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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도의 바다와 모래(Substitute Bride)

서인도의 바다와 모래(Substitute Bride)

Margaret Pargeter

 

1

에마 데이비스는 짐 브라운을 돌아다보며 힘없이 웃었다. "인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 메어리가 걱정하겠어요."

"혼자서 괜찮겠어, 에마?"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부르러 갈게요. 하지만 데이지는 첫 경험이 아니니까, 그다지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긴 하지. 그러나 아무 걱정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지는 일이 가끔 있으니까."

소 데이지는 세 번째의 해산을 앞두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일이 나쁜 사태로 빠지는 것을 에마는 여러 번 경험했다. 걱정하고 있어 보아야 소용없는 일이었다."내일 아침에 또 봐요, ." 에마 는 일부러 힘주어 말했다. 짐이 가 버리자, 에마는 데이지 곁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그다지 넓은 농장은 아니지만 일은 산더미처럼 많았고, 거들어 주는 사람이라고는 짐 한 사람 뿐이어서, 여섯 시에 일을 시작하여 저녁에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고,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가 못하다. 바깥일이 일찍 끝나도 집안의 일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밤에는 힐다 큰어머니와, 사촌인 브랜티가 외출하여 저녁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다행이었다. 에마 혼자라면 간단한 식사로 끝내면 된다.

에마는 오두막의 벽에 기대어 데이지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무릎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진 바지는 다 낡아빠져서 누덕누덕 기운 것이엇다. 옛날을 돌이켜 보는 일이 거의 없는 에마였지만, 지금은 왠지 어머니가 이런 자기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 지났으나, 그 섬세함과 결벽 합을 에마는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잇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자기 나름대로 지키며 살아가려던 에마의 인생은, 아버지 회사의 도산에 이어 아버지가 급사하는 거듭되는 시련으로 해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열 여섯의 나이에 그 견디기 힘든 충격을 받은 에마는, 학비가 비싼 기숙학교를 중퇴하고 큰아버지가 경영하는 이 농장으로 올 수박에 없었다. 큰아버지는 원기 왕성하던 아버지와 딴판인 노인으로, 아내와 딸이 조카인 에마에게 얼마나 심하게 대하고 있는지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큰어머니는 에마가 농장에 오자마자 농장에 고용하고 있던 소년을 내보내고 에마에게 그 일을 맡겼던 것이다. 게다가 집안일 도 식사 준비도 거의 다 에마가 하게 됐다. 그러고 일년 후 큰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두 사람은 농장의 일 일체를 에마에게 떠맡겨 버렸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도 농장의 일은 에마 혼자 맡아서 하고 있다. 하지만 영리하고 부지런한 에마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큰아버지로부터 충분한 훈련도 받았었지만 에마로서는 일에 대한 야심은 없었다. 다만 묵묵해 일할 뿐이었다. 농장에서 지내는 것은 좋았지만, 비상용 저축이 없는 것이 걱정이었다. 조금이라도 돈의 여유가 생기면, 리다와 브랜티가 다 써버리는 것이었다.

사촌 생각을 하며 에마는 괴로운 한숨을 내 쉬었다. 25세인 브랜티는 용모는 아름다우나 성격이 굉장히 까다롭다. 모델 일을 하고 있어서 일이 있을 때는 런던에 가지만 그 외에는 거의 짐에 있었다.

3 개월 전에 브랜티는 리처드 콘웨이와 약혼했다. 그는 서인도 제도의 바베이도즈 섬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고 있다. 두 사람은 파티에서 얼게 되었는데, 리처드는 만난 다음날 브랜티에게 구혼을 하였다 고한다.

에마 는 그가 농장으로 큰 어머니를 찾아왔을 때 한번 보았는데, 35,6세 정도로 후리후리한 키에 거무스름한 피부의 미남으로,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언동에는 호감이 가지 않았다. 사촌과 마찬가지로 거만한 데가 있어, 두 사람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리처드에겐 어딘가 에마를 끄는 데가 있어, 그의 파란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에마는 한 순간 눈길을 돌릴 수가 업었다.

그때 가슴을 두근거리던 일이 생각나자 에마는 쓴웃음을 짓고 머리를 흔들었다. 리처드 콘웨이는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능하여, 에마와 같은 하찮은 계집아이에게도 넌지시 관심을 갖게 하는 태도를 보이는 모양이었다. 리처드는 그 후 곧 바메이도즈로 돌아갔으므로 다시 만난 일은 없었지만, 왜 그 정도의 사나이가 브랜티와 같은 경박한 여자를 좋아하게 되어는 지, 에마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내를 원하고 있어." 만족스러워 하는 브랜티의 말이, 에마의 의문에 절반은 대답을 한 셈이었다. 리처드를 배웅하고 온 브랜티의 손가락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다이아본드 약혼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그는 한눈에 나한테 반했어."

에마는 물끄러미 브랜티를 바라보았다. "렉스는 어떻게 하지?" 렉스 올리버와 브랜티와는 친밀한 사이로, 에마는 브랜티가 그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렉스는 결혼할 타입이 아니야. 남자는 그래도 상관없어, 40이 되어도 상대는 나타나지까. 한지만 내게S 그런 찬스가 자꾸 줄어들 뿐이잖아."

"하진 만 나는...... ."렉스의 이름이 나왔을 때 브랜티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알아차리고, 에마는 얼버무려버렸다.

"인제 이 이야기는 그만두자. 나는 리크와 결혼하여 바베이도즈에 가서 살 거야. 이렇게 기후가 나쁜 고 장에서 나날을 보내는 데는 이제 싫증이 나."

"결혼식은 언제 하지? 그 사람은 이번에 너를 데리고 가고 싶어 했던 것 아니다? 기다릴 수 없는 것 같아 보이던데." 에마가 물었다.

"제가 남자의 마음을 어떻게 아니, 남자 친구를 사귀어 보지도 못한 주제에?" 브랜티는 심술궂게 말했다."분명히 리크는 함께 가자고 했지만, 나는 서두르는 건 질색이거든.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려야 하고, 렉스에게 작별 인사를 할 시간도 필요해."

그것을 구실로 브랜티는 또 매일 밤 렉스와 만날 작정인 모양이다. 에마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니면, 브랜티는 이번에도 감쪽같이 리처드를 속일 셈인가. 사람들은 브랜티가 아름답기 때문에 자주 그녀를 용서해 왔다. 에마는 거울 앞에 서서, 자기와 그녀는 사촌간인데 어쩌면 이처럼 얼굴 보습이 다를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큰 어머니는 브랜티가 자기 쪽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하지만 에마의 어머니도 아름다웠고, 아버지의 얼굴 모습도 단정했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브랜티와 조금도 닮은 데가 없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옛날에는 칭찬을 받은 일도 있는 날씬한 몸매는, 이재 옛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게 여위어 있다.

"여어, 잘 있었오!"

머릿속에 그리던 남자의 목소리를 갑자기 등 뒤에 듣고 에마는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가 이내 새파래졌다.

콘웨이씨! 깜짝 놀랐어요!"

"꿈이라도 꾸고 있었나?" 리처드 콘웨이는 미소를 지었다."리크라고 불러줘요."

"." 에마는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언제 오셨나요?"

"오늘 오후에. 집에는 아부도 없는 모양인데, 당신 혼자만 남겨 두고 모두들 외출한 거요?"

에마는 마음의 흔들림을 감추려고 눈을 내리깔았다."." "공교롭군. 브랜티는 어디 갔지?"

"일 때문에 나간 모양인데, 어디 갔는지는 모르겠어요. 미리 연락을 하고 오셨더라면 좋았을걸." "그렇군." 아리송한 빛을 띤 눈이 에마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당신은 브랜티가 간 곳을 모르고 있군." 에마는 거북한 듯 입속으로 우물거렸다.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는 말은 무슨일이 있어도 학수 없다. 리처드 콘웨이가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위축되는데, 그가 화라도 낸다면 어떻게 될까. 리처드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자, 에마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브랜티가 돌아올 때까지 그는 여기서 기다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은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서두를 건 없고. 지나가다가 브랜티를 놀래 주려고 들른 것뿐이니까요. 그녀가 있는 데를 알면 데리러 갈 텐데."

묻는 듯한 파란 눈동자와 마주치자, 에마는 회색 눈을 크게 떴다. 그때 마침, 데이지가 괴로운 듯 신음소리를 냈으므로, 두 사람의 관심은 그쪽으로 쏠렸다.

곧 해산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덕분에 에마는 한숨 돌릴 수가 있었다.

"언제나 가는 곳을 물어 두지는 않아요. 어쩌면 브랜티가 말을 했는데도 내가 못 들었는지도 모르고요."

"그렇군." 그제서야 납득한 듯 리처드는 에마 쪽으로 걸어왔다. "그렇다면 기다릴 수밖에 없겠군."

주위에는 저녁 어스름이 밀려오고 있었으나, 축사 안은 따뜻해서 그런 대로 괜찮았다. 에마는 리처드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지금도 그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남자다움에 압도되어 시선을 돌렸다. 리처드는 공항에서 곧장 이리로 온 듯, 여행 복인 회색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새하얀 실크 셔츠가 그의 까무잡잡한 얼굴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에마는 리처드의 근육질인 탄탄한 몸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마음이, 아플 정도로 긴장되었다. 그러나 리처드의 관심이 다시 데이지에게로 쏠리자 그 기문은 다소 완화되었다.

"이런 일을 도와줄 남자도 없소?" 리처드는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에마는 아름다운 이를 드러내 a보이며 웃었다. "데이지의 해산은 순산이고, 나는 이런 일에 익숙해요."

"하지만 농장 책입자를 부르는 게 좋겠군, 처녀가 할 일이 아니오."

"농장 책임자 같은 건 없어요. 일을 도와주고 있는 사람은 짐뿐이에요."

"그렇지만...... ."리처드는 미간을 모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브랜티의 말을 잘못 들었나. 당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에마의 얼굴에 떠오른,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웃음을 리처드는 놓치지 않았다."왜 그런 얼굴을 하지?"

"그런 얼굴이라니요?" 에마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리처드는 에마가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는지,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

"당신은 사촌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 같군. 브랜티를 질투하고 있는 거요?"

"질투라고요!" 에마는 화가 나서 일어섰다. 차가운 눈이 뚫어져라 에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브랜티는 아름답지만 당신은 평범하니까." 에마는 괴로움으로 볼을 붉혔다. 되쏘아 주려던 말이 갑자기 솟아오르는 눈물로 막혀 버렸다. 눈물을 본 리처드는 놀라서 큰 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심한 말을 해서 여자가 민감해지는 말을 깜빡 잊고 그만...... . 부탁이니 울지 말아요."

자신의 나약함이 못 견디게 부끄러워 에마는 리처드가 내민 하얀 손수건을 얼른 받으며, 굳어진 목소리고 말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대수로운 일은 아니니까요. 정말이에요. , 자신의 얼굴을 잘 알고 있어요. 다만, 요즈음 매우 바빠서 지쳐 있기 때문에...... "

"그런데 내가 발을 잡아당긴 셈이군. 미리 온다고 브랜티에게 알렸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했으면 당신이 이런 꼴을 당하진 않아도 되었을 것 아니오."

"정말 괜찮다니 가요." 하고 말하며 에마는 또다시 침착성을 잃어다.

리처드는 역시 기다릴 모양이다. 브랜티는 몇 시나 되어야 돌아올까? 춤을 추러 가기 전에, 옷을 갈아입으러 렉스와 함께 오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리처드에게 손수건을 돌려주며. 에마는 어떻게든 그전에 이 사람을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어, 오늘은 그냥 런던으로 돌아가시고, 내일 브랜티에게 전화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니, 아파트에 전화를 했더니 룸메이트가 브랜티는 여기 왔다고 그랬소."

"하지만, 무작정 기다리려면 매우 지루할 테데요." 리처드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팔에 여자를 안아 본 게 상당히 오래 되었소. 약혼녀에게 충실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오." 그의 눈이 놀리듯이 번득였다. "당신은 그런 일하고는 거리가 멀겠지만."

에마는 분노와 당혹으로 또 얼굴이 빨개져다. "나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남자 친구도 있어요." 정색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정말인가? 거짓말은 언제고 탄로 나는 법이오."

"또 실례되는 말을 하시는군요!" 에마는 날카롭게 말했다.

"그럴 속셈은 아니오. 남자는 속된 것을 좋아하거든, 그리고 당신은 입술이 잘생겼어요. 조금만 다듬으면 당신은 아주 괜찮은 여자가 될 거요."

"그것으로 못생긴 얼굴을 커버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에마는 쏘아붙이듯이 발했다.

"침대 속에서는 그런 건 상관없지." , 놀리는 듯한 말이 나왔다.

리처드의 노골적인 말에 에마는 피가 머리로 치솟고 몸이 떨렸다. 그러나 그에 대해 불쾌한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브랜티가 없어서 초조한 마음을 달래려고 그러는 것이겠지 렉스 올리버도 곧잘 그런 말을 에마에게 하곤 하지만, 인상은 아주 딴판이다. 렉스가 브랜티에게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에마는 소름이 끼칠 때도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리처드와 약혼까지 했는데......

"영국에 오래 계실 건가요?" 에마는 화제를 바꾸려고 시도했다. "2,3. 그러니까 오늘밤에 꼭 브랜티를 만나고 싶어요. 앞으로 3주일가량 오스트레일리아에 가 있어양 하거든요. 북 킌즈랜드에서, 사촌이 내 사탕수수 농원을 경영하고 있는데, 돌발 사건이 발생한 모양이오. 사실은 브랜티와 함께 가서 신혼여행을 대신하고 싶었는데, 그러자면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아무래도 시간적으로 무리일 것 같아요. 그래서 브랜티에게 2,3주일 동안 결혼 준비를 하게 하고, 나 캐나다 갔다 와서 곧 식을 올릴까 해요."

"좋은 생각이군요." 에마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가라앉아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애써 웃는 얼굴을 모이려고 했다.

"혼인신고도 했는데, 브랜티가 기뻐해 줄까요?" 리처드는 밝게 말했다.

"물론이지요." 에마의 가슴에 묘한 공허감이 스며들었다. 도대체 왜 이럴까, 브랜티가 없다고 외로울 까닭도 없는데? 그러타면 달리 이유가 있는 것일까? 당혹하여 리처드를 올려다본 에마는, 자신이 이상한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확실히 알았다.

그때 또 데이지가 신음소리를 냈으므로, 에마는 구원을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질 위에 무릎을 끓고 소의 목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에마." 리처드는 데이지의 모습을 보더니, 재빨리 에마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나는 배가 몹시 고파요. 몇 시간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 못했소. 이곳은 내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먹을 것을 좀 만들어 주지 않겠소?"

"하지만 데이지가...... 내가 없는 동안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곤란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리처드는 웃으며 손을 놓았다. "나는 설탕을 만드는 사람이지만, 말이나 가축을 다루는 데도 익숙하지."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데이지의 큰 눈이 나무라듯이 보고 있었으나, 리처드의 억지에는 거역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에마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차가 마시고 싶던 참이에요. 하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부르러 오셔야 해요."

"알리고말고."

그 말은 애매한 말이라는 것을, 에마는 그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에마는, 집으로 돌아와 작은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며 어깨에 기대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생각으로 가슴을 태우고 있었다. 브랜티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가를 빨리 깨달아양 한다. 렉스 올리버와 계속 사귀는 일은 위험하다. 아까 용모에 대한 말을 들은 뒤로, 리처드가 싫어졌지만 렉스와 비교하면 남자로서는 그가 훨씬 낫다는 느낌은 부인할 수 없었다.

브랜티는 약혼자를 잃은 것이 당연하다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에마는 어떻게든지 잘되게 해주고 싶었다. 집에 돌아오자 곧 브랜티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으나 헛일이었다. 렉스가 경영하는 두 군데의 클럽에 까지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렉스에게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브랜티가,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 리처드의 차를 발견하고 렉스를 돌려보내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브랜티는 직감이 날카로우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위기를 모면하게 외었으면 좋으련만......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냄비를 남미를 물에서 내려놓고 리처드를 부르러 축사로 가자, 놀랍게도 짐 브라운이 와 있었다.

"둘이서 해산구완을 했소. 그러니까 인제 걱정하지 않아도 왜요"

리처드가 엄숙하게 하는 말을 듣고 에마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데이지가 자랑스러운 듯이 막 낳은 송아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에마는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리처드가 자기 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을 보다, 그가 몹시 시장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얼굴을 붉혔다.

"미안해요. 식사 준비가 되었다는 말을 하로 왔던 거예요."

뒷일을 짐에게 맡기고 다시 집으로 와 주방으로 들어갔을 때, 에마는 리처드의 옷차림이 방금 하고 온 일에 딱 어울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슈트를 버리지 않았나요?"

"축사 안에 헌 방수복이 있기에 그걸...... 그리고 차 안에도 또 한 벌의 슈트가 있고 내일 런던에 가면 새로 살수도 있으니까 걱정할 것 없소."

"돈이라는 것은 편리한거군요!" 에마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얼굴이 아름답지 못한 사람은 말도 함부로 하는군." 에마의 볼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리처드는 태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에마의 비위를 긁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무엇인가를 만일 그가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그것이 에마의 기쁨과 연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를 모독하는 일이 끝나면 세면소를 가르쳐 드리겠어요." 에마는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주방의 개수대면 돼요." 리처드는 웃옷과 셔츠를 벗어 버지자, 개수대 쪽으로 걸어갔다.

수도를 틀고 잇는 리처드를 바라보며 에마는 묘하게 목구멍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리처드의 떡 벌어진 늠름한 어깨. 그때 리처드가 조금 몸을 틀었으므로, 건장한 가승을 덮고 있는 곱슬곱슬한 털이 보였다. 에마는 당황하여 눈을 돌리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스프를 접시에 담았다.

리처드가 자리에 앉은 뒤에도 에마는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도대체 왜 이럴까...... 왜 이렇게 손이 떨릴까. "맛있게 먹었소." 리처드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쉬는 것을 듣고, 에마는 어찌 할 줄을 몰랐다.

"당신이 만든 거요?"

"." 에마는 수프 접시를 치우고 스테이크를 리처드 앞에 놓았다. "어제 바깥일이 끝난 뒤에 만든 거예요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당신은 요리 솜씨가 좋군. 스테이크도 아주 맛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스테이크는 처음 먹어 보는걸."

"별로 대단한 건 못 돼요. 잔손이 단 것만은 사실이지만." 갑자기 에마의 유머 센스가 머리를 쳐들었다. "나에게도 자랑할 만한 것이 있는 셈이더군요." 리처드가 눈썹을 치켜 올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에마의 미소는 사라졌다 리처드에게서 찻잔 말을 끌어내려고 했던 자신에게 화가 나서, 에마는 창백해진 얼굴로 자기의 스테이크 접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식욕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나요? 전혀 없어요."

"브랜티와 내가 결혼하거든 우리 집에 놀려 와요, 서인도 제도의 요리를 대접할 테니."

", 그러겠어요." 공허한 대답이 되었으나, 에마로선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커피를 끓일까, 당신은 피곤한 것 같으니까?" 리처드는 에마로서는 예기치도 못한 말을 했다.

농장에 온 뒤로 피곤하겠다는 말을 들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에마는 눈을 크게 떴다. ", 괜찮으시다면." 에마는 퍼콜레이터를 가리켰다. "나는 별로 피곤하지는 않지만, 브랜티가 돌아오면 먼저 쉬어야겠어요."

리처드는 퍼콜레이터를 집어 들며 물었다. "이곳의 벌이는 얼마나 되지?"

"40 헥타르가 조금 넘어요. 당신네 농장은요?" 에마의 질문이 이상했는지, 리처드는 미소를 지었다. "여기보다는 넓지."

리처드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으므로 에마는 화제를 바꿨다.

"오늘 일,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지요?"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요." 리처드는 놀리듯이 대꾸했다. "나는 아기도 아주 잘 받아요. 사탕수수 농원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생기지. 의사를 부르러 갈 틈이 없을 때도 있소."

리처드는 일부러 에마가 당혹해 할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에마는 볼이 상기되어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도 자식이 필요하겠지요?"

"필요하고 말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아기는 애정에서 태어난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 아니오?" 날카로운 눈초리로 에마를 쳐다보고 웃었다. "하지만 세상엔 그런 낭만파만 있는 건 아니오."

"하지만 나는...... ."

에마가 화가 나서 막 대꾸를 하려는데, 홀의 문이 확 열렸다.

브랜티가 주방을 향해 급하게 걸어오고 있었고, 바로 뒤에는 렉스 올리버가 따라오고 있었다.

에마는 몸이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리처드와 정신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않았더라도, 그들이 돌아온 것을 금방 알아차렸을 텐데. 에마는 새파랗게 질려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굳어진 입술에서 겨우 나온 것은 묘한 신음소리뿐이었다.

그러나 에마가 애를 태운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브랜티는 한순간 당황하는 듯했으나, 그녀의 특기인 잽싼 눈치로 곧 태도를 바꾸었다. 리처드가 일어서자, 그녀는 감탄의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몸을 내던졌다.

"리크, 어쩌면 이렇게 멋지죠!"

리처드의 팔이 브랜티를 안고, 두 사람이 키스를 주고받는 것을, 에마는 온몸이 마비된 듯이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줄 알았어." 리처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냉정한 눈은 브랜티와 함께 들어온 사나이를 의심스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브랜티는 키스 때문이라는 듯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눈도 묘한 흥분에 반짝이고 있었다.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 하지만 미리 알기고 오셨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렉스가 에마를 데리러 온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면, 난 돌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렉스에게, 온는 길에 태워다 달라고 했거든요." 브랜티는 생긋 웃고 에마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나 때문에 늦어졌다고 렉스가 투덜대지 뭐야. 하지만 에마는 보나마나 약속도 잊고 있을 거라고 했어. 안 그래, 에마?"

에마가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에 브랜티는 홱 리처드에게 등을 돌리고는, 렉스와 에마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렉스는 장사꾼이라 그런지 브랜티의 말에 교묘하게 동조하며, 미소를 띠고 당혹해 하고 있는 에마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바빴겠지. 하지만, 파티에 가려면 준비를 해야지."

"파티요?" 중얼거리면 에마는 그의 팔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틀었다.

"정말 잊은 건 아니겠지?" 놀리듯이 말하며 렉스는 경고하듯이 에마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는 리처드를 향해 한숨을 쉬어 보였다. "에마는 농장의 일에만 열중하느라고 이렇게 나와의 약속은 잊는답니다."

"모두 함께 댄스를 하러 가요." 에마의 모습에 불안을 느꼈는지 브랜티가 급하게 말했다. "그래요, 달링." 잠자코 있는 리처드에게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가고 싶다면. 하지만 의논할 일이 많이 있어."

"그렇게 서둘러야 할 이야긴가요?"

"우리들의 결혼식 이야기야. 약혼한 것을 기억하고 있겠지?" 리처드가 가벼운 어조로 놀렸다.

"물론이지요." 브랜티는 화사하게 웃어 보였으나, 입가에는 초조함이 떠올랐다. "잊지는 않았지만, 온다고 미리 연락해 주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갑자기 예정을 모두 최소할 숴는 없잖아요? 모델 일을 계약한 것이 있거든요."

리처드의 실눈이 렉스 쪽을 흘끔 쳐다봤다.

"여기서는 이야기할 수 없으니 나중에 합시다."

에마를 끌어당기는 렉스의 손에 힘이 주어지고, 그가 에마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피곤하다면 옷 갈아입는 것을 거들어 줄게. 달링, 전에도 그랬었잖아."

"괜찮아요." 렉스의 뻔뻔스러운 얼굴을 후려쳐 주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고 에마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에마는 브랜티를 위한 일이니 그녀에 대한 경멸감으로 부글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렉스에게 고개를 끄떡여 보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요. ........" 리처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우리 바빠서 그만 잊었어요....." 그리고 브랜티 쪽을 보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옷을 갈아입고 갈 거지?"

"리크와 렉스에게, 거실에서 마실 것을 대접한 다음에. 거 먼저 가."

나중에 침실로 온 브랜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에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떻게 하다니?" 웃옷을 벗으며 브랜티는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마치 아래층에 있는 사나이들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는 듯한 투였다. 에마가 기절할 정도로 냉정하게 브랜티는 말했다. "잘 되도록 빌 뿐이야."

"지금 제 행동은 정말 너무해. 약혼까지 했으면서 다른 남자와 사귀다니!" 에마는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브랜티에게 터뜨렷다.

"흥분하지 마. 리크가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잖아. 네가 알려만 줬으면 피할 수 있었을 테데." 파란 눈에 증오를 담고 브랜티는 심술궂게 말했다. "너는 최악의 사태를 바라고 있었지!"

조용해진 방에서는 브랜티의 거친 숨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그녀 쪽을 흘끔 본 에마는 숨을 삼켰다. 브랜티가 증오를 잔뜩 드러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에마는 입술을 깨물며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전화는 여기저기 했어. 그러나 아무도 네 거처를 아는 사람이 없었어. 만일 리크에게 약혼을 취소당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너는 너 자신을 나무랄 수밖에 없어." 에마로서는 이 정도의 말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머리고 피가 솟구쳤다.

브랜티는 손이 신경질적으로 떨리는 것을 참으며 금하게 말했다.

"미안해.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대가 아니야. 나를 도와줘야겠어!"

에마는 브랜티의 마음의 움직임을 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래층의 사나이들만 없다면 말이 나오는 대로 마구 퍼부었을 것이다.

"너를 돕는 일이 내가 오늘 밤 렉스와 함께 외출하는 일이라면 나는 못해."

"대수로운 일은 아니잖아?" 브랜티는 필사적이었다.

"어딘가, 렉스와 나와의 사이가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가게에 가서 한두 시간 보내기만 하면 돼."

"결국 리크를 속이는 일을 도와 달라는 것 아니야?" 에마는 냉정을 되찾았다. "그게 싫은 거야."

"그게 너한테 뭐가 나쁘다는 거야?" 다시 목소리가 거칠어지고 브랜티의 얼굴은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리크가 좋아진 건 아니겠지!"

"천만에, 그런 사람은....." 에마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하지만, 만일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다면, 도리를 지키고 충실히 대할 거야. 만약 리크가, 네가 저지른 행동을 알게 된다면 둘의 관계는 끝장이 날 거야."

"어떻게 그걸 알지? 리크 역시 성인은 아니야. 그가 바람을 피우는 건 허용되고, 나는 안 된다는 법은 없어.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니, 우스운 이야기야."

"너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일을 알고 있다면......"

브랜티를 타일러 봐야 헛일이라는 것을 알자 에마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두자."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에 그런 대로 분노를 가라앉혔는지 브랜티는 애원하는 투로 말했다. "부탁이니, 드레스를 입어 줘."

"드레스 같은 것 .없어."

"뭐라고?" 에마가 반항하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인지 목소리가 또 날카로워졌다. "여기 올 때 몇 벌 가져온 것이 있었잖아!"

에마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큰어머니가 빼앗아가 버렸어. 남은 것은 열네 살 때 학교 행사 때 입던 드레스 하나 뿐이야."

브랜티는 얼굴을 붉혔으나 사죄하는 뜻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파리에서 파는 그런 사치스러운 드레스는 여기 있는 동안은 너한테 필요 없잖아, 곰팡이가 슬 뿐이지. 그리고 너한테 드는 돈을 메꾸려면 그렇게 라도 할 수밖에 없잖아."

"인제 됐어." 지금의 에마로서는, 자신이 몇백 파운드나 하는 이브닝드레스를 여러 벌 가지고 있었다는 일조차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딸인 나의 응석을 받아 주고, 좋은 옷으로 차려 입히는 것을 아주 좋아했었는데......

옛날을 그리워해 봐야 아부 소용없는 일이다. 에마는 한숨과 함께 추억을 가슴속에 묻어 버렸다.

"네 드레스 중에서 아무거나 빌려주겠어?"

"내 드레스를 입으면 웃음거리가 될 뿐이야. 내 키가 훨씬 큰걸. 너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보기 흉할 거야. 그러니 너의 헌 드레스를 찾아서 입는 게 나을 거야."

"내가 여느 때보다 더 보기 싫게 보여도 상관없어?" 에마는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옆에 있으면 아무도 너를 쳐다보지 않아."

그 말이 얼마나 진실한 말인가를 에마는 바로 뼈저리게 느꼈다. 에마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칙칙한 회색 새틴으로 몸을 감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리처드 콘웨이는 표정하난 달라지지 않았다.

유행에 뒤떨어진 드레스며 급하게 묶은 머리, 허둥지둥 화장을 한 얼굴은 그의 관심을 조금도 끌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이트클럽의 댄스 플로어에서 렉스 올리버와 함께 스텝을 밟으며 에마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렉스와 단둘이 있게 된 기회를 이용해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 브랜티와 사귀고 있지요, 그녀는 이미 약혼을 했는데?"

렉스는 작은 신음소리를 내더니 에마의 도전하는 듯한 눈을 내려다보았다.

"분위기 깨지 말아요, 에마!" 마음 탓인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위기를 깨다니, 무슨 소리죠?"

렉스는 갑자기 히죽이 웃었다.

"당신은 미인이오. 천사처럼 춤을 추는군. 이렇게 춤을 추고 있으려니 당신이 좋아질 거서 같아."

"쓸데없는 소리로 어물쩍 피하려 하지 말아요, 렉스!" 에마는 화가 났다.

렉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에마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당신은 멋진 여자가 될 가능성이 있어." 미간을 모으며 렉스는 중얼거렸다.

"농담하지 말아요.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놀리지 말아요!"

놀리는 게 아니오. 나에게는 소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날카로운 눈이 있어. 나는 당신을 멋진 여자로 만들어 보일 수 있어. 나는 당신을 멋진 여자로 만들어 보일 수 있지. 만일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에마......"

"필요 없어요." 어째서 남자들이란 이렇게 중요한 때에 사람을 놀리고 싶어 할까....... "나는 브랜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 그랬었지." 어째서 남자들이란 이렇게 중요한 때에 사람을 놀리고 싶어 할까....... ‘나는 브랜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 그랬었지." 레스는 순순히 응했다. "당신은 내가 순정적인 어린 처녀를 속이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군. 그렇다면 한 가지만 분명히 해두지. 브랜티는 분명히 약혼은 하고 있지만, 이미 순정적인 어린 처녀는 아니요. 벌써 몇 년 전부터 그렇지 않아."

"그런 말이 아니에요." 에마는 우겨댔다. "브랜티는 자리를 잡으려 하는 거예요. 리크의 도움으로."

"콘웨이는 브랜티가 무슨 짓을 하건 신경을 쓰지 않아, 그녀에겐 매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1,2년 지나 그녀에게서 지금의 빛이 사라져 버리면 무엇이 남겠소?"

에마는 오싹해졌다. 그의 말이 맞는다. 숙치로 화장을 하지 않은 아침의 브랜티는 몹시 늙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걱정 없어, 브랜티는 문제를 잘 해결하니까?"

