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자유에의 염원
1934년 2월 20일
지난 2개월은 맑은 날씨가 계속되었는데 오늘 갑자기 그것이 불투명해졌다. 니나와 나는 오늘 언젠가 한 번 얘기하기로 했던 그 불길한 주제에 관해 토의했다. 니나는 그녀 특유의 도전적인 태도로 내게 환자에게 연민을 느끼는가를 물어 왔다. 나는 의사로서는 그렇지 않지만 감정이 있는 인간으로서 또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고통 받는 환자와 인류 전체에 대해 연민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나는 환자에게 동정을 나타내는 것을 극히 조심하고 있다. 그것은 때때로 환자나 의사 자신에게 병의 진상을 속여 기분 좋은 감정을 만들어 냄으로써 의사로서의 의무에 위배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어서 좀 더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으나 니나의 생각은 다른 것에 가 있었다. 그녀는 그렇다면 연민으로 인해 환자를 죽이는 일은 전혀 없겠다고 했다. 그건 한 마디로 간단하게 대답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물론 환자가 스스로 불치의 병이라는 걸 알고 그 생명이 생명 자체의 가치를 상실하고 죽음에 의해 그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이 생물학적인 생명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다면 안락사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또 한 가지 정말 치유가 불가능한 정신병의 경우 그를 희생함으로써 한 단체나 사회를 구제할 수 있는 경우를 들 수 있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니나는 빠른 어조로 말했다.
"당신도 단체니 희생이니 하는 말을 사용하시는군요. 국민 대다수를 위해 환자 몇 명쯤 매장시킨다는 것, 꽤 그럴 듯하긴 해요. 하지만 대체 그 인간의 가치와 무가치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단체에 관한 유용성, 이건 제 경우 아무 것도 아니에요. 인간은 각기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어요. 생물학적으로 보아 건강하다고 해서 가치 있는 생명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게다가 가치와 무가치에 관해 절대의 믿음을 가지고 판단할 사람은 어디 있나요? 무엇보다도 병의 완전한 치유를 믿는 사고 방식이 우스꽝스러워요. 병은 언제나 있어요. 건강과 병. 이들은 아마 균형이 잡혀 있을 거예요. 그래요. 무엇보다도 의학의 이 생물학적 관점이 근본적인 문제예요."
나는 몇 번인가 그녀의 격렬한 흥분을 제지하고 설명하려 했다. 나는 다른 모든 과학처럼 의학 역시 자꾸 변천하며 현재에도 모체를 구하기 위해 태아를 죽인다는 의학적 살해 수단이 있으나 이런 것은 객관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고 이러한 것을 허가하는 법의 개정이나 다른 혁명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니에요."
니나는 말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객관적이어서는 안돼요. 그리고 이 세상에는 절대 번복될 수 없는 선입견도 있기 때문이에요. 선생님은 현명하시고 경험이 많으니 법을 가장하기 어렵지 않겠고 또 실제로 옳을 수도 있어요. 선생님은 객관적인 과학자니까요. 하지만 전 이 모든 것이 거짓이고 우리가 끔찍한 잘못을 저지르게 되리라는......"
니나는 갑자기 말을 중단하더니 이어 낮고 우울하게 말했다.
"흥분해서 죄송해요. 그렇지만 전 모든 게 진절머리가 나요. 강의 시간에도 그 말만 들으면 더 견딜 수가 없어요. 그만둘까 봐요."
"니나, 지나치군. 이 해도 또 지나가게 돼"
"누구나 그렇게 말해요. 하지만 정말 지나갈까요? 선생님까지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니나는 분노로 침묵한 채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뭔가 오해했군. 난 니나의 인도주의적인 의견에 동의했을 뿐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비윤리적인 의학적 견해를 발견할 수 있으셨는지 모르겠군요. 그 문제를 연구하고 계시지요?"
나는 니나의 목소리에 들어있는 적의에 깜짝 놀랐다. 나는 니나가 내게 싸움을 걸고 있으며 무엇에 관한 것이든 우리의 토론이 싸움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사이에, 아니 니나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는 나에게서 멀어져 간 것이다. 그리고 언쟁은 그 사실을 니나가 인식하는 데 필요했을 뿐이다. 니나는 나를 응시했다. 어딘지 낯선 표정으로, 그녀는 문득 내 목에 팔을 감고 말했다.
"죄송해요, 짜증을 내서. 하지만 제가 위선을 배우고 있다는 건 참을 수 없어요, 저는 자신도 초월할 수 없는 감정이나 내면적인 한계라든지 법칙을 지니고 있어요. 다른 직업을 구해 보는 게 나을 듯해요"
"언제고 내게 올 수 있다는 걸 알면서 다른 직업을 구한다고?"
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간단해요. 결단으로부터 은신하는 것에 불과해요. 그런 일을 제가 안 하리라는 건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그리고 선생님도 그걸 원하지 않으세요? 거짓말을 않고 다른 사람들과 타협하는 일도 없는 직업은 없을까요?"
"좀 두고 생각해 봐야겠지?"
니나는 돌아갈 준비를 했다. 나는 언제나처럼 차로 데려다주기 위해 함께 차고로 갔다. 그러자 니나는 불쑥 혼자 걸어가고 싶다고 했다.
"모든 걸 좀 끝까지 생각해 보고 싶어요."
나는 니나가 말한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니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서 떠나가 버린 것을 느꼈다. 니나는 이상스럽게 흥분한 채 내게 성급히 키스를 하고는 돌아서서 뛰어갔다. 나는 고요한 길 위에 니나의 발걸음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영원히 떠나갔다. 다시 내일의 해후를 기약할 수는 있어도 그녀는 나를 영원히 떠났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1934년 2월 28일
어제 니나에게 갔었다. 그녀가 초대한 것이다. 난 지난 한 주일간 그녀를 보지 못했었는데 바빴노라고 했다. 그랬을 것이다. 우린 지난번의 언쟁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취직을 했어요. 4월부터 나가게 돼요"
"대학서점의 점원이에요. 거기서라면 안전하게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거기에도 위험은 따르지. 우선 동급생들이 니나를 알고 있으니 감시를 받을 건 뻔하잖아. 게다가 니나의 의견에 상반되는 책도 팔아야 하고 말야."
니나는 가볍게 웃은 뒤 신비스런 표정으로 그래요. 하고 말했다. 나는 갑자기 불안과 두려움에 몰려 자신을 억제하지 못했다.
"니난 내게 오는 것보다 점원 쪽을 택했어. 이젠 나를 사랑하지도 않고."
"아니, 사랑해요."
"그렇지 않아. 그렇다면 내게 이런 고통을 줄 리가 없어."
"사랑해요."
니나는 억양 없이 반복했다. 눈에 눈물이 그렁했으나 울진 않았다.
"당신 외엔 누구도 없어요. 내가 누굴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당신뿐이에요."
"아니, 당신은 오직 모험과 생을 사랑할 뿐이야. 내가 아니야."
그녀는 나를 쳐다보았다.
"생을 사랑한다고요? 그래요, 그러나 난 당신을 통해서 생을 사랑하는 거예요."
맹목적이고 집요한 고통과 열정이 나의 가슴을 헤집었다.
"니나, 난 당신 속에서만 생을 사랑할 수 있어. 우리들 사이의 차이란 바로 그거야, 그러니 다시 내게서 떠난다 해도 괜찮아."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니나의 눈 속에 어리는 엄청난 두려움에 문득 불안해졌다. 단지 내가 잘못 보거나 판단한 것일 수도 있으나 이미 나는 탈선해서 점점 아래의 단애로 굴러 떨어지는 기차와도 같았다. 나는 방 안을 서성거리며 외쳤다.
"넌 다시 내게서 떠날 거야. 넌 충실이 뭔지 몰라. 과일 속에 씨가 있는 것처럼 내 사랑 안에는 충실함이 있다. 그런데 넌 사랑하다가는 돌아서고 다시 마음이 내키면 사랑하고 그러다가 떠날 거야, 니나. 또 다른 사람들이나 아니면 무엇이든 다른 것을 통해서."
니나는 두려움으로 커진 눈을 방 안을 거니는 내게 못 박고 있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내가 그녀의 앞날을 예감하고 돌연 그녀의 본심을 인식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일 수도 있지 않는가.
니나는 느릿느릿 일어났다.
"대체 무슨 말씀이지요? 제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당신이라고 한 사실을 잊으셨나요?"
"그랬지, 하지만 지금 넌 그 약속으로 인해 고민하고 있어. 다시 자유롭고 싶어진 거야. 네 그 약속은 반환하겠어."
"알았어요."
니나는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더 이상 나를 원하지 않는 거예요."
순간 나는 고통으로 온몸이 경직되어 창가에 우뚝 서서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나는 그렇게 선 채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그런 식의 지독한 오해는 그만 둬"
"당신이 두려워요"
"내가? 산다는 건 지독해"
나는 소리쳤다.
"그야 당신이 그렇게 만들고 계시잖아요."
니나의 음성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간신히 이성을 회복하고 말했다.
"니나,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아마 모를 거야. 난 다만 니나가 스스로 내게 오기를 원할 뿐이야. 난 네 고민을 알아. 그리고 넌 그걸 숨기지 못하고......기다리겠어. 네가 내게 오겠다고 할 때까지. 그리고 아까 말한 대로 네 약속은 돌려주겠어. 난 너를 돕는 것 이외의 무엇도 바라지 않으니까"
내 마지막 말에 이번엔 니나가 소리 질렀다.
"도와준다고요? 누구도 날 도와줄 필요는 없어요."
"좋아, 그 말이 싫다면 다른 말을 쓰겠어. 난 다만 기회를 주고 싶은 거야. 나와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이해하겠어?"
나는 다시 내 말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침묵했다. 니나는 화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자유, 되돌려 받기로 하겠어요.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늘상 다니던 길을 잘못 찾아 엉뚱한 곳으로 차를 모는 바람에 밤중에야 집으로 왔다. 들판에 나왔을 때에야 그것을 깨달았는데 차를 세워 놓고 자정까지 그대로 망연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1934년 4월 2일
니나가 대학을 그만두고 처음으로 나는 그녀의 서점을 찾아갔다. 나는 그녀가 바쁜 틈을 타 그녀를 관찰할 수 있었다. 니나는 조금 지나치다 싶을 만큼 성숙한 진지함과 중후한 사색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어 보였다. 나를 발견한 니나는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바쁜 것 같기에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좋을 대로 하라고 했다. 나는 근처 골목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한 시간 남짓 기다리는 동안 나는 초조했으며 뭔가 불투명한 어떤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으며 아무 것도 모른다는 느낌은 결코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며칠 동안 그런 느낌에 묶여 있었다. 자주 일어나서 문을 열어 보지만 밖에는 아무 것도 없고 편지를 받아 보아도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
수화기를 들어도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도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는다.
거리에는 나 혼자인 것이다. 이 모든 느낌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며 나는 그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 나는 왜 무언가가 '행복'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행복이 아니리라.
누구도 행복하지는 않은데 왜 내 소망만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가? 내가 그처럼 끊임없는 인내로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인가? 천만에, 누구도 공적에 따라 보상받지 않으며 아무도 타인의 노력을 존중하진 않는다.
니나는 왠지 서먹하고 팽팽히 긴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좀 바래다 달라고 말했다. 우리는 영국공원을 걸었다. 나는 그녀를 전에 그 비만한 교수와 걷던 길로 데리고 갔으나 그녀는 그 길을 전혀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 때의 광경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니나의 발랄하고 몽상적인 헌신에 가득 차 있던 모습,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잊은 것이다. 몇 년 후 그녀는 이 길을 다시 걸을 테지만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었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난 결코 잊을 수 없다. 이것이 우리 차이의 전부다.
"선생님은 너무 말이 없어서 제가 무슨 말을 하기가 어려워요."
니나는 조금은 소원한, 그러나 예사로운 태도로 말했는데 내 대답은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웠다.
"아무 말이든 할 필요 없어."
니나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신비스럽게 말했다.
"죄송해요. 이제 집에 가야해요. 학생 하나가 집에 와서 같이 공부하기로 되어 있거든요."
나는 어떤 공부를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니나도 어쩌면 설명할 말이 없었으리라. 아마 그녀는 정치적 활동을 다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겐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내 옆을 걷고 있는 니나를 쳐다보았다. 늘 나보다 반걸음씩 앞서서 얼굴은 똑바로 앞으로 행하고 약간 빨리 걷는 니나.
그녀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보지는 못하지만 감지하고 있는 그 목표는? 어떤 남자가 그녀를 붙드는 데 성공할 수 있겠는가? 만약, 만에 하나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남자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니나는 한 남자에게 정착하기 위해 얼마나 더 경험을 쌓아야 하는가? 그녀는 어느 누구의 니나도 아닌 바로 나의 니나이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버림받기 전에 이미 단념하고 있다. 아, 나는 그녀를 내 생명처럼 붙들고 싶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리라.
1934년 4월 22일
어제 니나가 왔었다. 내가 오래 전부터 예감하고 있던 일을 그녀는 내게 말했다. 이별을.
그녀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불편한 방법을 선택했다. 아니 그 편이 그녀에게는 편했으리라.
니나는 침묵한 채 느리게 진행되는 어떤 과정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지나치게 냉정하고 빠른 결말을 원했으리라.
나는 그녀를 보는 순간 무슨 일이 있었으며 또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했으나 솔직히 말해서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차를 마셨으며 나는 자신이 놀라워할 만큼 다정하게 많이 지껄였다. 내가 일생 동안 재치 있고 기지에 넘쳐 상대를 웃길 수 있었던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니나는 묵묵히 내 말을 들었으며 차갑지 않았다. 그녀는 냉정할 수는 없는 여자이다. 그녀의 본질은 바로 생명의 따스함이기에. 하지만 그 따사로움은 찬 기운에 휩싸여져 있었고 동물적인 영혼의 냉기로 덮여 있었다. 니나는 문득 우리의 대화를 끊고 나를 쳐다보았는데 그녀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비애가 스쳐 지나갔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한 번도 내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신 적이 없어요. 그리고 제 약속을 돌려 주셨지요. 전 이제 그 자유를 돌려받고 싶어요."
"니난 그걸 잃은 적이 없어"
"하지만 전 당신에게 저를 붙들어 두고 싶었어요."
그녀의 눈에 다시 비애가 넘쳤다. 그녀는 조용히 반복했다.
"전 그걸 원해요"
"니난 그걸 하지 못해"
"그럴지도 몰라요."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계속했다.
"원하지 않은 것이 저라고 한다면 그건 잘못이에요."
"그렇다면 내가 원하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거칠게 물었다.
"그런 식으로 일부러 곡해하셔선 안 돼요."
그녀는 태연히 말했으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야릇한 만족감을 느끼며 고집스럽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이해하란 말야?"
"저를 데려갈 사람은 다른 어떤 남자가 아닌 바로 당신이란 걸 아셨으면 해요"
순간 나는 자유의 결단으로 나를 버리면서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그녀가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거칠게 어깨를 치켜 올렸는데 속으로 그런 자신을 경멸했다. 니나는 그것을 못 본 것처럼 말을 이었다.
"누구도 당신 이상으로 절 사랑해주진 못할 거예요"
"하지만 넌 날 사랑하지 않아. 왜 그것은 분명히 말 못하지?"
"당신은 감당하기 어려워요."
니나는 나이보다 훨씬 성숙해 보이는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계속했다.
"전 사랑이 무엇인지는 몰라요. 그렇지만 결코 속박당하지 않겠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어요. 전 자유롭고 싶어요. 불투명한 무엇이 자신의 의사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자신을 밀어붙이는데 그것을 미리 알았어야 했어요. 아니 알고 있었어요. 그걸 처음부터 당신에게 분명히 말하지 않은 것은 제 불찰이니 갚아야 해요. 어쨌든 전 당신 곁에 머무르게 되기를 염원했어요."
그녀의 말은 나를 감동시켰다. 나는 마음이 누그러졌으나 그것을 내색하진 않았다. 나는 부자연스런 조소마저 띠며 말했다.
"무엇이 널 밀어붙이지?"
"모르겠어요. 아니 알고는 있지만 확실하게 이름을 붙일 수 없을 뿐이예요."
나는 냉정하게 물었다.
"자유에의 염원?"
"어쩌면 그럴 거예요. 하지만 그런 말은 의미가 없어요. 그리고 일부분에 불과해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 내게로 와서 어깨를 잡아 흔들려고 했다. 그리고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너무 가장이 지나치세요. 저보다 훨씬 잘 알고 계시면서"
"그렇지 않아."
그녀는 내 어깨를 놓고 내 앞에 섰다.
"왜 제게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도록 강요하는 거지요? 난 몇 주 일 전에 꿈을 꿨어요."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지?"
"상관이 있어요. 전 어떠한 얇은 막 속에 갇혀 있었어요. 우리나 면사포처럼 아주 얇고 투명한 막 속에, 전 그 속에 갇혀 그저 바깥 세계를 동경하듯이 그 곳에서 나오려고 했어요. 그때 누군가가 말했어요. 그 엷은 막이 너를 갈라놓고 있다고. 무엇으로부터 나를 갈라놓고 있다는 말은 없었지만 전 그걸 알 수 있었어요. 그것은 자유, 평화, 예지, 그리고 그 밖에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제가 필요로 했던 것이었고 또 그리고 가야 하는 것이었어요. 그 꿈을 꾼 후에 제겐 보다 많은 게 확실해졌어요. 당신은 그것이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헛소리라고 하실 지도 몰라요. 당신이 절 믿지 않는다면 저로서도 당신을 납득시킬 방법이 없어요. 그저 당신의 경멸을 등에 느끼며 떠날 수밖에."
"그렇지 않아."
나는 말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몰려오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느라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다.
"난 널 경멸하지 않아. 넌 스스로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야. 넌 자유로우니까. 난 네가 발전해야 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어. 오직 그것을 위해 우리 사이에 완전한 절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야."
"아 당신은 심한 상처를 입으셨군요. 하지만 전 어쩔 수 없어요."
"알아, 그 얘긴 이제 그만 두지."
하지만 니나는 단호한 결심의 빛을 보이며 말했다.
"그런 일에 대해 많은 얘길 하는 건 물론 잘못이에요. 당신은 절 이해하고 계시면서도 긍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당신은 영혼이란 것을 잘 알죠? 영혼이란 기아나, 비나, 더위 같은 것과 다를 바 없이 현실적이란 것을 말예요. 왜 당신은 귀머거리이고 장님인 체하시는 거예요?"
"좋아. 난 널 이해해. 전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어. 부탁이야. 너도 날 이해해 줘, 네가 내게서 떠나면 그것은 곧 내 생명을 가지고 가는 것이란 사실을 말이야."
니나는 머리를 저었다.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강해요, 그리고 당신이 제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전 선생님이 상상하고 계시는 것의 반 정도의 가치도 없어요."
그녀는 웃었는데 나는 그로 인해 다시 자신을 제어할 수 있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난 널 과대평가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아. 하지만 난 야생의 살쾡이를 길들일 수 없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지. 난 다만 그 살쾡이가 인간의 영혼을 지니게 되길 바랄 뿐이야."
니나는 놀라 나를 쳐다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차분히 우월감을 머금은 태도를 고수하는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다시는 절 안 만나실 생각이신가요?"
"그건 네 자유야. 오고 싶으면 오고 싫으면 그만 두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부질없는 희망에 가슴이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 안녕. 바래다주겠어. 괜찮겠지?"
문득 니나는 내게 시선을 보냈는데 나는 평생 그 눈길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내릴 생각이었던 섬 곁을 배를 타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의 눈길이었다. 배가 그냥 지나쳐 버릴 때 승객은 비애에 넘쳐 섬을 바라보면서 섬으로 항로를 바꾸어 달라고 선장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를 붙들어 그는 그것에 순종한다. 그리고 그것이 옳게 생각되는 것이다. 섬은 대양의 한가운데에 그대로 떠 있고 배는 계속 나아간다. 이제 그 섬에 가까이 갈 배는 영원히 없으리라.
니나는 갔다. 나는 그녀를 집 안에서 작별했다. 나는 이제 혼자다. 더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처음부터 그렇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면 실망할 필요도 없는 일 아닌가. 단호하고 깨끗한 결말이다. 끝난 것이다. 나는 창가에 서서 걸어가는 니나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니나는 모든 것을 내게 털어놓는다는 불유쾌한 의무를 마쳤을 뿐이다. 모든 것은 정리되고 해명된 것이다. 니나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며 앞으로 가벼워진 마음으로 계속 살아나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나는?
이 기록 뒤에는 한 페이지의 여백이 있었으며 그 밖에 또 몇 장의 백지가 있었다. 고개를 들자 나는 니나가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오랫동안 언닐 보고 있었어. 뭘 그렇게 열중해 있지?"
니나가 말했다.
"아까 쓰던 건 다 끝냈니?"
니나는 벌떡 일어서며 외치듯 말했다.
"아, 일을 할 수가 없어. 도무지 안 돼. 이젠 글을 쓸 수 없을 거야."
니나는 종이를 뭉쳐서 쓰레기통 속에다 던져 버렸다.
"곧 떠나야 돼. 왜 아직 이곳에서 꾸물거리는지 모르겠어. 여권도 비자도 나왔고 수속도 끝났는데, 내일 갈까?"
"내게 묻는 거라면 말리겠어."
"내가 언니한테 뭐지?"
니나는 내 팔을 감고 세차게 눌렀다.
"언닌 언제 떠나야 되지?"
"오늘 밤차로 가야 해"
"아니, 가지 마"
"내일 남편이 돌아와. 나를 기다릴 거야."
"그래"
니나는 외쳤다.
"언닌 늘 남편이 있어. 한 번쯤 혼자 있는다고 해서 어떻게 되진 않아. 전보를 쳐"
"좋아, 그런데 내용은? 내일 간다고 할까?"
"아니, 그냥 곧 돌아갈 거라고 해"
"넌 내일 떠난다면서?"
"모르겠어, 모르겠어."
니나는 중얼거렸다. 나는 전화로 전보를 부탁했다. 니나는 다시 술을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런 니나에게 화가 났다. 도무지 그녀에겐 안 어울리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자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니나는 마개를 뽑은 술병을 든 채 미동도 않고 서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가면처럼 완전히 가리워져 절망의 빛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술병을 닫아서 옆에 놓고는 말했다.
"일기를 다시 읽었어? 뭐라고 씌어 있어?"
"이별 얘기야"
"오, 꽤 감동적이었겠는데. 어때, 우리의 연기는 고상했어?"
"냉소는 네게 안 어울려."
"알아, 나한테는 절망도, 절규도, 술 마시는 것도 아마 어울리지 않을 거야."
니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계속했다.
"사람들은 늘 내가 극히 남을 위로할 것을 기대하고 있어. 나 역시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을 지닌 한 인간일 뿐인데. 그만둬, 이런 얘긴. 자, 난 다시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용감한 여자야. 이리 와서 함께 편지나 봐."
니나는 이틀 동안 모인 우편물을 뒤적이더니 혼자 뭐라고 중얼거렸다. 문득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아이들이 보낸 거야"
그녀는 엄지손가락으로 봉투를 뜯었다.
"두 통이야."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따스한 감동이 넘쳐 있었다. 니나는 행복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그처럼 부드럽고 생기에 넘치는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데 놀랐다.
"루트가 보낸 거야. 지금 열네 살이야."
"뭐라고 씌어 있니?"
내가 물었다.
사랑하는 엄마,
난 엄마가 영국으로 가는 게 무척 슬퍼. 마르틴은 엄마가 가는 게 엄마한테 좋을 거라지만. 엄마는 무엇이 엄마에게 좋은가를 잘 알 테지만 일요일마다 엄마를 못 만나는 것은 서운해. 오페라에도 우리만 가야 하잖아? 물론 엄마는 다시 올 거지? 우린 잘 지내고 있어. 난 음악에 수를 받았어. 피아노, 노래, 이론 모두 다. 그리고 지금 바스티엔 역을 연습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칭찬해 주셨어. 5월 1일 공연할 예정이지만 엄마가 볼 수 없어서 정말 유감이야. 난 피아니스트보다는 가수가 되었으면 해. 하긴 난 너무 어리고 너무 말라깽이지만 엄마, 내가 열일곱이 되면 꼭 음악대학에 보내줘야 해. 알았지? 새로 오신 음악 선생님은 너무 좋은 분이셔.
엄마, 난 그 선생님한테 아주 반했어. 선생님은 그걸 몰라. 내가 선생님이 눈치 채지 못하게 애쓰고 있어. 선생님도 나를 예뻐해 주셔.선생님이 나를 바라보면 난 가슴이 마구 뛰곤 해. 엄마한테 이런 얘길 다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아. 엄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제일 멋있는 엄마야. 영국에서 엄마의 모든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어.
키스를 보내며 엄마의 루트가
"애도 참"
웃는 니나는 매우 행복해 보였다.
"루트는 참 착해. 그리고 알렉산더의 감수성과 재능을 물려받았지. 이건 마르틴의 편지야. 열세 살인데 누나와는 아주 틀려, 퍼시의 아이야."
엄마 난 돈을 저금하고 있어. 소년단을 따라 내년에 영국에 갈 생각이야. 그럼 엄마도 찾아갈게. 루트는 엄마가 어떤 영국 사람과 결혼할 거라지만 난 루트 말을 믿지 않아. 엄마는 늘 무슨 얘기든 우리한테 했잖아?
우리 걱정은 하나도 안 해도 돼요, 엄마. 난 수학과 물리에 수를 받았어. 이 두 과목은 늘 내가 1등이야. 그런데 건방지다고 선생님한테 꾸중을 들었어. 엄마, 화났어? 난 엄마가 화내지 않을 거라고 믿어. 그럼 안녕.
엄마의 마르틴으로부터
니나는 두 통의 편지를 느릿느릿 가방에 넣었다.
"나도 아이들이 있으면 좋겠어."
내가 말했다
"사람이 뭐든 다 가질 수는 없는 거야."
니나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넌 다 갖고 있잖아?"
"언니, 지나친 생각이야. 난 남편도 없는데"
"넌 그 이상의 것을 지니고 있어"
니나는 그 말에는 대답을 안 하고 내 팔 위에 손을 얹었다.
"만약 언니의 아들이 전장에 나갈 나이였다고 생각해 봐. 그렇다면 십중팔구는 전사를 못 면했을 거야.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없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돼."
"아니, 네 말은 옳지 않아. 너도 그걸 알 거야."
니나는 뜻밖이란 얼굴로 나를 보았는데 나 자신 역시 내 말에 놀라고 있었다. 전에는 나도 니나가 말한 대로 이 지독한 시대에 아이를 갖기 않은 것을 극히 다행스럽게 여겨 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실한 무엇을 한탄하는 편이 처음부터 갖고 있지 못한 쪽보다 낫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마흔여덟이나 된 지금에 와서야 고통도 재산일 수 있음을 안 것이다.
니나는 우편물의 거의 반을 내게 주며 읽어봐 달라고 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말해 줘. 나 혼자 모두 읽을 기운이 없어서 그래"
처음 것은 출판사에서 온 계산서였다. 니나는 그것을 보지 않은 채 가방에다 넣었다. 다음 것은 니나가 백 마르크를 자선했는데 그것을 받은 한 대학생이 보낸 감사의 편지였다.
다른 봉투 속에는 한 장의 스케치가 들어 있었는데 선이 몇 개 그어져 있을 뿐이었다. 돛이 힘없이 쳐진 보트 안에 두 남녀가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었다. 남자는 날아가는 새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사인을 보자 나도 남편도 잘 아는 화가 N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젊고 아름다운 부인도 잘 알고 있었다.
