이 옵니다
늑대
다시 비극
다 왔다
달의 자유
독감
독시법(讀詩法)
독주
들길
등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
루시의 죽음
마지막 희망
만개(滿開)
맹물
먹통 전화
먼 발치에서
모비 딕
모순
모순의 자리
무명의 사자에게
무엇인가 말한다는 것은
물
물거품 노트
미로
바다
바다 무제
바람의 캔버스
밤바다
백치풍경(白痴風景)
뱀
별이 물이 되어 흐르고
병아리
보물섬의 지도
복어
봄비
분수
불꽃 속의 싸락눈
비
비 오는 날
비의 나라
빈 들에 홀로
산
산 비
새 발자국 고수레
석류
소리
소묘
소풍
손
송가(頌歌)
술래잡기
슬로비디오
시계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
시의 바다
신 만춘전
실솔가
악어
안개
암세포
어느 공원
어젯밤 꿈에
엑스레이 사진
연애편지
외톨 바다
우체부 김씨
원형의 눈
위약(違約)
은하 그림
이명증
일기 예보
전천후 산성비
절벽
정적의 개
종전차(終電車)
죽지 않는 도시
징깽맨이의 편지
찔레꽃
창(窓)
초상정사(草上靜思)
칼을 간다
코끼리와 나그네
코스모스
편자
폭포
풍경에서
풍선 심장
하운(夏雲)
항복에 대하여
해가 져도 노을이 없다
해바라기
해일 경보
허무의 빛깔
호수
황혼
희망의 집
2월
11월
가슴
이형기
1
나의 가슴은 동굴처럼 비어 있다.
흉벽이란 이름뿐
메마른 판자 한 장으로
겨우 뚜껑을 해 덮었을 뿐이다.
그래도 낮시간엔
넥타이를 맨 신사복 차림의 그 속을
감히 헤쳐볼 사람이 없다.
그리고 이것저것 풀어놓은 한밤중엔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버린다.
불가불 나 혼자
겁먹은 눈으로 들여다보는 심야의 공포―
분명 거기 있어야 할 것들이 없다.
꿈도 추억도
심지어는 심장마저도 모조리 삼켜버린
악어처럼 크게 입 벌린 어둠
어둠 한 마리밖에는
온몸에 오싹 소름 끼치는 찬바람이
지구 저쪽에서 불어오고 있다.
2
친구여 내게는 가슴이 없다
있는 것은 다만 허구(虛構)의 장치(裝置)
마타호른의 눈사태처럼 무너져 내리는
벼랑일 뿐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조난(遭難)을 약속한다
그 조난의 최후의 비명이
고성능 마이크를 타고 퍼지는
그러나 누구도 듣지 못하는
절망의 헛된 메아리를 약속한다
그러므로 친구여 나의 가슴은
벼랑이 아니라 벼랑을 삼킨 함정
마침내는 지구(地球)까지
송두리째 둘러 꺼지기를 기다리는
음흉한 꿈이다
그 꿈이
밤 내 휘두르는 곡괭이
펑펑 터뜨리는 다이너마이트
<더러는 압사(壓死)!>
그러나 밤을 샌 이튿날 보면
벼랑도 함정도 이미 없다
남은 것은 다만
온통 파헤쳐진 쑥대밭 가슴
가슴 있던 자리의 페허일 뿐이다
가을 변주곡
이형기
가는 자 이와 같은 강물이 흐른다.
철환천하(轍環天下)의 여수에 물든
전국(戰國) 각지(各地)의 저녁노을
인간의 소망은 슬프다고 하지만
여자들은 싱싱하기 배추포기 같다.
사대부의 수레가 지나가며 훔쳐보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여자들의 종아리
언제는 전국시대 아닌 때가 있었던가.
그때나 이때나
여자들은 강에서 배추포기를 씻고
그때나 이때나
소국(小國) 노(魯)나라의 우리 집 뜨락엔
가을이 마지막 햇볕을 쏟고
그때나 이때나 슬픈 소망은
한결같이 하얗게 바래지고 있는 것을.
구식여수(舊式旅愁)
이형기
섬으로 갈까보다.
지도를 펴들고 더듬는 뱃길……
가서 이렇게 살까보다.
낮잠을 깬
섬의 선술집의
작부의 기둥서방의
선하품.
아직 해가 지기는 이른
오후 네시쯤
또는 네시 반쯤
얼굴이 꺼칠한 가을 해바라기.
육자배기나
목포의 눈물이나
떨어지지 않는 화투패나
또 무엇이나
신문 벽지의 빈대 핏자국이나
쌓인 담배꽁초나
콜록 기침이나
또 무엇이나
허세여 허세여
적막한 허세여
이를테면 나노도(羅老島)의
외나로도(外羅老島)쯤으로 가는 구식여수(舊式旅愁)……
모조리 혼자 차지한 양
허세나 부리며 살까 보다.
감기
이형기
미열 6도 7분의 홍조
더운 이마를 식힐까 보다.
아스피린과 산탄 엽총
그리고는 가벼운 흥분을 곁들인다.
가늠자 위에서 떨고 있는
새 한 마리.
방아쇠를 당기면
그러나 새는 이미 날아간지 오래다.
빈 총소리만 요란하다.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의
감기를 앓는 기침 소리
미열 6도 7분의 이마에
식은땀 같은 이건 뭔가.
강가에서
이형기
물을 따라
자꾸 흐를라치면
네가 사는 바닷말에
이르리라고
풀잎 따서
작은 그리움 하나
편지하듯 이렇게
띄워본다
겨울의 비
이형기
모조리 떨고 나니 온다
겨울의 비.
이젠 낙엽도 질 것이 없는
마른 나뭇가지,
빈 들판엔
남루를 걸친 계절의 신이
혼자 웅크리고 있다.
머지않아 잠들 것이다.
그리고 묻힐 것이다.
그렇게 한 소절을 매듭짓는 의식······
눈이 내릴 걸 생각한다.
눈물을 뿌릴 만도 하지만
눈물이 아닌 겨울의 비.
어제는 오후 내내 바람이 불고
오늘은 이 차가운 인식이
목덜미를 적신다.
구식 철도
이형기
나의 철도는
기관차가 아직도 눈으로 불을 때는
눈이 오는 날에만 운행하는 구식이다.
화물차는 아예 달지를 않고
승객은 한 칸에 한 사람씩
아무리 많아도 혼자일 수 밖에 없는
기나긴 객차가 이어져 있다.
그것은 철로가 필요 없는 기차
눈보라로 길이 막힌 밤이면
들판이든 산이든 더욱 신나게
초특급으로 달린다.
하얀 눈이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을 먹고
기관차가 거친 숨결을 뿜어낼 때
시대의 편리함에 길들지 못한
야생마의 슬픔이
추억처럼 되살아나는 기적 소리
차표는 팔지 않는다
누구나 가진
이 세상 끝까지 떠돌고 싶은 마음
겨울 나그네의 꿈 한 조각
그것이 차표다.
그러므로 수지는 걱정할 것 없는
나의 구식 철도
기관차의 연료는 아직도 눈이기에
눈보라 치는 밤엔 초특급으로 달린다.
귀로
이형기
이제는 나도 옷깃을 여미자
마을에는 등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복된 저녁상을 받고 앉았을 게다.
지금은
이 언덕길을 내려가는 시간,
한오큼 내 각혈의
선명한 빛깔 우에 바람이 불고
지는 가랑잎처럼
나는 이대로 외로워서 좋다.
눈을 감으면
누군가 말없이 울고 간
내 마음 숲 속 길에
가을이 온다.
내 팔에 안기기에는 너무나 벅찬
숭엄(崇嚴)한 가을이
아무 데서나 나를 향하여 밀려든다.
그대
이형기
1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참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손목을 쥔 채
그냥 더워 오는 우리들의 체온을……
내 손바닥에
점 찍힌 하나의 슬픔이 있을 때
벌판을 적시는 강물처럼
폭넓은 슬픔으로 오히려
다사로운 그대.
2
이만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내가 그대를 부른다
그대가 또한 나를 부른다.
멀어질 수도 없는
가까워질 수도 없는
이 엄연한 사랑의 거리 앞에서
나의 울음은 참회와 같다.
3
제야의 촛불처럼
나 혼자
황홀히 켜졌다간
꺼져버리고 싶다.
외로움이란
내가 그대에게
그대가 나에게
서로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것이다.
그해 겨울의 눈
이형기
그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렸다
희부옇게 한밤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디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 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영화 시대의 환상의 필름
덧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
클라이막스밖에 없는 화면들이
관객 없는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린
그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도 화려한 낭비였다
기적
이형기
적도하의 밀림 속
코끼리의 시체 하나 썩고 있다.
독한 냄새로 사방에 기별하는
이제야 혼자된 이 기쁨
거대한 짐승은 제 몸을 헐어
필생의 대향연(大饗宴)을 벌인다.
오라, 바람아
햇빛아 미물들아
와서 먹고 마시고 취하라
여기 원래의 그대들 몫이 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광란의 도가니
하늘도 벌겋게 달아오른 그때
홀연 코끼리는 온데간데없고
상아 두 뿌리
높이 모천(暮天)을 뚫고 솟는 기적!
썩게 하라 나를
그리고 내일 아침
두 개의 송곳니만 남게 하라.
길
이형기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
나무
이형기
나무는
실로 운명처럼
조용하고 슬픈 자세를 가졌다.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그 아랫마을에 등불이 켜이듯
그런 자세로
평생을 산다.
철따라 바람이 불고 가는
소란한 마을길 위에
스스로 펴는
그 폭넓은 그늘······
나무는
제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
천 년의 강물이다.
나무 위에 사는 물고기
이형기
물고기들은
물속이 아니라 나무 위에 산다
바람이 불면
하늘하늘 꼬리와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고기
그러나 바람에는
세찬 강풍도 있어서
죽기살기로 나무에 매달리는 물고기
그리고 물고기는
마침내 숨을 거둔다
그 허망함
애초부터 그것은 예정된 일이다
그래봤자 그게 뭐 대순가
물고기가 나무 위에 살거나
바위 속에 살거나
그게 다 그것이니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형기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세기 전의 해적선이 바다를 누빈다.
나뭇잎만큼 많은 돛을 달고
그 어떤 격랑도 지울 수 없는
벌레 먹은 항적(抗跡)
나뭇잎을 다시 들여다보면
나무가 뿌리채
그 밑바닥에 침몰해 있다.
파들파들 떨리는 단말마의
손짓
잎사귀들이
나의 물고기
이형기
나의 물고기는 나무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바위 속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물고기
또 그것은 물결을
아니 바람을 박차고 오른다
이윽고 그것은 모래가 된다
모래가 되어 장맛비처럼 쏟아진다
왜 하필 그래야 하는가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그렇게 모르고 보니 슬프구나
이것저것 한데 어울려 슬픔이로구나
그리고 또 가슴이 뻥 뚫리는 서글픔이로구나
나의 시(詩)
이형기
나의 시는 참으로 보잘 것 없다.
