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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1945~ )

가난한 새의 기도

가신 이에게

가위질

가을

가을 길

가을 노래

가을바람

가을바람 편지

가을 비에게

가을빛

가을 사랑

가을 산은

가을에

가을에 밤(栗)을 받고

가을엔 이렇게 살게 하소서

가을 엽서

가을의 말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가을이 아름다운 건

가을 일기

가을 저녁

가을 편지 1

가을 편지 2

가을 편지 3

갈릴리 호수에서

감사 예찬

감사와 행복

감은 눈 안으로

감을 먹으며

감자의 맛

강(江)

거울 속의 내가

건망증

겨울 길을 간다

겨울나무

겨울 노래

겨울 바다

겨울밤

겨울 산길에서

겨울 아가

겨울 연가

겨울 엽서

겨울이 잠든 거리에서

겨울잠을 깨우는 봄

겸손

고독

고독에게

고독을 위한 의자

고마운 손

고마운 여름

고백

고운 말

고운 새는 어디에 숨었을까

고추를 찧으며

고향의 달

구름의 노래

군인을 위한 기도

그네뛰기

그대 차가운 손을 – 위령 성월에

그리운 등불 하나

그 사랑 놓치지 마라

그해 겨울의 산타클로스

기다리는 행복

기도 일기

기도할 때 내 마음은

기쁨 꽃

기쁨에게

기쁨으로 불을 놓게 하소서

기쁨이란

기쁨이란 반지는

기쁨이 열리는 창

기쁨 찾는 기쁨

기차를 타요

길 위에서

길을 떠나며

길을 떠날 때

김칫국 이야기

까치에게

깨어 사는 고독

꽃과 나

꽃 마음 별 마음

꽃망울

꽃멀미

꽃밭에 서면

꽃봉오리 속에 숨겨온 그 마음

꽃샘바람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

꽃씨를 선물하는 마음

꽃을 보고 오렴

꽃의 말

꽃의 향기, 사람의 향기

꽃 이름 외우듯이

곷집에서

꽃 한 송이 되어

꿈길에서

꿈을 위한 변명

꿈 일기

나 그대에게 고운 향기가 되리라

나를 길들이는 시간

나를 부르는 당신

나를 위로하는 날

나를 키우는 말

나무

나무를 안고

나무에게 받은 위로

나무의 마음으로

나무의 사랑법

나무의 자장가

나무 책상

나뭇잎 러브레터

나비에게

나비의 연가

나에게 말하네

나의 꿈속엔

나의 밭에는 어떤 씨를 뿌릴 것인가

나의 별이신 당신에게

나의 서가

나의 시(詩)

나의 시편들

나의 창은

나의 첫 기도

나의 하늘은

나팔꽃

낙엽

낙엽 빛깔 닮은 커피

낡은 구두

낯설어진 세상에서

내가 나에게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내가 비어 있음으로 편안하구나

내가 선택한 당신

내가 아플 때

내가 알게 된 참 겸손

내 고운 친구야

내 기도의 말은

내 나이 가을에 서서

내 마음

내 마음을 흔들던 날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내 마음의 방

내 마음의 사계절

‘내 마음이 메마를 때면’ 중에서

내 안에서 크는 산

내 안에 흐르는 시

내일

내 혼에 불을 놓아

너에게 가겠다

너와 나는

너의 집은 어디니

누가 나를 위해

누구라도 문구점

누군가 내 안에서

눈꽃 노래

눈꽃단상

눈꽃 아가

눈 내리는 날

눈 내리는 바닷가로

눈물

눈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니

눈물의 힘

능소화 연가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다리

다시 겨울 아침에

다시 바다에서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단추를 달 듯

단풍나무 아래서

달맞이꽃

달빛 기도

달빛 인사

달을 닮아

달팽이 노래

당신도 꽃처럼

당신만큼

당신 앞에 나는

당신에게

당신을 위해 내가

당신을 위해서임을 잊지 말아요

당신을 향해

당신의 숲속에서

당신이 보고 싶은 날

당신이 울고 있던 날

대청소

도라지꽃

동백꽃이 질 때

둘이서 만드는 노래

듣게 하소서

듣기

들국화

들음의 길 위에서

등꽃 아래서

따뜻한 마음

따스한 웃음을

마늘밭에서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비우는 새

마음의 문

마음의 선물

마음이 마음에게

마지막 기도

만남의 길 위에서

말 말 말

말과 글

말없이 사랑하십시오

말을 위한 기도

말의 빛

맑은 종소리에

매화 앞에서

머리를 빗듯

먼지가 정다운 것은

먼지를 쓸어 내고

메밀꽃 미소

몽당연필

묘지에서

무궁화

무지개 빛깔의 새해 엽서

묵은 달력을 떼어내며

물망초

미리 쓰는 유서

미소를 잃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민들레

민들레의 영토

바다가 쉴 때는

바다는 나에게

바다로 달려가는 바람처럼

바다새

바다에서 쓴 편지

바다여 당신은

바다 일기

바닷가에서

바람 부는 가을 숲으로 가자

바람에게

바람의 시

바람이 내게 준 말

바람이여

반지

밤의 기도

밤의 얼굴

밤 한 톨

밥집에서

밭노래

밭도 아름답다

배추밭에서

백합의 말

버섯에게

번개 연가

벗에게

별을 보며

별을 보면

병상 일기

보게 하소서

보고 싶다는 말

보름달에게

보호색

복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봄과 같은 사람

봄까치꽃

봄날 같은 사람

봄날 아침 식사

봄 아침

봄이 되면 땅은

봄이 오는 길목에서

봄이 오면 나는

봄 일기

봄 편지

봄 햇살 속으로

봉숭아

부고(訃告)

부끄러운 고백

부끄러운 손

부르심

부활절 아침에

분꽃에게

비가 전하는 말

비 갠 아침

비 내리는 날

비도 오고 너도 오니

비밀

비밀 서랍

비 오는 날에

비 오는 날의 일기

비타민을 먹으며

빈 꽃병의 말

빈 들에서

빈 의자의 주인에게

빨래

빨래를 하십시오

사과 향기

사라지는 침묵 속에서

사람 구경

사람 꽃도 저마다의 꽃술이 있다

사랑도 나무처럼

사랑병

사랑에 대한 단상

사랑은 어디서나

사랑의 말

사랑의 사람들이여

사랑 키우기

사랑의 털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중(中)에서

사르비아의 노래

사막에서

산에서 큰다

산 위에서

산을 보며

산처럼 바다처럼

살아가는 모든 날들이

살아 있는 날은

삶과 시

삶의 층계에서

상사화

상처의 교훈

새가 있는 언덕길에서

새들에게 쓰는 편지

새롭게 사랑하는 기쁨으로

새벽 창가에서

새해 마음

새해 새 아침

새해 아침에

새해에는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새해의 기도

새해의 약속은 이렇게

새해 첫날의 소망

색연필

서시(序詩)

석류

석류꽃

석류의 말

선물의 집

선인장

선인장의 고백

설거지

섬에서

성 금요일의 기도

성서

성지 순례기

성탄 인사

성탄 편지

소금 호수에서

소나무 연가

소녀들에게

소녀에게

소망의 꽃씨

손톱을 깎으며

솔방울 이야기

송년 기도 시

송년 엽서

수국을 보며

수녀와 까치

수평선을 바라보며

숲에서 쓰는 편지

슬픈 날의 편지

슬픔이 침묵할 때

시가 익느라고

시간의 얼굴

시에게

시의 집

시인은

시 읽기

심부름

쌀 노래

쓰레기통 앞에서

쓸쓸한 날만 당신을

씨를 뿌리는 마음

아기는

아름다운 기도

아름다운 모습

아름다운 슬픔

아이의 창엔

아침

아침 바다에서

아침의 향기

아카시아꽃

아픈 날의 일기

안개꽃

안녕히 가십시오

안타까움

앞치마를 입으세요

약속의 슬픔

어느 꽃에게

어느 날의 커피

어느 노인의 고백

어느 말 한마디가

어느 무희(舞姬)에게

어느 봄날

어느 수채화

어느 아침

어느 일기

어느 조가비의 노래

어둠 속에서

어떤 결심

어떤 기도

어떤 별에게

어떤 후회

어린 왕자를 위하여

어머니

어머니가 계시기에

어머니께 드리는 노래

어머니의 방

어머니의 빈방에서

어머니의 섬

어머니의 편지

어여쁜 눈사람이 되어

언니

언어는 돌이 되어

엄마를 기다리며

엄마와 딸

엄마와 분꽃

엄마와 아이

엄마, 저는요

엉겅퀴의 기도

여름 노래

여름이 오면

여름 일기

여백이 있는 날

여정

여행길에서

연필을 깎으며

열두 빛깔 편지

열매

오늘도 십자가 앞에 서면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오늘은 쉬십시오

오늘을 위한 기도

오늘의 약속

오늘의 얼굴

오늘의 행복

오월의 아가

오직 사랑 때문에

왜 그럴까, 우리는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외로움을 진지하게 맞아들이세요

용서를 위한 기도

용서의 꽃

용서하십시오

우리를 흔들어 깨우소서

우리 집

우산이 되어

우정 일기

우체국 가는 길

유월의 숲에는

유채꽃

유혹에서 지켜주소서

음악의 향기

음악인들을 위하여

이 가을에는

이끼 낀 돌층계에서

이별 노래

이별 연습

이별의 눈물

이별 소곡

이사

이제는 봄이구나

이제 당신이 오시어

이젠 다시 사랑으로

이타적인 예민함을

익어가는 가을

인연의 잎사귀

입춘 일기

있잖니 꼭 그만때

잎사귀 명상

자연을 닮아

작은 노래

작은 새가 되고 싶다

작은 언니

작은 위로

잠 노래

잠의 집

장독대

장독대에서

장미를 생각하며

장미의 기도

장미를 생각하며

저녁 강가에서

전화를 걸 때면

정말 미안해

정성껏 살아간다는 것은

제비꽃 연가

조그만 행복

조시(弔詩)를 쓰고 나서

종소리

좋은 말이 사람을 키웁니다

주일 노래

주일에 나는

죽은 아기를 위하여

죽음을 잊고 살다가

즐거운 산책

지도에는 금이 가도

지혜로 가득한 밤

지혜를 찾는 기쁨

진달래

진주조개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집을 위한 노래

찔레꽃

차를 마셔요, 우리

차 한잔하시겠어요

창가에서

채송화 꽃밭에서

책과의 여행

책을 읽는 기쁨

천리향

첫눈 편지

청소 시간

초대의 말

촛불

촛불 켜는 아침

추억 일기

춘분 일기

치자꽃

친구 바람에게

친구에게

친구야 너는 아니

침묵

침묵에게

침묵 일기

코스모스

튤립을 닮은 동무

파꽃

파도여 당신은

파도의 말

패랭이꽃 추억

편지

편지 쓰기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푸른 하늘

풀꽃의 노래

풀물 든 가슴으로

하관

하느님 당신은

하늘은 투명한 거울

하늘, 하늘, 하늘

하루의 문을 닫으며

하얀 집

한 그루의 나무처럼

한 그루의 우정 나무를 위해

한 방울의 그리움

한 송이 수련으로

한여름 아침

한 톨의 사랑이 되어

한해를 돌아보는 길 위에서

할미꽃

합창을 할 때처럼

항아리에 기쁨을

해녀의 꿈

해님도 나를 보고

해바라기 마음

해바라기 연가

해질녘의 단상

해질녘의 바다에서

햇빛을 받으면

행복

행복에게

행복을 향해 가는 문

행복의 얼굴

행복이라 부릅니다

향기로운 말

헌혈

헝겊 주머니

호수 앞에서

홀로 있는 시간

홀로 있는 시간은

환대

황홀한 고백

후회

휴가 때의 기도

흐르는 삶만이

흙을 만지면

희망에게

1%의 행복

3월에

3월의 바람 속에

3월의 바람 속에 – 법정 스님 추도시

4월의 시

5월

5월의 시

5월의 편지

6월엔 내가

6월의 장미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8월의 시

9월의 기도

10월의 기도

10월 엽서

11`월에

11월의 나무처럼

12월의 노래

12월의 시

12월의 엽서

12월의 촛불 기도

 

 

 

가난한 새의 기도

이해인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필요한 만큼만 둥지를 틀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새처럼

당신의 하늘을 날게 해주십시오

 

가진 것 없어도

맑고 밝은 웃음으로

기쁨의 깃을 치며

오늘을 살게 해주십시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먼 길을 떠나는 철새의 당당함으로

텅 빈 하늘을 나는

고독과 자유를 맛보게 해주십시오

 

오직 사랑 하나로

눈물 속에도 기쁨이 넘쳐날

서원의 삶에

햇살로 넘쳐오는 축복

 

나의 선택은

가난을 위한 가난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가난이기에

모든 것 버리고도

넉넉할 수 있음이니

 

내 삶의 하늘에 떠다니는

흰구름의 평화여

 

날마다 새가 되어

새로이 떠나려는 내게

더 이상

무게가 주는 슬픔은 없습니다

 

 

 

가신 이에게 - 글라라 수녀님께

이해인

 

'내가 잘못한 일

나로 인해 서운한 일 있으면

모두 모두 용서해줄 거제?

먼 길 떠나기가 와 이리 힘드노'

하시던 수녀님

 

오랜 병고로

누구보다 괴롭고 고독했던

수도 여정을 끝까지

기도와 유머로 이어오신 수녀님

 

이젠 지상에서의 삶을 끝내시고

숨을 거두셨다구요?

그래서 하얀 홑이불에 싸인 채

병원에서 집으로 오셨군요

 

연도를 드리다 말고

수녀님 쓰시던 성당 자리에서

책을 치우고

침방에서 옷가지며

신발을 정리하는데

어느새 곁에 와서

말을 건네시는 수녀님

 

'내 들꽃 좋아하는 것 알제?

내가 좋아하는 가을길을 걸어서

꽃의 고향으로 왔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거래이......

이젠 나도 편히 쉴란다'

 

 

 

가위질

이해인

 

예쁜 색지(色紙)도

무늬 고운 헝겊도

 

쏙닥쏙닥 

오리길 좋아했었네

 

기인 머리채도

결 고운 비단도

 

나를 자르듯

잘라낼 수 있었지만

 

칼끝 같은 가위로도

도려낼 수 없는

 

아득하고 아득한

너를 향해 펼쳐진 마음

 

 

 

가을

이해인

 

보고 싶어

보고 싶어

 

가을은

사랑에 빠진

하느님 얼굴

 

산천이

일어서네

 

풀섶의 벌레가

숨어 빚는 가락이

기도가 되는

 

가을은

나를 안은

유리 항아리

 

눈을 감아도

하늘 고이네

물이 고이네

 

 

 

가을 길

이해인

 

바람이 지나가다

내 마음의 창문을

살짝 흔드는 가을길

 

탱자. 시냇물. 어머니

그리운 단어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잠시 멈추어 선 가을길

 

푸른 하늘을 안으면

나의 사랑이 넓어지고

 

겸손한 땅을 밟으면

나의 꿈이 단단해져요

 

이제 내 마음에도

서늘한 길 하나 낼거에요

 

쓸쓸한 사람들을 잘 돌보는

나무 한 그루 키우려고..

 

 

 

가을 노래

이해인

 

1

하늘은 높아가고

마음은 깊어가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이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 싶고

 

죄 없이 눈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

 

친구여, 너와 나의 사이에도

말보다는 소리 없이 강이 흐르게

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져야겠구나

 

남은 시간 아껴 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잎이 질 때마다

한 움큼의 시들을 쏟아내는

나무여, 바람이여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하늘은 높아가고 가을은 깊어가네.

 

 

2

가을엔 물이 되고 싶어요

소리를 내면 비어 오는

사랑한다는 말을

흐르며 속삭이는 물이 되고 싶어요

 

가을엔 바람이고 싶어요

서걱이는 풀잎의 이마를 쓰다듬다

깔깔대는 꽃 웃음에 취해도 보는

연한 바람으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풀벌레이고 싶어요

별빛을 등에 업고

푸른 목청 뽑아 노래하는

숨은 풀벌레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감이 되고 싶어요

가지 끝에 매 달린 그리움 익혀

당신의 것으로 바쳐 드리는

불을 먹은 감이 되고 싶어요

 

 

 

가을바람

이해인

 

숲과 바다를 흔들다가

이제는 내 안에 들어와

나를 깨우는 바람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놓고 햇빛과 손잡는

눈부신 바람이 있어 가을을 사네

 

바람이 싣고 오는  쓸쓸함으로

나를 길들이면 가까운 이들과의

눈물겨운 이별도 견뎌낼 수 있으리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사랑과 기도의

아름다운 말 향기로운 말

깊이 접어두고

침묵으로 침묵으로

나를 내려가게 하는 가을바람이여

 

하늘길에 떠가는 한 조각구름처럼

아무 매인 곳 없이 내가 님을 뵈옵도록

끝까지 나를 밀어내는

바람이 있어 나는 홀로 가도

외롭지 않네

 

 

 

가을바람 편지

이해인

 

꽃밭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코스모스 빛깔입니다.

 

코스모스 코스모스를

노래의 후렴처럼 읊조리며

바람은 내게 와서 말합니다.

 

나는 모든 꽃을 흔드는 바람이에요.

당신도 꽃처럼

아름답게 흔들려 보세요.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믿음과 사랑의 길에서

나는 흔들리는 것을 많이 두려워

하면서 살아온 것 같네요.

 

종종 흔들리기는 하되

쉽게 쓰러지지만

않으면 되는데 말이지요.

 

아름다운 것들에 깊이 감동할 줄 알고

일상의 작은 것들에도

깊이 감사할 줄 알고

 

아픈 사람 슬픈 사람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

많이 울 줄도 알고

 

그렇게 순하게

아름답게 흔들리면서

이 가을을 보내고 싶습니다.

 

 

 

가을 비에게

이해인

 

여름을 다 보내고

차갑게 천천히 오시는군요

 

​사람과 삶에 대해

대책 없이 뜨거운 마음

조금씩 식히라고 하셨지요?

 

​이제는 눈을 맑게 뜨고

서늘해질 준비를 하라고

재촉하시는군요

 

당신이 오늘은

저의 반가운

첫 손님이시군요.

 

 

 

가을빛

이해인

 

가을엔 바람도 하늘빛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말들도

 

기도의 말들도

모두 너무 투명해서

두려운 가을빛이다

 

들국화와 억새풀이 바람 속에

그리움을 풀어헤친 언덕길에서

우린 모두 말을 아끼며 깊어지고 싶다.

 

 

 

가을 사랑

이해인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 부는 저녁 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가을 산은

이해인

 

가을 산은 내게 더 가까이 있고

더 푸르게 있다

 

​슬픔 가운데도 빛나는

내 귀한 연륜

 

​시시로 높은 산정 오르며

생각했지

 

눈 감으면 보이고

눈 뜨면 사라지는 나의 사랑

 

​하 그리 고운 언어들

많이도 잊었지만

 

은총의 빛 얻어

슬프지 않은 가을날

 

희게 손을 씻고 뛰어가는

당신의 언덕길

 

덧없이 숨이 차 옴은

그게 다 어린 탓이라고

 

혼자 생각에

마음 더욱 가난히 키워

 

고개를 들면 가을 산은

내게 더 가까이 있고 더 푸르게 있다

 

 

 

가을에

이해인

 

​가을에 바람이 불면

더 깊어진 눈빛으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겠습니다

 

​가을에 나뭇잎이 물들면

더 곱게 물든 마음으로

당신이 그립다고 편지를 쓰겠습니다

 

​가을에 별과 달이 뜨면

더 빛나는 기도로

하늘을 향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기에

이 세상 모든 것을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더 넓게 사랑하는

기쁨을 배웠다고

황금빛 들판에 나가

감사의 춤을 추겠습니다 ​

 

 

 

가을에 밤(栗)을 받고

이해인

 

'내년 가을이

제게 다시 올지 몰라

 

가을이 들어 있는 작은 열매

밤 한 상자 보내니 맛있게 드세요'

 

암으로 투병 중인

그대의 편지를 받고 마음이 아픕니다

 

밤을 깎으며

하얗게 드러나는 가을의 속살

 

얼마나 더 깎아야 고통은

마침내 기도가 되는 걸까요?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여기며

최선을 다하는 그대의 겸손을

 

모든 사람을 마지막인 듯

​정성껏 만나는 그 간절한 사랑을

 

눈물겨워하며 밤 한 톨 깍아

가을을 먹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그 웃음

아끼지 마시고

 

이 가을 언덕에 하얀 들국화로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십시오

 

 

 

가을엔 이렇게 살게 하소서

이해인

 

가을에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내 욕심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 없이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맑고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가을에는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집착과 구속이라는 돌덩이로

우리들 여린 가슴을 짓눌러

별처럼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하며

고통과 번민 속에 지내지 않도록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풋풋한 그리움 하나 품게 하소서.

우리들 매 순간 살아감이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누군가의 어깨가 절실히 필요할 때

보이지 않는 따스함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아 줄 수 있는

풋풋한 그리움 하나 품게 하소서.

 

가을에는

말 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사랑이라는 말이 범람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간절한 사랑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며

부족함조차도 메꾸어줄 수 있는

겸손하고도

말 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정녕 넉넉하게 비워지고

따뜻해지는 작은 가슴 하나 가득

환한 미소로 이름 없는 사랑이 되어서라도

그대를 사랑하게 하소서.

 

 

 

가을 엽서

이해인

 

1

하늘이 맑으니 바람도 맑고

내 마음도 맑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으로 잘 익은

그대의 목소리가 노래로 펼쳐지고

 

들꽃으로 피어나는 가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물들어 떨어질 때마다

 

그대를 향한 나의 그리움도

한 잎 두 잎 익어서 떨어집니다

 

 

2

사랑하는 이여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어서 조용히 웃으며

걸어오십시오 

 

낙엽 빛깔 닮은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우리, 사랑의 첫 마음을

향기롭게 피워 올려요

 

쓴맛도 달게 변한

우리 사랑을 자축해요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힘들고

고달팠어도 함께 고마워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조금은 불안해도

 

새롭게 기뻐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 없이

 

서늘한 가을바람 가을하늘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해요

 

 

 

가을의 말

이해인

 

하늘의 흰 구름이 나에게 말했다

흘러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흐르고 또 흐르다 보면

어느 날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뜨락의 석류가 나에게 말했다.

상처를 두려워하지 마라

 

잘 익어서 터질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면

어느 날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이해인

 

가을, 가을, 가을 하고 불러보면

나는 금방 흰 구름을 닮은 가을의 시인이 되어

기도의 시를 적어봅니다.

 

가을엔 나의 눈길이 저 푸른 하늘을 향해

파랗게 물들어서 더욱 깨어있길 원합니다.

서늘하게 깨어있는 눈길로 하루를 시작하고

사람들을 바라는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가을엔 나의 마음이 불타는 단풍 숲으로 들어가

붉게 물들어서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을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가을엔 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바람을 잡아

그리움의 기도로 키우며 노래하길 원합니다.

하루하루를 늘 기도로 시작하고 세상 만물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는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가을엔 나의 발길이 산길을 걷는 수행자처럼

좀 더 성실하고 부지런해지길 겸손하길 원합니다.

선과 진리의 길을 찾아 끝까지 인내하며

걸어가는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가을을 사랑하는 가을의 사람이 되어

길을 가는 가을의 기쁨, 감사드립니다.

가을이 주는 서늘한 평화 가슴에 안고

벗들을 불러 보는 가을의 은총, 감사드립니다.

 

우리 함께 가을의 사람이 되어 가을을 노래하기로 해요.

깊고 맑고 높은 높고 착한 가을을 함께 살기로 해요.

그러면 가을도 우리를 축복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가을의 열매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익어 갈 것입니다.

 

 

 

가을이 아름다운 건

이해인

 

구절초, 마타리, 쑥부쟁이꽃으로

피었기 때문이다.

그리운 이름이

그리운 얼굴이

봄 여름 헤매던 연서들이

가난한 가슴에 닿아

열매로 익어갈 때

몇 몇은 하마 낙엽이 되었으리라.

 

온종일 망설이던 수화기를 들면

긴 신호음으로 달려온 그대를

보내듯 끊었던 애잔함...

뒹구는 낙엽이여...

아, 가슴의 현이란 현 모두 열어

귀뚜리의 선율로 울어도 좋을

가을이 진정 아름다운 건

눈물 가득 고여오는

그대가 있기 때문이리...

 

 

 

가을 일기

이해인

 

잎새와의 이별에

나무들은 저마다

가슴이 아프구나

 

가을의 시작부터

시로 물든 내 마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에

조용히 흔들리는 마음이

너를 향한 그리움인 것을

가을을 보내며

비로소 아는구나

 

곁에 없어도

늘 함께 있는 너에게

가을 내내

단풍 위에 썼던 고운 편지들이

한 잎 한 잎 떨어지고 있구나

 

지상에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동안

붉게 물들었던 아픔들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려

새로운 별로 솟아오르는 기쁨을

나는 어느새

기다리고 있구나

 

 

 

가을 저녁

이해인

 

박하 내음의 정결한 고독의 집

연기가 피네

 

당신 생각 하나에

안방을 비질하다

 

한 장의 홍엽(紅葉)으로

내가 물든 가을 저녁

 

낡고 정든 신도 벗고

떠나고 싶네

 

 

 

가을 편지 1

이해인

 

1

하늘 향한 그리움에

눈이 맑아지고

사람 향한 그리움에

마음이 깊어지는 계절

 

순하고도 단호한

바람의 말에 귀 기울이며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용서하며

산길을 걷다 보면

 

툭, 하고 떨어지는

조그만 도토리 하나

 

내 안에 조심스레 익어가는

참회의 기도를 닮았네

 

 

2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아 익은 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나무에서 내가 열리는 날을

잠시 헤아려보는 가을 아침입니다.

 

가을처럼 서늘한 당신의 모습이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싱싱한 마음으로 사과를 사러 갔었습니다

사과씨만 한 일상의 기쁨들이

가슴 속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나의 이웃들과도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싶었읍니다

 

 

 

가을 편지 2

이해인

 

1

당신이 내게 주신 가을 노트의 흰 페이지마다 나는 서투른 글씨의 노래들을 채워 넣습니다

글씨는 어느새 들꽃으로 피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

말은 없어지고 눈빛만 노을로 타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눈빛과 마주칩니다. 가을마다 당신은 저녁노을로 오십니다

 

3

말은 없어지고 목소리만 살아남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에 목숨을 걸고 사는 나의 푸른 목소리로 나는 오늘도 당신을 부릅니다

 

4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아 익은 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나무에서 내가 열리는 날을 잠시 헤아려보는 가을 아침입니다. 가을처럼 서늘한 당신의 모습이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5

싱싱한 마음으로 사과를 사러 갔었습니다. 사과 씨만 한 일상의 기쁨들이 가슴 속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나의 이웃들과도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6

기쁠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감탄사를 아껴둡니다. 슬플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둡니다. 슬플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둡니다. 이 가을엔 나의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냅니다. 나에 도취하여 당신을 잃는 일이 없기 위하여---

 

7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8. 빛바랜 시집, 책갈피에 숨어 있던 20년 전의 단풍잎에도 내가 살아 온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친구의 글씨가 추억으로 찍혀 있는 한 장의 단풍잎에서 붉은 피 흐르는 당신의 손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 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습니다.

 

9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은 단풍숲, 누구도 끌 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내마음을 열리는 가을 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

 

10

하찮은 일에도 왠지 가슴이 뛰는 가을. 내가 당신 앞에 늘 소심증 환자입니다. 내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도 죄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고, 내 모든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도 사랑은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는 것 – 이것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초초합니다.

 

11

뜰에는 한 잎 두 잎 낙엽이 쌓이고 내 마음엔 한 잎 두 잎 시(詩)가 쌓입니다. 가을이 내민 단풍빛의 편지지에 타서 익은 말들을 적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읽으시는 고요한 저녁, 내 영혼의 촉수 높여 빈방을 밝힙니다.

 

12

나무가 미련 없이 잎을 버리듯 더 자유스럽게. 더 홀가분하게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의 높은 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도 넘어야 하고 하나의 큰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강도 건너야 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삶의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찮고 짜증스럽기조차 한 일상의 일들을 최선의 노력으로 견디어 내야 한다는 것을,

 

13

바람이 붑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내 고뇌의 분량만큼 보이지 않게 보이지 않게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14

숲속에 앉아 해를 받고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기도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한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이승에 뿌리내린 삶의 나무에서 지는 잎처럼 하나씩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 때 아무도 그의 혼이 태우는 마지막 기도를 들을 수 없어 안타까와 해본 적이 있습니까. 지는 잎처럼 그의 삶이 또한 잊혀져 갈 것을 '당연한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와해 본 적이 있습니까.

 

15

은행잎이 지고 있어요. 노란 꽃비처럼, 나비처럼 춤을 추는 무도회. 이 순간을 마지막인 듯이 당신을 사랑한 나의 언어처럼 쏟아지는 빗소리… 마지막으로 아껴두었던 이별의 인사처럼 지금은 잎이 지고 있어요. 그토록 눈부시던 당신과 나의 황금빛 추억들이 울면서 웃으면서 떨어지고 있어요. 아프도록 찬란했던 당신과 나의 시간들이 또다시 사랑으로 지고 있어요.

 

16

당신은 늘 나를 용서하는 어진 바다입니다. 내 모든 죄를 파도로 밀어내며 온몸으로 나를 부르는 바다. 나도 당신처럼 넓혀 주십시오. 나의 모든 삶이 당신에게 업혀 가게 하십시오.

 

17

당신은 늘 나를 무릎에 앉히는 너그러운 산. 내 모든 잘못을 사랑으로 덮으며 오늘도 나를 위해 낮게 내려앉는 산. 나를 당신께 드립니다. 나도 당신처럼 높여 주십시오.

 

18

당신은 내 생(生)에 그어진 가장 정직한 하나의 선(線). 그리고 내 생(生)에 찍혀진 가장 완벽한 한 개의 점(點). 오직 당신을 위하여 살게 하십시오.

 

19

당신이 안 보이는 날. 울지 않으려고 올려다본 하늘 위에 착한 새 한 마리 날으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내 무언(無言)의 높고 재빠른 그 나래짓처럼.

 

20

당신은 내 안에 깊은 우물 하나 파 놓으시고 물은 거저 주시지 않습니다. 찾아야 주십니다. 당신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는 갈증. 당신은 마셔도 마셔도 끝이 없는 샘. 돌아서면 즉시 모이는 마른 샘 … 당신 앞엔 목마르지 않은 날 하루도 없습니다.

 

21

이 가을엔 안팎으로 많은 것을 떠나보냈습니다. 원해서 가진 가난한 마음 후회롭지 않도록 나는 산새처럼 기도합니다. 詩도 못 쓰고 나뭇잎만 주워도 풍요로운 가을날, 초승달에서 차오르던 내 사랑의 보름달도 어느새 다시 그믐달이 되었습니다.

 

22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섬은 변함이 없고 내 마음 위에 우뚝 솟은 사랑도 변함이 없읍니다. 사랑은 밝은 귀, 귀가 밝아서 내가 하는 모든 말 죄다 엿듣고 있읍니다. 사랑은 밝은 눈, 눈이 밝아서 내 속마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읽어냅니다. 사람은 늙어 가도 늙지 않는 사람, 세월은 떠나가도 갈 줄 모르는 사랑, 나는 그를 절대로 숨길 수가 없습니다.

 

23

잊혀진 언어들이 어둠 속에 깨어나 손 흔들며 옵니다. 국화빛 새 옷 입고, 석류알 웃음 물고 가까이 옵니다. 그들과 함께 나는 밤새 화려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찔레 열매를 닮은 기쁨들이 가슴 속에 매달립니다. 풀벌레가 쏟아 버린 가을 울음도 오늘은 쓸쓸할 틈이 없습니다.

 

24

당신이 축복해 주신 목숨이 왜 이다지 배고픕니까. 내게 모든 걸 주셨지만 받을수록 목마릅니다. 당신에게 모든 걸 드렸지만 드릴수록 허전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끝이 나겠습니까.

 

25

당신과의 거리를 다시 확인하는 아침 미사에서 나팔꽃으로 피워 올리는 나의 기도. <나의 사랑이 티 없이 단순하게 하십시오. 풀숲에 앉은 민들레 한 송이처럼 숨어 피게 하십시오.>

 

26

오늘은 모짜르트 곡을 들으며 잠들고 싶습니다. 몰래 숨어 들어온 감기 기운 같은 영원에의 그리움을 휘감고 쓸쓸함조차 실컷 맛 들이고 싶습니다. 당신 아닌 그 누군가에게 기대를 걸었던 나의 어리석음도 뉘우치면서 당신 안에 평온히 쉬고 싶습니다.

 

27

엄마를 만났다 헤어질 때처럼 눈물이 핑 돌아도 서운하지 않은 가을날. 살아 있음이 더욱 고맙고 슬픈 일이 생겨도 그저 은혜로운 가을날. 홀로 떠나기 위해 홀로 사는 목숨 또한 아름다운 것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28

가을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가을에 온 당신이 나를 떠날까 두렵습니다. 가을엔 아픔도 아름다운 것. 근심으로 얼굴이 핼쓱해져도 당신 앞엔 늘 행복합니다. 걸을 수 있는데도 업혀 가길 원했던 나. 아이처럼 철없는 나의 행동을 오히려 어여삐 여기시던 당신----- 한 켤레의 고독을 신고 정갈한 마음으로 들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29

잃은 단어 하나를 찾아 헤매다 병이 나 버리는 나의 마음을 창 밖의 귀뚜라미는 알아줍니다. 사람들이 싫어서는 아닌데도 조그만 벌레 한 마리에서 더 큰 위로를 받을 때도 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30

여기 제가 왔습니다. 언제나 사랑의 원정(園丁)인 당신. 당신이 익히신 저 눈부신 열매들을 어서 먹게 해 주십시오. 가을 하늘처럼 높고 깊은 당신 사랑의 비법(秘法)을 들려주십시오. 당신을 부르는 내 마음이 이 가을엔 좀 더 겸허하게 하십시오.

 

31

풀벌레 소리에 잠이 깨는 가을밤. 머리맡에 놓인 성서를 펼쳐들면 귀에 익어 더 반가운 당신의 음성. 오직 당신으로 하여 오늘도 푸성귀처럼 푸르고 싱싱해진 이 마음의 뜨락에 당신은 어서 주인으로 오십시오.

 

32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 빗속에서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은 꼭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의 창을 열고 조용히 들어서는 당신의 그 낮은 목소리. 비가 와도 비에 젖지 않고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따뜻한 목소리. 그보다 더한 음악이 아직은 내게 없습니다.

 

33

바람 부는 들녘, 저마다의 자리에서 유순한 얼굴로 꽃들이 일어섰습니다. 뜨거운 여름의 불길을 지나 더욱 단단해진 믿음의 보석 하나 빛나는 첫 선물로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의연한 눈빛으로 일어서야겠습니다.

 

34

올가을 들어 처음으로 감을 먹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감꽃의 그 얼굴도 떠올리면서, 조그만 불덩이 하나 입에 넣듯이 감을 먹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 가시 박힌 아픔을 잘 익은 말로 삭혀주던 어느 사제의 모습도 떠올리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감을 먹었습니다.

 

 

 

가을 편지 3

이해인

 

1

가을엔 언제나 수많은 낙엽과

단풍의 이야기를 즐겨 듣습니다.

페이지마다 금빛 지문(指紋)이

찍혀 있는 당신의

그 길고 긴 편지들을

가을 내내 읽고 또 읽듯이 -

 

2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아

익은 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나무에서 내가 열리는 날을

잠시 헤아려보는 가을 아침입니다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3

가을이 파 놓은 고독이란

우물가에서 물을 긷습니다.

두레박 없이도 그 맑은 물을

퍼마시면 비로소 내가 보입니다.

지난 여름 내 욕심의 숲에 가려

아니 보였던 당신 모습도

하나 가득 출렁여 오는 우물,

날마다 새로이 나를 키우는

하늘빛 고독의 깊이를 나는 사랑합니다.

 

4

가을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가을에 온 당신이 나를 떠날까 두렵습니다.

가을엔 아픔도 아름다운 것,

근심으로 얼굴이 핼쓱해져도

당신 앞엔 늘 행복합니다.

걸을 수 있는데도 업혀 가길 원했던 나.

아이처럼 철없는 나의 행동을

오히려 어여삐 여기시던 당신

한 켤레의 고독을 신고

정갈한 마음으로

들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5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

빗속에서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은 꼭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의 창을 열고

조용히 들어서는

당신의 그 낮은 목소리.

비가 와도 비에 젖지 않고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따뜻한 목소리.

그보다 더한 음악이 아직은 내게 없습니다.

 

6

고추잠자리 한 마리 내 하얀 머리

수건 위에 올려놓은 바람.

그리고 손에 쥐어 보는

유리빛 가을 햇살.

잠자리 날개의 무늬처럼

고운 설레임으로

삶을 더욱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당신의 가을 햇살 잊지 못합니다.

 

7

기도서 책갈피를 넘기다가

발견한 마른 분꽃 잎들.

작년에 끼워 둔 것이지만

아직도 선연한 빛깔의 붉고 노란 꽃잎들.

분꽃잎을 보면 잊었던

시어(時語)들이 생각납니다.

당신이 정답게 내 이름을 불렀던

시골집 앞마당, 그 추억의 꽃밭도 떠오릅니다.

 

8

기쁠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감탄사를 아껴둡니다.

슬플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둡니다.

이 가을엔 나의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냅니다.

나에 도취하여 당신을 잃는 일이 없기 위하여 -

 

9

깊은 밤, 홀로 깨어

느끼는 배고픔과 목마름.

방 안에 가득한 탱자 향기의 고독.

가을은 나에게 청빈을 가르칩니다.

대나무처럼 비우고 비워

더 맑게 울리는

내 영혼의 기도 한 자락.

가을은 나에게 순명을 가르칩니다.

 

10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11

가을 길에 줄지어 선 코스모스처럼

내 마음 길에 수없이 한들대는

시심(時心)의 꽃잎들. '따지 말고

그냥 두면 더한 아름다움일 것을'

이러한 생각이 시 쓰는 나를

괴롭힐 때가 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12 

가을에 혼자서 바치는

낙엽 빛 기도

삶의 전부를 은총이게 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의 매일을

기쁨의 은방울로 쩔렁이는 당신

당신을 꼭 만나고 싶습니다

 

13 

가을엔 내가 잠을 자는 시간조차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좀 더 참을 걸 그랬지,

유순할 걸 그랬지.'

남을 언짢게 만든 사소한 잘못들도

더 깊이 뉘우치면서 촛불을 켜고

깨어있어야만, 

꼭 그래야만 될 것 같은 가을밤.

당신 안에 만남을 이룬 이들의 착한

얼굴들을 착한 마음으로 그려 봅니다.

 

14 

가을엔 들꽃이고 싶습니다.

말로는 다 못 할 사랑에 몸을 떠는 꽃

빈 마음 가득히 하늘을 채워

이웃과 나누면 기도가 되는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파란 들꽃이고 싶습니다

 

15 

가을엔 가장 작은 들꽃의

웃음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습니다.

남몰래 앓고 있는 내 이웃의 작은

아픔까지도 깊이 이해하며

그를 위한 나의 눈물이

기도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16 

가을엔 지는 노을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조심스런 눈빛으로 매일을 살아갑니다.

당신과의 만남은 저 노을처럼 짧게

스쳐 가는 황홀한 순간과,

보다 더 긴 안타까움의

순간들을 남겨 놓고 떠납니다.

그러나 오십시오. 아름다운 당신은

오늘도 저 노을처럼 오십시오.

 

17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우산도 채 받지 않고 길을 가는 이들의

적막한 얼굴 속에서

나는 당신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삶은 비애를 긋고 가는 한 줄기 가을비일까」

혼자서 나직이 뇌어보며

오늘은 더욱 당신이 보고 싶고,

당신을 닮고 싶었습니다.

 

18 

감사합니다, 당신이여

호수에 가득 하늘이 차듯

가을엔 새파란

바람이고 싶음을

휘파람 부는

바람이고 싶음을 감사합니다

 

19 

귀뚜라미 노랫소리에

깊어가는 가을밤.

내 피곤한 육신을 맨땅에 눕히듯이

작은 나무 침대 위에 눕히면,

오랜만에 달고 싱싱한

사탕수수 같은 나의 꿈과 잠.

꿈에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긴 여행을 합니다.

꿈꾸는 것조차도 당신 안에선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20 

그 푸른 하늘에

당신을 향해 쓰고 싶은 말들이

오늘은 

단풍잎으로 타버립니다

밤새 산을 넘은 바람이

손짓을 하면 나도 잘 익은

과일로 떨어지고 싶습니다

당신 손안에

 

21 

급히 할 일도 접어두고

어디든지 여행을 떠나고 싶은 가을.

정든 집을 떠나 객지에서 바라보는

나의 모습, 당신의 모습, 이웃의 모습.

떠나서야 모두가 더 새롭고

아름답게 보일 것만 같은 그런 마음.

그러나 멀리 떠나지 않고서도 오늘을

더 알뜰히 사랑하며 살게 해 주십시오.

 

22

나무가 미련 없이 잎을 버리듯

더 자유스럽게, 더 홀가분하게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의 높은 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도 넘어야 하고,

하나의 큰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작은 강도

건너야 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삶의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찮고 짜증스럽기조차 한

일상의 일들을 최선의 노력으로

견디어 내야 한다는 것을.

 

23 

낙엽 타는 밤마다

죽음이 향기로운 가을

당신을 위하여 연기로 피는

남은 생애 살펴 주십시오

죽은 이들이 나에게

정다운 말을 건네는

가을엔 당신께

편지를 쓰겠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직은 마지막이 아닌

편지를 쓰겠습니다

 

24

네가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이의

눈 속에 출렁이는 그림 한 점,

샤갈의 <푸른 장미>.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이의 목소리 속에 조용히 흔들리는 선율,

내게 이런 모든 것을 느끼도록 해

주신 당신의 크신 얼굴이

더 크게 살아오는 가을. 루오의 그림마다에서

당신의 커다란 눈들이 나를 부릅니다.

 

25

15년 전부터 내가 아껴 쓰던 열두 빛깔의

색연필을 깎아 이 글을 씁니다.

이 연필들이 나의 손에 길들어져

조금씩 닳아 가듯이

나 또한 당신에게 길들어지며

담백한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싶습니다.

 

26 

노을을 휘감고 묵도하는

11월의 나무 앞에 서면

나를 부르는 당신의 음성이

그대로 음악입니다.

이별과 죽음의 얼굴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 가을의 끝.

주여, 이제는 나도 당신처럼

어질고 아프게 스스로를 비우는

겸손의 나무이게 하소서.

아낌없이 비워 냈기에

가슴 속엔 지혜의 불을 지닌

당신의 나무로 서게 하소서.

 

27 

누구나 한번은

수의를 준비하는 가을입니다

살아온 날을 고마와하며

떠날 채비에 눈을 씻는 계절

모두에게 용서를 빌고

약속의 땅으로 뛰어가고 싶습니다

 

28

늦가을, 산 위에 올라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깊이 사랑할수록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며

사라지는 무희들의

마지막 공연을 보듯이,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매일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지켜보듯이

 

29

당신은 늘 나를

무릎에 앉히는 너그러운 산.

내 모든 잘못을

사랑으로 덮으며

오늘도 나를 위해

낮게 내려앉는 산.

나를 당신께 드립니다.

나도 당신처럼 높여 주십시오.

 

30

당신이 내게 주신

가을 노트의 흰 페이지마다

나는 서투른 글씨의

노래들을 채워 넣습니다.

글씨는 어느새 들꽃으로 피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31

당신과의 거리를

다시 확인하는 아침

미사에서 나팔꽃으로 피워

올리는 나의 기도

나의 사랑이

티 없이 단순하게 하십시오.

풀숲에 앉은 민들레 한 송이처럼

숨어 피게 하십시오.

 

32

당신 한 분 뵈옵기 위해

수없는 이별을 고하며 걸어온 길

가을은 언제나

이별을 가르치는 친구입니다

이별의 창을 또 하나 열면

가까운 당신

 

33

당신은 내 생(生)에 그어진

가장 정직한 하나의 선(線).

그리고 내 生에 찍혀진

가장 완벽한 한 개의 점(點).

오직 당신을 위하여

살게 하십시오.

 

34

당신은 내 안에 깊은

우물 하나 파 놓으시고

물은 거저 주시지 않습니다.

찾아야 주십니다.

당신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는 갈증.

당신은 마셔도 끝이 없는 샘,

돌아서면 즉시 목이 마른 샘

당신 앞엔 목마르지 않은 날

하루도 없습니다.

 

35

당신은 늘 나를

용서하는 어진 바다입니다.

내 모든 죄를 파도로 밀어내며

온몸으로 나를 부르는 바다.

나도 당신처럼 넓혀 주십시오.

나의 모든 삶이

당신에게 업혀가게 하십시오.

 

36

당신이 안 보이는 날.

울지 않으려고 올려다본 하늘 위에

착한 새 한 마리

날으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내 무언(無言)의

높고 재빠른 그 나래짓처럼.

 

37

당신이 축복해 주신 목숨이

왜 이다지 배고픕니까.

내게 모든 걸 주셨지만

받을수록 목마릅니다.

당신께 모든 걸 드렸지만

드릴수록 허전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끝이 나겠습니까.

 

38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 숲,

누구도 끌 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내 마음은 열리는 가을 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

 

39 

대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우리집 앞마당.

대추나무 꼭대기에서 몇 마리의

참새가 올리는 명랑한 아침 기도.

바람이 불어와도 흩어지지 않는

새들의 고운 음색.

나도 그 소리에 맞추어 즐겁게

노래했습니다. 당신을 기억하며

 

40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삶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이 가을엔

꼭 찾아 얻게 하소서.

꽃이 죽어서 키워낸 열매,

당신이 죽어서 살려낸 나,

가을엔 이것만 생각해도 넉넉합니다.

 

41

뜰에는 한 잎 두 잎

낙엽이 쌓이고

내 마음엔 한 잎 두 잎

시(詩)가 쌓입니다.

가을이 내민 단풍빛의

편지지에 타서

익은 말들을 적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읽으시는 고요한 저녁,

내 영혼의 촉수 높여

빈방을 밝힙니다.

 

42

말은 없어지고 눈빛만

노을로 타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 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눈빛과 마주칩니다.

가을마다 당신은

저녁노을로 오십니다.

 

43

말은 없어지고 목소리만

살아남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에 목숨을 걸고 사는

나의 푸른 목소리로

나는 오늘도 당신을 부릅니다.

 

44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섬은

변함이 없고

내 마음 위에 우뚝 솟은

사랑도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은 밝은 귀, 귀가 밝아서

내가 하는 모든 말

죄다 엿듣고 있습니다.

사랑은 밝은 눈, 눈이 밝아서

내 속마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읽어냅니다.

사람은 늙어 가도 늙지 않는 사랑.

세월은 떠나가도 갈 줄 모르는 사랑.

나는 그를 절대로

숨길 수가 없습니다.

 

45 

바람 부는 들녘,

저마다의 자리에서

유순한 얼굴로

꽃들이 일어섰습니다.

뜨거운 여름의 불길을 지나

더욱 단단해진 믿음의 보석 하나

빛나는 첫 선물로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의연한 눈빛으로

일어서야겠습니다.

 

46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섬은 변함이 없고

내 마음 위에 우뚝 솟은

사랑도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은 밝은 귀, 귀가 밝아서

내가 하는 모든 말

죄다 엿듣고 있습니다.

사랑은 밝은 눈, 눈이 밝아서

내 속마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읽어냅니다.

사람은 늙어 가도 늙지 않는 사랑.

세월은 떠나가도 갈줄 모르는 사랑.

나는 그를 절대로

숨길 수가 없습니다.

 

47 

버리기 아까워 여름 내내

말린 채로 꽃아 둔

장미꽃 몇 송이가

말을 건네 옵니다.

"우린 아직 죽은 게 아니어요."

그래서 시든 꽃을 버리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함을

깨닫는 아름다운 가을의 소심증.

 

48 

보름달 속에 비치는

당신의 빛나는 모습.

달처럼 차고 또 기우는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달빛에게 세례받은

하얀 박꽃처럼

순결한 마음으로 당신을

기억하며 살고 싶습니다.

나 또한 당신의 넓은 하늘에서

하나의 달이 되어 뜰 때까지.

 

49 

빛바랜 시집,

책갈피에 숨어 있던

20년 전의 단풍잎에도

내가 살아온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친구의 글씨가 추억으로

찍혀 있는 한 장의 풀잎에서

​붉은 피 흐르는

당신의 손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습니다.

 

50

사랑할 때 우리 모두는

단풍나무가 되나 봅니다.

기다림에 깊이 물들지 않고는

어쩌지 못하는 빨간 별,

별과 같은 가슴의

단풍나무가 되나 봅니다.

 

51

사랑하는 이여,

나는 당신을 쉬게 하고 싶습니다.

피곤에 지친 당신을

가을의 부드러운 무릎 위에 눕히고,

나는 당신의 혼(魂) 속으로

깊이 들어가 오래오래

당신을 잠재우는

가을 바람이고 싶습니다.

 

52

새벽에 성당 가는 길엔

푸른색 나팔꽃 한 송이와

꼭 마주치게 됩니다.

그 꽃이 나를 바라보듯이

내가 그 꽃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유순하고 사심(私心) 없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게 하여주십시오.

 

53

세월이 흐를수록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옛적부터 타던 사랑

오늘은 빨갛게 익어

터질 듯한 감홍시

참 고마운 아픔이여

 

54

세수를 하다 말고,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문득 놀라워서 들여다보는

대야 속의 물거울.

'오늘은 더욱 사랑하며 살리라'는

맑은 결심을 합니다.

그 언제가 될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나의 마지막 세수도 미리 기억해 보며,

차갑고 투명한 가을 물에

가장 기쁜 세수를 합니다.

 

55

숲속에 앉아 해를 받고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기도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한 나무에서 떨어지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이승에 뿌리내린 삶의 나무에서

지는 잎처럼 하나씩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 때

아무도 그이 혼이 태우는

마지막 기도를 들을 수 없어

안타까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지는 잎처럼 그의 삶이 또한

잊혀져 갈 것을 "당연한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56

싱싱한 마음으로

사과를 사러 갔었습니다.

사과 씨만 한 일상의 기쁨들이

가슴 속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나의 이웃들과도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57

언제나 한(恨)과 눈물이 서린 듯한,

그러나 나를 낳아 준 모국의 정든 산천.

하루도 근심이 끊이지 않는 그녀의

쓸쓸한 이마를 보면 눈물이 핑 돕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인해 살아서도 이미

죽음의 순간을

맛보는 나의 이웃들을

지금은 그 아무도

위로해 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왜 그토록

힘이 없어 보입니까.

 

58

엄마를 만났다

헤어질 때처럼

눈물이 핑 돌아도

서운하지 않은 가을날.

살아 있음이 더욱 고맙고

슬픈 일이 생겨도

그저 은혜로운 가을날.

홀로 떠나기 위해

홀로 사는 목숨 또한

아름다운 것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59

여름의 꽃들이

조용히 무너져 내린 잔디밭에

작은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보며 앉아 있었습니다.

새도 즐기는 이른 새벽의

침묵의 향기

새의 명상을 방해할까 두려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길로 비켜 갔습니다.

 

60

여기 제가 왔습니다.

언제나 사랑의 원정(園丁)인 당신.

당신이 익히신 저 눈부신 열매들을

어서 먹게 해 주십시오.

가을 하늘처럼 높고 깊은

당신 사랑의 비법(秘法)을 들려주십시오.

당신을 부르는 내 마음이

이 가을엔 좀 더 겸허하게 하십시오.

 

61

오늘은 가을 숲의 빈 벤치에 앉아

새 소리를 들으며

흰 구름을 바라봅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불볕처럼

타올랐던 나의 마음을

서늘한 바람에 식히며

앉아 있을 수 있는

이 정갈한 시간들을

감사합니다.

 

62 

오늘은 길을 떠나는 친구와

한 잔의 레몬차를 나누었습니다.

이별의 서운함은 침묵의 향기로

차(茶) 안에 녹아내리고

우리는 그저 조용히 바라봄으로써

서로의 평화를 빌어 주고 있었습니다.

정든 벗을 떠나보낼 때는

언제나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헤어질 때면 더욱 커 보이는 그의 얼굴.

손 흔들 때면 더욱 작아 보이는 나의 얼굴.

 

63 

오늘은 모짜르트 곡을 들으며

잠들고 싶습니다.

몰래 숨어 들어온 감기 기운 같은

영원에의 그리움을 휘감고

쓸쓸함조차 실컷

맛들이고 싶습니다.

당신 아닌 그 누군가에게

기대룰 걸었던 나의 어리석음도

뉘우치면서 당신 안에

평온히 쉬고 싶습니다.

 

64 

오늘은 빨갛게 익은

동백 열매 하나 따 들고 언덕을 오르며,

당신을 향한 나의 그리움 또한

이 작은 열매처럼 하도 잘 익어서

'툭' 하고 쪼개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65 

올가을 들어

처음으로 감을 먹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감꽃의 그 얼굴도 떠올리면서,

조그만 불덩이 하나

입에 넣듯이 감을 먹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 가시 박힌 아픔을

잘 익은 말로 삭혀 주던

어느 사제의 모습도 떠올리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감을 먹었습니다.

 

66 

유리처럼 잘 닦인 마음 밖엔

가진 게 없습니다

이 가을엔 내가 당신을 위해

부서진 진주빛 눈물

당신의 이름 하나 가슴에 꽂고

전부를 드리겠다 약속했습니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손잡기 어려운 이여

나는 이제 당신 앞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67 

은행잎이 지고 있어요.

노란 꽃비처럼,

나비처럼 춤을 추는 무도회.

이 순간을 마지막인 듯이

당신을 사랑한 나의 언어처럼

쏟아지는 빗소리

마지막으로 아껴두었던

이별의 인사처럼

지금은 잎이 지고 있어요.

그토록 눈부시던 당신과

나의 황금빛 추억들이

울면서 웃으면서 떨어지고 있어요.

아프도록 찬란했던

당신과 나의 시간들이

또다시 사랑으로 지고 있어요.

 

68 

이름 없이 떠난 이들의

이름 없는 꿈들이

들국화로 피어난 가을 무덤가

흙의 향기에 취해

가만히 눈을 감는 가을

이름 없이 행복한 당신의 내가

가난하게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입니까

 

69 

이 가을엔 안팎으로

많은 것을 떠나보냈습니다.

원해서 가진 가난한 마음

후회롭지 않도록

나는 산새처럼 기도합니다.

시(詩)도 못 쓰고 나뭇잎만 주워도

풍요로운 가을날,

초승달에서 차오르던

내 사랑의 보름달도

어느새 다시 그믐달이 되었습니다.

 

70 

이끼 낀 바위처럼 정답고

든든한 나의 사랑이여

당신 이름이 묻어오는

가을 기슭엔 수만 개의 흰

국화가 떨고 있읍니다

화려한 슬픔의 꽃술을 달고

하나의 꽃으로 내가 흔들립니다

당신을 위하여

소리 없이 소리 없이

피었다 지고 싶은

 

71

잊혀진 언어들이

어둠 속에 깨어나 손 흔들며 옵니다.

국화빛 새옷 입고,

석류알 웃음 물고 가까이 옵니다.

그들과 함께 나는

밤새 화려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찔레 열매를 닮은

기쁨들이 가슴 속에 매달립니다.

풀벌레가 쏟아 버린

가을 울음도 오늘은 쓸쓸할 틈이 없습니다.

 

72

잃은 단어 하나를 찾아 헤매다

병이 나버리는

나의 마음을

창 밖의 귀뚜라미는 알아줍니다.

사람들이 싫어서는 아닌데도

조그만 벌레 한 마리에서

더 큰 위로를 받을 때도 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73

풀벌레 소리에 잠이 깨는 가을밤.

머리맡에 놓인 성서를 펼쳐 들면

귀에 익어 더 반가운 당신의 음성.

오직 당신으로 하여 오늘도 푸성귀처럼

푸르고 싱싱해진 이 마음의 뜨락에

당신은 어서 주인으로 오십시오.

 

74

하찮은 일에도 왠지 가슴이 뛰는 가을.

나는 당신 앞에 늘 소심증 환자입니다.

내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도

죄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고,

내 모든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도

사랑은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는 것

이것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초조합니다.

 

75

하늘에 당신을 향해 쓰고 싶은 말들이

오늘은 단풍잎으로 타버립니다

밤새 산을 넘은 바람이

손짓을 하면

나도 잘 익은 과일로

떨어지고 싶습니다. 당신의 손안에

 

76

한 포기의 난(蘭)을 정성껏 키우듯이

언제나 정성스런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면 그것이 곧 기도이지요?

물만 마시고도 꽃대와

잎새를 싱싱하게 피워 올리는

한 포기의 난과도 같이,

나 또한 매일 매일 당신이

사랑의 분무기로 뿜어 주시는 물을,

생명의 물을 받아 마신다면 그것으로 넉넉하지요?

 

77

호수에 하늘이 뜨면 흐르는 더운 피로

유서처럼 간절한 시를 씁니다

당신의 크신 손이

우주에 불을 놓아 타는 단풍잎

흰 무명옷의 슬픔들을

다림질하는 가을

은총의 베틀 앞에 긴 밤을 밝히며

결 고운 사랑을 짜겠습니다

 

 

 

78

도토리만 한 꿈 한 알

밤 한 톨만 한 기도 한 알

 

가슴에 품고 길을 가면

황금빛 벼 이삭은 바다로 출렁이고

 

​단풍 숲은 불타며

온 천지에 일어서고

 

​하늘에선 흰 구름이

큰 잔치를 준비하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살아있음의 축복 가을이여, 사랑이여

 

 

 

갈릴리 호수에서

이해인

 

하늘이 호수 같고

호수가 하늘 같은

6월 어느 날

어부의 배를 타고

물 속을 들여다봅니다

 

갈릴리 호수보다

더 깊고 넓은 사랑으로

세상과 사람을 껴안았던

예수의 그 얼굴을 찾아보려고

이마를 적십니다

 

그물을 치던 제자들을

나직이 부르시던 당신의 음성이

오늘은 이토록 푸른 호수가 되어

내 안에 출렁입니다

 

더 이상 자신 안에 갇히지 말고

넓고 깊은 사랑의 호수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라고

당신은 나를 부르십니다

 

 

 

감사 예찬

이해인

 

감사만이 꽃길입니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걸어가는 향기 나는

길입니다

 

감사만이 보석입니다​

슬프고 힘들 때도

감사할 수 있으면

 

삶은 어느 순간 보석으로

빛납니다

 

감사만이 기도입니다​

기도 한 줄 외우지 못해도

 

그저

고맙다 고맙다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 날

삶 자체가

기도의 강으로 흘러

가만히 눈물 흘리는

자신을 보며

감동하게 됩니다

 

 

 

감사와 행복

이해인

 

내 하루의 처음과 마지막 기도

한 해의 처음과 마지막 기도

그리고 내 한 생애의 처음과 마지막 기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되도록

감사를 하나의 숨결같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

 

감사하면 아름다우리라,

감사하면 행복하리라.

감사하면 따뜻하리라.

감사하면 웃게 되리라.

 

감사가 힘들 적에도

시를 읊듯이

항상 이렇게 노래 봅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살아서 하늘과 바다와

산을 바라볼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하늘의 높음과 깊음을 통해

오래오래 사랑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어 행복합니다.

 

 

 

감은 눈 안으로

이해인

 

감은 눈 안으로

잠 속에 나를 묻고 나를 잊네

 

그의 품에 안기면

누구라도 용서하는

천사의 마음이 되네

 

​감은 눈 안으로

빛을 그리며 다시 태어나리

 

순하게 부드럽게 청빈하게

살아 있는 고마움을

꿈에도 노래하리

 

​어느 날

다시는 깨어나지 못 할

단 한 번의 영원한 잠

 

​끝까지 기다리며

오늘을 사랑하리

 

 

 

감을 먹으며

이해인

 

하얀 눈 내리는 날

주홍빛 홍시를 먹는다

 

감을 건네주는

할머니의 깊은 사랑도 먹는다

 

감은 활활 타오르는

그리움의 빛과 맛

 

감을 달게 익혀 준

햇볕과 바람을 나도 달게 마신다

 

감 속에 들어 있는 고향 하늘

붉게 타는 저녁노을도 마신다

 

 

 

감자의 맛

이해인

 

통째로 삶은

하얀 감자를

한 개만 먹어도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넉넉해지네

 

고구마처럼

달지도 않고

호박이나 가지처럼

무르지도 않으면서

 

싱겁지는 않은

담담하고 차분한

중용의 맛

 

화가 날 때는

감자를 먹으면서

모난 마음을 달래야겠다

 

 

 

강(江)

이해인

 

지울수록 살아나는

당신 모습은

 

내가 싣고 가는

평생의 짐입니다

 

나는 밤낮으로 여울지는

끝없는 강물

 

흐르지 않고는

목숨일 수 없음에

 

오늘도 부서지며

넘치는 강입니다

 

 

 

거울 속의 내가

이해인

 

"아직 살아 있군요"

또 하나의 내가

나를 향해 웃습니다

 

"안녕하세요?"

