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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느를 찾아서 1

세잔느를 찾아서

Peter Mayle

1. 앙드레와 카밀라

 

예쁜 여비서는 마치 실내 장식의 일부처럼 방과 잘 조화되어 있었다, 그녀는 잘 가꾸어진 세련미를 풍기는 주변 분위기와 짜 맞춘 듯 완벽하게 조화된 인간 장식물처럼 보였다. 베이지 색과 검정색이 잘 어울리는 옷을 걸치고 잔뜩 멋을 부린 세련미까지 갖춘 그녀는 자기 앞에 서 있는 후줄근한 젊은이를 본체만체하고 전화통화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젊은이가 그녀의 책상 위에 너덜너덜한 가죽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그녀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는 바람에 화장으로 만든 매끈한 가면이 구겨질 뻔했다 그 가죽 가방만 없다면 흠잡을 데 없이 말끔했을 반들반들한 단풍나무 책상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녀는 금발 머리채의 한 쪽을 뒤로 젖히더니 통화하는 데 걸리적거려 빼두었던 금귀고리를 다시 달았다. 본래의 눈썹을 깡그리 뽑아 낸 자리에 그려 넣은 그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면서, 무슨 일로 왔는지 묻는 표정을 지었다.

젊은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카밀라 편집장과 약속이 있는데."

그녀는 눈썹을 그대로 치켜뜬 채 딱딱한 어투로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앙드레 켈리라고 합니다. 아가씨는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나 보지요?"

비서는 묻는 말에는 들은 체 만 체 딴전을 부리며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카밀라는 왜 허구한 날 이런 여자들을 데려다 앉혀 놓는지 앙드레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자들은 두 달을 채우는 경우가 드물었고 가고 나면 세련으로 포장된 복제품이 금방 그 자리를 메웠다. 온갖 장식으로 치장한, 사람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잔인할 정도로 무신경한 여자들.

여길 그만두면 그녀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바니 백화점(최고급품만 취급하는 미국의 패션 전문 백화점 체인-역주) 화장품 코너? 말쑥한 장의사 사무실? 그것도 아니라면, 유럽 귀족 사회 하류층에 속하는 카밀라의 수많은 친구 중 하나를 붙잡아 쓸려 가버리는 걸까?

"회의가 길어질 것 같대요."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접객실 맨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가방을 집어 들며 앙드레는 또 한 번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아가씨는 늘 그렇게 심기가 불편한가요? 아니면 학교에서 그 비결을 배운 거요?"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비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윤기 있는 한 쪽 머리칼 밑으로 어느새 수화기를 찌르고 다시 수다를 시작하고 있었다. 의자에 죽치고 앉은 앙드레는 하염없는 기다림을 시작할 태세를 갖췄다.

카밀라는 일부러 시간을 지키지 않고 이중으로 약속을 해서 편집장으로서의 권위와 사교상의 지위를 돋보이게 만드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오히려 그런 점에서 그녀를 찬양하는 사람도 간혹 있긴 했다.

한날한시에 로열튼 호텔 식당에 테이블 두 곳을 예약해 놓고, 양쪽 자리를 오가면 이 테이블에선 로켓(셀러드용 겨자와 식물-역주)을 홀짝거리면서 중요한 광고업자와 유망한 남미 건축가를 동시에 접대하여, 파워 런치(중요한 사람들 간의 비즈니스를 겸한 점심식사-역주) 세계에서 신분야를 개척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그러면서도 두 손님 중 누구도 불쾌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 그녀의 명성을 드높였고, 마침내 이러한 두 테이블 런치는 카밀라의 사교 레퍼토리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런 식의 자기과시가 용인되는 것은 결국 그녀가 성공한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성공만 하면 제아무리 나쁜 매너도 용서되는 곳이 뉴욕이다. 그녀는 쓰러지기 직전의 오래된 잡지사를 수렁에서 건져내어 현대화시켰다. 잡지명을 바꾸고, 고리타분한 기고자들을 자르고, 사교계에 관한 톡톡 튀는 '편집자로부터의 편지' 코너를 새로 만들고, 표지, 식자, 사진은 물론 비서와 접객실까지 최신 감각으로 끌어올렸다.

잡지 판매 실적은 세배로 껑충 뛰었고 광고 면이 꾸준히 늘어났다. 여전히 손해를 보고 있긴 해도 잡지 소유주들은 혜성같이 나타난 편집장의 재능에 흠뻑 취했다. 잡지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현재로선 카밀라 제임슨 포터의 앞길은 탄탄대로로 보였다.

잡지가 그처럼 급격하게 부상하게 된 데는 물론 겉모습의 화려한 변신도 도움이 되었지만, 사실 더 근본적이랄 수 있는 요인은 바로 카밀라의 편집 철학이었다.

이 철학이 발전된 과정이 또 기묘했다. 야심은 있지만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저널리스트였던 그녀는 초창기에 사교계의 속물 근성에 영합하는 런던의 한 타블로이드 지의 R&L(소문과 명예훼손)이라는 면을 맡아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돈 많은 상류층 남자를 붙잡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키가 헌칠하고 검은 머리에 엉뚱한 데가 있는 제레미 제임슨 포터였다.

카밀라는 그의 이름뿐만 아니라(그의 이름은 그녀가 태어나면서 얻은 카밀라 부트란 이름에 비해 너무나 멋지게 들렸다) 가문 좋은 그의 친구들까지 감싸 안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중 한 사람을 너무나 열렬히 감싸 안는 현장이 포착되고 말았다. 곧 이혼이 뒤따랐지만 아미 카밀라는 정차 뉴욕에서 일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교훈을 배우고도 남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부자들 틈에서 생활해 온 터였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철학이었다. 부자들은 소유욕이 많다. 그리고 몇몇 특이한 예외를 제외하고 대다수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결국 특권층 생활에서 오는 만족이란 그 생활이 남들에게 일으키는 부러움이 절반을 차지한다. 제아무리 귀하고 값비싼 것을 가지고 있다 한들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독신녀로서 직업을 가직 살아가야 할 미래를 그려 볼 때면 바로 그 너무도 명백한 통찰이 카밀라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되살아났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통찰을 직업으로 바꾸어 놓을 계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평소 다니던 치과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었는데, 표지 사진에 이끌려 밝은 색상의 가십 잡지 하나를 무심코 집어 들었다.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한 상류층 미술 수집가가 최근에 구입한 거대한 저택 앞에서 역시 최근에 결혼한 아내와 나란히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런 부부가 왜 이런 잡지에 얼굴을 싣기로 동의한 것일까? 카밀라는 그것이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의 의문에 대한 답은 표지 기사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두 무릎을 꿇고 쓴 기사였다. 미술 수집가와 그의 터져 나갈 듯 탱탱한 젊은 신부, 코모호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미술품으로 가득 한 쉰일곱개의 방이 있는 사랑의 보금자리에 대해, 기자는 낯뜨거울 정도로 아첨하며 묘사해 놓았다. 인공 명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찍은 다수의 사진들에도 본문 못지않게 아첨 섞은 설명들이 달려 있었다. 그것은 기사라기보다는 차라리 7페이지짜리 아부 특집이었다.

카말라는 그 잡지의 나머지 다른 부분들까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잡지는 유럽사회에서 불완전고용 부문을 차지하고 있는 팔자 좋은 유한계급에 속한 상류층 사람들의 동정을 사진을 곁들여 일목요연하게 다루고 있었다. 자선무도회, 새 향수 품평회, 화랑 개관식, 기타 파리에서 런던에서 제네바에서 로마에서 그 집단 사람들이 서로 끊임없이 마주치는-켈르 수르프리즈(quelle surprise ; 어머, 여기서 만나 뵐 줄이야!)-구실 역할을 해주는 공허한 위락 거리들. 한 면 한 면 넘길 때마다 미소 짓는 얼굴들, 장황한 사진 설명들, 거품투성이의 이벤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과에서 나오는 카밀라의 손에는 그 잡지가 들려 있었고, 카밀라는 커버 스토리에 대해 생각하느라 그날 저녁을 다 보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이디어 하나가 조금씩 모양을 갖춰 가기 시작했다.

성공이란 약간의 운이 따라 주지 않고는 달성하기 힘든 법. 카밀라의 경우 그 운은 뉴욕에 사는 한 저널리스트 친구가 전화를 걸러 오는 형태로 다가와 주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개러비디언 형제의 출판업 진출을 두고 맨해튼의 전언론이 떠들어대고 있는 것 같 았다. 요양원 사업과 송증(보내는 물품의 내용을 받는 사람에게 적어 보내는 명세서-역주)의 수금 대리업, 폐기물 처리업으로 적잖게 돈을 번 그들은 최근 작은 출판사. 롱아일랜드 신문, 기타 노후 혹은 붕괴의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전문 잡지 몇 개를 끼고 있는 한 그룹사를 인수했다.

개러비디언 형제가 그 그룹을 인수한 짓은 그룹의 주요 자산인 매디슨 가의 빌딩 때문이었겠지만, '연료를 대겠다' 라는 동생 개러비디언의 발언과 관련해 어쩌면 잡지사 한두 개는 살아 남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재정 분석가들은 그의 발언을 상당 규모의 자본을 투입하겠다는 뜻으로 풀이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룹 잡지사들 중에서 퇴출을 면할 수 있는 잡지는 -데코레이팅 쿼털리(계간 장식)-일 것으로 추측되었다.

-데코레이팅 쿼털리-는 근엄한 논조에 촌스런 모양의 잡지로서, 뉴포트 맨션의 응접실 같은 데서 지면이 누렇게 변색되고 끝자락이 돌돌 말린 채 발견되기 십상인 그런 간행물이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몇 면 안 되는 광고란은 커튼 천과 모조 호화 조명 시설 따위가 차지했다. 기사들은 오르멀루(금 도금한 물건-역주)가 주는 기쁨이나 18세기 도자기의 올바른 손질법 따위나 논했다. 이 잡지의 편집진은 조금이라도 현대적이다 싶은 건 모조리 외면해 버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입이 점점 줄어드는 한계상황에서 절룩거리면서도 일부 핵심 독자층은 용케 보유해 왔다.

잡지의 운영 실태를 검토한 형 개러비디언은 그 잡지를 폐간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의 동생과 결혼한, 필립 스탁(세계적인 인테리어 디자이너-역주)에 관한 감동적인 얘기들을 즐겨 읽는다는 자칭 주부라는 젊은 여자가 그 잡지를 살려 보도록 남편을 설득했고, 그리하여 -데코레이팅 쿼털리-는 퇴출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제대로 된 편집 공식만 찾아낸다면 이 잡지에도 서광이 비칠 수 있게 되었다.

그 소식이 유언비어 정보망을 타고 퍼져나가 술렁거렸다. 친구에게서 대충의 내용을 간략하게 전해 들은 카밀라는 제일 짧은 치마를 입고, 동생 개러비디언에게 제시할 상세한 계획서를 챙겨서 뉴욕으로 날아갔다. 설명 작업은 다소 시시덕거리는 분위기에서, 점심 식사를 위해 두 시간 쉰 것을 빼고, 열 시부터 네 시까지 이어졌다.

결국 개러비디언은 그녀의 다리에 못지않게 그녀의 아이디어에 감명받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는데, 그는 어쨌거나 카밀라를 채용했다. 편집상의 첫 조치로 그녀는 잡지명을 바꾼다고 선포했다. 이제 -데코레이팅 쿼털리--DQ-로 알려지게 될 터였다. 뉴욕 전체가 주목하며 기다렸다.

새로 온 편집장들이 영향력을 과시할 때 대체로 그러하듯, 카밀라는 개러비디언이 낸 돈의 상당 부분을 자기 홍보에 신속히 투자했다. 그녀는 적절하면서도 값비싼 의상을 입고 필요한 모든 행사에 모습을 나타냈고,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으며, 자신의 개인 파파라초(사진을 찍어 언론에 파는 사람-역주)를 시켜 그 매력적인 순간들을 담게 했다. -DQ-첫 판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그녀는 이미 어느 정도의 명성을 굳혀 가고 있었다. 비록 확실한 능력이 아닌 왕성한 사교 활동에 기초한 명성이긴 했지만.

그러나 가서 만나고 모습을 드러내고 관계를 다지기 위해 애쓰며 보낸 그 무수한 저녁들, 그리고 후속 작업으로 같이한 수십 차례의 점심 식사는 분명 헛수고가 아니었다. 카밀라는 알아 두어야 할 모든 사람들, 즉 돈 많고 권태에 찌든 사람들, 사교계를 맴돌며 이런 저런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 그리고 아마도 제일 중요한 인물일 그들와 실내 장식가들과 재빨리 관계를 텄다. 실내 장식가들은 고객에게 직물과 가구에 관해 조언해 주는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튼 카밀라는 특히 그들에게 공을 들였다. 물론 그들이 자신의 이름이 선전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이 잡지사에 의해 선정된 사냥감들 가운데 사진사, 작가, 꽃꽂이 전문가, 디자이너, 까만 옷에 휴대폰을 든 수많은 조수들 따위가 자기네 집에 침략해 들어오는 건 곤란하다며 드물긴 하지만 난색을 표해 오는 경우가 발생할 때면, 카밀라는 그 집의 실내 장식을 맡았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면 실내 장식가는 고객의 팔을 살며시 비틀었고 그 집 문은 열리게 되었다.

카밀라는 이런 수법으로, 과거 이런 유의 잡지에서는 가보지 못한 곳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맡고 나서 첫 번째로 내놓은 특종 기사는 그녀의 앞길을 훤히 열어 주었다.

월스트리트의 거물 클레멘트 집안의 리처드 클레멘트가 소유한 집들을 다뤘는데 파크 애비뉴의 트리플렉스(33세대 아파트-역주)에선 욕실마다 인상파 그림 하나씩, 무스티크의 별장에선 손님 한 명당 하인 세 명이 공개되었다. 평소 대중 앞에 드러나지 않는 생활을 해온 그는 사실 은둔자에 가까운 독신이었지만, 자신의 젊은 이탈리아인 반려자(그 남자도 햇병아리 실내 장식가였다)와 카밀라의 협공 작전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콤한 묘사와 보기 좋은 사진들로 가득 찬 퀘페이지의 완성된 기사는 큰 주목과 높은 평가를 받았다. -DQ-의 출발은 순조로웠던 셈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고 잡지는 애초의 신조 , '누구에 대해서든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험담을 쓰지 말라'를 굳게 지키면서 계속 번창해 왔다. 내년에는 카밀라에게 드는 비용까지 감안하더라도 상당액의 흑자를 낼 터였다.

의자 옆에 놓여 있던 -DQ-최신호를 집어 든 앙드레는 밀라노에 있는 부오나귀디의 아파트에서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들이 나와 있는 난을 찾았다. 사진 찍는 현장에서 카밀라가 카날레토(이탈리아 화가-역주)의 그림을 사진이 더 잘 받는 장소로 옮겨 달라고 부탁하자 당황해 하던 그 자그만 사업가와 그의 경호원을 생각하며 앙드레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판단이 옳았다. 그는 카밀라와 함께 일하는 게 그런 대로 즐거웠다. 그녀는 안목도 있는데다 재미있는 여자였고 개러비디언와 돈으로 선심도 후하게 썼다. 이제 일 년만 더 그녀에게서 정기적으로 일거리를 받는다면 그도 독립해서 자신의 책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앙드레는 오늘은 그녀가 무슨 일로 불렀는지 궁금해 하면서 기왕이면 따뜻한 햇살이 있는 곳으로 파견될 작업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뉴욕의 겨울은 정말이지 혹독해서, 지난번 시 위생과가 파업에 돌입했을 때도 파업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 정도였다. 썩어 가는 쓰레기 냄새야말로 그들의 강력한 협상 무기였는데, 올겨울엔 쓰레기가 얼어 버려 냄새가 진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조원들은 지금 봄이 되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얼음이 녹아 코를 찌르는 냄새가 되살아나길 말이다.

매끄러운 석판 바닥에 부딪히는 하이힐 소리에 앙드레가 고개를 들자 또각대며 걸어가는 카밀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손은 검정 텐트를 두른 것 같은 차림에 턱수염을 기른 한 젊은이의 팔꿈치 밑에 끼워져 있었다. 그들이 승강기 앞에 멈춰 섰을 때 앙드레는 그가 올리비에 투렝스란 걸 알았다. 그는 미니멀 아트(극단적인 간결함이 특징인 미술의 한 조류-역주) 가구로 유명한 파리의 최첨단 디자이너로, 지금은 소호(맨해튼 남쪽의 화랑가-역주)에 있는 버려진 육류 통조림 공장을 부티크 호텔로 개조하는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승강기가 도착했다. 한 번은 서로의 뺨을 위해 또 한 번은 행운을 위해 얼굴 양쪽의 허공에 대고 하는 에어키스가 한바탕 교환되었다,

승강기 문이 미끄러지듯 닫히자 카밀라가 앙드레에게 왔다.

"어머, 자기! 잘 지냈어-기다리게 해서 어쩐다지?"

그녀는 그의 팔짱을 꽉 끼더니 쏜살같이 걷기 시작하여 비서의 책상 앞을 순식간에 지나쳤다.

"이 아가씨는 도미니크야. 벌써 인사는 했겠군."

비서가 고개를 들더니 립스틱 칠한 입술이 펴지는 둥 마는 둥 미소 짓는 시늉을 해보였다.

앙드레가 말했다

"글쎄요, 인사를 나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복도를 따라 앙드레를 몰고 가던 카밀라가 한숨을 쉬며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말했다.

"직원 관리는 정말 힘들어. 약간 밥맛 없는 인상이란 건 나도 알지만 재네 아버지가 좀 쓸모가 있거든."

카밀라는 까만 안경 너머로 앙드레를 쳐다보며 간략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소더비 씨(세계적인 미술품 경매업자-역주)라고 알지?

두 사람이 카밀라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계절에 맞지 않게 피부가 짙게 탄 호리호리한 중년 남자가 수첩을 들고 뒤따라 들어왔다. 카밀라의 수석 비서인 그는 앙드레를 보고 씩 웃었다.

"여전히 기막힌 사진을 찍고 있는 거지?"

"최선을 다하는 거죠, . 그런데 노엘, 어디 다녀왔어요?"

"팜 기치(미국 플로리다 주 동남부의 해안 피한지-역주). 거기서 누구랑 있었는지 물어봐 주지 않겠어?"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노엘이 약간 실망스런 표정을 짓더니 카밀라에게 말했다.

"미스터 G가 당신과 얘기하고 싶대요. 다른 전화는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카밀라는 수화기를 어깨 위에 올려 놓고 책상 뒤로 왔다 갔다 했다. 그녀의 음성이 고양이처럼 낮고 은밀하게 가르랑거렸다. 그것이 그녀가 개러비디언과 통화할 때 내는 음성이라는 걸 아는 앙드레는, 처음 드는 의문도 아니지만 그들의 관계가 정말 비즈니스에 국한되어 있을까 새삼 궁금해졌다. 사실 카밀라는 개러비디언와 취향에 비해 지나치게 드세고 저돌적인 여성 간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여자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온갖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젊음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말라깽이 축에서 살짝 벗어난 적당히 호리호리한 몸매에, 아직까지 살이 처지지 않은 매끈한 목. 게다가 매일 아침 여섯 시에 하는 운동 적에 팔 윗부분과 허벅지와 엉덩이도 군살 없이 팽팽했다. 카밀라의 신체에서 다소나마 두껍다고 할 수 있는 부위는 머리칼뿐이었다. 단발로 자른 그녀의 짙은 밤색 머릿결은 부드러움과 깨끗함과 윤기와 믿어지지 않는 탄력으로, 그녀가 일주일에 세 차례 머리를 손질받는 버그도프 미용실에선 전설로 통했다.

앙드레는 그녀가 수화기를 내려놓기 전에 개러비디언에게 작별 인사를 속삭이느라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바람에 뺨으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을 바라봤다.

앙드레를 쳐다본 그녀가 인상을 썼다.

"어쩌지? 일이 생겼어. 그가 아르메니아식 파티를 열려고 한 대요. 상상이 돼?"

"맘에 드실 거예요. 민족의상을 입어 볼 기회가 되겠군요."

"그게 어떤 건데?"

"노엘에게 물어보세요, 아마 자기 의상을 빌려줄 겁니다,"

"됐어, 자기. 하나도 재미없어,"

메모 용지에 무엇인가 끄적거리고 나서 카밀라는 손목에 찬 대형금덩이 같은 롤렉스 시계를 보았다,

"어머, 눈썹을 휘날리며 날아가야겠네."

"카밀라, 제게 할 얘기가 있다고 오라고 하셨잖아요. 잊었어요?

"점심 약속에 늦었어. 지안니하고의 약속인데. 그를 기다리게 할 순 없어. 이번에 또 그러면 안 된다구. "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들어요, 자기, 성화야. 리비에라(프랑스의 세계적인 관광휴양지-역주)에 가서 성화를 찍는 거야. 어쩌면 파베르제(러시아의 금 세공사, 보석상-역주)의 소품들도 있을지 몰라. 자기가 수소문해서 찾아가야 해. 소유주는 늙은 러시아 미망인이야. 자세한 건 노엘이 알고 있어."

카밀라는 책상에 놓여 있던 백을 집어 들었다.

"노엘! 밑에 차 준비해 뒀어? 내 코트는 어디 있지? 로열튼에 전화해서 내가 지금 차 안에 갇혀 있다고 지안니에게 전해요. 굉장히 언짢은 장례식에 다녀오는 중이라고 둘러대라구."

앙드레에게 키스를 날려 보낸 그녀는 놀라운 탄력의 머리칼을 날리며 승강기 쪽으로 또각또각 사라졌고, 그 옆으로 비서가 그녀의 코트와 서류 한 뭉치를 들고 총총걸음으로 따라갔다, 앙드레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노엘의 책상머리에 걸터앉았다.

