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야, 한국시를 찬양하라
가방
가비야운, 나비
가야산
가을걷이
강
강변 유원지
거미 시론(詩論)
검은 가방
검은 길
것들
게
경계
경주 남산
고추잠자리
고향에서 온 편지
곤줄박이
골목들
교통사고
구석진 곳
구두
구름 뻐꾸기
구름의 키스
구형왕릉 – 산청에서
굳게 다짐합니다
그대였기에, 우리는 서로 아름다워서 – 문인수 형을 그리며
그래, 길이 있다
그 무덤들이 우리 안에 없다면
기울어진 지평
기지촌
긴 나무 의자
길
길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김씨의 옆얼굴
깊은 침묵
깊이에 대하여
깡통
나는 망가지
나른한 현장
나무
나무들
나무 아래
나무에 대하여
나무의 기억
나비
낙엽 편지
날아오르는 명태
남한강
낯선, 시
내 시란 뭔가
내 편들
냇물 속에 뭔가가 있다
녹향
누런 가방
눈과 코와 입이 보이지 않고
눈물 한 방울 또는 물방울 같은 것
늦가을의 시
다 맞게
단추
담배
대가천 – 은어 낚시
돌
돌의 시간
동물도감
돼지감자
뒤쪽 풍경
땅에 누운 사람의 나무
또 다른 길
또다시 가야산에서
또한 죽음의 기억은
마애란
만금이년 젖 먹자
매미
모래알 소리
못
몽유도원도
무덤인 이 땅에서
문간
물통
밀양강
밀어(密漁)
바다의 해산(海産)
밖
밖으로
밝은 교신
밤눈
밥상
방천시장의 봄
배
배추밭머리
버려진 병
벽
별
별밤
병
봄꽃
부서진 활주로
부재
분신
분홍강
불멸의 노래
불안한 의자
불타는 숲의 얼굴
붉은 물
붉은 벽보
붉은 언덕
블루 콤마
비무장지대
비밀
빈 잠
빈집
빛의 그늘
사랑
사막
산밭뙈기
산책 시편
삼릉계곡을 오르며
상응
상처
새파란 길
서로
서시
서울, 더 그레이
섬
성묘
세 사내
소광리
소화가 잘 안 되어서 써보는 시
솔방울
쇼핑백들
수북수북
순례
숲
시여, 몹쓸 것
시인
신천
아름다운 길
아메리카
아주 오래된 지금에사
아직
악어
안
애인들은 쪽, 쪽 소리를 낸다
야외소풍
야적
어느 날 문득, 가만히
어느 잠녀의 기억 – 그날, 가오리에게
어떤 버려진 골짝이라도
어떤 풍경 사진
여름
여름휴가
연애 간(間)
연어
연탄재들
열 수 없는 창
영춘화(迎春化)
오대산 바람
용정 가는 길
우리 낯선 사람들
우주선
웃는가?
원통리
유리 속의 폭풍
유리의 방
은종이
의자의 구조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
익은 탑
자부동 의자
장터목
전어(錢魚)
전화기
젊은 시인
정말이지, 나는
제비꽃
종이 놀이
죽은 아기를 새내에 띄우며
죽음이 또는 ‘죽음’이란 말이
집
철거 주택
철모와 수통
첫눈
첫얼음
청도 냇가에서 대 무늬 진 돌을 주워 '동풍'이라 이름 짓고
초록의 길
초록의 창녀
추락지점
측백나무 울타리
커피숍
커피 인간
컵
타이프라이터
탑
통
통영
투명한 속
틈만 나면
파편들
편지 쓰는 밤
편지의 꿈
폐교
폐차장
폭포의 시
풀씨 하나 떠돌다가
핀
하늘
해안
해우(解憂)
현풍장
호박
환한, 내 것인 네 것
환한 밤
MADE IN U.S.A
1월 1일
2월 산
3분간
4월이 또 와서
가랑비야, 한국시를 찬양하라
이하석
가랑비가 끝장난 길 위에 내린다.
주머니 속에 접어 넣어둔 시 쓴 종이를
감춘 손으로 한 번 더 구긴다.
감춘 시를 써왔구나, 나는.
부패한 물들이 하수구로 흘러들고
나의 그림자가 그 위를 맴돌고
가랑비가 그 위에 내린다.
사람들은 우울하게 우산을 들고 정류장에 서 있다.
붉은 블록 조각들 처참하게 깔린 길 위로
전경들과 대학생들 뒤엉켜 피흘리고 흩어진 다음,
버스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문득 제각기 갈 길이 바빠지고
가랑비가 그 위에 내린다.
모든 길이 비에 젖어
젖지 않은 종이가 없다.
가방
이하석
가방이 있고 신문지가 놓여 있다
가방은 늘 닫혀 있고
신문지는 때로 펄럭거린다
검은 가방은 속을 알 수 없지만
신문지는 온갖 것을 다 보여준다
나는 시간이 있어서 서서 그걸 이리저리 훑어보지만
다 읽진 않는다
가방 속은 알 수 없다
가방 주인은 가방 안에 별로 중요한 것이 없기에
그냥 두고 잠시 볼일을 보러 간 게지
그러나 사실은 그게 그에게는 제일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읽던 신문을 그 곁에 놓아둔 건 확실한 볼 것으로
가방 안에 대한 궁금증을 희석시키려는 것일까
물론 아무도 가방 안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펼쳐놓은 신문은 더러 눈길을 끌지만
별수 없는 일들을 너무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다들 생각하는 듯하다
가방은 입을 굳게 다물고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안에는 천국의 열쇠도 있을 수 있지만
모두 짐짓 무심하니 눈길 주지 않는다
역사 안의 모두가 가방처럼 입을 닫고 있다
가방처럼 잠시 여기저기 놓여진 채
저마다 고요히 누구를 기다리거나
단순한 궁금증을 못 참고 신문을 읽는다
가비야운, 나비
이하석
저 가비야운 나비
가 넘는, 바다
섬 없는
나비, 나비라고
석양이 가로막지 않는다
바람보다 나비가 힘이 세다는 건 다 안다
폭풍을 뚫느라 단련된 강철 어깨의 신비한 문신이 있다
나비는 늘 바다가 넓지만
나비는 언제나 자신에게 바다보다 작지 않다
가야산
이하석
계류와 더불어 칭얼대며 내가 숨긴 길.
동굴의 숲가엔 엘레지 꽃들이 고개 숙인 채
나의 그림자를 응시한다.
그 짧은 생애들의 외롭고 강렬한 눈길 따돌리며 산등성이에 올라서자
조릿대 숲이 앙칼지게 울며 열린다.
큰바람이 내 욕망을 뒤집느라 웅성거린다.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바람의 칼날이 조각하다 부러뜨린 나뭇가지 끝에
간밤에 눈이 얼리고 간 내 꿈이 싹트고,
산정에서 뒤엉키는 내 마음의 사나운 구름.
가을걷이
이하석
할머니 뒤에 펼쳐진 하늘이 구겨져 있지 않아서
아무 구름도 피어오르지 않는다
모든 게 너무 맑아져서 서럽다
도로변에 푸른 비닐 깔고 물벼 널어 말리며,
구멍 난 장갑으로 쓰윽 문지르는 볼에 이마 목덜미에
흰 햇빛 그늘만 묻어난다
이 쌀로 밥상 차려봤자 올해도 밥 한 그릇뿐일 텐데
그 위 소복한 하늘만 눈부셔 어찌할꼬?
겸상하고자 불러들이면 마을 사람들도 민망하겠네
강
이하석
짙푸른 숨결로 가득 찬
땅의 가장 낮은 곳을 불길처럼 흐르는,
노을 머금은
캄캄한, 강.
대궁이에, 그 긴 잎자루에 단단히 매달린 채
명아주 마른 잎은 불탄 마음처럼 서걱거리고,
내 마음에 강둑길이 매달려 있다.
그 비탈을 내달아 올라서면
찔레 마른 덤불을 핥퀴는 바람 속
그이가 강을 건너와
불 피울 한 들길에 내려서는 것이 보인다.
강변 유원지
이하석
1
강물에 반쯤 몸 담그고,
사이다병은 주둥이 속으로
속의 작고 깊은 하늘을 내보인다.
햇빛 속에서,
병 속의 물과 강물은 같이 썩는다.
물결이 뜨거운 모래를 적시며
기어올라 깡통 하나를 물 밖으로 밀어낸다.
붉은 녹물을 흘리며,
깡통에는 몇 개의 이즈러진 글자와 숫자가 지워지고 있다.
사랑의 표시일까,
그것을 이젠 해독할 수 없다.
엉겅퀴꽃 그늘에 숨어들던 눈을 치뜨고
여자는 발로 모래를 헤집으면서,
강가에 선 남자의 맨발을 눈부시게 바라본다.
남자 양말 구겨져 던져진 모래밭 위,
여자의 그림자가 짧게 흔들린다.
햇빛 속에서 남자의 발밑에서 강물은 뒤척인다.
아지랭이로 뜨거움은 피어오르고.
대여섯 명의 남녀의 웃음이 어우러져 피어오르는 술집.
탁자 밑으로 구두와 하이힐은 부딪치고 여자들의 스타킹은 구겨진다.
소주와 사이다와 콜라 사이를 지글대며
솟아오르는 돼지고기구이 연기 속으로
마릴린 몬로의 젖은 거대한 입술이 보인다.
낙서로 얼룩진 입술은 찢어져,
그 구멍 속으로 먼지 낀 유리창 밖 두 남녀가
모래의 아지랭이 속에서 흔들리며 맨발로 만나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가슴을 지나 싸구려 여인숙이 보이고,
강물의 더러운 깊이 속,
어딘가에서 새어나오는 혼곤한 신음 소리가 들린다.
2
소주 속으로 강에 드리운 불빛이 비친다.
불빛 속에 어둔 숲속에서 누가 노래하고
강물에 돌을 던진다. 술잔이 출렁한다.
술기운 속으로 강에 드리운 불빛은 아롱지고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노래 속에 뒤섞이며
강의 밑바닥으로 내려간다. 뜨거움은
강 밑바닥에서 솟아오른다. 막연한,
슬프고 더러운 끓는 풍경.
돌아가요, 여자는 머뭇거리며 말한다. 남자는
강물에 남은 소주를 붓는다. 그들의 뒤로
펼쳐진 술집의 깔깔대는 소리들이 강물에
어지럽게 풀린다. 돌아가요 우리, 여자는
확실하게 말한다. 술기운 때문에 여름밤의
어두운 깊이가 메시꺼워진다. 여자는
그 메시거움이 강물 속 모래에 스며들어, 진한
돌이킬 수 없는 소주 한 병을 만드는 것을
본다. 돌아가요.
달이 강물 속에 드리운 불빛 속으로
얇은 비닐 조각처럼 지나간다.
달은 강물 깊숙이 빛을 못 내리고
모래 속 소주의 밑바닥까지 못 미친다.
유원지는 스카치테프를 뜯어내듯이
밤중에 강의 수면을 뜯어내어
바람에 날려 버린다.
거미 시론(詩論)
이하석
제 안
여미며
읽는 바깥바람
그리하여 제 방적돌기 가동해서
뽑아낸
실을
바람에 띄우면
그 실의 촉수가 닿는 곳에서
제 몸까지가
집
설계의
지름이 된다.
거미는 그 한 가닥
지름에
몸을 실어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집을 짓기 시작한다.
팔방으로 그은
지름을
둥글게 엮어내는
그
촘촘한
그물은
허공을 길러내는
허기의
구조다,
마치 시의
행간이
시인이 불어내는
숨으로 얽어
짜인
함정이듯이.
그물의
집이 허공의
꽃깥이
피어 있다,
협각을 감춘 채.
시도
허공에
꽃처럼
피는
위험한
말의 그물이라서,
그 그물에 무엇인가가
걸려들면
도리어
시인이 온몸이
흔들리며
제 집이 찢어지는
소동을 겪는다.
검은 가방
이하석
사과 상자도 감쪽같기는 마찬가지다
안이 더 넓고, 겉으론 투박하고 인정미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걸 이용하지 않은 것은
가방 주인이 세련된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좀 더 냉정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각진 가방에 2억 원이나 들어갔다
얼굴 없는 이는 그걸 갖고 온 이의 뒷모습을 의심하면서,
먹물에 잉크 풀 듯 내용물을 처리했다
그 다음 그 모든 게 결국, 다, 잘, 되었다
가방은 쓸 만해서 사시 공부하는 그의 아들에게 공공연히 전해졌다
검은 길
이하석
비닐의 푸른 노란 검은 붉은 분홍의 그늘 아래,
쥐새끼들이 어둠의 털을 곤두세우고 출몰한다.
고독 아래, 그 검은 어둠 덩어리들은
우리의 삶 저 까마득한 아래쪽에
자기네들의 길을 얽어 짜놓는다.
그 길을 빌딩의 뿌리와 얽힌 컴퓨터칩을 뚫고 달리기도 하고,
백화점 뒷골목에서 소녀를 납치하는 갱들의 도주로를 가로지르기도 한다.
우리 중 누가 우리의 길에서 불심검문 당할 때도
그 검은 길들은 들키지 않는다.
것들
이하석
바다는 우리의 것들을 밖으로 쓸어낸다
우리 있는 곳을 밖이라 할 수 없어서
생각들이 더 더러워진다 끊임없이
되치운다
우리가 버린 것들을 바다 역시 싫다며 고스란히 꺼내놓는다
널브러진 생각들, 욕망의 추억들, 증오와 폭력들의 잔해가 바랜 채 하얗게 뒤집혀지거나
검은 모래 속에 빠진 채 엎어져 있다
나사가 빠지고 못도 빠져나가 헐겁지만
그것들은 우리 편도 아니다
더욱 제 몸들 부스러뜨릴 파도 덮치길 겁내며
몇 번이나 우리의 다리를 되걸어 넘어뜨린다
여름 홍수에 그런 것들 거세게 바다 파고들지만
바다는 이내 그 모든 것들을 제 바깥으로 쓸어 내놓는다
우리 있는 곳을 밖이라 할 수 없어서
우리 생각들이 더 더러워진다 끊임없이
되치워야 한다
게
이하석
파도는 절지의 보각(步脚)처럼 접히지만,
게의, 수면 밖에 대한 생각의 계단일 뿐.
그러나 올라갈 수 없는 처지여서 물 아래에서 어기적거리는 게는
물 접는 파도의 소식이 마음에 걸려
늘 위를 경계해야 하는 제 주소의 지도를 숙지한다.
물 아래선 모든 생각들이 돌처럼 가라앉아 있다.
게의 삶도 그 이하여서
돌 아래서 돌 아래로 빠르게 옮아가며 모래 속에 몸을 숨긴다.
거듭 말하지만, 바람이 수면을 파도로 헤적일 때,
햇빛 어룽지는 바깥의 무늬가 돌에 새겨지면,
게는 그 무늬를 제 문신으로 새긴다.
좀 더 완벽하게 숨으려는 전략이다.
세상의 파도 밑 고요한 바닥을 어기적거리고 싶은 나도
내려갈 계단이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심연을 들여다보며 가라앉는 꿈자리나 드러낼 뿐.
경계
이하석
저것들은 우리가 오기 전부터 여기서 날던 것들.
지금도 그러하다. 지금도
파도와 모래, 그리고 하늘의 단순한 구도 안에서
푸른 물빛에 쪼여 희게 빛나며 빠르게
오르내리며 물속에서 재빨리 먹이를 낚아챈다.
새들은 비닐에 싸인 것, 비닐이 터져
빠져나와 모래에 몸을 파묻은 채 몸을 버린 것들,
바람에 마음 없이 잘 찢어지는 것들의 위로 날지만
내려와 앉지는 않는다.
파도에도 씻겨지지 않는
시간에도 부드러워지지 못하는
햇볕에 바래지 않는 것들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다.
새들은 조금씩 더 멀리 난다.
쓰레기들이 이룬 자연과 인간의 경계의 위험을
나보다 먼저 알았을까.
나는 쓰레기 더미에 그림자를 묻은 채 남는다.
끼룩거리며 수천의 새들이 해안을 덮고
솟구쳐 오르고 빠르게 내리꽂이는
저 희게 반짝이는 삶의 어지러운 한낮이
내 안에선지 밖에선지 여전히 들끓고.
경주 남산
이하석
돌 안에 슬픔이, 금 가기 쉬운 상처가
들어앉아 있다
미소를 머금은 채
누가 그걸 깎아 불상으로 드러내놓았을까
제 마음 형상 깎아내놓고
내 슬픔 일깨우려 기도하라는가
나는 없고
이 돌만이 오래 있을 뿐
슬픔 앞에 불려온 이들 기도로
천둥 치면 어둡던 돌의 뒤가 환해진다
고추잠자리
이하석
그가 날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 여린, 모든 설명과 죄악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그가
문득 내 앞에 나타났다고.
이 턱없는, 아슬아슬한,
사랑이 실은 나의 힘이다.
내가 사는 도시의 미세하게 얽어 짜인 미궁들을 비켜서
그만이 아는 미로의 해답을 더듬어서
그가 내게 왔다.
그 길은
내가 가보고 싶었던 길
그를 붙잡으려고 볼펜을 놓다가 밀린 서류를 챙기느라 나는 또 깜빡 빠져든다. 아침에 샤워한 등이 에어콘 기운에 닿아 무감각해진다.
그는 붉은 섬광처럼
내 서류 위에 날개 그늘을 드리운 다음
찬바람에 떠밀려 방음의 천정을 휘젓다가
창밖으로 날아가 버린다.
누가 문을 연 실수를 범했나 보다.
누가 투덜대며 문을 닫는 소리에 바깥에서 침입하던 소리들이 끊겨, 나는 잠시 멍한 적막 속에 빠져든다.
내 주위에서 몇 사람이 황급히 서류 속에 몸을 숨기는 게 느껴진다. 나보다 먼저 그를 본 이들임을 알겠다. 그들은 창밖의 가볍고 투명한 날개의 침입자들을 잠시나마 은밀히 지켜보았겠지.
그러나, 다행히, 그는 문 닫기 전에 빠져나갔고
그래, 그는 내게 왔다가, 문득, 가버렸다.
그는 잘 돌아갔을까
왔던 길을 되짚어서
실바람처럼
그가 간 길을 나는 헤아리지 못하지만,
타이피스트 김양은, 지난 주말에 산에 갔다가
폭우를 만나 숲에서 허둥댔는데
그것들이 나뭇잎 뒤에 실바람처럼
붙어 있더라고 말한다.
고향에서 온 편지
이하석
네가 도시사막에서 보내온 편지는
사랑한다는 건지 물을 보내달라는 건지
잘 해독하지 못하겠다
여기도 옛날엔 오아시스였다
그러나 지금은 건기, 유목민들은
철수하고 없다
모래언덕엔 녹슨 철근들의 뿌리만
사방으로 뻗어 낙타풀을 솟구쳐올린다
그리운 이들은 너처럼 사막 너머 멀리 있고
우린 늘 집안에서만 소근거리며 내다본다
밤마다 지붕 위로 별이 뜨지만
걸핏하면 모래 우는 소리에 쓸려가버린다
회오리바람이 불면
온통 편지와 청구서와 휴지와 시가 날려
무너진 건물 구석과 별 안 비치는 마른 저수지 바닥
에 쌓인다
그걸 뒤지는 거지들도 많이 생겨났다
거기서 희망이라는 말들을 찾아내어
내게 되팔기도 한다
고령장날 떨이로 석 장을 샀다
네게 한 장 부쳐주마
또 편지해라 내가 버린
희망을 누가 다시 찾아낸 걸 구입하여
보낸다는 절망할 필요는 없겠지
안녕
곤줄박이
이하석
벽에 걸어둔 채 잊어버린 밀짚모자에 알들을 낳아놓은 것이다
내 모자지만 새에게 해산할 동안만 공으로 세 준 양
짐짓 너그러워진다
어쨌든 자연스러워진다
내버려져서야 누군가의 품이었다
차츰차츰 주인이 되레 곁방살이 사는 듯
곧 새끼들 태어나 어미가 물어주는 벌레들을 먹고 삑삑거리리라
그동안 나는 숨죽인 채 다른 모자를 살펴 쓰고 다닌다
어느새 손주 받을 한 아비가 된 듯하다.
골목들
이하석
뜯어내는 집이
황혼 같네
기둥과 대들보의 근육들이
뒤틀렸네 추억처럼
돌이킬 수 없어 보이네
그러나 다 들어내진 않고
교묘한 손질로 겨우
정서의 높낮이를 다시 짜 맞추네
그 옆으로는 시멘트로 깁스한 건물들,
추억 파스로 땜질하고 덧댄 상처들의 건물들이
제화점들, 성인텍들과
서로 한 동네로 간섭하네
전쟁 통에 밀려와 쓸리던
화가와 시인들이 떠난 다방 자리도
엇나간 풍경으로 기울다가
리모델링 되어 카페들로 거듭나네
거기 무슨 색들과 말들이 더 남았을까
나는 기웃거리며 뒤적이며
무너진 추억의 퍼즐 조각들을 줍게 될까?
바랜 향촌동 골목들이여
오래 속 끓이고 전전긍긍하던
우리 추억의 실핏줄들이여
황혼같이, 리모델링을 거듭하여 되새기는
이상한 새것의 껍질들이여
투억만 덕지덕지한 근대의 현대여
숨바꼭질처럼,
늙은 가수의 노래처럼,
황혼같이,
밤을 꼬박 새운 아침같이,
여전히 숨어드는 생들을
더욱 더 가지고
내다보는 이들이여
구두
이하석
풀덤불 속에 입을 벌리고 누워
구두는 뒷굽이나마 갈고 싶어 한다, 풀들 속으로
난 작은 길을 가고 싶어 하며, 어디로든
가버릴 것들을 놓아주면서.
주물 공장 최 반장은 토요일에 그를 차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최씨의 바지 밑으로 그는 끈이 풀렸고
뒷굽이 너무 닳아 있었다. 일년 가까이
그는 벌겋게 달아 있었다, 술과 불이 어울어진
최씨의 온몸 밑에서. 내던져진 채
그는 이제 가고 싶은 곳을 잊었다,
최씨의 여자 속을 걸어가는 허약한 다리 대신
차가운 빗물을 맑게 담고서.
문득 흐르던 구름 하나가 구두 속에 깃들어
어디론가 가자고 한다. 그래도 최씨의 구두는
뒷굽에 매달린다.
구석진 곳
이하석
나는 여전히 구석진 곳에서
노래한다 여기저기 빈 깡통들 버려져
쭈그러진 안이 제 스스로 예리해져 있다
촉각이 예민한 모기는 가는 생각 가는 다리 가는 목소리로 내 피를 노래 부른다
깡통은 이제 제 빈 안을 미워하지 않는다
한때 제 안에 담았던 풍부한 음식들도 과자들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모기가 빨대를 들이밀어도 추억의 어둠의 피마저 내준다
구석에 쌓인 신문지는 쥐들 파먹은 사건들로 너덜너덜하고
그 여백에 내가 쓴 글자들 바랜 채 바스락거린다
모든 게 마른 기억 너머에 있다
영혼도 없는 모기의 노래만 날아다닌다
구름 뻐꾸기
이하석
이 불어 터진 돌기들이
산 위의 그 구름인가.
뻐꾸기 울음처럼 내부에서 바깥으로 부풀면서
우울하게 떠서 흐르는 마음.
흩어지거나 모이나 바람에 언제나 하염없이 높은
꿈이길 바라면서, 아래로 내려서는 젖은 꿈이면서.
그러나 이 안은 너무 지독해.
온통 썩었잖아.
산성비는 이런 폐기되지 못한 구름의 침출수였구먼.
우리가 올려보낸 사랑의 말과 신앙들이
엉망으로 젖은 채 부식되어 있군.
비행기 탄 이들은 그래도 이 구름 보고
우주의 신비를 노래하겠지.
다시 내려가 봄 풀 돋는 강가에 앉아보면
그것들은 여전히 하얀 말씀, 피어오르는
유혹의 비유, 가볍게 뜬 수줍음일 따름이네.
우리가 위를 보며 나누는 말들이 독이라면
우리 사랑은 그렇게 무책임하게 피어올랐네.
내 안에 엉긴 흰 구름이
또 먼 산 위로 피어오르며 그 상처를
뻐꾸기의 목처럼 부풀리네.
구름의 키스
이하석
구름이 어디서든
팽창팽창
피어오른다.
그걸 올려다보는 재미로
여름을 난다.
보라, 한 구름이
여자 모양으로 목을 늘여서
구름 남자에게 뭉게뭉게
다가가는걸.
구름 여자의 입술이
구름 남자에게 팽창팽창
닿으면
까치 부리 안처럼 단순한 남자의 안에도
뭉게뭉게
바람이 분다.
누가 내 입
핥고
간
기억처럼
내 입안에도
구름의 말이
뭉게뭉게
씹힌다.
구형왕릉 - 산청에서
이하석
치켜든 꽃
아래는 뱀 길
죽음을 돌로 덮었지만
그 속을 들락날락하는
가늘고 긴 삶의 또 한 가지
향기가 있네
굳게 다짐합니다
이하석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라도 아름답습니다
나는 화장실을 깨끗하게 사용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라는 글이 화장실마다 붙어 있다
아름다운화장실문화협의회라는 게
나의 바로 옆에 있는 모양이다
그 사람들이 내 뒤를 캐는 모양이다
뒤를 보기가 무섭다
시 쓰는 일은 앞을 보며
뒤를 보는 일
도깨비가 나올까 봐 겁나긴 하지만
뒤를 보는 힘으로 앞을 보는 일
그래서 나는
뭐든, 깨끗하게 뒤를 볼 것을
굳게, 매일 다짐한다
'그대였기에, 우리는 서로 아름다워서' - 문인수 형을 그리며
이하석
작은 돌이 내 책상 위에서 깜빡, 눈 뜨고 있습니다.
그대가 내게 주워준 까만 돌로,
그대는 내게 원고지처럼 눌려져 있습니다.
인도에서 가져다준 불상 하나가
내 방의 구석을 성스럽게 부스럭거리고 있습니다.
그대의 몸에 맞추었다가 온 옷들 몇 벌도 헐렁하니
때로 내게 건들거립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많은 것들이, 그대라서
내게 아주 있습니다.
아아 그대 때문에 우리는 함께 아름다워서
동화천과 남한강, 동강의 여울에 재잘재잘 노을처럼 탔지요.
우리는 서로 눈부셔서, 주전 바닷가 파도 소리에
돌의 말들 닳도록 섞었지요.
우리는 서로 화안해서 동해처럼 서해 해안처럼 퍼덕였지요.
우리는 서로 수줍어서 함께 고령과 성주의 신작로를 닦았지요.
우리가 서로 마주 불러서야 지리산도 굽이굽이 텅텅거렸지요.
그대와 함께 있었던 모든 자리가 그렇게
마구, 끄뜩없이, 꽃불 났지요.
그리운 이여. 그대는 이제 저물어서
눈부심과 화안함, 수줍음과 아름다움의 꽃 언덕을 넘어가네요.
그대의 뒷모습이 눈부심과 화안함과 수줍음과 아름다움으로
물들었네요. 서로 자꾸 땡기네요. 그러나 자꾸 불러도
돌아보지 않으면, 그대는 가는 사람. 이미 간 사람. 어쩌면
마구, 가버린 사람.
그대가 시로 지피던 서정과 명랑성의 기도는
무한 환하고, 눈부시고, 수줍어서 수시로 열리지만,
그대는 마침내 가는 사람, 이미 간 사람,
어쩌면 다 가버린 사람.
그리하여 내겐 곁이 없어져서,
그 바닷가에, 산등성이에, 강여울에,
함께 앉았던 수성구청 앞 벤치에
꽃차처럼 달려가는 수줍음과 눈부심으로
그대와 함께 펼쳐 서 보네요.
아아, 그대였기에
우리는 서로 아름다워서.
그래, 길이 있다
이하석
그래, 길이 있다
굴참나무 울창한 숲을 안으로 가르며,
전화줄처럼 명확하고도 애매하게,
길이 나 있다
아침을 지나 아무도 없는 숲 안에서
나는 외롭고, 지나치게, 무섭다
길 저쪽 깊은 숲속으로 곧장 난
길 저쪽 어쩌면 길 저 끝에
무엇인가가 있는 듯 느껴진다
굴참나무 잎들이 쌓인 숲 저 안,
어둠의 폭풍이 소용돌이치는 곳
그 무덤들이 우리 안에 없다면
이하석
우리 안에
그 무덤들이 없다면,
저들이 지운 흔적의 압화押花 속에
고스란히 있다.
안팎에서
부르는 호명에 귀 막는
빈 메아리의 골에
푸른 산의 갈피에
봉분도 없이 있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만
버려져
있다.
행방불명으로 있다.
