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하지만 쥐는 연애를 하지 않아요
그 주중에 나는 유리 끝에 손바닥을 깊이 찔리고 말았다. 레코드 선반의 칸막이 유리가 깨져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엄청난 피가 흘러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지배인이 수건을 몇 장 들고 나와 그것을 붕대 대신 감아 주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 야간에도 환자를 받는 응급 병원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
변변치 않은 사람 이이었지만 그런 처리만큼은 빨랐다. 다행히도 병원은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거기에 도착하기도 전에 수건은 이미 벌건 피로 흥건히 젖었고, 스며 나온 피는 아스팔트 위로 뚝뚝 떨어졌다.
사람들은 당황해서 길을 비켜 주었다. 그들은 무슨 싸움이라도 벌어져서 그렇게 된 것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심한 통증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쉼 없이 피가 흐를 뿐이었다.
의사는 무표정하게 피투성이가 된 수건을 벗겨 내고 손목을 단단히 죄어 묶어서 지혈을 한 뒤, 소독을 하고 꿰맸다. 그리고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
레코드 가게로 들어가자 지배인은 출근한 것으로 해줄 테니까 퇴근하라고 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가사와 방으로 갔다. 상처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어서 누구와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고, 그와는 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방에 있었고, 텔레비젼의 스페인어 강좌를 들으면서 캔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붕대로 칭칭 동여맨 손을 보더니 어찌된 거냐고 물었다. 조금 다쳤을 뿐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맥주를 들겠느냐고 그가 묻기에 나는 사양했다.
"이거 금방 끝나니까 좀 기다려" 하고 나가사와는 말하고 스페인어 발음을 연습했다. 나는 내 손으로 물을 끓여 티 백으로 홍차를 만들어 마셨다. 스페인 여자가 예문을 읽었다.
"이렇게 많은 비는 처음입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다리가 몇 개나 떠내려갔습니다."
나가사와는 자기도 그 예문을 읽어 발음을 한 뒤
"형편없는 예문이군" 하고 말했다. "외국어 강좌의 예문이라는 게 대개 이래, 한심하다니까."
스페인어 강좌가 끝나자 나가사와는 텔레비젼을 끄고, 소형 냉장고에서 맥주 하나를 더 꺼내 마셨다.
"혹시 방해한 건 아닙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내게? 전혀 아니야. 따분했던 참이라구. 정말 맥주 안 마실래?"
안 마시겠다고 나는 대답했다.
"참, 얼마 전에 시험 발표가 있었지. 합격했어"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외무성 시험 말입니까?"
"그래, 정식 이름은 외무 공무원 채용 1종 시험이라고 하는데, 어딘가 바보스럽지?"
"축하합니다" 하면선 나는 왼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고마워."
"하긴 합격은 당연한 일 아니었습니까?"
"뭐, 그렇긴 했지만" 하고 나가사와는 웃었다.
"하지만 확실히 안정 받는다는 건 좋은 일이야, 어떻든."
"외국으로 나갑니까, 외무성에 들어가면?"
"아니, 처음 일년 동안은 국내 연수야. 그 뒤에는 당분간 외국 근무를 하게 될 거야."
나는 홍차를 들고, 그는 맛있게 맥주를 들이켰다.
"이 냉장고 말인데, 만일 좋다면 여기서 나갈 때 네게 줄게"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갖고 싶지? 이게 있으면 냉맥주를 마실 수도 있잖아."
"그거야 준다면 좋지요. 하지만 선배님도 필요하신 거 아닙니까? 어차피 아파트 생활을 할 테니까요."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여길 나가면 난 더 큰 냉장고를 사서 그럴 듯하게 해놓고 살 거야. 이런 구질구질한 데서 4년간이나 참고 살았어. 여기서 쓰던 건 두 번 다시 보기도 싫어 필요한 건 뭐든지 다 줄게. 텔레비전이건 보온병이건 라디오건."
"뭐든지 좋지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던 스페인어 텍스트 북을 손에 들었다.
"스페인어를 시작했습니까?"
"응. 어학은 하나라도 더 많이 할 수 있는 게 도움이 되니까. 원래 난 어학에 선천적인 소질이 있어. 불어도 독학이었지만, 거의 완벽하거든. 게임과 마찬가지지. 룰을 하나만 제대로 알면 나머진 몇 개라도 다 같아. 여자와 마찬가지지."
"상당히 치밀한 생활방식이군요" 하고 나는 빈정거렸다.
"그런데 언제 한 번 함께 식사하러 안 가겠나?"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또 여자 사냥은 아니겠지요?"
"그래. 그게 아니고 그저 순수한 식사야. 하쓰미와 셋이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회식하는 거야. 내 합격 축하 파티지. 되도록 비싼 데로 가자구. 어차피 지불은 아버지가 할 거니까."
"그런 식사라면 하쓰미 씨와 둘이서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네가 가주는 게 편해. 내게도 하쓰미에게도"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세상에, 이건 기즈키, 나오코의 경우와 똑같지 않은가.
"식사 후에 난 하쓰미한테 가서 잘 테니까, 식사만큼은 셋이서 함께 하자구."
"두 분이 다 그렇다면 함께 가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선배님은 어쩔 작정입니까, 하쓰미씨 말입니다. 연수가 끝나고 해외 근무를 하게 되면 몇 년씩 못 돌아오는 게 아닙니까? 그럼 하쓰미 씨는 어떻게 되죠?"
"그건 하쓰미의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야."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는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은 채 맥주를 마셨고, 하품을 했다.
"말하자면 난 누구와도 결혼할 의사가 없고, 그 점은 하쓰미에게도 확실히 말해 두고 있어. 그러니 하쓰미는 누구든 결혼하고 싶으면 결혼하면 되는 거야. 난 말리지 않아.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날 기다리고 싶으면 기다리면 되는 거고, 그런 뜻이야."
"하아" 하고 나는 감탄했다.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날?"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이란 것은 원리적으로 불공평한 거야. 그건 내 탓이 아냐.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거라구. 나는 하쓰미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그런 쪽에서라면 난 지독한 인간이니까, 그게 싫다면 헤어지자고 확실히 말해 두었다고."
나가사와는 맥주를 다 마시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선배님은 인생에 대해 공포를 느낄 때가 없습니까?"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이봐, 나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라구" 하고 그가 말했다.
"물론 인생에 대한 공포를 느낄 때가 있어. 그건 당연하잖아. 다만 나는 그런 걸 전제 조건으로 인정할 수는 없어. 자기의 힘을 백 퍼센트 발휘해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는 거야. 원하는 건 취하고, 원치 않는 건 취하질 않아.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막히면 막힌 곳에서 다시 생각해. 불공평한 시회랑 역으로 생각하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하지."
"아전인수적인 이야기 같은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난 하늘을 올려다보고 과일이 떨어지기나 기다리고 있는 건 아냐. 나는 나대로 무척 노력하고 있어. 너보다 열 배는 더 노력하고 있을 거야."
"그럴 겁니다" 하고 나는 인정했다.
"그래서 말이야, 때때로 나는 이 세상을 둘러보면 정말 한심해져, 어째서 이 사람들은 노력을 안 할까, 왜 노력을 않고 불평만 할까 하고 말이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나가사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눈으로 보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악착같이, 허리가 휘도록 일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것입니까?"
"그건 노력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일 뿐이야." 하고 나가사와는 간단히 말했다.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 좀더 주체적이고 목적적으로 하는 것을 말하는 거야."
"이를테면 다들 취직이 결정되어 한숨 놓고 있을 때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한다던가 그런 겁니까?"
"그래 그런 거야. 난 봄까진 스페인어를 완전히 마스터할 거야. 영어, 독일어, 불어는 이미 되었고, 이탈리아어도 대충 돼가고 있어. 이런 게 노력 없이 되는 줄 알아?"
그는 담배를 피웠고, 나는 미도리의 부친을 생각했다. 그리고 미도리의 부친은 텔레비전으로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노력과 노동이 차이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도 생각조차 안 해 봤을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기엔 그는 아마 너무 바빴을 것이다, 일도 바빴고 후쿠시마까지 가출한 딸을 데리러 가기도 해야 했으니까.
"그 회식 이야기인데, 이번 토요일이면 어때?"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좋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가사와가 택한 곳은 아자부의 뒤쪽에 있는, 조용하고 고급스런 프랑스 요리점이었다. 나가사와가 그의 이름을 대자 우리를 안쪽 방으로 안내하였다.
작은 방 벽에는 판화가 열다 섯 점쯤 걸려 있었다. 하쓰미가 도착할 때까지 그와 나는 조셉 콘래드의 소설 이야기를 하면서 맛 좋은 포도주를 마셨다. 나가사와는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그레이 양복을 입고 있었고, 나는 극히 평범한 네이비 블루의 블레이저 코트를 입고 있었다.
15분쯤 기다리자 하쓰미가 왔다. 그녀는 매우 깔끔하게 화장을 하고 금으로 된 귀고리를 달고, 짙은 하늘색의 멋스러운 원피스에다 우아한 스타일의 빨간 무용 신발 같은 것을 신고 있었다. 내가 원피스 빛깔을 칭찬하니까 이런 걸 미드나이트 블루라고 해요, 하고 하쓰미가 가르쳐 주었다.
"요긴 분위기가 퍽 근사한데"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도쿄에 오면 꼭 여기서 식사를 하지. 전에도 한 번 온 적이 있어. 난 이런 비싼 요리는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어머, 가끔씩 이라면 이런 것도 좋잖아요. 그렇지요, 와타나베?"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돈을 자기가 내는 것만 아니라면"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언제나 대개 여자와 같이 오지"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도쿄에 여자가 있으니까."
"그래?"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나는 못 들은 척하고 와인을 마셨다
이윽고 웨이터가 왔고 우리는 요리를 주문했다. 우리는 전채 요리로 수프를 선택하였고, 메인 디쉬로는 나가사와가 오리 요리를, 나와 하쓰미는 농어를 주문했다.
요리는 제법 시간이 오래 걸렸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엔 나가사와가 외무성의 시험 이야기를 꺼냈다. 수험자의 대부분이 바닥 모를 늪 속에 처박아 넣고 싶을 정도의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었지만, 개중에는 몇몇 올바로 된 사람들로 있더라고 말했다. 그 비율이 일반 사회와 비교해서 낮은지 높은지를 내가 물어보았다.
"같아, 물론" 하고 나가사와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건 어디든 마찬가지야. 고정불변한 거라구."
와인 한 병이 비자 나가사와는 다시 한 병을 주문했고, 자기 몫으론 스카치위스키를 더블로 부탁했다.
그 뒤 하쓰미가 다시 나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여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것은 하쓰미와 나 사이의 영원한 화제였다. 그녀는 내게 클럽 하급생 중에 매우 예쁜 애를 소개하고 싶어 했고, 나는 언제나 피하고만 있었다.
"정말 좋은 애예요, 미인이고. 다음에 데리고 나올 테니까 한 번 만나 봐요. 틀림없이 마음에 들 거야."
"아닙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하쓰미 씨네 대학 여자들과 사귀기엔 나는 너무 가난합니다. 돈도 없고 화제도 맞지 않을 거고."
"어머, 그렇지 않아요. 그 앤 수수하고 매우 좋은 애예요. 그런 콧대 높은 애가 전혀 아니라니까요."
"한번 만나 보면 되잖아, 와타나베" 하고 나가사와가 거들었다.
"꼭 그걸 하라는 건 아니니까."
"당연해요. 그런 일 하면 큰일 나요. 틀림없는 숫처녀인데"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전에 네가 그랬듯이."
"그래요,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고 하쓰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와타나베 씨, 가난하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는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물론 학급에서도 몇몇은 굉장한 새침데기고 콧대 높은 애들도 있지만, 나머지 애들은 다 보통이에요. 점심땐 구내식당에서 2백5십엔 짜리 정식을 먹고..."
"저, 하쓰미 씨. 우리 학교엔 점심도 ABC가 있어, A가 120엔, B는 100엔, C는 80엔입니다. 그래서 어쩌다 내가 A라도 시키면 모두가 언짢은 눈으로 보는 겁니다. 그리고 C도 먹을 형편이 못되면 60엔짜리 라면을 먹어요. 그런 학교지요. 화제가 어울릴 것 같습니까?"
하쓰미는 크게 웃었다.
"그거 정말 싸군요. 나, 한 번 먹으러 가볼까. 그렇지만 와타나베 씨, 당신은 사람이 좋으니까 그 애와 틀림없이 이야기가 맞을 거예요. 혹시 알아요, 그 애도 120엔짜리 점심을 좋아할지."
"설마"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무도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할 수 없으니까 먹는 거죠."
"하지만 먹는 걸 가지고 우릴 판단하지는 말아요. 물론 내로라하는 양갓집 딸들이 많은 학교긴 하지만, 진지하게 인생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착실한 애들도 많아요. 모두가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남자와 교제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구요."
"그건 물론 나도 압니다."
"와타나베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그런데도 그 여자에 대해선, 이 사나이는 한마디도 말하진 않는 거야. 지독하게 입이 무겁지. 모든 게 수수께끼야."
"정말?" 하고 하쓰미가 나에게 물었다.
"정말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수수께끼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사정이 몹시 얽혀 있어서 말하기가 언짢을 뿐이죠."
"험난한 사랑 같은 거? 내게 상담해 봐요."
나는 와인을 마시며 그 순간을 얼버무렸다.
"저것 봐, 입이 무겁지?" 위스키를 마시며 나가사와가 말했다.
"이 사나이는 한 번 말 않기로 작정하면 절대로 말 안 해."
"유감인데요" 하고 하쓰미는 테리느를 잘게 썰어 입으로 가져가면서 말했다.
"내 후배와 와타나베 씨가 잘 되었다면, 우린 오늘 더블 데이트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술에 취하면 바꿔치기도 할 수 있고 말이지."
"못하는 소리가 없군요."
"못하는 소리가 아냐, 와타나베는 널 좋아하니까."
"좋아한다는 것과 그건 다르잖아요" 하고 하쓰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와타나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자기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지요. 난 그걸 알아요. 그러니까 내가 여자를 소개해 주려고 한 거예요."
"하지만 와타나베와 나는 여자를 바꿔치기 한 적이 있었어, 전에. 그렇지, 안 그래?"
나가사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위스키 잔을 비우더니 다시 한 잔을 주문했다.
하쓰미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살며시 입을 닦았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았다.
"와타나베 씨, 정말 그런 짓을 했나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나는 잠자코 있었다.
"정직하게 이야기해, 괜찮으니까"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난처하게 됐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가사와에게는 때때로 술이 들어가면 심술궂게 구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밤의 그의 심술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하쓰미에게 향한 것이었다.
그걸 알고 있는 만큼 나로서도 덩달아 심기가 불편했다.
"그 이야길 듣고 싶네요.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하고 하쓰미가 내게 말했다.
"술에 취해 있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나무라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저 그 이야기가 듣고 싶을 뿐이에요."
"시부야의 바에서 선배님과 술을 마시다, 둘이 놀러 온 여자애들과 친해진 겁니다. 어딘가의 전문대 여학생들이었는데 여자애들도 꽤 취해 있었고, 그래서 뭐, 결국 가까운 호텔로 가서 잤습니다. 둘이서 서로 옆방을 잡고. 그런데 밤중에 선배님이 내 방을 노크하더니, 우리 여자를 서로 바꿔 보자고 하기에 나는 선배님 방으로 가고, 선배님은 내 방으로 들어갔지요."
"그 여자애들은 화내지 않았나요?"
"그 애들도 취해 있었고, 게다가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던 겁니다, 결국 그 애들도요."
"그렇게 한 덴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어떤 이유?"
"걔네 둘 말인데, 좀 차이가 심하더라구. 한 애는 예뻤지만 다른 한 애는 형편없었지. 그래서. 이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 거야. 즉 내가 미녀를 차지했으니까, 와타나베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 그래서 교환한 거야. 그렇지 와타나베?"
"그래요" 하고 내가 말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 미인이 아닌 쪽의 여자가 한결 마음에 들었었다.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성격도 좋은 애였다. 그녀도 나도 섹스를 한 후 침대 속에서 비교적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나가사와가 교환하자고 제안해 온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괜찮겠냐고 묻자 뭐, 좋아요, 당신들이 그러고 싶다면, 하고 동의해 준 것이다. 그녀는 아마 내가 그 미인 쪽의 여자아이와 자고 싶어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즐거웠어요?" 하고 하쓰미가 내게 물었다.
"교환 말입니까?"
"그런 일 저런 일 모두."
"따로 특별히 즐거웠던 것은 없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그저 그뿐입니다. 그런 식으로 여자와 자보았자 특별히 즐거운 일이 있을 까닭이 없지요."
"그럼 왜 그런 짓을 하죠?"
"내가 유혹하니까"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나, 와타나베 씨에게 묻고 있어요" 하고 하쓰미가 단호하게 나무라듯 말했다.
"왜 그런 짓을 해요?"
"이따금 못 견디게 여자와 자고 싶어집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그 사람과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하고 하쓰미가 잠시 생각하더니 그렇게 말했다.
"좀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하쓰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요리가 들어왔다. 나가사와 앞에는 오리고기 로스가 놓여졌고, 하쓰미와 내 앞에는 농어 요기 접시가 놓여졌다.
접시에 데친 야채가 나뉘어 담아지고, 소스가 뿌려졌다. 그리고 종업원이 나가자 우리는 다시 셋이 되었다.
나가사와는 나이프로 오리고기를 썰어 입맛 당기게 먹으며 위스키를 마셨다. 나는 시금치를 먹어 보았다. 하쓰미는 요리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저, 와타나베 씨.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런 짓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고, 당신답지도 않다고 보는데 어때요?"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렇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저 자신도 때때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그만두지 못하죠?"
"때때로 체온이 그리워지거든요" 하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 따스한 살갗의 온기 같은 게 없으면 때때로 견딜 수 없이 외로워지는 겁니다."
"요약하면 이런 거라고 생각해" 하고 나가사와가 끼어들었다.
"와타나베에겐 좋아하는 여자가 있지만 어떤 사정이 있어서 섹스가 불가능하지. 그래서 섹스는 섹스로 잘라서 이해하고, 다른 데서 처리를 하는 거야. 그것으로 좋은 거 아냐? 이야기로선 이치에 닿는다구. 방안에 틀어박혀 마스터베이션만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렇지만 그 여자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참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와타나베 씨?"
"그럴지도 모르죠" 하고 말하고 나서, 나는 크림소스가 뿌려진 농어의 몸통을 입으로 가져갔다.
"너는 남자의 성욕이라는 걸 이해할 수 없을 거야" 하고 나가사와는 하쓰미에게 말했다.
"예를 들어 난 너하고 3년간이나 교제하고 있으면서, 그 사이에 이런저런 딴 여자들하고도 자고 있어. 그렇지만 난 그런 여자들을 누구 하나 기억에 남겨 놓고 있지는 않아.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기억 못 해. 누구하고도 한 번 밖에 자지 않거든. 만나고, 자고, 헤어지고, 그것뿐이야. 그게 어디가 나쁘다는 거지?“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당신의 그런 오만이에요" 하고 하쓰미가 나직하게 말했다.
"다른 여자와 자고 안 자고의 문제가 아니야. 나, 지금껏 당신의 여자 놀이에 대해 정말로 화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잖아요?"
"그런 건 여자 놀이라고도 못해. 그저 게임에 지나지 않아. 누구도 다치지 않으니까."
"내게 상처를 줬어."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어째서 나만으론 모자라는 거죠?"
잠시 나가사와는 말없이 위스키 잔을 흔들고 있었다.
"부족해서가 아니야.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구. 내 몸속엔 뭔가 그런 것을 원하는 갈증 같은 게 있지. 그것이 네게 상처를 주었다면 미안해. 결코 너 하나만으로 부족하다든가 그런 건 아니야. 그러나 나는 그런 갈증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남자고, 그게 바로 나야. 어쩔 수 없잖아."
하쓰미는 마침내 나이프와 포크를 손에 들었고, 농어를 먹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거기에 와타나베 씨를 끌어들이진 말아요."
"나와 와타나베는 닮은 데가 있어" 하고 나가사와는 말했다.
"와타나베도 나처럼 본질적으로는 자기에게 밖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야. 오만하다든가 그렇지 않다든가 하는 차이는 있지만 말야.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고, 자기가 무엇을 느끼고, 자기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그런 것밖에는 흥미를 못 가져. 그러니까 자기와 타인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있지. 내가 와타나베를 좋아하는 건 바로 그런 점이야. 다만 이 사나이의 경우는 스스로 확실하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서, 헤매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는 거야."
"헤매지도 않고, 상처받지도 않는 인간이 어디 있어요?"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아니면 당신은 헤매거나 상처받은 적이 없다는 말인가요?"
"물론 나도 헤매고 상처도 입어. 그러나 그것은 훈련으로 경감시킬 수 있지. 쥐도 전기 쇼크를 주면 상처를 덜 받는 길을 찾게 된다구."
"하지만 쥐는 연애를 하지 않아요."
"쥐는 연애를 하지 않는다" 하고 나가사와는 되뇌고 나서 나를 보았다.
"멋져! 백그라운드 뮤직이 아쉽군. 오케스트라에 하프 두 대가 낀."
"농담하지 말아요. 난, 지금 진지해요."
"지금은 식사 중이야"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게다가 와타나베가 있어. 진지하게 할 이야기는 다른 기회로 미루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
"제가 자리를 비울까요?" 하고 내가 물었다.
"그대로 있어요. 그 편이 좋아요"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큰맘 먹고 왔는데 여유롭게 디저트도 먹고 가자구"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 뒤, 우리는 잠시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나는 농어를 깨끗이 먹어치웠고, 하쓰미는 절반쯤 남겼다. 나가사와는 일찌감치 오리 로스를 다 먹어치우고 계속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농어가 정말 맛있군요" 하고 내가 말했지만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흡사 깊은 굴에 작은 돌을 던진 것 같았다.
식탁이 치워지고 레몬 샤베트와 에스프레소 커피가 나왔다. 나가사와는 어느 쪽에도 조금씩 손만 댔을 뿐, 금방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하쓰미는 레몬 샤케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참 할 수 없군, 하고 나는 샤베트를 말끔히 먹은 다음 커피를 마셨다
하쓰미는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쓰미가 몸에 지니고 있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 두 손도 세련되고 품위 있었으며 고급스럽게 보였다.
나는 나오코나 레이코 여사를 생각했다. 그녀들은 지금쯤 뭘하고 있을까? 나오코는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레이코 여사는 기타로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속에서, 그들이 있는 그 작은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격한 그리움이 소용돌이쳤다. 나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와타나베와 내가 닮은 점은, 자기의 일을 타인의 이해해 주길 바라지 않는다는 거야"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그게 다른 녀석들과 다른 점이야. 다른 녀석들은 모두 자기의 일을 주위의 인간이 알아주기를 바라며 안달하지.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고 와타나베도 그렇지 않아. 이해를 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자기는 자기고 타인은 타인이라고."
"그래요?" 하고 하쓰미가 내게 물었다.
"설마"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그만큼 강한 인간이 아닙니다. 아무에게도 이해를 받지 못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서로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상대도 있습니다. 다만 그 밖의 사람들에겐 어느 정도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고 있을 분입니다. 체념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선배님 말대로 남에게 이해를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있는 말도 거의 같은 뜻이야." 하고 나가사와가 커피스푼을 잡으려 말했다.
"정말 같은 거야. 늦은 아침 식사와 이른 점심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다구. 먹는 것도 같고 먹는 시간도 같은데, 다만 부르는 방식이 다를 뿐이야."
"나가사와, 당신은 내게도 별로 이해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하고 하쓰미가 물었다.
"넌 아무래도 내 말을 이해 못하는 것 같은데,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될 만한 시기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그 누군가가 상대에게 이해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야."
"그럼 내가 어떤 사람한테 올바른 이해를 받기 바라는 건 잘못된 일인가요? 이를테면 당신에게?"
"아냐, 별로 잘못된 일은 아니야." 하고 나가사와가 대답했다.
"성실한 인간은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지. 만일 네가 나을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말이야. 하지만, 내 시스템은 다른 인간이 살아가는 시스템과는 매우 다른 거야."
"하지만, 날 사랑하고 있지는 않는 거죠?"
"그러니까 너는 내 시스템을..."
"시스템 따윈 아무래도 좋아요!" 하고 하쓰미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녀가 고함을 지르는 것을 본 것은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는 그때가 딱 한 번뿐이었다.
나가사와가 테이블 옆의 벨을 누르자 종업원이 계산서를 들고 왔다. 나가사와는 종업원에게 크레디트카드를 건네주었다.
"와타나베, 오늘은 미안하게 됐어." 하고 그가 말했다.
"난 하쓰미를 바래다줄 테니까, 그다음은 너 혼자서 알아서 하도록 해."
"괜찮습니다, 저는. 식사도 훌륭했고" 하고 나는 말했지만, 거기에 대해선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종업원이 카드와 계산서를 가져오자 나가사와는 금액을 확인하고 펜으로 사인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나가사와는 도로로 택시를 세우려고 했지만 하쓰미가 그걸 제지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오늘은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바래도 주지 않아도 돼요. 식사 고마웠어요."
"좋도록"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와타나베 씨에게 바래다 달랠 거예요"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좋도록"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그렇지만 와타나베 역시 나와 거의 같아. 친절하고 부드러운 사나이지만 마음의 밑바닥으로부터 누군가를 사랑할 수는 없다구. 언제나 어딘가가 깨져 있고, 그리곤 다만 갈증이 있을 뿐이야. 난 그걸 알 수 있어."
나는 택시를 세우고 먼저 하쓰미를 태우면서,
"저, 아무튼 바래다주고 오겠습니다." 하고 나가사와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하고 그는 나에게 인사를 했지만, 머릿속에선 이미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로 가지요? 에비스로 돌아갈 겁니까?" 하고 나는 하쓰미에게 물었다. 그녀의 아파트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쓰미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럼, 저 어디서 한잔하겠습니까?"
"응" 하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부야" 하고 나는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
하쓰미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택시 좌석 한 귀통이에 기대고 있었다. 작은 금귀고리가 차가 흔들릴 때마다 여린 빛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의 미드나이트 블루의 원피스는 마치 택시 한구석의 어둠에 맞춰 만들어진 것 같았다. 옅은 색조로 칠해진 그녀의 모양 좋은 입술이 독백을 하다 만 것처럼 이따금 삐죽거렸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까 나가사와가 왜 그녀를 특별한 상대로 택했는지를 알 것만 같았다.
하쓰미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나가사와라면 그런 여자를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쓰미라는 여성 속에는 뭔가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드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그녀 스스로가 강한 힘을 내어 상대를 뒤흔드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발산하는 힘은 작았지만 그것이 상대의 마음에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택시가 시부야에 이를 때까지 나는 줄곧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고, 그녀가 내 마음속을 일렁이게 하는 이 감정이 흔들림의 정체가 과연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끝까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은 12년이나 13년 뒤의 일이었다. 나는 어떤 화가를 인터뷰하기 위해 뉴멕시코주의 산타페 거리에 있었는데, 해거름에 근처의 파지 하우스에 들러 맥주와 피자를 먹으며 기적처럼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계의 모든 것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내 손과 접시, 테이블에 이르기까지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온통 붉게 물들고 있었다. 마치 특수한 과즙을 머리끝에서부터 뒤집어쓴 것처럼 온통 선홍색 일색이었다.