"나 참, '성화야, 자기. 리비에라에 있어,' 내가 아는 건 그게 전부예요."

"내가 알려 줄게."

노엘이 자신의 수첩을 뒤적였다.

"어디 보자. 그 집은 니스(지중해에 면한 프랑스 남동부의 항루 도시-역주)에서 32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 생폴드방스 바로 밑이지. 그 할머니의 이름은 오스팔로프인데 자기 말로는 옛날에 공주였대."

노엘이 고개를 들며 윙크를 했다.

"하기야 요즘엔 누구나 왕자, 공주잖아? 어쨌거나 콜롱브 도르(황금 비둘기) 호텔에 자네 이름으로 34일간 방을 예약해 뒀어. 카밀라도 파리로 가는 길에 인터뷰하러 그리로 갈 거야, 그날 밤은 그녀도 거기서 묵게 될 테니 자네랑 둘이서 아늑한 저녁을 들 수 있겠구먼. 그저 내가 하지 않을 짓은 자네도 하지 않는 게 좋아."

"그 점은 걱정마세요, 노엘. 두통이 났다고 할 테니까."

노엘은 책상 위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꼭 그래야 돼. , 비행기 표, 차편과 호텔 예약 확인서, 그리고 러시아 아줌마의 주소와 전화번호야. 비행기를 놓치면 안 돼, 그 아줌마는 모레 자네를 만나는 걸로 알고 있으니까,"

봉투를 가방에 넣고 앙드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올 때 뭐 하나 사다 드릴까요? 에스파드릴(샌들의 일종-역주) 어떠세요? 아니면 셀룰파이트(피하 지방이 뭉쳐서 밖으로 우툴두툴 드러난 것-역주) 제거 크림?"

노엘이 천장을 쳐다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정 사다주고 싶다면 난 자그만 라벤더 에센스 로션이 좋겠어."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든 노엘은 방에서 나가는 앙드레에게 손가락 끝을 까닥거리며 인사했다.

리비에라. 지저분하게 얼어붙은 매디슨 가로 나가기 전에, 앙드레는 담요를 두르듯 리비에라 생각으로 몸을 감쌌다. 행인들은 살갗을 찢을 정도로 매서운 바람 때문에 목을 잔뜩 웅크린 채 종종걸음으로 오가고 있었다. 담배 한 모금 빨아 보려고 맨해튼 오피스 건물들 출입구 바깥에 죄인들처럼 서넛씩 웅크리고 선 니코틴 동호인들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수상스럽고 불편해 보였다(뉴욕은 공공 장소의 실내 흡연이 금지되어 있음-역주).

그들은 악의에 찬 냉랭한 공기 속에서 찡그린 얼굴로 담배를 빨아들이며 덜덜 떨고들 있었다. 코카인을 애용하는 그들의 동료들이 따뜻하고 상대적으로 안락한 빌딩 화장실을 독차지하는 반면, 흡연가들은 그와 동등한 권리를 주장할 기회를 거부당한 채 거리로 내몰리는 현실이 앙드레에겐 을 아이러니컬해 보였다.

그는 아래쪽으로 태워다 줄 택시를 기다리며 51번가와 5번가(맨해튼의 고급 쇼핑가-역주) 모퉁이에 서 있었다. 리비에라, 지금쯤 미모사가 꽃을 피웠을 테고 좀 대담한 사람들은 벌써 야외에서 점심을 먹을 것이다. 해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가격을 올려놓고, 올여름엔 어떻게 하면 플라지스트(유료 해수욕장 경영자-역주)에게 내는 세를 줄일 수 있을까 궁리할 것이다. 보트들은 지저분한 밑바닥을 긁어 내고 페인트도 다시 칠해져서 전세 안내 책자에 소개될 것이다 레스토랑, 의상실, 나이트클럽 주인들은 5월부터 9월까지만 땀을 흘리면 한 해의 나머지 기간을 풍족하게 놀며 보낼 수 있으므로, 금년의 지출을 전망해 보며 올해엔 어디에 돈을 쓸까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을 것이다.

앙드레는 언제나 리비에라가 좋았다. 힘들이지 않고 매력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가면서도 오히려 이쪽에서 은혜를 입은 듯한 느낌이 들도록 만드는 곳이었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는 해변, 이따금 겪게 되는 무례함, 자주 마주치는 터무니없는 물건값, 악명 높은 여름철 교통 대란,,,,,, 그 모든 악조건들도 그는 프랑스 남부의 매력을 맛보는 대가 정도로 여기며 즐거운 마음으로 참아낼 수 있었다.

예술가, 작가, 억만장자를 비롯하여 행운을 찾아 나선 사람들, 들뜬 과부. 애인을 구하는 예쁜 여자들, 기회를 노리는 젊은 남자들을 끌어당기는 곳이 되어 왔다. 다소 퇴폐적인 면이 없잖아 있고, 비싼 물가에 사람이 너무 많이 붐비는 건 분명했지만, 그러나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침 택시 한 대가 도착하여 동상 직전의 그를 구해 주었을 때 앙드레는 생각했다. 그곳은 날씨가 따뜻하다.

택시는 그가 미처 차 문을 닫기도 전에 출발하더니 버스의 코앞을 가로지른 다음 적색 신호등을 무시하고 횡단 보도를 건너뛰었다. 그제야 앙드레는 자신이 지금 스턴트맨 흉내를 내는 운전사의 손아귀에 들어 있음을 알았다. 맨해튼 거리를 인간과 기계의 시험장쯤으로 생각하고 아무데서나 가로지르고 돌진하는 스타일인 것이다.

택시가 속도를 높이며 마구잡이로 돌진하여 급사하기 딱 좋게 요리조리 비켜 가는 한편, 기사가 귀에 거슬리는 알아듣지 못할 말투로 교통 상황을 저주해 가며 5번가를 내달리기 시작하자, 앙드레는 무릎 사이가 벌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힘을 주고 항공사들이 추락 사고시 권장하는 태아형 자세를 취할 준비를 갖췄다.

마침내 택시가 웨스트 브로드웨이로 접어들자 기사는 자기식으로 개조한 영어를 앙드레에게 시도했다.

"오케이, 어디 번호?

운이 끝까지 따라 주지는 않으리란 예감에 앙드레는 남은 두 블록은 걸어서 가기로 결심했다.

"이쯤이면 됐어요."

"됐어요?

", 바로 여깁니다."

"오케이 , 그러시구려 ."

기사가 제맘껏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뒤따라오던 차들이 급정거에 미끄러지면서 택시 꽁무니를 아주 살짝 들이받았다. 택시 기사는 제 목을 움켜잡고 쏜살같이 뛰어내리더니 자기네 모국어로 긴 비난 연설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의 말 가운데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딱 두 개였다. '삔 목''이 개자식아' 앙드레는 요금을 지불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

그가 2분 정도 종종걸음을 쳐서 당도한 건물은 원래 의류 제조 공장으로 시작한 곳이었다. 그러나 소호 거리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그렇듯이 지금은 몇 겹으로 새 단장이 되어 본래의 초라한 내력을 말끔히 씻어 버렸다. 높다란 천장에 빛 잘 드는 내부 공간들을 잘게 나누어 칸막이를 치고, 페인트칠을 하고, 전선도 새로 깔고, 배관공사도 다시 하고, 구역 분할도 새로 하고,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새로운 가격이 매겨졌다. 건물 입주자들은 대부분 예술 및 정보 통신 분야의 자그만 업체들인데, 앙드레의 작업을 대행해 주는 에이전시 '이미지 플러스'의 본부도 이곳에 있었다.

'이미지 플러스' 는 지적이고 안목이 높으며 따뜻한 날씨를 좋아하는 스티븐 모스라는 젊 은이가 설립한 업체였다. 비패션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사진작가들과 삽화가들이 그의 고객이었다. 스티븐은 의류업계나 남잔지 여잔지 모를 모델들의 까다로운 비위를 맞춰 가며 그들과 얽혀서 작업하는 것을 꺼려 했다.

초창기 몇 년 동안 고생한 끝에 그는 이제 탄탄하고 수익 좋은 작은 업체를 꾸려 가고 있었다. 이 에이전시에서는 전문 직업 상담을 비롯하여 세금에 관한 조언과 보수 협상에 이르기까지 고객의 일과 관련된 일체 사항들을 대행해 주는 대가로 고객 수입의 15~20퍼센트를 받았다. 스티븐은 발이 넓고, 사랑에 빠진 여자 친구가 하나 있고, 정상적인 건강상태에 풍성한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에게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가 뉴욕의 겨울을 지독하게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루시 월콧을 하급 파트너로 데려 오게 된 배경에는 사업을 확장해 보려는 야망도 있었지만 사실 추위에 대한 공포감도 무시 못할 이유였다. 그로부터 9개월 후 그는, 자살 충동을 일으킬 만큼 사람을 못견디게 만드는 1월부터 3월까지의 기간에는 루시에게 사무실을 맡기고 떠나기로 한 자신의 결정이 대단히 현명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루시는 그런 책무를 맡게 되어 좋았고, 스티븐은 키웨스트의 햇볕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앙드레는 예쁜 숙녀와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좋았다.

루시를 알게 되면서 앙드레는 그녀와 좀더 깊은 관계를 만들어 볼 기회를 노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출장이 지나치게 잦았고, 그녀는 매주 대단한 근육질의 새로운 젊은 남자를 유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두 사람은 사무실 밖에선 따로 만난 일 없이 지금까지 지내 왔다.

벨이 울리며 철문이 열렸고 앙드레는 넓게 트인 공간으로 들어섰다. 한쪽 구석에 놓인 긴 소파와 나직한 탁자 외에 커다랗고 네모난 4인용 업무 책상이 이 사무실의 유일한 가구였다. 의자 세 개는 텅 비어 있었다. 루시는 네 번째 의자에 앉아 컴퓨터 키보드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룰루, 오늘은 당신의 날이에요,"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고 앙드레는 책상 쪽으로 갔다.

"점심 초대예요, 룰루. 진짜 근사한 점심. 어느 식당이든 말만 해요. 방금 막 일거리를 받아 가지고 오는 길인데 자축하지 않곤 못 배기겠어. 어때요?"

루시는 빙그레 웃으며 의자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리호리하고 쭉 뻗은 몸매에, 곱슬거리는 까만 머리칼을 한 가닥으로 묶은 탓에 168센티미터의 공식 수치보다 더 커 보이는 그녀는 겨울철 뉴욕 사람으로 보기엔 너무도 건강해 보였다. 초콜릿 색과 꿀색 중간쯤 되는 그녀의 살결은 고향인 바베이도스(서인도 제도의 영 연방 섬나라-역주)의 햇살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 반짝이는 짙은 캐러멜 색이었다. 신상에 대해 물어 보면 자신은 순종 쿼드룬(흑인의 피를 4분의 1 이어받은 혼혈-역주)이라고 설명하곤 하는데, 상대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으로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그녀는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앙드레가 시내에 좀 오래 머물기만 한다면 그와 가까이 지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떠냐니까요?"

앙드레는 웃음기 어린 희망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도 없는 책상을 가리켰다.

"오늘은 두 아가씨가 다 쉬어요. 메리는 감기에 걸렸고 다나는 배심원 임무를 수행하러 갔어요. 내가 사무실을 지켜야 해요."

뉴욕에서 12년 넘게 살았다곤 하지만 루시의 목소리에는 서인도 제도의 감미로운 리듬이 깔려 있었다.

"할 수 없군요. 그럼 다음번엔 꼭 같이 갑시다?"

"좋아요. "

루시는 소파 위에 잔뜩 쌓인 명세표 더미를 치우고 두 사람이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어떤 일인지 말해 봐요. 설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편집장이 낀 일은 아니겠죠?"

루시와 카밀라 사이엔 이상한 반감이 있었다. 카밀라가 루시를 가리켜 "구불거리는 머리칼의 이상한 아가씨"라고 말한 게 발단이 되었는데, 그 얘기가 루시의 귀에 들어간 후로 두 여자의 악감정은 커져만 갔다. 카밀라는 루시가 공경심이 전혀 없으며 자기네 고객 편만 들어 지나치게 요구해 온다고 생각했다. 한편 루시는 카밀라가 거만하며 허세가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사업상 하는 수 없이 위태롭고 차가운 예의 바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앙드레는 소파 쪽으로 가서 루시 옆에 앉았다. 그녀의 향기를 느낄 만큼 가까운 거리였는데, 감귤향 짙은 따스한 냄새였다.

"룰루, 거짓말은 못하겠군. 사실은 카밀라가 나더러 프랑스 남부에 가서 성화를 찍어 오라고 했어요. 2~3일 걸릴 거야. 내일 출발해요, "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돈 얘긴 해보지도 않았죠?"

아주 커다란 갈색 눈 두 개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앙드레는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양손을 번쩍 쳐들었다.

"내가? 당연히 안 했죠. 그 얘긴 하지 말라고 당신이 늘 주의시키잖아요."

"그야, 당신이 그 방면엔 재주가 없으니까 한 소리죠."

그녀는 책상 위 메모지에 뭔가를 적고 나서 다시 와 앉더니 빙그레 웃었다.

"좋아요. 이제 당신도 몸값을 올릴 때가 됐어요. 그 사람들, 당신을 자기네 전속 사진사 정도의 보수밖에 주지 않으면서 잡지를 낼 때마다 부려먹고 있잖아요."

앙드레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날 구제해 주고 있잖아요."

"그런 것 같진 않은데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루시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자 말끔하고 얌전한 턱이 드러났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미소 지어 보였다.

"그 쪽과는 내가 담판을 지을 테니까 당신은 일에만 열중하세요. 참 그 여자도 거기에 간대요?"

앙드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콜롱브 도르에서 저녁을 먹을 거예요. 거긴 그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호텔 레스토랑의 하나죠."

"당신과 카밀라, 그리고 그녀의 미용사 셋이서만. 멋지군요."

앙드레가 주춤했다. 그가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루시가 수화기를 들었고 잠시 듣고 있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수화기를 손으로 가리고 그녀가 말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요."

그녀가 키스를 날려 보냈다.

"몸조심하시고 잘 다녀오세요."

 

차가 로열튼을 빠져나올 무렵 수화기를 잡은 카밀라는 손톱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 가며 번호를 .눌렀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긴 했지만 성공적인 점심 식사였고 지안니는 대단히 협조적이었다. 그 호텔로 시가 한 상자를 보내야겠다고 그녀는 머릿속에 입력했다.

"여보세요?"

전화 저쪽의 목소리는 뭔가에 몰두해 있는 것처럼 들렸다.

"자기, 나예요. 파리 행 건은 모두 완료됐어요. 지안니가 모든 걸 처리해 놨어요. 하인 한 명이 그 아파트를 안내해 줄 거예요. 원한다면 하루 종일 있어도 된대요."

상대는 좀더 관심 있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그림들이 거기에 있다는 거야? 겨울이라고 창고에 처박아 둔 건 없고? 어디로 빌려 준 것도 없고?"

"모조리 거기 있어요. 지안니가 파리에서 오기 전에 확인했대요.''

"좋았어. 정말 잘했어, 자기. 아주 좋아. 나중에 보자고."

어슴푸레한 빛이 스며드는 어둑어둑한 서재, 수화기를 내려놓은 루돌프 홀츠는 마이센(독일의 자기 산지로 유명한 도시-역주) 산 컵에 든 녹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 좀 전에 읽고 있던 기사로 다시 돌아갔다.

-시카고 트리분-지에 난 런던발 기사였는데 '스코틀랜드 야드 미술품 및 골동품 팀' 이 노르웨이의 가장 유명한 그림을 되찾은 내용을 다룬 것이었다. 그것은 시가 4500만 달러에 달하는 에드바르드 뭉크의 (절규)였다. 이 그림은 1991년에 도둑맞았는데 2년 만에 노르웨이 남부의 한 지하실에서 종이에 싸여진 채 발견되었다. 홀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기사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기자의 말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도둑맞거나 분실된 미술품은 '최소한' 30억 달러 이상을 호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 수치가 홀츠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를 떠올리게 했다. 2년 전, 카밀라를 만났던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이었던가.

그들의 관계는 사교적으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홀츠가 미술 거래상이라는 합법적인 자격으로 정기적으로 드나들던 한 화랑 전시회에서 만났다. 당시 그는 그림에 싫증이 나 있던 때였는데 카밀라가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들 두 사람에겐 뭔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그는 직감했고, 그 다음 주에 점심을 같이하며 탐색해 보는 동안 그러한 직감은 더욱 굳어졌다. 예의를 차린 진부한 대화 밑으로 어떤 암류가 흘렀고 그것은 두뇌와 야심이 만난 첫 징표였다.

저녁 식사 만남이 이어지면서 언어의 유희는 솔직함과 비슷한 권가로 바뀌었고, 이윽고 카밀라가 파크 애비뉴에 위치한 홀츠의 아파트에서 호화로운 물건들에 둘러싸여 네 개의 기둥이 달린 그의 침대를 함께 쓰게 되었을 즈음엔, 두 사람은 탐욕적이라는 면에서 마음이 꼭 맞는 천생연분이라는 것이 서로에게 분명해졌다.

사랑스런 카밀라. 찻잔을 마저 비운 홀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오후 네 시를 넘긴 시각, 15층 아래 파크 애비뉴에 차가운 어둠이 깃들면서 사람들이 택시를 잡느라 아우성치고 있었다. 렉싱턴 애비뉴에선 지금쯤 눈에 젖은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홀츠는 부자로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를 새삼 만끽하고 있었다.

 

 

2. 취재

 

"가방을 직접 꾸리셨나요?"

"그렇소."

"꾸려진 짐이 손님의 시야에서 벗어났던 적은 없었구요?"

"없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받은 선물이나 기타 품목을 소지하고 있나요?"

"아니오."

델타 항공 비즈니스 클래스 담당 여직원이 여권을 훑어보았다.

'성명 :앙드레 켈리. 출생지 :프랑스, 파리. 생년월일-1965614, '

사진과 실물을 대조하려고, 처음으로 고개를 든 그녀는 짧게 깎은 검은 머리에 각진 턱의 호감 가는 얼굴을 돋보이게 만드는 초록색 눈과 마주쳤다. 진짜 초록색 눈을 본 것이 처음인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게 되었다.

앙드레가 빙그레 웃었다.

"아버지가 아일랜드인이세요. 가문 대대로 초록색 눈이죠."

여자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제가 그렇게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었나요?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 보군요."

그녀가 티켓과 수하물 꼬리표를 처리하느라 바쁜 사이에 앙드레는 니스행 야간 여객기에 함께 타게 될 승객들을 둘러보았다.

대부분 업무차 여행하는 프랑스인들이었는데 뉴욕의 날씨와 소음과 부산함에 대처하느라 고생한 뒤여서 다들 지친 표정들이었다. 게다가 뉴욕의 영어는, 그들이 벌리츠(세계적인 어학 전문 학원-역주)에서 배운 박자가 딱딱 맞는 발음과는 완전히 다른 기관총 리듬이 아니던가.

여직원이 그의 여권과 탑승권을 되돌려 주었다.

"다 됐습니다, 켈리 씨. 그런데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손님은 아일랜드인이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파리에서 태어나셨나요?"

"그때 우리 어머니가 거기 계셨거든요. 어머닌 프랑스인이죠. 난 혼혈이에요."

앙드레가 탑승권을 윗호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말했다,

"어머, 그래요? 멋진데요. 아무튼 좋은 여행 되세요."

여객기로 향하는 느릿느릿한 대열에 붙은 그는 옆 좌석이 비었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차선은 예쁜 여자가 앉아 주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차 차선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입도 벙긋하지 않는 기업 간부라도 괜찮다.

막 자리를 잡고 앉은 그는 옆에서 누군가가 서성이는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팽팽하게 긴장된 여윈 얼굴의 젊은 여자가 통로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녀는 까만 정장에 소형 서류가방을 든 전형적인 직업여성 차림새였고 불룩한 검정 백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앙드레는 그녀가 창가 좌석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리에서 일어나 주었다.

여자는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분명히 통로 쪽 좌석을 준다고 했는데. 전 언제나 통로 쪽에 앉거든요."

탑승권을 꺼내 좌석 번호를 확인한 앙드레는 자신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음을 알았다. 그는 젊은 여자에게 탑승권을 보여 주었다.

여자가 말했다.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전 창문 기피증이라서요."

그런 희한한 증상은 앙드레로선 금시초문이었지만 앞으로 일곱 시간동안이나 여자의 불평을 들으며 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평화로운 비행을 위해 그는 자신의 통로 쪽 좌석을 그 여자에게 양보했고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창가 쪽에 앉은 그는 여자가 업무에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서류며 노트북 컴퓨터를 앞에 꺼내 놓는 것을 지켜보았다. 전에도 이따금 해본 생각이지만 현재의 여행을 기분 전환의 기회라고 하는 건 너무도 과장된 얘기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람으로 붐비고, 지겹고, 안락하지 못하며, 거의 대부분 짜증스럽게 된다.

"여행이란 정말 멋지죠? 그러니까, 프랑스 남부로 가게 되다니, 거긴 정말이지......"

원하던 자리를 차지하고 나니 기분이 완전히 풀린 듯 젊은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좋다구요?"

그의 무미건조한 대꾸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여자가 앙드레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책을 펼쳐 들었다 여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노트북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방해받지 않고 몇 시간 조용하게 있고 싶어하는 항공기 승객이 가장 피해받기 쉬운 시간은 바로 기내식이 나올 때다. 자는 척하는 것도 소용없고 책 뒤로 숨어 버리면 먹는 것이 불가능해져 버린다.