우리 안에 있으면
푸나무처럼 솟아나
절망과 희망의 광합성으로
서로 우거질 테지.
그러나 아무 곳에도 없어
이 강산 도처에서
계속 파헤쳐지는 질문의 삽질.
빠른 대답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뼈들.
망각의 껍질을,
꺼리는 질문과 대답으로
파들어가서
어리둥절하게 만나는
역사의 민낯이여.
사방팔방 침묵하지 못하는
초혼의 말들만
만수 넘본다.
기울어진 지평
이하석
지평선이 꽤 기울어져 있다
기사가 쉬러 갈 때 측량기를 너무 세게 누른 탓이다
기울어진 지평의 아래는 기울어지지 않은 무성한 풀덤불
숲 너머로 사선을 그으며 나비가 날아간다
개미의 집이 어둡고
때로 쥐들은 그 가까운 데서 출몰한다
폭풍의 구름이 끊임없이 솟구치며 감정을 확장시키지만
기운 지평선은 어쩌지 못하고
역광에 풀들만 날카롭게 곤두서 예리해져 있다
측량기를 통해 보는 선은 정확하게 어떤 지점을 끊어낸다
어쩌면 기울어진 측량기 그대로 선이 그어질지도 모른다
끊어낸 만큼 저 풀숲은 파헤쳐지고
그 상태로 지평선은 수평 유지할 것이다
어떤 미심쩍은 신앙이 그 위에 세위질까
수많은 개미구멍 같은 깊이와 높이 속으로
사람들은 들락거리며 구름처럼 솟구치며 확장되겠지
개미와 쥐들의 세계인 풀숲이 사라져도
아이들의 소리에 떠서 종이 나비는 날 테고
지평선은 그 아래 펄럭이는 깃발이 되기도 하리라
그래도 개미와 쥐들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집요하게 인간들의 마음 파고들어
더 깊고 아늑한 집과 통로 만들어내겠지
그리고는 구름처럼 거대한 지평선이 펄럭이며
덮쳐오기를 꿈꿀 것이다
기지촌
이하석
공군 기지의 꿩들과 참새들은 숲속에 숨어서
지저귄다, 숲 위 하늘엔 인간들의 무수한 길들이
누워있고. 나무들이 낮게 엎드린 사이로
활주로도 길게 예리한 굉음의 길로 누워있다.
잔디의 발뿌리가 닿지 못하는
흰 페인트 길에 번쩍이는 햇빛.
폭탄을 적재한 비행기들은 정확하게
하늘길을 안다. 하느님도 연들이 가는 꿈나라도 없이
하늘은 높고 푸르다고, 기지촌 아이들은
모형 비행기 놀이 속에서 느낀다.
꿩 울음소리로 봄이 와서 아이들의 신발에 닿아
잔디의 발뿌리가 또 근지럽다.
꿩을 찾아 숲속에 들어간 아이들은 잡초 속 꿩의 길에 누워있는 타이어 조각과 병 조각들 빈 깡통 무더기 속에 부서진 거울 한쪽이 떨어져 흙 속에 묻혀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아이가 쓱 손가락으로 먼지를 닦으니, 거울 속 아이의 손가락이 지나간 쪽으로 비행기도 길도 없는 하늘이 한쪽 문득 푸르게 비쳐 왔다.
긴 나무 의자
이하석
바람과 비에 바랜 채
햇빛 속 하얗게
기다리고 있는 긴 의자
남녀가 거기 앉아서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밀어 쓸어뜨리면
여자의 머리는 의자 밖으로 빠지고
의자의 다리 하나가 문득 삐걱댄다
사랑이 가볍지 않고 한쪽으로 너무 기운 탓이다
숲이 끊임없이 사운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의 개구리들은 요란히 운다
어딜 향하든 길들이 급하지 않다
사랑이 아니라도 아무나 의자에 앉으면
숲 아래 잠든 물빛에 숨죽일 것이다
그의 다리와 의자의 다리는 튼튼해서 외롭고
때로 무너져 다시 고쳐 놓으면 의자는
제 깡기를 한동안 유지하려 애쓴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과 숲에서 나오는 길의
목에 의자는 성실하게 앉아 있다
때로 달빛이 물컵 엎지른 것처럼 쏟아져 내려도
의자는 기다리고 있다
길
이하석
길은 상심도 없이
어지러운 구름 아래로 치닫는다.
푸르스름하고 회색인 강에 빠지지 않고
물 위를 걸어, 천국과 이어지지 않고
철 구조물과 시멘트로 이어지는 게 확실하다.
강 이쪽에선 갈색과 푸른색이
격렬하게 싸운다.
찢어진 대지의 상처를
덮어놓고 뒤덮는 검은, 거친 풀들.
풀들을 타이르며 욕지거리하며
몇 번이나 포크레인에 뒤집히는 흙들.
강 저쪽은 어지러운 문질러진 구름 아래
검게 빛나는 선들이 얽힌
회색의 도시.
그렇다면 길은 강을 건너와
이쪽으로 쳐들어온 게 분명하다
길을 보내놓고 끊임없이 히며
길을 잡아당겨 보는
싸움은 저쪽에서 더 격렬한 게다.
길은 쇠의 힘으로 난폭하게
나를 뚫고 나의 뒤로 뻗어나간다.
뚫려버린 나와 함께
이쪽은 다만 거친 풀들 위로
얼음 기둥처럼
잎 없는 나무가 몇 그루,
물 없어 뿌리 썩지 않아
바람에 몸을 버팅길 수밖에 없다는 듯이 서 있다.
한때 울창한 숲이었음을 떠올려주는
기념비처럼
길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하석
전화 케이블 선이 어두워지는 벌판을 혼곤하게 흘러간다.
길 따라, 송전탑이 줄지어 늘어서서 잦아지는 쪽으로
초저녁의 잔광이 페인트칠로 고운 미끈한 철제 파이프의 형체를 겨우 드러낸다.
길은 도로표지판이 가리키는 쪽으로 아스팔트가 곧장 뻗는다.
길 위로 무성히 널린 전깃줄들에 바람은 수시로 걸리고 찢긴다.
남루한 힘 빠진 바람은 길을 가로질러 송유관 속으로
송유관 밑 축축한 흙 속으로 드나든다.
그 바람에 제비꽃이 얼핏 피기도 한다.
저 길을 혼자 걸어가는 사람은 외롭게 듣는다.
케이블 선 속을 흐르는 말의 개울물 소리와
전선 속을 뜨겁게 흐르는 불의 강물 소리를.
그 소리들 아래로 그 소리 따라 뻗힌 길엔,
벌판에서 굴러온 돌들의 상한 머리들이 이따금 잔광에 반짝인다.
잔광에 반짝이며 몇 개의 편린들도 날고 있다.
쇠조각인가? 비닐 또는 마음 조각?
아니면 이 풍경을 밖에서 긁은 손톱자국?
이윽고 어둠.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송전탑의 꼭대기로 부는 바람의 길은 보인다.
저 길을 지나 그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저 길을 따라가면 혼곤한 소리의 마을은 나타날까?
김씨의 옆얼굴
이하석
은사시나뭇잎 그늘이 얼룩져
그의 얼굴은 어둡고 술 취한 듯하다.
육교 밑으로 휴지를 쓸어갈 때
발밑을 구르는 신문지 조각을
때로 주워 읽는다. 길 가, 인도와 차도를 가로지른
철제 난간에 앉아, 그는 먼지 속처럼 아득히
버마 사건의 그 후와 최근의 학원 사태를 느낀다.
그것들은 그의 코언저리를 붉게 하고
깊은 줄이 패인 이마를 불룩거리게 한다.
청소가 끝날 때쯤, 그의 귀 언저리 털에서
이 거리의 마지막 먼지가 부스스 떨어진다.
중앙로의 오늘 그가 맡은 구간은 은사시나무길,
비와 바람과 불빛과 사람들이 자주 흐르는.
50이 넘어서면서 자꾸 허리가 결리고,
그는 목뼈를 주먹으로 자주 두드린다.
신문엔 안 났지만, 레이건이 중공을 방문하기 직전에 그랬을 것처럼,
때로 그는 자, 신나는 일이 있을 꺼야 하고 중얼거린다.
그걸 위해 그의 눈길이 자식들의 얼굴처럼 생긴
노변의 햇수박 쪽으로도 자주 간다.
은사시나뭇잎 그늘이 거기에도 얼룩져 있다.
육교 옆, 미도 백화점의 셔터가 올라가자
큰 유리창에 이내 김씨의 빈 얼굴이 비친다.
때로 밝게 때로 어둡게 때로 앞모습만
그 숙인 얼굴이 하루종일 유리창에
맑은 유리창 속 아름다운 온갖 상품들 위에
비친다. 밤 11시 철제 셔터가 내려진 후에도
그의 얼굴이 철제 셔터의 위에 완강하게
비친다. 어둡게 또는 새하얗게. 헌 신문지 같은,
또는 은사시나뭇잎 같은, 또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철제 셔터 같은 얼굴이 거기에 있다.
깊은 침묵
이하석
옛 맑은 물은 수문을 빠져나갔고,
수문 녹슬어 닫힌 채 물들 어두운 깊이만으로 썩어간다.
이 도시가 버린 자식들의 얼굴들
한밤 때때로 수면에 떠오르고
고기의 넋은 진흙 속에 처박힌다.
민들레와 제비꽃의 물가는 허물어져
연탄재와 고철들과 비닐 조각들로 어지럽다.
능수버들 허리 꺾인 곳 몇 개의 술집들 철거되고,
술집들 더욱 변두리로 작부들 데리고 떠나가고,
저 물에 빌딩과 거대한 타이프라이터와 시장이 비쳐온다.
물가에 서성이며 고철 줍는 아낙네,
망태기에 어른어른 석양에 번쩍이는 물그림자 일렁일 때
꼬챙이로 물가 해적이며,
물의 침묵을 침묵으로 들여다본다.
그다음 불도저는 못물을 메워 버리고
고철과 비닐과 물과 아낙네가 훔쳐본 물의 침묵을
한가지로 흙 속에 다져 버린다.
깊이에 대하여
이하석
자판기 커피 뽑는 것도 시비꺼리가 될 수 있는지,
종이컵 속 커피 위에 뜬 거품을 걷어내면 "왜 거품을 걷어내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
나는 "커피의 깊이를 보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마음에 없는 말일 수 있다.
인스턴트커피에 무슨 근사한 깊이가 있느냐고 물으면,
대단치 않는 깊이에도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해 준다. 모두 얕다.
기실 따뜻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대단찮은 깊이까지 사랑한다 해도,
커피는 어두워 바닥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마실 어둠의 깊이를 얕볼 수 없다.
싸고 만만한 커피지만, 내 손이 받쳐 든 보이지 않는
그 깊이를 은밀하게 캐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걸 누가 쉬이 들여다볼 수 있단 말인가?
깡통
이하석
1
풀숲 빈 깡통들은 모여서 흩어지면서,
쉬 녹슬어 버리는 자신들과 헤어지려고 애쓰면서,
스스로 무거워지는 틈을 스스로 자꾸만 비우면서,
자신들이 누운 곳을 언제나 빈 터로
만들어 버린다, 봄 오는 연탄재 더미 속
연탄재를 또 한 번 부서뜨려 놓으면서.
풀꿈의 고통 속 초록은 무성해지고
깡통 속 그 그늘들은 드리워진다.
달개비꽃 피는 양지쪽으로 뻗는 풀의 발가락 황홀할 때
깡통들은 달개비의 햇빛을 날카로운 이빨로 벗겨 놓으면서
더욱 무거워지는 몸을 또 몇 번이나 비운다.
아름답다고 말해줄까 달개비야
내 가벼운 몸 뿐으로는
네 이름도 그 이상의 무엇도 감당할 수 없군
<몸뿐>이라는 깡통의 말에 달개비는 수줍게
웃는다, 깡통을 벗어나려는 고통 뒤에 스스로의 몸을
감추면서, 깡통들은 은연중 그 수줍음에 걸려
투명해져 버린다, 무게가 없는 몸을 풀의 고통 위에 띄우며.
웃지마라 달개비야 네 수줍음 뒤켠의 더 깊은 어둠에 비쳐 내 몸이 나타나는구나 내 몸은 앙상하구나 그러나 저 어둠을 욕해선 안 된다 달개비야 인간인 저 어둠에 비쳐 우리는 나타나는 것 우리는 어차피 인간의 편이지만 지금은 시들어 버려진 몸 그러나 너는 수줍음만 끝내 보일 뿐 우리를 받아주지 않고 지금은 우리들만으로 떠돌 뿐인 몸들을 자꾸 비워낼 뿐
<지금은>이라는 자신의 말에 깡통은 수그러지며
쭈그러든다. 지금은 쭈그러들 뿐이야,
깊숙하고 더욱 차가운 쪽으로 빠져들며,
모든 것을 제 자신이 헐어 버리며,
팽개쳐진 몸의 마음도 팽개치면서.
3
페인트 껍질 벗겨져, 노랗게
나비처럼 바람에 날아갔다, 풀섶 그늘에
한 조각 황음한 흔들림만 남겨 놓고.
속에 찬 빗물 마르는 대낮,
녹슨 몸 스스로 망가뜨리며 깡통은 기울어진다,
그의 내부에서 나와 소나기 달려가던 언덕 끝에
쓸려가는 소리에 공허해지며.
깡통은 스스로 안에 간직했던 하늘을
하늘에 주어 버린다. 구름을 구름에게
패랭이를 패랭이에게 지나가는 쥐의 얼굴을
쥐들에게 주어 버린다. 빗물 말라
자신 속에 어려오던 모든 그림자들 사라지고.
먼지와 흙들로 그의 속이 채워질 때
깡통의 귀는 풀들을 ㄸ고 솟아
그의 안보다 더 깊은 세계 쪽으로
스스로의 안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는다.
마침내 묻혀 버리는 것들.
깡통을 묻은 다음 안으로 죄어드는 흙,
이윽고 깡통 소리가 쇳소리를 벗어난다.
나는 망가지
이하석
나는 망가진 풍경이다 언제나
지난밤의 어둠이 남아 있는 구석을
내 몸과 방에 갖고 있다
나는, 내다보는
갇힌 풍경이다 나는,
끝난 풍경이다 나는,
차갑게 반영하는, 투명한,
풍경이다 누가, 들여다본다
나는, 풍경이 아니다 바깥을 향한
뜨거운 눈이다
나른한 현장
이하석
분홍빛 스타킹이. 한 켤레. 구겨진 채
길게 놓여 있다. 초록의 융단 위에.
그것들은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떠오를 듯.
검은 숄이 그 밑에 놓이고. 따스한 기운 속
그녀의 연약한 목덜미의 기억을 드러낸다.
스타킹의 발치에는. 마루 바닥에 누운 여자의
벌거벗은 하체를 찍은 흑백 사진이 한 장.
던져져 있다. 사타구니의 검은 숲은
늘 스타킹 속 장미 팬티 안에서 젖어 있던.
그녀의 가랑이의 어둠을 보여준다.
그 아래 흑갈색의 무늬 아로새겨진 빗이. 놓여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것.
그러나 이것들 속에 그녀는 없다.
이 정물의 풍경 속.
나른한 초록의 융단 위에 그녀는 찍히지 않았다.
그녀는 이것들을 벗어놓고
어디로 갔나?
나무
이하석
가파르게 서 있는 나무.
지난가을에 무성한 바람의 기억들 떨쳐버리고
망각의 바탈로 밀려났다고 여겼는데,
언제 기억 되찾았는지,
우리가 미처 발견하기도 전에,
문득 전신이 푸르스름해져 있다.
바람기가 곧 무성해진다는 걸 드러낸 게다.
우리 자는 사이 밤을 치대던 천둥.
그 환한 예언의 소리 온몸으로 맞은. 어혈 같다.
그러고 보니 이월의 끝이고 삼월의 초입이다
그러니까 나무는 절로
제 온몸의 봄을 당연한 소식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 기세는 여름으로 이어져 무성해진다.
나는 바로 보고 말해야겠다,
나무는 모든 계절의 끝머리쯤에서
망각되거나 의심되어지는 게 아님을,
언제나 그렇듯 나무가 선 그곳이
모든 계절의 출발점인 것을,
나도 그렇게 비탈에 서 있음을.
나무들
이하석
사람들 마구 죽여
파묻어버린 땅에서
솟아난
저 나무들은
햇볕 강하게
쬐어도 속속들이
환해지진 않는다.
완강한 기억의 표상으로
안으로만
우거져
사랑은 켜진다
바람이
피면
몸
전체로
제 뿌리에서 올라와
우거진 죽음을
분다
바람
자면
그 그늘
아래서,
살아 있다고
죽은 이의 자식들이
온몸 사방팔방
접는다
질문의
합동 제삿날
묵념하다 문득
올려다본다
새가 현기증을
걸어놓고
간
우듬지에
조기처럼,
또는 국가보안법인 양
높이
걸린 채
내려다보는,
골 아래서 날아온
검은
비닐
나무 아래
이하석
사람들 동네 입구엔 의레 생울타리인 양 나무 있고
그 위 바람 지나는 길목엔 수문인 양 까치집 떠 있다
까치 아이들 어지럽겠다
몸보다 마음이 더 어지러운 술 취한 아버지
그 집 아래서 자주 늪처럼 뒤척이며 잠들지만
까치는 언제든 크게 울어 깨워선 아랫동네로 잘 내려 보낸다
골짜기에서 개울물처럼 쏟아져나오는 범종 소리에
까치집 아래는 황혼이 소처럼 감돈다
식구들 다 돌아온 까치집에 별의 불 켜진다
절 찾아 올라온 할머니가 비탈길 위에 서서
그 등불 올려다보며 괜히, 절한다
나무에 대하여
이하석
1 - 높이의 뿌리
나무는 서 있는 게 본래 모습이라고,
그러니까 높이로 존재하며, 높이의 지향이 제 논리이며 꿈이고 메시지라고,
누운 건 높이로부터 내팽개쳐진, 죽은 것일 뿐이라고,
피치 못해 누웠다면 곧바로 그 끝을 세울 수밖에 없다고,
무엇보다 바로 서 있기 위해서는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 뿌리는 캄캄한 땅 속으로, 위로 서 있는 나무와 대칭되게 아래로 뻗으며
아래를 움켜잡고, 아래를 밀며 거꾸로 서 있을 수밖에 없다.
2 - 매실
나무의 상수도가 가동된다면,
그 아래서 나무처럼 흔들리며 오줌 누면
취기마저 흙에 박아놓은 상수도관으로 이어져 나무 우듬지까지 올라가는 걸 상상할 수 있다.
하수도와 상수도는 그런 상상력으로 연결되어야 튼튼하다.
그러면 온갖 일들이 아래서 올리와 핀다.
매화 피우고 나면 맨 아래서 올라온 소문처럼 돋아나는 잎들이 그 꽃자리 덮는다.
그 그늘 속으로 아래의 가려움이 위로 긁어대어 맺힌 매실들이 무슨 증거처럼 푸르게, 차츰 노랗게 드러난다.
나무의 기억
이하석
그래, 여기가 우리 집터였지.
늙은 나무 한 그루만이
아버지가 유일하게 세운 우리 집의 기념비였지.
아버지는 우리 집을 헐값에 넘기고 떠났다.
새 건물 유리에 아버지가 심은 나무가 비쳐 흔들리는
잔인한 여름만이 무성하게 서 있을 뿐이다.
그 유리로 본다.
나무속 새집에 흰 깃털들 남아 있어도
그 아래 나무 그늘 밟고 지나가는 행인인 내가 보인다.
나비
이하석
내 가비야운 비상 가까이에서
폭탄과 아우성을 터뜨리지 마라,
나는 죄 없어 부서지기 쉬우니.
나는 산과 들을 파고들고 날아도
자취 남기지 않았다.
장다리꽃에 꽃도 모르게
미동도 없이 오고 갔었다.
밤이면 풀숲에 뜻없이 깃들어
내 세계는 잠들고
실바람에도 내 몸은 잠을 안고
혼곤히 사방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의 구석을 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단지 혼란스런 감정만을 지닌
향기로운 구석을 나는 오간다.
낙엽 편지
이하석
4대강 사업 반대 시 읽는데 낙엽들이 날아온다.
바람 센 데, 비 뿌리고, 우레도 치는 저녁.
목소리 높여 읽는데 낙엽들이 날아와 중앙파출소 앞 작은 광장에 쌓이고,
천막 안으로 날아들어 행사용 음향기기 위를 긁어댄다.
사람들의 발아래 모여들어 끊임없이 사각거린다.
근방에 나무가 있는 모양이다.
그 나무가 우리들의 말을 듣는지,
저도 긴 팔 벌려 수많은 잎들 구호처럼 흔들며 여름 지나왔다고
우리에게, 바람 우체부 편에 편지들을 보낸 것일까?
응원 메시지라도 담겨있을까?
시 읽는 행사장에서, 저 편지들은 글자가 없어도 늘 읽을 만한 것.
우리 가까이 나무들이 많다면 연말 위문편지들처럼 수북수북 쌓이리라.
우리의 삶이 흘러가는 큰 강 지키자고
울려내는 시의 소리들도 사방으로 퍼져나가
저 낙엽들처럼 간절하게 쌓이고 보채며 긁어댄다.
그래, 한데 시 읽는 곳으로, 작지만, 아주 아름답게 잘 물든
자연의 편지들이 온다.
제 뿌리 덮듯
우리 언 발들 덮어주러 온다.
날아오르는 명태
이하석
1
말라 비틀린 희푸른 몸 솟구치며
검푸른 또는 청회색 머금은
붉은 기운 감도는 현암 속을
어둠의 불기운 속을
날아 오릅니다.
바람의 칼날에 날카롭게 조각된 흰 구름의 가로
펼쳐진 깊푸른 어둠의 바다가 보입니다.
2
창은 명태의 눈알처럼
하늘을 머금고 있습니다.
그려놓은 명태의 눈알처럼
녹차의 연두빛 물에 푸르스럼한 하늘이 빛납니다. 침대 주위에 쌓아둔 화구들에 기댄 기름 먹은 풋잠이 깹니다. 대낮인가 봅니다. 밖이 부드러이 환하니 봄인지도 모르죠. 녹차 잔을 의자에 내려놓고 일어나 벽에 마른 명태들과 함께 걸린 바지를 걷어 내려서 다리를 찔러 넣습니다. 세 마리의 명태들은 한껏 벌려진 입이 실에 꿰여서 철사 옷걸이에 매달린 채 벽에 걸려 대롱거립니다. 명태의 휘부연 아가미 주위에는 푸른 좀이 슬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시장엘 나가지 않아서 새것으로 바꾸지 못했지요. 바지 끝단이 헤어져, 명태들로부터 좀들이 건너와 헤쳐놓은 것이나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어제는 밤 늦게 명태를 그리는 작업을 했고, 새벽에도 깨어나 홀로 캔버스에 청황빛 하늘을 입혔습니다. 이젠 잠시 쉬러 들에나 나가 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늘 그렇듯이, 아파트를 나서면 역이 나오고, 역 앞 나무도 없는 정류장에서 5분쯤 흐린 하늘을 보고 있으면 하양이나 월배행 시내버스가 오겠지요.
3
들에 나가면 고분 발굴 광경을 볼 때도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개미처럼 구멍을 파고 들락거립니다. 때로 이런 광경도 보이지요. 무덤 위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흰 담배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릅니다.
때때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지요. 어둡고 습기 찬 돌방 속에는 천 년 동안 먼지가 쌓여 검푸른 토기와 청동 말안장을 덮고 있습니다. 구석구석에 낀 어둠을 살피노라면 문득 발밑에 무엇이 꿈틀하니 밟히는 걸 느낍니다. 조심스레 손으로 잡아 올려보면 그것은 푸른 먼지 또는 도마뱀의 꼬리 같습니다.
시간은 도마뱀 같은 걸까요,
잡았다고 느낀 순간 본체는 사라져 버리고
그 꼬리만을 남기는.
그래, 들에 갔다 온 직후에는 잠깐동안이나마 그려놓은 명태의 몸에 생기가 느껴집니다. 사나왔던 시절을 가두어 지나와 헐렁해진 바짓단을 걷어붙이고 화폭 앞에 서면, 명태들은 추운 바다 빛 눈망울을 부신 듯 부릅뜹니다. 들의 흙 속에 옛사람들의 방이 있듯 화가의 방 안엔 명태의 하늘이 무수히 날아오릅니다.
4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의 삶은 실패했네.
일방적인 평가지요. 누가 날 안단 말예요.
평생을 썩은 나무등걸만 구해와서 깎는 사람의 숲을 나는 압니다.
평생을 통만 만드는 이의 하늘을 나는 압니다.
평생 돌만 모아 귀꽃을 돋치는 이의 땅을 나는 압니다.
그 덧없고 값없는 짓거리들, 하며 당신들은 비웃겠지요.
나는 스스로의 일 속에 나를 몰아넣음으로써
스스로를 지켰습니다. 그것도 생산이라고
나는 그걸로 가족들을 먹이고 화구들을 샀지요.
나는 스스로의 삶만을 살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나를 가둔 건 내가 아니라고도 해야겠지요.
나를 가둔 사람들에게 나는 명태의 하늘을 보여줍니다.
나는 나의 삶을 지킨 거예요.
실패하지 않았어요.
나는 명태를 그리며 그것들을 하늘로 날리며
나를 지켜준 방 속에 잘 있습니다.
거기에도 물론―생각하기에 따라서는―사방으로
검은 하늘과 누런 땅이 있고
그리하여 하늘이며 땅인 자리로
늘 옮겨앉습니다, 하늘과 땅이 맞부딪는 곳으로
패랭이꽃 같은 문이 나 있는.
5
그의 삶은 실패했네
그는 죽음의 문턱에 두 번이나 섰었네
마른 쑥부쟁이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발아래 늘 캄캄한 방을 느꼈네
그는 다만 색깔 문제로
붉은 벽 속에 끌려 내려갔네
해방 직후였네 제길할
그들은 그의 화폭 속의 하늘이 붉다며
바른대로 대라고 윽박질렀네
그 후로 붉은 색은 결코 쓰지 않았네
실패한 삶을 살았네
그는 실패한 삶을 살았네
죽은 명태만 그렸네
명태는 한국인만이 식용으로 하지, 하면서
그는 마른 명태만 그렸네
그의 삶이 명태로 말라붙은 걸까
마른 명태는 입 한껏 벌리고 끊임없이 소리치지, 들어봐, 들리진 않을 테지만 비틀린 몸이 짜내는 기막힌 소리가 그 속엔 있지, 고통이든 환희든 명태는 비틀며 소리치지, 하면서
그는 마른 명태만 그렸네
그의 삶은 끝까지 실패했네
그는 노년의 문턱에서 큰 병을 만나
죽음의 방문을 열기까지 했었네
고통으로 입 한껏 벌리고
마른 얼굴의 주름 위로
눈물을 흘렸네 실패의 연속이었네
그 후에도 그의 삶은 여전히 실패했네
죽음의 문 밖을 나와 비로소
명태를 하늘로 날리기 시작했지만
그의 전시장에서 아내는 허무하다며 울음을 터뜨렸네
명태는 끊임없이 날아오르고
날아오르는 그 높이만큼 그의 삶은
공허하게 떠올랐네
그래도 그의 명태의 하늘은 불타고 푸르르며
때로 무한의 깊이로 나타났네
6
내가 날린 명태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날아오르지요. 보세요. 나는 실패하지 않았어요.
삶을 가두어놓은 방이
명태의 하늘로 열리면
방이 곧 하늘입니다.
무덤의 안이 옛사람들의 별자리인 것처럼.
벽에 걸린 화폭들 속으로 명태들은
푸르고 노란 또는 불타는 붉은 하늘을
두 눈 부릅뜨고 소리쳐 오릅니다.
물론 저 아래서도 함성이 폭풍처럼 올라옵니다.
풀잎들이 서로 몸 부비며 떠오르는
또는 부딪침으로써 서로 확장되는 소리일까요?
매일 사람을 자기 위에 세우는 들이
스스로의 속의 무덤을 하늘 쪽으로 보여주기 위해
몸 뒤집는 소리일까요?
재생이 하늘 저편으로만 열린다면
나는 하늘 저편으로 명태를 날립니다.
그런 다음 나는 새롭게 돌아오는 밀물 가에
또는 바람에 퍼득이며 피는 제비꽃의 들녘에
당당히 서고 싶습니다.
남한강
이하석
몸의 70% 이상이 물이라서 사람 사는 게 다 솨하고 물 흐르는 소릴 내는 거란다. 그 우스갯소리가 왜 모두를 강물처럼 굽이치게 할까? 아리랑 한 자락 구성지게 우러내는 이의 강이, 그렇게 저무는 제 생풀이의 후렴처럼, 흐른다.