그러한 압도적인 석양 속에서 나는 문득 하쓰미를 생각해 냈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일으킨 내 마음의 소용돌이가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이해했다. 그것은 채워질 수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채워질 수 없을 소년기의 동경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러한 타오르는 순진무구한 동경을 벌써 까마득한 옛날에 어딘가에 놓고 잊어버려 왔기에, 그러한 것이 한때 내 속에 존재했다는 것조차도 오랫동안 생각해 내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다. 하쓰미가 뒤흔들어 놓은 것은 내 속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던 나 자신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거의 울어 버릴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그녀는 정말로, 정말로 특별한 여자였다. 누군가가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구원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나가사와도 나도 그녀를 구원하지는 못했다. 하쓰미는 - 내가 아는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 인생의 어느 단계에 이르자,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스스로의 생명을 끊었다. 그녀는 나가사와가 독일로 가버린 2년 후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그 2년 후에 면도칼로 손목을 잘랐다.
그녀의 죽음을 나에게 전해 준 사람은 물론 나가사와였다. 그는 서독의 수도 본에서 내게 편지를 보내 왔다.
"하쓰미의 죽음으로 인해서 무언가가 꺼져버렸고, 그것은 못 견디게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나 같은 사람에게도."
나는 그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두 번 다시 그에게는 편지를 쓰지 않았다.
우리는 작은 바에 들어가서 몇 잔씩인가 술을 마셨다. 나도 하쓰미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권태기의 부부처럼 마주보고 앉아 묵묵히 술을 들고 땅콩을 먹었다. 그러는 사이에 가게가 붐비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바깥으로 나가 잠시 산책을 하기로 했다. 하쓰미는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했지만 내가 말을 꺼낸 거니까, 하고 내가 지불했다.
밖으로 나오니 밤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하쓰미는 옅은 회색 카디건을 걸친 채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내 곁을 걸었다. 어디로 간다는 목적도 없었지만, 나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천천히 밤거리를 걸었다. 꼭 나오코와 거닐던 때 같구나,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와타나베 씨, 어디 이 부근 당구칠 데 없을까?"
하쓰미가 돌연 그렇게 말했다.
"당구?" 하고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하쓰미 씨가 당구를 다 치세요?"
"응, 나, 제법 잘 쳐요. 와타나베는 어때요?"
"치긴 합니다. 잘 하진 못하지만."
"그럼 가요."
우린 가까운 당구장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길 막다른 곳에 있는 작은 가게였다.
멋진 원피스를 입은 하쓰미와 네이비 블루의 블레이저 코트에 레지멘털 타이를 맨 나와의 한 쌍은 당구장 내에서도 유난스럽게 보였지만, 그런 데에 하쓰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큐를 고른 후 큐 끝에다 초크를 문질러댔다. 그리고 백에서 머리핀을 꺼내 이마 끝에 찔러서, 공을 칠 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했다.
우리는 두 게임을 쳤지만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하쓰미는 매우 솜씨가 좋았고, 나는 손에 두텁게 붕대를 감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잘 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게임 모두 그녀가 압승했다.
"잘 치는군요" 하고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보기와는 다르죠?" 하고 하쓰미 신중하게 공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방긋 웃었다.
"도대체 어디서 배웠습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워낙 노시기를 좋아하는 분이라 당구대를 집에 두고 있었지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거기에 가면 오빠와 둘이서 당구를 치면서 놀았어요. 좀 성장하고 나서는 할아버지가 정식으로 가르쳐 주셨고. 참 좋은 분이었어요. 스마트하고 잘생기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요. 옛날 뉴욕에서 다이애나 더빈을 만난 적이 있다는 게 그분의 자랑거리였지요."
그녀는 세 번을 계속해서 득점하고 네 번째는 실패했다. 나는 간신히 한 번만 득점을 하고 다음은 쉬운 공도 제대로 치질 못했다.
"붕대를 감고 있어서 그래요" 하고 하쓰미 위로해 주었다.
"오래 안 쳐서 그렇습니다. 벌써 2년 5개월째 큐를 잡지 않았으니까요."
"어째서 그렇게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요?"
"친구하고 당구를 친 그날 밤 그 친구가 죽었거든요, 그래서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엔 당구와 손을 끊었어요?"
"아닙니다. 특별히 그런 각오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하고 나는 조금 생각을 하고 나서 대답했다.
"그저 이럭저럭 당구를 칠 기회가 없었던 겁니다. 그것뿐입니다."
"친구는 어떻게 해서 죽었어?"
"교통사고였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몇 번인가 계속해서 공을 맞혔다. 공의 길을 보고 있을 때의 그녀의 눈빛은 꽤 진지했고, 공을 칠 때의 힘을 주는 요령도 정확했다.
그녀가 깨끗하게 세트한 머리칼을 훌쩍 뒤로 넘기고, 금귀고리를 반짝이며, 무용 신발처럼 생긴 구두를 신은 발의 위치를 정하고, 갸름하게 예쁜 손가락을 당구대의 펠트 위에 받친 채 공을 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그 우중충한 당구장의 그곳만은 어느 훌륭한 사교장의 한 부분처럼 보였다.
그녀와 단둘이 있어 보긴 처음이었지만, 그것은 나에게는 멋진 경험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내 인생이 한 단계 끌어 올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 번째 게임이 끝날 무렵 - 물론 세 번째도 그녀가 이겼다. - 내 손의 상처가 조금 아파 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린 당구를 끝내기로 했다.
"미안해요. 당구를 치자고 하는 게 아닌데..." 하고 하쓰미가 정말 민망스러워
하면서 말했다.
"괜찮습니다. 대단한 상처는 아니니까. 그리고 매우 즐거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나올 때 당구장 주인 같은 깡마른 중년 부인이,
"아가씨, 소질이 있네요" 하고 말했다.
"고마워요" 하고 방긋 웃으며 하쓰미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계산을 했다.
"아파요?" 하고 밖으로 나오자 하쓰미가 말했다.
"대단치는 않아요" 하고 내가 말했다.
"상처가 벌어졌을지도 몰라요."
"괜찮을 겁니다, 아마."
"그래요, 내 아파트로 가요. 내가 상처를 봐줄게요. 붕대도 갈아야 할 테니까"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집에는 붕대도 소독약도 있어요. 여기서 멀지도 않고."
그렇게 염려할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상처가 벌어졌는지를 봐야 한다고 고집했다.
"아니면 나와 같이 있는 게 싫어요? 조금이라도 빨리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가요?" 하고 하쓰미가 농담처럼 말했다.
"천만 에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사양 말고 우리 집으로 가요, 걸어서 금방이니까."
하쓰미의 아파트는 시부야에서 에비스 쪽으로 15분쯤 걸어간 데에 있었다. 호화롭다고는 못해도 제법 훌륭한 아파트였는데, 작은 로지에다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하쓰미는 주방 테이블에 나를 앉혀 놓고, 옆방으로 가더니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프린스턴 유니버시티라는 글자가 영문으로 박힌 요트 파카와 면바지 차림으로, 조금 전 귀엽게 반짝이던 금귀고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선가 구급함을 들고 나와, 테이블 위에서 내 붕대를 풀더니, 상처가 터지지 않았음을 확인하자 일단 그곳을 소독한 후, 다시 새 붕대를 감아 주었다. 손놀림이 매우 훌륭했다.
"어쩌면 그렇게 여러 가지 일에 능숙합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옛날에 자원봉사로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있어요. 간호사 흉내 같은 것, 거기서 배웠어요"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붕대를 다 감고 나자 그녀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 두 개를 꺼내 왔다. 그녀가 반 캔을 마시고, 내가 한 개 반을 마셨다. 그리고 나서 하쓰미는 클럽의 하급생 여자애들의 사진을 내게 보여 주었다. 거기엔 확실히 몇몇 귀여운 애들이 있었다.
"만일 걸 프렌드가 필요하면 내게 말만 해요. 당장 소개해 줄 테니까요."
"그렇게 하죠."
"와타나베 씨는 날 중매쟁이 같다고 행각하고 있죠, 정직하게 말해서?"
"조금은" 하고 나는 정직하게 대답하고 웃었다. 하쓰미도 웃었다.
그녀는 웃는 얼굴이 썩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와타나베 씨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와 나가사와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다니, 뭘 말입니까?"
"난 어쩌면 좋지요, 지금부터?"
"내가 뭐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고 나는 마시기 딱 좋게 차가워진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괜찮아요. 뭐든지 생각하고 있는 대로 말해 봐요."
"내가 당신이라면 난 그 남자와는 헤어집니다. 그리고 좀더 성실한 사고방식을 지닌 상대를 찾아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아무리 호의적으로 보아도, 그 사람과 교제해서 행복해질 까닭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행복해지겠다거나 남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그런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함께 있으면 머리가 이상해집니다. 내가 보기엔 하쓰미 씨가 그 사람과 3년 동안이나 교제하고 있다는 게 이미 기적입니다. 물론 나도 내 나름으로 그 사람을 좋아합니다. 재미있는 사람이고 훌륭한 점도 많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나 같은 건 따라갈 수조차 없는 능력과 강인함을 지니고 있고요, 하지만 말입니다. 그 사람의 사고방식이라든가 살아가는 방법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으면, 때때로 나 자신은 같은 곳을 계속 허우적거리며 맴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는 나와 같은 생활방식으로 살아도 착착 위로 오르고 있는데, 나는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몹시 허무해집니다. 이를테면 시스템 그 자체가 다른 거지요. 제 말 알아듣겠습니까?"
"잘 알겠어요" 하고 하쓰미는 말하고 냉장고에서 다시 새 맥주를 꺼내다 주었다.
"게다가 그 사람, 외무성에 들어가 일년 동안이 국내 연수가 끝나면 상당한 기간동안은 해외로 나가게 돼 있지 않습니까? 하쓰미 씨는 어떻게 할 겁니까? 마냥 기다리겠습니까? 그 사람, 누구하고도 결혼할 생각 같은 건 없어요."
"그것도 알고 있어요."
"그럼, 내가 더 해야 할 말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이상."
"음" 하고 하쓰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유리잔에 천천히 맥주를 따라 마셨다.
"아까 하쓰미 씨와 당구를 치다 얼핏 생각이 났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난 형제가 없어서 외아들로 자랐지만, 그러면서도 외롭다거나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던가 하고 생각한 일은 없었습니다. 혼자도 상관없다 싶었지요. 그런데 아까 당구를 치면서 문득 내게도 하쓰미 씨 같은 누나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마트하고 멋지고, 미드나이트 블루 원피스에가 금귀고리가 잘 어울리고, 당구도 잘 치는 누나 말입니다."
하쓰미는 기쁘게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요 일년 동안, 내가 남에게 들은 말 중에서 지금 당신의 말이 최고로 기쁘군요.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나로서도 하쓰미 씨가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나는 약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하쓰미 씨 같으면 누구하고도 행복해질 것 같은데 어째서 하필이면 나가사와 같은 사람에게 매이게 됐습니까?"
"아마도 그런 일이란 게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인가 봐요.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나가사와의 말을 빌자면 그건 네 책임이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가 되겠지만요,"
"그렇게 말하겠네요" 하고 나는 동의했다.
"그렇지만 말이에요, 와타나베 씨. 난 그렇게 머리가 좋은 여자가 아니에요 나는 어느 편인가 하면 어리석고 고지식한 여자예요. 시스템이라든가 책임이라든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결혼을 하고, 좋은 사람에게 밤마다 안기고, 그래서 아이를 낳으면 그걸로 좋은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내가 바라고 있는 건 그것뿐이라구요."
"그가 구하고 있는 건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변해요, 안 그래요?"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사회에 나가 세파에 시달리고, 좌절하고, 어른이 되고 그런 것 말입니까?"
"그래요. 그리고 오래 나와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나에 대한 감정이 달라질지도 모르잖아요?"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깁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사람은 다릅니다. 그 사람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설 만큼 의지가 강한 사람이고, 게다가 매일매일 그것을 강화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에 얻어맞으면 더욱 강해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등을 보이느니 차라리 괄태충이라도 삼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쓰미 씨는 도대체 뭘 기대합니까?"
"그렇지만 와타나베 씨, 지금이 나로선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하고 하쓰미는 테이블 위에다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말했다.
"그렇게도 나가사와가 좋습니까?"
"좋아요" 하고 그녀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허어" 하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남아 있던 맥주를 마저 마셨다.
"그만큼 확신을 가지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입니다."
"난 그저 어리석고 고지식한 여자일 뿐이에요" 하고 하쓰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맥주 더 마시겠어요?"
"아니, 이제 됐습니다. 슬슬 일어나야지요. 붕대와 맥주, 고마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그때 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하쓰미는 나를 보고, 전화를 보고, 그리고 다시 나를 보았다.
"안녕" 하고 인사를 한 후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문이 조용히 닫힐 때, 수화기를 집어드는 하쓰미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그것이 내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것은 열한 시 반이었다. 나는 그대로 나가사와의 방으로 가서 노크했다. 그리고 열 번 정도 노크하고 나서야 오늘이 토요일 밤임을 깨달았다.
토요일 밤엔 친척집에 묵는가는 명목으로, 나가사와는 매주 마다 외박 허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넥타이를 풀고, 윗도리와 바지를 벗어서 옷걸이에 건 뒤 파자마로 갈아입고, 이를 닦았다. 그리고 어, 내일이 또 일요일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마치 나흘에 한 번 정도의 간격으로 일요일이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앞으로 두 번 더 일요일이 지나면 나는 스무 살이 된다. 나는 침대에 벌렁 누운 채 벽의 달력을 보면서 암울한 기분이 되었다.
일요일 아침,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상에 앉아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다. 큰 컵으로 커피를 마시고, 마일즈 데이비스의 옛 레코드를 들으면서 긴 편지를 썼다.
창밖에는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방안은 수족관처럼 썰렁했다. 옷상자에서 막 꺼내온 두터운 스웨터에는 방충제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유리창 위쪽에는 통통한 파리 한 마리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바람이 없는 탓인지, 일장기가 고대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걸치던 토가 자락처럼 축축하게 깃대에 엉킨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로 들어왔는지 심약한 얼굴의 말라빠진 누런 개가 정원의 꽃에다 코를 대고 모조리 킁킁킁 냄새를 맡아 가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비가 내리는 날에 개가 꽃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녀야 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다가 펜을 든 오른손의 상처가 아파 오면 그런 빗속의 정원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먼저 레코드 가게에서 일을 하다 손바닥에 깊은 상처를 입은 일을 쓰고, 일요일 밤에 나가사와와 하쓰미, 나 셋이서 나가사와의 외교관 시험 합격의 축하연 비슷한 것을 가졌다고 썼다. 그리고 나는 그게 어떤 음식점이고 어떤 요리가 나왔는지를 설명했다. 요리는 상당한 것이었지만 도중에 분위기가 약간 이상해졌다는 등의 얘기를 썼다.
하쓰미와 당구장에 갔던 일과 관련하여 기즈키와의 이야기를 쓸까 말까 하고 좀 망설이다가 결국은 쓰기로 했다. 써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 기즈키가 죽은 날 - 그가 마지막으로 친 공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건 상당히 어려운 쿠션을 이용해야만 하는 공이었기에, 나는 그게 설마 맞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그런데 아마 우연이었겠지만 그 공이 정확하게 코스를 따라가서, 흰 공과 빨간 공이 녹색의 펠트 위에서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살며시 부딪쳐 그것이 결국 그날의 최종 득점이 됐던 거야. 지금도 눈에 선할 정도로 깨끗하고 인상적이었어. 그리고 그 이후 2년 반 가까이 나는 결코 당구를 친 적이 없지.
그런데 하쓰미와 당구를 친 그날 밤, 나는 첫 게임이 끝날 때까지 기즈키를 떠올리지 않았고, 그랬다는 사살이 나로서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즈키가 죽은 뒤 앞으론 당구를 칠 때마다 그 녀석을 떠올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랬는데도 나는 한 게임이 끝나 자동판매기에서 펩시콜라를 뽑아 마시기 직전까지도 기즈키를 생각조차 안한 거야. 그런데 거기서 갑자기 기즈키가 생각났던 것은, 기즈키와 함께 자주 다니던 당구장에도 펩시 판매기가 있어서, 우린 자주 그 펩시 값을 걸고 게임을 했었기 때문이야.
기즈키를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한 일로, 나는 무언가 그에게 못할 짓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때는 마치 내가 그를 저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거야.
하지만 그날 밤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이런 식으로도 생각했지. 그로부터 이미 2년 반이나 지났다. 그러나 그 녀석은 아직도 열 일곱 살 그대로다, 하고. 하지만 그것은 내 속에서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냐. 그의 죽음이 가져다 준 것은 아직도 선명하게 내 속에 남아 있고, 그 중의 어떤 것은 그 당시보다 오히려 더 선명할 정도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래. 나는 이제 곧 스물이고, 나와 기즈키가 열여섯 살과 열일곱 살 나이에 공유했던 것 중의 어떤 것은 이미 소멸되어 버려서, 그것은 아무리 한탄해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거야. 나는 이 이상 더 잘 설명할 순 없지만 나오코라면 내가 느낀 것,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이해해 주리라고 믿어. 그리고 이런 것을 이해해 줄 사람은 나오코밖에 없다는 생각도 하고 있어.
나는 지금까지 해오던 이상으로 나오코 생각을 하고 있어. 오늘은 비가 오고 있구나,. 비가 오는 일요일은 나를 좀 혼란스럽게 만들어. 비가 오면 빨래를 할 수 없고, 따라서 다리미질도 못하게 되니까. 산책도 못하고, 옥상에서 뒹굴지도 못하지. 책상 앞에 앉아 <카인드 오브 블루>를 자동 반복으로 틀어 놓고 몇 번이고 들으면서, 비내리는 마당 풍경이나 멍하니 바라보는 정도가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전에도 썼지만 나는 일요일엔 태엽을 감지 않아. 그건 탓으로 편지가 너무 길어졌어. 이만 쓰겠어. 그리고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어야겠어. 안녕.
제9장 봄철의 새끼 곰만큼 네가 좋아
이튿날의 강의에도 미도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전화통화를 한 지 벌써 열흘이 지나 있었다. 집에 전화를 걸어 볼까도 생각했지만 자신이 전화를 하겠다던 그녀의 말이 생각나 그만두었다.
그 주의 목요일에 나는 식당에서 나가사와와 마주쳤다. 그는 식사쟁반을 들고 와 내 옆자리에 앉더니, 일전엔 여러 가지로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했다.
"괜찮아요, 나야말로 잘 먹었고" 하고 나는 말했다.
"하긴, 묘한 좀 취직 축하연이었지만 요."
"그러게 말이야." 하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하쓰미하곤 화해가 됐어." 하고 그가 말했다.
"그래야겠지요" 하고 나는 말했다.
"네게도 꽤 심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겁니까, 지금 반성하고 있는 건가요? 어디 몸이 안 좋은 건 아닙니까?"
"그런지도 모르지." 하고 말하고 나서 희미하게 두세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 하쓰미하고 나와 헤어지라고 충고했다면서?"
"당연하지요."
"뭐, 딴은 그렇긴 해."
"그 여자, 좋은 사람이에요" 하고 나는 된장국을 마시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알고 있어" 하고 나가사와는 한숨을 내쉬면 말했다.
"내게는 좀 과분하다 싶게 좋은 여자야."
전화가 온 것을 알리는 버저 소리가 났을 때, 나는 죽은 것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나로서는 무엇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자고 있는 동안에 머리가 물에 잠겨 뇌가 물렁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 십오 분이었지만 그것이 오전인지 오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며칠의 무슨 요일인가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마 오후 여섯 시가 좀 지났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국기 게양이라는 것도 제법 도움이 되는 것인가 보다.
"와타나베, 지금 한가해요?"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금요일."
"지금이 오후?"
"당연하죠. 이상한 사람이야. 지금은 오후, 으음, 여섯 시 십팔 분."
역시 저녁이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 잠에 빠져버린 거다. 금요일 - 하고 나는 재빨리 생각해 보았다. 금요일 밤엔 아르바이트가 없다.
"시간 있어. 어, 지금 어디에 있지?"
"우에노 역. 지금부터 신주쿠로 갈 테니까 거기서 만나지 않겠어요?"
우리는 장소와 시간을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DUG에 도착해 보니, 미도리는 이미 카운터 맨 끝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남성용의 구겨진 흰 스텐드 칼라 코트 아래 얇은 황색 스웨터를 입고, 블루진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손목에는 팔지 두 개를 끼고 있었다.
"뭘 마시고 있어?"
"탐 칼린즈"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나는 위스키 소다를 주문하고 나서야, 그녀의 발 밑에 큰 가방이 놓여 있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을 갔었어요. 막 돌아오는 길이에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어딜 갔었지?"
"나라와 아오모리."
"한꺼번에?" 하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설마, 내가 아무리 별난 애라지 만 나라와 아오모리를 한꺼번에 갈 거 같아요? 따로따로 갔었어요. 두 번으로 나누어서. 나라엔 그와 같이 갔었고, 아오모리엔 혼자서 훌쩍 다녀왔어요."
나는 위스키 소다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미도리가 물고 있는 말보로에 불을 붙여 줬다.
"여러 가지로 힘들었지? 장례식이라든가 그런 것 때문에."
"장례식 같은 건 간단해요. 우린 그런 데 익숙해 있거든요. 검은 옷을 입고,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으면 주위 사람들이 적절히 다 일을 진행해 주니까. 친척 아저씨라든가 동네 사람들이 다들 알아서 술을 사오고, 초밥도 준비하고, 위로도 해주고, 울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고, 자기 좋을 대로 유품을 나눠 갖기도 하고, 아주 편하지요. 피크닉이나 다름없어요. 날이면 날마다 병간호에 시달리던 때에 비하면 피크닉이에요. 지칠 대로 지쳐서 눈물도 나오지 않는 걸요, 언니도 나도. 기운이 빠져서 눈물도 나오지 않는 거예요, 정말로. 하지만 그러면 주위 사람들은 이 집 딸들은 차갑다,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고 흉을 봐요. 그래서 우린 오기로 더 울지 않지요. 우는 척해도 안 될 건 없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화가 나니까. 다들 우리가 우는 걸 기대하고 있으니까 더욱 울어 주지 않는 거예요. 나와 언니는 그런 점에선 마음이 맞아요. 성격은 꽤 다른데도."
미도리는 팔지 소리를 찰랑찰랑 내면서 웨이터를 불러, 탐 칼린즈를 추가하고 피스타치오 한 접시를 주문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다들 돌아간 뒤에 언니와 둘이서 우린 새벽까지 청주를 마셨어요. 큰 병으로 한 병 반 정도.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욕을 있는 대로 다 했지요. 그 녀석은 바보 천치다, 개똥이다, 비루먹은 개다, 돼지다, 위선자다, 도둑놈이다, 하고 마냥 지껄였어요. 그랬더니 가슴이 후련해지더군요."
"그랬겠지."
"그리고 잔뜩 취해서 잠자리에 들어 푹 잤어요. 정신없이. 도중에 전화가 걸려와도 아예 무시하고 쿨쿨 잔 거예요.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둘이서 초밥을 시켜다 먹으며, 의논해서 결정했어요. 당분간 가게 문을 닫고 서로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보자고.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애써 왔으니까 그 정도는 해도 되잖겠어요? 그래서 언니는 그이와 둘이서 마음 편히 지내고, 난 그와 둘이서 2박 3일 정도 여행을 하면서 실컷 즐겨나 보자고 생각한 거예요."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귀 언저리를 뻑뻑 긁었다.
"미안해요, 말이 거칠어서."
"괜찮아. 그래서 나라에 간 거로군."
"그래요, 옛날부터 난 나라가 좋았어요."
"그래서 실컷 즐겼어?"
"아니 한 번도..."하고 그녀는 대답한 후 한숨을 쉬었다.
"호텔에 도착해 가방을 내던진 순간에 생기가 시작된 거예요, 거침없이."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빨랐다구요. 울고 싶더라니까, 정말. 여러 가지로 긴장해 있어서 빨라진 것 같아요. 그도 끙끙 화를 내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에요, 그는. 하지만 할 수 없잖아요.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닌데, 게다가 난 양이 많아요, 그게. 통증도 심하고. 처음 이틀 정도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요. 그러니까 그럴 때는 나와 만나지 말자구요."
"그리고 싶지만 어떻게 그걸 알지?" 하고 나는 물었다.
"그럼 나, 생기기 시작되면 2, 3일 동안 빨간 모자를 쓸게요. 그럼 알 수 있지 않아요?" 하고 미도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빨간 모자를 쓰고 있으면 길에서 만나도 못 본척 도망가면 돼요."
"차라리 이 세상 여자들이 모두 그래 주면 좋을 텐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나라에선 뭘 했지?"
"할 수 없이 사슴과 놀기도 하고, 여기저기 산책만 하다 돌아왔어요, 정말 엉망이지 뭐예요. 그와 싸우고는 그 뒤로 지금껏 만나지도 못하고. 뭐, 그렇게 해서 도쿄로 돌아와 2, 3일 동안 아무 일도 안하고 있다가, 이번엔 혼자서 마음 편하게 여행이나 다녀오자고 아오모리에 갔던 거예요. 히로사키에 친구들이 있어서 한 이틀 동안 오모리에 묵고, 그 뒤에는 시모키타라든가 탓피 등을 돌았어요. 좋은 곳이에요, 굉장히. 나 그 지방 지도의 해설서를 쓴 적이 있거든요, 한 번. 와타나베는 그곳에 가본 적 있어요?" 없다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하고 미도리는 탐 칼린즈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피스타치오의 껍질을 벗겼다.
"혼자 여행을 하면서 줄곧 와타나베를 생각했어요.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와타나베가 있었으면 했어요."
"어째서?"
"어째서?" 하고 되뇌이니 미도리는 허무를 응시하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라니, 무슨 말이에요, 그게?"
"즉, 어째서 나를 생각해 냈느냐는 거야."
좋아하니까, 그런 거 뻔하지 않아요. 그 밖에 무슨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도대체 어느 누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네겐 애인도 있고, 나를 생각할 까닭이 없잖아" 하고 나는 위스키 소다를 천천히 마시면서 말했다.
"애인이 있다고 해서 자기를 생각하면 안 되는 건가?"
"아니, 그런 뜻을 아니지만..."
"봐요, 와타나베" 하고 미도리는 검지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경고해 두지만 지금 내 속엔 한 달분 가량의 이런저런 것들이 쌓이고 엉키어 있어서 부글부글 끓고 있어요, 지독하게. 그러니 더 이상 심한 말은 하지 말아 줘요. 그렇잖으면 나, 여기서 엉엉 울게 될 것 같고, 나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밤새도록 울어요. 그래도 좋아요? 난 말이에요, 주위와 관계없이 짐승처럼 운다구요, 정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스키 소다를 두 잔째 주문하고, 피스타치오를 먹었다. 세이커가 흔들리고 유리잔이 부딪치고 제빙기에서 얼음을 뜨느라 들그락 소리가 나는 뒤꼍에서, 사라 본이 옛 러브 송을 부르고 있었다.
