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성
50이 넘어도 가리마 자국 하나 미어지지 않고 이드를하게 한창 기름이 오른 얼굴에는 별양 주름살도 없이 푸근한 젖빛 같은 살결을 보면, 10년은 젊어 보이는 중년 부인이다. 회색 망토를 한 팔에 걸고 의젓이 버티고 들어온 뒤에는, 날씬한 트레머리 여학생이 감색 외투를 사뿟이 입고 따라섰다. 언뜻 보기에는 대갓집 모녀분 같고, 좀더 뜯어보면 노기나 대궐 퇴물인 귀인이 행차 같다.
-흥흥, 이것이 장안의 명물 매당이군!
경애는 고개를 갸우뚱히 비꼬고 의자에 딱 젖히고 거만히 비껴 앉아서 들어오는 두 여자를 한수 내려다보듯이 한편 입귀를 빼뚜름히 다물고 눈웃음을 쳐 가며 쏘아본다.
상훈이 어색하게 헤헤 웃으며 앉았자니까,
"아 이거 무슨 난봉이 이렇게 난단 말씀이요? 이왕 자리를 뜰 바에는 하다못해..."
하고 매당은 달뜬 목소리로 나무라듯이 소리를 치다가, 경애의 냉소하는 눈길과 마주치자 입을 닫아버린다. 뒤에 따른 여학생도 웃는 이빨에서 금빛이 반짝하다가 꺼지며 금시로 새침하여진다.
매당을 우선 초벌 간선한 경애의 눈길은 여학생- 다음 시대에는 없어질 말이지마는 아직까지도 여학생이라는 이 말에는 좋고 나쁘고 간에 얇은 살갗이나 깜짝깜짝하는 옴폭한 눈이 인형을 연상하게 하는 온유한 표정이요, 치수는 작으나 날씬한 몸매가 경애의 눈에도 예쁜 아가씨로 비치었다. 이렇게 첫인상이 좋은 데에 경애는 도리어 동정이 갔으나, 이 애가 낮에는 유치원에서 천사같이 나비춤을 추고, 밤에는 술상머리에 앉는구나!고 생각하며 경애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나 그것은 이 의경을 나무라는 것인지 세상을 한탄하는 것인지, 또는 자기 자신을 혀를 차는 것인지 자기도 모르겠다.
"앉으슈."
경애는 자기 옆자리를 권하였다. 의외의 양장 미인이 앉아 있는 데에 저기가 된 의경은, 쭈뼛쭈뼛하면서도 대항적 태도로 눈은 딴 데다가 두고 고개만 까딱해 보이며 외투를 입은 채 의자에 걸터앉는다. 외투를 벗지 않고 체모를 차리는 것이 좌중을 무시한다는 경애에 대한 무언의 반항을 의미하는 기색이다.
매당이 상훈과 소곤소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을 경애는 곁눈으로 거들떠보며 자기의 '큐라소' 잔을 들어 쭉 마시고, 빈 잔을 의경에게 내민다. 경애는 의경이 일부러 자기를 무시하는 기색을 보이려는 눈치에 반감이 생기어 첫눈에 가졌던 호감이 스러지고 '아니꼬운 년!' 하고 조금 시달림을 주려는 생각이다.
"에그 난 못 먹어요."
의경은 저편 이야기를 골독히 들으려고 정신이 팔려 앉았다가 질색을 하면서, 시키지 않은 짓 그만두라는 듯이 손으로 막는다.
"온, 소리 못하는 기생, 손 못 보는 갈보는 있다구먼마는 술 못 먹는 술집 색시는 처음 보겠네!"
경애는 의경의 표정이 한층 더 아니꼬워서 이런 꼬집는 소리를 하고 깔깔 웃으니까, 매당과 상훈이 말을 뚝 끊고 바라다본다.
"김의경 아씨! 한잔 드우. 여기는 유치원과 달러! 염려 말구 한 잔 들어요. 우리 동창생 아닌가? 하하하..."
경애는 너 그럴 양이면 어디 견디어봐라 하는 반감과, 제 아무런 매당이라도 내 앞에선 꿈쩍 못하게 납청장을 만들어보겠다는 객기가 난 것이다.
얼굴빛이 변한 매당은 금시로 두 볼이 처지며, 눈이 실룩거렸다. 그보다도 의경은 얼굴이 푸르락붉으락 어쩔 줄 몰라 가슴을 새가슴처럼 발랑거리며 말끔히 경애를 치어다볼 뿐이다. 처음에는 누군지 모르고 섣불리 툭 쏘았으나, 술집 색시라고 모욕을 하는 데에 발근한 것도 한 순간이요, 자기 이름을 부르고 유치원을 쳐들고, 나중에는 동창생이 아닌가 하고 농쳐버리는 데에는 의기가 질리고 만 것이다.
"팔 떨어지겠군 그래 이 잔을 그대루 놓을 수야 있나? 손이 무색치 않은가?"
경애가 일부러 혀 꼬부라진 소리로 약간 쇠하는 기색을 보이자,
"어쨌든 받으렴."
하고 매당이 타이른다. 그러나 입맛이 쓴지 눈썹 새에 내 천 자를 누빈다.
의경은 마지못해 잔을 받았으나 울며 겨자 먹는 상이다.