니나에게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스케치 뒷면에 뭔가가 적혀 있었다. 신문에서 오려 낸 기사를 읽고 있는 니나에게 그 말을 하자 읽어 봐 달라고 했다.
'이것은 내 생활이다.
너 없이는 일할 수 없다.
늘 널 생각한다.
넌 그것을 알아줘야 해.
너의 다음 책의 삽화를 그리고 싶다.'
이어 형편없이 흘려 쓴 서명이 있었으나 나는 그를 알고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매주 그런 편지를 보내와. 그러나 난 그에게 관심이 없어."
니나는 건성으로 반쯤 듣고 있다가 그렇게 말했으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위선과 정면으로 부딪쳤을 때의 당혹감......
그 화가와 그의 아내는 아주 행복해 보였으며 모두들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그는 엉뚱하게도 니나를 사랑하고 있으며 자신의 결혼을 참혹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아내를 속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아내 역시 남편을 기만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나는 오래 전부터 성실이란 불가능하며 그저 깨어지지 않는 공동생활의 습성만이 있을 뿐이라고 체념해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우리 인간이 어디를 디디든 추락의 가능성이 있고 어떤 난간이나 계단도 무너질 수 있으며 어떤 다리나 거리도 붕괴의 가능성이 있고 온갖 것이 안개나 썩은 목재로 만들어졌을 뿐임을 알게 된다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일 수는 없지 않은가.
내 남편은 지금 잘츠부르크에 가 있다. 그는 너무 자주 그 곳에 간다. 볼 일이 있다는 건 알지만 일을 마치면 그는 무엇을 할까? 그러나 이런 생각이 나를 아프게 하진 않았다. 그럼 난 어떤가? 난 확실히 성실하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내가 더 낫다고 할 수 있는가.
니나는 내게 그를 사랑하는가고 물었다. 나는 그를 나의 집과 그 밖의 유쾌한 것들을 사랑하듯 습관적으로 사랑한다. 그는 내게 하나의 습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나를 괴롭히진 않는다. 나는 자신이 늙어가는 것을 느낀다.
그건 그렇고, 니나와 그 남자는 어떻게 될까? 두개의 불타는 별이 서로 부딪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들은 그들의 불을 식혀야 하리라. 안 그러면 그들은 서로를 파멸시키고 말 것이다. 그리고 니나는 그 제어할 수 없는 힘으로 끝내 자신과 그를 구제할 것이다. 내가 요 며칠동안 그녀에 대해 다시 알게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들이 서로를 파멸시키리라는 쪽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문득 니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 저 햇빛 좀 봐!"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비가 왔었고 지금은 햇빛이 구름 사이로 나와 지붕과 처마마다 빛나고 있었다. 허공에 매달린 모든 것이 햇살 속에 융해된 것 같았다. 니나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향기가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나가 보지 않겠어?"
니나는 결심을 당장 실천에 옮기려는 듯 그녀 특유의 서두르는 태도로 말했다. 그녀는 초조하게 문간에 서서 내가 외투 입는 것을 기다렸다. 그녀는 무슨 중대한 일이라도 놓치는 것처럼 나를 재촉했는데 내가 장갑을 찾느라 꾸물거리자 참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기까지 했다.
우리는 잠자코 발 닿는 대로 걸으면서 강렬한 봄의 향기를 호흡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아무데서나 저녁을 먹었다. 니나는 언제나처럼 몇 번 손을 놀리는 것으로 식사를 대신했다.
우리는 공원 쪽으로 향했다.
도중에 니나는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어떤 광고탑 앞에서 멈추었다. 모든 기능이 마비된 사람 같았다.
"오늘 밤 글루크의 '오르페우스' 공연이 있군.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말야."
나는 그것이 니나를 그처럼 흥분시키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가 볼래? 시간이 조금 늦었지만."
"아니."
니나는 고개를 흔들고는 계속 걸어갔다. 그녀는 얼마 동안 흙탕물이 괸 땅을 디디거나 나뭇가지에 부딪혀 물을 흠뻑 뒤집어써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냥 걸었다. 나는 아마 그 남자는 가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오르페우스'를 노래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역할은 남자가 부르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지휘자이거나 무대 감독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니나는 그가 이 공연을 보러 뮌헨에 와 있다는 것을 아는 게 아닐까?
아, 그러고 보니 나마저 전염된 모양이다. 이 모든 일을 그 남자와 결부시키려 하다니.
우리는 당초엔 공원 끝까지 갈 작정이었으나 니나는 클라인헤세 오르호반쯤 왔을 때 돌아가고 싶어 했다.
"돌아가야 해"
말하면서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길은 우울하고 초조해 보였다. 우리는 돌아섰다. 산책이 아니라 무엇에 쫓기는 듯한 심정이 되어 있었다. 무엇이 니나를 그렇게 만드는가? 집에 가서 누구의 방문을 기다려야 하는 것도 아닐 테고 우편물은 대충 보았으며 '그 남자'의 전화도 받지 않았던가. 나는 니나의 굉장히 빠른 걸음과 보조를 맞추려고 애쓰며 그 말을 이해하고자 했다.
니나의 말은 너무 빨라서 알아듣기 어려웠으며 그나마 자동차의 소음과 바람 소리에 끊기곤 했으나 나는 대강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그 남자와 오페라에 갔었다. 그들이 함께 처음 들은 음악이 바로 '오르페우스'였던 것이다. 그들은 오페라를 보러 가던 날 둘 다 일에 몰려 신경이 피로해 있었고 전날 밤에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둘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둘 다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둘은 그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음악에 도취되었다. 그들은 사랑과 음악으로 맺어진 일종의 황홀경을 만끽했으리라. 오페라는 끝났고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그들은 비를 맞고 서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그 남자가 니나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지극히 평범한 싸움을 벌였을 뿐인데도 니나를 무척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행복이 다만 두 시간 동안만 지속되었을 뿐임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빗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그녀가 우는 걸 알자 사람들이 많은 앞에서 화를 내며 큰 소리를 질렀다.
"다시는 너와 음악을 듣지 않겠어."
니나는 그 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것은 그가 니나에게 자기의 사랑을 표시한 것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와 같이 지내는 일은 수월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니나를 자주 그런 식으로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는데 아마도 니나를 그에게 묶어 두는 것이 그 불가사의에 있는 것이 아니었나 한다. 나는 니나가 그의 그런 불가사의한 신비성을 지켰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의 사랑의 비밀이었던 까닭에. 나는 그것을 인식하게 되자 무의식중에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니나는 문득 나를 돌아보더니 자기에게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었다.
"아니, 아무 말도 안 했어"
나는 끝까지 내가 생각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벌써 집에 와야 하다니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닌데."
니나는 중얼거리면서 곧 서둘러 문을 닫고는 층계를 뛰어 올라갔다. 그녀는 집 안에 아무도 없는 것에 무척 실망하는 눈치였다. 집을 비운 사이에 누가 왔으리라는 기대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재빠르고 수줍은 시선을 방안 여기저기에 던지더니 곧 체념했다. 그녀는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녀는 굳은 동작으로 외투를 걸고 창문을 닫고 집 안을 정리했다.
그러더니 불쑥 엉뚱한 말을 끄집어냈다.
"나는 지옥이 어떤 곳인가에 관해 확실한 상상을 할 수 있어. 언닌 어때?"
난 한 번도 그러한 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음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알아. 그게 어떤 곳인지"
니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건 사람이 완전무결하게 혼자가 되어 결코 다시는 사랑할 수 없으리란 것을 느끼고 이제 다시는 영원히 어느 한 사람과 만날 수 없으리란 걸 아는 거야. 그리고 다시는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아는 것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문득 이런 유의 대화에 짜증이 나서 우스갯소리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천국은 한 발 떼어 놓을 때마다 그저 약간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곳이지. 자신에게 편리하고 달콤한 만큼만 사랑하고 그 이상 깊이 들어가진 않는 거야. 한 사람만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우린 뜻밖의 불더미 속에서 고통 받게 되거든."
니나는 내 말에 심각해지면서 천국은 반쯤만 행복한 상태라고 했다. 내가 왜 반쯤만이냐고 항의하자 그녀는 거의 연민에 가까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억지웃음을 웃었다.
7. 퍼시의 죽음
나는 갑자기 그녀의 체념이 슬퍼졌다. 체념한다는 것은 니나의 본질을 희미하게 하는 것이다. 니나는 철저하게 절망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넘어설 수는 있어도 절대 체념해서는 안 되는 형이다. 나는 그녀가 술을 마시든 애기를 하든 무엇이든 해 주길 바란다.
그렇듯 지친 절망적인 표정은 참을 수 없다. 나는 일기장을 펴서 1934년 4월 22일 마지막 일기에 이어진 공백을 찾기 시작했다. 니나는 무심히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생각에 잠긴 말투로 말했다.
"1934년 그 해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통 기억이 없어. 아니 잠깐 생각해 보겠어. 아냐, 역시 아무 일도 없었어. 나는 정치적 활동도 하지 않고 슈타인도 만나지 않고 서점에서 일하며 완전히 혼자였어. 아니. 그때 퍼시를 만났었군,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어느 날 슈타른베르크에 갔다가 기차로 뮌헨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 그 때 나는 유리창에 비치는 한 얼굴을 보았는데 바로 퍼시였어"
니나는 한참을 언짢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답답해져서 그 얼굴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어떤 얼굴?"
"퍼시의 얼굴 말이다. 방금 네가 얘기하려던"
"아, 그랬던가. 그런데 어땠느냐니, 그게 무슨 소리지?"
니나는 퍼시와는 무관한 생각에 열중해 있는 듯했다. 아무리 애써도 계산이 안 맞아든다는 듯한 귀찮은 표정이었다.
"난 그 창문에 비친 얼굴이 어땠느냐를 묻고 있는 거야"
"남자답더군"
니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는데 무슨 생각에선지 화난 표정으로 덧붙였다.
"내가 그를 알기 전이었거든. 하지만 알고 난 뒤엔 더 견딜 수 없어진 타입이었어. 큰 키에 금발이고 파란 눈을 한 운동선수 타입이었지. 언니, 왜 웃지?"
"내 남편과 흡사해서"
니나와 난 서로 슬쩍 눈을 흘기며 마주 보고 픽 웃었으나 이내 웃음을 거두었다. 우린 서로의 웃음에 씁쓸한 무엇이 내포되어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그는 그렇긴 해도 많은 면에서 완벽했어. 죽을 땐 더욱 근사했지"
나는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니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가 그에게 독약을 먹였어. 어, 언니, 그런 무서운 얼굴 하지 마. 내가 죽인 건 아니니까. 그저 교수대에서 구제해 주었을 뿐"
"왜, 구속됐었니?"
"그래, 하지만 난 모르고 있었어. 우린 그 훨씬 전에 이혼했었거든, 그런데 1944년 이었을 거야. 한밤중에 그의 아내가 날 찾아왔어. 난 그녀를 아주 싫어했고 거의 4년간이나 안 만나고 있었어/"
"알아"
"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네 목소리가 그렇게 느끼게 했어. 넌 그 여잘 이름 부르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미워했어."
"맞았어. 정말 알 수 없어. 아주 옛날 얘긴데도 끔찍한 감정의 찌꺼기가 내부에 앙금처럼 남아 있다는 건. 난 그 여자가 진짜 싫어. 마치 굶주린 강아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퍼시 같은 남자가 대체 그 여자의 어디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 궁금해. 언니, 웃지 마. 언닌 여자란 남편이 다른 여자의 어디를 좋아하는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테지만 그건 틀려. 퍼시는 전에도 애인이 있었지만 그 여잔 예쁘고 아주 사랑스러운 성격이라 나는 퍼시가 그 여자와 자는 걸 납득할 수 있었어. 그런데 클레레란 여자는 못생긴 편이었어. 커다란 이빨을 어찌나 자주 내놓던지 나는 그때마다 그녀가 그 이빨로 시뻘건 양고기를 뜯어먹은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어. 화가라곤 했는데 재능이 없었어. 그녀의 가장 큰 결점이었지. 나는 그 때문에 퍼시를 용서할 수 없었어. 그 여자 얘긴 그만두겠어. 기분 나빠. 하긴 그 여자도 슬픈 일을 많이 겪었지."
"퍼시는 그녀와 결혼한 사이였니?"
"아니, 하려고는 했는데 잘 안 된 모양이야. 잘은 모르겠어. 어쨌든 그녀는 임신 7개월의 몸으로 날 찾아왔어. 그것도 한밤중에 맞지 않는 헐렁한 외투를 입고 외투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어. 그녀는 두려움 때문에 계단을 헐레벌떡 올라와서는 꽤 배가 불렀는데도 마치 뱀장어처럼 문틈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문을 닫더군. 난 그녀가 아기를 가진 것을 알자 퍼시에게 버림을 받고 날 찾아온 거라고 지레짐작해 버렸어. 그래서 난 그런 일엔 관심도 없거니와 널 도와 줄 수 없으니 어서 가 버려라, 하는 태도를 취했지. 그 여잔 움푹 들어간 눈하며 아주 형편없이 늙어보였어. 난 내심 통쾌했지. 나 역시 적수가 잘못되면 손뼉을 치는 평범한 여자니까."
나는 니나가 그 말을 강조하는 것으로 미루어 실제에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음을 느꼈다.
"난 막 파티에서 돌아온 길이라 근사한 차림을 하고 있었지. 난 그녀와 마주 앉자 우선 담배를 물고는 그녀에게 권했어. 그녀가 처한 상황이 담배를 피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모기만한 소리로 담배는 안 피우니 커피나 한 잔 주면 고맙겠다더군. 그 여자가 날 찾아와서 뭘 달라고 할 때까지의 자기 억제란 굉장한 것이었을 거야. 난 커피를 끓여 주었지. 전쟁 중이라 아주 귀했지만 다행히 조금 남은 게 있었거든, 그녀는 아, 진짜 커피군요 라고 하잖겠어. 그래 난 속으로 아무렴, 난 보다시피 잘 산다, 하고 말했지. 실상은 그 반대였고 그건 마지막 커피였어. 하지만 난 내가 썩 잘 살고 있으며 퍼시에게 조금의 미련도 없음을 과시하고 싶었어. 그녀는 찾아온 용건을 말하지 않았는데 나도 묻지 않았어. 난 그녀가 말을 더 꺼내기가 어렵도록 일부러 묻지 않은 거지. 너희 둘이 날 밖으로 내던지던 날을 내가 잊을 줄 아니? 그때가 밤 10시였는데 너희들은 어디로 가겠느냐고 묻지도 않았어. 그 날 밤 너흰 함께 잤지만 난 선술집 의자 위에서 밤을 새웠어. 넌 그때 아주 당당해져서 말했지? '여기서 뭘 하는 거지요? 내가 퍼시의 아내가 된 걸 모르시나요?' 난 발작적으로 라디오의 스위치를 틀었어. 댄스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 여자의 표정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졌어. 난 엉뚱하게도 그 표정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어. 악마의 유쾌함을, '퍼시가 죽게 됐어요.' 문득 그녀가 아주 낮게 말했는데 난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아주 태연하게 '병이야?' 하고 물었지, '아, 아니에요.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했어요. 사형이 확실하대요. 그도 알고 있어요. 다음 주일엔 형 집행이 있을 거예요.' 나는 갑자기 초조해져서 이제까지의 내 만족을 부끄러워할 여유조차 없었어. '어떻게 그를 살려야 하지?' 내 다급한 물음에 그녀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거였어. 난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구제를 희망하고 있는 쪽이라 그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어, 그는 트라운슈타인에 있는데 슈탄들하임으로 가서 처형될 예정이라는 거였어. 그녀는 친척도 뭐도 아니라는 이유로 면회가 금지되었고 면회는 다만 그의 아내만이 가능하다는 거야. 난 이미 이혼했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의 아이를 갖고 있으므로 그건 상관없다고 하더군, 그래서 난 그를 만나 뭘 하겠느냐, 그가 반가워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가 원하는 건 클레레 당신이 아니냐고 비꼬아 주었지. 그 여자는 지금은 그런 게 문제가 될 수는 없으며 다만 우린 그를 그처럼 혼자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고 간곡히 말하더군. 나는 결국 결심하고 말했지. '좋아, 내일 첫 차로 떠나겠어. 나와 함께 가도록 하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 말대로 그녀는 이튿날 함께 갔어. 그 여자는 꼭 매 맞은 짐승 같았는데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길을 제일 참을 수 없었어. 그리고 내가 너그러운 자의 역할을 해야 했던 것도. 물론 난 다른 사람이라면 기꺼이 도와주었겠지만 그것이 퍼시였다는 게 저주스러웠던 거지. 어쨌든 난 그 역할을 해내야 했어. 2월의 날씨는 몹시 추웠고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있고 땅은 축축이 젖어 있었지. 거리 여기저기엔 웅덩이에 물이 괴어 있고 자동차는 사방에 흙탕물을 튀기며 달려가고 있었어. 도시 전체가 잿빛으로 세계 밖에 팽개쳐져 있는 느낌이더군. 호텔에 빈 방이 없어 우린 간신히 2인용 침대 하나를 빌릴 수 있었어. 방은 스팀이 고장 났는지 아니면 석탄이 바닥이 났는지 몹시 추웠어. 클레레는 방에 있고 난 밖으로 나갔지. 면회 허가는 첫날 바로 되었어. 그래서 이튿날 형무소로 갔지."
"언니, 감옥에 가 본 일 없지?"
"그래, 다행스럽게 아직 못 가 봤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건 쉬운 일이 아냐. 자신이 수감되어 있지 않은 게 한편으로는 괜찮고 어떤 의미론 더 나빠. 자신은 자유스럽게 나가면서 남을 창살 안에 남겨 둔다는 건 끔찍해. 내가 면회증을 내밀자 소장은 퍼시를 큰 소리로 불렀어. 잠시 후에 좀 작게 다시 한 번 불렀는데 그래도 대답이 없자 간수를 쳐다보며 세 번째 부르더군. 간수는 마치 안 들린다는 태도였는데 난 이내 퍼시가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어.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이미 죽은 사람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았어. 간수의 태도가 그랬어. 나는 소장에게 남편이 이미 선고를 받았느냐고 물었지. 소장은 외면하며 모른다는 거야. 그래서 다시 언제 여기서 나올 수 있느냐고 했더니 '아마 월요일일 겁니다. 하지만 알 수는 없어요.' 하며 창가로 가더니 밖을 내다보며 낮은 소리로 말하더군. '그때까진 매일 면회가 됩니다.' 하지만 그 날은 이미 수요일이었어. 그리고 곧 퍼시가 나왔어. 그는 놀랄 만큼 달라져 있었어. 몰라보게 여윈 데다 빡빡 깎인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하며 그는 날 보자 몹시 당황했어. 누가 면회 왔다는 걸 알리지 않았거나 클레레려니 했었겠지. 처음엔 선뜻 말이 나오지 않더군. 나는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몰랐던 거야.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어서 아무런 연결이 없음을 느끼기 때문이지. 그래 언제나 쓸데없는 얘기나 하게 되고 '어떻게 지내요? 뭐 필요한 건 없나요? '하는 식이었지.
그럼 상대는 필요없다거나 그저 웃어 보이는 거야. 난 클레레와 같이 와 있는데 면회 허락이 안 되니 뭐 전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지. 그는 '클레레.' 하더군. 마치 생각해 봐야 알겠다는 투였어. '클레레는 일곱 달째라더군요. 안부를 전해 달랬어요.' '고맙군, 내 안부도 전해 줘.' 그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쥐어짜듯 말했지. '이 어려운 때에 부디 그 여잘 혼자 버려두지 마.' 어떤 일이 있었든 간에 난 그 때 그를 도울 수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녀는 자기가 어떻게 될는지 알고 있을 거라고 하더군. 그러자 곁에 지켜서 있던 간수가 재빨리 형벌에 관한 말을 할 수 없게 돼 있다고 참견하더군.
하지만 상관없었어. 우린 충분히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으니까. 잠시 후 간수가 전화를 받으러 간 사이에 우린 얘기할 수 있었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에게 독약을 갖다 달라는 거야.
'난 이 인간들 속에 떨어지긴 싫어. 부탁이니 내일 좀 갖다 줘.' 난 대답할 수가 없었어. 바로 그 때 간수가 돌아왔고 5분의 면회시간은 끝났던 거야. 클레레에게 해야 할 말을 생각해 봤어. 건강도 건강이지만 나와 함께 있을 때 진실을 아는 쪽이 나을 것 같았거든. 나라면 분명 그랬을 거야. 그래도 다른 방법이 있을 것도 같아 나는 오후 내내 거리를 헤매며 그 방법을 생각해 봤어. 난 퍼시에게 독약을 가져다주고 나 혼자만이 절대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있었어. 그는 이제 희망이 없었고 그렇다고 냉큼 처형당할 수도 없었어. 난 그 긴 최후의 날들을 그가 겪도록 버려둘 수 없다고 결심한 거야. 물론 한순간 곧 전쟁이 끝나거나 사면되거나 탈출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기도 했어, 우연이란 어디서든 존재하니까. 그는 극히 명확하게 처형을 알게 되기 전에는 독약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난 곧 결론을 내렸어. 그러자 이번엔 독약을 구하는 게 문제였어. 변호사와 상의할 문제도 아니고 도무지 그 이야긴 누구와도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난 문득 슈타인을 생각해 냈어. 그 길로 호텔로 돌아가 클레레를 안심시켰어.
'그는 잘 지내고 있으며 사태는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는 않다, 변호사는 상고까지 했다' 라고. 그러자 그녀는 안심시키지 않아도 되니 진실을 말해 달라더군. 그래서 그건 진실이며 그 증거로 내가 뮌헨에 가서 그에게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거라고 했어. 그녀는 내 말을 믿는 눈치였어. 난 그 날 밤에 뮌헨으로 가 슈타인을 방문했어. 그는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문을 열어 주었어. 그런데 그 때 그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혀 다른 일이며 비장한 각오가 돼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까맣게 몰랐었어. 그는 체포영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말야. 난 그가 어떤 근심이나 흥분을 지니고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어. 그만큼 이기적이었던 셈이지, 아니라면 그의 몹시 창백한 안색을 눈치 챘어야 하는 건데 난 그의 면도하지 않은 꺼칠한 얼굴을 그 때 처음 보았는데도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어. 난 곧 찾아온 용건을 털어놓았어. 물론 나의 요구가 너무 지나친 것이고 그가 퍼시를 싫어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 약제를 말할 수는 없었어. 그는 내 말에 한동안 침묵을 고수했어. 그러더니 방안을 서성거리며 짧게 '운명을 앞지를 순 없어' 라고 하더군.
내가 버티고 고집을 부리자 그는 세 번씩이나 완강히 안 된다고 했어. 그래도 버티었지. 그는 새벽녘에야 카페인을 주면서 버터와 섞어 빵에 바르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어. 독의 작용도 빠른 거였고 치사량이었어. 난 거리로 나와서야 작별할 때의 그의 눈길을 생각해냈어. 다시 되돌아가 비로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어. 그는 의심을 받고 있었는데 '뭐 별일은 아니야. 정치적인 불신이지' 라고 하더군. 달리 방법을 생각해 보았느냐고 했더니 그는 '아니 단지 여기서 일할 뿐이야. 그 밖에 달리 뭘 할 수 있겠나?' 하잖겠어. 베를린으로 가서 지하에 숨어 있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고개를 흔들었어. 이미 오래 전부터 기다려 왔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였어. 하지만 그건 그의 진심은 아니었지. 그는 자기의 연구와 학생들에게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어서 그것의 상실을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어. 난 그때 그에게 감동했어.
아마 내가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면 바로 그 날 아침부터였을 거야. 나는 걷다가 잠시 뒤돌아보았는데 그는 문간에 그대로 서 있었어. 마치 잿빛의 바위처럼 묵묵히 서 있는 그의 전신을 무서운 고독이 휘감고 있었고 거기엔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위대함이 있었어. 만약 그가 그때 청혼해 왔더라면 난 쾌히 그것을 받아들였을 거야.'
"연민 때문에?"
내가 물었다.
"아니, 존경심이라는 게 옳았을 거야. 그건 어쩌면 우정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는 다행히 그렇게 하진 않았어. 난 집으로 가서 루트와 마르틴이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잠깐 들여다 았어. 난 착실한 가정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트라운슈타인으로 돌아 갈 수 있었어. 스팀도 없는 완행열차였는데 찻간에 나 혼자밖에 없었어. 억수 같은 비가 창유리로 줄줄 흘러내리고 차는 역이 아닌 곳에서도 웬일인지 가끔 멈추어 섰고 기차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만이 단조로웠어. 거기에 내 상념의 망령들이...... 밤새 그런 상념들에 시달려 지치고 전신은 추위로 꽁꽁 얼어붙었는데도 트라운슈타인에 도착할 무렵엔 오히려 정신이 말짱해지더군. 그때 난 행동 일정을 정했어. 우선 변호사에게 구제의 가능성 여부를 물어보고 그가 포기할 경우 선고일까지 머물러 있기로 했어. 형무소장은 내게 호의 내지는 연민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 후에 퍼시에게 약을 줄 수도 있었거든.
변호사는 아침 식사중이었는데 난 도저히 그가 그처럼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어. 그는 이미 사형이 확실하다는 정보를 들었다고 했는데 그가 '교수형' 이라고 말했을 때 구토를 느꼈어. 그 길로 밖으로 나와 토해 버린 뒤 호텔로 갔어. 클레레는 몹시 들떠 있더군. 그의 내의는 어디에 있느냐고 하길래 벌써 차입했다고 둘러대는 수밖에 없었어. 그녀는 내가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것을 걱정했는데 꼬박 기차 여행에 시달려 그렇다고 대충 거짓말을 한 뒤 다시 나왔어. 눈에 띄는 아무 음식점에나 들어가 버터와 빵을 주문했지. 그 중 하나는 내가 먹었는데 어떻게 먹을 수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식당엔 손님이라곤 다행히 나밖에 없어 난 태연히 버터에 카페인을 섞을 수 있었어. 그걸 빵에 바른 뒤 종이에 싸면서 난 그걸 먹어 버리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물리쳐야 했어. 형무소장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어. 하지만 난 이미 퍼시에게 할 말을 정확하게 생각해 두었기 때문에 간수가 옆에 있는 것에 개의할 필요는 없었어.
'클레레가 안부전하더군요. 그리고 클레레는 내가 얼마 동안 데리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나는 말했어. 그는 고맙다고 짤막하게 대답하더군. 난 '먹을 걸 좀 가져 왔어요. 사과 몇 개와 버터 바른 빵인데 들지 않겠어요?' 라고 했지. 간수는 재빨리 음식을 가로채 빵을 한개 잘라보더군, 면도날 같은 게 들어 있지 않을까 해서. 난 실컷 잘라 보아라, 하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그에게 눈짓을 했어. 그는 곧 알아차렸고 난 마침 면회 시간이 끝난 것을 감사해 했어. 더 이상 자신을 감당하기 어려웠거든. 그는 다시 한 번 고맙다고 하더군.
우린 악수를 하고 서로를 마주 보았어. '우리의 아이에게 내 키스를 보내겠어. 난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 이건 분명한 거야. 다 잘 될 거야. 고마워'
그는 간수에게 이끌려 가면서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어. 그리고 그게 그와의 마지막이었지."
