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노을빛이 유난히 붉은 저녁이다.
정박사는 딸의 사무실이 있는 백화점 주변 공원에 앉아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정박사는 벌써 여러 번 한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한숨은커녕 자기가 지금 뭘 하려고 하는지도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세상은 참 공평하지가 못하다. 주위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더없이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말이 가까울 무렵의 백화점 주변이 늘 그렇듯, 각자 쇼핑백이며 선물 꾸러미들을 한 아름씩 안은 채 어디론가 분주히 가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혹은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가 선물을 주고받고 웃으며,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씻고 나름대로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즐길 것이다.
이런 시간에, 공원 벤치에 앉아 사그라드는 저녁노을이나 바라보고 있는 늙은 사내의 절망 따위를 누가 알겠는가. 그는 죽어가는 아내를 병원에 방치해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딸애한테 와서는, 곧 너희들은 어미 없는 자식이 돼야 할 운명이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그뿐인가. 딸아이의 충격이나 고통을 어떻게 감싸 줘야 할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팔순 노모 대소변이라도 받아 주려면 오늘 귀갓길도 바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희망 따위에 속고 살진 않는다. 아침이 와도 희망 같은 건 없다. 그것도 밥줄이라고 월급이 나오는 한 쫓겨나는 날까지 목을 매야 하는 직장이라는 아수라장이 그나마 이즈음 그의 유일한 도피처이다. 아니 도피처라고 할 수도 없겠다. 아수라장에서 아수라장으로의 이동.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삶의 진흙탕이 나이 육십이 넘도록 일궈 온 정박사의 현실이었다.
그동안 그래도 이 진흙탕을 먼지 나는 신작로쯤으로 알고 살게 해준 고마운 이가 있었기에 그런대로 살 만한 세상이었다. 아내라는 존재가 없었더라면 그는 반 그릇의 밥그릇도 채우지 못한 인생의 낙제생으로 생을 마감했을 터였다.
밥그릇의 비어 있는 절반이 정박사의 실패한 인생이라면, 아내는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져 나머지 절반을 채워 그의 몫으로 보태 주었다.
세상이 왜 이다지도 불공평한가.
일러 무엇하랴. 속절없이 죽어가는 그 착한 아내만 생각하면 정박사는 제가 쉬고 있는 숨조차 비열하고 역겹게 느껴진다. 무턱대고 가슴이 콱콱 막힌다. 부끄럽고 창피하다. 바보같이 착하기만 한 아내가, 평생 한 일이라곤 저 고생시킨 기억밖에 없는 무책임한 자신에게 아무런 죄의 대가도 물어오지 않는 까닭에 정박사는 더더욱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
어느새 붉던 노을이 사그라지고 하늘이 청회색으로 짙어지고 있었다.
연수가 살그머니 정박사 곁으로 와 앉는다. 어릴 때 같이 지낸 기억이 별로 없는 부녀지간은 늘 그렇게 서먹서먹하다.
정박사는 아비 노릇 한번 제대로 해준 적 없는데 어느덧 이렇게 어엿한 숙녀로 성장해 준 딸자식이 새삼 마음에 맺힌다.
"연수야."
담배를 세 대나 태우도록 입을 열지 못하던 정박사가 조용히 딸의 이름을 부른다. 시선을 어디 먼 고향이라도 걸어둔 듯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무래도 그냥은 말이 나올 것 같지 않다. 그는 양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니 엄마."
연수는 말이 없다.
"니 엄마 아무래도 오래 못 살 것 같다."
그래도 연수는 말이 없다.
정박사는 여전히 허공을 응시한 채 단숨에 말해 버렸다.
"죽을 것 같애."
순간, 연수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말씀이세요?"
"말한 그대로다. 오래 못 살고 죽을 것 같다."
연수는 끝내 자신을 외면한 채 한숨처럼 토해 내는 정박사의 말을 듣다 못 해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든다.
"무슨 말씀이냐구요, 그게. 수술했는데 왜 죽느냐구요?"
" 수술 못 했다."
딸이 흔드는 대로 출렁이는 정박사의 양어깨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자꾸 붉어지려는 눈시울을 딸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한사코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수술 못 했다. 수술할 수가 없었다."
연수는 그 황당한 아버지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경우를 두고 기가 막히다는 것인지. 불과 며칠 만에 어머니는 암이었다가 곧 죽을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연수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말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그렇다고 해요. 그럼, 얼마나 사실 수 있는 거예요?"
"한 달 두 달 나두 잘 모르겠다."
그 말에 연수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원망에 가득 찬 눈으로 아버지를 노려보며 경멸하듯 외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아버지가 의사신데, 어떻게 그 지경까지 갈 수 있어요? 아버지, 의사잖아요?"
의사이기 때문에 더 할 말도, 더 어떻게 손써볼 일도 없다는 걸, 그런 아버지의 답답한 심정을 딸은 알지 못한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연수는 갑자기 그렇게 외치며 후다닥 뛰어가 버렸다.
정박사는 저만치 멀어져가는 연수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성깔하며 고집이 누군가를 많이 닮은 듯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그날 밤, 연수는 윤박사를 찾아갔다.
아버지 말만으로는 도무지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모든 일에 독선적이고 신경질적이며, 또 쉽게 비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증세가 다소 과장됐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아버지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 윤박사라면 뭔가 확실한 얘기를 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연수가 윤박사로부터 듣게 된 첫마디는 먼저 아버지를 신뢰해야 한다는 충고였다.
"전, 아버지 안 믿어요."
윤박사는 연수의 당돌한 대꾸에 당황한 나머지 잠시 말을 잊었다.
"아버진 의료사고를 내 멀쩡한 사람을 죽인 적도 있어요. 그 때문에 병원이 넘어가고, 할머니가 정신을 놓고, 불같은 아버지 성질 무서워 가뜩이나 기 못 펴고 살던 엄마랑 우리는 더 힘들어졌어요. 아버진, 의사로서도 아들로서도 남편으로서도, 또 아버지로서도 실패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덩달아 포기할 순 없어요."
"그렇게 말하지 마. 그건 어쩔 수 없는 의료사고였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버지한테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윤박사의 단호한 설득에도 연수는 좀처럼 아버지를 향한 불신의 벽을 허물어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윤박사는 어린 동생 달래듯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 환자는 급성 위궤양으로 아버질 찾았어. 큰 병원으로 옮기기엔 이미 늦은 상태였고, 수술은 성공적이었어."
"그런데 환자가 깨어나지 못했죠. 간이 나빴다죠? 당시 아버지는 명의 소리라도 듣고 싶었겠죠. 그 명성에 대한 욕심 때문에 무리하게 수술하셨던 거예요."
"아니, 그 당시엔 간의 상태보다 위의 상태가 더 급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어. 그 환잔 아버지가 수술 안 했다면 길거리에서 바로 객사했을 거야. 단 한 번의 희망도 가져보지 못하고."
윤박사의 차분한 설득으로 아버지에 대한 오해는 다소 풀렸지만, 아직 앙금이 말끔히 가신 건 아니었다. 더구나 정작 그녀에게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아직 하지 못한 채였다.
"전 지금 엄마 얘길 묻고 있어요. 아버지 의견이 아닌 아줌마 의견을 듣고 싶어요."
" 마음의 준비를 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언하세요?"
지금껏 차분하던 태도와는 달리 윤박사의 표정에도 그늘이 졌다.
연수는 자신도 모르게 화를 버럭 내며 윤박사를 마구 다그쳤다.
"수술 전에 뭐라고 하셨어요, 초기라고 했죠? 수술하면 깨끗하다고 했죠?"
"처음 수술에 들어갈 때도 기대는 없었어. 암세포가 이미 임파선을 타고 여러 곳으로 전이된 상태였어. 큰 것만이라도 떼 내려고 개복했던 거야."
"그런데요?"
"할 수 없었어. 장기에 암세포가 엉겨 도저히 손을 못 댈 지경이었어."
"그래서요?"
연수의 반문은 점점 증오와 경멸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손도 못 댔어. 간을, 위를, 허파를 모두 도려낼 순 없었어."
"그래도 해봤어야죠! 박사가 서너 명이나 달라붙었으면서 왜 우리 엄마 한 사람 못 살려냈어요? 살려냈어야죠!"
어머니가 그 지경이 되도록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 연수는 그들 모두를 향해 절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증오의 대상은 고통스럽게도 자기 자신이었다.
" 믿을 수 없어요. 어떻게 우리가, 우리 엄마가 그렇게 될 때까지 모를 수가 있어요. 자식인데, 남편인데."
"그게 암이야. 발견하기 전엔 모르구, 설사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땐 이미 늦구. 그게 암이야."
"싫어요. 난 안 믿을래요."
연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자꾸 흔들어대며 모질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줌마도, 장박사 아저씨도, 아버지도 모두 욕심 없는 분들인 거 알아요. 그래서 더 포기하기가 쉬웠겠죠. 전 안 그래요. 포기 안 할거예요."
"포기해야 돼."
윤박사의 어조는 단호했다.
연수는 그에 반발하듯 더욱더 매몰차게 말을 이었다.
"안 해요. 자식이 어떻게 엄말 포기해요. 아줌마 같으면, 아줌마 부모라면 포기하겠어요?"
" 곁에서 포기하지 않으면 엄마가 더 힘들 거야."
순간 연수의 눈가에 독기가 서렸다.
"아버지가 포기하자고 아줌말 설득했죠? 부딪혀 싸우기보단 피하는 데 능한 분이니까, 분명 그러셨을 거예요. 전 포기 안 해요. 엄말 포기한 아버질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를 향한 불신과 증오가 다시금 연수를 모질게 만들고 있었다.
늘 착하고 정도 많은 아이였는데.
윤박사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연수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내 말 잘 들어. 우린, 장박사님과 나는 아주 오래전에 포기했어. 하지만 아버진, 지금 포기하신 거야."
윤박사는 '지금' 이란 단어에 또박또박 힘을 주었다.
잠시 분별력을 잃고 증오로 가득 차 있던 연수의 표정에 얼핏 당혹감이 떠올랐다.
윤박사가 그 기미를 놓치지 않고 부드럽게 덧붙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가능성이 있는데 손을 놓은 게 아니야. 엄마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으로 포기하는 길을 택한 거야. 이제 우리가 엄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야."
이젠 연수가 포기해야 할 차례였다. 아버지 말대로 집에 와선 손 하나 까딱 않고, 그것도 모자라 늘상 바깥 일 힘들다고 짜증이나 내던 딸이, 그 종처럼 부려먹던 어머니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고, 또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연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윤박사를 향해 허탈하게 물었다.
"전 이제 어떡해야 하죠?"
"글쎄,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윤박사는 물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수를 향해 쓸쓸하게 웃는다.
"우리 부모님은 차 사고로 한순간에 돌아가셨어. 장사치를 땐 모르겠더니, 묻고 집에 오니까 그때부터 눈물이 나더라. 그게 꼬박 일 년을 넘게 갔어. 밥을 먹다가, 일을 하다가, 잠을 자다가, 그렇게 아무 데서나 눈물이 났어. 받은 건 태산 같은데 해드린 건 하나 없는 내가 미워 눈물이 나더라구."
윤박사의 독백은 장차 연수의 독백이기도 할 터였다. 그녀는 자식이라면 누구나 겪어야만 하는, 부모의 죽음을 먼저 겪은 슬픔의 선배로서 연수에게 하나씩 하나씩 이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연수야, 넌 그러지 마. 네가 받은 만큼, 받은 것의 만분지 일이라도 돌려 드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밥두, 빨래두, 세수도 시켜 드려. 네가 어른이란 걸 알려 드려. 니 걱정 때문에 가시는 길 무겁게 하지 말구."
" 전요, 아줌마, 전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사람은 다, 한 번은 다 죽는데, 우리 엄마가 죽게 될 줄은 정말 몰랐고, 딸들은 다 도둑년이라는데 제가 이렇게 나쁜 년인지 전 몰랐어요. 지금 이 순간두 난 우리 엄마가 얼마나 아플까보다는 엄마가 안 계시면 난 어쩌나, 그 생각밖에 안 들어요. 엄마가 없는데 어떻게 살까, 어떻게 살까. 그 생각밖에 안 들어요. 나, 어떡해요, 아줌마?"
연수는 제 설움에 못 이겨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 어떡해요, 이제 난 어떡해!"
운전석에 앉아 서럽게 우는 연수의 어깨를 토닥이며 윤박사가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 그래도 넌 행복한 거야, 연수야. 난 후회뿐이지. 너처럼 울 기회도 없었어.'
단 한 시간이라도 이별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나중이 이렇듯 허망하진 않았으리라.
우는 연수를 바라보며 윤박사 또한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14
밤늦은 시각, 정수는 동네 파출소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다 잡혀 왔으니 데려가라는 내용이었다. 정수는 대충 옷을 걸쳐 입고 툴툴거리며 밖으로 나섰다. 그 나이에 파출소 신세나 지고 다니는 아버지가 한심스러웠다. 그럴 시간 있으면 어머니한테나 가볼 일이지, 왜 하필 요즘 같은 때 아버지가 자꾸 이상해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정수는 짜증을 있는 대로 부리며 파출소 문을 벌컥 열었다.
파출소 바닥에 큰 대자로 뻗어 있는 거지 행색의 취객을 경관이 발로 툭툭 차서 깨우고 있었다.
정수는 좀 더 안쪽을 두리번거리다 구석진 곳에 등을 보인 채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였다.
"일어나세요."
정박사는 꾸벅꾸벅 졸다가 희미하게 눈을 뜨고 아들을 돌아보았다.
"너, 누구냐?"
"정수지, 누구예요. 빨리 일어나시라니까요!"
정수는 아버지의 흐트러진 모습에 기가 막혀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술기운에도 아들의 불쾌한 낯빛에 당황한 정박사는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다소 얼떨떨해진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술을 너무 마셨던 탓인지,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와 있는지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정박사는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음성으로 아들을 향해 물었다.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어요."
아들의 대답은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아무리 술 취한 와중이라지만 정박사는 정수가 꼭 남의 자식 같이 느껴졌다.
"어서 집으로 가세요."
정수가 무뚝뚝하게 팔을 잡아끌었다.
정박사는 그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놔, 이노무 자식아!"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을 때였다. 정박사는 몸의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안 그래도 짜증을 내던 정수가 기어이 분통을 터뜨렸다.
"왜, 그래요, 챙피하게 정말!"
"뭐, 창피해?"
정박사가 격앙된 어조로 다그치자 정수는 주위를 의식하며 낯을 들지 못했다. 그는 사람들이 흘깃거리자 태도를 조금 누그러뜨려 아버지를 부축하였다.
"가요."
"애비가 챙피해?"
정박사는 아들의 등짝을 후려치며 고함을 질렀다.
"정말 왜 이러세요, 갈수록. 제발 좀 가만히 계세요!"
"이 자식이 어디서 소릴 질러. 애비한테!"
"에이!"
연이어 뒤통수까지 냅다 얻어맞은 정수는 금세 달려들기라도 할 듯 정박사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곧 그는 아버지를 집으로 데려가기를 포기하고 혼자서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정박사는 부아가 치미는 걸 참고 서서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담배를 빼 물었다.
이런 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사실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사랑스런 자식인데, 겉으로는 그걸 손톱만큼도 표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화를 내고 윽박지르고 때리기까지 하고 있으니. 뻔히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 내처 그 길로만 가는 어이없는 행보, 그런 오죽잖은 행보가 모여서 한 사람의 인생을 대변한다면, 도대체 사람이란 뭐란 말인가, 도대체 삶이란 뭐란 말인가.
하긴 품 안에 있을 때나 자식이라고, 자식도 머리가 굵어지면 우선 아버지라는 존재부터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긴 그렇지. 유사 이래 어디 아버지와 문제없는 자식이 있기나 했겠는가.
정박사는 파출소 앞에 멍하니 선 채 괜히 입맛을 쩝 다셨다. 뭔가 스산한 기운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아 몸을 푸르르 떨었다.
평생 외길이랍시고 병원 밖 세상은 꿈도 못꿔 봤는데, 어쩌다 이 지경으로 헛헛한 취객이 되어 여기 서 있는지. 발바닥이 닳도록 열심히 살아왔건만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도 없고, 무엇 하나 추억할 만한 것도 없는 답답한 중늙은이가 되어 이젠 등신처럼 아내의 죽음이나 기다리고 있는 이 한심한 꼴이라니.
정박사는 절름발이처럼 휘청거리며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삐져 나온 와이셔츠 자락 밑으로 고추장인지 뭔지 시뻘건 국물이 범벅이다. 가로등 밑으로 가 확인해 보니 아까 안주로 먹은 매운탕 찌개 국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일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다.
초저녁에 연수를 만났고, 혼자 술을 마셨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 과일가게에 들러 연시랑 사과를 산 것까지는 좋았는데, 골목에서 비틀거리다 그만 봉지가 찢어져 버렸다. 컴컴한 골목길 아래로 우르르 쏟아져 내려가는 과일들을 잡는답시고 몇 번 넘어졌고, 어느 순간 경찰관이 왔다.
아니 그전에 오줌을 눈 게 먼저였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 경찰관과 시비가 붙었고, 파출소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정수란 놈이 왔었지.
다시 정수를 생각하자 정박사는 얼핏 낯이 뜨거워졌다. 녀석도 어느새 장정이 다 되었다. 아까 장소가 파출소 안만 아니었다면 녀석, 아비 하나쯤이야 거뜬히 메다꽂을 수도 있을 기운이었다. 그렇게 든든한 아들이건만 데리고 목욕탕 한번 가지 못했다. 매번 대학에 떨어진다고 퉁박은 주었지만, 담임선생 이름 하나 아는 게 없었다. 저라고 그런 아비한테 무슨 정이 있었으랴.
정박사는 조용히 철제 대문을 열었다. 아내가 입원한 뒤로는 식구들 모두 열쇠를 가지고 다니도록 한 게 정박사 자신이었다. 아이 둘도 드나들며 병원으로, 집으로, 직장으로 분주하게 옮겨 다녀야 했으므로, 저녁까지 노모를 돌봐 주는 간병인에게 한 가지 일이라도 덜어 주자는 심산에서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직업 의식이 투철한 간병인이라도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게 요즘 인심이었다.
거실이며 2층 방엔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항상 맨 먼저 눈이 가던 곳. 이때쯤이면 아내가 안방에 앉아 빨래를 개거나 다림질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아내가 거기 그러고 앉아 있는 것이 그대로 이 가정의 평화, 행복을 상징한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 왜 이제서야 깨달아지는 걸까. 이제 안방은 텅 빈 채 어둠에 감겨 있다.
아내의 부재, 그것은 이미 이 가정의 와해를 가장 현실감 있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제 이 가정의 일상은 밤늦게 대문 열쇠를 끼워 넣는 공허한 쇳소리로 전락해 있고, 불 꺼진 안방의 토굴 같은 분위기로 전락해 있다. 누군가가 등불을 켜고 기다려 주지 않는 집. 대문을 열어 줄 사람이 없는 집이라는 게 과연 가정이랄 수 있을까.
집 안으로 들어선 정박사는 조용히 노모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연수가 등을 보인 채 쪼그려 앉아 있는 옆에서 노모는 옷가지들을 잔뜩 꺼내 놓고 있다.
"아줌마, 왜 그러고 있어? 아줌마 짐 안 싸?"
노모는 며느리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날 짐을 싸던 흉내를 내는 중이었다.
눈가에 눈물이 말라붙어 얼룩진 탓인지 꺼칠한 얼굴을 하고 연수는 넋 나간 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 빨리 가자. 우리 엄마가 보기보다 성질이 더러워서 약속 시간 늦으면 난리다! 아줌마두 빨리 짐 챙겨, 가게."
