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아미료에서 날아온 편지
"편지 줘서 고마웠어요." 라고 나오코는 쓰고 있었다. 편지는 나오코의 집에서 이곳으로 바로 전송되어 왔다. 내 편지를 받은 것이 난처하다기보다는 솔직히 말해서 무척 기뻤다, 사실은 자기 쪽에서 편지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고 그 편지에는 쓰여 있었다.
거기까지 읽고 나서 나는 창문을 열고 윗도리를 벗은 다음, 침대에 걸터앉았다. 근처의 비둘기 집에서는 구구구 비둘기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나는 나오코가 보내온 일곱 장의 편지를 손에 든 채, 걷잡을 수 없는 상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맨 앞의 몇 줄을 읽었을 뿐인데, 내 주위의 현실 세계가 온통 그 색채를 잃어 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긴 시간 동안 마음을 하나로 가다듬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 그 뒤를 계속해서 읽었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4개월 가까이 됩니다. 나는 지난 4개월 동안 당신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그리고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당신에 대해 공정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봤답니다. 나는 당신에게 좀 더 정확한 인간으로서 공정하게 행동했어야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그다지 올바른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 나이 또래의 여자들은 대개 공정 따위의 말은 쓰지 않기 때문이죠. 보통의 여자로서는 사물이 공정한가 어떤가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극히 평범한 여자는 무엇이 공정하냐 아니냐 보다는, 무엇이 아름답다든가, 어떻게 하면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든가 하는, 그런 것을 중심으로 사물을 생각하는 법이죠. '공정'이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가 사용하는 말이에요.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이 공정이란 말이 너무나 딱 들어맞는 말같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무엇이 아름답고,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내게 있어서는 아주 번거롭고 까다로운 명제여서, 그만 다른 기준에 매달려버리게 되는가 봅니다. 예를 든다면 공정이라든가 정직이라든가 보편적이라든가 그런 것에 말입니다.
하지만 어떻든 나는 나 자신이 당신에 대해 공정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당신을 매우 어지럽게 했고, 상처받게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일로 해서 나 역시 나 자신을 휘둘렀으며, 상처를 입혔어요. 변명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변호를 하자는 것도 아니지만, 정말 그런 겁니다. 만일 내가 당신 속에다 어떤 상처를 남겨 놓았다면, 그것은 당신만의 상처가 아니고 저의 상처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일로 해서 나를 미워하진 말아주세요.
나는 불완전한 인간이에요. 나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당신의 미움을 받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당신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면, 정말 나는 산산조각이 나 버릴 겁니다. 나는 당신처럼 자기의 껍질 속으로 쏙 들어가 무엇인가를 해나갈 수 없어요.
나는 사실상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나에겐 어쩐지 그렇게 보일때가 있답니다. 그래서 때론 당신이 몹시 부럽기도 했으며, 당신을 필요 이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도 어쩌면 그 부러움 탓이었는 지도 모릅니다.
사물을 보는 이러한 견해가 어쩌면 지나치게 분석적인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이곳의 치료 방법이 결코 지나치게 분석적이라고는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나 같은 입장에 놓여서 몇 달이고 치료를 받다 보면 어차피 많건 적건 분석적이 되어 버리는 법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러한 탓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이러한 것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이러한 것이다, 하고 말에요. 이러한 분석이 세계를 단순화하려는 것인지, 세분화하려는 것인지 나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떻든 나는 그때에 비하면 상당히 회복되었다고 자신도 느끼고 있고, 주위 사람들도 그것을 인정해 주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차분하게 편지를 쓸 수 있는 것도 참 오랜만입니다. 7월에 당신한테 보낸 편지는 몸을 쥐어짜는 듯한 느낌으로 쓴 것이지만(솔직히 무슨 말을 썼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아요. 좀 심한 편지가 아니었는지 모르겠어요.), 이번에는 제법 차분한 심정으로 쓰고 있답니다.
맑은 공기, 밖으로부터 차단된 조용한 세계, 규칙적인 생활, 매일 하는 운동, 역시 그런 것들이 저에게는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누구에겐가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예요. 누구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자 책상 앞에 앉아서 펜을 들고, 이렇게 글을 쓸수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입니다.
물론 글로 써놓고 보면,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것의 아주 일부분밖엔 표현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다 싶어요. 누구에게 뭔가를 적어 보고 싶다는 그 기분이 든 것만으로도 지금의 나로서는 행복합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당신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답니다.
지금은 저녁 일곱시 반입니다. 저녁 식사도 했고, 목욕도 끝낸 시간입니다. 주위는 조용하고, 창 밖은 캄캄합니다. 빛하나 보이지 않아요. 여느 때는 별이 참 아름다웠는데 오늘은 흐려서 보이지 않는군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다들 별에 대해 잘 알아서, 저것이 처녀자리다라든가 저것이 사수자리라든가 하고 내게 가르쳐 준답니다. 아마 날이 저물면 아무 할 일이 없으니, 별수 없이 별에 대해 잘 알게 돼버리는 거겠지요.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 이유로 이곳 사람들은 새랑 꽃이랑 벌레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답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자면, 내 자신이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했던가 하는 것을 깨닫고, 그런 식으로나마 깨닫는 게 무척 기분이 좋답니다.
이곳에는 모두 70명쯤 되는 사람들이 들어와 생활하고 있어요. 그 밖에 스태프가 20명이 남짓 있답니다. 무척 넓은 곳이라서, 이 정도는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산하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르겠군요.
드넓게 사방으로 자연이 충만해 있고, 사람들은 다들 조용하게 살고 있습니다. 너무 조용해서 때때로 여기가 진짜 옳은 세계가 아닐까 하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물론 그렇진 않아요. 우리들은 어떤 종류의 전제하에 여기서 살고 있으니까, 이런 식이 될 수도 있겠지요.
나는 테니스와 농구를 하고 있습니다. 농구팀은 환자와 스태프를 섞어서 구성했습니다. 하지만 게임에 열중하다 보면 누가 환자고 누가 스태프인지 갈수록 알쏭달쏭해져요.
이건 어쩐지 이상한 일이에요. 이상한 일이란, 게임을 하면서 주위를 보고 있자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일그러져 보이는 겁니다.
어느 날 담당 의사에게 그 말을 했더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옳다고 하더군요. 그는 우리들이 이곳에 와 있는 것은. 그 비뚤어진 것을 교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비뚤어짐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우리들 문제점의 하나는 그 비뚤어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겁니다.
각기 사람마다 걸음걸이에 버릇이 있듯이 느끼는 방식이나, 사고방식, 사물에 대한 견해에도 버릇이 있고, 그것은 고치려 해도 갑자기 고쳐지는 것이 아니며, 무리하게 고치려 들면 다른 데가 이상해진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단순화한 설명이고, 그런 것은 우리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어느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가 말하려는 그 뜻을 어슴푸레나마 알 것도 같습니다.
우리들은 확실히 자시의 비뚤어짐에 잘 순응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비뚤어짐이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아픔이나 고통을 적절하게 자기 속에 자리 잡게 할 수 없어서, 또 그러한 것에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서 이곳에 들어와 있는 셈입니다.
이곳에 있는 한 우리들은 타인을 괴롭히지 않아도 되며, 타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도 되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자신이 '비뚤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점이 바깥 세계와 전혀 다른 점입니다. 바깥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비뚤어짐을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거든요.
하지만 우리들의 이 작은 세계에서는 비뚤어짐이야말로 전제 조건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인디언이 머리에다 그 부족을 나타내는 깃털을 꽂고 있듯이, 비뚤어짐을 몸에 달고 있지요. 그리고 서로가 다치치 않도록 조용히 살고 있는 겁니다.
운동을 하는 것 이외에도 우리는 야채를 가꾸고 있습니다. 토마토, 가지, 오이, 수박, 딸기, 파, 양배추, 무, 그 밖의 여러 가지. 웬만한 건 다 가꾸고 있답니다. 온실도 사용하고 있고요.
이곳 사람들은 야채 가꾸는 일에 아주 익숙하고 또 열심입니다. 책도 보고 전문가를 초청하기도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료는 어떤 것이 좋다는 둥 토질이 어떻다는 둥, 그런 이야기만 하고 지내기도 합니다.
나도 야채 가꾸기를 좋아하게 됐답니다. 갖가지 과일이며 야채가 매일 조금씩 자라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흐뭇한 알입니다. 당신은 수박을 재배해 본 일이 있나요? 수박이란, 마치 작은 동물처럼 무럭무럭 자라는 법이지요.
우리는 날마다 그런 싱싱한 야채며 과일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어요. 고기며 생선도 물론 식탁에 나오지만, 여기 있으면 그런 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은 차츰 덜해집니다. 아무튼 야채가 너무 싱싱하고 맛있기 때문이죠.
밖에 나가 산나물이며 버섯을 딸 때도 있어요. 그런 것에도 전문가가 있어서 이건 조다, 저건 안된다 하고 가르쳐 준답니다. 덕분에 나는 여기 와서 체중이 3킬로그램이나 늘었는 걸요. 꼭 알맞은 체중인 셈이지요. 이게 다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 덕분입니다.
그 밖의 시간에 우리들은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합니다. 텔레비전이라든가 라디오 같은 것은 없지만 그 대신 아주 좋은 도서실도 있고, 레코드 라이브러리도 있지요. 레코드 라이브러리에는 말러의 교향곡 전집에서부터 비틀즈까지 갖추어져 있어서, 나는 늘 거기서 레코드를 빌려다가 방에서 듣곤 합니다.
이 시설의 문제점이라면, 한 번 이곳에 들어오면 밖으로 나가기가 귀찮아지거나 혹은 무서워진다는 그런 점입니다. 우리들은 이곳에 있는 한, 평화롭고 평온한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자신의 비뚤어짐에 대해서도 자연스런 마음으로 대할 수 있고, 자신이 회복된 것도 느끼게 되지요. 하지만 바같 세상이 과연 우리들을 이와 같이 수용해 줄 것인지 어떨지, 나로서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답니다.
담당 의사는 내가 이제는 차츰 외부 사람과 접촉을 갖기 시작해도 좋을 시기라고 합니다. '외부 사람이란 즉 정상적인 세계의 정상적인 사람이란 뜻인데, 그런 말을 들어도 내게는 당신의 얼굴밖엔 떠오르지 않는군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부모님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분들은 나로 인해 몹시 혼란을 겪고 있어서, 이야기를 한다 해도 나는 어쩐지 참담한 심정이 될 뿐일 거예요.
더구나 나로서는 당신에게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몇 가지 있어요.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고, 회피해 지나칠 수도 없는 이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나를 짐스럽게 생각진 말아요. 나는 누군가의 무거운 짐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나는 나에 대한 당신의 호의를 느꼈으며, 그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심정을 솔직하게 당신에게 전하고 있을 뿐이에요.
지금의 나는 다분히 그러한 호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에게 내가 한 말 중에 어느 것이든 부담스럽게 느껴졌다면 사과하겠어요. 용서하세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불완전한 인간이랍니다.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하지요. 만약에 나와 당신이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상황에서 만나 서로가 호의를 가졌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고요. 내가 정상이고 당신도 정상이고(처음부터 정상이었겠지만), 기즈키가 없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고요. 하지만 우리에게 이 '만약'은 너무나 크군요.
적어도 나는 공정하고 정직하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겁니다.
이곳 시설은 보통 병원하고는 달라서 면회는 원칙적으로 자유예요. 하루 전에만 전화 연락을 한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죠. 식사도 함께 할 수 있고, 숙박 시설도 있어요. 당신의 형편이 허용될 때, 한 번 와 주기를 바라겠어요. 지도를 함께 보냅니다. 편지가 길어져서 미안해요.
나는 끝까지 읽고 나서 또다시 되풀이해 읽었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돌아와, 그것을 마시면서 또 한 번 되풀이해 읽었다. 그리고 그 일곱 장의 편지를 봉투에 도로 넣어 책상 위에 놓았다.
핑크색 봉투에는. 여자치고는 좀 지나치게 차분하달 만큼 또박또박 잔은 글씨로 내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잠시 그 봉투를 바라보았다. 봉투 뒷면의 주소에는 아미료라고 쓰여있었다.
묘한 이름이었다. 나는 그 이름에 대해 5, 6분 동안 두루두루 생각해 본 끝에, 이건 아마 프랑스 어의 아미(역주: 친구라는 말로 표기는 ami)로부터 따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했다.
편지를 책상 서랍에다 넣고 나서 나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 편지 가까이에 있다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되풀이해 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에 나오코와 둘이서 늘 그렇게 했듯이, 일요일 도쿄의 거리를 정처 없이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그녀의 편지 한 줄 한 줄을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시내 거리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서야 기숙사로 돌아와, 나오코가 있는 '아미료'에 장거리 전화를 걸어 보았다.
교환이 나오며 용건을 물었다. 나는 나오코의 이름을 대고 될 수 있으면 내일 오후에 면회하러 가고 싶은데, 가능할지 어떨지를 물었다. 교환은 나의 이름을 묻더니, 30분 후에 다시 한 번 걸어 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식사를 끝내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같은 여성이 나와 "면회가 가능하니 꼭 오세요."라고 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은 다음, 배낭에다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를 챙겼다. 그리고 잠이 올 때까지 브랜디를 마시면서, 읽다가 만 '마의산'을 마저 읽었다. 그리도 가까스로 잠이 든 것은 새벽 한 시가 지나서였다.
제6장 정상적인 세계와 비정상적인 세계
월요일 아침 일곱 시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서둘러 세수를 하고 수염을 깎은 다음, 아침도 먹지 않은 채 사감을 찾아가 이틀 정도 등산을 다녀오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했다. 그때까지 며칠씩 자주 여행을 다녀온 때문이어서인지 사감은 그저 그래,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나는 혼잡한 통근 전철을 타고 도쿄 역으로 가서 쿄토까지 가는 신칸선의 자유석 표를 산 다음, 제일 빠른 히키리(역주 : 신칸선의 한 종류)에 말 그대로 뛰어올라, 뜨거운 커피에다 샌드위치로 아침을 대신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선잠을 잤다.
교토 역에 도착한 것은 열한 시가 조금 전이었다. 나는 나오코가 일러준 대로 버스를 타고 산초까지 가서, 그 근처에 있는 사철 버스 터미널로 걸어가 16번 버스가 어느 승차구에서 몇 시에 출발하는가를 물었다. 열한 시 삼십오 분에 정류소의 저쪽 제일 끝에서 출발하며, 목적지까지는 대충 한 시간이 걸린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매표소에서 승차권을 구입한 후 서점에 들어가 지도를 사서, 대합실 벤치에 앉아 아미료 요양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보았다. 지도를 보니 요양원은 기가 막힐 정도로 깊은 산 속에 있었다. 버스는 산을 몇 개씩 넘으면서 북상을 하다, 더 이상은 못 가지 않을까 싶은 지점까지 가서야 시내로 다시 되돌아올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내릴 정류장은 종점 거의 다 간 곳에 있었다. 정류장으로부터는 등산길이 나 있고, 20분 정도 걸어가면 요양원에 다다른다고 나오코는 편지에 썼었다. '이정도까지 깊은 산속이라면 굉장히 조용하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20명 남짓한 승객을 태우자 버스는 곧 출발했고, 가무가와를 따라서 교툐 시내로부터 북으로 달렸다. 북으로 가면 갈수록 거리의 집들이 뜸해지면서 밭들과 공지가 눈에 띄었고, 검은 기와지붕과 비닐하우스들이 초가을 햇살을 받으며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얼마후 버스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꼬불꼬불 굽이진 길이어서 운전기사는 쉼없이 계속 핸들을 꺾었고, 나는 약간 가슴이 답답해져옴을 느꼈다. 아침에 마신 커피 냄새가 위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러다 커브도 차차 뜸해져 겨우 한숨을 돌릴 무렵, 버스는 갑자기 서늘한 삼나무 숲속으로 들어섰다. 삼나무는 마치 원시림처럼 높이 뻗어 올라 온통 햇빛을 가렸고, 그 어두운 그림자로 만물을 덮고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갑자기 차가워지고, 바람에 실려 온 습기가 피부에 따갑게 느껴졌다. 계곡 하천을 따라 버스는 그 삼나무 숲속을 무척 오랜 시간 동안 달렸다.
온 세계가 끝없이 삼나무 숲으로 뒤덮여 버린 게 아닌가 하고 느껴질 무렵에야 겨우 숲이 끝나고, 우리는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같은 곳에 다다랐다. 분지에는 푸른 밭이 아득히 펼쳐져 있었고, 맑은 강이 길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멀리서 하얀 연기는 한 가닥이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이곳저곳 빨랫줄에는 빨래가 널려 있었으며, 몇 마리인지 개 짖는 소리도 들려왔다. 집 앞에는 장작이 처마 밑까지 쌓여 있었고, 그 위에서 고양이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도로변에는 한참 동안 그런 인가가 계속되었지만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같은 풍경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다. 버스는 삼나무 숲으로 들어가고, 숲을 빠져나와선 마을로 들어가고, 마을을 벗어나선 또 삼나무 숲으로 접어들었다.
마을에서 버스가 멎을 때마다 몇 사람씩 승객이 내렸지만 타는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시내를 출발한 지 40분쯤 되어 전망이 탁 트인 고갯마루에 다다르자, 운전기사는 차를 세우고 5, 6분 동안 기다려야 할 테니까 내리고 싶은 사람은 내렸다 타도 된다고 승객들에게 말했다.
손님은 이제 나를 비롯해서 네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버스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눈이 아래로 펼쳐져 있는 교토의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길가에 서서 소변을 보았다. 끈으로 묶은 큰 골판지 상자를 차 안으로 들고 들어왔던 쉰 살 전후의 햇빛에 잘 그을은 남자가 등산을 할 거냐고 내게 물어왔다. 귀찮아서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잠시 후 반대 방향으로부터 버스가 올라와 우리가 타고 온 버스 옆에 정차하더니 운전기사가 내렸다. 두 운전기사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각자의 버스에 올라탔다. 승객도 좌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 대의 버스는 각각의 방향으로 또 달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우리 버스가 고개 무렵에서 다른 버스를 기다려야 했는지 그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고개를 조금 내려온 데서부터 길 폭이 갑자기 좁아져, 대형 버스 다 대가 엇갈려 지나가기란 전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버스는 몇 대의 경화물차나 일반 승용차와 엇갈리게 되었지만 그때마다 어느 한쪽이 후진해서 커브길 가장자리에 차를 바싹 붙여 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계곡을 따라 줄지어 있던 마을도 아까보다는 훨씬 적어지고, 경작된 농지도 협소해졌다. 산세가 점점 험해지면서 바로 눈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개가 많은 것만은 어디든 한결 같았는데, 버스가 오면 서로 겨루듯이 짖어댔다.
내가 내려선 정류장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인가도 없고, 밭도 없었다. 정류장 표지만이 덩그러니 서 있는 옆에 작은 냇물이 흘렀고, 저만치 등산로의 입구가 보일 뿐이었다.
나는 배낭을 걸머지고 계곡을 따라 등산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길의 왼쪽엔 냇물이 흘렀고, 오른쪽에는 잡목숲이 이어졌다. 그렇게 완만한 비탈길을 15분쯤 올라가자 오른쪽으로 겨우 차 한 대가 지나 갈만한 갈림길이 하나 나오고, 그 입구에는 '아미료 관계자 이외의 출입을 사절합니다.'라는 푯말이 서 있었다.
잡목숲 사이로 지나가는 그 샛길에는 자동차 바퀴 자국이 뚜렷하게 나 있었다. 주변의 숲속에서 간혹 푸드득 하는 새의 날갯짓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부분적으로 확대된 것처럼 이상하게 선명한 소리였다. 딱 한 번 총소리 같은, 탕 하는 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왔지만, 이쪽에선 필터 몇 장쯤 거쳐서 온 듯 작고 억눌린 것 같은 소리로 들렸다.
잡목숲을 벗어나자 흰 돌담이 보였다. 돌담이라고 해도 내 키만큼의 높이인 데다 위에 철책이나 망이 처져있는 것도 아니어서, 넘어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는 그런 담이었다. 검은 칠을 한 철제 대문은 튼튼해 보였지만 그것 역시 열린 채였다.
수위실에도 수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문 옆엔 조금 전에 본 것과 같은 '아미료 관계자 이외에 출입을 사절합니다.'라는 푯말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수위실에는 방금 전까지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세 개 있었고, 찻잔에는 미처 다 마시지 못한 차가 남아 있었으며, 선반에는 트랜지스터라디오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시계가 똑딱똑딱 메마른 소리를 내면서 시간을 쫓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수위를 기다려 보았지만 돌아올 것 같은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가까이에 있는 벨 같은 것을 두어 번 눌러 보았다. 대문 바로 안쪽은 주차장으로 되어있어, 미니 버스와 4WD의 지프, 그리고 검푸른색 볼보가 세워져 있었다. 30대 정도는 주차 시킬 만한 공간이었지만 서 있는 차는 그 세대뿐이었다.
2, 3분을 기다리니 감색 제복을 입은 수위가 노란색 자전거를 타고 숲길을 따라 이쪽으로 왔다. 예순 살 가량의 키가 크고 머리가 벗겨진 남자였다. 그는 노란색 자전거를 수위실 벽에 기댄 후 나를 향하더니,
"아이구, 죄송합니다." 라고 그다지 죄송한 것 같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자전거 바퀴 덮개에는 흰 페인트로 32라고 씌여 있었다.
내가 이름을 대니까 그는 어디엔가로 전화를 걸어 내 이름을 두 번 되풀이 하여 말했다. 상대가 뭔가 말을 하자 그는 "네, 네에, 알았습니다."라고 대답을 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본관으로 가서 말씀입니다, 이시다 선생님을 찾으세요." 라고 수위가 말했다.
"저 숲길을 따라가면 로터리가 나옵니다. 거기서 왼쪽으로 두 번째, 아시겠어요? 왼쪽으로 두 번째 길로 가십시오. 그러면 낡은 건물이 나올 테니 거기서 오른편으로 꺾어 다시 숲속을 지나면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있어요. 그게 본관입니다. 곳곳에 팻말이 붙어 있으니까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일러주는 대로 로터리에서 왼쪽으로, 두 번째 길에 접어드니, 맞은편에는 얼핏 보기에 몇십 년 전에는 별장이었으리라고 짐작이 되는 낡은 건물이 있었다. 뜰에는 모양새 놓은 바윗돌과 석등같은 게 놓여 있었고, 나무들은 잘 손질이 되어있었다. 원래는 틀림없이 누군가의 별장이었던 같았다.
거기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 숲을 지나가니, 눈앞에 철근 콘크리트 3층 건물이 보였다. 3층 건물이긴 해도 땅을 파낸 듯이 내려앉은 자리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렇다 할 위압적인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그저 건물 설계가 간결하고 청결하게 느껴졌다.
현관은 2층에 있었다. 몇 계단인가 되는 층계를 걸어올라 큰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안내실에 앉아 있었다. 나는 내 이름을 대며 이시다 선생님을 만나뵈라는 말을 듣고 왔다고 했다.
방긋 미소를 띄우며 그녀는 로비에 있는 다갈색 소파를 가리키며 "저기 앉아 기다려 주세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한 후에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나는 어깨에서 배낭을 내리고 그 푹신한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청결하고 느낌이 좋은 로비였다. 관옆식물 화분이 몇 개 있었고, 벽에는 고상한 추상화가 걸려 있었으며, 마루는 윤이 나도록 잘 닦여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줄곧 그 마루에 비춰진 내 그 구두를 굽어보고 있었다.
도중에 한 번의 안내실의 여자가 "곧 오실 거에요." 라고 말을 건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렇게도 조용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서는 도대체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웬지 낮잠 자는 시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도 동물도, 벌레도, 초목도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같은 고요한 오후였다.
하지만 곧 부드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무척 뻣뻣하게 느껴지는 단발머리의 중년 여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냉큼 내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나와 악수를 교환했다. 그녀는 악수를 하면서 내 손등과 손바닥을 번갈아 찬찬히 관찰했다.
"당신 악기라곤 적어도 요즘 몇 년 동안 손에 대본 일이 없지요"
라고 그녀는 첫마디를 던졌다.
"네"
하고 나는 놀라며 대답했다.
"손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참으로 이상한 느낌이 드는 여인이었다. 얼굴에는 제법 많은 '주름'이 있어서 그것이 먼저 눈이 띄었지만,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늙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이를 초월한 젊음 같은 것이 그 '주름'에 의해 강조되고 있었다.
그 '주름'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 잘 어울렸다. 그녀가 웃으면 '주름'도 함께 웃고, 그녀가 언짢은 얼굴을 하면 '주름'도 함께 언짢은 얼굴을 했다. 웃지도 찌푸리지도 않는 얼굴을 할 때에는 '주름'은 어딘지 모르게 짓궂게 보였지만, 그러면서도 따뜻하게 얼굴 가득히 퍼져 있었다.
나이는 30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호감이 갈 뿐만 아니라 왠지 마음이 끌리는 여성이었다. 나는 첫눈에 대번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머리는 몹시 어수선하게 잘려 군데군데 뻗친 데가 있었고, 앞머리도 가지런하지 못한 채 이마를 덮고 있었지만, 헤어스타일 전체가 그녀에게 매우 어울려 보였다. 흰 티셔츠에 청색 작업 셔츠를 걸치고, 크림색의 느슨한 면바지에 테니스화를 신고 있었다.
가날프게 여윈 몸에는 젖가슴이란 것이 거의 없었고, 줄곧 짓궂게 입술이 한쪽으로 비틀어져 있었으며, 눈꼬리의 주름이 가늘게 움직였다. 얼마만큼은 세상일에 불만이 있는, 친절하고 기술이 좋은 여자 목공처럼 보였다.
그녀는 턱을 약간 아래로 당기고 입술은 비튼 채, 잠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당장 호주머니에서 자라도 꺼내어 내 몸 이곳저곳의 치수를 재기라도 할 것처럼.
"악기는 다룰 줄 알아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거 유감인데요. 뭘 할 줄 안다면 좋을 텐데."
"그렇군요"
하고 나는 말했지만, 왜 악기 이야기만 되풀이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앞주머니에서 세븐 스타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더니, 라이터로 불을 당기고 맛있게 한 모금 연기를 뿜어냈다.
"그런데 참, 와타나베라고 했죠? 학생이 나오코를 만나기 전에 내가 이곳을 설명해 두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나하고 먼저 이렇게 이야길 나누게 된 거예요. 여긴 딴 곳과 좀 다르니까, 아무 예비지식이 없으면 약간 당황도 될 거예요. 그렇죠? 학생은 아직 여길 잘 모르죠?"
"네, 거의 여길 잘 모르죠?"
"그럼, 처음부터 설명하자면......"
하다가 말고, 그녀는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딱 하고 손가락을 꺾었다.
"학생, 점심 먹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고픕니다."
"그럼 같이 가요.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면서 이야길 나누도록 해요. 점심 시간은 끝났지만, 지금 가도 아직 뭐가 좀 있을 테니까."
그녀는 앞장서서 성큼성큼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더니 1층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엔 2백 명가량이 식사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지만, 쓰고 있는 것은 절반뿐이고, 나머지 절반은 칸막이로 가려져 있었다. 마치 철 지난 휴양지의 식당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점심 메뉴는 국수를 넣은 포테이토 스튜와 아채 샐러드, 그리고 주스와 빵이었다. 나오코의 편지에도 씌어 있었지만, 이곳 야채는 깜짝 놀랄 만큼 맛이 좋았다. 나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 치웠다.
"정말 맛있게 식사하는군요"
하고 그녀는 몹시 감탄했다.
"정말 맛있습니다. 게다가 아침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했거든요."
"괜찮다면 내 것도 드실래요? 난 벌써 배가 부르니까......"
"네, 좋습니다."
"난 위가 작아서 조금밖에 못 먹어요. 그래서 식사를 조금 하는 만큼 담배를 피워 채우고 있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또 세븐 스타를 빼어 물고 불을 당겼다.
"참, 날 레이코라고 불러요.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조금밖에 손을 대지 않은 포테이토 스튜와 빵을 먹성 좋게 먹고 있는 나를, 그녀는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나오코의 담당 의사십니까?"
하고 나는 그녀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내가 의사?"
하고 그녀는 놀란 것처럼 얼굴이 굳어지면서 반문했다.
"왜 내가 의사라는 거죠?"
"이시다 선생님을 만나라는 말을 들었기에........"
"아아, 그렇군요. 나는 여기서 음악 선생 노릇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요. 하지만 사실은 나도 환자예요. 그런데 7년이나 여기 있으면서 음악도 가르치고 사무실 일을 거들어 주기도 하니까 환자인지 직원인지 분간이 안 되게 버렸어요. 요즘은. 나오코가 내 얘길 학생에게 안했나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군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아무튼 나오코와 나는 한 방을 쓰고 있어요. 말하자면 룸메이트죠. 그 애와 같이 생활하는 건 아주 재미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하고. 학생 이야기도 자주 해요."
"내 어떤 이야기를 하죠?"
하고 나는 물었다.
"참, 그렇지. 그전에 이곳을 설명해 줘야지"
하며 그녀는 나의 질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먼저 이해해 줘야 할 것은, 여기는 일반적인 '병원'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한마디로 말해서 여긴 치료하는 데가 아니라 요양하는 곳이거든요. 물론 의사도 몇 명은 있으니까 매일 한 시간 정도 면담을 하긴 해요. 하지만 그것도 체온을 재는 것처럼 어느 정도인가 체크하는 정도지 다른 병원에서와 같은 적극적인 치료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기엔 철창도 없고 여기에 들어오고 자발적으로 여길 떠나가요. 그리고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요양에 적합한 사람들뿐이에요. 아무나 다 받아들여지진 않아요.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그 증상에 따라서 전문 병원으로 보내지요. 여기까진 알겠죠?"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요양이라는 것.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겁니까?"
"여기 생활 그 자체가 요양이죠. 규칙적인 생활, 운동, 외부로부터의 격리, 조용함, 맑은 공기. 여긴 밭도 있으니까 거의 자급자족하는 생활이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도 없어요. 요즘 유행하고 있는 코뮌 같다고나 할까요. 하기야 여기에 들어오려면 돈이 꽤 드니까 그 점은 코뮌과 다르지만요."
"그렇게 많이 듭니까?"
"엄청나게 비싸진 않지만 싸다곤 못해요. 설치한 설비만 봐도 그렇지 않겠어요? 장소는 넓은 데다 환자는 적고, 직원은 많고. 나 같은 경우엔 들어온 지가 오래고 반쯤은 직원 같으니까, 실질적으로 입원비를 면제받고 있어서 별문제가 없지만요. 어때요, 커피 안 마실래요?"
마시고 싶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에 있는 커피 워머에서 컵 두 개에 커피를 따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설탕을 넣고 스푼으로 휘젓더니 얼굴을 찌푸리면서 그것을 마셨다.
"이 요양소는 말이죠, 영리 기업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아직은 입원비를 그다지 비싸게 받지 않아도 지탱해 나가는 거예요. 여기 땅도 어떤 사람이 기부한 거죠. 옛날엔 이 부근 일대가 그 사람 별장이었대요. 20년쯤 전까지만 해도, 오다가 낡은 저택을 보았지요?"
보았다고 나는 대답했다.
"예전엔 건물도 그것뿐이어서, 거기다 환자를 모아놓고 그룹 요양을 시켰대요. 어째서 그런 일을 시작했는가 하면 그 사람 아들 역시 정신병적인 성향이 있어서, 어떤 전문의가 그 사람에게 그룹 요양을 권했기 때문이래요. 인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모두가 상부상조하며 육체노동을 하면서 생활하고 거기에 의사가 끼여 조언도 하고 상태를 체크도 해주면, 어떤 종류의 병은 치유될 수도 있다는 게 그 의사의 어른이었던 거죠. 그런 식으로 해서 이곳이 시작됐어요. 그것이 차차 켜져서 법인체가 되었고, 농장도 확장이 되었으며, 본관도 5년 전에 세워졌지요."
"치료의 효과가 있었나 보군요."
"그래요, 하지만 만병 통치일 수는 없고, 낫지 않는 사람도 많아요. 그래도 딴 데서 못 고친 사람도 여기서 꽤 많이 회복되어 나간걸요. 이곳의 가장 좋은 점은 모두가 서로서로 돕는다는 거예요. 누구나 자기가 불완전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서로 도우려고 하죠. 다른 곳에선 그렇지가 못해요, 유감스럽지만. 다른 곳에선 의사는 어디까지나 의사고, 환자는 어디까지나 환자일 뿐이죠. 환자는 의사에게 도움을 청하고, 의사는 환자를 도와주는 거예요. 그렇지만 여기서는 서로가 도와요. 우린 서로의 거울이고, 의사도 우리와 같은 동료죠. 곁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다가 뭔가 필요하구나, 하고 느껴지면 어느새 다가와서 도와주지만, 어떤 때는 우리가 그들을 돕기도 해요. 그렇다는 건 경우에 따라선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는 거죠. 예를 들어 나는 어떤 의사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또 다른 환자는 간호사에게 불어를 가르치거든요.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에요. 우리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중엔 전문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 꽤 많은가 봐요. 그래서 여기서는 모두가 평등하지요. 환자도, 직원도, 그리고 학생도. 학생도 여기에 있는 동안은 우리의 한 동료니까 나는 학생을 돕고, 학생도 나를 돕는 거예요."
그녀는 온 얼굴의 주름을 부드럽게 펴면서 웃었다.
"학생은 나오코를 도와주고, 나오코는 학생을 돕는 거구요."
"구체적으로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우선 첫째로 상대방을 돕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것. 그리고 자기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것. 둘째는 정직할 것. 거짓말을 하거나 꾸며대거나, 형편이 좋지 않다고 얼버무리거나 하지 말 것. 그러면 되는 거예요."
"노력하겠습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레이코 여사님은 어째서 7년 동안이나 여기에 계셨던 거죠? 전 지금껏 대화를 나누면서도 전혀 이상한 점을 느낄 수가 없었는데요."
"낮에는 그렇지"
하고 그녀는 그늘진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밤에는 형편없이 돼요. 밤이 되면 침을 질질 흘리면서 온 마룻바닥을 뒹굴어요."
"정말이세요?"
"아니야, 농담이었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다 회복됐어요, 현재로선 그래요. 그저 여기 남아 여러 사람들의 회복을 도와주는 게 좋아서 그래요. 음악도 가르치고, 야채도 기르고. 난 여기가 좋아요. 다들 친구 같거든. 거기 비하면 밖의 세상엔 뭐가 있어요? 내 나이 지금 서른여덟이니까 금방 마흔이에요. 나오코하곤 달라요. 내가 여길 나간다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받아 줄 가정도 없고, 이렇다 할 직장이 있나, 친구가 있나, 게다가 7년씩이나 여기 있다 보니 세상일은 아무것도 몰라요. 물론 가끔 도서관에서 신문을 읽긴 하지만, 7년 동안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가 본 일이 없는 걸. 이제 와서 나간댔자 어떻게 하면 좋을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지 누가 압니까?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면서 그녀는 잠시 손아귀에서 라이터를 빙빙 돌렸다.
"그렇지만 와타나베 군, 내게도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요. 괜찮다면 다음에 시간이 더 있을 때 천천히 이야기해 줄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오코는 좀 좋아지고 있는 겁니까?"
"글쎄, 우린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처음엔 퍽 혼란스런 상태여서 우리도 어떻게 하나 하고 다소 걱정스러웠지요. 하지만 지금은 차분해지고 말하는 것도 훨씬 나아져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도 표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좋아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요. 그렇지만 나오코는 좀 더 일찍 치료를 받아야 했어요. 나오코의 경우는 그 기즈키라는 남자 친구가 죽은 시점부터 이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거예요. 그렇다는 가족들도 알고 있었을 테고, 나오코 자신도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가정적인 배경도 있고 하니까......"
"가정적인 배경이라니요?"
하고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어머, 학생은 그걸 모르고 있었어요?"
라고 이번엔 오히려 그녀가 더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그 이야긴 나오코에게 직접 들어요. 그쪽이 더 나올 테니까. 나오코도 학생한텐 여러 가지 얘기를 정직하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스푼을 들고 또 커피를 휘저은 다음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규칙상 그렇게 돼 있으니까 처음에 말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학생과 나오코가 단둘이만 있는 건 금지되어 있어요. 이건 규칙이에요. 방문자가 면회 상대하고 둘이만 있지는 못해요. 그러니까 항상 거기엔 관찰자가-현실적으로 내가 되지만요-배석하게 돼 있어요. 안됐다고는 생각하지만 참아 줄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 같아요. 괜찮죠?"
"괜찮습니다."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주저할 것 없이 아무 이야기나 다 해요. 내가 곁에 있다는 것엔 신경 쓰지 말고. 난 학생과 나오코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 대부분을 다 알고 있으니까."
"다요?"