"그럼 클레레는? 그는 정말로 독약으로 죽었니?"
"그래. 사형선고가 한발 늦은 셈이 됐지. 난 그로부터 이틀 후에 그 소식을 들었는데 게슈타포들이 날 찾아왔더군. 하지만 그들은 내게서 아무 것도 발견해 내지 못했어. 난 정색한 채 말했어.
'내가 어떻게 그에게 독약을 줄 수 있었겠어요? 면회는 꼭 두 번밖에 안 했고 그때마다 간수가 차입한 물건을 세세하게 조사했다는 것쯤은 당신들도 알고 있는 일 아니에요? 남편은 늘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려고 독약을 지니고 다녔어요.' 라고.
클레레는 퍼시의 아주머니에게 데려다 주었는데 거기서 아들을 낳았어. 난 매주 그녀를 찾아갔었어."
"어쩌면, 어떻게 싫어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니?"
"퍼시의 죽음으로 흥분해 있던 처음 얼마동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인간은 그렇듯 상식 밖의 상황에 놓이면 선악에 관계없이 일상적이 아닌 일을 할 수도 있는 법이거든. 하지만 차츰 그 일이 어려워지기 시작했어. 그녀가 아들을 낳고 다시 직장에 나가게 되자 곧 손을 끊었어. 퍼시의 죽음에 관해서는 반 년 뒤에야 진실을 알게 되었어. 나는 그렇다고 내가 느낀 바를 설명할 순 없었어. 나는 조금은 끔찍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지."
정도 이상의 의무감과 확고부동한 신뢰감, 그리고 실제로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은 비인간적이고 지독한 감각 같은 것이 내포돼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니나는 냉혹하지도 메마르지도 않다. 오히려 예민하고 열정적인 편이다. 그녀는 그러한 태도를 지켜 나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을까?
나는 이제야 비로서 왜 니나가 다른 사람에게서 그 같은 강함과 용기를 요구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니나는 얼굴에 표정이 없었고 엄숙하기까지 했으므로 나는 그녀의 이야기로 해서 내가 받은 충격을 나타낼 수가 없었다. 나는 무슨 말이건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그래도 네가 퍼시를 사랑한 것 같은데?"
"모르겠어. 그걸 조금도 알 수가 없어"
"그래도 넌 그와 결혼했었잖니?"
"그건 출발부터가 내 의사와 무관한 거였어. 뭐랄까. 마치 그물에 걸려든 짐승 꼴이었지. 모든 게 너무 빨리 진행이 돼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멍청하게 그물에 끌려들고 만 형편이었어."
"니나, 네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단 말이니?"
"가능했어. 솜씨만 놀라우면 나 같은 사람은 쉽게 무릎을 꿇지. 난 기차에서 그를 보았을 때 외면했었어. 그런데 그는 나와 같은 역에서 내려 함께 개찰구를 나오고 같은 전차를 탔어. 그 동안 줄곧 나를 쳐다보았는데 그 시선은 지극히 자연스러웠어. 마치 거절 따윈 생각지도 않는다는 듯한, 이미 내 몸에 손을 댄 것 같은 표정이었어. 그는 마침내 퀘니긴 가에서 말을 건네 왔고 5분 후에는 내 팔을 잡고 걸었고 한 시간 뒤에는 내게 키스를 했어. 그리고 다시 한 시간 뒤에는 그의 신상명세서를 보는 듯 많은 것을 알게 됐지. 건축가이면서 그는 자기 건축 양식에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돈은 별로 없지만 결혼해서 아내를 먹여 살릴 정도의 능력은 있다는 것 등등. 우린 헤어질 무렵엔 서로 주소를 알려 주었고 주말 등산을 약속했고 그걸 실천에 옮겼어. 여행은 말할 수 없이 근사했어. 모든 만물이 가을의 황금빛에 잠겨 있었고 나는 퍼시 만이 아름다운 날씨와 근사한 가을의 즐거움의 원인이라고 믿고 싶었어. 뮌헨으로 돌아왔을 땐 약혼한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서로 친숙해져 있었지."
"그가 네 마음에 들었단 말이냐?"
"그걸 모르겠어. 다만 그는 힘과 탄력에 넘쳐 있었어. 인생을 휘어잡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고 생각을 별로 안하는 타입이었지.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안정을 지닐 수 있다는 건 유쾌한 일이었어. 물론 그건 진짜는 아니었지만 그 무렵의 나는 그 정도로도 만족할 수 있었어. 너무 근사한 가을이었고 난 아내가 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지. 내 젊음에 종말을 고하고 나를 그와의 생활에 맞춰나갔던 거야. 우린 새 집을 구했고 거기에 어울리는 가구를 사들이기 시작했어. 여기엔 화분, 저기엔 커튼,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재미있었고 신부 노릇도 즐거웠어. 난 자신이 지극히 정상이 되었으며 아주 달라졌다고까지 느꼈으니까. 퍼시는 좀 경박한 게 흠이었지만 젊고 박력이 넘쳤어. 그가 때때로 나를 경멸하는 것조차 좋아했을 정도야. 그걸 그의 우월감의 표시로 받아들였거든."
하지만 난 그것이 니나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 뜻을 말했더니 니나는 대답했다.
"언닌 내가 얼마나 순종하기 좋아하는지 모를 거야. 난 명령받고 싶고 아주 부드러워지고 싶어."
"니나, 그건 네 상상에 지나지 않아. 넌 아주 고집이 세고 독립심이 강해"
"그야 그래야 하니까 어쩌지 못해 그런 것뿐이야. 모두들 니나 부슈만을 현대적이고 해방된 여성의 한 상징처럼 말하지. 자신과 아이들의 생계를 혼자 꾸려 나가고 남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남자처럼 생각이 분명하고 대담하게 생을 사는 것으로 알지. 하지만 그건 나의 일부분에 불과한 거야. 내겐 절대 필요한 것에 대한 강한 감각이 있어. 그러나 나도 결혼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평범한 여자일 뿐이야."
니나는 말끝에 약간 웃었다. 나는 조금은 화가 난 목소리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넌 하려면 열두 번이라도 할 수 있었어."
니나는 암울한 시선을 잠시 내게 주더니 말했다.
"난 생각보다 구식이야. 난 결혼을 믿어. 상식적인 여자라면 누구나 원만한 결혼 생활을 하고 싶어 하고 모두들 조금은 폭군적인 남편을 좋아하는 법이야. 언닌 그렇잖아?"
"아니, 난 늘 여자의 자유를 외치는 쪽이지. 나 자신이 지극히 착한 아내였지만 말야. 글쎄 모르겠어. 내 남편이 폭군적이었다면 그를 사랑했을지 어떨지. 하지만 그는 전혀 그 반대지. 늘 사려 깊고 자상하고 뭐든 내 멋대로 방임해 두는 편이니까"
"그래?"
니나는 창 밖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내가 무슨 얘길 하려던 참이었지?"
"퍼시와의 결혼 얘기 아니었니?"
"아니, 아니야. 11월말이나 12월경 이었을 거야. 내가 퍼시를 슈타인에게 데려갔던 일을 애기할 작정이었어. 왠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건 실패로 끝났어. 나는 그때 충동적으로 퍼시에게 슈타인은 오래된 내 친군데 함께 방문하지 않겠느냐고 했어. 그는 응해 주었어. 물론 슈타인에겐 미리 약혼을 알리고 퍼시를 소개하고 싶은데 괜찮겠냐고 해 두었지. 그는 지극히 정중한 답장을 보내왔는데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어. 난 자신의 행동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그에게 갔어. 두 남자는 첫 순간부터 적이었어. 피차 용납하기 어려울 만큼 달랐으니까. 그들이 반감에 차서 악수하는 장면은 마치 선전포고를 연상케 하더군. 그때 퍼시는 슈타인이 나를 사랑했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는데도 말야. 다행히 헬레네가 함께 있으면서 차를 대접해 주었는데 전에 없이 다정스럽고 예의 있는 태도였어. 아마 당분간은 슈타인을 위해 마음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작용했던 탓일 거야. 대화는 헬레네와 나 사이에서만 이루어졌고 두 남자는 적의로 굳어진 채 담배만 피우고 있었어.
퍼시는 거리로 나오자 내뱉듯 말하더군. '유쾌한 친구는 아니더군. 둘 사이에 뭔가 있었지?' '아니, 우정 이상은 없었어.' 내 말에 퍼시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웃더군. '그 친군 내가 널 빼앗았다고 화를 내고 있어' 그의 말에 화가 치밀었지만 잠자코 있었어. 그는 다만 당신 영혼의 감수성의 결핍을 미워하는 거야.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만두었지. 한순간 난 매우 확실하게 퍼시와 결혼해선 안된다는 걸 느꼈지만 그저 느낌으로 끝내고 말았지.
난 어떤 경우에도 그에게 성실하고 싶었거든. 결국 난 신의 경고를 무시했고 그 보복을 받은 셈이라고 할 수 있어. 경고는 두 번 씩이나 있었거든. 크리스마스 때였어. 퍼시는 그의 집에서 내가 크리스마스를 보냈으면 하더군. 난 그의 집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어. 그는 자기의 가족을 그리 사랑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애착심은 대단했었어. 그의 부친은 영국인을 아버지로 해서 태어났는데, 그 아버지는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채 행방불명됐다는 것과 키티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있는데 화가라는 것이 내가 그의 가족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어. 벨을 누르자 앞치마를 두르고 밀가루 반죽을 잔뜩 묻힌 뚱뚱한 부인이 나왔어. 그의 어머니였어. 부인은 우리를 힘 있게 포옹하고는 2층을 향해 외쳤어. '키티, 손님이 왔다. 내려와 보렴. 퍼시와 그의 색시다!' 그러자 2층에서 '난 제발 빼줘!' 라는 외침이 들려왔어. 어머니는 다시 외치더군. '좋아, 우린 너 없이도 커피를 잘 마실 테니까' 나는 잠시 퍼시가 원망스럽더군. 내게 마음의 준비라도 시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 때만 해도 나는 그다지 유머 센스가 있는 편이 못 돼 마치 기습을 당하는 기분이었어. 지금이라면 웃었을 텐데 그때는 그렇지 못했지. 난 한풀 톡톡히 꺾여 부엌에 웅크리고 있었지. 어머니는 과자를 굽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 그때 벌써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몇 바구니나 구워져 있었어. 나 대체 저 많은 걸 누가 다 먹을까 의심스럽더군. 어머니는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쉴 새 없이 지껄였는데 난 부엌의 연기며 김 한복판에 앉아서 그 소리를 아득하게 듣고 있었어. 퍼시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없었어. 키티가 한 번 얼굴을 내밀었을 뿐인데 열아홉 살쯤 돼 보였고 미인이었어. 어머니처럼 검은 머리에 붉은 스카프를 매고 담뱃재를 아무 데나 털고 다녔어.
'당신이 니나로군요. 이 집으로 시집을 올 용기가 생겼다니 축하해야겠군요. 아마 많은 기적을 겪게 될 거예요. 미리 공개는 않겠지만요' 그녀는 재빨리 지껄이더니 담배꽁초를 크게 원을 그리며 부엌 아궁이 속으로 던져 넣고는 나가버렸어. '미친 계집애' 어머니의 말이었어. '하지만 색시, 언짢게는 생각지 말우.' 그러더니 키티가 나간 쪽을 향해 고함을 쳤어. '선물 교환 시간에 맞추어 일찍 들어와!' 그러자 키티는 지지 않고 '내가 그런 고리타분한 축하놀이를 할 것 같아!' 하고 외치더군. 12시 전엔 안 들어올 테니 그런 줄 알라며 그냥 사라져 버렸어. 이윽고 퍼시가 오고 트리에 촛불을 켤 차례가 됐는데 그때 마나님은 문득 영감님이 안 계시다는 데 생각이 미쳤어. 8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우린 부엌에서 기다리다 지쳐 트럼프를 치다가 져녁 식사를 했어. 난 그의 어머니의 비위를 맞추느라 터무니없이 많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안 되었어. 어머니는 무지하게 많이 먹었는데 다른 사람은 적게 먹을 수도 있다는 걸 납득 못하는 것 같았어.
아버진 10시가 지나도록 안 나타났어. 퍼시가 아버질 찾으러 간다기에 나도 따라 일어섰지. 그랬더니 내 소관이 아니라며 나를 눌러 앉혔어. 아들이 나가 버리자 어머니는 비참한 표정으로 방안을 서성거렸어.
'이 영감쟁이는 일생을 두고 이 지경이라니까. 그는 자신이 이해를 못 받는다고 여기고 자기가 특이한 인간이라고 믿고 있어. 그것도 병적으로. 그런데 왜 일생을 말단 관리로 만족하고 노력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 그 모든 게 내 탓이라는군. 내가 자기의 날개를 꺾었다는 등, 자기 발에 납덩이처럼 매달려 있다는 등, 평생의 불행의 원인은 나라는 등 별별 소리를 다 해대는 거야. 실제로 내가 없었더라면 벌써 죽었을 위인이 말야. 이 집, 이 가구, 그릇, 이 옷가지, 모두 내 돈으로 마련한 거야. 그런데도 내가 자기의 불행이라니. 원.'
어머니는 자기 가슴을 마구 두들기기까지 했어. 난 험담이 듣기 거북해 슬쩍 화제를 바꾸었지. '퍼시는 어때요?' 하고 말야. '그 앤 날 닮았지. 하지만 요주의 인물이지. 열다섯에 첫 계집을 가졌던 후로는 늘 그랬으니까. 사실을 말하자면 그건 제 아비에게 물려받은 천성이라고. 그 위인은 아직도 그 버릇을 못 고칠 정도지. 퍼시는 그 점만 제외하면 제법 똑똑하지. 색시가 그를 붙들어 둘 수만 있다면 다 잘 될텐데'
난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는 외투를 입고 그대로 뛰쳐나오고 말았어. 영원히 돌아가지 않을 작정으로. 퍼시와 그 집 가족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거지. 난 꽁꽁 얼어붙은 들판을 걸었어. 안개가 걷힌 하늘엔 별이 수없이 총총히 깔려 있었어. 그 때 누군가가 땅에 엎드려 있는 게 보였어. 남자였는데 난 그를 흔들었어. 독한 브랜디 냄새가 물씬 풍겼고 추위에 얼어 산 사람 같지가 않았어. 그 때 육감이랄까. 그가 퍼시의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더군. 황량하게 얼어붙은 들판에는 나와 그 사람뿐이었어. 무서운 생각이 들더군. 소리쳐 퍼시를 부르며 노인을 끌고 가려 했지만 움쭉도 안 했어. 생각지도 않게 울음이 터져 나오지 않겠어. 그 길로 집으로 달려갔는데 다행히 도중에서 퍼시를 만났어. 그는 노인을 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노인은 반은 가사 상태에서 자기를 죽게 내버려 두라고 중얼거렸어. 생활은 이제 지긋지긋하며 그렇게 살기엔 자기는 너무 아깝다나. 어머니는 쓸데없는 소린 그만 두라고 면박을 주면서 더운 물로 씻긴 후 차를 끓여 마시도록 했어. 노인의 넋두리는 계속되고 퍼시는 내게 안방에 가 있으라고 위협조로 말했어. 난 크리스마스트리 옆에 얼마동안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퍼시에게 화를 내며 따지듯 말했어. '왜 나와 결혼하려는 거지?' 난 지금도 그의 대답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그때 그의 대답은 내게 이상한 위안을 주었어.
'나는 너하고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라고 했어. 그는 나의 약점을 알고 정곡을 찌른 셈이지. 나는 비겁하긴 싫었고 어떻게든 버텨 나가리라 작정했어. 용기를 내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며 속으로 다짐했어. 사람은 뭐든 다 겪어둘 필요가 있다고. 난 그 날 모르고 있던 많은 것을 배웠어. 아주 기막힌 성탄절이었지. 모든 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언젠가는 그 이야기를 소설화 하리라 마음먹었어."
니나는 문득 쿡쿡거리며 낮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퍼시 아버진 확실히 특이했어. 그는 자신에게 상당한 연민을 느끼고 있었어. 성탄절 날 아침 식탁에서 그는 간밤의 일을 매우 낯 뜨거워 했어. 나와 잠시 악수를 한 뒤 자기 자리에 앉더니 퍼시의 어머니를 슬쩍 곁눈질했는데 펴시 어머니는 경멸의 시선을 던지며 남편에게 과자 접시를 밀어주더군. 퍼시 아버지는 상당한 미남에 은발을 기른 모습이 영국 신사다운 면모가 있었어. 외모로 보면 영락없는 학자 타입이었어.
그는 별로 내키지 않는 태도로 식사를 했어. 마치 그런 너절한 작업을 증오한다는 표정으로 말야. 하지만 퍼시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과자 두 개를 더 놓아 주었고 그는 복종에 길들여져 있다는 듯이 그것을 먹었어. 어머니, 퍼시, 키티는 무슨 먹기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무지하게 많은 분량을 먹어 치웠어. 식사가 끝나 부엌에서 설거지를 거들려고 했더니 아버지가 내게 손짓을 하더군. 그는 나를 자기의 다락방으로 데리고 갔어. 협소하고 누추한 방이었어. 쇠난로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손수 재를 퍼내고 불을 넣고 굴뚝 청소도 혼자 했어. 그 방은 집안 식구에게는 금단의 구역인 듯했어. 아내가 방 청소나 유리창을 닦는 일도 금지되어 있었고. 그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훔쳐 내가 보았다나. 그는 터무니없이 작은 소파에서 잠을 잤고 뒤뚱거리는 조그만 책상에 앉아 일을 했어. 그는 지나치게 정중한 태도를 취했는데 그 우아하기까지 한 태도는 차라리 희극적이었어. 난 그 방에 하나밖에 없는 의자에 앉았어. 그는 침대용 소파에 앉는 게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던지 난로 옆 벽에 기대섰어. 그리고는 전날의 숙취가 조금은 덜 깬듯, 그러나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어. 친애하는 며느리여, 로 시작했는데 손을 깍지 끼며 다시 정정했어. 미래의 며느리여로. '미래의 며느리여, 이 집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지극히 모순투성이로 구성돼 있는 이 가정의 일원으로서의 너를' 그는 처음엔 나지막하게 그 다음엔 차츰 속삭이듯한 어투로 바꾸어 갔어. '이 집의 구성원은 각기 서로의 불행을 위해 태어났지. 각자는 모두 가치 있는 인간이지만 서로에게는 쇠사슬과 방해물에 지나지 않아. 내 일생의 반려자인 마나님은 아주 능력 있고 주부의 모범이지만 고원한 이상을 향한 노력을 전혀 이해 못하지. 또한 모든 정신적인 것을 의심하며 나를 의심하고 내가 돈을 충분히 벌어 오지 못한다고 나를 경멸하고 있지. 도대체 돈이 내게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를 모르거든! 그 다음 내 딸 키티는 왕성한 생명력의 소유자지. 재능도 있고 하지만 감수성이 없고 오만하고 역시 나를 우습게 생각하지. 네가 남편으로 택한 퍼시, 그 애는 어머니의 생활력과 영국인 할아버지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지. 하지만 그 고집만은......' 거기서 그는 단호한 어조로 잘라 말했어. '그와 행복하게 살기 바란다.' 난 그 말의 격렬함에 깜짝 놀랐을 정도야. 나는 '퍼시에 관해 좀 더 말해 주세요' 했지. 그는 나지막이 '아무것도 얘기할 것은 없어' 라고 하더군. '생은 어렵다. 어둠과 함정만이 군데군데 존재할 뿐 정말 행복한 사람은 없어. 모든 게 기만과 환상일 뿐 누구도 타인을 알지 못한다.' 그는 문득 내게 고통스러운 눈길을 보냈어. '자신을 마비시키는 것 이외에 우리에게 무엇이 있니? 난 보다시피 술을 마시고 넌 어젯밤 참혹한 꼴을 목격했어. 그러나 나는 너의 따뜻한 이해를 느낄 수 있다. 넌 이 괴물들 가운데 단 하나 연민을 지니고 있는 따스한 마음의 소유자이다. 넌 내가 이곳에서 받는 고통을 알 거야. 넌 이들 셋과는 처음부터 다르게 만들어진 인간이다.' 그리고 그는 문쪽으로 귀를 돌리고 발끝으로 내게 걸어와서 소곤거렸어. '퍼시와 결혼하지 말거라'
이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어. 그의 말이 옳다고 느낀 순간 어떤 반발로 나는 아주 화가 난 태도로 일어섰어. 그리고는 단호하게 말했어. '그건 제가 알아서 할 문제예요. 다른 사람의 개입을 원치 않아요' 그러자 그는 몹시 절망적으로 중얼거렸어. '아, 난 늘 이런 식으로 당하지. 최선을 다해 말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경멸한다. 나의 어떤 행동이나 말도 옳지 못하다고 몰아붙이고, 난 경멸받기 위해서 태어난 놈이라고' 그는 눈물을 흘렸는데 강한 연민이 느껴졌지만 위로의 말을 찾기는 어려웠어. 나는 그가 좋았어. 퍼시보다도 그가 가깝게 느껴졌을 정도니까. 하지만 나의 호감 속에 경멸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야. 그의 말대로였어. 누구나 다 그를 경멸했고 나 역시 본의는 아니었지만 경멸했어. 만약 그가 좀 더 다른 조건에서 태어났더라면 필경 외모만큼의 인간이 되었을 거야. 어쨌든 그는 그 무렵 상심하고 있었고 그의 자기 연민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았어. 마침 퍼시가 나를 불러준 것이 고마울 정도였어. 그의 아버지는 내가 1주일간 머무는 동안 어찌된 셈인지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어. 그랬는데도 매일 그리 유쾌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는 거야. 노부부간의 싸움이 아니면 키티와 마나님의 싸움, 아니면 퍼시와 키티간의 말다툼. 언제나 욕지거리가 끊이질 않고 문을 쾅쾅거리며 여닫곤 했지만 누구 하나 마음을 쓰지 않았어.
말하자면 그런 싸움은 그들에겐 생활의 하나인 필수적인 의식인 셈이었어. 지금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노부부는 폭격으로, 키티는 독약을 잘못 먹고 죽었어. 키티는 전쟁 중에 화학 실험 조수로 있었으니 잘못 먹은 게 아닐지도 몰라. 그리고 퍼시는 그렇게 됐고. 그들에겐 아예 친척 한 사람도 안 남았어. 마르틴이 유일한 혈육인 셈이지. 난 마르틴이 그 집안의 성질을 너무 많이 닮은 것 같아 때때로 걱정스러워. 하긴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 언니나 나의 경우만 해도 부모를 닮았다면 어떻게 됐겠어? 차갑고 오만한 어머니와 편협하고 의심 많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우리들은? 그렇지만 우린 부모들이 어떠했는지 모를 정도거든. 난 가끔 늙은 후의 나를 생각해 볼 때가 있어. 아마 늘 불만투성이인 침울하고 의심 많은 노파가 되겠지. 가난뱅이가 되어 양로원 신세를 질 지도 모르고 말야."
"아니, 넌 결코 그렇게 되진 않아"
나는 외쳤다
"그렇게 되기엔 넌 너무 생기에 가득 차 있어"
"아, 언닌 모르는 것 같군, 사람을 완전히 다르게 만드는 고통이 있다는 걸 말야."
나는 다시 니나가 고통의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밤이 되었다. 우리는 한동안 묵묵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이 며칠은 내가 겪은 가장 기묘한 날들이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니나와 오랜만에 얘기도 좀 하고 도와주려고 온 게 분명한데 지금은 그저 구경만 할 따름이다. 니나가 한 남자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나는 자신의 발밑에서 방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고 그 모든 게 나와 무관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나는 이 드라마의 중심부에 불쑥 뛰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결코 유쾌할 수 없는 드라마인데.... 나는 갑자기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보았다. 포장은 찢기고 무대에서는 찬 바람이 몰아친다. 나는 내 말이 한마디도 니나의 마음에 전달되지 못함을 알면서도 절망적으로 니나를 불렀다.
"니나, 넌 자신에 대해 너무 잔혹하다고 생각지 않니? 넌 지금 생과 행복을 자신에게서 억지로 떼어 내려 하고 있지만 언젠가 후회할지도 모르잖니? 난 네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니나는 피곤한 표정으로 내 말을 받았다
"행복하게 라고? 그게 무슨 소리지?"
그녀는 내게로 몰을 돌리며 나와 또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를 변호하기라도 하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언닌 내가 절망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사실이야. 하지만 난 행복해. 내 말 알겠어?"
순간 나는 니나가 늘 극단의 경우에만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녀의 힘이 극단적인 한계에 머물 때만. 하지만 난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슬픔이 나를 휩쌌고 위안을 받아야 하는 건 바로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이제까지의 습성대로 산다는 일은 힘들 것 같았다.
"밖에 나가고 싶어. 언닌 안 갈래?"
니나는 충동적으로 일어나며 말했는데 나는 그 어투에서 그녀가 혼자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어쩌면 나와 줄곧 같이 있는 것이 힘겨워졌는지도 몰랐다.
"난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어. 혼자 가렴."
나는 창으로 니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걸음은 너무 빨라 거의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문득 모퉁이에서 발을 멈추더니 돌아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밤거리에서 니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나는 그 때에야 비로소 확실하게 니나의 철저하고 완전한 고독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어둡고 질척거리는 거리에서 할 일을 잊은 사람처럼 한동안 막연히 서 있었다. 이윽고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 놓더니 공원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지독한 우울에 휘감겨 위스키를 한 잔 가득 따라 단숨에 비워 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심한 시장기가 느껴졌다. 흥분과 시장기로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니나가 절망에 빠져 밤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식욕을 느낀다는 게 부끄러웠으나 잔뜩 먹었다.
그 왕성한 식욕에는 일종의 반항심도 들어 있었다. 내가 이 혼란의 와중에 더 이상 말려들 필요가 있는가. 나도 사실 집에 가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요 며칠 동안의 일은 잊어버리는 게 좋으리라. 나는 그처럼 엄청난 결단과 단념과 격렬한 감정을 견디기 어렵다. 나는 니나가 아닌 것이다. 내게는 내 나름의 생이 있지 않은가.
나는 식사를 끝내고 나서 니나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그녀가 밤거리를 방황하는 것도 나를 빈 방에 혼자 남겨 두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니나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슈타인의 일기를 펼쳐 들었다. 1934년 4월 22일에 그는 '니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 나갈 것이지만 나는? 나는?' 이라고 써 놓았다.
그 뒤에는 마치 긴장으로 가득 찬 긴 내면적 사건으로 뒤덮인 불안한 공백처럼 보이는 빈 페이지에 이어 다시 일기가 이어져 있었다.
8.생의 변화
1934년 12월 2일
아침 일찍 니나의 약혼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나는 대체 왜 몇 달 동안 나를 피하던 니나가
내게 다시 돌아오리라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했던가! 그리고 왜 지금 이 소식에 이토록 흥분하는가?
