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Norwegian Wood)
무라카미 하루키
제1장 나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서른일곱 살이던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 거대한 비행기는 두터운 비구름을 뚫고 내려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11월의 차가운 비가 대지를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고, 비옷을 걸친 정비공들, 민둥민둥한 공항 빌딩 위에 나부끼는 깃발, BMW의 광고판 등 이런저런 것들이 플랑드르파의 음울한 그림의 배경처럼 보였다. 아, 또 독일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금연등이 꺼지고 기내의 스피커에서 조용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떤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이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언제나처럼 나를 어지럽혔다. 아니, 다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며 뒤흔들었다.
나는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아 몸을 움츠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그대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독일인 스튜어디스가 내 앞으로 오더니 어디가 불편하냐고 영어로 물었다. 괜찮다, 좀 현기증이 났을 뿐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스튜어디스는 생긋 웃으며 가버렸고, 음악은 빌리 조엘의 곡으로 바뀌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북해의 상공에 떠 있는 어두운 구름을 바라보면서,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었거나 또는 사라져 간 사람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난 기억들을.
비행기가 완전히 멈춰, 사람들이 좌석 벨트를 풀고 가방과 옷가지 등을 선반에서 내리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줄곧 그 초원 속에 있었다. 나는 풀 냄새를 맡았고,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을 느꼈으며, 새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1996년 가을이었고, 내가 곧 스무 살이 될 무렵이었다.
아까의 스튜어디스가 다시 와서 내 옆에 걸터앉더니 이제 좀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어쩐지 좀 외로워졌을 뿐이에요(It's all right now, thank you. I only felt lonely, you know)."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요, 저도 가끔 그러니까요(Well, I feel same way, same thing, once in a while. I know what you mean)."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흔들며 좌석에서 일어나 매우 유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빌겠어요. 안녕히(I hope you'll have a nice trip. Auf Wiedersehen)!"
"안녕히(Auf Wiedersehen)!" 하고 나도 말했다.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버린 지금에 와서도 나는 그 초원의 풍경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며칠인가 계속된 부드러운 비로, 여름 동안 쌓였던 먼지가 말끔히 씻겨 내려진 산은 깊고 선연한 푸르름을 머금고 있었고, 10월의 바람은 억새잎을 한들한들 흔들고 있었으며, 기다란 그름이 얼음장처럼 투명한 푸른 창공에 떠 있었다. 하늘이 너무나 높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아파 올 지경이었다. 바람은 초원을 건너 그녀의 머리카락을 잔잔히 흔들고는 잡목 숲으로 빠져나갔다.
나뭇잎들이 사각거리고,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다른 세계의 입구로부터 들려 오는 것만 같은, 희미하고 어렴풋한 울음소리였다. 그밖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어떤 소리도 우리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어느 한 사람과도 마주치질 않았다. 다만 빨간 새 두 마리가 초원 속에서 무엇인가 겁먹은 듯 날아올라, 잡목 숲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걸어가면서 나오코는 내게 우물 이야기를 해 주었다.
기억이란 건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다. 거기에 실제로 내가 있었을 때 나는 그런 풍경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특별히 인상적인 풍경이라는 느낌도 없었고, 더구나 18년 후에 그 풍경을 선명하게 기억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때 나에겐 그런 풍경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으며, 그때 내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건 아름다운 한 여인에 대해 생각했고, 나와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는 무엇을 보든, 무엇을 느끼든, 무엇을 생각하든, 결국 모든 것은 부메랑(역주 : 갈고리 모양의 장난감으로, 던지면 되돌아온다)처럼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그런 나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랑은 몹시 복잡한 곳으로 나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주위의 풍경에 마음을 쓸 여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나의 뇌리에 맨 먼저 떠오르는 건 그 초원의 풍경이 아닌가. 풀 냄새, 차가움을 머금은 부드러운 바람, 산 능선, 개 짖는 소리, 그런 것들이 우선 먼저 떠오른다. 너무도 선명하게. 그것들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손을 뻗으면 그 하나하나가 손가락으로 만져질 것만 같다.
그러나 그 풍경 속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다. 그녀도 나도 없다. 우리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토록 소중해 보이던 그때의 그녀와 나, 그리고 나의 세계는 모두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그래, 지금의 나로선 그녀의 얼굴을 바로 떠올릴 수조차 없는 것이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배경뿐이다.
물론 시간만 들이면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수는 있다. 조그맣고 차가운 손, 산뜻하고 곧은 머리결, 부드럽고 동그란 귓불, 그 바로 밑에 있는 조그마한 검은 점, 겨울이면 자주 걸치고 다니던 우아한 카멜 코트, 언제나 상대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질문하는 버릇, 이따금 무슨 영문인지 떨리는 듯하던 목소리(마치 강풍이 부는 언덕 위에서 재잘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이미지를 하나하나 쌓아 가면 문득 자연스레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먼저 옆얼굴이 떠오른다. 그건 아마도 나와 그녀가 언제나 나란히 걸어다녔던 탓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건 언제나 그녀의 옆얼굴이다.
그다음에 그녀는 나를 보며 생긋 웃고, 가웃이 고개를 기울여 말을 걸고, 내 눈을 들여다본다. 마치 맑은 샘물을 번뜩 헤치며 가는 작은 물고기의 그림자라도 찾아내려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식으로 내 머릿속에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기까지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거기에 필요한 시간은 점점 길어지게 된다. 슬픈 일이긴 하지만 그건 사실이다.
처음엔 한 5초면 떠올랐는데, 그것이 10초가 되고 30초가 되고 1분이 된다. 마치 저녁 무렵의 그림자처럼 그것은 자꾸만 길어진다. 그리고 마침내는 땅거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 나의 기억은 확실히 그녀가 서 있던 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마치 내가 그 옛날 나 자신이 서 있던 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풍경만이, 그 10월의 초원 풍경만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되풀이 되풀이되어 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 풍경은 나의 머리 어느 한 부분을 집요하게 걷어차고 있다.
이봐, 일어나지 못해? 난 아직도 여기 있어. 일어나! 일어나서 생각해 봐! 왜 내가 아직도 여기 있는가 하는 그 이유를. 아픔은 없다. 아픔은 전혀 없다. 걷어찰 때마다 공허한 소리만 날 뿐이다. 그리고 그 소리마저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이 결국은 사라져 버렸던 것처럼.
그러나 함부르크 공항의 루프트한자 비행기 안에서 그것은 여느 때보다도 오래, 여느 때보다도 세차게 내 머리를 걷어차고 있었다. 일어나라, 생각해 보라, 하고.
그래서 나는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무슨 일이든 글로 써 보지 않고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무슨 이야길 했던가?
그렇다. 그녀는 내게 들판에 있는 우물 이야길 했다. 그런 우물이 정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 안에 밖엔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이미지나 상징이었는지도 모른다-그 어두운 나날에 그녀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실을 뽑듯 자아낸 다른 수많은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그녀가 그 우물 이야기를 해준 다음부터, 나는 그 우물 모습 없이는 초원의 풍경을 떠올릴 수가 없게 되었다. 실제로 내 눈으로 본 것도 아닌 우물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선 분리할 수 없는 일부로 그 풍경 속에 뚜렷하게 붙박혀 있다.
나는 그 우물의 모습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물은 초원이 끝나고 잡목 숲이 시작되는 바로 그 경계선에 있다. 땅밑으로 빠끔히 열린, 지름 1미터가량의 어두운 구멍을 풀들이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둘레에는 목책도, 높다란 돌담도 없다. 다만 그 구멍만이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가장자리의 돌들은 비바람을 맞아 희끄무레하게 변색됐고, 여기저기 틈이 벌어지고 무너져 내려 있다. 작은 녹색 도마뱀이 그런 돌 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몸을 기울여 그 구멍 속을 들여다보아도 그밖엔 아무것도 안 보인다.
나로서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건, 그 우물이 아무튼 지독하게 깊다는 사실뿐이다. 어림할 수조차 없을 만큼 깊다. 그리고 그 구멍 속에는 암흑이 - 이 세상 온갖 종류의 암흑을 응축해 놓은 것 같은 암흑이-가득 차 있다.
"그건 정말-정말 깊단 말에요" 하고 그녀는 신중하게 어휘를 골라 가면서 말했다.
그녀는 가끔씩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다. 정확한 어휘를 골라 찾으면서 아주 천천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말 깊어요. 하지만 그것이 어디에 있는진 아무도 알지 못해요. 이 들판 어딘가에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내 얼굴을 보면서 정말이에요, 하듯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잖아. 어딘가에 깊은 우물이 있다, 그런데 그게 어디에 있는진 아무도 모른다......그럼 거기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어쩔 수 없겠죠. 쉬익-풍덩. 그걸로 끝장이죠, 뭐."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
"가끔 일어나요. 2년 또는 3년에 한 번쯤......어떤 사람이 갑자기 없어져서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근처 사람들은 말하죠. 들판의 우물에 빠진 거라구요."
"별로 좋은 죽음은 못 되는 것 같군."
"끔찍한 죽음이죠"라고 말하고, 그녀는 외투에 붙은 풀잎들을 털었다. "그냥 목뼈라도 부러져 깨끗이 죽어 버리면 좋겠지만, 어쩌다가 발을 삔 정도로 끝난다면 정말 난처하거든요. 소리 소리 질러 보아도 누구 하나 듣는 사람도 없고, 누군가 발견해 줄 가망도 없구요. 사방엔 지네나 거미가 우글우글하고, 거기서 죽어 간 사람들의 해골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어둡고 침침하고......그리고 저 높이 머리 위엔 빛의 동그라미가 마치 겨울 달처럼 조그맣게 떠 있겠죠. 그런 곳에서 혼자서 서서히 죽어 가는 거예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군. 누군가가 찾아내어 울타리를 만들어야겠어."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 우물은 발견되지 않아요. 그러니 제대로 난 길에서 벗어나면 안 돼요."
"그래야겠지"
그녀는 주머니에서 왼손을 꺼내더니 내 손을 쥐었다.
"하지만 걱정 없어요. 당신은 아무 염려 말아요. 당신은 어두운 밤에 이 주변을 무작정 걸어 다닌다 해도, 절대로 그 우물에 빠지진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당신과 이렇게 꼭 붙어 있는 한 나도 절대로 빠지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절대로."
"어떻게 그걸 알지?"
"난 알 수 있어요. 그냥 알아요."
그녀는 내 손을 꼭 쥔 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난 잘 알아요. 이유라든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느끼는 거예요. 말하자면 지금 이렇게 당신과 꼭 붙어 있으면 말이에요, 난 전혀 무섭지 않아요. 어떤 나쁜 일이든 어두운 일이든, 나를 유혹하려 하질 않는 거예요."
"그럼 문제는 간단하군. 줄곧 이렇게 하고만 있으면 그만일 테니까."
"그거-진심이에요?"
"물론 진심이지"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두 손을 내 어깨 위에 얹은 채,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는 묵직한 액체가 이상한 모양의 소용돌이를 그려내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발돋움하더니 내 볼에다 살며시 볼을 대었다. 그것은 한순간 가슴이 막혀 버릴 만큼 뜨겁고 멋진 동작이었다.
"고마워요."
"천만에."
"그렇게 말해 줘서 정말 기쁘지 뭐예요, 정말" 하고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어째서?"
"그건 안 될 일이니까요. 잔혹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말을 하다가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대로 걷기만 했다. 갖가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안 나는, 역시 말없이 그녀의 곁에서 묵묵히 걷기만 했다.
한참 뒤에야 그녀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건......올바른 일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당신에게도, 또 내게도."
"왜 올바르지 못한 일이지?" 하고 나는 조용히 물었다.
"글쎄요...... 누가 누군가를 영원히 지킨다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안 그래요? 가령 내가 당신과 결혼을 했다고 쳐요. 그럼 당신은 회사에 다니겠지요. 그럼 당신이 회사에 있는 동안엔 도대체 누가 나를 보호하고 지켜 줄까요? 당신이 출장을 가 있는 동안엔 또 누가 나를 지켜 주지요? 그러니 나는 죽을 때까지 당신과 붙어 다녀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그런 것은 좋지 못해요. 그런 것은 인간관계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그리고 언젠가 당신은 내게 싫증을 느끼고 말할 거예요. '내 인생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여자를 돌보는 일뿐이란 말인가' 하고. 난 그런 건 싫어요. 그래서는 내가 안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그런 일이 일생 동안 계속되는 건 아냐. 언젠가는 끝나. 그것이 끝나는 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거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그때는 어쩌면 나오코가 나를 도와주게 될지도 모르지. 우리는 손익 계산표에 맞추어 살고 있는 건 아냐. 만약 나오코가 지금 당장 나를 필요로 하면 나를 쓰면 되는 거야. 안 그래? 어째서 그런 식으로 모든 일을 어렵게 생각하지? 어깨의 힘을 좀 빼라구.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런 눈으로 사물을 보게 되는 거야. 어깨에서 힘을 좀 빼면 몸이 가볍게 돼."
"어째서 그런 식으로 말하죠?" 하고 그녀는 몹시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뭔가 아주 잘못된 말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죠?" 하고 그녀는 꼼짝도 않고 발밑의 땅을 보면서 말했다. "어깨 힘을 빼면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 쯤은 나도 알아요. 그건 말을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구요. 알겠어요? 내가 지금 어깨 힘을 뺀다면 산산조각이 난단 말이에요. 나는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만 살아왔고, 지금도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한 번 힘을 빼면 다시는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다구요. 난 산산조각이 나서 어딘가로 날려가 버릴 거예요. 어째서 그걸 모르는 거죠? 그걸 모르면서 어떻게 나를 돌봐 준다는 말을 할 수가 있죠?"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난 지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깊은 혼란에 빠져 있어요. 어둡고 차갑고 혼란스럽고......어째서 그때 나와 잠자리를 함께 한 거죠? 왜 나를 내버려두지 못했지요?"
우리는 너무나도 조용한 소나무 숲속을 걷고 있었다. 길에는 늦여름에 죽은 매미가 바삭바삭하게 말라 흩어져 있어서, 그것이 구두밑에서 사각사각 소리를 내었다. 우리는 마치 잃어버린 물건이라도 찾듯이 땅을 보면서 천천히 소나무 숲속을 걸었다.
"미안해요."
그녀가 내 팔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몇 번인가 고개를 저었다.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어요. 내가 한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정말 미안해요. 난 다만 내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을 뿐이니까요."
"난 아직은 정말로 나오코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진 않아.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무엇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지. 하지만 만일 시간만 있다면 나는 나오코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나오코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는 거기에 멈춰 서서 정적 속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구두 끝으로 죽은 매미나 솔방울을 굴리기도 했고,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우러러보기도 했다. 그녀는 외투 주머니에다 두 손을 집어넣은 채, 무엇을 눈여겨보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생각엔가 골몰해 있었다.
"이봐요, 와타나베. 날 좋아해요?"
"물론이지."
"그럼 내 부탁을 두 가지만 들어줄래요?"
"세 가지라도 들어주지."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두 가지면 그만이에요. 두 가지면 충분해요. 하나는 당신이 잃게 날 만나러 와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해요. 정말 기쁘고, 정말 구제받은 거 같아요. 혹시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해도 말이에요."
"또 만나러 올 거야. 다른 하나는 뭐지?"
"나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내가 존재해서 이렇게 당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라도 기억해 줄래요?
"물론 언제까지라도 기억하지."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드는 가을 햇살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하늘하늘 춤추고 있었다.
또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그것은 조금 전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들려 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작은 언덕 같은 곳으로 오르더니 소나무 숲에서 나와, 비스듬한 비탈길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녀의 두세 걸음 뒤에서 걸어갔다.
"이쪽으로 와, 주위에 우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녀의 등 뒤에서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방긋이 웃으며 내 팔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남은 길을 둘이서 나란히 걸어갔다.
"정말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을 거죠?"
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언제까지라도 기억하고말고. 내가 나오코를 잊을 까닭이 없지."
그러나 기억은 확실히 멀어져 가는 것이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이미 잊어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면서 글을 쓰고 있으면, 나는 가끔 몹시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고 만다. 어쩌면 내가 가장 중요한 부분의 기억을 상실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아 문득 들기 때문이다. 내 몸속에 기억의 변두리라고나 부를 만한 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소중한 기억들이 모두 거기에 싸여 부드러운 먼지로 변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그러나 어쨌든 지금으로선 그것이 내 손에 넣을 수 있는 전부인 것이다. 이미 엷어져 버렸고, 지금도 시시각각 엷어져 가는 그 불완전한 기억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뼈라도 핥는 심정으로 나는 이 글을 써 나가고 있다.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선 이러는 수밖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오래 전, 내가 아직 젊고 그 기억이 훨씬 선명했던 무렵, 나는 그녀에 관해서 글을 써보려고 시도한 적이 몇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엔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첫 한 줄만 나와 준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든 술술 써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한 줄이 아무리 애써도 나와 주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선명한 지도가, 선명함이 지나쳐 때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젠 안다. 결국에는 - 하고 나는 생각한다.-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상념밖엔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나오코에 관한 기억이 내 안에서 희미해져 가면 갈수록, 나는 보다 더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그녀가 나를 향해 '나를 잊지 말아요' 하고 당부했는지 그 이유도 나는 지금 알 것 같다.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안에서 그녀에 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바로 그렇기때문에 그녀는 나를 향해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를 언제까지라도 잊지 말아 줘요. 내가 존재했다는 걸 기억해 줘요."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서글프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를 사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2장 죽음이 찾아왔던 열일곱 살의 봄날
옛날 일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20년 전쯤의 일이다. 그 당시 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나는 열여덟 살이었다. 도쿄에 대해 무엇 하나 아는 게 없었고 혼자서 사는 것도 처음이어서, 부모님이 그 기숙사를 구해 주었다. 거기라면 식사도 해결되고 갖가지 시설도 갖춰져 있어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열여덟 살 소년일지라도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다. 기숙사의 생활비는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적게 들었다. 어떻든 이불과 전기스탠드만 있으면 무엇하나 사들일 필요가 없었으니까.
나는 되도록 아파트를 빌려 혼자 마음 편히 살고 싶었지만, 사립 대학의 입학금이며 수업료며 다달이 드는 생활비를 생각하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고 부모님께 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도 결국은, 사는 곳쯤 어딘들 어떠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기숙사는 전망이 좋은 높은 지대에 있었다. 대지는 넓었고, 주위는 높은 콘크리트 담장으로 싸여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거대한 느티나무가 솟구쳐 있었는데, 수령이 적어도 150년은 된다고 했다. 나무 밑에 서서 위를 쳐다보면, 하늘은 온통 그 푸른 잎들로 가려 보이지 않았다.
콘크리트 포장길은 그 느티나무를 우회하듯 구부러져, 거기서 다시 기다란 직선으로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다. 마당 양쪽에는 철근 콘크리트 3층 건물 두 동이 나란히 서 있다. 창이 많이 달린 커다란 건물인데, 아파트로 개조한 교도소거나 교도소를 개조한 아파트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결코 불결하진 않으며 어두운 인상도 없다. 활짝 열어젖힌 창문 쪽에선 라디오 소리가 들린다. 창문의 커튼 어느 방이나 똑같은 크림색으로 빛이 바래더라도 별로 눈에 띄지 않을 무난한 색깔이다.
포장길을 곧바로 걸어가면 2층으로 된 본관 건물이 있다. 12층에는 식당과 커다란 목욕탕, 2층에는 강당과 몇 개의 집회실, 그리고 무엇에 사용하는지는 몰라도 귀빈실까지 있다. 본관 건물 옆에는 3층으로 된 제 3 기숙사 건물이 있다.
초록빛 잔디로 뒤덮인 드넓은 마당에는 스프링쿨러가 햇볕을 반사하면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분관 건물 뒤편에는 야구와 축구 겸용 운동장이 있고, 테니스 코트도 여섯 개나 있다. 있을 건 다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기숙사의 유일한 문제점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수상한 냄새가 있었다. 기숙사는 지극히 우익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한 정체불명의 재단 법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으며, 그 운영 방침은 - 물론 내 눈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지만 - 매우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기숙사 안내 팜플렛과 기숙사 생활 규칙을 읽어보면 그 대충을 알 수 있다. '교육의 근간을 추구하여, 국가에 있어서 유용한 인재의 육성에 힘쓴다.'라는 것이 이 기숙사의 창설 정신이며, 그래서 '그 정신에 찬성 여러 재계 인사들이 사재를 털어......' 라는 것이 겉으로 내세운 얼굴인 셈인데, 그 이면의 일은 하나같이 확실하지 않다.
정확한 것은 어느 누구도 모른다. 단순히 세금을 조금 내기 위한 수법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이름을 파는 행위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며, 기숙사 설립이란 명목으로 이 일등지를 사기나 다름없는 수법으로 손에 넣은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니, 더욱더 깊은 속셈이 있을 거라는 사람도 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이 기숙사의 출신자로 정재계에 지하 세력을 만들고자 하는 게 설립자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기숙사에는 학생들 중의 톱 엘리트들을 모아 놓은 특권적인 클럽 같은 게 있어서, 나도 자세한 건 잘 알지 못하지만 한 달에 몇 번씩 그 설립자를 참석시켜 연구회 같은 걸 열고 있으며, 그 클럽에 들어가 있는 한 취직 걱정은 없다고들 했다.
그런 설에 대한 옳고 그름을 나로선 판단할 길이 없지만, 그러한 설들은 '어쨌든 여기는 수상쩍은 냄새가 나는 곳이다'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아무튼 1968년 봄부터 1970년 봄까지 2년 동안 나는 그 수상쩍은 기숙사에서 지냈다. 어째서 그런 수상쩍은 곳에서 2년 동안이나 있었느냐고 물어도 대답할 수가 없다. 일상생활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우익이든 좌익이든, 위선이든 위악이든 그건 그다지 대수로운 차이가 없는 것이다.
기숙사의 하루는 장엄한 국기 게양과 함께 시작된다. 물론 국가도 울린다. 스포츠 뉴스에서 행진곡을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국기 게양에서 국가를 떼놓을 수는 없다. 국기 게양대는 마당 한가운데에 있어서 어느 동의 창문에서도 보이게끔 되어있다.
국기 게양은 동쪽 동-내가 들어 있는 기숙사다-사감의 임무다. 키가 훤칠하고 눈매가 날카로운 예순 살 안팎의 남자였다. 사뭇 뻣뻣해 보이는 머리에는 간간이 흰머리가 섞여 있고, 볕에 탄 목줄기에는 기다란 상처 자국이 있다.
그 사감이 육군 나카노 학교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역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그의 곁에는 국기 게양을 도와주는 조수 같은 학생이 늘 따랐는데, 그 학생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없다. 짧게 깎은 머리에다 늘 학생복을 입고 있는 그의 이름도 모르고 어느 방에서 생활하는지도 모른다. 식상에서든 목욕탕에서든 한 번도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다. 진짜 학생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다. 하지만 학생복을 입고 있으니 역시 학생일 것이다. 그렇게 밖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 조수는 문제의 '나카노 학교'와는 반대로 키가 작고 오동통하며 피부가 희다. 이 음산하기 짝이 없는 두 사람이 매일 아침 여섯 시에 기숙사 마당에서 국기를 게양하는 셈이다.
기숙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나는 호기심에서 일부러 여섯 시에 일어나 이 애국적 의식을 곧잘 구경하곤 했다.
아침 여섯 시면 라디오의 시보가 울림과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모습이 마당에 나타난다. '학생복'은 물론 학생복 차림에 검정 가죽구두, '나카노 학교'는 잠바에다 흰색 운동화 차림이다. '학생복'은 얇은 오동나무 상자를 들고 있다. '나카노 학교'는 소니 제품인 휴대용 녹음기를 들고 있다. '나카노 학교'가 녹음기를 게양대의 발밑에 놓고, '학생복'이 오동나무 상자를 연다. 상자 속에는 반듯하게 개어 넣은 국기가 들어 있다. 그리고 '학생복'이 '나카노 학교'에게 정중하게 국기를 내민다. '나카노 학교'가 도르래 줄에 국기를 매고, '학생복'이 녹음기의 스위치를 누른다.
기미가요(일본 국가)가 울리는 동안, 국기는 매끄럽게 깃봉을 따라 올라간다.
"사사레 이시노오-"하는 대목에서 깃발은 깃봉의 바로 중간에 이르고, "마아데-"하는 대목에 이르면 정상에 닿는다. 그러면 두 사람은 등을 꼿꼿이 펴고는 '차려' 자세로 국기를 똑바로 올려다본다. 하늘이 맑게 개고 바람이 알맞게 분다면 이거야말로 굉장한 광경이다.
저녁 무렵 국기 하강식 때도 대체로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데, 단지 그 순서만 아침과 정반대일 뿐이다. 국기는 매끄럽게 미끄러져 내려와 오동나무 상자 속에 간직된다. 때문에 밤에는 국기가 펄럭이지 않는다.
밤에는 어째서 국기가 내려지는지, 나는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밤사이에도 국가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고,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선로 공사장 인부들이며 택시 기사, 그리고 바의 호스티스, 야근하는 소방대원, 빌딩의 야간 경비원들....... 그처럼 밤에 일을 하는 사람들이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무래도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사실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아마 누구도 그런 일엔 관심조차 없을 테니까. 관심을 가진다 해도 아마 나 정도일 것이다. 게다가 나 역시 어쩌다 문득 이렇게 생각했을 뿐, 그것을 깊이 파고들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기숙사의 방 배치는 원칙적으로, 1, 2학년은 한 방에 두 명씩, 3, 4학년은 독방을 쓰도록 되어 있었다. 두 명이 거처하는 방은 다다미 6장짜리 방을 길게 한 정도의 넓이로서, 안쪽 벽에는 알루미늄 틀 창문이 달려 있었고, 창문 앞에는 서로 등을 대고 공부할 수 있도록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입구 왼쪽에는 철제 2단 침대가 있었는데, 가구들은 모두 단순하고 탄탄하며 묵중한 것들이었다.
책상과 침대 이외에는 사물함이 두 개, 자그마한 커피 테이블이 하나, 그리고 붙박이 선반이 있었다. 아무리 좋게 보아준다 해도 시적인 공간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대체로 선반에는 트랜지스터라디오와 헤어드라이어, 전기 포트, 그리고 전열기와 인스턴트커피 혹은 홍차, 각설탕, 라면을 끓이기 위한 냄비와 간단한 식기가 몇 개 갖추어져 있는 게 보통이었다.