노모가 소풍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신바람이 나서 커다란 가방에 옷을 꾸겨 넣는 모습을 처량하게 쳐다보며 정박사는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아줌마, 안 가? 아줌마가 길 아는데, 같이 가야지. 가자, 응?"
안에선 여전히 노모의 신명 난 음성만 들려올 뿐 연수는 아무 반응도 없는 모양이었다.
15
이튿날 아침.
정박사는 일찍부터 원장의 호출을 받았다. 그동안의 분위기로 보아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몹시 좋지 않았다.
"정박사님이 그동안 고생하신 건 잘 아는데, 워낙 환자가 적어서."
아무리 작은 병원의 인사라지만 십 년 가까이 부려먹던 사람을 당장 그날로 그만두라는 원장의 횡포에 정박사는 모멸감마저 느껴야 했다. 젊은 원장은 말하는 내용과 달리 무척이나 고압적인 자세였다.
"김원장, 나 부탁 하나 합시다."
정박사는 젊은 원장의 면상이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말을 이었다.
"여편네가 곧 죽을 것 같은데, 그때까지만 어떻게 안 되겠소?"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사정하는 말이었지만 젊은 원장은 그 고압적인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대학병원 송박사님이 모레부터 오시기로 했습니다. 방이 없네요."
그 말에 정박사는 오장이 뒤틀리는 듯했으나 부릅뜬 눈만 감았다 다시 떴다. 정년을 일 년밖에 남기지 않은 사람을 내쫓으면서 그 정도 배려도 안 해주려는 이따위 더러운 직장엔 그도 별 애착이 없었다. 문제는 죽어가는 아내 앞에서 실직 당한 꼴까지 보여야 하는 난감함이었다.
원장이 앉은 쪽으론 눈길 한번 주지 않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수위실 옆이라도 있게 해 주시오. 한 달만 그렇게 있게 해 주시오. 더는 바라지 않으리다."
결국 그 제의 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박사로선 할 수 있는 온갖 구차한 사정을 다한 셈이었다. 그는 처참하게 일그러진 몰골로 원장실을 나왔다.
진찰실로 돌아온 그는 이를 악다물고 짐을 꾸렸다.
작은 라면박스에 짐이랄 것도 없는 집기들을 챙겨 넣으면서도 도무지 아귀가 맞지 않는다. 마침 그때 윤박사가 문을 열었다. 혼자서도 끙끙대며 어쩔 줄을 모르던 그가 문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윤박사는 소태 씹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는 정박사를 차마 마주 보지도 못했다.
"무능한 인간은 뭘 해도 티가 나네."
정박사는 짐짓 씁쓸한 너스레를 떨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 짐, 니 방에 좀 놓자. 며칠이면 돼. 그래 줄 수 있지?"
어느새 눈시울이 젖은 윤박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요즘 부쩍 눈물이 흔해졌다.
"애들하고 마누라 볼 면목이 안 선다."
평생 몸 바쳐 일한 흔적이 고작 라면박스 두 개를 다 못 채웠다.
정박사는 짐을 챙기다 말고 윤박사를 외면한 채 입을 열었다.
"윤아"
"..."
"집에 말하지 마라."
"네."
윤박사는 이를 악물고 짐을 마저 챙기는 정박사를 몹시 곤혹스런 낯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직장에서 떨려나고 짐까지 챙겼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정박사는 곧 아내가 있는 장박사의 병원으로 향했다. 오늘쯤 아내의 검사 결과가 나올 예정이었다.
"환자가 치료제를 쓰고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치료제가 환자의 몸 안에서 전혀 도움을 못 주고 있단 얘기야. 평범한 사람들 같으면 머리 안 빠지고 구토도 없으니까 좋아라 하겠지만 의사 입장에서 그게 아니지. 너두 알잖아."
장박사는 정박사를 만난 자리에서 항암 치료 중단의 당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내의 증세로 보아 겉으론 멀쩡한 것 같지만 항암 치료가 오히려 역효과를 주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정박사는 점점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심정이었다.
"검사 결과 나왔니?"
"백혈구 수가 많이 떨어졌어."
"그냥 치료 계속해."
"벌써 지시했어. 오늘 저녁부터 치료 중단이야."
그 말에 정박사는 매섭게 장박사를 노려보았다.
"왜 그랬어, 엉? 니 맘대로 누가 그러래?"
"어제 연수 엄마 어지럽다고 해서 갔었어. 약 효과가 나나 했는데, 아니더군. 경미하긴 했지만 치료제 쇼크였어. 이미 위에도 전이가 됐어."
정박사는 더 이상 고집 피워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한숨만 몰아쉬었다.
"괜한 데다 미련 갖지 마. 지금 상태에선 쇼크가 더 무서워. 내일모레쯤 퇴원하도록 해."
정박사는 장박사의 충고를 따르는 수밖에 더 이상의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장박사의 진찰실을 나섰다.
저만치서 딸 연수가 공중전화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으나 그는 미처 보지 못했다.
연수는 회사에다 며칠 특별 휴가를 내고 무작정 어머니의 병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막상 어머니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니 차마 병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연수는 밤새 울어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어제 점심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해 금세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연수는 우선 공중전화 부스로 가 수화기를 들었다.
영석은 자리에 없었다. 그날 하루 결근계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고 여직원이 일러 주었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그의 아파트로 전화를 걸었다.
"그만해, 그만. 전화 받는데 그러면 반칙이야. 저리 가 있어."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깔깔대는 웃음소리. 그는 아이들과 한참 신나게 놀아 주던 중이었는지 전화를 받는 동안에도 간지럼을 타듯 유쾌한 웃음소리를 냈다.
"여보세요?"
"저예요."
"어, 잠깐만 기다려."
갑자기 어색해진 영석의 음성.
'여보, 나 회사에 급한 전화 왔거든? 서재 가서 받을게. 부르지 마.'
아내한테 둘러대는 영석의 음성에 이어 문 닫히는 소리. 방해하지 말아야 할 시간이란 걸 알면서도 연수는 지금 간절하게 그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동안 왜 연락 없었니?"
"걱정했어요?"
"그럼."
"여기 우리 엄마 병원인데 잠깐 나올 수 있어요?"
"어떡하지. 집사람이 왔어."
그는 허둥대고 있다. 그가 전화를 빨리 끊어 주길 바란다는 걸 느끼면서도 연수는 절실하게 매달렸다.
"잠깐이면 돼요."
"미안해, 나갈 수 없어."
"나, 지금 아주 힘들어요."
서재 밖에서 '여보, 식사하세요.' 하는 아내의 음성이 들려오자 그는 약간 짜증을 내는 것 같다.
"집사람 있을 땐 이러지 마. 내가 낼 전화할게."
전화는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끊겨 버렸다.
연수는 단절음만 들려오는 수화기를 한동안 귀에서 떼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병원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16
지지리도 복도 없는 여편네 같으니.
정박사는 병실 안에서 들려오는 처남 근덕의 목소리에 아내가 측은한 생각부터 들었다. 처남이 병원에 누워 있는 제 누나한테 또 돈을 뜯으러 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안 준다고?"
"그래. 못 줘."
근덕의 험악한 목소리에 이어 아내가 조용히 타이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요란하게 접시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박사는 후다닥 뛰어 들어가서 처남의 턱주가리라도 한 방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왜 안 줘. 내 마누라 종처럼 부려먹고, 단돈 백만 원도 못 줘?"
"못 줘!"
"왜 못 줘? 거저 달라는 것도 아니고 개처럼 부린 품삯 달라는데, 왜 못 줘?"
"니놈한텐 일 원 한 푼 못 줘."
"그러는 거 아냐, 돈푼깨나 만지고 산다고, 동생 알기를 된장 항아리에 박힌 짠지 정도로 아나 본데, 벌 받어. 지금 아픈 거, 그거 다 벌 받는 거야. 알기나 알어?"
"당신 그러면 안 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넌 가만히 있어, 쌍년아!"
"내가 무슨 벌을 받어, 이놈아. 내가 뭘 잘못하고 살아서 벌을 받어, 이놈아!"
"나 어리다구 우리 집 재산 빼돌려, 남편 병원 지었지? 그리구선 내가 운수업 좀 한다구 했을 때, 두 사람 어땠어? 단돈 천만 원, 그게 전부였어."
"이놈이 터진 입이라구 하늘이 알고 땅이 알어 이놈아. 아버지 재산 니놈이, 이 사업한다 퍼가고, 저 사업한다고 퍼가고, 밑바닥 똥창까지 박박 긁어 가 퍼 쓰고, 이제 와 누구한테 행패야, 이놈!"
더 듣지 않아도 뻔한 내용이었다.
근덕은 오래전부터 틈만 나면 제 누나를 협박해 왔다. 부모 재산 다 날리고 누나한테 뜯어간 돈으로도 모자라 평생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쳐 사는 위인이었다. 그는 자형이란 자가 한때 병원이라도 짓고 살았던 걸 처가 재산 덕인 줄로만 믿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면 정박사로서도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아내가 시집오자마자 노모한테 구박을 당한 것도 다 그 있지도 않은 처가 재산 때문이었다. 맏딸을 출가시키기도 전에 이미 달랑 집 한 채 남겨 놓고 망해 버린 장인 재산 하나 믿고 노모는 중매를 성사시켰다.
예전에 부자였던 그 한 가지 사실만 믿고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었다. 노모의 기대와는 달리 신부는 오히려 친정 동생 뒷바라지로 평생을 뜯어먹히며 살아왔다. 그나마 집칸이라도 있던 것을 팔아 없앤 뒤부터는 장인 돌아가실 때 제 나이 어렸다는 이유만으로 저렇듯 시도 때도 없이 누나를 닦아세우는 것이었다. 그런 처남을 정박사는 인간 취급도 안 하려 들었다.
"내가 얼마나 써서? 만석지기 재산이 그렇게 쉽게 끝나! 좋아! 나 당신하고 인연 끊은 사람이야. 두말하기 싫어. 내 여편네 데려갈 테니까, 그리 알어! 가, 이년아!"
"형님 아퍼요. 이러지 마! 맨날 신세지다 이제 갚는구만, 당신 이러면 안 돼!"
"신세는 무슨 개뼉따귀 같은 신세를 졌다고 그래, 너?"
"뭐 한다고 천만 원, 뭐 한다고 오백만 원, 번번이 안 그랬어?"
"주둥아리 닥쳐, 따라와!"
의자 넘어지는 소리에 이어서 처남댁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일은 그동안 수도 없이 당한 일이었다.
정박사는 처남을 타일러 보기도 했고, 우격다짐으로 보려고도 했지만, 이젠 피차 서로 보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핏줄이라고 아내가 연연해 하는 걸 보면 울화가 치밀곤 했다. 해서 몇 번 큰소리를 낸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끝내 아내의 마음을 돌려놓진 못했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남매간의 일을 가지고 남편인 그가 나서서 무조건 다잡아 휘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는 그가 근덕에게 냉랭하게 구는 걸 늘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아내는 결코 남편이 끼여들기를 바라지 않을 터였다.
핏줄이란 그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쳐죽일 악인이라 해도 저희들끼리만은 어쩌지 못하고 어르고 보듬어야 할 생래의 의무가 있다. 저희들끼리만 통하는 원시적 보호 본능이 있다. 이래저래 아내의 입장을 생각한답시고 밖에서 속만 끓이고 있던 정박사는 도저히 더 견딜 수가 없어 막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거 갖고, 니 마누라 두고 가."
아내의 가라앉은 음성과 함께 뭔가 바닥에 툭 떨어지는 기척이 들려왔다.
"안 돼요, 그거. 그 돈이 어떤 돈인데, 형님 병원비 낼 거예요. 어서 줘요, 어서!"
처남댁의 울먹이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순식간에 근덕이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왔다.
"또 도박하러 가지, 이 인간아! 손모가지를 잘라 버릴 거야, 내가!"
근덕은 돈 봉투를 뺏기지 않으려 정신없이 뛰쳐나가느라 문밖에 서 있던 자형도 알아보지 못한 눈치였다. 그 몸놀림이 어찌나 날쌘지 정박사는 따라잡을 수도 없었다.
"누굴 닮아 저렇게 염치가 바닥일까. 어떡해요. 고모부 아시면 또 난리 날 텐데."
"설마 그 돈 줬다고 날 죽이겠어, 살리겠어. 으이구, 드런 팔자. 단돈 몇백 제 요량대로 쓰지 못해 벌벌 떨고. 으이구, 치사스런 내 팔자야."
정박사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내는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한쪽에선 공연히 죄 없는 처남댁이 코를 훌쩍이며 어질러진 바닥을 치우던 중이었다. 처남댁은 갑자기 정박사가 들어서자 당황해서 딸국질까지 해대며 수선을 피웠다.
"그래, 병원비를 내줬어?"
잠시 후 근덕댁이 자리를 비켜 준 사이 정박사가 측은한 눈길로 아내를 보며 물었다.
"줬어요. 왜요? 나는 그깟 돈도 내 맘대로 못 써요?"
아내는 전 같으면 불같이 화를 내던 남편의 성격을 의식하고 지레 겁을 먹었던지, 아예 딴전을 피웠다.
"평생 호강은 고사하고라도, 응, 사람이 배를 가르고 누워 있으면 하루 한 번은 몰라도 이틀에 한 번은 들여다라도 봐야지. 어떻게 사람들이 그리 무심해! 딸년을 키우면 뭐할 거고, 아들놈을 키우면 뭐할 거고, 서방이 있으면 뭐할 거야. 나를 어떻게 보겠어, 응? 집 쫓겨난 성질 사나운 중늙은이로밖에 더 보겠어, 나쁜 사람들 그저 날 부려먹을 궁리만 하지. 딴생각은 없는 사람들이라니까."
"듣기 싫어!"
아내의 탄식은 그대로 정박사의 가슴에 와 박히는 비수였다. 그는 무심결에 버럭 소리를 질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엔 아내가 싸움이라도 할 기세로 따지고 들었다.
"소리 더 질러요! 소리 더 질러! 누가 무섭대? 내가 당신한테 이렇게 무심했어 봐. 당신은 아주 멸치 볶듯이 날 볶아댔을걸."
병원에 혼자 있는 동안 무척 속이 상했나 보다.
정박사는 아내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따지고 말고 할 명분도 잃어버렸다. 그는 새색시처럼 뾰로퉁하게 토라져 있는 아내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만해. 그래, 돈은 있어? 낼 모레 퇴원인데."
"살림하는 사람이 그만한 돈 없을까 봐."
아내 음성도 한풀 꺾였다. 그녀는 아마 속으로 근덕에게 돈 뜯긴 일이 무사히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그래 놓고도 며칠은 남편 볼 면목도 없는 여자처럼 기죽어 사는 게 아내의 여린 마음이었다.
"그럼 됐어."
정박사는 부드럽게 아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약 봉지를 가져왔다. 간호사가 건네준 약을 입에 넣으려던 인희씨가 문득 그 알약들을 손바닥에 쏟았다. 그녀는 뭐가 이상한지 알약 수를 일일이 헤아려 보는 것이었다.
"이상하네, 빨간 약이 두 알 안 보이네?"
항암제 빠진 걸 아내가 알아차린 것이다.
"이거 내 약 아닌 것 같네."
"어디 보자."
정박사는 대충 짚이는 게 있었지만 아내가 손을 들고 있는 알약들을 확인해 보았다. 틀림없는 아내 약이다.
"이거 맞아. 당신 거야."
남편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던 인희씨가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도로 의 자에 앉으려는 정박사를 밀쳐 내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바꿔 와야 되겠네. 내 약 아니야, 이거."
"앉아, 어딜 가!"
"빨간 약이 항암제라며? 그게 안 들었는데 어떻게 내 약이야.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그 약을 먹었는데."
"맞아요. 그 약 있었어요."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근덕댁까지 아내 편을 들고 나섰다.
정박사는 일순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매사에 까탈스럽지 않은 편인 아내가 유독 약 문제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걸 보니 문득 가슴 한켠이 아렸다.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나가려는 아내를 잡아끌며 부드럽게 달랬다.
"그 약 당신 약이야. 그거 먹어. 나 의사야. 내 말 믿구, 먹어."
"아니라니까. 간호사들이 정신 없어서 약 잘못 줄 때가 얼마나 많은데 그리구 내가 먹는 약을 내가 제일 잘 알지."
"내가 시켰어."
결국 정박사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는 도무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아내를 향해 차분하게 설명했다.
" 당신 그 약 먹구 어제 힘들었다며? 그래서 내가 주지 말라고 했어."
"미쳤나, 이 양반이? 그럼 그 주사약도 당신이 빼라 그랬어요?"
아내는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온다는 표정이었다. 암 환자가 항암 주사 끊기고 치료 약까지 빼앗겼으니 이게 무슨 병원인가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남편을 짜증스럽게 흘겨보았다.
"아무리 힘들어두 아픈 사람이 약을 먹어야 낫지. 의사란 양반이 도대체 저리 가요, 약 타오게."
인희씨는 이내 복도로 나가 버렸다.
환자가 오래되면 절반은 의사가 된다는데, 지금 아내는 의사보다 더 옳은 말을 하고 있다. 정박사는 뒤통수를 크게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아내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저, 아가씨. 나 알지? 장박사님 환잔데 그 양반이 내가 힘들다고 여태 먹던 약을 뺐다네."
다짜고짜 너스 스테이션으로 달려간 인희씨는 아무나 붙잡고 설득을 시작했다.
간호사들은 서로 영문을 몰라 얼굴만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인희씨의 설명은 확신에 차 있었다.
"왜 그 약 있잖아요? 빨간 캡슐에 든 거. 항암제. 나 그 약 두 알 줘."
"약이 취소됐는데요."
여지껏 한 번도 암이라는 단어를 자기 입에 올리지 않던 인희씨였다. 그런 그녀가 차트판을 뒤적이고 있는 간호사에게 괜하게 미안한 표정까지 떠올리며 말하고 있었다. 인희씨는 약을 주기 전에는 물러날 가세가 아니었다.
"알어, 우리 집 양반하구 장박사 그 양반하구 친군데 나 힘들다구 뺐대. 근데, 나 힘 안 드니까 그 약 줘, 응? 남자들이 괜하게 신경 쓴다구 한다는 짓이 다 그렇지 뭐. 그 중요한 약을 한때라도 거르면 쓰겠어, 줘, 응?"
인희씨의 말은 점점 애원투로 바뀌었다. 그런 인희씨를 보며 난감해하는 간호사 뒤에서 몇몇은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도 했다.
정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그만 가!"
소리 지르는 정박사보다 더 속이 상한 건 인희씨였다. 그녀는 명색이 원장 친구라는 남편이 역성은 들어 주지 못할망정 간호사들 앞에서 무안까지 주는 게 야속했던지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놔요! 정말, 왜 그래? 나는 말야, 한시가 급해 죽겠는데, 당신은 시키지두 않은 괜한 짓을 하구. 정말 늙어갈수록 어째 그렇게 내 속을 썩여요. 하루라도 빨리 나아야 할 거 아냐! 집에 가구 싶다구!"
인희씨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버럭 화를 냈다. 정작 할 말이 없어진 정박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때 마침 수간호사가 지나다 정박사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 왔다. 그녀는 인사를 했는데도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외면하는 정박사의 모습에서 왠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수간호사가 정박사와 환자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어, 수간호사시구나. 우리 집 양반 알지?"
"네, 알죠."
"그 약 있잖아. 빨간 알약, 나 그거 안 받았거든."
"아, 네. 이젠 안 아프세요?"
인희씨는 모처럼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나타나자 기가 사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마치 든든한 백이라도 만난 것처럼 열심히 주변 사람들의 무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수간호사가 대충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 이제 안 아퍼. 그 약 줄 거지?"
"네. 잠시 기다리세요."