하늘에서의 진수성찬을 실은 손수레가 다가오고 있을 때 앙드레는 옆자리 여자가 이따금 자신을 훔쳐본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노트북 화면 들여다보기를 그만두고 앙드레와의 대화를 다시 한번 시도 해 볼 눈치였다.

마침내 피해 갈 수 없는 기내식 단골 메뉴인 치킨 한 조각이 그의 앞에 놓이자 그는 얼른 헤드폰을 끼고 접시 위로 머리를 숙여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으로 음식물에서 주위를 돌려 보려 애썼다.

이제 허구한 날 여행하고 다니는 짓은 그만둘 때가 됐다. 사교 생활, 연애 사업, 심지어 소화 능력까지 모든 것이 고통을 겪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임시 숙소로 쓰고 있는 처지였다. 그곳에 갖다 놓은 책이며 옷가지 상자들은 여덟 달이 지나도록 아직 개봉도 안 된 채 뒹굴고 있었다.

자동 응답기에 대고 말하다 지쳐 버린 뉴욕 친구들은 그에게 전화 거는 것을 아예 포기해 버렸다. 파리에서 대학에 다닐 때부터 사귀어 온 프랑스 친구들은 이제 대부분 아이들을 낳았고 어느 정도 정착한 듯 보였다. 친구의 아내들은 앙드레를 받아들이긴 하되 흉금을 트고 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지 못 믿을 사람이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그녀들은 앙드레를 여자들이나 쫓아다니는 사람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밤늦게까지 나돌아다니기 일쑤였고 술을 좋아했다. 따라서 가장 생활의 즐거움과 제약에 아직 완전하게 길들여지지 않은 젊은 남편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외로울 법도 했지만 그러나 외로울 시간조차 없었다. 그의 인생은 일이었다. 다행히 그는 일을 사랑했다. 카밀라가 점점 더 괴팍해지고 사사건건 독재적으로 변해 가는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앙드레에게 클로즈업해서 그림들을 찍도록 고집하는 성가신 습관도 생겨났다.

그런 걸 찍어 봤자 완성된 기사에 넣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보수가 괜찮았고 남들이 알아주는 최고의 인테리어 사진작가로서의 명성을 쌓아 가고 있었다. 책을 만들어 보자고 접근해 온 출판업자도 이미 둘이나 있었다. 내년에는 책을 한번 내리라고 그는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다, 작업 속도도 자신이 조절하고, 주제 선정도 알아서 하고, 스스로 사장이 되어 일할 것이다.

그는 치킨에 손을 댈까 하다가 그만두고 좌석 위 전등을 끈 다음 뒤로 기대어 누웠다 내일이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눈을 감았고 곧 잠에 빠져들었다.

입국장을 빠져나와 니스 공항 대합실로 들어서자 코에 익은 프랑스 냄새가 그를 반겼다. 그가 구성 요소를 분석해 보려고 종종 시도해 봤던 냄새였다. 진한 블랙 커피향도 배어 있고, 담배 냄새도 약간, 디젤 연료 비슷한 냄새와 오데콜롱 향한 자락, 그리고 버터가 듬뿍 든 페이스트리의 기막힌 향 등이 어우러져 프랑스 냄새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프랑스란 나라의 국기만큼이나 특징적이어서 앙드레에게는 청춘의 많은 시간을 보냈던 이 나라에 다시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게 해 주는 첫 번째 즐거움이었다. 다른 공항들에서는 시시한 다국적 냄새가 난다. 그러나 니스에선 프랑스 냄새가 난다.

아까 옆자리에 앉았던 까만 정장의 여자가 수하물 찾는 구역에 서 있었다. 검정 고무벌레 같은 회전 벨트가 짐도 싣지 않은 채 느릿느릿 승객들 사이를 지나 벽 속 구멍으로 되돌아가는 동안 여자는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곤 했다. 그녀의 표정은 바로 뉴욕의 표정이었다. 이맛살을 찌푸리고 초조해 하는, 뭔가에 쫓기는 듯한 표정 그 여자가 과연 느긋한 휴식을 가져본 적이 있을지 앙드레는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녀에게 동정이 갔다.

그가 여자의 어깨를 톡톡 치자 그녀가 움찔했다. 그가 말했다.

"시간이 늦은 모양이군요. 내가 좀 도와 드릴까요?"

"이 사람들, 도대체 비행기에서 짐 꺼내 오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거죠?"

앙드레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긴 프랑스 남부예요.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죠."

여자가 손목시계를 다시 보았다.

"소피아 앙티폴리스에서 약속이 있는데. 혹시 거기 위치를 아세요? 택시를 타고 가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소피아 앙티폴리스 비즈니스 센터는 앙티브와 칸느 중간의 언덕지대 뒤편에 있었다 앙드레가 말했다.

"교통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얼추 45분 정도 걸릴 겁니다."

여자는 안심이 되는지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다행이네요. 고맙습니다. 비행기 속에서 어땠는지 아세요? 당신이 혼자 잘난 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앙드레가 한숨을 쉬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저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입니다."

그의 짐이 벨트 위에 얹혀 슬슬 나오고 있었다.

"자 그럼, 볼일 잘 보시고, 일 끝나거든 거기서 되도록 빨리 벗어

나세요."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요? 위험한 곳인가요?"

앙드레는 짐을 집어 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음식이 형편없는 곳이거든요,"

그는 렌트한 르노를 타고 카녜쉬르메르 해안 도로를 벗어나 루 강 상류로 구불구불 이어진 6번 지방 도로를 따라 생폴드방스로 향했다. 갑자기 차가워진 이른 아침의 쌀쌀한 기운이 스며 왔지만 조금 지나면 풀릴 터였다. 앞창에 내리 쬐이는 햇볕이 벌써 따스했고, 멀리 산꼭대기 봉우리들에 쌓인 눈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맨해튼과 겨울은 멀리 다른 행성에 두고 온 것 같았다.

차창을 내리자 부족한 산소 속에서 하룻밤을 보낸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제시간에 생폴에 도착한 그는, 프랑스에서 주차위반 딱지를 제일 신속하게 끊기로 명성 높은 마을 경찰병력인 뚱뚱한 경관 하나가 카페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경관은 카페 문간에 멈춰 서서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오늘의 첫 위반자를 잡아 볼까 하고 자그만 광장을 꼼꼼하게 훑었다. 그리고 앙드레가 정말 차량 몇 대밖에 허용되지 않는 광장 주차 구역에 차 꽁무니를 밀어 넣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손목시계를 꽤 오래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규칙적인 장화발 소리와 함께, 자신의 권위적 지위에 걸맞게 천천히 차 쪽으로 다가왔다.

앙드레가 차 문을 잠그며 그에게 목례했다.

"봉주르(안녕하세요)"

경관도 되받아 끄덕였다.

"한 시간이오. 한 시간이 지나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콩트라방시용(경범죄요) "

그는 한 치의 잘못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경고성 동작인 듯 자신의 선글라스를 고쳐 쓰더니 이 아침에 이루어 낸 자그만 첫 승리에 만족해하며 멀어져 갔다.

그는 7, 8월을 얼마나 학수고대했는지 모른다. 가장 좋아하는 달이 바로 그 두 달이었다. 그땐 근엄한 얼굴로 마을 입구에 버티고 서서 끝없이 이어지는 차량 행렬을 되돌려 놓을 수도 있었다. 운 좋은 날엔 백 명에 달하는 운전자들을 격분시킬 수도 있었다. 그런 것이야말로 이 직업의 숨겨진 즐거움들 중에 하나였다.

카페에 들어간 앙드레는 크르와상과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 광장 한가운데 쪽을 내다보았다. 그곳은 날씨가 허용되는 한 일 년 내내 불르(프랑스의 공놀이-역주) 게임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앙드레는 어릴 때 처음으로 생폴에 왔던 일이 떠올랐다. 그 시절 어느 날. 웨이터같이 검정과 흰색의 정장을 입은 이브 몽탕은 마을 노인들과 어울려 놀았고, 그 사이 시몬느 시노레(몽탕의 아내로 배우이자 작가였음-역주)는 담배를 피우며 구경하고, 제임스 볼드윈(미국의 흑인 작가-역주)은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들이 유명한 사람들이라고 앙드레에게 말해주었고, 그는 빨대로 오랑지나(오렌지 소다-역주)를 마시며 몇 시간씩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었다.

십 년 후 두 번째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 그는 한 스웨덴 여자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우체국 뒤에서 나눈 열정적인 키스들, 파리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맛보았던 가슴 저린 아픔, 그리고 그럭저럭 진행되다 마침내 끊겨 버린 편지 왕래. 그 후 그는 소르본느 대학에 진학하여 다른 여자들과 사귀었다, 그리고 런던에서 한 사진작가의 조수 겸 견습생으로 보낸 몇 년. 그런 후엔 이국적인 풍경을 담고 싶어, 또한 미국식 보수 기준에 끌려, 뉴욕으로 날아갔다. 크르와상을 먹어 치운 그는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쳤다. 그 러시아 미망인은 여기서 제분 거기에 불과한 생자네 아래쪽에 살고 있었다. 그는 호텔에 짐을 풀기 전에 일단 가서 자신을 소개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주차장에서 빠져 나을 무렵 생폴은 슬슬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좀전의 그 경관은 사냥감을 찾아 배회하고 있었고, 콜롱브 도르 호텔에서 나온 웨이터가 호텔 입구에서부터 안마당까지 호스로 물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돌바닥에 부딪혀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이 햇살 속에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앙드레는 길 양편의 경치를 번갈아 감상하며 생자네 방향으로 슬슬 차를 몰았다. 오른쪽으로는 콘크리트와 타일을 뒤섞어 경사진 대지를 덮어 버리고 줄지어 들어선 멋진 별장들이 눈길 닿는 데까지 늘어서 있었는데 그 경관은 지중해까지 쭉 이어졌다. 왼쪽은 표백한 듯 하얀 불모지로서 건축물이라곤 들어서지 않은 콜드방스 경사지가 나무들 꼭대기 위로 솟아 있었다.

그러한 대조적인 경관은 남부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쉽게 발견되곤 한다 마치 어느 선 너머로는 별장을 지을 수 없도록 금을 그어 놓은 듯, 치열한 개발 지역에서 느닷없이 텅 빈 자연 지역으로 바뀌곤 하는 것이다. 앙드레는 그 선이 유지되기를 바랐다. 다른 건 몰라도 프랑스의 현대 건축만은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되기에.

표지판을 따라 좁다란 도로에서 벗어나 계곡 자락으로 이어진 자그만 자갈밭 길로 들어선 앙드레는 자신이 개발업자들의 마수에서 용케 벗어난 한 고립 지대에 들어서 있음을 깨달았다, 작은 시내 둑을 따라 오래된 석조 건물들이 일렬로 쭉 서 있었는데, 담장마다 제라늄 꽃송이들이 늘어져 있고 어느 굴뚝에선 연기 한 자락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주차를 마친 앙드레는 고르지 않은 층계로 된 야트막한 현관 계단으로 올라갔다. 담장 뒤에 앉은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반쯤 감긴 거만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니 문득 그의 아버지가 즐겨 인용하시던 말씀 하나가 떠올랐다.

'고양이란 놈들은 사람을 내려다본다. 개들은 사람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돼지들은 똑바로 눈높이로 본다.'

문을 두드리면서 그는 빙그레 웃었다.

딸가닥하고 빗장 내리는 소리가 났다. 곱슬곱슬한 회색 머리칼 밑으로 갈색 단추 같튼 두 눈을 가진 동그스름하고 혈색 좋은 얼굴 하나가 문을 빼곡이 열고 내다보았다. 앙드레는 좀전의 그 고양이 놈들이 어느새 자신의 다리를 스치며 집안으로 들어간 것을 느꼈다.

"마담, 봉주르. 저는 미국에서 온 사진작가입니다. 잡지사에서 나왔죠. 미리 연락을 받으셨을 줄 압니다만 "

상대방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여자라고 들었는데요."

"그녀는 오늘 늦게나 여기로 올 겁니다. 불편하시다면 갔다가 나중에 다시 올 수도 있습니다."

노부인은 관절염이 있을 것 같은 구부정한 손가락으로 코를 비볐다.

"카메라는 어디 있수?"

"차 안에요."

". (, 그래요)."

앙드레는 카메라를 차에 두고 왔다는 자신의 대답이 노부인의 결정에 한몫했음을 눈치챘다.

"내일이 좋겠네요. 오늘은 청소하는 여자가 오기로 되어 있어서."

노부인은 앙드레에게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곤 면전에서 탕 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그는 차로 가서 카메라를 꺼내 왔다. 해가 동쪽에 있을 때 집의 외관을 좀 찍어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카메라 렌즈 속으로 창을 통해 그를 내다보고 있는 노부인의 얼굴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이 부인은 과연 카밀라를 어떻게 견뎌낼까? 필름 한 통을 다 쓴 그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나머지 외관은 저녁에 와서 다시 찍기로 했다.

그는 호텔로 되돌아와 체크인을 했고 묵직한 키를 쩔렁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이어진 복도를 따라갔다, 그는 이 호텔을 좋아했다, 소란하고 격식을 갖추지 않은 것이 호텔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시골집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물론 벽마다 걸린 그림들, 정원에 늘어선 조각품들과 마주치기 전까지의 얘기다.

콜롱브 도르는 1차 대전이 종결된 후에 농부였던 폴 루란 사람이 세웠다. 그는 배고픈 화가들에게 동정적인 사람이었다. 화가들은 그의 식당에 와서 식사를 하곤 했는데 예술가들이 으레 그러하듯 후원금 부족으로 시달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루 씨는 친절하게도 화가들이 자기 작품으로 음식값을 내도록 허용했고 그러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샤갈, 브라크, 피카소, 레제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의 그림을 소장하게 되었다.

그 일이 사업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은 루는 그다음부턴 아예 그림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40년이 지나자 프랑스에서 가장 훌륭한 20세기 미술 컬렉션을 가진 개인 소장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은행에는 겨우 몇백 달러의 돈을 남겼지만 벽에 큰 재산들을 걸어 놓은 채 사망했다.

앙드레가 침대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덧문을 열어 제칠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팩스가 와 있다는 전갈이었다. 그는 나가는 길에 가지러 가겠노라고 대답했다. 업무 여행을 하면서 한두 번 당해 본 경우가 아니어서 어떤 내용의 팩스인지 알고도 남았다.

카밀라는 어느 곳에 가든 무계획하게 조용하게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의 평소 지시들을 보완한 메모 사항이나 주의사항들( 난 핑크빛 방은 절대 안 됨'으로 시작해서, 자신이 마시게 될 미네랄 워터의 거품 방을 크기부터 싱싱한 꽃다발의 색깔까지, 자신의 온갖 변덕을 다 반영한 일장 연설문이다)이 언제나 그녀의 도착보다 미리, 일제 사격하듯 퍼부어지곤 했다.

밖으로 나온 앙드레가 햇살 좋은 마당에서 읽고 있는 것과 같은 추가 게시 항목들은 대체로 카밀라의 그날그날 움직임과 선약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런 식의 정보 전달에 대해 익히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궁정 회람장' 이라 불렀다. 영국 여왕과 왕가의 행사 계획표를 내보내는 -런던 타임스-의 한 정기 기고란을 본뜬 말이었다.

수요일 : 오전에 콩코드를 타고 파리 공항으로. 거기서 에어프랑스로 갈아타고 니스로. 니스 공항에서 아주르사() 리무진을 타고 콜롱브 도르로 가서 앙드레와 저녁.

목요일 : 오스팔로프 공녀와 하루. 코후 다섯 시 '에어 앵테르나시 오날'로 다시 파리로. 오를레망에서 에펠사() 리무진을 타고 리츠 호텔로. 거기서 앙뒤예트 자작 부인과 저녁.

금요일 : 포쉬 가() 보몽 씨네 집 방문. 랑브루와지에서 길르와 점심. 크리용 호텔에서,,,,,,

이런 식으로, 여행 일정을 31초 단위로 보고하고 마실 것과 먹을 것의 구체적인 품목까지 세세하게 나열하는 거만스럽기 짝이 없는 카탈로그가 숨쉴 새 없이 이어졌다. 노엘의 말마따나, 보통 사람이라면 카밀라의 스케줄을 읽는 것만으로도 녹초가 되고 남을 것이다. 앙드레는 팩스 용지를 쓱 훑어 보았다. 모두가 하나같이 신분의 무게가 느껴지는 이름들이었다, 카밀라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기가 왜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른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팩스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는 관광 시간과 작업 시간을 나누어 즐거운 한나절을 보냈다. 퐁다시옹 마에트와 마티스 예배당을 방문한 다음 방스의 야외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고, 이어 그미망인의 저택 외관을몇 장 더 찍기 위해 다시 그리로 갔다. 이번엔 서녘 햇살을 배경으로 찍었다. 호텔로 돌아온 그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바에 가 앉아 M. F. K. 피셔의 -프로방스의 두 마을-을 읽었다, 그나 오래 전부터 갖고 다니며 틈틈이 읽어 온 책이었다.

그날 저녁 일진은 시원치 않았다. 바 한구석에서는 탁자 밑으로 손과 무릎을 맞댄 남녀 한 쌍이 부끄러울 것 없는 관계인 것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면서 샴페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바에 앉은 손님 하나는 프랑스에서 우익 정치가 장 마리 르 팽의 세가 점점 확대되고 있는 현상에 대해 바텐더를 상대로 근엄한 연설을 혼자 해대고 있었 다. 듣는 데는 이력이 난 그 청중은 말 중간중간에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곤 했다. 레스토랑 쪽에서 술병 코르크 마개 뽑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바깥에는 어둠이 시나브로 내려앉았고 호텔 마당에 하나둘씩 불이 들어왔다.

갑자기 약한 엔진 소리가 들려 차 앙드레는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메르세데스 벤츠 한 대가 천천히 마당 입구를 가로질러 와 멈춰섰다. 운전기사가 차 뒷문을 열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샤넬 제품으로 치장한 카밀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마당 판석 위로 또각또각 걸으며 지시하는 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퍼졌다.

"짐은 내 방으로 갖다 줘요. 장 루이. 의상 백은 꼭 벽에 걸어야 한다는 거 잊지 말구요. 내일 오후 네 시 정각에 이리로 와요. 콩프 레네(알았죠)?"

그녀는 바에서 나오는 앙드레를 보았다.

"어머, 자기 여기 있었네. 장 루이한테 팁 좀 두둑이 줄래? 난 가서 연락 온 거 있나 확인해 봐야 해."

운전기사가 그녀의 가방을 내려놓는 동안 앙드레가 요금을 계산했다. 그때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카밀라의 음성이 클 안에 메아리쳤다.

"말도 안 돼. 세 앵포시블(그럴 리가 없어). 아니, 정말 아무것도 오지 않았어요?"

다른 직원들도 불려 나와 심문을 받았다. 그녀 앞으로 온 메시지를 찾기 위해 호텔 전체가 법석을 떨었다.

앙드레는 레스토랑에서 메뉴 두 장을 챙겨 다시 바에 가서 앉았다. 막무가내로 나오는 한 개인이 순식간에 한 업소 전체의 고요를 깨뜨리는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삐르(버찌 술-역주)를 또 한 잔 주문하고 난 그는 요즘 카밀라가 마시는 생수가 뭐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바두와였던 것 같다.

그녀가 와서 긴 한숨과 함께 앙드레 앞자리에 앉더니 백에서 담배를 꺼냈다.

"재수 없는 날이야 내 꼴이 완전히 마귀할멈 같았을 거야."

그녀는 다궈를 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앙드레가 자신의 말을 부인해 주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저녁 식사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죠."

앙드레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메뉴를 건넸다.

"여긴 양고기가 좋아요. 맛이 아주 최고죠."

"오우, 그만해, 육류가 장에 얼마나 오래 머무는지 알기나 해요? 며칠은 간다구. , 이제 얘기나 해봐요. 그 공녀는 어땠어?"

앙드레가 아침나절의 그 짧은 만남을 고고하는 동안 카밀라는 물을 홀짝거리며 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루종일 긴 여행을 하고 난 뒤인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는 활기 차고 집중력 있는 태도로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다음 날의 작업 계획을 세웠다.

그녀의 에너지는 니스식 샐러드를 먹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그것이 그녀의 저녁 식사 전부였다. 반면에 앙드레는 구운 양고기와 적포도주를 먹고도 몸이 축 가라앉아 점점 더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계산서가 식탁 위에 나왔을 때 그녀가 말했다.

"피곤한가 봐, 자기. 가서 잘까?"

그 정도 속뜻은 알아차릴 만한 영어 실력이 되는지 웨이터가 눈썹을 치올리며 입술을 내밀었다.

앙드레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눈가까지는 미치지 않는 엷은 미소를 띠고 눈길을 되받았다. 그는 유혹받은 것처럼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카밀라는 돈 많은 애인과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이따금 개러비디언과도 은밀한 하오의 정사를 즐기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니 사진작가쯤이야 대수겠는가? 원거리 출장중에 잠시 편집장의 위안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제의는 꽤 오랜만에 받아 보네요."

이렇게 말하면서 앙드레는 웃음을 터뜨려 그 순간을 모면했다.

"커퍼 더 안 드실래요, 카밀라?"

카밀라는 대답은 않고 냅킨을 식탁 위에 집어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여덟 시에 봐요, 로비에서."

앙드레는 레스토랑에서 나가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거절당한 여자의 뒷모습이었다 그는 괜히 밥줄이 위태로워지는 짓을 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3. 목격

 

앙드레는 정확하게 그 시간에 호텔 현관에 나와 아침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산등성이 위로 옅은 구름 몇 점이 높이 떠갈 뿐 하늘은 멀리 눈길 닿는 데까지 파랗고 맑았다.