나는 오늘 온종일 다흐아우어의 늪을 방황했다. 그러나 내가 어디에 와 있는가도, 비가 내린 것도, 외투가 흠뻑 젖은 뒤에야 알았다. 그러니까 니나가 약혼을 한 것이다. 이제 결혼을 할 테지. 니나가 사랑을 했고 드디어 결정을 한 것이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까지도 나는 그 사실이 납득이 안 갔다. 난 결코 그것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벽, 이제까지 나의 생명을 둘러싸고 있던 벽의 기묘한 붕괴, 최후까지 매달려 있던 희망이 무너짐, 지독한 절망,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이 가장 흔해 빠진 절망. 이제 생은 지나가 버렸고 모든 것은 끝났다. 이제 이 손으로 다시 무엇을 잡을 수 있겠는가? 대체 무엇이 이 손에 남아 있을 것인가? 티끌이 아닌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먼지의 냄새를 맡는다. 먼지는 어디에나 있다. 그 먼지는 질식이라도 시킬 듯이 두텁게 나를 덮고 있다. 나는 니나의 행복을 축복해 주어야 하리라. 그녀도 그것을 기대할 것이다. 관례상이라도 답장을 보내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라.
그 장에는 편지 초안이 셋이나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 중 두 장은 반은 찢어지고 구겨진 것을 다시 펴서 붙여 놓은 것이었다.
친애하는 부슈만 양
진심으로 약혼을 축하합니다.
새로운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두 번째 편지는 처음 것과 아주 달랐다.
니나, 넌 그렇게 해서 끝내 나를 등졌구나. 넌 행복하겠지.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으리라. 그런데 네가 한 짓은 대체 뭐지? 물론 넌 그걸 모를 것이고 그건 당연하다.
넌 아직은 이런 절망을 알지 못한다. 넌 어떤 고통 속에서도 다시 희망이 솟아나겠지만 내겐 파멸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제부터는 방향 감각도 목적의식도 상실한 채 기계적인 발걸음을 옮기고 날이 갈수록 더욱 생에 대해 무감각해질 것이다. 마비는 지금 척추로 진행 중이다, 곧 중추 신경에 이르러 나는 뻣뻣해지고 말겠지. 그리고 너를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넌 불가결한 일, 네가 그렇다고 여기던 일을 하는 것일 테니까. 넌 이제 닿을 수 없는 먼 곳으로 간다. 이것만이 침묵에 빠지기 직전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다.
이 편지는 펜으로 줄까지 쳐 있었으나 잉크 자국을 지우려고 한 흔적이 있었다. 그는 왜 이 편지를 간수했을까. 그는 그때 이미 이 편지를 언젠가는 니나에게 보낼 작정을 했는지도 모른다. 세 번째의 편지가 결정적인 초안인 듯했는데 며칠 후의 날씨가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부슈만 양
확실한 심사숙고 끝에 이루어졌을 당신의 생의 변화를 내게 알려준 데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것의 반은 선으로 지워져 있고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다.
당신은 당신 생의 새로운 변화를 깊이 생각해서 결정했을 것이고 당신 특유의 용기와 결단으로 그것을 지켜나가리라 믿습니다. 나는 당신이 만족하실 것과 당신의 새로운 생활이 당신의 발전에 도움이 되길 기원합니다.
이어 다음 장에는 일기가 계속되었다.
1935년 12월 8일
니나는 대체 어떻게 퍼시를 내게 데려올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니나는 그와 그녀의 방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 왔었다. 퍼시는 그 금발과 파란 눈만으로도 화려한 영웅이 될 수 있는 그런 류의 젊은이였다. 자신에게 회의를 느껴 본 적이 없는 만큼 조금은 당돌하고 지나치게 건강하고 성공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지성의 소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선 좋은 녀석으로 통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분명 그 또래의 젊은이들에게는 좋은 친구이리라. 감춘 것이 없으니 솔직하고 어떤 난관도 없으니 쾌활하다.
게다가 요즈음 여성들이 흠모하는 뚜렷한 남성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통찰력도, 신비스러움도, 사고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니나가 찾던 정체이다. 나는 그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다. 그녀의 그 부조리해 보이는 선택은 쥐덫 앞에 놓인 그녀의 본질이 보다 가벼운 상대를 필요로 했던 데에서 생겨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를 비밀스럽게 인도하고 있는 모순된 정신이 나와는 극단으로 다른 남성을 선택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니나를 위압한 듯하다. 어쩌면 니나는 그런 류의 남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당돌하고 철면피한 관능이 내게 없음을 불만스럽게 여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녀를 소유할 수 있었던 기회를 끝내 다 놓쳐 버리지 않았던가? 니나 같은 여자까지도 그렇듯 생각 이상으로 본능에 좌우되는 것인가? 여자란 질식할 만큼 조롱받을 수만 있다면 정신적 이해 따윈 관심 밖이란 말인가? 여자에겐 침대가 영혼보다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니나는 퍼시와 함께 자고 그의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면 그만인 것이다. 오늘 오후의 이별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쓴맛이야 내 혀 위에 잠시 머물렀다가는 곧 사라질 것이다.
1936년 새해 아침
언제나처럼 헬레네와 함께 아네트 아주머니 댁에서 성탄절을 보냈다.
나는 니나가 마지막으로 거처했던 방을 썼다. 그 방에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한 인상이 깃들여 있었다. 지극히 아름다운 운명에의 공포를 감지하며 나는 일기장을 펼쳐든다. 나는 큰 충격을 느끼며 이런 대목을 읽는다.
'이제는 전처럼 다시 생의 의미 따위를 묻진 않겠다.'
지금도 나는 그것을 묻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된 것인가? 나는 죽음 같은 잠을 잤다. 니나가 나를 버렸을 때 내 마음은 얼어붙은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 같은 상태로 나는 자신에 대한 아무 의혹도 없이 2년을 보냈으나 아제 나는 깨어났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며 감각한다. 나는 산다, 나는 산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전혀 알 수 없다.
헬레네의 제안으로 난 별다른 흥미 없이 이번 여행을 떠났다. 아주머니의 서재에 틀어박혀서 매일을 보냈다. 감히 밖으로 나갈 용기가 없었다. 그것은 공포의 감정 때문이기도 했다. 추억에의 두려움, 각성과 고통의 두려움 말이다. 나는 어제 아주머니에게 불려갔다. 아주머니는 너무 늙고 쇠약해 침대에 누워 생활하고 있었으나 눈빛은 예리했고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확실하게 다가온 죽음이 그녀에게 보다 예리한 통찰력과 총명함을 부여하고 있었다. 하긴 일평생 그래 왔지만 아주머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넌 고집불통이 돼 버렸다. 그 애 때문에 그러니?"
나는 재빨리 마음의 문을 콱 닫아 버렸다. 아주머니는 대답을 기대하진 않은 듯 계속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얘기 안 해도 괜찮다. 이미 예감하고 있던 일이니까. 넌 내 말을 믿지 않았지. 뭐 그건 아무래도 괜찮다. 모두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하진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네가 지금 취하고 있는 옳지 못한 태도야. 넌 무엇 때문에 어리석은 반항심을 품고 뻣뻣하게 굳어져서 구석에 웅크리고 있니? 소원이 성취되지 않아서냐? 그게 무어 그리 소중한 것이라고. 그리고 넌 그 애와 결혼했더라도 분명 행복하지 못했을 거야. 그건 너 역시 잘 알고 있는 일 아니냐?"
나는 마구 화가 치밀었다. 그것은 오랜만에 나의 내부에서 일어난 활기 넘치는 동요였다. 아직은 너무 미약해 한마디 반대의 말도 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머니는 틈을 주지 않고 계속했다.
"넌 어느 만큼이나 모욕을 더 견딜 셈이니? 아닌 척하지 마라. 넌 모욕당했다고 느끼고 있어. 네 대신 다른 남자가 선택된 것에, 넌 그걸 이해하지 못할 게다. 다른 누구라도 그런 경우에는 이해하기 힘든 법이지."
나는 재빨리 말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란 건 아주머니도 잘 아시잖습니까?"
아주머니는 내 팔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물론 안다. 그게 네 생의 마지막 희망이었다는 걸, 넌 아주 나를 감동시켰어."
그 말을 하는 아주머니의 표정은 진지했고 전에 없이 온화했다.
"피곤하구나. 그만 나가 보거라"
나는 밖으로 나와 거의 무의식적으로 전에 니나와 함께 걸었던 길을 걸었다.
내가 그것을 알아챘을 때 격렬한 고통이 엄습해 왔다. 고통은 곧 지나가고 말았으나 나는 거의 혼미 상태에 빠져 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파란 하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눈이 없는 한겨울의 정원은 벌거벗고 있었으나 살아서 부드러운 빛을 뿜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니나가 즐겨 앉던 돌로 쌓은 풀장 곁에 와 있었다. 순간 나의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 없어졌다. 그것은 거의 난폭한 용해였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 목적도 없이 뜰을 지나고 잔디밭 출입문을 지났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나는 높은 산 위의 숲 속에 있었다. 울창하게 들어선 나무숲과 덤불이 둘러쳐져 있었다. 낯선 풍경이었으나 무서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선 채 사방을 둘러보며 마치 이제껏 한 번도 숨 쉬지 않았던 것처럼 크게 호흡했다. 공기는 차고 맑았다. 나는 어느새 이제까지의 과거가 알 수 없어지고 말았다. 나는 오직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며 숨 쉬었을 뿐이었다. 나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간신히 마을의 입구를 찾아 낼 수 있었는데 그렇게 산을 내려오는 동안 차츰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아네트 아주머니는 니나가 내 생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했었다. 그럴 경우 그것은 단순히 니나 때문만은 아니지 않을까? 니나는 그저 하나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니나와 결혼하고 싶어 한 내 욕망은 단순히 숙명에서 도피하려는 본능에 불과하지 않은가? 나는 니나를 진실로 사랑한 것이 아니잖은가? 아직은 그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며 나는 아직 그것을 전부 알지 못한다. 한밤중이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무엇이 내게서 요구되었는가를.
나는 체념의 고통에 자신의 육신을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스스로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아주머니 말대로 최후의 생의 희망이었으며 니나를 잃은 나의 고통이란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의 심정 이상이 아님을 고백해야 하는가? 나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시간이 꽤 지났다. 나는 잠들지 못했으나 수면제를 복용하진 않았다. 그대로 아침을 맞았다. 그때 나는 문득 고통이라는 친구가 내 생의 가장 깊은 심층에까지 이르렀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심층을 뚫어 새로운 물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새해의 새 아침이다. 나는 난생 처음 유쾌함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감을 느꼈다. 그리고 스스로 몇 년을 그 안에서 살아왔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생의 위기를 극복한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지금도 나는 안다. 또한 다시는 그것을 의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리라. 다시는 잃어서는 안 될 그녀를.
나는 나를 벗겨준 고통에 고마워한다. 내 생에 응고된 고통을 간밤의 눈물이 씻어 주었으며 아제 나에게 남은 것은 비애가 깔린 단념의 유쾌함뿐이다.
니나는 내가 지니고 싶고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의 상징이며 비유일지도 모른다. 언제까지나 그것에 변함이 없기를. 이제 니나는 내게 생 자체의 상징인 것이다. 니나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그녀를 통해서 내게 일어난 심적 변화에 대해 감사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2년간의 그녀의 소식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런 긴 침묵 끝에 쓰는, 그것도 개인적인 내용의 편지는 그녀에게 단순한 방해물일 수도 있다.
나는 그녀를 방해하긴 싫다. 다만 니나가 살고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감사할 따름이다.
1936년 1월 30일
아직 나는 새해 아침의 그 기묘한 쾌활함을 잃지 않고 있다. 드디어 내 생은 보다 밝은 단계에 들어간 듯하다. 행복이 내게 순진무구한 미소를 보낸다. 누구의 변호에 의해서가 아니면 어떤 사정에 의해서겠지만 나는 정치적 불신으로 인해 빼앗겼던 교직에 복귀했다. 다시 교단에 서자 일부 학생들은 열광적으로 나를 환영해 주었는데 그것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을 정도였다. 그러나 몇몇 소수의 학생들은 날로 커가는 의심으로 나의 목적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나는 달걀 위에서의 유희를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 성공할 것인지의 여부를 나는 장담할 수 없다. 어쨌든 다시 강의를 계속하게 된 것만이 기쁘다. 개인적인 일도 잘 돼 나가고 있는 편이다. 더구나 나의 유일한 옛 친구인 알렉산더가 내게 온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그는 캄마슈피일에서 에그먼트 역을 노래하기 위해서 왔다. 그는 오랫동안 비엔나와 취리히에 가 있어서 소식이 두절되었었다. 그러나 그러한 오랜 격리도 우리 사이를 떼어놓진 못했다. 우리는 한 시간도 못돼 예전의 신뢰와 조용하고도 자연스러운 우정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니까.
나는 그와 같은 우정을 니나 이외의 다른 누구에게도 느낄 수 없었다. 알렉산더는 나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었기에 우리의 우정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내가 알기로는 아주 뛰어난 오페라 가수이며 그들 중에서는 가장 활동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어떤 인상이든 놓치지 않고 어떤 그물이라도 교묘히 빠져 나가는 특수한 인물이다. 그를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즐겁다. 그는 비지성적인 인간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억눌림 없는 조화가 주는 고상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성격은 폭풍처럼 정열적이어서 때때로 뜻밖의 박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여자들과의 연애 사건도 부지기수여서 내가 지켜본 것만도 한 다스는 될 것이다. 성실은 그와는 무관한 얘기이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아무런 해명도 없이 버린 여자들이 그 후로도 계속해서 그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오로지 내게만 그 애정의 지속과 집착을 보여준다.
이 일기의 여백에는 1937년 5월의 날짜가 적힌 다음과 같은 해석이 붙어 있었다.
만약 니나가 언젠가 이 페이지를 읽게 된다면 나나 알렉산더가 우리의 우정에 관해 악덕의 평판, 즉 니나가 언젠가 동성애를 가리켜 한 말을 부여할 의도는 결코 없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싶다. 물론 알렉산더를 향한 나의 우정이 종종 정도를 넘긴 했지만
나는 문득 니나가 걱정스러워졌다. 대체 이 밤중에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창가로 가서 어두운 한길을 내려다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린 철부지가 아닌 다음에야. 하는 생각으로 불안을 누르려 했으나 오히려 불안은 공처럼 부풀기만 했다. 슈타인의 일기 역시 위안을 줄 성질의 것이 못 되었다.
1936년 2월 16일
아, 이런 참혹함이라니! 나는 니나가 도움을 청해 왔는데도 도울 수가 없다. 오후에 전화로 니나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너무 놀라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니나는 저녁에 시간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애써 전처럼 반말을 하며 내게 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아니에요. 시내에서 만나는 게 좋겠어요. 8시에 전에 만났던 레스토랑에서 기다릴게요."
나는 8시까지 부질없는 생각에 시달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 쪽을 향해 앉아 있던 그녀는 이내 나를 발견했다. 안경이 훈기로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으므로 나는 쩔쩔매며 니나에게로 다가갔다. 안경으로 그녀가 흐릿하게 보였으나 나는 곧 그녀가 형편없이 여위고 창백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손은 몹시 찼다. 내가 준비해 간 몇 마디 그럴 듯한 말은 소용없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놀라셨지요?"
라고 했는데 쉰 듯한 음성이 낯설게 들렸다.
"그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또 불쑥 나타나 뜻밖이셨을 거예요"
"천만에"
나는 웃었다. 두 개의 가면은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이제 나를 놀라게 할 것은 별로 없었다. 니나는 먹다 남은 빵 부스러기를 짜증스럽게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제가 의논을 할 수 있는 분이라곤 선생님밖에 없었어요."
나는 지극히 예사로운 어투를 가장하며 물었다.
"무슨 의논인데?"
나는 여기에 온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제가 선생님께 전화를 건 것은 염치없는 짓이었어요, 그렇지만 선생님밖엔 없었어요."
나는 연민에 떨며 니나의 팔위에 내 손을 얹었다. 니나는 잠자코 있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 위안이 되는 듯했다. 그만큼 그녀는 인간적인 따스함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니나, 뭐든 얘기해 봐"
니나는 내게 복잡한 시선을 힐끗 던졌는데 그 눈길은
'당신은 절 도울 수 없어요. 누구도 그건 불가능해요'
하는 듯했다. 그리고 말하기가 몹시 어려운 것 같았는데 나로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 동안 별 일 없으셨어요."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다시 교단에 설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고맙군, 그래 결혼은 했나?"
나는 예사롭게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은 추억과 두려움, 그리고 희망으로 마구 뒤엉켰다.
"아직요. 그대로 서점에 있어요. 지금은 슈바벤에 있는 지점을 관리하고 있지요, 손님들은 모두 훌륭해요. 다른 출판사들은 우리 때문에 그다지 이익을 못 보죠."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짧게 웃었는데 그 웃음으로 그녀는 깨끗하고 다정한 예전의 니나가 되었다.
"아직 글을 쓰나? 내게 보여 주고 싶은 작품은 없어?"
나는 단순히 지껄이기 위해, 그리고 니나에게 이야기를 시키기 위해 물었다.
"계속 쓰고는 있지만 시간이 많이 나진 않아요. 그래 봐야 졸작이지만......"
그녀는 문득 나를 응시했다. 확실하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결심한 표정이었다.
"여름에 결혼을 할 것 같아요. 퍼시는 어느 건축 사무실에 취직이 됐어요."
그리고 그녀는 지극히 무감동한 어조로 놀라운 말을 했다.
"전 곧 아기를 갖게 돼요"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 표정을 읽은 그녀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런데 퍼시의 아기는 아니에요."
나는 이번에는 할 말을 잃었다.
"아직 당신 외에는 아무도 몰라요."
"니나, 나가자. 다른 곳에 가서 얘길 계속하지"
나의 단호한 태도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전 몸이 불편해요. 두 달째예요."
"그럼 집으로 가자. 차가 있으니까"
"그냥 여기 있고 싶어요."
니나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했다. 나는 초라한 그곳이 싫었지만 그대로 있기로 했다. 내가 물었다.
"확실한 거야?"
"네"
"아무도 모른다는 것도?"
내 질문의 억양에 그녀는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네, 몰라요. 그렇지만 퍼시에게는 물론 얘기할 작정이에요."
하긴 그렇게 하는 것이 그녀로서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니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젠 저와는 상관없어요."
"아기의 아버지도 모르나?"
"아직은요."
그녀의 눈은 순간적으로 번쩍였는데 나는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퍼시를 잃고 대신 아직은 누군지도 모르는 아기 아버지를 얻게 된다면 그것이 그녀에게 과연 좋은 일일까?
그렇다면 니나는 그 남자와 내게로 오면 되는데...... 그러나 그것은 아직 너무 이른 나의 바람이었다. 나는 그 바람이 스스로에게 보다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니나는 그처럼 확실하고 명백하면서 왜 나를 필요로 했을까? 나는 말했다.
"아기 아버지와는 결혼할 수 있니?"
"그건 알 수 없어요."
"니나, 아기를 낳는 게 나을 것 같니?"
"모르겠어요."
니나의 눈은 다시 흐려졌다. 그녀는 아직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생리적인 변화로 고통 받고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이다.
종이가 거기에서 잘려져 있고 대신 1946년 5월의 날짜가 적힌 여러 장이 붙어 있었다.
나는 1938년 '유태인과의 친밀한 접촉' 으로 체포될 우려가 있었을 때 일기를 숨기는 일 외에 그 중 몇 장은 완전히 없앴다. 이 같은 나의 소심함 때문에 완전하고 새로우며 해독과 화농의 걱정이 전혀 없는 임신 중절에 관한 구절이 없어지고 말았다. 니나에게 임신 중절을 권하는 것 외에 달리 무슨 방법이 있었을까? 나는 그날 저녁에는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심 저항을 느꼈겠지만 이튿날 다시 나를 찾아오라고 말했다. 니나는 머뭇거렸지만 약속했다. 나는 두 번 다시 가 보지 않을 그 이름 없는 레스토랑 앞에서의 작별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길가 가로등 아래의 내 자동차 옆에 서 있었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가운데 내가 말했다.
"널 도울 순 있다. 니나"
니나의 주의 깊은 시선 앞에서 이야기를 계속 한다는 일은 힘겨웠다.
"넌 아기를 반드시 낳을 필요는 없어"
나는 그녀의 눈빛으로 그녀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는데 그것은 영원하면서도 구제불능의 충격의 몸짓이었다.
"그것에 관해선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희망이 그녀의 눈에 어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내일 오후 내게로 와"
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한밤중, 나는 의혹에 사로잡혔다. 나의 방법은 절대로 안전했으며 위험성은 없었다. 나는 의학상 불가피한 때 여러 번 중절수술을 했다. 하지만 니나에게도 그 필요 불가결한 경우가 적용되는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니나는 건강했으며 자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절망 상태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체 이 숙명에 간섭할 어떤 권리가 내게 주어졌단 말인가? 나는 그녀가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많은 것을 약속하고 있던 그녀의 발전이 멈추어 나쁜 방향으로 이끌리고 있음을 본 것이다.
니나의 그 영혼의 대담성, 굽힐 줄 모르는 생명력, 체념과 고뇌와 죽음에 관한 호기심 등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녀는 무엇이 되어 버렸나? 그녀는 정신 착란증을 일으키는 불안에 싸인 작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게 돼 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생각일 뿐 그녀는 그다지 나쁜 상태는 아니었고 다음 날 그것은 보다 확실해졌다. 나는 니나의 생이 펼쳐질 방향을 상상해 보았다.
퍼시가 그녀를 버리거나 그녀가 퍼시를 떠날 경우와 그녀가 아이 아버지와도 결혼하지 않을 경우에 그녀의 생의 방향을 생각해 보았다.
아이는 낳을 것이지만 직장 일로 아이는 탁아소 신세를 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일요일 하루만 아이를 집에 데려오는 기묘한 즐거움을 갖게 되리라.
그러한 장래는 상상만으로도 참혹했다. 내게는 그녀를 도울 권리가 없는가? 그것이 이 세상의 정신적인 조화자의 뜻과 일치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더욱 초조해졌다. 아침이 되었을 때 나는 니나의 결심을 막기로 자신과 합의를 보았다. 니나는 어제보다 훨씬 나아져서 내게 왔다. 나는 곧 그녀의 무감각을 깨우친 어떤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1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녀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었으나 세세한 대화를 완전히 기억하진 못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재구성하는 것을 원치도 않는다. 물론 중요한 사실만은 잊지 않고 있다. 니나는 밤새 생각한 끝에 아침에 약혼자에게 사실을 털어놓자 퍼시는 단순히 이렇게만 반문했다고 했다.
"무슨 희극을 연출하는 거야? 그게 내 아이가 아니란 걸 누가 알지?"
이 반문은 니나를 당혹하게 했고 갑자기 그 상황이 의심스러워지기까지 했으며 그녀가 방 안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동안 퍼시는 한 시간 씩이나 방 안을 쉬지 않고 서성거렸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니나는 뭔가 무서운 일이 일어났음을 깨닫고 약속을 파기한 것이다. 이젠 누구도 그녀를 믿을 수 없으며 스스로도 자신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나는 그녀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침범할 수 없는 그녀의 순결한 본질은 이 새로운 체험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인지! 니나는 스스로 엄격한 재판관이었고 어떠한 변명도 용납하지 않았다. 니나는 방이 갑자기 좁아졌다가 마침내는 그녀를 내리눌렀다고 표현했는데 그녀는 기절한 것이었다.
정신이 들어보니 그녀는 소파 위에 누워 있었고 퍼시가 옆에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다른 사람도 알고 있니? 아니야? 좋아, 다른 사람에겐 절대 얘기하면 안 돼. 난 널 붙들어 둘 테야. 우린 곧 결혼할 테고 아이를 좀 일찍 낳는대서 이상할 건 없는 거야. 그 애는 우리의 아이야. 사실 그럴 거고. 이제 그만 두자. 한숨 푹 자"
그것은 지극히 이성적인 결정이었으며 그 점은 니나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나 역시 착란의 정도와 원인을 아예 무시함으로서 갈등을 해결하려는 태도의 단호함에 놀라움과 존경을 동시에 느꼈다. 니나는 그리하여 지극히 감사해 하며 착한 아내가 될 것을 약속했다고 했다.
그 후 나는 그녀의 결혼 소식과 초가을에 첫 딸 루트를 낳았다는 소식 외에는 들은 바가 없다.
니나는 그 무렵 단호한 결심과 자유로운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외면적인 혼란이 잘 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1936년 3월 3일
니나의 방문은 나의 안일을 파괴했다. 그것은 공허하고 인위적인 만큼 위태위태해서 어떤 결합점에서 불협화음을 내는 그런 안일이었다.
그녀는 이제 떠났고 그 알량한 남자와 결혼했다. 니나는 그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약속에 충실하려는 것이다. 또한 그녀가 사랑하는 아이의 아버지는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녀의 마음을 점령하고는 떠나 버린 것이다., 지나치게 무책임하고 비열한 짓이다. 나는 니나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으나, 물었더라도 대답은 듣지 못했을 게 뻔했다. 나는 결혼식을 앞둔 그녀를 유혹해 낼 수 있었던 그 남자를 상상하는 데 오랜 시간을 소비했다. 그는 아주 능숙하고 교활하지 않았다면 니나의 잠재적인 이상형과 지나치게 닮았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그녀는 약혼의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한 방법으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나로선 알 수 없다. 여자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단지 자신이 새로운 고통과 슬픔, 질투를 극복한 것으로 여겼던 감정의 질곡으로 다시 빠져들고 있음을 알 뿐이다. 나는 끔찍한 매혹을 느끼며 니나와 나의 숙명을 재삼 확인한다. 나는 니나를 축복하며 동시에 저주한다.
9. 전화
나는 일기의 내용을 생각하다가 깜박 졸았던지 초인종 소리에 화다닥 깨어 일어났다. 잠이 덜 깬 채 문께로 달려갔다. 그러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울리고 있는 것은 전화벨이었다. 나는 반은 졸면서 수화기를 들었다.
"제네바에서 부슈만 양에게 온 전화입니다. 수화자가 있습니까?"
이렇게 해서 내가 네, 본인입니다, 라고 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곧 남의 일에 관여하는 자신에게 짜증을 냈다. 니나 역시 그것을 언짢게 생각하거나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나는 곧 전화국에 전화를 걸어 내가 아니라 동생한테 온 전화였으며 동생은 지금 없으니 한 시간 후에 걸어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진 않았다. 평소의 나는 남의 일에 정도를 넘는 호기심을 갖거나 예의를 잃는 성격이 아니었고 육감도 썩 발달돼 있는 편은 못 되었다.
그런데 이때만은 어떻게 된 셈인지 전화기 옆을 떠나기가 싫었다. 알 수 없는 뭔가가 나를 지배하고 결정했다. 그리하여 나는 아직 잠에서 채 깨어나지 않은 졸리운 표정으로 전화기 옆에 서 있었다.
만약 '그 남자' 에게서 온 전화라면? 하는 생각이 어떤 계시처럼 나를 스쳐갔다. 그러나 니나가 그 때문에 독일을 떠나는 것이라면 그는 제네바가 아닌 독일 안에 있어야 했다. 어쩌면 니나는 구라파 대륙을 독일로 뜻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행 중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지난번 전화에서 니나가 영국으로 떠났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니나의 영국 주소를 알기 위해 전화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생각들을 여기 적은 것처럼 침착하게 추리하진 못했다. 지극히 단편적인 상념의 조각들이었을 뿐
나는 흥분이 지나쳐 온몸이 차가워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곧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정말 그가 건 전화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가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내야 한다. 이건 내가 니나를 위해 뭔가를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니나와 그 '남자'의 운명이 내 손 안에 달려 있다니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내가 처해 있는 그러한 상황을 저주할지언정 후회하진 않았다.