수간호사는 선뜻 대답하고는 조제실로 들어갔다. 인희씨는 그 모습을 의기양양하게 쳐다보며 한껏 마음이 놓이는 눈치였다.
잠시 후 수간호사가 조제실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인희씨에게 빨간색 캡슐 두 알을 내밀었다.
"맞죠?"
"맞네. 고마워요."
인희씨는 반색을 하며 그 알약들을 소중히 받아들었다. 이어 그녀는 남편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도도하게 병실로 향했다.
"영양제예요."
아내의 뒷모습을 멍청히 지켜보고 있는 정박사를 향해 수간호사가 다소 민망해 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17
어머니의 퇴원을 하루 앞둔 날 저녁.
연수는 정수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껏 숨겨 왔지만 계속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건 윤박사 말대로 어머니를 위해서나 동생을 위해서나 옳은 일이 아니었다.
"웬일이야, 누나가 나한테 술을 다 사구?"
약속 시간에 맞춰 호프집에 나타난 정수는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누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하나.
정수는 여지껏 어머니가 암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입원을 그저 간단한 산부인과 수술 때문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막내라 그런지 그 정도로도 정수는 꽤 불안해했었다. 그런 동생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충격을 받을까. 연수는 입을 열기도 전에 목이 메었다.
"정수야,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침착하게 들어."
연수는 빈 잔에 술을 채워 주며 동생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데, 그래? 사람 긴장되네."
맥주 한 컵을 단숨에 비운 뒤 정수가 장난스레 물었다.
나이 차이가 세 살 터울밖에 안 됐지만 동생은 아직 막내 티가 역력하다.
연수는 벌써 맥주를 서너 잔 정도 마셨다. 술기운을 빌어서라도 차분하게 말을 이어 보려 했지만 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말해 봐. 누나, 뭐 고민 있어?"
"그런 게 아니구."
"그럼 뭐야? 왜 표정이 그러냐구?"
"정수야."
"엄마 얘기야?"
"응?"
정수 얼굴에서 장난기가 싹 가셨다.
"뭐야, 빨리 말해 봐."
연수는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동생의 시선을 마주 보며 얘기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응?"
누나가 쉽게 입을 못 열자 정수는 이내 침착성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맥주 두 잔을 거푸 마시며 그는 다소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눈길로 연수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연수는 입을 열어야 했다.
"잘 들어, 정수야. 엄마 오래 못 사셔."
"그게, 무슨 말이야?"
연수는 놀란 정수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남을 술을 들이켰다.
"누나!"
"암이야. 그것도 심한, 말기래."
"누나?"
정수가 술잔을 소리 나게 탁자에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누가, 엄마가?"
"응, 엄마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엄마 그거 간단한 수술이라며?"
술잔을 쥔 정수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
연수는 정수의 손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도 그런 줄 알았어, 정수야. 아버지가 처음 내게 엄마 얘길 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심각한 줄은 몰랐어."
"그런데?"
"우리들 걱정할까 봐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신 거야."
"그런데?"
"그런데 엄마는 암이었고 심각하셔."
갑자기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정수가 벌떡 일어섰다.
"누가 그래, 엄마가 왜 죽어!"
주위 사람들이 두 남매를 힐끗 쳐다보았다.
정수는 주변의 눈길 따윈 무시한 채 악을 써대기 시작했다.
"넌 언제부터 안 거야? 누난 언제부터 안 거냐구! 나만 나만 모른 거야?"
연수는 말없이 술잔만 응시하고 있었다.
정수의 음성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런 거야?"
"엄마두 몰라."
연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정수는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정수야, 정수야!"
다급해진 연수는 무작정 뛰어나가는 정수를 뒤따라가 허리를 잡고 매달렸다.
정수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연수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러면 안 돼, 정수야. 엄마 생각해서라도 이러지 마."
"놔!"
"이러라고 너한테 말한 거 아냐, 정수야!"
정수가 뒤에서 껴안고 있는 누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누나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댔다.
"넌 내 맘 몰라. 누난 재수도 안 하구, 일류 대학 나오구, 취직도 해서 엄마 용돈도 줘 보구, 다 했지? 누난 다 해봤지? 난 뭐야. 난 아무것도 못 했잖아. 아무것도 해준 게 없잖아. 공부한답시고 별 지랄 같은 유세 다 떨고, 맨날 술 처먹는 꼴만 보여 줬잖아."
울먹이며 겨우겨우 말을 이어가던 정수는 마침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가 누나의 어깨를 뿌리치며 외쳤다.
"난 이대로 못 보내! 누난 보낼 수 있어도, 난 못 보내!"
"이러지 마, 정수야!"
연수는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정수를 붙잡고 늘어지며 애원했다.
"놔!"
누나의 애원도 통하지 않았다. 정수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사코 돌리며 몸부림쳤다.
연수는 차라리 동생을 대신해서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러지 말자, 정수야. 이러지 말자."
"이거 놔!"
"더 이상 엄마를 힘들게 하지 말자, 우리!"
연수는 정수를 으스러져라 끌어안으며 절규했다.
이윽고 정수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왜, 왜 우리 엄마가 죽어야 한대, 왜?"
연수는 땅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울부짖는 정수를 끌어안은 채 이를 악물었다. 정수의 어깨 너머로 푸른 가로등이 을씨년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신경 쓸 거, 안 쓸 거 분간도 못 하면서. 밉살맞은 영감태기, 마누라 병문안 오면서 그 흔한 주스 한 병 안 사 오고. 내 기운만 차려 봐라. 한번 호되게 들었다 놓을 테니까."
이튿날, 인희씨는 잔뜩 골이 나서 투덜거리며 퇴원을 했다. 비록 입으론 불평을 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게 그래도 꽤 흡족한 모양인지 얼마쯤 기가 살아 있었다. 근덕댁과 연수의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인희씨는 간간이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곤 했다. 정박사는 지금 집에서 노모를 돌보고 있을 터였다.
인희씨가 집에 돌아오자 가장 반긴 사람은 다름아닌 상주댁이었다. 상주댁은 그 동안 며느리가 도망간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런 며느리가 난데없이 돌아오자 상주댁은 괜하게 달뜬 얼굴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인희씨는 그런 시어머니와 놀아 줄 기운도 없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나쁜 년! 이번에 또 도망가면, 내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버릴 테다!"
상주댁은 며느리가 잠들어 있는 안방 문 앞을 단단히 지키고 앉아 눈빛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며느리가 야속하면서도 이렇게 돌아와 준 게 몹시 반가웠던지 성을 내는 눈빛에 얼마쯤 안도의 기색이 서려 있었다.
정박사는 그런 노모의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집을 나섰다. 아내가 그토록 소망하던 일산 새집이 완공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는 길이었다. 정박사는 연수의 차를 얻어 타고 버스 정류장까지 갔다. 연수는 정박사를 내려놓고 곧 회사로 돌아갔다.
일산행 버스 안에서 정박사는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공사현장에도 찾아가 보지 않은 남편을 대신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을 아내를 생각하면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공들여 지은 집에서 살아 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아야 할 운명이란 걸 그녀가 도대체 상상이나 했겠는가. 몇 년만, 딱 몇 년만, 아니 딱 몇 달만이라도 아내와 그 새집에서 살아 볼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정박사는 그대로 아내와 함께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정박사는 현장 소장의 안내로 새집을 둘러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잘 나왔습니다. 워낙 찬찬하게 챙기시는 분이시라 저희가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더군요."
현장 소장이 입에 발린 공치사를 늘어놓는 것 같진 않았다. 집 안팎 곳곳에 아내의 극성맞은 잔소리가 배어 있는 듯 모든 게 안주인의 취향 그대로였다.
집 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 창틀이며 바닥 공사에 이르기까지 허술하게 처리된 곳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실내는 가구 하나 없이 썰렁했지만 그런대로 잘 정돈된 모습이었다.
정박사는 텅 빈 거실을 가로질러 화장실 문을 열어 보았다. 정갈하게 깔아놓은 타일 바닥 색깔에 맞춰 욕조며 세면대 색상도 아내가 직접 고른 것이었다. 곧이어 그는 안방 문을 열어 보았다.
새집 지으면 안방 창 쪽으로 커다란 베란다를 만들 거예요. 그곳에 꽃도 심고, 작은 테이블도 하나 들여놓을 거야. 당신이랑 가끔 차도 마시고 꽃도 볼 겸. 아침 저녁으로 해도 보고, 달도 보고.
아내 말대로 널따란 베란다가 만들어져 있었다.
정박사는 그 앞에 가서 한동안 굳은 듯 서 있었다. 시야가 확트인 베란다 밖으로 커다란 호수가 내려다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이 창가에 서서 그녀는 몹시 설레이는 마음으로 미래를 설계했을 것이다. 새로운 날, 새로운 시간들을 꿈꾸며 행복해 했을 것이다. 그녀는 종종 새집 이야기를 했다. 새집으로 이사 가면 더 이상 욕심부리지 말고 변두리 보통 늙은이로 소박하게 옛이야기나 하며 살아가자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런데.
부부가 나란히 저 호수를 내려다보며 도란도란 지난 얘기나 하며 살길 바랐던 그녀의 소박한 꿈은 이제 가망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정박사는 문득 그 꿈을 이루지 못하는 아픔이 아내만큼 자신에게도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내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이 방에 홀로 남아 저 호수를 내려다봐야 할 자신의 신세도 처량하게 그지없었다.
아내가 없으면 그림 같은 새집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썰렁한 공간만큼이나 처량해질 자신의 앞날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집 바깥 여기저기에 공사가 끝나면서 미처 거둬 내지 못한 자재 부스러기와 쓰레기들이 굴러다닌다. 아내가 저 모습을 본다면 분명 눈살을 찌푸릴 터였다.
정박사는 이내 밖으로 나가 그것들을 하나하나 골라 한쪽에 치워 놓았다. 얼마 안 돼 보였는데 막상 일을 벌여 놓고 보니 만만치가 않았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가는데 쓰레기는 아무리 치워도 끝이 없었다. 그는 웃옷을 벗어 붙인 채 열심히 돌덩이, 자재 부스러기, 쓰레기들을 치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다 보니 육체적으로 힘이 들어도 마음이 뿌듯해졌다.
앞으로 한 달은, 아니 일주일은, 하루는 이곳에서 살 수 있겠지. 쓰레기 더미를 다 치우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선 그는, 이번엔 비와 걸레를 집어 들었다. 아내를 위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여태껏 여자들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던 집안청소를 해주는 일이었다.
그는 나중에 사람을 시켜도 될 일이라며 만류하는 현장 소장을 돌려보낸 뒤 화장실 청소까지 마저 해치웠다. 늘 화장실 바닥이며 벽면 여기저기 할 것 없이 비누 거품을 묻힌 솔로 박박 문질러 닦던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는 평생 안 해 보이던 일을 있는 성의껏 흉내 내고 있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대충 청소가 끝나자 집 안이 그만하게 깨끗해졌다. 화장실 타일도 반들반들 윤이 났고, 욕조며 세면대도 말끔했다. 정박사는 말끔해진 화장실에 선 채 가만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기 초로의 한 사내가 어색하게 담겨 있었다. 한동안 거울을 들여다보던 그는 문득 아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인희야."
얼마 만에 불러보는 아내 이름인가.
거울 속의 사내가, 그리고 울고 있었다.
"죽지 마, 인희야."
사내는 거울 속에 담긴 사내를 마주 보다 이내 고개를 꺾었다. 타일 바닥으로 한두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 대문을 들어서던 정박사는 마당 한구석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아들과 마주쳤다.
"아버지, 저 술 좀 사주세요."
정수는 이미 술이 거나하게 오른 모습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눈가에 얼핏 물기가 어렸다.
정박사는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아래 포장마차에 가 있어라. 내 곧 가마."
정수는 말없이 대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비틀거리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정박사의 표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부자가 무슨 비밀 얘기가 있어서 밖에서 만난대?"
집에 오기 무섭게 또 나갈 채비를 하는 남편을 인희씨는 힘없이 바라보고 있다.
정박사는 그녀가 이미 심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벽에 기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도 병색이 완연하게 느껴졌다.
" 어째, 나 자꾸 아프네. 여보, 다리며 팔이며 온몸에 괜한 멍이 자꾸 들구."
군데군데 퍼렇게 멍이 든 다리를 내보이며 아내가 애처로운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봐, 부딪힌 데두 없는데."
정박사는 아내가 겁먹을까 두려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진통제 먹어."
"먹어두 그래."
아내는 고통을 호소하기가 미안한지 고개를 떨군 채 손으로 방바닥을 문질러대고 있다.
정박사는 애써 그 모습을 외면하며 달래듯 말을 이었다.
"이따가 주사 맞자. 먹는 것보단 맞는 게 빨라. 금방 나갔다 올게."
그는 아파도 엄살 한번 못해 보고 속으로 끙끙 앓을 게 뻔한 아내를 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죽을 때 죽더라고 고통이나 느끼지 못하면 마음이 덜 아플 것 같았다.
불행하게도 암이라는 몹쓸 병은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를 쥐어짜며 죽음에 이르게 한다. 환자가 틀어쥐고 있는 자기 목숨을 순순히 내놓을 때까지 결코 그 지독한 공격을 늦추지 않는 게 암세포라는 악마의 실체인 것이다.
정박사는 극심한 무력감으로 다시 집을 나서야만 했다. 그는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포장마차를 향해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부자지간에 난생처음 가져보는 술자리였다. 정박사가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얼마쯤 시간이 흘렀다. 부자는 그동안 어색한 모양새로 서로 술을 따르고 받고 하며 두어 잔씩 마셨다.
"아버지, 엄마 말이에요."
이윽고 정수가 퉁퉁 부은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정박사는 묵묵히 그 눈을 응시했다.
"아버지, 엄마가 제 대학 발표날까지만이라도 살게 해주실 순 없어요?"
대학 합격자 발표가 나려면 아직 달포는 더 기다려야 한다. 정박사로선 장담할 수 없는 기간이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아들 앞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꺾고 말았다.
"아버진 의사시잖아요. 안 되면 그래요, 식물인간 상태로라도 숨만 끊어지지 않게 해주세요. 저 아버지 닮아 별루 욕심 없는 거 아시죠. 발표 날까지만, 그때까지만 어떻게 해주세요."
정박사는 아들의 어떤 청에도 딱 부러지게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한 듯 정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저요, 딱 한 번만이라도 엄말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요. 이대로 돌아가시면요, 저 엄마 땅에 안 묻을 거예요."
정박사는 차마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 이번엔 자신 있어요."
정수가 이번에는 단언하듯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대학 들어갈 자신 있어요. 지난번처럼 거짓말 아니에요. 이번엔 확실해요. 지난번 그 대학 커트라인 봤는데, 그것보다 제 점수가 20점이나 더 나왔어요. 아버진 제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안 믿으시지만, 이번엔 진짜예요."
"그래."
"정말이에요."
"믿는다."
정박사는 격앙되어 호소하듯 말하는 아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곧이어 정수가 고개를 떨구며 말을 이었다.
"저, 대학 가면 아르바이트 할 거예요."
정수는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울먹이기 시작했다.
"술도 안 마시구, 공부두 열심히 할 거라구요. 장학금 받아 학교 다닐 자신 있어요."
정박사는 아들의 기특한 결심에 고개를 끄덕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정수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아버지의 태도가 영 불안하기만 했다. 정수는 다시 다급한 목소리로 사정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정수야."
"아버지, 전 엄말 이렇게 보내 드릴 수가 없어요. 너무 미안해서, 미안해서 안 돼요. 이렇게는 안 돼요. 미안해서, 죄송해서 안 돼요."
정박사는 서럽게 흐느껴 우는 아들의 머리를 가슴으로 와락 끌어안았다. 내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끝없이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정박사는 애써 삼키고 있었다.
18
정박사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그는 병원을 그만뒀다는 사실을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때맞춰 출근했다 돌아오는 그를 실직자라고 의심할 만큼 정신적으로 여유 있는 식구들도 없었다.
연수는 다시 며칠 휴가를 내어 집안 일을 거들고 있었다. 어머니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안 이후로는 정수도 가급적 외출을 삼간 채 집에서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아침에 병원으로 출근한 것처럼 나간 정박사는 하루 세 차례씩 꼬박꼬박 전화를 걸어 아내의 상태를 체크하곤 했다.
겉보기엔 평온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었다. 한낮이면 상주댁은 으레 소파에서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낮잠을 자고, 인희씨는 그 옆에서 오도카니 앉아 연수가 집안일 거드는 걸 대견한 듯 바라보았다. 그럴 때 정수는 주방 식탁이나 거실 창가쯤에서 애처로운 눈길로 인희씨를 훔쳐보곤 했다. 인희씨는 기력이 떨어지긴 했으나 식구들 앞에서 표나게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은 느슨한 가운데 평온한 집안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낮에 장독대로 나갔던 근덕댁이 호들갑을 떨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머머, 웃기네, 웃겨!"
거실에서 다림질을 하고 있던 연수는 외숙모가 워낙 수다스러워 그러려니 여기며 그대로 하던 일에 열중했다. 어머니가 하던 일을 맡아 하다 보니 연수는 새삼 집안 일에 대해 알아지는 게 있었다. 어머니 혼자서 언제 이 많은 일을 다 했나 싶을 정도로 빨래는 매일매일 쏟아져 나왔다. 잠시만 틈을 두면 설거지 그릇이 한가득 생겼고, 한 끼 한 끼 음식 장만하는 일도 보통 성가신 게 아니었다. 오늘 하루 다림질을 해 놓아야 할 옷만 해도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어머머! 안주인이 아프면 장맛부터 변한다더니, 이 한겨울에 글쎄 고추장이며 된장이며, 독한 간장까지 옴팡 하얗게 곰팡이가 일구 말라붙은 구데기가 버글버글한 게 난리두 아니에요, 형님!"
그 소리에 인희씨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근덕댁이 퍼 온 고추장 그릇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말이야, 그게?"
"이거 보세요. 내가 골라내구 골라내구 해서 퍼 온 건데, 맛이 완전히 갔어요."
인희씨는 근덕댁이 호들갑을 떨며 내미는 고추장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았다. 고추장 그릇을 받아든 인희씨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세상에, 세상에. 이게 웬일이야! 삼십여 년 동안 장 담그며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병원 가기 전에두 멀쩡했는데. 뭔 일이래, 이게?"
인희씨는 속상해서 혀를 끌끌 차며 장독대로 향했다.
연수는 어머니의 뒷모습만 씁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픈 사람 앞에 놓고 주책없이 호들갑 떠는 외숙모를 탓하기보다는 그 속된 미신을 차라리 무시해버리지 못하는 어머니가 더 가여웠다.
연수는 주방 식탁에 앉아 있다 굳은 표정으로 제 방으로 올라가는 정수를 의식하며 묵묵히 다림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서리처럼 곰팡이가 하얗게 주저앉았어요, 형님. 정말이에요."
고추장 그릇을 탁자에 놓고 뒤쫓아온 근덕댁이 조심성 없이 내뱉는 말엔 대꾸도 않고 인희씨는 먼저 된장독 뚜껑을 열었다.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새하얀 장독 안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대번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고추장 독을 열어 보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형님, 혹시 몸이 더 나빠지실 거 아녜요? 안주인이 아프면 펄펄 끓던 장도 순식간에 식는다는데."
근덕댁의 속없는 말 한마디에 인희씨는 잠시 멀미를 느낀 듯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연수는 뒤에서 몰래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인희씨는 무슨 불길한 징조라도 대하듯 장독 앞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정말 희한한 일이죠, 형님?"
근덕댁의 입방정은 거실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다.
연수는 못 들은 척 빨랫감을 챙겨 들고 안방으로 향했다. 뒤에서 인희씨가 그녀를 불렀다.
"연수야, 아버지 건 놔둬. 엄마가 할게."
"오늘은 제가 할게요."