"거의 다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린 그룹 진료를 하거든요. 그러니까 우린 웬만큼 알 만한 건 다 알고 있어요. 게다가 나와 나오코하곤 무엇이든 서로 숨김없이 말하니까. 여기선 그렇게 비밀이 많지 않아요."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전 잘 모르겠습니다. 도쿄에 있을 때 제가 나오코에게 한 일이 정말 옳았는지.,....그 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봤지만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나 역시 몰라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나오코도 모르니까. 그건 둘이 서로 잘 이야기해 보고 앞으로 결정지을 일이죠. 그렇잖아요? 설사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겠죠.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면, 그 일이 옳았는지 어쨌는지는 그 뒤에 다시 생각해 보면 되지 않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 셋은 서로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학생과 나오코와 나. 정직하게 서로를 돕고자 마음만 먹으면 말에요. 셋이서 그렇게 하면 경우에 따라선 상당한 효과가 있을 거예요. 학생은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 있지요?"
"모레 저녁때까지는 도쿄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르바이트 가야 할 일이 있고, 목요일엔 독일어 시험이 있으니까요."
"알았어요. 그럼 우리 방에서 자요. 그렇게 하면 돈도 안 들고, 시간에 구애받을 것도 없이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테니까."
"우리 방이라니, 누구 방입니까?"
"나와 나오코의 방이지 누구 방이겠어요? 방이 둘로 나누어져 있고, 소파 침대가 하나 있으니까 자는 데도 지장이 없어요, 걱정말아요."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말하자면 남자 방문객이 여자 방에 묵는다는 게......."
"왜요, 설마 한밤중에 우리 침실로 들어와서 번갈아 강간할 것도 아니잖아?"
"물론입니다."
"그렇담 문제 될 게 없지요. 우리 방에 묵으면서 차분히 여러 가지 이야길 나눠요. 그게 좋아요. 그래야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고, 내가 기타를 치는 것도 들을 수 있고, 꽤 잘 쳐요, 나."
"그렇지만 정말 폐가 안 되겠습니까?"
레이코 여사는 세 개째의 세븐 스타를 입에 물고, 입 끝을 힘주어 모으더니 불을 붙였다.
"우리 둘은 이미 그 문제를 놓고 의논을 마쳤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들을 대표해서 내가 학생을 초대하고 있는 거예요, 사적인 것이지만. 그쯤이면 예의 바르게 승낙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물론입니다. 기꺼이."
그녀는 눈꼬리에 주름을 깊게 짓고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학생은 참 이상한 말투를 쓰네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호밀 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의 흉내를 내고 있는 건 아닐 테고."
"설마요"
라고 말하면서 내가 웃었더니, 그녀도 담배를 입에 문 채 웃었다.
"그렇지만 학생은 솔직한 사람인 것 같군요. 난 보면 알아요. 여기에 7년간 있으면서 온갖 사람이 오가는 걸 봐왔으니까.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과의 차이 말에요. 학생은 마음을 열 수 있는 쪽이에요. 정확하게 말해서 열려고 마음만 먹으면 열 수 있는 사람."
"열면 어떻게 됩니까?"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즐거운 듯이 테이블 위에 손은 모았다.
"회복되죠"
라고 그녀는 말했다. 담뱃재가 테이블 위에 떨어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본부 건물에서 나온 우리는 조금만 언덕을 넘어, 풀장과 테니스 코트와 농구 코트 옆을 지나갔다. 테니스 코트에선 두 남자가 연습을 하고 있었다. 깡마른 중년의 남자와 살찐 젊은이였다.
두 사람 다 잘 치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테니스가 아닌 전혀 다른 경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게임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불의 탄성에 흥미가 있어서 그것을 연구하는 중이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생각에 잠긴 듯하면서 열심히 불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둘 다 흥건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던 젊은이가 레이코 여사를 보자 게임을 중단하고 걸어와서는, 벙실벙실 웃으면서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테니스 코트 옆에서는 커다란 잔디 깎는 기계를 든 남자가 무표정하게 잔디를 깎고 있었다.
앞으로 더 나아가니까 숲이 나타났고, 숲속에는 아담한 양옥들이 거리를 두고 열다섯이나 스물 채 가량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집 앞에는 수위가 타고 있었던 것과 같은 노란색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여긴 직원들이 살고 있다고 레이코 여사가 가르쳐 주었다.
"시내에 나가지 않아도, 여기서 뭐든지 구할 수 있어요."
라고 그녀는 걸어가면서 설명했다.
"식료품은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거의 자급자족해요. 양계장이 있으니까 계란도 먹을 수 있고, 책이랑 레코드도 다 있어요. 운동 시설도 있고 조그만 수퍼마켓 같은 것도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 이발사도 다녀가고, 주말엔 영화도 상영해요. 특별한 물건은 시내에 다녀오는 직원에게 부탁할 수 있고, 양복 같은 것은 카탈로그를 보고 주문하면 되고, 그런대로 불편을 느끼지 않아요."
"시내엔 나가지 못합니까?"
"그건 안 돼요. 가령 치과에 가야 한다든가, 그런 특별한 경우엔 예외지만 원칙적으론 허가되지 않아요. 여길 떠난다는 것은 완전히 그 사람의 자유의사에 달렸지만, 한 번 떠나면 다신 여기로 돌아오지 못하죠. 나무다리를 불살라 버리는 것과 같아요. 이삼일 시내에 나갔다 돌아온다는 건 불가능해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걸 허락해 버리면 들락날락하는 사람 천지가 되어 버릴 테니까."
숲에서 벗어나니 완만한 경사지였다. 그곳에는 이상한 분위기가 감도는 2층짜리 목조 건물이 불규칙하게 줄지어 있었다. 어디가 어떻게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잘 성명하진 못하겠지만, 아무튼 처음 느낌이 어딘가 이들 건물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비현실적인 것을 분위기 있게 그리려고 한 그림에서 흔히 느끼는 정감과 흡사했다. 월트 디즈니가 뭉크의 그림을 기초로 만화 영화를 만든다면 혹시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건물들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다 같은 모양에다 다 같은 색깔이었다. 모양은 대체적으로 입방체에 가까웠고, 좌우 대칭인 데다 출입구가 넓었으며, 창문이 많이 달려 있었다. 그 건물들 사이사이로, 마치 자동차 운전 교습소 코스 같은 꾸불꾸불한 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어느 건물 앞에나 화초가 심어져 있었고, 잘 가꾸어져 있었다. 인적이 없었고, 어느 창문에나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여길 C지구라고 하는데 여자들만 살고 있어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는 곳이에요. 이런 건물이 열 동 있고, 각 동마다 넷으로 나누어져 하나에 두 사람씩 살게 돼 있지요. 그러니까 80명은 수용할 수 있지만 지금 있는 인원은 32명뿐이에요."
"아주 조용하군요."
"지금 이 시간엔 아무도 없어요. 나는 특별 취급이니까 이러구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행동하고 있지요. 운동하는 사람, 뜰을 손질하는 사람, 그룹 요법을 받고 있는 사람, 밖에 나가 산나물을 캐는 사람......각자가 스스로 정해서 스케줄을 짜요. 나오코는 지금 뭘하고 있더라? 벽지를 새로 바르는 일이나 페인트칠을 다시 하는 일이 아닐까. 그런저런 일이 대충 다섯 시까지 몇 가지가 있어요."
'C-7'이라는 번호가 붙은 건물로 들어간 그녀는, 맨 끝에 있는 층계로 올라가 오른쪽 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녀가 집안을 안내하며 보여 주었다. 거실과 침실, 그리고 부엌과 욕실 등 네 공간으로 나누어진, 간소하고 좋은 인상을 주는 주거지였다. 불필요한 장식도 없고, 별다른 가구도 없으면서 그리 허전한 느낌은 주지 않았다. 꼬집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방 안에 있으려니까 그녀를 앞에 놓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몸의 긴장이 풀리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거실에는 소파 하나에다 테이블, 그리고 흔들의자가 있었다. 부엌에도 식탁이 있었는데, 양쪽 테이블 위에는 큼지막한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침실에는 침대 두 개, 책상 두 개와 벽장이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작은 탁자와 독서용 전등이 있었고, 문고본이 뒤집어진 채로 놓여 있었다. 부엌에는 소형 전기 레인지와 냉장고 하나가 세트로 놓여 있어서, 간단한 요리 정도는 마음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어있었다.
"욕조가 없어 샤워밖에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훌륭하죠?"
라고 그녀는 말했다.
"욕탕과 세탁 시설은 공동으로 쓰게 되어있어요."
"지나칠 정도로 잘 돼 있습니다. 제가 있는 기숙사는 천장과 창문뿐인 걸요."
"학생은 이곳 겨울이 어떤지 몰라서 그래요."
그녀는 나의 등을 두드리며 소파에 앉힌 다음 자기도 그 옆에 앉았다.
"길고 고생스러운 게 여기 겨울이죠. 어딜 봐도 눈 눈 눈, 눈 천지고, 음습하게 습기가 차서 뼛속까지 얼어붙어요. 겨울이 되면, 우린 날이면 날마다 눈을 치우며 하루를 보내죠. 그런 계절엔 밤을 따뜻하게 해놓고, 음악을 듣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뜨개질을 하면서 지내요. 그러니까 이 정도의 공간이 없으면 숨이 막혀서 모든 일이 잘 안 되지. 학생도 겨울에 와보면 알게 될 거야.“
그녀는 긴 겨울 생각을 떠올린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릎 위에 손을 모두였다.
"이걸 옆으로 눕혀서 침대로 만들어 줄게요."
하며 그녀는 둘이 앉아 있는 소파를 탕탕 두드렸다.
"우린 침대에서 자니까 학생은 여기서 자요. 그래도 되겠죠?"
"전 상관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정해요. 그리고 우린 아마 다섯 시경이나 돼야 돌아올 거에요. 그때까진 나오코나 나난 할 일이 있으니까, 학생은 여기서 기다려 주면 좋겠어요, 괜찮지요?"
"좋습니다, 독일어 공부를 하고 있겠습니다."
그녀가 나간 뒤 나는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요 속에 별생각 없이 얼마 동안 몸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불현듯 기즈키와 둘이서 오토바이를 타고 멀리 드라이브 나갔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가을이었던 것 같다. 몇 년 전 가을이었더라? 4년 전이다. 나는 기즈키의 가죽 잠바 냄새와 그 소리가 굉장히 시끄러운 야마하의 125cc짜리 오토바이를 떠올렸다. 우린 굉장히 먼 해안까지 나갔다가 저녁 무렵에 몹시 지쳐서 돌아왔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때의 드라이브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가을바람이 귓전에서 날카롭게 소리를 냈고, 기즈키의 잠바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하늘을 쳐다보면, 마치 내 몸이 허공으로 날아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오랜 시간 나는 같은 자세로 소파에 누워 있으면서, 그 당시의 일을 잇따라 떠올리고 있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옛날 일과 정경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에 떠올랐다. 어떤 것은 즐거웠고, 어떤 것은 조금 슬펐다.
얼마쯤 그러고 있었을까. 나는 예상도 하지 못했던 기억의 홍수(그것은 참으로 샘물처럼 바위틈으로부터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속에 깊이 잠겨 있었기에, 나오코가 조용히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온 것도 모를 정도였다.
얼핏 보니 나오코가 거기에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잠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파의 팔걸이 부분에 걸터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처음엔 그 모습이 내가 빚어낸 이미지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는 나오코였다.
"자고 있었어요?"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뭘 좀 생각하느라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래, 잘 있었어?"
"음, 그래요."
나오코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미소는 옅은 색깔의 먼 풍경처럼 보였다.
"금방 가야 해요. 사실은 여기 와선 안 되는데, 잠깐 틈이 나서 왔어요. 그러니까 오래 있진 못해요. 내 머리 모양이 형편없지요?"
"아니, 아주 예뻐."
그녀는 초등학교 여학생 같은 산뜻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는데, 한쪽은 옛날과 다름없이 단정하게 핀을 꽂고 있었다. 그 헤어스타일은 정말로 그녀에게 잘 어울렸고 그녀다웠다. 그녀는 중세의 목판화에 자주 등장하는 아름다운 소녀처럼 보였다.
"귀찮아서 레이코 언니에게 매번 자르고 있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예뻐요?"
"정말이야."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엉망이라고 하던데."
나오코는 머리핀을 풀어 머리를 내리고, 몇 차례 손가락으로 빗어 올리고 다시 묶었다. 나비 모양의 머리핀이었다.
"나, 셋이서 만나기 전에 꼭 당신과 단둘이서 만나고 싶었어요. 특별히 무슨 이야기를 한다거나 그런 게 아니더라도, 당신 얼굴을 보고 먼저 익혀 두고 싶었던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서먹할 것 같아서요. 난 숫기가 없거든요."
"여기 생활에는 익숙해졌어?"
"그래요, 조금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또 머리핀에 손을 댔다.
"하지만 이젠 더 시간이 없어요. 나, 가봐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타나베, 여기까지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나 지금 몹시 기뻐요. 그렇지만 여기 있는 게 부담스러워지면 주저하지 말고 말해 줘요. 여긴 조금 특수한 장소인 데다 규칙도 특수하니까, 더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만일 그렇게 느껴지면 솔직하게 말해 줘요. 그렇다고 내가 실망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우린 여기선 모두 정직해요. 다들 솔직하게 말하거든요."
"그래, 나도 솔직하게 말할게."
나오코가 내 옆에 앉더니 몸을 기대어 왔다. 어깨를 안으니까 그녀는 머리를 내 어깨에 얹고, 코끝을 목에 대었다. 그리고 내 체온을 확인이나 하려는 듯이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그녀를 부드럽게 안고 있자니까 가슴이 약간 뜨거워졌다.
얼마 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서,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가 가버린 후, 나는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잠들 생각은 없었는데도 나는 나오코의 존재감 속에서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부엌에는 그녀가 사용하는 그릇이 있고, 욕실에는 그녀가 사용하는 칫솔이 있으며, 침실에는 그녀가 잠자는 침대가 있었다. 그런 방에서 나는 세포의 구석구석으로부터 한 방울씩 피로를 짜듯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어스름 어둠 속에서 춤추는 나비 꿈을 꿨다.
잠이 깨었을 때 시계는 네시 삼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해가 기울고, 바람은 자고, 구름의 모양이 달라져 있었다. 자면서 땀을 흘렸기 때문에 배장에서 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고, 셔츠를 새것으로 갈아있었다. 그리고 부엌에 가서 물을 마시고 싱크대 앞의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맞은편 동의 창문이 보였다. 그 창문 안쪽에는 두꺼운 종이를 오려 만든 장식물이 몇 가닥 실에 매달려 있었다. 새라든가 구름, 소와 고양이 같은 모양이 정성 들여 오려진 모빌 같은 거였다.
주변에는 여전히 아무 인기척도 없었고, 무슨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어쩐지 손질이 잘 된 폐허 속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C지구'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다섯 시가 조금 지나서부터였다. 부엌 창엣 내다보니 두세 명의 여자가 바로 밑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셋 다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나 나이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음성에서 받은 느낌으로는 그렇게 젊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뒤 조금 있자니까, 또 같은 방향으로부터 여자 넷이 걸어오고, 마찬가지로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주위에는 해질녘의 분위기가 감도록 있었다. 거실의 창문으로 숲과 산 능선이 보였다. 능선 위에는 그 외형을 장식하는 듯 희미한 빛이 떠 있었다.
다섯 시 반에, 나오코와 레이코 여사가 함께 돌아왔다. 나오코와 나는 오랜만에 처음 만났을 때 하는 것처럼 인사를 했다. 나오코는 정말 부끄러움을 타는 것 같았다. 레이코 여사는 내가 읽던 책이 눈에 띄자 뭘 읽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어쩌면.....왜 이런 곳까지 그런 책을 들고 와요."
라고 레이코 여사는 기가 차다는 투로 말을 했다. 듣고 보니 딴은 그럴 만도 한 것 같았다.
레이코 여사가 끓여온 커피를 셋이서 마셨다. 나는 나오코에게 '돌격대'가 갑자기 자취를 감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 만났던 날에 그가 나에게 준 반딧불 이야기를 했다.
"정말 서운하네, 그 사람이 살졌다니까. 그 사람 이야기는 좀 많이 듣고 싶었는데."
나오코는 몹시 섭섭한 듯이 말했다.
레이코 여사가 '돌격대'가 뭔지 알고 싶어 하길래 나는 또 그의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녀도 한바탕 크게 웃었다. '돌격대' 이야기를 하는 한 세계는 평화롭고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섯 시가 되자 우리 셋은 본관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나오코와 나는 생선구이에다 야채 샐러드, 조림, 그리고 밥과 된장국을 먹고, 레이코 여사는 마카로니 샐러드와 커피만을 들었다. 그리고 나서는 또 담배를 피웠다.
"나이가 들면 말이죠, 그다지 많이 먹지 않아도 괜찮도록 몸이 달라져요."
하며 그녀는 사뭇 설명조로 말했다.
식당에서 약 20여 명이 테이블에 앉아 식사하는 동안에도, 몇 사람씩 들어오고 또 나갔다. 식당의 광경은 연령의 편차가 크다는 것을 제외하면 기숙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한 가지 다르다면 누구나가 일정한 음량으로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크게 떠드는 사람도 없거니와 소곤거리는 사람도 없었다. 소리 내어 웃거나 놀라거나, 손을 치켜들고 누굴 부른다거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나가 같은 음량으로 조용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몇 개의 테이블에 나누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 테이블에 세 사람, 많아야 다섯 사람이었다. 한 사람이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며 응, 응, 하면서 수긍을 하고, 그 사람의 말이 끝나면 다른 사람이 거기에 대해서 얼마 동안 말을 하곤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들의 대화는 내가 낮에 본 그 기묘한 테니스 게임을 떠올리게 했다. 나오코도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지 의아스러웠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한순간 질투 섞인 외로움을 느꼈다.
내 뒤쪽 테이블에서는 흰옷을 입은, 어느 모로 보나 의사인 듯한 분위기가 풍기는 머리숱이 적은 남자가, 안경을 낀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와 다람쥐 같은 얼굴의 중년 여성을 향해, 무중력 상태일 때 위액이 분비가 어떻게 되는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청년과 중년 여성은 '네'라든가 '그래요?' 하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말하는 것을 듣다 보니, 머리숱이 적은 흰옷의 남자가 정말 의사인지 차츰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식당에서는 아무도 내게 이렇다 하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내 쪽을 힐끗힐끗 쳐다보지 않았고, 내가 거기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그 자리에 끼어있는 것도 그들에겐 늘 있는 일의 하나인 것 같았다.
단 한 번, 흰옷을 입은 남자가 갑자기 뒤돌아보면서
"언제까지 여기 계실 예정이죠?"
하고 내게 물었다.
"이틀 묵고, 수요일에 떠날까 합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계절적으로 요즘이 제일 좋아요, 여긴. 그러나 겨울에도 와봐요, 온갖 것이 흰색으로 덮인 것도 볼 만하니까요"
하고 그는 말했다.
"나오코는 눈이 오기 전에 여길 떠날지도 몰라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그 남자에게 말했다.
"아니야, 그래도 겨울은 좋아"
하고 남자는 진지한 얼굴로 되풀이했다. 그 남자가 정말 의사인지 나는 점점 알 수 없게 되었다.
"여기 사람들은 다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나는 레이코 여사에게 물었다. 그녀는 질문의 취지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이야기라니, 보통 누구나 다 하는 이야기죠, 하루에 있었던 일, 읽었던 책, 내일의 날씨, 그런저런 이야기요. 설마 학생은 누가 벌떡 일어서서 '오늘은 북극곰이 별을 먹었으니까 내일은 비가 올 거야!' 같은 말을 외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물론이죠,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다들, 너무 조용하게 이야길 하고 있으니까,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하는 궁금증이 언뜻 들었을 뿐입니다."
"여긴 환경이 조용하니까 자연히 모두들 환경에 맞게 조용히 이야길 하게 돼요."
나오코는 생선 뼈를 가려서 접시 한 귀퉁이에 깨끗하게 치워 놓고,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게다가 큰소리를 낼 필요가 없어요. 누굴 설득할 일도 없고, 남의 주목을 끌 필요도 없고."
"그렇군요"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으려니까 어쩐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그리워졌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무의미한 외침, 과장된 표현 등이 그리웠다. 물론 나는 그러한 웅성거림엔 진저리가 나 있었지만, 그래도 그 기묘한 정적 속에서 생선을 먹고 있으려니까 어쩐지 차분할 수가 없었다.
그 식당의 분위긴, 특수한 기계 공구의 견본 전시장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한정된 분야에 대한 강한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한정된 장소에 모여서, 자기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교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서, 나오코와 레이코 여사는 'C 지구' 안에 있는 공동 목욕탕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샤워만이라도 좋다면 욕실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들이 나가고 나서 나는 옷을 벗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면서 책장에 꽂혀 있는 레코드 중에서 빌 에반스의 것을 꺼내려다 말고, 그게 나오코의 생일날 그녀의 방에서 내가 몇 번인가 들었던 것과 같은 레코드임을 깨달았다. 나오코가 울었고, 내가 그녀를 안았던 그 밤이었다.
반년밖에 안 될 일이었지만 그게 아득한 옛날처럼 생각되었다. 아마 그 일을 두고두고 몇 번씩이나 생각해 왔던 탓이 아닐까. 너무나 자주 생각하였기 때문에 시간 감각이 늘어나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달빛이 매우 밝았기 때문에, 나는 불을 끄고 소파에 누워서 빌 에반스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창으로 비쳐 들어오는 달빛이 온갖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려, 마치 연한 먹물을 칠한 듯 그윽하게 벽을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배낭에서 브랜디를 담은 얇은 금속제의 물통을 꺼내어, 한 모금 입에 넣고 천천히 마셨다. 따뜻한 감촉이 목구멍으로부터 위장으로 서서히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따스함은 위로부터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다시 한 모금 브랜디를 마시고 나서 물통의 마개를 막고 그것을 배낭 속에 도로 넣었다. 달빛이 음악에 맞춰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오코와 레이코 여사는 20분쯤 지나서 돌아왔다.
"밖에서 보니 방에 전깃불이 꺼져 있어서 놀랐어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짐을 챙겨 도쿄로 돌아가 버린 줄 알았다구요."
"설마 그럴려구요. 이렇게 밝은 달빛을 본 지가 오래돼서 그저 전등을 꺼본 겁니다."
"그러고 보니 멋있다, 이렇게 하니까"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저, 레이코 언니, 요전에 정전 때 쓰다 남은 초 있지요?"
"부엌 서랍에 있을걸, 아마."
나오코가 부엌으로 가더니 서랍 속에서 하얀 초를 꺼내 들고 왔다. 나는 불을 붙이고 촛불을 재떨이에 떨어뜨려, 거기에 초를 세웠다. 레이코 여사가 그 불에 담뱃불을 당겼다.
주위는 여전히 괴괴했다. 셋이 촛불 주위에 둘러앉아 가만히 있으려니까, 마치 우리 셋만이 세계의 끝에 떠밀려 와 있는 것 같았다.
호젓한 달빛 그림자와 흔들리는 촛불 그림자가 하얀 벽에서 겹치고 또 엉키고 있었다. 나오코와 나는 나란히 소파에 앉았고, 레이코 여사는 맞은편의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때요, 포도주 안 마실래요?"
레이코 여사가 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술을 마셔도 됩니까?"
나는 약간 놀라서 물었다.
"정말은 그래선 안 되는데"
라고 레이코 여사는 귀를 만지면서 멋적은 듯이 말했다.
"대개는, 봐도 못 본 척해요, 포도주나 맥주 정도라면. 과음만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는 거예요. 난 친한 직원에게 부탁해서 조금씩 사달라고 하죠."
"가끔 둘이서 술 파티를 벌이는걸요, 우린."
나오코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좋겠군"
하고 내가 말했다.
레이코 여사가 냉장고에서 백포도주를 꺼내어 따개로 코르크 마개를 뽑은 다음, 유리잔 세 개를 들고 들어왔다. 정말 뒤뜰에서 만든 것처럼 개운하고 맛좋은 포도주였다.
레코드판이 다 돌아가자, 레이코 여사는 침대 밑에서 기타를 들고나와 귀여운 듯이 조율을 하고선, 천천히 바흐의 푸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가끔 손놀림이 막히는 곳은 있었지만 정성이 깃든, 흐트러짐이 없는 바흐 곡이었다. 따스하고 친밀하고, 거기엔 연주하는 기쁨 같은 것이 충만해 있었다.
"기타는 여기 와서 시작했어요. 방에 피아노가 없으니까. 혼자 배우는 데다, 손가락이 기타에 적합하지 않아서 좀처럼 숙달이 안 돼요. 그렇지만, 난 기타가 좋아요. 조그맣고, 간결하고, 부드럽고, 이를테면 작고 따스한 방 같아요."
그녀는 바흐의 소품을 한 곡 더 연주했다. 조곡 중의 뭔가였다. 촛불을 바라보고 포도주를 마시며 레이코 여사가 연주하는 바흐의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졌다.
바흐가 끝나자 나오코가 레이코 여사에게, 비틀즈의 것을 연주해 달라고 청했다.
"희망곡 시간"
이라고 레이코 여사가 한 눈을 가늘게 뜨고 나에게 말했다.
"나오코가 온 뒤로는 날이면 날마다 비틀즈 노래만 쳐달라고 성화거든요. 마치 가엾은 음악의 노예처럼."
그녀는 그러면서도 <미셜>을 매우 능숙하게 연주했다.
"좋은 곡이야. 나, 이 곡이 정말 좋아"
하고 레이코 여사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후,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넓은 초원에 부드럽게 비가 내리는 것 같은 곡이야."
그리고서 그녀는 <노웨어 맨>과 <줄리아>를 쳤다. 이따금 기타를 치면서 그녀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또 포도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노르웨이의 숲>을 부탁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레이코 여사가 부엌에서, 고양이 모양의 저금통을 들고 오자, 나오코가 지갑에서 1백 엔짜리 동전을 꺼내어 거기에 넣었다.
"뭡니까, 그거?"
하고 내가 물었다.
"내가 <노르웨이의 숲>을 신청할 땐 여기에 1백 엔씩 넣게 돼 있어요. 이 곡을 제일 좋아하니까, 특별히 그렇게 정했어요. 정성을 담아 신청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돈이 내 담뱃값이 되는 거지"
하고 레이코 여사는 덧붙이고 나서 손가락을 주물러 풀고는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했다.
그녀가 치는 곡엔 정성이 깃들어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감정이 지나치게 흐르는 적은 없었다. 나도 주머니에서 1백 엔짜리 동전을 꺼내어 그 저금통에 넣었다.
"고마워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방긋이 웃었다.
"이 곡을 들으면 난 가끔 무척 슬퍼질 때가 있어요. 왜 그런지 모르지만 내가 깊은 숲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감정에 휩싸여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혼자서 외롭고 춥고, 그리고 어둡고, 아무도 구해 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내가 신청하지 않으면 레이코 언니는 이 곡을 연주하지 않아요."
"무슨 <카사블랑카> 같은 이야기죠?"
하고 레이코 여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뒤에 레이코 여사는 보사 노바를 몇 곡 더 연주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나오코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편지에서도 스스로 말했듯이 전보다 건강해진 것 같았고, 햇빛에 까뭇하게 그을러 있었으며, 운동과 옥외 작업 덕택으로 몸매도 탄탄해 보였다.
호수처럼 깊고 맑은 눈과 수줍은 듯 흔들리는 작은 입술만은 예전과 다름없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녀의 아름다움은 성숙한 여자의 그것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지난날 그녀의 아름다움의 그늘에 보였다 사라졌다 하던 어떤 날카로움-상대방을 문득 서늘하게 만들곤 하던 그 얇은 칼날과 같은 날카로움-은 멀리 뒤로 물러서 있었고, 그 대신 부드럽게 감싸 주는 듯한 독특한 차분함이 주변을 감돌고 있었다. 그러한 아름다움은 내 마음에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불과 6개월 동안에 한 여성이 이렇게도 많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새로운 아름다움은 이전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 이상으로 나를 매혹시켰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사라진 면을 생각하니 아쉽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사춘기 소녀의 독특한, 그 자체가 성큼성큼 혼자서 걸어가는 듯한 자신감 있는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그러한 것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오코는 나의 생활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대학에서의 동맹 휴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에게 나가사와 이야기를 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묘한 인간성과 독자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편견에 치우친 도덕성을 독자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편견에 치우친 도덕성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마지막엔 그녀도 대체적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이해한 것 같았다. 나는 내가 그와 함께 여자를 낚으러 갔던 일은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 기숙사에서 친하게 지내고 있는 유일한 남자가 이런 별난 인물이라고 설명했을 뿐이다.
그동안 레이코 여사는 기타를 안고 다시 한 번 아까의 그 푸가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짬짬이 포도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했다.
"그 사람 좀 이상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이상한 남자지."
"그래도 그 사람이 좋아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좋아한다고는 아마 못할 것 같아. 그 사람은 좋아진다거나 어쩐다거나 하는 그러한 범주의 존재가 아니니까. 그리고 본인 역시 그런 걸 원하지도 않아. 그런 점에선 그 사람 꽤 정직해. 거짓이 없고, 매우 금욕적인 사람이야."
"그렇게 많은 여자들과 잔다면서 금욕적이다는 것은 이상하잖아요."
하고 나오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몇 여자와 잤다고 그랬지요?"
"거의 80명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그의 경우 상대한 여자의 수가 늘면 느는 만큼 그 하나하나의 행위가 갖는 뜻도 급속도로 희박해져. 그런데 그게 또 그가 원하는 거야."
"그런 게 금욕적이다는 거예요?"
"그에겐 그래."
나오코는 잠시 내가 한 말을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 사람 나보다 훨씬 머리가 이상해진 사람 같아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지만 그 사람의 경우는 자기 마음속에 비틀려 있는 것을 모두 정연하게 계통을 세워서 이론화시키고 있거든.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여기에 데려와 봐, 이틀이면 나가 버릴 거야. 이것도 알고 있고, 저것도 이젠 알았고, 이젠 다 알았다고 하면서 말이지. 그런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세상에선 존경을 받는다구."
"난 정말 머리가 나쁜가 봐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여기 일을 아직도 잘 모르겠거든요. 나 자신을 아직 잘 모르는 것처럼 말이에요."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그게 보통이야. 나도 나 자시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아. 그런 게 보통 인간이지."
나오코는 두 다리를 소파에 올려 무릎을 세우고는, 그 위에 턱을 고였다.
"나 말이지, 당신을 좀더 알고 싶어요."
"그저 보통 사람이야. 보통 가정에서 태어나 보통으로 자랐고, 보통 얼굴을 하고 있는 데다 성적도 보통이고, 보통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그렇지만요, 자기를 보통 사람이라고 그러는 인간을 믿어선 안 된다는 글을 쓴 사람이, 당신이 좋아하는 스코트 피츠제럴드가 아니었나요? 나 그 책, 당신한테 빌려 읽었거든요."
나오코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
하고 나는 인정을 했다.
"그렇지만 내가 의식적으로 그렇다고 나 자신을 몰아가고 있는 건 아니야. 정말로 마음속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해. 내가 보통 사람이라고. 나오코는 내게 뭔가 보통이 아니 게 있다고 생각해? 아니지?"
"그걸 말이라고 물어요?'
하고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 것도 물어봐야 알아요? 그렇다면 내가 당신과 잤겠어요? 술에 취해 누구면 어떠냐고 당신과 잔 줄 알아요?"
"물론 그렇겐 생각 안해"
하고 내가 말했다.
나오코는 자기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암담해서 포도주를 마셨다.
"당신과 잔 여자는 몇 사람쯤 되나요?'
하고 나오코는 불현듯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여덟이나 아홉 명쯤"
하고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레이코 여사가 연습을 그치고 기타를 소리 나게 무릎 위로 떨어뜨렸다.
"학생은 아직 스무 살도 안 됐잖아? 대체 어떤 생활을 하고 있길래 그래요?"
나오코는 아무 말 없이 그 맑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레이코 여사에게 최초의 여자와 자고 그녀와 헤어진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를 사랑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가사와에게 이끌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여자 저 여자와 자게 된 사정도 이야기했다.
"변명 같지만 난 괴로웠던 거야"
하고 나오코에게 말했다.
"너와 매주 같이 만나 이야기하는 건 난데, 네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는건 기즈키뿐이라는 사실이 말이야. 그걸 생각하면 괴롭기 짝이 없었어. 그래서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잔 것 같아."
나오코는 몇 차례 고개를 가볍게 흔들다가, 얼굴을 들고 또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그때 왜 기즈키와 자지 않았느냐고 물었지요? 아직도 그게 알고 싶어요?"
"알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죽은 사람은 그대로 죽은 채지만 우린 앞으로 더 살아야 하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코 여사는 어려운 악절을 몇 번씩 되풀이하며 다시 연습하고 있었다.
"난 기즈키와 자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고 말하면서 나오코는 머리핀을 풀더니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나비 모양의 그 핀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물론 그도 나와 자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우리 둘은 몇 번이나 그러려고 해봤어요. 하지만 안 됐어요. 못한 거예요. 왜 안 되는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고, 지금도 몰라요. 나는 기즈키를 사랑하고 있었고, 처녀성이니 뭐니 하는 그런 것에도 별로 구애받지 않았거든요. 그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난 뭐든지 해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못했어요."
나오코는 또다시 머리칼을 올리고 핀을 꽂았다.
"전혀 몸이 따라가질 않았어요"
하고 나오코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열리지가 않았어요, 전혀. 그래서 몹시 아팠어요. 말라 있어서 아팠던 거예요. 이런저런 방법을 우린 다해 봤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도 안 되었어요. 뭘 가지고 적셔 봐도 역시 아픈 거예요. 그래서 난 줄곧 기즈키 것을 손이나 입으로......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오코는 창밖의 달을 바라보았다. 달은 아까보다도 한층 크고 밝아진 것 같았다.
"와타나베, 나도 이런 이야기는 되도록이면 하고 싶지 않았어요. 되도록이면 나 혼자 가슴속에 조용히 간직해 두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할 수 없어요.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나로서는 문제가 풀리지 않으니까요. 그렇잖아요, 당신과 잤을 땐 나 금방 젖어왔지요? 그렇지요?"
"응."
"나, 그 스무 살 되던 생일날 저녁, 당신과 잔 이후부터 줄곧 젖어 있었어요. 그리고 쭉 당신에게 안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안겨서, 알몸이 되고, 몸에 당신의 손길을 받고..... 그런 생각을 한 건 난생처음이었어요. 왜 그랬을까? 왜 그런 생각이 나는 거지요? 기즈키를 정말 사랑하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나는 사랑하고 있지도 않았는데, 라는 뜻인가?"
"미안해요."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당신에게 상처 주고 싶지는 않지만 이것만은 이해해 줘요. 나와 기즈키는 정말 특별한 관계였어요. 우리는 세 살 때인가부터 함께 놀았어요. 우린 언제나 함께였고, 그렇게 자랐어요. 처음 키스를 한 게 초등학교 6학년 때였죠. 정말 멋졌어요. 내가 처음 생리가 있었을 땐 그 사람한테 달려가서 엉엉 울었지요. 우린 어떻든 그런 관계였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죽은 뒤로는 어떻게 사람들과 접촉해야 할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어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어떠한 것인지조차도."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포도주잔을 집으려고 했지만, 잘 잡혀지지 않아 잔은 바닥으로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카펫 위로 포도주가 쏟아졌다. 내가 몸을 굽혀 잔을 집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나오코에게 포도주를 좀 더 마시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잠시 대답이 없더니 갑자기 몸을 떨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몸을 둘로 접고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예전처럼 숨이 끊어질 듯이 격렬하게 울었다. 레이코 여사가 기타를 내려놓고 다가와 나오코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리고 나오코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그녀는 갓난아기처럼 머리를 레이코 여사의 가슴에 파묻었다.
"저, 와타나베 학생"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20분 정도 밖에 나가 산책하고 오지 않을래요. 여긴 내가 수습할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서서 셔츠 위에 스웨터를 입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라고 레이코 여사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학생 탓이 아니니까. 마음 쓰지 말아요. 돌아올 무렵엔 진정돼 있을 거예요."
하고 그녀는 말하면서 한 눈을 나에게 찡긋 감아 보였다.
나는 묘하도록 비현실적인 달빛이 밝혀 주는 길을 따라서, 잡목 숲으로 접어들어 하염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달빛 아래서는 온갖 소리가 야릇한 울림을 내고 있었다. 달빛 아래서는 온갖 소리가 야릇한 울림을 내고 있었다. 나의 발걸음 소리가 흡사 바다 밑바닥을 걷고 있는 사람의 발걸음 소리처럼, 어딘지 전혀 방향이 다른 곳에서부터 둔하게 들려왔다.
가끔 뒤쪽에서 바삭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밤 짐승들이 숨을 죽이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듯한 무거운 분위기가 숲 속에 서려 있었다.
잡목 숲을 벗어나 야트막한 언덕의 경사면에 앉아서, 나는 나오코가 살고 있는 건물 쪽을 바라보았다.