통화가 늦어져 나는 한동안 그에게 할 말을 정리해 볼 수 있었다. 하나 문득 나의 그럭저럭 깊은 사려가 구멍이 너무 크고 듬성듬성한 낡은 그물처럼 여겨졌다. 나는 나의 말을 감당할 수 없다. 나는 니나가 나에게 한 말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통화에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뭔가 결정적인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화기가 손에서 떨리는 것을 보자 나의 고통은 배가 되었다. 나의 한마디가 모든 것을 완전히 파괴해 버릴 수도 있다.
'아, 왜 이리 통화가 늦는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딸칵 소리가 났다. 나는 마치 운명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느릿느릿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니나?"
먼 나라에서 부르는 소리 같았다.
"아니에요, 니나는 없어요."
나는 별안간 지극히 냉정해질 수 있었다.
전화의 음성은 갑자기 변했다. 약간은 투명해졌으며 날카로웠다.
"부슈만 부인이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그는 뒤이어 물었다.
"전화를 받고 계신 분은 누구신지요?"
"니나의 언니예요. 제가 그저께도 전화를 받았었는데"
"아닙니다. 니나는 떠나지 않았어요? 중요한 문젭니다. 사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좋아요. 니나는 아직 떠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 여기엔 없어요. 밖에 나가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이라고요? 무엇 때문에? 왜 그러는 겁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그래요, 거리를. 어둠 속을요"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말했다.
"어둠 속을 혼자 돌아다닌다는 말씀입니까?"
그 말에 나는 쿡 하고 터지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물론 혼자서예요."
"어째서 물론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는 느릿느릿 물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자신을 쿡 찔렀다. 이 정도에서 그치자.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지 않으면......
"니나는 매우 괴로워하고 있어요. 뭔가 커다란 문제가 있는 듯한데 좀처럼 얘기하려 들지 않아요. 오히려 나타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요."
짧은 침묵이 있은 후 그는 다시 물었다.
"직업상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아이들 때문입니까?"
'오, 하느님! 당신은 그렇게 감각이 둔하신가요, 아니면 근사한 연극 대사를 외는 겁니까?'
나는 자칫 이렇게 큰소리로 외칠 뻔했다. 그러나 나는 다만
"오, 아니에요."
라고만 대답했다. 그 대답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흥분했을 것이지만,
"어디 건강이 나빠진 겁니까?"
그의 목소리에 불안이 겹쳤다. 그것을 깨닫자 나는 기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래요, 병은 아니지만 무섭게 지쳐 있어요."
"니나가 말입니까? 제 얘기는 당신 동생에 관해 아시는 일이...... 아, 아닙니다."
"제가 아는 건 그저 제 눈앞에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 앤 곧 영국으로 떠날 거예요."
"정말로 영국엘 가는군요? 언제 출발합니까?"
"내일"
"내일이라고요?"
전화 속의 그의 음성은 충격으로 떨렸다. 그리고 그 음성은 냉정함을 잃어버렸다. 그가 외쳤다.
"여보세요. 내 얘길 좀 들어보십시오. 내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니나에겐 말하지 않는 게 좋겠군요. 그런데 내일은 도착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레 오후 비행기로 떠나면 저녁 땐 그 곳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자신이 떨고 있음을 느끼자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건 너무 늦어요."
"그렇지만 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는 지독하게 절망하고 있었다.
"그 이상 일찍은 갈 수가 없습니다. 중대한 회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니나를 좀 붙들어 놔 주십시오. 어떻게 해서든 내가 도착할 때까지만, 꼭 부탁드립니다. 내가 가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고 느낀 뒤에도 중얼거림은 계속되었다.
"가겠습니다. 가겠습니다......"
그것은 마치 무슨 맹세처럼 울리다가 사라졌다
니나는 이미 10시 반이었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 니나가 없었던 건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그렇지만 이 앤 왜 아직 안 돌아오는 걸까
나는 내 집으로, 내 조용한 생활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어졌다.
근사하기는 하지만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위험지대를 가는 여행보다는 정돈된 내 집에서 안일하게 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곧 어느 편이 나은지 분별할 수가 없어졌다. 문득 나는 여러가지의 질서가 있을 수 있으며 그 모든 게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모두가 나쁘게도 생각되었다. 슈타인의 일기를 계속 읽으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한마디도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끝없는 불안감을 주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쨍쨍 울리고 있었다. 이 일에 내가 이토록 깊이 말려들다니! 나는 배후에서 뜻밖의 기습을 받은 셈이 되고 말았다. 또한 나를 잡고 있는 보이지 않는 줄은 거미줄만큼이나 가느다란 것이긴 해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줄인 것이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무척이나 당혹했다.
창문을 열었다. 3월의 공기는 차갑고 매서워 기분이 좋았다. 이른 봄의 불안스러운 초록빛을 띤 별들이 하늘 가득 깔려 있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지극히 작은 것들만이 진실했다. 명확한 윤곽을 지닌 지붕, 빛을 발하는 전선, 예리한 선을 그으며 서 있는 나무의 윤곽, 멀리 역에서 들려오는 소음 같은 것만이.
나는 불확실한 것, 정열 따위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다. 내 생이 니나의 생보다 얼마나 적은가를 스스로 안다 한들 그건 이제 부질없는 인식으로 끝날 뿐인 것이다. 텅 빈 거리에서는 발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밤바람이 너무 매서워 나는 창문을 닫았다. 이 방 저 방을 오락가락했다. 니나는 10분쯤 뒤에 돌아왔다.
"나, 너무 늦었군."
니나는 큰소리로 말했다.
"강가를 걷고 또 걸었어. 그 길을 다시 돌아오자니 자연 늦었어. 언니. 그 동안 심심했지? 뭘 했어?"
"일기를 읽었어."
"편집부에서 전화 없었어?"
"그래 거기선 없었어."
나는 아무론 양심의 가책도 안 받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 이상 묻지 않았는데 도무지 얘기할 기분이 아닌 듯했다. 자신 속으로 들어가 내면의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 보였다. 니나는 자고 싶다고 했다.
"오늘은 자야겠어."
그녀는 아주 확고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생각은 다른 데 가 있는 듯한 음성으로 되풀이했다.
"자겠어."
그것은 꼭 그 남자가 가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전등불을 끄고는 어둠 속에 누웠다. 니나는 잠시 후 소곤거리듯 말했다.
"언니, 뭔가 내게 속이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잠들어 못 들은 체했다. 그러나 니나는 계속 말했다.
"누구한테선가 전화 왔었지? 그렇지?"
"아까 다 말했잖니?"
나는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는 니나의 고르고 깊은 숨소리만이 방안에 퍼졌다. 그리고 한참 후 달빛이 스며들어 니나의 평화로움으로 가득 찬 얼굴을 비추어 주었다. 나는 그 날 밤 잠들 수 없었다. 회색의 새벽빛이 흐린 하루를 예고하는 것을 보며 간신히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때에는 여전히 잿빛 어둠이 실내에 흐르고 있었다. 8시가 지나고 있었고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멍한 시선을 들어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창문은 열려있고 니나가 헝클어진 머리에 잠옷 바람으로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버림받은 여자 같았다. 어디선가 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들은 비가 와서 기쁜 모양으로 일제히 지저귀고 있었다. 니나는 내가 두 번씩이나 불렀는데도 듣지 못한 듯 꼼짝도 않고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그녀가 그처럼 비애와 철저한 고독에 젖어 서 있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일어서서 니나 곁으로 갔다. 그녀는 나를 못 본 척했다. 아니 정말 나를 못 알아차렸는지도 몰랐다.
"감기 들겠구나. 니나"
내가 입을 열자 그녀는 느릿느릿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젖어 있었다. 나는 엄청난 놀라움에 사로잡혀 그만 큰 소리로 말했다.
"너, 울고 있었구나?"
니나는 시선을 내게서 거두어 창밖을 망연히 내다보았다. 소리 없는 눈물은 계속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순간 계면쩍어졌다. 나도 창 밑 나무판자에 기대어 서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니나는 아예 내 존재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는데 내가 다시 제자리로 갔을 때에도 그녀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니나는 한참만에야 잠옷 소매로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닦더니 몸을 내게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오늘 떠나야겠어."
그 억양 없는 어조는 이제는 뭐라 해도 다 소용없다. 나는 결심했다, 커다랗게 외치듯 말했다.
"니나, 넌 목요일에 떠날 거라고 했었잖니?"
"그럴 생각이었어. 하지만 다시 생각이 바뀌었어."
니나의 음성에 손톱만큼이나마 거부의 흔적이 보였더라면 나는 희망을 가지고 설득작업을 폈으리라. 하지만 니나의 음성은 지나치게 무감각했으며 마치 모든 것이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한 어조였다.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휘말리며 진심으로 말했다.
"니나, 너와 며칠이나마 더 있게 된다는 희망은 내겐 큰 기쁨이었단다."
"아, 언니에게 내가 무슨 소용이 있어."
니나는 재빨리 말하고 방을 나갔다. 잠시 후 욕실에서 물을 트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머릿속은 돌멩이가 뻐그적거리며 갈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전화가 왔었다는 것을 니나에게 알려야할지 어떨지? 니나의 앞으로의 운명은 내가 그녀를 붙들어 둘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마침내 '그 남자'가 니나를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영국에 가서라도 니나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쪽으로 생각을 정해 버렸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경박하고 나태한 마음 탓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 만남의 의미를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니나가 그렇듯 끈질기게 그를 피함으로써 니나는 그에게 더 소중해 보일 수도 있잖은가? 그러나 만약, 만약에 그가 니나의 이번 결정을 어쩔 수 없는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리하여 그가 깊은 상처를 받고 실망해서 돌아서고 만다면? 그는 니나를 그렇게 모를까? 니나가 왜 달아나는지를 그는 왜 모를까?
결국 나는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운명을 거역할 수는 없으며 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늘 당사자의 생각과는 터무니없이 결정되고 마는 법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얼마 동안은 안심이 되었으나 니나가 욕실에서 나와 눈물 자국 하나 없는 단정한 얼굴로 전화기에 갔을 때 그런 안심은 사라지고 말았다.
니나가 다이얼을 채 돌리기 전에 나는 말했다.
"전화기를 내려 놔."
전혀 내 심중에 없던 뜻밖의 말이었다. 니나는 별로 놀라는 표정도 없이 그저 예의상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넌 내일 밤까지는 떠나면 안 돼."
나는 극히 예사롭게 말했다. 니나는 불만스런 표정을 띤 채 왜냐고 물었다.
"말 안 해도 넌 잘 알고 있잖니?"
니나는 심각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마에 깊은 주름이 우울하게 천천히 자리 잡혀 갔다. 그녀는 견디기 어려운 신체적 고통을 참을 때처럼 눈을 꽉 감았다. 그 모든 행동은 마치 그름의 그림자처럼 떠올랐다가는 곧 사라졌다. 그 다음 니나는 말했다.
"그럼 언닌 이제 어떻게 하겠어?"
나는 이 뜻밖의 질문에 대답할 바를 몰랐다.
"그것 봐"
니나는 말한 뒤 다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럼 그에게 전보라도 치지 않겠니?"
나는 절망에 차서 말했다.
니나는 다이얼을 돌리면서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니나는 그 일에 관한 한 더 언급할 말이 없다는 태도였다. 좋다. 내가 달리 더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꼭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 남자를 이곳에서 기다리겠다. 그의 여행이 허망하게 끝나지 않도록 말이다.'
나는 내 생각을 니나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니나가 여행사에 전화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한 장 남아 있는 다음 날 밤 열차표를 예매했다. 이제는 모든 게 결정된 것이다. '봉인이 찍혔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의 침울한 감정은 더욱 나를 욱죄어서 마침내 아주 비참한 우울에 빠지고 말았다. 이튿날 나는 니나를 따라다니며 많은 물건을 사러 다녔다. 누군가가 우리의 거동을 관찰했다면 그 신경질적인 쾌활함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 갔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다 남편이 출타 중일 때 자기네들이 외출이라도 하게 된 여인네들의 아무 근심 없는 기쁨을 잠시 도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홈플마이어에서 점심을 먹고 칼톤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자 니나는 점점 창백하게 질려갔고 말 수가 적어졌다. 그녀는 나와 함께 외출하여 아이들을 위해 스웨터, 장갑, 초컬릿 등을 사서 소포로 꾸려 우체국으로 보냈다. 그녀는 매우 피곤한 듯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니나는 집에 오자 피로도 잊고 곧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서둘러 짐을 꾸리는 바람에 나는 그녀가 좋아하든 안하든 도와주는 수밖에 없었다.
일을 끝내 놓고 나니 7시였다. 기차는 9시에 떠나기로 돼 있었다.
그 사이의 두 시간은 생각보다 힘겨웠다. 니나의 어떠한 문제나 난관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이 나에게가지 전염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침묵이 방안을 지배하고 거북함과 슬픔이 우리를 휩쌌다. 내가 슈타인의 일기를 집어들자 니나는 내 손에서 그것을 빼앗아갔다.
"내가 떠난 뒤에 읽어 봐. 두고 갈 테니까"
니나는 아무런 흥미도 없이 권태로운 잡지를 뒤적거리듯 일기를 뒤적이더니 결재를 끝낸 서류처럼 탁 닫아 밀어 놓았다.
"읽을 거야?"
그녀는 단지 침묵을 깨기 위해 물었으나 나는 물론, 하고 대답했다.
니나는 어깨를 추슬러 보았다. 어떻게 해서 그런 것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나는 문득 그 모든 기록이 그녀에게는 이미 지나가 버린 완전한 과거일 뿐임을 깨달았다.
"이걸 정말 읽을 생각이라면 미리 말해 둘 게 있어."
니나는 말했다.
"나의 자살 기도에 관해 그가 어떻게 기록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 진짜 원인은 모르고 있었어. 하긴 뭐 아무래도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나는 뭐야."
"나는 언니가 날 제대로 봤으면 해."
재빨리 말하고 나를 흘긋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애정이 넘쳐 있었으나 곧 그 시선을 거두어 버렸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가 이야기하면서 어느 정도 괴로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퍼시와 함께 살 때 그러니까 그와 결혼했을 때......"
니나는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계속했다.
"그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어. 우린 무섭게 안간힘을 썼어. 퍼시는 특히 그랬어. 그는 때때로 이를 악물기까지 했어.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는 단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어. 아이가 울기라도 하면 곧 밖으로 나가 버리는 거야. 아무 말도 없이 거의 매일 밤 집을 비웠어. 나는 루트의 작은 침대를 부엌 병풍 뒤에 세워 놓았지. 거긴 그가 오지 않았거든. 베란다에 기저귀를 널 수도 없었어. 그래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아는 사람의 마당까지 들고 가 널어야 했었지."
"네가 그걸 참아냈단 말이니?"
나는 거의 고함치듯 말했다.
"그건 이행되어야 할 계약이었어."
"왜 루트의 아버지에겐 가지 않았니?"
니나는 어깨를 추켜올렸다.
"말했잖아. 방금. 계약을 파기해선 안 되는 거였어. 나중에 퍼시가 클레레에게 갔을 때는 달랐지만 말야. 그 땐 루트의 아버지 알렉산더는 이미 결혼한 뒤였어."
니나는 심각하게 무릎을 내려다 보았다.
"알렉산더와의 일은 지속을 바랄 순 없는 거였지. 난 오직 하룻밤을 그와 지냈을 뿐이거든. 루트가 태어난 지 7주째였어. 나는 퍼시가 아기의 침대 옆에 가 있는 걸 보았어. 그런 일은 처음이었어. 난 '아,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기에게 몸을 굽히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는 말을 끊었다.
"그래서?"
나는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니나의 눈에 공포가 스쳐갔다.
꽤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눈은 그 때의 상황을 그대로 반추하고 있었다. 그녀가 끝내 말하지 않아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뭔가 지독한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니나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는 내게 말했어. '나도 나의 아이를 갖겠어' 라고. 아직 점심 무렵이었고 부엌에 음식이 놓여 있는데도 그는 막무가내였어. 내가 그의 힘을 이길 수도 없겠지만 저항하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아 말했지. '아직 일러. 루트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건강이 나쁜 걸 알잖아?' 그러자 그가 말했어. '그게 내 탓이니?' 할 말이 없더군. 그의 말은 정당했으니까. 그 뒤 몇 주일 동안 그가 그처럼 다정하고 비열할 정도로 잘 해주지만 않았더라면 모든 게 그토록 불유쾌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는 자신이 잔혹하지만 너그러운 승리자라는 걸 내게 느끼도록 했어. 그런데 나는 어느 날 그에게 복수하는 방법을 생각해냈어. 그건 내 아이를 그가 소유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어. 난 슈타인을 찾아갔어. 그런데 그는 도와주려 하지 않았어. 다른 의사에게 갈 만한 돈은 없었고 낡아빠진 민간 처방은 효과가 없었어. 나는 막막했어. 슈타인에게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난 확고하게 결정을 내렸어. 우선 집을 정리하고 편지 몇 장을 쓰고 루트를 보모에게 맡기고 그녀에게 편지를 주어 슈타인에게 보내기로 한 거야. 그 다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거야. 인간은 그런 상태에서 아주 정확하고 비상하게 행동할 수 있는 법이거든. 언니도 그런 경험이 있는지 어쩐지 알 수 없지만 말야."
니나는 냉정하고 흥미롭게 나를 응시했다.
"난 그런 경험은 전혀 없어. 적어도 그런 식으로 절망해 본 적은 없거든."
"그래?"
니나는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알 수 없어. 한 번도 절망하지 않았다니 얼마나 좋을까"
"글쎄. 그래서 넌 네 결정대로 했니?"
"응, 모두 다. 난 맨 마지막으로 집에 갔어. 새 집인데다 이사를 서둘러 석회 냄새가 났어. 난 지금도 젖은 석회 냄새를 맡으면 욕지기가 치밀어. 그런데 그 때 나는 가스에 중독되면 토한다는 걸 생각했어. 그러나 그건 추한 일이었지.
난 풀었던 가스를 다시 닫았어. 안 그래도 난 임신 중이라 구토를 했고 두 손가락을 입에 넣기만 하면 됐어. 가스는 끔찍해. 다신 가스를 택하진 않겠어."
"니나!"
나는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니나는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더니 계속 했다.
"처음엔 기분이 좋았어. 가스가 새는 소리가 마치 바람 소리 같아 깊은 숲속에 와 있는 느낌이었거든. 그 소리는 차츰 음악처럼 높아지고 힘찬 관현악을 이루었어. 그런데 그 다음 순간에는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을 하고 구토가 치밀고 숨을 쉴 수가 없어졌어."
니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시는 가스로는 하지 않아"
"그래서 어떻게 됐니?"
"슈타인이 너무 빨리 오는 바람에 착오가 생겼어. 난 그가 내 편지를 받을 때쯤엔 이미 죽어 있으리라 생각했거든.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난 그의 집에 있었어. 그렇게 끝난 셈이지."
"그런데 난 그런 일을 하나도 모르고 있었구나."
"언니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
"그래, 다시 깨어나 살아 있는 걸 느꼈을 때 기분은 어떻든?"
"그건 별로 차이는 없어."
니나는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으나 잠시 후 별안간 큰소리로 말했다.
"슈타인은 아마 자기가 날 구해 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누가 죽는다는 걸 말리는 일이 그 사람을 살리는 것만은 아니야."
나는 슈타인에 대한 추억이 다시 한 번 니나를 흥분시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슈타인은 니나가 믿고 있는 것 이상으로 그녀에게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 역시 자기 말의 격렬함에 놀라며 서둘러 덧붙였다.
"그 무렵 그는 내게 큰 도움이 됐어. 하지만 그는 절대 할 일은 하지 않았어."
니나는 새삼 화가 나는 듯 자신을 억제하느라 애쓰며 말했다.
"그때 내가 퍼시와 헤어지지 않은 건 그의 잘못이었어. 그는 말했어. 그 저주할 모든 결단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말야. 아니, 그의 얘긴 그만두겠어. 나를 도와 준 것은 그가 아니었어."
"그럼 누구였는데?"
"그건 나 자신이었어. 모두들 내가 이 사건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어느 날 나는 요양원에서 살기로, 곧 그걸 실천했어, 언닌 웃는군."
정말 나는 웃었다. 그녀의 표현이 기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나는 집요하게 되풀이했다.
"웃지마. 그건 정말이야. 난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
"그렇게 곧바로?"
나의 표현이야말로 니나의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진 않았어. 첫날은 아예 손도 대지 못했고 둘째 날은 한 줄은 썼는데 그 이튿날은 그걸 지워 버렸고 그 다음날에야 간신히 두서너 줄 쓸 수 있었어. 그런 식으로 하나를 완성했어."
니나는 벌떡 일어서더니 뭔가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창가로 갔다,
"지금 뭐라고 그랬니?"
"아, 아무것도 아니야. 구역질이 난다고 그랬어."
"뭐가 구역질이 난다는 거니?"
"내가 이런 말을 다 털어놓다니. 왜 그랬을까?"
"그야 내가 얘기해 달라고 했잖니?"
당황한 나는 그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안 하는 게 좋은 얘기였어. 좋은 기분이 아냐."
"니나!"
나는 놀라 외쳤다. 그러나 니나는 내 말을 막아버렸다.
"그런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는 건 좋은 취미라곤 할 수 없어. 어떤 특별한 필요도 없이 말야."
니나는 짧게 웃었다.
"이런 심각한 경우는 취미가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다는 좋은 예야. 좋은 취미는 늘 중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아마 난 극단을 위해 태어난 모양이야. 난 좋은 취미가 우리에게 주는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인간에게 다소간의 야만성이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인간은 늘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용기를 지니고 있진 않기 때문이지"
'그래, 우리에겐 그게 없다. 니나 너도'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니나는 지금 여행 같은 것을 떠나려 하진 않으리라. 니나는 이런 내 생각을 알기라도 한 듯 갑자기 속삭이듯 물었다.
"언니라면 나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했겠어?"
"짓궂은 질문이구나. 모든 건 이미 오래 전에 결정되었잖아?"
"하긴 그래."
니나는 더욱 작은 소리로 나를 외면한 채 말했다.
"그렇지만 그건 옳지 않아. 그런 걸 내게 요구하면 어떻게 해?"
"알았어. 택시를 부르지."
니나가 전화기로 가는 동안의 몇 초는 내 생의 최악의 순간이었다. 역으로 가면서 우리는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예사롭게 주고받았다. 니나는 기차에 오르자 재빠르고 힘차게 나를 끌어안고는 이내 계단으로 올라가 소리쳤다.
"언니, 내가 부탁한 대로 해 줘! 그가 오면 아무 것도 말하지 마. 내 주소도 알려 줄 것 없어."
기관차는 증기를 뿜었고 물기가 있는 흰 구름이 차 밑에서 솟아올랐다.
소리가 요란해 나는 니나에게 대답하지 않아도 되었다. 잠시 후 기차가 다시 조용해지자 니나는 내게로 몸을 굽히며 소곤거렸다.
"그이에게 내가 결혼한다고 말해줘. 꼭 그렇게 말해야 돼."
"니나, 그게 정말이니?"
니나는 비애에 넘쳐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내가 니나를 본 마지막 모습이기도 했다.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녀가 서 있는 유리창은 빗물로 흐려졌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니나가 떠나 버린 빈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자기 위해 바로 소파에 누웠다. 비가 오는 게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내가 잠들기 전까지 들은 것은 간격 없이 들려오는 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의 단조로운 음향뿐이었고 아침에 잠을 깨어 들은 것도 그 소리였다. 비는 밤새 내린 것이다. 창문과 책상 사이의 마룻바닥이 젖어서 거무튀튀해 보였다. 나는 그렇게 시작된 하루가 무서웠다. 다음 열차로 떠나 버리고 싶다는 유혹을 물리치기가 어려웠다. 나는 한 시간 동안이나 떠날 생각만 했다. 그러나 결국 자기가 끓인 죽은 자신이 먹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실제로 그를 이곳에 오게 한 것은 내가 아닌가. 나는 그에게 해명할 의무가 있었고 그러자면 떠나서는 안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한 생각의 저 편에는 니나가 사랑하는 남자를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남자가 그렇듯 서둘러 달려와 빈 집의 초인종을 눌러 대는 모습을 상상하면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당황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눈앞에 보는 듯했다. 그는 그러다가 이웃집 부인이나 집주인을 찾아갈 것이고
"부슈만 부인은 떠났어요. 그녀의 언니도요"
라는 대답을 듣게 되리라. 그러면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상처를 입고 천천히 돌아 설 것이다. 아, 그럴 순 없다. 그를 그렇게 돌아서게 해선 안 된다. 다시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아 슈타인의 일기를 펼쳐 들었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오후에 보려고 아껴 두기로 했다. 비는 억수처럼 쏟아져 밖에 나갈 수 없었다. 쓰레기통에서 반은 찢어진 탐정 소설을 찾아냈으나 따분했다. 억지로 훑어 내려갔으나 나는 그런 따분한 오락물을 읽을 기분은 전혀 아니었다. 니나를 생각해도, 그를 생각해도 견디기 어려운 우울과 긴장이 나를 내리누르는데 어떻게 그런 것을 읽을 마음이 나겠는가?
나는 결국 슈타인의 일기를 꺼내 읽기로 했다. 내가 읽다 만 대목을 다시 보기로 했다. 그 대목을 다시 찾는 데 약간 힘이 들었다. 1936년 2월 16일의 기록에 이어 같은 해 3월 3일자의 슈타인이 니나의 '유혹자'를 상상해 보는 수기가 있었고 그 다음은 거의 반 년 뒤의 일기였다.
10.생의 과제
1936년 10월 10일
니나에게 나를 묶어 놓고 있는 사슬을 끊어버리려는 노력은 결국 부질없는 것이었다. 밀라노 대학에서의 초청 강의를 끝낸 후 남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을 거쳐 북 아프리카로 가려고 했을 무렵 나는 자신이 완전히 구제되었으며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다.
난 혼자였다. 헬레네는 아네트 아주머니의 집을 처분하는 일로 분주했다. 그 집은 내게 상속된 것이지만 니나가 결혼해 버린 지금 그곳에 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처음 얼마간은 니나가 이 여행의 동반자였더라면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는데 그렇다고 해서 혼란되거나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로마에서 받은 한 묶음의 우편물 속에 니나의 딸 출산에 관한 소식이 들어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아주 심하게 발을 다친 기억이 있다. 나는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한 채 피가 흐르고 살갗이 찢어져 벌어진 것을 보고 있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고 나는 한참 뒤에야 소리를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 때의 기묘하게 둔한 감각이 그 편지를 받았을 때에도 작용되었다. 편지를 읽고 나서 나는 다른 것을 무시한 채 마냥 돌아다녔고 난생 처음 만취해서 밤에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예정보다 3주일이나 앞당겨 독일로 돌아오면서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대체 왜 그처럼 흥분했던가? 그건 어쩌면 인쇄된 전보용지 위에 니나가 연필로 적어 넣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어요, 라는 구절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까지 서둘러 귀국할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아기는 10월 1일 태어났고 소식을 받은 것은 7일이었다. 그 사이에 니나는 이내 난산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다시 건강을 되찾았으며 내가 필요 없으리란 건 확실했다. 그러나 나는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탈리아도 알제리도 견디기 힘들었고 아무런 매력도 느낄 수 없었다. 헬레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내 집이었지만 낯설었다. 나는 창의 덧문을 내리고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니나의 남편이 와 있었다. 나는 니나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동안 기다려야 했다. 얼마 후 그녀의 남편이 간호사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병실을 나왔다. 그러나 그는 몇 발작 옮겨 놓기가 무섭게 냉혹하고 우울한 분노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다시 병실 쪽으로 시선을 던졌을 때 나는 그 시선의 철저한 야만성에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간호사 하나가 뛰어 지나가자 그의 표정은 곧 환하게 밝아졌다.