저녁이 몰려오자 허기처럼 어두워진 풀덤불에서 매운 연기 솟구친다. 하루 일 막 끝낸 공공근로자 서너 명이 모닥불가에 둘러앉아 몇 잔의 술로 속 데우며 깡마른 귀들 세우니 강물이 먼 북소리처럼 울렁이며, 참 검게 속 감추어 흘러간다. 그 우여곡절마다 소주 같은 생의 푸른 그림자들 어울려 이룬 여울 소리 희게 부서져 내린다.
낯선, 시
이하석
사랑은 서로 시로 하는 것
시의 말로 약속 잡고
결국 더 눈시울을 건드리지
그런 음지(陰地)지
잔 이별마저 시로 하는 거야
너는 내게 미소 짓는다,
나무 의자 수리하는 시인같이
그런 시는 도대체 무슨 말일까?
그래, 네 말고 이 세상에
누가 더 낯선 시인가?
내 시란 뭔가
이하석
너의, 내 시란 뭔가
토함산 골짝에 봄을 여는
노루귀 같은 걸까
아니면 방금 먹은 저녁밥의
흰 그늘 같은 걸까
그래, 서로
부르는 것, 그러나
시가 그렇듯
사랑도 언제 어디서나
인적 없는 곳, 바로 내 안에
함정이 있다
골짝 바위 그늘에 서봐도
희게 드러나는 내 그림자여
내 편들
이하석
갈대들은 제각기
바람의 정처(定處)
누굴 만났느냐고 서로 귀싸대기를 후려친다
여울로 돌들 꿴 목걸이 걸친 산그늘이
찬물에 목을 움츠린 채 굳어 있다
일렁이는 강변의 파동도서관은
자주 열어놓는 책
쪽마다 펄럭이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만 자꾸 밑줄을 친다
개들은 한결같이 목줄에 끌려 나와선 똥만 싸놓고
날아가는 왜가리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존재
그들이라고 왜 제 똥을 하늘로 던지고 싶지 않겠는가?
냇물 속에 뭔가가 있다
이하석
낮이거나 저녁이거나
또는 한밤중이거나
잔주름 지는 물의 푸르고 노란
또는 검은 자갈들 비치는 내에
그것은 있다
모래무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큰 머리 주억대며
은백색의 흰 배와 검은 등이 빛나는 몸에
여섯 개의 흐린 무늬가 찍힌, 모래 같은
그 고기는 수염을 떨며 모래 속에 파고들고
때로 모래를 불어 물결에 흘린다
그것은 냇물을 자맥질하면서
거꾸로 선 떡버드나무의 하늘을 휘젓고
그러면서 그게 내겐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것 때문에
냇물은 흐르는 소리 높이거나 낮추고
거꾸로 선 나의 머리 아래로
깊은 세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일까 까만 물풀일까
내가 한때 한껏 몸 기울인 채 보았던
연꽃의 그 아래의 어둠일까 빛일까
빈 병일지도 모른다
모래에 반쯤 몸을 묻고
양각된 글자와 그림들 물로 모래로 매끈해진
주둥이를 뻥하니 벌린 채
때로 물 아래서 번쩍이는
모래무지가 낸 길이 아른거리는
물결 아래의 모래 위로 나서
모래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 길 어귀에 죽음과 생성의
그늘은 어른거린다
그걸 비켜 가지 않으려고 그 길에 내려섰다가
아얏 하고 맨발은 마음보다 먼저 오그라지며
물 밖으로 튕겨 나간다
유리 조각에 찔렸나 보다
아니면 내가 찾으려는 그것이
날 밀어낸 것일까
녹향
이하석
시인들은 가파른 계단으로,
참호인 듯,
술집 곤도로 올라갔지
그 아래층 녹향은 음악의 산실
지금은 대구 향토문화관 지하로 옮겨져 있지만,
그때 향촌동 골목 안에 서식했던 녹향족들은
뚱보집과 고바우집과 건너집 등 술집을 끼고 놀았지
양명문은 술안주로 시를 써서 「명태」 노래로 내걸렸고,
그 술렁이던 음악의 골짜기 헤매던
허만하와 박지수의 젊음
고바우집 안주인의 기둥서방인 박지수는 시장판에서 손금을 봐주어 번 돈으로 음악을 듣고 술을 샀지
그 방황하는 운명의 비틀거리는
제 손금의 지도 위에도
바흐 음악은 흘렀지
누런 가방
이하석
가방들을 두고 침묵의 마을이라 한 화가를 기억한다
그의 가방은 잘 열리지 않고
늘 구석에 놓여 있었겠지
주인의 마음처럼
지퍼란 지퍼, 멩빵이란 멜빵,
끈들은 모두 가지런히 빠짐없이
닫혀지고 꼭꼭 매여진 채
여행 중인 검은 가방들이 서울역 무궁화호 개찰구 가까운 바닥 여기저기
놓여 있다
인공 쇠가죽의 불빛 덮어쓴 위쪽은 금빛으로 빛나는데
그 아래쪽은 불룩하니 캄캄하다
가방 주위 어딘가에 있을 주인의 주머니도 가방만큼 자주 열리지 않아
뭐든 타협이 잘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갈 데가 있고
집요하게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바쁘게 일어설 때까지,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가방들은 완강하게 입 다물고 자리를 지킨다
안에 든 게 뭐든 제 것이 아닌
가방은 아무도 함부로 열어볼 수 없다
열어보려는 이도 없이 가방들은 버려진 채 떠도는 늙은이의 어깨들처럼
위가 짓눌린 채 구겨져 있다.
눈과 코와 입이 보이지 않고
이하석
눈과 코와 입이 보이지 않고
얼굴은 캄캄하게 그늘져 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이마쯤에
달팽이의 더듬이 같은 게 돋아나 있는 듯하다
윤곽만이 외부의 빛을 역광으로 받아
고양이나 곰의 털 같은
머리털과 수염이 드러나 보인다
그는 때때로 뭐라고, 말, 한다
입에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어두운 내부에서
소리가 울려나오는 듯하다
누군가가 그 소리에 귀 기울일 때
그의 내부에선가 아르렁대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이마에 돋아난 안테나들의 불이 켜지고 꺼진다
근심의 신호인지 기쁨의 표시인지
확인되지 않는
눈물 한 방울 또는 물방울 같은 것
이하석
나뭇가지가 찌르는 허공을 날리는
눈발, 저녁때쯤 도시로 몰려든다.
도시 사람들 버스 기다리며 돌아갈 곳
망설이고, 술집에서 새어나오는 음악 소리에
귀 기울이며, 붐비는 눈발 앞에서
모든 것은 한풀 꺾인 모습.
뼛가루같이 몰려다니며,
데모같이 부대끼며,
눈은 교회의 첨탑을 지나서
고철과 폐차장의 마른 풀덤불과
공지에 던져진 망가진 타이프라이터 위를 가리지 않고
쌓인다, 바람에 날리며,
구석으로 몰리며 흩어지며,
때로는 불 속으로 떨어져 사라지며.
모든 것은 비스듬히 섰다가 희게 지워진다, 눈물
한 방울, 또는 물방울 같은 것들
바람에 얼리며. 얼음 맺힌 폐차의
흐린 창 너머 타임지 펄럭거리고
기름과 먼지로 얼룩진 돌멩이들이
눈 속에서 깜깜할 때, 눈물 한 방울
또는 물방울 같은 것들
돌 속으로도 스미며.
늦가을의 시
이하석
들녘에서 누가 울고 있다
새 떼들 산 너머 바다를 건너가고 있다
빈 들은 이제 안팎으로 마른다
젖은 손수건에 싸여
차들도 떠나고
산은 뼈를 후들거린다
너는 무엇이 되어
홀로 남은 자의 산천을 이제 돌아오느냐
빈터에 빈손으로 와서 무얼 하겠느냐
애닯다 네가 지피는 모닥불이
들녘에서 그냥 솟는구나
그 연기가 하늘로 오르면
구름 같은 시밖에 더 되겠느냐
다 맞게
이하석
사과는 하늘에 닿아 익고
참외는 땅에 닿아 익지요
다 맞는 삶이지요
사과는 빨갛고
참외는 노래도
다 맞게 달아요
맞게 맛있어요
다 제대로 그렇지요
내가 심은 가지의 열매는
당연히 보라색이구요
단추 - 또는 검은 수녀
이하석
열일곱 개의, 또는 스물한 개의 단추들이 그녀를 가두었다.
마음도 어항 곁에서 흔들리는 머리칼도 잠그고
그녀는 검게 고개 숙였다.
누구에게나 검게, 고요하게,
그녀는 문을 닫아걸었다.
남자의 겨드랑이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단추로 바꾸어 달면서
그녀는 하나님에게서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홀로 있다.
밤마다 그녀의 단추는 떨어져내려
침대 밑을 구르며 문설주를 넘나들었다.
그녀는 그게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럽다.
그녀는 단추만 보이면 주워선 잽싸게 스스로의 옷에 달았다.
마침내는 성기에까지도 단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언제나 어두운 골목 끝에 서서 그녀는 검게 빛났다.
어느덧 세상의 들판은 어두워졌고
곡식들은 빈 쭉지만을 땅에 떨어뜨렸다.
담배
이하석
담배 때문에 수명이 짧아진다고 텔레비젼에선 야단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죽지 않고 싸우며
여전히, 담배 연기가 아늑하게 인간의 내외에 깔려 있다
그렇지만 나도 결국 끊어야 하지 않을까,
하긴 끊어야 한다는 생각이 문제고, 그래서
오히려 끊는 게 더 공포스러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내 자신에 대해 한다
끊어야 한다면 담배보다 오히려 더 해로운 것들,
연애나 결혼, 또는 이렇게 시 만드는 일들 ‥‥‥
이 치명적인 것들 끊는 게 더 급하지 않을까
담배갑이 여기, 오래전부터, 놓여 있다
그리고 재떨이는 거기 놓여 치워지지 않는다
각이 져 있거나 둥글게 파여진 라이터들은
아름다운 무늬나 디자인이 새겨지거나 조각되어 그들 곁에 늘 있다
그것들은 서로 없어지지 않는다
끊을 수 없는 사랑처럼 끈질기게
서로 연기 한 모금씩 피워서 나누어 가지길 기대하며 있다
대가천 – 은어 낚시
이하석
나는 은어를 본다.
물의 힘줄 속에 그것들의 길이 있다.
물을 힘줄을 은어들이 당겨 강이 탱탱해진다.
나는 은어를 본다.
강의 힘줄이 내 늑간근에도 느껴진다.
그밖에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은어를 본다,
언어에 기대어서.
이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누가 강의 힘줄을 풀어놓느냐.
강에는 은어가 올라와야 한다.
그밖에 중요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돌
이하석
책상머리에 앉은, 동그마니,
모서리를 찧은, 쥐 같은 것
책상머리가 식자들의 제단이라면
그 위에 놓인 것들은 뭐든 원래 자리가 아니어서
서로 택배처럼 민감해져 있다
저 돌도 강물 아래 따로 여며졌겠지만,
세상사에 휩쓸려서 내게 잘못 부쳐온 한밤중이다
- 우린 어떻게 서로 치워져버릴까?
그냥 있다는 외로움 때문에
돌을 뜯어내어 부처를 꺼내기도 하지만,
이런 밤엔 생쥐처럼, 생쥐를 닮은 돌처럼
제단 밑 그늘로 숨으려 하는
보속(補贖)의 시도 있다
돌의 시간
이하석
고통과 너무 많이 떨어진
대낮의 약속은
죽음이 내몬 길에서
또 기다리는 이를 버립니다.
물푸레나무가 겨울의 입장을 세우듯이
기다리는 이에겐
수척하게 기다린 남은 시간이 있을 뿐이지요.
이유가 없이 끌려간 당신의 길은
아직도 행방불명인 채,
늘 사랑의 약속 쪽으로 금이 간
돌의 시간일 뿐입니다.
동물도감
이하석
그가 기르던 너구리가 튀었다, 간밤
프라스틱의 쭈그러진 구멍을 통하여. 한때의
그의 집안 내력을 훔쳐서 너구리는 빌딩의 숲을 지나
달아나 버렸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그의 기침 아래로 난 매캐한 수은의 길도 주저않고.
너구리는 무사히 이 도시를 빠져 나갔을까, 젠장, 절망적인
그리움이 그를 저녁이면 문 밖에다 세웠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세일즈맨 박씨는
주위가 허전해졌다. 그가 너구리 따위를 키우려들다니,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어쨌든 그날 밤에 도둑맞은 그의 삶이
그의 출근길을 빠져나가 새로운 길을 이루고 있음을
알아 버렸다. 그는 동물도감을 낯선 집에 월부로 떠맡기면서
이따금 도시 밖으로 파란 빛깔이 깡충대며 산을 오르는 것을
힐끔거렸다. 제기랄, 지랄 같은 그리움의
봄.
돼지감자
이하석
1
왜 잔인한 기억의 흙들에 뿌리 내려 저리 퍼렇게 우거질 때까지 슬금슬금 밭떼기 가에서 솟아오르더니 여름 오기 전 못 돈 질문처럼 숲을 이룬다
2
여름이 지쳐갈 무렵 노란 꽃들이 숲의 상부에 피어나 마구 주위를 살핀다. 자신의 뿌리 감추려 눈치 보는 걸까? 그 뿌리들이 여전히 주점들에 닿아있다면 가을에 밭 주인은 울퉁불퉁하게 뭉쳐진 덩어리들을 캐내면서 문득 새로 드러나는 대답의 뼈들인가 싶기도 하리라.
3
돼지감자 뿌리는 당뇨 등에 좋단다. 주검들이 북돋워서 무성하게 했다면 저 숲 같아 엎어 그 뿌리 맺힌 응어리들을 수확한 게 내 트라우마인 그리움의 치료약이 되기도 할까? 뚱딴지* 같으니라구? 글쎄, 저것들 점점 더 번져나가 총살한 이들 파묻은 언덕 덮은 것 보라구. 그게 자연스럽다면 숨기려는 게 아니라 보듬는 것 아니겠어?
* 돼지감자의 다른 이름
뒤쪽 풍경
이하석
1
뒷길, 석양은 내던져진 유리 조각 속에서
부서지고, 풀들은 유리를 통해 살기를 느낀다.
밤이 오고 공기 중에 떠도는 물방울들
차가운 쇠 표면에 엉겨 반짝인다,
어둠 속으로 투명한 속을 열어놓으며
일부는 제 무게에 못 이겨 흘러내리고
흙속에 스며들어 풀뿌리에 닿는다,
붉은 녹과 함께 흥건한 녹물이 되어
일부는 어둠속으로 증발해 버린다.
땅속에 깃든 쇠조각들 풀뿌리의 길을 막고
어느덧 풀뿌리에 엉켜 혼곤해진다.
신문지 위 몇 개의 사건들을 덮는 풀, 쇠의 길을 돌아서
아늑하게, 차차 완강하게 쇠를 잠재우며
풀들은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나간다.
2
먼지 속에서 뒤척이며 찢어진 신문에서 떨어져 나와
푸른 여자 먼지 일으키며 날아갔다.
비고 우그러지고 벗겨진 채 햇빛에도 바랜 채
뒹굴던 깡통들 뻔뻔하게 흙속에 처박히고,
풀들 어쩌다 깡통 속에 다리 뻗쳐
부르튼 다리로 깡통들 뚫어버린다.
나비 올 때쯤 기약도 없이 꽃피는 민들레, 저 혼자
씨앗 흩이고 쓰러진 후, 그 곁에 내던져진 채
몇 개의 사건들 기억해내려고 심각해진 남자들의
찢어진 얼굴들. 그 얼굴들만 휴지로 빠져 나와
바람에 사라지는 것들 속에 저절로 섞이며,
혹은 모든 사건들 속에서 평온하게
따로 미끄러지면서.
땅에 누운 사람의 나무
이하석
나무들은 왜 무성하게 가지를 뻗어
우리를 그 우듬지까지 올려다보게 할까.
땅 아래 누운 이들을 기억하는 한
그 죽음의 힘으로 치켜올리는 것이 나무이기 때문일까.
나무의 끝을 끌어올리는 것이 삶의 힘이라면
나는 더 먼 죽음의 힘도 그렇게 느낀다.
곧게 선 나무 둥치는
오늘도 그 힘을 따지는 기둥이다.
또 다른 길
이하석
나는 일찍이 도시의 사랑을 다듬어 말했지만
지금은 자작나무숲에 대해 쉽게 노래하련다.
자작나무숲에 다녀왔거든.
가까이 와보렴. 나의 온몸에서
서걱이는 잎들과 그 바람 소리가 들리잖니?
너희들이 빌딩 속 그늘 깊은 아래
내려가 숨어 놀 때
나는 온통 자작나무숲에 있었지.
숲은 컴컴하다고?
천만에. 자작나무숲은 온통 희고 환했지.
너희들이 상상이나 하겠니?
그건 식물도감에도 나오지 않는 사실이란다.
나는 자작나무숲에 들어갔다 나왔지.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갔더라면 길을 잃어버렸으리라.
곰을 만나 따귀를 한 방 맞을 수도 있었겠지.
그랬다면 어찌 이곳에 와서 너흴 볼 수 있었겠니?
생각만 해도 끔찍스럽지?
허지만 그렇게 여기는 우리 마음이 더 끔찍한 거야.
너희들이 도시에서 시를 만들 때
자연은 --- 자연스런 것은 --- 자칫 끔찍스럽지.
알겠어? 너희들도 한번
그 숲에 들어갔다 나와보렴.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면
또 다른 길을 만날 테니까.
또다시 가야산에서
이하석
가래잎나무, 물푸레나무, 엄나무들의
뿌리 사이 검은 흙들 부드럽다. 물기에 젖어
돌을 녹이고, 깡통들을 녹여 흙은 스스로를
한없이 넓혀놓는다. 물줄기 곤두박질하는
홍류동 계곡의 물소리에 모든 시간들 씻어보내며
바위에 새겨놓은 이름들과 시들, 물과 바람과 어둠과
비에 닳아간다. 물소리 흙 속에 스미며
비닐과 수은, 철제 부스러기들의 귀를 먹이고
흙들 그것들 감싸안고 얼리고 녹이며
봄과 여름 또는 가을을 가리지 않고
초목들의 끝 가지에서 물에 실어보낸다.
마침내 봄 하루의 바람, 물소리와 바위와
흙 밑에 얽힌 모든 뿌리만의 것인
가야산.
또한 죽음의 기억은
이하석
또한 죽음의 기억은
집 나온 길 같다.
구불구불, 구절양장의 소화력이 있다.
남은 우리 삶들을 곧잘
막다른 골목 끝에 뚝, 뚝, 세워놓는다.
마애란
이하석
그 꽃, 산길 소나무 뿌리 맡에 잎도 없이 솟아있었지
뜻밖, 이었지
바람 안으로 모으며
연자줏빛 또렷하게 흔들고 있었지
줄기를 당겨보다가 가만 두었지
작은 힘에도 쉬 떨어져버릴 것 같아서
내 맘에만 사진 찍어두었지
그 인화(印畵)도 마애(磨崖)가 될까?
다음 해에 그 곳에 가니 그 꽃은 올라오지 않았지
그다음 해에 그 곳에 가니 그 꽃은 올라오지 않았지
내 맘의 돌은 이지러지고 삭아내렸지
그 소나무 뿌리 맡을 파보면 그 꽃의 뿌리라도 나올까?
그새 소나무 뿌리는 더 굵어졌지
어떤 꽃이 날 향해 피어 있기나 했던가?
더 꽃 필 나의 뜻밖, 은 또 어디일까?
꽃 하나 혼자 보았던 일을 자꾸 의심하는 남자가
돌아다 보이지만
만금이년 젖 먹자
이하석
“우리 만금이 늘 새롭다고 새만금이
헌 것 그대로가 새 것인 새만금이
그대로 늘 새로운 새만금이
젖 먹어라
우리 찾아가는 삼보일배 길에
무릎 까져 흐르는 고통의 피가
온몸 흐르는 땀방울 방울 방울이
다 젖이다
이 길 막는 이들
새 것만 우기며 만금이 겁탈하고 죽이는 이
젖 못 얻어먹으리라
헌 것 그대로가 늘 새 것이 되는
만금아 천만금아 만만금아
우린 네가 낳은 딸이고 아들이거니
미륵이거니
만금이년 살려 젖 얻어먹자
많이 먹고 억만년을 또 드넓게 크자”
매미
이하석
매미가 우네
동성로 가까운 우체통 옆
밤의 나무 그늘에 우표처럼 붙어서
애절하게
이 밤중에 매미가 왜 막 우노?
불빛 밝아 낮인 줄 알았나?
그보다는 더 그리우니까
그러니까 그리우니까,
아직도 서로 완전히 오지 않아서
불빛 아래 차오르는 그늘의 수위를 재며
우리는 가로수 그늘 아래서 마주 있고
오 매미,
새벽까지도 울음 그치지 않네
이산가족들 만나 껴안고 우는 사진 구겨진
신문 덮고 집 없는 이는 저 구석에서 자는데
오 매미 맘
오직 울음으로 만나질 제 짝 그려
지하에서 한사코 지상에 올라온 것들
제 모든 걸 울어 밝혀 잠 못드는
모래알 소리
이하석
모래언덕에서 몸을 빼어 빈 깡통은
바다로 굴러내린다, 소금물이
속에 차올라 물보라 속 헛된 꿈을 게워내면서.
깡통들끼리 모인 골짜기,
바위와 모래뿐인 어슴프레한 속,
물풀들은 스스로의 발목을 끊으며 달아나고,
소금은 반짝거리며 흩어진다.
낮 동안 수면에도 떠올라 다두턴 쇠들
다시 몇 개의 알 수 없는 휴전을 나눠갖고 잠기고,
깡통들의 모서리, 입 다문 조개들의 동리 어귀,
물풀들의 뿌리 끝이 분명해진다.
이윽고 깡통 속 모래알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바다는 더욱 깊어지고 어두워진다.
못
이하석
1
우리는 인간의 손들 사이를 빠져나와 많은
거대한 쇠들에서도 멀어졌다, 반짝거리는 침들
끊임없이 무디어지라고 외치면서. 가을 밤,
흙속에서 우리는 자려고 한다, 풀들의 뿌리 밑에
누워서, 붉게 녹슨 몸들을 더욱 안으로
꼬부리면서. 쓰레기 하치장 부근,
활자 날아가 버린 신문지를 끌어 덮으며,
우리도 이미 많은 것들을 날려 보낸 후.
쉬이 잠이 오리라. 빗물에 눕는 풀들 소리 없이
흐느끼고, 밤이 빗물 속에 모든 어둠을 풀어 놓을 때
못들의 잠은 때로 반짝거린다, 흙속에서
자갈 틈서리에서 또는 철교의 침목 곁에서.
빗물에 지워지며 눕는 마음, 껌종이와
타임지와 서양 여자 노랑머리 퇴색한
휴지 속에서 그들의 꿈은 심한 욕지거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며.
2
그들은 녹슨 몸속에도 여전히 쇠꼬챙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깃든 어느 곳에서든 부스럭거리며
그들은 긁고 찌른다. 흙 속, 헐어버린 건물 안,
이전해버린 공장의 빈터, 폐쇄해버린 술집의
판자 틈, 버려진 구석 어디에서나
그들은 내팽개쳐진 채, 나무든 흙이든 풀이든
바람이든 강철이든 지나가는 쥐의 발목이든 찌른다.
새로 짓는 건물의 벽에서도 떨어져 흙 속에 빠지면서
시멘트 묻은 서까래에 깔리면서 또 하나의 못이
집 밖을 나온다. 하수구를 지나 개울가
지갈밭에 만신창이 몸으로 떠돌다가
그는 침을 숨긴 채 물 밑에 반듯이 눕는다.
흐르는 물을 조금씩 찌르면서,
송어 아가미에 피를 조금씩 긁어내면서,
어느덧 그 자신도 쇠꼬챙이도 조금씩 꼬부라지면서.
몽유도원도
이하석
땅이 없으니 하늘 쪽이라도 개간하는겐가
산동네에 세 들면 옥상에 알루미늄 박스랑 플라스틱 바케츠랑 깡통들부터 늘어놓는다
빈 수프 깡통까지 밑구멍 뚫어 흙 담아놓으면 상치밭 된다
봄엔 복사꽃 두어 송이 갈색 페인트 깡통에서 피어올라 무릉도원이라 불리더니?
높은 지대라 나팔 불기 좋은 곳 아니냔 듯 페트병에서 솟아난 부지런한 나팔꽃 덩굴 옥상 난간 감아 올라 여름 알린다
채소들 연일 뜯어내도 흙심 좋아 이내 새로 푸르게 솟아나고, 도꼬마리, 개망초, 속새 씨들 바람길 떠돌다 아무 깡통이나 플라스틱 통들에 왁자지껄 뿌리 내려 수북하니 숲 이룬다
밖은 뜨거워도 옥상 풀숲엔 맹수 고양이족 서식하는 서늘한 어둠이 있어서
대도시 사막 건너온 이들 숨어드는 오아시스라 불린다
저 아랫동네 먼지 세상에서 낙타보다 편리한 기계 부리는 이들이 꿈꾸는 것도 흙바람 뚫고 솟은 무릉도원 아니겠는가
그러나 꽃들 구름처럼 피어나는 이 몽유의 높이는
저 아래 사막 세계의 현자들은 못 찾겠지
끊임없이 자잘한 꽃 피워 넘보는
아슬아슬한 몽유길이여
옥상 난간 벼랑에 나팔꽃 새순이 내는 위태로운 잔도가 꿈길이어서
산동네 사람들 하늘 향해 떠들어대며 꽃 피는 아침이 늘 그 길로 오신다
무덤인 이 땅에서
이하석
뭇 것들의 무덤인 이 땅에서
우리를 지펴줄 푸른 불의 숲이 무성하게
커 올라오고 있습니다.
사랑은 어서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끓어 넘치지요.
문간
이하석
돌 축대 위 붉은 흙 바른 문간 안팎엔
소나기 한 줄금 소란하게 새김질한 흔적이 있다.
빗물 빠져나간 하수구로 난 쥐의 길은 땅으로 스며들었다가
돌 담장 아래로 젖은 어둠과 함께 자주 되나온다.
나무 문은 종일 함구한다.
문간의 회칠한 벽에는 사람과 짐승들이 자주 민 자국이 있다.
문 아래 쪽으로 벽 틈으로 스며드는 작은 삶의 기척들
짐승 길들 부지런히 얽혀들지만,
바람 길 따라 질러온 풀들이 먼저 담장 넘어와 자리 잡았다.
온갖 새끼 치는 그늘들이 거기 우묵해진다.
가족들 돌아오면 문간에 불 켜고
집 안팎 들락대는 온갖 틈들로부터 막겠지만,
이 집은 이후로도 오래 버려져 궁뚱망뚱하여
개수 구멍으로, 쥐들 훔쳐간 어둠이 낮에도 집안 내력처럼 깜감하게 내다보이리라.
그 내력을 굳게 닫힌 문간이 함구해도
이 집 아래위 드나드는 것들은 더 많이 말하고 소리치며
제 밝은 내력의 길들을 집안 곳곳에 새겨놓는다.
물통
이하석
어디에나 물통은 와 있다
다리도 가슴도 털도 없는, 오직 부푼 몸통뿐인
몸통과 주둥이뿐인 물통들이
집에도 사무실에도 여행객의 차 내에도 와 있다
어디에나 굳게 입을 봉한 채 정좌해 있다
인터넷의 물 검색은 내 손을 적시지 않는다
그러나 손끝이 감지하는 물결 출렁이는 사이트는 마음을 적신다
주문하고 온라인 결재하면 그 출렁임이 누구에게나 온다 물통으로
내게도 사흘에 한 번꼴로 배달되는
부엌 제단 위 신상처럼 당당하게 세워지는
투명 유리 물통엔 물이 가득 들어 있다
믿을 만한 물 藥臭 나는 수돗물이 넘보지 못할
먼 곳에서 온 천연수,
라고 배달원은 늘 자신 있게 말한다
물통은 주둥이가 좁고 밑이 넓다
바람난 여신처럼 배가 허리가 등이 풍만하다
다리도 가슴도 털도 없는, 오직 부푼 몸통뿐인,
몸통과 주둥이뿐인 저 물통
그리고 한결같이 주둥이를 굳게 닫고 온다
그 물길도 젖지 않아 되짚어 찾아내기란 어렵다
때가 되었으니 오늘 아침엔 또 배달되어 오리라
나는 수척한 나무 그늘에서 빈 물통 들고 내다본다
물이 오는 길 끝은 당연히 모든 물의 최상류,
산의 샘 같은 하늘로 열린 문 있으리라
여기서 되가져간 빈 물통은 거기서 거듭나리라
믿을 수 있는 물 끝까지 믿을 수밖에 없는 물
우리는 고즈넉하게 기다리고 있다
사랑 나누는 이의 대답보다 더 절실하게
밀양강
이하석
1
인가 쪽을 달래는 강물로 산자락을 깎는 역사가 아프다.
