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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가운데(Mitte des Lebens) 1

생의 한가운데(Mitte des Lebens)

Luise Rinser

 

1. 재회의 기쁨

 

여자 형제들은 서로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던지 혹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지 둘 중 하나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동생 니나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나보다 열두 살이나 아래였는데, 내가 결혼할 때 그녀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귀여운 곳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는 말라깽이인 데다가 팔다리에는 어디서 할퀸 상처투성이이었다. 내 결혼식에 하녀처럼 면사포를 들라고 니나에게 말하자, 그녀는 면사포에 침을 뱉았다. 그 후로 이 같은 행동은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으나 귀여운 구석이 없기는 여전했다. 자신의 일에 대한 모든 간섭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는 그녀의 일에 상관하지 않았다. 게다가 남편을 따라 외국으로 간 뒤부터는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해 뜻밖에도 나는 그런 니나를 만났다. 바덴바일라에 있는 어느 호텔 바에서였다. 나는 금방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니나는 놀랄 만큼 변해 있었다. 최신 유행의 헤어스타일에 고급스런 멋진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여전히 예쁘지는 않았으나 꽤나 매력적이었고 아직도 야생적인 무엇인가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가 눈에 띄는 차림을 한 것도 아닌데 남자들은 모두 그녀를 돌아다보았고 내 남편 역시 그랬다. 그는 그 때까지 그녀가 니나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가 니나임을 남편에게 알리지 않았다. 니나는 테이블 앞에 앉아 위스키잔을 앞에 놓고 신문을 보고 있었다. 음울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문이 열릴 때마다 그 쪽으로 시선을 보냈으나 이내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위스키는 내가 헤아린 것만으로도 다섯 잔째였으니 그 전에는 얼마나 마셨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선뜻 그 애를 아는 척하지 못했다. 그 애가 일어나서 문 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서른일곱의 나이답지 않게 젊어 보였다. 나는 그녀 뒤를 따라 나갔다. 내가 부르자 그 애는 한참만에야 나를 알아보았다. 목소리에도 얼굴에도 의외라는 표정은 없었다.

"다시 독일로 왔니?"

"그래, 1년만 있다가 다시 스웨덴으로 갈 거야. 여기선 스톡홀름 신문 일을 보고 있어."

"그런데 넌 여기서 뭘 하니?"

나는 마지막 질문이 적당치 못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니나가 술을 마시고 있었노라고 대답했을 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있니? ? 여기 오래 있을 작정이야?"

니나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소리를 질렀다.

"얘길 좀 하렴, 어떻게 된 셈이니? 내가 도울 일은 없어?"

니나는 풀썩 웃었는데 조소 같기도 했으나 뭔가 가슴 뭉클한 우수가 가득 찬 미소 같기도 했다.

 

"나 좀 바래다주겠어?"

나는 니나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니나는 몸을 떨었다.

"아침 공기 때문이야."

갈라진 음성으로 니나가 말했다. 아직 어두웠는데도 다가오는 아침은 강렬했다. 우리는 공원을 걸어 나갔다. 밤사이 내린 이슬이 다리를 스쳤다.

나는 니나가 뭔가 이야기를 해주기를 바라면서도 따분한 연애 사건 이야기나 듣게 될까봐 은근히 두렵기도 했다. 한길로 나서서 언덕길을 내려가는 동안 니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누굴 기다렸는데 바람 맞았어. 오늘 기차로 떠날거야. 주소나 적어줘, 편질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주소를 적어 준 뒤 잠자코 니나를 보냈다.

 

그 뒤로 나는 순간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니나와의 만남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쓴 책을 사고 그녀가 기고했던 묵은 잡지도 사 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이 형편없는 것이라면 하는 두려움에 읽을 수 없었다. 9개월인가 지난 뒤 어느 날 아침, 나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뮌헨에서 온 장거리 전화였다. 낯익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미안해. 그 동안 전화를 할 수가 없었어. 나 니나야. 다음 주일에 런던으로 떠나"

"오래 머물 계획이니?"

나는 잠이 덜 깨어 그렇게 밖에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럴 것 같아. 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저어...... 내 생일날 와 주지 않을래?"

"넌 누가 생일 축하를 해 주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

"지금도 축하를 받으려는 건 아냐. 의논할 일이 있어. 오겠어?"

"그래, 야간열차로 갈게. 월요일 아침에 닿을 거다."

나는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니나의 돌처럼 고요한 음성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려 했으나 도대체 그 애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알고 있는 것이라곤 고작 니나가 스물여섯에 임신을 했으며 그 아이의 아버지와 결혼했고 몇 년 후에 이혼했으며 히틀러 치하에서 체포를 당했다는 사실 등등이었다. 그리고 불안정한 생활을 했으나 그것으로 인해 방해받지 않고 좋은 작품을 썼다는 것 정도였다. 니나를 아는 나의 몇몇 친지들은 니나를 오만하고 방종스러우며 매혹적이라고 평했는데 그 말에는 일종의 선망이 담겨 있어 나를 놀라게 하곤 했다. 그런 니나가 갑자기 내게로 가까이 온 것이다.

우리는 개성이 강하고 예민한 아이들이 갖는 그런 느낌 말고는 서로 공통점이 별로 없었다. 늘 조용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비좁은 집과 잔칫날의 추억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 뒤의 생활은 우리를 갈라놓았고 이제 다시 우리를 만나게 해 주었다. 나는 니나에게 갑자기 친근감을 느꼈고 재회의 기쁨에 잠겨 있었다. 남편은 나를 자동차로 뮌헨까지 데려다 준 뒤 잘츠부르크로 가 버렸다.

아침 7시였다. 기차보다 한 시간 빨랐다. 3층에 있는 니나의 방 창문은 열려 있었다. 니나는 집에 있었는데 나를 보자 다만 짧게 들어오라는 말만 했다. 핼쑥한 얼굴은 전화의 목소리처럼 돌과 같았다.

방 안은 벌써 텅 비어 있었다. 좀 더 많은 가구가 있었겠지만 이미 실려 나간 뒤인 것 같았다. 긴 의자 하나와 담요 몇 장, 조그만 가스난로와 넘칠 듯이 물이 끓고 있는 냄비, 그밖에 의자 두 개, 책과 노트, 살림 집기 몇 개가 있을 뿐이었다. 구석에는 못을 박은 궤짝 몇 개와 옷이 잔뜩 들어 있는 트렁크가 세 개 있었다.

나는 케이크와 백수선화 다발을 니나에게 주었다. 니나는 놀란 듯 웬 꽃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 애의 태도에 무색해졌다.

"네 생일이랬잖니?"

", 그랬구나. 잊고 있었어. 커피를 끓일게."

니나의 재빠른 동작은 어린 소녀 같았으나 찻잔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려고 몸을 돌렸을 때

나는 지난번 바에서보다 훨씬 늙은 얼굴을 보았다. 전날 밤 한잠도 자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쩌면 몇 날 밤을 그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니나는 다시 내 곁에 앉으며 물었다.

"커피 맛 괜찮아? 나는 아주 진하게 마셔. 언니는 어때?"

니나는 일어나서 유리잔 두 개와 상표가 없는 술병을 가져왔다. 니나는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 단숨에 마셔 버렸다. 나는 깜짝 놀라 나무랐으나

"아냐. 지금은 마시고 싶어. 하지만 여길 떠나면 안 마실 거야."

라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다시 한 잔을 넘치도록 따라 이번엔 반만 마시며 니나가 말했다.

"어떻게 벌써 도착했어? 마중을 나가려던 참인데."

니나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했다.

"수요일 날 떠나."

빠른 어조로 말하고 니나는 남은 술잔을 비웠다. 그녀의 시선이 궤짝 위에 놓아 둔 꽃에 머물렀다.

"수선화로군, 내가 이 꽃을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그런 줄 모르고 그냥 산 거야."

나는 약간 무안해 하며 대꾸했다.

"난 수선화와 분홍 살갈퀴 꽃, 붉은 장미가 좋아. 난 늘 그래. 그렇게 많은 걸, 모든 걸 좋아한다니까."

빈 깡통에 꽃을 꽂으려고 일어나면서 그녀가 덧붙였다.

"그리고 이처럼 저주스런 생을."

니나는 깡통에 물을 부으며 목요일에 떠날 생각이라고 말했다.

"수요일이 아니고?"

"아니, 뭐 수요일도 괜찮아."

니나는 웃으며 커피를 가득 따라 뜨거운 것을 단숨에 마셔 버린 뒤 나를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 궤짝과 트렁크가 놓여 있었다. 니나는 그것을 내가 맡아 주길 희망했다. 나는 기꺼이 승낙했다. 니나는 궤짝 옆에 놓인 트렁크를 가리켰다.

"이건 열쇤데, 만약 내가 안 돌아오면......"

"니나!"

"아니, 그럴 수도 있다는 거야. 그러면 이걸 전부 애들에게 줘"

"그럼 애들은 두고 가는 거니?"

나는 놀라 물었다. 니나는 평온하게 대답했다.

"데려가서 뭘 해? 애들은 기숙사에서 잘 지내고 있는데. 돈은 얼마든지 있어."

나는 니나의 억양 없는 음성에 신경이 갈갈이 분해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니나의 어깨를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대체 무슨 일이니?"

니나는 내게서 빠져나가 핸드백에서 종이쪽지를 꺼냈다.

"내 주소야"

버크셔에 있는 어떤 시골이었다.

"거기서 뭘 할 생각이니?"

"아직은 알 수 없어. 우선은 어느 노부부의 집안일을 돌볼 생각이야. 외무부에서 서기관을 지낸 사람인데 전부터 잘 아는 사이야. 여기를 떠나자면 그렇게라도 시작해야 돼."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우편배달부 일거야."

니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가더니 한 묶음의 편지와 소포 한 개를 가져와선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놓았다.

"읽어 보지 않니?"

"매일 아침 이런 식인 걸. 별 거 아냐."

"그런데 난 왜 오라고 했니?"

"모르겠어. 아마 빈 집에 혼자 있는 게 싫었던 거지."

예사롭게 말하는 니나의 목소리에는 불안과 두려움, 절망 따위의 감정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나는 그 정체가 궁금했다. 니나는 그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으나 늘 중도에서 포기하곤 했다.

"위스키 한 잔 주겠니?"

니나는 잠자코 내게 한 잔을 따라 주며 느닷없이 말을 시작했다.

"언니를 오라고 한 건 부질없는 것이었어. 언니가 온다고 일이 잘 풀리는 건 아닌데 하지만 잘 와 주었어. 고마워."

니나는 재빠른 어조로 계속했다.

"난 결국 누구이든 한 사람에게는 얘길 해야 하니까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니나, 무슨 소리니?"

니나는 내 입을 손으로 막았다. 바짝 마른 뜨거운 손이었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알아 두어야 할 거야. 나를 이렇듯 내몬 것은 단지 누군가를 더 이상 방해하지 않으려는 나의 극기일 뿐임을. 내가 이곳에 있는 한은.... 단지 그것뿐이야."

"난 네 얘기만 듣고는 아무것도 모르겠구나."

니나는 놀랍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모르겠다구? 난 모두 얘기했는데"

 

니나는 발로 우편물을 걷어차며 지긋지긋하다고 투덜거렸다. 편지들은 옆으로 굴러 떨어지고 소포 뒤쪽에 씌어있는 발신인 주소가 보였다.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은 똑같이 거기에 머물렀고 니나는 발작하듯 궤짝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납빛처럼 질려 있었다. 니나는 속삭였다.

"저것 봐. 이럴 수 있을까? 그는 죽었는데 틀림없는 그의 글씨야."

나는 어리둥절한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뭐가 들었는지 열어볼까?"

"아니"

니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고는 부엌으로 가 그릇을 씻기 시작했다.

"난 그 글씨를 보면 참을 수 없어"

 

나는 궤짝 위에 앉아 소포를 풀었다. 끈이 끊어지면서 두터운 책처럼 보이는 물건이 떨어졌다. 서류를 넣어두는 두꺼운 종이봉투였는데 그 속에는 글이 적힌 종이가 묶여 있거나 따로 흩어져 있거나 했다. 그 중 두어 장이 바닥으로 흩어져서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편지였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겉봉에 '니나에게' 라고 씌어 있었다. 니나가 참을 수 없다던 그 필적이었다.

니나는 그릇을 다 씻고 나자 궤짝에 못을 박기 시작했다. 망치 소리가 텅 빈 집안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내가 집어 든 편지 중 하나는 타이프라이터로 친 것이었는데 활자가 어딘지 낯익은 느낌을 주었다. 편지는 첫 장이 없었고 둘째 장부터 있었다.

 

......많은 괴로움에 시달린 이 늙은이를 용서하기 바랍니다. 이 아이는 차갑고 방종하고 몰인정합니다. 친어머니를 감상적인 인물이라고 평하는가 하면 내가 지닌 완고한 성격이 발전 능력과 영혼이 모자라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철면피한 아입니다.

그런 말을 어린 계집애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린 아이를 잘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분명 타인의 영향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그 타인은 바로 당신일 거라고 믿습니다. 박사님, 이 아이는 당신에게서 커다란 정신적인 자극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묵과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만큼 내 딸에게 당신 집에 더 이상 드나들지 못하도록 한 명령을 십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거칠게 니나를 불렀다. 니나는 손에 망치를 들고 입에는 못을 물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편지를 읽었다. 니나는 입에서 못을 빼내며 느리게 말했다.

"옛날 일이야. 아버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건 아버지 잘못은 아니었어. 아버지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니나는 다시 망치질을 하며 말을 이었다.

"무엇을 이해한다는 건 몹시 힘든 작업이야. 나는 그것을 단념했어."

나는 잠자코 두 번째 편지로 눈을 주었다. 1930629일자 편지였는데 '존경하는 슈타인 박사에게'로 시작하고 있었다.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나 자신도 왜 그런지를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이런 풍요로움은 참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자연의 정지된 상태로 인해 허전하고 피곤합니다. 나 자신이 너무 가치 없는 인간으로 느껴집니다. 나는 때때로 삶에 대한 두려움에 몸을 떱니다. 인간은 이 두려움과 함께 완전히 혼자입니다. 그 무서운 시간이 지나면 나는 그 정체를 알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은 내가 이 생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리라는,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아무렇게나 흘려보내며 진실하게 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과오를 범하고 그것이 나의 발전을 지극히 좁은 공간 속에 가두도록 판결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내게서 훌륭한 무엇을 기대하다니 지나친 교만입니다. 그러나 나의 내부에는 뭔가가 있어서 스스로에게 다짐을 합니다. 너는 '그것'에 도달할 것이라고. 나는 확실하게는 아니지만 '그것'을 느끼기는 합니다. 때문에 나는 '그것'에 이르지 못할까 무서운 겁니다. 영원히 그것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두려움의 껍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중심점은 나로선 도저히 잡을 수 없습니다. 내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스스로 그런 상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극단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어지는 이상한 결단성을 감지합니다. 언젠가 어머니는 내게 미쳤다고 했는데 나는 때때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젠 더 이상 당신을 찾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더 이상 괴롭히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N

 

나는 편지를 들고 망치질을 하고 있는 니나에게 가서 그녀의 망치질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극단에 이르는 결단성이라고 쓴 부분을 읽었다.

"누가 쓴 거니?"

"아마 내가 쓴 걸 거야. 지금도 그렇게밖엔 쓸 수 없을 거야."

"그랬구나, 네가 열아홉 살 때 쓴 거였어. 편지를 다 읽어볼까?"

"아니, 그만 둬. 다 지나간 일이야. 그보다 그 자신이 쓴 편지가 있나 봐 줘."

나는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니나는 망설이듯 그것을 받아 들었다. 나는 소포가 있는 곳으로 가 다시 노트를 넘기기 시작했다. 상당한 분량으로 모두 펜으로 쓴 것이었다. 모두 날짜가 적혀 있어 무슨 일기 같기도 했다. 나는 뒤쪽을 아무데나 펴서 읽기 시작했다.

 

 

2. 생의 의미

 

1938118

오늘 저녁 또다시 헬레네는 모임을 열었다. 나의 기분전환을 위해서였으리라. 약간은 가슴이 짜릿하면서도 불편한 모임이었다. 헬레네는 파티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놀랄 정도로 손님 접대를 잘 해냈다. 그날 밤 우리는 지나치다 싶게 과음을 했다. 알렉산더는 10시 공연을 마치고 늦으막이 나타났는데 그 무렵 우리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명랑하고 약간은 기묘한 기분에 싸여 있었다. 그는 암울한 시선으로 헬레네가 내주는 샌드위치를 먹고 포도주를 두잔 연거푸 마셨다. 그는 버릇대로 방 안을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내 책상 위에는 니나의 글이 실려 있는 묵은 잡지가 놓여 있었다. 알렉산더는 기계적으로 그 잡지를 넘겼는데 그는 요즘 거의 광적으로 아무 책이나 신문, 잡지, 심지어는 편지까지도 닥치는 대로 펼쳐 보는 습관이 생겨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동요된 표정으로 잡지를 들고 창 쪽으로 갔다. 나는 왠지 불안해졌다. 마이트 부인이 몸을 굽혀 그가 읽는 것의 제목을 보려 하니까 그는 신경질적으로 나중에 읽으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를 내버려 두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저 사람은 니나 부슈만의 소설을 읽고 있어요."

마이트가 말했다.

"부슈만이라면 나도 그녀의 처녀작을 읽어 보았어요. 신인이지만 기대할 만한 작가예요."

빌 부인이 말했다. 마이트 부인이 남편을 팔꿈치로 찌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라면 언젠가 피아니스트라던가 하는 사람과 우리 집에 온 적이 있잖아요? 그녀가 뭐라고 할까. 변화로 가득 찬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야 알 수 없지. 하지만 지나치게 영리한 여자야."

"그래요, 예의가 있다고는 볼 수 없더군요. 누구에게든 불쾌한 말을 직선적으로 할 수 있는 여자예요."

"그리고 아무데서나 잠을 자지, 어떤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좋은 작품이 나올 순 없는 거야.

당신은 실제 이상으로 도덕적이고 어리석게 만들려고 애쓰지 마."

그는 그 여자를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갤 흔들었다. 그는 계속했다.

"한번 사귀어 보게. 내가 알기론 그녀는 인간이 위선 없이도 살 수 있다는 표본을 보여주고 있어. 그녀는 언제나 극단으로 치닫는 그런 타입이지."

 

그 때 헬레네가 큰 소리로 지하실에 가서 술을 한 병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나는 지하실 층계로 내려가며 현기증을 느꼈다. 나는 습기 찬 지하실의 차가운 벽에 이마를 대었다. 다른 누가 니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한다는 건 견디기 어렵다. 그녀가 타인의 관찰 대상이 된다는 그 자체가 싫다. 그녀가 만약 나의 아내가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면 그녀의 생은 얼마나 다르게 되었을까 하는 상념이 고통처럼 내게 되살아났다.

나는 지하실의 궤짝 위에 앉았다. 끝없는 황야가 내게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아득한 절망감이 나를 에워쌌다. 나는 어느 정도는 성공을 했고 돈도 벌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존경하고 있고 그것은 나를 잊게도 해 주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한다.

만약 니나가 내 아내가 된다면 내 생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가끔 자문해 본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여자가 생의 의미를 내게 믿게 해 주었던 그 기적을 이젠 어쩌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언젠가 내가 삶의 무의미함을 푸념하듯 말했을 때 그녀는 이런 말을 했었다.

"제 생각엔 생의 의미를 물어보는 사람에겐 해답이 결코 주어지지 않지만 그걸 묻지 않는 사람에겐 해답이 주어지는 것 같아요."

 

그 무렵 그녀는 크나큰 불행에 처해 있었다. 두 번째 임신을 했을 때 자살을 시도했던 그녀를 내가 구해 주어 그녀는 삶을 다시 받아들이는 순간 벌써 그 의미를 느꼈던 것이다.

"의식을 잃기 시작했던 순간처럼 생이 아름답고 강렬하게 느껴지긴 처음이었어요."

내겐 왜 그런 감각이 주어지지 않는가? 왜 캄캄한 지하실에서 종말만을 기다리는 것인가?

 

포도주병을 들고 지하실 층계를 올라왔을 때 알렉산더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토막 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여자는 그 때 중앙으로 뛰어들어 아이를 빼앗고는 그들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 여자는 그들이 잠시 멍청해 있는 동안 아이를 데리고 어떤 집으로 사라져 버렸고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그런데 그 여자는 집 안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골목골목을 계속 찾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그 여자는 아이를 안고 비틀거리며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다섯 살짜리 사내아이는 여자의 팔에 축 늘어진 채 잠자고 있었지요. 아이의 부모는 끌려갔고 그 아이도 여자가 빼앗아 오지 않았으면 그들에게 맞아 죽고 말았을 겁니다."

 

알렉산더는 지금껏 그 여자가 그 아이를 기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손님들은 당황해서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저 사람은 니나 부슈만이 뢰벤슈타인 거리에 사는 어린애를 구해 준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빌 부인이 내게 소곤거렸다. 나의 이마에 진땀이 배어 나왔다. 헬레네는 언제나처럼 곤란에 처해 있는 나를 아무도 모르게 구해 주었다. 손님들은 얼마 후 모두 돌아가고 말았다.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열었다. 알렉산더가 길 한복판으로 깨어진 유리 조각을 밟고 지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후 초인종이 울렸다.

"알렉산더일 거야. 뭘 잊고 갔나 봐."

헬레네가 나가려는 것을 막으며 나는 문을 열고 그를 맞아들였다. 그는 술집에 가서 몇 잔 더 마시고 온 것 같았다. 태도가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고 그는 손을 한 번 들었다가 떨어뜨렸다. 그가 최악의 절망에 빠졌을 때 나타내는 몸짓이었다.

나는 잠자코 담배 마는 일을 시작해 몇 다스를 끝냈다. 하지만 그 동안 욱죄는 불안감이 엄습해 와서 거의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만큼 그가 나를 바라보며 절망적으로 입을 열었을 때에는 구원이라도 받은 느낌이었다.

"자넨 날 형편없다고 할 테지만 난 이 문제를 혼자 해결할 수는 없네."

그는 다시 침묵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런 얘기가 아니야. 지극히 바보 같은 연애 얘길 하려던 참이었네."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니나와 관계있는 문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문제에 대한 강렬한 반발로 나는 생각 이상으로 차갑게 말했다.

"우린 피차 어떤 사건을 고백할 나이는 지났어."

그러나 그는 내 말 따위는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자넨 물론 이해할 수 없을 테지. 그런 일은 자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까. 난 그런 자넬 부러워하고 있지."

다음 순간 그는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그건 중요한 거야. 자넨 그걸 이해해야만 돼. 어느 순간 갑자기 생을 잘못 살아왔음을 깨닫는다는 건 참혹해."

나는 고통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 주지 않겠나?"

"나는 어떤 남자와 이미 약혼을 한 여자를 알게 돼 둘은 열정에 불탔고 여자는 임신을 했어. 약혼자는 그 사실을 알고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아 난 홧김에 가깝게 지내던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어. 알다시피 이제 그녀가 내 아내가 된 거야."

"그런데 지금 그 사내는 여자를 버렸고 여자는 내 아이와 살고 있어. 그 여자에 대한 나의 열정은 변함이 없고 그 일에 대해 의논을 하지만 여자는 물론 그걸 거부해. 난 이미 다른 여자에게 속해 있다는 거야. 그 여자는 또 내가 괜히 자기와 아이에 대한 의무감으로 그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나는 아직도 그가 니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이야기를 더 계속하려 했으나 난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야 니나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를 안 것이다. 그가 내 친구였다는 사실이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는 순수한 동기로 맺어진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 우정의 끈이라도 끊을 각오였다. 나는 차갑게 말했다.

"그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렇군. 나도 자네에게 뭘 원했는지 알 수가 없군. 어쩌면 자네에게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는지도 몰라."

그는 지친 몸짓으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자네가 그 여자를 안다면 좋겠는데 자넨 알고 싶지 않은가?"

"아니"

나는 대답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방을 나갔다. 나는 흠뻑 땀에 젖어 있었고 감당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어 1938220일자의 메모까지 읽었을 때 니나가 문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좀 전에 내가 준 편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게 설명이야."

나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194797일 밤

사랑하는 니나.

넌 이 날짜에 별다른 의미가 없었겠지만 우리가 18년 전에 처음 만난 날이야. 난 이제 이 땅에서 너와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야. 암이거든. 난 이 병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나를 옥죄어오기 전에 자진해서 이 생을 마무리할 자유 쪽을 택하기로 했다. 이해와 사랑으로 보아 주리라 믿는다. 나는 18년간 너에 관한 모든 것을 수집하고 기록했어. 그리고 이것을 네게 보내도록 헬레네에게 부탁했다. 너의 서른여덟 번째 생일에 보내 주도록. 그 나이쯤이면 이런 일로 당황하지는 않을 테니까. 난 살아있는 동안 결단을 회피했다는 점에서 크나큰 죄를 졌다. 그건 비겁함보다는 허약함 쪽일 게다.

나는 기꺼이 이 세상에 이별을 고하겠지만 다신 널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슬픔 같은 걸 느끼게 되곤 한다. 오늘 새벽 내 생애 처음으로 진실된 결단을 내릴 생각이다. 그것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의 강압에 의해서일 테지만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안녕. 니나.

 

나는 편지를 읽고 감히 니나를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울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니나는 창백한 표정으로 방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노트에는 뭐가 씌어 있어?"

"일기더구나."

니나는 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더니 갑자기 내게로 돌아섰다.

"언니가 결혼했을 때 형부는 이미 결혼했었지?"

", 하지만 그는 이혼했어."

"언니 때문에?"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어."

"형부가 그렇게 말해?"

"그래, 그리고 그건 누구나 다 알고 있던 일이었어."

"이혼하는데 힘은 안 들었을까?"

"글쎄, 그이는 아이를 사랑했고 아내도 그런대로 아끼고 있었지. 뭐랄까. 그건 일종의 해결이 아니었겠니?"

"언니도 형부도 지금 행복해?"

나는 그저 평화롭고 만족하게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럼 언닌 사랑이 뭐지 알아?"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도 거북함 같은 걸 느꼈다.

"사랑이란 한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모든 결과와 함께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럼 사랑과 정열의 차이는 뭘까?"

나는 '정열은 이내 스쳐가는 것이지만 사랑은 영속적이다' 라고 말하려 했으나 니나의 눈을 보는 순간 내 대답이 너무 진부하게 느껴졌다.