회칠을 한 벽에는 대중 잡지 '헤이본 펀치'의 핀업(인기 있는 미인사진)이나 어디선가 뜯어 온 포르노 영화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개중에는 장난으로 돼지가 교미하는 사진을 붙여 놓은 학생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예외 중의 예외며, 벽에 붙어 있는 것은 거의가 벌거벗은 여자나 젊은 여가수, 여배우의 사진들이었다. 그리고 책꽂이에는 교과서며 사전, 소설책 따위가 꽂혀 있었다.
남자들만 있는 방이라서 대체로 몹시 지저분했다. 휴지통 밑바닥에는 곰팡이 핀 귤 껍질들이 들러붙어 있고, 재떨이로 쓰는 빈 깡통에는 담배꽁초가 10센티미터나 쌓여 있어서, 그것이 타오르면 커피나 맥주를 끼얹어 끄기 때문에 시큼하고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
식기들은 어느 것이나 덕지덕지 때투성이에다 뭔지 모를 것들이 달라붙어 있고, 방바닥에는 라면 봉지하며 빈 맥주병, 그리고 무슨 뚜껑 같은 이런저런 것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 빗자루로 쓸어 휴지통에 버린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생각지 않는 일이다.
바람이 불면 바닥에서 먼지가 보얗게 피어오른다. 어떤 방에서건 고약한 냄새가 떠돈다. 방에 따라 그 냄새가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냄새를 구성하고 있는 성분은 모두가 같은 땀 냄새와 먼지다.
세탁물은 모두가 하나같이 침대 밑에 쑤셔 넣어 둔다. 정기적으로 이불을 볕에 말리는 학생도 전혀 없어서, 이불은 언제나 땀에 흠뻑 절어 구제 불능의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그런 카오스(천지창조 이전의 혼돈이나 무질서) 속에서 치명적인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은 것을 나는 지금도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다.
거기에 비하면 내 방은 시체 안치소만큼이나 청결했다. 바닥에는 먼지 하나 없고 창문 유리에도 티 하나 없으며, 이불은 일주일에 한 번씩 볕을 쪼였고, 연필은 연필꽂이에 질서 정연하게 꽂혀 있었으며, 커튼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빨았다. 내 동거인의, 병적일 정도의 결벽증 때문이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에게 "저 녀석은 커튼까지 빤다구"라고 말했지만 누구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커튼은 이따금씩 빨아야 한다는 것을 누구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커튼이란 반영구적으로 창문에 매달려 있는 것으로만 그들은 믿고 있었다.
"저 녀석은 성격이 이상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리고 모두들 '나치'나 '돌격대'로 부르게끔 되었다.
내 방에는 핀업 걸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 암스테르담 운하 사진에 붙어 있었다. 내가 누드 사진을 붙이니까, 그가 "이봐, 와타나베. 나, 난 이런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라고 하면서 그것을 떼어 버리고 그 대신 운하 사진을 붙여 놓았던 것이다.
나도 뭐 특별히 누드 사진을 붙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별다른 이의는 제기 하지 않았다. 내 방에 놀러 온 친구들은 다들 그 운하 사진을 보고는, "아니 이건 뭐야?"하고 물었다.
"돌격대는 이걸 보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한다구."
나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모두들 정말로 그 말을 믿어 버렸다. 그리고 모두들 너무나 쉽사리 그걸 믿어 버리는 바람에 나까지도 정말 그럴지 모르겠다고 믿어 버리게끔 되었다.
그들은 '돌격대'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는 사실을 놓고 나를 동정했지만, 나 자신은 그다지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내 주변을 깨끗하게 하고 있는 한 그는 나에 대해 일체 간섭하지 않았으므로 나로선 오히려 마음이 편할 정도였다.
청소는 그가 도맡아 했고, 이불도 그가 내다 널었으며 쓰레기도 그가 처리해 주었다. 내가 바빠서 사흘쯤 목욕을 거르면 킁킁대며 냄새를 맡아보고는 목욕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고, 이발소에 갈때가 되었다느니, 수염을 깎아야 되겠다느니 하는 말을 해주곤 했다.
난처한 것은 벌레라도 한 마리 발견하면 온 방안에 살충 스프레이를 뿌려대는 일인데, 그럴 때면 나는 옆방의 '카오스'속으로 대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격대'는 어느 국립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난 말이야, 지, 지, 지도 공부를 하고 있어."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도를 좋아하니?" 하고 내가 물었다.
"그래, 대학을 나오면 국토지리원에 들어가서 말이지, 지, 지도를 만들 거야."
과연 세상엔 여러 가지 희망이 있고 인생의 목적이 있구나 싶어, 나는 새삼스레 감탄했다. 그것은 도쿄에 와서 내가 처음으로 감탄한 일 중의 하나였다. 하긴 지도 만들기에 흥미와 열의를 가진 사람이 조금이라도 없다면-너무 많이 있을 필요도 없겠지만-그건 좀 곤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도'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더듬거리는 사람이 국토지리원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쩐지 좀 안 어울렸다. 그는 경우에 따라 말을 더듬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지도'라는 말만 나오면 백 퍼센트 더듬거렸다.
"너, 넌 뭘 전공하고 있지?" 하고 그가 물었다.
"연극"
"연극이라니, 신파극 같은 거?"
"아냐, 그런게 아니고 말이지, 희곡을 읽거나 하면서 연구를 하는 셈이지. 라신이라든가 이오네스코라든가 셰익스피어라든가......."
"셰익스피어 이외의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하고 그는 말했다. 나 역시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다. 다만 강의 요강에 그렇게 적혀 있었을 뿐이다.
"아무튼 그런 걸 좋아하는 모양이지?"
"별로 좋아하는 건 아냐."
그 대답은 그를 혼란스럽게 한 듯 했다. 혼란에 빠지면 그는 더듬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나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상관없었던 거지"하고 나는 설명했다. "민족학이든 동양사든 무엇이든 상관없었어. 다만 어쩌다 마음이 내킨 것이 연극이었다, 그것뿐이야."
하지만 그 설명도 물론 그를 이해시키지는 못했다.
"잘 모르겠는데......."
그는 정말로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내, 내 경우는 지, 지도가 좋아서 지, 지, 지도를 공부하거든. 그 때문에 일부러 도쿄의 대학에 들어왔고, 하, 학비 송금을 받고 있는 거야. 그런데 너는 그렇지가 않다니......"
그가 한 말이 타당한 논리였다. 나는 설명하기를 단념했다.
그리고 우리는 성냥개비로 제비를 뽑아 2단으로 된 침대의 아래위를 결정했다. 그가 위고 내가 아래였다.
그는 늘 흰 셔츠에 검은 바지, 그리고 감색 스웨터 차림이었다. 머리는 짧게 깎았고, 키가 컸으며, 광대뼈가 툭 불거져 있었다. 학교에 갈 때는 언제나 학생복을 입었다. 구두도 가방도 하나같이 까만색이었다. 보기만 해도 우익 학생의 모양새였고, 그렇기때문에 주위 친구들이 그를 돌격대로 불렀던 것이지만, 사실 그는 정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옷을 선택하는 게 귀찮아 늘 그런 차림으로 다닐 뿐이다.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해안선의 변화라든가, 새로운 철도 터널의 완성이라든가 하는 그런 종류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런 일이 화제에 오르면 그는 더듬거리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이쪽에서 달아나거나 잠들어 버릴 때까지 계속 떠들어 댔다.
매일 아침 여섯 시면 그는 '기미가요'를 자명종 시계 삼아 일어났다. 이거 보란 듯이 수선을 떠는 저 국기 게양식도 전혀 쓸모 없는 짓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옷을 입은 다음에 화장실을 들어가 세수를 한다. 세수하는 데에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빨을 하나하나 뽑아서 닦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방으로 돌아오면 탁탁 소리를 내면서 구겨진 수건을 팽팽하게 펴서는 스팀 위에 널어 말리고, 칫솔과 비누를 선반 위의 제자리에 정리한다. 그리고 나서 라디오를 켜고는 라디오 체조를 시작한다.
나는 대개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아침에는 여덟 시경까지 푹 자기 때문에, 그가 일어나서 부스럭거리거나 라디오 체조를 시작한다.
나는 대개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아침에는 여덟 시경까지 푹 자기 때문에, 그가 일어나서 부스럭거리거나 라디오를 켜놓고 체조를 시작해도 정신없이 잠을 잔다. 하지만 그럴 때도 라디오 체조가 도약 부분에 다다를 때엔 반드시 잠에서 깨어난다. 깨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뛸 때마다 - 그것도 참 높이도 뛰었다 - 그 진동으로 해서 침대가 삐걱삐걱 오르락내리락했기 때문이다.
사흘 동안을 나는 꾹 참았다. 공동생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흘째 되는 날 아침,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미안하지만 라디오 체조는 옥상이나 어느 다른 곳에서 하는 게 좋겠어." 하고 나는 딱 부러지게 말했다. "그거 시작하면 잠이 다 깨 버린다구."
"하지만 벌써 여섯 시 반이야"하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알고 있어, 그건. 여섯 시 반이란 말이지? 여섯 시 반은 내게는 아직도 잠을 자는 시간이야. 왜 그렇다는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돼 있다구."
"곤란해. 옥상에서 하면 3층 애들이 불평할 거야. 여긴 아래층이 창고여서 아무도 불평할 사람이 없지만."
"그럼 마당에 나가 하라구, 잔디 위에서."
"그것도 안 돼. 내, 내 라디오는 트랜지스터가 아니거든. 저, 전원 없이는 사용할 수 없고, 또 라디오 음악 없이 체조를 할 수는 없잖아?"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라디오는 아주 낡은 전원식이었고, 내 것은 트랜지스터였지만 FM만을 들을 수 있는 음악 전용이었다. 아이구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럼 우리 타협을 하자구"하고 나는 말했다. "라디오 체조는 해도 좋아. 그 대신 그 뛰는 대목은 빼줘. 그건 너무 시끄러우니까. 그럼 됐지?"
"뛰, 뛰다니?"하고 그는 깜짝 놀란 듯 물었다. "그게 뭐니?"
"뛰는게 뛰는 거지. 그 쿵쿵 뛰는 것 말이야."
"그런 것 없는데......"
나는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이젠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꺼낸 말은 확실하게 해둬야겠다 싶어서, 나는 실제로 NHK라디오 체조 첫 부분의 멜로디를 부르며 방바닥 위에서 쿵쿵 뛰어 보였다.
"보라구, 이거야. 분명히 있잖아?"
"그, 그래. 정말 있어. 미, 미처 몰랐어."
"그러니 그 부분만은 빼놓고 지나가는 것이 어때? 다른 대목은 다 참아 줄 테니까, 뛰는 부분만 빼서 내가 푹 자도록 해줄래?"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말했다.
"그건 안돼. 하나만 뺀다는 건 말도 안 돼. 10년을 두고 하루같이 해왔기 때문이야. 시작만 했다 하면 무, 무의식중에 전부 하게 되거든. 한 대목을 빼면 저, 전, 전부 못하게 돼."
그는 참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가장 손쉬운 것은 그 보기 싫은 라디오를 그가 없는 사이에 창문 밖으로 내동댕이쳐 버리는 것이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지옥의 뚜껑을 열어 놓은 것 같은 소동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 '돌격대'는 자기의 소지품이라면 끔찍이도 소중히 생각하는 사나이였기 때문이다.
내가 말을 잃고 멍청히 침대에 걸터앉아 있자니까 그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와,와타나베. 함께 일어나서 체조를 하면 좋을 텐데"하고 말하더니 그는 그래도 아침 식사를 하러 나가 버렸다.
내가 '돌격대'와 그의 라디오 체조 이야기를 하자 나오코는 킥킥 웃어댔다. 우스갯소리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나도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본 것은-그건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렸지만-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나와 나오코는 요쓰야 역에서 전철을 내려, 선로 옆 둑을 따라 이치가야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5월 중순경의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아침나절에 후드득후드득 오락가락하던 비도 낮이 되자 완전히 개고, 나직이 덮여 있던 음산한 비구름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쫓기듯이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산뜻한 벚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햇살을 반짝반짝 반사하고 있었다.
햇살은 이미 초여름이나 다름없었다. 스쳐 가는 사람들은 스웨터며 외투며 벗어, 어깨에 둘러메거나 팔에 걸치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는 누구나 모두 행복해 보였다. 둑 저편에 보이는 테니스 코트에서는 젊은 남자가 셔츠를 벗고 반바지 바람으로 라켓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수녀만이 까만 겨울 제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어서, 그녀들 주위에만은 여름 햇살이 아직도 미치지 않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그렇듯 두 수녀는 만족스런 얼굴로 햇볕 아래서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15분쯤 걸으니 등에 땀이 배었다. 나는 두터운 면 셔츠를 벗고 티셔츠 바람이 되었다. 나오코는 엷은 회색빛 트레이닝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 위에까지 걷어 올리고 있었다. 세탁을 해서 잘 손질한 듯 무척 느낌이 좋게 색깔이 바래 있었다.
훨씬 전에 그와 똑같은 셔츠를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러나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저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그녀에 대해서 당시, 나는 그렇게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공동생활은 어때요?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게 즐거워요?"
"잘 모르겠어. 이제 한 달이 좀 지났을 뿐이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나쁘진 않아. 적어도 견디지 못할 일은 없으니까."
그녀는 음료수대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한 모금의 물을 마시고는 바지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입을 닦았다. 그리고 몸을 굽혀 주의 깊게 구두끈을 고쳐 맸다.
"어때요, 나도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공동생활?"
"그래요."
"글쎄, 어떨까. 그런 건 생각하기 나름이야. 거북스런 일이 어느 정도 있다면 있지. 규칙이 귀찮고, 돼먹지 않은 녀석이 으스대고, 동거인은 아침 여섯 시 반에 라디오 체조를 시작하고. 뭐 그런 일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면 특별히 신경 쓰일 건 없어. 여기밖에 지낼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런대로 지낼 수도 있지. 그저 그런 거야."
"그렇겠죠"하고 그녀는 수긍하더니, 잠시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리고는 뭔가 신기한 것이라도 들여다보듯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유심히 보니 그녀의 눈은 놀라우리만큼 깊고 맑아 보였다. 그녀가 그처럼 맑은 눈을 갖고있는 줄은 그때까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볼 그런 기회도 없었다. 둘이서 걷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오래도록 이야기한 것도 처음이었다.
"기숙사 같은 데 들어갈 생각인가?"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냥 좀 생각해 본 거예요. 공동생활을 한다는 게 도대체 어떤 것일까 하고요. 그리고 그건 말하자면......"
그녀는 입술을 깨물면서 적당한 말이나 표현을 찾고 있었지만, 결국 그걸 찾아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눈을 아래로 내렸다.
"잘 모르겠어요. 그만 됐어요."
그것이 대화의 끝이었다. 그녀는 다시 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나는 조금 뒤에서 걸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거의 1년만의 일이었다. 1년 동안에 그녀는 형편없이 야위어 있었다. 탐스럽던 볼은 살이 거의 빠졌고, 목덜미도 훨씬 가늘어져 있었다. 야위었다고는 하지만 뼈가 앙상하다든가 건강이 안 좋다든가 하는 그런 인상은 전혀 아니었다. 그녀의 야윈 모습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차분해 보였다. 마치 어딘가 비좁은 장소에다 살짝 몸을 숨기고 있는 사이에, 몸이 멋대로 가늘어져 버린 것 같은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내가 그때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나는 그 점에 대해 그녀에게 뭔가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무슨 목적이 있어서 여기에 온 것은 아니었다. 나와 나오코는 중앙선 전철 안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혼자서 영화라도 볼까 해서 나왔던 것이고, 나는 간다의 서점에 가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둘 다 특별히 볼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녀가 내리자고 해서 우리는 전철에서 내렸다. 그것이 우연찮게 요쓰야 역이었을 뿐이다.
하긴 둘이서만 있게 되자 우리는 특별히 할 이야기도 별로 없었다. 왜 나오코가 전철에서 내리자는 말을 꺼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제란 게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역 밖으로 나오자 그녀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뒤를 쫓아 걸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항상 1미터 정도의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물론 그 거리를 좁히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좁힐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어색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나오코의 1미터쯤 뒤에서 그녀의 등과 곧고 검은 머리를 보면서 걸었다. 그녀는 커다란 갈색 머리핀을 꽂고 있어서 옆으로 향할 때마다 작고 하얀 귀가 보였다.
가끔 그녀는 뒤돌아보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얼른 대답을 할 수 있는 말도 있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전혀 갈피가 안 잡히는 말도 있었다. 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한 말도 있었다. 하지만 내게 들리든 들리지 않든 그런 것은 그녀에겐 아무래도 좋은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다 해버리고는 다시금 앞을 향해 계속 걸었다. 아무려면 어때,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체념했다.
하지만 산책이라고 하기엔 그녀의 걸음걸이가 좀 지나치게 빠른 것 같았다. 그녀는 이이다 다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오호리바타로 나갔고, 다시 진보초의 교차점을 넘어서 오차노미즈 고개를 올라 그대로 혼고로 빠졌다. 그리고 전철 선로를 끼고 고마고메까지 걸었다. 상당한 거리였다. 고마고메에 이르렀을 때 해는 이미 저물어 있었다. 평온한 봄날의 저녁 무렵이었다.
"여기가 어디죠?"
나오코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고마고메. 몰랐어? 우린 빙 돌아온 거야."
"왜 이런 데까지 왔죠?"
"나오코가 온 거야. 난 그저 뒤따라 왔을 뿐이고."
우리는 역 근처의 국수집에 들어가 가벼운 식사를 했다.
갈증이 나 있던 나는 혼자서 맥주를 마셨다. 주문하고부터 다 먹을 때까지 우리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걷느라고 피곤해서 약간 힘이 빠져 있었고, 그녀는 테이블 위에다 두 손을 올려놓은 채 또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일요일인 오늘은 어떤 행락지든지 모두 인파로 차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요쓰야부터 고마고메까지 걸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매우 건강한 편인데." 하고 나는 국수를 다 먹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놀랐어?"
"응."
"이래봬도 중학교 시절엔 장거리 선수로 10킬로미터나 15킬로미터도 뛰었어요. 게다가 아버지가 등산을 좋아해서 어릴 적부터 일요일이면 등산을 했죠. 그리고 집 뒤가 바로 산이잖아요? 그러니까 자연히 다리도 허리도 튼튼할 수밖에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래요. 다들 나를 연약한 여자로만 생각해요. 하지만 사람은 겉보기와는 다른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덧붙이듯 살짝 웃었다.
"미안하지만 난 꽤 지쳤어."
"미안해요, 온종일 끌고 다녀서."
"하지만 나오코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어. 단둘이서 이야기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
나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를 생각해 내려 해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의 재떨이를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저어, 혹 괜찮다면-혹 폐가 되지 않는다면 이란 뜻이지만-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런 말 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처지?"하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처지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아마도 내 놀람이 좀 지나쳤기 때문일 것이다.
"잘 설명할 수는 없어요."하고 나오코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녀는 트레이닝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전등불이 그녀의 솜털을 고운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처지라는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좀더 다른 표현으로 말하려 했는데......"
그녀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서, 잠시 벽에 걸린 달력을 보고 있었다. 마치 거기에서 뭔가 적당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보는 것처럼. 하지만 물론 그런 것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고 머리핀을 만지작거렸다.
"상관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나오코가 말하려는 그 뜻인 어느 정도 알 것 같으니까. 나역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잘 설명할 수가 없어요." 하고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요즘 늘 이런게 계속되고 있어요. 빗나가거나 전혀 반대되는 말을 하거나 하죠. 그렇게 되면 처음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돼버려요. 마치 내 몸이 두 개로 갈라져서 쫓고 쫓기고 하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한복판에 굉장히 굵은 기둥이 서 있어서 그 주위를 빙빙 돌며 술래잡기를 하는 거예요. 꼭 알맞은 말이란 늘 또 다른 내가 품고 있어서, 이쪽의 나는 절대로 그걸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나오코는 얼굴을 들어 내 눈을 응시했다.
"그런 느낌을 알 수 있어요?"
"많든 적든 그런 느낌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모두가 자신을 표현하려고 하지만 정확하게 표현이 안 되니까 초조해지는 거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약간 실망한 것 같았다.
"그것과는 또 달라요." 하고 그녀는 말했지만 그 이상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만나는 건 아무 상관없어. 어차피 일요일에 늘 하릴없이 뒹굴고 있을 바에야 걷는 것도 건강에 좋고."
우리는 함께 야마노테선을 탄 후, 나오코는 신주쿠에서 중앙선으로 갈아탔다. 그녀는 고쿠분지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어때요. 내 말투가 예전과 좀 달라졌어요?"하고 헤어질 무렵에 나오코가 물었다.
"좀 달라진 것도 같군. 하지만 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어.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자주 얼굴을 대했지만 그다지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으니까."
"그래요." 하고 그녀도 그것을 인정했다.
"이번 토요일에 전화해도 괜찮아요?"
"좋아, 기다리고 있겠어."
처음으로 나오코를 만난 것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그 해 봄이었다. 그녀도 역시 2학년으로, 미션 계통의 전통이 오랜 여학교에서 다니고 있었다. 너무 열심히 공부를 하면 오히려 '품위 없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정도의 기풍 있는 학교였다.
내겐 기즈키라고 하는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친하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나오코는 그의 애인이었다. 기즈키와 그녀는 거의 세상에 나올 때부터 소꿉친구로서 서로의 집도 200미터가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여러 다른 소꿉친구 커플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의 관계도 매우 개방적이어서, 두 사람만 있고 싶다는 욕망은 그다지 강한 것 같지 않았다. 두 사람은 수시로 서로의 집을 방문해서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도 하고 마작을 하기도 했다.
나와 더블데이트를 한 적도 몇 번인가 있었다. 나오코가 클래스메이트인 여자아이를 데리고 나오면 네 사람이 동물원에도 가고, 풀장에 가기도 하고,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오코가 데리고 오는 여자아이들은 귀엽긴 했지만 내게는 좀 과분한 것 같았다. 나로선 다소 덜렁대더라도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공립 고교의 클래스메이트인 여자아이들이 성미에 맞았다.
나오코가 데리고 나오는 여자아이들은, 그 귀여운 머릿속에서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로선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녀들로서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기즈키는 나를 데이트에 끌어내기를 단념했고, 결국은 우리들 셋이서만 어딘가로 가보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기즈키와 나오코와 나, 세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이야기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러는 것이 제일 마음 편했고 또 잘 어울려졌다. 다른 아이가 끼어들면 분위기가 어쩐지 어색해지곤 했다. 세 사람이 있으면 그건 마치 내가 초대 손님이고, 기즈키가 유능한 진행자고, 나오코가 보조역할을 하는 텔레비전의 토크 프로그램 같기도 했다. 언제나 기즈키가 그 자리의 중심에 있었으며, 그는 그러는 것에 능숙했다.
기즈키는 확실히 냉소적인 경향이 있어서 남에게 교만하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본성은 친절하고 공평한 사나이였다. 세 사람이 함께 있으면, 그는 나오코에 대해서나 나에 대해서나 마찬가지로 똑같이 이야기를 해오고, 농담을 하고, 어느 한 사람이 따분한 느낌을 갖지 않도록 신경을 쓰곤 했다. 그리고 어느 쪽인가 오래도록 잠자코 있으면, 그쪽에게 말을 걸어서 상대의 이야기를 곧잘 끌어내곤 했다.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참 힘들겠구나 싶었지만, 사실 그에겐 생각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에겐 그 자리의 분위기를 순간순간 포착하여 거기에 잘 대응해가는 능력이 있었다. 또 거기에 덧붙여 그다지 재밌지도 않은 상대의 이야기에서 재미난 부분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좀 얻기 어려운 재능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나는 나 자신이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고, 재미있는 인생을 보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그는 나 외에는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토록 머리가 명석하고 좌담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어째서 그 능력을 좀 더 넓은 세계로 돌리지 않고 우리 세 사람만의 작은 세계로 집중을 하는 데 만족하는지 나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째서 그가 나를 친구로 선택했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나는 혼자서 책을 읽거나 음악 듣는 걸 좋아하는, 이를테면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인간이어서 기즈키가 일부러 주목해서 이야기를 걸어 올 만한, 남보다 빼어난 그 무엇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내 마음이 맞아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의 부친은 치과 의사였는데, 훌륭한 수완과 비싼 치료비를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이번 일요일에 더불 데이트하지 않겠니? 내 여자 친구가 여고생인데 예쁜 여자 애를 데리고 온다니까"
하고 알게 되자마자 이내 기즈키가 말했다.
"좋아"하고 난 대답했고, 그렇게 해서 나와 나오코는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나와 기즈키와 나오코는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기즈키가 자리를 뜨는 바람에 두 사람만 남게 되면, 나와 나오코는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두 사람 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나와 나오코 사이에 공통된 화제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우리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을 마셔도 보고 탁자 위의 것을 만지작거려 보기도 했다. 그리고 기즈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기즈키가 돌아오면 그제서야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나오코도 그다지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고, 나도 내가 이야기하기보단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그녀와 단둘이 있게 되면 나로선 어지간히 불편한 게 아니었다. 성격이 맞지 않는다든가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이야깃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기즈키의 장례식이 있은 지 2주일쯤 뒤에, 나와 나오코는 딱 한 번 얼굴을 마주했다. 볼일이 좀 있어서 찻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용건이 끝나고 나자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었다. 나는 몇 가지 화제를 찾아내 그녀에게 이야기를 걸어 보았지만, 이야기는 번번이 중도에서 끊기고 말았다.
게다가 그녀의 어조에는 어딘지 모가 나 있었다. 나오코는 나에 대해 어쩐지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 이유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와 나오코는 헤어졌고, 그로부터 1년 후 중앙선 전철에서 딱 마주치기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나오코가 나에 대해 화를 냈던 건, 기즈키와 마지막으로 만나서 이야기한 것이 그녀가 아니고 나였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나도 기즈키가 만난 마지막 상대가 그녀였더라면 하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결국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며, 어떻게 생각한들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다.
그 5월의 기분 좋은 오후, 점심을 먹고 나자 기즈키는 내게 오후 수업을 빼먹고 당구나 치러 가자고 했다. 나도 특별히 오후 수업에 흥미가 있지도 않았으므로, 학교를 나서서 어슬렁어슬렁 고개를 내려가 항구 쪽까지 가서 네 게임을 쳤다.