"술투정은 한다더구먼마는 술 한잔 대접하기에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술을 따르는 경애는 의기양양하다. 장안의 여걸(?)이라는 매당이 자기의 외수 전갈에 의경을 끌고 온 것을 보고도 경애는 속으로 샐쭉 웃으며 콧날이 우뚝해진 터에, 속이 쓰리면서도 의경더러 술잔을 받으라고 똥기기까지 하는 것을 보니, 경애는 이제는 완전히 매당의 기를 꺾어놓았다는 만심도 생기는 것이다.
"아 참 두 분 인사하시지. 이분은 조선의 여걸 장매당 마마, 이분은 서울의 모던 애기씨..."
"난 술장수 홍경앱니다. 말씀은 익히 듣잡고 이렇게 뵙기가 늦었습니다."
매당은 '술장수 홍경애'라는 말이 자기를 빈정대는 것을 들렸던지 좋지 않은 기색이었으나 만나기가 늦었다는 인사를 자기에게 가까이하려는 기미로 알아차렸던지 쓸모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걸풍의 너털웃음으로 농쳐 버리며,
"우리집에두 놀러 오세요."
하고 의미심장한 인사를 한다.
"그렇지 않아두 아까두 댁 문전까지 갔었습니다마는 나 같은 것두 붙이십니까?"
하고 냉소를 한다.
"헤? 우리집에를?"
하고 매당은 놀라다가,
"난봉 영감 붙들러 다니기시에 뼛골두 빠지겠소마는, 이왕이면 좀 들어오시지를 않구."
"머리에 성에가 서는 영감을 붙들어다 약에나 쓸까마는 이 아씨 앞에서 그런 말씀 마슈."
하고 경애는 콧날을 째끗해 보이며 의경에게,
"영감 뺏길 염려는 없으니 마음놓슈마는 잃어버리지 않게 호패를 한 해서 채슈."
하고 좌충우돌이다.
"객설 그만해!"
상훈은 경애를 나무라며,
"그런데 저 색시는 언제부터 그렇게 잘 알던가?"
하고 아까부터 궁금한 말을 꺼낸다.
"장안 일 쳐놓고 나 모르는 일이 어디 있단 말씀이요, 노상 안면야 많지 우리 간동 근처서 늘 만나지 않았소?"
이런 딴전도 붙인다. 의경은 말을 탄했다가는 자기만 밑질 것 같아서 그런지 얼굴이 발개서 눈만 깜짝깜짝하고 앞에 놓은 술잔만 노려보고 앉았다가 팔뚝시계를 보며 일어선다.
"왜 가려우? 술잔이나 내주고 가야지 않소."
하고 경애는 일어나서 다정히 어깨를 껴안듯이 하여 앉힌다.
매당도 일어설 생각이 없는지 가만히 앉았다. 더 앉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요년의 춤에 놀아서 어설피 나와가지고는 놀림감만 되고 그대로 간대서야 여걸의 체면에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경 역시 매당이나 영감이나 엉덩이를 들려도 않고 먼저 가라는 분부도 아니 내리니 주저앉는 수밖에 없지마는 물계가 아무래도 영감을 뺏길 것 같아서 지키고 앉았자는 것이다.
술잔 재촉을 또 받고서 의경은 어찌는 수 없이 자기 앞의 잔을 '어머니'에게로 밀어 놓았다. 매당은 잔을 성큼 들어 쭉 마시었다. 조선의 여걸도 브랜디, 위스키는 알지마는 이런 기린 모가지 같은 병의 술은 처음 보는 거라 호기심으로 마시기는 하였으나 술잔을 요 괘심하고 가증스런 양장 미인에게 돌려보내고 따라 바치는 것은 한 번 더 치수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을 시초로 매당과 경애는 정종으로 달라붙어서 주거니 받거니 두 술장수가 내기를 하는지 판을 차리고 먹었다.
"이거 주류상 경음회인가? 경음회인가?"
상훈은 재담을 한 마디 내놓았으나 술잔은 그리 들지도 않는다.
"바커스 대 매당의 초회전이라우."
"플레이, 플레이! 바커스 세다!"
이호, 삼호, 둘씩 한자리에 앉히고, 주지포림에 세상이 꽨 듯싶은지 상훈은 나이 아깝게 경애를 응원하고 앉았다.
"당신은 깃발 대신에 이거나 휘두르구 어머니 응원 좀 하우."
하고 경애는 앞에 놓인 수건을 의경에게 던진다.
이건 객담으로 재미도 없는 술이 깊어갔으나, 매당은 아무래도 이 계집애를 잠뽁 취하게 해서 자기 집으로 끌고 가고 싶은 것이다. 젊은 년이 무람없이 덤비는 것이 괘씸하나 여걸의 체면보다도 장사가 급하다. 수양딸로 삼고 싶은 것이다.
"에구, 벌서 자정 들어가네. 영감 이젠 일어섭시다."
매당은 시계를 보더니 남은 잔을 마시고 일어서려 한다. 경애는 매당의 '영감 일어섭시다'하는 의논성그런 말씨가 그럴 듯이 드렸던지,
"걸맞는 내외분 같구려. 따님 아가씨 데리구."
하며 깔깔 웃는다. 경애는 층계를 내려오는 발씨가 위태위태하였으나 매당은 자기 집에서부터 전작이 상당하건마는 아직도 싱싱하였다. 문밖에 나오니 인력거 네 대가 대령하고 있다.