"그건 아무도 확실히는 모르는 게 아닐까?"

나는 말했다.

"맞아, 누구도 그것을 몰라"

 

니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슈타인씨는 나를 사랑했어, 그는 17년간 나를 관찰하고 방해하고 자신을 방해했어. 그에게 사랑은 병이었어. 그렇지만 사랑이 없이는 메말라 버렸을 사람이야. 자신의 생기를 유지하자면 사랑이 절대 필요했어. 어쨌든 그는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고 내게 수없이 수모를 당하다가 끝내 단념했어."

"그는 두 사람이 서로 맞지 않는다고 느낀 건 아닐까?"

"그래. 그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사랑했어. 끝까지 나를 소유하고자 했으면서도 언제나 거의 확실해질 때면 포기하곤 했어. 그는 물러선 거야. 언닌 알 수 있겠어?"

나는 머뭇거리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입을 다물었던 니나가 불쑥 말했다.

 

"난 일생 동안 한 번도 진실로 사랑해보지 않았어. 한 번도 진짜는 아니었고 한 남자로 인해 진짜 불행해본 일도 없었어.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알아."

나는 숨을 죽이고 니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니나는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지독한 거야."

나는 니나에게 노트를 읽어 볼 것을 권했다. 니나는 그에 대한 일은 참을 수 없다면서도 내게로 와 궤짝 위에 앉았다.

"처음 것을 읽어 봐. 그건 좀 덜할지도 몰라. 참 언닌 슈타인 씨가 누군지 모르지? 스켈 가에 개업했던 의사로 후에 대학 교수로 있었어."

"어떻게 생겼는데? 혹시 생각이 날지도 몰라"

"키가 크고 바짝 마른 데다 뼈대가 굵었어. 어서 읽어봐."

 

1929915

새로 여 환자가 생겼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자각하지 못한 채 묘한 방법으로 나를 불편하고 귀찮게 한다. 그녀는 한 일주일 전에 진찰 대기실에 찾아와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처음엔 말라깽이 어린애인 줄 알았다. 그녀는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두 시간을 꼬박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가 마침내 진찰실 문턱으로 들어섰을 때 나의 내부에서는 무언가가 꿈틀하고 움직였다. 진찰실 문을 넘어서면서 그녀는 의식을 잃어 휘청했고 내가 잡아주자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의자에 주저앉아 구두끈을 풀었다.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도와주려 하자 내 손을 뿌리치며 양말을 쑥 잡아 뽑았다.

"농독증이예요."

여자는 표정 없이 말했다. 극히 악화된 상태였다. 나는 헬레네를 불렀다.

 

 

그 때 니나가 내게 말했다.

"그의 여동생이야. 난 그때 두 달 동안 지독하게 앓았어. 가을 내내 누워만 있었지. 어서 계속해 수술 기록은 빼고. 따분하거든."

"그는 네가 국부 마취를 고집해 그렇게 했다는 것과 네가 누워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는 것을 썼을 뿐이야."

"계속 읽어 줘. 그 때 이미 그가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는지 알고 싶어"

 

그녀는 두 눈을 감고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여자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그 나이의 소녀들이 간직한 귀염성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대신 말라빠진 갈색 몸에 헝클어지고 먼지투성이인 머리카락이 관자놀이에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황야의 바람에 휘말려 온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녀를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차를 마시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일어서려다가 이번엔 진짜 기절하고 말았다. 나는 10년 만에 여자를 팔에 안았다. 지나치게 가벼웠다. 그리고 고열로 인해 뜨거웠으며 먼지와 땀 냄새도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안아서 자동차로 데려갈 때에는 마치 침대로 데려가는 기분이었다. 질투심 강하고 예민한 헬레네는 오빠가 언제부터 환자를 오빠 자동차로 데려갔느냐고 냉담하게 빈정거렸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 여잔 날 싫어했어."

니나가 말했다.

"그리고 그가 묘사한 내 모습은 좀 너무하잖아. 난 그 정도로 흉하진 않았는데. 그때 사진도 있는 걸. 내가 왜 그걸 다 듣고 있는지 모르겠군. 다 부질없고 지나간 일인데."

"그가 네가 죽을 것이라는 걸 말한 대목이 있을 텐데 더 들어 봐."

"그래, 읽어 줘. 죽음은 사랑보다 흥미 있는 것이거든."

"넌 죽고 싶니?"

나는 대답을 두려워하며 물었다.

"아니, 지금은 안 죽어. 이제까지 몇 번인가 시도했고 한 번은 거의 성공할 뻔도 했지만 그때 실패한 걸 다행으로 여겨. 절망한 끝에 자살한다는 것은 옳은 처사가 못 돼."

니나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뭔가 애를 쓰며 말했다.

"하지만 행복에 겨울 때에는 죽어도 좋은 건지 몰라. 그렇지만 역시 그것도 다른 모든 일과 다를 바 없이 비겁한 일일 것 같군."

 

1929918

매일 N.B.를 왕진한다. 열은 높아도 의식은 맑다. 도무지 말이 없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딸의 몫까지 지껄인다. N이 냉정하고 독선적이며 마치 집안 식구가 아닌 것처럼 군다고 하소연했다. 실상 N은 이 가족에 속해 있지 않다. 은행 관리인 아버지는 어딘가 비굴하고 예의바르면서도 그 아래 냉혹함을 감추고 있다. N의 집안 분위기는 질식할 것만 같다. 발끝으로 걸어 다녀야 하고 모든 것이 유리알처럼 반들거리며 어머니의 독재에 굴복해 있는 느낌이다.

 

나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아주 기막히게 썼구나. 그렇지?"

그러나 니나는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긴장해 있었다.

"누굴 기다리니?"

", 아냐. 그저 버릇일 뿐이야."

니나는 발소리가 방 앞을 지나간 뒤에야 긴장을 풀었다.

"더 읽어 줘. 그이가 내게 죽을 것이라고 말한 데만."

 

1929920

오늘은 둘만이 있을 수 있었다. 니나는 맑고 평온한 얼굴로 자기의 죽음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제게 굳이 숨기실 필요 없어요. 전 곧 제 혈관이 막히리라는 걸 알아요. 제가 죽어야 한다면 전 알고 싶어요. 죽음이란 중요한 거예요. 그리고 또 한 번 밖에 체험할 수 없는 건데 그것을 어떻게 의식 없이 맞이할 수가 있겠어요.?"

아마도 그건 근사할 거라고 니나가 말했다. 나는 죽어 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지만 그것은 결코 근사란 죽음은 못 되었다. 그러나 니나는 자신의 죽음을 '대단한' 것으로 만들리라.

"언젠가 죽는 꿈을 꾼 적이 있어요, 끔찍한 공포의 순간이 일순 지나자 전 새털처럼 가벼워져서 허공을 마구 날아다녔어요. 뭐랄까. 수정처럼 맑고 투명하면서도 딱딱하지도 무겁지도 않은 물체로 변해 점점 더 가벼워지고 투명해져서 마지막엔 은빛 공기로 된 공 같아졌어요.

말할 수 없이 황홀한 느낌이었어요. 그러다가 잠에서 깨어나 나무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고 끔찍히 불행한 기분이었어요. 무한이란 걸 체험한 뒤론 육체를 감당할 수 없게 됐어요."

나는 그녀가 너무 말을 많이 했음을 주의시켰으나 소용없었다.

"선생님. 전 죽고 싶어요. 우리의 생에 멋지고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는 걸 전 책에서 읽어 알고 있어요. 사랑을 하거나 아이를 낳거나 어떤 진리를 발견하거나 하는 한 순간 말예요. 하지만 그런 건 영속적인 것이 못 돼요. 우린 그저 맛보듯 슬쩍 구경을 했을 뿐인데 다시 빼앗기고 말아요. 전 결코 만족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전 죽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 선생님은 모든 걸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아시겠어요?"

나는 당황했다. 그녀의 담담한 영혼과 그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한 인간으로서의 고통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간절한 소망과 믿음에 의해 죽음에 이를 수는 없을까요?"

그녀는 자신이 나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그 자리를 떠날 때 행복한 기대에 넘쳐 있었다.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 날 밤에는. 그날 밤 자정 무렵 나는 니나의 집 앞으로 갔다. 다섯 시간 동안이나 숲에 숨어 담장에 기댄 채 집을 바라보았다. 나는 마치 니나의 생명이 내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데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은 6시다. 나는 조금 전에 집으로 왔다. 두 시간쯤 눈을 붙여야겠다. 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녀는 어쩌면 내가 떠난 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나는 자지 않겠다.

 

"그가 담 아래 서 있는 줄은 몰랐어."

니나는 지나치게 태연하게 말했다.

"다행이었지. 알았으면 귀찮아졌을 테니까. 그건 아주 근사한 밤이었어. 나는 창을 활짝 열고 누워서 기다렸어. 죽음을, 아니 죽음 그 뒤를. 처음 잠시 동안은 확실히 행복했어. 그러나 그 뒤에 찾아온 상념들이 나를 불안하게 했어. 내게 남아있는 미래가 굉장한 것을 가져다 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게 큰 재능이 있어 유명해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훌륭한 남자를 만나 결혼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 말야. 유혹은 내게 하나씩 떠올라 왔고 그것은 생의 환상이었어. 꽃밭과 강이 아침 햇살에 부서지는 대도시의 거리를 나는 늘 원했으면서도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봄 투피스를 입고 걷고 있었지. 무대에서 '하일브론의 캐첸'의 캐첸역을 해내기도 했어. 그 때만 해도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었거든. 담배 냄새도 맡았어. 난 그때 담배 피우는 걸 멋의 전형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이러한 바보 같은 유혹적인 생의 환상 앞에서 당황하고 초조해졌어. 곧 내가 바라던 주유의 환상이 나타나 평온해질 수는 있었지만 다시 죽음을 바랄 용기는 사라진 뒤였어. 그렇게 한낮이 되어 내가 다시 생의 한가운데 내던져졌을 때 난 무척이나 부끄러웠어. 창가에 기대어 슬픔에 찬 눈물을 흘렸어. 그 뒤론 며칠 계속 잠만 잤어. 그 뒤 차츰 건강이 회복되고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어. 슈타인이 가져다주는 건 닥치는 대로 다 읽었어. 아마 그의 장서의 반은 될 거야. 그 때 죽음의 편에서 삶의 쪽으로 돌아선 내게 산다는 것은 많이 알고 탐색하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했어,

나는 늘 과장 속에 살아왔어."

니나는 우울하게 말끝을 맺었다.

 

"그 다음엔 뭐라고 썼어? 건강해진 뒤 난 공부를 계속했고 그에게 나누어 줄 시간이 없었어."

내가 보기에도 그 사이에 긴 공백이 있었다. 다음 기록은 1931512일로 되어 있었다.

니나가 이 도시에서 사라진 것 같다는 것과 자신의 생이 한 여인으로 인해 바뀌었으며 그게 니나라는 것 등을 적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어디 있었니?"

", 이사했었어. 여기 편지가 있는데 한번 읽어 봐 주겠어?"

"그러렴."

1931628일의 날짜가 적혀있고 '존경하는 부슈만 양에게' 로 시작되는 편지에는 스탕달의 <적과 흑>을 빌려 간 일이 없는가를 지나치게 정중하게 묻고 있었다.

니나가 말했다.

"맙소사. 내가 그 책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난 이 편질 받지 못했어."

편지는 또 있었다. 같은 날짜의 편지였다.

 

이 편지는 당신에게 전혀 뜻밖의 것일지도 모릅니다만 제 심정을 이해해 주십시오. 나는 우리가 처음 만난 이후부터 당신이 나의 생과 떨어질 수 없게 맺어져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생에 새로운 방향이 있음을 보여 주었고 나의 내면에 있는 두껍고 단단한 단층을 융해시켜 주었습니다. 나는 일상 마시는 공기 이상으로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을 찾으려고 난 거리를 방황하고 있습니다. 부디 나를 찾아 주거나 아니면 한 줄의 글이라도 좋으니 보내 주십시오. 내 생명은 당신에 의해 좌우됩니다.

 

"이 편지도 받질 못했어."

니나가 말했다. 그가 편지를 보냈더라면 어떻게 됐겠느냐고 했더니 니나는 아마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고 대답했다.

 

193178

나는 N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우연이었고 만약 우연이 아니라면 불행하나 상당히 교훈적인 운명이었다. 그녀는 저녁 무렵 한 남자와 공원을 걷고 있었다. 남자는 키가 키고 투박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N은 남자와 보조를 맞추느라 애쓰며 감동에서 오는 우울한 어두워진 모든 것을 고백하는 눈으로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바로 옆을 지나쳤는데도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샛길로 해서 앞질렀다가 다시 그들 앞으로 마주 다가갔다. 해면처럼 울퉁불퉁한 얼굴을 한 남자가 술주정뱅이 같았고 뒷짐을 지고 구부정하게 걷는 뚱뚱한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몸을 부딪칠 만큼 바싹 다가갔는데 그녀는 짜증스런 시선을 잠깐 내게 던졌을 뿐 알아보지는 못했다. 나는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때처럼 내 자신이 바보스럽고 혐오스러운 적은 없었다. 사방에 어둠이 내리고 나서도 그들은 산책을 계속했고 11시나 되어서야 헤어졌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남자를 따라가 욕을 퍼붓고 뺨을 때리고 싶은 어리석은 욕망에 나는 놀랐다. N은 막연히 길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 사내를 위해서라면 나무로라도 변할 마음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차마 그녀에게 말을 건넬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잠자코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이사를 한 것이었다.

 

1931818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N이 살고 있는 거리에 차를 몰고 가거나 걸어갔다. 그러니 다시 N을 만난 것을 우연이라고 할 수만은 없으리라. 이번에는 먼저 그녀가 말을 건네 왔다. 지극히 무감동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눈은 수줍었으나 너무 맑아 내가 지녔던 밤의 욕망이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심리학을 공부 중이며 방학이라 도서관에서 공부로 소일한다고 했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주말여행을 제의했고 그녀는 지극히 태연하게 거절했다. 나는 재차 그녀에게 내 손님이 되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그녀는 '제 양친께선 남자가 제게 돈을 쓰게 해선 안된다고 했어요.' 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아네트 아주머니에게 가야 하니 그런 건 걱정할 일이 못 되며 우리는 아네트 아주머니의 손님으로 가게 된다는 것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녀는 금요일에 전화하겠다고 했다. 나는 여행을 제안하면서도 그녀가 거절해 줄 것을 고대하는 자신을 느끼고 놀랐으나 어쨌든 즐거웠다.

 

1931820

N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중에 중요한 책을 빌리기로 한 교수댁에 들을 수 있으면 함께 가겠다고 했다. 나는 이런 구실은 그녀가 자존심과 수줍음으로 인해 꾸민 가정으로 이해했다. 토요일 낮에 떠나서 일요일 저녁에 돌아올 예정이다. 헬레네에게는 본에서 개최되고 있는 의학 회의에 간다고 말할 생각이다. 이제까지 비밀 없는 생활을 하던 남자가 갑자기 뭔가 비밀이 생겼을 때 내면에선 반발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어쨌든 나는 이제껏 내가 그처럼 거짓말에 능숙하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헬레네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정성스럽게 트렁크를 챙겨 줄 것이고 아무 것도 알아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헬레네에겐 내가 말이 없어도 무엇이든 다 안다는 무서운 무기가 있었다. 무수한 상념으로 잠이 안 온다. 수면제라도 먹고 자 두어야 한다. 안 그러면 더 늙어 보일 테니까. 나는 이런 두려움에서 어리석음의 극단을 읽었다.

 

니나는 짧게 웃고는 심각하게 말했다.

"난 전에 거짓말하는 남자를 증오했었지. 생은 언제나 투명해야 하며 한낮의 밝은 햇빛 속을 똑바로 걸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지금은 어린애들에게도 때때로 거짓말이 필요하다는 걸 이해하고 있어."

"슈타인과의 여행은 어땠니?"

내가 물었으나 그녀는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이상해. 슈타인이 그 교수를 그처럼 질투했다는 건. 대체 무얼 가르치던 사람인데?"

"고등학교 때 물리학 담당이었는데 우린 모두 그 선생님을 좋아했었어. 그 중 내가 제일 오래 따랐어. 나는 스물하나가 되도록 이론적으로는 사랑에 대해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키스 한 번 못 해 보았었지."

나는 호기심보다는 니나에게 이야기를 계속 시키기 위해 슈타인과 여행했을 때에는 어땠느냐고 물어 보았다.

"나는 그 경험을 전혀 다른 방법으로 체득했어.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이 나다니.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그리고 또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했었어. 언닌 언니의 딸이 순전히 모험심과 호기심으로 남자를 따라 빠 같은데 간다면 어떻게 하겠어? 빠를 무슨 아편굴쯤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 앤 이것저것 마구 섞어 마셨고 처음 마시는 술이라 녹초가 돼 어서 침대로 가고만 싶었어. 남자는 호텔로 데려갔고 순순히 따라오는 것을 보자 경험자로 오인했지. 그 다음엔 순서대로 올 일이 왔고 반항하자 남자에게는 그게 쑥스러움으로 보였지. 그는 사실을 알고 나서 오직 한마디 '맙소사' 라고 했을 뿐이야. 여자는 집으로 가고."

"그래 널 혼자 가게 내버려 뒀단 말이야?"

"후회를 하거나 장황하게 연극을 연출하는 것보다 그 편이 나아. 내게 그는 주소를 적어 줬지만 찢어 버렸어."

나는 아직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말했다.

"그래, 넌 워낙 강한 애니까 다른 여자였다면......"

"난 다른 여자가 아니아. 그리고 그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어, 참 배고프지? 계란 프라이 두 개면 되겠어?"

나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지만 배가 고팠다. 나는 프라이팬을 뺏어 들고 달걀을 네 개 부쳐 토스트 위에 두개씩 얹었다. 니나는 잠자코 토스트를 먹었으나 어찌나 맛없게 먹는지 가엾을 정도였다.

"우리가 이렇듯 나이가 들어 만났다는 게 이상해."

니나는 담배를 피우며 내게 흘끗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은 애정에 넘쳐 있었고 강렬한 감정을 감추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동생을 그런 식으로 조금씩 알아 간다는 게 즐거웠다. 설거지를 끝낸 뒤 니나는 슈타인의 기록을 더 읽어 달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슈타인의 기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했다.

 

 

3. 슈타인과의 여행

 

1931821

여행에서 돌아왔다. 출발해서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온유함이 넘치는 비온 뒤의 가을 풍경 속을 말없이 달렸다. 투칭에 이르자 그녀는 갑자기 생기를 띠며 차를 세워 달라고 했다. 교수댁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30분 이상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나는 N이 들어간 집 마당의 얕은 담장으로 갔다. 엿볼 마음은 없었으나 결국은 그런 셈이 되었다.

니나는 언젠가 나를 화나게 했던 예의 그 교수와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남자는 멈추어 서서 기묘한 짐승을 바라볼 때와 같은 차갑고 끈질긴 우수를 지닌 표정으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순간적으로 그 의미가 N에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그들은 헤어졌다.

N은 다시 말없이 오랫동안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알프스에 가까이 갔을 때에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는 자신이 낯선 풍경 속에 있는 것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득 나는 니나가 듣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뭘 생각하고 있니?"

그녀가 흠칫 몸을 떤 것으로 보아 생각이 얼마나 달리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슬픔에 대해 생각했어."

그녀는 느릿느릿 말했다.

"모든 아름다움이 다 부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저 잠시 빌려 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나 불모의 땅에 있는 것처럼 고독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누구나 슬픔에 잠기게 될 거야. 이 세상엔 의도적인 가짜 슬픔이란 것도 있어. 그 사람의 눈을 보면 그걸 알 수 있어. 정말 우울한 눈은 활기가 아니면 바쁜 빛을 띠고 있어. 하지만 그건 어두운 베일일 뿐 뒤에는 무대가 있고 거기에는 어둠 속에서 희망도 분노도 없이 한 남자가 웃고 있지. 자기의 우울도 마비됐기 때문이야. 그는 우리를 보고 웃고 우리의 말을 믿는 것 같이 보이지만 정말 우리와 함께 가기 위해 일어서지는 않아."

나는 니나가 사랑하는 남자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니나는 문득 표정이 상기되면서 말을 이었다.

"이성적인 언닌 날 뭐라고 할까?"

"가끔은 덜 이성적이어서 커다란 일을 저지르고 혼란이라도 일으킬 수 있다면 어떤 밤도 아깝지 않을 듯해"

내가 이렇게 말하자 니나는 그런 일을 원하는 건 경박한 마음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건 언제나 너무 큰 도박이거든. 언니는 생이 너무 조용해서 불만일 테지만 나는 너무 불안정해서 불만이야. 인간이란 정말 알 수가 없어."

니나는 짧게 웃고는 내 팔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야. 난 생의 안정 따윈 원하지 않아. 여름날 저녁 무렵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가정의 밝고 온화한 웃음소리는 내게 가정에 대한 끔찍이도 강렬한 동경을 부여하기도 해. 그리고 자문하지. 나는 왜 집 없는 강아지처럼 그렇게 방황해야 하는가? 왜 나는 운명으로부터 그것을 몇 번씩 제의받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하지만 결국 그걸 거부한 건 나 자신이었고 한번은 그것을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엉망이었어. 그리고 그 무렵 슈타인은 아주 시적인 가정 풍경 이상의 것을 제공해 왔었어. 그는 그걸 보여주기 위해 날 자기 아주머니에게 데리고 갔어. 나는 그토록 아름다운 집을 정말이지 처음 보았어. 그건 슈타인이 상속하기로 돼 있었지. 그리고 그 아주머니는 이미 그에게 그 집을 내주고 있었고 그 집의 모든 것이 아주 근사하고 기분 좋았기 때문에 지금도 향수 같은 것이 남아 있을 정도야. 아주머니가 살아있는 동안 꽤 자주 그곳에 갔었어.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뒤 슈타인은 나를 갖지 못하게 되자 집까지도 가지려 하지 않았어. 팔아버렸거든."

"정말 넌 지독하게 그의 생을 엉망으로 만들었구나!"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소리치고 말았다. 니나는 조용히 나를 용서했다.

"언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그는 그의 생을 가득 차지하는 일을 갖고 있었고 생에 생기를 주는 사랑을 지니고 있었어. 행복이란 결국 늘 생기를 지니고 무엇엔가 몰두해 있는 가운데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이제껏 매우 불행했지만 한편으로 몹시 행복했던 것도 같아. 슈타인의 경우도 이와 흡사할 거야. 그는 나에 대한 집착이 소용없으리란 걸 잘 알면서도 그게 필요했기 때문에 꽉 붙잡고 있었던 걸 거야. 그건 그의 생의 목표였지. 하긴 단지 내 추측일 뿐 사실은 그 반대일지도 몰라. 우린 타인을 알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우린 나이를 먹을수록 고양이처럼 사는 것을 배우게 돼. 늙는다는 징표지. 난 늙어 간다는 일이 기뻐."

나는 니나가 전혀 늙어 가는 것 같지 않아 픽 웃고 말았다.

"웃지마. 누구든 갈구하기를 그치면 늙는 거야. 난 얼마 전까지도 뭐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기대를 가지고 아침마다 눈을 떴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갑자기 니나는 난폭하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난 지금 끔찍이 도덕적인 일을 감행하려고 해."

니나는 궤짝에서 발작적으로 일어나더니 창가로 가서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떠나는 것은......"

니나는 그 남자에 관해 말할 때마다 말이 토막 났다.

"그는 기혼자이고 나로 인해 그에게 야기될 혼란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야. 이건 분명 도덕적인 일인데도 난 뭔가 지독히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느낌에서 헤어날 수가 없어. 언닌 윤리나 양심까지도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는 상황이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어? 나는 그다지 도덕적인 편은 못 돼. 양친을 다시 한 번 무덤에 묻기 꼭 알맞은 일도 몇 번인가 저질렀어. 하지만 거짓 유희는 안했고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결합은 중요시했어."

문득 니나는 길고 절망적인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자신에게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돼 버렸어. 그래서 내게 부정으로 보일 일을 저질렀고 난 지금 그게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지금 내가 더 이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떠난다면 아마 뭔가 잘못을 범한 듯한 절망적인 감정을 지니고 가는 걸 거야."

차라리 니나가 그때 슈타인과 결혼했다면 예쁜 집에서 평화로웠을 거라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랬더라도 넌 분명 다른 남자를 만났을 거야."

"운명은 어쩔 수 없는 법이니까. 그건 그래."

니나가 대답했다. 잠시 후 우리들은 그의 일기를 함께 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정원에서 아네트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주머니는 주의 깊게 N을 관찰하는 것 같았다. N이 저지르는 실수를 일일이 잡아냈으나 그 시선에는 호감 같은 것이 깃들여 있었다. 그러나 니나는 조금도 아주머니의 마음에 들려 하지 않았다. 반대로 평소 냉담하고 거만하던 아주머니가 오히려 니나의 호감을 사려는 게 놀라웠다. 식사를 끝내고 나는 잠시 아주머니와 둘이 있었다. 아주머니는 생기 띤 음성으로 니나를 가르쳐보고 싶다고 말했다.

"불안정한 태도를 좀 고치고 옷도 제대로 입는 법을 가르치고 머리 모양만 고치면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애더구나. 가끔 데려와라. 빨리 배울 아이다."

아주머니는 내게 팔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넌 그 애를 소유하기 힘들게다. 너의 엷은 공기 안에선 살지 못할 타입이야. 열정과 변화가 있어야 하고 많은 모험을 감행할 아이다."

니나는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시든 꽃을 손에 들고 빙빙 돌리며 우울하게 물었다.

"왜 날 여기 데려 오셨지요? 난 이곳에 어울리지 않아요. 당신도 그걸 잘 아시잖아요?"

"왜 그런 소릴 하지?"

"전 이런 곳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요."

"미안하군.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오늘 밤만 참아줘요."

뜰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내 곁을 걷고 있는 니나의 발걸음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원 숲은 고요했다. 그녀는 침묵하고 있었고 나는 말을 건네기를 삼갔다. 그녀의 침실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나는 내일의 계획을 의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문에 기대어 선 채 맑고 큰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젊음과 순결함은 나를 유혹했다. 나는 뜨겁게 그녀를 요구하면서도 순간적인 망설임으로 그녀와 작별했다. 나는 어두운 현관에 앉아 모험을 무릅쓰고라도 뭔가 획득해보려고 하지 않는 남자란 과연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자문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보낸 시골에서의 일요일은 거의 아무런 방해도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그녀와 내가 한 치도 가까워지지 않고 있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로에 올랐을 때 나는 생의 무의미함이 너무 무섭게 밀려오는 바람에 고통스러웠다. 나는 말했다.