안방에 들어와 보니 이부자리도 그대로였다. 연수는 먼저 이불부터 개서 장에 넣은 다음 작은 요와 이불을 꺼냈다. 어머니가 눕기 편하도록 한쪽에 이불을 깔아놓은 다음, 그녀는 옷장 문을 열었다.
처음으로 눈여겨보는 어머니의 옷장. 순간 그녀는 아찔한 충격으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듯하게 다려진 형태로 켜켜이 쌓여 있는 아버지의 와이셔츠, 장롱 옷걸이엔 역시 나름대로 모양을 내서 걸어둔 옷가지들.
연수는 천천히 아랫서랍을 열어 보았다. 칸마다 아버지의 속옷이며 양말, 손수건 등이 눈이 부시도록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꼼꼼하고 정성스런 모양새. 연수는 완벽하게 정돈되어있는 서랍 안이 무척 낯익었다.
문짝에 나란히 매달려 있는 예닐곱 개의 넥타이 가운데 몇 개는 매듭이 매어져 있다. 거기까지 보고 난 후 그녀는 마침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머니의 방에도 그 여자가, 사진 속의 그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날 저녁 또다시 영석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동안 연수는 적당히 핑계를 대어 그를 피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그녀가 만나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자 예전에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영석이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집 앞에까지 와서 클랙슨을 울렸다. 어쨌거나 연수는 그를 언젠가는 한 번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석은 말없이 한강변으로 차를 몰았다. 겨울 저녁의 한강은 무척이나 을씨년스러웠다.
영석의 승용차가 한강변에 멎었을 때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안 좋으신지 정말 몰랐다. 알았다면 그날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갔을 거야."
굳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던 영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그의 담배 연기는 더 이상 푸르지 않다.
" 우리 이제 그만 만나요."
영석의 눈빛이 곤혹스럽게 흔들리고 있다.
연수는 어둠 저편으로 길게 누운 강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시선을 거둬 영석을 보며 말을 이었다.
"매 끼니마다 나랑 같이 밥 먹을 수 있어요? 내가 사준 넥타이 떳떳하게 맬 수 있나요? 컴컴한 비상구 말구 딴 데서 날 안을 수 있어요? 사람 많은 곳에서 두리번거리지 않고 나랑 나란히 서서 갈 수 있어요? 그럴 수 있어요?"
남몰래 품어 온 욕심, 그 불문율의 금기사항을 그녀가 한 가지씩 토해내고 있다. 그녀는 별로 떨리지도, 울음을 섞이지도 않은 단조로운 음성으로 덧붙였다.
"사랑에도 공식이 있다는 걸 오늘 알았어요. 처녀는 총각을 만날 것, 유부남은 가정만 알 것."
영석의 고개가 힘없이 기울어졌다. 조용히 그를 바라보는 연수의 눈가에 한 방울 이슬이 맺혔다.
"오늘 내 어머니한테서 당신 부인을 보았어요. 나, 잘 살게요. 좋은 남자 만나 우리 엄마처럼, 당신 부인처럼 착하게 살 거예요.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할 거예요. 내 남자는 잠버릇이 이렇더라, 나 없이는 양말 한 짝 못 찾아 신고, 세수를 할 때면 옷이 앞섶까지 젖더라, 난 그런 남자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보고 싶더라."
영석은 그녀가 주문처럼 되뇌이는 말을 한마디씩 아프게 새긴다. 그는 한숨을 내쉬듯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가 다시금 한숨을 들이쉬듯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
"널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걸."
끝내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모습으로 어렵게 입을 여는 영석을 향해 연수는 시린 가슴으로나마 따뜻하게 웃어 주었다. 그녀는 이제 그를 웃으며 보내 줄 수 있다.
"우리 인연이 이것밖에 되지 않았어요."
십이월. 어디선가 아직 잎이 남아 있는 나무들이 바람에 몸을 뒤채고 있었다.
연수는 강물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서로 마주보지 않고 작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저 어둠처럼 자꾸 가라앉으려는 마음을 애써 다독거렸다.
십 년이나 이십 년쯤 세월이 지나면 두 사람 다 오늘 이 강가에 오길 잘했다고, 그게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리라.
한때는 우리 서로 사랑했으리. 비록 온전한 이름은 얻지 못했으되 그 한 조각 사랑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을 청춘의 한때를 위하여 연수는 기꺼이 오늘의 아픈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연수는 그렇게 청춘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중이었다. 스물네 살, 그 어줍은 첫사랑의.
19
예년보다 조금 늦게 첫눈이 내렸고, 인희씨의 본격적인 통증이 시작되었다.
초저녁부터 속이 거북하다며 힘들어 하던 인희씨는 한밤중에 화장실로 기어가다시피 했다. 구토가 시작된 것이다. 그 시간에 식구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좌변기에 매달려 처음 헛구역질을 해대던 인희씨는 배 아래 쪽에서 목구멍으로 치받쳐 오르는 통증과 함께 쓴물을 쏟아냈다. 수술이 끝났고 항암제도 꾸준히 먹어 이제 별탈 없으리라 믿었던 인희씨는 헛구역질 끝에 올라오는 노란 토사물을 보고 와락 겁을 먹었다.
"여보!"
신음하는 인희씨의 입가에 피가 번지고 있었다.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힘없이 달싹거리는 입술 사이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인희씨는 아직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구토와 더불어 온몸을 관통하는 한기. 그것만으로도 인희씨의 공포는 통증의 고통 이상이었다.
"여보!"
안방에서 자고 있던 정박사가 눈을 뜬 것은 새벽 두 시경이었다. 그는 어디선가 나지막이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얼핏 잠에서 깨어났다.
"여보."
숨이 끊어질 듯 잦아드는 아내의 신음소리.
정박사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내는 보이지 않는다. 소리가 나는 쪽은 화장실 방향이었다. 그는 후다닥 방문을 열고 화장실로 향했다.
주저앉아 몸을 숙인 채 등을 보이고 있는 아내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정박사는 섬찟한 예감으로 잠시 감전된 듯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이내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아내의 몸을 돌려 일으켜 세웠다. 아내의 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괜찮아?"
정박사가 떨리는 손길로 아내의 뺨을 어루만지려 할 때였다.
쓰러질 듯 몸을 휘청이던 그녀가 '억' 하는 소리와 함께 핏덩이를 토했다. 순식간에 사방으로 튄 핏물이 정박사의 손과 옷을 붉게 물들였다.
"여보!"
정박사는 마침내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남편의 가슴에 묻고 아내가 묻는다.
"여보, 나 왜 이래, 수술했는데 나 왜 이래? 여보."
아내는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고 있다.
정박사는 아내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등을 쓸어 주었다. 이 여자의 마음이, 몸이 이렇게 떨리는데도 자신이 지금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등을 쓰다듬어 주는 일밖엔 없었다. 그러나 이 연약한 여자의 몸뚱아리를 갉아먹고 있는 고통은 그가 손바닥으로 어루만져 준다고 해서 덜어지는 게 결코 아니었다.
"여보, 나 왜 이래?"
아내는 발을 동동 구르며 본능적으로 구원을 청하고 있다.
정박사는 차라리 눈을 감은 채 이를 악물어야 했다. 아내의 눈빛에 서린 공포를 차마 볼 수가 없다.
아내여! 내가 그 아픔을 대신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정박사는 이 여자를 위해서라면 그 고통의 배의 배라도 대신 감내할 용의가 있었다.
아내는 바닥에 흥건한 피를 보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놀라움과 공포로 뒤범벅이 된 아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정박사는 아내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 죽나 봐, 그치! 여보, 안 낫나 봐, 그치?"
인희씨는 한사코 고개를 들어 남편의 눈을 보려 한다. 그런 아내의 눈을 남편은 또 한사코 외면하고 있다.
"여보, 나 왜 이러니? 나 아퍼, 여보."
헛구역질에 놀라고, 으스스 휘몰아치는 한기에 놀라고, 입술 사이로 꾸역꾸역 쏟아져 내리는 핏덩어리에 놀란 아내가 이번엔 거울을 보고 넋이 나갔다.
"된장 고추장이 다 썩었던데 나 죽지? 나 죽는 거지?"
마침내 그녀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늙은 여자의 절규가 적막에 싸여 있는 집 안을 친친 감고 울려 퍼졌다. 그 바람에 자고 있던 두 남매가 각자 방에서 뛰쳐나와 아래층으로 달려왔다.
"엄마!"
"정수야!"
인희씨는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정수는 아버지 품에 안겨 울부짖던 어머니가 고개를 드는 순간 와락 달려들어 그 얼굴 넋 나간 듯 더듬어 보았다. 손가락 마디마디 핏물이 묻어나고 있었다.
정수는 겁에 질린 채 어머니를 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연수는 어머니를 안은 채 짐승처럼 목울음을 토해내는 아버지와 넋 나간 듯 울부짖고 있는 정수 뒤에 그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눈물은 이제부터 시작될 고통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밖에서는 여전히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은 영원히 죽지도, 새로 태어나지도 않는다. 내리는 눈은 늘 첫눈이다. 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첫눈뿐이라고 어떤 시인이 말했던가. 사람의 인생도 이와 같을 수만 있다면.
20
인희씨는 서서히 자신의 목을 조여오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
아무도 그녀에게 죽음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본 죽음의 그림자는, 그녀의 목숨이 본능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낮에 정원 의자에 앉아 잠시 잠깐 인색하게 내리쬐는 겨울 햇빛을 쏘이고 있자면, 인희씨는 시시각각 흐려 오는 제 목숨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깊은 밤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에도 먼 데서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했다.
처음 그것은 징그럽고 불유쾌한 유혹이었다. 보지 않으려 해도 눈에 들어오는 손짓. 듣지 않으려 귀를 막아도 그것은 은밀한 속삭임으로, 역한 기운으로, 혹은 거부할 수 없는 몸짓으로 이미 그녀 곁에 와 있었다.
손으로도 그것을 만질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컥컥 숨이 막혀 와 정신 없이 화장실로 달려가면 이윽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붉은 피! 온몸을 찢어발길 듯 엄습하는 잦은 통증. 전생을 되짚어 통틀어도 이렇게 심하게 아픈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순간순간 만져지는 모든 것들이 이미 그녀를 이승에서 저 강 너머로 밀어내고 있었다.
추적추적 겨울비라도 내리는 밤이면 검은 망토를 걸친 사내가 창가에 와서 똑똑 문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사방에서 죽음은 어서 오라 손짓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아직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리하여 매일 반복되는 엄청난 통증과 악몽이 밤낮으로 그녀의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하루 종일 미동도 없이 꼬박 창가에 앉아 정성 들여 가꾼 화분들을 들여다보고 난 어느 날이었다.
뿌리가 잘린 꽃처럼 점점 시들어가는 인희씨의 얼굴에 모처럼 단아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오랜 세월 객지를 떠돌다 이제 마악 집에 도착한 여인처럼, 인희씨는 그립고 사무치는 눈빛으로 집 안 구석구석을 오래도록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안방으로 향했다. 느릿느릿, 전혀 서두르지도 않는 걸음이었다.
방 안에서 그녀가 맨 처음으로 눈여겨본 것은 시집올 때 가져온 자개장롱이었다. 세월의 더께로 인해 이미 날고 초라해진 장롱은 그래도 안방에선 가장 귀하고 소중한 물건이었다.
새집으로 이사 가면 바꾸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냥 가져가는 게 좋지 싶다. 내가 죽더라도 저 장롱이나마 남아서. 그러다 문득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이젠 내 몫이 아니다. 산 자의 인생이고 산 자의 몫이다. 저 자개장롱이든 무엇이든 남은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새집 안방에 다시 틀고 앉든 말든, 내 죽은 육신 태울 불쏘시개가 되든 말든.
그녀는 장롱한테 미안한 생각마저 들어 한참 눈을 떼지 못한다.
서랍 안에는 삼십 년 동안 살 비비며 살아온 남편의 옷가지들. 살다 보니 그것들이 남편의 체온보다 더 자주 그녀의 손길을 타곤 했다.
젊어서는 왠지 손님처럼 어렵고 낯설기만 하던 남편이었기에 속상한 일이 있어도 말도 못 하고 야속한 심사를 옷가지에 대고 넋두리하던 날이 많았다.
다듬이 방망이로 빨랫감들을 두들겨가며, 조물조물 양말짝들을 주물러가며, 때 낀 와이셔츠를 솔로 박박 문질러가며 속으로 얼마나 많은 푸념들을 늘어놓았던가.
그 아슴한 세월의 저편 어딘가 아직도 빨랫줄에 걸려 펄럭이고 있을 젊은 날의 고단한 기억들.
인희씨는 이제 그 기억들이 하나도 아프지 않다. 흘러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슬프고 아름다운, 그래서 그저 한 번쯤은 다시 돌아가도 좋을 추억만이 그녀를 목 메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갑 속에는 힘들었지만 보람도 적지 않았던 살림의 기록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치 그녀의 보물창고 같은 것이다. 삼십 년 동안 꼼꼼히 적은 가계부만 해도 수십 권. 어떤 것은 너무 낡아서 귀퉁이가 헤진 것도 있지만, 한 집안의 역사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 안쪽은 대부분 멀쩡한 상태였다.
남편한테 첫 월급을 받아본 게 언제였더라. 처음 몇 권을 들춰 보아도 목돈을 받아쓴 기록은 나와 있지 않다. 시댁 식구들 제사며, 생신, 챙겨야 할 경조사 따위들로만 대부분 채워진 가계부들이 거의 열 권 남짓이나 되었다.
며느리가 들어온 지 십 년이 지나도록 시어머니는 경제권을 넘겨주지 않았다. 그런 시어머니한테 남편의 월급을 쪼개 받으며 살아야 했던 세월의 흔적이 거기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외 드문드문 차입금이 적혀 있거나 지불해야 할 이자에 대한 기록. 알푼달푼 모아 적금 탄 일, 시어머니 환갑 잔치 해드린 일, 시아버지 묘소에 상석 세운 일, 연수 치아 교정해 준 일, 정수 간염 치료한 일, 집들이 음식 장만한 일, 도배 새로 한 일, 남편 양복 맞춰 입히고 연수 입학식 간 일, 은행에서 대출받은 일. 그런 소소한 기록들이 담겨 있는 가계부는 그 전 것들보다 몇 배 더 반들반들 귀가 닳아 있다. 거기서부터가 직접 살림을 맡아 살아온 세월이었다.
인희씨는 방바닥에 가계부며 통장, 잡다한 서류들을 다 꺼내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그중 몇 가지를 챙겨 문갑 속에 따로 보관해 놓고 남은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형님, 뭘 그렇게 들여다보고 계세요?"
근덕댁이 문을 빼꼼 열고 들어왔다.
계속되는 병간호에 지치기도 했으련만 그녀는 항상 다람쥐처럼 손발이 빠르고 호기심도 많다.
인희씨는 요 며칠 그녀가 남몰래 화장실에서 찔찔 짜곤 한다는 걸 눈치로 알고 있다. 천성이 쾌활하다 보니 우거지상으로 지내는 날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요즘 들어 시누이 걱정으로 몹시 풀이 죽어 있는 건 사실이다. 어디 시누이 걱정뿐이랴. 팔불출이 제 남편 때문에 속도 어지간히 썩어 지낼 터였다.
"마침 잘 왔다. 이리와 앉아."
근덕댁이 막상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면서도 앉으라는 말에는 쭈뼛거리며 눈치를 본다. 누가 정색을 하는 데에는 영 익숙해지지 않는 주변머리가 그녀를 자꾸 어리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희씨는 그런 올케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반쯤 접은 노란 봉투를 하나 건네주었다.
"이거 가지고 집에 가."
"왜요? 제가 뭘 잘못했어요?"
한사코 그 봉투를 받지 않으려 손사래를 치면서 근덕댁은 울상을 지었다. 시누이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해서 자신을 내보내려는 줄 착각한 것이다.
인희씨는 근덕댁이 질색을 하는 이유를 훤히 꿰뚫고 타이르듯 입을 열었다.
"근덕이 놔두구 여기서 살 거야?"
"요즘은 들어오지두 않아요."
"집에 가. 밀린 일이 태산일 텐데."
그 말엔 근덕댁도 더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사실 그녀도 집 걱정으로 심란할 때가 있긴 했던 것이다.
대신 근덕댁이 시누이가 내민 봉투를 슬그머니 앞쪽으로 밀어 놓았다.
"간호사라면 싫어요."
"나 돈 없어. 돈 아니야. 뭔지는 집에 가서 보구, 어여 가지구 가."
"제가 있으면 밥이라두 하는데."
근덕댁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워낙 정이 많은 데다 친언니처럼 따르던 시누이를 병석에 두고 가려니 마음이 아픈 것이다.
인희씨로서는 그 모든 걸 이해하기 때문에 더더욱 올케를 돌려보내야만 했다.
"나, 연수가 지어 주는 밥 먹을래."
"형님 옆에 있고 싶은데."
"귀찮어. 내 옆에 사람 많어."
근덕댁은 자꾸 운다.
조심성 없이 함부로 지껄이고, 시도때도 없이 눈물도 많고, 거꾸로 웃기도 잘하는 푼수데기였지만 속정은 무척 깊은 여자였다.
인희씨는 착한 올케를 촉촉한 눈길로 바라보며 마지막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꼭 우리 근덕이 옆에 있어. 그놈이 뭐라고 해도 어디 가지 말구, 꼭 옆에 있어. 제 놈이 지금 힘이 넘쳐 꽥꽥대긴 해두 늙어 봐. 올케한테 미안한 거 알구 잘할걸. 어머니 일찍 돌아가시구 내가 업어 키운 애야. 걔가 부모 일찍 여의고 정을 못 받고 자라 그렇지, 본성은 나쁜 애가 아니야."
" 아, 알아요."
"울지 마, 다 큰 사람이."
인희씨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올케 손에 다시 노란 봉투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이거, 근덕이 하고 올케만 아는 거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근덕댁이 영문을 몰라 두 눈을 꿈벅거렸다.
인희씨는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더 늦기 전에 어여 가. 나 피곤해서 눕고 싶어."
인희씨가 손짓을 하자 근덕댁은 석연찮은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그녀가 방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한동안 시선을 거두지 못하던 인희씨는 조용히 쓰러지듯 방바닥에 누웠다.
어디선가 그 알 수 없는 속삭임이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땅속 깊은 곳에선 듯 하늘 밖에선 듯 아련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는 분명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부르고 있었다.
인희씨는 이제 그 소리가 무섭지 않다. 오래된 친구처럼 친밀하게도 느껴진다. 죽음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그녀의 동반자였다
21
모처럼 재수 좋은 날이다.
근덕은 두둑해진 주머니를 한 번 만져 보고는 입이 째져라 호탕하게 웃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밤중에 웬 미친놈이 저러나 수상한 눈길로 힐끔거렸다. 그게 뭐 대수냐, 내 기분이 좋으면 장땡이지.
근덕은 휘파람까지 휙휙 불어제치며 산동네 가파른 골목길을 한달음에 오르는 중이었다.
노름판에서 돈을 따보기는 몇 개월 만에 처음이었다.
그동안 갖다 바친 돈만 해도 얼마였던가. 까짓 잃은 돈이야 술 먹고 없앴다고 생각하면 그만이고, 이제 목돈도 들어왔으니 한 몇 달 마음잡고 착실히 살아볼까 싶기도 했다.
한 번 해본 생각이긴 해도 그나마 자신이 기특할 정도로 건전해졌을 땐 꼭 돈을 손에 쥐었을 때뿐이었다. 돈이 궁할 땐 어떻게든 빨리 돈을 변통해 노름판으로 달려가야지 하는 생각뿐이었고, 목돈이 좀 생기면 잠시 잠깐 이제 좀 사람답게 살아 볼까 하고 제법 멀쩡한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의지가 약한 사람이 죄 그렇듯 쉽게 번 돈이라고 흥청망청 날리다 보면 며칠 못가 기어이 노름판을 기웃거리고 마는 게 근덕의 어쩔 수 없는 버릇이자 약점이었다. 어쨌거나 기분이 잔뜩 좋아진 근덕은 호기롭게 대문을 활짝 열었다.