그는 테라스를 가로질러 가서 수영장을 내려다보았다, 수영장 한 쪽엔 빽빽하게 군사 대열로 심어진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경호하듯 죽 늘어서 있고, 한쪽 가장자리엔 콜더(미국의 조각가, 모빌의 창시자-역주)의 으스스한 모빌 하나가 감시하듯 서 있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물 속엔 어젯밤 바에서 보았던 그 남녀가 아이들처럼 깔깔대며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앙드레는 이런 멋진 하루를 함께 해줄 누군가가 곁에 있으면 얼마나 근사할까 잠시 생각했다, 하긴, 옆에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 여기 있었네. 자기, 카메라에 필름은 넣어 뒀겠지? 차는 어디 있어?"

카밀라가 밀짚모자 테를 한 손으로 살짝 잡은 폼으로 서 있었다. 그 모자는 아마도 내년 여름이면 너나없이 쓰고 다니게 될 것이다.

그녀는 자칭 작업복이라고 부르는 중간 굽 구두에 다소 수수한 아르마니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날씨와 썩 잘 어울렸다. 지난밤엔 괜히 그녀의 신호를 잘못 받아들였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앙드레는 다소 마음을 놓았다.

생자네로 가는 길에 그녀는 자신이 러시아의 모든 것을 다 좋아하지만 특히 성화를 얼마나 열렬히 좋아하는지에 관해 떠들어댔다, 만일 그들이 바이에른(독일 남부의 주-역주)의 한 성이나 베네치아의 궁전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면 그녀는 아마 독일 것이나 이탈리아 것이면 뭐든 찬양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자신의 실험 재료를 구워삶아 흘리려 할 때의 방식이었다.

과연 그녀는 오전 내내 그 수법으로 밀고 나갔다. 우아하긴 하지만 다소 낡든 소박함을 지닌 그 고가의 모든 것들에 대해 탄성을 연발했고("때 묻지 않은 매력이야, 자기. 기둥들이 대단하지? 이런 매력의 진수를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포착해야 해")몇 점 안 되긴 해도 대단한 걸작인 바로 그 성화들에 대해선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카밀라가 열광하며 인터뷰하는 사이 앙드레는 사진을 찍어 댔고 정오쯤 되가 작업이 대충 끝났다, 이제 오후에 작업할 땐 실험작도 몇 점 찍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노부인은 점심 대접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부엌에서 카밀라의 지칠 줄 모르는 쾌활함과 아첨은 난처한 시험대에 놓이고 말았다. 그것은 앙드레 입장에선 매일매일 먹을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은 수수한 식단이었다. 통통하고 윤시 나는 까만 올리브 열매, 횐 버터를 바른 무 요리, 오래 씹어 먹어야 되는 시골 빵, 적포도주 한 주전자, 그리고 예와 성을 다해 가늘게 썬, 속이 꽉 차고 불그스름한 소시송(큰 소시지 -역주).

앙드레는 접시를 내밀고 노부인이 덜어 주는 음식을 즐겁게 받으며 말했다.

"정말 근사한 대접입니다. 미국에선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겁니다. 아마 그쪽에선 이런 건 위법이라고 할 거예요."

노부인이 빙그레 웃었다.

"프랑스산 치즈를 대접해도 그런 소리를 듣곤 한다우. 정말이지 미국은 이해하기 힘든 나라예요"

그녀가 카밀라 쪽을 보았다,

"좀더 드시려우, 마담? 이 소시송은 아를 산이에요. 소고기에다 돼지고기와 당나귀 고기를 섞어 만든 거죠. 이게 특별한 맛이 나는 건 바로 당나귀 고기 때문이라고들 하죠."

이 말을 듣는 순간 카밀라의 미소가 얼어붙어 버렸다. 그렇잖아도 그녀는 시련에 가까운 점심을 견뎌내고 있는 중이었다, 바두와도 없고(사실 식탁 위에는 부엌 수도꼭지에서 받아 온 지극히 수상쩍은 물밖에 없었다), 샐러드도 없고, 게다가 고양이 한 놈이 상 위에 올라 가 포도주 주전자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또 당나귀 고기라니! 그녀는 창자가 뒤집히기 직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의상, 또 잡지사의 보다 큰 이익을 위해, 기꺼이 소시지 한 조각을 목구멍으로 삼키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당나귀라니 -그녀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앙드레는 표정이 완전히 굳어 버린 채 절박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그녀를 흘끗 보고 그녀가 할 말을 잃은 상태임을 알았다. 어쩌면 그것은 그로서는 처음 보는 카밀라의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할 만도 했다, 그는 노부인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깜빡 했네요. 여기 있는 제 동료는 채식주의자랍니다."

거기에다 하나 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장이 극도로 민감하죠."

", ?"

", 그녀의 주치의는 어떤 종류든 붉은 육류를 금하고 있답니다. 특히 당나귀 고기는 섬세한 근육 조직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치죠."

노부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카밀라를 쳐다보자 그녀는 매우 유감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놈의 장이 늘 골치라니까요. 정말이지 지긋지긋해요."

그러자 노부인은 재빨리 시원한 국수와 소금에 절인 대구를 권했는데, 카밀라도 재빨리 손을 채저으며 자신은 올리브와 무만으로도 더할 수 없이 만족스럽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거절했고, 그리하여 점심 식사는 금방 끝나 버렸다. 고양이 놈만 남은 소시지나 주워 먹어 볼까 기대하며 식탁에서 꾸무럭대고 있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섰고 일을 다시 시작할 참이었다, 사실 더 할 일도 별로 없었지만.

앙드레는 성화의 위치를 바꾸어 가며 바위, 오래된 석고상, 목재 덧문같은 다양한 배경에서 몇 장 더 찍었고, 고양이와 함제 나지막한 돌담에 앉아 있는 노부인의 인물 사진을 찍을 땐 그녀를 구슬려서 뜻밖의 젊은 미소를 얻어내기도 했다. 카밀라는 메모하기도 하고 자그만 녹음기에 대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세 시쯤 되자 작업이 모두 끝났다,

저택에서 빠져 나온 차가 언덕 위로 접어들자 카밀라는 담배에 불을 붙여 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차창 밖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맙소사, 당나귀라니, 아니, 그런 걸 어떻게 입에 댈 수 있지?"

"맛있기만 하던데요, ,"

앙드레가 속력을 줄이며 말했다. 옆걸음으로 도로를 가로지르던 황토색 개 한 마리가 잡초가 우거진 하수구로 뛰어들기 직전, 차를 비웃기라도 하듯 갑자기 멈춰 섰기 때문이다.

"내장 요리도 한번 먹어 보세요,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죠."

카밀라는 치를 떨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좋아하는 개화된 파리 친구들이 아니라 프랑스 촌사람들은, 식습관이 아주 저속하다는 것을 그녀는 이따금 확인했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음식을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 들어간 끔찍한 재료에 대해 떠들어대면서 즐거워한다는 점이었다. , 창자, 토끼 머리와 양의 발, 젤리처럼 굳힌 이름도 모를 덩어리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잡다한 고기 찌꺼기 ......그녀는 또 한 번 몸을 떨었다.

"그런데, 자기, 뉴욕엔 언제 돌아갈 거야?"

이번엔 앙드레가 치를 떨 차례였다. 그로선 이 좋은 초봄을 놔두고 끔찍한 맨해튼 겨울의 끄트머리로 돌아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주말이나 지내고 갈까 해요. 내일은 니스로 들어가 '알지아리' 와 오에르의 사진이나 몇 점 찍을 거예요."

"누구 이름들인지 모르겠네. 내가 알아야 되는 사람들이야?"

"사람이 아니라 가게들이에요,"

생폴로 들어선 차는 호텔 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경관이 아주 멋진 가게들이죠. 앞에 말한 데는 올리브와 올리브 기름을 파는 데고, 뒤의 것은 맛이 기막힌 잼을 파는 데예요."

카밀라가 흥미를 보일 만한 얘기가 아니었다. 올리브나 잼 따위에선 사회적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여자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광장 맨 끄트머리에 주차되어 있는 메르세데스를 향해 다급하게 손짓했다.

"장 루이가 저기 와 있어. 안에 들어가서 내 짐들을 갖다 실으라고 얘기해 줄래? 난 메시지 온 게 있는지 가봐야겠어."

그 다음 15분은 카밀라가 공항으로 출발하는 뻑적지근한 의식에 할애되었다. 경관의 주의 깊은 눈길 속에 짐들이 옮겨져 메르세데스에 실렸다, 객실 담당 종업원들은 사라진 카밀라의 귀고리 한 짝을 찾기 위해 침대 밑까지 뒤지는 서비스를 덧보태야 했다. 카밀라가 뉴욕으로 마지막 팩스를 보내고, 비행기가 제시간에 뜨는지 공항에 확인 전화를 하고, 호텔 측에 팁과 찬사를 나눠 주고. 마침내 마당을 지나 차 뒷좌석에 들어가 앉는 순간, 호텔 직원들은 한결같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지켜보았다.

열려진 창으로 그녀가 앙드레를 올려다보았다.

"화요일에 양화 필름 준비해가지고 내 사무실로 와줄 거지? 다음 주엔 신간판을 짤 거니까."

그리고는 앙드레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차오(헤어질 때 쓰는 이탈리아 인사말-역주)

인사말과 동시에 창이 올려졌고 마침내 카밀라는 이번엔 파리의 넋을 빼놓으러 가버렸다.

앙드레는 메르세데스가 좁은 도로를 조심조심 올라가 마을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리츠 호텔 수위가 조만간 닥칠 난리법석에 충분히 대비했으면 좋으련만.

이제부턴 아무 부담 없는 하루 저녁과 하루 낮이 통째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샤워를 하고 나서 지도를 들고 바에로 내려갔다, 지도라고 해봤자 사실은 그가 대학 시절부터 봐온 탓에 낡고 바랜 너덜너덜한 미씰링(안내 책자명-역주) 245페이지였는데 그는 그것을 식탁 위, 그가 준문한 키르 옆에 펼쳤다.

그가 가장 아끼는 지도인 이 245페이지는 감상에 끌려 여행하던 시절의 선물이어서 더더욱 추억 어린 물건이었다. 과거 그는 서쪽으로 님므와 카마르쥐, 동쪽으로 이탈리아 국경에 이르기까지 이 지도에 나타난 지역들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긴 여름방학을 보낸 적이 많았다. 늘 돈이 궁했고 그래서 자주 난처한 처지가 되곤 했어도 그땐 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는 과거의 회상으로 빠져들었다 태양이 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시절, 5프랑짜리 와인을 마셔도 라투르(고급 와인-역주) 맛이 났고, 뒷골목 싸구려 여관엘 들어도 깔끔하게 단장하고 반겨 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시절 그의 곁엔 하얀 시트 위에 더욱 도드라지는 구릿빛으로 탄 여자들이 언제나 하나씩 붙어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 가운데 이름이 기억나는 여자는 거의 없었다.

그가 키르잔을 집어 들자 유리잔 아래쪽에 맺힌 물방울이 지도의 니스 바로 남쪽 지중해 위에 톡 떨어졌다. 물기가 코르시카로 가는 뱃길을 표시한 점선들을 적시고 캅페라 끄트머리에까지 번지자 이번엔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다소 최근의 일이었다.

작년 여름이 끝나 갈 무렵 그는 곶에 위치한 한 절묘한 빌라(카밀라가 소곤대며 말하기론 '바다의 유산계급이야, 자기' )에서 작업하느라 이틀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은 드노이예 집안, 보나파르트 시대 이후 조용하게 부를 쌓아 온 바로 그 전통적인 부자 가문이 소유한 저택이었다. 처음에 나폴레옹 군대의 그 수많은 장병들에게 제복을 만들어주기로 한 계약이 세대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성공적으로 이어지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직물을 제공하는 거대한 기업으로 발전한 것아다.

현재 그 집안의 총수격인 베르나르 트노이예는 별로 시간을 바칠 필요도 없는 탄탄한 기업과 마음껏 누려도 좋은 특권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앙드레는 그에게 호감을 가졌던 기억이 났다 물론 그의 딸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의 딸 마리 로르 드노이예의 사진은 프랑스에서 깔끔한 축에 드는 잡지들에 심심치 않게 실리곤 했다. 계절에 따라 롱샹 경마장에서 아버지 휘하의 기수와 잡담하는 모습, 혹은 쿠르세벨 스키장에서, 혹은 몬테카를로의 적십자 주최 무도회에서 예쁘게 미소 짓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곤 했는데, 가슴 설레는 젊은이들 패거리에 둘러싸여 있는 건 어디서나 변함없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우아한 금발 머리에, 태양에서 절대로 멀리 떨어져 살지 않는 사람만이 지필 수 있는 살결(언제나 황금색이 도는 연한 구릿빛)을 지닌 그녀는 부잣집 딸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범했다. 적당히 활발하고 상냥했으며 따로 남자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카밀라는 그녀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앙드레는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내일 아침에 니스로 갈 것이 아니라 캅페라로 가서 드노이예 집안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운이 좋으면 마리 로르가 시간을 내어, 점심을 함께해 줄지도 모른다, 그는 키르를 마저 마시고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내일 일에 대한 기대로 식욕이 돋는 것 같았다.

* * *

캅페라는 야자수와 소나무 숲이 우아하고 흠잡을 데 없이 보존되어 있으며, 물가가 엄청나게 비싸긴 해도 예부터 코트다질르 지역에서 최첨단을 달려온 지역이다, 니스 동편 지중해와 맞닿은 이곳에는 돈이라는 완충 장치에 의해 일반 대중과 격리된, 높다란 담장과 무성한 나무 울타리로 가리고 철대문으로 막은 유명한 혹은 악명 높은 저택들이 많다.

과거 이곳에 살았던 인사들로는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 서머셋 모옴, 그리고 해외에 나갈 때면 가발 50개가 든 트렁크 없이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머리 장식의 대가 베아트리스 드 로췰그 남작 부인 등이 있다.

사회가 좀더 개인주의적으로 바뀌고 이유도 없이 봉변을 당할 수 있는 요즘 시대에 이곳에 살고 있는 거주자들은 가급적 명부에 실리지 않고 알려지지 않고 방해받지 않고 싶어하기 때문에, 캅페라는 해안가 부락 중에서도 관광객들의 혼잡과 아우성에서 벗어나 있는 몇 안 되는 곳들 중 하나이다.

니스에서 들어온 방문객들이 맨 처음 느끼게 되는 것 중 하나는 여기엔 소음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잔디 깎는 기계 소리까지도(물론 소리야 들리지만 담장과 울타리로 가려져 있어 보이진 않는다) 침묵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맞추려는 듯 조용하고 나긋나긋하다. 차들도 별로 다니지 않지만, 그나마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는 차들도 근엄하다 싶을 정도로 여유만만이다. 프랑스 운전자들에게서 흔히 느껴지는 경쟁적인 다급함의 기미는 전혀 없다. 한마디로 여기는 정적감 같은 것이 뒤덮여 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돌진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느끼는 것 같다.

등대를 지나 제네랄드골 거리를 따라가던 앙드레는 좁다잔 사유 도로로 접어들었다. 곶 언저리와 이어진 막다른 길이다. 그 도로 끄트머리에서부터 3미터 높이의 돌담과 드노이예 가문의 문장이 장식된 육중한 두 개의 철문이 눈에 확 띄는 드노이예의 사유지가 시작된다.

철문을 넘어가면 지대가 급격하게 낮아지면서 100미터는 됨직한 저택 내 신작로가 이어지고 그 양편으로 계단식 잔디밭이 펼쳐진다.

야자수들이 줄지어 선 신작로 끄트머리에는 차를 돌리는 둥그런 순환로가 있고, 화려한 분수대와 호화로운 현관문이 나타난다. 지대가 경사지여서 꼭대기 길에서 보면 저택 지붕 너머로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지중해가 보인다,

앙드레는 정원에서 보트 창고와 사유지 해변으로 곧장 이어진 터널로 안내받았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드노이예는 침식 작용 때문에 걱정이라고 하면서,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매년 봄마다 모래를 실어 나르는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든다고 했었다.

차에서 내린 앙드레는 철대문이 잠져 있음을 알았다. 쇠창살 사이로 멀리 저택이 보였다. 눈에 들어오는 창문들마다 덧문이 내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드노이예 일가는 집에 없음이 분명했다. 여기로 오기엔 철이 너무 이른 것이다. 그들은 아직 깊은 산속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거나 어느 따뜻한 해변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음이 분명 했다. 마리 로르는 살결에 선탠을 보강하고 있을 테고.

실망감을 안고 돌아서려던 순간 그는 느닷없이 현관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남자 하나가 뭔가 큼직한 것을 들고 나타났다. 네모난 물건, 색상이 선명한 사각판이었다. 남자는 그것이 몸에 닿지 않도록 아주 조심조심 들고 저택 측면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앙드레는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눈부신 햇살 때문에 자세히 볼 수가 없어 눈을 찡그렸다.

그때 차 뒷좌석에 두고 온 카메라가 떠올랐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흥미로운 장면과 부딪힐 때를 대비해 긴 망원 렌즈를 장착해 두었는데 그런 즉석 사진을 찍는 것은 그의 오래 된 습관이었다 차에 가서 카메라를 가져온 그는 현관 앞의 인물이 정확하고 선명하게 보일 때까지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게 하고 보니 그가 아는 얼굴이었다.

앙드레가 알기로 그는 늙은 클로드였다(이 집 수석 정원사인 젊은 클로드와 구별하기 위해 그렇게들 불렀다). 늙은 클로드는 이십여 년간 드노이예 집안의 온갖 일을 처리하며 일해 왔다 잡역부, 심부름꾼, 공항을 오가며 손님들을 모시는 운전기사, 집안 일꾼들의 감독관, 고속 모터보트 관리인 등으로서 이 집 고용인들의 핵심 인물이었다, 지난해에 앙드레가 사진을 찍으러 왔을 때도 가구를 옮기고 조명을 조절해 주고 친절하게 여러모로 도와주어서 앙브레가 그를 조수로 쓰면 좋겠다고 농담까지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림을 가지고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그림 역시 앙드레가 잘 아는 것이었다 세잔느의 그림이었다. 세잔느 특유의 기법을 담은 것으로 한때 르누아르가 소장하기도 했다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앙드레는 그 그림이 걸려 있던 위치까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본관 응접실의 화려하게 장식된 벽난로 위에 걸려 있었다. 당시 카밀라는 매혹적인 붓 터치를 포착해야 한다면서 클로즈업으로 여러 장 찍으라고 우겼지만 정작 기사에는 클로즈업 사진이 단 한 장도 실리지 않았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고, 또한 사진작가의 본능도 작용해서 앙드레는 현관 계단에 서 있는 클로드의 모습을 몇 장 찍었다, 곧 클로드의 모습은 저택 측면을 돌아나와 그의 앞에 멈춰 선 작은 밴에 의해 가려졌다. 프랑스 어느 도시에 가도 볼 수 있는 칙칙한 청색의 평범한 르노 차였다. 측면에 자그맣게 새겨진 광고 문안은 이 차량이 '주카렐리 플롱브리 쇼파질(주카렐리 난방 및 배관) 소속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앙드레가 렌즈를 통해 지여보는 가운데 밴에서 기사가 내리더니 차 뒷문을 열고 대형 판지 상자와 거품 비닐 한 뭉치를 꺼냈다. 클로드도 작업을 도왔다, 두 사람은 그림을 조심조심 포장하여 상자에 넣은 다음 다시 밴에 실었다. 이어서 차 문이 닫혔다. 남자들은 집안으로 사라졌다. 그 모든 과정이 카메라 필름에 기록되었다.

앙드레는 카메라를 내렸다. 도배체 무슨 일일까? 끌로드가 버젓이 있는 백주대낮에 이루어진 일이니 도둑질이라고 보긴 힘들다. 그는 이십 년 동안 이 집에 충직하게 봉사해 왔고 주인으로부터 더할 수 없이 신뢰받고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림을 소제하려고 어디로 보내는 것일까? 그림 틀을 바꾸려는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배관사 차 뒤에 실어 보내는 이큐는 무엇일까? 이상하다, 아주 이상하다.

그러나 솔직히 앙드레 자기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차로 돌아갔고 정갈하고 근엄하고 나른한 캅페라를 천천히 벗어 나와 니스로 들어가는 해안 토로까지 왔다.

처음엔 일이 용두사미로 끝나 버린 것 같아서 실망감도 느꼈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사실 벅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격이었다. 설사 마리 로르를 만났다 한들 그녀는 그를 기억조차 못 했을지도 모른다, 또 그를 알아봤다 하더라도 쓸데없이 접근하려 드는 정신 나간 녀석쯤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앙드레든 어느새 휴일 하루를 즐기고 있었다. 축제가 끝나 관광객들이 빠져 나가면 동면으로 들어간 듯 보일 정도로 나른한 분위기로 빠져드는 칸느와 달리 니스는 연중 내내 활기를 유지한다. 식당들도 늘 문을 열고, 시장도 계속 서며, 거리는 부산하고, '프롬나드 데 앙글레(영국인들의 산책로)는 바다 경치를 구경하며 운동을 즐기려는 조깅꾼들로 북적대고, 교통량도 많아 체증을 일으키기 일쑤다. 도시 전체가 활력에 넘치는 것이다.

뷔유니스의 좁은 골목들을 돌아다니다 생프랑수아 광장에 들른 앙드레는 얼마 전 근거지를 옮겨 요즘은 어시장 널빤지들을 점거하고 사는 지중해 텃새들을 보고 탄복했다. 그는 '쿠르 살레야(살레야 산책로)에 앉아 맥주를 마시셔 이번에도 망원 렌즈를 이용해 노점 상인들과 손님들을 필름에 담았다. 이웃에서 장보러 나온 모범적인 주부들은 상추나 누에콩 감식가일 뿐 아니라 흥정에도 전문가들이다.

