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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느를 찾아서 3

15. 프란젠

 

그들은 여덟 시 직전에 로비에서 만났다. 루시는 가져온 옷 중에서 제일 멋진 검정색 옷으로 차려입었고, 앙드레는 넥타이를 착용할 때면 늘 경험하는 금방 질식할 듯한 느낌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사이러스는 불바르디에(파리의 큰 거리를 배회하는 플레이보이 족-역주) 분위기의 체크 무늬 정장 차림이었다. 그가 기사처럼 큰절을 하며 루시의 손을 잡더니 입을 맞췄다.

"아가씨, 아주 매혹적이오, 파리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아가씨 같아요."

루시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사이러스 뒤에 서 있던 젊은 호텔 웨이터 하나가 눈을 맞추기 위해 애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에게 미소 지어 준 그녀는 홍수 같은 불어 공격에 직면하고 말았다.

'방금 호텔까지 손님을 태워다 준 택시가 한 대 있다. 지금 비어있어서 타실 수 있다. 원하신다면 마드모아젤(아가씨)을 위해 기꺼이 그 택시를 붙잡아 줄 수 있다.'

홀린 듯한 그의 표정으로 보건대 사실은 택시가 아니라 마드모아젤을 붙잡고 싶은 속셈 같았다. 당황한 루시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한쪽에 서 있던 앙드레를 돌아보았다.

"이 사람, 지금 뭐라고 그래요?"

"자기가 수많은 여자들을 보았지만 당신한테 견줄 만한 여자는 없다고 하는군. 당신을 집에 데리고 가서 자기 엄마한테 소개시키고 싶대."

어쨌거나 그 택시를 잡아 탄 그들은 생제르맹 가를 지나 콩코드 다리를 건너갔다 화려한 교각들 밑으로 거대한 검정 리본처럼 펼쳐진 세느강 풍경에 루시가 숨을 죽였다. 그녀를 지켜보던 앙드레가 말했다.

"내가 룰루 당신을 위해 교각들에 불을 밝히라고 했어. 저기 오른쪽으로 보이는 게 튈르리 공원이고 바로 정면이 콩코드 광장이야. 비 오는 월요일 아침의 웨스트 브로드웨키와 맞먹는 풍경이지?"

특이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주변 풍경들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루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온통 투광 조명으로 칠해진 것 같은 건물들, 도로변에 자로 잰듯 정확하게 줄지어 선 나무들, 육중한 돌담들에 조각같이 드리운 짙은 그림자들. 파리의 밤 풍경을 처음 대한 그녀는 넋이 나간 듯 말이 없었다.

택시 기사는 한가하게 경치를 즐길 기분이 전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는 가속 페달을 힘차게 밟아 르와얄 가를 빠져나와 마들렌 광장으로 돌진하더니 오토바이 한 대 앞으로 갑자기 끼어들었다. 곧 욕이 쏟아졌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기분 좋은 듯 한마디 불퉁스럽게 내뱉으며 보도 쪽으로 차를 붙였다, 팁 액수가 적절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보나페티(많이 드세요-라고 중얼거린 다음 세 사람을 식당 입구 정면 보도에 남겨 놓은 채 다시 차량들 속으로 밀고 들어갔다. 입구 위에 붙은 간판을 보니 식당 이름 바로 밑에 스타급 주방장, 알랭 상드랑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약간 연극적인 기질이 느껴졌다.

루카스 카르통 식당의 기원은 18세기, 과감한 영국인 로버트 루카스가 먹는 즐거움을 박탈당하고 사는 파리 토박이들에게 냉육과 찐 푸딩을 제공하려고 개업한 타베른 앵글레(영국식 주막)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능성 없어 보이는 이 두 요리의 조합은 그러나 지역 식도락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루카스의 이름과 명성은 그의 사후에도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130여 년 후 식당이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면서 새 주인은 식당 이름을 타테른 루카스로 바꾸었다. 호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20세기 초, 이 점포는 아르 누보 양식으로 개조되었고, 1925년에 프랑시스 카르통으로 또 한 번 주인이 바뀌었다.

실내 분위기는 아마도 90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진 바 없을 것이다. 청동 장식제들이 놀랍도록 유려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거울과 장식용 조각 패널들, 화사함을 자랑하는 신선한 꽃들, 크림색의 큼직한 메뉴들 뒤에서 들려 오는 웅얼대는 목소리들,,, ,,, 전반적으로 호사스럽고 향락적인 분위기다.

사이러스가 양손을 비비며 마치 특별하게 효험 있는 산소라도 한 줄기 들이켜는 것처럼 만족스럽게 심호흡을 했다,

"프록 코트(남자의 의례용 긴 상의 -역주)에 실크햇으로 차려입고 왔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긴데,"

그가 실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의 손님이 와 계시는 것 같은가?"

식탁의 대부분이 말쑥하고 점잖게 차려입은 비즈니스맨들에게 점령당해 있었는데 매력은 없지만 이들이야말로 값비싼 식당의 핵심 기둥들이다. 검정 양복 패거리들 사이로 여자들 몇 명이 두드러져 보였다. 일부는 화장 분위기와 맞추어 돋보이는 보석들을 달고 있었고, 나머지 여자들은 다국적 군대와도 같은 기업을 확연히 보여 주는 맞춤 제복 차림들이었다. 그리고 실내 맨 끝 구석진 자리에 혼자 앉아 메뉴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이 보였는데, 그의 뒤에 달린 벽면 거울 속에 단정치 못한 그의 뒤통수가 비쳐져 있었다.

식당의 지배인이 그들 일행을 그쪽으로 안내해 가자 프란젠이 돋보기안경 너머로 올려다보았다. 앙드레와 사이러스를 훑고 난 그의 동그랗고 파란 눈이 루시를 보더니 휘둥그레졌다. 그는 다소 힘들게 일어나 살찐 손을 내밀고 탁자 위로 몸을 구부려 그들 세 사람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곰처럼 덩치가 컸는데 총알도 막아 낼 것 같은 두꺼운 갈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고 있어서 부피가 더 커 보였다. 맨 윗단추를 열어 놓은 체크 무의 셔츠에 다소 구김이 가 있었지만 노란 모직 넥타이를 곁들여 겨우 격식을 차린 시늉을 냈다.

그는 두상이 컸다, 길게 쭉 뻗은 코, 잘 다듬은 콧수염, 넓은 앞이마 위로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텁수룩하니 후광처럼 사방으로 삐쳐 나가 있었다. 그가 말을 하자 거의 완벽에 가까운 영어가 튀어나와, 네덜란드에선 보육원 시절부터 영어를 가르치나 싶을 정도였다.

"좀 의외입니다. 파인 씨 한 분만 오실 줄 알았는데."

그는 일행에게 다정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메뉴를 집어 들었다.

"오늘은 사교적인 자리 같군요, 아닌가요?"

"일도 약간 처리할 수 있겠죠. 미스 월콧과 미스터 켈리는 내 동료들이오. 대단히 신중한 친구들이란 건 내가 장담할 수 있소."

사이러스가 말했다.

식탁 옆에 서서 얼음통 놓을 자리를 만들고 있던 웨이터가 얼음통에서 물기가 뚝뚝 흐르는 술병을 상표가 보일 때까지 끌어올렸다.

술병을 힐끔 본 프란젠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이러스를 향해 미소 지었다.

"가정집에서 만든 샴페인이죠. 틀림없이 만족하실 겁니다. 아주 맛이 좋아요."

잠시 대화가 끊기고 병 코르크 마개를 뽑는, 급작스런 한숨보다 크지 않은 소리가 났고 술잔들에서 거품이 보글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사이러스가 식탁 위로 몸을 굽히더니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오늘 저녁 계산은 내가 책임지려 하니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꼭 내고 싶소."

그 네덜란드인은 자기 잔 밑동을 만지작거리며 사이러스의 말을 잠시 되씹는 듯했다, 그는 출발이 창 좋다고 생각했다 1상팀(100분의 1프랑-역주)까지도 물고 늘어져 협상하려 드는 저 인색한 홀츠 녀석과 전혀 다르다. 그가 고개를 약간 숙여 보이며 말했다.

"정말 후하시군요. 선생과 함께 일하면 마음이 서로 잘 맞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사이러스가 좌중을 둘러보며 잔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예술을 위해."

"사업을 위해."

프란젠이 말했다. 그러고 나서 덧붙였다.

"하지만 빈 속으론 안 되죠."

식탁 밑으로 무릎을 맞대고 앉은 루시와 앙드레는 메뉴를 두고 예의를 차려 가며 티격태격하는 두 노신사를 내버려둔 채 둘이서 무엇을 주문할기 의논했다. 앙드레는 요리명을 번역해 주고 루시는 넋을 잃고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누가 봤다면 둘이서 결혼 문제를 상의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앙드레가 비고르노(경단 고둥요리 -역주)에 대해 설명하느라 애를 먹고있는 중이었다.

"고둥의 일종이야, 룰루 알지? 식용 고둥. 바다에서 나는 거."

"생선 종류? 게 같은 거?"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구. 달팽이에 더 가깝지."

루시가 자기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리 드 보(송아지나 양 새끼의 흉선-역주)는 어떨까?"

"맛있지, 하지만 그게 뭔지 알고 나면 입맛이 싹 가실 텐데."

"그렇게나 끔찍한 거야?"

"그럼 . "

"좋아, 먹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군. 그럼 퀴스 드 그러뉴(개구리 넓적다리 요리 -역주)로 할까?"

"좋은 요리지 연한 닭고기하고 맛이 아주 비슷해."

"닭고기는 아닌가 봐?"

"응 개구리 허벅지 살이야."

"오우."

그러자 프란젠이 자신의 메뉴를 루시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내가 좀 도와 드릴까요? 프랑스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 가도 맛볼 수 없는 이곳만의 요리가 하나 있어요. 바로 카나르 아피시우스죠. 이 요리의 비법은 2천 년 전 로마인들로 거슬러 올라간답니다."

그는 말을 끊고 샴페인을 조금 마셨다.

"오리 요리이긴 하지만 어떤 오리 요리와도 다르죠. 꿀과 향신료에 절였다. 구운 오리로서 맛이 그야말로 환상적이에요. 이 오리 맛이야말로 평생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겁니다."

그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요란하게 입맞추어 찬사의 뜻을 표했다.

"당신 손자들에게 이 오리 얘길 들려줄 수 있을 겁니다."

루시는 자신에게 향해진 세 남자의 얼굴을 둘러보며 빙그레 웃었다.

"어떻게 하지? 그래요, 그 오리 요리로 하겠어요 "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오자 프란젠은 자신이 일행 모두의 식사를 지휘하는 사람인 듯 엄청난 열정과 해박한 지식으로 그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자 지배인과 소말리에(와인 감정가)가 서로 경쟁하듯 와인을 추천하여 그들의 식탁이 그 식당에서 제일 활기를 띠게 되었다. 주문이 끝난 후 앙드레가 프란젠에게 그 점을 지적했더니 네덜란드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야 아주 간단하오. 이런 식당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릇된 동기를 갖고 옵니다. 다시 말해서 저녁 한 끼에 몇천 프랑을 쓸 능력이 있다는 걸 과시하러 온다 이겁니다. 그들에겐 돈이 성스러운 것이니까 마치 교회에 와 있는 것처럼 행동하게 마련이죠."

그는 양손을 모으고 천장에 그려진 먼 옛날의 천사를 한번 올려다보았다.

"웃지도 않고 와인도 많이 먹지 않고, '구스토(맛을 즐기는 태도)'도 없고. 그러니 웨이터들이나 소말리에들로선 별로 재미가 없죠. 안 그렇겠어요? 맛보다 가격에 더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음식과 와인을 제공해 보았자 무슨 만족을 느낄 수 있겠소? !"

그는 잔을 마저 비우고 너더니 더 얘기하겠다는 뜻으로 지배인에게 눈을 징긋해 보였다.

"그러나 우린, 우리는 다릅니다. 우린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해 여기에 와 있어요. 진정한 식도락가라 이겁니다. 우린 주아 드 망제(먹는 즐거움)을 믿습니다. 주방장의 청중이 되어주죠.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점을 평가하고 있소. 그들은 우리가 통하는 사람들이란 걸 이미 알아챘어요. 식사가 끝날 무렵이면 아마 우리한테 술을 살 겁니다."

프란젠의 태도엔 거역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고, 게다가 파리에서 가장 훌륭한 요리들에 곁들여 부르고뉴와 보르도 산 와인을 쉴 새 없이 따라 마시다 보니 네 사람은 금세 편안한 동료들 같은 분위기로 빠져 들었다. 사이러스는 프란젠을 적절히 요리하고 있는 와인과 두 젊은이를 주시해 가며 때를 기다렸다. 이 자리의 목적을 털어놓을 적절한 순간을 포착할 셈이었다.

주요리를 먹어 치우고 잠시 휴식의 시간으로 접어들었을 때 마침내 기회가 왔다. 그러나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은 오히려 프란젠 쪽이었다.

"오리 요리를 먹고 나니 매일 저녁 여기 와서 식사하고 싶어지는군요."

냅킨으로 조심조심 콧수염을 닦으며 그가 말했다, 그러곤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로 말을 이었다.

"고정 예약 손님이 되어, 매일 밤 같은 식탁에 앉아 미리 얼음통에 담가 둔 와인을 마시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식당 측에서 환히 알고 있고, 이따금 주방장이 내 식탁에 놀러 오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냅킨을 셔츠 깃 속으로 다시 꽂고 난 그는 결론에 도달한 사람 같은 투로 냅킨을 가만히 쓸어내리더니 사이러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 같은 야망이 있으니만큼 내겐 일거리가 필요하오. 선생이 원하는 게 뭡니까? 뉴욕의 그 친구와 통화하긴 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거든요. , 말씀해 보시죠."

그림 그리는 사람들의 여린 감성과 자의식 강한 분방한 성향을 다년간 경험해 온 사이러스는, 우선 화가로서의 지위를 존경하고 있음을 이 네덜란드인에게 분명하게 확인시키면서 조심스레 접근해 가기 시작했다.

프란젠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생, 지금 피카소하고 얘기하는 거요? 난 그저 붓으로 벌어 먹고사는 직업인이라오."

사이러스가 말했다.

"그렇게 얘기하니 오히려 다행이오. 그럼 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난 세잔느가 필요하오."

프란젠의 양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거참 희한하군. 세잔느 작품은 1992년에 한 번 해보고 손을 놓았는데 금년엔 두 번째 작을 마치자마자 또 세잔느 작품이 들어오다니 그 늙은이, 인기가 좋은 모양이구먼 일이란 건 때때로 이런 식으로 풀린다니까요.

사이러스가 무어라고 덧붙이기 직전, 디저트 주문을 받으려고 지배인이 다가왔고 그러자 프란젠의 관심은 금세 그리로 쏠렸다.

", 모두들 메뉴를 다시 펼쳐 보시죠. 꼭 맛보셔야 할 게 있어요."

좌중의 일행이 그의 지시에 따르자 프란젠이 말을 이었다.

"치즈엔 적포도주를 마시는 게 일반적인 관행이죠. 하지만 여길 좀 보세요. 카망베르와 칼바도스(사과주-역주)에푸아세와 마르드 부르고뉴(포도찌꺼기로 만든 프랜디 -역주)뷔유 브레비스와 만자닐라(스페인산 포도주-역주). 모두 기가 막힌 조합들이죠. , 이 대단한 상상력! 대단한 탐구력!"

프란젠은 고개를 내저어가며 30여 가지에 달하는, 치즈별로 엄선해 놓은 술 목록을 계속 훑어 나갔다, 그가 메뉴를 내려놓고 다시 세잔느 얘기로 돌아오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난 세잔느를 아주 존경합니다만 꼭 그의 작품 때문만은 아니죠. 미안하지만 그 병 좀 건네 주시겠소? 내가 즐겨 얘기하곤 하는 세잔느의 일화를 하나 소개해 드리리다."

남은 보르도를 마저 따른 프란젠은 술잔을 들어 불빛에 비추더니 한숨을 내쉬고 나서 쭉 들이켰다

"화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세잔느 역시 살아생전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편이었는데, 그의 화풍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 경우도 허다했지요. 그가 엑상프로방스에 있을 때 얘깁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그 지방은 그림에 관한 한 결코 세계적 중심지라곤 할 수 없는 곳이죠. 어쨌거나 거기서 그의 작품 전시회가 열렸고, 늘 그렇듯 지역 비평가들도 다수 참석했죠. 세잔느는 우연히 그들 가운데 한 사람 뒤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 비평가는 그림 한 점을 두고 한창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얘기가 점점 불쾌한 쪽으로 발전되더니 드디어 아주 모욕적인 소리까지 한마디 곁들인 모양입니다. 세잔느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지요. 그가 비평가의 어깨를 톡톡 치자 그 사람이 뒤돌아보았습니다. '선생.' 세잔느가 말했습니다. '엿이나 먹으시지.' 그 말에 뭐라고 응수할 수 있었겠어요? 그때 그 비평가의 얼굴을 한 번 봤어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 저기 치즈가 오는군요."

치즈를 다 먹고 나자 사이러스는 다량의 코냑의 힘을 빌린 수완을 발휘해 점점 흥이 나는 이 네덜란드인을 사업 얘기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내일 아침 모두들 맑은 정신으로 프란젠의 화실에서 만나 세부 사항을 해결하기로 얘기가 됐다. 합의가 되자 프란젠은 내일 혹시 가벼운 점심이라도 하면서 모두의 새로운 관계를 자축하고 싶어지거든 자신이 잘 아는 곳으로 안내하겠노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루 데 생페레에 위치한 자신의 주소들 휘갈겨 적고 나서 아파트 현관문을 통과하는 데 필요한 비밀번호까지 적어 주었다. 사이러스 편에선 몽탈랑베르 호텔 방 번호를 적어 주었다.

세 명의 웨이터와 소말리에, 지배인이 정중하게 안내하는 가운데 좋은 밤이 되라는 인사를 받으며 그들은 식당에서 맨 마지막으로 나왔다. 대단히 훌륭한 만찬이었다. 마침내 그 네덜란드인을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나자 사이러스는 흡족한 기분이 되었다. 오늘 밤엔 그를 친구를 만들었다. 내일은 운만 따라준다면 그를 공범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호텔로 돌아오고 있었다, 와인 기운이 따뜻하게 올라오면서 시차로 인한 졸음이 쏟아졌다. 졸린 눈으로 생제르맹 가의 흐릿한 불빛들을 바라보던 루시는 어느새 끄덕끄덕 졸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앙드레? 우리 오늘 밤에 저 다리를 걸어 보기로 했죠? 그거 내일로 미루면 안 될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앙드레?"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사이러스 선생님?"

그녀는 백미러 속 택시 기사의 눈과 마주쳤다.

"도도(잠드셨네요). 두 분 다 잠에 빠져 있어요."

그가 말했다.

* * *

프란젠은 자신의 아파트로 들어섰다 코에 익은 유화 물감과 테레빈유 냄새가 머리에 밴 알코올 냄새를 뚫고 밀려왔다. 화실로 쓰고 있는 거실을 지나 자그만 부엌으로 곧장 간 그는 커피를 달이기 시작했다.

사이러스 파인은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루돌프 홀츠와는 아주 다르다. 퍼컬레이터(여과기가 달린 커피 끓이개 -역주)를 쳐다보며 앉아 있자니 해묵은 반감들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홀츠는 탐욕스럽다. 약한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야비한인 데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프란젠의 밥벌이를 제공해 주는 인물이고 두 사람 모두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점잖은 새 고객과 만나게 될 이 일을 기화로 다른 일거리들이 쭉 이어지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일 파인이 오면 포장을 끝내고 이송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저 두 점의 그림도 보여줘 버릴까? 두 그림을 나란히 보여 주면 그 거래상도 내 솜씨를 한결 높이 평가할 텐데.

커피를 준비하고, 오늘은 진짜 마지막이라고 결심하며 코냑을 한잔 더 따른 프잔젠은 닳아 빠진 가죽 의자에 몸을 묻고 주머니를 뒤져 담배 한 대를 찾아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전화는 계속해서 울렸다. 언젠가는, 아니 내일 당장이라도 자동 응답기를 사고 말겠다고 작정하면서 그는 어기적어기적 거실을 가로질러 가 수화기를 들었다.

"프란젠? 홀츠요. 파인 씨와 즐거운 저녁 식사를 했겠군 "

프란젠은 하품을 했다. 홀츠는 항상 이런 식이다. 고객을 소개해 주면 그 첫 만남에서부터 그림이 완성되고 물감이 마르는 순간까지 언제나 꼬치꼬치 참견한다. 점검하고, 귀찮게 볶아치고, 제 몫을 잘 챙겨줄지 반드시 확인한다.

", 아주 잘 통하는 사람이던데요."

"그가 원하는 게 뭐지?"

"세잔느요."

"젠장, 세잔느를 원한다는 건 나도 알아. 그 얘긴 자네한테 전화하기 전에 빌리에르한테서 들었다구. 세잔느의 어느 그림이냔 말이야?"

"아직은 몰라요."

홀츠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림이 뭔지 알아야 위작의 가격을 어림잡아 볼 수 있다. 아니 도대체, 저녁 내내 같이 있었으면서 일 얘기를 안 했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그는 짜증난 음성이 되지 않도록 애쓰며 말했다.

"언제 알게 될 것 같은가?"

"내일쯤. 오전 열 시에 그들이 내 화실로 올 거예요, 그때 ,,,,,,"

"그들? 그들이라니? 파인 혼자인 줄 알았는데."

", 아니에요. 두 사람 더 따라왔던데요. 젊은 남자하고 여자."

홀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이름이 뭐야? 그들의 이름 말일세."

"남자는 켈리, 앙드레 켈리예요. 여자는 루시라고 했어요. 성은 생각이 안 나고."

홀츠는 말을 잊은 채,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파크 애비뉴의 초저녁 차량 물결을 아무 생각 없이 응시했다.

"홀츠? 듣고 있어요?"

"자네, 거기서 나와야겠어. 그 그림들을 챙겨서 나오라구. 오늘 밤, 지금 당장,"

"왜요? 난 통 영문을 모르겠네, "

홀츠는 한차례 숨을 들이켜더니, 고집 센 아이를 타이르는 사람처럼 급한 마음을 겨우겨우 눌러 가며 말했다.

"그림들을 챙겨서 호텔로 들어가게. 방을 잡거든 내게 전화해서 자네의 위치를 알려 줘, 꼼짝 않고 전화기 옆에 붙어 있을 테니까. 내 말 똑똑히 들었나?"