처음 게임을 내가 가볍게 이기자, 그가 갑자기 진지해지는 바람에 남은 세 게임은 전부 내가 지고 말했다. 약속대로 내가 게임 비용을 지불했다. 게임을 하는 동안 그는 농담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게임이 끝나자 우리는 차 한 잔씩을 마신 후 담배를 피웠다.
"오늘은 이상하게 진지하던데?" 하고 내가 물어보았다.
"오늘은 지고 싶지 않았어." 하고 기즈키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는 그날 밤, 자기 집 차고 안에서 죽었다. N360의 배기 파이프에 고무호수를 잇고, 창문 틈을 테이프로 땜질을 한 채 엔진을 가동시켰던 것이다.
그가 죽기전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친척 병문안을 갔던 그의 부모가 돌아와서 차를 넣으려고 차고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라디오는 켜놓은 채였고, 와이퍼에는 주유소 영수증이 끼워져 있었다.
유서도 없었거니와 짐작되는 동기도 없었다. 그와 마지막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는 이유로, 나는 경찰서에 불려가 취조라는 걸 당했다.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습니다, 여느 때나 똑같았습니다, 하고 나는 조사하는 경찰관에게 말했다. 경찰관은 나에게 대해서나 기즈키에 대해서나 그다지 좋은 인상은 갖지 못했던 것 같다. 학교 수업을 빼먹고 당구나 치러 가는 그런 고교생들이라면, 자살했다고 해서 그렇게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신문에 자그마하게 기사가 실리고, 그걸로 사건은 끝났다. 빨간색의 그 N360은 처분되었다. 그리고 교실 그의 책상 위에는 얼마 동안 흰 꽃이 장식돼 있었다.
기즈키가 죽고 나서 고교를 졸업하기까지 한 10개월 동안, 나는 주위의 세계 속에 나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설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떤 여자아이와 사이가 좋아져서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했지만, 결국 반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그녀는 나에게 어느 것 하나 바라는 게 없었던 것이다.
나는 특별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들어갈 듯 싶은 도쿄의 사립 대학을 택해 시험을 보았고, 특별한 기쁨도 없이 입학했다. 그 여자아이는 내게 도쿄로 가지 말라고 말했지만, 나는 아무튼 고베거리를 떠나고 싶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넌 나와 이미 자버렸으니,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거지?" 라고 말하며 그녀는 울었다.
"그런 게 아냐."하고 나는 대꾸했다.
나는 그저 그곳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도쿄로 향하는 신칸센 기차 안에서, 나는 그녀의 좋은 부분이나 뛰어난 부분을 떠올리고 내가 참으로 몹쓸 짓을 하고 말았구나 하고 뉘우쳤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잊어버리기로 했다.
도쿄에 도착해서 기숙사에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 그것뿐이었다.
나는 녹색 테이프를 발라 붙인 당구대나 새빨간 N360, 책상 위의 흰 꽃 같은 것들은 모두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했다. 화장터의 높다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경찰서의 취조실에 놓여 있던 펑퍼짐한 모양의 문진 같은 그런 모든 것들을.
처음에는 그렇게 잘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잊어버리려 해도 내 안에는 무언가 뿌옇게 흐린 공기 덩어리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덩어리는 단순하면서도 뚜렸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상을 말로 바꿔 놓을 수가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말로 해버리면 평범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몸 안에 있는 하나의 공기 덩어리로서 느꼈던 것이다. 당구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빨간색과 하얀색으로 된 네 개의 공 안에도 죽음은 존재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마치 미세한 티끌처럼 폐 속으로 들이마시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들을 그 손아귀에 넣는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들을 잡는 그 날까지 우리들은 죽음에 잡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하고.
그것은 나에겐 지극히 당연하고 논리적인 명제로 생각되었다. 삶은 이쪽에 있으며, 죽음은 저쪽에 있다. 나는 이쪽에 있고, 저쪽에는 없다.
그러나 기즈키가 죽은 밤을 경계선으로 하여, 나로선 이제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죽음을(그리고 삶을) 파악할 수는 없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적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제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해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저 열일곱 살의 5월 어느 날 밤에 기즈키를 사로잡은 죽음은, 그때 동시에 나를 사로잡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공기 덩어리를 몸속에 느끼면서 열여덟 살의 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심각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심각해진다는 것이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죽음은 심각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런 숨막히는 배반성 속에서 끝없는 제자리걸음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확실히 기묘한 나날이었다. 삶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3장 비와 눈물이 섞인 하룻밤
그 다음 토요일에 나오코는 내게 전화를 걸었고, 일요일에 우린 데이트를 했다. 그냥 데이트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밖에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는 전과 같이 거리를 걸었고, 어느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또 걸었으며, 저녁무렵에 식사를 하고 안녕, 하고 헤어졌다.
그녀는 여전히 드문드문 그렇게밖에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고, 나도 특별히 그걸 의식해서 이야기하진 않았다. 마음 내키면 서로의 생활이며 대학 이야기를 했지만, 어느 것이나 다 단편적인 이야기여서 그것이 무엇인가로 이어져 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우린 과거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체로 거리를 걸어가는 데에만 열중해 있었다. 고맙게도 도쿄 거리는 넓어서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었다.
우리는 거의 매주 만나선 그런 식으로 걸어 다녔다. 그녀가 앞장을 서고, 내가 그 조금 뒤를 따라 걸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모양의 머리핀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오른쪽 귀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 무렵 그녀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던 탓으로 지금도 그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부끄러워할 때 그녀는 곧잘 머리핀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곤 했다. 그리곤 늘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손수건으로 입을 닦는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의 버릇이었다. 그런 걸 보고 있는 중에 나는 조금씩 조금씩 그녀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무사시노의 변두리에 있는 여자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영어 교육으로 유명한 작고 아담한 대학이었다. 그녀의 아파트 가까이의 개울에는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어서 가끔씩 우리는 그 주변을 산책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기 방으로 나를 초대해서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는데, 방안에서 나와 단 줄이 있게 되어도, 그녀는 그런 건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쓸데없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깨끗한 방이었는데, 창문이 있는 구석에 스타킹이 널려 있지만 않았어도 여자의 방이라곤 결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매우 검소하고 간결하게 살고 있었으며, 친구는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러한 생활 방식은 여고 시절의 그녀에게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예전의 그녀는 언제나 화사한 옷을 입고, 많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 방을 바라보고 있자니까, 그녀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대학에 입학해 고향을 떠나서, 알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학교를 택한 건, 우리 고등학교에서는 아무도 이 학교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에요."
하고 나오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여기에 입학한 거예요. 우리들은 모두 좀 더 멋진 대학으로 가길 원하니까요. 그렇지요?"
그러나 나와 나오코의 관계에 전혀 진전이 없었던 건 아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녀는 내게 익숙해졌고, 나도 나오코에게 익숙해져 갔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자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내 곁에 붙어 다니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 그녀가 나를 한 사람의 친구로서 인정해 준 증표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아름다운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니는 건 정말 싫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우리는 둘이서 도쿄 거리를 정처 없이 마냥 걷고 또 걸었다. 고개를 오르고, 냇물을 건너고, 선로를 넘고, 어디까지라도 걸어갔다. 어디로 가고 싶다는 목적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걷기만 하면 좋았다. 마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종교의식처럼 우리는 한 눈 팔지 않고 걸었다. 그리고 비가 오면 우산을 받쳐 들고 걸었다.
가을이 와서 기숙사 마당이 느티나무 잎으로 뒤덮였다. 스웨터를 입으니 가을 냄새가 났다. 나는 다 떨어진 구두 한 켤레를 버리고 새 스웨이 구두를 샀다.
그 무렵,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도무지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아마도 대수로운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여전히 우리는 과거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기즈키라는 이름은 우리의 화제엔 거의 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그 무렵에는 둘이서 잠자코 찻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는 일에도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는 '돌격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서 나는 곧잘 그 이야기를 했다. '돌격대'는 클래스의 여자(물론 지리학과의 여자)와 한 번 데이트를 했는데 저녁때가 다 되어서 아주 낙담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것이 6월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는 내게,
"저, 저 말이야, 와타나베. 여, 여자애하고 말이야, 무슨 얘길 하지?" 하고 물어보았다.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떻든 그는 질문의 상대를 완전히 헛짚었던 것이다.
7월에 그가 없는 동안, 누군가 암스테르담의 운하 사진을 떼어내고, 그 대산 샌프란시스코의 골든 브리지 사진을 붙여 놓고 갔다. 골든 브리지를 쳐다보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할 수 있는지 어떤지를 알고 싶다는 그저 그 뿐의 이유에서였다.
"아주 좋아하면서 하고 있던데"하고 내가 적당히 둘러 붙여 얘기해 주자, 누군가가 이번엔 그것을 빙산 사진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진이 달라질 때마다 '돌격대'는 심한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누가, 이, 이, 이런 짓을 한 거지?" 하고 그는 고함을 쳤다.
"글세, 하지만 좋잖아. 어느 거나 아름다운 사진이잖아. 누가 그러든 고마운 일이지, 뭐" 하고 나는 그를 위로했다.
"그야 뭐 그렇지만 아무튼 기분이 나빠."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 '돌격대' 이야기를 하면 나오코는 언제나 웃었다. 그녀는 좀처럼 웃는 일이 없었기에 나도 곧잘 그의 이야기를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를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것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는 그다지 넉넉하다곤 할 수 없는 가정의, 너무 고지식한 셋째 아들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도를 작성하는 것만이 그의 인생의 자그마한 꿈인 것이다. 누가 그것을 우스개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는 하나 '돌격대 조크'는 이미 기숙사 내에선 없어선 안 될 화제 중의 하나가 돼 있었고, 이제 와서 내가 거두려 한다고 해서 거둘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오코의 웃는 얼굴을 눈으로 보는 건 나로서도 그런대로 기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모두에게 '돌격대' 이야기를 계속 제공하게 되었다.
나오코는 내게 꼭 한 번, 좋아하는 여자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헤어진 여자 이야기를 했다. 좋은 아이였고, 그녀와 자는 건 좋았고, 지금도 가끔씩 그립긴 하지만 왜 그런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고 나는 말했다. 아마 내 마음속에는 딱딱한 껍질 같은 게 있어서, 거기를 뚫고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제한되어있는 것같이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대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고.
"지금까지 누군가를 사랑한 적은 없나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없어."
그녀는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가을이 끝나고 찬바람이 거리를 휘몰아치자, 그녀는 가끔씩 내 팔에 몸을 기대었다. 더플 코(역주: 모자가 달린 무릎까지 내려오는 코트)의 두꺼운 천을 통해, 나는 나오코의 숨결을 희미하게 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내 팔에 자기의 팔을 감기도 하고, 내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기도 하고, 정말 추울 때에는 내 팔에 매달려 떨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그뿐이었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 그 이상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여느 때나 다름없이 걸어갔다. 나도 그녀도 바닥이 고무로 된 구두를 신고 있어서 두 사람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도로에 떨어진 커다란 플라타너스 낙엽을 밟을 때에만 바삭거리는 마른 소리가 났다.
그런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는 나오코가 불쌍해 보였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팔인 것이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나의 따스함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따스함인 것이다. 내가 나자신이라는 데서, 나는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겨울이 깊어 갈수록 그녀의 눈은 전보다 더 투명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투명함이었다. 가끔 그녀는 이렇다 할 이야기도 없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듯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쓸쓸한 것 같은, 견딜 수 없는 것 같은 야릇한 기분이 들곤 했다.
아마도 그녀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아니,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자기 안에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리라. 그렇기때문에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늘 머리핀을 만지작거리고, 손수건으로 입술을 닦기도 하고,
내 눈을 물끄러미 의미도 없이 들여다보곤 하는 것이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나오코를 끌어안아 주고 싶기도 했지만, 언제나 망설임 끝에 그만두었다. 어쩌면 그런 일로 해서 그녀가 상처라도 입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도쿄 거리를 계속 걸어 다녔으며, 그녀는 허공 속에서 계속 말을 찾고 있었다.
기숙사 동료들은 나오코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거나, 일요일 아침에 외출을 하거나 하면 언제나 나를 놀려댔다. 그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에게 분명 애인이 생긴 것이라고들 생각했던 모양이다. 설명할 수도 없도 설명할 필요도 없었기에 나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저녁에 헤어져 돌아오면, 누군가가 어떤 체위로 했느냐, 그녀의 그곳은 어떤 모양이었느냐, 속옷은 무슨 색이었느냐, 하고 이런저런 너절한 질문을 해왔고, 나는 그때마다 적당히 가감을 해서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열여덟 살에서 열 아홉 살이 되었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국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그리고 일요일이 되면 죽은 친구의 애인과 데이트를 했다. 도대체 나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제부터 무엇을 하려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대학에서 클로델을 읽고 라신을 읽고 에이젠수테인을 읽었지만 내게 그러한 책들은 거의 아무런 감동도 유발시키지 못했다.
나는 대학 클레스에선 단 한 명의 친구도 만들지 않았으며, 기숙사에서의 교제도 의례적인 것이 지나지 않았다. 기숙사 동료들은 내가 언제나 혼자 책을 읽고 있어서 작가가 되려는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별로 작가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 무엇도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런 심정을 나오코에게 몇 번인가 이야기하려 했다. 그녀라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어휘가 찾아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건 마치 그녀의 '말 찾기 병'이 내 쪽으로 옮아 버린 게 아닌가 싶어서.
토요일 밤이 되면, 나는 전화기가 있는 현관 로비의 의자에 앉아서 나오코의 전화를 기다렸다. 토요일 밤이면 대부분은 밖으로 놀러 나가, 로비는 여느 때보다 사람도 적고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나는 늘 그런 침묵의 공간에 반짝반짝 떠 있는 빛의 입자를 응시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려고 노력해 보았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해답다운 해답은 찾아지지 않았다. 나는 가끔 공중에 떠도는 빛의 입자를 행해 손을 내밀어 보았으나, 그 손가락 끝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나는 곧잘 책을 읽었지만, '많은 책을 읽는' 독서가는 아니었고, 그저 마음에 드는 책을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읽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내가 당시 좋아했던 것은 트루먼 카포티, 존업다이크, 스코트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챈들러 등 등의 작가들이었는데, 클래스에서도 기숙사에서도 그러한 종류의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읽는 것은 다카하시 가즈미나 오에 겐자부로나 미시마 유키오, 또는 현대 프랑스 작가의 소설이 많았다.
그러니 당연히 대화도 서로 맞지 않았으며, 나는 혼자서 묵묵히 책만 읽고 있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책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은 다음, 가끔씩 눈을 감은 채 책의 향기를 가슴 속에 담곤 했다. 그 책의 향기를 맡으면서 책갈피에 손을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기분을 맛볼 수가 있었다.
열여덟 살의 나에게 최고의 책은 존 업다이크의 '켄타우로스'였는데, 몇 번 되풀이해 읽은 중에 그것은 처음의 광채를 약간씩 잃게 되었고,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게츠비'에게 베스트 원의 자리를 양보하게끔 되었다. 그리고 '위대한 게츠비'는 그 후 줄곧 내게 있어서는 최고의 소설로 지속되었다.
나는 마음이 내키기만 하면 책꽂이에서 '위대한 게츠비'를 꺼내어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그 부분을 한바탕 읽는 것이 습관처럼 돼 있었는데, 단 한 번도 실망을 맛본 적이 없었을 만큼 단 한 페이지도 시시한 페이지는 없었다. 이렇게 멋진 소설이 또 있을까 싶어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 멋지단 말을 전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 주위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적이 있는 사람은 없었으며, 읽어도 좋겠지 싶은 사람조차도 없었다. 1968년에 스코트 피츠제럴드를 읽는다는 것은 반동이라고까지 할 수 없었으나, 결코 권장할 만한 행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내 주위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으며, 나와 그가 친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나가사와라는 이름을 가진 도쿄대학 법학부의 학생으로서, 나보다 두 학년 위였다. 우리는 같은 기숙사에 살고 있어서, 자연 서로가 얼굴만 알고 있는 그런 사이였는데, 어느 날 내가 식당의 양지쪽에서 볕을 쬐며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있자니까, 옆에 와 앉아서 무엇을 읽느냐고 물어 왔다. '위대한 개츠비'라고 말했더니 재미있냐고 물었다. 훑어 읽는 건 세 번째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가 있다고 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는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 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듯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10월의 일이었다.
나가사와라는 사람은 잘 알면 알수록 묘한 사나이였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많은 기묘한 사람과 만나고, 서로 알고 스쳐지나 왔지만, 그처럼 기묘한 사람을 만난 적은 아직 없다. 그는 나 같은 건 따라잡을 수도 없을 정도의 굉장한 독서가였는데, 죽어서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에는 원칙적으로 손도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책 외에는 신용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다만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을 읽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지. 인생은 짧아."
"나가사와 선배는 어떤 작가를 좋아하지요?"
"발자크, 단테, 조셉 콘래드, 디킨스" 하고 그는 막힘 없이 잘도 대답했다.
"그렇게 연대적 성향이 강한 작가라곤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읽는 거야. 남과 같은 걸 읽고 있으면, 남과 같은 생각밖엔 못하게 돼. 그런 촌놈, 속물의 세계야. 제대로 된 인간은 그런 짓을 안 하는 법이지. 어때, 알겠어, 와타나베? 이 기숙사에서 제대로 된 건 나와 너뿐이야. 나머지는 죄다 종이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거든."
"어떻게 해서 그걸 압니까?" 하고 나는 어리벙벙해서 물었다.
"난 알아. 이마에 딱지가 붙어 있는 것처럼 척 보면 다 알아. 보기만 해도 안단 말야. 게다가 우리는 둘 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잖아?"
나는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해 보았다.
"하지만 스코트 피츠제럴드는 죽은 지 아직 28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요?"
"상관없어, 2년쯤은"하고 그는 말했다. "스코트 피츠제럴드 정도의 훌륭한 작가라면 언더파(역주: 골프 용어로, 정해진 타수 이내)로도 충분해"
하기야 나가사와가 고전 소설의 숨은 독서가임은 기숙사 안에선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설령 알려졌다 해도 거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뭐니 뭐니 해도 우선 첫째로 머리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무런 고생도 없이 도쿄 대학에 입학했고, 흠잡을 데 없는 성적을 받았으며, 공무원 시험을 쳐서 외무성에 들어가 외교관이 되려 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나고야에서 큰 병원을 경영했고, 형 역시 도쿄 대학의 의학부를 나와 그 뒤를 잇기로 되어 있었다.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가정인 것 같았다. 용돈도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고, 더구나 풍채도 좋았다. 그래서 누구나가 그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기숙사 사감마저 나가사와에게만은 큰소리를 치지 못했다. 그가 누구에겐가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요구받은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하자는 대로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가사와라는 인간 속에는 아주 자연스레 사람을 끌어당기고 따르게 하는 그 무엇이, 천성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 위에 서서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사람들에게 솜씨있게 정확한 지시를 내려 주며, 사람들을 순순히 따르게 하는 능력 말이다.
그의 머리 위에는 그러한 힘이 갖춰져 있음을 보여 주는 영기가 천사의 고리처럼 두둥실 떠 있어서, 누구나 얼핏 보기만 해도 '이 사나이는 특별한 존재야' 하고 황송해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나 같은 이렇다 할 특징도 없는 자가 나가사와의 개인적인 친구로 선택된 데 대해 모두들 몹시 놀라워했으며, 그런 탓으로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약간의 존경조차 받기도 했다. 그들은 알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나가사와가 나를 좋아한 것은, 내가 그에 대해 조금의 경의도 복종도 감탄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인간성의 매우 기묘한 부분, 굴절된 부분에 대해 흥미를 갖긴 했지만, 성적의 우수함이라든가 영묘한 기운이라든가 남자다운 풍채라든가에 대해선 한 가닥의 관심도 갖지 않았다. 나가사와로서는 나의 그런 태도가 아주 신기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가사와는 몇 가지의 상반되는 특질을,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써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때로는 나조차 감동하고 말 정도로 친절했지만, 그와 동시에 더럽게 심술궂은 데가 있었다. 깜짝 놀랄 만큼 고귀한 정신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별 수 없는 속물이기도 했다. 사람들을 이끌어 낙천적으로 거침없이 앞으로 나가면서도, 그 마음은 고독하게 음울한 진흙 구덩이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그의 이율배반성을 처음부터 명백히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이 어째서 그의 그러한 면을 보지 못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사나이는 이 사나이 나름의 지옥을 안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나는 그에 대해 호의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최대 미덕은 정직함이었다. 그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잘못이나 결점은 언제든 딱 잘라 인정했다. 자신에게 이롭지 못한 것을 숨기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나에 대해선 언제나 변함없이 친절했으며, 여러 가지로 보살펴 주었다. 그가 그래 주지 않았던들, 기숙사에서의 나의 생활은 훨씬 더 불편하고 불쾌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에게 한 번도 마음을 허락한 적이 없었으며, 그런 면에서 나와 그와의 관계는, 나와 기즈키와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나가사와가 술에 취한 채 어떤 여자에게 지독히도 심술궂게 대하는 걸 목격한 후로, 이 사나이에게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음을 허용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던 것이다.
나가사와는 기숙사 안에서 몇 가지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한 가지는 그가 괄태충(역주: 달팽이같이 생긴 것으로 야채류를 먹고 산다.)을 세 마리나 먹은 적이 있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그가 매우 큰 페니스를 갖고 있어서 지금까지 백 명 이상의 여자와 잤다는 것이었다.
괄태충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내가 물었더니 그는
"아, 사실이지 그거" 하고 말했다.
"커다란 놈을 세 마리나 삼켰지."
"어째서 그런 것을 먹었습니까?"
"음, 좀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이 기숙사에 들어왔던 해에, 신입생과 상급생 사이에 좀 성가신 일이 생겼었지. 9월이었던가, 아마. 그래서 신입생 대표격으로 상급생들에게 결판을 내러 갔었어. 상대는 우익이라, 목도 따위를 갖고 있었는데, 도저히 결판이 날 분위기가 아니었어. 그래서 난 '알겠습니다, 내 선에서 끝날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걸로 결판을 내주시오' 했지. 그랬더니 '그럼 너 괄태충을 삼켜봐!' 그러지 않겠나. '좋습니다, 삼키지요' 그랬지. 그래서 삼킨 거야. 자식들, 커다란 놈을 세 마리나 들고 왔지 뭔가. "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어떤 기분이고 뭐고, 그놈을 삼킬 때의 기분이라니, 그놈을 먹어 본 인간밖에 알 수가 없지. 괄태충이 미끄덩미끄덩 목구멍을 통과해서, 쪼르르 뱃속으로 내려가는 그 기분이란 정말 뭐라고 말할 수 없지. 차갑고, 입안에 뒷맛이 남거든. 생각만 해도 섬뜩하지 뭔가. 웩웩 토하고 싶은 걸 죽는 셈치고 참았지. 암, 토하기라도 하면 다시 삼켜야 했거든. 그래서 난 마침내 세 마리 전부를 삼킨 거야."
"삼키고 나서 어떻게 했습니까?"
"물론 내 방에 돌아와 소금물을 벌컥벌컥 마셨지. 그러지 않고는 달리 어쩔 도리가 있나."
"하긴 그렇군요."
"하지만 그 후론, 누구도 나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하게 됐어. 상급생까지 포함해서 그 누구도 말이야. 그런 괄태충을 세 마리나 삼킬 수 있는 인간은 나말곤 아무도 없으니까."
"없겠지요."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니스의 크기를 확인하는 건 간단했다. 함께 욕탕에 들어가면 되는 것이니까. 분명 그것은 꽤나 훌륭한 것이었다. 하지만 백 명이 넘는 여자와 잤다는 건 과정이었다. 일흔댓 명 가량 될까, 하고 그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잘 기억하진 못하지만 일흔 명은 될 거리고 말했다. 내가 한 여자하고밖엔 자보지 못했다고 하니,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다음에 나와 같이 하러 가자구. 걱정하지 마, 쉽게 되니까."
나는 그때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지만, 실제로 해보니 참으로 간단했다. 너무나 간단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와 함께 시부야나 신주쿠의 바라든가 스낵에 들어가(가게는 대개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여자 둘이 와 있는 패를 찾아내 이야기를 하곤(세상은 짝지은 여자들로 충만해 있었다.), 술을 마시고, 그리고 호텔에 들어가 섹스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는 화술에 능했다. 무슨 대수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여자들은 대개 다들 멍청해져서 감탄을 하고, 그 이야기에 끌려 들어가 그만 술을 과음하여 취해 버렸고, 그래서 그와 자게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잘생기고, 친절하고, 재치와 눈치가 빨라서, 여자들은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나로선 참으로 불가사의한 노릇이지만, 그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마저 어쩐지 매력적인 남자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내가 그의 독촉을 받고 무슨 말인가 하면, 여자들은 그에게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이야기에 대해 몹시 감탄도 하고 웃기도 해주는 것이다. 모두가 그의 마력 탓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재능이구나, 그럴 때마다 나는 감탄했다.
이런 것에 비하면, 기즈키의 화술 재능 따위는 어린아이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아주 스케일이 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나가사와의 그런 능력에 휘말려 들면서도 나는 기즈키를 몹시 그리워했다. 기즈키는 참으로 성실한 사람이었음이 새삼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그런 대수롭지 않은 재능이나마 나와 나오코를 위해 따로 남겨 놓아주었던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나가사와는 그 압도적인 재능을 게임이라도 하듯 주위에 흩뿌리고 있었다. 대체로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여자들과 진정으로 자고 싶어 하는 건 결코 아닌 것 같았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단순한 게임에 지나지 않았다. 나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잔다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성욕을 처리하는 방법으로선 마음이 편했고, 여자와 서로 포옹하거나 서로 몸을 접촉하는 것 자체는 즐거웠다.
내가 싫은 건 다음 날 아침 헤어질 무렵이다. 눈을 뜨면 옆에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쿨쿨 자고 있고, 온 방 안에 술 냄새가 풍기고, 침대고 조명이고 커튼이고 무엇이든 간에 모두 러브 호텔 특유의 요란한 색채투성이고, 내 머리는 숙취로 인해서 흐리멍텅해 있다. 얼마후 여자가 눈을 뜨고, 주섬주섬 속옷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스타킹을 신으면서
"봐요, 어젯밤 제대로 그거 썼어? 나, 정통으로 위험한 날이었거든" 하고 내뱉는다. 그리곤 거울을 향해 골치가 아프다, 화장이 잘 안 받는다 하고 투덜대면서, 루즈를 바르고 속눈썹을 붙이곤 한다.