먼 길을 가다 말고
잠시 다리를 쉬는 풀섶에
흐르는 실개천
쳐다보는 흰 구름
또는 해 질 무렵 산허리에 어리는
저녁 안개처럼 덧없이 가볍다.
아, 보랏빛 안개 서린 희로애락
먼 길을 가며 보는 강산 풍경……
일모(日暮)와 더불어 귀로에 오르는
내 이웃들의 단란(團欒)을 빌고
외로운 사람의
불을 끈 창변에
서늘한 달빛같이 스미고 싶다.
여류(如流)한 세월에 물같이 흐르는
흘러서 마지 않는 온갖 인연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싶다.
나의 집
이형기
나의 집은
흐르는 강물
그 먼 강심에 있다
크기는 넉넉한 두 평 단칸
들어앉으면 물의 흐름에
절로 손발이 씻기는 깨끗한 그 방
모래로 된 책도 몇권 있다
별빛을 등불 삼아 그 책장을 넘기면
위잉 위잉 후루룩 위잉
그것은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
세상에서 가장 크게 울리지만
실은 침묵만을 낳고 마는
지구 자전의 그 소리
그것이 내게는 선연하게 들려오는
강심에 있는 단칸방 나의 집
낙타
이형기
광대한 사막 하나 펼쳐져 있다
거기 터벅터벅
낙타 한 마리 가고 있다
쇠추를 매단 듯 발걸음은 무겁다
등에 솟아있는 혹
그 몽우리엔 노을이 비켜있다
왜 가는지를 모르고 가는 낙타
지구는 둥글다
낙타는 느릿느릿 둥근 지구를 타고
간다
낙타는 외톨이
그리고 낙타는 눈이 멀었다
먼눈으로도 볼 수 있는 것만
보고 가는 낙타
둥근 지구를 터벅터벅 타고 간다
낙화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낮달
이형기
새를 그린다
힘차게 퍼덕이는 커다란 날개
날개를 타고 가는 크레온의 곡선을
그려놓고 다시 보니
새가 없다
다만 찢긴 날개 몇 짝
무참하게 방바닥에 흩어져 있다
그리려는 순간에 재빨리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버린 새
모양이 없는 새
그리고 뒤에 남은 휴지의 구겨짐
창밖엔 헛것처럼 달이 떠 있다
남은 도화지로
누군가 하늘에 오려 붙인 새
새가 아닌 낮달
노년환각(老年幻覺)
이형기
자라서 늙고 싶다
나는 한 그루 수목같이
먼 여정이 끝난 곳에
그늘을 느린 나의 추억
또 어느덧 하루해가 저물어
그곳에 등(藤)의자를 내려놓고 쉴 때―
눈을 감고 있으면
청춘의 자취 위에 내리는 싸락눈
표백된 비극의 분말
―그러나 나는
겨울날 단양한 양지 짝에
누워서 존다
육중한 대지에 묻힌
사랑과 미움
내 가고 난 다음 천년쯤 후에
자라서 무성한 가지를 펴라
놀이의 기하학
이형기
점 하나를 찍는다
그 점이 움직인다
선이 그어진다
선과 선 사이의 공간
그 공간을
모로 세우거나 거꾸로 세우면
거기 나타나는 입방체
아하 그렇구나
점 하나로 시작되어 만사를 이룩하곤
점 하나로 돌아가는구나
아둥바둥할 것 없다고 하지 말라
그것은 작난이다
가장 엄숙한 장엄한 작난이다
눈이 옵니다
이형기
눈이 옵니다. 聖母 마리아
당신을 向하여 손을 모운 내 어깨에
포근한 하늘의 은총이 내려 쌓입니다
마음껏 눈물을 흘리게 하세요.
눈물이 흘러
당신의 발목을 적시게 하세요.
아직도 슬픔이 갖는 무게를 모릅니다.
허나 당신 앞에서 혼자 울 수 있는
크고 너그러운 물같은 흐름을
내 살아가는 표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내 어린 영혼은 편히 쉬고
먼 훗날에도 포근히 내려쌓일
눈 같은 당신의 손길을 짐작합니다.
늑대
이형기
무리에서 벗어난 늑대 한 마리
혼자 등성이로 올라가고 있다
늑대는 보통 예닐곱 마리가 모여
가족을 이룬다
헌데도 놈은 거기서 탈락한 것이다
하긴 그럴만도 하다
놈은 늙고 병들었으니
그러나 가슴속 아니 핏속에는
옛날의 뜨거움이 조금은 살아 있다
드디어 놈은 산마루에 이른다
하늘을 쳐다보니 달이 떠 있다
이윽고 사그라질 그믐달이다
임자 없는 외톨이 달이다
다시 비극
이형기
“행복도 팝니다”
파는 것은 공짜가 아니다
반드시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니 행복을 논하기 전에
선행적으로 필요한 것은 돈
행복도 파는 이 시장에선
행복은 없고 돈
돈을 위해서만 눈이 벌겋다
이 비극
매끄럽게 싸서
“행복도 팝니다”
다 왔다
이형기
자 이젠 다 왔다
다음은 쉴 차례
아니 깊이깊이 잠들 차례다
이 세상 끝나는 그날까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다
이젠 다 왔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정말 있는가
다만 다 왔다고 생각한
그 생각만이 공중에 떠돌 뿐이다
떠도는 가운데서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젠 다 왔다는 한때
그것이 또한 끝이 아닌 것을
이것저것 다 알고 있는 나의 죽음
그것조차도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달의 자유
이형기
이 아파트 단지에서는
아무도 달을 쳐다보지 않는다
증권시세표가 아닌 달
텔레비젼 연속극도 아닌 달
더구나 화염병도 최루탄도 아닌 달
그래서 달은
대낮에도 15층 옥사에 내려와서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서
오 자유여
이제야 제 시간 제 맘대로 즐기는
실업자가 된 달의 자유여
독감
이형기
겨우내 앓다가
겨우 한동안 고개 숙인 독감이
다시 도진 엊그제 그날부터
밤마다 마구간 마루판을 차대는
고독한 소란자
달구지꾼 아버지가 물려준
이제는 그때의 아버지보다도 늙은 나귀여
연거푸 쏟아지는 나의 기침이
네게는 온몸에 신열로 퍼져서
우리가 함께 잠을 설치는 요즘 며칠 밤
아니 옛날의 그날 밤
레이다처럼 정확하게 봄을 예감하고
피를 토한 아버지의 기침은
이튿날 어김없이
앞산을 진달래로 붉게 물들였기
내일이면 다시 진달래 피려는가
눈곱 낀 눈에도 열이 올라
숨가쁘게 코를 불고 퉁탕거리는
너의 옛날 그대로의 발작
융통성없이 말라빠진
아 이 처치곤란한 봄의 유산이여
독시법(讀詩法)
이형기
시를 읽으면서 하품을 한다
내가 쓴 시
물론 네가 써도 아무 상관 없는 시
쓰고 나서 속으로 쾌재를 부른 시
누구나 첫눈에 이건 진짜
참 참기름
백 프로 보증의 딱지가 붙은 시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이 개를 문 기삿거리 사건이 아니다
그 사건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또는 달밤의 체조적 의의를 규명하는
스피노자의 안경알
둥근 세모꼴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만 시
케이에스 마크의 진짜 시
협잡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잡인금접(雜人禁接)의 쇠창살 안에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갇혀 있는 시
그러므로 그것은 진짜답게 황홀한 재주를 부린다
오 터지는 박수 갈채여
잘못은 매일 동물원밖에는 갈 데가 없는
너와 내가 그 속에 끼어 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마비된 수치감으로
부푼 감동의 풍선에 슬쩍 바늘을 찔러
바람을 빼는 하품
간악한 배신의 하품을 하면서 시를 읽는다
내가 쓴 시
물론 네가 써도 아무 상관 없는 시
독주
이형기
쓸쓸함으로 밀 한 됫박
맷돌에 갈아서 누룩을 만든다
헐어서 짓물린 가슴에
그 누룩 비벼 넣으면
파랗게 인광처럼 살아나는 쓸쓸함
또 다른 많은 쓸쓸함을 불러 모아
암세포처럼 증식하는 쓸쓸함
내 온몸 펄펄 끓는다
그리하여 백년 하루 해가 저무는
세기말의 서천에 시뻘건 노을
진하게 진하게 번져가는 열병
아 나의 부패성 해체여
드디어 내가 없어진 자리에
어디로 왔는가
한 동이 독한 전국술 있거니
이 세상 쓸쓸한 사람들 모두 와서
이 술 먹자
밤새 서로 등돌리고 앉아서
아무 말 말고 이 술 먹자
들길
이형기
고향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 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
백지에다 한 가닥
선을 그어보아라
백지에 가득 차는
선의 의미······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그늘······
그 무한한 안정에 싸여
들길을 간다.
등
이형기
나는 알고 있다
네가 거기
바로 거기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팔을 뻗어도
내 손은 네게 닿지 않는다
무슨 대단한 보물인가 어디
겨우 두 세번 긁어대면 그만인
가려움의 벌레 한 마리
꼬물대는 그것조차
어쩌지 못하는 아득한 거리여
그래도 사람들은
너와 내가 한 몸이라 하는구나
그래그래 한 몸
앞뒤가 어울려 짝이 된 한 몸
뒤돌아보면
이미 나의 등 뒤에 숨어버린 나
대면할 길 없는 타자(他者)가
한 몸 되어 함께 살고 있다
이승과 저승처럼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
이형기
나 어느새 예까지 왔노라.
가뭄이 든 랑겔한스 섬
거북 한 마리 엉금엉금 기는
갈라진 등판의 소금꽃.
속을 리 없도다.
실은 만리장성으로 끌려가는
어느 짐꾼의 어깨에 허옇게
허옇게 번진 마른 버짐이니라.
오 박토여.
반쯤 피다 말고 시들어버린 메밀 농사와
쭉쭉 골이 패인
내 손톱 밑의 반달의 고사(枯死)여.
가면 가는 그만큼
길은 뒤에서 허물어지나니
한 걸음 뗄 때마다 낭떠러지 하나씩 거느리고
예까지 온 길 랑겔한스 섬,
꿈꾸는도다 까맣게 탄 하늘.
물도 불도 그 아래선
한 줌 먼지 되어 풀석거리는 승천의 꿈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이니라.
* 랑겔한스섬(랑게르한스섬Langerhans islets)
이자 내에 섬(島) 모양으로 산재하는 내분비선 조직으로 췌도(膵島)라고도 한다. 섬 모양으로 보이는 세포의 집단으로 1869년 독일의 병리학자 P.랑게르한스가 발견하여 "랑게르한스섬"이라 이름 붙인 것
루시의 죽음
이형기
쥐약 먹고 죽은 쥐를 먹은
빈사(瀕死)의 루시
어두컴컴한 마루 밑에 숨어서
루시는 주인인 나를 보고도 이를 갈았다.