프란젠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지금여기 시간이 몇 신 줄 알기나 해요?"

"이런, 답답한 사람 같으니. 심각한 문제란 말이야, 아무 소리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당장."

프란젠은 이미 끊긴 수화기를 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못 들은 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음 순간 직업적인 경계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다른 면으로야 어떤 인간이든 홀츠는 결코 쉽게 겁먹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가 심각한 일이라고 했다. 프란젠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숨겨 놓은 그림 두 점을 가지러 갔다.

홀츠는 서재에 앉아서 초조한 마음에 검정 스웨이드 가죽 실내화를 신은 발로 오부송 카펫 바닥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사진사 녀석. 도대체 파리로 가서 무슨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지금쯤 홍콩에 가 있어야 할 녀석이.

"자기?"

카밀라가 문간에 나타났다. 은빛 옥구슬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공들여 야회용 화장을 한 그녀는 자선의 밤 행사에 나갈 준비를 완전히 끝낸 상태였다.

"자기? 이러다 늦겠어."

"들어와 문이나 닫아, 우린 오늘 아무 데도 안 가."

 

 

16. 파라두

 

치밀어 오르는 울화로 갑자기 술이 다 깨버린 프란젠은 적막한 한밤의 거리를 재빨리 걸어 내려가 자신의 임대 차고가 위치한 골목길로 향했다. 그의 한 손엔 가방이, 다른 한 순엔 대형 알루미늄 아트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케이스 안에는 기포 고무와 거품 비닐로 겹겹이 싼 그림 두 점이 들어있었다. 폴 세잔느가 그린 <멜론과 여인>, 그리고 니코 프란젠이 그린 <멜론과 여인>. 두 그림의 합산가는 3천만 달러와 거스름돈.

한밤중에 그처럼 짐을 들고 파리의 뒷골목을 홀로 돌아다닌다는 것은 보통 때 같았으면 생각만 해도 오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골목길로 접어들 무렵엔 그러한 초조감도 점점 치밀어 오르는 울화에 밀려났고, 그 울화의 일부는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그는 홀츠 같은 인간을 결코 좋아하지 않으며 한 번도 그를 믿은 적이 없었다. 이쪽 계통에선 루돌프와 홀츠와 악수하고 난 후엔 반드시 손가락 수를 세어 봐야 한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홀츠가 시키는 그대로 움직이고 있는 신세다. 악성 편집증을 앓고 있는 자그만 인간에게 목줄이 매여 잡아끄는 대로 껑충대는 강아지처럼, 따뜻한 잠자리와 수익 높은 일거리 전망까지 떨치고 나와 밤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대체 뭐가 그리 심각하다는 건가? 파인에 대해선 이미 조회가 끝난 상태 아닌가? 미술계에서 유명한 성실한 거래상으로서 정직성 면에서도 인정받는 축에 드는 인물이라고 빌리에르가 힘주어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사람이 경찰에 밀고하는 짓거리를 하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차고 문 앞에 멈춰 선 프란젠은 귀가 너덜너덜한 고양이 한 마리가 호기심어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맹꽁이 열쇠를 찾아 더듬거렸다. 지난번에 이웃집 고양이 놈이 화실로 기어들어 와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쇠라(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역주)의 거의 완벽한 위작에 날카로운 발톱 자국을 남겨 버린 일을 생각하고, 그는 고양이를 향해 '쉬쉭' 소리를 냈다. 그는 고양이란 놈들을 증오했다. 도무지 예술을 알아보지 못하는 놈들이다.

차고 문을 연 그는 전깃불을 켰다. 고양이를 한 대 차버리려고 하자 녀석은 먼지로 얼룩진 시트로엥 DS의 보닛으로 훌쩍 뛰어 올라가 웅크렸다. 차고 벽들에는 연대별로 대충 추려 놓은 낡은 캔버스와 캔버스 틀이 수십 점 쌓아 올려져 있었다. 벼룩시장이나 가재도구 정리 세일 장에 부지런히 다니며 모아 온 수집품들로서 부지런한 날조자에겐 모두 훌륭한 재료였다.

프란젠은 커다란 덩치를 차 측면과 벽 사이로 밀어 넣고 그림 두 점을 차에 실은 다음 시동을 걸고 차고에서 빠져 나왔다. 차에서 내려 차고 불을 끄고 자물쇠를 잠그는 동안 게으르게 덜덜대는 디젤 엔진 소리가 골목길 담에 부딪혀 메아리 쳤다. 멀리 안전한 곳으로 달아난 좀전의 그 고양이가 원망스런 눈길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프란젠은 잠자리를 찾아 나섰다.

이미 새벽 한 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지금 시각에 호텔 문을 두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크리용 호텔의 더블룸 생각이 굴뚝같은 가운데 그는 리옹 역 뒤편의 음산한 골목길을 슬슬 돌아다녔다. 역전 부근 호텔들은 이런 유별난 시각에 찾아드는 손님들에게 익숙할 것 같았다.

호텔 레옹 투 콩포르란 전등 간판이 깜박이는 것을 마침내 발견했을 무렵에 그는 얼마나 지쳤던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호텔 앞 주차장엔 빈공간도 하나 있었다.

트랜지스터라디오와 모서리가 접힌 잡지를 까고 졸리운 듯 앉아 있던 알제리인 안내원은 일단 현금을 치르고 나서야 방 열쇠를 넘겨주었다. 그러곤 털 빠진 오렌지색 카펫이 깔린, 희미하게 불 밝혀진 콘크리트 계단 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프란젠은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좁다란 복도를 지나 마침내 하룻밤 묵게 될 방의 문을 열었다.

방에는 여기저기 얼룩이 진 침대와 커버와 쭈그러든 얇은 베개 두 개가 놓인 철제 침대가 있었다. 화장실을 욕실로 개조하느라 꽤나 고생한 모양이지만 완벽한 성공작은 아니었다. 서랍장과 침대 옆 탁자의 표면은 오래된 담뱃불 자국투성이고, 침대 머리맡에 걸린 흐릿한 에펠 탑 포스터엔 먼저 묵고 간 손님이 힘주어 휘갈긴 험악한 대문자들로 뒤덮여 있었다. 'MERDE(메르드, 빌어먹을)'. 루카스 카르통에서의 우아한 안락과는 참으로 거리가 먼 잠자리였다.

프란젠은 아트 케이스를 침대 밑에 밀어 넣고 나서 주소와 전화번호를 기록해 두는 메모장을 찾느라 잠시 여행 가방을 뒤졌다. 무심결에 침대 옆 탁자 쪽으로 손을 뻗던 그는 이 호텔의 설비 수준이 객실 전화에까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침대가 조금이라도 몸을 눕히고 싶어지는 구석이 있었다면, 아니 위생적으로 보이기만 했어도, 전화 거는 일은 아침으로 미뤘을 것이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메모장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 안내원 앞으로 갔다. 마지못해 센터포드(잡지 속에 누드사진 따위를 접어 넣은 페이지-역주)에서 눈을 뗀 안내원은 프란젠 쪽으로 전화기를 밀어주곤 스위치를 찰칵 눌러 통화 시간과 요금을 기록하는 자그만 기계를 작동시켰다.

첫 번째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홀츠가 응답했다.

"어디 있어? 전화번호를 대줘."

"됐어요, 이 싸구려 호텔엔 오늘 하룻밤만 묵을 거니까. 그건 그렇고,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켈리란 녀석 때문이야. 자네가 파인과 함께 만난 녀석 말이야. 드노이예의 집에서 그림을 빼내는 걸 그 녀석이 목격했어."

"그래서요?"

"그 녀석이 수상쩍어. 그가 왜 파인과 함께 있을 것 같은가? 뭣땜에 파리에까지 가 있겠냐구? 녀석 때문에 모든 일이 엉망이 될 수도 있어."

안내원은 사진 속에서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터질 것 같은 젊은 여자의 몸매를 다른 각도에서 즐기려고 잡지를 돌려 세우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 때문에 프란젠이 눈을 찡그렸다.

"이해가 안 돼요. 파인은 인터폴(국제 경찰-역주)이 아니고 거래상이라구요. 내가 그의 일을 해주면 그도 공범으로 연루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사람이 뭣 땜에 밀고를……."

"이해가 안 되면 할 필요없어. 자네한텐 그림을 그리라고 한 거지 생각하라고 돈을 준 건 아니니까. 잘 듣게. 내 얘긴 자네 화실 근방에서 어정대고 있으란 게 아니야. 깨끗이 행방을 감춰. 그런 다음 자네의 소재를 내게 알려 줘. 그리고 파인의 일을 맡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

프란젠은 윗입술을 깨물며 성질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짭짤한 수입을 포기하라 이 얘기요?"

"그래, 만일 파인의 일을 해주면 자넨 끝이야."

"협박하지 말아요, 홀츠. 그게 협박이 아니라면 약속이오?"

잠시 지직대는 잡음을 들으며 홀츠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려고 애썼다.

"니코, 니코, 우리가 지금 뭣 땜에 이렇게 싸우고 있는 거지?"

그림들이 현재 이 네덜란드인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는지, 홀츠는 갑자기 싹싹해진 태도로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우리가 함께 해온 일들을 생각해 보라구. 앞으로도 우린 함께 일할 거야. 좀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되지 않겠어? 내가 내일 파리고 날아갈 걸세. 우리 둘이서 모든 걸 처리하자구. 리츠 호텔에 자네 연락처를 남겨 두게나."

프란젠은 자그맣고 지저분한 접수처를 잠시 훑었다. 기름때 낀 플라스틱 나무 화분이 놓인 책상 너머에서 안내원이 잡지를 넘기려고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 있었다.

"리츠 호텔이란 말이죠."

그가 반복했다.

"내일 밤 만나세, 친구. 그림들을 가져오는 걸 잊으면 안 돼."

전화 요금을 지불한 프란젠은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호주머니에 든 것들을 모두 꺼내 탁자에 올려 놓던 그는 사이러스 파인의 명함이 눈에 띄자 잠시 동작을 멈췄다. 명함 뒤편엔 그이 호텔 방 전화번호가 휘갈겨져 있었다. 이제 결코 성사되지 못할 일이 되어 버렸다.

프란젠은 불쾌한 눈길로 침대를 쳐다보았다. 비듬 있는 사람들이 머물고 간 듯 지저분해 보였다. 감히 시트 속으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으므로 옷 입은 그대로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채 천장을 응시하며 홀츠를 생각했다. 빌어먹을 노랭이 영감.

"멍청한 네덜란드 녀석."

홀츠는 중얼거리며 양무릎을 싸안고 안락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카밀라를 쳐다보았다. 여태껏 혼쭐이 난 카밀라는 자신에게 퍼부어진 그 더러운 욕설의 상처에서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턱시도 차림의 그가 성난 늙은 난쟁이처럼 머리를 어깨에 묻고 잘 다듬어진 손가락들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침묵을 깨고 말하는 그녀의 음성에는 망설임이 깃들여 있었다.

"내가 할 일이라도 있어요?"

홀츠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마치 회의를 선언하는 사람처럼 책상 위에 양손을 쫙 펴고 말했다.

"내일 콩코드 편으로 파리로 갈 수 있게 해. 리츠 호텔에 전화해서 방도 하나 예약하고."

"나도 가야 해요?"

"당신도 쓸모가 있을지 모르니까 같이 가. 기분 전환도 될 테고."

그의 표정을 본 카밀라는 지금 무슨 얘길 해봤자 좋은 소릴 듣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밝은 면을 보자. 4월의 파리, 멋지잖아? 그녀는 전화도 걸고 짐도 꾸리려고 나왔다. 봄은 참으로 나해한 계절이다. 봄날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다시 자리에 앉은 홀츠는 프란젠과의 통화 내용을 곰곰이 되씹었다. 저 멍청이는 상황의 심각성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것이 바로 그림쟁이들의 맹점이다. 자기들 분야에선 얼마나 솜씨가 좋은지 몰라도 도무지 생각할 줄을 모른다. 아니, 하찮은 자신들의 관심사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전체 구도나 미래에 대해선 결코 생각하지 못한다. 비전이 없다.

만일 이번 실수가 계속 발전되도록 방치했더라면, 위작을 한 점 더 그렸다는 사실을 만에 하나 드노이예가 알게 됐더라면, 파인과 그 사진사가 경찰에 불었더라면, 참으로 끔찍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홀츠는 두 개의 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매년 들어오는 수백만 달러에 의존하여 지금과 같이 호화롭고 특권적인 생활을 계속 영위하는 길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상황이 복잡해지는 경우다. 드노이예와 사이가 틀어질 뿐 아니라 만천하에 알려지면서 루돌프 홀츠의 평판은 땅에 떨어지고,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 놓은 것들이 하루아침에 날아간다.

미술계란 데가 자기 기반을 잃은 회원에게 얼마나 냉정한지는 빌리에르의 경우만 봐도 자명하다. 죄를 범하는 것 자체는 결코 죄악이 아니다. 발각되는 것이야말로 사람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뭐라고 제안할까? 75? 10?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 사업에 드는, 정말 겁날 정도로 큰 액수의 비용을 생각하며 홀츠는 고개를 내저었다. 공제 가능성도 없는 지출이다.

예상치 못한 시각에 걸려 오는 전화들은 브루노 파라두에겐 일종의 직업적 재난이었다. 이 직업에선(그의 명함에 적힌 대로라면 '보안 이사') 불안과 당황은 다반사다. 고객들은 늘 초조해 하며 때로는 필사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워낙 그런 직업이라고 해도 새벽 세 시라는 시각에 기분 좋게 전화 받기란 그로서도 힘든 노릇이었다.

그는 아주 결연한 의지로 전화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포기하기 딱 좋게 으르렁대는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파라두? 나 홀츠네. 자네한테 줄 일거리가 있어."

"아탕(기다리세요)."

파라두는 거실에 가서 전화를 받으려고 나직이 코를 골고 있는 아내를 내버려둔 채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시간을 확인하고 난 그는 담배와 메모지를 전화기 옆에 갖다 놓고 거래상의 회의를 할 준비를 갖췄는데, 홀츠를 대할 땐 늘 이런 식으로 해야 했다.

"즈부 제쿠트(말씀해 보시죠)."

홀츠는 각별히 급한 일이라고 강조하면서 일에 대해 설명했다. 파라두는 그의 지시를 조목조목 되짚으면서 머릿속으로 값을 올려갔다. 보수를 깎으려 들 게 뻔하기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3만 정도는 될 거야."

홀츠가 말했다.

"두당?"

"미쳤어? 그들 모두에 대해서지."

"말도 안 돼요. 겨우 몇 시간 주고 그사이에 모든 일을 처리하라니. 우선 잠입해야죠, 둘러봐야죠, 물건 정리도 해야죠.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엄청나게 서둘러 해야 하는 일이니 보수도 최고라야 돼요. 그래야 말이 되죠."

홀츠는 한숨을 내쉬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네가 생각하는 최고의 보수는 얼마 정도를 말하는 건가?"

"10."

홀츠는 고통받는 동물의 소리에 가까운 신음을 한차례 내뱉고 나서야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5."

"75."

"이 악당. 내일 밤엔 내가 파리의 리츠 호텔에 가 있을 거야. 그리로 전화하게."

파라두는 옷을 갖춰 입고 나서 필요한 장비를 추려 보기 시작했다. 그는 빵빵하고 땅딸막한 체격에 짧게 깎은 검은 머리칼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외인부대에 있을 때부터 쭉 유지해 온 두발형이었다.

그가 홀츠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몇 년 전, 민간인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유명인들의 보디가드로 일하던 때였다. 그림 경매가 끝나고 파티가 벌어졌는데 그날 저녁 파라두의 고객이었던 무수한 이혼 경력의 한 여배우는 자신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가십 잡지 기자를 한사코 만나려 하지 않았다.

파라두는 그 기자의 코뼈를 부러뜨려 결국 구급차에 실려 나가게 만들어버렸는데, 그의 신중하고도 효율적인 활약에 홀츠는 큰 감명을 받았다. 그 후로 홀츠는 사업상 파라두의 남다른 기술이 필요할 때면 몇 차례 그에게 일을 시키곤 했다.

그러나 오늘 밤의 일은 격이 좀 달랐다. 상대를 위협하거나 뼈 몇 대를 부러뜨리는 따위의 늘 해오던 일들에 비해 다소 패기를 요하는 일이다. 그러나 가방 지퍼를 잠그는 파라두는 어느새 즐거이 콧노래를 흥얼대고 있었다.

단순한 폭력도 물론 즐겁지만 그러나 이제 그 정도론 충분치 않았다. 그에겐 군대가 자상하게 가르쳐 준 그 모든 것들을 써먹을 수 있는 일종의 도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번이 바로 그 기회였다. 보수를 높일 수 있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계획과 전문 능력을 제대로 검증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보수에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제 그는 스스로 선택한 전문직에서 한 차원 높아지려 하고 있었다.

몽파르나스에 위치한 그의 아파트에서 생페레까지 가는 길은 인적이 끊겨 고요했고 불과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혹시 경관이 길가에 잠복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신호들을 지켜 가며 조심조심 운전해 간 파라두는, 프란젠의 아파트 건물에서 5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주차 공간을 발견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였다. 시간이 좀더 주어졌으면 좋았을걸. 그는 라텍스 장갑을 끼고 가방에 든 것들을 점검한 다음 차 문을 잠갔다. 그러곤 고무로 밑창을 댄 신을 신고 소리나지 않게 움직였다.

아파트 건물은 이웃한 다른 건물들과 비슷한 유형으로서 삼면이 마당과 면해 있고 마당은 높은 담과 육중한 이중문에 의해 도로와 차단된 형태였다. 벽에는 전자식 키 패드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거주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흔히 출입 비밀번호를 매달 바꾸도록 되어 있었다.

파라두는 어둠 속에서 빙그레 웃었다. 불쌍한 풋내기들, 그래 봤자 말짱 헛거라는 걸 아시는지 모르겠네. 파리의 집주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결같다. 현대의 기술을 따라잡기엔 동작이 너무 느리고 투자에 인색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는 가방에서 가느다란 상자를 꺼내 키 패드 위에 붙인 다음 상자의 스위치를 켰다. 자그만 화면에 불빛이 들어오면서 아라비아 숫자 여섯 개가 나타났다. 그는 숫자를 읽은 다음 상자를 다시 가방에 넣고 비밀번호를 두드렸다. 무거운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파라두는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 같은 쾌감 속에서 잠시 어둠 속에 서서 마당을 둘러보았다. 현관문 위에 달린 등 외엔 불빛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꽃들이 심어진 작달막한 함지통들이 하얀 자갈밭과 대비되어 한결 더 까맣게 형체를 드러냈고 위층 창들은 덧문이 내려진 채 깜깜했다. 지금까진 아주 잘 되어 가고 있었다.

그가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문까지 가는 덴 2초밖에 걸리지 않았고 구식 자물쇠는 꼬챙이로 후비는 데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문 위쪽 유리 창살로 새어 들어온 불빛이 희미하게 현관 복도를 밝히고 있었는데 멀리 안쪽 벽에 기대 세워진 자전거와 돌계단의 우아한 곡선이 눈에 들어왔다.

두 개 층을 올라가 꼭대기 층에 다다른 그는 오른쪽 방문 앞에 섰다. 이번엔 여덟 살짜리도 딸 수 있을 것 같은 초보적인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파라두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처럼 빈약한 폐물을 믿고 살다니 그 믿음이 가상할 정도였다.

문을 닫고 들어선 그는 조심스레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지금까진 장난삼아 드라이브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흥미로운 영역에 들어섰다. 파라두는 회중전등을 켰다.

12미터는 됨직한 길이에 넓이도 거의 그 정도 되어 보이는 널찍한 실내가 불빛에 드러났다. 비스듬한 지붕에 설치된 채광창 밑으로 이젤과 커다란 작업대가 놓여 있었는데 작업대 위에는 붓통, 팔레트 나이프, 튜브형 물감과 병 물감, 말아 놓은 캔버스, 다양한 크기의 못과 압정들을 담아 놓은 낡은 주철통, 가장자리에 담배꽁초가 쪽 늘어선 놋쇠 재떨이 따위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작업 구역 너머로는 책과 신문 더미, 손대지 않은 거피 잔과 동그란 브랜디 잔이 놓인 나지막한 탁자 주위로 긴 의자 하나와 안락의자들이 모여 있었다. 더 안으로 들어간 파라두는 자그만 식탁을 지나 좁다란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이라고 해봐야 고작 대리석 표면의 조리대로 실내 한 쪽을 막아 구분해 놓은 공간이었다. 그는 바로 이거란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토브를 살펴보았다. 그는 가스를 좋아했다. 가스엔 가능성들이 있다.

짧은 통로 맨 끝에 위치한 침실과 욕실에선 아무런 흥미도, 감흥도 느끼지 못한 채 파라두는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브랜디 잔을 들고 냄새를 맡은 다음 한 모금 들이켰다. 화끈한 맛은 없었지만 아주 오래된 질 좋은 코냑의 온기가 슬슬 펴졌다.

그는 덧문 틈새로 2층 아래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사람 셋을 손잡고 다이빙하게 만들 계획이라고 있다면 여기가 아주 멋진 장소였다. 부어진 목들이 사방에 나뒹굴 것이다. 살아 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는 코냑 한 모금을 더 들이켜고 나서 부엌에서 거실 한중간의 거리를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서게 될 지점은 어디쯤일까? 작업대 다리에 기대 세워진 작고 금 간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것을 들어 텅 빈 이젤 위에 놓고 늘어진 작업복으로 캔버스 한 귀퉁이만 살짝 보이게 가렸다. 이제 누구든 작업복을 들추어보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파라두는 시간이 빠듯한 데 대해 욕설을 내뱉었다. 필요한 장치를 하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24시간만 더 여유가 있어 폭파 장치를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온 집안에 위장 폭탄을 가설하고 불꽃이 타들어 가기 시작할 때쯤엔 침대로 되돌아가 있을 텐데. 그러나 동틀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아서 잠시 후면 아파트 주민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할 터였다. 이쯤에서 그만둘 수밖에 없다.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절반은 이젤에 장착하고 나머지 절반은 스토브에 장착한 다음 전선으로 잇고, 전선은 바닥에 놓인 주조물에 테이프로 붙이거나 갈라진 바닥 판자 틈샐 쑤셔 넣었다. 부엌으로 가서 가스를 약하게 틀어 둔 다음 현관문으로 간 그는 손잡이만 살짝 틀어도 열리도록 빗장을 열어 두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실내를 둘러보고 나서 문을 살짝 닫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열 시에 도착할 거라고 홀츠는 말했었다. 그렇다면 아직 네 시간 넘게 시간이 있었다. 이 건물에서 제일 가까운 주차 공간을 차지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커피부터 한잔해야 했다.