나는 그런 것이 싫었다. 그래서 사실은 아침까지 있지 않는 게 좋았는데, 기숙사의 폐문 시간인 열두 시에 신경 쓰면서 여자를 설득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그런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무래도 외박 허가를 얻어가지고 나와야 했다. 그렇게 되면 아침까지 거기에 있어야만 되고, 자기 혐오와 환멸을 느끼면서 기숙사로 돌아오게 되는 셈이다. 햇살이 눈부시고, 입안이 깔깔하고, 머리통은 어쩐지 다른 누군가의 머리통처럼 느껴지곤 했다.
나는 세 번인가 네 번인가, 그런 식으로 여자와 자고 난 뒤에 나가사와에게 물어보았다. 이런 짓을 일흔 번이나 계속하고도 허무해지지 않느냐고 말이다. "네가 이런 걸 허무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네가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증거고 아주 바람직한 일이야.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자고 다녀 봤자 얻는 건 아무것도 없지. 피곤하고, 자신이 싫어지게 될 뿐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구."
"그럼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겁니까?"
"그걸 설명하기란 어려워. 왜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에 관해서 쓴 것 있지?
그것과 마찬가지야. 즉 말이지, 가능성이 주위에 충만해 있을 때, 그것을 그냥 두고 지나간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 그걸 알겠어?"
"왠만큼......" 하고 나는 우물거렸다.
"날이 저문다. 여자아이가 거리에 나와 주변을 어정거리면서 술을 홀짝거리고 있다. 그녀들은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데, 나는 그 무엇인가를 그녀들에게 줄 수 있는 거야. 그건 참으로 간단한 일이지. 수도꼭지를 비틀어 물을 마시는 것과 꼭 같은 간단한 일이야. 그런 상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함락시킬 수 있고, 상대방도 그걸 기다리고 있는 거지. 그것이 가능성이라는 거야. 그러한 가능성이 눈앞에 뒹굴고 있는데, 그걸 그저 보고만 지나칠 셈인가? 자신에게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을 발휘할 장소가 있는데, 자넨 잠자코 지나치겠단 말인가?"
"그러한 입장에 닥쳐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어떤 것인지 짐작도 안가는데요." 하고 웃으면서 나는 말했다.
"어떤 의미에선 행복이라는 거야, 그건" 하고 나가사와는 말했다.
집안이 넉넉하면서도 나가사와는 기숙사에 들어와 있는 것은, 그의 여성 편력이 원인이었다. 도쿄에 나가 독신 생활을 하면 어쩔 수 없이 여자와 놀아나지 않겠느냐고 걱정한 그의 부친이, 4년간 기숙사 생활을 강요했던 것이다. 하기야 나가사와로서는 그런 건 아무려면 어떠냐는 생각이었고, 그는 기숙사의 규칙 같은 것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 자기 좋을 대로 지내고 있었다. 마음이 내키면 외박 허가를 얻어 '여자사냥'을 나갔고, 애인의 아파트로 묵으러 가기도 했다. 외박 허가를 얻는 일은 어지간히 성가신 일이었지만, 그의 경우는 거의 프리 패스였고, 그가 말을 거들어 주는 한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나가사와에겐 대학에 입학했을 때부터 사귀고 있는 어엿한 애인이 있었다. 하쓰미라고 하는 그와 같은 나이의 여자로, 나도 몇 번인가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었는데 아주 인상이 좋았다.
앗, 하고 눈을 끄는 그런 미인은 아니고 그저 평범하다고 할 외모였으므로, 어째서 나가사와 같은 사나이가 이 정도의 여자와......하고 처음엔 생각하게 되었지만, 조금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누구나 그녀에게 호감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러한 타입의 여성이었다. 조용하고 이지적이고 유머가 있고 동정심이 있고, 언제나 멋지고 고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썩 좋았고 내게 가령 이런 연인이 있다면 다른 시시한 여자와 자거나 하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내가 마음에 든다며, 내게 그녀 클럽의 후배를 소개해 줄 테니 넷이서 테이트를 하자고 열심히 권유했지만, 나는 지난날의 실패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한 핑계를 대며 번번히 회피하고 있었다. 히쓰미가 다니는 학교는 특급 간부의 딸들이 모여드는 것으로 유명한 여자 대학이라서, 그런 여자들과 내가 말이 통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나가사와가 노상 다른 여자와 자고 다닌다는 것을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 일로 그에게 불평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나가사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내겐 분에 넘치는 여자야."
나가사와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 그대로라고 나도 생각했다.
겨울에 나는 신주쿠의 조그마한 레코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급료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하는 일은 편했으며, 한 주일에 세 번, 밤 당번만 서면 된다는 것도 좋았다. 게다가 레코드도 값싸게 살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나는 나오코가 아주 좋아하는, 디어헌터가 들어 있는 헨리 맨시니의 레코드를 사서 선물했다. 포장까지도 내손으로 직접 하고 빨간 리본까지 매었다. 나오코는 자기 손으로 뜬 털실 장갑을 주었다. 엄지손가락 부분이 약간 짧았지만 따뜻했다.
"미안해요. 난 너무나 손재주가 없어요." 하고 나오코는 낯을 붉히면서 부끄러운 듯 말했다.
"괜찮아. 보라구, 제대로 맞는걸"하고 나는 장갑을 끼어 보였다.
"그래도 이거면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지 않아도 되겠죠?"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오코는 그해 겨울엔 고배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도 연말까지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결국 그럭저럭 그대로 도쿄에 눌러앉아 버렸다. 고베로 돌아간댔자 무슨 재미난 일도 있을 것 같지 않았고 만나고 싶은 상대도 없었다.
정월 설 동안은 기숙사 식당은 문을 닫았기 때문에, 나는 나오코의 아파트에서 식사를 했다. 둘이서 떡을 구워서 간단한 떡국을 해먹었다.
1969년의 1월에서 2월까지는 제법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1월말에 돌격대가 40도 가까이나 열이 올라 드러누웠다. 덕분에 나는 나오코와의 데이트를 허탕 쳐버리고 말았다. 나는 어느 콘서트의 초대권 두 장을 고심 끝에 입수해서 나오코와 함께 가기로 했던 것이다. 오케스트라는 나오코가 매우 좋아하는 브람스의 심포니 4번을 연주하기로 돼 있어서, 그녀는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격대가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면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고통스런 모습이어서, 그냥 두고 외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나 대신에 그를 간호해 줄 만한 마음 좋은 사람도 없었다. 나는 얼음을 사다가 비닐 주머니를 몇 장 겹쳐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이마에 얹어주고, 수건을 차갑게 해서 땀을 닦아 주고, 한 시간마다 열을 재고, 셔츠까지 갈아입혔다.
그러나 열은 꼬박 하루 동안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째 아침이 되자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체조를 시작했다. 체온을 재어 보니 36도 2분이었다. 인간 같지가 않았다.
"이상하군, 지금껏 열 같은 건 나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하면서 돌격대는 그게 마치 내 술수라도 된다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열이 났잖아." 하고 나는 화가 나서 대꾸를 했다. 그리고 그가 열이 난 탓에 쓸모없게 된 두 장의 초대권을 내보였다.
"하지만 초대권이니 괜찮잖아." 하고 돌격대는 말했다. 나는 그의 라디오를 창문으로 내던질까 했으나 머리가 지끈거려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가 잠을 잤다.
2월에는 몇번인가 눈이 내렸다.
2월 말 무렵에 나는 하찮은 일로 싸움질을 벌였다. 기숙사의 같은 층에 있는 상급생을 때렸는데, 상대방은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으며, 나가사와가 일을 잘 수습해 주었지만 나는 사감실에 불려가 주의를 받았고, 그 후로 기숙사 생활도 자연 마음이 편치 않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동안 한 학년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다. 나는 몇 과목에서 학점을 따지 못했다. 나는 몇 과목에서 학점을 따지 못했다. 나머지 성적도 그저 그런 편이었다. 태반이 C나 D였고, B가 약간 있을 뿐이었다. 나오코 쪽은 한 과목도 빠뜨리지 않고 학점을 따서 2학년이 되었다. 계절이 어느덧 한 바퀴 돈 것이다.
4월 중순에 나오코는 스무살이 되었다. 내가 11월생이니까 그녀가 약 7개월 연상인 셈이다. 그녀가 스무 살이 된다는 게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든 그녀든 실상은 열여덟 살과 열아홉 살 사이를 오가는 편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열여덟 살 다음에 열아홉 살이고, 열아홉 살 다음에 열여덟 살-그렇다면 좋겠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다. 그리고 가을엔 나도 스무 살이 되는 것이다. 이미 죽어 버린 기즈키만이 언제까지나 열일곱 살이었다.
나오코의 생일에는 비가 내렸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 근처에서 케이크를 사 가지고 전철을 타고 그녀의 아파트로 갔다. 어떻든 스무 살이 된 셈이니 무슨 축하 행위인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내가 말을 꺼냈던 것이다. 가령 반대로 내 입장이었다면 나 역시 그런 걸 바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외돌토리로 스무 살의 생일을 지낸다는 건 분명 괴로운 노릇일 게다.
전철은 붐볐고, 더구나 너무 흔들렸다. 덕분에 나오코의 방에 당도했을 때엔, 케이크는 로마의 콜로세움 유적과 같은 형태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대로 준비한 조그마한 양초를 20개 꽂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인 후, 커튼을 닫고 전깃불을 끄니 그럭저럭 생일 축하 분위기가 났다. 나오코가 양주를 땄다. 우리는 양주를 마시고, 케이크를 조금 먹은 후 간단한 식사를 했다.
"스무 살이 되다니 어쩐지 바보스러운걸요. 난 스무 살이 되는 준비 같은 거, 전혀 돼 있지 않아요. 묘한 기분이 드는 게, 어쩐지 뒤로부터 무리하게 떠밀려 온 것만 같아요."
"나는 아직도 7개월이나 남았으니까 서서히 준비하겠어."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좋겠네요, 아직도 열아홉 살이라니" 하고 나오코는 부러운 듯 말했다.
식사하는 동안 나는 돌격대가 새 스웨터를 샀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그때까지 스웨터를 한 벌밖에 갖지 못했는데(고등학교 때의 감색 교복 스웨터), 이제야 가까스로 두 벌이 된 것이다. 새 스웨터는 사슴 모양의 손뜨개로 떠넣은, 빨강과 까망이 섞인 귀여운 것으로, 스웨터 자체는 멋진 것이지만 그가 그걸 걸치고 다니면 모두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로선 어째서 모두가 웃는지 통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와타나베, 어, 어디 우스운 데라도 있니?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하고 그는 식당에서 내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아무것도 묻은 것도 없고, 우습지도 않아. 아무튼 좋은 스웨터구나, 그거" 하고 나는 표정을 억제하면서 말했다.
"고마워" 하고 돌격대는 사뭇 기쁜 듯 벙긋 웃었다.
나오코는 그의 이야기를 하면 기뻐했다.
"그 사람 만나 보고 싶어요,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안 되겠는데, 나오코는 분명 웃음보를 터뜨릴 테니까."
"정말 웃음보를 터뜨릴 거라고 생각해요?"
"내길 해도 좋아. 난 매일 함께 있어도 가끔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으니까."
식사가 끝나자 둘이서 그릇을 치우고, 방바닥에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나머지 양주를 마셨다. 내가 한 잔을 마시는 동안에 그녀는 두 잔을 마셨다.
나오코는 그날 드물게 잘도 떠들었다. 어릴 적 일이며, 학교 일이며, 집안에 대한 일을 이야기했다. 어느 것이나 긴 이야기로, 마치 세밀화처럼 분명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단한 기억력이라고 감탄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숨겨져 있는 그 무엇인가가 차츰 의식되기 시작했다.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무엇인가가 부자연스럽고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하나하나의 이야기는 옳고 제법 줄거리도 일관해 있는데, 그 연관성이 아무래도 기묘했다.
A의 이야기가 어느 틈엔가 그 A를 포함되는 B의 이야기가 되고, 이윽고 B에 포함되는 C의 이야기가 되고, 그것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었다. 끝남이라는 게 없었다.
나는 처음 한동안은 맞장구를 쳤지만 그러다가 그것도 그만두었다. 나는 레코드를 걸고 그것이 끝나면 바늘을 올려 다음 레코드를 걸었다. 한 바퀴 전부 걸고 나자 다시 처음의 레코드를 걸었다. 레코드는 전부라야 여섯 장밖에 없었고, 사이클의 시작은 비틀즈의 '서전트 페퍼즈 론리 하츠 클럽 밴드'고, 끝은 빌 에반스의 '왈츠 포 데비'였다.
창밖에서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시간은 서서히 흐르고 나오코는 혼자서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나오코 이야기의 부자연스러움은, 그녀가 몇 개의 포인트에 언급을 회피하듯 조심조심 이야기하는 데에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기즈키에 관한 것도 그 포인트 중의 하나였는데, 나에겐 그녀가 회피하고 있는 것은 그것만이 아닌 것 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을 여럿 품고 있으면서도,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연의 세세한 부분에 관해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골똘하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어서, 나는 그녀가 줄곧 떠드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시계가 열한 시를 가리키자 나는 아닌 게 아니라 불안해졌다. 그녀는 이미 네 시간 이상이나 쉬지 않고 떠들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갈 마지막 전철도 걱정되었고, 기숙사 폐문 시간도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적당한 틈을 찾아 그녀의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슬슬 가야겠어. 전철 시간도 있으니." 하고 나는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내 말은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귀에는 들렸어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순간엔 입을 다물었으나 이내 또 이야기의 뒤를 이어 갔다.
나는 다 단념하고 자세를 고쳐 앉아, 두병째 양주를 마저 마셨다. 이렇게 된 바엔 그녀에게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들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지막 전철이고 폐문이고, 모두 다 되가는 대로 내맡겨 두리라, 그렇게 나는 마음먹었다.
그러나 나오코의 이야기도 길게는 계속되지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끝나 있었다. 이야기의 말끝이 잡아 뜯긴 듯한 꼴로 공중에 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이야기는 끝난게 아니었다. 어디선가 훌쩍 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야기를 계속하려 했으나 거기엔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인가가 손상되고 만 것이다.
어쩌면 그것을 손상 시킨 것은 나인지도 몰랐다. 내가 한 말이 마침내 그녀의 귀에 들어가고, 시간을 들여 이해시키고, 그 때문에 그녀를 떠들게 했던 에너지 같은 것이 손상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나오코는 입술을 빠끔히 연 채, 내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작동하고 있는 도중에 전원이 끊겨 버린 기계처럼 보였다. 그녀의 눈은 마치 불투명한 엷은 막을 덥어 놓은 것처럼 흐려져 있었다.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 그저 시간이 꽤 늦었고,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뺨을 적시더니, 커다란 소리를 내며 레코드 재킷위로 떨어졌다. 맨 처음의 눈물이 흘러내리자, 다음은 더 막을 길이 없었다. 그녀는 두 손을 방바닥에 짚고 앞으로 몸을 구부린 채 마치 토하는 듯한 자세로 울었다. 나는 누군가가 그토록 처절하게 우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그녀의 어깨는 부들부들 잔물결 치듯 떨리고 있었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나의 팔 안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 없이 울었다. 눈물과 뜨거운 입김으로 나의 셔츠는 눅눅해졌고, 그리고 촉촉이 젖었다. 그녀의 열 손가락은 마치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듯 나의 등덜미 위를 더듬고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그녀의 곧고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나는 오랫동안 그 자세 그대로, 그녀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그녀와 잤다. 그러는 것이 옳았는지 아닌지 나로선 알지 못한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것은 역시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 생각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하는 이외에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감정은 격앙되어 있었고, 혼란스러웠으며, 내가 그 감정을 진정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전 등을 끄고 천천히 조심조심 그녀의 옷을 벗기고, 나도 옷을 벗었다. 그리고 끌어안았다. 비 오는 훈훈한 밤이어서, 우리는 알몸인 채였지만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나와 나오코는 어둠 속에서 말없이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덮치고 두 손으로 부드럽게 젖가슴을 감쌌다. 그녀는 뻣뻣하게 굳어진 나의 페니스를 잡았다. 그녀의 그것은 촉촉하고 따뜻하게 젖어서 나를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몹시 아파했다. 처음이냐고 물었더니, 나오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여지껏 기즈키와 나오코가 같이 잤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페니스를 아주 깊숙이 밀어 놓은 채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서, 그녀를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진정되자, 천천히 움직여 오랜 시간을 두고 사정했다. 마지막에는 나오코가 나의 몸을 힘껏 껴안으면서 소리를 내었다. 내가 그때까지 들었던 오르가즘 소리 중에서 가장 애절한 그런 소리였다.
다 끝나고 나서 나는 왜 기즈키와 자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런 건 묻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녀는 내 몸에서 손을 떼더니, 또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벽 붙박이장에서 이불을 꺼내어 그녀를 눕혔다. 그리곤 창밖에 쏟아지는 4월의 비를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아침이 되자 날은 개어 있었다. 나오코는 나에게 등을 돌린 채 자고 있었다. 그녀는 어쩌면 한숨도 자지 않고 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깨어 있었든 잠들어 있었든, 그녀의 입술은 언어를 모두를 잃었고, 그 몸은 얼어붙은 듯 굳어져 있었다. 여러 차례 말을 걸어 보았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고, 꼼짝도 하질 않았다. 나는 얼마 동안 알몸인 그녀의 어깨를 지켜 보고 있다가, 단념하고 그만 일어나기로 했다.
방바닥에는 레코드 재킷과 글라스, 양주병과 재떨이, 그런 것들이 어젯밤 그대로 흩어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형체가 일그러진 생일 케이크가 절반쯤 남아 있었다. 마치 거기서 갑자기 시간이 정지하여 움직이지 않게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방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들을 주워 모아 치우고, 수돗가에서 물을 두 컵 들이켰다.
책상 위에는 사전과 프랑스어 동사표가 놓여 있었다. 책상 앞 벽에는 달력이 붙어 있었다. 사진도 그림도, 아무것도 없는 숫자뿐인 달력이었다. 달력은 깨끗했다. 특별히 적어 넣은 메모도 없었고, 표시한 것도 없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옷을 주워 입었다. 셔츠의 가슴 부분은 아직도 차고 축축이 젖어 있었다.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니 나오코의 냄새가 났다. 나는 책상 위 메모지에, 그녀의 마음이 진정되면 차분하게 이야기하고 싶으니, 가까운 시실 안에 전화를 주면 좋겠다, 생일을 축하한다, 그렇게 적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다시 한 번 바라보고는 밖을 나와 가만가만 문을 닫았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나오코의 아파트는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나는 일요일 아침에 고쿠분지의 아파트까지 갔다. 그러나 그녀는 없었고, 문에 붙어 있던 문패도 떼어지고 없었다. 그리고 창문은 덧문까지 굳게 닫혀져 있었다.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이미 사흘 전에 이사를 했다는 것이다.
"글세, 어디로 옮겼는지는 알 수가 없는데요." 하고 관리인은 말했다.
나는 기숙사로 돌아와 그녀의 고베 주소로 긴 편지를 썼다. 나오코가 어디로 이사를 했든, 그 편지는 그녀 앞으로 배달될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 것들을 솔직하게 썼다. 나로선 여러 일들이 아직 잘 이해되지 않으며, 진정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지나가 버린 다음에 나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가 있을지는, 지금의 나로선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나오코에게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고, 무엇을 요구한다거나 그럴 듯한 말들을 나열할 형편도 못 된다. 첫째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만약 나오코가 내게 시간을 허락해 준다면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고, 우리는 좀더 서로를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나오코가 내게 시간을 허락해 준다면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고, 우리는 좀더 서로를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다시 한 번 나오코와 만나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기즈키를 잃어버리고 나서부터 나는 내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상대를 잃었고, 그것은 아마 나오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서로를 원하고 있었지 않나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우리는 어지간히도 먼길을 우회하게 되어버렸고, 어떤 의미에서는 왜곡돼 버린 셈이다. 나는 다분히 그런 식으로는 살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는 수밖엔 없었지 않은가? 그리고 그때 나오코에 대해서 느꼈던 친밀하고 따스한 감정은 내가 이제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다. 답장을 받고 싶다. 어떤 식의 답장이라도 좋으니 꼭 보내주기를 바란다 - 그녀에게 쓴 편지는 그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몸속의 무엇인가가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를 메워 줄 아무것도 없는 채, 그것은 순수한 공동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때문에 몸은 부자연스럽게 가벼웠고, 소리는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나는 평일에는 이전보다 한층 더 충실하게 대학에 나가 강의를 들었다. 강의는 지루하고, 클래스 녀석들과는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없었지만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나는 혼자서 교실 맨 앞줄 끝에 앉아서 강의를 들었고,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혼자서 식사를 했으며, 담배는 이제 피우지 않기로 했다.
5월 말 대학은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 그들은 대학해체를 외치고 있었다. 좋아, 해체할 테면 하라고 나는 생각했다. 해체해서 산산조각을 내어 발로 짓밟아 가루로 만들어 버리라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나도 홀가분할 것이고, 뒷일이야 혼자서 어떻게든 해볼 것이 아닌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줄 수도 있어. 재빨리 해치우라구.
대학 문이 봉쇄되고 강의가 중단되었으므로, 나는 화물 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화물 트럭 조수석에 앉아서 짐짝을 싣고 부리고 하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고되어서 처음에는 아침에 일어나기도 어려울 정도로 몸이 쑤셔댔지만, 그대신 그만큼 보수가 좋은 편이었고, 바쁘게 몸을 움직이는 동안에는 나 자신 속의 동공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일주일에 닷새는 낮에 화물 센터에서 일하고, 사흘은 밤에 레코드 가게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일이 없는 밤에는 방에서 위스키를 마시면서 책을 읽었다. 돌격대는 술을 한 방울도 못해서 알코올 냄새에 아주 민감했다. 내가 침대에 누워 위스키를 마시면, 그는 냄새가 역겨워 공부를 할 수 없으니 밖에 나가서 마실 수 없겠냐고 투덜댔다.
"네가 나가" 라고 나는 말했다.
"아니, 기숙사 안에서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건 규, 규, 규칙이잖아." 하고 그는 이의를 제기 했다.
"네가 나가."
나는 되풀이해서 반박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니꼬운 기분이 들어 옥상으로 올라가 혼자서 위스키를 마셨다.
6월에 들어서자 나는 나오코에게 다시 한 번 긴 편지를 써서, 역시 고베 주소로 띄웠다. 내용은 대체로 전과 같았다. 그리고 편지 끝에다, 답장을 기다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내가 나오코에게 상처를 입힌 것인지 어떤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나니 내 마음속의 공동이 좀 더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6월 중 나는 두 번이나 나가사와와 함께 시내로 나가 여자와 잤다. 어느 쪽도 아주 간단했다. 한 여자는 내가 호텔 침대로 데리고 가 옷을 벗기려 하자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내가 귀찮아져 침대 안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었더니, 잠시 뒤에는 그녀 스스로 파고 들어왔다. 또 한 여자는 섹스를 끝내고 나자,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다.
지금까지 몇 명의 여자하고 잤느냐, 어디 출신이냐, 어느 대학에 다니느냐,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느냐, 외국 여행을 한다면 어딜 가보고 싶으냐, 내 젖꼭지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 좀 크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둥, 아무튼 미주알고주알 캐물었다.
나는 적당히 대답하고 자버렸다. 잠에서 깨어나자 그녀는 함께 아침 식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카페로 들어가, 모닝 서비스로 주는 맛없는 토스트와 맛없는 계란을 먹고 맛없는 커피를 마셨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줄곧 나에게 질문을 해댔다. 아버지 직업이 뭐냐, 고교 시절엔 성적이 좋았느냐, 생일이 언제냐, 개구리를 먹어 본 일이 있느냐 등등. 나는 머리가 아파 왔기 때문에 식사를 끝내자, 이제부터 슬슬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한다고 했다.
"봐요, 다시는 만날 수 없나요?" 하고 그녀는 섭섭한 듯이 추근대며 말했다.
"살다 보면 어디선가 또 만날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 그냥 갈라섰다. 그리고 혼자가 되자 '아, 난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지겨운 생각에 빠졌다. 이런 짓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몸은 굶주리고 메말라 있어서 여자와 잘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들과 자면서도 줄곧 나오코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 희뿌옇게 떠올라 있던 나오코의 알몸이며, 그 한숨 소리며, 빗소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몸은 더욱더 허기가 지고 메말라 갔다. 나는 혼자 옥상에 올라가 위스키를 마시며,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7월 초에 나오코로부터 편지가 왔다. 길지 않은 편지였다.
답장이 늦어져서 미안해요. 하지만 이해해 줘요. 글을 쓸 수 있게끔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그리고 이 편지도 벌써 열 번이나 다시 썼는 걸요. 글을 쓴다는 것은 나로선 아주 고역이에요.
결론부터 쓰겠어요. 하는 수 없이 대학을 1년간 휴학하기로 했어요. 하는 수 없다고는 했지만,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는 일은 아마 없지 않을까 생각해요. 휴학이란 말은 어디까지나 절차상의 일이니까요.
갑작스런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훨씬 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이에요. 그 점에 대해서는 몇 번인가 이야기하려 마음먹었지만, 끝내 말문을 열지 못하고 말았어요. 입밖에 내는 일이 몹시 두려웠거든요.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설령 무슨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또 설령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이렇게 돼 있지 않을까 해요. 어쩌면 이런 말이 당신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겠군요. 만일 그렇다면 사과하겠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 일로 해서 당신이 자신을 책망하지는 말아 달라는 것이에요. 이것은 정말이지 나 자신이 깨끗하게 모두 짊어져야 할 일이니까요. 요 일년 남짓한 동안 나는 그것을 미루고 미루어 왔으며, 그 때문에 당신한테도 많은 폐를 끼쳤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내 한계겠지요.
고쿠분지의 아파트를 떠난 다음, 나는 고베의 집으로 돌아와 잠시 병원에 다녔어요. 의사 선생님 이야기로는 교토의 산속에 나에게 적당한 요양소가 있다고 하니, 잠시 거기 들어가 볼까 해요. 엄격한 의미에서의 병원이 아니고 훨씬 자유로운, 요양을 위한 시설이래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쓰기로 하겠어요. 지금은 아직 제대로 쓸 수가 없으니까요. 현재의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깥 세계와 차단된, 어딘가 조용한 곳에서 신경을 절대적으로 안정시키는 일이에요.