기억하라
반드시 갚고야 말리라
눈에는 눈 이빨에는 이빨.
루시는 이미 개가 아니다.
다만 증오
그 일점을 향해서만 타는
파란 백금 불꽃
일순 루시는 내 혈관을 뚫고 내닫는다.
번뜩이는 칼날의
그 번뜩임처럼 황홀한 전율
루시는 이미 개가 아니다.
독한 쥐약이다.
기억하라 눈에눈 눈 이빨에는 이빨
아니다.
그 투명한 극치를.
마지막 희망
이형기
심부름 센터에 부탁하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대신해준다
시험지옥에는 대리시험
학위논문도 물론 대신 써준다
관공서에 가면 그는 그림자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실체는
그를 대신하는 주민등록증이다
다른 사람의 소송대리인 되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수재들
아들딸 낳고 싶으면
대리모와 정자은행에 연락하시오
살인도 대신해주려고
살인청부업자가 기다리고 있다
값이 좀 비싸지만
그러나 죽는 것만은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한다
내가 직접 죽을밖에 없다
아 안심이다
그래도 내가 꼭 나라야만 되는 일
마지막 희망 하나 아직 남아 있으니
만개(滿開)
이형기
한 시도 쉬지 않던 너의 발걸음이
마침내 절정에 이르렀구나
벚꽃의 만개여
더 이상은 갈 데가 없는 절대절명
그 팽팽한 긴장감의 한계에서
더러는 한두 잎
너의 종말을 예고하는 낙화
아아 벼랑 끝에 선 자의 절망이
그 깊은 나락을 굽어보며
사치를 다한
마지막 잔치를 벌이고 있다
지화자 어디선가 풍악도 울리는
휘황하게 너무나도 휘황하게 불 밝힌
가슴 저리는 슬픔
벚꽃의 만개여
맹물
이형기
물을 마신다
맹물이다
아무리 마셔도 맹물
그냥 맹물이다
안으로 들어간 물은
다시 밖으로 뿜겨져 나온다
뿜겨져 나오는 건
보니 뜻밖에도 불길이다
내 뱃속에 숨어있는
일곱 난쟁이가 그 불길을 뿜는다
불길이 이번에 재로 바뀐다
재는 가루
가루된 재가
소리도 없이 내려 쌓인다
그러자 내 머리가 하얗게 센다
맹물이 불길
불길이 맹물
그리고 가루가 맹물이고 불길이다
아~ 그렇구나
세상만사 모두 맹물이구나.
먹통 전화
이형기
전화가 고장났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덩이 작은 어둠이 되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먹통전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것은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소문에 너무 민감했던 귀
하소할 게 너무 많았던 입을
꼼짝달싹 못하게 틀어막아버린다
그래도 아직
할 말
들어야 할 소식 있으면
네가 네한테 말하고 들어라
고장난 전화는 그러나
그런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먹통
먹통 같은 묵비권 하나로
제 어둠을 지키고 있다
혹시나 하고 만져보면
찬피 검은 두꺼비처럼 손바닥에 감응하는
그것은 분명 살아 있는 어둠
섬뜩한 어둠이다
먼발치에서
이형기
완만한 곡선
타원형 슬픔
거기 속속들이 스민 황토빛 깔
그런 한국의 산을 보자고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난다.
가서는 그대에게 편지하마
발신지는 모르지만 사연은 이렇다.
사랑하는이여
이제 나는 그대를 먼 발치에서
바라볼 뿐이다.
그렇다 먼발치에서
아니 그 먼 발치로의 가을의 낙하
낙하하는 가을 속에 한국의 산
그 슬픈 능선이 떠 있다
모비 딕
이형기
영화는 끝났다.
예정대로 조연들은 먼저 죽고
에이허브 선장은 마지막에 죽었지만
유일한 생존자
이스마엘도 이제는 간 곳이 없다
남은 것은 다만
불이 켜져 그것만 커다랗게 드러난
아무것도 비쳐주지 않는 스크린
희멀건 공백
그러고 보니 모비 딕 제놈도
한 마리 새우로
그 속에 후루룩 빨려가고 말았다
진짜 모비 딕은
영화가 끝나고나서야 이렇게
만사를 허옇게 다 지워 버리는
그리하여 공백으로 완성시키는
끔찍한 제 정체를 드러낸다
모순
이형기
완성된 것은 없다
그러기에 모두가 완성이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바닥에 떨어진 솔잎은 솔잎대로
실개천은 실개천
바다는 바다대로
버려진 돌덩이와
돌덩이에 새겨진 부처님과
그리고 그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일제사격의 뒷자리조차도
그것은 그것대로 완성이다
그러기에 모두가 완성이 아니다
아 이 모순이여
모순과 모순이 함께 하는 순리여
모순의 자리
이형기
눈을 감으면
아득한 기억의 저 쪽에서
하얗게 떠오르는것이 있다
보니 그것은
여태까지 내가 수없이 입밖에 내었던
그리고 또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다가
꿀꺽 삼켜버린 말들이다
원래는 색깔과 모양과 의미가 있었던
그것들이 이제는 그저 하얗다
만들어진 모든것은
필경 사그라져 버린다는 뜻인가
그러나 다시보면
그것은 싸락눈이 깔린 언덕이다
봄이되어 그 눈이 녹으면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날
그리하여 새로 시작할 그 자리
소멸과 생성이
둘이면서하나인 모순의 자리가
바로 거기 있구나
무명의 사자(死者)에게
이형기
너에게는 얼굴이 없다.
그러나 한밤중
불면의 창 너머로
너는 문득 달빛처럼 틈입한다.
사람들은 네가 잠들었다 하지만
어떠한 사상도
너를 잠재우는 자장가가 될 수 없다.
잠든 자를 도리어 흔들어 깨우는
너는 예고 없는 불청객이다.
그때 얼굴 없는 네 얼굴을 바라보면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눈
눈밖에 없는 것이 되어 무표정하게 웃는다.
그 웃음 속에 깃든 달빛
달빛처럼 싸늘한 공포.
걱정 말아라.
내게는 공포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스페이드의 불길한 왕자처럼
파멸로 내닫는
아직은 건장한 각력(脚力)이 있다.
이미 죽었으므로
다시는 죽을 리 없는 너
온갖 도시와 사원(寺院)과
사원 앞에 늘어선
눈곱 낀 한푼 줍쇼가 모두 너의 것이다.
그러나 네 소유의 알짜는
한 줌의 재
한 줌의 바람
도둑이 마취제를 뿌리듯 오늘밤
내 침실에 그것을 뿌려라.
무엇인가 말한다는 것은
이형기
먼 미래의
그 풀밭에서 너는 운다.
어깨와 허리, 또는 그 아래......
말하자면 엎드린 너의 자태를
나의 원근법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다만 너의 전신을 감싼
격정의 물결을 느낄 뿐이다.
느껴서 가슴이 뿌듯할 때
나의 안타까움은 고정된다.
그리하여 나를 차단한 지평선
오늘 일기는 진종일 눈이고나.
무엇인가
말한다는 것은 참 부질없다.
사락사락 내리는 그 감촉을
망각의 풍차가
스스로 돌아가는 그 음향을
느껴서 가슴이 뿌듯할 때
부질없고나 정말
내가 무엇인가 말한다는 것은.
물
이형기
얼음 속에 갇혔다 빠져나온 물은
실눈을 뜨고 살며시 대지에 스민다.
스며선 뿔뿔이 흩어지는 물
네덜란드의 둑으로도 가고
백두산 천지로도 기어오른다.
마나과의 지진 터
그 폐허를 찾아가서는
늙은 겨울의
해진 구두 밑창을 적시는 물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한 줄기는 엉뚱하게
내 혈관 속으로 기어든다.
겨우내 검게 응어리진 피를 풀자는 뜻인가
그래서 나를
슬픔을 다는 저울침의 눈금처럼
파들거리게 하자는 뜻인가
쳐다보면 뿌연 하늘
하늘에도 벌써 물 한 줄기 스며들었고나!
물거품 노트
이형기
나의 노트는 그 책장이
파도의 물거품으로 되어 있다
밤내 시를 써서 한 권을 채우지만
이튿날 보면
문자는 모두 떠내려가버리고
다만 펼쳐진 망망대해
그 속에서 나는 혼자 표류하고 있다
미로
이형기
오랜 헤맴 끝에
간신히 골목을 빠져 나왔다
미로를 졸업하고
이젠 큰 길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동서남북 아무데로나 트여있는
넓은 자유의 길
아뿔사, 그러나
동시에 사방으로 갈 수는 없다
어떻게 방향을 잡을 것인가
캄캄하게 버티고 있는 미로
예대로의 미로!
바다
이형기
1
어젯밤 나는 바다를 죽였다.
작살의 섬광 아래
바다는 온몸을 뒤틀면서
단말마의 소리를 질렀다.
알고 보니 바다는
거대한 어둠의 흡반이었다.
나를 덮쳤다.
모든 길은 차단되고
동시에 모든 길은 개방되었다.
작살은 불꽃처럼 춤을 추었다.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의
그 살기찬 오르가즘!
어젯밤 나는 바다를 죽였다.
교미를 끝낸 혹종(或種)의 곤충처럼
나도 함께 죽었다.
2
그 큰 바다를 다 가질 순 없다
알맹이 하나만 내게 다오
그러자 어디선가 뚝 한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이 세상 함대란 함대는 모두 나와서
싸워봐라 그리고 침몰해 봐라
내가 이렇게 다만 한 방울로
그 바다 자초지종을 요약하리니
바다 무제
이형기
삽으로
밤내 바다를 퍼낸다.
새벽녘에는
한 방울 땀으로 졸아들어
물결 새로 뚝 떨어져버리는
간밤의 쿨리[고력(苦力)]
그 무명의 죽음 속에 응축된 바다를
바다가 삼킨다.
쿨리의 혼령 플랑크톤
그 위에 아침 햇살이 퍼진다.
오 참극이여
클라이맥스가 없는 되풀이
되풀이
바다를 퍼내
바다에 보탠다.
바람의 캔버스
이형기
나의 캔버스는 바람으로 되어있다
거기에 나는 그림을 그린다
그것은 내 주변의 풍경과
또는 나의 초상화이다
어찌보면 그것은
많은 색채가 칠해진 그림
그러나 다시 보면 그것은
아무 색깔도 없느 그림이다
열가지 스무가지 설흔가지로 어지러운
그러나 잘 조화된 색깔의 어울림
그 어울림은 어울림 그대로 하나를 이룬다
아무것도 없는 텅빈 바람의 자리
나의 캔버스에서.
밤바다
이형기
날개 상한 갈매기들이
몸부림치고 있다. 솟구쳐 오르려고
그러나 이내 주저앉아버리는
밤바다
파도의 좌절.