나오코의 방을 찾기는 쉬웠다. 전등이 켜있지 않은 창문 중에 안쪽에서 작은 불빛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는 곳을 찾으면 되었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그 작은 불빛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 불빛은 나에게 타다 남은 영혼의 마지막 명멸과 같은 것을 연상시켰다. 나는 그 불빛을 두 손으로 감싸 단단하게 지켜 주고 싶었다. 나는 개츠비가 강 건너편의 작은 불빛을 매일 밤 지켜보던 것처럼, 가늘게 흔들리는 그 불빛을 오래오래 보고 있었다.
내가 방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30분 후였다. 숙소 앞에까지 오니까 레이코 여사가 기타 연습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용히 계단을 올라가 노크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나오코는 보이지 않고, 레이코 여사 혼자 카펫 위에 앉아서 기타를 치고 있었다.
레이코 여사는 손가락으로 침실 문을 가리켰다. 나오코는 안에 있다는 말인 것 같았다. 그녀는 기타를 바닥에 내려놓고 소파에 앉더니, 나보고 옆에 와 앉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병에 남아 있는 포도주를 유리잔 두 개에 나누어 따랐다.
"나오코는 괜찮아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내 무릎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잠깐 혼자 누워 있으면 진정될 테니까 걱정 말아요. 조금 흥분했을 뿐이니까. 어때요, 그 사이에 우리 둘이서 밖을 거닐지 않을래요?"
"그러지요."
레이코 여사와 나는 가로등이 밝혀 주는 길을 천천히 걸어, 테니스 코트와 농구 코트가 있는 곳까지 가서, 거기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그녀는 벤치 밑에서 오렌지 색 농구공을 꺼내어 잠시 손에 들고 빙글빙글 돌렸다. 그리고 나에게 테니스 할 줄 아니냐고 물었다. 아주 서툴지만 못하지는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농구는?"
"잘하는 편은 못 됩니다."
"그럼, 학생이 잘하는 건 뭐가 있어요?"
하고 그녀는 눈꼬리에 주름살을 모으듯이 하고 웃으며 말했다.
"여자와 자는 것말고?"
"꼭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닙니다."
나는 조금 마음이 상하여 대꾸했다.
"화내진 말아요, 농담으로 그런 거니까. 그런데 사실은 어때요? 진짜 잘하는 게 뭐예요?"
"잘하는 게 없습니다. 좋아하는 건 있어도."
"어떤 걸 좋아하죠?"
"걸어서 여행하는 것, 수영, 책읽는 것."
"혼자서 하는 일을 좋아하는군요?"
"그렇군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남들과 같이 하는 게임 같은 게엔 옛날부터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건 뭘 해도 제대로 심취할 수가 없어요. 잘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이라는 기분이 들곤 하죠."
"그럼 겨울에 여기로 와요. 겨울이면 우리는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하곤 해요. 학생도 틀림없이 재미있어 할 거야. 눈 위를 하루종일 허둥지둥 달리고, 땀도 흠뻑 흘리고......"
그녀는 그렇게 말한 후에 가로등 불 밑에서 낡은 악기라도 점검하듯, 골똘히 자기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나오코는 자주 저런 상태에 빠집니까?"
"그래요, 가끔은"
하고 그녀는 이번엔 왼손을 보며 말했다.
"가끔 저렇게 돼요. 흥분하고, 울고. 그래도 그건 그것대로 좋은 거야. 감정을 밖으로 노출시켜 보이니까. 무서운 건 노출이 안 될 때거든. 그렇게 되면 감정이 몸속에 쌓이고 점점 굳어 가요. 온갖 감정이 뭉쳐 몸속에서 죽어 가는 거예요. 그 지경이 되면 큰일이죠."
"제가 아까 무슨 잘못 말한 거라도 있습니까?"
"천만에, 염려 말아요. 잘못한 말은 아무것도 없으니 마음 놓아요. 무엇이든 정직하게 말해요. 그게 가장 좋아요. 혹 그 말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더라도, 혹은 아까처럼 남의 감정을 흥분시키는 결과가 되더라도, 긴 안목으로 보면 그게 최상의 방법이에요. 학생이 진심으로 나오코를 회복시켜야겠다고 바란다면, 그렇게 해요. 처음에도 말했지만 나오코를 돕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나오코를 회복시킴으로써 자기도 회복되기록 바라야 해요. 그게 이곳의 방법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학생도 여러 가지 일을 정직하게 말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죠, 여기서는. 밖에선 모은 것을 다 정직하게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알았습니다."
"나는 여기에 7년 동안 있으면서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걸 지켜봤어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아마 너무 많이 봐왔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을 보고만 있어도 그 사람이 회복될 거라거나 안 될 거라는 게 비교적 직감적으로 파악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나오코의 경우는 나도 전혀 짐작이 안 돼요. 다음 달이 되면 깨끗이 치료될지도 모르겠고, 몇 년이나 그런 상태가 계속될지도 모르겠고, 도무지 짐작이 안 가요. 그러니까 그 점에 관해선 학생에게 뭐라고 말을 못하겠어요. 그저 정직하게 대하라거나, 도와주라는 일반적인 조언밖에 할 수 없어요."
"어째서 나오코의 경우에만 짐작이 안 가는 거죠?"
"아마 내가 나오코를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애, 그래서 잘 가늠이 안 되는 게 아닐까, 감정에 치우쳐서. 나, 나오코를 참 좋아하거든. 그리고 그것과는 별도로 나오코의 경우에는 여러 사람이 다소 복잡하게, 줄이 얽힌 것처럼 얽혀 있어서, 그걸 하나하나 풀어나가자면 힘이 들어요. 그걸 푸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어떠한 기획에 확 다 풀릴지도 모르겠고, 그래요. 그래서 나도 판단이 안 서는 거죠."
그녀는 다시 한 번 농구공을 손에 들고 빙글빙글 돌리더니 이번엔 땅에다 튀겼다.
"제일 중요한 점은 서둘지 않는 것이에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내게 말했다.
"이게 또 하나의 나의 충고라면 충고예요. 서둘지 말아야 해요.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일이 얽히고 설켜 있어도, 절망적인 기분에 빠지거나 짜증을 부려서 무리하게 잡아당기거나 하면 안 돼요. 시간을 두고 하나하나 서서히 풀어나가지 않으면요. 할 수 있겠어요?"
"해보겠습니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고, 또 시간을 들여도 완전하게 고쳐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학생, 그 점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린다는 거 쉽지 않아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공을 튀기면서 말했다.
"특히 학생 또래의 사람에게는 그래요. 오로지 그녀가 낫기만은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하니까. 그렇다고 거기에 기한이 있거나 보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학생이 할 수 있겠어요? 그럴 만큼 나오코를 사랑해요?"
"모르겠습니다."
하고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저로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정말 잘 모릅니다. 나오코가 하던 말과는 다른 뜻에서입니다. 하지만 난 할 수 있는 한 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선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거든요. 어쨌든 레이코 여사가 아까 말한 것처럼 나와 나오코는 서로 도와야 하겠고, 그 방법밖에 서로에 대한 구제의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다가다 만나는 여자와 잘 거예요?"
"그것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마스터베이션이나 하면서 줄곧 기다려야만 합니까? 저로선 수습이 잘 안 되거든요. 그런 일은."
"레이코 여사는 공을 땅 위에 내려놓더니 내 무릎을 가볍게 쳤다.
"여자들하고 자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학생이 그래도 좋다면 그걸로 좋은 거죠. 학생의 인생이니까 학생 스스로가 정하면 되는 거예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부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자기를 마모시키지 말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런 식으로 사는 게 얼마나 아까워요. 열아홉, 스무 살이라면 인격이 완성되는 데 가장 중요한 시기잖아요. 그러한 시기에 부질없이 옆길로 쏠리면 나이 들어서 고생하게 돼요. 정말이에요, 이건. 그러니까 잘 생각해서 행동해요. 나오코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자기 자신도 소중하게 여겨야죠."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게도 스무 살 시절이 있었어요, 아득한 옛날이지만. 믿어져요?"
"믿지요, 물론."
"진짜로?"
"진짜 믿습니다."
하고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오코만큼은 못 돼도 나 역시 나름대로 예뻤어, 그 무렵엔. 지금처럼 주름살도 없었고."
그 주름살이 나에겐 몹시 좋아 보인다고 말하자 그녀는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앞으론 여자에게 '당신의 주름살은 매력적입니다' 하는 말을 하면 못 써요. 나야 물론 그 말이 기쁘지만."
"조심하겠습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전철 정기권을 넣는 자리에 들어 있던 사진 한 장을 꺼내어 나에게 보여 줬다. 열 살 안팎의 예쁘장한 여자아이의 칼라사진이었다. 여자아이는 화려한 스키복을 입고, 스키를 신은 모습으로 눈 위에서 빙긋이 웃고 있었다.
"아주 예쁘죠? 내 딸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올해 초에 보내 온 거죠.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이던가......"
"웃는 모습이 닮았습니다."
나는 사진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지갑을 주머니에 도로 넣고 작은 소리로 콧소리를 내더니 담배를 물고 불을 당겼다.
"난 젊었을 때 전문적인 피아니스트가 꿈이었어요. 재능도 그런대로 있었고, 주위에서도 인정을 했지요. 제법 귀여움도 받고 자랐어요. 콩쿠르에서 우승한 적도 있고, 음대에선 줄곧 일등, 졸업 후의 독일 유학도 대략 결정이 나 있었어요.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청춘이었죠. 뭘 해도 순조로웠고, 순조롭지 못해도 주변에서 먼저 손을 써서 잘 되게 해주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나서 모든 게 한꺼번에 무너져 버렸어요. 음대 4학년 때죠. 비교적 중요한 콩쿠르가 있어서 쭉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왼손의 새끼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마사지도 하고, 뜨거운 물에 담그기도 하고, 이삼일 연습도 쉬어 보았지만 그래도 전혀 안 움직였어요. 새파랗게 질려서 병원으로 갔지요. 그래서 온갖 검사를 받아 봤지만 병원에서도 잘 모른다는 거예요. 손가락엔 아무 이성이 없고, 신경도 정상이니까 안 움직일 까닭이 없다는 거였죠. 그래서 신경성이 아닌가라는 말이 나와서 정신과에도 가보았어요. 하지만 거기에서도 확실한 원인을 찾지 못했어요. 콩쿠르를 앞둔 스트레스 때문이 아닐까 하는 정도밖엔. 그래서 아무튼 당분간은 피아노를 떠나서 살라는 말을 들었지요."
레이코 여사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신 후 내뿜었다. 그리고 고개를 몇 번인가 흔들었다.
"그래서 이즈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가서 당분간 요양하기로 했어요. 콩쿠르 일은 잊어버리고 당분간 편히 쉬었다 오자, 보름쯤 피아노도 만지지 말고 하고 싶었던 일이나 하며 놀다 오자고 마음먹었던 거죠. 그런데 그게 그렇게 안 되더군요. 뭘 해도 머리에 피아노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것밖에 생각나는 게 없었어요. 일생동안 새끼손가락이 이대로 굳어 버리는 게 아닌가, 그렇게 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자꾸 그런 생각만 머릿속에 빙빙 도는 거예요. 하기야 그럴 수밖에. 그때까지 내 인생은 피아노가 전부였으니까. 나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서 그것만을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그 밖의 것은 거의 아무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손을 다쳐선 안 된다고 하길래 부엌일 한 번 거든 일이 없는 데다, 주위에선 피아노 잘 친다는 것만은 칭찬해 주었는데, 그렇게 자라온 아이한테서 피아노를 빼봐요, 뭐가 남겠어요? 그것으로 펑! 머리 나사가 어디론지 날아가 버렸어요. 머릿속은 뒤엉키고 캄캄해지고."
"그녀는 담배를 땅에다 밟아서 꺼버리고는 또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은 깨졌어요. 두 달 동안 입원을 했다가 퇴원을 했지요. 입원하고 좀 있으니까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해서, 음대에 복학하고 겨우 졸업은 했어요. 하지만 말에요, 이미 뭔가가 꺼져버렸던 거예요. 뭐랄까, 에너지 덩어리 같은 것이 내 몸에서 빠져나갔던 거죠. 병원 의사도 전문 피아니스트가 되기엔 너무 신경이 약하다며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그러고. 그래서 졸업한 뒤로는 집에서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어요. 그러나 그게 처량하기 그지없었죠. 내 인생이 거기서 끝난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던 거죠. 내 인생에 있어 최고의 부분이 스물 갓 넘어 끝나 버린 거지 뭐예요. 너무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난 온갖 가능성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아무것도 남아 있질 않은 거예요. 아무도 박수 치는 사람이 없고, 떠받쳐 주거나 칭찬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데다, 허구한 날 동네 아이들에게 바이엘이나 소나타를 가르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너무 비참해서 매일 울고만 지냈어요. 억울하기 짝이 없고, 나보다 못하던 사람들이 어느 콩쿠르에서 2등으로 입상했다든가, 어느 음악당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든가, 그런 얘기를 들을 적마다 분해서 눈물을 흘렸어요. 부모님은 나를 무슨 깨지기 쉬운 그릇 다루듯 조심스러워했어요. 하지만 전 알아요. 그분들 역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들에게 딸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이젠 정신 병원을 드나드는 딸이 돼버렸으니까. 혼인 길도 막히고...... 그분들의 그러한 고민들은, 함께 살고있는 동안 무거운 공기처럼 전달되어왔어요. 지겹기 이를 데 없었죠. 밖에 나가면 동네 사람들이 죄다 내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서 겁을 먹고 아예 나가지도 못했어요. 그러니까 또 펑! 하고 터지고, 나사가 빠지고, 실타래가 엉키고, 캄캄해지고, 그게 스물넷 되던 해였어요. 그때는 7개월 동안이나 요양소에 있었죠. 여기도 아닌, 격식대로 높은 담이 둘러쳐져 있고 문도 잠겨 있는 곳이었어요. 더럽고, 피아노도 없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정말 한심했어요. 그렇지만 여길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 버텼지요. 7개월-참 길었어요. 그렇게 해서 주름살도 하나하나 늘어갔고."
레이코 여사는 입을 옆으로 당기듯 하고 웃었다.
"퇴원해서 얼마 후에 애기 아빠를 만나 결혼했어요. 나보다 한 살 아래였죠. 비행기 만드는 회사의 기술자였는데, 내 피아노 제자였어요. 좋은 사람이죠. 말수가 적긴 하지만 성실하고 마음이 따뜻하고. 그런데 반년 정도 레슨을 받은 후에 갑자기 나더러 결혼해 주지 않겠느냐고 말을 꺼냈던 거예요. 어느 날 레슨이 끝나고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데 갑자기 말이에요. 믿어져요? 그때까지 우린 데이트를 한 적도 없거니와 손을 잡은 일도 없었거든요. 정말 놀랐어요. 그래서 나는 결혼은 안 된다고 했죠.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고 호의도 품고 있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결혼은 할 수 없다고요. 그 사정이라는 게 뭐냐고 묻길래 정직하게 털어놓았죠. 두 번이나 정신이 이상해져서 입원한 적이 있다고 말이죠. 조그마한 일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해 주었어요. 뭐가 원인이었고, 지금은 어떻고,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조금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길래 천천히 잘 생각해 보라고 말했죠. 나는 전혀 급하지 않으니까, 하고. 그런데 다음 주 그가 와서 말하길, 역시 결혼하고 싶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랬죠. 3개월만 기다려 보자고. 3개월 동안 둘이 교제해 보고도 당신에게 여전히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고.
3개월 동안 우린 일주일에 한 번씩 데이트를 했어요. 여러 곳을 함께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죠. 그러는 동안 나도 그가 몹시 좋아졌어요. 그와 함께 있으면 비로소 내 인생이 나에게 돌아온 느낌이 들었죠. 둘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싫은 일도 다 잊혀지곤 했어요. 피아니스트가 못 되었어도, 정신병원에 입원 경력이 있다 해도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다, 인생에는 내가 모르는 좋은 일이 아직도 가득 채워져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그이가 고마웠어요. 3개월이 지나고 나서도 역시 그이가 결혼하고 싶다고 했죠. 그래서 저와 자고 싶다면 자도 좋다고 나는 말해 줬어요. '전 아직 그런 경험은 없지만, 당신을 좋아하니까 안고 싶으면 안아도 전혀 개의치 않아요. 그러나 저하고 결혼한다는 것과 그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죠. 당신은 저와 결혼함으로써 저의 문제까지 떠맡게 되는 거예요. 이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문젯거리죠. 그래도 괜찮은가요?'라고, 괜찮다고 그이는 말했어요. 자기는 그저 나와 자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결혼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 갖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건 그이의 진심이었어요. 정말 마음에 품고 있는 말밖에 안 하고, 말한 것은 어김없이 실천하는 사람이거든요. '좋아요, 결혼해요' 하고 대답을 했죠.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결혼은 그 4개월 후였던가......? 그이는 그 일로 부모와 다투고 인연마저 끊었어요. 그이 집안은 시코쿠의 시골 토박이 명문이어서 부모가 철저하게 나에 대해 뒷조사하는 바람에, 입원 경력이 두 번 된다는 게 들통났지 뭐예요. 그래서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 싸움이 벌어졌죠. 반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어요. 결국 우린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죠. 구청에 가서 혼인 신고를 하고 2박 3일 동안 하코네로 여행만 갔을 뿐이죠. 그렇지만 행복했어요, 모든 것이. 나는 결혼할 때까지 처녀였거든요. 스물다섯 살까지. 거짓말 같죠?"
레이코 여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또 농구공을 손에 들었다.
"이 사람하고 함께 사는 한 나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고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다시 나빠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이에요. 우리 같은 병자에겐 그런 신뢰감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이 사람에게 의지하면 된다. 조금이라도 상태가 이상해지면, 말하자면 나사가 풀리기 시작한다면 금방 그걸 알아차리고 주의 깊게, 인내심을 갖고 고쳐 줄 것이다. '나사를 조여 주고, 엉킨 실을 풀어주겠지' 하는 신뢰감만 있으면 우리 같은 병은 재발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 신뢰감이 있는 한 그 '펑!'은 일어나지 않아요. 난 무척 행복했어요. 인생이란 이렇게도 멋진 것인가 하고 생각했죠. 이를테면 황망하고 차디찬 바닷물에서 구출되어, 담요에 싸요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그런 기분이었거든요. 결혼한 지 2년 만에 아이를 낳고, 그때부터는 아이를 키우느라고 정신이 없었죠. 내 병 같은 건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였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집안일을 하고, 아이의 시중을 들고, 그이가 돌아오면 저녁상을 차리고......매일 매일이 같은 일의 되풀이였어요. 하지만 행복했어요.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인 것 같아요. 그게 몇 년 지속되었을까? 서른하나가 될 때까지는 그런 상태였어요. 그러다 또 '펑!'이 왔어요. 폭발한 거죠."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바람은 이미 자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곧게 피어오르다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언뜻 보니까 하늘엔 무수한 별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래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몹시 기막힌 일이 생겼어요. 꼭 무슨 덫이나 함정이 나를 노리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요.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난 지금도 소름이 끼쳐요."
그녀는 담배를 들지 않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미안한데요, 내 이야기만 해서. 모처럼 나오코를 만나러 왔는데......"
"듣고 싶습니다, 정말"
하고 나는 말했다.
"괜찮다면 그 이야기를 해주지 않겠습니까?"
"우리 애가 유치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난 조금씩 또 피아노를 만지기 시작했어요."
하고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거예요. 바흐라든가 모차르트, 칼라티...... 그러한 사람들의 소품부터 치기 시작했죠. 물론 너무 오랜 공백이 있었으니까 쉽게 감각이 돌아오진 않았어요. 손놀림도 예전 같지 않았고. 그래도 기쁜 건 말할 수가 없었죠. 또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앞서서 말이에요. 그렇게 피아노를 치고 있으려니까, 내가 얼마만큼 음악을 좋아하는지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였어요. 그리고 얼마나 거기에 굶주리고 있었던가 하는 것도 어울러서. 참 좋았어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음악을 연주한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좀 전에도 얘기했지만 난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쳐왔는데, 생각해 보니 나 자신을 위해서 피아노를 쳤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거나, 과목의 지정곡이라서, 아니면 남을 감탄시키기 위해서 등등, 그저 그런 일로만 계속 피아노를 쳐왔던 거예요. 물론 그건 그것대로 중요한 일이긴 해요, 한 가지 알기를 마스터하기 위해서는 말이죠.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으면 안 돼요. 음악이란 그런 것이지요. 나는 엘리트 코스에서 탈락된 후 그것도 서른하나나 둘이 되어서 비로소 그것을 깨달은 거예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집안일을 대강대강 해치우곤,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내가 좋아하는 곡을 쳤어요. 거기까진 아무 탈이 없었어요. 그렇지요?"
나는 수긍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얼굴만 알고 지내는, 길에서 만나 그저 인사만 할 정도인 부인이 날 찾아와서, 사실은 자기 딸이 내게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하는데 좀 가르쳐 줄 수 없겠느냐 하는 거예요. 동네 사람이긴 해도 그리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집 딸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그 부인 이야기론 그 애가 우리 집 앞을 지나다니면서 내 피아노 소리를 자주 들었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는 거예요. 게다가 내 얼굴도 이미 알고 있어서 존경하고 있다는 거였어요. 중학교 2학년인데, 지금까지 몇 사람에겐가 피아노를 배웠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잘되지 않아, 지금은 그만두고 있는 중이라고 했어요. 난 거절했어요. 몇 해씩이나 공백이 있었고,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면 모르지만 몇 년 동안 레슨을 받아 온 아이를 도중에서 가르치는 건 무리라고 했죠. 우선 우리 집 아이 시중을 들어줘야 하기때문에 바빠서도 안 되겠다고 했어요. 게다가, 물론 이건 상대방에게 말은 안 했지만, 걸핏하면 선생을 바꾸는 아이란 누가 가르쳐도 잘 안 될 게 뻔하죠. 그런데 그 부인은 자기 딸을 한번 만나 보기라도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제법 밀어붙이는 성격인 것 같아서 막무가내로 거절하면 뒤가 시끄러울 것 같았고, 만나고 싶다는데 그것마저 거절하기가 뭣해서, 만나기만 하는 거라면 그렇게 하자고 그랬죠. 사흘 후에 그 애 혼자서 날 찾아왔더군요. 천사처럼 예쁜 애였어요. 정말 빛이 날 정도로 예뻤죠. 그렇게 예쁜 아이를 본 건 예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없었으니까요. 머릿결이 막 갈아 놓은 먹물같이 까맣고 길었어요. 팔다리는 늘씬하고, 눈은 반짝거리고, 입술은 갓 만들어진 듯이 부드럽고 작았지요. 처음 그 애를 만났을 때 난 할 말을 잃고 말았어요. 잠시동안. 그만큼 예뻤죠. 그 애가 앉아 있으니까 우리 집 응접실은 꼭 다른 집이 된 것처럼 호화롭게 보였어요. 그 애를 보고 있자니까 눈이 부셔서, 이렇게 가느다랗게 감고 싶어지더군요. 그런 애였어요. 지금도 눈에 선해요."
그녀는 정말로 그 애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는 듯이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커피를 마시면서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여러 가지 화제로 말이에요. 음악이라든가 학교 이야기 같은 것. 겉보기에도 머리가 좋은 것 같았어요. 이야기 솜씨도 좋고, 의견도 날카롭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천부적인 소질도 있어 보였지요. 무서울 정도로요. 하지만 그 무서움이 뭐였는지 그때는 나도 잘 몰랐어요. 그저 겁날 정도로 영리한 데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언뜻 스쳐 갔을 뿐이니까. 그런데 그 애를 앞에 놓고 이야기하고 있으려니까 차츰 정상적인 판단을 잃어 가게 되더군요. 결국 상대가 너무 싱싱하고 예쁘니까, 거기에 압도돼 버린 거예요. 자신이 그 애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열악하고 못난 사람으로 느껴졌던 거지요. 게다가 그 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어쩌다 떠올랐다 해도,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비뚤어지고 못난 생각이라는 반성을 하게 만들더군요."
그녀는 몇 번인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만약 그 애만큼 예쁘고 머리가 좋았다면, 아마 좀더 성실한 인간이 되었을 거예요. 그렇게 머리가 좋고 예쁜데 뭘 더 바라겠어요? 그만큼 남들에게 소중한 대접을 받고 있는데, 왜 자기보다 못나고 약한 사람을 못 살게 굴고 짓밟아야 하지요? 그래야 할 아무런 까닭이 없는데......"
"무슨 지독한 일이라도 당했습니까?"
"순서에 따라 이야기하자면, 그 앤 병적인 거짓말쟁이였어요. 완전히 병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을 정도였죠. 닥치는 대로 이야기를 꾸며댔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자기 자신도 그걸 정말이라고 믿어 버렸죠. 그리곤 이야기의 앞뒤를 맞추기 위해 주변 상황을 거침없이 각색을 해버리는 거였어요. 보통 그 정도면 이거 이상하다, 우습다 하고 느껴질 텐데도, 워낙 그 애는 머리 회전이 빠르니까 남을 앞질러서 손을 썼어요. 그러니까 상대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거죠,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우선 그렇게 예쁜 아이가 아무 일도 아닌 것 갖고 거짓말을 한다곤 아무도 생각을 못한 거예요. 나도 그랬지요. 그 애가 꾸며대는 이야길 6개월 동안 엄청나게 많이 들으면서도 손톱만큼의 의심도 품지 않았으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거짓말이었는데도 말이죠. 바보 같았어요, 정말."
"어떤 거짓말을 했는데요?"
"온갖 거짓말이요"
라고 그녀는 비꼬임이 잔뜩 서린 어조로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방금 전에 말했잖아요? 사람은 뭐 한 가지를 거짓말하기 시작하면 거기에 맞춰서 한없이 거짓말을 더 하게 된다고. 그게 바로 허언증이죠. 하지만 허언증을 앓는 사람의 거짓말이란 대체적으로 순진한 것이고, 주변 사람도 대략 눈치채게 마련이거든요. 그렇지만 그 애의 경우는 달랐어요. 그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선 아무 거리낌 없이 남을 해치는 거짓말도 했고, 이용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다 써먹으려고 했어요. 게다가 상대에 따라 거짓말하는 정도도 자유자재지 뭐예요. 엄마라든가 친한 친구처럼 거짓말하면 금방 탄로가 날 것 같은 상대에겐 그다지 거짓말을 안 했어요. 한다고 해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죠. 그리고 절대로 탄로 나지 않을 만한 거짓말만 했구요. 그러다가도 어쩌다 탄로가 나면, 그 예쁜 눈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변명을 하거나 사과를 하는 거예요, 애원하듯이. 그러면 누구도 그 이상 화를 내지 못했죠.
그 애가 왜 나를 택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그 애의 희생자로서 나를 선택했는지, 아니면 어떤 구원을 얻으려고 나를 선택했는지, 그건 지금도 모르겠어요, 전연. 하긴 지금 와선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요. 이젠 모든 것이 끝장나 버렸고, 그리고 결국은 이런 몰골이 되어 버렸으니까."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애 어머니가 하던 말을 그 애도 다시 되풀이하더군요. 우리 집 앞을 지나다니면서 내 피아노 소릴 듣고 감동했다. 나를 밖에서 몇 번인가 볼 기회가 있었고, 동경해 왔다는 둥......'동경해왔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면서 얼굴이 빨개졌어요, 난. 인형같이 예쁜 아이한테 동경을 받는다는데 안 그랬겠어요. 하지만 그게 전적으로 다 거짓말은 아니지 않았을까 생각도 돼요. 나야 물론 서른을 넘어있었고, 그 애만큼 미인도 아니고, 머리도 좋지 않고, 눈에 띄게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머리도 좋지 않고, 눈에 띄게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애의 마음을 끄는 뭔가가 있었는지도 모르잖아요? 그 애에게 결핍되어있는 거라거나 뭐 그런 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애가 내게 흥미를 가진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래요. 그렇다고 지금 내 자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구요."
"압니다, 그 뜻은"
"그 애는 '악보를 가지고 온 게 있는데 쳐봐도 될까요' 하고 물었어요. '좋아, 쳐봐'하고 허락했지요. 그래서 그 애가 친 게 바흐의 <인벤션>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뭐랄까, 아주 흥미로운 연주였어요. 흥미롭다고는 했지만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하여간 보통과는 좀 달랐지요. 물론 그렇게 잘 치지는 못했어요. 전문적인 학교에서 배운 것도 아니고, 레슨도 다녔다 안 다녔다 자기 멋대로였으니까. 정확하게 훈련받은 소리는 못 되었어요. 만약 음악 학교 입시 실기에서 그런 연주를 했다간 단번에 낙제죠. 그런데도 그게 들을 만하더라구요. 말하자면 전체의 90퍼센트는 엉망이었는데, 나머지 10퍼센트인 요점을 제대로 해내는 거였어요. 그것도 바흐의 <인벤션>을 말이에요! 그래서 나는 그 애에게 흥미를 느꼈어요. 이 아이는 대체 어떤 애일까 하고.
물론 세상엔 더 멋지게 바흐의 곡을 치는 애들이 많아요. 그 애보다 몇십 배 더 잘 치는 애도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런 연주치고 속이 차 있는 경우는 드물죠. 텅 비어 있게 마련이에요. 그런데 그 애는 서툴지만 사람을, 적어도 나를 매료시키는 점을 조금은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생각했지요. 이 애 같으면 가르쳐 볼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하고. 물론 그때부터 다시 훈련을 시켜서 프롤 만든다는 건 무리였지만, 그래도 그 당시의 나처럼-지금도 그렇지만-즐기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행복한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렇지만 그게 다 헛된 꿈이 되고 말았어요. 그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은밀하게 뭘 한다든가 그런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그앤 남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써가며, 세밀한 계산을 하는 애였거든요. 그 앤 어떻게 하면 남들이 감탄하고 칭찬하는가를 빈틈없이 알고 있었어요. 어떤 식으로 연주를 하면 나를 이끌 수 있는가 하는 것까지도 포함해서 말이죠. 전부 정확하게 계산돼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 곡의 요점만을 열심히 연습했겠죠. 눈에 선해요.
하지만 그래도, 그런 것을 알게 된 지금도, 역시 그 연주는 멋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시 한 번 지금 그 연주를 듣게 된다 해도 역시 내 가슴은 두근거릴 것 같아요. 그 애의 교활함이나 거짓, 결점을 다 감안하더라도 말이에요. 세상엔 그런 일도 있어요."
그녀의 쉰 목소리로 기침을 하더니 이야기를 그치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그 여학생을 제자로 받아들였습니까?"
"그래요,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 오전에. 그 애가 다니는 학교는 토요일에 수업이 없었으니까. 거르는 일도 한 번 없었고, 지각도 하지 않는 아주 이상적인 제자였어요. 연습도 잘해 오고. 레슨이 끝나면 우린 케이크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녀는 언뜻 생각이 난 듯 손목시계를 보았다.
"슬슬 방을 돌아가 봐야 하지 않을까, 나오코가 좀 걱정스러워지는데. 학생도 설마 나오코를 잊어버린 건 아니겠죠?"
"잊어버리긴요"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야기에 빨려들었을 뿐입니다."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내일 해줄게요. 이야기가 기니까 한꺼번에는 다 못해요."
"마치 <셰에라자드(역주 :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음악> 같군요."
"음, 도쿄에 못 돌아가게 될 거예요."
하고 그녀도 웃었다.
우린 왔던 길을 되돌아서 잡목숲을 걸어나가 방으로 돌아왔다.
촛불은 꺼진 채였고, 거실의 불도 꺼져 있었다. 그저 침실 문이 열려 있어 그 사이로, 침대 옆 스탠드의 희미한 불빛이 거실까지 새어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 어슴푸레한 어둠에 싸인 소파에 나오코는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가운 같은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그 옷깃을 목 언저리까지 단단히 여민 채, 소파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레이코 여사가 나오코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제 괜찮니?"
"네, 괜찮아요. 미안해요."
하고 나오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를 보고는 부끄러운 듯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놀랐죠?"
"조금."
방긋이 웃으면서 내가 대답했다.
"이리로 와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내가 곁에 앉으니까 나오코는 귀엣말을 하듯이 내 귀 가까이 얼굴을 가져오더니, 귀 옆에 살며시 입술을 댔다.
"미안해요."
하고 나오코는 다시 한 번 내 귀에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는 몸을 떼었다.
"이따금 나 자신도 뭐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게 될 때가 있어요."
"그런 일이라면 나도 늘 그래."
나오코는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괜찮다면 나오코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고 말했다. 여기서의 생활 같은 것-매일 뭘 하고 지내고, 여긴 어떤 사람이 있다든지 하는 그런 것에 대해 듣고 싶다고 말했다.
나오코는 자신의 하루하루의 생활에 대해서 조심조심,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침 여섯 시에 기상, 식사를 하고 새집을 청소하고 나서 보통은 대부분 농장에서 일한다. 채소밭 손질 같은 것. 점심 전 아니면 그 후에 한 시간 정도는 담당 의사와 개별 면담, 아니면 그룹 토론이 있다. 오후에는 자기가 선택한 스케줄에 따라 마음에 드는 강의를 듣거나 야외 작업에 나가거나 운동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오코는 프랑스 어, 뜨개질, 피아노, 고대사 등 몇 가지 강좌에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피아노는 레이코 언니한테 배워요."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레이코 언니는 그 밖에도 기타를 가르치지요. 우린 모두 선생이 됐다 학생이 됐다 그래요. 프랑스어를 잘하는 사람은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사회 과목 선생을 하던 사람은 역사를, 뜨개질에 능한 사람은 뜨개질을 가르쳐요. 그만한 것만 가지고도 웬만한 학교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유감스럽게도 난 남을 가르칠 만한 아무런 소질도 없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무튼 난 대학에 다닐 때보다 몇 배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여기선. 공부하는 게 아주 즐거워요."
"저녁 식사 후엔 늘 뭘 하고 지내지?"
"레이코 언니와 이야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음악도 듣고, 다른 방에 가서 게임도 하고.......그러죠."
"난 기타 연습을 하거나, 자서전을 쓰기도 하지"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자서전?"
"그건 농담!"
하고 레이코 여사는 웃었다.
"그리고 우린 열 시쯤이면 자요. 어때요. 건전한 생활이죠? 잠을 푹 잘 수 있다구요."
나는 시계를 보았다. 아홉 시 조금 전이었다.
"그럼 슬슬 잠을 잘 시간이잖아?"
"하지만 오늘은 괜찮아요, 좀 늦어도"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오랜만이니까 좀 더 이야기하고 싶어요. 무슨 이야기든 해줘요."
"아까 나 혼자 여기 있을 때 갑자기 옛날 일이 떠올랐어."
하고 내가 말했다.
"옛날 기즈키와 둘이서 너에게 문병 갔을 때 생각나니? 바닷가에 있던 병원에 말이야. 고등학교 2학년 때 여름이었지. 아마."
"가슴 수술을 했을 때 말이군요."
하며 나오코는 방긋이 웃었다.
"그래, 생각나요. 당신과 기즈키가 오토바이를 타고 왔었지요. 녹아서 짓이겨진 초콜릿을 가지고. 그거 먹느라고 혼났어요. 그런데 어쩐지 그게 굉장히 옛날일 같군요."
"그래. 그때 나오코는 긴 시를 쓰고 있었지, 아마."
"그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란 모두 시를 쓰는 거예요."
하며 나오코는 깔깔 웃었다.
"왜 그 일을 갑자기 생각해 냈지요?"
"모르겠어, 그저 생각이 났어. 바닷바람 냄새라든가, 협죽도라든가, 그런 것들이 문득 떠오른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그때 기즈키는 병문안을 자주 왔었어?"
"병문안이라니, 거의 오지 않았어요. 그걸 가지고 우린 다투었으니까. 물론 나중의 일이지만. 처음에 한 번 혼자 오고, 그리고 당신과 온 것뿐이었어요. 너무했지요? 처음 왔을 때도 안절부절못하더니 10분 정도 있다가 그냥 가버렸어요. 오렌지를 들고 왔지요. 뭔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중얼중얼거리더니 굳이 오렌지 껍질을 벗겨 먹여 주고, 또 중얼중얼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다 휑하니 돌아가 버렸어요. 난 정말 병원은 질색이라든가 하는 말을 하고."
그렇게 말하면서 나오코는 웃었다.
"그런 면에서 그 사람은 어린 티를 못 벗어나고 있었어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병원이 좋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환자를 위로하기 위해 병문안을 가는 거 아녜요. 기운을 내라고 말이에요. 그런 거 그 사람은 잘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나와 둘이서 병원에 갔을 적엔 그렇게 심하게 굴진 않았는데......지극히 보통이었잖아?"