살아온 날들

만나온 사람들이

저만치서 나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얼굴을 돌리려 들면

거울 속의 내가

나에게 말합니다

 

"더 예뻐져서 오실래요?"

"사랑하면 된다던데 -"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나는 늘 내가 낯설어

도망치고 싶습니다

 

 

 

건망증

이해인

 

금방 말하려고 했던 것

글로 쓰려고 했던

것을 잊어버리다니

 

너무 잘 두어서

찾지 못하는 물건

 

너무 깊이 간직해서 꺼내 쓰지

못하는 오래된 생각들

 

하루 종일 찾아도 소용이 없네

헛수고했다고 종이에 적으면서

마음을 고쳐 먹기로 한다

 

이 세상 떠날 때도

잊고 갈 것 두고 갈 것

너무 많을 테니

 

미리 작은 죽음을

연습했다고 치지 뭐

 

 

 

겨울 길을 간다

이해인

 

겨울 길을 간다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

 

가을과 함께

서서히 옷을 벗으면

 

텅 빈 해질녘에

겨울이 오는 소리

 

문득 창을 열면

흰 눈 덮인 오솔길

 

어둠은 더욱 깊고

아는 이 하나 없다

 

별 없는 겨울 숲을

혼자서 가니

 

먼 길에 목마른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길을 간다

 

 

 

겨울나무

이해인

 

내 목숨 이어가는

참 고운 하늘을

먹었습니다

 

눈 감아도 트여오는

백설의 겨울 산길

깊숙이 묻어 둔

사랑의 불씨

 

감사하고 있습니다

살아온 날

살아갈 날

넘치는 은혜의 바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가는 세월

오는 세월

기도하며 지새운 밤

 

종소리 안으로

밝아 오는 새벽이면

영원을 보는 마음

 

해를 기다립니다

내 목숨 이어 가는

너무 고운 하늘을

먹었습니다

 

 

 

겨울 노래

이해인

 

끝없는 생각은

산기슭에 설목(雪木)으로 서고

슬픔은 바다로 치달려

섬으로 엎드린다

 

고해소에 앉아

나의 참회를 기다리는

은총의 겨울

 

더운 눈물은 소리없이

눈밭에 떨어지고

 

미완성의 노래를 개켜 들고

훌훌히 떠난 자들의 마을을 향해

나도 멀리 갈길을 예비한다

 

밤마다 깃발 드는

예언자의 목쉰 소리

 

오늘도

나를 기다리며

다듬이질하는 겨울

 

 

 

겨울 바다

이해인

 

내 쓸모없는 생각들이 모두

겨울 바다 속으로 침몰해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일 때

바다를 본다

 

누구도 사랑하기 어려운 마음일 때

기도가 되지 않는 답답한 때

아무도 이해 못 받는

혼자임을 느낄 때

나는 바다를 본다

 

참 아름다운 바다빛

하늘빛

하느님의 빛

그 푸르디푸른 빛을 보면

누군가에게 꼭 편지를 쓰고 싶다

 

사랑이 길게 물 흐르는 바다에

나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

 

 

 

겨울밤

이해인

 

귀에는 아프나

새길수록 진실인 말

 

가시돋혀 있어도

향기를 가진

어느 아픈 말들이

 

문득 고운 열매로

나를 먹여주는 양식이 됨을

고맙게 깨닫는 긴긴 겨울밤

 

 

 

겨울 산길에서

이해인

 

추억의 껍질 흩어진 겨울 산길에

촘촘히 들어앉은 은빛 바람이

피리 불고 있었네

 

새 소리 묻은 솔잎 향기 사이로

수없이 듣고 싶은 그대의 음성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았네

 

시린 두 손으로 햇볕을 끌어내려

새 봄의 속옷을 짜는

겨울의 지혜

 

찢어진 나목(裸木)의 가슴 한켠을

살짝 엿보다

무심코 잃어버린

오래전의 나를 찾았네

 

 

 

겨울 아가

이해인

 

1

눈보라 속에서 기침하는

벙어리 겨울나무처럼

그대를 사랑하리라

 

밖으로는 눈꽃을

안으로는 뜨거운 지혜의 꽃 피우며

기다림의 긴 추위를 이겨 내리라

 

비록 어느 날

눈사태에 쓰러져

하얀 피 흘리는

무명(無名)의 순교자가 될지라도

후회 없는 사랑의 아픔

연약한 나의 두 팔로

힘껏 받아 안으리라

 

모든 잎새의 무게를 내려 놓고

하얀 뼈 마디 마디 봄을 키우는

겨울나무여

 

나도 언젠가는

끝없는 그리움의 무게를

땅 위에 내려놓고 떠나리라

 

노래하며 노래하며

순백(純白)의 눈사람으로

그대가 나를 기다리는

순백의 나라로

 

 

2

하얀 배추속같이

깨끗한 내음의 12월에

우리는 월동 준비를 해요

 

단 한 마디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

헛말을 많이 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잊어버려요

 

때로는 마늘이 되고

때로는 파가 되고

때로는 생강이 되는

사랑의 양념

 

부서지지 않고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음을

다시 기억해요

 

함께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의 시간

 

땅 속에 묻힌 김장독처럼

자신을 통째로 묻고 서서

하늘을 보아야 해요

 

얼마쯤의 고독한 거리는

항상 지켜야 해요

 

한겨울 추위 속에

제 맛이 드는 김치처럼

우리의 사랑도 제 맛이 들게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해요

 

 

 

겨울 연가

이해인

 

함박눈 펑펑 내리는 날

네가 있는 곳에도 눈이 오는지 궁금해

창문을 열어 본다.

 

너를 향한 나의 그리움도

쏟아지는 함박눈이다.

얼어붙은 솜사탕이다.

 

와아!

하루종일 눈꽃 속에 묻혀 가는

나의 감탄사!

 

어찌 감당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겨울 엽서

이해인

 

오랜만에 다시 온

광안리 수녀원의

아침 산책길에서

시를 줍듯이

솔방울을 줍다가 만난

한 마리의 고운 새

 

새가 건네 준

유순한 아침인사를

그대에게 보냅니다

 

파밭에 오래 서서

파처럼 아린 마음으로

조용히 끌어안던 하늘과 바다의

그 하나된 푸르름을

우정의 빛깔로 보냅니다

 

빨간 동백꽃잎 사이사이

숨어 있는 바람을

가만히 흔들어 깨우다가

멈추어 서서 듣던 종소리

 

맑음과 여운이 하도 길어

영원에까지 닿을 듯한

수녀원의 종소리도 보내니

영원한 마음으로 받아 주십시오

 

 

 

겨울이 잠든 거리에서

이해인

 

앞 사람이 남기고 간 외로움의 조각들을

살얼음처럼 밟고 가면 나도 문득 외로워진다.

아이들이 햇빛과 노는 골목길에서

경이로운 봄을 만난다.

조무래기들이 흘린 웃음을 받아 가슴에 넣고

겨울이 잠든 거리에 기쁨의 씨를 뿌리며 걷고 싶다.

 

 

 

겨울잠을 깨우는 봄

이해인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어도

잠시 쉬고 나면 새 힘을 얻는 것처럼

겨울 뒤에 오는 봄은

깨어남, 일어섬, 움직임의 계절

'잠에서 깨어 나세요

일어나 움직이세요, '

봄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소녀처럼

살짝 다가와

겨울잠 속에 안주하려는

나를 흔들어 댄다

 

 

 

겸손

이해인

 

자기 도취의

부패를 막아주는

겸손은

하얀 소금

 

욕심을 버릴수록

숨어서도 빛나는

눈부신 소금이네

 

'그래

사랑하면 됐지

바보가 되면 어때'

 

결 고운 소금으로

아침마다 마음을 닦고

또 하루의 길을 가네

짜디짠 기도를 바치네

 

무시당해도 묵묵하고

부서져도 두렵지 않은

겸손은

하얀 소금

 

 

 

고독

이해인

 

누군가를 처음으로 사랑하기 시작할 땐

차고 넘치도록 많은 말을 하지만

연륜과 깊이를 더해갈수록

말은 차츰 줄어들고

조금은 물러나서

고독을 즐길 줄도 아는

하나의 섬이 된다

 

 

 

고독에게

이해인

 

1

나의 삶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먼 데서도 팽팽하게

나를 잡아당겨 주겠다구요?

 

​얼음처럼 차갑지만 순결해서 좋은 그대

오래 사귀다보니 꽤 친해졌지만

아직은 함부로 대할 순 없는 그대

 

​내가 어느새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게

그 맑고 투명한 눈빛으로 나를 지켜주겠다구요?

​고맙다는 말을 이제야 전하게 돼 정말 미안해요

 

 

2

당신은 나를

바로 보게 하는 거울입니다.

가장 가까운 벗들이

 

나의 약점을 미워하며 나를 비켜갈 때

​노여워하거나 울지 않도록

나를 손잡아 준 당신

 

쓰라린 소금을 삼키듯

절망을 삼킬 수 있어야

하얗게 승화될 수 있음을

 

진정 겸손해야만

삶이 빛날 수 있음을

조심스레 일러준 당신

 

​오늘은 당신에게

감사의 들꽃 한 묶음

꼭 바치렵니다

 

제 곁을 떠나지 말아주세요

천년이 지나도 녹지 않는

아름다운 얼음 공주님...

 

 

 

고독을 위한 의자

이해인

 

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나 속의 나를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으므로.

 

여럿 속에 있을 땐

미처 되새기지 못했던

삶의 깊이와 무게를

고독 속에 헤아려볼 수 있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

안 해야 할 일 분별하며

내밀한 양심의 소리에

더 깊이 귀 기울일 수 있으므로.

 

그래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

여럿 속의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고독 속에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고마운 손

이해인

 

손톱을 깎다가

문득 처음 만난 듯

반가운 나의 손

 

매일 세수하고 밥을 먹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글을 쓰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잊고 살았구나 "미안해"

 

밭에서 일할 때면

다섯 손가락 사이 좋게

함께 땀 흘리며 기뻐했지?

 

바다에서 조가비를 줍거나

산숲에서 나뭇잎을 주울 때면

움직이는 시가 되었지?

 

사이가 나빠진 친구에게

내가 화해의 악수를 청할 때

 

맑고 고운 정성을 모아

누군가를 위해 기도드릴 때면

더욱 따스한 피 고여오며

흐뭇해하던 나의 손

 

눈여겨보지 않았던

손마디에, 손바닥에 흘러가는

내 나이만큼의 강물을

조용히 열심히 들여다보며

 

고맙다 고맙다 인사하는 내게

환히 웃어 주는 작지만 든든한

나의 손, 소중한 손

 

 

 

고마운 여름

이해인

 

푸른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들이

새삼 고마워서

"나무야, 나무야"

친구를 부르듯이

정답게 불러 봅니다

 

나의 땀을 식혀 주는

한 줄기 바람이

새삼 고마워서

"바람아, 바람아"

노래를 부르듯이

정답게 불러 봅니다

 

장마 뒤에

쨍쨍 내리쬐는 햇볕이

새삼 고마워서

"해님, 해님"

하느님을 부르듯이

반갑게 불러 봅니다

 

해 아래서

해에 익은 둥근 수박

여럿이 나누어 먹으면

크게

넓게

둥글게

열리는 마음

 

지구 모양의 수박을

먹을 때마다

지구 가족

우리 가족

하나 되는 꿈을 꾸는

고마운 여름

 

 

 

고백

이해인

 

1

사람들로부터

사랑도 많이 받았지만

미움도 더러 받았습니다

이해도 많이 받았지만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기쁜 일도 많았지만

슬픈 일도 많았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다 소중하고 필요했습니다"

선뜻 이렇게 고백하기 위해서

왜 그리도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요

 

 

2

너무 기뻐 위로 위로 잎사귀를 흔드는

노래의 나무였다가

 

오해와 미움을 받을 적엔 너무 슬퍼

울지도 못하고

 

아래로 아래로 고독을 삼키는

침묵의 나무였다가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뿌리가 깊어진 걸 보고 깜짝 놀랐지

 

둘레가 넓어진 걸 보고

행복하였지

 

사랑의 비밀은 기쁨보다는

슬픔 속에 은밀하게 숨어 있음을

 

새롭게 발견하고

푸른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지

 

 

 

고운 말

​이해인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지요

 

언어가 그리 많아도 잘 골라

써야만 보석이 됩니다

 

​우리 오늘도 고운 말로

새롭게 하루를 시작해요

 

녹차가 우려내는 은은한 향기로

다른 이를 감싸고 따뜻하게 배려하는 말

 

​하나의 노래 같고 웃음같이 밝은 말

서로 먼저 찾아서 건네 보아요.

 

​잔디밭에서 찾은 네잎 클로버

한 장 건네주듯이

 

마음은 그게 아닌데

말이 그만...'하는 변명을

 

자주 하지 않도록

조금만 더 깨어있으면 됩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고운 말 하는 지혜가 따라옵니다

 

​삶에 지친 사람들

상처받은 마음들

 

​고운 말로

치유하는 우리가 되면

 

세 살 또한 조금씩

고운 빛으로 물들겠지요

 

​고운 말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물이지요

 

 

 

고운 새는 어디에 숨었을까

이해인

 

하루종일 비가 많이 내리는 날

귀 있는 사람은 바쁜 중에도

모르는 척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노래하던 고운 새들은

이 비오는 날, 모두 어디에 숨었을까

 

 

 

고추를 찧으며

이해인

 

해 아래 불타던 붉은 고추를 절구에 찧으며

사랑을 찧는 연습을 하네

나를 보네

눈물나도록 아프게 익혀서 매운 속마음

부서지기 어려워 망설이는 걸까

피를 토하는 절규

그래도 참아야 하네

 

사랑은 고추처럼 참 독하기도 하지

모질기도 하지

 

 

 

고향의 달

이해인

 

강원도의 깊은 산골에서

내가 태어날 무렵

어머니가 꿈속에서 보았다는

그 아름다운 달

고향 하늘의

밝고 둥근 달이

오랜 세월 지난 지금도

정다운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네

 

'너는 나의 아이였지

나의 빛을 많이 마시며 컸지'

은은한 미소로 속삭이는 달

 

달빛처럼 고요하고

부드럽게 살고 싶어

눈물 흘리며 괴로워했던

달 아이의 지난 세월도

높이 떠오르네

 

삶이 고단하고 사랑이 어려울 때

차갑고도 포근하게

나를 안아주며 달래던 달

 

나를 낳아준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그리고 또 어머니

수많은 어머니를 달 속에 보네

피를 나누지 않고도

이미 가족이 된 내 사랑하는 이들

가을길 코스모스처럼 줄지어서

손 흔드는 모습을 보네

 

달이 뜰 때마다 그립던 고향

고향에 와서 달을 보니

그립지 않은 것 하나도 없어라

설레임에 잠 못 이루는 한가위 날

물소리 찰랑이는 나의 가슴에도

또 하나의 달이 뜨네

 

 

 

구름의 노래

이해인

 

1

구름도 이젠 나이를 먹어

담담하다 못해 답답해졌나?

 

하늘 아래 새것도 없고

놀라울 것도 없다고

 

감탄사를 줄였나?

그리움도 적어지니

괴로움도 적어지지?

 

​거룩한 초연함인지

아니면 무디어서 그런 건지

​궁금하고 궁금하다 대답해주겠니?

 

 

2

나의 삶은 당신을 향해 흐르는

한 장의 길고 긴 연서였습니다

 

새털구름 조개구름

양떼구름 꽃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여러 형태의 무늬가 가득하여

삶이 지루한 줄 몰랐습니다.

 

오늘도 나는

열심히 당신을 찾고 있군요

내 안에는 당신만 가득하군요

 

보이는 그림은 바뀌어도

숨은 배경인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고

 

나는 구름으로 흐르며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군인을 위한 기도

이해인

 

어떻게 님들을 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님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꽃다운 나이에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다

함께 스러진 슬픈 님들이여

 

아직도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 조그만 나라 위해

목숨까지 바친 고마운 님들이여

 

지금은 이 낯선 땅

돌 위에 새겨진 남들의 이름을

바람과 파도가 기도처럼 불러줍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정다운 별로 살아오는 남들

지지 않는 그리움이여.....

 

우리의 조국에 님들의 이름을

사랑으로 새깁니다

 

우리의 가슴에 님들의 이름을

감사로 새깁니다.

 

 

 

그네뛰기

이해인

 

사랑은

그네뛰기

 

당신과 함께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나아가는

이승의 줄기찬 몸짓

 

걷지 않고 뛰어도

사랑은 늘

모자라는 시간

 

더 높이

날고 싶어라

 

출렁이는 그리움

발을 구르면

 

가슴에 묻어오는

아픈 하늘 빛깔

당신

 

 

 

그대 차가운 손을 - 위령 성월에

이해인

 

해가 지는 언덕에서

온 몸에 바람 휘감고

당신을 생각합니다

 

아직은 낯설어도

언젠가 몸째로

나를 안을 그대

 

때가 되면 다정히

날 데려가 주어요

 

그대 차가운 두 손을 내밀어도

아무 말 없이 떠날 수 있게

얼마쯤의 시간을 허락해 주어요

 

그대 등에 업히어

흰 강(江)을 건널 땐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지

 

그 나라의 향연에선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밤마다 설레이며 생각합니다

 

 

 

그리운 등불 하나

이해인

 

내 가슴 깊은 곳에

그리운 등불 하나 켜 놓겠습니다

 

사랑하는 그대

언제든지 내가 그립걸랑

그 등불 향해 오십시오

 

오늘처럼 하늘빛 따라

슬픔이 몰려오는 날

그대 내게로 오십시오

 

나 그대 위해

기쁨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삶에 지쳐 어깨가

무겁게 느껴지는 날

그대 내게로 오십시오

 

나 그대 위해

빈 의자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가슴이 허전해

함께 할 친구가 필요한 날

그대 내게로 오십시오

 

나 그대의

좋은 친구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그대 내게 오실땐

푸르른 하늘빛으로 오십시오

고운 향내 전하는 바람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그대 내게 오시기 전

갈색 그리운 낙엽으로 먼저 오십시오

 

나 오늘도 그대 향한

그리운 등불 하나 켜 놓겠습니다.

 

 

 

그 사랑 놓치지 마라

이해인

 

당신을 보기만 해도 그냥 웃음이 나요

이유 없이 행복해요

 

웬만한 아픔 견딜 수 있고

어떠한 모욕도 참을 수 있어요

 

바람이 많이 불어도 뿌리가 깊어

버틸 수 있는 내 마음 모두 당신 덕분이지요

 

​어느 날 열매를 많이 달고

당신과 함께 춤을 추고 싶어요

 

 

 

그해 겨울의 산타클로스

이해인

 

어려운 피난 시절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산타클로스의 선물

 

빨간 벙어리 장갑

고운 물방울 무늬 가득한 털스웨터

 

아버지와 생이별한 여섯 살 소녀에게

머리맡에 놓인 그 선물은

참으로 정겹고 아름다운

기쁨과 행복이었습니다

 

그 시절 산타클로스의 정체를 알게 된 지금

작은아버지를 뵐 때마다

내 마음의 창엔 따스한 불빛이 스며듭니다

 

 

 

기다리는 행복

이해인

 

온 생애를 두고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수수한 옷차림의 기다림입니다.

 

겨울 항아리에 담긴 포도주처럼

나의 언어를 익혀 내 복된 삶의 즙을 짜겠습니다.

 

밀물이 오면 썰물을, 꽃이 지면 열매를,

어둠이 구워 내는 빛을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나의 친구여, 당신이 잃어버린 나를 만나러

더 이상 먼 곳을 헤매지 마십시오.

 

내가 길들인 기다림의 일상속에 머무는 나.

때로는 눈물 흘리며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오랜 나날 상처받고도 죽지 않는 기다림,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나의 소임입니다.

 

 

 

기도 일기

이해인

 

1 - 갈릴리 호수에서, 1997년 6월

하늘이 호수 같고

호수가 하늘 같은

6월 어느 날

어부의 배를 타고

물 속을 들여다봅니다

 

갈릴리 호수보다

더 깊고 넓은 사랑으로

세상과 사람을 껴안았던

예수의 그 얼굴을 찾아보려고

이마를 적십니다

 

그물을 치던 제자들을

나직이 부르시던 당신의 음성이

오늘은 이토록 푸른 호수가 되어

내 안에 출렁입니다

 

더이상 자신 안에 갇히지 말고

넓고 깊은 사랑의 호수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라고

당신은 나를 부르십니다

 

 

2 - 겟세마니에서, 1997년 6월

죄를 많이 지어

부끄러움뿐인 제가

땅에 엎디어 울 수도 없는

돌이 되어 서 있음을

용서하십시오

 

부드러운 올리브나무 잎새로

가늘게 들려오는 당신의 신음소리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고 피 흘리신

당신의 그 처절한 괴로움으로부터

늘 멀리 달아나고자 했습니다

 

당신을 섬기면서도

당신의 길을 따르기는

쉽지 않았던 세월을 돌아보며

오늘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으로나

당신 곁에 머무르려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기도할 때 내 마음은

이해인

 

1

기도할 때 내 마음은 바다로 갑니다

파도에 씻긴 흰 모래밭의 조개껍질처럼 닳고 닳았어도

 

늘 새롭기만 한 감사와 찬미의 말을 한꺼번에 쏟아 놓으면

저 수평선 끝에서 빙그레 웃으시는 나의 하느님

 

 

2

기도할 때 내 마음은 하늘이 됩니다

슬픔과 뉘우침의 말들은 비가 되고

기쁨과 사랑의 말들은 흰 눈으로 쌓입니다

 

때로는 번개와 우박으로 잠깐 지나가는 두려움

때로는 구름이나 노을로 잠깐 스쳐가는 환희로

 

조용히 빛나는 내 기도의 하늘

이 하늘 위에 뜨는 해. 달. 별. 믿음. 소망. 사랑

 

 

3

기도할 때 내 마음은 숲으로 갑니다

소나무처럼 푸르게 대나무처럼 곧게

한 그루 정직한 나무로 내가 서는 숲

 

때로는 붉은 철쭉꽃의 뜨거운 언어를

때로는 하얀 도라지꽃의 청순한 언어를 피워 내며

한 송이 꽃으로 내가 서는 숲

 

사계절 내내 절망을 모르는 내 기도의 숲에 서면

초록의 웃음 속에 항상 살아 계신 나의 하느님

 

 

 

기쁨 꽃

이해인

 

한 번씩 욕심을 버리고

미움을 버리고

노여움을 버릴 때마다

 

​그래 그래 고개 끄덕이며

순한 눈길로 내 마음에 피어나는

기쁨 꽃, 맑은 꽃

 

한 번씩 좋은 생각 하고

좋은 말 하고 좋은 일할 때마다

그래 그래 환히 웃으며

 

고마움의 꽃술 달고

내 마음 안에 피어나는

기쁨 꽃, 밝은 꽃

 

한결같은 정성으로

기쁨 꽃 피워내며

기쁘게 살아야지

 

사랑으로 가꾸어

이웃에게 나누어줄

열매도 맺어야지

 

 

 

기쁨에게

이해인

 

기쁨아, 너는

맑게 흘러왔다

맑게 흘러나가는

물의 모임이구나

 

빠르게 느리게

높게 낮게 모여드는

강, 바다

호수, 폭포

 

조금씩 모습을 바꾸며

흘러오는 너를

나는 그때마다

느낌으로 안다

 

모든 맑은 물이 그러하듯

기쁨아, 누구도 너를

혼자만 간직할 수 없음을

세상은 안다

 

그래서

흐르는 생명으로 네가 오면

나도 너처럼

멀리 흘러야 한다

메마른 세상을 적시며 흐르는

웃지 않는 세상에 노래를 주는

한 방울의 기쁨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기쁨으로 불을 놓게 하소서

이해인

 

​당신이 아니 계신 절망의 시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뉘우쳐도 끝없는 죄의 어둠 속에

저희의 눈물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바람과 먼지 속에 시간도 죽어 있던

빈 무덤을 지키며 당신을 기다려 온

저희에게 흰옷 입고 오시는

그리움의 승리자 기쁨의 절정, 예수여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따르지 못한

죄책감을 찔레 가시처럼 품고

사는 이들의 슬픔도

용서하고 위로해 주십니까

 

​믿음을 잃어 불안하고

사랑을 잃어 허무한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들도

더욱 가까이 불러 주십니까

 

스스로 만든 절망의 무덤 속에

꼼짝 못 하고 누워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일으켜 세워 주십시오

이기심으로 기쁨을 잃어버린 저희에게

 

다시 기뻐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자주 헛된 것에 정신이 팔리는 저희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이제 저희를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하늘과 땅과 사람들이 가장 큰

기쁨으로 손잡는 오늘 부활하신

당신 안에 새롭게 태어나는

저희의 이름 또한 새로운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성실히 키워

온 누리에 불을 놓게 하소서

고통의 세월 속에 잘 익은

사랑이 향유로 넘쳐흐르는 옥합을 들고

 

오늘은 한마음으로

당신 앞에 서 있는 우리

먼 길 오신 당신의 거룩한 발에 엎디어

겸허히 입맞춤하고 싶습니다

 

​엄청난 감사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세상과 이웃을 향하여 큰 소리로 웃고 싶은 오늘

천년의 문을 열고 설레며 불러 보는

당신의 이름은 희망으로 이어지는 기쁨입니다

 

이 불멸의 기쁨으로 세상 끝까지

꺼지지 않는 불을 놓게 하소서

이제는 다시 살아야겠다고

부활의 종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새봄의 노래 생명의 노래 알렐루야 알렐루야

사랑으로 죽어서 사랑으로 살아오신 님이여

찬미 영광 받으소서

이제와 영원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기쁨이란

이해인

 

매인 데 없이 가벼워야만

기쁨이 된다고 생각했다

한 톨의 근심도 없는

잔잔한 평화가 기쁨이라고

 

석류처럼 곱게 쪼개지는 것이

기쁨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며칠 앓고 난 지금의 나는

삶이 가져오는 무거운 것 슬픈 것

 

나를 힘겹게 하는모욕과

오해 가운데서도 기쁨을 발견하여

보석처럼 갈고 닦는 지혜를

순간마다 새롭게 배운다

 

내가 순해지고 작아져야

기쁨은 빛을 낸다는 것도 다시 배운다

​어느 날은 기쁨의 커다란 보석상을

세상에 차려놓고 큰 잔치를 하고 싶어

 

 

 

기쁨이란 반지는

이해인

 

기쁨은

날마다 내가 새로 만들어

끼고 다니는 풀꽃 반지

 

누가 눈여겨보지 않아도

소중히 간직하다가

어느 날 누가 내게 달라고 하면

이내 내어주고

다시 만들어 끼지

 

크고 눈부시지 않아

더욱 아름다워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많이 나누어 가질수록

그 향기를 더하네

기쁨이란 반지는

 

 

 

기쁨이 열리는 창

이해인

 

나는 기쁨이라는 단어를 무척 사랑한다.

어린시절부터 세상 모든 것들이

 

나에겐 다 신기하게 여겨져 행복했고

놀라운 것들이 하도 많아

삶이 지루하지 않았다.

 

나의 남은 날들을 기쁨으로

물들여야지 하고 새롭게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마음의 창에 기쁨의 종을 달자.

사랑하는 이들을 기쁨으로 불러 모으자.

 

슬픈 이들, 아픈 이들,

우울한 이들, 괴로운 이들이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기쁨을 발견하도록 돕는

기쁨 천사가 될 순 없을까?

 

 

 

기쁨 찾는 기쁨

이해인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생활 안에서

권태나 우울에 빠져들다가도

재빨리 기쁜 쪽으로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슬기를

구하고 싶다

 

매일 보물찾기라고 하듯이

'기뻐할거리'를 찾는다면

불평의 습성도 차츰 달아나고 말테지

 

기쁨을 찾는 기쁨만으로도

나의 삶은

더욱 풍요로울 것이다

안에서 만드는 기쁨은

늘 힘이 있다

 

 

 

기차를 타요

이해인

 

우리 함께

기차를 타요

 

도시락 대신

사랑 하나 싸들고

 

나란히 앉아

창 밖을 바라보며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서 길어지는

 

또 하나의 기차가 되어

먼 길을 가요

 

 

 

이해인

 

오늘은 가장 깊고 낮은 목소리로

당신을 부르게 해 주소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당신을 떠나보내야 했던

 

마리아의 비통한 가슴에 꽃힌

한 자루의 어둠으로 흐느끼게 하소서

 

아무래도 혼자서는 숨이 찬 세월

가는 길 마음 길 둘 다 좁아서

 

발걸음이 생각보단 무척 더디네

갈수록 힘에 겨워 내가 무거워

 

어느 숲에 머물다가 내가 찾은 새

무늬 고운 새를 이고 먼 길을 가네

 

 

 

길 위에서

이해인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없어서는 아니 될 하나의 길이 된다

 

내게 잠시

환한 불 밝혀주는 사랑의 말들도

다른 이를 통해 내 안에 들어와

고드름으로 얼어붙는 슬픔도

 

일을 하다 겪게 되는

사소한 갈등과 고민

설명할 수 없는 오해도

 

살아갈수록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나 자신에 대한 무력함도

 

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오늘도 몇 번이고 고개 끄덕이면서

빛을 그리워하는 나

 

어두울수록

눈물 날수록

나는 더 걸음을 빨리 한다

 

 

 

길을 떠나며

이해인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만 살기로 했다.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 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길을 떠날 때

이해인

 

길을 떠날 때면 처음으로 빛을 보는 나비가 된다.

바람따라 떠다니는 한숨 같은 민들레씨,

내일 향한 소리없는 사라짐을 본다.

여행길에 오르면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기쁨을 수없이 감사하고,

서서히 죽어 가는 슬픔을 또한 감사한다.

산, 나무, 강에게 손을 흔들며 나는

들꽃처럼 숨어 피는 이웃을 생각한다.

숨어서도 향기로운 착한 이웃들에게 다정한 목례를 보낸다.

 

 

 

김칫국 이야기

이해인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 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칫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칫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 보면 김칫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더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칫국물 한두 방울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 일이다

 

 

 

까치에게

이해인

 

오늘은 손님이 오시겠다고

노래하는 거니?

 

어른에겐

어른이 되고

 

어린이에겐

어린이가 되어

 

정성을 다해야

후회 없을 거라고

 

내가 고마운 마음으로

곱게 대답할 때까지

 

넌 멈추지도 않고

소리를 높이는구나

 

그래 알았어

잘해볼게

 

잔소리도 노래로 엮어

나를 교육하는 네가 있어

 

오늘도 행복하다

 

 

 

깨어 사는 고독

이해인

 

외출했다 돌아온 나의 빈 방에,

흰 무명옷을 빨아입은 정갈한 모습.

말없이 날 기다려 준 고운 눈매의 너.

손짓하지 않아도 밤낮 내 방을 지키며 깨어 사는 손님인가.

천장에도, 벽에도, 문에도 숨어 있다 가슴으로 파고드네.

죽고나면 또 어느 누가 이 나무침대 위에 쉬게 될까.

지금은 내가 이 자리에 누워 너를 만난다.

들을수록 정다운 카랑카랑한 목소리 뽑아 네가 노래를 하면

나의 방은 신기한 바닷속 궁전이 된다.

지느러미 하늘대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나는 짜디짠 밤의 물을 마신다.

 

 

 

꽃과 나

이해인

 

예쁘다고, 예쁘다고

내가 꽃들에게 말을 하는 동안

꽃들은 더 예뻐지고

 

고맙다고, 고맙다고

꽃들이 나에게 인사하는 동안

나는 더 착해지고

 

꽃물이 든 마음으로

환히 웃어주는

우리는 고운 친구

 

 

 

꽃 마음 별 마음

이해인

 

오래오래 꽃을 바라보면

꽃 마음이 됩니다

소리 없이 피어나

먼 데까지 향기를 날리는

 

한 송이의 꽃처럼 나도 만나는

이들에게 기쁨의 향기 전하는

꽃 마음 고운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싶습니다

 

오래오래 별을 올려다보면

별 마음이 됩니다

하늘 높이 떠서도 뽐내지 않고

소리 없이 빛을 뿜어내는

 

한 점 별처럼 나도 누구에게나

빛을 건네주는

별 마음 밝은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싶습니다

 

 

 

꽃망울

이해인

 

너를 향한 내 그리움의 꽃망울도

봄비에 젖어 터지려 한다

진달래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나의 꽃망울

이제는 울면서 조용히 터지려 한다

 

 

 

꽃 멀미

이해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

꽃들을 너무 많이 대하면

향기에 취해서 멀미가 나지

 

살아 있는 것은 아픈것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

너무 많아도 싫지 않은 꽃을 보면서

나는 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지

사람들에게도 꽃처럼 향기가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자

 

 

 

꽃밭에 서면

이해인

 

꽃밭에 서면 큰 소리로 꽈리를 불고 싶다

피리를 불듯이

순결한 마음으로

 

꽈리 속의 자디잔 씨알처럼

내 가슴에 가득 찬 근심 걱정

후련히 쏟아 내며

꽈리를 불고 싶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동그란 마음으로

꽃밭에 서면

 

저녁노을 바라보며

지는 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고 싶다

 

남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받고 싶다

 

꽃들의 죄없는 웃음소리

붉게 타오르는

꽃밭에 서면

 

 

 

꽃봉오리 속에 숨겨온 그 마음

이해인

 

복을 빈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너무 자주 하면 향기가 사라질 것 같아

꽃봉오리 속에 숨겨온 그 마음

 

가시를 지닌 장미처럼

삶의 모든 아픔 속에서도

고운 꽃을 피워내라는

한 송이의 기도와 격려로

그대의 꽃 선물을 받아들입니다

 

 

 

꽃샘바람

이해인 

 

속으론 나를 좋아하면서도

만나면 짐짓 모른 체하던

어느 옛친구를 닮았네

 

꽃을 피우기 위해선

쌀쌀함 냉랭함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얄밉도록 오래 부는

눈매 고운 꽃샘바람

 

나는 갑자기

아프고 싶다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

이해인

 

내가 심은 꽃씨가

처음으로 꽃을 피우던 날의

그 고운 설레임으로

 

며칠을 앓고 난 후

창문을 열고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의

그 눈부신 감동으로

 

비온 뒤의 햇빛 속에

나무들이 들려주는

그 깨끗한 목소리로

 

별것 아닌 일로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던

친구와 오랜만에 화해한 후의

그 티없는 웃음으로

 

나는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못 견디게 힘든 때에도

다시 기뻐하고

다시 시작하여

끝내는 꽃씨를 닮은 마침표 찍힌

한 통의 아름다운 편지로

매일을 살고 싶다

 

 

 

꽃씨를 선물하는 마음

이해인

 

생일을 맞는 이에게 주려고

오늘은 분꽃씨를 따서 고운 봉지에 담아두었다.

우리가 서로 꽃씨를 선물로 주고받고

꽃이 피고 나면 그 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음은

얼마나 아름답고 기쁜 일인지!

지난 봄 선물로 받아 뿌린 나팔꽃씨에서

꽃잎이 비로드처럼 부드러운

붉은 꽃, 보라색 꽃이 끊임없이 피어올라

날마다 새로운 아침을 열고 있다.

 

 

 

꽃을 보고 오렴

이해인

 

네가 울고 싶으면 꽃을 보아라

웃고 싶어도 꽃을 보아라

 

늘 너와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꽃

 

꽃은 아름다운 그만큼 맘씨도 곱단다.

변덕이 없어 사귈 만 하단다.

 

네가 나를 만나러 오기 전

꽃부터 먼저 만나고 오렴

 

그럼 우리는

절대로 싸우지 않을 거다.

 

누구의 험담도 하지 않고

내내 고운 이야기만 할 거다.

 

 

 

꽃의 말

이해인

 

고통을 그렇게 낭망적으로 말하면

나는 슬퍼요.

 

필 때도 아프고 질때도 아파요.

당신이 나를 자꾸 바라보면 부끄럽고

 

​떠나가면 서운하고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더 많아 미안하고 미안해요.

 

삶은 늘 신기하고 배울 게 많아

울다가도 웃지요.

 

예쁘다고 말해주는 당신이 곁에 있어

행복하고 고마워요.

 

앉아서도 멀리 갈게요.

노래를 멈추지 않는 삶으로 겸손한 향기가 될게요.

 

 

 

꽃의 향기, 사람의 향기

이해인

 

어느 땐 바로 가까이 피어 있는 꽃들도

그냥 지나칠 때가 많은데,

 

이 쪽에서 먼저 눈길을 주지 않으면

꽃들은 자주 향기로 먼저 말을 건네오곤 합니다.

 

좋은 냄새든, 역겨운 냄새든 사람들도

그 인품만큼의 향기를 풍깁니다.

 

많은 말이나 요란한 소리없이 고요한 향기로

먼저 말을 건네오는 꽃처럼 살 수 있다면,

 

이웃에게도 무거운 짐이 아닌

가벼운 향기를 전하며 한세상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꽃 이름 외우듯이

이해인

 

우리 산 우리 들에 피는 꽃

꽃이름 알아가는 기쁨으로

새해, 새날을 시작하자

 

회리바람꽃, 초롱꽃, 돌꽃, 벌깨덩굴꽃

큰바늘꽃, 구름채꽃, 바위솔, 모싯대

족두리풀, 오이풀, 까치수염, 솔나리

 

외우다 보면

웃음으로 꽃물이 드는

정든 모국어

 

꽃이름 외우듯이

새봄을 시작하자

꽃이름 외우듯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즐거움으로

우리의 첫 만남을 시작하자

 

우리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먼데서도 날아오는 꽃향기처럼

 

봄바람 타고 어디든지

희망을 실어나르는

향기가 되자

 

 

 

꽃집에서

이해인

 

"어느 꽃을 사겠니?"

"어느 꽃을 사겠냐니까?."

 

꽃집에서 들어가서

꽃을 사는 일은

정말 어려워요.

 

꽃들은 다

저마다의 모양과 빛깔이

너무 아름답거든요

 

향기가 좋거든요

모두 다

내 마음에 들거든요

 

꼭 한 가지만

골라서 산다는 일은

어쩐지 미안하고

 

어쩐지 슬퍼집니다

그래서 꽃집을 슬며시

그냥 나와 버립니다

 

 

 

꽃 한 송이 되어

이해인

 

비 오는 날

오동꽃이 보랏빛 우산을 쓰고

나에게 말했습니다

 

넓어져라

넓어져라

 

더 넓게

더 넓게 살려면

향기가 없어도 괜찮다

 

나는 얼른

꽃 한 송이 되어

올라갔습니다

 

처음으로 올라가본

오동나무의 집은

하도 편안해

내려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도 오실래요?

 

 

 

꿈길에서

이해인

 

1

살아 있는 동안은 매일 밤 꿈을 꾸며

조금씩 키가 크고 마음도 넓어지네

 

꿈에 가보는 그 많은 길들과

약속 없이 만나 수많은 사람들

 

낯설고 낯익은 꿈속의 현실이

소리 없이 가르쳐준 삶의 이야기들

 

한 번 꾸고 사라질 꿈도 삶을 빛내느니

세상 어디에도 버릴 것은 없어라

 

살아 있어 꿈을 꾸고

꿈이 있어 행복하다고 나 말하리

 

 

2

나는 늘 꿈에도 길을 가지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멀고도 좁은 길을

 

낯익은 사람 낯선 사람

꿈속에선 모두 가까운 동행인이 되지

 

꿈속의 길이라고 더 새롭지도 않은

나의 평범한 길을 열심히 걷다 보면

 

깨어나서도 내내

기쁨으로 흘러가는 나의 시간들

 

마음도 걸음도 흩어지지 않으려고

꿈에도 연습을 많이 했지

 

나를 길들이며 누구에게나

떳떳하고 아름다운 이웃으로

문을 열고 싶었지

 

 

 

꿈을 위한 변명

이해인

 

아직 살아 있기에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꿈꾸지 말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꿈이 많은 사람은

정신이 산만하고

삶이 맑지 못한 때문이라고

단정 짓지 마세요

 

나는 매일

꿈을 꿉니다

슬퍼도 기뻐도

아름다운 꿈

꿈은 그대로 삶이 됩니다

 

오늘의 이야기도

내일의 이야기도

꿈길에 그려질 때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꿈이 없는 삶

삶이 없는 꿈은

얼마나 지루할까요

 

죽으면 꿈이 멎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꿈을 꾸고 싶습니다

꿈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꿈 일기

이해인

 

1

나는 가끔

꿈길에서

어린 소녀가 된다

 

낯설면서도 낯익은

또 하나의 나를 본다

 

엄마가 지어준

노란 원피스를 입고

나비처럼 춤을 추거나

엄마가 수 놓아준

푸른 헝겊 가방에

책과 공책을 잔뜩 넣고

학교 길을 걸으며

지각할까 마음 조이는

콩새 가슴의 학생이 된다

 

얘, 넌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내게 묻는 나무들에게

아직은 몰라, 천천히 생각해야 돼

새침을 떨며 조용히 걸어가는 나

 

아직 어른으로 깨어나지 못하고

꿈속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어린 날의 추억과 뒹구는

작은 인형이 된다, 나는

 

 

2

목마른 이들에게

물 한 잔씩 건네다가

꿈이 깨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겠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다시

사랑해야겠습니다

 

누구에게나

물 한 잔 건네는

그런 마음으로

목마른 마음으로......

 

꿈에서

나는 때로

천사이지만

 

꿈을 깨면

자신의 목마름도

달래지 못합니다

 

 

 

나 그대에게 고운 향기가 되리라

이해인 

 

초승달이 노니는 호수로

사랑하는 이여!

함께 가자

 

찰랑이는 물결위에

사무쳤던 그리움 던져두고

꽃내음 번져오는 전원의 초록에

조그만 초가 짓고 호롱불 밝혀

사랑꽃을 피워보자구나

 

거기 고요히 평안의 날개를 펴고

동이 트는 아침

햇살타고 울어주는 방울새 노래

기쁨의 이슬로 내리는 소리를 듣자구나

 

사랑하는 이여!

일어나 함께 가자

 

착한 마음 한아름 가득 안고서

나 그대에게

황혼의 아름다운 만추의 날까지

빛나는 가을의 고운 향기가 되리라

 

 

 

나를 길들이는 시간

이해인

 

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나 속의 나를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으므로

 

여럿 속에 있을 땐

미처 되새기지 못했던

삶의 깊이와 무게를

고독 속에 헤아려볼 수 있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 안해야 할 일

분별하며 내밀한 양심의 소리에

더 깊이 귀기울일 수 있으므로

 

그래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

여럿 속의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고독 속에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나를 부르는 당신

이해인

 

오를 때는 몰랐는데

내려와 올려다보면

퍽도 높은 산을 내가 넘었구나

 

건널 때는 몰랐는데

되건너와 다시 보면

퍽도 긴 강을 건넜구나

 

이제는 편히 쉬고만 싶어

다시는

떠나지 않으렸더니

 

아아, 당신

 

그래도

움직이는 산

굽이치는 강

 

나를 부르는

당신

 

 

 

나를 위로하는 날

이해인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가 나를 위로할 필요가 있네

 

큰일 아닌데도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죽음을 맛볼 때

남에겐 채 드러나지 않은 나의 허물과

약점들이 나를 잠 못 들게 하고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에 문 닫고 숨고 싶을 때

괜찮아 괜찮아. 힘을 내라구

이제부터 잘 하면 되잖아

 

조금은 계면쩍지만 내가 나를 위로하며

조용히 거울 앞에 설 때가 있네

내가 나에게 조금 더 따뜻하고 너그러워지는

동그란 마음, 활짝 웃어주는 마음

남에게 주기 전에 내가 나에게

먼저 주는 위로의 선물이라네.

 

 

 

나를 키우는 말

이해인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나무

이해인

 

나무야, 네 눈빛만 보아도 나는 행복해.

쓰러질 듯 가느다란 몸으로

그토록 많은 잎과 열매를 묵묵히 키워내는

너를 오래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더욱 살고 싶어져.

모든 슬픔을 잊게 돼.

바람에 흔들리는 네 소리만 들어도

나는 네 마음을 알 것 같아.

모든 이를 골고루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애쓰는 너.

우리 엄마처럼 웬만한 괴로움은 내색도 않고

하늘만 쳐다보는 네 깊은 속마음을

알 것 같단 말이야.

 

 

 

나무를 안고

이해인

 

길을 가다가 하도 아파서

나무를 안고 잠시 기도하니

 

든든하고 편하고 좋았어요

괜찮아 곧 괜찮아질 거야

 

​나뭇잎들도 일제히 웃으며

나를 위로해 주었어요

 

​힘내라

힘내라

 

바람 속에 다 같이

노래해 주니

나도 나무가 되었어요.

 

 

 

나무에게 받은 위로

이해인

 

길을 걷다가 하도 아파서

나무를 껴안고 잠시 기도하니

든든하고 편하고 좋았어요

 

괜찮아

곧 괜찮아질 거야

 

나뭇잎들도 일제히 웃으며

나를 위로해주었어요

 

힘내라 힘내라

바람 속에 다 같이

 

노래해주니

나도 나무가 되었어요

 

 

 

나무의 마음으로

이해인

 

참회의 눈물로 뿌리를 내려

하늘과 화해하는

나무의 마음으로 선다

 

천만 번을 가져도 내가 늘 목마를 당신

보고 싶으면

미루나무 끝에 앉은

겨울 바람으로 내가 운다

 

당신이 빛일수록

더 짙은 어둠의 나

이 세상 누구와도 닮은 일 없는

폭풍 같은 당신을 알아 편할 길 없다

 

오늘은 엇갈리는 만남의 비극 속에

내일은 열리는가

땅 위의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내 존재의 끝은 당신

 

편히 잠들 날 없는

가장 정직한 나무의 마음으로

당신 앞에 선다

 

 

 

나무의 사랑법

이해인

 

자꾸만 가까이

기대고 싶어 하지만

 

서로의 거리를 두어야

잘 보이고

 

침묵을 잘해야

할 말이 떠오릅니다

 

​남의  말을 듣고 또 듣는 것이

사랑의 방법입니다

 

침묵 속에 기다리는 것이

지혜의 발견입니다

 

​아퍼도 슬퍼도

쉽게 울지 않고

 

​견디고 또 견디는 것이

기도의 완성입니다

 

​사계절 내내 중심 잡고

서 있기 힘들 때도 많지만

 

그래도 기쁘게 사는 것은

흐르는 세월 속에

 

땅 깊이 내려가는 뿌리

하늘로 뻗어가는 줄기

 

바람에 춤추는 잎사귀들

덕분입니다

 

​오늘도 사랑받고

사랑하는 저를

 

사랑으로 지켜봐 주십시오

늘 고맙습니다.

 

 

 

나무의 자장가

이해인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는

나른한 여름

 

눈을 감아도

몸과 마음이

모아지지 않고

멋대로 흩어지는 오후

 

달디단 바람이 와서

가만가만 나를 달래며

잠들게 해줍니다

초록빛 나뭇잎들이

나무에서 내려와

자장가를 불러줍니다

 

나는 금방

초록빛 시원한

잠의 숲속으로 들어가

깨어날 줄을 모릅니다

 

 

나무 책상

이해인

 

숲의 향기 가득히 밴

나무 책상을 하나 갖고 싶다

 

​편히 엎디어 공상도 하고

나무 냄새 나는 종이를 꺼내

그림도 그리고 편지도 쓰고

 

시와 꽃을 피우면서 선뜻 나를

내려놓아도 좋은 부담없는

친구같은 책상을 곁에두고싶다

 

​동서남북 네 귀퉁이엔

비밀스런 꿈도 심어야지

외롭다고 느낄 때마다

 

살짝 웃어보는 나를

어진 마음으로 받아주는

​그 평범해 보이지만

 

아름다운 깊이로 나를

제자리에 앉히는 향기로운

나무 책상을 하나 갖고싶다

 

 

 

나뭇잎 러브레터

이해인

 

당신이 내게 주신 

나뭇잎 한 장이 나의 가을을 

사랑으로 물들입니다

 

나뭇잎에 들어 있는

바람과 햇빛과 별빛과

달빛의 이야기를

 

풀어서 읽는 것

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한 장의 나뭇잎은 또 다른

당신과 나의 모습이지요?

 

이 가을엔 나도 나뭇잎 한 장으로

많은 벗들에게 고마움의

러브레터를 쓰겠습니다

 

 

 

나비에게

이해인

 

너의 집은

어디니?

 

오늘은

어디에 앉고 싶니?

 

살아가는 게

너는 즐겁니?

죽는 게 두렵진 않니?

 

사랑과 이별

인생과 자유

그리고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늘

물어볼 게 많은데

 

언제 한번

대답해 주겠니?

 

너무 바삐 달려가지만 말고

지금은 잠시

나하고 놀자

 

갈 곳이 멀더라도

잠시 쉬어가렴

사랑하는 나비야

 

 

 

나비의 연가

이해인

 

가르쳐 주시지 않아도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향해 날으는

한 마리 순한 나비인 것을

 

가볍게 춤추는 나에게도

슬픔의 노란 가루가

남몰래 묻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눈멀 듯 부신 햇살에

차라리 날개를 접고 싶은

황홀한 은총으로 살아온 나날

 

빛나는 하늘이

훨훨 날으는

나의 것임을 알았습니다

 

행복은 가난한 마음임을 가르치는

풀잎들의 합창

 

수없는 들꽃에게 웃음 가르치며

나는 조용히 타버릴

당신의 나비입니다

 

부디 꿈꾸며 살게 해 주십시오

버려진 꽃들을 잊지 않게 하십시오

 

들릴 듯 말 듯한 나의 숨결은

당신께 바쳐지는

무언(無言)의 기도

 

당신을 향한

맨 처음의 사랑

불망(不忘)의 나비입니다, 나는

 

 

 

나에게 말하네

이해인

 

사랑하는 일에도

자주 마음이 닫히고

꽁해지는 나에게

나보다 나이 많은 나무가

말하네

 

하늘을 보려면 마음을 넓혀야지

별을 보려면 희망도 높여야지

 

 

 

나의 꿈속엔

이해인

 

꿈 속에서 그려 보는

나의 그림 속엔

하나도 슬픈 얼굴이 없다

 

세월이 가면 자꾸 가면

할 수 없이

사람은 늙는다지만

 

우리 엄마 얼굴은

언제나 젊어 있고

 

북녘 멀리

떠나신 아빠도

이내 돌아오시고

 

나는 참 기뻐서

웃기만 한다

 

꿈 속에서 그려 본

나의 그림 속엔

한 번도 어둔 빛깔이 없다

 

어른들이

멋없이

괴로워하는 세상

 

세상이 어둡다면

빨갛게 파랗게

물들여 놓을까

 

나의 꿈 속엔

나의 하늘엔

오늘도 즐거워라

무지개 선다

 

 

 

나의 밭에는 어떤 씨를 뿌릴 것인가

이해인

 

늘 열려있고 무한한 가능성을 안고 누워 있는 밭

그러나 누군가 씨를 뿌리지 않으면

그대로 죽어 있을 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밭

 

매일 다시 시작하는 나의 삶도 어쩌면

새로운 밭과 같은 것이 아닐까

밭에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매일 살 수 있어야겠다.

 

매일이라는 나의 밭에

나는 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여러 종류의 씨를 뿌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익한 명상의 씨를 더 많이 뿌리는 날도 있으리라.

아름다운 말의 씨를 뿌릴 때가 있는가 하면

가시 돋힌 말의 씨를 뿌릴 때도 있으며

 

봉사적인 행동으로 사랑의 씨를 뿌리는 날이 있는가 하면

이기적인 행동으로 무관심의 씨를 뿌린 채

하루를 마감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매일 어떤 씨를 뿌리느냐에 따라서

내 삶의 밭 모양도 달라지는 것일 게다.

 

 

 

나의 별이신 당신에게

이해인

 

조용히 끝난 하루를 걷어 안고

그렇게도 멀리 살으시는

당신의 창가에 나를 기대이면

짙푸른 시원(始原)의 바다를 향하여

열리는 가슴

 

구름이 써놓은 하늘의 시

바람이 전해 온 불멸의 음악에

당신을 기억하며

뜨겁게 타오르는

작은 화산이고 싶습니다

 

내가 숲으로 가는

한 점 구름이었을 때

더욱 가까웁고 따스했던

당신의 눈길

 

문득 우주가 새로와지는

놀라운 환희의 시심을

처음으로 내게 알게 한 당신

 

아프도록 순수한 영혼 속의 대화를

침묵 속에 빛나는 기도의 영원함을

날마다 조심스레 일깨우는 당신이여

 

오직 당신을 통하여

하늘로 난 하나의 문이 열리면

나의 어둠은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하고

 

어진 눈길 묵묵히 모아

당신이 계신 은하의 강가에서

가슴 적시웁니다 나는

 

언제나 함께 사는

멀리 가까운

나의 별이여

 

 

 

나의 서가

이해인

 

에밀리 디킨슨, 로버트 프로스트,

칼릴 지브란이

정답게 악수하는 자리에

나도 때때로 친구가 된다

김소월, 노천명, 윤동주의 시집과

오늘을 살아가는 시인들의

제목도 아름다운 시집들이

따뜻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들을

즐겨 들으며 살아가는 기쁨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책을 읽는 즐거움을

 

 

 

나의 시(詩)

이해인

 

제대로 옷을 못 입어 볼품 없어도

키운 정 때문에 버릴 수 없는 나의 시(詩),

써도 써도 끝까지 부끄러운 나의 시(詩)는

나를 닮아 언제나 혼자서 사는 게지.

맨몸으로 펄럭이는 제단 위의 촛불 같은 나의 언어,

나의 제물. 내가 너를 만나면 길이 열린다.

아직 그 누구도 밟지 않은 하얀 새벽길,

그곳에 비로소 설레이는 나의 하루가 있다.

 

 

 

나의 시편들

이해인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나의 시편들이

오밀조밀 숨어 사는 책상 서랍에서

싱싱한 과일같은 행복을 꺼내 먹습니다

남에게 읽히지 않은 시들은

싫증이 나지 않은 무구한 얼굴

아무도 소유한 일 없는 귀한 보석을

손에 쥔 듯한 느낌

어쩌면 갇혀 있어 더욱 소중히 느껴지는

나의 언어들을

날마다 포옹하며 사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 모두를 얻은 듯

행복하고 감미롭습니다

 

 

 

나의 창은

이해인

 

산이

살아서 온다

 

저만치 서 있다가

나무 함께 조용히

걸어서 온다

 

창은

움직이는 것들을 불러 세우고

서서히 길을 연다

꿈꾸게 한다

 

기쁨을 데려다 꽃피워 주는

창은 고운 새 키우는 숲

창 속의 숲마을은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밝아오는 고향

 

온갖 어둠 몰아내고

처음인 듯 새롭게

창은

부활하는 아침

 

갑자기 꽃밭이 되어

나를 데리러 오면

나는 작아서 행복한

여왕이 된다

 

하얀 날개로

하늘을 날으던 구름

 

어린 시절엔

그리 황홀했던 꿈

지금은 그냥 잊어만 간다

 

창은 - 나의 창은

오늘도

자꾸 피리를 분다

끝없이 나를 데리고 간다

 

 

 

나의 첫 기도

이해인

 

누워서도 하늘과 숲을 바라볼 수 있는

나의 작은 수방修房을 사랑한다

새들의 노랫소리와 나무들의 기침소리가

거침없이 들어와 나를 흔들어 깨우는 새벽

나의 가슴엔 풀물이 든다

송진 내음 가득한 솔숲으로 뻗어가는

나의 일상

너무 고요하고 평화스러워 늘상

송구한 마음으로 시작되는

나의 첫 기도

 

 

 

나의 하늘은

이해인

1

그 푸른 빛이 너무 좋아

창가에서 올려다본

나의 하늘은

어제는 바다가 되고

오늘은 숲이 되고

내일은 또

무엇이 될까

 

몹시 갑갑하고

울고 싶을 때

문득 쳐다본 나의 하늘이

지금은 집이 되고

호수가 되고

들판이 된다

 

그 들판에서

꿈을 꾸는 내 마음

파랗게 파랗게

부서지지 않는 빛깔

 

 

2

하늘은

희망을 고인

푸른 호수

 

나는 날마다

희망을 긷고 싶어

땅에서 긴 두레박을

하늘까지 댄다

 

내가 물을 많이 퍼 가도

늘 말이 없는

하늘

 

 

 

나팔꽃

이해인

 

햇살에 눈뜨는 나팔꽃처럼

나의 생애는

당신을 향해 열린

아침입니다

 

신선한 뜨락에 피워 올린

한 송이 소망 끝에

내 안에서 종을 치는

하나의 큰 이름은

언제나 당신입니다

 

순명(順命)보다 원망을 드린

부끄러운 세월 앞에

해를 안고 익은 사랑

 

때가 되면

추억도 버리고 떠날

나는 한 송이 나팔꽃입니다

 

 

 

낙엽

이해인

 

낙엽은 나에게 살아 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 깨우쳐준다.

 

​낙엽은 나에게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이승의 큰 가지 끝에서 내가 한 장

낙엽으로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일까

헤아려 보게 한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내 사랑의 나무에서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좀

더 의식하고 살아야겠다

 

 

 

낙엽 빛깔 닮은 커피

이해인

 

하늘이 맑으니

바람도 맑고 내 마음도 맑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으로 잘 익은

그대의 목소리가 노래로 펼쳐지고

 

들꽃으로 피어나는 가을

한잎 두잎 나뭇잎이 물들어 떨어질 때마다

 

그대를 향한 나의 그리움도

한잎 두잎 익어서 떨어집니다

 

​사랑하는 이여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어서 조용히 웃으며 걸어오십시오

 

​낙엽 빛깔 닮은 커피 한잔 마시면서

우리 사랑의 첫 마음을 향기롭게 피어 올려요

쓴맛도 달게 변한 우리 사랑을 자축해요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힘들고 고달팠어도 함께 고마워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조금은 불안해도

새롭게 기뻐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 없이 서늘한 가을바람

가을하늘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해요.