홍합과 샐러드와 치즈로 점심을 때운 그는 '오에르' '알지아리'로 가서 천연색 필름 서너 통을 찍었고 카밀라의 수석 비서 노엘에게 줄 라벤더 에센스 모션을 샀다 그리고 자신의 에이전트 루시를 위해, 피레네 산간 지역에서 만든 방수 보증 베레모도 하나 샀다. 그녀가 그걸 쓴 모습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

생폴로 되돌아오는 길에 비가 뿌리기 시작하더니 밤새도록 꾸준하게 가느다란 이슬비가 내렸다. 그 비는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급작스런 날씨 변화가 앙드레로선 찬가웠다. 프랑스 남부에서 떠나기란 언제나 고역이었는데 만일 해가 쨍쨍하고 뜨거웠더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 비가 뚝뚝 떨어지는 잿빛 하늘을 보며 떠나는 게 가슴이 덜 쓰라릴 것이다.

공항으로 가는 도로에 늘어선 야자수들이 비를 피해 몸을 움츠린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야자수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리와 강철과 콘크리트로 된 종착지가 나타났다. 앙드레는 렌터카를 되돌려 주고 나서, 체크인을 하려고 줄지어 선 비즈니스맨들(뉴욕에서 올 때 같이 타고 왔던 지친 집시들 같은 그 사람들일까?)과 햇볕에 타 뺨과 코가 발그스름해진 행락객들 틈에 끼여들었다.

"안녕하세요? 또 만났군요?"

고개를 돌린 앙드레는 지난번 비행기에 함께 탔던 창문 과민증 여자가 환히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도 되받아 웃어 주며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행은 어땠어요? 틀림없이 대단한 요리를 맛보셨을 것 같군요. 저는 칸느에 있는 정말 깔끔한 곳에 갔었어요. 선생님도 아시는 델 것 같은데 '르 루주' 뭐였던가? 잠깐만요, 그 집 소개장이 어딘가 있을 텐데,"

그녀가 백을 뒤지더니 두툼한 다이어리를 꺼냈다. 대기 행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앙드레는 비행기가 만원이길. 그리고 어쩌다 아는 사이가 되어 버린 이 여자와 가능하면 먼 좌석이길 빌었다.

 

 

4. 의혹

 

늦은 오후 케네디 공항에는 붉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공기는 칼날처럼 매서웠다. 오염된 눈으로 덮인 경사지가 니스의 찬란한 꽃밭들과 참담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택시에 탄 앙드레는 좌석에 붙은 징그러운 녹색의 껌 덩어리를 떼어 내고 나서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설명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비행기 여행은 순탄했고 다행히도 만원이었다. 한 가지 방해물이 있었다면, 스테로이드제로 근육을 키운 할리우드 영웅들이 나머지 배역들을 몽땅 싹쓸이해 버리는 할리우드 영화였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영화였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드노이예 저택에서 본 장면이 몇 차례나 그의 생각을 어지럽혔다. 그가 알기로 그 그림은 엄청난 가격의 그림인데, 그것이 한 마을 일꾼의 밴에 실려 옮겨진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맘 편하게 덮어두고 넘어가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당시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지만 뒤늦게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또 있었다. 그가 돌 문기둥에 박힌 인터폰 버튼을 눌렀는데도 묵묵부답이었던 것이다. 만일 그 집이 텅 비었더라면, 그래서 응답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면야 물론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클로드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저택과 외부 세계를 단절시켜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찍은 그 사진들을 한시바삐 보고 싶어졌다.

기억보다 훨씬 믿을 만한 기록이 사진인 것이다. 그래서 작업실로 곧장 가서 필름을 현상해 보기로 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요란하게 쏟아져 나오는 인도 음악 소리 와중에서 의사를 밝히려고 애쓰던 앙드레는, 결국 터번을 두른 택시 기사의 뒤통수에까지 고개를 내빼 고 고함치듯 소리지른 후에야 목적지가 어딘지 전달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일곱 시가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곧바로 작업대로 가서 환등기를 켰다. 선명한 양화들을 유리판 위에 나란히 펼쳐 놓는 동안 불빛이 깜박이더니 새하얀 빛 산으로 번졌다. 자그만 상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클로드, 세잔느 그림, 주카렐리 사 밴, 그리고 주카렐리 본인인 듯한 밴 운전수. 앙드레는 양화를 시간 순서대로 재배치하고 스토리를 짜보았다. 찍을 때 확대경을 최대로 사용한 덕에 세부 상들도 선명하고 초점도 완벽했다. 증거물로서 이보다 더 확정적인 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의 증거란 말인가? 주인의 명에 따라 심부름한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앙드레는 고개를 내저었다, 과연 그럴까?

그는 작업대 위 벽에 매달린 게시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폴라로이드(즉석 현상 카메라-역주)로 찍은 사진들이 뒤죽박죽 매달려 있고, 영수증, 신문 스크랩, 전화 번호나 주소가 휘갈겨진 메모지들, 라미 루이 식당 메뉴, 경비 청구서, 응답해 주지 못한 초대장들.

IRS(미국 국세청 -역주)에서 보내 온 개봉도 하지 않은 봉투들 그리고 그 모든 우울한 잡동사니들 틈에서 한 가닥 햇살처럼 빛나는 사진 한 장, 앙드레가 사무실에 있는 루시를 찍은 것이었다.

루시가 카밀라와 통화하는 중에 찍은 사진이다. 수화기를 귀에서 멀찍이 떼고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승리의 미소로 반짝이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앙드레의 마지막 보수 인상안과 관련하여 <DQ>와 협상을 벌이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날 마침 카밀라가 소란은 엄청나게 떨고 쥐꼬리만한 은전을 베푼 데 불과했지만 어쨌든 그 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룰루. 그녀에게 이 사진들을 보여 주고 생각을 들어보면 어떨까? 한 다리 건넌 견해를 말이다.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룰루? 앙드렙니다. 방금 막 돌아왔어요. 당신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 괜찮은 거예요?"

"아무 일 없어요. 저녁 식사 어때요?"

"오늘은 토요일이에요, 앙드레. 몰랐어요? 일하는 여자들이 데이트하고 놀러 나가는 날이라구요."

"가볍게 한잔하는 건 어때요? 중요한 일이어서 그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럼, 내가 저녁 식사 약속을 한 장소로 나을 수 있어요?"

20분 후 앙드레는 그곳에 도착하여 반쯤 들어찬 바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달 전 지나가다 보았던 이곳은 진열창에 먼지가 긴 자질구레한 용구와 죽은 파리들이 나뒹구는 다 쓰러져 가는 철물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첨단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또 하나의 소호 풍 레스토랑으로 변모해 있었다. 최소한의 실내 장식, 빈틈없는 외관, 조금이라도 얼굴이 알려진 사람은 홀 반대편에서도 손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한껏 높여 놓은 조명.

무대 화장을 한 것으로 보아 연극 배우의 야심이 있는 것 같은 그 집 여주인은 스스럼없는 매너에, 그쪽 계통 여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요란하게 몸을 흔들며 걸었다. 메뉴엔 유행에 걸맞은 야채 이름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고 와인 목록에는 열두어 가지 브랜드의 광천수가 섞여 있었다. 주인이 오만가지를 다 고려한 모양이니 이 식당이 적어도 3개월 동안이나마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 말란 법도 없다.

모델 같은 여자를 에스코트한 사내족들이 쳐들어오기엔 아직 시간이 좀 일렀고, 일찌감치 저녁을 먹으러 온 사람들 몇 명만이 식사를 거의 끝내가고 있었다, 그들은 음식값과 식당 직원들의 눈초리에 겁을 먹어 완전히 기가 질린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카밀라가 터널 족(맨해튼에 차로 들어올 때 통과하는 해저 터널을 말함-역주)이라고 부르는 뉴저지주나 외곽 지역에서 근사한 저녁을 기대하고 도심으로 들어왔음직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을 뿐 아니라 팁을 주는 것도 아까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웨이터들로부터 노골적으로 냉대받고 경멸 어린 눈길을 받는다, 집으로 돌아갈 땐 아마도 일종의 비뚤어진 만족감 속에서 서로 얘기할 것이다. 뉴욕이란 도시는 정말 몹쓸 데라고. 바 뒤쪽 거울 속으로 식당 입구가 훤히 보이는 자리에 앉은 앙드레는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들고 숱 많고 곱슬거리는 까만 머리칼의 루시를 찾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녀가 도착했을 때 그는 깜짝 놀라 다시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실에서 늘 보아 오던 루시의 모습과 너무나 달라 보였던 것이다.

윤기 나는 머리칼을 모조리 뒤로 넘겨 매끈하고 긴 목을 뽐내고 있었고, 화장으로 눈과 광대뼈 부위를 살짝 강조했으며, 양 귓불엔 자그만 금단추 같은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그리고 낮에 입는 수수한 옷차림과는 달리 값비싼 속옷처럼 보이는 짧은 검정색 실크 드레스 차림이었다.

앙드레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양 볼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향기를 맡고 양손에 와닿는 그녀의 어깨가 맨살이라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보게 되어 기쁘긴 했지만 그 기쁨엔 질투가 깃들여 있었다.

"당신이 이렇게 차려 입고 나을 줄 알았더라면 나도 넥타이라도 매고 나오는 건데."

그가 양손을 내렸다.

"별말씀 다 하시네요. 무엇을 드시고 싶어요?"

얼음은 빼고 럼주에 물만 타달라고 주문해 바텐더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게 만든 루시는 앙드레가 캅페라에서 본 일을 얘기하는 동안 천천히 술을 홀짝였다. 그녀에게 투명 양화를 넘겨준 그는 그녀가 그것들을 뜯어보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 어리는 조명의 유희를 지켜보았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오늘 저녁 파트너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식당 안이 점차 부산해지더니 바에도 이제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자리를 잡고 술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듬성듬성 돋은 수염과 머리형을 비교하는 듯 슬쩍슬쩍 곁눈질로 서로를 쳐다보곤 했다. 앙드레는 갑자기 자신의 차림새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내가 너무 말끔히 면도를 했나?

", 어떻게 생각해요? 그 그림은 분명히 엄청난 값어치가 있는 그림일 텐데,"

루시는 주홍색 매니큐어를 칠한 긴 손가락들을 움직여 투명 양화들을 바 위에 차곡차곡 쌓았다. 앙드레는 그녀가 손톱을 칠한 모습도 처음 보았다.

"글쎄요, 이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고 있는 거라면 밤에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왜 환한 아침부터 그림을 들고 현관 앞을 왔다 갔다 했겠어요?"

럼주를 한 모금 더 홀짝이고 난 그녀는 잔뜩 주름잡힌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좋은 생각이 있어요. 그 일이 그렇게 신경에 거슬리거든 드노이예 씨에게 전화해 봐요. 그가 있는 곳은 알고 있겠죠?"

"그야 알아볼 순 있죠. 어쨌거나 이상하지 않아요?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드노이예 씨한테 전화해 봐야겠어요."

투명 양화들을 봉투에 넣은 후 그는 자신의 표정이 열정적으로 보이길 기대하며 루시를 쳐다보고 말했다.

"토요일 밤 내내 혼자 보내야겠군. 내가 꿈꿔 오던 여자는 다른 녀석과 약속을 하고."

그는 땅이 꺼질 듯 길게 한숨을 뱉어 냈다.

"피자나 먹고 텔레비전이나 보고 지저분한 접시들이나 늘어놓고 미친 척하고 머리를 감을지도 모르겠네. 고양이나 길러 볼까?"

루시가 빙그레 웃었다.

"정말 가슴 아픈 얘기군요."

"도대체 당신과 만나는 그 행운아는 누구죠?"

그녀는 술잔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냥 남자죠, ."

"체육관에서 만났나요? 그렇군, 핵 잠수함 같은 사내들 틈에서 꽃핀 사랑. 헬스 기계 너머로 눈길이 마주친다. 그의 근육질 가슴을 보는 순간 당신은 그의 포로가 되어 버린다."

그가 또 한 번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나한텐 왜 그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 걸까요?"

"당신은 여기 붙어 있지를 않잖아요."

그녀는 잠시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아요?"

앙드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건 그렇고, 데이트 상대가 너무 늦어지네요. 그는 최고의 기회를 날려 버렸군요. 우리 저쪽 구석 자리로 가서 근사한 식사나,,, ,,, ."

그때 짙은 애프터세이브 로션 냄새가 확 풍기는 바람에 옆을 돌아본 앙드레는, 검정 양복에 위협적일 정도로 요란한 줄무늬 셔츠를 입은 한 청년이 갑자기 루시와 자기 사이를 꽉 채우고 들어서 있음을 알았다, 그의 재킷 밑엔 분명히, 빨간 벨트 멜빵이 숨어 있으리라, 웬 기생오라비?

루시의 소개로 두 남자는 아무런 열의 없이 악수를 나누었고 마침내 앙드레가 바 좌석을 양보했다.

"룰루, 드노이예 씨한테 전화해 보고 나서 내일 연락할게요. 그럼, 즐거운 만찬이 되길 빕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미소 지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앙드레는 얼음이 덮여 베니어합판처럼 미끌미끌해진 보도를 걸으며 흔히 인용되는 통계치를 떠올렸다.

'맨해튼에는 애인 없는 남자 한 명당 애인 없는 여자가 세 명씩 있다, '

그러나 그것은 지금 이 순간 그에겐 크게 위안이 되지 못하는 수치일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늘 다른 곳으로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계속하는 한 말이다. 루시 말이 맞다. 그는 루시와 줄무늬 셔츠가 저녁 식사하는 장면을 머리에서 떨쳐 버리려고 애쓰면서 델리점에 들러 샌드위치를 하나 샀다.

잠시 후 앙드레의 집. 멘델스존을 연주하는 아이작 스턴(러시아 태생.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역주)의 천상의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앙드레는 서랍 하나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의 앞으로 오는 업무 관련 카드들을 집어 던져 두곤 하는 서랍이었다. 드노이예의 카드는 크고 부티나는 프랑스 풍일 테니 다른 것들보다 큼직할 것이다. 과연 그랬다. 드노이예의 카드를 뽑아 낸 그는 고전적 분위기의 까만 동판 인쇄 카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계절별로 두 개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에테(여름), 빌라 라 피네드, 06230생장 캅페라. 이베르(겨울), 쿠퍼케이, 뉴프로비던스, 바하마 제도. 파리나 쿠르세벨이란 지명은 언급되지 않은 걸로 보아 지금 스키를 즐기고 있는 중이 아니라면 드노이예은 아직 바하마에 있을 것이다.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된 앙드레는 하품을 했다. 새벽 네 시였다. 그는 내일 전화해 보기로 했다

쿠퍼케이와 연결된 잡음 많은 전화선을 통해 들리는 드노이예의 목소리는 느긋하고 다정스러웠다. 물론 그는 앙드레와 그가 찍은 멋진 사진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많은 친구들이 지난 번 그 기사를 보고 앙드레를 칭찬했다는 것이다, 그는 앙드레가 바하마에 와서 사진 찍을 생각이 있는지 은근히 기대했다.

바하마 제도는 연중 이맘때, 특히 맨해튼의 날씨가 이처럼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이때쯤에 방문하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드노이예는 터놓고 물어 보는 대신 잠시 말을 멈추고 기다렸다.

앙드레가 말했다.

"사실은, 프랑스 일로 전화드렸습니다. 지난 주에 제가 캅페라에 다녀왔거든요. 선생님 댁에도 들렀구요."

"안됐군요, 그때 우린 거기 없었어요. 겨울엔 그 집을 사용하지 않지요. , 물론 직접 확인했겠지만 말입니다. 우린 4월이 될 때까진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 이상한 일이 있어서요. 선생님네 집사를 봤습니다."

"클로드 말인가요? 당연하죠. 우리가 없는 동안 집을 비우지 못하게 하거든요."

드노이예가 껄껄댔다.

"제 얘긴. 그가 하는 행동이 어딘지 이상스러웠다는 뜻입니다만."

"행동이 이상하다니요?"

"선생님께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클로드와 또 한 남자가 선생님의 그림 하나를, 세잔느 그림 말입니다. 그 그림을 밴에 옮겨 싣고 있었습니다. 배관사 소속의 차였죠. 제가 대문 앞에서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전화에서 잠시 지직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드노이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랐다기보다는 재미있다는 투의 음성이었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요, 선생. 배관사 밴? 당신은 대문 앞에 있었다는 거요? 거긴 집에서 꽤 먼 거린데. 뭘 잘못 본 것 같군요. 혹시 점심을 거하게 먹고 나 터라 뭘 잘못 본 거 아니요?"

그가 키득거렸다.

"그땐 아침나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진도 찍어 뒀구요. 사진들이 아주 선명해요. 하나도 빼먹지 않았죠."

앙드레가 길게 한숨지었다. 또 한 번 침묵이 흘렀다.

"그래요? 그렇다면 아마 클로드가 봄맞이 집안 청소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내가 전화해 보리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가벼운 투로 덧붙였다.

"그보다도 그 사진들을 한 번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구려. 그걸 이리로 보내 주겠소?"

즉석에서 가볍게 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 같지만도 않았다. 지나가는 호기심 이상의 관심이 묻어 나는 음성이었다. 그러자 앙드레는 문득 사진을 보는 드노이예의 표정이 어떨지 한번 보고 싶어졌다. 그가 말했다.

"우편으로 보내는 것보다 제가 직접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는 어느새 술술 말을 지어내고 있었다.

"다음 주에 마이애미에 있는 한 주택을 둘러봐야 하거든요. 거긴 나소(바하마 제도의 주도-역주)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죠."

드노이예가 그렇게 수고할 것까진 없다며 인사치레로 몇 마디 이의를 제기하고 난 후 곧 합의가 이루어졌다. 앙드레는 남은 오전 시간을 비행기 표 예약과 루시에게 연락해 보는 일로 보냈다.

그녀는 외출하고 없었다. 줄무늬 셔츠가 그녀를 꼬드겨 북극같이 황량한 센트럴 공원에서 촌스럽게 일요일을 보내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녀는 어제 저녁 식사 이후로 집에 들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이 무슨 끔찍하고도 소모적인 상상인가. 정말이지 여행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그는 여행 가방에 든 구겨진 내용물들을 세탁물 바구니에 탁탁 털어놓고 나서 바그너 음악을 아주 크게 틀었다. 그러곤 바하마로 가져갈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5. 드노이예

 

맨해튼의 날씨가 누그러지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온난전선이 도시로 기어들어 와 쌓인 눈을 잿빛 늪지로 바꿔 버렸고,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봉투 더미들이 햇살에 노출되면서 파업을 일으킨 사람들의 가슴에 기쁨을 안겨 주었다. 이제 곧 쓰레기들이 지나가는 수 백만 행인들의 코에 대고 제 존재를 알리기 시작할 테고, 그렇게 되면 미화원 노조에선 악취라는 강력한 무기를 앞세워 협상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이다.

웨스트 브로드웨이에 내린 앙드레는 눈이 녹으면서 엉망이 된 진창길을 가까스로 지나 간신히 에이전시 사무실에 도착했다_ 루시가 인상을 찌푸린 채 야무진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했다. 앙드레는 가방을 뒤져 지난번에 찍은 성화 사진이 담긴 봉투를 꺼내 들고는 긴 의자에 가서 앉았다.

"안 돼요."

루시의 표정이 한층 더 찌푸려졌다.

"그건 안 돼요. 이번 주엔 바빠요. 언제가 될진 모르겠어요. 이제 그만 끊어야 겠네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네, 당신 전화번호는 갖고 있어요. 그래요, 당신두."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녀는 긴 숨을 불어 내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앙드레가 씩 웃었다.

"내가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방해가 됐음이 분명하다고 느끼며 앙드레가 말했다.

"그 줄무의 셔츠의 친구 아닌가요?"

그녀는 사나운 표정을 지어 보이려다 그만두었다.

"어제 당신이 구석 자리로 가자고 할 때 따라갔어야 했는데. 정말이지 끔찍한 저녁이었어요, 가능성이 있는 남잔 줄 알았지 뭐예요. 혹시 시가 바에 가봤어요?"

루시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물었다. 앙드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가지 말아요."

"연기가 너무 자욱했나요?

"줄무의 셔츠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리고 빨간 멜빵도?"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간색에, 줄무늬에, 꽃무늬, 모노그램(머리글자를 짜 맞추어 도안화한 것-역주), 증권 강세 및 약세표, 칵테일 비법. 심지어 한 녀석은 다우존스 주가지수가 프린트된 옷까지 입고 있지 뭐예요. 술을 마실 땐 모두들 겉옷을 벗어 두니까."

지난 밤 일을 생각하곤 그녀가 또 한 번 고개를 내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멜빵에 대해선 어떻게 알았죠?"

"그게 없으면 월스트리트는 슬럼프에 빠질 테니까. 월스트리트의 거의 모든 바지가 흘러내릴 거예요. 그 사람,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사람 맞죠?"

"똑똑한 체하는 사진작가는 아니라고만 해두죠."

그녀는 작업대 쪽으로 가더니 사진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게 프랑스에서 찍어 온 것들인가요?"

"당신이 그걸 카밀라에게 전해 줄 수 있을지 물어보려고 왔어요. 난 또 비행기 탈 일이 생겼거든요."

"대단하시군요,"

투명 양화들을 살펴보는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멋져요. 정말 기품 있는 노부인이네 하얗지만 않으면 꼭 우리 월콧 할머니 같아요. 이게 그녀의 집인가요?"

"낡은 방앗간이에요. 당신은 프랑스를 좋아할 것 같군요, 룰루."

"아름다워요."

투명 양화를 다시 봉투 속에 넣은 후 그녀는 쾌활하고 사무적인 업무 자세로 돌아왔다.