회색빛 첫 여명이 밤하늘을 밀어내고 있을 즈음 그는 생제르맹 가를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프란젠은 침대 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불편하고 피곤한 하룻밤이었다. 리츠 호텔에 앉아 있는 홀츠의 모습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바람에 한 번씩 발작적으로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돈이 가득 든 가방 위에 이무기처럼 웅크리고 앉아 유혹의 손짓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땅딸막한 악당은 프란젠이 해주고 있는 일에는 어울리지 않은 인간이었다.

하품을 하면 기지개를 켜던 프란젠은 등에 뻐근한 마디들이 맺힌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그는 꺼칠꺼칠한 턱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갑자기 최상의 기분이 되었다. 이 불결하고 비참한 아침을 깨끗이 보상해 줄 완벽한 위안물이 침대 밑에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그에겐 그림들이 있었다.

열쇠를 반납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갈 즈음 그는 휘파람까지 불고 있었다. 안내원은 잡지 보는 재미에 지쳐 버렸는지 권태롭고 흐릿한 눈길로 바깥 거리를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다.

"결코 잊지 못할 하룻밤이었소. 손님 맞느 태도, 객실 상태, 서비스 수준, 한결같이 최고 수준이었소."

프란젠이 말했다.

안내원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찬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감동받지 않는 듯했다.

"샤워하셨수?"

"타월이 한 장도 없던데."

"타월은 내가 갖고 있죠. 20프랑입니다."

"그걸 미처 몰랐군."

프란젠은 여행 가방과 3천만 달러짜리 케이스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리옹 역의 모퉁이를 돌아갔다. 아침을 먹으면서 눈앞에 닥친 미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참이었다.

 

 

17. 구사일생

 

리옹 역 대합실 카페, 프란젠은 식탁에 나온 크르와상을 감상하며 앉아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대로 중간 부분은 황금색이고 양쪽 끄트머리는 짙은 갈색으로 구워져 있었다. 그는 빵 한 모서리를 커피에 적셔 한 입 베어물고 음미하며 씹었다. 이른 아침에 구운 신선함이 느껴지는 게 역전에서 파는 크르와상치곤 대단히 훌륭했다. 거키도 뜨겁고 진해서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프란젠은 속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겉모습은 약간 손봐 줄 필요가 있었다. 구겨진 셔츠와 그레이비(육즙 소스) 얼룩이 남은 넥타이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면도하고 샤워한 다음 깨끗한 셔츠로 갈아입자, 그러고 나서 오늘 하루르 공격할 채비를 갖추자. 식사가 끝나는 대로 괜찮은 호텔부터 찾아봐야겠다.

호텔 생각을 하니 리츠 호텔이 떠올랐고 자연스럽게 루돌프 홀츠와 만나기로 한 약속에 생각이 미쳤다. 그것은 프란젠으로선 도저히 즐거울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아파트에서까지 퇴거당했다고 생각하니 가슴 깊이에서 끓어 오르는 적개심을 누를 길이 없었다. 어젯밤 전화로 얘기할 때 홀츠는 그를 마치 제 종복 대하듯 했다. 사실 지난날의 관계를 돌이켜봐도 그런 구도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다. 홀츠는 일거리와 돈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어 놓고 즐거움을 느낀다.

수염에 붙은 부스러기를 털어 내는 동안 프란젠은 어느새 빙그레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번엔 좀 다를 것이다. 그는 식탁 밑에 놓인 케이스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나에겐 이 그림들이 있다. 이것들을 손에 쥐고 있는 한 내가 유리하다.

비록 그늘진 직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그에겐 약간의 정직성이 있어서 결코 합의된 보수 이상으로 우려내려 들진 않았다. 그러나 사람 관계란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는 홀츠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정직하게 벌어먹고 살 자유, 기회가 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위작을 그려 줄 자유가 그에게도 있어야 온당하다. 그리고 지금 그 같은 기회가 바로 문 앞에 와 있다. 아니 몇 시간 상관의 문제로 다가왔다. 파인과 그의 친구들이 아파트에 오기로 한 시간을 따지자면 말이다.

프란젠은 호주머니를 뒤진 끝에 파인의 명함을 찾아냈다. 시계를 보니 문명인이 기상하기엔 아직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호텔을 하나 골라 들어가 거기서 전화해도 시간이 충분할 터였다. 스스로의 결정에 용기가 생긴 그는 짐들을 들고 옅은 햇살 속으로 빠져나왔다. 새롭고 더 나은 하루가 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브루노 파라두는 차 안에 죽치고 앉아서 슬슬 활기를 띠어 가는 생페레 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문이 하나 열리더니 안경 낀 중년 남자가 하나 나타났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쾌청한 아침 하늘임에도 불구하고 비옷 차림에 우산을 들고 나온 걸로 봐서 비관주의자임에 분명했다. 사내는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손목시계를 보고 나서는 거리 쪽으로 열심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하철 이용객이다. 파라두에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이다.

30분 정도 더 지나자 마침내 그가 기다리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 하나가 좁은 도로를 건너오더니 프란젠의 아파트 건물 맞은편에 주차된 차 문을 따기 시작했다. 파라두는 차를 끌고 그 쪽으로 내려갔다. 여자는 운전석에 앉더니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 화장선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고 가방에서 브러시를 꺼내 이미 잘 다듬어진 머리를 또 손질했다.

파라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운전자가 경적을 울려 댔다. 파라두는 차창 밖으로 팔을 내밀고 '엿이나 먹어라'는 의미의 손가락 모양을 해보인 다음 자신도 경적을 울려 댔다. 여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더니 비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곤 일부러 더 느린 동작으로 까만 안경을 꺼내 쓴 다음 마침내 주차 구역에서 빠져나갔다. '좋아.'

파라두는 그 자리에 차를 넣은 다음 시동을 끄고 유식한 용병들의 잡지 솔저 오브 포춘을 핸들 위에 펼쳤다. 그의 영어 실력은 바에서 주워들은 몇 마디에 불과했으므로 잡지의 세부적인 내용은 사실 이해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화보와 광고들을 좋아했다. 부지런한 투자자가 월스트리트 저널을 탐독하듯 그는 보다 개량된 새로운 파괴 도구를 다룬 광고들(무슨 소린지 약간만 이해하면 참으로 매력적인 데가 있다)을 탐독했다.

오늘은 건장한 사내의 손바닥에 올려 놓고 찍은, 새로 나온 글록 26이 그의 첫 눈길을 끌었다. 9밀리 구경에 10발짜리 탄창, 더블 니트나 스위스 군용 양말 속에 차고 다니기 딱 좋은 560그램의 가벼운 총. 전투 능력도 검증받은 제품.

페이지를 넘겨 가던 그는 또 다른 광고들에서 손길을 멈추었다. 3인치 깊이로 절단할 수 있는 나이프, 자유자재로 매달 수 있는 마닐라 로프, 머신 건 뉴스의 구독 예약 유혹, 손마디 부분을 납 처리한 사슴 가죽 장갑, 온갖 사이즈의 야간 투시 장비, 저격병 훈련 교육 과정, 방탄조끼.

미국이란 데는 얼마나 멋진 나라인가. 탄약 벨트와 자동 소총 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매를 자랑하는 금발 미녀 사진을 뜯어보며 그는 생각했다. 이따금 그는 고개를 들고 거리를 확인했다. 그러나 아직까진 돈을 받으면 어디에 쓸지나 궁리하면 될 뿐 달리 신경 쓸게 없는 시간대였다. 75천 달러라. 우지(단기관총 상품명-역주)가 제아무리 고가라 해도 그 돈이면 떡을 치고도 남을 터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차는 웬만한 자명종보다 사람을 깨우는 데 효과가 크다. 거기에다 파리 구경을 더 하고 싶은 루시의 흥분감까지 보태져 그녀와 앙드레는 아침 일곱 시가 막 지난 이른 시각에 몽탈 랑베르 호텔 아래층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사이러스는 이미 내려와 있었다. 그는 혈색 좋은 뺨에 베이럼(베이베리 나무를 원료로 한 향유-역주) 냄새를 살짝 풍기면서 헤럴드 트리뷴지를 훑고 있었다.

"잘들 잤는가, 젊은이들. 이렇게 일찌기 내려올 줄은 몰랐는걸. 침대에서 아침을 먹으니 어떻던가? 파리의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낭만적으로 삶은 계란을 먹고, 오렌지 주스에 샴페인을 흩뿌리고……."

루시가 허리를 굽혀 그의 뺨에 입맞추며 말했다.

"선생님께도 여자 친구를 하나 구해 드릴 때가 됐나 봐요."

"그래 주면 좋지."

사이러스는 돋보기를 벗고 실내를 둘러보았다.

"이 안에 내게 어울릴 만한 여자가 보이는가? 천사 같은 성품에 돈 많은 과부, 단단하고 풍만한 가슴, 그리고 일생루이에 아파트 한 채를 가진 여자. 요리를 할 줄 알면 더 좋겠지만 필수 사항은 아니고, 유머 감각은 꼭 있어야 하겠는데." "룸서비스는 어때요?"

앙드레가 물었다.

커피가 나왔을 즈음 실내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그들은 파리에서의 멋진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두고 의논했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고민일 것이었다. 물론 이미 열 시 약속이 있고 일이 잘 풀리면 프란젠과 점심 식사를 함께하게 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러나 오후는 온전히 그들의 시간이었다.

루시는 사이러스와 앙드레가 꼭 가봐야 할 파리의 명물이라고 제안하는 것을 듣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르세 미술관엔 꼭 가봐야 한다, 개선문 꼭대기에 올라가 경치를 구경해 봐야 한다, 사크레 쾨르(몽마르트 언덕의 성당-역주), 세느강의 바토 무쉬(통통배), 앙드레가 대학 시절에 자주 드나들었던 라팔레트 카페,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 오스카 와일드의 마지막 안식처, 윌리의 와인 바도 빼놓지 말고 가봐야 한다고 계속 늘어놓았다. 이윽고 루시에게 말할 기회가 돌아왔다.

그녀는 특별한 곳보다는 남들이 다 간다는 샹젤리제 거리, 에펠탑, 세느 강이나 구경하면 그냥 평범한 관광객들처럼 하루를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향에 계신 월콧 할머니께 보내드릴 사진이나 많이 찍고 싶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20년 전 당신의 조카가 트리니다드 처녀와 결혼할 때 포터브스페인에 나가 보신 것 외엔 바베이도스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이 없으신 분이니까. 그녀는 걱정스레 두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렇게 하면 너무 별 볼 일 없는 관광이 될까요?"

"그렇지 않아요. 나도 에펠탑을 다시 보게 되길 얼마나 기다렸는데. 자네도 그렇지? 젊은이." 사이러스가 말했다.

앙드레는 말없이 루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이러스 얘기가 진담인지 농담인지 몰라 하고 있는 그녀의 표정엔 사랑스런 진지함이 깃들여 있었다.

"지금 농담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내가 왜 아침부터 농담을 하겠어? , 그럼 프란젠을 만나기 전에 먼저 어딜 구경해 볼까? 강으로 갈까? 탑으로 갈까?"

강으로 가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들은 여덟 시 직후에 호텔을 떠났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분 후, 불행하게도 사이러스 앞으로 오전 약속시간을 약간 변경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갈을 전할 수 있을까 하고 호텔 웨이터가 황급히 거리로 뛰어나가 봤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서둘러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사이러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시각, 그들은 앙드레가 파리에서 제일 좋아하는 한군데로 가보기 위해 뒷길을 택해 가고 있었다. 뷔시 가 주변 지역으로서 거의 매일 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이곳은 한 나라의 수도라기보다는 부산한 시골읍 분위기에 가까웠다. 거리를 따라 노점들이 펼쳐져 있고 부스러기를 차지하려는 시장 개들이 가판대 밑에서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인사말과 욕설도 오가지만, 상인들과 단골손님들 간에는 건강을 염려해주는, 특히 간의 상태를 걱정하는 말들이 오간다. 치즈, , 소시지들이 넘쳐나고, 생쥐라 불리는 작달막한 감자를 비롯하여 성냥개비 두께보다 얇은 강낭콩 꼬투리에 이르기까지 형형색색의 신선한 야채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왕성한 식욕을 불러일으킨다.

노점들 뒤로 들어선 상설 점포들 대부분은 갈란틴(, 송아지의 뼈를 추려내고 고기를 채워 삶거나 쩌서 양념한 요리-역주), 테린(단지에 담은 스튜 요리의 일종-역주), 타트(과일 파이-역주) 따위를 취급하는 저렴한 음식점들인데, 진열창 속엔 흔히 자그맣고 먹음직스런 음식들이 예술 작품처럼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다. 제철일 경우, 시장 한구석엔 굴 통들이 쌓여 있고 가죽장갑 낀 사내가 껍질 깐 굴들을 잘게 부순 얼음 무더기 위로 집어 던진다.

꽃들은 항상 볼 수 있다. 프리지아의 자극적인 향기, 이슬 머금은 꽃잎들, 어린 양치식물의 싱그런 냄새…… 유난히 풍성한 꽃들의 향기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갖가지 즐거움을 제공한다.

한 노점 앞에 멈춰 선 루시는 파리에서의 첫 상품 구매를 했다. 자그만 암적색 장미 두 송이였는데 그것들을 남자들의 재킷 깃 단추 구멍에 한 송이씩 끼워 주며 그녀가 말했다.

", 이제 사진 찍을 준비가 다 된 것 같군요."

세느강을 보기 위해 그들은 도핀 가를 따라 내려갔다. 물론 파리에서 제일 오래됐지만 이름은 퐁네프(새 다리란 뜻-역주)인 다리도 구경할 예정이었다.

그럭저럭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 루시의 월콧 할머니께 보내 드릴 사진을 남기기 위해 루시가 선정한 장소를 배경으로 포즈를 잡느라 약간 우스꽝스런 한때도 보냈다. 사이러스와 앙드레가 번갈아 가며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를 잡고 있지 않은 남자는 엑스트라 역을 맡거나 인간 받침대 역을 맡았다. 앙드레는 루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를 취했고 사이러스는 가로등 뒤에서 곁눈질하는 포즈를 취했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앙드레가 사진을 좀 찍어 달라고 경관 하나를 설득해 냈다 세 사람은 서로 팔을 끼고 일드라시테를 배경으로 다리 위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이어서 루시가 경관에게 자기와 사진 한 장 같이 찍자고 부탁해서 성사되었는데, 루시는 그 사진이야말로 바베이도스의 화젯거리가 될 거라고 장담했다.

그들이 생페레 가의 약속 장소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그녀가 말했다.

"재미있는 현상이에요. 파리 사람들은 오만불손하단 얘길 수도 없이 들었잖아요? 까다롭고 무례하고 건방지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뉴욕이었다면 감히 경관에게 사진 한 장 같이 찍자고 할 수 있었겠어요?" 앙드레가 말했다,

"프랑스 경관이라고 해도 프랑스 사람이란 게 먼저고 경관이 나중이란 걸 잊지 말라구, 경관 아니라도 웬만한 프랑스 사람이면 예쁜 숙녀의 얼굴을 위해 그만한 수고는 해주게 되어 있어."

"그것도 맞는 얘기군." 사이러스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걸음을 빨리했다.

"아직 멀었나? 늦고 싶진 않은데."

그들이 선창을 벗어나 생페레 가로 올라오고 있을 무렵 파라두는 줄담배의 마지막 꽁초를 차창 밖으로 집어 던졌다. 잡지도 치워 버리고(장차 참고할 만한 몇 페이지는 귀퉁이를 접어놓았다) 홀츠가 설명해 준 모습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나 하고 거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키가 크고 은발 머리에 옷을 잘 입은 남자, 검은 머리의 젊은 남자(이 남자는 카메라를 메고 있을 수도 있다),그리고 호리호리한 미인형의 흑인 여자. 그런 세 사람이 함께라면 그다지 어렵잖게 눈에 띌 터였다.

파라두는 옆자리 조수석에 놓인 가방에서 폭파 장치를 꺼냈다. 5분에서 10분 정도의 여유를 줄 것이다. 이제 어느 순간에든 나타나기만 해라.

이윽고 생제르맹 가 쪽에서 서둘러 내려오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들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깔깔대고 있었는데 남자는 남자들과 보폭을 맞추려고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그는 무심하게 그들을 지켜보았다. 타이밍 맞추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그에겐 그들이 사람으로 보이기보다는 75천 달러의 돈더미로 보였다. 건물 입구를 지나 마당을 통과하려면 5분 정도 걸릴 것이다. 노인네가 하나 끼였으니 계단을 올라가는 데 시간이 약간 더 걸릴 수도 있다. 그다음엔 펑!

그들이 건물 입구에 멈춰 펐다. 사이러스가 호주머니에서 종잇조각을 꺼내 프란젠이 일러 준 비밀번호를 확인한 다음 키 패드를 눌렀다. 젊은이들이 먼저 들어가도록 한쪽으로 물러나 있던 그는 반쯤 미소 띤 얼굴로 나비넥타이를 가다듬었다. 그들이 들어가고 문이 닫히는 것을 본 파라두는 시간을 확인했다. 7분 여유를 줄 작정이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탄 그들이 벨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면서 귀에 핸드폰을 박은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나왔다, 그는 그들 일행에겐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고 나가 버렸고 그들은 복도를 따라 들어갔다. 사이러스가 다시 한번 쪽지를 확인했다. 맨 위층 오른편 문. 그들은 돌층계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깥 도로에선 파라두가 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초조한 듯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치고 앉아 있었다.

일행이 계단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사이러스가 숨을 약간 몰아쉬며 말했다.

"아이고, 이렇게 높은 데 살면 다리 운동도 되고 건강엔 좋겠구먼,"

앙드레가 두 차례 노크했다. 놋치로 된 낡은 노커 (현관문에 붙은, 부딪혀 소리 내는 쇠붙이 -역주)의 굵고 낮은 소리가 벽들에 부딪혀 울렸다. 앙드레가 손잡이를 건드리자 문이 살짝 열렸다. 그들은 잠시 망설이며 기다려 보았다. 앙드레가 말했다.

"우리가 올 줄 알고 문을 열어 두었나 봐요. 들어가시죠."

그가 문을 열며 말했다.

"니코! 안녕하세요. 우리가 왔어요."

그들은 문지방에서 걸음을 멈췄다, 코를 찡그리게 만들 정도로 짙은 가스 냄새가 난 데다 그냥 들어가려니 어쩐지 무단침입 같은 기분도 들어서였다. 바로 그때 뒤편 복도 쪽에서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일 레 파르티(그는 떠났어요)"

옆집에서 나온 늙수그레한 여인의 미심쩍은 듯한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그녀는 닳은 앞치마로 양손을 닦으며 맑은 노안으로 사이러스와 루시와 앙드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요." 앙드레가 말했다.

노부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화가들이란 늘 불규칙하게 움직이므로 신뢰하기 힘든 법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어젯밤 분명히 들어왔다 나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얕은 잠을 자는 편이어서 잘 안다, 물론 속된 호기심에서 엿듣는 게 아니라 이웃에 대안 일종의 의무로 늘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그녀는 코를 킁킁대며, 누군가 가스를 틀어 두고 나간 게 분명하다고 말을 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부주의할 수 있느냐는 듯 그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덧붙였다.

"예술가들이란 원래 그렇잖아요. 괴짜들이죠."

손목시계의 초침이 정확하게 7분 후를 가리키는 것을 확인한 파라두는 폭파 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두 개의 폭약이 천등 같은 소리와 함께 연속적으로 터지면서 부엌과 화실 한구석을 파괴했고 채광창과 창문들, 지붕도 상당 부분 망가뜨렸다. 가스 때문에 증폭된 폭발력이 현관문을 날려 버렸고 다른 사람들은 우르르 층계참으로 달아났으나 그들 네 사람은 모두 몸이 붕 뜨면서 벽에 부딪혔다. 이어서 돌 조각 떨어지는 소리와 항께 파편이 비 오듯 떨어졌고,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잠시 후 노부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한차례 터져 나왔다. 노부인은 당황한 나머지 그녀의 가슴 쪽으로 찰싹 달라붙은 사이러스를 떠밀어 내고있는 중이었다. 고막이 찢어진 것처럼 귀가 멍해진 앙드레는 머리를 흔들어 댔다. 그때 어깨에 와닿은 루시의 손길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당신, 괜찮아?"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놓았다.

"사이러스 선생님? 무사해요?" ", 괜찮은 것 같아."

그가머뭇대며 한쪽 팔을 움직이자 노부인에게서 또 한 번 비명이 터져 나왔다.

'미안합니다, 부인, 용서하세요. 앙드레, 고의가 아니라고 어서 말씀드리게."

그들은 느릿느릿 서로 얽혔던 몸을 풀었다. 앙드레는 노부인을 부축해 주었다.

"소방서에 연락해야겠는데 전화 좀 써도 되겠어요?"

앙드레가 노부인에게 말했다.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은 본능적으로 앞치마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을 털고 들어가세요."

거리가 멀고 벽들 때문에 소리가 죽긴 했어도 폭발음은 충분히 요란했다고 파라두는 판단했다 이제 곧 경찰과 소방서에서 출동할 터였다. 그리고 구급차도. 그로선 시신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새 지나가던 행인 서넛이 건물 앞에 모여들어 있었다. 그들은 마당으로 통하는 닫혀진 이중문을 쳐다보며 틀림없이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도로가 봉쇄되면 빠져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파라두는 주차위반 딱지를 떼일 각오를 하고 생제르맹 가로 빠져 나가 차를 세워 둔 다음 걸어서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이웃의 재난에 이글려 나온 구경꾼인 척 군중 속에 섞였다.

째지는 클랙슨 소리를 앞세우고 소방차 한 대가 도로로 접어들더니 아파트 건물 앞에 멈췄고 그 뒤로 경찰차 여러 대가 줄지어 들어 왔다. 얼마 안 되어 현장 일대는 제복 입은 사람들로 뒤덮였다 그들은 이중문을 열어제치고, 점점 불어나는 구경꾼 무리를 한 쪽으로 밀어붙이고, 차량을 우회시키고, 무전기에 대고 꽥꽥대며 끊임없이 지시를 내리는 등 부산을 떨었다. 파라두는 검은 안경을 꺼내 쓰고 건물 맞은편 보도에 모여 선 사람들 무리에 달라붙었다.