당신이 1년 동안 내 곁에 있어준 데 대해서, 나는 내 나름대로 감사하고 있어요. 그것만은 믿어 주세요. 당신이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은 결코 아니니까요.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은 나 자신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나는 아직 당신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요.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만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뜻이에요. 만약 준비가 됐다 싶을 때, 나는 즉시 당신에게 편지를 쓰겠어요. 그때가 되면 우리는 좀더 서로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당신의 말대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하겠지요. 안녕히.
나는 몇 백 번이고 이 편지를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리고 되풀이해 읽을 때마다 견딜 수 없이 서글퍼졌다. 그것은 마치 나오코가 말끄러미 나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느낀 것과 같은 서글픔이었다.
나는 그 같은 안타까운 심정을 어디로 가져갈 수도, 어디다 간직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몸 주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윤곽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그것은 몸 주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윤곽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몸에 걸치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풍경이 내 앞을 느릿느릿 지나갔다. 그들이 하는 말은 전혀 내 귀에 와닿지 않았다.
토요일 밤이 되자, 나는 여전히 로비의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전화가 걸려 올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나는 늘 텔레비전의 야구 중계를 켜놓은 채 그것을 보는 척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텔레비전 사이에 가로놓인 막막한 공간을 둘로 구분하고, 그 쪼개진 공간을 또 둘로 구분했다. 그리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일을 계속하여, 마지막에는 손바닥에 놓일 만큼의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열 시가 되자 나는 텔레비젼을 끄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을 잤다.
그달 하순께에 돌격대가 나에게 반딧불을 주었다.
반딧불은 인스턴트커피 병에 들어 있었다. 병 속에는 풀잎과 물이 약간 들어 있었고, 뚜껑에는 자잘한 공기 구멍이 몇 개 뚫려 있었다. 주위가 아직 밝아서 그것은 별다를 것도 없는 냇가의 검은 벌레로밖엔 보이지 않았지만, 돌격대는 그것이 틀림없는 반딧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반딧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말했고, 나는 특별히 그것을 부정할 이유도 근거도 없었다. 그래, 반딧불이야. 반딧불은 왠지 졸리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미끌미끌한 유리벽을 오르려고 계속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그만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마당에 있었어."
"여기 마당에?"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왜, 이 근처의 호텔에서 여름이 되면, 손님을 끌기 위해 반딧불을 풀어 놓잖아. 그것이 이리로 흘러들어온 거라구."
그는 검은 보스톤 가방에다 옷가지며 노트를 쑤셔 넣으면서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여름 방학에 들어선 지도 이미 몇 주일이 지났기 때문에 아직 기숙사에 남아 있는 건 우리 정도였다. 나는 별로 고베로 가고 싶지 않아서 아르바이트를 계속하고 있었고, 그에겐 실습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실습도 끝나서 그는 이제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돌격대의 집은 야마나시에 있었다.
"이거 말이지, 여자한테 주면 좋을 거야. 틀림없이 좋아할 테니까" 하고 그가 말했다.
"고마워." 하고 나는 말했다.
날이 저물자 기숙사는 휑뎅그렁한 게 마치 폐허처럼 느껴졌다. 국기가 게양대에서 내려지고, 식당 창문에는 전등이 켜졌다. 학생 수가 줄어든 탓으로 식당 전등은 늘 절반밖에 켜 있지 않았다. 오른쪽 절반은 꺼지고 왼쪽 절반만 켜져 있었다. 그런대로 은은하게 저녁 냄새가 풍겨 왔다. 크림 스튜 냄새였다. 나는 반딧불이 들어 있는 인스턴트커피 병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누군가 걷어 들이는 것을 잊은 흰 셔츠만 빨랫줄에 널려 있어서, 무슨 속 빈 껍데기처럼 해질녘의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옥상 구석에 있는 철제 사다리를 타고 급수탑 위로 올라갔다. 원통형의 급수 탱크는 낮 동안에 듬뿍 빨아들인 열로 해서 아직도 따스했다. 좁다란 공간에 앉아 난간에 기대니 약간 이지러진 하얀 달이 눈앞에 떠올라 있었다.
오른쪽에는 신주쿠 거리의 불빛이, 그리고 왼쪽에는 이케부쿠로 거리의 불빛이 보였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선명하게 빛의 물결을 이루며 거리에서 거리로 흐르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소리가 서로 어울린 부드러운 음향이 마치 구름처럼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하지만 그 빛깔은 너무나 희미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반딧불을 본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는데, 그 기억 속에서 반딧불은 훨씬 뚜렷하고 선명한 빛을 여름밤의 어둠 속에서 발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반딧불이란 그처럼 선명하게 타오르는 듯한 빛을 발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반딧불은 지쳐서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병 주둥이를 붙잡고 몇 번인가 가볍게 흔들어 봤다. 반딧불은 유리 벽에다 몸을 부딪치며 아주 조금 날았다. 하지만 그 빛은 여전히 희미했다.
반딧불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전제였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거기가 도대체 어디였던가?
나는 그 광경을 생각해 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장소와 시간은 도무지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어두운 밤에 물소리가 들렸다. 벽돌로 만든 구식 수문도 있었다. 핸들을 빙빙 돌려서 열고 닫는 그런 수문이다. 큰 강은 아니었다. 강변의 수초가 수면을 거의 뒤덮다시피 하고 있는 작은 냇물이었다.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워 회중전등을 꺼버리면 자신의 발밑조차 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수문의 괸 물웅덩이 위를 몇백 마리의 반딧불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수면에 비쳐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기억의 어둠 속에 잠시 몸을 담갔다. 바람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다지 심한 바람도 아닌데 그것은 이상하게 선명한 흔적을 남기며 나의 몸 주위를 빠져나갔다. 눈을 떠보니 여름밤의 어둠은 조금 더 깊어져 있었다.
나는 병뚜껑을 열고 반딧불을 집어내어 3센티미터쯤 튀어나온 급수탑 가장자리 위에다 놓았다. 반딧불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반딧불은 볼트 주위를 비틀거리면서 한 바퀴 돌기도 하고, 부스럼 딱지처럼 보풀어진 페인트에다 다리를 걸쳐 보기도 했다. 오른쪽으로 한참을 가더니 거기가 막다른 곳이라는 것을 확인했는지 다시 왼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나서 시간을 들여 볼트의 꼭대기로 올라가더니 거기에서 꼼짝도 않고 웅크리고 있었다. 반딧불은 마치 숨이 끊어진 것처럼 그래도 꼼짝 않고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난간에 기댄 채 그런 반딧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반딧불도 오랫동안 꼼짝도 않고 그곳에 있었다. 바람만이 우리의 주의를 스쳐 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무수한 느티나무 잎새가 서로 부벼댔다.
나는 오래오래 기다리고 있었다.
반딧불이 날아간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반딧불은 뭔가 생각난 듯이 문득 날개를 펼치더니, 그다음 순간 난간을 넘어서 희미한 어둠 속에 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라도 하려는 듯, 급수탑 옆에서 재빨리 원을 그렸다. 그리고 기 빛의 선이 바람에 스며드는 것을 지켜보기라도 하듯 잠시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이윽고 동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반딧불이 사라져 버린 뒤에도 그 빛의 흔적은 내 안에 오래오래 머물러 있었다. 눈을 감은 두터운 어둠 속을, 그 가녀린 엷은 빛은 마치 갈 곳을 잃은 영혼처럼 언제까지나 방황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한 어둠속에 몇 번이고 손을 뻗쳐 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조그마한 빛은 언제나 나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안타까운 거리에 있었다.
제4장 부드럽고 평온한 입맞춤
여름 방학 동안 대학에는 기동대의 출동을 요청하였고, 기동대는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안에서 농성 중이던 학생 전원을 체포했다.
그 당시는 어느 대학에서나 그 같은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특별히 새삼스러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대학은 해체는커녕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대학에는 엄청난 자본이 투입되어 있었으므로, 학생들이 난동을 좀 부렸다고 해서 '예, 그렇습니까' 하고 덩치 큰 학교가 얌전하게 해체될 턱이 없었다.
그리고 대학을 바리케이드로 봉쇄했던 측들도 사실상 대학을 해체 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단지 대학 기구의 주도권 변경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었고, 나로서는 주도권이 어찌 되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동맹 휴학이 좌절됐다고 해서 특별한 감회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9월에 들어서서 대학이 거의 폐허가 돼 있으리라 예상하면서, 가보았으나. 대학은 전혀 손상되지 않고 멀쩡했다. 도서관의 책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교수 연구실도 멀쩡했으며, 학생과가 있는 건물도 그대로였다. 이 녀석들 도대체 한 것이 뭐냐 싶어서, 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동맹 휴학이 철회되고 기동대의 점령하에서 강의가 재개되자, 맨 먼저 출석한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선동, 주도했던 패거리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강의실에 나와 강의를 들었고,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했다. 이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동맹 휴학 결의는 아직도 유효했고, 아무도 동맹 휴학 종결을 선언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 측이 기동대를 끌어들여 바리케이드를 파괴했을 뿐, 원칙적으로 동맹 휴학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동맹 휴학 결의 때에는 하고 싶은 만큼 큰소리를 치면서, 동맹 휴학에 반대하는 혹은 의혹을 표명하는 학생을 매도하고, 혹은 규탄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들을 찾아가 왜 동맹 휴학을 계속하지 않고 강의에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대답을 못했다. 대답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출석 일수가 모자라 학점을 따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 패거리들이 대학해체를 외쳐댔구나, 하고 생각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비열한 패거리들은 바람의 방향을 하나로 큰소리를 쳤다, 움츠러들었다 하는 것이다.
이봐, 기즈키, 여긴 정말 형편없는 세계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작자들이 버젓하게 대학에서 학점을 따고, 사회에 나가 부지런히 비열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는 얼마 동안은 강의에 나가되 출석을 부를 때에는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짓을 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기분이 나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클래스 안에서의 내 입장은 한층 더 고립되어 갔다. 이름을 부르는데도 내가 잠자코 있으니까 강의실 안에는 어색하고 불편한 공기가 감돌았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나 또한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9월의 둘째 주에 이르러, 나는 대학 교육이란 전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나는 대학 생활을 무료함을 견디는 훈련 기간으로 삼기로 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대학을 그만두고 사회에 나가 뭔가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매일 학교에 나가 강의에 출석을 하고, 필기를 하고, 빈 시간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자료 조사를 했다.
9월 둘째 주가 되었는데도, 돌격대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이상하다기보다는 천지 개벽할 사건이었다. 대학에서는 이미 수없이 시작되었는데 돌격대가 수업을 빼먹다니,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책상이며 라디오 위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선반 위에는 플라스틱 컵과 칫솔, 찻병과 살충 스프레이 그런 것들이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돌격대가 없는 동안에는 내가 청소를 했다. 지난 1년 동안에 방을 청결하게 한다는 것은 내 습성의 일부가 되어있었고, 돌격대가 없을 때에는 내가 그 청결함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매일 같이 방바닥을 쓸고, 사흘에 한 번쯤은 창문을 닦았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이불을 내다 널었다. 그리고 돌격대가 돌아와서 '와타나베! 어찌된 일이지? 이거 굉장히 깨끗하잖아.' 하고 칭찬해 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그가 돌아오기는커녕 그의 짐이 몽땅 없어졌다. 방문 앞의 명찰도 없어지고 내 것만 남아 있었다. 나는 사감실로 가서 도대체 그가 어찌 된 거냐고 물었다.
"기숙사에서 나갔네." 하고 사감은 아주 간단히 말했다.
"당분간 혼자 지내게."
나는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사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는 타인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며, 자기 혼자서 사물을 관리하는 데에 무한한 기쁨을 느끼는 그런 타입의 속물이었다.
방 벽에는 빙산 사진이 한동안 붙어 있었지만, 얼마 후 나는 그것마저 떼버리고, 그 대신 짐 모리슨과 마일즈 데이비스의 사진을 붙였다. 그래서 내 방안이 조금은 내 방다워졌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자그마한 스테레오 플레이어를 샀다. 그리고 밤이면 혼자서 술을 마시면서 음악을 들었다. 이따금 돌격대 생각이 떠오르곤 했지만, 그래도 혼자서 지낸다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었다.
월요일 열시 부터 연극사 2의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강의가 있었고, 그 강의는 열한 시 반에 끝났다. 강의가 끝나자 나는, 학교에서 10분쯤 거리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까지 걸어가 오믈렛과 샐러드를 먹었다.
번화가에서 떨어져 있는 그 레스토랑의 음식값은 학생 식당보다는 약간 비쌌지만 조용하고 안정감이 있었으며, 매우 맛있는 오믈렛을 먹을 수 있었다. 무뚝뚝한 부부와 아르바이트하는 여자아이, 그렇게 셋이서 일하고 있었다.
내가 창가에 혼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으려니까 한 무리의 학생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산뜻한 옷차림을 한 그들은 남자가 둘, 여자가 둘이었다. 그들은 입구 쪽 테이블에 앉아 메뉴를 바라보며 한참이나 이모저모 검토하더니, 이윽고 한 사람이 주문을 모아 아르바이트 여자에게 그것을 전달했다.
그때 나는 문득 그들 중 여학생 하나가 내 쪽을 흘끔흘끔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머리가 굉장히 짧은 여자였는데,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하얀 면으로 된 미니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전혀 생소해서 나는 그대로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문득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테이블 끝에 다 한쪽 손을 짚고 내 이름을 불렀다.
"와타나베 씨, 맞죠?"
나는 얼굴을 들어 다시 한 번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아주 눈에 띠는 여자여서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다면 곧 생각이 났을 타입이었다. 더구나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대학에 그리 흔하지 않을 터였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아니면 누구 올 사람이 있나요, 여기에?"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앉아요."
그녀는 드르륵 소리를 내며 의자를 끌어당겨 내 맞은 편에 앉더니, 선글라스 안쪽에서 나를 빤히 보고는, 그 다음엔 내 접시 위로 시선을 옮겼다.
"맛있어 보이네요, 그거."
"맛있어요. 송이버섯 오믈렛과 완두콩 샐러드죠."
"으음, 다음엔 그걸 먹어야지. 오늘은 이미 다른 걸 주문했으니까." 하고 그녀는 말했다.
"뭘 주문했는데요?"
"마카로니 그라탱."
"마카로니 그라탱도 괜찮아요. 그런데 우리가 어디서 만났더라? 아무래도 생각이 나지 않는데."
"에우리피데스" 하고 그녀는 간단하게 말했다.
"엘렉트라. '아니오, 신께서도 불행한 자가 하는 말에는 귀 기울이려 하시지 않는답니다.', 조금 전에 수업이 막 끝났잖아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자, 그제서야 겨우 생각이 났다. 연극사2클래스에서 본적이 있는 1학년 여자였다. 다만 머리 스타일이 너무나 엉뚱하게 달라져 있어서 누군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여름 방학 전엔 머리가 여기까지 이만큼 길었잖아?" 하고 나는 어깨 밑 10센티미터쯤 위치에다 손을 갖다 댔다.
"그래요, 여름에 파마를 해버렸어요. 그런데 소름이 끼칠 정도로 형편없지 뭐예요. 이게 글세, 한 번은 죽어 버릴까 생각했을 정도예요. 꼭 미역이 머리에 엉켜 붙은 물귀신 같았어요. 죽어 버릴까 생각하다가 자포자기 끝에 짧게 잘라 버렸어요. 시원하긴 하지 뭐예요, 이거."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길이 4센티미터나 5센티미터 정도의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쓱쓱 어루만졌다. 그리곤 나를 향해 생긋 웃었다.
"하지만 전혀 나쁘지 않은데, 그거" 하고 나는 남은 오믈렛을 먹으면서 말했다.
"어디 좀 머리를 옆으로 돌려 보라구."
그녀는 옆을 향한 채 5초가량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음,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분명 머리 모양이 잘 생겼나봐, 귀도 단정해 보이고."
"그래요,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자르고 보니까 아 이것 역시 나쁘지 않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남자들이란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거든요. 국민 학생 같다느니, 강제 수용소의 죄수 같다느니, 그런 소리만 하지 뭐예요? 어째서 남자들이란 머리가 긴 여자를 좋아하죠? 그건 꼭 파시스트 같아요. 정말 시시하다구요. 어째서 남자들이란 머리가 긴 여자가 우아하며 마음이 상냥하고 여성답다, 그러는 걸까? 난 말에요, 머리가 긴 야비한 여자를 2백 50명쯤은 알고 있어요. 정말."
"난 지금 그 머리가 좋은 걸." 하고 나는 말했다.
사실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길던 때의 그녀는, 내 기억 같아선 그저 아주 평범한 귀여운 여자애였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녀는, 마치 봄을 맞아 바깥 세계로 막 뛰어나온 새끼 동물처럼 싱그러운 생명감을 분출시키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마치 독립된 생명체처럼, 즐겁게 요동치고 웃고 화내고, 어이없어하고 체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싱싱한 표정을 목격한 것이 오랜만이라서, 한동안 감탄해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샐러드를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내 얼굴을 보았다.
"봐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그래, 되도록 정직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는 편이니까."
"흐음." 하고 그녀는 콧소리를 냈다.
"그런데 왜 그런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
"갑작스레 머리가 짧아지니까 지독하게 허전한 느낌이 들어서요. 아치 알몸으로 붐비는 사람들 속에 내던져진 것만 같아 전혀 안정감이 없어서, 그래서 선글라스를 쓰는 거예요."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머지 오믈렛을 마저 먹었다. 그녀는 내가 먹는 걸 흥미진진해 하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쪽 자리로 가지 않아도 되나?" 하고 나는 그녀의 동행들이 있는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뭐 괜찮아요. 요리가 나오면 가죠. 신경 쓸 거 없어요. 그런데 내가 여기 있으면 식사하는 데 방해가 될까요?"
"방해는 무슨 방해, 벌써 다 먹었는걸."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기 테이블로 되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기에 커피를 주문했다.
여자 주인이 접시를 거둬 가고, 다시 그 자리에 설탕과 크림을 놓고 갔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 수업에 출석 체크를 해도 대답을 안했죠? 와타나베가 선배 이름이죠? 와타나베 도오루, 그렇죠?"
"그래, 맞아."
"그럼 왜 대답하지 않았죠?"
"오늘은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어."
그녀는 다시 한 번 선글라스를 벗어서 테이블 위에 놓더니, 마치 희귀 동물이 들어 있는 울 속이라도 들여다보는 그런 눈으로 말끄러미 나를 보았다.
"오늘은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어" 하고 그녀는 내 말을 되풀이 했다.
"봐요, 선배 말투는 꼬옥 험프리 보가트 같아요. 냉소적이고 터프하고."
"설마. 난 지극히 보통 사람이야. 저만치 어디에나 있는"
여자 주인이 커피를 날라다가 내 앞에 놓았다. 나는 설탕도 크림도 넣지 않고 그걸 가만히 마셨다.
"그것 봐요, 역시 설탕도 크림도 넣지 않았잖아요."
"그저 단순히 단 것을 좋아하지 않을 뿐이야. 무슨 오해라도 하고 있는 것 아냐?" 하고 나는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어째서 그렇게 햇볕에 탔죠?"
"2주일 정도 줄곧 걸어서 여행을 했거든. 여기저기. 배낭과 침낭을 짊어지고 말야. 그래서 볕에 탄 거야."
"어떤 곳?"
"가나자와에서 노토 반도를 한 바퀴 빙 돌았어. 니이가타까지 갔었지."
"혼자서요?"
"그래. 여기저기서 어쩌다가 동행이 생기는 수도 있었지만."
"로맨스는 없었나요? 여행길에서 어쩌다가 여자와 알게 됐다든지."
"로맨스?" 하고 나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이봐, 역시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침낭을 짊어지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걸어 다니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로맨스 같은 것과 해후한단 말이야?"
"언제나 그렇게 혼자서 여행을 해요?"
"그래"
"고독을 좋아해요?" 하고 그녀는 턱을 괴고 앉아 말했다.
"혼자서 여행하고,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떨어져 앉아 강의를 듣는 게 좋아요?"
"고독을 좋아하는 인간이란 없는 법이야.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뿐이
지. 그런 짓을 해봤자 실망할 뿐이거든."
그녀는 선글라스의 안경다리를 입에 물더니 나직나직한 소리로,
"고독을 좋아하는 인간이란 없다. 그저 실망하는 것이 싫을 뿐이다. 가령 선배가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그땐 대사를 그 대사를 쓸 수 있겠네요." 하고 말했다.
"고마워"
"초록색을 좋아해요?"
"그건 왜 묻지?"
"초록색 폴로 셔츠를 입고 있어서요."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냐. 무슨 색이면 어때?"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냐. 무슨 색이면 어때?" 하고 그녀는 내 말을 되풀이하고는 이렇게 물었다.
"난 그런 말투가 굉장히 좋아요. 산뜻하게 벽을 회로 바르는 것 같으니까. 지금까지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나요?"
"없어."
"내 이름은 미도리라고 해요. 그런데도 전혀 초록색이 안 어울려요. 이상하죠? 좀 심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꼭 저주받은 인생 같잖아요. 그리고 우리 언니는 모모코라고 해요. 우습지 않아요?"
"그럼 언니는 핑크가 어울리나?"
"그게 글세, 굉장히 잘 어울리거든요. 핑크를 입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요. 치, 정말 불공평하지 뭐예요."
그녀의 테이블에 요리가 놓이자, 마드라스 체크(역주 : 인도 마드라스 산 체크 무늬 섬유) 윗도리를 걸친 남자가
"이봐, 미도리! 음식 나왔어" 하고 불렀다. 그녀는 그쪽을 향해 마치 '알았어' 라고 하듯 손을 들어 보였다.
"저 와타나베 선배, 강의를 필기하고 있어요? 연극사 2?"
"물론"
"미안하지만 빌려주지 않을래요? 난 두 번이나 강의를 빼먹었거든요. 그 클래스엔 아는 사람도 없고."
"물론이지, 좋아"
나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어 무슨 쓸데없는 거나 써놓지 않았는가를 확인하고 미도리에게 넘겨주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와타나베 선배, 모래 학교에 나와요?"
"응."
"그럼 열두 시에 이리로 올래요? 노트를 돌려줄 겸 점심을 살 테니까요. 뭐 혼자서 밥 먹지 않음 소화 불량을 일으킨다든가 그렇지 않겠지요?"
"설마, 하지만 답례 같은 건 필요 없다구. 노트쯤 빌려 준 것 가지고 뭐."
"괜찮아요. 난 답례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괜찮을까요, 수첩에 안 적어도 잊어버리지 않겠어요?"
"잊어버리긴, 모래 열두 시에 미도리와 여기서 만난다."
저편에서
"야 미도리, 빨리 안 오면 식어버린다구."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 소리를 무시했다.
"있잖아요, 예전부터 그런 말투였어요?"
"그랬던 것 같애. 별로 의식하고 그런 적은 없지만"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내 말투가 색다르단 소리를 정말 그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잠시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얼마 후 생긋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자기 테이플 쪽으로 돌아갔다.
내가 그 테이블 곁을 지나갈 때, 미도리는 나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리고 다른 세 사람은 흘끗 내 얼굴을 보았을 뿐이다.
수요일, 약속한 열두 시가 다 되어도, 미도리는 그 레스토랑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올 때까지 맥주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을 작정이었으나, 레스토랑이 붐비기 시작하기에 할 수 없이 음식을 주문하여 혼자서 먹었다.
다 먹은 건 열두 시 삼십오 분이었는데, 그래도 미도리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음식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와 레스토랑 맞은편에 있는 자그마한 신사의 돌층계에 앉아, 맥주의 취기를 가라앉히면서 한 시까지 그녀를 기다렸으나 그때까지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나는 단념하고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두 시부터 있는 독일어 수업에 들어갔다.
강의가 끝나자 나는 학생과에 가서 강의 등록부를 찾아, 연극사 2 클래스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냈다. 다행히도 미도리라는 고바야시 미도리 한 명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카드식으로 된 학생 명부를 뒤적여 1969년도 입학생 중에서 고바야시 미도리를 찾아내어, 주소와 전화번호를 메모했다. 주소는 도요시마 구었고 집은 자택이었다. 나는 전화 부스로 들어가 그 번호를 천천히 돌렸다.
"여보세요, 고바야시 서점입니다." 하고 남자 목소리가 대답했다.
고바야시 서점이라는 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저, 죄송합니다만, 미도리 양을 찾습니다만."
"예, 미도리는 지금 없는데요."
"학교에 갔습니까?"
"아, 저어 병원에 간 것 같은데요. 댁의 이름은?"
나는 이름을 대지 않고, 고맙다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병원이라고? 그녀가 무슨 부상을 당했거나 병에라도 걸려 병원에 갔단 말인가? 그러나 그 남자의 목소리에선 그런 종류의 비일상적인 긴박감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아, 저어 병원에 간 것 같은데요"
그것은 마치 병원이 생활의 일부이기라도 하다는 그런 어투였다. 생선가게에 생선을 사러 갔다든가 하는 그런 정도의 가벼운 어조였다.
나는 그 점에 대해 잠시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지만 귀찮아져서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기숙사로 돌아와 침대에 뒹굴면서 나가사와에게 빌려 왔던 조셉 콘래드의 '로드 짐'의 나머지를 읽어 버렸다. 그리고 그에게 책을 돌려주러 갔다. 나가사와는 막 식사를 하러 가려던 참이어서, 함께 가서 저녁을 먹었다.
"외무성 시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외무성의 상급 제 2차 시험이 이미 8월에 있었던 것이다.
나가사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보통이지. 그런 건 보통만 되도 합격이야. 집단 토론이니 면접이니 그런 거니까. 여자앨 꼬이는 거나 다름없어."
"그럼 말하자면 간단했다, 그 말이군요. 발표는 언젭니까?"
"10월 초순께. 만약 합격한다면 멋지게 한턱 쓰지."
"그런데 외무성의 상급 제2차 시험이라는 건 어떤 겁니까? 선배님 같은 사람들만 시험을 치러 옵니까?"
"천만에. 대개는 얼간이들이지. 얼간이 아니면 변태자고. 관료 나부랭이나 되려고 하는 인간의 95퍼센트 정도는 쓰레기거든.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니까. 그 작자들 글자조차 똑바로 읽지 못한다구."
"그럼 어째서 선배님은 외무성에 들어가려고 하지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외국 근무를 선호한다든지 해서지.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내 능력을 테스트해 보고 싶다는 거야. 어차피 테스트한다면 제일 커다란 그릇 속에서 테스트해 보고 싶다, 그거지. 말하자면 국가 말일세. 이 거창한 관료 기구 속에서 어디까지 자기가 올라갈 수 있느냐, 어디까지 자신이 힘을 낼수 있느냐, 그런 걸 시험해 보고 싶다 그거야, 알겠나?"