"그런데 오늘은 또 어디로 간다는 거예요?"

앙드레는 바하마에 전화했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얘기하는 도중에, 어쩌면 자신이 드노이예의 응답 태도에서 너무 큰 것을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말을 잠간씩 끊고 머뭇거린 것이나 목소리의 톤만으로는 어떤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다. 더구나 액면 그대로 보자면 미심쩍은 얘긴 한마디도 없었을 뿐 아니라 앙드레의 얘기에 놀라거나 충격받거나 하는 기미도 없었다 사실 사진 얘기가 나오기 전까진 예의상 관심을 보였을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흐트러지지 않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앙드레는 뭔가가 삐걱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 확신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루시를 납득시키기보다는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싶었는지,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을 꾸미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앞으로 빼고 진지한 표정이 되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긴 의자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듣고 있던 루시는 그의 제스처가 점차 활발해지자 이따금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얘기가 열기를 띠면서 그는 조금씩 프랑스인 본래의 모습을 내 비치고 있었다. 손으로 마침표를 찍어 보이기도 하고, 어구나 중요한 뉘앙스를 강조할 때는 손가락으로 공중을 찌르거나 빙빙 돌리기도 했다.

마침내 얘기가 끝났을 때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프랑스인 그 자체였다. 어깨와 양눈썹을 동시에 치켜올리고, 양 팔꿈치는 허리께에 박혀 있었으며, 양손바닥은 팍 펴져 있고, 아랫입술은 내밀고, 자신의 결론은 논리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발을 뺀 모든 부위를 동원한 셈이었다. 소르본느 대학의 옛 스승이 계셨더라면 그를 자랑스러워하셨을 것이다.

"난 그저 어디로 가나 물어본 것뿐인데."

루시가 말했다.

* * *

겨울철에 바하마 제도로 가는 사람들은 흔히 날씨를 기대하고 나선 사람들이어서 승객 대부분이 공항 출구에서부터 이미 한여름 의상을 하고 있었다.

밀짚모자에 선글라스, 해변에서 볼 수 있는 화사한 복장, 심지어 유달리 성급하고 담대한 한두 쌍은 반바지 차림까지 하여 열대 지방 분위기를 잔뜩 내고 있었다, 입으로는 스킨 다이빙, 열기 넘치는 나소의 나이트클럽들, 선정적인 이름의 해변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즐거움 따위를 쉴새없이 교환하는 그들은, 즐기며 과음 과식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축제길에 나선 군중들 같았다.

그러나 이제 껏시간 내로 그들 대부분은 풍토병과 같은 바카르디 (럼의 상품명-역주)와 햇볕에 탄 화상 때문에 고통받을 것이라고 앙드레는 생각했다.

앙드레와 카리브해의 관계는 그다지 유쾌한 것이 못 됐다, 몇 년 전이던가, 뉴욕에서 첫 겨울을 맞은 그는 비행기로 잠깐 날아가면 하얀 백사장 해변이 있다는 것을 알고 끈질긴 유혹에 빠졌었다, 버진아일랜드의 섬 중 덜 유명한 곳에 가면 싼 비용으로 며칠 보내고 올 수 있다는 권유에 굴복한 그는 마침내 돈을 빌렸고 나흘 후 돌아올 요량으로 떠났다.

그러나 알고 보니 물가는 터무니없이 비쌌고, 별 볼 일 없는 음식은 너무 많이 튀겨 소화도 안 됐으며, 그가 만난 몇 안 되는 토착민들은 진과 가십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 후로도 업무차 카리브해의 진주라는 몇 군데 섬들에 다녀오긴 했지만 최초의 견해를 바꾸진 못했다. 그는 작은 섬들파는 잘 맞지 않는 체질이었다. 그런 곳에 가기만 하면 밀실 공포증과 소차 불량이 따라왔다.

조종사치 인사말이 끝나고 기내 방송에서 깡통 두드리는 듯한 칼립소 가락이 나오자 그는 유쾌한 기대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명감 속에서 좌석 벨트로 몸을 묶었다 조종사들은 어쩌면 저렇게 한결같이 성량 좋고 자신만만하고 무한히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그 직업을 가지려면 비행 기술과 완벽한 혈압 외에 그것도 필수조건인 것일까? 비행 교육 과정에 말씨와 연설에 관한 비결도 들어있는 것일까?

비행기가 순항 고도로 접어들어 끝없이 푸르른 창공으로 들어서자 앙드레는 안전벨트를 풀고 다리를 쭉 뻗어 보았다. 뉴욕의 흙탕물들을 휘젓고 다니느라 바지가 축축해져 있었다.

하루 이틀 정도 거기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을 터였다.

* * *

나소 공항의 햇살이 눈을 시리게 했다. 물수건을 온몸에 두른 듯 느껴지는 오후의 열기 때문에 입고 있는 겨울옷들이 가슴과 엉덩이에 착 달라붙어 끈적끈적하고 답답했다.

에어컨 시설이 된 택시를 잡는 데는 실패하고 낡은 시보레 한 대를 골라 잡은 그는 바람을 쐬기 위해 열려진 창에 개처럼 얼굴을 매달고 쿠퍼케이까지 가야 했다.

드노이예는 그를 위해 클럽하우스에 방 하나를 준비해 두었다. 그러나 어떤 손님이든 그 잘 꾸며지고 엄중하게 방비된 구역에 들어가려면 먼저 몇 가지 자잘한 절차들을 거쳐야 했다.

입구를 카로막은 녹색과 횐색 줄무늬의 장애물 때문에 차를 멈춰 세운 택시 기사는 경적을 울려댔다. 군인 제복에 뾰족한 모자, 거울같이 반들반들한 장화 차림을 한 건장한 사내 하나가 내키지 않는 듯 어슬렁거리며 수위실에서 나와 택시 쪽으로 다가왔다. 그와 택시 기사는 오랜 친구처럼 재잘거렸다. 이런 좋은 날, 시간은 많고 딱히 갈 네는 없는 친구들처럼 말이다.

결국 두 사람은 최근의 신변 잡사를 늘어놓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마침내 제복의 사내가 차 뒷좌석에 늘어져 있는 앙드레를 발견하고는 누굴 만나러 왔느냐고 물었다. 느릿느릿 수위실로 되돌아간 그는 본부에 확인 전화를 넣었다 얘기가 잘된 모양이었다.

장애물이 걷혀졌다, 택시가 또 한번 삑 경적을 울리며 안으로 들어섰고, 앙드레는 천만 달러 이상의 재력과 베이 가의 잘 나가는 변호사들을 고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생그릴라(히말라야에 있다는 지상 낙원-역주)로 입장했다.

처음엔 키가 15미터는 됨직한 코코넛 나무들이 늘어선 널따란 도로가 똑바로 이어지더니 흰색이나 분홍색으로 칠해진 거대한 저택들로 연결된 수많은 내부 차도로 접어들자 커브길로 변했다. 선명한 색상의 표지판들이 부겐빌레아(분꽃과의 열대성 덩굴 식물-역주) 사이사이에 세워져 각 저택의 명칭을 신중하게 표시해 주고 있었는데, 장미, 산호, 모자반, 야자(당연히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지만-카수아비나 등 한결같이 작은 시골 별장 같은 소박함을 가장한 이름 들이었다. 저택마다 딸린 정원들은 단아하게 잘 다듬어져 있고 햇볕을 막기 위해 덧문들을 모두 내려놓았다.

앙드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과 캅페라에 있는 드노이예의 또 다른 은신처를 비교하고 있었다. 심어져 있는 식물도 다르고 열기와 공기의 질, 건축물들도 달랐지만 한 가지 뚜렷한 유사성이 느껴졌는데 그것은 바로 고요하고 나른한 부자 동네 분위기, 바깥세상과는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 바로 그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에겐 금지 구역인 것이다.

에메랄드빛 골프 코스 끝자락으로 접어들자 도로가 다시 휘어졌다. 그곳은 아무도 걸어갈 수 없는 구역이었다. 홀에서 볼로, 한 번씩 샷을 날린 후에 옮겨 갈 수 있도록 쿠퍼케이 전용색인 녹색과 흰색으로 칠해진 전동 카트가 구비되어 있었다. 카트에 탄 골퍼들이 내려 한바탕 땅을 패고 나서 다시 타고 가는 것이다. 신체의 노고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장치인 셈이다.

클럽하우스 입구 정면을 널따랗게 차지한 돌계단까지 온 택시 기사가 팁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그가 덮칠 듯이 앙드레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들었지만 어느새 등장한 클럽 보이가 이번엔 그의 손에서 가방을 낚아챘다. 녹색과 흰색의 줄무늬 조끼를 입은 거인 같은 클럽 보이가 반짝이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 보였다. 앙드레는 손 벌리고 기다리는 기사에게 땀에 절어 축축해진 지폐를 쥐어준 뒤 시원하고 천장이 높은 로비로 들어갔다.

보이의 안내로 풀장이 내려다보이는 방을 둘러보고 난 그는 이번에도 축축한 돈을 몇 푼 축내야 했다, 그는 짐을 풀기 전에 옷부터 벗어 내고 5분 정도 차가운 샤워기 밑에 서 있다가 알몸으로 물을 뚝뚝 흘리며 돌바닥을 가로질러 창가로 가서 바깥을 구경했다.

길다란 직사각형의 터키옥 빛 풀은 텅 비어 있었지만, 한 쪽 모서리에 동료 투숙객들이 늦은 오후의 햇살을 붙잡으려고 오일을 바르고 세즈 롱느(길다란 의자-역주)에 꼼짝 않고 한 줄로 드러누워 있는 게 보였다. 가죽 같은 가무잡잡한 피부에 잘 먹어 피둥피둥한 중년 남자들, 풀장 장신구 외에는 거의 걸치지 않은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젊고 날씬했다. 아이들이나 소음 따위, 생활의 흔적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창에서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 탁자에 놓인 하이비스더스(열대산 아욱과 식물-역주) 그릇에 크림색 봉투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그는 손의 물기를 닦고 봉투를 열어보았다. 드노이예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자는 초대장이었는데 클럽하우스에서 그들이 머무는 저택까지, 멋지게 손질된 400야드에 이르는 정글 속을 무사히 지나도록 자그만 지도와 함께 안내의 말로 끝맺고 있었다. 그는 몸에 두른 타월을 벗어 내고 침대 위에 가방 속 내용물을 다 털어냈다.

드노이예는 열대 지방에서 저녁 식사할 때도 하얀 턱시도를 입고 나타나는 사람일까? 자신의 손님도 그런 복장으로 나오길 기대할까? 앙드레는 옷 뭉치 속에서 하얀 리넨 셔츠와 카키색 바지를 골라 욕실에 갖다 걸고 다시 샤워기를 틀었다. 여행이 남긴 처참한 자취를 깨끗이 씻어 낼 셈이었다.

클럽하우스 현관의 프런트 보이는 드노이예의 저택까지 연결되는 골프용 수레를 타고 가라며 앙드레를 설득하려다가 거절당하자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쿠퍼케이에선 아무도 걸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밤에는.

그러나 얼마나 멋진 밤인가. 따뜻한 검정 벨벳 같은 어둠, 낫 모양의 달, 윙크하듯 깜박이는 별들, 바다에서 불어오는 소금기 도는 가벼운 미풍, 발밑에는 빽빽하고 탄력 있는 촉감의 거친 열대성 풀, 관목 숲에서 떠들썩하게 윙윙대는 보이지 않는 곤충들의 그 기분 좋은 소리들 앙드레는 한 순간 특별난 행복감에 젖어 들었고, 겨울엔 카리브해 사람들이 목청을 높일 만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노이예가 '라 메종 블랑쉬(하얀 집)'라고 이름 붙임으로써 평범한 별장에서 저택으로 승격된 그 집은 이웃집들과 마찬가지로 당당하고 나무랄 데 하나 없었다. 현관문을 열어 준 위엄 있는 집사 역시도 그랬다. 앙드레는 널따란 중앙홀 복도를 지나 저댁 길이만큼 뻗은 야외 테라스로 안내되었다.

테라스에서 보니 불 밝혀진 오솔길 하나가 수영장을 지나 야자 숲을 통과하여 부잔교(부두에서 선박에 걸쳐 놓아 사람들이 오르내리게 한 다리-역주)까지 이어졌다. 그 너머 어둠 속에서는 물결 찰싹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므시유 켈리(켈리 씨)! 봉수와, 봉수와(안녕하세요). 쿠퍼게이에 온 걸 환영하오."

드노이예는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산호 판석이 깔린 테라스를 가로질러 왔다. 그는 슬랙스에 반팔 셔츠, 운동화를 신은 편안한 차림이어서 앙드레로선 반가웠다. 그가 유복한 사람임을 보여 주는 건 햇볕에 타 가무잡잡한 손목에 채워진 큼지막한 큰 금시계(수심 150미터에서도 완전 방수되는 매우 실용적인 종류였다)뿐이었다, 그의 살결은 건강미로 반짝였고 주름이 지긴 했어도 여전히 잘생긴 얼굴엔 따뜻한 미소가 퍼져 있었다.

그는 앙드레를 나지막한 유리 탁자 주위로 등나무 의자들이 쭉 놓인 쪽으로 데려갔다.

"내 아내, 카트린느, 기억하시오?"

"물론입니다."

앙드레는 보석이 달린 가느다란 손을 잡고 흔들었다. 드노이예 부인은 나이가 들었을 뿐 딸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연푸른 실크로 된 수수한 시프트 드레스 차림에, 금발을 뒤로 넘겨 쪽머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우아했고, 잘생긴 뼈대에 약간 오만하게 느껴지는 얼굴에서 몇 세대를 이어온 훌륭한 가정 교육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서 앉으세요, 켈리 씨. 뭘로 드시겠어요?"

집사가 와인을 가져왔다, 드노이예가 말했다.

"우리 집사 페르낭 베르길리스요. 마음에 드셨으면 하오."

그렇게 말하고는 미안한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캘리포니아 산 백포도주는 우리한텐 영 맞지가 않아서요. 오랜 입맛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것 같소."

그가 자기 잔을 들었다,

"여기까지 와줘서 정말 반갑소."

와인을 홀짝이는 그의 눈길이 앙드레가 탁자 위에 얹어 놓은 봉투에 잠시 머물더니 이내 달아났다. 마치 담뱃갑 정도로 여길 뿐 그 이상의 관심은 전혀 없는 물건이란 듯한 태도였다.

앙드레는 빙그레 웃었다.

"어쨌든 저도 이웃이 됐군요,"

그러고 나서 드노이예 부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님은 잘 계시겠죠?

"마리 로르요?"

부인은 인상을 쓰는 것처럼 잠시 입이 뿌루퉁해졌다.

"그 앤 여기 와 있으면 스키를 타고 싶어하고, 스키를 타러 가서는 해변에 가고 싶어하죠. 우리가 애를 버려 놓은 거예요. 아니, 이이가 애를 망친 거죠."

그녀는 애정과 가벼운 힐난이 반반씩 섞인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럼 또 어때? 난 재미있기만 한데."

드노이예가 앙드라를 돌아보았다.

"사실 선생은 그 앨 아슬아슬하게 놓친 거요. 어제 파리로 돌아갔거든요. 아마 캅페라에서 주말을 보낼 겁니다."

그는 아내를 보며 미소 지었다.

"사실 그 앨 망치는 건 내가 아니라 클로드라구."

클로드 얘기가 나오자 드노이예는 앙드레가 온 동기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양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고갯짓으로 탁자 위에 놓인 봉투를 가리켰다.

"이게 선생이 찍었다는 사진들이오?"

너무도 무심해 보이는 고갯짓이었고 너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것도 완벽하진 못했다. 적어도 앙드레가 보기엔 그랬다.

", . 바로 이겁니다. 보여 드릴 만한 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앙드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드노이예는 양손을 들고 공손하게 부인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래도 선생이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잖소."

그가 손을 뻗어 봉투를 집었다.

"봐도 되겠소?"

그때 집사가 터벅터벅 집에서 나오더니 드노이예 부인의 귀에 대고 무어라고 속삭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보면 안 돼요, 세리(여보)? 수플레(달걀흰자에 우유를 섞어 구운 요리-역주)가 다 식을 것 같은데."

비록 지리적으로는 다른 곳에 와 있어도 프랑스식 우선순위를 따르는 전형적인 프랑스 집안이었다.

수플레가 볼품없이 쭈그러든 팬케이크 꼴로 망쳐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다른 모든 일보다 우선인 드노이예 부인은 허둥지둥 남자들을 식당으로 몰아갔다. 식탁에 앉은 앙드레는 자신의 봉투를 드노이예가 들고 왔음을 알았다.

식당은 세 사람이 앉아서 먹기엔 너무나 크고 웅대했다. 그들은 열두 명의 인원이 넉넉하게 앉을 수 있는 커다란 마호가니 식탁 한 귀퉁이에 둘러앉았다.

앙드레의 머릿속에 드노이예 부부만 달랑 앉아 식사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식탁 양 끝에 한 사람씩 앉아 있으면 소금, 후추, 심지어 대화까지 집사가 중간에서 전달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여기서 지내면 정말 즐거우실 것 같군요, 그렇죠?"

앙드레가 드노이예 부인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안면을 약간 찡그려 보였다.

"재미 따윈 기대도 안 해요. 여기 사람들은 모두 골프 아니면 간통, 소득세 얘기나 늘어놓죠. 우린 차라리 프랑스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지내길 좋아한답니다."

집사가 품질 검사를 받기 위해 황금색의 둥그런 수플레를 내밀어 보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켈리 씨도 골프를 치시나요? 여기 코스는 최상이라고들 하던데,"

"아닙니다. 골프는 한 번도 쳐보지 않았어요. 만일 제가 여기서 살게 되면 이곳 사람들의 분위기를 망쳐 놓게 되겠군요."

앙드레는 자기 몫의 수플레 꼭대기를 무너뜨리고 허브 향을 한 모금 들이마신 다음 까만 타페나드(양각초 꽃봉오리와 까만 올리브, 멸치 가루를 넣고 올리브 기름을 뿌려서 먹는 요리-역주)를 한 스푼 떠서 목구멍으로 넘겼다.

"간통 방면으로도 별로 능한 편이 못 되고요."

드노이예 부인은 빙그레 웃었다. 무언가를 사진으로 찍어 왔다는 이 젊은이는 남다른 시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유머 감각까지 있다고 부인은 생각했다. 마리 로르가 없어서 정말이지 유감이었다.

"보나페티(많이 드세요)."

향기로우면서도 담백하기 그지없는 수플레에 대한 성의 표시로 그것을 먹는 동안엔 대화가 없었다. 이어 와인이 한 잔씩 더 나오자 드노이예가 술잔을 기울이며 프랑스 경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 전반적으로 암울한 전망을 피력하더니 이어 앙드레의 일에 관해, 뉴욕 생활과 파리 생활의 차이에 관해, 자주 찾는 식당들에 관해 실례되지 않을 정도로 몇 가지 물어 왔다.

꼬치꼬치 캐묻거나 사생활을 지나치게 들추어내는 데까진 발전하지 않되, 만찬에 참석한 낯선 사람들을 응집시켜 주는 사교적 접착제쯤 되는 가볍고도 진부한 이야깃거리들이었다 그 사이에 드노이예의 눈길이 자기 접시 옆에 놓인 봉투 쪽으로 자주 가곤 했지만 사진에 관한 얘기는 일절 없었다.

주요리는 생선이었다. 그러나 카리브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죽재료에 질식당한 생선이 아니라 호밀빵 가루를 입혀 살짝 튀기고 신선한 라임 조각 몇 개를 얹어 장식한 것이었는데, 입에서 살살 녹는 폼므 알리메트(감자 칩의 일종-역주)와 함께 나왔다. 두 가지 다 음식 평가서에서 별을 네 개 주고도 상위 목록에 올릴 만한 맛이라고 생각한 앙드레는 드노이예 부인의 요리사를 칭찬했다.

"어쨌거나 바하마 요리계에도 희망은 있어 보이는군요."

드노이예 부인이 자신의 와인 잔 옆에 놓인 자그만 크리스털 종을 딸랑거려 집사를 불렀다.

"칭찬해 주시니 고맙군요,"

그녀는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씩 웃어 보였는데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세월이 지워지면서 자기 딸과 똑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 요리사는 마르티니크(서인도 제도의 프랑스령 섬-역주) 출신이랍니다."

앙드레는 디저트를 먹는 대신 와인 한잔을 마지막으로 마셨다, 거실에 가서 커피나 들자고 드노이예가 제안했다. 거실 역시 군중 집회를 열어도 될 만한 크기였다. 그들은 천장에서 천천히 돌아가는 선풍기 밑, 대리석 바닥의 한가운데 섬처럼 달랑 놓인 안락의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드노이예가 말했다.

", 우리 집 늙은 악당 클로드가 뭘 어쨌다는 건지 어디 한번 봅시다."

 

 

6. 피습

 

루돌프 홀츠는 월요일 밤 스케줄을 벌써 몇 년째 엄격하게 지켜왔다. 사업 관련 약속은 오후 여섯 시 정각까지 모두 끝낸다. 사교적인 초청 자리는 만들지도 않고 응하지도 않는다. 월요일 저녁은 온전히 그의 것이었고 매주 정확하게 똑같은 순서로 이어졌다.

머레이 식당에서 주문해 온 훈제 연어와 몽라세(프랑스 부르군디산 백포도주-역주) 반 병으로(메뉴가 바뀌는 일도 없었다) 일찌감치 가벼운 저녁을 끝낸 홀츠는 최근 그림 판매 카탈로그와 화랑 공시표, 현재 자신의 고객 및 유망 고객 목록 따위를 끌어모아 침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침대에서 베개에 몸을 기대고 앞일을 구상하곤 했다.