나는 어느 것이 그의 진실한 면모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리고 그가 평소 니나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어느 쪽인지도.
나는 니나가 왜 그와 결혼했는지 또 무엇 때문에 그처럼 집요하게 그의 곁에 머물러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에 니나의 아기가 운반되어 내 곁을 지나갔다. 그 때 문득 나는 저 아기일 수도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는데 아기에게 아내가 젖을 물리고 있는 것을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이상의 즐거움은 다시 없으리라.
그것은 그야말로 완벽한 조화의 느낌을 줄 것이다. 생이 인간에게 준 과제이며 완수한 느낌, 자연의 질서 안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지니게 될 것이며 감사에 넘쳐서 미소 지으며 주위를 둘러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그 무서운 고독을 극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일는지도 모른다. 내가 단 몇 시간만이라도 질서 있고 안정된 생활이 주는 단순한 행복을 소유할 수 있다면!
나는 이미 그런 부질없는 꿈을 꿀 나이는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도 꿈과 현실은 마구 뒤엉켜 엉망이었다. 아이는 실제로는 누구의 아이이든 내 아이이며 니나는 나의 아내이다. 그러지 않았었던가? 현재는 그렇지 않단 말인가? 아니, 니나는 내 아내였고 또한 지금도 그렇다.
아기가 다시 운반되어 들어갈 때 나는 좀 보여 달라고 했다. 아기가 나를 보았다. 내가 서 있는 창을 통해 한 줄기 햇살처럼 그 시선은 단순히 우연한 것이었으나 그것은 나를 보았다. 생이 나를 본 것이다. 하지만 아기는 갔고 생을 다시 빼앗겼다. 내 아이가 아니었으며 나와는 무관했다. 나는 곧바로 니나에게 갈 수 없었다. 그녀를 위해 사왔던 꽃을 전해달라고 부탁하고는 한 시간 뒤에 오겠다고 하고는 병원을 나왔다.
니나가 그처럼 비참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니나는 나의 방문을 미리 들어 알고 있었던 만큼 조용히 맞아 주었다. 니나의 얼굴빛은 시트보다도 더 하얗게 되어 있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고 니나 역시 말할 기분이 아닌 듯해 곧 작별했다. 니나는 내 손을 아주 꼭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와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다신 오지 마세요. 당신이 퍼시와 마주치는 게 싫어요."
아, 니나는 남편의 질투를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이중의 신경과민으로 더 이상의 나쁜 결과를 무서워하는가? 그녀는 남편의 의심스러운 너그러움 때문에 그를 불쾌하게 할 모든 가능성을 피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의 자유분방한 자존심의 행방은? 아니, 어쩌면 니나의 자존심이 바로 그녀에게 새로운 과제를 불평없이 분명하게 실천하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니나를 제대로 알 지 못하는 것 같다. 어쨌든 그녀는 전에 때때로 나를 비난할 때 사용한 '비인간적인 오만함'을 그녀 스스로 집요하게 고수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다음 일기는 글씨가 형편없이 흘려 씌어져 있었다.
1937년 1월 12일
최악의 이틀이었다. 니나가 자살을 기도하다니. 그것은 거의 성공할 뻔했으며 내게도 책임이 있다.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의 정확한 계산에서 그것을 실행했고 그것은 나를 광적인 흥분 상태로 몰아넣었다. 지금 그 경과를 정확하게 써 나가겠다. 그러노라면 자신을 진정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니나는 1월 10일 정오 무렵 나를 방문했다. 아주 창백해져서 어떤 주저함도 없이 목적을 위해 돌진해 온 것이다.
다음 장에는 1936년의 기록이 붙어져 있었다.
니나는 전에 내가 제안한 적이 있는 임신 중절을 내게 상기시키고는 그걸 내가 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래야만 하는 타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단지 남편의 아이를 갖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이다. 게다가 벌써 위험도 높은 여러 가지 민간 처방을 써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고까지 했다. 니나는 암울한 결단을 집요하게 고집하고 있었다, 그런 경우 어떤 단정을 내린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물론 임신 중인 아이에 대한 그녀의 반감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남편의 곁에 머물기로 결심했을 때에는 거기에서 오는 모든 의무도 함께 받아들인 것이 아니겠는가? 첫 아이의 경우는 모든 상황이 지금과는 아주 판이했었다. 그때에는 니나의 발전과 자유가 위험했었으나 두 번째는 그것을 극복하는 새로운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니나의 소망이 나의 소망과 너무나 합치되는 데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마치 퍼시인 것처럼 음산한 쾌감을 느끼며 죽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분별력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니나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나 자신의 염원에 이끌리는 것이 될까 봐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거절했다.
다음 장에는 1937년의 기록이 이어졌다.
니나가 가버리고 나자 한동안은 편안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유혹을 물리친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난 회의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로부터 스스로 재판관이 되는 권리를 부여받았는가? 내가 어떻게 하고 안하고의 결단을 내릴 수 있는가? 대체 어디에서 니나의 그처럼 절박한 염원을 거절할 힘이 생겨났을까? 물론 니나가 마구잡이로 졸랐다면 나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결심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렇게 본 내 관찰이 잘못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에도 절실한 절망이 스며들었을 텐데도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는 얘기 말이다. 나는 분명하게 따지자면 예고된 살인을 범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부르며 뛰어나갔으나 그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나는 니나의 새 집 주소를 모른다. 설령 알고 있었더라도 그녀 남편의 집에는 가지 않았으리라. 몇 시간 후 집에 와 보니 그녀의 편지가 와 있었다.
그 편지도 거기에 첨부되어 있었으나 나는 뒤에 읽기로 했다.
헬레네는 웬 여자가 어린애를 데리고 와서 그 편지를 놓고 갔다고 말했다. 편지의 내용은 짐작한 대로였다. 나는 어떻게 니나에게까지 갔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니나는 편지에 집 주소를 적어 놓고 있었으나 새 주택지라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어 찾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찾아냈으나 문은 잠겨 있었고 이미 초인종을 누른다는 일 따위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 몇 분은 내 생애 최악의 순간이었다. 나는 집 주인이 열쇠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 길 밖에 없었다. 나는 수중에 돈을 전부 털어 주고 그의 입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내며 거절하고는 역시 나처럼 흥분해서 나를 도와주었다. 예감했던 대로 니나는 이미 죽은 것 같았다. 묘하게도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때의 그녀의 모습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희망을 버리고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가스 중독은 이미 진전되어 있었다. 집 주인은 니나가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을 때까지 나를 거들었다. 나는 그녀가 숨을 쉬게 되자 안아다 차에 태웠고 집주인은 집 안을 대강 정리했다. 막 차에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집 주인이 뛰어와 편지를 하나 전해주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니나의 남편이 여행에서 돌아올 때까지 그녀의 어린 딸을 보살펴 주겠다고 했다. 고양이 한마리가 마구 울어대며 슬프게 따라오려 해 그 놈도 차에 태웠다.
처음에는 니나를 W에 있는 병원으로 옮길까 했으나 소문이 날 것 같아 집으로 데려왔다. 니나는 의식을 잃고 있어 헬레네와 나 사이의 불쾌한 장면을 다행히 볼 수 없었다. 나는 헬레네에게 간단하게 경위를 설명했는데 그녀는 말없이 외면하고는 돌아섰다. 그녀는 필요한 우유며 기타 여러 가지를 마루에 있는 책상에 가져다 놓고는 한 번도 니나가 있는 방에 가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고집이 그녀와 나 사이를 영원히 불쾌하게 망칠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러나 길게 그것을 생각해 볼 여유는 없었다. 니나는 오늘 정오까지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오후에야 정신이 돌아온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니!"
그녀의 표정은 씁쓸한 실망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벽 쪽으로 돌아눕더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태를 알고 나자 나를 증오하게 된 듯했다. 얼마 후 잠이 든 그녀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루트는 어디 있나요?"
내가 위로하자 그녀는 말했다.
"퍼시에겐 아무 것도 말하지 마세요. 그러나 다시는 그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넌 내 곁에 있으면 돼. 루트를 이리 데려오지. 아니 요양소에 가 있는 게 나을지 몰라"
"살고 싶지 않아요. 왜 날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어요?"
나는 위로의 말을 찾지는 않았다. 니나 자신이 생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분명 다시 살아갈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겠지만
니나는 아주 쇠약해져 있었고 열이 높았다. 그녀는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의식을 잃기 시작할 때처럼 생을 미칠 듯이 강렬하게 느낀 적은 없었어요. 아름답고 두렵고 열정적으로 말예요."
니나는 어느새 우리 집에 익숙해진 고양이가 창가에 있는 것을 보자 불렀다. 니나는 고양이를 안고 울음을 터뜨렸는데 나는 내버려두었다. 니나는 꽤 오래 마치 봄비가 내리듯 소리 없이 울었다. 그녀는 내가 창가에 서서 그렇게 함께 운 것을 알지 못했으나 내 눈물은 그녀보다도 더욱 쓰라린 것이었다. 그것은 고통과 분노의 눈물이었다. 그 순간 니나를 소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나는 다만 생을 저주할 뿐이다. 니나는 울다가 지쳤는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 방의 소파에서 자기로 했다. 그녀의 호흡을 들을 수 있고 그녀가 깨면 우유를 갖다 줄 수도 있다. 나는 마음을 정리하려고 애를 써 보았다.
정리한다고? 근사한 표현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다시는 마음의 정리를 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니나, 넌 그것을 할 수 있다. 너는 자신이 느끼고 있든 아니든 생을 믿고 있으니까. 네겐 자살을 기도하는 것까지도 생의 일부분이니까. 그것은 네 영혼과 생명력이 네게 시험해 본 새로운 기쁨일 뿐이며 흥미로운 체험이 될 것이다.
1937년 1월 13일
니나는 내가 우는 것을 보았다는 뜻밖의 말을 내게 했다. 그러나 그때가 저녁이었는지 밤이었는지 알 수 없으며 어쩌면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꿈이든 아니든 난 당신이 운 까닭을 알아요. 당신은 나와 함께 죽지 못하고 나를 살린 걸 후회하고 있어요."
니나의 말에 내가 놀라 반박하려 하자 그녀는 재빨리 내 말을 막았다.
"당신도 나처럼 인간이란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예요. 우린 생의 의미를 물었지요. 그럼 안 되는 거였는데 말예요. 인간은 생의 의미를 물으면 결코 그걸 알 수 없지만 묻지 않는 사람은 그걸 알지요."
니나는 슬프고 단순하게 말했는데 그 길지 않은 한마디는 나를 생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나는 어째서인지 알 수 없으나 자신이 뜻밖에 강해지고 정리된 것을 느꼈다. 대체 니나에게는 어느 만큼이나 많은 힘이 있어 나처럼 희망 없이 지친 상태의 인간을 일으켜 세운단 말인가. 어쨌든 나는 그 힘이 필요했다.
오늘 그녀의 남편이 여행에서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역으로 그를 마중 나가 지금까지의 상황에 대해 적당히 꾸며 설명해 줄 필요성을 느꼈다. 집주인이 니나가 그에게 쓴 편지를 발견해 내게 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뜯지 않은 채로 여기에 첨부해 놓겠다. 니나는 그 편지나 남편에 관해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잊어버리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내가 그에게 뭐라고 해야 하는가를 묻자 그녀는 무관심하게
"나를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 전해주세요"
라고 했을 뿐이다. 나 역시 그와 만난다는 일이 유쾌하진 않다.
1937년 1월 14일
나는 오후 기차 시간에 맞추어 역으로 나갔으나 퍼시는 오지 않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니나가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그에게 말하셨나요?"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물었다. 내가
"아니, 그는 오지 않았어."
라고 말하려는데 그녀는 아니, 하는 말만 듣고 내게 마구 화를 냈다.
"그렇게 전해 달랬잖아요? 왜 당신은 꼭 해야 할 일은 한 번도 하지 않아요."
"그는 오지 않았어."
"아, 네. 오면 꼭 그렇게 전해 주셔야 해요"
그녀는 다짐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전환이었다. 나로서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무슨 말을 하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어지고 말았다. 기차가 막 들어올 때까지도 그것을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내게는 즉흥적인 연기의 재주는 없다. 그 때문에 난 기차가 들어왔을 때 혼란된 기분이었다. 그가 한 소녀와 내리는 것을 보았을 땐 더욱 그랬다. 그들은 기차 안에서 사귄 듯했다. 그들이 아주 즐겁게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망치는 데 일종의 음험한 기쁨을 느끼며 그들은 가로막고 말했다.
"퍼시씨, 중요한 얘기가 있습니다."
그는 곧 날 알아보았다. 그다지 반가운 표정은 아니었으나 일이 중대하다는 느낌은 드는 모양이다. 그는 곧 그 소녀와 작별했는데 소녀는 실망하고 화가 난 듯 재빨리 가버렸다. 그와의 대화는 5분도 채 안 걸렸다. 그리고 그것은 통행인들의 소음과 기차 연기에 뒤덮인 밤의 플랫폼에서 이루어졌다.
"당신이 여행 중일 때 부인에게 사고가 생겼습니다. 뭐, 대단치는 않아요. 하지만 낙상은 임산부에게는 대개 그 결과가 나쁘지요."
그는 잠자코 예리하게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당황하게 하는 일이 유쾌했다.
"무사히 출산을 하자면 안정이 필요합니다. 부인은 지금 내 곁에 있습니다. 내게 부인이 도움을 청해 오셔서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댁에서도 그 점은 납득하시리라 믿습니다. 몇 주일 지나면 요양소로 가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출산 가능성이 희박해집니다."
나는 말을 하면서도 그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는 창백했는데 흐린 역의 불빛 탓만은 아닌 듯했다. 그는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다시 되풀이했을 때에야 나는 알아들었다.
"니나에게 가겠습니다. 집에 데리고 제가 간호하겠습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당신 아이의 출산도 문제지만 부인의 생명을 생각하신다면 내 말대로 하셔야 합니다. 따님은 집 주인이 돌보고 있습니다."
그는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하듯 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의 말을 믿겠소."
물론 그가 나를 믿지 않는 것은 확실했다. 그 때 나는 니나가 재삼 부탁했던 말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집 전화번호입니다."
그가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했으나 다만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때마침 화물열차가 지나가며 우리 대화를 가로막아 형식적인 작별인사조차도 필요 없었다. 그는 여태까지 전화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는지 알 수 없다. 니나는 어젯밤 내가 돌아왔을 때 잠들어 있었다. 수면제를 먹은 것 같았는데 그것은 그녀에게 금해진 것이었다. 나의 추궁에 그녀는 오늘 헬레네가 수면제를 주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놀랐다.
"헬레네가 이 방에 왔었단 말야?"
"그래요, 과일을 가져다주었어요."
무슨 말 없었느냐는 나의 추궁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에게 묻진 않았다. 니나는 오늘 남편에 대해서는 언급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무감동하게 누워 있거나 아니면 잠만 잤다. 밤에 그녀의 남편이 전화했다. 1분간의 짧은 통화였다. 니나에게 그것을 전했으나 무관심하게 들었다. 그녀는 지금 깊은 잠에 빠져있다. 잠든 그녀의 얼굴에는 지나치게 그녀를 옭아맨 불쾌한 일들로 해서 가려져 있던 타고난 귀여움이 생생하고도 감동적으로 떠올라 있다. 그녀를 바라보는 일은 싫지 않다. 그녀를 바라보노라면 나의 무감각, 죄의식, 조심성 같은 것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잠깐이지만 내 생의 또하나의 행복의 가능성을 믿게 된다. 그녀가 정말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하는 생각은 물론 가져보지를 않았다. 하지만 니나가 이곳에서 아이들과 놀고 방을 돌아다니고 나와 함께 여행을 하는 상상은 내게 벅찬 기쁨을 안겨주곤 했다. 나는 자지 않겠다. 니나의 호흡을 들으며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행복감을 맛보고 싶다.
1937년 1월 15일
나는 어젯밤 기대했던 그 미묘한 행복을 결코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어째서 아주 지독한 유혹없이 그녀의 곁에 오래 머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
니나는 임신중이고 지쳐 있었으나 매혹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나의 사랑을 정리했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소년과 같은 이상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속적이지 못한 순결'에 관해 언젠가 말한 것은 니나였던가? 값싼 사랑이 불가능한 나는 순결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아주 굳게, 나는 치졸한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극기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그런 욕망에서 해방된 맑은 아침의 기분을 아낀다. 그러나 나는 육체적 접근의 위험을 지나치게 얕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는 한밤중에 옆방으로 옮겨가 아침을 맞았다. 오늘부터는 내 방에서 자야겠다. 계속 태연할 수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니나가 곧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아주 훌륭한 의사인 볼레에게 전화했다. 오바스트도르프에 있는 그의 요양원 역시 썩 훌륭하다. 니나의 남편에게서 하루 종일 전화가 없었고 니나의 고열은 늑막염의 시초인 것 같아 걱정이다. 내일은 마이트에게 전화해서 알아봐야겠다.
1937년 1월 16일
부질없는 걱정이다. 열이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다. 니나와 같이 요양원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무관심하게 듣더니 내 말을 가로막았다.
"우린 돈이 없어요."
"남편이 특허 하나를 팔았다고 전화했어. 걱정할 것 없어"
물론 거짓말이었다. 니나는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저녁 때 니나가 고양이를 찾는 바람에 고양이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헬레네에게 물었더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독약을 안 먹었다면 돌아오겠지요."
"뭐야? 고양이가 왜 독약을 먹어?"
내가 놀라 묻자 그녀는 무뚝뚝하고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언제 먹었댔어요? 안 먹었으면 돌아올 거라고 말했을 뿐이잖아요."
헬레네와 나 사이의 긴장은 니나를 향한 나의 욕망과 정비례해서 커간다. 니나는 며칠만 있으면 떠나게 될 것이다.
1937년 1월 22일 새벽
나는 니나와 그녀의 어린 딸을 역까지 배웅했다. 요양원까지 데려다 주고 싶었으나 그녀는 굳이 고집을 피웠다. 요양원에서는 구급차가 마중 나올 예정이었다. 나는 방금 볼레에게 전화했다. 니나의 상태는 좋은 편이라고 하면서도 그는 꽤 오래 걸릴 깊은 위기를 예언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을 그에게 알려 줄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헬레네는 내가 역으로 간 뒤 청소부가 올 때까지 참지 못하고 곧 니나가 있던 방을 청소했다. 내가 돌아왔을 때 그 방은 엉망진창이었다. 그 추위에 창문은 모조리 다 열려 있고 이불과 베갯잇은 다 벗겨져 있으며 이불은 밖에 널려 있었다. 헬레네가 평소에는 무거워 혼자서는 들지도 못하던 카펫은 발코니에 널려 있고 커튼은 전부 떼어진 채였다. 시위라도 하듯 청소부 차림을 한 헬레네는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초칠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길로 집을 나와 그 하루 중 남은 시간을 조용한 찻집에서 보냈다. 그 곳에는 마침 마이트가 와 있었다. 그는 내가 어딘지 산만해 보인다며 과로 때문일 거라고 했다. 실제로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니나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그저 예사롭게 말했다. 마이트는 직설적으로 그녀와 내가 결혼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 여자가 바라지 않을 거야.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거든."
나는 정말 그렇게 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마이트는 경멸이 담긴, 그러나 하나도 모욕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윽고 말했다.
"자넨 생각이 너무 많은 데 비해 행동은 극히 적거든."
그것은 지극히 진부한 결론이면서도 내 참담함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기도 했다.
"자네 자신이 결혼에 어울린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나? 결혼이란 걸 소망할 만하며 유용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냔 말야."
그의 질문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그는 내 친구들 중에서 드물게 모범적인 결혼을 한 케이스로 꼽히고 있었다.
"자네도 알지만 내가 결혼할 때 아내는 열일곱이었고 나는 서른이었네. 아내는 생기발랄했고 내 마음에 들었어. 그래서 나는 교육을 시켰는데 처음 한두 해는 그녀의 빠른 발전에 도취해 있었지.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어. 난 처음부터 그녀가 가지고 있던 발전 가능성만을 발전시켰을 뿐 곧 한계에 이르고 만 거야. 그 때부터 그녀는 자기 멋대로였어. 더 높이 끌어올리려는 내 의도에 반항을 하더니 끝내 나를 경멸하기 시작하더군. 그녀는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를 꾸며 놓고 그 안에 도사리고 앉아 만족해하고 있다네. 내가 그대로 방임해 두고 있으니까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모범적인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어. 그녀는 나 혼자서만 발전해 왔고 내가 그녀에게 무관심하다는 건 상상조차 못하고 있지. 이봐, 여자는 우리를 실망시킨다네."
뒤이어 그는 덧붙였다.
"우리 역시 그녀들을 실망시키고. 이 세상엔 진실한 결혼이란 존재하지 않아. 다만 체념이 있을 뿐이지."
마이트 부인은 미인 축에 들었고 보통 정도의 지능은 가지고 있었으며 자의식이 강하고 생기 있게 살림을 꾸려 나갈 줄도 아는 여자였다. 나는 그 여자와 니나를 비교해 보았다. 둘 사이엔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나는 마침내 말할 수 있었다.
"자네 말은 일리가 있어 하지만 우리와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아니 우리보다 앞서갈 수 있는 여자들도 있어"
"그래? 그렇지만 그런 여자는 참기 어려운 형이 아닐까?"
그는 일순간 우수에 찬 시선을 내게 보냈으나 이윽고 우리는 둘 다 엉터리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이트는 내가 사랑하고 있는 '그 여자' 를 소개해 줄 것을 부탁했다. 내가 그렇게는 안 되겠다고 했더니 그는 함께 유곽에 가지 않겠는가고 제의해 왔다. 그는 솔직하게 가끔 그런 걸 필요로 하고 있음을 털어놓았다. 차로 그를 그곳까지 데려다 주었을 때 나는 문득 긴장을 풀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그러나 끝나고 났을 때 나는 실망했다. 어떤 매력이 없는 것은 권태로운 작업일 뿐이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
이 장에 니나가 슈타인에게 보낸 편지가 끼워져 있었다. 가느다란 글씨에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필체였다.
1937년 1월 10일
전 아직도 알 수가 없어요. 왜 당신은 제가 진짜 당신을 필요로 했던 이번 일에 손을 내밀어 주지 않으셨는지를. 당신은 분명 제가 이것을 극기해 낼 만큼 강하리라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리고 그건 곧 제가 저지른 죄 값이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어떤 보상이나 속죄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습니다. 실수 없이 인간이 어떻게 살아 나갈 수 있겠어요? 그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전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유를 상실했습니다. 이제 다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저를 죽게 하신 건 잘하신 일이예요. 그로 인해 마음을 쓰셔선 안 돼요. 제게 죽음은 하나도 힘든 게 아니에요. 이제까지 당신이 제게 해 주신 모든 일에 감사를 드리며 마지막 한 가지를 더 부탁드리겠어요. 제 딸아이를 돌봐 주세요. 퍼시에게 그 애의 아버지가 데려갈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해 주세요. 퍼시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쉽게 주소도 찾아 낼 수 있을 거예요. 퍼시가 여행에서 돌아올 때까지는 아이를 집주인에게 맡겨 놓으세요. 여기에 돈을 동봉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전부예요. 이제부턴 과거는 생각지 않기로 하겠어요.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필연적인 것만을 생각하겠어요.
당신의 N으로부터
추신: 전 3시쯤 그 일을 하겠어요. 지금은 벌써 반은 끝낸 것처럼 피곤하군요.
다음 장에는 니나가 퍼시에게 보내는 편지가 개봉되지 않은 채 첨부되어 있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봉투를 뜯었다.
1937년 1월 9일
퍼시, 나는 더 이상 당신의 그 너그러움을 참을 수 없어요. 당신도 그 점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당신이 내 아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당신 아이를 사랑할 수 없어요. 서로 빚을 갚은 셈이 되는군요. 당신은 이혼에 합의할 것을 거절했고 난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지쳤어요. 그러니 이 길밖에 없어요. 여기에 동봉한 편지를 루트의 아버지에게 전해 주세요. 그는 아마 취리히에 있을 거예요. 그리고 나로 인해 슬퍼하진 마세요. 오래는 아니겠지만요. 이건 당신에 대한 비난은 아닙니다. 당신은 원래 그래요. 나와는 정반대이죠. 어째서 나는 당신과 결혼했고 또 당산은 그걸 고집했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정말 서로에게 큰 불행이었는데도.
나는 당신의 가치를 알고 있지만 당신이 나의 그 '복잡성' 이라고 부르는 것을 미워하듯 난 당신의 무신경을 증오해요. 난 지쳤어요. 첫 출산 이후 강제로 임신한 아이는 내게 몹시 힘겨워요.
나는 동봉한 편지도 읽었다.
1937년 1월 9일
알렉산더
제가 죽고 한참 뒤에야 당신이 이 편지를 보게 될 거라는 생각은 제게 이상한 느낌을 줍니다. 당신은 아마 절 확실히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그건 당신 탓은 아니에요. 근래에 일어난 몇몇 일은 제게 죽음을 택하도록 종용하고 있습니다. 부탁입니다. 당신의 딸 루트를 데려가 주세요.
전 그 애가 당신의 성격과 재능을 물려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애는 살아야 합니다. 당신의 딸이거든요. 언젠가 그 애가 엄마에 관해 알고자 하거든 부자유와 굴욕을 참지 못해 엄마는 죽음을 택했다고 전해 주세요. 전 완전한 자유를 향한 강렬한 동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를 이해하시리라 믿어요. 안녕히 계세요.
N으로부터
슈타인에게 보내는 것 이외의 두 장은 날짜가 10일 아닌 9일로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니나는 슈타인에게 가기 전에 벌써 모든 희망을 버렸으며 슈타인의 거절은 그녀가 예기하고 있던 것의 확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처럼 완전히 절망한 한 인간이 죽음에 임박해서 그렇듯 차분하고 확실한 편지를 쓸 수도 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무서운 느낌이었다는 편이 옳다. 니나는 끔찍할 정도로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야 그녀가 며칠 전에 '많은 힘을 갖는다는 건 위험한 일이야' 라고 하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태연할 수 있는 것이 위대할는지는 모르나 한 번쯤 약해지는 것도 보다 인간적이 아닐까. 나는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지나친 긴장감을 갖는 일은 인간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고 보면 나의 생에 대한 태도가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은 나태하고 깊은 사려가 결여되어 있고 쉽게 자기만족에 취하고 어떤 특별한 정열도 없이 그저 살아 나가는 생이지만.
다음 페이지에는 니나의 완쾌에 대한 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11. 분노
1937년 3월 28일
지난 두 달간 나는 매일같이 볼레에게 전화했다. 니나는 얼마 전까지 위험한 상태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그 돌연한 변화는 볼레 자신에게도 수수께끼였노라고 했다. 그는 마침내 니나를 방문해도 좋다고 했으며 나는 방학 첫날을 이 여행으로 보냈다.