 

 

 

낡은 구두

이해인

 

내가 걸어다닌 수많은 장소를

그는 알고 있겠지

내가 만나 본 수많은 이들의 모습도

아마 기억하고 있겠지

 

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 보던 그는

내가 쓴 시간의 증인

비스듬히 닳아 버린 뒤축처럼

고르지 못해 부끄럽던 나의 날들도

그는 알고 있겠지

 

언제나 편안하고 참을성 많던

한 켤레의 낡은 구두

이제는 더 신을 수 없게 되었어도

선뜻 내다 버릴 수가 없다

 

몇 년 동안 나와 함께 다니며

슬픔에도 기쁨에도 정들었던 친구

묵묵히 나의 삶을 받쳐 준

고마운 그를

 

 

 

낯설어진 세상에서

이해인

 

참 이상도 하지

사랑하는 이를

저 세상으로

눈물 속에 떠나 보내고

 

다시 돌아와 마주하는

이 세상의 시간들

이미 알았던 사람들

이리도 서먹하게 여겨지다니

 

태연하기 그지없는

일상적인 대화와

웃음소리

당연한 일인데도

자꾸 낯설고 야속하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토록 낯설어진 세상에서

누구를 의지할까

 

어차피 우리는 서로를

잊으면서 산다지만

다른 이들의 슬픔에

깊이 귀 기울일 줄 모르는

오늘의 무심함을

조금은 원망하면서

 

서운하게

쓸쓸하게

달을 바라보다가

달빛 속에 잠이 드네

 

 

 

내가 나에게

이해인

 

오늘은 오랜만에

내가 나에게

푸른 엽서를 쓴다

 

어서 일어나

섬들이 많은

바다로 가자고

 

파도 아래 숨 쉬는

고요한 깊이

고요한 차가움이

마침내는 따뜻하게 건네오는

하나의 노래를 듣기 위해

끝까지 기다리자고 한다

 

이젠

사랑할 준비가 되었냐고

만날 적마다 눈빛으로

내게 묻는 갈매기에게

오늘은 이렇게 말해야지

 

파도를 보면

자꾸 기침이 나온다고

수평선을 향하여

일어서는 희망이

나를 자꾸 재촉해서

숨이 차다고 -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이해인

 

1

처음으로 사랑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하늘색 원피스의 언니처럼

다정한 웃음을 파도치고 있었네

 

더 커서 슬픔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실연당한 오빠처럼

시퍼런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네

 

어느 날 이별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남빛 치마폭의 엄마처럼

너그러운 가슴을 열어 주었네

 

그리고 마침내 기도를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파도를 튕기는 은어(銀魚)처럼

펄펄 살아 뛰는 하느님 얼굴이었네

 

 

2

이렇게 후련할 수 있을까

마음에 붙은 볼을

물 같은 마음으로 꺼버리고

바다에 나갔을 제

 

바다는

내가 감추어 둔 슬픔마저

눈치채고 가라앉혔네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아

나와 함께

답답했던 바다여

 

이제 욕심을 버리려

바다에 왔을 제

처음으로 내 안에 출렁이는

자유의 바다여

 

 

3

바다에 와서

빈 배를 보면

왜 이리 기쁜가

 

빈 마음으로

떠날 수 있음은

얼마나한 아름다움인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내 굽은 마음을 곧게

흰 모래를 밟으며

내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손에 쥔 몇 개의 조가비가

푸른 음성으로 읊어 대는

바다의 詩

 

해초(海草)를 캐듯

시(時)를 캐는

해녀(海女)이고 싶어

 

썰물 때의 바닷가에서

 

 

4

아이를 달래는 엄마처럼

가슴이 열린 바다

 

그는

가진 게 많아도

뽐내지 않는다

 

줄 게 많아도

우쭐대지 않는다

 

 

5

답답한 마음

바다에 내려놓고

탁 트인 마음 들고 온다

 

가득 찬 욕심

바다에 벗어놓고

빈 마음 들고 온다

 

 

6

숨은 보물을 찾듯

모래밭에 묻힌

조개껍질들을 줍는다

 

파도에 씻긴

조그맣고 단단한 그 얼굴들은

바다가 낳은 아이들

 

태어날 적부터

섬섬한 빛깔의

무늬 고운 옷을 입고 있다

 

하얀 모래밭에

모래알 웃음을

쏟아내고 있다

 

 

저녁 바다에서

내가 바치는 바다빛 기도는

 

속으로 가만히

당신을 부르는 것

 

바람 속에

조용히 웃어 보는 것

 

바다를 떠나서도

바다처럼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

 

 

8

바다는 온몸으로

시를 읊는 나의 선생님

 

때로는 높게

때로는 낮게

 

어느 날은 거칠게

어느 날은 부드럽게

 

가끔은 내가 알아듣지 못해도

멈추지 않고 시를 읊는

푸른 목소리의 선생님

 

 

9

바다는 온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나의 선생님

 

때로는 푸른빛

때로는 남빛

 

어느 날은 회색빛

어느 날은 검푸른 빛

 

가끔은 내가 알아보지 못해도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림을

쉬지 않고 그리는

아름다운 선생님

 

 

10

바다에 가지 않아도

항상 내 안에는

바다가 출렁이네

 

눈을 들면

수평선

 

파도로 뛰는 마음

늘 푸르게 살라 한다

물새로 깃을 치는 마음

늘 기쁘게 살라 한다

 

 

 

내가 비어 있음으로 편안하구나

이해인

 

내가 입다 걸어둔 한 벌의 허름한 옷

몸과 삶이 빠져나와 쓸쓸하구나

 

이 지상에서 나의 날개에 묻어 있는

온갖 고뇌와 그리움의 때

빨지 않아도 정답구나

 

오래 걸어둔 한 벌의 옷이 비어 있듯

내가 비어 있음으로

편안하구나

 

 

 

내가 선택한 당신

이해인

 

사랑이여, 내가 선택한 당신은 12월의 흰 얼굴을 닮았습니다.

눈송이처럼 내 안으로 떨어져 눈물로 피는 당신이여,

전부를 드리고 싶은 내 뜨거운 그리움이 썰매를 타는 겨울은

그대의 눈, 바람은 그대의 음성, 바람은 기도입니다.

그대 앞에 나는 언제나 떨리는 기다림의 3월입니다.

힘찬 파도로 내 안에 부서지고 보채며 절규하는 사랑이여.

 

 

 

내가 아플 때

이해인

 

내가 아플 때

내 이마를 짚어 보는

엄마의 손은

내가 안 아플 때 만져 보던

엄마의 손보다

몇 배나 더 부드럽고 따스해서

나는 금세

눈물이 핑 돕니다

 

내가 아플 때

유리창으로 내다보는

조그만 크기의 하늘은

내가 안 아플 때

마음놓고 올려다본 하늘보다

몇 배나 더 푸르고 아름다워서

나는 금세

울어 버릴 것만 같습니다

 

내가 아플 때는

후회되는 일들도 많습니다

이제 다시 학교에 가면

조그만 일로 말다툼했던 현아에게

제일 먼저 달려가서

활짝 핀 웃음을 선물하겠습니다

 

 

 

내가 알게 된 참 겸손

이해인

 

책을 읽다가 '겸손은 땅이다.'라는

대목에 눈길이 멈췄습니다.

 

겸손은 땅처럼 낮고, 밟히고,

쓰레기까지 받아들이면서도

그곳에서 생명을 일으키고

 

풍성하게 자라 열매 맺게

한다는 것입니다.

 

더 놀란 것은 그동안

내가 생각한 겸손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나는 겸손을

내 몸 높이로 보았습니다.

 

몸 위쪽이 아닌 내 발만큼만

낮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겸손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 발이 아니라 그 아래로

더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밟히고,

눌리고, 다져지고,

아픈 것이 겸손이었습니다.

 

그 밟힘과 아픔과 애태움 속에서

나는 쓰러진 채 침묵하지만

 

남이 탄생하고 자라 열매 맺는

것이었습니다. 겸손은 나무도,

물도, 바람도 아닌 땅이었습니다. 아멘!

 

 

 

내 고운 친구야

이해인

 

어느 날

"눈이 빠지게 널 기다렸어"

하며 내게 눈을 흘기며

마실 물을 건네주던

고운 친구야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 안에서

찰랑이는 물소리를 내는

그리운 친구야

네 앞에서만은

항상 늙지 않은 어린이로

남아 있고 싶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는

너를 사랑하던 아름다운 기억을

그대로 안고갈 거야

서로를 위해 주고 격려하며 설레임으로

가득했던 그 기다림의 순간들을

하얀 치자꽃으로 피워낼 거야

진정 우리의 우정은

아름다운 기도의 시작이구나

친구야

 

 

 

내 기도의 말은

이해인

 

수화기 들고

긴 말 안 해도

금방 마음이 통하는

연인들의 통화처럼

 

너무 오래된

내 기도의 말은

단순하고 따스하다

 

뜨겁지 않아도

두렵지 않다

 

끊고 나면

늘 아쉬움이

가슴에 남는 통화처럼

일생을 되풀이하는

내 기도의 말 또한

 

부족하고 안타까운

하나의 그리움일 뿐

끝없는 목마름일 뿐

 

 

 

내 나이 가을에 서서

이해인

 

젊었을 적

내 향기가 너무 짙어서

남의 향기를

맡을 줄 몰랐습니다

 

내 밥그릇이 가득 차서

남의 밥그릇이

빈 줄을 몰랐습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사랑에 갈한 마음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세월이 지나 퇴색의 계절

반짝반짝 윤이 나고 풍성했던

나의 가진 것들이 바래고

향기마저 옅어지면서

은은히 풍겨오는

다른 이의 향기를

맡게 되었습니다

 

고픈 이들의

빈 소리도

들려옵니다

목마른 이의 갈라지고

터진 마음도 보입니다

 

이제서야 보이는

이제서야 들리는

내 삶의 늦은 깨달음

이제는

은은한 국화꽃 향기 같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내 밥그릇 보다

빈 밥그릇을

먼저 채 우겠습니다

받은 사랑 잘 키워서

풍성히 나눠 드리겠습니다

내 나이 가을에

겸손의 언어로 채우겠습니다

 

 

 

내 마음

이해인

 

꿈길로 가만히 가면

무엇이나 다 볼 수 있고

어디든지 다 갈 수 있는

내 마음

 

화가 나고 울고 싶다가도

금방 깔깔 웃기도

좋기도 한 내 마음

 

꼭 하나인 것 같으면서도

날마다 때마다

다른 빛깔 되는 마음

 

사진으로 찍어 낼 수만 있다면

어떤 모양이 될까?

정말 궁금한 내 마음

 

 

 

내 마음을 흔들던 날

이해인

 

바람 부는 소리가 하루 종일 내 마음을 흔들던날.

코스모스와 국화가 없으면 가을은 얼마나 쓸쓸할까.

이 가을에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길들여야지.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한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에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실수나 잘못을,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세심하게

읽어낼 수 있는 지혜를 지녀야겠다.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이해인

 

1

하늘이 맑으니

바람도 맑고

내 마음도 맑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으로 잘 익은

그대의 목소리가

노래로 펼쳐지고

들꽃으로 피어나는 가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물들어

떨어질 때마다

그대를 향한

나의 그리움도

한 잎 두 잎

익어서 떨어집니다

 

 

2

사랑하는 이여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어서 조용히

웃으며 걸어오십시오

 

낙엽 빛깔 닮은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우리, 사랑의 첫 마음을

향기롭게 피워 올려요

쓴맛도 달게 변한

오랜 사랑을 자축해요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힘들고 고달팠어도

함께 고마워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조금은 불안해도

새롭게 기뻐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 없이 서늘한 가을바람

가을하늘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해요

 

 

 

내 마음의 방

이해인

 

혼자 쓰는 방안에서의 극히 단순한 '살림살이'조차도

바쁜 것을 핑계로 돌보지 않고 소홀히 하면 이내 지저분하게 되곤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나의 방을 치우고 정리하는 일 못지않게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방을 깨끗이 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내 안에 가득찬 미움과 불평과 오만의 먼지, 분노와 이기심과 질투의 쓰레기들을

쓸어내고 그 자리에 사랑과 기쁨과 겸손, 양보와 인내와 관용을 심어야겠다.

내 방 벽 위에 새로운 마음으로 새 달력을 걸듯이 내 마음의 벽 위에도

'기쁨'이란 달력을 걸어놓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

 

 

 

내 마음의 사계절

이해인

꽃을 만나기 전

새 소리 먼저 들려오는 봄

봄이 오면 나도

 

삶을 새롭게

노래하는 새가 되렵니다.

얼음 덮인 침묵 속에 겨울을 견뎌

 

더욱 맑고 투명해진

나의 사랑을 안고

봄과 같은 가벼움으로

당신께 가는 이 마음 받아 주십시오,

 

해아래 서 있으면

단숨에 불길로 타버릴 것 같은

여름이 오면 나도 불꽃이 되렵니다.

 

슬픔과 절망 속에

잃어버린 꿈 식어버린 열정

밖으로 불러내어 땀을 흘리다 보면

 

삶은 곧 축복이 될 테지요

웃음이 폭포로 쏟아지는

기쁨을 안고 여름과 같은 뜨거움으로

 

당신께 가는

이 마음 받아주십시오

푸른 하늘도 살며시 내려와

 

바람 소리에

가슴을 여는 가을이

오면 나도 바람이 되렵니다.

 

동서남북 세상 곳곳

여기저기 달려가서

생명을 불어넣는 바람

 

바람에 잘 익은 기도를 안고

가을 같은 서늘함으로

당신께 가는 이 마음 받아주십시오

 

춥고 힘들어도

하얀 눈을 기다리는 겨울

겨울이 오면 나도 눈꽃이 되렵니다.

 

상처받아 어둠 속에

숨은 이들의 죄를 뉘우치며

눈물로 엎드린 이들 하얗게 덮어주는

 

위로의 눈꽃

순결함이 빚어낸 지혜를

안고서 겨울 같은 눈부심으로

당신께 가는 이 마음 받아주십시오

 

 

 

‘내 마음이 메마를 때면’ 중에서

이해인

 

내 마음이 메마를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메마르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메마르고 차가운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불안 할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불안하고 답답한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외로울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버리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외롭고 허전한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불평이 쌓일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불만스럽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나에게 쌓이는 불평과 불만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없을 때는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내 기쁨을 빼앗아 가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나에게 기쁨과 평화가 없는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서 희망이 사라질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낙심시키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일들이

내 마음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오늘

 

나는 내 마음 밭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씨앗 하나를 떨어뜨려 봅니다.

 

 

 

내 안에서 크는 산

이해인

 

좋아하면 할수록

산은 조금씩 더

내 안에서 크고 있다

 

엄마 한번 불러 보고

하느님 한번 불러 보고

 

친구의 이름도 더러 부르면서

산에 오르는 날이 많아질수록

 

나는 조금씩

산을 닮아 가는 것일까?

 

하늘과 바다를 가까이 두고

산처럼 높이

솟아오르고 싶은 걸 보면

 

산처럼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그냥 마음이 넉넉하고

늘 기쁜 걸 보면

 

 

 

내 안에 흐르는 시

이해인

 

1

내 안에 흐르는

피와 물처럼

보이지 않게 감추어 둔

생명의 말들

 

어느 날

시(詩)가 되어 쏟아지면

밖으로 쏟아진 만큼

나는 아프고

이로 인해 후유증이 심해도

나는 늘 행복하고

 

 

2

내 마음의 바다 위에

해초(海草)처럼 떠 다니는

푸른 시상(詩想)들

 

힘껏 건져 올리고 나면

이미 퇴색하는 그 빛깔

 

끝내

햇볕을 보지 못하고

남아 있는 언어들이

하도 많아서

 

나는

가난하게 살아도

항상 넉넉하구나

 

 

 

내일

이해인

 

부르지 않아도

이미

와 있는 너

 

이승의 어느 끝엘 가면

네 모습

안 보일까

 

물 같은 그리움을

아직은 우리

아껴 써야 하리

 

내가 바람이면

끝도 없는 파도로

밀리는 너

 

 

 

내 혼에 불을 놓아

이해인

 

언제쯤 당신 앞에 꽃으로 피겠습니까.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 노을빛 바람이여,

봉오리로 맺혀 있던 갑갑한 이 아픔이 소리없이 터지도록

그 타는 눈길과 숨결을 주십시오.

기다림에 초조한 내 비밀스런 가슴을 열어놓고 싶습니다.

나의 가느다란 꽃술의 가느다란 슬픔을 이해하는

은총의 바람이여,

당신 앞에 "네"라고 대답하는 나의 목소리는

언제나 떨리는 3월입니다.

고요히 내 혼에 불을 놓아 꽃으로 피워내는

뜨거운 바람이여.

 

 

 

이해인

 

내 얕은 마음을

깊게 해주고

내 좁은 마음을

넓게 해주는

 

숲속에 가면

한 그루 나무로 걸어오고

바다에 가면

한 점 섬으로 떠서

내게로 살아오는

 

늘 말이 없어도

말을 건네오는

내 오래된 친구야

멀리 있어도 그립고

가까이 있어도 그리운

친구야

 

 

 

너에게 가겠다

이해인

 

오늘도

한줄기

노래가 되어

너에게 가겠다

 

바람 속에 떨면서도

꽃은 피어나듯이

 

사랑이 낳아준

눈물 속에

하도 잘 익어서

별로 뜨는

나의 시간들

 

침묵할수록

맑아지는 노래를

너는 듣게 되겠지

 

무게를 견디지 못한

그리움이 흰 모래로

부서지는데

 

멈출 수 없는

하나의 노래로

나는 오늘도

너에게 달려가겠다

 

 

 

너와 나는

이해인

 

돌아도 끝없는

둥근 세상

 

너와 나는

밤낮을 같이하는

두 개의 시계바늘

 

네가 길면

나는 짧고

네가 짧으면

나는 길고

 

사랑으로 못박히면

돌이킬 수 없네

 

서로를 받쳐 주는 원 안에

빛을 향해 눈뜨는

숙명의 반려

 

한순간도

쉴 틈이 없는

너와 나는

 

영원을 똑딱이는

두 개의 시계바늘

 

 

 

너의 집은 어디니

이해인

 

"너의 집은 어디니?"

"넌 행복하니?"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너와 눈이 마주치면

나는 늘 이렇게 물었지

 

네가 나를 바라볼 때의

그 찰라적인 황홀함을

어떻게 설명할까

 

너를 잊을 수 없어

너를 닮은

모든 새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맑은 눈빛

가벼운 나래짓으로

나를 부끄럽게 만든 너

 

항상

네 노래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자주 숨어 있는 너를

그리워하며

말 안 해도 행복하다

 

 

 

누가 나를 위해

이해인

 

누가 나를 위해

조용하고도 뜨겁게

기도를 하나보다

오래 메마르던

시의 샘에

오늘은 물이 고이는 걸 보면

 

누군가 나를 위해

먼 데서도 가까이

사랑의 기(氣)를 넣어주나보다

힘들었던 일도 가벼워지고

힘들었던 사람에게도

먼저 미소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으로

내가 달라지는걸

내가 느끼는 걸 보면

 

 

 

누구라도 문구점

이해인

 

나는 가끔 상상 속의 문구점 주인이

될 때가 있습니다

가게 이름은 누구라도 들어와서

원하는 물품들뿐 아니라

기쁨과 희망과 사랑도 담아가는

'누구라도 문구점'이라 지으면 어떨까요?

덮어놓고 새것만 선호하지 말고

작은 것이라도 자기가 이미 사용하는

물품들과 끝까지 길들이고 정들이며

좋은 친구가 되는 아름다움을

키워야 한다고 일러주겠습니다

꼭 사야할 물건이 없을 때라도

평소에 나눈 정 때문에 길을 가다가도

잠시 들렀다 갈 수 있는

평범하지만 삶의 멋을 아는

성실한 단골손님들을

많이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누군가 내 안에서

이해인

 

누군가 내 안에서

기침을 하고 있다

 

겨울나무처럼 쓸쓸하고

정직한 한 사람이 서 있다

 

그는 목 쉰 채로

나를 부르지만

 

나는 선뜻 대답을 못해

하늘만 보는 막막함이여

 

내가 그를 외롭게 한 것일까

그가 나를 아프게 한 것일까

 

겸허한 그 사람은

내 안에서 기침을 계속하고

 

나는 더욱 할 말이

없어지는 막막함이여

 

 

 

눈꽃 노래

이해인

 

1

산과 들에

밤새 흰 눈이 많이 쌓이고

내 마음엔

시를 닮은 생각들이 많이 쌓이고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걸으니

세상 사람 모두가

흰 옷을 입은 눈사람으로

나에게 걸어오네

 

순간마다

마음이 순결해지는 눈나라에선

미운 사람 아무도 없고

용서 못할 사람 아무도 없네

 

햇빛에 녹아 사라질 때까진

너도 나도

그냥 웃으면 되지

 

 

2

포근하고

순결하다

 

수없이 잘못한

인간의 죄를

용서로 덮는

하얀 눈

송이송이

끝도 없이 떨어지네

 

울다가 웃다가

꽃으로 기도로

내리는 눈

 

행복한 사람 되라고

고요히 고요히

함박눈으로 떨어지는

하느님의 하얀 용서

 

 

3

산과 들에

밤새 흰 눈이 많이 쌓이고

내 마음엔

시를 닮은 생각들이 많이 쌓이고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걸으니

세상 사람 모두가

흰 옷을 입은 눈사람으로

나에게 걸어오네

 

순간마다

마음이 순결해지는 눈나라에선

미운 사람 아무도 없고

용서 못할 사람 아무도 없네

 

햇빛에 녹아 사라질 때까진

너도 나도

그냥 웃으면 되지

 

 

 

눈꽃단상

이해인

 

1.

차갑고도 따스하게

송이송이 시(詩)가 되어 내리는 눈

눈나라의 흰 평화는 눈이 부셔라

 

털어내면 그뿐

다신 달라붙지 않는

깨끗한 자유로움

 

가볍게 쌓여서

조용히 이루어내는

무게와 깊이

 

하얀 고집을 꺽고

끝내는 녹아버릴 줄도 아는

온유함이여

 

나도 그런 사랑을 해야겠네

그대가 하얀 눈사람으로

나를 기다리는 눈나라에서

하얗게 피어날 줄밖에 모르는

눈꽃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순결한 사랑을 해야겠네

 

 

2.

평생을 오들오들

떨기만 해서 가여웠던

해 묵은 그리움도

포근히 눈밭에 눕혀놓고

하늘을 보고 싶네

 

어느날 내가

지상의 모든 것과 작별하는 날도

눈이 내리면 좋으리

 

하얀 눈 속에 길게 누워

오래도록 사랑했던

신(神)과 이웃을 위해

이기심의 짠 맛은 다 빠진

맑고 투명한 물이 되어 흐를까

 

녹지 않는 꿈들일랑 얼음으로 남기고

누워서도 잠못드는

하얀 침묵으로 깨어 있을까

 

 

3.

첫눈 위에

첫 그리움으로

내가 써보는 네 이름

 

맑고 순한 눈빛의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서 기침하며

나를 내려다본다

 

자꾸 쌓이는 눈 속에

네 이름은 고이 묻히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무수히 피어나는 눈꽃 속에

 

나 혼자 감당 못할

사랑의 말들은

사랑의 말들은

내 가슴 속으로 녹아흐르고

나는 그대로

하얀 눈물이 되려는데

 

누구에게도 말 못 할

한 방울의 피와 같은 아픔도

눈밭에 다 쏟아놓고 가라

 

부리 고운 저 분홍 가슴의 새는

자꾸 나를 재촉하고···.

 

 

 

눈꽃 아가

이해인

 

1

차갑고도 따스하게

송이송이 시가 되어 내리는 눈

눈나라의 흰 평화는 눈이 부셔라

 

털어내면 그뿐

다신 달라붙지 않는

깨끗한 자유로움

 

가볍게 쌓여서

조용히 이루어내는

무게와 깊이

 

하얀 고집을 꺾고

끝내는 녹아버릴 줄도 아는

온유함이여

 

나도 그런 사랑을 해야겠네

그대가 하얀 눈사람으로

나를 기다리는 눈나라에서

 

하얗게 피어난 줄밖에 모르는

눈꽃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순결한 사랑을 해야겠네

 

 

2

평생을 오들오들

떨기만 해서 가여웠던

해묵은 그리움도

포근히 눈밭에 눕혀놓고

하늘을 보고 싶네

 

어느 날 내가

지상의 모든 것과 작별하는 날도

눈이 내리면 좋으리

 

하얀 눈 속에 길게 누워

오래도록 사랑했던

신과 이웃을 위해

이기심의 짠맛은 다 빠진

맑고 투명한 물이 되어 흐를까

 

녹지 않는 꿈들일랑 얼음으로 남기고

누워서도 잠 못 드는

하얀 침묵으로 깨어 있을까

 

 

3

첫눈 위에

첫 그리움으로

내가 써보는 네 이름

 

맑고 순한 눈빛의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서 기침하며

나를 내려다본다

 

자꾸 쌓이는 눈 속에

네 이름은 고이 묻히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무수히 피어나는 눈꽃 속에

 

나 혼자 감당 못할

사랑의 말들은

내 가슴속으로 녹아 흐르고

나는 그대로

하얀 눈물이 되려는데

 

누구에게도 말 못할

한 방울의 피와 같은 아픔도

눈밭에 다 쏟아놓고 가라

 

부리 고운 저 분홍 가슴의 새는

자꾸 나를 재촉하고.

 

 

 

눈 내리는 날

이해인

 

눈 내리는 겨울 아침

가슴에도 희게 피는

설레임의 눈꽃

 

오래 머물지 못해도

아름다운 눈처럼

오늘을 살고 싶네

 

차갑게 부드럽게

스러지는 아픔 또한

노래하려네

 

이제껏 내가 받은

은총의 분량만큼

소리없이 소리없이 쏟아지는 눈

눈처럼 사랑하려네

 

신(神)의 눈부신 설원에서

나는 하얀 기쁨 뒤집어쓴

하얀 눈사람이네

 

 

 

 

눈 내리는 바닷가로

이해인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가장 순결한 마음으로

부르고 싶으면

눈 내리는 바닷가로 오십시오

 

가슴에 깊이 묻어둔

어떤 슬픔 하나

아직도 소리 내어

울지 못했으면

눈 내리는 바닷가로 오십시오

 

차가운 눈을 맞고

바다는 더욱 고요하고

따뜻해졌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해서는

하얀 웃음을

죽은 이들을 위해서는

하얀 눈물을 피우며

송이송이

바다에서 꽃이 되는 눈

 

어느 날 문득

흰옷 입은 천사의

노래를 듣고 싶거든

눈 내리는 바닷가로 오십시오

 

 

 

눈물

이해인

 

새로 돋아난

내 사랑의 풀숲에

맺히는 눈물

 

나를 속일 수 없는

한 다발의

정직한 꽃

 

당신을 부르는 목소리처럼

간절한 빛깔로

기쁠 때 슬플 때 피네

 

사무치도록 아파 와도

유순히 녹아 내리는

흰 꽃의 향기

 

눈물은 그대로

기도가 되네

 

뼛속으로 흐르는

음악이 되네

 

 

 

눈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니

이해인

 

너무 기쁠 때에도

너무 슬플 때에도

왜 똑같이 눈물이 날까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가

호수처럼 고여오기도 하고

폭포처럼 쏟아지기도 하는

눈물

 

차가운 나를 따스하게 만들고

경직된 나를 부드럽게 만드는

고마운 눈물

 

눈물은 묘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

내 안에도 많은 눈물이 숨어 있음을

오늘 다시 알게 되어 기쁘단다

 

 

 

눈물의 힘

이해인

 

내가 세상과 영원히

작별하는 꿈을 꾸고

 

울다가 잠이 깬 아침

눈은 퉁퉁 붓고 몸은 무거운데

 

눈물이 씻어준 마음과 영혼은

맑고 평화롭고 가볍기만 하네

 

창밖에서 지저귀던 새들이 나에게

노래로 노래로 말을 거는 아침

 

미리 생각하는 이별은 오늘의 길을

더 열심히 가게 한다고

 

눈물은 약하지 않는 힘으로

나를 키운다고 힘이 있다고

 

 

 

능소화 연가

이해인

 

이렇게

바람 많이 부는 날은

당신이 보고 싶어

내 마음이 흔들립니다

 

옆에 있는 나무들에게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지를 뻗은 그리움이

자꾸자꾸 올라갑니다

 

저를 다스릴 힘도

당신이 주실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주는

찬미의 말보다

침묵 속에도 불타는

당신의 그 눈길 하나가

나에겐 기도입니다

전 생애를 건 사랑입니다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이해인

 

"하늘에도

연못이 있네"

소리치다

깨어난 아침

 

창문을 열고

다시 올려다본 하늘

꿈에 본 하늘이

하도 반가워

 

나는 그만

그 하늘에 빠지고 말았네

 

내 몸에 내 혼에

푸른 물이 깊이 들어

이제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다리

이해인

 

이미 건너간 사람은

건너지 못한 이의 슬픔쯤

이내 잊어버리겠지

 

어차피 건너야 할 것이기에

저마다 바쁜 걸음

뛰고 있는 것일까

 

살아가자면 언제이고

차례가 온다

 

따뜻한 염원의 강(江)은

넌지시 일러주었네

 

어둔 밤 길게 누워

별을 헤다가

 

문득 생각난 듯

먼 강기슭의 나를 향해

큰 기침 하는 다리

 

고단했던 하루를 펴서

다림질한다

 

보채는 순례객을 잠재우는

꿈의 다리 저편엔

 

나를 기다리는

너의

깊은 그림자가 누워 있다

 

 

 

 

다시 겨울 아침에

이해인 

 

몸 마음

많이 아픈 사람들이

나에게 쏟아놓고 간 눈물이

 

내 안에 들어와

보석이 되느라고

밤새 뒤척이는

괴로운 신음소리

 

내가 듣고

내가 놀라

잠들지 못하네

 

힘들게 일어나

창문을 열면

 

나의 기침소리

알아듣는

작은 새 한 마리

나를 반기고

 

어떻게 살까

묻지 않아도

 

오늘은 희망이라고

깃을 치는 아침 인사에

 

나는 웃으며

하늘을 보네

 

 

 

다시 바다에서

이해인

 

열여섯 살에 처음으로

환희의 눈물 속에

내가 만났던 바다

 

짜디짠 소금물로

나의 부패를 막고

내가 잠든 밤에도

파도로 밀려와

작고 좁은 내 영혼의 그릇을

어머니로 채워주던 바다

 

침묵으로 출렁이는

그 속 깊은 말

수평선으로 이어지는 기도를

오늘도 다시 듣네

 

낮게 누워서도

높은 하늘 가득 담아

하늘의 편지를 읽어주며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내게 영원을 약속하는

푸른 사제 푸른 시인을

나는 죽어서도

잊을 수 없네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

이해인

 

첫눈, 첫사랑, 첫걸음

첫약속, 첫여행, 첫무대

처음의 것은

늘 신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순결한 설레임의 기쁨이

숨어 있습니다

 

새해 첫 날

첫기도가 아름답듯이

우리의 모든 아침은

초인종을 누르며

새로이 찾아오는 고운 첫 손님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의

나팔꽃 같은 얼굴에도

사랑의 무거운 책임을 지고

현관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기침소리에도

가족들의 신발을 가지런히 하는

어머니의 겸허한 이마에도

아침은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새 아침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밤새 괴로움의 눈물 흘렸던

기다림의 그 순간들도

축복해주십시오. 주님

 

'듣는 것은 씨 뿌리는 것

실천하는 것은 열매 맺는 것' 이라는

성 아오스딩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가 너무 많이 들어서

겉돌기만 했던 좋은 말들

이제는 삶속에 뿌리내리고 열매 맺는

은총의 한해가 되게 하십시오

 

사랑과 용서와 기도의 일을

조금씩 미루는 동안

세월은 저만치 비켜가고

어느새 죽음이 성큼 다가옴을

항시 기억하게 하십시오

 

게으름과 타성의 늪에 빠질 때마다

한없이 뜨겁고 순수했던

우리의 첫열정을 새롭히며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

다시 살게 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하는 일

정을 나누는 일에도

정성이 부족하여

외로움의 병을 앓고 있는 우리

 

가까운 가족끼리도 낯설게 느껴질 만큼

바쁘게 쫓기며 살아가는 우리

잘못해서 부끄러운 일 많더라도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밝은 태양속에 바로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길 위의 푸른 신호등처럼

희망이 우리를 손짓하고

성당의 종소리처럼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새해 아침

 

아침의 사랑으로 먼 길을 가야 할 우리 모두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

다시 살게 하십시오

 

 

 

다시 태어난다면

이해인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엄청난 당신보다는

덜 힘든 한 사람을 선택하겠습니다

 

나의 뜻과 어긋나는 당신이기에

나는 놀라서 도망치다

신들린 바람

 

내가 만약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사랑이신 당신을 모르고 싶은

죄스런 바램을 어찌해야 합니까

 

주문(呪文) 외며 달아나다

내가 쓰러질 곳 또한

당신 품 안인 것을

 

 

 

단추를 달 듯

이해인

 

떨어진 단추를

제자리에 달고 있는

나의 손등 위에

배시시 웃고 있는 고운 햇살

 

오늘이라는 새 옷 위에

나는 어떤 모양의 단추를 달까

 

산다는 일은

끊임없이 새 옷을 갈아 입어도

떨어진 단추를 제자리에 달듯

평범한 일들의 연속이지

 

탄탄한 실을 바늘에 꿰어

하나의 단추를 달듯

제자리를 찾으며 살아야겠네

 

보는 이 없어도

함부로 살아 버릴 수 없는

나의 삶을 확인하며

단추를 다는 이 시간

 

그리 낯설던 행복이

가까이 웃고 있네

 

 

 

단풍나무 아래서

이해인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다

문득 그가 보고 싶을 적엔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마음속에 가득 찬 말들이

잘 표현되지 않아 안타까울 때도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세상과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저절로 기도가 되는

 

단풍나무 아래서

하늘을 보면 행복합니다

 

별을 닮은 단풍잎들이

황홀한 웃음에 취해

​나의 남은 세월 모두가

사랑으로 물드는 기쁨이여!

 

 

 

달맞이꽃

이해인

 

당신은 아시지요?

달님

 

당신의 밝은 빛

남김 없이 내 안에

스며들 수 있도록

이렇게 얇은 옷을 입었습니다

 

해질녘에야

조심스레 문을 여는

나의 길고 긴 침묵은

그대로 나의 노래인 것을,

달님

 

맑고 온유한

당신의 그 빛을 마시고 싶어

당신의 빛깔로 입었습니다

 

끝없이 차고 기우는 당신의 모습 따라

졌다가 다시 피는 나의 기다림을

당신은 아시지요?

달님

 

 

 

달빛 기도

이해인          

 

너도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 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 내

좀 더 환해지기를

모난 마음과 편견을 버리고

좀 더 둥글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려니

하늘보다 내 마음에

고운 달이 먼저 뜹니다

한가위 달을 마음에 걸어 두고

당신도 내내 행복하세요, 둥글게

 

 

 

달빛 인사

이해인

 

달을 닮은 사람들이

달 속에서 웃고 있네요

 

티없는 사랑으로

죄를 덮어주는

어머니 같은 달빛

 

잊을 것은 잊고

순하게 살아가라

조용히 재촉하는

언니 같은 달빛

 

슬픈 이들에겐

눈물 어린 위로를 보내는

친구 같은 달빛

 

하늘도

땅도

오늘은 온통

둥근 기도로 출렁이네요

 

환한 보름달을

환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지금껏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달빛 인사를 건네는

추석날 밤

 

그리움이 꽉 차서

자꾸 터질 것만 같네요

나도 달이 되네요

 

 

 

달을 닮아

이해인

 

박꽃에 스미는 달빛

달맞이꽃에 스미는 달빛

그대로

내 마음에 스며 드네

 

밤새

달빛 안고

잠을 자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달을 닮아

마음도 고요하고

부드러워지겠네

햇빛 또한

잘 받겠네

 

 

 

달팽이 노래

이해인

 

비 오는 날은

나를 설레게 해요

 

돌층계 위에서

꿈을 펼치다가

잎새에 묻은 빗방울도 핥으며

사는 게 즐거워요

 

동그란 집 속에

몸을 깊이 감추어도

마음은 닫지 않아요

 

언젠가는 풀기 위해

감아 두는 나의 꿈

 

넓은 세상도

사람들도

더욱 잘 보이는

비 오는 날

 

빗방울 끝에 맺히는

기도의 진주 한 알

 

미묘한 집 속에

숨어 살아도

늘 행복해요

 

 

 

당신도 꽃처럼

이해인 

 

아름다운 것들에

깊이 감동할 줄 알고

 

일상의 작은 것들에도

깊이 감사할 줄 알고

 

아픈 사람 슬픈 사람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 울 줄도 알고

 

그렇게 순하게 아름답게

흔들리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당신도 꽃처럼

아름답게 흔들려보세요.

 

 

 

당신만큼

이해인

 

당신만큼 나를 구속하는 이도 없고

당신만큼 나를 자유롭게 하는 이도 없습니다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이면서

당신과 함께라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만능가입니다

당신만큼 나를 어리석에 만든 이도 없고

당신만큼 나를 슬기롭게 하는 이도 없습니다

 

 

 

당신 앞에 나는

이해인

 

당신 앞에 나는 꼼짝도 할 수 없는 항아리에요.

비켜 설 땅도 없는 이 자리에서

당신만 생각하는 길고 긴 밤낮.

나는 처음부터 뚜껑 없는 몸이었어요.

햇빛을 담고, 바람을 담고, 구름을 담고,

아직도 남아 있는 비인 자리,

당신만이 채우실 자리.

당신 앞에 나는 늘 얼굴 없는 항아리,

기다림에 가슴이 크는 항아리에요.

 

 

 

당신에게

이해인

 

흠뻑

젖으실래요?

 

슬퍼도

울 줄 모르는 당신

기뻐도

웃을 줄 모르는 당신

 

오늘은

한 번

실컷 젖어보세요

젖어서 외쳐보세요

 

나는 젖어 있다

나는 살아 있다

 

진정 젖어서

살아 뛰는

당신의 힘찬 목소리를

나는

꼭 한번 듣고 싶거든요

 

 

 

당신을 위해 내가

이해인

 

캄캄한 밤 등불도 없이

창가에 앉았으면

 

시리도록 스며드는

여울물 소리

 

먼 산 안개 어린 별빛에

소롯이 꿈이 이울어

깊이 눈감고 합장하면

이밤사 더 밝게

타오르는 마음길

 

인고의 깊은 땅에

나를 묻어 당신을 위해 꽃피는 기쁨

 

어느 하늘 밑

지금쯤 누가 또 촛불 켜 노래 날릴까

 

차가운 밤 밀물소리

살포시 안개 속을 오시는 당신을 위해

 

남은 목숨

고이 빛이 되는 사랑이여

 

 

 

당신을 위해서임을 잊지 말아요

이해인

 

나는 늘 구름이 되어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지

"나의 집이 하늘인 것도

다 당신을 위해서임을

잊지 말아요

높이 떠도는 외로움도

어느 날 비 되어

당신께 가기 위해서임을

잊지 말아요

멀리 멀리 있어도

부르면 가까운 구름인 것을"

 

 

 

당신을 향해

이해인

 

간밤의 어수선한 꿈을 털고 일어나

찬물로 세수를 하면 눈이 뜨이는 아침,

나는 당신을 향해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으고 싶다.

내 좁은 방은 하늘이 되고,

내 무거운 육신은 날개를 달아,

멀리 떠나지 않고도 당신을 소유하는

새가 되는 연습을 한다.

한겨울 추위 속에 살아 있는 내가 깃을 치는 아침,

어둠을 먹고 크는 나의 기도 속에

보이지 않게 손을 내미는 당신.

 

 

 

당신의 숲속에서

이해인

 

1

당신의 숲속에서 나는

도토리만한 기쁨을 주우며

마음도 영글어 가는

한 마리의 신나는 다람쥐

 

때로는 동그란 기도의 알을 낳아

오래오래 가슴에 품어 두는

한 마리의 다정한 산새

 

당신의 숲속에서 나는

사유의 올을 풀어 내어

열심히 집을 짓는

한 마리의 고독한 거미

 

그리고 때로는

가장 조그만 은총의 빵부스러기도

놓치지 않고 거두어들이는

한 마리의 감사한 개미

 

 

2

어느 아침엔

한 편의 서정시로 살아오시더니

어느 밤에는

한 편의 서사시로 살아오시고

 

어느 봄에는

환상이 흐르는 추상화이시더니

어느 가을엔

은은한 빛의 동양화이시고

 

어느 여름엔

바다 빛 교향곡으로 오시더니

어느 겨울엔

하얀 눈빛의 가곡으로 오시고

 

끊임없는 언어와

끊임없는 빛깔과

끊임없는 소리로

 

당신이 살아오는

당신의 숲속에서 -

 

 

 

당신이 보고 싶은 날

이해인

 

요즘엔 당신이 더욱 보고 싶습니다

지척인 당신을 두고서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마음 한구석을 멍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운 마음에 견딜 수 없을 때면

이런 상상을 합니다

당신이 꿈이었으면

당신이 꿈이었으면

 

꿈속에 들어가서

당신을 만날 수 있을 텐데

하루종일 꿈 속에 있기 위해

영원히 잠 속에 빠져 들수도 있을 텐데

 

​​당신은 지금 현실 속에 있습니다

냉혹한 현실은

내 마음에 화살이 되고

저는 과녁이 됩니다

 

또 한번의 그리움의 고난이 끝나면

남겨지는 내 삶의 체취들

눈물들 그리움들

그리고 사무치는 고독들

 

​조용히 생각하며

내 자신을 달랩니다

당신이 꿈이었으면.

 

 

 

당신이 울고 있던 날

이해인

 

오늘, 당신은 몹시 울고 있군요

나와 모든 이를 위해서 통곡하고 있군요

그래요

실컷 쏟아 버리세요

눈물비를 쏟아 버리세요

세차게 아주 세차게

당신이 울고 있는 날은

나도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마음으로 함께 울고 있어요

 

 

 

대청소

이해인

 

푸른 앞치마를 입고 한바탕

유리 대청소를 했다

우리 수녀원처럼 유리 많은

유리집이 또 있을까

살아서 유리를 닦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유리처럼 티없이 투명하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맑게 닦을수록 맑게 열리는

마음의 창

하늘이 내려앉은 유리창

열심히 창을 닦는 이들의 얼굴에도

화안한 희망의 창이 열리고 있었다

 

 

 

도라지꽃

이해인

 

엷게 받쳐 입은 보라빛 고운 적삼

찬 이슬 머금은 수줍은 몸짓

사랑의 순한 눈길 안으로 모아

가만히 떠 올린 동그란 미소.

 

눈물 고여오는 세월일지라도

너처럼 유순히 기도하며 살고 싶다.

어느 먼 나라에서 기별도 없이 왔니.

내 무덤가에 언젠가 피어 잔잔한 송가를 바쳐 주겠니

 

 

 

동백꽃이 질 때

이해인

 

비에 젖은 동백꽃이

바다를 안고

종일토록 토해내는

처절한 울음소리

들어보셨어요?

 

피 흘려도

사랑은 찬란한 것이라고

순간마다 외치며 꽃을 피워냈듯이

이제는 온몸으로 노래하며

떨어지는 꽃잎들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거부하고

편히 살고 싶은 나의 생각들

쌓이고 쌓이면

죄가 될 것 같아서

 

마침내 여기

섬에 이르러 행복하네요

동백꽃 지고 나면

내가 그대로

붉게 타오르는 꽃이 되려는

남쪽의 동백섬에서

 

 

 

둘이서 만드는 노래

이해인

 

사랑은

비밀 번호

아무 번호나 누르면

안 됩니다

 

그와 내가 하나 되는

깊고

넓고

높은

특별한 암호 속에

길이 열린답니다

 

사랑은

보물섬

 

날마다 새롭게

숨겨진 보물 찾느라

날마다 새롭게

시간이 모자랍니다

 

사랑은

둘이서 만드는 노래

 

듣는 이 없어도

지칠 줄 모르고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함께 부르는 노래는

끝이 없습니다

 

 

 

듣게 하소서

이해인

 

주여 나로 하여금

이웃의 말과 행동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내 하루의 작은 여정에서

내가 만나는 이의 말과 행동을

건성으로 들어 치우거나

귀찮아하는 표정과 몸짓으로

가로막는 일이 없게 하소서

 

이웃을 잘 듣는 것이

곧 사랑하는 길임을

내가 성숙하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이기심의 포로가 되어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적당히 듣고

돌아서면 이내 잊어버리는 무심함에서

나를 구해 주소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못 들은 척 귀막아 버리고

그러면서도 "시간이 없으니까"

"잘 몰랐으니까" 하며 핑계를 둘러 대는

적당한 편리주의, 얄미운 합리주의를

견책하여 주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주어진 상황과 사건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앉아야 할 자리에 앉고

서야 할 자리에 서고

울어야 할 때에 울고

웃어야 할 때에 웃을 수 있는

민감하게 듣고 순응하는

삶의 지혜를 깨치게 하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자신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나를 잘 듣는 사람만이

남을 잘 들을 수 있음을

당신을 잘 들을 수 있음을

거듭 깨치게 하소서

 

선한 것을 지향하는 마음의 소리를

잘 듣기 위해

침묵과 고독 속에

자신을 조용히 숨길 줄도 알게 하소서

 

나는 두 귀를 가졌지만

형편없는 귀머거리임을 몰랐습니다

사람과 사물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말만 많이 했음을 용서하소서

 

들으려는 노력도 아니하면서

당신과 이웃과 세상에 대해

멋대로 의심하고 불평했음을

지금은 뉘우칩니다

 

매일매일의 내 작은 여정에서

내 생애의 큰 여정에서

잘 듣고 잘 말하는 이가 되도록

밝고 큰 귀와 입을 갖고 싶습니다

 

말소리만 커지는 현대의 소음과

언어의 공해 속에서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겸손히 듣고 또 듣는

들어서 지혜를 깨치는

삶의 구도자 되게 하소서

 

 

 

듣기

이해인

 

귀로 듣고 몸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고

전인적인 들음만이 사랑입니다.

 

모든 불행은 듣지 않음에서 시작됨을

모르지 않으면서 듣지 않음에서 시작됨을.

 

잘 듣지 않고 말만 많이 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네요.

아침에 일어나면 나에게 외침니다.

들어라! 들어라! 들어라!.

 

하루의 문을 닫는 한밤중에 나에게 외칩니다.

들었니? 들었니? 들었니?

 

 

 

들국화

이해인

 

꿈을 잃고 숨져 간

어느 소녀의 넋이

다시 피어난 것일까

흙냄새 풍겨 오는

외로운 들길에

웃음 잃고 피어난

연보랏빛 꽃

하늘만 믿고 사는 푸른 마음속에

바람이 실어다 주는

꿈과 같은 얘기

멀고 먼 하늘 나라 얘기

구름 따라 날던

작은 새 한 마리 찾아 주면

타오르는 마음으로 노래를 엮어

사랑의 기쁨에 젖어 보는

자꾸

하늘을 닮고 싶은 꽃

오늘은

어느 누구의 새하얀 마음을 울려주었나

또다시 바람이 일면

조그만 소망에

스스로 몸부림치는 꽃

 

 

 

들음의 길 위에서

이해인

 

어제보다는

좀 더 잘 들으라고

저희에게 또 한 번

새날의 창문을

열어주시는 주님

 

자신의 안뜰을

고요히 들여다보기보다는

항상 바깥일에 바삐 쫓기며

많은 말을 하고 매일을 살아가는 모습

듣는 일에는 정성이 부족한 채

'대충' '건성' ' 빨리' 해치우려는

저희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이들끼리

정을 나누는 자리에서도

상대방의 말을 주위 깊게 듣기보다는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자기 말만 되풀이하느라

참된 대화가 되지 못하고

독백으로 머무를 때도 많습니다

 

- 우린 참 들을 줄 몰라

- 왜 이리 참을성이 없지?

- 같은 말을 쓰면서도 통교가 안 되다니

 

잘 듣지 못함을 반성하고 나서도

돌아서면 이내 무디어지는

저희의 어리석음과 습관적인 잘못은

언제야 끝이 날까요

 

정확히 듣지 못해

약속이 어긋나고

감정과 편견에 치우쳐

오해가 깊어갈 때마다

사람들은 저마다 쓸쓸함을 삼키는

외딴 섬으로 서게 됩니다

 

잘 들어야만 사랑이 이루어짐을

들음의 삶으로써 보여주신 주님

오늘도 아침의 나팔꽃처럼

활짝 열린 가슴과 귀로

저희가 진정

주님의 말씀을 잘 듣게 하여 주소서

언어로 몸짓으로 마음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이웃의 언어에

민감히 귀기울일 줄 알게 하소서

 

말하기 전에

듣기를 먼저 배우는

겸손한 어린이의 모습으로

현재의 순간이 마지막인 듯이

성실을 다하는 수행자의 모습으로

들음의 여정을 다시 시작하는

들음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잘 들어서

지혜 더욱 밝아지고

잘 들어서

사랑 또한 깊어지는 복된 사람

평범하지만 들꽃 향기 풍기는

아름다운 들음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등꽃 아래서

이해인

 

차마

하늘을 바라볼 수 없는 것일까

수줍게 늘어뜨린

연보라빛 꽃타래

 

혼자서 등꽃 아래 서면

누군가를 위해

꽃등을 밝히고 싶은 마음

 

나도 이젠

더 아래로

내려가야 하리

 

세월과 함께

뚝뚝 떨어지는 추억의 꽃잎을 모아

또 하나의 꽃을 피우는 마음으로

노래를 불러야 하리

 

때가 되면 아낌없이

보랏빛으로 보랏빛으로

무너져 내리는 등꽃의 겸허함을

배워야 하리

 

 

 

따뜻한 마음

이해인

 

기뻐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와 함께 슬퍼할 수 있는

부드럽고 자비로운 마음

 

다른 이의 아픔을 값싼 동정이 아니라

진정 나의 것으로 느끼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연민의 마음을 지니고 싶습니다

 

남에 대한 사소한 배려를 잊지 않으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따뜻한 마음

 

주변에 우울함보다는

기쁨을 퍼뜨리는 밝은 마음

 

아무리 속상해도 모진 말로

상처를 주지 않는

온유한 마음으로 하루하루가

평화의 선물이 되게 해 주십시오

 

 

 

따스한 웃음을

이해인

 

나의 슬픔에만 깊이 빠져

이웃을 향한

한 가닥의 웃음에도 인색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주님, 당신이 선물로 주신

영원한 생명을

나의 어리석음으로 놓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모든 일상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굴복이 아니라 극복의 태도로

임하게 해주소서

 

살아 있을 때 이웃에게

한 번이라도 더

따스한 격려의 말과

웃음을 주게 하소서

 

 

 

마늘밭에서

이해인

 

하늘을 위에 두고

바다를 곁에 두고

 

수도원의 마늘밭은

고요하다

가지런하다

 

마늘이 익어가는

엄마 같은 흙 속에 얼굴을 묻고

실컷 소리 내어 울고 싶을 때가 있네

 

슬프고 억울한 일 당해도

아무도 대신

울어줄 수 없는 이를 위해

지금도 잠 못 들고 괴로워하는 이를 위해

작은 죄를 뉘우칠 줄 모르는

나 자신을 위하여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을 때가 있네

 

아리디 아린 마늘 한 쪽 먹으며

실컷 울고 나면 행복할 거라고

바람에게 가만히 이야기하는데

 

시퍼렇게 날이 선 마늘 줄기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냉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네

 

 

 

마음에 대하여

이해인

 

마음 찾기

 

1

숨어 있기 싫어서인가?

가끔은 내 마음도

집 밖으로 외출을 한다

 

그가 빨리 돌아오지 않아

내내 불편하고

잠이 오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고 괴로웠다

 

 

2

내내 밖으로 서성이다

오랜만에

제자리로 돌아온

마음이여 고맙다

 

네가 가출한 동안은

단순한 일도 손에 안 잡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울면서 기도해도

대답 없던 시간들

 

네가 돌아와

나의 삶은 다시

기쁨이 되었다

 

주인인 내가 너무 무관심해서

화가 났다구?

 

이젠 나도 잘할게

 

다시 만난 기념으로

아침엔 녹차 한잔

저녁엔 포도주 한잔할까?

 

 

건조주의보

 

'영남지방엔 건조주의보

산불 나지 않을까 각별히 조심'

 

신문의 기사를 보는 순간

내가 나에게 주는 말

 

'내 마음도 건조주의보

감동 없는 삶을 살지 않도록 유의'

 

그래서 늘

물이 그립다

 

물이 있어야

마음이 맑아지고

마음이 맑아져야

눈물도 흐르지

 

 

시간 쓰기

 

시간 없어 바쁠 땐

내내 시간 시간 노래하며

무작정 여유를 아쉬워하다

 

막상 시간이 많아지면

오히려 바쁠 때가 낫다고 한다

 

바쁠 적에 잠시 잠시

살뜰히 챙겨 쓰던

자투리 시간들이

더 그립다고 한다

 

 

잘못된 관계

 

한번 넘어져서 뼈들이

서로 어긋나니

정확히 맞추기가 힘이 들고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시간과 공이 많이 드네

 

사람과의 관계도 한번 어긋나면

다시 맞추기 꽤나 힘들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려면

시간과 정성을

아주 많이 들여야 하고

그러니 처음부터 잘해야 해

 

 

 

마음을 비우는 새

이해인​

 

차창 밖으로 산과 하늘이

언덕과 길들이 지나가듯이

 

우리의 삶도

지나가는 것임을,

 

길다란 기차는 연기를

뿜어대며 길게 말하지요.

 

행복과 사랑 근심과 걱정

미움과 분노 다 지나가는 것이니

 

마음을 비우라고

큰소리로 기적을 울립니다.

 

 

 

마음의 문

이해인

 

내 마음을 여는 순간 당신은 내게 와서

문이 되었습니다.

 

그 문 열고 들어가 오래 행복했습니다.

이젠 나도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문이

되고 싶었지만 걱정만 앞서니 걱정입니다.

 

살아갈 날이 그리 많지 않아 걱정

사랑의 분량은 많지 않아 걱정

 

마음 활짝 열어야 문이 되는데

오히려 닫고 있는 나를 보게 되는 걱정

 

하지만 오늘도 걱정의 틈은 좁히고

마음은 넓혀서 문이 되는 꿈을 꾸겠습니다.

 

 

 

마음의 선물

이해인

 

상대방에게 희망을 주는

칭찬과 격려 따스한 웃음

다른 이의 약점을 감싸주는 사랑과 인내

이웃의 잘못을 받아들이는 이해와 관용

힘없고 아픈 이들에 대한 참된 배려와 정성

 

한겨울 추위 속에

제 맛이 드는 김치처럼

우리의 사랑도 제 맛이 들게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해요

 

 

 

마음이 마음에게

이해인

 

내가 너무 커버려서

맑지 못한 것

밝지 못한 것

바르지 못한 것

 

누구보다

내 마음이

먼저 알고

나에게 충고하네요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다 욕심이에요

거룩한 소임에도

이기심을 버려야

순결해진답니다

 

마음은 보기보다

약하다구요?

작은 먼지에도

쉽게 상처를 받는다구요?

 

오래오래 눈을 맑게 지니려면

마음 단속부터 잘해야지요

 

작지만 옹졸하진 않게

평범하지만 우둔하진 않게

마음을 다스려야

맑은 삶이 된다고

마음이 마음에게 말하네요

 

 

 

마지막 기도

이해인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두고 갈 것도 없고

가져갈 것도 없는

가벼운 충만함이여

 

헛되고 헛된 욕심이

나를 다시 휘감기 전

어서 떠날 준비를 해야지

 

땅 밑으로 흐르는

한 방울의 물이기보다

하늘에 숨어 사는

한 송이의 흰구름이고 싶은

마지막 소망도 접어두리

 

숨이 멎어가는

마지막 고통 속에서도

눈을 감으면

희미한 빛 속에 길이 열리고

등불을 든 나의 사랑은

흰옷을 입고 마중 나오리라

 

어떻게 웃을까

고통 속에도 설레이는

나의 마지막 기도를

그이는 들으실까

 

 

 

만남의 길 위에서

이해인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제가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과의 만남 또한

아름다운 축복이며 의미 있는 선물로

이어지지 못했을 겁니다

 

진정 당신과의 만남으로

저의 삶은 새로운 노래로 피어오르며

이웃과의 만남이 피워내는 새로운 꽃들이

저의 정원에 가득함을 감사드립니다

 

만남의 길 위에서

가장 곁에 있는 저의 가족들을 사랑하고

멀리 있어도 마음으로 함께하는

벗과 친지들을 그리워하며

저의 편견과 불친절과 무관심으로

어느새 멀어져간 이웃들을

뉘우침의 눈물 속에 기억합니다

 

깊게 뿌리내리는 만남이든지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든지

모든 만남은 제 자신을

정직하게 비춰주는 거울이 되며

인생의 사계절을 가르쳐주는 지혜서입니다

 

사람들의 서로 다른 모습들만큼이나

다양하게 열려오는 만남의 길 위에서

사랑과 인내와 정성을 다하신 주님

나무랄 데 없는 의인뿐 아니라

가장 멸시받는 죄인들에게조차

성급한 판단과 처벌의 돌팔매질보다는

자비와 연민으로 다가가셨던 주님

 

당신의 그 모습을 생각하면

사랑하는 일에서도

늘 계산이 앞서고

까다롭게 따지려 드는

저의 옹졸함이 너무도 부끄럽습니다

 

습관적으로 남을 먼저 판단하고

늘상 이웃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이기적인 태도로

슬픔과 상처를 이웃에게 더 많이 주었으며

용서하는 일에는 굼뜨기 그지없었음을 용서하십시오

 

때로는 만남에서 오는 축복보다

작은 근심과 두려움을 더 많이 헤아리며

남을 의심하는 겁쟁이임을 용서하십시오

 

앞으로 더 멀리 가야 할 만남의 길 위에서

저의 비겁한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당신처럼 겸허하고 자유로운

기쁨의 순례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반갑고 기쁘게 다가오는 만남뿐 아니라

성가시고 부담스런 만남까지도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깊고 높은 지혜와 용기를 주십시오

 

저는 비록 완벽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좋은 사람으로

좋은 만남을 이루며 살고 싶습니다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맑게 흐르는

주님의 바다를 향해

저도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며

쉼 없이 흘러가며

작지만 아름다운 시냇물이 되고 싶습니다

 

 

 

말 말 말

이해인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맞고

언제나 책임있는 말을 갈고 닦게하소서

 

하나의 말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도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 있는

한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말과 글

이해인

 

글은 오래오래 종이에 남는 것이고

말은 그냥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 마디의 말 또한

듣는 이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간직된다

 

한 사람의 펜으로 씌어진 글은

그 사람 특유의 개성을 지닌 작품이 되듯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는 하나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노력으로

참으로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말의 작품을 빚을 일이다

 

 

 

말없이 사랑하십시오

이해인

 

말없이 사랑하십시오

내가 그렇게 했듯이

드러나지 않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이 깊고 참된 것일수록 말이 적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도움을 주고

드러나지 않게 선을 베푸십시오

그리고 침묵하십시오

변명하지 말고

행여 마음이 상하더라도 맞서지 말며

그대의 마음을 사랑으로

이웃에 대한 섬세한 사랑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사람들이 그대를 멀리할 때에도

도움을 거부할 때에도

오해를 받을 때에도

말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대 사랑이 무시당하여

마음이 슬플 때에도 말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대 주위에 기쁨을 뿌리며

행복을 심도록 마음을 쓰십시오

 

사람들의 말이나 태도가 그대를 괴롭히더라도

말없이 사랑하며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행여 그대의 마음에

원한이나 격한 분노와 판단이

끼어 들 틈을 주지 말고

 

언제나 이웃을 귀하게 여기며

묵묵히 사랑하도록 하십시오

 

 

 

말을 위한 기도

이해인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어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 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주여

내가 지닌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 있는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어지 않게 도와주시어

좀 더 겸허하고

좀 더 인내롭고

좀 더 분별 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른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노래처럼 즐거운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가게 하소서

아멘

 

 

 

말의 빛

이해인

 

​쓰면 쓸수록 정드는 오래된 말

닦을수록 빛을 내며 자라는

고운 우리말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억지 부리지 않아도

하늘에 절로 피는 노을 빛

 

나를 내어주려고

내가 타오르는 빛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언제나 부담없는

푸르른 소나무 빛

 

나를 키우려고

내가 싱그러워지는 빛

 

"용서하세요"라는 말은

부끄러워 스러지는

겸허한 반딧불 빛

 

나를 비우려고

내가 작아지는 빛

 

 

 

맑은 종소리에

이해인

 

맑은 종소리에

풀잎도 크는

수녀원 안뜰에서

생각하는 새

 

이슬 내린 잔디밭

남몰래 산책하다

고운 님 보고 싶어

애태우는 맘

 

찔레꽃 하얗게

울음 토하는

생각의 뒷산으로

가고 싶은 새

 

맑은 종소리에

나무도 크는

수녀원 언덕 위에

앉아 있는 새

 

시 한줄 읊고 싶어

눈을 감는다

 

아득한 하늘로

치솟고 싶어

명주올 꿈을 향처럼

피워 올린다

 

맑은 종소리에

마음이 크는

수녀원의 못가에서

깃을 접는 새

 

새벽마다

해와 함께

바다를 품는다

 

 

 

매화 앞에서

이해인

 

보이지 않기에 더욱 깊은 땅속 어둠

뿌리에서 줄기와 가지 꽃잎에 이르기까지

먼 길을 걸어온 어여뿐 봄이

마침내 여기 앉아 있네

 

뼛속 깊이 춥다고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하던

희디흰 봄 햇살도 꽃잎 속에 접혀있네

 

해마다 첫사랑의 애틋함으로

제일 먼저 매화끝에 피어나는 나의 봄

눈 속에 묻어두었던 이별의 슬픔도

문득 새가 되어 날아오르네

 

꽃나무 앞에 서면

갈 곳 없는 바람도 따스하여라

살아갈수록 겨울은 길고

봄이 짧더라도 열심히 살 거란다

 

그래, 알고 있어

편하게만 살 순 없지

매화도 내게 그렇게 말했단다

 

눈이 맑은 소꿉동무에게

오늘은 향기 나는 편지를 쓸까

매화는 기어이

보드라운 꽃술처럼 숨겨두려던

눈물 한 방울 내 가슴에 떨어뜨리네

 

 

 

머리를 빗듯

이해인

 

촘촘히 살이 박힌 빗으로 아침마다 머리를 빗듯

내 헝클어진 꿈들을 모두 일으켜 빗질하고 싶다.

허연 고뇌의 먼지도 말끔히 털어 내는 시간.

명주실처럼 탄탄하고 질긴 내 사랑의 올을

가지런히 빗겨 땋아놓고 싶다.

그러나 가늘게 날이 선 빗으로도 빗질할 수 없는 아픔,

빗겨도 말 안 듣는 아픔은 어떻게 해야 할까.

 

 

 

먼지가 정다운 것은

이해인

 

날마다 나도 모르게

먼지를 마시며 살고

 

날마다 일어나서

먼지를 쓸며사네.