방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아내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는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아내의 낡은 구두 뒤축을 힐끗 보며 이 참에 옷이라고 한 벌 쫘악 뽑아 입혀야겠다 마음먹었다.
성질이 수다스럽고 종알종알 바가지 긁는 덴 선수였지만, 그래도 저만큼 무던한 여편네도 없었다.
근덕은 아내를 놀래줄 심산으로 소리 없이 마루로 올라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내는 무슨 까닭인지 벽에 등을 기댄 채 곡절 많은 여자처럼 징징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너, 왜 울어? 서방 죽었냐, 왜 울고 지랄이야?"
근덕은 청승맞게 울고 있는 아내를 내려다보며 웃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졌다. 기껏 기분이 좋아서 모처럼 잘해 주려고 했더니 그 꼴을 보자 버럭 짜증이 나 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또 금세 마음이 풀어진 근덕은 바지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내 보이며 아내를 웃겨 보려고 했다.
"야, 너 이만한 돈 봤냐? 못 봤지?"
그러나 여전히 아내는 눈물을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무슨 서류 하나를 손에 펴 들고 말없이 울고 있었는데, 그 꼴이 꼭 넋 나간 여편네 같았다.
근덕은 돈뭉치를 좀 더 확실히 보여 주려고 몸을 굽혀 그녀의 어깨를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야, 이거 돈이라니까 돈 주는데 싫어?"
근덕은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넋 나간 듯 눈물을 줄줄 흘리던 아내 눈에서 순간적으로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그것도 찰나였다. 그 불길은 그녀의 눈에서 코로, 양볼로, 입술로, 얼굴 전체로 퍼지더니, 이내 성난 암사자처럼 변하는 것이었다. 표정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근덕은 순식간에 맹수로 돌변한 아내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통에 팔뚝을 냅다 물어뜯기고 말았다.
"아악!"
다급해진 근덕은 비명을 지르며 아내의 등짝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그래도 아내는 근덕의 팔뚝에서 얼굴을 떼지 않았다. 어찌나 억세게 물어뜯겼던지 팔뚝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이게 미쳤나. 놔, 아퍼, 이년아!"
근덕은 소리소리 고함을 치며 아내를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워낙에 억세고 근력 좋은 여자라서 여간해선 팔뚝을 놓아 줄 기세가 아니었다.
근덕은 죽자고 달려드는 아내를 있는 힘을 다해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제야 아내는 제풀에 지쳐 방구석으로 나동그라지는 것이었다.
"너 돌았니? 왜 그래, 엉?"
근덕의 팔뚝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얼마나 세게 물었던지 아직도 정신이 얼얼할 정도로 물린 자리가 욱신거렸다.
근덕은 물린 팔을 한쪽 손으로 감싸 쥐며 아내를 험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래, 나 미쳤다. 미쳤어, 이 인간아!"
여자 눈에 핏발이 서렸다.
근덕은 그 앙칼지고 표독스런 눈매에 진저리를 쳤다. 지금까지 살을 맞대고 살아왔지만 저토록 매서운 눈빛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무리 남편이 미워도 그렇지 세상에 무슨 원수가 졌다고 이 여자가 저런 눈으로 사람을 볼까 생각하니, 근덕은 아닌 게 아니라 좀 이상한 생각이 들기는 했다.
잡아먹을 듯이 남편을 노려보던 아내가 씩씩대며 손에 들고 있던 종잇조각을 그에게 내던졌다.
"그게 뭔지나 알어?"
근덕은 하도 기막힌 꼴을 다한 직후라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였다, 그는 꼭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지껏 부부싸움도 숱하게 했었다. 하지만 아내가 지금처럼 길길이 날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다 못 해 오입질을 하다 들켰을 때에도 저렇게 악착같이 덤벼들진 않았던 것이다.
근덕은 멍청하게 서서 아내가 던져 준 서류를 펼쳐 보았다.
"이게 뭐야?"
어디서 빚 독촉이라고 온 줄만 알았던 근덕은 또 한 번 얼떨떨 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가입자가 김인희, 누나 이름으로 된 생명보험 증서였다.
"니 누나 곧 죽는데"
보험증서를 쥔 근덕의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아내가 악을 쓰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다.
"그거, 니 누나가 자기 죽으면 너한테 줄려고 식구들 몰래 들어놓은 거래! 알어? 이 나쁜 인간아! 행여, 행여 니가 그 맘 알겠다, 행여 니가 알겠어? 너 같은 인간이 뭘 알어?"
근덕은 입을 쩍 벌린 채 꼼짝 않고 서 있기만 했다.
악에 받친 아내가 빗자루를 들어 사정없이 남편의 등짝을 두들겨팼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그 자리에 못박인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것도 갖다 도박해라! 그것도 갖다 도박하라구, 이 인간아! 그것도 갖다 기집질해, 이 인간아! 너 이제 어떻게 살래 어떻게 살래!"
근덕은 아내가 엉엉 울며 악담을 퍼붓는 데도 그 소리가 귓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남편을 두들겨 패다 지친 그녀가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발버둥을 치는 모습도 그에겐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그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그 눈물이 눈을 흐리게 하고, 그 눈물이 귀를 멀게 했다.
누나가 죽을 줄은 몰랐다. 설마 그 산처럼 든든하던 누나가 죽을 줄은 몰랐다. 누나는 평생 그의 어머니였고, 평생 아무때나 대문이 열려 있는 고향 집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누나가 죽다니, 죽다니 지난번에 갔을 때 그 악담만 안 했더라도 이렇듯 마음이 쓰리진 않았을 것을. 천하에 불상놈 같이 그 모진 악담만 안 했더라도
잊고 있었던 눈물이 한줄기 그의 가슴을 적시는가 싶더니 이 내 물꼬가 터진 듯 흘러나왔다. 그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건, 그가 꼼짝도 못 하고 선 채로 돌처럼 굳어 있는 건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그 눈물 탓이었다.
22
며칠 이상한 침묵이 집안을 싸고 돌았다.
인희씨는 여전히 아팠고, 하루에도 몇 번씩 피를 토했다. 어느땐 좌변기를 붙잡고 죽은 듯 쓰러져 있기도 했다.
연수는 시체처럼 늘어진 채 아버지 품에 안겨 안방으로 들어가는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을 여러 차례 목격하였다. 그럴 때마다 정작 연수가 숨이 막히는 건 어머니를 품에 안고 있는 아버지의 막막한 표정 때문이었다.
인희씨는 통증이 와도 전처럼 놀라거나 울부짖지는 않았다. 그저 식구들 모르게 화장실에서 오래 헛구역질을 해대고, 그러다가 쓰러져 잠드는 게 인희씨의 하루 일과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희씨의 사투를 식구들 모두 참담한 침묵으로 지켜보는 동안 여러 날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연수는 아침밥을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깜짝 놀랐다. 이른 시간인데도 거실 커튼이 활짝 열려 있었고 주방에선 귀에 익은 도마 소리가 들려왔다. 연수는 황급히 주방으로 향했다.
"놔두세요. 제가 할 테니 쉬세요."
연수는 어머니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을 빼앗으려 했다.
인희씨는 벌써 쌀을 씻어 밥을 안친 뒤 호박이며 감자, 대파 등속을 가지런히 다듬어 놓고 있는 중이었다.
"다쳐, 엄마가 할게."
인희씨는 연수가 못 미더운 듯 칼을 내주지 않았다.
"제가 할게요."
연수는 어머니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인희씨는 버럭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놔둬라. 내가 벌써 송장 됐어? 왜 다들 사람 움직이는 걸 못 봐?"
"힘드시잖아요."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연수는 어머니의 고집에 더 어쩌지 못하고 식탁으로 가 앉았다.
인희씨는 그 말씨며 태도가 병 나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솜씨 있게 도마질을 하며 인희씨가 물었다.
"일 안 나가?"
"오늘 잠깐 나가 봐야 해요."
"일 나가. 일 다 그만두고 나 죽기 기다렸다, 나 죽으면 손가락 빨고 살 거야?"
연수는 오늘 그동안의 결근계에 이어 아예 휴직계까지 내려던 참이었다.
연수는 어머니에게 이렇다 할 대답도 못 하고 식탁에 앉아 물컵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된장찌개엔 꼭 쌀뜨물을 쓰고, 처음 끊일 때부터 호박 넣으라구 몇 번을 말하니? 다 끓은 뒤 넣으면 서걱서걱한 게 그게 무슨 맛이 있어? 모양 내다 맛 버려. 된장도 하나 제대로 못 끓이구 어떻게 시집을 갈라는지."
예전에 연수가 간혹 주방일을 거들 때마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던 잔소리였다.
인희씨는 냄비에 재료들을 쓸어넣은 뒤 가스레인지 불을 올렸다. 그런 다음에 손을 씻고 앞치마를 벗어 있던 자리에 걸어놓은 뒤 안방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안방에선 정박사가 이불을 개고 있었다. 평소 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서비스였다. 정박사는 이불을 개서 장롱에 넣으려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아내를 보며 다소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잘하면서 왜 진작 안 했누?"
정박사는 별 표정 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인희씨가 자리에 앉자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 물었다.
"빈속에 그 누무 담배는?"
아내의 걱정 섞인 잔소리도 요즘 들어선 꽤 오랜만인 것 같다.
며칠 그녀는 옆에서 누가 담배를 피우거나 말거나 의식도 못 하는 것 같았었다. 그래서 정박사는 모처럼 기운을 차린 듯한 아내의 잔소리가 외려 반갑게 들렸다.
정박사는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인희씨가 퉁명스레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며 그를 만류했다.
"그냥 피워요."
정박사는 도로 주저앉아 담배를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그러는 동안 인희씨는 무릎걸음으로 문갑 쪽으로 다가가 서류들이 가득 든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녀는 그것을 들고 다시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정박사 쪽으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는 볼멘소리로 설명했다.
"통장이랑 집문서, 땅문서, 보험, 뭐 그런 거예요."
정박사는 이마를 찌푸리며 한쪽에 치워 놓았던 담배를 다시 꺼내 물었다.
인희씨는 그런 남편을 보지 않고 여전히 볼멘소리를 했다.
"대충 보니까, 당신 언제 죽을랑가는 몰라도 아껴 쓰면 죽을 때까지는 쓰겠대. 당신은 좋겠수, 부자라."
거기까지 말하고는 이내 짜증이 나는지 목청을 다소 높였다.
"거기 노란 통장은 연수 시집 보낼 거고, 흰 통장은 정수 거니까 애저녁에 손댈 생각 말구요."
정박사는 아내가 가리키는 통장도, 아내 얼굴도 보지 않고 한숨처럼 내뱉었다.
"당신이 가지고 있어."
"그만둬요."
인희씨는 단호하게 정박사의 말을 묵살하며 옆으로 틀어 앉았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남편을 똑바로 응시하며 짜증스럽게 덧붙였다.
"내가 뭐 당신 이뻐서 주는 줄 알아요? 나 죽고 나서 통장 어딨나, 울지도 않고 자식새끼들 앞세워 찾아 나설까 봐 주는 거예요. 그 꼴 보기 싫어서."
"안 그럴 테니 넣어 둬."
"그럴지 안 그럴지 어떻게 알어."
정박사는 이런 식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아내의 모습이 측은한 한편 그만하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녀는 일견 짜증을 내고 있지만 그건 결국 슬픔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란 걸 정박사는 알고 있었다.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희씨는 남편을 바라보며 무척 속상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 시간 있을 때 나 일산 좀 데리고 가요."
정박사는 그 말에 선뜻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정박사는 요즘 매일 일산으로 출퇴근하다시피 하는 중이었다. 그동안 가구도 들여놓고 집 정리를 하긴 했는데, 도저히 아내를 데리고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과거에 그 집은 아내에게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집은 아내의 죽을 자리인 것이다.
" 집이 얼추 다 됐을 텐데."
인희씨가 눈치를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박사는 말없이 방을 나왔다. 뒤에서 화가 나서 투덜거리는 아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으이구, 저 주변머리. 죽은 사람 소원두 들어 준다는데, 그게 뭐 큰 소원이라구, 말을 안 한대. 으이구, 속 터져!"
정박사는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아내 소원대로 해주자. 직장엔 며칠 휴가계를 냈다고 둘러대고 내일이라도 당장 일산으로 가자.
그는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어쩌면 매일 아침 출근하는 척하고 집을 나서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그에게도 나름대로 소원이 있다면 이 참에 아내와 단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갖고, 변변찮으나마 손수 밥이라도 한 끼 지어 아내에게 먹이고 싶었다. 그다지 모양새가 잘 갖춰진 건 아니지만, 어쨌든 직장에 갈 일도 없고 시간은 얼마든지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정박사는 그동안 아내가 걱정할까 봐 사실대로 털어놓지 못하고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휴가계를 생각해 내지 못한 건 아내가 말한 그대로 자신의 주변머리 없는 성격 때문이었다.
"아버지, 식사하세요. 출근하셔야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정박사는 연수가 부르는 소리에 주방 쪽으로 향했다.
처남댁이 살림을 해줄 땐 밥 먹을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편치 않더니 연수가 집안일을 꼼꼼히 처리하는 모습을 보니 기특하기만 했다.
정박사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아내는 노모에게 가져갈 밥상을 챙기고 있었다.
"제가 해도 되는데요."
연수가 머뭇거리며 쟁반을 건네주었다.
"넌 밥이나 먹어. 나야 급할 거 하나 없으니까."
연수는 예사롭게 핀잔하며 주방을 나서는 어머니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이구 추워라."
상주댁은 춥다며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인희씨는 그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집을 옮겨야 하는데 지금 살고 있는 집이 팔리지 않는 바람에 차질이 생겼다. 그놈의 병만 안 났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알아라도 볼 텐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으니 애간장만 태울 뿐이었다.
직장 일로 바쁜 남편한테 부탁하자니 눈치가 보이고, 복덕방에서 임자를 물색해 주겠다고 전화로 약속은 했지만 영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집을 제대로 지었나, 일산에도 가보아야 하는데. 인희씨는 이래저래 속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에잇, 퉤!"
갑자기 상주댁이 밥알을 뱉어냈다. 밥알 몇 개가 그대로 며느리 얼굴에 날아와 붙었다. 인희씨는 깜짝 놀랐다. 얌전히 떠먹여 주는 대로 밥을 받아먹던 시어머니가 또 노망을 부리는 것이었다.
"왜 그런데, 또?"
시어머니가 바닥에 뱉어낸 밥알을 보고 속상한 인희씨가 짜증을 냈다. 시어머니는 책 토라져서 된장국에 비빈 밥알들을 가리켰다.
"썩었어."
"썩긴 뭐가 썩어. 아침에 끓인 게."
"이년이!"
상주댁은 뱉어낸 밥알을 손으로 집어서 며느리 눈 앞으로 바짝 들이댔다.
"이게 안 썩었어? 누런데, 이게 안 썩어?"
"되지도 않는 말 어지간히 해요, 정말! 이게 뭐가 썩어, 된장에 비빈 밥이 다 누렇지, 어디가 썩어!"
인희씨는 화가 나는지 신경질을 부렸다.
상주댁은 밥그릇을 들어 보이며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따지는 며느리를 고까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밥그릇을 확 낚아채어 며느리 머리 위에다 냅다 뒤집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인희씨는 혼비백산을 했다.
"이 노인네, 미쳤나 봐, 정말!"
졸지에 밥알을 머리에 뒤집어쓴 며느리가 짜증을 내자 상주댁은 더욱 노여워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나 미쳤다. 미쳤다, 이년아!"
상주댁은 길길이 날뛰며 갑자기 방구석에 있는 요강 단지를 번쩍 집어 들었다.
인희씨가 말리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와장창, 요강 깨지는 소리가 났고, 뒤이어 인희씨의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이구, 못 살어! 징글징글해 정말."
주방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던 정박사와 연수, 정수는 갑자기 건넌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수저를 놓았다. 분명 어머니의 비명소리였다.
식구들은 놀란 얼굴로 뛰어가 건넌방 방문을 열어 보았다.
누런 밥알 찌꺼기와 오줌으로 범벅이 된 몰골로 인희씨는 방 한가운데 주저앉아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방바닥은 깨진 요강 단지와 엎어진 그릇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고, 상주댁은 여전히 씩씩거리며 며느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썩은 거 너나 먹어라, 이년. 우리 아들 병원 차려 준다더니 병원두 안 차려 주고, 이 나쁜 년. 죽어, 이년, 죽어!"
"놔, 아퍼."
상주댁은 앙칼진 눈으로 며느리를 노려보다 기어이 머리채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노망든 시어머니의 힘을 당할 길이 없었던 인희씨는 그저 머리채를 휘둘린 채로 비명만 지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정박사가 눈에 불을 튀기는 사이 연수가 황급히 달려들어 할머니를 뜯어말렸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할머니를 어쩔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정수가 할머니를 뜯어말렸다.
"이 손 놔요, 놔요!"
"나쁜 년, 내 집 망친 년. 이년! 시에밀 까다만 콩깍지로 아는 이년, 이년!"
정수까지 합세해 간신히 뜯어말린 뒤에도 상주댁의 노여운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마침내 인희씨가 두 다리를 버둥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못 살어, 내가. 못산다, 내가!"
울 수도 없고,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 여자는 지린내가 진동하는 방 한켠에 거지꼴을 하고 앉아 엉엉 울고 있었고, 또 한 여자는 그런 며느리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팔을 걷어붙인 채 씩씩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박사는 차마 못 볼 꼴을 보고 난 사람처럼 참담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연수가 운전하는 차는 어느덧 정박사의 병원 앞에 와 멎었다.
눈이라도 한바탕 퍼부으려는지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정박사는 아까부터 굳은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며 멍한 표정이었다.
"아버지, 다 왔어요."
연수는 넋 나간 듯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정박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병원 앞에 왔는데도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쩐지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으응, 그래."
약간 당황한 몸짓으로 차 문을 열던 정박사가 연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오늘 오후에 시간 있니?"
"휴직계 내고 조금 있다 들어갈 거예요."
"그래? 그럼 나 좀 보자."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무슨 일이세요?"
후임자에게 업무를 정리해서 넘겨주려면 시간이 얼마쯤 걸릴 것 같았다. 정박사는 되묻는 연수를 건너다보며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그냥 볼까 싶어서."
"제가 전화 드릴게요."
연수는 지금으로선 약속 시간을 정해 놓기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해서 적당히 시간을 봐가며 아버지한테 연락을 취할 생각이었다. 정박사로선 딸의 그 제의가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려 했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딸에게 말했다.
"아니다. 나도 오늘 진료 안 보고 일찍 휴가계만 내고 나올 거야. 내가 근처에 가서 전화하마."
" 그러실래요?"
"응. 그러자."
이야기가 다 끝났는데도 차에서 내린 정박사는 이내 몸을 돌리지 않는다.
연수는 아버지가 병원으로 들어가길 기다리며 차를 출발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아버진 저렇게 서 있기만 하는 걸까. 어색하게 차 안에 남아 있던 연수가 또 한 번 정박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들어가세요."
"먼저 가라."
연수는 그 자리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버지를 뒤로 한 채 차를 출발시켰다. 백미러를 통해 그 후로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아버지 모습이 보였다.
정박사는 딸의 자동차가 시야에서 멀어진 다음에야 천천히 발길을 옮겨 한길 쪽으로 향했다.