"걱정 없어, 브랜티는 문제를 잘 해결하니까. 나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에마는 막막하여, 리처드와 춤을 추고 있는 브랜티 쪽을 보았다. 오늘 밤의 그녀는 환하게 빛나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드레스도....... 리처드의 손이, 뒤가 푹 패인 드레스를 입은 브랜티의 드러난 등을 다정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 손이 드레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 에마는 속이 메스꺼워졌다.

누가 보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알아차렸는지, 리처드의 눈길이 품안의 연인을 떠나 에마의 경멸에 찬 눈길과 마주쳤다. 에마가 얼굴을 붉히면서도 눈길을 돌리지 않는 것을 보자, 그는 빈정거리듯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 보아라. 너에게 마음을 주는 남자는 없을 거다.’ 그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존심이 상한 에마는 나중에 리처드가 춤을 추자고 했을 때, 상대는 해주면서도 마음은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별로 말은 하지 않았으나, 렉스 올리버하고는 오래 전부터 사귀어 왔느냐고 묻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 오래 전부터였어요." 에마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브랜티가 처음으로 렉스를 데리고 온 것이 언제였을까....... 생각날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사람, 정말 당신이 좋아하는 타입이오?" 에마가 화가 발끈 나서 말을 하려 하자, 리처드는 급히 말을 이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당신은 남의 충고를 듣지 않는 여자라고 브랜티가 말하던데, 그렇다면 내 말에도 귀를 기울일 생각이 없겠군."

"왜 내가 당신의 충고를 들어야 하지요!" 에마는 화가 나서 차갑게 말했다.

"하긴 그렇군. 데이지의 해산을 도와 준 일 외엔 내가 당신에게 호감을 살만한 일을 한 건 없으니까. 당신의 용모에 대해 듣기 싫은 말만 하고...... 하지만 그건 여동생과 이야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리처드의 팔에 힘이 주어지는 것을 느끼고 에마의 몸은 부르르 떨렸다. "기민하고 요리를 잘 만드는 데다, 놀라운 정도로 춤도 잘 추는군. 농장일은 해내는 솜씨도 물론 우수하고..... 그밖에도 재능이 있겠지?"

"남을 그렇게 모욕하는 게 아니에요." 그 칭찬하는 말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에마는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모욕하는 게 아니오. 그리고 우리는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잖아요."

"바로 그게 문제지. 좀 더 기회를 만들었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당신은 날 처음 만났을 때도 그 큰 눈으로 비판하듯이 보았는데 내가 싫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다는 거지요?" 에마의 질문은 그 절반은 자기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에 대한 것을 하나도 몰랐는데. 다만, 왜 당신이 브랜티를 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만은 확실해요- 바베이도즈에도 젊은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테데요."

"아무도 나를 택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럴 리가 없어요."

그 뒤로 에마는 줄곧, 렉스의 권유로 마지못해 춤울 추었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녀도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학교를 나온 뒤로 한 번도 춤을 춘 일이 없었으므로, 자기가 이처럼 댄스를 즐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렉스 역시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에마와 함께 가볍게 스텝을 밟는 그의 얼굴에서 여느 때의 지루해하는 표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한번 에마가 재미있는 말을 하자, 렉스는 소리 내어 웃으며 에마를 꽉 끌어당겼다. 마침 곁을 지나치던 리처드와 브랜티가 경멸의 빛을 띠고, 즐거워하는 렉스를 돌아다보았을 정도였다.

나중에 클로크룸에서 마주쳤을 때 브랜티는 너무 지나쳤다고 에마를 나무랐다.

드레스가 두꺼워서 더웠으므로 에마는 수돗물에 손을 적셔 달아오른 볼을 적시며 멍하니 브랜티는 너무 지나쳤다고 에마를 나무랐다.

드레스가 두꺼워서 더웠으므로 에마는 수돗물에 손을 적셔 달아오른 볼을 적시며 멍하니 브랜티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렉스를 나의 남자친구로 보이게 해야 할 것 같아서........"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너는 너무 지나쳤어!" 농장으로 돌아오자, 곧 렉스와 리처드가 뒤따라 돌아왔다. 놀랍게도 리처드가 한 발 먼저 나갔는데, 그는 다음날 밤에 타협을 하기로 브랜티와 최종적인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

이튿날은 에마로서는 시간이 너무나 더디 가는 것 같았다. 평상시에는 시간이 모자라서 쩔쩔매는데, 오늘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게다가 리처드 콘웨이의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서 몹시 화가 났다. 그 사람과 춤을 출 때, 가슴을 죄는 듯한 기분이 든 것은 어째서였을까? 그 사람에 대한 적의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리처드의 검은 눈과 육감적인 입가에 감도는 묘한 잔혹함이 생각나, 에마는 몸이 부르르 덜렸다.

리처드와 브랜티는 밖에서 식가를 하기로 되어 있고 큰어머니 힐다도 외출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에마는 모두가 나간 뒤 여느 때의 샤워 대신 천천히 목욕을 할 참이었다. 빨리 일을 마치려고 개수대에서 접시를 씻고 있는데, 현관의 벨이 울렸다. 아무도 나가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서둘러 손을 닦고 주방문을 연 에마는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리처즈 콘웨이가 브랜티와 키스를 하고 입술을 천천히 떼는 중이었다. 에마는 숨을 삼키며, 머리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브랜티의 맨살에 댄 리처드의 손가락의 움직임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이 있었다.

볼이 화끈거려 견디기 힘든 에마는, 자신의 동요를 감추려고, 입가에 조소를 띠고 냉랭한 회색 눈동자로 리처드를 노려보았다.

얼굴을 든 리처드의 눈이 그녀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의 표정에 분노가 번뜩이고 브랜티를 안은 팔에 힘이 주어졌다. 놀란 브랜티가 작은 신음소리를 낼 정도로 힘을 주었던 것이다.

에마는 인사도 하지 않고 몸을 홱 돌려 주방으로 달려갔다. 등 뒤에서, 브랜티가 아프다고 투덜대더니 이층에 가서 코트를 가져오겠다고 하는 말이 들렸다.

에마는 매우 먼 거리를 달려온 듯이 숨이 차서,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문이 열리며 누군가의 손이 에마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에마는 재빨리 돌아다보았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리처드가 날카롭게 말하고 에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리처드의 입술이 다가왔다. 그러나 에마로선 피할 도리가 없었다. 갑자기 입술이 눌렸다. 그의 팔이 우악스럽게 에마를 끌어안았다. 리처드는 마치 에마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일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단 뗀 뒤, 다시 밀어붙인 입술은 무자비할 정도로 격하게 에마를 압도했다.

자기 속에서 눈을 뜨기 시작한 불꽃을 알아차리고, 에마는 본능적으로 리처드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의 팔에 주어진 힘은 에마의 저항을 막아 버렸다. 리처드의 체온이 전달되어 오자, 에마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다시 그를 밀어내려고 들었던 손은, 오히려 그의 넓은 어깨에 달라붙어 있었다. 리처드가 입술을 밀어붙인 채, 낮은 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 순간, 에마의 몸속에서는 욕망 같은 것이 타올랐다. 리처드가 포옹한 탓인지 가느다란 목이 뒤로 젖혀저 금방이라도 꺾어질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리처드가 손을 놓았다. 두 사람은 숨을 헐떡이며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리처드의 눈동자의 빛깔이 더 짙어 보였다.

"너무 거칠게 다룬 것 같군." 리처드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도 바라던 바였을 거야."

"농담하지 마세여!" 침착성을 조금 되찾은 에마는 쏘아붙였다. "당신이 브랜티를 만지는 손놀림을 보면 비위가 상해서 구역질이 나요!"

"하고 싶은 말을 제법 하는군! 나를 비판할 자격이 없을 텐데. 당신의 이야기는 어제 렉스 올리버에게서 충분히 들었어, 당신과 브랜티가 이층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에."

"내 이야기를? 정말 뻔뻔스럽군요!"

"말한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의 남자친구야. 당신은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모양이지만, 그 사람은 헤어지려고 하더군. 어제도 그래서 그가 일부러 늦게 왔던 거야. 브랜티를 태우고 왔기 때문에 늦은 게 아니란 말이오."

에마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렉스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요."

"에마, 그런 얼굴을 하지 말아,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도 아니면서. 당신은 겉보기보다는 어른인 것 같더군. 연극을 할 필요는 없어. 가엾게도 브랜티는 당신을 재기시키려고 고생이 많았을 테지. 당신이 상당히 놀아났었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에마는 마음속으로 싸우고 있었다. 렉스와 브랜티의 거짓말을 폭로하면 어떻게 될까? 에마가 사실을 말하면, 리처드는 결혼식을 중지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생기게 되면, 괴로워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에마 자신이다. 리처드가 그대로 믿게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결혼식만 끝나면 더 이상 리처드를 만날 일도 없게 된다.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그것으로 에마의 소문이 나쁘게 나지는 않을 것이다. 요즈음의 젊은 여자들은 거의 다 제멋대로고 또 그것을 흠잡는 사람도 없는 세대니까.

"걱정도 팔자군요." 에마는 가까스로 그 말만 하고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럴 테지, 나를 속일 정도의 여자니까. 굳이 렉스가 당신의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 하도라도 나는 당신과 춤을 출 때, 당신이 품행이 단정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지. 당신의 움직임은 상당히 도발적이었거든. 나는 가능하다면, 당신을 그 자리에 그냥 쓰러뜨리고 싶은 심정이었소."

화가 발끈 난 에마는 리처드가 밉살스러워서 그의 빰을 힘껏 때렸다.

"당신은......정말 지독한 사람이군요!" 에마는 햄없이 소리쳤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요? 마치 내가......바람둥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지." 리처드는 그녀를 깔보듯이 웃더니, 홱 돌아서서 에마에게 등을 보이고 나가버렸다.

그날 이후 리처드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날 때까지, 에바는 그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떠났다는 말을 듣자, 곧 큰어머니와 브랜티에게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힐다는 그만큼 비용이 절약된다고 생각했는지 곧 승낙했다. 어차피 누군가가 남아서 농장을 지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는 때 같으면 에마는 힐다의 타산적인 처사에 기분이 나빴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때만은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리처드 콘웨이가 브랜티하고든 다른 어느 구구하고든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보는 것은 질색이다- 그런 말을 들은 뒤여서!

생각이 날 때마다 에마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만일 리처드의 오해를 풀 수만 있다면, 글르 만나도 괜찮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도니다. 브랜티를 위해서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에마 자신을 위해서도. 그 심술궂은 브랜티가 앞에서 사라진다는 일만으로도 에마는 자존심을 조금은 희생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에마는 웬일인지 보상이 너무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자신의 마음속의 속삭임을 무시하고 싶었다. 그 횡포한 사탕수수 농장 주인이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 것을 고민하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로부터 곡 일주일 후의 일이었다. 브랜티가 에마의 침실로 불숙 들어왔다.

"엄마는 안 계서,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

양말을 깁고 있던 에마는 미간을 모으려 얼굴을 들었다. 브랜티는 매우 흥분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뭔가 비밀이야기인 것 같다. 에마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브랜티는 할 말이 있다는 말만 해 놓고는 한동안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았다. 창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고 있다.

"오늘은 일찍 들어왔네?" 브랜티가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에마 쪽에서 말을꺼내 모았다. 브랜티의 속사정 이야기를 듣는 것은 별로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이어서 큰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그러나 에마의 목소리를 듣자, 브랜티는 결의를 굳힌 듯이 돌아다보았다.

"2,3, 파리에 갔다올까해, 렉스와 함께." 브랜티의 차가운 목소리가 에마의 물음을 막아 버리듯이 울렸다. 에마는 너무나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눈을 깜빡이며 브랜티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야, 에마." 에마의 표정을 보고 브랜티는 괴로운 듯이 말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리크를 어쩔 셈인가 하는 따위의 질문은 하지 말아 줘.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알릴 필요 없어."

"아니......?" 에마가 겁을 먹고 중얼거렸다. "너는 그와 결혼할 거 아니야. 만일 리크가 알게 되면,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알 까닭이 없어."

"어떻게 그러리라는 자신이 있지? 그리고 그런 일은 비겁한 짓이야!"

"선량한 체는 그만 해 둬!" 브랜티의 말투가 갑자기 거칠어졌다. "리크에 대해서 넌 아무것도 몰라. 결혼하면 그 사람은 아내를 꽉 휘어잡을 사람이야. 그의 아내는 모든 면에서 그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안 돼, 침대 속에서나 밖에서나. 그는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대범한 사람이 아니야."

에마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브랜티의 노골적인 설명을 들으며, 그 말 속에서 가장 자극적인 부분은 무시하기로 했다. , 리처드나 브랜티는 나를 곤혹하게 하는 말만 골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리크와 결혼하려는 거지?"

"전에도 말했잖아. 일에서 해방되고 햇빛과 돈을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야. 물론 그는 내놓은 돈 만큼의 대가는 요구하겠지만!"

"그런 분명해." 에마는 리처드의 힘찬 몸과 얼굴 모습을 생각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돈이 전부가 아니야, 브랜티. 노는 것을 일삼는 생활이란.......그리고 렉스를 사람하면서 어떻게 리크와 결혼할 생각을 한 건지 모를 일이군."

", 머리가 이상한 것 아니니?" 브랜티가 소리쳤다. "렉스에 대해서 난 그런 감정 갖고 있지 않아. 단지 흥미가 있을 뿐이야. 그리고 일을 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받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일뿐이어서, 에마는 멍하니 브랜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브랜티는 충고를 들을 의향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에마는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렉스의 일은 잊어버리고 리크의 돈만 생각 하면 어때? 리크는 틀림없이 너를 소중히 여길 거야. 너를 만난 뒤로는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그러던데."

"3개월 전의 이야기 아니야?" 브랜티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어?" 에마는 열심히 설득하려 했다.

"리크는 지닌 3개월 동안 세인트루새더라는 카리브해의 고도에 가 있었지만 유혹을 받을 일도 없었어. 일을 하기 위해 그 섬에 간 일이 있었는데, 나는 도저히 그런 곳에는 오래 있지 못할 것 같았어. 생각을 달리해 줘야지."

"하지만 리크는 그곳 일을 좋아하잖아? 그는 뭐든 자기가 생각한 대로 밀고 나가는 타입이 아니냔 말야."

"그만 해 둬! 내가 리크에 대한 것을 잘 모른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가끔 내가 정말 그 사람과 잘해 나갈 수 있을지 어떨지 자신이 없을 때가 있어. 굉장히 신경질적이라는 소문도 있고."

"나 같으면, 그런 생각이 들면 결혼하지 않겠어!"

"그렇지 않아. 나는 리처드 콘웨이의 아내가 될 작정이야. 하지만, 그러기 전에 마지막 모험을 하고 싶은 거야. 목숨을 거는 일이더라도. 그리고 너만 도와주면 리크에게 들킬 염려도 없어."

"내가?" 또 리크의 분노를 막아야 하다니, 에마의 마음은 떨렸다. 요전과 같은 일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다!

그러나 브랜티는 태연하게 말했다.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만일 리크가 전화하거든 나는 헬렌 아주머니네 집에 가 있다고 하면 돼. 그곳에는 전화가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 아주머니는 몸이 좋지 않아 결혼식에 오지 못하기 때문에 내일 엄마를 모시고 가서 2,3일 동안 함께 있도록 할 거야."

"큰어머니가 돌아오셨을 때, 리크가 그 일에 대해서 물으면 어떻게 하지?"

"묻지 않을 거야. 그리고 업마에게도 단단히 말해둘 테고."

"그래서 지금 나보고 리크를 속이는 일에 한 몫 거들란 말이야?" 에마는 어이가 없었다.

"에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리크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하지만......하지만....."

"그러면 그이한테 사실을 말해! 마음대로 하면 될 것 아냐. 어쨌든 나는 렉스와 파리에 갈 테니까!"

꽝 하고 닫힌 문을 에마는 당황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리처드에게 진실을 말할 수는 없다. 브랜티도 그것을 알고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교활한 점이다.

브랜티는 파리로 떠나기 전에 렉스와 묵을 파리의 고급 호텔의 이름을 말해 주고 갔다. 헨렌 아주머니의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빴으므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엇 마지못해 숙소를 가르쳐 준 것이다.

"아주머니에게 별일이 없는 한 연락하지 말아야 해." 브랜티는 협박조로 말했다.

렉스가 문 앞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는 것을 본 에마는 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남의 약혼녀를 가로채서 어쩌자는 것일까!

"잠자코 있어!" 그런 눈치를 챈 브랜티가 에마의 귀에 대고 말했다.

"말할 만한 일인지도 몰라."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나 신 네가 파리에 갈 거야? 너한테 파리는 어울리지 않아." 브랜티가 비웃었다.

에마는 미간을 모았다. 에마가 여러 차례 파리에 갔던 일이 있었다는 것을 브랜티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에마가 학생이었을 때 아버지는 자주 에마를 데리고 파리에 가, 외가 쪽으로 친척뻘이 되는 클라리스의 집에서 머물고는 했었다. 그 우아한 클라리스가 지금의 에마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한때 에마는 아버지가 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겁을 먹었었는데, 결국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브랜티는 에마가 옛날 일을 회상하고 있는 동안 슈트케이스를 들고 나가 버려서 에마는 결국 두 사람에게 충고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콘웨이는 전화를 걸어오지는 않았다. 그 대신 예정보다 열흘이나 빠른, 브랜티가 떠난 다음날 아침에 농장에 나타난 것이다.

에마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노크도 하지 않고 갑자기 주방문을 열고 리처드가 들어온 것이다.

"당신은 집에 있을 때면 언제나 주방에만 매달려 있는 것 같군."

에마는 리처드의 경박한 말에 신경질적인 웃음이 나오려 하는 것을, 사태의 중대함을 생각하고 가까스로 참았다. 충격이 너무 커서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여길?"

"달리 갈 곳이 없어서. 브랜티는 어디 갔지?"

", 브랜티요?"

갑자기 리처드의 눈이 실눈이 되었다.

"어디 갔는지 말해 줘요, 더 이상 숨기지 말고!"

, 어떡하나! 리처드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질 뿐이다.

", 어딘지 외국인 것 같아요. 하지만 어딘지는 몰라요."

"전과 똑같은 대사군. 이번에는 외국이라고?"

"어째서 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런던에 있는 그녀의 매니저에게라도 연락해 보지 그래요. 나는 바쁘니, 이만 실례해도 되겠지요?"

그러나 그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잽싸게 리처드의 손이 에마를 안아 올렸다. 다음 순간, 에마는 그의 무릎위에 올려 놓여, 바지를 입은 엉덩이를 그에게 호되게 얻어맞고 있었다. 에마는 분노와 아픔으로 소리를 질렀다.

"놔요! 경찰을 부르겠어요!"

리처드는 그래도 계속 때리고 있었다.

"당신이 말할 때까지 때릴 거야." 거친 목소리였다. 에마는 크게 신음소리를 냈다. 분명히 브랜티는, 리처드가 오랫동안 고도에서 생활했다고 말했다. 그녀가 지적한 대로 리처드에겐, 겉보기의 대범함과는 반대로 잔혹할 정도의 우악스러움이 숨어 있는 듯했다.

에마의 볼에 눈물이 흘렀다.

"이러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에마는 애원하였다.

"말을 하겠다는 거야?"

에마는 비참한 마음으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떡이고는 그가 놓아주자 정신없이 소리쳤다.

"당신 같은 사람, 꼴도 보기 싫어요!" 일어서니까 현기증이 나고 온몸이 아팠다. "여기서 당장 나가요....... . 왜 이래요!" 또 리처드의 손에 잡힐 것 같자 에마는 비명을 질렀다.

리처드가 내뱉듯이 말했다.

"그럼, 말해, 나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에마는 그럴 수가 없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리처드가 미웠다. 그러나 심한 현기증이, 에마로부터 저항하려는 힘을 빼앗아갔다.

"그 여자는 어디 갔지, 에마?"

"파리에요."

에마의 눈물에 젖은 큰 눈동자에 이끌리듯이 리처드가 다시 물었다.

"누구하고?"

"누구하고.....?" 에마는 얼버무리려 했다.

"말해 봐! 속임수는 통하지 않아!" 그의 말뜻은 분명했다. 눈물이 또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으나, 자신을 사람답게 취급한 일조차 없는 브랜티를 위해 마지막 힙을 쥐어짰다.

"할 수 없어요, 말할 수 없어요!"

"말해야 해." 이번에는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 ." 에마는 아파서 신음소리를 냈다. 리처드를 괴롭힐 방법은 있으나, 그 일만은 하고 싶지 않다-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에마였으나, 그가 다시 한번 머리채를 힘껏 잡아당기자 분노가 폭발했다. 에마는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한순간 자기 자신을 잊고 말았다. "렉스와 함께 갔어요!"

"...... ." 분노에 찬 한숨이 리처드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 일찌감치 이곳에 돌아와 보고 싶었던 나의 육감이 제대로 들어맞은 셈이군. 수고양이 같은 놈 나는...... ."

에마는 귀를 막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 것은 브랜티다. 리처드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고 싶었으나, 이런 상황에 있는 사나이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을 생각해 낼 도리는 없었다.

"브랜티는 당신에겐 아무것도 알리지 않을 작정이었어요.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던 거예요." 이 정도의 말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당신은 전부터 알고 있었소, 브랜티가 당신에게서 렉스 올리버를 빼앗으려 했던 것을? 그러면서 나에게는 경고조차 하지 않았소." 리처드가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말했다면 당신이 귀를 기울였을까요?" 리처드의 비꼬는 듯한 눈초리에 에마는 아연했다.

"당신이 올리버를 잡아 두는 일에 필사적이 아니었다면, 남을 생각해 줄 여유도 있었을 텐데?"

"당신의 일을 걱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당신은 무엇이나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데요."

"그건 빈정거리려고 하는 말이오? 대체적인 일은 할 수 있으나, 모르는 일이야 어쩔 수 없잖소, 직감에 의존할 수밖에. 열흘이나 빨리 이곳에 온 것도 직감 덕분이지만."

"렉스에게 충고를 해줄 수만 있었더라면!" 그때 말렸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자 에마의 가슴은 에는 듯 아팠다.

"그가 귀를 기울였을까?" 리처드는 경멸의 눈초리로 에마를 훑어보았다. "렉스는 당신을 애용하고 있었을 뿐일 테니, 당신과 사귀는 일을 과연 즐겼을지 조차도 의문이군." 에마가 분노로 숨을 삼키는 것을 곁눈으로 보면서, 리처드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당신은 그런 사나이를 집에 데려와 나를 이런 꼴로 만든 보상은 어떻게 해주겠소!"

"나는...... ." 에마는 말을 하려다 말끝을 흐려 버렸다. 리처드에게 자토지종을 설명해서 어쩌자는 건가. 그는 믿으려 하지도 않을 테고 또 그는 아무래도 곧 이 집을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까 한 말에 대한 증오와는 반대로, 리처드에게 자기 몸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은 강한 충동이 갑자기 에마를 사로잡았다. 에마가 무슨 말을 하건, 브랜티나 렉스가 다 이상 잃을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기 전에 다시 한번 리처드의 마음을 확인해아지...... . "브핸티를 용서할 수는 없겠어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거지요?"

"사랑?" 리처드는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말라는 듯이 웃었다. "나는 남을 용서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특히 다른 남자와 도망친 그런 여자는 더욱 그래. 브랜티의 일은 물론 용서할 생각도 없고, 그대로 눈을 감아 줄 생각도 없소. 죗값은 치르도록 하고 말겠소."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마세요, 후회하게 돼요."

"당신은 줄곧 나화고 함께 있게 될 테니까, 내가 후회하는지 어떤지 확인할 수 있을 거요." 리처드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리처드가 무슨 말을 한 것일까? 그러나 에마로선 이제 그런 것을 생각할 기력도 없었다. 오로지, 그가 돌아가 줬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브랜태가 돌아오면 더 심한 책망을 듣게 될 것이다. 그 일을 견뎌낼 수 있을까? 곤혹하여 리처드를 바라보고 있자니까, 몸의 결백을 증명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어졌다. 지금은 다만, 리처드가 돌아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미안해요, 당신이 한 발을 잘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해요. 나도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에요."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 리처드의 차가운 눈에는 동정의 빛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해결된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보다 브랜티를 만나세요. 그녀에게 설명을 듣는 것이 최선책일 거예요."

"섹스와 놀아나는 일에 대해서 말이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이제 당신하고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는 못하겠소." 일그러진 리처드의 입술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당신은 나하고 결혼해아 할 테니까."

"진심이에요?" 리처드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자, 에마는 소름이 끼쳤다.

"진심이고말고. 나는 언제나 재빠르게 결단을 내리지. 그리고 나의 직감은 거의 빗나가는 일이 없어. 브랜티의 경우는 분명히 실패했지만, 당신하고라면 틀림없이 잘 될 거요. 그래서 브랜티와 같은 호텔에 묵는 거요."

에마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리처드가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면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런 일을 생각하다니, 당신 머리가 이상해진 것 아니에요?" 에마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본정신이오, 에마." 눈앞에 버티고 선 리처드의 위압적인 장신은 에마를 겁먹게 하였다. "나는 결혼 허가증도 가지고 있소-다행이 당신의 성도 데이비슨에다가, 브랜티의 세컨드 네임도 에마니까, 아무 문제도 없소."

에마는 회색 눈을 크게 떴다. 리처드가 무서웠다.

"그건 어리석은 짓이에요. 냉정을 찾으세요. 브랜티가 마음이 달라져서 파리에 가지 않고 런던에 있을지 모르니까요."

"확인해 볼까. 전화를 좀 빕시다." 에마는 불안에 떨며 리처드를 서재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곳을 나오려 하는데 리처드가 손목을 잡았다.

"여기 있어. 당신을 놓치지는 않을 거요."

이 어처구니없는 계획에 왜 나까지 끌어들이려 하는 것일까. 서재에 들어오기 전에 에마는 두 사람이 묵고 있는 호텔의 이름을 말하고 만 것이다. 리처드의 날카로운 눈앞에서는 시치미를 떼려고 해도 헛일이었다.

리처드는 빈정거리듯 어깨를 움츠렸다.

"최고급 호텔이야. 나는 아직 묵은 일도 없는데, 올리버는 인색하지는 않은 모양이군."

리처드가 전화를 거는 것을 에마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리처드의 입에서 유창한 프랑스 말이 흘러나왔지만, 그 사실에는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브랜티가 전날 밤부터 정말 그 호텔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에마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있어." 리처드의 얼굴이 분노로 굳어졌다. "렉스 올리버 부인의 이름으로 묵고 있어."

"분명히 브랜티예요?"

"틀림없소. 브랜티는, 공공연하게 행동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언제나 말했었지. 그리고 올리버 쪽에선 아무것도 잃는 것은 없을 테고........ ."

에마는 불안에 쫓기어 중얼거렷다.

"내일부터 방을 빌리기로 예약했나요?"

"나의 프랑스 말을 알아들었소?"

"조금은요." 리처드가 놀라는 것을 눈치 챘으나, 에마는 달리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당신은....... 당신은 두 사람을 뒤쫓을 참인가요?"

"총은 가지고 가지 않지만, 그 대신 아까 말한 것처럼 아내라는 강력한 무기를 데리고 가겠소."

"안돼요!" 에마는 소리쳤다.

리처드는 에마의 항의가 들리지 않는 듯 무자비하게 계속했다.

"오늘 안으로 런던으로 가서 결혼식을 올린 뒤, 해협을 건너기로 합시다. 당신도 즐거울 거라고 생각해."

"당신은 미치광이예요! 이런 때 농담을 하다니 정상이 아니에요." 에마의 마음속에는 공포가 일었다.

"이런 때니까 말할 수 있는 거야, 이 바보 아가씨야." 리처드는 에마의 앙상한 어깨를 아플 정도로 힘껏 붙잡았다. "내 말을 들어. 당신이나 나나 복수를 원하고 있어.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이라면 결혼 따위는 물론 하지 않아도 돼. 나도 당신과 같은 여자에게 묶여있기는 싫으니까. 그러나 친구와 친척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신부를 데리고 가지 않아서 창피를 당하기는 싫단 말이야."

리처드의 이 모욕적인 말에 분개한 에마는 재빨리 이렇게 대꾸해 주었다.

"당신의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될 것 아니에요."

"그런 거짓말은 반드시 탄로 나게 마련이지."

"그리고 결혼 상대라면, 당신한테는 아름다운 걸프렌드가 많이 있을 것 아니에요. 그중에서...... ."

"그러나 그것으로는 브랜티에 대한 충분한 복수가 못 돼. 사촌인 당신이 나하고 결혼하면 브랜티는 자신의 어리석음의 보복을 두고두고 당하게 될 것이오. 당신과 얼굴을 마주할 일은 좀처럼 없다 해도, 영원히 잊어버릴 수는 없을 테니까."

"화풀이로 그런 일을 하면 당신 자신도 괴로워하게 될 거예요." 에마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당신은 브랜티하고가 아니라 나하고 살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브랜티는 화가 나서 이를 가는 대신, 매력이 없는 여자를 아내로 맞은 당신을 불쌍히 여기게 될 거예요."

"걱정할 것 없소." 리처드는 내뱉듯이 말했다.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만이니 별로 오래 걸리진 않아."

에마는 멍해졌다. 리처드는, 가장 괴로워할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남자가 상처 입은 프라이드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란 어느 정도나 되는 것일까...... . 리처드 콘웨이는 물론 브랜티를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를 입은 것이겠지만, 그를 몰아세우고 있는 이유는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뭔가 잊진 않았어요?" 에마는 반항적으로 리처드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나를 경멸하고 있지만, 당신의 어리석은 계획을 실행하려면 나의 협력이 필요할 거예요. 그러나 나는 협력할 수 없어요!"

"아니, 당신은 거정하지 않을 거요, 정발 바보가 아니 이상. 당신은 렉스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데다 여기서 해방될 수 있지. 더구나 최저 1년은 사치스럽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어. 나는 당신의 침실에 들어가지는 않을 태니까,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오히려 당신에겐 불만스러울지 모르지만 그만한 보답은 충분히 하겠소."

"실례예요!" 온몸이 분노로 뜨거워졌다.

"당신이 큰 먹이를 잡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올리버의 얼굴을 상상해 봐요."

"하지만 역시......."

리처드는 이제 에마의 헛소리는 충분히 들었다는 듯이 차갑게 가로막았다.

"두세 군데 전화를 걸어야겠소. 그동안 커피를 준비하며 생가해 보지 않겠소? 당신은 틀림없이 나에게 협력해 줄 마음이 생길 거요."

마치 비즈니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에마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커피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놓고는 테이블 앞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알고 있는 것일까? 충경이 그를 그런 묘한 행동을 하도록 몰아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브랜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에마의 마음에 묘한 통증이 치달았다. 그것이 자기 때문인지 리처드 때문인지 에마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브랜티는 괴로워해야 한다-그 점에서는 리처드가 옳다. 그러나 복수하려는 자는 그 보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리처드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만약 에마가 리처드와의 결혼에 동의하여 파리에 간다면, 마지막에 가장 괴로워할 사람은 자기가 아닌가. 이런 불안이 에마를 괴롭혔다.