"하긴 탐폰 사건 이후, 나와 그의 사이는 좀 험악해졌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탐폰 사건?"
"음, 한 달쯤 전에 나와 그, 그리고 그의 친구들 대여섯 명이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거든요. 그때 내가, 우리 이웃집의 어떤 부인이 재채기를 하는 순간 그 탐폰이 훌렁 빠져 버렸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우습지요?"
"우스운데" 하고 나는 웃으며 동의했다.
"다들 박수를 치며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만 화를 벌컥 냈어요. 그런 저질스런 이야기를 한다고. 그래서 분위기가 왕창 깨져 버렸어요."
"흐음."
"좋은 사람이지만 그런 것엔 편협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예를 들면 내가 흰색 아닌, 색깔이 있는 속옷을 입으면 화를 내거든요. 편협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그런거?"
"으음, 그렇지만 그런 건 기호의 문제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나로서는 그런 인물이 미도리를 좋아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움이었지만, 그건 입밖에 내지 않기로 했다.
"자기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아무 일도 없었어. 줄곧 같았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약속한 대로 미도리를 생각하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해 보았던 일을 떠올렸다. 나는 주위에는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미도리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미도리는 얼굴을 빛내면서 손가락을 딱 하고 퉁겼다.
"어땠어요? 잘 됐어요?"
"도중에 왠지 창피해져서 그만뒀어."
"왜, 안돼요?"
"그래."
"유감이군요" 하고 미도리는 곁눈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창피해하거나 하면 안 돼요. 지독하게 야한 생각을 해도 좋으니까. 내가 좋다는데 꺼릴게 없잖아요. 그래, 다음엔 내가 전화로 말해 줄게요. 아아... 거기 거기... 아아, 좋아... 더 못 참겠어, 나, 될 것같아... 아아, 거긴 말고... 그런 것. 그걸 들으면서 자기가 하는 거야."
"기숙사 전화는 현관 옆 로비에 있어서, 다들 그 앞을 지나 출입하게 되어있어." 하고 나는 설명했다.
"그런 데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다간 사감한테 맞아 죽는다구, 틀림없이."
"그래? 그럼 어쩌지?"
"어쩌긴. 다시 나 혼자 어떻게 해보아야지."
"힘을 내요."
"으음."
"내가 섹시하지 못한 거에요, 존재 그 자체가."
"아니, 그런 문제가 아냐" 하고 내가 말했다.
"뭐라고 할까, 이를테면 입장의 문제야."
"난 말이야, 등이 몹시 민감해요, 손으로 살며시 애무해 주면."
"명심해 둘게."
"저, 지금부터 야한 영화 보러 안 갈래요? 끔찍한 SM인데"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미도리와 나는 장어집에 들러 장어를 먹고, 신주쿠에서도 몇 안 되는 그런 초라한 영화관에 들어가, 성인 영화 세 편을 연속해서 보았다. 신문을 사서 보니까 SM물은 거기서밖에 상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냄새가 나는 영화관이었다. 다행히도 우리가 들어갔을 때, 바로 그 SM영화가 시작되었다. 직장 여성인 언니와 고교생인 여동생이 치한 몇 명에게 납치되어 감금당한 채, 변태적인 폭행을 당하는 거였다. 치한들이 여동생을 폭행하겠다고 협박하며, 언니에게 온갖 잔인한 행위를 저지르는 가운데, 언니는 마침내 완전한 자학성 변태자가 되고, 여동생을 그러한 광경을 강제로 낱낱이 보고 있다가 머리가 이상해진다는 줄거리였다. 분위기가 지나치게 굴절되어 암울한 데다 비슷한 장면만 반복되고 있어서, 나는 도중에 좀 지겨워졌다.
"내가 여동생이라면 저 정도로 미치진 않겠어요. 좀더 열심히 보고 있지." 하고 미도리가 나에게 말했다.
"그럴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지만 저 동생 말이야, 처녀 고교생치곤 유두가 너무 검다는 생각 안 들어요?"
"정말."
미도리는 매우 열심히 그 영화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처럼 열성적으로 본다면 입장료쯤은 너끈히 본전을 뽑고도 남을 거라고 나는 감탄했다. 미도리는 무슨 생각이 날 적마다 일일이 그걸 나에게 보고했다.
"어머머, 불쌍해, 저런 짓을 다하다니" 라든가,
"지독해요, 셋에게 한꺼번에 당하면 망가지겠어" 라느니,
"와타나베, 나도 누가 저렇게 한 번 해주면 좋겠어." 하는 따위였다. 나는 영화 구경보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쪽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휴식 시간에 장내를 둘러보니, 미도리 이외의 여자 손님은 없는 것 같았다. 가까이에 앉아 있던 학생같이 보이는 젊은 사내는 미도리를 보자 멀리 자리를 옮겨갔다.
"저 말이지 와타나베"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이런 거 보고 흥분돼요?"
"뭐, 그야 때때로" 하고 내가 말했다.
"이런 영화란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거니까."
"그러니까 그런 장면이 나오면 여기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의 그게 일제히 스탠드 업? 서른개 마흔 개가 일제히? 그런 걸 생각하면 좀 이상한 기분이 안 들어요?"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다고 나는 말했다.
두 번째 영화는 비교적 정상적인 영화였다. 그러나 정상적인 만큼 첫 번째 것보다 더 따분했다. 구순 성애가 너무나 흔히 나오는 영화였는데, 그런 장면마다 효과음이 영화관 내에 크게 울려 펴졌다. 그러한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이 기묘한 혹성 위에서 삶을 보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무엇인가 이상한 감동을 느꼈다.
"누가 저런 소리를 생각해 냈을까?" 하고 나는 미도리에게 말했다.
"나, 저 소리 좋아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섹스가 진행될 때의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소리가 난다는 걸 난 그때까지 실제로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침대가 삐꺽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한 장면들이 그칠 줄 모르고 이어져 나갔다.
미도리는 처음엔 재미있어 했으나 차차 지겨워졌던지 그만 나가자고 나를 끌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심호흡을 했다. 신주쿠 거리의 공기가 그때처럼 상쾌하게 느껴진 것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재미있었어"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다음에 또 구경 와요."
"몇 번 봐도 다 그게 그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할 수 없잖아요, 우리도 늘 그게 그거니까."
듣고 보니 사실 그건 그랬다.
영화관에서 나와 우리는 다시 다른 바에 들어가 술을 마셨다. 나는 위스키를 마셨고, 미도리는 뭔지 알 수 없는 칵테일을 서너 잔 마셨다. 그리고는 바에서 나오자마자 미도리는 나무에 올라가 보고 싶다고 했다.
"이 부근엔 나무 같은 건 없어. 그리고 그렇게 휘청거려선 나무에 못 올라간다구" 하고 나는 말했다.
"자기는 언제나 분별력 있게 굴면서 사람을 기죽여요, 취하고 싶어서 취한 거예요. 그것으로 좋은 거 아네요? 취해도 나무쯤은 올라갈 수 있다구요. 흐응, 높디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매미처럼 오줌이나 뿌려 주는 거예요."
"지금 화장실에 가고 싶은 거지?"
"그래요."
나는 신주쿠 역의 유료 화장실까지 미도리를 데려가서는, 동전을 내고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매점에서 석간신문을 사서 그걸 읽으면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미도리는 좀처럼 나오질 않았다. 15분이 지나 좀 걱정스러워서, 가보아야 하나, 하고 생각할 즈음에야 겨우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 얼굴이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미안해요, 앉아 있다가 그만 졸아 버렸지 뭐예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기분은 어때?" 하고 나는 코트를 입혀 주면서 물었다.
"그렇게 좋진 않아."
"집까지 바래다줄게" 하고 나는 말했다.
"집에 가서 목용하고 푹자면 다 풀릴 거야. 피곤해서 그래."
"집엔 안 가요. 지금 집에 돌아가도 아무도 없고, 그런 데서 혼자 자긴 싫어요."
"이런, 그럼 대체 어떻게 할 거야?" 하고 내가 물었다.
"이 근처 러브호텔에 들어가서 우리 둘이 껴안고 자는 거야. 아침까지 푹. 그리고 아침이 되면 여기 아무데서나 아침 식사를 하고 함께 학교에 가요."
"처음부터 그럴려고 날 불러냈나?"
"물론이에요."
"그럼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을 불러내야 했잖아. 아무리 봐도 그게 정상이잖아. 애인이란 그럴 때를 위해 있는 거라구."
"하지만 나, 자기와 함께 있고 싶어요."
"그럴 순 없어" 하고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첫째 난 열두시 까지 기숙사에 돌아가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무단외박이 되니까. 전에 한 번 그랬다가 혼이 났어. 둘째 나 역시 여자와 자면 아무래도 참을 수 없으니까, 그걸 참으면서까지 끙끙거리긴 싫어. 정말, 무리하게 떼를 쓸지도 모르니까."
"날 때리고, 결박하고 뒤에서?"
"이것 봐, 농담이 아니야, 이건."
"하지만 나 외로워요. 지독하게 외로워요. 나도 미안한 줄은 알지요. 아무것도 주지는 않으면서 온갖 것을 요구만 하고. 제멋대로 지껄이고, 불러내고, 끌고 다니고. 하지만 내가 그럴 수 있는 상대는 자기밖에 없어. 지금까지 20평생 동안 난 단 한 번도 내 응석이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구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전혀 모른 척했고, 그 사람도 그런 타입이 아니에요. 응석을 부리면 화를 내거든. 그리곤 싸움을 하죠. 그러니까 이런 말은 정말 자기에게밖에 못해요. 그리고 나, 지금 지칠 대로 지쳐 있어요. 누구한테 선가 귀엽다든가 예쁘다든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잠들고 싶어요. 그저 그것뿐 에요. 눈을 뜨면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있을 테고, 두 번 다시 이런 일방적인 요구는 하지 않겠어요, 절대로. 아주 착한 애가 될 테니까."
"그래도 곤란해."
"부탁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나, 여기 주저앉아서 밤새도록 엉엉 울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제일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과 자버릴 거에요."
나는 어쩔 수 없이 기숙사에 전화를 걸어 나가사와를 바꿔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기숙사에 돌아와 있는 것처럼 손을 써 줄 수 없겠는가 하고 부탁했다. 여자애와 지금 같이 있거든요, 하고 나는 말했다. 알았어, 그런 일이라면 기꺼이 힘이 되어 주지, 하고 그는 흔쾌히 대답했다.
"명패를 재실 쪽으로 바꿔 놓을 테니까 걱정말고 놀다 와. 내일 아침 내 방 창문으로 해서 들어오면 될 거야" 하고 그는 말했다.
"미안합니다. 신세는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고 나서 나는 전화를 끊었다.
"잘 됐어?"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그럭저럭" 하고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디스코라도 추러 가요."
"너 피곤하잖아?"
"그런 거라면 전혀 관계 없다구요."
확실히 춤을 추고 있는 동안에, 미도리는 조금씩 기운을 회복해 가는 것 같았다. 위스키 코크를 두 잔 더 마시더니, 이마에 땀이 밸 때까지 춤을 추었다.
"아주 즐거워" 하고 미도리는 테이블에 앉아 한숨을 돌리면서 말했다.
"이렇게 춤을 추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야. 몸을 움직이니까 정신도 해방되는 것 같아요."
"너야 늘 해방되어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지도 못해" 하고 그녀는 방긋 웃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구, 기운이 나니까 배도 고프네요. 피자라도 먹을래요?"
나는 내가 잘 가는 피자 하우스로 그녀를 안내한 후, 생맥주와 안초비 피자를 주문했다. 나는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기 때문에 열두 조각중 넷만을 먹고, 나머지는 미도리가 모두 먹어치웠다.
"꽤 회복이 빠르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창백하고 휘청거리더니" 하고 나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응석을 받아주었기 때문이야."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그래서 받침대가 필요 없게 된 거예요. 그런데 이 피자 정말 맛있군요."
"저, 정말 집에 지금 아무도 없어?"
"그래요, 언니도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했어요. 언니는 겁이 많아서 내가 없으면 혼자 못 자요."
"러브호텔 같은 덴 가지 말자."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런 데 가봤자 허무해질 뿐이야. 그런 거 집어치우고 너희 집으로 가자. 내가 덮은 이불 정도야 있겠지?"
미도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우리 집으로 가요."
우린 야마노테선 전철을 타고 오쓰카까지 가서, 고바야시 서점의 셔터를 올렸다. 셔터에는 휴업 중이란 쪽지가 붙어 있었다. 셔터는 오랫동안 올려지지 않았던 모양으로, 어두운 점포 안에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서가의 절반쯤이 비어 있었고, 잡지는 거의 가 반품할 양으로 묶여져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점포는 더 휑해 보였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마치 파도에 의해 밀어 붙여진 해변의 폐선처럼 보였다.
"가게를 계속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 하고 내가 물었다.
"팔기로 했어요" 하고 미도리가 쓸쓸히 말했다.
"팔아서 언니와 그 돈을 반으로 나눌 거예요. 그리고 누구의 보호도 받지 않고 몸 하나로 살아갈 거예요. 언니는 내년에 결혼하고 나는 앞으로 3년 남짓 대학에 다니면 돼요. 그만한 돈은 될 거예요. 아르바이트도 할 거고, 가게가 팔리면 어디 아파트라도 빌려서 당분간 언니와 둘이 살려고 해요."
"가겐 팔릴 것 같아?"
"그럴 것 같아요. 아는 사람 중에 털실 가게를 열겠다는 사람이 얼마 전부터 여길 팔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요.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가게를 장만하고, 빚을 조금씩 갚으며, 갖은 애를 다 썼는데 결국 남은 것이란 거의 아무것도 없잖아요. 마치 물거품이 스러지듯 사라진 거예요."
"네가 남아 있잖아" 하고 나는 말했다.
"나?" 하고 미도리는 반문하더니 야릇하게 웃었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킨 후 토해 냈다.
"그만 위로 올라가요. 여긴 추워요."
2층으로 올라가자 그녀는 나를 식탁 앞에 앉혀놓고 목욕물을 끓였다. 그사이 나는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엽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목욕물이 데워질 때까지 그녀와 나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엽차를 마셨다.
그녀는 탁자 위에 턱을 괴고 한동안 내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와, 냉장고 온도 조절 장치의 돌아가다 멈추다 하는 소리 이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계는 이미 자정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와타나베,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자기 꽤 재미있게 생겼네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그런가" 하고 나는 조금은 기분이 상해서 대꾸했다.
"나 역시 얼굴이 잘 생긴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자기 얼굴은 뭐랄까, 자꾸 보고 있으면 차츰 이 사람이면 됐다 싶어지거든요."
"나 자신도 가끔 날 그렇게 생각하지. 뭐, 그런대로 됐다고 말이야."
"나, 지금 나쁘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난 말이지, 감정 표현이 아주 서툴러요. 그래서 자주 오해를 받지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거야. 이 말은 조금 전에도 했던가요?"
"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말하자면 나도 조금씩 남자에 대해 배우고 있는 거예요."
미도리는 말보로 담배를 들고 오더니 한 개비를 꺼내 피웠다.
"최초가 제로라면 배울 것도 많은 법이지."
"그럴 테지."
"아 그래요. 우리 아버지한테 향을 피워 주겠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나는 그녀 뒤를 따라 영정이 있는 방으로 가서 향을 피우고 합장을 했다.
"나 말이야, 얼마 전에 아버지 사진 앞에서 옷을 홀랑 다 벗었댔어요. 다 벗고 알몸을 보여 드렸어요, 요가 식으로 앉아서. 아버지, 이게 젖이고, 이게 배꼽이고..."
"그건 또 왜?" 하고 나는 아연해서 물었다.
"그저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내 존재의 절반은 아버지의 정자잖아요? 보여 드리면 어때요. 이게 당신의 딸이라고. 저 좀 취한 탓도 있었지만."
"흐음."
"그때 언니가 들어오더니 기겁을 하더군요. 내가 아버지 영정 앞에서 홀랑 벗고 서 있었으니 기겁을 할 수밖에..."
"으음, 그랬겠지."
"그래서 내 뜻을 설명해 줬어요. 이러이러하다고. 그러니 언니도 내 옆에 앉아 옷을 벗고 아버지한테 보여 드리라고. 하지만 언니는 벗지 않았어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 나가 버리더군요. 그런 면에서 언니는 너무 보수적이에요."
"비교적 정상인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음, 자기는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어요?"
"난 초면인 사람을 대하는 데 퍽 어설픈 편이야. 그런데 그분과는 둘이 있어도 고통스럽지 않았어. 그런 대로 부담스럽지 않았으니까. 여러 가지로 이야기도 했고."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에우리피데스."
미도리는 몹시 즐겁다는 듯 깔깔댔다.
"정말 별스럽군요. 죽음을 앞두고 고통을 겪고 있는 초면의 병자에게 난데없이 에우리피데스 이야기를 하다니! 아마도 그런 사람은 없을 거예요."
"아버지 영정 앞에서 벌거벗는 딸도 아마 없을 거야."
미도리는 깔깔거리며 웃더니 불간이 종을 땡 하고 쳤다.
"아버지 편히 쉬세요. 우린 지금부터 즐겁게 지낼 테니까 안심하고 주무세요. 이젠 고통스럽지 않지요? 돌아가셨으니까 아프지도 않을 거예요. 아직도 아프시면 하느님한테 대드세요.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고요. 천당에서 어머니 만나 사이좋게 지내세요. 소변 시중을 들 때 그걸 보았는데, 정말 훌륭했어요. 그러니 힘내세요. 그럼 편히 주무세요"
우리는 교대로 목욕을 하고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나는 미도리의 아버지가 몇 번밖에 사용 안한, 새것과 다름없는 파자마를 입었다. 조금 작은 듯했으나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미도리는 불단이 있는 방에 내 이불을 펴주었다.
"불단 앞인데 무섭지 않아요?"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무섭지 않아. 아무것도 나쁜 짓을 한 게 없으니까"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내가 잠들 때 까진 곁에 있으면서 안아 줘요, 응?"
"좋아."
나는 미도리의 작은 침대 가장자리에서 몇 번이나 굴러떨어질 뻔하면서도, 줄곧 그녀를 안고 있었다. 미도리는 내 가슴팍에 코를 밀어붙이고, 내 허리에 손을 감고 있었다. 나는 오른손을 그녀의 등으로 돌리고, 왼손으론 침대를 잡은 채 떨어지지 않도록 받치고 있었다. 성적으로 달아오를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내 코앞엔 머리가 있었고, 그 짧게 컷한 머리카락이 내 코를 간지럽혔다.
"저, 저, 뭔가 말해 줘요" 하고 미도리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무슨 이야기?"
"뭐라도 좋아요. 내 기분이 좋아질 만한 것."
"미도리" 하고 그녀가 말했다.
"이름을 불러 줘요."
"너무 사랑스러워, 미도리" 하고 나는 고쳐 말했다.
"너무라니 얼마만큼?"
"산이 무너져 바다가 메워질 만큼 사랑스러워."
미도리는 얼굴을 들더니 나를 보았다.
"자긴 정말 표현 방법이 아주 독특해요."
"네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흐뭇한데"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더 멋진 말을 해줘요."
"네가 나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철의 곰만큼."
"봄철의 곰?" 하고 미도리가 또 얼굴을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봄철의 곰이라니?"
"봄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 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네가 좋아."
미도리는 깊숙이 내 품에 안겨 왔다.
"최고"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만큼 내가 좋으면 내 말을 뭐든지 들어주겠죠? 화 안 내죠?"
"그럼."
"그리고 날 언제까지나 소중히 생각해 줘요."
"물론"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짧고 부드러운, 사내 애 같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걱정마, 모든 게 다 잘 될 테니까."
"하지만 겁이 나요, 나"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미도리의 어깨를 가볍게 안고 있자니, 어느 사이엔가 그녀의 어깨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가지런한 숨소리도 들려왔기에, 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부엌으로 가서 맥주를 마셨다.
나는 전혀 잠이 오지 않아서 책이라도 읽을까 하였지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책 같은 게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미도리의 방으로 가서 책꽂이의 책이라도 찾아볼까 했지만, 발소리가 그녀를 깨우게 될까 봐 그만두었다.
한참 멍하니 맥주를 마시는 동안에 아, 그래, 이 집은 책방이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전 등을 켜고 문고본을 살펴보았다. 읽을 만한 것이 별로 없었고, 태반은 벌써 읽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뭔가 읽을거리가 필요했기에 오랜 재고로 등표지가 변색 되어버린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를 고르고, 책값에 해당되는 돈을 카운터에 놓았다. 적어도 그만큼은 고바야시 서전에 재고가 줄어든 셈이다.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부엌 테이블에 앉아 그 책을 내리읽었다. 처음으로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은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였다. 그리고 8년 후, 나는 여자의 집 부엌에서 한밤중에, 그것도 여자 친구의 죽은 아버지가 생전에 입었던 사이즈가 작은 파자마를 입은 채 같은 제목의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참 기묘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만일 그러한 상황에 놓이지 않았다면, 내가 수레바퀴 밑에서를 다시 읽는 일이란 없었을 것이다.
수레바퀴 밑에서는 진부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나쁘지는 않은 소설이었다. 나는 밤이 깊어 정적 어린 부엌에서 나름대로 제법 즐기며 그 소설을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어 갔다. 선반 위에 먼지 쌓인 브랜디가 한 병 있기에 커피잔에 조금 따라 마셨다. 브랜디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긴 하였지만 잠을 가져다주진 않았다.
세 시 조금 전에 조용히 미도리를 살피러 갔지만, 그녀는 상당히 고단했던 모양으로 푹 잠이 들어있었다. 창밖에 서 있는 상점가의 가로등이 달빛처럼 희뿌옇게 방안을 비추고 있었고, 그 빛에 등을 돌린 자세로 그녀는 자고 있었다. 미도리의 몸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귀를 가까이 대어 보니 숨결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부친을 꼭 닮은 자세라고 나는 생각했다.
침대 옆엔 여행 가방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흰 코트가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었다. 책상 위는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그 앞의 벽엔 스누피가 그려진 달력이 걸려 있었다.
나는 창문이 커튼을 조금 열고 인적 없는 상가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상점마다 다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술집 앞에 줄지어 있는 자동판매기들만이 몸을 움츠린 모습으로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거리 트럭의 윙윙거리는 타이어 소리가 이따금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진동시켰다. 나는 부엌으로 돌아가 브랜디를 한 잔 더 마신 다음 계속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었다.
그 책을 다 읽어갈 무렵, 하늘은 이미 밝아 오고 있었다. 나는 물을 끓여 인스턴트커피를 마시고, 테이블 위에 있던 메모지에 볼펜으로 편지를 썼다. 브랜디를 조금 실례했다, 수레바퀴 밑에서를 샀다, 날이 밝았으니 돌아간다, 안녕, 이라고 나는 썼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잠들어 있는 너는 정말 사랑스러웠어 하고 덧붙여 썼다. 그리고 나서 커피잔을 씻고, 부엌 전 등을 끄고, 계단을 내려와 조용히 셔터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웃 사람들이 보면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하고 걱정을 했지만, 아침 여섯 시 이전에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었다. 까마귀가 지붕 위에 앉아 주변을 노려보듯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미도리 방의 핑크색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을 잠깐 올려다본 뒤 전철역까지 걸어갔고, 종점에서 내려 기숙사까지 또 걸었다.
아침 식사를 하는 대중식당이 문을 열었기에 거기서 따뜻한 밥과 된장국, 그리고 배추절임과 계란 라이를 먹었다. 그리고 기숙사 뒤켠으로 돌아가 1층의 나가사와의 방 창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나가사와는 금방 창문을 열어 주었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라도 마실 텐가?" 라고 그는 말했지만 나는 사양했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돌아가, 이를 닦고는 바지를 벗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꿈도 없는, 무거운 납덩이와 같은 잠이 찾아들었다.
나는 매주 나오코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녀에게서도 몇 통인가의 편지가 왔다. 그리 긴 편지는 아니었다. 11월에 드니 점점 아침저녁으로 더 추워져 간다고 편지에 씌어 있었다.
당신이 도쿄로 돌아가 여기에서 없어져 버린 것과 가을이 깊어진 것이 거의 동시였기 때문에, 내 몸 한구석의 휑하니 빈 구멍이 나 버린 듯한 기분은 당신이 없어진 탓인지 계절의 탓인지 얼마 동안은 제대로 분간을 못했어요.
레이코 언니와는 자주 당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 편지에 안부 전해 달라는 부탁도 받았고, 레이코 언니는 언제나 다름없이 내게 친절해 대해 주고 있어요. 그녀가 없었던들 여기의 생활을 내가 견뎌 낼 수 있었을까 의문스러워요.
외로워지면 나는 울어 버려요. 울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레이코 언니는 말하지요. 하지만 외로움이란 정말 괴로운 것이에요. 내가 외로워하고 있으면 밤의 어두움 속에서 온갖 사람들이 말을 걸어오곤 해요. 밤에 나무들이 바람 곁에 사각사각 소리를 내듯 온갖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 와요. 이미 저승 사람이 된 기트키나 언니와도 그럴 때 많은 이야기를 하지요. 그들 역시 외로워서 말상대를 찾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외롭고 고통스러운 밤엔 자주 당신의 편지를 되읽곤 해요. 밖에서 들어오는 대부분의 것은 나의 머리를 혼란시키지만, 당신이 써서 보내 주는 당신 주변의 세계만은 나를 더없이 편안하게 해줘요. 이상하죠,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나는 몇 번이나 다시 읽게 되고, 레이코 언니도 마찬가지로 몇 번은 다시 읽어요. 그리고 그 내용을 두고 둘이서 이야길 하곤 해요. 미도리의 부친에 관한 이야기가 난 퍽 좋았어요. 우린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당신의 편지를, 몇 안 되는 우리 오락 중의 하나로 - 편지는 여기선 오락이에요 - 항상 즐겁게 기다리고 있어요.
나도 되도록 시간을 내서 편지를 쓰려고 애는 쓰지만, 편지지를 대하기만 하면 마음이 곧 가라앉고 말아요. 이 편지도 지금 온갖 힘을 다해 쓰고 있는 거예요.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고 레이코 언니에게 꾸지람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 줘요. 난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일, 전하고 싶은 말들이 많아요. 하지만 그것들이 글이 되어 나와 주질 않아요. 그래서 나는 편지 쓰기가 여간 고통스럽지 않답니다.
미도리라는 여자는 재미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 편지를 읽은 후 그녀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 같다고 말하니까, 레이코 언니는 당연하지, 나도 와타나베를 좋아하는 걸 하고 말했어요.