방해와 변형의 마음이 이룬 뚝 위에서 자다가
문득 다가서는 낯선 물소리에 꿈은 다급해진다.
나의 전부를 흘려보내고 난 다음 인적 없는 쪽으로 칭얼대는 강.
2
속 모를 생각의 잔 파문. 잡된 꿈의 합류로 더 넓어지는 강폭의 전망.
홍수의 자해(自害)와 가문 날의 불의 반영으로 얼룩진,
내 속에서 굽이치며 깊어지는 틈과 푸른 상처.
3
나의 사랑은 비로소 중류(中流)를 이루며 네 가파른 어귀에서 오래 막히지 않는다. 잠깐 소용돌이칠 뿐, 양안에 가득 잔모래만 쌓을 뿐.
나는 관념의 말들로 네 속을 흐르지 않는다. 너의 봄 너의 여름 너의 가을 너의 겨울이 흘러와 나의 훼손된 침묵은 한결 뚜렷하니 큰 강에 들어 되새김질될 뿐.
그러나 또 문득 쏟아지는 마음을 짚고 여울 쪽을 잡아 강을 건너간 내가 오래 강둑에 그림자를 치켜들고 서 있다.
밀어(蜜魚)
이하석
녹슨 시간의 푸르스름한,
예민한 살로 맺히며 쏠리는 물결 속,
다만, 그 이끼로 숨겨진 돌 틈에
그 맑은 하늘만 담으려는 낡은 감정이 구르는 여울에
내 악의 무표정 곁에,
그것들은 숨어 있다.
그것들은 몸부림만으로 들키며,
여린 연기처럼 피었다가
사라진다.
비 온 뒤나,
어쩌다 수면이 고요해지면
그것들이 밖으로 숨 쉬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내 악의 무표정 곁
녹슨 시간의 한쪽으로 쏠리는 물결 속,
이끼로 숨겨진 돌 틈에,
다만, 아직도 애타는 피의, 성난 감정이 흐르는 여울에.
바다의 해산(海産)
이하석
서해는 온갖 너울 뒤집는 말로서도 뭐든 낳아놓는다.
끓는 속 밀어낸 파도로 제 가장자리 긁어대어
해변 노니는 이들 어머, 어머, 하며 뒷걸음질 치게 하면서도,
우리가 찍어 포개놓은 발자국들 순식간에 지워버리면서도.
그렇게 제 가장자리를 내처 긁어대면서도
솥의 바다 가득 미역국처럼 끓어 넘쳐서
해안선을 언제나 멀리 둘러친다.
그러니까 미역국처럼 끓는 바다는
애 낳는 새댁이 고함치며 퍼덕여서 끝내 거뜬히 몸 풀어내는 것처럼
젖은 제 속 피워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아내의 해산기에 맘 졸인 채 조심스럽게 바다 밀며, 어선 몰고 나온 사내는
빨리 돌아오라고 파도 끈 당기는 아내의 손가락 힘 느끼며
미역국 가득히 끓는 솥의 바다 속에서 퍼덕이는 무지개만 건져 올린다.
수평선 너머 구름이 김처럼 피어오르고,
마침내 파도의 지붕 위로 으앙! 아기 울음 실린다.
밖
이하석
문을 열면
어떤 길이 어떤 어두운 밝음이
어떤 미로가
나를 이끌 것인가
나는 내다본다
속에서 어둠의 뇌성은 치고
나가고 싶다
초록의 문을 열고 실다. 나는
또 나가고 싶잖은 마음이 인다
또는 잠시 나가 패랭이나 캐서
화분에 심어보고 싶다
이 위태로운 어질어질함
누가, 바깥에서 문고리를 만진다
…밖에서…누가
내 방의 어두운 창유리를 닦는다
밖으로
이하석
창유리를 부수며 고개를 내민다
문득 다른 공기가 느껴진다
문을 밀면서 귀를 세운다
강물소리, 사람들 두런대는 소리
내가 어둠 속에 숨은 건 그것들 향한 그리움 때문이니
그것들이 마침내 나를 이끌리라
어둠은 나를 밀어주리라 내가 키웠으니까
그렇다면 밝은 문은 어둠의 힘으로 열린다
나는 열리는 문 앞에서
수줍고 눈부셔 한다
밝은 교신
이하석
하루에도 수백의 나비들 벌들
활주로 뜨고 내리느라
꽃의 관제탑은 쉴 틈이 없지만,
종일 밝게 펴놓은 교신들로
오늘도 단 한 건의 항공사고가 없었다.
밤눈
이하석
눈이 와도
구름에 발목 빠진 생각들
내려올 기미가 없다.
가볍게 떨어져내린
그리움 조각들 쌓아 올리며
벗은 나무 그림자를
우두커니 떠올린다.
나무 위
빌딩 그늘 아래
쌓여서 얼어붙은 마음을
밟아 다지는 이의
구석진 하늘이 사뭇 파랗다.
밥상
이하석
찬 길바닥이 밥자리다
별처럼 밥알들이 흩어져
비둘기들도 내려와 쫀다
어제도 여기서 먹었고
아래도 여기서 먹었다
얕은 쟁반 위에 놓인 아홉 개의 그릇들이
길바닥에 놓여진 여기가 그녀의 안방이고 바깥방이다
밥 고봉은 높고 뜨겁고 희다
청국장 굽은 내음이 길바닥 낭자하게 물들이는데
열무김치와 김장 김치 그릇 옆에 곤쟁이젖 반 종지
얇게 저민 더덕무침과 콩나물무침이 각각 한 접시씩
흙과 자갈들 위에 놓여 빛나는
전화주문에 대꺽 실어 와선 길바닥에 부려 놓은 밥 쟁반
덮었던 신문지 걷어 깔고 앉으면
그 실한 여자 떨게 하던 추위도 김 내며 에워싸고
대지에 봄꽃처럼 꽃 핀 밥상이
한 상 가득 펼쳐지는 것이다
방천시장의 봄
이하석
대구 중구에서 봄을 제일 먼저 파는 데는
당연히, 방천시장 입구다.
겨울의 끝에서 먼 데 할머니가 캐 와서
새삼, 수줍수줍 펴 보이는
냉이의 봄 뿌리가 파라니
희다.
어떻게 한 움큼 쥐어주든 천 원을 안 넘어,
아무도 못 깎는
절대의 봄값.
시장의 아침 그렇게 열어놓고 일찍 장사 끝낸 할머닌 또 손주 밥 먹일 때라며
서둘러 버스로 돌아간다.
시장통 입구에
종일 밝게 남아 있는,
할머니 냉이꽃처럼 앉았던
봄 성지(聖地)
배
이하석
배를 탄 사람은
뒤를 미는
누군가의
힘을
의식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저를 띄운
물이
저를 치대는
파도 때문에
언제나 뒤로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떠밀린
기억들.
바람이
자도
검은 생각의
수면 위에
멍하니
떠 있는 배의
저, 내,
내밀(內密)한 용골(龍骨)의,
물에 뿌리 못 내리는
멀리.
배추밭머리
이하석
배추밭 붉은 흙 깊은 도랑을 파내려가니, 지하 일 미
터쯤에서 화강암의 돌방들이 나타난다. 방마다 깨어진
그릇 기울어진 속에 맑은 물과 노란 흙이 뭉쳐져 있다.
큰 방바닥에는 철제 칼과 금귀걸이도 떨어져 있다.
밭머리에 앉아 밭주인 김씨와 담배를 나누며, 우리는
발 아래로 캄캄한 시간의 깊이를 들여다본다.
대칼과 꽃삽을 들고 고분발굴자는 다시 무덤 속으로
내려가며, 밭머리 김씨 집에 널린 갓 태어난 아기의 흰
기저귀를 향해 웃는다, 우리가 함께 느끼는 시간의 깊이
와 세상에서 가장 깊숙히 묻혀 있는 사랑의 방도 꽃삽
하나로 가볍게 떠올릴 수 있다는 듯이.
버려진 병
이하석
바람 불어와 신문지와 비닐 조각 날리고
깊은 세계 속에 잠든 먼지 일으켜 놓고
사라진다, 도꼬마리 대궁이 밑 반짝이는
유리 조각에 긁히며. 풀들이 감춘 어둠 속
여름은 뜨거운 쇠 무더기에서 되살아난다.
녹물 흘러, 붉고 푸른, 뜨겁고
고요한 죽음의 그늘 쌓은 채.
목마른 코카콜라 빈 병, 땅에 꽃힌 채
풀과 함께 기울어져 있다. 먼지와 쇠조각들에 스치며
이지러진 알파벳 흙 속에 감추며.
바람 빈 병을 스쳐갈 때
병 속에서 울려오는 소리, 끊임없이
알아듣지 못할 말 중얼거리며,
휘파람처럼 풀들의 귀를 간지르며.
풀들 흘리는 땀으로 후줄그레한 들판에
바람도 코카콜라 병 근처에서는 목이 마르고.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 와
콜라 병 알아듣지 못할 말 중얼거리며
쓰러진다. 풀들 그 위를 덮고
흙들 그 속을 채워, 병들은 침묵한다,
어느덧 묵묵한 흙무더기로 속을 감추면서.
벽
이하석
어떤 벽이든 벽보판이 될 수 있다고
포스터 붙이는 게 직업인 나는 여긴다
넘을 수 없지만 뭐든 불일 수는 있는, 벽
벽 안에서 텔레비전 보는 이는 감시 카메라를 보는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렇게 벽 앞에 선 나와 통하느니
내가 붙인 포스터엔 벽돌 자국이 강인하게 도두라져 있다
잘 붙으라고 벽을 힘껏 밀 때 벽이 되레 나를 밀어낸 자국이다
밀어붙이는 힘에 따라 벽 안이 만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별
이하석
길의 마음 위로 낙엽이 진다.
돌아가는 이 거리의 불끈 가게를 지나
별들의 뒤로 낙엽들이 몰려가며 운다.
저 눈물들 모아 이 가을 나의 이부자리 만들어야겠다.
너는 어느 골짜기에서 또 뉘 그리며 그럴는지
별밤
이하석
평생 밭일해온 어머니를 오랜만에 찾은 시인이 하늘 보며
"와, 여긴 별들도 많네요!" 하자,
어머니는 "시인이 어째 그 정도밖에 안 돼? 적어도 이쯤은 말해야지"라며 목소리를 챙긴다.
"아이고 무시라. 별밭이네!"
병
이하석
쥬스, 코카콜라, 사이다, 뜨거운
소주 같은 것들 사람들의 어깨를 넘어서
떠나가 버렸다, 질퍽하게. 미치광이 길을 따라
여름은 발가벗긴 채, 버려진 병의 밑바닥으로
이끌려 왔다. 발가벗긴 채 모든 것은 내동댕이쳐졌다.
병들끼리 부딪치며, 그 소리에 시끄러워하며,
흙들의 어둠 속에 빠지면서, 이제는 누구나 먼지 속
혼음의 골짜기로 굴러떨어졌다.
우리가누구냐고요?내용이없으니아무것도아니지요뚜껑이필요없는빈병일뿐그냥엎드린채더낮게고개숙이고더깊숙한곳으로몸이나파묻을뿐속은비었지만허전하지않아요우린아무것도아니라니까요
청정한 세계를 담기 위하여 빈 병은 엎질러진다.
엎질러진 다음 냉정해지는 유리. 스스로 버려지면서
병은 더 이상 담을 수 없는 것들만의 세계 쪽으로
주둥이가 빠진다. 고요하다. 남은 빈 병들은 엎질러지며
그들이 둘러싼 세계가 거꾸로 그 자신들을 껴안는 것을
느낀다.
봄꽃
이하석
팝콘 쏟아 내놓은 듯
겨울 속 적의가 굳은 얼음과
수상한 풍문들이 세운 귀들,
누군가를 곧잘 죽여버리던 연인들의 닫힌 역사들
그 모든 톡톡 불거진 것들 누군가가 다 모아선
불 위에서 돌려 달궈 팽팽하게 부풀어서
마침내 한꺼번에 터트려버린,
봄꽃들
아삭아삭 진종일 예쁜 팝콘만 먹어대는
바람의 저 희디흰 이빨들
부서진 활주로
이하석
활주로는 군데군데 금이 가, 풀들
솟아오르고, 나무도 없는 넓은 아스팔트에는
흰 페인트로 횡단로 그어져 있다. 구겨진 표지판
밑
그의 화살표 이지러진 채, 무한한 곳
가리키게 놓아 두고.
방독면 부서져 활주로변 풀덤불 속에
누워 있다. 쥐들 그 속 들락거리고
개스처럼 이따금 먼지 덮인다.완강한 철조망에
싸여
부서진 총기와 방독면은 부패되어 간다.
풀뿌리가 그것들 더듬고 흙 속으로 당긴다.
타임지와 팔말 담배 밥과 은종이들은 바래어
바람에 날아가기도 하고, 철조망에 걸려
찢어지기도 한다, 구름처럼
우울한 얼굴을 한 채.
타이어 조작들의 구멍 속으로
하늘은 노오랗다. 마지막 비행기가 문득
끌고 가버린 하늘.
부재
이하석
장미꽃 화병은 투명하고 장미꽃은
붉은 그늘 속에 모돌씨를 숨긴다.
저쪽 못가 흰 나무 의자에 마주 앉은 두 여자.
그중 한 여자를 기다리며 모돌씨는 붉은 안락의자에 앉아
탁자 위 장미꽃 화병 아래 재떨이 속에
담뱃재를 쌓는다.
재는 쌓이고, 두 여자는 모돌씨를
얘기한다. 못물은 기슭을 치고
그들은 다툰다. 이건, 그이가 옛날에
내게 보냈던 사랑의 편지예요. 보세요.
난, 안, 봐요. 난, 지금, 그이를, 사랑해, 요.
물이 기슭을 친다.
모돌씨의 손이 탁자를 잘못 건드려 장미 화병이 넘어진다.
왈칵, 물이 붉은 융단 위로 쏟아진다.
레지는 웃으면서 괜찮아요 그까짓 것,
꽃의 물을 새로 갈고 탁자를 닦은 후 다시 놓아준다.
미안, 해요.
햇빛이 떡버드나무 그늘 속으로 쏟아져
흰 나무 의자에 어른거린다,
못물은 기슭을 치고. 다신 만나지 말아요.
그렇지만, 난, 그이를, 사랑, 해요.
무슨 소리예요. 난 그이의 아내예요. 다신 만나지 말아요.
그렇지만, 난, 그이가, 필요, 해요.
무슨 소리예요. 난 그이의 아내예요. 다신 만나지 말아요.
다신 만나지 말아요. 알았어요? 만나지 말아요.
만나지 말아요. 만나지 말아요. 알았어요?
……알, 았어요. 만나지 않, 겠어요.
갑자기 장미꽃 화병이 모돌씨가 탁자를 잘못 짚는 바람에
흔들하고 엎질러진다.
물이 왈칵, 쏟기고 꽃이 융단 위로 떨어진다.
레지는 까르르 웃으면서 달려와 꽃을 줍고 탁자를 닦으면서,
괜찮아요, 치워드릴까요? 라고 말한다.
치워 주세요, 아예, 없는 게 낫겠어요,
모돌씨는 갑자기 불안해서 소리친다. 치워 버리세요.
저쪽 물가의 흰 나무 의자가 비고
이쪽 도심지 다방의 붉은 의자도 빈다.
레지는 이쪽 의자의 탁자의 재떨이를 치운다.
장미꽃 화병이 다시 놓여지고 젊은 남녀가 그 자리에 앉는다.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레지는 웃는다. 커피? 쥬스?
난 커피. 난,
아무거나.
분신
이하석
1
연기가 그의 속주머니에서 함께 타는
비밀스러운 연애편지처럼 안이 검다
향기 짙은 석유의 꽃이
마른 신문지처럼 피어난다
처음엔 검은 연기가
그의 가슴에서 나는 듯
쾅쾅 솟구친다
그 다음 흰 연기가 함성처럼 비명처럼 솟아올라
아래로 드리워져 깔린다
사람들이 메스꺼워 토할 때
석유 스민 땅에도 불이 붙는다
흰 연기 속에서는
사랑도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다
검은 철모 쓴 이들이 불을 끄고 나서도
흰 연기는 땅에서 그의 검은 재에서 솟아나온다
사람들은 얼굴이 그을린 채
제 손아귀에 움켜쥐어본 불을 놓아버린다
흰 연기는 거기서부터
도시의 골목골목으로 스며든다
소방차들이 붉게 왱왱대며 재채기하며
낯 뜨거운 도시를 질주한다
2
불타는 몸이 내려온다
아직도 그렇듯 거대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아니 수미산에서 내려오는 꽃잎일까
소신공양으로 타오른다
흐린 인쇄에다 오래된 신문이라
뜨겁게 들여다봐야 타오르는 게 보인다
철쭉꽃처럼
몸은 떨어져 내려도 불은 계속 지펴지면서 올라간다
불이 오르려는 곳은 거대건물 옥상이거나 수미산 정상
몸이 내려앉는 곳은 우리가 사는 땅,
땅, 땅 몰인정한 총소리 속
불타는 몸은 제 옷이 다 탈 때까지 마음보다 먼저 떨어져 내린다
떨어진 몸은 까맣고 차고 얼음 같다
이후 하늘에 수시로 출몰하는 불은 그의 몸에서 올라간 것
밤공기 속 그의 몸냄새가 싸하게 느껴지지 않느냐
별이라고도 해 쌓지만
아직 여전히 타는 그의 옷깃이다
제 몸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그의 마지막 남긴 말에서
뭘 업신여겼는지 뭘 남겼는지 의심하며
심각하게, 재 같은 신문 뒤적이며 열심히 부음 기사 읽는 이 있다면
그가 바로 모든 나다
분홍강
이하석
내 쓸쓸한 날 분홍 강가에 나가
울었지요, 내 눈물 쪽으로 오는 눈물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사월, 푸른 풀 돋아나는 강가에
고기떼 햇빛 속에 모일 때
나는 불렀지요, 사라진 모든 뒷모습들의
이름들을
당신은 따뜻했지요
한때 우리는 함께 이곳에 있었고
분홍 강가에 서나 앉으나 누워있을 때나
웃음은 웃음과 만나거나
눈물은 눈물끼리 모였었지요
지금은 바람 불고 찬 서리 내리는데
분홍강 먼 곳을 떨어져 흐르고
내 창가에서 떨며 회색으로 저물 때
우리들 모든 모닥불과 하나님들은
다 어디 갔나요?
천의 강물 소리 일깨워
분홍강 그 위에 겹쳐 흐르던
불멸의 노래
이하석
총알 받은 몸이사
콩알처럼 나뒹굴었지.
마침내 비가 올 게야.
그 젖은 땅에서
콩이 싹트듯
내가, 우리가
날 거야.
죽기 전 저항의 노랠 불렀으니
모두 영원이 되고
불멸이 될 거야.
그래, 그래,
새벽의 어둠이 우릴 피워 올리기 위해
마구 수런거리겠지.
마침내 너끈히 세계의 상공에
꽃들 뽑아 올려질 거야.
불안한 의자
이하석
흙 위에 마른 먼지 날리는 대지 위에 쌓인 저것들
큰 합판 위에 네모난 작은 합판을 깔고
거친 합판 조각들을 그 위에 이리저리 걸친 다음
다시 더 큰 합판 조각들과 합판 조각들을 쌓고
작은 합판 조각들을 그 위에 걸치고
합판의 큰 조각들을 쌓고...
그게 얼마나 높이 올라가든 허물어지게 돼 있다
그러면 내 고단한 오후를 그 위에 엉덩이 걸치고
앉아 쉴 수 있으련만
한때는 의자였던 합판들
상자였던 합판들 테이블이었던 합판들
위에 신문지 깔고 앉으면
합판들끼리 지지고 볶고 싸우는지 온통 삐걱거려
땅에 발 닿지 않은 내 몸 전체가 울렁울렁거린다
합판 무더기에 깔린 풀들이야 옆으로 삐져나와 꽃 핀다
그것들 겁나게 자라나 내 임시 의자인 합판 무더기들을
뒤집어버릴 수도 있으리라
그러면 나는 땅 위에 내동댕이쳐져서
아무 데나 주저앉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타는 숲의 얼굴
이하석
숲속은 눈이 내려
환하다. 그 깊이서부터, 또 뉘 마음을 받치고
어둡고 계단도 없이
푸르고 높은 데로 겨울과 봄은 이어진다.
누군가의 얼굴이 그 숲 위로 떠올라
어둡게 불타고
겨울은 검은 흙과 흰 길이 서로 냉대하면서
곧은 나무들의 밀집으로만 정신의 그물을 드러냄을
부인하지 않는다.
사랑이여 저 깊은 곳에서
새끼 낳던 멧돼지의 젖처럼
불어난 시간의 깊이여.
그 불 피워
얼마나 많은 탐색과 접촉과 밀어냄을 애태웠던가.
푸른 존재의 우듬지가 열리는
불이여. 그 꽃의 사랑이
있기 위해 애태우다 젊은 짐승들은
또 바람 소리의 제 밑둥치를 흔든다.
붉은 물
이하석
나의 집 대문까지
내 감정의 창문 아래까지
물이 차오르는구나.
파도 기슭과 봉우리마다
꽃피는 운무.
운무 아래 내려가지 않으려고
나의 식구들은 기침 터트린다.
마당의 백일홍도 잠긴 발끝을 들고
어제 핀 꽃을 처든다.
물은 갈라진 길들을 지우고
나의 집 위로 호수 아래 누운
백일홍 꽃 위로 흐르는구나.
나는 언덕에서 손짓하는 사람들에게 가고
내겐 이제 아무것도 없다.
가족도 꽃도
다 쓸려내려 가버렸다.
뒤돌아보면 감정은 붉게 들끓고
때로 저지대에서는 물이 역류한다.
역류의 힘으로
사람들이 키우던 개들이 사슬을 끊고 도망하는구나.
늑대가 되려고 산으로 가겠지.
아니면 바다로 가서 죽는 것일까.
먼 산골짜기에서
뭇 감정의 사태가 나고
개 울음 같은 음산한 수런거림이 밀려 내려온다.
그 물마루가 높은 언덕을 휩쓸어
미처 피하지 못한 어느 집 딸의 머리채를 잡고 가버리는구나.
하늘의 소식은 끊임없이 쏟아지고
깊은 세계가 끊임없이 발밑에서 일렁이는구나.
아직 아무도 안심할 수 없느니.
붉은 벽보
이하석
벽 끝으로 돌아간 길은
아직 불들이 꺼지지 않았는데도 어둡다
신새벽 숙취의 햇빛이 벽을 비추고
닫힌 창들마다 어둔 하늘이 안의 어둠과 함께 비친다
부나비와 하루살이들 어둠 속으로 숨어들고
갑지기 통째 드러나버린,
가출한 아내를 찾는 한 사내가ㅓ
곁을 따르는 소년의 검은 옷을 여미고 지나가며
고개 수그린다
벽에 그들의 그림자가 붉게 걸린다
붉은 언덕
이하석
바람이 해적이는 폐허의 비탈에
모닥불이 피어 오른다
동학꾼들이 주먹밥을 서두르다 내려간 언덕에서
엉겅퀴와 민들레는 여름내 독을 퍼뜨리며 사랑을 다투다가
가을에 애증의 휴전을 선포한다
여행자들의 모닥불은
지난해 지나간 거치른 불길의 맞불,
도시락을 들며 여행자들은 김치를 서로 나누지만
이곳에서 젊음이란 해결 안 된 빛나는 물의 기능일 뿐.
서로 얽혀 들며 확장되던 거친 숨결의 안팎에서
초겨울 싸락눈은 수줍게 빛난다.
엉겅퀴 말냉이 민들레들의 사연 그대로
김칫국들로 얼룩진 땅은 몇 번인가 뒤짚혀져
벌겋게 녹이 슬었다
여행자들은 그 불 그늘을 헤쳐 난 들쥐의 길도
거친 사랑의 기약임을 울컥 이해한다.
블루 콤마
이하석
강변 카페는 전망만 밝힌다. 안은 바깥 향한 유리창들만 쭉 신경 써서 둘러놓았다.
거기 앉아서, 나도 내다보는 자,
커피만 쓰게 받아들이는
유리창 밖이 더 유리하다면
내다보는 내가 도리어 들여다보이는 느낌이다.
블루 콤마의 주인도 내다보는 자에 속하지만, 자주 카페 밖으로 나가 강변 풍경이 되어서 담배를 피운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데, 그럴 때마다 연기가 급히 그의 몸을 부풀리다가 위축시킨다. 제 생을 제대로 왜곡시킬 줄 아는 것 같다. 나도, 카페의 손님들도 그 모습을 멍하니, 내다본다. 하지만 결국, 서로 빤히, 들여다보이는 느낌이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서로, 울컥해진다.
그보다 블루 콤마에서는, 어쨌든, 강을 외면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니 늘 잘 내다보지만, 그때마다 쇠백로가 제 발 담군 물속에서 물고기들을 부리로 꼭, 꼭, 집아내는 게 푸르게 보인다. 언제나 밖으로만 있는 쇠백로에게는 그게 가장 큰 일이라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듯하다
비무장지대
이하석
시월, 철원 평야 가로질러 청둥오리 떼 남으로
날아온다, 철조망에 푸른 그림자 걸려 퍼덕이며,
걸린 그림자 미처 못 건진 채 새들 날아가고,
쇠들만 널린 들판, 쇠 조각들 밤마다 일어나
그 그림자들 찢어놓는다.
이윽고 새들 울음 긴 포물선으로 남은 채
얼어붙은 하늘 밑 들판은 살 비비는 풀들 짓이기며
엎어져 버린다. 한꺼번에 큰 겨울이 오고
포탄의 심지 파고들며 흙들 속 뻗어 나오던
풀뿌리들 다리 오그리고, 자욱히 씨앗 날리던
하늘 북풍에 날아가고, 쟁기와 낫 사라진 들판,
철새들 그림자만 어지럽게
널려 마른 풀들이 덮는다.
녹슨 철조망 새로 보수하는
봄, 청둥오리 떼 아득히 가는 북쪽 하늘,
철조망에 걸려 새로 칠한 페인트 묻은 푸른
그림자들 퍼덕거리고, 들판을 기어가는 풀뿌리 지뢰 밞아,
흙들 싹트는 씨앗 움켜쥔 채
공중으로 흩어진다.
비밀
이하석
그 나무는 신의 모습으로 서 있었네.
- 모든 나무는 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
해 뜰 무렵 출근길에 인도와 차도 사이, 아슬아슬하게,
나무의 서쪽으로 드리운 그 그림자에
내 그림자의 가슴을 맞추었네.
다른 사람들이 버스가 오나 하고
동쪽으로 목을 뺄 때에,
슬쩍.
그게 `일치'라는 암호를 쓰는
내 비밀이네.
여러분들도 도시인이라 물론 많은 비밀을 가졌을 테지만.
해질 무렵 버스에서 내려
동쪽으로 뻗친 그 나무 그림자에
내 그림자를 몰래 맞추려 했지만,
퇴근 시간이라 사람들이 붐벼
또 뒤섞였네.
빈 잠
이하석
깊이 비워버린 줄 알았는데
의외로 너무 얕았나? 그 빈 병과
나란히 입 벌리고 잔다
뒤척이면서 푸르스름한 기운에 싸인 몸
추스린다 때로 허리 꼬부리면서
꿈나라의 해석 안 되는 말을 짧게 내뱉는다
그가 헤적이기 싫어하는 비닐봉투를
바람이 너덜너덜하니 열어놓는다
거기 비져나온 망치와 드라이버, 노란 칠 한 군대식 물통은
그의 내일 아침을 기대하지 않는 듯
완강하게 빛난다
새벽 두 시 지나 대합실 떠도는 잠 못 든 불빛들
그의 머리맡 뒤적이다 사라진다
꿈이 얕으니 더 뒤질 것도 없다
바람도 더 이상 그의 꿈과 현실을 파헤치지 않는다
이미 다 열려버려서
아침이 와도 늦게까지 그 자신을
여미지 못할 것이다
빈집
이하석
먼지들이 들뜨면 곧장 바람을 탄다
문이 부서져 있어도 더 닫을 마음이 없다
축대 아래 마당은 바랜 기억이 빛들로 덮여 있다
축대의 돌들이 얽어짜고 있는 침묵의 구조는
바람만이 그늘진 표정으로 읽어낸다
축대 사이 캄캄한 속 내보이는 수구(水口)
그 비밀스러운 입구-또는 출구-가 착잡하게 열려 있다
뒤안의 우묵한 데 고인 물이 그리로 해서 빠져나갈 때는
늘 어둠이 물을 씻어놓아서 빛도 소리도 없었다
바깥이 내다보이는 문의 부서진 틈으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다
집 안 구석구석 숨어 있는 어둠의 끈들로 묶인 틈들을
바람이 들컹대며 흔들어 보지만,
봉창부터 여미는 풀넝쿨들의 교묘한 그늘의 직조를
거미들이 재빠르게 마감해놓는다
빛의 그늘
이하석
이 나무 아래서 무슨 이별의 잘잘못 따질 일 있었던가
누군가의 등에 찍히는 나무 그늘이 매 맞은 자국처럼 도두라진다
마른 가지의 생(生) 그늘이 속옷까지 촘촘한 올에 짜인다
생 그늘 가지가 아니라 가지의 생 그늘 자국 뿌리가
한 번 어둡게 드러났다가 다시 환해진다
길가 능수버들 한 채
잎 다 떨군 손들 늘어뜨린 채 어깨 치켜올리며
누가 그 아래 서든 바람에 눈부신 빛의 그늘 뿜어낸다
사랑
이하석
청석 위 도꼬마리 풀섶에서 당신을 읽어요.