"그건, 당신 앞이었기 때문이에요"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그 사람 당신과 있을 땐 언제나 그랬어요. 자기의 약한 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요. 당신을 퍽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 사람. 그래서 자신의 좋은 면만을 보이려고 노력했죠. 하지만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좀 어깨의 힘을 빼는 거예요. 사실은 성격이 변덕스러운 편이었죠. 가령 혼자서 한참을 주절거린다 싶은데 다음 순간엔 울적해하고, 그런 일이 자주 있었어요. 어릴 적부터 그랬는걸요. 하지만 늘상 자신이 달라지도록, 향상이 되도록 노력했어요."
나오코는 소파 위에서 꼬았던 다리를 바꿔 꼬았다.
"늘 자신이 달라지도록, 향상이 되도록 노력했는데, 그게 잘 안 되면 짜증을 내거나 슬퍼했어요. 자기도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을 지니고 있었는데, 결국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지 못해서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바꿔 봐야지 하는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생각해 보면 불쌍해요, 그 사람."
"하지만 그 친구가 내게 좋은 면만 보이려고 애를 썼다면, 그 노력은 성공한 것 같은데. 내겐 그 친구의 좋은 면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나오코는 내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을 들으면 그 사람도 좋아할 거예요. 당신은 그 사람의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기즈키 또한 내게 유일한 친구였어.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내겐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난 당신과 기즈키 셋이서 함께 있는 것이 좋았던 거예요. 그러면 나도 기즈키의 좋은 면만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럴 때면 꽤 즐거웠어요. 마음이 편안했지요. 그래서 셋이 있는 게 좋았어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나오코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거기에만 마음이 쓰였던 것 같애"
라고 말하면서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일이 언제까지고 지속될 리가 없다는 데 있었어요. 그런 작은 고리 같은 것이 영원히 유지될 까닭이 없지요. 그건 기즈키도 알고 있었고, 나도 알고 있었고, 당신도 알고 있었어요, 안 그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난 그 사람의 약한 면도 무척 좋아했어요. 좋은 면 못지않게 좋아했으니까요. 그에겐 교활하거나 심술궂은 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저 약했을 뿐이죠. 그런데도 내가 그런 말을 하면 그 사람은 전혀 믿어 주질 않았어요. 한결같은 대꾸가 이랬어요. '나오코, 그건 너와 내가 세 살 적부터 늘 함께 있었으니까 나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뭐가 결점이고 뭐가 장점인지 구별이 안 될 만큼 온갖 것을 범벅으로 만들고 있어, 넌' 그는 항상 그랬어요. 그렇지만 그가 뭐라고 하든 난 그 사람이 좋았고, 그 이외의 사람에겐 거의 관심조차 가질 수가 없었지요."
나오코는 나를 보며 슬픈 듯이 미소 지었다.
"우리 사인 보통의 남녀 관계하곤 상당한 거리가 있었어요. 뭔가 어느 부분에선가 육체가 밀착되어있는 것 같은 그러한 관계였어요. 어쩌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특수한 인력에 의해 되돌아와, 또 이전처럼 밀착되고 마는 것 같은. 그러나 나와 기즈키가 연인 같은 관계로 발전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고려해 본다거나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일이었지요. 우린 열두 살 때 키스를 하고 열세 살 때 벌써 페팅을 했어요. 내가 그 사람 방에 가거나 그 사람이 내 방으로 놀러 와서 그의 것을 손으로 처리해 주고......그래도 우린 우리가 조숙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건 당연하다는 생각 있으니까요. 그 사람이 내 가슴이나 성기를 만지고 싶어 하면 전혀 개의치 않았고, 그 사람이 정액을 쏟고 싶다면 그걸 거들어 주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그러니까 누가 그 일로 우릴 비난했다면 난 놀라거나 화를 내거나 그랬을 거예요. 왜냐하면 우린 잘못된 일을 한 게 아니었거든요. 당연히 하게 될 일을 한 데 지나지 않았던 거예요. 우린 서로의 몸을 구석구석까지 보여 줬고, 마치 상대의 몸을 공유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린 당분간은 그 이상은 가지 않기로 했지요. 임신이 될까 봐 겁이 났고, 그땐 피임 방법 같은 것도 잘 몰랐으니까......어떻든 우린 그런 식으로 자랐어요. 둘이 손을 붙잡고 한 짝이 되어서 말이에요. 다른 성장기의 어린이들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성의 중압감이라든가 에고의 팽창 같은 고통은 거의 모르고 지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우린 성에 관해서 일관성 있게 열려 있었고, 자아라는 것도 서로가 흡수하거나 나누어 가지는 게 가능했기 때문에, 그것만이 특별히 강하게 의식되는 일도 없었지요. 내 말 알아듣겠어요?"
"알 것 같애"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 둘은 헤어질 수가 없는 관계였어요. 그러니까 만일 기즈키가 살아 있다면, 아마 우린 함께 있으면서 사랑을 나누다가, 그리고 조금씩 불행해져 갔을 거라고 생각돼요."
"어째서?"
나오코는 손가락으로 몇 차례 머리를 빗었다. 이제는 핀을 풀어놓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를 숙이면 머리가 내려와서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아마 우린, 세상에 진 빚을 갚지 않으면 안 되었을 테니까."
나오코는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성장의 고통 같은 것을 치러야 할 때에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바람에 그 고지서가 이제야 돌아온 거예요. 그래서 기즈키는 그렇게 되었고, 나는 이렇게 여기 있는 거고. 우린 무인도에서 자란 헐벗을 아이 같은 존재였어요. 배가 고프면 바나나를 따 먹고, 외로워지면 서로 품에 안고 잠든 거지요. 하지만 그런 게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겠어요? 우린 자꾸만 자라고, 사회로 진출도 해야 하고.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에게 중요한 존재였어요. 당신은 우리 둘을 바깥 세상과 이어 주는 고리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어요. 결국엔 잘 안 되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우리가 당신을 이용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 줘요. 기즈키는 정말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고, 공교롭게도 당신은 우리에게 있어 최초의 타인과의 접촉이었던 거죠. 그리고 그것은 지금껏 지속되고 있어요. 물론 기즈키는 죽고 이 세상에 없지만, 당신은 나와 밖의 세상을 이어 주는 유일한 고리예요, 지금도. 그리고 기즈키가 당신을 좋아했던 것처럼 나도 당신이 좋아요. 그리고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도, 결과적으로 우린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어요."
나오코는 또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어때, 코코아라도 마시지 않을래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입을 열었다.
"네, 그래요. 마시고 싶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전 가지고 온 브랜디를 마시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그래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그럼 나도 한잔 줄래요?"
"물론 좋습니다."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레이코 여사가 잔을 두 개 들고 왔고, 나와 그녀는 그걸로 건배를 했다. 그리고 레이코 여사는 부엌으로 나가 코코아를 탔다.
"좀 더 밝은 이야기 안 할래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그러나 나에겐 밝은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돌격대'가 계속 함께 있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만 있으면 연달아 에피소드가 생기고, 다 함께 그 얘기를 하고 있으면 누구나가 기분이 즐거워지는데, 하고. 하는 수 없이 나는 기숙사에서 다들 얼마나 불결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를 했다. 너무 불결해서 이야기만으로도 나는 짜증스러웠지만, 둘은 그런 이야기가 신기한 듯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그다음은 레이코 여사가 여러 정신병 환자의 제스처를 흉내 내 보였다. 그것도 상당히 재미있었다.
열한 시가 되어 나오코가 졸리는 눈을 하자, 레이코 여사는 소파의 등받이를 눕혀 침대로 만들고, 내가 쓸 시트와 담요, 베개를 갖추어 주었다.
"한밤중에 강간하러 오는 건 좋지만 상대를 바꿔치진 말아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왼쪽 침대에 자고있는, 주름살 없는 몸이 나오코니까."
"거짓말이에요, 난 오른쪽이에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내일은 말이야, 오후의 스케줄을 몇 시간 안 나가도 되게 해놓았으니까, 우리 함께 피크닉 가요. 가까이에 아주 좋은 데가 있어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녀들이 번갈아 세면대에서 이를 닦고 침실로 들어가 버리자, 나는 브랜디를 조금 마신 후, 소파 침대에 누워 오늘 일어난 일을 아침부터 차례로 더듬어 갔다.
어쩐지 굉장히 길었던 하루처럼 느껴졌다. 방안엔 여전히 달빛이 희뿌옇게 비치고 있었다. 나오코와 레이코 여사가 자고 있는 침실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고,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가끔 침대가 삐걱거리는 작은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눈을 감자 어둠 속에서 희끗희끗 미세한 도형이 춤을 추었고, 귓가에도 레이코 여사가 치던 기타의 잔향이 느껴졌지만, 그것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잠이 밀려와 따뜻한 진흙 속으로 나를 실어 갔다. 그리고 나는 버드나무 꿈을 꾸었다.
산길 양옆으로 버드나무가 줄줄이 서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버드나무들이었다. 제법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는데도 버들가지들은 꼼짝도 하지 앓았다. 왜 그럴까 하고 자세히 보니까 버들가지 하나하나마다 작은 새가 앉아 있었다. 그 무게로 버들가지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막대기를 들고 가까이에 있는 가지를 두들겨 보았다. 새를 쫓아 버들가지가 흔들리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새들은 날아가지 않았다. 날아가는 대신에 새들은 새 모양을 한 금속이 되어, 텅텅 소리를 내면서 땅 위로 떨어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마치 그 꿈의 계속되는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방안은 달빛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며 새 모양의 금속을 찾았지만, 물론 그러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오코가 내 침대 발치에 호젓이 앉아 창밖을 골똘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무릎을 세우고, 굶주린 고아처럼 그 위에 턱을 받치고 있었다. 나는 시계를 보려고 머리맡에 둔 손목시계를 찾았지만 그것은 그 자리에 없었다. 달빛으로 보아 아마도 두 시나 세 시쯤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심한 갈증을 느꼈지만, 나는 그대로 가만히 그녀의 동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녀는 아까와 같은 하늘색 가운 비슷한 것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예의 그 나비 모양 핀을 꽂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그녀의 아름다운 이마가 선명하게 달빛을 받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아까 자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머리핀을 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같은 자세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러고 있었다. 마치 달빛에 이끌린 밤의 작은 동물처럼 보였다. 달빛의 각도 탓으로 입술의 그림자가 과장되어 있었다. 그 상처 입기 쉬울 것 같은 그림자가, 그녀의 심장 고동이나 아니면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가늘게 실룩실룩 떨리고 있었다. 마치 밤의 어둠을 향해 소리 없이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나는 갈증을 달래기 위해 침을 삼켰다. 그 꿀꺽하는 소리가, 밤의 적막 속에서 엄청나게 크게 울렸다. 그 소리가 무슨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는 훌쩍 일어서더니, 조용히 옷 스치는 소리를 내며 내 머리맡에 와서 무릎을 꿇고,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도 그녀의 눈을 보았지만, 그녀의 눈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눈동자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맑아 저쪽 사계가 비쳐 보일 정도였지만,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속에서 뭘 찾아낼 수는 없었다. 우리의 얼굴은 서로 30센티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몇 광년이나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녀 쪽으로 손을 뻗자 그녀는 흠칫 몸을 뺐다. 입술이 조금 떨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두 손을 올려 천천히 가운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단추는 모두 일곱 개였다.
나는 그녀의 가늘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그것을 순서대로 끄르는 것을, 마치 꿈의 연속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일곱 개의 흰 단추가 전부 끌러지자, 그녀는 벌레가 허물을 벗듯 가운을 허리 쪽으로 스르르 미끄러뜨려 벗어 던지고, 알몸이 되었다.
그녀는 가운 속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 붙어 있는 것은 나비 모양의 머리핀뿐이었다. 가운을 벗어 던진 그녀는 마루에 무릎을 댄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달빛에 비친 그녀의 알몸은, 갓 태어난 아기의 새로운 육체처럼 윤기 있고 애처로웠다.
그녀가 몸을 조금 움직이며-그것은 지극히 작은 움직임이었는데도-달빛을 받은 부분이 미묘하게 이동하여, 몸을 물들이는 그늘의 모양이 달라졌다. 둥글게 솟은 젖가슴과 작은 젖꼭지, 움푹한 배꼽과 허리선, 그리고 음모가 빚어내는 거친 입자의 그늘이, 마치 조용한 호수의 수면을 움직이는 파문처럼 그 모양을 바꿔 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완전한 육체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오코가 어느 사이에 이처럼 완전한 육체를 갖게 된 것일까? 그 봄날 밤에 내가 품었던 그녀의 육체는 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날 밤 울고만 있는 나오코의 옷을 천천히 부드럽게 벗겨 갔을 때, 나는 그녀의 몸이 어딘지 모르게 불완전한 것만 같은 인상을 받았었다. 젖가슴도 딱딱하고, 젖꼭지는 엉뚱한 곳에 솟은 돌기처럼 느껴졌고, 허리는 이상하게 굳어 있었다.
물론 그녀는 아름다운 처녀였고, 그 육체는 매력적이었다. 그것이 나를 성적으로 흥분시켰고, 거대한 힘으로 나를 휩쓸어 가긴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알몸을 안아, 애무하고, 거기에 입술을 대면서도, 육체의 불완전함에 대해, 아직 미숙함에 대해 언뜻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나는 나오코를 안으면서 그녀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나는 지금 너와 성교하고 있다. 나는 네 몸 속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이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아무런 문제도 아니다. 다만 이건 육체의 뒤섞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린 서로의 불완전한 육체를 맞댐으로써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우린 다만 서로의 불완전함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지만 물론 그런 것들은 말로써 잘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세차게 그녀를 끌어안고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 나는 그 속에 뭔지 잘 어울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이물과도 같은 거칠거칠한 감촉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감촉은 나를 사랑하는 기분에 빠지도록 만들었고, 무서울 정도로 단단하게 발기시켰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녀의 육체는 그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몇 번의 변천을 겪은 끝에, 지금 이렇게 완전한 육체가 되어 달빛 속에 태어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먼저 말랑말랑하게 부풀었던 소녀의 육체는 기즈키의 죽음을 전후해서 사라지고, 그로부터 성숙이라는 육체를 갖게 된 것이다. 나오코의 육체는 너무나도 아름답게 완성되어 있어서 나는 성적인 흥분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망연히 그 아름다운 허리의 선과 둥글게 윤이 나는 젖가슴, 숨 쉴 때마다 조용히 오르내리는 유연한 배와 그 밑의 부드럽고 까만 음모의 그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자기 알몸을 내 눈앞에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아마 5분이나 6분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얼마 후 그녀는 다시 가운을 입고, 위에서부터 차례로 단추를 채워 갔다. 단추를 다 채우자 그녀는 훌쩍 일어서서 조용히 침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상당히 오랜 시간 침대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생각을 바꿔 침대에서 나와, 마루에 떨어져 있던 시계를 주워 달빛 쪽으로 비춰 보았다. 세 시 삼십 분이었다.
나는 주방으로 나가 몇 컵인가 물을 마시고 다시 침대로 들어가 누웠지만, 결국 날이 밝아 햇살이 방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었던 창백한 달빛의 얼룩을 완전히 지워 버릴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내가 겨우 잠이 들락말락할 참에 레이코 여사가 다가와서는 내 뺨을 살살 때리면서
"아침이에요, 아침"
하고 소리쳤다.
레이코 여사가 내 침대를 치우는 동안 나오코는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했다.
나오코가 나를 보고 방긋이 웃으면서
"굿모닝"
하고 인사했다. 나도 같이
"굿모닝"
이라고 했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물을 끓이고 빵을 썰고 있는 나오코의 모습을 곁에 서서 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젯밤 내 앞에서 알몸이 되었었다는 기색은 전혀 엿볼 수가 없었다.
"어머, 눈에 핏발이 섰어요. 왜 그래요?"
하고 나오코가 커피를 따르면서 나에게 물었다.
"밤중에 깨어서......그리곤 자지 못했어."
"우리, 코를 골지 않던가요?"
하고 레이코가 물었다.
"전혀요"
하고 내가 대답했다.
"다행이야"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그건 인사치레야"
하고 레이코 여사가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나는 처음엔 나오코가 레이코 여사 앞이라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꾸미고 있거나,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코 여사가 잠시 방을 비운 뒤에도 그녀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그 눈은 언제나처럼 맑았다.
"잘 잤어?"
하고 나는 나오코에게 물었다.
"응, 푹 잤어요"
하고 나오코는 태연스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답했다. 그녀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심플한 머리핀을 한쪽에 꽂고 있었다.
나의 그 개운치 않은 기분은 아침을 먹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빵에 버터를 바르거나, 삶은 계란의 껍질을 벗기는 동안에도, 나는 무슨 표시 같은 것을 찾아 맞은편에 앉은 나오코의 얼굴을 이따금 흘끔거렸다.
"그런데 와타나베, 왜 오늘 아침엔 내 얼굴만 보고 있지요?"
하고 나오코가 우습다는 듯이 물었다.
"그는 누굴 사랑하고 있는 거야"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와타나베 누굴 사랑하고 있어요?"
하고 나오코가 나에게 물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나도 웃었다. 그리고 두 여자가 그 이야길 두고 나를 미끼 삼아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보면서, 더 이상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한 채 빵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 두 사람은 지금부터 새장에 가서 모이를 줘야 한다고 하기에 나도 따라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작업용 청바지와 셔츠로 갈아입고, 흰 장화를 신었다. 새집은 테니스 코트 뒤쪽 조그만 공원 같은 곳에 있었는데, 닭이랑 비둘기에서부터 공작새, 앵무새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새가 살고 있었다.
둘레의 화단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벤치가 있었다. 그리고 환자같이 보이는 남자 둘이서 통로에 흩어진 낙엽을 쓸어모으고 있었다. 양쪽 모두 마흔에서 쉰 살 사이의 나이로 보였다.
레이코 여사와 나오코는 그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아침 인사를 했다. 레이코 여사가 또 무슨 우스갯소리를 하는지 두 남자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화단에는 코스모스가 한창이었고, 나무들은 잘 정리되어 있었다. 레이코 여사의 모습을 보자 새들이 짹짹거리며 새장 안을 이리저리 날았다.
그녀들은 새장 옆에 있는 작은 창고로 들어가 먹이 자루와 고무호스를 들고 나왔다. 나오코가 호스를 수도꼭지에 연결하고 물은 튼 다음, 새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조심스레 새장 안으로 들어가서 오물을 씻어 내렸다. 그리고 레이코 여사는 큰 솔로 바닥을 북북 문질렀다.
물보라가 햇빛에 눈부시게 빛났고, 공작새들은 물 튀기는 것을 피해 새장 안을 파다닥파다닥 뛰며 도망쳤다. 칠면조는 심술궂은 노인 같은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고, 앵무새는 옆으로 고정된 가로대 위에서 불쾌한 듯 큰소리를 내며 날갯짓을 했다.
레이코 여사가 앵무새를 노려보며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니까, 앵무새는 구석에 박혀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가, 조금 후에
"고마워, 미친놈, 빌어먹고"
하고 외쳤다.
"누가 저런 걸 다 가르쳤지?"
하고 나오코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아니야. 난 그런 상스런 말 같은 건 가르치지 않는다구"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그리고 또 고양이 울음소리를 냈다. 앵무새는 이번엔 잠자코 있었다.
"이 앵무새, 고양이한테 한번 혼이 나더니 고양이를 무척 무서워해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청소를 마치자 두 사람은 청소 도구를 치우고 여러 개의 모이통에 모이만 넣었다. 칠면조는 바닥에 고인 물을 튀기면서 철벅철벅 달려와 모이통에 머리를 박고는, 나오코가 조용히 궁둥이를 두들겨도 정신없이 모이만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매일 아침 이 일을 하는 거야?"
하고 나는 나오코에게 물었다.
"그래요, 새로 들어온 여자는 대개 이 일을 해요. 간단하니까. 토끼 보고 싶어요?"
보고 싶다고 나는 대답했다.
토끼장은 새장 뒤쪽에 있었는데, 열 마리가량의 토끼가 볏짚 위에서 자고 있었다. 그녀는 빗자루로 토끼 똥을 쓸어 담고, 모이통에 모이를 넣고는 새끼를 품에 안고 불을 비벼댔다.
"예쁘지요?"
하고 나오코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토끼를 안겨 주었다. 그 따뜻하고 작은 덩어리가 내 품 안에서 몸을 움츠린 채 움칠움칠 귀를 떨고 있었다.
"괜찮아, 이 사람 무서운 사람 아니야."
하고 나오코는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토끼의 머리를 쓸어 주고, 내 얼굴을 보며 방긋이 웃었다. 구김살 없는 눈부신 웃음이었기 때문에 나도 그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젯밤의 나오코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틀림없는 진짜 나오코였다. 결코 꿈이 아니었다-그녀는 확실히 내 앞에 옷을 벗고 알몸이 되었다, 하는.
레이코 여사는 <프라우드 메리>를 휘파람으로 멋지게 불면서 쓰레기를 모아 비닐 주머니에 담고는 그 끝을 묶었다. 나도 청소 도구와 모이 자루를 창고에 챙기는 일을 거들었다.
"난 아침이 제일 좋아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새로 시작되는 것 같으니까요. 그래서 점심때가 되면 슬퍼져요. 저녁이 제일 싫구. 매일매일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당신들도 나처럼 나이를 먹는 거야. 아침이 되고 밤이 오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말이에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금방이라구, 그렇게 되는 건."
"하지만 레이코 언니는 즐기면서 나이를 먹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나이 드는 게 즐겁지는 않지만, 다시 한 번 젊어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하고 레이코 여사는 대답했다.
"왜 그렇습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귀찮으니까. 뻔하잖아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대답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프라우드 메리>를 휘파람으로 불며 빗자루를 창고 속에 던져 넣고 문을 닫았다.
방으로 들어오자 그녀들은 고무 장화를 벗고 일반 운동화로 갈아 신으면서, 지금부터 농장에 간다고 말했다. 구경해 봤자 재미있는 일은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 작업이니까, 나는 남아서 책이라도 보고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그리고 세면실에, 우리가 벗어 놓은 때 묻은 속옷들이 잔뜩 있으니까 좀 빨아 줄래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농담이지요?"
나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물론이지"
하고 레이코 여사는 웃었다.
"농담인 게 뻔하잖아요. 학생도 참 순진해. 그렇게 생각 안 해, 나오코?"
"그래요"
하고 나오코도 동의했다.
"독일어나 공부하고 있겠습니다."
하고 나는 휴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착한 학생이군요, 점심때가 되기 전에 돌아올 테니까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깔깔거리면서 방을 나갔다. 몇몇 사람들이 지나가는 발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세면실로 가서 세수를 다시 하고, 거기 있는 손톱깎이로 손톱을 깎았다. 두 여자가 살고 있는 것치고는 아주 간소한 세면실이었다. 영양 크림이라든가 립 크림, 햇볕에 타는 것을 막는 크림, 로숀 같은 것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을 뿐, 화장품다운 화장품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톱을 깎고 나서 나는 부엌에 들어가 커피를 타고, 테이블에 앉아 그걸 마시면서 독일어 교과서를 펼쳤다. 부엌의 양지바른 곳에서 티셔츠 바람으로 독일어 문법 표를 모조리 암기하고 있으려니 언뜻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독일어의 불규칙 동사와 이 부엌의 테이블하고는, 거의 상상도 못할 만큼의 먼 거리에 의해 격리되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열한 시 반에 농장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번갈아 샤워를 하고 산뜻한 옷으로 바꿔 입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셋은 식당으로 가 점심을 먹은 후에 정문까지 걸어나갔다. 이번엔 수위실의 수위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식당에서 날라다 주었는지 책상에 앉아 점심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우리가 다가가니까 그는 여어, 하고 손을 들어 인사했다. 우리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지금 셋이서 산책하러 간다, 세 시간 정도면 돌아올 거다, 라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아 그러세요, 다녀오세요. 날씨도 좋으니까. 계곡 길은 지난번 내린 비 때문에 무너져서 위험하지만, 거기만 아니면 괜찮아요, 문제없을 겁니다"
하고 수위가 말했다.
레이코 여사는 외출자 명단 용지에 나오코와 자기 이름, 그리고 외출 시간을 기입했다.
"살펴서 잘 다녀오세요."
하고 수위가 말했다.
"친절한 사람이군요."
하고 내가 말했다.
"저 사람 좀 여기가 이상해"
하고 레이코 여사는 손가락 끝으로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수위가 말한 대로 참 좋은 날씨였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르고, 여러 갈래로 빗어진 구름은 마치 시험 삼아 한 번 붓질을 해본 페인트칠처럼 하얗게 펼쳐져 있었다.
우린 잠시 '아미료'의 낮은 돌담을 끼고 걷다가, 돌담에서 벗어나 폭이 좁은 가파른 언덕길을 차례로 올라갔다. 선두가 레이코 여사, 중간이 나오코, 내가 맨 끈에서 따라갔다.
레이코 여사는 이 부근 산이라면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는 듯한 자신 있는 발걸음으로 그 좁은 산길을 올라갔다. 나는 거의 입을 다문 채 기를 쓰고 발걸음을 옮겼다. 나오코는 청바지에 흰 셔츠 바람이었으며, 윗도리는 벗어서 손에 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곧게 뻗은 머리카락이 어깨에서 좌우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걸었다. 나오코는 이따금 뒤를 돌아보고, 나와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었다.
언덕길은 아득하리만큼 길게 이어졌지만 레이코 여사의 발걸음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나오코도 가끔씩 땀을 닦으면서 쳐지지 않고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나는 등산 같은 것을 한동안 하지 않은 탓에 몹시 숨이 가빴다.
"언제나 이처럼 등산을 하나?"
하고 나오코에게 물었다.
"2주일에 한 번쯤 될까"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힘들지요, 제법?"
"응, 조금."
"3분의 2는 왔으니까, 이제 조금만 가면 돼요. 학생은 남자잖아. 기운을 내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운동 부족입니다."
"여자들과 놀기만 하니까 그래요"
하고 나오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라고 되받아 주려고 했지만 숨이 차올라서 말이 잘 나오지를 않았다.
가끔 머리에 붉은 깃털 같은 게 달린 새가 눈앞을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나는 그 새들의 모습은 너무도 선명했다. 주위의 초원에는 하얗고 노오란 꽃들이 무수히 피어있었고, 벌의 날갯짓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나는 주위의 그러한 풍경을 보면서 아무 생각도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떼어 갔다.
거기서 10분쯤 더 올라가니 비탈길이 끝나고, 고원과 같은 평탄한 곳이 나왔다. 우린 거기서 잠깐 쉬며 땀을 닦고 숨을 돌리면서, 물통의 물을 마셨다. 레이코 여사는 무슨 풀인지 풀잎을 찾아, 그것으로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길이 완전한 내리막길이 되면서 양쪽엔 갈대가 무성하게 돋아 있었다. 15분쯤 걸어 작은 마을을 지났지만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열 두세 채 되는 집은 모조리 폐허가 된 채였다.
집 주변에는 허리가지 오는 잡초가 무성했고, 벽에 뚫린 구멍에는 비둘기 똥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어떤 집은 기둥만 남고 무너져내려 있었지만, 그중에는 덧문만 열면 지금이라도 금방 사람이 들어 살 수 있을 것 같은 집도 있었다. 우리는 죽어 버린 무언의 집들 사이로 난 길을 벗어났다.
"불과 7,8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사람들이 몇 살고 있었어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가르쳐 주었다.
"주위는 다 밭이었고 말에요. 하지만 이젠 모두 떠나가 버렸어요. 생활하기에 너무 어렵거든요. 겨울엔 눈이 쌓여 꼼짝도 못하지, 그렇다고 땅이 비옥한 거도 아니구요. 도시에 나가서 일하는 편이 돈을 더 버니까요."
"아까운데요. 아직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집도 있는데"
하고 내가 말했다.
"한때 히피가 산 적도 있지만, 겨울이 되자 그들마저 손을 털고 떠나 버렸어요."
작은 마을을 빠져나가 조금 더 가니까 울타리에 둘러싸인 넓은 목장 같은 것이 나왔고, 멀리 몇 마리의 말이 풀을 뜯고 있는 게 보였다.
울타리를 따라 걸어가니 큰 개가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달려와, 레이코 여사를 밀어젖히다시피 하면서 얼굴의 냄새를 맡더니, 다음에는 나오코에게 달라붙어 아양을 떨었다. 내가 휘파람을 불자 이번엔 내게로 달려와, 긴 혓바닥으로 내 손을 날름날름 핥았다.
"목장의 개예요."
하고 나오코가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스무 살 정도는 된 게 아닐까? 이빨이 약해져서 딱딱한 음식은 거의 먹지를 못해요. 언제나 가게 앞에서 자고 있다가,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리면 뛰어와서 놀자고 그래요."
레이코 여사가 배낭에서 치즈 조작을 꺼내자, 개는 그 냄새를 맡고 그쪽으로 뛰어가 기쁜 듯이 치즈를 받아먹었다.
"이 개와 만날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개의 머리를 두들겨 주며 말했다.
"10월 중순이 넘으면 말과 소를 트럭에 싣고, 아래쪽의 축사로 데리고 가요. 여름 동안만 여기다 방목해서 풀을 뜯게 하고, 관광객 상대로 조그만 커피하우스 같은 걸 열고 있어요. 관광객이라 해봤자 택시 타고 하루에 20명 정도나 올까 말까 하지만. 학생, 뭐 마시지 않을래요?"
"좋습니다."
개가 앞장서서 우리를 그 커피하우스로 안내했다. 정면으로 베란다가 나 있는, 흰 페인트를 칠한 작은 건물이었는데 커피잔 모양의 낡은 간판이 처마에 매달려 있었다. 개가 먼저 베란다에 올라가 털썩 눕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가 베란다 테이블에 앉자, 안에서 트레이닝 셔츠와 흰색 진바지 차림에 말꼬리 모양의 머리를 한 아가씨가 나와서, 레이코 여사와 나오코에게 친숙하게 인사를 했다.
"이분은 나오코의 친구야"
하고 레이코 여사가 나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하고 그 아가씨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나도 인사를 건넸다.
세 여자가 얼마간 세상 이야기를 하고있는 동안, 나는 테이블 아래 엎드려 있는 개의 목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개의 목덜미는 확실히 늙어서 그런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 굳은 곳을 긁어 주자 개는 기분이 좋은 듯 눈을 스르르 감고 하아하아 숨을 내쉬었다.
"개 이름이 뭐지요?"
하고 나는 아가씨에게 물었다.
"페페"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페페"
하고 내가 불러 봤지만, 개는 꿈쩍도 않으면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귀가 멀어서, 더 큰 소리로 불러야지 잘 안 들려요."
하고 아가씨가 교토 사투리로 말했다.
"페펫!"
하고 내가 큰 소리로 부르니까, 그제서야 개가 눈을 뜨더니 발딱 일어서서 멍! 하고 짖었다.
"됐어, 됐어. 이젠 됐으니 푹 자고, 오래 살아라."
하고 아가시가 말하니까, 페페는 다시 내 발밑에 슬며시 누웠다.
나오코와 레이코 여사는 아이스 밀크를 주문했고 나는 맥주를 시켰다. 레이코 여사가 아가씨에게
"FM을 틀어 줘요"
하고 부탁하자, 아가씨는 앰프의 스위치를 눌러 FM 방송을 들었다. 블러드 스웨트 앤드 티어즈가 <스피닝 휠>을 노래하는 것이 들려 왔다.
"난 사실대로 말하면, FM을 들으러 여기 오는 거예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만족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사는 덴 라디오도 없으니까, 가끔 여기라도 와서 듣지 않으면 어떤 음악이 지금 세상에 나돌고 있는지 전혀 모르게 되거든."
"종일 여기서 지내나요?"
하고 나는 아가씨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하고 아가씨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밤에 이런 곳에 있다간 외로워서 죽고 말 거예요. 저녁이 되면 목장 사람에게 부탁해서 저걸 타고 시내로 가요. 그리고 다시 아침이면 이리로 출근하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사륜구동차를 가리켰다.
"이젠 손님도 뜸하지 않아?"
하고 레이코 여사가 물었다.
"그래요, 슬슬 끝나 가요"
하고 아가씨가 말했다.
레이코 여사가 담배를 권하고 그녀들은 둘이서 담배를 피웠다.
"아가씨가 떠나면 외로워지겠어."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내년 5월이면 다시 오는데요, 뭐"
하고 아가씨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크림의 <화이트 룸>이 흐르고, 광고가 있은 뒤 사이몬과 가펑클의 <스카브로 페어>나 흘러 나왔다. 노래가 끝나자 레이코 여사는 내게 그 노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 영화 봤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누가 나오죠?"
"더스틴 호프만."
"그 사람 모르는데"
하고 레이코 여사가 애처롭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세상이 막 변하는 거예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레이코 여사는 아가씨에게 기타를 빌려 달라고 했다. 아가씨는 라디오를 끄고, 집안에서 낡은 기타를 들고 나왔다. 개가 고개를 들더니 기타 냄새를 킁킁 맡았다.
"먹을 것이 아냐, 이건"
하고 레이코 여사는 개에게 가르치듯 말했다.
풀 내음이 실린 바람이 베란다를 스쳐 갔다. 산의 능선이 선명하게 우리들의 눈앞에 떠올라 있었다.
"꼭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 같습니다."
하고 나는 조율을 하고 있는 레이코 여사에게 말했다.
"놀리지 말아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스카브로 페어> 첫부분의 코드를 잡았다. 악보 없이는 처음인 것 같았다. 처음엔 정확한 코드를 찾느라 망설이고 있었지만 몇 번인가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동안에 그녀는 어떤 흐름 같은 것을 포착하여, 곡 전체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군데군데에 효과음까지 넣어 가며 거의 막힘 없이 쳤다.
"감각이 좋거든"
하고 레이코 여사는 내게 윙크를 하며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세 번만 들으면 악보 없이도 대개 무슨 곡이든 칠 수 있어요."
그녀는 멜로디를 작은 소리로 허밍하면서 <스카브로 페어>를 마지막까지 완전하게 연주해 보였다. 우리 셋은 박수를 보냈고, 레이코 여사는 얌전하게 답례를 했다.
"옛날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연주했을 땐 박수 소리가 더 컸는데"
하고 그녀는 말했다.
가게의 아가씨가 비틀즈의 <히어 컴즈 더 선>을 들려주면 아이스밀크 값을 안 받겠다고 말했다. 레이코 여사는 엄지를 치켜들고 OK 사인을 했다. 그리고 가사를 붙여 가며 <히어 컴즈 더 선>을 연주했다. 성량이 크지 못하고, 아마도 담배를 많이 피우는 탓에 목소리가 쉬어 있었지만 존재감이 있는 멋진 음성이었다.
맥주를 마시며 산을 바라보고, 그러면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려니가 정말로 거기에서 태양이 다시 얼굴을 내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참으로 따사롭고 부드러운 기분이었다.
<히어 컴즈 더 선>의 노래가 끝나자 레이코 여사는 기타를 아가씨에게 들려주고, 다시 FM을 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오코와 둘이서 한 시간쯤 부근을 산책하고 오라고 말했다.
"난 여기서 라디오를 들으며 이 아가씨와 이야기하고 있을 테니까, 세 시까지 여기로 돌아오면 돼요."
"그렇게 오래 우리 단둘이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사실은 안 되자만 뭐 괜찮아요. 나도 감시 할멈이 아니니까 혼자서 좀 편해 봐야겠어. 그리고 모처럼 먼 데서 왔는데 이야기할 것도 많지 않겠어?"
하고 레이코 여사가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럼 가요"
하고 나오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자리를 털고 뒤를 따라오다가 그만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우린 목장의 울타리를 끼고 나 있는 평탄한 길을 조용히 걸었다.
가끔 나오코는 내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했다.
"이렇게 걷고 있으니까 옛날로 돌아간 것 같지 않아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그게 뭐 옛날이야. 고작 올봄의 일인데"
하고 나도 웃으면서 말했다.
"올봄까지 이랬어. 그게 옛날이라면 10년 전은 고대사가 된다구."
"고대사나 다름없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하지만 어젠 참 미안했어요. 웬지 신경이 예민해지고 말았거든요. 모처럼 당신이 와 있었는데, 잘못했어요."
"괜찮아. 아마 여러 가지 감정들을 더 많이 밖으로 쏟아내는 게 좋을 것 같아, 나오코도 나도. 그러니까 만일 누구에겐가 감정을 퍼붓고 싶거든 내게 그 감정을 퍼부어. 그러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거야."
"나를 이해해서,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거죠?"
"나오코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군. 뭐가 어떻게 된다는 게 문제가 아니야, 이건. 세상엔 기차 시간표를 조사하는 게 좋아서 온종일 발착 시간표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냥개비를 이어서 길이 1미터나 되는 배 모형을 만들고 있는 사람도 있지. 그런 것처럼 세상에 나오코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하나쯤 있어도 이상할 게 없잖아?"
"취미 같은 거란 말인가요?"
하고 나오코가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취미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일반적으로 생각이 제대로 박힌 사람들은 그걸 애정이라든가 호의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나오코가 취미라고 부르고 싶으면 취미라고 해도 좋아."
"저 말이야, 와타나베"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당신은 기즈키도 좋아했지요?"