"우리 함께 가서 또 한잔합시다."
매당은 경애를 부축해 태워주며 권하였다.
"그거 좋은 말씀요. 어디 하룻밤 새워 보십시다요."
경애는 말없이 대찬성이었다. 상훈도 해롭지 않은 듯이 말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네 채가 의경의 인력거를 앞세우고 열을 지어 큰길을 건너서니까, 둘째로 선 경애의 차가 채를 돌리면서,
"안녕히 가 주무슈. 구경 잘 시켜줘 고맙습니다."
고 소리를 치며 빠져 달아나버린다.
인력거 위의 매당은 흥! 하고 콧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동짓달 밤바람에 설취한 술도 다 깨어버렸다. 그러나 끝끝내 패에 넘어간 것이 분한지, 우연히 그물에 걸렸던 단단한 한밑천감이 미꾸라지 새끼 빠져나가듯이 놓쳐버린 것이 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여간에 그런 재치 있고 색깔 다른 '수양딸'이라면 우선은 웃돈 주고라도 사들이고 싶고, 인물로만 해도 자기 집에 드나드는 누구보다도 나을 것 같아서 허욕이 부쩍 나는 것이었다.
"영감 덕에 오늘은 욕 단단히 봤소. 그 대신에 영감 솜씨로 고년 꼭 한 번 데려와야 해요.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가르쳐놔야지."
집에 들어가서 밤참으로 또 한 상 차려놓고 앉아서 매당은 상훈에게 폭백을 하는 것이었다.
"재주껏 해 보구려. 여간 그물에는 걸리 것 같지도 않으니!"
상훈도 오늘 눈치로 경애는 이젠 단념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샘이 나서 그러나 하였더니, 결국에 그야말로 구경이 하고 싶은 객기요 보복적 조롱에 지나지 않은 것을 이제야 겨우 짐작이 난 모양이다.
의경도 이 날은 여기서 묵고 말았다. 이 집에 드나든 지가 벌써 서너 달 되어도 아직까지는 집에서 나와서 잔 일은 없으나 워낙이 늦기도 하였지만 경애 같은 강적을 만난 뒤라 내친걸음에 한층 더 대담하여졌다. 게다가 요새는 또 한 가지 걱정이 생겨서 상훈에게 아주 몸을 탁 싣는 것이다. 이 달 들어서부터는 다달이 보이던 것이 없어져서 애를 쓰는 것이다.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더 미끄러져 들어갔다.
중상과 모략
조 의관은 사랑에 누워서는 모든 것이 불편하고 안심이 아니 되고 누가 자기에게 약사발이라도 안겨서 죽일 것만 같아서 야단야단 치고 안으로 옮아 들어왔다. 아들이 있고 손자가 있고 증손자까지 두었건마는 그래도 수원집만은 모두 못하였다. 수원집이 옆에서 앉았기만 하면 병은 저절로 나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절대로 안정을 시키라는 늙은이를 떼메어 들여왔으니 아무리 네 각을 떠서 들여온 것은 아니지마는 늙은이의 노끈 같은 허리가 아무래도 추슬렸을 것이다. 막 날 고비쯤 되었던 허리가 다시 물러났는지 옮아 온 며칠 동안은 허리뼈가 여전히 시큰거리고 쑤시고 부기가 더 성하여 갔다.
게다가 불질이 아무래도 심하니까 병실의 온도가 알맞지 못하여 조급한 성미에 이불을 시시로 벗기라고 야단이요 그러는 대로 방문은 여닫고 하니까 감기 기운도 나을 만하다가는 다시 도지고도지고 하여 이제는 시들부들 쇠하여 버렸다. 그러는 동안에 제일 무서워하던 폐렴이 곁들었다. 한의 양의가 번갈아 들며 집안은 약 시중에 꼭두식전부터 오밤중까지 잔칫집같이 법석이었다. 수원집은 어쨌든 살이 더럭더럭 내렷다. 이목은 번다한데 귀찮은 내색을 보이지 않으려니만큼 속은 더 썩는 것이다.
꼴 보니 병은 오래 끌 모양인데 앓는 어린애처럼 한시 한때 곁을 떠나지 못하게는 하고 밤이나 낮이나 똥오줌은 받아내야 하니 낮에는 남의 손을 빌리지만 밤에는 제 손으로 치워야 한다. 그럴 때마다 단잠을 깨우는 것도 죽겠지마는, 마음대로 문도 못 열어놓으니 방 안에 냄새가 탕진을 하여 몰래 향수 뿌린 비단수건으로 코를 막고야 자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나 이불 속에 넣은 수건은 눈에 안 보이고 냄새는 맡히니까 영감은 웬 향내가 이렇게 나느냐고 군소리를 중얼중얼하는 것이었다. 향내가 싫은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무슨 냄새가 나니까 그게 싫어서 향수로 소독을 하거니 하고 짜증을 내는 것이다.