아파트 문을 나설 때, 환하게, 당신의 편지가 왔지요.
당장 문간에서 읽고 싶었지만,
나는 사랑 모르는 감옥에 갇힌 자들 속에 갇혀 홀로 한 곳으로 불타오르는 여자,
이 도시가 버린,
우리가 늘 만나는,
이 빈 터에서 당신을 읽고 싶었어요,
도꼬마리 풀섶 청석 위에서 당신을 읽어요.
문득 눈물이 솟구치네.
우린 늘 방이 그리웠지요.
그러나 우리의 방은 어디에도 없고, 티끌처럼 점처럼 우린 떠돌지요.
때로 눈물의 집 속에 들어 내가 바깥을 내다볼 때,
내가 깃든 눈물의 투명한 물방울집은 세상의 시선에 맞아 자주 터뜨려버려요.
세상 밖 어디에서 땅을 얻어 세상 밖 어디에다 우리 집을 지을까요?
도꼬마리 청석 위 우리가 가꾸는 세상은 도시의 빈터만큼 눈물겨워요.
이 도시의 빈터에서 당신을 읽어요.
은행나무는 먼 곳의 은행나무 한 그루를 보네.
팔을 벌리고 솟아오르면,
간지러운 겨드랑이 아래로 반짝이며 떠가는 물방울과
공기들의 혼곤한 여행길이 보이네.
나는 그 길을 은행나무 아래서 바라보네,
멀리서 떠오르는 은행나무를 향해 손짓하며.
내가 나무 아래서 쉬거나 잠잘 때,
은행나무는 나의 사랑을 수만의 잎사귀 부딪치는 소리에 싸서 바람에 실어보내네.
잘 받으시라,
나의 아름다운 눈 가진 사람아.
(나는 푸른 사랑이 온통 나를 간지르는 것을 느끼네.)
바람아 불어라.
수만의 잎사귀들 사운대는 소리 속으로 수만의 잎사귀들 사운대는 소리가 섞이네.
그 소리에 섞이며 나는 푸른 사랑이 은행나무에 물을 올리고
수만의 물방울들 속에 은행나무들을 솟구치게 하는 것을 보네.
우리는 백일을 지나야 다시 만나지만,
우리가 키우는 두 그루 은행나무는 떨어진 채 언제나 만나네.
바람이 불면 두 그루의 나무가 멀리서 마주보며 혼곤하게 몸을 섞는 것이 보이네.
푸른 사랑이 온통 나를 간지르는 것을 느끼네.
바람이 불면 나의 사랑은 수만의 잎사귀 사운대며 먼 곳으로 떠나네.
먼 곳에서 나를 안은 바람을 껴안으려고 누군가가 팔을 벌리는 것이 보이네.
당신을 읽으면 언제나 나는 무한으로 열리는 내 몸을 느껴요.
도꼬마리 풀섶 청석 위에서 도꼬마리 노란 꽃이 팔월에 피고
그 꽃이 시월 밤 별로 돋아날 때
우린 이 빈터에서 약혼을 했죠.
도꼬마리 풀섶 청석 위에서,
이 도시의 버려진 빈터에서
내 사랑은 수억 년 전부터 이미 이루어졌던 것.
사막
이하석
사막의 무덤은 모래로 덮고 둥글게 봉분을 한다
누가 엎드려 울고
바람 소리처럼 엎드린다
만든 꽃도 젖는다
바람 앞에
핑계 없는 무덤도 있다
노란 천을 쓴 위그르 여인은
파미르를 넘어온 이의 후예와 결혼하여
돈황 언저리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 남편은 죽어
슬픔보다 시신이 먼저 마른다
어떤 무덤이든 바람이 덮어준다
나는 무덤 너머에 숨어서 똥을 누며
엉덩이를 모래 알갱이가 때리는 걸 참는다
나의 냄새를 바람은 모래로 덮는다
그런 다음 나는 모래에 손을 씻는다
나의 몸의 한 무덤도 이미 하나 생긴걸
바람 속에 기록해 둔다
대구로 돌아와서 내가 묻었던 나의 똥 무덤을 생각한다
그것을 조상하기 위해 다시 사막에 갈 필요는 있으리
이곳도 바람 속이고 많은 것들이 죽어
남긴 봉분들로 세계가 가득 차 있다
황사가 덮이는 날은
나의 무덤이 떠서 날아오는
바람 소리를 듣는다
산밭뙈기
이하석
태풍에 상처 난 상추밭의 상추들이나마
줄 세워 일으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산 아래 덮어오는 개망초를 걷어내다 보면
제 꽃이 희다고만 여겨지지 않듯
구름이 회색 테두리를 빛내며 산밭을 덮어오는 날은
모질게 때려치운 마음을 움츠려
상추밭의 푸른 벌레들처럼
찬밥에 목메이는 낯선 황홀도 있게 마련이다.
산책 시편 - 20170219
이하석
문득 연둣빛으로 온몸 바꿔버린 왕버드나무, 그 뿌리는 냇물의 지향점을 갖기에 늘 목이 탔는데, 아마도, 지나는 습한 바람기에 가장 먼저 포섭당한 듯하다. 반란의 조짐이다. 간밤의 가장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수상한 기운은 갈대 순을 밀어올리기에 앞서 민감한 왕버드나무의 가지를 흔들었던 것이다.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게다. 그 조짐으로 지난 며칠간 온갖 유언비어가 돌았고, 순찰조의 바람들은 어수선한 경계 분위기였다.
수달이 어느새 펄럭이는 물살 속에다 제 척후의 첩보를 선동하는 현수막을 매달았다.
삼릉계곡을 오르며
이하석
1
소나무들은 제각기 뒤틀린 생각으로 골똘하게 서 있다.
바람 편에, 내 삶처럼 온갖 생각 버리지 못해 흔들린다.
이마 데우는 햇살 손바닥으로 가린 채 마음 끓는 하늘 올려다본다.
목 없는 불상의 목 위는 허공이 파랗다.
그 텅 빈 공간이 우리가 오를 자리다.
반야경 외며 흘러가는 개울물이 나를 힐끗거린다.
그 환한 시선에 붙잡혀 석동도 이 돌 쪼아 부처 드러내며 눈부셨으리.
편단우견의 옷고름 섬세하게 매여진 걸 살뜰히 표현한 건
꼬인 세상사와 달리 풀 필요가 없는 마음을 드러낸 것.
2
많은 불상들이 보고 있는 서편으로
멀리 벽도산 위 무성한 통신시설들 너머 정토가 안 보인다.
무엇보다 산속이라, 휴대폰이 잘 터지지 않는다.
여기서 저 먼 산정까지의 통신을 푸른 바람으로 하는지,
남산의 부처들은 하나같이 귀가 삭아 내렸다.
귀를 지우고, 코를 낮추며, 목을 떼 내어버린 세월이
개울물 낮은 여울 소리에 여윈다.
3
가파른 비탈 숨 몰아쉬며 오르면 누구든 절벽 위에 우뚝, 서게 마련.
탑처럼 내 몸 세워보면 딛고 선 남산 전체가 기단이 되어준다.
이 높이에서 비로소 휴대폰도 터지면, 내 탑의 상륜부가 안테나인 양 곧추서서
세상사와 잠깐 너그럽게 이어진다.
상응
이하석
못 둑 위에서 너는 검은 염소처럼 가만히 뿔 세운 채
못 둑 아래 서 있는 나와 내 집을 내려다본다,
못물보다 더 아래의, 고요한 깊이 가늠하듯이.
그러면 나는 또 못물 바닥의 돌처럼 바람 기운에 어룽지며
그늘의 잎을 다 턴 채 빨간 등들 주렁주렁 매단 감나무 한 그루를
환하게 못 둑 위로 올려보낸다.
상처
이하석
1
대구시 상공을 가로지르는
날개가 큰, 까치 같고 어치 같은
검은 새 한 마리.
대구은행 옥상에나
동아 백화점의 맨끝 층 계단에
앉으리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것들 위에 새의 그림자가 찍히고
그 때 빌딩들은 뼈마디 쑤시는 소리를 낸다.
창에는 사람 그림자들이 어른거리고.
나의 길은 도시에서 도시로 이어지지만
저 새의 길은 숲에서 숲으로 이어진다.
하늘이 조금 비친 빌딩의 윗쪽으로는
파란색이 창백하게 그물에 걸린 새처럼
퍼덕이고, 그쪽으로 누군가가
가슴에 통증을 느낀다.
물론, 내게도 가슴에
새가 지나간 자국이 만져진다.
2
난초가 꽃을 틔워 입방아에 오른다. 서기자의 짓이다. 서기자는 원고와 각종 정보자료 더미 쌓인 탁자 위에 난 분을 올려놓음으로써 편집국 안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길에서 2천 원 주고 샀어. 곧 꽃이 필 거야. 기자들은 원고를 --- 그러니까 기사를 --- 쓰다가 처음엔 무심히, 차츰 심각한 표정으로 난분 위로 솟는 꽃대궁을 바라보곤 했다. 때로 건조한 실내 공기가 난초를 질식시키지나 않을지 걱정하는 소리도 했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한 기자들이 납과 기름 먼지로 얼룩진 책상을 원고지로 훔치다가 서기자의 난분에 솟구쳐오른 꽃을 발견했다. 더러는 무심히 더러는 심각하게, 핀잔처럼 또는 비애처럼 수줍게 핀 꽃을 흘낏거리며 짐짓 감정을 원고지 아래로 숨겼지만, 그 때문에 서기자는 괜히 무안한 표정으로 길에서 2천원을 주고 샀다고 옆사람에게 말하곤 했다. 그렇더라도, 그게 아무 문제가 될 수 없음을 모두는 알고 있다. 신기해. 꽃이라니. 조기자는 생기 있는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이 삭막한 세상에 난초가 살아 있고 그게 꽃 피운다는 사실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5일이 지나 그 꽃이 약간 풀이 죽을 때쯤, 누가 신문지를 오리는 가위로 꽃대를 밑둥부터 싹뚝 잘라버렸다. 아아 저저저런, 하는 수런거림이 편집국 안을 일렁댔다. 그는 연두빛 풀물이 묻은 가위로 신문을 오리면서, 꽃을 빨리 잘라주어야 난초의 고통을 덜어주어 잎이 싱싱해진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서기자에게 물을 잘 주라고 말했다. 누가 자료실에 전화하여 난초 키우기 책이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우리에게 이런 혼란은 물론 자주 있는 게 아니다.
새파란 길
이하석
맥주처럼 마음 부글대느라 듣지 못했을까
차바퀴에 깔린 비명 소리
술과 속도감에 취해
누군가를 죽이고 도주하는 무리들
뒤이어 차들 왈칵왈칵 몰려와
부서진 삵 으깨어 아스팔트 위에 납작하니 붙여놓는다
지리산 밑 88고속도로 위
햇살에 빛나는 붉은 핏자국
야성의 제 길 위험하다는 경고 표지 같다
굉음의 차들 그 표지 무시하며 짓뭉개고 지나가도
봄날 고속도로가 끊어놓은 길에 새싹 돋아나
이쪽과 저쪽 당겨 잇는 힘도 어김없이 새파래진다
서로
이하석
갈라져서야 서로 불러대면 귀가 난청이 되지만
서로의 시선들에 사뭇 트여져 있기에,
우리 사이 철조망이 자라도
바람에 비에, 서로의 숨결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녹슨다네
바람아 흔들어라
서로 넘나드는
번역 안 해도 되는 푸나무와 바람의 말로, 사뭇
틘 귀를 서로 씻기에,
눈을 닦기에,
우리네 사랑은 또 아는 도둑처럼
속지 않고 서로 훔친다네
서시
이하석
우리가 갈 곳을 지우며
안개가 검게 흰 진창 위로 피어
오른다. 먼 데로 도주하는 마음이
돌아보는 밤.
꼭두새벽에 돌아온다.
진 데를 빠져나와 비로소 잠 밖으로 몸을 털 때
우리의 길을 지우는 찬 밤의 흰 꼬리가
아침 해가 내린 그물에 휘감기는 게 보인다.
서울, 더 그레이
이하석
서로 마음 갈피에 핀 게
붉은 장미의 구석이다.
이 구석 이틀 봄밤에 닫혀
순례된다.
사랑이여,
우린 서로 구겨진 걸 펴주며
더 구겨진 아우성의 구석을 가진다.
겹쳐진 곳 또 겹치고
그곳이 조금씩 어두워진다 해도
네가 파고든 곳 나도 따라 파고들고
눈 감자 뜨고
잠자는 너를 바라보았지.
어슴푸레한 결핍의 길목.
맹목으로 포개어진 아침,
어둠 펴려
젖은 장미는 햇살 쪽으로 고개 돌린다.
섬
이하석
부도라는 이름의 섬이 있으리라
바람이 띄운, 바람이 피운, 바람피우는, 섬
늘 설레어서 갯완두꽃 속 열어놓는
늘 제 생을 흔들어대는 산부추가
제 가장 높은 곳에 띄운 꽃 때문에 멀미를 하는 섬
파도 속에 낳아놓은 새의 알처럼
그런 섬이 멀리서 뒤척이며 부른다
버스도 지하철도 떼어놓고 출렁대는 배를 타고 가서 맞는 바람의,
지하철 옆 카페에만 줄창 앉아 있는 당신처럼
사흘 벼려 겨우 마음 내어 닿는 섬
내 안팎의 바람 휘몰아치는,
바람이 사방 에워싸서 흰 파도들이 만나 으르렁대는,
그런 섬에 바람이 피워서 갯완두꽃 속이 열리는
성묘
이하석
할아버지 묘, 곁에 아버지 묘, 지나 파란 불로 타오르는 가야산 보며 능선을 넘어, 그 아래 파란 물 흐르는 골짜기에 할머니 묘, 그 건너편에 오촌 당숙 묘, 종조모 묘…….
또 봄이 와, 여름에서 가을까지 이곳에는 며느리밥풀, 산비장이, 산꼬리풀, 등골나무, 냉초, 구절초, 개시호, 수리취, 잔대, 마타리, 바디나물, 뚝깔, 패랭이, 쉽사리, 짚신나물, 층층이꽃, 털동자, 할미, 비비추, 애기원추리, 솔나물, 꿩의다리, 바위채송화가 어우러지네.
애고애고, 그런 산을 내 삶과 죽음의 시간들이 바랜 사진의 아버지 표정처럼 물끄러미 뿜어 올리고 있네.
세 사내
이하석
대구 변두리, 토지 구획 정리 작업장의 한구석,
세 사내가 불을 쬐고 있다.
서리의 한 끝, 날카로운 마른 풀들 부서진 길가에서
판자 조각들은 붉은 불길 솟구치며 타오른다.
기침이 한 사내를 폭풍 속 전나무처럼 흐트러 놓는다.
또 한 기침은, 자신이 키운 낯익은 둔덕 쪽으로 번지는
불을 발끝으로 지우는 또 한 사내를 빈 깡통처럼 굴린다.
그리고 또 한 사내는 말 없이
분할된 들판 길을 건너오는 찬 바람 앞에
고개 수그린다, 불꽃 이글거리는
눈만 차갑게 치켜뜬 채.
소광리
이하석
1
독수리는
내 뇌수의 찬물 햇빛에 반짝이는 골짜기에서
먹이를 찾지 않는다.
검은 바위에서 날아올라
나의 세계를 내려다보며 유유히
푸른 공기 속에 자신의 궤적을 그리며
때로 내 눈에서 벗어나 세계의 중심에서
날 뿐이다.
바위와바위와풀과풀과풀과나무와나무와물소리뿐인
낯선 곳으로
내 마음은 또 언뜻 벗어난다.
2
바람은 춘양목 우듬지까지
나의 시간과 삶을 밀어 올리지만
나는 끓어오르지 못한다.
정말 시간이 없다면 나는 죽음마저
그 위로 끌어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는 늘 내게 남아 있고
나는 해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붉은 춘양목 둥치가 뽑아 올리는 한 줄기 서늘한 하늘에
나는 시계를 걸어 두었을 뿐,
그 시계 햇빛에 잘 마른다.
3
계곡에는 짐승들이 물 마시러 온 길이 나 있다.
산지기 김씨는 그 길의 어귀에서
늘 어둠에 눈부셔 한다.
나는 그 길을 가로지르며 어떤 아픔이
내 발바닥을 밝게 찌르는 것을 느낀다.
그게 김씨의 눈부심과 같은 것일까 하고
나는 신발을 고쳐 신으며 묻는다.
4
길 끝에 쳐진 철제 바리케이드.
거기서부터 자연이다.
죽음과 삶이 똑같이 거칠고
부드러우며 잘 썩는,
내가 들면 바로 바깥인.
소화(消化)가 잘 안 되어서 써 보는 시
이하석
소화를 잘해야 제대로 사는 거라고
어릴 적 어머닌 내 아픈 배 손으로 문지르며 말하곤 했다
그러면 막힌 게 뭐든 슬슬 잘 풀렸다
소화가 잘 안 되는 건 고통스럽다
저이를 보라 외부적으로야 볼품 없지만 내부적으로는 왕성한 소화력을 자랑한다
그 옆 사람이 심각한 표정 짓는 건 뭔가 소화가 안 되어서겠지
자주 제 배 문질러댄다
소화가 너무 잘 되는 때도 두렵지만 대개는 평생 소화가 잘 안 돼 고생한다
나 죽으면 또 누군가가 없어진 나를 소화하려 얼마나 끙끙댈까
솔방울
이하석
솔방울들은 과보호의 성장기를 지낸 게 아닐까?
그리하여 사춘기를 지나 오히려 그 반항이 거세져서 완전 거친 갑옷으로 스스로를 무장해버린 게 아닐까?
허긴 허공에 매달려 살아온 삶의 역정이니 그런 자기 트집도 필요했겠지.
그러나, 차츰차츰, 그 촘촘한 갑옷 속에는 언제든 제 질문들이 쉬 빠져나갈 방책만이 단단히 들어 있음을 우리는 안다.
강해 보이지만, 기실은 누구에게나 부드러운 바람기의 방책인 것이다.
그것들도 비로소 철이 든 것이리라.
그 안에 빼곡하니 이별의 날개를 단 눈들이 많아서,
부스스, 서로 다투어 먼 데를 내다보는 걸 내가 조마조마하게 느끼는 건
그 때문이다.
쇼핑백들
이하석
노란 쇼핑백은 파란 쇼핑백과 한통속임을 치욕으로 여길까
노란 쇼핑백은 안을 보여주지 않는다
검은 쇼핑백은 안을 보여주지 않는다
파란 쇼핑백을 안이 약간 보이는데 포장한 박스들이 들어 있다
택시는 오지 않고
쇼핑백들 곁 검은 옷 입은 여자가 푸른 쇼핑백을 들고 서 있다
분홍 옷 입은 여자가 남자친구에게 흰 쇼핑백을 건넨다
남자는 유난히 조심스레 쇼핑백을 든다
쇼핑백처럼 입을 꾸욱 다물고
푸른 옷 입은 여자가 노란 쇼핑백을 들고 곁을 지나가지만
아무도 그 안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택시는 오지 않고
남자가 화를 내며 여자에게 쇼핑백을 건넨 다음 가버린다
서로의 속을 너무 알아버린 것일까
여자가 분홍 옷 속을 전혀 보여주지 않아서일까
택시가 와서 한 여자가 쇼핑백을 건넨 다음 가버린다
갈색 옷 입은 남자가 또 쇼핑백들을 건물 앞에 세운다
파란 쇼핑백과 검은 쇼핑백은 서로 기대지만
서로에 대해 만만하지는 않다
쇼핑백의 주인은 택시를 기다린다
수북수북
이하석
참나무가 잎들 떨구어선 제 뿌리 수북수북 덮는다.
그게, 요즘 내가 읽어내야 할,
가장 두터운 가을 사상서의 두께다.
순례
이하석
어디에서든 바로 가지 못하고
비뚤어진 세상에는 온통 부러지고 망가진 길들뿐,
기름과 석탄 사이를 걸어서 졸면서
또는 기도하는 몸짓으로 어두운 어깨만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먼지를 덮어쓴 풀들은 깡통들의 투명한 표정들을 감추고 있고,
바람이 나무둥치를 흔들 때,
나무들 쇠 껴안은 붉은 뿌리에서부터 쓸쓸해지고,
머리에 구름과 모래를 인 사람들이
나무뿌리들이 감춘 물속으로 그림자 던지며 지나갔다.
그들은 깡통과 비닐을 비껴 흐르는 길들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기름들을 쏟고 깡통들을 풀밭에 던졌다.
그들은 스스로 흩트려 놓은 것들 때문에
결코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리라.
인간들이 지나간 들판에 버려진 채로
인간을 그리워하는 것들만이 남아
어느덧 신성한 기운에 싸여갈 뿐.
숲
이하석
사람들 숲에 들자
그늘 속 어룽대는 햇빛으로 문신을 한다.
금방 서로 부시게 바뀌는 얼굴들.
그러나 이내 몇 잔씩 저마다의 생애의 상처 속으로
들이붓는 막걸리들이
그 얼굴들을 붉게 발효시킨다.
시여, 몹쓸 것
이하석
나를 가두는 시를 이 안에서 내치기 위해
꿈의 심장을 도끼로 찍고
순수의 눈동자를 핀으로 뽑자.
서정의 속옷을 벗겨 찢어발기자.
아름다운 말에 똥을 싸자.
그러면 덧정 없어
그것들은 제 집을 나가리라
그런 이별에 연연하지 말자.
시여, 몹쓸 것, 하며
탁자 위 흰 종이와 향나무 연필의 그늘을 걷어내며
한 시인이 한국의 최루탄 자욱한 매운 거리를 내다본다.
이 속에 이 눈물 속에 분노와 그리움과
꿈과 순수와 서정이 있고 아름다운
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누가 소리칠 때,
그의 심장은 파리하고
그의 눈동자는 창백하다.
시인
이하석
1
시를 만드는 것은
사랑하는 일이기보다는
사랑하는 일에 끼어드는 일
그러니까 시인은 언제나 참여자이다
군인이 제 총을 손으로 쓰다듬듯
그는 말들을 쓸어모은 쓰레기통을 종이 위에 부어
더욱더 버리고 헤적인다
펴놓은 종이의 왼쪽에 있는 말들과
오른쪽 구석에 몰려 있는 말들도 있고
그걸 구획 지어 찢어놓기도 한다
종이가 구겨져 있다면, 거기 누군가의
지문도 구겨진 채 왼쪽 구석에서
오른쪽 귀퉁이로 온몸 무게로 그은 흔적을 남긴다
그건 통일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일까
언제든 사랑하는 일에 끼어들어
손 다치는 일 일어날 게다
누군가는 거기 죽음 직전까지 밀고 간 몸을
위험한 말들 너머로 보고 읽을 것이다
2 - 화가 홍창룡에게
의자 위에는 늘
구름 뭉텅이가
앉아
있다,
곧잘 비
머금어
물렁물렁해지는,
천둥이,
봄의 우레가
그 안에서
웅성거리는.
신천
이하석
비슬산의
숭엄과 신화의 바위가
검은 속 왈칵왈칵 쏟아내어
질펀한 서사를 이룬 것입니다.
그 물 대구 시내 들어오는
가창 끝머리쯤에서
맑은 죽음들 품어 쓰다듬는 할머니가 떠먹고,
한바탕, 서러운 술을 깨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그 깨움을 들고서야 겨우,
어미 강이 되는 것입니다.
수달이든 왜가리든 고라니든 인간이든
선 것들 입에 젖 물린 채
마구 불어나는 것입니다.
그 죽은 이들의 자식들 여전히 여기서 자라기에
대구분지는 그렇게 문득 또, 환하게
젖는 것입니다.
한바탕, 새로 저항해야,
깨어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길
이하석
잠깐 잠들었다가 눈 뜨니, 차창 밖에
흰 구름의 길이 떠 있다.
소리와 먼지의 두 시에 서울 출발.
네 시 무렵 추풍령을 넘고
산골짜기로 난 칙칙폭폭 쇠소리 길은
산 그늘로 얼룩덜룩해진다.
저 멀리 기러기 길이
기차길 밖으로
나 있다, 환하게
또는 어둡게.
여섯 시, 경부선을 세우고
대구에 내린다.
계단을 올라 기차표를 빼앗길 때
낯익은 길과 겹친 낯선 길이
내 앞에 여러 갈래로 누워있음을 본다.
기러기 길과 구름의 길과 이어지지
소리와 먼지의 길이
어둡게.
아름다운 길을 가고 싶다.
아름다운 길은 왁자지끌한 사람들의 속
외로움의 끝길이며 첫길.
아메리카
이하석
독한 불의 밤을 지나 재의 새벽,
빈 양주병 곁에서 잠이 깬다. 미스 빼주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미국식으로 쓰윽, 쓸어올린다.
화장이 군데군데 지워져
그녀의 눈 위에는 푸른 그늘이 얼룩져 있다.
하품이 술기와 구역질과 욕지거리의 입으로 새어나온다.
타임지엔 중동쯤에서 대량 학살이 있었음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사진 아랜 색정 넘치는 여인의 분홍빛 침실의 화장품 광고.
마른 포와 땅콩 껍질이 피와 먼지 뒤엉킨 주검들 위에 흩어져 있다.
브라운인지 브라본지가 있었던 자리엔 몇 장의 지폐,
노란 휴지와 함께 구겨져 있다.
그녀는 문득 벽의 거울을 발견하곤 그쪽으로 웃는다,
타임즈의 광고 속 아름다운 여자처럼.
잠시 꿈꾸는 거지
곧 정신을 차리면 그만이지
누가 알기나 해?
미국 놈들은 한국년들을 좋아하니까
우린 비싸지 않거든
난 몸이 그늘과 늘 깊이 닿아있지
그러니까 난 누구보다도 미국을 잘 이해하지
정말이지 난 그들의 애인이니까
그녀는 잘난 미군이나 하나 잘 낚아 한탕 할 날을 꿈꾼다.
잘하면 미국행 비행기도 탈 수 있을 거야.
그 꿈이 담배를 피워 물게 한다.
깡통 맥주와 알약과 시끌한 축제를 위해,
그녀는 세수를 하고 투명한 스타킹 속에
희멀건 다리를 찔러넣는다.
토요일 오후, 미스 빼주는 길 건너 소리사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가락에 맞춰 껌을 씹으며,
미 팔군 후문의 담장 사이로,
전혀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듯이
미끈한 허리를 슬쩍 열어 보인다.
아주 오래된 지금에사
이하석
뭇 삶의 뒤꼍에 숨겨진
아주 오래된 지금에사
당신의 이름이 새로 불리어지네.
그러면 나보다 훨씬 젊은 아비의 모습을
나 역시 새로 알아보네.
그뿐,
당신은 여전히 행방불명이네.
뭇 삶의 뒤꼍에 숨겨진
침묵의 구조여,
그 어둠으로 간을 맞추어
밤 먹는
삶이여,
아주 오래 달궈온 삶이
침묵의 뜸을 들이네.
아직
이하석
보이지 않을 만큼, 어떤 큰, 것이,
네모진, 엄한,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부둣가에 바다로 가는, 또는 바다가 오는 것을
막은, 높은 선착장에,
나를 가리며, 이중 삼중으로
무표정하게,
---- 그것들은 쌓여 있다.
우리가 슬쩍 그 그늘 아래로
숨어 들었던 곳,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질서 정연하게
또는 제멋대로
그것들은 아무데나 쌓여 있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쌓여 있는 것들 뒤에는 가려진 것이 있다.