우린 요즘 매일같이 송이버섯도 캐고 밤도 주워서, 그걸 먹고 있어요. 밤밥이나 송이버섯 밥이 계속되고 있지만, 아주 맛이 있고 물리지도 않아요. 그러나 레이코 언니는 여전히 조금밖에 안 먹고, 담배만 계속 피우고 있어요, 새들도 토끼들도 잘 있어요, 안녕.
나의 스무 살 생일이 3일 지난 뒤에 나오코로부터 소포가 왔다. 그 속에는 포도색의 라운드 스웨터와 편지가 들어있었다.
"생일 축하해요" 하고 나오코는 적고 있었다.
당신의 스무 살이 행복하기를 빌고 있어요. 나의 스무 살은 어쩐지 엉망으로 끝날 것 같지만, 당신이 내 몫까지 모두 행복해진다면 더 이상이 기쁨이 없을 것 같아요. 이건 진심이에요.
이 스웨터는 레이코 언니와 내가 반반씩 짠 거예요. 나 혼자서 했더라면 아마 내년 발렌타인 데이까지 걸렸을 거예요. 잘 짜여진 절반이 그녀의 솜씨고, 잘 못 짜여진 절반이 내 솜씨에요.
레이코 언니는 무엇을 해도 솜씨가 좋아서, 그녀를 보고 있으려면 나 스스로가 한심하게만 느껴져요. 내가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란 결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안녕, 건강해요.
레이코가 쓴 짧은 메시지도 들어있었다.
잘 있어요? 당신에게 나오코는 최고의 행복과 같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저 손재주 없는 쓸모없는 여자에 지나지 않아요. 그래도 뭐, 간신히 때맞춰 스웨터를 완성 시켰어요. 어때요, 멋지죠? 색깔과 모양은 둘이서 결정했어요. 생일을 축하해요.
제10장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말 것
1969년이라는 해는, 나에겐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진창을 떠올리게 한다. 한 발짝 발을 떼어놓을 적마다 신발이 훌렁 벗겨질 것만 같은 깊고 끈적한 진창이다. 그러한 진창 속을 나는 무척이나 힘겹고 힘겹게 걷고 있었다. 앞에도 뒤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 암울한 빛의 진창만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마저도 그러한 나의 걸음걸이에 맞추어 느리게 뒤뚱뒤뚱 흐르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이미 저만큼 앞장서서 가고 있었으나, 나와 나의 시간만은 진창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내 주위의 세계는 크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존 콜트레인을 비롯한 이런저런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들은 변혁을 부르짖었고, 그 변혁은 바로 가까운 저 길모퉁이에까지 다가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모든 사건은 아무런 실체가 없는, 전혀 무의미한 배경 그림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거의 고개를 처박다시피 숙이고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내 눈에 비쳐지는 것은 무한히 계속되는 진창뿐이었다. 오른발을 앞에 내딛고, 그리고 또 왼발을 들어 올렸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실치가 않았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조차 없었다. 그저 어디론가 가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스무살이 되었고 가을은 겨울로 바뀌어 갔지만, 내 생활에 변화다운 변화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런 감흥도 없이 대학에 다니고, 일주일에 세 번 아르바이트를 하는가 하면, 이따금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고, 일요일이 되면 빨래를 하고, 나오코에게 긴 편지를 썼다. 때때로 미도리와 만나 식사를 하거나 동물원에 가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고바야시 서점을 매각하는 일은 잘 진행되어, 그녀와 그녀의 언니는 지하철 묘가다니 역 근처에 2DK 짜리 아파트를 빌려 살게 되었다. 언니가 결혼하면 거길 나와서 다른 아파트를 빌릴 거라고 미도리는 말했다.
나는 한 번 그곳에 초대되어 점심을 대접받았다. 양지바른 깨끗한 아파트였는데, 미도리는 서점에서 살 때 보다는 생활이 퍽 즐거운 듯이 보였다.
나가사와 선배가 몇 번인가 여자 사냥을 가자고 유혹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일이 있다고 거절했다. 모든 것이 번거롭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와 자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밤거리에 나가 술을 마시고, 적당한 여자를 찾아내고, 이야기를 나누고, 호텔에 간다는 과정을 생각하니 아무래도 지겨웠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염없이 되풀이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싫증도 내지 않는 나가사와라는 사나이에게 새삼스럽게 외경스러움을 느꼈다.
하쓰미에게 그런 말을 들은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름도 알 수 없는 하찮은 여자와 자느니 나오코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편이 나에게는 행복스러웠다. 초원의 한가운데서 나를 사정으로 이끌어 준 나오코의 손가락의 감촉은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12월 초에 나오코에게 편지를 보내, 겨울 방학에 그곳에 가도 좋은가를 물었다. 레이코 여사가 대신 답장을 주었다. 꼭 와줄 것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린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나오코는 조금 편지 쓰기가 어려워서 내가 대신 쓴 거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상태가 나쁜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진 말라, 파도 같은 것이 일고 있을 따름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대학이 방학에 들어가자 나는 배낭에 짐을 챙기고, 설화를 신은 후 교토로 떠났다. 그 기묘한 의사가 하던 말대로 눈이 쌓인 산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지난번처럼 나오코와 레이코 여사의 방에서 이틀을 묵었고, 지난번과 거의 비슷한 사흘을 보냈다. 해가 저물면 레이코 여사는 기타를 쳤고,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낮에는 피크닉 대신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즐겼다.
스키를 신고 한 시간쯤 산속을 달렸더니 숨이 차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한가한 시간에는 모두가 제설 작업하는 걸 도왔다. 미야타라고 하는 그 기묘한 의사는 또 우리들의 저녁 테이블에 찾아와서, 왜 사람의 중지는 인지보다 길고, 발가락은 그 반대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수위 오무라 씨는 또 도쿄에 돼지고기 이야기를 했다 레이코 여사는 내가 선물 대신 들고 간 레코드판을 받고 몹시 기뻐해 주었고, 그중의 몇 곡은 악보로 옮겨 기타로 연주했다.
가을에 왔을 적보다 나오코는 훨씬 말수가 적어져 있었다. 셋이 있으면 그녀는 거의 말이 없었고, 소파에 앉아서 그저 싱글싱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만큼을 더 레이코 여사가 이야기했다.
"하지만 마음 쓰지 말아요"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지금은 그럴 때에요. 말하기보다 듣고 있는 편이 더 즐거워요."
레이코 여사가 일을 만들어 어딘 가로 가버리면 나와 나오코는 침대 위에서 포옹했다. 나는 그녀의 목덜미며 어깨, 그리고 젖가슴에 가만히 입맞춤을 했고, 나오코는 지난번처럼 다시 손으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사정이 끝나자 자는 나오코를 끌어안고, 이 두 달 동안 내내 네 손의 감촉을 떠올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너를 생각하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했다고.
"다른 누구와도 자지 않았어요?" 하고 나오코가 물었다.
"안 잤어." 하고 나는 대답했다.
"저, 그럼 이것도 잊지 말아 줘요"하고 그녀는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나의 페니스에다 살며시 입술을 대고, 그리고 따뜻하게 감싸면서 혀를 간지럽게 움직였다. 나오코의 매끄러운 머리칼이 나의 아랫배를 슬면서 그녀의 입술의 움직임에 따라 찰랑찰랑 흔들렸다. 그리하여 나는 두 번째 사정을 했다.
"기억해 주겠어요?" 하고 그 뒤에 그녀가 물었다.
"물론,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 거야"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나오코를 힘껏 끌어당겨 속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그 작은 숲에 이르렀으나 그곳은 메말라 있었다. 나오코는 머리를 흔들며 나의 손을 치웠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번 일 년이 끝나면 기숙사를 나와서, 어딘가에 방을 구해 보려고 해" 라고 나는 말했다.
"기숙사 생활도 점점 지겹고 아르바이트를 하면 생활비는 그럭저럭 메워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얘긴데 나오코만 좋다면 우리 함께 살았으면 해. 전에도 말했지만."
"고마워요. 그렇게 얘기해 주니 몹시 기뻐요"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여기도 나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해. 조용하고, 환경도 좋고, 레이코 여사도 좋은 사람이고. 하지만 오래 있을 곳은 못 돼. 오래 있기엔 장소가 너무 특수하니까.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나가기가 더 힘들게 될 거야.
나오코는 아무 대꾸 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참 밖엔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눈구름이 어둡게 해를 가리며 낮게 떠 있어서 눈으로 뒤덮인 대지와 하늘 사이에는 아주 작은 공간밖에 열려 있지 않았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 하고 나는 말했다.
"어쨌든 나는 3월까진 이사할 테니까, 내게 오고 싶으면 언제라고 오면 돼."
나오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들어 올릴 때처럼 두 팔로 나오코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녀는 내 목에 팔을 감았다. 나는 알몸이었고 그녀는 앙증맞은 삼각 흰 팬티만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아름다웠고,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질 않았다.
"왜 난 젖어 오질 않지?" 하고 나오코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된 건 정말 그때 한 번뿐이에요. 4월의 그 스무 살의 생일날. 자기에게 안겼던 그 밤뿐이에요. 왜 안되는지 몰라."
"그건 정신적인 거니까 시간이 흐르면 잘 될 거야. 조급해할 필요 없어."
"내 문제는 다 정상적인 거에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만일 내가 일생동안 젖는 일이 없고, 일생동안 섹스를 못 해도 자긴 변함없이 날 좋아할 수 있겠어요? 언제까지나 손과 입술만으로 참을 수 있어요? 아니면 섹스 문제는 다른 여자와 자며 해결할 거에요?"
"난 본질적으로 낙천적인 인간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티셔츠를 머리부터 뒤집어쓰고, 플란넬 셔츠를 입은 후, 청바지를 입었다. 나도 옷을 입었다.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자기도 천천히 생각해 봐요."
"생각하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나오코의 펠라티오는 굉장했어."
그녀는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방긋 미소를 지었다.
"기즈키도 그렇게 말했어요."
"나와 그는 생각이나 취미 면에서 모든 게 잘 맞았었지." 하고 말하고 나는 웃었다.
그리고 우린 부엌에서 테이블을 가운데 놓고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옛날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조금씩 기즈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조심조심 언어를 선택하면서 그녀는 이야기를 했다.
눈이 내렸다 멎었다 했지만, 사흘 동안 하루도 맑은 하늘은 모이지 않았다. 3월에 또 올 수 있을 거야, 하고 나는 헤어질 적에 말했다. 그리고 두터운 코트를 입은 채 그녀를 포옹하고 입을 맞추었다. 안녕, 하고 그녀가 말했다.
1970년이라는 낯선 울림을 가진 해가 오고, 나의 십대는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진창에 발을 내디뎠다.
학년말 시험이 있었고 나는 비교적 쉽게 그것을 통과했다. 달리 할 일이 없어 거의 매일 강의실에 나갔던 덕분에 특별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시험에 통과하는 것쯤은 간단한 일이었다.
기숙사에는 몇 번인가 트러블이 있었다. 운동권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던 학생들이 기숙사 내에 헬멧이나 쇠파이프를 숨겨 놓고 있었고, 그 대문에 기숙사 사감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체육계 학생들과 충돌이 벌어져, 두 사람이 부상을 입고 여섯 명이 기숙사에서 쫓겨났다.
그 사건은 꽤나 오래 까지 꼬리를 물어 매일처럼 어디에선가 작은 싸움이 벌어졌다. 기숙사 내에는 계속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나에게도 그 불똥이 튀어 하마터면 체육계 학생들에게 얻어맞을 뻔했지만, 나가사와 선배가 중간에 끼어들어 무마해 주었다. 어쨌거나 나는 기숙사에서 나오려는 참이었다.
시험이 일단락되자 나는 열심히 방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겨우 기치조지 교외에서 알맞은 집을 찾았다.
교통은 좀 불편했지만 고맙게도 독립가옥이었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집을 얻은 셈이었다. 넓은 땅 한 귀퉁이에 문지기의 살림집이나 별채처럼 동떨어져 있었고, 본채와의 사이에는 적잖이 황폐한 장원이 펼쳐져 있었다. 주인은 앞문을 사용하고 나는 뒷문을 사용하게 되어있어 프라이버시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방 하나에 작은 주방과 화장실, 그리고 넓은 미닫이 옷장이 붙어 있고, 뜰을 마주 보고 있는 툇마루까지 있었다. 내년쯤 어쩌면 손자가 도쿄로 올라올지 모르니 그때는 비워 줘야 한다는 게 조건이었지만, 그 덕에 시세보다 집세도 제법 쌌다. 주인은 사람이 좋아 보이는 노부부였고, 따로 어렵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 마음 편히 살아달라고 했다.
이사는 나가사와 선배가 거들어 주었다. 어디선가 작은 트럭을 빌려 와선 내 짐을 날라주고, 약속대로 냉장고와 텔레비전 그리고 대형 보온병을 물려주었다. 나에겐 고마운 선물이었다. 그 이틀 후엔 그도 기숙사를 나와 미타의 어느 아파트로 이사 가게 되어있었다.
"당분간은 만날 기회가 없겠지만 잘 지내" 하고 헤어지면서 나가사와가 말했다.
"그렇지만 언젠가 말했듯이 먼 훗날, 묘한 곳에서 널 만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그때 우리 서로 바꿔치기 한 여자 말인데, 미인 아닌 여자 쪽이 더 좋았어."
"동감입니다"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선배님, 하쓰미 씨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좋은 사람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고, 보기보다 상처받기 쉬운 여자인 것 같으니까요."
음, 그건 알고 있어." 하고 그는 수긍했다.
"그래서 진심을 말하는 건데, 내 뒤를 네가 인계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 너와 하쓰미 같으면 서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테니까."
"농담하지 마세요" 하고 나는 아연해서 말했다.
"농담이야"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자, 행운이 있기를. 여러 가지 일이 있겠지만 너도 상당히 강한 편이니까 어떻게든 잘해 나가리라 믿는다. 그런 게 한 가지 충고해도 될까?"
"좋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동정하지 말아." 하고 그가 말했다.
"자신을 동정하는 건 비열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기억해 두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그는 새로운 세계로, 나는 나의 진창으로 되돌아갔다.
이사한 지 사흘 후에 나는 나오코에게 편지를 보냈다. 새로운 집에 대해 쓰고, 기숙사의 갈등에서 벗어나 더 이상 되지 못한 패거리들의 쓸데없는 생각에 휘말려 들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기쁘고 시원하다, 여기에서 새로운 기분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고 생각한다고.
창 밖은 넓은 정원이며, 동네 고양이들의 집회 장소가 되고 있다. 한가할 적에는 툇마루에 누워 그런 고양이들을 바라보곤 한다. 도저히 몇 마리나 되는지 모를 정도지만, 어쨌든 많은 수의 고양이야. 그놈들은 모두가 뒹굴며 햇살을 쬐고 있다.
내가 이 한구석에 살게 된 것이 그들로서는 별로 탐탁지 않은 것 같지만, 오래된 치즈를 놓아주었더니 그래도 몇 마린가는 주춤주춤 다가와서 먹는다. 이러는 동안에 그들과도 사이가 좋아질지도 모르겠다. 그 중이 한 마리는 귀가 절반 떨어져 나간 얼룩무늬 고양인데, 이게 놀랄 만큼 그 기숙사 사감을 닮았다. 지금이라도 정원에서 국기를 올리기 시작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학교에서는 좀 멀어졌지만, 전곡 과정에 들어가면 오전 강의가 줄어드니까 별문제는 없을 것 같다. 전철 속에서 여유 있게 책을 읽을 수도 있으니 오히려 잘 됐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할 일은 하숙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일주일에 3, 4일 정도 힘들지 않게 아르바이트 할 수 있는 자리를 구하는 것뿐이다. 그렇게만 되면 매일 태엽을 감는 그런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
나로선 결론을 서두를 생각은 없지만, 봄이라는 계절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에 썩 좋은 계절이다. 만일 우리가 4월부터 함께 살 수 있게 된다면, 그게 가장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되면 나오코도 대학에 복학이 될 테고. 함께 사는 게 문제가 된다면, 이 근처에 나오코가 살 만한 아파트를 구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언제나 바로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봄이라는 계절에 꼭 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 여름이 좋겠다면 여름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이에 대해 나오코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답장해 주었으면 한다.
난 앞으로 좀 더 성실히 아르바이트를 해볼 작정이다. 이사 비용을 충당해야 하니까. 자취 생활을 시작해 보니 이것저것 돈 드는 데가 제법 많다. 냄비며 식기 같은 것도 마련해야 하니까.
하지만 3월이 되면 시간이 나니까 꼭 나오코를 만나러 가고 싶다. 편리한 날짜를 알려 주면 좋겠다. 그러면 그날에 맞춰 교토로 가려고 생각한다. 나오코와 만나는 날을 즐거움으로 간직하면서 답장을 기다린다.
그리고 나서 2, 3일 동안 나는 기치조지이 거리에서 조금씩 이것저것을 사들인 후, 집에서 내 손으로 간단한 식사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까운 목재상에서 제목을 사다가 자르고 가다듬어 선반도 올렸고, 조미료도 제법 갖추어 놓았다. 생후 6개월 정도 되는 흼 암코양이가 나와 얼굴이 익어 함께 집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그놈에게는 갈매기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대강 그 정도나마 모양이 갖추어지자 나는 시내 페인트 집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얻어 2주 동안 조수로 일했다. 급료는 좋았지만 대단한 노동이었고 신나 냄새 때문에 머리가 줄곧 멍했다.
하루 일이 끝나면 간이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신 뒤 집으로 돌아와 고양이와 놀고, 그리고는 죽은 것처럼 잠을 잤다. 하지만 2주일이 지나도 나오코한테선 답장이 없었다.
나는 페인트칠을 하면서 문득 미도리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3주 가까이 미도리와는 연락이 없었고, 이사를 한 것조차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슬슬 이사를 할까 생각한다고 내가 말했고 그러냐고 말한 것이 끝이었다.
나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서 미도리네 아파트 전화번호를 돌렸다. 언니인 듯 싶은 사람이 전화를 받더니, 내가 이름을 대자 잠깐만요 하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미도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저, 말이죠. 미도리가 몹시 화를 내며, 학생하곤 이야기하기 싫다는데요." 하고 언니로 짐작되는 사람이 그녀의 말을 전했다.
"이사할 적에 미도리에게 아무 연락도 안 하셨죠? 행선지도 말하지 않고 훌쩍 떠나 버린 뒤, 감감무소식이었죠? 그래서 굉장히 화가 나있는 거에요. 그 앤 한 번 화를 내면 웬만해서 풀리지 않아요. 동물과 같으니까요."
"제가 설명을 할 테니 좀 바꿔 주실 수 없습니까?"
"설명 같은 건 듣고 싶지 않대요."
"그럼 지금 설명할 테니 죄송하지만 미도리에게 전해 주십시오."
"싫어요, 그런 거" 하고 언니로 보이는 사람이 내뱉듯이 말했다.
"그런 건 직접 해요. 학생은 남자지요? 스스로 책임을 지고 현명하게 해결해요."
어쩔 수 없이 나는 사과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미도리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사에 집 정리에 돈을 벌기 위한 노동에 쫓겨 미도리의 일은 전혀 생각조차 않았던 것이다. 미도리뿐만 아니라 나오코조차도 거의 생각지를 못했다. 나에겐 어려서부터 그런 점이 있었다. 무엇인가에 열중하면 그 밖의 주변의 일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반대로 미도리가 행방을 가르쳐 주지도 않은 채 어디론가 이사를 하고, 그대로 3주일 동안이나 연락을 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를 생각해 보았다.
틀림없이 나는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것도 꽤 깊은 상처일 것이다. 우리가 비록 연인은 아니었지만 어느 부분에선 그 이상으로 친밀하게 서로를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다. 남의 마음에 그것도 소중한 상대의 마음에 공연히 상처를 입게 한다는 것이 몹시 싫었다.
나는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자 새 책상에 앉아 미도리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정직하게 그대로 썼다. 변명도 설명도 집어치우고 내가 무신경했음과 부주의했음을 사과했다. 미도리가 무척 보고 싶다, 새로 이사 온 집도 구경와 주었으면 좋겠다. 답장을 바란다 하고 썼다. 그리고 속달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기묘한 봄의 시작이었다. 나는 봄방학 동안 줄 곧 편지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도 갈 수 없고, 고향에도 갈 수 없고,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었다. 며칠쯤 만나러 와 달라는 나오코의 편지가 언제 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낮에는 기치조지로 나가서 두 편 연속 상영하는 영화를 보거나, 재즈 음악다방에 앉아 반나절이 넘도록 책을 읽곤 했다.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계속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그 편지에는 답장에 관해선 전혀 쓰지를 않았다. 그녀를 재촉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페인트 가게에서 하는 일에 대해 썼고,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 정원의 복숭아꽃에 대한 이야기, 친절한 두부집 할머니와 심술궂은 채소 가게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썼고, 내가 매일 어떤 음식을 만들고 있는가에 대해서 썼다. 그리도 답장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레코드를 듣거나 하는 것에도 지치자 나는 조금씩 정원을 손질했다. 주인한테는 큰 빗자루와 갈퀴, 그리고 쓰레받기에다 전지가위까지 얻어 잡초를 뽑고, 웃자란 식목들을 적당하게 잘라 다듬었다. 조금 손질을 했을 뿐인데도 정원은 제법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그런 일을 하고 있자니, 주인이 나를 불러 차라도 한잔 들고 하라고 했다.
나는 안채의 툇마루에 앉아 그와 둘이서 차를 마시고, 쌀 과자를 먹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퇴직을 한 뒤에 한동안 보험 회사의 임원으로 있다가, 2년 전에 그것도 그만두고 지금은 이렇듯 한가로이 살고 있는 거라고 말했다. 집도 땅도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고, 아이들도 모두 독립해 버려 아무 일 하지 않고도 한가로이 노후를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줄곧 부부가 둘이서 여행을 한다고.
"좋으시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좋질 않아" 하고 그가 말했다.
"여행 같은 건 하나도 재미가 없어. 일을 하는 게 훨씬 좋다고."
정원을 손질 안 하고 버려둔 것은 이 근처 정원사에 변변한 사람이 없어서고, 사실은 손수 조금씩 해나가면 되는데, 요즘에 코 알레르기가 심해져서 풀을 만질 수 없다는 거였다. 그렇군요,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마시고 나자 그는 창고를 나에게 보여 주면서 감사의 표시가 될 것도 없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전부 필요 없는 물건들이니, 쓰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갖다 쓰라고 했다.
창고 속엔 정말 갖가지 것이 쌓여 있었다. 목욕용 물통에서부터 어린이용 풀, 야구 방망이까지 있었다. 나는 고물 자전거와 그리 크지 않은 식탁과 의자 두 개, 그리고 거울과 기타를 발견하고 이것만 빌리고 싶다고 말했다. 좋을 대로 써도 좋다고 그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나는 꼬박 하루 절려 자전거의 녹을 닦아 내고, 기름을 치고, 타이어에 바람을 넣고, 기어를 조정하고, 자전거 점포에 가서 클러치와이어를 새것으로 갈았다. 그러고 나니 자전거는 몰라볼 만큼 깨끗해졌다.
식탁은 먼지를 깨끗이 닦은 후 니스를 다시 칠했다. 기타 줄도 전부 새것으로 갈고, 갈라진 나무판은 접착제로 붙였다. 녹도 와이어브러시로 깨끗이 닦고 나사도 조정했다. 좋은 기타는 아니었지만 정확한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돌이켜 보니 기타를 손에 들어 본 것도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는 툇마루에 앉아 옛날에 연습하였던 드리프터즈의 업 온더 루프를 더듬어 가며 천천히 쳐보았다. 신기한 정도로 어느 정도는 코드가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그리고 나는 쓰다 남은 목재로 우편함을 만들어 빨간 페인트를 칠한 후, 이름을 적어서 문 앞에 달아 놓았다. 그러나 4월 3일까지 거기에 들어있는 우편물이란 고작 고등학교 동창회 통지뿐이었고, 나는 설사 무슨 일이 있다 해도 그런 모임에만은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와 기즈키가 함께 있었던 클래스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걸 구겨 휴지통에 버렸다.
4월 4일 오후, 한 통의 편지가 우편함에 들어있었지만, 그것은 레이코 여사에게서 온 것이었다. 겉봉 뒤에 이시다 레이코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가위로 깨끗이 잘라 툇마루에 앉아서 그것을 읽었다. 처음부터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닐 것 같은 예감은 있었지만 읽어보니 바로 그대로였다.
첫머리에 레이코 여사는 답장이 너무 늦어진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었다. 나오코는 당신에게 답장을 쓰려고 내내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쓸 수가 없었다. 나는 몇 번이나 대신 써주마, 답장이 늦어지면 안 되니까 하고 설득했지만, 나오코는 이건 매우 개인적인 일이니 기어이 자신이 쓰겠다고 고집을 부려 이렇게 늦어져 버리고 말았다. 여러 가지로 걱정을 끼쳤는지 모르겠지만 용서해 주기 바란다고 레이코는 쓰고 있었다.
와타나베도 이 한 달 동안 나오코의 답장을 기다리느라 고통스러웠는지 모르지만, 나오코로서도 이 한들은 대단히 괴로운 한 달이었어요. 그것만을 알아주어야 해요. 정직하게 말해서 그녀의 지금 상황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에요. 그녀는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좋은 결과가 나오고 있질 않아요.
생각해 보면 최초의 징후는 편지가 잘 씌어지지 않게 된 거였어요. 11월 말인가 12월 초부터였지요. 그때부터 조금씩 환청이 시작되었어요. 그녀가 편지를 쓰려고 하면 여러 사람이 말을 걸어 편지 쓰는 걸 방해하는 거예요. 그녀가 할 말을 고르려고 하면 방해하는 거지요.
하지만 와타나베의 두 번째 방문 때까지만 해도 그런 증상은 비교적 경미했고, 나 자신도 정직히 말해서 그렇게 심각하게는 생각하질 않았어요. 우리들은 어느 정도 그런 증상의 주기 같은데 있으니까요.
하지만 와타나베가 돌아간 뒤부터 그 증상은 한결 심각한 게 되고 말았어요. 그녀는 지금 일상 대화를 나눈 데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답니다. 언어가 선택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나오코는 지금 몹시 혼란에 빠져 있어요. 혼란스러운 데다 겁까지 먹고 있는 거예요. 환청도 점점 심해지고요.
우린 매일 전문의와 함께 상담 진료를 받고 있어요. 나오코와 나, 그리고 의사와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석의 상처 입은 부분을 정확히 찾아내려는 거에요.
나는 가능하다면 와타나베도 참가하는 상담을 하고 싶다고 제안했고 의사도 거기에 찬성했지만 나오코가 반대했어요. 그녀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만날 때에는 깨끗한 몸으로 만나고 싶으니까 라는 게 그 이유였지요. 문제는 그게 아니고 하루빨리 회복되는 것이라고 나는 설득하였지만 그녀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어요.
전에도 와타나베에게 설명했다고 생각되지만 여긴 전문적인 병원은 아니에요. 물론 훌륭한 전문의가 있어 효과적인 치료도 행해지고 있지만 집중적인 치료는 곤란해요. 이곳 시설의 목적은 환자가 자기 치료를 가능케 하는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지, 정확하게 말해서 의학적인 치료는 거기엔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그러니 만일 나오코의 증상이 이 이상 악화된다면 다른 병원이나 의료 시설로 옮겨 갈 수밖에 없겠지요.