"어째 게임이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게임 같은 거야. 나에겐 권력욕이랄까 금전욕이랄까 그런 건 거의 없어. 정말이야, 난 하찮은 고집스런 사내일지 모르지만, 그런 욕심은 놀랄만큼 없는 놈이야. 이를테면 무사무욕, 그런 인간이거든, 다만 호기심이 있을 뿐이야. 그리고 넓고 억센 세계에서 자기 힘을 시험해 보고 싶을 뿐이지."
"그럼 이상이랄까, 그런 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 말입니까?"
"물론 없지"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인생엔 그런 건 필요 없어. 필요한 건 이상이 아니라 바로 행동 규범, 그거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인생도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래, 나 같은 인생은 싫다, 그 말인가?"
"농담은 그만두세요. 싫고 좋고가 있을 수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나는 도쿄 대학에 입학할 수도 없고, 나 좋을 때에 좋아하는 여자와 잘 수도 없고, 제법 말솜씨가 유창하달 것도 없습니다.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니고,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2류 사립 대학의 문학부를 나온댔자 뭐 전망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내 인생이 부러운가?"
"부럽진 않습니다. 난 너무나 내 자신에 익숙해 있으니까요.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고쿄 대학에도 외무성에도 흥미가 없습니다. 그저 한 가지 부러운 건, 하쓰미 같은 멋진 애인을 가졌다는 그 점이지요."
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했다.
"이봐, 와타나베" 하고 식사가 끝나자 나가사와는 나에게 말했다.
"나와 너는 이 학교를 나와 10년 또는 20년이 지나서도, 또 어딘 가에서 만나게 될 건만 같아.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서로 관련을 가질 것만 같고."
"꼭 디킨스의 소설 같은 이야기로 군요." 하고 말하곤 나는 웃었다.
"그렇군. 하지만 내 예감은 잘 맞아떨어지지" 하고 그 또한 웃었다.
"식사 후에 둘이서 근처 스낵 바로 술을 마시러 갔다. 그리고는 거기서 아홉 시가 지나도록 마셨다.
"그런데 선배님, 대체 선배님의 그 인생의 행동 규범이란 어떤 것입니까?"
"넌 분명히 웃을 거야."
"웃긴 왜 웃어요!"
"신사일 것, 그거지!"
"그럼, 신사일 것이란 어떤 의미지요? 만약 정의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신사야."
"선배님은 내가 지금껏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색다른 사람입니다."
"너는 내가 지금껏 만난 인간 중에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돈으로 술값을 치렀다.
다음 주 월요일 연극사 2강의 시간에도 고바야시 미도리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교실을 죽 둘러보고 그녀가 출석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여느 때처럼 맨 앞 줄 좌석에 앉아 교수가 나타날 때까지 나오코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나는 여름 방학에 했던 여행에 대해 썼다. 걸어 다닌 길이며, 지나간 거리 거리며, 만난 사람들에 대해 썼다.
나는 밤이면 나오코 생각을 한다. 나오코와 만나지 못하면서부터,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나오코를 요구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대학은 따분하기 짝이 없지만, 자기 훈련 삼아 꼭꼭 출석해서 공부하고 있다. 나오코가 내 앞에서 사라지고 나서부터는, 무슨 일을 해도 시시하게만 느껴진다. 한 번 나오코를 만나 차분히 이야기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나오코가 들어갔다는 요양소를 방문하고, 몇 시간만이라도 면회하고 싶은데 그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될 수만 있다면 전과 같이, 나오코와 둘이서 나란히 걸어 보고 싶다. 부담이 될지 모르지만 아무리 짧은 편지라도 좋으니 꼭 답장을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게만 쓰고 나서 나는 그 네장의 편지지를 곱게 접어 준비한 봉투에 놓고, 나오코의 주소를 썼다.
얼마 후, 울적한 듯한 얼굴을 한 작달만한 교수가 들어와서 출석 체크를 하더니,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는 다리가 약해서인지 노상 금속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연극사 2는 재미있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들을 만한 내실 있는 강의였다.
"여전히 덥군요." 하고 말한 다음,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에 있어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역주 : 기계 장치로 된 신이라는 뜻)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우리피데스에 있어서의 신이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에 관해서도 말했다.
15분쯤 지났을 즈음에 강의 실 문이 열리고 미도리가 들어왔다. 그녀는 짙은 블루의 스포츠 셔츠에다 크림 빛 면바지를 입고, 전과 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교수를 향해 지각해서 죄송스럽다는 그런 미소를 띄우고 나서, 내 옆으로 와 앉았다. 그리곤 숄더 백에서 노트를 꺼내어 나에게 주었다. 노트 속에는 '수요일, 미안했어요. 화났어요?' 그렇게 적힌 메모가 들어 있었다.
강의가 반쯤 진행되어 교수가 흑판에 희랍극의 무대 장치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다시 문이 열리고 헬멧을 뒤집어쓴 학생 두명이 들어왔다. 마치 만담을 하는 콤비 같은 2인조였다. 한 명은 훤칠한 키에 얼굴이 희고, 또 한 명은 키가 작고 둥근 얼굴에 피부 빛이 검고, 어울리지도 않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키가 훤칠한 쪽이 선동 전단을 안고 있었다. 키가 작은 쪽이 교수에게 다가가더니, 수업의 후반을 토론에 할당하고 싶으니 양해해달라, 희랍 비극보다도 훨씬 심각한 문제가 오늘의 세계를 뒤덮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요구가 아니라 단순한 통고일 뿐이었다. 나로선 희랍 비극보다도 심각한 문제가 현재 세계에 존재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으나, 뭐라고 해도 통하지 않을 테니 좋을 대로 하라고 교수는 말했다. 그리곤 강단 모서리를 잡고 다리를 아래로 내리더니, 금속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질질 끌며 강의실에서 나가 버렸다.
키가 훤칠한 녀석이 전단을 나누어 주는 동안, 얼굴이 둥근 녀석이 단상에 올라 연설을 했다. 전단에는 저 모든 사상을 단순화하는 특유의 간결 서체로, '기만적인 총장 선거 분쇄하고, 새로운 전학 동맹휴학에 전력을 결집하며, 일제 산학 협동 노선에 철퇴를 가한다.' 라고 씌어 있었다.
내세우는 바는 제법 훌륭했고, 내용에도 특별한 이의는 없었으나, 문장에 설득력이 없었다. 또한 신뢰성도 없었거니와 마음을 사로잡는 힘도 없었다. 둥근 얼굴이 한 연설도 피장파장이었었다. 그 타령이 그 타령이었다. 똑같은 멜로디에 가사의 토씨만 틀릴 뿐이었다. 이 녀석들의 진짜 적은 국가 권력이 아니라 상상력의 결핍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 나가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나는 그러자며 일어나서 미도리와 같이 교실을 나섰다. 그때 둥근 얼굴이 내게 무엇이라고 말했는데, 무엇이라고 했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미도리는 "그럼 안녕" 하고는 그에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거, 우리가 반혁명분자일까요?" 하고 교실을 빠져나온 미도리가 나에게 말했다.
"혁명이 성취된다면 우린 전봇대에 나란히 매달리겠지요?"
"매달리기 전에 가급적이면 점심을 먹어 두고 싶군." 하고 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 좀 멀긴 하지만 선배를 데리고 가고픈 가게가 있어요. 좀 시간이 걸려도 괜찮겠지요?"
"괜찮지, 두 시부터 수없이 있으니까, 그때까지 시간이 남아. 어차피 뺑소니칠 참이었으니까."
미도리는 나를 데리고 버스로 요쓰야까지 갔다 그녀가 데리고 간 가게는 요쓰야 뒷골목의 좀 으슥한 곳에 있는 도시락집이었다.
우리가 탁자 앞에 앉자, 무슨 말도 하기 전에 주홍칠기의 사격형 용기에 담긴, 그날그날 내용물이 바뀌는 도시락과 국물 그릇이 놓여졌다. 과연 일부러 버스를 타고 찾아올 만한 값어치는 분명 있는 식당이었다.
"맛있는데."
"응. 게다가 값도 아주 싸요. 그래서 고교 시절부터 가끔씩 여기로 점심을 먹으러 왔죠. 내가 다니던 학교가 바로 이 근처에 있었어요. 어찌나 까다로운 학교였던지, 우린 몰래 먹으로 왔지 뭐예요. 어쨌든 외식하는 걸 들키기만 하면, 당장 정학 처분을 당하는 학교였거든요."
선글라스를 벗은 미도리는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약간 졸린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왼쪽 손목에 낀 가느다란 은팔찌를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새끼손가락 끝으로 눈언저리를 갉작갉작 긁기도 했다.
"졸려?" 하고 내가 물었다.
"약간. 수면 부족인가봐요. 어제 좀 바빠서요. 하지만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지난번엔 미안했어요. 아무래도 빠져 나올 수 없는 중요한 볼 일이 생겼거든요. 그것도 아침에 갑자기,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 레스토랑에 전화할까 했지만 가게 이름도 기억나지 않고, 선배 집 전화번호도 모르고. 많이 기다렸죠?"
"뭐, 괜찮아. 난 시간이 너무 많아 죽을 지경이니까."
"그렇게 한가해요?"
"내 시간을 좀 줘서, 그 속에 미도리를 잠자게 해줬으면 싶을 정도지."
미도리는 턱을 고인 채 생긋 웃고는 내 얼굴을 보았다.
"선배, 참 친절한 사람이에요."
"친절할 것까진 없고, 그저 시간이 남아도는 거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미도리는 병원에 갔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 있었나?"
"우리 집에? 어떻게 집 전화번호를 알았지요?"
"학생과에서 알아냈지. 물론 누구든 다 알아낼 수 있는 일이야."
알겠다는 듯이 그녀는 두세 번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또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그랬군요. 그런 건 미처 생각지도 못했어요. 선배 전화번호도 그렇게 하면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그 병원 말인데요, 다음번에 얘기하죠. 지금은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미안해요."
"괜찮아, 어째 좀 쓸데없는 걸 물어봤나 보군."
"으응, 그렇진 않아요. 지금 난 좀 지쳐 있을 뿐이에요. 비 맞은 원숭이처럼 지쳤거든요."
"집에 가서 자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나는 말해 보았다.
"아직 자고 싶진 않아요. 좀 걸을까요?" 하고 미도리는 내 표정을 살폈다.
미도리는 요쓰야 역에서 부터 얼마쯤 걸어간 곳에 있는, 그녀가 다녔다는 여고 앞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요쓰야 역 앞을 지나갈 때 나는 문득 나오코와의 그 끝없는 보행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은 이 장소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만약 저 5월의 일요일에 중앙선 전철 안에서 공교롭게도 나오코와 만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같은 결과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고쳐 생각했다. 아마도 나와 나오코는 그때 만나야 했기 때문에 만난 것이고, 만약에 그때 만나지 않았다 하더라고, 어딘가에서 우리는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특별히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와 미도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그녀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학교 건물에는 담쟁이덩굴이 얽혀 있고, 난간에는 몇 마리의 비둘기가 앉아서 날개를 쉬고 있었다. 제법 정취 있는 낡은 건물이었다. 정원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고, 그 곁으로는 하얀 연기가 하늘로 꼿꼿이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여름날의 남은 햇살이 연기를 더욱 아련히 보이게 했다.
"와타나베, 저 연기, 무엇인지 알겠어요?"
갑자기 미도리가 물었다.
"모르겠어."
"저거, 생리대를 태우고 있는 거예요."
"어휴." 나는 그런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그밖에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모두가 화장실 휴지통에 그런 걸 버리잖아요, 여학교니까. 그걸 청소부 아저씨가 모아 소각장에서 태우거든요. 그게 저 연기라구요."
"그런 줄 알고 보니 어딘지 처절하군 그래."
"응, 나도 교실 창문으로 저 연기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처절하구나 하고. 우리 학교는 중. 고교 합치면 천 명 가까이 여자애들이 있었어요. 아직 시작되지 않은 애도 있으니까 9백 명이라 치고, 그중 5분의 1이 생리 중이라 치면, 대충 180명이겠죠. 그러면 하루에 180명분의 생리대가 휴지통에 버려진다는 계산이 나오죠?"
"대충 그렇겠군, 자세한 계산에는 흥미가 없지만."
"꽤 상당한 양이잖아요? 180명분이니까. 그걸 모아서 태운다는 거, 어떤 기분일까요?"
"글세, 상상이 안 되는데."
어떻게 그런 걸 내가 알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한참 동안 둘이서 그 하얀 연기를 바라보았다.
"사실 난 저 학교엔 가고 싶지 않았어요" 하고 미도리는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난 그저 보통의 공립 학교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아주 보통의 사람들이 가는 아주 보통의 학교에. 그리고 즐겁고 한가하게 청춘을 보내고 싶었어요. 하지만 부모님의 허영 때문에 저기 들어가고 말았지요. 왜 초등학교 때 성적이 좋으면 그렇게 되는 수가 있잖아요? 선생님이 이 아이 성적이라면 거기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렇게 되는 거요. 그래서 들어가게 된 거예요. 6년 동안 다녔지만 아무리 해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요. 하루빨리 거기서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6년을 다녔죠. 글세, 난 무지각, 무결석으로 표창까지 받았어요. 그토록 학교가 싫었는데도, 어째서 그랬는지 알겠어요?"
"모르겠는데."
"학교가 죽고 싶도록 싫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오히려 이를 악물고 하루도 쉬지 않았어요. 지고 싶지 않았거든요. 한 번 지고 나면 끝장이란 생각, 한 번 지고 나면 그냥 줄줄 끌려가게 되지 않나 싶어서 겁이 났어요. 39도까지 열이 올랐을 때도 기어가다시피 해서 학교엘 갔어요. 선생님이 '이봐, 미도리, 너 몸이 별로 좋지 못한 것 같은데.' 하면, 나는 '괜찮아요' 하고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버텼어요. 그래서 무지각. 무결석 표창장과 프랑스어 사전을 받았던 거예요. 그랬기 때문에 난, 대학에서 독일어를 택했죠. 그래, 이놈의 학교 은혜 따위를 뭣 때문에 입는담, 하고.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학교의 어떤 점이 그렇게 싫었지?"
"선배는 학교를 좋아했어요?"
"좋아하지도 또 특별히 싫어하지도 않았어. 난 아주 보통의 공립 고교에 다녔지만, 특별히 신경 쓰지는 않았나 봐."
"저 학교 말이에요." 하고 미도리는 새끼손가락으로 눈가를 갉작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엘리트 여자애들이 모이는 학교예요. 좋은 집안에 성적도 좋다는 여자애들이 한 천 명 모여드는 거죠. 말하자면 갑부의 딸들만이라 그거예요. 안 그러면 버틸 수가 없으니까요. 수업료는 비싸겠다, 기부금도 노상 받아들이겠다. 수학여행이라도 가면 교토의 여관을 전세내 가지고, 칠기 소반에 가이세키 요리(역주: 만드는 대로 한 가지씩 손님에게 내놓는 고급 요리)를 먹겠다. 일년에 한 번씩 오쿠라 호텔에서 테이블 매너 강습을 하겠다. 아무튼 보통이 아니란 말이예요. 알고 있어요? 우리 학년 160명중 도요시마 구에 살고 있는 학생은 나뿐이었다구. 난 언젠가 학생 명부를 전부 살펴보았어요. 다들 도대체 어떤 곳에 살고 있을까 하고요. 굉장하지도 않지 뭐예요. 지요다 구 3번가, 미나토 구모토아자부, 오오타 구 덴엔초후, 세타가야 구 세이조. 아오, 주욱 그런 곳뿐이겠죠. 꼭 하나, 지바 현에 사는 가시와라는 여자애가 있었는데, 난 그 애하고는 좀 사이가 좋았죠. 착한 애였어요. '우리 집에 놀러 와, 먼 데라서 미안하지만' 하길래 '그래 좋아, 그러자' 하고 가보았지요. 놀라 자빠졌지 뭐예요. 아무튼 정원을 다 돌아보는 데 15분이나 걸렸으니까. 굉장한 정원에서, 소형 차만한 커다란 개 두 마리가 글세, 쇠고기 덩어릴 우적우적 먹고 있잖아요, 클래스에서 말에요. 지각할 염려가 있으면 메르세데스 벤츠를 타고 학교 가까이까지 오는 아이가 말에요. 차는 운전사가 딸린 차였는데, 그 운전사 또 그린 호네트 에서 나오는 운전사처럼 모자를 쓰고 흰 장갑을 끼고 있지 뭐예요. 그런데도 그앤 글세, 자신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믿을 수 없죠? 그래, 믿을 수 있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도요시마 구 기타오쓰카 같은 거, 학교 전체를 찾아봐도 나 정도밖엔 없었어요. 더구나 부모의 직업란에는 이렇게 돼 있죠, '서점 경영'이라고. 덕분에 클래스 전원이 나를 두고 몹시 신기해 했어요. 읽고 싶은 책을 얼마든지 읽어서 좋겠다고. 어처구니없지 뭐야. 모두가 생각하는 건 기노쿠니야 같은 대형 서점이란 말에요. 그 애들은 서점이라면 그런 대형 서점밖엔 상상치 못하는가 봐요. 하지만 그 실물로 말하자면 참담하기 그지 없죠. 고바야시 서점, 가엾은 고바야시 서점. 드르륵 문을 열면 눈앞에 즐비하게 잡지가 줄지어 있어요. 제일 착실하게 팔리는 것이 여성 잡지, 새로운 성의 기교, 그림과 해설을 곁들인 마흔여덟 가지 방법의 부록이 달린 그거예요. 동네 주부가 그런 걸 사갖고 가서 주방 탁자 앞에 앉아서 숙독을 하곤, 남편이 들어오면 당장 시험해 보는 거지요. 그게 제법 볼 만하지 뭐예요. 정말이지 세상 부인네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지 몰라요. 그리고 또 만화, 이것 역시 잘 팔린다구요. '매거진','선데이','점프' 등등 그리고 물론 주간지들. 아무튼 거의 전부가 잡지죠. 얼마쯤 문고본도 있지만 대단한 건 없어요. 미스테리라든지, 역사물, 풍속물, 그런 것밖엔 팔리지 않거든요. 그리고 실용 서적 같은 것, 바둑 두는 법, 분재 가꾸기, 결혼식 주례법, 이것만은 알아야 할 성생활, 담배는 곧 끊을 수 있다. 등등. 그리고 우리 집에선 문방구까지 팔고 있거든요. 계산대 옆에 볼펜이라든지 연필이라든지 노트라든지 그런 걸 진열해 놓고 말에요. 그것뿐이에요. '전쟁과 평화'도 없고, '성적 인간'도 없고, '호밀밭의 파수꾼'도 없어요. 그것이 고바야시 서점이지요. 그런 것들의 도대체 어디가 부럽다는 거예요? 선배도 부러워요?"
'그 전경이 눈앞에 떠오르는데."
"말하자면 그런 가게예요. 동네 사람들이 다들 우리 집으로 책을 사러 오겠다, 배달도 해주겠다, 단골 손님도 많겠다, 그래서 한 가족 네 사람은 충분히 먹고 살지요. 빚도 없고요. 딸 둘을 대학에 보낼 순 있어요. 하지만 그것뿐, 그 이상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할 만한 여유는 집엔 없어요. 그러니까 저런 학교에 날 넣어선 안 될 일이었다구요. 그런, 참담해질 뿐인 걸. 무슨 기부가 있을 때마다 부모님은 투덜투덜 불평을 하고, 클래스 친구들과 어딘가 놀러 가더라도, 식사 때가 되면 비싼 가게에 들어가 모자라지 않을까 겁을 먹어야 하고. 그런 인생이란 어둡지 뭐예요. 와타나베 선배네는 부자예요?"
"우리 집? 우리 아버진 아주 평범한 회사원이야. 특별한 부자도 아니고 특별히 가난 뱅이도 아니지. 자식을 도쿄의 사립 대학에 보내는 건 어지간히 힘든 일로 생각되지만, 자식은 나 하나뿐이니 그런대로 별 문제는 없지. 보내주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아.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지극히 평범한 가정이라구. 자그마한 뜰이 있고 도요타 카롤러가 있고."
"무슨 아르바이트를 해요?"
"한 주에 세 번 신주쿠의 레코드 가게에서 밤일을 하고 있어. 쉬운 일이야. 가만히 앉아서 가게만 지키면 되니까."
"흐음"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난 말이죠, 선배는 돈 고생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어쩐지, 겉보기로는 그래요."
"고생한 적은 없지, 별로. 그다지 많은 돈을 가진 게 아니라는 것뿐이야. 세상 사람들 대개는 다 그렇지."
"내가 다닌 학교에선 대개의 사람들이 부자였다구요." 하고 그녀는 무릎 위에 놓인 양쪽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며 말했다.
"그것이 문제였어요."
"그럼 이제부터는 그렇지 않은 세계를 실컷 보면 되잖아."
"부자의 최대 이점이란 게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모르겠는데?"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예요. 가령 내가 클래스 친구한테 뭐 좀 하자꾸나 그랬다고 해요. 그러면 상대는 이렇게 말하겠지요. '나 지금 돈 없어서 안돼'라고. 반대 입장이 된다면, 나는 절대 그런 소리를 못해요. 내가 가령 지금 돈이 없어 그런다면, 그건 정말 돈이 없다는 소리니까요. 비참할 뿐이지요. 예쁜 여자가 '나 오늘은 얼굴이 지저분하니까 외출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과 같거든요. 못생긴 여자가 그런 소릴 해봐요. 웃음거리만 될 뿐이지. 그런 것이 내 세계였던 거예요. 지난해까지 6년간이나."
"이렇게 지내다 보면 잊혀진다구."
"어서 잊어버리고 싶어요. 난 대학에 들어와서 정말 마음이 놓였어요. 보통 사람들이 아주 잔뜩 있어서."
그녀는 아주 조금 입술을 비쭉이 하고 웃고는, 짧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미도리는 무슨 아르바이트라도 하니?"
"응, 지도의 해설 쓰기요. 지도를 사면 팸플릿 비슷한 게 붙어 있지요? 도시 설명이라든지, 인구라든지, 명소라든 지에 대해 여러 가지로 씌어져 있는 거. 이곳에 이러이러한 하이킹 코스가 있고, 이러한 전설이 있으며, 이러한 꽃이 피고, 이러한 새가 있다든지 하는 거 말이에요. 그 원고를 쓰는 일이죠. 그런 건 참 간단해요. 히비야 도서관에 가서 하루 동안만 책을 뒤지면 한 권은 쓸 수 있거든요. 조금만 비결을 터득하면 일거리는 얼마든지 들어오고."
"비결이라니, 어떤 비결이지?"
"이를테면 말에요, 남이 쓸 수 없는 그런 걸 조그만 끼워 놓으면 되거든요. 그러면 지금 회사의 담당자는 '저애는 제법 글을 쓴다.'고 생각한단 말에요. 몹시 감탄해 주기도 하고. 아주 대수로운 게 아니라도 좋아요. 아주 간단한 거면 돼요. 가령 말이에요. '댐을 만들기 위해 마을 하나가 여기에 수몰됐는데, 철새들은 지금도 그 마을에 대해 기억하고 있어서, 계절이 돌아오면 새들이 그 호수 위를 언제까지나 날아다니는 광경을 언제까지나 볼 수 있다.'라든지 하는 에피소드를 한가지 끼워 놓으면, 다들 굉장히 좋아하죠. 어때요, 서정적이고 낭만적이잖아요? 아르바이트하는 다른 보통의 아이들은 그런 궁리는 안 하거든요, 그다지. 그래서 난 제법 좋은 돈벌이를 하고 있는 셈이에요. 그 원고 작업 덕분에."
"하지만 어떻게 그런 에피소드를 그렇게 잘 찾아내지?"
"그래요." 하고 미도리는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찾아내려고만 한다면 어떻게 어떻게 찾아지는 것이고, 찾아지지 않으면 해롭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 내면 되죠, 뭐."
"옳아" 하고 나는 감탄했다.
"피이스(평화)" 하고 미도리는 외쳤다.
그녀는 내가 있는 기숙사 얘기를 듣고 싶어 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국기 게양' 이야기며 '돌격대'의 라디오 체조 이야기 등을 했다. 미도리도 '돌격대' 이야기엔 배꼽을 잡았다. '돌격대'는 온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 같았다. 미도리는 재미있어 보이니 한 번 꼭 좀 그 기숙사를 보고 싶다고 했다.
"보았자 별 재미도 없어. 남자 녀석들이 몇백 명 지저분한 방안에서 술도 마시고, 마스터베이션도 하고 있을 뿐이니까."
"선배도 해요 그 짓?"
"안 하는 인간은 없지." 하고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자에게 생리가 있는 것처럼, 남자는 마스터베이션을 하거든. 모두가 하지, 누구나 다.
"애인이 있는 사람도 할까요? 즉 섹스 상대가 있는 사람도?"
"그런 문제가 아냐. 내 옆방의 게이오에 다니는 녀석만 해도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나서 데이트를 하러 간다구. 그러는 편이 안정이 된다나."
"난 이해하기 힘든데요? 줄곧 여학교에만 다녔으니까."
"여성 잡지 부록에도 씌어 있지 않고 말이지."
"정말" 하고 미도리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와타나베 선배, 이번 일요일에 한가해요? 시간 있어요?"
"어느 일요일이든 한가하지. 여섯 시부터 아르바이트를 나가야 하긴 하지만."
"좋다면 우리 집에 한 번 놀러오지 않을래요? 고바야시 서점에. 가게는 닫혔겠지만, 난 저녁때까지 집을 봐야 해요. 좀 중요한 전화가 걸려 올지도 모르니까요. 어때, 점심 같이 먹지 않을래요? 내가 지어 줄게요."
"고맙군" 하고 나는 동의 했다.
그녀는 노트를 찢어서 집까지의 약도를 자세하게 그려 주었다. 그리고 빨강 볼펜을 꺼내어 집이 있는 곳에 크게 X표를 쳤다.
"싫더라도 저절로 알게 돼요. '고바야시 서점'이라는 간판이 나붙었으니깐. 열두 시쯤 해서 와줄래요? 점심을 준비해 두겠어요."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그 약도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슬슬 대학에 돌아가 두 시부터 시작되는 독일어 강의에 출석하겠다고 했다. 그녀도 갈 데가 있다면서 요쓰야에서 전철을 탔다.