나는 먼저 볼레를 만났다. 그는 약간은 특별한 호의를 니나에게 품고 있는 듯했다. 그는 니나가 지독한 생의 위기를 겪었으며 언제고 다시 그럴 위험성이 있다고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그리고는 이어 니나의 남편을 만났는데 그와의 결합이 니나의 발전에 큰 장애가 되고 있는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그는 좀 안됐던지 그러한 단언이 그 남자에 대한 가치 평가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런 후에 니나는 그러한 결론을 하나의 과제로 알고 그것을 잘 해내기 위해 전력투구했으나 별로 효과가 없음을 말하려 했던 것뿐이라고 했다.
니나는 이제 다시 그 파괴되었던 의지를 부질없는 투쟁을 위해 주워 맞추려는 것 같았다. 볼레는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일을 해줄 것을 새삼 부탁했다. 니나가 남편과 헤어지도록 해 줄 것도,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보수적이고 이제까지는 어떤 이유에서든 이혼은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는 자신이 만족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면서도 지금까지는 노력 여하에 따라 어떤 경우에도 결혼 생활은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쪽이었던 것이다. 난 그때마다 정신병 전문의인 그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의심스러웠고 생의 현실에 왜곡된 표현으로 들었었다. 자연히 나는 볼레가 니나에게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것 이상의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러한 의혹은 나의 자극받기 쉬운 질투심의 발로일 수도 있었다. 어떻든 그는 니나에 대한 나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크게 평가하고 있었다.
하긴 그가 어떻게 단순히 내가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니나의 반발과 반항심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나는 그의 예전의 견해를 예로 들어 가며 현재의 그의 견해를 반박하고 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알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열렬하게 자기의 새 견해를 두둔했다. 보다 위대한 본질을 소유한 인간이 그의 발전을 막는 상대와 결합한다는 일은 생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순이라는 것이다. 물론 나도 그의 의견에 찬성이다. 하지만 나는 니나가 진정으로 남편과 헤어질 결심을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한 니나는 한 번 택한 것을 그리 쉽게 단념해 버리지 않는 여자이다. 하루가 지난 오늘 생각해 보니 볼레는 니나를 향한 나의 관심이 우정 이상인 것인지를 알아보려고 숲을 두들기듯 조심스레 두들겨 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는 나에 대해 확실한 것을 몰랐으며 나 역시 그에 대해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서로간의 탐색은 지극히 희극적인 것이었다. 남자란 애정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쉽게 자신을 그렇듯 희극적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일까?
그것도 두 남자가 결코 소유하기 어려운 한 상대를 목표로 할 때에는 더욱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니나 스스로는 철저하게 그런 세계 밖에서 살고 있다. 그녀는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수줍음 많고 차분하며 완전히 자기 자신 속에 파묻혀 사는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던 그녀의 또 다른 본질이었다. 니나는 예민한 감각에 부드러운, 사람을 그렇게 부를 수도 있다면 상당히 식물적으로 되어 있었다. 말수가 적어 다소 백치 같은 다정한 웃음을 지을 줄 아는 여인, 그녀의 책상 위에는 종이가 잔뜩 놓여 있었는데 최근 몇 주 동안 쓴 소설이라고 니나는 설명했다. 나는 헤어지기 전에 퇴원 후의 계획에 대해 알고자 했다. 그러자 니나는 전에 없이 주저하는 태도와 감동적이고 수줍은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볼레가 왜 니나가 퍼시와 계속 살 결심을 한 것으로 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보기에 그녀의 외적인 생활은 어떤 의무나 요구도 없이 저 멀리 희미한 박명 속으로 사라진 것 같다. 이번의 생의 위기는 아마 니나에게 큰 축복이 될지도 모른다. 니나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장 깊은 심층을 일깨웠던 것이다. 물론 완쾌한 후의 그녀에게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나는 지금은 다소 가벼워진 마음으로 안도감을 느낀다.
1937년 6월 25일
나는 오늘 저녁 거리에서 니나를 발견했다. 사방에 어둠이 내린 뒤였으나 분명히 니나였다. 내가 횡단보도에서 차를 세우고 보행자들이 건너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중에 마치 몽유병자처럼 걸어가고 있는 한 여자가 있었는데 분명 니나였다. 그녀의 시선은 멀리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마치 그 곳으로 끌려가듯 걷고 있었다. 여러 번 사람들과 부딪치면서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냥 걷고 있었다. 니나의 야윈 몸은 임신으로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신호가 바뀌자 나는 곧 니나가 간 방향으로 차를 몰았으나 그녀를 찾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를 찾아갈 수도 편지를 쓸 수도 없다. 8주만의 이 해후는 나의 걱정을 배가시켰다. 니나는 요양원에서 퍼시에게로 돌아가며 자기의 결혼에 관해 간섭하지 말 것을 내게 통고했고 그 후 나는 그것을 충실히 지켜왔다. 나는 새로운 파멸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볼레에게 전화를 해 공동전선을 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1937년 7월 29일
나는 어제 니나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기 분만이었다. 병원 간호부장이 전화해서 그것을 알려 주었다. 아울러 니나가 내게 안부를 전하더라는 소식도.
그것은 다시 말해 방문을 말아 달라는 뜻도 되는 것이다. 나는 꽃을 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니나는 신경을 쓰게 될 것이고 퍼시의 분노를 살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이제 니나의 운명은 결정지어진 듯했다. 니나는 거기 머물러서 아이를 기를 것이다. 꿈을 상실하고 체념한 채 그처럼 전도가 유망했고 확실히 특별한 여자였던 니나가,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방학을 보내려고 한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니나는 나를 불러 오지 못할 것이다. 헬레네와 동반해야겠다.
1937년 10월 28일
니나의 편지가 여행에서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편지를 첨부해 두겠다.
1937년 10월 24일
선생님이 이탈리아와 알제리에 가 계시는 동안 몇 가지 일이 있었어요. 퍼시와 드디어 헤어졌어요. 드디어.
지금은 레오폴드 거리에 작은 집을 구해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아이들을 돌봐줄 가정부도 구했어요. 전 다시 예전의 서점 일을 보고 있는데 곧 한 출판사의 원고 교정을 맡게 될 것 같아요. 이제 제 결심은 다시 번복되지 않을 거예요. 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결심을 해 버렸어요. 그 얘긴 다음에 해 드리겠어요. 왜냐하면 곧 그런 얘기들은 제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될 테니까요. 아직 이혼이란 난관이 있는데도 전 벌써 중병을 앓고 난 기분이에요. 그리고 지금도 새로운 강기슭에 이르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어요. 이번의 결심과 변화로 감각이 마비된 것 같아요. 지금부터 새로 걸음마와 가벼운 공기를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전 그걸 해낼 수 있어요. 절 한번 방문해 주지 않으시겠어요.? 전에 나가던 서점으로 오시면 돼요. 수요일을 제외하고는 낮 시간에 늘 있어요.
N으로부터
나는 이 편지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정보다 길어진 여행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도 안정된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니나를 잊는 일에, 아니 잊었다고 믿는 일에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이 나의 부질없는 희망이었음을 알았다. 나는 니나를 잊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잊을 수 없으리라.
지금 니나가 나를 찾고 있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니나는 자기가 원할 때면 나를 부르고 그렇지 않을 때는 쫓아 버린다. 그녀는 내가 자기의 원대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 때문에 나를 경멸할지도 모른다. 경우에 따라 내가 그녀의 무리한 청을 거절하기라도 했었다면 나는 훨씬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었으리라. 그녀를 여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대했기에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난 니나의 이성과 예지를 믿는다. 하지만 한 여인에게 있어서 그러한 능력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니나는 자신이 '생'이라 부르는 걸 위해서라면 언제고 그러한 것들을 던져 버릴 여자이다. 난 그녀에게 가지 않겠다. 그녀는 내 도움이나 우정을 필요로 하고 있진 않다. 그렇다면 이 초대의 의미는?
1937년 10월 29일
나는 니나의 편지 때문에 밤에 잠들지 못한다. 나는 어제의 나의 일기를 읽어보고 나의 폭발에 놀랐다. 나의 무엇이 그토록 니나를 혹평하게 만드는가? 나는 니나가 그런 처지에 놓인 어떠한 여자라도 했을 똑같은 일을 했다고 해서 실망하고 있는 것인가? 그녀가 결혼의 사슬에서 풀려난 데 대해 화를 내는 것인가? 나는 그녀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했는데 그녀가 평범한 일을 했다 해서 지금 분노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 장에는 다른 종이쪽지가 붙여져 있었는데 아마 지극히 중요한 것인 듯했다. 나는 그 내용을 읽어 보았다.
1947년 5월 5일
나는 10년 후인 지금에야 비로소 내 분노의 진짜 이유를 발견했다. 아니, 그것을 이제야 인정했다는 표현이 옳다. 그 원인은 희극적이고 수치스러우며 깊다. 니나가 자유를 얻으려 했을 때 내게는 갑자기 그녀를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넓어졌다. 그것은 무서울 정도로 유혹적이었고 내게 확실하고 궁극적인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전에도 또 그 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러한 결단을 내릴 능력이 없었다. 자유를 사랑하는 그 여자와의 결합을 나의 확실한 감각은 스스로에게 경고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반쯤 밖에는 진실이 아니다. 그 결합을 회피한 것은 나 자신이다. 오랜 세월 나의 내부에서는 그리움과 두려움이 투쟁을 계속해 왔으며 내가 그 치욕스러운 싸움에서 해방되자면 죽음이나 불치의 병에 가까워져야 했다.
나는 10년 전에 지금만큼은 자신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의 그 격렬한 폭발의 원인이 니나가 아닌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니나에 대한 내 싸움이 나의 본질의 특수한 방향을 향한 발전과 안식을 위한 싸움이었다는 것 역시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여인을 선택하는가의 문젠 아니었으며 자신의 본질이 지니는 어떤 가능성의 선택이 문제였던 것이다. 니나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내 본질의 한 부분과 하나의 가능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0년 전의 내가 장님이었다는 사실은 내게 회한을 느끼게 한다. 나는 지금이라도 자신을 바로 볼 수 있게 된 것에 커다란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
1937년 10월 29일
나는 결단코 니나를 찾지 않겠다. 나는 휘파람을 불면 따라가는 개가 아니다.
1937년 10월 30일
이 피할 길 없는 잡념과 생각들.
정말 니나에게는 깨어지지 않는 나의 우정을 기대할 권리가 없는 것일까?
니나는 자신이 폭군과 같은 권한으로 나를 자유자재로 조종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녀는 단지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일을 하는 것뿐이지 않는가. 내가 그처럼 오랜 세월을 자진해서 바쳐온 우정을 그녀가 믿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게다가 그녀에게 내가 가장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만약 니나를 찾아 간다면 그건 단순한 우정의 발로일 것이다.
1937년 11월 12일
끝내 어제 니나를 찾아가고 말았다. 니나는 조금은 더 풍요해져 있었지만 예전 그대로였다. 조금은 신경질적인 몸짓과 표정은 그녀가 겪은 고통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는 벌써 매혹적인 웃음과 약간의 용기와 경박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나를 매혹하면서도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못다한 것을 다 해 볼 심산인 듯 기대와 생기에 넘쳐 있었다. 최근 장편 소설에 착수했으며 이미 단편 두 편을 완성했다고 말했는데 이제야 겨우 천성에 어울리게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무한한 자유 아래 살고 있는 것이다. 결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여자이다. 니나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그녀 곁에 머무르는 것이 내겐 고통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니나가 왜 나를 부르는 것일까? 그녀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7년 전에도 사랑하지 않았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게 대한 속박을 풀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그녀는 모르는 것이다. 니나는 그토록 영리하지만 다른 여자들보다 아주 다른 것도 없다. 그럼 나는 다른 남자들보다 현명하단 말인가?
희극적이고 지독한 유희이다. 그러나 나는 자주 니나를 찾을 것이다. 이 무슨 어리석고도 광적인 짓인가! 하지만 니나가 없는 나의 생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1938년 3월 1일
니나와 함께 어젯밤 '레기나'에 갔었다. 그녀는 모처럼 매우 유쾌해 보였는데 나는 그것이 무의식중에 내게 전염되는 것에 내심 반발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샴페인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니나는 내가 할 줄도 모르고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춤을 추자고 졸랐던 것이다. 그녀는 이윽고 유쾌한 기분의 원인을 털어놓았다. 어제 정식 이혼을 했다는 것이다. 니나는 그것을 기쁨에 넘친 눈으로 말했다.
"물론 잘못은 퍼시가 짊어졌지요."
나는 그녀의 그러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가가 감추어져 있는 것 같아 그것을 알아내고자 애썼으나 그것은 나의 지나친 생각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러한 니나가 마음에 안 든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어느 때보다도 매혹적이기는 했지만. 니나는 어젯밤 같았으면 무리 없이 나와 함께 내 집으로 가거나 어느 호텔로 가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값싼 기회를 이용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다음 장에는 타이프로 친 익명의 편지가 끼어 있었다.
1938년 3월 18일
친애하는 슈타인 교수에게
우리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당신을 동정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높이 보고 있는 한 사람에게 악용당하고 있습니다. 대체 당신은 사람을 볼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 여자는 당신이 그렇게 돌봐줄 만큼 가치가 없습니다. 그녀는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2주 동안 네 명의 다른 남자와...... 그 다음의 구구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우리는 그 여자가 공공의 장소에서 터무니없이 난잡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당신에 대한 호의에서 당신이 그 여자와 관계를 끊을 것을 충고합니다. 그 여자는 유태인과 그 밖의 요시찰 인물들과 사귀고 있으나 오래 그렇게 하도록 방치해 두지는 않을 작정입니다. 당신도 주목을 했었으나 그럴 필요는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의 말이 의심스럽거든 밤에 빠 '사계절' 이나 '물렝루주'에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게 좋을 겁니다.
1938년 3월 20일
익명의 편지는 기분 나쁘다. 정치적인 위협만 아니었더라도 다 읽기 전에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을 것이다. 니나가 정치적인 위협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는 것은 내게 충격을 주었다. 그녀에게 경고해 주어야겠지만 그 전에 이 편지의 사실 여부를 확인해 둘 필요가 있으리라. 니나의 방종은 내게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방향으로의 전환을 기대하고 있었던 편이니까. 나는 내 습성과 내부의 반발을 무릅쓰고라도 문제의 장소에 가서 그녀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는가를 봐야 할 것 같다. 편지를 두 번씩 읽어봐도 누가 썼는지 종잡기 어려웠다. 문체는 서툴렀는데 누군가가 애써 서투름을 가장한 것이 분명했다. 대체 누구인가? 나를 이 사건에서 멀리함으로써 니나를 위험 속에 빠뜨리는 것이 과연 누구에게 이익이 된단 말인가? 나는 순간이나마 헬레네를 떠올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니나의 고양이가 없어진 후 그녀와의 사이는 전처럼 회복되진 않았다. 아름다웠던 아프리카 여행의 동반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헬레네가 아무리 나를 보호하는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유치한 책략은 쓰지 않을 것이다. 나를 향한 헬레네의 사랑은 신비로운 모습을 띠어가고 있다. 그녀가 최근 초대하고 있는 새로운 인물들 중에는 아주 아름다운 소녀들도 있는데 그 때마다 내가 한 시간은 함께 즐기는 데 할당할 것을 요구하곤 했다. 투서는 니나의 정치적 행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전혀 모르는 자들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 지금 내 신경은 불안에 날카로워져 있다. 빠른 시일 안에 니나를 살펴보고 필요하다면 경고를 해 두어야겠다.
1938년 4월 1일
나는 불가피한, 그러나 구토가 치미는 일을 해치웠다. 하지만 그것은 나와 니나 사이의 우정에 찬물을 끼얹은 결과 외에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나는 내가 본 것을 적고 싶진 않으나 이 기록의 정확성을 위해 짧게 쓰겠다. 이 기록을 니나 이외의 다른 누가 보진 않을 테니까. 나는 3월 24일 '레기나' 호텔 바로 갔다. 니나는 그 곳에서 나의 옛 동료인 마이트의 팔에 의심의 여지없는 태도로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뭔가 아주 유쾌해 보였다. 나는 그들 눈에 띄기 전에 그 곳을 나와 버렸다. 3월 26일에는 '물랭루주' 에서 니나가 청년들 몇 명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술을 마시지도 유난스럽게 난잡하지도 않았다. 뭔가 토론에 열중해 있었는데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여자는 니나 혼자였는데 아마 그 그룹의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듯했다. 청년들은 자주 감동적인 시선을 니나에게 던졌으나 그것은 단순히 공동연구 중인 과제의 주제 때문인 것 같았다. 니나의 열중한 표정은 나를 놀라게 했고 그러한 니나의 태도는 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레기나'에서 본 것보다 더 내 마음을 쓰게 했다.
3월 28일 '사계절'에서 본 니나는 가장 나의 마음을 언짢게 했다. 그녀는 두 남자와 함께 있었는데 그 중 한 남자는 나의 고문 변호사 헬름바흐였다. 두 사나이는 만취해 있었는데 니나가 둘 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헬름바흐는 나와 동년배로 아주 근엄한 남자였다. 나는 그가 바람피우는 걸 짐작 못할 정도로 순진하진 않았으나 그가 그러한 부자연스럽고 경박한 유희로 나이와 평소의 위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몰상식한 느낌을 주었다. 니나는 그들의 경박한 행동을 재미있어 하면서 더욱 그들을 어리석게 유도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끝가지 지켜볼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이제까지의 관찰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어젯밤 니나와 그 문제를 논의했다. 그리고 그것은 실패했고 나를 희극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나는 전에 몇 번 간 일이 있는 니나의 집으로 그녀를 찾아갔다. 난 물론 언제나처럼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유쾌했음을 부인하진 않겠다. 나는 그곳에 가서도 망설이고 있었다. 그 때 니나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초조하신 것 같군요. 무슨 일이 있으세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고 니나는 집요하게 설명을 요구했다. 결국 나는 우리의 우정을 잃게 되고 말았던 그 불길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니나, 너무 무리하게 일을 하는 것 같더군"
나는 그렇게 시작했다. 니나는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또 정치 운동에 관계하고 있지?"
니나는 벌떡 일어나더니 손으로 내 입을 막고 커피포트 뚜껑으로 전화를 덮었다.
"요즈음은 도청할 수가 있대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소파로 돌아가며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했다. 그녀의 음성은 경멸에 차 있어 나는 이야기를 할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녀가 내 대신 말했다.
"그래서 제게 경고하러 오신 거로군요. 고맙습니다. 잘 알겠어요. 그러나 그 점에서 우린 서로 동지였잖아요?"
"물론 그랬었어. 좋아. 이야기하겠어. 안 그러면 날 멍청한 겁쟁이라고 할 테니까. 익명의 편지를 받았어. 네가 감시당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어."
"그래서요?"
"그래서요라니? 넌 위험하단 말야!"
나는 큰소리로 고함치듯 말했다.
"이미 6년 동안이나 그래 왔어요. 당신도 그건 잘 아시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있잖아? 게다가 요즈음은 정부에 대항해서 하는 일이 전과 같지 않아. 두 배나 힘들어졌어."
니나는 갑자기 일어섰다. 그녀의 표정에서 모든 사랑스러움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래요, 당신은 정부에 반대하면서도 그것을 파괴하려고는 하지 않으니까요."
나는 그것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다. 이제 와서 그것을 붕괴시키려는 노력은 비합리적이다. 모든 것은 너무나 굳게 박혀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나는 니나의 경멸에 가득 찬 시선을 받으며 개의치 않고 말했다.
"넌 아직 젊어. 그리고 난 너희들의 힘을 믿어. 하지만 구르고 있는 바퀴는 멈출 수 있다고 생각지 마. 언젠가는 제풀에 맞게 되지 않겠어? 그럼 결국 손해를 보는 건 어느 쪽이야? 애매한 너희들이란 말야."
"그럴지도 모르죠"
나는 하고자 했던 말의 반도 못했으므로 다시 말을 계속했다.
"넌 너무 위태로운 곡예를 하고 있어"
그러나 니나는 차갑게 내 말을 잘랐다.
"그 말씀은 방금도 하셨어요."
니나의 맹목에 가까운 반항에 나는 절망했다. 덕분에 나는 보다 확실하게 말할 용기를 얻었다.
"넌 내 애길 잘못 이해한 것 같아"
"오, 그 밖의 생활에 관해서도 이미 보고받으셨단 말씀인가요?"
니나는 짧게 웃더니 계속했다.
"고마워요. 제 영혼을 구제하러 와 주셔서. 설교하시는 건 당신에게 아주 어울려요"
"그래, 네 생활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난 다른 사람들보다 너를 많이 알아. 네가 모든 위험에 면역되어 있지 못한 것도 알고 있지."
니나는 차분히 나를 응시했다.
"무엇이 그렇게 위험한지는 아직 말씀 안 하셨어요. 제가 가끔 밤에 외출을 하고, 사랑에 빠지고, 어쨌든 다른 평범한 여자들이면 누구나 다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말하시는 건가요? 아님 뭐 또 다른 얘긴가요?"
"넌 힘을 많이 가졌어. 하지만 너무 모험이 많으면 손해를 보게 돼."
"그럼 절더러 생을 포기하라는 말씀이에요?"
니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전 살고 싶어요. 생 전체를 사랑해요.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당신은 이해 못 하실 거예요. 당신은 늘 생을 피해 갔지요. 언제 한 번 위험을 감행한 적이 없어요. 늘 잃어버리기만 했고요."
니나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당신은 행복하세요? 당신은 그렇지 못할 뿐더러 도무지 행복 자체도 몰라요. 하지만 난 알아요.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내 생을, 모처럼의 일요일을 딱딱한 숙제로 망쳐 버리는 것처럼 당신 생과 똑같이 만들려는 것을 참을 수 없어요. 저를 경박하다고 하실 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생에 대한 당신의 공포보다는 생을 사랑하는 나의 태도가 덜 경박할 거예요."
"생, 생, 대체 그게 뭐야?"
나는 분노를 누를 길이 없어 소리쳤다.
"생이라고 모두 인간적인 게 아니야. 넌 단지 생이라고 해서 매혹되고 분별도 없이 그 앞에 서 있어. 넌 이 남자 저 남자와 번갈아 가며 자는 게 생이라고 생각하니?"
그 다음 우리는 언쟁의 격렬함에 둘 다 놀라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잠시 후 니나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지친 듯 말했다.
"이젠 도덕에 충실한 재판관들이 무엇을 체험했는지 아셨겠지요?"
"이런, 내가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란 건 잘 알잖아?"
나는 다시 한 번 절망하며 말했다.
"난 설교를 하려는 게 아냐. 단지 넌 힘을 너무 낭비해선 안 된다는 걸 말하려던 참이었어. 진정한 재능은 집중이 요구되는 거야."
"그래요."
니나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도 생의 이런 면을 알아야 한다는 걸 모르시지는 않지요? 제발 저를 내버려두세요. 쾌락 때문만은 아니에요. 난 오직...... 내가 해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끝내 이해하지 못하실 거예요."
그녀는 갑자기 다시 화를 내기 시작했다.
"당신은 나보다 스무 살이나 연상이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전 어떤지 아세요? 전 아침 6시에 일어납니다. 밤에 몇 시에 잤든지. 일어나서는 원고를 읽어요. 출판사 원고예요. 그 다음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서점에서 일해요. 그 뒤 한 시간은 아이들을 돌보고 영화관에 가야 돼요. 석간에 영화평을 쓰고 있다니까요. 정치적인 일과도 바빠요. 게다가 단편을 쓰고 이젠 장편에 손을 댔어요. 이런 것만이 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세요?"
니나는 말하는 동안 계속 방안을 서성거렸다.
"당신은 좀 달라요. 하루에 고작 네 시간의 강의를 끝내면 뭐든 마음먹은 일을 할 수 있고 돈도 충분히 있어요. 걱정거리도 아이도 없어서 생활은 그저 조용히 흘러갑니다, 사회적인 위치도 확실하고 쉽게 고상할 수도 있고 여유를 가질 수도 있어요. 덕분에 나처럼 수선스럽고 의심스러운 사람에 대해 당신은 우월감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는 니나는 별안간 쿡쿡거리고 웃었다.
"제 영혼은 구원이 필요치 않습니다. 당신은 제가 이미 구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시나요? 모든 타락한 인간은 그렇게 얘기하고 또 그처럼 말하는 사람은 벌써 아래 묶여 있으므로 신의 은총만이 그것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어 그녀는 날카롭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수선을 피우며 몰려다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잘못이에요. 전 제 스스로 삽니다. 타인에 의해 살아가진 않아요. 당신도 정말로 살기 위해 그 고상한 여유를 버린다 해서 손해될 건 없을 거예요."
이번엔 내가 웃을 순서였다.
"나도 구원은 필요치 않아. 그러고 보니 우린 각자의 방법으로 파멸되도록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겠군."
"아니, 난 파멸하지 않아요."
우리는 우울한 상념과 격렬한 자기주장을 담은 시선으로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헤어질 때의 니나는 어느 때보다도 차갑고 오만했으며 조소와 우월감까지 나타내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녀가 내게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녀의 비난은 정당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내 적나라한 질투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 않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 그 부질없고 가소롭기까지 한 간섭의 진짜 동기야말로 바로 그 질투였다. 그 터무니없는 대화로 나는 그녀의 호의를 파괴하여 인내로써 그녀의 사랑을 얻을 최후의 기회를 보내 버렸다. 나는 피상적이고 오해받기 쉬운 바보 같은 말만을 지껄였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얘기해야 하는지 안다. 아니, 나는 그것을 그 날 밤에는 알았으나 지금은 알지 못한다. 말이나 견해의 차이에서가 아닌 본질적인 것의 그런 유의 오해란 풀어가기가 어렵다. 그것은 다시는 더 이상 다리를 놓아 볼 수 없는 깊은 수렁 같은 낯설음이었다. 나는 다시는 니나를 찾지 않겠다.
이 장에 이어 내가 처음 일기를 읽었을 때 본 1938년 11월 9일의 기록이 있고 메모가 첨부되어 있었다.
1939년 2월 30일
나는 이 일기에서 니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을 기록할 생각은 없다. 어느 날인가는 이것이 니나의 손에 들어갈 것이고 나는 니나에게 설명할 책임이 있으며 또 그렇게 하고자 한다.
니나는 아마 내가 한 일을 이해하고 용납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지 못할지도 모른다.
여기에 나는 그 사실을 기록한다.
하지만 그 사실이 기록된 페이지는 찢어져 없어진 것 같았다. 대신 새 종이가 붙여져 있었다.
1946년 7월 21일
1942년 가택수색의 위험에 놓였을 때 나는 여기 빠진 면을 없애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심히 유감스런 일이었다. 1939년 무렵에 내가 취한 행동은 어떻게 설명해 봐도 오늘날에는 비겁하다는 혹평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만약 엄격한 니나가 그 장을 읽게 되면 그녀는 내가 어떤 법정에서도 스스로 변명할 수 있었으며 또 그것을 강요당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내게 있어 오랜 친구인 그녀에게 정당하게 평가되는 것은 나의 공적인 명예 회복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렵 내가 기록했던 것을 여기에 보탬 없이 그대로 다시 적을 생각이다. 나는 벌써 몇 차례 입당을 종용 당했으나 그때마다 교묘히 그 그물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1939년 정월 초에 최후의 통첩을 받고 아찔했다. 그것은 나치 입당이냐 관직추방이냐의 양자택일이었다. 물론 그 무렵 내가 니나의 상상처럼 자유롭고 얽매임이 없었다면 나는 쉽게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교수직을 빼앗는 것 이상의 무엇이라 해도.