 

어디서 오는지

분명치 않은 먼지와 먼지

 

하얀 민들레 솜털처럼,

먼지가 정다운 것은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이지

 

어느 날 나도 한 줌

가벼운 먼지로 남게 됨을

 

헤아려 볼 수

있기 때문이지

 

 

 

먼지를 쓸어 내고

이해인

 

먼지를 쓸어 내고

걸레질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내 마음도

깨끗해진다

 

더러움을 싫어하고

깨끗함을 좋아하는 마음이

초록빛 풀잎처럼

새로 돋아난다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청소를 할 때마다

식구들이 웃는다

나도 따라 웃으면

환해지는 우리 집

환해지는 이 세상

 

 

 

메밀꽃 미소

이해인

 

하얀 날개 춤을 춘다.

그대의 손에 앉아버린

미소 머문 메밀꽃밭

 

벼랑 끝에 매여 있는

그대의 사랑이

안온한 가슴으로

하얗게 안기웠다.

 

마주 앉은 파란 물결

염전 속에 미소 띄워

둘만의 사랑을

마주 보며 속삭인다.

 

 

 

몽당연필

이해인

 

아침마다 새로 맞는

나의 매일 매일도

한 자루의 새 연필과 같은 것

 

나는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고

열심히 깍아 써야 하겠다

 

나 역시

한 자루의 연필이 되어

자신을 깍아내는 겸손과

사랑의 서약을

더욱 새롭게 해야겠다

 

 

 

묘지에서

이해인

 

욕심을 다 벗어버린

하얀 뼈들이 누워 있는

이 침묵의 나라에 오면

쓸쓸하고 평화롭다

 

지워지지 않는 슬픔을

한 묶음의 들꽃으로 들고와

인사하는 이들에게

죽은 이들은 땅 속에서

어떤 기도로

응답하는 것일까

 

돌에 새겨진 많은 이름들

유족들이 새긴 이별의 말들

다시 읽어보며

나는 문득

누군가 꽃을 들고 찾아올

미래의 내 무덤을 생각해본다

그때 나는 비로소

하얗게 타버린

한 편의 시가 되어 누워 있을까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잊혀지는 슬픔에서조차

해방될 수 있는 가벼움으로

하얗게 삭아내릴까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내려오는 길

하늘엔 노을이 곱고

내 마음엔

이승의 슬픔을 넘어선

고요한 평화가

흰 구름으로 깔려 있다

 

 

 

무궁화

이해인

 

아픔의 꽃술 길게 물고

하늘 향해 섰는 무궁화여

 

우리의 한과 슬픔을 알고 있어서

우리 탓도 아니게 두 동강 나버린

삼팔선의 비극을 알고 있어서

차라리 입 다문 거지?

향기도 감춘 거지?

좋은 일이 있어도 헤프게 웃지 않는

슬기를 배운 거지?

 

오늘도 의연히 버티고 서서

마음으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헤아리는 꽃

 

붉은 가슴마다 태극기를 꽂으며

오늘도 자유를 노래하는

겨레의 꽃 무궁화여

 

 

 

무지개 빛깔의 새해 엽서

이해인

 

빨강 - 그 눈부신 열정의 빛깔로

새해에는

나의 가족, 친지, 이웃들은

더욱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느님과 자연과 주변의 사물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겠습니다

결점이 많아 마음에 안 드는 나 자신을

올바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렵니다

 

주황 - 그 타오르는 환희의 빛깔로

새해에는

내게 오는 시간들을 성실하게 관리하고

내가 맡은 일들에는

인내와 정성과 책임을 다해

알찬 열매 맺도록 힘쓰겠습니다

 

노랑 - 그 부드러운 평화의 빛깔로

새해에는

누구에게나 밝고 따스한 말씨

친절하고 온유한 말씨를 씀으로써

듣는 이를 행복하게 하는

지혜로운 매일을 가꾸어가겠습니다

 

초록 - 그 싱그러운 생명의 빛깔로

새해에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힘들게 하더라도

절망의 늪으로 빠지지 않고

초록빛 물감을 풀어 희망을 짜는

희망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파랑 - 그 열려 있는 바다빛으로

새해에는

더욱 푸른 꿈과 소망을 키우고

이상을 넓혀가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삶의 바다를 힘차게 항해하는

부지런한 순례자가 되겠습니다

 

남색 - 그 마르지 않는 잉크빛으로

새해에는

가슴 깊이 묻어둔 사랑의 말을 꺼내

편지를 쓰고, 일기를 쓰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색의 뜰을 풍요롭게 가꾸는

창조적인 기쁨을 누리겠습니다

 

보라 - 그 은은한 신비의 빛깔로

새해에는

잃어버렸던 기도의 말을 다시 찾아

고운 설빔으로 차려입고

하루의 일과를 깊이 반성할 줄 알며

감사로 마무리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른 이에게 거듭 강요하기보다는

조용한 실천으로 먼저 깨어 있는

침묵의 사람이 되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일곱 가지 무지개 빛깔로

새로운 결심을 꽃피우며

또 한 해의 길을

우리 함께 떠나기로 해요

 

 

 

묵은 달력을 떼어내며

이해인

 

묵은 달력을 떼어내는

나의 손이 새삼 부끄러운 것은

어제의 시간들을

제대로 쓰지 못한

나의 게으름과 어리석음 때문이네

 

우리에게 늘 할말이 많아

잠들지 못하는 바다처럼

오늘도 다시 깨어나라고

멈추지 말고 흘러야 한다고

새해는 파도를 철썩이며 오나 보다

 

 

 

물망초

이해인

 

오직

나를 위해서만 살아달라고

나를 잊어선 안 된다고

차마 소리내어

부탁하질 못하겠어요

 

죽는 날까지

당신을 잊지 않겠다고

내가 먼저 약속하는 일이

더 행복해요

 

당신을 기억하는

생의 모든 순간이

모두가 다

꽃으로 필 거예요

물이 되어 흐를 거예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미리 쓰는 유서

이해인

 

소나무 가득한 솔숲에

솔방울 묻듯이 나를 묻어주세요

 

묘비엔 관례대로

언제 태어나고

언제 수녀되고

언제 죽었는가

단 세 마디로 요약이 될 삶이지만

 

'민들레의 영토'에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남은 이들 마음속에

기억되길 바랍니다

 

영정 사진은

너무 엄숙하지 않은 걸로

조금의 웃음이 깃든 걸로

놓아주세요

 

시를 쓰지 않아도 되는 지금

나는 이제 진짜 시가 되었다고

믿고 싶어요

갚을 길 없는 사랑의 빚은

그대로 두고 감을 용서하셔요

 

생각보다 빨리

나를 잊어도 좋아요

부탁 따로 안 해도 그리 되겠지요

 

수녀원의 종소리

하늘과 구름과 바다와 새

눈부신 햇빛이

조금은 그리울 것 같군요

 

그동안 받은 사랑

진정 고마웠습니다

 

 

 

미소를 잃지 않고 살 수 있기를

이해인

 

빗속을 걸으며 많은 것을 생각했다

빗속에 서면 나는 늘 작은 새

작은 가슴이 된다

자꾸 건조해지는 마음을

빗속에 촉촉히 적시며 기도했다

힘 드는 가운데도 미소를 잃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민들레

이해인

 

은밀히 감겨간 생각의 실타래를

밖으로 풀어내긴 어쩐지 허전해서

차라리 입을 다문 노란 민들레

 

앉은뱅이 몸으로는 갈길이 멀어

하얗게 머리 풀고 솜털 날리면

춤추는 나비들도 길 비켜 가네

 

꽃씨만한 행복을 이마에 얹고

바람한테 준 마음 후회 없어라

혼자서 생각하다 혼자서 별을 헤다

땅에서 하늘에서 다시 피는 민들레

 

 

 

민들레의 영토

이해인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로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쳐다보는

인정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강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원색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 싶은 얼굴이여.

 

 

 

바다가 쉴 때는

이해인

 

여름에 왔던

많은 사람들로

몸살을 앓던 바다가

지금은 조용히 누워

혼자서 쉬고 있다

 

흰 모래밭에

나도 오래 누워

쉬고 싶은 바닷가

 

노을 한 자락 끌어 내려

저고리를 만들고

바다 한 자락 끌어 올려

치마를 만들면서

수평선을 바라보면

내가 혼자인 것이

외롭지 않다

 

 

 

바다는 나에게

이해인

 

바다는 가끔

내가 좋아하는

삼촌처럼 곁에 있다

 

나의 이야길 잘 들어주다가도

어느 순간 내가

힘들다고 하소연하면

"엄살은 무슨? 복에 겨운 투정이야"

하고 못 들은 척한다

 

어느 날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을

하나하나 부탁하면

금방 구해줄 것처럼 다정하게

"그래, 알았어" 하다가도

"너무 욕심이 많군!" 하고

꼭 한 마디 해서

나를 무안하게 한다

 

바다는 나에게

삼촌처럼 정겹고 든든한

푸른 힘이다

 

 

 

바다로 달려가는 바람처럼

이해인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달려오는가

함께 있을 땐 잊고 있다가도

멀리 떠나고 나면

다시 그리워지는 바람

 

처음 듣는 황홀한 음악처럼

나뭇잎을 스쳐가다

내 작은 방

유리창을 두드리는

서늘한 눈매의 바람

 

여름 내내 끓어오르던

내 마음을 식히며

이제 바람은

흰 옷 입고 문을 여는 내게

박하 내음 가득한 언어를

풀어내려 하네

 

나의 약점까지도 이해하는

오래된 친구처럼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더 넓어지라고 하네

 

사소한 일들은 훌훌 털어버리고

바다로 달려가는 바람처럼

더 맑게, 크게

웃으라고 하네

 

 

 

바다새

이해인

 

이 땅의 어느 곳

누구에게도 마음 붙일 수 없어

바다로 온 거야

 

너무 많은 것 보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예까지 온 거야

 

너무 많은 말들을

하고 싶지 않아

혼자서 온 거야

 

아 어떻게 설명할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이 작은 가슴의 불길

 

물 위에 앉아

조용히 식히고 싶어

바다로 온 거야

 

미역처럼 싱싱한 슬픔

파도에 씻으며 살고 싶어

바다로 온 거야

 

 

 

바다에서 쓴 편지

이해인

 

짜디짠 소금물로

내 안에 출렁이는

나의 하느님

오늘은 바다에 누워

푸르디푸른 교향곡을

들려주시는 하느님

 

당신을 보면

내가 살고 싶습니다

당신을 보면

내가 죽고 싶습니다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당신을 맛보게 하는 일이

하도 어려워

살아갈수록 나의 기도는

소금 맛을 잃어갑니다

 

필요할 때만 찾아 쓰고

이내 잊어버리는

찬장 속의 소금쯤으로나

당신을 생각하는

많은 이들 사이에서

나의 노래는 종종 희망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제발

안 보이는 깊은 곳으로만

가라앉아 계시지 말고

더욱 짜디짠

사랑의 바다로 일어서십시오

이 세상을

희망의 소금물로 출렁이십시오

 

 

 

바다여 당신은

이해인

 

내가 목놓아 울고 싶은 건

가슴을 뒤흔들고 가버린

거센 파도 때문이 아니다

한밤을 보채고도 끊이지 않는

목쉰 바람 소리 탓도 아니다

 

스스로의 어둠을 울다

빛을 잃어버린

사랑의 어둠

 

죄스럽게 비좁은 나의 가슴을

커다란 웃음으로 용서하는 바다여

저 안개 덮인 산에서 어둠을 걷고

오늘도 나에게 노래를 다오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나에게 노래를 다오

 

언젠가는 모두가 쓸쓸히 부서져 갈

한 잎 외로운 혼임을

바다여 당신은 알고 있는가

 

영원한 메아리처럼 맑은 여운

어느 파안 끝에선가

종이 울고 있다

 

어제와 오늘 사이를 가로누워

한번도 말이 없는 묵묵한 바다여

잊어서는 아니될

하나의 노래를 내게 다오

 

당신의 넓은 길로 걸어가면

나는 이미 슬픔을 잊은

행복한 작은 배

 

이글거리는 태양을

화산 같은 파도를

기다리는 내 가슴에

불지르는 바다여

 

폭풍을 뚫고 가게 해 다오

돛폭이 찟기워도 떠나게 해 다오

 

 

 

바다 일기

이해인

 

1

늘 푸르게 살라 한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내 굽은 마음을 곧게

 

흰 모래를 밟으며

내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바위를 바라보며

내 약한 마음을 든든하게

 

그리고

파도처럼 출렁이는 마음

갈매기처럼 춤추는 마음

 

늘 기쁘게 살라 한다

 

 

2

바람 많이 부는 날

나는 바다에 나가

마음에 가득 찼던

미움과 욕심의 찌꺼기들을

모조리 쏟아 버리고

 

거센 파도 밀리면

깊이 숨겨 두었던

비밀 이야기들을

바다는 소라 껍질에 담아

모조리 쏟아 버리네

 

 

3

집에 돌아와서도

자꾸만 바다를 생각하다가

꿈에도 바다에 가네

 

아이들과 함께 조가비를 줍다가

금방 하루가 저물어 안타까운

바다빛 꿈을 꾸네

 

 

 

바닷가에서

이해인 

 

오늘은

맨발로

바닷가를 거닐었습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한번은 하느님의 통곡으로

한번은 당신의 울음으로 들렸습니다

 

삶이 피곤하고

기댈 데가 없는 섬이라고

우리가 한 번씩 푸념할 적마다

쓸쓸함의 해초도

더 깊이 자라는 걸 보았습니다

 

밀물이 들어오며 하는 말

감당 못할 열정으로

삶을 끌어안아보십시오

썰물이 나가면서 하는 말

놓아버릴 욕심들은

미루지 말고 버리십시오

 

바다가 모래 위에 엎질러놓은

많은 말을 다 전할 순 없어도

마음에 출렁이는 푸른 그리움을

당신께 선물로 드릴께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슬픔이 없는 바닷가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로

춤추는 물새로 만나는 꿈을 꾸며

큰 바다를 번쩍 들고 왔습니다

 

 

 

바람 부는 가을 숲으로 가자

이해인

 

젊은 날 사랑의 뜨거움이 불볕더위의 여름과 같을까.

여름 속에 가만히 실눈 뜨고 나를 내려다보던 가을이 속삭인다.

불볕처럼 타오르던 사랑도 끝내는 서늘하고 담담한 바람이 되어야 한다고

눈먼 열정에서 풀려나야 무엇이든 제대로 볼 수 있고,

욕심을 버려야 참으로 맑고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어서 바람 부는 가을 숲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바람에게

이해인

 

몸이 아프고

마음이 우울한 날

너는 나의

어여쁜 위안이다, 바람이여

 

창문을 열면

언제라도 들어와

무더기로 쏟아내는

네 초록빛 웃음에 취해

나도 바람이 될까

 

근심 속에 저무는

무거운 하루일지라도

자꾸 가라앉지 않도록

나를 일으켜다오

나무들이 많이 사는

숲의 나라로 나를 데려가다오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겠다

삶의 절반은 뉘우침뿐이라고

눈물 흘리는 나의 등을 토닥이며

묵묵히 하늘을 보여준 그 한 사람을

꼭 만나야겠다

 

 

 

바람의 시

이해인

 

바람이 부네

내 혼에 불을 놓으며 부네

영원을 약속하던

그대의 푸른 목소리도

바람으로 감겨오네

 

바다 안에 탄생한

내 이름을 부르며

내 목에 감기는 바람

이승과 빛과 어둠 사이를

오늘도 바람이 부네

 

당신을 몰랐다면

너무 막막해서

내가 떠났을 세상

이 마음에 적막한 불을 붙이며

바람이 부네

 

그대가 바람이어서

나도 바람이 되는 기쁨

꿈을 꾸네 바람으로

 

 

 

바람이 내게 준 말

이해인

 

넌 왜 내가 떠난 후에야

인사를 하는 거니?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왜 제때엔 못 하고

한 발 늦게야 표현을 하는 거니?

 

​오늘도 이끼 낀 돌층계에 앉아

생각에 잠긴 너를 나는 보았단다

​봉숭아 꽃나무에 물을 주는 너를

 

내가 잘 익혀놓은 동백 열매를

만지작거리며 기뻐하는 너를 지켜보았단다.

 

언제라도 시를 쓰고 싶을 땐

나를 부르렴 어느 계절이나

나는 네게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단다

 

나의 걸음은 네게로 달려가는

내 마음보다도 빠르단다

 

사랑하고 싶을 땐 나를 부르렴

​나는 누구의 마음도 다치지 않으면서

심부름 잘하는 지혜를 지녔단다

 

세월이 가고 늙지 않는

젊음을 지녔단다

 

 

 

바람이여

이해인

 

살 속 깊이 들어박힌

나의 슬픔은

바람이여 모두가 너의 탓이다

 

바위 끝에 부서지는 이승의 파도 위에

나를 낳아 키워서

갖고 싶은 바람이여

 

처음의 네 사랑이 칼로 꽂힌 심장에

위로의 눈짓 한번 건네 주지 않는

무정한 바람이여

 

어둠을 일으킨 그대

화살을 쏘아

시름시름 앓아 누운

내 불면의 세월

 

상처받은 사랑은

할 말이 없다

 

잠시도 날 잊지 못해

스러진 남은 목숨

불고 싶은 바람이여

죽지 않는 바람이여

 

 

 

반지

이해인

 

약속의 사슬로

나를 묶는다

 

조금씩 신음하며

닳아 가는 너

 

난초 같은 나의 세월

몰래 넘겨 보며

 

가늘게 한숨 쉬는

사랑의 무게

 

말없이 인사 건네며

시간을 감는다

나의 반려는

 

잠든 넋을 깨우는

약속의 사슬

 

 

 

밤의 기도

이해인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밤은 싱싱한 바다

 

별을 삼킨 인어(人魚) 되어

깊은 어둠 속을 헤엄쳐 가면

뜨거운 불향기의 당신이 오십니다

 

고단한 여정(旅程)에

살갗마다 스며든 쓰라림을

향유(香油)로 씻어 내며 크게 하소서

 

안 보이는 밤에는

더욱 잘 보이는

당신의 얼굴

 

눈멀어야 가까이 볼 수 있다면

눈멀게 하소서

너무 많이 사랑함도 죄일 수 있다면

죄인이게 하소서

 

죽음과 이별하고

소리없이 일어서는

밤은 눈이 큰 바다

 

순결한 나를 그 바다 위에

떠올리게 하소서

가느단 빛의 올을 꼬리에 하늘대며

수천의 새 아침을 쏟아내게 하소서

 

 

 

밤의 얼굴

이해인

 

붙잡히지 않는

언어의 날개 달고

 

울면서 울면서

거리를 헤매다

돌아온 빈 방

 

홀로 깨어

낯을 씻는

밤의 얼굴

 

늘 본 듯도 하고

낯도 설은데

 

나에 취해서

나를 잃어가는 동안

기억 밖에 매 두었던

친구의 얼굴인가

 

나는 지쳐 있고

너는 살았구나

 

기다리는 네 손에

내가 주는 건

싸늘한 빈 손 뿐

 

너는

소리없이 밖에 나가

잃었던 내 심장을 찾아오고

 

내게 버림받은 이웃의

슬픈 눈길을 불러 들이고

재로 식은 내 사랑에

불을 지핀다

 

갑자기 일어나

신들린 무녀처럼 춤을 추다가

 

나를 잠재우고 떠나는

웃지 않는 얼굴

 

이제

너는 지쳐 있고

내가 살았구나

 

 

 

밤 한 톨

이해인

 

가을날

정든 나무에

이별을 고하며 떨어져 내린

자유의 둥근 몸짓

 

가시로 얽힌 집 속에서

침묵을 삼키며

얼굴 하나 안 상하고

잘도 영글었구나

 

햇살도 축복하는

그대의

출가(出家)

 

오늘을 위해

그토록 단단한 의지로

숨어 살았구나

 

 

 

밥집에서 - 1999년 8월

이해인

 

"밥 좀 많이 주이소"

 

며칠 동안의 허기를

한꺼번에 채우려는 듯

내일의 몫까지 미리 채우려는 듯

그릇을 들고 오는 이들마다

일제히 큰소리로 외치는

이곳, 성 분도 두레상

 

나는 팔목이 아프도록

밥을 푸고 또 퍼도

다시 반복되는 후렴

"밥 좀 많이 주이소"

 

많이 많이 드시고 또 오세요

인사말을 건네는데

장미 가득한 정원의 성모상도

이쪽으로 걸어오시네

 

밥이 곧 생명이고 기쁨이고

삶의 행복임을

나머지는 다 그 다음 문제임을

다시 알아듣는 곳

나도 잠시 배고프니

조금 더 알아듣겠다

 

 

 

밭노래

이해인

 

1

밭은 해마다

젖이 많은 엄마처럼

아이들을 먹여 살립니다

 

배추 무 상추 쑥갓

감자 호박 당근 오이

수박 참외 토마토 옥수수

 

아이들의 이름은

참 많기도 합니다

 

 

2

비 온 뒤

밭에 나가니

땅 속을 몰래 빠져 나온

아기 홍당무가

흙 묻은 얼굴로 웃고 있다가

나에게 들켜서

얼굴이 더 빨개졌습니다

 

"나 좀 씻겨 줘" 하길래

방으로 데리고 왔더니

내 책상 위에 앉아

날마다 밭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3

비 온 뒤

밭에 나가면

마음도 흙처럼 부드러워집니다

흙 속에 꿈틀대는 굼벵이도

오늘은 정답게 느껴집니다

 

다시 보는 햇빛 아래 흙을 만지면

말 잘 듣는 어린이의

착한 마음이 됩니다

 

 

4

아침부터 하양 나비가

밭에서 춤을 춥니다

하얀 감자꽃 위에

살포시 앉아

생각에 잠긴 흰나비

 

먼데서 보니

꽃과 나비가 하나입니다

 

 

 

밭도 아름답다

이해인

 

바다도 아름답지만

밭도 아름답다

 

바다는 멀리 있지만

밭은 가까이 있다

 

바다는 물의 시지만

밭은 흙의 시이다

 

상추, 쑥갓, 파, 마늘

무, 배추, 당근, 오이

흙냄새 나는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보면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새로움, 놀라움

고마움의 빛

 

나는 더없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열려 있는

엄마 밭이 되고 싶다

흙의 시가 되고 싶다

 

 

 

배추밭에서

이해인

 

죽을 때까지

들키고 싶지 않은 속 이야기도

배추밭에선

다 쏟아놓게 되네

 

싱싱함

냉정함

거룩함

 

표정도 다양한

겨울 배추들

 

나에게 손 내밀며

삶은 희망이라고

묻지도 않는데

자꾸만

이야기하네

함께 누워

하늘을 보자 하네

 

죽어서 행복한

월동 준비도

서두르자 하네

 

 

 

백합의 말

이해인

 

지금은

긴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만나

되살아난

목숨의 향기

 

캄캄한 가슴 속엔

당신이 떨어뜨린

별 하나가 숨어 살아요

 

당신의 부재(不在)조차

절망이 될 수 없는

나의 믿음을

 

승리의 향기로

피워 올리면

 

흰 옷 입은

천사의 나팔소리

 

나는 오늘도

부활하는 꽃이에요

 

 

 

버섯에게

이해인

 

햇볕 한 줌 없는

그늘 속에서도

기품 있고 아름답게

눈을 뜨고 사는 너

 

어느 디자이너도

흉내 낼 수 없는

너만의 빛깔과 무늬로

옷을 차려입고서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멋진 꿈을 펼치는구나

 

넌 이해할 수 있니?

기쁨 뒤에 가려진 슬픔

밝음 뒤에 가려진 그늘

웃음 뒤에 가려진 눈물의 의미를?

 

한 세상을 살면서

드러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너는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겠니?

 

 

 

번개 연가

이해인

 

갑자기

번쩍이니

처음엔 무서웠어요

그 다음엔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황홀했어요

 

그토록

찰나적인 만남을

애타게 기다리며

세월이 흐릅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그리움은

식을 줄 모르는

놀라움이군요

 

내 생의

가시덤불 속에

꼭 다시 한번

아름다운 번개로

나타나 주십시오

 

 

 

벗에게

이해인

 

1

너는

내 안에서

고운 잇속 드러내며

살짝 웃는다

 

이슬 달고 피어난

하얀 도라지 꽃

 

날마다

정성껏

너를 가꾼다

 

네가 꽃을 피워

나에겐

사랑이 되고

 

네가 살아 와서

나의 눈물은

반짝이는 구슬이 된다

 

세월이 가도

젊음만 퍼올리는

영혼의 샘가에서

 

순결한 눈짓 마주하여

피리 불다가

 

우리는 조용히

하나가 된다

 

 

2

내가 누구인지

벗이여

오늘은 그대에게 묻고 싶다

 

잠에서 깨어나

거울 앞에서 바라보는

낯선 얼굴의 나

 

밤길을 걷다

나를 따라붙는

나보다 큰

나의 검은 그림자가

두렵고 낯설었다

 

이젠 내가

나와 친해질 나이도 되었는데

갈수록 나에게서 멀어지는 슬픔

 

나를 찾지 못한 부끄러움에

오늘도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내게

 

벗이여

무슨 말이라도 해다오

 

 

3

내가 죽더라도

너는 죽지 않으면 좋겠다

꼭 죽어야 한다면

내가 먼저 죽으면 좋겠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같은 날 같은 시에 죽으면 좋겠다

 

이 또한

터무니없는 욕심이라고

너는 담담히 말을 할까

 

우정보다 더 길고 깊은

하나의 눈부신 강이 있다면

그 강에 너를 세우겠다

 

사랑보다 더 높고 푸른

하나의 신령한 산이 있다면

그 산에 너를 세우겠다

 

내게 처음으로

하늘과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내 목숨보다

귀한 벗이여

 

 

 

이해인

 

밤이 오는 층계에서 별을 바라봅니다

내가 사는 집에는 층계가 많아

나의 하루는 수시로 숨이 차지만

다람쥐처럼 하루를 오르내리는 삶의 즐거움이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층계

갈수록 높아뵈는

삶의 층계에서

별을 안고 기도하는 은은한 기쁨이여

별이신 당신을 오늘도 바라봅니다

 

 

 

별을 보며

이해인

 

고개가 아프도록

별을 올려다본 날은

꿈에도 별을 봅니다

 

반짝이는 별을 보면

반짝이는 기쁨이

내 마음의 하늘에도

쏟아져 내립니다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혼자인 줄 아는 별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키는 별

나도 별처럼 살고 싶습니다

 

얼굴은 작게 보여도

마음은 크고 넉넉한 별

먼데까지 많은 이를 비추어 주는

나의 하늘 친구 별

 

나도 날마다

별처럼 고운 마음

반짝이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별을 보면

이해인

 

하늘은

별들의 꽃밭

 

별을 보면

내 마음

뜨겁게 가난해지네

 

내 작은 몸이

무거워

울고 싶을 때

 

그 넓은 꽃밭에 앉아

영혼의 호흡소리

음악을 듣네

 

기도는 물

마실수록 가득찬 기쁨

 

내일을 약속하는

커단 거울 앞에

꿇어 앉으면

 

안으로 넘치는 강이

바다가 되네

길은 멀고 아득하여

피리소린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별 뜨고

구름 가면

세월도 가네

 

오늘은 어제보다

죽음이

한치 더 가까와도

 

평화로이

별을 보며

웃어 주는 마음

 

훗날

별만이 아는 나의 이야기

꽃으로 피게

 

살아서 오늘을 더 높이

내 불던 피리

찾아야겠네

 

 

 

병상 일기

이해인

 

1

아플 땐 누구라도

외로운 섬이 되지

 

하루 종일 누워 지내면

문득 그리워지는

일상의 바쁜 걸음

무작정 부럽기만 한

이웃의 웃음소리

 

가벼운 위로의 말은

가벼운 수초처럼 뜰 뿐

마음 깊이 뿌리내리진 못해도

그래도 듣고 싶어지네

 

남들 보기엔

별것 아닌 아픔이어도

삶보다는 죽음을

더 가까이 느껴보며

혼자 누워 있는 외딴 섬

 

무너지진 말아야지

아픔이 주는 쓸쓸함을

홀로 견디며 노래할 수 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삶을 껴안는 너그러움과

겸허한 사랑을 배우리

 

 

2

이만큼 어른이 되어서도

몹시 아플땐

'엄마' 하고 불러보는

나의 기도

 

이유 없이 칭얼대는 아기처럼

아플 땐

웃음 대신 눈물 먼저 삼키는

나약함을

하느님도 이해해주시리라

 

열꽃 가득한

내 이마를 내가 짚어보는

고즈넉한 오후

 

잘못한 것만

많이 생각나

마음까지 아프구나

 

창밖의 햇살을 끌어다

이불로 덮으며

나 스스로

나의 벗이 되어보는

외롭지만 고마운 시간

 

 

3

뼈도 아프고 살도 아프고

마음도 아픈 어느 날

 

이유도 모르면서 함께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예쁘고 고마웠다.

 

나의 참을성을 시험하는 듯

이것저것 따져 묻는 사람들이 미웠다.

 

누굴 사랑하면 오직 그 사랑에게만

신경이 쓰이듯이

 

어디가 아프면 온통 아픈 자리에만

신경이 쓰이는 것

 

큰 잘못은 아니겠지 아프다고 터놓고

말해도 되겠지

 

아픔의 끝은 어느 날의 죽음일 테지만

죽음보다 아픔이 두렵다니

 

그런 날이 내게도 오는 것이 참으로 두렵지만

그래도 오늘은 괜찮다고 웃어 보는 행복이여

 

 

 

보게 하소서

이해인

 

길을 가던 당신에게 어느 소경이

"주여, 보게 하소서"라고 외치던

그 간절한 기도를 자주 기억합니다

 

주여,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문 닫은 밤이 되면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졌다" 고 표현한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문득 커다란 눈이 되어

나를 살피러 오는 이 밤의 고요 속에

나는 눈을 뜨고자 합니다

 

당신은 나에게 두 눈을

선물로 주셨지만

눈을 받은 고마움을 잊고 살았습니다

 

눈이 없는 사람처럼

답답하게 행동할 때가 많았습니다

먼지 낀 창문처럼 흐려진 눈빛으로

세상과 인간을 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것들과는 거리가 먼

헛된 욕심에 혈안이 되어

눈이 아파 올 땐 어찌해야 합니까

 

보기 싫은 것들이 많아

눈을 감고 싶을 땐 어찌해야 합니까

 

웬만한 것쯤은

다 용서하고 다 받아들이는

사랑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소서

 

너무 가까이만 보고

멀리는 못 보는 근시안도 아닌

너무 멀리만 보고

가까이는 못 보는 원시안도 아닌

사물의 중심을 바로 못 보는

난시안도 아닌

밝고 맑은 시력을 주소서 주여

 

편견과 독선의 색안경을 끼기보다

기도의 투명한 안경을 끼고

살아가는 기쁨을 알게 하소서

 

남을 비난하고 불평하기 전에

나의 못남과 어리석음을

먼저 보게 하여 주소서

 

결점투성이의 나를 보고

절망하기 전에

다시 한번

당신의 사랑을 바라보게 하소서

 

다시 한번

당신께의 믿음으로 눈을 뜨게 하소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눈과 분별력을 주소서

 

살아서 눈을 뜨고 사는 고마움으로

언제나 당신 안에 보게 하소서

 

오늘도 샅샅이 나를 살피시는

눈이 크신 주님

 

 

 

보고 싶다는 말

이해인

 

생전 처음 듣는 말처럼

오늘은 이 말이 새롭다

 

보고 싶은데…

 

비오는 날의 첼로 소리 같기도 하고

맑은 날의 피아노 소리 같기도 한

너의 목소리

 

들을 때마다

노래가 되는 말

평생을 들어도

가슴이 뛰는 말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감칠맛 나는

네 말속에 들어 있는

평범하지만 깊디깊은

그리움의 바다

 

보고 싶은데

 

나에게도

푸른 파도 밀려오고

내 마음에도 다시

새가 날고

 

 

 

보름달에게

이해인

 

1

너는

나만의 것은 아니면서

모든 이의 것

모든 이의 것이면서

나만의 것

 

만지면

물소리가 날 것 같은

 

세상엔 이렇듯

흠도 티도 없는 아름다움이 있음을

비로소 너를 보고 안다

달이여

 

내가 살아서

너를 보는 날들이

얼마만큼이나 될까?

 

 

2

네 앞에 서면

말문이 막힌다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 오르면

할 말을 잊는 것처럼

너무 빈틈없이 차 올라

나를 압도하는

달이여

 

바다 건너

네가 보내는

한 가닥의 빛만으로도

설레이누나

 

내가 죽으면

너처럼 부드러운 침묵의 달로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에

한 번씩 떠오르고 싶다

 

 

 

보호색

이해인

 

배춧잎 속에 숨은

연두색 벌레처럼

우리는 저마다

보호색 만들기에

능한지도 몰라

 

다른 이를 위해 만들어가는

사랑의 보호색은

아름답고 따뜻해 보이지만

자기만의 유익을 위한

이기적인 보호색은

차디차고 징그러워

정이 가질 않네

 

이기심을 적당히 숨긴

사랑의 모습으로

그럴듯한 보호색을

만들어갈 때마다

나는 내가 싫고 흉해

얼굴을 돌린다

 

 

 

복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이해인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더욱 열려 있는

사랑과 기도로 복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일상의 소임에서 가꾸어가는

잔잔한 기쁨과 감사로

복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타인의 잘못을 받아들이는

이해와 용서로 복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잘난 체하지 않는

온유와 겸손으로 복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옳고 그른 것을 잘 분별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로 복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봄과 같은 사람

이해인

 

봄과 같은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일까 생각해 본다.

그는 아마도 늘 희망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따뜻한 사람, 친절한 사람, 명랑한 사람, 온유한 사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

창조적인 사람, 긍정적인 사람일 게다.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고 불평하기 전에

우선 그 안에 해야할 바를 최선의 성실로 수행하는 사람,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새롭히며 나아가는 사람이다.

 

 

 

봄까치꽃

이해인

 

까치가 놀로 나온

잔디밭 옆에서

 

가만히 나를 부르는

봄까치꽃

 

하도 작아서

눈에 먼저 띄는 꽃

 

어디 숨어 있었니?

언제 피었니?

 

반가워서 큰소리로

내가 말을 건네면

 

어떻게 대답할까

부끄러워

하늘색 얼굴이

더 얇아지는 꽃

 

잊었던 네 이름을 찾아

내가 기뻤던 봄

 

노래처럼 다시 불러보는

너, 봄까치꽃

 

잊혀져도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나도 너처럼

그렇게 살면 좋겠네

 

 

 

봄날 같은 사람

이해인

 

겨우내 언 가슴으로 그토록 기다렸던 봄이 한창이다.

만물은 봄의 부름에 화답이라도 하듯 생기가 돌고 힘이 뻗친다.

생명이 약동하고 소생하는 계절의 하루하루가 이토록 고마울까 싶다.

두꺼운 옷을 벗어 던지는 것만으로도 몸이 가벼운데,

이름 모를 꽃들이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피어 있으니 마음 또한 날아갈 것만 같다.

 

사실 우리들 가슴을 포근히 적셔주는 것은 봄이다.

‘봄’이란 말만으로도 향기가 나고 신선한 기분이 감돈다.

봄의 자연을 마음 곁에 두고 사는 이웃들에게서 배시시 흘러나오는

미소가 편안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봄날 같으면 좋겠다’는 말이 생겼나 보다.

 

수녀인 이해인 시인은 ‘봄날 같은 사람’을 이렇게 그렸다.

“그는 늘 희망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따뜻한 사람, 친절한 사람,

명랑한 사람, 온유한 사람,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 창조적인 사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긍정적인 사람일 것” 이라고.

그런 사람이야 말로 삭정 같은 마른 세상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게 하는

자양분이 아닌가 싶다.

 

이제 봄을 시샘 하는 꽃샘추위도 물러났다.

영국 시인 셸리의 표현처럼 봄은 생생한 빛과 향기로 들과 산을

채워가고 있는 중이다.

이 봄에, 미국에서 날아든 한 교포학생의 광기서린 행동으로 지난 며칠은

마음을 졸이면서 악몽을 꾸는 봄날이었다.

 

나는 다시금 마음을 추스르고 향기롭고 청량한 ‘봄날 같은 사람’이 되고자

다짐하면서,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에 희망의 노래를 마음껏 불러 보련다.

 

 

 

봄날 아침 식사

이해인

 

냉이국 한 그릇에 봄을 마신다.

냉이에 묻은 흙내음

조개에 묻은 바다내음

마주 앉은 가족들의 웃음도 섞어

모처럼 기쁨의 밥을 말아 먹는다.

냉이처럼 들쭉날쭉한 내 마음에도

어느새 봄이 실뿌리가 하얗게 내리고 있다.

 

 

 

봄 아침

이해인

 

창틈으로 쏟아진

천상 햇살의

눈부신 색실 타래

 

하얀 손 위에 무지개로 흔들릴 때

눈물로 빚어 내는

영혼의 맑은 가락

 

바람에 헝클어진 빛의 올을

정성껏 빗질하는 당신의 손이

노을을 쓸어 내는 아침입니다

 

초라해도 봄이 오는 나의 안뜰에

당신을 모시면

기쁨 터뜨리는 매화 꽃망울

 

문신(文身) 같은 그리움을

이 가슴에 찍어 논

당신은 이상한 나라의 주인

 

지울 수 없는 슬픔도

당신 앞엔

축복입니다

 

 

 

봄이 되면 땅은

이해인

 

깊숙히 숨겨 둔

온갖 보물

빨리 쏟아 놓고 싶어서

땅은 어쩔 줄 모른다

 

겨우내

잉태했던 씨앗들

어서 빨리 낳아 주고 싶어서

 

온 몸이

가렵고 아픈

어머니 땅

 

봄이 되면 땅은

너무 바빠

마음놓고 앓지도 못한다

너무 기뻐

아픔을 잊어버린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이해인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엔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 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걸음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구나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내 마음의 바위틈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봄과 함께

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보는 사람들이

모두 새롭고 소중하여

고마움의 꽃망울이 터지는 봄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

 

 

 

봄이 오면 나는

이해인

 

봄이 오면 나는

활짝 피어나기 전에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

꽃나무들 옆에서 덩달아 봄 앓이를 하고 싶다

살아 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 올리는

꽃나무와 함께 나도 기쁨의 잔기침을 하며

조용히 깨어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매일 새소리를 듣고 싶다

산에서 바다에서 정원에서

고운 목청 돋우는 새들의 지저귐으로

봄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나는

바쁘고 힘든 삶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의 은빛 날개 하나를

내 영혼에 달아주고 싶다

 

봄아 오면 나는

조금은 들뜨게 되는 마음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욱 기쁘고 명랑하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유리창을 맑게 닦아 하늘과 나무와 연못이

잘 보이게 하고

또 하나의 창문을 마음에 달고 싶다

 

 

 

봄 일기

이해인

 

1

지난 겨울

추위의 칼로 상처받은 아픔,

육교의 낡은 층계처럼

삐꺽이는 소리를 내던 삶의 무게도

지금은 그대로 내 안에 녹아 흐르는

눈물이 되었나 보다

 

이 눈물 위에서

생명의 꽃을 피우는

미나리 빛깔의 봄

 

잠시 일손을 멈추고

어린이의 눈빛으로

하늘과 언덕을 바라보고 싶다

냉이꽃만한 소망의 말이라도

이웃과 나누고 싶다

 

봄에도 바람의 맛은 매일 다르듯이

매일을 사는 내 마음의 빛도

조금씩 다르지만

쉬임 없이 노래했었지

 

쑥처럼 흔하게 돋아나는

일상(日常)의 근심중에도

희망의 향기로운 들꽃이

마음 속에 숨어 피는 기쁨을

 

언제나 진달래빛 설레임으로

사랑하는 이를 맞듯이

매일의 문을 열면

안으로 조용히

빛이 터지는 소리

봄을 살기 위하여

내가 열리는 소리

 

 

2

봄이 일어서니

내 마음도 기쁘게 일어서야지

나도 어서 희망이 되어야지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 봄이 되려면

내가 먼저 봄이 되어야지

 

그렇구나

그렇구나

마음이 흐르는 시냇물 소리...

 

 

3

봄에도 바람의 맛은 매일 다르듯이

매일을 사는 내 마음빛도

조금씩 다르지만

쉬임없이 노래했었지

쑥처럼 흔하게 돋아나는

일상의 근심 중에도

희망의 향기로운 들꽃이

마음속에 숨어 피는 기쁨을

 

언제나 신선한 설레임으로

사랑하는 이를 맞듯이

매일의 문을 열면

안으로 조용히 비치 터지는 소리

봄을 살기 위하여

내가 열리는 소리

 

 

 

봄 편지

이해인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듯 들꽃으로 오렴

 

눈 덮인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둣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봄 햇살 속으로

이해인

 

긴 겨울이 끝나고 안으로 지쳐 있던 나

봄 햇살 속으로 깊이 깊이 걸어간다

내 마음에도 싹을 틔우고

다시 웃음을 찾으려고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눈을 감고

들어가고 또 들어간 끝자리에는

지금껏 보았지만 비로소 처음 본

푸른 하늘이 집 한 채로 열려 있다

 

 

 

봉숭아

이해인

 

한여름 내내 태양을 업고

너만 생각했다

 

이별도 간절한 기도임을

처음 알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잊어야 할까

 

내가 너의 마음 진하게

물들일 수 있다면

 

네 혼에 불을 놓는

꽃잎일 수 있다면

 

나는 숨어서도 눈부시게​

행복한 거다

 

 

 

부고(訃告)

이해인

 

어느 비 오는 날

길에서 나를 만나

조수미 독창회에 간다며

남편과 둘이서

환히 웃던 젊은 주부 구일숙

 

며칠 전

그의 친척을 만나

"일숙이도 잘 지내지요?" 하니

"글쎄...... 며칠 전에 죽었어요"

"아니, 왜요?"

"갑자기 암이 번져서 그만......"

 

죽었어요

죽었어요

며칠 내내

이 말이 떠나질 않네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한 문장 속에

끝나다니

이젠 지상에서 다시

그를 볼 수 없다니

 

부고를 접할 적마다

나도 조금씩 죽어가는

소리를 듣네

 

들꽃 한 송이

허공에 놓으며

나는 다시

울 수밖에 없네

눈물만이 작게나마

기도가 되네

 

 

 

부끄러운 고백

이해인

 

부끄럽지만

나는 아직 안구 기증

장기 기증을 못 했어요

 

죽으면 아무 느낌도 없어

상관이 없을 텐데

누군가 칼을 들어

나의 눈알을 빼고

장기를 도려내는 일이

미리부터 슬프고

끔찍하게 생각되거든요

 

죽어서라도

많은 이의 목숨을 구하는

좋은 기회를 놓쳐선 안 되겠지만

선뜻 나서지를 못하겠어요

 

'나는 살고 싶다' 고

어느 날 도마 위에서

나를 올려다보던

생선 한 마리의

그 측은한 눈빛이

 

잊으려 해도

자꾸 나를 따라다니는

요즘이에요

 

 

 

부끄러운 손

이해인

 

오래전 어느 해 가장 뜨거운 여름날

내가 잘 아는 전신마비 장애인응 방문했다.

 

무엇을 줄까 궁리하다

'그래 더위를 식힐 부채 하나 좋지'하며

가장 크고 멋진 것을 준비해 갔다.

 

그러나 내가 웃으며 선물을 건넸을 때

그는 웃지 않고 말했다.

 

'잊으셨어요? 제가 손도 불편하다는 걸?

이 손으로 어찌 부채를 부치라고!'

 

실망 가득한 그에게 나는

미안하다 미안하다 되출이하며

전에도 몇 번 보긴 했지만

 

불편한 게 내 손이 아니다 보니

그의 손을 잠시 잊었다 했다.

 

남을 배려한다 하면서도

건성일 때가 많음을 반성하였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땀이

더 많이 나던 내 부끄러운 손

 

그 이후로 나는 누구에게

선물을 주기 전에 진정 합당한가 아닌가를

더 오래 생각하는 습관을 키웠다.

 

연탄가스로 옥상에서 떨어져

몸이 많이 상했지만

정신은 더없이 맑고 지혜로웠던

 

​문학청년 임종욱 아오스딩

지금은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 어디쯤 가 있는

그가 이 여름에 나를 다시 부끄럽게 한다.

 

 

 

부르심

이해인

 

나는

한번도

숨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날 내가 흰 깃을 치며

무인도로 날아 버린

시인 같은 물새였을 때

 

뽕잎을 갉아 먹고

긴 잠에 취해 버린

꿈꾸는 누에였을 때

 

해초 내음 즐기며

모래 속에 웅크린

바다빛 껍질의 조개였을 때

 

깊은 가슴 속으로

향을 피우던

수백만개의 햇살

 

찬란한 당신 앞엔

눈 못 뜨는 나

 

부르시는 그 사랑을

듣게 하소서

 

무량의 바다 위에

두 팔을 벌리고

소리치는 태양이여

 

당신에겐

순명하여

피리부는 바람

 

춤추는 파도로

뛰어가게 하소서

 

 

 

부활절 아침에

이해인

 

깊은 잠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고

봄바람 봄햇살을 마시며

새들과 함께 주님의 이름을

첫 노래로 봉헌하는 4월의 아침

 

이 아침 저희는

기쁨의 수액을 뿜어내며

바삐 움직이는

부활의 나무들이 됩니다

 

 

 

분꽃에게

이해인

 

사랑하는 이를 생각할 때마다

내가 누리는

조그만 천국

 

그 소박하고도 화려한

기쁨의 빛깔이네

붉고도 노란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땅에서도

태양과 노을을 받아 안고

그토록 고운 촛불

켜 들었구나

 

섣불리 말해 버릴 수 없는

속 깊은 지병(持病)

그 끝없는

그리움과 향기이네

 

다시 꽃피울

까만 씨알 하나

정성껏 익혀 둔 너처럼

 

나도 이젠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도의 씨알 하나

깊이 품어야겠구나

 

 

 

비가 전하는 말

이해인

 

밤새

길을 찾는 꿈을 꾸다가

빗소리에 잠이 깨었네

 

물길 사이로 트이는 아침

어디서 한 마리 새가 날아와

나를 부르네

만남보다 이별을 먼저 배워

나보다 더 자유로운 새는

작은 욕심도 줄이라고

정든 땅을 떠나

힘차게 날아오르라고

나를 향해 곱게 눈을 흘기네

 

아침을 가르는

하얀 빗줄기도

내 가슴에 빗금을 그으며

전하는 말

 

진정 아름다운 삶이란

떨어져 내리는 아픔을

끝까지 견뎌내는 겸손이라고 -

 

오늘은 나도 이야기하려네

함께 사는 삶이란 힘들어도

서로의 다름을 견디면서

서로를 적셔주는 기쁨이라고 -

 

 

 

비 갠 아침

이해인

 

비 갠 아침 하나의 태양이

온 세상을 골고루 비춘다는 것을

처음 발견한 듯한 기쁨.

 

꽃의 죽음으로 태어난

한 알의 사과를

 

아무런 고마운 마음도 없이

먹어버린 데 대한

조그만 슬픔

 

사랑하는 이가 앓고 있어도

대신 아퍼줄 수 없고

 

그저 눈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뼈아픈 막막함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삶을 배운다

 

그리고 조금씩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비 내리는 날

이해인

 

잊혀진 언어들이

웃으며 살아오네

 

사색의 못가에도

노래처럼 비 내리네

 

해맑은 가슴으로

창을 열면

 

무심히 흘려버린

일상의 얘기들이

 

저만치 내버렸던

이웃의 음성들이

문득 정다웁게

빗속으로 젖어오네

 

잊혀진 기억들이

살아서 걸어오네

 

젖은 나무와 함께

고개 숙이면

 

내겐 처음으로

바다가 열리네

 

 

 

비도 오고 너도 오니

이해인

 

구름이

오래오래 참았다가

쏟아져 내려오는

그리움인가 보지?

 

비를 기다리면서

아침부터

하늘을 올려다보고

 

너를 기다리면서

아침부터 내내

창밖을 내다보던 날

 

맑게 젖은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까?

 

비도 오고

너도 오니

너무 반가워

눈물이 난다

친구야

 

내 마음에 맺히는

기쁨의 빗방울

영롱한 진주로 키워

어느 날 다시

너에게 보내줄게

 

 

 

비밀

이해인

 

겹겹이 싸매 둔 장미의 비밀은

장미 너만이 알고

속으로 피흘리는 나의 아픔은

나만이 안다

 

살아서도 죽어 가는

이 세상 비인 자리

 

이웃과 악수하며 웃음 날리다

뽀얀 외롬 하나

구름으로 뜨는 걸

누가 알까

 

꽃밭에 불밝힌

장미의 향기보다

더 환히 뜨겁고

미쁜 목숨 하나

 

별로 뜨는 사랑

누가 알까

 

 

 

비밀 서랍

이해인

 

어린 시절, 혼자만의 비밀 서랍을

갖고 즐거워했던 것처럼

내 마음에도

작은 서랍이 있다

 

사랑과 우정과 기도

내 나름대로의 좌우명과

아름다운 삶의 비결을 모아둔

나의 비밀 서랍

 

누가 나를 좀 힘들게 하더라도

이 서랍에서 얼른

지혜를 꺼내 최선을 다하면

슬프지 않다

 

 

 

비 오는 날에

이해인

 

1

비를 맞고 일어서는 강, 일어서는 바다, 내 안에도 갑자기 물난리가 나네. 사랑하고 싶은 마음의 소나기를 감당 못 하는 기쁨이여.

 

2

온종일 사선(斜線)으로 나를 적시는 비. 나도 몰래 내가 키운 일상(日常)의 안일함을 채찍질하는 목소리로 나를 깨워 일으키는 눈물이여.

 

3

비가 너무 많이 와도 우리는 울고 비가 너무 오지 않아도 우리는 운다.

눈물로 마음을 적시지만 아름다운 사랑처럼 오늘도 세상을 적시는 꼭 필요한 비야, 생명을 적시기 위해 눈물일 수밖에 없는 비야.

 

4

삶이란 한바탕 쏟아졌다 어느새 지나가는 비와 같은 것.

폭풍 속에서 '큰일 났다' '큰일 났다' 말하다가도 지나고 나면 다시 개인 하늘 보며 새롭게 웃어 보는 -

 

5

먼지 뒤집어쓰고 피부병을 앓고 있는 도시의 꽃과 나무들을 씻어주는 비야, 갈라진 논바닥에 떨어져 생수가 되는 비야,

그리고 오늘은 내 가슴을 적시며 마음 놓고 참회의 시가 되는 비야.

씻고 또 씻어 내도 다시 그을음이 생기는 나의 일상엔 다시 내리는 비처럼 크고 작은 허물들이 참 많기도 하구나, 쏟아지는 비처럼.

 

6

하얀 비가 내리네. 죽어서도 잊혀진 무명(無名)의 순교자의 뼈처럼 희고 단단한 슬픔,

더디 부서지는 슬픔의 조각들이 하도 많은 이 땅에 오늘은 하얀 비가 내리네.

 

7

우산도 받지 않고 빗속으로 황망히 뛰어들던 벗이여,

함께 쏟아지는 빗줄기가 각각 홀로이듯이 함께 사는 우리도 각각 홀로임을 깨닫는 비오는 날 아침.

우리의 젊음이 너무 빨리 가버린다 해도 아직은 갈길이 멀구나. 얻기 위하여 버릴 것들이 너무 많구나.

 

8

비를 맞고 더욱 환해진 꽃밭의 꽃들을 보며 슬픔의 눈물을 흘린 뒤에 더욱 아름다워진 한 사람을 생각한다.

대지가 비를 필요로 하듯 사람에겐 꼭 눈물이 필요하다.

 

9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던 젖은 얼굴들이 보이네.

열기를 식혀서 더욱 담담하고 편안해진 참 오래된 사랑의 눈길로 그들이 나를 바라보네.

마른 가슴 가득히 고여 오는 물살을 감당 못 해 나는 처음으로 비와 함께 시인이 되네.

 

10

젖지 않으려고 비옷을 입어도 소용없듯이 장마철이 아니어도 계속되는 그대의 소나기 같은 사랑의 말에 나는 내내 젖지 않을 수가 없네.

 

11

이른 아침부터 쏟아지는 소나기의 4부 합창.

오랜 세월 연꽃처럼 피워 올린 나의 조용한 기도에 대한 힘찬 응답의 소리로 오늘은 비의 노래를 듣는다.

 

12

기다릴 땐 안 오다가 문득 예고 없이 나의 창을 두드리는 비처럼 나의 죽음도 언젠가 그렇게 올 테지. 미리 문을 열어두자.

 

 

 

비 오는 날의 일기

이해인 

 

1

비오는 날은

촛불을 밝히고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습관적으로 내리면서도

습관적인 것을 거부하며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그대에게

내가 처음으로 쓰고 싶던

사랑의 말도

부드럽고 영롱한 빗방울로

내 가슴에 다시 파문을 일으키네

 

 

2

빨랫줄에 매달린

작은 빗방울 하나

사라지며 내게 속삭이네

 

혼자만의 기쁨

혼자만의 아픔은

소리로 표현하는 순간부터

상처를 받게 된다고

늘 잠잠히 있는 것이 제일 좋으니

건성으로 듣지 말고 명심하라고

떠나면서 일러주네

 

 

3

너무 목이 말라

죽어가던 우리의 산하

부스럼 난 논바닥에

 

부활의 아침처럼

오늘은 하얀 비가 내리네

 

어떠한 음악보다

아름다운 소리로

산에 들에 가슴에 꽂히는 비

 

​얇디얇은 옷을 입어

부끄러워하는 단비

 

차갑지만 사랑스런

그 뺨에 입맞추고 싶네

​우리도 오늘은 비가 되자

 

사랑 없어 거칠고 용서 못해

갈라진 사나운 눈길 거두고

 

이 세상 어디든지

한 방울의 기쁨으로

​​한 줄기의 웃음으로

순하게 녹아내리는

하얀 비, 고운 비 맑은 비가 되자

 

 

4

집도

몸도

마음도

물에 젖어

무겁다

 

무거울수록

힘든 삶

 

죽어서도

젖고 싶진 않다고

나의 뼈는

처음으로 외친다

 

함께 있을 땐

무심히 보아 넘긴

한 줄기 햇볕을

이토록 어여쁜 그리움으로

노래하게 될 줄이야

 

내 몸과 마음을

퉁퉁 붓게 한 물기를 빼고

어서 가벼워지고 싶다

뽀송뽀송 빛나는 마른 노래를

해 아래 부르고 싶다

 

 

 

비타민을 먹으며

이해인

 

"이제 수녀님도

건강을 좀 챙기셔야죠"

 

얼굴이 박꽃 같은 간호수녀가

앙징스런 통 속에

각종 비타민을 분류해넣으며

희게 웃는다

 

"이걸 드시면

감기도 몸살도 덜하실 걸요"

 

월화수목금토가 그려진

약통 속에서 빛깔 고운 알약 하나

꺼내 먹으며 신신당부한다

 

살아 있는 날까지

사랑에 지치지 않는

힘을 주면 좋겠다고

매일 매일 인내하고

절제하는 데 도움이 되는

특효약이 되어주면

더욱 좋겠다고 -

 

 

 

빈 꽃병의 말

이해인

 

1

꽃이여 어서 와서

한 송이의 사랑으로 머물러 다오

 

비어있음으로

종일토록 너를 그리워할 수 있고

 

비어있음으로

너을 안아 볼 수 있는 기쁨에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부르고 싶은 나

 

닦을수록 더 빛나는

고독의 단추를 흰옷에 달며

 

지금은 창밖의

바람 소릴 듣고 있다

 

너를 만나기도 전에

어느새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오늘의 나에게

 

꽃이여 어서 와서

한 송이의 이별로 꽂혀다오

 

 

2

꽃들을 다 보낸 뒤

그늘진 한 모퉁이에서 말을 잃었다

 

꽃과 더불어 화려했던

어제의 기억을 가라앉히며

 

기도의 진주 한 알

입에 물고 섰다 하얀 맨발로 섰다

 

아무도 오지 않는 텅 빈 가슴에

고독으로 불을 켜는 나의 의지

 

누구에게도 문 닫는 일 없이

기다림에 눈 뜨고 산다

 

희망의 잎새 하나

끝내 피워 물고 싶다

 

 

 

빈 들에서

이해인

 

많은 생명을 낳아 키워

멀리 떠나 보내고

지금은 다시 길게 누워

몸을 뒤집는 밭

봄을 기다리는 땅

 

오랜만에

하늘 보며 비어 있으니

하느님의 기침소리도

더 가까이 들린다 하네

 

빈 들에서 그분은

사랑을 속삭인다지

 

빈 들에서 처음 듣는

순교자의 울음 같은

저 바람소리

 

일어나라 일어나라

살아서도 죽어 있는

나의 잠을 깨우네

 

 

 

빈 의자의 주인에게

이해인

 

당신이 세상을 떠난후

당신이 앉았던 빈 의자에 나는 내내

당신의 그림자를 찾고 있습니다.

 

세상욕심 다 비워

뼈만 남은 당신을 닮은

하얀 시간들이 가만히 일어섭니다.

 

웃기도 했다가

울기도 했다가

어쩔 줄을 모르는 시간의 얼굴

 

다른 사람이 와서

당신의 그 의자에

다시 앉을 때까지

 

내내 몸살을 앓는

우리도 시간도 모두

가엾지 않습니까?

 

지금 대체 당신은

어디에 계신건가요?

기도도 안 되는 이 깊은 슬픔이

 

당신을 향한

우리의 기도인가요?

그리움인가요?

 

 

 

빨래

이해인

 

오늘도

빨래를 한다

 

옷에 묻은

나의 체온을

쩔었던 시간들을

흔들어 빤다

 

비누거품 속으로

말없이 사라지는

나의 어제여

 

물이 되어 일어서는

희디힌 설레임이여

 

다시 세례받고

햇빛 속에 널리고 싶은

나의 혼을

꼭 짜서 헹구어 넌다

 

 

 

빨래를 하십시오

이해인 

 

우울한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맑은 물이 소리내며

튕겨 울리는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밝아진답니다.

 

​애인이 그리운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물 속에 흔들리는

그의 얼굴이 자꾸만 웃을 거에요.

 

기도하기 힘든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몇 차례 빨래를

헹구어내는 기다림의 순간을

 

사랑하다 보면

저절로 기도가 된답니다.

 

누구를 용서하기 힘든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비누가 부서지며

풍기는 향기를 맡으며

 

마음은 문득 넓어지고

그래서 행복할 거에요.

 

 

 

사과 향기

이해인

 

겨울날 한 알의 홍옥을 깨무는 맛

쪼개면 물기 많고 부드럽고

신선한 홍옥

정답게 친구와 나누어 먹고 싶은

한 알의 사과에선

빨간 장미의 향기도 난다

그 열매 속에 숨어 있는

햇빛 바람 비 사랑

 

 

 

사라지는 침묵 속에서

이해인

 

꽃이 질 때

노을이 질 때

사람의 목숨이 질 때

 

우리는 깊은 슬픔 중에도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지혜를 배우고

이웃을 용서하는

겸손을 배우네

 

노래 부를 수 없고

웃을 수 없는 침묵 속에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기도를 배우고

자신의 모습을 깊이 들여다보는

진실을 배우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고요하고 고요한 찰나에

더디 깨우치는

아름다운 우매함이여

 

 

 

사람 구경

이해인

 

꽃구경보다 사람 구경이

더 재미있다고 누가 내게 말했다.

 

그래 그래 맞다 맞아

내가 답했다.

 

어디에나 사람들이 있고

어디에나 하느님이 계시다.

 

하느님이 세상에 오신 것도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우리도 더 많이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기 전에

자꾸만 사람 구경을 해야 한다.

 

꽃을 보듯이!

별을 보듯이!

 

 

 

사람 꽃도 저마다의 꽃술이 있다

이해인

 

날마다 꽃밭에 나가 꽃술을 보며 묵상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지 모른다

​마침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로

내적 어둠과 갈등을 겪으며 우울해 있던

나에게 ​꽃술 순례'는 큰 위로가 되어줬다

 

꽃들 안에 감추어진 꽃술을 향해

가다가 꿀을 먹는 벌을 만나기도 하고

꽃들의 주변을 맴도는 나비나 새를

만나 이야기도 하면서 산책하니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공동체에서 함께 사는 이들의 겉모습이

하나의 꽃이라면 겉만 보고 잘 알 수 없는

그들의 내면이 꽃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양한 모습을 한 여러 꽃이 저마다의 다른

꽃술을 지니고 있듯 사람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누구나 타인을 있는 그 모습으로

존중하고 인정할 때 참된 우정과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못할 적이 많아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성격이 급하고 날카로워 보여

다가가기 힘들지만 그 속을 잘 들여다보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지혜와 분별력의 예리한

꽃술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꽃술은 복잡한

상황을 단번에 정리해주는 명쾌함이 있다

 

어떤 사람은 매우 느리고 답답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모든 이를 차별 없이 감싸 안는 포근한

사랑의 꽃술로 위로를 준다 어떤 사람은 덜렁대고

말이 많아 보여도 그것은 부분적일 뿐 항상 주위를

밝고 환하게 만드는 명랑함의 꽃술로 기쁨을 준다

 

또 어떤 사람은 무뚝뚝하고

재미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깊고 어진 심성을 지니고 있어

신뢰를 주며 어떤 일이 닥치면

희생과 책임감의 꽃술로 의리를 지킨다

 

그러니 나와 다른 여러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숨어 있어 못 보았던 그들의 장점과 특성을 잘 발견해

기쁨을 누리기만 하면 매일매일 다시 걷는 삶의 길 위에서

​오늘도 나는 함께 생활하는 사람 꽃들 나의 도반인 꽃들에게

밝고 맑은 동심을 새롭게 꽃피우며 이렇게 말을 건네고 싶다

 

​너는 꽃이니? 나도 꽃이야 너는 나랑 다르게

생겼지만 참 예쁘구나 나비나 꿀벌이 오면 너도 기쁘니?