이제 이러한 월요일 저녁은 그가 일가는 한 주의 대단히 귀중한 일부가 되어 버렸고, 이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이용하여 그동안 수익성 높은 성공작도 여러 건 고안해 냈다. 지극히 합법적인 건수도 일부 있었지만 말이다.

옆에는 카밀라가 까만 새틴 안대로 빛을 가리고 이미 잠들어 있었다. 벅스 카운티에서 정신나간 친구들 몇 명과 주말을 보내고 왔으니 뻗을 만도 했다.

그녀는 나직하고 규칙적인 숨소리와 함께 코까지 골아 한때 홀츠가 사랑해 주었던 퍼그 견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그는 가끔씩 건성으로 그녀를 쓰다듬으며 카탈로그들을 훑어 나가다가 특별한 그림이 나오면 옆에 적당한 사람 이름을 메모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일 가운데서도 각 예술작품이 어울릴 만한 집을 찾아주는 일을 대단히 즐겼으며 자선 차원에서 봉사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이 아무리 크다 한들, 거래가 끝나고 일곱 자릿수의 수표를 은행에 예치할 때 느끼는 그 깊은 만족감과는 당연히 비교될 수 없었다.

전화 벨이 울린 것은, 그가 작지만 매혹적인 코로(프랑스의 화가 -역주)의 작품 하나를 들여다보며 오노즈카의 도쿄 컬렉션에 끼워 넣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카밀라가 작은 소리로 웅얼거리더니 이불을 뒤집어 썼다. 홀츠는 침대 옆에 놓인 시계를 힐끔 보았다. 열 한 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홀츠 씨? 나 베르나르 드노이예요."

홀츠는 또 한 번 시계를 확인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일찍도 일어나셨군요, 드노이예 씨. 거긴 지금 이른 새벽일 텐데요. "

"아니, 여긴 바하마요. 홀츠 씨, 나는 지금 아주 언짢은 사진을 보고 있는 참이오. 지난 주에 캅페라의 내 집 바깥에서 찍은 사진들이오. 세잔느요, 홀츠 씨. 그 세잔느 그림이 배관공의 밴에 실려 나가는 장면이오."

홀츠는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키며 음성을 높였다.

"뭐라구요?"

카밀라가 끙끙대며 베개로 머리를 덮었다.

"누가 찍었습니까? 혹시 파리마치(프랑스의 일간지-역주)의 그 악당들 아닌가요?"

"아니오, 사진은 지금 내 손에 있소. 사진작가가 내게 주고 갔습니다, 잡지사에서 일하는 켈리란 사람이오. 작년에 우리 집에 관해 대형 기사를 실었던 그 잡지 말이오. <DQ>라든가 뭐든가?"

"그런 사람 이름은 못 들어 봤는데."

카밀라의 신음이 계속됐다. 홀츠는 그녀의 머리 위에 베개를 하나 더 얹어 주었다.

".리라,,, ,,, 그가 돈을 원하던가요?"

잠시 머뭇거린 끝에 드노이예가 대답했다.

"그런 것 같진 않소. 복사판을 떠놨는지 어쨌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그는 내일 뉴욕으로 돌아갈 거라고 하니까 또 볼 일은 없을 것 같소. 어쨌거나,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돼 가는 거요? 나는 당신이 그 그림을 취리히로 옮기고 있는 걸로 알고 있었소. 우리가 합의한 게 그거 아니오. 취리히로 가서 홍콩으로, 거기서 다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소."

홀츠는 지금까지 만만찮은 고객을 많이 상대해 왔다. 이번 건처럼 변칙적인 거래의 경우 대부분 때에 따라 몇 시간, 며칠, 혹은 몇 주의 연옥 기간이 있곤 했다. 완전 합의를 이루기 위해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기간인 것이다.

홀츠는 다른 사람을 믿음으로써 오는 부담이 실제 자신에게 닥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어떤 결정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수반되는 위험이 있어 자신의 운명이나 돈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다시 베개에 몸을 묻고 제일 편한 자세를 취했다.

시중에 나도는 사진들이 더 없다면 걱정할 건 전혀 없다고 그는 드노이예에게 말했다 그리고 옆에서 자고 있는 여인을 힐끔 쳐다보며 덧붙였다. 게다가 자신은 자세한 내막을 확인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므로 현재로선 뭐라고 얘기할 수 없다며, 질문하려 드는 드노이예의 말을 끊으며 계속 얘기했다.

클로드는 문제 될 것이 없다.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다. 충복이니만큼 확실하게 입을 다물 것이다. 그리고 그 밴은 단순한 위장물일 뿐이다. 밴 기사는 사실 배관공이 아니라 자신이 고용한 사람으로서 각종 귀한 품목을 남의 이목을 끌지 않고 수송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안내인이다. 그런 평범한 기능공의 지저분하고 낡은 르노 차 안에 귀한 그림이 들어있으리라고 누가 의심하겠는가?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드노이예 당신은 세잔느의 그림이 지금 신중하고도 안전하게 유럽을 빠져나가고 있는 걸로 믿어도 좋다. 흘츠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

홀츠는 그림이 잠깐 파리를 경유하게 될 떠란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건 드노이예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선생,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그 일은 사소한 불편거리에 불과합니다. 우연의 일치죠. 좋은 햇살이나 즐기시고 나머진 나한테 맡겨 주시면 됩니다."

드노이예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조용한 바하마의 어둠을 내다보았다, 그가 이번에 홀츠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하게 된 건 정직하고 질서 정연한 그의 삶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로서, 그다지 유쾌한 경험으로 생각되진 않았다. 뭔가 취약하고 위험스럽고 통제력이 부족한 듯하고 초조한 느낌이 들었으며 어떤 땐 죄의식 같은 것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너무 깊이 연루되어 버렸다,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냑을 한잔 따랐다. 홀츠는 혹시 다른 사진들이 나도는 게 있는지 추적해 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사진을 가져온 그 젊은이가 속이는 게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어쩌면 완벽한 우연의 일치를 두고 드노이예 자신이 너무 깊이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일이 일단락되기 전까진 마음을 놓을 수 없을 터였다.

한편 홀츠는, 말은 자신만만하게 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못한 상태였다. 만일 드노이예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에겐 내일까지밖에 시간이 없다, 그는 몸을 굽혀 카밀라의 머리에 얹힌 베개들을 치우고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카밀라가 안대를 위로 치켜올렸다. 그녀가 흐릿한 한쪽 눈을 뜨자 가늘게 쭉 찢어진 눈매가 드러났다. 습관처럼 하고 다니던 화장을 지우고 난 맨얼굴은 아주 낯설어 보였다.

"지금은 안 돼, 자기 난 피곤하단 말이에요. 내일 아침이라면 몰라도, 체육관 가기 전에 말이야."

키 작은 남자들이 흔히 그렇듯, 홀츠는 왕성한 성욕으로 단신의 결점을 보상하려 들곤 했는데 카밀라로선 그게 다소 성가실 때가 있었다. 그녀가 그의 손을 쓰다듬었다.

"여자들한텐 이따금 그냥 자는 밤도 필요한 거예요, 자기. 정말이라니까."

홀츠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당신이 고용하고 있는 그 사진사의 주소를 알아야만 해. 켈리 말이야."

카밀라가 이불을 끌어올려 가슴을 가리면서 어렵사리 일어나 앉았다.

"뭐라구요? 나중에 하면 안 돼요? 루디, 당신도 알잖아요. 난 지금 잠을 자지 않으면 몸이 완전히 간다구요. 게다가 내일은,,,,,-"

"중요한 일이야 뭔가가 잘못됐어."

그의 굳은 입술을 본 그녀는 더 이상 얘기해 봤자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가 이따금 다소 잔혹한 야만인처럼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카밀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백을 가지러 가다가 루이 15세 서랍장에 발가락이 채였다. 한쪽 다리로 콩콩 뛰며 볼썽 사나운 꼴로 침대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주소록을 꺼내 K란을 펼쳤다.

"발가락이 깨진 것 같아 틀림없어요. 저 빌어먹을 서랍장,"

그녀는 주소록을 홀츠에게 건네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나도 알면 안 돼요?"

"이봐, 당신은 아마 즐거운 인생을 살게 될 거야, 일단 전화나 하게 해줘."

이제 완전히 잠이 달아난 데다가 호기심까지 발동한 카밀라는 핸드백에서 손거울을 꺼내 머리칼을 추스리며 홀츠와 베니란 자의 전화통화 끝자락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차라리 듣지 말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_ 정말이지 오늘 밤만은 너절한 온갖 내막을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안대를 착용하고 움푹 패인 베개들 속으로 뛰어들어 자는 척해 버렸다.

그러나 잠들긴 어려웠다. 그녀는 대화가 다 끝나 간다는 것을 어렴풋한 잠결에 알아차렸다. 갑자기 부드럽고도 끈덕지게 몸을 더듬는 홀츠의 손길이 느껴졌고 그가 그녀를 자기 쪽으로 돌려 뉘었다. 그녀는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역시 좀 작았다, 누워 있을 때도 말이다.

그의 손길은 끈덕졌다. 피해 갈 수 없는 욕구에 굴복한 카밀라는 한숨을 지으며 다친 발가락이 홀츠의 허우적대는 발길과 부딪히지 않도록 그쪽 발을 될 수 있는 한 멀리 떼어놓았다.

* * *

앙드레가 택시 백미러로 보니 쿠퍼케이를 평범한 무리의 침략으로부터 막아 주는 줄무늬 장애물이 다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완벽하게 화창한 아침이었다. 열대성 초록을 배경으로 꽃들의 색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곳 거주자들이 떨어진 이파리나 시든 꽃송이 같은 참상을 보지 않도록 마당 관리인들이 쓸고 잘라내고 있었다. 그는 좌석에 몸을 묻고 실망감을 추스렸다. 24시간을 괜히 낭비한 기분이었다.

드노이예는 더할 수 없이 잘해 주었고 어제저녁도 대체로 편안하게 보냈다. 그러나 나진을 보고 난 그의 반응은 앙드레가 기대했던 만큼의 놀라움과 관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세잔느보다는 자기네 집의 정원 상태에 더 관심이 있는 듯했다. 딱 한번 속내를 드러낸 순간이 있긴 했었다. 사진 속의 밴을 본 그가 느닷없이 한차례 이맛살을 찌푸렸던 것이다. 그러나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고 금세 원래 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사진 속 배관공은 클로드의 오래된 친구로서 종종 집안 심부름을 해주곤 한다고 그가 설명해 주었다. 세잔느 그림은 이따금 칸느에서 화랑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빌려 주곤 하는데 아마 이번에도 그 경우인 것 같다고 드노이예는 말했다, 그러나 그림을 이처럼 부주의하게 수송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클로드와 꼭 한 번 재론해 봐야겠다고 덧붙였다. 앙드레가 관심을 가져 준 데 대한 사례로 클럽하우스의 숙박비는 자기가 내겠노라고 우겼다. 그러나 어쨌든 어제 저녁은 아니 이번 여행은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그날 오후 뉴욕에 도착한 그는 작으나마 위안거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얼음이 녹으면서 아파트 단지 주변 보도가 빙판 상태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아파트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던 그는 기운을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루시와의 저녁 식사를 떠올렸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곧장 전화기 쪽으로 향했다. 그가 주위가 온통 난장판으로 변해 있음을 알아차리고 걸음을 뚝 멈춘 것은 거실로 반쯤 들어가서였다.

세상에, 상자란 상자는 모조리 꺼내져 열려 있었다. 거칠고 성난 손들이 집어 던진 듯 책, 사진, 옷가지, 여행 기념품들이 바닥이며 벽 쪽에 뒤죽박죽 쌓인 물건들 속에 흩어져 있었다.

작업대 쪽으로 가보니 팍삭 깨진 유리판이 발에 밟혔다. 투명 양화를 연도별, 장소별로 구분하여 보관해 두는 파일함들도 모조리 텅 빈 채 열려 있었다. 그 옆에 놓인 장비 보관용 벽장도, 그가 고쳐 쓰려고 모아 둔 접는 삼각대와 낡든 플레이트 카메라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의 나머지 카메라들과 렌즈, 필터, 조명 장치, 그리고 그런 것들을 넣고 다니는 맞춤 가방들, 모조리 사라졌다.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 본 그는 거기 있던 필름들까지 한 통도 남지 않고 사라졌음을 알았지만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탈탈 털린 집만이 뉴욕으로의 귀환을 반겨 준 셈이다.

침실에는 열린 서랍들이 축 늘어져 있고, 벽장은 텅 비고, 옷가지들은 아무 데나 던져져 있고, 매트리스는 침대에서 끌어 내려져 있었다. 그는 잠시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분노감이나 침해당했다는 인식은 나중에야 다가왔다. 잔해처럼 널린 물건들을 헤치고 작업대로 간 그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몇 눈데 전화들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경찰에 전화했다. 공손하게 받긴 했지만 지겨운 모양이었다. 이 도시에서 이런 일은 지난 주말부터 발생한 수백 건에 달하는 범죄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대개 범죄 목록의 첫머리는 살인, 강간, 약물과용 사건들이 차지하고, 게다가 지하철에서 발생하는 범죄들이 기승을 부리는 시즌이 시작된 관계로 가벼운 절도 사건쯤은 맨 끄트머리를 차지하게 마련이다. 만일 자세한 내막을 관할서에 신고한다면 절도 건으로 공식 기록될 것이다. 그래봤자 그 파일은, 아주 운 좋은 경우가 아니라면 먼지나 뒤집어쓰고 있게 될 컷이다. 앙드레는 잠금 장치를 바꿔 보라는 충고를 받았다.

보험회사에 전화했더니 그들은 즉각 방어태세로 나왔다. 전문가답게 미심쩍은 태도를 견지하며 속사포를 쏘듯이 질문을 해댔다. 문과 창문들은 모두 잠가 두었는가? 경보장치는 작동시켰는가? 필요한 모든 서류들 즉 영수증, 구매 날짜, 일련번호, 장비 교환 견적서 등은 보관하고 있는가? 그러한 결정적인 자료들이 없다면 어떤 조치도 취해 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이번에도 앙드레는 잠금장치를 교환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수화기를 내려놓던 그는 문득 이 보험회사의 광고 슬로건을 떠올렸다. 방송 광고 끝머리마다 달콤하고 진심 어린 목소리가 전해 주던 말, '어려울 때 친구 같은 존재이고 싶습니다.' .

루시에게 전화했을 때야 비로소 약간의 동정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사무실 일이 끝나는 대로 오겠다고 말했다.

놀라움과 분노로 굳어진 얼굴로 난장판 같은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거실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가 니스에서 사다 준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하루 종일 본 것들 중에 최고의 장면이었고 그를 미소 짓게끔 만들었다.

"모자가 잘 어울려요, 룰루. 자전거하고 양파 한 줄도 사다 줘야겠는걸, 모자와 잘 맞을 것 같은데 "

그녀가 모자를 벗고 머리채를 흔들었다.

"그렇게 용감한 척 허풍떨 거라면 저녁 외식에 데리고 나가지 않을 거예요. 맙소사, 엉망진창이군요."

두 사람은 침실 치우기부터 시작했다. 루시는 재빠르고도 능숙하게 움직였다 옷가지들을 개고, 걸고, 세탁 바구니에 넣었다. 앙드레가 스웨터 하나를 가지고 쩔쩔매는 것을 본 그녀는 그를 거실로 내보냈다, 최소한 빗자루 사용법 정도는 포함된 가정 교육을 받았길 기대하면서.

앙드레는 별 생각 없이 보브 말리의 CD를 찾아내서 틀었다. 그런데 스테레오에서 뒤돌아서기 직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다. 스테레오가 남아 있다. 왜 다른 것들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을까?

이어서 부서진 유리 파편을 쓸어 담기 시작한 그는 가져간 게 뭔지, 아니 가져가지 않은 게 뭔지 꼼꼼히 따져보았다. 스테레오, 텔레비전, 침대 머리맡에 둔 단파 라디오, 무선 전화기, 모두 그대로 있다. 심지어 은으로 된 아르 누보 사진틀 여섯 개도 평소 있던 그 자리, 선반 밑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다. 도둑들이 전문 사진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놈들이 아니라면 도무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놈들이 원한 게 사진 장비였다면 투명 양화들은 왜 가져갔을까? 냉장고에 넣어 둔 필름 뭉치들은 왜? 집안을 모조리 뒤져 놓은 건 또 왜인가? 놈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일까?

두 시간이 지나자 집안에도 질서 비슷한 것이 다시 갖춰지기 시작했지만 루시는 손길을 늦추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시장하거나 목마른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앙드레는 두 가지 욕구가 다 들면서 집안 치우는 일에서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책 무더기를 턱까지 닿게 안고 위태위태하게 방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 그가 막아섰다.

"됐어요, 룰루. 이만하면-충분해요."

그는 그녀에게서 책을 받아 내려놓았다,

"아까 저녁이 어쩌구 했잖아요. 혹시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멈추지 못하는 거 아니에요?"

루시가 양손을 허리께에 얹고 몸을 뒤로 쭉 폈다.

"하지만 밤새도록 해야 할 것 같은데요. 혹시 파출부 쓰세요?"

"?"

"아녜요, 그런 건 안 하실 것 같군요. 내가 내일 사람을 하나 보내 드릴게요. 물청소로 싹 씻어 내야 집안 꼴이 될 것 같아요. 창들도 그렇고요. 저 창문들 한 번이라도 닦아 본 적 있어요? 그리고 앙드레, 아무리 냉장고 안이라지만 요구르트도 결국 상한다구요. 색이 변하면 싹 내다 버려야 하는 거예요, 알겠죠?"

앙드레는 갑자기 사생활의 일부가 새로운 감독관 밑에 들어간 것 같은 기이하면서도 유쾌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는 루시가 코트 입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베레모를 집어 든 그녀가 실내를 쭉 둘러보았다.

"여긴 거울도 없네요."

베레모를 머리에 쓴 그녀는 모자를 한쪽 눈 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이다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프랑스에선 이렇게들 쓴다던데,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사람들 쪽이 쓰는 법을 바꿔야겠군요."

루시는 자신이 자주 찾는다는, 듀에인가에 위치한 소위 시골풍에 자그맣고 따뜻하고 소란스런 한 식당으로 그를 데려갔다. 마운스 게이 럼주에 레드 스트라이프 맥주가 나오는, 자메이카인 주방장과 이탈리아인 아내가 하는 식당이었다. 짧은 메뉴에도 그 두 지역의 결합이 반영되어 있었다.

루시는 럼주를 홀짝였다.

"그런 일을 당하다니 안됐군요."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요."

앙드레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자신의 유리잔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놈들은 5분이면 거리에 내다 팔 수 있을 물건들엔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오직 카메라들만, 카메라와 내가 찍어 놓은 것들만 가져갔어요. 내 작업에 관심이 있다 이거죠. 그들이 원하는 건 그거였어요. 그리고 놈들은 프로였어요. 문을 부수지도 않았고, 경보장치를 차단하는 법도 알고 있었어요."

그가 고개를 들었다.

"프로들이라고요, 룰루. 그런데 왜 날 택했을까? 내겐 고작해야 집이며 가구, 그림, 사진들밖에 없는데. <<인콰이어러>>지에 돈 받고 팔아넘길 만한 것들도 아니잖아요. 알몸 사진이라곤 그림 속 누드 들밖에 없으니 말이에요."

주방장의 아내가 주문을 받으려고 탁자들 사이로 풍만한 몸집을 비집고 다가왔다. 그녀는 루시가 썰어 말린 닭고기를 주문하자 자기 손끝에다 입을 맞춰 보였고, 앙드레가 해물 리소토(이태리식 쌀밥 요리-역주)를 선택하자 흐뭇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은 제가 골라 드릴까요? 맛이 기가 막힌 자메이카식 오르비에토(묘약)가 있는데."

그녀는 한바탕 수다스럽게 지껄이고 난 뒤에 부여 쪽으로 비척비척 걸어가 버렸다.

루시가 빙그레 웃었다.

"프랑스 사람 티 내듯 그렇게 못마땅한 표정 짓지 말아요. 안젤리카도 많이 안다구요. , 조금 과거로 돌아가서 어제 여행은 어땠는지 얘기해 보세요."

앙드레는 사실 그대로 설명하려고 애쓰면서 루시의 반응을 알고 싶어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며 쭉 이야기했다. 그녀는 남의 얘기를 들을 때 진지하게 완전히 몰입해서 듣는 더할 수 없이 매력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어서 앙드레는 안젤리카가 음식과 와인을 가지고 온 것도 모를 뻔했다. 두 사람은 그녀가 접시를 내려놓도록 공간을 주기 위해 각자의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안젤리카가 말했다.

"그만들 해요, 분위기가 너무 좋으시네. 어서 드세요."

그로부터 몇 분간은 두 사람 다 음식을 먹느라 말이 없었다, 루시가 와인을 마시기 위해 잠시 식사를 멈추고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누군가가 당신의 작품들을 망쳐 버리기로 마음먹고 한 짓이 아니라면 납득하기 힘든 일이네요, 당신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사업상으로 말이에요."

"딱히 누구라고 떠오르진 않지만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왜 예전에 찍어 둔 투명 양화들까지 모조리 가져갔을까요? 팔아먹을 만한 것도 전혀 없는데, 그리고 놈들은 왜 온 집안을 들쑤셔 놓았을까요?"

"뭔가를 찾으려고 그랬겠죠. 당신이 뭔가 숨겨 놓은 게 있다고 생각했나 봐요."

안젤리카가 불쑥 나타나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음식이 어때요?

그녀는 와인 병을 들더니 두 사람의 잔에 채워 주었다.

"손님은 여기 처음 오셨죠?