"물론"
하고 나는 대답했다.
"레이코 언니는 어때요?"
"그 사람도 매우 좋아해.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왜 당신은 그런 사람들만 좋아하는 거지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우리 모두 어딘가 휘어지고, 비뚤어지고, 헤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물속에 빠져 들어가기만 하는 인간들이에요. 나도 기즈키도 레이코 언니도, 모두 그래요. 어째서 좀 더 정상적인 사람을 좋아하지 못하는 거죠?"
"그건, 내겐 그렇게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야."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그렇게 대답했다.
"나오코나 기즈키, 레이코 여사가 어딘지 비뚤어져 있다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거든. 어딘가 비뚤어졌다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힘차게 바깥세상을 활보하고 있어."
"하지만 우린 비뚤어져 있어요. 난 알고 있다구."
우린 잠시 말없이 걸었다. 길은 목장 울타리에서 멀어져, 작은 호수처럼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인 원형 모양의 초원으로 접어들었다.
"가끔 밤중에 잠이 깨면, 견딜 수 없이 무서워질 때가 있어요."
나오코는 내 팔에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이렇게 비뚤어진 채로 두 번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이대로 여기서 늙어 죽어가는 게 아닌가 하고 말에요.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몸서리가 쳐져요. 고통스럽고 몸이 차가워지고."
나는 나오코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지긋이 힘을 주었다.
"꼭 기즈키가 어두운 곳에서 손을 뻗어 나를 찾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봐, 나오코, 우린 떨어질 수 없는 사이야, 하고. 그럴 때마다 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요."
"그럴 땐 어떻게 하지?"
"응, 와타나베, 이상하게 생각하진 말아요."
"이상하게 생각지 않아"
하고 나는 대답했다.
"레이코 언니에게 안아 달라고 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레이코 언니를 깨우고 그녀 침대로 기어들어가 안겨요. 그리고 우는 거예요. 언니가 내 몸을 어루만져 줘요. 얼었던 몸이 따뜻해질 때까지. 이런 거 좀 이상하죠?"
"이상하진 않아. 레이코 여사 대신 내가 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만."
"지금 안아 줘요, 여기서"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우린 초원의 마른 풀밭에 앉아 포옹했다. 앉으니까 풀들이 우리 키를 넘어, 하늘과 구름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오코의 몸을 서서히 풀 위에 넘어뜨리고 꼭 껴안았다. 나오코의 육체는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그 손은 내 몸을 원하고 있었다.
나오코와 나는 마음이 담긴 입맞춤을 했다.
"저 말이야, 와타나베"
하고 내 귓가에 대고 나오코가 말했다.
"응?"
"나와 자고 있어요?"
"물론"
하고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기다릴 수 있어요?"
"물론 기다리지."
"그러지 전에 나, 좀 더 나를 정리해 두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당신 취미에 어울리는 인간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때까지 기다려 줄래요?"
"물론 기다리지."
"지금 곳꼿해졌어요?"
"발바닥 말이야?"
"바보"
하고 나오코가 깔깔댔다.
"발개했느냐는 말이라면 돼 있지, 물론."
"음, 그 물론이란 말 좀 그만해 줄래요?"
"좋아, 안 할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거 고통스러워요?"
"뭐가?"
"그게 꼿꼿하게 서는 것."
"고통스러우냐고?"
하고 내가 되물었다.
"말하자면 저......괴로운가 그 말이에요"
"생각하기에 따라선."
"제가 잠재워 줄까요?"
"손으로?"
"그래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정직하게 말하면, 아까부터 그게 불쑥불쑥 내 몸에 닿아서 아팠다구요."
나는 몸을 뒤로 조금 움츠렸다.
"이러면 괜찮아?"
"됐어요."
"이봐, 나오코."
"네?"
"해줘."
"좋아요."
하고 나오코는 생긋 미소지었다.
그녀는 내 바지 지퍼를 내리고, 단단해진 페니스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나는 나오코가 손을 움직이려 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푼 다음 등으로 손을 돌려 브래지어의 고리를 풀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핑크색 젖가슴에 살며시 입술을 댔다.
나오코는 눈을 감고, 그리고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우 능숙하군."
하고 내가 말했다.
"착한 아이는 잠자코 있는 거예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사정이 끝나자 나는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또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브래지어와 블라우스의 매무새를 고치고 나는 바지의 지퍼를 올렸다.
"이제는 좀 편안하게 걸을 수 있을 것 같애요?"
하고 나오코가 나를 향해 물었다.
"덕분에"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럼 조금 더 걷지 않을래요?"
"좋아."
우리는 초원을 지나고, 잡목림을 지나고, 또 초원을 지나갔다. 그렇게 걷는 동안 나오코는 죽은 언니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긴 거의 아무한테도 한 적이 없지만, 당신에겐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하는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우린 터울이 여섯 살이나 되었고, 성격도 상당히 달랐지만, 그래도 퍽 사이가 좋았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다툰 일 한 번 없었어요, 정말. 하기야 싸움이 안 될 만큼 수준의 차이가 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언니는 뭘 해도 1등을 차지하는 그런 타입이었다고 나오코는 말했다. 공부도 1등, 운동도 1등, 인기가 있는가 하면 지도력도 있고, 친절한 데다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남학생들이 좋아했고,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으며, 표창장도 수없이 많이 받아 여자였다.
어떤 공립 학교에도 그런 여학생은 하나쯤 있다. 그렇지만, 자기 언니라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그런 걸로 성격이 못돼지거나 콧대가 높아지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뭘 해도 저절로 1등이 되는 것뿐이었다, 하고.
"그래서 나, 어릴 적부터 귀여운 애가 되자고 결심했지요."
나오코는 갈댓잎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언제나 주위의 사람들이 언니를 칭찬하고, 머리가 좋다, 운동을 잘한다, 인기가 있다는 등의 이야길 하는 것만 듣고 자랐거든요.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 해도 언니한텐 이기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얼굴만큼은 내가 좀 예쁜 편이었으니까 부모님도 나를 귀엽게 키우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그런 학교엘 보냈던 거예요. 벨벳 원피스라든가 프릴이 달린 블라우스라든가 에나멜 신발, 게다가 피아노다 발레다 하면서. 그래도 언닌 무척 나를 사랑해 줬어요. 귀여운 내 작은 동생이란 식으로.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사다가 선물로 주었고, 데리고 놀러 다니기도 하였고, 공부도 봐줬어요. 남자 친구하고 데이트할 적에 날 데리고 간 일도 있었고. 정말 멋진 언니였어. 그 언니가 왜 자살했는지 누구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지요. 기즈키의 경우와 마찬가지예요. 나이도 열일곱밖에 안 되었고, 그 직전까지도 자살할 것 같은 낌새도 전혀 없었고, 유서도 없었고......같지요?"
"그렇군."
"다들 그 애는 머리가 지나치게 좋았다느니 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었다느니 하고들 말했어요. 책은 사실 많이 읽고 있었던 것 같아요. 엄청나게 책이 많았어요. 나도 언니가 죽은 뒤 그중에서 꽤 많이 골라 읽었는데, 참 사람 슬프게 만들더군요. 메모 적어 놓은 것, 꽃을 눌러 놓은 것들이 나오니까......남자 친구의 편지가 끼워져 있기도 했어요. 그래서 나 정말 숱하게 울었어요."
나오코는 잠시 말없이 갈댓잎을 돌렸다.
"대개의 일은 자기 혼자서 처리해 버리는 사람이었어요. 누구에게 의논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따로 특별히 프라이드가 높아서가 아니에요. 그저 그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아마. 그리고 부모들도 거기에 익숙해져 있어서 이 애는 내버려둬도 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난 언니에게 자주 자주 상담했고, 언니는 언니대로 매우 친절하게 많은 걸 내게 가르쳐 주었지만 자기는 누구에게도 의논을 안 했어요. 혼자서 처리했죠. 화내는 일도 없고 기분 나빠하는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야, 이거 과장이 아니에요. 여자란, 가령 생리 같은 걸 할 땐, 공연히 짜증스럽고 심술을 부리기도 하잖아요? 조금씩 말이에요. 그러는 일은 없었어요. 언니의 경우엔 짜증을 내는 대신에 혼자 틀어박혀 버리곤 했지요. 두세 달에 한 번씩 그럴 때가 오면 이틀 정도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잠을 잤어요. 학교도 쉬고,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방을 캄캄하게 해놓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있었지요. 하지만 기분이 상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에 불러다 곁에 앉히고는, 그날 있었던 일을 듣는 거예요.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고 그저 친구와 뭘하고 놀았다든가,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든가, 시험 결과가 어땠다든가 그런 것이었지요. 그런 이야기인데도 열심히 듣고, 감상을 말해 주거나 충고를 해줬어요. 하지만 내가 집을 비우면-가령 친구네 놀러 갔다든가 발레 연습을 갔다든가 하면-또 혼자서 멍해 있는 거예요. 그러다 이틀 정도 지나면 그게 확 자연스럽게 풀고, 다시 쾌활하게 학교엘 다녔어요. 그런 상태가 그렇지, 한 4년쯤 계속되었던 것 같아요. 처음엔 부모님도 걱정하고 병원 의사에게 의논도 했던 것 같은데, 이틀 후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멀쩡하니까, 내버려둬도 그럭저럭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머리가 좋고 똑똑한 애니까 말이에요. 그런데 언니가 죽은 뒤에 작은아버지 이야기였죠. 작은아버지도 머리가 상당히 좋았던가 봐요. 그런데 열일곱에서 스물한 살 때까지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더니 결국 어느 날 갑자기 가출을 하고, 전철에 투신자살했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아무래도 내 쪽의 내력인 것 같아'하고 말했어요."
나오코는 이야길 하면서 무의식중에 갈댓잎을 하나하나 손으로 뜯어서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다 뜯어내자 이번엔 끈처럼 그 줄기를 손가락에 칭칭 감았다.
"언니가 죽어 있는 걸 발견한 건 나였어요."
하고 나오코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가을이었어요. 11월이었죠. 비가 오고, 음산한 하루였어요. 그때 언니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내가 피아노 레슨을 받고 집에 오니까 여섯 시 반, 어머니가 저녁 준비를 하면서 식사를 할 테니까 언니를 불러오라고 하는 거예요. 2층에 올라가서 언니 방을 노크하곤 밥 먹어, 하고 큰 소리로 불렀죠. 그런데 대답은 없고 조용하기만 하잖아요. 어쩐지 이상한 것 같아서 또 한 번 노크를 하고, 살며시 문을 열고 들여다봤어요. 잠이 들었는가 해서 말이에요. 그런데 언니는 자고 있지 않았어요. 창가에 서서, 목을 이렇게 옆으로 수그리고는 밖을 골똘히 내다보고 있었어요. 무슨 생각엔가 잠겨 있는 것 같았어요. 방은 어두운데 불도 켜있지 않아서 모든 게 어슴푸레하고 잘 보이질 않았어요. 난 '뭘하고 있어, 언니? 밥 먹으래' 하고 말을 걸었어요. 그러면서 보니까 언니가 여느 때보다 키가 커 있지 뭐예요. 왜 이러지? 하이힐을 신고 있나, 아니면 어디에 올라서 있는 건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며 가까이 다가가 말을 하려는 순간, 난 그걸 봤어요. 목에 줄이 매달려 있는 거예요. 천장에서 줄이 일직선으로 내려와 있었어요. -그게 글쎄 놀라울 만큼 곧은 거예요. 꼭 자를 대고 허공에다 일직선을 그어 놓은 것 같았어요. 언니는 흰 블라우스에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이런 심플한 거였어요- 회색 스커트를 입었고, 발끝을 마치 발레를 하고있는 것처럼 쭉 뻗고 있었어요. 그래서, 마루와 발가락 끝 사이에 20센티미터 정도 빈 공간이 나 있었지요. 그런 세밀한 것까지 나 다 봤어요. 얼굴도 봐 버렸어요. 안 볼 수가 없었어요. 빨리 아래로 내려가서 어머니한테 알려야지, 고함을 질러야지, 하면서도 몸이 말을 안 들었어요. 내 의식과는 별도로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어요. 내 의식은 빨리 어머니한테 가야 하는데, 몸은 어느새 언니를 끈에서 풀어 주려고 허둥거리고 있었던 거예요. 물론 내 힘으로 그게 될 리가 없었고, 5, 6분 동안 나는 거기서 멍하니 있었나 봐요. 방심 상태로. 뭐가 뭔지 갈피가 안 잡히고, 내 몸속의 뭔가가 죽어 있는 것 같았어요. 어머니가 '뭘 하고 있니?' 하면서 올라올 때까지 난 줄곧 거기에 있었어요. 언니와 함께 그 어둡고 차가운 곳에......"
나오코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난 말을 못했어요. 죽은 것처럼 침대에서 눈만 뜨고 꼼짝을 못했어요. 뭐가 뭔지 정신이 들지 않았어요."
나오코는 내 팔에 몸을 기댔다.
"편지에도 내가 그랬지요? 난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내 병은 더 무겁고, 그 뿌리도 깊어요. 그러니 당신이 앞서서 갈 수 있다면 당신 혼자서 앞서가 주길 바라요. 날 기다리지 말고. 다른 여자와 자고 싶으면 자고. 나를 생각해서 주춤거리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당당히 해나가요.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에 당신이 말려들지도 모르겠고......하지만 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는 만들고 싶지 않아요. 결코 당신의 인생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다구요. 좀 전에도 말했지만 가끔은 나를 만나러 와주고, 그리고 언제까지나 나를 기억해 주는 것.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 아니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나와 관계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당신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거예요."
"난 아무것도 낭비하고 있지 않아"
"하지만 나는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날 기다리겠어요? 10년이고 20년이고 날 기다릴 수 있어요?"
"나오코는 너무 겁을 먹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어둠이라든가, 고통스러운 꿈이라든가, 죽은 사람의 힘 같은 것에 말이야. 나오코가 해야 할 일은 그걸 잊는 일이야. 그걸 잊게 되면 나오코는 거뜬히 회복될 수 있어."
"잊을 수만 있다면야"
하고 나오코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길 나가게 되면 함께 살지 않을래?"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면 나오코를 어둠과 악몽에서 지켜 줄 수가 있고, 레이코 여사가 없이도 고통스러워지면 내가 나오코를 안아 줄 테니까."
나오코는 내 팔에 찰싹 몸을 붙여 왔다.
"그렇게 되면 정말 멋질 거예요."
우리가 커피하우스로 돌아온 것은 세 시 조금 전이었다. 레이코 여사는 책을 읽으면서 FM방송으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고 있었다. 어딜 보나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초원의 한끝에서 FM 방송의 브람스 곡이 들려온다는 것은 참으로 근사한 일이었다. 3악장의 첫 첼로 부분의 곡을 그녀는 휘파람으로 흥얼거리고 있었다.
"박하우스와 뵘이야"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옛날엔 레코드판이 닳도록 이 곡을 들었지. 정말 닳아 버렸댔어. 구석에서 구석까지 들었어요. 핥아 버리듯이 말에요."
나오코와 나는 뜨거운 커피를 시켰다.
"이야기가 잘 됐어?"
하고 레이코 여사가 나오코에게 물었다.
"네, 아주 많이."
나오코가 대답했다.
"나중에 다 이야기해 줘. 그의 것이 어떠했는지."
"그런 거 아무것도 안했어요"
하고 나오코가 얼굴이 빨개지면서 대답했다.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하고 레이고 여사가 내게 물었다.
"안 했습니다."
"시시하군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시들하게 말했다.
"그러나 말에요"
하고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대답했다.
저녁 식사 모습은 어제와 다름이 없었다. 분위기도, 이야기 소리도, 사람들의 표정도 어제 그대로였고, 단지 메뉴만 달라져 있을 뿐이었다.
어제, 무중력 상태에서의 위액의 분비에 대해 이야기하던 하얀 옷을 입은 그 남자가 이번엔 우리 세 사람이 앉은 테이블로 와서는, 뇌의 크기와 그 능력의 상관관계에 대해 줄곧 이야기해댔다.
우리들은 대두콩 햄버그스테이크라는 걸 먹으면서, 비스마르크며 나폴레옹의 뇌 용량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는 접시를 밀어내고, 메모 용지에 볼펜으로 뇌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아, 이게 아니지, 좀 틀렸군, 이거"
하고는 고쳐 그리곤 했다.
그리고 그림을 다 그리고 나자 소중스레 메모 용지를 하얀 옷의 주머니에 넣고는 볼펜을 앞주머니에 꽂았다. 앞주머니에는 볼펜 세 자루와 연필, 그리고 삼각자가 들어있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그는,
"이곳 겨울은 참 좋습니다. 다음엔 꼭 겨울에 오십시오"
하고 어제와 똑같은 말을 하고 사라졌다.
"저 사람 의사 선생입니까, 아니면 환잡니까?"
하고 나는 레이코 여사에게 물었다.
"어느 편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편인지 전혀 분간할 수가 없군요. 아무튼 정상으론 보이지 않습니다."
"의사예요, 미야타 선생이라고 하지"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하지만 저분은 이곳에서 가장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에요. 내기를 걸어도 좋다구"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수위실의 오무라 씨 역시 아주 이상해요, 그렇죠?"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응, 그 사람도 돌았어"
하고 레이코 여사가 야채 요리를 포크로 찍어 먹으면서 말했다.
"글쎄, 아침마다 뭔지 모를 말을 소리소리 지르면서 엉망으로 체조를 한다니까요. 그리고 나오코가 여기 들어오기 전에 기노시타라고 경리를 맡은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노이로제 증세로 자살을 기도했다가 미수에 그쳤어요. 도쿠시마라는 간호사는 작년에 알콜 중독이 심해져서 쫓겨났고요."
"환자, 스태프 할 것 없이 전부 바꿔치기해도 좋을 정도군요"
하고 나는 놀라며 말했다.
"그 말이 맞아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포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말했다.
"와타나베 군도 세상 구조가 어떻게 돼 있는지를 차츰 알아가는 것 같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에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방으로 돌아와서 나와 나오코는 트럼프 놀이를 했고, 그러는 동안에 레이코 여사는 다시 기타로 바흐의 곡을 연습했다.
"내일 몇 시에 떠나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손을 멈추고 담배에 불을 당기면서 물었다.
"아침 식사를 한 후에 바로 떠날 겁니다. 아홉 시 좀 지나서 버스가 오니까 그걸 타면 저녁 아르바이트를 빼먹지 않아도 될 거예요."
"섭섭하네요, 좀 더 있다가 천천히 가면 좋을 텐데."
"그랬다간 나도 이대로 이곳에 주저앉게 될 것만 같습니다."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긴 그렇군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그리고 나오코에게,
"참, 오카 씨한테 가서 포도를 가져와야지! 까맣게 잊고 있었네."
하고 말했다.
"함께 가 드릴까요?"
하고 내가 말했다.
"어때, 와타나베 군을 좀 빌려 가도 되겠어?"
하고 레이코 여사가 나오코에게 말했다.
"좋아요."
"그럼, 또 둘이서 밤 산책을 해볼까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어제는 조금만 더 하라는 데서 그쳤으니까, 오늘 밤은 완전히 끝까지 해버리자구요."
"좋아요, 부디 좋으실 대로"
하고 나오코가 깔깔거리면서 말했다.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레이코 여사는 셔츠 위에다 엷은 청색 카디건을 입고,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다 찔러 넣었다.
그녀는 걸으면서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고, 강아지처럼 킁킁 냄새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비 냄새가 나네요."
하고 말했다. 나도 그런 식으로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과연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덮였고, 달도 그 구름 뒤에 숨어 버렸다.
"여기에 오래 있으면 공기 냄새로 대개 날씨를 알게 돼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직원들 주택이 있는 잡목 숲으로 들어서자, 레이코 여사는 나를 잠시 기다리게 하고, 혼자서 어느 집 앞의 벨을 눌렀다. 안주인인 듯한 여성이 나와 레이코 여사와 깔깔대며 이야기를 하더니, 안으로 들어가 이번에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나왔다. 레이코 여사는 그녀에게
"고마워요, 안녕"
하고는 내게로 돌아왔다.
"봐요, 포도를 얻어 왔어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비닐봉지 속을 보여 주었다. 봉지 속에는 꽤 많은 포도송이가 들어있었다.
"포도 좋아해요?"
"좋아합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맨 위의 한 송이를 집어 들고 내 손에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거 씻은 거니까, 그냥 먹어도 돼요."
나는 걸으면서 포도를 먹으며, 껍질과 씨는 땅에다 버렸다. 아주 싱싱했다. 레이코 여사도 자기 몫을 먹었다.
"저 집 아들에게 피아노를 조금씩 가르쳐 주고 있거든요. 그 답례 삼아 별걸 다 준다구요, 저 사람들. 요전번 양주만 해도 그렇구요, 시내에 가서 간단한 장도 봐다 주구요."
"어제 이야기를 마저 듣고 싶군요."
하고 내가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이렇게 밤마다 늦게 돌아가면 나오코가 우리 사이를 의심하지 않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뒷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습니다."
"OK, 그럼 지붕이나 있는 데서 이야기하기로 해요. 오늘은 좀 쌀쌀하니까."
그녀는 테니스 코트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지더니 좁다란 계단을 내려가서, 자그마한 창고가 연립 주택처럼 몇 채인가 줄지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작은 건물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전등 스위치를 켰다.
"들어와요, 아무것도 없는 곳이지만."
창고 속에는 크로스컨트리용 스키관과 스틱과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제설 도구며 약품 따위가 쌓여 있었다.
"옛날엔 여기 와서 기타 연습을 했어요. 혼자 있고 싶을 때면 말에요. 아늑해서 좋지요?"
레이코 여사는 약품 푸대 위에 걸터앉더니, 나도 옆에 앉으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연기가 좀 차겠지만, 담배를 피워도 될까?"
"좋습니다."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은 끊을 수가 없단 말이야"
하고 레이코 여사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리고 맛있다는 듯이 담배를 피웠다. 이처럼 맛있게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드물 것 같았다. 나는 한 알 한 알 소중하게 포도를 먹고, 껍질과 씨는 쓰레기통 대용으로 사용하는 깡통 속에 버렸다.
"어제는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바위제비의 둥우리를 뒤지러 가파른 벼랑을 기어오르는 대목까지요."
하고 내가 말했다.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그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는 대목까지 말했지, 아마?"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남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있나 없나로 구분해 본다면, 나는 대개 앞에 해당된다고 생각해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을 이었다.
"젊었을 땐 그렇게 생각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뜻도 있었겠죠. 그런데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철이 들면서부터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난 남을 가르치는 일에 능숙하다고 말이죠. 나, 정말 능숙했다구요."
"그랬으리라 생각합니다."
하고 나도 동의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보단 남을 대할 때 훨씬 참을성이 있고, 무슨 일에서나 좋은 면을 잘 이끌어낼 수가 있나 봐요. 난 그런 타입의 사람인 것 같아요. 왜 그 성냥갑 옆구리에 붙어 있는 깔깔한 빨간 딱지 같은 존재 말이에요.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요. 별로 나쁠 건 없잖아요? 아무튼 난 성냥개비보단 일류 성냥갑 쪽이 더 좋아요.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렇죠, 그 아이를 가르치게 되면서부터예요. 좀 더 젊었던 시절에 아르바이트로 몇 사람 가르쳐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땐 별로 그런 생각은 안 했었죠. 그 애를 가르치면서 비로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머, 내가 이렇게 남을 가르치는 데에 재주가 있었던가 하고. 그만큼 그애에 대한 피아노 레슨은 아주 잘 돼 나갔어요. 어제도 말했듯이 테크닉 면에 있어서 그 아이의 피아노 솜씨는 보잘 것이 없었고, 또 그 애가 전문적인 음악가가 되려는 것도 아니고 해서, 나는 별 부담 없이 가르칠 수 있었죠. 더구나 그 애가 다니는 학교는, 적당한 성적만 유지해 주면 대학까지 에스컬레이터 식으로 올라갈 수 있는 여자 학교였어요. 악착같이 공부할 필요도 없고 해서, 그 애 어머니 입장도 '쉬엄 쉬엄 그저 취미 삼아 하라'는 거였죠. 그러니까 나 역시 그 아이에게 이래라저래라 강요하진 않았어요. 억지로 강요당하는 걸 싫어하는 아이라는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알았거든요. 입으로는 고분고분 네 네 했지만,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건 절대로 안하는 아이였지요. 그래서 자기가 치고 싶어 하는 대로 치게 그냥 내버려두었어요. 그다음에 내가 그것과 똑같은 곡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쳐 보이는 거죠. 그리고 둘이서 어는 방법이 좋은지 나쁜지 토론을 하는 거였지요.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그 아이를 시켜 보죠. 그럼 앞서보다 몇 단계 연주가 좋아지는 거였어요. 좋은 법을 꿰뚫어보고 제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아이였어요."
레이코 여사가 숨을 돌리고 담뱃불을 바라는 동안, 나는 잠자코 포도만 먹어댔다.
"나도 상당히 음악적 센스가 있는 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 아이는 나 이상이었어요. 아깝다 싶었지요. 어려서부터 좋은 선생을 만나 규칙적인 훈련을 받았더라면, 상당한 수준까지 가 있었을텐데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그렇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 아인 그런 규칙적인 훈련을 견뎌내지 못할 아이였거든요. 세상엔 그런 사람도 있어요. 훌륭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체계화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해서 재능을 무산시켜 버리고 마는 그런 사람들요. 난 그런 사람을 여럿 보아 왔지요. 예컨대 굉장히 까다로운 곡도 악보를 한번 보고는 거침없이 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요. 보고 있는 사람은 그만 압도돼 버리는 거죠. 나 같은 건 도저히 당할 수 없고 말에요. 하지만 그뿐인 거예요. 그들은 거기에서 앞으로 더 나가지 못하니까. 그럼 왜 그럴까?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안 하기 때문이에요. 노력하는 훈련이 다져져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바로 자기 재능을 망치는 거라구요. 섣부른 재주는 있어서 어릴 때부터 노력 없이도 꽤 잘 해내고, 다들 잘한다 잘한다 추켜 세우니까, 노력 따위는 그까짓 것하고 우습게 여기거든요. 다른 아이가 3주일 걸리는 곡을 절반 동안에 해치우니, 선생도 이 아인 재능이 뛰어나다 싶어, 다음 단계로 그냥 넘어가 버리는 거예요. 그것 역시 남들보다 절반 동안에 해치우고, 또 앞으로 나가고...... 그래서 노력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한 채, 인간 형성에 필요한 어떤 요소를 빠뜨리고 지나쳐 버리는 거죠. 이건 비극이에요. 따지고 보면 나에게도 다소 그런 면은 있었지만, 다행이도 우리 선생님은 굉장히 엄격한 분이었으니까 그래도 이 정도나 된 거죠.
하지만 그 아이에게 레슨하는 일은 정말 즐거웠어요. 고성능의 스포츠카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꼭 그런 기분이었으니까요. 손가락을 아주 약간 움직이기만 해도 그 애는 짜릿짜릿 재빠르게 반을 하는 거예요. 좀 너무 빠르다 싶을 때도 있긴 있지만요. 그런 아이를 가르칠 때의 요령은, 우선 지나친 칭찬은 삼가하는 거죠.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칭찬을 받는 일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칭찬을 받아도 고까짓것 하고 기뻐하지도 않거든요. 이따금 적절한 칭찬을 해주면 그만이에요. 그리고 무슨 일이나 강요하지 말 것. 제 스스로 선택하게 할 것. 앞으로 앞으로 나가게만 하지 말고, 멈춰 서서 생각해 보게 할 것. 그것뿐이죠. 그렇게만 하면 아주 잘 돼 나가는 거예요."
레이코 여사는 담배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밟아서 껐다. 그리고 감정을 진정하려는 듯 심호흡을 했다.
"레슨이 끝나면 말이에요, 차를 마시면서 서로 이야길 했죠. 가끔씩 내가 재즈 피아노 흉내를 내면서 가르쳐 주기도 하구요. 이런 것이 버드 파우엘, 이런 것이 셀로니어스 몽크 하고 말에요. 하지만 대개는 그 아이 혼자 떠들어댔죠.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그만 저절로 빠져들 정도였어요. 글쎄, 어제도 말했듯이 대부분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재미가 있었어요. 정말 관찰력이 날카롭고 표현이 정확한가 하면, 독설과 유머가 있어서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거예요. 아무튼 남의 감정을 자극하고 동요시키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는 아이였어요. 그리고 제 스스로도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되도록 교묘하고 적당히 그것을 사용하려고 했죠. 남을 화나게 하고, 슬퍼하게도 하고, 동정하게도 하고, 또 낙담하게도, 기뻐하게도 하고, 그렇게 능수능란하게 자극을 하는 거예요. 그것도 그저 자기 능력을 시험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무의미하게 타인의 감정을 마구 주물러 놓는 거죠. 그런 일도 물론 나중에서야 그래 그랬었구나 싶었지, 그 당시엔 전혀 알지 못했어요."
레이코 여사는 고개를 젓고 나서 포도 몇 알을 따먹었다.
"병이었어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병들어 있었던 거죠, 그것도 말이지, 썩은 사과가 주위의 다른 것까지 병들게 하듯 그런 꼴로 병들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런 그 애의 병은 이미 누구도 고칠 수가 없었지요. 죽을 때까지 그런 꼴로 앓아야만 하는 병이거든요. 그러니 한편 생각하면 불쌍한 아이지요. 나만 해도 만일 피해자가 되지 않았던들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이 아이도 희생자의 하나구나 하고요." 그리고 또 그녀는 포도를 먹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끌고 갈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대로 반년 동안은 꽤 즐겁게 지냈어요. 때로는 아차 싶을 때도 있었고, 뭔지 좀 이상하다고 느낀 일도 있었죠. 그리고 이야기하는 중에, 그 애가 누군가에 대해, 아무래도 이치에 닿지 않는 무의미한 악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곤, 소름이 끼친 적도 있었구요. 너무 눈치가 빨라 도대체 이 아이의 속셈이 무엇일까 싶을 때도 있었고......하지만 사람이란 누구나 결점이란 게 있잖아요? 게다가 나는 일개 피아노 교사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 아이의 인간성이 어떻건 성격이 어떻건 그런 거야 상관하지 않으면 그만이었구요. 연습만 착실하게 해주면 나로선 더 바랄 것이 없었지요. 게다가 사실 나는 그 아이를 퍽 좋아했으니까요.
다만 그애한테는 개인적인 일은 함부로 말하지 말자고 생각했죠. 글쎄, 난 어쩐지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는 편이 좋겠다 싶었으니까요. 그래서 그애가 내 일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해도-끈질기게 알고 싶어 했지만-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 그런 말밖엔 해주지 않았어요.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느 학교에 다녔다는 그저 그런 이야기만요. '선생님에 대해 좀 더 얘기해 주세요' 하고 그 아이는 성화를 부렸지만, 난 알아서 뭘 해, 별 볼 일 없는 인생인데, 평범한 남편에 아이가 있고, 집안 살림에 쫓기고......그렇게만 말했죠. 그래도 전 선생님이 좋아요, 그러니까 얘기해 주세요 하면서 그 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거예요. 매달리다시피 하고서 말에요. 그런 식으로 그 애가 매달리니까 나도 그다지 기분이 나쁘진 않더군요. 그래도 필요 이상의 말은 해주지 않았지만.
그러니까 그게 한 5월께였던가 봐. 레슨을 하고있는 도중에, 그 애가 갑자기 기분이 안 좋다지 않겠어요. 얼굴을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창백해진 채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쩔래, 집으로 갈래?' 하고 물었더니 '잠깐만 눕게 해주세요, 그러면 나아질 거예요' 하길래, '그럼 이리 와서 내 침대에 누워라' 하고 그애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해 가지고 침실로 데려갔지요. 우리 집 소파는 아주 작은 것이었기 때문에, 침실의 침대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미안해요, 걱정을 끼쳐 드려서', 그 애가 그러길래 '뭐 괜찮아, 그런 건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요. '어때, 물이라도 마시겠니?' 하고 물었더니 '괜찮아요, 제 옆에서 잠깐 지켜봐 주시기만 하면 돼요', 그 애가 그러길래, '알았어, 옆에서 봐주는 것쯤 못 해주겠니' 하고 난 그대로 앉아 있었지요.
그렇게 얼마 동안 있는데, '죄송하지만 제 등 좀 쓰다듬어 주세요'하고 그 애가 괴로운 얼굴로 부탁하는 거예요. 보니까 몹시 땀을 흘리고 있길래 난 부지런히 그애의 등을 문질러 줬어요. 그랬더니 다시 '미안해요, 브래지어 좀 벗겨 주세요. 답답해서 못 견디겠어요' 그러질 않겠어요. 별 수 없어서 벗겨 줬지요. 몸에 딱 붙는 셔츠를 입고 있길래, 그 단추를 풀고 브래지어를 벗겨 줬어요. 열세 살짜리로선 젖가슴이 큰 아이였어요. 브래지어도 주니어용이 아니고 어엿한 성인용인 데다, 그것도 꽤 고급품이었죠. 글쎄 그런 건 아무려면 어때요. 아무튼 난 그 애의 등을 계속 문질러 줬어요. '바보처럼 굴다니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고 그 애는 연신 그 말만 되풀이하고, 그런 때마다 나는 '괜찮아, 괜찮아'를 되풀이했지요."
레이코 여사는 발밑에다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그때쯤 해서는 나도 포도 먹던 손을 멈추고 그녀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그 애가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니 웬일이지?' 하고 물었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자, 탁 털어놓고 말해 봐.' '가끔가끔 이렇게 돼요. 나 자신도 어쩔 수가 없어요. 외롭고, 슬프고,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없구요. 그래서 난 이렇게 되고 마는 거예요. 밤에도 제대로 잠이 오지 않고, 식욕도 거의 없어요. 그저 선생님한테 오는 것만이 즐거워요, 전.'
'음,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말해 봐, 들어줄 테니까.'
집안이 편치 않다고 말하더군요. 부모를 사랑할 수 없으며, 부모 쪽에서도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따로 여자가 있어서 좀처럼 집에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는 그 일로 해서 반은 미친 사람이 돼 가지고 그 애한테만 신경질을 부려서 매일처럼 얻어맞는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집으로 가기가 무섭다고 했어요. 그렇게 말하곤 엉엉 울지 뭐예요. 귀여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요. 그걸 보면 아마 하느님이라도 가슴이 뭉클해질 거예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지요. 그렇게 집에 가는 게 무섭다면 레슨 때 말고도 우리 집에 눌러 와도 좋다고요. 그러자 그 애는 나한테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정말 죄송해요,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난 어떡해야 좋을지 몰랐을 거예요. 제발 날 버리지 말아 주세요. 선생님마저 날 버리면, 난 아무데도 갈 데가 없는걸요' 그러는 거였어요.
별수 없어서 난 그 애의 머리를 끌어안고 어루만져 줬지요. '그래, 알겠다' 하면서. 그때쯤 해서 그 애는 이미 내 등에 이렇게 손을 돌려대고는 더듬고 있었지요. 그러는 사이에, 난 차츰차츰 묘한 기분이 들지 뭐예요. 몸이 어째 마구 뜨거워지는 것처럼 되면서 말에요. 글세, 안 그렇겠어요? 그림에서 오려낸 것처럼 예쁘게 생긴 아이하고 단둘이 침대에서 서로 껴안고 있는 데다, 그 애가 내 잔등을 더듬고 있는 그 솜씨가 글세 이만저만 관능적이 아니더란 말이에요. 남편의 솜씨 따위는 발밑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지 뭐예요. 그 애 손이 한번 지나갈 때마다, 내 몸의 태엽이 조금씩 조금씩 풀려 가는 것만 같더라구요. 그렇게 기막힐 수가 없었어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 애는 내 블라우스를 벗기고, 내 브래지어까지 풀고는 내 젖무덤을 만지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난 그제서야 깨달았지요. 이에는 레즈비언이구나 하고요. 난 전에도 한 번 당한 적이 있거든요. 고교 시절에 상급생 아이한테. 그래서 난 '안 돼, 그만둬' 하고 말했지요. '부탁이에요, 조금이면 돼요. 전 진짜 외로워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진짜 외롭다니깐요. 선생님밖엔 없어요. 절 버리지 마세요' 그러면서 그 애는 내 손을 잡더니, 자기 가슴으로 가져가지 않겠어요? 굉장히 예쁜 젖무덤이었어요. 그 젖무덤에 손이 닿자, 어쩐지 내 가슴이 꾸욱 조여드는 것만 같았어요. 여자인 나마저도 말에요. 난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몰라서 '안 돼, 그러면 안 돼' 하고 바보처럼 그 말만 되뇌고 있을 뿐이었지요. 웬일인지 몸이 통 움직이질 않았던 거예요. 고교 땐 제대로 뿌리칠 수가 있었는데도, 그땐 통 그렇게 안 되더군요.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 애는 왼손으로 내 손을 잡아 자기 가스에다 눌러대고는, 입술로는 내 젖꼭지를 상냥하게 깨물고 빨고 하면서, 오른손으로는 내 등이랑 옆구리랑 엉덩이랑 애무하는 거였어요. 커튼이 내려진 침실에서,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한테 알몸이나 다름없이 옷을 벗기운 채-그때쯤 해서 뭐가 뭔지 모르는 사이에 이미 한 가지 한 가지씩 옷을 벗기우고 있지 뭐예요-그런 애한테 애무를 받고 몸부림치고 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믿어지지가 않아요. 바보스럽지 뭐예요. 하지만 그땐 말이죠, 어쩐지 글쎄 마술에나 걸린 것만 같았어요. 그 애는 내 젖꼭지를 빨아 대면서 '외로워요, 선생님밖엔 없다니까요. 버리지 마세요. 진짜 외롭다니까요' 그렇게만 계속 속삭여 댔고, 나는 또 '안 돼, 안 돼'라고만 계속 말하고 있었단 말에요."