그리고 리처드의 가족과의 문제도 있다. 브랜티에게서 리처드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지만, 육친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 되지나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에 대하여 이미 품고 있는 마음이 깊어진다면? 리처드는 물론 에마를 미워하고 있지만, 이 기묘한 감정에는 그것을 웃도는 강한 힘이 있다. 그에게 어깨를 잡혔을 때, 아픔 이상으로 에마를 당황케 한 것은, 몸속을 치닫는 불꽃과 같은 감각이었다.

막연한 위기감이, 지금 도망치는 편이 낫다고 에마의 마음속에서 속삭이고는 있었지만, 결국 리처드의 신청을 받아들이기로 에마의 결심을 굳히게 한 것은 또 하나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브랜티가 사태를 알면 미친 듯 날뛸 것은 뻔한 일이다. 계속 이곳에 머물러 있으려면 앞으로의 생활은 견디기 힘들게 돌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돈도 일도 없는 에마로서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어떻게 생계를 꾸러가야 할 것인가? 그러나 리처드와 결혼하면 그 점만은 그에게 보증 받을 수 있다. 끝내는 이혼한다 하더라도, 무일푼으로 쫓아내지는 않겠지. 그와 결혼함으로써 장래의 일을 생각할 여유는 생기게 되는 셈이다.

몇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남아 있었지만, 어쨌든 에마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려면, 렉스 올버가 연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리처드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알게 되면 리처드의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르니까. 브랜티가 에마에 대해 고해바친 일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리처드는 모든 것을 백지로 돌려 버릴 것이다. 지금의 에마에게는 브랜티에 대한 공포가 더 컸다. 명목만의 결혼이지만, 새로운 스타트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약간의 변상은 될지도 모른다.

일단 결심해 버리니까, 에마의 마음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몇 분 후 리처드에게 결혼을 승낙할 때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침착했다.

그러나 그처럼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을 리처드는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것을 보니, 에마는 분한 생각이 들었다. 에마가 결혼 신청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해도, 리처드는 커피를 마시며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던 것이다.

"이층에 가서 짐을 꾸려요, 곧 떠날 테니까."

"곧 떠나요?" 에마는 커피를 엎지를 뻔했다. ", 그건 안 돼요. 짐에게라도 말해야 하고, 집안일도 있고...... ."

"당신이 준비를 하는 사이에 내가 그 사람을 만나고 오겠소."

"하지만, 짐 혼자서 농장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대로 나가다니 무리한 일이에요."

"걱정할 것 없고. 지난주에 짐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여기에는 가축도 별로 없고, 봄의 일은 끝났다고 하더군. 큰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는 짐 혼자서라도 충분해."

"그럴까요." 마음속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심하게 느끼면서도 에마는 웬일인지 리처드를 따르려는 쪽으로 마음이 약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급해 이층으로 뛰어올라가 런던에 입고 갈 옷을 찾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리처드가 침실 문에 기대서서 이쪽을 복 있었다. 어느 틈에 왔을까, 에마는 펄쩍 뛰어오를 정도로 놀랐다.

"나가세요! 우리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어요." 놀리는 듯한 어조로 말하는 리처드의 눈은 차가왔다.

"나는 그런 일로 온 게 아니오- 앞으로도 당신에게 그런 걸 요구하지는 않을 거요."

에마는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미안해요. 나 그런 뜻으로...... ."

"그렇다면 됐소. 실은 당신에게 다짐을 해 두려고 온 거요, 당신이 내 곁에 있어 줘야 하는 것은 남들 앞에서 만이라는 사실을."

"단둘이 있을 때는 나를 팽개쳐 두겠다는 말인가요?" 어쩐지 에마는 외로운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팽개쳐 두겠다는 건 아니오.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없겠지만, 재기할 수 있게 해줄 의향은 있으니까. 엄격하게 다루는 게 당신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거요. 브랜티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어딘가 비뚤어진 성격을 물려받은 거 같으니까."

에마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일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의 일이 실패한 것은 남을 속이려던 것이 원인이었다고 힐다 큰어머니에게서 들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리처드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다.

", 슈트케이스를 닫아요. 당신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 차에 실어 둘 테니."

"옷은 조금밖에 없어요. 하지만 부모님의 사진이 있어요. 이것만은 꼭 가지고 가야 해요."에마는 신문지에 싸인 사진을 주었다.

"가지고 가요." 리처드는 에마의 손에서 꾸러미를 받아 슈트케이스에 넣더니 뚜껑을 탁 닫았다. ", 어서 갑시다. 5분 이내에 내려오지 않으면 두고 가버리겠소."

리처드가 진심으로 말한 것인지 어떤지 알지 못한 채, 에마는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에마는 런던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리처드에게 저항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계속 화를 내고 있었다.

런던에 도착하자 리처드는 에마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빨리 일을 진행시켰다. 모든 일을 에마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을 만큼 척척 해치웠다. 호화로운 호텔에 짐을 내려놓더니, 드레스를 사기 위해 고급 부티크로 데리고 갔다.

항의하려는 에마에게 리처드는 지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밤의 디너에도 그리고 결혼식에도 입을 옷이 있어야 해요. 지금 것은 아무리 봐도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소."

"너무해요!"

"그렇게 초라한 드레스밖에 없는 것은 올리버와 사귈 때 입던 옷을 가지고 오기 싫었기 때문이겠지?"

에마는 깜짝 놀라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리처드에게는 자기의 말을 인정한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것을 깨달은 에마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려다가 망설였다. 눈치가 빠른 리처드이니까 무슨 말을 하면 렉스 올리버와 에마와는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에마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드레스를 두 벌 골랐다. 옷을 입어보고 있는 에마를 보고, 리처드는 그녀의 취미에 감탄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음으로 그가 데려가 준 미용실에서 머리를 아름답게 다듬고, 그동안 농장 일로 거칠어진 살갗에 윤기를 주기 위해 모이스처 크림도 샀다.

결혼식 날은 꿈처럼 지나가 버렸다. 간소한 식이어서 결혼했다는 실감은 맛볼 수 없었지만, 아무튼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파리의 리볼리 거리에 있는 호화로운 호텔의 문으로 들어서기까지의 모든 일이 현실로 느끼지지가 않았다. 이상하게도 리처드의 존재에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농장을 나온 뒤로, 그는 에마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모르는 남자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에마가 리처드 콘웨이 부인이 된 그 순간, 리처드는 더 먼 곳으로 가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결혼반지가 끼워지려 자자, 가느다란 손가락이 떨렸고, 잠깐 동안의 형식적인 키스를 할 때에는 입술도 떨렸던 것 같다. 그러나 에마의 감정에는 그다지 심한 동요는 닫히고 리처드와 단둘이 있게 되기 전까지는 자기의 평정한 마음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훌륭한 실내 장식에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데, 리처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녁식사는 여기서 하기로 했소. 브랜티와 렉스를 만나는 것은 내일이 되겠지."

에마는 그 조용한 어조에 놀라 돌아다보았다.

"렉스를 한시라도 빨리 공격할 생각이 아니었던가요? 그를 곯려 주고 싶은 거죠?"

리처드는 일부러 웃는 듯했다.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겠소. 당신의 애인에 대해 그 정도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꼬마 아가씨."

에마는 착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을 리처드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나 브랜티의 입장을 더 이상 나쁘게 할 수는 없다. 사촌을 감싸 주려는 마음이 아직도 에마를 혼란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탈출 수단으로서 결혼을 택한 자신의 생각도 그다지 칭찬받을 일은 못 되는 것이다. 에마는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려고 했다.

"꼬마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어린아이는 아니니까요."

"19세 아니오!" 에마가 아차 하고 생각했을 때, 리처드의 손이 가냘픈 어깨에 털썩 놓여졌다. "등기소에 가기 전에 그것을 알았더라면 모든 것을 취소했을 거요. 당신은 19세고 나는 35세라니! 왜 진작 말하지 않았지?"

"당신이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리처드의 손에 우악스러운 힘이 주어졌다. 마치 에마를 처음 보는 것처럼, 그의 신선은 에마의 뜨겁게 달아 오른 볼 위를 더듬고 있었다.

"브랜티도 렉스도, 당신이 20세를 훨씬 넘은 것처럼 말했거든."

"별로 문제가 될 건 없잖아요. 우리는 진짜 결혼을 한 것도 아니니까요." 에마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리처드의 미간에 세로로 주름이 생겼다.

"다른 사람들은 진짜 결혼으로 알고 있소."

"아버지하고 딸 정도로 차가 나지는 않잖아요. 내 나이에 상당히 연상인 사람과 결혼하는 처녀는 얼마든지 있어요."

"그렇기는 해. 오래 끌 것도 아니니까." 리처드는 건성으로 말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고 그는 갑자기 손을 내리더니 홱 돌아섰다.

에마도 리처드에게 등을 돌리고 비척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갔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했다. 창밖에는 봄의 꽃이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밤이 다가와 하늘을 아름다운 보랏빛으로 물들이려 하고 있었다. 정말 낭만적인 광경이구나, 하는 행각을 자자 에마는 문득 공허감을 느꼈다.

"당신의 침대를 골라잡아야지."

리처드의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주저하면서도 에마는 순순히 따랐다. 이 스위트에는 침실과 욕실이 두 개 있고, 거실도 넓었다. 리처드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에마는 얼른 작은 쪽의 침실을 쓰기로 했다.

"이쪽으로 하겠어요."

리처드는 거기에 대해 마무말도 하지 않고 또 하나의 침실로 들어갔다. 에마는 그가 닫은 문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기의 방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가, 침대 위에 백을 내던졌다.

파란 실크 투피스를 입은 모습이 화장대의 거ㅓ울에 비쳤다. 4월의 런던은 이 드레스로는 추웠으며, 이 으스스한 추위는 리처드와 결혼식을 올린 때의 에마의 마음과 흡사했다. 식이 끝난 뒤, 리처드는 놀리듯이 에마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눈을 감은 에마의 가슴에, 전에 두 차례 경험했던 기억이 있는 이상한 불꽃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눈을 뜬 에마는 리처드의 빈정거리는 눈초리에 부딪히자 당황했다.

"더 잘할 수 있을 테데?"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에마는 그때 리처드의 머릿속에는 브랜티가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에마가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갑자기 두 개의 침실을 연결하는 문이 열리고 리처드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미 웃옷을 벗고 셔츠와 바지만 입고 있었으며, 셔츠도 컬러의 단추는 빼 놓고 있었다.

눈을 내리깐 채 흘끔 리처드 쪽을 쳐다본 에마는 자신의 마음이 고조될까보아 억누르기에 바빴다. 그가 남편의 권리를 행사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에마의 심장은 저절로 고동이 빨라졌다. 리처드는 어쩌면 이렇게도 사람의 마음을 혼란케 할 정도로 매력적일까.

"짐을 푸느라고 쩔쩔 매고 있었어요."

사방을 둘러본 리처드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목욕중인 줄 알고 왔는데."

"왜요?" 에마의 볼이 빨개졌다.

"함께 들어간다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긴장을 푸는 데는 목욕이 제일이오. 그리고 오늘 밤에는 올리버를 만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라구."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만일 그 말을 하려고 오신 거라면...... ."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럼 무슨 일로 왔어요.....?" 에마는 애가 타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리처드가 쳐다보기만 해도 온몸이 긴장하고 만다. 갑자기 에마는 어딘가 먼 곳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리처드가 다가오는 것을 본 에마는 저도 모르게 도망치려 했으나, 억센 손에 잡히고 말았다.

"도망치면 안 돼. 당신은 내가 가까이 가면 언제나 석상처럼 굳어져 버리는데, 당신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그 두 사람은 우리가 조금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챈단 말이오."

노골적인 말에 에마는 마음이 얼어붙은 것 갖았다. 리처드는 분노에 쫓겨 결혼한 것이다. 보통 허니문과는 다르다.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은 무리에요."

"그러나 당신만 긴장을 풀어 J주면 서로 끌리고 있는 체라도 할 수 있어."

"그런 약속은 하지 않았어요."

"그 정도의 일은 약속까지 할 것도 없잖아?"

리처드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며 에마는 굳어져 있었다.

"시간을 주세요."

"그건 안 돼. 고집 센 여자에게 말을 듣게 하는 방법은 아무래도 한 가지밖에 없는 것 같군. 가장 빠르고 실패도 없는 방법이지."

에마가 움직이려 하자, 리처드는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겁을 먹은 에마가 소리를 지르려는 것을 막듯이 입술을 겹쳐왔다.

"힘을 빼도록 해. 이것도 일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될 것 아냐."

강제로 밀어붙인 입술이 차차로 늦추어지자, 에마는 그제서야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에마의 작은 한 숨 소리를 듣자, 리처드의 손이 목덜미와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은가?"

리처드의 늠름한 몸이 이렇게 힘껏 밀어붙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질 까닭이 없었다. 에마는 혼란된 머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게다가 리처드의 검은 눈동자의 번득임이 무서워, 도저히 마음의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리처드가 금방이라도 에마를 안아 올려 침대로 데리고 갈 것만 같았다. 브랜티의 배신에 그런 식으로 보복할 작정인지도 모른다.

"부탁이에요, 이러지 마세요." 겁을 먹으면서도 리처드의 매혹적인 입술의 움직임에 에마의 심장은 마구 뛰고 있었다. 저항을 계속하던 에마의 얼어붙은 몸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몸 깊숙이에서 눈을 뜬 불꽃이 얼음을 서서히 녹여 갔다.

"그래, 그렇게 하면 돼."

리처드의 낮은 들렸다. 그는 자신이 욕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더구나 에마에 대해서 욕망을 품게 된 스스로에게 놀라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직감했을 때, 에마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굴욕감을 느꼈다.

괴로운 신음소리와 함께 에마는 몸을 틀어서 리처드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리처드의 표정에 분노의 빛이 치달았으나,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그러자 욕망이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에마를 덮쳐 왔다. 그러나 다행히도 리처드의 눈동자에서 정열의 빛이 사라진 것을 보고, 에마는 마음을 잡을 수가 있었다....... .

한순간이라고는 한지만, 자신이 리처드의 유혹에 응하고 만 것이 부끄러워 에마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경험이 없는 에마로서도 리처드의 남자다움에 여자들이 얼마나 매력을 느낄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브랜티와의 사이가 순조롭지 못했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아직도 남남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

"기분이 좀 좋아졌나?" 리처드의 무자비한 목소리는 마치 에마에게 얼굴을 들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요!" 말하고 나자, 에마는 예스라고 대답하는 현이 현명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더 계속할까? 옷을 벗는 게 낫다고 생각지 않나?"

에마의 불안이 적중했다. 리처드의 따귀를 때리려던 에마의 손이 그에게 잽싸게 잡히고 말았다. 숨이 막히고 볼이 확확 달아올랐다. 가까스로 에마는 말했다.

"우리는 결혼했고, 묘한 계약도 했어요. 하지만 그 계약 속엔 옷을 벗는다는 것은 들어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떻다는 말이지?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결한 처녀라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싫도록 경험한 몸이잖소."

에마는 화가 발끈 치밀었다.

"그런 식의 말,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어요!"

"나도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지금 나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침대로 가는 일뿐이야."

리처드의 차갑게 빛나는 눈초리를 받는 것이 불쾌했다. 온몸이 떨리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나서 에마는 쏘아붙였다.

"나처럼 매력 없는 여자와는.....침대에 가고 싶지 않겠지요?"

리처드의 손이 에마의 입술에 닿았다.

"매력이 없건 있건 침대 속에서는 상관없어."

"그럴 수는 없어요. 나는 싫어하는 남자와 침대에 가지는 않아요!" 더 이상 리처드에게 놀림을 당하거나 마구 몸을 만지게 하기는 싫었다.

리처드는 그런 에마를 벌이라도 주듯 확 끌어당기더니, 다시 거칠게 떼밀었다.

"당신은 아직도 공부가 부족하군. 증오나 사랑하고 관계없이 할 수 있는 거야. 올리버는 당신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모양이군." 당황하여 쳐다보고 있는 에마에게 리처드는 덧붙여 말했다. "잊으면 안 돼. 브랜티가 이곳에 오면, 당신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줘야 해.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부탁이에요, 리크!" 에마의 눈에 눈물이 번졌다. "이런 일, 다 그만두지 않겠어요? 나는 영국으로 돌아갈 테니 당신도 당신 집으로 돌아가 주세요. 어리석은 짓이에요...... ."

"안 돼." 고개를 내두르는 리처드의 눈동자에는 검은 그림자가 스쳤다. "나중에 후회화지는 모르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끝까지 해내야 해."

리처드의 굳은 결심을 눈앞에 보니, 에마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하다못해 연장시키는 방법이라도 없을까 하고 궁리하고 있는데 리처드가 갑자기 몸을 돌려 방을 나가 버렸다.

에마는 그가 조용히 닫은 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왜 리처드는 그렇게 고집을 세우는 것일까? 그는 틀림없이 모욕을 당하는 일에 익숙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브랜티의 행동에 자존심이 심하게 상해서 복수의 불꽃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농장에서 천천히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면 행동을 달리 취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잇달아 일어나는 바람에 천천히 생각할 틈이 없었던 것이 아니F. 그러나 복수를 한다 해도 그것이 그에게 어떤 기쁨을 가져다준다는 것인가?

식사가 끝나고 리처드가 나간 뒤, 에마는 일찍 쉬기로 했다. 리처드는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다. 다만 늦어지지는 않는다는 것과 먼저 자도록 하라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의 눈에는 빈정거리는 빛이 있었으나, 에마는 그것을 정시할 생각은 없었다. 식사 중의 대화만으로도 완전히 지쳐서, 더 이상 그의 놀림에 견딜 기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방에서 식사를 마친 뒤 둘이 함께 외출을 했다. 언제 브랜티외 렉스를 만나게 될지 모르는 장소에서 벗어난 것이 에마로서는 기뻤다.

"드레스가 더 필요해." 리처드는 그렇게 말하더니 택시를 탔다. 세느 강의 왼쪽 강변과 벼룩시장(중고품 취급 시장)이며 꽃시장, 특히 루브르 미술관과 베르사이유 궁전을 보고 싶다는 에마의 희망을 부시하고 차는 샹젤리제의 고급 미용실 앞에 와서 섰다.

"왜 이리로 왔지요? 미장원이라면 런던에서도 갔었는데."

"머리 손질을 더 해 두는 것이 좋겠어, 얼굴도."

리처드는 에마의 마음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듯이 말하더니, 가게 주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리처드는 에마를 무시한 채 주문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시에 데리러 오겠다고 하고는 리처드는 가 버렸다. 시게는 아직 열 시를 가리키고 있다. 에마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한 시까지, 에마는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마치 요술에 걸린 것 같았다. 손질만 하면 자기가 매력적인 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에마는 좋든 싫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돌아온 리처드가 자기를 보고 눈썹을 치켜 올린 것을 알아차린 그녀는 만족스러움에 마음이 설레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리처드의 그 표정은 사라져 버렸다. 그 정도로는, 에마는 매력적이 못 된다는 듯이...... .

에마는 실망하여 리처드의 긴장된 입가를 흘끔 쳐다보았다.

"머슈 루네가 내 머리 모양이 좋다고 그랬어요." 말하고 난 에마는, 자신이 리처드의 칭찬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리처드는 에마 쪽은 보지도 않고 택시를 향해 손을 들었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호화로운 레스토랑에서 에마는, 대게 요리와 독한 부르고뉴의 백포도주를 주문했다. 에마는, 자기의 침착한 거동에 리처드가 놀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이런 생활에 익숙했던 자신의 옛날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에마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학교의 방학 때면, 아버지는 곧잘 당신의 일로 가는 여행에 딸을 데리고 다녔다..... .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식사가 끝나자 리처드는 루 드 라 페에 있는, 역시 유명한 부티크로 에마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가게 주인에게 빠른 어조로 뭐라고 말하더니, 또 에마만 두고 나가 버렸다. 아내를 위해, 고치지 않고 곧 가지고 갈 수 있는 드레스를 달라는 것이 그가 주문하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카리브에서 이 생활에 맞는 것을 달라는 것이었다. 에마의 마음은 침울했다. 역시 리처드는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가 가족과 만나게 할 생각인 것이다. 이제 도망칠 방법도 없다.

그날 밤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자는 리처드의 말을 듣고, 에마는 흰 실크 드레스를 사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심플한 흰 드레스라면 브랜티가 샘을 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일로 브랜티의 원한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에마는 조심스러워서 머리를 수수하게 뒤로 묶어 올리고 화장도 아주 엷게 했다. 머리는 아름다운 금빛으로 빛나기는 하지만, 그 스타일로 해서 남의 눈길을 끌지는 못할 것이다.

에마의 모습을 본 리처드는 매우 탐탁지 않은 얼굴을 했다 이튿날 아침에는 더 화사한 드레스가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조금씩 공부하겠어요. 이런 물건을 사는 일에는 익숙지 못해서요."

"하지만 당신은 센스가 있는 거 같아. 그러나 사치라는 유혹을 코끝에 걸면, 어떤 여자든지 자라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마련이야."

"경험으로 말하는 거군요." 에마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어조로 대꾸하며 리처드는 도대체 몇 사람의 여장에게 이런 식으로 돈을 썼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와 관련되었을 여자들의 일을 상상하니 괴로웠다.

"나 정도의 나이라면 다소의 경험은 있는 게 당연하잖소."

리처드는 더 이상 말할 의욕을 잃은 듯, 레스토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에마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에마 역시 브랜티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긴장되어 도저히 이야기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가지 말자고 부탁해 보고도 싶었으나, 이 어리석은 계약에 응한 이상 그럴 수도 없었다. 리처드가 이 어리서은 계약에서 에마를 풀어 놓아 줄 때까지는 싫든 좋든 그와 행동을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레스토랑에 브랜티의 모습은 없었으나, 이정도의 큰 호텔이라면 금세 만나게 되지 않는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일단 안심은 했으나, 그렇다고 위험이 아주 사라진 것도 아니다. 에마는 적이 숨어 있는 숲 한복판에 서 있는 병사와 같은 기분이었다. 오히려 빨리 브랜티를 만나 버리는 편이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른다.

턱시도가 멋지게 어울리는 리처드는 거만하게 입을 다물고 있다. 에마는 그 모습을 황홀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새신랑으로는 보이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리처드는 에마에게 전혀 말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에마 쪽에서 일부러 화제를 꺼내도 마치 귀가 먹은 사람 같았다. 단지 리처드의 표정에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웨이터가 에마를 마담이라고 불렀을 때 보인 놀라움에 대한 초조함 정도였다.

"내가 아직 마드모와젤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 탓이 아니에요." 에마는 볼을 붉히며 가까스로 말했으나, 말한 순간 곧 후회하였다.

"그럴까?" 리처드는 짤막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열 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두 사람은 방으로 향했다. 에마는 거리 쪽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파리의 밤의 화려한 매력에 그 정도로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쯤은 경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특해 신혼여행을 온 것이므로 더욱 그러했다. 댄스를 하는 것도 좋을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팔을 끼고 세느 강변을 산책하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 이상한 설렘을 느끼고 에마는 리처드의 얼굴을 슬그머니 올려다보았으나, 리처드의 표정에는 아무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당신은 또 아래층에 갈 건가요?" 방에 들어와 술을 잔에 따르고 있는 리처드에게 에마는 물어 보았다.

"그렇게 되겠지."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아래층에는 아무도 없었잖아요." 어쩐지 브랜티의 이름을 입 밖에 내기가 싫었다.

"당신도 곧 알게 될 거야." 애매모호한 말이었다.

에마가 그 말의 뜻을 물으려 한 순간, 설명이 필요 없게 되었다.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들어오세요." 하는 리처드의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놀라서 쳐다보고 있는 에마를 곁눈으로 보며 리처드는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렀다. 호텔의 보이라면 열쇠를 가지고 있을 테니, 리처드의 목소리를 들었으면 금방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크를 한 주인공은 종업원이 아니라 손님일 것이다.

리처드가 문을 열었다. 브랜티가 들어온 것을 보고, 예기한 일이기는 했지만 에마는 겁에 질린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인제 몸을 숨기기에는 너무 늦었다.

브랜티의 뒤에 렉스가 천천히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이런 사태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았다. 브랜티는 어쩔 셈일까? 무슨 말을 하러 온 것일까? 설마 여느 때처럼 강한 태도로 밀어붙일 작정은 아니겠지. 이번에만은 브랜티도 전처럼 뭐라고 둘러대지는 못하겠지. 리처드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브랜티에게 알려 줄 방법이 현재호서는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리크!" 브랜티는 재빠르고 나긋나긋한 몸놀림으로 리처드의 팔을 잡았다. "깜짝 놀랐어요, 달링! 왜 여기 있지요? 왜 에마가 합께 있지요?" 날카로운 시선이 에마에게로 향했다.

"함께 있으면 안 되나?" 리처드는 당당한 태도로 응했다. 그리고 차갑게 브랜티를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는 어저께 결혼했소."

", 결혼!" 브랜티는 당황하여 더듬거리더니, 다음 순간 소리 내어 웃었다. "농담은 그만 하세요, 달링. 나와 약혼한 것을 잊으셨어요? 거기 있는.......계집아이하고가 아니란 말이에요!"

"잊은 것은 당신 쪽 아니오?" 브랜티의 볼이 빨개졌다. "렉스와 함께 파리에 온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상한 추측은 하지 마세요. 일 관계로 온 것이니까."

"일 관계로?" 리처드는 억지웃음을 웃었다. "같은 방에 묵어야 할 정도의 일이란 도대체 뭘까?"

"스파이 노릇을 했군요!" 발끈 화를 잘 내는 브랜티는 이성을 잃을 것처럼 흥분했으나, 그래도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는 게 아니에요? 안 그래요, 렉스.......?"

렉스는 인제 변명은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브랜티의 말에 어깨를 움츠러 버렸다.

"당신은 내기에서 진 거요. 이제 항복하는 편이 종지 않을까?"

"항복을 왜 해요!" 브랜티는 무섭게 화를 내며 대답했다. 그리고 숨을 삼키고 있는 에마 쪽으로 돌아섰다. "모든 것은 다 네가 나빴기 때문이야! 리크와 결혼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유감스럽지만 사실이오." 리처드의 손이 에마를 끌어당겼다. "우리는 어제 아침, 런던에서 식을 올렸소."

브랜티는 한순간, 생각에 잠기는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얇은 입술이 일그러져 보기 흉했다.

"사랑하고 잇다는 뜻인가요?" 리처드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고 일단 납득했는지, 그녀는 빈정거리는 어조로 물었다.

"적어도 서로 이끌리고는 있어."

"당신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돌아온 날짜가 빨랐던 거예요!" 브랜티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래, 다행스럽게도." 리처드의 어조는 조용했으나, 에마에게 감긴 팔에 주어진 힘은 그의 분노를 느끼게 했다.

겁을 잔뜩 먹은 에마는 행복한 부부처럼 행동하기로 한 리처드와의 약속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협력하기는커녕 오히려 굳어져서 리처드로부터 떨어지려고 했다.

"리크, 당신은 브랜티와 둘이서 이야기하는 게 어때요? 나느 렉스와 이야기하겠어요. 브랜티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세요. 우린 언젠가는...... "

"에마!"

에마가 이혼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 전에 리처드가 말문을 콱 막았다. 당황한 에마의 눈에, 경멸하는 듯한 브랜티의 눈초리가 뛰어들었다.

"옛날 애인에게 뭐 할 말 없어, 에마?" 브랜티는 애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빈틈이 없는 브랜티는 에마가 우물거리는 것을 보자 재빨리 무엇인가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어서 리처드에게 슬픈 듯한 미소를 보낼T. "달링, 에마의 말대로 우리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어요?"

"에마와 결혼 생활을 계속할 작정은 아니지요? 반발로 결혼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당치도 않은 소리."

"그러면 왜 여기에 왔지요?" 브랜티는 소리쳤다. "설마 우연이라는 말은 못하겠지요. 만일 당신이...... 부인인 에마를 사랑하고 있다면 나를 만나러 올 필요는 없었을 것 아니에요!"

"브랜티, 그만해...... " 에마는 브랜티가 멋대로 지껄이는 소리를 어떻게든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잠자코 있어! 너는 렉스에게 배신당한 충격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겠지."

에마는 입을 다문 채 브랜티를 보았다. 브랜티는 어쩔 셈일까?

리처드의 입가가 초조함으로 굳어지는 것을 보고 렉스가 끼어들었다.

"브랜티, 우리는 물러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만하면 충분해." 애원하는 듯한 시선을 에마에게로 보냈다.

"미안해, 에마. 만일 말이 별 도움이 되지 않을는지는 모르지만, 만일 콘웨이가 심하게 대하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로 와요."

그의 말을 리처드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리처드가 렉스를 때리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 에마는 미친 듯이 그의 팔을 잡았다.

"리크, 제발 그러지 말아요!"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러자 브랜티가 소리쳤다.

"에마는 당신이 렉스를 해칠까봐 겁을 먹고 있는 거예요, 리크. 에마가 렉스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인제 알았겠지요!"

렉스가 강제로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으나, 브랜티는 여전히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리처드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얼굴은 심한 질투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브랜티는 한 번 더 소리쳤다.

"이것으로 끝난 건 아니에요!"

다시 조용해지자,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리처드에게 갑자기 어깨를 붙잡히자 그 떨림은 한층 더 심해졌다.

"됐어. 당신은 줄곧 기절하기 직전의 얼굴이더군. 나하고의 약속이 있었는데도 그 사나이에 대한 애정은 억누를 수가 없다는 건가?"

"리크, 그런 게 아니에요. 내 말을 들어 보세요!" 에마는 정신이 벗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리처드가 진실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올리버는 당신에게 사과하는 듯한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던데, 그래도 당신은 몸을 내던져서까지 감싸려고 했으니 그만하면 됐어!"

리처드의 분노의 불꽃은 에마를 감쌌다. 입술이 갑자기 바싹 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진실을 알게 되면 리처드는 곧 나를 농장으로 돌려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갈 곳이 없어서라기보다 리처드를 잃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번개처럼 에마의 머릿속을 스쳐갔던 것이다. 미워해야 할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품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일이었으나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의 곁에 있으면 심장이 쿵쿵 뛰고 온몸의 힘이 빠져 버린다.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된 것인지 에마는 알 수 없었으나 ,언젠가는 헤어지게 된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피곤해요." 에마는 갑자기 리처드에게서 떨어졌다. "당신이 화를 내는 이유는 알고 있지만, 그 사람들의 배신은 내 탓이 아니에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야. 당신은 나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도 하지 않았잖아. 마치 겁먹은 소녀 같았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소!" 리처드는 무서운 기세로 쏘아붙였다.

리처드가 이처럼 화를 내는 것을 보기는 결혼한 후로 처음이었다. 이 자리를 빨리 뜨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나는 그만 쉬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리처드의 볼에 분노의 빛이 떠오르고, 그의 손은 잽싸게 에마를 붙잡고 있었다.