그래도 수원집은 영감 앞에서는 입의 혀같이 살랑거렸다. 이번 판에 공을 들여 놓아야 100석이 200석 될 것이 아닌가? 그것도 그렇지마는 이번에는 손주며느리도 먹어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들 내외와 그만큼 버스러졌으니까 죽을 때에도 손자 내외에게 많이 몫을 지어줄지 모를 일이니 손자 식구마저 떼어 놓으면 항 뙈기라도 그리 붙일 것을 이리로 더 붙이게 될 것은 인정의 어쩌는 수 없는 약점이겠기에 말이다.
"젊은것이 걀러 빠져 못쓰겠어요."
조금만 영감의 눈살이 아드득 찌푸려지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을 손주며느리에게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아직 어린것이 자식이 딸렸으니까 그럴 수밖에! 또 무에 들지는 않았나?"
영감은 그런 중에도 손주며느리는 물오른 기지에 달린 봉오리처럼 귀엽게 보는 것이었다.
"게다가 또 있으면 어째요. 하나를 가지고 헤나지를 못하는 치신에..."
수원집의 입은 샐록하였다.
"그래두 있을 때가 되면 있어야지."
영감은 손자가 이번에 다녀갔으니까 있으려니 하는 것이다. 수원집 몸에 있는 것만은 못하여도 계계승승하여 억만대에 뻗칠 xx조씨의 손이 놀까보아 이 영감은 병중에도 걱정인가보다.
"몸은 편치 않으신데 별걱정을 다 하시우."
자기에게는 있어도 걱정이자만 시기가 나는 것이었다.
"어쨌든 시어미란 게 버려놓았어요. 네것 내것을 그렇게도 야멸치게 싹싹 가르고 요강 하나라도 이 방에서 나가는 것은 무슨 병이 붙어 나가는지 제 방 것을 부시면서도 건드리기는 고사하고 보기만 하여도 더러더러 하고 눈살을 찌푸리니 절더러 부시라는 건 아니건마는 그게 말예요."
우선 초벌로 헐어놓는 것이다.
"그야 부실 사람이 없어 그애더러 하랄까."
영감은 그만만 해도 자기에게 피침한 일이니 듣기에 좋을 것은 없으나 이렇게 눌렀다.
"그러니 말씀이죠. 한 일을 보면 열 일을 안다고 약 달이는 것도 꼭 아랫것들에게만 맡겨 두고 모른 척하니 그래 지날 결에라도 들여다보면 못쓸게 무어예요. 아아니, 약은 그만두고라도 어른 잡숫는 찌개 한 그릇이고 숭늉 하나라도 정성이 있으면 더운가 찬가 애가 쓰이고 들여다보는 게 옳지 않아요..."
영감은 여기 와서는 잠자코 귀가 솔깃해지는 눈치다. 영감이 잠자코 말면 이제는 귀가 뚫렸구나 하고 수원집의 입은 신이 나서 입술이 더 나불거리는 판이다.
늙은이 좋다 할 사람 없고 더구나 긴 병에 효자 없다 하지마는 자여손이 남부럽지 않고, 그래도 경향간에 누구라도 손꼽을 만한 천량을 가지고 앉아서도 늙게 의탁할 사람이라곤 뜨내기로 들어온 거나 다름없는 수원집 하나요, 세상에 없는 신약을 구하여 와도 하인년의 손에 달여 먹으니 졸아붙으면 그래도 괴롭다는 말 한마디 없이 고분고분히 시중을 드는 것이 신통하고 가상하다. 처음에 수원집을 끌어들일 때 말썽이 많고 온 집안이 반대하였지마는, 지금 생각하면 수원집이나마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꼬? 죽을 때 물 한 모금이라도 떠넣어줄 사람은 그래도 수원집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덕기만 하더라도 제 처한테 편지를 하면서 떠나간 뒤에 이때까지 영감께 상서는 없었지요?"
수원집은 덕기까지 쳐들었다.
"응, 도착하는 길로 한 번 오긴 왔지, 한데 언제 또 왔다고?"
영감은 손주며느리를 불러들였다.
"얘, 아비에게서 편지가 왔다지?"
"예."
"그럼 날 좀 보여야지."
영감은 젊은 애가 내외끼리 한 편지를 보자고 한다. 다른 때 같으면 그런 생각 없는 소리를 아니하였겠지마는, 병석에 누운 뒤로는 신경이 흥분하여 망령난 늙은이처럼 불관한 일에까지 총찰이 하고 싶고, 앓는 어린애처럼 노염을 잘 타는데다가 수원집의 그 말을 들으니 화가 발칵 난 것이었다.
"별말 없어요. 책을 한 권 건넌방에 빠뜨린 것하고 넥타이 두고 간 걸 보내 달라는 거야요."
젊은 색시는 남편에게서 온 편지를 시조부 앞에 내놓기가 부끄러웠다.
"어쨌든 이리 가져 와!"
영감의 말소리는 좀 역정스러웠다.
손주며느리는 웬 영문인지?- 모른다느니보다도 또 수원집의 농간이려니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하는 수없이 제 방으로 가서 편지를 가져다 바치었다.
편지에는 사실 그 말밖에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님 병환은 좀 차도가 계시냐고 한마디 물었을 뿐인데 어린 아이에게 대하여는 감기 들리지 않게 주의를 하라는 둥, 잘 때에 젖은 물리지 말라는 둥 부인 잡지권에서 얻어들었는지 하는 주의를 자질구레히 쓴 것이 영감에게는 거슬렸다.