​바람이 불면 무슨 생각하니? 달뜨고 별 뜨면 무슨 생각하니?

나하고 친구하자 서로의 다름도 기뻐하면서

살아 있는 모든 날을 더 예쁘게 사랑하자. 우리

 

 

 

사랑도 나무처럼

이해인

 

사랑도 나무처럼

사계절을 타는 것일까

 

물오른 설레임이

연두빛 새싹으로

가슴에 돋아나는

희망의 봄이 있고

 

태양을 머리에 인 잎새들이

마음껏 쏟아내는 언어들로

누구나 초록의 시인이 되는

눈부신 여름이 있고

 

열매 하나 얻기 위해

모두를 버리는 아픔으로

눈물겹게 아름다운

충만의 가을이 있고

 

눈속에 발을 묻고

홀로서서 침묵하며 기다리는

인고의 겨울이 있네

 

사랑도 나무처럼

그런 것일까

 

다른 이에겐 들키고 싶지 않은

그리움의 무게를

바람에 실어 보내며

오늘도 태연한 척 눈을 감는

나무여 사랑이여 

 

 

 

사랑병

이해인

 

기쁨의 고열(高熱)에 시달리며

가끔은 헛소리도 하는

대단한 몸살

 

치통(齒通)처럼

속으로 간직해야 할 아픔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화상(火傷)처럼

깊은 흉터를 남기는

오랜 후유증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대단한 용기

 

 

 

사랑에 대한 단상

이해인

 

1

나의 사랑에선

늘 송진 향기가 난다

 

끈적거리지만

싫지 않은

아주 특별한 맛

 

나는 평생

이 향기를 마시기로 한다

아니 열심히 씹어보기로 한다

 

 

2

흔들리긴 해도

쓰러지진 않는

나무와 같이

태풍을 잘 견디어낸

한 그루 나무와 같이

 

오늘까지

나를 버티게 해준

슬프도록 깊은 사랑이여

고맙고 고마워라

 

아직도 내 안에서

휘파람을 불며

크고 있는 사랑이여

 

 

3

내 마음 안에

이렇듯 깊은 우물 하나

숨어 있는 줄을 몰랐다

 

네가 나에게

사랑의 말 한마디씩

건네줄 때마다

별이 되어 출렁이는 물살

 

어디까지 깊어질지

감당 못하면 어쩌나

두려워하면서도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낯선 듯 낯익은

나의 우물이여

 

 

 

사랑은 어디서나

이해인

 

1

사랑은 어디서나 마음 안에 파문을 일으키네.

연못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동그란 기쁨과 고통이 늘 함께 왔다 사라지네.

 

2

사랑하면 언제나 새 얼굴이 된다.

엄마의 목을 끌어안고 입맞춤하는 어린아이처럼

언제나 모든 것을 신뢰하는 맑고 단순한 새 얼굴이 된다.

 

3

몹시 피로할 때, 밀어내려 밀어내려 안간힘 써도

마침내 두 눈이 스르르 감기고 마는 잠의 무게처럼

사랑의 무게 또한 어쩔 수 없다.

이 무게를 매일 즐겁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4

어느새 내 안에 들어와 살고 있는 그.

이미 그의 말로 나의 말을 하고도 나는 놀라지 않는다.

오래된 결합에서 오는 물과 같은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

사람들은 이런 것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나는 늘 그가 시키는 대로 말할 뿐인데도 ···.

 

5

풀빛의 봄, 바다 빛의 여름, 단풍빛의 가을, 눈의 겨울 ···

사랑도 사계절처럼 돌고 도는 것.

계절마다 조금씩 다른 빛을 내지만 변함 없이 아름답다.

처음이 아닌데도 처음인듯 새롭다.

 

6

준다고 준다고 말로는 그러면서도

실은 더 많이 받고 싶은 욕심에 때로는 눈이 멀고,

그래서 혼자서도 부끄러워지는 것이 사랑의 병인가,

그러나 받은 사랑을 이웃과 나누어 쓸수록,

그 욕심은 조금씩 치유되는 게 아닐까.

 

7

쓰레기통 옆에 핀

보랏빛 엉겅퀴의

강인한 모습과도 같이,

 

진실한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당당하면서도 겸손하다.

 

8

사랑이란 말에는

 

태풍이 들어 있고,

화산이 들어 있다.

 

미풍이 들어 있고,

호수가 들어 있다.

 

9

사랑은 씀바귀 맛.

누구도 처음엔

그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가는 세월 아끼며,

조심스레 씹을수록

제 맛을 안다.

 

10

내가 그에게

보내는 사랑의 말은

 

오월의 유채꽃밭에

날아다니는 한 마리의 흰

나비와 같다.

 

수많은 나비들이

한데 어울려 춤을 추어도

내 모습을 용케 알아차린다.

 

11

사랑은

이사를 가지 않는

나의 집.

 

이곳에 오래 머물러,

많은 이웃을 얻었네.

​내가 이 집을 떠나고 나면

나는 금방 초라해지고 말지

 

12

사랑할 때 바다는 우리 대신 말해 주네.

밤낮 설레는 우리네 가슴처럼

 

숨찬 파도를 이끌며 달려오네.

우리가 주고받은 숱한 이야기들처럼 조가비들을

한꺼번에 쏟아놓고,

 

저만치 물러서는 파도여, 사랑이여.

 

13

그에게서만은

같은 말을 수백 번 들어도 지루하지 않다.

그와 만나는 장소는

늘 같은 곳인데도 새롭기만 하다.

 

14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식물 세포처럼

사랑의 말과 느낌은 섬세하고 다채롭다.

 

15

꽃에게, 

나무에게, 

돌에게조차 

자꾸만 그의 이름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

 

​누가 묻지도 않는데도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하루에도 열두 번 알리고 싶은 마음.

사랑할수록 바보가 되는 즐거움.

 

16

어디서나 그를 기억하는

내 가슴 속에는, 논바닥에 심겨진 어린 모처럼

 

새파란 희망의 언어들이

가지런히 싹을 틔우고 있다.

 

​매일 물을 마시며, 나와 이웃의

밥이 될 기쁨을 준비하고 있다.

 

17

사랑이 나에게 바다가 되니

나는 그 바다에 떨어져

 

녹아내리는 

한 방울의 물이 되어 사네.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태어남을 거듭하는

 

한 방울의 물 같은 사랑도

영원하다는 것을

 

나는 당신 안에 흐르고 또 흐르는

물이 되어 생각하네.

 

18

사랑은 파도타기.

일어섰다 가라앉고

의심했다 확신하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파도 파도 파도.

 

 

 

사랑의 말

이해인

 

1

시냇물에 잠긴 하얀 조약돌처럼

깨끗하고 단단하게 마음속 깊이

숨어 있던 그 귀한 말

 

사랑의 말을 막상

입으로 뱉고 나면

왠지 쓸쓸하다

 

처음의 고운 빛깔이

조금은 바랜 것 같은 아쉬움을

어쩌지 못해 공연히 후회도 해본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더 듣고 싶어 모든 이가 기다리고

애태우는 사랑의 말

 

이 말은 가장 흔하고

귀하면서도

강한 힘을 지녔다 

 

 

2

여기는 바다

 

고통 속에 진주를 만드는

기다림의 세월

 

마르지 않은 눈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기는 산

 

뿌리 깊은 나무를 키우는

흙냄새 가득한 기도

 

끝없는 설레임의 웃음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사람들이여

이해인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사랑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는 두 사람이

꽃과 나무처럼 걸어와서

서로의 모든 것이 되기 위해

오랜 기다림 끝에 혼례식을 치르는 날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라

둘이 함께 하나 되어 사랑의 층계를

오르려는 사랑의 사람들이여

하얀 혼례복처럼 아름답고 순결한

기쁨으로 그대들의 새 삶을 채우십시오

 

어느 날 시련의 어둠이 닥치더라도

함께 참고 함께 애써 더욱 하나 되는

사랑의 승리자가 되어 주십시오

 

서로가 서로에게 문을 열어

또 한 채의 사랑의 집'을 이 세상에

지으려는 사랑의 사람들이여

사랑할수록 애틋하게 타오르는

그리움과 목마름으로 마침내는

주님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보는

고운 사람들이여

 

어떠한 슬픔 속에서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은

오직 사랑만이 기도이며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그대들의 삶으로 보여 주십시오

 

 

 

사랑 키우기

이해인

 

화분에 물을 주어 고운 꽃을 피워내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사랑이란 물을 주어

우리의 존재를 꽃피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사랑하는 일

이 또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자기를 올바로 사랑하지 않고는

남을 사랑할 수도 없으며

현재의 삶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털실

이해인

 

당신을 향한 사랑의 털실을

감다보면 하루가 갑니다

잘못 감긴 것 같아 털실을

풀다보면 또 하루가 갑니다

감거나 풀거나 변함없는 건

사랑

아무것도 뜨지 못한 채

또 하루를 보냅니다

그래도 기쁩니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중(中)에서

이해인 

 

요즘 내가 가장 부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밝은 표정, 밝은 말씨로

 

옆 사람까지도 밝은 분위기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직접 만나거나 전화로 이야기를 나눌 때

​한결같이 밝은 음성으로

 

정성스럽고 친절한 말씨를 쓰는 

몇 사람의 친지를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가 몹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음을

​이쪽에서 훤히 알고 있는데도

 

여전히 밝고 고운 말씨를 듣게 되면 ​무슨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느냐고 묻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말은 마치 노래와 같은 울림으로

​하루의 삶에 즐거움과 활기를 더해 주고

 

맑고 향기로운 여운으로 오래 기억됩니다.

​상대가 비록 마음에 안드는 말로

 

자신을 성가시게 할 때조차도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적당히 맞장구치며

 

성실한 인내를 다하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자기 자신의 기분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을 먼저

헤아리고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이 느껴지는 말씨,

 

이기심과는 거리가 먼 인정 가득한 말씨는

​우리에게 언제나 감동을 줍니다.

 

​자기가 속상하고 우울하고 화가 났다는 것을 핑계로

​우리는 얼마나 자주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말씨로

 

주위의 사람들까지도 우울하고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 충고한다고 하면서 ​얼마나

냉랭하고 모진 말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곤 하는지

이러한 잘못을 거듭해 온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새삼 부끄러워집니다.

 

​금방 후회할 줄 알면서도

생각 없이 말을 함부로 내뱉은 날은

 

내내 불안하고 잠시라도 편치 않음을

나는 여러 차례 경험하였습니다.

 

뜻깊고 진지한 의미의 언어라기보다는

​가볍고 충동적인 지껄임과 경박한 말 놀음이

 

더 많이 난무하는 듯한

요즘 시대를 살아오면서

 

참으로 마음을 정화시켜 줄 고운 말,

밝은 말, 참된 말이 그리워집니다.

 

 

 

사르비아의 노래

이해인

 

저 푸른 가을 하늘

물 같은 서늘함으로

내 사랑의 열도(熱度) 높음을

식히고 싶다

 

아무리 아름다운 상처라지만

끝내는 감당 못 할

사랑의 출혈(出血)

이제는 조금씩

멈추게 하고 싶다

 

바람아

너는 알겠니?

 

네 하얀 붕대를 풀어

피투성이의 나를

싸매다오

 

불같은 뜨거움으로

한여름을 태우던

나의 꽃 심장이

너무도 아프단다, 바람아

 

 

 

사막에서 - death valley에서

이해인

 

불볕 속에

숨이 막혔습니다

 

모래바람 속에서

방향을 잃었습니다

 

필요한 것이

너무 많은 곳에서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생각나질 않네요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우는 이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며

목이 마릅니다

 

사막을 끝까지 가면

물동이를 들고

당신이 계시리라는 확신

신기루일지라도

오직 희망만이

양식입니다

 

어쩌다 마주치는

사막의 풀처럼

흔적을 드물게 남기며

그러나

뜨겁게 살아야겠습니다

 

 

 

산에서 큰다

이해인

 

나는

산에서 큰다

 

언제나 듣고 싶은

그대의 음성

대답 없는 대답

침묵의 말씀

 

고개 하나

까딱 않고

빙그레 웃는 산

 

커단 가슴 가득한

바위

풀향기

덤덤한 얼굴빛

침묵의 성자

 

인자한 눈빛으로

나를 달래다

호통도 곧잘 치시는

오라버니 산

 

오늘도

끝없이

산에서 큰다

 

 

 

산 위에서

이해인

 

그 누구를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 들 때

그 마음을 묻으려고 산에 오른다.

 

산의 참 이야기는 산만이 알고

나의 참 이야기는 나만이 아는 것

세상에 사는 동안 다는 말 못할일 들을

사람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 품고 산다.

 

그 누구도 추측만으로

그 진실을 밝혀낼 수 없다

꼭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기 어려워

 

산에 오르면

산은 침묵으로 튼튼해진

 

그의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아준다.

좀더 참을성을 키우라고

내 어깨를 두드린다.

 

 

 

산을 보며

이해인

 

늘 그렇게

고요하고 든든한

푸른 힘으로 나를 지켜주십시오

 

기쁠 때나 슬플 때

나의 삶이 메마르고

참을성이 부족할 때

오해받은 일이 억울하여

누구를 용서할 수 없을 때

당신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이름만 불러도 희망이 생기고

바라만 보아도 위로가 되는 산

그 푸른 침묵 속에

기도로 열리는 오늘입니다

 

다시 사랑할 힘을 주십시오

 

 

 

산처럼 바다처럼

이해인

 

산을 좋아하는 친구야

초록의 나무들이

초록의 꿈 이야기를 솔솔 풀어내는

산에 오를 때마다

나는 너에게 산을 주고 싶다

수많은 나무들을 키우며 묵묵한 산

한결같은 산처럼 참고 기다리는 마음을

우리 함께 새롭히자

 

바다를 좋아하는 친구야

밀물과 썰물이 때를 따라 움직이고

파도에 씻긴 조가비들이

사랑의 노래처럼 널려있는

바다에 나갈 때 마다

나는 너에게 바다를 주고 싶다

모든 것을 받아 안고 쏟아낼 줄 아는 바다

바다처럼 넉넉하고 자혜로운 마음을

우리 함께 배워가자

 

젊음 하나만으로도

나를 기쁨에 설레이게 하는

보고 싶은 친구야

선한 것, 진실한 것, 아름다운 것을

목말라 하는 너를 그리며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

산의 깊은 마음과 바다의 어진 마음으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

 

 

 

살아가는 모든 날들이

이해인

 

큰 수술 뒤에 잠에서 깨어난 환자가

회복실에서 처음으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새삼 감격스러워하듯이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자

 

살아가는 모든 날들이

나에겐 새 날이요

보물로 꿰어야 할 새 시간이요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임을

오늘도 잊지 말자

 

 

 

살아 있는 날은

이해인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깍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깍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 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이해인

 

내 몸 속에 길을 낸 혈관 속에

사랑은 살아서 콸콸 흐르고 있다

 

내 허전한 머리를 덮은 머리카락처럼

죽음도 검게 일어나

나와 함께 매일을 빗질하고 있다

 

깎아도 또 생기는 단단한 껍질

남모르게 자라나는 나의 손톱처럼

보이지 않는 신앙도

보이지 않게 크고 있다

 

살아 있는 세포마다

살아 있는 사랑

살아 있는 슬픔을

아무도 셀 수가 없다

 

산다는 것은

흐르면서 죽는 것

보이지 않게

 

조금씩 흔들리며

성숙하는 아픔이다

 

 

 

삶과 시

이해인

 

시를 쓸 때는

아까운 말들도

곧잘 버리면서

 

삶에선

작은 것도 버리지 못하는

나의 욕심이

부끄럽다

 

열매를 위해

꽃자리를 비우는

한 그루 나무처럼

 

아파도 아름답게

마음을 넓히며

열매를 맺어야 하리

 

종이에 적지 않아도

나의 삶이 내 안에서

시로 익어가는 소리를 듣는

맑은 날이 온다면

 

나는 비로소

살아 있는 시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

 

 

 

삶의 층계에서

이해인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

무언가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은

어떤 기대와 호기심

 

층계를 마주치면 문득 오르고 싶어진다

한 걸을 한 걸음

천천히 생각하며 오를 수 있는 돌계단

 

층계는 만남과 기쁨과 기다림의 설레임이

가득한 장소, 때로는 이별의 슬픔이 깔린 장소

 

지금껏 걸어온 삶의 길 삶의 층계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이별했을까

 

 

 

상사화

이해인

 

아직 한 번도

당신을 직접 뵙진 못했군요

 

기다림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기다려보지 못한 이들은 잘 모릅니다

 

좋아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

어긋나보지 않은 이들은 잘 모릅니다

 

날마다 그리움으로 길어진 꽃술

내 분홍빛 애틋한 사랑은

언제까지 홀로여야 할까요?

 

오랜 세월 침묵 속에서

나는 당신께 말하는 법을 배웠고

어둠 속에서 위로 없이도 신뢰하는 법을

익혀 왔습니다

 

죽어서라도 꼭 당신을 만나야지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

오늘은 어제보다 더욱 믿으니까요

 

 

 

상처의 교훈

이해인

 

마주하긴 겁이 나서

늦게야 대면하는 내 몸의 상처

 

​상처는 소리 없이 아물어

마침내 고운 꽃으로 앉아있네

 

​아프고 괴로울 때

피 흘리며 신음했던 나의 상처는

 

​내 마음을 넓히고

지혜를 가르쳤네

 

​형체를 알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지 못해

 

힘들었던 날들도 이제는 내가

고운 꽃으로 피워낼 수 있으리

 

 

 

이해인

 

아침마다

나를 깨우는 부지런한 새들

 

가끔은 편지 대신

이슬 묻은 깃털 한 개

나의 창가에 두고 가는 새들

 

단순함, 투명함, 간결함으로

나의 삶을 떠받쳐준

고마운 새들

 

새는 늘 떠날 준비를 하고

나는 늘 남아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새가 있는 언덕길에서

이해인

 

새야, 네가 앉아 있는 푸른 풀밭에

나도 동그마니 앉아 있을 때,

 

네 조그만 발자국이 찍힌

하얀 모래밭을 맨발로 거닐 때

나도 문득 한 마리의 새가 된다.

 

오늘은 꽃향기 가득한 언덕길을 오르다가

네가 떨어뜨린 고운 깃털 한 개를 주으며

미움이 없는 네 눈길을 생각한다.

 

지금은 네가 어느 하늘을

날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주운 따스하고 보드라운 깃털 한 개로

넌 어느새 내 그리운 친구가 되었구나.

 

넌 이해할 수 있니?

늘 가까이 만나 오던 이들도

어느 순간 왠지 서먹해지고

 

처음 대하는 이도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것처럼

정답게 느껴질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말이야

 

네가 무심히 흘리고 간 한 개의 깃털이

나의 시집 갈피에서 푸드득 날개소리를 내듯이

 

내가 이 땅에 흘려 놓은 시의 조각들이

어디선가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니

 

아니 하늘로 영원히 오르기 전에

사랑하는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이미 새가 될 수 있다면....

 

너를 조용히 생각하는 오늘밤은

나의 삶도 더욱 경이롭게 느껴져

잠이 오질 않는구나

 

내 삶의 숲에는 아직도

숨어 있는 보물들이 너무 많아

나는 내내 콩새가슴으로 설레는구나

 

 

 

새들에게 쓰는 편지

이해인

 

철새들에게 - 순천만에서

 

검은머리물떼새

검은머리갈매기

혹부리오리

흑두루미

 

겨울 갈대밭에서

가만히 출석을 불러보네

 

너무 먼 길 오느라

멀미나진 않았니?

 

얇은 날갯죽지와

가는 발목이 상하진 않았니?

 

텅 빈 들녘 어디가

그리 좋으니?

가야 할 길을 못 가고

늘 망설이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떠나는 법을 가르쳐주렴

말보다 힘찬 날갯짓으로

희망을 보여주는 새야

 

바라보기만 해도

아련한 그리움으로

눈에 밟히는 여리고도 당찬 새야

 

 

 

새롭게 사랑하는 기쁨으로 - 자원 봉사자 모임에서, 1997년 2월

이해인

 

우리는 늘 배웁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찾아내서 할 일들이

생각보다 많이 숨어 있음을,

물방울처럼 작은 힘도 함께 모이면

깊고 큰 사랑의 바다를 이룰 수 있음을

오늘도 새롭게 배웁니다

 

우리는 늘 돕습니다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어버이 마음, 친구의 마음, 연인의 마음으로

성실한 책임과 친절한 미소를 다해

하찮은 일도 보석으로 빛내는 도우미로

자신을 아름답게 갈고 닦으렵니다

 

우리는 늘 고마워합니다

사랑으로 끌어안아야 할 우리 나라, 우리 겨레

우리 가족, 우리 이웃이 곁에 있음을,

가끔 잘못하고 실수하는 일이 있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과 용기가

우리를 재촉하고 있음을 고마워합니다

 

우리는 늘 기뻐합니다

서로 참고, 이해하고, 신뢰하는 마음에만

활짝 열리는 사랑과 우정의 열매로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는 축복을,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은혜를

함께 기뻐합니다

 

우리는 늘 기도합니다

봉사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사랑을 거스르고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는 걸림돌이 아니라

겸손한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에 대해서 말만 많이 하는 이론가가 아니라

묵묵히 행동이 앞서는 사랑의 실천가가 되도록

깨어 기도합니다

 

우리는 늘 행복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걷는 이 길에서

메마름을 적시는 자비의 마음,

어둠을 밝히는 사랑의 손길이

더 많이 더 정성스럽게

빛을 밝히는 세상에 살고 있어 행복합니다

그래서 힘겨운 일들 우리에게 덮쳐와도

세상은 아직 아름답다고 노래하렵니다

이웃은 사랑스럽고, 우리도 소중하다고

겸허한 하늘빛 마음으로 노래하렵니다

 

모두 한마음으로 축복해주십시오

새롭게 사랑하는 기쁨으로

새롭게 선택한 사랑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

하얀빛, 하얀 소금 되고 싶은 여기 우리들을......

 

 

 

새벽 창가에서

이해인

 

하늘

그 푸른 둘레에

조용히

집을 짓고 살자 했지

 

귤빛 새벽이

어둠을 헹구고

눈을 뜨는 연못가

 

순결은 빛이라 이르시던

당신의 목소리

바람 속에 찬데

 

나의 그림자만 데리고

저만치 손 흔들며

앞서가는 세월

 

나의 창문엔

때로 어둠이 내렸는데

화려한 꽃밭에는

비도 내렸는데

 

못가엔

꿈을 심고 살자 했지

 

백합과 촛불 들고 가는

새벽 길에

기도를 뿌리면

 

돌을 던질 수 없는

침묵의 깊은 바다

내 마음에

태양이 뜬다

 

꽃들이 설레이며

웃고 있는 밭 사이

창은 하늘을 마시고

 

내가 작아지는

당신의 길

새벽은 동그란 연못

 

 

 

새해 마음

이해인

 

늘 나에게 있는

새로운 마음이지만

오늘은 이 마음에

색동옷 입혀

새해 마음이라 이름 붙여줍니다

 

일년내내

이웃에게 복을 빌어주며

행복을 손짓하는

따뜻한 마음

 

작은 일에도 고마워하며

감동의 웃음을

꽃으로 피워내는

밝은 마음

 

내가 바라는 것은

남에게 먼저 배려하고

먼저 사랑할 줄 아는

넓은 마음

 

다시 오는 시간들을

잘 관리하고 정성을 다하는

성실한 마음

 

실수하고 넘어져도

언제나 희망으로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있는

겸손한 마음

 

곱게 설빔 차려입은

나의 마음과 어깨동무 하고

새롭게 길을 가니

새롭게 행복합니다.

 

 

 

새해 새 아침

이해인

 

새해의 시작도

새 하루부터 시작됩니다

 

시작을 잘해야만

빛나게 될 삶을 위해

겸손히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아침이여

 

어서

희망의 문을 열고

들어오십시오

 

사철 내내 변치 않는

소나무빛 옷을 입고

기다리면서 기다리면서

우리를 키워온 희망

 

힘들어도 웃으라고

잊을 것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어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희망은 자꾸만 우리를 재촉하네요

 

어서

기쁨의 문을 열고

들어오십시오

 

오늘은 배추밭에 앉아

차곡차곡 시간을 포개는 기쁨

흙냄새 가득한

싱싱한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네요

 

땅에 충실해야 기쁨이 온다고

기쁨으로 만들 숨은 싹을 찾아서

잘 키워야만 좋은 열매 맺는다고

조용조용 일러주네요

 

어서

사랑의 문을 열고

들어오십시오

 

언제나

하얀 소금밭에 엎드려

가끔은 울면서

불을 쪼이는 사랑

 

사랑에 대해

말만 무성했던 날들이 부끄러워

울고 싶은 우리에게

소금들이 통통 튀며 말하네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여기저기 팽개쳐진 상처들을

하얀 붕대로 싸매주라고

 

새롭게 주어진 시간

만나는 사람들을

한결같은 따뜻함으로 대하면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눈부신 소금꽃이 말을 하네요

 

시작을 잘 해야만

빛나게 될 삶을 위해

설레이는 첫 감사로 문을 여는 아침

천년의 기다림이 비로소 시작되는

하늘빛 은총의 아침

서로가 복을 빌어주는 동안에도

이미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새해 새 아침이여.

 

 

 

새해 아침에

이해인

 

창문을 열고

밤새 내린 흰 눈을 바라볼 때의

그 순결한 설레임으로

사랑아

새해 아침애도

나는 제일 먼저

네가 보고 싶다

늘 함께 있으면서도

새로이 샘솟는 그리움으로

네가 보고 싶다

새해에도 너와 함께

긴 여행을 떠나고

가장 정적한 시를 쓰고

가장 뜨거운 기도를 바치겠다.

 

내가 어둠이어도

빛으로 오는 사랑아

말은 필요 없어

내 손목을 잡고 가는 눈부신 사랑아

겨울에도 돋아나는

내 가슴 속 푸른 잔디 위에

노란 민들레 한 송이로

네가 앉아 웃고 있다

날마다 나의 깊은 잠을

꿈으로 깨우는 아름다운 사랑아

세상에 너 없이는

희망도 없다

새해도 없다

 

내 영혼 나비처럼

네 안에서 접힐 때

나의 새해는 비로소

색동의 설빔을 차려 입는다

내 묵은 날들의 슬픔도

새 연두 저고리에

자줏빛 끝동을 단다

아름다운 사랑아 

 

 

 

새해에는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이해인

 

평범하지만

가슴엔 별을 지닌 따뜻함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신뢰와 용기로써 나아가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월의 보름달만큼만 환하고

둥근 마음 나날이 새로 지어먹으며

밝고 맑게 살아가는

"희망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너무 튀지 않는 빛깔로

누구에게나 친구로 다가서는 이웃

그러면서도 말보다는

행동이 뜨거운 진실로 앞서는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오랜 기다림과 아픔의 열매인

마음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화해와 용서를 먼저 실천하는

"평화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일상에서도

새롭게 이어지는 고마움이 기도가 되고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아 지루함을 모르는

"기쁨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새해의 기도

이해인

 

1

1월에는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그동안 쌓인 추한 마음 모두 덮어 버리고

이제는 하얀 눈처럼 깨끗하게 하소서

 

2월에는

내 마음에 꽃이 싹트게 하소서

하얀 백지에 내 아름다운 꽃이

또렷이 그려지게 하소서

 

3월에는

내 마음에 믿음에 믿음이 찾아오게 하소서

의심을 버리고 믿음을 가짐으로

삶에 대한 기쁨과 확신이 있게 하소서

 

4월에는

내 마음이 성실의 의미를 알게 하소서

작은 일 작은 한 시간이 우리 인생을 결정하는

기회임을 알게 하소서

 

5월에는

내 마음이 사랑으로 설레게 하소서

우리 삶이 아름다운 사랑 안에 있음을 알고

사랑으로 가슴이 물들게 하소서

 

6월에는

내 마음이 겸손하게 하소서

남을 귀히 여기고 자랑과 교만에서

내 마음이 멀어지게 하소서

 

7월에는

내 마음이 인내의 가치를 알게 하소서

어려움을 참고 오랜 기다림이 없는 열매는

좋은 열매가 아님을 알게 하소서

 

8월에는

내 마음에 쉼을 주소서

건강을 지키고 나와 남을 여유있게 볼 수 있는

쉼을 맞는 시간을 주소서

 

9월에는

내 마음이 평화를 느끼게 하소서

내 마음의 평화는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숙할 때 함께 자라는 것임을 알게 하소서

 

10월에는

내 마음이 은혜를 알게 하소서

나의 오늘이 있게 한 모든 이들의 은혜가

하나하나 생각나게 하소서

 

11월에는

내 마음이 욕심을 버리게 하소서

아직도 남아 있는

욕심과 미움과 갈등을 버리고

빈 마음을 바라보면서

만족하게 하소서

 

12월에는

내 마음에 감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계획한 일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지난해의 모든 것을

감사하게 하소서

 

 

2

코로나 위기 속에

어둡고 답답한 마음으로

한 해를 보내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무참하게 희생된

우리 가족 친지 이웃

 

수많은 의료진들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내며

제대로 된 애도조차 못 한

미안함과 회한으로

 

우리의 눈물은 아직도

마를 날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희망의 별을

찾아야 할지 몰라

 

마주 보는 웃음대신 탄식을 앞세우며

시시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웃음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푸르디 푸른 생명의 힘과

 

다른 이를 더 먼저 배려 할수 있는

사랑의 지혜를 주십시오

 

설레임과 반가움으로

한 해를 맞아야 할 우리 마음이

 

아직은 어둠 속에

두렵고 떨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다시 힘을 모아

희망을 향한 발걸음을 시작해야겠지요?

 

일상의 거리두기에서 배운

자신을 위한 절제와

이웃을 향한 그리움으로

더 넓은 사랑을 시작해야겠지요?

 

공간의 균을 소독하는 방역 뿐 아니라

어느 새 몰래 숨어들어 온

미움 탐욕 불신 분노 나태 등등

 

마음의 균도 제대로 소독하면서

진정한 참회의 기도로 거듭나는

 

코로나 수련생

치열한 구도자가 되어야겠지요?

 

하얀 소의 해라는 2021년

우리도 소처럼

 

어리석을만큼 우직하게

순하게 부지런하게

깨어살 수 있길 소망합니다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실한 참을성과 겸손함으로

 

가정 속의 나 나라 속의 나

세계 속의 나를 다시 한 번

샘솟는 희망과 용기로 길들이며

 

2021년을 하나의 선물로

받아 안을 수 있길 원합니다

 

그 어느 날

고난과 시련의 절망스런 위기를

희망으로 극복 한 후의

 

가장 크고 밝은 웃음꽃이

우리 모두의 것일 수 있도록!

 

 

 

새해의 약속은 이렇게

이해인

 

또 한 해를 맞이하는 희망으로

새해의 약속은 이렇게 시작될 것입니다

 

'먼저 웃고

먼저 사랑하고

먼저 감사하자'

 

안팎으로 힘든 일이 많아

웃기 힘든 날들이지만

내가 먼저 웃을 수 있도록

웃는 연습부터 해야겠어요

 

우울하고 시무룩한 표정을 한 이들에게도

환한 웃음꽃을 피울 수 있도록

아침부터 밝은 마음 지니도록 애쓰겠습니다

 

때때로 성격과 견해 차이로

쉽게 친해지지 않는 이들에게

사소한 오해로 사이가 서먹해진 벗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하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

우두커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가가는 노력의 열매가 사랑이니까요

상대가 나에게 해주기 바라는 것을

내가 먼저 다가가서 해주는

겸손한 용기가 사랑임을 믿으니까요

차 한 잔으로, 좋은 책으로, 대화로

내가 먼저 마음 문을 연다면

나를 피했던 이들조차 벗이 될 것입니다

 

습관적인 불평의 말이 나오려 할 땐

의식적으로 고마운 일부터 챙겨보는

성실함을 잃지 않겠습니다

 

평범한 삶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이야말로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가꾸어주는

소중한 밑거름이니까요

감사는 나를 살게 하는 힘

감사를 많이 할수록

행복도 커진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그동안 감사를 소홀히 했습니다

 

해 아래 사는 이의 기쁨으로

다시 새해를 맞으며 새롭게 다짐합니다

'먼저 웃고

먼저 사랑하고

먼저 감사하자'

 

그리하면 나의 삶은

평범하지만 진주처럼 영롱한

한 편의 시(詩)가 될 것입니다

 

 

 

새해 첫날의 소망

이해인

 

가만히 귀기울이면

첫눈 내리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은

하얀 새 달력 위에

그리고 내 마음 위에

 

바다 내음 풍겨오는

푸른 잉크를 찍어

희망이라고 씁니다

 

창문을 열고

오래 정들었던 겨울 나무를 향해

'한결같은 참을성과 고요함을 지닐 것'

이라고 푸른 목소리로 다짐합니다

 

세월은 부지런히

앞으로 가는데

나는 게으르게

뒤처지는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후회하며

올려다본 하늘에는

둥근 해님이 환한 얼굴로

웃으라고 웃으라고

나를 재촉합니다

 

너무도 눈부신 햇살에

나는 눈을 못 뜨고

해님이 지어주는

기쁨의 새 옷 한 벌

우울하고 초조해서 떨고 있는

불쌍한 나에게 입혀 줍니다

 

노여움을 오래 품지 않는 온유함과

용서에 더디지 않은 겸손과

감사의 인사를 미루지 않는 슬기를 청하며

촛불을 켜는 새해 아침

나의 첫 마음 또한

촛불만큼 뜨겁습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어디서나 평화의 종을 치는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모든 이와 골고루 평화를 이루려면

좀 더 낮아지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겸허히 두 손 모으는

나의 기도 또한 뜨겁습니다

 

진정 사랑하면

삶이 곧 빛이 되고 노래가 되는 것을

나날이 새롭게 배웁니다

욕심 없이 사랑하면

지식이 부족해도

지혜는 늘어나 삶에 힘이 생김을

체험으로 압니다

 

우리가 아직도 함께 살아서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주고받는

평범하지만 뜻 깊은 새해 인사가

이렇듯 새롭고 소중한 것이군요

서로에게 더없이 다정하고

아름다운 선물이군요

 

이 땅의 모든 이를 향한

우리의 사랑도

오늘은

더욱 순결한 기도의 강으로

흐르게 해요, 우리

 

부디 올 한 해도

건강하게 웃으며

복을 짓고 복을 받는 새해 되라고

가족에게 이웃에게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노래처럼 즐겁게 이야기해요, 우리

 

 

 

색연필

이해인

 

햇빛이 잘 들어오는 창가에서

내 소중한 친구가

 

먼 곳으로 떠나며 선물로 건네준

색연필 한 다스를 깎았습니다

빨강, 파랑, 연두, 초록, 보라...

 

몇년간 내가 연필을 깎지않고

서랍 깊숙히 넣어 두었듯이

 

오랫동안 절제하며 접어두었던

그리움이 이제는 빛깔마다

살아서 출렁입니다.

 

 

 

서시(序詩)

이해인

 

당신을 위한 나의 기도가

그대로

한 편의 시(詩)가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 숨쉬는 나의 매일이

읽을수록 맛드는

한 편의 시(詩)가 되게 하소서

 

때로는 아까운 말도

용기 있게 버려서 더욱 빛나는

한 편의 시(詩)처럼 살게 하소서

 

 

 

석류

이해인

 

참았다가

참았다가

터지는 웃음소리

 

바람에 익힌

가장 눈부신 환희를

엎지르리라

 

촘촘히 들어박힌

진홍의

찬미기도

 

껍질째로 쪼개어 준

가을볕

바람이 좋아

 

까르르 쏟아지는

찬란한

웃음소리

 

 

 

석류꽃

이해인

 

지울 수 없는

사랑의 화인(火印)

가슴에 찍혀

 

오늘도

달아오른

붉은 석류꽃

 

황홀하여라

끌 수 없는

사랑

 

초록의 잎새마다

불을 붙이며

꽃으로 타고 있네

 

 

 

석류의 말

이해인

 

감추려고

감추려고

애를 쓰는데도

 

어느새

살짝 삐져나오는

이 붉은 그리움은

제 탓이 아니에요

 

푸름으로

눈부신

가을 하늘 아래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터질 것 같은 가슴

 

이젠 부끄러워도

할 수 없네요

 

아직은

시고 떫은 채로

그대를 향해

터질 수밖에 없는

 

이 한 번의 사랑을

부디 아름답다고

말해주어요

 

 

 

선물의 집

이해인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은

바닥이 나지 않는 선물의 집

무엇을 줄까

어렵게 궁리하지 않아도

서로를 기쁘게 할 묘안이

끝없이 떠오르네

 

다른 이의 눈엔 더러

어리석게 보여도 개의치 않고

언어로, 사물로 사랑을 표현한다

마침내는 존재 자체로

선물이 되네, 서로에게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은

괴로움도 달콤한 선물의 집

 

이 집을 잘 지키라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준 것이겠지?

 

 

 

선인장

이해인

 

사막에서도

나를

살게 하셨습니다

 

쓰디쓴 목마름도

필요한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내 푸른 살을

고통의 가시들로

축복하신 당신

 

피 묻은

인고의 세월

견딜 힘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그 어느 날

 

가장 긴 가시 끝에

가장 화려한 꽃 한 송이

피워 물게 하셨습니다

 

 

 

선인장의 고백

이해인

 

하나뿐인 사랑조차

고단하고 두려울 때가 있어요

 

​황홀한 꽃 한 송이

더디 피워도 좋으니

 

조금 더 서늘한 곳으로

날 데려가주어요

 

​목마르지 않을

지혜의 샘 하나 가슴에 지니고

 

이젠 그냥 그대 곁에서 조금 더

편히 쉬고 싶음을 용서해주어요

 

 

 

설겆이

이해인

 

살아서 아침을 맞고

또 밤을 보내듯

살아서 밥을 먹고

그릇을 치우네

 

크고 작은 빈 그릇에 담겼던

내 하루의 언어와 사고를

즐겁게 정돈하는 시간

 

이빠진 것들은 따로 치우고

깨어진 것들은 내버리면서

다시 만나는 나의 모습

 

행주로 그릇을 닦아

찬장에 넣듯이

잃었던 질서를 챙겨

마음 속에 포개 넣네

 

그릇을 닦으며

생활이 노래가 되듯

열심히 하루를 치우는

나의 손끝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내일의 희망

 

 

 

섬에서

이해인

 

나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잠시 비켜 있으려고

여기 왔습니다

 

비겁하게

도망친 것은 아니고

즐겁게 숨었지요

 

절대 침묵으로

사랑하는 일이

아직은 힘들지만

여기서 배우겠습니다

 

다시

뭍으로 나가기 위해

바위로 엎디어 있으렵니다

바위 끝에 부서져서

눈물을 노래로 일으키는

파도가 되렵니다

 

 

 

성 금요일의 기도

이해인

 

오늘은 가장 깊고 낮은 목소리로

당신을 부르게 해 주소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당신을 떠나 보내야 했던

마리아의 비통한 가슴에 꽂힌

한 자루의 어둠으로 흐느끼게 하소서

 

배신의 죄를 슬피 울던

베드로의 절절한 통곡처럼

나도 당신 앞에

겸허한 어둠으로 엎드리게 하소서

 

죽음의 쓴잔을 마셔

죽음보다 강해진 사랑의 주인이여

 

당신을 닮지 않고는

내가 감히 사랑한다고

뽐내지 말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했기에

더 깊이 절망했던 이들과 함께

오늘은 돌무덤에 갇힌

한 점 칙칙한 어둠이게 하소서

 

빛이신 당신과 함께 잠들어

당신과 함께 깨어날

한 점 눈부신 어둠이게 하소서

 

 

성서

이해인

 

내 일생을 바쳐 생명의 책인

성서를 읽습니다.

 

말씀을 물로 세례 받아

내 마음을 씻고

 

말씀을 불로 통회하며

내 죄를 태우고

 

말씀의 길 속에

삶의 방향을 맡기니

 

나도 어느새

길이 되는 꿈을 꿉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맛이 들어 할 말을 잃게 되는

 

성서의 만찬이여!

소금 같은 행복이여!

 

 

 

성지 순례기

이해인

 

떠나기도 전에 눈물이 나네요.

만나기도 전에 가슴이 뛰네요.

 

길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이

처음엔 낮설어도 금방 다 친구이고

천척이고 가족이 되네요.

 

예수님이 태어나서 사랑의 일을하고

사랑으로 죽으신 사랑의 땅에서

 

나의 기도는 말로는 다 못할

눈물일 뿐 침묵일 뿐.

 

발로 뛴 기도가 마음에 도달하여

거듭 난 기쁨이 갈릴리 호수로 넘쳐흐르네요.

 

아픔이 많아 더욱 거룩해진 땅에서

오늘도 새롭게 많은 이들의 기도가

연기처럼 피어오르네요.

 

성지에 다녀온 순례자의 마음으로

여생은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겠네요.

 

 

 

성탄 인사

이해인

 

사랑으로 태어난 예수 아기의

따뜻한 겸손함으로

가장 아름다운 인사를 나누어요 우리

오늘은 낯선 사람이 없어요

 

구세주를 간절히 기다려온

세상에게

이웃에게

우리 자신에게

두 팔 크게 벌리고

 

가난하지만 뜨거운 마음으로

오늘날만이라도

죄 없는 웃음으로

엠마누엘

엠마누엘

 

예수 아기가 누워 계셔

거룩한 집이 된 구유 앞에

우리 모두 동그란 마음으로 둘러서서

서로를 더욱 용서하고

서로를 더욱 신뢰하고

사랑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요

 

예수님을 닮은

평화의 사람으로 길을 가기 위해

오래오래 꺼지지 않는

등을 밝혀요 우리

주님이 주시는 믿음의 기름을

더욱 넉넉히 준비해요

 

엠마누엘

엠마누엘

예수 아기의 흠 없는 사랑 안에

새롭게 태어나요

 

 

 

성탄 편지

이해인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사랑하는 그대에게

제가 드릴 성탄 선물은

오래 전부터

가슴에 별이 되어 박힌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안에 꽃피고 열매 맺은

우정의 기쁨과 평화인 것을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아기예수의 탄생과 함께

갓 태어난 기쁨과 희망이

제가 그대에게 드리는

아름다운 새해 선물인 것을

 

 

 

소금 호수에서 - salt lake에서

이해인

 

나는

당신의 소금입니다

 

항상

짜게 남아 있으려니

쓰라림을 참아야 하고

그래서

편할 날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호수입니다

 

항상

고요하게 푸르게

깨어 있어야 하니

쉴 틈이 없습니다

 

사랑은

고달파도 아름다운

소금 호수라고

 

여기

소금 호수에 와서

다시 듣는 기쁨이여

 

 

 

소나무 연가

이해인

 

늘 당신께 기대고 싶었지만

기댈 틈을 좀체 주지 않으셨지요

 

험한 세상 잘 걸어가라

홀로서기 일찍 시킨

당신의 뜻이 고마우면서도

가끔은 서러워 울었습니다

 

한결같음이 지루하다고 말하는 건

얼마나 주제 넘은 허영이고

이기적인 사치인가요

 

솔잎 사이로

익어가는 시간들 속에

이제 나도 조금은

당신을 닮았습니다

 

나의 첫사랑으로

새롭게 당신을 선택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의무가 아니라

흘러넘치는 기쁨으로

당신을 선택하며

온몸과 마음이

송진 향내로 가득한 행복이여

 

 

 

소녀들에게

이해인

 

헤어지고 나면

금방 다시 보고 싶은 그리움으로

너희의 고운 이름을 불러본다

 

마음이 답답할 때면

죄없이 맑아서 좋은

너희의 목소리를 그리워하며

하루의 창을 연다

 

진정 너희가 살아 있어

세상은 아직

향기로운 꽃밭임을 믿으며

희망의 꽃삽을 든다

 

혼돈과 불안의 시대를 살면서

자주 믿음이 흔들리다가도

너희를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하고 부드러워진단다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눈물 흘릴 줄 아는

따뜻함을 다시 배운단다

 

아직은 어둠을 모르는

그 밝은 웃음과 순결한 눈빛으로

부디 우리에게 힘이 되어다오

 

지혜와 성실의 기름으로

등불을 밝히고 우리를 이끄는

작은 길잡이가 되어다오

진리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말고

마침내는 선이 승리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열어가는

푸른 힘이 되어다오

 

사랑하는 소녀들아

밤하늘의 별들처럼

먼 데서도 우리를 비추어주는 너희

항상 꿈을 잃지 않는 너희가 있어

오늘도 기쁘단다, 우리는

새롭게 길을 간단다, 우리는

 

 

 

소녀에게

이해인

 

값비싼 보석보다도

파도에 씻긴 작은 조가비 한 개를

더 사랑하고

거액의 지폐보다도

한 장의 낙엽을 더 사랑할 수 있는

너의 순수를 누가 어리석다 할지라도

나는 그렇게 어리석은 기쁨만으로

평생을 살고 싶다

 

 

소망의 꽃씨

이해인

 

​서랍 속에 잠자던 꽃씨를 꺼내면

사랑하는 이의 묵은 편지를 읽는 것처럼

 

환한 불이 켜지는 추억의 창

코스모스 분꽃 봉숭아

이름을 찾아 꽃밭을 새로 마련하듯이

 

내 허전한 마음 밭에도

소망의 꽃씨들을 새로 뿌려야겠다.

 

 

 

손톱을 깎으며

이해인

 

언제 이만큼 자랐나?

나도 모르는 새

굳어 버린

나의 자의식

 

무심한 세월이 얹힌

마른 껍질을

스스로 깎아낸다

조심스럽게

 

언제 또 이만큼 자랐나?

나도 모르는 새

새로 돋는

나의 자의식

 

 

 

솔방울 이야기

이해인

 

1

뒷산에 오를 때마다

한두 개씩 보물을 줍듯

 

주워 온 솔방울들이

여러 개 모여 있는 나의 방안에서

 

그들의 산 이야길 들으며

산을 생각하는 파아란 기쁨

 

모두 다 저마다의 이야길 지녀

생긴 모습도 조금씩 다른 걸까

 

어느 날은 내게 숲속에서 만난

산꿩 가족의 정다운 모습과

 

도토리 줍는 다람쥐의

귀여운 몸짓을 이야기해 주고

 

또 어느 날은 내가 좋아하는

진달래나 철쭉의 다른 점을 이야기해 주었지

 

 

2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

눈이 아플 때면

 

정든 친구를 만나 보듯

솔방울을 본다

 

몸이 아파 하루종일

혼자 누워 있을 때도

 

송방울들 때문에

심심하지 않았지

 

그들의 바다 이야길 들으며

바다를 생각하는 파아란 기쁨

 

어느 날은 내게

소나무 꼭대기에서 바라보았던

 

파도와 수평선과 갈매기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 그리듯 이야기해 주고

 

또 어느 날은

바다에 펼쳐진 저녁 노을의 모습을

 

지는 해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해 주었지

 

내가 좋아하는 좋은 친구 솔방울들은

끝도 없는 이야기 방울이지

 

 

 

송년 기도 시

이해인

 

1 - 평화로 가는 길

이 둥근 세계에

평화를 주십사고 기도하지만

가시에 찔려 피나는 아픔은

날로 더해갑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왜 이리 먼가요

 

얼마나 더 어둡게 부서져야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는 건가요

 

멀고도 가까운 나의 이웃에게

가깝고도 먼 내 안의 나에게

맑고 깊고 넓은 평화가 흘러

마침내 하나로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울겠습니다

 

얼마나 더 낮아지고 선해져야

평화의 열매 하나 얻을지

오늘은 꼭 일러주시면 합니다

 

 

2 – 용서하기

용서해야만 평화를 얻고

행복이 오는 걸 알고 있지만

이 일이 어려워 헤매는 날들입니다

 

지난 1년 동안

무관심으로 일관한 시간들

무감동으로 대했던 만남들

무자비했던 언어들

무절제했던 욕심들

하나하나 돌아보며

용서를 청합니다

 

진정 용서받고 용서해야만

서로가 웃게 되는 삶의 길에서

나도 이제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따지지 않고 남겨두지 않고

일단 용서부터 하는 법을

산타에게 배우는 산타가 되겠습니다

 

 

3 - 가족을 생각하며

가족이 그립고

집이 그리운 계절입니다

집이 있어도 가족은 없는 쓸쓸함

가까운 사람들이 만든 외로움의 추위를

사랑으로 녹여야 할 계절입니다

 

놀러 오라 초대해 놓고도

막상 전화하면

집에 없는 사람들이 많아 슬퍼요

무에 그리 바쁜지 어디로 나갔는지

대답 좀 해 보실래요?

 

함께 웃고 함께 밥 먹는 기쁨으로

평범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삶의 주인공이 되세요

 

눈 내리는 12월엔

손님이 머물 빈방도 하나 준비하며

행복한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세요.

 

 

 

송년 엽서

이해인 

 

하늘에서 별똥별 한 개 떨어지듯

나뭇잎에 바람 한번 스쳐가듯

빨리 왔던 시간들은 빨리도 떠나가지요

 

나이 들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간다고 내게 말했던 벗이여

어서 잊을 것은 잊고 용서할 것은 용서하며

그리운 이들을 만나야겠습니다

 

목숨까지도 떨어지기 전 미루지 않고 사랑하는 일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내게 말했던 벗이여

 

눈길은 고요하게

마음은 뜨겁게

아름다운 삶을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 충실히 살다 보면

 

첫새벽의 기쁨이

새해에도 항상 우리 길을 밝혀 주겠지요

 

 

 

수국을 보며

이해인​

 

기도가 잘 안 되는

여름 오후

수국이 가득한 꽃밭에서

더위를 삭히네

 

꽃잎마다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흐르고

물 흐르는 소리

 

각박한 세상에도

서로 가까이 손 내밀며

원을 이루어 하나 되는 꽃

 

혼자서 여름을 앓던

내 안에도 오늘은

푸르디푸른

한 다발 희망이 되네

 

수국처럼 둥근 웃음

내 이웃들의 웃음이

꽃 무더기로 쏟아지네

 

 

 

수녀와 까치

이해인

 

네가

나의 창가에서 울던 날은

까치야

 

멀리 수녀원에 간

작은 언니한테서

솔향기 나는 편지를 받았단다

 

아침마다 즐겁게

찬미의 노래를 부른다는 언니

세상 욕심 다 버리고

흰 갓을 단 검은 옷에

하얀 수건을 쓰고 사는 언니는

꼭 너를 닮았구나

까치야

 

언니도 너처럼

누구에게나 기쁜 소식 전해 주는

한 마리의 새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까치야

 

 

 

수평선을 바라보며

이해인

 

당신은

늘 하늘과 맞닿아 있는

수평선과 같습니다

 

내가

다른 일에 몰두하다

잠시 눈을 들면

환히 펼쳐지는 기쁨

 

가는 곳마다

당신이 계셨지요

눈감아도 보였지요

 

한결같은 고요함과

깨끗함으로

먼데서도 나를 감싸주던

 

그 푸른 선은

나를 살게 하는 힘

 

목숨 걸고

당신을 사랑하길

정말 잘했습니다

 

 

 

숲에서 쓰는 편지

이해인

 

1

기다리다 못해

내가 포기하고 싶었던 희망

 

힘들고 두려워

다신 시작하지 않으리라

포기했던 사랑

 

신록의 숲에서

나는 다시 찾고 있네

 

순결한 웃음으로

멈추지 않는 사랑으로

신(神)과 하나 되고 싶던

여기 초록빛 잎새 하나

 

어느 날 열매로 익어 떨어질

초록빛 그리움 하나

 

 

2

꽃과 이별한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가며 행복한

나무들의 숨은 힘

 

뿌리 깊은 외로움을 견디어냈기에

더욱 깊이 뻗어가는 눈부신 생명이여

 

신록의 숲에 오면

우린 모두 말없는

초록의 사람들이 되네

 

사랑이 깊을수록

침묵하는 이유를

나무에게 물으며

말없음표 가득한

한 장의 편지를

그대에게 쓰고 싶네

 

어느새 숲으로 따라와

모든 눈물과 어둠을 말려주는

고마운 햇빛이여

 

잃었던 노래를 다시 찾은 나는

나무 같은 그대의 음성을

나무 옆에서 듣네

 

꽃에 가려져도 주눅들지 않고

늘 당당한 신록의 잎새들

잎새처럼 싱그러운 사랑을

우리도 마침내

삶의 가지 끝에

피워 올려야 한다고......

 

 

 

슬픈 날의 편지

이해인

 

모래벌판에 박혀있는

하얀 조가비처럼

내 마음속에 박혀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슬픔 하나

 

하도 오래되어 정든 슬픔

하나는 눈물로도 달래길 없고

그대의 따뜻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이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듯이

그들도 나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올 수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지금은 그저

혼자만의 슬픔 속에

치유된다는 믿음을

 

사랑하는 이여

항상 답답하시겠지만

오늘도 멀찍이서 지켜보며

좀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유 없이 거리를 두고

그대를 비켜 가는 듯한 나를

끝까지 용서해 달라는

이 터무니 없음을 용서하십시오

 

 

 

슬픔이 침묵할 때

이해인

 

슬픔을

잘 키워서

고요히 맛들이면

나도 조금은

거룩해질까

 

큰 소리로

남에게 방해될까

두려워하며

 

오래 익힌

포도주빛 향기로

슬픔이 침묵할 때

 

나는

흰 손으로

제단에 촛불을 켜리

 

눈물 가운데도

나를 겸손히 일어서게 한

슬픔에게 인사하리

 

 

 

시가 익느라고

이해인

 

오 그랬구나

 

내가 여러 날

열이 나고

시름시름 아픈 건

 

내 안에서 소리 없이

시가 익어가느라고 그런 걸

미처 몰랐구나

 

뜸들일 새 없이

밖으로 나올까

조바심하느라고

잠들지 못한 시간들

 

그래 알았어

익지 않은 것은

내놓지 않고 싶어

그러나 이왕 내놓은 걸

안 익었다고

사람들이 투정하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지?

 

 

 

시간의 얼굴

이해인

 

1

흰옷 입은 사제처럼 시간은 새벽마다 신의 이름으로 우주를 축성하네. 오래되어도 처음 본 듯 새로운 시간의 얼굴.

그는 가기도 하지만 오는 것임을 나는 다시 생각해 보네. 오늘도 그 안에 새로이 태어나네.

 

2

나이 들수록 시간은 두려움의 무게로 다가서지만 이제 그와는 못할 말이 없다.

슬픔도, 기쁨도, 사랑도, 미움도 그에겐 늘 담담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다.

 

3

내가 원치 않는 필름가지 낱낱이 현상해 두었다가, 어느 날 내게 짓궂게 들이대는 사진사처럼 시간 앞엔 나를 조금도 속일 수 없다.

그 앞엔 참 어쩔 수 없다.

 

4

어느 날, 시간이 내게 보낸 한 장의 속달 엽서를 읽는다.

'나를 그냥 보내 놓고 후회한다면 그건 네 탓이야, 알았지? 나를 사랑하지 않은 하루는 짠맛 잃은 소금과 같다니까, 알았지?'

 

5

내가 게으를 때, 시간은 종종 성을 내며 행복의 문을 잠거 버린다.

번번이 용서를 청하는 부끄러운 나와 화해한 뒤, 슬며시 손을 잡아 주는 시간의 흰 손은 따스하고 부드럽다.

 

6

자목련 꽃봉오리 속에 깊이 숨어 있던 시간들이 내게 사랑의 수화(手話)를 시작한다.

소리 없이도 우리는 긴말을 할 수 있다. 금방 친해질 수 있다.

 

7

기도 안에서 항아리에 가득 채워 둔 나의 시간들.

이웃을 위해 조금씩 그 시간을 꺼내 쓰면 어느새 신(神)이 오시어 내가 쓴 것보다 더 많은 분량을 채워 주신다.

 

8

내가 깨어 있을 때만 시간은 내게 와서 빛나는 소금이 된다. 염전(鹽田)에서 몇 차례의 수련을 끝내고 이제는 환히 웃는 하얀 결정체.

내가 깨어 있을 때만 그는 내게 와서 꼭 필요한 소금이 된다.

 

9

침묵의 시간이 피워 낸 한 송이의 눈부신 말의 꽃.

신(神)이 축복하신 그 희디흰 꽃잎 위에 오늘의 햇살과 함께 한 마리의 고운 나비를 앉히고 싶다.

 

10

어느 날, 시(詩)로 태어날 나의 언어들을 시간의 항아리에 깊이 묻어 놓고, 오래오래 기다리며 사는 기쁨.

한 잔의 향기로운 포도주로 시가 익기도 전에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시간은 돌보아 줄까.

썩어서야 향기를 풍길지 모르는 나의 조그만 언어들을.

 

11

한 마리의 자벌레처럼 나는 매일 시간을 재며 걷지만, 시간은 오히려 넉넉한 눈길로 나를 기다릴 줄 아네.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곱게 피었다 지는 한 송이 보랏빛 붓꽃처럼, 자연스럽게 왔다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조용한 시간이여.

 

12

시간은 날마다 지혜를 쏟아 내는 이야기책. 그러나 책장을 넘겨야만 읽을 수 있지.

살아 있는 동안 읽을 게 너무 많아 나는 행복하다. 살아 갈수록 시간에겐 고마운 게 무척 많다.

 

13

시간이 어둠 속에 나를 깨운다. 잠 속에 딩구는 어제의 꿈을 미련없이 털어내고, 신이 나를 기다리는 아침의 숲으로 가자고 한다.

 

14

종소리 속에 음악이 되어 실려 오는 수도원의 시간. 제단 위에 촛불로 펄럭이며 나를 부르는 시간.

높게, 넓게 그리고 더 깊이 기도할수록 시간은 거룩하다. 조용히 내게 와서 노래가 된다.

 

15

죽음이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린다 해도 진실히 사랑했던 그 시간만은 영원히 남지.

 

16

죽지 않고는 사랑을 증거할 수 없던 예수의 시간. 눈물 없이는 아들을 기다릴 수 없던 마리아의 시간.

의심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던 제자들의 시간. 믿고, 기다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힘들고 아픈 시간.

이 모든 시간들 속에 거듭거듭 태어나고 성장하는 너와 나의 삶.

 

17

시간이 내게 와서 말을 거네. 슬픔중에도 마음을 비우면 맑은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미래는 불확실해도 죽음만은 확실한 것이니 잘 준비하라고...

 

18

시간을 따라 끝까지 가면, 잘 참고 견디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는 예수의 말씀을 좀 더 깊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목숨 바친 봉헌의 삶이어도, 아직 자유인이 못 된 나는 때때로 울면서 하늘을 보네.

 

19

무서운 태풍 속에 나를 질책하던 시간의 목소리. 그 부드러움과 여유는 다 어디로 갔을까?

물난리에 휩쓸려 간 내 이웃들이 목쉰 소리로 나를 부르는 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흰 벽 위의 십자가만 바라보며 잠 못 이루네.

 

20

사랑하는 이의 무덤 위에, 시들지 않는 슬픔 한 송이 꽃으로 피워 놓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

사랑으로 피 흘리며 행복했던 우리의 지난 시간들이 노을 속에 타고 있네.

죽음이 끝이 아님을 믿고 또 믿으며 젖은 마음으로 내려오는 길.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 해. 기쁘게 살아야 해'라고 어느새 내 곁에 와서 신음하듯 뇌며 부축하는 오늘의 시간이여.

 

 

 

시에게

이해인

 

수십 년 동안

한번도 나를

배반한 적 없는 너는

나의 눈물겨운 첫사랑이다

 

밤새

파도로 출렁이며

나를 잠 못 들게 해도

반가운 얼굴

 

어쩌다

터무니없는 오해로

내가 외면을 해도

성을 내지 않고

슬며시 옆에 와서 버티고 섰는

아름다운 섬

 

아무리 고단해도

지치지 않는 법을

내게 가르쳐주는

보물섬이다, 너는

 

네가 있음으로 하여

더욱 살고 싶은 세상에서

이젠 나도

더 이상 너를

배반하지 않겠다

 

 

 

시의 집

이해인

 

나무 안에 수액이 흐르듯

내 가슴 안에는

늘 시가 흘러요

 

빛깔도 냄새도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어

그냥 흐르게 놔두지요

 

여행길에 나를 따라오는 달처럼

내가 움직일 때마다

조용히 따라오는......