"어디가 잘못된 건지 생각해 보자구." 에마의 몸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

리처드는 그대로 에마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에마의 저항에는 개의치 않고 그녀를 침대에 눕히곤는 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쳤다. 입술이 맞닿았다.

자신이 그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에마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몸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을 무시하고 필사적으로 리처드를 밀어내려 했다. 에마는 리처드가 분노로 자기를 안으려 하는 일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면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텐데. 처음으로 겪는 데 대한 두려움은 있더라도 그의 사랑을 믿을 수만 있다면...... 리처드의 입술에서 다정함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는 것이, 에마를 굳어지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처드의 키스는 너무도 격렬하여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재빠른 손이 드레스의 지퍼를 내렸다.

"이러지 말아요, 리크. 부탁이에요! 당신은 내게 그런 짓을 할 권리가 없어요!"

"그럴까? 내가 당신을 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T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내겐 올리버보다 더 큰 권리가 있는 거야."

"렉스의 일은 그만두고 당신이 브랜티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생각하세요!"

"나는 브랜티를 아내로서 적당하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야. 지금 내 곁에는 당신이 있어. 비록 적당하지는 않더라도 손에 넣은 이상 충분히 즐겨야지."

심한 굴욕을 느끼면서도 에마는 냉정해지려고 애를 썼다.

"아침이 되면 당신은 후회하게 될 거에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후회하겠지." 리처드는 히죽이 웃더니, 입술을 세게 밀어붙여 에마의 입을 막아 벼렸다.

에마는 온힘을 다해 저항했으나 리처드의 힘센 몸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힘이 다 빠진 에마의 몸속에서 차차로 관능이 눈뜨기 시작했다. 리처드의 셔츠의 단추는 허리께까지 풀어져 있어, 남자다운 탄탄한 가슴과 떡 벌어진 어깨가 가까이 와 닿았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해서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에마는 알 수 없었다.

브리지어가 벗겨지려 하고 있었다...... 리처드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남자아이처럼 여위었군!" 그 말에 에마는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갑자기 리처드의 심장의 고동이 격렬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남자들이 당신에게 끌렸였다면, 어딘가에 그만한 매력은 있을 테지......"

화가 발끈 난 에마는 다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나한테는 아무런 매력도 없어요."

"가만히 있어. 내가 찾아낼 테야!"

"이러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마는 더 이상 리처드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리처드의 격정에 맞추어 자신도 욕망의 달콤한 흐름에 휩쓸린 것만 같았다.

그때 갑자기 리처드가 키스를 멈췄다.

그러자 에마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거운 눈을 뜨자, 리처드가 뚫어져라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에마는 그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리크, ......"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 당신은 올리버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남자가 그 사람 하나는 아니야. 곧 잊게 될 거야."

렉스의 이름을 듣자 에마는 갑자기 오싹해졌다. 브랜티의 비난하는 듯한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라, 그들이 같은 건물 안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죄책감이 느껴졌다.

"브랜티와 렉스는 아직 이곳에 있을 거예요!" 에마는 안색이 달라지며 소리쳤다. 그 말이 리처드를 자극했다.

"그 사람 일이 그렇게 마음에 걸리나! 어리석은 여자군, 그런 사나이를 그토록 좋아하다니!" 리처드는 분노로 몸을 떨며 에마를 밀어내고 일어섰다.

리처드의 등 뒤에서 문이 쾅 하고 닫히는 것을 보자, 에마의 볼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려는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은 일이 야속하기는 했으나 렉스와 브랜티가 묵고 있는 이 호텔에 함께 있기가 싫었으므로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마을 할 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질이 급한 덕분에 그 말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엇던 것이다. 리처드로 하여금, 내가 렉스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앞일을 생각하면, 지금조금 괴로움을 겪는다 해도 괜찮지 않겠는가.

리처드의 침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에마늘 오랫동안 잠을 못 이루고 몸을 뒤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깨까지 아팠다. 그것은 아까 리처드에게 어깨를 세게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잠시 후에 깨달았다.

"잠이 깼나? 이곳을 떠나야겠소."

"떠나다니, 지금요? 오늘요?"

", 아침에."

리처드의 묘한 눈초리에 에마는 자기가 거의 아무것도 몸에 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젯밤 그가 사라지고 나자, 에마는 입을 것을 찾을 기력조차 없었던 것이다. 옷을 입어 둘 것을 그랬다고 에마는 후회했다. 시트 밑으로 파고들며, 에마는 물었다.

"왜 그렇게 서둘러야 하는 거지요?" 말하고 나니 한숨이 나왔다. 어젯밤엔 그처럼, 빨리 나갔으면 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모순투성일까.

"당신이 옷을 입고 나면 이야기하겠소."

"가운을 입는 동안 저쪽을 보고 계세요."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하긴 그렇군요." 에마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태연한체했다. "당신은 나를 보아도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할 테니까요."

"간밤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지?" 에마는 잠시 망설였다.

"그것은 브랜티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어요. 그렇지 않고서는 당신이 내 몸을 만지려 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아마, 당신 말이 맞을 거요." 리처드는 그렇게 말하더니 홱 등을 돌렸다.

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가운을 집으려고 손을 내민 에마는, 리처드가 다시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을 처음에는 모르로 있었으나 곧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이 빨개지며 온몸이 마비된 듯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의 충격이 남아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본 리처드는, 에마가 남자 앞에서 거의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고 해석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에마의 육감이 들어맞은 것 같았다.

"올리버는 몇 번이고 이런 식으로 당신을 보았겠지?" 하고 리처드는 물었다.

에마는 가운의 끈을 꽉 맸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렇게 나를 시험해 보기 위한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리처드는 그렇게 말하고 어깨를 움츠렸다."아니야, 나는 당신의 옛 애인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니야. 오늘 집에 간다는 말을 전하러 온 거야."

"집이요?"

"바베이도즈야. 이제 더 이상 여기 있을 생각은 없어. 아침 비행기를 예약했으니까 앞으로 한 시간 정도밖에 여유가 없어."

요 며칠 사이에 너무도 많은 충격을 받은 에마는 여기에다 또 무슨 일이 한 가지만 더 일어난다면 머리가 이상해지고 말 것만 같았다. 또한 리처드와 함께 바베이도즈로 간다는 것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에마는 예정을 늦출 구실을 찾았다.

"새 드레스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오늘 도착될 예정인데요? "

"이미 도착했어. 파리는 벌써 몇 시간 전에 잠이 깨서 움직이고 있으니까."

"다행이군요." 예정을 늦출 구실이 없어져 버렸다. "하진만, 브랜티가 뭔가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만나 주는 게 어때요? 어쩌면 그녀가 올지도 모르잖아요."

"나도 그걸 걱정하고 있어. 5분 이내에 준비를 끝내지 않으면 그 차림으로 그냥 끌고 갈 거야. 나는 인제 브랜티를 만날 생각은 없어. 당신도 인제 나와 결혼한 이상 다른 남자들은 잊어버려야 해."

"나한테 몇 명의 애인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요?"

"알고 싶지 않아, 체크할 방법이 없는 정보는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알았어요." 에마는 한숨을 쉬었다. 리처드에게 완전히 신용을 잃었다는 것을 알자, 목구멍으로 무엇이 치미는 것 같았다.

"당신이 샤워를 하는 동안, 도착한 드레스를 가져오겠고 입을 옷만 고르고 나머지는 짐으로 꾸리는 거야.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은 없어."

단념한 에마는 급히 샤워를 하고 리처드가 침대 위에 던지고 간 꾸러미에서 슬랙스와 아름다운 스웨터를 골랐다. 그리고 나머지 것은 가벼운 슈트케이스에 넣고 숄더백을 어깨에 메자 준비는 끝났다.

좌석은 일등석이었다.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가는데도 힘이 드는 긴 여행이었다. 주위에는 남자는 많았으나 여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대부분이 비즈니스 같았는데, 그 남자들의 눈길이 자기에게 쏠리고 있는 것을 알고 에마는 놀랐다. 자신의 가냘픈 몸매가 다소곳하고 우아한 인상을 주어, 아름답게 밫나는 머리와 잘 어울려서 아주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에마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자기가 젊기 때문이라고만 에마는 생각했다. 실제로, 가끔 자기를 돌아보는 리처드의 눈길에는 에마가 너무 어린 데 대한 초조감 같은 것이 보였다.

서쪽으로 감에 따라 하늘이 점점 밝아오자, 에마는 묘한 불안감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리처드의 가족은 어떤 사람들일까?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도 못했으나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아버님은 건재하신가요, 리크?" 리처드는 옆에서 서류에 적혀 있는 숫자를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에마는 지금은 자신의 의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래를 본 채로 리처드는 대답했다.

"의붓어머님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떤 분인가는 이야기해 주지 않았어요." 에마는 다시 물었다.

리처드는 흘끔 그녀를 보더니, 단념한 듯이 서류를 옆으로 밀어 놓았다.

"무엇이 알고 싶은가를 말해 줘!"

리처드가 그런 어투로 말하니까 에마는 그만 기가 죽고 말았다. 에마는 미간을 모으고 그를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이렇게 정면으로 도전하듯이 말하자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꼭 필요한 질문만 두세 가지 골라서 입을 열었는데, 그것도 스스로도 화가 날 정도로 더듬거렸다.

", 만일 우리가...... 보통 부부라면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렇군." 리처드의 묘한 웃음을 보고, 에마는 그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신의 몸매는 평범하지만 살결은 고와."

"내 살결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에요!" 에마는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당신은 상당히 멋지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야." 하지만 당신은 흥미가 없는 거지요, 하고 에마는 말하고 싶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듯 리처드는 갑자기 그녀를 끌어당겨 목에 입술을 갖다 댔다.

"좋은 냄새가 나는군." 그는 황홀한 듯 말하고 에마의 팔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에마는 리처드에 의해 불이 붙은 불꽃이 되어 타오르는 것이 아닌가 겁을 먹고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왜 이래요, 리크!" 에마는 속삭이듯 말하고 리처드의 입술을 피하려고 옆을 보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자기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리처드에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 상책이었다.

"내가 올리버가 아닌 것이 유감이군." 리처드는 차갑게 말하더니 자세를 바로 했다.

"렉스라면 당신보다는 훨씬 더 나를 생각해 주었을 거예요." 분개한 에마는 저도 모르게 쏘아붙였다.

"그런 말을 사람들 앞에서 하면 안 돼!"

"나는 당신네 가족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거예요."

", 그 이야기!" 신음하듯 말했으나, 이윽고 리처드는 의붓어머니 외에 배다른 동생과 누이동생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걱정할 것 없어. 리타는 그렇게 까다로운 타입이 아니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한 3년 전에 결혼했지. 게일과 벤은 그때 1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골치 아픈 일도 있었으나 지금은 괜찮아."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되었나요?"

"10."

그 말은, 리처드도 그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해 왔다는 것이 된다. 리처드라면 그런 책임을 질 만한 도량이 있을 것이다. 그의 떡 벌어진 어깨에 갖추어진 권위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지금도......모두 함께 살고 있나요?"

"그러는 편이, 집을 비우는 일이 많은 나에게는 편리하니까."

"그래......앞으로는요?"

"앞으로?" 리처드이 눈에 여느 때의 빈정거리는 빛이 깃들었다. "당신과 결혼한 이후라는 뜻이라면, 물론 그 때문에 지금까지의 상태를 바꿀 마음은 없어. 불과 몇 달 동안 같이 있을 사람을 위해서 나나 나의 가족의 생활을 바꿀 필요는 없을 테니까."

바베이도즈의 수도 브리지타운에서 18킬로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그랜틀리 애덤즈 국제공항에 착륙하니 밤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몸을 쭉 편 에마는 정신없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파리향기와는 다른 남국의 이국적인 향기이다. 수천의 꽃과 나무들의 향기인 모양이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속에 섞인 무엇인가가 에마의 피를 끓게 했다. 어디선가 흘러오는 음악의 리듬이 림보나 칼립소를 연상케 했다. 서인도 제도의 밤은 아름다운 별들로 뒤덮여 있었다. 에마는, 리처드에게 다정하게 끌어 안기어 춤을 추는 자신을 꿈꾸고 있었다. 음악이 격렬해짐에 따라 두 사람의 마음도 고조되어 간다.....

에마가 몸을 부르르 떠는 순간 리처드가 돌아다보았다. 그는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에마의 모습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왜 이래 에마. 나의 마음을 끌려고 그래 봐야 시간낭비야."

"마음을 끈다구요?" 에마는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천국에 착륙한 줄 아나?"

"나는 당신의 마음을 끌 생각은 없어요."

"그래?" 리처드는 어깨를 움츠렸다. 에마의 말 따위는 일체 믿지 않고, 에마의 마음을 상하게 해주는 것에만 새디스틱한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베라스코라는 바베이도즈인이 운전하는 차가 두 사람을 마중 나와 있었다. 그는 리처드에게 인사를 하고 에마에게 흥미 있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새 아씨신가요, 주인어른?"

"그래."

소개를 받자 에마는 생긋 웃었다. 베라스코도 에마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이것으로 적어도 친구가 한 사람 생긴 셈이다.

차는 북쪽 스페이처 타운으로 향했다. 리처드의 말에 의하면 사탕수수 농원은 거의 다 이곳에 있다고 한다. 레몬, 오렌지, 아보카드, 바나나, 그리고 에마가 처음 보는 나무들이 우거진 과수원이 계속되고 있다. 리처드에게 물어 보고 싶은 것도 많았으나 공항에서의 그의 태도가 생각나자 입을 열 마음이 없어졌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밖의 풍경에서 차 안으로 눈길을 돌린 에마는 백미러에 비치는 베라스코의 묘한 표정을 알아차렸다. 그 얼굴을 본 순간 에마는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었다. 이곳사람들은 리처드가 아름다운 신부를 데리고 오는 줄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베라스코가 놀라는 것을 보면, 리처드의 가족들의 놀라움은 얼마나 클까?

아름다운 콜로우니얼 양식의 저택 앞에다 세운 차에서 내린 에마의 얼굴은 비참할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 여기가 당신의 집인가요?"

"당신도 이런 집에 빨리 익숙해져야지." 에마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본 리처드의 어조에는 다소 정다운 데가 있었으나, 다음의 말로 그것도 사라지고 말았다. "하기야, 가난에 익숙해지는 것보다 사치에 익숙해지는 것은 간단하니까. 게다가 당신에게는 일 년 밖에 기간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 두기 바라."

"당신의 재산을 보고 놀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나도 일 년 이상 있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당신의 가족에 대한 일이에요."

"무순 뜻이지?"

"가족들은 아름다운 신부를 기대하고 있을 게 아니에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차마 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법이니까."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을까? 에마는 괴로운 마음으로 리처드를 쳐다보았다. 리처드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우리 가족은 도깨비가 아니야. 그리고 평범한 모습의 신부를 환영할지도 몰라. 여자란 그런 거니까."

"당신은 여자에 대해서는 권위자시군요."

"아마 그럴 거야." 리처드는 솔직히 인정했다.

리처드와 사귄 여자들은 모두 콘웨이 부인이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에마의 마음은 어쩐지 침울해졌다.

짐을 운반하고 있는 베라스코를 남겨 두고, 두 사람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에마는 말없이 리처드의 뒤를 따랐다. 호화로운 홀에 들어서자, 한쪽 문에서 중년 부인과 젊은 여자가 나타나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리크, 빨리 왔구나!" 중년을 넘긴 부인이 소리쳤다. 리처드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술을 대고, 젏은 여자에게도 똑같이 입술을 대더니 에마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어머니, 이 사람이 에마입니다. 에마, 어머니와 여동생 게일이야." 왜 빨리 돌아오게 되었는지는 설명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에마는 리타의 평가하는 듯한 눈썹의 움직임이며 살피는 듯한 눈초리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실례가 된다면 미안해요. 그런데 브랜티인 줄 알았는데요."

"그럴 예정이었는데 마음이 달라져 그 여자의 사촌과 결혼했어요." 리처드는 당연한 듯한 어조로 말하고는 에마를 끌어안았다. "에마를 쉬게 해주세요."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쉬어야 할 것이 아니라고 에마는 생각했다.

리타의 목소리도 서먹서먹했다.

"저녁식사는 했니?"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한 어조였다.

"준비하라고 할까요?" 게일은 말이 없는 신부에게 실망했는지 그곳에서 벗어날 구실을 찾고 있는 듯했다.

"아니, 비행기 안에서 먹었어. 나중에 아무거나 가볍게 먹게 될지도 모르지만."

"미리 준비시켜 두겠다." 리타는 미소를 지었다.

리처드는 고개를 끄떡이더니, 에마를 감싸 안은 채 이층으로 올라가 에마의 침실이 될 방으로 그녀를 안내하였다. 방안에 들어서자 그는 갑자기 손을 놓았다.

"여기면 되겠어?" 에마가 고개를 끄떡이자, 리처드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우리들의 방은 문으로 연결되어 있어, 물론 나는 그 문을 쓸 작정은 아니지만. 당신은 이곳의 욕실을 쓰도록 해요, 나는 복도 쪽에 있는 것을 쓸 테니까."

에마의 프라이버시는 완전히 지킬 수 있게 되는 셈인데, 일단 침실에 들어가면 리처드의 얼굴은 볼 수 없게 된다. 어쩐지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 같았다.......

"실망했나?" 에마의 당혹을 알아차린 듯 리처드가 놀렸다.

"아니요, 실망할 일이 뭐가 있어요?"

검은 눈썹이 냉소하듯이 치켜 올라갔다.

"내가, 올리버가 상대하던 헌 사람을 상대하리라고는 생각지 않겠지. 몇 번 키스했다고 해서 오해하면 곤란해. 당신한테는 분명히 매력은 있어. 나도 모르게 키스하고 싶어지는 그런 입술을 가지고 있어-다른 일은 일절 생각지 않는다고 하면......"

"다른 일이란..... 무엇이지요?"

"많은 남자들을 알고 지냈다는 거야."

에마는 화가 발끈 나서 소리쳤다.

"당신의 여자 친구들은 모두 순결했다는 말이라도 할 참인가요? 증명서가 없으면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인가요?"

"이것 봐요, 아가씨 증명서 따위가 없어도 남자들 알 수 있어. 그리고 나는 여러 여자들과 사귀어 왔지만, 결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

"그래서 후회하고 있군요, 감정적으로 결혼해 버린 것을."

"맞아. 죽도록 후회하고 있어. 올리버가 한 것처럼 결혼하지 않고 당신을 파리로 데리고 갔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

"적어도 렉스는 위선자는 아니에요!"

에마의 팔을 재빨리 잡은 리처드의 손가락이 쇠처럼 날카롭게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과해! 나를 모욕하는 자는 그 누구도 용서할 수없어. 사과하지 않으면.....!"

그 말은 단순한 위협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에마는 끝까지 버텼다.

"싫어요, 사실 대로 말했을 뿐이에요!"

"당신 마음을 돌릴 방법은 있어." 리처드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침대는 바로 거기 있어."

"이러지 말아요!" 새파랗게 질린 에마는 리처드가 어떤 식으로 벌을 줄 것인가를 알자 몸이 상기되고 몸이 떨렸다. 그럴 것이라면 사과하는 편이 훨씬 낫다. "미안해요." 에마는 우물거리고는 리처드의 핸섬한 얼굴에서 눈을 돌렸다.

"됐어."

", 당신은 정말 질색이에요!"

"그런가." 리처드는 비웃듯이 말하고는 갑자기 돌아서며, "30분 후에 내려와," 하고 덧붙엿다.

문이 닫히자, 에마는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지칠 대로 지친 에마의 볼에 눈물이 흘러내렷다. 리처드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모두 에마 자신의 탓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경멸당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렇다고 해서 에마는 진실을 말했다가는 집으로 돌려보내질 것이다. 내가 순결하다는 것을 알면, 리처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할 테니까.

갑자기 향수에 젖은 에마는, 리처드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눈에 익은 초원이며 영국의 회색 하늘이 그리워졌다. 언제나 시중을 들어 주던 에마의 모습을 찾고 있을 데이지의 갈색 눈이 눈앞에 떠올랐다. 농장의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끊이지 않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온 일도 마음에 걸렸다. 특히 힐다와 짐이 농장 일을 잘 해나가고 있는지가 걱정이었다. 브랜티는 믿을 수 없다. 그녀는 집안일을 도울만한 정신 상태가 아닐 테니까.

눈물을 손으로 닦자, 에마는 샤워를 하기로 하였다. 걱정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어쨌든, 진작 생각할 시간이 좀 있었다면 오늘 밤 이렇게 이 자리에 있게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30분 후, 에마는 가벼운 드레스로 갈아입고 다시 리처드의 가족과 대면하였다. 이번에는 게일의 오빠도 있었다. 25세의 핸섬한 청년인 그는 에마를 보자 눈을 반짝였다.

"다행이군요! 리크의 모델인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었는데. 모델이란 머리만 조금 흩어져도 법석을 떠니까요. 당신은 좋아질 것 같아요."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말에 놀라고 있는 에마는 쳐다보지도 않고 리처드가 말했다.

"에마하고 나한테 마실 것을 좀 주지 않겠니, . 인사는 끝났잖아."

벤은 배다른 형의 빈정거림도 눈치 채지 못한 듯, 마실 것을 건네주면서도 에마를 계속 바라보고 있다.

"이름이 말해 주듯, 조금 고루한 느낌이 드는군요. 청초하다고 할까....."

"이 사람은 조금도 고루하지 않아. 그리고 더 이상이 사람을 나쁘게 말하지 마."

에둘러 말함으로써 모욕을 준 데 대해 에마가 얼굴을 붉혔을 때, 하녀가 쟁반을 가지고 들어왔다.

"여기서 간단한 식사를 하면 어떨까 하고." 리타의 미소에 리처드는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60세가 되었는데도 아직 아름다운 리타는 에마를 본 순간, 정색을 한 차가운 얼굴로 바뀌었다.

"저기 앉는 게 좋겠군."

걷기 시작한 에마는 그만 잘못하여, 들고 있던 잔에서 노란색 액체를 엎지르자 당혹한 나머지 입속으로 우물거렸다.

", 미안합니다."

"비행기 안에서 지나치게 마신 것 아니에요?" 게일일 심술궂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그렇지 않아요." 왜 리처드는 도와주지 않는 것일까.

"앉아요." 초조하게 말한 리처드는 리타의 편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마는 조심스럽게 앉았다. 리타는 커피를 따르며 또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하는 일에 빨리 익숙해져야 해요. 이 섬에서는 파티다 뭐다 해서 모임을 갖는 일이 많지. 그런 일이 없다면 지리할 테지만."

마치 가족의 일원으로 여길 의향이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에마는 당혹하여 리타의 차가운 얼굴을 보며, 리처드는 왜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또 했다. 리타는 에마와 같은 어린 여자 아이에게 주부의 자리를 넘겨줄 생각은 없다고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어두운 충동에 쫓긴 에마는 거침없이 대꾸했다.

"저는 파티를 좋아하지 않아요. 여기에는 더 중요한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요."

"리크는 내가 이 집 일을 처리해 나가기를 바라고 있어요." 리타의 입술이 굳어지고 있었다.

대답을 하려다가 에마는 망설였다. 조금도 고민할 것은 없다. 리처드의 아내로 있는 것은 불과 1년뿐인 것이다. 리처드 역시 에마가 주부가 되기를 원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리타에게 맡기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게 하면 에마가 가버린 뒤에도, 이 집 사람들에게는 산들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 인상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좋아하겠지?" 에마가 잠자코 있는 것을 보고 리타는 위협하듯이 물었다.

"물론이에요."

"이 사람은 한동안 사람들 앞에 내보내지 않을 작정이에요." 리처드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에마는 주춤했다. 리처드는 내가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베로니카가, 내일 열리는 파티에 너희들을 보내겠다고 약속해 버렸어." 하고 리타가 말했다.

"어제 형들이 돌아온다는 말을 들었거든. 그녀가 한번 말하면 막무가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벤이 어머니를 거들어서 말했다.

"그렇군." 리처드는 굳은 표정을 지었으나 곧 어깨를 움츠렸다. "이번만은 가기로 할까. 일이 밀려 있어 사교에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지만."

"너는 언제나 베로니카의 파티 권유는 거절하지 않더구나." 리타가 의미 있는 듯한 말을 했다. 리처드가 결혼했다는 사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투였다.

베로니카란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분명히 리타는 에마보다 그 여자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에마는 묻듯이 리처드를 보았으나 그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리타와 게일과 이야기를 계속하느라고, 에마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남들 앞에서는 사이좋게 행동하겠다던 리처드의 말이 생각나 에마는 분개했다. 리처드야말로 조금도 노력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에마에게 호의를 보인 것은 벤 한 사람뿐이었다. 그후 몇 주일 동안 에마는 그의 다정한 도움을 받았다.

다음날 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닥쳐왔다. 그날 하루종일 리처드를 거의 만나지 못했으나, 눈길을 끄는 것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코랄하우스라 불리는 이 저택은, 오래 된 건물이지만 설비는 근대화되어 있어 거처하기에 편했다.

그리고 널따란 정원이 펼쳐져 있어 멋진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농원에 흥미가 있는 에마는 리처드에게 질문을 하고 싶었으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다. 리타에게 물어 보니 그는 바쁘다고 냉담하게 대답했다.

리타의 경멸의 눈초리에서 벗어나 저택 안을 거닐다 보니, 정원에 큰 풀이 있었다. 돌아다니느라고 땀을 흘린 에마는 풀에 들어가 몸을 식히기로 하엿다.

"리크는 함께 오지 않았나요?" 풀 가에 앉아 있는 에마를 발견하고 벤이 다가왔다.

"보시는 바와 같아요."

"바쁜 사람이니까요. 오전 내내 함께 일했는데 전혀 쉴 생각을 하지 않아요."

"당신은 일하는 것이 싫은가요?"

"그렇지는 않지만, 한도가 있으니까요. 리크는 사람을 매우 혹사시키거든요. 결혼했으니 좀 나아질까 했는데 여전하군요. 당신은 모델은 아니지만 귀여우니까요."

에마는 애써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나 이외의 일일 거예요."

"리크가 당신을 무시한다면 당신은 리처드를 그냥 두지 않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여자들과 같은 운명이 되겠지." 다른 목소리가 벤이 말을 받았다.

놀라서 돌아다보니 게일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온 것을 모르고 있던 에마는 그 차가운 어조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벤의 말은 가볍게 놀리는 말이었으나, 게일의 말에는 악의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벤은 여동생을 노려보며 에마의 손에 자기의 손을 다정하게 겹쳤다.

"신경 쓸 것 없어요. 게일은 고양이새끼처럼 금방 발톱을 세우니까요."

"오늘 밤엔 베로니카를 조심해야 할 거예요." 게일이 곧 말을 이어받았다. "그 여자는 리크와 오랫동안 사귀어 왔으니까요. 당신에게 손을 들 사람은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에마는 좀 여위긴 했지만 매력적이야." 하고 벤이 말했다.

게일은 가느다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뭏든 묘한 이야기군요."

게일의 따지는 듯한 시선에 에마는 얼굴이 빨개졌다. 비틀거리듯 일어서서 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리처드와 만나면서부터 결혼을 하기까지의 경위를 게일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똑바로 누워 물위에 떠 있으려니, 벤과 게일이 다투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멀리 있어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서 몇 달을 살려면 웬만큼 신경이 무뎌지지 않고서는 힘들 것 같다. 리타도 게일도 에마에게는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고 리처드의 도움도 바랄 수 없다. 게다가 리처드의 그전 여자 친구들도 있다. 다정히 대해 주는 것은 벤 한 사람뿐이다. 벤이라면 곤란할 때 도움의 손실을 내밀어 줄 것이다.

 

베로니카 레이는 해안을 따라 몇 킬로 간 곳에서 마일즈와 할레라는 두 오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 레이의 집은 브리지타운에 큰 회사를 가지고 있어 베로니카는 부족한 것이라고는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있다면 리처드 콘웨이를 잡지 못했다는 것 한 가지뿐인 것이다.

그러나 파티에서 리처드의 어린 아내를 본 베로니카는 눈에 뛸 정도로 놀라는 빛을 띠며, 새 희망을 가진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는 더욱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리처드는 그녀와 춤을 추며, 그 검은 눈동자를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에마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갓 결혼한 신부가 이처럼 무시당하고 있다면 앞으로 어떤 소문이 날지 모를 일이다. 에마는 실의에 빠져 있었다.

벤이 춤을 추자고 했을 때, 에마는 마음이 놓여 눈물이 솟아올랐다.

"어마, 고마워요."

"리크와 헤어지는 건 아니겠지요?" 벤은 농담으로 말했으나 걱정하는 듯한 눈치였다.

"결혼했다고 해서 언제나 곁에만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에마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을 무시해도 된다는 이유도 없잖아요, 꼬마 아가씨."

그런 식으로 불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에마는 잘라 말했다.

"친구를 무시하는 것이 훨씬 더 나빠요."

"진정한 친구라면 이해해 줄 거예요."

"좋아요! 나는 춤추기를 좋아하는데 당신도 춤을 잘 추는군요." 에마는 애써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도."

벤은 웃고 에마를 팔 안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주위의 험담이나 차가운 눈을 단번에 잊을 정도의 기세로, 에마는 멋지게 돌았다.

벤은 에마와 세 곡을 춘 뒤, 마지못해 다른 여자의 파트너가 되었다.

"이따 또 봐요. 당신은 정말로 멋있어요. 이렇게 즐거웠던 일은 처음이에요."

리처드는 아직도 베로니카와 추고 있고 리타와 게일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혼자 남게 된 에마는 즐거운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고 있었으나, 그 표정은 곧 얼어붙어 버렸다. 다른 여자와 춤을 추기 시작한 리처드가 치크 댄스를 시작한 것이다. 그 여자는 팔을 그의 목에 휘감고 있었다.

에마가 마비된 듯이 시선을 돌리자, 베로니카의 심술궂은 시선과 마주쳤다.

"그를 잡아 두는 것은 무리인 것 같군요. 2,3주간만 유지되면 좋은 편 아니겠어요?"

에마는 있는 힘을 다해 대답했다.

"리크와 나는 서로 이해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베로니카는 큰 소리로 웃더니 그 자리를 떠났다.

에마는 그 뒤의 시간을 가까스로 보냈다. 리처드가 한 번 춤을 청해서 응하기는 했으나, 기분이 나빠서 잘 추어지지 않았다. 그와 춤을 출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는데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니......

그날 밤 넓은 침대에 몸을 던진 에마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열린 창문으로 재스민의 향기가 스며들어왔다. 가까스로 잠이 든 에마의 꿈에 나타난 것은 역시 리처드였다. 꿈속에서 리처드에게 안기어 키스를 받았을 때, 눈물에 젖은 에마의 볼에 방긋이 웃음이 떠올랐다.

리타와 게일은 아침식사에는 내려오니 않는 것이 습관인 모양이었다. 가정부가, 리처드는 벌써 농원에 일을 하러 갔다고 전했다.