'갑작스럽게 어린것이 자식 귀한 줄은 아는 게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래 부쳐달라는 것 부쳤니?"
하고 물었다. 무슨 난데없는 호령이 내리지나 않는가 하고 조심하여 시조부의 낯빛만 내려다보고 섰던 손주며느리는 마음이 죄면서,
"아직 못 부쳤에요."
하고 대답을 하였다.
"난 편지 쓸 새가 없고 하니 자세한 답장을 해주어라. 내 병 이야기도 하고 나는 이번엔 아마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라고 하여라."
조부는 이렇게 이르고서 소포 부칠 것을 어서 싸서 사랑으로 내보내어지는 주사에게 부치라고 할 것과, 집안 일에 네가 주장을 해서 잘 거두라는 것을 한 참 잔소리한 뒤에는,
"약 같은 것도 그렇지 않느냐? 네가 전력을 해서 달이지 않고 부엌데기나 어린 계집애년들에게만 내맡겨 두면 어쩌란 말이냐? 약은 어쨌든지 간에 네 도리로라도 그러는 게 옳지 않느냐."
영감은 좀 더 단단히 말이 하고 싶으나 어린것을 그럴 수도 없어서 참는 것이었다.
그러나 손주며느리로서는 억울하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약 달이는 데에 자기같이 정성을 쓰는 사람이 이 집안 속에서 누굴까. 그렇게 말하면 수원집이야말로 공연히 떠들고만 다녔지 이때껏 약 한 첩 자기 손으로 달이는 것을 본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분하여도 하는 수 없다. 친정 부모밖에는 이 집 속에서 하소연 한마디 할 데조차 없다.
"하느라고 합니다마는..."
겨우 이렇게 한마디밖에는 말대답이 될까보아 입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글쎄, 그러니까 더 주의하라는 말이다."
영감은 이렇게만 일러 내보내 놓고도 손자의 편지에 자기 병 걱정은 한 마디도 없이 어린 자식 조심시키란 말만 한 것이 아무래도 못 마땅하였다.
아침 후에 상훈이 문안을 왔다. 영감이 누운 뒤로 아침저녁 문안만은 신통히도 궐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안이라고는 병인의 방에 들어와서 잠깐 섰다가 나가는 것이건마는 그 2분이나 3분 동안이 피차에 지리한 것 같고 성이 났다.
"너 날마다 아침술을 먹고 다니니?"
부친은 앓는 아비를 주기 있는 얼굴로 와서 보나 싶어서 말하자면 공연한 트집이다. 실상은 어제 청목당으로 매당집으로 돌아다니며 술상이 벌어졌어야 모두 몇 잔 먹지는 않았다. 원체 폭음은 하는 것도 아니지마는 근자에는 그리 받지도 않은 터이다. 다만 늦게 자서 잠이 부족하여 눈알이 붉을 뿐이다.
"...너는 지금 앓는 아비를 보러 온 게 아니라, 해정을 하려고 술친구를 찾아다니는 거냐?"
영감은 돌아누워 버렸다. 상훈은 먹먹히 섰다가 나오려니까,
"다시는 오지도 말고 죽어도 알릴 리도 없으니 어서 가서 술집에고 계집의 집에고 틀어박혀 있거라."
나가는 아들의 등덜미에 찬물을 끼어얹듯이 이런 소리를 꽥 질렀다.
부친의 호령은 언제나 박박 할퀴는 것 같았다. 심장 밑이 찌르르하였다. 그럴 때마다 하속배나 어린 며느리자식 보기에도 창피한 증이 들었다. 여생이 얼마 안 남은 부친이니 그야말로 양지는 못할망정 자식된 자기로서 제 속마음으로라도 향의만은 정성껏 하리라고 생각하다가도 주책없는 어린애처럼 배심이 드는 것이었다.
-내가 잘한 것이야 없지마는 효도 윗사람이 받아주셔야 할 것이 아닌가?
상훈은 이런 생각도 하였다. 언제라도 부자간에 따뜻한 말 한마디 주고받은 것은 아니로되, 수원집이 들어온 후로 한층 더 심한 것을 생각하면 밤낮으로 으르렁대는 자기 마누라만 나무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어제 매당집에 왔던 생각을 하면 도저히 이 집 속에 붙여둘 수 없겠건마는 부친의 일이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부친만 돌아가면 자식이야 있든 없든 남 될 사람이요, 또 벌서부터 뒷셈 차리느라고 그런 데를 드나드는 것이겠지마는 큰 걱정은 까닭 없이 몇백 석이고 빼앗길 일이다. 그것도 잘 지니고 자식이나 기른다면 모르겠지만 어떤 놈 좋은 일이나 시키고 말 것을 생각하면 아까운 일이다. 그것을 장을 대고 벌써 어떤 놈이 뒤에 달렸는지도 모를 일- 달렸기에 병인을 내버려 두고 틈틈이 매당집에를 다니는 것이다. 수원집도 제 밑 들어 남 보이기니까 어제 매당집에서 피차 만났다는 말이야 영감님께 하고 싶어도 못 하였겠지마는 오늘에 한하여 별안간 계집의 집에나 술집에 가서 틀어박혀 있으라고 부친이 역정을 내는 것은 웬일일꼬. 저는 발을 빼고 또 무어라고 헐어냈나? 정말 그렇다면 이편에서도 가만히는 안 있으련다!