 

슬플 때도

힘이 되어주는 시가 흘러

고마운 삶이지요

 

 

 

시인은

이해인

 

어디서나 문 열고

단 하나의 말을

찾아나선 이여

 

눈내리는 빈 숲의 겨울나무처럼

봄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이여

 

마음 붙일 언어의 집이 없어

때로는 엉뚱한 곳에

둥지를 트는 새여

 

즐거운 날에도

약간의 몸살기로

마음 앓는 이여

 

잠을 자면서도

다는 잠들지 않고

시의 팔을 베는

 

오늘도

고달픈 순례자여

 

 

 

시 읽기

이해인

 

이 땅의 시인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짜낸

시의 즙을

단숨에 마셔버리는 건

아무래도 미안하다

 

좋은 것일수록

아끼며 설레이며

조금씩 마시다 보면

나도 어느 날은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포도주빛 황홀한 예감

 

시의 음료에

천천히 취해

잠이 들면

시는 내 안에서

어느새

피와 물이 되어

내 영혼을 적신다

 

 

 

심부름

이해인

 

손님 맞이 심부름, 편지 쓰는 심부름, 전화 심부름,

외출하는 심부름. 여러 종류의 심부름 중에도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는 심부름은 제일 기쁘다.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선물 받는 상대에게 어울리는

물건들을 골라 고운 포장지나 꽃달력으로 만든 봉투에 넣고

리본을 매면서 사랑하는 마음, 고마운 마음을 새롭히는 일은

언제나 기쁘고 설레이는 작은 축제.

 

 

 

쌀 노래

이해인

 

나는 듣고 있네

내 안에 들어와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는

한 톨의 쌀의 노래

그가 춤추는 소리를

 

쌀의 고운 웃음

가득히 흔들리는

우리의 겸허한 들판은

꿈에서도 잊을 수 없네

 

하얀 쌀을 씻어

밥을 안치는 엄마의 마음으로

날마다 새롭게

희망을 안쳐야지

 

적은 양의 쌀이 불어

많은 양의 밥이 되듯

적은 분량의 사랑으로도

나눌수록 넘쳐나는 사랑의 기쁨

 

갈수록 살기 힘들어도

절망하지 말아야지

밥을 뜸들이는 기다림으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희망으로

내일의 식탁을 준비해야지

 

 

 

쓰레기통 앞에서

이해인

 

헝겊 조각 종이 조각 유리 조각

과일 껍질 계란 껍질 볼펜 껍질

 

버려진 것들로만 가득 찬

우리집 쓰레기통 앞에서

썩어 가는 냄새 대신

삶의 진한 향기를

맡을 때가 있습니다

 

아낌 없이 이용당하고

지금은 사라져 가는

 

주인에게 사랑받다가

지금은 잊혀져 가는

 

수많은 조각과 껍질들이

왠지 불쌍하게 느껴져서

마주하고 있으면

 

고마운 마음 전하지 못하고

버리는 일에만 급급해 미안했다고

작별 인사를 하노라면

 

어느새 웃으며

낮은 목소리의 노래를 부르는

정든 친구 같은 쓰레기들

 

 

 

쓸쓸한 날만 당신을

이해인

 

기쁜 날보다는

쓸쓸한 날만

당신을 찾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주님

 

살아온 날들의 부끄러움이

노오란 수세미꽃으로

마음의 벽을 타고 오르는 날

 

가까운 이들로부터

따돌림받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날

 

사랑의 충고보다는

가시 돋힌 비난의 말들로

조금은 상처를 받는 날......

 

제 마음은

하늘 바다에

고요한 섬으로 떠서

눈물을 흘립니다

 

어느 때보다도

맑고 겸허한 기도를

구름으로 피워올립니다

 

쓸쓸한 날이 꼭 필요함을

새롭게 알려주시는

저의 노래이신 주님

 

 

 

씨를 뿌리는 마음

이해인

 

밭에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 수 있어야겠다

 

매일이라는 나의 밭에

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여러 종류의 씨를 뿌린다

 

유익한 명상의 씨

아름다운 말의 씨를 뿌리기도 하고

 

가시돋힌 말의 씨

이기적인 무관심의 씨를 뿌리기도 한다

 

내가 매일 어떤 씨를 뿌리느냐에 따라

내 삶의 밭도 달라지는 것일 게다

 

 

 

아기는

이해인

 

실핏줄까지도

살짝 내비치는

연분홍 부드러움

 

아기의 얼굴은

꽃잎을 닮았네

 

웃을 때마다

꽃가루 날리며

펴져 가는

아기의 향기

 

말을 배우기 전의

어린 아기는

한 송이 꽃으로

누워서도 걸어오네

 

새근새근 숨소리는

실로폰 소리를 내며

음악이 되네

 

 

 

아름다운 기도

이해인

 

당신 앞엔

많은 말이 필요없겠지요, 하느님

 

그래도

기쁠 때엔

말이 좀더 많아지고

슬플 때엔

말이 적어집니다

 

어쩌다 한 번씩

마음의 문 크게 열고

큰 소리로

웃어보는 것

 

가슴 밑바닥까지

강물이 넘치도록

울어보는 것

 

이 또한

아름다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어도

괜찮겠지요?

 

 

 

아름다운 모습

이해인

 

친구의 이야기를

아주 유심히 들어주며

까르르 웃는 이의 모습

 

동그랗게 둘려앉아

서로 더 먹으라고 권하면서

열심히 밥을 먹는 가족들의 모습

 

어떤 모임에서

필요한 것 챙겨놓고

슬그머니 사라지는 이의

겸허한 뒷모습

 

좋은 책을 읽다가

열심히 메모하고

밑줄을 그으며

뜻깊은 미소를 짓는 이의 모습

 

조용히 고개 숙여

손님이 벗어놓은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이의 모습

 

"저기요. 사진 하나 찍어주세요!"

갑자기 부탁을 하였을 때도

귀찮아하지 않은 웃음으로

정성 다해 사진을 찍어주는 이의 모습

 

이웃이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제일 먼저 달려와서

말없이 손잡고 눈물 글썽이며

기도부터 해주는 이의 모습

 

누가 몸이 아프다고 하면

큰일 난 것처럼 한걸음에 달려와

자기 일처럼 내내 걱정하며

그의 곁을 지켜주는 이의 모습

 

 

 

아름다운 슬픔

이해인

 

이별보다 더 아름다운 슬픔은 없다.

수없이 망설이며 사랑하는 것들을 떠나보낸 뒤,

하얀 라일락 향기로 피어오른 나의 눈물,

이별은 야속하게 손을 내밀지만

서늘한 눈의 자비를 베풀며 떠나려 한다.

철없는 나를 거울 앞에 세워 새옷을 입혀놓고 돌아서는 친구.

내가 비로소 유순한 영혼으로 당신께 돌아와 문을 여는 자유.

사무치던 서러움은 새가 되리라.

훨훨 날으고 싶은 기도와 뉘우침의 산실(産室),

이별보다 더 후련한 비애는 없다.

 

 

 

아이의 창엔

이해인

 

아이가 유리창을 닦는다

그 위에

화안히 비쳐 오는

산 바다 하늘

 

닦으면 닦을수록

어쩌면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일까

 

산 숲에선

산새가 울고

 

멀리 구름 위에

아까부터

웃고 계신 해님

 

아침마다 하늘 보는

아이의 까아만 속눈에

촉촉히 빛나는 구슬

 

이제

유리창보다

말갛게 개인 아이의 창에

산 바다 하늘 길과 함께

빨간 석류꽃 아침이 핀다

 

 

 

아침

이해인

 

사랑하는 친구에게 처음 받은

시집의 첫 장을 열듯 오늘도

아침을 엽니다

 

나에겐 오늘이 새날이듯

당신도 언제나 새사람이고

당신을 느끼는 내 마음도 언제나

새마음입니다

 

처음으로 당신을 만났던 날의

설레임으로

나의 하루는 눈을 뜨고

나는 당신을 향해

출렁이는 안타까운 강입니다

 

 

 

아침 바다에서

이해인

 

금빛 번쩍이는 욕망의 비늘을 털고

당신께 가겠습니다

 

밤새 침몰했던 죽음들이

흰 거품 물고 일어서는 부활의 바다

 

황홀한 아침을

전신(全身)으로 쏟아 내는 당신 앞에

나는 몸부림치며 부서지는

숙명의 파도입니다

 

승리의 기를 흔들며 오실 당신을 위해

빈 배로 닻을 내린 나의 생애

 

수평선을 가르며

춤추는 갈매기로 가겠습니다

 

내력을 묻지 않고

보채는 내 마음을 안아 주는 바다

 

영원히 흰 포말(泡沫)로 일어서는

바다로 가겠습니다

 

 

 

아침의 향기

이해인

 

아침마다

소나무 향기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고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솔잎처럼 예리한 지혜와

푸른 향기로

나의 사랑이

변함없기를

 

찬물에 세수하다 말고

비누향기 속에 풀리는

나의 아침에게

인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온유하게 녹아서

누군가에게 향기를 묻히는

정다운 벗이기를

평화의 노래이기를

 

 

 

아카시아꽃

이해인

 

향기로 숲을 덮으며

흰 노래를 날리는

아카시아꽃

 

가시 돋친 가슴으로

몸살을 하면서도

 

꽃잎과 잎새는

그토록

부드럽게 피워 냈구나

 

내가 철이 없어

너무 많이 엎질러 놓은

젊은날의 그리움이

 

일제히 숲으로 들어가

꽃이 된 것만 같은

아카시아꽃

 

 

 

아픈 날의 일기

이해인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과 이마를 다친

어느 날 밤

 

아프다 아프다

혼자 외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편할 때는 잊고 있던

살아 있음의 고마움

한꺼번에 밀려와

감당하기 힘들었지요

 

자기가 직접 아파야만

남의 아픔 이해하고

마음도 넓어진다던

그대의 말을 기억하면서

울면서도 웃었던 순간

 

아파도 외로워하진 않으리라

아무도 모르게 결심했지요

 

상처를 어루만지는

나의 손이 조금은 떨렸을 뿐

내 마음엔 오랜만에

환한 꽃등 하나 밝혀졌습니다

 

 

 

안개꽃

이해인

 

혼자서는

웃는 것도 부끄러운

한 점 안개꽃

 

한데 어우러져야

비로소 빛이 되고

소리가 되는가

 

장미나 카네이션을

조용히 받쳐주는

기쁨의 별 무더기

 

남을 위하여

자신의 목마름은

숨길 줄도 아는

하얀 겸손이여

 

 

 

안녕히 가십시오 - 추모시

이해인

 

언젠가 오리라

예상을 했지만

당신과의 영원한 이별은

깊은 슬픔입니다

 

사랑이 너무 많아

잠시도 쉴 틈 없이 고달파도

누구보다 행복했던

마더 데레사

 

메마른 세상 곳곳

사랑의 샘을 만들고

인종과 이념의 벽을 넘어

누구에게나 평화의 어머니가 되셨던

마더 데레사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사랑의 예수와 함께

이젠 하늘나라에서

모든 시름 잊으시고

편히 쉬십시오

 

반세기 동안

당신이 뿌려 놓은

사랑과 희망의 씨앗들은

당신을 따르는 선교회 수녀들과

당신을 기리는 이들의 삶을 통해

길이 꽃피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겸손과 신뢰가 출렁이던

당신의 푸른 눈을 들여다 보고

오래된 나무처럼 투박했던 당신의 두손 잡고

이기심과 욕심을 부끄러워하며

맑고 순한 기쁨만 가슴에 가득한

만남의 순간들을 항상 기억하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당신의 그 마지막 말씀을

다시 삶의 지표로 세우고

끝까지 가야 할 사랑의 길을

우리도 기쁘게 달려가겠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안녕히 가십시오

 

 

 

안타까움

이해인

 

너무 좋은 것들에 늘 젖어 살다보면

너무 무심하게 살아버리기 쉬운데서

오는 안타까움

한 예술가의 위대한 작품을 귀한 줄도 모르고

건성으로 보아 넘기듯이

때로는 당신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들을

다 놓쳐 버리고 마는 안타까움

 

 

 

앞치마를 입으세요

이해인

 

삶이 지루하거든 앞치마를 입으세요.

꽃밭에 물을 줄 땐 꽃무늬의 앞치마를,

 

부엌에서 일을 할 땐 줄무늬의 앞치마를..

청소하고 빨래할 땐 물방울무늬의 앞치마를 입어보세요.

 

흙 냄새 비누 냄새 반찬 냄새

그대의 땀냄새를 풍기며 앞치마는 속삭일 거예요

 

그대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조금 더 기쁘게 움직여보라고..

 

앞치마는 그대 앞에서 끊임없이 꿈을 꾸며

희망을 재촉하는 친구가 될 거예요.

​​때로는 하늘과 구름도 담아줄 거예요

 

 

 

 

약속의 슬픔

이해인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세상엔 왜 그리 약속이 많은지

 

약속을 하려면

왜 그리 복잡한지!

 

어쩌다 생각이 나 그대가 보고 싶다고

전화를 해도 늘 핑계가 많으니

 

네 알겠습니다.

다음에 뵙지요!

 

머리로는 이해를 하면서도

가슴으로는 야속하고 슬퍼요!

 

다음엔 내가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데

속으로만 생각을 하지요.

 

늘 다음으로 다음으로

미루고 미루다가

 

끝나버리는 약속이

오늘도 나를 슬프게 하네요.

 

 

 

어느 꽃에게

이해인

 

넌 왜

나만 보면

기침을 하니?

꼭 한마디 하고 싶어하니?

 

속으로 아픈 만큼

고운 빛깔을 내고

남 모르게 아픈 만큼

사람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오늘도 나에게 말하려구?

 

밤낮의 아픔들이 모여

꽃나무를 키우듯

크고 작은 아픔들이 모여

더욱 향기로운 삶을 이루는 거라고

또 그 말 하려구?

 

 

 

어느 날의 커피

이해인

 

어느 날  혼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허무해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

눈물이 쏟아지는데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사람이 없다.

 

주위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날 이런 마음을

들어줄 사람을 생각하니

 

수첩에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를 읽어내려가 

보아도 모두가 아니었다.

 

혼자 바람맞고 사는 세상

거리를 걷다 가슴을 삭이고

마시는 뜨거운 한잔의 커피

 

 

 

어느 노인의 고백

이해인

 

하루 종일

창 밖을 내다보는 일이

나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누가 오지 않아도

창이 있어 고맙고

하늘도 구름도

바람도 벗이 됩니다

 

내 지나온 날들을

빨래처럼 꼭 짜서

햇살에 널어두고 봅니다

 

바람 속에 펄럭이는

희노애락이

어느새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네요

 

이왕이면

외로움도 눈부시도록

가끔은

음악을 듣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내가 용서할 일도

용서받을 일도 참 많지만

너무 조바심하거나

걱정하진 않기로 합니다

 

죽음의 침묵은

용서하고

용서받은 거라고

믿고 싶어요

 

고요하고 고요하게

하나의 노래처럼

한 잎의 풀잎처럼

사라질 수 있다면

난 잊혀져도

행복할 거예요

 

 

 

어느 말 한마디가

이해인

 

어느 날 내가 네게 주고 싶던

속 깊은 말 한마디가

비로소 하나의 소리로 날아갔을 제

그 말은 불쌍하게도

부러진 날개를 달고 되돌아왔다

 

네 가슴 속에 뿌리를 내려야 했을

나의 말 한 마디는

돌부리에 채이며 곤두박질치며

피 묻은 얼굴로 되돌아왔다

 

상처받은 그 말을 하얀 붕대로 싸매 주어도

이제는 미아처럼 갈 곳이 없구나

 

버림받은 고아처럼 보채는 그를

달랠 길이 없구나

 

쫓기는 시간에 취해 가려진 귀를

조금 더 열어 주었다면

네 얼어붙은 가슴을

조금 더 따뜻하게 열어 주었다면

이런 일이 있었겠니

 

말 한마디에 이내 금이 가는 우정이란

얼마나 슬픈 것이겠니

 

지금은 너를 원망해도 시원찮은 마음으로

또 무슨 말을 하겠니

 

네게 실연당한 나의 말이

언젠가 다시 부활하여 너를 찾을 때까지

나는 당분간 입을 다물어야겠구나

 

네가 나를 받아들일 그 날을 기다려야겠구나

 

 

 

어느 무희(舞姬)에게

이해인

 

인생의 사계절을

아프고도 뜨겁게

온몸으로 표현하는 기도의 사람이여

 

막이 열리면

작은 우주가 되는 무대 위에서

웃고, 울고, 뛰며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춤까지

밖으로 끌어내는 생명의 사람이여

 

춤추는 동안 그대는 진정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한 마리 새가 되고

한 송이 꽃이 되고

타오르는 불꽃이 되는가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갈라진 것들을 한데 모으는

천사가 되는가

 

고단한 삶의 여정에서

몸과 마음이 무거운 우리에게

잠시나마 가벼운 자유의 날개를 달아주는

참 고마운 사람

처음 보아도 낯설지 않은 아름다운 사람

 

순간에서 영원을 사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그대

구름 같은 사람이여

 

 

 

어느 봄날

이해인

 

겨우내 참고 있던 진분홍 그리움이 진달래로 피는 봄.

당신이 오시어 다시 피는 이 목숨의 꽃도 흔들립니다.

크신 이름이 나날이 새로 돋는 이 연두빛 가슴에

진정 죽은 것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소생하는 당신의 대지(大地) 위에서 다시 낯을 씻는 나.

당신이 창조하신 죄없는 꽃들의 얼굴을 닮게 하시고

그 웃음처럼 환히 당신 앞에 피는, 그 울음처럼 겸허히

당신 앞에 지는 한 송이 떨리는 영혼이게 하소서.

때를 가릴 줄 아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어느 수채화

이해인

 

비 오는 날

유리창이 만든

한 폭의 수채화

 

선연하게 피어나는

고향의

산마을

 

나뭇잎에 달린

은빛 물방울 속으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

 

물결 따라

풀잎 위엔

무지개 뜬다

 

그 위로 흘러오는

영원이란 음악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잡히지 않는 것들을

속삭이는 빗소리

 

내가 살아온 날

남은 날을

헤아려 준다

 

창은 맑아서

그림을 그린다

 

 

 

어느 아침

이해인

 

밤새 깔린

어둠의 부스러기들을

행주로 닦아 내고

 

정결한 식탁에

희망을 차린다

 

그릇이 부딪칠 때마다

가슴에도 달그락거리는

그 웃음소리

 

마주 앉은 가족의 눈 속에서

사랑의 언어를 꺼내

양식을 삼는

어느 아침

 

 

 

어느 일기

이해인

 

어제는 다정히 웃던 그 사람이 오늘은 세상에 없다.

소식을 듣고 잠이 오지 않는다.

내일 그의 장례식엔 어떤 기도를 바칠까.

내일도 해는 뜨고 지겠지.

누군가 또 마지막 숨을 내쉴지 모르는데

- 나는 아무에게도 할 말이 없다.

반딧불처럼 반짝 살아 있는 나도 언젠가는 스러질 터인데

- 묵은 편지 가득한 서랍을 여니 해야 할 기도도

사랑의 의무도 모두 밀려 있다. 울고만 싶다.

 

 

 

어느 조가비의 노래

이해인

 

바다 어머니

흰 모래밭에 엎디어

모래처럼 부드러운 침묵 속에

그리움을 참고 참아

진주로 키우려고 했습니다

 

밤낮으로 파도에 밀려온

아픔의 세월 속에

이만큼 비워내고

이만큼 단단해진 제 모습을

자랑스레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아직 못다 이룬 꿈들

못다 한 말들 때문에

슬퍼하거나 애태우지 않으렵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으니

가슴속에 고요한 섬 하나 들여놓고

조금씩 기쁨의 별을 키우라고

먼 데서도 일러주시는 푸른 어머니

 

비어서 더욱 출렁이는 마음에

자꾸 고여오는 넓고 깊은 사랑을

저는 어떻게 감당할까요?

 

이 세상 하얀 모래밭에 그 사랑을

두고두고 쏟아낼 수밖에 없는

저의 이름은 '작은 기쁨' 조가비

하늘과 바다로 사랑의 편지를 보내는

'흰구름' 조가비입니다

 

 

 

어둠 속에서

이해인

 

불을 끄고

혼자서 누워보는

내 방의 어둔 바다

 

아무도 오지 않는

적막한 어둠 속에

나는 비로소

눈이 밝아지고

아무도 말을 건네오지 않는

깊은 침묵 속에

나는 할말이 많은

섬으로 떠오르네

 

고독한 바람

어쩌다 휘몰아쳐도

끝까지 견디어낼 힘을

어둠 속에 기르는

한밤의 이 기쁜 섬

 

 

 

어떤 결심

이해인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고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도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만치서 행복의

웃으며 걸어왔다

 

 

 

어떤 기도

이해인

 

적어도 하루에

여섯 번은 감사하자고

예쁜 공책에 적었다

 

하늘을 보는 것

바다를 보는 것

숲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기쁨이라고

그래서 새롭게

노래하자고......

 

먼 길을 함께 갈 벗이 있음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기쁜 일이 있으면

기뻐서 감사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슬픔 중에도 감사하자고

그러면 다시 새 힘이 생긴다고

내 마음의 공책에

오늘도 다시 쓴다

 

 

 

어떤 별에게

이해인

 

나는 당신의 이름을 모르지만

산에서 하늘을 보면

금방이라도 가까이

제 곁에 내려앉을 것 같습니다

 

다른 별에 비하면

지구는 아주 작은 별이라는 걸

얼른 이해할 수 없듯이

때로는 그 안에

먼지처럼 작은 내가 있음을

자주 잊어버리며 삽니다

 

요즘은 혜성, 목성이 거대한 충돌로

온 세계가 하늘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큰 별과 별, 천체의 부딪침이 신기하고 놀랍듯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이

어느 순간 섬광처럼 부딪쳐 일어나는

사랑의 사건 또한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것인가요?

 

누가 눈여겨보지 않아도

그 황홀한 내면의 빛은

소리 없이 활활 타올라

우주를 밝히고 세상을 구원합니다

 

그래서 사랑할 땐 우리도 별이 되고

이미 별나라에 들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심하게 부딪치고도 깨어지지 않는

지상에서의 사랑을 별나라에까지 들고 갑니다.

 

 

 

어떤 후회

이해인

 

물건이든

마음이든

무조건 주는 걸 좋아했고

남에게 주는 기쁨 모여야만

행복이 된다고 생각했어

 

어느 날 곰곰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더라구

 

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그 습성이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자신을 구속하고

다른 이를 불편하게 함을

부끄럽게 깨달았어

 

주는 일에 숨어 따르는

허영과 자만심을

경계하라던 그대의 말을

다시 기억했어

 

남을 떠먹이는 일에

밤낮으로 바쁘기 전에

자신도 떠먹일 줄 아는 지혜와

용기를 지녀야 한다던 그대의 말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기억했어

 

 

 

어린 왕자를 위하여

이해인

 

잠시 다니러 온 지구 여행을 마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멋있게 작별할 줄 알았던

어린 왕자의 그 순결한 영혼과

책임성 있는 결단력을 사랑합니다

 

사라져도 슬프지 않은

별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사랑으로 길들이며

사랑 속에 살아야겠지요

 

 

 

어머니

이해인

 

당신의 이름에선

새색시 웃음 칠한

시골집 안마당의

분꽃 향기가 난다

 

안으로 주름진 한숨의 세월에도

바다가 넘실대는

남빛 치마폭 사랑

 

남루한 옷을 걸친

나의 오늘이

그 안에 누워 있다

 

기워 주신 꽃골무 속에

소복이 담겨 있는

幼年의 추억

 

당신의 가리마 같이

한 갈래로 난 길을

똑바로 걸어가면

 

나의 연두 감사 저고리에

끝동을 다는

다사로운 손길

 

까만 씨알 품은

어머니의 향기가

바람에 흩어진다

 

 

 

어머니가 계시기에

이해인

 

새해 첫날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면

한 마리의 학이

소나무 위에 내려앉듯

우리 마음의 나뭇가지에도

희망이란 흰 새가 내려와

날개를 접습니다

 

새로운 한 해에도

새로운 마음으로

당신과 함께

먼 길을 가야겠지요?

 

어머니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신 당신과 함께

순명의 길을

침묵 속에 숨어 사신 당신과 함께

겸손의 길을

우리도 끝까지 가게 해 주십시오

숨차고 고달픈 삶의 여정에도

어머니가 계시기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계시기에

우리는 아직도 넘어지지 않고

길을 갑니다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는 어머니

마음에 가득 낀

욕심의 먼지부터 닦아내야

주님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겠지요?

 

죄없이 맑은 눈빛으로

세상과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어린이처럼 되어야만

하늘이 잘 보임을

새로이 깨우치는 새해 아침

 

당신의 사랑 안에

우리 모두 새로이 태어나게 하십시오

 

사랑 안에서가 아니면

그 누구도 새로워질 수 없음을

조용히 일러 주시는 어머니

 

어머니가 계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희망이란 새를 날리며

또 한 해의 길을 갑니다

 

 

 

어머니께 드리는 노래

이해인

 

어디에 계시든지

사랑으로 흘러

우리에겐 고향의 강이 되는

푸른 어머니

 

제앞길만 가리며

바삐 사는 자식들에게

더러는 잊혀지면서도

보이지 않게 함께 있는 바람처럼

끝없는 용서로

우리를 감싸안은 어머니

 

당신의 고통속에 생명을 받아

이만큼 자라온 날들을

깊이 감사할줄 모르는

우리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기쁨보다는 근심이

만남보다는 이별이 더 많은

어머니의 언덕길에선

하얗게 머리 푼 억새풀처럼

흔들리는 슬픔도 모두 기도가 됩니다

 

삶이 고단하고 괴로울 때

눈물 속에서 불러보는

가장 따뜻한 이름, 어머니

집은 있어도

사랑이 없어 울고 있는

이 시대의 방황하는 자식들에게

영원한 그리움으로 다시 오십시오. 어머니

 

아름답게 열려있는 사랑을 하고 싶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어제의 기억을 묻고

우리도 이제는 어머니처럼

살아있는 강이 되겠습니다

목마른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푸른 어머니가 되겠습니다

 

 

 

어머니의 방

이해인

 

낡은 기도서와

가족들의 빛 바랜 사진

타다 남은 초가 있는

어머니의 방에 오면

 

철없던 시절의

내 목소리 그대로 살아 있고

동생과 소꿉놀이하며 키웠던

석류빛 꿈도 그대로 살아 있네

 

어둡고 고달픈 세월에도

항상 희망을 기웠던

어머니의 조각보와

사랑을 틀질했던

어머니의 손재봉틀을 만져보며

 

이제 다시

보석으로 주워담는

어머니의 눈물

그 눈물의 세월이

 

나에겐 웃음으로 열매 맺었음을

늦게야 깨닫고 슬퍼하는

어머니의 빈 방에서

이젠 나도 어머니로 태어나려네

 

 

 

어머니의 빈방에서

이해인

 

어머니가 지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던

 

바로 그 자리에 저도 누워서

눈을 감아 봅니다

 

힘겨워도 고요하게

고독해도 의연하게

 

평소의 모습대로 먼 길을 떠나신

당신의 모습을 그리며

 

가만히 꿈길로 떠나는

이 엄숙한 슬픔 속의 자그만 행복!

 

언제 왔어? 반갑네!"

화들짝 놀라며 반가워하시던

 

어머니가 안 계신

어머니의 빈 방에 오니

 

어머니의 사진만

말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어요

 

즐겨 입으시던 분홍 원피스만

저를 향해 슬피 웃고 있어요

 

건강하시던 시절

제가 어머니를 방문하면

 

제가 손을 댈 틈도 없이 어느 틈엔가

제 옷을 깨끗히 빨아

개켜 놓곤 하시던 어머니

 

덜렁대는 제가 잊을세라

칫솔까지 가방에 얹어 두신

 

어머니의 좋은 기억력은

사랑으로 더욱 빛났습니다

 

 

 

어머니의 섬

이해인

 

늘 잔걱정이 많아

아직도 뭍에서만 서성이는 나를

섬으로 불러주십시오, 어머니

 

세월과 함께 깊어가는

내 그리움의 바다에

가장 오랜 섬으로 떠있는

어머니

 

서른세 살 꿈속에

달과 선녀를 보시고

세상에 나를 낳아주신

당신의 그 쓸쓸한 기침소리는

천리 밖에 있어도

가까이 들립니다

 

헤어져 사는 동안 쏟아놓지 못했던

우리의 이야기를

바람과 파도가 대신해주는

어머니의 섬에선

외로움도 눈부십니다

안으로 흘린 인내의 눈물이 모여

바위가 된 어머니의 섬

하늘이 잘 보이는 어머니의 섬에서

나는 처음으로 기도를 배우며

높이 날아가는

한 마리 새가 되는 꿈을 꿉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편지

이해인

 

철 따라 내게 보내는

어머니 편지에는

어머니의 향기와

추억이 묻어있다

 

당신이 무치던 산나물 향기 같은

봄 편지에는 어린 동생의 손목을 잡고

시장 간 당신을 기다리던

낯익은 골목길이 보인다

 

당신이 입으시던 옥색 모시 적삼처럼

깨끗하고 시원한 여름 편지에는

우리가 잠자는 새빨간 봉숭아 물

손톱에 들여 주던 당신의 사랑이 출렁인다

 

당신이 정성껏 문 창호지에 끼워

바르던 국화잎 내 마음의 가을 편지에는

어느 날 딸을 보내고 목메어 돌아서던

당신의 쓸쓸한 뒷모습이 보인다

 

당신이 다듬이질하던

하얀 옥양목 같은 겨울 편지에는

끓어서 목주알 굴리는

당신의 기도가 흰 눈처럼 쌓여 있다

 

철 따라 아름다운 당신의 편지 속에

나는 늘 사랑받는 아이로 남아

어머니만이 읽을 수 있는

색동의 시들을 가슴에 개켜둔다

 

 

 

어여쁜 눈사람이 되어

이해인

 

부질없는 근심도 끈적거리던 우울도

모두 눈 속에 녹아라

어둠을 걷고 밝게 웃는 하얀 세상에

나는 다시 살고 싶어라

나는 당신의 어여쁜 눈사람이 되어

당신의 가슴에서 녹아내리고 싶어라

 

 

 

언니

이해인

 

언니라는 말에선 하얀 찔레꽃과 치자꽃 향기가

바람에 실려오는 것 같은 상큼한 향기가 난다.

언니라는 말은 엄마 다음으로 가장 아름답고

포근하고 다정한 호칭이 아닐까?

큰언니, 작은언니, 올케언니, 새언니, 선배언니.

그 대상이 누구든지간에 '언니!' 하고 부르면

왠지 마음에 따뜻한 그리움이 밀려오며

모차르트의 시냇물 같은 음악이 듣고 싶어진다.

 

 

 

언어는 돌이 되어

이해인

 

그토록 당신 앞에 할말이 많던 나도

이제는 당신에게 편지를 잊었습니다

사랑을 적당히 할 수가 없듯이

편지를 적당히 쓸 수가 없어

나는 오늘도 망설임뿐

그래서 흰 종이 위엔 침묵만 남고

언어는 돌이 되어

가슴 밑으로 가라앉아 버립니다

 

 

 

엄마를 기다리며

이해인

 

동생과 둘이서

시장 가신 엄마를 기다리다가

나는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문득 눈을 떠 보니

"언니, 이것 봐!

우리 엄마 냄새 난다"

 

벽에 걸려 있는

엄마의 치마폭에 코를 대고

웃고 있는 내 동생

 

시장 바구니 들고

골목길을 돌아오는

엄마 모습이

금방 보일 듯하여

 

나는 동생 손목을 잡고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엄마 기다리는 우리 마음에

빨간 노을이 물듭니다

 

 

 

엄마와 딸

이해인

 

이렇게 나이를 먹어서도

엄마와 헤어질 땐 눈물이 난다

낙엽 타는 노모(老母)의 적막한 얼굴과

젖은 목소리를 뒤로 하고 기차를 타면

추수 끝낸 가을 들판처럼

비어가는 내 마음

순례자인 딸을 낳은

아프지만 아름다운 세상

 

늘 함께 살고 싶어도

함께 살 수는 없는

엄마와 딸이

서로를 감싸주며

꿈에서도 하나 되는

미역빛 그리움이여

 

 

 

엄마와 분꽃

이해인

 

엄마는 해마다

분꽃씨를 받아서

얇은 종이에 꼭꼭 싸매 두시고

더러는 흰 봉투에 몇 알씩 넣어

멀리 있는 언니들에게

선물로 보내셨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에게 엄마는

"분꽃씨를 뿌렸단다

머지않아 싹이 트고 꽃이 피겠지?"

하시며 분꽃처럼 환히 웃으셨다

 

많은 꽃이 피던 날

나는 오래오래 생각했다

 

고 까만 꽃씨 속에서

어쩌면 그렇게 푸른 잎이 돋았는지?

어쩌면 그렇게 빨간 꽃 노란 꽃이

태어날 수 있었는지?

 

고 딱딱한 작은 씨알 속에서

어쩌면 그렇게 부드러운 꽃잎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는지?

 

나는 오래오래

분꽃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엄마와 아이

이해인

 

"엄마

난 엄마가

내 앞에 계셔도

엄마가 보고 싶어요"

 

동그랗게 웃음짓는

동그란 아이를 끌어안는

동그란

그리움 속의 엄마

 

"그래

나도 네가

내 앞에 있어도

네가 보고 싶단다"

 

 

 

엄마, 저는요

이해인

 

엄마, 저는요

새해 첫날 엄마가

저의 방에 걸어 준

고운 꽃달력을 볼 때처럼

늘 첫 희망과 첫 설레임이 피어나는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첫눈이 많이 내린 날

다투었던 친구와 화해한 뒤

손 잡고 길을 가던 때처럼

늘 용서하고 용서받는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엄마, 저는요

장독대를 손질하며

콧노래를 부르시고

꽃밭을 가꾸시다

푸른 하늘 올려다보시는

엄마의 그 모습처럼

늘 부지런하면서도 여유 있는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엉겅퀴의 기도

이해인

 

제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누구에게든지 가서 벗이 되겠습니다.

 

참을성 있는 기다림과

절제 있는 다스림으로

가시 속에서도 꽃을 피워낸

큰 기쁨을 님께 드리겠습니다.

 

불길을 지난 사랑 속에서만

물 같은 삶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음을

내게 처음으로 가르쳐 준 당신

 

모든 걸 당신께 맡기면서도

때로는 불안했고

저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울 때도 많았습니다.

 

일상의 잔잔한 평화와

고운 질서를 거부하고 달아나고 싶던

저의 보랏빛 반란이

너무도 길었음을 용서하십시오.

 

이젠 더 이상 진실을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허영심을 버리고

그대로의 제가 되겠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저를 불러 주십시오

참회의 눈물을 흘린 후의

가장 겸허한 모습으로

 

 

 

여름 노래

이해인

 

엄마의 무릎을 베고

스르르 잠이 드는

여름 한낮

 

온 세상이

내 것인 양

행복합니다

 

꿈에서도

엄마와 둘이서

바닷가를 거닐고

조가비를 줍다가

 

문득 잠이 깨니

엄마의 무릎은 아직도

넓고 푸른 바다입니다

 

 

 

여름이 오면

이해인

 

움직이지 않아도

태양이 우리를 못 견디게 만드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서로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기쁨으로 타오르는

작은 햇덩이가 되자고 했지

 

산에 오르지 않아도

신록의 숲이 마음에 들어차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묵묵히 기도하며

이웃에게 그늘을 드리워주는

한 그루 나무가 되자고 했지

 

바다에 나가지 않아도

파도 소리가 마음을 흔드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탁 트인 희망과 용서로

매일을 출렁이는

작은 바다가 되자고 했지

 

여름을 좋아해서

여름을 닮아가는 나의 초록빛 친구야

 

멀리 떠나지 않고서도

삶을 즐기는 법을 너는 알고 있구나

 

너의 싱싱한 기쁨으로

나를 더욱 살고 싶게 만드는

그윽한 눈빛의 고마운 친구야

 

 

 

여름 일기

이해인

 

1

여름엔 

햇볕에 춤추는 하얀 빨래처럼

깨끗한 기쁨을 맛보고 싶다.

영혼의 속까지 태울 듯한 태양아래

나를 빨아 널고 싶다.

 

여름엔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향기로운 땀을 흘리고 싶다.

방울마저도 노래가 될 수 있도록

뜨겁게 살고 싶다.

 

여름엔 

꼭 한번 바다에 가고 싶다.

바다에 가서

오랜 세월 파도에 시달려온 

섬 이야기를 듣고 싶다.

침묵으로 엎드려 기도하는 그에게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오고 싶다.

 

 

2

오늘 아침

내 마음의 밭에는

밤새 봉오리로 맺혀있던

한 마디의 시어가

노란 쑥갓꽃으로 피어 있습니다.

 

비와 햇볕이 동시에 고마워서

자주 하늘을 보는 여름

잘 익은 수박을 쪼개어

이웃과 나누어 먹는 초록의 기쁨이여

 

우리가 사는 지구 위에도

수박처럼 둥글고 시원한

자유와 평화 가득한 여름이면 좋겠습니다.

 

오는 아침 나는 다림질한 흰옷에

물을 뿌리며 생각합니다.

 

우울과 나태로 풀기 없던 나의 일상을

희망으로 풀 먹여 다림질해야겠음을 

지금쯤 바쁜 일터로 향하는

나의 이웃을 위해

한 송이의 기도를 꽃피워야겠음을.

 

 

3

아무리 더워도

덥다고 

불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차라리 

땀을 많이 흘리며

내가 여름이 되기로 했습니다.

 

일하고 사랑하고

인내하고 용서하며

해 아래 피어나는 

삶의 기쁨 속에

 

여름을 더욱 사랑하며

내가 여름이 되기로 했습니다

 

 

4

떠오르는 해를 보고

멀리서도 인사하니

세상과 사람들이

더 가까이

웃으며 걸어옵니다.

 

이왕이면 

붉게 뜨겁게

살아야 한다고

어둡고 차갑고

미지근한 삶은 

죄가 된다고

고요히 일러주는 나의 해님

 

아아, 

나의 대답은

말보다 먼저 또 오르는 

감탄사일 뿐

둥근 해를 닮은

사랑일 뿐!

 

 

5

사람들은

나이 들면

고운 마음

어진 웃음

잃기 쉬운데

느티나무여

 

당신은 나이가 들어도

어찌 그리 푸른 기품 잃지 않고

넉넉하게 아름다운지

나는 너무 부러워서

당신 그늘 아래

오래오래 앉아서

당신의 향기를 맡습니다.

조금이라도 당신을 닮고 싶어

시원한 그늘 떠날 줄을 모릅니다.

 

당신처럼 뿌리가 깊어 더 빛나는

시의 잎사귀를 달 수 있도록

나를 기다려주십시오.

당신처럼 뿌리 깊고 넓은 사랑을

나도 하고 싶습니다

 

 

6

사계절 중에

여름이 제일 좋다는

젊은 벗이여

나는 오늘

달고 맛있는

초록 수박 한 덩이

그대에게 보내며

시원한 여름을 가져봅니다

 

한창 진행 중이라는

그대의 첫사랑도

이 수박처럼

물기 많고

싱싱하고

어떤 시련 중에도

모나지 않은 둥근 힘으로

끝까지 아름다울 수 있기를

해 아래 웃으며 기도합니다

 

 

7

바다가 그리운 여름날은

오이를 썰고

얼음을 띄워

미역냉국을 해먹습니다

 

입안에 가득 고여오는

비릿한 바다 내음과

하얀 파도 소리에

나는 어느새 눈을 감고

해녀가 되어

시의 전복을 따러 갑니다

 

 

 

여백이 있는 날

이해인

 

휴식과 사색이 마련될 수 있는 날

평소에 무심히 지나쳤던

자연과 사물과 사람을

제대로 유심히 바라보며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여백이 있는 날

 

 

 

여정

이해인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순례자

강원도의 높은 산과

낮은 호숫가 사이에 태어났으니

 

나의 여정은 하루하루

산을 오르는 것과 같았고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았네

 

지금은 내 몸이 많이 아파

삶이 더욱 무거워졌지만

 

내 마음은 산으로 가는 바람처럼

호수 위를 나르는 흰새처럼

가볍기만 하네

 

세상 여정 마치기 전 꼭 한번 말하리라.

길 위에서 만났던 모든 이에게

가만히 손 흔들며 말하리라

 

많이 울어야 할 순간들도

사랑으로 받아 안아

행복했다고 고마웠다고 아름다웠다고

 

 

 

여행길에서

이해인

 

우리의 삶은

늘 찾으면서 떠나고

 

찾으면서 끝나지

진부해서 지루했던

사랑의 표현도

 

새로이 해보고

달밤에 배꽃 지듯

 

흩날리면 사라졌던

나의 시간들도

새로이 사랑하며

 

걸어가는 여행길

어디엘 가면

행복을 만날까

 

이 세상 어디에도

집은 없는데.

 

집을 찾는 동안의 행복을

우리는 늘 놓치면서 사는 게 아닐까

 

 

 

연필을 깎으며

이해인

 

오랜만에

연필을 깎으며

행복했다

 

풋과일처럼

설익은 나이에

수녀원에 와서

채 익기도 전에

깎을 것은 많아

힘이 들었지

이기심

자존심

욕심

 

너무 억지로 깎으려다

때로는

내가 통째로 없어진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몰라

대책 없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

아직도 내게 불필요한 것들을

다는 깎아내지 못했지만

나는 그런대로

청빈하다고

자유롭다고

여유를 지니며

곧잘 웃는다

 

나의 남은 날들을

조금씩 깎아내리는 세월의 칼에

아픔을 느끼면서도

행복한 오늘

 

나 스스로 한 자루의 연필로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깎이면서 사는 지금

나는 웬일인지

쓸쓸해도 즐겁다

 

 

 

열두 빛깔 편지

이해인

 

오늘은 하얀 편지지에

열두 빛깔의 색연필로

긴 편지를 쓰렵니다

연필처럼 깍일 수 없는 그리움을

글씨로는 다 쓰지 못해

빛깔로 칠하는

내 마음을 넣어서

 

 

 

열매

이해인

 

꽃이 진 그 자리에

어느새 소리 없이

고운 열매가 달렸어요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고 나면

수고의 땀이 맺어주는

기쁨의 열매

 

내가 아파서 흘린

눈물 뒤에는

인내가 낳아주는

웃음의 열매

 

아프고 힘들지 않고

열리는 열매는 없다고

정말 그렇다고

 

나의 맘을 엿보던

고운 바람이

나에게 일러줍니다.

 

 

 

오늘도 십자가 앞에 서면

이해인

 

기쁠 때에도 슬플 때에도

성당의 십자가 앞에 서면

예기치 않은 기쁨과 평화가 피어 오릅니다.

 

말을 하면 향기가 달아날까 봐

안으로 밖으로 고요히 침묵하면

오늘도 십자가 앞에서 사랑을 배웁니다.

 

날마다 이마에 가슴에 십자를 굿고

십자 목걸이와 십자 반지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정작은 잊고 살았던 십자가의 의미

 

슬픔의 가시가 박힌 삶의 무게를

두려워 않고 받아 안을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십자가에 숨어 있는 놀라운 빛의 기도

사랑의 승리로 날마다 새롭게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 누구를 위로하고 싶을 때

그 누구로부터 위로받고 싶을 때

성당의 십자가 앞에 서면

 

죽음의 눈물도 부활의 웃음으로

바뀌는 기적 같은 은총이여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의 어리석음을 몸으로 가르친

예수 그분이 계시기에

절망 속에서도 빛나는 삶의 희망이여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이해인

 

손 시린 나모(裸木)의 가지 끝에

홀로 앉은 바람 같은

목숨의 빛깔

 

그대의 빈 하늘 위에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차오르는 빛

 

구름에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누이처럼 부드러운 달빛이 된다

 

잎새 하나 남지 않은

나의 뜨락인 바람이 차고

마음엔 불이 붙는 겨울날

 

빛이 있어

혼자서도

풍요로와라

 

맑고 높이 사는 법을

빛으로 출렁이는

겨울 반달이여

 

 

 

오늘은 쉬십시오

이해인

 

오늘은 쉬십시오.

일에 지친 어깨, 산나무 그늘 아래 눕히고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어제까지의 일은 잘했습니다.

그리고 내일 일은 내일 시작하면 됩니다.

 

오늘은 아무일도 하지 말고

팔베게 하고 누워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면서 편히 쉬십시오.

 

오늘은 쉬십시오.

사랑 찾아 다니다 지친 발,

오늘은 흐르는 물에 담그고 편히 쉬십시오.

 

사랑보다 더 소중한 것은 내 마음의 평화입니다.

오늘은 어떠한 사랑도 생각하지 말고 모든 것 잊으십시오.

그리고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편히 쉬십시오.

 

오늘은 쉬십시오.

주어야 할 돈도 받아야 할 돈도

오늘은 모두 잊어버리십시오.

 

그동안 돈 때문에 얼마나 애태웠습니까.

돈의 가치보다 훨씬 많은 것 잃었지요.

 

오늘은 바닷가 모래밭에 누워,

가진 것 없어 자유로운 하늘을나는

새를 보면서 편히 쉬십시오.

 

오늘은 쉬십시오. 휴대폰도 꺼 버리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그동안 말을 하기 위하여, 듣기 위하여 얼마나 마음 졸였습니까.

 

오늘은 입을 닫고 밤하늘의 별을 보십시오.

별들이 말을 한다면 온 우주가 얼마나 시끄러울까요.

침묵의 별들이기에 영원히 아름답지요.

 

오늘은 쉬십시오

모든 예절, 규칙, 질서, 권위, 양식

모두 벗어 버리고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그동안 이런 것들 때문에 얼마나 긴장했습니까.

옷을 벗듯 훌훌 벗어 버리고

오늘은 냇가 너른 바위에 두 팔 벌리고 누워 편히 쉬십시오.

 

오늘은 쉬십시오.

모든 아픔, 모든 슬픔, 모든 추억, 모든 아쉬움

강물에 띄워 버리고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흘러가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잊혀지는 법,

잊어야 할 것 모두 강물에 흘려 보내고

강 언덕 미루나무 그늘 아래서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오늘을 위한 기도

이해인

 

오늘 하루의 숲속에서

제가 원치 않아도

어느새 돋아나는 우울의 이끼,

욕심의 곰팡이, 교만의 넝쿨들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러하오나 주님,

이러한 제 자신에 대해서도

너무 쉽게 절망하지 말고

자신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어가는

꿋꿋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게 하소서.

 

어제의 열매이며

내일의 씨앗인 오늘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때는

어느날 닥칠 저의 죽음을

미리 연습해 보는 겸허함으로

조용히 눈을 감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오늘의 약속

이해인

 

내가 돌보지 못해

墓碑(묘비)처럼 잊혀진 너의 얼굴

 

미안하다 악수 나눌 때

나는 떳떳하고 햇살은 눈부시다

 

슬픔에 수척해진

숱한 기억들을 지워 보내며

 

내일 향해 그네 뛰는

오늘의 행복 문을 열어라

 

나는 너를 위해

한 점 바람에도 흔들리는 풀잎

 

새 옷을 차려입고

떠날 채비를 하는 나의 오늘이여

 

착한 누이의 사랑으로

너를 보듬으면

 

올올이 쏟아지는 빛의 향기

어김없는 약속의 내일로 가라

 

 

 

오늘의 얼굴

이해인 

 

내가 돌보지 못해

묘비(墓碑)처럼 잊혀진 너의 얼굴

 

미안하다 악수 나눌 때

나는 떳떳하고 햇살은 눈부시다

 

슬픔에 수척해진

숱한 기억들을 지워 보내며

 

내일 향해 그네 뛰는

오늘의 행복 문을 열어라

 

나는 너를 위해

한 점 바람에도 흔들리는 풀잎

 

새 옷을 차려입고

떠날 채비를 하는 나의 오늘이여

 

착한 누이의 사랑으로

너를 보듬으면

 

올올이 쏟아지는 빛의 향기

어김없는 약속의 내일로 가라

 

 

 

오늘의 행복

이해인

 

오늘은 

나에게 펼쳐진

한 권의 책

 

두 번 다신 오지않을

오늘 이 시간 속의

하느님과 이읏이

자연과 사물이

내게 말을 걸어오네

 

시로 수필로

소설로 동화로

빛나는 새 얼굴의

첫 페이지를 열며

읽어달라 재촉하네

 

때로는 

내가 해독할 수 없는

사랑의 암호를

사랑으로 연구하여

풀어 읽으라 하네

 

아무 일 없이

편안하길 바라지만

풀 수 없는 숙제가 많아

삶은 나를 더욱

설레게 하고

고마움과 놀라움에

눈뜨게 하고

힘들어도

아름답다

살 만하다

고백하게 하네

 

어제와 내일 사이

오늘이란 선물에

숨어 있는 행복!

 

 

 

오월의 아가

이해인

 

칼로 물을 베는 식의

사랑싸움을

많이도 했습니다

 

하느님,

아름답다 못해 쓸쓸한

당신과의 싸움은

늘 나의 눈물로

끝이 났지만

눈물을 통해서만

나는

새로이 철드는

당신의 아이였습니다

 

푸른 보리를 키우는

오월의 대지처럼

나를 키우는 당신

가슴에 새를 앉히는

오월의 미루나무처럼

나를 받아 주시는 당신

 

당신께 감히 싸움을 거는 것은

오월의 찔레꽃 향기처럼

먼데까지 도달해야 할

내 사랑의 시작임을

믿어 주십시오, 하느님.

 

 

 

오직 사랑 때문에(순교자를 위한 시)

이해인

 

번번이 결심을 하면서

세속적 욕망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비열한 마음

죄를 짓고도

절절히 뉘우칠 줄 모르는 무딘 마음

믿음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지 못하는

냉랭한 마음

우리의 이러한 마음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안에 피흘리며

울고 계신 님들이여

어서 산이 되어 일어나

말씀하소서

고통의 높은 산을 넘어

끝내는 목숨 바칠 수 있는 믿음만이

믿음이라고 -

어서 굽이치는 강이 되어

소리치소서

 

고통의 깊은 강을 건너

끝내는 죽을 수 있는 사랑만이

사랑이라고 -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가파른 생명의 길

고독한 진리의 길을

그리스도와 함께 끝까지 걸어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하신 님들이여

이제 우리도

가게 하소서

 

어제의 환상이 아닌

오늘의 아픔의 무게

꽃처럼 고운 꿈이 아닌

피투성이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도 님들을 따라가게 하소서

 

오직 사랑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 않는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우리 마음의 어둠을 밝히시려

날마다 흰 옷 입고 부활하는

미쁘신 님들이여

산천이 울리도록

우리를 부르소서

그리운 님들 안에

하나 되게 하소서

 

 

 

왜 그럴까, 우리는

이해인

 

자기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는

그리도 길게 늘어놓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네

아니, 처음부터 아예

듣기를 싫어하네

 

해야 할 일 뒤로 미루고

하고 싶은 것만 골라 하고

기분에 따라

우선 순위를 잘도 바꾸면서

늘 시간이 없다고 성화이네

 

저 세상으로 떠나기 전

한 조각의 미소를 그리워하며

외롭게 괴롭게 누워 있는 이들에게도

시간 내어주기를 아까워하는

건강하지만 인색한 사람들

늘 말로만 그럴듯하게 살아 있는

자비심 없는 사람들 모습 속엔

분명 내 모습도

들어 있는 걸

나는 알고 있지

 

정말 왜 그럴까

왜 조금 더

자신을 내어놓지 못하고

그토록 이기적일까, 우리는.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이해인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 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 지어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외로움을 진지하게 맞아들이세요

이해인

 

외로움을 맛볼 때 멀리 도망치기보다는 오히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낯선 손님이 아닌 정다운 친구로 외로움을

진지하게 맞아들이고 길들여가는 것이지요.

 

새 옷, 새 구두, 새 만년필도 편안한 내 것을 만들기 위해선

한참을 길들여야 하듯이 처음엔 낯설었던 외로움도

나와 친숙해지면 더 이상 외로움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신의 외로움을 누군가에게 선전하고 싶을 때

외로움을 잊으려고 쾌락에 탐닉하고 싶을 때.

 

바로 그 시간에 오히려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모습과 삶을 조용히 돌아볼 수 있는

슬기를 지녀야겠습니다.

 

외로움에 매여 사는 노예가 되지 않고

외로움을 다스리는 자유를 누릴 때 우리는

깊은 명상과 사색, 기쁨과 여유를 찾게 될 것입니다.

 

 

 

용서를 위한 기도

이해인

 

그 누구를 그 무엇을

용서하고 용서받기 어려울 때마다

십자가 위의 당신을 바라봅니다

 

가장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이유 없는 모욕과 멸시를 받고도

피 흘리는 십자가의 침묵으로

모든 이를 용서하신 주님

 

용서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용서는 구원이라고

오늘도 십자가 위에서

조용히 외치시는 주님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기엔

죄가 많은 자신임을 모르지 않으면서

진정 용서하는 일은 왜 이리 힘든지요

제가 이미 용서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직도 미운 모습으로 마음에 남아

저를 힘들게 할 때도 있고

깨끗이 용서받았다고 믿었던 일들이

어느새 어둠의 뿌리로 칭칭 감겨와

저를 괴롭힐 때도 있습니다

조금씩 이어지던 화해의 다리가

제 옹졸한 편견과 냉랭한 비겁함으로

끊어진 적도 많습니다

 

서로 용서가 안 되고 화해가 안 되면

혈관이 막힌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늘 망설이고 미루는 저의 어리석음을

오늘도 꾸짖어주십시오

언제나 용서에 더디어

살아서도 죽음을 체험하는 어리석음을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주님

제가 다른 이를 용서할 땐 온유한 마음을

다른 이들로부터 용서를 받을 땐

겸손한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아무리 작은 잘못이라도

하루 해 지기 전에

진심으로 뉘우치고

먼저 용서를 청할 수 있는

겸손한 믿음과 용기를 주십시오

 

잔잔한 마음에 거센 풍랑이 일고

때로는 감당 못할 부끄러움에

눈물을 많이 흘리게 될지라도

끝까지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사랑을 넓혀가는 삶의 길로

저를 이끌어주십시오, 주님

 

너무 엄청나서 차라리 피하고 싶던

당신의 그 사랑을 조금씩 닮고자

저도 이제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렵니다

피 흘리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모든 이를 끌어안은 당신과 함께

끝까지 용서함으로써만 가능한

희망의 길을 끝까지 가렵니다

 

오늘도 십자가 위에서 묵묵히

용서와 화해의 삶으로 저를 재촉하시며

가시에 찔리시는 주님

용서하고 용서받은 평화를

이웃과 나누라고 오늘도 저를 재촉하시는

자비로우신 주님

 

 

 

용서의 꽃

이해인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용서하지 않은

나 자신을 용서하기

힘든 날이 있습니다

 

무어라고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나의 부끄러움을 대신해

오늘은 당신께

고운 꽃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토록 모진 말로

나를 아프게 한 당신을

미워하는 동안

 

내 마음의 잿빛 하늘엔

평화의 구름 한 점 뜨지 않아

몹시 괴로웠습니다

 

이젠 당신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참 이기적이지요?

 

나를 바로 보게 도와준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아직은 용기 없어

이렇게 꽃다발로 대신하는

내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용서하십시오

이해인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한 세기를 마감하고,

또 한 세기의 언덕을 오르기 위해 차분히 심호흡을 하는 오늘

해 아래 살아 있는 기쁨을 감사드리며

우리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밤새 뉘우침의 눈물로 빚어낸 하얀 평화가

새천년의 아침을 더욱 아름답게 해 주십시오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부끄러운 행동을 많이 하고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함으로

죄를 짓고도 참회하지 않았음을 용서하십시오

 

나라와 겨레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나라와 겨레가 있는 고마움을

소중한 축복으로 헤아리기보다는

비난과 불평과 원망으로 일관했으며,

큰일이 일어나 힘들 때마다 기도하기보다는

'형편없는 나라' '형편없는 국민'이라고

습관적으로 푸념하며 스스로 비하시켰음을 용서하십시오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사랑으로 다하지 못하고 소홀히 했습니다.

바쁜 것을 핑계 삼아 가까운 이들에게도

이기적이고 무관심하게 행동했으며,

시간을 내어주는 일엔 늘 인색했습니다.

 

깊은 대화가 필요할 때조차 겉도는 말로 지나친 적이 많았고,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말로 상처를 입히고도

용서를 청하지 않는 무례함을 거듭했습니다.

 

연로한 이들에 대한 존경이 부족했고,

젊은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병약한 이들에 대한 연민과 배려가 부족했음을 용서하십시오.

 

자신의 존재와 일에 대해 정성과 애정을 쏟아붓지 못했습니다.

신뢰를 잃어버린 공허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일상생활을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고집, 열등감, 우울함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

남에게 부담을 준 적이 많았습니다.

 

맡은 일에 책임과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

성급한 판단으로 일을 그르치곤 했습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깨어있지 못한 실수로 인해 많은 이에게 피해를 주고도,

사과하기보다는 비겁한 변명에만 급급했음을 용서하십시오.

 

​잘못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이가 아니 되도록,

오늘도 우리를 조용히 흔들어 주십시오.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이들에게

첫눈처럼 새하얀 축복을 주십시오.

 

이제 우리도 다시 시작하고, 다시 기뻐하고 싶습니다.

희망에 물든 새 옷을 겸허히 차려입고,

우리 모두 새천년의 문으로 웃으며 들어서는

희망의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를 흔들어 깨우소서

이해인

 

어디서나 산이 보이고 강이 보이는

작지만 사랑스런 나라

우리가 태어나 언젠가 다시 묻혀야 할

이 아름다운 모국의 땅에서

우린 늘 아름다운 것을 기억하며

아름답게 살고 싶습니다

이 소박한 꿈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를 긴 잠에서 흔들어 깨우소서, 주님

또 한 해가 저물기 전에 두 손 모으고

겸허한 참회의 눈물을 흘릴 줄 알게 하소서

 

나라의 일꾼으로 뽑힌 사람들이

거짓과 속임수를 쓰며

욕심에 눈이 어두운 세상

자식이 어버이를 죽이고

제자가 스승을 때리며

길을 가던 이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우리의 병든 세상을 불쌍히 여기소서

 

자신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훼손하고

그럴듯한 이유로 합리화시키며

잉태된 아기를 수없이 죽이면서도

해 아래 웃고 사는 우리의 태연함을

가엾이 여기소서

 

한 주검을 깊이 애도하기도 전에

또 다른 주검이 보도되는 비극에도

적당히 무디어진 마음들이 부끄럽습니다

하늘에서, 땅에서, 강에서, 바다에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우리 가족과 이웃들을 굽어보소서

 

잘못된 것은 다 남의 탓이라고만 했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비겁하게 발뺌할 궁리만 했습니다

 

자신의 아픔과 슬픔은

하찮은 것에도 그리 민감하면서

다른 사람의 엄청난 아픔과 슬픔엔

안일한 방관자였음을 용서하소서

 

우리가 배불리 먹는 동안

세상엔 아직 굶주리는 이웃 있음을

따뜻한 잠자리에 머무는 동안

추위에 떨며 울고 있는 이들 있음을

잠시도 잊지 않게 하소서

 

사랑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먼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생명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먼저 생명을 존중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변화시켜 주소서, 주님

항상 생명의 맑은 물로 흘러야 할 우리가

흐르지 않아 썩은 냄새 풍기는

오만과 방종으로 더럽혀지지 않게 하소서

사랑이 샘솟아야 할 우리 가정이

미움과 이기심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게 하소서

 

나 아닌 그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해주길 바라고 미루는

사랑과 평화의 밭을 일구는 일

비록 힘들더라도

나의 몫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의 집을

내가 먼저 짓기 시작하여

더 많은 이웃을 불러 모으게 하소서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나직이 죽은 이를 불러 보는 낙엽의 계절

우리는 이제 뉘우침의 눈물을 닦고

희망의 첫 삽에 기도를 담습니다, 주님

 

 

 

우리 집

이해인

 

우리집이라는 말에선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라는 말은

음악처럼 즐겁다

 

멀리 밖에 나와

우리 집을 바라보면

잠시 낯설다가

오래 그리운 마음

 

가족들과 함께한 웃음과 눈물

서로 못마땅해서 언성을 높이던

부끄러운 순간까지 그리워

눈물 글썽이는 마음

그래서 집은 고향이 되나 보다

 

헤어지고 싶다가도

헤어지고 나면

금방 보고 싶은 사람들

주고받은 상처를

서로 다시 위로하며

그래, 그래 고개 끄덕이다

따뜻한 눈길로 하나 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언제라도 문을 열어 반기는

우리 집 우리 집

 

우리 집이라는 말에선

늘 장작 타는 냄새가 난다

고마움 가득한

송진 향기가 난다

 

 

 

우산이 되어

이해인

 

우산도 받지 않은

쓸쓸한 사랑이

문 밖에 울고 있다

 

누구의 설움이

비 되어 오나

피해도 젖어 오는

무수한 빗방울

 

땅 위에 떨어지는

구름의 선물로 죄를 씻고 싶은

비오는 날은 젖은 사랑

 

수많은 나의 너와

젖은 손 악수하며

이 세상 큰 거리를

한없이 쏘다니리

 

우산을 펴 주고 싶어

누구에게나

우산이 되리

모두를 위해

 

 

 

우정 일기

이해인

 

1

내 마음속엔 아름다운 굴뚝이 하나 있지. 너를 향한 그리움이 하얀 연기로 피어오르다 노래가 되는 너의 집이기도 한 나의 집. 이 하얀 집으로 너는 오늘도 들어오렴, 친구야.