나로서는 괴로운 일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물론 그렇게 되어도 치료를 위한 일시적인 출장이니까 다시 이리로 돌아오는 건 가능해요. 혹은 일이 잘 돼서 그대로 완치되어 퇴원하게 될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우린 온 힘을 기울이고 있고, 나오코도 전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와타나베도 그녀의 회복을 빌어 줘요. 그리고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편지를 보내주기 바래요.
편지를 다 읽고 나자 나는 그대로 툇마루에 앉아 봄기운이 완연한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원에는 오래된 벚꽃 나무가 있어, 한밤의 등불처럼 흐드러진 벚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바람은 부드러웠지만 햇살은 어쩐지 뿌옇고 이상한 빛깔로 흐려 있었다. 조금 있으니 어디에선가 갈매기가 나타나 툇마루의 판자를 잠시 박박 긁더니 내 곁에서 기분 좋은 듯이 몸을 늘어뜨리고 잠들어 버렸다.
무엇인가를 생각해야지, 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은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솔직하게 말해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될 때가 오겠지, 그때 가서 천천히 생각하자고 나는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툇마루에 앉아 등을 기둥에 댄 채, 갈매기를 쓸어 주면서 온종일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몸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후로 접어들자 해가 기울며 어슴푸레해지더니 이윽고 푸른 빛 어둠이 정원을 감쌌다.
갈매기는 이미 그 모습을 감추어 버렸지만, 나는 여전히 벚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봄의 어둠 속에서 벚꽃은 마치 내게는 살갗을 터뜨리고 튀어나온 짓무른 살덩이처럼 보였다. 정원은 그러한 많은 살덩이의 달콤하고 무거운 썩은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오코의 육체를 생각했다. 나오코의 아름다운 육체는 어둠 속에 누워 있었고, 그 피부로부터는 무수한 식물의 싹이 돋아나, 그 적색의 작은 싹들은 어디에선지 불어오는 바람에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도 아름다운 육체가 병을 앓아야 하는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째서 나오코를 조용히 놔두지 않는가, 하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 창문의 커튼을 쳤지만 방안에도 역시 그놈의 향기는 충만해 있었다. 봄의 향기가 온 지면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것이 나에게 연상시키는 것은 오로지 썩은 냄새뿐이었다. 나는 커튼을 모두 쳐버린 방안에서 봄을 격렬하게 미워했다. 나는 봄이 나에게 가져온 것을 미워하고, 그것이 내 몸 깊은 곳에서 일으키고 있는 듯한 아픔 같은 것까지도 미워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토록 강렬하게 무엇인가를 미워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나는 길은 바다의 밑바닥을 걷고 있는 듯한 묘한 나날을 보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와도 나에겐 그것이 잘 들리지 않았고,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해도 그들은 그것을 듣지 못하였다. 마치 내 몸 주위에 무언가 빈틈없는 투명 유리막이라도 둘러쳐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막 때문에 나는 외계와 제대로 접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들도 또한 내 살에 접촉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 자신은 무력하지만 이렇게 되어있는 한, 그들도 나에 대해 무력할 것이다.
나는 벽에 기대어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배가 고파지면 내 주위에 있는 것을 씹고, 물을 마시고, 슬퍼지면 위스키를 마시고 잠을 잤다. 욕탕에도 들어가지 않고 수염도 깍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사흘이 지나갔다.
4월 6일 미도리에게서 편지가 왔다. 4월 10일 수강 신청이 있으니 그날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 점심을 같이 하지 않겠느냐고 쓰여 있었다.
답장을 이렇게 늦게 쓰긴 했지만 이걸로 서로 비겼으니, 이젠 사이좋게 지내자, 아무래도 나와 만나지 못하면 외로우니까 하고 편지에 적고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네 번이나 되풀이 읽었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편지가 도대체 무슨 뜻이지? 나는 그저 막연하기만 하였고, 한 문장이 다음 문장과 이어지는 의미상의 접점이 잘 찾아지질 않았다. 어째서 수강 신청하는 날의 만남이 비김이 되고 무엇 때문에 점심을 함께 하자는 것일까? 어쩐지 내 머리까지 이상하게 되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의식이 턱없이 이완되고, 음지 식물의 뿌리처럼 물컹하게 부풀어져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말아라고 하던 나가사와의 말을 돌연 생각했다.
"자신을 동정하는 것은 비열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다."
그래요, 나가사와 선배님 당신은 훌륭해요,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한숨을 내신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오랜만에 빨래를 하고, 목욕탕에 가서 수염을 깎고, 방 청소를 하고, 시장을 보아 그럴 듯한 식사를 지어먹고, 그동안 배를 주렸을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었으며, 맥주 이외의 술은 마시지 않고 체조를 삼십뿐 정도 했다. 수염을 깎을 때 거울을 보고 나서야 내 얼굴이 핼쑥해져 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눈이 유난히 튀어나와 있어서 어쩐지 남의 얼굴 같았다.
이튿날 아침, 나는 자전거를 타고 좀 멀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레이코 여사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레이코 여사의 편지를 받고 내가 쇼크를 받은 큰 이유는, 쾌유 쪽으로 믿고 있었던 나오코에 대한 나의 낙관적인 생각이 일순간에 뒤집혀진 데에 있었다. 나오코 스스로도 자기 병은 뿌리가 깊다는 말을 하였고, 레이코 여사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두 번의 만남에서 나오코가 회복되어 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고,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현실적인 사회로 복귀하겠다는 용기를 나오코가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용기를 되찾게 되기만 하면, 우리 둘이서 힘을 합쳐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고.
그러나 내가 허약한 가설 위에 지어 올렸던 환상의 성은 레이코 여사의 편지로 아차 하는 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뒤엔 무감각하고 밋밋한 평면이 덩그렇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나는 자세를 다시 가다듬어야만 했다. 나오코가 이번에 다시 한 번 회복하기엔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회복이 된다 해도 회복 시의 그녀는 이전보다 더 쇠약하고 더욱 더 자신을 읽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새로운 상황에 나 자신을 적응시켜야만 한다. 물론 내가 강해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스스로 사기를 북돋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회복을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아아, 기즈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너와는 달리 난 살려고 결정했고 그것도 내 나름대로 올바르게 살겠다고 결정했다. 너도 틀림없이 괴로웠겠지만 나 역시 괴롭다, 정말이야. 이렇게 된 것도 네가 나오코를 남겨 놓고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녀를 절대로 버리지는 않을 거다. 나는 그녀가 좋고 그녀보다는 내 쪽이 강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난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다. 그리고 성숙해질 거야. 어른이 되는 거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지.
난 지금껏 열일곱, 열여덟인 채로 있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지 않아. 나는 십대의 소년이 아니니까. 난 책임이란 것은 느낀다. 아아, 기즈키, 난 너와 함께 있었을 때의 내가 아냐. 난 이미 스무살이 된 거라구. 그래서 난 계속 살아가기 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거야.
"어머, 어떻게 된 거야 와타나베?"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많이 야위었잖아, 자기?"
"그런가?" 하고 나는 말했다.
"지나쳤던 거 아니에요, 그 유부녀 애인과?"
나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난 해 10월 초부터 여자와 잔일은 한 번도 없어."
미도리는 갈라지는 듯한 휘파람 소리를 냈다.
"벌써 반년이나 그걸 안 했다구요? 정말?"
"그래."
"그럼 왜 그렇게 야위었어요?"
"어른이 됐으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미도리는 내 양어깨를 잡고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표정을 찌푸리더니 곧 방긋 웃었다.
"정말이야, 확실히 뭔가 달라진 것 같아요. 전에 비해서..."
"어른이 됐기 때문이야."
"자긴 정말 최고예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하고 그녀는 정말 감격한 듯이 말했다.
"식사하러 가요. 배가 고파요."
우린 문학부 뒤켠에 있는 조그만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난 그날이 런치 정식을 주문했고, 그녀도 그게 좋겠다고 해서 둘 다 런치 정식을 주문했다.
"저, 화가 나 있어요?"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무엇에 대해서?"
"말하자면 내가 앙갚음으로 오랫동안 안 썼던 데 대해서.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자기는 정중히 사과를 했는데도 말이에요."
"내 쪽이 잘못했으니 할 수 없지 뭐" 하고 나는 말했다.
"언니는 그래선 못 쓴다고 날 나무랐어요. 너무나 마음이 좁고 너무나 어린애 같다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어떻든 마음이 후련해진 거 아냐? 앙갚음을 해서?"
"응."
"뭐, 그럼 됐지 않아."
"자기는 정말 너그러워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자기, 정말 반년 동안이나 섹스를 안 했어요?"
"안 했어."
"그럼, 전에 날 잠들게 해 주었을 때, 사실은 굉장히 원했던 거 아니에요?"
"아마 그랬을 거야."
"그러면서도..."
"넌 지금 내 가장 소중한 친구여서, 널 잃고 싶지는 않다구." 하고 나는 말했다.
"나 그때 자기가 달려들었어도 아마 거부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때 몹시 혼란스런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내 것은 굉장한데?"
그녀는 빙긋 웃더니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나, 전부터 자길 믿겠다고 결정했어요. 백 퍼센트. 그래서 그때도 나 안심하고 편히 잠들었던 거에요. 자기하고 라면 걱정 없다고 안심해도 좋다고. 그때 푹 잤지요. 나?"
"음, 확실히"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자기가 내게, 저 미도리 널 갖고 싶어. 그러면 모든 게 잘 될 테니까. 그랬더라면 아마 응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이런 말 한다고 해서 자기를 유혹하고 있다거나, 능청을 떨면서 자극하고 있다곤 생각하지 말아 줘요. 난 그저 내가 느낀 그대로 정직하게 말해 주고 싶을 뿐이니까."
"알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린 점심을 먹으면서 수강 신청카드를 보여 주었고, 두 강의를 함께 받게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일주일에 두 번은 그녀와 얼굴을 맞대게 된 셈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생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 주었다.
미도리의 언니도, 그녀 자신의 한동안은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지질 못했다. 그때까지의 그녀들의 인생에 비해서 너무나 편안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누군가의 병간호를 하거나, 가게 일을 거들어 주면서 매일을 바쁘게 보내는 데 너무 길들여져 있었다고 미도리는 말했다.
"하지만 최근에 이것으로 좋다고 생각하게 된 거에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이게 우리 자신을 위한 본래의 생활이라고, 그러니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한껏 기를 펴고 살면 된다고. 하지만 그건 정말 불안했어요. 몸이 이삼 센티미터가량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이건 거짓이다, 이렇게 편한 인생이 현실에 존재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얼마 안 있어 이게 완전히 뒤집혀 엎어지는 날이 있을 것만 같아 둘이서 긴장을 풀지 못했지요."
"고생을 타고난 자매 같군"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너무나 가혹했으니까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요. 우리 두 자매가 그동안 고생한 값을 이제부터 되돌려 받으면 되니까."
"미도리 자매 같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하고 나는 말했다.
"언니는 매일 뭐하고 지내?"
"언니 친구가 최근에 액세서리 가게를 냈어요. 그래서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거기 일을 봐주러 나가고 있어요. 그리고 남는 시간은 요리를 배우러 다니고, 약혼자와 데이트를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그저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어쨌거나 인생을 즐기고 있는 편이에요."
미도리는 나의 새로운 자취 생활에 대해 물었다. 나는 집의 크기라든가 구조, 넓은 정원, 그리고 고양이 갈매기라든가 주인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재미있어요?"
"나쁘진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런데 왜 기운이 없어 보이죠?"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봄인데도 말이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애인이 떠준 멋진 스웨터를 입고 있으면서도 말에요."
나는 깜짝 놀라 입고 있던 포도색 스웨터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그걸 알았지?"
"자기는 정말 정직해. 그런 거야 짐작으로 맞추는 거 아니에요?" 하고 미도리는 어이없어 했다.
"그건 그렇고 왜 그렇게 기운이 없지요?"
"기운을 내려 하고 있는데."
"인생이란 비스킷 통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나는 몇 번인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다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머리가 나쁜 탓이겠지만, 가끔 미도리의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어."
"비스킷 통에 비스킷이 가득 들어있고, 거기엔 좋아하는 것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자꾸 먹어 버리면 그다음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이걸 겪어 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다라고."
"음, 하나의 인생 철학이군"
"하지만 그건 정말이에요. 난 경험으로 그걸 배웠거든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미도리와 같은 클래스 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둘이 레스토랑으로 들어왔다. 미도리와 셋이서 수강 신청카드를 주고받고 하더니, 지난해 독일어 성적이 어땠고, 운동권의 패거리들이 충돌하는 바람에 누가 다쳤고, 그 구두 참 좋은데 어디서 샀느냐는 따위의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한동안 늘어놓았다. 저절로 들려오는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그 이야기들이 어쩐지 지구의 저 뒤켠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금년에도 대학으로 되돌아오지 못한 나오코를 생각했다. 창가에는 아네모네 꽃이 꽂힌 작은 유리컵이 있었다.
두 여학생이 그럼 또 봐 하고 자기들 테이블로 돌아간 후, 미도리와 나는 가게에서 나와 거리를 산책했다.
헌책 가게를 돌아 책을 몇 권 사고,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게임 센터에서 핀볼을 하고,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체적으로 말은 미도리가 하는 편이고 나는 응, 응, 대답만 하고 있었다. 미도리가 목이 마르다고 하기에 나는 가까이 있는 가게를 찾아 콜라 두 병을 사왔다. 그 사이 그녀는 리포트 용지에다 볼펜으로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뭐야 그건" 하고 내가 묻자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세 시 반이 되자 그녀는,
"이제는 가봐야지, 언니와 긴자에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하고 말했다. 우리는 전철역까지 걸어가 거기서 헤어졌다. 헤어질 때 그녀는 내 코트 주머니에 네 번 접은 리포트 용지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읽어달라고 했다. 나는 그걸 전철 안에서 읽었다.
전략.
지금 자기는 콜라를 사러 갔고, 나는 그 틈을 이용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벤치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다니 나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자기에게 전달될 가망이 없으니까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자기가 거의 아무 말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요. 그렇지요?
저, 알고 있어요? 자기는 오늘 내게 몹시 가혹한 행동을 했다는 걸. 자기는 내 머리 스타일이 달라진 것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죠? 나, 애써 조금씩 머리를 길러 겨우 지난 주말에야 여자다운 머리 스타일로 바꿀 수 있게 됐다구요. 그런데 그것조차 의식하지 못했죠? 꽤나 예쁘게 되었으니 오랜만에 만나 놀라게 해 주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알아보지도 못했으니 그건 너무했지 뭐예요?
하긴 자기는 내가 오늘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조차 기억에 없는지도 모르죠. 나도 여자예요. 얼마나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는 몰라도 조금쯤은 나를 똑바로 보아주면 안 돼요? 단 한마디, 그 머리 예쁜데, 하고만 말해 줬던들 그 후에 자기가 무엇을 했건, 얼만큼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건, 난 자기를 용서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지금, 자기에게 거짓말을 한 거예요. 긴자에서 언니와 만날 약속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난 오늘 자기 집에 가서 잘 생각으로 잠옷까지 갖고 왔다구요. 그래요, 내 백 속엔 잠옷과 칫솔이 들어있었죠.
흥, 참 어리석기도 하지. 그런데 자긴 자기 집으로 가자는 한마디 유혹도 없었어요. 뭐, 하지만 좋아요. 자기는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혼자 있게 해 줄게요. 열심히 온갖 것을 마음껏 생각해 보라구요.
하지만 내가 자기에 대해서 전적으로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니에요. 난 다만, 다만 외로운 거예요. 오히려 자기는 내게 여러 가지로 친절을 베풀어 주었는데, 내가 자기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기 때문이지요. 자기는 언제나 자기 세계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아무리 노크를 해도 잠시 눈을 치뜰 뿐, 금방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것 같아요.
지금 콜라를 든 자기가 막 돌아오고 있어요.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면 걷고 있는 것 같아서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져 버렸으면 하고 나는 생각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어요.
자기는 지금 내 옆에서 꿀꺽꿀꺽 콜라를 마시고 있어요. 콜라를 들고 돌아오면서 아니,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잖아! 하고 놀라워 해줄 것을 기대해 보았지만 허사였어요. 만일 그래 주었다면 이따위 편지는 찢어 버리고 저, 자취방을 구경하고 싶어요. 맛있는 저녁 지어 줄게요. 그리고 사이좋게 함께 자요. 하고 말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만 자기는 철판처럼 무신경했어요. 안녕.
P.S. 이다음에 교실에서 만나도 내게 말 걸지 말아요.
기치조지 역에서 내려 미도리의 아파트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아무도 받지를 않았다. 특별히 해야 할 일도 딱히 없었기에 나는 거리를 걸으며, 학교를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보았다.
나는 토요일과 일요일이 온전히 비어 있고, 월. 화. 수. 목요일엔 다섯 시부터 일할 수가 있었지만, 그 같은 내 스케줄에 딱 들어맞는 일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체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 시장을 보는 길에, 다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언니가 전화를 받더니, 미도리는 아직 안 돌아왔고 언제 돌아올지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저녁을 먹고 미도리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지만 몇 번을 고쳐 써도 잘 써지지 않아, 결국은 나오코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봄이 되어 다시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었다고 썼다. 나오코를 만나지 못해 매우 섭섭하다, 어떠한 형식이든 나오코와 만나고 싶었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강해지려고 결심했다, 그 밖에는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이 달리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고 썼다.
그리고 이건 나 자신의 문제고, 나오코로서는 어쩌면 상관이 없는 일인지 모르겠으나, 난 이젠 아무하고도 자지 않고 있어. 나오코의 손길이 머물렀던 때의 그 기억을 잃어버리기 싫기 때문이야. 그것은 나로서는 나오코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야. 나는 언제나 그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어.
나는 편지를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이고, 책상 앞에 앉아 한참 동안 그것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훨씬 짧은 편지였지만, 어쩐지 그렇게 하는 편이 그녀에게 내 뜻을 더 잘 전할 수 있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나는 글라스에 3센티미터 가량의 위스키를 부어, 두 모금에 그걸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나는 기치조지 역 부근에서 토요일과 일요일만 하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그리 크지 않은 이탈리아 요리점의 웨이터 자리였는데, 조금은 그저 그랬지만 점심을 먹여 주고 교통비도 주었다. 월. 수. 목의 야간 근무자가 쉴 적에는 - 그들은 자주 쉬었다. - 대신 출근해도 좋다는 이야기여서 나로서도 퍽 다행스러웠다. 3개월 뒤에는 급료를 올려 주마며, 이번 토요일부터 출근해 달라고 매니저가 말했다. 신투쿠 레코드 가게의 그 엉터리 지배인에 비하면 상당히 정확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미도리의 아파트에 전화하자 또 언니가 받아, 미도리는 어제 나간 뒤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 있는지는 오히려 자기가 알고 싶다, 무엇인가 짚이는 데가 없느냐며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백에 잠옷과 칫솔을 넣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수요일 강의에서 나는 미도리를 보았다. 그녀는 쑥색 스웨터를 입고 여름에 자주 끼고 다니던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뒷좌석에 앉아서, 전에 한 번 본 일이 있는 안경 낀 자그마한 여자아이와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리로 가서 강의가 끝나고 이야기 좀 하고 싶다고 미도리에게 말했다. 안경을 낀 여자아이가 먼저 나를 쳐다보고, 그리고 미도리가 나를 쳐다봤다. 미도리의 머리는 전에 비하면 확실히 훨씬 여자다운 스타일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약간 어른스럽게도 보였다.
"나, 약속이 있어요" 하고 미도리가 조금 고개를 기울이는 듯한 자세로 말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 5분이면 되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미도리는 선글라스를 벗더니 눈을 가느다랗게 찌푸렸다. 무엇인가 백 미터가량 저쪽의 무너져 가는 폐옥을 바라다보는 듯한 유쾌하지 않은 눈초리였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미안하지만."
안경을 낀 여자아이가, 얘는 당신하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대요. 미안하지만, 이라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제일 앞 우측 끝자리에 앉아 강의를 듣고, 강의가 끝나자 천천히 셋을 헤아린 후 뒤를 돌아보았다. 미도리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4월은 혼자서 보내기엔 너무나 외로운 계절이었다. 4월에는 주위의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게 보였다. 사람들은 코트를 벗어 던진 채, 양지바른 곳에 모여 이야기를 하거나, 캐치볼을 하거나, 사랑은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완전한 외돌토리였다. 나오코도 미도리도 나가사와도, 누구도 모두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멀어져 갔다. 그래서 지금의 나에겐 안녕하고 인사할 상대조차 없었다. 그 돌격대마저도 나는 그리웠다.
나는 그러한 괴로운 슬픔을 달랠 길 없는 고독 속에서 4월을 보냈다. 몇 번인가 더 미도리에게 말을 걸어 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언제나 같았다. 지금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그 어조로 보아 진심으로 느끼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대체적으로 그 안경 낀 여자와 함께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키가 크고 머리를 짧게 깎은 남학생과 같이 있었다. 유달리 다리가 긴 남학생으로 그는 언제나 흰 농구화를 신고 있었다.
4월이 가고 5월이 왔지만 5월은 4월 보다 더 가혹했다. 5월이 되자 나는 깊어가는 봄의 한가운데에서 마음이 떨리고, 흔들리기 시작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떨림은 대개 해질녘에 찾아들었다. 목련의 향기가 그윽하게 풍겨 오는 옅은 어둠 속에서, 내 마음은 까닭 없이 부풀어오르고, 떨리고, 흔들리고, 아픔으로 차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천천히 긴 시간이 걸려 그것은 지나갔고, 그 뒤에 둔탁한 아픔을 남겨 놓았다.
그럴 적에 나는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는 근사한 일, 기분 좋은 일, 이름다운 일 밖에는 쓰지 않았다.
풀 내음, 상쾌한 봄바람, 달빛, 최근에 본 영화, 좋아하는 노래, 감명을 받은 책, 그러한 것에 대해서만 썼다. 그런 편지를 되풀이 읽노라면 나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다. 어쩌면 이렇게 멋진 세계에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그러한 편지를 몇 통이나 썼다. 하지만 나오케에게서도 레이코 여사에게서도 편지는 오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레스토랑에서, 나는 이토라는 동년배의 아르바이트 학생과 알게 되어 이따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미술 대학 유화과에 다니는 얌전하고 말이 없는 사나이로, 이야기를 하게 되기까지엔 꽤 시간이 걸렸지만,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일이 끝나면 근처의 가게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해서 우리는 대체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날씬하고 잘생긴 사나이로, 미대의 학생치고는 머리도 짧고 청결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정상적인 기호와 사고를 갖고 있었다. 프랑스 소설을 좋아해서 조르주 바타유와 보리스 비앙의 것을 즐겨 읽고, 음악은 모차르트와 모리스 라벨의 곡을 주로 듣는다고 했다. 그리고 나처럼 그런 걸 화제로 삼을 수 있는 친구를 찾고 있었다.
그는 나를 한 번 자기 아파트로 초대해 주었다. 이노카시라 공원 뒤쪽에 있는 조금 이상한 구조의 단층 아파트였는데, 방안에는 그림 재료라든가 캔버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림을 보고 싶다고 나는 말했지만, 아직은 부끄러운 수준이라고 하며 보여 주지 않았다.
우린 그가 아버지한테서 몰래 들고 온 시바르 리갈을 마시며, 풍로에 물고기를 구워 먹고, 로벨 카사드쉬가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콘체르토를 들었다.
그는 나가사키 출신이었으면 고향에 애인이 있었다. 그는 나가사키에 돌아갈 적마다 그녀와 자곤 했는데, 최근엔 뭔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도 모르게 알게 되잖아. 여자란 말이야." 하고 그가 말했다.
"스물이나 스물한 살쯤 되면 갑자기 여러 가지 일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거야. 몹시 현실적이 되어 가는 거지. 그렇게 되면 말야, 지금까지 사랑스럽다고 느껴지던 것이 그저 그렇게 따분하게만 비쳐지지. 날 만나기만 하면 말이야, 대개 섹스를 한 뒤이긴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면 뭘 하겠느냐 묻는 거야.“
"뭘 할 생각이지?"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뭘 하겠느냐고 하지만 뭘 할 게 없어, 그림쟁이한테는. 그런 것까지 생각하면 아무도 그림쟁이가 되지 못해. 그렇지 않겠어? 미대 나와 보았자 밥조차 먹지 못하니까. 그렇게 말하면 그녀는 나가사키에 돌아와서 미술 선생이 되라는 거야. 그녀는 영어 선생을 할 작정이거든, 나 참."
"그 여자를 이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거 같군."
"아마 그런 것 같애." 하고 이토는 시인했다.
"게다가 난 미술 선생 같은 건 되고 싶질 않다구. 원숭이 같이 떠들기만 하고 버릇없는 중학생들에게 그림이나 가르치며 일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아."
"그런 어떠하든, 그럼 그녀와는 헤어지는 게 좋은 거 아냐? 서로를 위해서 말이야" 하고 내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말을 꺼낼 수가 없어, 불쌍해서. 그녀는 나와 결혼할 생각인데, 헤어지자, 난 이젠 널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하고 말을 꺼낼 수가 없는 거야."
우린 얼음도 넣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시바스리갈을 마시고, 고기 안주가 바닥이 나자 오이와 샐러리를 길게 썰어 된장에 찍어 먹었다. 오이를 아작아작 씹자니까 문득 죽은 미도리의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리고 미도리가 없는 나의 생활이 얼마나 무미건조한가에 생각이 미치자 턱없이 외로운 기분이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속에서 그녀의 존재가 점점 부풀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너, 애인 있어?" 하고 이토가 물었다.
있기는 있어, 하고 나는 한 호흡을 쉰 후 대답했다. 하지만 사정이 있어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지만, 서로 마음은 통하고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구원의 길이 없으니까" 하고 나는 농담처럼 말했다.
그는 모차르트의 훌륭함에 대해서 조용한 목소리로 늘어놓았다. 그는 시골 사람들이 산길을 잘 알고 있듯이, 모차르트의 훌륭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부친이 좋아했기 때문에 세 살 적부터 줄곧 모차르트를 들어왔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클래식 음악에 대해 그렇게 깊이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의 아 바로 여기가... 라든가 어때, 여기... 라고 하는 적절하고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서 모차르트의 콘체르토에 귀를 기울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노카시라 공원 숲 위로 떠 있는 초승달을 바라보며 시바스 리갈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셨다. 맛 좋은 술이었다.
그는 하룻밤을 묵고 가라고 했지만 나는 볼일이 있다고 사양하고는 잘 마셨노라고 인사를 한 후에 아홉시 전에 그의 아파트에서 나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공중 전화 부스에 들어가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희한하게도 미도리가 전화를 받았다.