윤박사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까지는 약 세 시간 정도나 남았다. 그동안 혼자 어디든 가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른 아침부터 다방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그 시간에 제일 만만한 곳이라면 서점 아니면 공원이었다.
실업자 생활도 오래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더니 정박사가 그 격이었다. 그는 일없이 거리를 좀 배회하다 서점이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서점으로 들어섰다.
그는 서점에 가서도 취업이니 창업이니 하는 직업 관련 서적이 있는 쪽으로는 발도 떼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그런 책이나 들춰보며 남몰래 한숨짓는 사오십대 사내의 뒷모습을 그 누구라서 좋게 보아 주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그가 보기에도 그런 사내들의 뒷모습이 영 궁상스러워 보였다.
무슨 쓸데없는 자존심인지 그들 옆에 서 있으면 자신이 더욱 초라해지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시간에 쫓기는 젊은 직장인처럼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전문서적이나 몇 권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것도 오래 보면 괜스레 뒤통수가 따끔거려서 그저 길어야 한 시간이 고작이었다.
시간이 또 남는다.
이번엔 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그는 이번에도 요령을 피운다. 공원에서도 오래 죽치고 앉아 있는 축들은 대개 하릴없이 노인들이나 실업자들이다.
몇 번 와 보니 아예 고정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소일하는 부류들도 적지 않았다. 한결같이 무기력하고 우울한 표정들. 사내들도 나이가 들수록 여자들처럼 수다스러워지는 모양이다. 몇몇 중늙은이는 공연히 무리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말참견을 하거나 장기판 같은 데서 눈총을 받아가며 훈수를 두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다. 당사자들이 영 마뜩찮아 하는데도 나 몰라라 하고 시시콜콜 참견이다. 어디든 끼어 함께 참여하고 싶은 모양이다.
나이가 많이 든 노인들은 저마다 따로 앉아 비둘기에게 팝콘을 던져 주거나 꽁초를 빨며 멍하니 앉아 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이승에서의 삶에 흥미도 관심도 없어 보인다. 어찌 보면 그들은 마치 도인 한가지로 세월을 관조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두셋 모여 앉은 노인들도 별 말이 없다. 꾹 다문 입술 새로 가끔 담배 연기만 비어져 나올 뿐이다. 이미 할 말은 다 했고, 이제 남은 일이라곤 손에 묻은 먼지를 털 듯 툭툭 시간을 터는 일만 남았다는 듯이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다.
정박사는 자신이 아직 그들만큼 늙지는 않았지만, 또한 패기 있게 뭔가를 다시 시작할 만큼 젊지도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긴 환갑이 넘은 나이에 무슨 신명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으랴, 싶은 아득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 곧 황혼이지, 황혼이야. 정박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파고다 공원을 빠져나왔다.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그만큼 더 쓸쓸해진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결국 그는 파고다 공원에서 삼청공원으로, 다시 효창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오락가락하며 시간을 보냈다. 중간에 힘이 들면, 잠시 공원 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느긋한 표정을 짓고 벤치에 앉았다가 이내 장소를 옮기는 것이다. 정박사는 끝끝내 나는 아닌 척, 하는 그런 가식의 자신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덧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커피숍에 나타난 윤박사는 작은 상자를 들고 있었다.
"언니 약이에요."
"고맙다."
"통증이 심하시죠?"
"그런 모양이야."
윤박사는 정박사의 우울한 대답에 잠자코 차를 마시다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동안 왜 통 안 오셨어요?"
"일산에 새집을 지었거든. 나 요즘 거기 다녀. 거기 가면 쓸모없는 나두 할 일이 많아."
윤박사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정박사를 내심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잠시 주저하며 뜸을 들였다가 말을 꺼냈다.
"저, 전에 부탁하신 얘긴데요."
정박사가 일전에 부탁한 취직자리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응, 좀 알아봤어?"
"네. 알아보긴 했는데."
윤박사는 왠지 말하기가 어렵다는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정박사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보건소 소장 자리예요. 일산 쪽에 새로 생긴."
순간, 정박사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비로소 윤박사가 선뜻 말을 못 꺼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보건소 소장 자리라는 게 보수 면이나 직업 환경으로나 의사 시절보다 못하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죄송해요. 더 좋은 자리가 있었으면 했는데."
"무슨 말이야, 보건소 일이면 어때, 괜찮아. 고맙다, 윤아!"
정박사는 그나마 일자리가 생긴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그는 모처럼 활짝 웃는 얼굴로 윤박사에게 물었다.
"그 자리 틀림없는 거지?"
"그럼요."
"고맙다. 윤아. 내가 나중에 한턱 쓸게."
그는 점심이라도 같이 하자는 윤박사의 제의를 마다하고 커피숍을 나섰다.
정박사는 괜하게 휴우 한숨이 나왔다. 다름 아닌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러고 나니 세상이 조금 달라 보이기까지 했다. 아침나절 거리를 배회할 때와는 달리 발걸음도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정박사는 우선 집으로 향했다.
오전 내내 인수인계를 끝낸 뒤 사무실을 나서던 연수는 마침 거래처에 들렀다 오는 인철과 마주쳤다.
인철은 연수가 다시 출근하는 줄로만 알고 반색을 했다.
"저, 휴직계 냈어요."
"괜찮으신 줄 알았는데."
"저두 괜찮으실 줄 알았어요."
인철은 연수의 뜻밖의 말에 무척 당황한 표정이었다. 괜찮지 않다면 그렇다면.
" 잘 해드려라."
인철은 겨우 그렇게 말했다.
그의 곤혹스러워 하는 표정을 외면한 채 연수가 말을 이었다.
"못해 드린 거, 나중에 한이 될까 두려워 받은 만큼 돌려 드리고 싶은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밥도 잘 못 짓구, 빨래도 내가 하면 때가 잘 안 져요. 청소를 해도 한두 군데는 꼭 빠뜨리구."
"자식이 부모한테 받은 걸 다 돌려줄 순 없어."
인철이 자동판매기 커피를 뽑아 건네며 제법 인생을 산 듯한 중늙은이투로 말했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사람들이 결혼하는 건 자기가 부모에게 받은 걸 주체할 수 없어서 털어놓을 델 찾는 거라구. 그래서 자식을 낳는 거라구."
" 그렇겠네요."
연수는 천천히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두, 몸조심해라."
"고마워요."
연수는 얼마쯤 젖은 시선으로 인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인철이 가만 연수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려 주었다.
연수는 그 손길을 뿌리치지 않은 채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밖에선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23
정박사는 아침에 병원 앞에서 헤어질 때와는 딴판의 표정으로 백화점 로비에 서 있었다.
연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어떤 생기 같은 걸 감지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연수는 자꾸 아버지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이윽고 연수는 아버지를 태우고 거리로 나섰다.
"집에 일찍 가봐야 할 텐데."
벌써 오후 세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연수는 백미러를 통해 아버지를 보며 집 걱정부터 했다. 아침에 그 험한 꼴을 보고 나왔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당장 어머니의 병보다는 할머니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를까 봐 그게 더 걱정이었다.
"할머니 주무시는 거 보고 나왔으니 괜찮을 거다."
"집에 들렀다 오셨어요?"
"그래."
한 번 잠들면 한나절 이상은 깨지 않는 할머니를 생각하며 연수는 그제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백화점 주변 도로를 빠져나갈 때 연수가 물었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일산 집으로 가자."
"일산으로요?"
정박사는 연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하자 시선을 창밖으로 향한 채 말을 이었다.
"니 엄마, 거기 한번 데려가 달라는데, 집이 어수선해서 나 혼자 정리하자니 어째 시원찮구나."
그랬었구나.
연수는 비로소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늘 무뚝뚝하고 냉정한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에게 저렇듯 자상한 면도 있었다니. 연수는 괜히 코끝이 찡했다.
그러나 그 감동은 막상 일산 집에 도착했을 때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이었다.
새집 문을 여니 포장을 뜯지 않은 가구들이며 살림 등속이 거실에 가득 쌓여 있었다.
연수는 한동안 멍하니 거실에 놓은 집기들을 바라보았다. 눈에 뻔히 보이는 가구들은 제쳐두고, 아직 뜯지도 않은 포장지를 이것저것 들춰 보니 벽걸이 장식용 액자며 소품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걸 다 아버지가 준비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색깔이 좀 그렇지? 내가 어제 대충 샀는데. 내 맘에도 그냥 썩 드는 건 아닌데."
어느새 팔을 걷어붙이고 화장실에 들어가 걸레까지 빨아가지고 나오던 정박사가 겸연쩍은 듯 딸의 눈치를 보았다. 그 큰 덩치에 걸레를 들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한편, 연수에겐 퍽이나 놀랍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정박사 자신은 연수가 자기를 어찌 보는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아뇨."
연수는 아버지가 무색해하지 않도록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얼른 걸레를 뺏어 들었다.
"좋아요. 걸레질은 제가 할게요. 아버진 그냥 앉아 계세요."
"이거 저쪽으로 치우고 바닥도 한 번 닦아야 할 텐데. 그냥 하면 니 엄마 먼지 냄새난다구 싫어할 텐데."
정박사는 어색하게 가구들을 가리켜 보이며 딸에게 이것저것 주의를 주었다.
연수는 그런 아버지를 향해 짐짓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러죠, 뭐. 그럼 가구부터 일단 저쪽으로 옮길까요?"
"그러자."
정박사는 딸의 선선한 대꾸에 만족스러워하며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가구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언제 이렇게 늙으셨는지 아버지는 작은 소파 하나 옮기는 데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연수는 정박사와 함께 가구들을 하나씩 옮기면서 문득 가슴이 아렸다.
아버지는 늙고 힘없는 자신이 민망한지 둘이 해야 될 일도 혼자 옮기겠다며 고집을 피우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는 딸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고 싶으신 거다.
연수는 아버지의 반쯤 벗겨진 앞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을 간간이 정겨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둘이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가구들을 옮기고 나니, 이번엔 바닥 청소가 남아 있었다. 연수가 공들여 걸레질을 하는 동안 정박사는 벽에 액자들을 걸었다.
"연수야, 이거 여기 걸면 되는 거냐?"
"네, 아버지. 약간만 왼쪽으로요."
정박사는 딸이 시키는 대로 액자를 고쳐 걸며 묻는다.
"됐지?"
연수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액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아버지의 기우뚱한 몸집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는다.
"이번엔 약간 오른쪽으로요."
생전 안 해본 일이라 정박사가 하는 일은 하나같이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래도 그는 무척 열심히 액자 거는 일에 몰두해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딸에게 퇴짜를 맞고 말았다.
"아뇨, 비뚤어졌어요."
"됐냐?"
"네, 아버지."
겨우겨우 거실 정리가 끝났고, 이번엔 커튼을 달 차례였다.
연수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꼼꼼히 살림살이들을 준비했는지 보는 것마다 감탄할 정도였다. 커튼 색상이며 침대 커버, 바닥에 깐 양탄자까지도 어머니의 취향을 그대로 따른 것들이었다. 이 모든 걸 혼자 준비하며 아버지는 속으로 얼마나 우셨을까 하는 생각에 연수는 자꾸만 목이 메어왔다.
침대 커버를 씌워 놓은 침대맡에 앉아 보고는 무심코 허탈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 모습에 와락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잠시 아버지를 홀로 남겨둔 채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왔다.
정박사는 연수가 앉았던 침대맡에 가 앉았다.
나이 들어 이불 개는 것도 힘들다며, 이사 가면 안방에도 침대는 꼭 들여놓겠다던 아내 모습이 가슴에 사무친다. 머지않아 아내는 가고, 그녀가 바라던 것들만 남아 있을 이 집.
정박사는 아무래도 이 집에 온전하게 정붙이고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버지, 커피 드세요."
바깥에서 연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정박사는 급히 붉어진 눈시울을 꾹꾹 눌러 닦고 거실로 나왔다.
"지난번에 죄송했어요."
거실 소파에 앉아 부녀가 차를 마시던 중 연수가 뜬금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정박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뭘?"
연수는 일없이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아버지한테 화가 난 게 아니었어요. 저한테, 저 자신한테 화가 났었어요."
"그래."
"죄송해요."
정박사는 딸을 애처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위로해주었다.
"아니다. 니 엄마가 불쌍해서 그렇지, 난 괜찮다. 너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라.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니 엄마가 지금 죽는 게 다행이라고. 남보다 고생을 두 배는 더한 사람, 좀 더 일찍 좋은 데로 간다고, 난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 말에 연수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잘 해드리고 싶었어요."
"우리 모두 잘 해주고 싶었지 그 맘 알 거다."
정박사는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연수가 들고 있는 찻잔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 잔, 이쁘지?"
" 네."
"니 엄마 줄려고 내가 특별히 산 거야. 너 시집 가두 그건 못 준다."
말을 마친 정박사가 희미하게 웃는다.
연수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샀다는 찻잔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집안에서 유독 어머니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는 물건이길래 안 그래도 속으로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다소 촌스럽긴 했지만 그 잔은, 황금색 금박 장식이 휘황찬란한 어머니의 그 잔은,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황후를 위해 바치는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의 표시였다.
저녁 여덟 시.
인희씨는 대문 밖을 서성이며 식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일찍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인희씨는 요즘 초저녁부터 식구들이 그립다. 인희씨는 추위도 잊은 채 아까부터 큰길가를 향해 목을 길게 빼고 아이들과 남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때 골목 아래쪽에서 정수가 여자 친구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정수는 손에 한 아름이나 되는 꽃을 들었다.
"엄마 꽃 드리면 좋아하실 거야."
"그래. 내가 사야 했는데."
정수가 여자 친구 재영을 미안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재영은 그런 정수를 향해 밝게 웃어 주었다. 그 웃음 끝에 그녀가 말했다.
"내가 사드리고 싶었어."
정수는 재영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문득 다른 소리를 했다.
"난 요즘 니가 참 부럽다."
"왜? 대학 다녀서? 엄마한테 너 대학생인 거 보여 주지 못해서? 그렇게 생각하지마. 공부 열심히 하는 모습 보여 드렸잖아. 발표 때까지 사실 수도 있고."
"그게 아냐."
재영은 가던 길을 멈추고 정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니네 엄만 건강하시잖아? 오래 사실 거구. 난 그게 부러워. 요즘은 엄마가 건강한 사람, 엄마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제일 부러워."
재영은 뭐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정수는 그런 그녀의 등을 툭 치며 짐짓 명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가. 요즘은 만날 때마다 니가 날 바래다주는구나. 싫겠다?"
"아니, 내가 바래다주는 것두 나쁘진 않아."
"고맙다, 어서 가."
"조금만 더 걷지 뭐."
그렇게 둘이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골목을 내려오던 인희씨가 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정수야!"
정수는 어디선지 정답게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음성을 듣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엄마!"
집 쪽에서 인희씨가 잰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 앞으로 가까이 와서는 신기한 눈빛으로 재영을 바라보았다.
"우리 정수 여자 친군가 보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이쁘게 생겼네."
인희씨는 쑥스럽게 웃으며 인사하는 아들의 여자 친구를 찬찬히 보고 있었다.
곁에 있던 정수가 시계를 보며 재영에게 눈짓을 했다.
"가봐."
재영이 정수를 향해 알았다는 눈짓을 하고는 인희씨를 바라보았다.
"저, 다음에 또 뵐게요."
"왜? 집에 들어갔다 가지?"
인희씨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재영에게 아쉬운 듯 말을 붙였다. 집에 데려가 차라도 한잔 먹여 보내고 싶은 것이다.
"아니에요. 늦었는걸요. 가볼게요."
재영이 웃으며 정수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몸을 돌렸다.
인희씨는 재영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저 아이가 어쩌면 내 며느리가 될지도 모르는데, 하는 못내 궁금하고 아쉬운 눈길이다.
"저만큼이나 꽃두 이쁜 걸 샀네."
멀어져가는 재영의 뒷모습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던 인희씨는 문득 정수가 건네준 꽃을 받아들고 향기를 맡았다.
정수는 어머니 등을 감싸 안고 걸으며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추운데 왜 나와 계세요?"
"웃긴다, 야. 너두 사내라고 기집애를 다 사귀고."
인희씨는 하던 말끝에 뜬금없이 물었다.
"입은 맞춰 봤어?"
정수는 어머니의 짓궂은 물음에 얼굴을 붉혔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대답할 수도 없었고, 아니라고 펄쩍 뛰기도 좀 그랬다.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므로 정수는 그저 피식 웃어 보였다.
장난기 가득한 인희씨의 그 물음에는 장성한 아들에 대한 신기하고 대견한 마음이 듬뿍 묻어나 있었다.
"참하게 생겼드라. 꼭 니 누나 닮은 것 같애. 나 처녀 때 같기도 하고."
"그럼, 재영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들은 다 닮았다는 얘기네?"
"그럼!"
모자가 다정하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집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연수의 차였다.
인희씨는 남편과 딸이 동시에 내리는 모습을 보고 반색을 했다.
"이게 웬일이야. 오늘은 온 가족이 시간을 맞췄네?"
"추운데 왜 나왔어?"
"빨리 들어가요, 엄마. 감기 들겠어요."
"괜찮아. 좋은 걸, 뭐."
모처럼 네 식구가 나란히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인희씨는 한껏 기분이 좋아서 현관문을 열었다.
"노친네 안 깨셨나 모르겠네."
앞서가던 인희씨가 중얼거리며 막 현관문을 열었을 때였다.
"이 나쁜 년! 또 날 버리고 갈라고?"
갑자기 상주댁이 몽둥이를 들고 덤벼들었다.
인희씨는 몸을 피할 겨를도 없이 상주댁이 내리친 몽둥이에 그대로 맞았다. 썩은 고목 넘어지듯 인희씨는 그 자리에 벌렁 나동그라졌다.
"어이쿠!"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비명소리에 뒤따라 들어오던 세 사람은 동시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맨 먼저 안으로 뛰어 들어간 연수가 바닥에 쓰러진 어머니를 일으켜 세웠다.
"엄마, 엄마, 괜찮아요?"
인희씨의 이마엔 선홍빛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연수는 다급한 시선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인희씨는 벌써부터 정신이 가물가물해져 가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격분한 정수가 순식간에 할머니에게 달려들어 모질게 악을 썼다.
"이제 그만 좀 하세요! 차라리 돌아가시라구요!"
할머니의 몽둥이를 뺏어 든 정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 새끼, 이 나쁜 새끼!"
상주댁은 정수가 고함을 치자 분해서 입가를 씰룩거리며 팔을 치켜들었다. 이어 손주의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굳은 듯 서 있던 정박사가 휙 몸을 돌려 신발장 서랍을 뒤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으로 서랍에서 망치와 못을 꺼내 들었다. 정박사는 한 손에 망치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노모를 번쩍 안아 들은 채 건넌방으로 향했다.
"놔라, 이노무 새끼. 놔, 어서 놔! 에미야!"
상주댁이 정박사 팔에 안긴 채 발버둥을 쳤다.
그때까지도 두 남매는 얼이 빠진 채 격분한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상주댁은 정박사의 격분한 태도가 기가 질렸는지 한풀 꺾인 목소리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아저씨 왜 그래? 날 들고 어딜 가!"
정박사는 노모를 거칠게 방바닥에 내려놓은 뒤 방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겁에 질린 노모가 그의 다리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정박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애원하는 노모를 모질게 떼어놓고 방문을 닫아 버렸다.
"아저씨, 왜 그래? 에미야, 살려 줘!"
안에서 계속 상주댁의 겁먹은 비명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까지 정신을 놓고 있던 인희씨가 비로소 힘없이 눈을 떴다. 마침 정박사가 입에 물고 있던 못을 고쳐 들고 망치로 문을 때려 박으려던 참이었다.
"에미야, 에미야!"
상주댁이 잠긴 문을 손톱으로 마구 긁으며 울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정수가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뜯어말렸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이러지 마세요!"