"이 세상엔 모든 것이 완전하게 주어진 사람도 있고 거의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은 사람이 있지. 그 중엔 90퍼센트쯤 주어져 있는 사람도 있고 난 아마 여기에 속할 거야. 거의 다 있는데 가장 중요한 10퍼센트가 결여돼 있어. 나 같은 인간은 태어나지 않은 편이 나을 뻔했어."

니나는 조용히 내 팔에 손을 얹었다. 연민에 가득 차서, 마치 생명 자체가 나를 만지는 느낌이었다. 고통은 녹아내리고 달콤한 희망을 위한 공간만이 남았다. 눈에 눈물이 가득 괴어 왔으나 니나는 보지 못했다. 설령 그녀가 내 눈물을 보았다고 해도 난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리라. 헬레네는 언제나처럼 정답게 대해 주었고. 의학 회의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내 나이의 남자가 한 소녀에게서 생의 의미를 찾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나는 자문해 보았다. 니나와 결혼하고 싶다.

 

글은 펜촉이 갈라진 듯 길게 그은 선으로 끝나 있었다. 니나는 그 굵은 선을 무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난 그런 걸 몰랐어. 알았더라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난 늘 그에게 화가 나 있었어. 무언지 나로서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가 되고 싶지 않은 걸 그는 나로부터 만들어 내려고 했어."

니나는 격분한 어조로 말하더니 다시 잦아들었다.

"실상 난 그에게 고마워해야 될 거야. 그에게 끊임없이 반항하는 동안 진정한 날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전날과는 아주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는 날이 있지. 우린 그렇게 변신할 수가 있고 자신과 유희를 할 수도 있어. 인간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면 수백 개의 자기를 볼 수 있지만 그 중 어느 하나도 진실된 나는 아냐. 그 수백 개를 다 합치면 참 자기가 될지는 모르지만 결정된 것을 없는 거야.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우린 그 수많은 나 중에서 이미 정해져 있는 어느 하나만을 택할 수 있을 뿐이거든."

"그래 그리고 우린 가끔 그 선택이 잘못된 듯한 느낌을 갖지."

내가 말했다.

"언니가 자신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이지?"

니나는 놀라워하며 물었다.

"때때로"

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언닌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거라곤 없고 지극히 모범적이잖아. 난 그런 언니에게 감탄하고 있어"

니나의 말에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제대로인 건 없잖니? 너야말로 제대로 살고 있는 것 같구나. 넌 수많은 자기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도 널 고정시키지 않았잖니?"

"바로 그거야."

니나는 갑자기 소리쳤다.

"난 생의 가운데를 떠돌아다니고 있어. 집시처럼. 문젠 그거야. 나는 아이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속해 있지 않아. 내 생에는 확실한 선이란 없어."

"그럼 네 일이며 성공은 어떻게 되니?"

"그건 내게 지나치게 하잘 것 없는 거야. 다른 작업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껄 그랬어. 그 때 레니 아주머니의 상점에 그대로 눌러 있는 건데."

"무슨 소리니? 아주머니란 누구야?"

"아버지의 왕고모 되는 분이 있었어. 언닌 모를 거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언닌 남미에 가 있어 연락이 안됐을 때였어. 아버진 돌아가시기 직전 부동산 투기를 해 다 날려 버리고 어머니와 난 빚더미를 떠맡게 되었지. 그 무렵 그 아주머니가 자긴 너무 늙었으니 와서 가게를 봐주면 날 상속인으로 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왔어. 어머니는 시내에 남아 방을 세놓았지. 난 커피, 사탕, 담배 같은 걸 팔기 위해 벤하임으로 가고."

니나는 거기서 얘길 중단했다.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니나가 늘 다니는 작은 식당으로 갔다. 가는 도중 공원을 지났는데 니나는 벤치에 앉았다. 그리곤 그대로 주저앉아 바로 잠들어 버렸다. 마치 시체같은 모습으로. 반시간쯤 후 잠에서 깨어난 니나는 나를 보고 무안하듯 말했다.

"잠들었던 모양이지? 가끔씩 그래. 며칠 밤을 자지 않고 있다가 낮에 갑자기 잠들곤 해. 언젠가 전차 안에서 선 채로 잔 적도 있어."

니나는 거의 아무 것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니나를 알고 있는 웨이터 영감은 내게 호소하듯 벌써 몇 주째 니나가 식사에 소홀하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니나는 갑자기 서둘러 달리다시피 했다. 그녀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집 앞에 왔을 때 옆집의 어떤 부인이 아까부터 전화가 미친 듯이 울리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편집부일 테지."

니나는 이번에는 지나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일일 수도 있잖니?"

"아니, 다른데서 올 전화는 없어. 받아보고 싶으면 언니가 받아봐. 누구든 나는 떠난 지 오래됐다고 해줘."

내가 방안에 들어서자 전화는 다시 마구 울리기 시작했다.

"니나?"

남자 목소리였다.

"아니에요."

나는 필요 이상으로 외치듯 말했다.

"니나 없습니까?"

"니나는 갔어요."

"갔다고요?"

나는 그 다급한 음성에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영국으로 갔어요."

"영국으로요?"

나는 대답이 나오질 않아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음 같은 짧은 외침이 들리더니 전화는 끊겼다.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고통에 고통을 절감한 남자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 나는 그것이 슈타인, 그만이 지닐 수 있는 목소리란 걸 알 수 있었다. 니나가 올라왔을 때 나는 편집부에서 온 전화였다고 묻지도 않는데 말했다. 잠자리에 들어서 나는 니나에게 알려준다는 구실로 그 남자의 이름과 주소를 물어보지 않은 자신의 멍청함에 화를 냈다. 눈을 떴을 때 타이프 치는 소리와 니나가 구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일어난 기척을 하자 니나가 다가왔다.

"곧 끝날 거야. 우편물을 처리하려고 여비서를 불러왔어."

다시 건너간 니나는 아주 간결하고 정확하게 구술을 시작했다. 간간이 우스운 이야기를 해서 비서를 웃기고 자기도 웃었다. 잠시 후 니나는 홍차를 한 잔 가져다주었고 나는 그걸 홀짝거리며 슈타인의 일기를 펴 들었다. 그는 거의 2년간 일기를 쓰지 않았다. 나는 19321231일이란 날자가 적혀있는 일기를 읽었다.

 

나는 자신의 패배를 기록해야 하리라. 난 한달 전에 니나를 방문하기 위해 벤하임에 갔었다. 그것에 대해 기록한다는 일은 나로선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해 아픔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는 니나를 만나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 기록과 함께 내 생의 이 장은 끝막음을 하게 되리라.

니나와의 여행 후 1주일쯤 됐을 때 나는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비난에 넘치는 편지를 받았다. 내가 니나에게 반항 정신을 가르쳤으며 그것을 막기 위해서 니나에게 나를 방문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금지가 니나로 하여금 더욱 내게 오게 할 것이라고 믿고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그녀는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초조하나 감미로운 행복감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그저 뻐근한 통증으로 나는 기다림을 감수했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병에 걸렸고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다림의 제3단계인 깊은 피로가 나를 엄습했다. 나는 이 피로감으로 인해 무관심해졌다.

나는 차츰 니나와의 관계에 종말을 생각했고 나른한 평화까지 느꼈으나 그것은 갑자기 내가 무감각 아래에서 질식하기 시작함을 의미할 뿐이라는 의식으로 내게 확대되어 왔다. 이러한 깨달음은 내게 고통과 구원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나는 기다림의 마지막인 지옥과도 같은 뜨거운 열병을 앓는 듯한 고통에 나를 내맡겼다. 헬레네의 말없는 관심과 생각 깊은 호의까지 귀찮아졌다.

그 무렵 나는 뮌헨 대학 외과에서 겨울학기 강좌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아 들였다. 학교에 가면 니나를 만날 수 있으리란 희망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나는 자신의 건강이 눈에 띄게 호전되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야 나는 니나가 학교를 그만 두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녀의 친구 주소를 알아 가지고 그 주소로 찾아갔다. 소녀는 니나의 이름을 듣자 울음을 터뜨리며 한 통의 편지를 찾아 내게 주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니나는 벤하임에 가 있다는 것과 가게 된 경위를 편지에 자세히 적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헬레네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벤하임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나는 그녀에게 귀찮은 존재가 될 것을 잘 알면서도 왜 그녀에게 가지 않으면 안되었는지......그러나 나는 그녀에게도 싫고 내게도 고통스러운 관계나마 어떤 연줄이 그녀와 나 사이에 다시 소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대가로 모욕을 기꺼이 감수하리라.

오후 늦게 도착한 벤하임의 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곳은 회색과 죽음의 거리였다. 지나치게 깨끗한 골목들이 오히려 고통스러울 만큼 완전히 버림받은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인상을 그렇게 단정 지은 것은 나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 니나가 이곳에서 도저히 살 수 없음을 나 자신에게 말하고 설득시킬 수 있기 위해서.

니나는 사탕이 든 유리병과 상록수 화환, 파이프용 담배와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화분 사이에 서 있었다. 비에 젖은 가게 유리창이 안의 온기로 흐려있음에도 나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니나는 걸레로 테이블 위를 문지른 뒤 유리에 얼굴을 대고 밖을 내다보더니 이윽고 어두운 가게 속으로 찾아들었다. 가게에 들어서서 니나가 자루와 상자 틈에 쭈그리고 있는 것을 본 순간 가장 강렬하고 순수한 연민으로 나는 가슴이 떨렸다.

니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글 표정은 나를 맥 빠지게 만들었다. 노골적으로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의 자존심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어쨌든 의미 있고 정당한 것으로 믿으려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순간 집요한 집착이 나를 엄습해왔고 나는 비로소 그녀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의 소심함과 그녀의 불신과 지독한 자존심에 지지 않으리라고 작정했던 것이다.

"니나, 담배를 주겠어?"

"그러죠, 하지만 영국제는 없어요."

나는 그녀가 아직 내가 영국산 담배를 좋아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음에 감격했다.

"비에 젖으셨군요. 안으로 들어가세요. 그만 문을 닫아야겠어요. 시간도 됐으니."

그녀는 가게의 쇠고리 문을 내리고 나를 가게 뒤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방에도 가게와 마찬가지로 식초며 비누, 먼지 냄새가 가득했으나 따뜻했다. 난로 옆의 안락의자에는 무서울 정도로 추악한 노파가 앉아 있었다.

"왕고모님이세요. 귀도 눈도 멀었어요. 방해되진 않겠죠?"

그녀의 태도는 아무 것도 흥미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작은 알코올램프에서 찻물 끓는 소리가 났다. 방에 가구라곤 없었다.

"니나, 너무 심한 고생이군."

"저도 기분이 좋은 곳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녀의 말은 지극히 예사로운 것 같았으나 나는 일말의 불안을 찾아냈다. 내가 그녀에게 추억과 소망을 가져온 것이다. 주말여행을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니나가 동행해 준다면 기쁘겠다고 덧붙였다.

"안돼요. 할머닐 혼자 계시게 할 순 없어요."

그녀는 자극을 감추려는 듯 굵은 음색으로 말했다. 그녀는 말없이 홍차를 따랐고 나는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에 감동했다. 문득 나는 그녀를 영원히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순간 아무에게도 한 적 없는 온갖 정열적인 사랑의 말이 생각났으나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우리는 책에 대해, 나의 일에 관해, 그리고 그녀의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이야기했다. 할머니를 옆에 두고 그녀가 할머니가 죽고 나면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괜찮아요. 할머니는 듣지 못해요. 듣는다 해도 곧 돌아가실 거예요."

나는 용기를 내어 할머니와 함께 사는 게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다. 순간 니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전 지금 서서히 죽어가는 할머니를 정확히 관찰하고 그것에 대해 소설을 쓰고 있어요."

나는 쓴 것을 보여 달라고 했으나 그녀는 언제고 진짜를 쓸 때까지는 다 태워버리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녀가 현재 처해 있는 불행을 은폐시키려고 너무나 빤한 오만과 고집을 부릴 때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마침 그녀가 불을 보기 위해 난로로 가려고 일어섰을 때 나는 지난 20년간 입 밖에 내제 않았던 사랑 고백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석탄을 난로에 넣느라고 내 말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되풀이 하지는 않았다. 니나는 나를 여관으로 안내해주고 자동차 빌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나는 가르미슈로 가기 위해 자동차를 빌리기로 한 것이다. 나는 수면제를 몇 알 입 속에 털어놓고 깊이 잠들었다.

이튿날 날씨는 아주 화창했다. 나는 니나에게 나의 제안을 거절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할 여유를 주고 또한 그녀를 불안과 기대 속에 놓아두고 싶어 오후가 되어서야 그녀에게로 갔다.

니나는 창가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외출복 차림인 그녀는 가게나 할머니 쪽으로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내게로 왔다.

햇살이 넘실거리는 늦가을의 시골길을 달리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 순간 나는 이렇게 행복한 순간에 삶을 끝마치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에 사로잡혔다. 갑자기 속력을 내어 오른쪽으로 급하게 커브를 돌면 나무 기둥, 무덤, 종말, 이것은 완전한 것이 되고 니나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으리라.

나는 니나를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상기돼 있고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리고 눈은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그녀가 내게로 향했다. 순간 나는 니나의 기쁨과 내가 무관함을 알았다. 나는 그저 동반자 이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니나는 차가 좀 더 빨리 달리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어느 사이엔가 어둠이 내리고 산에 다가갔을 때에는 짙은 안개가 덮였다. 니나는 얄팍하고 초라한 외투 밑에서 추위에 떨고 있었다. 나는 내 외투를 걸쳐 주었다. 나는 호텔 앞에 차를 세우고 어리둥절해 하는 니나를 느긋이 바라보았다.

니나는 추위에 꽁꽁 얼었으므로 따뜻한 홀을 반기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따뜻함은 니나를 피로하게 했고 순종적으로 만들었다. 내가 숙박계를 적고 있는 동안 니나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무심하고 부주의해 보이는 시선으로 인해 본명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가 '부인과 함께' 라고 쓰는 것을 보지 못하기를 바랐다. 그녀가 태연하게 그렇지 않다고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니나는 잠자코 방으로 따라왔다. 나는 내 염려가 기우였나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죽음 같은 무감각 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니나는 저녁 식사 때쯤부터는 차차 생기를 회복했고 포도주 한 병을 마신 뒤에는 명랑해졌다. 우리가 방으로 돌아온 것은 늦어서였다. 니나는 방 한구석으로 돌아서서 당연하다는 태도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그녀의 순진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갑자기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상황이 불가사의한 것으로 느껴졌다. 나는 혼자 가서 술을 더 마셨다. 그 날 밤 나는 니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니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방으로 되돌아왔을 때 니나는 잠들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문득 니나가 똑바로 내게 시선을 던지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힘을 다해 그녀의 손을 잡아 내 얼굴 위에 놓았으나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키스하는 것도 내버려 두었다. 짧게 써야겠다.

그때의 일을 다시 상기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다. 나는 무서운 마비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생은 내게 복수한 것이다. 내가 그처럼 오래 생에 대해 역으로 살아온 것의 복수였다. 니나가 잠들었다고 느꼈을 때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문득 내 눈 위에 니나의 손이 느껴졌다.

"울고 계시는군요. 웬일이세요?"

그녀의 음성은 처음에는 놀라움으로 다음에는 따스함과 순진함으로 차 있었다. 나는 그녀를 부드럽게 다시 눕히고 울음을 억제했다. 나는 그날 밤 잠들지 않았다. 새벽이 다가왔을 때 나는 영원히 그녀의 곁을 떠나리라 작정했다. 그토록 어지럽혀진 밤을 니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아침 식사 때 니나는 수줍은 듯하면서도 다정했으며 어딘가 어른스러워 진 것 같았다. 벤하임으로 돌아오는 동안의 니나는 아주 경험이 많아진 여자처럼 보였다. 그 불면의 밤사이에 그녀의 내부에 어떤 변화가 왔을까? 내게 그것은 영원한 불가시의로 남으리라.

벤하임에서 기차를 탔다. 차가 떠나기 직전 니나는 그녀가 후에 많은 일을 겪은 뒤에나 갖게 될지도 모르는 표정으로 나를 전송했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포용하는 너그러움에 넘친 얼굴,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의 방황하는 눈과 많은 것을 알면서도 끝내 생을 경멸하지 않는 사람의 평온함을 지닌 얼굴, 나는 더욱 니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결코 다시 만나지는 않으리라.

 

"언닌 알 수 없을 거야. 사람이 연민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언니, 한 번은 순전히 호기심에서 했던 것을 얘기할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도전적이던 시선은 다시 절망했다. 니나는 짧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모두들 인생을 정말로 알기를 두려워하고 있어. 그보다 조금은 시적인 다른 얘기를 할게. 듣고 나서 윤리적인지의 여부를 들려줘."

나는 니나가 너무 심각해 있어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니나는 산책을 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이자르 강변을 지나 뮌헨 시의 북쪽 강변에 이르렀다. 강물의 물살은 세차고 빨랐다. 니나는 무엇에 저항이라도 하듯 몸을 뒤로 젖히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나는 잠시 후 니나가 입을 열었을 때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내가 만약 한다면 이런 밤, 여기서 하겠어. 대기는 생명이 넘쳐있어야 하고 지금처럼 숲이 일렁이는 소리가 들려야 돼."

니나는 그 동안 꽉 잡고 있던 내 팔을 힘없이 놓았다.

"내가 꽤 멍청해졌군. 이런 소린 지난 몇 년 동안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는데 지난 주 내내 거의 잠자지 않고 일했기 때문이야."

"아까 하려던 얘긴 뭐였니?"

", 다 부질없는 거야."

'그럴 테지, 네가 무슨 귀신에라도 홀린 듯 생각하고 있는 그 남자 외에는'

하지만 나는 이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나는 니나가 그를 발견했을 때 자신을 알았다는 것과 만일 그를 잃게 된다면 생명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럽고도 가장 직접적인 줄이 끊긴다는 것을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니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입을 열었다.

"몇 년 전일 거야. 어느 시골에 연구소를 가지고 있는 학자와 인터뷰를 해 달라는 청탁을 잡지사에서 받은 일이 있어. 연구소를 찾아갔으나 그는 없고 아무도 그가 있는 곳을 가르쳐주려 하지 않더군. 나는 사택으로 찾아갔지. 마찬가지였어. 식모아이가 교수님은 면회를 안 한다고 딱 잡아떼는 거였어. 안에 있긴 한데 벌써 4주일 동안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더군. 나는 잠자코 집 안으로 들어가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방으로 들어갔어. 어린애 방이었어. 텅 빈 침대는 어지럽혀져 있고 방바닥엔 망가진 장난감이며 찢어진 그림책 따위가 널려져 있고, 아무튼 엉망이었어. 나는 그 교수가 어린이용 의자에 앉아 나를 무심히 쳐다보는 걸 발견했어. 그 때 그냥 돌아서서 나와야 하는 거였는데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말을 건네고 말았어. 그의 이야길 그대로 옮기진 않겠어. 모든 결혼 생활처럼 따분하고 권태로우니까. 그런데 끝이 좀 틀려.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버린 거야. 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고 그게 자신의 죄는 아니었더라도 아내를 용서해야 했어.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내를 포용할 수 없게 된 거야. 그건 정말 갑자기 였어. 그의 아내는 선량하고 영리하고 간호사처럼 정확하고 친절하지만 남자에게 꿈을 줄 수는 없는 여자였나 봐. 세상엔 그런 여자가 의외로 많거든. 그의 아내는 3년을 기다렸지만 그것은 끝내 불가능했고 그래서 여자가 가버린 거야. 그게 4주일 전이었어. 그는 너무나 절망해서 산 사람 같지가 않았어. 우린 허옇게 자갈이 드러난 강변을 함께 산책했어. 햇볕은 여름날답게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었지. 우린 커다란 돌 더미 있는 곳까지 갔고 난 거기서 도와주고 싶다고 했어. 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어. 그 때까지 다른 여자에게 가는 걸 그는 스스로 허락하지 않았던 거지."

니나는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으므로, 나는 겨우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큰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걸 네가 했단 말이니? 그것도 연민 때문에?"

", 했어. 그럼 안 되는 거야?"

내가 대답이 없자 그녀는 큰소리로 말했다.

"내 말대로야. 언닌 정말 인생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하지 않아."

"그래, 그에게 도움이 됐니?"

"아니, 그는 희망에 넘쳐 아내에게 돌아갔지만 불가능했으므로 체념해 버렸어. 끔찍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언니?"

나는 니나의 말대로였으나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후에 가서는 니나가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서먹해져서 잠자코 슈타인의 일기를 펴 들었다. 다음 일기는 1933115일 것이었다.

 

니나가 나를 다시 찾아왔다. 의논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나는 그녀가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조언을 구한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그것은 희망 없는 오랜 기다림 위에 떨어진 육중한 통증 같은 기쁨이었다. 헬레네는 마침 외출 중이었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었는데 나는 완전한 고독에 싸여 있었다. 나는 니나의 목소리를 듣고 격렬한 놀라움에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우리가 서재에 들어왔을 때까지 무슨 얘길 했는지 기억할 수 없다. 그녀의 눈빛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내가 할머니에 대해 묻자, 할머니는 유령 같은 모습으로 아직 살아 있으며 아버지의 빚은 많이 갚았지만 아직 꽤 남아 있다고 했다.

"나는 그 곳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그 음성에는 어떤 결심이 나타나 있었으나 나를 속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상속받을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꺼냈으나 그녀는 내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재빨리 내 말문을 막으며 그것을 사양했다. 예상한 일이었으나 그것은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나의 고통을 다시 깨우고 말았어.

"나는 그것을 인수했고 이제 와서 그렇게 내던질 수는 없어요. 만일 그렇게 한다면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너무 가치 없어 보일 거예요."

"니나, 그건 니나의 일이 아니잖아? 그런 노파를 간호하고 물건을 파는 일은."

니나는 똑바로 나를 응시했는데 그 시선에 나는 부끄러워졌다.

"제 일이 아니었다면 그 곳에 가지 않았을 거예요."

니나의 운명에 대한 신념은 굳건했다. 그것은 그녀의 강점이었고 그녀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침침한 방 안에 할머니와 단 둘이 있을 때에는 그 참혹함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녀는 강했지만 스스로의 참혹함을 참을 수 없다고 느끼지 않을 정도로 강하지는 않으리라. 순간 나는 니나의 의무에 충실한 그 인내심을 자살적이며 부질없는 자학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것은 그녀의 절망적이고 오만한 안정감을 망쳐버리고 싶다는 주체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어려 있는 정결한 용기를 보았을 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우리는 한동안 지극히 시시콜콜한 일상의 대화를 계속했으나 끝내 대화는 갈피를 잃어버렸고 침묵이 우리를 휘감았다. 마침내 니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의논드릴 게 있어요. 이 문젠 선생님 이외의 다른 누구와도 의논하고 싶지 않아요."

니나의 그 말이 상실했던 생의 의의를 내게 다시 부여했음을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그녀를 위해 못할 일은 없었다. 정열에 사로잡힌 남자가 어린 연인에게 대신 죽을 수 있게 해 달라고까지 말하게 만드는 광적이고도 성실한, 어떤 희생이라도 감내할 수 있다는 황홀감이 나를 휩쌌다. 죽음 직후와도 같은 맑고 신비스럽기까지 한 조화의 순간이었다. 니나는 폐결핵인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모든 환자에게 하듯 증세를 물었다.

"저녁이 되면 자주 미열이 있어요."

그녀는 주저하는 시선으로 말했다. 나는 미열은 다른 원인으로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해 주었다.

"아니에요. 전염된 거예요."

그녀는 외면하며 대답했다. 뭔가 감추고 있는 게 있었으나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기대에 찬 얼굴에서 그녀의 소망을 읽었다. 난 그 때 X레이를 찍자고 말해야 했다. 니나도 그걸 바라고 있었고 그것만이 가장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친구 중에 브라운 박사라고 결핵 전문의가 있지. 내일 아침 일찍 촬영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전화하지."

니나는 잠자코 수화기로 옮겨가는 내 손의 동작을 지켜보더니 들릴락 말락 말했다.

"선생님이 해 주시기를 바랐어요. 전 선생님도 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

나는 순간 행복이 황홀하게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거부를 그녀에게 설명할 도리는 없었다.

"내 전문 분야가 아니거든"

나는 피하듯 대답했다. 니나는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확실하지는 않으니까 선생님이 진단서를 써 주신 뒤에라도......"

그러나 우리는 다음 날 만날 시간을 약속했고 니나도 고분고분했다. 그녀가 감사의 말을 했을 때 나는 어딘가 모르게 그녀가 적의를 지닌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상냥하게 감사의 말을 되풀이했고 작별인사를 덧붙였다. 나는 잠은 어디서 잘 작정인가고 묻고 싶었으나 이곳에서 쉬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다시 침묵의 공간이 지배했다. 우리는 애써 감춘 긴장에 휘감겨 꼼짝 않고 마주 서 있었다. 그러나 이 유희에서 니나는 늘 일방적이다. 강하게 감동돼 있는 편이 늘 손해를 보게 마련이다. 감정은 어리석고 방해물이 되고 정열에 걸려 쓰러지고 그 때마다 자진해서 어릿광대가 된다. 기회는 차츰 적어지고 반비례해서 감정은 쑥쑥 커 간다.

"아직은 시간이 좀 있어요."

니나는 장갑을 매만지며 말했다. 두꺼운 벙어리 털장갑이었다. 나는 다시 연민에 가슴이 아팠다. 나는 니나가 그 장갑을 잃어버리도록 하고 싶었다. 1월의 강추위는 털이 든 새 장갑을 선물하더라도 별로 의식할 것도 없이 받을 수밖에 없게 만들 테니까.

"흉하죠? 그래도 따뜻하긴 해요."

내 시선을 느끼며 니나가 말했다.

"오늘은 시내에 가 보고 싶어요. 오랫동안 음악이 있는 레스토랑엘 가지 못했거든요."

나는 니나가 전에는 레스토랑에서 음악 같은 것을 듣는 걸 참을 수 없어 하던 일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그 말을 했더니 니나도 빙긋이 웃었다. 변화와 경험을 내포한 그 미소는 둘 사이에 현재와 과거 사이의 다리가 되었다. 나는 현관의 외투걸이 옆에다 헬레네에게 쪽지를 써 놓았다.