제복 입은 사람들은 계단 꼭대기에서 나뉘어 소방관 한 무리는 폐허가 된 프란젠의 아파트 안으로 조심조심 진입하고 경관 두 명은 네 명의 생존자들을 확인하기 위해 옆집으로 들어갔다. 노부인은 이제 충격에서 충분히 회복되었는지 상급 경관(교대 시간이 왔는지 푸르스름한 턱에 지쳐 보이는 사람이었다)을 붙들고 분통을 터뜨리며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괘씸한 이웃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지금까지도 가스 냄새가 나지 않느냐, 하마터면 모두 가루가 되어 죽을 뻔했다고 하소연했으며, 그리고 자기는 자기 집고양이 다음으로 예민한 기질의 여자라고 덧붙였다.

경관이 한숨을 지으며 최대한 동정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소방관 한 명이 문간으로 고개를 내밀고 잔해 속에 묻힌 시체는 전혀 없다고 보고했다. 이름과 주소, 증언들을 기록하는 지루한 절차가 시작되었다.

파라두는 구급차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어찌된 일인지 구급차는 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더 이상의 폭발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피 흘리는 부쌍자나 시체를 보게 될 기미도 보이지 않자 구경꾼들이 하나 둘씩 흩어지기 시작하면서, 남들 눈에 띄고 싶지 않은 파라두의 노력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몸 가릴 곳을 찾아 거리 아래위를 오가던 그는 마침내 한 고서점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자리를 잡은 그는 라신(17세기 프랑스의 극작가-역주)의 가죽 장정본 한 권을 집어 들고 책 구경하는 사람인 척했다.

메모장을 뒤적여 본 경관이 눈을 비비고 나서 앙드레에게 말했다.

"이젠 가셔도 됩니다. 우리 신임 경관이 호텔까지 모셔다드릴 것입니다. 파리에 와서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시다니 참으로 유감입니다."

그리고 노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그녀는 긴 한숨을 지으며 의무에 충실한 시민인 듯이 말했다.

"'나중에 또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경찰서로 갈테니."

"아닙니다, 부인, 그럴 필은 없을 겁니다."

", ."

그녀는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문간에 서서 앙드레 일행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파라두는 세 사람의 목표물이 아파트 건물에서 빠져 나와 경찰차 뒷좌석에 타는 것을 보았다. 목표물들은 먼지만 좀 뒤집어썼을 뿐 전혀 다친 데가 없었다, 그때 길을 막고 있던 소방차를 빼기 위해 소방관 한 명이 달려 나왔다.

"메르드(빌어먹을)"

책을 탁자 위에 집어 던진 그는 서점 문을 거칠게 열고 나와 자기 차 쪽으로 향했다. 나가는 그를 서점 주인이 눈썹을 치올리고 쳐다보았다, 라신의 작품 세계가 모든 이들의 취향에 다 맞지않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위대한 작가의 작품에 저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건 아주 드문 경우였다.

경찰차는 경광등을 울리며 생제르맹 가를 달려갔다. 파라두는 끊임없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어렵사리 따라붙었다. 쥐탱 폴리스(망할 놈의 경찰 녀석-정신병자같이 차를 몰잖아.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더듬더듬 담배를 찾았다 대관절 놈들은 어떻게 해서 폭파 지점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것일까?

이제 경찰차 뒷좌석에 앉은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 든 남자가 옆에 앉은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무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75천 달러가 바로 저기에,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불운으론 충분치 않다는 듯 이번엔 소변이 마려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놈들은 어디까지 가려는 것인가?

커브 길을 돌 때의 타이어의 마찰음과 함께 대로를 벗어나 뤼뒤박으로 접어든 경찰차는 몽탈랑베르 호텔 진입로로 들어서더니 멈춰 섰다. 점점 참기 어려워지고 있는 배설의 욕구 때문에 파라두는 어디든 아무 데나 차 세울 곳을 찾아야 했다. 사이러스가 말했다.

"자네들 두 사람은 어떤지 모르지만 난 한 잔 해야될 것 같아."

그들이 바에 들어가려고 할 때 프런트 데스크의 아가씨가 로비를 가로질러 달려왔다.

"파인 선생님이시죠? 아까 나가신 직후에 이 전갈이 왔어요. 저희가 뒤따라 나가 봤지만, 벌서 어디론가 사라지셨더라구요." 사이러스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한 후 메모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계획이 바뀌어 미안하오. 를레 크리스틴 호텔, 43. 26. 71. 80으로 내게 전화해 주시오. 프란젠." 앙드레가 말했다.

"그걸 이제 얘기하면 어떡해. 폭파 건을 그가 미리 알고 있었을까요?"

"그건 이제 곧 밝혀지겠지. 전화하고 곧 돌아올 테니 이 바에서 제일 큰 걸로 보드카 한잔 주문해 주겠나?"

앙드레와 루시는 바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 바로 앞쪽에 검은 안경의 건장한 사내가 있다는 것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 건장한 사내는 약간 다급한 태도로 리카르드(파스티스 술 상표명 -역주)를 주문하고 나서 남자 화장실의 위치를 급히 물었다. 자리에 앉자 앙드레가 루시의 뺨에 묻은 얼룩을 떨어내 주었다.

"일이 이렇게 돼서 미안해, 룰루. 정말 괜찮은 거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운이 좋았어, 그렇지? 그때 그 노부인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앙드레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차가운 손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럼주로 할 거지?"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 더블로. 얼음 빼고."

용변을 마치고 바에 돌아온 파라두는 앙드레와 루시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곤 신문을 펴들고 얼굴을 가린 채 좌절감을 달랬다. 참담한 실패로 끝난 오늘 아침 작업에서 그래도 한 가지 건진 게 있다면 그들의 숙소를 알아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들이 얼마나 머물 것인가가 문제였다. 그들이 호텔 안에 머무는 한 파라두가 일을 꾸밀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을 터였다. 오늘 저녁이면 홀츠는 파리에 와 있을 거라고 말했었다. 어쩌면 그에게서 새로운 안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때까진 저들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손짓으로 리카르드를 한잔 더 주문한 그는 나이 든 남자가 두 젊은이와 합류하는 것을 신문 너머로 지켜보았다.

보드카를 한 모금 쭉 들이켠 후 사이러스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낮게 말했다.

"폭발 건으로 우리 일이 크게 잘못되진 않을 것 같네, 그 얘길 했더니 프란젠은 깜짝 놀라더군. 크게 충격받은 모양이야. 자네들은 무사한지 묻더군. 그리고 자기는 아직도 우릴 만날 마음이 있다고 했어. 하지만 파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자는 거야,"

"그건 왜요?"

"너무 위험하기는 거지. 뭔가를, 아니 누군가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 같았어. 하지만 무슨 문젠지, 누구인지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네. 파리는 우리 모두에게 안전하지 못한 곳이라고만 하더군."

앙드레는 루시의 손이 자신의 손을 죄여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튼 아직까진 그도 무사한가 보네요. 어디서 만나자고 하던가요?"

자신의 잔을 응시하고 있던 사이러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 알려 주겠다고만 했어. 지금은 파리를 떠나고있는 중이래. 자기가 전화하거나 어떤 연락을 취할 때까지 우리는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어. 우리가 미행당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하더군."

앙드레와 루시는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특별히 수상한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다, , 혹은 여럿이 앉아 있는 테이블이 몇 군데 있긴 했지만 웃으며 얘기하거나 점심을 주문하는 중이었다. 한 테이블엔 몹시 마르고 창백한 여자가 혼자 앉아 있었는데 로비 쪽을 내다보는 틈틈이 손목시계를 쳐다보곤 했다. 맨 구석 자리에 앉은 사내 하나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이처럼 쾌적한 실내에, 느긋하고 평범한 사람들 속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앙드레가 말했다.

"선생님, 그의 얘길 바 믿으시는 거예요?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우릴 미행하겠어요?"

"내 생각은 이렇네." 사이러스가 보드카 잔을 비웠다,

"첫째, 아까도 말했듯이 그는 정말 진심인 것 같았어. 그리고 진짜로 겁먹고 있었고. 둘째, 오늘 아침 일이 그 그림과 관계가 있다는 건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을 걸세. 그리고 셋째로,,,,,," 그는 루시를 쳐다보며 말했다,

"루시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앙드레도 마찬가지고. 지금 거래를 해보려는 사람은 바로 나니까, 자네들까지 얽혀들 필요가 없지."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주변에서 웅얼웅얼 들려 오던 대화 소리들이 갑자기 커지면서 또렷해졌다. 미국인 목소리였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말했지, 만일 내달까지 이혼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내가 떠나겠다고. 약속했든 말든 사랑의 보금자리를 끝장내 버리겠다고. 빌어먹을 프랑스 남자들. 네 생각은 어때? 오우, 연어가 먹음직해 보이네."

루시가 키득거렸다.

"됐어요, 선생님, 이제 그만 긴장을 푸세요. 그건 사고에 지나지 않아요. 선생님도 가스 냄새를 맡았잖아요. 어쩌면 프란젠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의 소행인지도 모르고요. 어쨌든 돌아가지 않을래요." 그녀가 앙드레를 쳐다보았다.

"우리 함께 남을 거죠?" 야무지게 턱을 치켜올리며 호전적이다 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나오는 그녀를 바라보며 앙드레가 빙그레 웃었다,

"룰루 얘기가 옳은 것 같아요. 별수없이 저희를 달고 다니셔야겠네요, 선생님."

"그렇게 해준다면 나야 더 좋지 ."

사이러스가 말했다. 이어 결심한 듯 심호흡을 하는 그의 표정에선 진심으로 기쁜 빛이 느껴졌고 두 눈도 반짝였다.

"이 근방에 체르세 미디라고 아주 작고 멋진 식당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폭발 사고를 겪은 후엔 식욕이 더 당기는 법이지. 그리로 가볼까?

파라두는 그들이 로비를 지나 출구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따라 나갔다. 리카르드를 마셔서인지 시장기가 돌았는데 10분 후 그들이 작은 식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니 배가 더 고파졌다. 그는 잠시 바깥에 서서 그들이 식당에 자리잡는 것을 확인한 다음 샌드위치 가게를 찾아 나섰다.

 

 

18. 감시

 

프란젠은 파리 교외로 향하는 차량 행렬에 끼어있었다. 파리와 홀츠에게서, 그리고 폭탄으로 사람을 죽이려 드는 정신병자들에게서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폭발 사건의 배후엔 홀츠가 있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결과적으로는 그에게 그림들을 더 잘 지키도록 경고해 준 셈이 되고 달았다.

그 얼마나 귀한 그림들인가. 휴대용 생명보험 증권이나 다름없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피난처와 생각하고 결정할 시간이었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홀츠냐 파인이냐, 둘 중에 하나다. 그러나 우선은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내는 것이 급하다.

무심코 달려가던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르군디를 거쳐 리옹으로 이어지는 A6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에겐 남부 지방과 관련된 좋은 기억들이 왜 있었는데 특히 그중 하나는 지금 눈앞에 닥친 그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줄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적절히 사과하고 아부하고 지어내고, 다급한 상황임을 분명히 인식시키고, 매력을 발휘하여 끌어당기고 하는 과정들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의 마음은 어느새 엑상프로방스와 산악 지역 중간 어느 전원 속에 묻혀 있는 자그만 마을 레크로탱과, 생빅투와르 산이 내다보이는 허름한 오두막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아누크가 살고 있었다.

그와 아누크는 6년 동안 함께 지냈는데, 아누크의 매우 변덕스러운 성격 때문에 함께 있다 헤어졌다를 반복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녀는 어느 모로 보나 대단히 당당한 여자였다, 목소리도 그렇고, 길고 숱 많은 갈기형 머리칼과 푸짐한 외형이 모두 그랬다, 속을 너무 채운 쿠션 같은 여자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루벤스(플랑드르의 화가-역주)라면 그런 소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프란젠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함께한 그 시절은 대체로 좋은 시간들이었지만 시간의 흐름이 장밋빛으로 채색해 주면서 더더욱 좋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둘의 관계가 끝장난 것은 18개월 전이었다. 프란젠이 생각할 땐 정말 사소한 예술상의 오해에 불과한 일이 발단이었다. 어느 날 오후, 예기치 못한 시각에 집으로 돌아온 아누크는 프란젠이 그림 모델이 되어 준 마을 처녀의 가느다란 팔다리를 만지며 자세를 고쳐 주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때 그 처녀가 머리에 화환 하나만 달랑 얹고 있을 게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도 하나 걸치고 있었더라면(그때 프란젠은 낭만파 양식의 그림을 그리고있던 중이었다-또 그 처녀가 몸을 굽히고 있더라도 좀 더 품행이 방정하게 보였더라면, 그리고 또 그때 프란젠이 바지라 도 입고 있었더라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그러했으니만큼 아누크는 즉각 결론에 도달했고 두 남녀를 집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오해를 청산하기 위한 시도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프란젠은 기죽은 채 파리로 물러나을 수밖에 없었다.

불규칙하게 뻗어 나간 파리의 교외 지역에서 빠져나와 탁 트민 전원이 나타나기 시작할 즈음 그는 생각했다, 역시 세월이 약이 되는지, 비록 그녀의 변덕스러운 성질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은 따뜻한 여자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비록 성질이 변덕스럽긴 싸지만 마음이 따뜻한 여자다.

어쩌면 오늘 밤에 그녀를 찾아가 쫓기고 있는 몸이니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라고 몸을 맡겨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생각으론 벌써 화해가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러고 나니 다소 현실적인 문제로 생각이 미쳤다. 이른 아침에 약간 먹은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위에서 계속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지저분한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점심까지 거른 비극을 겪고 난 프란젠은 이제 근사한 저녁 식사와 깨끗한 잠자리로 위안받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마콩과 리옹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나타나자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서쪽으로 그 두 지역 중간쯤 어딘가에 로안느란 읍이 있다. 아누크와 함께한 초창기 시절 어느 날 둘이서 트루와그로에 들러 점심을 먹었었다. 차가운 백랍 주전자에 담긴, 집에서 빛은 플뢰리를 몇 주전자나 마셨고 일품요리 일곱 개 코스의 점심식사를 했었다. 두 사람 모두 얼마나 먹어댔던지 그 식당 맞은 편에 위치한 자그만 호텔까지 건너가는 데도 어지간히 애를 먹었던 그 점심.

도망자 주제에 그 이상의 것을 어찌 싸랄 수 있겠는가? 프란젠은 현명한 결정임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기라도 하듯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파라두로서는 기분을 풀기 위해 애쓰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는 오후였다. 잠시 기회를 잡아 차를 가지고 온 그는 차 안에 앉은 채 체르계 미디 식당 밖에서 두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앙드레와 일행이 식당에서 나와 택시를 탔고 그들 뒤를 밟아 에펠탑까지 간 그는 거기서 또 지루하게 기다려야 했다. 그들이 개선문 꼭대기에 올라가 있을 즈음엔 담배까지 떨어졌다.

연락 온 게 없는지 물어보려고 핸드폰으로 아내에게 전화했다. 저녁 식사 땐 집에 들어오느냐고 아내가 물었다. 젠장, 지금 내가 그걸 어떻게 아나? 더 나쁜 것은 이런 공공장소에선 그들을 어떻게 해볼 기회조차 없다는 점이다. 다만 한 가지, 나중에 홀츠에게 그들의 소재를 알려 줄 수는 있을 터였다.

벌써 오후 다섯 시 가까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저 빌어먹을 샹젤리제를 도대체 언제까지 내려다보고 있을 참인가?

"루시가 오늘 꼭 봐야 할 곳이 한군데 더 있어 "

개선문에서 내려오면서 사이러스가 루시에게 말했다.

"파리에 처음 온 아가씨라면 반드시 리츠 호텔에서 술 한잔은 해야 하거든. 생카세트(다섯 시에서 일곱 시, 오후의 밀회 -역주)가 어떤 건지 내가 구경시켜 주지,"

앙드레가 빙그레 웃었다. "나쁜 아저씨네요, 선생님."

"난 리츠에 가서 나쁜 짓을 볼 준비가 되어 있긴 한데...도대체 어떤 건데요?"

루시가 물었다. 사이러스가 나비넥타이를 비틀더니 말했다.

"오랜 전통이지, 다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의 두 시간은 파리의 신사들이 아내가 있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애인을 즐겁게 해주는 시간이야. 대단히 사려 깊고 낭만적인 전통이지."

"낭만적이라구요?"

루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사이러스를 좋아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화를 냈을 것이다.

"끔찍하군요. 그런 쇼비니즘(맹목적 애국주의, 우월주의-역주)적 전통은 난생처음 들어봐요."

사이러스가 그녀를 향해 활짝 웃었다.

"쇼비니즘적인 전통이란 말은 맞는 말이야. 그러나 명심할 것은, 그 쇼뱅(쇼비니즘이란 용어가 나오게 한 장본인-역주)이란 자가 바로 프랑스 남자였다는 사실이야, 비록 섹스보다는 애국주의도 더 유명해지긴 했지만 말이야."

루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생님은 정말 걸작이세요. 프랑스식 해피 아워(술집의 할인 시간대 -역주)군요, 그렇죠? 뭐 특별한 거 없을까요?"

"있고말고. 아름답게 차려입고 다리를 꼬고 앉아 샴페인을 마시는 거지."

루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네요."

앙드레에겐 다른 계획이 있었다.

"난 볼일이 좀 있어, 룰루. 게다가 리츠 호텔에 어울리는 복장도 아니고. 당신이 스커트를 2인치 정도 끌어 올리고 있으면 호텔 측에서 아마 땅콩을 더 갖다 줄 거야."

그녀는 그에게 혀를 날름해 보이곤 사이러스의 팔에 매달렸다.

"어디에 볼일이 있는지 물어볼 생각도 없다구."

"놀랄 일이로군. 나중에 호텔에서 다시 봐요."

앙드레가 그들 일행이 두 패로 갈라지는 것을 본 파라두는 우거지상이 되었다. 나이 든 남자와 여자는 택시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고 젊은 남자는 지하철역 쪽으로 걷고 있었다. 별수 없었다. 그로선 차를 두고 갈 수도 없고 차를 둘로 쪼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내 그는 일행 중 두 사람 쪽을 계속 감시하기로 결정했다.

* * *

루시와 사이러스가 아직도 샹젤리제의 러시아워 인파 한가운데 서 있는 시각에 생제르맹 지하철역에서 올라온 앙드레는 자코브 가의 골동품 가게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가게는 이웃한 여러 비슷한 점포들과 마찬가지로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유혹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계산하에 물건을 전시해 두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뒤죽박죽인 것 같지만 실상은 기교를 부려 진열된 물건들 대부분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고 가격 표시가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도자기 주발, 끈으로 몇 자루씩 묶어 놓은 포크와 나이프들, 황동 모자걸이, 세월에 깃든 성숙미를 자랑하는 거울, 머스태시 컵(코밑 수염이 젖지 않도록 컵 안쪽에 수염 받치는 장치가 된 컵-역주) 상아와 은으로 된 단추걸이(단추를 끼우거나 빼낼 때 쓰는 갈고리 모양의 기구-역주) 손잡이에 솔이 달린 포도주 코르크 마개뽑이, 굽이 달린 술잔과 코디얼 주술잔, 발 올려놓는 자그만 대, 코담배 갑, 환약 상자, 크리스털 잉크병 ,,,,,, 이 모든 물건들이 무성의해 보일 정도로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흥정이라고 하는, 현대 사회에서 보기 드문 영역을 최후까지 고수하고 있는 주인들의 술수에 걸려 넘어진 경험을 고려하면 구경만 하고 지나가는 손님들을 욕할 수도 없다. 학생 시절부터 이 가게 주인과 알고 지내 온 앙드레는 사실 이쪽 거래의 진상을 잘 알고 있었다. 주인들이 부르는 값은 턱없이 높게 마련이고 최상품은 언제나 뒷구석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출입문을 밀고 들어간 드는 언제나 나태한 자세로 드러누워 순진한 손님을 속여 먹는 박제 고양이를 성큼 뛰어넘었다.

"위베르! 그만 자고 일어나요-오늘의 첫 손님이 왔다구요."

옻칠 된 칸막이 뒤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주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프랑스 사람치곤 유난히 큰 키에 곱슬기 있는 갈색 머리칼의 그는 입술에 문 시가 연기 때문에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깃 없는 횐 셔츠에 가느다란 세로줄 무늬의 낡은 바지를 입고, 마리르 본 크리켓 클럽 회원임을 나타내는 색상의 실크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타이 역시 낡아 있었다.

시가를 뱉고 난 그가 어두침침한 뒷구석에서 가게 전면으로 걸어 나오며 고개를 앞으로 쑥 뽑았다.

"이게 누구야? 현대판 라르티그(1920~1930년대의 파리 사진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사진작가-역주)인가? 미래의 카르티에 브레송(프랑스의 세계적인 사진작가-역주)인가? 아니면 그 고약한 앙드레인가? 아니, 자네가 어떻게 여길 다 왔어?

아바나 여송연 냄새를 풍기며 앙드레를 끌어안고 난 덩치 큰 주인이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너무 말랐군. 하긴 자네가 뉴욕에 산다는 걸 내가 깜박 했네. 거긴 문명인이 먹을 만한 거라곤 하나도 없는 곳이니 말이야. 어떻게 지내나?"

"잘 지내요, 아저씬요?'

", 나야 그저 땅이나 파먹고 살지. 늘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신세지 뭐."

"요즘도 경주마를 갖고 계세요?"

위베르가 눈을 찡긋했다.

"세 마리 있어, 카린한텐 비밀이야."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는 동안 두 사람은 어느새 편안한 옛 친구 사이로 되어 진부한 농담과 애정 어린 욕설, 함께했던 지인들 소식, 그리고 그 지인들의 아내에 대한 평가 따위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보니 앙드레가 방문 목적을 꺼내기까지 30분이나 시간이 걸렸다.

앙드레가 찾고 있는 것을 설명하자 열심히 듣고 있던 위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찾아오긴 했네 그려."

그는 앙드레를 옛 파트너의 책상 쪽으로 데리고 갔다.

"이리로 와서 이것들을 좀 보게."

그가 널찍한 중간 서랍을 열더니 좀 벌레 먹은 벨벳 천에 싸여진 커다란 상자를 꺼냈다. 하얀 토끼를 튀어나오게 만드는 마술사와도 같이, 그는 유연하게 팔을 휘저어 단번에 덮개 천을 벗겨 내렸다.

",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파리 최고의 상품들이지."

흐릿한 시가 연기를 뚫고 내려다본 앙드레는 휘파람 소리를 냈다.