그녀가 앙드레에게 말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주 좋은데요,"

"잘됐네요. 여자 분께 좀 많이 드시라고 하세요. 너무 야위었잖아요."

안젤리카는 포동포동한 손으로 자기 배를 두드리며 식탁에서 멀어져 갔다.

식사하면서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절도 건에 대한 이러저러한 추측들은 그만 접고 일과 관련된 잡다한 얘기들로 넘어갔다.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희망 사항과 야망 따위를 교환하는 단계를 지나, 서로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흔히 털어놓는 사소한 사항들까지 자연스럽게 거론하게 되었다.

그들이 커피를 마시고 났을 무렵엔 식당은 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거리로 나서자 눅눅한 냉기가 몸을 파고들었다. 몸을 떨던 루시는 그와 나란히 듀에인 가 모퉁이를 돌아 웨스트 브로드웨이로 걸어갈 때쯤엔 앙드레의 팔에 한 손을 끼고 있었다, 그가 택시를 한 대 불러 세웠고 그러자 잠시 다소 어색한 분위기가 그날 저녁 처음으로 두 사람을 감쌌다.

루시가 차 문을 열었다.

"집에 가더라도 집안일은 더이상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그럴게요.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룰루. 저녁 식사도 멋졌고 도둑맞은 게 다 보상된 기분이에요."

그녀가 뒤꿈치를 세우며 그의 코끝에 살짝 입맞추었다.

"자물쇠를 갈아요, 알았죠?"

그리고 그녀는 가버렸다.

그는 무수한 차량 불빛들 속으로 사라져 가는 택시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한참 서 있었다 난생처음 도둑맞은 사람치곤 놀라울 정도로 행복한 기분으로.

 

 

7. 거짓말

 

매디슨가의 분주한 <<DQ>>사무실은 신간 발행을 앞두고 평소보다 긴장감이 팽배해 있었다. 카밀라의 계획이, 그녀 말대로 너무도 충격적으로 뒤집혀 버렸다.

청탁도 하지 않았는데 파리 태생의 유망한 칸 젊은 사진작가가 찍은 매혹적인 사진들까지 곁들여 화려한 장식으로 유명한 비데(변기에 부착하는 국부 세척기-역주)에 관한 기사 하나가 들어왔던 것이다. 보기 드물게 호사스럽고 조각품에 가까운 그 위생 도자기는 현대의 잘 치장된 욕실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물건처럼 보였다. 게다가 겨울이 거의 다 간 후라 독자들이 각자 가정의 위생 필수품들을 점검하기에 딱 좋은 시기였다.

편집 회의가 열렸고, 이 기사야말로 선구자감이다, 심지어 잡지 사상 최초의 기록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까지 쏟아져 나왔다 또한 카밀라가 재빨리 지적한 대로 그 비데를 가진 저명한 사람들에게서 받아 온 품질 확인 서명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물론 용도가 그러니만큼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는 모습까진 사진에 담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관대하게도 이름을 빌려주었다. 퇴짜 놓기엔 참으로 아까운 기사였다.

그러나 신간은 이미 꽉 짜여져 있었으므로 계획된 특집 기사 가운데 하나를 잘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견본판이 펼쳐진 회의실 길다란 탁자 옆에서 카밀라는 왔다 갔다 하며 궁리했다. 그녀 뒤엔 언제나 그랬듯이 메모 용지를 든 비서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미술부장, 직물 편집자, 가구 편집자, 액세서리 편집자, 그리고 젊은 보조 편집자 한 패거리가 줄지어 선 엄숙한 검은 옷의 요정들 같은 모양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카밀라가 걸음을 멈추더니 아랫입술을 달짝거렸다. 움브리아 지방의 피뇰라타 스트루폴리 공작부인의 중세에나 있을 법한 우행에 관한 기사나, 스위스의 한 억만장자가 도르도뉴 강변의 수녀원을 사들여 공들여서 개조한 내막을 다룬 또 다른 특집기사는 그녀로선 도저히 미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사교계의 반발이 만만찮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미 초대장을 받아 둔 여름철 초청 건들도 위태롭게 되기 쉬웠다.

마침내 그녀는 결론에 도달했다. 요정이 요술 지팡이로 뿅 하고 사라지게 하듯 그녀는 몽블랑 만년필로 견본판 가운데 세 면을 하나씩 두드렸다.

정말이지 이것들을 빼고 싶진 않아. 하지만 성화란 주제는 시류를 타지 않지만 비데는 지금과 같은 이른 봄이 한철이거든. 성화 기사는 여름에나 다루도록 합시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하고 하는 가운데 회의는 끝났다, 물론 일부 뿌루퉁해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레이아웃을 모조리 다시 짜게 된 미술부장은 컬 머리채를 획 쳐들었다.

자기 사무실로 돌아온 카밀라는 상당히 유감스런 표정으로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노엘을 보았다.

"저런, 정말이지 안됐어. 자네에겐 보물과도 같은 걸 웬 짐승 같은 놈들에게 다 도둑맞다니. 나까지 울고 싶은 심정이군. 참으로 안 된 일이야. , 마침 편집장이 오셨네. 바꿔 줄게."

그가 카밀라를 쳐다보았다.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앙드레가 도둑을 맞았대요. 위로해 줘야 할 것 같군요."

카밀라는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앙드레, 그의 이름을 들으니 모호하면서도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솟았다. 죄의식 같은 건가? 아무튼 앙드레는 지금 그녀로선 전혀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 이어서 그녀는 노엘의 책상과 자신의 사무실 사이에 그럴싸한 위기 상황을 만들어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도록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전화기가 빨간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충격받고 동정해 줄 채비를 갖추고 수화기를 들었다.

"자기-어떻게 된 거야?"

앙드레가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하자 카밀라는 콕콕 쑤시는 다친 발가락을 편하게 해주려고 구두를 벗었다. 한숨 돌린 것도 잠시, 또다시 통증이 시작되자 상처난 발을 용감하게 샤넬의 최고 구두에 쑤셔 넣고 다니느니 차라리 부상당한 편집장처럼 보이도록 입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지에, 편안한 벨벳 슬리퍼 차림 말이다, 손잡이가 상아로 된 지팡이도 하나쯤 장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코코 샤넬이란 여자도 말년엔 지팡이를 짚고 다니지 않았던가? 그래, 지팡이가 꼭 필요해. 그녀는 메모지에 적기 시작했다.

"카밀라 듣고 있어요?"

"물론이지, 자기. 너무도 충격적인 얘기라 넋이 빠졌던 것뿐이야. 정말이지 돌아버릴 일이군."

"그래도 또 살아가야죠. 다행히도 그 성화 필름은 가져가지 않았어요. 그 사진들, 어때요?"

카밀라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앙드레도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탁월해, 자기. 완벽하다구 그런데 사실은, 계획에 작은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몇 페이지를 날려 버렸어. 막판에 끼어든 광고들 때문에 말미야. 정말이지 어떻게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속상해. 그래서 우린 계획을 재조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성화들은 이번 호에 나오지 못하게 됐어. 내 기분이 지금 얼마나 처량한진 말로 다 못 해."

실망한 앙드레가 말이 없자 카밀라는 누가 찾아온 것처럼 꾸며대어 그 침묵을 깨뜨렸다.

"거기서 그렇게 왔다갔다 하지 말아요. 금방 갈 테니까."

이어서 그녀는 앙드레에게 말했다.

"가봐야겠어, 자기. 나중에 다시 얘기해. 그럼 차오."

그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 버렸고 곧바로 인터폰을 눌러 비서를 불렀다. 죄의식의 흔적 따윈 완전히 털어 버린 채 그녀의 생각은 이미 걸어 다니는 의상의 일부인 지팡이 쪽에 가 있었다.

재수 없게 시작된 앙드레의 한 주는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곤궁 할 때 즉각 찾아주는 친구라던 보험회사 직원들은, 그가 전화할 때마다 보상비를 지급하는 데 장애가 되는 조항을 새로 찾아냈다며 그를 허위 신고한 사기꾼 취급했다. 장비 교체를 하려면 수천 달러에 달하는 비용이 필요했다. 카밀라에게선 새 일감에 대한 얘기가 전혀 없었다. 루시가 새 일감을 이리저리 알아보고 있긴 했지만 아직까진 아무 성과가 얼었다.

도난 사건 이후 그는 여기저기 전화하는 틈틈이 물건 정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묵은 잡지 더미 속에서 드노이예의 저택에 관한 특집기사가 실린 <<DQ>>판을 발견한 그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책장을 넘겨 보았다, 그 집 본관 응접실이 찍힌 사진을 보자 짙은 호기심이 되살아났다. 벽난로 위쪽에 걸린, 프로방스의 색채들로 번쩍이는 세잔느 그림이 그 방의 초점으로 맞추어 찍혀 있었다.

지금 이 그림은 어디에 있을까? 드노이예의 말대로라면 칸느의 한 화랑에 걸려 있을 것이다. 그는 사진 속 그림을 응시하면서 칸느에서 화랑을 본 적이 있는지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아마 화랑이 많진 않을 것이다. 알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라도 확인을 해야 적어도 마음이 흡족할 것 같았다. 만일 그 그림이 드노이예가 얘기한 곳에 있다면 그가 본 일이 그럭저럭 설명이 되므로 그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날 이른 아침, 그는 파리의 한 친구에게 전화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프랑스의 전자 통신 전화 명부인 '미니텔' 2분 정도 뒤져 본 끝에 칸느에 소재한 몇 안 되는 화랑들의 이름과 전화 번호를 앙드레에게 알려 줄 수 있었다. 앙드레는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받는 곳마다 유감을 표하는 정도는 달랐지만, 자기네 화랑엔 세잔느가 없을 뿐 아니라 드노이예 씨란 사람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 대답만은 한결같았다.

그렇다면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얘기다.

"그가 거짓말을 한 저예요, 룰루. 켕기는 게 없다면 왜 그랬겠어요?"

루시의 책상 끝머리에 걸터앉은 앙드레는 사과를 먹고 있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입 속의 것을 우물거리고 난 그녀는 눈이 둥그레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앙드레, 그건 그 사람 그림이에요 자기가 맘대로 처분할 수 있다구요."

"그런데 거짓말은 왜 해요? 사실 그의 얘기가 거짓이란 게 나로선 다행이에요. 엉뚱하고 멍청한 녀석으로 기억되고 싶진 않으니까.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루시가 항복했다는 듯이 양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 문제예요. 우리에겐 우리 문제가 있구요."

그녀는 책상에 놓여 있던 종이 한 장을 집어 그에게 주었다.

"일거리가 있나 하고 연락해 본 잡지사들 명단이에요. 아직 회답이 온 덴 한 군데도 없어요. 그런데 카밀라한텐 얘기해 봤어요? 맡길 일감이 있대요?"

앙드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신간을 준비하고 있을 땐 어떤지 당신도 잘 알잖아요. 점심시간도 모르고 일하니까."

그는 루시가 준 목록을 건성으로 훌었다.

"지난번에 통화했을 때 성화 기사를 빼기로 했다고 그러더군요. 광고가 너무 많아서라나? 결국 이런 일 저런 일로 이번 주는 끝내주는 한 주가 되어 버렸어요."

그는 우리에 갇힌 사냥개처럼 처량한 모습이었다.

"앙드레, 비참한 날은 누구에게나 닥치게 마련이에요. 그러지 말고 나가서 당신의 새 장비나 골라 보는 게 어때요? 내가 일을 마칠 무렵이면 그게 필요할 거예요. 그럼 우리, 좀 덜 우울하게 보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이전시 사무실에서 나와 웨스트 브로드웨이를 걸어 내려가던 그의 눈에 리졸리 서점 윈

도에 진열된 책 한 권이 들어왔다. 새로 나온 고갱의 전기였는데 박학다식한 설명을 곁들였는지 두껍고 불룩했다. 가지런히 쌓인 책 무더기 뒤로 고갱의 작품 (꽃과 여인)을 담은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여자의 포즈나 그녀를 그린 각도가 어딘가 낯익었다. 색채와 기법은 달랐지만 그 그림에선 좀 더 나이 들고 건강한 여자가 등장하는 드노이예의 세잔느 그림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가게로 들어가 인상파 화가들에 관한 책을 모조리 훑어가던 앙드레는 마침내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다. 한 면 가득 채운 그 그림 밑에 간략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었다.

'멜론과 여인. 폴 세잔느, 1873년경, 한때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소장, 현재는 개인 소장.'

그래, 지금도 개인 소장이지 하고 앙드레는 생각했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쯤 배관공의 밴 뒤에 실려 있을지도 모른다. 칸느의 화랑에 없다는 건 분명했다. 그는 책값을 지불하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이제 오만가지 핑계를 내세우는 그 보험회사의 천벌을 받을 직원, 의심 많은 도마(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은 사도-역주)와 또 한판 붙을 차례였다.

기울어 가는 마지막 창백한 햇살이 건물들 꼭대기 뒤로 넘어가자 맨해튼 시내는 저녁 빛깔로 물들기 시작했다. 앙드레는 마지막 잡동사니 한 보따리를 쓰레기 더미에 보태고 나서 적포도주 한잔을 따랐다. 아파트 안을 쭉 둘러보니 이사 온 이후로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것 같았다. 생활을 정리하려면 한바탕 거창하게 도둑맞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을 즈음 전화 벨이 울렸다.

"다행이네요, 아직 자살해 버리진 않은 것 같으니."

루시가 웃음을 터뜨리자 앙드레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말한 그 수수께끼의 그림에 대해 쭉 생각해 봤어요. 아직도 그 일이 마음에 걸려요?"

"글쎄 ,,,,,, 그래, 그런 것 같군요. 그런데 그건 왜 묻죠?"

"내 친구 하나가 요기 모퉁이 근처에서 화랑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얘긴데, 혹시 그쪽 분야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오늘 저녁에 나랑 같이 그 친구한테 들러도 될 것 같아서요."

"룰루, 정말 고마운 얘기긴 한데 당신은 이미 다 들은 얘기잖아요. 지겹지 않아요?"

"지겨운 일은 나중에 있어요. 바베이도스에 사는 내 사촌 부부가 지금 시내에 와 있는데 날 자기네 친구 하나와 소개팅시켜 준대지 뭐예요. 바잔 정부를 상대로 컴퓨터 판매 대리업을 하는 사람인데 뉴욕엔 처음이라나 봐요. 그런데 그 사람 너무너무 수줍음을 탄대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당신은 몰라요, 룰루. 우리처럼 숙맥인 사람들이 오히려 깊이가 있다구요. 10분 후에 데리러 갈게요."

앙드레는 가볍게 샤워하고 나서 새 셔츠로 갈아입고 애프터세이브로션을 듬뿍 발랐다. 그리고 휘파람을 불며 아파트를 나섰다.

* * *

화랑은 브룸 가, 낡았지만 멋진 한 건물의 2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금빛 목재 바닥에 주석 도금한 천장, 은은한 조명을 한 그곳의 주인은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었다.

"그 친구 아버지가 부자래요. 그렇다고 기죽을 건 없어요. 데이비드는 사람도 좋고 자기 뜻대로 열심히 사는 스타일이에요."

계단을 올라갈 때 루시가 말했었다.

화랑 저 끄트머리에서 데이비드가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호리호리하고 하얀 얼굴의 그는 검정 양복에 하얀 티셔츠 차림이었는데, 미니멀 아트 풍 책상 뒤에서 전화기를 어깨에 끼고 통화하는 중이었다 다른 청년 두 사람은 그림들을 텅 빈 벽들에 기대 세우고 있었다. 실내 어딘가에 숨겨 놓은 스피커에서 키스 자렛(재즈 피아니스트-역주)의 쾰른 공연 실황이 잔잔하게 흘렀다.

통화를 마친 데이비드는 두 사람 쪽으로 와서 루시의 볼에 살짝 입맞추고 앙드레와 가볍게 악수를 나누며 반겼다.

"난장판이라서 미안합니다. 새 전시회를 준비하는 중이어서요."

그는 큼직하고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공간을 가리켰다, 그리고 뒤편 문으로 나가 아무렇게나 너질러져 있어 좀 전보다는 사람 냄새가 나는 방으로 두 사람을 데리고 갔다. 방에는 사무용 의자 두 개 와 낡은 긴 가죽 의자가 드문드문 놓여 있었고, 그림 서적 무더기들 사이로 컴퓨터와 팩스가 비좁은 듯 끼어있었다.

"세잔느를 찾고 계신다고 루시한테 들었습니다."

데이비드가 씩 웃었다.

"사실은 저도 그래요."

앙드레가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동안 젊은 미술 거래상은 이따금 한 손으로 은귀고리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하게 열심히 귀 기울였고, 앙드레가 칸느에까지 일일이 전화한 대목에선 양눈썹을 치켜 올리기도 했다.

"그 일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는군요, 그렇죠?"

"그런 셈이죠. 물론 나하고 아무 상관 없는 일이란 건 알지만 모른 척하고 넘어가긴 힘들 것 같아서 말이죠."

앙드레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데이비드는 혀를 차며 생각에 잠겼다.

"저도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런 일은 제 분야가 아니라서요. 저는 그저 애숭이 거래상일 뿐이죠."

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맛살을 찌푸렸고 이번에도 귀고리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 도와줄 만한 사람이 있을 텐데,,, , , 잠깐 기다려 보세요."

그는 앉았던 의자를 빙 돌려 컴퓨터와 마주했다.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키보드를 두드려 파일을 열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님 친구분이신데 잘나가는 아트 딜러 중 한 사람이죠. 이스트 사이드 육십몇 번 가에 즐비한 포트 녹스(미연방 금괴 저장소-역주)처럼 경비가 삼엄한 고급 아파트에 사시는 분이에요."

그가 화면에 나타난 주소 목록을 훑었다.

"여기 있군요. 파인아트, 그가 장난삼아 쓰는 이름이죠. 그분 성함은 파인, 사이러스 파인이에요."

데이비드는 파인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메모지에 휘갈겼다.

"저는 한 두어 번 뵌 적이 있어요. 그분은 특별히 인상파 그림만 다루는데 모든 거물 수집가들과 줄이 닿죠,"

자리에서 일어선 데이비드는 메모지를 앙드레에게 넘겨주고 나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런, 전 이만 가봐야겠네요. 내일 새 전시회가 시작이거든요. 사이러스 씨 만나시거든 안부 좀 전해 주세요."

거리로 나논 앙드레는 루시의 팔을 잡아 웨스트 브로드웨이 쪽으로 방향을 틀고 힘차게 걸어갔다.

"룰루, 당신은 정말 보석 같은 사람이에요. 인생에서 최고의 것을 누릴 자격이 있어. 샴페인 한 잔 할 시간 있어요?"

루시가 미소 지었다. 다시 쾌활해진 그를 보니 흐뭇했다.

"없진 않죠."

"좋아요. 펠릭스로 갑시다. 당신의 베레모를 사람들한테 보여 주고도 싶어요."

두 사람은 프랑스어로 말하는 목소리들로 시끌시끌한 자그마한 바 한 귀퉁이에 자리 잡았다. 참을성 있게 생긴, 세상에 넌더리가 난 듯한 개 한 마리가 실내 한구석의 남자 화장실 앞에 놓인 의자에 묶인 채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냄새에 코를 씰룩대고 있었다. 모두들 내놓고 담배를 피워 댔다, 이런 밤이면 마치 파리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앙드레가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루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소음 속에서 아는 단어를 찾아보려고 애썼다.

"프랑스 사람들은 늘 저렇게 빨리 말하나요?"

"언제나. 체호프의 편지 가운데 멋진 구절이 있어요. '프랑스인들은 심각하게 노망이 들지 않는 한 흥분해 있는 게 정상이다."

"심각하게 노망이 들면 어떻게 되는데요?

", 그야, 계속 여자들을 쫓아다니죠. 하지만 술을 엎지르진 않도록 천천히 하지요."

샴페인이 오자 앙드레가 잔을 치켜들었다.

"정말 고마워요, 룰루. 괜한 시간 낭비일지도 모르지만 그 그림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난 정말이지 알고 싶어요."

* * *

그들이 있는 바에서 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루돌프 홀츠와 카밀라도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에겐 흡족한 며칠이었다. 당황한 드노이예의 전화도 더 이상 걸려 오지 않았고, 세잔느의 그림도 파리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앙드레의 작업실에서 훔쳐내 온 물건들을 철저히 뒤져 본 결과 놀라운 것을 찾아내긴 했지만 찝찝할 건 없었다, 그 투명 양화는 불태워졌고 사진 장비는 퀸스에 사는 베니 아저씨라는, 미덥진 않아도 수완 하나는 좋은 자의 손을 거쳐 처분했다.

홀츠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아무 염려할 것 없어. 만일 켈리 녀석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처지라면 지금쯤 우리에게 정보가 들어왔을 거야. 드노이예와 다시 접촉하려고 했을지도 모르지."

카밀라는 벨벳 누에고치 같은 슬리퍼 속에 든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통증은 가셨지만 이제 그녀는 지팡이 때문에 쏟아지는 이목을 즐기는 중이었고 좀더 매력적인 절름발이로 보일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 일에 대해선 난 모르지만, 그가 요 며칠 계속해서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왔어요."

"전화 거는 게 당연하지. 그에겐 지금 일거리가 필요하니까."

홀츠는 입고 있던 턱시도 소맷자락에서 실 보푸라기 하나를 털어냈다.

"하지만 당분간은 그와 접촉하지 않는 게 현명할 거요. 다른 사진작가를 찾도록 해요. 이제 그만 가자구."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건물 입구에 리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네 블록 떨어진 민간 기금 마련 만찬장으로 그들을 모셔 갈 차였다. 홀츠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 유의 자선의 밤 행사는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파산시킬 수도 있다 그는 수표장을 집에다 잘 두고 왔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려고 호주머니를 쓰다듬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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