'외출함, 귀가는 예정키 어렵다.'

니나는 그것을 읽었고 우리의 시선이 부딪쳤다. 공범자들의 의미 있는 시선, 놓쳐버린 청춘과 어리석은 게임의 유쾌한 입김이 나를 스쳐갔다. 경박함과 대담함이 수반되는 일종의 도취가 나를 엄습했다. 부드러운 눈송이는 영원히 내릴 것처럼 그렇게 흩날렸다. 나는 잠자코 니나를 레스토랑 '슈바르츠발트'로 데리고 갔다. 니나는 처음엔 당황하는 것 같았으나 곧 기꺼워했다.

그녀가 제일 값싼 음식을 주문하길래 나는 메뉴를 빼앗아 다시 주문을 했다. 그녀는 식사 중에도 먹이에 꼬임을 당해 나온 짐승 같이 본능적인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현재 처해 있는 곤란한 상황을 해결하는 데 알코올의 힘을 빌린다는 건 정당하지 못한 줄 알면서도 나는 삼폐인을 주문했다. 그런 객기는 니나의 주저하는 듯한 태도 때문일 수도 있었다. 왜 늘 니나로 인해 나는 일상의 사고에 반대되는 그걸 무시해 버리는 행동을 하는 것인가?

 

이 폐이지 끝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쓴 193832일의 일기가 적혀 있었다.

 

몇 년 동안의 이러한 관찰의 결과 나는 어떤 것이 참된 나의 본질인지 알 수 없어졌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이성의 명령과 통제를 따르는 것이 진실된 자아인가, 아니면 니나로 인해 일어나는 유혹자의 모습을 한 불가사의하고 난폭하기까지 한 자아가 진실된 나인가. 이성은 야만스러운 자아가 고개를 드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마침내는 조금씩 나타나 단순한 인식으로 만족하는 데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이제 조화에 이르기엔 너무 늦었다, 그것은 방해가 되는 것을 영원히 죽여버려야 하는 것 이외의 방법은 없다. 아직 살지 않은 생에 대한 무한한 슬픔과 끔찍한 꿈이 나를 괴롭히는 밤, 그것은 내게 보복을 한다.

 

1933115일의 일기가 다음 장에 계속되고 있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면서 니나는 조심성 없이 마구 마셨다. 나는 경고 따윈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표정과 태도가 차츰 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불순한 쾌감을 느꼈을 뿐. 니나에게서 벤하임은 안개 뒤로 사라져 버렸고 눈에선 차츰 경계심이 없어졌고 그 눈은 가끔씩 내게 미소했다. 하지만 그것은 따뜻한 방과 샴폐인과 담배 연기, 그리고 풍성하고 유쾌한 저녁을 위한 미소일 뿐이다.

나는 조금도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니나가 취할수록 내 의식은 더욱 맑아졌다. 나는 확실하고 집요하게 내 목표를 쫓았고 니나는 어지러움 속에서 무심히 나를 따랐다. 꽃장수 여인이 장미꽃을 내밀었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누구에게도 꽃을 보내지 않았기에 이제 그것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으며 부끄러웠으나 강렬한 즐거움이 따르는 부끄러움이었다.

장미는 아주 예뻤다. 무심히 내가 꽃을 사는 것을 보고 있던 니나는 그것을 건네주자 당황했다. 그녀의 놀란 손 움직임이 내가 감정을 나타낸 것이 얼마만한 모험이었나를 말해 주고 있었다. 니나는 무안을 당한 어린애처럼 '병에다 꽂아야지요', 라고 말했다.

매혹은 되돌아왔다. 니나의 눈빛이 나른해졌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그것을 쓴다는 일이 수치스러우나 나는 써야겠다. 그것은 그녀가 내게 보여 준 그녀의 본질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나는 끈기 있고 온화한 공격을 개시했다.

"유형지에서 돌아오면 뭘 할 생각이지?"

"공부를 계속하리란 건 잘 아시잖아요."

"그 다음엔?"

내 물음에 니나는 눌라 꿈꾸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직장을 갖고 일도 하고 글도 쓸 거예요. 소설을 쓰게 될지도 몰라요."

"그 다음엔?"

내 질문에 니나는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그 다음엔...... 그야 알 수 없는 거 아녜요. 전 살겠어요."

문득 니나의 눈이 빛났다. 그녀의 분명한 어조로 되풀이했다.

"그 다음엔 살겠어요."

"니나 나이의 처녀들은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

내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니나는 눈치 채지 못하고 말았다.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요. 혼자 있는 걸 좋아하거든요. 타인들이 방해가 될 때가 종종 있어요."

니나는 갑자기 결연한 태도로 핸드백을 열고 구겨진 종이쪽지를 꺼내 내게 주었다. 시였다.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긴 처음이었다. 나는 약간 주저하며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기를 빌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 감정은 흔들릴 것인가? 재능이 없고 좋지 않은 취미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자신을 용서할 수가 있을 것인가?

 

나는 읽기를 멈추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이건 너무 지나치잖아. 사랑을 재능 따위로 가늠하다니! 사랑하므로 사랑하는 거지. 능력이야 둘째 문제 아냐?"

"그렇지는 않아."

니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 시가 터무니없는 졸작이라면, 내용이나 형식이 값싼 감상만을 나타내고 있다면 나의 내면에도 그런 경향들이 있는 게 분명한 거야. 우린 자기가 쓴 글과 같아. 그것을 분리시킬 순 없어. 그 점에서 슈타인의 생각은 내 견해와 일치하지. 나 역시 어떤 능력도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해. 내 말이 너무 이기적이고 차갑다고 생각되겠지만 말야."

"그래, 무자비할 지경이다. 물론 여자가 남자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있어. 우린 남자에게서 성공과 활동 모두를 기대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여자는 그저 여자이면 되는 거야. 굳이 일을 해서 그것을 증명하지 않더라도 말이야."

니나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언니 얘기도 맞아. 하지만 여자가 일을 시작할 경우 그 여자에게는 일을 평가할 때 쓰이는 기준 이외의 다른 기준을 적용할 순 없어."

니나는 우울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자주 나의 재능이란 걸 저주했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집안을 가꾸고 뜰에 빨래를 너는 여자들과 나를 수백 번이나 바꾸고 싶었어. 언니, 우스워?"

"그래, 우습다."

"언닌 내 말뜻을 알 거야. 난 분명하게 어떤 선이 그어져 있는 정리된 단순한 생활을 갖고 싶은 거야. 언니 웃지 마."

"그래도 우스운 걸, 난 네가 조금도 그런 생활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내 말에 니나는 격렬하게 말했다.

"언닌 내가 늘 토끼처럼 밤낮 사는 것에 진저리가 날 거라고 생각지 않아?"

니나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긴 언니 말이 옳아. 나는 달리 살고 싶지 않아. 누구와도 나를 바꾸고 싶지도 않고."

니나는 수줍고 정답게 내 팔에 손을 얹었다.

"고통의 심연에는 어떤 맹렬한 아픔도 와 닿지 않는 방풍지대가 있어. 그 곳엔 일종의 환희가, 승리에 넘친 긍정이 있지."

"그래 알아."

나의 대답에 니나는 놀란 것 같았다.

"언니가 어떻게 그걸 알지? 언닌 날 모르잖아?"

"느낄 순 있어. 내면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상처받을 수 없는 본질을"

"정말이야?"

니나는 빠른 말씨로 말했다. 니나는 무엇이 무안했던지 일기장에 얼굴을 묻었다. 니나는 한참 뒤에야 내게로 일기장을 내밀었다.

 

니나의 시가 나를 실망시키진 않았다. 그것은 아직 완전한 자기의 호흡을 지니고 있진 못했으나 순수했다. 지금은 첫 구절과 마지막 연 정도를 기억하나 그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그 시를 고친다는 일은 불가능하다. 니나는 그 종이를 내게 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단호한 태도로 찢어버렸다.

 

, 이 한 번만은 나를 방해하지 말라.

오늘 숲에서 나를 따라온 내 수줍은 본질을

내가 말없이 어둠을 지날 때

태고의 지혜를 성스러운 무언으로 얘기하며

두 눈 크게 뜨고 기다리며 숲을 달려 나온

내 수줍은 본질을 방해하지 말라.

 

마지막 연은 처음 구절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희들, 너희들 타인을 방해하지 말라.

, 이 한 번만은 방해하지 말라.

너희가 내게서 예감하는 내 수줍은 본질을.

 

그 밖에 나는 다음 한 구절을 기억하고 있다.

, 너희들, 크나큰 죽음으로 유혹하는 자들이여.

 

"아름다운 시군, 그런데 찢어버리다니 아깝군."

내가 말했다.

"암기할 수 있어?"

"아뇨, 잊어버렸어요. 저와는 이미 무관한 거예요. 지나가 버리고 만 어떤 것을 얘기했을 뿐, 저도 그 사이 나이를 먹었어요."

"무슨 소리야? 겨우 사흘 전의 날짜가 씌어 있는데."

 

"사흘이 짧진 않아요. 그런데 이젠 내가 왜 혼자 있고 싶어 하는지를 이해하시겠어요? 인간은 누구나 많은 외로움을 필요로 해요."

니나는 실제적이고 솔직한 어린아이 같은 흥미를 갖고 나를 지켜보았다.

"선생님은 때때로 혼자 지내는 게 필요하지 않으세요?"

니나의 맑은 눈빛과 질문은 나의 긴장을 완전히 풀어버리고 말았다.

"나도 고독이 필요하지만 너무 많이 지니고 있지. 그리고 지나치게 오랜 세월을"

니나는 시선을 떨구었다. 나는 그녀가 내 말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했다고 믿었으나 그녀가 대답에 궁색해진 소녀처럼 입술을 깨물며 심각하게 생각에 잠긴 것을 보자 불안해졌다. 니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실망했다. 패배를 자인하고, 무기를 내던졌다. 커다란 환멸이 엄습했다. 니나를 소유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나는 화가 나 있었다. 도대체 가까이 가는 것조차 어려운 것이다. 그녀는 화산 같다. 유혹적이고 천진하면서도 절대 도덕가인 척하지 않는 니나. 본능적으로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멀고 낯설고 잡을 수 없는 니나, 하지만 난 니나가 여자가 되고나면 지니게 될 얼굴을 벌써 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인간적인 영혼을 알게 되기까지 어떤 일이 얼마나 더 일어나야 하는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문득 니나의 시선을 느꼈다.

"미안해요."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나의 씁쓸한 생각은 목소리마저 날카롭게 했다.

"뭐가?"

내가 물었다.

"전부 다 그래요"

니나는 슬프고 신비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말을 잃었다. 나는 니나의 눈에 드리워진 우수의 그늘에서 그녀가 내 말을 이해했으나 나를 도와줄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우리는 연민과 슬픔과 애정을 지니고 한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그 순간은 이내 지나갔다.

"가 봐야겠어요."

니나가 말했다. 나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가는 동안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결과 보고도 할 겸 내일 잠깐 댁에 들르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작별할 때 니나가 말했다.

'아니, 다신 오지마. 난 더 견딜 수 없어.'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말하는 대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니나는 의혹과 긴장과 우월감이 뒤얽힌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고 그 눈빛은 나를 다시 한 번 불안과 초조 속에 빠뜨렸다.

나는 그 날 밤 한잠도 잘 수 없었다. 쓰라린 패배의 아픔도 다시 니나를 만날 수 있다는 행복감 앞에서는 완전히 나를 압도하진 못했다. 나는 불면의 시간들을 뻐근한 통증으로 부드럽게 떠 있는 것 같은 상태 속에서 보냈다. 그러한 상태는 아침 내내 계속되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그것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맹렬하고 광적인 기다림이 되었다.

"막차를 타자면 15분밖에 시간이 없어요."

니나가 말했다.

"내가 자동차로 데려다주면 되잖아."

"이렇게 눈이 쏟아지는데 자동차론 안 돼요. 중간에서 갈 수 없게 될 게 뻔해요."

나는 눈 속에서 차를 몬 적이 여러 번 있다고 그녀를 설득했으나 고집은 완강했다. 그리고는 의자 한 귀퉁이에 걸터앉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브라운 박사가 폐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니나는 일단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크게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니나에게 아프다는 일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다지 지독한 일은 아닌 듯했다.

그녀는 역까지 배웅할 굿을 겨우 허락했다. 나는 거센 눈보라 속을 운전하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편지 드리겠어요."

작별할 때 니나는 한마디 던지고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녀에게 주려고 샀던 털장갑을 주는 것까지 잊고 있었다. 니나가 조금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보다 확실하게 내게 다가왔다. 이제 나는 아무런 희망 없는 기다림 속에, 커다란 혼란 속에 남겨진 것이다. 그녀 자신은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다. 니나가 자신도 알 수 없는 사랑에 흥미를 갖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니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수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나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3318

이러한 엉터리 생각을 정말로 믿을 만큼 나는 어리석었다. 나는 진정으로 니나와 결혼하고 싶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맹목적인 고집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녀를 갖고 싶다. 나는 도대체 어찌되는 건가. 이 얼마나 어이없는 미래로의 추락인가. 내가 그토록 굳건하다고 확신하는 나의 이성은 겨우 생의 기반에 불과하단 말인가. 이런 생각은 정말 견딜 수 없다. 나는 니나를 사랑하고 그녀의 편지를 기다린다. 전보다 더 명료한 의식을 지니고 내가 젊었을 때부터 싸워 온 어두운 힘에 나를 맡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무 확실하게 내가 자신의 법칙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왜 니나에게 아름다운 우정 이상을 기대하는가. 우정이라면 둘 사이에 성립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이미 나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파괴는 개선장군처럼 행진을 하고 있다. 지금 누가 있어 내게 이 괴이한 글을 적게 하는 건가? 이 모든 부질없고 하잘 것 없는 생각을 적는 자신이 치욕스럽다.

 

1933125

마침내 니나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는 다음 장에 녹슨 핀으로 꽂혀 있었다.

 

1933122

슈타인 박사님께

몇 달을 안부 편지만 쓴 탓인지 이처럼 전혀 다른 편지를 쓴다는 일이 어렵군요. 선생님께 편지 쓸 것을 약속했으나 그런 약속이 아니었더라도 저는 썼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제게 고독을 말씀하셨을 때 저는 죄송하다고 했었지요. 진부한 표현이었지만 제 진심이었습니다. 전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은 누구든 다 마찬가지로 고독하고 그것은 변경할 수 없으며 무서운 것이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생각됐습니다. 누구든 자신에 관해 얘기해선 안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까지도. 마음을 털어놓고 나면 우린 더욱 가난하고 외로워지니까요. 속마음을 서로에게 얘기함으로써 타인과 가까워지리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침묵 속의 공감만이 인간을 가깝게 할 뿐입니다. 저와 선생님은 그런 점에서 실패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선생님은 제 소망과는 다른 방향으로 저를 몰고 가십니다. 수줍은 소녀로 만드시고는 성숙한 여인의 결단을 제게 요구하십니다. 전 둘 중의 어느 것도 아닙니다. 전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여야 한다는 것 이상은 알지 못합니다. 제 내면에는 숱한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은 그 어느 것도 미정이고 이제 시발점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무엇에 스스로를 묶어둘 수 있겠어요.

전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제게 제안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류의 경험은 원치 않습니다. 제게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있을 따름입니다. 제가 어떻게 이 조그만 죽음의 거리에서 유령 같은 할머니 곁에서, 소금 포대와 식초통 사이에서 견디어 나간다고 생각하세요? 전 그 모든 외적인 것과는 무관한, 외부로부터의 입구가 없는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누군가 이 세계에 들어오기를 허락한다면 오직 선생님뿐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진 않겠습니다.

때때로 외로움이 무겁게 짓눌러 와서 참을 수 없을 때도 물론 있습니다. 제게 결핵에 걸린 것 같다고 말씀드렸었지요. 지금은 괜찮다고 하지만 전염될 우려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전 매일 결핵 환자와 함께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신학과 학생으로 요양소에 빈자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죽음을 예감하고 그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 함께 이야기를 할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그는 제게 가톨릭 교리학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는 모든 교리학자들이 지니고 있는 오만한 안정감을 미워했고 또 그에게는 한낱 이교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흥미 있는 공부였습니다.

가끔 그는 제게 키스를 했고 저는 어느 날인가 마멸돼 가는 그의 육체에 구토를 느꼈을 때까지 그것을 용납했습니다. 나의 저항을 그는 죽음의 냄새가 나니까 자기를 버리려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에게 구토를 느낀다고 말할 순 없었습니다. 그의 요구대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요? 전 지금 그렇게 하면서도 전염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선생님께 여쭈어 보고 싶은 거예요. 솔직한 제 감정대로 한다면 그의 방문을 허락지 말아야 했지만 그는 나를 방문하는 것에 생의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의 환상을 빼앗을 수는 없어요.

가혹한 진실과 온화하고 구원에 넘치는 위선과 어느 편이 더 나을까요? 전 때때로 인간이란 그저 타협안에서만 살 수 있는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무서워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이 문제에 대하서도 진실을 말할 것입니다. 물론 그때가 되면 그는 왜 자신을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었느냐고 당연한 것처럼 묻겠지요. 그러면 전 마음이 약한 탓에, 어리석은 연민 때문이라고 대답하겠지요. 사람은 비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건지도 몰라요. 전 이 모든 것에 관해 선생님과 얘기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생각에서 그칠 뿐입니다, 전 편지로 밖에 이런 말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너무 긴 편지가 되고 말았군요. 그것도 순전히 제 얘기만 늘어놓으면서 바로 제가 제일 싫어하는 짓을 한 셈입니다. 찢어 버리고 싶지만 약속을 이행 못할 것 같아 그냥 둡니다. 다시 편지를 쓴다는 일은 불가능하니까요.

N.B.드림

 

 

편지 뒷장에는 슈타인의 짧은 주석이 붙어 있었다.

 

몇 년 후 니나는 내게 말했다. 그 신학도를 다시 만났으며 그는 완치되어 어엿한 신부가 되어 있었다고, 두 사람은 인사만 나누었을 뿐 서로의 과거에 관한 어떤 암시도 없었다고 했다. 니나는 말했다.

"분명 성당에서 그의 설교를 듣고 있는 누구도 그가 결코 되살리고 싶지 않은 투쟁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거예요."

니나는 이 말을 어떤 악의나 비꼼을 가지고 하진 않았으나 그 말의 어쩔 수 없는 사실성은 어떤 비난보다도 예리하고 가혹하게 들렸다.

 

여기서 니나는 하품을 했다.

"아주 까맣게 잊고 있었어. 이상해. 우린 자주 너무 많은 걸 잊고 말거든. 난 피곤해."

"가서 자도록 하자꾸나."

"잔다고? 아니, 난 그럴 순 없어. 너무 자기중심적일까. 언닌 졸릴 테고 또 자야 될 텐데. 이 긴 의자에 누워. 옆집 부인한테 이불과 의자를 빌려오지."

나는 니나와 함께 베르트람 부인에게 갔다. 친절한 노부인이었다.

"부슈만 부인이 떠나신다니 너무 섭섭해요. 내가 아파서 누워 있을 때 그 많은 일을 제쳐놓고 돌봐 주셨는데. 그 폭풍우 속을 한밤중에 약국으로 뛰어가시던 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그녀의 푸념에 니나는 피곤한 듯 말했다.

"대신 아주머니께서 저를 얼마나 위로해 주셨는데요."

"아니, 언제 위안이 필요한 때나 있으셨나요?"

"가끔은, 저녁 무렵 제가 저 뒤의 난롯가에 앉아 아주머니가 끓여 주시는 차를 마셨을 때라든가......"

"하지만 그럴 땐 늘 유쾌하셨잖아요. 나에게 재미있는 말씀도 많이 해 주시고."

우리는 노부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돌아왔다.

 

내가 세수를 하는 동안 니나는 잠자리를 마련했다. 나와 마주 보이게 의자를 놓았다.

"수면제가 있어야겠어. 언니도 줘?"

나는 무심코 니나가 냉홍차 두 잔을 만들어 한잔에는 수면제를 넣고 한잔에는 넣지 않는 것을 보았다. 니나는 수면제가 든 잔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니나의 잘못을 알려주려 했다. 그 때 문득 나는 그것이 니나의 저의를 알 수 없는 고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잔을 받아 마시는 척하다가 치워버렸다. 우리는 전등을 끈 어둠 속에 누워 멀리 야간열차가 밤을 달리는 소리와 봄바람 소리를 들었다.

"언니, ?"

얼마 후 니나가 물었다.

"아니, 아직 안 자."

니나는 갑작스런 충동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대개의 인간들에겐 운명이 없어. 그들의 잘못이지. 운명을 가지려 하지 않거든. 한 번의 커다란 충격을 피하는 대신 수많은 작은 충격을 받아들이고 있는 거야. 그런 작은 충격은 인간을 차츰 참혹함 속으로 밀어 넣지만 그건 아프진 않아. 타락은 편하거든. 그리고 그건 파산 직전의 상인이 파산을 감추려고 여기저기 손을 벌리다가 일생 동안 이자를 갚아가는 공포에 질린 소상인으로 끝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거라고 생각해. 나 같으면 언제고 파산을 선언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어."

나는 졸음을 참을 수 없어 건성으로 그래, 하고 대답했다. 니나는 실망한 것 같았다.

"언닌 내 말을 이해 못했군. 내 말은 우리가 선택한 생의 길이 막혀 버린다면 그걸 자인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야."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곧 잠들고 말았다.

 

한밤중에 잠이 깼을 때 약한 불빛이 방안에 흐르고 있음을 알았다. 작은 스탠드가 켜진 채 불빛이 헝겊으로 가려져 있었다. 소파 앞에는 의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 깡통에 기대어 상반신 사진 한잔이 세워져 있었다. 처음에는 니나의 사진인 줄 알았으나 니나가 몸을 움직였을 때 나는 곧 유리에 비친 니나의 얼굴을 사진으로 착각했음을 알았다.

내가 뭔가 소리를 냈던 듯 니나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실눈을 뜨고 잠들어 있는 것처럼 깊이 규칙적으로 숨을 쉬었다. 그리고 실눈을 뜨고 이번에는 진짜 사진의 주인을 보았다. 넓적하고 어딘가 특이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니나는 내가 잠들었음을 확인하자 다시 그 사진 앞으로 몸을 굽혔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사진의 얼굴로 가져가 둘이 서로 접치게 했다. 눈과 입과 그 밖의 모든 부분이 서로의 것으로 들어가서 구별을 곤란하게 했다. 나는 그 때 그것이 기묘하다거나 무섭다고 느끼진 않았다.

나는 니나가 유리창이 열려 있는 추운 방에서 잠옷 바람으로 3월의 찬 밤공기를 마시며 반시간이나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걱정스러워졌다. 니나는 어찌나 몰입해 있던지 내가 실수로 벽을 치는 소리도 못 들었다.

문득 그녀는 사진틀에서 손을 땠다. 그런 니나의 몸짓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나는 가슴이 쓰라렸다. 니나는 사진틀을 헝겊으로 정성스럽게 싸서 가방에 접어 넣더니 곧 불을 껐다. 니나가 잠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니나는 그토록 괴로워하면서도 나와 얘기하기를 거부해 가면서까지 이 밤을 혼자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을까? 나는 이런 시간만이 니나가 아무 방해 없이 그 남자와 단 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으로 그녀를 이해했다.

시계가 2시를 치고 조금 있다가 다시 방안이 밝아졌다. 니나는 내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반 쯤 누운 자세로 뭔가 쓰기 시작했다. 나는 니나가 그 남자에게 보내지도 않을 편지를 쓰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니나는 걷잡을 수 없도록 감정이 자신을 억누르는 이런 밤에 쓴 편지를 상대방에게 보낼 여자는 아닌 것이다.

나는 아침 8시에 다시 눈을 떴다, 푸르스름한 안개를 헤치고 햇살이 비쳤으나 스탠드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그 불빛으로 니나의 얼굴은 거의 초록빛으로 보였다. 노트는 방바닥에 떨어져있고 니나는 손가락에 펜을 쥔 채로 마치 죽은 사람처럼 긴 의자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돌처럼 무감각한 잠 속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불을 끄고 욕실로 갔다. 다시 돌아왔을 때도 니나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 펜이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 노트위에 굴러 떨어져 있었다.

나는 창가에 앉았다. 새하얀 아침 공기 속에서 보는 니나의 방은 휑뎅그렁한 것이 기차역의 대합실 같았다. 못박은 궤짝이며 널려져 있는 트렁크가 주는 을씨년스러움 때문에도 더욱 그랬다. 전에는 필경 기분 좋고 아늑한 곳이었으리라.

니나의 옷 입는 걸 보면 어딜 가든 집을 개성 있게 꾸밀 줄 아는 여자라고 생각된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그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내던지기도 할 그런 니나임에 틀림없으리라. 니나는 무슨 일이 있든 어떤 것을 꽉 잡고 있을 그런 형은 아니다. 그녀는 집시를 닮은 구석이 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천막을 치고 한동안 살다가 그 땅을 알고 나면 망설임 없이 내던지고 다시 출발한다.

니나의 표정에는 고향 잃은 사람의 비애와 야생적 자유가 지니는 행복감이 함께 있었다. 아침거리는 신선하고 활기가 넘치고 부지런해 보였다. 그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모두들 저렇게 매일 새 희망을 안고 다시 시작하고 그러다가 낮이 지나고 밤이 오고 하루가 지나지만 그 이상의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매일의 일상을 그대로 뒤바꿔 놓는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나 자신의 생활은? 별스런 고통도 돈 걱정도 없고, 알맞은 자기기만과 연민에 의해 모두 없애 버릴 만한 일뿐인,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아름답고 조용한 일상들, 더 이상은 그것이 싫다.

 

니나는 아직 자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소망할 수 있었던 모든 것, 재능과 생기와 열정, 그리고 남자가 있었다. 나는 문득 그녀를 시기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밤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대로 니나를 보고 있으면 미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누구를 미워할 수 있는 천성을 타고나지는 못했다. 그리고 누군가를 미워하려고 생각해본 적도 이제까지 없었다.

니나가 눈을 떳다. 잠을 잔 얼굴 같지가 않았다.

"몇 시야?"

"아직 7시 반이야."

사실은 9시였다. 니나는 안심한 표정으로 방바닥의 노트를 집어 들었다.