부풀어 오르는 하늘과 바다,
추억 속에 흰 갈매기, 어떤 사랑,
그러나 상상의 것들은 쌓여 있는 것들과 함께
트인 바다 앞에서 쉽게 사라져 버린다.
부두에는 배가 떠 있기고 하고
파도 위에, 없기도 한다.
컨테이너는 물론 늘, 거기, 쌓여 있는 게 아니다.
그 배들이 부려 놓았거나, 그 배들에 실려 갈
컨테이너는 우리들에게, 혹은 먼 나라 사람들에게
쉽게 몸을 열 것이다.
차가운 컨테이너,
그 모퉁이 뒤켠에 낮은 속삭임,
돌아보면 그 그림자조차 없다.
부두에는 배가 떠 있기도 하고
파도 위에, 없기도 한다.
부둣가의 컨테이너 역시 그러하다.
악어
이하석
이 악어는 우리가 본 악어 중 가장 크게 여겨진다
과장이 심했기 때문인데,
그러나 무섭지 않은 악어
어슬렁거리지 않고 화가의 작업실 한구석에 놓여 있다
두터운 갑피는 하나하나 다른 모양으로
우리 삶터 곳곳에 숨어 있다가 화가에게 들킨 것이다
쓰레기 하치장, 폐차장, 고물상 어디에나
그는 악어 조각을 찾아다녔다 악어가 될 만하면
뭐든 사 모으고 주워 모았다
온갖 쇠 파이프들 용접하면서
그는 악어처럼 마음과 몸 뒤틀었다
불꽃이 튀어도 악어처럼 악문 쇠 놓지 않은 채
온몸 뒤틀어댔다
완성되면 화물차에 실려가서
시내 중심가 우아한 건물 안에 한동안 전시된다
그런 악어만을 찾아다니는 문화인들이 그 큰 아가리에 손을 넣어
악어의 영혼에 닿기라도 하려는 듯 깊숙이 손가락을 휘저어본다
깊은 속 닿아 아주 차갑게 느껴지는 게 있다고 해서
그게 악어의 영혼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게 실제로 더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심한 과장 때문만은 아니다
안
이하석
구석진 내 넋의
차고 빛나는 유리 덮개를 닦으면
꿈인가 강 저편 언덕의 푸른 풀춤이 보인다
사람들이 모여 내지르는 함성의 몸짓일까
강물엔 햇빛 들끓고
끊임없이 흐르며 사방에서 누가
나를 부르고 부르고
그러나 나는 다만 은밀히 내다보며
나의 춤을 휘장 속에 숨기며
또 내다볼 뿐
유리창 안으로
내 말과 춤을 어둠에 문지를 뿐
애인들은 쪽, 쪽, 소리를 낸다
이하석
바다 다슬기들은 민물에 삶긴 몸들을
바닷가 플라스틱 함지박에 누인다. 노란
타올을 쓴 아낙네는 밤새 바다다슬기들의 꽁무니를
뺀찌로 절단했다. 사랑하는 남녀가
바다다슬기 한 봉지를 3백 원에 사선
다정하게 마주보며 먹기 시작한다.
다슬기의 앞쪽을 쪽, 쪽, 소리내어 빨면
다슬기의 속이 살덩이 채로 입 안에 톡, 떨어진다.
여자는 처음엔 부끄러워했지만 다슬기의 몸을
집어낸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사내는 쪽, 쪽, 소리를 내는 여자를
사랑한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남자는 저쪽, 싸구려 해안 여인숙의 창에 서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도 쪽, 쪽,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본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여자는
승용차를 내려 20대의 타이피스트를 껴안다시피
바다다슬기를 안기는 40대 남자의 살찐 가랑이를
본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에 굴리고.
그리고 바다는 끊임없이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2월의 부산 부두는 다슬기의 껍질만
쌓인다. 3백 원 또는 6백 원어치의 껍질들만 남겨두고
애인들은 가버리고, 모래 속으로 바다를 느끼면서
껍질들은 구멍 뚫린 몸들을 모래로 채운다. 노란
타올을 쓴 아낙네는 껍질들 위에 앉아
옛 애인의 쪽, 쪽, 하던 소리를 물거품 위로
듣는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아낙네는 주름진
입술 사이로 하염없이 쪽, 쪽, 소리를 내며.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바다 다슬기를 먹는 자는 누구나 쪽, 쪽,
소리를 내며, 모래 위를 구르는 흰 물거품을
이해한다. 누구든 흰 물거품 속에선 흰 물거품으로 밀리며
2월, 애인들은 어디서든 쪽, 쪽,
소리를 낸다
야외소풍
이하석
1
도로표지판의 화살표 방향으로만
달리는 길
도로표지판의 화살표를 따라
불빛 속 벗어나지 않은 채 달리며
나는 화살표가 비켜 가는 숲의
캄캄한 안을 힐끗거린다
갑작스레 비치는 헤드라이트에
망연자실해진 나무들 아래
감춰져 있던 흰 길들 소리치며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게 보인다
빌딩 숲 밑에서 모든 길들로
욕망을 열어두고 잠든 거지처럼
저 숲길로 자못 숨어드는 마음의
화살표는 어디?
2
소나무는 죽는다
도시에서 뻗어 나온 길들이 칡넝쿨처럼
감고 올라와 전신이 어두워져서
더 이상 바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칡뿌리를 캐다가 나의 마음이
그 뿌리에 걸려 죽은 나무 베어넘긴 골짝으로
굴러떨어진다
야적
이하석
1 - 노인
야적장 부근에 늘그막에 눌러앉은 노인은
기억의 부속품들 잘 챙겨지지 않는 몸으로
사람들의 꿈과 잔해들 뒤적여 고철로 팔아먹는다
바랜 욕망들과 함께 햇빛 아래 수북히 쌓아놓은 잔해들엔
어둠들이 골다공증처럼 뻐꿈하니 내다보인다
오늘 하루도 내 것이 아니었다며
더 뒤질 것 없는 욕망의 빈터를 접으면
뒤진 자리마다 퍼런 풀들 돋아난다
미망(迷妄)의 꿈 그늘들 또 무성해진다
2 - 구제역
정치적인 것은
쌓인 것을 울며
태워 없애 보이는 것
짐승들의 갈라진 다리는
하늘로 치켜들린 채
회염새들의 날카로운 부리들에
뼈를 발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렇게 죽여야 전염되지 않는단다
전염된 사람들의 마음만 아파서
제 문을 열 뿐이다
스스로 그 마음을 넘어뜨리면
가축들이 뜯어먹던 풀들이
사납게 고함치며
모든 연민들을 태운다
뜨거움을 느끼는 돌에
재가 되는 흙에
불길 속으로
가늘게 떠지는 눈길들에
불길을 더 보채는 기름에
사진기의 섬광에
경찰들의 헬멧 위로 쌓이는 잿기루에
짐승을 키우지 않는 정치인의 입술에
시인의 노래에
정체되지 않은 연민이 있다.
3
숲이었던 자리를 노을이 붉게 물들인다.
적송들이 쌓인 채
자신들의 붉은 속이 게워낸 진액이
피처럼 말라붙은 나날을 서로 기댄다.
생(生)이 잘린 채 쌓여
예저기 높고 낮은 산을 누워서 이루는 나무들.
껍질이 두터운 것들은 서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바닥에 흘러내린다.
인부 장씨가 술로 불그레하니 상기된 채
나뭇더미에 기대어 잠든 채 무너진다.
어둠이 나무 사이에서 더 이상 무너지지 않자
나무 속의 벌레들이 조심스레
그의 체취를 더 잘 맡으러 기어나온다.
자꾸 쌓여도
자꾸 무너지는 장씨의 꿈이
왈칵, 어둠에 쌓인다.
4 - 포대들
내놓은 포대들
버려지지 못하고 다시 헤적여지는
2003년 2월 26일 경찰이 대구 지하철 안심 기지창에
옮겨 놓은 화재 현장 쓰레기를 분류하니 유류품 중에는
화재 당시 승객들의 신체 부위는 물론,
황색 중절모가 나온다 모자 주인의 머리가 타버려서
모든 이들의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즉석 복권 다섯 장과 부적은 죽은 이의 행운과 관련이 있으리라
그걸로 누가 연기 속에 뜬 별을 가늠했을까
그리고 조리사 기능 문제집과 초등학교 6학년 수학 문제집이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들과 함께 나온다
묵주 줄은 끊어지지 않아 죽은 이의 완강한 신앙심을 짚게 한다
화장품, 목걸이 구슬, 신발 뒤축, 안경태, 멜빵 끈, 대구은행 통장 조각......
죽은 이들을 좀체 풀어놓지 않는 이 매듭들
반쯤 탔거나 온통 그을려 있는
죽은 이들이 끝내 가져가지 못해 우리가 하나하나 자세히 살피는 것들
아무도 드러내놓지 않으려 안간힘 했으나
쓰레기로 쏠려 나와 다시 챙겨지는 단서들
사랑과 증오와 바깥에 내버려진 504개의 쓰레기 포대 안에는
너무 많은 삶의 단서들이 캄캄하게 접혀 있거나 부풀려져 있다
5
강 긁어 쌓는 모래산.
급경사를 이룬다.
강바닥 냄새와 함께 모래산 위로 들어 올려진 자갈들은
자꾸 아래로 굴러 내린다,
모래 속에 얼굴을 숨기며.
오리섬* 에워싼 모래산.
꼭대기 높아도
도요새는 전망대로 삼지 않는다.
제 무게조차 지탱하지 못하고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섬 드나들던 고라니와 철새들은
이미 자신들의 삶의 고샅길과
그늘들을 감추어버렸다.
강물 속에는 맑은 거울이
깨어져 있다.
거기 구름의 얼굴이 산산히
부서져 있다.
새벽잠 깨어 강가에 가니,
밤새 떠올려진 많은 꿈들이
강 가로질러 촘촘하게 박아놓은 길쭉한 강판들에
비닐처럼 걸려 펄럭인다.
이제 아무도
아무것도 제대로
흐르지 못하리라.
* 낙동강 상주보 부근의 모래섬
6
어둠으로
두드러져 있는
무슨 추억에 그슬린 빛깔
같이……다만……애매하게……쌓여 있는.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우리를 돌아가게 하는, 그저
……뚱뚱하고, 속이 빈, 드럼통들.
그 안은……어둡지만, 제각기 노랗고, 푸르며, 붉다. 그러나
……빈 것들. 그 남은 빛깔들은 바깥으로
새어나와, 갑자기, ……기침하듯……강렬해진다.
그것들을 비켜서 우리는 어디 못 가에 앉을까.
바람에 웅웅대면서
빈 속을 중얼대면서 그것들은 풍경을 지우고……
그래서……우리의 전망도 점점 넓게 ……깔아뭉개진다.
다만 그것은 도로변 못 가에 쌓여 있다
……그저……허물어 내리면서……확장되고……
젖어내려 못물이 노래지고, 파래지며, 붉어져……어두워진다.
송사리가 없어진 것도 모르고
못물은 자신의 수면 위에
하늘을 비추고……드럼통과 비켜
……우리 그림자를 거꾸로 세워놓기도
한다.
7
태풍 사오마이는 정치적인 것들이 아닌
실제의 삶들을 후려쳤다.
흐트러진 세상의 삶 조각들을 사람들이 끌어모아 쌓아놓지만
동대구로에 쓰러져 출근길 교통 대란을 빚은 히말라야시더의 당당한 잔해가
그 속에서 빛난다.
그것이 떠받쳤던 하늘이 그 위에 무너져내리지만
치워질 수 없는 추억처럼, 햇볕에 바랜 채
그것은 가장 낮은 세상의 땅의
그 몰인정한 넓이와 깊이에 전신을 뉘어
가까스로 제 푸른 꿈을 떠받친다.
어느 날 문득, 가만히
이하석
한국작가회의대구경북지부가 2019년에 낸 시선집을 읽는다. 그 안에 내 시도, 있다.
아직, 새초롬하게, 있다.
짚어나가다가 많은 이들의 말들에 밑줄을 그으며 자꾸 내 말도 더 기웃거린다.
요 몇 해까지만 해도 왁자하니 함께 있었던 이들의 시들이 더러, 가만히, 빠졌다.
문득 내 나이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아챈다.
그래, 그래, 어느 날 문득 내 시도 이 책 속에 없으리라.
그러면 나는, 가만히, 삐치는 게지.
그렇다고 모든 사랑들로부터 빠진 말이라고 두어두기는 이미, 쉽지 않겠지.
내 말은, 그제사, 그 밖의 밖에서, 가만히, 누군가에 의해 밑줄이 쳐질까,
그렇게 놓여나질 까라고 물끄러미, 또 기웃대어지는 것이다.
어느 잠녀의 기억-그날, 가오리에게
이하석
미안하여라
네게 못할 짓 하였구나
내가 어찌 알았겠나
단 한 발
나의 삶 앞에 너의 삶이 있었다는 것을
그해 여름,
어떤 단단한 가오리가 열두 새끼를 배었는데
달려도 그리 달릴 수 없었던 몸속에서
모래언덕까지
나 끝내 삼지창 앞세워
숨 다한 그 가오리 잡아 올렸네
어찌 알았겠나
네 몸에 품은 그 여리디 여린 것들
순간
내 마음은 와락 치욕이 달려들었네
어찌할 줄 몰랐네
아, 나도 조금만
여덞 아이 베었던 몸인 줄 았았더라면
정말 미안하였네
그러나 아우여 그대에겐 행여
나 같은 우연이 없길 바라네
아흔의 바다에서 유영하는 내내
왜 내 몸이 내 눈을 덮치는지 몰라
왜 단단하게 무장한 갑각류처럼
그날의 우연이
오늘도 내 밤을 따라오는지 몰라
어떤 버려진 골짝이라도
이하석
어떤 버려진 골짝이라도, 호젓한
모든 것이 홀로인 채로 돌아앉아 깨어 있는 곳,
부스럭거리는 깡통들의 틈서리라도,
다 제각기의 삶은 열리고 닫힌 채로 사랑에 겨워 있다,
인간들의 꿈과 정액들과 손찌검이 묻은 채,
그것들은 황음한 욕망과 전쟁을 거쳐왔으므로.
풀이여 깡통이여, 너희들이 향하는 인간의 세계는
늘 고통으로 너희곁에 있다, 버려진 채로
더욱 확실하게 모든 것을 떠받들고서.
어떤 풍경 사진
이하석
길은
사랑이 무르익기 전까진
집을 가르쳐주지 않는 이 같습니다.
끊임없이 구불거리며, 나타납니다.
전혀, 막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굴참나무 아래서
죽음 쪽으로 떠밀려간 이들의
외길을 짚습니다.
누가 주춤거리며 돌아보고
누가 재촉하는 게
잔광 속에 찍혀 있습니다.
어떻게 남겨진 사랑이 긁어댄 풍경인가요?
풍경의 헤진 언저리에 우거진
어둠을 좀 더 밝게 인화하면,
행방불명으로 도드라지는 이름들과
아버지의, 되돌아 나오지 못한 막다른 길이 보입니다.
여름
이하석
해는 못속에 들어가
빛살을 푼다
매미 소리 푸른 숲으로
아이들의 풀잎 같은 귀가 반짝이며 뻗는다
햇볕에 그을어 아이들은
수신(水神)처럼 물에서 돌아온다.
몸모습 없고 때 여의신 이*가
자비로 슬퍼하던 땅에
아이들의 맨발들이 무성히 반짝인다
못이 있는 여름은
하늘에 해 하나만 남겨두고
남은 해 천만 개를
풀숲에 물 속에 혹은 아이들의 맨발 밑에
숨겨 두었다
여름휴가
이하석
사람들은 바삐 세돌씨의 곁을 스쳐서,
건물 사이로 창 너머로 보이는 초록의 들판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 버린다.
코카콜라와 꽁치 통조림,
껌과 커피와 양주와 보리빵 덩어리들을
버너와 담배와 함께 며칠을 골몰하여 준비하고.
세돌씨는 남은 사람.
남은 사람들은 또 고고나 로큰롤 음악 속으로 자지러들고,
지나가는 여자들의 엉덩이나 훔쳐보며,
공중 변소에서 수음을 한다.
어느 여자이든지 사랑을 줄 수 있지,
남은 사람은 남은 사람들끼리 또 무언가를 남기며.
봉숭아꽃 있지요? 몰라요? 빨간색이에요 저녁에도 피지요
그걸로 꽃물을 들여봤어요
꽃은 고향 집에서 따왔고 백반은 어느 약국에서든 팔거든요
피임약과 함께 예쁘죠?
고향 집엔 없는 꽃이 없어요
나는 일찍 집 떠나와선 버린 몸이지만
피임약과 함께 황혼이 온다.
세돌씨는 여자의 더러운 손톱을 깨물면서 작은 여우처럼 으르렁거린다.
폭우가 또 퍼붓고, 태풍 세실양의 치마자락이
누추한 여관의 창을 휘감는다.
태풍은 도시를 흔들고,
모든 것은 너무 빨리 끝난다.
비가 멎자 곧바로 하수구로 몰려 순식간에 빠져나가 버리는 물들.
여자는 서둘러 사라져 버리고,
남은 세돌씨는 무엇이 자기에게 남겨졌는지도 모른 채,
무료하게 백화점 쇼윈도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캄캄하게 어른거리는 자신의 모습 너머 많은 여자들의 스타킹들이 보인다.
유리 속에 진열된 채,
그것들은 곧 걸어갈 자세를 취하고 있다.
스타킹 너머에는 어둡고,
거기에서도 암내를 쫓는 털짐승들이 으르렁거리는 게 보인다.
그 뒤로, 산을 내려와, 폭우를 피해 도시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풀 죽은 뒷모습도
얼핏, 보인다.
연애 간(間)
이하석
점과 점이
마음 내어
선을 이루지만,
참새라도 앉으면
여리게 떨리는,
저 전깃줄.
연어
이하석
돌아온다. 약속 많은 언덕이 엎드려 지키는 여울의 길목으로,
온다. 온다. 떼 지어 달리는 마라톤 경기처럼,
붉고 노란 유니폼 입은 선수들이 몰려온다,
유도선이 없어도 제 생애의 무늬 속에 잘 각인된 길이
바다에서 강으로 들어, 에돌아, 돌아, 곧바로, 상류에 이른다.
그 시작과 끝은 언제나 예정된 길로 이어져 굽이친다.
강가에서 낚시질하거나 그물질하는 우리들이 잡아 올리는
장편 서사의, 쉬 끌어 올려지지 않는, 퍼덕이는
긴 노정.
기실 낚시질과 그물질로도 연어의 길은 헝클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연어들은 혼인색으로 노랑 빨강 보라로 장엄한 채
상류로 내처, 막무가내로, 치달아선 제가 아는 길의 꿈을 새로 낳는다.
그게 서사의 후렴이 아니라 늘 서사의 서두임을 우리는 안다.
죽음으로 복제한 길. 연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낳은 어린 여행자들은
이내 떠난다,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오래전부터 당연히 감당해 온 처음의 제 길을 열며,
거친 삶 풀어놓는다. 그냥 그대로, 돌아오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멀리 나가는 강의 길이 길게 바다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연탄재들
이하석
인제(麟蹄) 부근 산골 부대 쓰레기 하치장,
마분지 조각 쇠 조각 껌 종이 서류 파지 같은 것들
불에 그을어, 연탄재 더미 사이로 몸을 숨긴다.
하치장 부근의 오리나무도 불에
그을어, 어깨가 처진 채로 가지 하나를
힘겹게 하늘로 밀어 올린다.
민들레꽃이 황토 비탈에서 잠깐 피었다 진 후
병사들은 다시 주위의 풀들을 뽑아 버렸다,
깊은 밤 먼 논의 개구리 울음소리에
연탄이 하나 허물어져 내린다,
뼈들은 바람에 실리어 가고
마음은 흙에 묻히며.
열 수 없는 창
이하석
열 수 없는 창의 바깥 면이 말갛다
밧줄에 생계 매단 사내들 불러 닦았나
그들이 들여다봤을 창턱에 놓인 제라늄 화분의 꽃들을
또 누가 가지런히 정리해놓았다
자판기 커피 맛으로 꽃잎 헤아리다가
일과 후 알 수 없는 마음 거둬 엘리베이터로 내려가
모두 건물을 나가 버린다
열 수 없는 창의 밖이 훤해서
제라늄은 밤새 꽃문도 닫지 못하고
치워질 때까지는 어쨌든 그렇게 아득히 피어 있다
영춘화(迎春化)
이하석
그러니까 봄은 공공적이어서
누구에게나 느닷없이 기습처럼, 사치로
나누어진다네
그렇게, 골목에 내놓은 화분이 먼저 피어내지만,
여늬 꽃처럼 오만하지 못해서
땅에 닿을 듯 기면서
겨우 얼굴을 쳐드는 것이네
향촌동 이름에 걸맞게 향기 바라 키웠다고
그렇게 봄이 오면 좋았으리라고
근대 문화의 거리가 되면서 오르는 전세 값 감당 못해 더 후미진 동네로 이사 가는
할머니가 또 되돌아보네
이삿짐에서 떼 내어 화분을 골목에 놓고 가는 건
동네 사람들에 대한 기약 인사일까?
다른 꽃들보다 먼저 봄을 피우고 마는 꽃이라서
그런 기쁨도 슬픔도 이젠 감당 못 한다며
자꾸 뒤돌아보네
오대산 바람
이하석
오대산 바람은 삼나무 높이를 흔들지만,
측량사처럼 오치를 강조하진 않는다.
그늘 무성한 댓바람의 높이는
서어나무 바람보다 낮지만,
삼나무 높이 걸린 마음까지 이르기도 하여
쉬 측량되지 않는다.
오랜만에 상원사 다녀오는 어머니의 바깥바람은
깊은 산골짜기의 정적을 삼나무 우듬지처럼 떠들어 올리는
기도를 머금고 있다.
절 측량하는 이들 사이에 끼어 내가 탑 꼭대기의 높이를 가늠하는 동안에도
오대산 바람은 높은 것들 놓아두고 낮게 흐르는
계곡물에 스며들 때가 아주 맑다.
그 깊이는 하늘빛으로 측량된다.
용정 가는 길
이하석
들뿐인 구릉 위에 서니
하늘이 넓어
내가 잘 드러난다
광야엔
굉장한 넓이의 침묵이
고요의 굉장함이
날 보고 뭔가를 말하라고
긴장해 있다
숨을 수 없어
`나는 한국인!'이라 소리치니
내 소리가 두 말로 갈라진다
저 아래서, 서로 맞받는 메아리처럼
두 말이 솟구쳐올라
서로 부딪쳐 피 흘린다
돌아보니 마른 수수밭 머리에
큰바람이 먼지를 말아올린다
우주선
이하석
저녁을 먹고, 세일즈맨 김모돌씨는 텔레비전을 켠다.
광막한 우주 속으로 게으르게, 또는 비현실적으로 흰 쇳덩이가 유영하는 게 보인다.
고요하게 달 또는 지구를 배경으로 인공위성은 반짝이며 서서히 나아간다.
김모돌씨는 재채기를 참으며,
화면 속으로 비처럼 내리는 어둠을 또 그 밑의 빛이 떠받치는 것을 본다.
빛이 중요해, 그는 중얼거린다.
세상은 빛으로만 떠오르고,
우주 속으로 외롭고 암담한 빛깔이 흘러간다.
그의 장부 속 붉고 푸른 줄 위로 흐르던 볼펜의 끝이 반짝인다.
그는 볼펜 심을 바꾸어 끼면서 그 밑 어두운 손바닥 위로
흐르는 흐린 빛에 자신이 문득 휩싸임을 느낀다.
저 지구 속에서도 나와 내 집이 있을까,
그는 자세히 텔리비전을 들여다본다.
그의 집은 후미진 빌딩 사이에 있어,
텔리비전 화면이 고르지 못해 우주 속의 지구가 잘 안 보인다.
그의 텔레비전 안테나 끝은 아슴프레히 녹슬어 하늘 높은 곳으로 녹들을 날리고,
젖은 날은 녹물이 그의 지붕에도 흘러내린다.
밤에는 이슬 속으로 녹물이 엉켜 별빛이 그 속에서 빛난다.
그가 낯선 집을 방문하여 새로운 상품을 소개하고 거짓말을 하고 야비하게 설득할 때도,
그의 집은 고요하고 외롭게 텔리비전 안테나 끝에서부터 삭아내린다.
토요일이거나 일요일 저녁이거나 요즈음은 자주 우주선의 창이 텔리비전에 비친다.
그가 장부와 카탈로그를 껴안고 골목을 기웃거릴 때,
때때로 힐끗거리는 하늘에는 많은 안테나들이 보인다.
그것들은 새로 섰거나 헐어서 폐기 직전이거나
한결같이 하늘 쪽의 끝이 녹슬어 하늘 깊숙이 녹물을 흘려보낸다.
우주의 녹물을 타고 외롭게 선을 따라 들어 김모돌씨의 안방에서 펼쳐진다.
그는 우주 속에서 벗어나 텔리비전 밖에 누워있다.
그는 다만 볼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도 민주주의도 자유도 혁명도 그의 집 대문이 아니라
텔리비전 안테나를 통해 그의 방에 들어온다.
그는 다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다만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차하면 텔리비전을 꺼 버릴 수도 있다.
그 일만은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해낼 수 있다.
담배를 피우는 김모돌씨의 게으른 연기 속으로
우주선도 안테나가 붉게 녹슬어 어둠 속으로
무엇인가가 어슴프레히 녹아내리는 게 보인다.
그리고 그다음,
그 녹물 속으로 새로운 쇳덩이의 싹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저런, 저런, 김모돌씨는 마른침을 삼킨다.
그것은 무서운 광경이다.
웃는가?
이하석
흙에서 뽑아낸 무같이 희뿌연한,
무 뽑아낸 흙 속처럼 어둔 할머니의 얼굴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
흐릿하지만 귀언저리는 밝다
뺨에 떨어진 햇살이 주름 골짜기 깊음을 강조해도
그 나이가 제대로 가늠되는 건 아니다
뿌연 햇빛의 뿌리가 얽힌 목덜미는
끊임없이 입 쪽으로 상승하는 소리의 통로
드러내는 것으로 두드러져 울렁거리지만,
그 소리는 늘 가르랑거린다
이마는 검은 부분이 강조되어 반쯤 지워진 듯하다
눈언저리와 코 아래 입술 주변은 거무스레한 것들이 윤곽이 되어
서러운 표정이 애매하게 일렁인다
그 흐린 삶 안에 누가 또렷이 있는지
주름이 감춘 삶의 이력 속으로 어떤 길이 나 있는지
어느 정도라도 아는 이 이 곳에 있는가
혼자 흙을 피워서 피어
무처럼 감춘 이력도 부풀어 그늘이 푸르러져 있는데
원통리
이하석
전쟁은 모든 버려진 것들을 다시 일으키고
내던졌다. 원통리 민둥산의 완만한 능선 밑에
엎드린 흉기를 덮으며 사방으로 뻗는 풀들을 달래는
흙들. 흙들 속에서 때때로 터지는 폭탄들이
풀들의 다리 짜르고, 풀덤불 속 잠자는 토끼의
귀를 찢는, 밤낮으로 쌓인 재들만 날리는 산.
무덤들의 주인들도 혼비백산한 채
사방으로 흩어지고.
찬비 내려 눈 녹는 오월, 묻혀 있던 쇠들 솟아나
골짜기마다 죽인다 죽인다는 말들만 짙어진다.
병사들이 심심풀이로 잡다 놓친 노루, 쇠들에 걸려
넘어지고, 골짜기 음지에 수줍게 남은 잔설이
노루가 밟은 지뢰에 놀라 흩어진다.
산 아래는 죽인다는 말로만 덮어 오는 신록,
바람도 산등성이를 넘자 살기등등해진다.
유리 속의 폭풍
이하석
구름이 푸른 갈기를 휘날리면서 전신주를 꺾는다.
흰 기둥들은 꺾인 채 완강하게 서 있고,
전선들은 끊어진 채 전신주와 구름 사이를 토막토막 잇고 있다.
그 아래 어두운 건물들의 덩어리가 뭉쳐진 채 솟아오른다.
신호등 아래서, 솟아오르는 은사시나무의 윗가지 너머
푸른 신호등이 건너편 인도 위로 켜지길 기다린다.
푸르고 노란, 또는 남빛의, 검은 차들은
은사시나무 새로 솟는 윗가지 위로 솟아오르는 소리만 뒤섞으며
나의 앞을 어지럽게, 어디론가 내가 가야할 곳으로
또는 결코 가볼 수 없는 곳으로
또는 그런 곳들로부터 와선 또 어디론가로 가버린다.
나는 기다려야 한다. 푸른 신호등이 켜질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길 건너 온통 거울로 벽을 바른 금융회사 육 층 건물의 거울 속에 비쳐 있어야 한다.