그러나 나는 반유태인 문제로 직장을 잃은 마이트와 정치적 불신으로 해직돼 오직 나만을 의지하고 있는 나의 옛 조수 빌 부인을 돌봐야 했고 그 밖에 학생 몇 명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게다가 니나 역시 곧 어떤 정치적 곤란에 빠질 것이 확실했으므로 내가 잘못되고 나면 누구도 그녀를 도와 줄 수는 없을 것이다. 1939년 2월 20일 나는 나치 입당을 결정했다. 비극적인 불길한 사태가 곧 닥쳐올 것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몇 사람의 구제를 위해 그들과 그 외의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위험한 대열에 끼게 된 것이다.
내가 만약 나의 정치적 신념을 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가치 있고 나를 믿고 있던 몇 사람의 희생은 물론 일반적인 파괴도 방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 모든 친구들을 전쟁 말기까지 구제할 수 있었다. 위험은 가까스로 우리를 넘어갔고 나의 피보호자들은 지금 사회의 지도적인 위치에서 나의 명예회복을 위한 모든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이른바 관청 용어로 '책임면제' 라는 것이 될 것이고 다시 교수직을 얻게 될 것이고 지불 연기된 봉급을 다시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사건은 어떤 흥미나 추억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져 버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손 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되찾은 모든 권리를 거부할 것이며 대학 강단에 서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표면상 신병을 내세우면 될 것이고 내가 죽을병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니나 그들은 인정해 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죄로 인해 날카로운 감정을 지니고 있다. 나와 같은 류의 인간에게 새로운 시대의 운명이 위임될 수는 없다. 나는 물론 확고한 견식은 있으나 무조건 그에 따르는 힘이 없는 부류의 인간에 속한다. 미래는 니나와 같은 강렬하고도 순간적으로 혹독하고 편파적인 결단이 가능한 사람들에게나 있는 것이다. 도대체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은 어디에도 소용이 닿지 않는 것이다.
다음 장은 다시 1942년의 기록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1942년 2월 14일
내 일기의 커다란 공백은 전쟁이 그 모든 결과와 함께 나를 침묵시켰고 일반적인 파괴에 비해 모든 개인적인 것은 하잘 것 없는 먼지에 불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난 해 니나를 자주 만났다. 이제 우리의 우정은 냉정하고도 유리와 같은 영속적인 상태에 돌입한 것 같다. 니나는 누구나 다 이 시기의 큰 소용돌이 속에서 조금씩은 자기의 음조를 잃어버린 것처럼 어느 정도 비개인적이 되었다. 니나는 그 사이에 책을 두 권 출판했다. 첫 작품은 굉장한 인기를 얻었으나 두 번째 것은 판금되고 말았다. 그것 때문에 출판사의 일자리를 잃은 그녀는 다시 예전의 서점에 나가게 되었다. 니나는 그러한 사태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으며 묵묵히 비통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니나의 아이들은 잘 자랐다. 특히 알렉산더를 아주 쏙 닮은 루트는 더욱 잘 크고 있다. 니나는 아이들이 어머니의 근심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훌륭하게 어머니의 역할을 해냈다. 그녀는 온종일 일과 흥분으로 지칠 대로 지쳐 집에 돌아와서는 아이들과 재미있게 웃고 떠들고 행복한 것처럼 보이게 했는데 나는 자주 그러한 광경을 보았다. 나는 때때로 그녀의 집에서 몇몇 학생들과 만났으며 나를 도와준 집주인 노인과도 마주쳤다. 그 역시 니나의 정치 그룹에 속해 있는 것 같았다. 내 앞에서 그들은 정치에 대해선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나는 니나가 나의 행적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고의로 무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강렬하고도 공격적으로 내게 혹독한 비난을 퍼부어야 마땅했다. 어쩌면 그녀는 나의 동기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동기를 존중하고 있는지도..
아니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나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밤의 나의 방문으로 보아 그녀는 확실히 나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에 그랬던 것처럼 나를 특별한 목적에 이용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나는 이 모든 내 의문에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으며 그것에 관해 그녀와 의논해 볼 용기는 더욱 나지 않는다. 나는 지독한 불안과 충격, 공포를 억누르기 위해 과장 없이 모든 것을 적고 있으나 아, 나는 결코 진정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자정이 조금 못 되었을 때 벨에 울렸다.
나는 보통 체포는 새벽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면서도 올 것이 왔다고 믿었다. 나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문을 열었다. 문 밖에 서 있는 것은 니나였다. 그녀의 외투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니나는 그것을 벗을 생각도 않고 선 채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지나치게 야성적으로 보였고 운 것 같았다. 나는 쫓기고 있다고 순간적으로 믿었으나 그녀는 퍼시의 이야기를 했다.
체포되어 수감 중인데 곧 처형될 것이라고 했다. 퍼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이야기는 내게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니나의 슬퍼하는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내겐 니나가 아직도 그 친구에게 미련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은 이상한 변종이었다. 니나는 퍼시가 교수대에 오르기 전에 먼저 죽을 수 있도록 내게 독약을 요구했다. 그것이 가장 나은 방안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자유에의 권리를 죽음의 결단에까지 확대시키는 데 동의할 수는 있었으나 이 경우 나는 보다 더 심각하고 복잡한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니나가 그 계획에 나를 끌어들인 것은 구역질나는 운명의 유희였다. 전에 퍼시가 죽어 버렸으면 하는 마음을 억제한 일이 있는 내게 하필이면 그의 죽음에 동의를 요구하다니. 게다가 나는 아직도 그의 죽음에 대한 소망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죽음을 갈망하고 그것이 필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용납될 수는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니나와 얘기하고 싶지 않아 독약을 가져다주는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방향으로 이 애기를 유도하려 했다.
나중엔 아이들의 안전까지 들먹여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아이들은 무엇보다도 소중했으며 퍼시가 아이들보다 중요하다고 결코 생각할 수 없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이것은 니나의 본질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아직도 니나가 거부당하고 핍박당하고 우울한 방법으로 퍼시를 사랑한다 해도 그것은 인내와 고집이 가능한 그녀의 생동적이고 마녀적인 기질에 반대되는 것일 게다. 그러고 보면 사랑이 끝난 오랜 뒤에도 비밀스런 연결의 성립은 가능한 것 같다. 나에 대한 니나의 저 놀라운 집착 역시 이 집요함이 근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그녀의 가장 예민한 정곡을 찌르려고 애쓰며 누구도 비상하고 심각한 경험의 가능성을 위장할 수는 없다는 식의 말을 했다. 퍼시에게서 그 시련의 마지막 날을 빼앗는 것은 그에게 어떤 인식의 상실을 가져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하지만 니나는 나의 머뭇거림에 화를 낼 뿐이었다. 퍼시는 죽음의 결단과 죽음 사이의 그 한 시간의 더욱 중요한 인식은 모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퍼시가 그 온갖 추측에 반해 구제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해 보았다. 니나는 분노를 담은 날카로운 시선을 내게 던졌다.
"우리가 오랜 우정을 계속 유지하는 동안 내가 당신에게 하는 두 번째 청을 당신은 거절하시는 군요"
오히려 그녀에게 정곡을 찔린 꼴이 되었다. 나는 결국 유사시에 대비해 늘 지니고 다니는 카페인 분말의 반을 그녀에게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새벽 4시에 돌아갔다. 비가 내리는 축축한 잿빛의 새벽에 그녀는 갔다. 내가 바래다주는 것을 거절하고 돌아간 그녀는 잠시 후 다시 돌아와 내게 결렬하게 키스했다. 나는 점점 거세어지는 빗줄기로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랫동안 그녀를 문 앞에서 전송했다.
그 사이에 나는 나의 변신을 느꼈다. 세포와 신경줄이 한 가닥 한 가닥 모두 얼어 버릴 만큼 추웠다. 나는 그 추위 속에 아무 감각도 없이 남겨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까지 나를 엄습하고 있던 공포나 불안마저도 단순히 외면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내면의 생명은 사라지고 허물만이 남았으며 그런 채로 생은 끝날 것이다.
12. 아름다운 해후
니나가 구속되었다. 반란 방조죄로 15년의 징역이 구형되었다. 그녀는 지금 아이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 나는 어제 그녀를 면회했다. 그녀는 그 판결이 후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형이나 강제수용소행이 아닌 것만도 다행이에요."
"하지만 15년씩이나......"
나는 난처해져서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으며 간간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이미 반년을 산 뒤였고 나는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녀가 간수에게 인도되어 들어온 후에도 나는 여전히 문 쪽을 응시한 채 내가 알고 있던 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니나는 수의를 입고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막신을 신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먼저 아는 체하기 전까지 나는 알아보지 못했다. 목소리만은 예전 그대로였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니나는 뜻밖에도 놀라운 정신 집중을 보였고 마치 그곳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재회의 장소이며 유쾌한 시간인 것처럼 인사를 했다. 면회 시간은 5분간이었으나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거리기만 했다. 니나는 내게 아이들을 가끔 찾아가 줄 것을 부탁했다. 아이들은 1942년 12월 제 2폭격으로 그녀의 집이 반파되었을 때 예전의 가정부가 살던 시골로 옮겨가 있었다. 나는 그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물었으나 니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여간수는 그녀에게 친절했고 건성으로 듣고 있어서 그녀는 내게 귓속말을 할 수 있었다.
"어떤 시도도 하실 것 없어요. 전 꽤 운이 좋은 편인데다 결코 15년씩 계속되진 않아요."
작별하기 직전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다시는 오시지 마세요. 당신은 흥분만 하게 되고 제게 도움을 주진 못해요. 아셨지요?"
니나에게서 절망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쑥 들어간 눈도 그늘은 졌을지언정 여전히 광채를 뿜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그토록 숱한 시련을 겪어 온 그녀가 이제 더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하지만 나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 니나가 내가 도울 길도 없이 그 곳에 있다는 것, 그리하여 나 자신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목구멍으로 나오지 않는 악몽을 꾸는 것처럼 그것을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나로선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1939년 나치에 입당함으로써 니나를 구할 수 있기를 희망했었다. 이 세상에 양면적인 타협처럼 구제불능의 결함은 없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된다. 니나가 자유롭게 될 때까지 나는 살고 싶다. 그 때까지 나는 아이들을 돌보아 주겠다. 러시아에 가 있는 알렉산더에게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것은 지나친 모험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와 베를린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었다. 봉인된 편지를 헬름바흐에게 맡겼다가 나의 사후에 알렉산더에게 전하는 방법을 고려해 봐야겠다.
이 장의 하단에는 종이쪽지가 첨부되어 있었는데 글씨가 지나치게 흘려 씌어져 있었다.
1947년 9월 3일
나는 오늘 알렉산더가 러시아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다시 만나는 집요한 환상에 빠져 있다. 스스로 억제해 가며 사후의 생활에 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내게 그것은 놀라운 상념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고통의 극한적인 한계에서 온갖 위안이, 더할 수 없을 만큼 총화된 자유로운 쾌활함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 증명할 수 없는 초정신적인 상념은 내 생애의 작별에 대한 마음의 대비를 충실하게 해준다.
이어 다음에 무언가를 적기 위해 남겨진 것 같이 보이는, 사용되지 않은 두 페이지의 여백이 있었다. 이 빈 페이지는 불쑥 내 앞에 나타난 심연처럼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거기에 기록되어 있어야 할 많은 것이 불가항력으로 침묵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나의 망상일 수도 있었다. 불면의 밤을 보내고 난 뒤 지친 피로감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 아무튼 계속되고 있는 일기로 미루어 보아 그 사이에 특별히 중대한 일이 없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1945년 5월 10일
전쟁은 종식되었고 니나는 자유로워졌다. 그녀는 제일 먼저 나를 찾아 왔다. 화장기 없는 지치고 쇠약해진 모습은, 병들어서 나의 진료실을 찾아왔던 15년 전의 그녀와 아주 닮아 있었다, 지나치게 쇠약해 있으면서도 생명력과 신뢰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까지도. 그것은 아직 내게 어떤 기대가 남아 있었다면 내게로 옮겨졌을 것이다. 내가 일선으로 가게 될 것을 확신하고 그녀에게 썼던 작별의 편지를 그녀에게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는 종이쪽지에 불과했다. 나는 병들어 늙어가고 있으며 그 고통은 불가항력으로 심각해 나는 기껏해야 2년쯤밖에 더 살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언제나처럼 니나를 사랑할 것이다. 나의 생명이 이 단 한 가지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기에 더욱. 나는 니나에게 당분간은 내 집에서 지내라고 권유해 보았다. 그러나 니나는 슈른베르크의 호반에서 당분간 지내고 싶다고 했다. 니나가 내 가까이에 있는 일이 몹시 필요했던 나는 그녀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서운했다. 나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변형에 몹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이 시대에 더 크지 못했으나 니나는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나를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이 시대와 현실에서 도피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과연 그러한가?
구출된 자와 함께 까마득히 긴 해안을 급히 뛰어가는 사람, 혹은 한 번은 가치가 있었고 그 가치를 지니고 그것을 보장하기 위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과연 도피자가 누구란 말인가?
1946년 8월 4일
순전한 호의에서 오히려 네게 고통을 주는 친구들에게 내가 그들이 제공해 주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것이 끝나가기만을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일은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나는 죄를 시인하는 것으로 안도를 얻으려 하진 않는다. 나는 모든 행위의 취소할 수 없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작용을 그렇듯 날카롭게 본 일은 없다. 실제로 나의 죄과는 극히 경미한 것이나 그것이 내 양심 안에 깊은 죄로 나타날 때에는 어떻게 그 죄 값을 치러야 하는가? 나는 그러한 내 형편에 대해 니나와 이야기하고 싶다는, 거의 불가항력적인 갈망에 몸을 떨곤 한다.
니나는 내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과연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서 때때로 지극히 허약해진다는 것을 이해하려 들 것인가는 알 수 없다. 나는 그것에 관해 니나에게 이야기하고 때로는 저녁식사에도 초대하고 싶다. 밤에는 수면제가 있지만 저녁 시간에도 친밀한 대화가 있었으면 한다. 그 점에서 헬레네는 차츰 더 적합하지 않은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녀는 내가 괴로워하자 그녀 자신도 괴로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린 묵묵히 침묵한 채 마주앉아 흘러가는 시간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니나를 오게 해야겠다. 그녀는 8개월쯤 통역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새 소식' 지의 기자가 되었다. 나는 요즈음 가끔씩 그녀를 볼 뿐이다. 그녀는 너무 바빠 나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 줄지 의문이다.
1946년 8월 8일
니나에게 나는 바보스러운 말 상대에 지나지 않았나 겁이 난다. 그녀는 오늘 마치 열두 폭의 돛을 단 배가 때마침 대해에 이르러 순풍을 받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익숙하질 못하다. 옛날의 그 암울하고도 집요하던 정열이나 우울한 마녀적인 기질은 이미 보이질 않았다.
그녀는 성공했고 그것으로 인생과 이성과 예지에 보답했다.
그녀에게서 가장 매혹적이고 내가 늘 찬사를 아끼지 않던 그 힘. 그의 의지는 지나치게 긴장되어 있어 그녀의 예전의 모습을 방해하는 자기 안정감의 한 양태를 본질적으로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주저하며 적나라한 진실을 수용하지 않기에는 너무 우울하고 의미 깊은 꿈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결코 이 세계에 속해 있지 않은 것 같았는데 언젠가는 그것을 경멸할 것이다. 나는 그녀가 자기에게 필요한 자유와 그렇지 않은 자유를 함께 지니게 된 것이 그녀에게 어느 정도 큰 기쁨인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힘과 힘 안에 있는 가능성을 느끼는 것도 이해한다. 그녀는 이제부터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것과 자신의 젊음을 보상받을 것이고 그 나이에 지니게 되는 무한한 모든 성공과 그 효력이나 평가에 있어서의 순진무구한 당돌함 등을 찾게 될 것이다. 또한 행복의 여신은 그녀가 시작하는 것은 뭐든 성공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듯하다. 니나는 좋은 집으로 이사했고 수입이나 권위 면에서 신문사일은 괜찮았다.
니나의 새 소설은 굉장한 평판을 얻고 있다. 나는 그것을 읽었다. 그것은 지나치게 사실적인 것에의 집착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예전에 발표한 소설의 특징인 그 현명한 우울이 부족한 듯싶었다. 어쨌든 아주 좋은 소설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친구와 지인이 많았으며 사람들은 그녀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주었다. 정치적인 진로를 취할 것을 권유받기도 했으나 니나는 그것을 거부했다. 공명심과 활발해진 행동력에 이끌리는 것 같았으나 그것도 그런 선에서 끝난 것이다.
나는 니나가 그와 같이 유쾌하고 믿음직스럽게 지내고 있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의 명예 회복을 위해 뒤에서 가장 애를 쓴 건 그녀였으면서도 내겐 단 한마디도 비치지 않았었다. 그녀는 아직 독신이었는데 그것을 후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사실 아직 젊었으므로 새로운 결합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니나는 연륜으로도 저울질 될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였다. 나는 오늘 밤에도 몇 번이나 그녀의 황홀한 매력에 이끌리는 자신을 느꼈다. 그녀의 외적인 행동의 우아함은 의지나 지성과는 또 다른 것으로서 내가 오래 전에 상실한 고통과 흥분을 몰고 오는 잘못을 범하도록 나를 유혹했다. 물론 이제는 그것도 지극히 일시적인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나는 오늘 밤 마치 찬 서리와 같은 우울에 빠져 들었고 그것은 고독을 동반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과 너무 오래 유리된 채 지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니나와 알렉산더 이외의 누구도 찾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내게 친밀하게 접근해 오는 사람들을 막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과의 사이에는 어떤 공동체적 의식도 없으며 나는 다른 누구의 공감도 필요하지 않는 나만의 길을 간다. 내가 니나를 부른 것은 끔찍한 고독에 반대하는 공동전선을 펴자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설사 니나가 그것을 원하며 모든 힘을 기울여 그것을 구하려 할지라도. 물론 나는 이제 그런 불행에 슬퍼하거나 고통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무감각은 언제나처럼 저항력이 없는 나의 본질에 대한 보호를 위장하고 그 속에 불가피하고 극단적인 절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1947년 9월 4일
예상했던 대로 오랜 요양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이제 몇 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아픔은 이제 참을 수 없을 정도에 이르지 않았는가. 알렉산더의 죽음을 알리는 통지를 어제 받았다. 그것은 나의 최후에 대한 동경을 더욱 강한 것으로 만들었다. 나는 내 최후의 날을 9월 8일로 정했다. 니나를 처음 만난 지 꼭 18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그 전에 니나와의 작별 파티를 할 계획이다. 니나는 내가 병들어 있는 것을 알지만 그 파괴의 정도는 모르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그것을 알리지는 않겠다. 나는 결코 죽음의 축제를 베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내 눈 속에 잔영으로 남아 나를 어둠으로 인도할 그런 축연을 한 번쯤은 베풀고 싶다.
1947년 9월 7일 밤에서 8일 사이.
이것은 내 마지막 일기가 될 것 같다. 나는 벌써 쓰는 것조차 힘들다. 중간에 쉬어가며 적어 나가기로 하겠다. 나는 이미 생각보다는 죽음 쪽으로 훨씬 기울어져 있다. 기억은 무가치한 것, 나는 니나를 위해 완성을 위해서만 회상하겠다.
오후 늦게 니나가 왔다. 나는 헬레네에게 그녀와 둘이 있고 싶다고 했다. 헬레네는 비통하고 용기 있는 태도로 그렇게 해 주었다. 나는 아편 덕분에 몇 시간은 비교적 견딜 만했다.
니나가 처음으로 꽃을 가져와 나를 감격시켰다. 나는 그녀를 초대하는 데 다소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생기를 감당할 수 없기에 더욱.
니나가 작년에 보여 주었던 분주함, 정열, 그 숨찬 명예, 과잉 노출은 이미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이 단순한 하나의 노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니나 스스로를 노력가로 만들고 그녀에게 부여된 침묵에서 도피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이긴 했으나 분명 실패로 끝날 한 시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니나, 너는 이 말을 진실로 이해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곧 너는 내 말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나로선 다시 여기에 적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우리는 나누었다. 우리는 피차 강 건너의 대안에 어둡게 자리하고 있었으면서도 서로 다른 편에서 부르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지기 직전에 나눈 마지막 한마디와 침묵으로 처음으로 서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넌 늘 내가 어둡고 출구도 보이지 않는 긴 복도를 지날 때 문을 열어 주었고 내게 가까이 와 햇빛이 찬란한 들판을 보여 주었다. 나는 그 들판에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절망의 극단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지."
"아, 당신은 제가 늘 그 문을 다시 닫아버렸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니나는 비애에 차서, 그러나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 그렇진 않았어. 오히려 넌 내 생각보다 늘 훨씬 오래 또 자주 그 문을 열고 있었어. 그런데 내가 그리로 들어갈 힘이 없었던 거야. 내 눈은 빛이나 색깔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고, 넌 우리가 서로 만나기는 하면서도 상대가 서 있는 대안의 언덕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을 알았어. 넌 내 생을 인정하지 않을 거야. 그건 네 것과는 전혀 달랐으니까."
"그렇지만 당신은 제 생을 이해하고 인정하시겠지요?"
니나는 놀란 듯 외쳤다. 나는 꼭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널 사랑하므로' 라고.
대신 나는 웃어 보였다. 니나는 여전히 의아스럽게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이해하고는 차분하게 물었다.
"당신은 왜 '대할 수 있었다' '원했었다' 라고만 말씀하시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내 침묵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 어쨌든 그녀는 그 침묵이 어떤 심연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녀는 곧 돌아갔다. 나는 그녀가 모퉁이에 이르러 뒤돌아보았을 때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작별에 슬픔을 느껴야 했다.
나는 이 아름다운 해후를 내게 선물한 생에 감사한다. 니나의 목소리는 내가 마지막 듣는 목소리이며 그 눈은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눈일 것이다.
새벽녘, 나는 다시 한 번 더 생을 돌아보라는 양심의 종용을 받고 많은 나의 죄를 본다. 생의 죄를. 이제 달리 어떤 변화도 불가능한 이 순간에 그러한 통찰의 고통은 작은 것이 아니다. 나는 니나에게 최후의 편지를 썼다. 차츰 날이 밝아오고 시간은 가까이에 와 있다. 나의 의식은 통증으로 함몰되어 가기 시작한다.
기록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나는 마지막이 너무 슬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니나가 가 버린 텅 빈 방안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실컷 울 수 있었다. 또한 나는 이미 지나가 버린 슈타인이 준 아픔이나, 떠난 니나 때문이 아닌 나 자신 때문에 난생 처음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잿빛으로 젖어 촘촘하게 얽힌 그물 같은 나와 모든 인간의 숙명에 대해서도 울음을 삼켰다. 누가 있어 그 그물을 찢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설령 찢어버릴 수 있다 한들 그 그물은 늘 발에 밟히고 걸려 우리의 뒤를 질질 따라다니지 않겠는가? 아, 그건 정말이지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로 우리를 억눌러 온다.
나는 멍청하게 앉아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과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차츰 어둠이 내리자 나는 기다림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남자를 기다린다는 일이 힘들어졌다. 그가 오면 대체 무슨 얘기를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줄곧 시내에 나가거나 친절한 이웃집 부인에게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방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니나의 위스키 병을 찾아보니 조금 남아 있었다. 한 잔의 위스키는 나의 원기를 조금은 북돋워 주었으나 그걸로 그만이었다. 저녁답에 날씨가 흐린데다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나는 그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덴바일라에서의 니나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 때 니나는 온 종일 기다렸고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인물일까? 나는 호기심, 초조, 분노, 우울 등으로 해서 다시 엉망이 되고 말았다. 밤이 되었을 무렵 집 앞에 차 한대가 와 멎었다. 이내 벨이 울렸는데 그렇듯 빨리 층계를 올라올 수 있다니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는 마침내 온 것이다. 나의 상상대로 정신없이 서두르며......
그는 일순 방심한 표정으로 내게 미소를 보낸 뒤 재빨리 나를 넘어 빈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나는 그 짧은 순간에 그 사나이가 그처럼 재빨리 사태를 파악하는 것에 깜짝 놀랐다.
"언제 떠났습니까?"
"어젯밤에요. 니나가 예정했던 대로죠."
상대방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런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어오세요."
내가 말했지만 그는 듣고 있지 않았다.
"내가 전화했던 걸 알고 있습니까? 니나가 말입니다."
"그래요, 알아맞히더군요. 어쨌든 좀 들어오시지요."
그는 들어와 휑하게 빈 방을 보며 마치 심장 속까지 놀란 듯 호흡을 모았다. 니나의 출국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내가 의자를 내어 주자 그는 앉았다. 그는 우울하고 신중하게 허리를 굽히고 앉아 있었는데 몹시 창백하고 그늘져 보였다. 자기의 실망을 조금도 감추려 들지 않는 자세였다. 나는 뭔가 말을 해야 한다고 느꼈으나 그 비통한 슬픔 앞에서는 어떠한 말도 부질없는 것이 될 것 같았다.
"너무 늦으셨어요, 당신은 니나가 그렇게 하리란 걸 잘 아셨을 텐데."
나는 불쑥 그렇게 말했다.
그는 무겁고 우수에 찬 시선을 내게 보냈으나 잠자코 있었다. 나는 이 일에 관한 한 그에게 무슨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 외에 누가 있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난 당신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런 만큼 당신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건 제 동생에게 나쁜 일이예요. 제 생각으론 사람이란 그런 사건은 철저하게 단념하든지 아니면 어젠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봐요. 그건 당신도 잘 아실 겁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이 어느 정도 어려웠는지는 신만이 알 것이다.
"니나는 영국에서 결혼할 거라고 당신에게 전해 달라더군요."
그는 고개 한번 들지 않고 딱딱하게 굳은 채 내 말을 들었다.
"물론 그건 거짓말이에요."
"압니다."
남자는 비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영국 주소를 알려 주는 일도 하지 말라고 했겠지요?"
"그래요. 그렇지만 주소는 여기 있어요."
나는 주소를 적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성급하게 그것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댁은 참 현명하시군요."
"천만에요."
그는 다시 약간 방심한 듯 웃었다.
"아니, 당신은 우리 셋 중에서 가장 너그럽고 이해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가 이 때 보여준 미소를 잊지 못하리라. 그 미소는 나를 매혹해 쉽게 그리고 영원히 나를 그의 편으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는 그 밤을 함께 그 곳에서 지냈는데 우리가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니나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어서 작별했고 그가 설령 니나를 따라갈 생각을 했다 해도 나는 그에게 어떤 원망도 지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후 반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여름날 니나에게서 짤막한 소식이 왔다.
이곳에서 난 잘 지내. 카펜터 부인의 집안일은 많지가 않아. 그래서 나는 시간이 나는 틈틈이 번역일도 하고 새로운 작품을 쓰기도 하지. 간혹 독일에서 매우 떨어져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은행 전권 위임장을 동봉하니까 루트에게 새 옷을 사 주었으면 해. 크기가 38 정도의 예쁜 비단옷이 좋겠어. 여기는 시골이라 마땅한 게 없거든. 런던에는 당분간 가지 않을래. 가을에 독일로 가게 되면 언니한테 연락할게. 편지 해줘. 늦게나마 언니를 찾아 정말 기뻐. 내 걱정은 하지마. 잘 지내고 있으니까.
그 이후 다시는 니나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는 가을 나는 그녀를 만날 기대를 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가슴이 떨린다. 마음 한 자락, 그녀를 만나는 일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