"어젯밤 문득 어떤 신문사에 보낼 단편소설 약속이 생각나잖아. 단단히 약속을 해 놓고는 잊어버렸었어. 영국에 가기 전에 꼭 보내야 돼. 괜찮을지 모르겠어. 읽어 봐 주겠어? 그 동안 난 목욕을 해야겠군."

그러나 니난 욕실로 가는 대신 베개를 고쳐 베더니 뭐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잠들고 말았다.

나는 니나가 어젯밤 몇 시간 동안 쓴 것이 피로와 이별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지켜진 약속이라는 데에 놀랐다.

나는 읽어 내려갔다.

 

 

4. 단편소설

 

1945422

한나는 그녀가 체포되기 전에 살던 지방의 경계에 이르렀다. 고향까지는 아직도 30km나 남아 있었다. 봄날답게 부드럽고 따스한 비가 활짝 핀 꽃잎을 적시고 있었다. 사방에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으나 어딘지 쓸쓸했다. 어디에도 인적이라곤 없었다. 빗줄기는 차츰 거세어지고 어둠이 밀려왔다. 한나는 속옷까지 흠뻑 젖었다. 외투도 없이 하루 종일 걸었던 탓에 무섭게 피곤하고 허기가 져서 한 걸음씩 떼어 놓기가 죽음과도 같았다. 게다가 신발은 너무 컸고 발뒤꿈치는 방황 첫날 이미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청홍색 가로줄 무늬가 그대로 있는 구멍투성이의 형무소 양말 때문이었다. 오늘로 그녀는 닷새째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417일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모든 감방 문이 열렸다. 여간수와 소장, 지도관들, 죄수들, 그리고 몇몇 게슈타포 대원과 검사들은 모두 미친 듯이 서둘러댔다. 그 날은 언제나처럼 마당에 집합한 죄수들의 열이 비뚤어진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죄수들은 잠자코 서 있었다. 아직 잠도 채 덜 깬 탓도 있었지만 절망에 익숙해 있었던 까닭이었다. 문 양쪽으로 하나씩 켜져 있는 전등은 수의를 입고 나막신을 신은 4백 명의 여자들을 날카롭게 비추고 있었다.

"누가 또 도망쳤나?"

누군가가 나직이 물었으나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나는 지난 밤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를 들었다. 전방의 총성인지도 몰랐고 아니면 늘 들리는 듯한 폭격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나는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에 다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모두 그 소리를 들었으나 조용히 있었다. 전진하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아니면 석방? 그러나 그들은 그 어느 것도 알 수 없었다. 누구도 그들과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고 그들은 아무도 믿으려 들지 않았다. 교도관이 밖으로 나왔다. 바지는 내려가 있고 구두끈은 한쪽이 풀려 있었다.

그는 말했다.

"적은 50km 앞에 와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석방합니다."

여러분이란다. 어제만 해도 이것들, 아니면 이 더럽고 천한 것들이 전부였는데.

"여러분들에게 소지품을 되돌려 주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서서 각자의 물건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1인당 빵 하나와 감자 네 개를 배급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전부입니다. 그걸 받고 나면 되도록 빨리 이곳에서 사라지길 바랍니다."

누구도 꼼짝할 수 없었다. 그것은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는 새벽에 너무 뜻밖에 빈속에 닥쳐왔고 누구도 이미 구원을 믿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석방 증명서를 받아 쥐고서 그들은 무엇에 홀린 듯 잠자코 서 있다가 여간수들이 옷과 빵이 들어있는 광주리를 가져왔을 때에야 비로소 한꺼번에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정말 우릴 보내주는구나"

누군가가 소리쳤다. 집에 갈 수도 없게 된 지금에서야. 기차가 갈 수 있는 곳이라곤 한 것도 없는 지금에서야. 서쪽엔 미군, 동쪽엔 소련군이 우글거리는데. 그리고 그 중앙에는 나치 친위대와 게슈타포가 있고, 누군가가 또 외쳤다.

"그리고 늑대들은? , 늑대는 이제 더 물 수가 없어. 그치들도 무서워 떨고 있으니까."

잠시 침묵이 지배했다. 그들은 문득 자기 운명의 거대한 전환을 이해한 것이다. 나치가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다시 수선스러워지는 듯 싶자 형사범 소녀 몇몇이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요? 여기선 그래도 머리 위에 지붕이라도 있었지만 들판에서 잘 수는 없잖아."

하지만 누구도 그런 푸념을 듣고 있진 않았다. 자기 옷을 찾느라고 대혼잡이 일었다. 옷마다 수인 번호가 있고 이제 신속히 처리될 참이었다. 옷을 받은 사람들은 잽싸게 갈아입었다. 그들은 잠자코 수의와 누더기가 된 회색 치마와 너무 오래 세탁하지 않은 내의들을 거침없이 벗어던졌다. 층계에 앉아 있는 경찰들은 외면한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옷 광주리에 우르르 달려든 죄수들은 스웨터, 구두, 양말 따위를 뒤적이고 들쑤시고 서로 깨물고 할퀴고 비명을 질렀다. 여간수들이 주먹으로 마구 내리쳤으나 소용없었다. 경찰들은 자기들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듯 싱글거리며 바라보더니 침을 탁 뱉고는 나치 대원을 불러 시큰둥하게 말했다.

"한방 쏴라. 저것들이 겁먹도록"

총을 쏜 순간은 잠시 조용했으나 소동은 이내 계속되었고 다만 한나 옆에 있던 노파만이 총소리에 쓰러졌다. 공포가 그녀를 죽인 것이다. 한나가 소리를 질렀지만 누구 하나 쳐다보지 않았다. 나치 대원이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

"닥쳐! 떠들면 살아서 못 나갈 줄 알아. 하나쯤 더 죽이는 건 문제가 아니라고."

그는 죽은 노파를 안아 올리고 뜰을 지나 지하실 입구로 갔다. 경찰들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때 교도관이 다시 나타나 호각을 불며 외쳤다.

"5분 안에 전원 여기를 떠나시오."

한나는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구두 한 켤레를 받았으나 양말은 다 없어진 뒤라 형무소 양말을 그냥 신어야 했다. 또 다행히 전에 입던 옷은 찾을 수 있었으나 외투는 없어진 뒤였다.

5시가 막 넘어 철문이 열렸고 팔에다 빵을 끼고 외투주머니에 감자를 넣은 여자들은 한참을 더 머뭇거리다 말 안 듣는 암소 떼처럼 쫓겨 나왔다. 다시는 닫히지 않을 철문을 뒤로 하고 한나는 맨 마지막 패에 끼어 있었다. 정치범들은 서둘지 않고 함께 뭉쳐 있었다. 아직 잠들어 있는 도시의 어두운 거리에는 뿔뿔히 사라져 가는 여자들의 발소리가 흩어지고 있었다.

정치범 여덟 명도 묵묵히 빠른 걸음을 떼어 놓았다. 그들은 교외의 언덕 기슭에서 쉬었다.

"별 좀 봐. 많이도 깔렸군."

누군가의 말에 그들은 오래 보지 못했던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나가 말했다.

"어떡하지? 돈도 없고 기차는 불통이고 난 걸어가겠어. 우리 집은 여기서 80km. 함께 간다면 우리 집에서 묵을 수 있어."

그 중 둘은 도시 근방에 집이 있었다. 서쪽과 북쪽은 전쟁이 한창이었다. 서쪽에 사는 둘은 전선을 지나면 틀림없이 귀가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형무소에서 겪은 것보다 고약한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 한 명은 총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으나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이미 죽음은 그들 밖에 있었다. 그들은 재빨리 포성이 들려오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남은 사람들 중 하나가 말했다.

"무사할까? 그리고 우리는?"

그녀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다른 한 여자도 울음을 터뜨렸다.

"가야지. 우린 전쟁과 경주해야 하니까"

한나가 말했다.

도시가 멀리 골짜기 속으로 가라앉아 보이지 않게 되는 곳까지 오자 그들은 증오에 찬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다 지난 일이야. 이젠. 우린 이렇게 살아 있잖아"

한나가 말하자 둘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형무소에 있을 때 그 오랜 시간을 여덟 명 중 누구도 울지 않았었다.

"그만들 하고 빵이나 먹어. 먹어야 견딜 테니까."

"길가에서? 나치들이 우릴 찾음 어떡하라고"

그들은 흐느낌을 참으며 말했다.

"우린 자유야. 석방증명서도 있잖아."

한나가 외쳤다.

하지만 그들은 한사코 나무 수풀 속에 웅크리고 앉아 먹으려 했다. 그리고 한길이 아닌 봄비에 젖어 있는 좁은 오솔길로 갈 것을 원했다. 첫날밤을 늪 속에 있는 오두막의 짚더미 위에서 보냈다. 둘째 날은 끊어진 철로에 팽개쳐져 있는 화물열차 안에서 보냈고 셋째 날 아침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들은 마지막 빵을 먹었다. 저녁 무렵 그 중 하나가 쓰려졌다. 육십이 넘은 할머니였다. 외진 농가를 발견하고 한나가 용기를 내어 빵을 얻으러 갔으나 그 곳에는 본대를 떠나 그 집에서 숙박할 예정인 중무장의 나치 부대가 득실거렸다. 농부의 아낙은 바들바들 떨며 문간에 나와 빵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녀는 마구간에서 감자와 무를 앞치마로 가득 가져다주고 담배꽁초 두개도 주워다 주면서 한나를 급히 대문 밖으로 내몰다시피 했다.

"저기 꼭대기에 수녀원이 있어요. 그리고 가보세요."

한나는 밖으로 나서며 아낙이 황급히 문을 잠그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한 발짝도 걷지 못하는 할머니와 함께 자정 무렵 산꼭대기의 수녀원에 닿았으나 수녀원은 쥐죽은 듯했고 문은 끝내 안 열렸다. 나무광을 발견하고 그들은 거기서 밤을 지냈다. 아침이 되자 다시 벨을 눌렀다. 누군가가 망보는 거울로 재빨리 내다보더니 문을 열었다. 수녀들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남루하고 수상한 차림은 의심받아 마땅했다. 그래도 수녀들은 할머니와 발가락이 곪은 다른 두 명도 받아들여 주었다. 한나는 혼자 길로 나섰다. 이정표를 보고서야 이제껏 30km 밖에 못 왔음을 알았다. 빵은 없었고 발은 온통 물집투성이었다. 엿새 째되는 날 한나는 간신히 고향 지방의 경계에 닿을 수 있었다.

 

425,

그녀는 언덕 위에서 자기의 옛집을 내려다보았다. 집은 마을에서 떨어진 인적이 드문 숲속에 잘 감추어져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집에 돌아온 것이다.

 

53,

그녀는 나치의 트럭이 여러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평소 농가의 비료차라든가 마차나 겨우 다니던 길 위를 그들은 살인적인 속력으로 쾌주하고 있었다. 사흘 동안은 수없이 많은 차량이 줄을 이어 지나가더니 56일에는 무섭도록 조용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57일에 전쟁은 종말을 고했다. 그 다음 1주일은 패전 군인들이 지나갔고 그들은 매일 한나의 집 문간에 와서 물과 빵을 구했다. 형편없이 말라 틀어진 그들은 말을 잃었으며 패배를 수치스러워했다. 귀가 외에 그들의 소망은 있을 수 없었다. 대부분 100km 밖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 발칸반도, 이탈리아 등지에서.

모두들 한길을 피해 숲의 오솔길을 헤치고 왔다. 한나는 그들에게 홍차나 수프를 끓여주는 게 일과가 돼 버렸다. 한나는 그 이상 가지고 있지 못했다. 5월 말 어느 날 밤, 또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한나는 언제나처럼 깜짝 놀랐다. 아직 자유에 안심할 만큼 공포의 습관이 가셔지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문을 열었다. 패잔병 두 사람이 서 있었고 그 중 하나는 아직 소년이었다. 반대로 한 사람은 덥수룩한 수염 때문에 늙은이처럼 보였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나무광 속에 잠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는 비틀거렸고 소년은 그를 부축했다. 시간은 자정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한나는 그들을 받아들였다. 남자는 부엌 한복판에서 기절했는데 소년과 한나는 그를 들어 올릴 수가 없어서 깨어날 때까지 그대로 눕혀 두어야 했다.

"어디가 아픈 거예요?"

한나의 물음에 소년병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당신한테도 아픈 것을 말 안 했다는 거예요?"

한나가 짜증스럽게 물었으나 소년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 허기가 져서 그런 것 아녜요?"

한나가 제차 묻자 소년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 때 남자는 의식을 되찾았다. 소년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한나는 외면했다. 뒷날 자신이 왜 얼굴을 돌렸는지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자신과 무관한 말없는 대화의 증인이 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시선을 보았을 때 마음 에 떠오른 의혹을 더 이상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았으며 다만 환자를 도와준다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싶었다. 그녀는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일만 했다. 불을 피워 물을 올려놓고 냄비에 보리를 볶았다. 기름도 설탕도 다 떨어져 없었고, 우유가 조금 있을 뿐이었다. 요 며칠 동안 그녀의 식량은 우유가 전부였다. 두 남자는 그녀의 뒤에서 묵묵히 식탁에 앉았다.

"이게 전부예요."

그녀가 말했다. 소년이 문득 생기를 띠며 자기들에게 식료품이 있다고 했다. 그때 남자가 쓰러졌다. 한나는 놀라 대체 어디가 아픈 거냐고 소년에게 소리쳤다. 소년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한나는 다그치듯 말했다.

"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 저 사람의 아픈 데를 모르고는 도와 줄 수가 없잖아요?"

소년은 그저 입 속으로 웅얼웅얼했다. 재차 한나가 묻자 소곤거리듯 말했다.

"농독증입니다."

"어디예요? 늦기 전에 어서 말해요!"

소년은 절망적인 눈빛으로 고개를 떨구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으면 당장 나가요."

한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소리쳤다.

"말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소년은 마치 매맞은 아이처럼 쓰러져 누워 있는 남자에게 두려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는 소곤거렸다.

"왼쪽 팔이예요."

한나는 안심하며 웃옷을 벗기려 하였다.

"안 돼요"

소년은 마치 주인을 방어하는 것처럼 그 남자 앞을 막아섰다. 한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좋아요. 그는 곧 죽어요."

소년은 비켜섰다. 한나는 남자의 군복을 벗겼다. 군복이 고급 옷감이라 한나는 잠깐 의아하게 생각했다. 셔츠가 팔에 달라붙어 한나는 셔츠의 팔을 자르고 상처를 묶은 손수건을 풀었다. 상처는 이상하게 사각형이었는데 고름이 나오고 있었다. 상처에서 겨드랑이 아래로 한 줄기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한나가 의아해서 물었다. 소년은 잠자코 장화코를 내려다보다가 울기 시작했다. 그는 흐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안 하면 쏴 죽인다는 거예요. 나는 칼을 불에 달구어 조심을 했지만 농독이 생겼어요. 내 잘못이 아니에요."

"대체 뭘 어떻게 했다는 거예요"

한나는 의혹에 싸이며 물었다.

"팔에 표지를 한 게 있었어요. 나치 당원은 모두 팔에 표지를 하고 있는데 적에게 발견되면 끝장이란 거예요."

소년은 애써 울음을 삼켰으나 계속 흘러 내렸다.

"너는?"

한나는 그가 어린애로 느껴져 그렇게 말했다.

"전쟁이 끝나기 1주일 전에 입대를 했기 때문에 그런 게 없어요."

한나는 쓰러져 있는 남자를 살펴보고 나서 의사한테 가자고 했다. 그러자 소년은 차라리 미군한테 가서 죽겠다고 주절거렸다.

"알았어요. 난 의사가 아닙니다. 이 사람이 죽어도 난 알 바 아니에요."

소년은 그녀의 단호한 말에 애원하는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나는 끓인 물과 솜, 불에 달군 작고 예리한 칼을 준비했다.

"꽉 붙잡아요."

그녀의 주의에도 불구하도 소년은 그녀가 고름주머니를 찌르자 헛구역질을 하며 쓰러지려고 했다. 한나는 그를 밖으로 내보냈다. 상처를 치료하는 법은 감옥에서 배웠는데 제법 능숙했다. 한나가 한참을 쩔쩔매고 있는데 그가 눈을 뜨고 주의를 거칠게 두리번거렸다.

"꼼짝 말고 그대로 있어요."

그녀의 주의에 놀라 그는 복종했다.

"부상이었지요."

그가 소곤거렸다.

"내게 거짓말 할 필요 없어요. 난 내 눈에 보이는 것 정도는 볼 줄 아니까요"

소년이 납처럼 질린 얼굴로 돌아왔을 때 남자는 긴 의자 위에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그들은 마주 보았다. 한나는 밖으로 나왔다. 머릿속이 혼란했으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부엌으로 돌아오자 말다툼 소리가 들렸다.

"네가 말했지?"

남자가 소리쳤다.

"그 여자가 보았을 뿐이에요."

소년은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나가 소년의 말을 이었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당신들은 어쨌든 내 앞에선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그럼 우리 편이었군요?"

남자가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물었다.

"아니, 난 반대했기 때문에 6주일 전에 감옥에서 풀려났어요."

소년은 입을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정말입니까?"

남자가 물었다. 그러나 대답을 듣진 못했다. 한나는 소년을 나무광으로 보냈다.

"이불은 거기 있어요. 그리고 당신은 여기 그대로 누워 있어요. 열을 살펴야 하니까"

소년이 나가자 남자와 그녀만이 남았다. 그녀는 식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가끔 주의 깊은 시선을 그에게 보냈는데 그는 말없이 대답했다. 새벽녘에 그는 잠들었다. 한나는 몇 시간 후 상처를 보기 위해 그를 깨웠다. 피가 훨씬 약하게 흘렀다.

"당신도 이제 나무광으로 가세요. 누구도 당신을 찾으러 거기까지 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걸을 수 있게 되면 곧 떠나 주세요."

그는 그녀를 외면한 채 헛간으로 갔다, 한나는 그가 톱밥이 깔린 어둠 속에서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거들었다. 그들은 사흘간 거기 머물러 있었다. 한나는 밤중에 음식을 날라다 주었으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 나무를 가지러 갔을 때 그들은 없었다. 먹다 남은 식료품과 쪽지가 있었다.

'고맙습니다. 나치 소대장 한스 메르크'

쉽게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것이 조롱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마침내 한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 종이쪽지를 구겨 그들이 누워 있던 톱밥 위에 던지고 톱밥을 광주리에 퍼 담아 부엌으로 가져다가 태워 버렸다. 이틀 후 미군 헌병이 와서 무기와 숨어있는 지도자를 찾는다고 집 안을 뒤졌다. 그들은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하고 한나가 석방 증명서를 보이자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단숨에 이 소설을 읽었다. 니나는 깨어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건 실패작인 것 같아. 피곤할 때 쓰는 게 아닌데."

그녀가 말했다.

"나쁘진 않은데. 긴박감이 있어"

"긴박감이 있다고? 그것 봐. 순전히 스토리에 치중했다는 증거야. 나는 그것처럼 싫은 건 없어. 누구나 모두 그렇게 쓰지. 그 따위 얘긴 내 머릿속에 한 다스는 돼. 그렇지만 가치가 없어. 내게 소재는 그리 문제가 안 돼."

"너야 그럴지 모르지만 독자들은 달라."

내 말에 그녀는 팽개치듯 말했다.

"독자라고? 그들은 오락을 원하고 있어. 처음엔 이것이 일어나고 다음엔 저것이, 그리고 다시 그 일이. 이런 식으로 해서 끝에 가선 행이든 불행이든 둥글게 끝나야 하지. 극장에서처럼 만사가 질서 있게 진행돼야 하는 거야. 그런 주제에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진짜 리얼리스트라고 믿고 있지. 인생엔 어떤 계산서도 들어맞지 않으며 아무런 결말도 주어져 있지 않은데 전부가 무질서하고 혼란에 빠져 있고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뿐인데 사람들은 거기서 조그만 조각들을 끌어내어 현실에선 불가능한, 생의 복잡성에 비하면 지극히 우스꽝스러운 작고 알뜰한 설계도에 따라 그것을 건축하고 있는 거야. 전부 다 꾸민 사건에 불과해. 내 소설도 다를 바 없고."

"너무 과장이 심하구나. 네 소설은 날 감동시켰어. 그렇다고 내가 판단력이 전혀 없는 사람도 아니고"

니나는 내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머리칼을 매만졌다.

"고쳐야겠어. 난 늘 그래. 한 편 쓰는 데 세 번 네 번 고치거든. 소재가 그 본질을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갈고 또 가는 거야. 그런데 지금은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어. 하긴 시간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는 건데. 그게 별 문제가 되진 않아."

"어딜 고칠 생각이니?"

"우선 너무 길어. 마지막 몇 줄은 지금 언니가 줄을 그어도 돼"

니나는 내게 펜을 던졌다.

"한나는 톱밥을 태웠다. 그래, 거기서 끊어. 그게 옳아. 한나는 마치 나병환자가 거기 누워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걸 태운 거야. 그 다음은 흔해빠진 결말에 지나지 않아. 결말을 짓는 커다란 몸짓, 독자들을 향한 우아한 인사지. , 이젠 끝났으니 박수를 쳐라. 바로 그거야. 우리에겐 하나같이 허영심이 있어. 하지만 난 그걸 갖고 싶지 않아. 우린 빨리 타락하고 말거든. 이리 줘. 내가 봐야겠어."

니나는 그것을 빨리 읽었다.

"아무래도 이걸 보낼 순 없어. 혈액형 표지를 보았을 때 한나의 머릿속에 진짜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를 너무 쉽게 써 버렸어. 한나는 화를 냈고 그런 채로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영웅적으로 수행해 내고 그리고는 독자들한테 감탄과 박수갈채를 받게 된다. 이건 너무 흔해. 그녀를 덜 영웅적으로 만드는 건데. 그 두 남자는 와서 긴 얘길 하지. 탈주했기 때문에 나치의 추격을 받고 있다는 식으로 말야. 팔의 상처는 물론 나치의 총에 맞았다고 하겠지. 한나는 감동해 자기의 감옥 생활이며 그 곳에서의 나치의 대우 등을 말하고, 그러면 그들 중 하나가 나치에게 마구 욕을 해대는 거야. 다만 소년은 외면한 채 얼굴을 붉히겠지. 한나는 상처를 치료할 때에야 자기가 속았음을 알게 되고 이 편이 낫겠지? 아름다움도 효과도 훨씬 적어. 독자들은 너무 쉽게 그들의 얘길 믿고 속마음을 털어놓은 한나를 수치스럽다고 생각할 거야. 그렇지만 이 편이 진실성이 있어. 우린 영웅이 아니잖아? 가끔 영웅적인 척할 뿐이지. 우린 적당히 비겁하고 조금은 약삭빠르고 이기적일 뿐 위대할 순 없어. 난 바로 그걸 말하고 싶었어. 난 모든 것이 다 복잡하고 혼란한데도 그것을 단순하게 하는 인간이 싫어."

니나는 일어나 앉아 창 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해가 높이 솟아 있었다.

"어머, 이걸 어째. 언닌 날 너무 오래 자게 내버려 두었군."

"왜 급한 일이라도 있니?"

"아니, 그렇진 않아."

"아주 잘 자던데"

"그래, 오늘처럼 깊이 잠들긴 처음이야. 하지만 오늘 안에 이 소설을 정리해야 되거든."

"이렇게 을씨년스러운 방에서? 나 같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거야."

"나도 전엔 그랬어. 꼭 책상 앞에 앉아야 되고 저녁 때 커튼을 다 내린 뒤에라야 일할 수 있었지.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그저 아무데서나, 대개는 창가에 있는 작은 책상에서, 밖이 어두울 때에는 커튼을 젖혀 놓은 채 쓸 수가 있게 됐어. 닫혀있는 건 질색이야. 밖이 보고 싶어. 높은 지붕이나 전차선, 소방용 사다리 같은 그런 게 보고 싶어,"

니나는 힐끗 나를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언닌 저기 검은 굴뚝을 볼 때마다 얼마나 기분이 언짢아지는지 모를 거야. 특히 비가 올 때 광고 포스터가 찢긴 벽을 볼 땐 더욱."

 

그럭저럭 정오가 되어 우린 점심 겸 아침을 먹었다.

"네가 한나였지? 정말은 어떻게 됐니?"

식사를 하며 내가 물었다.

"내가 나중에 얘기한 대로지 뭐"

"난 네가 갇혀있는 걸 몰랐어. 왜 그랬니?"

", 그건 지나간 일일 뿐이야. 난 과거는 생각하기 싫어. 그런데 언니라면 그를 도와주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난 그 뒤에 자주 자문해 봤어. 그게 정당했는지 어땠는지를. 그때 한순간 난 자신이 없었어. '그저 눈앞에서 죽어라, 내가 즐겁도록' 라는 생각을 했어. 그를 죽도록 내버려 두거나 그를 단박에 죽여 버린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하는 게 궁금했었지"

"니나!"

나는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녀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냉정하면서도 야릇한 표정 때문이었다. 그 표정에는 어떤 흥미로움마저 떠올랐는데, 나는 그 표정에서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니나는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차분히 계속했다.

"그걸 알아야 해. 그렇지만 난 오해 전부터 악한 일을 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 얼굴은 하지 마. 악한 일은 수지가 안 맞거든. 지극히 비생산적이지."

니나는 내가 이해하건 말건 그저 지껄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때까지도 니나를 몰랐다. 니나는 설거지를 시작했고 나는 방을 치웠다. 내가 말했다.

"넌 인간이 선악의 어지러운 혼돈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걸 믿지 않니? 넌 그걸 주장했잖아."

"그랬지"

니나는 설거지물이 든 물통을 들고 나가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시 들어오면서 계속했다.

"아마 성자들은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들 평범한 인간은....."

"그렇다면 우리에겐 자신과 타인에 대한 불신만이 남는 거 아니니?"

"과장은 내 전용물인 줄 알았는데 언니도 심각한데"

니나는 조금 웃으며 말했다.

"난 우리가 어디서도 안전하다고 믿어선 안 된다고 하고 싶었어. 모든 짐승들은 그렇게 살고 있어, 그 한가운데 살면서 새끼를 키우고 있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들을 봐도 그래. 언제나 공포에 떨면서 달아날 준비를 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온 세상이 그것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만 그들은 노래를 부르지"

문득 니나는 계면쩍은 웃음을 띠었다.