"미안해, 하지만 지금 자기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건 나도 잘 알아. 몇 번이나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너와의 관계를 끊고 싶지는 않아. 넌 정말로 몇 안 되는 내 친구 중의 한 사람이고, 널 만나지 못하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니까. 언제쯤 너와 이야기할 수 있지? 그것만이라도 가르쳐 줘."
"내가 이야기할게요, 그때가 되면."
"건강해?"
"그저 그래"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5월 중순경에 레이코 여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언제나 보내 주는 편지 고마워요. 나오코는 몹시 기뻐하며 읽고 있어요. 나도 보여 달라고 해서 읽고요. 괜찮지요, 내가 읽어도?
오랫동안 편지를 쓰지 못해 미안해요. 정직하게 말해서 나도 좀 피곤했고, 좋은 소식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에요. 나오코의 사정은 그렇게 좋지를 못해요. 일전에 고베에서 나오코의 어머니가 찾아와, 전문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나와 넷이서 많은 의견을 서로 나누었어요. 그래서 당분간 전문 병원에 가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고, 그 결과를 보고 나서 다기 이곳으로 돌아오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합의에 이르렀지요.
나오코는 가급적이면 계속 여기 있으면서 고쳐 보고 싶다고 하고, 나도 그녀와 헤어지기가 쓸쓸하고 걱정도 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여기서 그녀를 컨트롤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보통은 이렇다 할 만한 별다른 일이 없다가도, 때때로 감정이 몹시 불안정해지는 일이 있어서, 그럴 때에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지 모르기 때문이죠. 환청이 심해져서 나오코는 모든 것을 닫고 자기 속으로 기어들어 가버려요.
그래서 나도 나오코가 한동안 적당한 시설에 들어가 그곳에서 치료를 받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전에도 와타나베에게 말했지만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제일이에요. 희망을 잃지 말고 엉킨 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거예요. 사태가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실마리는 어딘가에 있게 마련이죠. 주위가 어두우면 잠시 가만히 있으면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듯이 말에요.
이 편지가 와타나베에게 닿을 무렵이면 나오코도 그쪽 병원으로 옮겨가고 없을 거예요. 연락이 언제나 뒤로 처져서 미안하지만 여러 가지 일이 잇따라 조급하게 결정돼 버렸어요.
새로운 병원은 확실히 좋은 병원이에요. 좋은 의사도 있고요. 주소를 뒤에 적어 놓았으니까 편지를 그쪽으로 보내요. 나오코에 대한 소식은 내 쪽에도 전해지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려 주겠어요.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으면 와타나베에게도 얼마나 좋겠어요.
와타나베도 괴롭겠지만 기운을 내요. 나오코는 없지만 가끔도 좋으니까 내게도 편지 줘요. 그럼 안녕.
그 봄에 나는 매우 많은 편지를 썼다. 나오코에겐 일주일에 한 번씩 썼고, 레이코 여사에게도, 미도리에게도 몇 번인가 편지를 썼다.
강의실에서 쓰고, 집의 책상에서 갈매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쓰고, 휴식 시간에 아르바이트하는 이탈리아 요리점의 테이블에서도 썼다. 마치 편지를 씀으로써 산산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생활을 겨우 지탱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너와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척 괴롭고 쓸쓸한 4월과 5월을 보냈다고, 나는 미도리에게 보낸 편지에다 썼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쓸쓸한 봄을 체험한 것은 처음이며, 이 모양이면 차라리 2월이 세 번 계속되는 편이 훨씬 낫다. 지금 새삼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새로운 헤어스타일은 네게 너무나 잘 어울린다. 매우 귀엽다. 지금은 이탈리아 요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요리사한테서 맛있는 스파게티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언젠가 네게 만들어 주고 싶다고.
나는 매일 학교에 다니며, 일주일에 두세 번 이탈리아 요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이토와 책이나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에게서 보리스 비앙의 책을 몇 권인가 빌려 읽고, 편지를 쓰고 갈매기와 놀고, 스파게티를 만들고, 정원을 손질하고, 나오코를 생각하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많은 영화를 보았다. 미도리가 말을 건 것은 6월 중순경이었다. 나와 미도리는 2개월 동안이나 말없이 지냈던 것이다.
그녀는 강의가 끝나자 내 옆자리에 앉아, 잠시 턱을 괴고 묵묵히 있었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마철 특유의 바람을 수반하지 않은 곧은 비로, 그것은 온갖 것을 여지없이 적시는 거센 비였다. 다른 학생들이 교실에서 다 나간 뒤에도 미도리는 계속 그런 자세로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진 재킷의 호주머니에서 말보로를 꺼내 입에 물고는 성냥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미도리는 그 입술을 둥글게 오므려 담배 연기를 내 얼굴에다 천천히 내뿜었다.
"내 헤어스타일 괜찮아요?"
"굉장히 좋아."
"어느 만큼 좋아?" 하고 미도리가 다시 물었다.
"온 세계의 숲에 있는 나무가 다 쓰러질 만큼 멋져" 하고 나는 대답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녀는 잠시 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더니 이윽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나보다도 그녀가 더 마음이 놓인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담뱃재를 바닥에 털고는 불쑥 일어섰다.
"점심 먹으러 가요. 배가 고파"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어디로 가지?"
"니혼바시의 다카시마야 백화점 식당."
"무엇 때문에 일부러 그런 데까지 가지?"
"이따금 거기 가고 싶어져요, 나."
그래서 우리는 전철을 타고 니혼바시까지 갔다. 아침부터 쉬지 않고 비가 내린 탓인지 백화점 안은 사람이 그림자가 드물었다. 그저 비의 냄새가 떠돌 뿐, 점원들도 할 일이 없어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는 지하의 식당으로 가서 윈도우의 견본을 면밀히 검토해 본 후 둘 다 도시락을 먹기로 했다. 점심때였지만 식당은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백화점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도 참 오랜만이군" 하고 나는 백화점 식당에서밖에 볼 수 없는, 희고 매끈매끈한 컵에 담긴 파를 마시면서 말했다.
"난, 좋아해요. 이런 거"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뭔지 특별한 일을 하고있는 기분이 돼요. 아마도 어렸을 적이 기억 탓일 거예요. 백화점 같은 덴 좀처럼 누가 데려다주지 않았으니까."
"난 자주 다녔던 것 같아. 어머니가 백화점에 가는 걸 좋아하셨었거든."
"좋았겠어요."
"별로 좋은 것도 없었어. 난 백화점에 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 말이 아니고, 귀여움을 받았으니 좋았겠다는 뜻이에요."
"응, 외아들이었으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어른이 되면 백화점 식당엘 혼자 가서 맛있는 것을 실컷 먹어 보자고 생각했어요. 어릴 적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그렇지만 허무해요. 혼자 이런 곳에서 꾸역꾸역 밥을 먹어본들 재미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특별나게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넓고 붐비고 시끄럽고 공기도 나쁘고. 하지만 이따금 이곳에 오고 싶어지거든요."
"지난 두 달 동안 쓸쓸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편지에서도 읽었어요." 하고 그녀는 무표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점심 먹어요. 난 지금 그 밖에 일은 생각지도 못하겠어."
우리는 반원형 칠그릇에 담겨진 도시락을 말끔히 먹고, 국을 마시고, 차를 마셨다. 미도리는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다 피우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성큼 일어서서 우산을 들었다. 나도 함께 일어나 우산을 들었다.
"이젠 어딜 갈 거지?" 하고 내가 물었다.
"백화점에 와서 점심을 먹었으니 다음은 옥상이잖아, 당연히"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비가 내리는 옥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완동물 용품 매장에도 점원은 보이지 않았고, 다른 매점도 닫혀 있었다.
우리는 우산을 들고 비로 흥건히 젖은 회전목마라든가 나무 의자, 그리고 간이매점들 사이를 산책했다. 도쿄의 한복판에 이렇게 인기척 없고 황량한 곳이 있다는 게 나로선 새로운 놀라움이었다. 미도리는 망원경을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동전을 넣어 주고, 그녀가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우산을 받쳐 주었다.
옥상 한 귀퉁이에 지붕이 있는 오락장이 있었고, 어린이용 게임 기계가 몇 대 줄지어 있었다. 우린 거기 있는 발돋움용 나무통에 나란히 걸터앉아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뭔가 이야기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이야기할 게 있지요, 자기?"
"변명을 하고 싶진 않지만, 그땐 나도 나사가 빠져 머리가 멍해 있었던 거야. 그래서 이런저런 일 모두가 머리에 잘 들어오질 않았어."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너와 만나지 못하게 되자 깨달았어. 네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그럭저럭 버티어 왔다는 것을. 네가 없으니까 너무 괴롭고 쓸쓸했어."
"하지만 자기는 모르죠? 자기와 만나지 못한 지난 두 달 동안, 내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쓸쓸했는지를?"
"몰랐어, 그런 거" 하고 나는 깜짝 놀라 말했다.
"넌 나 때문에 화가 나 있고, 그래서 날 만나기 싫어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어."
"어째서 자기는 그렇게 바보야? 만나고 싶을 게 뻔하잖아요? 이미 난 자기를 좋아한다고 말했잖아요? 난 그렇게 간단히 누가 좋아지고 미워지고 하는 사람이 아냐, 그런 것도 몰라요?"
"그런 물론 그렇지만..."
"물론 나도 화가 났어요. 마구 발길질을 해줘도 시원치 않을 만큼.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자기는 멍하니 다른 여자 생각만 하고 있고, 나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으니까. 하지만 말에요, 그것과는 별도로 나, 자기와 좀 떨어져 있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어요. 여러 가지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이라니?"
"자기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요. 말하자면 난 자기와 함께 있는 편이 점점 더 즐거워졌다구요.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보다. 그건 아무래도 부자연스럽고 좀 난처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나, 그 사람 좋아해요. 좀 고집이 세고 편협하고 파시스트긴 하지만, 좋은 점도 많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좋아진 사람이기도 하고. 하지만 자기는 어쩐지 좀 특별해요, 내게 있어서는. 함께 있으면 썩 잘 어울린다는 기분이 들거든요. 난 자기를 신뢰하고 있고, 좋고, 놓치기가 싫어요. 요컨대 나 자신도 혼란스러워진 거야. 그래서 그 사람한테 가서 솔직하게 의논했어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와타나베와는 더 이상 만나지 말라고 그 사람은 말했어요. 만일 와타나베와 만나려면 나와는 헤어지자고."
"그래서 어떻게 했어?"
"그 사람과 헤어졌어요, 깨끗이."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고 말보로를 입에 물더니, 손으로 가려 성냥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셨다.
"어째서?"
"어째서?" 하고 미도리는 소리를 질렀다.
"자기, 머리가 이상한 것 아냐? 영어의 가정법을 알고, 순열을 이해하고, 마르크스를 읽을 줄 알면서 왜 그런 걸 묻는 거지요? 어째서 그런 걸 여자에게 말하게 해요? 그 사람보다 자기를 더 좋아하니까 그렇게 하는 게 뻔하잖아. 나도 좀 더 근사한 남자를 좋아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자기가 좋아져 버렸으니까."
나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미도리는 물이 고인 곳에다 담배를 던졌다.
"그렇다고 너무 그렇게 난처한 표정은 짓지 말아요, 슬퍼지니까. 괜찮아요, 나 말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따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안아 주는 정도는 할 수 있죠? 나도 지난 두달 도안 정말 괴로웠으니까."
우린 게임장 뒤켠에서 우산을 받쳐든 채 포옹을 했다. 단단히 몸을 붙이고 서로의 입술을 더듬었다. 그녀의 머리에서도 진의 재킷 옷깃에서도 비 냄새가 났다. 여자의 몸이란 왜 이토록 부드럽고 따뜻할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재킷 너머로 나는 그녀의 따뜻한 젖가슴의 감촉을 확실히 가슴에 느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살아 있는 사람과 접촉한 것 같았다.
"자기와 요전에 만났던 날 밤, 그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헤어졌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난 널 정말 좋아해" 하고 내가 말했다.
"마음으로부터 널 좋아해. 앞으로 두 번 다시 놓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지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 여자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줘요, 그 여자와 잔 일 있어요?"
"1년 전에 꼭 한 번."
"그리곤 만나지 못했어요?"
"두 번 만났어. 하지만 같이 자진 않았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왜 그래요? 그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나로선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사정이 몹시 읽혀 있어. 어떤 문제가 엉키어 있는 데다 그게 오래 지속되어 왔기 때문에, 정말은 어떤 건지 점점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어. 나도 그 여자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그게 인간으로서 어떤 종류의 책임이라는 거야. 그래서 난 그것을 저버릴 수가 없는 거야.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느끼고 있어. 설사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해도."
"난 살아 있는 피가 흐르는 여자예요."
미도리가 내 목덜미에 볼을 비벼대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자기에게 이렇게 안겨서 자기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거라구요. 자기가 이래라 하면 난 그게 뭐든지 할 거예요. 나, 약간 억지스러운데가 있긴 하지만 정직하고 좋은 아이고, 일 잘하고, 얼굴도 이렇게 예쁘고, 가슴도 잘생겼고, 요리도 잘하고, 아버지의 유산도 신탁 예금을 해 두었고... 너무나 싸구려로 넘어간다고 생각지 않아요? 자기가 갖지 않으면 그동안에 난 어딘가로 가버릴 거예요."
"시간이 필요해" 하고 나는 말했다.
"생각을 하고, 정리도 하고, 판단을 할 시간이 필요해. 안됐다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어."
"하지만 날 마음속으로부터 좋아하고, 두 번 다시 놓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미도리는 몸을 떼더니 방긋 미소를 짓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좋아요, 기다려 줄게요. 자기를 믿으니까" 하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나를 가질 때는 나만을 가져야 해요. 그리고 나를 안을 때는 나만을 생각해 줘요. 내가 말하는 뜻 알겠어요?"
"잘 알아."
"그리고 내게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지만 상처만은 입히지 말아줘요. 나, 지금까지의 인생에서도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서 더 이상은 상처를 받고 싶지 않다고요. 행복해지고 싶은 거예요."
나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 하찮은 우산 따위는 집어치우고 두 팔로 더 좀 꼭 안아 줘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우산을 쓰지 않으면 흠뻑 젖어 버릴 텐데?"
"괜찮아요. 그까짓 것, 아무러면 어때요.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저 안기고 싶어요. 나, 두 달 동안이나 참아온걸요."
나는 우산을 발밑에 놓고 빗속에서 힘껏 미도리를 끌어안았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의 둔중한 타이어 소리만이 안개처럼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비는 소리도 없이 집요하게 계속 쏟아졌고, 그것은 우리들의 머리를 흠뻑 적시고 눈물처럼 볼을 따라 흐르고 그녀의 진 재킷과 나의 황색 나이론 윈드 브레이커를 어두운 색깔로 물들였다.
"어디 지붕 있는 데로 슬슬 가지 않을래?"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 집으로 가요.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 이대로 있다간 감기 들겠어."
"그렇군."
"저, 우리 어쩐지 강을 헤엄쳐 온 사람 같아요" 하고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아, 기분 좋았어."
우린 백화점에서 좀 큼직한 수건을 사 가지고, 번갈아 세면장으로 들어가 머리를 말렸다. 그리고 전철을 타가며 그녀의 아파트까지 갔다.
미도리는 곧 나부터 샤워할 수 있게 준비해 주고, 이어서 그녀도 샤워를 했다. 그리고 내 옷이 마를 때까지 욕의를 빌려주고 그녀는 폴로셔츠와 스커트로 갈아입었다. 우리는 주방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셨다.
"자기 이야기 좀 해줘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내 어떤 이야기?"
"글세... 어떤 게 싫어요?"
"닭고기와 성병과 그리고 말이 많은 이발사가 싫어."
"그 밖에?"
"4월의 고독한 밤과 레이스 달린 전화기 커버가 싫어."
"그 밖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밖에 특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나의 그이는 - 즉 전의 그이는 싫어하는 게 많았어요. 내가 아주 짧은 치마를 입는 것이라든가 담배 피우는 걸 싫어했고, 금방 술에 취한다든가 야한 말을 한다든가 그의 친구들 욕을 한다든가... 그러니까 그런 나에 관해 싫은 게 있다면 서슴없이 말해줘요. 고칠 수 있는 건 고쳐 나갈 테니까."
"별로 없는데"하고 나는 잠깐 생각한 끝에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없어."
"정말?"
"네가 입고 있는 건 뭐든지 좋고, 네가 하는 일도, 말하는 것도, 걸음걸이도, 술주정도, 무엇이든 좋아해."
"정말 이대로 좋은 거예요?"
"또 바뀌면 어떤 게 좋은지 모르겠으니까 그대로가 좋아."
"온 세계 정글 속의 호랑이가 모두 녹아 버터가 돼버릴 만큼 좋아" 하고 내가 말했다.
"으음" 하고 미도리는 조금은 만족한 듯이 말했다.
"한 번 더 안아 줄 거야?"
나와 미도리는 그녀 방의 침대에서 힘껏 포옹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린 이불 속에서 입술을 포갰고, 세계의 형성에서부터 삶을 계란의 정도에 따른 기호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야기를 했다.
"비 오는 날엔 개미들은 도대체 뭘 하지?"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몰라" 하고 내가 말했다.
"아마도 집을 청소하거나 저장품을 정리하는 게 아닐까. 개미는 일을 열심히 하니까."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어째서 개미는 진화도 못하고 지금도 그저 개미지요?"
"모르겠는데. 하지만 몸의 구조가 진화에 적합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 즉 원숭이 같은 것에 비해서 말이야."
"자기도 의외로 모르는 게 많네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와타나베라면 세상의 일은 거의 다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세계는 넓어" 하고 내가 말했다.
"산은 높고 바다는 깊어"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그리고 욕의 자락 밑으로 손을 넣어 나의 남성을 잡았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었다.
"와타나베, 안됐지만 이건 농담이 아니고 정말 안 되겠어요. 이렇게 거창해서야..."
"농담이겠지" 하고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농담이야" 하고 미도리는 킥킥 웃었다.
"괜찮아, 안심해요. 이 정도라 해도 어떻게든 들어갈 거니까요. 나, 자세히 봐도 돼요?"
"좋도록 해." 하고 나는 말했다.
미도리는 이불 속에 머리를 박고 잠시동안 내 페니스를 만지작거렸다. 표피를 잡아당겨 보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고환의 무게를 저울질해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불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첨하는 게 아니라 정말 좋아요,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 하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와는 싫은 거죠? 여러 가지 일이 확실해지기 전엔."
"싫을 리가 없잖아" 하고 나는 말했다.
"머리가 이상해질 만큼 원해.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고집이 세군요. 나라면 안 그래요. 생각은 그 뒤에 할 거라구."
"정말 그래?"
"거짓말" 하고 미도리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참을 거예요. 내가 자기래도 역시 같을 거예요. 그리고 난 자기의 그런 점이 좋아요. 정말 정말 좋아요."
"얼마만큼?" 하고 나는 물었지만 미도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 내게 몸을 밀착시키고 내 젖꼭지에 입술을 댄 다음, 내 남성을 잡은 손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그때 느낀 것은 나오코가 해주던 손의 움직임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양쪽 다 부드럽고 훌륭했지만 뭔가 차이기 있어서, 전혀 별개의 체험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으음, 자기 지금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지요?"
"아니" 하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정말?"
"정말이야."
"이럴 때 다른 여자 생각하면 싫어요."
"생각하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내 가슴이나 거기 만지고 싶어요?"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그러고 싶지만, 아직은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한꺼번에 여러 가질 하면 자극이 너무 강하거든."
미도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내의를 벗고, 자신의 것을 내 페니스 끝에 갖다 댔다.
"여기에 사정해도 좋아."
"하지만 더러워질 텐데."
"눈물이 나니까 싱거운 소린 하지 마" 하고 미도리는 울먹일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탁하면 그만이야. 사양 말고 마음껏 해버려요.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새것을 사서 선물하면 되잖아. 아니면 내 것 가지곤 기분에 들지 않아 안 되겠어요?"
"설마"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자..."
내가 사정을 끝내자 미도리는 나의 정액을 점검했다.
"정말 많아" 하고 그녀는 감탄한 듯이 말했다.
"너무 많았나?"
"괜찮아, 바보같이. 마음껏 하라고 그랬잖아요" 하고 미도리는 웃으며 말하고 내게 키스했다.
저녁때가 되자 미도리는 근처에서 장을 봐와서는 밥을 지어 주었다. 우린 주방 식탁에서 맥주를 마시며 튀김을 먹고, 완두콩을 넣은 밥을 먹었다.
"많이 먹고 많이 만드는 거예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그러면 내가 부드럽게 해결해 줄 테니까요."
"고마워" 하고 나는 말했다.
"나, 여러 가지 방법을 알고 있어요. 서점 운영할 때 여성 잡지에서 그런걸 배웠다구요. 저, 임신 중엔 그거 못하니까 그동안 남편이 바람을 피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처리해 주는 방법이 특집이었어요. 정말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구요. 즐거워요?"
"즐겁지" 하고 나는 말했다.
미도리와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나는 역에서 샀던 석간을 펼쳐 보았지만, 생각해 보니 그까짓 것 조금도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읽어 보았자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런 아무 뜻 없는 신문의 지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난 대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나를 둘러싼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불쑥불쑥 내 주위에서 세계가 두근두근 맥박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나는 한숨을 몰아쉬고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 일에 대해 나는 전혀 후회가 없었다. 오늘을 다시 한 번 산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역시 비 내리는 옥상에서 미도리를 세차게 안았을 것이고, 물벼락을 맞은 듯 젖었을 것이며, 그녀의 침대에서 그녀의 손가락에 의해 사정을 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선 한 가닥의 의심도 없었다.
나는 미도리를 좋아했고 그녀가 나에게 되돌아온 것이 무척 기뻤다. 그녀하고 라면 둘이서 잘 살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미도리는 자기 자신이 말하던 대로 숨쉬고 있는 현실의 여자며, 그 따스한 몸을 내 품에 내맡기고 있지 않았던가.
나로선 미도리의 몸을 열고 그 따뜻함 속으로 침몰되어 가고 싶은 세찬 욕망을 누르는 게 고작이었다. 나의 페니스를 잡은 손이 서서히 움직이는 것을 저지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나는 그걸 간절히 원하고 있는데, 누가 그걸 감히 멈출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 나는 미도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은 훨씬 이전부터 내가 알고 있던 거였다. 다만 그런 결론을 내가 오랫동안 회피해 왔을 뿐이었다.
문제는 내가 나오코에게 그러한 상황 전개를 잘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나오코에게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따위의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나오코 역시 사랑하고 있었다. 어느 과정에서인지 이상한 형태로 비뚤어져 버린 방식이긴 했지만 나는 틀림없이 나오코를 사랑하고 있었고, 내 속엔 나오코를 위해 꽤 넓은 자리가 빈 채로 보존되어 있었다.
나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레이코 여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정직한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 툇마루에 앉아 비가 내리는 밤의 정원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에서 몇 가지 문장을 나열해 보았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편지를 썼다.
"이런 편지를 레이코 여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정직한 편지를 써야 한다는 것은 나로서도 퍽 괴로운 일입니다." 하고 나는 첫머리에다 썼다. 그리고 미도리와의 지금까지의 관계를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오늘 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썼다.
나는 나오코를 사랑해 왔고, 지금도 역시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도리와 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이대로 자꾸자꾸 저 끝까지 떠밀려 가버릴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내가 나오코에 대해 느끼는 것은 무섭게 조용하고 부드럽고 맑은 애정이지만, 미도리에 대해선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서 걸어가고, 호흡을 하고, 고동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뒤흔듭니다. 저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몹시 혼란스러워져 있습니다.
결코 변명할 생각은 아닙니다만, 나는 내 나름으로 성실하게 살아온 셈이고, 누구에게도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 입히지 않도록 줄곧 조심해 왔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런 미궁과 같은 곳에 내동댕이쳐졌는지 나로선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에겐 레이코 여사밖에 의논할 상대가 없습니다.
나는 속달 우표를 붙여 그날 밤으로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레이코 여사에게서 답장이 온 것은 그로부터 5일 후였다.
전략.
우선 좋은 뉴스.
나오코는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나도 한 번 전화로 이야기했지만 말이 꽤 분명했어요. 어쩌면 머지않아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다음은 와타나베 군에 관해서.
그런 식으로 온갖 일을 그저 심각하게만 받아들이는 건 좋지 않다고 나는 생각해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고, 그 애정이 성실한 것이라면 누구도 미궁 속에 내동댕이쳐지지는 않아요. 자신을 가져요.
나의 충고는 매우 간단해요. 우선 첫째로 그 미도리에게 당신이 강하게 매료되었다면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그것은 잘되어질 수도 있고 그다지 잘 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연애란 원래가 그런 거예요. 사랑에 빠지면 거기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자연스런 것이겠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것도 성실의 한 모습이니까요.
둘째로 학생이 미도리와 섹스를 하느냐 안 하느냐는 것은 와타나베 군 자신의 문제지, 나로선 무어라고도 할 수 없어요. 미도리와 둘이서 잘 이야기해 보고 남들이 가는 결론을 내도록 해봐요.
셋째로 나오코에겐 아직 그 일은 덮어두도록 해요. 만일 그녀에게 뭔가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상황이 오면, 그땐 나와 와타나베 군 둘이서 좋은 방법을 생각하기로 해요. 그러니 지금은 나오코에겐 잠자코 있도록 해요. 그 일은 그저 내게 맡겨줘요.
넷째, 와타나베는 지금까지 나오코의 든든한 지주가 되어 왔듯이 혹시 그녀에게 연인으로서의 애정을 품지 않게 되었다 해도, 와타나베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많다는 거예요. 그러니 모든 것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도록 해요.
우리는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에요. 자로 깊이를 재고, 각도기로 각도를 재서 은행 예금처럼 빡빡하게 살아 나갈 순 없어요. 안 그래요?
나의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미도리라는 여자는 매우 멋있는 여자인 것 같아요. 와타나베가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다는 것은 편지만 봐도 잘 알아요. 그러면서 동시에 나오코에게도 마음이 끌린다는 것도 잘 알겠어요. 그런 건 죄도 아무것도 아니죠. 이 드넓은 세계에는 흔히 있는 일이니까! 날씨고 좋은 날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를 띄우고, 호수도 아름답지만 하늘도 아름답다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요.
그런 식으로 고민하지 말아요. 내버려둬도 만사는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입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마련이지요. 인생이란 그런 거예요. 대단한 것을 말하는 것 같지만, 와타나베군도 그런 인생살이를 슬슬 배워도 좋은 때라고 생각하세요.
와타나베 군은 때때로 인생을 지나치게 자기 방식으로만 끌어들이려고 해요. 정신 병원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좀 더 마음을 열고, 인생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맡겨 봐요. 나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도 때로는 산다는 게 근사하다고 생각하고 산다구요. 정말이에요, 그건! 그러니 와타나베 군도 더욱더 행복해져야 해요. 행복해지는 노력을 해봐요.
물론 나는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해피엔딩을 맞을 수 없다는 걸 섭섭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결국 무엇이 좋았다는 것은 그 누가 알 수 있겠어요? 그러니 와타나베 군은 누구도 염려하지 말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행복해지도록 해요. 경험에 의한 나의 생각이지만, 그런 기회란 인생에 두세 번밖에 없고, 그것을 놓치면 일생을 후회하게 돼요.