상훈은 혼잣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아이년이 업은 손자새끼를 얼러 주다가 사랑으로 나가려니까 안에서는 눈에 안 띄던 수원집이 사랑문 앞에서 들어오다가 마주쳤다.
"매당집은 언제부터 알았습디까?"
상훈은 지나쳐 들어가려는 수원집에게 순탄한 낯빛으로 물어봤다. 어제 보았다는 표시를 해서 발등을 디디고 다시는 못 다니게 하려는 생가으로이었으나 마당에 섰는 사람에게나 방 안에 들릴까보아 사폐 보아주어서 말소리만은 나직이 하였다.
"매당집요? 요전에 사귀었어요. 어제 종로까지 잠깐 무얼 사러 나갔다가 길에서 만나서 어찌 끄는지 잠깐 들렀었죠마는 나으리께서도, 아셔요?"
상훈은 유산태평으로 목소리를 크게 지르는 데 우선 놀랐다. 남은 일껏 사정 보아 주어서 은근히 묻는데, 저편은 한층 더 뛰어서 모두 들으라는 듯이 떠들어 놓는다. 더구나 어제 마주친 것은 시치미 딱 떼어버리고 나으리께서도 아느냐고 묻는 그 담찬 소리에 귓구멍이 막힐 노릇이다.
"알고 모르고가 없이 어제 거기서 만나지 않았소?"
상훈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올라왔으니 눈에는 꾸짖고 위험하다는 빛이 어리었다.
수원집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도 깜짝 놀란 듯이,
"예에, 난 설마 했더니! 그런데 나으리께서 어떻게 거기서 약주를 잡숫고 계셨어요? 그 집 주인 사내 양반하고 친하세요?"
호들갑스럽게 딴청이다.
"예에, 그럭저럭 알지만..."
상훈 역시 어름어름하면서,
"그건 고사하고 매당을 언제 알았습니까?"
하고 다시 캔다.
"글쎄, 요전에 알게 되었어요. 조선극장엘 갔더니 그이두 왔는데, 데리고 온 계집애년이 예전에 우리집에서 자란 종년의 딸이겠지요. 그년하고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 차차 알게 되었는데 어제는 한사코 자기 집을 알아두고 가라고 끄는군요. 영감님은 저러시고 한가로이 놀러 갈 새는 없지만 뿌리치다 못해 잠깐 들러보았지요."
말이 혀끝에서 나발나발 힘 안 들이고 청산유수같이 나온다.
"하여간 그렇다면 몰라도 가까이 다니지는 마우. 남자들이 모여서 술이나 먹는, 말하자면 내외주점 비슷한 데니까..."
상훈은 수원집의 말을 열 마디를 다 곧이들을 수는 없으나 혹은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면서 이렇게 일렀다.
"예, 그런 데예요? 그럼 공연히 갔군요... 퍽 잘사는 모양이요, 살림두 얌전한가보던데 왜 그런 영업을 할까요... 주인 영감도 퍽 점잖은 영감이라던데요?"
수원집은 천만 뜻밖의 소리를 듣는다는 듯이 연해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쨌든 나는 남자니까 상관없지마는 다시는 가지 마우."
하고 상훈이 헤어져 사랑문에 발을 들여놓으려니까 최 참봉이 뒷짐을 지고 담 밑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상훈은 최 참봉을 보자 저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담 밑이 양지라 해서 거기서 어른거리는 지도 모르겠으나 지금 자기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 싫기도 하고 날마다 대령하는 축이 아직 안 모여서 스라소니 같은 지 주사만 지키고 들어 앉았는 이 사랑에 수원집이 나왔으면 최 참봉밖에 만날 사람이 누굴까. 최 참봉이란 늙은 오입쟁이다. 파고다 공원에 가서 천냥만냥하는 축이나 다름없으나 어디서 생기는지 인조견으로 질질 감고 번지르르한 노랑 구두도 언제 보나 올이 성하다. 또 그만큼 차리고 다니기에 파고다 공원에는 안가는 것이다.
어쨌든 이 사람은 수원집을 이 집에 들여앉힌 사람이니 주인 영감에게는 유공한 병정이다. 천냥 만냥이 본업이요 그런 일이 부업인지, 뚜쟁이 계집 기간이 전업이요 땅 중개가 부업인지 그것은 닥치는 대로니까 당자도 분간하기가 좀 어려우리라.
하여간 요전에 들어온 이 댁 어멈인가 안잠자기인가도 이 사람의 진권이라 하니 자기 말마따나 이 세 사람이 한 통속은 한통속일 것이라고 상훈도 짐작은 없는 바 아니다 일전 파제삿날에 수원집과 싸우고 온 마누라를 나무랄 때 마누라 입에서 들은 말이지마는, 제삿날도 문간에서 최 참봉과 쑤군거리다가 어진지 갔다 왔다 하지 않는가. 소문에는 원체 최 참봉과 그렇지 않은 새이나 살 수가 없어서 일 들여앉힌 것이라는 말도 귓결에 떠들어온 것을 기억하고 있다. 어쨌든지 상훈은 최 참봉만 보면 달라는 것 없이 미웠다. 미운 사람에는 또 한사람 있다. 제삿날 저녁에 말다툼하던 재종형인 창훈이다. 이 두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놓아야 하겠다고 벼르는 것이나 아편이 싫어서 저편도 좋아할 리 없다.