"이런 걸 모두 어디서 훔쳐 오셨어요?"

위베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맘에 드는 게 있나?"

앙드레는 가지런히 정렬된 자그만 은 사진틀들을 유심히 살폈다.

모두 매끈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는 아르 누보 스타일로서 반짝이는 은빛에 질감도 부드러웠다. 위베르는 마를렌 디트리히, 그레타 가르보, 에디트 피아프, 잔 모로, 브리지트 바르도 등의 암갈색 인화지 사진을 사진틀 속에 하나씩 끼워 넣었다.

그렇게 놓고 보니 중앙의 것이 눈에 쏙 들어왔다. 다른 것들보다 크기가 약간 더 컸는데 꼭 지하철 역 위에 걸린 철제 표지판을 찍어 낸 것 같았다. 디자인도 단순해서 대문자로 'PARIS'라고 새겨 넣은 게 고작이었다 지금 그 사진틀 속에서 까만 머리칼을 초승달 모양 의 빳빳한 컬로 만들어 이마에 붙이고 미소 짓고 있는 인물은 조세핀 베이커(20년대 프랑스에서 인기 있던 미국의 흑인 엔터테이너-역주)였다. 은의 묵직함과 뒷면에 덧댄 보드라운 천의 감촉을 느끼며 앙드레가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이게 맘에 들어요."

그 순간 '친구' 위베르는 '전문 골동품상' 위베르로 바뀌었다.

"그래? 자넨 역시 안목이 있어, 앙드레. 그건 몇 개밖에 제작되지 않은 귀한 물건이지. 나도 지난 5년 동안 겨우 두 개밖에 못 봤다네 게다가 이처럼 완벽한 상태의 물건은 구경하기도 힘들지. 완전 오리지널이야, 유리까지 말일세,"

덩치 큰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앙드레의 어깨를 붙잡고 지그시 눌렀다.

"특히 자네에겐 그 안에 든 사진까지 그냥 덤으로 주겠네."

그 가격은(그는 마치 고위 기관이 지정한 가격이어서 자기로선 어쩔 수 없다는 듯, 안됐다는 투로 값을 말했다) 앙드레가 예상했던 대로였고, 결국 그는 수중에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꺼내 주었다. 당일자 <<르 몽드>>지를 찢어 사진틀을 포장하는 것으로 거래는 끝났다. 앙드레는 와인이나 한잔하며 원하던 물건을 손에 넣은 것을 자축할 겸 이 옛 친구에게서 오히려 100프랑을 빌려 플로르 카페로 들어갔다.

그는 재킷 주머니에 든 사진틀의 묵직한 무게를 느끼며 초저녁 대로를 오가는 행렬을 구경하고 앉아 있었다. 이 선물을 받은 룰루의 표정이 얼른 보고 싶어졌다. 그 생각을 하니 빙그레 웃음이 나오면서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녀가 파리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지켜보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

* * *

"여기 교통은 늘 이런 식인가요?"

생오노레 가로 느릿느릿 기어 내려가는 택시 안에서 루시가 사이러스에게 말했다. 다른 운전자들의 어리석음 교통 혼잡을 부채질하는 결과만 낳고 있는 경관들, 이런 악조건하에서 벌어먹고 사는 것의 불가능함에 대해 투덜대는 운전기사의 짜증스런 독백이 계속 이어졌다. 두 사람은 무슨 말인지는 잘 몰라도 이해는 할 것 같았다. 그것은 세계 어느 대도시에 가더라도 들을 수 있는 택시 기사들의 국제적인 신세타령이다.

사이러스는 르와얄 가 모퉁이에서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렸다. 남은 거리는 걸어서 갈 참이었다 택시 기사는 병 속에 긴 코르크 마개 꼴로 뒤에 남았다. 100미터쯤 떨어져서 따라가던 파라두는 차에서 내려 그들이 왼쪽으로 돌아 방돔 광장으로 접어드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갈 수도 안 따라갈 수도 없어 낭패감에 싸인 그는 다시 차에 올라 경적만 요란하게 울려 댔다.

나폴레옹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는 거대한 원기등 쪽으로 걸어가며 사이러스가 말했다.

"난 말이야, 루시를 아르마니의 부티크 근처엔 절대 데려가지 않을 거야. 그게 루시한테도 좋을 테고. 저기 그의 가게가 보이지? 무수한 사람들의 신용을 파탄시켜 버린 장본인이지. 난 늘 놀라곤 해------."

"선생님, 잠깐만요."

루시가 어느 출구 쪽으로 그의 팔을 잡아 끌더니 검정 메르세데스 한 대가 멈춰 서 있는 리츠 호텔 입구 쪽을 가리켰다.

까만 선글라스를 착용한 남자와 여자가 차 트렁크 옆에 거서 짐들이 내려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더 큰 키였다.

"저 여잘 알아요, 바로 앙드레가 일하는 그 잡지를 맡고 있는 여자죠, 카밀라라구요."

사이러스가 주의 깊게 남녀를 살피더니 말했다.

"나 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니. 여자와 함께 있는 저 남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야. 루돌프 홀츠란 사람이지."

그들이 계단을 올라가 호텔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사이러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턱을 비비며 잠시 지켜보았다.

"리츠 호텔에 들르는 계획을 포기한다면 루시로선 대단히 실망스럽겠지? 하지만 지금 우린 호텔로 돌아가 앙드레를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군. 어서 갑시다, 홀츠에 대해선 가면서 얘기해 줄 테니."

파라두는 방돔 광장 주변을 두 바퀴나 돈 끝에 차를 주차시키고 광장을 돌아보았지만 곧 그들을 놓쳐 버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츠 호텔 앞에 멈춰 선 그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연착하지 않았다면 홀츠가 지금쯤 호텔에 투숙해 있을 터였다 홀츠와 그의 75천 달러가 말이다.

메르드(빌어먹을) 재수에 옴 붙은 날이다, 그는 어깨를 쭉 펴고 자신의 방광을 저주했다. 그러곤 호텔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 * *

카밀라는 호텔에 도착하면 습관적으로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룸 서비스 부에 전화해 샴페인을 부탁하고, 호텔 관리실에 전화해 그녀의 중요한 의상들을 걷어 가 재빨리 세탁해 다림질까지 마쳐 줄 성실한 세탁부를 보내 달라고 하는 일이다.

그녀는 이제 한결 본모습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홀츠의 기분도 상당히 좋아졌다. 하긴 그의 방식은 늘 그렇지만. 그리고 자세한 얘긴 없었지만 뭔가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평소처럼 호텔 직원들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지 않고 팁을 주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샴페인이 도착했을 때 그는 그 엄청나게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통화하고 있는 중이었다, 카밀라는 그의 앞에 놓인 탁자에 샴페인을 한잔 갖다 놓고 나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풍경이 보였다. 이곳 파리의 아르마니 부티크는 쇼핑의 즐거움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내일 아침 루디가 마사지받는 사이 얼른 건너갔다 와야겠다고 카밀라는 마음먹었다.

통화를 끝낸 홀츠가 안경을 집으려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 ,,,올려 보내시오."

카닐라가 말했다.

"그런데 자기, 오늘 밤엔 어디서 식사할까요?"

홀츠는 안경을 집어 코에 걸었다.

", 어디 수수한 데로 가지 뭐. 타이예방이나 그랑 베푸르가 어떨까? 당신이 정해. 호텔 안내인한테 물어보면 될 거야."

더블 룸 출입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것은 샴페인 첫 모금을 맛본 홀츠의 혀가 짜릿한 뒷맛에서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패였다.

카밀라가 문을 열자 파라두가 비척비척 겁먹은 게걸음으로 들어오더니 인사를 하는 등 마는 등 고개를 까딱이곤 욕실을 사용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카밀라는 욕실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

"도대체 누구예요? 저 사람, 원래 저런 걸음으로 걸어 다녀요?"

"내 일을 좀 거들고 있는 사람이야."

홀츠로서는 카밀라에에까지 내막을 털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일이니까. 그는 미안한 듯 카밀라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사람은 영어를 잘 못하니까 우리 얘길 듣고 있어 봤자 당신은 지겹기만 할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난 내려가서 안내인한테 식당이나 알아볼게요."

바지 지퍼를 올리며 나오는 파라두를 미심쩍은 눈길로 쳐다보고 난 그녀는 이내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재빨리 방에서 나가 버렸다.

"어서 오게, 파라두 "

홀츠가 의자에 몸을 묻었다.

"이거나 한잔하면서 좋은 소식을 들려주게나,"

입을 열기 전, 파라두는 우선 샴페인 한잔을 통째로 들이켰다. 감정을 전혀 섞지 않고 딱딱 끊어서 얘기하는 그의 스타일은 군대식 언어 습관으로서, 승리 아니면 패배를 보고할 때나 어울리는 말투였다. 시간, 상황, 모든 것들을 일어난 순서대로, 견해는 섞지 않고 주로 사실들만 얘기했다.

얘기를 하면서 지켜보노라니 기분 좋은 기대감에 젖어 있던 홀츠의 표정이 불쾌감으로 딱딱하게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의 얘기가 끝나자 길고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홀츠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숙소는 알고 있다 이거군. 거기서도 뭔가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았나?"

파라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했습니다."

홀츠가 한숨을 지었다.

"불가능이라,,,,,, 10만 달러를 준다 해도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일까?"

"홀츠 씨, 체포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맘만 먹으면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광적인 놈들은 그러잖아요. 그래요, 그들이 호텔에서 나을 때 바로 쏴버릴 수도 있었소. 살인이란 게 별 건 아니니까. 하지만 잡히지 않고 달아난다는 건 또 다른 문제요. 말썽 많은 알제리인들 때문에 파리 시내에 경찰이 확 깔려 있소."

파라두는 아랫배에 양손을 대고 깍지꼈다. 그로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홀츠가 일어나더니 방안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후퇴, 심각한 후퇴다. 그러나 만회 불가능한 것이란 없다. 폭발 건은 파리에서 매일같이 수백 건씩 발생하는 단순 사고의 하나로 처리될 것이다. 루돌프 홀츠와는 아무 연관도 없다. 프란젠과 연락이 닿으면 그럴싸한 스토리로 납득시켜야겠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파인과 그의 친구들의 문제는 또 다르다. 그들은 너무 가까이에 있다, 어떤 수를 써서든 그들이 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때까진 잘 감시해야 한다.

창가로 간 홀츠는 팔짱을 끼고 방돔 광장의 불빛들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들을 계속해서 감시해 주기 바라네. 조만간 기회가 생길 거야. 하지만 그들 모두를 처리해야 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 여기저기 사방에 말을 퍼뜨리고 다니는 일이 발생해선 절대 안 돼."

그가 몸을 돌려 파라두를 쳐다보았다.

"내 말 알겠지?"

"주야로 감시하라고요?"

등줄기가 쑤시는 것를 느끼며 파라두가 자세를 바꿔 앉았다.

"그러자면 함께 일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비용은 물론 선생이 대주셔야죠."

홀츠는 뺨 맞은 사람처럼 잠시 빠르게 눈을 깜박이더니 아주 내키지 않는 태도로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모조리 처치해야 돼 "

그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파라두가 씩 웃었다.

"10만 달러로 합의된 거죠?"

그는 완전히 공친 날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또 연락하겠습니다."

* * *

몽탈랑베르 호텔의 로비에 들어선 앙드레는 휘파람을 불며 바 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루시와 사이러스가 벌써 와서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자리에 앉기 전, 그는 루시에게 입맞췄다.

"리츠에서 샴페인이 떨어졌대요?"

"여보게, 일에 진전이 생겼네, 대단히 기묘한 진전이야."

사이러스는 앙드레가 주문하는 동안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자네 친구 카밀라께서 방금 막 리츠에 투숙했네, 그리고 홀츠라는 아주 불쾌한 작은 친구도 그녀와 함께 있었어, 거래상이지,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는데, 그걸로도 충분하더군."

앙드레가 식탁 위로 몸을 숙였다.

"그들도 두 분을 알아봤나요?"

사이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도 루시가 그들을 먼저 봤지. 잘 듣게, 홀츠란 사람은 대단한 거래를 하는 것으로 미술계에 평판이 나 있네. 몇 건의 경우는 최고 수준의 거래였지. 이를테면 4천만 달러에 달하는 피카소의 작품을 취급하기도 했지, 하지만 또 하나, 물론 전혀 검증되지 않은 소문에 불과하지만, 그가 뒤에서 장물을 취급한다는 얘기가 있어."

웨이터가 앙드레의 와인을 가지고 보자 사이러스는 잠시 얘기를 중단했다.

"좀전에도 말했지만 확실한 얘기는 아닐세 하지만 내가 보기엔 대단히 신빙성 있는 얘기 같네. 그는 파렴치한 인간으로 알려져 있어. 그에게 당한 미술계 인사들도 왜 많지."

"그가 카밀라와 함께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걸까요?"

함께 일해 온 편집장의 사생활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앙드레가 물었다.

그녀의 사생활을 모르기는 <<DQ>>의 직원들도, 심지어 노엘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 부분은 늘 잡지사 직원들의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었고 개중에는 입에 담기 힘든 추측도 나돌았다. 버그도프 미용실의 그녀 담당 미용사, 그녀의 개인 코치 동생 개러비디언, 그리고 여러 다양한 인테리어 장식가들이 그녀의 파트너로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러나 홀츠란 이름은 그 누구도 거론한 바 없었다.

사이러스가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파리에 와서 뭘 하고 있느냐 하는 걸세. 나이를 먹어 가다 보니 의심이 많아진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일과 연관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네. 우연의 일치일 리는 없어,"

앙드레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잔뜩 긴장해서 양눈썹을 실룩대며 손가락으로 식탁을 톡톡 두드려 대고 있는 사이러스의 꼴이 가까운 개구멍을 찾고 있는 테리어 견 같아 보였던 것이다. 앙드레가 말했다.

"선생님의 추측이 옳다고 쳐요. 하지만 모든 내막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밝혀 줄 수 있는 인물은 프란젠뿐이에요. 그에게서 연락이 왔나요?"

사이러스의 손가락들시 멈췄다.

"아니, 아직 없었네, 하지만 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어. 그가 홀츠와 연루되었든 아니든 날조자들이 일거리를 거절하는 법은 극히 드무니까, 지금 그는 우리가 일거리를 주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전화가 올 거야."

사이러스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올 거라구 "

그리고 자신의 잔이 빈 것을 본 그는 언제나처럼 놀라는 시늉을 해보이곤 손목시계를 봤다.

"지금으로선 기다리는 수밖에 없네. , 우리 샤워하고 나서 간단하게 저녁 식사나 하는 게 어때?"

* * *

자기 치수보다 큰 헐렁헐렁한 횐 가운을 걸친 루시가 머리에 타월을 감고 욕실에서 나왔다.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볼 땐 선생님은 이 일에서 짜릿한 스릴을 느끼는 것 같아. 분명히 흥분해 있어."

앙드레는 재킷을 벗고 호주머니에서 사진틀을 꺼냈다.

"당신은 안 그래?"

루시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물어볼 것도 없는 얘기 아냐?"

타월을 풀어 목에 걸친 루시는 앙드레가 내민 물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야?"

"선물이야, 룰루. 당신의 경관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넣어 두라고 샀어."

그것을 양손으로 감싸 들고 종이 밑의 형체를 더듬어 보던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포장지가 그래서 미안해, 뭐해? 어서 뜯어보지 않고."

종이를 뜯어본 그녀는 사진틀을 만져 보며 잠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워, 앙드레 고마워요."

고개를 든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거기에다 꼭 프랑스 경관 사진을 넣을 필요는 없겠지? 월콧 할머니 사진도 좋고, 가로등 뒤에서 손 흔드는 사이러스...... ."

그의 말은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따뜻하고 촉촉하고 향기로운 여자의 입술이 그의 입을 막아 버렸던 것이다.

잠시 후, 샤워기 밑에서 목줄기를 때리는 물살을 받고 서 있던 그는 루시가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오늘 밤엔 우리 어디로 갈 거지? 입을 옷을 골라야 하는데."

"약간 죄는 옷이면 좋겠어, 룰루."

그녀는 혹시 기회가 오면 입으려고 몇 달 전에 사둔 공기처럼 가벼운 토카 드레스를 들고 침실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또 한 번 소리쳤다,

"너무 야해 보이는 거 아냐?"

* * *

셔츠 깃에 냅킨을 끼운 프란젠은 홀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세상은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전화하자 예상했던 대로 아누크는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전혀 동정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낙관주의자라면 그녀를 따뜻한 여자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프란젠 자신이야말로 기질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분명히 낙관주의적 성향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긴 했지만 우호적이었다, 아니, 적어도 쌀쌀맞진 않았다.

그녀와 트루와그로에 가서 근사한 물고기 젤리 요리를 먹으며 꽃을 바칠 것이다. 모든 게 잘 풀릴 것이다. 이쯤 되면 이제 막 시작된 긴 프로방스의 여름을 고려해 볼 때도 췄다. 핑크빛 와인, 아을리 (남프랑스의 마요네즈의 일종-역주) 즙 많은 신선한 복숭아, 그리고 남부의 햇빛으로 가득한 그 몇 달. 웨이터가 다가오자 그는 지극히 만족스런 미소로 반기며 음식을 주문했다. 내일 아침엔 사업을 진행시킬 것이다, 사이러스 파인에게 전화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홀츠 쪽을 포기하는 게 된다. 개인적인 감정은 차치하더라도 산산조각 난 아파트 문제가 남는다, 홀츠의 소행임이 분명하다. 그림들을 돌려주기 전에 먼저 그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번에 새로 뚫은 이 거래 관계에서 얼마나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을진 아직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수십만 프랑 정도는 시작에 불과하다. 그렇다, 내일 아침 제일 먼저 할 일은 파인에게 전화하는 것이다. 프란젠은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19. 미행

 

아침 일곱 시를 조금 넘긴 시각, 파라두는 샤르니에와 교대하기 위해 몽탈랑베르 호텔 부근에 도착했다. 자동차 옆 보도에 서 있던 샤르니에는 반가운 듯 기지개를 펴고 나서 간간이 하품을 해가며 경과를 보고했다.

보고할 것도 별로 없었다. 자정 무렵 샤르니에는 그들이 호텔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고 그후론 아무 일도 없었다. 아침 여섯 시 직전에 갓 구운 빵과 파티스리(과자)가 배달되기 전까진 생쥐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30분 후엔 이른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는 손님 한 쌍이 호텔에서 나갔다.

그것 말곤 아무 일도 없었다. 격식 차릴 것도 없고 부정한 돈이 오갈 여지도 없는 조용한 임무 교대였다.

쌀쌀한 아침 바람을 피해 코트 깃을 세운 샤르니에가 떠나면서 말했다.

"이제 대장 차례군요. 오후에 전화할게요."

차 안으로 들어간 파라두는 창을 열고 담배 연기와 마늘 냄새로 후텁지근한 공기를 빼냈다. 샤르니에는 착실하고 고분고분한 녀석이긴 하지만 그 빌어먹을 프랑스 소시지를 차 안에 들고 와서 먹고는, 고약한 냄새에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포장지를 늘 좌석 밑에 쑤셔 넣어 두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파라두는 쓰레기를 길가 하수구에 던져 버리고 나서 자기 물건들을 주위에 늘어놓았다.

담배와 핸드폰은 계기판 위에, 각종 무기가 든 나일론 가방은 조수석에, 그리고 뚜껑 달린 5리터들이 플라스틱병은 차 바닥에 내려놓았다. 당황스런 경험을 어제 이미 두 차례나 한 그로서는 또따시 뒤통수를 맞고 싶진 않았다.

거리에서 장시간 잠복하는 일은 그의 직업상의 어려움 중에서도 최악에 속했다. 게다가 그 지루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룻밤 푹 자고 나온 데다, 일이 끝난 후 여섯 자리 수의 보수를 손에 쥐게 될 생각을 하니 이까짓 지루함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거리는 청소 차들이 뿌리고 간 물기로 아직 축축했고 공기는 신선했으며 햇살은 엷은 잿빛 구름을 뚫고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호텔 웨이터 한 명이 입구를 쓸고 있고 다른 한 명은 테라스 가장자리에 심어져 있는 상록수들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파라두는 바로 옆 건물로 눈길을 옮겼다. 지저분한 창에 블라인드가 쳐져 있고 현관문에 무거운 쇠고리가 감겨 있는 걸로 보아 빈 건물임이 분명했는데, 바로 옆의 말쑥한 호텔과 대비되어 한결 더 꾀죄죄해 보였다.

저 빈 건물로 들어가서 벽을 뚫고 호텔로 침투하면 어떨까? 그런 다음,,, ,,, 그러나 너무나 소란스럽고 복잡한 작업이다. 그들이 모두 거리로 나오면, 그리고 군중들에게서 떨어져 볼로뉴 숲 같은 호젓한 곳으로 가준다면 좋을 텐데.

아니, 놈들은 조깅하러도 안 가나? 미국인들은 너나없이 조깅을 즐긴다던데. .

* * *

사이러스는 면도를 하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그가 코 바로 밑 인중과 까다로운 부위를 상대로 한창 씨름하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시오, 친구. 나 니코 프란젠이오. 무사하시겠죠?"

프란젠은 지난번 마지막 통화 때의 근심에 찬 음성과는 크게 다르게 쾌활하고 자신만만한 분위기였다.

"연락해 줘서 정말 고맙소, 니코. 지금 어디에 있소?"

"다행히도 생제르맹 가에서 멀리 벗어나 있어요. 잘 들으세요. 나는 지금 엑상프로방스 부근의 친구네 집에 가고 있는 중이오. 거기서 만날 수 있겠어요? 파리에서 오기도 편해요. 테제베(고속 철도-역주)를 타고 네 시간이면 곧장 아비뇽역에 떨어지니까 거기서 차를 렌트해서 오면 돼요." 사이러스는 전화기에 떨어진 면도 크림을 닦아 내고 나서 메모지와 연필을 집었다. "우리가 그리로 가겠소, 어디서 만나지요?"

"내가 머물게 될 곳의 전화번호를 알려 줄게요. 엑상프로방스에 도착하거든 전화하시오. 피차 할 얘기가 많을 겁니다."

잠깐 조용하더니 다시 그의 음성이 들려 왔다.

", 사이러스 씨 어제 별다른 일은 없었소? 미행당하거나 하진 않았어요?"

사이러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홀츠를 봤다고 하면 이 네덜란드인이 겁을 집어먹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 얘긴 만나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혀, 아무 일도 없었소."

"잘됐군, 좋아요. 연필 준비됐어요?"