깨어보면 베개엔
끈끈하게 소금기가 배어 있다.
멀쩡한 사지가
상한 날개보다도 무력한 나날의
뒤척이는 선잠.
어디선가 개 한 마리 짖고 있다.
방파제 너머 재빨리
몸을 숨기는 검은 그림자
침묵은 왜 방파제처럼 완강한가.
정체불명인가.
갈매기와 파도는 어느새
질색해버렸다. 어둠 속에서
그러한 나의 밤바다 저쪽에
좌초한 폐선 한 척
괴물처럼 떠 있다.
백치풍경(白痴風景)
이형기
하느님은 오늘밤 톱질을 한다.
사르륵 사르륵
실톱으로 켜는 나의 갈비뼈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하얀 톱밥
그 미세한 뼈가루가 떨어진다.
하느님은 이따금 일손을 멈추고
안경을 고쳐 쓴다.
훅 하고 톱밥을 불어낸다.
갑자기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남미산(南美産) 흡혈(吸血)박쥐의 목마름
하느님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바튼 기침을 한다.
이제는 늙어 피가 마른 하느님
잠도 없는 하느님
그래서 오늘밤은
나의 갈비뼈나 썰고 있는 하느님
아 알겠다,
들판이 들판 위에 넘어져 죽어 있는
새벽마다의 서리
그 허연 백치풍경(白痴風景)을 이제는 알겠다.
뱀
이형기
너는 소리없이 미끄러져 나간다
번들번들 윤이 나는
긴 몸뚱이의 S자 만곡 교태를 부리면서
그러나 그것은 유혹이 아니다
차라리 현기증
삼복 더위 한복판에서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차가운 섬광
그때 너는 잠시 멈춰서서
가늘게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댄다
불꽃처럼
또는 불꽃 속에 숨어든 얼음의 혼령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너의 그 두 가지 말은 부르고 있구나
너의 작은 두개골을 짓찧고 말 돌덩이
아니 겁에 질린 인간들의 잔인한 발작을
하지만 너는 언제난 살아 있다
죄지은 자의 가슴속에만 가득 차 있는 슬픔
슬픔이 키워낸 환상의 꽃그늘 아래
별이 물이 되어 흐르고
이형기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참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손목을 쥔 채
그냥 더워오는 우리들의 체온을······
내 손바닥에
점 찍힌 하나의 슬픔이 있을 때
벌판을 적시는 강물처럼
폭넓은 슬픔으로 오히려
다사로운 그대.
이만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내가 그대를 부른다
그대가 또한 나를 부른다.
멀어질 수도 없는
가까워질 수도 없는
이 엄연한 사랑의 거리 앞에서
나의 울음은 참회와 같다.
제야의 촛불처럼
나 혼자
황홀히 켜졌다간
꺼져버리고 싶다.
외로움이란
내가 그대에게
그대가 나에게
서로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것이다.
병아리
이형기
달걀의 꿈은 병아리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는
병아리로 부화될 수 없는 달걀만이 달걀이다.
몇 달 전에 망해버린 내 친구 양계업자
빈털터리가 된 그는 이제
외로운 밤시간을 갖게 되었지만
양계업자는 밤이 없다.
밤이면 낮보다 더 강렬한 불빛이
오직 생산!
생산만을 다그친다.
밤은 꿈꾸는 시간
꿈꾸면서 사랑을 나눈다는 관념은
그 양계장
양계장 같은 도시의 번영을 위협하는
불온사상이다.
그리고 암탉들은 실제로
사랑하지 않았기에 더 많은 달걀을 낳는다.
태어날 때부터
병아리로 부화될 꿈의 염색체가 제거된 달걀,
유해한 콜레스테롤의 함량의 극소화
하얗고 깨끗하게 표정도 지워진
우량품 달걀.
병아리는 이 도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망해버린 내 친구 양계업자의
외로운 밤시간에 환청으로만
길 잃은 한 마리가 삐약거릴 뿐이다.
보물섬의 지도
이형기
손바닥을 펴놓고 내일을 점친다
몇 가닥의 길을 고집스레 따로 뻗고
또 몇 가닥은
서로 마주쳐 종잡을 수 없는
보물섬의 지도가 그려진 손바닥
무성한 잡초 속에 흔적만 남은
오솔길처럼
잔손금은 잔손금 나름으로 어지럽다
그러나 아무리 얽히고 설켜도
모든 길은 한곳으로 통한다
로마가 아니라 로마의 폐허
손바닥을 벗어나는 낭떠러지 저쪽으로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확실한 참사
추락의 일진풍(一陣風)
그때의 바람 한줌 움켜쥔 주먹으로
누군가 힘껏 책상을 내리친다.
암 찾아야지 보물섬의 보물
길이 모두 그곳으로 통하는 낭떠러지
그 너머의 보물섬
해적이 그린 해골 표지의
보물 동굴이나 찾아야지 제기랄!
복어
이형기
복어는 늘 화를 내고 있다.
최근의 화는 아직 부글부글 끓고 있다.
부글부글 메탄가스처럼
그 때문에 우스꽝스럽게 복배가 튀어나온
만화 같은 불평분자
그러나 끓고 끓어서
청산가리 13배로 농축된 그 알맹이는
창자 속에 또는 피 속에 차갑게 간직된다.
사람들은 그 진짜는 질색이다.
세심한 주의로 모조리 제거하고
무해무득(無害無得)한 부분에만 입맛을 다신다.
그래도 속이 확 풀어진다니 천만다행이다.
겨우 술꾼들의
속이나 풀어주는 그 속은 아랑곳없는
이 인공의 국물 한 그릇,
오 형제여 위선의 독자여
어릴 때 나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복어 대가리가
밤내 파란 인광을
뿜고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봄비
이형기
밤,
봄비가 창에 스민다
기다림에 지친 마음이 젖는다.
봄,
밤에 내리는 비
반 옥타브 낮은 목소리.
물기가 배인 육신의 무게를
가눌 길 없고나.
봄밤에 비온다.
먼 사람아 당신의 손길은
봄비와 같이 성가시다.
잠재워다오.
분수
이형기
너는 언제나 한 순간에 전부를 산다.
그리고 또
일시에 전부가 부서져 버린다.
부서짐이 곧 삶의 전부인
너는 모순의 눈보라
그 속엔 하늘을 건너는 다리
무지개가 서 있다.
그러나 너는 꿈에 취하지 않는다.
열띠지도 않는다.
서늘하게 깨어 있는
천 개 만 개의 눈빛을 반짝이면서
다만 허무를 꽃피운다.
오, 분수, 냉담한 정열!
불꽃 속의 싸락눈
이형기
1
시는 허공이란 논밭에 구름으로 씨 뿌리고 바람을 소출로 수확하는 농업이다.
거기에는 수확의 많고 적음에 대한 어떤 기대나 또 수확을 저장할 곳간도 필요하지 않다.
그런 것이 필요 없다는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수확은 풍성해지는 것이다.
2
어떤 사물도 불변의 고유한 본질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여기 바위 하나가 있다 하자.
그 바위의 본질은 단단한 고체의 성질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주변의 상황과 조건이 달라져서 그것이 굉장히 뜨거운 열 속에 장시간 놓여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상식으로 말해도 그것은 열에 녹아 액체로 흘러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 액체의 유동성도 바위가 갖는 성질이 아닐 수 없는데 이것은 분명 처음의 단단한 성질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상반된 두 개의 성질은 어느 쪽이 바위의 본질일 것인가.
이 물음에 배타적인 대답은 있을 수 없다.
구태여 말한다면 단단함과 유동성 두 가지가 다 바위의 본질이다.
사물에는 고유한 본질이 없다는 사실을 그것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고유한 본질이 없는 사물은 그 자체 이외의 다른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바위가 물에 흘러간다>고 말해도 아무 탈이 없다.
시는 바로 이런 사실을 철저하게 꿰뚫어 보고 사물을 이해한 언어이다.
3
슬퍼 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이 세상에는 적지 않다.
그때는 슬퍼해 봐도 물론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슬퍼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슬픔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슬픔은 가장 순수하고 따라서 값지다
4
시가 말 그대로 의미있는 창작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방법론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 필수적인 방법론은 평생 준수할 법칙이 아니라 내일이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방법론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넘어섬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방법론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어찌 그것을 극복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면 시의 방법론은 의미 있는 창작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13
인류 창생 이래 여태까지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모두 말없이 죽어갔고,
또 그러해서 이 지구에는 아무런 말썽도 생기지 않았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은
이 놀라움에 대해
살아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놀라움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
이형기
적막강산에 비 내린다.
늙은 바람기
먼 산 변두리를 슬며시 돌아서
저문 창가에 머물 때
저버린 일상
으슥한 평면에
가늘고 차운 것이 비처럼 내린다.
나직한 구름자리
타지 않는 日暮......
텅 빈 내 꿈의 뒤란에
시든 잡초 적시며 비는 내린다.
지금은 누구나
가진 것 하나하나 내놓아야 할 때
풍경은 정좌하고
산은 멀리 물러앉아 우는데
나를 에워싼 적막강산
그저 이렇게 빗속에서 저문다.
살고 싶어라.
사람 그리운 정에 못 이겨
차라리 사람 없는 곳에 살아서
청명과 불안
기대와 허무
천지에 자욱한 가랑비 내리니
아 이 적막강산에 살고 싶어라.
비 오는 날
이형기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도 갈앉은
저녁 하늘에
눈먼 우화는 끝났다더라.
한 색 보라로 칠을 하고
길 아닌 천 리를
더듬어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너머 산너머서 네가 오듯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 보다.
비의 나라
이형기
비가 온다
나는 비의 나라 왕이다
비로 지은 궁정
비 내리는 창밖에는
저기압의 깃발 바람에 나부끼며
우수(憂愁)의 성으로 쳐들어가는 충용한 군사들
먼바다에서 모두 전사해 버린다
그들의 패망으로
새로 또 확장되는 나의 패망의 영토
확실한 소유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상실만이 확실하게 남아서
나의 왕권을 강화해 준다
그것은 지도가 필요 없는 나라
있는 것은 없고
없는 것은 있어서
두개골을 뚫고 뇌장에도 비가 오는 그 나라
아침이 되면
밤에서 다시 밤으로 층계를 내려가는
시계 소리 들린다
그리고 밤의 밑바닥에 피어 있는 꽃
보이지 않는 검은 해바라기
방사능처럼 고독한 빛살을 펼쳐서
천지사방에 비가 온다
나는 비의 나라 왕이다
빈 들에 홀로
이형기
눈비가 오려나
호지(胡地) 일모(日暮)
먼 산자락 넘어
구름은 가고
정은 만 리
청노새 울음
호지 일모에
눈비 오려나
저녁 바람 분다
빈 들에 홀로
산 비
이형기
산에 오는 비는
소리만 난다.