상훈이 밖에 나가서 하는 일거일동을 영감에게 아뢰어 바치는 사람은 이 두 사람이다.
"요새 어떠슈? 살살 혼자만 다니지 말고, 어떻게 나 같은 놈도 데리고 다녀 보구려? 과히 해로울 건 없으리다."
최 참봉은 이런 소리를 하고 껄껄 웃는다. 나이는 상훈보다 6,7 년 위나 말은 좀 더 높인다.
"어디를 가잔 말요?"
상훈은 핀잔을 주며 냉소한다.
어젯밤 일이 벌서 이 놈팽이에게 보고가 들어갔구나 하니 더욱 불쾌하다,
"매당집에 자주 간답니다그려? 거기나 가볼까?"
상훈은 고쳐 생각하고 앞질러 떠보았다.
"그거 좋지! 매당이란 말은 들었어도 이때껏 가보지는 못했어."
"수원집이 다 가는 데를 못 가봤어? 퍽 고루하군! 서울 오입쟁이 아니로군!"
"이 늙은 놈을 가지고 그 무슨 말씀요. 허허허... 그런데 수원집이 그런 데를 가다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하며 최 참봉은 자기 딸의 말이나 나온 듯이 놀란다.
"지금 못 들었소?"
상훈은 여전히 코웃음을 친다.
"무얼 들었단 말씀이요?"
이 사람도 딴전이다.
"모르면 모르고..."
상훈은 툭 뿌리치는 소리를 하고 휘죽 나가려니까 최 참봉은 헤헤 웃고 바라보다가,
"이따 만납시다요. 나는 약조를 어기는 법은 없으니까."
하고 소리를 친다.
안방에서는 영감이 들어와 앉은 수원집더러 상훈과 무슨 이야기를 하였느냐고 묻는다.
"어제 갔던 집 이야기예요. 나으리도 그 집 영감하고 친하다나요. 어쩌면 벌써 이야기를 해두었던 것이다.
"그 집 주인은 무엇하는 사람인데?"
영감은 의심쩍어 묻는 것이 아니었다. 의심쩍은 일이 있으면야 당자가 애초에 알려 바칠 리도 없으려니 하는 생각이거니와 다만 아들과 친한 사람의 집이라니까 자기도 혹 짐작할 사람인가 하고 묻는 것이다.
"모르겠어요. 아마 같은 교회 사람인지도 모르겠어요."
수원집은 영감에게 매당이란 매 자도 입밖에 아니 내었지마는, 매당에게 영감이 있다면 죽으로 있을지 몰라도 웬놈의 그런 남편이 있으랴. 그러나 상훈에게나 영감에게나 아무렇게나 이렇게 발라맞추는 것이다.
"상훈이 친구면야 모두 그따위들이겠지마는 아무튼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 거야. 여편네가 요새 세상에 까딱하면 타락하는 것은 모두 못된 년의 꾐에 넘어가는 것이니까... 저만 봉변을 하는 게 아니라 남편의 얼굴에 똥칠을 하게 되고 가문을 더럽히고..."
영감이 또 잔소리를 꺼내리까 수원집은,
"염려 마세요. 한두 살 먹은 어린애니 걱정이십니까? 누구고 누구고 안 사귀면 그만 아닙니까?"
하고 말을 막아 버린다.
활동
경애가 바커스에서 자정이나 되어 집에 돌아와 보니 병화는 조금 전에 갔다 하고 건넌방의 피혁군은 자는지 문을 첩첩이 닫고 감감하다.
"주무세요?"
하고 소리를 쳐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혹시 병화와 길이 어긋나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그대로 들어와 자버렸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문도 안 열어놓아서 문을 흔드는 소리에 부엌에서 불을 지피고 있던 모친이 나가 보니 얌전한 처녀애가 보따리를 끼고 덮어 놓고 들어서면서,
"홍경애 씨 계시죠?"
하고 묻는다. 모친은 멀뚱히 치어다보다가,
"들어가 보우."
하고 문을 지치고 들어왔다.
"얘, 내다봐라."
모친이 안방에다 대고 소리를 칠 새도 없이 건넌방에서 먼저 덧문이 펄썩 열리더니 피혁군이 중대강이 같은 시퍼런 머리를 쑥 내밀며,
"새문 밖에서 오셨수? 이리 주슈."
하고 보따리를 냉큼 받으면서,
"춘데 애쓰셨소이다."
하며 인사를 한다.
그러나 처녀애는 아무 대답도 없이 머뭇머뭇하고 섰는 양이 주인을 좀 만나 보고 가려는 눈치다.
"얘, 그저 자니? 손님 왔다."
모친이 또 한번 소리를 치니까 그제야 머리맡 미닫이를 밀치고 경애가 잠이 어린 눈으로 내다본다.
"어디서 오셨소?"
경애는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묻다가,
"새문 밖에서... 저 김병화 씨께서..."
하고 필순이 어름어름하는 것을 듣고는 반색을 하면서,
"예, 예, 어서 들어오슈."
하고 부리나케 자리 속에서 나온다.
필순은 곧 가겠다지도 않고 옷 입는 동안을 지체하여 안방문을 열기를 기다려 들어왔다.