일요일 아침, 나는 아홉 시에 일어나 수염을 깎고, 빨래를 해서 옥상에 널었다. 상쾌한 날씨였다. 제법 가을 냄새가 났다. 고추잠자리 떼가 안마당을 빙빙 날아다니고, 동네 아이들이 잠자리채를 가지고 쫓아다녔다. 바람은 없고 국기는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깨끗이 다림질을 한 셔츠를 입고 기숙사를 나와 전철역까지 걸었다. 일요일의 학생 구역은 마치 쥐죽은 듯이 휑뎅그렁하여 사람 그림지도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상점들은 닫혀 있었다.
거리의 갖가지 소음은 여느 때보다 한층 또렷또렷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목재 힐이 달린 사보를 신은 여자가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아스팔트 도로를 가로지르고, 전철 차고 옆에서는 네댓 명의 아이들이 빈 깡통을 나란히 세워 놓고 그걸 겨누어 돌을 던지고 있었다.
꽃집 하나가 열려 있기에, 나는 거기서 수선화 몇 송이를 샀다. 가을에 수선화를 산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었지만, 나는 예전부터 수선화를 좋아했다.
일요일 아침 전철에는 일행인 듯한 할머니 세 분만 타고 있었다. 내가 차에 오르자 할머니들은 내 얼굴과 내 손에 들고 있는 수선화를 번갈아 보았다. 그중 한 할머니가 나의 얼굴을 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나도 빙그레 웃어 주고는 맨 뒷자리에 앉아, 창밖을 스쳐 가는 낡은 집들을 바라보았다. 전철은 그 집들의 추녀 끝에 닿을락 말락 하며 달렸다.
어느 집의 베란다에는 토마토의 모종 화분이 여러 개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커다란 검은 고양이가 햇볕을 쬐고 있었다. 마당에서 어린아이가 비눗방울을 날리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어디선가 이시다 아유미의 노래가 들려 왔다. 그리고 어디선지 카레 냄새도 풍겨왔다.
전철은 그러한 인정 어린 뒷골목을 누비듯 스르르 달리고 있었다. 도중 역에서 몇몇 승객이 올라탔다. 할머니 일행은 싫증도 안 나는 지 뭔가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오쓰카 역에서 내린 나는 그녀가 약도에 그려 준 대로 별 볼품없는 길을 걸었다. 길을 따라 즐비하게 서 있는 상점들은 하나같이 그저 그렇게 보였다. 어느 상점이나 낡은 건물에다 상점 안은 침침해 보였다. 간판 글씨가 거의 지워진 것도 있었다.
건물이 낡은 정도나 스타일로 보아서, 이 근처는 전쟁 때 폭격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이 같은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지 싶었다. 물론 새로 개축한 집도 있었고, 어느 집이나 거의가 증축을 했거나 부분적으로 보수를 하긴 했지만, 그런 것은 숫제 허름한 옛집보다도 한층 지저분해 보일 경우가 많았다.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자동차의 포 상태와 대기 오염, 지독한 소음과 비싼 집세에 견디다 못해 교외로 옮겨가 버렸고, 뒤에 남은 것은 싸구려 아파트나 사택, 이사하기 어려운 상점, 또는 오랫동안 이곳 토지에 매달려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뿐이라는 분위기를 주는 거리였다. 자동차 배기가스 때문에 마치 안개가 덮인 듯이 모두가 희뿌옇고 구질구질했다.
그런 길을 10분쯤 걸어가다 주유소 모퉁이를 오른쪽으로 돌아가자 조그마한 상점가가 있었고, 한 중간쯤에 고바야시 서점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분명 큰 편은 아니었지만, 내가 미도리의 말을 듣고 상상했던 만큼 작지도 않았다. 흔히 볼 수 있는 거리의 흔히 있는 보통의 서점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발매일을 기다리다 못해 소년 잡지를 사러 갈려갔던 그런 책방이었다. 고바야시 서점 앞에 서 있자니까, 어쩐지 옛날이 그리워졌다. 어느 거리에나 이런 서점은 있게 마련이다.
서점은 아주 셔터를 내렸고 셔터엔 '주간 문춘 매주 목요일 발매' 라고 씌어진 종이가 붙어 있었다. 열두 시가 되려면 아직도 15분쯤 남아 있었다. 수선화를 들고 상점가를 거닐면서 시간을 때우자니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나는 셔터 옆에 있는 벨을 누르고 두세 걸음 뒤로 물러서서 대답을 기다렸다.
15초쯤 기다렸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벨을 누를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이고 있는데, 위쪽에서 드르륵 창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미도리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셔터 열고 들어와요."하고 그녀가 소리쳤다.
"시간이 좀 이른데 괜찮아?"
나도 되받아 소리쳤다.
"괜찮고 말고요. 2층으로 올라와요. 난 지금 잠시도 손을 뗄 수 없어서 그래요."
그리고는 다시 드르륵 창문이 닫혔다.
나는 터무니없이 큰소리를 내면서 셔터를 1미터쯤 밀어 올리고, 몸을 구부려 안으로 들어가 셔터를 다시 제자리로 내려놓았다. 가게 안은 아주 캄캄했다. 나는 끈으로 묶어놓은 반품용 잡지 꾸러미에 걸려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면서, 간신히 안쪽으로 들어가 손으로 더듬더듬 구두를 벗고 위로 올라갔다.
집 안은 어둡고 침침했다. 디딤돌을 올라서자 응접실처럼 되어있는 곳에 소박한 소파 세트가 놓여 있었다. 방이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고, 창문에는 한 10년 전의 폴란드 영화 장면 같은 어둑한 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왼쪽에는 창고 같기도 하고 다용도실 같기도 한 공간이 있었고, 화장실 문도 보였다. 오른쪽 가파른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가니 2층이 나타났다. 2층은 아래층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밝아 나는 겨우 마음이 놓였다.
"이쪽이에요." 하고 어디선가 미도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올라서니 오른쪽에 식당 같은 방이 있었고, 그 안쪽에는 주방이 있었다. 집 자체는 낡았지만 주방은 아주 최근에 보수한 듯, 싱크대도 수도꼭지도 찬장도 모두가 반짝거리는 새것이었다. 그리고 미도리가 거기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냄비에서는 뭔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났고, 생선 굽는 냄새도 났다.
"냉장고에 맥주가 있으니 거기 앉아서 마시고 있을래요?" 하고 미도리가 이쪽을 흘끗 보면서 말했다.
나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테이블 의자에 앉아서 마셨다. 맥주는 한 반년쯤 그 속에 들어 있었지 않나 싶을 정도로 냉장이 잘 돼 있었다. 테이플 위에는 조그만 재떨이와 신문과 간장병이 놓여 있었다. 메모 용지며 볼펜도 있었는데, 메모 용지에는 전화번호며 시장을 본 계산을 한 듯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한 10분쯤이면 다 될 것 같은데, 거기서 기다릴래요? 기다릴 수 있어요?"
"물론 기다릴 수 있지."
"기다리면서 뱃속을 좀 비워 둬요. 양은 충분하니까."
나는 찬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정신없이 요리를 만드는 미도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잽싸고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면서 한꺼번에 네 가지 정도의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이쪽에서 끓는 것의 맛을 보는가 하면, 뭔가를 도마 위에서 재빨리 썰고,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어 담아 놓는가 하면, 다 사용한 냄비를 물에다 깨끗이 씻기도 했다.
뒤에서 보는 그녀의 그 모습은 마치 인도의 타악기 연주자를 연상케 했다. 저쪽 종을 울리는가 하면 이쪽 판자를 두드리고, 그리곤 물소 뼈를 두드리기도 하는 그런 식이었다. 하나하나의 동작이 민첩하고 낭비가 없었으며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나는 감탄하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좀 도울 일이 없을까?" 하고 나는 말을 걸어 보았다.
"아니에요, 나 혼자 하는 데 익숙하니까요." 하고 그녀는 말하면서 살짝 이쪽을 보고 웃었다.
그녀는 통이 좁은 불루진 바지에 네이비 블루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등판에 애플 레코드의 사과 마크가 큼직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뒤에서 보니 그녀의 허리는 놀라우리만큼 가늘었다. 마치 허리를 튼튼하게 굳히기 위한 성장의 한 과정을, 어떤 사정으로 뛰어넘어 버렸지 않나 싶을 정도로 날씬한 허리였다. 그래서 보통 여자가 슬림진을 입었을 때의 모습보다 훨씬 중성적인 인상을 주었다.
싱크대 위의 창문으로 비쳐드는 밝은 빛살이 그녀 몸매의 윤곽에다 어렴풋이 테두리 장식 같은 것을 달아 놓고 있었다.
"그렇게 근사한 식사를 만들 것까지는 없는데."
"전혀 근사하지 않아요." 하고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꾸를 했다.
"어제는 바빠서 시장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냉장고에 있는걸 이것저것 모아서 만들었을 뿐인 걸요. 그러니 전혀 신경 쓸 것 없어요, 정말. 그리고 손님 접대하기 좋아하는 건 우리 집 가풍이에요. 우리 가족은 말이죠, 어떻게 된 셈인지 손님 접대를 무척 좋아해요, 근본적으로 어째 좀 병적인 것 같아요. 별로 남달리 친절한 가정이랄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인망이 높은 것도 아니면서요. 어쨌든 손님만 왔다 하면 모든 일을 제쳐 놓고 접대를 하거든요. 가족 모두가 그런 성격이에요. 행복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우리 아버진 거의 술도 못하면서 집안엔 온통 술투성이라니까요. 왜 그런지 알아요? 손님 접대를 하기 위해서예요. 그러니까 마음 놓고 실컷 맥주를 들어요, 사양 말고."
"고마워."
나는 문득 수선화를 아래층에 놓아두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구두를 벗을 때 옆에 놓고는 깜빡 잊은 채 올라온 것이다. 나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 어두컴컴한 데서 열 송이의 하얀 수선화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찬장 속에서 홀쭉한 유리컵을 꺼내더니 거기다 수선화를 꽂았다.
"난 수선화를 참 좋아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옛날 고등학교 다닐 때 문화제에서, '일곱송이 수선화'를 부른 적이 있는데, 그 노래 알아요, '일곱송이 수선화'?"
"알지, 물론 알고말고."
"전에 포크 그룹을 했죠, 기타 치면서."
그녀는 '일곱송이 수선화'를 흥얼거리면서 요리를 접시에 담았다.
만들어진 요리는 나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어선 훌륭한 솜씨였다. 생선회 식초 무침에다, 산뜻한 국물, 계란말이, 손수 만든 삼치 절임, 가지 조림, 순채 장국, 버섯 밥, 거기다 단무지를 잘게 썰어 깨소금을 뿌린 것을 듬뿍 곁들여 내놓았다. 양념 솜씨는 산뜻한 간사이 식이었다.
"아주 맛있군." 하고 나는 감탄했다.
"어때요, 와타나베 선배. 솔직히 말해서 처음부터 내 요리 솜씨를 기대하진 않았겠죠?"
"글세" 하고 나는 어정쩡하게 대꾸했다.
"와타나베 선배는 간사이 사람이니까 이런 양념을 좋아하죠?"
"나 때문에 일부러 간사이 식으로 만들었어?"
"설마, 아무리 그렇기로 그런 까다로운 짓을 누가 해요. 우리 집은 늘 이런 식이에요."
"그럼 부모님이 간사이 분이신가?"
"아니, 아버진 내내 이 고장에 계셨고, 어머닌 후쿠시마 분이에요. 우리 친척 중엔 아무리 찾아도 간사이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다구요. 우린 도쿄, 북간도계 일가니까요."
"잘 모르겠는데, 그럼 어떻게 이처럼 완벽한 정통 간사이 식 요리를 만들 수 있지? 누구에게 배웠어?"
"뭐 이야기하자면 길어져요." 하고 그녀는 계란말이를 먹으면서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도대체가 집안일이라고 이름 붙은 일은 딱 질색이었으니까, 요리 같은 거는 아예 만들지도 않았거든요. 더구나 보다시피 우리는 장사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오늘은 뭐 사다 먹자라든가, 식육점에서 만들어 파는 고로케를 사다가 그걸로 때워 버린다든가, 그런 식이 상당히 많았다구요. 난 어릴 때 부터 그런 식이 정말 싫었거든요. 정말 죽도록 싫었죠. 카레 3인분을 한꺼번에 만들어 놓고 매일 같이 그걸 먹는다든가 하니. 그래서 어느 날, 중3 때의 일이지만, 식사만은 꼬박꼬박 제때에 내가 만들어야겠다고 결심을 했어요. 그리고 신주쿠의 기노쿠니야 서점에 가서, 가장 휼륭해 보이는 요리책을 사 들고 돌아와 거기 적혀 있는 걸 몽땅 마스터 했죠. 칼과 도마 선택하는 법, 칼 가는 법, 생선 다루는 법, 가쓰오부시 깎는 법, 모두 다요. 그런데 그 책을 쓴 사람이 간사이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만드는 요리도 전부 간사이 식이 돼버린 거예요.“
"그럼 이걸 모두 책으로 공부했어?" 하고 나는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나중엔 돈을 모아 가지고 제대로 된 가이세키 요리를 먹으러 가기도 했죠. 그래서 제법 맛들인 거야. 난 제법 감을 잘 잡거든요. 논리적 사고라든가 하는 건 틀려먹었지만."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고 이만한 요리를 만들 수 있다니, 이건 정말 대단해."
"나, 정말 혼났다니까요." 하고 그녀는 한숨까지 쉬며 말했다.
"어쨌든 요리엔 전혀 이해도 관심도 없는 집안이었어요. 제대로 된 칼이며 냄비를 사고 싶다해도 누가 돈을 줘야지요.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거였죠. 참 엉터리지. 저런 얄팍한 칼로 생선을 어떻게 다루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말이죠, 생선을 발라내긴 뭘 발라내느냐는 거죠. 그러니 말 다했죠. 하는 수 없이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식칼이라든가 냄비라든가 소쿠리 같은 것을 샀어요. 어때, 믿을 수 있어요? 열대여섯 살짜리 여자애가 손톱에 불이 붙은 듯 열심히 돈을 모아 소쿠리, 숫돌, 튀김 냄비 등등을 사들였다는 걸요. 내 친구들은 용돈을 듬뿍 타가지고 멋진 드레스며 구두를 사는 데 말이죠. 어때요, 불쌍하지 않아요?"
나는 순 채 장국을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1 때, 난 아무래도 계란 굽는 기구가 사고 싶었어요. 국물 계란말이를 만들기 위한 가늘고 길쭉한 동제품이었죠. 그래서 난 새 브래지어 살 돈으로 그것을 사버렸어요. 덕분에 혼이 났죠. 한 3개월쯤을 브래지어 한 개로 견뎌야 했으니까요. 믿을 수 있어요? 밤이면 빨아서 열심히 말려 아침에 그걸 하고 나갔죠. 가끔 마르지 않으면 그런 비극이 또 없었죠. 세상에 축축한 브래지어를 하는 것만큼 서글픈 일은 없을 거예요. 더구나 그것이 국물 계란말이 기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말에요."
"정말 그랬겠군, 알만해"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 하긴 어머니한테는 좀 미안한 얘기지만, 약간은 다행이다 싶었죠. 생활비를 맘대로 쓰고, 사고 싶은 것도 맘대로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요리 기구가 상당히 갖추어졌어요. 우리 아버진 생활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니까."
"어머님은 언제 돌아가셨는데?"
"2년 전" 하고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암이었어요, 뇌종양. 1년 반을 입원해 있으면서 갖은 고생 끝에, 나중엔 약에 절은 것처럼 돼 버렸어요.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거의 안락사나 다를 바 없이 그렇게 돌아가셨조. 뭐라고 할까, 그건 정말 최악의 죽음이었어요. 본인도 고통스럽고 주위 사람들도 고생이고. 그 때문에 집에는 돈이 바닥이 나다시피 했어요. 한 대에 2만 엔이나 하는 주사를 계속 맞아야 하죠, 간호하는 사람도 있어야죠. 그러니 이래저래 그렇게 됐죠. 간호하느라고 나는 휴학을 해야 했고, 뭐 엉망진창이었어요. 더구나"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시 생각을 바꿨는지 그만두고, 젓가락을 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가 뜻하지 않게 침울해졌네요. 어째서 이런 이야길 하게 됐죠?"
"젖은 브래지어 이야기부터였지."
"바로 그 국물 계란말이예요. 정성을 들인 거라구요."
그녀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 몫을 다 먹고 나니 배가 가득 찼다. 그녀는 별로 많이 먹지 않았다.
"요리를 만들면 그 만드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구요." 하면서 그녀는 일찍 젓가락을 놓았다.
식사를 끝내자 그녀는 그릇을 거두고 테이블 위를 닦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말보로 담뱃갑을 들고 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더니 성냥불로 그어댔다. 그녀는 수선화가 꽂혀 있는 유리컵을 손에 들고 잠시 바라보았다.
"이대로가 좋을 것 같아요. 꽃병에 옮기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요. 막 가까운 물가에서 수선화를 꺾어다 우선 손에 닿는 대로 컵에 꽂아 놓았다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오쓰카 역 앞 물가에서 꺾어 왔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깔깔대며 웃었다.
"와타나베 선배는 참 이상해요. 농담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농담을 하거든요."
그녀는 턱을 괴고 담배를 절반쯤 피우더니, 재떨이에 힘껏 눌러 비벼 껐다. 그리고 연기가 눈에 들어갔는지 손가락으로 눈을 마냥 비볐다.
"여자는 좀 더 품위 있게 담배를 끄는 법이야." 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야 꼭 천박한 여자 같잖아. 무리하게 끄려고 애쓰지 말고 서서히 주위부터 꺼 들어가는 거야. 그렇게 짓누르지 않아도 된다구. 그건 좀 너무하잖아.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코로 담배 연기를 내뿜지 말아야 해. 남자와 둘이서 식사할 때는, 석 달 동안을 브래지어 하나로 견뎠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하지 않지, 보통의 여자들이라면."
"난 그런 여자야." 하고 그녀는 콧등을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조신하게 굴 수 없는 걸요 뭐. 이따금 장난삼아 피워보지만 아무래도 몸에 배지 않아요. 달리 또 뭐 할 말이 있나요?"
"말보로는 여자가 피우는 담배가 아니야."
"어때요, 뭐. 어차피 뭘 피우건 맛없기는 마찬가진데."
그녀는 손 안에서 말보로의 딱딱한 빨간 패키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지난달부터 피우기 시작했을 뿐이에요. 사실은 특별히 피우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저 호기심에서."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지?"
그녀는 테이블 위에 두 손을 모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라기보다, 선배는 담배 안 피워요?"
"6월에 끊었어."
"왜 끊었죠?"
"귀찮아서지. 밤중에 담배가 떨어졌을 때의 그 괴로움, 그런 것 말이야. 그래서 끊었지. 무엇이든지 그런 식으로 속박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보기보단 만사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성격이군요, 그렇죠?"
"글세, 그럴지도 모르지. 아마 그런 성격 탓으로 사람들에게 별로 호감을 못 주는지도 모르고. 옛날부터 그랬어."
"그건요, 선배가 남이 좋아하지 않아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선배를 못마땅해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녀는 턱을 괴면서 어정쩡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선배와 이야기하는 게 정말 좋아요, 말투도 아주 특이하고. '무엇에든지 속박당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하는 말 같은 거."
나는 그릇 씻는 것을 도왔다. 그녀 옆에 서서 그녀가 씻어 놓은 그릇을 행주로 닦아 조리대 위에 쌓으며 물었다.
"그런데 가족들은 모두 어딜 간 거지, 오늘?"
"엄마는 무덤 속에요. 2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그건 아까 들었어."
"언니는 약혼자와 데이트하고 있어요. 어딘가 드라이브라도 갔겠죠. 언니 그이는 자동차 회사에 다녀요. 그래서 자동차를 무척 좋아해요. 난 자동차가 그렇게 좋지 않지만."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문 채 다시 접시를 씻었고, 나도 말없이 그것을 닦았다.
"다음은 아버지인데" 하고 잠시 후 그녀는 말했다.
"아버진 작년 6월 우루과이에 간 채 돌아오지 않았어요."
"우루과이?" 하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우루과이는 왜?"
"아버진 우루과이로 이민 갈 생각이었죠, 바보 같은 이야기지만. 군대 있을 때 사귄 사람이 우루과이에 농장을 가지고 있으니, 거길 가면 어떻게든 될 것 아니냐구 했나 봐요. 갑자기 그 말을 꺼내더니 혼자서 그대로 비행기를 타고 가버린 거죠. 우린 한사코 말렸어요. 그런 곳에 가보았자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도 통하지 않고, 무엇보다 아버지는 도쿄 밖으론 나가 본 일이 별로 없지 않느냐고요. 하지만 헛일이었어요. 아버지는 분명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로 해서 굉장한 쇼크를 받았던 거예요. 그래서 머리의 나사가 빠져 버렸던 모양이에요. 그만큼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었죠. 정말이에요."
나는 뭐라고 맞장구를 칠 수가 없어서, 입을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우리 자매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이렇게 말했어요 '난 몹시 억울하다. 너의 어머니를 잃기보단 너희들 자매를 잃는 편이 훨씬 나았겠다'. 우린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어요. 어때요, 그렇지 않겠어요? 아무리 그렇기로 어떻게 그런 말을, 물론 가장 사랑하는 반려자를 잃은 괴로움과 슬픔과 고통, 그건 이해해요. 안 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친딸을 보고 너희들이 대신 죽었더라면 하는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안 그래요? 그건 좀 너무했다 싶지 않아요?"
"그건 그렇군."
"우리라고 뭐 속이 편할 순 없잖아요. 아무튼 우리 가족은 모두 좀 이상해요. 어딘가 좀 어긋나 있는 거죠." 하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같군." 하고 나도 인정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딸들에게 너희들이 대신 죽었더라면 좋았겠다고 할 만큼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
"글세, 그렇게 말하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리곤 우루과이로 가버린 거예요. 우리를 그냥 버려두고."
나는 말 없이 접시를 닦았다. 접시를 다 닦자 그녀는 내가 닦아 놓은 그릇들을 선반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래, 아버님은 연락이 없어?"
"꼭 한 번 그림엽서가 왔어요. 지난 3월에. 하지만 자세한 이야긴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어요. 이쪽은 덥다는 둥, 생각보다는 과일 맛이 좋지 않다는 둥 그런 말뿐이었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죠. 그것도 신통치 않은 당나귀 사진이 담긴 엽서에다 말에요. 머리가 좀 이상해요, 우리 아버진. 그 친군지 친진지를 만났는지 못 만났는지 조차도 적혀 있지 않았다니까요. 끝에다 좀더 안정이 되면 나와 언니를 데려가겠다고 씌어 있긴 했지만요. 그리곤 그만 소식 불통. 제가 편지를 보냈는데도 답장이 안 오지 뭐예요."
"그런데 혹 아버님이 우루과이로 오라고 하면 미도린 어쩔 거야?"
"난 가볼 생각이에요. 재미있지 않아요? 언닌 절대로 안 간대요. 우리 언닌 불결한 물건이나 불결한 장소, 그런 것은 아주 딱 질색이거든요."
"우루과이가 그렇게 불결한가?"
"몰라요, 하지만 언니는 그렇게 믿고 있거든요. 길에는 당나귀 똥이 널렸고, 거기엔 파리가 윙윙거리고, 수세식 변소라는 곳에는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도마뱀이나 전갈 따위가 우글거리고, 그런 영화를 어디선가 보았겠죠. 우리 언닌 벌레라면 질색을 해요. 언니가 좋아하는 건 번쩍번쩍하는 차를 타고 쇼난 같은 델 드라이브하는 거죠."
"으음."
"우루과이, 좋지 않아요? 난 가도 좋아요."
"그럼 이 서점은 현재 누가 하고 있지?"
"언니가 그럭저럭하고 있죠. 근처에 살고있는 친척 아저씨가 매일 도와줘요. 배달도 해주고. 나도 틈나는 대로 돕고. 책방이란 게 그렇게 중노동은 아니니까 우물쭈물 해나가는 거죠. 도저히 안 된다면 가겔 팔아 버릴 작정이지만."
"아버님은 좋아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좋아한달 것도 없어요."
"그럼 어째서 우루과이까지 가겠다는 거지?"
"믿기 때문이죠."
"믿는다고?"
"그래요.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믿기는 하죠, 아버지를 말이에요. 어머니를 잃어버린 쇼크로 가정도 자식도 일도 다 포기하고 훌쩍 우루과이로 가버린 그런 분이시지만, 난 믿는다 그거예요. 알겠어요?"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알 것 같기도 하고, 알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우습다는 듯이 웃고는, 내 잔 등을 두드렸다.
"됐어요, 뭐 어느 쪽이건 상관없으니까."
그 일요일 오후에는 꼬리를 물고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다. 이상한 하루였다. 미도리네 집 바로 근처에서 불이 나 우리는 3층 옥상으로 올라가 불구경을 하고, 그리곤 얼떨결에 키스를 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바보스럽기도 하지만, 어떻든 일이 바로 그렇게 진행된 것이다.
우리가 대학 이야기를 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 왔다. 사이렌 소리가 차츰 커지는 것으로 보아, 그 숫자도 점점 증가하는 것 같았다. 창문 아래로 많은 사람들이 달려가고, 몇 사람인가는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미도리는 한길이 보이는 방으로 가서 창문을 열고 아래를 보더니,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요."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통통통 하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혼자 커피를 마시면서 '우루과이란 대체 어디에 있었더라?'하고 생각 했다. 브라질이 거기고, 베네수엘라가 거기고, 이 언저리가 콜롬비아고 하면서 한참을 생각했으나, 우루과이가 어느 부근에 있는지는 아무리 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미도리가 아래로 내려와서,
"이봐요, 어서 이리 와요!" 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복도 끝에 있는 비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널찍한 옥상으로 나섰다. 그곳은 주위의 다른 집들의 지붕보다도 한결 높아서, 동네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서너 집 저편에서 뭉게뭉게 검은 연기가 치솟아 미풍을 타고 한 길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무언가 타는 퀘퀘한 냄새도 함께 풍겼다.
미도리는 난간에서 몸을 내밀 듯이 하고 말했다.
"저거 사카모토 씨네 집이에요. 사카모토 씨는 전에 건구점을 했어요. 지금은 가게를 닫았지만."