먼 데서 또닥또닥
가슴을 두드린다.
몰래 젖고
몰래 잠이 든다.
단조로운 꿈을
되풀이한다.
문득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운무만리(雲霧萬里)를
단숨에 난다.
산
이형기
이 가을
석류가 익는다
익어서 반쯤 벌어져 있다
실은 지난봄
어느 시인의 대뇌 좌우반구
그 뇌막에 퍼지기 시작한 작은 물집들
물집 모양의 종양들이 하나 가득 알알이 익어서
석류처럼 절로 벌어진 이 가을
사람들아
와서 그 속을 들여다보아라
정원의 석류나무 그늘에 흔들의자를 내놓고
흔들흔들 바람을 타고 가는 시인의
반쯤 열린 의식의 病巢
아니 그 꿈의 밀실을
가을이 없는 킴벌리 광산의
깊이 감추어진 가을의 속살
눈부신 노다지가 거기 있다
그리고 또 늙은 창녀의······
밤이면 밤마다
머리를 쥐어뜯곤 하던
지난 봄부터의 가려움의 발작이
이제는 갈 데까지 가서 도리어
석류처럼 알이 찬 이 結晶
그러기에 시인은
봄이 아니라 가을에 미친다
맑은 정신으로
새 발자국 고수레
이형기
내 죽거들랑 무덤을 짓지 말라
하물며 돌에 문자를 새긴 묘비일까 보냐
그냥 불에 태운 뼛가루 두어 줌
강가에 뿌리면 그만이다
그러면 나는
원래의 내 자리
실은 누구나 게서 온 그 자리
텅 빈 가이없는 허공으로
깨끗한 잊어짐의 길 떠나갈 것이다
비 오는 날이면
추적대는 빗줄기
휴우휴우 바람 부는 밤이면
불어대는 그 바람으로 날려서
공중에 무수하게 찍혀 있는
새의 발자국 그것이나 주워서
가는 길 하늘에 고수레하고
기꺼이 사라질 것이다
무엇이든 마지막엔 드러나는 바탕
아무것도 없음이여
억조(億兆)의 죽음을 삼키고도 예전 그대로
없음만이 찰랑대는 그곳 허무의 집으로
나는 선선히 돌아갈 것이다
석류
이형기
이 가을
석류가 익는다
익어서 반쯤 벌어져 있다
실은 지난봄
어느 시인의 대뇌 좌우반구
그 뇌막에 퍼지기 시작한 작은 물집들
물집 모양의 종양들이 하나 가득 알알이 익어서
석류처럼 절로 벌어진 이 가을
사람들아
와서 그 속을 들여다보아라
정원의 석류나무 그늘에 흔들의자를 내놓고
흔들흔들 바람을 타고 가는 시인의
반쯤 열린 의식의 病巢
아니 그 꿈의 밀실을
가을이 없는 킴벌리 광산의
깊이 감추어진 가을의 속살
눈부신 노다지가 거기 있다
그리고 또 늙은 창녀의······
밤이면 밤마다
머리를 쥐어뜯곤 하던
지난 봄부터의 가려움의 발작이
이제는 갈 데까지 가서 도리어
석류처럼 알이 찬 이 結晶
그러기에 시인은
봄이 아니라 가을에 미친다
맑은 정신으로
소리
이형기
살을 에는 아픔이
순간 온 몸속에 흐른다
그리고 나는
캄캄한 어둠 속에 묻힌다
그 어두움에 대고
누가 돌 하나를 던진다
이윽고 툭하고 떨어지는
어둠의 밑바닥
소리한테 소리가 빨려 들어가서
침묵이 되는 그 소리
소묘
이형기
산에 올 때마다 가을은 한 겹씩 옷을 벗는다.
잘 익은 그러나 욕정엔 물들지 않은 그녀의 육체
팽팽한 탄력이 곡선에 눌려 더욱 뚜렷하다.
말끔히 씻긴 眼睛
눈으로도 맡는 향긋한 내음
어떠한 장식도 완미(完美) 앞에서는 남루에 불과하다.
차라리 낙엽처럼 떨어버려야 한다.
그러나 나는 해마다 그녀의 나체를 보는 덴 실패한다.
누구나 그녀의 슈미즈까지밖엔 볼 수 없을 것이다.
전라가 되려는 그 찰나에 겨울이 덮쳐 버리기 때문이다.
악한은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때를 노리고 겨울은 지금도
저 풀숲 어디쯤에 숨어 있을는지 모른다.
소풍
이형기
소록도로 가고 싶다
문둥이 주제에 소풍이 당할까만
이 봄날 이 햇볕 아래서
문둥이는 문둥이끼리 손을 잡고
소풍 한번 가고 싶다
어제는 또 발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겨우 두 개 남은 오른발 발가락이
그 오른발 아주 못쓰기 전에
절뚝거리면서 저편 들길을 지나
해변까지 걸어가고 싶다
꼭 돌아와야 하는 소풍은 아니다
가서 늦어져 이쪽에 등불이 켜질 때
아무 생각 말고 그 등불
멍하니 바라보다 그만 잠들어버리는
그런 소풍
하지만 도시락 점심도 싸야 한다
수통에는 물을 채우고
소주도 몇병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아직 한데는 한데
옷은 좀 두툼하게 껴입어야 한다
그러면 준비가 다 끝나는 소풍
그것은 얼마나 즐거울까
슬플 수도 있으련만 슬프다는 말은
하지 않고 웃는다
그냥 웃는다
그런 소풍을 가고 싶다
문둥이가 문둥이끼리 손을 잡고 가는
성한 사람은 낄 수 없는 소풍
귀로가 늦어져 마을에 켜진 등불을
바라보다 잠드는
그런 소풍을 가고 싶다
손
이형기
그대의 사랑을 나는 이 손으로 느낀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잠든 한 떨기 꽃,
꽃 같은 손이다.
깨어나면 어느덧 턱밑에 수염이 자란 손,
노동하는 손이다.
대폿집에서 빈대떡을 집으며
눈보라 치는 밤에 호호 입김을 불며
그 손을 펴들고 받드는 중량,
휘어지는 반동,
그러나 내게 남은 체온을
악수로써 친구들과 나누는 손이다.
모든 사람들이 손을 잡는 손.
실은 나 혼자 이마를 짚는 손.
추억의 그네줄을 잡고 멀리 하늘을 날으는 손.
무한한 가능의 항로 위에서
또는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벽 앞에서
때로 내 손은 춤을 추지만
때로 내 손은 속수무책이다.
송가(頌歌)
이형기
나는 아무것도 너에게 줄 것이 없다
다만 무력(無力)을 고백하는 나의 신뢰와
그리고 이 하찮은 두어 줄 시밖에.
내 마음 항아리처럼 비어 있고
너는 언제나
향그러운 술이 되어 그것을 채운다.
정신의 불안과 그보다
더 무거운 생활에 이끌려
황막한 벌판
또는 비내리는 밤거리의 처마 밑에서
내가 쓰디쓴 여수(旅愁)에 잠길 때
너는 무심코 사생(寫生)에 주었다
토요일 오후의 맑은 하늘을.
어쩌면 꽃
어쩌면 잎새
어쩌면 산마루에 바람 소리
흐르는 물소리
아니 이 모든 것은 전체와 그밖에
또 헤아릴 수 없이 풍성한 토지와
차운 대리석!
아 너는 진실로 교목(喬木)같이 크고
나는 너의 그늘 아래 잠이 든
여름철 보채는 소년에 불과하다.
술래잡기
이형기
1
누군가를 찾고 있다
아무리 찾아봐도 허탕밖에 없는
아무도 없는 이 벌판에서
그래도 찾아야 할 누가 있나 두리번거리니
쉿! 저기 안 보이는 저기
숨은 듯 아닌 듯한 그림자
보니 그것은 나 자신이다
필경은 나를 찾는
확실하고 허망한 이 술래잡기!
2
술래잡기만 하면
나는 언제나 술래였다
동네의 허물어진 돌담 모퉁이
또는 전신주에 기대 눈을 감고
무궁화꽃을 피웠다
애들은 잘도 숨어서
누구도 들키지 않았다
아니 들켜도 나보다 먼저 달려가
술래판을 밟았고
나는 또 술래가 되었다
어느덧 해는 꼴깍 지고
애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
판은 오래전에 끝나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술래인 채로
혼자 무궁화꽃을 피운다
이제 애들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술래
- 찌뽕 잡았다!
달려가면 그것은 허깨비였지만
허깨비라도 걸려라 우직한 술래한테
슬로비디오
이형기
날으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 - 제논
자 골인의 순간이다.
승자여 너의 영광을 보라,
마치 무중력 상태에서처럼
일그러진 표정으로 맥없이
허우적거리는
옆구리찔러 절받기로
슬쩍 옆구리를 찔렀더니
그도 장난삼아 천천히 허리를 굽히고
또 무릎을 꾼다.
일러 가로되 케이오의 순간이다.
허구(虛構)로써 허구(虛構)의 껍질을 벗기는
슬로비디오
나는 그대들의 진실을 비웃고
거짓으로 죽으리라
하마처럼 크게 하품을 하면서
자 절명의 순간이다.
칼을 맞고
뒤로 몸을 뻗대는 나의
무용교본의 사진판 도해(圖解) 같은
슬로비디오
시계
이형기
그 쇠붙이 가공물은 죽어 있다
뚜껑속에 갇힌채
차겁게 조그맣게
망각을 베고 누운 병사의 시체
그 팔뚝에서 그것은 살아난다
도둑처럼 혼자 몰래
귀를 기울이면
재깍재깍 정확한 숨소리
아니 저벅저벅 곁눈질이 없는
일정한 보조의 군화소리
살아난 그것은 행진해 간다
보무당당하게 앞으로 앞으로
이 세상 끝까지
그 너머 저쪽까지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
이형기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은
밤에 또한 잠을 못 잔다.
국산 수면제 스리나
그 매끈매끈한 하얀 정제 속에는
꿈이 스며들 틈이 없고나.
차라리 아무것도 생각지 않지만
때로는 너무 생각이 많다.
생각이 많을수록 하얀 정제를······
아아 내게서 꿈을 내쫓고
복용,
한 시간 전후에 동물적인 수면을······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은
잠에 취해서 꿈을 잊어버린다.
시의 바다
이형기
그 나라의 시인들은
해변 모래판에 시를 쓴다.