"아주 일을 잘 하시거든요, 리크는."

"하지만 농원에는 책임자가 있을 것 아니에요?" 커피를 마시며 에마는 물었다.

"농원 책임자는 있지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벤도 계시고요, 멀지 않아 독립하기겠지만."

"그런 계획이 있나요?" 에마는 걱정이 되었다.

"물론 있지요. 공부가 끝나는 대로 독립시키겠다고 리크가 말씀하셨어요."

에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처럼 사이가 좋아진 벤이 곧 독립해 나가게 된다는 것은 서운한 일이다. 걱정스러운 시선을 가정부 쪽으로 던지며 에마는 생각했다. 보통 같으면 에마가 주부의 역할을 해야 할 테지만, 리처드는 그렇게 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에마도 리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에마가 사라진 뒤 리처드의 시중을 들어 줄 사람은 리타일 테니까.

앞으로는 누구의 지시를 따라야 되느냐는 질문을 가정부가 금방이라도 해 올 것 같아, 에마는 서둘러 커피를 마시고는 "나갔다 오겠어요."하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결국 에마는 하루 종일 리처드는 만나지 못했다. 피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분노에 사로잡힌 에마는 그날 밤 옆방에 리처드의 기척을 느끼자 무모하게도 그의 침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단추를 빼고 있던 손을 멈춘 그의 태도에서, 깜짝 놀라는 기미를 엿볼 수 있었다.

리처드의 드러난 가슴에 당황하여 눈길을 돌리면서도, 에마는 그가 몹시 지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젯밤 다른 여자들에게 지나친 서비스를 한 탓이라는 생각이 더욱 분노를 일으키게 했다.

"남들 앞에서는 사이좋은 부부처럼 행동하라고 말한 것은 당신이에요! 그런데 당신에게 이처럼 무시당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지요?"

리처드가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안됐지만 나는 마음을 바꿨어. 좋아하지도 않는데 사이좋은 체해 봐야 별수 없잖아. 그러는 편이 헤어질 때도 간편해. 처음부터 순조롭지 못하다면 아무도 이유를 묻지는 않을 테니까."

에마의 분노는 삽시간에 비참한 마음으로 변했다.

"그렇게 결정했나요?"

"슬퍼할 건 없잖아?" 리처드는 잘라 발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니까. 당신 역시 눈을 감고 뛰어든 것도 아니고."

"분명히 그렇군요." 에마는 힘없이 인정했다.

"어쩌면 당신은," 리처드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이곳 생활을 보자 그것을 잃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 아닌가?"

에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천만의 말씀! 당신이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런......."

"아무튼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분별 있게 행동해야만 해."

"그리고 당신은 멋대로 하는 거구요?"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해.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해." 에마의 눈물에 젖은 눈을 보고 리처드는 엄격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결정에 따라 춤을 춰야 하는 군요, 결과야 어찌 되든."

"어떤.....결과를 기대하고 있는데?"

에마는 눈을 내리깔았다. 리처드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면 뭐라고 할까? 그는 아직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가슴에 타오르는 이 마음이 증오이기를 비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몸에 꼭 끼는 바지를 입고 셔츠 단추를 빼놓은 리처드의 늠름한 장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맥박이 빨리 뛴다. 에마는 리처드의 질문에 자연스럽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별로. 마음의 상처가 조금은 남을지 모르지만 곧 아물겠지요."

"다 그런 거요." 방을 나가려는 에마에게 리처드는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여기서의 생활에 문제는 없나? 벤이 도와주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신경을 써 주는 사람은 벤밖에 없어요."

"당신은 마음이 침울하겠지.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침에 한두 시간, 틈을 내어 당신에게 섬 구경을 시켜주는 것 정도야. 한번만 돌면 그 뒤로는 혼자서도 갈 수 있게 되겠지."

나 혼자서 즐길 수 있게 되면 자기의 짐을 덜게 된다는 것이겠지. 그의 의도는 알 수 있었지만 잠깐 동안이라도 그와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권유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생각인지도 모르겠군요." 에마는 고개를 끄떡이며 방을 나왔다.

이튿날 아침 에마가, 리처드의 마음이 달라졌나 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스포츠카를 몰고 나타나더니 그녀에게 나가자고 했다. 해안을 따라 나 있는 길은 넓고 아름다웠다. 큰 저택이 해안선에 늘어서 있고, 프라이빗 비치가 이어져 있었다. 떠나기 전의 불안과는 반대로 에마의 기분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제일 먼저 리처드의 사유지를 한 바퀴 돈 에마는, 그 넓이에 놀랐다. 저택 안은, 침실들과 리처드의 서재 외에는 다 보았으므로, 오늘은 부지 전체와 농원을 둘러보았다. 에마는 일하고 있는 사나이들을 보고 고용인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수확 때는 몇 백 명이 되지만, 그밖에는 그다지 많지 않아."

조용히 굽이치는 녹색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디에 그런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집 같은 것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대부분이 시내에 살고 있다고 리처드가 설명해 주었다.

해가 중천에 뜨자 더워졌으므로 수영을 하기로 했다.

"브리지타운과 명소에는 다음에 가기로 하지." 바닷물은 따뜻하여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러나 리처드를 의식하고 있었으므로 에마는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수영복을 입은 리처드의 모습은 완벽했다. 그가 나이 많은 매력 없는 남자였다면 눈길을 주지 않아도 되어 편했을 텐데, 하고 에마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여기서는 혼자 헤엄치면 안 돼." 거품이 이는 파도에서 올라오며 리처드가 말했다.

해안에는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당신이 언제나 함께 와 주시지는 않겠지요?" 오고 싶지도 않겠지요, 하는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리처드의 대답은 에마를 놀라게 했다.

"가끔 올게. 하지만 내가 함께 못 올 때는 정원의 풀을 사용하도록 해."

"벤이 와 줄지도 몰라요. 친절하니까."

"벤은 안 돼!" 리처드의 심한 말에 에마의 밝은 미소는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시선이 에마의 가냘픈 몸과 금빛 머리를 더듬고 있다.

"내가 그에게 약간의 낭만적인 느낌을 갖고 있다면?" 에마는 놀리듯이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물론 벤이나 다른 남자하고 로맨틱한 관계를 가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그것을 리처드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

한 순간 확 끌어당겨져서 키스를 당한 에마는 앞 뒤 생각 없이 한 질문을 후회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리처드의 입술은 더울 격렬해져 아무리 버둥거려 봐도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얼굴을 든 리처드가 짙푸른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전에도 말했듯이, 당신의 입술은 굉장히 매력적이야."

리처드를 밀어내려 했을 때, 큰 파도가 두 사람의 발밑을 씻었으므로, 썰물에 휩쓸릴 것 같아 에마는 저도 모르게 리처드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리처드 역시 파도로 다리의 균형을 잃어, 두 사람은 모래 위에 쓰러져서 다음의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다. 따뜻한 바닷물로 야릇한 감각에 눈을 뜨게 된 에마는, 다시 리처드가 입술을 덮치고 모래 위에 짓눌러 댔어도 저항할 마음을 잃고 있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격정에 사로잡혀 두 사람은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에마가 저도 모르게 내 쉰 신음소리에 리처드는 팔에 더욱더 힘을 가해 왔다.

"에마?" 에마의 떨리는 입술에 리처드는 속삭였다. "에마, 당신을 안게 해줘."

리처드가 입 박에 내지 않았다면 에마는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리처드는 물었을까? 왜 잠자코 안아 주지 않았을까?

에마는 본능적으로 노우라고 말했으나, 그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리처드는 씁쓸하게 내뱉었다.

"다른 남자는 거부하지 않았으면서." 입술을 뗀 리처드는 뚫어지게 에마를 들여다보았다. 그 눈에는 거친 불꽃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에마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일 뿐이지 애정에서가 아니다.

"놔요, 리크." 그것은 에마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은 아니었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의 것이 될 기회를 뿌리쳤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넘쳐흘렀다. 리처드의 다리의 무게를 견디며, 에마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리처드는 노골적으로 경멸의 빛을 보이며 몸을 떼었다. "묘한 여자군."

리처드가 손을 잡아 끌어 에마는 머리를 흔들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것을 본 리처드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 행동으로 마음이 상했나?"

"아니요." 에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왜 울지?"

"여자는 어떨 때 운다고 생각하세요?" 어떻게든지 질문을 주고받으려고 에마는 되물었다.

"글세, 왜 그럴까? 자기 뜻대로 하기 위한 수단일까? 그러나 남자는 그 수단에 놀아나진 않아, 특히 당신과 같은 여자의 경우에는."

"그만 둬요!" 에마는 몸을 홱 돌리고는 모래사장을 달렸다. 에마의 일을 오해하고 있는 리처드는, 눈물의 뜻을 에마의 마음의 동요라고는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그러한 리처드가 밉다. 그리고 자기를 싫어하고 있는 사람 때문에 운 자신도 싫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에게 노우라고 말할 수 있는 강한 힘이 자신에게 있었던 일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에마는 리처드를 사랑하고는 있으나 가끔 두 사람을 격렬하게 사로잡는 정열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는 두려웠다. 언제까지 거기에 저항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리처드는 에마를 자기의 것으로 하더라도 결국은 버릴 것이다. 그리고 에마는 절망에 빠지게 될 것이다.

호텔에서 점심을 먹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안했다. 커피를 마실 때서야 에마는 용기를 내어 바베이도즈에 대한 질문을 시도해 보려 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화제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질문이었다. "세인트루샌더의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그곳 농원도 코랄 베이의 것과 같은가요?"

"누구에게서 세인트루샌더 이야기를 들었지, 나는 말하지 않았는데?"

리처드의 날카로운 어조가 에마를 놀라게 했다. "글쎄요......." 어리석은 말을 한 것 같았다. 브랜티에게서 들었다고 하면 리처드는 언짢은 얼굴을 하겠지. "누구에게 들었는지......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분명히...... " 에마는 얼버무렸다.

"당신은 거짓말을 잘 못하는군. 브랜티지?" 에마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그곳에서 일하는 때가 많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에요."

"그 여자는 그것이 불만이었지?"

"그래요. 하지만 그것은 당신과 헤어져 있는 것이 싫어서였을 거예요."

"그보다, 나와 함께 그곳에서 몇 주간을 살아야 하는 것이 더 싫었던 것 아닐까?"

에마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외로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겠지요......"

"나는 행운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리처드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하더니, 에마를 흘끔 보았다. "물론 산을 넘으면 또 산이라고는 하지만. 그런데 당신도 나와 함께 고도에서 허니문을 보내는 것이 싫은가?"

에마를 난처하게 하려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에마의 심장은 갑자기 세차게 뛰어, 커피잔을 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왜 나를 이런 식으로 곯리는 것일까?

"떠는 것은 무서워서 인가, 아니면 기대감에선가?"리처드는 계속 몰아세웠다.

"떨긴 누가 떨어요!"

"그런가?" 리처드는 히죽 웃었다.

"리크, 우리 이성적으로 이야기를 나주지 않겠어요?" 에마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허니문은 고사하고 나는 당신의 섬도 보지 못했어요. 데리고 가주시지 않겠어요?"

"그건 안 될 말이야. 세인트루샌더에는 오락 시설이 전혀 없어. 스스로 즐기는 도리밖에 없는데, 당신한테 나와 함께 즐길 의향이 없잖아?"

리처드가 말하려 하는 것은 분명했다. 볼이 붉어진 것을 감추려고 에마는 소리쳤다.

"베로니카 레이와 함께 간 일은 없었나요?"

"있었어." 너무도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에마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가까스로 말했다.

"그 여자는 아름다워요."

"그래."

"나보다 그 여자를 더 좋아하시지요?"

"당신보다 그 여자를 잘 알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초조한 나머지 한숨을 쉬자, 리처드는 일어섰다. "슬슬 가 볼까. 질문 공세는 질색이야."

 

사흘 후 리처드는 사업 관계로 캐나다에 갔다. 바베이도즈는 18세기 이후로 캐나다에서 원목을 수입하고, 캐나다측은 당밀과 럼주를 수입하고 있어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바베이도즈에는 캐나다의 조사 기관도 있고, 바베이도즈인이 캐나다에 유학을 가거나 영주하는 예도 종종 있다. 벤도 캐나다의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나, 이주한다면 오스트레일리아가 더 좋다고 했다.

리처드에게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었으나,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어떤 뜻으로는 그의 출장은 한숨 돌릴 기회가 되기도 했다. 매일 곁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떨어져 있다는 것은 더없이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함께 수영을 하러 갔던 날 이후로, 저녁식사자리 이외에는 거의 얼굴을 대한 일이 없다. 그나마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그는 에마를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 대하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어느 날 밤, 리처드는 밖으로 식사를 하러 가면서, 혼자가 아님을 은근히 비쳤기 때문에 에마는 비참한 심정이 되었었다. 베로니칼까? 오후에 전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녀임에 틀림없다. 마음의 아픔을 숨기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 않았을 텐데. 차라리 힐다와 브랜티에게 보복을 당하는 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에마는 리처드가 떠난 뒤 2,3일 동안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역시 리처드는 자기의 방패가 되어 주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가끔 저녁식사 때 에마가 리타의 악의에 찬 말의 표적이 될 듯하면 리처드의 무언의 시선이 리타의 입을 막아 주곤 했던 것이다. 리처드가 없으니 한편 안도의 한숨이 나오기는 했으나 한편으로는 역시 불안했다.

리타와 게일은 에마가 자기들의 위치를 위협할 우려가 없음을 깨달은 뒤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으나 키스도 하지 않고 떠나 버린 뒤, 에마를 구해 준 것은 벤이었다. 벤의 따뜻하고 대범한 우정이 없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3년간에 걸친 심한 노동과, 지난 몇 주일 동안의 긴장의 아픔에서 회복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에마는 조금씩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바다와 모래와 19세의 젊음이 그녀를 도와준 것이다.

벤은 낚시터에도 데리고 가 주고, 노를 젓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배를 좋아하는 에마는 곧 노 젓기에 숙달하여 벤을 놀라게 하엿다.

수영도 잘하게 되었다. 학교 시절에 배운 수영법이, 벤의 지도로 완전히 기억이 난 것이다. 에마의 실력을 안 벤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물갈퀴를 달게 하고는 잠수까지 합께 했다. 해저의 산호초가 꿈처럼 아름다웠다. 물속에 있으니 에마는, 리처드와 최후로 나눈 키스가 생각났다. 파도가 심할 때는 그의 힘찬 입술의 기억을 허둥지둥 머릿속에서 몰아내야만 했지만......

에마는 그러한 기억과 이유를 모르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벤이 일이 바쁠 때에는 혼자서라도 섬을 돌아다녔고 브리지타운에도 갔다. 브리지타운에는 일류 미장원이 잇는데, 에마가 가면 정성껏 머리와 피부 손질을 해주곤 했다. 에마의 살결은 윤기가 돌았다. 게다가 몸매도 놀라울 정도의 아름다운 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 에마의 통통한 모습을 벤은 솔직히, ‘마음을 빼앗길 정도로 매력적이라고 형용했다.

"리크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당신이 아주 멋쟁이가 되었다고 온 섬사람들이 말할 정도니까요." 벤이 놀렸다.

"온 섬사람들이요?" 에마는 웃으며 되물었다.

", 그래요...... 내가 허풍스럽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소문이 나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당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여자들은 모두 당신이 불쌍하다고 소곤거렸어요. 그러나 지금은 당신을 부러워하고 있어요. 그 비결을 알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예요."

에마는 미간을 모았다. 자신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말에도 조금도 기쁘지가 않았다.

"뭐 특별한 비결은 없어요. 나는 다만 회복되었을 뿐일 거예요."

"회복이라니, 무엇에......?"

", 글쎄요, 여러 면에서겠지요." 에마는 웃어 넘겨버렸다. 오랜 동안의 노동과 리처드의 차가운 보복에 대한 마를 할까 하다가, 차라리 그 일은 잊고 싶어서 그만두었다.

벤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그 대신 에마를 관찰하듯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머리, 잘록한 허리, 바야흐로 완벽해진 곡선-갑자기 벤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에마, 만일 리크에게 싫증이 나거든 나하고 결혼해줘요."

"어마, ." 에마는 또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절대로 리크처럼 당신을 무시하거나 하지 않아요." 벤은 말을 정면으로 부정할 수도 없어서 에마는 잠자코 있었다. 침묵이 계속되는 동안 벤의 얼굴에 동정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알아차리고 에마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가 베로니카 레이 정도로 아름답다면....."

"베로니카와 당신과를 같이 놓고 견줄 수는 없어요." 벤이 아리송한 어조로 말했다.

역시 나는 베로니카의 아름다움에는 당할 수 없나보구나, 하고 에마는 씁쓸한 생각을 했다.

어느 날 리타가, 베로니카가 모두를 파티에 초청했다는 말을 했을 때, 에마는 귀를 의심했다.

"저도요? 정말로 저도 초대했다는 건가요?" 리타는 그렇다고 했다. 게일이 말참견을 했다.

"베로니카는 연적이 아름다워졌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는 거예요, 보나마나."

에마를 흘끔 본 리타의 시선에는 분명히 의혹이 떠올라 있었다. 최초의 만남에서 에마를 대수롭지 않게 평가했던 리타다. 그 인상을 바꿀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마치 그 자리에 에마가 없는 것처럼 리타는 딸에게 말했다.

"여자는 외모로만 평가하는 게 아니야. 사교 면에서도 남편을 도와줄 수 있을 정도라야지. 리크는 멀지 않아 에마에게 실망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베로니카의 파티 날이 되었어도, 리타의 말로 인해서 입은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파티가 얼리는 동안 내내 벤은 에마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에마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벤만이 아닌 것 같았다.

베로니카의 오빠인 마일즈 레이의 시선이 아까부터 에마에게 못 박혀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한 부유한 청년이었다.

"왜 좀 더 빨리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마일즈는 큰 소리로 말하더니, 강제로 에마를 끌고 나가 춤을 추었다.

스텝을 밟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일즈는 내일 점심식사를 같이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성급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요." 진지한 어조였다.

공손히 거절하려고 에마는 망설였다. 거절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아주 인상이 좋은 청년이다. 젊고 핸섬하고 어딘가 마음이 통할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벤에게만 의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처음에는 벤의 청혼을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에마였지만, 요즘에는 그렇지 않은 면이 있다. 벤의 눈길은 에마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그에 대해서는 오누이와 같은 생각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데...... 에마가 마일즈와 가끔 외출을 하게 되면 벤도 생각을 달리해 주겠지.

마일즈에게 미소를 보인 에마는, 왜 상대가 나를 보고 놀라게 되었나 하고 내심 의아해 하면서 그에게 말했다.

"기꺼이 초대에 응하겠어요."

베로니카는 놀랍게도 오빠가 에마와 친해지는 데 대해 반대하는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큰 백화점을 경영하고 있는 마일즈는 매일 브리지타운에 가곤 하는데, 그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어 에마에게 백화점을 안내해 주었다. 에마는 백화점의 규모가 크고 상품의 질이 높은 데 놀랐다. 여기 진열된 비산 상품들은 수백만 파운드어치가 될 것이다.

에마가 유리 케이스 속의 아름다운 팔찌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다이아몬드며 여러 가지 보석이 박힌 팔찌는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자 마일즈는 곧 점원에게 케이스를 열게 하더니, 팔찌를 꺼내 포장하라고 했다.

에마가 놀라니까, 그는 곧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보다 우선 끼어 보는 게 좋겠군. 별로 당신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것을 찾아봅시다."

순간 에마는 충격을 받았다. 마일즈가 팔찌를 포장하라고 했을 때, 그것을 자기에게 주려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 값비싼 것을 받을 수는 없다- 남편으로부터라면 몰라도. 갑자기 리처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리처드는 항상, 두 사람의 결혼을 일시적인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멀지 않아 이혼 수속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에마가 다른 남자와 사귀게 되면, 에마도 그의 의향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오해할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다른 남자로부터 호의를 받고 있다는 증거를 리처드에게 보이는 것만이 그나마 프라이드를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 될지도 모른다

한순간, 마일즈의 선물을 받을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에마는 결국 받지 않기로 했다. 리처드에게 깨닫게 하는 것은 좋지만, 이런 방법은 쓰고 싶지 않다. 팔찌를 받으면 마음이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마일즈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거절하려면 뭐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베로니카 레이가 모습을 나타냈다.

베로니카는 팔찌를 보자 빠르게 소리쳤다.

"잘 어울려요, 에마. 하지만 리크가 여러 가지를 사주었지요?"

에마의 얼굴이 새빨개진 것을 보고 마일즈는 동생을 흘겨보았다.

"저리 가 있어, 너와는 상관없는 일 아냐."

"그렇군요, 하지만 흥미가 있는걸요. 이것에 비하면 오빠들이 생일날 나에게 준 건 너무 초라해요."

"너 많이 가지고 있잖아. 그리고 너는 누이동생에 지나지 않으니까."

"에마도 남의 부인에 지나지 않잖아요." 마일즈의 안색이 달라졌다.

"잠자코 저리 가 있어. 에마하고 나하고는 서로 이해하고 있어."

"리크가 들으면 기뻐하겠군요! 에마를 이혼하게 하려는 거지요?"

"에마가 나하고 같은 기분이 든다면." 마일즈는 에마의 차가운 손을 꽉 쥐었다. "나는 에마를 사랑하고 있지만, 뒤에서 몰래 사귈 생각은 없어. 리크에게 에마와 결혼하고 싶다고 당당히 말할 참이야."

갑작스러운 선언에 베로니카는 한순간 주춤했으나 곧 원상태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면 에마가 나의 올케가 되는 셈이네요?"

"에마가 동의만 해준다면."

"잠깐만!" 에마는 새파래져서 외쳤다. 점심식사를 함께 할 작정이었을 뿐인데, 뜻밖의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마일즈에게 호의는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소문이 난다면, 아무리 이름만의 아내라도 리처드는 굉장히 화를 낼 것이다. 이런 일이 온 섬에 알려진다면 그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 된다.

"팔찌는 받을 수 없어요. 마일즈, 친절은......" 마일즈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에마는 우물거렸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안 받겠지요. 마일즈, 주머니에 넣었다가 나중에 주면 어때요? 리크에게 보고하겠어요." 베로니카가 심술궂게 말했다.

"닥쳐!" 마일즈는 팔찌를 든 채로 백화점을 나갔다. 차안에서 마일즈는 팔찌를 시트 상이에 놓았다.

"받아 주겠지요?" 이렇게 당혹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받을 수 없어요. 이해해 주세요. 리크와 살고 있는 동안은....."

"줄곧 살 것 같지 않을 것 같다는 소문이던데." 마일즈의 눈이 의아한 듯이 가느다래졌다.

"모 모르겠어요."이성을 잃은 에마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그럴 것 같긴 해요. 하지만 살고 있는 동안엔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아요."

마일즈는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더 이상 묻지 않으려고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베로니카는 정말 지독한 녀석이야, 그 아이가 와서 운이 없기는 했지만,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고 한 말은 진정이오."

"하지만, 내가 그런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잖아요?" 마일즈는 에마의 턱에 손을 대며 말했다.

"그렇게 슬픈 얼굴은 하지 말아요. 나는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귀엽고 충실하고 정직해요. 사랑해요, 난 당신 이외의 여자하고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리처드는 왜 이처럼 나를 믿어 주지 않을까, 떠난 지 6주일이나 되었는데, 전화 한 번 없다. 리처드로부터 코랄 하우스에 전화가 걸려오긴 했으나 리타나 벤하고만 통화할 뿐이다. 나에 대한 것을 묻기는 하는 모양이지만, 직접 통화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에마는 그를 배신할 생각은 없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다. 사랑도 못 받고 있는데.

"미안해요, 마일즈." 에마는 눈에 눈물이 가득 괸 채 말했다. "잊는 게 좋을 거예요."

"괜찮아요. 그보다 잠깐 집에 들러 차라도 마시고가지 않겠어요? 그 정도는 괜찮겠지요."

너무 고집스럽게 거절함으로써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마일즈의 마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레이의 집 객실에 들어섰을 때 에마는 말했다.

"인제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마일즈." 마일즈는 한순간 어두운 표정을 지었으나 곧 어깨를 움츠리고 웃었다.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게요. 하지만 주말에 리타가 개최하는 파티에는 가기로 약속을 했으니까, 그때는 만나게 되겠군요. 되어가는 대로 합시다, 에마. 나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에마는 웃으며 한숨을 쉬었으나, 베로니카가 왔으므로 대답은 하지 않았다.

베로니카의 호수테스로서의 역할은 완벽했다. 돌아오려고 할 때 마일즈에게 전화가 걸려 왔으므로, 에마는 차 안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만 있게 된 순간, 베로니카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마치 잡은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와 같은 눈초리였다.

주말에 에마는 기분을 바꿔 보려고 여느 때보다 정성껏 몸치장을 했다. 낮에 브리지타운에서 머리를 세트하고, 얼굴 마사지도 했다. 그러면서 에마는, 요즈음 배싼 화장품 값을 리처드 앞으로 다는 일에 미안함을 느꼈다. 리처드는 용서해 줄까. 에마의 살결은 몰라볼 정도로 아름다워지기는 했으나 리처드가 그것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파리에서 산, 광택 있는 천의 드레스가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는 것을 에마는 알고 있었다. 작은 파티에는 조금 호화로울지 모르지만 이것 외에는 적당한 것이 없었다. 바베이도즈에 와서는 심플한 드레스만 몇 벌 샀을 뿐, 필요 이상의 옷은 사지 않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벤과 마일즈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에마가 춤을 출 때 그녀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했었다. 그날 밤의 에마는 젊은 남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모으고 있었다.

"당신은 여위기는 했지만 섹시해요." 대담한 청년이 솔직히 말하는 바람에 에마는 볼을 붉혔다. 그들은 다정하게 대했으나 어디까지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들이 이처럼 대하는 것도 실은 에마가 리처드의 아내기 때문이었다. 리처드는 이 섬에서 존경받는 인물인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에마를 무시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르다. 새로운 우정을 갖게 된 것은 기뻤지만, 리처드의 아내로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다- 그의 일을 도와주고 가끔 밤의 외출도 한다. 외식을 하러가거나 춤을 추러 가거나.... 상상 가운데서 가장 즐거운 것은 함께 배를 타는 일이었다. 수영을 가면 리처드는 아무도 모르는 아름다운 해저를 보여줄 것이다. 아침 일찍 승마를 하는 것도 즐겁겠지. 그러나 에마의 상상은 거기서 그쳤다. 침실에서 리처드와 함께 잇는 것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괴로워진다.

"마음은 딴 데 가 있군요!" 함께 춤을 추던 벤이 에마의 몸을 흔들며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에마는 제정신으로 돌아와 어색하게 얼굴을 붉혔다.

"미안해요."

"그 행운의 사나이가 누구요?"

"누구.......?" 에마는 멍해졌다.

"숨겨 봐야 소용없어요. 아무리 시치미를 떼려 해도 당신이 리크의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여자는 누구나 꿈을 꾸는 법이에요." 에마는 그 말을 피하려 했다.

"나는 어때요? 사랑하고 있어요, 꼬마 아가씨." 에마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는데, 댄스가 끝나자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벤은 너무도 열심이었다. 요전에도 잘 자라는 키스를 해달라고 졸랐을 정도였다. 리타가 알면 무섭게 화를 낼 것이다. 그녀는 벤의 상대로 부자 집 외동딸을 고르고 있으니까. 다음의 레코드가 걸렸는데도 벤은 에마를 마일즈에게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마일즈하고 추고 싶지 않지요?" 벤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마일즈는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농담으로 대꾸했다. " "

"나도 자네만큼 능하면 좋으련만, ."

에마는 마일즈에게 팔을 잡히면서 베로니카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리타에게 뭐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왜 둘은 저렇게 경멸의 눈초리로 에마를 보고 있는 것일까?

마음이 무거워진 에마는 정원으로 산책을 나가자는 마일즈의 제의에 기꺼이 응했다.

"조금, 기분이 나빠요. 당신은 괜찮아요?" 마일즈가 말했다.

", 좀 더 빨리 말해 주시지 그랬어요. 무엇을 좀 가지고 올까요?"

"아니 신선한 공기 속에서 당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만 있으면 돼요."

두 사람은 테라스를 나와 오솔길로 들어섰다. 마일즈를 만난 것은 그와 베로니카와 차를 마신 뒤로 이것이 처음이다. 그 뒤로 에마는 만나기를 거절해 왔던 것이다. 이렇게 둘이서만 있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마일즈는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그리고 집이 바로 가까이 있으니까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자기에게 남자를 끄는 힘이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진지하게 에마에게 끌리지 않았다면, 벤이나 마일즈가 그녀에게 구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구혼 뒤에는 나쁜 의도가 숨어 있는 수도 있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나에게 이혼해 달라는 부탁을 할 수 있을까?

"이야기라니 무엇인가요?" 에마는 한참 후에 물었다.

"당신과....." 마일즈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당신과 당신의 결혼에 대한 거요."

"그것은......" 에마는 망설였다. "나는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리크와 나, 둘이서 생각할 일이에요, 언젠가 내버려 두어 달라고 했었지요."

"나와 상관없다는 이야기군요. , 에마,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아줬으면 해요, 당신도 나한테 호의는 갖고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이 결혼했다는 것을 잊은 적이 없어요.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끊임없이 나를 상하게 하고 괴롭히는 그 사실을? 유일한 위안은 당신의 결혼이 보통 결혼이 아니라는 것이오. 리크가 그것을 인정했다고 베로니카라 그러더군요."

"마일즈, 그만 해 둬요!" 리처드가 함부로 지껄였다는 것을 알고 에마는 충격을 받았다. 에마는 자기들의 결혼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잠자코 있기는 힘들었으나,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에마!" 마일즈는 에마의 곤혹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마일즈가 급격히 이성을 잃어 가고 있음을 알아차린 에마는 겁을 먹기 시작했다. "에마, 당신을 원해요- 아내로 맞고 싶어요.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과 결혼해서 죽을 때까지 함께 살고 싶어요."

이게 무슨 꼴이람. 이 섬의 남자들은 모두 머리가 이상한 것 아닐까. 아니-침착해야지, 하고 에마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어리석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벤과 마일즈뿐이다. 그러나 벤은 리처드의 배다른 동생이고 마일즈가 베로니카의 오빠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이런 애기가 조금이라도 리처드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는 격노할 것이다. 에마는 떨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뭐라고 말 좀 해요, 에마. 나의 마음은 알고 있겠지. 당신의 마음은 팔찌를 받아 줄 때까지는 모르겠지만....." 마일즈의 손이 에마의 굳어진 어깨를 잡았다.

"그녀를 놓아, 레이!"

에마는 흠칫 놀라 돌아다 보았다. 벤이 새파래진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나의 것이다, 나가줘!"

마일즈는 조용히 대꾸했다.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 자네가 이 여자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다는 거지. 그리고 이 여자는 자네를 좋아하지도 않아."