나도 난간에서 몸을 내밀 듯이 하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3층짜리 빌딩 그늘이 져 있어서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소방차가 세 대인지 네 대인지 모여서 진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길거리가 비좁은 탓으로 겨우 두 대밖엔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나머지 차들은 큰길 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큰길에는 여느 때처럼 구경꾼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중요한 물건이 있으면 챙겨서 이곳을 뜨는 게 좋겠는데" 하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은 바람이 반대로 부니까 괜찮지만 언제 바뀔지도 모르고, 바로 옆이 주유소잖아. 내가 도울 테니 짐을 꾸리라고."
"중요한 물건 같은 건 없는걸요."
"그래도 무언가 있을 테지. 예금 통장이라든가 인감도장이라든가 무슨 증서라든가 그런 것. 우선 무엇보다도 돈이 없으면 곤란할 테니까."
"걱정 없어요. 난 도망 안 갈 거니까."
"여기가 불에 타도?"
"그래요 죽어도 상관없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녀도 내 눈을 보았다. 그녀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가 본심이고, 어디서부터 농담인지 나로선 통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한참 그녀를 보고 있었는데, 그러는 동안에 뭐 아무러면 어떠냐 하는 심정이 되었다.
"좋아, 알았어. 나도 너랑 같이 있겠어."
"같이 죽어 줄래요?" 하고 그녀는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설마. 위험해지면 난 도망칠 거야. 죽고 싶거든 너 혼자서 죽으면 되잖아."
"냉정하네요."
"점심 대접쯤 받았대서 같이 죽을 순 없잖아. 저녁 식사라면 또 몰라도."
"흐응, 그래 좋아요, 아무튼 여기서 잠깐 어떻게 되나 바라보면서 우리 노래라도 불러요. 사태가 위험해지면 또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니까."
"노래를?"
그녀는 아래에서 방석 두 개와 캔 맥주 네 개, 그리고 기타를 가지고 왔다. 우리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런 짓을 해서 동네 사람들의 빈축을 사지 않겠느냐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동네에 불이 난 것을 구경하며 옥상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른다는 게, 그다지 떳떳한 행동이라곤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걱정할 것 없어요, 뭐, 그런거. 우리는 동네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살고 있으니까."
미도리는 가볍게 대꾸하고 나서 옛날에 유행했던 포크 송을 불렀다. 한 수 접어놓고 봐준대도 노래나 기타 솜씨나 좋다곤 할 수 없었지만, 본인은 아주 즐거운 듯했다. 그녀는 '레몬트리'니 '팝'이니 '500마일', '꽃들은 어디로 갔나', '노 저어라 마이클' 등을 닥치는 대로 불러댔다.
처음엔 미도리는 내게 저음 파트를 가르쳐 둘이서 합창을 하려고 했으나, 내 노래가 워낙 시원치 않자 그녀는 단념하고 혼자서 기분 나는 대로 불러댔다. 나는 맥주를 홀짝거리고,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서 불타는 상황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연기는 갑자기 기세를 부리는가 싶더니 조금 잠잠해지는 그런 상황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큰소리로 무어라 외치고 명령했다. 타타타 타타타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신문사 헬리콥터가 날아와서, 사진을 찍고 돌아갔다. 우리 모습이 찍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경찰관이 확성기로 구경꾼들을 향해, 좀더 뒤로 물러나라고 호통을 치고 있었다. 어린애가 우는 소리로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어디선가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바람이 어수선하게 춤추듯 불어대고, 타다 남은 흰 부스러기 따위가 우리 주위에까지 희끗희끗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미도리는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기분 좋은 듯 노래를 계속 불러대고 있었다. 알고 있는 노래를 한바탕 부르고 나더니, 이번엔 자신이 작사 작곡했다는 이상한 노래를 불렀다.
당신을 위해 스튜를 만들고 싶은데
내게는 냄비가 없어
당신을 위해 머플러를 뜨고 싶은데
내게는 털실이 없어
당신을 위해 시를 쓰고 싶은데
내게는 펜이 없어
"아무것도 없어 라는 노래예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가사도 형편없고, 곡도 형편없었다.
나는 그런 엉터리 노래를 들으면서 '만약 불이 주유소에 옮겨붙는다면 이 집도 날라가 버리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노래 부르기에 지쳤는지 기타를 놓고, 양지쪽의 고양이처럼 달랑 내 어깨에 기대어 왔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만든 노래, 어땠어?"
"특이하고 독창적이고, 네 성격이 잘 나타나 있어." 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아무것도 없다는 게 테마라구요."
"알 것도 같애."
"으음. 우리 어머니가 죽었을 때 이야긴데 말이에요."
미도리는 내 쪽을 향하며 말했다.
"응"
"나, 하나도 슬프지 않았어요."
"응."
"그리고 아버지가 없어졌을 때도 전혀 슬프지 않았어요."
"그래?"
"그래요. 이거 좀 심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지 않냐구요?"
"하지만 여러 가지로 사정이 있을 테지.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렇죠, 뭐, 여러 가지로 말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 나름대로 복잡했죠, 우리 집. 하지만 난 줄곧 이렇게 생각해 왔어요. 뭐니 뭐니 해도 친아버지. 친어머니인 만큼, 죽어 이별이건, 살아 이별이건 슬픈 건 사실일 거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쓸쓸하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고, 거의 생각도 나지 않고. 가끔 꿈에 나타날 뿐. 어머니가 나타나서 말이죠, 어둠 속에서 물끄러미 나를 노려보고 이렇게 비난하지 않겠어요, '너 내가 죽어서 기쁘지?' 하고. 별로 기쁠 것도 없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그저 그렇게 슬프지는 않다는 것뿐이죠. 솔직히 말해서 눈물 한 방울도 안 나온 건 사실이었어. 어릴 적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을 땐 하룻밤 내내 울었는데도."
이째서 이토록 심하게 연기가 날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불도 보이지 않고, 더 번져 나갈 상황 같지도 않았다. 그저 끊임없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이렇게 오랫동안 무엇이 타고 있는 것일까 하고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탓만은 아니에요. 그야 나도 야속한 데가 있긴 해요. 그건 인정해요. 하지만, 가령 그 분들-아버지와 어머니-이 좀더 날 사랑해 주었다면, 나도 더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더욱더 슬픈 기분이 들게 된다든지 하는."
"별로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해?"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충분하지 않다'와 '아주 부족하다'의 중간 정도예요. 늘 굶주려 있었어요, 난.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사랑을 담뿍 받아보고 싶었죠. 이젠 됐어요, 배가 터질 것 같아요, 잘 먹었어요, 그럴 정도로. 한 번이면 돼요, 단 한 번이면.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내게 그런 걸 주어 본 적이 없었어요. 응석을 떨면 내동댕이를 치고, 돈이 든다고 꾸중만 하고, 줄곧 그래 왔단 말이에요. 그래서 난 이렇게 생각했어요. 나에 대해 1년 내내 백 퍼센트 생각하고 사랑해 줄 사람을 내 힘으로 찾아내어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초등학교 5학년이던가 6학년 때에 그렇게 결심했죠."
"대단하군!" 하고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그래, 성과는 있었어?"
"어려운 일이지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그리고 연기를 바라보면서 얼마 동안 생각하는 듯했다. "아마도 너무나 오래 기다린 탓일지도 몰라요. 난 굉장히 완벽한 것을 원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완벽한 사랑을?"
"아니, 아무리 내가 욕심쟁이라곤 하지만 거기까진 바라지 않아요.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에요. 완벽하게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가령 지금 내가 선배에게 딸기 쇼트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면 말에요, 그러면 선배는 모든 걸 집어치우고 그걸 사러 달려가는 거예요. 그리고 헐레벌떡 돌아와서 '자, 미도리, 딸기 쇼트케이크야' 하고 내밀겠죠. 그러면 나는 '흥, 이따위 것 이젠 먹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 그걸 창문으로 휙 내던지는 것이에요.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가란 말에요."
"그런 건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 하고 나는 조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관계가 있어요. 선배가 알지 못할 뿐이에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여자에겐 말이에요 그런 것이 굉장히 소중할 때가 있는 거예요."
"딸기 쇼트케이크를 창문으로 내던지는 그것이?"
"그래요, 난 상대방 남자가 이렇게 말해 주면 좋겠어요. '알았어, 미도리, 내가 잘못했어. 네가 딸기 쇼트 케이크를 먹고 싶지 않아지리라는 것쯤은 짐작했어야 했는데. 난 당나귀 똥만큼이나 바보스럽고 무지한 것 같아. 사과할 겸 다시 한 번 다른 걸 사다 주지. 무엇이 좋아? 초콜릿 무스, 아니면 치즈 케이크?‘
"그러면 어떻게 되지?"
"난 그렇게 해서 받은 것만큼 어김없이 상대방을 사랑할 거야."
"지극히 불합리한 이야기 같은데."
"하지만 나로선 그게 사랑이에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하고 미도리는 내 어깨 위에서 살래살래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쩐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란 게 지극히 하찮은, 혹은 시시한 데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거기서부터가 아니면 시작되지 않는 거지요."
"너처럼 생각하는 여자는 처음이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꽤 많아요."
그녀는 손톱을 갉작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진짜 그런 사고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저 정직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에요. 별로 남과 다른 생각을 한다곤 생각지도 않고, 그런 걸 바라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정직하게 말하면, 다들 농담 아니면 연기인 줄로 알아요. 그래서 가끔 모든 것이 다 귀찮아져 버리지만."
"그래서 불이 아니까 죽어 버리자, 그렇게 생각했나?"
"어머, 이건 그런 게 아니에요. 이건 말야, 단순한 호기심이에요."
"불에 타 죽는 것이?"
"그게 아니고 당신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고 싶었던 거예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죽는다는 것 자체는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그건 정말이에요. 연기에 휩싸여 실신한 채 그대로 죽어 버리면 그뿐이잖아요. 눈 깜짝할 사인데요, 뭘. 전혀 두렵지 않아요. 내가 보아 온 어머니나 다른 친척들의 죽음에 비하면 말에요. 글세, 우리 친척들은 모두 큰 병을 앓다가 고생 고생 끝에 죽었다구요. 우리 가계는 아무래도 그런 혈통인가 봐요. 죽기까지 굉장히 시간이 걸린다니까요. 마지막에는 살아 있는지 죽은 건지조차 모를 정도였어요. 남은 의식이라고는 아픔과 괴로움뿐이지 뭐예요."
그녀는 말보로를 입에 물더니 불을 당겼다.
"내가 두려운 건 그런 죽음이에요. 서서히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생명의 영역을 침식하여, 정신이 들면 어둠침침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고, 주위 사람들도 나를 두고 산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그런 상황 말에요. 그런 건 싫어요. 절대로 견딜 수가 없어요, 난."
그로부터 약 30분 만에 결국 불은 꺼졌다. 큰 불로 번지지도 않았고 부상자도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방차도 한 대만 남겨 놓고 다 되돌아갔으며, 사람들도 왁자지껄 이야기를 하면서 상점가에서 물러나 돌아갔다.
교통을 통제하는 경찰차가 남아 노상에서 라이트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까마귀 두 마리가 전신주 꼭대기에 앉아서 지상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재가 수습되고 나자, 미도리는 어쩐지 얼이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몸의 힘을 빼고 멍청하니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지쳤어?"
"그렇진 않아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힘을 빼본 것뿐이에요. 멍하니."
내가 그녀의 눈을 보자, 그녀도 내 눈을 보았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했다. 그녀는 아주 약간만 으쓱 어깨를 움직였으나, 이내 다시 몸의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5초 아니면 6초, 우리는 가만히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
초가을의 햇살이 그녀의 뺨 위에 속눈썹 그림자를 드리워 그것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부드럽고 평온하고, 그리고 어디로 간다는 목표도 없는 입맞춤이었다.
오후의 햇살 속에서 옥상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불구경을 하고 있지만 않았던들, 나는 그날 그녀에게 입맞춤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기분은 그녀 쪽도 같았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옥상에서 반짝거리는 집집의 지붕이며 연기며 고추잠자리며, 그런 것들을 줄곧 바라보다가 따스하고 친밀한 기분이 들어, 그것을 무슨 형태로나 남겨 놓고 싶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입맞춤은 그러한 타입의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물론 온갖 입맞춤이 그러하듯, 어느 정도의 위험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건 아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미도리였다. 그녀는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리고 어쩐지 말하기 거북한 듯이 자신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건 나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선배도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요?"
"있지."
"그런데 왜 일요일엔 언제나 한가하죠?"
"매우 복잡해."
그리고 나는 초가을 오후의 잠깐 동안의 마력이, 이미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음을 알았다.
다섯 시에 나는 아르바이트 하러 가야겠다고 말하고 그녀의 집을 나섰다. 함께 밖으로 나가 가볍게 식사나 하지 않겠냐고 권유해 보았으나 전화가 걸려 올지도 모른다면서 그녀는 거절했다.
"하루종일 집 안에서 전화를 기다려야 한다는 건 정말 질색이에요. 혼자서만 있으면 말에요, 몸뚱이가 조금씩 조금씩 썩어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점점 썩고 녹아서 마지막엔 초록빛의 걸쭉한 액체만 남아 땅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지요. 그래서 나중엔 옷만 남고요. 그런 기분이 들어요, 하루종일 기다리고 있자면."
"만일 또 전화를 기다려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함께 있어 주겠어, 점심을 대접받는 조건으로."
"좋아요, 어김없이 식후의 불구경도 준비해 둘 테니까요."
다음날의 연극사 2 강의에 미도리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자 나는 학생 식당에 들어가 혼자서 맛없는 점심을 먹고, 그리고 양지쪽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서는 여학생 둘이서 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어린아이라도 보듬어 안은 듯이 테니스 라켓을 소중히 가슴에 안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책 몇 권과 레너드 번스타인의 LP들고 서 있었다.
매우 예쁘게 생긴 그들은 무척 즐거운 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서클 회관 쪽에서는 누군가 베이스의 음계 연습을 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군데군데 네댓 명씩 학생들이 모여 앉자 이런저런 일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견을 표명하거나, 아니면 웃거나 소리치고 있는 게 보였다.
주차장에는 스케이트보드를 즐기는 무리가 있었고, 가죽 가방을 옆에 낀 교수가 스케이트보드를 피하듯이 그곳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교정 안쪽에서는 헬멧을 쓴 여학생이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미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이 어쩌니저쩌니 하는 대자보를 쓰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대학의 점심시간 풍경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새삼스럽게 그런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에, 나는 문득 어떤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행복해 보이는 것이다. 그들이 정말 행복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단순히 그렇게 보일 뿐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떻든 그 9월 하순의 기분 놓은 한나절에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해 보였고, 그 덕분에 나는 여느 때보다 적적한 기분을 느꼈다. 나 혼자만이 그 풍경에 익숙해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도대체 나는 어떤 풍경이 익숙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친숙한 광경은, 기즈키와 둘이서 당구를 친 항구 근처의 그 당구장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기즈키는 죽어 버렸고, 그 이후로 나와 세상 사이에는 뭔가 모르게 서로 어색하고 썰렁한 공기가 끼어들게 된 것이다.
내게 있어서 기즈키라는 사내의 존재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 해답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하여 나의 어도어센스라고나 할 수 있는 기능의 일부분이 완전히, 영원히 손상돼 버린 것 같다는 느낌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확실하게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지는 전혀 나의 이해 밖의 일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거기에 앉아서, 켐퍼스의 풍경과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나는 도서실에 가서 독일어 예습을 했다.
그 주 토요일 오후에 나가사와가 내 방에 와서, 괜찮다면 놀러가지 않겠느냐, 외박 허가는 받아줄 테니, 하고 말했다. 좋다고 했다. 지난 1주일 동안 내 머리는 몹시 어수선해서, 누구라도 좋으니 함께 자고 싶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나는 저녁 무렵 목욕을 하고 수염을 깍고, 폴로 셔츠 위에 면으로 된 윗도리를 입었다. 그리고 나가사와와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버스를 타고 신주쿠 거리로 나갔다.
신주쿠 3가의 소란 속에서 버스를 내려 그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늘 가는 근처의 바에 들어가, 적당한 여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여자 손님이 많다는 게 그 술집의 특징이었는데, 그날따라 여자들은 거의 모두가 우리 주위에 접근해 오지 않았다.
우리는 취하지 않을 만큼 위스키 소다를 홀짝거리면서, 두 시간 가까이 거기에 있었다. 상냥해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카운터에 앉아서 김렌과 마르가리타를 주문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가사와가 수작을 붙이러 갔지만 그녀들은 남자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와 잠시 친근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기다리던 상대가 오자 둘은 그쪽으로 가버렸다.
장소를 옮기자면서 나가사와는 나를 다른 바로 데리고 갔다. 좀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가게였는데, 손님이 거의 들어차서 시끌시끌했다.
안쪽 테이블에 세 명의 여자들이 있어서, 우리는 그리로 다가가 다섯이서 이야기했다.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들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그러나 다른 가게로 옮겨서 좀 더 마시지 않겠냐고 권했더니, 그녀들은 우린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해요, 거의 문 닫을 시간이니까 하고 말했다.
세 여자가 다 어느 여자 대학의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 재수 없는 하루였다. 그런 다음에 또 장소를 옮겨 보았지만 허탕이었다. 어떻게 된 셈인지 오늘은 여자들이 접근해 오는 일이 전혀 없었다.
열한 시 반이 되어서, 오늘은 허탕을 치는가 보다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미안한데, 끌고 다녀서."
"상관없습니다, 난. 선배에게도 이런 날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만 해도 즐겁습니다." 하고 말하며 나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1년에 한 번쯤은 이럴 때도 있지."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더 이상 섹스 따위는 아무러면 어떠냐는 기분이었다.
토요일, 신주쿠의 밤의 소란 속을 세 시간 반이나 어슬렁거렸으며, 성욕이나 알코올 따위가 뒤섞인, 영문도 알 수 없는 에너지를 소모하고, 또 그런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나 자신의 성욕 같은 것은 보잘 것 없는, 천하고 하찮은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와타나베." 하고 나가사와가 내게 물었다.
"올나이트 영화라도 보지요. 한동안 영화도 못 보았으니까요."
"그럼 난 하쓰미나 찾아가겠어. 괜찮지?"
"나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만일 괜찮다면 재워 줄 여자 하나쯤 소개할 용의가 있는데 어떤가?"
"아닙니다. 오늘은 영화가 보고 싶습니다."
"미안한데, 언젠가 보충해 주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붐비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햄버거집에 들어가, 치즈버거를 먹고 따끈한 커피를 마셔 취기를 가라앉히고 나서, 근처의 재개봉관에 들어가 영화 '졸업'을 보았다.
그다지 재미있는 영화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달리 할 일도 없고 해서 그대로 또 한 번 되풀이 해서 그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영화관에서 나와, 새벽 네 시 전의 썰렁한 신주쿠 거리를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정처 없이 어슬렁거렸다.
걷는 데 지쳤으므로 나는 심야 영업을 하는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으면서 첫 전철을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 있으니까 다방은 역사 나처럼 첫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혼잡을 이루었다.
웨이터가 내게로 오더니, 죄송하지만 다른 손님과 동석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나는 좋다고 응했다. 어차피 나는 책을 읽고 있을 뿐이고, 옆자리에 누가 와서 앉거나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내 앞에 동석한 사람은 두 여자애였다. 둘 다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인 듯 싶었고, 미인이랄 수는 없었지만 괜찮은 아이들이었다.
화장도 옷차림도 수수했고, 아침 다섯 시 전에 가부키초를 방황하는 그런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무슨 사정으로 막차를 놓치고 말았거나 어쨌거나 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들은 동석한 상대가 나라는 데서 약간은 마음이 놓인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말쑥한 모양을 하고 있었고, 저녁때 수염도 깎았으며, 게다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열심히 읽고 있었으니까.
한 여자는 덩치가 큰 편이었는데, 회색 요트 파카에다 하얀 진을 입고, 커다란 비닐 레저 가방을 들었으며, 조개 모양의 커다란 귀걸이를 양쪽 귀에 달고 있었다. 또 한 여자는 몸집이 작은 편이었는데, 안경을 쓰고 격자무늬의 셔츠 우에 파랑색 카디건을 입었으며, 손가락에는 터키석 파란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쪽 여자는 가끔씩 안경을 벗고 손가락 끝으로 눈을 누르곤 하는 게 버릇인 것 같았다.
그녀들은 똑같이 카페오레와 케이크를 주문하고는, 뭔가 조용조용 의논을 하면서 천천히 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했다. 덩치 큰 여자는 여러 번 고개를 갸웃거렸고, 작은 여자는 번번이 고개를 저었다. 마빈 게이며 비지스며, 그런 음악이 크게 울리고 있어서 이야기의 내용까지는 들을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작은 여자가 고민을 하거나 화를 내거나 해서, 큰 여자가 그것을 애써 달래고 있는 모양 같았다.
나는 책을 읽는 척하면서 그녀들을 관찰하는 일을 번갈아 되풀이하고 있었다.
작은 여자애가 숄더백을 끌어안듯이 하고 화장실로 가버리자, 덩치 큰 여자 아이가 나를 향해 '미안합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책을 내려놓고 그녀를 보았다.
"이 근처에 아직도 술을 마실 만한 가게가 있는지 혹은 알고 계세요?"
"새벽 다섯 시가 지났는데 말입니까?" 하고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예"
"아니, 새벽 다섯 시 이십 분이라면 대개는 사람들은 술이 깨서 잠을 자려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아닙니까?"
"예, 그건 잘 알고 있긴 하지만." 하고 그녀는 몹시 부끄럽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저 친구가 굳이 술을 마시고 싶다는 거예요. 뭐 여러 가지 사정이 있고 해서."
"집에 돌아가 둘이서 마실 수밖에 없겠군요."
"하지만 전 아침 일곱 시 반경 전철로 나가노에 가야 하거든요."
"그럼 자동판매기에서 술을 사 가지고, 거기 아무 데나 앉아서 마시는 수밖에 없겠네요."
미안하지만 함께 가주지 않겠냐고 그녀가 말했다. 여자 둘이서 그럴 수가 없다면서. 나는 그 당시의 신주쿠 거리에서 여러 가지 이상한 체험을 해보았지만, 아침 다섯 시 이십 분에 전혀 낯선 여자들로부터 술친구를 해달라는 유혹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거절하기도 귀찮았고 또 시간도 있었기에, 나는 가까이 있는 자동판매기에서 정종 몇 병과 간단한 안주를 적당히 사 가지고, 그녀들과 함께 서쪽 출입구 광장으로 가서 즉석 파티를 벌였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두 사람은 같은 여행사 대리점에 근무하고 있었다. 둘 다 올해에 단과 대학을 나와 곧바로 근무하기 시작한 친한 친구 사이였다.
작은 여자에게는 애인이 있어, 한 1년쯤 잘 교제해 왔는데, 최근에 와서 남자가 또 다른 여자와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상심해 있다는 것이 대강의 사연이었다.
덩치 큰 여자는, 오늘 오빠의 결혼식이 있어서 어제저녁에 나가노 고향 집에 갔어야 할 형편이지만, 친구와 같이 있어 주느라고 온밤을 신주쿠에서 지새우고, 일요일 아침 첫차인 특급을 타고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다른 여자와 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요?"
나는 작은 여자에게 물어보았다.
작은 여자는 정종을 홀짝거리면서 발밑의 잡초를 괜시리 잡아 뜯고 있었다.
"그의 방문을 열었더니, 바로 눈앞에서 그 짓을 하고 있지 뭐예요. 그러니 알고 모르고 할 것도 없잖아요."
"그게 언제 일이지요?"
"그저께 밤."
"흐음. 그래, 문을 잠그지도 않았던가요?"
"그래요."
"어째서 잠그지도 않았을까요?"
"누가 알겠어요, 그걸. 알 턱이 없잖아요."
"하지만, 그건 정말 충격적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건 너무 지독하잖아요. 그러니 이 애의 기분이 어떻겠어요?" 하고 어리숙해 보이는 큰 여자가 말했다.
"뭐라고 말할 순 없지만, 한 번 서로 잘 이야기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결국 용서하느냐 않느냐의 문제겠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누구도 내 기분을 모를 거예요." 하고 작은 여자가 여전히 잡초를 팍팍 잡아 뜯으면서 뱉어 버리듯 말했다.
까마귀 떼가 서쪽에서 몰려와 오다큐 백화점 상공을 넘어갔다. 날은 완전히 밝았다.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큰 여자의 전철 시간이 다가왔기에, 우리는 나머지 술을 서쪽 출입구 지하에 있는 부랑자에게 주고, 입장권을 사서 그녀를 전송했다.
그녀가 탄 전철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나와 작은 여자는 어느 쪽이 먼저 유인한 것도 아니면서 호텔로 들어갔다. 나도 그녀도 특별하게 같이 자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다만 자지 않고서는 매듭이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호텔로 들어서자 나는 먼저 옷을 벗도 욕탕에 들어가, 욕조에 푹 잠겨서 거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맥주를 마셨다.
여자도 이내 뒤따라 들어왔으므로, 둘은 욕조 속에 비스듬히 눕게 되었다. 그 여자와 나는 맥주를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도 않고 졸립지도 않았다. 그녀의 피부는 희고 매끌매끌했으며, 다리 모양이 무척 예뻤다. 내가 다리를 칭찬했더니, 그녀는 무뚝뚝한 소리로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침대에 들어가자,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의 손놀림에 맞추어 그녀는 민감하게 반응했고, 몸을 비틀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그녀 속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내 등에다 힘껏 손톱을 세우고, 오르가슴에 가까워지자 열여섯 번이나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사정을 늦추기 위해, 열심히 그 횟수를 헤아렸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열두 시 분에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편지도 메시지도 없었다. 뜻하지 않은 시간에 술을 마셨기에, 한쪽 머리가 야릇하게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샤워를 하며 졸음을 쫓고, 수염을 깎고 알몸인 채 의자에 앉아 냉장고의 쥬스 한 병을 마셨다. 그리고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들을 차례대로 하나하나 돌이켜 보았다. 생각나는 일마다 어느 것이나 유리판을 두세 장 사이에 끼워 넣은 것 같은, 이상하고 어색하고 비현실적인 일들로 느껴졌지만, 틀림없이 나의 신상에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맥주를 마신 컵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목욕탕에는 사용한 칫솔도 있었다.
나는 신주쿠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전화부스에 들어가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어쩌면 그녀는 오늘도 또 혼자서 전화 당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다섯 번이나 벨이 울렸는데도,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20분 후에 다시 걸어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입구의 우편함에는 내 앞으로 온 속달 봉투가 들어 있었다. 나오코로부터 온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