이내 파도가 밀려와서
그들의 시를 모두 지워버린다
순간의 소멸이다
이윽고 바다가
그 파도를 또한 삼켜버린다
허구한 날
그렇게 되풀이하다 보니 어느새
멀리 수평선 저쪽까지
검푸르게 시의 독이 퍼진 바다
시가 된 바다
그 나라의 시인들은 해변 모래판에
시가 아닌 순간의 소멸을 쌓아
바다를 만든다
신 만전춘
이형기
얼음우에 댓닢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얼어 죽으려고
한겨울 이 밤 더디 새라 했더니
그리하여 가슴 저리는 사랑노래
애절한 꿈으로 하나 남기려 했더니
아서라 말아라
때는 바야흐로 지구 온난화시대
거대한 그 온실 안에서는
아무데도 얼음이 얼지 않는구나
아희야 댓닢자리 치워라
님과 나와 택시 잡아타고
포근한 러브 호텔 침대로 가리니
실솔가
이형기
설움이 도른도른
물같이 흐르는
가을밤 귀뚜리
초갓 지붕에
뚫어진 영창 위에
조용히 잠든 눈시울 위에
옛날 옛날 먼 이야기
몇 구비 돌아간 연륜(年輪) 자욱
달은 밝았다
나는 울고 싶었다
모두가 그날 같은
가을밤
귀뚜리......
그렇게 가지런한
그림 한 폭
악어
이형기
악어는 왜 하필 악어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악어는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지 모르겠다
그 눈물 뒤에는 보이지 않는 용용죽겠지가 숨어 있다
용용죽겠지하고 웃는 악어
그 웃음을
단지 눈물로만 드러내는 악어
악어의 눈물이 뿌려진 오솔길을
엉금엉금 기어가는 악어
목에 딸랑딸랑 방울을
달고 있으면 좋으련만 악어
그렇지도 못하고 악어는
왜 하필 악어인지 모르겠다.
안개
이형기
오늘도 이 도시엔
새벽부터 안개가 자욱하다
새벽부터라 했지만 사실은
초저녁이고 밤중이고 가리지 않고
밀려드는 안개
미세한 물방울인 그것들은
한데 뭉쳐서 강력한 안개
군단을 이룬다
그 군단의 포위 속에서
시민들은 눈만 뜨면 안개를 마시고
다시 안개로 녹아서
실체 없는 소문으로만 떠돈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합쳐져
구분이 없는 이 도시
그리하여 모든 것이
필경 안개로 돌아간다
안개가 전부다
암세포
이형기
우리의 번영은 하늘을 찌른다.
모든 성좌
모든 천체를 사정없이 덮치는
우주공간의 마라푼다 -
우리는 하늘마저 약탈해버린다.
일상의 때가 낀
티눈만도 못한 육안은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일편의 유리 조각과
그 위에 달라붙은 한 점 얼룩을 볼 뿐이다.
가장 냉정한 제삼자
현미경이여 네가 말하라
밤내 폭죽이 터지는 우리의 축제
광란의 증식
그 홀연한 성운의 탄생을……
우리에겐 아무런 제약이 없다.
폭탄처럼 자유롭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방지축
정체불명이다.
그렇다, 우리의 그 정체불명의 침략성
그러나 보라
평화는 오직 우리의 것이다.
막강한 군기(軍旗)가
명정(銘旌)보다도 화려하게 나부끼는 우리의 점령지
그곳은 너의 안식을 보장한다.
어느 공원
이형기
덩치가 너무 커져서
제 힘으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서
마침내 멸종한 공룡들이
산책을 즐기는 이 공원
원래는 번성하는 도시였다 한다
없어서가 아니라 많이 가져서
더 많이 가질 필요성만 자꾸 찾아낸
영리한 인간들이 세운 거대한 욕심의 집산처…
잠도 자지 않는 집들을
더 크게 더 높이
하늘로 하늘로 치솟아 올린 철근콘크리트가
그 자체의 무게에 짓눌려
공룡처럼 스스로 자멸한 도시
그 폐허
이제는 공원이 되어 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2억 년 전의 공룡들이 되살아나서
어슬렁 어슬렁 추억을 되새기며
산책을 즐기는 이 공원
인간들아 너희들이 없어도
지구는 이처럼 평화롭게 건재한다.
어젯밤 꿈에
이형기
어젯밤 꿈에 최군을 만났다
이십오년 만이던가
함께 거닐면서 얘기를 나누었지만
내용은 다 잊고 아득할 뿐이다
다만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그가
죽을 당시의 젊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동안에
이십오년보다 십년이나 더 늙어서
얼굴은 쭈글쭈글 머리도 벗어져
보기 숭하다
한 인간을
언제나 젊은 그대로 살게 하는 죽음과
젊은이를 사정없이 늙음으로 몰고가는
차원이 다른 두 개의 시간
최군은 내게 그 차이를 가르쳐주었다
꿈을 깨고 나니
이쪽 세상을 가득 채운 공해투성이 소음이
저쪽 세상의 바람 같은 적막 앞에 기를 펴지 못한다
귀가 멍한 허공의 울림 그 속에
살아서도 젊고 죽어서도 젊은 친구의 싱그러움
늙었지만 나도 거기 가서
자네 꿈속의 인물이 되고 싶다.
엑스레이 사진
이형기
장안유남아(長安有男兒) 이십심이후(二十心已朽) - 이하(李賀)
폐허의 풍경을 잡은
이 사진은 앵글이 기막히다.
뼈대만 남은 고층건물
앙상한 늑골 새로
죽어서 납덩이가 된 도시를 보여준다.
그 배경
담천(曇天)을 가로질러 모여든
까마귀 한 떼
무엇인가를 파먹고 있다.
사람의 가슴이
가슴속에 흐르는 피가 붉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터지는 검은 먹물
그리고 폐허는 질척거린다.
내일이면 함몰
다시 내일이면 늪이 될 폐허
수수께끼의 광선 엑스레이는
이처럼 오직 사실만을 증명한다.
연애편지
이형기
구식이긴 하지만
편지는 역시 연애편지가 제일이다
수동이든 전동이든
편리한 타자기론 한숨이 배지 않아
쓸 수 없는 편지
그래서 꼭 쥔 연필 한 자루
입맞추듯 때때로 침을 묻혀가면서
글씨야 예뻐져라 또박또박
또박또박이 재깍재깍으로 바뀌어
밤을 새는 편지
답장은 없다 다만 창밖에
스산한 찬바람이 낙엽을 굴린다
(그래야지 그래야지)
그래야만 애가 타서 또 쓰는 편지
그것은 타자 쳐서 사진식자로 인쇄하는
홍보용 인사장이 아니다
일 대 일이다
이쪽도 혼자 저쪽도 혼자
실은 저쪽한테 묻지도 않고 이쪽이 혼자
또박또박 재깍재깍 밤을 새우는
지금도 창밖에는
답장 없는 스산한 찬바람
낙엽이 굴고 있다
(그래야지 그래야지)
그래야만 애가 타서 또 쓸밖에 없는
편지는 역시 연애편지가 제일이다
외톨 바다
이형기
바다를 말린다.
햇볕으로 슬슬
바람으로 슬슬
그리하여 드러난 개펄을 또한
세월아 네월아
슬슬 말린다.
이제는 하느님도 회수할 수 없는
하느님이 뿌린 공포의 표백제
무색 투명한 시간의 분말이
바다를 그 연골까지 속속들이
흡수해버린다.
어느 날 사람들은
그 빈터를 사막이라 불렀다.
모래 한 알마다에
말라버린 바다의 최종단위
운모질(雲母質) 반짝임이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외톨 바다.
외톨이 무수한 외톨 불러모아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바다
갇힌 바다.
그래도 바다에는 잔물결 인다.
아니 잔물결 덮치는 파도
사구(砂丘)의 대이동
아니 파도를 뒤집는 소용돌이
타크라마칸의 모래 소용돌이
외톨 바다의 폭발!
우체부 김씨
이형기
이 도시에는
편지를 쓰는 시민이 아무도 없다
전화를 두고
팩시를 두고
성가시게 편지는 무슨 편지
하지만 우체부 김씨의 우편낭은
산타클로스의 선물푸대보다 더 크다
그 속에 가득 찬
안 사면 손해인 소비자의 복음
홍보용 인쇄물
공짜로 줄 듯한 모델 아가씨의 미소와
모시는 말씀 알리는 말씀
말씀만 쏙 빠지게 다듬어낸 활자들은
마음이 없기에 어떤 마음도 가질 수 있다
마음이 어디 밥 먹여 주는가!
우체부 김씨에겐
루돌프 사슴이 모는 썰매가 없다
그래도 매일이 크리스카스 같은 우편낭을
꼽추 콰지모도의 등에 난 혹처럼 메고
찾아오는 김씨
편지를 쓰지 않으니 받을 편지도 없어서
누구도 김씨를 기다리지 않는 이 도시
다만 쓰레기통만이
공짜로 줄 듯한 상냥한 아가씨와
모시는 말씀 알리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원형의 눈
이형기
당신은
일체의 장식을 버렸다
그리고 벌거벗은 맨몸의
한 조각 살
마지막 핏방울까지 다 흘려보냈다
또 살과 피한테 어우러진 정념과
정념의 뿌리
정신이란 이름의 마목도
역시 깨끗하게 빠져나갔다
부질없어라 눈은 보고 귀 듣고
코는 냄새 맡아 무엇할 것인가
당신에게는
오밀조밀 아기자기한 그런 기능도
이제는 한갓 소꿉놀이의 흔적
어질러진 뒷자리 치우고 나면
날씨는 청명하다
그러고 보니 엊그제까지의 모습은 허상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갖고
이제야말로 원형으로 돌아온 당신
촉루라는 이름은 좀 어렵다
알기 쉽게 해골박
누구나 이렇게 해골박이 될 것을
그 눈으로
아니 눈 있던 자리에 뻥 뚫린
바람이 씽씽 통하는 구멍으로
당신은 훤히 꿰뚫어 보고 있다
위약(違約)
이형기
1
약속은 그것을 지켰을 때보다
어겼을 때 더 많은 여운을 남긴다.
그만 깜박 잊어버린 약속,
사후(事後)에 느닷없이 생각이 나서
혀를 차는 약속,
조금은 섭섭하고 조금은 아쉽고
또 조금은 죄스럽고 또 조금은……
혀를 차지만 역시 조금은
조금은 그 여운이 남는다.
2
벌을 서서
청소 당번이 된 날의 하학 종소리,
여섯시 정각의 데이트를 놓친
여섯 번째의 괘종소리,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소리,
위약은 언제나 사후에 깨닫는
그 운명의 여운이다.
3
잠시 한눈을 파는 새
그 사람은 떠나가버렸다.
헤어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구나.
그늘이 밝음을 일깨워주듯
위약이 나를 일깨워준 약속의 무게,
또 그만한 삶의 무게,
조금은 단념하고 조금은 뉘우치고……
하지만 역시 조금은 그 여운이 남는다.