프란젠이 아누크의 전화번호를 부르자 사이러스가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적었다.

"그런데 하나 물어봅시다."

프란젠의 음성에서 근심의 낌새를 느긴 사이러스는 순간 긴장하여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저녁엔 어디서 식사했소?"

"브라스리 립 (립 식당) "슈쿠르트(양배추 절임 요리)?"

"물론이오. " "잘했어요. , 그럼 아 비엥토(또 봅시다)"

앙드레와 루시에게 전화하고 면도를 끝내고 짐을 챙긴 사이러스는 30분 후엔 밑으로 내려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몇 분 후 앙드레와 루시가 들어왔다. 빨리 소식을 듣고 싶었던지 급하게 갖춘 듯한 차림새에 상기된 얼굴들이었다.

"그가 연락해 올 거라고 내가 그랬지?"

다소 흥분되는 듯 사이러스의 아침 안색도 여느 때보다 발그스름했다.

"이제 우린 어디로 좀 가봐야 하네. 루시가 아직 파리 구경을 다 못했을 텐데 다른 데로 끌고 가게 돼서 미안하구먼."

그가 눈썹을 치켜 올려 미안함을 표시했다.

"하지만 프로방스도 그다지 흉한 곳은 아니라고 들었네. 난 엑상프로방스 쪽으론 한 번도 못 가봤어. 앙드레, 자넨 가봤겠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들이 있는 곳이죠. 여대생들도 있고. 돈 많은 과부도 한둘 있을지 모르죠. 당신도 맘에 들 거야, 룰루. 정말 아름다운 고장이거든."

루시가 파리 여자들을 유심히 관찰한 끝에 체득한 제스처를 흉내 냈다. 아랫입술을 쑥 내밀고 입을 삐죽대면서 어깨 으쓱하기가 그것이었다.

"예쁜 여자들? 무슨 끔찍한 소리야? 다른 데서 만날 순 없어? 프랑스에는 호보켄(뉴욕 시와 마주보고 있는 뉴저지의 베드타운-역주)같은 곳은 없나? 그런 데가 편할 것 같은데."

식사를 마친 그들이 숙박비를 계산하고 있을 즈음 다섯 번째 담배를 입에 문 파라두는 잡지를 사오지 못한 걸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윽고 앙드레 일행과 그들의 짐이 나오는 것을 본 그는 간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공항으로,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 같았다. 10만 달러는 날아갔다. 메르드. 택시 한 대가 호텔 앞에 멈추자 그는 시동을 켜고 본능적으로 연료 계기판을 확인했다.

강을 건넌 택시는 로와시 공항이 있는 동남쪽으로 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우회전했다. 마음이 푹 놓인 파라두는 계기판을 철썩 때렸다. 오스테를리츠 역이나 리옹 역으로 가려는 모양이다. 5분 후, 그들이 리옹 역으로 가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그로선 견인 구역에 차를 두고 가야 한다는 얘기다. 메르드. 하지만 10만 달러에 비하면 그깟 벌금이 대수인가, 그는 핸들을 잡지 않은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호주머니에 쑤셔 넣은 다음 택시를 뒤따라 테제베 전용 대합실 앞에 차를 세웠다. 그들이 표를 미리 사두었을 경우 따라잡으려면 서둘러야 할 터였다. 그는 보도 연석에 바퀴 두 개를 처박아 주차시킨 다음 가방을 들고 황급히 대합실로 달려들어갔다.

달려가던 그는 미끄러지며 멈춰 섰다. 때마침 신문 가판대에 놓인 잡지들을 구경하고 있던 그 여자와 하마터면 충돌할 뻔했다. 곧 남자 둘도 발견했다.

그들은 표를 사려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긴 행렬에 합류했는데 파라두에겐 줄이 긴 게 무한히 반가웠다. 그는 신문을 사서 머리를 숨긴 채 그들 바로 옆줄에 섰다.

그들이 자기네 줄 창구에 도달하기 전에 그의 차례가 먼저 왔다, 표 판매원이 짜증스러운 듯 쳐다보더니 말했다. "손님은요?"

메스인가? 스트라스부르? 마르세유?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행렬에서 빠져나온 파라두는 가방에서 무엇을 찾는 척하며 옆줄에 등을 돌린 채 서서 귀를 쫑긋 세웠다.

미국식 발음을 듣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그는 앙드레가 유창한 프랑스어로 아비뇽 행 좌석 세 개를 주문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다른 사람들 얘기로 착각하고 넘어갈 뻔했다. 그러나 이어서 영어가 들렸다. "선생님, 다음 기차는 10분 후에 떠난대요,"

아비뇽으로 간다는 얘기다. 뒤에 선 여자의 불평과 그녀의 개가 낑낑대는 소리를 무시하고 다시 표 사는 줄로 밀고 들어간 파라두는 창구로 돈을 밀어 넣었다.

기차가 출발하려면 아직 몇 분의 시간이 있었지만 홀츠에게 전화할 시점은 아니었다. 파라두는 그들 세 사람이 기차에 오르는 것을 확인할 때까진 기다릴 참이었다.

카밀라는 밝고 명랑한 척 해보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대단히 고전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만 해도 그렇게도 좋았던 루디의 기분이 싹 바뀌어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변기의 받침대를 올려놓고 나와 카밀라에게 엄청난 짜증을 불러일으켰던 그 끔찍하고 불쾌한 사내 때문임이 분명했다.

저녁에 타이예방에 가서 훌륭한 음식을 먹긴 했지만 생기 넘치는 자리가 되진 못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도 내내 루디는 딱딱거리기만 했다. 식사엔 거의 손도 안 대고, 마사지도 안 받으려 들고, 장 폴, 필립과 함께 점심 먹자는 그녀의 제안을 매우 상스런 소리와 함께 거절했다. 그들처럼 재미있는 사람도 없는데.

이런저런 상황을 종합해 본 그녀는 따라오지 말걸 하는 후회가 슬슬 들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는 넋 나간 사람처럼 전화기 옆에만 붙어 있다. 그러나 노력해 볼 필요는 있다. 그 더러운 내막을 혹시 털어놓을지도 모른다.

"얘기해 봐요, 자기,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홀츠는 전화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도움은 무슨 도움."

카밀라는 담배에 불을 붙여 그의 쪽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루디, 당신의 소년과 같은 매력이 참으로 뿌리치기 힘들게 느껴지는 때가 가끔 있어요. 난 그저 도와주려는 것뿐이에요. 무슨 일이죠? 그 네덜란드인 때문인가요?"

물론 그 녀석 때문이다. 3천만 달러짜리 세잔느를 들고 파리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그 녀석. 자신의 위치를 알려 주겠노라고 했던 바로 그 녀석. 그가 전화를 걸어 올 때까진, 그리고 파라두가 연락해 올 때까진 홀츠는 꼼짝 않고 전화기 옆에 앉아 있어야 할 입장이었다, 리츠 호텔에 감금된 것이나 마찬가지다_ 그는 카밀라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진짜로 알고 싶은 건 아니겠지?"

카밀라가 고개를 움츠렸다. 자신이 신고 있는 샤넬 구두의 두 가지 색조가 소리 나지 않는 오부송 카펫의 분홍색 초록색과 대비되는 그 놀라운 색상 효과를 보고 감탄사를 내지 않으려니 무척 힘들었다. 그녀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전혀 알고 싶지 않아요. 난 나가서 산책이나 할까 봐."

홀츠가 불퉁거렸다.

마지막으로 올라탄 승객들이 자기 좌석을 찾아 객실을 이동하는 동안 기차는 서서히 역에서 빠져 나갔다. 바지런한 중역들은 어느새 윗도리를 벗어부치고 앞에다 노트북 컴퓨터를 펼쳤고, 어린아이들과 함께 탄 어머니들은 장난감과 심심풀이 먹거리를 찾느라 짐보따리를 뒤지고 있었으며, 행락객들은 잡지 책이나 안내서를 보느라 모두들 기차의 속력이 빨라지고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매끄럽게 속도를 높여 가고 있는 기차는 이제 시속 16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그들을 남쪽으로 옮껴 갈 터였다.

이등석 표를 산 파라두는 기차 후미에서 일등석 객실 쪽으로 천천히 지나가며 까만 선글라스 밑으로 이쪽 저쪽을 훑고 있었다. 곱슬머리를 한 타래로 묶은 여자부터 찾는 게 손쉽다. 역에서 느꼈던 불안감은 이미 사라졌다, 그는 그들이 타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고 그들이 내릴 곳도 알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기차 안에서 혹시 누군가와 접촉하는지 여부만 점검하고 나면 홀츠에게 보고할 참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다음 몇 시간은 좀 편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앞쪽 객실 중간쯤에 그들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탁자를 긴 네 자리 좌석에 앉아 있었는데 네 번째 좌석은 비어 있었다 그는 핸드폰이 들어 있는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객실 끄트머리로 가서 WC라고 표시된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러곤 그 안의 좌석이 허용하는 대로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취한 다음 리츠 호텔 전화번호를 눌렀다.

홀츠가 오전 내내 신경에 거슬렸던 문제를 두고 궁리해 가며 전화를 받는 바람에 그들의 통화는 꽤 길어졌다. 혹시 프란젠에게 뭔가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건 아닐까? 지금쯤은 분명히 리츠로 연락이 왔어야 하는데. 전화를 하지 않는 이유는? 돈을 더 짜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남은 한 가지 이유는 뻔하다. 홀츠의 경고를 무시하고 엉뚱한 짓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홀츠에게 지고 있는 막대한 도덕적 의무를 저버리고 사이러스 파인과 일하기로 한 것이다. 홀츠는 그 네덜란드인에 대해 파라두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파라두가 그의 말을 막았다.

"그야 당연히 탐욕스럽고 은혜도 모르는 인간이겠죠. 하지만 그렇게 설명해 가지곤 도움이 안 돼요. 정확히 어떻게 생겼어요? 그리고 그를 찾아냈을 경우 어떻게 해주길 파라는 거예요?" 홀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프란젠의 신체적 특징을 집중적으로 얘기했다. 그리고 파라두에게 다시 한번 반복시켰다.

그러나 프란젠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정리가 되지 않아서 그다음 지시는 정확하게 내리기 어려웠다. 보수가 높아질 것을 예상한 파라두가 대뜸 내놓은 안은 그를 제거하자는 것이었아.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적어도 그 그림들을 되돌려 받을 때까진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를 보는 대로 내게 알려 주기만 하면 돼. 그다음에는 내가 결정할 테니까. 그리고 자네의 핸드폰 번호나 알려 주게."

바 칸으로 갔던 루시가 커피 세 잔을 들고 당황스런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참 별일도 다 있네. 여기선 남자 둘이 함께 화장실에 들어가도 되는 거야? 프랑스 사람들은 원래 그런가?" 앙드레가 웃으며 쳐다보았다

"내가 알기론 절대 그랬던 적은 없는데, 룰루, 그런데, ?"

"방금 화장실 앞을 지나오는데 안에서 누군가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어. "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화장실 쪽을 가리켰다.

"진짜 대화 소리가 났다구."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프랑스는 정말 요상스런 나라야."

규칙적이고 부드럽고 졸리운 흔들림과 함께 기차는 남쪽으로 계속 달렸다. 리옹을 지나자, 부르군디의 녹색 만곡들에서 남부의 들쭉날쭉한 경관으로 전원 풍경이 바뀌었다. 포도밭들이 가파른 언덕배기를 수놓고, 하늘의 푸르름도 눈에 띄게 짙어켰다. 사이러스가 가볍게 코를 고는 동안 앙드레는 루시에게 자신이 아는 프로방스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프로방스는 특이한 고장이다. 고유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해하기 힘든 프랑스어를 구사한다. 사람들의 성격은 화끈하고 급한 지중해 기질이다. 시계가 아니라 계절로 구분되는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어 시간을 정확나게 지키는 것을 북부의 요상한 강박관념쯤으로 생각한다. 프로방스 배후의 산야는 넉넉한 아름다움을 지녔고 사람으로 붐비는 시장들에선 인간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홍학과 목동들로 유명한 카마르그(남부 론강 어귀의 섬-역주) 그리고 먹거리들, 타페나드, 에투페(찜 요리 - 역주) 송로, 무화과, 염소젖 치즈, 올리브 기름, 허브 향내 나는 시스테롱산 양고기, 엑상프로방스의 다이아몬드 모양의 칼리송(아몬드 과자-역주)이 유명하다.

루시의 손가락이 앙드레의 입술을 막았다.

"꼭 관광 사무소 직원 같아. 당신 얘길 듣고 있으니까 배가 더 고파지잖아."

다음 정거장이 아비뇽이니 내리실 승객은 정확히 2분 내로 움직여 달라는 안내 방송이 불어와 영어로 나왔다. 사이러스가 눈을 뜨고 머리를 흔들더니 말했다.

"하마터면 잠들 뻔했네. 이제 다 온 건가?"

아비뇽역은 사실 프로방스의 관문으로 택할 만한 곳이 못 된다. 볼 때마다 언제나 깨끗이 청소하고 제대로 정리해 주길 기다리는 상태로 남아 있다.

무거운 짐을 옳기는 데 더할 수 없이 불편한 변덕스런 에스컬레이터와 높은 계단, 자동차를 증오한 나머지 특별히 악의를 가지고 설계한 듯한 역 앞 광장. 질서라고는 전혀 없고 사람들 언성이 높아진다, 진입이 차단되어 낭패감에 빠진 운전자들은 흔히 품위 유지를 포기하고 손이나 팔을 휘두르며 소리 높여 인사해야 한다 .

그들 세 사람이 렌터카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파라두는 택시를 잡아 뒷좌석에 탔다, 기사가 한쪽 눈썹을 구부정하니 치켜 올리고 뒤돌아보았다.

파라두가 말했다. "잠깐 기다려요. 차 한 대를 뒤쫓아가야 하니까,"

기사가 손짓으로 주차 구역을 가리켰다. "차라면 얼마든지 골라잡을 수 있습니다, 손님. 특별히 좋아하는 색이라도 있으십니까?" 파라두는 렌터카 사무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잠자코 있으시오. 그 차가 보이면 내가 알려 주겠소."

기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슈. 돈이야 당신이 내는 거니까."

기사는 미터기를 작동시킨 다음 신문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10분 후, 앙드레가 운전하는 청색 르노가 조심조심 렌터카 주차장

에서 빠져나왔다.

"바로 저 차요. 어서 가요, 놓치면 안 되니까."

파라두가 말했다.

두 대의 차는 철교 밑을 지나 A7 도로로 향하는 차량 행렬에 합류했다. 앙드레는 이 지역 운전 기법에 익숙해질 때까지 조심해서 리노를 몰았다.

한동안 프랑스에서 떠나 있다가 돌아와 운전할 때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차량들의 속도와 급작스런 차로 변경, 배기관에 달라붙을 듯 착 불어 따라오며 호시탐탐 추월할 기회만 노리는 뒤차들 때문에 마음 편하게 운전할 수가 없다. 그 상태가 계속되다가 아비뇽 공항을 지나 널찍하게 펼쳐진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앙드레는 비로소 어깨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루시와 사이러스는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가는 차들과 성난 듯 빵빵대는 경적소리에 이따금 눈살을 찌푸리며 말없이 앉다 있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야 왜 저렇게 서두르지? 남부가 멋지고 조용하고 나른한 곳이라는 말은 거짓말이야." 루시가 말했다,

소형 시트로엥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앞을 가로지르는 바람에 앙드레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유전자 때문이야, 룰루. 프랑스 사람들은 가속 페달에 올려놓는 오른발이 무겁게 태어났거든. 차는 보지 말고 경치나 즐기라구."

그들은 계속 남쪽으로 달렸다. 파라두가 탄 택시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 뒤를 쫓고 있었다. 지중해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잠겨 드는 오후 해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짙은 푸른색 하늘을 배경으로 솟은 석회암 언덕들을 구워 버릴 듯한 바깥 열기가 차 안에서도 느껴졌다, 잠시 후 엑상프로방스에 가까워지자 들쭉날쭉한 거대한 산 생빅투와르 산이 펼쳐졌다 세잔느를 그토록 매료시켰던 바로 그 산이다.

엑상프로방스로 들어서자 앙드레는 차창을 내리고 대기에 깃든 신선함을 맛보았다. 산들바람이 미라보 산책로 아래쪽에 공들여 마련해 놓은 거대한 분수에서 나오는 물보라를 흩날리고 있었다. 앙드레가 말했다.

"저기에 신사 숙녀들이 보이죠? 프랑스에서 제일 아름다운 거리예요."

그들은 산책로 양편으로 늘어선 플라타너스 가지들로 이루어진 긴 터널로 접어들었다. 그늘진 녹색 터널에서 시원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디 보자, 와본 지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한걸. 여기 어디에 호텔 하나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 바로 저거야. 네그르 코스트 호텔. 저기가 어때요?"

파라두는 그들이 차 키를 호텔 도어맨에게 넘겨주고 짐을 안으로 들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방을 잡아 들어갈 때까지 한 5분 정도 시간을 둔 후 택시 기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내렸다, 그러곤 호텔 맞은편 벤치에 가서 앉았다. 어디에 가면 차를 렌트할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을 때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파라두? 지금 어디에 있나?" 홀츠의 음성이 희미하고 가느다랗게 들려 왔다.

"엑상프로방스에요. 그들이 5분 전에 호텔에 투숙했어요." "누굴 만나거나 한 적은 없고?" 파라두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어 댔다.

"내가 돌벽까지 꿰뚫어 볼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잠깐, 그들이 다시 밖으로 나왔어요,

그들 셋만 있어요."

파라두가 거리를 따라 올라가는 그들을 지켜보는 사이 잠시 대화가 끊겼다

"됐어요. 카페로 들어가는군요. 나중에 내가 전화할게요."

카페를 들여다보니 손님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서비스도 느릴 게 분명하다. 시원한 황금색 맥주를 들고 가는 웨이터를 본 그는 입술을 한번 핥고 나서 다시 거리를 따라 내려왔다. 렌트하는 데를 찾을 셈이었다.

사이러스가 프란젠에게 전화하러 간 사이 루시와 앙드레는 뒤 가르송 싸페 테라스에 앉은 다른 손님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관광객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지역 비즈니스맨들, 전혀 실용적이지 못한 일과를 마치고 쉬고 있는 대학생들 루시는 학생들에게 매료되었다. 앙드레의 말대로 눈에 띠게 잘생긴 학생들이 몇 명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검은 잔과 담배를 쉬지 않고 만지락대며 희희덕거리고 웃어대다가 요란하게 포옹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자주 일어서곤 했다.

"재네들은 대학생이 아니라 직업적인 키스꾼 같아. 저기 저 사람들 좀 봐" 루시가 말했다.

"그것도 커리클럼의 일부야, 룰루. 입맞춤 전공 학생들이지. 뭘로 마실래?"

마실 것을 주문한 그들은 끊임없이 바뀌며 느릿느릿 보도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행인들의 시선과 카페 탁자에서 내다보는 시선들이 마주치면서 아무 근거 없는 호기심들이 느긋하게 끝없이 교환되고 있었다.

앙드레는 루시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녀는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듯, 걸리는 건 모조리 빨아들이는 레이더 스캐너처럼 열심히 이쪽 저쪽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앙드레는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 그녀 쪽으로 자기 얼굴을 갖다 댔다.

"당신과 함께 온 나라는 사람은 잊어버린 거야?"

웨이터가 마실 것을 들고 나타났을 때 사이러스가 다가와 말했다.

"맙소사, 키스하는 것도 전염성이 있나 보군. 내가 들어간 전화 부스 바로 옆에도 완전히 딱 붙어 버린 한 쌍이 보이더니 그 커플은 아직도 저러고 있다네. , 청춘이란 좋은 거야." 그가 자리에 앉아 잔을 들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준비가 다 됐네. 르 피아크르란 식당으로 가서 니코를 만나는 거야. 여기서 30분가량 떨어진 전원 지역이래. 그는 프티트 아미 (귀여운 여자 친구)를 데리고 나오겠다는군." 맥주를 한 모금 쭉 들이켠 그는 만족스러운 듯 입술을 닦았다.

"재미있는 저녁 한때가 될 것 같아."

루시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또 하나 오네. 여긴 선남선녀들이 득실대는군요."

"아무래도 운에 맡겨야 될 것 같아. 그렇지 않은가? 난 왠지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싶어져. 이제 그래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사이러스가 말했다.

그들은 가능성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과연 프란젠이 그 위작을 그렸을까(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와 홀츠는 굳건한 동업자 관계일까(사이러스는 그게 다소 의심스럽다고 보았다.)? 프란젠은 드노이예를 알고 있을까? 원작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까?

의문은 계속 이어졌지만 해답은 하나도 얻어낼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이제 내막을 밝혀 볼 때가 됐다는 사이러스의 말에 동의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옅은 자줏빛 황혼이 미라보 산책로를 번쩍이는 동굴 같은 풍경으로 바꿔 가고 있었다. 학생들은 슬슬 카페에서 나가 저녁 시간대 교육 기회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쌍쌍이 팔짱을 끼고 어슬렁대던 커플들이 걸음을 멈추고 식당 바깥에 전시된 메뉴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쑤시는 엉덩이를 비비며 벤치에서 일어난 파라두는 호텔로 돌아가고 있는 그들 세 사람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세잔느라는 화가가 왜 저 산을 그렇게 자주 그렸는지 해답이 보이는 것 같지 않아?"

사이러스가 말했다. "저길 한번 보게, 참으로 걸작이야."

그들은 왼쪽으로 생빅투와르 산을 끼고 D17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산꼭대기엔 마지막 노을빛이 걸려 있고 아래쪽 등성이들엔 이미 짙은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그러다가 듬방 사방이 깜깜해졌다. 엑상프로방스에서 불과 몇 마일 외곽 지역을 지나고 있을 뿐인데 먼 농가들의 가느다란 불빛들만 이따금 보일 뿐 사람 사는 흔적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차량들도 뜸했다. 이따금 불도 켜지 않은 트랙터들이 헉헉대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과, 반대편 차선에서 충돌할 듯 달려오는 차량들만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들 뒤로 차 한 대가 꾸준하게 쫓아오고 있었다. 뒤차는 프랑스 운전자치곤 보기 드물게 신중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 백미러에 잘 잡히지도 않았다,

좌석에 등을 기댄 파라두는 핸들을 붙잡고 앉아 있었다. 상황이 점점 유리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시골구석으로 들어가다 보면 분명히 기회가 올 터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들을 덮치고픈 유혹에 시달렸다. 도로에서 끌어 내린 다음 파리에서부터 끼고 온 총으로 단숨에 일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전문가로서의 신중함이 요구되었다.