레이코 여사는 이야기를 중단하고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실, 나, 남자에게 이 이야길 하는 건 처음이에요."
레이코 여사는 내 얼굴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와타나베 군에게는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얘기하고 있지만 나로서도 이런 걸 말한다는 건 굉장히 창피하다구요."
"미안합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 밖에는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얼마 동안 계속하더니, 그다음부턴 점점 오른손이 아래로아래로 내려오는 거예요. 그리곤 속옷 위로 그곳을 만지지 않겠어요. 그때쯤 해서 난 벌써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흠뻑 젖어 있었어요, 거기가. 창피한 이야기지만 그렇게 젖어 버린 건 그 전에도, 그 후에도 한 번도 없었어요. 어느 쪽이냐면, 난 그때까지도 나 자신이 성적으로 담백한 편일 줄 알고 있었죠. 그런데도 그 모양이 되고 보고, 나로서도 사뭇 어안이 벙벙해 버렸지 뭐예요. 그리곤 속옷 속으로 그 애의 가늘고 보드라운 손가락이 들어오더니, 그 손가락으로.......네 알겠죠, 대충? 그런 걸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해요. 도저히......그 느낌이 말이죠, 남자의 두툴두툴한 손가락으로 당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어요. 무시무시할 정도였지요, 정말. 마치 깃털로 간지럼 태우듯 하지 뭐예요. 난 그만 머릿속의 퓨즈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말에요, 난 멍해진 머리로도 이런 짓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한번 이런 짓을 하면 꼬리를 이어 이걸 계속하게 될 것이고, 그런 비밀까지 가지게 되면, 내 머리는 또 뒤범벅이 될 것이 틀림없었거든요. 그리고 아이 생각을 했지요. 만약 아이에게 이런 장면을 들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요. 아이는 토요일에는 늘 세 시경까지 외가에서 놀다 오게 돼 있었지만, 만일 무슨 일이 있어서 갑작스레 집에 돌아오거나 하면 어떻게 하랴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난 온몸의 힘을 다 짜가지고 일어나 앉아서는 '그만둬, 부탁이야!'하고 외쳤지요.
하지만 그앤 그만두지 않았어요. 그앤 그때 내 속옷을 벗기곤 그곳을 입으로...... 난 부끄러워서 남편한테도 그런 짓은 거의 하지 못하게 했었는데, 글쎄 열세 살짜리 여자애가......질렸지 뭐예요. 그런 게 그게 또 하늘에라도 날아오른 것처럼 기가 막힐 정도였어요. '그만두라니까!' 하고 다시 한 번 호통치고는, 그 애 뺨을 후려쳤어요, 있는 힘껏. 그제서야 그 앤 가까스로 그만두더군요. 그리곤 모을 일으키더니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어요. 우리는 그때 둘 다 알몸뚱이 상태로 침대 위에 몸을 일으키고 앉아서, 서로를 말똥말똥 쳐다본 셈이지요. 그 애는 열세 살이고, 난 서른한 살이고...... 하지만 그 애 몸뚱이를 보고 있자니까, 난 어쩐지 압도당했어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게 열세 살짜리 여자애의 육체라곤 나로선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고,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걸요. 그 애 앞에 서면 이 내 몸뚱이 같은 건,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싶을 정도로 형편없었어요, 정말이에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몰라 나는 잠자코 있었다.
"'왜 이러세요' 하고 그애가 말했어요. '선생님도 이런 거 좋아하시죠?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좋아하죠? 난 다 안다구요, 그런 거. 남자하고 하는 것보다 훨씬 좋지요? 글세, 이렇게 젖어 있잖아요. 난 더욱더 기분 좋게 해드릴 수가 있다구요. 정말이에요. 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기분 좋게 해드릴 수가 있다니까요. 좋지요, 네?' 하지만 글쎄, 정말 그 애가 하는 말이 맞았어요, 정말. 그 애하고 그러는 게 남편이랑 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고, 좀 더 그래 줬으면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할 순 없었어요. '우리, 일주일에 한 번씩 이거 해요. 한 번이면 돼요. 아무도 알지 못해요. 선생님하고 나하고 만의 비밀로 해요, 네?' 그렇게 그 앤 말했어요.
하지만 난 일어서서 실내복을 걸치고, '이제 돌아가! 이제 다신 오지 말아 줘!' 그렇게 말했지요. 그런데 그 눈이 말이죠, 여느 때와는 달리 굉장히 평평한 거예요. 마치 마분지에 물감을 칠해서 그런 것처럼 평평하게 느껴졌어요. 깊이도 없는 것 같구. 한참이나 말끄러미 내 쪽을 노려보다가 잠자코 자기 옷가지를 주워 모으더니, 마치 이것 보라는 듯이 그 애는 천천히 하나하난 그걸 몸에 걸치고, 그런 다음 피아노가 있는 거실로 가서는, 백에서 헤어브러쉬를 꺼내 머리를 빗고, 손수건으로 입술의 피를 닦고는, 구두를 신고 나가 버렸어요. 그리고 나가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레즈비언이야. 정말이야, 제아무리 죽이려 해도 죽을 때까지 그럴 거야' 하고요."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레이코 여사는 입술을 삐죽이 하고 한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남편보다 그 애와 그러는 편이 더 흥분됐으니까. 이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한땐 나 스스로도 정말 레즈비언이 아닐까 하고 역시 진지하게 고민했죠. 이제껏 그걸 깨닫지 못했을 뿐이 아니겠느냐고요. 하지만 요즘은 그렇겐 생각하지요. 물론 그런 경향이 내 안에 없다고 하지는 않겠어요. 다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정확한 의미로는 난 레즈비언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 쪽에서 여자애를 보고 적극적으로 욕정을 일으키는 일은 없으니까요, 알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어떤 종류의 여자애가 나한테 감정을 보내면 그 감응이 나한테 전달될 뿐이에요. 그런 경우에만 난 그렇게 되고 마는 거예요. 그렇기때문에 가령 나오코를 껴안는다 해도, 난 특별히 무엇을 느끼거나 하진 않아요. 우리는 더울 때면 방안에서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지내고 있고, 목욕탕에도 함께 들어가고, 때때로 한 이불 속에서 자기도 하고......하지만 아무 일도 없어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요. 나오코의 몸뚱이도 기막히게 예쁘지만요, 그저 그것 뿐이죠. 하긴, 우린 꼭 한 번 레즈비언 놀이를 한 적은 있어요. 나오코하고 나하고. 이런 얘기 듣고 싶어요?"
"얘기해 주세요."
"내가 이 얘길 나오코에게 했을 때-우린 아무 이야기나 다 하니까요-나오코가 시험 삼아 내 몸뚱이의 이곳저곳을 애무해 줬어요. 둘이서 알몸뚱이가 돼가지고. 하지만 전연 흥분이 안 되더라구요. 간지럽고 그저 간지럽기만 해서 죽을 지경이었어요. 지금 그 장면을 떠올려 봐도 근질거리기만 해요. 그런 일에 나오코는 정말 서투르니까요. 어때요, 조금은 안심했어요?"
"그렇군요, 솔직히 말해서"
하고 나는 대답했다.
"뭐, 그런 일이었어요, 대충"
하고 레이코 여사는 새끼손가락 끝으로 눈썹 언저리를 갉작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 여자애가 나가 버리자, 난 한동안 의자에 멍청히 앉아 있었어요. 어떡하면 좋을지 몰라서요. 몸뚱이의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심장 고둥이 덜컥덜컥 둔탁한 소리를 내고, 손발이 몹시 무겁고, 입안은 나방이라도 집어삼킨 것처럼 서걱서걱하고. 하지만 우리 아이가 곧 돌아올 것 같아서, 아무튼 목욕을 할 생각으로 욕탕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 애가 더듬고 혀를 대고 핥기도 한 몸뚱이를 어떻든 깨끗이 씻어 버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비누로 싹싹 닦아도, 그런 미끈미끈한 점액 비슷한 건 잘 떨어지질 않았어요. 그런 건 다분히 생각 탓일 거라고 자위했지만, 역시 잘 안 됐어요. 그리고 그날 밤, 남편에게 안겼지요. 그 뒤끝 같은 느낌으로요. 물론 남편에겐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말할 수가 없었으니까. 다만 안아 달라고 했고, 여느 때보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해달라고 했죠. 남편은 몹시 정성을 들였어요. 난 나도 모르게 줄곧 가쁜 숨을 내쉬었어요. 그렇게 근사한 건 결혼하고 처음이었으니까요. 왜 그랬을 것 같아요? 그 아이의 손가락 감촉이 내 몸에 아직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뿐이에요. 부끄럽군요, 이런 이야기. 땀이 다 나네요."
레이코 여사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소리 없이 웃었다.
"하지만 말에요, 그래도 소용없었어요. 글쎄, 이틀이 지나도, 사흘이 지나도 남아 있는 거예요, 그 애의 감촉이 말이에요. 그리고 그 애가 마지막으로 던지고 간 말이 내 머릿속에서 산울림처럼 계속 윙윙거리는 거예요.
토요일, 그 애는 오지 않았어요. 만일 오면 어떡하지 하고, 나는 잔뜩 겁을 먹고 집에 있었어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멍청하니 앉아서 말이죠. 하지만 오지 않았어요. 그래, 오지 않는 게 당연했지요. 자존심이 강한 아이겠다, 또 그 모양으로 갈라졌으니까요. 그리고 다음 주도 또 그 다음 주도 오지 않은 채, 한 달이 지난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일도 잊어버리겠지 싶었지만, 그래도 난 어째 잊어버릴 수가 없지 뭐예요. 혼자서 집에 있노라면, 어쩐지 그 애의 인기척이 주위에 문득문득 느껴지면서 안정감을 잃는 거예요. 피아노도 쳐지지 않고, 뭘 좀 생각해 보려 해도 생각이 집중되지 않았어요. 무엇을 하려 해도 좀처럼 손에 잡히지가 않고. 그런 식으로 한 달 정도 지나서야, 어느날 문득 깨닫게 되었어요. 바깥을 걷고 있자니까 뭔가 좀 이상한 거예요. 동네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어요. 나를 보는 눈들이 어쩐지 야릇한 느낌을 주면서 서먹서먹했단 말에요. 물론 인사말 정도는 건넸지만, 그 말투나 대하는 태도가 지금까지와는 다르지 않겠어요? 가끔씩 집으로 놀러 오던 이웃집 부인조차, 어쩐지 나를 피하는 것 같고. 하지만 나는 되도록이면 그런 거 신경 쓰지 않기로 했죠. 그런 걸 신경 쓰기 시작하면 바로 그게 병의 초기 증세니까.
하루는 나와 친하게 지내는 부인이 우리 집에 놀러 왔어요. 나와는 같은 연배고, 우리 어머니 친지의 따님이기도 하고, 또 아이들의 유치원이 같기도 해서 그녀하곤 비교적 친한 편이었죠. 그 부인이 갑자기 찾아와서는 당신에 관해 몹쓸 소문이 떠돌고 있는데 그걸 알고 있느냐고 그러지 않겠어요? 나는 고개를 젓고 물었지요.
‘무슨 소문이죠?’
‘그렇게 정색을 하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무척 어려운 걸요.’
‘대답하기 어렵다지만, 이미 거기까지 말해 버렸잖아요. 이왕이면 전부 말해 줘요.’
그래도 그녀는 몹시 말하기를 꺼렸지만, 나는 끝까지 추궁했어요. 하긴 그 부인도 처음부터 말하고 싶어서 온 셈이었으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말을 돌리다가 끝내는 말하고 말았어요. 그래, 그녀의 말에 따르자면 그 소문이란, 내가 정신 병원에 수차 들락거린 적이 있는 소문난 동성 연애자로,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다니던 아이를 발가벗겨 가지고 희롱하려 하다가, 그 애가 반항을 하자 얼굴이 부어오르도록 때렸다, 그런 이야기였어요. 이야기의 날조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어떻게 내가 입원한 적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았는지 그 부인도 깜짝 놀랐다고 하더군요.
‘나는 당신에 대해 예전부터 잘 알고 있는데, 결코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남들에게 강조했어요’하고 그녀는 말했지요.‘......하지만, 그 아이의 부모는 그렇게 딱 믿고 있어서, 동네 사람들에게 죄다 그런 말을 퍼뜨리고 있는 걸요. 자기네 딸이 희롱을 당했다고 하기에, 당신 뒤를 들춰 보았더니 정신병 경력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면서요.’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즉 그 사건이 있었던 날이죠-그 애가 울어서 부어오른 얼굴로 돌아왔길래, 대관절 어떻게 된 셈이냐고 아이 어머니가 추궁을 했대요. 얼굴이 부었을 뿐만 아니라, 입술은 터져서 피가 나고, 블라우스의 단추가 떨어지고, 속옷도 좀 찢어져 있었대요. 그게 글쎄 믿어져요? 물론 이야기를 꾸며내기 위해 그 애 자신이 전부 그렇게 했겠지요. 블라우스에 일부러 피를 묻히고 단추를 떼고 브래지어의 레이스도 찢어 놓고, 눈을 빨갛게 하고 엉엉 울면서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리고, 그래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세 양동이도 넘는 거짓말을 한 거예요. 그게 눈에 선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애 이야기를 믿어 버린 여러 사람들을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가령 그런 입장에 놓인다면 나라도 믿어 버렸을 테니까요. 인형처럼 예쁘장하고 악마처럼 말재간이 능란한 여자애가 훌쩍거리면서 ‘싫어, 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아이 참, 창피해!’ 해가면서 실토를 하는 척한다면 누구나 다 그만 믿어 버리고 말겠지요. 게다가 재수 없게도, 나한테 정신 병원 입원경력이 있다는 건 사실이었잖아요. 그 애 얼굴을 때렸다는 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해 봤자 누가 그 말을 믿어 주겠어요? 믿어줄 사람은 내 남편 정도밖엔 없겠지요.
며칠 동안 꽤나 망설인 끝에 마음먹고 남편에게 이야기해 보았어요. 물론 그는 내 말을 믿어 주었지요. 난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남편에게 이야기했어요. 레즈비언들이나 하는 짓을 그 애한테 당했노라고요, 그래서 따귀를 때렸노라고. 물론 ‘흥분했다’는 것까진 말하지 않았어요. 그런 아무래도 모양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죠.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 집에 가서 담판을 내고 오겠어’하고 남편은 노발대발하면서 말했어요. ‘당신과 나는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잖아. 어째서 레즈비언 소리를 들어야 하지? 그따위 말 같지 않은 소리가 어디 있어!’ 하지만 난 그를 말렸어요. 가지 말라고요. 그만두세요, 그렇게 해보았자 우리의 상처만 깊어질 뿐이라고요. 그래요, 난 알고 있었어요, 이미. 그 애 마음이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요. 나도 그렇게 병들어 있는 사람들을 여럿 보아온 터라 잘 알고 있었지요. 그 애는 몸속까지 속속들이 썩어 있는 거예요. 그 예쁜 피부를 한 꺼풀 벗기면, 속은 전부 썩은 살덩이다 그거지요. 이렇게 말하면 좀 심할지 모르지만, 정말 그렇단 말에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그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하는 한, 아무리 해도 우린 이길 승산이 없는 거예요. 그 애는 어른들의 감정을 조작하는 데 능숙하지만, 우리들 손에는 아무런 좋은 방법이 없으니까요. 도대체 열세 살짜리 여자애가 서른 살 넘은 여자에게 동성연애를 걸려고 했다면 대체 어느 누가 그 말을 믿겠어요? 무슨 소리를 하건 세상 사람들이란, 자기들이 믿고 싶은 말밖엔 믿지 않는 법이에요. 발버둥 치면 발버둥 칠수록 우리들의 입장만 더욱더 악화돼 갈 뿐인 걸요.
이사를 가자고 남편에게 말했지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더 이상 여기 있다간 너무 너무 긴장해서, 내 머리의 태엽이 또다시 날아갈 거예요. 지금도 내 머릿속은 혼란해져 있는 걸요. 아무튼 아무도 없는 먼 곳으로 옮겨 가자구요’그랬지요. 하지만 남편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어요. 그이는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거예요. 그 당시 그는 회사에서 하는 일에 제법 재미를 붙이고 있었고, 집 장사가 지은 건물이긴 했지만 자그마한 집도 겨우 한 채 마련했고, 딸아이도 유치원에 익숙해졌던 때고 해서......아, 좀 기다리자, 그렇게 갑작스레 움직일 순 없잖느냐, 하고 그는 말했지요. 직장도 새로 구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고, 집도 모두 팔아야 하고, 아이의 유치원도 새로 물색해야 하니, 아무리 급히 서둔다 해도 두 달은 걸리지 않겠느냐고요.
‘안 돼요, 그렇게 하다간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다치게 된다구요’하고 난 말했지요. 당신을 겁주려는 게 아니고, 이건 정말이라니까요. 그건 자명한 일이었어요. 난 그 무렵엔 벌써 이명과 환청과 불면증 그런 증세들이 조금씩 시작되고 있었거든요. ‘그럼 당신 혼자 먼저 어디엔가 가 있으라구, 난 내 일을 다 보고 나서 갈 테니까’ 그는 그렇게 말했어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싫어요. 나 혼자선 어디도 가고 싶지 않아요. 이제 당신하고 떨어지면 우리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게 돼요. 난 지금 당신이 필요해요. 날 혼자 있게 하지 말아요’하고 그는 나를 꼭 안아 주었어요. 그리고 잠시 동안만 참으면 되니까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아 달라고 그랬어요. 한 달 동안만 우선 참아 보라고요. 그러는 동안에 내가 모든 걸 손을 써서 처리하겠다, 직장도 정리하고, 집도 팔고, 아이의 유치원도 해결하고, 새 직업도 찾아보겠다, 잘하면 오스트레일리아에 일자리가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한 달 동안만 기다려 줘. 그렇게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지도 몰라, 하고요. 그렇게 말하는 데는, 나도 그 이상 더 할 말이 없더군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그럴수록 나만 더 고독해지고 말 것만 같았으니까요.
레이코 여사는 후유 하고 한숨을 쉰 후, 천장의 전등을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달도 채 못 가서 어느 날 머리통 속의 태엽이 끊겨져 버리고, 또 펑! 이지 뭐예요. 이번엔 좀 심했지요. 수면제를 먹고 가스 밸브를 열어 놓았거든요. 하지만 죽지도 못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의 침대 위더라 그거예요. 그걸로 끝장난 셈이죠. 몇 달인가 지나서 좀 안정을 되찾아 생각을 가다듬게 됐을 즈음해서, 이혼해 달라고 남편한테 말했어요. 그러는 게 당신을 위해서나 아이를 위해서나 가장 좋은 길이라고요. 이혼할 생각은 없다고 남편이 잘라 거듭 말했어요.
'다시 한 번 새 출발을 할 수 있어. 새로운 곳에 가서 우리 셋이서 새 출발을 하자구.' 남편은 그렇게 나를 설득했지요.
'이젠 늦었어요, 그때 이미 모든 게 끝난 거예요. 한 달 동안만 기다려 달라고 당신이 말했던 그때 말에요. 만약에 진짜로 새 출발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당신은 그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어요. 어디로 가건, 아무리 먼 데로 옮겨가건 또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 거예요. 그리고 난 또 같은 걸 요구해서 당신을 괴롭히겠죠. 난 더 이상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혼한 거죠. 내 쪽에서 무리하게 이혼을 해버린 거지만. 그는 2년 전에 재혼을 했는데, 난 퍽 잘된 일이라고 지금도 생각해요. 정말에요. 그 무렵엔 내 인생이 줄곧 이런 식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런 일에 다른 누구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거든요. 또 언제 다시 머리통 속의 태엽이 끊어질지, 잔뜩 겁을 먹고 지내는 그런 생활을 누구한테도 강요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는 내게 정말 잘해 주었어요. 신뢰할 수 있는 성실한 사람이었고, 힘이 세고 참을성이 있었으며, 나한테는 아주 이상적인 남편이었어요. 그는 내 병을 고치려고 노력했어요. 그를 위해서나 아이를 위해서나요. 그리고 나 자신도 이젠 고쳐진 걸로 알고 있었지요. 결혼해서 6년, 행복했었죠. 그는 99퍼센트까지 완벽하게 해줬어요. 하지만 1퍼센트, 단 1퍼센트 때문에 모든 게 빗나갔던 거예요. 그래서 펑! 했던 거지요. 우리가 쌓아 올려 왔던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완전히 제로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 몹쓸 여자아이 하나 때문에 말이죠."
레이코 여사는 발밑에 밟아 끈 담배꽁초를 주워 모아 깡통 속에 넣었다.
"한심한 이야기지 뭐예요, 글쎄. 우리가 그토록 고생고생하면서, 이것저것을 조금씩 쌓아 올렸는데도 말이죠, 무너진다 싶으니, 정말 눈 깜짝할 새가 아니겠어요. 눈 깜짝할 새에 무너져 버리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더란 말이에요."
레이코 여사는 일어나서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방으로 돌아가요. 시간도 늦었구요."
하늘은 아까보다도 더욱 어둡게 구름에 덮여 있었고, 달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빗방울 냄새가 나에게도 느껴져 왔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비닐 주머니 속의 싱그러운 포도송이 냄새도 거기에 섞여 있었다.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좀처럼 나갈 수가 없어요........이곳에서 나가 바깥세상과 관련을 갖는 게 몹시 겁이 나요......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생각을 한다는 게 두렵단 말에요."
"그 심정, 잘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레이코 여사는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바깥세상에 나가 제대로 착착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내가 말하자, 레이코 여사는 생긋이 웃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오코는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다리를 포개고 손가락으로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어휘들을 손가락으로 눌러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새 뚝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전등 불빛이 자잘한 가루처럼 그녀의 몸 주위에 반짝반짝 떠돌고 있었다. 레이코 여사와 줄곧 둘이서 이야기를 나눈 뒤에 나오코를 보니, 그녀가 얼마나 젊은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늦어서 미안해"
하고 레이코 여사가 나오코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둘이서 즐거웠어요?"
하고 나오코가 얼굴을 들고 말했다.
"물론"
하고 레이코 여사가 대답했다.
"무슨 일을 했는데 둘이서?"
하고 나오코가 내게 물었다.
"입으론 말할 수 없는 그런 거야"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오코는 깔깔 웃고 나서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우리들은 빗소리를 들으면서 포도를 먹었다.
"이렇게 비가 내리니까, 마치 이 세상에 우리 세 사람밖에 없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줄곧 비가 내린다면, 우리 세 사람은 줄곧 이러고 있을 수 있을 텐데."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들 둘이 서로 껴안고 있는 동안, 난 눈치코치 없는 흑인 노예처럼, 기다란 손잡이가 달린 부채로 펄럭펄럭 부채질도 하고, 기타로 BGM도 반주하고 그러겠지? 싫어, 그런 거"
하고 레이코 여사가 대꾸했다.
"어머, 가끔 빌려줄게요"
하고 나오코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나쁘지도 않군"
하고 레이코 여사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나쁘지도 않군"
하고 레이코 여사는 웃으며 말했다.
"비여, 계속 내리소서."
비는 계속 내렸다. 이따금 천둥마저 쳤다. 포도를 다 먹고 나자 레이코 여사는 여느 때처럼 담배에 불을 당겨 물고, 침대 밑에서 기타를 꺼내어 치기 시작했다. <데사피나도>와 <이파네마의 처녀>를 치고, 그리고 바카락의 곡이며 레논과 매카트니의 곡을 연주했다.
나와 레이코 여사는 또 와인을 마시고, 와인이 바닥나자 수통에 남아 있던 브랜디를 나누어 마셨다. 그리고 매우 좋은 기분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이대로 줄곧 비가 계속 내렸으면 좋겠다고 나도 생각했다.
"또 언젠가 만나러 와주겠어요?"
하고 나오코가 내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물론 오지"
하고 나는 대답했다.
"편지도 보내 줄래요?'
"음, 매주 보낼게."
"나한테도 좀 보내 줄래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좋습니다. 보내죠, 기꺼이"
하고 나는 말했다.
열한 시가 되자 레이코 여사는 나를 위해, 어젯밤처럼 소파를 넘어뜨려 침대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서로 인사를 한 후, 전등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서 배낭에서 회중전등과 <마의 산>을 꺼내어 줄곧 읽고 있었다.
열두 시가 되기 조금 전에 침실의 문이 살그머니 열리더니, 나오코가 다가와 내 옆으로 기어들었다. 어젯밤과는 달리 나오코는 그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나오코였다. 눈도 흐릿하지 않고 거동도 제법 활달했다.
그녀는 내 귀에 입을 대고
"잠이 오질 않아요, 웬지......"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나는 책을 놓고 회중전등을 끈 다음, 나오코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했다. 어둠과 빗소리가 부드럽게 우리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레이코 여사는?"
"괜찮아요, 푹 잠들어 있으니까. 그 사람은 잠이 들면 좀처럼 깨질 않아요."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정말 또 만나러 와주겠어요?"
"오고말고."
"당신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데도?"
나는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오코의 젖무덤이 똑똑히 내 가슴에 감촉되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가운을 걸친 채인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어깨로부터 등으로, 그리고 허리께로, 나는 천천히 몇 번이고 손을 움직여 그녀의 몸의 윤곽이며 부드러움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얼마 동안 그 모양으로 다정하게 서로 포옹하고 난 다음, 나오코는 내 이마에 살짝 입맞춤을 하고는, 사르르 침대에서 빠져나갔다. 나오코의 엷은 블루 가운이 어둠 속에서 마치 물고기처럼 잽싸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안녕-"
하고 나오코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빗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조용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비는 아침까지도 내리고 있었다. 어젯밤과는 달리,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가는 가을비였다. 물웅덩이의 물무늬와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로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겨우 알아차릴 정도였다.
눈을 떴을 때 창밖에는 우윳빛 안개가 자욱이 드리워 있었지만, 해가 솟아오를수록 안개는 바람에 밀려나고, 잡목 숲이며 산의 능선이 조금씩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제 아침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셋이서 아침 식사를 하고 새집으로 새들을 돌보러 갔다. 나오코와 레이코 여사는 모자가 달린 비닐 비옷을 입었고, 나는 스웨터 위의 방수가 되는 윈드 브레이커를 입었다. 공기는 습기를 머금어 썰렁했다. 새들도 비를 피하려는 듯 새집 안쪽으로 깊숙이 몰려서 몸을 서로 바싹 붙여 의지하고 있었다.
"춥군요, 비가 내리니까
하고 레이코 여사에게 말했다.
"비가 내릴 때마다 조금씩 추워지다가 어느 틈엔가 그것이 마침내 눈으로 변해 버리는 게 이곳 날씨예요. 일본해로부터 밀려온 구름이 이 언저리에 듬뿍 누을 떨어뜨리곤 저쪽으로 빠져나가죠"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새들은 겨울철엔 어떻게 합니까?"
"물론 실내로 옮겨요. 글세, 안 그래요? 봄이 되면 얼어붙은 새들을 눈 밑에서 파내어 해동시켜 살려 놓고는, '자, 다들 밥 먹어라' 그럴 순 없잖아요?"
내가 손가락으로 철망을 톡톡 두드리자 앵무새가 날개를 파닥거리면서
"개새끼"
"고마워"
"미친놈"
하고 소리쳤다.
"저걸 그대로 냉동해 버리고 싶어요."
하고 나오코가 우울한 소리로 말했다.
"매일 아침 저 소릴 듣고 있으면, 정말 머리가 이상해지고 말 것만 같아."
새집 청소를 끝낸 후 우리들은 방으로 돌아왔고 나는 짐을 꾸렸다. 그리고 그녀들은 농장으로 갈 채비를 했다. 우리들은 함께 밖으로 나와 테니스 코트 조금 앞에서 헤어졌다.
그녀들은 오른쪽으로 꺾어지고 나는 곧장 앞으로 걸어나갔다.
"안녕"
하고 그녀들은 말했고, 나도
"안녕"
하고 인사했다. 그리고
"또 만나러 올 거야"
하고 말했다.
나오코는 미소를 짓고,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갔다.
정문에 다다르기까지 여러 사람들과 스쳐 지났는데, 누구나 하나같이 나오코가 걸쳤던 것과 같은 노란색 비옷을 걸치고, 머리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비가 내린 탓으로 모든 사물의 빛깔이 뚜렷하게 보였다. 지면은 거무칙칙하고, 소나무는 선명한 초록색이었으며, 노란 비옷으로 몸을 감싼 사람들은, 비 오는 아침에만 땅 위를 방황할 수 있도록 허가받은 특수한 영혼처럼 보였다. 그들은 농기구며 바구니며 무슨 자루 등을 든 채, 소리도 없이 조용히 땅 위를 이동하고 있었다.
수위는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나갈 때에 방문자 명부에 적힌 내 이름이 있는 곳에 표시를 했다.
"도쿄에서 오셨나 보군요"
하고 그 노인은 내 주소를 보고 말했다.
"나도 딱 한 번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곳은 돼지고기 맛이 좋은 곳이더군요."
"그렇습니까?"
하고 나는 잘 모르는 대로 적당하게 대답했다.
"도쿄에서 먹은 음식들 대부분이 맛이 별로 좋질 않았는데, 돼지고기만은 맛이 있었어요. 그건 저어, 무슨 특별한 사육법 같은 거라도 있나 보지요?'
그 점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나는 말했다. 도쿄의 돼지고기 맛이 좋다는 말을 들은 거도 처음이었다.
"그게 언제쯤 이야기지요? 도쿄를 가보셨다는 게?"
하고 나는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언제였더라......황태자 전하께서 결혼하셨을 때였나 봅니다. 아들놈이 도쿄에 있었는데, 한번 와보지 않겠느냐 하기에 가보았지요, 그때."
"그럼 그 시절엔 분명 도쿄의 돼지고기가 맛있었던가 보죠, 뭐"
하고 나는 말했다.
"요즘은 어때요?"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런 평판은 별로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나는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말했더니, 그는 좀 낙담한 것 같았다. 노인은 좀더 이야기하고 싶은 기색이었으나 버스 시간이 별로 없다고 말을 맺고, 나는 도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냇가의 길에는 아직도 군데군데 안개 조각들이 남아 있었고, 그것은 바람에 날려서 산비탈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나는 도중에 몇 번이고 멈춰 서서 뒤를 돌아다보기도 하고, 별 의미 없이 한숨을 쉬어 보기도 했다. 어쩐지 마치 어딘가 중력이 다른 혹성에라도 와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그렇지, 이것이 바로 바깥 세계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웬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기숙사에 도착한 것은 네 시 반이었다. 나는 방에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이내 옷을 갈아입고, 아르바이트 일터인 신주쿠의 레코드 가게로 갔다. 그리고 여섯 시부터 열 시 반까지 가게를 보면서 레코드를 팔았다.
그러는 동안, 가게밖에 잡다한 부류의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가족 동반이나 커플, 주정뱅이나 건달패, 짧은 스커트를 입은 팔팔한 여자나, 히피 풍의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 클럽의 호스테스, 그 밖의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한길을 오가고 있었다.
하드록을 틀었더니 히피며 후유텐(역주 : 거지꼴을 한 부랑자) 몇 녀석이 가게 앞에 모여들어 춤도 추고 신나 냄새를 맡는가 하면,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털썩 주저앉아 있기도 했다. 그리고 토니베네트의 코드를 걸었더니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웃에는 '어른들을 위한 장난감' 가게가 있어서, 졸린 듯한 눈을 한 중년 사내가 묘한 성기구를 팔고 있었다. 누가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원하는지 나로선 짐작도 가지 않는 물건들뿐이었지만, 그런대로 가게는 제법 성업 중인 것 같았다.
가게의 엇비슷한 맞은편 골목에서는 술을 과음한 학생이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맞은편의 오락실에서는 근처 음식점의 요리사가 현금을 걸고 빙고 게임을 하면서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편 거무티티한 얼굴을 한 부랑자가 닫힌 가게의 처마 밑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엷은 핑크색 루즈를 바른, 아무리 보아도 중학생으로밖엔 보이지 않는 여자아이가 가게로 들어와서, 롤링 스톤즈의 <점핀 잭 프래쉬>를 틀어 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내가 핀을 찾아 걸어 주었더니, 그녀는 손가락을 퉁겨 딱 딱 소리를 내어 리듬을 잡으며, 허리를 흔들며 춤을 췄다. 그리곤 담배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지배인이 놓고 간 라크 한 개비를 빼주었다. 여자아이는 맛있다는 듯이 그것을 피우더니, 레코드가 끝나자 고맙다는 인사조차 없이 나가 버렸다.
15분 간격을 두고 구급차인지 패트롤카인지 구분이 안 되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비슷한 정도로 술에 취한 세 사람의 샐러리맨이, 공중전화를 걸고 있는 머리칼이 길다란 예쁘장한 여자아이를 향해, 몇 번이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내뱉고는 미친 듯이 웃어제꼈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자니까, 나는 차츰 머리가 혼란해져서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이들 광경은 모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고.
지배인이 식사를 하고 돌아와서는
"야, 와타나베, 엊그저께 저기 부티크 여자와 한탕 했다구."
하고 말했다.
그는 근처의 부티크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에게 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어서, 종종 가게의 레코드를 선물로 주고 있었다.
"거, 잘됐네요."
하고 내가 말하자, 그는 자초지종을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여자와 자고 싶거든 말야"
하고 그는 득의양양해서 가르쳐 주었다.
"좌우지간 물건을 선물하고, 그런 다음에 마구 술을 마시게 해서 취하게 만드는 거야, 마구마구. 그렇게 하면 다음은 그저 자는 일뿐이야. 간단하지?"
나는 혼란스런 머리를 주체하지 못한 채 전철을 타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방의 커튼을 닫고 전등을 끄고 침대에 드러눕자, 지금이라도 나오코가 내 옆으로 기어들어 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으니 그 젖무덤의 부드러움과 풍만함이 가슴에 느껴지고, 속삭임이 들려왔으며, 두 손에 그 몸의 윤곽을 감지할 수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나오코의 그 작은 세계로 돌아갔다. 나는 초원의 냄새를 맡고, 밤의 빗소리를 들었다. 저 달빛 아래서 보았던 알몸의 나오코를 생각하고, 그 부드럽고 아름다운 육체가 노란 비옷으로 감사인 채 새집 청소도 하고, 야채를 가꾸기도 하는 광경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발기한 페니스를 잡고, 나오코를 생각하면서 사정을 했다. 사정을 하고 나니 내 머릿속의 혼란도 조금은 수습된 것 같았으나, 그래도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몹시 피곤해서 한없이 졸린데도 여간해서 잠들 수가 없었다. 나는 일어나 창가에 서서, 안마당의 국기 게양대를 잠시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깃발이 달려 있지 않은 흰 막대가, 마치 밤의 어둠 속에 나타난 거대한 백골처럼 보였다. 나오코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잠들어 있을 게다. 저 작은 불가사의한 세계의 어둠에 감싸여 푸욱 잠들어 있을 게다. 그녀가 괴로운 꿈을 꾸지 않도록 나는 빌었다.
제7장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독한 일요일
'아미료'에서 돌아온 이튿날인 목요일 오전엔 체육 수업이 있었다. 길이가 50미터인 풀을 몇 차례 나는 왕복했다.
격렬한 운동을 한 덕택에 기분도 조금은 상쾌해지고 식욕도 났다. 식당에서 점심을 배불리 먹은 나는, 자료를 살펴보려고 문학부의 도서실로 걸어가던 차에 미도리와 딱 마주쳤다.
그녀는 작은 몸집에 안경을 낀 여자아이와 함께 있었는데, 내 모습을 보자 혼자서 내게로 다가왔다.
"어딜 가요?" 하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도서실."
"거기 가지 말고 나와 함께 점심 먹으러 가지 않겠어?"
"조금 전에 먹었어."
"어때, 한 번 더 먹어요."
결국 나와 미도리는 부근의 카페로 들어가, 그녀는 카레를 먹고 나는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긴소매가 달린 하얀 셔츠 위에 물고기 그림이 아로새겨진, 노란 털실로 짠 조끼를 입고, 금빛 가느다란 목걸이를 걸고, 디즈니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맛있다는 듯이 정신없이 카레를 먹고는 물을 세 컵이나 마셔댔다.