은하 그림
이형기
오늘 나는 그림을 그린다
은하의 그림이다
거기서는
별이 물되고 바람이 모래된다
철로가 없는데도 거기서는 또
기적소리 999
비둘기처럼 은하철도가 달린다
추락의 꿈을 싣고
우주의 낭떠러지 저쪽으로
실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마음 하나 펼쳐본 그림
별리 물되어 흐르고
바람이 모래되어 강변에 쌓이는
은하 그림
거기서는 또
백지가 스스로 불꽃으로 타올라
블랙홀로 가는 길을 밝힌다
이명증
이형기
나의 귀는 소라껍질
꼬불꼬불한 미로의 터널이 그 안에 뚫려 있다.
간교한 소시민 근성이 어느 날
그 안에 작은 악마 한 마리를 가두고
고막으로 출구를 봉쇄해버렸다.
악마도 갇히면 별수없는 듯
힘없이 울어대는 날이 있다.
앵앵앵 위잉위잉 이명증이여.
다시 들어보니
아뿔싸 그것은 악마가 아니라
가을밤 모기처럼 쇠약해진 내 꿈의 흐느낌.
그래도 제딴엔 안간힘을 다해
가증스런 소시민 근성의 추종자
나의 안면을 방해하고 있다.
아 너 아직 명맥은 살아 있구나 꿈이여.
병은 아니라고
다만 병적 증상일 뿐이라고 안심하라고
웃기는 동정적 진단이 떨어진 이명증이여.
일기 예보
이형기
한겨울
심야의 라디오 일기 예보는
듣기 전에 이미 가슴이 설렌다.
바람은 북동풍 초속 이십오 미터
심술로 퉁퉁 부은
천이십 밀리바의 저기압을 등에 업고
오호츠크해로 지금 눈보라를 몰고 간다.
모든 선박의 운항 금지를 명하는
폭풍경보
세상을 온통 꼼짝달싹 못하게
계엄령처럼 숨죽여 놓고
거동이 수상한 캄차카 반도는
공중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저 혼자 미쳐 날뛰는 오호츠크 해
그리고 눈보라를
내 가슴에 가득 채우는 한겨울
심야의 일기예보.
그것은 명왕성 저쪽으로부터
세기말의 감수성한테 보내는
은밀한 스탠바이 신호
지구 폭파의
디데이통보처럼 전율적이다.
거덜나리니
내 기꺼이 거덜나리니
바람아 광풍아 석달 열흘만 불어라!
전천후 산성비
이형기
우리 시대의 비는 계절과 무관하다.
시도 때도 없이
푸른 것은 모조리 갉아먹어 버리는
전천후 산성비.
그렇다 전천후로
비는 죽은 구근을 흔들어 깨워서
자꾸만 생산을 재촉하고 있다.
그래서 생산이 넘치고 넘치는
그래서 미처 다 소비하기도 전에
쓰레기통만 가득 채우는 시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다린다고는
누군가 참 잘도 말했다.
한때는 선지자의 예언처럼 고독했던
그러한 절망이 도처에서 천방지축으로
장미처럼 요란하게 꽃피고 있는 시대.
죽은 자의 욕망까지 흔들어 깨우면서
그 위에 내리는
시도 때도 없는 산성비.
사람들은 모두 우산을 쓰고 있다.
일회용 비닐우산이 되어버린
절망을 쓰고 있다.
비극이 되기에는
너무나 흔해빠진 우리 시대의 비.
대량생산의 장미를 쓰레기통에 가득 채우는
전천후 산성비 오늘도 내린다.
절벽
이형기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마라
높게
날카롭게
완강하게 버텨 서 있는 것
아스라한 그 정수리에선
몸을 던질밖에 다른 길이 없는
냉혹함으로
거기 그렇게 고립해 있고나
아아 절벽!
정적의 개
이형기
정적은 이상한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다.
그것은 짖기만 할 뿐 보이지 않는 개
이 세상 온갖 소리가 모두 잠들고 나면
정적은 놈을 슬그머니 풀어놓는다.
보이지 않는지라
딱히 어디라고 짚을 수도 없는 어둠 속에서
놈은 짖어댄다.
짖는다고 했지만 때로는 신음 같고
또 때로는 비명 같은 그 소리.
놈은 틀림없이 병들어 있다.
소음은 귀를 막으면 꺼지지만
그 소리는 귀를 막을수록 날카롭게 아니 음침하게
지구의 밑바닥까지 울린다.
실은 그 지구 밑바닥에서 혼자
병든 개 한 마리로 어슬렁대고 있는 정적
놈이 제 고독을 그렇게 짖고 있다.
식, 꺼져라. 이놈의 개!
종전차(終電車)
이형기
멀리서 삐걱거리며
종전차는 간다.
마즈막 기대가 실려 간다.
내 가슴에 역력한 차바퀴
여인아
그곳에 눈물을 쏟으라
약한 자의 침실에는
달이 비칠 것이다. 오늘밤
자비의 명월(明月)이
다사롭고나. 오히려
생활에 찌든 검은 손등을
어루만지는 자비의 월광(月光)
아아 인생의 희비는
가벼운 싸락눈이다.
또 그처럼 무심한 은혜다.
어디에서고 내가
팔을 벼고 누웠는 창 밖을
가는 종전차.
죽지 않는 도시
이형기
이 도시의 시민들은 아무도 죽지 않는다
어제 분명히 죽었는데도
오늘은 또 거뜬히 살아나서
조간을 펼쳐 든 스트랄드브라그 씨의 아침 식탁
그것은 위대한 생명공학의 승리
인공 합성의 디엔에이 주사한 대가
시민들의 영생불사를 확실하게 보장하고 있다
교통사고로 머리가 깨어진 채
오토바이의 엑셀레이터를 밟아대는 젊은 폭주족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서
수술한 배를 그냥 덮어버린 노인이
내기 장기를 두다가 싸운다
아무도 죽지 않기 때문에
장사를 망치고 죽을 지경인 장의사 주인도
죽지 않고 살아서 계속 파리를 날린다
1년에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는 계산은
전설이 되어버린 도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누구도 제 나이를 아는 사람이 없다
젊어도 늙고
늙어도 늙고
태어날 때부터 이미 폭삭 늙어서
온통 노욕과 고집불통만 칡넝쿨처럼 칭칭
무성하게 뻗어난 도시
실연한 백발의 노처녀가 드디어 목을 맨다
그러나 결코 죽을 수는 없는
차가운 디엔에이의 위력
스스로 개발한 첨단의 생명공학이
죽음에의 길마저 차단해버린 문명의 막바지에서
시민들의 소망은 하나밖에 없다
아 죽고 싶다
징깽맨이*의 편지
이형기
여보게 친구
쇠붙이에도 혼령이 있다네
더구나 방짜쇠 구리와 주석을
대충 4대 1로 섞어 녹인 그 방짜쇠에는
지리산의 물돌
물돌로 만든 틀에
방짜쇠 그 쇳물을 부어 굳힌 바디기에는
바디기를 다시 불에 담궈
앞메 전메 센메
세 메꾼이 메질하는 늘품질
그리고는 바디기 가장자리를 두들겨 세워
시울을 만드는 돋음질
다음은 부질일세 징 모양을 잡아주는
그러나 아직은 징이 아니야
혼령이 잠든 한밤중의 백치(白痴)
눈뜨라 혼령아 징의 혼령아
중망치로 두드려 흔들어 깨우면
우웅 웅얼웅얼 무딘 울음 소리
여보게 친구
혼령은 울음일세
하지만 첫번 울음 풋울음은 설다네
익지 않았어
울음도 익어야만 제맛이 나서
남을 울리거든
뜸들이듯 두세 밤 더 재우지
그동안엔 징 바닥의
익어라 익은 만큼 드러나는 나이테
상사를 새긴다네
날이 새면 드디어 재울음을 깨울 차례
그렇지 깨우지 잠자는 울음
잠자는 혼령을
망치여 망치여
온몸에 전기가 통해 쩌릿쩌릿
손끝 떨리는 중망치여
어쩌면 내 가슴속 울음을 몽땅
징한테 먹여주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친구
울음말곤 혼령이 또 어디 있겠나
* 징깽맨이: 징장(匠)의 자조적 호칭.
찔레꽃
이형기
찔레꽃 피고 지는 이 언덕 이 고개
혼자 넘는 가슴에 함박눈 온다
가고 없는 사람의 먼 그림자는
여름철 그윽한 찔레꽃 향기
설움도 잊었더라 이 모진 세파도
사랑하기 때문에 지켜온 순정
헤어지는 오늘은 혼자 가려네
찔레꽃 한 아름 가슴에 안고
그대의 복을 빌며 돌아서는 날
눈 내리는 자하문 추억의 터전
순정일로 외줄기 가고 또 가고
찔레꽃 피는 길은 끝이 없어라
창(窓)
이형기
1
갈피 잡을 수 없는 엇갈린 생각을
네게 의지하면
나의 그리움은
비로소 하나의 영상을 이룬다.
허구헌 날
물같이 흐르는 세월의 단면을
조용히 가로막는 투명체
나의 창이여
언젠가는 모두가
검은 망각의 그늘에 묻힐 것을
너는 지금 영원과 연결시킨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유를 대듯이
추잡한 욕망이 순화되어가는 신비의 문
이 세상 온갖 하찮은 일상을
너는 하나하나 제 자리에 앉힌다.
그리하여 밤이면 밤마다 나는
창(窓), 너와 더불어 침묵하며
오래 오래 참고 기다리는
눈을 기른다. 절망하지 않는다.
2
나의 마음은 비어 있다.
오직 네가 와서
가득 채워 주기를 기다리는 뜻으로
이것을 하나 마련하였다.
소리치는 것보다
차라리 눈을 감고 인내의 한때
그리고 멀리
떠나가면 그만인 구름 같은 마음을
아아 이 조그만 면적에 기대서
나는 나의 반평생을 저울질한다.
애절한 박모
안개 서린 골목길
부슬비 오는 밤에
나는 먼 여행길에서 돌아오고 있다.
때로 나는 회의하고
때로 나는 눈물을 흘린다.
그것들이 얼룩진 초가집 영창 밖에
밤을 새워 우는 가을 풀벌레.
귀를 기울이면 가랑잎이 지는데
조심스런 네 발자욱 소리가 들린다.
비어 있는 내 마음의 갈구의 표지
창에 불이 켜 있는 것을 보아라.
초상정사(草上靜思)
이형기
풀밭에 호올로 눈을 감으면
아무래도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다.
연못에 구름이 스쳐가듯이
언젠가 내 가슴을 고이 스쳐 간
서러운 그림자가 있었나 보다.
마치 스스로의 더운 입김에
모란이 뚝뚝 져버리듯이
한 없이 나늘 울렸나 보다.
누구였기에
누구였기에
아아 진정 누구였기에 .....
풀밭에 호올로 눈을 감으면
어디선가 단 한 번 만난 사람을
아무래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칼을 간다
이형기
칼을 간다.
칼을 가는 소리 서걱서걱
이따금 날을 비춰보는
달빛.
지난 여름
호열자가 휩쓸고 간 마을에
이제사 돌아온 1년 만의 가을이다.
칼을 간다.