폭풍의 구름 아래 너무 어두워 이쪽에선 보이지 않지만
나는 조그만 덩어리로 비쳐 있어야 한다.
구름의 갈기가 뒤섞이면서 전신주가 꺾인다.
심상치 않은 폭풍이 오려나 보다.
내가 길을 건너갈 때에도 솟아오르는 어두운 건물의 덩어리 아래로
나는 보이지 않고 검기나 한 그 속에
푸른 신호등만이 켜져 있다.
푸른 신호등 아래 은사시나무 가로수와 나는 안 보인다.
다만 빨리 건너가야 할 뿐이다.
건너가서 재빨리 저 유리를 빠져나가야 할 뿐이다.
나는 그 속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내 눈에 내가 안 보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휘젓는 폭풍을 그 속에서 보았으니까.
유리의 방
이하석
검은 유리의 방 안에 날아든
후투티. 눈이 까만 게,
혀가 붉다.
우리를 맴돌며
방안 솟아난 산딸나무에 부리 부빈다.
산딸나무 무색해져, 더 심하게 자라는 그 욕망으로
우리를 하늘 끝까지 몰고 갈 사랑의 엔진이 달아오른다.
왈칵, 창 열면 후투티 날아가고,
바깥 공기가 안을 여미는
봄의 감기(感氣).
은종이
이하석
바브민트의 옷을 벗긴 다음 소년은 철조망에 반짝이는 천사를 달아두었다. 봄이 와서 소년의 주머니 속 뽀빠이가 팔을 올리듯이 천사들의 치맛자락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다시 로보트 태권 V를 철조망에 매달았다. 철조망 안 어두운 몸들을 세운 풀들 위로 로보트 태권 V는 철권을 흔들고 작년의 은종이 천사들이 찢긴 날개로 혼곤한 세상의 봄 속을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그 봄을 사랑했다.
의자의 구조
이하석
의자 위엔 대개 구름이 내려와 앉아 있다
누구든 그 위에 앉으면 그 무게만큼 구름이 떠올라
그의 머리가 구름 속에 꽂힌다
어디선가 우레 치고 큰비 내리는데
그는 복잡한 생각에 싸여 앉아 있다
제 의자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힘준 발가락 느끼며
그 아래는 대개 구조가 단순하다
의자 다리는 네 개
그 사람 다리는 두 개
여섯 개의 다리 중 두 개에는 발가락이 달려
모든 균형이 잡힌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
이하석
어둠이 깃든다.
수만의 푸른 고기 떼 두근대는 나무에, 나무가 열어놓은 낯선 꽃들에, 꽃 속 수런대는 비밀스런 우물에
하루가 저문다.
꽃에서 꽃으로 이동하는 것들의 길이 저문다.
다만 사랑의 기억만이 잉태를 꿈꾸는 시간.
이미 누기진 숲 저 안에선 어둠이 알을 낳아 굴리는 소리.
바람이 부화를 돕자 달빛도 흔들리며 무늬져 숲 전체가 푸른 산고로 흔들린다.
불모의 숲 밖은 갖은 불빛들로 밝게 저문다.
나는 숲으로 드는 바람길을 타 넘지 못하고, 도시에서 나와 저무는 길의 이정표에 기대어서 밤을 맞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로 뒤척이는 밤.
숲 안의 어둠이 부화한 새들
날아올라
달 켜든 하늘 덮는 게 보인다.
익은 탑
이하석
탑이 쌓이건 무너지건 도로변 흥정은 자주 유쾌하다
무너지면 포도 위 나뒹구는 사과들까지 날렵하게 주워
할머니는 매번 정성들여 다시 쌓는다
상원사 폐탑 사진을 내 방의 책상 위에 세워두었지만
그건 그것이고,
푸성귀와 함께 길가에 늘어놓고 사과 한 상자를 종일 앉아서 파는 할머니는
고운 탑을 하루에도 수백 번 우리 동네 앞 길가에 쌓는다
제일 아래층은 다섯 개,
그 윗층은 세 개,
그 위 꼭대기 층은 한 개로
한결같이 가지런하게 쌓여지는 삼층탑들
폐탑이란 있을 수 없는 저 탑의 높이는 가장 맛있는 높이
어느 누구도 올려다볼 수 없어 아이들까지도 내려다보는,
그 높이가 아주 낮아도 거룩하게 까마득해 할머니가 내내 그윽해하는,
황혼 어른댈 녘이면 없어졌다가 아침 해그림자 짧을 때쯤 늘 새로 나타나 세워지는
우리 동네의 싱싱한 거리 탑들
자부동 의자
이하석
상치 솎아내는 여자들, 엉덩이에 방석들 붙이고 있다
스툴 팬츠의 변용이라고 말할 것까지는 없다
그냥 자부동 의자란다
몸빼바지 엉덩이에 단단히 붙여매여저
모진 생계처럼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그게 붙어있으니 앉아서 작업하기가 그럴 수 없이 편하지 뭔가
거기 앉으면 땅이 폭신폭신한 걸 느낄 수 있다네
일손 놓고 쉴 때는 그 위에 그윽히 퍼질고 앉아서
밭머리에 서 있는 나를 채소 사러 왔는지 살피기도 한다
제 의자를 떼내어 잠시 앉으라고 권하기도 하며
상치밭이 넓어 해도 해도 일이 잘 깝아지지 않지만
자부동 의자가 있는 한 오래 일할 수 있는 게지
쇠가죽 소파가 대순가
땅이 온통 의자가 되는 자부동 의자가 최고지
자부동 의자라야 그녀는 물론
장터목
이하석
바람이 지우고 지워도
늘 새로 밝혀 서는
먼 데, 높이,
나앉은,
천심(天心) 나누는 장터.
가쁜 숨으로 우련하게 올라서면
낮게 엎드린 채 고개 드는 악착으로
울컥, 원추리 피어 있는
구름 위로 뉘 부르는 한 소절 더 높은
바람목.
전어(錢魚)
이하석
서유구는 전어를 두고 "사고자 하는 이는 돈을 따지지 않는다"라고 했다. 특별난 맛 강조한 말이겠지만, 보기에 특별하지 않은 고기를 구워 먹는 자리는 그리 비싸지 않는 밤의 뒤꼍이다. 허름한 선술집에서 친구는 어물전에서 사온 전어를 주모에게 구워 달래서 안주로 삼지만, 소주 마시는 속도가 전보다 빨라졌다.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나와 내게 돈 얘기를 하지 않으려 안간힘하면서도 고기 이름에 돈 전자가 들어간 이유를 이해한다며 전어 속의 미세한 가시를 연신 발겨낸다. 민물과 해수가 격렬하게 만나는 강 하구에서 상류에로의 꿈 지피며 지내다가 가을이면 다시 파도 작은 만에 들어와 겨울을 나는 전어처럼 그는 내게 와서 새삼 전어 몇 마리 구워 달랑 안주로 벌여놓고 얼마나 먼 데로 스스로의 마음을 구조조정하며 꿈을 구조조정하며 소주병을 따는가? 그렇다면 나는 당연히 술값을 내야 하고, 만처럼 잔잔하게 뒤척이며 그와 함께 흔들려야 한다, 전어의 잔가시 많은 불그스레한 속살 헤적여 보이는 친구의 오랜만에 꽤 부유한 취흥도 소주로 계속 지피면서.
전화기
이하석
흙 속에서 연탄재 더미 속에서 전화기가 울린다,
맑은 하늘 속으로 햇빛을 흩이며.
휴지 위엔 전화번호만 햇빛에 바래고
구석진 곳 쥐새끼들의 귀는 선다.
한기 속 전화 소리는 소리끼리 서로 몸을 섞고 몸을 푼다.
알 수 없는 곳으로 소리의 문은 열리고.
소리들은 흩어지면서 지상의 모든 전깃줄을 끊고
토막 난 소리들만 허공에 가득하다.
여 보 세 요 거 기 구 름 다 방 이 죠? 미 스 김?
미 스 리?하 여 튼 나 모 르 겠 어? 그 래 그 렇 지 그 래
무료한 날은 하느님도 전화로 여자를 불러내고
쓰레기 하치장 부근 민들레꽃의 귓가를 맴돌아서
망가진 전화기 한 대만 귀가 멍하니 서 있다.
젊은 시인
이하석
백지 같지만, 아주 희진 않고
황촉규마냥 솟아 큰 꽃 환히 피울 듯 고개 들고 두리번거리며
무엇에건 잘 슬피 물들고, 그래도 늘 깨끗하게
보인다, 본다
절망도 젊은, 약은 점쟁이 같으니라구
그의 언어는 가슴에서 나오다가 어깨를 돌아 날이 서서
우리 뒷덜미 치며 바람처럼 머리칼 흐트린다
어떤 말이든 무슨 강이건 막말로 맨몸으로 건너간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정말이지, 나는
이하석
우리는, 아니 나는 더러운 창 아래를 지나왔다.
꿈결인 양 얼핏, 나의 오른쪽 어깨가
유리에 굴절되어 비치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 창 안에서 허연 수의를 입은 누군가가
내다보고 있었는 것도 같다.
착각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22층의 거대한 건물 밑으로 창은 알미늄 샷시이 유리를 끼웠고,
그 유리에는 도시의 11월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알미늄 샷시에는 누가 칼로 긁은 자국이 꽤 있었고,
그 안쪽에도 그런 것 같았다.
유리는 손때가 묻어 더러웠다.
누군가가 붉은 얼굴로 들여다보려고
또는 내다보려고 애쓴 흔적이겠지.
거기에 비친 하늘은 맑고 아름다웠다.
그 안쪽으로는 깜깜했고,
누가 허연 수의를 입고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는 것 같다.
착각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을 것도 같다.
가만히 생각하면 창의 유리 한쪽은 떨어져 나가,
더러운 속이 보인 듯하다.
또는 구멍 난 유리에 10월 10일 자의,
아웅산 묘소 폭발 기사가 반쯤 찢긴 채로
타임지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착각인지도 모른다.
그 안쪽은 깜깜했고
누가 허연 수의를 입고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잘못 보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그 창문 밑을 지나온 일이 없다.
그럴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나는 아무, 것, 도...못, 보았다고 말할, 순...없을, 테지만...
제비꽃
이하석
웅크린 바위 피운 꽃이
악수 청하는 적의 손처럼
흔들린다
나의 웅덩이는 어둡게 닦은 수면의 백지에
그 화해의 수결(手決)을 확실하게 인쇄해놓는다
종이 놀이
이하석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 숫타니파아타
1984년 1월, 우리 시쟁이들 몇은 대구에서 소리를 접고 펴는 일을 벌였다. 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명을 받으며 시를 쓰고 고치는 행위를 해 보였다. 나의 시를 사람들에게 읽게 한 후, 고쳐 써선 다시 읽히고 고쳐 썼다. 그건 나의 놀이였을까? 아니면 나를 지켜본 그들의 놀이였을까? 또는 그건 놀이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들은 그때 그 자리에서 씌어진 것들이다.
1 - 소리
종이를 찢는다. 오오하고
종이 찢기는 소리가 난다.
종이를 구긴다. 히유하고
종이 구겨지는 소리가 난다.
유리잔 너머 남자가 노랗게 돌아보고
여자가 분홍 잠옷으로 걸어 나오는
광고지를 접는다.
남자의 어깨와 여자의 가슴이 부딪치며 부스럭 소리가 난다.
부스럭거리는 종이를 찢으면
남자의 어깨와 여자의 가슴이 째애앵 찢어진다.
유리잔에 금이 갔나 보다.
나는 시를 긋는다.
종이 위로 볼펜 지나가는 소리가 째애앵 들린다.
나는 시를 구긴다.
종이로 시를 접는다.
내 시의 종이는 끊임없이 찢기고 접혀지며 부스럭거린다.
시 위로 볼펜 지나가는 소리가 째애앵 난다.
시를 찢으면 히유하고 종이 찢겨지는 소리가 난다.
히유와 오오가 부딪치며 시가 접혀진다.
쫘악, 하고 시는 곧잘 찢어진다.
나는 시를 찢는다.
나는 아무 종이에나 시를 구긴다.
아무것도 아닌 찢김,
아무것도 아닌 구겨짐,
아무것도 아닌 접히는 소리,
아무것도 아닌 내던짐,
아무것도 아닌 부딪침,
아무것도 아닌 떨어지는 소리.
아무것도 아닌.
2 - 시
종이가 하얀, 또는 노란 빛 속에서 펴진다.
내가 들어 있는 빛을 둘러싼 어둠 속엔
숨죽인 백여 명의 어깨들이 있다.
어두운 눈들과 귀들이 있다.
나는 시를 쓴다.
그들은 나를 보고 있다.
내 손과 어깨를 보고 있다.
강한 빛 속에서는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어둠 속의 그들을 나는 안다.
나는 시를 쓴다,
빛이 어둠과 닿은 경계에서,
흰빛의 종이 위에, 어둠으로.
유리잔이 맑게 놓이고,
저쪽, 노랗게 서 있는 남자와
이쪽, 여자가 분홍 잠옷만으로 걸어 나오는
광고지엔 아름다운 삶이란 글이 씌어져 있다.
아름다운 여자의 가슴이 구겨지며 남자의 어깨와 닿는다.
종이를 찢으면 남자의 어깨와 여자의 가슴이 닿은 채로
쫘악, 찢기는 소리를 낸다.
아름다와 운 삶이 서로 떨어진다.
찢어지는 소리 멀리, 유리잔이 금 가는 소리가 반짝인다.
나는 시를 쓴다.
누가 나를 보고 있다.
끊임없이 누가 나를 보고 있고, 내가 종이를 접을 때
빛 속에 숨어 있던 그늘 몇 장이 은밀하게 접혀진다.
또는 내가 종이를 찢을 때 몇 개의 어둠은 튄다.
찌직하는 소리가 난다.
종이를 찢을 때 시가 찢기는 소리가 히유, 하고 들린다.
어둠 속에서 흠흠, 기침 소리도 난다.
누가 나를 보고 있다. 어둠 속엔 숨죽인 채
나를 보는 백여 명의 마른침들이 각자의 목구멍을 타고 올라간다.
마른침이 올라가는 쪽으로 찢기는 종이 소리는
깡통 속 반쯤 채워진 모래 소리이다.
나는 시를 만든다.
모래알은 달그락거린다.
나는 등을 구부린 채 볼펜으로 시를 쓴다.
모래알이 바람에 쓸린다.
나는 어깨를 추스리며 종이를 구기면서 시를 만든다.
모래 소리가 허물어진다.
나는 다리를 펴거나 이따금 기지개를 켜면서 시를 만든다.
모래 위로 따스함이 배어든다.
그들은 기침을 하면서 나를 본다.
모래가 달그락거린다.
그들은 왼 주먹에 턱을 괴고 나를 본다.
모래가 일어서며 달그락거린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옆구리로 숨을 쉬며 나를 본다.
모래알은 달그락거리고 모래밭은 경전처럼 펄럭인다.
나는 팔짱을 끼고 허벅지로 숨을 쉬며 시를 만든다.
누가 모래를 밟는 소리.
3 - 사랑
종이가, 고즈너기, 빛 속에서, 펴진다.
펴진 종이 위에, 나는 사랑을 껴안는다라고 쓰다가 구겨 버린다.
구겨지는 소리가 빛을 흔들고
탁자 위 몇 장의 흰 종이를 흔든다.
빛의 바깥, 구겨진 종이 내던져진 어둠 속에 눕고 싶다.
빛이 어둠과 닿은 경계에서
수치와 암담함의 백지가 만져진다.
유리잔이 놓인 저쪽, 노랗게 서 있는 남자와,
이쪽, 분홍 잠옷만으로 앉아 있는
광고지엔 아름다운 삶이란 글자가 씌어 있다.
찢어 버리고 싶다.
아름다운 여자의 가슴을 구기면 남자의 어깨에 닿아 짓이겨진다.
종이를 찢으면 남자의 어깨와 여자의 가슴은
닿은 채로 쫘악, 찢어진다.
아름다움과 삶이 떨어져 내동댕이쳐진다.
유리잔의 날카롭게 부서진 잔해 속에
노랑과 분홍이 서로의 몸을 찌르며 엎질러진다.
나는 시를 만든다. 알 수 없다.
또는 시가 나를 만든다.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시.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종이.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닌 독자. 알 수 없다.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나. 모르겠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시를 쓰고 싶다.
내 구겨진 종이의 몸을 펴고 싶다.
알 수 없는. 몸과. 마음으로.
다시 내가 구겨서 던진 종이를 주워 펴 본다.
나는 사랑을 껴안는다라고 펴진 종이 위에 씌어 있다.
그러나 구겨진 종이는 유리잔의 금처럼 찢겨진 자국이 짓이겨져 있다.
새 종이를 꺼내, 나는 사랑을 껴안는다라고 다시 쓴다.
종이 위 볼펜을 쥔 손아귀에서 새어나오는 빛과 어둠과 시와 삶이,
노오란 파란 또는 무지개를 이룬 섬세한 모든 색들이
다림질한 책상보처럼 곱게 펴져 어른댄다.
종이를 함부로 찢거나 구겨서 버리지 말라.
나는 사랑이라고 쓴 종이 위에
내 몸을 펴며 포갠다.
죽은 아기를 새내에 띄우며
이하석
새내 물가에서 이별하고, 자갈밭 버석거리며 돌아와
그녀는 버석거리며 스타킹을 벗는다.
냇물은 소리 없이 이 도시의 중심을 흘러내린다,
내동댕이쳐진 스타킹처럼 구겨진 채.
루즈와 마스카라를 지우고 그녀는 거울 앞에서
비로소 흐려지는 눈앞을 본다.
그 남자는 말 없이 담배만 피웠었다.
모든 남자가 다 그랬다.
괜히 여뀌풀을 바로 문지르다가 장난치듯
어둠 속으로 그녀의 몸도 더듬고 담배불을 던진 다음 가 버렸다.
그녀는 빠알간 불덩이 하나가 허공을 날아가
흐르는 물 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더러운 물. 그러나 밤엔 도시의 불빛으로 아름다웠다.
그녀는 짜증을 내며,
젖은 넓적다리를 포개고
몸을 구부린 채 잠든다.
그녀의 브래지어는 탁자 가에 내던져져
탁자에 새겨진 석류꽃을 덮는다.
땀과 풀물이 밴 스타킹엔
검은 모래알도 묻어 반짝인다.
그녀는 잠을 자면서도 때때로 흐느낀다.
이부자리 위엔 아무렇게나 펼쳐진 여성 잡지.
그 속엔 아름다운 스타킹만으로 서 있는 노랑머리 아가씨가 요염하게 웃는다.
그녀는 성도 모르는 아기를 사산한다.
어두운 밤 그녀는 아무도 몰래 죽은 아기를 새내에 띄워 보낸다.
잘가라 아가야 잘도 가는구나 잘도 가 버려라
이 강가에 더러운 여뀌풀 돋아나는 봄을 더는 기다리지 않으련다
아가야
안녕
죽음이-또는 ‘죽음’이란 말이
이하석
바람 갈피에 숨은
모래 그늘처럼,
바람이 미끄러져 내리는
모래산의 정상처럼
내다본다.
그렇게 서걱이는
그림자가 있다.
잦은 문단속에도
못된 질문처럼 드나들며
늘 문풍지처럼
징징댄다.
밤에 환히 엄습하는 빛,
낮꿈의 갈피를 여는 어둠이
늘 챙겨지지 못한 숙제처럼
제각기 흐린 창을 갖고 있다.
죽어서도
포승 풀지 못한 채로
밤낮 살아나곤 한다고,
못된 질문처럼
퀴즈 내는 아이처럼
꼭, 꼭, 내다보며
답해라, 말하라고 재촉한다.
집
이하석
집은 너무 쉽게 통일을 이룬다.
황사 바람에 흙으로 메워진 틈서리마다 바랭이풀이 눈 트고
움막 위 쌓인 먼지가 흙이 된 곳엔
작년에 꽃 피웠던 제비꽃의 새싹도 돋는다.
해마다 그 씨앗들이 바람을 훗부쳐
터널 주위 너덜엔 바랭이풀과 제비꽃이 어우러졌다.
바랭이와 제비꽃이 쏟뜨린 향기로 인간의 경계가 덮인다.
삶의 밑은 알 수 없는 정적의 터널이 휑하니 뚫려 있다
그는 그 위 시멘트 바닥에 임시로 몸 붙일 움막을 지었다.
그 삶이 오래가리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차는 아직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오지 않는다.
통일은 녹슨 철로 위 믿을 수 없는 뜬 삶처럼,
알 수 없는 그들 삶의 밑처럼 아득하다.
허공 위에 덧댄 천막의 삶의 40년 넘게 펄럭여
그의 생은 이제 그 바람의 갈피에 뿌리내렸다.
그나마 뜯기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면서
한편으로는 그 맨 마음에 불안해 하면서
늘 임시 삶을 살아왔다.
때로 서울로 대구로 목포로 살림 나간 자식들이 오면
그는 자신의 삶터를 이룬 그 풀과 꽃들 속에 술상을 차린다.
녹슬어 버려진 철로를 따라 바람에 묻어오는 꽃향기가
막노동에서 돌아오는 그의 저녁을 때아닌 부드러움으로 감싼다.
그럴 때면 그는 움막 밑 터널에 들어, 기차처럼,
터널 위에 붙은 집들을 털어낼 듯이 굉음을 내며
앞뒤로 몸을 덜컹거려 보는 것이다.
철거 주택
이하석
벽과 대문에 휘갈겨놓은 ‘철거 주택’
붉은 글씨가 빗장처럼 획이 서 있다
빗물에도 이지러지지 않은,
누군가를 저주하며 떠난 마음이 스프레이로 내뿜은
그리하여, 비로소 모든 게 구석이 된
잊은 맘처럼 아무 데서나 민들레꽃이
돋는 어둡고 낯선 느낌으로
남아 있는 모든 게 쓰레기가 되는
집, 터들
민들레꽃 그늘에는 욕망의 껍질인 시멘트 블록이 깨진 채
도드라져 부재의 역사성을 떠올려준다
꽃을 그리라고 한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주었을 볼펜도 버려져
노란 민들레꽃 빛에 푸른 심이 상기해 있다
온 동네가 다 떠난 곳인데도
곳곳에 기척을 살피는 눈들은 남아 있다
버리고 간 고양이들
그것들도 민들레꽃이 끊임없이 번져나가
이 일대가 숲이 될 거라 믿고 발톱을 갈진 않는다
이내 아파트 숲이 짙으면 상가의 틈에 스며들어
바람처럼 쓰레기 뒤져 온통 펄럭이게 만들리라
철모와 수통
이하석
철모와 수통은 우연히 만나, 조수 속 기우뚱거리며 쓸려 내려간다,
굴껍질 딱딱한 바위 기슭에 때로 휴전처럼 쉬며,
탄혼의 질린 표정을 굴껍질 밑에 서로 숨기면서.
망가뜨려진 몸으로 갖는 그들의 휴식과 비탄은 공허하다,
전쟁도 그 이상의 평화도 수고의 값도 없이.
오직 쓸려갈 뿐,
차가운 동해의 깊이 속에 내던져진 채,
끊임없이 밑바닥으로만 내려가면서.
몇 마리 광어 새끼들 눈 비비며 철모 속에 숨어든다.
밤, 인광의 흰 소금물 속에서 문득 철모의 한끝이 떨어져 나간다,
붉은 녹의 껍질로만 사라져간 어둠 속만이 아프다.
광어 새끼들의 잠 속으로 몇 개의 불덩이가 지나갔다.
불덩이 쪽으로 열린 광어 새끼들의 꿈을 향해
수통은 막연히 속이 출렁거림을 느낀다.
죽음과 함께 병사의 목줄기를 타고 넘어가 버렸던 물.
광어 새끼들의 잠 깬 눈을 숨기는 바위 기슭,
수통의 헤진 구멍 틈으로 몇 방울 물이 고즈너기 흘러내렸다,
전쟁도 그 이상의 평화도 갈증도 남김없이
오직 쓸려갈 뿐인 거대한 소금의 밑바닥에서.
첫눈
이하석
모닥불이 설일(雪日)을 피워올린다.
끊임없이 내리는 흰 조각들.
인부들은 불을 쪼이며
들판과 도시의 지붕들을 덮는 눈을 보고 있다.
감독과 주인이 돌아가 버린 후,
공사가 중단된 집은 뼈 채로 서 있다.
콜타르와 목재 조각이 섞여 타는 모닥불의 연기가
짓다 만 집의 구석구석을 매캐하게 핥고 또 핥는다.
인부들은 불에 달구어진 얼굴로 벌겋게 상기되어 있다.
때때로 눈으로 덮힌 들판 저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들판이 우는 듯 혹은 들판 속에 감추어진 못의 웃음소리 같았다.
한 사나이가 그 소리를 찾아 달려갔다가,
끝내 들판 위에 흰 뼈로 서는 것을
인부들은 물끄러미 본다.
첫얼음
이하석
자갈 더미 위에서 꼼짝않고 펄럭이며
백로는 얼어붙는 냇속을 바라본다.
아침 햇살에 번쩍이는,
바람이 지나가는 물.
뼈아픈 눈발처럼 펄럭이며 백로들은
얼어붙는 냇속을 바라본다.
얼지 않으려는 물 소리는 또랑또랑하고
잔고기들은 그 소리 아래 숨어 있다.
여름내 개간한 냇가 둔덕 콩밭뙤기.
간밤 서리 맞아 하얀 노인은
백로가 넘보아온 시간을 비닐로 덮었다가
오늘 기어이 그 안을 털어낸다.
그러나 백로들은 외발로 서서 여전히
얼어붙는 냇 속만 바라본다.
콩자루 울러멘 노인이 아침밥 먹으러 돌아가도
그 그림자마저 지켜보려는 듯
꼼짝 않고 바람에 펄럭이며.
청도 냇가에서 대 무늬 진 돌을 주워 '동풍'이라 이름 짓고
이하석
속속들이 두근대는 동부새에, 상기 성깔 남은 소소리바람에, 짐짓 명랑한 듯 퍼덕이는 동풍에 휘는 - 꼿꼿하게 휘는 - 겨울, 대나무들. 감기로, 누워서도 안간힘으로 버티면서 마디마디 곧게 설레는, 동부새에 소소리바람에 동풍에 눕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마디마디 한 마디로 일어나는 대나무들의 푸른 물음들. 봄으로 쓸리는, 서걱대는, 헛될 수 없는 말의 카랑카랑한 잎사귀들. 동부새를 소소리바람을 동풍을 안으려 흰 겨울 비탈에 서는 이가 그렇게 온몸 흔들며 안간힘 하며 휘젓는 칼날의 춤. 마구, 또 기어이 제 몸의 빗자루로 서서 성긴 적멸의 어둠을 쓴다
초록의 길
이하석
때때로 가벼운 주검이
아주 가까운 데서 만져지는 수가 있다.
11월의 오후, 차고 마른 풀잎들이 모여 있는
도시 변두리 또는 도심의 공터의
푸른 빛이 먼지와 함께 흩어지는 곳에서.
방아깨비 한 마리를 내가 사는 아파트의 빈터에서 서성대다 발견했다. 아이들의 노래소리 가까이 그 주검은 아무도 몰래 버려져 있었다. 바랭이풀의 마른 잎 사이에서 서걱이는 것을, 처음에 나는 빈터 멀리서 날아온 은사시나무 가로수의 마른 잎인 줄 알았다. 그것은 속날개였다. 바깥을 덮었던 초록 외피의 튼튼한 겉날개는 떨어져 나가고, 속날개는 끝이 찢긴 채 몸체에 겨우 붙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렸다. 흡사 죽어간 방아개비의 몸을 떠나, 방아개비의 초록 영혼을 이 도시의 하늘 위로 날리려는 것처럼. 통통했던, 미세한 물결 무늬로 마디를 이루었던 배는 벌레에게 뜯겨나가, 속이 비어 있었다. 머리 역시 반쯤 뜯겨 나가, 속이 비어 있었다. 껍질뿐인 몸으로 바람에 조금씩 날개 파닥이며 닳아갔다. 우리가 사는 도시의 밑바닥에는 칼날의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댔다. 나는 풀밭을 계속 걸어다녔다. 잠시 후 풀섶 아래서 풀무치의 주검을 보았다. 이어서 여치와 잠자리의 주검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 주검들 앞에서 애통해할 까닭은 없다.