"언닌 내게 말을 시키는 나쁜 버릇이 있군. 그것도 평소라면 내가 하지 않았을 말을"

니나는 다시 심각해져서 언니의 질문에 대답이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래, 하지만 그건 너처럼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야"

"용기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낼 수 있는 거야."

니나는 약간 화난 어조로 말했다. 이번엔 내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젠 그거다. 아무나 용기를 낼 능력이 없는 것 말야."

하지만 니나는 내 말을 납득하지 못한 듯했다. 나는 니나의 본질의 강인함이 천성적으로 더 약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성품에서 오는 것임을 알았다. 니나는 스스로에게는 물론 타인에게도 극단을 원했다. 나는 니나와 함께 사는 일이 수월하지 않음을 느꼈다. 그래도 나는 내 질문을 고집해 보았다.

"그렇다면 넌 우정도 안 믿는구나. 그리고 사랑도."

니나는 뜻밖이란 표정이 되었다.

"지금 막 얘길 했잖아. 우린 위험 사이에서 특히 사랑에 있어서는 더욱 주의 깊게 말없이 살고 있다고"

니나는 목소리를 아주 낮추어 속삭이듯 덧붙였다. 아주 재빠른 어조였다.

 

문득 나는 몇십 년 전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우리는 침실을 같이 썼는데 어느 날 밤 문득 눈을 뜬 니나가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한겨울이었고 방 안은 매우 추웠으나 우린 1년 내내 창을 열고 자야했다. 그때 니나는 아홉 살이었을 것이다. 그 후 난 곧 결혼했었다.

 

거리에서 흘러들어온 불빛이 니나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지금과 꼭 닮은 표정이었다. 모든 정신이 집중된 얼굴이었다. 힘찬 빛을 지니고 있었고 어떤 상상에 완전히 긴장된 열정적인 헌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말했다.

"감기 들겠다, 뭘 하고 있니? 기도해?"

니나는 나를 극히 침착하게 쳐다보더니 바로 지금처럼 표정을 거두고 말했다.

"내버려 둬. 난 이해할 수 있게 되어야 하니까"

"?"

"전부 다.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따뜻한 침대에서 나와 찬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가서 돋친 나무를 들고, 나쁜 개한테 가고, 매를 잡아내고, 소금을 삼키고, 뭐든 다 할 수 있어야 해."

그때 니나가 더 늘어놓은 말은 잊어버렸지만 그 광경만은 확실하게 기억한다. 나는 의지를 굳히려고 안간힘을 쓰는 반은 금욕과 고행의 성자 같고 반은 인도 여자 같은 니나의 모습을 본다.그녀가 너무 강한 의지를 가진 것이 아마 가끔씩 자신에게 손해가 됐을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운명에 대해 좀 더 인내와 연민을 지녔더라면 나았으리라.

그렇지만 이제 그녀가 영국으로 가고 그 남자를 포기하는 것은 이미 어쩔 수 없는 확고한 결단이었다. 나는 그 결단이 너무 단호하고 확실한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그 결단 속에는 일종의 위험스러운 폭력이 있었다. 니나는 운명을 앞지른 것이다. 인생을 그처럼 깊이 이해하고 내게 방금 말한 것처럼 조심스럽게 조용하게 사는 방법을 알고 있는 니나가 그런 잘못을 범하는 건 모순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니나는 창가로 다가가더니 밖이 너무 시끄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한대의 자동차가 지나갔고 어디선가 개가 짖었으며 뜰에서 새가 울었을 뿐, 조용한 거리였다.

"난 이 도시와 거리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이런 감정은 처음이야. 언닌 지금까지 애착을 갖고 있던 무엇이 모두 아주 지겨워진 일이 없는지 모르겠어."

니나는 계속 말했다.

"난 하루도 더 참을 수가 없어졌어. 사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것이 예전과 달라 보이고 혐오스러워지고 쓸쓸하고 적의가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거야. 떠날 때가 온 거지, 일순간도 더 머뭇거릴 필요가 없어. 무의식중에 우리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끌어낸 거야. 그것들은 스스로 살고 있기보다는 우리가 그들은 보니까 사는 거야."

니나는 창문을 닫았다.

"내가 떠나기도 전에 그 모든 것은 이미 나를 버렸어,"

그녀는 잠자코 반쯤 남은 위스키병을 들고 와 내게 한 잔 권했다. 내가 고개를 흔들자 그녀는 자기가 마셔버렸다. 그녀는 병을 다시 닫아 제자리로 가져가며 말했다.

"난 괜찮아. 누가 나를 떠날 때에는 오히려 강렬한 만족감을 느끼는 편이지, 폭탄이 우리 집을 때려 집이 불탈 때 난 길에 서서 바라보았어. 모두들 악을 쓰고 울부짖고 했는데 난 그렇게 서서 뜻밖의 감정을 맛보고 있었어. 그건 좀 특이한 환희 같은 거였어. 그렇다고 파괴에 관한 도착적이고 광적인 환희는 아니었어. 그러기엔 너무 지독했지. 교수대에 오르는 사형수의 비틀린 웃음은 더욱 아니었고 이웃집 부부는 겨우 건져낸 트렁크 위에 앉아 술을 마시며 농담을 했지. 하지만 내가 느낀 감정은 그런 것도 아니었어. 어떤 냉담이나 영웅주의는 아니었고 뭐랄까 단순히 생에서 짐 하나가 덜어진 것이 기뻤던 거야."

문득 니나는 의심에 찬 눈으로 나를 보았다.

"언닌 내가 난폭하고 너무 광적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언닌 그걸 이해해야 돼. 내게는 그게 중요해. 지인이나 친구가 나를 버리거나 죽거나 할 때면 난 늘 그런 종류의 기쁨을 느껴. 난 마치 이별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인 것 같아. 이별과 단순화를 위해 만들어진 인간! 언니가 내 말의 뜻을 이해했으면 해. 난 아무것도 없는 빈 방과 역 대합실같이 사람을 붙잡아 매지 않는 것이면 뭐든지 좋아. 난 방해받는 청교도지., 집사이기도 하고."

"정반대로 주장할 수도 있어."

내가 말했다.

"그래, 확실히. 아마 반대가 옳을 거야. 언니는 내 얘기를 하나도 심각하게 들을 건 없어. 일기는 어디까지 읽었지?"

니나가 그것을 찾는 동안 나는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벌로 장난감을 빼앗기면 무섭게 소리를 지르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니나는 몇 년 후 똑같은 벌을 일종의 단호한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니나가 일곱 살 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니나는 누구보다도 그 할머니를 사랑했었다. 장례식 날 니나는 무덤 곁에 서서 꼼작도 않고 있었다. 모두들 울었으나 그녀는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식이 끝나자 니나의 손목을 잡고 흙을 덮지 않은 무덤으로 이끌었다.

"할머니는 이곳에 누워 계시고 너와는 이제 영영 만날 수 없단다. 슬프지 않니?"

"아니, 난 조금도 슬프지 않아."

니나는 표정없이 큰소리로 말했다. 친척들은 놀란 표정으로 그 애를 보았고 어머니는 남부끄럽다며 그 애를 무덤에서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서 몇 차례나 뺨을 때렸다.

친척들은 모두 니나가 잔인하고 가혹한 인간이 될 거라고 수군거렸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니나가 일기에서 아까 읽다 만 곳을 찾아냈다.

 

 

5.생과 용기

 

1933316

나는 오늘 브라운 박사를 만나 니나가 이곳에 왔었다는 것을 알았다. 브라운 박사한테 두 번이나 진찰을 받았으며 음성 반응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니나에 관해 뭐든 궁금했는데 그가 오늘 나를 만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내가 니나를 알고 있었는가와, 그녀가 정말 상점의 점원인가를 궁금해 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브라운은 이런 내게 의아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내게 심문하는 것 같은 시선을 던졌는데 내가 뭔가 감추고 있다고 느낀 게 분명했다.

그는 니나가 아주 총명해 보이며 교육의 가능성을 더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난 모른 척하며 약간 날카롭게 어떤 가능성을 말하는 거냐고 물었다. 브라운은 단박에 눈치챌 수 있는 서투르게 과장된 무관심으로 니나가 의사의 조수로 적당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우린 끝내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며 작별했다. 그와의 대화에 나는 초조해 있었다. 그는 니나에게 꽤 심취해 있는 듯했는데 그는 결단성도 있고 미남이며 나보다 젊었다.

이 광증에서 날 해방시킬 방법은 없는가. 나는 니나에게만 특별히 강하고 순수하게 존재하는 그 성격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그녀의 용기와 생에의 영원한 호기심과 그 결단성만을.

나는 자신의 사랑을 의심해 보지만 이 자기 유지 본능의 교묘한 방법까지도 나를 구제할 순 없다. 아마 나는 거절을 당한, 남몰래 영원히 구애하는 기사로서 일생을 마치리라.

 

나는 이 사건의 낭만적인 면에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한다.

나는 자신을 모욕하고 있다.

한 남자에게 생의 방해가 되는 많은 죄악 중 특히 나쁜 것은 구토이다.

그것은 삼류 호텔 주방의 지독한 악취로 순간마다 생을 뚫고 스며든다.

그것으로 해서 온갖 사고와 감각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 된다.

쓰레기통에나 쑤셔 넣으면 어울리게......

 

이어 몹시 흥분한 상태에서 쓴 모양으로 커다랗게 휘갈겨 쓴 구절이 있었는데 앞부분은 새까맣게 지워져 있고 마지막 구절은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영원히 니나를 잃어버렸다.'

 

다음 기록은 그로부터 오랜 뒤의 날짜가 적혀 있고 고친 흔적이 많았다.

 

 

1933615

지금 내 생을 지배하고 있던 저주스런 원칙은 제 기능을 발휘 중이며 '우연'이 믿을 만한 그 조력자인 듯하다.

 

성령 강림절 전날인 토요일 새벽 3시경,

난 나우하임에서 걸려온 장거리 전화로 어머니의 심한 심장발작 소식을 들었다. 요양차 그곳에 가 있던 어머니는 다음날을 넘길 것 같지 않다는 거였다. 나는 그 길로 헬레네를 깨웠고 3시 반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시내를 달렸다. 청청한 새벽이었다. 만약 안개가 짙은 11월의 새벽이었거나 우리가 5분만 늦게 그린발츠 호텔 앞 광장에 닿았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내 시선이 광장의 비둘기한테라도 분산되었던들 나는 호텔현관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새벽의 여명과 음울한 가로등 불빛이 섞인 속에서 니나는 호텔 입구의 계단에 서 있었다. 어떤 남자와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내 호텔 안으로 사라졌다. 의심할 여지없이 니나였다. 난 헬레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도 니나를 보았음을 알았다. 그녀는 똑바로 앞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입술은 혐오로 굳게 다물어져 있고 콧날은 평소보다 더 날카롭고 오만에 차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니나를 욕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 주었다면 어떻게든 내가 니나를 변호해 줄 수도 있었는데.

헬레네의 이러한 특수한 조심성은 극히 냉혹한 것이라 다시 고칠 수 없는 치명적인 판결이었다. 차를 달리고 있는 동안 헬레네를 향한 분노가 고통을 마비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나는 말없이 헬레네를 비난했으며 그녀의 연애 사건까지 들추어가며 그녀의 도덕이 거부당한 소녀의 아집에 지나지 않는다고 극단으로 생각을 몰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딱히 그렇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에는 조금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힘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으며 얼마나 빨리 한계에 부딪치는지 자신을 한 번도 시험해 보지 않은 사람에겐 엄격한 척도를 내리기가 수월하다. 나는 헬레네의 목석같고 도덕가인 척하며 혼자만 정당한 척하는 정의감을 비난했다.

헬레네에게 곧 그런 일이 일어나 웃음거리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순간 지극히 희미하나마 약간의 정의의 감정이 되살아나 헬레네는 다만 나로 인해 니나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라고 고쳐 생각했다. 헬레네는 말이 없고 오만하지만 몰래 나를 사랑하고 있다. 헬레네는 유일하게 진짜 나를 사랑한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나를 괴롭히는 니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녀는 내가 그처럼 탈선이 가능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용서할 수 없었으리라.

나는 탈선이라고 말했지만 과연 그랬을까?

호텔 앞의 광경은 단순히 우발적이고 대수롭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 나는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할 순 없었다. 니나는 참혹한 시골의 구멍가게에서 그만 완전히 지친 것이다. 그리하여 그처럼 길었던 추방 끝에 생을 찾았고 그것을 제공되는 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 결핵 환자라던 신학도와도 그런 지점에 놓여 있는 것일 게다. 그것 역시 느릿느릿 진행된 탈선이 아니었을까? 도시가 등 뒤로 밀리고 탁 트인 전원이 펼쳐졌을 때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모든 사려가 밀려가 버렸다. 아침은 무척 아름다웠으며 평소 같으면 내가 가장 아끼던 시간이었다. 인간에게 호의를 갖지 않는 유리처럼 차갑고 엄격한 해뜨기 직전의 휴식 시간이었다. 자연의 숨쉬기를 멈춘, 어떤 소리도 생기도 전해지지 않는 그런 시간, 영원에 속하는 무섭기까지 한 순간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난생 처음 그 시간에 적의를 느꼈다. 성령 강림절의 전원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헬레네가 옆에 있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그러나 다행히 새벽의 피로와 해가 뜨자 갑자기 늘어난 자전거와 자동차와 통행인들로 인해 내 고통은 스러질 수 있었다. 헬레네가 따끈한 커피를 따라 주었다. 나는 자신이나 다른 이에게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 둔중한 피로 속에 잠기고 싶었으나 깨어 있기 위해 커피를 마셨다. 얼마 후 헬레네가 차를 세우고 뭘 좀 먹지 않겠느냐고 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헬레네는 다시 묻지 않는 대신 때때로 속력을 너무 낸다는 주의를 주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을 찾아내려 했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을 위해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그런 절대적인 면이 니나와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로부터 몇 주가 흐른 지금 그녀가 다가올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이 내게 몹시 고통스럽긴 하지만 니나를 그런 식으로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덜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령 강림절의 아침은 더할 수 없이 강렬하고 눈부셨으며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모든 사람이 나처럼 돌아다니며 자연에 대한 무한한 환희와 즐거움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우하임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신 뒤였다. 나는 마취된 듯한 상태 속에서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렀다. 죽음에 따르는 방문객 접대와 상담, 물건을 사들이는 일 등으로 나는 니나를 잊었다. 관이 무덤 속에 놓여 졌을 때 내 의식은 혼돈을 가져왔다. 내가 장사 지내는 것은 바로 니나였다.

돌아오는 길은 날씨가 나빴다. 잿빛 젖은 안개가 들판을 덮었고 늪과 묘지에는 누런 꽃잎이 흐린 물속에 떠 있었으며 길은 회색 속에서 검은 금속처럼 빛나고 있었다. 검은 상복차림의 헬레네의 슬픔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슬픔 때문에 나를 지독한 우울 속에 내버려 두었다. 몇 주가 흐른 지금까지도 그 우울은 나를 채우고 있다. 나는 영원히 니나를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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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버린 이 사태에 숨이 막힌다. 이틀 전 니나에게서 편지가 왔다. 내가 보낸 책에 대한 감사의 편지였다. 나는 출판사에 의뢰해서 열대 지방에서의 내 의학적 활동에 대해 쓴 책을 보냈었다. 니나는 왜 내가 그녀에게 그 때의 일이나 '위대한 업적'에 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느냐고 항의하고 있었다. 편지 속에 '업적' 이란 말이 세 번이나 등장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나의 '업적'에 감동한 덕분에 그녀에 대한 나의 기회가 늘어나는 것은 확실했다. 마침 재판이 새로 나왔길래 그것을 니나에게 보냈었다. 이 말을 쓰면서도 니나를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과 이 변명 사이의 우스꽝스러운 당착에 나는 고소해하고 있다. 변명은 이제 그만두겠다. 내가 책을 보낸 것이 엄연한 사실인만큼 그리고 난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니나의 짤막한 편지는 언제 한번 자기를 방문해 주지 않겠느냐는 말로 끝나 있었다.

나는 당연히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기 직전이라 그 준비로 틈이 없다고 답장을 보냈어야 했을 것이다. 아니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일'로 미루어 그 편지를 찢어버리는 편이 훨씬 당연했으리라. 그러나 그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일' 에 앞서 나는 책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리고 대체 어떤 일이 있었단 말인가? 니나는 그 나이에 맞는 모험을 겪었을 뿐이지 않는가.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다. 이 모든 생각들은 모두 이론적인 것이다.

나는 헬레네가 외출 중일 때 편지를 받았는데 헬레네 몰래 달아나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조하게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그녀가 오자 드라이브나 함께 하지 않겠는가 하고 묻기까지 했다. 나는 그녀가 그날 밤 손님을 초대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초조하면서도 용기에 가득 찬 기분으로 떠났다.

아침부터 무더웠는데, 세상의 어떤 남자라도 수치스럽게 여길 일을 내가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인식했다. 니나의 부름을 마치 개가 여주인의 휘파람 소리를 따르듯 따른 것이다. 정오 무렵 벤하임에 닿을 수 있었다. 도시는 여전히 죽은 듯했고 창이란 창은 모두 닫혀 있었다. 통행인이라곤 없어서 모퉁이에서 경적을 울릴 필요마저 없었다. 분수는 물이 말라 버렸거나 아예 폐쇄되어 있었다. 나는 자동차를 자그마한 성당 뒤 손바닥만한 응달에 세워두었다.

나는 너무 무더워서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스러지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눈이 부셔서 어두운 지하실에라도 들어간 것처럼 휘청거렸다. 그리고 모습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정말 오셨군요 이 무더위 속을"

어둠에 익숙해지자 나는 니나가 책을 읽고 있었음을 알았다. 내 책이었다. 펼쳐져 있는 페이지에는 여백에 깨알 같은 메모가 잔뜩 들어왔다. 내 시선이 머무른 것을 알자 니나는 재빨리 책을 덮고 말았다.

"반시간만 있으면 문을 닫아도 돼요. 손님은 거의 다 오전에 다녀갔으니까요. 이 때쯤이면 벽돌 공장 노동자들이 담배를 사러 오죠."

니나는 부엌 겸 안방인 옆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변한 것은 없었다. 할머니는 그 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같이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고 얼굴과 손, 감고 있는 눈과 입술 위까지 파리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전보다 더욱 비대해진 할머니의 누렇게 기름진 몸이 의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수종증이 부쩍 심해진 게 분명하다. 오래갈 것 같지 않았다. 니나가 소다수 한 병을 가지고 왔을 때 나는 소리를 죽여 그 말을 했다.

"그래요?"

니나의 음성에는 안정감이 없었으나 할머니에게 던지는 시선에는 전 같은 혐오는 없었다.

"곧 해방되겠군. 니나"

나는 도전하듯 말했는데 니나는 지나치게 무감동한 표정으로 네, 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소다수를 잔에 따르며 덧붙였다.

"이젠 습관이 되었어요. 여러 면에서 이로운 곳이기도 하고요."

니나가 서둘러 밖으로 나간 뒤 나는 그 말의 뜻을 생각해 보았다. 할머니는 내가 있는 것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금 쿨룩거리는 기침이 아니었더라면 누구도 산 사람으로 보진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가 앉아 있는 의자 옆에는 파리 잡는 끈끈이 종이가 천장으로부터 늘어져 있었는데 파리의 시체로 새까맸다. 파리는 그 끈끈한 종이에 붙어 얼마 동안 절망적인 몸부림을 치다가 풀의 질긴 실에 얽혀 차츰 참담한 죽음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달콤한 풀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경계심보다 강한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먼저 붙어서 절망적으로 파닥이는 동료들이 그들에게 경고가 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시체의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갑자기 구토가 치밀어 벌떡 일어났다. 커튼이 쳐진 작은 창문 사이로 가게가 내다보였다. 니나는 노동자들에게 담배를 내어 준 뒤, 계산대에 몸을 굽히고 뭔가를 적고 있었다. 니나는 왜 나를 여기 앉아 있게 하고 내게 오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내게 이곳에서의 자기의 생활을 알리려고 한 것은 아닐는지? 나는 휑한 방과 서서히 침식해 가는 수종으로 부은 할머니와 작은 가게와 파리를 둘러보았다. 니나는 1년 가까이 이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내 도움을 거절하기 위해서인가? 아니, 그녀는 생이 자기에게 부여하는 모든 과제를 수행해 낼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이 유형지에서 니나는 불행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어떤 난관을 극복했을 때 불행해지는 건 아닐까?

니나는 얼굴을 내게로 돌렸으나 나를 보진 않았다. 덧문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니나가 들어왔다. 내게 있어서 니나가 손을 씻고 정갈하게 앞치마를 두르고 식탁을 차리는 것은 고통스러운 즐거움이었다. 니나의 동작은 날렵하고 익숙했는데 나는 무의식중에 헬레네와 비교해 보았다.

헬레네는 기계처럼 정확하게 일했는데 니나는 그보다 훨씬 가볍게 아무렇게나 움직였다. 생각은 다른 것에 가 있고 몸만이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절대적인 인내를 가지고 할머니에게 음식을 먹였다. 할머니는 반쯤 마비되어 입에 넣어 준 것을 거의 다시 밖으로 흘렸다. 니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작은 숟갈에 그것을 받아서 다시 푸르뎅뎅한 입술 사이로 밀어 넣곤 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저녁에 자동차로 산에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일요일을 아이프호반이나 아네트 아주머니 댁에서 보내자고 했다. 니나는 간단하게 못 간다고 했으나 나는 용기를 내어 전에도 가지 않았느냐고 말해 보았다. 나는 이내 내말을 후회했다. 니나는 그 불길했던 밤의 만추를 두려워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기우였다. 니나는 말했다.

"할머니를 혼자 놔 둘 수가 없어요. 내가 먹여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먹으려 하지 않아요. 듣지도 보지도 못하지만 내가 아니란 걸 다 알아요. 선생님이 해 보세요."

나는 니나가 하던 대로 해 보았으나 할머니는 곧 입술을 꼭 다물었고 눈을 감은 누렇고 통통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 보세요. 정말 이상해요. 사람이 그 생의 최후에 이런 어린애 같은 고집을 피운다는 게.

전 늙은 사람이 싫어요. 아니, 아주 극소수를 빼고는. 자주 시내에 나가 아주 늙은 노인들을 찾아요. 전 그들을 알아요."

니나는 약간 무안한 듯 덧붙였다.

"그것에 대해 뭔가 쓰고 있지요. 두 가지를, 하나는 심리학적 연구논문이지만 하나는 소설이에요. 그들과 교제하다 보면 스스로 인간이라는 게 혐오스러워져요."

니나는 계속 말했다.

"팔십이 넘은 나이에 악의에 차고 고집불통으로 일방통행이 되고 낯 뜨거워질 정도로 탐욕스러워진다면 대체 인간이란 뭔가요?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너무 지쳐 살아온 의미가 없다고 말해요. 전 늘 사람이 나이가 들면 착해진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늙는 것이 두렵지 않았어요. 이젠 달라요. 만약 저도 그렇게 된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 걸까요?"

"니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알 수 없지요. 어쨌든 제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걸 아셨지요?"

나는 그 말을 할 때 그녀가 진짜 이유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게 청소 좀 해야겠어요. 청소부가 없거든요"

나는 그녀가 그런 돈을 아껴야 할 정도로 절약해야 하는가 생각했으나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잠자코 서 있었다. 그러나 걸레를 짜고 빗자루를 다루는 그녀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내게 큰 고통이었다. 내 앞에서 그 일을 하는 니나에게 도전적인 빛은 없었다. 그녀는 자기의 유능을 과장하거나 연민을 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익숙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니나와 같은 인간이 어떻게 그런 일에 익숙해 질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그 동안 자신이 공부한 여러 권의 심리학 서적과 다른 책을 여럿 보여주었다.

그 중에는 지드, 콘래드, 스탕달의 소설이 몇 권 있었고 파스칼이 한 권,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한 권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싶었던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어떤 것으로도 매수할 수 없을 만큼 결벽하며 모든 인간에 대한 불신에 차 있다는 것이다. 내게 대해서도 역시 예외일 순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저녁때가 되어도 조금도 시원해지지 않아 우리는 니나가 그래도 시원한 공기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 언덕의 묘지를 산책했다. 그 곳 역시 여전히 열기에 찌들고 있었으나 조금은 시원한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낮은 쪽의 묘지 담 벽 위에 앉았다. 뒤에는 비석과 십자가가 있었고 앞에 끝없이 펼쳐진 들판은 음산한 먼지와 빛바랜 황혼 속에서 마치 사막처럼 보였다. 무덤들 위의 시든 장미에서는 자극적이면서도 불쾌한 마취약 냄새가 풍겨왔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단 둘이었다. 그 때 갑자기 시작된 귀뚜라미 울음은 끝내 멎을 줄을 몰랐다. 마치 돈을 받고 기계적인 인내로 연주하는 카바레 악사들처럼 나의 의식을 빼앗아야 보수를 받게 되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열심히 날개를 비벼댔다.

나는 담에서 돌을 긁어내어 마른 들판을 행해 던졌다. 무의미한 행동이었으며 어떤 효과도 없었다. 니나는 조그맣게 웃었는데 그녀로선 그런 웃음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그녀는 내 팔을 꽉 잡았다. 그리고는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선생님이 절 사랑하시는 거 잘 알아요. 저도 지금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거짓말이 될 거예요. 하지만 선생님은 제가 증오를 보내는 유일한 분이예요.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제가 선생님을 사랑하도 있는 건 분명할 거예요."

니나는 문득 맥 풀린 듯 내 팔을 놓더니 크게 말했다.

"키스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지나치게 당혹한 나는 성급하게 건성으로 키스했다. 니나는

"아니에요. 그렇게 말고요."

라고 소리쳤다. 동시에 입술이 터져 갈라진 내 입속에 그녀의 입술과 이빨이 부딪쳤다.

그녀는 뜨거웠고 먼지투성이였다. 나는 문득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을 생각해냈다. 그녀는 그 때 환자였고 기절 직전이었다. 나는 갑자기 거친 그녀가 두려워졌다.

그것은 사랑도 아니었고 욕망은 더더욱 아니었다. 지나치게 돌발적이고 과장된 무엇이었는데 나는 그게 무엇이든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거절할 순 더욱 없었다. 나는 그녀를 팔에 안고 있었다. 그녀는 전율했고 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키스에 답하면서도 자신을 철저히 억제해야 했다. 나는 그녀가 그녀의 도취를 악용한다면 나를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내가 지금 그녀를 이 와삭거리는 풀밭에 누이지 않았다는 것 역시 용서하지 않으리라.