"요즘 계속 여기 없었죠? 내가 몇 번이나 전화를 했다구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왜, 무슨 볼일이 있었어?"
"무슨 일 같은 건 없었어요. 그저 전화를 걸어 보았을 뿐이에요."
"음."
"음, 이라니 대체 무슨 뜻이죠?"
"뭐 아무것도 아냐. 그저 맞장구를 친 거지" 하고 나는 말했다.
"어때, 요즘엔 화재가 나지 않았나?"
"응, 지난번 그거 정말 재미있던데요. 피해는 별로 없으면서도 연기가 잔뜩 피어올라서 리얼리티도 있구요. 난 그런 게 좋아."
미도리는 이렇게 말하고 또 물을 마셨다. 그리고 한숨 돌린 다음,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봐 와타나베, 어떻게 된 거예요? 왠지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에요. 눈의 초점도 흐리고."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약간 피로할 뿐이야."
"유령이라도 보고 온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요."
"음."
"와타나베, 오후에 수업 있어요?"
"독일어와 종교학."
"그거 빼먹을 수 없어요?"
"독일어는 무리야. 오늘 테스트가 있거든."
"그게 몇 시에 끝나죠?"
"두 시."
"그럼 그 뒤에 시내로 나가 함께 술 마시지 않겠어요?"
"대낮 두 시부터?" 하고 나는 말했다.
"때로는 괜찮지 않아요? 자기 지금 굉장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나와 함께 술이라도 마시면서 기운을 내야 할 것 같아요. 나도 자기와 술 마시면서 기운을 내고 싶으니까. 좋지요?"
"좋아, 그럼 마시러 가자" 하고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두 시에 문학부 안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
독일어 수업이 끝나자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신주쿠 거리로 나가, 기노쿠니야 출판사 뒤쪽 지하에 있는 DUG에 들어가 보드카 토닉을 두 잔씩 마셨다.
"이따금 난 여기에 와요. 낮에 술을 마셔도 전혀 꺼림칙한 느낌이 들지 않아서요."
"이렇게 대낮부터 술을 마신다구?"
"이따금" 하고 말을 잠시 끊고 그녀는 글라스에 남은 얼음 조각들이 달그락거리도록 흔들었다.
"가끔 삶이 고달퍼지면 여기 와서 보드카 토닉을 마시곤 해요."
"삶이 고달퍼?"
"때로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내게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요."
"이를테면 어떤 일?"
"집안일, 애인에 관한 일, 생리 불순 따위, 여러 가지요."
"한 잔 더 마실 거야?"
"물론이에요."
나는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러 보드카 토닉 두 잔을 더 주문했다.
"지난 일요일에 내게 키스해 줬지?" 하고 그녀는 말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지만, 그때 좋았어, 굉장히."
"그랬다니 괜찮군."
"그랬다니 괜찮군" 하고 또 그녀가 내 말을 되풀이했다.
"와타나베는 정말 별난 말투를 쓰는군요."
"그런가?"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그렇구 아무튼 나는 그때 생각했어. 이게 난생처음 해보는 남자와의 키스였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하고. 만일 내가 인생 순번을 바꿔 놓을 수만 있다면, 그걸 퍼스트 키스로 삼을 거예요, 반드시. 그리고 나머지 인생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지낼 거예요. 빨래를 널어 말리는 옥상에서, 내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키스를 나눈 와타나베라는 남자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쉰여덟 살이 된 지금은... 하고 말에요. 어때, 멋있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멋있을 거야" 하고 나는 피스타치오 껍질을 벗기면서 말했다.
"와타나베, 한 번 더 물어보겠는데 왜 그렇게 멍한 얼굴을 하고 있지요?"
"아마 세상에 아직 정이 들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하고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어쩐지 이곳이 진짜 세계가 아닌 것처럼 여겨져."
그녀는 테이블에 한쪽 팔꿈치로 턱을 괸 채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짐 모리슨의 노래에 분명히 그런 게 있었어요."
"People are strange when you are a stranger."
"피스" 하고 그녀가 말했다.
"피스" 하고 나도 따라 했다.
"나와 함께 우루과이로 가버리는 게 어때요" 하고 그녀는 계속 한쪽 팔꿈치를 괸 채로 말했다.
"애인이나 가족이나 대학 따위는 모두 버리고 말에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모든 걸 내팽개치고, 알고 있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곳으로 가버리는 게 멋있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난 이따금 그러고 싶어져요, 굉장히. 그러니까 만일 자기가 나를 불시에 어딘가 먼 곳으로 데려다준다면, 난 자기를 위해 소처럼 튼튼한 아기를 잔뜩 낳아줄 거야. 그리고 모두들 즐겁게 지내는 거야. 마룻바닥을 뛰어다니면서 말에요."
나는 웃으면서 세 잔째의 보드카 토닉을 쭉 들이켰다.
"소처럼 튼튼한 아기는 아직 그다지 갖고 싶지 않은가 보죠?" 하고 그녀는 말했다.
"굉장히 흥미는 있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도 싶고."
"괜찮아요, 갖고 싶지 않아도" 하고 그녀는 피스타치오를 먹으면서 말했다.
"나 역시 낮술을 마신 김에 터무니없는 생각을 해 봤을 뿐이니까요. 모든 걸 내팽개치고 어디로든 가버리고 싶다고 말에요. 어차피 우루과이 같은 델 가봐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럴지도 몰라."
"어디엘 가나 마찬가질 거야. 여기에 있든 저리로 가든. 세계는 온통 마찬가질 거야. 이 딱딱한 거 줄까요?"
미도리는 내게 껍질이 딱딱한 피스타치오를 건네주었다. 나는 힘들게 그 껍질을 벗겼다.
"하지만 지난 일요일엔 난 정말 마음이 편했어요. 둘이서 옥상으로 올라가 불구경을 하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그렇게 마음이 편했던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왜냐하면 모두들 내게 여러 가지를 강요하거든요. 얼굴을 마주치기만 하면 이러쿵저러쿵하면서 말에요. 적어도 자기만은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잖아요."
"무엇을 강용 할만큼 미도리를 아직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거야."
"그럼 나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되면, 자기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게 여러 가지를 강요할 거예요?"
"그럴 가능성은 있겠지" 하고 나는 말했다.
"현실의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여러 가지를 강요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와타나베는 그러지 않으리라고 생각해. 육감으로 알 수 있어요. 강요하거나 강요당하는 일에 관해서는 내가 상당한 권위자니까. 자기는 그런 타입이 아냐. 그래서 난 자기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안정돼요. 알고 있겠지? 세상에는 여러 가지를 강요하거나 강요당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어요. 그리고 강요했다느니 강요당했다느니 하면서 소란을 떨지요. 그런 걸 좋아하는 거예요. 하지만 난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일 뿐."
"미도리는 어떠한 것들을 강요하고 또 강요당하고 있지?"
그녀는 얼음 조각을 입에 넣고 잠시 우물거리고 있었다.
"나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흥미는 있어, 약간."
"나는 나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하고 질문했어요. 그건 좀 빗나간 대답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더 알고 싶어, 미도리에 대해"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정말."
"고개를 돌리고 싶어져도?"
"그렇게 심해?"
"어떤 의미에서는" 하고 그녀는 말하면서 이마를 찌푸렸다.
"한 잔 더 마실래요."
나는 웨이터를 불러 네 잔째의 보드카 토닉을 주문했다. 술이 올 때까지도 그녀는 테이블에 손을 얹은 채 턱을 괴고 있었다.
나는 잠자코 셀로니어스 몽크가 연주하는 허니 서클로즈를 듣고 있었다. 카페에는 우리 외에 5, 6명의 손님이 더 있었지만, 술을 마시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커피의 향기로운 냄새가 카페 안 가득 오후의 친밀한 공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번 일요일에 시간 낼 수 있어요?" 하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지난번에도 말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일요엘 에는 언제나 시간이 있어. 여섯 시부터 시작되는 아르바이트를 제외하면."
"그럼 이번 일요일에 날 만나 주겠어요?"
"좋아."
"일요일 아침에 자기 기숙사로 갈게요. 시간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괜찮아요?"
"상관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이봐, 와타나베. 내가 지금 하고 싶어 하는 게 뭔지 알겠어요?"
"글세, 짐작도 할 수 없는데."
"넓고 푹신푹신한 침대에 드러눕고 싶어요, 우선" 하고 그녀는 말했다.
"굉장히 좋은 기분으로, 잔뜩 술에 취한 채 주위에 개똥 따위는 전혀 없고 옆에는 자기가 누워 있는 거예요. 그리고 조금씩 내 옷을 벗기는 거야. 굉장히 부드럽게. 어머니가 어린애의 옷을 벗길 때처럼 살며시."
"음" 하고 나는 말했다.
"난 계속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멍한 상태로 있다가 그만 문득 제정신이 들어 안돼, 와타나베 하고 외치는 거예요. 난 와타나베를 좋아하지만 내게는 애인이 따로 있으니 이런 짓은 할 수 없어요. 난 그런 건 굳게 지킨다구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둬요! 하고 말에요. 하지만 자기는 그만두질 않고..."
"그만둔다구, 나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환상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이대로 좋은 거예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내게 드러내 보이는 거예요, 그것을. 발기한 것을. 나는 이내 눈을 돌리지만 그래도 흘끗 보고 말아요. 그리고 안돼 정말 안돼! 그렇게 크고 딱딱한 건 안 들어가요, 하고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크지 않아, 보통이야."
"상관없어요, 이건 환상이니까. 그러면 자기는 굉장히 슬픈 표정을 짓는 거예요. 그리고 난 그게 가엾어서 위로해 주지요. 아유 가엾어라, 하고."
"그게 바로 미도리가 지금 하고 싶은 거야?"
"그래요."
"아이고 맙소사" 하고 나는 실소했다.
보드카 토닉을 다섯 잔씩 마시고 나서야 우리는 카페를 나왔다. 내가 돈을 내려고 하자 미도리는 내 손을 툭 치면서 밀어내더니, 지갑에서 빳빳한 만 엔짜리 지폐를 꺼내 계산을 마쳤다.
"괜찮아요, 아르바이트한 돈도 있겠다, 또 내가 자기를 불러냈잖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물론 자기가 굳건한 신념이 있는 파시스트여서 여자가 내는 술 따위는 얻어먹고 싶지 안하고 생각하고 있다면 얘기는 다르지만."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진 않아."
"게다가 그걸 해주지도 않았고."
"딱딱하고 크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 하고 그녀가 되풀이했다.
"딱딱하고 크니까."
그녀가 술에 취해 계단을 헛디딘 탓에, 우리는 하마터면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카페 밖으로 나가자, 하늘을 엷게 뒤덮고 있던 구름이 걷히고, 거리에는 해질녘의 부드러운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나와 미도리는 그러한 거리를 얼마 동안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녔다. 그녀는 나무에 오르고 싶다고 말했지만, 신주쿠에는 공교롭게도 그러한 나무가 없었고, 신주쿠 교엔은 이미 문 닫을 시간이었다.
"유감스러워, 난 나무 오르기를 무척 좋아하는데"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와 둘이서 윈도우 쇼핑을 하며 걷고 있으려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자연스럽던 거리의 광경이 제법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미도리를 만난 덕분에 이 세계에 약간 정이 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멈춰 선 채로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눈의 초점도 꽤 확실해진 것 같아요. 나와 어울리고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기지요?"
"맞아!"하고 나는 말했다.
다섯 시 반이 되자, 그녀는 식사 준비 때문에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도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나서, 그녀는 신주쿠 역까지 바래다주고 거기서 헤어졌다.
"봐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알겠어요?" 하고 헤어질 무렵 그녀는 또 내게 물었다.
"짐작도 할 수 없어, 미도리가 생각하고 있는 건" 하고 나는 대답했다.
"자기와 둘이서 해적에게 붙들려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마주 보도록 몸을 밀착시킨 채 밧줄에 꽁꽁 묶이는 거예요."
"왜 그런 짓을 하지?"
"변태적인 해적이라서 그래요."
"미도리가 오히려 더 변태적인 것 같은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한 시간 후에는 바다에 집어 던질 테니까 그때까지 그 모양으로 실컷 즐기라고 말하면서 배 안의 창고에 버려두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실컷 즐겨요. 데굴데굴 구르거나 몸을 비틀거나 하면서."
"그게 미도리가 지금 제일 하고 싶은 일이야?"
"그래요."
"아이고 맙소사" 하고 말하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도리는 일요일 아침 아홉 시 반에 나를 만나러 왔다. 나는 갓 깨어난 참이이서 아직 세수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누군가가 내 방문을 똑똑 두드리면서,
"와타나베, 여자가 찾아왔어!" 하고 외치길래 현관으로 내려가 보니, 미도리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짧은 진 스커트를 입고 로비의 의자에 다리를 포개어 앉은 채 하품을 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러 가는 학생들이 모두 그녀의 매끄러운 다리를 유심히 바라보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는 확실히 돋보이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왔나 봐."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와타나베, 이제 막 일어난 모양이죠?"
"지금부터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고 올 테니 15분 즘 기다려 주겠어?" 하고 말했다.
"기다리는 건 좋지만, 아까부터 모두들 내 다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어요."
"당연하잖아. 남자 기숙사에 그렇게 짧은 스커트를 입고 오니까 모두들 바라보지."
"하지만 괜찮아요. 오늘은 아주 예쁜 속옷을 입고 있으니까. 핑크색인데 물결 모양의 멋진 레이서로 장식되어 있다구요."
"그런 게 더 나쁘다구" 하고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서둘러 세수를 하고 면도했다. 그리고 푸른 버튼다운 셔츠 위에 회색 모직물의 윗도리를 걸치고 아래로 내려가, 그녀를 기숙사 문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봐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마스터베이션을 하고있는 거예요?"
미도리는 기숙사 건물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렇겠지."
"남자는 여자 생각을 하면서 그걸 하는 거예요?"
"그럴 테지" 하고 나는 말했다.
"주식 시세나 동사의 활용이나 수에즈 운하 따위를 생각하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남자는 없을 거야. 대체로 여자 생각을 하면서 하지 않을까..."
"수에즈 운하?"
"이를테면 말야."
"즉 특정한 여자 생각을 하는 거군요?"
"아, 그런 건 미도리 애인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하고 나는 말했다.
"왜 내가 일요일 아침부터 미도리에게 일일이 그런 걸 설명해야 하지?"
"난, 그저 알고 싶을 뿐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걸 물어보면 금방 화를 내거든요. 여자는 그런 걸 일일이 물어보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말야."
"맞는 말이야."
"하지만 난 알고 싶어요. 이건 순수한 호기심이야. 저, 와타나베는 마스터베이션을 할 때 특정한 여자를 생각해요?"
"생각해, 적어도 난 말야. 남의 일까지는 잘 알 수 없지만" 하고 나는 체념하면서 말했다.
"와타나베는 혹시 나를 생각하면서 한 적은 없어요? 정직하게 대답해줘요, 화내지 않을 테니까."
"한 적 없어, 정말" 하고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왜? 내가 매력적이 아니어서?"
"아니, 너는 매력적이면서 귀엽고, 도발적인 자세가 잘 어울려."
"그럼 왜 나를 생각하지 않아요?"
"우선 첫째로 나는 너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일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을 거야. 그러한 성적 환상에 말야. 둘째로는..."
"머리에 떠올릴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
"그런 셈이지" 하고 나는 말했다.
"자기는 그럼 면에서도 예의가 바르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난 자기의 그런 점을 좋아해. 그렇지만 한 번쯤 나를 잠깐 출연시켜 주지 않겠어? 그 성적인 환상인가 망상인가 하는 것에 말에요. 나, 그런데 참가해 보고 싶어. 아는 친구이기 때문에 부탁하는 거예요. 이런 걸 다른 사람에게는 부탁할 수 없으니까. 오늘 밤 마스터베이션을 할 때에는 나를 좀 생각해 달라고 누구에게나 말할 순 없잖아요. 자기를 친구로 생각하기 때문에 부탁하는 거예요. 그리고 어떠했는지도 나중에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일을 했다든가..."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진짜로 하는 건 안 돼요. 우린 친구니까. 알았지요? 진짜로 하지만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요. 무슨 생각을 하든."
"글세, 그러한 제약이 딸린 걸 별로 해본 적이 없어서" 하고 나는 말했다.
"생각해 보겠어요?"
"해보지."
"와타나베, 나를 음란하다든지 욕구 불만이라든지 도발적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진 말아요. 나는 다만 그러한 일에 굉장히 흥미가 있어서 몹시 알고 싶을 뿐이니까. 난 여자 학교에서 여학생들 사이에서만 자라왔잖아? 그래서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몸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는가를 몹시 알고 싶어요. 그것도 여성 잡지에서 다루는 식이 아니라, 말하자면 케이스 스터디로서."
"케이스 스터디라..." 하고 나는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가 여러 가지를 알고 싶어 하거나 하고 싶어 하면, 내 애인은 언짢아하거나 화를 내요. 음란하다고 말하면서 내 머리가 돌았다는 거예요. 펠라티오도 여간해선 못하게 해요 난 그걸 몹시 연구해 보고 싶은데."
"음" 하고 나는 말했다.
"자기도 펠라티오 하는 거 싫어해?"
"별로 싫어하진 않아."
"그럼 좋아하는 편?"
"좋아하는 편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 얘기는 다음에 하자구. 오늘은 아주 기분 좋은 일요일 아침이니까, 마스터베이션이나 펠라티오 이야기를 하면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 다른 이야기를 하자구. 미도리 애인은 우리 대학에 다니나?"
"아니, 다른 대학이에요, 물론.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에 클럽 활동을 하면서 서로 알게 되었어요. 나는 여학교에 다니고 그는 남자 학교, 흔히 있잖아? 합동 콘서트 따위 말에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의 일이지만, 저, 와타나베?"
"응?"
"정말 한 번이라도 나를 생각해 줘요."
"그렇게 해보지, 다음엔" 하고 나는 체념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역에서 전철을 타고 오차노미즈까지 갔다. 나는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주쿠 역에서 갈아탈 때 역의 스탠드에서 형편없는 샌드위치를 사 먹고, 신문의 잉크를 끓인 듯, 역겨운 맛이 나는 커피를 마셨다.
일요일 아침 전철은, 나들이하려는 가족들이나 커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남학생들이 야구 방망이를 손에 든 채, 전철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전철 안에도 짧은 스커트를 입은 몇 명의 여학생들이 있긴 했지만, 미도리만큼 짧은 스커트를 입은 여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미도리는 이따금씩 스커트 자락을 끌어 내렸다. 몇 명의 남자들이 그녀의 다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어서 아무래도 나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지만, 그년 그런 것 따위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아주 자연스러웠다.
"저, 내가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요?" 하고 이치가야 부근에서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짐작도 할 수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제발 전철 안에서는 그 얘길 하지 말라구. 다른 사람이 들으면 난처하니까."
"유감스러운데요. 아주 굉장한 건데, 이번엔" 하고 그녀는 정말 유감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런데 오차노미즈엔 무엇이 있지?"
"따라오기만 해요, 가보면 알 테니."
일요일의 오차노미지는 모의 테스트인지 예비 학교에서의 강습인지를 받으러 가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숄더 백의 끈을 쥐고 오른손으로는 내 손을 잡은 채, 그러한 학생들의 잡담 속을 빠져나갔다.
"와타나베, 영어의 가정법 현재와 가정법 과거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요?" 하고 갑자기 미도리가 나에게 질문했다.
"설명할 수 있을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물어보겠는데, 그러한 게 일상생활에서 무슨 도움이 되지요?"
"일상생활 속에서 무슨 도움이 되진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그러한 게 사물을 보다 더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훈련이 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
그녀는 잠시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하더니,
"자기 참 훌륭해요" 하고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러한 걸 생각해 보지도 못했어. 가정법이니 미분이나 화학 기호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래서 쭉 무시해 온 거예요, 그런 까다로운 것들은. 내가 살아온 방식이 잘못된 걸까?"
"무시해 왔다구?"
"그래, 그런 건 없는 것으로 간주해 왔어요. 난 사인이나 코사인도 전혀 몰라요."
"그런데도 용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엘 들어갈 수 있었군" 하고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와타나베는 바보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눈치만 빠르면 아무것도 몰라도 대학 시험 같은 건 치를 수 있어요. 난 육감으로 알 수 있으니까. 다음 세 가지 중 옳은 것을 고르라고 하면 나는 대뜸 알아내거든."
"나는 너만큼 눈치가 빠르지 않으니까 어느 정도 체계적인 사고방식을 익힐 필요가 있지. 까마귀가 나무 구멍에 유리 조각을 저장해 두는 것처럼 말야."
"그런 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글세" 하고 나는 말했다.
"어떤 종류의 일은 하기 쉬워지겠지."
"이를테면 어떤 일?"
"형이상학적 사고나 몇 나라의 국어를 습득하는 일 따위, 이를테면 말야."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는데요?"
"그건 사람 나름이겠지. 쓸모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쓸모없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하지만 그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훈련이고, 쓸모가 있느냐의 여부는 그 다음 문제야. 처음에도 말한 것처럼 말이야."
"그래요" 하고 그녀는 감탄한 듯이 말하고는 내 손을 잡고 언덕길을 계속 내려갔다.
"자기는 어떤 일을 남에게 설명하는 데 아주 능숙해요."
"그런가?"
"그래요. 나는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영어의 가정법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하고 질문해 보았지만, 아무도 그렇게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어요. 영어 선생님조차도 모두들 내가 그러한 질문을 하면 혼란에 빠지거나 화를 내거나 바보 취급을 했어요.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그런 때에 자기 같은 사람이 나타나 올바로 설명해 주었더라면 나도 가정법에 흥미를 가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응" 하고 나는 말했다.
"자기 자본론 읽어 본 적 있어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읽어 봤어. 물론 전부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이해할 수 있는 데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데도 있었어. 자본론을 정확히 읽으려면, 먼저 그걸 이해하기 위한 사고 시스템의 습득이 필요해. 물론 총체적으로는 마르크시즘을 대체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방면의 책을 별로 읽어본 적이 없는 대학의 신입생이 자본론을 읽고 이내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그건 무리가 아닐까?" 하고 나는 말했다.
"저, 난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포크송 클럽에 들어갔어요. 노래를 부르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게 엉터리 같은 놈들의 소굴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봐도 오싹 소름이 끼치는 일이에요. 거기에 들어갔더니 우선 마르크스를 읽으라고 하더군요. 몇 페이지부터 몇 페이지까지 읽어 오라는 거예요. 포크 송이란 사회와 기본적으로 관련되어야 한다는 따위의 연설을 하고 나서 말에요.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열심히 마르크스를 읽었어요, 집에 돌아와서. 하지만 무슨 소린지 통 알 수가 없더군요. 가정법 이상으로 말이에요. 겨우 세 페이진가 읽다가 내던져 버렸어요. 그리고 다음 주 모임에 가서, 읽어보았지만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그 이후로는 완전히 사람을 바보로 취급하는 거예요. 문제의식이 없다느니,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다느니 하면서 말에요. 결코 농담이 아니었어요. 나는 단지 문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을 뿐인데. 이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응" 하고 나는 대답했다.
"토의 라는건 왜 그렇게 또 지겨운지. 모두들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을 한 채 어려운 말을 사용하는 거예요. 나는 이해가 잘되지 않아서 그때마다 질문을 했어요. 그 제국주의적 착취란 무슨 뜻입니까? 동인도 회사에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또는 산학 협동체 분쇄란, 대학을 나온 다음에도 회사에 취직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까? 하고 말야. 하지만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정색을 하면서 화를 내는 거야. 이런 얘기 믿을 수 있겠어요?"
"믿을 수 있어."
"그런 걸 모르면 어떻게 하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야 미도리는? 녀석들은 고작 이 정도였어요. 물론 난 그다지 머리가 좋지는 않아요. 서민이구요. 하지만 세상을 뒷받침하고 있는 게 서민이고, 착취당하고 있는 게 서민이잖아요. 서민이 알지 못하는 말이나 휘둘러대면서 무슨 혁명을 하고, 무슨 놈의 사회변혁을 하겠다는 거야. 나 역시 세상이 좋아지도록 하고 싶어요. 만일 누군가가 정말 착취당하고 있다면 착취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때문에 질문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지요?"
"그래."
"그때 난 생각했어요. 이들은 모두 엉터리 같은 가짜들이라고 말에요. 적당히 그럴 듯한 말을 지껄여대면서 우쭐해져 가지고, 새로 입학한 여학생을 감탄시키고는 스커트 속에 손을 집어넣는 일밖에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구요, 그자들은. 그리고 4학년이 되면 머리를 짧게 깎고 미쓰비시 상사나 TBS, IBM, 후지은행 같은 데에 재빨리 취직해서, 마르크스 따위는 읽어 본 적도 없는 귀여운 신부를 맞아들이고 어린애를 낳으면 제법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주는 거예요. 산학 협동체 분쇄는 무슨 놈의 산학 협동체 분쇄야. 너무 우스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다른 신입생들도 웃겨요. 모두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는 체하며 우쭐거리는 거예요. 그로고는 나중에 내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넌 바보구나, 알지 못하더라도 네, 네, 그렇군요, 하고 말하고 있으면 되잖아 하고. 저, 와타나베 속이 더 울컥울컥 치밀었던 적도 있었는데 그 얘기도 마저 들어주시겠어요?"
"그러지."
"어느 날 우리 모두 야간의 정치 집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여학생들은 모두 각기 밤참용 김밥을 스무 개씩 만들어 오라는 지시가 내려졌었어요. 농담이 아네요. 이건 완전한 성차별이었어요. 하지만 항상 소란을 피우는 것도 이상할 거 같아서 나는 잠자코 김밥 스무 개를 만들어 갔지요. 매실 장아찌를 넣고 김으로 말아서요. 그랬더니 나중에 뭐라고 말 한줄 알아요? 미도리의 김밥은 속에 매실 장아찌밖에 들어있지 않고 반찬도 딸려 있지 않더라는 거예요. 다른 여학생의 김밥 속에는 연어나 명란젓이 들어있고 달걀부침도 딸려 있더라는 거였죠. 정말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혁명 운운하며 떠들고 있는 자들이 왜 겨우 밤참용 김밥 따위를 가지고 소란을 피우는 걸까, 일일이 속에다 매실 장아찌를 넣고 김으로 말았으면 고급이잖아요. 인도의 어린애들을 생각해 봐요."
나는 웃었다.
"그래, 그 클럽 일은 어떻게 됐어?"
"6월에 그만뒀어요. 화가 울컥 치밀어서. 아무튼 이 대학에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엉터리 같은 애들이야. 모두들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는걸 남들이 알아챌까 봐 잔뜩 두려워하면서 지내고 있다구요. 그래서 모두들 똑같은 책을 읽고 똑같은 말을 지껄이며, 존 콜트레인을 듣거나 파졸리니의 영화를 보면서 감동한 척하고 있는 거죠. 그런 게 혁명이에요?"
"글세, 나는 실제로 혁명을 목격하지 않았으니까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군."
"그런 게 혁명이라면, 난 혁명 따위는 필요 없어요. 난 틀림없이 주먹밥에 매실 장아찌밖에 넣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살당해 버릴 거예요. 자기도 틀림없이 총살당해 버릴 거고. 가정법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다는 따위의 이유로."
"있을 수 있는 일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와타나베, 난 알고 있어요. 난 서민이니까. 혁명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간에 서민이라는 것은 변변찮은 곳에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요. 혁명이라는 게 뭐야? 기껏해야 관청의 이름이 바뀔 뿐이잖아요. 하지만 그 아이들은 그러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 쓸모 없는 말이나 지껄여대고 있는 아이들 말에요. 자기 세무서 직원 본 적 있어요?"
"없는데."
"난 여러 번 봤어요. 그들은 집안으로 함부로 들어와서 으시대곤 하죠. 장부가 뭐 이래? 당신들 엉터리로 장사를 하고 있구만. 이게 경비요, 정말? 영수증을 보여줘요, 영수증! 우리는 한쪽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식사 때가 되면 특별히 주문한 초밥을 대접해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세금을 내면서 속임수를 쓴 적은 한 번도 없다구요, 정말. 아버진 그러한 분이에요. 옛날 기질이 있는 분이라서. 그런데 세무서에서 나온 직원들은 계속 지근덕거리는 거예요. 이건 수입이 너무 적지 않느냐 해가면서 말에요. 농담이 아니에요. 수입이 적은 건 벌이가 시원찮기 때문일텐데 말에요. 그러한 소릴 듣고 있으면 난 분해서, 좀 더 부유한 사람한테나 가서 그러한 짓을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죠. 만일 혁명이 일어나면 그런 세무서 직원의 태도가 달라지리라고 생각해요?"
"매우 의심스러워."
"그럼 난 혁명 따위는 믿지 않겠어요. 나는 애정밖에 믿지 않아요."
"피스" 하고 나는 말했다.
"피스" 하고 그녀도 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하고 내가 물었다.
"병원.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데, 오늘 하루는 내가 돌보아 드려야 해요. 내 차례니까."
"아버지?" 하고 나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아버지는 우루과이에 가시지 않았나?"
"거짓말이었어, 그건."
미도리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당신은 예전부터 우루과이에 가겠다고 말해 왔지만, 갈 수가 없는 몸이에요. 도쿄 시외에도 제대로 나갈 수 없는데."
"병세는 어때?"
"분명히 말해 시간 문제예요."
우리는 한참 동안 잠자코 걸어갔다.
"어머니가 앓던 병이라 잘 알 수 있어요. 뇌종양. 믿을 수 있어요? 불과 2년 전에 어머니가 그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이번에는 아버지마저 그 뇌종양에 걸리셨어요."
대학 병원 안은 일요일이어서 인지, 문병 온 사람들과 가벼운 증세의 환자들로만 붐비고 있었다. 그리고 특유의 병원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소독약과 문병용 꽃다발, 소변, 이불 등에서 나는 냄새가 어우러져 병원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고, 간호사가 신 발굽 소리를 내며 그 속을 바삐 걸어다녔다.
미도리의 아버지는 2인용 병실이 문 쪽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의 누워 있는 모습은 깊은 상처를 입은 작은 동물을 연상시켰다.
그는 옆으로 느른하게 누워 링거 주삿바늘이 꽂힌 왼팔을 축 늘어뜨린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여위고 몸집이 작은 남자였지만, 앞으로 더 여위고 더 작아질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머리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져 있고, 창백한 팔에는 주삿바늘 자국이 드문드문 나 있었다. 그는 반쯤 뜬눈으로 공간의 한 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미도리와 내가 들어서자 그 밝게 충혈된 눈을 움직여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10초쯤 바라보다가 다시 공간이 한 점으로 그 연약한 시선을 옮겼다.
그 눈을 보자, 이 남자는 이제 곧 죽으리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생명력이란 걸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거기에 있는 것은 그저 한 생명의 연약하고 희미한 흔적뿐이었다. 마치 가재도구를 모두 끌어낸 후에 해체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낡아빠진 가옥 같은 느낌이었다.
바싹 마른 입술 주위에는 그래도 수염이 잡초처럼 드문드문 자라고 있었다. 이토록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도 수염만은 제대로 자라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미도리는 창문 쪽의 침대에 누워 있는 뚱뚱한 중년 남자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상대는 말을 잘 할 수 없는 지 빙긋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는 두세 번 기침을 하고 나서 머리맡에 놓여 있는 물을 마신 다음, 몸을 겨우 움직여 옆으로 눕더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으로는 전신주와 전선만이 보였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조차 없었다.
"어떠세요, 아버지, 기운은?" 하고 미도리가 아버지의 귀에 대고 말했다.
마치 마이크 테스트를 하고 있는 듯한 어조였다.
"어떠세요, 오늘은?"
아버지는 겨우 입술을 움직여서, 좋지 않다고 말했다. 말을 한다기보다는, 목구멍 속에 있는 메마른 공기로써 우선 말을 끌어내는 것처럼 들렸다. 머리하고 그는 말했다.
"머리가 아프세요?"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그래"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4음절 이상의 말은 잘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할 수 없죠. 수술을 받은 직후니까 아프시겠죠. 괴롭지만 좀 더 참으세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이 사람은 제 친구인 와타나베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절반쯤 입술을 벌렸다간 곧 닫았다.
"거기에 앉아요" 하고 미도리는 침대 옆에 놓여 있는 둥근 비닐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시키는 대로 거기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물 주전자에서 물을 조금 따라 아버지에게 먹이고, 과일이나 프루츠 젤리를 먹고 싶지 않은가를 물었다. 안 먹겠다고 그녀의 아버지는 말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미도리가 말하자, 먹었다고 그는 대답했다.
침대의 머리맡에는 작은 테이블 모양의 찬장 같은 게 마련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물 주전자와 컵, 쟁반, 작은 시계 등 일용품들이 놓여 있었다.
미도리는 그 밑에 놓여 있는 커다란 자루 속에서 갈아입을 잠옷이나 속옷 등을 꺼내어 정리한 다음, 문 옆에 있는 사물함 속에 집어넣었다. 자루의 바닥 쪽에는 환자가 먹을 음식이 들어있었다. 그레이프 프루츠 두 개와 프루츠 젤리, 그리고 오이 세 개.
"오이?" 하고 미도리가 깜짝 놀라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왜 또 오이같은 게 여기 있을까? 정말 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짐작도 할 수 없다구요. 이러이러한 것들을 사다 달라고 전화로 일러두었는데도. 난 오이를 사다 달라고는 하지 않았어요."
"키위라고 한 걸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참견해 보았다.
미도리는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확실히 나는 키위라고 말했어요. 그래도 그렇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잖아요? 환자가 왜 오이를 날로 먹겠어요? 아버지 오이 드시고 싶으세요?"
"안 먹는다" 하고 어버지는 말했다.
미도리는 머리맡에 앉아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하였다. 텔레비전이 잘 나오지 않아 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느니, 다카이도에 있는 아줌마가 2, 3일 사이에 한 번 문병을 오겠다고 말했다느니, 약국의 미야와키 씨가 자전거를 타다가 굴로 떨어졌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저 응, 응,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잡수고 싶지 않으세요, 아버지?"
"먹고 싶지 않아" 하고 그녀의 아버지는 대답했다.
"와타나베, 그레이프 프루츠라도 먹을래요?"
"아니" 하고 나도 대답했다.
잠시 후에 미도리는 나를 휴게실로 데리고 가서,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휴게실에는 파자마 차림의 환자 세 명이 역시 담배를 피우면서 정치 토론회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저, 저기 목발을 갖고있는 아저씨 있잖아, 내 다리를 아까부터 유심히 바라보고 있어요. 안경을 끼고 푸른 파자마를 입은 아저씨 말에요" 하고 그녀는 즐거운 듯이 말했다.
"그야 바라볼 밖에. 그런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 누구나 다 바라본다구."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모두들 지루할 테니까, 때로는 젊은 아가씨의 다리를 구경하는 것도 좋다구요. 흥분해서 회복이 빨라지지 않을까요?"
"그 반대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라구"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곧바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이야긴데"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나쁜 분은 아니에요. 이따금 심한 소리를 해서 화가 울컥 치밀긴 하지만, 적어도 근본은 정직한 분이고,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했었어요. 그리고 당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오신 분이에요. 성격도 좀 약한 데가 있고 장사하는 데도 서투르고 덕망은 없었지만, 그래도 거짓말만 하면서 요령껏 돌아다니고 있는 주위의 약아빠진 자들보다는 훨씬 나은 분이셨어요. 나도 말을 꺼내면 물러서지 않는 성격이어서 노상 아버지와 다투긴 했지만, 아무튼 나쁜 분은 아니라구요."
미도리는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줍기라도 하듯이 내 손을 잡아 자기 무릎 위로 가져갔다. 내 손바닥의 절반은 스커트 위에, 나머지 절반은 허벅지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와타나베, 이런 곳이라 미안한 부탁이지만, 좀더 나하고 함께 있어 주겠어요?"
"다섯 시까지는 괜찮으니까 같이 있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미도리와 함께 있는 게 즐겁기도 하고, 또 달리 할 일도 없으니까."
"일요일엔 주로 무슨 일을 해요?"
"빨래. 그리고 다리미질."
"와타나베, 내게 그 여자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겠죠? 사귀고 있는 사람 말에요."
"그래.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 복잡하고 또 잘 설명할 수 도 없을 거 같고."
"괜찮아요, 설명하지 않아도"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내가 상상하고 있는 걸 조금 얘기해 봐도 되겠어요?"
"좋아. 미도리가 상상하고 있는 건 뭔가 재미있을 것 같아. 꼭 들어보고 싶은데."
"나는 와타나베가 사귀고 있는 상대가 유부녀라고 생각해요."
"그래?"