그 뒤의 일은 마치 악몽과 같았다.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는 벤은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분노를 발산하려고 했다. 분노에 사로잡힌 그는 이성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이런 사태에 겁을 먹고 두 사람 사이를 잽싸게 가로막고 선 에마는, 그 순간 벤의 주먹을 볼에 맞았다.

벤은 에마가 외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들렸어도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벤은 줄곧 마일즈 레이를 혐오하고 있었으므로, 쌓여온 원한을 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눈이 어두워 있었는지도 모른다. 벤은 정신없이 에마를 밀어냈고, 에마는 가시덤불 속으로 나가떨어졌다.

순간 정신이 아뜩해졌다가 가까스로 눈을 뜬 에마는 두려움에 떨며 아무 소리도 못한 채,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벤은 젊고 힘도 세다. 벤의 주먹을 정면으로 맞자 마일즈는 쾅하고 나가 쓰러졌다.

그러나 마일즈도 지고 가만있지는 않았다. 다시 필사적으로 말리려는 에마를 밀쳐 버리고 일어섰다. 누군가에게 팔을 잡히고, 그것이 누군지도 모르는 채 에마는 그 자리에 다시 쓰러졌다. 자신의 무력함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에마 앞에서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키가 크고 떡 벌어진 어깨에 당당한 체격의 사나이였다. 사나이는 곧 상황을 파악하고는, 다투고 있는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에는, 다른 두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분노가 떠올라 있었다.

겁을 먹고 에마는, 상처를 입고 눈물에 젖은 얼굴을 가기고 리처드를 보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그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였으면 하고 생각했다. 리처드가 사나이들을 향해, 숙녀 앞에서는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퍼붓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나를 알아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소원은 헛일이었다. 갑자기 에마 쪽으로 돌아선 리처드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에마? 내가 잠깐 없는 사이에....."

잠깐이 아니라 그는 7주간이나 집을 비웠던 것이다. 그러나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에마는 충격과 오열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잠깐, 콘웨이. 내가 설명하지." 마일즈는 새빨개진 얼굴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위엄을 되찾으려 했다.

"닥쳐!" 리처드는 홱 등을 돌렸다.

벤은 증오에 찬 눈으로 마일즈를 노려보고 있었다. 리처드가 뛰어들지만 않았으면 자기가 이겼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 화풀이를 배다른 형에게 하였다.

"마일즈는 에마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에마가 그의 데이트 신청에 응했기 때문이야."

리처드는 갑자기, 아내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엄격한 얼굴을 집 쪽으로 가리켰다.

"저리 가 있어!"

에마는 리처드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마일즈와 벤을 위해 해명을 하고 싶었으나, 너무도 당혹한 나머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리처드의 분노만이 그녀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다. 리처드는 틀림없이 전보다 더 나를 싫어할 것이다. 그것은 불에 입은 상처의 아픔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한 고통이었다.

이층의 침실로 온 에마는 리처드의 분노에 짓눌린 듯 침대에 쓰러졌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드레스를 벗고는, 영국에서 입고 있던 헌 올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몸에 익은 따사로움이 전신을 감싸주었다. 아열대의 밤은 꽤 더웠으나, 너무도 큰 두려움에 에마는 덜덜 떨고 있었다.

리처드가 들어왔을 때까지도 에마는 그대로 웅크리고 있었다. 에마는 벤의 주먹과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베개에 파묻어 감추었다. 리처드의 분노가 가라앉기를 바랐으나, 목소리로 보아 아직도 그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은 것 같았다.

"잠시만 눈을 돌려도 당신은 결혼 전의 상태로 돌아가 버리는군." 거친 말투였다.

"무슨 뜻이지요?" 에마는 낮은 소리로 되물었다.

"매춘부야!"

에마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내 탓이 아니에요, 그렇게 된 것은."

"그럼 누구 탓이지? 당신이 두 사람이 맞붙어 싸울만한 말을 한 게 아닌가." 리처드의 시선이 등에 와 꽂히는 것 같았다.

"나는 어느 쪽에도 마음을 허락한 일이 없어요. 두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를 묘한 말만하고....."

"무슨 말을?" 리처드는 날카롭게 추궁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벤과 마일즈에게 구혼을 받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지금쯤은 마음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리처드는 두 사람의 의도를 본심이라곤 판단치 않을 것이다.

"남자는 아무 이유 없이 여자 문제로 다투거나 하지 않아. 당신은 아름답지만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니까. 이유는 한 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군." 리처드는 내뱉듯이 말했다.

너무 심한 말에 마음이 크게 상한 에마는, 흐느낌을 억누르고 쏘아붙였다.

"부당해요!"

"부당하다고! 나는 자칫하면 살인을 할 뻔했어, 당신의 행동에 대해 충고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충고요?" 에마는 어리둥절했다.

"당신이 값비싼 보석을 마일즈에게서 받았다고."

"받지 않앗어요! 그가 나한테 선물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거절했어요!"

"거짓말은 그만 해 둬!" 리처드는 경대 서랍을 열더니, 문제의 팔찌를 끄집어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자랑을 했으면서, 왜 나한테는 보여주지 않지? 뭐라고 변명을 할 참이야?"

에마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상처 입은 얼굴 따위는 잊어버리고 팔찌를 들여다보았다. 이 팔찌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날 밤 마일즈의 차 안에서였다. 마일즈도 에마의 말을 겨우 납득해 주어, 그것을 차 안에 둔 채 집 안으로 들어갔었다. 나중에 집까지 바래다 줄 때에는 팔찌는 이미 차 안에 없었으나, 에마는 그 일은 말하지 않았다. 마일즈가 집에 들어가기 전에 치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누군가가 몰래 그것을 에마의 서랍 속에 넣은 것이다. 그런데 누가? 에마는 반짝이는 보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줗을지....... 왜 이것이 여기 들어 있는지 짐작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야?" 리처드는 모욕적인 어조로 말하며 팔찌를 호주머니에 집어넣더니, 에마의 손을 잡아 끌어 침대 위에 일으켜 앉혔다.

리처드의 얼굴이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으므로 자신의 비참한 얼굴을 생각하고 에마는 눈을 감았다. 최근에 얻었던 아름다움은 다 사라졌을 것이고 헌 가운으로 해서 몸의 곡선도 가려져 있을 것이다. 리처드의 손의 감촉에 몸을 떨면서 에마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것을 받았다면, 왜 오늘 밤에 끼지 않았겠어요. 당신 말대로 경박한 여자라면 자랑하고 싶었을 것 아니에요?"

"그럴 테지."

"왜 확인해 보지 않는 거지요?"

"잠자코 있어!"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이 어깨에 파고들었다. "당신의 거짓말은 더 아상 듣고 싶지 않아. 당신 집안은 모두가 거짓말의 천재인 것 같군. 특히...... 당신은 나와 만난 뒤로 문제만 일으켰어. 그래도 아직 모자라나?"

"나를 그처럼 경멸하면서도 여전히 이용은 할 생각이군요."

"목적만 달성하면 돼." 리처드는 상처 난 에마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보다, 우선 당신을 세인트루샌더에 데리고 가는 것이 나을 것 같군. 그러지 않으면 모두들 내가 당신에게 주먹을 휘두른 줄 알 테니까."

"벤과 마일즈 때문이에요." 또 눈물이 솟았다. "하지만,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에요, 내가 말리다가 맞은 거예요."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하지?" 비꼬는 듯한 말투다. "아내 탓이 아니다, 아내의 두 연인이 그녀를 쟁탈하려 했을 뿐이다, 라고 말해야 하나?"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입 다물고 있어. 세인트루샌더에 가서, 내가 용서할 마음이 생길 때까지 거기에 머무르는 거야. 몇 주일 동안 나하고 단둘이만 있으면, 당신도 조금은 정신을 차리게 되겠지."

리처드가 나에 대한 애정에서 세인투루샌더에 가자고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러나 지금 에마는 단둘이서 섬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감출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그는 나에게 증오밖에 품고 있지 않은데.

"영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에마는 쉰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그렇게 되면, 영국 사람들도 당신의 상처가 내 탓인 줄 알 거야. 나는 아직 브랜티에게 우리들의 결혼이 파국을 맞은 것을 보이고 싶진 않아."

"벤과 마일즈 탓이라고 했잖아요."

"두 사람 다 그 보상은 받을 거야." 리처드의 눈에 악마와 같은 빛이 깃들었다. "당신이 지금 괴로워하고 있는 이상으로 그들도 괴로워하게 될 거야."

"리크!" 에마는 놀랐다. "당신......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지요- 나한테는 그럴 만한 값어치가 없어요." 리처드를 트러블에 끌어 들이고 싶지 않아서 에마는 어떻게든지 그를 말리려 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누구의 보살핌이 없어도 자신의 일은 스스로가 할 수 있어. 내일 아침, 베라스코에게 당신을 세인트루새더에 데려다 주라고 하겠어. 나는 나중에 갈게."

강경한 말투에 에마는 그만 위축되었다.

"부탁이에요, 리크. 그런 일만은 참아 줘요, 그런 벌을 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어요."

"내가 들은 이야기하고는 다르군. 당신은 몰염치한 행동을 했어. 개들도 손에 들어오지 않을 뼈다귀 때문에 다투거나 하진 않는 법이야."

"나는 가지 않겠어요!" 저항해야 헛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에마는 소리쳤다. 리처든는 에마가 억울함을 호소한다 해서 맏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나쁜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당신은 가야해!" 에마를 노려보는가 했더니, 리처드는 갑자기 그녀를 끌어당겨 항의하려는 입술을 키스로 막았다.

에마의 마음속에서 증오가 불타올랐다. 그러나 끌어 안기어 몸속에서 불꽃이 일기 시작하자, 몸이 마음을 배신하는 것을 또 깨닫게 되었다.

리처드는 격한 짧은 키스에서 얼굴을 들었다.

"내가 섬에 데리고 갔던 여자들은 모두 섬을 싫어했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문명사회로 돌아오고 싶어 했던 거지. 당신은 좀처럼 돌아올 수 없겠지만,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약속하지. 참을 수 없을 테니까."

이튿날 아침, 베라스코가 리처드의 모터보트로 에마를 섬까지 데려다 주었다. 보트엔 특별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고, 주인님은 이것으로 바라쿠다 낚시를 간다고 베라스코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힘찬 엔진이 파도를 가르고, 바베이도즈는 눈 깜짝할 사이에 등 뒤로 사라졌다. 에마는 처음에, 리처드는 이런 값비싼 보트를 용케도 남에게 맡길 수 있구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엣날에 아버지와 그의 친구들과 뱃놀이를 한 경험으로 곧, 베라스코의 솜씨는 매우 노련함을 알아 차렸다. 에마는 안심하고 벽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 협박하는 듯한 말을 남기고 리처드는 방을 나갔다. 그러나 몇 분 후에 따끈한 우유와 브랜디를 들고 들어오더니, 에마가 다 마실 때까지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방을 나갈 때에는 문을 잠그고, 누가 오더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명령했다. 에마는 시키는 대로 했으나 다행히 아무도 찾아오지는 않았다. 리처드가 가져다 준 약을 얼굴에 바르고 에마는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에 리처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문을 노크하고, 준비는 다 되었느냐고 물으러 온 것은 베라스코였다. 아침 일찍 다른 하인들이 일어나기 전에 두 사람은 집을 살그머니 빠져나왔다. 리처드는 어딘가에서 보고 있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고 에마는 생각했다.

지금, 파란 카리브 해에 눈길을 주며, 에마는 자신의 앞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어젯밤 분노로 굳어졌던 리처드의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할 셈인가? 헤어질 시기가 올 때가지 에마를 세인트루샌더에 가두어 둘 작정일까? 빛나는 태양 아래서 에마는 지친 눈을 감았다. 그의 섬을 보고 싶다고 줄곧 원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던 것이다. 가끔 베라스코가 이상하다는 듯이, 에마의 상처 입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리처드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으련만, 하고 에마는 쓴 웃음을 지었다.

"정원에서 나무에 부딪쳤어요." 에마는 결국 말을 했다. 특별히 설명할 작정은 아니었으나 덤불에 나가 쓰려졌던 것도 사실이고, 그것으로 납득해 주면 되었다.

"그랬군요, 아가씨." 믿지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베라스코느 대답했다. "정말 큰일날 뻔하셨군요."

"주인이요." 에마는 베라스코가 아가씨라고 말한 것을 정정시키려고 강조하듯이 말했다. "주인이 약을 주었으니까, 금방 나올 거데요."

"어떤 상처건 금방 나을 겁니다." 베라스코는 열심히 말하고 검은 얼굴을 흔들어 보였다.

에마는 어깨를 움츠렸다. 정말로 그럴까......

세인트루샌더는 바베이도즈와 전혀 달랐다. 에마는 그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젯밤의 피로로 도증에 꽤 오래 잠을 잔 에마로서는 지금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에마는 잠에서 깨어난 후 베라스코가 듬뿍 마련해 준 커피를 마시며, 앞으로의 일을 멍하니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섬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베라스코의 말에 의하면 인구도 꽤 많은 듯, 사탕수수 농원에서 일할 때 외에는 저마다의 할 일이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초록빛 후미에 닿았다. 에마는 자신의 얼굴이 그곳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몹시 신경이 쓰였다. 화장을 짙게 하기는 했으나 상처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아무도 에마가 리처드 콘웨이의 아내인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고, 베라스코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마는 그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작은 섬에서는 그런 일을 끝까지 감출 수는 없을 것이다.

운전수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베라스코는 정중히 에마를 부축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살핀 다음 운전수에게 출발을 명령하였다.

길은 나빴으나, 섬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에마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세인트루샌더의 모래는 은빛으로 빛나고, 파란 바다로 둘러싸인 섬을 푸른 산이 지키고 있었다. 분명히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리처드가 말하던 외로움을 상상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에마의 등에 갑자기 전원을 치달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이곳을 떠날 때, 자기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여자가 되어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무서운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집에 도착해 보니, 자기는 여자들에겐 그다지 인기가 없다고 하던 리처드의 말이 납득이 갔다. 넓고 튼튼하게 지어진 집이었으나, 베로니카나 브랜티가 좋아할 만한 곳은 아닌 것 같았다.

이층에는 큰 침실이 네 개 있고, 무게 있어 보이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침대 옆에 페이퍼백이 쌓여 있고, 서랍장 안에는 두세 벌의 셔츠가 들어 있었다. 에마는 그것을 확인하자 그 방에서 가장 먼 방을 자기 방으로 택했다.

가정부는 조세핀이라는 프랑스계의 사람이라고 한다. 그녀가 딸을 보내 시중을 들게 해주었으므로, 에마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도 그날 밤은 저녁을 먹고 나자, 녹초가 되어 침대에 그냥 쓰러지고 싶을 정도였다. 걱정이 되어 커피와 티를 가져온 조세핀에게 에마는, 피곤할 뿐이니까 내일 아침이면 괜찮아질 거라고 열심히 안심시켰다.

그래도 조세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방을 나가자, 에마는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쳐다보며, 리타와 게일은 자기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리처드가 돌아온 뒤로는 두 사람을 만나지 못 했다. 리처드가 에마의 갑작스러운 출발을 어떻게 설명했을지 조바심이 낫다. 그리고 생각한지 않으려 해도, 서랍에서 나온 마일즈의 팔찌에 대한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어떻게 그게 그곳에 있었을까? 마일즈가 그랬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사람밖에 그럴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선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마일즈가 그런 방법을 썼기 때문이지, 에마가 자진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마무리 변명해도 리처드는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린 에마는, 이윽고 아침이 되어 일어나게 된 것을 오히려 기쁘게 생각했댜. 재빨리 숏패츠와 셔츠를 입고 세수를 하며 거울을 보니 얼굴의 상처가 걱정했던 것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었으나, 어제보다는 훨씬 좋아져 눈에 별로 띄지 않았다. 아름다워진 몸의 선도 그대로였다. 리처드는 아직도 그 변화를 모르고 있다. 코랄하우스의 침실에서 언쟁이 있었을 때, 그는 전과 똑같이 에마를 다루었고, 에마의 마음도 옛날처럼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리처드에게는 영원히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장밋빛 안경도 있고 검정 안경도 있어서 그것을 쓰고 있으면, 사람은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섬에서의 시간은 천천히 지나갔다. 절박한 걱정거리도 없었으므로 에마는 한가하게 지내고 있었다. 물론 친절하게 대해 주는 덕분에 마음 편히 섬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탐험하고 헤엄치고, 뜨거운 모래에 눕고 하는 동안에도, 베라스코가 멀리서 지켜 주어 있었다.

리처드의 가족이 베라스코를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는 에마는, 바베이도즈의 집을 오래 비워두어도 괜찮으냐고 그에게 물은 일이 있었다.

"괜찮을 겁니다. 오실 때까지는 돌아가면 기뻐할지 모르지만, 주인님이 오실 때까지는 돌아가지 못합니다."

리처드가 나타난 것은 일주일이나 지나서였다. 인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아름다운 섬에 나를 혼자 가두어 둘 참인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느 날 밤, 해안에서 돌아온 에마는 저녁 식사 전에 갑자기 나타난 리처드와 딱 마주쳤던 것이다. 층계를 반쯤 올라가던 리처드는 차가운 표정으로 에마를 돌아다보았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에마를 찬찬히 바라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주방 쪽을 통해 집으로 들어와 베라스코와 막 헤어진 에마는 놀라움에 얼굴이 새파래졌다. 창백해진 얼굴에는, 거의 없어진 상처 자국이 다시 떠올라 보였던 것이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에마는 이 동요를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너무 자세히 보니 말았으면 좋겠다-리처드의 뒤를 따라 층계를 올라가면서 에마는 믿었다. 가늘게 뜬 리처드의 눈이, 매끄러운 에마의 살결과 날씬한 몸매를 살피듯이 훑어보고 있었다.

마음을 잡은 것 같군."

리처드의 시선에 위축되는 것 같던 에마는, 그의 예사로운 말에 놀랐다.

"." 리처드의 냉정함을 본뜨려 했으나, 헛일이었다. "." 에마는 힘주어 다시 대답했다.

리처드가 고개를 끄덕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에마는 초조해서 물어 보았다.

"어떻게 오셨지요?"

"배로. 배는 몇 척이 있으니까. 도중에서 잠깐 낚시질도 하고 왔지."

"그래요....." 그러면 서둘러 온 것은 아니다.

리처드가 갑자기 등을 돌렸다.

"식사 전에 샤워를 좀 하고 싶어. 당신도 이층에 가겠소?"

". 저녁식사를 하려면 드레스를 입는 것이 좋겠지요?"

"어느 정도는 단정하게 해주었으면 좋겠소. 바베이도즈에 있을 때처럼 의례적일 필요는 없지만."

", 그래요." 에마는 입속으로 얼버무렸다. 더 중요한 일로 머릿속이 가득한데 왜 이렇게 하찮은 말만 하고 있는 것일까. 리처드 때문이다. 리처드의 빈정거리는 듯한 시선을 받으면 침착성을 잃게 된다. 왜 그는 이렇게 나를 쳐다보는 것일까? 뒤를 따라가고 있는 에마를 리처드는 몇 번이고 돌아다보았다.

"짧은 드레스 정도는 있을 것 아니오?" 리처드의 시선이 숏팬츠 밑으로 나와 있는 긴 다리로 쏠렸다.

그는 왜 빈정거리고 있는 것일까?

"해안에 가느라고 그랬어요." 에마는 변명을 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사과만 하게 된다.

자기 침실의 문에 손을 대며, 리처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나 에마가 지나쳐 가려고 하자, 그녀의 팔을 잡았다.

어디로 갈 참이지?"

"내 방에요." 에마는 리처드의 얼굴을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또 빈정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겠지. "여기에는 이어진 방이 없어서 저쪽 방을 택했어요. 있기가 아주 편해요......"

"나하고 있으면 있기 불편하다는 뜻인가?"

리처드의 말투에는 무엇인가 에마의 몸을 굳어지게 하는 것이 있었다.

". 당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가? 여기는 내 방이야. 그것은 즉 당신의 방이기도 하다는 뜻이야."

에마는 동요를 눈치 채이지 않으려고 손의 떨림을 억눌렀다.

"하지만......콜랄 하우스에선 방을 따로 썼잖아요!"

"그래, 당신이 나와의 결혼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던 거야. 그러나 아량을 베풀면 오히려 보답을 받지 못하는 법인가 봐. 다른 남자들에게 앞지름을 당하다니."

"당신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리크?" 에마는 떨면서도 그의 참마음을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 나는 장님이 아니라는 뜻이야. 정원에서 큰 소동이 있은 뒤, 방에서 당신을 않았을 때 난 당신의 반응을 느낄 수 있었어. 눈을 감은 당신은 레이나 벤을 생각했겠지만, 키스를 하는 방법으로 나는 알았어, 당신이 여러 가지를 배웠다는 것을." 파란 눈이 쏘아보듯이 에마를 보았다.

리처드가 비친 뜻을 알아차린 에마의 눈에 분개의 눈물이 번졌다.

"나는 당신 이외의 사람과 키스한 일 없어요!" 충동적인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 말을 들은 리처드는 얼굴을 젖히고 웃었다. 그다지 유쾌해 보이는 웃음이 아니어서 에마의 마음은 몹시 아팠다. 얼마나 무서운 모욕인가. 다음 순간, 리처드의 얼굴이 분노로 흐려졌다.

"더 이상 거짓말을 하면 나늘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말싸움에 이치는 통용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든 리처드는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에마는 필사적인 생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쪽 방에서 자게 해주세요. 당신이 그처럼 나를 싫어하고 있는데 같은 방에서 잘 수가 있겠어요?"

리처드는 그 애원을 무시하고 명령했다.

"당신의 소지품을 가지고 와요, 결혼 생활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함께 있는 동안은 서로 즐겨도 불편할 건 없잖아. 보통 부부처럼 살도록 하자구, 헤어질 때까지는."

에마는 혼란을 일으키며, 리처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일단 이치에 닿는 듯했으나 그는 당치도 않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리처드가 내심 끓어오르는 듯한 분노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안 에마는, 묘한 두려움에 몸이 떨려 옴을 느끼고 거역할 용기를 잃었다.

"옷을 갈아입고 소지품을 챙기겠어요."

리처드는 엄격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이고는 에마의 팔을 놓았다.

방을 돌아가자 에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생각에 쫓기면서 정신없이 샤워를 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던 심플한 면 원피스를 입었다. 리처드는 저녁식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라고 하겠지만, 이런 험악한 분위기에서 함께 식사를 해 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나중에 후회할 일을 하기 전에 리처드가 제정신으로 돌아와 주었으면 좋으련만. 더 이상 거역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방에 대한 문제는 다시 생각해 줄지도 모른다- 에마는 마음속을 그렇게 되기만을 빌었다.

리처드의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그 뒤로는 몇 분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므로, 에마는 그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으려니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방을 나가려는 순간 리처드가 불쑥 들어왔다.

에마의 당황해 하는 모습은 아랑곳하지 않고 리처드는 말했다.

"짐을 날라다 주지. 남자들이 추어주는 바람에 들떠 있던 마음은 가라앉은 모양이지만, 아직 당신의 부정한 마음이 가라앉았다고는 볼 수 없으니까. 위험은 범하지 않은 게 최선책이야."

어쩌면 이렇게 모욕적인 말만 할까!

"아직 짐을 꾸리지 않았어요." 에마는 우물거렸다. 리처드가 웃었다.

"복도 저쪽으로 옮기는 건데, 짐을 꾸릴 필요가 뭐 있어."

리처드가 조심스럽게 드레스를 끌어안는 것을 보자, 에마는 거역할 용기를 잃고 말았다. 그는 방으로 가더니 옷들을 서랍 속에 차곡차곡 넣고, 롱드레스는 양복장의 그의 슈트 옆에 걸어 주었다.

"이것으로 됐지?"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리처드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이 방에서 두 사람, 편하게 살 수 있어."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진심으로 이방의 커다란 헌 침대에서 함께 잘 참인 가? 에마의 창백해진 볼이 발그레해졌다.

"리크......약속은 이렇지가....."

"마일즈 레이의 일도 약속에는 없었어. 계약을 먼저 어긴 것은 당신 쪽이야, 나의 이름의 바베이도즈의 모래 속에 처박은 것은 . 그것만 생각해도 규칙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리처드의 얼굴에 떠오른 조소를 에마는 증오했다. 어쩌면 이렇게 비겁할까. 베로니카 레이와 자기와의 관계는 어떤 데 그는 이렇게 말하는 건가.

리처드의 도전하는 듯한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에마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그와 다투어 봐야 헛일이다. 그때 마침 종소리가 들렸다. 홀에 있는 큰 놋쇠 종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에마는 대답을 그만두고 이야기를 중단해 버렸다.

요리를 날라 오는 동안, 리처드는 테이블 맞은쪽에서 에마를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에마는 그의 분노를 피부로 느끼면 자신의 행동이 그 정도로 리처드의 프라이드를 상하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리처드의 눈동자가 더욱 번뜩이자, 그가 또 그 화제를 입에 올릴 것 같은 기미를 느끼고 에마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캐나다에서의 이야기는 아직 해주지 않았어요."

"여느 때나 같아." 하녀가 물러가자 두 사람은 요리에 손을 댔다. 오늘의 요리는 특별히 정성을 들여 만든 것 같았다. 주인님이 오면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쉬림프 칵테일이 굉장히 맛있었다.

리처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마는 그가 캐나다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싶었다. 같이 생활한 지 얼마 안 되는 상대에게는, 이야기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편지도 전화도 해주시지 않았지요?" 하고 말하는 에마의 눈에서 눈물이 솟아올랐다.

"기다리고 있었나?" 날카로운 어조로 리처드가 물었다.

"아니요, 하지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어요. 혼자서......외로왔어요."

"외로움을 참지 못해서 다른 남자들에게서 위안을 구했다는 건가?"

에마는 당황했다.

"......가끔 벤과 만난 것은 사실이에요. 여러 가지 일을 배웠어요."

"인제 그런 일도 없겠지. 그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으니까."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요? 에마는 리타의 분노를 생각하고 몸을 떨었다.

"아무튼 가기로 되어 있었던 거야."

"하지만 그렇게 금방은 아니었잖아요."

"별로 많이 앞당겨진 건 아니야."

에마는 소리쳤다.

"벤으로서는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요, 나쁜 이유로 갑자기 당한 일이라면."

"그렇진 않아." 리처드는 잔을 비웠다.

"당신과 벤은 사이가 좋았어요, 벤은 당신을 존경하고 있었고,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하지만 나......"

"그만 해 둬, 모든 것은 결말이 났으니까."

"그럼, 마일즈는요?" 에마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 사람은 어떻게 했나요?"

"이윽고 본심을 드러내는군!" 리처드의 입술에 잔혹한 웃음이 떠올랐다. "마일즈는 당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느라 필사적이었어.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신의 경우와 같은 그것을 뒷받침해 줄 증거는 없는 거야."

"당신은 그 사람을 책망하지는 않았겠지요?"

"팔찌를 돌려주고,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가를 솔직히 이야기해 주었어."

그 상황을 상상하고 에마는 떨었다. 리처드의 의기양양해 하는 얼굴을 보면 짐작이 갔다. 갑자기 화제를 바꾸고 싶어 에마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줄곧 캐나다에 있었나요?"

"아니."

"더 이상 이야기해 주지 않을 작정이에요?" "그것으로 충분하잖아." 비웃듯이 바라보며 리처드는 잔을 들었다. "이번에는 당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어때?"

"이를테면?"

"이를테면, 세인트루샌더에서의 여러 가지 생활 이야기라든지....."

"지루하지는 않았어요."

"이상하군." 리처드는 놀란 듯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혼자서 무엇을 했지?"

"별로 일은 하지 않았어요." 아무 일도 하지 않은데 대해 에마는 꺼림칙한 생각이 들었다. "조세핀이 무엇이든 다 해줘서요, 내 침대쯤은 내가 정리하겠다고 하는데도......."

"우리들의 침대야...... 오늘부터." 리처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에마의 볼이 매력적인 빛으로 물들었다. 이층으로 도망치고 싶든 충동에 사로잡혔으나, 이층에도 인제는 혼자 있을 장소가 없는 것이다. 어디로 가야하나. 냉소를 알아차린 에마는 무슨 말이든 해주고 싶었다.

"당신이 나 같은 여자와 침대를 같이하려 하다니 이해할 수 없군요."

그 이야기는 전에도 했잖아. 또 한 번 말하게 할 참인가? 당신은 불완전하지만 나의 아내고, 여기에는 달리 여자가 없어.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으니까. , 포도주를 마셔 버려요." 이야기는 끝났다는 듯이 리처드는 갑자기 명려했다.

가라앉은 기분으로 포도주를 마시고 나자, 에마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꽤 많이 마신 것 같았다. 가끔 세리를 한 잔 마시는 정도밖에 술은 입에 댄 일이 없었던 것이다. 라운지로 가 앉으면서 에마는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견디려면 몽롱한 머리가 차라리 낫다.

살며시 웃으며 소파에 파묻혀 앉은 에마의 눈을 리처드가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순간 에마는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걱정하지 말아요, 리크. 취하진 않았어요. 조금 머리가 어지러울 뿐이에요. 베로니카는 이렇게 되는 일이 없나요?"

"그 여자의 이야기는 하지 마." 리처드는 블랙커피를 에마에게 건네주었다. "질투하고 있자?"

"그렇다면 잘 된 거 아니에요. 당신은 내가 괴로워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모양이니까."

"그렇군." 리처드는 무표정하게 동의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군, 나 자신의 욕구불만을 초래할 뿐이니까. 커피를 마셔. 늦었어."

그렇다. 에마는 일부러 천천히, 오랜 시간에 걸쳐 식사를 한 것이다. 생각하기도 두려운 순간을 되도록 늦게 맞으려는 듯이. 지금 리처드가 늦었어라고 한 말을 듣고 에마의 심장은 마구 뛰기 시작했고, 팔다리에서는 힘이 빠졌다. 온몸이 리처드의 매력에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리 와요." 시선이 마주치자, 리처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안 돼요!" 에마는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나는 나의 침대로 가겠어요, 나 혼자 잘 침대로. 놀리는 것은 다른 여자에게나 하세요."

리처드의 눈동자에는 엄격함이 더해졌다.

"매일 밤, 이런 놀이를 하고 있는 건 아니야. 당신은 앞으로 내가 하는 대로 따라와야 해. 그러니 이러쿵저러쿵하지 마!"

그 강한 어투에 에마는, 마음과는 달리 사과의 말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리크. 화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이제 자고 싶어요."

"아직 열 시밖에 안 됐어. 이렇게 일찍 잘 생각이야?" 좀 전에는 늦었다고 했으면서!

"이곳에 온 뒤로는 줄곧 열 실 이전에 잠자리에 들었거든요. 농장에서도 언제나 일찍 잤어요." 에마는 쌀쌀하게 말했다.

"언제나? 렉스 올리버가 그렇게 일찍 자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남자들이 당신의 어디에 끌리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당신의 몸의 선이 전에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는데."