나는 매일 들려줄 사람도 없이 기타를 치고 있어요. 이것도 무언가 쓸모 없는 짓이죠. 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도 싫군요. 언젠가 다시 와타나베 군과 나오코가 있는 방에서 포도를 먹으며 기타를 치고 싶어요.
그럼 이만.
6월 17일 이시다 레이코
제11장 계속 살아가는 일만을 생각해야 한다
나오코가 죽은 뒤에도 레이코 여사는 내게 몇 번이나 편지를 보내, 그것은 내 탓도 아니고 그 누구의 탓도 아니며, 그것은 비가 내리는 것처럼 누구도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서 답장을 쓰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좋은가? 게다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나오코는 이미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한 줌의 재가 돼버린 것이다.
8월 말 나오코의 장례식이 조용히 끝나자, 나는 도쿄로 돌아와 주인에게 당분간 집을 비우겠으니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고, 아르바이트 직장에는 죄송하지만 당분간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도리에게는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나쁘다고는 생각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는 짤막한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3일 동안 메일, 영화관을 돌며 아침부터 밤까지 영화를 보았다. 도쿄에서 개봉되는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나는 배낭에 짐을 꾸리고 돈을 남김없이 찾은 다음, 신주쿠 역으로 가서 바로 출발하는 급행열차를 탔다.
도대체 어디를 어떤 식으로 돌아왔는지 나로서는 전혀 생각해 낼 수가 없다. 풍경이나 냄새나 소리는 꽤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지명이란 것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갔는지 차례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기차나 버스로, 때로는 지나가는 트럭 조수석을 얻어 타고 한 도시에서 다음 도시로 이동했으며, 공터나 역, 공원이나 냇가, 해안, 그밖에 잠을 잘 만한 곳이 있으면 어디서든 침낭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파출소 한구석을 빌려 잔 적도 있고, 묘지 언저리에서 잔 적도 있다. 사람들 왕래에 방해가 되지 않고,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걷다 지친 몸을 침낭 속에 묻고 싸구려 위스키를 꿀꺽꿀꺽 마시고는 곧 잠들었다. 친절한 도시를 만나면 사람들이 음식을 갖다 주기도 하고, 모기향을 주기도 하였지만, 불친절한 도시에선 사람들이 경찰을 불러 나를 공원에서 내쫓았다. 어느 쪽이든 나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구하고 있었던 것은 모르는 도시에서 푹 잠을 자는 일뿐이었다.
돈이 떨어지면 나는 막노동을 3, 4일 해서 당장 필요한 돈을 벌었다. 어디든 무엇인가 할 일은 있었다. 나는 어디로 간다는 목표도 없이 도시에서 오시로 하나씩 이동해 갔다. 세계는 넓고 이상한 사상과 기묘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한 번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견딜 수 없이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뭘 해요, 개학한 지가 언젠데?"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리포트를 제출해야 할 것도 제법 있다구요. 어떻게 할 거예요, 도대체? 벌써 3주째에요, 소식을 끊은 지가. 어디서 뭘하고 있어요?"
"안됐지만 지금은 도쿄로 돌아갈 수가 없어, 아직은."
"할 말은 그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 제대로. 10월이 되면..."
미도리는 아무 말 없이 찰칵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그래도 여행을 계속했다. 때때로 싸구려 여관에 들어 목욕도 하고 수염도 깎았다. 거울을 보니 나는 정말 지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햇볕에 타서 살갗은 까슬까슬해지고, 눈은 퀭했으며, 여윈 뺨에는 까닭 모를 반점과 상처가 나 있었다. 지금 막 캄캄한 굴속에서 기어 나온 인간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확실히 내 얼굴이었다.
그 무렵 내가 걷고 있었던 곳은 산인 지방의 해안이었다. 도토리가 아니면 효고의 북쪽 해안이거나 그 부근에서 항상 걸었다.
해안을 따라 걷는 것은 마음 편했다. 모래밭 어딘가에는 반드시 기분 좋게 잠을 잘 수 있는 장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도에 밀려온 나무를 주워 모닥불을 피우고, 생선 가게에서 사 온 마른고기를 구워 먹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위스키를 마시고,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오코를 생각했다.
그녀가 죽어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묘한 일이었다. 내게는 그 사실이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관 뚜껑에 못질을 하는 그 소리까지 들었는데도, 그녀가 무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아무래도 순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지나치게 선명하고 강렬하게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의 페니스를 살며시 입에 물고, 그 머리칼이 내 아랫배를 살짝 스치며 간질이던 그 모습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그 따스함과 숨결, 그리고 안타까운 사정의 감촉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마치 5분 전에 있었던 일처럼 선명하게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내 곁에 나오코가 있어 손을 뻗으면 그 몸에 손이 닿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 없었다. 그녀의 육체는 이미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에 나오코의 여러 가지 모습을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속에는 나오코의 추억이 너무나 가득히 채워져 있었고, 그 추억들은 정말 작은 틈새를 억지로 헤집고 잇따라 밖으로 퉁겨져 나오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출을 억누르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나는 그녀가 그 비 내리는 아침에 노란 비옷을 입고 새집을 청소하거나 모이 푸대를 나르고 있던 광경을 생각해 냈다. 절반쯤 무너져 버린 생일 케이크와, 그날 밤, 내 셔츠를 적신 나오코의 눈물의 감촉을 생각해 냈다.
그 겨울에 그래, 그날 밤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에 그녀는 카멜 오버코트를 입고 내 곁은 걷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머리핀을 꽂고, 언제나 그것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해맑은 눈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푸른 가운을 입고, 소파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다 턱을 괴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그녀의 이미지는 밀물처럼 잇따라 나에게 밀려와 내 몸을 기묘한 장소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 기묘한 장소에서, 나는 사자와 함께 살았다. 거기에는 나오코가 살아 있어서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혹은 포옹할 수도 있었다.
그 장소에서 죽음이란 삶을 결말짓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거기에선 죽음이란 삶을 구성하는 많은 요인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나오코는 죽음을 안은 채 거기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와타나베. 그건 그저 죽은 일뿐이야. 마음 쓰지 말아요" 하고.
그런 장소에선 나는 슬픔이란 것은 느끼지 않았다. 죽음은 죽음이고, 나오코는 나오코였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 여기에 있잖아요? 하고 나오코는 부끄러운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언제 나와 같은 사소한 몸짓이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치유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이것이 죽임이라면 죽음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이구나, 하고. 그래요, 죽는다는 건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에요,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죽음이란 건 그저 죽음일 뿐이에요, 게다가 나는 여기 있으니 아주 편안해요. 어두운 파도 소리 틈에서 나오코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윽고 썰물이 되자 나는 혼자서 모래밭에 남겨져 있었다. 나는 무력해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슬픔이 깊은 어두움이 되어 보다 흡사 땀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다.
기즈키가 죽었을 때, 나는 그 죽음에선 한 가지를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체념으로 익혔다. 혹은 익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감으로 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우지 않으면 안 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읽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도 어떠한 성실함도 어떠한 상함도 어떠한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마음껏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그 밤의 파도 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매일처럼 골똘히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위스키를 몇 병씩이나 비우고, 빵을 씹고, 수통의 물을 마시고, 머리를 모래투성이로 만든 채, 배낭을 메고 초가을의 해안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었다.
바람이 강하게 불던 어느 저녁, 내가 폐선 그늘에 침낭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젊은 어부가 다가와서 내게 담배를 권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십 몇 개월 만에 담배를 피웠다. 왜 울고 있느냐고 그가 내게 물었다. 어머니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서러움을 이기지 못해 이렇게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마음으로부터 동정해 주었다. 그리고 집에서 술 한 병과 컵을 두 개 가져왔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모래밭에서 우리는 둘이서 술을 마셨다.
자기도 열여섯 살 때 모친을 잃었다고 어부는 말했다. 그리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서도 자기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만 하다가, 그래서 몸을 잔뜩 망가뜨린 채 세상을 떴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 멍청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고,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그것은 아주 먼 세계의 이야기처럼 내게 느껴졌다. 그게 도대체 어쨌다는 말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면서 돌연 이 사내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격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네 어머니가 어쨌다는 거야? 나는 나오코를 잃었어! 그렇게 아름다운 육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거라구! 그런데 왜 넌 그따위 네 어머니 얘기나 하고있는 거야?
그렇지만 그런 노여움은 곧 사라졌다. 나는 눈을 감고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어부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멍하니 그렇게 있었다. 이윽고 그는 내게 밥은 먹었느냐고 물었다. 먹지는 않았지만 배낭 속에 빵과 치즈와 토마토와 초콜릿이 있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하더니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는 말리려고 했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할 수 없이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모래밭엔 불꽃놀이를 하고 난 휴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파도는 마치 미친 듯이 굉음을 내며 부서지고 있었다. 말라빠진 개가 꼬리를 흔들며 찾아와 무엇인가 먹을 것이 없나 하고 내가 피운 작은 모닥불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자 단념하고 돌아갔다.
삼십 분쯤 뒤에 그 어부가 나무 도시락 두 개와 새로운 술을 들고 돌아왔다. 이걸 먹게, 하고 그는 말했다. 아래 것은 김밥 유부초밥이니까 내일 먹게, 하고 그는 말했다.
그는 술을 자기 잔에 붓고, 내 잔에도 따랐다. 나는 인사를 하고 두 사람분은 충분히 될 거 같은 초밥을 먹었다. 그리고 또 둘이서 술을 마셨다. 이제 더 이상 못 마실 정도의 한계까지 마시자 그는 자기 집에 와서 묵으라고 했지만, 여기서 혼자 자는 게 편하다고 했더니 더 이상은 권하지 않았다.
그는 헤어질 때 포켓에서 넷으로 접은 5천 엔짜리 지폐를 꺼내, 내 셔츠 포켓에 찔러 넣으면서 이걸로 영양가 있는 거라도 사 먹게, 당신, 얼굴이 형편없어, 하고 말했다. 이미 대접을 잘 받았으니 거기에다 돈까지 받을 순 없다고 사양했지만, 그는 돈을 되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건 돈이 아니라 내 마음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받아 둬라, 하고 그는 말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그것을 받았다.
어부가 돌아간 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잤던 여자 친구가 문득 생각났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몸 쓸 짓을 했는가 생각을 하자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며, 그리고 어떤 상처를 입을지 따위는 거의 생각도 안 해 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까지 그녀에 대한 일은 거의 생각조차 안 해 본 것이다.
그녀는 아주 온순한 여자였다. 그러나 그 당시의 나는 그러한 온순함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거의 뒤돌아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나를 용서해 주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몹시 기분이 울적해진 나는 폐선 옆에다 토했다. 과음한 탓으로 머리가 지끈거렸고, 어부에게 거짓말을 해서 돈까지 얻은 일로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슬슬 도쿄에 돌아가도 될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영원히 이런 일을 계속 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침낭을 말아 배낭에 챙긴 다음, 그것을 메고 국철역까지 걸어가서, 지금 도쿄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역무원에게 물었다. 그는 시간표를 살피더니 밤 열차를 바로 갈아타면 아침까진 오사카에 도착할 수 있고, 거기서 신칸센으로 가면 도쿄에 도착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어부에게 얻은 5천 엔으로 도쿄까지의 기차표를 샀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신문을 사서 날짜를 보았다. 거기엔 1970년 10월 2일이라고 박혀 있었다. 꼭 한 달 동안 여행을 계속해온 셈이었다. 어떻게든 현실 세계로 돌아가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한 달 동안의 여행은 나의 심경을 북돋아 주지도 못했고,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준 충격을 가볍게 해 주지도 않았다. 나는 한 달 전과 별다른 변화가 없는 상태를 한 채 도쿄로 돌아왔다.
미도리에게 전화조차 걸 수 없었다. 도대체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하는가? 모든게 이제 끝났어, 우리 둘이서 행복하게 지내자... 그렇게 말하면 좋은 것일까? 물론 나로서는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말하든, 어떤 표현을 빌리든, 결국 말해야 할 사실은 하나인 것이다. 나오코는 죽었고, 미도리는 남아 있는 것이다. 나오코는 흰 재가 되었고, 미도리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도쿄에 돌아와서도 혼자서 방안에 틀어박혀 며칠인가를 보냈다.
나의 기억 대부분은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에게 이어져 있었다. 내가 나오코를 위해 마련해 둔 몇 개인가의 방에는 쇠사슬이 늘어져 있었고, 가구는 흰 천으로 덮여 있었으며, 창틀에는 보얗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그런 방안에서 보냈다. 그리고 나는 기즈키를 생각했다. 이봐, 기즈키. 너는 기어코 나오코를 손에 넣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 좋아. 나오코는 원래 네 것이었으니까. 결국은 그녀가 가야 할 장소였겠지, 아마. 하지만 이 세계에서 이 불완전한 산자의 세계에서 나는 나오코에게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나는 나오코와 둘이서 어떻게든 새로운 삶을 구축하려고 노력했어. 그렇지만 괜찮아, 기즈키. 나오코는 네게 줄게. 나오코는 네 쪽을 택했으니까. 그녀 자신의 마음처럼 어두운 숲 깊은 곳에서 목을 맨 거야.
이봐, 기즈키. 너는 옛날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어. 때때로 나는 박물관의 관리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휑뎅그렁한 박물관 말이야. 나는 내 자신을 위해 그것을 관리하고 있는 거야.
도쿄로 돌아온 지 4일째 되던 날, 레이코 여사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봉투에는 속달 우표가 붙어 있었다. 편지 내용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와타나베 군과 내내 연락이 되지 않아 몹시 걱정하고 있다. 전화를 걸어 주면 좋겠다. 아침 아홉 시와 밤 아홉 시에 전화기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나는 밤 아홉 시에 그 번호를 돌렸다. 신호 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레이코 여사가 나왔다.
"건강해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그저 그렇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저, 나 모레쯤 와타나베 군을 만나러 가도 괜찮을까?"
"오다니요, 도쿄로 말입니까?"
"응, 그래요. 와타나베하고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가지 않으면 만나러 못 가잖아" 하고 그녀가 말했다.
"이젠 나갈 때도 됐어요. 이미 8년이나 있었으니까. 더 이상 있으면 썩어 버려요."
나는 거기에 맞는 좋은 대답이 나오지 않아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모레 신칸센으로 세 시 이십 분에 도쿄역에 도착하니까 마중 나와 줄래요? 내 얼굴 아직 기억해요? 그게 아니면 나오코가 죽었으니 나 같은 여자에겐 이제 흥미가 없다는 게 아닐까?"
"천만에요" 하고 나는 말했다.
"모레 세 시 이십 분에 도쿄역으로 마중 가겠습니다."
"금방 알 거야. 기타를 든 중년 여자를 그리 흔하지 않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도쿄역에서 나는 금방 레이코 여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남자용 트위드 재킷에다 흰 바지를 입고, 빨간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머리는 여전히 짧아 여기저기 삐쳐 있었고, 오른손에는 여행용 갈색 가방을, 왼손에는 검은 기타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얼굴의 주름살을 한꺼번에 흩트리며 웃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나도 그만 활짝 미소를 짓고 말았다. 나는 그녀의 여행 가방을 들고 중앙선의 승강장까지 나란히 걸었다.
"와타나베, 언제부터 그런 지독한 얼굴을 하고 있지요? 아니면 도쿄에선 요즘 그런 지독한 얼굴을 하는 게 유행인가?"
"한동안 여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먹는 게 시원치 않았거든요" 하고 나는 말했다.
"신칸센은 어땠습니까?"
"그거 형편없더군요. 창문도 열리지 않게 되어있고, 도중에 도시락을 사려고 생각했었는데 뜻같이 않아서 아주 혼났어요."
"차 안에서 뭔가 팔지 않았습니까?"
"그 비싸기만 하고 맛없는 샌드위치? 그런 건 굶어 죽게 된 말이라도 아 못 먹어요. 난 말이지, 고텐바에서 도미밥을 사 먹는 게 좋았거든."
"그런 말을 하면 늙은이 취급을 당합니다."
"괜찮아, 난 늙은인데, 뭐"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기치조지까지 가는 전철 속에서 그녀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무사시노의 풍경을 신기한 듯이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8년이 지나고 보니 풍경도 달라졌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와타나베,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 모르죠?"
"모르겠는데요."
"너무 무섭고 무서워서 미칠 것만 같아. 어떻게 해야될 지 모르겠거든. 나 혼자 덩그마니 이런 곳에 내팽개쳐졌으니"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그렇지만 미칠 것만 같다는 게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지 않아?"
나는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습니다. 레이코 여사는 이제 전혀 걱정 없고 게다가 스스로의 힘으로 거길 나왔으니까요."
"내가 거길 나올 수 있었던 건 내 힘이 아니야."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내가 거길 나올 수 있었던 건 나오코와 와타나베 군 덕분이에요. 나는 나오코가 없는 그 장소에 남아 있는 게 견딜 수 없었고, 도쿄로 나와 와타나베와 한 번 조용히 이야기할 필요를 느꼈어요. 그래서 거길 나온 거예요. 만일 그런 게 없었더라면, 난 아마 일생 동안 거기에 처박혀 있게 되었을 거야."
나는 수긍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겁니까, 레이코 여사는?"
"아사히가와로 가려고 해. 아사히가와!" 하고 그녀는 힘주어 말했다.
"음대 다닐 때 친했던 친구들이 아사히가와에서 음악 교실을 하고 있거든요. 내게 도와달라고 2, 3년 전부터 성화였지만 추운 데는 가기 싫다고 거절하고 있었어요. 당연하지 않아요, 겨우 자유로운 몸이 되었는데, 가는 곳이 하사이가와라면 좀 엉뚱하잖아요. 왠지 거긴 무언가 잘못 만들어진 굴 같은 곳 아냐?"
"그렇게 형편없는 곳은 아닙니다." 하고 나는 웃었다.
"한번 가본 적이 있지만, 나쁘지 않은 도시입니다. 좀 재미 나는 분위기도 있고."
"정말?"
"그래요. 도쿄에 있는 것보다는 좋습니다, 틀림없이."
"으음, 달리 갈 데도 없고, 짐도 이미 부쳐 버렸으니까" 하고 그녀는 말했다.
"와타나베, 그럼 한 번 아사히가와에 놀러 와주겠어?"
"물론 가지요. 하지만 지금 바로 갈 겁니까? 그전에 얼마쯤 도쿄에 있을 거죠?"
"응 2, 3일 동안. 가능하다면 좀 느긋이 지내고 싶어. 와타나베 군에게 신세를 져도 될까? 곤란하게 하진 않을 테니까."
"전혀 상관없습니다. 난 침낭에 들어가 벽장 속에서 자면 되니까요."
"안됐는데."
"안될 것도 없습니다. 벽장이 꽤 넓으니까요."
레이코 여사는 다리 사이에 낀 기타 케이스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리듬을 잡고 있었다.
"난 아무래도 내 몸을 길들일 필요가 있어요. 아사히가와에 가기 전에. 아직 바깥세상에 전혀 익숙하지 못하니까. 모르는 것도 많고, 긴장도 하고 있고. 그런 거 좀 도와주겠어? 나, 와타나베 군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다니까."
"나라도 좋다면 얼마든지 도와 드리죠" 하고 나는 말했다.
"나, 와타나베 군을 귀찮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 무엇을 귀찮게 하고 있습니까?"
레이코 여사는 나의 얼굴을 보고 삐죽이 웃었다. 그리고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치조지에서 전철을 내려 버스를 타고 내방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말은 하지 않았다. 도쿄의 거리 모습이 달라져 버렸다든가, 그녀의 음대 시절 이야기라든가, 내가 아사히가와에 갔을 때의 이야기 같은 대화를 간간이 나눴을 뿐이다.
나오코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레이코 여사를 만난 것은 10개월 만이었지만, 그녀와 함께 걷고 있자니 내 마음이 이상하게도 따스해져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이전에도 같은 생각을 한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나오코와 둘이서 도쿄 거기를 함께 걸을 때도, 나는 이와 꼭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일찍이 나와 나오코가 기즈키라는 죽은 자를 공유하고 있었듯이, 지금 나와 레이코 여사는 나오코라는 죽은 자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갑자기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레이코 여사는 한참을 혼자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내가 입을 다물고 있음을 알자 그녀도 말을 멈췄으므로 그대로 둘이서 버스를 타고 내 방까지 갔다.
내가 맨 처음, 꼭 일 년 전에 교토로 나오코를 방문했을 때와 똑같이 맑은 햇살이 눈부신 오후였다. 구름은 뼈처럼 희고 가늘었으면, 하늘은 꿰뚫릴 듯이 드높았다. 다시 가을이 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바람 냄새와 햇살의 빛깔, 풀숲에 피어 있는 작은 꽃들과 잠깐잠깐씩 들려오는 소리의 울림들이 나에게 가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계절이 돌아 올 적마다 나와 죽은 자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간다. 기즈키는 열일곱 살 그대로고 나오코는 스물하나인 채 그대로다. 영원히.
"이런 곳에 오면 마음이 좀 놓여요" 하고 버스를 내려 주위를 돌아본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데니까요" 하고 내가 말했다.
내가 뒷문을 통해 정원으로 들어가 별채로 안내하니까 레이코 여사는 온갖 것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아주 좋은 곳이잖아?"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거 다 와타나베가 만들었어요? 이 선반이랑 책상 같은 것?"
"그래요" 하고 나는 물을 끓이고 차를 넣으면서 말했다.
"다 돌격대 덕분입니다. 그가 나를 청결한 성격으로 만들어 주었으니까. 그래서 주인도 좋아합니다. 집을 깨끗이 써준다고요."
"아, 그래요. 주인한테 인사하고 올게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주인은 정원 저쪽에 살고 있겠죠?"
"인사? 인사를 무엇 때문에 합니까?"
"당연한 일이잖아. 와타나베 집에 이상한 중년 여자가 굴러 들어와서 기타를 치거나 하면 주인도 뭔가, 하고 생각하겠지? 그런 건 미리미리 깔끔하게 해 두는 게 좋아요. 그것 때문에 선물까지 준비해 왔으니까."
"머리 회전이 잘 되는군요" 하고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나이 덕이야. 교토에서 온 와타나베의 이모라고 해둘 테니까 잊지 말고 입을 잘 맞춰요. 참, 이럴 땐, 나이 차가 있어서 편리하군.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여행 가방에서 선물 상자를 꺼내 들어 나가고, 나는 툇마루에 앉아 차를 한 잔 더 마시면서 고양이와 놀았다. 레이코 여사는 이십 분쯤 지나서 돌아왔다. 그녀는 돌아오자 여행 가방에서 과자 통을 꺼내더니 내게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이십 분씩이나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하고 나는 과자를 먹으면서 물었다.
"그야 물론 와타나베 이야기지" 하고 그녀는 고양이를 안아 들고 볼에 비벼대면서 말했다.
"깔끔하고 성실한 학생이라고 칭찬하던데."
"내가 말입니까?"
"그래요, 물론 와타나베죠" 하고 레이코 여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내 기타를 발견하자 손에 들고 잠시 줄을 고르더니 카를로스조빔의 데사피나도를 연주했다. 그녀의 기타 연주를 듣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지만, 그것은 예전과 다름없이 나의 마음을 따스하게 해 주었다.
"기타 연습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집 창고에 굴러다니던 걸 빌려 와 좀 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 뒤에 무료로 레슨해 줄게요" 하고 말하고 레이코 여사는 기타를 내려놓고, 윗도리를 벗은 후 마루 기둥에 기대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녀는 상의 밑에 마드라스 체크의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다.
"저 이거 멋진 셔츠죠?" 하고 레이코 여사가 물었다.
"그런데요" 하고 나도 동의했다. 확실히 아주 멋진 셔츠였다.
"이거 나오코 거야"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알아요? 나오코와 나는 옷 사이즈가 거의 같았어요. 특히 거기 처음 들어왔을 무렵엔. 나중에 그 애가 살이 붙어서 사이즈가 달라졌지만, 그래도 대체로 같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지요. 셔츠도 바지도 신발도 모자도. 사이즈가 달랐던 건 브래지어 정도가 아니었을까. 난 거의 가슴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우린 언제나 옷을 바꿔 입곤 했어요. 아니, 둘이서 거의 공유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어요."
나는 새삼스럽게 레이코 여사의 몸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듣고 보니 정말 키나 몸집이 나오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얼굴 모습이라든가 손목이 가는 탓으로 레이코 여사 쪽이 나오코보다 말라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의외로 몸매가 단단한 것도 같았다.
"이 바지도 윗도리고 그래요, 전부 나오코의 것이야. 와타나베는 내가 나오코의 것을 몸에 걸치고 있는 게 싫은가요?"
"아닙니다. 나오코 역시 누가 입어 주는 걸 기뻐할 겁니다. 특히 레이코 여사가."
"이상해요" 하고 그녀는 말하고 나서 작은 소리로 손가락을 무슨 버릇처럼 퉁겼다.
"나오코는 아무한테도 유서를 남기지 않았지만, 옷에 관해서 만큼은 글을 남겼어요. 메모지에 딱 한 줄 흘려 놓았는데, 그게 책상 위에 놓여 있었어요. 옷은 다 레이코 여사에게 드리도록 해 주세요, 하고. 이상한 애라는 생각 안 들어요? 자기가 지금부터 죽으려 하고 있을 때, 어째서 옷 같은 게 생각이 났을까. 옷 같은 거야 아무러면 어때요. 달리 말해 두고 싶은 일이 산처럼 많았을 텐데."
"아무것도 없었는지도 모르죠."
레이코 여사는 담배를 피우면서 잠시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으음, 처음부터 하나하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이야기해 줘요" 하고 나는 말했다.
"병원에서 검사 결과, 나오코의 병은 회복 상태에 들어가 있지만, 지금 근본적으로 집중 치료를 해주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라도 좋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그래서 나오코는 좀 더 장기적인 치료를 목적으로 그 오사카의 병원에 옮겨가게 되었어. 거기까진 틀림없이 편지에 썼을 거예요. 8월 10일 전후에 부쳤다고 생각되는데."
"그 편지는 읽었습니다."
"8월 24일에 나오코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나오코가 한 번 그쪽에 가보고 싶다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었어요. 자신이 직접 짐도 정리하고 싶고, 가능하면 하룻밤 같이 잘 수 없겠는가 하고. 나로선 좋다고 했지요. 나도 무척 나오코가 보고 싶었고, 이야기가 하고 싶었으니까. 그러고 이튿날인 25일에 어머니와 둘이서 택시를 타고 왔어요. 그래서 우리 셋이 짐을 정리한 거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저녁 무렵이 되자 나오코가 어머니에게, 이제 돌아가셔도 좋아요, 대충 다 되었으니까, 하고 말했지. 그래서 어머니는 택시를 불러 타고 돌아갔어요. 나
오코는 아주 건강해 보여서 어머니나 나나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어요. 사실은 그때까지 나는 무척 걱정을 했거든요. 그녀가 의기소침해서 입을 다물고 우울해 있지나 않을까 하고. 그런 병원의 검사라든가 치료라는 게 사람의 에너지를 퍽 소모시키는 일이란 걸 나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괜찮을까 하고 걱정했던 거지.