가까이 온 번갯불에 니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야성적이고 암울하고 표독스럽기까지 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다만 시험해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을 함께 시험하고 있을 뿐이다. 마침내 니나는 내 품을 빠져 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감동하게 말했다.

"곧 비가 오겠네요."

돌아오는 길에 니나는 전에 없이 일상의 얘기를 열심히 늘어놓기까지 했다. 우리는 소나기가 내리기 직전에 집에 올 수 있었는데 니나의 표정이 너무 조용해서 묘지에서의 일이 단순한 나의 환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니나는 옆집에서 한 부인을 데려왔다. 그 부인은 매일 밤 몹시 무거워진 할머니를 침대에 누이는 것을 도와주는 모양이었다.

니나는 이웃집 여자가 가고 나자 문을 잠갔다.

"곧 비가 올 텐데, 지금은 갈 수 없어요."

나는 자동차는 방수가 돼 있으니 괜찮다고 했으나 그녀는 고집스럽게 자기 의견을 말했다.

나는 그녀가 홍차를 끓여주며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는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워 혼란에 빠져 버렸다. 번개가 요란했으나 비는 잠깐 오고 그쳤다. 우린 밖으로 나갔다. 땅은 여전히 먼지가 풀썩거렸다. 니나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더니 빠른 어조로 말했다.

"제 부탁을 들어 주시겠어요?"

"뭔데?"

그녀는 나를 다시 집 안으로 데리고 가서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소곤거리듯 말했다.

"오늘 밤 누구를 좀 데려다 주실 수 있겠어요?"

그러마고 대답은 했으나 나는 그녀의 부탁이 대수롭지 않은 데 실망했으며 한편 그녀의 지나치게 심각한 태도가 의아했다.

"선생님 동료 중 한분이세요. 국경으로 가야 하는데 선생님 차로 가면 훨씬 빠를 것 같기에......"

나는 그제서야 이해했다.

"니나,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 알고 있는 거야?"

니나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어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에요. 브라운 박사가 처음이었지요. 6주 전에."

"그럼 브라운은 탐험대를 따라 티베트에 간 게 아니었군!"

내가 외치자 그녀는 웃었다.

"전 그가 스위스에 도착해 안전하길 빌고 있어요. 오늘은 페타센이에요. 이미 오래 전부터 의심을 받아 오다가 드디어 경고를 받았고 이제는 달아날 때가 된 거예요. 선생님도 알고 계실 제 친구가 당에서 비서로 있어요, 가끔씩 다음 차례가 누군지 알아내 주지요. 이젠 제가 왜 여길 떠나려고 서두르지 않는지 아시겠지요? 그리고 식모도 청소부도 두지 않는 이유를요"

나는 니나를 보았다. 방종한 마녀의 얼굴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니나는 얼마나 많은 얼굴을 갖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나를 공범으로 만들어 스스로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을 한 것인가. 그래서 내게 편지를 하고. 하지만 증오 운운한 얘기는? 거기엔 도대체 어떤 의미가 내재 되어 있고 또한 조금 전의 발작적인 몸부림도 순수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나는 여자와의 경험이 너무 부족한 자신이 짜증스러웠다,

니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배우가 될 수 있는 부류의 여자일지도 모른다. 나의 이런 생각이 표정에 그대로 나타났던지 니나는.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시죠?"

라고 하면서 경멸을 담은 어조로 덧붙였다.

"선생님은 이 유희에 끼어들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전 이 일을 꺼려하는 사람의 기분을 압니다."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연스럽고 다정하게 내 손을 잡았다.

"죄송해요, 선생님은 겁을 내시는 게 아닌데. 선생님은 생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시잖아요."

니나는 묘지의 마녀 같은 사나움보다도 부드러움으로 나를 감쌌는데, 나는 그 부드러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선생님 책은 마음에 썩 들었어요. 선생님은 그 어려운 환경에서 훌륭한 업적들을 이룩하셨어요."

나는 그 '업적' 이란 말이 참을 수 없었다.

"니나, 그 업적이 그렇게 소중해 보이나?"

니나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니나에게서 나의 '업적'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없애고 싶었다.

나는 말했다.

"좋아, 2년 동안 열대에 있으면서 수백 명의 원주민을 치료해 주고 연구를 했어. 책에 쓰인 것 이상으로 일했지. 무보수로 일했고 그 책과 다른 몇 권의 책의 인세도 그 곳에 기부했어. 그런데 내가 왜 거기를 가고 그 모든 일을 했는지 알아? 그건 단순한 야망과 호기심, 그리고 권태와 죽는 것에 대한 단순한 염증 때문이었어. 그 곳에서도 권태를 이기지 못하자 난 아버지가 남겨 준 유산의 일부로 세계를 여행했지. 이게 바로 그 '업적'의 전부야"

니나는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다가 부드럽고 따스하게 내게 키스했다. 나는 그녀를 옆으로 밀어내며 조용히 말했다.

"니나, 당신은 여태까지 날 너무 나쁘게 보더니 이젠 그 반대의 극단에 빠지는군, 과대평가는 곤란해."

니나는 손으로 내 입을 가리려 했으나 나는 그 손을 꽉 붙잡았다. 나는 끝까지 말할 필요가 있었다.

"니나는 있는 그대로 날 봐야 해. 열대 지방에서 2년을 보내고 나니 지겨운 생각이 들더군. 계약은 3년이었지만 난 떠나지 못해 안달이었고 마침내 병에 걸리는 데 성공했지. 사실은 바로 이렇게 된 거야. 니나. 난 아직 누구에게도 이런 얘길 하진 않았어. 난 어딜 가나 인내하지 못하고 게으르며 회의에 싸여 살고 있어. 니나는 그런 날 제대로 볼 필요가 있어. 난 극단적인 것을 요구하는 결단에 있어서는 비겁한 인간이야. 언젠가도 말했지만 나 같은 인간은 태어나지 않았던 게 훨씬 나았을 거야."

니나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찬 키스를 퍼부었다. 일종의 분노와 애정이 섞여있는 키스를.

그것은 나의 책을 읽었거나 아니면 나의 정치적 협력을 알게 됨으로써, 혹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신비한 체험을 통해 그녀의 내면에 이루어진 나의 모습을 내가 무자비하게 파괴해 버리려는 것으로 인해 생겨난 분노 같았다. 어쩌면 그녀도 나를 사랑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내가 아닌 그녀의 환상의 나일뿐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그녀를 혼란 속에 빠뜨리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나로 인해 안이하고 위안적인 환상을 경멸하는 고고한 습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니나는 감미롭고 본능적인 따뜻함으로 내게 육박해왔고 나는 모든 저항력을 잃고 나른한 무기력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나는 전적으로 내게 향하는 것이 아닌 애정이나 어떤 감정도 수용하기 싫었다. 브라운이 니나에게 왔었다는 사실부터가 불쾌했다. 물론 무신경하게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또다시 니나를 조용히 내 곁에서 밀어냈다. 니나는 냉정함, 혹은 애정 어린 인내라고도 할 수 있는 태도로 잠자코 내 거부를 받아들였다.

니나는 잠시 후 희미하게 들려오는 야간열차의 기적소리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후 15분쯤 나는 완전히 니나의 존재 밖에 있었다. 니나는 문득 생각난 듯 위층 계단을 올라가 미리 마련해 두었던 음식을 가져왔다. 그리고는 물을 알코올 램프 위에 올려놓고 커피를 끓였다.

물이 끓는 동안 그녀는 재빨리 식탁을 차렸다. 재빠르고 침착하게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가끔 행한 적이 있는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뒷문으로 달려 나갔다. 나는 집으로 가까이 오는 발소리나 대문 열리는 소리 같은 것도 듣지 못했으며 모든 일은 그처럼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

페타센은 능숙하게 변장을 하고 있어 나는 거의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사냥꾼 차림이었는데 아마 평생 한 번도 쏘아보지 못했을 엽총을 메고 있었다. 니나가 밀렵자로 몰릴 우려가 있다고 하자 그는 용의주도하게 수렵증명서까지 내보였다. 페타센과 나는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와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아하게 생각지 않았을 뿐더러 국경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내 제안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니나는 뜨겁고 진한 커피와 음식을 거의 강제로 먹이다시피 했다. 음식을 먹고 나자 출발을 재촉했다. 그로부터 반시간쯤 뒤에 나는 페타센을 국경 근처에 내려주었다.

그 때 그는 물었다.

"당신은 그냥 머물러 있을 작정이십니까?"

멀리서 자갈 위를 걷는 것 같은 수상한 소리가 들려와 얘긴 그것으로 중단되었고 그는 어둠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나는 난생 처음 본능적이고 지극히 동물적인 공포를 느끼면서 차를 몰았다. 그 공포는 페타센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으나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없었다. 나는 그것에 놀라고 있었다. 나는 자신이 생명은 별로 중히 여기지 않고 생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믿어 왔는데 지금 공포를 느낀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이 같은 통찰이 나로 하여금 생각에 잠기게 했다. 그리고 페타센이 얘기하지도 바라지도 않았으면서 마지막 말이 되고 만, '당신은 그냥 여기 머물러 있을 작정입니까?' 라는 말을 되풀이해서 생각해 보았다.

달아날 생각이 내게는 없었다. 나는 비정치적이었고 해독을 끼치지 않는 한낱 학자에 불과했다. 머물겠다는 내 뜻은 보다 굳어졌다. 니나가 나를 필요로 하는 한. 니나와 함께 어떤 위험하고도 비밀스런 과제를 해낸다는 일은 나를 행복하게 했고 나의 생에 순간적이나마 의미를 부여했다.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이 내게 요구되고 어떤 식으로 그것이 전달될지 혹은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에 관한 모든 것에 조금은 궁금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니나의 돌변한 행동과 나의 '업적'에 관한 일시적이고 변덕스러운 기분은 언제 식어 버릴지 모르는 열광인지, 아니면 영리하고 지극히 타산적인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1933814일 새벽 4

국경에서의 두 번째 일을 끝내고 왔다. 어제 오후 니나는 약간 달라진 글씨체로 당신을 다시 한 번 우리의 모임에 초대하고 싶다는 내용의 엽서를 보내 왔다. 나는 그 길로 W로 갔다.

엽서가 오고 뒤이어 한 낯모르는 청년이 찾아와 잠자코 봉투를 내밀고는 가 버렸다. 봉투에는 여권이 두 장 들어 있었다. 나는 일이 너무나 소리 없이 빨리 진행되는 데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긴 쇠사슬에서 고리 하나의 역할이라도 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나는 기쁨에 가득 찬 유쾌한 기분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낯익은 W로 길을 달렸다. 니나는 다정하면서도 따뜻함이 없는 어딘가 조급한 표정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서둘러 한 생면부지의 사내를 옆에 앉히고 국경으로 차를 몰았다. 그는 내가 가져간 여권 중 하나를 받아들였다. 하나는 만약의 경우 나를 위해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나는 3시경 집으로 왔다. 잠이 오질 않았다. 일어나 앉아 몇 줄의 글을 쓰고 날이 밝을 때까지 책을 읽기로 했다. 물론 니나의 그 조급하고 쌀쌀한 태도에 관해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 없었고 결국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가까이한 것이 숭고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무의식적인 타산이라 하여도, 나는 절망할 수 없었다. 다만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평소 내가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을 볼 줄 아는 특이한 내 능력이 니나의 경우에만은 작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본질 안에 숨겨져 있는 마녀적이고 화산 같은 기질은 확실히 나를 당혹케 했는데 어쩌면 나는 그녀를 전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날이 밝자 나는 창가로 가서 아침 이슬 냄새를 맡았다. 밤을 꼬박 밝혔는데도 평소보다 더욱 상쾌하고 행복하기까지 한 기분이었다. 행복이란 내게 있어 순간적이나마 내 생이 완전히 무의미하지만은 않다는 믿음을 스스로 지닐 수 있는 것을 뜻한다. 물론 수많은 체험이 내게 경고하지만 암울한 배후가 나와 어떤 상관이 있단 말인가.

 

1933102

거의 한 주일 동안에 우리는 열 사람을 국경에 데려다 주었다. 나는 '우리'라고 했지만 누가 그 '우리' 인지는 물론 알지 못한다. 매번 그 말 없는 청년이 내게 전갈을 하면 나는 W로 가서 안면이 있거나 아니면 생면부지의 사람을 국경 근처에 내려 주곤 한 것이다.

니나와는 한 번도 둘만이 있진 못했다. 그녀는 개인적인 생활을 지나고 있지 않은 것 같았고 그것을 스스로 당연하게 여기는 듯했다. 나흘 전 그녀는 이것이 나의 마지막 여행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경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와 그녀는 이 사건에서 제외하기로 되었다는 것이다.

니나는 조용하고 창백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분간 제게 오지 마세요. 위험하지 않게 제가 찾아뵙겠어요. 먼저 국경으로 데려다 준 그들은 수용소를 탈주해 왔기 때문에 그들과 우리를 수색 중에 있어요. 학기 시작까지 여행을 떠나 부재증명을 만들어 놓으세요. 그리고 누구든 나를 아느냐고 하거든 모른다고 하셔야 돼요. 그럼 나는 모든 걸 부인하고 놈들이 내 말을 믿어 주기를 바라야겠지요."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럼 어쩔 수 없지요."

나는 같이 떠나자고 했다. 니나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떠나면 여기 있는 모든 것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했다. 나는 놈들이 강제로 그녀를 끌어가게 된다 해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기는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했다.

"아니, 마찬가지일 순 없지요."

조용히 말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의아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니나를 이해 못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 혼자 안전한 곳으로 가고 그녀를 위험 속에다 놓아두는 것이 내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리고 싶었을 뿐이다. 니나는 나중에는 차갑게 그렇다면 나도 시내에 있으라고 했다. 나는 그러마고 했고 그녀는 자기를 아는 체하거나 편지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는 돌아섰다.

그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나는 어쩌면 그녀를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른다. 매국노는 즉결처분을 받게 돼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본 니나의 얼굴을 영원히 기억하리라. 그 표정엔 조금의 두려움이나 불안도 없었다. 단지 지극히 창백하고 눈에는 삶과 죽음이 동시에 격양되는 감정을 의미하는 젊음의 도전적인 대담성이 담겨져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지금 이 도시에 주저앉아 있다.

나는 가끔씩 한밤중이나 새벽에 공포로 몸을 떤다. 어둠 속을 걷는 발소리, 자동차의 경적소리,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 이런 것들이 내 이마에서 땀을 짜낸다.

나는 죽음보다도 국립경찰과의 만남, 정신적인 적과의 만남이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니나는? 그녀는 완전히 혼자이다. 위험 속에 혼자 남아 함께 두려움을 얘기할 사람도 없이 동그마니 남겨져 있는 것이다. 새벽녘의 이 참기 어려운 시간, 두려움에 관해 공동의 유대를 나눌 수 있는 그 누구도 없이 모든 피난처로부터 줄이 끊긴 채 외로움 속에 던져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찾아 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녀를 더 큰 궁지로 몰아넣을 것이 뻔했다. 나는 하루에도 수없이 벤하임까지 차를 몰고 가 무관하게 지나가는 사람처럼 니나의 가게에서 담배를 살 것을 작정하곤 했으나 나의 행동이 일일이 감시받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헬레네는 내가 여행을 그만두자 그것을 시작했을 때보다 더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벌써 나흘째 식사를 하지 않고 있음을 통고해 왔다. 나는 그것마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헬레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아 마음의 짐을 덜고 싶었다.

하지만 니나는 누구에게도 말하는 것을 금지했고 그녀가 그러지 않았더라도 나 역시 말하지는 않았으리라. 니나 또한 공포 속에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요즘은 낮이나 밤의 어느 순간 느끼게 되는 공포감이 때때로 인간에게 적절한 상태라는 느낌마저 든다. 그것은 무슨 특별한 생각은 아니었으나 내가 막상 부딪치고 나니 나의 생과 인간의 존재 전반에 걸쳐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중대한 인식이었다. 내게는 인간이 공포를 사랑하게 된다는 일이 가능한 것처럼 여겨진 것이다. 나는 병으로 누워 있는 어린 시절의 친구를 불쑥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의 방은 담배연기로 꽉 차 있었으나 그것에 섞여 다른 낯선 냄새가 있었다.

나는 마침내 그것이 거의 눈치 챌 수 없을 정도의 가스 냄새라는 것을 알았다. 친구는 재빨리 말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내가 새는 것을 발견해서 곧 고칠 것을 고집하자 그는 이상할 정도로 초조하게 제발 그대로 두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이 유독성의 냄새와 그의 곁을 맴돌고 있는 위험을 사랑하노라고 털어놓았다. 그것은 마약 같은, 혹은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향훈 같은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새는 곳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으며 사실은 새는 곳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는 한 번도 가스 중독에 걸린 적이 없었는데 그의 신체기관이 그것에 익숙해버린 까닭이었다.

 

1933103

이렇게 니나와 떨어져 사는 일은 견딜 수 없다. 나는 혹시나 그녀가 집에 왔을 때 내가 없을 것을 염려해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부질없는 짓인 줄은 안다. 그녀가 오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끈질기게 그녀의 방문이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1933105

니나에게 갔었다. 물론 니나는 그것을 모른다. 나는 기차를 타고 가다 두 정거장 전에서 내려 들길을 걸어 W로 내려갔다. 인적이라곤 없었고 비가 내렸다. 니나는 언제나처럼 가게에 있었다. 그녀는 사탕이 든 유리병과 커피 깡통과 피라미드형으로 쌓아 둔 구두약 뒤에 있었다.

나는 얼마간 비에 젖은 유리창 밖에 서 있었다.

그 곳까지 가서 그렇게 잠자코 돌아선다는 일이 쉽지는 않았으나 나는 곧 돌아서서 정처 없이 걸었다. 나중엔 길을 잃어 큰길에 나와 트럭을 얻어 타고 집까지 왔다.

옷은 흠뻑 젖어 있었고 신발은 진흙투성이였으며 옷에는 온통 흙탕물이 튀어 있었고 완전히 지쳐 있었다. 그러나 명랑했다. 그것은 헬레네의 시선이 말해 주는 것처럼 지극히 점잖지 못한 상태였다. 어쨌든 니나는 살아있고 아직 그 곳에서 사탕과 담배를 팔고 있다. 나는 어서 위험이 지나가 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19331012

여름학기 준비를 하면서도 어떤 즐거움도 없었고 하루에도 수백 번씩 절망하곤 했다.

 

19331016

내일 니나가 온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집도 팔렸다고 했다.

W는 니나의 기억 속에 악몽처럼 혹은 1년간의 외인부대 근무처럼 지독한 시절이면서도 좋은 교훈으로 남겨지리라. 니나는 전화에서 말한 것처럼 올 것이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이 도시에서 살 것이며 나는 대학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 나는 니나의 낮은 음성을 들으며 그냥 지나쳐준 위험에 감사했다. 나는 역으로 니나를 마중 갈 것이고 여기서 함께 차를 마실 것이다.

헬레네는 그러한 내 말에 어떤 과자를 굽느냐, 무엇을 제일 잘 먹느냐고 묻기까지 했는데 이것은 헬레네로서는 참으로 엄청난 자기극복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건 나로선 어쩔 수 없다. 니나가 전에 어떤 과실을 저질렀건 그것을 다 보상할 만한 일을 했다는 것을 헬레네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니나가 어떤 인간인가는 헬레네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이며 설령 헬레네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해도 나로서는 상관없는 일이다.

 

19331018

니나가 차를 마시러 와서 저녁 무렵까지 있었다. 그녀는 창백했고 전보다 더 여위었으며 피로로 지쳐보였다. 헬레네는 애써 자신을 억제하며 니나에게 인사를 하고 함께 차를 마시고 소도시에 대해 예의바르게 몇 마디 건네고는 곧 자리를 떴다.

니나는 묵묵히 있었는데 아주 부드러웠다. 니나는 잠시 후에 W에서 지낸 마지막 1주일에 관해 얘기했다. 내가 열심히 질문하는 것에 대답만 하는 식으로 담담하게 들려준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할머니는 106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나는 니나에게 언젠가 그녀가 죽는 것을 한번 보고 싶다고 한 일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이젠 본 셈이죠."

니나가 말했다.

"그저 종말일 뿐이었어요.

아름답지도 않고 추하지도 않은 그저 단순한 종말, 만약 제가 죽는다면 아마 종말은 아닐 거예요. 전 아직 완성도 없고 지금 지나치게 동요로 넘쳐있으니까요. 할머니는 2년 걸려서 돌아가셨어요. 처음엔 고목처럼 메말라 죽은 것 같았는데 별안간 부어오르더군요. 수종증 때문에 맥주통처럼 뚱뚱해졌지요. 아무리 물을 빼고 주사를 놓아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때도 보셨지만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어요. 게다가 반신불수가 되어 늘 대소변 위에 주저앉거나 누워있기가 일쑤였어요. 이웃집 부인이 없을 때에는 그대로 두지 않으면 안 되고 전 그 냄새와 모습에 견디기 어려웠어요. 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했을 때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마구 소리를 지르더군요.

결국 그대로 두는 수밖에 없었어요. 한번은 간호사를 두려고 했더니 식사를 거부하는 거예요, 혼수상태 속에서도 내가 시중을 들지 않으면 유언장을 바꾸어 쓰겠다고 하더군요. 그 후 일주일 동안은 무척 힘이 들더군요. 물론 처음 그곳에 갔을 땐 돈 때문이었지만 그처럼 오래 있었던 건 그래서만은 아니었거든요."

나는 니나가 머뭇거리는 것을 알고 계속 하라는 시선을 보냈다.

"처음에는 지독한 혐오감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끝내는 익숙해진다는 걸 이해하실지 모르겠어요. 아니 한 번도 거기에 익숙할 수는 없었어요.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였어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인간이 스스로를 잘 처리해 나갈 수만 있다면 견디지 못할 상태란 없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가게의 싸구려 잡화 냄새와 비누 냄새에 소름이 끼쳤어요. 특히 비누는 그 지독한 냄새 때문에 구토가 치밀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는 동안 전 가게의 그 음울한 냉기와 작은 질서 속에서 어떤 매력을 찾아냈어요. 죽어가는 할머니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느릿느릿 다가오는 죽음, 부어오르는 누런 살집, 그 섬뜩한 붕괴, 그리고 누구도 마음을 쓰지 않는 거의 해체된 몸의 고집과 자기주장 같은 것이 나를 매혹시켰어요. 소도시 역시 처음엔 혐오스러웠지만 차츰 흥미를 느끼게 되더군요. 기묘하고 욕심 많은 사람들, 하잘 것 없는 일에 허풍을 떠는 과장된 몸짓들, 그저 무심히 스쳐 가는 모습들 등이 나의 흥미를 끌었고 마침내 그 소도시는 현실이 아닌 기발하고 악의에 넘치는 꿈의 도시로 내게 비쳤어요. 그것에 관한 소설을 썼는데 잘 되진 못했어요. 전 아직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내가 소설을 보여 달라고 하자 니나는 간단하게 찢어 버렸다고 말했다.

"그 다음엔 죽음이 조급한 걸음으로 왔어요."

니나는 말했다.

"전 부엌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고 할머니는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지요. 저녁 무렵이었는데 전 할머니를 보며 생의 끔찍스러움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할머니의 오랜 옛날 사진을 봤는데 그 때는 귀여운 소녀였고 아름다운 신부였어요. 그런 할머니가 이제는 늙어 저렇듯 무섭고 추한 모습으로 냄새를 피우며 앉아 있구나, 하는 생각. 할머니는 거의 죽은 사람 같았고 저 외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완전히 외로웠던 거예요. 저 역시 상속이 목적이었고 오기로 거기서 버티고 있었으니까요. 그것이 끝막음이었어요. 전 오랫동안 할머니를 지켜보며 인간이 정신 속에서 자신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산다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가 하는 것을 난생 처음 느꼈어요. 할머니를 보고 있는 동안 문득 제 자신이 할머니처럼 그렇게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늙고 병들어 반쯤 죽은 상태로 말예요. 좋은 기분일 수가 없더군요. 문득 공포가 치밀어 뒷마당으로 뛰어나갔어요, 제가 심은 달리아와 국화가 피어 있더군요. 전 혼자 앉아 생각했어요. 내가 이런 식으로 중요한 인식과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외면하려 하다니.

'어서 다시 들어가 늙은 할머니와 네 자신을 보아라. 구토가 치밀어도 내게 해롭진 않을 거다. 그것은 생의 일부분이니까.'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다시 안으로 들어가 나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볼 수 있었어요. 할머니는 뭔가 확실히 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나로선 그게 뭔지 알 수 없었어요. 할머니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는데 그것은 그저 얼굴을 찡그린 것일 수도 있어요. 어쨌든 할머니는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보고 있는 듯했어요. 이윽고 천식이 발작하듯 숨이 멈추고 몸을 웅크렸다고 느끼자 죽음은 작업을 시작했어요. 주검은 그대로 썩기 시작해서 이틀 만에 매장했어요. 운명하기 직전의 몇 분은 정말 중요했어요. 할머니는 그 때 뭔가를 보았고 그것은 할머니의 생의 최후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어요. 인간이 그 마지막 순간까지 기만당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잖아요. 알 순 없지만 할머니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왜 우리는 그것을 그처럼 늦게서야 알게 되는 걸까요? 정말이지 이해하기 어려워요."

니나는 여기에서 문득 화제를 바꾸었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국경까지 데려다 준 둘 중 하나는 총살당했어요. 생존자가 알려 왔어요."

니나는 갑자기 일어나 팔로 내 몸을 감싸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이제까지 해 주신 모든 일에 관해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니나는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 총살당한 사람 때문인 줄로 생각했는데 그녀는 피로해서 운 것이었다. 유형지에서 보낸 2년은 초인간적인 인내를 필요로 했고 그것은 확실히 힘겨운 작업이었던 것이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수많은 생각이 나의 손을 마비시키려고 했다. 마침내 나는 그녀를 내 무릎에 앉혔다. 니나는 얌전히 내가 하는 대로 있었다. 니나는 그렇게 앉아 한참동안 흐느꼈다.

이윽고 그녀는 울음을 뚝 그치더니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쓱 훔치고는 무안한 듯 웃었다.

"결국 이런 꼴을 보였군요. 이렇게 눈물을 쏟다니."

"난 니나가 내 앞에서 운다는 일이 행복한데."