죽은 자 곁에
살아남은 자의 죽음이 있다.
밑바닥이 없는 가을의 밑바닥
눈이 있다.
칼을 간다.
칼을 갈 듯 그 눈을 간다.
이따금 날을 비춰보는 달빛
가을을 간다.
코끼리와 나그네
이형기
한 나그네
인도의 오지 정글에 가서
늙은 귀머거리 코끼리를 만난다
보자니 그는
테크노피아의 위생적인 살충제가 멸종시킨
귀뚜라미의 마지막 한 마리
들리지 않는 코끼리의 귓바퀴에 올라앉아
열심히 열심히 혼신의 힘으로
가을을 울어주고 있다
코스모스
이형기
언제나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니 꽃피는 코스모스였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 같은 그리움이었다.
송두리째--희망도, 절망도,
불타지 못하는 육신
머리를 박고 쓰러진 코스모스는
귀뚜리 우는 섬돌가에
몸부림쳐 새겨진 어룽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흐느끼지 않는 설움 홀로 달래며
목이 가늘도록 참아내련다.
까마득한 하늘가에
내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
편자
이형기
좋은 칼을 만들자면 좋은 강철을 구해야 한다. 좋은 강철이란 오랫동안 음습한 골방에 갇혀 빛을 보지 못한 강철이다. 일생 일대의 명도(名刀)를 만들려는 도공(刀工)은 그래서 강철을 일부러 땅에 묻고 세월을 보낸다. 이 거짓말 같은 참말은 돈키호테의 나라 에스파니아의 총포 제작자들에 의해 실증되고 있다. 거기서는 편자를 가리키는 Herraduras라는 말이 한편으론 성능 좋은 기병총의 총신을 뜻하기도 한다. 편자, 곧 총신인 것이다. 쉬르레알리즘의 은유처럼 당돌한 이 이질적인 양자의 결합에는 그러나 실제적인 이유가 있다. 즉 에스파니아에서는 노새의 낡아빠진 그러기에 버림받아 녹이 슨 편자를 모아 질좋은 소총의 그 총신을 만들기 때문이다. 녹슨 쇠는 병든 쇠, 그 병을 가령 건성(乾性) 괴저(壞疽)라 한다면 녹은 까실까실 마른 채 허물어져가는 세포 조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이 병든 쇠가 병들지 아니한 정상적인 쇠보다 인성(靭性)이 강해서 편자 곧 총신이 되는 이 엄연한 현실! 번쩍이는 칼날의 냉혹한은 녹슬고 부스러져 파멸하는 강철의 실은 깊이 감추어진 본성이다.
폭포
이형기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 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풍경에서
이형기
혼자 거닐어 외롭지 않구나
이 풍경.
보람이 무너진 빈자리
길은 아무데나 트여 있는 거리에
노을이 지는가,
日暮를 알리는
적막한 동굴 같은 종이 우는가.
이제는 옛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인생은, 아
떠나서 뒤에 남는 뉘우침으로
인생은 산다.
운다는 것이
도리어 한 오리 바람으로 통하는
이 풍경.
풍선 심장
이형기
심장을 만듭니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어
색칠을 합니다.
원래의 심장은
지난 여름 장마때
피가 모조리 씻겨 빠졌습니다.
그리고 장마 뒤의 불볕 속에서
내 심장
빈 껍데기만 남은 그것은
허물처럼 까실까실 말라버렸습니다.
이제는 쓸모가 없게 된 심장
구겨 뭉쳐 쓰레기통에 내버린 심장
한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심장을 달랍니다.
드리고 말고요
어렵잖은 일입니다.
당신의 맘에 꼭 드는
예쁘장한 심장
어두운 가슴 속에
감추어 둘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쩨쩨하게 혼자
독점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 둥둥 하늘에 띄우는 심장
떠다니다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심장
오늘 나는 그 풍선 심장에
곱게 곱게 색칠을 합니다.
하운(夏雲)
이형기
해안선을 따라
그 둘레만큼 커다란 어망을 던진다.
등허리가 밖으로 비어져 나와
육중하게 몸을 뒤트는 대어
그 비늘에 찬란한 금빛이 흩어질 때
바다는 일제히 함성을 지른다.
놓치지 말아라
힘껏 당겨라
아니 뛰어들어라 뛰어들어라
빙빙 도는 바다
곧추서는 바다
숨찬 뒤범벅
가슴에선가 아랫배에선가
불끈 솟는
아아 욕망의 하운(夏雲)
구름따라 바다는 돌연 승천한다.
항복에 대하여
이형기
항복한 자는
두 손을 번쩍 위로 치켜든다.
그리하여 뜻밖에도
하늘을 저 혼자 차지해버린다.
손은 완전히 비어 있다.
들었던 것도 내버리지 않으면
항복할 수가 없다.
막바지에 몰려 벌거벗고 나선
겨울 들판의 앙상한 나무 한 그루.
실은 행복에서
내리긋는 한 줄만 덜어내면 항복이다.
겨우 한 줄만 덜어내도
행복처럼 기를 쓰고 지킬 필요가 없는
항복의 축복.
하늘에 새 한 마리 날고 있다.
벌거벗은 겨울나무가 새가 되어
한 줄 덜어낸
항복의 그 가벼움을 날고 있다.
아니다. 퇴로가 차단된 막바지
추락의 꿈이
하늘을 다 차지한 새 한 마리
두 손을 치켜들고 그렇게 날리고 있다.
해가 져도 노을이 없다
이형기
한 세기가 저물고 있다
멸망의 아름다움
하늘에 붉게 타는 저녁노을은
그러나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지난 백년 동안 온통 파헤쳐져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는 지구
완전히 골병든 그 노파는 아랫도리를
겨우 사막으로 가렸을 뿐이다
그녀의 깊은 샘은 말라버렸다
거기서 흘러나오던 정액과 눈물
눈물과 같은 비율의 소금기의 바다는 흔적만으로
그 사막치마 밑에 감추어져 있다
불모의 쓰라림을
또다른 불모로써 견디고 있는
차가운 무표정이 그녀의 몫이다
그러나 지금은
소금이 필요없는 방부제의 시대
아무것도 썩지 않고 번영에 또 번영이 보태져
번영이 그대로 쓰레기가 되는 시대
멸망조차 방부제를 듬뿍 먹고
박제가 된 이 세기말의 저녁 하늘에는
해가 져도 타는 노을이 없다
해바라기
이형기
황혼이로다.
드디어 기우는 사직이로다.
변방에는 도둑의 무리
잔을 들고 고기를 뜯을 때
바닥난 내탕금(內帑金)
바닥을 보는 황음(荒淫)이로다.
해여
이제 막 숨을 거둔 해여
너를 향해
신들은 일제히 노래를 부르나니
오 바다
빛의 무덤
춤추는 어둠이로다.
보라
어둠 속에 일륜(一輪) 해바라기
왕(王)도 비빈(妃嬪)도 도둑도
모조리 삼켜버린 탐욕의 꽃이로다.
땅끝에 서는도다.
해일 경보
이형기
바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서버린 늦가을
텅 빈 일모(日暮)
일모(日暮)의 그때까지 숨을 죽인 채
그러나 음모의 효모균은 퍼지고
퍼져서는 서서히 부풀어올라
육중하게 몸을 뒤트는 바다
자정이 넘어서도 잠들지 못한다.
- 언젠가는 덮치리라.
일거에 요절을 내고야 말리라.
그리하여 지구를
다만 하나의 암벽으로 남겨
고립시키리라.
그것은 선캄브리아대의
밤마다의 폭풍우 속에 싹튼 꿈
부유하는 코아세르바트의 무리가
저마다 하나씩의 눈이 되어 교환한
은밀한 약속의 방전(放電)
40억 년 전의 그 전류에
귀를 앓는 사내가 밤을 새운다.
잠자리 날개처럼 떨고 있는 고막의
단속적인 경련
해일 경보의 전광판이 명멸하고 있다.
허무의 빛깔
이형기
여기는 인적 없는 바닷가
수많은 조개껍질 흩어져 있다
주워봐라 그 중의 오래된 하나를
파도가 일어서고 부서져 내리고
거기 햇빛과 또 달빛
그리고 어둠의 속살까지 속속들이 비쳐들어
십억 년 또는 이십억 년 까마득한 시간이 쌓인다
하필이면 조개껍질에
까닭을 알 수 없이 아로새겨진
오묘한 빛깔!
반투명의 흰 바탕에
엷은 분홍무늬 가늘게 곁들여져
파르스럼 떠올라 있다
십억 년 또는 이십억 년
덧없는 시간의 되풀이가 아무 뜻 없이
아름답게 녹아들어 하나된 그것은
없음이 만들어낸 없음의 빛깔
그래 그렇다 허무의 빛깔이다
호수
이형기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지는 이 호숫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던 것이
이렇게 고요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
황혼
이형기
누군가 목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다
흥건하게 흘러 번진 피
그 자리에 바다만큼 침묵이 고여 있다
지구 하나 그 속으로
꽃송이처럼 떨어져간다
그래도 아무 소리가 없는
오늘의 종말
실은 전세계의 벙어리들이 일제히
무엇인가를 외쳐대고 있다
소리로 가공되기 이전의
원유 같은 목청으로
희망의 집
이형기
그는 언제나 추위를 탄다
어깨를 웅크리고 주위를 살피면서
그가 찾아가는 술집은 희망의 집
한여름에도 눈이 내리는 집이다
눈은 그의 가장 힘겨운 부채
희망을 하얗게 묻어버린다
그리하여 지평선까지의 대평원
희망의 무덤이
지구처럼 둥글게 공중에 떠있는 집
무덤 위에서 눈을 한오큼 덜어내
그는 가슴에 불을 지핀다
불길에 녹아서
누군가 한동안 울다 간 것처럼
바닥이 조금 젖어있는 그 집
희망의 집
2월
이형기
어둡고 먼 곳에서
꿈같은 것이 피었다 지는 달 二月
삼십대 미망인의 창변에
잠시 깃든 마음의 공백...
二月은 그이보다 먼저와
그이를 기다리는 찻집의 난롯가
또는 서로 외면한 채
그러나 어디서 본듯한 사람끼리
어색한 마음새
행로에 차고 맑은 바람 불 때
二月은 문득 내 어린시절의 추억 같은 곳에서
아직도 희끗 희끗 눈 내리는
개울
징검다리를 건너 뛴다.
11월
이형기
그가 가고 있다
빈 들판 저쪽으로 구부정한 키
누군지 알 수 없는 그가 혼자 가고 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뒤돌아본다
순간 말문이 막히는 마른 침
얼굴이 없다!
백지 한 장
이목구비가 다 지워진
썰렁한 벽지 한 장
왜 그러나 이 친구
어디 아픈가?
실은 아무도 없는 들판
찬바람에 서걱대는 마른 풀잎들이
아까부터 그렇게 나보고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