"렉스는 그런 일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럴까?"

에마는 리처드가 내뱉듯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있는 힘을 다해 설명할 말을 찾고 있었다. 그런 에마를 리처드가 끌어당겼다. 작게 신음소리를 낸 에마를, 리처드는 말없이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리처드의 팔에 잡힐 듯하게 되자, 에마는 소리를 질렀다.

"부탁이에요, 리크. 놓아주세요!"

"안 돼." 따뜻한 숨결이 에마의 얼굴에 닿았다. "오늘 밤엔 당신은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나와 함께 있어야 해."

"리크!" 리처드가 진지하다는 것을 깨닫자, 에마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사랑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지요?"

"사랑 따위가 무슨 상관이 있지? 당신은 지금까지 함께 잔 사나이들을 모두 사랑했다는 건가?"

답변을 읺은 에마의 눈에 절망의 눈물이 번졌다. 에마의 몸은 완전히 리처드의 품속에 있었고, 입술도 리처드에게 정복당하고 있었다. 저항하려고 주먹을 들었지만, 그 주먹은 금방 힘을 잃고 저도 모르게 리처드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에마의 입술을 계속 덮치고 있던 리처드의 입술이 눈물에 젖은 에마의 볼을 다정하게 닦아주었다. 드레스의 단추에 손이 와 닿았다. 에마의 눈물도 애원도, 리처드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리처드의 손의 움직임을 느끼며 에마는 부끄러워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항할 수 없다면 견딜 수밖에 없다. 견딜까? 리처드에게 호응하듯이 자기 속에서도 눈뜨기 시작한 불을, 에마는 무시하려 하고 있었다. 리처드의 동작은 느렸으며, 느리기 때문에 오히려 자극적이었다. 에마는 무시하려 하고 있었다. 에마를 안아 올리더니, 그는 문을 빠져나가 침실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움을 청하려 해도, 집에는 그들 외에 아무도 없었다.

침실에 들어가자 리처드는 에마를 마루 위에 세웠다. 놓아주는가 했더니, 다시 에마의 몸은 끌어당겨졌다. 리처드의 손이 등에서 허리로 더듬어 내려가자, 에마는 자진해서 리처드에게 매달렸다. 리처드의 몸의 따뜻한 촉감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리처드의 입술이 볼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 입술의 감촉은 에마를 한순간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했다.

"리크, 부탁이에요, 그만해요." 에마는 속삭였다. 빈정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일즈 레이에겐 그런 말은 하지 않았겠지?"

"왜 믿어 주지 않지요?" 눈물이 쏟아져, 리처드의 가시 돋친 웃음소리에 에마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당신이 그자와 깊은 사이였다고 생각되는 증거가 있어. 나는 그것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야."

혼란 속에서 에마는 울음을 참으려 애쎴다. 이것은 나쁜 꿈에 지나지 않는다. 남자와 사귄 일조차 없는 에마가 이런 일을 당할 리가 없다. 에마에게는 남편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증거가 있더라도 나만 믿어 준다면......"

"믿으라구?" 리처드의 이가 에마의 귓볼을 깨물었다. "미안하지만 무리한 이야기야."

아픔에 자극을 받아 에마는 소리쳤다.

"왜 마일즈에게 물어 보지 않지요? 진상을 알 수 있을 텐데."

"사람 우습게보지 마. 그는 이미 자기의 것으로 했으니 결혼하고 싶다고 했어. 그러나 그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야."

"그밖에 무슨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는 야심에선지도 모르지."

"내가 언제나 그자보다 앞서 가고 있었으니까-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나의 아내를 훔치면 자신이 생기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왜 나 같은 걸? 나같이 지지리 궁상인 여자를......?"

"당신은 인제 지지리 궁상이 아니야." 리처드의 어조가 부드러워졌다. "내가 없는 동안에 당신은 이상할 정도로 변했어. 그러나 당신이 지니고 있는, 그 묘하게 청순한 인상이 나는 싫어. 속이는 것만큼 싫은 것은 없으니까!"

리처드는 어쩌면 이렇게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에마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도 개의치 않고 리처드는 에마의 어깨에서 드레스를 끌어내리더니 입술을 밀어붙였다. 에마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저항하려 했다.

"이런 짓을 하면 후회할 거예요, 리크!"

"상관없어, 나에게는 권리가 있어, 대가를 지불한 만큼 취할 권리가!"

"이미 취했어요......권리 같은 건 더 이상 없어요........"

"당신이 주려 하지 않는 것까지 취할 생각은 없어......." 깊은 숨결 속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 악마처럼 비꼬인 무자비한 사나이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인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오묘한 포옹에 사로잡혀, 감장의 파도에 밀려 내려갈 것만 같았다. 망설이다 보니 에마는, 리처드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자기의 열정에 겁을 먹고, 어리석게도 에마는 리처드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다시 몸부림쳤다. 그것이 리처드의 분노를 사서, 에마는 그의 엄격한 눈길을 받았다.

"나를 너무 애태우지 마!"

가차 없는 포옹 속에서 어느 결에 에마는 온몸이 불꽃에 휩싸여 리처드에게 응하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신음소리와 함께 리처드는 에마를 안아 올려 침대 위에 뉘었다. 그러고는 자기도 옆에 눕더니, 에마의 빛나는 머리를 손가락 휘어 감고, 정열이 고조됨에 따라 길고 격렬한 키스를 되풀이하였다. 감정의 흐름에 몸을 내맡기고 있던 에마는 한순간 물에 빠진 사람이 잠시 정신을 차리듯이 제정신으로 돌아가 리처드의 입술을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곧 그에게 꼭 안겨 더 이상 저항할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심장이 괴로울 정도로 심하게 뛰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불은 커져 있지 않았지만,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두 사람을 비치고 있었다. 리처드의 떡 벌어진 어깨와, 웨이스트에서 히프로 흐르는 뚜렷한 선에 에마는 압도되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남자를 본 일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에마는, 리처드의 남성적 매력에 수치마저 잊고 환희를 느끼고 있는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얼마 안 가서 자기를 쫓아 낼 남자에게 이런 감정을 갖다니....... 그를 사랑하고는 있으나, 그렇다고 이렇게 쉽게 항복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달리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가 아닌가- 이렇게 리처드를 매료시켜 나를 요구해 오도록 하는 것은.

에마는 한숨과 함께 고래를 살짝 끄덕이며 리처드의 목에 팔을 감았다.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쉰 목소리로 리처드가 속삭였다.

사랑의 말을 속삭여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다시 입술이 겹쳐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자, 에마는 모든 것을 잊고 말았다. 리처드의 정열이 고조되어 감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에마를 경험 있는 여자로 취급하고 있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에마는 감각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에게 겁을 먹으면서도 더욱더 그에게 바싹 다가가고 있었다.

리차드는 거역하려는 에마를 벌주듯이 자신의 온몸의 무게로 에마를 내리누르자, 에마의 모든 것은 리처드의 것이 되었다. 심한 아픔과 그리고 미지의 기쁨이 에마를 사로잡았으며, 마지막에는 격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에마는 신비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에마를 삼켜 버린 불은 아직도 연기를 뿜고 있었으나, 천천히 꺼져가고 있었다. 잠에 빠지기 전에, 연인의 품속에서 그 뒷맛을 음미하는 일이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흐느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에마는 당황했다.

리처드가 아까부터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것은 슬픔의 원인인지도 모른다. 그의 침묵의 이유가 무엇인지, 에마로서는 알 수 없었다. 에마의 미숙함이 불만이었을까. 리처드는 내가 경험이 풍부한 여자인 줄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아무 반응이 없었던 것에 화내고 있는 모양이다. 책망을 당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에마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에마는 정신없이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욕실로 가려던 순간, 에마의 몸은 리처드의 팔에 안겨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뭐라고 말하려는 에마를 막더니, 리처드는 욕실로 데려다 주었다. 눈물로 흐려진 눈에 리처드의 창백한 얼굴이 비쳤다.

그 뒤 다시 침대까지 에마를 데려다 주더니, 그는 그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살짝 닦아 주었다. 리처드는 이상하게도 에마를 지나칠 정도로 다정히 대해 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에마의 눈동자는 무거운 눈까풀이 내리덮여,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리처드는 가만히 누워 에마의 몸에 가벼운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 행동도 매우 다정스러웠다. 에마의 이마에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려 주는 리처드의 손이, 마음 탓인지 떨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마는 그 손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사랑하고 있다고 속삭이려 한 순간 잠에 빠져 버렸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리처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에마는 어지러운 생각 속에서 퍼즐을 맞추듯 어젯밤의 일을 생각해 내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퍼즐은 맞지 않는 곳투성이었다.

생각나는 것은 잠들기 직전의 일뿐이었다. 부끄러움이 다른 기억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리처드는 에마를 싫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표정이 엄격하고 눈동자는 차가왔으나, 에마를 혐오하는 것 같은 태도는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에마에게 다정스레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을 터인데......

뜨거운 볼을 베개에 묻으며 에마는 갑자기, 리처드가 침대 속에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가 있었다면 그 말도 하고 싶었다. 어젯밤에는 하지 못했던 말도 지금은 솔직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마는 떨면서 자신이 리처드의 것이 되던 순간을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그 멋진 기분을 재현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치달았던 번개, 리처드의 자제심까지 빼앗아 갈 정도로 격렬했던 것 같았다.

그 순간, 리처드의 팔에 잔혹할 정도로 힘이 주어지고, 밀어붙인 입술 밑에서 자신이 신음소리를 냈던 것이 어렴풋하게 기억이 났다. 그러자, 모든 것을 생각해 내려고 에마는 애를 태웠다. 그러나 역시 아무리 생각 해 내려 해도 모르는 부분이 남았다.

마음속으로 고대하고 있었는데도, 샤워를 하고 드레스를 갈아입을 때까지 리처드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일이 바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았으나 사무실에도 식당에도 리처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방으로 가니 조세핀이, 그는 외출했다고 일러주었다.

"세인트구샌더에서는 주인님은 언제나 바쁘십니다." 조세핀은 에마의 슬픈 듯한 얼글을 의아한 눈으로 보더니 커피를 타다 주었다.

그때 베라스코가 들어왔다. 바베이도즈로 돌아갈 준비가 다 된 모양이다.

"안녕히 계십시오, 젊은 마님." 흰 이를 보이고 웃었다.

젊은 마님? 그에게 이렇게 불린 것은 처음이다.

"리크를 만났어요?" 에마는 베라스코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주인님은 섬 저쪽에 계십니다."

베라스코의 표정을 보자 에마는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에마는 웃는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애섰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찾으러 가보겠어요."

"오늘은 기분이 매우 언짢으신 것 같던데요." 베라스코는 경고하듯이 말했다. "저녁에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으실 겁니다."

차가운 충격이 몸속을 치달았다. 바베이도즈에서의 생활과 같단 말인가? 저녁식사 때 외에는 리처드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일까? 아니, 성급히 생각할 것은 없다. 어젯밤 있었던 일을 리처드도 그렇게 간단히 잊지는 못할 것이다. 남자라면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오늘 아침만은 리처드도 일에 몰두할 수는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낙관적어로 생각하려 해도,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베라스코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고, 에마는 가까스로 아침식사를 했다.

리처드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하루가 지나가자 에마의 마음은 침울해졌다. 리처드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는 내가 많은 남자들과 사귀어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외출한 것은, 어찌 생각하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 셈이니까.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리처드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말았을 것이다.

에마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가서 시간을 보냈으나 헤엄칠 기분은 아니었다. 점심을 먹은 뒤 잠시 이층에 가서 침대에 걸터앉았으나, 문득 이럴 때 리처드가 갑자기 돌아오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 노예 같았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쓴웃음을 지으며 에마는 다시 바닷가로 가 종려나무 밑에 누워 그대로 잠에 빠졌다.

잠시 후에 눈을 뜬 에마는,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식사를 위해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그리고 새파란 실크드레스를 고르자, 그가 돌아오기 전에 준비를 마치려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그는 돌아오기나 할까? 베라스코와 함께 바베이도즈로 돌아가 버리고, 나중에 전갈을 보내오는 것이나 아닐까?

에마는 리처드가 들어왔을 때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웃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리처드는 뒷문으로 들어와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것 같았다. 꼭 맞는 바지를 입은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어젯밤의 일이 생각나 숨이 차 왔으므로 에마는 눈길을 돌렸다.

"좋은 하루였나요?" 에마가 가까스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리처드는 마실 것을 잔에 따랐다.

"그렇지도 않아." 리처드의 대답이 차갑게 느껴졌다. 베라스코가 말한 대로 기분이 나쁜 것일까? 미간을 모으고 있는 에마에게 다시 리처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어땠어?"

"베라스코가 떠난 뒤, 바닷가에 갔었어요. 달리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에마는 아직도 펑정한 마음으로 리처드를 볼 수가 없었다.

리처드는 에마를 흘끔 보고 위스키를 단숨에 마시더니, 또 잔을 채웠다.

"지루했나?"

대답하지 않고 있는 에마를 날카롭게 처다 본 리처드는, 그때야 비로소 에마에게는 마실 것을 따라 주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난 듯, 그녀에게 드라이 셰리를 권했다. 에마는 고개를 흔들어 거절했다.

자기의 행동이 어린아이같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에마는 술의 힘으로 자신이 대담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왜 리처드는 내가 지루했으리라고 생각했을까? 이 섬을 나가고 싶어 그런 말을 한 것일까? 마음대로 후미로 뛰어들면 될 게 아닌가! 에마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세인트루샌더를 좋아하고, 이곳에 있고 싶은걸!

"나는 여기가 좋아요." 리처드의 파란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에마는 분명히 말했다.

"만일 괜찮다면, 내일 뱃놀이에 데리고 가 줄게, 점심을 먹고 천천히 즐깁시다."

리처드가 가벼운 어조로 한 말은 에마를 매우 놀라게 했다. 리처드는 어쩔 셈인가? 고양이 노리개인 쥐가 되는 것은 질색이다. 그의 눈동자의 열성적인 반짝임도 믿을 수 없다. 에마는 갑자기 혼란을 일으켰다.

"당신은 바쁘잖아요."

리처드는 미간을 모으고 우물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러나 나는 오늘 하루, 여러 가지 일을 생각했어-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

리처드가 이런 식으로 우물거리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으므로, 에마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볼이 달아올랐다. 당황한 에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까닭도 없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뱃놀이 같은 것을 해서 시간을 헛되게 보내도 되는 거예요?"

리처드가 표정을 부드럽게 하고 놀리듯이 말했다.

"벌써 잔소리 많은 마누라가 된 것 같군!"

에마는 당혹하여 리처드를 쳐다보았다. 그의 어조는 부드러웠고, 얼굴에는 미소까지 짓고 있다. 동조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했으나, 에마는 곧 그 생각을 몰아냈다. 언제나 그것이 잘못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리처드가 변했다고 생각한 일이...... 리처드 콘웨이와 같은 사나이는 결코 서투르게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헤어질 때까지는 휴전할 작정인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튿날 함께 지낼 일로 마음이 무거웠다. 함께 있으면 리처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일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에마는 뱃놀이에 동행할 것을 승낙하고 말았다. 그나마 냉정한 어조를 유지한 것이 최소한의 위한이 되었다고나 할까. 어디에 갈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리처드가 계속 지껄이고 있는 동안, 에마는 그런대로 냉정하게 귀를 기울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의 리처드의 태도는 에마르 당혹케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에마에게 손은 대지 않았으나, 시선은 에마의 얼굴에 못 박혀 있었다. 내일의 작은 항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한 뒤 두 사람은 저녁을 먹었는데 그동안에 리처드가 두 번이나, 에마에게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것도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저녁식사 후에는 에마가 좋아하는 레코드를 틀어주고, 천천히 캐나다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일이었다.

리처드가 침대에 함께 와 주었다면 최고의 밤이 될 것이다, 에마는 내심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열한 시가 되자 리처드는, 내일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그만 자라고 했다. 자기는 할 일이 있어서 더 있다가 자겠다고 했다. 그리고 끝내 에마의 침대에는 오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옆 자리에 리처드가 잔 흔적이 없어서 에마는, 그는 아래층에서 잔 것일까 아니면 밤을 새운 것일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아침식사 때 얼굴을 마주한 리처드는, 아주 활기차 보였다. 그를 본 순간, 에마는 심장의 고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데님의 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리처드에게서는 남성미가 넘치고 있었다. 에마는 그의 품속에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리처드에게 자신의 마음의 동요를 눈치 채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렸다. 가까스로 기분을 가라앉혀 리처드의 얼굴을 보니, 그의 눈에도 억눌린 불꽃이 있는 것 같았다.

만으로 가는 동안, 에마는 자신의 걱정이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느꼈다. 베라스코의 조수 노릇을 하던 소년도 동행하게 되어, 조금 떨어져서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에마는 그의 존재가 신경에 거슬렸다.

"왜 저 아이를 데리고 가지요?"

"배 때문이야." 엄격한 어조의 말에 에마가 움츠려들자, 리처드가 덧붙여 말했다. "미안해."

그래도 걱정스러운 듯이 리처드를 쳐다본 에마는, 갑자기 그의 눈과 입 언저리에 주름이 잡혀있는 것을 보았다.

"간밤에 줄곧 주무시지 않았나요? 이층에는 올라오지 않은 것 같던데요." 말하고 난 뒤 에마는 리처드의 얼굴에 떠오른 초조한 빛을 보고, 자신의 충동적인 말을 후회하며 볼을 붉게 불들였다.

그러나 리처드는 다만, "할일이 많아서." 하고 말 할뿐이었다.

"농원은 감독에게 거의 다 맡기고 있는 게 아닌가요?" 에마는 파란 지평선으로 눈길을 돌렸다. "요전에 감독을 하고 있는 청년이 집에 커피를 마시러 왔었어요, 아주 유능해 보이는 사람이더군요."

"당신은 그런 얘기는 하진 않은 것 같은데."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리처드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다음엔 당신이 집에 없을 때 그가 올 거야. 인제 그가 올 일도 없겠지만....." 차가운 어조로 그는 강조했다.

에마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몸이 떨리는 것을 참았으나 넘쳐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당신은 결코 나를 믿으려 하지 않는군요!"

"바보! 내가 믿지 않는 것은 당신이 아니야. 에마." 리처드는 고조되어 가는 감정을 가라앉히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볼이 빨개진 에마의 얼굴을 리처드의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눈을 떼지 않겠다는 듯이. 그러고는, 나직한 목소리였으나 정열을 담아서 속삭였다. ‘난 그저께의 일을 잊을 수 없어, 당신을 처음으로 알았을 때의 일을 어떤 남자라도 당신의 매력에는 저항하지 못할 거야 당신을 알면 누구나 정신을 빼앗기고 말 거야."

리처드의 숨결이 거칠어짐을 느끼자, 에마의 몸은 열에 들뜬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리처드는 멈추려 하지 않았다. 에마도 그것을 말릴 생각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에마의 발은 리처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리처드를 부르는 에마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듣자 리처드는 제정신을 돌아온 듯 했다. 에마에게 두려움을 주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리처드는 에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미안해, 에마." 부드러워진 리처드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만 열중하게 되어........ 우리, 좋은 친구가 되는 길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마음이 맞을 것 같다고 생각지 않소?"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며, 에마는 뱃전으로 도망쳤다. 나의 사랑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일까? 이제 새삼 친구가 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에마의 마음은 인제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리처드에게로 기울어져 버렸다. 그와 헤어져야 할 때가 온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리처드는 에마를 뒤쫓아 오지는 않았으나, 몇 분 뒤 그는 커피를 가져 왔다고 소리쳤다. 마음이 가라앉을 시간을 준 것을 고마워하며 에마는 그의 곁으로 갔다. 그 뒤로는 아무 일도 없이 시간이 지나, 배는 무인도의 아름다운 백사장 앞에서 닻을 내렸다.

맑은 물 밑에 있는 산호초가 이국적으로 보였다. 점심식사 뒤 두 사람은 댄을 배에 남겨 둔 채, 고무보트를 바닷가에 대 놓고 산호초의 탐험에 나섰다. 그 아찔한 아름다움에 매료된 탓일까, 물에서 나온 뒤에 보니, 에마의 규뇌르켈(물속에서의 호흡장치)이 빠지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리처드는 가능하면 에마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그는 초조하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리 와 봐. 꼭 어린아이 같군!"

에마가 빼지 못하던 슈뇌르켈을 리처드가 눈 깜짝할 사이에 빼버렸다. 에마는 마지못해 항복했다.

"당신은 언제나 위대하군요."

"그래, 나는 위대해." 리처드는 에마의 코를 살짝 건드렸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해."

"여자에게도 평등한 권리가 있어요."

"나의 여자는 안 그래, 물론 나의 아내도."

리처드의 시선이 너무 격렬하여 에마는 저도 모르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그의 늠름한 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는 핸섬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나, 남성적인 매력이 넘치고 있다. 다른 남작 옆에 와 서면 여자같이 보일 것이다.

"리크." 에마는 숨을 들이마셨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그녀의 머릿속에 없었다.

리처드의 시선이 작은 비키니를 입은 에마의 몸 위를 더듬고 있었고, 다음 순간, 에마는 리처드의 품속에 있었다. 따뜻한 입김이 볼에 와 닿았다.

볕에 탄 에마의 어깨를 리처드의 손이 다정하게 쓰다듬고, 뜨거운 한숨과 함께 입술이 겹쳐졌다. 강하게 끌어당기자, 에마의 몸은 녹아드는 것 같았다. 댄만 가까이 없었더라면 리처드는 그 자리에서 에마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에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리처드는 에마의 등을 쓰다듬었다. 에마는 리처드의 넓은 등에 팔을 감아 거기에 응했다. 에마의 긴 머리를 리처드의 손가락이 헤쳤다.

그러나 에마가 몸을 부르르 떤 순간, 희미한 숨소리와 함께 리처드의 손이 그녀의 몸에서 떼어졌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므로 에마는 놀라서 리처드를 쳐다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그래요, 리크?"

리처드는 한순간 주저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어."

베로니카의 일도 그중의 하나일까? 이유가 무엇이건, 포옹이 풀린 데 대해서 에마는 고마워해야 할 것 같았다. 그날 밤 이래로 줄곧 방치 상태로 있었는데, 또 간단히 항복할 뻔했다. 굴욕감에 볼이 굳어져 에마는 배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댄이 손을 흔들고 있어요." 분위기를 바꾸고 싶은 에마는 생각나는 대로 지껄여 댔다.

리처드도 계기가 생겨 안심한 듯했다.

"인제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 하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처드의 어조에 기분이 상한 에마는, 바닷가에 대놓은 고무보트 앞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옷을 입는 게 좋지 않겠고? 숏팬츠를 입어 봐야 별로 다를 바 없겠지만, 그래도 댄이 날 밀어내고 당신을 낚아채 가는 걸 말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리처드가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에마는 동조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재치 있는 대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결국 입에서 나온 것은 씁쓸한 말이었다.

"나 같은 여자를 채 갈 사람이 있을라구요."

리처드는 얼굴이 엄격해졌다.

"이미 증거가 있어."

"증거라구요?" 리처드의 말뜻을 이해한 에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격렬하게 그를 쏘아보았다. "나를 사랑한다던 벤은 인사도 없이 떠났고, 마일즈 레이도 나를 도와 주러 올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그자를 사랑한다는 눈치를 보였었나?"

에마는 창백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정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까지도 무슨 말을 해도 믿어 주지 않았는데.

"잊어 줘, 에마." 리처드의 얼굴은 파래졌다. "대답이 뻔한 것을 물어서 미안해. 나는 언제나 이처럼 어리석은 말만 한다니까."

댄은 고무보트가 다가가는 소리에 잠이 깬 모양이었다. 인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놀란 얼굴을 했다.

"언제라도 다시 올 수 있으니까." 리처드는 에마를 보며 뜻있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언제까지나 세인트루샌더에 계실 건가요?" 에마는 어깨를 움츠렸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대체 어떤 경우인가요? 이혼할 거면 빨리 헤어지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리처드는 댄이 들을까보아 억누른 목소리로 거칠게 말했다.

"따로따로의 방-- 따로따로의 인생. 그것이 당신이 진심으로 바라는 바인가?"

"처음부터 그것을 주장한 것은 당신이에요....." 에마는 너무 화가 나서 말끝을 흐렸다.

"내가 당신한테 한 일은......싫지 않았나?" 리처드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더구나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한번 리처드의 품에 안기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그것을 그가 아직도 눈치 채지 못한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아요." 에마는 거짓말을 했다.

"그것은 칭찬하는 말인가? 당신의 마음은 잘 알았어. 오늘 밤엔 그전에 쓰던 방에서 자도록 해. 나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 찌르는 듯한 말이었다.

비참한 생각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에마를 세인트루샌더에서 맞아 준 것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선창에 게일과 베로니카가 서 있었다. 게일은 손을 흔들고 있었으나, 베로니카는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에마는 두 여자를 보고 몸이 얼어붙어 비틀거렸다. 리처드도 두 여자를 보고 있었으나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댄이 화려한 관객 앞에서 원형의 항적을 그려 보인 순가, 에마는 이유도 없이 중얼거렸다.

"베로니카와 게일이에요......"

"그렇군." 리처드는 무뚝뚝하게 말하더니, 댄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는 미간을 모으고 초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에마 쪽을 보고 성급하게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지, 되도록 빨리." 베로니카 때문인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을 베로니카가 알아차릴까보아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에마는 결코 그 일을 그녀에게 밝히지는 않을 것이다. 리처드는 그것을 알고 있을까? "되도록 빨리." 리처드는 되뇌었다.

"글쎄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에마는 서둘러 눈길을 돌렸다. "저 사람들은 오래 있을 건가요?"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는 두 사람이 아무리 오래 있어도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에마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어요, 달링?" 베로니카는 매우 불쾌한 듯이, 선창으로 올라간 리처드를 맞았다.

"일할 시간이 아닌가요?"

"남자도 때로는 쉬어야지." 게일이 볼을 건드리고 베로니카는 키스를 했으나, 리처드는 그것을 싫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배를 내리려던 에마는 그것을 본 순간 다리가 휘청거렸다. 댄이 빨리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더라면 넘어질 뻔했다. 에마는 고마운 마음으로 댄을 돌아다보았다.

"집사람을 데리고 와야겠어." 초조한 얼굴로 리처드는 댄의 손에서 에마를 떼어 잡더니, 선창까지 안고 갔다. 그 태도는, 에마는 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리처드의 입술에 베로니카의 루즈가 묻어 있지 않았다면, 에마는 그의 행동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괜찮아?" 에마를 내려놓으며 리처드가 물었다.

", 고마워요." 리처드의 손은 아직도 에마를 놓지 않았다. 게일과 베로니카의 시선이 자기의 모래가 묻은 발에 쏠리고 있다는 것을 에마는 의식하고 있었다. 반바지와 셔츠 차림이 에마를 날씬하고 자그마하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왜 베로니카가 화가 치미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지, 에마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게일은 리처드의 엄격한 표정에 신경이 쓰이는지, 에마에게서 눈을 떼고 갑자기 물었다.

"와도 괜찮지요, 리크?"

"어마, 물론이지. 언제라도 오라고 했잖아요. 달링." 베로니카가 리처드를 보고 웃었다.

"그랬나?" 리처드의 팔은 아직도 에마의 가는 허리에 감은 채였다.

베로니카가 계속했다.

"당신이 캐나다에 가 있는 동안 바베이도즈는 지루했어요, 달링. 그런데, 당신은 금방 또 이 곳으로 와 버렸잖아요. 어느 날 밤 이후로, 난 당신과 떨어져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기분이 나빠서 에마는 리처드의 팔에서 도망쳤다. 너무도 비참했다. 리처드는 에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를 당했다고 해서 가슴 아파할 것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리처드는 나를 안았단 말인가? 다른 여자의 품에서 빠져나온 직후에......

에마는 갑자기 눈물이 솟아오른 눈동자에 경멸을 담아 리처드를 쳐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정사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리처드도 싫어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번 미간을 모을 뿐, 베로니카의 유혹하는 듯한 눈초리에 화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집에 닿을 때까지 베로니카는 계속 지껄여 댔다. 왜건 안에서 뜻밖에도 리처드는 에마를 옆에 앉혔다. 리처드의 무릎이 닿았다. 그는 날 놀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베로니카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일까.

"내가 방을 골라도 돼요?" 집에 도착하자 베로니카가 물었다. "난 당신의 옆방이 좋아요. 고도의 밤은 무서우니까요."

베로니카가 리처드의 옆방을 찾는 것은 무서워서가 아닐 것이다. 리처드가 아내와 함께 침실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는 모양이다.

리처드는 쌀쌀하게 대답했다.

"층계를 올라간 곳에 방 두 개가 있으니까 그것을 써요. 내 방은 복도 안쪽이야."

"어마, 하지만......."

"객실은 그것 두 개뿐이야. 만일 묵을 생각이 있다면......."

리처드의 목소리가 굳어지자, 베로니카는 곧 양보했다.

"물론 거기도 상관없어요. 우리는 어디서 자느냐가 문제가 아닌가요."

베로니카의 뭔가 암시하는 듯한 말투에 에마는 주춤했다. 그러나 아내가 있는 집에서 다른 여자와 비밀 관계를 갖는, 그런 일은 설마 하지 않겠지. 마음은 상하면서도, 에마는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리처드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해요." 에마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조세핀에게, 손님이 두 분 왔다고 말하고 오겠어요."

에마가 가 버리기 전에 게일이 재빨리 리처드에게 물었다.

"그 재미있는 감독도 저녁식사를 하러 오나요?"

"아니, 하지만 그러는 것도 좋겠군. 게일이 만나고 싶어 한다면 불러도 돼."

에마는 주방에 들른 뒤 이층으로 올라갔다. 몸이 찌르는 듯 아프다. 감독이 오려면 한 시간쯤 여유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샤워를 하고 오니 뜻밖에도 리처드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에마를 보자 그는 곧 일어섰다.

리처드의 손가락이 에마의 턱을 쳐들게 했다.

"에마, 이럴 작정이 아니었어, 용서해 줘."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걱정할 게 뻔한 걸! 내 말 좀 들어 줘 에마,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 의논하고 싶어."

"하지만......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에마는 아픈 마음을 감추려고 눈을 내리깔며 낮게 말했다. "부탁이에요, 리크. 인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요."

"견딜 수 없다구?"

"그래요!" 리처드의 비꼬는 듯한 목소리에 에마는 헐떡였다. "나 혼자 있고 싶어요......."

"마일즈 레이와 함께 어울리기 위해선가?"

"그렇지 않아요!"

"거짓말쟁이!"

리처드의 눈동자가 분노로 불타고 격렬하게 입술이 겹쳐졌다. 에마는 묘하게도 리처드가 자기보다 도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리처드의 늠름한 몸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에마의 몸속에 불러일으킨 정열에, 리처드가 영향을 받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갑자기 에마는 불꽃에 휩싸였다. 한 번만 더 리처드에게 안기고 싶다.....