가난하게 떨어져 땅에 눕는
내 시간의 따스한 집이여 주검이여
살아 있던 날들의 모든 기억을 고마워하며
우리 함께 여기에 눕느니
내 존재의 끝이자 시작인 너의 가슴에
지금 고요히 누워있느니
풀무치와 방아개비, 여치, 잠자리들은 그들의 빛나는 날개로 여름을 분주히 날았고, 어쩌다 이곳까지 왔었고, 죽을 때가 되어서 죽은 것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이 아파트의 가까운 이웃이 죽었을 때, 애통해하는 가족들의 울음 속으로 여치 울음이 끊임없이 들렸음을 나는 슬퍼한다. 죽은 이는 밧줄에 묶여 지상에 내려가 장의차를 타고 도심을 빠져나갔다. 이 도시와 산을 눈물로 이은 길을 만들면서. 또 나는, 사랑하는 이를 그릴 때 풀벌레의 울음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는 길고 고적한 밤도 보냈다. 내가 발견한 풀벌레의 주검들은 그 때 내 영혼을 흔들던 그것들이었으리라. 지금은 모든 풀벌레 소리도 끊기고, 밤은 너무나 고요하다. 모든 풀벌레들의 울음은 죽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 하나하나가 온 길을 비로소 찾아 나설 마음이 인다. 풀무치는 초록의 집을 따라, 산이나 들에서 이 도시 변두리의 빈터로 이어졌으리라. 그 다음엔 우리가 모르는 풀에서 풀로 이어진 길이 풀무치르르 미세하게 이끌었으리라. 그렇다, 이 도심의 회색 콘크리트의 세계에도 자세히 보면 -- 풀무치의 눈으로 보면 -- 들과 산으로 이어진 초록의 길이 있다. 아무도 찾으려 하지 않는 그런 신비한 길이. 단순하게 자연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우리 삶 속에는 그렇게 열린 길이 있다.
초록의 창녀
이하석
전나무로 만든 의자 위에
살로 부풀어 오른 여자는 앉아 있다
티셔츠엔 초록의 가는 줄들이 죽죽 그였고
그 줄무늬 끝에 노란 살들이
비져나와 있다.
어느 곳에서든, 그녀는 누구든 받아들인다
그녀의 앞에 앉아 신문이라도 보고 있으면,
그녀는 포갠 다리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꾸면서
슬쩍 자신의 초록 팬티를 보여 준다
그곳이 그녀의 가장 허약한 부분이란 걸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삶의 중심이며
하나의 덫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
누구든 그것을 거부하는 듯이 받아들인다는 것도
하늘 없는
내 마음속 피어나는 전나무처럼
우리의 도시 안에서 그녀는 초록의 검은 팔을 벌린다
추락지점
이하석
길이 바위 끝에서 끊겼다
바위엔 비가 악마처럼 칭얼댄 자국들이 있다
높은 소나무 그늘 아래
비가 악마처럼 칭얼댄 자국들이 있다
이 위험한 데를 그는 왜 왔을까?
바위에는 손가락이 긁은 흔적도 구두가 문지른 착찹한 몸부림 흔적도 없다
누가 바위 아래로, 이미 죽인 이를 굴렸을까?
바위엔 비가 악마처럼 칭얼댄 자국들만 있다
산골짜기는 그가 만든 잡지처럼 깊게 펼쳐져
우묵한 데 고인 물가에는
신갈나무숲이 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제 무덤 자리처럼 양지(陽地)를 열어놓고
그의 주검을 올라가 보려고 누가 또 바위를 타지만
바위 끝에 서볼 엄두를 못 낸다
자꾸 뒤돌아보며 뒷걸음질 친다
자연사로 처리될 수 없는 삶을 칭얼대는
자국을 그는 또 바위 끝에 남긴다
측백나무 울타리
이하석
버스에 부딪쳐
소형차는 길 밖으로 튕겨
가로수를 들이받아 쓰러뜨리고 뒤집혀져,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
그러나, 다아,
살았다.
죽음의 냄새 같은
향기가 주위에 가득할 뿐.
그것은 살아 있는,
측백나무 향기.
살펴보니 측백나무 울타리를
들이받고 멈춘 것이었다.
측백나무 울타리가 우릴 막아주었다,
죽음으로 가는 길을.
측백나무 가는 길을
측백나무 너머 캄캄한
죽음의 세계가 보인다.
신선한 향기로운 나무라고
모든 길들마다 측백나무를 심자고
그것이 죽음을 막아준다고,
측백나무를 찬양한다.
그러나 나는 결국 한쪽만을 찬양한 것이다.
측백나무가 어찌 죽음에 개의하랴.
측백나무 울타리 저 너머에서는
한 어머니가 어린 아들더러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달려 나가지 못하게 타이른다
이쪽 켠에
도리어 위험한 세계가 있다.
커피숍
이하석
커피잔에 넣은 흰 각설탕처럼
순식간에 녹아 어둠 속으로 사라진 사람 기다리는지
어둠을 스푼으로 잘 저어서 저 혼자 커피 마시는 이 있다
그날 '어둠'은 잘 저어서 드셨나요?
'각설탕'처럼 달콤하던 당신...
커피 인간
이하석
창가를 주로
서식처로
삼는다
바람
싹트는 마른
화분 곁.
그러니까,
뭐든
모든
안에 자리 잡지만
눈길은
항상 밖으로
터져 있다.
......밖이 잘 보이는 안은 결코 환하지 않다. 환하게 고요하지 않다......
그러니까
안으로
까칠하게 털을
세우고,
밖을
너그럽게
내다보면서
마신다.
커피 한잔은
그에게
독(毒) 없는 생각의
정량(定量).
심연의 검은
사상을
추구하지만,
빤한, 창의
명백성(明白性)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컵
이하석
유리창 밑 쇠 의자 위, 그 캄캄한
공간에 빈 컵이 놓여 있다.
컵에 비친 노을 속, 어슴프레한 붉은
얼굴이 하나 캄캄한 머리칼 늘어뜨린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차고 강한 철제의
의자 모서리에서 돋는 녹의 붉은 반점들은
어둠을 향해 녹아내리고, 허물어져 가는
빈 집은 창만이 맑다.
컵에 묻어 있는 것. 사랑 같은 것 또는 혼곤히
남아 있는 진홍색 루즈는 흙빛깔이 되고 싶어 한다.
그 순간 컵 속에서 맑은 수줍음 하나가 끓어오르고
컵은 땅으로 굴러떨어진다. 수줍음만 남아
이룩한 고요가 집마저 무너뜨린다.
그 다음 이 폐허의 구석에서 사랑처럼
풀과 흙냄새가 피어 오른다.
타이프라이터
이하석
금융회사의 김양은 손을 다쳤다, 타이프라이터 속에
서류를 끼워 넣다. 화장실에서 손을 붕대로 감은 채
그녀의 다리 사이로 조그맣게
Q자는 열리고, 때로 붕대를 만질 때 마다
몇 마디 말이 변기 속으로 급히 빠져 나갔다.
클립에 끼워진 하루를 처리하는 손이
금융 회사의 현관 유리에 붉게 걸릴 때,
그녀의 머리칼은 흘러 내리고, 엉덩이는
타이프라이터처럼 삐걱거렸다.
그녀는 오늘 밤 남자들과의 약속 때문에
손이 젖어서, 타이프라이터의 숫자를 잘못 찍어
해고되었다.
탑
이하석
너의 웃음이 보고 싶다.
희게 바랜 내 마음에 박히는,
너의 희게 바랜 치아,
네가 탑이라면,
그 탑을 떠받치고 있는 누런 땅이라면,
오래전에,
희게 바랜 탑을 물이끼 위로 솟은 현호색꽃과 함께
아주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통
이하석
통은 안이 안 보이게 닫혀 있다
그것들은 쌓여 있다
통들은 서 있는 게 누워 있는 것 같다
그것들은 끝까지 무표정하게 놓여 있다
통 심심하지 않은 표정들이다
나는 그것들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나의 그늘을 내려다본다
통 안이 안 보인다 해서
때로 그 안이 짐작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계 곳곳에는 그런 것들이 쌓여 있다
그 안에 내 시를 넣은 것도 있다고 우겨봐도
그것들은 무표정하게 놓여 있을 뿐이다
그 안에 주검이 들어 있어도 시간은 썩지 않을 것이다
삶을 위한 메모와 추억과 욕망의 계산서들이 들어 있어도
글쎄, 그것들은 무표정하게 쌓여 있을 뿐이다
어디로든 운반되기를 갈망하고
서로 포개진 채 묵묵히 기다리기도 한다
통영
이하석
거리는 바람의 비탈, 바다로
흘러내린 빗물 길이다.
저녁때 붉은 물결에 쓸려갔다는
김춘수의 소식.
아침 녘에 조개껍질처럼 바다를 게워내며
모래 우에 희게 밀려 나와 있다.
밤새 모래에 새긴 미래의 기억들조차
밀물의 질문인 양 붐비었다.
투명한 속
이하석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쇠 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 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 속에 깃들어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 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 들어간다. 비로소 쇠 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틈만 나면
이하석
틈만 나면,
찻길과 인도의 감전(感電)으로 피워낸
제비꽃들이 바람에 왁자지껄하다
마스크 쓴 사람들이 묵묵히,
자신들도 모르게 그 선 밟은 채
버스를 기다린다.
그래 무에 그리 위험한지
버스보다 먼저, 기우뚱거리며
질병 관리 본부의 방역차가 달려와
또 소독제를 뿌린다.
파편들
이하석
무기 박스였을 판자 조각들은 곧 터트러질 꿈도 없어진 채
가늠 안 되는 기계의 부속품이었을 강철 스프링과
철사들이 뒤틀린 채 한 몸으로 서로 미워하며 누워있는
그 위에서 그 모든 아래로 파고든다
DMZ에서 지난 수해 때 흘러 내려온 걸 수거했을까
겉이 썩은 지뢰가 터무니없이 버러져 여전히 긴장해 있다
옛날의 무전기와 오늘의 핸드폰이 선을 고집하거나
뚜껑 고집하며
함께 버러져 제 고집들 내세운다
방독면의 찢어진 주둥이도 꿍꿍이속을 드러낸 채 숨 죽이고 있다
부서진 인형은 제 몸 돌아볼 생각도 않는다
유리 조각은 4분의 1톤 무개 지프차의 앞창 파편인 걸 어설프게 숨긴다
온갖 것들이 널브러진 실내 또는 실내의 실외,
실내의 실외의 실내에는 나무 그림자도 버려져 있고,
그 나무의 잎인지, 푸른 잎 하나 뒹굴고 있다
그건, 버려진 희망이거나 수거해야 할 절망처럼 보인다
어떤 곳이든 언제나 그런 것들로 쌓이게 마련
문을 열어놓았거나 닫아놓았거나 자꾸 무언가가 안팎에서 내던져지고,
바람은 아무것이나 헤적인다
조만간에 저 나무 그늘과 나뭇잎마저 쓰레기들에 묻히리라
버려진 채 쌓이는 제 무게 못 이겨
겉이 썩은 지뢰의 속이 터져 모든 게 산산조각 나리라
편지 쓰는 밤
이하석
정적은 충만한 말들의 껍질일까요?
그대가 내 극악의 속말을 알아듣는 여우의 큰 귀를 가졌다면
풀숲에 몸을 숨긴 사냥꾼처럼
나의 말의 활시위는 바이올린보다 더 가늘게 떨립니다.
내 그런 욕망들이 사위어져야
나무들이 흰 눈을 터는 밝은 인기척으로
도리어 길들의 입구가 트이겠지요
창문 열어 그 고요를 환기하면
당신과 함께 내놓은 세상의 길들이
커피잔처럼 따뜻해집니다.
편지의 꿈
이하석
송전탑 아래서
에코나비고*의 유충을 줍는다.
예쁘다.
아파트 거실 텔레비전 옆에 두니 몇 번인가
허물을 벗은 다음 날개까지 난다.
어두운 구석에 알들을 슬어놓는다.
자주 날려 보내고 쓸어낸다.
그러나 이미 바퀴벌레보다 더 교묘하게
집안 구석구석을 그 기계충들이 점령했음을 안다.
편지를 꼭 우체국에 가서 부친다면,
이메일들을 저것들이 먼저 점검하고
소리의 색깔까지 씹어대는 게 기분 나쁘기 때문이리라,
나도 자주 핸드폰 밧데리를 뽑고 컴퓨터를 끈다.
그러나 그걸 끝내 버리지 못하니,
나도 그 기계충들에 사로잡힌 셈이다.
형형색색의 기계충들을 애완으로 기르는 친구들이 많다.
그들은 그런 내게 자주 연락두절을 투덜댄다.
그 투덜대는 소리의 전파를 야금야금 파먹는
기계충들의 이빨이 가지런하다.
*열 안테나 주위에 살며 송수신 전파를 먹고 사는 기계충.
폐교
이하석
어둠 속 높이 선 이순신은 전신이 파랗다
온통 바다 아래 잠긴 듯하다
폐교 운동장 침범하는 학교 앞 새로 핀 유흥가 불빛 때문인가
어떤 밤엔 빨갛게 달아오를 때도 있다
운동장 안 넘보는 건 취한 불빛뿐만 아니다
누가 애완하다 버린 짐승들조차 동네 떠나지 않고
그의 어둠 뒤지며 노략질한다
밤의 폐교 안은 내란으로 내몰린 바다처럼 들떠 있다
아이들 소리 하나하나 풍선처럼 떠올라 사라진 하늘엔
별들만 왁자지껄하니, 은비늘 쌤통 뾰루지들 돋아 있다
폐차장
이하석
1
폐차장의 여기저기 풀죽은 쇠들 녹슬어 있고,
마른 풀들 그것들 묻을 듯이 덮여 있다.
몇 그루 잎 떨군 나무들 날카로운 가지로 하늘 할퀴다
녹슨 쇠에 닿아 부르르 떤다.
눈비 속 녹물들은 흘러내린다,
돌들과 흙들, 풀들을 물들이면서,
한밤에 부딪히는 쇠들을 무마시키며,
녹물들은 숨기지도 않고 구석진 곳에서 드러나며 번져나간다.
차 속에 몸을 숨기며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의 바지에도 붉게 묻으며.
나사들은 차체에서 빠져나와 이리저리 떠돌다가 땅속으로 기어든다,
희고 섬세한 나무뿌리에도 깃들며,
나무들은 잔뿌리가 감싸는 나사들을 썩히며 부들부들 떤다.
타이어 조각들과 못들, 유리 부스러기와 페인트 껍질들도
더러 폐차장을 빠져나와 떠돌기도 하고
또는 흙 속으로 숨어든다.
풀들의 뿌리 밑 물기에도 젖으며, 흙이 되고 더러는 독이 되어
풀들을 더 넓게 무성하게 확장시킨다.
2
보랏빛 달개비꽃 주위로 조여드는 확장되는
넘쳐나는 쇠의 붉은 녹물.
아니 아니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더 아름답게,......이렇게
"수줍게 쇠들을 물로 달래는 보랏빛 달개비꽃."
3
도시의 하늘은 흐리고
때로 그윽하니 산이 보내오는 소식만 있다.
기다리는 이에겐 빈 하늘에도 산에서 무슨 씨앗을 전하는 우체부가 있는지
붉은 쇳조각들의 틈을 비집어 넓히며 봄 가을 없이
소인 찍힌 풀들이 돋아난다.
쇠가 이룬 산의 망루에 올라가
수염 깎은 감시자가 땅을 샅샅이 살피든 말든
풀들이 바람에 뒤엉킨다.
폭포의 시
이하석
큰 소리로, 너무 당당하게
쏟아져 내리며 모든 죄를
내게 흠뻑 뒤집어씌운다
그러면서 제 무지개 띄우는 후안무치의,
저 깡패 같은 표현이 또, 좋다
풀씨 하나 떠돌다가
이하석
깡통들 빈속에 고함 숨긴다,
반짝이는 쇠 조각에 부딪치며,
흐린 하늘 빈속에 차고 넘치며,
아랫도리 벗겨져 붉게 푸르게 흩어지며,
불에 그을려 푸른 여인의 입술 타버렸고,
고운 눈 땅속에 처박힌다.
여인의 눈 밑 상표들도 노랗게 땅에 묻히고
그 위 어둠과 비와 햇빛과
비닐의 찢긴 팔이 와서 감는다.
반짝이는 유리 조각들 얼었다가 흐려지는 하늘,
치약 껍질이 긋는 허공 가득히 빈속 잠재우는 눈도 내리고,
이윽고 오는 봄. 풀씨 하나 떠돌다가,
철조망 안 쓰레기 하치장에 떨어져 싹을 틔운다,
허물어진 연탄재 구멍 속으로 하늘 치어다보며.
그 싹 풀들로 자라나 쇠와 유리 조각과 빈 깡통 덮어,
사월이면 풀의 상공에 꽃도 피워낸다.
스스로 이룬 풀씨 다시 사방에 날리며.
핀
이하석
그들은 반짝거린다 눈만 날카롭게 뜬 채,
흰눈 속 노을 묻은 어깨 묻힌 채, 엷은 푸른 하늘 속에
두 손 든 나무 밑에서. 봄도 오기 전
백치의 땅 밑에 누워 질퍽한 잠을 자는
모든 것들의 정수리를 찌르며, 그들은 때로 풀처럼
싱싱하게 땅에서 솟으며, 노을 묻은 몸이
사악한 반짝임만으로 일어선다.
세상 모든 그들 반짝이며 노는 곳마다
우울하게 뒤로 일어서는 구름의 노을빛.
하늘
이하석
은행나무의 하늘이 노랗게 내려앉는다.
겨울비 오기 전 잠깐 밟아보는 폭신한 하늘.
나무 위엔 봄 여름 가을 내내 가지들이 찔러댔던 하늘이 상처도
없이 파랗다. 가지들이 제 욕망의 잎들을 떨군 다음 겨울 오기 전
서둘러 제 꿈을 바람의 실로 꿰맸기 때문이다.
해안
이하석
감정도 철골도 없는
시멘트 구조물
바위 위에 엄격하게만 놓여진
전망대
뭍과 바다로 맞구멍이 뚫린 시선들을
촘촘히 거르는 초소
밤엔 바다로만 가늘게 그물의 눈길이 나간다
시선의 사각지대인 초소 옆으로는
책임감이 강한 철책이 나 있어서
굳은 바다와 무른 땅을 구획 짓는다
낮에는 누구에게나 개방되는 곳
바위 그늘 아래,
사람들이 마시고 버린 맥주 깡통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것들은 밤이면 여전히 시끌벅적한 바람의 집이 되어
비군사적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는
초병의 뒷모습이 방한복으로만 지펴져 있다
총 맨 어깨 너머로
어떤 분단으로도 찢어질 수 없는
밤바다 파도의 달력이 꽤 구겨져 있다
해우(解憂)
이하석
높은 곳의 볼일은 훤히 열어놓고 본다.
팔공산 오도암 사립문 밖 천인절벽 위에 걸쳐놓은 측간에서 푸는 게 그러하다.
양철 조각들로 동 남 북을 얼추 막았으나 서편을 청산쪽으로 확 틔워놓아서,
거기 앉으면, 똥 누는 일도 아슬아슬한 절정에서 제 몸과 정신을 열어 제키는 일이라 여겨진다.
절벽 위에 걸터앉아 저 아래 골짜기 구름 피어오르는 것 헤아리면,
솔바람이 건넛산 능선 넘어와 내 아래를 씻는다.
금방, 더 내려보낼 게 없다,
그렇게 문득 일대사를 마친다.
멀리 내다보며 몸 추스리고, 내 것 떨어져 내려간 절벽 아래 상수리 새싹 트는 비탈 내려다본다.
현풍장
이하석
낫, 호미, 삽, 칼, 드라이버, 망치, 뺀치, 그리고 양동이, 물뿌리개, 연탄난로, 디지털 키, 도어록 등 온갖 철물들을 자신의 전 생애처럼 널어놓고 파는 김 씨.
평생 장을 떠돌아다녔지만, 결코 자신을 다 드러내놓은 건 아니라며 너무 밝은 대낮을 돌아앉아 있다.
시장 한구석에서 독을 파는 심 씨가 심심할 때마다 독 안에다 제 속 비워내는 목소리 우렁우렁거리는 걸 참 푸짐한 소리라며,
그래도 자신의 속까지 다 꺼내어 팔아선 안 된다며,
파장 때까지 제 그늘 밟고 앉아 낫처럼 허리 구부린 채 녹슨 철물들처럼 불콰하게 버틴다,
내가 양지쪽에 펼쳐놓은 김씨의 철물들 가운데서 햇볕에 잘 익어 참 따뜻한 것 하나를 골라낼 때까지.
호박
이하석
비탈로만 기어올라 돌담 위에 전신을 뉜 비루한 삶이 피우는 꽃들이 어찌 저리 큰가?
끝까지 일관되게 그 노란 꽃의 논리를 따라 뻗치던 여름,
그 여름이 이룬 역사의 무늬와 힘줄이 호박의 겉과 속을 밝게 지펴놓는다.
할머니는 그 거대한 열매의 꽉 찬 속을 거슬러 오르내리는 길을 안다.
구덩이를 파고 스스로의 똥으로 채운 그 위에 씨를 놓고 흙으로 덮는 것으로 자신의 꿈의 서사를 펼쳤으니,
저 까칠까칠한 호박 넝쿨을 따라가면 틀림없이 당신의 생의 탯줄이 뻗어 나온 길을 되짚어 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익은 누런 금빛 사상을 툇마루에 덜렁 놓아둔 게 참 당당하다.
환한, 내 것인 네 것
이하석
사진을 찍어달란다. 사진기를 받아 조그만 창으로 내다보니 그들은 서로 환하게, 붙는다. 서로 참는 모습이 아니다. 함께, 웃음의 맞불을 지핀다. 그녀의 부푼 가슴을 그의 팔꿈치가 지그시 짓이기는 게 보인다. 그런 걸 눌러 찍는다. 날 믿지 못하겠는지, 다시 확실하게 서로 간(間)을 붙들어두려는지 한 번만 더 찍어달란다. 조그만 창으로 내다보니 그들은 다시 환하게, 붙는다. 함께, 웃음의 맞불을 지핀다. 그녀의 부푼 가슴을 그의 팔꿈치가 또 지그시 짓이기는 게 보인다. 그런 걸 또 찍는다. 그들은 고맙다며 카메라를 가져간다. 내가 찍은, 내가 가져가야 할 가장 환한, 참을성 있는 장면을 금방, 빼앗아 가버린 저 날강도들!
환한 밤
이하석
누가 편의점에서 때우는 늦은 저녁
컵라면 물 끓이며 이미 어제가 되어버린 석간 뒤적이면
세상의, 뉴스라는 일들은 내내 구겨지는 소릴 낸다
빨리 끓는 물엔 라면발과 함께 잘게 썰어 말린 채소가 풀리고 매운 맛이 깊은 밤 속을 부침한다
남자와 여자가 밤의 매듭을 풀거나 엮는
구석은 밤새 소주처럼 환하다
심야 환히 켠 편의점으로 인해 생각의 구석들이 밝아지는 걸까
온갖 상품들 덮고 있는 불빛처럼
옛 추억은 디자인이나 상표들처럼 잠시 들추어질 뿐인데
등 뒤로 어둡게 날 선 바깥 가진, 불빛에 희게 탄 이들은
편의점에서 도시의 밤을 나누고 사며 카드로 긁는다
사람들마다, 혼자 좀 더 밝은 생각의 삼파장 형광 전구 갈아 끼우며
MADE IN U.S.A
이하석
이슬 투명한 물방울의 아침
빈, 얇은, 명료한 차가움 속으로
돌들과 쇠들 산그림자들 비쳐든다.
깡통 곁 허물어진 흙들에 볼 비비며
달개비꽃 벙그는 한때. 휴지 속에 구겨진 채
여자 노랑머리칼엔 달개비꽃 꽂혀
낡은, 흙 묻은 글씨로 날아가는 상표.
불꽃도 깡통 태우고 찬란히 하늘 날아가 버렸다.
빈 몸만 남아 재 끌어모을 때 싸늘한 녹슨 쇠의
고즈넉한 성이 하나
달개비꽃 밑으로 허물어지고.
1월 1일
이하석
동해 일출이라,
라면 국물과 라면발과 고춧가루와
김치를, 어제 산 신문을 엉덩이에 깔고 앉아서
신문이 바람에 날아갈까 봐 엉덩이를 들지도 않은 채 먹으며
몸 안에서 가랑잎처럼 바스락대는 추위를 몰아낼
큰 해가 해장국물처럼 떠오르길 기다린다
바닷가에는 갈매기들이 싫어하거나 개의치 않는
돌들이 쌓여 있다 바닷물에 저항할 수 없어
돌들은 저희들끼리 부딪쳐 아픈 소리를 낸다
사람들은 제각기 꿈들을 돌처럼 제 몸 안에 숨겨놓지만
아이들은 그 차가운 돌을 공중으로 던진다
그 돌에 맞을 갈매기는 없다
모두 제각기 버림받은 섬처럼 외로운 표정들이다
어제의 신문을 옆구리에 끼거나 바람막이로 세우고 시위자들처럼
입들을 앙다문 채 차츰 라면 국물처럼 밝아오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그게 희망의 조짐인 모양이지만
누가 벌건 얼굴로 떨면서 괜히 새 정부 인수위가 뜬다는 기사로 가득 찬 신문지를
다른 소식이 없나 하고 뒤적인다
드디어, 구름 사이로 퍼덕이는 바다 위로 해가 솟아오른다
새 정부 인수 문서 도장 같다 그게 희망의 빛이라면
라면 국물과는 다른 빛깔도 있는 듯하다
어젯밤에 고스톱 친 팔을 새삼 세우며
누가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또 누가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카메라 셔터들이 여기저기서 눌러진다
그게 새해 새 꿈의 확인이라 보긴 어렵지만
오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해를 보러 나온다네, 라고
누가 하루 지난 舊聞 흔들며 말해도
누가 조급하게 잇달아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그리곤 모두 제일 먼저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제 차를 향해 달린다
미처 챙겨오지 못한 내 그림자 찾으러 혼자 낮에 가보니
아무도 없는 해안이 환하다
바닷가에는 갈매기들이 싫어하거나 개의치 않는 돌들이 쌓여 있다
돌들은 햇살에 따뜻해져 해의 알들인 양 빛난다
버려진 해가 괜히 더 빛나고 있다
2월 산
이하석
산정에 덮인 흰눈이 밝다.
조금씩 밑에서부터 녹아내리리라.
해 머금은 바람이 갈참나무를 버석거리게 하고
매화를 꽃 피운다.
봄이 온다고 생각한 순간
산을 오르는 내 어깨를
눈 뒤집어쓴 봉우리의 어두운 그늘이 짚는다.
내 속에서 싹트는 어린것이 문득 오싹하니 아프다.
3분간
이하석
씻은 그릇을 헹구는데, 누가 죽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텔레비전을 덮는 비애 속 장의 행렬이 서서히 나아간다.
거룩한 죽음인 모양이다.
행주로 그릇들을 닦아 찬장에 챙기면서
그녀는 한 죽음이 장엄한 장식으로
아늑한 빛으로 덮이는 것을 힐끔 본다.
어린이 프로는 막 끝난 듯,
아들은 과자를 물고 안델센을 읽고,
그녀는 탁자 가에 묻은 도마도 캐찹을 닦아내면서
09 : 03의 숫자 아래서 아나운서가
하염없이 한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나른히 본다.
된장 그릇을 찬장 속 간장 종지 곁에 조심스럽게 놓을 때
누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칼을 수도물에 씻으며 보니 죽은 이의 딸이다.
09 : 04의 숫자가 그 여자의 풍성한 검은 머리칼 위로 찍힌다.
아들이 안델센을 놓고 밖으로 나간다,
현관문을 열어놓은 채.
그녀는 숟가락들을 물에서 건져내어 마른행주로 닦으면서,
장의차를 장식한 것이 국화......국화, 꽃, 사이로
아이가 뛰어......아니 현관문을 지나 아들이,
뛰어가는 것을 본다.
09 : 05의 숫자가 전신주가 팔을 벌린 시가지 위로
장의 행렬을 멀리한 채 찍힌다.
아나운서의 소리들이 시끄럽게 텔레비전 아래로 떨어져 재떨이에 쌓이고,
그녀는 남은 물을 하수구에 붓는다.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린다.
때맞춰 요리 강좌의 자막이 국화 꽃꽂이 위로 흐른다.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
4월이 또 와서
이하석
4월이 또 오는 군, 물돌씨는 바람 속에
눈물 몇 방울을 또 실려 보낸다. 아무도 오지 않고,
눈물이 찾아내는 세상은 젖어 있다.
일찍이 자신의 눈물 쪽으로 오는 눈물 한 방울 그리던
그, 이제 그는 스스로의 황혼이, 저무는 사월의
술과 물과 남은 햇빛과 흙과 공기 속에서 서럽게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다.
꿈엔 듯 저 숲과 물과 남은 햇빛과
흙과 공기 속으로 흐르는 바람에 실려
다가오는 흐느끼는 눈물 한 방울.
눈물을 맞으러 달려가는 감추인 불길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