정박사는 아들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쾅쾅 못을 때려 박았다.
"왜 그래요, 왜 그래? 연수야 말려. 니 아부지 말려"
인희씨도 질겁을 해서 건넌방 쪽으로 기어가며 소리쳤다. 인희씨는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외치며 힘들게 남편 앞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박사는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계속 못질을 해댔다.
"진정하세요, 아버지. 진정하세요!"
"잘못했어요! 그러지 마세요, 아버지!"
연수와 정수는 엉엉 울어가며 아버지를 끌어안고 애원했다. 그래도 정박사는 막무가내였다. 그의 얼굴은 이미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나마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드러나는 건 그의 눈이 붉게 젖은 채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수는 자신의 말이 지나쳤기 때문에 아버지가 화를 낸다고 생각한 나머지 무릎을 꿇고 빌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박사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급기야는 인희씨가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며 신음하듯 한마디 했다.
"그러지 마."
정박사의 행동이 조금 누그러진 건 바로 그때였다. 그는 이내 망치질을 멈추고 바짓가랑이에 매달린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정박사의 눈에서 떨어진 한 방울의 굵은 눈물이 아내의 이마를 적셨다. 그 참에 정수가 얼른 달려들어 망치를 나꿔챘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울며 마당으로 나가 망치를 내던져 버렸다. 연수는 아버지가 비통한 표정으로 숨만 헉헉 몰아쉬며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들어가, 연수야."
인희씨가 힘없이 연수에게 손짓을 했다. 정박사가 말없이 마당으로 나간 뒤였다. 연수는 어머니를 데려다 방에 눕힌 뒤 마당으로 향했다.
"아버지."
정박사는 마당에 선 채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고독한 뒷모습에 연수는 자꾸 눈물이 났다.
"들어가라."
"추워요."
"괜찮다. 가서 자라. 찬바람 들어간다."
정박사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허공을 응시하며 기인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연수는 착잡한 심정을 어쩌지 못해 부질없이 가슴만 쓸어내렸다. 정수도 마당 구석에 선 채 우는지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24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늦도록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며 비탄에 잠겨 있던 정박사는 새벽녘이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비록 순간적인 격분을 못 이겨 한 행동이었지만, 노모를 방에 가두고 못질을 하려 했던 자신에 대해서 그는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새벽녘, 잠결에도 간간이 한숨을 내쉬는 정박사를 누군가가 안쓰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인희씨였다. 그러나 정박사는 그걸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조금씩 잠의 수렁으로 잠기고 있었다.
인희씨는 한동안 벽에 기대어 남편의 불규칙한 숨소리를 헤아렸다. 그녀는 아까부터 구토가 일어 잠을 못 이루고 쪼그려 앉은 채 불쑥불쑥 치미는 온몸의 통증을 참아가며 겨우 버티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릴 땐 화장실에 가 토하는 것보다 이렇게 참고 있는 게 나았다. 이제 더 이상은 피를 토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남편은 이제 잠이 든 것 같다. 웅크린 채 자고 있는 모습이 왜 이렇게 처량하게 느껴지는 걸까. 인희씨는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남편의 자는 모습을 벌써 한 시간째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속이 울렁거려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영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 후 토기가 약간 가라앉는 걸 느끼며 그녀는 주방으로 나섰다. 쓰리고 메슥거리는 속을 달랠 겸 냉수를 한잔 따라 마셨다. 그런데 속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하게 울렁거렸다.
인희씨는 냉장고 앞에서 다시금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려 안간힘을 썼다. 오장육부가 다 아프다. 내장이 서로 엉켜 사투라도 벌이는지 순간순간 찢어지는 아픔이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망할 놈의 병은 왜 이다지 아픈 데도 많은가. 쪼그린 채로 몸을 뒤틀며 헛구역질을 꾹꾹 눌러 참던 인희씨는 엉금엉금 기어 주방을 나섰다. 죽음의 사신이 드리우는 어두운 그늘이 바로 저 앞에 긴 휘장을 펼치고 있었다. 인희씨는 손사래를 치며 겨우 그 그늘을 거둬냈다. 그러면 그 뒤에서 또 한 겹의 그늘이 보란 듯 휘장을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으."
슬픔 때문인지 고통 때문인지 인희씨의 목구멍에서 본능적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등 언저리로 축축한 식은땀이 흘러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푸르르 떨었다.
그때, 문득 인희씨는 건넌방을 돌아보았다. 가여운 노인네, 초저녁엔 또 얼마나 놀랐으랴. 인희씨는 잠시 통증이 지나간 틈을 비집어 겨우 쪼그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내 시어머니 방으로 다가섰다. 상주댁은 잠결에서조차 긴장이 풀리지 않았는지 이불을 한 움큼 끌어안고 몸을 조그맣게 웅크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인희씨는 그 모습을 잠시 측은하게 내려다보다 이부자리를 바로 고쳐 깔고 시어머니를 편하게 눕혔다. 이젠 이 작은 노인네 하나 눕히는 데도 힘이 부친다.
인희씨는 가쁜 숨을 헉헉 몰아쉬며 벽에 몸을 기댔다. 쉴 새 없이 식은땀이 흘러나왔고, 속은 여전히 울렁거렸다. 상주댁은 자면서도 악몽을 꾸는지 간혹 몸을 버둥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인희씨 눈빛에 말로는 다 못할 어떤 착잡한 상념이 서렸다.
젊어서는 사흘들이로 며느리를 잡아대던 시어머니. 그 매운 시집살이도 그다지 견디지 못할 건 아니었다. 미우네 고우네 해도 두 사람은 평생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사는 노인네와 세상에 기댈 언덕이라곤 남편밖에 없었던 한 여자. 그렇게 두 여자가 그 한 남자를 기다리며 살아온 세월만도 어언 이십오 년이었다.
미울 땐 여우 같은 며느리랑은 살아도 곰 같은 며느리랑은 못산다며 수시로 자신을 구박하던 시어머니지만, 그래도 더러 며느리 좋아하는 호두과자 같은 걸 빈방에 들여 놓아준 적도 있었다. 그땐 며느리 어디가 그렇게 이쁘셨을까. 남편 없는 시집살이에 아이들마저 학교에 가 없는 날이면 그나마 시어머니 잔소리라도 들어야 사람 사는 것 같은 시절도 있었다.
그 심란한 세월 다 보내고 늘그막에 미운 정 고운 정 담뿍 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를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때때로 서로 아웅다웅하면서도 여느 모녀지간 부럽지 않게 깊은 속정을 나누는 그 별난 관계를 어찌 말로, 모양새로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인희씨는 이불을 끌어 올려 시어머니의 목까지 덮어 주었다. 그러다, 인희씨는 왠지 한순간 흠칫 숨을 멈추었다. 목숨이 무엇이건대, 사는 게 무엇이건대 죽을 날 가까운 노모가 아들한테 방문 못질을 당하고, 손주 놈한테 모진 소리를 들어야 하나. 이제 내 한 몸 죽어지면 끈 떨어진 갓 모양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구박이나 당하며 사실 텐데. 나 가고 나도 이 노인네 투정 부리며 밥 잘 드실까. 근력 좋게 심통 부리며 이년, 저년 욕도 잘하실까. 아니, 아니지.
갑자기 인희씨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얼마나 한참을 울었을까. 그녀의 슬픈 눈에 돌연 비장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어 이불자락을 잡아채 시어머니 머리끝까지 덮어씌웠다. 잠결에 숨이 막힌 시어머니가 이불 속에서 발버둥을 쳤다. 인희씨는 눈을 꾹 감은 채 팔에 힘을 주었다. 온 힘을 다해 이불을 누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뭔지 모를 비애와 더불어 독한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이미 인희씨의 이마와 볼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었다.
어머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나 살았을 때 어머니가 죽어야 어머니도 편하고, 그래야 나도 편히 눈을 감지. 이제 금방 만날 거야, 어머니. 저승에 가서 내가 백 배, 천 배 더 효도할게.
"어으으으."
인희씨는 이를 악물었다.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시어머니의 신음에 잠시 멈칫했지만, 그녀는 이내 그 소리를 야멸차게 외면했다. 그리고 내처 그 늙은 목숨을 모질게 눌러댔다.
그 시각에 연수는 늦도록 가족사진을 들춰 보며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낡은 앨범의 곳곳에 온 가족의 단란했던 한때가 마치 거짓말처럼 담겨 있었다. 연수는 그 사진들을 새삼스런 눈으로 보고 또 보았다. 옛 사진을 보니 우리 가족에게도 그런 좋은 때가 있긴 있었구나 싶었다.
처음 아버지 병원이 문을 열었을 때쯤이었을 것이다. 그날 모처럼 온 가족이 함께 외식을 했고, 그 참에 사진도 몇 장 찍었다. 그때만큼은 할머니도 정신이 온전했고, 아버지 얼굴에도 중년 남자의 자신감과 활력이 펄펄 넘쳤다.
할머니를 한가운데 앉히고 부부가 평화스럽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오래도록 연수의 눈길을 끌었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는 밝고 건강한 중년 여성이었다. 이 모습으로 더도 말고 일 년만 더 식구들 곁에 머물러 주었으면. 그러면 연수는 아무것도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목숨도 무슨 물건처럼 내 것을 쪼개 남에게 나눠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연수는 문득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2층에서 내려와 주방으로 향하던 연수는 할머니 방에서 이상한 신음이 나는 것 같아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할머니 방으로 가 가만 방문을 열어 보았다. 처음에 연수는 웬 도둑이 들어온 줄 알고 덜컥 놀라기부터 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어머니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이불 속에 든 할머니를 잡아 누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연수는 눈앞에 캄캄해졌다. 그 이상한 소리는 바로 할머니의 신음이었던 것이다. 연수는 황망히 달려들어 어머니의 팔을 잡았다.
"엄마, 엄마, 왜 그래요. 놔요, 이러면 안 돼요."
인희씨는 딸의 다급한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이불을 잡아 누르고 있었다.
연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울부짖었다.
"엄마, 제발 놓으세요! 아버지, 아버지!"
연수는 있는 힘을 다해 어머니를 뜯어말렸지만, 도저히 어머니를 당해낼 수가 없어 아버지를 소리쳐 불렀다. 마치 인희씨는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이상한 기운에 휩싸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된다는 듯 시어머니를 마구 잡아 누르고만 있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이불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무슨 짓이야!"
"엄마!"
그 소동에 잠자리에서 뛰쳐나온 정박사와 정수가 무작정 그녀를 잡아떼었다. 그러나 숨을 헉헉대면서도 인희씨는 한사코 이불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정박사와 정수 둘이서 양쪽 팔을 하나씩 잡고 들어내서야 겨우 그녀를 떼어낼 수 있었다. 연수는 후다닥 달려들어 얼른 이불을 젖혔다. 상주댁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인희씨가 또다시 달려들어 팔을 뻗치는 바람에 상주댁은 다시 사색이 되었다.
"죽어!"
인희씨의 음성은 무척 단호하고 차가웠다. 정박사가 아내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쳤어? 왜 그래,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죽어!"
"정신 차려, 이 사람아!"
"엄마!"
정수는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변해 버린 어머니를 끌어안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인희씨 입에서 비명 같은 절규가 터져 나왔다.
"어머니, 어머니! 나랑 같이 죽자! 나 죽으면 어떻게 살래? 나랑 같이 죽자! 애들 고생 그만 시키고, 나랑 같이 죽자! 어머니이."
연수는 울컥 눈물이 치밀어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그때까지 정박사의 품에 안겨 있던 상주댁은 고통에 찬 며느리의 절규를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상주댁은 얼이 빠진 건지, 아니면 그 와중에 잠시 제정신이 돌아온 건지 얼핏 눈가에 이슬까지 맺혔다. 그 젖은 눈빛도 온전한 사람처럼 멀쩡하게 보였다.
어느덧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폭풍이 스치고 지나간 바닷가처럼 집안에는 괴괴하고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어찌 보면 바로 몇 시간 전에 난리를 치른 집 같지 않게 얼마쯤 평화로워 보이기도 했는데, 그건 순전히 인희씨 때문이었다. 인희씨는 일찍 깨어 밤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느 날과 전혀 다름없이 처신했던 것이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탓에 가족들은 모두 파김치가 되어 있었지만, 짐짓 겉으론 아무 일도 없는 듯 여느 날과 똑같이 처신했다. 우선 인희씨가 먼저 나서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머지 가족도 더불어 그녀 하는 양을 따라 그렇게 했던 것이다.
아침을 먹고 나서 인희씨는 시어머니를 씻긴다며 목욕탕으로 향했다. 상주댁은 순한 양처럼 며느리의 손에 이끌려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목욕탕 문이 딸깍 하고 닫히자 연수가 후다닥 달려갔다.
"엄마, 엄마! 저랑 같이 해요, 엄마!"
연수가 불안스런 목소리로 외치며 문을 두드려댔다. 모두들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은 죄 한마음이 되어 목욕탕 안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박사는 아들과 함께 소파에 앉아 연신 줄담배를 태웠다. 그러나 안에서는 바깥 분위기에 아랑곳없이 고부간에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희씨는 시어머니를 속옷 바람으로 좌변기 위에 앉혀 놓고 정성껏 비누칠을 해서 온몸을 씻기고 있었다. 간밤의 일로 어찌나 놀랐던지 상주댁은 옷을 입은 채로 그만 똥오줌을 싸고 만 것이었다.
"오늘뿐이야. 나 없으면 아무데나 똥 누고 그러면 안 돼. 안 그러실 거지?"
마지막으로 발을 닦아 주며 인희씨가 조금은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안 그러실 거지? 오늘은 내가 놀라게 해서 그런 거지? 이제 그러면 안 돼?"
인희씨는 어린애를 꾸짖듯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마음이 아파서 물기 어린 눈으로 시어머니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엄마!"
밖에서는 여전히 연수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희씨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예 대답도 하지 않고 목욕을 마친 시어머니에게 새 옷을 갈아 입혔다.
" 좋아?"
상주댁은 말없이 며느리를 보고만 있다.
인희씨가 그 앞에 쪼그려 앉으며 그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개운하지?"
상주댁은 어느덧 맑은 눈으로 며느리를 보고 있다. 어쩌면 정신이 돌아와 며느리 마음을 이해하는 것 같기도 한 눈빛이었다. 인희씨는 그런 시어머니를 대견한 듯 바라보았다.
"이렇게 입으니까 꼭 새색시 같네."
인희씨의 음성은 잔잔한 메아리가 되어 시어머니 가슴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싸우다 정든다고 나 어머니랑 정 많이 들었네. 친정어머니 먼저 가시고, 애비 공부한다고 객지 생활할 때, 애들 없구 외롭고 그럴 때도 어머닌 내 옆에 있었는데 나 밉다고 해도 가끔 나한테 당신 좋아하시는 거 아꼈다가 주곤 하셨는데 어머니 이제 기억 하나도 안 나지?"
인희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시어머니를 정겨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상주댁의 눈빛에도 참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바깥에서 또 마음을 놓지 못하는 연수의 목소리가 고부간의 대화를 끊어 놓았다.
"엄마?"
그때였다. 여지껏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상주댁이 연수가 있는 밖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저리 가, 이년아!"
인희씨는 마침내 시어머니가 말문을 열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시어머니의 그 눈빛이며 표정이 모두 해맑다. 인희씨는 비로소 시어머니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걸 깨닫고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 아까 미안해. 내 맘 알지?"
시어머니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인희씨는 다시 시어머니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말 하는 거 아닌데 어머니 정신 드실 때 혀라도 깨물어, 나 따라와. 아범이랑 애들 고생시키지 말고, 나 따라와, 기다릴게."
상주댁은 자기 손목을 끌어다 얼굴에 갖다대며 흐느끼는 며느리의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럴수록 며느리의 서러운 흐느낌을 잦아들 줄을 몰랐다.
25
다음날 인희씨는 늦게까지 잠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지난밤의 피곤이 이제사 인희씨를 곤한 잠에 빠뜨린 것이었다. 몹시 지친 듯 곤하게 자는 인희씨를 깨우지 않고 식구들은 저마다 조심스럽게 나들이 준비를 했다. 그날은 정박사 부부가 단둘이 일산 새집으로 나들이를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연수가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정수는 어머니의 짐을 챙겼다. 건넌방에선 정박사가 노모에게 아침밥을 떠먹여 드리는 중이었다.
"아, 하세요."
상주댁은 아들이 떠먹여 주는 죽을 가만가만 받아먹었다. 전에 없이 양순해진 눈빛 가득 뭔가 골똘한 생각들이 담겨 있는 듯했다.
"우리 어머니 잘 드시네. 다시 아, 하세요."
정박사는 아내 대신 노모에게 죽을 떠먹이며 자기도 모르게 아내를 흉내 내고 있었다. 노모는 얼핏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 보였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입을 벌렸다가 죽을 받아넘기며 간간이 뜻 모를 미소를 짓기도 했다.
"자, 이제 물 드시고 편안히 쉬고 계세요."
정박사는 노모가 식사를 마치고 물을 마시는 것을 지켜본 다음에야 건넌방을 나왔다. 주방에선 된장찌개 끓는 냄새가 구수하게 났다.
"나들이 준비는 안 하고, 내가 너무 오래 잤네."
얼마 후 기지개를 켜며 인희씨가 주방으로 나왔다. 그녀는 연수가 끓이는 된장찌개 냄비를 열어 보고는 방긋 웃어 보였다.
"쌀뜨물로 끓였니?"
"네."
연수가 쑥쓰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림 해두 되겠네."
인희씨는 식탁에 놓인 반찬들을 집어 먹으며 대견한 듯 딸을 바라보았다.
"아이고, 맛나다."
"간이 맞아요?"
"잘 맞네."
모처럼 어머니의 밝은 모습을 보니 연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찌개를 식탁으로 옮겨 놓고 수저도 보기 좋게 늘어놓았다. 그때 난데없이 어머니가 딸의 이름을 불렀다.
"연수야."
"네."
"연수야."
지극히 다정한 음성이었다. 연수는 문득 코끝이 찡해져 고개를 떨구었다. 인희씨는 연수가 대답을 해도 자꾸 이름을 부른다.
"어째 자꾸 우리 딸 이름이 부르고 싶네, 연수야."
연수는 공연히 안 닦아도 될 그릇들을 닦는 척하며 어머니가 부르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연수야."
" 네."
"난 우리 연수가 참 이쁘다."
순간 왈칵 목이 메이는 건 연수뿐만이 아니었다.
인희씨는 숫기 없는 딸의 뒷모습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며 굳는 듯 서 있었다.
불쌍한 것, 저것 시집 보내 놓고 극성맞은 친정어머니 소리 들어가며 총각김치며 밑반찬이며 열심히 퍼다 줄 생각에 마음이 설레기도 했었는데. 예전에 친정 엄마한테 못 받았던 것 저 애 시집보내고 다 해주려고 했는데.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던데, 정말 그러면 어쩌나, 불쌍해서 어쩌나.
인희씨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도 잊고 딸의 뒷모습만을 마냥 아프게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일어나셨네?"
어느 틈에 정수가 다가와 뒤에서 인희씨를 껴안았다. 인희씨는 이내 눈물을 닦고 감정을 수습했다.
정박사도 식탁에 와 앉았다. 정수는 어머니가 우는 걸 짐짓 모르는 체하고 누나를 도와 식탁에 밥을 날랐다. 이윽고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정수는 인희씨 곁에 앉아서 이것저것 수저에 반찬들을 얹어 주었다.
"이번엔 뭘 줄까? 무나물? 버섯?"
인희씨는 아들이 놓아주는 대로 가만히 밥술을 입에 넣어 넘기고 있었다. 정박사는 밥을 먹으며 눈으로는 신문을 뒤적거리는 척 그 모습을 못 본 체하고, 연수는 물을 떠다 놓는다, 찌개를 더 가져온다 하며 괜스레 자리를 뜨곤 했다.