"내 마음의 준비가 다 되거든 당신을 혼자 있게 해주지." 리처드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기 전에는 놓아줄 수 없어."

아래층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온 집안에 퍼졌다. 에마는 당황해서 리처드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베로니카가 찾으러 올라와!"

"우리가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면 좋겠어!"

"그럴 작정도 아니면서."

"어떤 작정이든 간에, 일분만 더 있었더라면 나는 무슨 짓을 했을지 몰라. 알아차리고 있었지? 그리고 당신도 원하고 있었잖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에마는 얼굴을 돌렸다. 그는 자기의 욕망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의 정열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 에마에게는 최소한의 위안이지만, 에마가 원하는 것은 리처드의 애정인데, 그것은 분명히 베로니카의 것이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손에 닿는 대로 드레스를 집어 들고 에마는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이미 그곳에는 리처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 라운지에 모여 있을 때 감독이 나타났다. 래리 타나는 젊고 잘생겼다. 게일이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래리는 모든 것이 정상이고 건전했다. 에마로선 그것이 어쩐지 기뻤다. 그 때문인지 에마의 웃음에는 따사로움이 조금 지나치게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리처드가 래리를 부른 것은 아마, 혼자서 세 여자의 상대를 하기가 벅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래리가 거의 에마하고만 이야기를 나누자, 리처드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떠올랐다.

게일도 호의를 가지고 있는 남자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불쾌해 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리처드는 줄곧 에마를 자기 옆에서 떼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리처드는 에마를 옆에 앉히고는,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시중을 들어 주었다. 때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에마의 손을 잡거나 손가락으로 매만지 기도 했다. 래리 타나를 견제하고 동생들 돕기 위해 서인 듯했다. 그런데도 에마의 맥박은 또 멋대로 빨라지고 있다. 에마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쓴 웃음을 지었다.

베로니카가 적의에 찬 눈초리로 이쪽을 쏘아 보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마일즈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좀이 쑤실 것이다. 그러나 마일즈의 일은 화제에 오르지 않은 채 식사는 진행되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마일즈의 팔찌가 서랍에서 나온 일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그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에마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식가가 끝나자 베로니카와 게일은 음악을 틀더니 춤을 추고 싶다고 했다. 리처드도 마음이 전혀 끌리지 않는 것은 아닌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래리가, 게일과 자기 중 누구에게 춤을 청할까, 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에마는 급히 구실을 만들어 방을 나왔다. 잠시 후에 돌아와 보니 래리는 게일과 춤을 추고 있었다. 에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베로니카가 리처드의 품에 안겨 스텝을 밟고 있는 것을 보자, 에마의 마음은 편하지 못했다. 베로니카의 팔은 리처드의 목덜미를 꽉 껴안고 있었다. 그때 에마는 리처드의 애매모호한 시선과 마주쳤다.

리처드는 에마하고는 춤을 추려 하지 않았으며, 그 뒤로는 다른 여자하고도 춤출 생각은 하지 않고, 래리가 돌아가고 여자들이 이층으로 올라간 뒤에도, 일이 있다며 서재에 남아 있었다.

그전 침실로 돌아갈까 하다가 에마는 망설였다. 일단 리처드에게 그 일을 허락받은 셈이긴 하지만 그가 서재에서 밤을 새울 것이라면 구태여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자신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리처드와 침대를 함께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베로니카에게 알리는 것이 싫은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쩌면 리처드도 베로니카도 그의 방 침대가 비어 있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대로 두 사람 다 놀라라고 하지!

명예를 되찾아야겠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방을 옮기지 않기로 한 에마였으나, 막상 드레스를 벗고 침대에 들어가고 보니, 긴장으로 몸이 덜려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리처드가 들어왔을 때는 자는 체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에마는 층계를 올라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잠시 후에 복도 저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낫다. 동요한 에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살금살금 문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러고는 문을 살짝 열고 내다보니, 베로니카의 뒷모습이 아래층 층계 쪽으로 사라져 가는 중이었다.

괴로움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아, 에마는 비참한 마음으로 침대로 돌아왔다. 리처드가 오늘 밤 그처럼 다정했던 것은 어째서였을까! 일이 있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리처드도, 리처드의 여자들도, 지독한 사람들뿐이다. 브랜티며 베로니카며.......

몸이 뒤틀릴 정도의 분노를 느끼고, 에마는 침대 속에서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누워 있었다. 울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너무도 상처가 깊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울어 왔지 않았는가. 에마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서재에서 베로니카를 안고 있을 리처드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몰아내려는 듯이.

그 뒤 리처드가 방으로 들어오기까지는 몇 분도 안 되었을 것이다. 문이 열렸을 때 에마는, 베로니카가 리처드를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하고 겁을 먹었다. 그러나 문이 조용히 닫히고 침대로 다가오는 것은 분명히 리처드의 발소리였다.

침대 옆에 서자 리처드는 다정하게 에마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하지 않고 잠든 체하고 있으니까, 그는 옷을 벗는 듯하더니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에는 침대 반대쪽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이 심한 심장의 고동이 리처드에게 들리지나 않을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에마는 그대로 잠든 체하고 있었다.

리처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에마를 건드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에마는 눈을 살그머니 뜨고 그를 훔쳐보았다. 리처드는 에마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똑바로 누워 창문 쪽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속에서 리처드의 옆얼굴이 멀리 보였다.

베로니카를 만났다 하더라도, 두 사람이 보낸 시간이 매우 짧았으므로 무슨 일이 일어났을 리는 없다. 에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처드가 손을 내밀어 안아 주었으면...... 그러나 그가 이렇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른 여자하고가 아니라 에마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서히 에마의 마음은 누그러져 괴롭고 길었던 하루의 피로로 어느 결에 빠지고 말았다.

밤새도록 에마는 리처드의 팔에 꼭 끌어 안겨 있는 꿈을 꾸고 있었다. 에마의 불안을 가라앉히려는 듯한, 리처드의 다정하면서도 애틋한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또한 그것은 리처드 자신의 불안도 가라앉히려는 듯한 목소리로 생각되었다. 리처드의 손이 조용히 에마의 머리를 쓰다듬자, 에마의 마음과 몸은 지금까지 느낀 일이 없는 안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에마가 눈을 뜬 것은 아홉 시가 지나서 였다. 리처드가 다정하게 에마의 몸을 흔들었다.

"일어나, 잠꾸러기야."

"리크?" 깜짝 놀라 에마는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였다. "지금 몇 시예요?"

"당신은 언제까지 자도 상관없지만 나는 할 일이 많아. 인제 나가 봐야 해." 리처드는 웃었다.

에마는 리처드가 하는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다만 머릿속에 있는 것은, 리처드가 곁에서 야릇한 눈초리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뿐이었다.

"당신, 여기서 주무셨나요, 어젯밤......?" 에마는 저도 모르게 속삭이듯이 물었다.

"" 리처드의 눈동자가 놀리는 듯이 반짝이더니, 손이 에마의 어깨에 놓였다. 입술이 가볍게 겹쳐졌다. "당신은 모르고 있었나? , 그럼 다시 한번 키스해 줄까?"

에마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라 우물거렸다.

".......나 아마 정신없이 잤던 모양이에요."

"그래,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정도로 -나를 굉장히 좋아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리크?" 그의 깊은 눈동자의 빛을 보는 것이 두려워져 에마는 숨을 삼켰다. "왜 이렇게 나에게 다정하게 대하지요?"

"나중에 설명할게.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리처드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며 일어서더니, 에마의 윤기 있는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때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싶어. 그래서 다른 문제들은 먼저 정리해 버릴 생각이야. 지금 당신과 이야기를 시작하면 아무 일도 못 하게 되니까, 그때까지는 나를 믿고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어."

리처드가 나가는 것을 보면서 에마는 당황하여 조그맣게 외쳤다. 그러나 그는 돌아다보지 않았다. 무슨 뜻일까? 그의 말을 믿어도 되는 것인가, 사랑받고 있다고 믿어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베로니카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책략이 아닐까? 어젯밤 그녀와 싸움을 해서, 그 보복으로 나를 사랑하는 체하여 베로니카의 질투심을 부채질하려는 것이라면? 계속 의심스러운 생각이 꼬리를 물어, 해답을 얻을 도리가 없는 에마는 점점 더 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침대에서 일어나자, 에마의 가슴속에는 다시 새로운 희망이 솟아올랐다. 서둘러 드레스를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았다. 그러나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밖을 내다보아도 게일과 베로니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방에 가서 조세핀에게 물어 보았지만, 그녀도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모두들 피로한 모양이구나.’ 어쩐지 행복한 생각이 들어서 에마는 낙관적인 생각을 했다. 커피 두 잔에, 조세핀이 손수 만든 맛있는 크로와상 여러 개........ 벌꿀이 입술에 묻자 에마는 웃었다. 리처드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키스를 하여 씻어 주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았던 것이다. 아니면, 침대까지 에마를 안고 가서 거기서 키스해 주었을까? 그때는 벌꿀을 닦아 주는 일만으로 끝내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에마는, 조세핀의 의아해 하는 시선을 느끼고 얼굴이 빨개졌다.

"그이가...... 어디 갔는지 아세요, 조세핀?"

"주인님은 타나씨가 있는 곳에 가시는 것 같던데요." 그 말을 듣자 에마는 웬일인지 마음이 불안해졌다. 조세핀은 어깨를 움츠리고 말했다. "주인님이, 오늘 점심은 부인 한 사람 몫만 준비하라고 그러시던데요. 다른 분들은 주인님께서 바베이도즈로 데리고 가신다는 것 같더군요."

바베이도즈로 돌아간다고? 놀란 나머지 에마는 온몸이 굳어졌다. 리처드는 처음부처 에마를 두고 갈 생각이었을 것이다. 혼자 바베이도즈로 돌아가고, 에마는 이곳에 가두어 둘 참인 것이다- 이혼하는 날까지. 에마는 인제, 아름다운 곳이기는 하지만 고독한 감방에 갇힌 죄수인 것이다. 에마는 창백한 얼굴로 일어섰다. 그리고 우물우물 조세핀에게 뭐라고 하고는, 해안 쪽을 향해 집을 나섰다.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그러나 에마의 마음은 우울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에마는 멍하니 아름다운 빛을 띤 새들이 지저귀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제 댄과 리처드와 함께 즐겼던, 작은 항해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몰아내려고 애썼다.

리처드에게 안기지만 안았더라도....... 그리고 오늘 아침 그가 다정한 태도를 보이지만 않았더라면...... 자기가 없어진 뒤 내가 조용히 있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을까. 이렇게 잔혹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무런 해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에마는 풀이 죽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벌써 열 두 시가 지났다. 모두 바베이도즈로 떠나 버렸겠지. 아무도 없기를 에마는 바랐다. 지금 주구하고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태연한 체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라운지로 가니, 게일과 베로니카가 그곳에 있었다. 에마는 당황했으나 그것을 눈치 채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둘 다, 마실 것을 손에 들고 있었고, 게일 쪽은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였으나, 베로니카는 에마를 보자 안색이 달라졌다.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지요?" 베로니카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다.

그 목소리에 에마는 놀랐다. 에마가 없었던 일이 이 두 사람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리처드가 에마를 괴롭히기 위해 작별인사를 시키려고 두 사람을 기다리게 한 것일까?

"해안에 가 있었어요. 나를 찾고 있었나요?"

베로니카는 경멸하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크를 만났나요?"

"아니요, 오늘 아침 일찍 만났을 뿐이에요." 에마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울어 버리든지, 뭔가 당치도 않은 말을 해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베로니카의 불쾌한 얼굴을, 게일이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바베이도즈로 돌아가야 한다고 조세핀이 그랬어요. 준비하고 있으라고 리크가 그랬대요......."

베로니카는 게일을 노려보았다.

"자꾸 되풀이 하지 말아요! 리크와 함께라면 기꺼이 돌아갈 거예요. 난 이런 섬은 딱 질색이니까."

"나는 아무데도 가지 않아." 리처드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와 전원이 문 쪽을 돌아다보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베로니카?"

리처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는 에마의 귀에, 베로니카의 의기양양해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주방에 있는 그 여자는 엉터리 같은 말을 한 거군요! 달링, 그 여자를 해고해 버리세요."

"아니, 그건 그렇지 않아." 리처드는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에마 쪽으로 다가가더니 그 파리한 얼굴을 보고 미간을 모았다. "무슨 이야기들을 했는지 모르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에마."

리처드가 이처럼 신경을 써주고 있는 것을 베로니카가 달가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에마는 고개를 끄떡였다. 리처드의 다정한 목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리처드는 바베이도즈에는 가지 않는다고 했으나 아침부터의 경위를 생각해 보면 모순된 이야기 같았다.

뜻하지 않게 리처드는 에마의 몸을 끌어안으며 베로니카와 게일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래리 타나한테 가서 타협을 하고 왔어.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생각했던 것보다 이야기가 길어졌지. 요약해서 말하면, 그는 3주 동안 휴가를 얻어 바베이도즈로 가기로 했는데, 그가 너희들을 데리고 가고, 나는 에마하고 여기 남을 거야."

"당신과 에마가! 아니, 왜요? 진심인가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베로니카가 물었다.

"물론. 우리는 결혼했어."

"하지만, 나에 대한 일은? 하지만 당신......"

"뭐야?"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에마를 .끌어안은 리처드의 팔에 힘이 주어졌다.

"당신과 아무 약속도 한 기억이 없는데, 베로니카."

"그건 그렇지만, 그러나.......당신이 약혼했을 때 사실은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특히 리타는!"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날카로와졌다.

"그 사람들이 무책임한 말을 했던 거야. 우리는 서로가 잘 알고 있잖아? 베로니카, 우리가 사랑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당신은 에마도 사랑하지 않잖아요!" 에마를 노려보는 베로니카의 얼굴은 증오로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 남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된 것이 견딜 수 없는 것 같았다. 리처드가 에마를 꽉 끌어안고 있지 않았다면 베로니카는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이런 여자, 사랑하고 있을 리가 없어요!"

"인제 이런 이야기는 진저리가 나."

리처드의 차가운 어조에 베로니카는 자제심을 잃은 듯했다.

"거짓말쟁이! 어떻게 믿지도 않는 여자와 함께 있을 수 있지요? 당신은 흥분해서 잊어버렸는지 모르지만, 신뢰할 수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본인의 입으로 말했었잖아요!"

"당신은, 당신 오빠의 일을 말하고 있는 건가? 그 이야기는 다 끝난 일이야. 인제 이야기할 가치도 없어."

리처드가 이야기를 끊으려고 한 말이 오히려 베로니카를 자극한 결과가 되었다.

"당신이 캐나다에서 돌아왔을 때 에마가 마일즈와 정원에 있는 것을 보고 당신은 굉장히 화를 냈었지요. 최악의 사태로 믿어 버리고." 리처드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자 베로니카는 재빨리 지껄였다. "그리고 나중에 에마가 마일즈로부터 값비싼 팔찌를 받았다고 생각한....."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지?" 리처드의 담담한 어조 뒤에는 무서운 분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에마는 떨었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알았어, 베로니카. 하지만 나하고 에마 사이에는 해결되지 않을 일은 없어. , 댄이 기다리고 있어. 쫓아내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우리가 게일하고 작별을 하는 동안 이곳을 나가 주지 않겠어?"

"그 팔찌는........" 베로니카가 또 입을 열었다. 리처드의 태도가 그녀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부는 것이다. 베로니카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해 버리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 팔찌를 에마의 방에 둔 것이 나였다는 것을 몰랐나요? 당신은 그것을 마일즈에게 되돌려주고 당신의 소중한 에마를 바베이도즈에서 쫓아냈어요. 에마와 마일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믿었던 거지요? 에마가 서랍 속에 감추어 둔 건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내가 그랬어요."

"당신은........무슨 짓이야!"

"그래요-당신이 그것을 발견하고는 에마를 나무라는 것을 나는 침실 밖에서 들었어요. 에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당신은, 에마가 열심히 변명하고 있는 것을 믿었어야 할 것 아니에요? 에마가 당신한테 열중해서 다른 남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가요?"

"그냥 끝낼 일이 아니군, 베러니카!"

리처드의 음성은 부드러웠으나, 에마로서는 그것이 오히려 두려워서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리처드의 손을 뿌리치고 에마는 방을 뒤쫓아 오려는 리처드 앞을 베로니카가 막아섰다는 것을 에마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대로 달려 나온 에마는 섬의 남쪽,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후미가 많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리처드가 이 섬에 오기 전에 에마 혼자서 돌아다닐 때 발견한 장소다. 리처드는 금방 뒤쫓아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 따위는 내버려둘지도 모른다. 에마는 한숨을 쉬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잘 생각해야 한다. 섬에는 어부가 방치해 둔 배가 있을 때가 있다. 그런 배를 찾아서 여기서 도망쳐 버릴까.

에마는 연약한 다리로, 절망에 쫓기듯이 계속 달렸다. 베로니카의 말이 옳다. 리처드는 한 번도 나를 믿어준 일이 없다. 나를 사랑하고 있는 체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변덕스러운 욕망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일단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나면, 간단히 버리고 말 것이다.-지금까지 다른 여자들에게 해 왔던 것처럼. 고통의 눈물로 볼을 적시며, 에마는 계속 달렸다.

몸을 숨기기에 알맞은 후미를 발견하자, 에마는 풀밭위에 쓰러졌다. 그러고는 울다가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눈을 떠 보니, 불편하기 짝이 없는 풀 침대 위여선지 온몸이 여기 저기 아팠다.

에마는 똑바로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다. 흥분의 파도가 가라앉고 난 지금 여기 이렇게 누워 있을 이유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어부의 배로 도망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에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아직 리처드를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직 그가 섬에 있다 하더라도 볼 면목이 없었다. 생각도 하기 전에 잠에 빠져 버리다니....... 시간을 헛되게 보낸 일이 생각만 해도 화가 났다.

에마는 몽롱한 머리로, 아까의 리처드와 베로니카와의 대화를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인가. 그런 일을 하다니, 베로니카의 머리가 어떻게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녀는 리처드의 결점을 꼬집어 말했던 것이다-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결점을.

하지만...... 에마는 문득 생각을 달리했다. 내가 만약 리처드의 입장이었다면 내가 한 일이 어떻게 보였을까? 나도 실은, 그렇지도 않은 베로니카와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았던가. 리처드나 나나 상대를 믿지 않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똑같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리처드의 방에서 다른 여자의 소지품을.......아니, 다른 여자로부터의 값비싼 선물을 발견했다면 나도 그릇된 추측을 했을 것이 아닌가. 리처드는 마일즈의 팔찌 일로 몹시 화를 냈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 정도의 증거를 보았다면 누구라도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리처드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에만느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리처드가 집에 있다면, 도망치려 했던 일을 사과해야 한다. 그밖에도 사과해야 할 일은 또 있다. 하지만 리처드라 화를 내지 않고 들어 줄까.......

불안감을 품고 달리던 에마는, 리처드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을 보자, 뒤로 돌아서서 달려가고 싶었다. 리처드는 말을 타고 있었고, 역시 말을 탄 댄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에마를 발견한, 리처드가 재빨리 댄에게 뭐라고 말하자 댄은 혼자서 되돌아갔다.

리처드는 에마에게 다가오더니 말에서 내렸다. 그는 긴장된 얼굴로 고삐를 놓고 에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얇은 셔츠와 면바지를 입은 늠름한 그의 몸이, 에마에게는 비바람 속에서 발견한 피난처처럼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리처드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태도는 의연했다. 그가 화를 내고 있는지 어떤지, 에마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리처드의 목소리는 표정과 같이 엄격했다.

"어디에 갔었어, 에마? 사고라도 난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어!"

분노로 번득이는 리처드의 눈을 정면으로 대하기가 두려웠다. 에마는 비참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리처드의 입매가 굳어졌다.

"갑자기 도망쳐 버리다니......!"

목으로 치밀어 오르는 덩어리를 삼키며 에마는 물었다.

"베로니카와?"

"그녀의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부탁이야, 에마."

리처드의 목소리에 경멸이 담겨 있단는 것을 알아차린 에마는 이야기를 바꾸었다.

"왜 댄과 함께 왔지요?" ""

"당신을 좀처럼 찾아낼 수 없어서 도움을 청했던 거야."

후회스러움으로 마음이 아파, 에마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잘못했어요, 리크. 이렇게 도망을 치고-하지만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어요."

"나는 미친 듯이 당신을 찾아다녔어. 당신은 금방 쓰러질 것 같군."

"나는 괜찮아요, 리크. 정말이에요."

그러나 그 순간, 에마의 몸은 번쩍 안아 올려져 말에 태워졌다. 리처드도 에마의 뒤에 올라탔다.

"돌아갑시다. 집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이야기를 나눕시다. 이번에는 우리, 거짓말은 하지 않기요."

"나는 한잠 잤어요." 에마는 힘없이 항의하였다.

"모래와 풀과 눈물 속에서 말이지." 리처드의 손이 등 뒤에서 에마의 몸을 끌어당겼다. 에마의 온몸은 뜨거워졌다. "당신의 얼굴은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새파랗군. 그러나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댄이 한 발 먼저 돌아와 보고했으므로, 조세핀이 이미 목욕물을 데워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조세핀은 자기가 에마의 시중을 들겠다고 했으나, 리처드는 식사 준비나 해 놓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조세핀은 만면에 의미 있는 듯한 웃음을 띠며, 두 사람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리처드는 목욕물의 온도가 알맞은가를 확인하더니, 에마에게 옷을 벗고 목욕을 하라고 명령하듯 말했다. 곧 따르지 않았다가는 완력으로라도 드레스를 벗기려고 들 것 같은 눈치였다. 욕실 안에서 에마는, 문 저쪽에서 리처드의 샤워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그러고 10분 수, 침실로 가 보니 리처드는 짧은 가운만 결치고 있었다.

"우리 옷을 입는 게 좋지 않겠어요?" 에마는 갑자기 자신의 모습에 신경이 쓰였다.

"이리와." 따르지 않고는 안 될 정도의 강한 어조로 리처드는 말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에마가 다가가자 손을 잡아 끌어 옆에 앉히려 했다.

"이야기를 하기로 하지 않았던가요, 리크?" 리처드의 눈동자 속에 떠오른 야릇한 빛을 보고 에마는 당황해서 말했다.

"그것은 나중이야."

눈 깜짝할 사이에 끌어안더니 입술을 겹쳐왔다. 그가 꽉 누르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위로 뜨거운 파도가 밀려왔다. 리처드는, 침대에 쓰러진 에마를 늠름한 몸으로 짓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격렬한 키스가 되풀이되자, 에마는 어느새 거기에 응하고 있었다.

"당신이 필요해." 리처드의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가 에마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에마는,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기쁨에 찬 발견이었다. 처음에 그에게 안겼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던 에마였지만, 이번에는 전혀 달랐다. 리처드의 정열적인 입술의 움직임에, 에마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리크.......부탁이에요, 들어주세요, 이번에는 나를 두고 가지 마세요. 요전에 잠에서 깨어 당신이 옆에 없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슬펐는지......"

"처음일 때?" 입술을 뗀 리처드는 다정하게 에마의 뜨거운 볼을 만지고,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려 주었다. "귀여운 에마, 왜 내가 그 뒤로 당신을 접하지 않았는지 이상하게 생각했겠지. 나는 당신은 경험이 있는 줄 알고 있었어-당신도 나의 오해를 풀려 하지 않았고. 그리고 당신이 처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었어. 난 나 자신의 정열을 막을 수가 없었던 거야. 그런 식으로 감정에 휩쓸린 일이 지금 까지는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을 끊더니 리처드는 슬픈 듯이 한숨을 쉬었다. "에마, 당신은 독한 술보다 더 나를 취하게 하는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당신을 두고 집을 나갔던 거야. 왜 당신은 나에게, 당신이 올리버의 연인이었다고 믿게 했지? 만일 당신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숫처녀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당신과 결혼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서 말하지 않았던 거예요, 리크." 에마는 속삭였다. "농장에서 벗어날 유일한 기회였는걸요. 남자라고는 사귄 일도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당신은 나를 데리고 나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편의상의 결혼이라는 말을 했을 때는 굉장히 불안했어요.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게 되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리처드가 얼굴을 들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에마가 되뇌자 그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독한 녀석이야, 에마.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 그러나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리처드의 검은 눈썹이 치켜져 올라갔다.

"나도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당신에게 키스를 당하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에마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입술이 겁쳐졌다. 리처드의 품속에서 에마의 몸은 떨고 있었다.

", 에마, 그동안 괴로워한 것은 당신만이 아니었어. 당신을 보기만 해도 나는 미칠 것만 같았지. 하지만 까닭을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최후로 농장을 찾아갔을 때는 나는 묘한 분노에 사로잡혀 다른 모든 것은 잊고 말았어. 렉스 올리버에 대해서 증오까지 느꼈었지."

"당신은 정말로 그가 나의......연인이라고 생각했었나요?"

". 브랜티가 한 말을 의심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니, 분명히 어리석은 일이었어. 그러나 내 나이가 되면, 여자에 대해 꿈을 가질 수 없게 돼. 브랜티를 제일 처음 만났을 때도 나는 그녀에게 끌렸어. 그러나 결혼을 하려고 한 것은 더 현실적인 이유에서였어. 그녀와 나는 사실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았다고 봐. 나는 다만 후계자가 필요했고, 그녀는 부를 원하고 있었어. 서로의 목적이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나의 소망을 이루어줄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운 일이지만." 리처드의 입술이 자조하듯이 일그러졌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돌아온 나는, 브랜티가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어. 그랬기 때문에, 그녀가 렉스 올리버와 파리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처럼 자존심이 상했던 거야. 그리고 당신을 이용하면 완벽한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러나......." 에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리처드는 속삭였다. "당신과 결혼하기 전에 이미 나는 패배했던 거야. 당신만 보면 나의 심장의 고동은 빨라졌으니까-다른 여자에게선 느낄 수 없었던 일이야."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어요." 에마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나 자신과 싸우느라고 그랬던 거야. 남자란 애가 타면 발버둥치는 법이거든 . 그러나 바베이도즈로 돌아온 뒤로는 나의 감정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여자에게, 더구나 이런 어린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거리를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캐나다로 도망쳤었지. 그러나 당신을 떠나서 산 나날은 나의 마음에 오히려 불을 붙이는 결과가 될 뿐이었어." 리처드의 손이 다정하게 에마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난 당신의 발밑에 무릎을 꿇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바베이도즈로 돌아왔는데, 당신을 놓고 두 사나이가 다투고 있는 것을 보자 질투의 불꽃이 타오르고 말았어. 당신도 전과는 달라져 있었어......훨씬 더 아름다워졌더군. 무엇보다 그 팔찌가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지."

이번에는 에마가 설명할 차례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심한 노동이 계속되던 농장에서의 나날은 에마의 몸에서 부드러움을 모두 빼앗아갔지만, 바베이도즈로 온 뒤로 편안한 나날이 계속된 덕분에 지금의 상태로 외복되었다는 것을.

"나는 가까스로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돌아오자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어요. 당신은 마일즈와 벤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고 봐요."

에마는 한숨을 내 쉬었다.

"내가 잘못했어, 에마, 당신을 그렇게 취급하다니. 하지만 그때는 나쁜 일만 계속되었으니까. 그 팔찌를 발견했을 때는 살인이라도 할 정도로 화가 나더군. 그래서 오늘 아침 베로니카의 고백을 들을 때, 나는 스스로를 억누르려고 필사적이었어."

"베로니카가 그 팔찌를 집어넣어 버렸던 거예요." 에마로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잠시 혼란을 일으켜, 마일즈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차를 마시자는 그의 말에 응했던 거예요. 그리고 그와는 특별한 과계를 가질 수 없다는 것도 분명히 이야기해 두고 싶었고. 마일즈는 차 안에 팔찌를 두고 내렸고, 그 뒤 집에 돌아온 베로니카가 그것을 발견하고 집어 가지고 왔던 것으로 봐요. 마일즈는 내가 집어넣은 것으로 알았을 테지요. 그러니까 그는 리타의 파티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했던 거예요. 내 마음이 변했다고 행각했던 모양이지요."

리처드가 조용히 응했다.

"어젯밤, 당신의 잠자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갑자기 당신은 무엇 하나 책망을 들을 일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동안 질투로 장님이 되었던 거지."

"내가 그때 마일즈와 함께 나갔던 게 잘못이었어요. 당신을 잊기 위해 그를 이용했던 거예요. 하지만 그에게 마음이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나한테도 몇 명 사귀던 여자는 있었지만, 당신을 만난 뒤로는 누구도 만난 일이 없어. 베로니카는 언제나 나한테 여러 가지 의논을 해 오곤 했었어, 가끔 식사를 하러 간 일도 있고. 그러나 로맨스하고는 관계없어. 여동생 같았지, 골치 아픈 동생이지만."

"당신이 집에 없는 동안의 내 생활은 정말 비참한 것이었어요. 당신의 사랑은 받을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더구나 당신은 이혼이란 말을 입에 담고 있었으니까요."

"처음에는 그럴 작정이었어." 입술이 겹쳐졌다. "인제는 이혼하지 않아, 절대로.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이야. 괜찮겠지?"

리처드의 입술이 목에서 가슴으로 더듬어 내려오자, 에마의 온몸에 불꽃이 퍼졌다. 리처드의 목에 감겼던 팔에 저도 모르게 힘이 주어졌다. 그러자 심오한 빛깔의 눈동자가 타오르듯이 에마를 바라보았다. 격렬하게 입술을 요구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뜨거운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이제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리처드의 속삭임이 그런 와중에서도 에마의 귀에 들렸다.

폭풍우가 사라진 뒤에도 리처드의 팔은 에마를 꽉 끌어안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 섬에서 앞으로 3주 동안 머무를 거야. 나를 마음껏 사랑해 주겠지?"

행복에 빛나는 얼굴로 에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리 티나는 게일이 자기들의 마음을 확인할 때까지는 바베이도즈에 머무를 거야. 그런 다음 리타와 게일은 벤을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 가게 될 것 같아. 둘이 떠난 뒤 우리는 코랄 하우스에 돌아가는 거야. 그런데 당신의 큰어머니에 대해 알아보았더니, 농장을 팔고 친척 집으로 이사를 했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당신은 인제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아도 돼."

"당신의 일 이외에는." 에마는 웃었다. 힐다 큰어머니의 일까지 신경을 써 주다니...... 리처드의 애정이 몸에 느껴져 기뻤다. "사랑해요- 당신도 이 섬도. 영원히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또 옵시다." 에마의 손가락이 리처드의 넓은 어깨를 쓰다듬자, 그의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당신은 늘 나를 괴롭힌다니까......."

", 리크!" 에마는 리처드의 몸에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 타오르는 불꽃을 보자, 가슴이 찡해 왔다.

"내가 졌어, 에마. 완전히 당신의 포로가 되어 인제 싸울 힘도 없어."

"싸워 볼까요?" 에마는 작은 소리로 꾀었다.

에마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그녀의 귀에 속삭이며, 리처드는 조용히 팔을 뻗어 불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