참자, 브루노, 기다리자, 짐을 싣지 않은 걸 보면 그리 멀리까지 가진 않을 모양이다. 그들이 차에서 내릴 때, 그때가 기회다.

"정말 여기가 맞아요, 선생님? 훌륭한 식당이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 니코 같은 식도락가가 올 만한 데가 아닌 것 같은데요,"

앙드레가 속도를 낮추고 급커브틀 돌았다.

"D17도로변에서 간판이 보일 거라고 했는데, , 저기 보이는 게 뭐지?

그것은 나무 기둥이었는데 빨간색, 흰색, 파란색으로 '피아크르, 르 파트롱 망쥐 이시(피아크르, 품격 높은 사람들의 식당)'라고 씌어진 간판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화살표 하나가 이륜 트럭 폭보다 넓어 보이지 않는 샛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이러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1킬로미터가량 꼬불꼬불한 길을 달린 끝에 마침내 프랑스인에겐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외지인들에게는 즐거운 충격을 안겨 주는 인적 드문 곳에 세워진, 자그맣고 품위 있으며, 주차장의 상태로 보건대 인기 있는 레스토랑에 당도했다. 건축학적으로 보자면, 흔히 원 건물에 박힌 암석 자재를 숨기거나 결합시칠 때 쓰는 수법인 분홍색 애벌 칠로 겉만 바꿔 놓은 수수하고 소박한 2층 건물이었다.

소박하긴 해도 손질이 잘되어 있었다. 건물 정면으로 포도 덩굴이 무성하게 기어올라 있고, 식탁과 의자들이 갖추어진 널따란 테라스에서 보면 사이프러스 나무들, 협죽도 덤불, 늙어 쭈글쭈글한 올리브 나무 한 그루가 심어진 정원이 한눈에 들어올 것 같았다. 지금 정원엔 조명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미안해요, 선생님. 아까 얘긴 취소할게요. 괜찮아 보이는 곳이네요."

앙드레가 몇 군데 빈자리 중 한 곳에 차를 세우며 말했다.

그들이 테라스를 가로질러 지나가자 몇몇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았다. 프란젠도 거기 있었다. 그는 당당한 몸집의 여자와 얘기하느라 정신이 팔려있었는데 여자는 희끗희끗한 머리칼 색을 돋보이게 하는 회색 드레스 차림이었다.

"마침내 만났군. 행운을 빌자구."

사이러스가 말했다.

D17 도로변에 차를 세운 파라두는 가방을 들고 깜깜한 도로에 내려섰다. 식당 정원 언저리의 어둠 속에서 사이프러스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살펴본 그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고 불빛도 너무 밝았다.

그러나 그들의 차가 있다. 살금살금 자갈 마당 주차장을 돌아간 그는 그들의 청색 르노를 찾아냈다.

 

 

20. 추격전

 

테라스 한쪽에서 청바지에 횐 셔츠 차림의 포동포동하고 키 작은 여인이 미소 짓는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식당의 테리어 견이 다리에 용수철이라도 단 듯 거칠게 뛰어오르자 그녀가 둥글게 만 메뉴판으로 개를 위협하며 그들을 보호했다.

"므시유, , 봉수와, 봉수와(신사 숙녀분들, 어서 오세요). 아누크의 친구분들이시죠?"

그녀가 공중으로 뛰어오른 개를 철썩 때렸다.

"에르클! 사 쉬피 (그만하라니까) , 절 따라오시죠."

그녀는 몸을 흔들며 마치 항해하듯 식탁들을 헤집고 그들을 인도했다. 테리어도 그녀 옆으로 껑충껑충 따라왔다. 그들을 본 프란젠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웃음 띤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친구에게 그들을 소개시켰다.

아누크는 전통적인 미인형은 아니지만 분명히 잘생긴 스타일이었다. 무성한 머리칼 밑으고 드러난 그녀의 옆모습은 동전에서 익히 보아 온 얼굴과 흡사했는데, 지중해 햇살을 그대로 간직한 듯한 올리브색 살결을 가지고 있었다. 까만색 눈에, 튼튼하고 수완 있어 보이는 손을 가진 그녀는 함부로 대할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를 본 사이러스는 눈을 빛내며 본능적으로 나비넥타이를 바로잡았다.

프란젠이 로제 와인 병을 바삐 기울이며 사람들의 잔을 채워 주면서 말했다.

"여기 음식은 뭐든 괜찮은 편이지만 피살라디예르(니스 풍의 파이-역주)가 특히 뛰어나죠. 그리고 햄도 프로방스에서 여기만한 곳이 없어요. 그렇지, 아누크?"

아직 약간 불안한 입지에서 조심조심 발을 내딛는 남자의 간절한 어조로 그가 아누크에게 말했다. "안 그럴 때도 많지만 이번엔 그럴지도 모르죠."

아누크는 억양이 다소 강하긴 해도 자신감이 느껴지는 영어를 구사했다. 그녀는 자기 말에 깃든 조소의 분위기를 해소하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다루기 힘든 고집 센 아이를 감시하는 어머니처럼 신중하면서도 따뜻한 눈길로 프란젠을 쳐다보았다.

느긋한 식전 절차, 메뉴를 연구하고 요리에 대해 토론하면서 우유부단함과 흥분감을 즐기는 가운데 더할 수 없이 식욕을 돋우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사이러스가 이제 점잖게 실무적인 주제를 거론해 볼 때가 됐다고 느낀 것은 첫 번째 술병이 비워지고 추가 주문을 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가 말했다. "니코, 당신에게 설명해 줄 게 좀 있소."

앙드레가 먼저 얘기를 시작했다, 아누크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열심히 듣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얘기가 전개될 때마다 눈에 띄게 반응하는 프란젠과 아주 대조적이었다. 특히 앙드레가 드노이예를 만난 일과 장비를 도둑맞은 얘기를 하는 대목에선 프란젠의 눈썹이 한참 높이 치켜 올라갔다.

사이러스가 앙드레 뒤를 이어서 얘기하려는 순간 일차 코스 요리가 나왔다. 속에 든 올리브, 양파, 앤초비(지중해산 멸치류-역주)가 그대로 드러난 타트, 야채 그룻, 콩 그룻, 나륵풀(향미료로 쓰이는 차조기과의 일년초-역주)과 마늘로 맛을 낸 파스타 수프 그릇, 타페나드 단지, 소금으로 간을 맞춘 브랑다드(대구 요리 -역주-미끈미끈한 잼 같은 라타튜이 (잡탕 스튜-역주). 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맛있는 장애물의 하나라고 알려진 프로방스 식단이었다.

사이러스는 음식을 먹는 틈틈이 프란젠을 힐끔힐끔 관찰했다 지금까지 한 얘기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네덜란드인은 마치 평범하고 흥겨운 친구들 모임에 와 있는 사람처럼 아누크의 브랑다드를 맛보기도 하고 자신의 수프를 맛보여 주기도 하면서 음식과 아누크에게만 열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다음 얘기를 듣고 난 후에도 그 기분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기를 사이러스는 빌었다.

한편 식탁 맞은편에 앉은 루시는 앙드레로부터 연신 훈계를 들으면서도 모른 척하며 식사에 열중해 있었다. 앙드레는 아직도 네 가지 요리 코스가 남아 있음을 명심하고 초반엔 좀 자제해서 먹으라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그게 그녀로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식욕 좋은 건강한 처녀인 데다 점심까지 거른 터여서 흙내 물씬하고 톡 쏘는 풍미의 이 일차 코스는 그녀가 일찍이 경험해 본 그 어느 식단과도 비교될 수 없었다, 그녀는 하루종일 몸을 움직인 일꾼처럼 게걸스럽게 먹어대고 있었고, 사실 그 모습은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깨끗이 비운 접시와 사발들이 치워지자 사이러스가 심호흡을 하고 나서 앙드레가 했던 다음부터 얘기하기 시작했다. 홀츠가 파리에 도착했다는 얘기가 나오자 뚜렷한 반응이 감지됐다. 그러나 반응한 사람은 프란젠이 아니라(그는 벌써 예상했다는 듯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아누크였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경멸의 코웃음이 이어졌다. 그러곤 불쾌해진 입맛을 와인으로 씻어 내고 싶은 듯 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그것을 본 사이러스가 용기를 내어 슬그머니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멜론과 여인)의 거래를 자신이 취급하고 싶다고 말했다. 원화 말이다.

얇게 썰어 구운 납작납작하고 바삭바삭한 감자와 함께 불그레한 분홍빛에 향 좋은 양고기가 나오자 프란젠이 한눈을 팔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누크의 중지가 가차 없이 그의 허리를 찔렀다.

"알로르(그렇다면) 니코, 지금까지 얘길 들었으니 이젠 당신이 얘기할 차례잖아요."

프란젠의 얘기는 중간중간 양고기를 뜯어 가며 진행되었으므로 끝이 나려면 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그 위작을 그렸지만 드노이예와는 만난 일이 없다고 했다, 홀츠가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홀츠란 이름이 언급되자 이번에도 아누크가 밥맛 떨어진다는 표정을 잠시 지었다. 그걸 본 사이러스는 그녀도 동맹군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프란젠의 얘기가 계속됐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홀츠가 똑같은 그림을 한 점 더 날조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악당들과 손잡고 일해 온 그로서도 그런 경우는 처음인 모양이었다. 내막을 알 수 없는 사이러스로선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거참 희한하군. 두 번째 위작은 누구 부탁으로 청탁한 걸까?"

프란젠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업종에선 그런 건 물어보지 않는 게 관례요. 아주 급하다고 하는 얘기만 들었소."

"홀츠가 원화를 팔아 주려 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위작이 나돈다는 것을 알면 드노이예도 기분이 좋지 않겠군."

사이러스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대단히 복잡해 보이긴 하지만, 홀츠가 원화와 위작 둘 다를 원화인 것처럼 해서 팔아 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그는 두 명의 고객을 찾고 있을 거요. 자기 그림을 대중 앞에 드러내 놓고 싶어하지 않는 아주 신중한 고객들 말이오. 사실 그런 고객은 찾아보면 많이 있거든.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몇 사람 되니까."

"그러니까, 그 두 고객 모두 자기가 진품을 산 걸로 생각할 거란 얘긴가요? 그건 말도 안 돼요, 선생님." 앙드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장담할 게 못 돼, 젊은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테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남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위대한 그림을 소유하는 걸로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다네. 허구한 날 지하실에 처박아 두는 한이 있더라도 말일세. 내가 듣기론 실제로 그 쪽이 더 뿌듯한 마음이 든다고 하더군."

사이러스는 와인을 홀짝이고 나서 프란젠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진품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니코?

프란젠이 아누크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교시를 바라고 그런 거라면 아무 소득도 없는 짓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했으니까. 그 네덜란드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사이러스는 이미 그의 답변을 감지했다. 프란젠이 말했다.

"내가 갖고 있소. 진품과 위작 둘 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그제야 아누크가 미소 비슷한 것을 얼핏 흘렸다.

사이러스는 말없이 몸을 뒤로 기댔다. 샐러드와 푸짐한 플라토 드 프로마질(치즈 쟁반-역주) 추가 주문한 와인이 식탁에 나왔던 것이다. 그는 네덜란드인을 지켜보며 앉아 있었다.

프란젠은 지금 프랑스 치즈들에 대해 루시에게 한창 강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염소, 젖소, 양의 젖으로 만든 수많은 치즈들, 그리고 브랜디와 마늘이 들어가 톡 쏘는 향을 가진 카샤.

사이러스 자신이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프란젠의 심사가 편안해 보였던 때문일까? 아무튼 프란젠은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한 사람처럼 보였다. 사이러스는 생각을 모으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가능성은 두 가지가 있어요. 우리가 힘을 합해 캅페라로 가서 드노이예를 만나는 겁니다. 그에게 또 하나의 위작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진품을 돌려준 다음 우리의 희망 사항을 털어놓는 거요, 우리에게 일을 맡겨 주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거라고 말이오. 앙드레의 얘기로 볼 때 그는 점잖은 사람인 것 같소. 그는 지금 그림을 팔려고 하는데 그거야말로 내 전공이니. 판매 수수료가 엄청날 거요. 우린 그 돈을 나누어 가지면 되오."

사이러스가 빙그레 웃었다.

"물론 지금까지 얘긴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된다고 가정할 때의 경웁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 같소."

프란젠이 입술을 닦고 나서 와인을 조금 마셨다.

"그럼 두 번째 가능성은 뭐요?"

", 그건, 첫 번 경우만큼 재미있진 않을 것 같소. 근사한 저녁 식사를 대접해 준 데 대해 당신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우린 뉴욕으로 돌아가는 거요. 당신과 홀츠는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도록 남겨 두고 말이오."

심사숙고하는 동안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바로 그 순간 테라스 건너편 깜깜한 정원 한구석에서 핸드폰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귀가 아주 예민한 사람이라면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이프러스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테라스 쪽을 계속 감시하고 있던 파라두는 전화를 받아도 될 만큼 충분히 먼 거리까지 황급히 후퇴했다.

"그들은 지금 엑상프로방스 외곽의 한 식당에 있어요. 그 네덜란드인과 함께."

홀츠가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파라두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언뜻 듣기에도 뭔가 안 좋은 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내려가겠어, 거기서 제일 가까운 공항이 어디지?"

"마르세유 공항이죠. 당신이 도착할 때쯤이면 좋은 소식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소. 그들의 차에 약간의 작업을 해두었으니까."

"그 네덜란드인이 다치는 건 바라지 않아. 마르세유에 가서 다시 연락하겠네 "

전화가 끊어졌다. 파라두는 부러운 눈길로 식당 불빛 쪽을 힐끔 보고 나서(그는 지금 며칠 굶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솔길을 따라 내려갔다. 자신의 차에서 기다릴 셈이었다.

자리가 의논하는 분위기에서 자축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었다. 아누크가 몇 차례 끄덕여 주고 쿡쿡 찔러 준 데서 다소 기운을 얻은 프란젠이 마침내 사이러스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들은 내일 아침 아누크의 집에서 만나 모두 함께 캅페라로 가기로 했다. 이쪽에서 솔직하게 나가면 드노비예도 감명을 받아, 도와줘서 고맙다고 할 것이다. 그들에게 호감을 느끼는 한편 홀츠의 음흉한 작태에 치를 떨면서 사이러스에게 거래를 맡기게 될 것이다. 그들은 기분이 좋아졌고 낙관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확실한 판단과 조리 있는 분석 때문만은 아니었다, 커피를 마시고 나자 프란젠이 주방장이 은밀히 보관하고 있는 마르 술(포도찌꺼기로 만든 브랜디-역주)을 몇 잔, 아니 인심 좋은 식당이니 아예 큰 컵으로 달라고 했던 것이다. 포도 껍질 즙을 짜서 만든 그 독한 증류주는 소화에도 도움을 주지만, 프랑스 의료계의 박식한 사람들도 인정한 바 있다고 알려진 특정한 효험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장시간 와인을 마시고 한껏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마신 마르 술은 사람들을 풀어지게 만들었다.

그들은 주차장에서 헤어졌다. 아누크와 프란젠은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자기네 마을로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충 엑상프로방스 쪽일 것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자신의 반사 신경계가 완전히 술에 절었다는 정도는 알 만큼 적당히 취한 사람이 운전할 패 그렇데 하듯이, 앙드레는 과장됐다 싶을 정도로 조심조심 속력을 줄여서 달리고 있었다, 이따금 대화를 해보려고 노력하던 루시와 사이러스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앙드레는 차창을 내리고 가능한 한 바람을 많이 받으려고 얼굴을 창 쪽으로 빼고 운전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한참 거리를 두고 뒤에서 따라오는 희미한 전조등이 보이긴 했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갈래 길과 모퉁이로 뒤덮인 낯설고 표지판도 없는 깜깜한 길을 갑작스레 달리게 된 앙드레는 머릿속이 흐리멍덩한 가운데서도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얼마를 달리다가 마침내 A7 도로로 나가는 방향이 표시된 청색 ,흰색의 표지판을 발견했다.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섰을 몇 분 후면 엑상프로방스에 도착할 것 같았다.

고속도로의 우회로로 접어든 앙드레는 창을 올리고 드문드문 달려가는 차량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속력을 높였다. 차량들은 대부분 남부의 따뜻한 흙에서 캐낸 작물들을 싣고 파리로 달려가는 야간 화물 트럭들이었다.

한시 바삐 호텔로 돌아가고 싶어진 앙드레는 무거워지는 눈꺼풀과 싸우며 눈 초점을 유지하기 위해 몇 차례 크게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차 길이가 자기 차의 두 배쯤 되는 스페인 국적의 냉동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속력을 줄였다.

늦은 시각이어서인지 냉동차 운전사는 난폭운전을 해대고 있었다. 차로를 바꾸기 전에 백미러를 잘 봤어야 했다. 흔히 사고 직전엔 의식이 아주 명료해지는 법이다. 그 트럭의 꽁무늬에 씌어진 글씨며 엉켜진 불빛들, 늘어진 흙투성이 플랩(바퀴 진흙받이 -역주) '레알 마드리드(스페인의 프로 축구팀 -역주) 만세' 라고 쓰인 스티커, 타이어에 새겨진 무늬 따위가 앙드레의 시야에 똑똑히 들어왔다.

앙드레가 그것들을 보고 나서 브레이크를 밟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1초도 되지 않았다. 트럭 꽁무니가 바로 코앞에 온 것을 본 순간 밟고 있는 브레이크 페달에서 갑자기 아무 저항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핸들을 왼쪽으로 트는 순간 차가 도로 중앙 풀밭을 덮쳤고 중앙선 구실을 하는 나무 울타리를 부수고 반대편 차선들을 가로질러 도로 가장자리에 세워진 장벽을 치고 나갔다. 덤불과 나뭇가지들과 바위들을 가르며 언덕배기로 미끄러져 내려간 차는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와 유리가 부서지는 둔탁한 소리를 끝으로 어느 소나무에 가 처박혔다.

엔진은 아직도 부르릉거리고 있었다. 앙드레는 핸들 위에서 떨고 있던 손을 뻗어 어렵사리 시동을 껐다.

보기 좋군, 파라두가 생각했다. 아주 보기 좋았다. 반대편에서 마주 오는 트럭과 충돌했더라면 더더욱 완벽했을 테지만 그만해도 충분했다. 이제 가서 부러진 목의 수나 세보면 된다. 그는 파괴된 차량이 있는 현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U턴할 지점을 모색했다.

알코올에 절은 머리를 맑아지게 하려면 죽음의 문턱에 가보는 것보다 나은 방법도 없다. 엄청난 강도로 흔들리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정신이 맑아진 세 사람은 언덕배기를 기어올라가 도로 가장자리에 올라섰다.

"저쪽 편으로 건너갈 수 있겠어요? 엑상프로방스로 들어가는 차를 얻어 타야겠어요."

앙드레가 말했다.

그들은 몸 속 아드레날린이 급격히 분비되는 것을 느끼며 통행이 끊긴 틈을 타서 전속력으로 뛰었다. 도로를 건너오자 비로소 구역질과 몸 떨림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앙드레는 갓길에 서서 달려오는 트럭에 대고 엄지손가락을 쭉 펴 보였다. 손가락이 아직도 떨고 있었지만 그래도 희망을 걸고.

트럭은 속력을 줄이지 않고 곧장 지나쳐 버렸다. 다음번 트럭도 마찬가지였고 그 뒤로 마주친 대여섯 대도 마찬가지였다.

"그걸로는 안 되겠어. 두 사람은 눈에 띄지 않도록 저기 밑으로 가 계시다가 내가 휘파람을 불거든 올라와요." 루시가 말했다.

두 남자가 깜깜한 도로변 언덕배기로 살짝 내려가 기다리는 동안 루시는 블라우스의 맨 윗단추를 열고 안 그래도 짧은 치마단을 좀 더 올린 다음 미소 띤 얼굴로 한 손을 들고 다가오는 전조등을 맞이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수압 브레이크의 거친 마찰음을 내며 용맹한 프랑스인 하나가 구조 현장에 멈춰 섰다.

조수석 문쓸 연 트럭 운전사는 입술을 오므리고 눈을 번득이며 루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브래지어 끈을 추스르며 그에게 살짝 윙크했다. "엑상프로방스?" "파리 시 부 불레, 세리(파리로 가는데, 아가씨가 괜찮다면)" "좋아요. "

그녀가 휘파람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사이러스와 앙드레가 나타났고 그것을 본 운전사는 재빨리 차문을 닫아 버렸다.

그가 실망스런 기분을 극복하는 데는 그의 손에 쥐어 준 100프랑짜리 지폐 몇 장이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앙드레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사고가 났다고 설명하자 약간의 동정심까지 얻어낼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고속도로에서 벗어난 그들은 시내 중심부 근 처에 와서 트럭에서 내렸다. 한 손에 총을 든 파라두가 그들의 부서진 차 주변 덤불을 뒤지고 있을 시각, 그들은 이미 호텔로 되돌아가 있었다.

홀츠와 카밀라는 적의 어린 침묵 속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리츠에서부터 시작된 언쟁은 차 안에서도 이어졌고,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마르세유행 마지막 여객기의 뒷좌석에 앉아 있는 지금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위기였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파리에서 끌고 온 데 대해 격분해 있었다. 그것도 필요할 때 운전이나 시키고 하인처럼 이것저것 부려먹기나 하려고 말이다. 그녀는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도 굳이 부인하려 들진 않았다.

그녀는 기분이 아주 나빴다. 편의시설도 갖추지 않은, 공항 주변의 형편없는 작은 호텔에 들어가 하룻밤을 보내게 될 게 뻔한 데다 루디의 기분도 엉망이고, 서둘러 출발하는 바람에 당장 내일 입을 의상도 전혀 준비하지 못했으므로 앞으로도 더 악화되면 됐지 좋아질 게 없었다.

호텔은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매우 황량했다. 그들이 아무 짐도 없이 투숙하려 하자 안내원의 얼굴에 알 만하다는 듯 교활한 표정이 스쳤고 그것을 보니 더 기분이 나빠졌다. 호텔의 안내원은 제정신이 박힌 남녀라면 낭만적인 밀회 장소로 마르세유 공항을 택할 리가 없다고 조소라도 하듯 힐끔힐끔 곁눈질을 했다. 모든 것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쾌했다.

호텔 방에 들어선 홀츠는 곧장 전화기 앞으로 갔고 눈에 띄게 불만스런 대화가 오래 이어졌다. 그의 찌푸린 얼굴을 본 카밀라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물을 받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가 잠들어 있기를 빌며 오래오래 씻을 생각이었다.