"서른 두세 살쯤 되는 부유한 집의 예쁜 부인요. 모피 코트나 찰스 주르당의 구두, 실크 속옷을 입는 타입인 데다 굉장히 섹스에 굶주려 있어요. 그리고 지독하게 역겨운 짓을 하죠. 평일에는 대낮 무렵부터 와타나베와 둘이서 탐욕스레 섹스에 열중해요. 하지만 일요일에는 남편이 집에 있으니까 와타나베와 만날 수 없는 거야. 어때요, 내 말 틀려요?"
"굉장히 재미있는 상상을 하고 있군" 하고 나는 말했다.
"틀림없이 몸을 결박하고 눈을 가린 다음, 온몸을 구석구석까지 실컷 빨게 하는 거야. 그리고 이상한 걸 집어넣게 하거나, 곡예사 같은 흉내를 내게 하면서, 그러한 장면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곤 하는 거죠."
"재미있겠는데."
"섹스에 굉장히 굶주려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다 해보는 거예요. 그녀는 매일 그런 궁리만 하고 있다구. 남아도는 시간이 많으니까. 이번에 와타나베가 오면 이런 걸 해야겠다고 말야. 그리고 침대에 들어가면 탐욕스레 여러 체위로 바꿔 가며 세 번쯤 하는 거예요. 그리고 와타나베에게 이렇게 말하죠. 어때 내 몸 굉장하지? 넌 이제 젊은 아가씨한테는 만족 할 수 없어. 젊은 아가씨가 이런 걸 제대로 해 줄 수 있겠어? 어때? 절정을 느껴? 하지만 아직 사정을 하면 안돼, 하고."
"미도리는 포르노 영화를 너무 많이 보고 있는 모양이야."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그럴 거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마나 난 포르노 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요! 다음에 함께 보러 가지 않겠어요?"
"좋아, 미도리가 시간이 나면 함께 가자구."
"정말? 굉장히 재미있어요. SM을 보러 가요. 채찍질을 하거나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여자에게 오줌을 싸게한다구. 난 그런 종류를 굉장히 좋아해요."
"좋아."
"저, 와타나베, 포르노 영화관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요?"
"글세 모르겠는데."
"섹스 장면이 나오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리거든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난 그 꿀꺽 하는 소리를 굉장히 좋아해요. 몹시 귀여워."
병실로 돌아가자, 미도리는 또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고, 아버지는 그래, 응, 하며 맞장구를 치거나 아니면 아무 말도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열한 시 경에 옆에 누워 있는 남자의 부인이 찾아와, 남편의 잠옷을 갈아입히고, 과일 껍질을 벗겨 주기도 했다. 갸름한 얼굴의 호탕하게 보이는 부인이었는데, 미도리와 둘이서 여러 가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였다.
간호사가 들어와 링거 주사용 병을 새것으로 갈아 끼우고는, 미도리와 그 부인과 이야기를 잠깐 나눈 후 곧 돌아갔다. 그동안 나는 허락 없이 방안을 멍하니 둘러보거나 창밖의 전깃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참새가 날아와 전선에 앉았다. 미도리는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땀을 닦아주고 가래를 받아주고, 옆쪽 부인이나 간호사와 이야기를 하거나, 내게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링거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다.
열한 시 반에는 의사의 회진이 있기 때문에, 나와 미도리는 복도로 나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가 나오자 미도리는 "선생님 상태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수술한 지 얼마 안 됐고 통증이 진정되도록 조치해 두었으니까" 하고 의사는 말했다.
"수술 결과는 앞으로 2, 3일이 경과해야만 알 수 있어요. 잘 되면 좋은 것이고, 잘 안 되면 또 그때 가서 생각해 봅시다."
"또, 수술을 해야 하는 건 아니죠?"
"그건 그때 가봐야 할지" 하고 의사는 말했다.
"오늘은 꽤나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군."
"멋있죠?"
"하지만 계단을 올라갈 때엔 어떡하지. 그걸?" 하고 의사가 질문했다.
"그냥 놔둬요. 다 보여 주죠" 하고 미도리가 말하자, 뒤에 있는 간호사가 빙긋 웃었다.
"아가씨도 조만간에 한 번 입원해서 머리를 열어 보고 진찰 좀 해봐야겠는걸" 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의사가 말했다.
"그리고 이 병원 안에서는 되도록 엘리베이터를 사용해 줘요. 더 이상 환자가 불어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요즘엔 그렇잖아도 바빠요."
회진이 끝나고 나자 이내 점심시간이 되었다. 간호사가 손수레로 식사를 실어와 각 병실에 날라다 주었다.
미도리 아버지의 식사는 포타즈 수프와 프루츠, 조려서 가시를 제거한 연한 생선, 야채를 으깨어 젤리처럼 만든 것 등이었다. 미도리는 아버지를 반듯이 눕게 하고, 아래쪽의 핸들을 돌려 침대를 일으켜 세워놓고는, 아버지에게 수프를 떠먹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 여섯 번 받아먹고는 도리질하면서 그만, 하고 말했다.
"더 잡수셔야 해요 아버지"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아버지는 나중에, 하고 말했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기운지 나지 않는다구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소변은 아직 안 보셔도 돼요?"
"음" 하고 아버지가 대답했다.
"와타나베, 식사하러 가지 않겠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좋아" 하고 나는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무엇을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식당은 의사나 간호사, 문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창문이 하나도 없는 지하의 휑뎅그렁한 홀에 의자와 테이블이 줄지어 배치되어 있는 가운데 모두들 식사를 하면서 제각기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 아마 질병에 대한 이야기겠지만 - 그 이야기 소리가 마치 지하도 속에서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 그러한 소리들을 압도하듯이 의사나 간호사를 불러내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내가 자리를 잡는 동안에, 미도리가 2인분의 정식을 알루미늄 쟁반에 담아 왔다. 크림 크로켓과 포테이토 샐러드, 양배추를 채 썰어 하얀 플라스틱 식기에 각기 담겨져 있었다. 나는 절반쯤 먹고 나머지는 남겼다. 그러나 그녀는 맛있게도 모두 먹어 치웠다.
"와타나베,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은가 봐" 하고 미도리가 다운 엽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응, 별로."
"병원이라서 그래요" 하고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그래요. 냄새나 소리, 탁한 공기, 환자의 얼굴, 긴장감, 초조함, 실망, 고통, 피로, 이러한 것들 때문이에요. 이러한 것들이 억눌러서 식욕이 나지 않게 만들지만 익숙해지면 이런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져요. 그리고 밥을 든든히 먹어 두지 않으면 환자를 간호할 수도 없고. 정말이지, 난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까지 네 분을 간호해 왔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무슨 일이 갑자기 생겨서 제때 식사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먹을 수 있을 때에 든든히 먹어두지 않으면 안 돼요."
"네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친척분들이 문병을 오면 여기서 함께 식사를 해요. 그러면 모두들 와타나베 처럼 절반쯤 남기죠. 그래서 내가 모두 먹어 버리면 미도리는 건강해서 좋아. 난 가슴이 답답해서 더 이상 먹을 수가 없는데 말야. 하고 말해요. 하지만 간호를 하고 있는 건 바로 저예요. 다 웃기를 소리죠. 다른 사람은 이따금 찾아와 동정만 하다 갈 뿐, 대소변을 받아내고, 가래를 받고, 몸을 닦아주는 건 저라구요. 동정만으로 대소변을 받는 일이 해결된다면 난 남들의 50배 정도는 동정할 거예요. 그런데 네가 밥을 다 먹으면 모두들 나를 비난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미도리는 건강해서 좋다는 거예요. 모두들 내가 무슨 수레라도 끌고 있는 당나귀 정도로 여겨지나 봐요. 나이도 지긋한 사람들이 왜 모두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을까? 입으로야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요. 중요한 건 대소변을 받아내느냐의 여부에요. 나라고 뭐 마음의 상처를 받지 말란 법 있어요? 나도 기진맥진할 때도 있고, 마냥 울고 싶을 때도 있어요. 쾌유될 가망도 없는데 의사들이 달려들어 머리에 메스를 대고 만지작거리는 그러한 짓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할 때마다 악화되어 머리가 점점 이상해져 가는 광경을 줄곧 목격하고 있어 봐요, 견딜 수가 없지요. 게다가 저축해 둔 돈은 점점 줄어들어 가지, 더구나 앞으로 대학에 3년 반이나 더 다닐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고, 언니도 이러한 상태로는 결혼식을 올릴 수 없잖아요."
"미도리는 일주일 며칠쯤 여기에 와 있지?" 하고 나는 나직하게 물어보았다.
"나흘쯤"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여기선 일단 완전 간호를 해주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지만, 실제 간호사만으로는 모두 감당할 수가 없어요. 간호사들은 정말 잘 해주고 있지만 그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모자라는 데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아무래도 가족이 돌보지 않을 수 없어요. 어느 정도는 말이에요. 언니는 가게 일을 봐야 하니까, 수업을 받으면서 틈틈이 내가 와 봐야 해요. 언니가 그래도 일주일에 사흘은 와보고, 내가 나흘 정도 에요. 그리고 그러한 틈을 이용해서 우린 데이트를 하고 있는 거라구요. 너무 빡빡한 스케줄이죠."
"그렇게 분주한데, 왜 나를 자주 만나지?"
"와타나베와 함께 있는 게 좋으니까" 하고 미도리는 플라스틱으로 된 빈 컵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두어 시간쯤 혼자서 바깥 공기도 쐴 겸 이 부근을 산책하고 와" 하고 내가 말했다.
"내가 잠시 아버지를 돌봐 드리고 있을 테니까."
"왜?"
"좀 병원을 벗어나서, 혼자 한가로이 있다가 오는 게 좋을 것 같애, 누구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머리를 텅 비울 수 있게 말야."
그녀는 잠깐 생각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괜찮을까?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대충 알만해. 링거를 체크하고 땀은 닦아주고, 가래를 받고, 요강은 침대 밑에 놓여 있고, 배가 고프시다면 점심식사를 먹여 드리고 그밖에 알 수 없는 건 간호사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그만큼 알고 있으면 너무나 충분해요" 하고 미도리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다만 아버지가 머리가 좀 이상해지기 시작한 상태니까 이따금 이상한 소리를 하실 거예요, 엉뚱한 소리 말에요. 그런 데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괜찮아" 하고 나는 말했다.
병실로 돌아와서 미도리는 아버지에게 자신은 볼일이 있어 잠깐 나갔다 오겠다면서, 그동안 이 사람이 돌보아 드릴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거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는 듯했다. 혹은 그녀가 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반듯이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눈을 깜박이지 않으면, 죽어 있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눈은 술에 잔뜩 취한 것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고, 깊이 호흡을 하면 코가 약간 벌렁거렸다. 그는 이미 움쩍도 않은 채 미도리가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답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그 혼탁한 의식의 밑바닥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미도리가 나가 버린 후에 나는 그에게 말을 걸어 보려 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결국 잠자코 있기로 했다. 그러자 그는 눈을 감고 잠들어 버렸다.
나는 머리맡의 의자에 앉아, 그가 이대로 죽어 버리지 않도록 기원하면서, 코가 이따금 벌렁거리는 모양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일 내가 옆에서 시중들고 있을 때에 이 남자가 숨을 거둬 버리면, 정말 묘한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남자를 조금 전에 처음으로 만났을 뿐이고, 이 남자와 나를 결부시키고 있는 건 미도리뿐이며, 그녀와 나 역시도 그저 연극사 2 강의를 함께 받고 있는 사이일 뿐이니까.
그러나 그는 죽어가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귀를 얼굴 가까이 가져가면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옆쪽의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가 미도리의 애인인줄 알았는지, 내게 쭉 미도리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아가씨는 정말 좋은 아가씨예요" 하고 부인이 말했다.
"아버지를 썩 잘 돌봐 주고 있죠, 친절하고, 유순하며, 민감하고 다부진 데다 얼굴도 예뻐요. 그 아가씨를 소중히 해야 해요. 놓치지 말아요. 그런 아가씨는 좀처럼 없으니까."
"소중히 하겠습니다." 하고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우리 집에는 스물한 살 난 딸과 열일곱 살 짜리 아들이 있지만 병원엔 오지도 않아요. 휴가 때는 서핑이니 데이트니 하면서 어디론가 놀러가 버리구요. 용돈이나 많이 얻어내면 그만이지요."
한 시 반이 되자 부인은 잠시 물건을 사러 나갔다 오겠다며 병실을 나갔다. 환자는 둘 다 깊이 잠들어 있었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방안에 환히 비쳐들고 있어서, 나도 둥근 의자 위에 앉아 그만 졸음에 빠질 것만 같았다.
창가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꽃별에는 희고 노란 국화꽃이 꽂혀 있어서, 지금이 가을임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병실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채 남겨져 있는, 점심으로 나온 생선 조림의 달콤한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여전히 구두굽 소리를 내면서 복도를 돌아다니며,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그녀들은 이따금 병실로 찾아와, 환자가 둘 다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내게 빙긋이 미소 짓고는 모습을 감추었다. 읽을 만한 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병실에는 책이나 잡지 신문 같은 것도 없었다. 달력이 벽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나오코의 일을 생각했다. 머리핀밖에 꽂지 않은 나오코의 나체를 생각했다. 잘룩한 허리와 그늘진 음모를 생각했다. 왜 그녀는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나체가 되었을까? 그때 나오코는 몽유 상태에 빠져 있었을까? 아니면 그것이 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을까?
시간이 경과하여 그 작은 세계로부터 멀어지면 벌어질수록, 나는 그날 밤의 사건이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환상인지의 여부를 점점 더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확실히 그러한 듯한 느낌이 들고, 환상이라고 생각하면 환상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환상이라고 보기에는 세밀한 부분까지 너무 뚜렷하게 기억났고, 정말로 있었던 일로 보기에는 모든 게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나오코의 몸이나 달빛마저도.
미도리의 아버지가 갑자기 깨어나 기침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의 생각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나는 화장지로 가래를 받아주고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물 드시겠어요?" 하고 내가 묻자 그는 4밀리쯤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물병으로 조금씩 천천히 먹여 주자, 마른 입술이 떨리면서 목줄기가 약간씩 움직였다.
그는 물병 속의 미지근한 물을 모두 마셨다.
"더 드시겠어요?" 하고 내가 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해서 나는 귀를 가까이 가져가 보았다.
"됐어" 하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메마르고 더 작아져 있었다.
"무엇 좀 드시겠어요? 배가 고프시죠?" 하고 내가 물었다.
그는 또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도리가 했던 것처럼 핸들을 돌려 침대를 일으켜 세우고, 야채 젤리와 생선 조림을 번갈아 가며 스푼으로 한 입씩 떠먹였다.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절반쯤을 먹고 나서, 이제 됐다는 듯이 그는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많이 움직이면 아픈지, 조금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과일도 드시겠냐고 묻자, 그는 안 먹는다고 말했다. 나는 수건으로 입가를 닦아주고, 침대를 수평으로 되돌려 놓고는 식기를 복도에 내놓았다.
"맛있었어요?"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맛없어" 하고 그는 말했다.
"네, 확실히 별로 맛있는 음식은 아니죠"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감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듯한 눈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남자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는 어쩐지 미도리와 있을 때보다는 나와 둘이서 있는 걸 더 편하게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면 나를 다른 사람과 혼동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만일 그렇다면 나로선 그 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깥 날씨가 굉장히 좋아요" 하고 나는 둥근 의자에 걸터앉은 채 다리를 포개며 말했다.
"가을에다 일요일이고 날씨도 좋아서 어딜 가나 사람들로 붐빕니다. 이러한 날에는 이렇게 방안에 편안히 있는 게 제일 좋지요. 피로해지지도 않고요. 사람들도 붐비는 델 가봐야 피곤하기만 하고 공기도 나쁘니까요. 저는 일요일에는 대게 빨래를 합니다. 아침에 빨아서 기숙사 옥상에 널어 말리고, 해가 지기 전에 거둬들여 열심히 다리미질을 하지요. 전 다리미질하는 일을 그리 싫어하진 않습니다. 구겨진 게 반듯하게 펴지는 게 정말 좋으니까요. 저는 다리미질을 비교적 잘합니다. 처음에는 물론 잘하지 못했습니다. 주름투성이가 되곤 했지요. 하지만 1개월쯤 하는 동안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일요일은 빨래하고 다리미질하는 날이 된 거예요. 오늘은 못했지만 요. 유감입니다. 빨래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니까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도 될 테니까요. 별로 염려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일요일이라도 그 밖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편이죠. 내일 아침에 빨래를 해서 널어 두고, 10시에 강의를 들을 겁니다. 그 강의는 미도리와 함께 듣고 있지요. 연극사 2인데, 지금은 에우리피데스를 다루고 있습니다. 혹시 에우리피데스를 알고 계십니까? 옛 그리스인인데, 아이스킬로스 그리고 소포클레스와 함께 그리스 비극의 빅 스리라고 불리고 있어요. 마지막에는 마케도니아에서 개에 물려 죽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견이 많습니다. 그 사람이 에우리피데스죠. 저는 소포클레스를 좋아합니다만, 이건 취향의 문제니까 어떻다고 말할 수 는 없습니다. 그의 연극의 특징은, 모든 사람들이 엉망으로 혼란에 빠져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점입니다. 아시겠어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각기 제나름의 사정과 이유와 주장이 있고, 도 모두들 나름대로 정의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모든 사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마는 거죠. 그건 그래요. 모든 사람이 정의가 통하고 모든 사람의 행복이 달성되는 일은 원리적으로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카오스가 닥쳐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게 또 실로 간단하게 풀립니다. 마지막에 하느님이 나타나는 거죠. 그리고 교통 정리를 하는 거예요. 너는 저리로 가라, 너는 이리로 와라, 너는 저자와 손을 잡아라, 너는 거기서 잠시 가만히 있어라,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중개인 같은 거죠. 그리하여 모든 일이 제대로 해결됩니다. 이걸 바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부르고 있어요.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에는 노상 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오는데, 이 대목에 이르러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잘라지고 있어요.
그러니 만일 현실 세계에 이러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있다면 일은 편할 겁니다. 곤란하게 됐다,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됐다고 생각되면, 하느님이 위로부터 스르르 내려와서 모두 처리해 줄 테니까요. 정말 편할 겁니다. 아무튼 이것이 연극사 2입니다. 우리는 대학에서 대체로 이러한 것을 배우고 있지요."
내가 얘기하고 있는 동안에 미도리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그가 약간이나마 이해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그 눈을 보고는 판단할 수 없었다.
"피스"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만큼 떠들고 나자 나는 몹시 배가 고파졌다. 아침을 거의 안 먹은 데다 점심도 반이나 남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점심을 제대로 먹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지만 후회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먹을 게 뭐 없을까 하고 여기저기를 뒤져보았지만, 김이 든 통과 빅스 사탕, 그리고 간장이 있을 뿐이었다. 종이봉지에는 오이와 그레이프 프루츠가 있었다.
"배가 고픈데요, 오이를 먹어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미도리 아버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세면실에서 오이 세 개를 씻어 왔다. 그리고 접시에 간장을 조금 붓고, 김으로 오이를 감아 간장에 찍어 아작아작 깨물어 먹었다.
"맛있는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간단하고, 신선하고, 생명의 내음이 물씬 납니다, 좋은 오인데요. 키위보다는 훨씬 좋은 음식인 것 같습니다."
나는 하나를 먹어치우고 두 개째에 손을 댔다. 아작아작하는 상쾌한 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오이를 송두리째 두 개를 먹고 나서야 나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복도에 있는 가스풍로에 물을 끓이고 차를 넣어 마셨다.
"물이나 주스를 드시겠습니까?"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오이"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방긋 웃었다.
"그러세요. 김을 말아 드릴까요?"
"그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침대를 올려세우고, 과도로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오이에가 김을 만 다음, 간장을 찍고, 이쑤시개를 꽂아서 그의 입에 대어 주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 거의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씹은 후에 삼켰다.
"어떠세요 맛이 좋지요?"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맛있어" 하고 그는 말했다.
먹는 것이 맛있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살아 있다는 증거 같은 거죠."
결국 그는 오이 하나를 다 먹었다. 오이를 먹고 나자 물을 원했기에 나는 또 물을 마시게 해 주었다. 물을 마시고 조금 있으려니 소변을 보고 싶다고 해서, 나는 침대 밑에서 병을 꺼내 페니스 끝에 대 주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버리고 병을 물로 씻었다. 그리고 병실로 돌아와 먹다 남은 차를 마저 마셨다.
"기분이 어떠세요?"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조금" 하고 그가 말했다.
"머리가."
"머리가 좀 아프세요?"
그렇다는 듯이 그는 야간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수술 뒤니까 그럴 겁니다. 전 수술 같은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요."
"차표" 하고 그가 말했다.
"차표? 무슨 차표 말입니까?"
"미도리. 차표."
무슨 소린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도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부탁해, 하고 말했다. 내게 부탁한다는 말인 것 같았다. 그는 눈을 뜨고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내게 전달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내용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우에노, 미도리" 하고 그가 말했다.
"우에노 역 말입니까?"
그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표, 미도리, 부탁, 우에노 역, 하고 나는 정리해 보았다. 하지만 의미는 역시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의식이 혼란해져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되었지만, 오히려 눈망울은 좀 전에 비해 꽤 뚜렷해진 것 같았다.
그는 링거 주삿바늘이 꽂혀 있지 않은 쪽의 팔을 들어 내게로 내밀었다. 그러기에 퍽 힘이 드는 듯, 손을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그 주름진 손을 잡았다. 그는 힘없이 내 손을 되잡으며 부탁해, 하고 되풀이했다.
"차표도 미도리도 제가 잘 할 테니까 염려 마세요" 하고 내가 말하자 그는 손을 떨어뜨리고 맥없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그가 죽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 병실 밖으로 나와 물을 끓이고 또 차를 마셨다. 그리고 내가 이 죽음에 임박해 있는 작은 몸집의 사나이에게 호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걸 깨달았다.
조금 뒤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돌아왔다. 그리고 괜찮았어요? 하고 나에게 물었다.
"네, 별일 없었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의 남편도 쿨쿨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미도리는 세 시가 지나서 돌아왔다.
"공원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자기가 일러준 대로 혼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머릿속을 텅 비운 채로."
"그래, 어땠어?"
"고마워요. 한결 개운해진 것 같아요. 아직도 조금은 피곤하지만 아까에 비하면 몸이 아주 가벼워졌어요. 아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 육신은 몹시 피곤해 있었나 봐요."
미도리의 아버지는 잠들어 있었고,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가지고 휴게실에 가서 마셨다.
그리고 나는 미도리에게 그녀가 없는 동안에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보고했다. 푹 한숨 자고 일어나 먹다 남은 점심의 절반을 먹고, 내가 오이를 먹는 것을 보더니 먹고 싶다면서 하나를 먹고, 오줌을 누고 또 잠이 들었다고.
"자기 참 굉장해요" 하고 미도리는 감탄한 듯 말했다.
"아무것도 안 드셔서 다들 애를 먹고 있었는데, 오이까지 드시게 했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정말."
"잘은 모르지만 내가 맛있게 먹었기 때문일 거야" 하고 나는 신나하며 말했다.
"아니면 자기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능력 같은 게 있는지도 몰라요."
"설마" 하고 말하며 나는 웃었다.
"그 반대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많은 편이야."
"우리 아버지 어떻게 생각해?"
"난 좋아. 별로 이렇다 할 이야기를 나누어 보진 못했지만, 어쩐지 좋으신 분인 것 같애."
"말썽은 없었어요?"
"아니, 전혀."
"하지만, 일주일 전엔 정말 지독했다구요" 하고 미도리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좀 머리가 이상해져서 큰 소동이 있었어요. 내게 컵을 다 내던지면서, 미친놈 너 같은 건 죽어 버렷! 하고 고함을 지르지 뭐예요. 이 병은 때때로 그래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때는 턱없이 심술을 부리는 거예요. 어머니도 그랬어요. 어머니가 날 보고 뭐랬는지 알아요? 넌 내 딸이 아니야 너 같은 건 꼴도 보기 싫다고 그랬어요. 난 그 순간 눈앞이 캄캄했어요. 그런 게 이 병의 특징이에요. 뭔가가 뇌를 압박해서 사람을 짜증스럽게 만들고는, 있는 일없는 일 마구 지껄이게 하는 거예요. 그건 나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런 이야길 들으면 속이 상해요, 아무래도. 이렇게 열심히 돌봐 드리고 있는데 왜 그런 이야기까지 들어야 하나 해서 정이 뚝 떨어져요."
"그 기분 알 만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했던 것을 떠올렸다.
"차표? 우에노 역?"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무슨 이야기일까?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부탁해, 미도리, 라고도 하셨어."
"그건 나를 부탁한다고 말한 게 아닐까?"
"혹은 내게 우에노 역에 가서 전철 표를 사가지고 와 달라는 게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말했다.
"어떻든 그 네 낱말 순번이 뒤죽박죽이어서 통 알아듣질 못했어. 우에노 역하면 뭔가 생각나는 게 없어?"
"우에노 역..." 하고 말하고서 미도리는 생각에 잠기었다.
"우에노 역하면 생각나는 건 내가 두 번 가출했던 일이에요. 초등학교 3학년 때와 5학년 때. 두 번 다 우에노에서 전철을 타고 후쿠시마까지 갔었어요. 계산대에서 돈을 꺼내 갖고. 무엇 때문인지 화가 나서 한 일이에요. 후쿠시마엔 고모네 집이 있었는데, 난 그 고모를 비교적 좋아했기 때문에 거기로 갔던 거죠. 그러면 아버지가 찾아와서 날 데리고 돌아가곤 했어요. 후쿠시마까지 찾아와서. 아버지와 전철을 타고 도시락을 사먹으며 우에노 역까지 돌아왔어요. 그럴 때 우리 아버진 심하게 더듬거리긴 했지만 나한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관동대지진 때의 이야기라든가 전쟁 때에 있었던 이야기, 그리고 내가 태어날 무렵의 이야기 같은 것 등등, 평소에는 하지 않던 그런 이야기들을 해 주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아버지와 내가 단둘이서 대화를 나눈 것은 아마 그때뿐이었던 것 같아요. 자기 이런 이야기 믿을 수 있어요? 우리 아버지는 관동대지진 때 도쿄 한복판에 있었으면서도 지진이 있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거예요."
"설마" 하고 나는 아연해져서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때 아버진 자전거에 리어카를 달고 고이시가와 부근을 달리고 있었는데, 글세 아무것도 몰랐대요. 집에 돌아와 보니 사방에 기왓장이 떨어져 있고, 가족들은 기둥을 부여잡고 달달 떨고 있더라나요. 그래서 아버진 영문을 몰라 뭘하고 있는 거야 도대체, 하고 물었대요. 그게 아버지의 관동대지진 때의 추억담이에요."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웃었다.
"아버지가 해주는 옛날이야기란 모두가 그랬어요.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은 거예요. 모두가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죠.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지난 오륙십 년 동안 일본엔 하찮은 사건들밖에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에요. 2.26 사건이든 태평양 전쟁이든,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는 식이죠. 우습지요? 후쿠시마에서 우에노로 돌아오는 동안에. 그런 이야기를 더듬더듬 해주고는 마지막으로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어딜 가든 마찬가지야, 미도리하고. 그런 말을 들으면 난 어린 마음에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우에노 역의 추억담?"
"그래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자기는 가출해 본 적 있어요?"
"없어."
"어째서요?"
"생각을 안해 본 거야. 가출 같은 건."
"자긴 참 이상해요" 하고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감탄했다.
"그런가?" 하고 나는 말했다.
"어떻든 아버지는 자기한테 날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
"그럼요. 난 그걸 잘 알 수가 있어요, 직감으로. 그런데 자긴 뭐라고 대답했어요?"
"잘 모르겠으니까 아무튼 걱정 말아요, 잘 될 겁니다. 미도리도 차표도 잘 알아서 할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그럼, 우리 아버지에게 그렇게 약속한 거군요? 날 돌봐 준다고요?"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런 게 아니라" 하고 나는 당황해서 변명을 했다..
"무엇이 무엇인지 그땐 잘 몰라서..."
"걱정 마, 농담이니까. 좀 놀려준 것뿐이에요."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자긴 그럴 때가 가장 사랑스러워요."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미도리와 나는 병실로 돌아갔다. 미도리의 아버지는 아직도 푹 잠들어 있었다. 귀를 갖다 대니까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오후 해가 기울어 감에 따라, 창밖의 햇살은 가을다운 부드럽고 조용한 빛깔로 바뀌어 갔다. 새들이 떼지어 와서 전선에 앉았다간 어디론가 날아갔다. 우리는 방 한 귀퉁이에 나란히 앉아 작은 소리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내 손금을 보더니 105세까지 살겠고, 세 번 결혼하며, 교통사고로 죽는다고 예언했다. 과히 나쁘지 않은 인생이군, 하고 나는 말했다.
네 시가 넘어서 아버지가 눈을 뜨자 미도리는 머리맡에 앉아서 땀도 닦아주고, 물도 먹이고, 두통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리고 간호사가 와서 열을 재고, 소변 횟수를 점검하고, 링거의 상태를 확인하였다. 나는 휴게실의 소파에 앉아 잠시 텔레비전에서 하는 축구 중계를 보았다.
"슬슬 가봐야겠어" 하고 다섯 시에 나는 말했다. 그리고 미도리 아버지에게, 지금부터 아르바이트를 가야 됩니다, 하고 말했다.
"여섯 시에서 열 시 반까지 신주쿠의 가게에서 레코드를 파는 일이거든요."
그는 내 쪽으로 눈길을 돌리더니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나 표현은 잘 못하지만,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하고 현관 로비에서 미도리가 나에게 말했다.
"그럴 만한 일 한 게 없어" 하고 내가 말했다.
"하지만 만일 내가 도움이 된다면 다음 주에 또 올게. 너의 아버지도 다시 한 번 뵙고 싶고."
"정말?"
"기숙사에 있어 봐야 대수로운 일도 없고, 여길 오면 오이도 먹을 수 있잖아."
미도리는 팔짱을 낀 채, 구두 뒤축으로 리놀륨 바닥을 통통 차고 있었다.
"도 한 번 둘이서 술 마시러 가고 싶은데..."하고 그녀는 약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포르노 영화는?"
"포르노를 보고 술을 마셔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그리고 또 언제나처럼 둘이서 지저분한 이야기를 잔뜩 하는 거예요."
"난 안했어, 네가 했지" 하고 나는 항의했다.
"어느 쪽이든 좋아요. 어떻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잔뜩 마시고 곤드레가 돼 가지고, 둘이서 끌어안고 자는 거예요."
"그다음은 대체로 상상이 돼" 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널 원하면 넌 거부하겠지?"
"흐응" 하며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오늘처럼 아침에 기숙사로 데리러 와, 다음 주 일요일에 함께 이쪽으로 오게."
"좀 더 긴 스커트를 입고?"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결국 그다음 주 일요일에 나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미도리의 부친이 금요일 아침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여섯 시 반에 미도리가 전화로 그걸 알려 왔다.
전화가 왔음을 알리는 버저가 울려, 나는 파자마만 걸친 채 로비로 내려가 전화를 받았다.
차가운 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좀전에 돌아가셨어요" 하고 미도리가 작고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내가 도울 게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고마워, 하지만 괜찮아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우린 장례식에 익숙해 있어요. 그저 자기한테 알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미도리는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
"장례식엔 오지 마세요. 나, 그런 거 싫어하니까. 그런 데서 자기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알았어"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포르노 영화를 구경시켜 줄 거예요?"
"물론."
"지독하게 지저분한 것으로."
"알았어. 물색해 둘게, 그런 것으로."
"그럼 내가 다시 연락할게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그 뒤 일주일 동안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강의실에서도 만나지 못했고, 전화도 걸려 오지 않았다. 기숙사로 돌아올 적마다 내게 무슨 메모라도 없나 하고 신경을 쓰고 찾아보았지만, 내게 걸려온 전화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나는 어느 날 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미도리를 떠올리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잘 되질 않았다. 할 수 없이 도중에 나오코로 바꿔 보았지만, 나오코의 이미지도 이번에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쩐지 바보스런 기분이 되어 집어치우고 말았다. 결국 위스키로 마음을 달랜 후 이를 닦고 잤다.
일요일 아침, 나는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편지에다 미도리 부친의 이야기를 썼다.
나는 같은 클래스에서 공부하는 여학생 부친의 병문안을 갔다가 오이를 먹었다. 그랬더니 그도 그걸 먹고 싶어해서 드렸더니 아작아작 베어 드셨다. 하지만 결국 5일 뒤의 아침에 세상을 떴다.
나는 그가 아작아작 오이를 씹고 있던 소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사람의 죽음이란 것은 작고도 묘한 추억들을 뒤에 남기고 가는 모양이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너와 레이코 여사와 새집을 생각한다. 공작새나 비둘기, 앵무새와 칠면조, 그리고 토끼 생각을. 또한 비 내리는 아침에 너와 거기 사람들이 입고 있던, 모자가 달린 노란 비옷도 기억하고 있다.
따뜻한 침대 속에서 너를 생각하다 보면 참으로 기분이 흐뭇해진다. 마리 내 곁에서, 네가 새우등을 한 채 잠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것이 만일 정말이라면 얼마나 근사한가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때때로 지독히 외로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대로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네가 메일 아침 새들을 돌보고 밭일을 하는 것처럼, 나도 매일 아침 내 자신의 태엽을 감고 있다. 침대에서 나와 이를 닦고, 수염을 깎고, 아침 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 현관을 나서서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대략 36회 정도 빠득빠득 태엽을 감는다. 너를 만날 수 없어 괴롭긴 하지만, 그나마 네가 존재해 있다는 사살이 도쿄에서의 생활을 그럭저럭 견디게 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 속에서 널 생각함으로써, 자, 태엽을 감고 오늘 하루도 성실하게 살자 하는 마음을 다지게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나는 요즘 자주 혼잣말을 하는 것 같다. 아마 태엽을 감으면서 불쑥불쑥 무엇인가 중얼거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태엽을 감지 않아도 되는 아침이다. 빨래를 끝내고 지금 방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이 편지를 다 쓰고는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어 버리면, 저녁 때까지 아무런 할 일이 없다. 일요일엔 공부도 하지 않는다. 나는 평일의 강의 시간 짬짬이 도서실에서 착실하게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일요일이라고 해서 달리 공부할 것도 없다.
일요일 오후는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그리고 고독하다. 나는 혼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한다. 네가 도쿄에 있었을 무렵의 일요일에 너와 둘이서 거닐었던 길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볼 때도 있다. 네가 입고 있던 옷가지들도 매우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일요일 오후엔 나는 정말로 여러 가지 기억들을 되살리곤 한다.
레이코 여사에게도 안부 전해 주기 바란다. 밤이 되면 그녀의 기타 소리가 한없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나는 편지를 다 써서, 2백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우체통에 넣었다. 그리곤 동네 제과점에서 계란 샌드위치와 콜라를 사들고, 공원 벤치에 가서 그걸로 점심을 대신했다.
공원에서는 아이들이 야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하늘은 점점 푸르르고 드높아져, 언뜻 우러러보니 비행기가 남기고 간 구름이 전철의 궤도처럼 두 줄기 평행선을 긋고 서쪽으로 뻗어 가고 있었다.
내 가까이로 굴러온 소프트볼을 던져 주니까 아이들이 모자를 벗어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 야구가 그렇듯 포볼과 도루가 많은 게임이었다.
오후가 되자 나는 방으로 돌아와 책을 읽었고, 책에 집중할 수 없게 되면 천장을 올려다보며 미도리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부친은 정말로 나에게 미도리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물론 그가 정말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아마 그는 어쩌면 나를 다른 누구와 착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는 찬비 내리는 금요일 아침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제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확인 할 방법은 없게 되었다. 아마도 숨을 거둘 때의 그는 한층 더 작게 오므라들어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상상했다. 그리고 소각로 속에서 한 줌의 재가되어 버렸을 것이라고.
그가 그 뒤에 남긴 것이란 우중충한 상점가에 있는 구석진 책방과 두 명의 - 적어도 그중의 하나는 약간 별스러운 - 딸뿐이었다. 그의 인생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병원의 침대 위에서 절개되어 혼탁해진 머리를 안고, 도대체 어떠한 생각으로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미도리 부친의 일을 생각하고 있으려니까 차츰 처량한 기분이 들어, 나는 서둘러 옥상의 빨래를 거둬들이고 신주쿠로 나가 거리를 거닐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붐비는 일요일의 거리는 나를 안정시켜 주었다. 나는 통근 전철처럼 혼잡한 기노쿠니야 서점에서 포크너의 8월의 빛을 사들고, 가급적 소리가 클 듯싶은 재즈 다방으로 찾아 들어가 오네트 콜만이라든가 베드 파웰의 레코드를 들으면서, 뜨겁고 진하나 맛이 없는 커피를 마셨고, 방금 산 책을 읽었다.
다섯 시 반에 나는 책을 덮고 다방을 나와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이런 일요일을 앞으로 몇십 번, 몇백번 겪게 될 것인가, 하고 문득 생각했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독한 일요일, 하고 나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일요일에는 나는 태엽을 감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