2

전에는 크게, 굵게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한꺼번에 많은 것을 이야기하더니 지금은 작게, 가늘게 내리는 이슬비처럼 조용히 내게 오는 너. 네가 어디에 있든지 너는 쉬임없이 나를 적셔준다.

 

3

소금을 안은 바다처럼 내 안엔 늘 짜디짠 그리움이 가득하단다. 친구야. 미역처럼 싱싱한 기쁨들이 너를 위해 자라고 있단다. 파도에 씻긴 조약돌을 닮은 나의 하얀 기도가 빛나고 있단다.

 

4

네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구나. 네 대신 아파줄 수 없어 안타까운 내 마음이 나의 몸까지도 아프게 하는 거 너는 알고 있니? 어서 일어나 네 밝은 얼굴을 다시 보여주렴. 내게 기쁨을 주는 너의 새 같은 목소리도 들려주렴.

 

5

내가 너를 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너도 보고 싶니, 내가?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처럼 너도 좋아하니, 나를? 알면서도 언제나 다시 묻는 말. 우리가 수없이 주고받는 어리지만 따뜻한 말. 어리석지만 정다운 말.

 

6

약속도 안했는데 똑같은 날 편지를 썼고, 똑같은 시간에 전화를 맞걸어서 통화가 안되던 일, 생각나니? 서로를 자꾸 생각하다보면 마음도 쌍둥이가 되나보지?

 

7

'내 마음에 있는 말을 네가 다 훔쳐 가서 나는 편지에도 더 이상 쓸 말이 없다'며 너는 종종 아름다운 불평을 했지? 오랜만에 네게 편지를 쓰려고 고운 편지지를 꺼내놓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무슨 말을 쓸 거니?' 어느새 먼저 와서 활짝 웃는 너의 얼굴. 몰래 너를 기쁘게 해주려던 내 마음이 너무 빨리 들켜버린 것만 같아서 나는 더 이상 편지를 쓸 수가 없구나.

 

8

'밥 많이 먹고 건강해야 돼. 알았지?' 같은 나이에도 늘 엄마처럼 챙겨주는 너의 말. '보고 싶어 혼났는데... 너 혹시 내 꿈 꾸지 않았니?' 하며 조용히 속삭이는 너의 말. 너의 모든 말들이 내게는 늘 아름다운 노래가 되는구나, 친구야.

 

9

나를 보고 미소하는 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아도, 네가 보내준 편지들을 다시 꺼내 읽어봐도 나의 그리움은 채워지질 않는구나. 너와 나의 추억이 아무리 아름다운 보석으로 빛을 발한다 해도 오늘의 내겐 오늘의 네 소식이 가장 궁금하고 소중할 뿐이구나, 친구야.

 

10

비 오는 날 듣는 뻐꾹새 소리가 더욱 새롭게 반가운 것처럼 내가 몹시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네가 내게 들려준 위로의 말은 오랜 세월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단다.

 

11

아무도 모르게 숲에 숨어 있어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와 나를 안아 주는 햇빛처럼 너는 늘 조용히 온다.

 

12

네가 평소에 무심히 흘려놓은 말들도 내겐 다 아름답고 소중하다. 우리집 솔숲의 솔방울을 줍듯이 나는 네 말을 주워다 기도의 바구니에 넣어둔다.

 

13

매일 산 위에 올라 참는 법을 배운다. 몹시 그리운 마음, 궁금한 마음, 즉시 내보이지 않고 절제할 수 있음도 너를 위한 또 다른 사랑의 표현임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다. 매일 산 위에 올라 바다를 보며 참는 힘을 키운다. 늘 보이지 않게 나를 키워주는 고마운 친구야.

 

14

내 얕은 마음을 깊게 해주고, 내 좁은 마음을 넓게 해주는 너. 숲 속에 가면 한그루 나무로 걸어오고, 바닷가에 가면 한점 섬으로 떠서 내게로 살아오는 너. 늘 말이 없어도 말을 건네오는 내 오래된 친구야, 멀리 있어도 그립고 가까이 있어도 그리운 친구야.

 

15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천사의 몫을 하는 게 아니겠어? 참으로 성실하게 남을 돌보고, 자기를 잊어버리고, 그래서 몸과 마음이 늘 사랑 때문에 가벼운 사람은 날개가 없어도 천사가 아닐까? 오늘은 그런 생각을 해보았어.

 

16

친구야, 이렇게 스산한 날에도 내가 춥지 않은 것은 나를 생각해 주는 네 마음이 불빛처럼 따스하게 가까이 있기 때문이야. 꼼짝을 못하고 누워서 앓을 때에도 내가 슬프지 않은 것은 알기만 하면 먼데서도 금방 달려올 것 같은 너의 그 마음을 내가 읽을 수 있기 때문이야. 약해질 때마다 나를 든든하게 하고, 먼 데서도 가까이 손잡아 주는 나의 친구야, 숨어 있다가도 어디선지 금방 나타날 것만 같은 반딧불 같은 친구야.

 

17

방에 들어서면 동그란 향기로 나를 휘감는 너의 향기. 네가 언젠가 건네준 탱자 한알에 가득 들어 있는 가을을 펼쳐놓고 나는 너의 웃음소릴 듣는다. 너와 함께 있고 싶은 나의 마음이 노란 탱자처럼 익어간다.

 

18

친구야, 너와 함께 별을 바라볼 때 내 마음에 쏟아져 내리던 그 별빛으로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너와 함께 갓 피어난 들꽃을 바라볼 때 내 마음을 가득 채우던 그 꽃의 향기로 나는 너를 그리워한다.

 

19

네가 만들어준 한 자루의 꽃초에 나의 기쁨을 태운다. 초 안에 들어 있는 과꽃은 얼마나 아름답고 아프게 보이는지. 하얀 초에 얼비치는 꽃들의 아픔 앞에 죽음도 은총임을 새삼 알겠다. 펄럭이는 꽃불 새로 펄럭이는 너의 얼굴. 네가 밝혀준 기쁨의 꽃심지를 돋우어 나는 다시 이웃을 밝히겠다.

 

20

너는 아프지도 않은데 '아프면 어쩌나?' 미리 근심하며 눈물 글썽인다. 한동안 소식이 뜸할 뿐인데 '나를 잊은 것은 아닌가?' 미리 근심하며 괴로워한다. 이러한 나를 너는 바보라고 부른다.

 

21

'축하한다. 친구야!' 네가 보내준 생일 카드 속에서 한묶음의 꽃들이 튀어나와 네 고운 마음처럼 내게 와 안기는구나. 나를 낳아주신 엄마가 더욱 고맙게 느껴지는 오늘. 내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너를 만날 수도 없었겠지? 먼 데서 나를 보고 싶어 하는 네 마음이 숨차게 달려온 듯 카드는 조금 얼굴이 상했구나. 그 카드에 나는 입을 맞춘다.

 

22

친구야, 너는 눈물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니? 너무 기쁠 때에도, 너무 슬플 때에도 왜 똑같이 눈물이 날까?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가 호수처럼 고여오기도 하고, 폭포처럼 쏟아지기도 하는 눈물. 차가운 나를 따스하게 만들고, 경직된 나를 부드럽게 만드는 고마운 눈물. 눈물은 묘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 내 안에도 많은 눈물이 숨어 있음을 오늘은 다시 알게 되어 기쁘단다.

 

23

아무리 서로 좋은 사람과 사람끼리라도 하루 스물네 시간을 함께 있을 수는 없다는 것 - 이것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나를 늘 쓸쓸하게 하는 것 중의 하나란다. 너무 어린 생각일까?

 

24

나는 따로 집을 짓지 않아도 된다. 내 앞에서 네가 있는 장소는 곧 나의 집인 것이기에, 친구야. 나는 따로 시계를 보지 않는다. 네가 내 앞에 있는 그 시간이 곧 살아 있는 시간이기에, 친구야. 오늘도 기도 안에 나를 키워주는 영원한 친구야

 

 

 

우체국 가는 길

이해인

 

세상은

편지로 이어지는

길이 아닐까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하나

미루나무로 줄지어 서고

사랑의 말들이

백일홍 꽃밭으로 펼쳐지는 길

 

설레임 때문에

봉해지지 않는

한 통의 편지가 되어

내가 뛰어가는 길

 

세상의 모든 슬픔

모든 기쁨을

다 끌어안을 수 있을까

 

작은 발로는 갈 수가 없어

넓은 날개를 달고

사랑을 나르는

편지 천사가

되고 싶네, 나는

 

 

 

유월의 숲에는

이해인

 

초록의 희망을 이고

숲으로 들어가면

뻐꾹새 

새 모습은 아니 보이고

노래 먼저 들려오네

 

아카시아꽃

꽃모습은 아니 보이고

향기 먼저 날아오네

 

나의 사랑도 그렇게

모습은 아니 보이고

늘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네

 

눈부신 초록의 노래처럼

향기처럼

나도 새로이 태어나리

 

유월의 숲에 서면

더 멀리 나를 보내기 위해

더 가까이 나를 부르는 당신

 

 

 

유채꽃

이해인

 

산 가까이 바다 가까이

어디라도 좋아요

착하게 필 꺼예요

 

같은 옷만 입어도

지루할 틈 없어요

노랗게 익다 못해

나의 꿈은

가만히기름이 되죠

 

하늘과 친해지니

사람 더욱 어여쁘고

바람과 친해지니

삶이 더욱 기쁘네요

 

수수한 행복 찿고 싶으면

유채꽃밭으로 오세요

 

 

 

유혹에서 지켜주소서

이해인

 

저의 매일은 자질구레한 유혹에서의

탈출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성을 내고 싶은 유혹에서

변명하고 싶은 유혹에서

부탁을 거절하고 싶은 유혹에서

말을 해야 할 때 말하기 싫은 유혹에서

저를 지켜주소서

 

 

 

음악의 향기

이해인

 

좋은 음악을 들을 땐

너도 나도 말이 필요 없지

한 잔의 차를 사이에 두고

강으로 흐르는 음악은

곧 기도가 되지

사랑으로 듣고

사랑으로 이해하면

사랑의 문이 열리지

낯선 사람들도

음악을 사이에 두고

이내 친구가 되는

음악으로 가득찬 집

여기서 우리는 음악의 향기 날리며

고운 마음으로 하나가 되지

 

 

 

음악인들을 위하여

이해인

 

사계절 내내

음악을 이야기하면서도

우리는 지칠 줄 모르는

음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음악은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희망의 언어였으며

세상과 이웃을 향해

하고 싶은 말들을 대신해주는

사랑의 편지였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한결같이 함께 해주는

충실한 벗이었으며

피곤한 발걸음으로 문을 두드리면

가장 따뜻하게 반겨주는

고향의 집이었습니다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시듯이 음악을 마시며

힘들 때도 행복했습니다

 

음악 안에서

음악과 함께

음악을 향해 살고 싶은 마음은

깊고 넓은 바다로 열리고

 

이 바다로 떠오르는 푸른 별 하나

음악은 영원하다고

환히 웃으며 길을 밝혀줍니다

 

음악은 기쁨

음악은 평화

음악은 기도

 

음악으로 난 길을

끝까지 새롭게 '첫마음' 으로 걷다보면

언젠가는 우리 또한

존재 자체로

아름다운 음악이 되겠지요?

 

믿으면 되리라

오늘도 노래하며

즐겁게 길을 갑니다

 

 

 

이 가을에는.

이해인

 

이 가을에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내 욕심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 없이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맑고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집착과 구속이라는 돌덩이로

우리들 여린 가슴을 짓눌러

별처럼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하며

고통과 번민 속에 지내지 않도록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풋풋한 그리움 하나 품게 하소서.

우리들 매 순간 살아감이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누군가의 어깨가 절실히 필요할 때

보이지 않는 따스함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아줄 수 있는

풋풋한 그리움 하나 품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말 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사랑이라는 말이 범람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간절한 사랑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며

부족함조차도 메꾸어줄 수 있는

겸손하고도 말 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정녕 넉넉하게 비워지고

따뜻해지는 작은 가슴 하나 가득

환한 미소로 이름 없는 사랑이 되어서라도

그대를 사랑하게 하소서.

 

 

 

이끼 낀 돌층계에서

이해인

 

이끼 낀 돌층계에

내가 찍어놓은

그리움의 발자국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죽음이 가까워도

세월은 푸르게

나를 안고 있다

 

층계에서 별을 보면

고요하고 따뜻해라

 

오늘의 눈물은 모두

이끼 속에 숨기고

화안히 웃어야지

 

내일을 기다리는

연인이 되어야지

 

 

 

이별 노래

이해인

 

떠나가는 제 이름을

부르지 마십시오

이별은

그냥 이별인 게 좋습니다

 

남은 정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갈 길을 가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움도

너무 깊으면 병이 되듯이

너무 많은 눈물은

다른 이에게 방해가 됩니다

 

차고 맑은 호수처럼

미련 없이 잎을 버린

깨끗한 겨울나무처럼

그렇게 이별하는 연습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이별 연습

이해인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리고

좋은 생각을 잊어버리고

잃고 잊는 게 하도 많아 내가 나에게 놀라네

 

나이를 먹는 것은 이별을 위한 준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살짝 변명하며 빙그레 웃어보는 오늘

 

세월과 더불어 빛을 잃어도

힘들다고 슬프다고 한탄하지 않으면

 

은은한 환희심이 반달로 차 오를 거라고

쓸쓸해도 자꾸만 웃음이 나올거라고

 

창밖의 새들이 노래로 말을 하네

정원의 꽃들이 향기로 손짓하네

우는 것도 예쁜 새 지는 것도 예쁜 꽃

 

언제나 무엇이나

괜찮다 괜찮다 나를 위로하니

두려운 이별이 두렵지 않네

 

잊혀져도 좋다고

마침내 고백하며 하늘을 보네

 

 

 

이별의 눈물

이해인

 

모르는 척

모르는 척

겉으론 무심해 보일 테지요

 

비에 젖은 꽃잎처럼

울고 있는 내 마음은

늘 숨기고 싶어요

 

누구와도 헤어질 일이

참 많은 세상에서

나는 살아갈수록

헤어짐이 두렵습니다

 

낯선 이와

잠시 만나 인사하고

헤어질 때도

눈물이 준비되어 있네요

 

이별의 눈물은 기도입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길 바라는

순결한 약속입니다

 

 

 

이별 소곡

이해인

 

헤어지는 연습 없이

사랑했는데

 

너와 내가

목메어

돌아서는 길목

 

돌층계에 깔리는

연연한 노을빛 그림자

 

쓸쓸히 손 흔들며

나목처럼

시린 가슴

 

용서하는 마음

사랑하는 정

가득 풀어 헤치고

 

서러운 눈빛으로

마주치다가

 

순명의 나무 되어

손을 모은다

 

이별은

기도의 출발

 

헤어져도

갈림 없는

두 마음

 

말간 하늘 폭에

하나의

돛을 단다

 

 

 

이사

이해인

 

몸이든

집이든

움직여야 살아난다

포기해야 새로 난다

 

욕심도 물건도

조금씩 줄이면서

선선히 내어놓고

제자리로 보내면서

 

미련 없이

환하게 웃을 수 있어야

이사를 잘 한 거다

 

옮기는 것이

결코 짐이 되지 않는

가벼운 날

 

그런 날은

아마도 내가

세상에 없는 날이겠지?

 

 

 

이제는 봄이구나

이해인

 

강에서는

조용히 얼음이 풀리고

 

나무는

조금씩 새순을 틔우고

 

새들은

밝은 웃음으로

나를 불러내고

 

이제는 봄이구나

친구야

 

바람이 정답게

꽃이름을 부르듯이

해마다 봄이면

제일 먼저 불러보는

너의 고운 이름

 

너를 만날

연둣빛 들판을 꿈꾸며

햇살 한 줌 떠서

그리움, 설레임, 기다림......

향기로운 기쁨의 말을 적는데

 

꽃샘바람 달려와서

네게 부칠 편지를

먼저 읽고 가는구나, 친구야

 

 

 

이제 당신이 오시어

이해인

 

세상은 무겁고 죽음은 어둡고 슬픔은 깊었습니다.

절망의 벼랑 끝에 눈물 흘리던 시간 위엔

고통의 상처가 덧나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이제 당신이 오시어 우리를 부르십니까.

두렵고 황홀한 번개처럼 오시어

우주를 흔들어 깨우십니까.

 

차가운 돌무덤에 갇혔던 당신이 따듯하게 살아오시어

세상은 잃었던 웃음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은 기뻐서 하늘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순간들이

부활의 흰 꽃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날마다 조금씩 아파하는 인내의 순간들이

 

부활의 흰 새로 날아오르게 하소서.

예수께서 직접 봄이 되고

빛이 되어 승리하신 이 아침

 

아아, 이젠 다시 살아야겠다고

풀물이 든 새 옷을 차려입는

처음의 희망이여, 떨림이여.

 

 

 

이젠 다시 사랑으로 - 사순절의 기도

이해인

 

아직은 빈손을 쳐들고 있는

3월의 나무들을 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경건한 기도를 바치며

내가 나를 타이르고 싶습니다

 

죄도 없이 십자나무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억하며

가슴 한켠에

슬픔의 가시가 박히는 계절

너무 죄가 많아 부끄러운 나를

매운 바람 속에 맡기고

모든 것을 향해

화해와 용서를 청하고 싶은

은총의 사순절입니다

 

호두껍질처럼 단단한 집 속에

자신을 숨겼던 죄인이지만

회심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슬퍼하지 않으렵니다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말하지 않으렵니다

 

우리 모두 나무처럼 고요히 서서

많은 말을 줄이고

주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해주십시오

나무처럼 깊숙이

믿음의 땅에 뿌리를 박고

세상을 끌어안되

속된 것을 멀리하는

맑은 지혜를 지니게 하십시오

 

매일의 삶 속에 일어나는

자신의 근심과 아픔은 잊어버리고

숨은 그림 찾듯이

이웃의 근심과 아픔을 찾아내어

도움의 손길을 펴는

넓은 사랑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현란한 불꽃과 같은

죄의 유혹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아온 날들,

기도를 게을리 하고도 정당화하며

보고, 듣고, 말하는 것에서

절제가 부족했던 시간들,

이웃에게 쉽게 화를 내며

참을성 없이 행동했던

지난날의 잘못에서

마음을 돌이키지도 않고

주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진정한 뉘우침도 없이

적당히 새날을 맞으려고 했던

나쁜 버릇을 용서하십시오

 

이젠 다시 사랑으로

회심할 때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교만에서 겸손으로

불목에서 화해로

증오에서 용서로

새로운 길을 가야 하지만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항상 멀기만 한 길입니다

 

이젠 다시 사랑으로

마음을 넓히며

사랑의 길을 걷게 해주십시오

 

오직 사랑 때문에

피 흘리신 예수와 함께

오늘을 마지막인 듯이 깨어사는

봉헌의 기쁨으로

부활을 향한 사랑의 길을

끝까지 피 흘리며 가게 해주십시오

 

아직은 꽃이 피지 않은

3월의 나무들을 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도하며

보랏빛 참회의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이타적인 예민함을

이해인

 

주위의 사람과 사물에 대하여

늘 깨어 있고

깊은 감정을 갖는 예민함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 예민함'이 아닌

 

남을 생각하는

'이타적인 예민함'을

나날이 키워가야겠다

 

 

 

익어가는 가을

이해인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도 익어가네

 

익어가는 날들은

행복하여라

 

말이 필요없는

고요한 기도

 

가을엔

너도나도

익어서

사랑이 되네

 

 

 

인연의 잎사귀

이해인

 

수첩을 새로 샀다

원래 수첩에 적혀있던 것들을

새 수첩에 옮겨 적으며 난 조금씩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

어느 이름은 지우고

어느 이름은 남겨 둘 것인가

그러다가 또 그대 생각을 했다

 

살아가면서 많은 것이

묻혀지고 잊혀진다 하더라도

그대 이름만은

내 가슴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은

언젠가 내가 바람 편에라도

그대를 만나보고 싶은 까닭이다

 

살아가면서 덮어두고

지워야 할 일이 많이 있겠지만

그대와의 사랑, 그 추억만은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까닭이다

 

두고두고 떠올리며

소식 알고픈 단 하나의 사람

내 삶에 흔들리는 잎사귀 하나 남겨준 사람

 

슬픔에서 벗어나야

슬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듯

그대에게 벗어나

나 이제 그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네

 

처음부터 많이도 달랐지만

많이도 같았던 차마 잊지 못할

내 소중한 인연이여

 

 

 

입춘 일기

이해인

 

겨울이 조용히 떠나면서

나에게 인사합니다.

안녕!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기를

봄이 살그머니 다가와

나에게 인사합니다.

안녕? 또 만나서 반가워요.

딱딱한 생각을 녹일 때

고운 말씨가 필요할 때

나를 이용해주세요.

어서 오세요. 봄!

나는 와락

봄을 껴안고

나비가 되는 꿈을 꿉니다.

 

 

 

있잖니 꼭 그맘때

이해인

 

있잖니 꼭 그맘때

산 위에 오르면

있잖이 꼭 그맘때

바닷가에 나가면

활활 타다 남은 저녁 노을

그 노을을 어떻게

그대로 그릴 수가 있겠니

 

한 번이라도 만져 보고 싶은

한 번이라도 입어 보고 싶은

주홍의 치마폭 물결을

어떻게 그릴 수가 있겠니

 

혼자 보기 아까워

언니를 부르러 간 사이

몰래 숨어 버리고 만 그 노을을

어떻게 잡을 수가 있겠니

 

그러나 나는

나에게 노을을 주고

너에게도 노을을 준다

 

우리의 꿈은 노을처럼 곱게

타올라야 하지 않겠니

때가 되면 조용히

숨을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니

 

 

 

잎사귀 명상

이해인

 

꽃이 지고 나면

비로소 잎사귀가 보인다

잎 가장자리 모양도

잎맥의 모양도

꽃보다 아름다운

시가 되어 살아온다

 

둥글게 길쭉하게

뾰족하게 넓적하게

 

내가 사귄 사람들의

서로 다른 얼굴이

나무 위에서 웃고 있다

 

마주나기잎

어긋나기잎

돌려나기잎

무리지어나기잎

 

내가 사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운명이

삶의 나무 위에 무성하다

 

 

 

자연을 닮아

이해인

 

내 마음은 달을 닮아

차오르기도 하고 기울기도 해

 

그리고 해를 닮아

떠오르기도 하고 지기도 하지

 

내 마음은 파도를 닮아

밀려오기도 하고 밀려가기도 해

 

그리고 밭을 닮아

씨앗을 키워서 열매를 맺기도 하지

 

 

 

작은 노래

이해인

 

1

마음은 고요하게 눈길은 온유하게 생활은

단순하게 날마다 새롭게 다짐을 해 보지만

 

쉽게 방향을 잃는 내 마음이

내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습니다.

 

작은 결심도 실천 못하는

나의 삶이 미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눈을 크게 뜨고 열심히 길을 가면

감사의 노래를 멈추지 않으면

 

한얀 연꽃을 닮은 희망 한 송이

어느 날 슬며시 피어오릅니다.

 

삶이 다시 예뻐지기 시작합니다.

 

 

2

하나의 태양이

이 넓은 세상을

골고루 비춘다는 사실을

처음인듯 발견한

어느 날 아침의 기쁨

 

꽃의 죽음으로 키워 낸

한 알의 사과를

고마운 마음도 없이

무심히 먹어 버린

조그만 슬픔

 

사랑하는 이가 앓고 있어도

그 대신 아파 줄 수 없고

그저 눈물로 바라보기만 하는

막막함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매일 삶을 배웁니다

그리고 조금씩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3

어느 날 비로소

큰 숲을 이루게 될 묘목들

넓은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며

갓 태어난 어린 새들

 

어른이 되기엔 아직도 먼

눈이 맑은 어린이

한 편의 시가 되기 위해

내 안에

민들레처럼 날아다니는

조그만 이야기들

더 높은 사랑에 이르기 위해선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조그만 슬픔과 괴로움

 

목표에 도달하기 전

완성되기 이전의 작은 것들은

늘 순수하고 겸허해서

마음이 끌리는 걸까

 

크지 않다는 이유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것들의

숨은 힘을 사랑하며

날마다 새롭게

착해지고 싶다

 

풀잎처럼 내 안에 흔들리는

조그만 생각들을 쓰다듬으며

욕심과 미움을 모르는

작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행복한 나라를 꿈꾸어본다

 

작은 것을 아끼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보이지 않게 심어주신

나의 하느님을 생각한다

내게 처음으로 작은 미소를 건네며

작은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가장 겸허한 친구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작은 새가 되고 싶다

이해인

 

친구야,

네가 너무 바빠 하늘을 볼 수 없을 때

나는 잠시 네 가슴에 내려앉아 하늘 냄새를 파닥이는

작은 새가 되고 싶다.

 

사는 일의 무게로

네가 기쁨을 잃었을 때

나는 잠시 너의 창가에 앉아 노랫소리로 훼방을 놓는

고운 새가 되고 싶다.

 

모든 이를

다 불러 모을 넓은 집은 내게 없어도

문득 너를 향한 그리움으로 다시 짓는 나의 집은,

부서져도 행복할 것 같은

자유의 빈집이다.

 

 

 

작은 언니

이해인

 

동생이 나에게

작은 언니!라고 부를 적마다

내 마음엔 색색의

패랭이꽃이 돋아나네

 

왜 그래? 대답하며

착해지고 싶네

 

이슬 묻은 풀잎들도

오늘은 나에게

작은 언니라고 부르는 것 같아

 

그래 그래

웃으며 대답하니

행복하다

 

수녀(sister)는

언니(sister)라는 말도 된다지

 

작은 일에 감동을 잘하고

오직 사랑 때문에

눈물도 많은 언니

 

싸움이 나면

세상 끝까지 가서

중간 역할을 잘해

평화를 이루어내는

 

사랑받는

작은 언니가 되고 싶네

 

 

 

작은 위로

이해인

 

잔디밭에 쓰러진

분홍색 상사화를 보며

혼자서 울었어요

쓰러진 꽃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하늘을 봅니다

비에 젖은 꽃들도

위로해주시구요

아름다운 죄 많아

가엾은 사람들도

더 많이 사랑해주세요

보고 싶은 하느님

오늘은 하루 종일

꼼짝을 못하겠으니

어서 저를

일으켜 주십시오

 

 

 

잠 노래

이해인

 

잠 속에

나를 묻고 나를 잊네

 

그의 품에 안기면

누구라도 용서하는

천사의 마음이 되네

 

감은 눈 안으로

빛을 그리며 다시 태어나리

순하게

부드럽게

청빈하게

 

살아있는 고마움을

꿈에도 노래하리

 

어느 날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단 한 번의 영원한 잠

 

끝까지 기다리며

오늘을 사랑하리

 

 

 

잠의 집

이해인

 

나는 때때로

걸어다니는

잠의 집이다

 

눈을 감으면

언제라도

꿈을 데려올 수 있는

고요한 잠의 노래이다

 

눕지 않고도

잠을 잘 수 있는

내 몸의 신비를

 

나는

감사하고 감사하며

잠 속의 하느님을 만난다

 

잠 속에서

그분을 새롭게 믿고

포근하게 사랑한다

 

 

 

장독대

이해인

 

장독대의 백 개도 넘는 항아리들

연도에 따라 된장 간장 고추장 젓갈류

각기 다른 이름표를 달고 있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

 

우리는 매일

그 안에 들어 있는 기다림의 시간들을

음식으로 녹여서 먹는 것일 테지

 

딸들이 수녀원에 오는 것을 반대하던

엄마의 경직된 얼굴에도

빙긋이 웃음꽃을 피우게 하는

우리 장독대

 

 

 

장독대에서

이해인

 

움직이지 않고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

우리집 항아리들

 

우리와 함께

바다를 내다보고

종소리를 들으며

삶의 시를 쓰는 항아리들

 

간장을 뜨면서

침묵의 세월이 키워준

겸손을 배우고

 

고추장을 뜨면서

맵게 깨어 있는 지혜와

기쁨을 배우고

 

된장을 뜨면서

냄새 나는 기다림 속에

잘 익은 평화를 배우네

 

마음이 무겁고

삶이 아프거든

우리집 장독대로

오실래요?

 

 

 

장미를 생각하며

이해인

 

우울한 날은

장미 한 송이 보고 싶네

 

장미 앞에서

소리내어 울면

나의 눈물에도 향기가 묻어날까

 

감당 못할 사랑의 기쁨으로

내내 앓고 있을 때

나의 눈을 환히 밝혀주던 장미를

잊지 못하네

 

내가 물 주고 가꾼 시간들이

겹겹의 무늬로 익어 있는 꽃잎들 사이로

길이 열리네

 

가시에 찔려 더욱 향기로웠던

나의 삶이

암호처럼 찍혀 있는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오늘도 내 마음에

불을 붙이네

 

 

 

장미의 기도

이해인

 

피게 하소서, 주님

당신이 주신 땅에 가시덤불 헤치며

피 흘리는 당신을 닮게 하소서

내 뾰족한 가시들이

남에게 큰 아픔이 되지 않게 하시며

나를 위한 고뇌 속에

성숙하게 기쁨을 알게 하소서....

 

오직 당신 한 분 위해

마음 가다듬는 슬기를

깨우치게 하소서

죽어서 다시 피는 목숨이게 하소서

 

 

 

장미를 생각하며

이해인

 

우울한 날은

장미 한 송이 보고 싶네

 

장미 앞에서

소리 내어 울면

나의 눈물에도 향기가 묻어날까

 

감당 못 할 사랑의 기쁨으로

내내 앓고 있을 때

나의 눈을 환히 밝혀주던 장미를

잊지 못하네

 

내가 물 주고 가꾼 시간들이

겹겹의 무늬로 익어 있는 꽃잎들 사이로

길이 열리네

 

 

가시에 찔려 더욱 향기로웠던

나의 삶이

암호처럼 찍혀 있는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오늘도 내 마음에

불을 붙이네

 

 

 

저녁 강가에서

이해인

 

바람 따라 파문 짓는 저녁 강가에

노을을 걸치고 앉아 있었다.

 

등 뒤에서 무거웁던 시간을 잊고

피곤한 눈길을 강물에 적시면

​​말없이 무한정 말이 깊은 강

 

고마운 오늘을 출렁이면서

기쁨의 내일을 가자고 한다

 

따스한 강물에 흔들리는 노을

나도 자꾸만 가고 있었다

 

 

 

전화를 걸 때면

이해인

 

사랑하는 너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나는 늘 두렵다

 

너의 '부재중'이 두렵고

자동응답기가 전해줄

정감 없는 목소리가

너 같지 않아서 두렵고

낯선 누군가

우리의 이야기를 엿들을까 두렵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왠지 전화로는

내 마음을 다 이해 못할 것 같은

너에 대한 약간의 불신이 두렵고

시간이 급히 달려와서

우리의 이별을 재촉하는 듯한 서운함이

나를 슬프게 한다

 

먼 거리도 가까이 이어주는

고마운 선이

내게는 탁탁 끊기는

불협화음의 쓸쓸함으로 남아

떠나질 않고 있으니

나는 오늘도 네게

전화를 걸 수 없다

 

 

 

정말 미안해

이해인

 

한 장의 손수건을 접어 주머니에 넣듯이

습관의 노예로 살아버린

나의 시간들이여, 미안하다

비오는 날 창문을 닫듯이

그저 별생각 없이 무심히 지나쳐버린

나의 시간들이여, 정말 미안하다

주인을 잘못 만나 불쌍했던 네게

고개 숙여 사과할게

 

 

 

정성껏 살아간다는 것은

이해인

 

바쁨 속에도 기쁨과 평화가 있다

유순한 마음, 좋은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을 할 때는

정신없이 바빠도

짜증이 나지 않고 즐겁다

 

나의 삶이 노래가 된다는 것은

그럭저럭

시간을 메우는 데 있지 않고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여

정성껏 살아가는 데 있다

 

 

 

제비꽃 연가

이해인

 

나를 받아주십시오

 

헤프지 않은 나의 웃음

아껴둔 나의 향기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가까이 오셔야

나는 겨우 고개를 들어

웃을 수 있고

감추어진 향기도

향기인 것을 압니다.

 

당신이 가까이 오셔야

내 작은 가슴속엔 하늘이 출렁일 수 있고

내가 앉은 이 세상은

아름다운 집이 됩니다.

 

담담한 세월을

뜨겁게 안고 사는 나는

가장 작은 꽃이지만

 

가장 큰 기쁜을 키워 드리는

사랑꽃이 되겠습니다.

 

당신의 삶을

온통 봄빛으로 채우기위해

어둠 밑으로 뿌리내린 나

비 오는 날에도 멈추지 않는

작은 시인이 되겠습니다.

나를 받아주십시오.

 

 

 

 

조그만 행복

이해인

      

바닷가에 가면

조개 껍질

 

솔숲에 가면

솔방울

 

동심을 잃지 않고 싶은 내게

평생의 노리개였지

 

예쁜 마음으로 주워서

예쁜 마음으로 건네면

 

별것 아닌 조그만 게

행복을 준다며

아이처럼 소리 내어

웃는 사람들

 

그들 덕분에

나도 내내

행복하였다

 

 

 

조시(弔詩)를 쓰고 나서

이해인

 

가까운 이들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눈물을 찍어 조시(弔詩)를 쓰고 나면

 

며칠은 시름시름

몸이 아프고

마음은

태풍에 쓰러진 나무와 같다

 

죽은이들은 말이 없는데

살아서 그를 위해 시를 쓰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을까

후회도 해본다

 

슬픔을 일으켜 세우는 건

언제나 슬픔인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안으로 안으로

실컷 슬픔을 풀어내고 나면

나는 어느새 용감해져서

일상의 길을 걸어가다가

조금씩 웃을 수 있다

 

 

 

종소리

이해인

 

항상 들어도

항상 새로운

당신의 첫 소리

 

방황하며

지친 내 영혼

울다 울다 쓰러져

다시 들으며

나를 찾네

 

멀리 있고

높이 있어도

늘 가깝고

귀에 익은

그리움의 힘이여

 

죽어도 잊을 수 없고

절망 속에도

쉽게 떠날 수 없는

처음의 사랑이여

 

 

 

좋은 말이 사람을 키웁니다

이해인​

 

어떤 상황에서 누가 강한 불만을 토로하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우린 잘 모르잖아요."

라고 조심스레 대꾸해 보고,

늘 자신을 비하하며 한탄하는 이들에겐

"걱정 마시고 힘을 내세요. 곧 좋아질 거예요."

라고 위로의 표현을 해 봅니다.

싫다, 지겹다는 말을 자꾸 되풀이하면

실제로 지겨운 삶이 될 테니

우선 말이라도 그 반대의 표현을 골라서

연습하다 보면 그 좋은 말이 우리를 키워 주는걸

경험하게 된다고 감히 경륜 쌓인 교사처럼

친지들에게 일러 주곤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나의 잘못이나

허물을 지적받았을 때도

변명을 앞세우기보다는 일단 고맙다,

죄송하다는 말부터 먼저 하고 나면

마음이 자유롭고 떳떳해지는

승리감을 맛보게 된다는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주일 노래

이해인

 

오늘은 해의 날

해를 지으신 당신을 기억하며

새 마음으로

새 옷을 입습니다

 

숨차게 달려오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단한 일손을 멈추고

바쁘다는 탄식도 오늘은

고요히 접어둡니다

 

진정 사랑하면

눈도 마음도

밝아진다고 하셨지요?

좀 더 밝아지기 위하여

오늘은 쉬면서

침묵 속으로 들어갑니다

 

기도를 첫 자리에 두는 지혜를

새롭게 배우는 주일

누군가를 위로하는 작은 천사 되라고

즐겁게 나를 재촉하는 주일

 

수도원 종소리에

새들도 잠시 앉아 기도하고

솔숲 사이로 보이는 동백꽃 웃음에

내 마음도 덩달아 환해지는

은총의 주일이여

 

 

 

주일에 나는

이해인

 

주일에 나는

물방울 같은 언어를

하늘에 튕깁니다

 

평소에 잃었던 나를 찾아들고

빈 집으로 오는 길

 

어둠이 깊을수록

잘 보이는 당신 앞에

 

나는 허무를 쪼아먹는

벙어리 새입니다

 

내 생애의 어느 들판에

겸손의 들꽃은 필 것입니까

 

뼈 마디 마디

내가 무거워 부서지는

안개빛 가루

 

죽은 이도 일어나 앉는 주일에

산 이들이 뿜어 내는

뽀얀 한숨 소리

 

나는 하나인 당신을 위해

물방울 같은 기도를

하늘에 튕깁니다

 

 

 

죽은 아기를 위하여

이해인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

아기를 잃은 엄마들의

숯덩이 같은 슬픔을

당신께 봉헌하오니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아기들의 울음소릴 들으며

밤낮으로 용서 청하는

엄마들의 눈물을

기도로 받아주십시오

 

피지도 못하고 죽은

우리 아기들은 이제

하늘나라에서 평화아기로

다시 태어난 것임을

믿어도 되지요?

 

엄마의 가슴에

별로 뜨는 천사가 되어

아기들은 말한답니다

 

엄마를 용서해요

엄마를 사랑해요

우리를 빚은 하느님이

사랑이시니까요

 

우리는 어둠 속에

사라졌지만

빛 속에 태어날

세상의 아기들을

기쁘게 받아서 키워주세요

아기들은 소리 없이 말한답니다

 

아아

생명은 영원한 것

사랑은 진정

용서할 수밖에 없는 것

 

눈물꽃 피우는 엄마와 아기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화해하게 해주십시오

 

조금씩 사랑을 키우며

기도 안에 하나된 눈물로

세상의 죄와 고통을

정화시킬 수 있도록

은총 베풀어주십시오

 

 

 

죽음을 잊고 살다가

이해인

 

매일 조금씩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죽음을 잊고 살다가

 

누군가의 임종 소식에 접하면

그를 깊이 알지 못해도

가슴 속엔 오래도록

찬 바람이 분다

 

'더 깊이 고독하여라'

'더 깊이 아파하여라'

'더 깊이 혼자가 되어라'

 

두렵고도

고마운 말 내게 전하며

서서히 떠날 채비를 하라 이르며

 

가을도 아닌데

가슴 속엔 오래도록

찬 바람이 분다

 

 

 

즐거운 산책

이해인

 

혼자 거닐면

평소엔 그저 무심히 듣던

새소리나 종소리도

더 의미있게 들리고

산책길에서 발견한 나뭇잎의 무늬

꽃잎과 꽃술의 모양도

더 자세히 보이고

심지어 내 옷에 묻은 얼룩

마음의 얼룩도

더 잘 보인다

 

비오는 날엔

연못에 떨어지는 빗방울 무늬

눈오는 날엔

바다에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고독한 산책의 즐거움

 

 

 

지도에는 금이 가도

이해인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어머니처럼 그리운 나라를

모국이라 부르는데

 

두 동강이 나 있는 지도를 보고

우리나라라고 말하다가

슬며시 멋쩍고 놀라는 마음

북쪽에선 북남이라 하고

남쪽에선 남북이라 말하는

우리의 두 나라는

 

언제 한번 하나 되어

함께 웃어볼 수 있을까

 

사계절의 강과 산이

소박하게 아름다운 나라에서

 

하나의 언어를 쓰면서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낯설게 살고 있는 슬픔을

결코 잊으면 안 되는데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답답할 뿐 답이 없네

 

기다림에 지쳐 무뎌진 마음에도

이제는 조금씩 눈물이 흐르네

 

힘든 중에도 우리는

다시 이해하는 사랑을 배우고

 

다시 화해와 용서를 시작하며

함께 행복하고 싶은데

함께 꿈을 꾸면 이루어질까?

희망의 싹을 틔우다 말고

 

다시 절망 속으로 내려앉던

그 아픔의 시간들은

어떻게 던져 올릴까

 

지도에는 금이 가도

마음에는 금이 가지 않게

 

간절한 기도를 바치는

눈물꽃의 기쁨이여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어

언젠가는 꼭 이루어낼

통일의 기쁨이여

 

 

 

지혜로 가득한 밤

이해인

 

좋은 말도 아껴쓰는 지혜를

칭찬을 두려워하는 지혜를

신께 청하며 촛불을 켜는 겨울밤

 

아침의 눈부신 말을 준비하는

벅찬 기쁨으로 나는

자면서도 깨어 있네

 

 

 

지혜를 찾는 기쁨

이해인

 

하루의 길 위에서

어느 것을 먼저 해야 할지 분별이 되지 않을 때,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설임만 길어 질 때,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해서 삶에 평화가 없을 때,

가치관이 흔들리고 교묘한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기 힘들 때,

지혜를 부릅니다.

 

책을 읽다가 이해가 안되는 때에도,

글을 써야하는데 막막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때에도 지혜를 부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중간역할을 할 때,

남에게 감히 충고를 할 입장이어서 용기가 필요할 때,

어떤 일로 흥분해서 감정의 절제가 필요할 때에도

"어서 와서 좀 도와주세요." 하며

친한 벗을 부르듯이 간절하게 지혜를 부릅니다.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항상 예의바르게 행동하지만 과장하지 않고

자연스런 분위기를 지닌 사람,

재치있지만 요란하지 않은 사람,

솔직하지만 교묘하게 꾸며서 말하지 않는 사람,

농담을 오래해도 질리지 않고 남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남에게 미루지 않는 사람,

들은 말을 경솔하게 퍼뜨리지 않고 침묵할 줄 아는 사람,

존재 자체로 평화를 전하는 사람,

자신의 장점과 재능을 과시하거나 교만하게 굴지 않고

감사하게 나눌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타인의 입장을 먼저 배려하기에 자신의 유익이나 이기심은

슬쩍 안으로 감출 줄 아는 사람 등등...

생각나는 대로 나열을 해보며 지혜를 구합니다.

 

지혜의 빛깔은 서늘한 가을 하늘빛이고

지혜의 소리는 목관악기를 닮았을 것 같지 않나요?

 

 

 

진달래

이해인

 

해마다 부활하는

사랑의 진한 빛깔 진달래여

 

네 가느단 꽃술이 바람에 떠는 날

상처입은 나비의 눈매를 본 적이 있니

견딜 길 없는 그리움의 끝을 너는 보았니

 

봄마다 앓아 눕는

우리들의 지병(持病)은 사랑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한 점 흰 구름 스쳐가는 나의 창가에

왜 사랑의 빛은 이토록 선연한가

 

모질게 먹은 마음도

해 아래 부서지는 꽃가루인데

 

물이 피 되어 흐르는가

오늘도 다시 피는

눈물의 진한 빛깔 진달래여

 

 

 

진주조개에게

이해인

 

언제나

비밀이 많으시군요

 

문 좀

열어보세요

 

하늘 담은

바다 이야길

듣고 싶어요

 

침묵 속에

보석이 되는

사랑 이야기를

 

아픔을 참아

눈이 부신

기다림의 승리를 -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이해인

 

새들도 쉬러 가고

사람들은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겸허한 시간

욕심을 버리고 지는 해를 바라보면

문득 아름다운 오늘의 삶

눈물나도록 힘든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견디고 싶은 마음이

고마움이 앞서네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래야 내일의 밝은 해를 볼 수 있다고

지는 해는 넌즈시 일러주며 작별 인사를 하네

 

 

 

집을 위한 노래

이해인

 

1

여행길에서

집에 돌아올 때마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

 

별이 내리는 저녁

내가 끌고 오는

나의 그림자도

낯선 듯 반갑고

방문을 열면

누군가 꽂아놓은

분홍 패랭이꽃 몇 송이

꽃술을 흔들며 웃는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책장 속의 책들도

손 흔들며 인사하는 나의 방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히고

두 눈을 감으면

사는 게 고마워서

눈물이 난다

잘못한 게 많지만 천사가 되고 싶은

야무진 꿈 하나

가슴 깊이 심는다

 

 

2

이사를 자주 다녔던 어린 시절

<집 없는 소녀>를 밤새워 읽으며

많이 울었다

조금씩 자라면서 나는

넓은 집이 되려 했다

 

생각이 짧고

마음 좁은 나지만

많은 이가 들어와 쉴 수 있는

따뜻한 집 한 채 되고 싶었다

 

더 이상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를 듣지 않으며

모진 말로 나를 외롭게 하는 이도

새롭게 이해하고 용서하며

웃음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오늘도 계속하는데......

 

진정 다른 이들을 향하여

활짝 열린 집이 될 수 있을까?

내게 묻는 순간부터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나를 모르는 내가 불안하여

잠시 하늘을 본다

 

 

3

땅속의 집은 어둡고 답답할 텐데

나 혼자 외로워서 어떡하지?

 

오늘처럼 비오는 날

이미 땅속에 묻혀 있는

그대의 마지막 말을 기억한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돌아가야 할 땅속의 집

별이 없어도 흙냄새 정답고

돌과 이끼 그득한

창문 없는 집

 

그 집에 들어가 울지 않으려면

땅 위의 이 집에서

많이 웃고 즐겁게 살라고

그대가 속삭이는 말을

나는 분명 들었지

 

뜻 없이 외우는 기도보다는

슬픔도 괴로움도 견디면서

들풀처럼 열심히

오늘을 살아내는 일이

더 힘찬 기도가 된다고

비에 젖은 채로 속삭이는

그대의 목소리를

나는 울면서 들었지

 

 

 

찔레꽃

이해인

 

아프다 아프다 하고

아무리 외쳐도

 

괜찮다 괜찮다 하며

마구 꺽으려는 손길 때문에

 

나의 상처는

가시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남모르게

내가 쏟은

하얀 피

하얀 눈물

한데 모여

향기가 되었다고

 

사랑은 원래

아픈 것이라고

당신이 내게 말하는 순간

 

나의 삶은

누구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차를 마셔요, 우리

이해인

 

오래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찻잔을 사이에 두고

우리 마음에 끓어오르는

담백한 물빛 이야기를

큰 소리로 고백하지 않아도

익어서 더욱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함께 차를 마셔요

 

오래 기뻐하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산을 닮은 어진 눈빛과

바다를 닮은 푸른 지혜로

치우침 없는 중용을 익히면서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지닐 수 있도록

함께 차를 마셔요

 

오래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 세상일들

혼자서 만들어 내는 쓸쓸함

남이 만들어 준 근심과 상처들을

단숨에 잊을 순 없어도

노여움을 품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며 함께 차를 마셔요

 

차를 마시는 것은

사랑을 마시는 것

기쁨을 마시는 것

기다림을 마시는 것이라고

다시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가 서로의 눈빛에서 확인하는

고마운 행복이여

 

조용히 차를 마시는 동안

세월은 강으로 흐르고

조금씩 욕심을 버려서

더욱 맑아진 우리의 가슴속에선

어느 날 혼을 흔드는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들려올 테지요?

 

 

 

차 한잔하시겠어요

이해인

 

사계절 내내 정겹고 아름다운

​이 초대의 말에선

​연둣빛 풀 향기가 난다.

 

그리운 사람을 만나

​설렘을 진정시키고 싶을 때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싶을 때

 

우리는 고요한 음성으로

"차 한잔하시겠어요?" 한다.

 

​낯선 사람끼리 만나

​어색한 침묵을 녹여야 할 때

 

잘 지내던 사람들끼리 오해가 쌓여

​화해의 대화를 시작해야 할 때도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차 한잔하시겠어요?" 한다.

 

​혼자서 일하다가 문득

​외롭고 쓸쓸해질 때도

 

스스로에게 웃으며

"차 한잔하시겠어요?" 하며 향기를 퍼 올린다.

 

​"차 한잔하시겠어요?"

 

이 말에 숨어 있는

사랑의 초대에

 

언제나 "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창가에서

이해인

 

창이 있음으로 아픈 이들도 병석에서 사계절의 변화를 바라볼 수 있고,

창이 있음으로 나도 매일 식당에서 산을 내다볼 수 있으며

멀이 있는 바다를 가까이 끌어다 가슴에 담을 수도 있다.

 

해질 무렵 마음을 비우고 창가에 서면 혼자라도 쓸쓸하지 않다.

창가에서 바라보는 하늘의 별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루 중의 어느 시간을 우리는 창가에서 기도하며

누군가의 맑은 창으로 열려야 하리라.

 

 

 

채송화 꽃밭에서

이해인

 

색색의 빛깔로 피어난 채송화 꽃밭에서

환한 햇살 받으며 환해지는 마음

 

키가 작아도 즐겁기만 한 채송화 무리처럼

나도 다부지게 피렵니다

 

우리들의 추억이 한데 모여 앉은

채송화 꽃밭에서

나는 오늘도 '작은 자'의 행복을 누립니다

 

 

 

책과의 여행

이해인

 

책은 배신을 모르는

충실하고 미더운 동반자가 되어준다

살아 있는 동안

좋은 책과의 여행을 계속하려면

깊이 고독할 줄도 알아야 한다

 

책이 있는 삶은 결코 메마르지 않을 것이며

책과의 여행에서 얻은 체험을

이웃과도 나눌 수 있는 순례자일 때

삶은 더욱 풍요롭게 빛날 것이다

 

 

 

책을 읽는 기쁨

이해인

 

좋은 책에서는 좋은 향기가 나고,

좋은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그 향기가 스며들어

옆 사람까지도 행복하게 한다.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모두 이 향기에 취하는

특권을 누려야 하리라.

 

아무리 바빠도 책을 읽는 기쁨을

꾸준히 키워나가야만

우리는

속이 꽉 찬 사람이 될 수 있다.

 

언제나 책과 함께 떠나는 여행으로

삶이 풍요로울 수 있음을 감사하라.

 

책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느 한 구절로

내 삶의 태도가

예전과 달라질 수 있음을

늘 새롭게 기대하며 살자.

 

 

 

천리향

이해인

 

어떠한 소리보다

아름다운 언어는

향기

 

멀리 계십시오

오히려

천리 밖에 계셔도

가까운 당신

 

당신으로 말미암아

내가

꽃이 되는 봄

마음은

천리안

 

바람 편에 띄웁니다

깊숙이 간직했던

말 없는 말을

향기로 대신하여 -

 

 

 

첫눈 편지

이해인

 

1

차갑고도 따스하게

송이송이 시가 되어 내리는 눈

눈나라의 흰 평화는 눈이 부셔라

 

털어내면 그뿐

다신 달라붙지 않는

깨끗한 자유로움

 

가볍게 쌓여서

조용히 이루어내는

무게와 깊이

 

하얀 고집을 꺽고

끝내는 녹아버릴 줄도 아는

온유함이여

 

나도 그런 사랑을 해야겠네

그대가 하얀 눈사람으로

나를 기다리는 눈나라에서

하얗게 피어날 줄밖에 모르는

눈꽃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순결한 사랑을 해야겠네

 

 

2

평생을 오들오들

떨기만 해서 가여웠던

해묵은 그리움도

포근히 눈밭에 눕혀놓고

하늘을 보고 싶네

 

어느 날 네가

지상의 모든 것과 작별하는 날도

눈이 내리면 좋으리

 

하얀 눈 속에 길게 누워

오래도록 사랑했던

신과 이웃을 위해

이기심의 짠맛은 다 빠진

맑고 투명한 물이 되어 흐를까

 

녹지 않는 꿀들일랑 얼음으로 남기고

누워서도 잠 못 드는

하얀 침묵으로 깨어 있을까

 

 

3

첫눈 위에

첫 그리움으로

내가 써보는 네 이름

 

맑고 순한 눈빛의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서 기침하며

나를 내려다본다

 

자꾸 쌓이는 눈 속에

네 이름은 고이 묻히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무수히 피어나는 눈꽃 속에

 

나 혼자 감당 못할

사랑의 말들은

내 가슴속으로 녹아 흐르고

나는 그대로

하얀 눈물이 되려는데

 

누구에게도 말 못할

한 방울의 피와 같은 아픔도

눈밭에 다 쏟아놓고 가라

 

부리 고운 저 분홍 가슴의 새는

자꾸 나를 재촉하고......

 

 

 

청소 시간

이해인

 

앞치마에 받은

물기 어린 아침

나의 두 손은 열심히

버릴 것을 찾고 있다

 

날마다

먼지를 쓸고 닦는 일은

나를 쓸고 닦는 일

 

먼지 낀 마음 말끔히 걸레질해도

자고 나면 또 쌓이는

한 웅큼의 새 먼지

 

부끄러움도 순히 받아들이며

나를 닮은 먼지를

구석구석 쓸어낸다

 

휴지통에 종이를 버리듯

내 구겨진 생각들을

미련 없이 버린다

 

버리는 일로 나를 찾으며

두 손으로 걸레를 짜는

새날의 시작이여

 

 

 

초대의 말

이해인

 

친구여 오십시오

 

은총의 빛으로 닦아

더욱 윤이 나는

나의 하얀 주전자에

기도의 물을 채워 넣고

오늘은

녹차를 끓이듯이

푸른 잎의

그리움을 끓입니다

 

이웃과 함께 나눌

희망과 기쁨의 잎새도

한데 넣어 끓이며

나는 조용히

그대를 기다립니다

 

눈빛만으로도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우리의 만남은

언제나

녹차처럼 은은하고

향기로운 맛

 

다시 끓여도

새롭게 우러나는

사랑의 맛

 

친구여 오십시오

 

오랜 세월이 지나도

퇴색치 않는 그리움이

잔디처럼 돋아나는

내 마음에

오늘은 주님의 손을 잡고

웃으며 들어오는

어진 눈빛의 친구여

 

물이 흐르는 듯한

그대의 음성을

음악처럼 들으며

나는

하늘빛 찻잔을 준비합니다

 

나눔의 기쁨으로

더욱 하나가 될

우리의 만남을

감사하면서

 

 

 

촛불

이해인

 

꽃밭에 물을 뿌리고 오면

수백 개의 촛불로 펄럭이는

이 마음의 깃발

 

푸른 해안으로

오늘도

흰 배가 밀리는데

 

하늘 속에 피는 꽃

 

펄럭이는 촛불 새로

변함없이 열려진

하나의 창문

 

문을 열고 나누는

너와의 악수

 

우리는 바람 속에 불리우고

또 밀려가는

강변의 작은 모래알 이웃이네

 

나도

활활 타버리는

불길이면 좋으리

 

수많은 불꽃 사이로

어두움을 사르고

 

누군가

목타게

나를 부르는 소리

 

수백개의 촛불로

내가 타고 있네

 

 

 

촛불 켜는 아침

이해인

 

밭은 기침 콜록이며

겨울을 앓고 있는 너를 위해

하얀 팔목의 나무처럼

나도 일어섰다

 

대신 울어 줄 수 없는

이웃의 낯선 슬픔까지도

일제히 불러 모아

나를 흔들어 깨우던

저 바람 소리

 

새로이 태어나는 아침마다

나는 왜 이리 목이 아픈가

살아갈수록 나의 기도는

왜 이리 무력한가

 

사랑할 시간마저

내 탓으로 잃어버린

어제의 어둠을 울며

하늘 위에 촛불 켜는 아침

 

너를 위한 나의 매일은

근심 중에서도

신년 축제의 노래와 같기를

 

그래서 나는

눈부신 언어를 날개에 단

아침 새가 되고 싶었다

 

햇빛을 끌어내려

젖은 어둠을 말리는 나무 위에

희망의 둥지를 트는

새가 되고 싶었다

 

 

 

추억 일기

이해인

 

1

"넌 그때 왜 그랬니?

온 식구가 찾아 헤맨 끝에 보니

어느 골방에서 배시시 웃으며

걸어 나오더구나. 쬐끄만 애가 말이야"

 

어린 시절

함께 지내던 고모님이

어느 날 불쑥 던지신 이야기 속으로

문득 걸어 나오는 다섯 살짜리 아이

 

조그만 크기의 라디오 하나 들고

아무도 없는 구석방에 들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원리를 캐내려고

꽤나 고민했다

작은 라디오 안에

어떻게 큰 사람이 들어가서

말을 하고 있는지

하도 신기하고 경이로워서

밥도 굶고 앉아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

하루에도 몇 번씩

서랍을 열 때마다

문득 그리워지는

내 유년의 비밀서랍

비밀도 없는데

비밀서랍을 만든 것은

누군가 봐주길 바라는

허영심 때문이었을까?

 

인형의 옷을 해 입힐

색종이와 자투리 헝겊

미래의 꿈과 동요가 적힌

공책과 몽당연필이

가득 들어찼던

내 어린 시절의 서랍은

어둠조차 설레임으로 빛나던

보물상자였는데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내 서랍 속엔

쓸모없는 낙서와 먼지

내가 만든 근심들만

수북이 쌓여 있다

 

 

3

하루 종일

종이인형을 만들며

함께 꿈을 키우던

동그스름한 얼굴의

소꿉친구가 그리운 날

 

노오란 은행잎을

편지 대신

내 손에 쥐어주던

눈이 깊은 소년이

보고 싶은 날

 

나는 색종이 상자를 꺼내

새를 접고

꽃을 접는다

 

아주 작은 죄도

지을 수 없을 것 같은

푸른 가을날

 

가장 아름다운 그림 물감을

내 마음에 풀어

제목 없는 그림을

많이도 그려본다

 

 

4

"엄마, 나야. 문 열어줘"

어느 날 해질녘

수녀원 옆집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고운 목소리

 

그 옛날

골목길에 들어서면

파란 대문 앞에서

내가 했던 그 소리

 

어둠 속의 그 말이

하도 정겨워서

울컥 치미는 그리움

 

어린 시절 동무들은

엄마를 거쳐

이젠 할머니도 되었는데

 

난 한평생

누구에게도 엄마 한 번 되지 못하고

철없는 아이로만 살았구나

 

어린 꽃에게 나무에게라도

가만히 엄마라고 불러달라까?

 

감옥에서 나더러

엄마가 되어달라는 소년의 글엔

아직 답을 못하겠다

 

 

 

춘분 일기

이해인

 

바람이 불 듯 말 듯

꽃이 필 듯 말 듯

 

해마다 3월 21일은

파밭의 흙 한 줌 찍어다가

내가 처음으로

시를 쓰는 날입니다

 

밤과 낮의 길이가

똑같다구요?

 

모든 이에게

골고루 사랑을 나누어주는

봄햇살 엄마가 되고 싶다고

 

춘분처럼

밤낮 길이 똑같아서 공평한

세상의 누이가 되고 싶다고

일기에 썼습니다

 

아직 겨울이 숨어 있는

꽃샘바람에

설레며 피어나는

내 마음의 춘란 한 송이

 

오늘따라

은은하고

어여쁩니다

 

 

 

치자꽃

이해인

 

눈에 익은

어머니의

옥양목 겹저고리

 

젊어서 혼자된

어머니의 멍울진 한을

하얗게 풀어서

향기로 날리는가

 

"얘야, 너의 삶도

이처럼 향기로우렴"

 

어느 날

어머니가

편지 속에 넣어 보낸

젖빛 꽃잎 위에

 

추억의 유년이

흰 나비로 접히네

 

 

 

친구 바람에게

이해인

 

나뭇잎을 스치며

이상한 피리 소리를 내는

친구 바람이여

 

잔잔한 바다를 일으켜

파도 속에 숨어 버리는

바람이여

나의 땀을 식혀 주고

나의 졸음 깨우려고

때로는 바쁘게 달려오는

친구 바람이여

 

얼굴이 없어도

항상 살아 있고

내가 잊고 있어도

내 곁에 먼저 와 있는 너를

나는 오늘 다시 알았단다

 

잊을 수 없는 친구처럼

나를 흔드는 그리움이

바로 너였음을

다시 알았단다

 

 

 

친구에게

이해인

 

1

나의 친구야! 오늘도 역시

동쪽 창으로 해가 뜨고

우린 또 하루를 맞이했지, 얼마나 좋으니

 

빨랫줄엔 흰 빨래가 팔랑거리듯이

우린 희망이라는 옷을

다리미질해야 하겠지

 

우리 웃자. 기쁜 듯이 언제나 웃자

우린 모두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행복을 향하여

웃음 지어야 하는 거야

 

계절이 가고 오는 이 흐르는 세월 속에

우리도 마찬가지로 얽혀 가겠지만

우리 변함없이 모든 것을 사랑하도록 하자

 

친구야 너와 나 같은 세상 아래에서

만나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 서로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자꾸나

 

너를 위하여 나는 무엇을 할까

너의 등불이 되어

너의 별이 되어, 달이 되어

 

너의 마스코트처럼

네가 마주 보는 거울처럼

우리 서로 지켜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 서로 사랑하자

우리 서로 감미롭고

듣기 좋은 음악 같은 사람이 되자

 

 

2

부를 때마다

내 가슴에서 별이 되는 이름

존재 자체로

내게 기쁨을 주는 친구야

오늘은 산숲의 아침 향기를 뿜어내며

뚜벅뚜벅 걸어와서

내 안에 한 그루 나무로 서는

그리운 친구야

 

때로는 저녁노을 안고

조용히 흘러가는 강으로

내 안에 들어와서

나의 메마름을 적셔 주는 친구야

어쩌다 가끔은 할말을 감추어 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내 안에서 기침을 계속하는

보고 싶은 친구야

 

보고 싶다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그리움과 설레임

파도로 출렁이는 내 푸른 기도를

선물로 받아 주겠니?