그 다음날 아침의 분위기도 즐거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파라두를 만나기 위해 일찌감치 호텔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엑상프로방스로 들어온 그들은 미라보 산책로, 네그르 코스트 호텔 입구와 비스듬히 마주 보는 지점에 세워진 그의 차에 들어앉아 있었다.

"놈들이 아직 저 호텔에 있는 건 확실해?"

카밀라와 함께 뒷좌석에 앉아 있는 홀츠를 파라두가 흐릿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어젯밤에 데스크에서 확인했어요. 무슨 수로 빠져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돌아왔대요, 그후론 내가 여기서 쭉 지켜봤어요."

차 안이 다시 침묵에 싸였다. 아침 햇살을 받은 짙은 녹색 거리의 아름다움, 햇살 무늬 얼룩덜룩한 카페 차양들, 유쾌한 광경과 소리들 속에 서서히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는 아름다운 읍내 ,,, .,,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들에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카밀라의 기분은 산산조각 나 있었고, 홀츠는 초조함과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으며, 파라두는 지독한 좌절감으로 슬슬 빠져들고 있었다. 단 몇 분 안에 그의 임무를 끝내줄 노골적이고 결정적인 폭력의 순간을 그 얼마나 고대했던가. 그는 팔 밑에 끼고 있는 총의 개머리판을 쓰다듬었다. 행운의 삼세판이다. 이번엔 바로 코앞에서 해치울 것이다. 놈들이 거꾸러지는 꼴을 보고 말 것이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편 거기서 50미터 정도 떨어진 호텔 안에선 세 사람이 평소와는 달리 조용한 분위기에서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충격과 알코올 기운 덕분에 마치 약 먹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긴 했지만, 그 기운이 싹 가신 지금 그들은 어젯밤 일이 단순한 사고가 아닐 수도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사이러스가 자기 혼자서 계속하겠다고 또 한 번 제안했고 이번에도 앙드레와 루시는 그의 안을 일축해 버렸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들이 할 일은 캅페라로 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새 차를 렌트하진 않기로 했다. 택시로 레크로탱에 있는 아누크의 집으로 가서 프란젠과 함께 가기로 했다.

그들이 엑상프로방스를 뒤로했을 무렵엔 벌써 해가 왜 높이 올라와 있었다, 생빅투와르 산과 나란히 달리는 뒷길로 접어들면서 위협 따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평온하고 일상적인 분위기가 이어지자 그들의 기분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동편 햇살을 받고 반짝이는 산은 신비스럽기도 하고 불길하기도 한 어젯밤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포도밭 중간중간에 난 흙길도 윙윙대며 오가는 밴과 트랙터들, 도로변에서 종종거리며 서로 다투는 까치들, 넓고 푸른 아침 하늘의 먼 창공 위에서 오락가락 하는 몇 점의 구름, 평범하고 아름다운 새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택시가 도로 한 쪽으로 난 갈래 길로 접어들자 레크로탱으로 올라가는 짧고 가파른 언덕이 시작되었다. 오전 경비를 서던 마을 개 두 마리가 돌진해 와서 택시 타이어를 향해 덤벼들자 운전사가 욕을 퍼부어 댔다.

"파란 덧문 집이오. 저기 길 끄트머리, 입구에 시트로엥이 서 있는 집."

앙드레가 말했다.

프란젠의 시트로엥 때문에 차를 돌릴 공간이 없어진 운전사의 입에서 또 한 번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이 지역 마을 길들은 당나귀 통행에나 적합했다. 팁을 받고 다소 기분이 풀어진 운전사는 그들 일행에게 고개를 까딱 바며 인사까지 하고 난 다음 차를 후진시켰다.

노크도 하기 전에 프란젠이 현관문을 열었다.

"살뤼, 메 자미(안녕하시오, 친구들). , 어서 들어와요."

남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거친 수염을 들이대며 루시의 양 뺨에 입 맞추고 난 그는 천장이 낮은 실내로 그들을 안내했다. 아누크는 워낙 아침잠이 많은 사람이어서 '봉 봐야주(좋은 여행)를 기원하며 조만간 또 보자고 하더라고 그가 해명했다.

"출발하기 전에 먼저 저것들을 보여 드리면 재미있어 할 것 같아서 ,,,,,."

그가 돌로 만들어진 벽난로 쪽을 가리켰다.

"실내가 좀 어둡긴 하지만, 저렇게 나란히 두고 봐도 웬만한 안목이 아니고서는 가려내기 힘들걸요? 그렇지 않소, 사이러스 씨?"

벽난로 돌 선반 위엔 세잔느의 (멜론과 여인)똬 그것의 쌍둥이 그림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분한 분위기와 아름다움까지 두 그림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 같았다. 사이러스가 다가가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진심으로 축하하오, 니코. 정말이지 완벽한 걸작이오. 직업상의 기밀 하나 물어봅시다. 저렇게 똑같이 그려내는 데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이 ,,,,,,." "사이러스 선생님?"

자동차 엔진 소리에 힐끔 창을 내다본 앙드레가 소리쳤다. 검은 안경을 쓴 짧게 깎은 머리의 남자가 백색 르노에서 내리더니 재킷 속에 손을 넣으며 길을 가로질러 집 쪽으로 오고 있었다. "누가 오고 있어요...,,,, 맙소사, 총을 가지고 있어."

잠시 동상처럼 꼼짝 않고 서 있던 네 사람은 끈덕지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다시금 정신을 추스렸다, 프란젠이 말했다. "부엌으로 가면 뒷문이 있소."

그가 벽난로 선반 위에 있던 그림들을 들고 앞장섰다 집안을 빠져 나오자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자그만 마당이 나왔다. 마당에는 골목으로 통하는 창살 달린 문이 달려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가면 내 차가 있어요," 사이러스가 말했다.

"알겠소. 하지만 총을 든 저 친구의 차도 거기에 있는데." "잠깐만요."

앙드레가 프란젠이 끼고 있는 그림들을 가리켰다.

"그가 쫓고 있는 것은 십중팔구 바로 저것들이에요. 니코, 그림 하나를 내게 주세요. 나머지 하나는 사이러스 씨에게 주고요. 당신은 차 키를 준비해요. 룰루, 당신은 내 뒤에 바짝 붙어요. 니코는 사이러스 선생님 뒤에 붙어요. 바짝 붙어야 안전해요. 저들은 세잔느 그림에 총알구멍이 생기는 건 결코 원하지 않을 거예요."

파라두는 현관문에서 물러나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차 뒷좌석에 탄 홀츠의 고함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린 파라두는 그림 두 개가 마당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림 하나에 발이 네 개씩 달린 채 완전히 코미디언들이군. 세상은 코미디언들로 가득하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총을 치켜들었다.

그때 홀츠에게서 고뇌에 찬 외마디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지금 차창으로 어깨까지 내밀고 있었다.

"안 돼-안 된다구! 빌어먹을, 쏘면 안 돼! 프란젠, 아니 니코, 우리 다시 협상해 보자구 내 말 잘들어 그건 모두 오해였을 뿐이야, 내가 설명해 줄,,,,,,."

사이러스가 들고 있는 그림을 방패 삼아 시트로엥 문을 열고 들어간 프란젠이 시동을 걸었다. 루시와 앙드레도 뒷좌석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사이러스가 프란젠 옆에 타자 시트로엥이 골목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백색 르노를 가깝게 지나치는 순간 앙드레는 그 차에 앉은 홀츠의 입가에 묻은 침까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 하얗게 질린 카밀라의 얼굴도 얼핏 보였다.

프란젠이 말했다. "저 차는 뒤로 빼서 돌아 나와야 하니까 한 2분 정도 우리가 출발이 빠른 셈이오." 앙드레가 뒤쪽을 보니 파라두가 르노에 막 타고 있었다.

"고속도로로 갑시다. 거긴 교통량이 많을 테니까. 어디에서 고속도로를 탈 수 있죠?"

앙드레가 말했다. "생막시맹까진 가야 하오. 놈들이 우릴 쫓아올까요?"

커다란 덩치의 시트로엥이 모퉁이를 돌았다.

사이러스는 무릎 위에 놓인 그림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우리가 아니라 3천만 달러를 쫓아고겠지."

N7 도로에 오른 프란젠이 가속을 붙이며 쭉 뻗은 평평한 도로를 따라 달릴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길이 너무 곧고 평탄해서 커브 길도, 숨을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프란젠은 운에 맡긴 채 경적을 울리며 계속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루시와 앙드레는 계속 차 뒤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 일 없이 30분이 지났다, 하긴, 프랑스에서 제일 지독한 도로를 30분 간 고속으로 달린다 해도 아무 일 없기는 매한가지이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차가 N7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오르자 차 안의 긴장감이 다소 씻어졌다.

통행 요금 징수소 앞에 온 프란젠은 통과를 기다리며 줄지어 선 차량들 뒤에 붙었다. 온몸의 공기가 다 빠져 나갈 듯 요란하게 안도의 숨을 내뱉은 그가 씩 웃으며 옆에 앉은 사이러스를 돌아보았다. "이제부턴 꼼짝 않고 위조 작업이나 할 겁니다, 정말이지 이런 짓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 모두들 괜찮소? 심장 발작을 일으킨 사람은 없나요?"

앙드레가 물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그자와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군지 ,,,,,,"

"앙드레? 저기에 그가 있어요." 루시가 굳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루시가 가리키는 쪽으로 모두의 눈이 따라갔다. 그들 바로 옆줄에서 백색 르노가 요금 징수대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파라두가 그들의 눈길을 되받았다. 그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루디, 이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에요."

방금 전 30분 동안 눈을 꼭 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밀라는 온몸이 산산 조각난 기분이었다. "미친 듯 질주하고, 게다가 총까지 ,,,,,, "

"입다물어, 이 여자야. 파라두, 자네 생각은 어떤가?"

"고속도로를 타면 우리에게 불리하죠. 하지만 놈들이 언제까지나 고속도로를 타진 못할 테니 계속 따라붙으며 기다려야죠."

카밀라가 또 한 번 애써 보았다. "만일 저들이 경찰에게 간다면?"

"저 차엔 도난당한 원화와 위작이 실려 있어. 난 내 물건을 되찾으려는 것뿐이야 경찰로 가든 말든 상관없지만 아마 그렇겐 못할걸. 자네 말이 맞아, 파라두. 계속 따라붙어."

홀츠가 말했다.

브리뇰과 프레쥐를 지나고, 칸느와 앙티브를 지날 때까지 그들은 차 두세 대 간격 이상으로 멀어지는 일 없이 잘 따라붙고 있었다. 카밀라는 부디 뉴욕까지 무사 귀환할 수 있기를 빌며 차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홀츠는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었다. 만일 내가 저들 입장이라면 이탈리아 쪽으로 향하는 척하다가 스위스 쪽으로 방향을 틀어 취리히의 그 사람에게 그림을 들고 갈 것이다. 파인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그러자면 길이 멀다. 놈들은 도중에 기름도 보충해야 할 테고 어차피 어두워질 때까지 달려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파라두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비뚤어진 업에 종사해 온 홀츠는 인내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조급하거나 너무 늦었다간 누구나 실수하는 법이다.

인간의 신체가 견며 낼 수 있는 초조와 근심의 양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놀란 가슴이 진정되면서 논리적 사고에 가까운 것을 다시 회복하게 되어 있다. 두 시간 정도 지나자 프란젠의 시트로엥에 탄 사람들도 그 같은 회복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캅페라는 가까워지고 있는데 백색 르노는 여전히 그들을 따라붙고 있었다, 같은 차로를 타기도 하고 다른 차로를 달리기도 하면서 변함없이 백미러 속에 잡히고 있었다.

니스 공항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한 것은 앙드레였다.

"우선 공항엔 차들이 많으니까 그들을 따돌릴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요. 그리고 방향을 틀면 놈들은 우리가 비행기를 타려는 것으로 짐작할 거예요. 일단 공항 주차장으로 들어갔다가 곧장 다른 출구로 빠져나가는 게 좋겠어요." 프란젠이 고개를 끄덕이며 핸들을 다잡았다. "빌어먹을, 놈들이 비행기를 타려 하고 있어." 홀츠가 말했다.

공항 건물들이 밀집한 구역 주변에 미로처럼 이리저리 꼬인 도로들을 뚫고 나가려고 아우성치는 차량들 속으로 시트로엥이 합류해 버리자 파라두는 시야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관광버스 한 대가 가로막는 바람에 귀중한 2분을 허비했고 앞길이 다시 뚫렸을 땐 시트로엥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터미널로 곧장 가."

홀츠가 말했다._

그러나 니스 공항엔 터미널이 두 군데 있었고, 그것도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중 한 터미널 앞으로 간 파라두는 카밀라와 홀츠를 차 안에 두고 다른 터미널까지 달려갔다. 애쓴 보람이 있어서 주차장을 빙 돌아 '투트 디렉시용(모든 방향 가능)'이라고 표시된 출구로 막 나가고 있는 프란젠의 시트로엥 꽁무니를 목격할 수 있었다.

머리끝까지 울화가 치민 파라두가 땀에 절어 헉헉대며 돌아와 보니 이번엔 그의 르노가 한 무리의 택시 기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기사들은 달변에다 몸짓 손짓까지 섞어 가며,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 여긴 정차 금지 구역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터미널 바깥 주차 공간은 신이 부여한 택시 기사들의 권리인데 감히 그런 자리를 무단 침입했다는 얘기였다. 결코 부드럽지 않은 태도로 기사들 틈을 뚫고 들어간 파라두가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놈들이 우릴 속였소. 나가는 걸 봤어요."

앙드레는 뒤따라오는 차량들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흰색 차는 모두 그 르노인 것만 같았다. "장담할 순 없지만 공항에서 빠져 나을 때부터 놈들이 쫓아오지 않아요. 작전 성공인 것 같군요."

프란젠이 만족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사이러스는 말없이 앉아 드노이예에게 할 얘기를 생각해 보고 있었다. 앙드레와 루시는 빌프랑슈와 생장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만날 때까지 뒤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그들의 시트로엥은 바다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드노이예는 아내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아내와 클로드를 니스로 보내고 혼자만의 오후를 즐기게 되어 좋았다.

언제나 그랬지만 그는 캅페라로 돌아오면 처음 며칠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여름철 손님들이 닥치기 전이라 평화로운 분위기에, 바하마의 무절제한 식물들을 실컷 보고 온 후 만나는 조각처럼 질서 정연한 정원의 소나무와 사이프러스들, 달라진 공기 맛을 다시 느끼는 것도 즐거웠고, 와인 저장실과 서재의 편안함도 좋았다. 즐거울 수 있는 건 많았다.

그러나 올해는 여느 해 같진 않았다. 지난번 통화할 때 들은 루돌프 홀츠의 말을 믿어 보려 애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잔느 건이 도무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게다가 요 며칠 사이엔 아무 소식조차 없는 것도 신경 쓰였다. 내일 다시 홀츠에게 전화해 봐야겠다. 아니, 지금 당장 해보자. 분명히 무슨 소식이 있을 것이다 드노이예는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벨 소리가 난 것은 그가 거실 중간쯤 다다랐을 때였다.

"드노이예 씨? 리브래종(배달 왔습니다)."

낯선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흘러 왔다.

카느린느가 또 뭘 주문한 모양이었다. 캅페라로 돌아온 처음 며칠간은 언제나 배달 사례가 쏟아지곤 하니까, 드노이예는 버튼을 눌러 대문을 열어 준 다음 현관문으로 나가 섰다. 한편 백색 르노는 햇빛을 받으며 니스 공항 주차장에 서 있었다.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의 열 받을 대로 받은 성질을 가라앉히는 데 전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카밀라는 뾰로퉁해 있었다. 루디, 파라두, 불결한 소형차들, 프랑스, 미친 듯한 추격전, 모조리 신물이 났다.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해 보기도 했지만 홀츠로부터 가시 돋힌 응수만 받았을 뿐이다. 이제 그녀는 입을 굳게 봉한 채 파라두의 굵은 목 뒷줄기로 흘러내리는 땀방울만 불쾌한 눈길로 응시하고 앉아 있었다. 궁리하던 홀츠가 무어라고 중얼거리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몰라, 놈들은 독자적으로 그림을 판매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다시 말해서 거래를 해볼 심산인 게지. 이제 우리로선 다른 수가 없어. 파라두, 최대 속력으로 캅페라로 가세," 홀츠가 갑자기 쳐다보는 바람에 카밀라가 움찔했다.

"드노이예의 집을 찾아낼 수 있겠지? 가본 적이 있잖아." "그에게 뭐라고 얘기하려구요?"

그러나 홀츠는 이미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스토리를 짜내느라 상상력을 있는 대로 발휘하는 중이었다. 프란젠이 날 배신하고 원화를 훔쳐 가 위작을 또 하나 그렸다고 말해 준다, 그리고 나는 최후의 순간에 나타나 구해 주는 영웅 역할만 하면 된다.

드노이예로선 충격적이다 싶을 정도로 경악스러운 30분이었다. 사이러스와 앙드레가 번갈아 가며 얘기하는 동안 그는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_ 그들이 얘기하는 동안 드노이예는 의자에 기대 세워 놓은 그림들을 자주 쳐다보았다.

이 사람들이 무슨 짓을 했든 어쨌거나 세잔느를 다시 그에게 가지고 왔다는 건 분명했다. 그것은 결국 어느 정도 정직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 사람들을 믿어도 될까? 신뢰해도 좋을까? 그림이 다시 수중에 들어왔는데 믿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사이러스가 아쉬운 눈길로 말했다.

"선생 입장에선 물론 우리와 더 할 얘기도 없으시겠지만, 이왕 그림을 매각하기로 하신 거라면 내가 책임지고 최대한 신중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선생께 필요한 사항들을 조언해 줄 수 있게 된다면 그것도 나로선 기쁜 일이고 말입니다."

자신을 빙 둘러싸고 앉은 네 사람의 열의 어린 얼굴을 훑어본 드노이예는 그림들을 한 번 더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저 날조자의 작품은 정말이지 감쪽같다.

"지금 당장 결정해 주리라곤 바라지 않겠지요?"

당연히 바라지, 사이러스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할 순 없었다.

"그야 물론이죠."

거실 바깥에서 벨 소리가 들리자 드노이예가 잠시 양해를 구하고 나갔다. 잠시 후 그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돌아왔다.

"웬 사람이 루돌프 홀츠와 함께 왔다고 하는군요. 문은 열어 주지 않았소."

그때 연이은 두 발의 총소리가 열려 있는 창을 통해 들려 왔고 이어서 세 번째 총소리가 났다. "총으로 문을 열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여기서 나갈 다른 길은 없나요?"

앙드레가 말했다. 드노이예가 창으로 내다보았다. 신작로 맨 끝에서 한 남자가 대문 쇠창살을 발로 차고 있었다. "따라오시오."

그림을 집어 든 드노이예가 그들을 안내해 집 뒤쪽으로 빠져 나갔다. 테라스를 지나자 선착장으로 이어진 터널이 나타났다.

"경찰을 불러야겠소. 이건 용납할 수 없는 폭력 행위요."

드노이예가 말했다.

카밀라는 다 쓴 탄창을 비워 내는 파라두를 보며 몸서리를 쳤다. 금방이라도 지독한 편두통이 덮칠 것 같은 위기감이 그녀로 하여금 입을 열게 만들었다.

"루디! 루디! 저 사람 좀 말려요! 맙소사, 여긴 캅페라라구요."

홀츠는 들은 척도 않고 파라두가 대문 자물쇠에 또 한 번 발길질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프랑스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라리 차로 밀어 버리면 안 될까요?"

홀츠는 입술을 깨물며 쇠창살 틈으로 저택 내부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는 이미 때가 늦었다는 사실을 수긍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지금쯤 드노이예는 경찰을 부르고 있을 것이다 이제 갈 길은 하나밖에 없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떠나야 할 때였다, 그는 감히 올가미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림을 손에 넣긴 틀렸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에서의 얘기일 뿐이다. 파인이 뉴욕으로 돌아오면 거기서 다시 한번,,,,,,. 멀리 나무들 너머로 움직이는 물체를 본 홀츠는 시야에서 햇살을 막으려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택 아래편으로 쭉 뻗은 수평선 위에 하얀 물거품을 길게 남기며 자그만 보트 하나가 검은 거울 같은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는 대문에서 물러서며 말했다.

"할 수 없군. 날 공항으로 데려다주게."

다섯 명의 승객을 싣고 물속에 얕게 잠긴 수상 스키 보트가 해안에서 200미터쯤 멀어질 때까진 아무도 안도의 숨을 쉴 수 없었다. 앙드레를 잡고 있던 루시의 손길이 다소 느슨해지더니 그녀가 말했다.

"이런 말 하긴 싫지만, 다른 데로 정신을 돌리지 않으면 멀미가 날 것 같아요."

앙드레는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결코 멀미할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던 것이다.

"파리에서 한 일주일쯤 더 지낼 생각을 하면 멀미가 달아나겠어?"

"도움이 될 거예요."

그녀는 발끝을 세워 그의 얼굴에 튄 물기를 닦아 주었다.

"2주라면 효과가 더 확실할 텐데."

보트의 속력을 늦추기 위해 레버를 조금 뒤로 늦춘 드노이예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집을 쳐다보았다.

"나쁜 놈들, 감히 총을 쏘아 대다니! 캅페라에 갱들이 나타났다고 하면 대단한 스캔들이 되겠군. 파인 씨, 한 가지 말할 게 있소. 상황이 마무리되거든 우리 곧장 생장의 경찰서로 갑시다. 홀츠와는 더 이상의 거래는 없을 것이오."

그러고는 재킷으로 그림 두 점을 가리고 있는 사이러스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당연한 거지만 나머지 위작 하나는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게 나로선 더 기쁘겠소."

사이러스가 대답했다.

"당연히 그러시겠죠. 니코, 당신이 할 일이 뭔지 알 만하죠?"

네덜란드인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사이러스 쪽으로 몸을 굽혀 캔버스 하나를 골라잡았다. 그것을 얼굴에 바짝 대고 한차례 입을 맞추고 난 다음 팔을 크게 뒤로 휘둘렀다가(그 바람에 보트가 뒤집힐 듯 요동했다) 어깨너머로 그림을 내던졌다.

그림은 수면에 평평하게 뜬 채 부드럽게 까딱거렸다.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 속 여인의 얼굴을 물결이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니코가 제대로 골라잡았길 하늘에 빌어야지."

사이러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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