"뭐, 두부? 엄마, 말해. 엄마 찌개 먹고 싶은데 내가 무나물 주고, 엄마 버섯 먹고 싶은데 내가 두부 줄까 봐 그래?"
아무 말 없이 수저만 들여다보고 있는 인희씨를 향해 정수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묻는다. 잠자코 있던 인희씨가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두부 주면 두부가 먹고 싶었던 것 같고, 네가 버섯 주면 꼭 그게 먹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랬다. 지금 인희씨는 아들이 수저에 모래를 얹어 준다 해도 꼭 그게 먹고 싶었던 것처럼 목이 메었다. 아직 어린 아들에게도 한이 많다.
이다음엔 정수도 장가를 들고 아빠가 되겠지. 이 녀석 결혼하면 해보고 싶은 것도 참 많았다. 며느리 앞세워 시장에도 가고, 옷도 사주고, 같이 순대도 먹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간혹 일찍 며느리를 본 친구들이 며느리 손잡고 쇼핑 다니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손주가 생기면 보약도 지어 먹이고, 어르르 까꿍 어르다 품에 안고 낮잠이라도 한번 자보고 싶었는데. 며느리가 가끔 제 잘난 맛에 까불면 따끔하게 시에미 매운맛도 보여 주리라.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이내 생각을 바꾼다. 아니야, 그랬다가 제 남편한테 화풀이라도 하면 큰일이지, 하며 마음을 고쳐먹기도 했었다. 요즘 세상의 그 이상한 며느리살이라는 것도 인희씨에겐 궁금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정말 그런 며느리들이 있을까. 내 아들 색시가 그렇게 나온다면 어째야 하나.
그러나 지금 이렇게 되고 보니 아들 장가는커녕 대학 등록금도 자기 손으로 못 내주는 아쉬움에 인희씨는 목이 메이는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아침 식사는 그렇게 끝났다. 인희씨는 시어머니와의 이별을 위하여 건넌방으로 향했다.
"어머니, 나 아범이 좋은 데 데려간대. 그런데 좀 힘들어. 집에서 어머니랑 애들하고 그냥 쉬고 싶기도 한데 쉬엄쉬엄 가보려구 해. 그냥 이 집이 조금 무섭네. 정 뗄라고 그러는지. 소란 피우지 말구 있어요?"
상주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인희씨는 함초롬히 젖은 눈매로 한동안 시어머니를 응시하다 손목을 꼭 쥐었다.
"나, 가요."
"어여 가."
"네, 갈게요."
잠시 두 여인의 눈빛이 마주쳤다. 찰나에 수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양 상주댁도 인희씨도 쉬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서로의 눈빛 사이로 시린 세월이 마치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두 여인이 함께 보낸 그 긴 세월의 길목에 켜켜이 쌓인 아픔이 이제 차차 물거품처럼 스러지고 있었다.
집 앞에는 근덕이 택시를 끌고 와 미리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누나의 사정을 전해 들은 그날 오후, 근덕은 택시 운전에만 전념하며 그런대로 착실히 일하고 있었다. 오늘 그는 누나가 집을 비운 사이 사돈댁 노인네를 돌봐 드릴 처를 데려다주려고 온 것이었다.
"상종 못 할 인간!"
근덕댁은 바로 코앞에까지 와서 한사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는 남편에게 화를 내며 차에서 내렸다. 아내의 볼멘소리에도 근덕은 묵묵히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차마 누나의 마지막 모습을 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갖다 줘."
그가 뚱한 얼굴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뭐야?"
"얼른 받아!"
근덕은 다짜고짜 쏘아붙이며 봉투를 힐끗 보는 아내를 향해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놀러 간다며? 갈 때 먹으라고 줘."
"뭔데?"
"호두과자야. 우리 누나, 그거 좋아해."
근덕은 다소 밉지 않은 시선으로 흘겨보는 아내를 짐짓 외면하며 핸들을 잡았다. 눈가에 어린 슬픔의 흔적을 아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제 산 거야. 레인지에 데워 먹으라고 해. 잘난 거 먹다 목메일라."
근덕은 누나가 있는 집 쪽을 한번 돌아보고는 그대로 떠나 버렸다. 근덕댁은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어쩌면 저렇게 주변머리가 없을까. 볼수록 한심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근덕은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택시를 멈췄다. 더 이상은 도저히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양손을 핸들이 부서져라 내리쳤다. 그리고 무너지듯 천천히 핸들에 고개를 처박았다. 갑자기 근덕의 어깨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속 안에 감춰둔 슬픔의 덩어리를 모조리 끄집어냈다. 지나던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꺼이꺼이 큰소리로 울어대는 것이었다.
출발 시간이 다가왔다.
인희씨는 창백하고 지친 모습으로 대문을 나섰다. 근덕댁이 바로 뒤에 따라나섰다.
"조심해 다녀오세요. 이거 반찬 몇 가지 하고, 이건 호두과자예요. 그이가 샀어요."
"근덕이가..."
인희씨는 올케가 건네준 호두과자 봉지를 가슴에 안았다. 갑자기 가슴 언저리가 짜안해져 인희씨는 봉지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못난 남동생의 마음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그이 이제 일해요. 택시 회사 다시 들어갔어요."
인희씨는 올케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케가 참 고맙네."
"뭘요?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인희씨는 호두과자 봉지를 소중히 안은 채 당부했다.
"노인네 잘 모셔."
"네."
인희씨는 올케 등을 몇 번 토닥여 준 다음 그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근덕댁은 벌써부터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고인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인희씨는 그 눈물을 뒤로 한 채 자동차로 향했다. 이미 정수와 연수는 앞좌석에 타고 있었다. 인희씨가 앞좌석 차 문을 두드리며 정수를 부른다.
"정수야. 니가 뒤에 타고, 당신은 앞에 타요."
정수가 아버지의 서운한 눈길을 의식하며 미적미적 뒷좌석으로 왔다. 이어 정박사가 앞좌석으로 가 앉은 다음에 차는 천천히 집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손을 흔드는 근덕댁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차는 시내를 거쳐 바로 강북 강변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얼마를 더 달려 자연스럽게 자유로로 합류했다.
"식구들끼리 소풍두 가구, 참 좋다. 근데, 길이 일산 쪽이네? 거긴 러브호텔 같은 것도 별로 없던데, 어디 좋은 데가 따로 있나?"
뒷좌석에서 정수의 손을 꼬옥 잡은 채 눈으로는 운전하는 연수의 뒷모습을 마냥 응시하며 인희씨가 어린애처럼 천진하게 물었다. 정박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때 차는 일산 보건소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앞으로 자신이 일하게 될 보건소를 바라보며 아내를 향해 속엣말로 중얼거렸다.
'잘 봐 둬. 당신 죽고 웬 홀애비 하나가 저기 있을 거야. 꽁지 빠진 닭처럼 늙고 초라한 홀애비 보건소장이 말이야.'
그러나 인희씨는 남편의 속엣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벌써부터 지친 얼굴이다.
"딴 데 가지. 경치 좋은데."
그 말을 끝으로 인희씨는 가물가물 잠에 빠져들었다. 정수는 그런 어머니를 한사코 외면한 채 굳은 얼굴로 창밖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인희씨는 연수가 차를 멈추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다 왔어요."
"여긴 우리 집이잖아?"
인희씨는 어머니의 기뻐하는 모습에 미소 지으며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내가 연수랑 정리했어. 들어가자."
인희씨는 짐 보따리를 들고 내리는 남편을 감격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내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릴 생각도 못 하고 그저 새집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로소 인희씨는 오늘 소풍이 자식들과의 마지막 이별 여행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만치서 정박사가 혼자 짐을 든 채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정수야, 엄마 봐야지?"
정수는 아까부터 한사코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인희씨가 부르자 그제서야 고개를 조금 돌리다 도로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정수는 입술을 꽉 다문 채 고개를 떨구었다. 인희씨는 그런 아들의 열린 셔츠 단추를 일일이 채워 주며 말을 이었다.
"엄마, 낼이라도 다 쉬었다 싶으면 갈게. 울어?"
정수는 고개를 젓는다. 그 바람에 인희씨의 손등으로 뜨거운 눈물방울이 튀었다. 그녀는 그것을 모른 체하고 짐짓 장난스럽게 묻는다.
"정수야, 나 누구야?"
"엄마."
인희씨는 울지 않으려 고개를 쳐들고 눈을 부릅뜨는 아들을 향해 방긋 웃는다.
"한 번만 더 불러 봐?"
"엄마."
정수는 기어이 목이 메어 어깨를 들썩거렸다. 인희씨가 어린아이한테 이르듯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정수야, 너 다 잊어버려두 엄마 얼굴두 웃음두 다 잊어버려두 니가 이 엄마 뱃속에서 나온 건 잊으면 안 돼!"
정수는 무척 힘들게 고개를 끄덕인다. 인희씨는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문득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내어 아들에게 쥐어 주었다.
"이거 나중에 니 마누라 줘."
인희씨는 정수가 그 반지를 받지 않고 자꾸 고개만 젓자 마침내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잊어먹을까 봐 그래. 아무리 뒤져 봐도 엄마가 이거밖에 줄 게 없다, 미안해."
정수는 인희씨 품에 안겨 이를 악물고 억지로 울음을 삼키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아들을 끌어안고 있던 인희씨는 이윽고 정수를 몸에서 떼어내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내려 봐. 누나랑 할 얘기 있어."
정수가 차에서 내렸다. 인희씨는 힘겨운 몸짓으로 시트에 등을 기대면서도 여전히 시선은 창밖을 향한 채 말을 이었다.
"연수야, 엄마가 아무래도 곧 정신을 놓칠 것 같다. 자꾸 가물가물해."
연수는 이미 어머니가 자식들과 마지막 이별 의식을 치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핸들을 부여잡은 채 앞만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인희씨의 낮은 음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엄마, 연수 사랑해. 알지?"
"네, 저도 엄마 사랑해요."
연수는 고개를 숙인 채 인희씨 몰래 울고 있었다.
"그래. 사랑해. 아주 많이 사랑해."
어머니도 울고 있는가. 목소리가 점점 흔들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너는 나야. 엄마는 연수야."
"네."
"이제 동생 데리고 가. 엄마 아버지랑 좀 쉬어야겠다."
연수는 소리 죽여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에서 인희씨가 목을 끌어안았다.
"착한 우리 딸."
인희씨의 눈물 젖은 입술이 연수의 볼에 닿았다. 연수의 볼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러내리고 있었다.
26
아이들이 가고 있다.
인희씨는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며 손을 흔든다.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가슴에, 갈비뼈에, 발등에 두루두루 불도장처럼 와서 박히는 것 같다. 저것들이 울며 간다. 먼발치에서 보아도 인희씨는 눈에 선하다. 봐야 안다지만 그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것들의 어미인 까닭에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선 채로 질근 입술을 물었다.
죽는다는 것, 그건 못 보는 것이다. 보고 싶어도 평생 못 보는 것. 만지고 싶은데 못 만지는 것. 평생 보지도 만지지도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이름의 지독한 이별인 것이다.
인희씨는 석상처럼 선 채 점점이 멀어져가는 연수의 차를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정박사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인희씨는 잘 꾸며진 집 안을 보고 몹시 감탄했다. 옷장이며 응접세트, 식탁, 침대까지 모두 눈에 마뜩해 보였다. 커튼, 액자, 벽시계도 모두 자기 취향에 꼭 맞았다.
"참 좋다. 언제 이걸 다."
"마음에 들어? 그냥 대충했는데."
인희씨는 남편의 이러한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못내 아쉬운 느낌도 들었다. 집 안 곳곳이 동화처럼 꾸며져 있었으나, 이런 배경은 가족 삶의 행복한 지속을 보장하는 공간인 동시에 자신에겐 영영 이별하는 아쉬운 장소, 그런 일회성의 공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인희씨는 차로 여기까지 오는데도 힘들었던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박사는 아내를 침대에 눕혔다. 이내 인희씨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겨울 낮은 노루꼬리처럼 짧았다. 인희씨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느라 그토록 소망하던 석양 무렵의 호수도 보지 못했다. 정박사는 오히려 다행이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노을 지는 광경이 아내에게 무슨 별난 감흥을 줄 수 있겠는가. 스스로 노을 지는 아내로서는 오히려 황혼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의 죽음이나 헤아리고 있을 게 뻔했다.
아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정박사는 혼자 이른 만찬을 준비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서서히 호수 주변으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당신, 솜씨 좋네. 새 장가가도 되겠네."
저녁 무렵 잠에서 깨어난 인희씨는 그가 정성껏 끓인 죽을 힘없이 받아먹으며 배시시 웃었다.
"이걸 어떻게 만들었대?"
"연수한테 좀 배웠지, 뭐."
인희씨는 입으로보다 눈으로 더 많은 음식을 먹었다. 정박사는 한 숟갈이라도 더 아내 입에 떠넣어 주려 수저를 들이대는데, 그녀는 한사코 보기만 한다. 입에 소태처럼 써서 음식이 잘 넘어가질 않는 것이다.
"한 숟갈만 더 먹어 봐."
"이제 차 마시자."
정박사가 마지막으로 떠넣어 주는 죽을 마지못해 받아넘기고 나서 그녀가 서툴게 응석을 부렸다. 그런 아내를 마주 보며 정박사가 희미하게 웃었다.
정박사는 곧 차를 끓여 거실로 가져왔다.
"무슨 찬지 향이 좋네. 무슨 차야?"
"몰라. 그냥 향이 좋은 차야. 훌훌 불어서 마셔. 뜨거워."
"꼭 신혼여행 온 것 같다. 당신 공부한다고 우리 신방도 못 차리고 산 거 알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방긋 미소 짓는 인희씨를 정박사는 처연한 시선으로 마주 보았다. 이름도 모르고 산 차 한 잔에도 저렇게 행복해하는 여자를 그동안 왜 그렇게 못 해줬던가.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아니 한 달에 십 분만이라도 아내를 저렇게 기쁘게 해주었더라면 지금처럼 마음이 헛헛하지는 않았을 것을. 정박사의 사무치는 회한을 꼬집기라도 하듯 인희씨가 이내 말을 이었다.
"말년에 복이 텄다더니, 이런 날이 올려고 그랬나 보네. 당신은 좋겠다. 이런 집에서 앞으로 십 년을 살겠지?"
정박사는 짐짓 아내의 말을 묵살하며 입을 열었다.
"씻을래?"
"힘들어."
"힘드니까 씻어, 씻겨 줄게."
"정말?"
인희씨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평생 목욕은커녕 한여름에도 물 한 바가지 안 끼얹어 주던 남편이었다. 정박사는 새삼 쑥스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아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욕조엔 이미 적당히 데워진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인희씨는 다소 부끄러워하면서도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겼다. 욕실에 들어선 정박사는 그녀를 욕조에 걸터앉히고 한 가지씩 가만가만 옷을 벗겨 주었다. 삶은 계란 속살처럼 희고 부드러웠던 살결이 이제는 나무껍질처럼 마르고 군데군데 멍든 자국이 선명하다. 그러나 정박사의 눈에는 그런 아내가 전혀 험해 보이지 않는다. 새색시인 양 여전히 곱다. 그는 아내의 몸을 조심스럽게 욕조에 누이고 비누칠을 해서 정성껏 닦아 주었다. 인희씨는 조금 어색해하면서도 간지럼을 타는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눈 매워."
"그러니까 눈을 꼭 감아야지."
"감아두 매워."
머리를 감기고 드라이어로 말린 다음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렇게 하고 나니 발그레한 홍조를 띤 인희씨 얼굴이 소녀처럼 해맑다. 정박사는 수건으로 얼굴에 남은 물기를 마저 닦아 주고 나서 그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쁘다, 우리 마누라."
그 말을 들은 인희씨가 갓 시집온 색시처럼 수줍게 웃었다. 이제 저 웃음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천년 뒤 내생의 어느 이름 모를 마을에서, 아니면 낯선 어느 길모퉁이에서, 그런 데서나마 볼 수 있을까. 곱다 그 웃음 슬프도록 곱다.
얼마 후, 부부는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테레비라도 하나 갖다 놓을 걸, 심심하네."
멀뚱하게 누워 있던 정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공연히 눈 둘 곳을 몰라 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부부가 이런 시간을 가져보기는 생전 처음이라 조금은 낯설고 멋쩍은 것이다. 이윽고 골똘히 무슨 생각에 잠겨 있던 인희씨가 입을 열었다.
"여보, 나 소원 있어."
"..."
"나, 무덤 만들어 줘."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인희씨는 차가운 땅속에 묻히기 싫다며 차라리 화장이 좋다고 했었다. 그땐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며 버럭 화를 냈었는데, 정박사는 지금 그럴 배짱도 없다.
"언젠 답답해서 싫다구 화장해 달라매?"
"우리 엄마 화장하니까 별루드라. 남한강에 뿌렸는데, 하두 오래되니까, 여기다 뿌렸는지, 저기다 뿌렸는지 도통 기억에 없구. 여기 가서 울다, 저기 가서 울다 꼭 미친 사람처럼. 당신하구 애들은 그러지 말라구."
정박사는 잠자코 앞만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 곁에서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손가락을 물어뜯고 있던 인희씨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당신은 나 없어도 괜찮지?"
정박사는 말없이 아내 얼굴만 돌아보았다.
인희씨가 그 눈길을 외면하며 지나가는 말처럼 다시 이었다.
"..."
"나, 보고 싶을 거는 같애?"
정박사는 아내를 더 이상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인희씨가 또 묻는다.
"언제? 어느 때?"
"다."
"다 언제?"
"아침에 출근하려고 넥타이 맬 때."
"또?"
"맛없는 된장국 먹을 때."
"또?"
"된장국 맛있을 때."
"또?"
묻는 아내도, 대답하는 남편도 점차 목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정박사는 아내를 보지 않은 채 마음속에 빗장처럼 걸려 있던 말들을 하나씩 하나씩 뱉어냈다.
"술 먹을 때, 술 깰 때, 잠자리 볼 때, 잔소리 듣고 싶을 때, 어머니 망령 부릴 때, 연수 시집갈 때, 정수 대학 갈 때, 그놈 졸업할 때, 설날 지짐이 부칠 때, 추석날 송편 빚을 때, 아플 때, 외로울 때."
정박사의 고백이 이어지는 동안 인희씨는 물기를 가득 머금은 눈으로 괜한 손톱을 물어뜯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도 차마 남편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할 만큼 감정의 진폭이 커지고 있었다.
"당신 빨리 와. 나 심심하지 않게."
기어이 인희씨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정박사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도 아내를 안은 채 꺽꺽 울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인희씨가 젖은 눈을 들어 수줍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여보, 나 이쁘면 뽀뽀나 한번 해주라."
정박사는 아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길고 오랜 영혼의 입맞춤을 나눴다.
"너 정말 고마웠다."
침실 가득 눈부신 햇살이 밀려들었다. 아침이었다. 햇살은 마치 무슨 축복인 양 쏟아져 들어와 잠든 인희씨의 하얀 얼굴을 비춰 주고 있었다. 정박사는 잠에서 깨자마자 조용히 아내를 불러 보았다.
"여보."
아내는 그의 팔에 안긴 채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깊은 잠에 빠진 아내를 돌아보지 않은 채 다시 한번 조용히 불렀다.
"여보."
아내를 안고 있는 오른쪽 팔에서는 이미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인희야!"
정박사는 오열하며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계속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서서히 몸을 굽혀 식어 버린 아내의 몸을 부서져라 껴안아 주었다. 그녀의 입술에 입 맞추며 그렇게 언제까지, 언제까지 끌어안고 있었다. 어느결에 고인 슬픔인지, 깊이 잠든 인희씨의 눈에도 차디찬 물기가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