늘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때

빙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주던

따뜻한 친구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모였다가

어느 날은 한 편의 시가 되고

노래가 되나 보다

 

때로는 하찮은 일로 너를 오해하는

나의 터무니없는 옹졸함을

나의 이기심과 허영심과 약점들을

비난보다는 이해의 눈길로 감싸 안는 친구야

하지만 꼭 필요할 땐

눈물나도록 아픈 충고를 아끼지 않는

진실한 친구야

 

내가 아플 때엔

제일 먼저 달려오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엔

함께 울어 주며

기쁜 일이 있을 때엔

나보다 더 기뻐해 주는

고마운 친구야

고맙다는 말을 자주 표현 못했지만

세월이 갈수록

너는 또 하나의 나임을 알게 된다

 

너를 통해 나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기뻐하는 법을 배운다

너의 그 깊고 넓은 마음

참을성 많고 한결같은 우정을 통해

나는 하느님을 더욱 가까이 본다

늘 기도해 주는 너를 생각하면

나 또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마음까지 훤히 들여다보는

네 맑고 고요한 눈을 생각하면

나는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나도 너에게 끝까지

성실한 벗이 되어야겠다고

새롭게 다짐해 본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 못해

힘든 때도 있었지만

화해와 용서를 거듭하며

오랜 세월 함께 견뎌 온 우리의 우정을

감사하고 자축하며

오늘은 한 잔의 차를 나누자

우리를 벗이라 불러 주신 주님께

정답게 손잡고 함께 갈 때까지

우리의 우정을 더 소중하게 가꾸어 가자

 

아름답고 튼튼한 사랑의 다리를 놓아

많은 사람들이 춤추며 지나가게 하자

누구에게나 다가가서

좋은 벗이 되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모든 이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행복한 이웃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벗이 되자

이름을 부르면 어느새 내 안에서

푸른 가을 하늘로 열리는

그리운 친구야

 

 

3

내게 기쁜 일이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달려와

웃으며 손잡아주는

봄 햇살 같은 친구야

 

내가 아프고 힘들어

눈물이 날 때마다

어느새 옆에 와서

"울지 마, 내가 있잖아"

라고 말해주던

눈이 맑은 친구야

 

내가 무얼 잘못해도

꾸지람하기 전에

기도부터 먼저 해주는

등대지기 같은 친구야

 

고마운 마음 전하고 싶어

새삼 너에게 편지를 쓰려니

"내 생일도 아닌데 편지를 쓰니?"

어느새 옆에 와서 참견하는 너

 

너와 함께 웃다가

나는 편지도 못 쓰고

네 이름만 가득히 그려놓는다

이름만 불러도

내 안에서 언제나

별이 되어 반짝이는

그리운 친구야

 

 

4

나무가 내게

걸어오지 않고서도

많은 말을 건네 주듯이

보고 싶은 친구야

그토록 먼 곳에 있으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너

 

겨울을 잘 견디었기에

새 봄을 맞는 나무처럼

슬기로운 눈빛으로

나를 지켜 주는 너에게

오늘은 나도

편지를 써야겠구나

 

네가 잎이 무성한 나무일 때

나는 그 가슴에 둥지를 트는

한 마리 새가 되는 이야기를

 

네가 하늘만큼

나를 보고 싶어할 때

나는 바다만큼

너를 향해 출렁이는 그리움임을

한 편의 시로 엮어 보내면

 

너는 너를 보듯이

나를 생각하고

나는 나를 보듯이

너를 생각하겠지?

보고 싶은 친구야

 

 

 

친구야 너는 아니

이해인​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줄 때

사실은 참 아픈거래

 

친구야 봄비처럼 아파도 웃으면서

너에게 가고픈 내 맘 아니

향기 속에 숨겨진 내 눈물이 한 송이

꽃이 되는걸 너는 아니

 

우리 눈에 다 보이진 않지만

우리 귀에 다 들리진 않지만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너무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

 

엄마가 혼잣말로 하시던

얘기가 자꾸 생각이 나는 날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너무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

 

친구야 봄비처럼 아파도 웃으면서

너에게 가고픈 내 맘 아니

향기 속에 숨겨진 내 눈물이 한 송이

꽃이 되는 걸 너는 아니

 

우리 눈에 다 보이진 않지만

우리 귀에 다 들리진 않지만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너무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

 

엄마가 혼잣말로 하시던

얘기가 자꾸 생각이 나는 날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너무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

 

우리 눈에 다 보이진 않지만

우리 귀에 다 들리진 않지만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너무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줄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침묵

이해인

 

1

맑고 깊으면 차가워도 아름답네

침묵이란 우물 앞에 혼자 서보자

 

자꾸자꾸 안을 들여다보면 먼 길 돌아

집으로 온 나의 웃음소리도 들리고

 

이끼 낀 돌층계에서 오래오래

나를 기다려온 하느님의 기쁨도 찰랑이고

 

"잘못 쓴 시간들은

사랑으로 고치면 돼요"

 

속삭이는 이웃들이 내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고

나의 눈물도 동그랗게 반짝이네

 

말을 많이 해서 죄를 많이

지었던 날들 잠시 잊어버리고

 

맑음으로 맑음으로 깊어지고 싶으면

오늘도 고요히 침묵이란 우물 앞에 서자

 

 

2

진정한 사랑의 말이 아닌 모든 말들은

뜻밖에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때가 많고

그것을 해명하고자 말을 거듭할수록

명쾌한 해결보다는

더 답답하게 얽힐 때가 많음을 본다

소리로서의 사랑의 언어 못지않게

침묵으로서의 사랑의 언어 또한

필요하고 소중하다

 

 

 

침묵에게

이해인

 

내가 행복할 때에도

내가 서러울 때에도

 

그윽한 눈길로

나를 기다리던

 

바위처럼 한결같은 네가

답답하고 지루해서

일부러 외면하고

비켜서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네 어깨너머로 보이는

저 하늘이

처음 본 듯 푸르구나

 

너의 든든한 팔에 안겨

소금처럼 썩지 않는

한마디의 말을 찾고 싶다

 

언젠가는 네 품에서

영원한 잠을 자고 싶다

침묵이여

 

 

 

침묵 일기

이해인

 

오늘은 향나무를 전지했습니다.

밑둥이 잘리면서 향기 더욱 진동하는

 

한 그루 나무처럼 잎만 무성한

말의 가지 잘라내어 늘 향기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 향나무 연필 깎아 일기에 적습니다.

 

말을 많이 해서 나도 모르게 금이 간

내 마음의 유리창을 이제사 침묵으로

갈아 끼우면서 왠지 눈물이 나려 합니다.

 

살아오면서 무수히 쏟아버린

내 사랑의 말들이 거짓은 아니었어도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오늘만이라도 잠시 벙어리가 되어

고요한 눈길 안으로만 모으고

 

말없이 기도하고 말없이 사랑하고

말없이 용서하면서 한결 맑아진

떳떳함으로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가장 온전한 집 한 채로

땅 위에 누울 그날까지

겸손한 한 채의 사랑방으로

 

억울해도 변명을 모르는

자그만 침묵의 집 한 채로

당신 곁에 머물고 싶습니다.

 

 

 

코스모스

이해인

 

몸달아

기다리다

피어오른 숨결

 

오시리라 믿었더니

오시리라 믿었더니

 

눈물로 무늬진

연분홍 옷고름

 

남겨 주신 노래는

아직도

맑은 이슬

 

뜨거운 그 말씀

재가 되겐 할 수 없어

 

곱게 머리 빗고

고개 숙이면

 

바람 부는

가을 길

노을이 탄다.

 

 

 

튤립을 닮은 동무

이해인

 

동무야

잘 있었니?

 

내가 슬프고 우울할 때

가장 환한 기쁨과

웃음의 불을 켜서

당겨주던 꽃

튤립을 닮은 나의 동무야

 

 

 

파꽃

이해인

 

뿌리에서 피워 올린

소망의 씨앗들을

엷은 베일로 가리고 피었네

 

한 자루의 초처럼 똑바로 서서

질긴 어둠을

고독으로 밝히는 꽃

 

향기조차 감추고

수수하게 살고 싶어

 

줄기마다 얼비치는

초록의 봉헌기도

 

매운 눈물은

안으로만 싸매 두고

스스로 깨어 사는

조용한 꽃

 

 

 

파도여 당신은

이해인

 

파도여 당신은

누워서도 잠들지 않는

바람의 집인가

 

어느날 죽어 버린

나의 꿈을 일으키며

산이 되는 파도여

 

오늘도 나는

말을 잃는다

 

신(神)의 모습을 닮아

출렁이는 당신이

그리 또한 태연한가

 

사랑하지 않고는

잠시도 못견디는

시퍼런 고뇌의 당신이

 

언젠가 통째로 나를 안을 하느님

파도여 당신은

누워서도 잠 못 드는 기다림인가

 

 

 

파도의 말

이해인

 

울고 싶어도

못 우는 너를 위해

내가 대신 울어줄게

마음놓고 울어줄게

 

오랜 나날

네가 그토록

사랑하고 사랑받은

모든 기억들

행복했던 순간들

 

푸르게 푸르게

내가 대신 노래해줄게

 

일상이 메마르고

무디어질 땐

새로움의 포말로

무작정 달려올게

 

 

 

패랭이꽃 추억

이해인

 

희랍 대리석처럼

희고 깨끗한 얼굴을 가졌던

세레나 언니에게서

15살의 생일에

처음으로 받았던

한 다발의 패랭이꽃

 

연분홍 진분홍 하양

꽃무늬만큼이나

황홀한 꿈을 꾸었던 소녀 시절

 

누군가에게

늘 꽃을 건네는 마음으로 살고 싶었다

아니 한 송이의 진짜 꽃이 되고 싶어

수녀원에 왔다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 욕심에

가슴이 뛰었다

 

바람 부는 날

수녀원 뜰에

지천으로 핀 패랭이꽃을

보고 또 보며

지상에서의 내 고운 날들이

흘러간다

 

 

 

편지

이해인

 

1

밤은 항상

뜨거운 불가마에 나를 구워 내는 도공(陶工)입니다

 

벗이여

칡뿌리같이 싸아한 향기를 거느린 밤 나는

깨어 사는 시인들을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 후둑후둑 비 맞고 섰는

빌린 목숨을 지켜보다

끝내는 신(神) 앞에 무릎 꿇었다는

당신의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지금은 고요히 창을 닫는 시간

허공을 뚫고 가는 기인 기적 소리에

흔들리는 향수(鄕愁) 같은 것

 

떠나는 자들의 고독을 한몸에 휘감은

기차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벗이여

우리에게 마침내 가야 할 집이 있음은

얼마나한 위로입니까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는 살아 가면서 절망을 거듭하지만

절망하는 만큼의 희망을 앎은

얼마나한 축복입니까

 

내 영혼이 시의 우물을 파는

밤에는 아무도 말을 건네지 않습니다

밤에는 가장 겸허한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벗이여

그리하여 이 밤엔 나도 도공(陶工)이 되어

펄펄 끓는 한 줄의 시를

사랑의 불가마에 구워내고 싶습니다

 

 

2

- 대모님께

 

"눈은 볼수록 만족지 않고

귀는 들을수록 부족을 느낀다"는

책 속의 말을

요즘은 더 자주 기억합니다

 

진정

눈과 귀를

깨끗하게 지키며

절제 있는 삶을 살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시대 탓을 해야 할까요

 

집착을 버릴수록 맑아지고

욕심을 버릴수록 자유로움을

모르지 않으면서

왜 스스로를

하찮은 것에 옭아매는지

왜 그토록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말하려고 하는지

오늘은 숲속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하늘에 떠다니는 흰 구름처럼

단순하고 부드럽고

자유로운 삶을 그리워했습니다

저도 그분의 흰 구름이 되도록

꼭 기도해 주십시오, 대모님

 

 

 

편지 쓰기

이해인

 

1

내 일생 동안

매일매일

편지를 썼으니

하늘나라에 가서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쓸까

 

내가 처음으로

너를 좋아할 때의

설레임으로

따뜻함으로

편지를 써야겠다

 

한때는 목숨 걸고

힘들게 글을 썼지만

하늘나라에서는

더욱 즐겁게

여유 있게

담백하게

죄없이 순결한

편지를 써야겠어

너는 답장 대신

흰 구름을 올려다보렴

 

 

2

네가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가

발견하고 사랑하며

편지를 쓰는 일은

목숨의 한 조각을

떼어 주는 행위

 

글씨마다 혼을 담아

멀리 띄워 보내면

받는 이의 웃음소리

가까이 들려오네

 

바쁜 세상에

숨차게 쫓겨 살며

무관심의 벽으로

얼굴을 가리지 말고

 

때로는 조용히

편지를 써야 하리

 

미루고 미루다

나도 어느 날은 모르고

죽은 이에게 편지를 썼네

 

끝내 오지 않을 그의 답을

꿈에서도 받고 싶었지만

내 편지 기다리던 그는

이 세상에 없어

커다란 뉘우침의 흰 꽃만

그의 영전에 바쳤네

 

편지를 쓰는 일은

쪼개진 심장을 드러내 놓고

부르는 노래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음을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기 위하여

때로는 편지를 써야 하리

 

사계(四季)의 바람과 햇빛을

가득히 담아

마음에 개켜 둔 이야기 꺼내

아주 짧게라도

편지를 써야 하리

살아 있는 동안은 -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이해인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엔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내 마음의 바위 틈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봄과 함께

내가 일어서는 봄아침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

 

 

 

푸른 하늘

이해인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살아 있기에 다시 보는 

저 푸른 하늘

 

하느님의 사랑

성모님의 눈물 새들의 노래

흰 구름의 시 저기 다 있네

 

아름답고 아름답다

충분하고 충분하다

저리 눈부신 은혜의 하늘 투명한 기도

 

 

 

풀꽃의 노래

이해인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굳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아

바람이 날 데려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

 

하고 싶은 모든 말을

아껴둘 때마다

씨앗으로 영그는 소리를 듣지

 

너무 작게 숨어 있다고

불완전한 것은 아니야

내게도 고운 이름이 있음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서운하지 않아

 

기다리는 법을

노래하는 법을

오래전부터

바람에게 배웠기에

기쁘게 살아갈 뿐이야

 

푸름에 물든 삶이기에

잊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풀물 든 가슴으로

이해인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두

풀빛으로 노래로

물드는 봄

 

겨우내 아팠던 싹들이

웃으며 웃으며 올라오는 봄

 

봄에는

슬퍼도 울지 마십시오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 내려오는

저 푸른 산이 보이시나요?

 

그 설레임의 산으로

어서 풀물 든 가슴으로

올라가십시오

 

 

 

하관

이해인

 

삶의 의무를 다 끝낸

겸허한 마침표 하나가

 

네모난 상자에 누워

천천히 땅 밑으로 내려가네

 

이승에서 못다 한 이야기

못다 한 사랑 대신하라 이르며

 

영원히 눈감은 우리 가운데의 한 사람

흙을 뿌리며 꽃을 던지며

 

울음을 삼키는 남은 이들 곁에

바람은 침묵하고 새들은 조용하네

 

더 깊이, 더 낮게 홀로 내려

가야 하는 고독한 작별 인사

 

흙빛의 차디찬 침묵 사이로

언뜻 스쳐 가는 우리 모두의 죽음

 

한평생 기도하며 살았기에

눈물도 성수처럼 맑을 수 있던

 

노수녀의 마지막 미소가 우리 가슴

속에 하얀 구름으로 떠오르네

 

 

 

하느님 당신은

이해인

 

나에게서 당신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가난뱅이 여인

 

나에게 당신을 옷 입히면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는

궁전의 여인

 

하느님

아무래도 당신은

기적의 신(神)입니다

 

보이지 않는 당신이

순간마다 내 안에 살아 오시니

내가 감히 당신을 사랑하다니

 

당신은 물입니까

당신은 불입니까

당신은 바람입니까

 

사랑하는 자에게만

사랑으로 탄생하는

사랑의 신이시여

 

가장 짧은 말로

가장 깊은 기도를

바치게 하소서

 

 

 

하늘은 투명한 거울

이해인

 

하늘은 속일 수 없는 당신과 나의 거울

당신이 하늘을 볼 때 보이는 나의 얼굴

내가 하늘을 볼 때 보이는 당신 얼굴

하늘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어도

흔들림이 없다

깨어지지 않는다

자주 들여다보기가 갈수록 두려워지는

너무 크고 투명한 나의 거울

 

 

 

하늘, 하늘, 하늘

이해인

 

하늘이란 말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하늘빛 향기

하늘의 향기에 나는 늘 취하고 싶어

하늘 하늘하고 수없이 뇌어보다가

잠이 들었다

자면서도 또 하늘을 생각했다

 

 

 

하루의 문을 닫으며

이해인

 

길을 가다가 내게 길을 물었던 어느 이웃의 둥근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오늘 아침, 전철에서 내게 자리를 양보했던 어느 이웃의 서늘한 눈매가 보이는 것 같다.

저녁이 되어, 하나둘 불이 켜지는 이웃의 창마다 나는 기쁨의 종을 달아주는 님프가 되고 싶다.

집집마다 들어가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놓고 몰래 빠져나와

하늘의 별을 보고 깔깔 웃어도 보는 반딧불 요정이고 싶다.

멀리 있어도 집채로 내게 가까이 오는 수많은 이웃의 불 켜진 창을 보며

내 마음의 창에도 오색 찬란하게 타오르는 고마움의 불빛, 함께 있음의 복됨이여.

 

 

 

하얀 집

이해인

 

내 마음속엔

아름다운 굴뚝이 하나 있지

 

너를 향한 그리움이

하얀 연기로 피어오르다 노래가 되는

너의 집이기도 한 나의 집

 

이 하얀 집으로

너는 오늘도 들어오렴

친구야

 

 

 

한 그루의 나무처럼

이해인

 

비바람을 견뎌내고 튼튼히 선 한 그루 나무처럼,

오늘이란 땅 위에 선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슬픔을 견뎌내야 조금씩 철이 드나 보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경험하고 터무니없는 오해도 받고,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면서 어둠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가볍지 않은 웃음을 웃을 수 있고,

다른 이를 이해하는 일도 좀 더 깊이 있게 할 수 있나 보다.

 

 

 

한 그루의 우정 나무를 위해

이해인

 

우리가 한 그루 우정의 나무를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선

한결같은 마음의 성실성과 참을성, 사랑의 노력이 필요하다.

지나친 고집과 독선, 교만과 이기심은 좋은 벗을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정성스럽고 진지한 자세로 깨어 있어야 한다.

 

나와는 다른 친구의 생각을 불평하기보다는 배워야 할 점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기쁨과 슬픔을 늘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을 지니자.

그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는 늘 흔연히 응답할 수 있는 민감함으로 달려가자.

 

가을 열매처럼 잘 익은 마음, 자신을 이겨내는 겸허함과 기도의 마음으로 우정의 나무를 가꾸자.

 

 

 

한 방울의 그리움

이해인

 

마르지 않는

한 방울의

잉크빛 그리움이

오래 전부터

내 안에 출렁입니다

 

지우려 해도

다시 번져오는

이 그리움의 이름이

바로 당신임을

너무 일찍 알아 기쁜 것 같기도

너무 늦게 알아 슬픈 것 같기도

 

나는 분명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을 잘 모르듯이

내 마음도 잘 모름을

용서받고 싶습니다

 

 

 

한 송이 수련으로

이해인

 

내가 꿈을 긷는 당신의 못 속에

하얗게 떠다니는

한 송이 수련으로 살게 하소서

 

겹겹이 쌓인 평생의 그리움

물 위에 풀어 놓고

그래도 목말라 물을 마시는 하루

 

도도한 사랑의 불길조차

담담히 다스리며 떠다니는

당신의 꽃으로 살게 하소서

 

밤마다

별을 안고 합장하는

물빛의 염원

 

단 하나의 영롱한 기도를

어둠의 심연에서 건져내게 하소서

 

나를 위해

순간마다 연못을 펼치는 당신

 

그 푸른 물 위에

말없이 떠다니는

한 송이 수련으로 살게 하소서

 

 

 

한여름 아침

이해인

 

비온 뒤의 햇살에 간밤의 눅눅한 꿈을,

젖은 어둠을 말린다.

바람에 실려오는 치자꽃 향기.

오늘도 내가 꽃처럼 자신을 얻어서

향기로운 하루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열매를 위하여 자신을 포기하는

꽃의 겸손 앞에 내가 새삼 부끄러워

창가에 선 한여름 아침.

 

 

 

한 톨의 사랑이 되어

이해인

 

오 친구여, 우리는

이제 한 톨의 사랑이 되어

배고픈 이들을 먹여야 하네

언젠가 우리 사랑

나누어 넉넉한 큰 들판이 될 때까지

 

오 친구여, 우리는 이제

한 방울의 사랑이 되어

목마른 이들을 적셔야 하네

언젠가 우리 세상

흘러서 넘치는 큰 강이 될 때까지

 

 

 

한해를 돌아보는 길 위에서

이해인

 

우리가 가장 믿어야 할 이들의

무책임과 불성실과 끝없는 욕심으로

집이 무너지고 마음마저 무너져

슬펐던 한 해 희망을 키우지 못해

더욱 괴로웠던 한 해였습니다.

 

​마지막 잎새 한 장 달려 있는

창 밖의 겨울나무를 바라보듯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의 달력을 바라보는 제 마음엔

초조하고 불안한 그림자가 덮쳐옵니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은 실천했나요?

사랑과 기도의 삶은 뿌리를 내렸나요?

감사를 잊고 살진 않았나요?

 

달력 위의 숫자들이 눈을 크게 뜨고

담담히 던져 오는 물음에

선뜻 대답을 못해 망설이는 저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주님

 

하루의 끝과 한 해의 끝이 되면

더욱 크게 드러나는 ​저의 허물과

약점을 받아들이고 반복되는 실수를

후회하는 일도 이젠 부끄럽다 못해

슬퍼만지는 저의 마음도 헤아려 주십니까?

 

정성과 사랑을 다해 제가 돌보아야 할

가족, 친지, 이웃을 저의 무관심으로

밀어낸 적이 많았습니다.

 

​다른 이를 이해하고 참아 주며

마음을 넓혀 가려는 노력조차

너무 추상적이고 미지근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웃과의 잘못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도전과 아픔이 두려워

바쁜 일이나 거짓된 평화 속으로

자주 숨어버린 겁쟁이였음을 용서하십시오.

 

남에겐 좋은 말도 많이 하고

더러는 좋은 일도 했지만 좀더 깊고

맑게 자신을 갈고 닦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위선자였음을 용서하십시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보배'라고

늘상 되뇌이면서도 새롭게 주어지는

시간의 구슬들을 제대로 꿰지 못해

녹슬게 했습니다.

 

바쁜 것을 핑계로 일상의 기쁨들을

놓치고 살며 우울한 늪으로 빠져들어

주위의 사람들까지 우울하게 했습니다.

 

아직 비워 내지 못한 마음과

낮아지지 못한 마음으로

혼자서도 얼굴을 붉히는 제게

조금만 더 용기를 주십시오.

 

다시 시작할 지혜를 주십시오.

한 해를 돌아보는 길 위에서

저녁놀을 바라보는 겸허함으로

오늘은 더 깊이 눈감게 해주십시오

더 밝게 눈 뜨기 위해...

 

 

 

할미꽃

이해인

 

손자 손녀

너무 많이 사랑하다

허리가 많이 굽은 우리 할머니

 

할머니 무덤 가에

봄마다 한 송이

할미꽃 피어

온 종일 연도를

바치고 있네

 

하늘 한 번 보지 않고

자주빛 옷고름으로

눈물 닦으며

 

지울 수 없는 슬픔을

땅 깊이 묻으며

 

생전의 우리 할머니처럼

오래오래

혼자서 기도 하고 싶어

혼자서 피었다

혼자서 사라지네

 

너무 많이 사랑해서

너무 많이 외로운

한숨 같은 할미꽃

 

 

 

합창을 할 때처럼

이해인

 

합창을 할 때처럼

오늘도 저에게

새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삶의 무대 위에 다시 한번

저를 세워주시니 감사합니다

 

합창을 할 때처럼

이기심을 버리고

절제하는 기쁨으로

매일을 살게 해주십시오

 

합창을 할 때처럼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소리와 행동에 귀기울이는

사랑의 인내를 실천하게 해주십시오

 

합창을 할 때처럼

틈새의 침묵을 맛들이면서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겸손을 배우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즐겁게 노래하는 마음으로

삶의 길을 걷게 해주십시오

 

 

 

항아리에 기쁨을

이해인

 

요즘 저는 “행복합니다”라는 말로

짧은 기도를 자주 바칩니다.

 

일상생활 속의 작은 것에서도

늘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은혜에 감사드리고,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제 마음에도

조용히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오늘이라는 저의 항아리에

기쁨을 가득 부어 저의 이웃과 나누고 싶습니다.

 

평화를 가득 부어 아직 온전히 용서 안 된

이들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하소서.

 

온유와 겸손의 물을

가득 부어 메마름을 없애고

 

늘 감탄과 경이로움을 향해

삶이 깨어 흐르게 하소서

 

 

 

해녀의 꿈

이해인

 

욕심 없이

바다에 뛰어들면

바다는

더욱 아름다워요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사랑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암초를 헤치며

미역을 따듯이

전복을 따듯이

 

힘들어도

희망을 꼭 따오겠어요

 

바다 속에

집을 짓고 살고 싶지만

다시 뭍으로 올라와야지요

 

짠냄새 가득 풍기는

물기 어린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

 

 

 

해님도 나를 보고

이해인

 

엄마 심부름을 기쁘게 하고

숙제도 열심히 하고

동생과도 사이좋게 잘 지낸 날

그런 날은

엄마가 나를 보고 웃으시듯이

해님도 나를 보고

웃는 것만 같아요

 

내가 엄마 말씀 잘 듣지 않고

숙제도 미루어 두고

동생하고도 싸움만 한 날

그런 날은

엄마가 나를 보고

찡그리시듯이

해님도 나를 보고

찡그리시는 것 같아요

 

반성하는 새 마음을

새 연필 깍아

또박또박 일기장에 적어 넣으면

내 마음의 하늘에도

해가 뜹니다

 

"잘못했습니다

다신 안 그럴께요"

용서를 청하고 나면

어두웠던 마음에도

해가 뜹니다

 

 

 

해바라기 마음

이해인

 

온종일 해를 보며 산다는

노란 해바라기를 엄마는 보셨을 거야

 

엄마의 꽃밭에는 해 바라는

아이들이 많이도 있다는데

 

사람들이 날마다

​해를 보고 사는 것처럼

 

​엄마를 보고 사는 건

우리의 제일 큰 기쁨이어요

 

하느님이 들려주는

​조용한 이야기들이

 

착한 맘을 갖고 있으면

​퍽 잘도 들려온다고

 

엄마는 해를 보고

​우리는 엄마를 보고

 

 

 

해바라기 연가

이해인

 

내 생애가 한번 뿐이듯

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

 

나의 임금이여

폭포처럼 쏟아져 오는 그리움에

목메어

죽을 것만 같은 열병을 앓습니다

 

당신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불치의 병은

사랑

 

이 가슴 안에서

올올이 뽑은 고운 실로

당신의 비단 옷을 짜겠습니다

 

빛나는 얼굴 눈부시어

고개 숙이면

속으로 타서 익는 까만 꽃씨

당신께 바치는 나의 언어들

 

이미 하나인 우리가

더욱 하나가 될 날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의 임금이여

드릴 것은 상처뿐이어도

어둠에 숨지지 않고

섬겨 살기 원이옵니다

 

 

 

해질녘의 단상

이해인

 

1

어려서부터

나는 늘

해질녘이 좋았다

 

분꽃과 달맞이꽃이

오므렸던 꿈들을

바람 속에 펼쳐대는

쓸쓸하고도 황홀한 저녁

나의 꿈도

바람에 흔들리며

꽃피기를 기다렸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눈물이 핑 도는

이별의 아픔을

아이는 처음으로 배웠다

 

 

2

헤어질 때면

"잘 있어, 응" 하던 그대의 말을

오늘은 둥근 해가 떠나며

내게 전하네

 

새들도 쉬러 가고

사람들은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겸허한 시간

욕심을 버리고 지는 해를 바라보면

문득 아름다운 오늘의 삶

눈물 나도록 힘든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견디고 싶은 마음이

고마움이 앞서네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래야 내일의 밝은 해를 밝게 볼 수 있다고

지는 해는 넌즈시 일러주며 작별 인사를 하네

 

 

3

비바람을 견뎌내고

튼튼히 선 한 그루 나무처럼

오늘이란 땅 위에 선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슬픔을 견뎌내야

조금씩 철이 드나 보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경험하고

터무니없는 오해도 받고

자신의 모습에 실망도 하면서

어둠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가볍지 않은 웃음을 웃을 수 있고

다른 이를 이해하는 일도

좀 더 깊이 있게 할 수 있나 보다

 

 

4

찬물로 세수하고

수도원 안 정원의 사철나무와 함께

파랗게 깨어나는 겨울 아침

 

흰 눈 속의 동백꽃을

자주 찾는 동박새처럼

호랑가시나무 열매를

즐겨 먹는다는 붉은 새처럼

 

나도 이제는

붉은 꽃, 붉은 열매에

피 흘리는 사랑에 사로잡힌

한 마리 가슴 붉은 새인지도 몰라

 

겨울에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기쁨

시들지 않는 노래로

훨훨 날아다니는 겨울새인지도 몰라

 

 

5

귀에는 아프나

새길수록 진실인 말

 

가시 돋혀 있어도

향기를 숨긴

어느 아픈 말들이

문득 고운 열매로

나를 먹여주는 양식이 됨을

고맙게 깨닫는 긴긴 겨울밤

 

좋은 말도 아껴 쓰는 지혜를

칭찬을 두려워하는 지혜를

신(神)께 청하며 촛불을 켜는 겨울밤

 

아침의 눈부신 말을 준비하는

벅찬 기쁨으로 나는

자면서도 깨어 있네

 

 

6

흰 눈 내리는 날

밤새 깨어 있던

겨울나무 한 그루

창을 열고 들어와

내게 말하네

 

맑게 살려면

가끔은 울어야 하지만

외롭다는 말은

함부로 내뱉지 말라고

 

사랑하는 일에도

자주 마음이 닫히고

꽁해지는 나에게

나보다 나이 많은 나무가

또 말하네

 

하늘을 보려면 마음을 넓혀야지

별을 보려면 희망도 높여야지

 

이름 없는 슬픔의 병으로

퉁퉁 부어 있는 나에게

어느새 연인이 된 나무는

자기도 춥고 아프면서

나를 위로하네

 

흰 눈 속에

내 죄를 묻고

모든 것을 용서해주겠다고

나의 나무는 또 말하네

참을성이 너무 많아

나를 주눅들게 하는

겨울나무 한 그루

 

 

 

해질녘의 바다에서

이해인

 

1

해질녘의 바다에 홀로 서서 마지막 기도처럼 어머니를 부르면, 나도 어머니가 된다.

세월과 함께 깊어 가는 사랑을 어쩌지 못해 그저 출렁이고 또 출렁이는 것밖엔 달리 할 말이 없는 파도 치는 가슴의 어머니가 된다.

 

2

바다에서 오랜만에 건져 올린 나의 시어(詩語)들에선 늘 비릿한 파래 내음이 난다.

얼마나 더 오래 말려 두어야 비로소 하나의 시가 될 수 있을까.

 

3

아름답고 쓸쓸하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해질녘의 바다는...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촛불이 타오르는 기도실에 고요히 무릎꿇고 있는 내 마음처럼.

 

4

바다에 나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면 지금껏 나만을 생각했던 일을 바다에게 그만 들켜 버린 것 같아 매우 부끄럽다.

이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하고 용서하며 한 마디의 기도라도 날마다 남을 위해 바치고 싶다.

내가 할 일도 조금씩 줄이면서 좁은 마음을 넓은 마음으로 바꾸어 오고 싶다.

 

5

내가 사랑한 것보다 몇 배나 많이 받아서 더 무거운 살아 있는 마음의 무게,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의 무게.

이 무게를 바다에 내려 놓고, 오늘은 남빛 옷을 걸치고 있는 끝없는 수평선 위에 내 마음을 눕힌다.

 

6

바다! 영원을 향한 그리움은 처음부터 그에게 배웠다.

그는 무작정 나를 기다려 주는데, 어느 때나 열려 있는 푸른 문인데, 나는 왜 종종 그가 두려울까.

 

7

지는 해를 바라보는 저녁 바다에 서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사라져 가는 것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

사랑은 남아도, 사랑했던 사람들은 매일 조금씩 죽음의 바다 속으로 침몰해 가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새로이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

 

8

내가 저녁기도를 바치면 어느새 내 옆에 와서 시편을 읊는 바다. 더 낮아지라고 한다.

더 낮은 목소리로 기도하며 겸손의 해초(海草)가 자라는 물 밑으로 더 깊이 내려 가라고 한다.

 

9

무엇이 배고픈가, 오늘은 바다가 울고 있네. 내 탓으로 흘려 버린 사랑의 시간들을 채 줍지 못해 안달을 하던 내가

가슴을 움켜쥐고 그 바다에 누워 아이처럼 울고 있네.

 

10

저녁 노을 가슴에 안고 온몸으로 하프를 켜는 바다,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춤을 추네.

물 위에 앉아 잠시 뜨거운 그리움 식히다가 다시 일어서서 춤을 추는 새가 되네.

 

11

해질녘 바다에 서면 나는 섬이 되고 싶어. '함께'이면서도 '홀로'일 줄 아는, 당당하면서도 겸손한, 고독하면서도 행복한,

하나의 섬으로 솟아오르고 싶어. 세상이란 큰 바다 위에 작지만 힘차게 온몸으로 노래하며 떠 있는 희망의 섬이고 싶어.

 

 

 

햇빛을 받으면

이해인

 

햇빛을 많이 받아

단물이 많이 든

​과일을 먹을 때 ​"아, 맛있다

 

햇빛을 아주 잘 받은 게야"

​감탄을 거듭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

 

​나도 ​하느님의 빛을 받아

​잘 익은 마음을 갖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몹시 추울 때

​나를 금세 녹여 주는

​한 줄기의 고마운 햇빛을 받으면 ​

 

나도 그렇게 소리없이

스며드는 햇빛처럼

​이웃을 따뜻하게 녹여 주는

 

사랑의 마음을

갖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행복

이해인 

 

매일은 나의 숲속

나는 이 숲속에서

때로는 상큼한 산딸기같은

기쁨의 열매들을 따먹고

때로는 찔레의 가시같은

아픔과 슬픔도 따먹으면서

스스로 행복해지는 법을 배운다

 

 

 

행복에게

이해인

 

어디엘 가면

그대를 만날까요

 

누구를 만나면

그대를 보여줄까요

 

내내 궁리하다

제가 찾기로 했습니다

 

하루하루 살면서

 

부딪치는 모든 일

 

저무는 시간 속에

마음을 고요히 하고

 

갯벌에 숨어 있는

조개를 찾듯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대를 찾기로 했습니다

 

내가 발견해야만

빛나는 옷 차려입고

 

사뿐 날아올

나의 그대

 

내가 길들여야만

낯설지 않은 보석이 될

나의 그대를

 

 

 

행복을 향해 가는 문

이해인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엔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걸음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구나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내 마음의 바위틈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봄과 함께

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보는 사람들이

모두 새롭고 소중하여

고마움의 꽃망울이 터지는 봄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

 

 

 

행복의 얼굴​

이해인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가 지금 행복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나에게 고통이 없다는 뜻은

정말 아닙니다

 

마음의 문 활짝 열면

행복은 천 개의 얼굴로

 

아니 무한대로

오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합니다

 

어디 숨어 있다

고운 날개 달고

살짝 나타날지 모르는

나의 행복

 

행복과 숨바꼭질하는

설렘의 기쁨으로 사는 것이

오늘도 행복합니다

 

 

 

행복이라 부릅니다

이해인

 

새로운 시간이여, 어서 오세요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정성껏 포장해서 리본을 달 때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나는 그대를 기다립니다

누군가에게 한 송이 장미를 건네줄 때처럼

환히 열려진 설레임으로 그대를 맞이합니다

그대가 연주하는 플루트 곡을 들으며

항상 새롭게 태어나는 이 기쁨

나는 행복이라 부릅니다

 

 

 

향기로운 말

이해인

 

매일 우리가 하는 말은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게 하소서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시고

남의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을 먼저 보는

긍정적인 말을 하게 하소서

 

매일 정성껏 물을 주어

한 포기의 난초를 가꾸듯

침묵과 기도의 샘에서 길어올린

지혜의 맑은 물로

우리의 말씨 가다듬게 하소서

겸손의 그윽한 향기

그 안에 스며들게 하소서

 

 

 

헌혈

이해인

 

내 피를

가져가세요

 

살아서

내 몸을 흐르던

따뜻한 피

320cc

 

처음으로 밖에 나온

나의 피

조금 낯설고

무섭지만

 

그래도 반가워서

얼굴을 붉히며

인사합니다

 

어디엘 가든지

맑아서 쓸모 있기를

누군가에게

사랑이 되기를 기도하며

 

나는 침대에 누워

하늘을 바라봅니다

붉은 피가 생명인 것을

다시 아는 이 기쁨!

 

 

 

헝겊 주머니

이해인

 

헝겊 주머니나 헝겊 가방은

나의 오래된 친구처럼 늘 편안하다

때가 묻으면 언제라도

쉽게 빨 수 있고

조금 욕심을 내서

이것저것 여러 종류의

물건을 사고 사치를 누리더라도

비난받을 걱정도 없다

내 나름대로의 수수한 멋과 여유를

즐기게 해주어서 좋다

나도 이웃과 친지들에게

부담없이 편안하고 수수한 모습의

헝겊 주머니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길

바라며 혼자서 가만히 웃어본다

 

 

 

호수 앞에서

이해인

 

호수는

늘 고요하고

말이 없어

좋다고 하지만

 

너무 고요하면

두렵지 않은가요?

 

때로는

흔들리는 모습도 보여주고

적당히 소리도 내야

편하지 않은가요?

 

문득

사람도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너무 조용해서

두려운 당신

 

오래 쌓아올린

침묵을 깨고

무어라고 나에게

말 좀 해보세요

 

 

 

홀로 있는 시간

이해인

 

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나 속의 나를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으므로

여럿 속에 있을 땐

미처 되새기지 못했던

삶의 깊이와 무게를

고독 속에 헤아려볼 수 있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

안 해야 할 일 분별하며

내밀한 양심의 소리에

더 깊이 귀기울일 수 있으므로

그래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

여럿 속의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고독 속에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홀로 있는 시간은

이해인 

 

홀로 있는 시간은

본래적인 자기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입니다.

발가벗은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기입니다.

 

하루하루를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 앞입니다.

그리고 내 영혼의 무게가 얼마쯤 나가는지

달아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외부의 빛깔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그리고 감촉에만 관심을 쏟느라고 저 아래 바닥에서

올라오는 진정한 자기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찻간이나 집 안에서 별로 듣지도 않으면서 라디오를 켜놓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이 바깥소리에 깊이 중독되어 버린 탓입니다.

우리는 지금 꽉 들어찬 속에서 쫓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여백이나 여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시간에 쫓기고, 돈에 쫓기고 일에 쫓기면서 허겁지겁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쫓기기만 하면서 살다 보니 이제는 쫓기지 않아도 될 자리에서조차

마음을 놓지 못한 채 무엇엔가 다시 쫓길 것을 찾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허가 아쉽습니다.

빈구석이 그립다는 말입니다.

일, 물건, 집, 사람 할 것 없이 너무 가득 차 있는 데서만

살고 있기 때문에 좀 덜 찬 데가, 좀 모자란 듯한 그런 구석이

그립고 아쉽습니다.

 

 

 

환대

이해인

 

손님과 생선은 삼 일이 자나면

냄새가 난다는 속담이 있다지

 

냄새도 향기가 되게 사랑으로

잘 모시면 축복이되 되지

 

손님은 내가 많은 것을

새롭게 배우는 선생님이 되고

 

생선이 맛있는 반찬이 될 수 있듯

만남을 잘 요리하면

 

손님은 언제나

정겨운 벗이 되어주지

 

 

 

황홀한 고백

이해인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같은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 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 내는

거대한 밤하늘이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 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후회

이해인

 

내일은 나에게 없다고 생각하며

오늘이 마지막인 둣이 모든 것을 정리해야지

 

사람들에겐 해지기 전에 한 톨 미움도

남겨두지 말아야지

 

찾아오는 이들에겐 항상 처음인 듯

지극한 사랑으로 대해야지

 

잠은 줄이고 기도 시간을 늘려야지

늘 결심만 하다 끝나는 게

 

벌써 몇 년째인지

또 하루가 가고 한숨 쉬는 어리석움

 

후회하고도 거듭나지 못하는

나의 미련함이여

 

 

 

휴가 때의 기도

이해인

 

바쁘고 숨차게 달려오기만 했던

일상의 삶터에서

잠시 일손을 멈추고

쉼의 시간을 그리워하는 저희를

따뜻한 눈길로 축복하시는 주님

 

넓디 넓은 바다에서는

끝없이 용서하는 기쁨을 배우고

깊고 그윽한 산에서는

한결같이 인내하는 겸손을 배우며

각자의 자리에서 성숙하게 하십시오

 

 

 

흐르는 삶만이

이해인

 

구름도 흐르고

강물도 흐르고

바람도 흐르고

 

오늘도

흐르는 것만이

나를 살게 하네

 

다른 사람이 던지는 칭찬의 말도

이러저런 비난의 말도

이것이 낳은 기쁨과 슬픔도

어서어서 흘러가라

 

흐르는 세월

흐르는 마음

흐르는 사람들

 

진정

흐르는 삶만이

나를 길들이네

 

 

 

흙을 만지면

이해인

 

바다도 아름답지만 밭도 아름답다

바다는 멀리 있지만 밭은 가까이 있다

바다는 물의 시지만

밭은 흙의 시이다

비온 뒤 밭에 나가면 발이 폭폭 빠지도록

젖어 있는 흙냄새가 눈물나도록 정다웠다

흙은 늘 편안하고 따스했다

흙을 만지면

더없이 맑고 단순한

어린이의 마음이 되는 것 같았다

 

 

 

희망에게

이해인

 

하얀 눈을 천상의 詩처럼 이고 섰는

겨울나무 속에서 빛나는 당신

1월의 찬물로 세수를 하고

새벽마다 당신을 맞습니다

 

답답하고 목마를 때 깎아먹는

한 조각 무우맛 같은 신선함

당신은 내게

잃었던 꿈을 찾아 줍니다

 

다정한 눈길을 주지 못한 일상에

새 옷을 입혀 줍니다

 

남이 내개 준 고통과 근심

내가 만든 한숨과 눈물 속에도

당신은 조용한 노래로 숨어 있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우리의 인사말 속에서도 당신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음으로

또다시 당신을 맞는 기쁨

종종 나의 불신과 고집으로 당신에게

충실치 못했음을 용서하세요

 

새해엔 더욱 청청한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1%의 행복

이해인

 

사람들이 자꾸 묻습니다.

행복하냐고 ~

낯선 모습으로, 낯선 곳에서 살고있는 제가 자꾸 걱정이 되나 봅니다.

저울에 "행복"을 달면 ~

불행과 행복이 반반이면, 저울이 움직이지 않지만

"불행 49%" "행복 51%"이면,

'저울'이 "행복"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행복의 조건"엔 이처럼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단 "1%"만 더 가지면, 행복한 겁니다!

어느 상품명처럼 2%가 부족하면, 그건 엄청난 기울기입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1%"가 빠져나가 ~ !!!

'불행'하다 느낄 때가 있습니다.

더 많은 수치가 기울기 전에, 약간의 좋은 것으로 ~

다시, 얼른 채워 넣어 ~

"행복의 무게"를 무겁게 해놓곤 합니다.

약간의 좋은 것 '1%"

우리 삶에서 아무것도 아닌

아주 '소소한 것' 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할 때의 평화로움,

따뜻한 아랫목,

친구의 편지,

좋았던 추억,

감미로운 음악,

파란 하늘, 태양, 달, 별, 나무와 꽃들 ~

그리고, 잔잔한 그리움까지 ~

팽팽한 무게 싸움에서는 아주 '미미한' 무게라도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단, "1%"가 우리를 "행복"하게, 또 '불행'하게, 합니다!

나는 오늘 그 "1%"를 "행복의 저울" 쪽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 행복하냐, 라는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네, 행복합니다!"

 

 

 

3월에

이해인

 

단발머리 소녀가

웃으며 건네준 한 장의 꽃봉투

 

새봄의 봉투를 열면

그 애의 눈빛처럼

가슴으로 쏟아져오는 소망의 씨앗들

 

가을에 만날

한 송이 꽃과의 약속을 위해

따뜻한 두손으로 흙을 만지는 3월

 

나는 누군가를 흔드는

새벽바람이고싶다

 

시들지 않는 언어를 그의 가슴에 꽃는

연두색 바람이고 싶다

 

 

 

3월의 바람 속에

이해인 

 

어디선지 몰래 숨어들어 온

근심, 걱정 때문에

겨우내 몸살이 심했습니다

 

흰 눈이 채 녹지 않은

내 마음의 산기슭에도

꽃 한송이 피워 내려고

바람은 이토록 오래 부는 것입니까

 

3월의 바람 속에

보이지 않게 꽃을 피우는

당신이 계시기에

아직은 시린 햇볕으로

희망을 짜는 나의 오늘

당신을 만나는 길엔

늘상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

 

살아 있기에 바람이 좋고

바람이 좋아 살아 있는 세상

혼자서 길을 가다 보면

보이지 않게 나를 흔드는

당신이 계시기에

 

나는 먼 데서도

잠들 수 없는 3월의 바람

어둠의 벼랑 끝에서도

​노래로 일어서는

3월의 바람입니다

 

 

 

3월의 바람 속에(법정 스님 추도시)

이해인

 

차갑고도 따뜻한 봄눈이 좋아

3월의 눈꽃 속에 정토로 떠나신 스님

 

"난 성미가 급한 편이야" 하시더니

꽃피는 것도 보지 않고 서둘러 가셨네요

 

마지막으로 누우실 조그만 집도 마다하시고

스님의 혼이 담긴 책들까지 절판을 하시라며

 

아직 보내 드릴 준비가 덜 된 우리 곁을

냉정하게 떠나가신 야속한 스님

 

탐욕으로 가득 찬 세상을 정화시키려

활활 타는 불길 속으로 들어가셨나요

 

이기심으로 가득 찬 중생들을 깨우치시고자

타고 타서 한 줌의 재가 되신 것인가요

 

스님의 당부처럼 스님을 못 놓아 드리는

쓰라린 그리움을 어찌할까요

 

많이 사랑한 이별의 슬픔이 낳아준 눈물은

갈수록 맑고 영롱한 사리가 되고

 

스님을 향한 사람들의 존경은 환희심 가득한

자비의 선행으로 더 넓게 이어질 것입니다

 

종파를 초월한 끝없는 기도는 연꽃으로 피어나고

하늘까지 닿는 평화의 탑이 될 것입니다

 

하얀 연기 속에 침묵으로 잔기침하시는 스님

소나무 같으신 삶과 지혜의 가르침들 고맙습니다

 

청정한 삶 가꾸라고 우리를 재촉하시며

3월의 바람 속에 길 떠나신 스님, 안녕히 가십시오

 

언제라도 3월의 바람으로 다시 오십시오, 우리에게

 

 

 

4월의 시

이해인

 

꽃무더기 세상을 삽니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세상은 오만가지 색색의 고운 꽃들이

자기가 제일인 양

활짝들 피었답니다

 

정말 아름다운 봄날입니다

​새삼스레 두 눈으로 볼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고

고운 향기 느낄 수 있어 감격이며

꽃들 가득한 4월의 길목에

살고 있음이 감동입니다

 

눈이 짓므르도록 이 봄을 느끼며

가슴 터지도록 이 봄을 즐기며

두 발 부르트도록 꽃길 걸어 볼랍니다

 

내일도 내 것이 아닌데

내년 봄은 너무 멀지요

오늘 이 봄을 사랑합니다

 

오늘 곁에 있는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4월이 문을 엽니다

 

 

 

5월

이해인

 

찔레꽃 아카시아꽃 탱자꽃 안개꽃이

모두 흰빛으로 향기로운 5월,

푸른 숲의 뻐꾹새 소리가 시혼詩魂을

흔들어 깨우는 5월

나는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고

신록의 숲으로 들어가

그동안 잃어버렸던 나를 만나고 싶다

살아서 누릴 수 있는 생명의 축제를

우선은 나 홀로 지낸 다음

사랑하는 이웃을 이 자리에 초대하고 싶다

 

 

 

5월의 시

이해인

 

풀잎은 풀잎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초록의 서정시를 쓰는 5월

하늘이 잘 보이는 숲으로 가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게 하십시요

 

피곤하고 산문적인 일상의 짐을 벗고

당신의 샘가에서 눈을 씻게 하십시요

물오른 수목처럼 싱싱한 사랑을

우리네 가슴속에 퍼올리게 하십시요

 

말을 아낀 지혜 속에 접어둔 기도가

한 송이 장미로 피어나는 5월

호수에 잠긴 달처럼 고요히 앉아

불신했던 날들을 뉘우치게 하십시요

 

은총을 향해 깨어 있는 지고한 믿음과

어머니의 생애처럼 겸허한 기도가

우리네 가슴속에 물 흐르게 하십시요

 

구김살 없는 햇빛이 아낌없는 축복을

쏟아 내는 5월

어머니. 우리가 빛을 보게 하십시요

 

 

 

5월의 편지

이해인

 

해 아래 눈부신 5월의 나무들처럼

오늘도 키가 크고 마음이 크는 푸른 아이들아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

우리 마음밭에 희망의 씨를 뿌리며

환히 웃어 주는 내일의 푸른 시인들아

너희가 기쁠 때엔 우리도 기쁘고

너희가 슬플 때엔 우리도 슬프단다

너희가 꿈을 꿀 땐 우리도 꿈을 꾸고

너희가 방황할 땐 우리도 길을 잃는단다

가끔은 세상이 원망스럽고 어른들이 미울 때라도

너희는 결코 어둠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지 말고

밝고, 지혜롭고, 꿋꿋하게 일어서다오

 

어리지만 든든한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다오

한 번뿐인 삶, 한 번뿐인 젊음을 열심히 뛰자

아직 조금 시간이 있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하늘빛 창을 달자

너희를 사랑하는 우리 마음에도

더 깊게, 더 푸르게 5월의 풀물이 드는 거

너희는 알고 있니?

정말 사랑해

 

 

6월엔 내가

이해인

 

숲속에 나무들이

일제히 낯을 씻고

환호하는 6월

 

6월엔 내가

빨갛게 목타는

장미가 되고

 

끝없는 산향기에

흠뻑 취하는

뻐꾸기가 된다

 

생명을 향해

하얗게 쏟아버린

아카시아 꽃타래

 

6월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욱 살아

 

산기슭에 엎디어

찬비 맞아도 좋은

바위가 된다

 

 

 

6월의 장미

이해인

 

하늘은 고요하고

땅은 향기롭고 마음은 뜨겁다

6월의 장미가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

사소한 일로 우울할 적마다

"밝아져라"

"맑아져라"

웃음을 재촉하는 장미

삶의 길에서

가장 가까운 이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무심히 찌르는 가시를

다시 가시로 찌르지 말아야

부드러운 꽃잎을 피워 낼 수 있다고

누구를 한 번씩 용서할 적마다

싱싱한 잎사귀가 돋아난다고

6월의 넝쿨장미들이

해 아래 나를 따라오며

자꾸만 말을 건네옵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 아름다운 장미의 계절에

내가 눈물 속에 피어낸

기쁨 한 송이 받으시고

내내 행복하십시오.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이해인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

 

하얗게 피었다가

질 떄는 고요히

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것일 테지요?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

그가 지닌 향기를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레일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7월의 편지 대신

하얀 치자꽃 한 송이

당신께 보내는 오늘

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

 

 

 

8월의 시 : 한 송이 수련으로

이해인

 

내가 꿈을 긷는 당신의 못 속에

하얗게 떠다니는

한 송이 수련으로 살게 하소서

 

겹겹이 쌓인 평생의 그리움

물 위에 풀어 놓고

그래도 목말라 물을 마시는 하루

도도한 사랑의 불길조차

담담히 다스리며 떠다니는

당신의 꽃으로 살게 하소서

 

밤마다 별을 안고 합장하는

물빛의 염원

 

단 하나의 영롱한 기도를

어둠의 심연에서 건져내게 하소서

 

나를 위해

순간마다 연못을 펼치는 당신

 

그 푸른 물 위에

말없이 떠다니는

한 송이 수련으로 살게 하소서

 

큰 연못에 떠다니는 수련처럼

우리들도 우주의 큰 연못에 떠다니는

수련 같은 존재가 아닐는지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느끼는

마음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합장을 해 봅니다

 

 

 

9월의 기도

이해인

 

저 찬란한 태양

마음의 문을 열어

온몸으로 빛을 느끼게 하소서

 

우울한 마음

어두운 마음

모두 지워버리고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

9월의 길을 나서게 하소서

 

꽃길을 거닐고

높고 푸르른 하늘을 바라다보며

자유롭게 비상하는

꿈이 있게 하소서

 

꿈을 말하고

꿈을 쓰고

꿈을 노래하고

꿈을 춤추게 하소서

 

이 가을에

떠나지 말게 하시고

이 가을에

사랑이 더 깊어지게 하소서

 

 

 

10월의 기도

이해인

 

언제나 향기로운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좋은 말과 행동으로 본보기가 되는

사람 냄새가 나는 향기를 지니게 하소서

 

타인에게 마음의 짐이 되는 말로

상처를 주지 않게 하소서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

 

늘 변함없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살아가며 고통이 따르지만

변함없는 마음으로 한결같은 사람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마음에 욕심을 품으며 살게 하지 마시고

비워두는 마음 문을 활짝 열게 하시고

남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게 하소서

 

무슨 일이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아픔이 따르는 삶이라도 그안에 좋은 것만 생각하게 하시고

건강 주시어 나보다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10월에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더욱 넓은 마음으로 서로 도와가며 살게 하시고

조금 넉넉한 인심으로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 있는 마음 주소서

 

 

 

10월 엽서

이해인

 

​사랑한다는 말 대신

잘 익은 석류를 쪼개 드릴께요

 

좋아한다는 말 대신

탄탄한 단감 하나 드리고

기도한다는 말 대신

탱자의 향기를 드릴께요

 

푸른 하늘이 담겨서

더욱 투명해진 내 마음

붉은 단풍에 물들어

더욱 따뜻해진 내 마음

 

우표 없이 부칠 테니

알아서 가져가실래요?

 

서먹했던 이들끼리도

정다운 벗이 될 것만 같은

눈부시게 고운 10월 어느 날

 

 

 

11월에

이해인

 

나뭇잎에 지는 세월

고향은 가까이 있고

나의 모습 더 없이

초라함을 깨달았네

 

푸른 계절 보내고

돌아와 묵도하는

생각의 나무여

 

영혼의 책갈피에

소중히 끼운 잎새

하나하나 연륜 헤며

슬픔의 눈부심을 긍정하는 오후

 

햇빛에 실리어 오는

행복의 물방울 튕기며

어디론지 떠나고 싶다

 

조용히 겨울을 넘겨보는

11월의 나무 위에

연처럼 걸려 있는

남은 이야기 하나

 

지금 아닌

머언 훗날

 

넓은 하늘가에

너울대는

나비가 될 수 있을까

 

별밭에 꽃밭에

나뭇잎 지는 세월

 

나의 원은 너무 커서

차라리 갈대처럼

여위어 간다

 

 

 

11월의 나무처럼

이해인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은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 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

 

 

 

12월의 노래

이해인

 

함께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의 시간

땅 속에 묻힌 김장독처럼

자신을 통째로 묻고 서서

하늘을 보아야 해요

얼마쯤의 고독한 거리는

항상 지켜야 해요

 

 

 

12월의 시

이해인 

 

또 한 해가 가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한 해 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 카드 한 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지요

해야 할 일들 곧잘 미루고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나에게 마음 닫아걸었던

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 합니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밖에 없는 것처럼

시간을 아껴 쓰고

모든 이를 용서하면

그것 자체가 행복일 텐데

 

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하는 것

너무 많아 멀미 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주십시오.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

나를 키우는 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12월의 엽서

이해인

 

또 한 해가 가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한 해 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카드 한 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지요

해야 할 일 곧잘 미루고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남에게 마음 닫아 걸었던

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 합니다

 

같은 잘못 되풀이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밖엔 없는 것처럼

시간을 아껴쓰고

모든 이를 용서하면

그것 자체로 행복할 텐데......

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할 것

너무 많아 멀미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주십시오

 

12월엔 묵은 달력 떼어내고

새 달력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

나를 키우는 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12월의 촛불 기도

이해인

 

향기 나는 소나무를 엮어

둥근 관을 만들고

4개의 초를 준비하는 12월

사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우리 함께 촛불을 밝혀야지요?

 

그리운 벗님

해마다 12월 한 달은 4주 동안

4개의 촛불을 차례로 켜고

날마다 새롭게 기다림을 배우는

한 자루의 초불이 되어 기도합니다

 

첫 번째는 감사의 촛불을 켭니다

올 한 해 동안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해서

아직 이렇게 살아 있음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기뻤던 일, 슬펐던 일, 억울했던 일, 노여웠던 일들을

힘들었지만 모두 받아들이고 모두 견뎌왔음을

그리고 이젠 모든 것을 오히려 '유익한 체험' 으로

다시 알아듣게 됨을 감사드리면서

촛불 속에 환히 웃는 저를 봅니다

비행기 테러로 폭파된 한 건물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뛰어나오며

행인들에게 소리치던 어느 생존자의 간절한 외침

"여러분 이렇게 살아 있음을 감사하세요!" 하는

그 젖은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두 번째는 참회의 촛불을 켭니다

말로만 용서하고 마음으로 용서 못한 적이 많은

저의 옹졸함을 부끄러워합니다

말로만 기도하고 마음은 다른 곳을 헤매거나

일상의 삶 자체를 기도로 승화시키지 못한

저의 게으름과 불충실을 부끄러워합니다

늘상 섬김과 나눔의 삶을 부르짖으면서도

하찮은 일에서조차 고집을 꺽지 않으며

교만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했던 날들을

뉘우치고 뉘우치면서

촛불 속에 녹아 흐르는

저의 눈물을 봅니다

 

세 번째는 평화의 촛불을 켭니다

세계의 평화

나라의 평화

가정의 평화를 기원하면서 촛불을 켜면

이 세상 사람들이 가까운 촛불로 펄럭입니다

사소한 일에서도 양보하는 법을 배우고

선과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하는

평화의 길이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촛불 속에 빛을 내는

저의 단단한 꿈을 봅니다

 

네 번째는 희망의 촛불을 켭니다

한 해가 왜 이리 빠를까?

한숨을 쉬다가

또 새로운 한 해가 오네

반가워하면서

다시 시작하는 설렘으로 희망의 노래를

힘찬 목소리로 부르렵니다

 

겸손히 불러야만 오는 희망

꾸준히 갈고 닦아야만 선물이 되는 희망을

더 깊이 끌어안으며

촛불 속에 춤추는 저를 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성서를 읽으며 기도하고 싶을 때

좋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마음을 가다듬고 촛불을 켜세요

하느님과 이웃에게 깊이 감사하고 싶은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촛불을 켜고 기도하세요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하고 힘들 때

촛불을 켜고 기도하세요

 

촛불 속으로 열리는 빛을 따라

변함없이 따스한 우정을 나누며

또 한 해를 보낸 길에서

또 한 해의 길을 달려갈 준비를

우리 함께 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