"아니, 아무 이유 없이 발작적으로 우는 여자를 본다는 것은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닐 거예요.

선생님은 우리를 많이 도와 주셨어요. 전에는 선생님이 그런 일을 하시리라곤 생각지 않았어요."

니나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선생님은 저를 위해 많은 일을 해 주실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순간 나는 무섭게 강한 사랑의 힘에 억눌려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니나, 무슨 일이든 하겠어. 당신을 위해서라면. 아직도 나와 사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나? 물론 나의 아내로서 말이야."

나중의 말은 거의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것이었다.

니나는 그 한마디로 인해 내가 이처럼 자세히 쓴 한 마디를 던졌다.

"아니, 이젠 어렵게 생각되지 않아요."

나는 난생 처음 생각이 따르지 않는 행위를 했다. 긴 키스였다. 자신의 내면에서도 그랬지만 니나에게서 저항을 느낄 수 없었다.

얼마 후 식탁을 차리러 온 헬레네는 우리의 유쾌한 모습을 보았다. 그날 밤 나는 학기 시작 전의 1주일을 아네트 아주머니 댁에서 보내자는 제안을 니나에게 했다. 니나는 승낙했다. 그것이 또 나를 감동시켰다. 그녀에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녀는 당분간은 어머니와 같이 있을 예정이나 곧 집을 팔면 어머니는 양로원으로 가고 자기는 학교 근처에 방을 얻을 계획이라고 했다. 그녀는 끝내 자유롭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의 입장에서 더 기다린다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으나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니나는 공부를 계속하고 내게 오고 싶을 때 오고 함께 여행하고 싶을 때 하고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시기가 되면 나와 결혼하면 되는 것이다. 헬레네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하겠다. 모레 나는 니나와 아네트 아주머니에게 갈 예정이다.

자정이다. 말할 수 없는 꿈결 같은 피로가 몰려온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긴장으로부터의 회복, 내 육신과 감각의 달콤한 분해와도 같은 피로이다. 인간은 확실히 행복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나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는 따위의 말을 다시는 입 밖에 내지 않겠다. 나는 내 생명을 니나의 손에서 받아들인다.

 

19331028

우리들이 공동으로 소유했던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나는 너무나 아름다운 완전한 날들을 체험한 덕분에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다. 나의 모든 경험과 생의 원칙으로 미루어 보아 이러한 날들이 반추나 지속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나를 전율케 한다. 나는 앞날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러한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만큼은 내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되리라.

나는 새로운 니나를 발견했다. 성숙한 여인인 니나를. 그녀의 태도는 부드럽고 조용했으며 내 말에 신중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가끔은 모든 일을 겪고 난 후의 여인들이나 지을 수 있는 표정으로 내 말을 듣기도 했다. 날씨는 우리 편이었고 니나는 건강을 되찾았다.

높은 산엔 첫눈이 남아 있었으나 골짜기는 한낮에는 꽤 따뜻해 정원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리에 푹 익은 산딸기를 따러 나서기도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내가 얼마나 오랜 세월 잊어버리고 있었던 일이 아니었던가.

전나무 아래의 눅눅한 이끼 냄새, 움푹 팬 길의 진흙 냄새, 맑은 하늘을 나는 새의 울음소리, 팽팽히 펼쳐져 있는 거미줄에 촘촘히 수놓인 이슬방울, 늪 위를 휩싸고 있는 파르스름한 안개, 정오 무렵 가볍게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소리, 꼼짝 않고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다람쥐의 맑은 눈, 숲길을 재빨리 굴러가는 고슴도치 등 이 모든 것은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다.

니나는 얼음장 같은 시냇물에 손을 담그고 손으로 물을 퍼 마시며 즐거워했는데 나는 그녀를 흉내 냈다. 그 물에서는 생의 냄새, 너무 오래 상실하고 있던 생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나는 유쾌했다. 니나가 좁은 산길을 걷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나는 그녀의 발랄한 걸음걸이와 내게 버섯이나 삵쾡이를 가리켜 주기 위해 재빠르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사랑했다.

또한 그녀의 검은 머리에 얹힌 꼿꼿한 전나무 잎들과 그녀의 치마에 휘감긴 거미줄을 사랑했다. 아네트 아주머니는 병으로 거의 온종일 누워 지냈는데 저녁때에만 우리를 만났다.

니나는 무언의 기쁨에 넘쳐 있었다. 그녀는 내게 팔을 감으며 말했다.

"빚을 다 갚고 조금이지만 은행에 예금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실 거예요. 3천 마르크나 되는데 아마 몇 년은 살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오늘 밤에야 니나에게 아내가 되어 주겠는가고 묻지 않은 것을 생각해냈다.

대체 이러한 안심의 저변은? 니나의 막연한 언질과 나의 열렬한 소망 이상은 아니지 않는가. 하나 그 날들만은 악령도 내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니나의 힘은 넓게 미쳤다. 밤에도 그랬다. 나는 니나와 벽을 사이에 두고 누워 꼬박 밤을 밝혔다. 새벽이 움터 오는 그 무섭도록 황홀한 시간, 나는 창가에 있는 침대에 누워 정원 너머로 저 멀리 차갑게 솟아 있는 눈 덮인 산과 어둠 속에 떠오르는 정원의 나무 숲, 그리고 가을의 빛깔이 깨어나는 것을 보았다. 우유배달부가 올 때마다 정원 문이 여닫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교육을 훌륭하게 받은 사람들이 집안에서 열심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하루를 시작하는 숱한 작은 소리를 들었다. 욕실에서 물 받는 소리, 주전자 올려놓는 소리, 층계를 조심조심 걷는 소리 등등.

니나가 눈을 뜬 것 같다. 곧 목욕을 할 테지. 나도 일어나야지. 나는 목욕을 하고 면도를 하고 옷입는 일이 유쾌하다. 전에는 왜 새날의 시작이 다만 권태와 슬픔뿐인 무자비한 톱니바퀴처럼 고통스러웠었는지. 나는 그때 생의 의미로 인해 회의하고 번민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 신과 성자에게 기도하고 싶다. 이 땅에 완전한 것은 없고 무상과 비애가 인간의 일상적 양식이라는 그들의 잔인한 법칙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고 싶다. 뒤늦은 행복에 나는 지금 전율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몇 시간 후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네트 아주머니의 침대 머리에서 작별을 고하고 테라스에서 점심을 들고 아직은 서리에 덮이지 않은 들국화와 작은 나무숲 사이의 마지막 장미 앞에서 이별의 깊은 호흡을 하고는 돌아가리라.

 

19331130

학기 초의 일에 나는 완전히 휩싸여 있다. 나는 일하기를 즐기며 또한 내가 맡은 일은 척척 잘 진행된다. 모든 것이 다 잘 되어 가는 것이다. 열대지방에서의 활동에 대해 쓴 책은 최근 영어, 이탈리아어, 스웨덴어로 번역되었고 스톡홀름에서 개최되는 의학 회의에서 매우 명예로운 초대를 해왔다. 니나도 동행할 것이다. 그녀는 나의 성공을 기뻐했다. 나는 그녀를 거의 매일 만난다. 그녀는 1주일 전 영국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만들 가의 작은 방에 세 들었다. 우리는 오후 늦게 쉬는 시간에 레오폴드 찻집에서 만났다. 니나의 공부에 대한 정열은 여전해서 매우 열심이었다. 그런 니나가 오늘은 조금 불안해 보였다. 동급생과 정치적인 충돌이 있었다고 했다.

정신병학 강의에서 안락사 문제를 다루었는데 학생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니나는 피로한 듯 그 일에 관해 말하기를 꺼렸는데 B교수는 조심스럽게 인간의 생명에 관한 허용권 파괴의 가능성을 말한 듯했다. 형법은 사형을 제정하고 국제법은 전쟁을 용인하므로 불치의 환자를 죽이는 일도 허가하는 법이 창안되어야 한다는 식이었다. 강의 중에는 잠잠했으나 그대로 넘어가진 못했다. 강의가 끝난 후 한 학생이 독일 민족이 인도주의자들의 허약한 견해를 반대하고 강자의 지배를 택했을 때 이미 그러한 법은 존재하지 않았잖느냐고 했다. 그러자 니나는 참을 수 없어졌다.

"나도 이 민족에 속해 있으나 반대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국민의 소수만이 원하는 법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니나가 격분해서 외치자 많은 학생들은 그것이 국민의 소수가 아니라 다수라고 했다.

니나는 마침내 그 소수를 보다 사악한 일부분이라고 몰아붙였는데 그 말은 다행히 한 여학생의 발언 때문에 문제시 되진 않는 듯했다. 그 여학생은 한 무리의 짐승을 전염병에서 구하자면 한 마리 병든 짐승을 죽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자 다시 의견이 구구해져서 인간이 짐승과 비교될 수 있는가. 불치의 정신병자가 아직도 인간인가. 환자의 격리가 살해처럼 사회를 구할 수 있을 때에도 사회가 굳이 살해를 요구할 수 있는가 등등이 논의되었다.

니나의 편이 되었던 두세 학생들은 불치의 정신병자가 인간인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며 실상 불치라는 개념마저 막연하고 진단의 오류도 있을 수 있고 또한 의학의 진보도 계산해 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반발론을 폈다.

니나는 정신병자의 경우 어떤 선을 긋는 일은 어려우며 불치의 환자라고 해도 사회에 봉사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건강한 인간이면서도 악을 감행하는 자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그렇다면 그 건강한 인간도 똑같이 살해되어야 하며 국민은 그들과 정신병자를 희생시켜야 한다고 나섰다. 니나는 더욱 격분해서 외쳤다.

"그럼 당신은 휠더린도 죽였겠군요? 대체 누가 생사를 결정하는 권위자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언제고 살인은 어찌 됐든 살인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 같은 비양심적인 인간들이 그 권위자가 될 테지요. 그리고 한 번 법을 가장해 죽이고 나면 나중에는 그저 무조건 죽이고 또 죽일 겁니다. 마침내는 살인자의 집단만이 남을 거고요. 하지만 난 절대 그것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살인을 허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필요성과 신의의 가장까지 씌워주는 국가는 결코 인정할 수 없습니다."

니나의 말에 모두 격분한 듯했다. 심지어는 당신 같은 인간은 대학에 적합하지 않으며 그런 사상을 불식하지 않는 한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외침마저 있었던 모양이었다.

니나의 말에 나는 극도로 흥분했으나 니나는 근심을 털기 위해 자신을 억제했다. 그리고 그런 충돌은 삼가라고 일렀다. 나와 그 문제에 관해 언제 조용히 얘기해 보기로 하고 침묵을 지키도록 충고했다. 그러자 니나는 그녀에게만 가능한 결단성을 보이며 말했다.

"어떻게 침묵을 지킬 수 있어요? 전 이런 헛소리, 정신병학과 의학의 위약적인 새로운 형식을 배워야 하고 또 그것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받는다면 차라리 공부를 그만 두겠어요. 정말이지 벤하임의 진열대 뒤에 그대로 쳐 박혀 있는 건데 그랬어요."

나는 대학에서 그녀의 충돌이 걱정되었으나 그 용기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다만 그것이 광기와 흡사한 용기가 아니길 빌었다. 니나에 대한 걱정이 내 행복을 희미하게 했으나 한편 달콤함을 더 강하게 했다. 니나는 앞으로 학교에서 일어날 일에 무심할 수 없을 것이고 나의 충고는 부질없는 것이 되리라.

만약 그녀가 대학을 떠나 나의 아내가 된다면 위험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는 실현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나는 그 용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두렵다. 밤이다.

내가 나의 행복이라 부르는 것에 조금은 두려움이 일렁인다. 니나의 용기와 본질은 넓은 무대를 위해서 존재하는데 그런 니나가 나의 아내로서 만족할 것인가? 그녀의 눈은 얼마나 방황했는가? 나는 이제 그 눈을 볼 수 없을까? 과연 그녀는 결혼을 위해 만들어진 여자이며 나는 그녀와 나를 유지하는 데 실패할 것인가? 나는 이제까지는 아네트 아주머니의 경고를 무시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의 마지막 방문 때 아주머니는

"너희들은 이제 함께 지내니?"

라고 하셨다.

", 우리는 3년이 지난 지금에야 함께 있습니다."

내 대답에 아주머니는 느리게 말했다.

"그래, 그렇구나"

"그게 이상합니까?"

"당연하잖니? 난 네 성질을 아니까"

나의 행동을 믿고 있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함께 있지 않으리라 믿으셨지요?"

아주머니는 애매하게 웃으며 말했다.

"함께 지내도록 해라.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을 해도 아깝지 않을 거다."

난 지금 그렇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내게 그런 능력이 있는가. 그리고 니나는? 그녀는 내가 자기를 이끌어 줄 것을 바랄까. 정말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이 우리 사이에 있었는가. 그래, 우리는 키스를 했고 정치적으로 공범이었고 매일 만난다. 과연 견고한 끈일 수 있는가? 나는 행복하다고 믿고 있었으나 이제 보니 그것은 한순간 명멸하는 빛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나는 고마움을 모르는 인간이다. 한 달 전만 해도 그 짧은 순간을 위해 무엇이든 내던질 수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이제 지속을 갈망한다. 니나는 처음으로 자기 집으로 차를 마시러 오라고 초대했다. 나는 매일 오후 그녀에게 갈 것이다. 악령들은 사라져다오. 나는 살고 싶다. 니나를 느끼고 그녀의 눈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싶다. 난 회의하거나 두려움을 느끼고 싶지 않다.

 

1933121

니나에게 갔다. 그리고 수없이 자문하고 있다. 오늘이 나에게 행복과 안정을 주었는가. 아니면 더 큰 불안 속으로 빠뜨렸는가를

니나는 나를 보자마자 브라운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들었는데 스위스에 가 있으며 구제는 성공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기쁨에 빛났고 그 소식과 그의 구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전부터 지니고 있던 의혹이 다시 피어올랐고 밤을 꼬박 밝힌 뒤라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나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만약 브라운이 다시 돌아온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니나는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위험한 동안은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 기간이 어느 정도일지는 알 수 없어요."

나는 집요하고 맹목적으로 내 질문을 되풀이했다.

"어찌 됐든 그가 돌아온다면?"

니나는 아직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채 대답했다.

"다시 개업할 테고 모든 악몽은 추억이 돼 버리겠지요."

"그는 니나를 사랑하고 있어"

어리석음에 눈이 먼 나는 끝내 이렇게 말했다. 니나는 일에 쫓기는 어머니가 세 살짜리의 어처구니없는 물음에 답하듯 참을성 있게, 그러면서도 약간 화를 내고는 한숨을 쉬었다.

"니나, 우리는 아직 이 문제에 관해 얘기한 적이 없어. 한 번도. 내 뜻은......"

니나는 나를 영국공원 쪽의 창가로 이끌었다. 눈이 녹기 시작한 나무는 파란 물속에 어두운 잿빛을 띤 채 앙상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저녁 햇살이 비스듬히 공원 위에 걸려 있고 피곤하고 차가운 빛을 공원에 던지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악의마저 풍기며 내 말을 이으려 했다. 그때 니나는 내게 행복의 눈물을 흘릴 만큼 감동을 주고 이젠 또 나를 몹시 불안하게 하는 한마디를 외쳤다.

"당신은 제가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상대가 자신이란 걸 모르시나요?"

나는 그 말을 긍정의 뜻으로 해석했다. 아주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나는 우리의 화제가 어떤 것인지 기억할 순 없다. 그리고 어쩌면 우린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방안은 그저 평범했고 어두웠다. 나는 꼿꼿이 의자에 앉아 있었고 커튼은 무거워 보였다. 하지만 니나의 생기가 방 안을 꽉 채우고 있어 방의 허술함 따윈 생각할 수도 없었다.

나는 내 방에 앉아서 회의하고 있다. 그리고 내 불안정에 관한 고통만으론 부족하다는 듯 또 다른 불안이 몰려왔다. 나는 니나가 여기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잘 손질된 내 아름다운 집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니나는 왜 내 집으로 옮기려 하지 않는가? 그녀와의 결혼 가능성은 얼마나 희박한 것인가.

니나는 어쩌면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존경하는 것일까? 그녀 스스로 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알고나 있을까? 그녀는 사랑과 우정을 구별할 수 있을까?

나는 정말 그녀를 소유할 수 있을까? 만약 그녀가 내 아이를 가진다면? 하지만 그건 정당하지 못하다. 결코 그럴 수도 없지만 그렇게 된다 해도 그것이 안정을 가져오진 않는다. 참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참으란 말인가? 그렇다고 달리 방법은 없다. 그래서 나는 니나의 말에 매달린다. '그건 당신입니다' 라던 말에. 그것은 모든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한편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은 정말 아무 뜻도 없는 말에 불과한 것이다.

 

1933년 새해 아침

이제까지의 어떤 새해 아침도 올해처럼 아름답지는 못했다. 나는 창을 열어 제치고 맑은 아침 공기를 크게 들이마신다. 그리고 니나가 있는 쪽을 본다. 어젯밤 자정이 지나서까지 니나는 나와 함께 지냈다. 우리는 함께 성당의 종이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니나의 손을 꼭 쥔 채 말했다.

"니나, 오늘 나는 다시 태어났어. 이제까지 나는 살고 있지 않았어. 니나가 내게 오겠다고 오늘 말한 그 순간까지."

니나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아주 심각하고 단호하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그 말을 약속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어젯밤 니나에게도 그런 뜻을 말했다.

"내겐 너와 같이 생을 보내고 싶다는 소망이 있을 뿐이며 이것은 너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네 말이 자신을 앞질렀는지도 모르며 그렇다면 어젠가 후회할 것이다. 그러니 네가 내게 묶여 있다고는 생각지 말아다오."

니나는 그러마고 했었다.

지금은 아침이다. 나는 부드럽고 차분한 손이 내 생에 질서를 부여함으로 감각한다. 나를 정리하는데 결코 그녀만이 요구되었던가? 구원이란 누군가와의 결합으로만 가능한 것인가? 이 결합이 몰락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것일까?

바람이 새를, 강물이 보트를 들어 자기에게 싣듯, 나를 들어 앞으로 보내는 벅찬 행복감이 내게 대답을 주고 있다. 생을 다 떨어진 장화처럼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자신의 멸망을 자인했던 내가 이 새해를 생에의 찬가로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니나가 같이 읽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그녀의 표정은 팽팽히 긴장되어 있었다. 나는 잠시 후에야 층계를 걸어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니나의 귀는 비상할 정도로 예민한 듯했다.

기다림이 그녀의 그 감각을 예민하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벨이 울리기도 전에 궤짝에서 재빨리 일어났다. 자신에게 미리 다짐이라도 하듯

"우체부야"

라고 말했다.

정말 우체부였다. 니나는 편지를 가득 쥐고 들어와서 전날의 우편물 위에 던졌다.

"궁금하지 않니? 어디서 보낸 건지?"

"뻔해. 독자들 아니면 견본 안내서나 은행에서 온 것일 테지. 늘 그래. 산책이나 하지 않겠어?"

그러나 하늘은 잿빛이었고 날씨는 음산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집에 있기로 했다. 문득 궤짝이 놓여 있는 휑한 방안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니나는 의자에 앉아 커피를 갈았다. 움직일 때마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물이 끓기 시작했고 커피 냄새가 방안을 채웠다. 스팀 관에서 약한 소리가 났다. 방 안은 따스했고 나는 동생과 같이 있는 것이 행복했다.

니나는 펄펄 끓는 물을 잔에 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지난 10년간 기분이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 그 전에도 그랬고. 늘 유쾌한 일을 갖고 싶었지만 내 운명엔 없나 봐. 언닌 며칠 계속 유쾌할 수 있어?"

난 며칠이나 몇 주, 아니 언제든 그럴 수 있었다. 나는 아름다운 내 집과 자상한 남편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아무렇게나 나를 기만하고 있을 테지만 용의주도했고 그 밖의 온갖 것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것을 보상하고 있었다. 늘 되풀이되는 나의 일상은 쾌적하게 흘러갔고 그 과거는 미래와 마찬가지로 평화롭게 나를 응시했다. 나는 뭐든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있었고 가질 수 없는 것은 소망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불유쾌하다면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 이후로는 기분 좋게 느끼는 일이 몹시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래? 난 이미 오래 전에 체념했지"

니나는 말했다.

"늘 나를 조급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어. 밤을 새워서라도 써야 할 것이 있었고 그 외에 다른 일이 항상 나를 필요로 했으므로 그 모든 것에서 풀려나는 일은 힘들었어. 그런데도 한 번도 완전할 수 없었고 늘 뛰어 오르려는 자세에서 머물렀던 거야. 종종 가파른 담벽을 오르려고 죽을힘을 쓰다가 손톱이 꺾이고 상처투성이가 되는 개와 다름없다는 느낌이 들곤 해. 늘 내가 전력투구를 하고 있지 못하며 이루어야 할 일을 다해내지 못하고 죽을 것 같은 생각에서 헤어날 수가 없어. 성공에 대한 불만이랄 수도 있지. 극히 짧은 순간 손에 쥐고 기뻐했을 뿐인데 이내 부서져 버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거야. 부상과 의혹을 기뻐할 순 없잖아. 그리고 또 새로운 망상이 늘 나를 괴롭혀. 그 수많은 불안, 애들이 아프거나 그들 중 누가 거짓말을 하거나 하면 나쁜 성격을 갖게 될까 봐 두렵고 아무 일도 없을 땐 또 그때대로 이제껏 뒤에 물러서 있던 유령이 갑자기 나타나고 지금까지 세상에 나와 있는 그 숱한 책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숨이 막힐 것만 같고. 모든 아름다운 것은 순간에 스러지고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바로 그 유령의 정체일 거야.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어. 완전히 순수한 절망마저도. 모든 게 값싼 혼합물에 불과한 거야. 인간은 행복할 수도 없지만 행복을 단념함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도 없어. 이러한 생각들은 늘 내 생활에 어떤 완전해 보이는 것이 나타났을 때 불쑥 더 올라 와. 그리고는 내게 말해. 이건 네게 안 어울려. 네 생의 법칙은 그저 계속 가는 것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는 거야. 오열을 터뜨리고 반항해도 부질없어. 그래도 그 생에 끌려가고 말거든."

니나는 커피에 물을 부은 지 오래 되었는데도 아직 주전자를 손에 들고 몸을 굽힌 채 그 속에서 자기가 말하는 것을 보듯 서 있었다.

"스스로 무엇이 나를 그렇게 쫓아오는가 하고 자문도 해 보지만 막상 대답하려면 대답할 말이 없어. 그건 바로 자신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건 말의 유희에 불과해. 자신이 행복을 소망하면서 그것을 쫓아낼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말에 지나지 않아. 운명은 자신 이외의 누구도 만들 수 없으니까. 그럼 왜? 하는 식으로 의혹은 되풀이되는 거야. 신이 나를 현명하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행복 안에서도 착해질 수 있는데 왜 현명하기까지 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게 돼. 그리고 현명하다는 것이 행복이나 착함보다 더 나은가, 하는 의문도......"

니나는 내게 대답이라도 구하는 듯 절망적인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인간은 왜 고뇌를 통해서만 현명해지게 되어 있는지. 그리고 왜 원하지도 않는데 현명해져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언닌 내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할 거야. 사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니나, 네가 행복했어도 글을 썼겠니?"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난 행복한 축에 들지만 글은 못 쓰잖니? 쓴다면 신문 기사 정도가 고작이야. 다른 것을 쓴다고 해도 물론 의도야 눈에 띄겠지만 누구도 감동시키지 못해. 넌 글을 쓸 수 있는 대가를 현금으로 지불하고 있는 것뿐이야. 넌 많은 것을 지불하는 대신 그 만큼 받고 나는 거의 지불하지 않으니까 받는 게 거의 없잖아?"

"그래, 계산은 맞는 것 같아. 그러나 때때로 너무 엄청난 것을 치르고 아무 것도 받지 못할 때도 있어. 그리고 그 대가가 무슨 소용이야. 성인이 되거나 수녀가 되지 않는 바에야 생의 바퀴가 도는 것을 감각하며 사는 수밖에 없어. 언닌 전에 바덴바일라에서 날 만났을 때 내가 얼마나 절망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나는 밤새 공원을 여기저기 방황하다가 새벽녘에 어떤 제지 공장을 지나갔어. 내가 왜 새삼 그때 얘길 꺼내는지 언니가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 곳에는 물레방아가 있었는데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어. 물레방아 위의 나무로 된 하수관에 물이 흐르고 있었어. 물이 적어 바퀴는 느리게 회전을 계속했어. 물레방아는 오래되기도 했지만 물때가 끼어서 새까맸는데 새벽빛 아래에서 마치 금속처럼 검푸르게 빛나 보였어. 물레방아는 피곤한 듯 천천히 물을 퍼 담고 있었어. 뭐랄까. 시간을 초월한 느낌이었어. 방아가 돌 때마다 음악도 소음도 아닌 낮은 소리가 났어. 모든 것이 지나치게 쓸쓸하고 암울하고 위대하게 느껴졌지. 난 그때 많은 걸 깨달았어."

"넌 시를 쓸 걸 그랬구나. 지금 네 말은 아주 시적이야."

"아니, 난 시를 쓸 수 없어. 난 조금도 시적인 데가 없어. 만약 언니가 내 글을 읽다가 그 속에서 시를 찾아낸다면 그건 내 의도는 아니야. 시적인 묘사는 영혼만으로는 모자람을 느끼는 모든 작가들의 도피처야."

니나는 흥분해 있었는데 난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니나, 네 글이 스스로 생각지도 않는 시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면 더욱 좋지 않니?"

내 말에 니나는 다시 조금은 권태롭고 차분한 음성으로

"그래, 그럼 시적이라고 해 둬도 괜찮아."

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창가에 있는 작은 책상으로 가서 가방 속에서 종이 뭉치를 끄집어냈다.

"한 시간만 실례해야겠는데 어젯밤에 쓴 원고를 수정해야 되거든. 나는 내 생각으로 이 이상 더 잘 될 수 없다고 느끼기 전에는 그걸 도저히 그냥 가져다주질 못 해"

니나는 만년필 뚜껑을 열고 책상에 몸을 굽혔고 나는 슈타인의 일기로 눈길을 주었다.

잠시 후 니나를 보았는데 그저 망연히 창밖으로 눈길을 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 후에도 몇 번을 보았으나 같은 자세였다. 나는 그녀의 추운 듯 웅크린 어깨만 봐도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왜 일을 못하는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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