그런데 만난 첫눈에 아아, 이거라면 됐어, 하고 생각했어요. 얼굴도 생각했던 것보다 건강해졌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농담도 했고, 말씨도 이전보다 훨씬 정상적이었고, 미장원에 갔었다면서 새 헤어스타일을 자랑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이 정도라면 어머니 없이 우리 둘이라도 걱정 없겠다고 생각했지요. 저 레이코 언니, 병원에서 이 기회에 말끔히 치료를 받을 거예요 하고 말하길래 나도 그게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리곤 우리는 둘이서 밖을 산책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길 했어요. 이제부터 어떻게 하겠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요, 나오코는 이런 말도 했어요. 둘이서 여길 나갈 수 있게 되고, 그래서 함께 살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레이코 여사와 둘이서요?"
"그래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하면서 어깨를 조금 움찔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 난 좋지만 와타나베는 어떻게 할 거냐고. 그랬더니, 그 사람과의 일은 확실하게 해 둘 테니까, 하더라구요. 그것뿐이야. 그리고 나와 어디에서 살자느니, 무엇을 하자느니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새집에 가서 새들과 놀고."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셨다. 레이코 여사는 또 담배에 불을 붙였고, 고양이는 그녀 무릎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애는 처음부터 전부 확실히 결정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기운차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건강하게 보였던 거야. 그리고 방안의 여러 가지 것을 정리하고, 필요 없는 건 바깥뜰의 드럼통에 넣어 태워 버렸어요. 일기장 대신 쓰고 있던 노트라든가 편지 따위, 그런 것 모두 말이야. 와타나베의 편지도. 그래서 나는 이상하게 그걸 왜 태우냐고 물었어요. 더구나 와타나베의 편지는 그때까지 줄곧 소중하게 보관하면서, 자주 꺼내 다시 읽곤 했으니까. 그랬더니 지금까지의 것은 전부 처분하고, 지금부터 새롭게 태어날 거예요, 하기에 난 그렇구나 하고 비교적 단순하게 넘겼지요. 그런 듯한 얘기 아냐, 그 애 나름으로는. 그래서 난 나오코가 빨리 건강을 회복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어요. 게다가 그날의 나오코는 정말 사랑스러웠어. 와타나베에게 보여 주고 싶을 만큼.
그리고 나서 우린 언제나처럼 저녁을 먹고, 목욕을 하고, 아껴 두었던 고급 포도주를 둘이서 마시고, 난 기타를 쳤어. 비틀즈를. 그리고 노르웨이의 숲이라든가 미셸 등 나오코가 좋아하는 그런 곡들을.
그리곤 우린 기분이 좋아져서 전 등을 끄고, 적당히 옷을 벗은 후 침대에 누웠어요. 지독하게 더운 밤이어서, 창문을 열어 놓고 있었는데도 바람 한 점 없었어요. 밖은 먹칠을 한 것처럼 깜깜하고, 벌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지요. 방안에까지 진한 여름 풀 냄새가 가득했고. 그런데 갑자기 나오코가 와타나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와타나베와의 섹스 이야기. 그것도 정말 상세하게. 어떻게 옷을 벗겼고, 어떻게 몸을 만졌고, 자기가 어떻게 젖었고, 어떤 식으로 문을 열었고, 그게 얼마나 근사했던가를 굉장히 선명하게 말하는 거야. 그래서 왜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당황해서 물었지요. 그때까지 그 애는 섹스 이야기 같은 건 그렇게 노골적으로 한 적도 없었거든. 물론 우린 어떤 종류의 요법 같은 것으로 섹스 이야기도 정직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 애는 자세한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았어요. 부끄럽다고. 그런데 그렇게 갑자기 술술 털어놓으니 나도 놀랐지 뭐야. 그저 어쩐지 하고 싶어졌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어요. 듣고 싶지 않으면 안 하겠지만... 좋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말끔히 털어놔. 들어줄 테니까, 하고 나는 말했어. 그의 것이 들어왔을 때, 난 어찌나 아프고 얼얼한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어요, 하고 그 애는 말했어요. 난 처음이기도 했고, 젖어 있으니까 들어오긴 들어왔는데 어쨌든 너무 아팠어요, 머리가 멍해질 만큼. 그는 깊숙이 들어왔고, 이 정도면 끝인가 했는데 내 다리를 좀 들게 하고 더 깊숙이 들어왔어요. 그러자 내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오는 거예요. 꼭 얼음물 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손발이 시려 오고 한기가 났어요. 대체 이게 어떻게 되는 건가, 이대로 난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가 내가 아파하는 것을 눈치채고, 깊이 넣은 채 더는 움직이지 않고 나를 부드럽게 안고, 머리라든가 목덜미, 가슴에다 마냥 키스해 줬어요, 오랫동안. 그러니까 차차 온기가 돌아오고 다시 그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레이코 언니, 그게 정말 좋았어요.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이대로 이 사람한테 안겨서 일생동안 이걸 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게 좋았다면 와타나베와 같이 살고, 매일 그걸 하면 좋았지 않아? 하고 난 말했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하고 나오코는 말했어. 난 그걸 알아요. 그건 한 번 왔다가 가버린 거라는 걸. 그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어떻게 하다가 일생에 단 한 번 일어난 일이에요. 그 뒤에도 전에도 난 아무것도 느끼질 못했어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난적도 없고, 젖어 본 일고 없어요. 물론 나는 자세히 설명해 줬어요. 그런 것은 젊은 여성에게는 일어나기 쉬운 일이고 나이가 들면 자연히 고쳐지는 게 태반이라고. 게다가 한 번 잘됐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나 역시 결혼 초엔 잘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었다고. 그게 아니에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어요. 난 아무런 걱정도 안 해요. 난 다만 이제 누구도 내 속으로 들어오길 원치 않고 있을 뿐이에요. 이젠 누구에 의해서도 어지럽혀지기가 싫을 뿐이에요."
나는 맥주를 비워 버렸고, 레이코 여사는 두 개비째 담배를 다 피워 버렸다. 고양이가 레이코 여사 무릎 위에서 기지개를 켜고 자세를 바꾸더니 다시 잠들어 버렸다. 레이코 여사는 망설이다가 세 개비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나서부터 나오코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어."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난 그녀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어루만져 주면서 걱정 마, 모든 게 잘 될 거야. 하고 말해 줬어요. 너처럼 젊고 예쁜 여자는 남자한테 안겨서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이에요. 무더운 밤인 데다 나오코는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어서 나는 목욕 타월을 들고 와 그 애의 얼굴과 몸을 닦아 줬어요. 팬티까지 축축해서 그것도 벗기고... 이상할 것 없어. 우린 줄곧 목욕도 함께 했고 그 애는 내 여동생 같았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건" 하고 나는 말했다.
"안아 주면 좋겠다고 나오코가 그랬어요. 이렇게 더운데 안기는 어떻게 안느냐고 그랬지만, 이게 마지막이라고 하기에 안아 줬어요. 목욕 수건으로 몸을 감아서 땀이 끈끈하지 않게 해놓고, 얼마 동안 그러다 진정이 된 것 같아 또 땀을 닦아주고, 잠옷으로 갈아 입힌 후 재웠어요. 어쩌면 잠든 척했는지도 모르지만 금방 잠이 들었어요. 어떻든 잠든 얼굴이 무척 사랑스러웠어요. 무언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상처란 모르고 지내온 열 서넛 되는 소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 그걸 보고 나도 잠들었어, 안심하고. 여섯 시에 눈을 떠보니까 그녀는 이미 자리에 없었어요. 잠옷이 던져져 있고, 옷과 운동화와 언제나 머리맡에 두고 자던 회중전등이 없어진 채로. 서둘러! 난 그때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잖아, 회중전등을 갖고 나갔다는 건 아직 어두울 때 방에서 나갔다는 얘기니까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책상 위 같은 델 보니까, 그 메모지가 있었어. 옷은 다 레이코 여사에게 드리도록 해 주세요, 하는. 그래서 난 급히 모두에게로 뛰어가서 나오코를 찾아봐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전원이 숙소 안에서부터 주변의 숲속까지 샅샅이 찾았어요. 그 애를 찾기까지는 다섯 시간이 걸렸어. 그 앤 오래 전부터 튼튼한 줄까지 준비해 왔었던 거야."
레이코 여사는 깊이 한숨을 몰아쉬곤 고양이의 머리를 힘없이 쓰다듬었다.
"차 들겠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고마워"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차를 넣어 툇마루로 들고 갔다.
이미 해질녘이 가까워 햇살이 상당히 여려져 있었고, 나무 그늘이 길게 우리 바로 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는 차를 마시면서 개나리며 진달래,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심어진 것 같은, 기묘하게 어수선한 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구급차가 와서 나오코를 데려갔고, 나는 경찰에게 여러 가지 조사를 받았어. 조사하고 해도 대단한 심문은 없었어요. 하여간 유서 비슷한 걸 남겨 놓은 게 있으니 자살이라는 건 확실했고, 게다가 정신병 환자였으니까 자살 같은 건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그저 형식적으로 물었을 뿐이야. 경찰이 돌아가자 나는 곧 전보를 쳤죠, 와타나베 군에게."
"쓸쓸한 장례식이었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너무나 조용하고, 사람도 적었고, 그 집 사람들은 나오코가 죽은 걸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에만 신경을 쓰고 있고. 아무도 주위 사람들에게 자살이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가 봅니다. 사살, 장례식엔 가지 말았어야 했던 것 같아요. 나는 그 때문에 형편없는 기분이 되어 곧 여행을 떠나 버렸습니다."
"와타나베, 우리 산책 좀 할까?"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저녁 반찬거리라도 사 오게. 나 배가 고파졌어."
"좋습니다.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있습니까?"
"전골" 하고 그녀가 말했다.
"전골 같은 거 먹어본 지가 아득하거든, 몇 년씩이나 됐어. 전골 꿈까지 꿨다니까. 고기에다 파하고 당면, 두부, 그리고 쑥갓을 넣고, 그걸 보글보글 끓여서..."
"그건 좋지만, 내겐 그걸 끓일 만한 냄비가 없습니다."
"문제없이, 내게 맡겨요. 주인한테 빌려올 테니까."
그녀는 성큼 일어서서 안채 쪽으로 가더니, 모양새 좋은 전골냄비와 가스 풍로, 그리고 긴 고무호스를 빌려 왔다.
"어때? 내 실력 괜찮지?"
"그렇군요" 하고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우린 동네에 있는 가까운 상점 거리로 나가 소고기와 계란, 야채, 두부 등 일체를 사고, 술을 파는 가게에서 비교적 질이 좋아 보이는 백포도주를 샀다. 내가 사겠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그녀가 모든 비용을 지불했다.
"조카한테 식료품 계산을 하게 했다면 친척들 간에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어?"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그리고 나 제법 돈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 걱정 안해도 돼요. 아무러면 무일푼으로 길을 나섰을까."
집으로 돌아오자 레이코 여사는 쌀을 씻어 안치고, 나는 고무호스를 끌어와 툇마루에서 전골을 해 먹을 준비를 했다.
준비가 끝나자 레이코 여사는 기타 케이스에서 자신의 기타를 꺼내, 벌써 어두워진 툇마루에 앉아 악기의 조율을 확인한 듯 천천히 바흐의 푸가를 연주했다.
세밀한 곡을 일부러 느리게 치기도 하고, 빨리 넘어가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대강대강 치는가 하면 센티멘털하게 연주하면서, 그 온갖 리듬에 사뭇 사랑스러운 듯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기타를 치고 있을 때의 레이코 여사는 흡사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바라보고 있는 열 일고여덟 살의 소녀처럼 보였다. 눈빛이 반짝이고 힘이 들어간 입을 오물거리기도 하였고, 순간순간 아련한 미소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기도 하였다. 연주를 끝내자 그녀는 기둥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보며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좋아요, 그저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니까"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레이코 여사는 남편이나 딸을 만나러는 안 갈 건가요? 도쿄에 있지요?"
"요코하마, 그렇지만 안 가요. 전에도 내가 말했죠? 그 사람들 이제 나와는 관계를 안 갖는 게 좋아요.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의 새로운 생활이 있고, 나는 만나면 만날수록 괴로워질 테니까. 안 만나는 게 제일이야."
그녀는 빈 세븐 스타 담뱃갑을 구겨 버리더니 가방에서 새것을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러나 불은 붙이지 않았다.
"나는 이미 끝난 인간이야. 와타나베 눈앞에 있는 건 나 자신의 잔존기억에 지나지 않아. 내 속에 있었던 가장 소중한 것들은 이미 옛날에 다 죽어 버렸고, 난 그저 그 기억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야."
"그렇지만 난 지금의 레이코 여사가 정말 좋습니다. 잔존기억이든 뭐든. 그리고 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인지 몰라도, 레이코 여사가 나오코의 옷을 입어 주고 있다는 게 나로선 몹시 기쁩니다."
레이코 여사는 방긋 웃더니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였다.
"와타나베는 그 나이에 비해 여자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난 생각한 대로 정직하게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밥이 다 되었기에, 나는 냄비에다 기름을 두르고 전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꿈은 아니겠지?" 하고 레이코 여사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백 퍼센트 현실인 전골 요립니다. 내 경험으론." 하고 나는 흥겨운 듯 말했다.
우리는 어느 쪽이랄 것도 없이 이야기도 나누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전골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그리고 밥을 먹었다. 고양이가 냄새를 맡고 왔기에 고기를 나누어주었다. 배를 채우고 나서 우리는 툇마루의 기둥에 기대어 달을 바라보았다.
"만족합니까, 이것으로?" 하고 나는 물었다.
"무척. 더할 나위 없이" 하고 레이코 여사는 포만감이 이제는 고통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 이렇게 과식해 보긴 처음이야."
"이제부터 뭘 하죠?"
"담배 한 대 피우고 목욕탕엘 가고 싶어요. 머리가 엉망이어서."
"좋습니다. 목욕탕이 바로 가까운 데 있으니까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와타나베. 괜찮다면 말해 주면 좋겠는데, 그 미도리라는 여자와는 잤나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물었다.
"섹스를 했느냐는 말입니까? 안 했습니다. 여러 가지 것이 확실히 정리될 때까진 안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제 이것으로 확연해진 게 아닐까..."
나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오코가 죽어 버렸으니 모든 게 제자리로 왔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지, 와타나베 군은 나오코가 죽기 전부터 이미 마음이 정해져 있었던 게 아니었어요? 그 미도리와는 헤어질 수 없다고. 나오코가 살아 있든 죽었든 그것과는 관계가 없이. 와타나베는 미도리를 선택했고, 나오코는 죽음을 선택한 거야. 와타나베도 이제 어른이니까 자신의 선택에 대해선 확실한 책임감을 가져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말아요."
"그렇지만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난 나오코에게 언제까지나 나오코를 기다리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최후에 그녀를 내동댕이쳤습니다. 이건 누구 탓이라든가 아니라든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아마 내가 도중에서 내팽개치지 않았더라고 결과는 같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나는 나 자신을 용설 할 수 없습니다. 레이코 여사는 그게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나와 나오코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린 처음부터 생각의 경계선에서 맺어진 것이니까요."
"와타나베 군이 만일 나오코의 죽음에 대해서 무엇인가 아픔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면, 와타나베는 그 아픔을 앞으로 인생을 꾸려 가는 동안 계속 간직하면 돼요. 그래서 만일 배울 것이 있다면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배워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미도리와 둘이서 행복해져야 해요. 와타나베의 아픔은 미도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니까. 이 이상 그녀를 상처 입히거나 하면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아요. 그러니 괴롭겠지만 좀 강해져요. 좀 더 성장해서 어른이 돼야 해요. 난 와타나베에게 그 말을 하려고 그곳을 나와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 먼 길을 그 관 같은 전철을 타고서."
"레이코 여사가 하는 말은 무슨 뜻인지 잘 압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나로선 아직 그 준비가 안 돼 있습니다. 그건 정말 너무나 쓸쓸한 장례식이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죽는 게 아닙니다."
레이코 여사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우리들 모두 언젠가는 그렇게 죽는 거야, 나도 와타나베도."
우리는 냇가의 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서 목욕탕엘 갔고, 조금은 상쾌한 기분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툇마루에 앉아 포도주를 마셨다.
"와타나베, 컵 하나 더 가져다주지 않겠어?"
"네 그러죠. 하지만 뭘 할 건데요?"
"지금부터 둘이서 나오코의 장례식을 치르는 거야"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쓸쓸하지 않은 장례식을."
내가 컵을 가지고 오자 레이코 여사는 거기에 가득 포도주를 채우고 정원의 석등 위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툇마루에 앉아 기타를 안고 기둥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성냥이 있으면 가져다주겠어요? 될수록 큰 것이 좋아."
나는 부엌에서 큰 성냥 통을 들고 와서는 그녀의 곁에 앉았다.
"그럼, 내가 한 곡 연주할 때마다, 성냥개비를 나란히 놓아줄래요? 나, 지금부터 기타를 칠 테니까."
그녀는 우선 헨리 맨시니의 디어헌터를 아주 깨끗하고 조용히 연주했다.
"이 레코드 와타나베가 나오코에게 선물했었지?"
"그래요, 재작년 크리스마스에. 나오코가 이 곡을 무척 좋아해서요."
"나도 좋아해, 이 곡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니까."
그녀는 디어헌터의 멜로디를 몇 소절 가볍게 다시 켜고는 포도주를 들었다.
"취하기 전에 몇 곡이나 연주할 수 있을까? 으음, 이런 장례식이라면 쓸쓸하지 않고 좋지?"
레이코 여사는 이어서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하고 예스터데이를 치고, 다음엔 미셸과, 섬싱을 치고 히어 컴즈 더 선과 푸울 온 더 힐을 연주했다. 나는 성냥개비 일곱 개를 나란히 놓았다.
"일곱 곡"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하고 나서 포도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이 사람들은 확실히 인생의 슬픔이라든가 아름다움 같은 걸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이 사람들이란 물론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그리고 조지 해리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돌리고 담배를 비벼 끄더니 다시 기타를 들어 페니 레인을 치고, 블랙 버드를 치고, 줄리아를 치고, 예순네 살이 되면을 치고, 노웨어 맨을 치고, 앤드 아이 러브 허를 치고, 헤이 주드를 쳤다.
"이제 몇 곡이지?"
"열네 곡" 하고 나는 대답했다.
"후우" 하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와타나벤 한 곡쯤 뭐 연주 못 해?"
"서툽니다."
"그래도 좋아."
나는 내 기타를 들고나와 어정쩡하게 업 온더 루프를 쳤다. 레이코 여사는 그 안 숨을 돌리며 담배를 피우고 포도주를 마셨다. 그리고 내가 다 치고 나자 손뼉을 쳤다.
그리고 그녀는 기타용으로 편곡된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와 드뷔시의 월광을 정중하고 아름답게 연주했다.
"이 두 곡은 나오코가 죽은 뒤에 마스터한 거야"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나오코의 음악적 취향은 마지막까지 센티멘털리즘이란 지평을 떠나지 못했어."
그리고 그녀는 바카락의 곡을 몇 곡인가 더 연주했다. 클로스 투 유, 워크 온 바이, 비에 젖어도, 웨딩벨 블루스 등을.
"스무 곡"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마치 인간 자동 전축이 된 것 같애" 하고 레이코 여사는 즐거운 듯이 말했다.
"음대 때의 교수들이 이런 걸 보면 놀라 자빠질걸."
그녀는 포도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잇따라 아는 곡을 연주해 나갔다.
보사 노바의 곡을 열 곡 가까이 치고 로저스 하트나 거쉰의 곡을 치고, 밥 딜런과 레이 찰스, 그리고 캐롤 킹과 비치 보이스 스티비 원더, 거기에 위를 보고 걷자 와 블루 벨벳, 그린 필드 등, 어떻든 이런 저럭 곡을 모조리 쳤다. 그녀는 가끔 눈을 감기도 하고 가볍게 고개를 흔들기도 했으며, 멜로디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포도주가 바닥이 나자 우린 위스키를 마셨다. 나는 정원에 놓았던 유리컵 속에 포도주를 석 등에 끼얹고 나서 그 빈 잔에 다시 위스키를 채웠다.
"이것으로 이제 몇 곡이지?"
"마흔여덟 곡" 하고 나는 말했다.
레이코 여사는 마흔아홉 곡째로 엘리노의 릭비를 쳤고, 쉰 곡째로 다시 한번 노르웨이의 숲을 쳤다. 쉰 곡이 끝나자 그녀는 손을 놓고서 위스키를 마셨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충분합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대단합니다."
"좋아요, 와타나베. 이젠 쓸쓸한 장례식 같은 건 깨끗이 잊어버려" 하고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장례식만을 기억해요, 멋있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덤으로"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쉰한 곡째로에의 바흐의 푸가를 연주했다.
"와타나베, 나와 그거 해" 하고 연주를 끝낸 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한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커튼을 드리운 어두운 방 안에서 레이코 여사와 나는 정말 당연한 일처럼 서로를 안고, 서로의 육체를 갈구했다. 나는 그녀의 셔츠를 벗기고, 바지를 벗기고, 속옷을 벗겼다.
"나 결국 이상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19세 연하의 남자에게 팬티를 벗기울 줄은 생각도 못해 봤어."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럼 스스로 벗겠습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아니, 벗겨줘"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지만 나 주름투성이니까 실망하진 말아요."
"나, 레이코 여사의 주름살이 좋은걸요."
"눈물이 나는데" 하고 그녀는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온갖 곳으로 입술을 가지고 갔고, 주름이 있으면 거길 혀로 더듬었다. 그리고 소녀같이 빈약한 젖가슴에 손을 대고, 젖꼭지를 부드럽게 불고, 따뜻하게 젖어 드는 그 작은 숲에 손가락을 대고 천천히 움직였다.
"으음, 와타나베" 라고 그녀는 내 귓가에서 속삭였다.
"거기가 아니야, 거긴 그냥 주름이라구."
"이럴 때도 농담밖에 못 해요?" 하고 나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미안해" 하고 그녀는 말했다.
"두려워 나. 이미 오래전부터 안 했으니까. 어쩐지 열일곱 여자아이가 남자아이 하숙집에 놀러왔다 벌거숭이가 된 기분이야."
"나도 정말로 열일곱 살의 여자아이를 범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나는 그 주금 속에 손가락을 놓고, 목덜미에서부터 귓가로 입을 맞추며 젖꼭지를 비볐다. 그리고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목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자 나는 그 가녀린 다리를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저, 알지? 임신 안 하게..." 하고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 나이에 임신한다면 창피하잖아."
"걱정말고 안심해요" 하고 나는 말했다.
깊숙이 그녀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온몸을 떨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면서 몇 번인가 움직였고,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연 사정을 했다. 그것은 억누를 길 없는 격렬한 사정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매달린 채 그 따스함 속에서 몇 번이나 쏟았다.
"미안합니다. 참을 수가 없었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바보, 그런 생각은 왜 해" 하고 그녀는 내 엉덩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여자와 자?"
"으음, 그래요."
"나와 할 때는 그런 생각 안 해도 괜찮아 잊어. 잊고 좋을 때 좋을 만큼 쏟아. 어때, 좋았어?"
"네, 굉장히."
"참을 것까진 없어. 그대로가 좋아. 나도 굉장히 좋았어."
"레이코 여사!"
"왜?"
"당신은 누군가와 다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멋진데 아깝지 않아요."
"그런가, 그럼 생각해 보겠어, 그건"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잠시 뒤 다시 그녀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내 아래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뒤틀었다. 나는 그녀를 안고 조용히 움직이면서,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그녀와 나누었다. 그녀 속에 들어간 채로 이야기를 하는 건 정말 근사했다. 내가 농담을 하고 그녀가 킬킬 웃으면 그 진동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우리는 오래오래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이러고 있으니 너무 좋아" 하고 그녀가 말했다.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럼 그걸 해봐요."
나는 그녀의 허리를 치켜들고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몸을 돌리듯 해서 그 감촉을 즐기고는, 그 즐거움의 끝에서 사정했다.
결국 우리는 그날 밤 네 번의 정사를 가졌다. 그 뒤 그녀는 내 품 안에서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몇 번 내쉬었으며, 몸을 여러 번 가늘게 떨었다.
"나 이제 일생동안 이걸 안 해도 되겠지?"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고 그래 줘. 부탁이야. 나머지 인생의 몫을 다했으니까 안심하라고."
"누가 그걸 확신하겠습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비행기로 가는 게 빠르고 편하다고 권했지만 그녀는 기차로 가겠다고 고집했다.
"나는 세이칸 연락선이 좋아. 하늘을 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구."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우에노역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그녀는 기타 케이스를, 나는 여행 가방을 들고, 기차가 올 때까지 플랫폼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도쿄에 올 때와 같은 트위드 재킷에다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정말 아사히가와라는 곳,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라고 그녀가 물었다.
"좋은 곳입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한번 찾아가겠습니다."
"정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 쓰겠습니다."
"특히 와타나베의 편지 좋아해요, 나. 나오코는 다 태워 버렸지만... 그렇게 좋은 편지였는데."
"편지는 그저 종이일 뿐입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태워 버려도 마음에 남는 건 남고, 가지고 있어도 남지 않는 건 남지 않아요."
"정직하게 말해서 나, 두려워. 혼자서 아사히가와에 가는 게 말이야. 그러니 편지해 줘. 와타나베의 편지를 읽으면 언제나 와타나베가 곁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내 편지로 된다면 얼마든지 쓰겠습니다. 하지만 괜찮을 겁니다. 레이코 여사라면 어딜 가든 잘 해낼 겁니다."
"그런데 내 몸속에 아직도 뭔가 잠겨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이거 착각일까?"
"잔존기억입니다, 그건" 하고 나는 말하며 웃었다. 그녀도 따라 웃었다.
"날 잊지 말아 줘" 하고 그녀가 말했다.
"잊지 않을 겁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와타나베와 만나는 일이 두 번 다시 없을지 모르지만, 난 어딜 가든 언제까지라도 나오코와 와타나베를 기억할 거야."
나는 그녀의 눈을 봤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키스했다. 곁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우릴 훔쳐보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것에 신경 쓰이지 않았다. 우리는 살아 있었고, 계속 살아가는 일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행복해야 해요" 하고 헤어질 때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내가 와타나베에게 충고할 만한 것은 이미 다 했으니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행복하라는 것밖에는."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든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야기할 게 많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게 잔뜩 있다, 온 세상에서 너 외에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너와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 모든 걸 너와 둘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도리는 한참 동안 전화 저쪽에서 말이 없었다. 마치 전 세계의 가랑비가 온 지구의 잔디밭에 내리고 있는 것 같은 침묵만이 계속되었다.
나는 그동안 줄곧 유리창에 이마를 붙이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당신, 지금 어디 있어요?"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얼굴을 들고 공중 전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딘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랄 것도 없이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아무데도 아닌 공간의 한 가운데에서 미도리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