이 처녀는 병화의 부탁도 부탁이려니와 덕기의 편지를 본 후로 경애를 한번 보았으면 하는 호기심이 잔뜩 있던 터인데 이렇게 속히 만나게 될 줄은 의외이었다. 필순은 첫눈에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한 외에 별로 깊은 인상은 갖지 못하였으나, 누구나 자고 난 얼굴이란 볼 수가 없겠건마는 이 여자는 갖추지 않은 얼굴이 그대로도 남의 눈을 끄는 데에 필순은 약간 친숙한 마음까지 일어났다. 방에 들어선 필순은, 방 치장이 으리으리하고 경애가 남자의 고의적삼 같기도 하고 청인의 옷 같기도 한 서양자리옷을 입은 양이, 눈서투르면서도 더 예뻐 보이는 데에 잠깐 일없이 섰었다. 그러나 자기 집 방 속을 머리에 그려보고는 너무나 동떨어진 데에 불쾌와 반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페 같은 데 가서 벌어서 이렇게 살면 무얼 하는 건구! 기생이나 다를 게 없지!'
이런 생각을 하니 필순은 도리어 더러운 것 같고 경멸하는 마음이 생긴다. 경멸하는 마음이 생긴다느니보다도 애를 써 경멸하는 마음을 먹어서 자기를 위로하고 부러운 생각을 누르려 하였다.
"김 선생님, 잘 가 주무셨수?"
경애는 자기에게 병화 심부름을 온 줄 알고 물었다.
"예, 그런데 조선옷을 가지고 왔에요."
경애도 어떤 영문인지를 몰랐다.
"무슨 옷요? 어디 두었수?"
"건넌방에요..."
경애도 필순의 대답을 듣기 전에 그러려니- 하는 짐작은 있었던 것이다.
경애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 눈치더니, 발딱 일어나서 벽에 걸린 외투를 떼어 파자마(자리옷) 위에다 들쓰며,
"김 선생님 언제 오신대요?"
"이제 뒤미처 오실걸요."
경애가, 잠깐 앉았으라 하고 급히 방문을 열고 나가려니까 필순도 따라 일어서며,
"두루마기가 짜르면 내가 예서 고쳐드리고 갈 테니 잠깐 입어보시라고 하세요."
하고 소곤소곤 이른다.
"뉘 건데요?"
"집의 아버님 건데 짧을 듯하다세요. 대중을 봐서, 절더러 고쳐놓고 오라고 하셨으니까 짧건 가지고 오셔요."
경애는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건넌방으로 건너갔다.
경애가 건넌방에 들어서며 눈을 크게 뜨고 깔깔 웃으니까,
"왜? 이상스러워?"
하고 피혁도 웃으며 빤빤한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다.
"아주 젊으셨는데. 다른 양반 같애요."
"그럴까?"
하고 머리맡 석경을 들어 본다.
"어느 틈에 깎으셨에요?"
"수염은 여기서 밀어버렸지마는, 하는 수가 있나. 현저동으로 가서 큰애더러 이발기계를 빌려볼 수 있느냐고 하니까, 얼른 제 동무에게 가서 빌려 가지고 와서 제법 깎아 놓겠지."
"그 대신 이발료가 일금 일원이면 싼 셈이랄까 비싼 셈이랄까."
피혁은 픽 웃어버린다. 현저동이란 경애의 외삼촌 집 말이다.
"일원 아니라 십원이라도 싸지요. 뭇사람이 드나드는 이발소에 가서 별안간 발갛게 깎다가 운수가 사나우려면 그 중에 무에 있을지 누가 안다구... 그래 어젠 어떻게 됐에요?"
"응, 잘 되었어."
피혁은 간단히 이렇게만 대답을 하고 한참 무슨 생각을 하다가,
"거기서 우수리만 날 주고, 나머지는 그대로 저 사람이 달랄 때 내주우."
하고 이른다.
경애는 더 캐어 묻지도 않고 잠자코 듣고만 있다.
"이따, 언제든지 떠날 테니 안 들어오건 떠났나보다 하우. 어머니께는 집으로 내려간다고 할게니 그렇게 알아두고 잘 지내우. 언제 또 만날지 모르지마는 지금 같은 그런 생활은 어서 집어치우고 저 사람을 좀 도와주도록 하우. 감독을 한다든지 감시를 할 수야 없지마는 옆에서 내용 아는 사람이 바라보고 있으면 행동이나 금전에 대해서 한만히 못하게 될 것이요, 또 그런 사람한테 적당한 여성이 있어서 위안도 주고 격려도 해주면 용기가 나는 수도 있으니까, 말하자면 저 사람을 못 믿는 것은 아니나 반은 경애를 믿고 가는 것이오."
경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고 둘이 너무 깊어져버려서 일이고 무어고 집어치워버리고 술이나 먹고 떠돌아다니면 큰일이야! 밖에서도 그런 소문은 빠르고 사실이라면 그 때는 참 정말 큰일이니까!"
피혁은 이런 부탁과 어르는 수작을 찬찬히 일렀다.
"에이 별걱정 다 하시는군! 그렇게 못 믿으실 지경이면야 어떻게 부탁을 하셨에요."
하고 경애는 핀잔을 주듯이 웃는다.
"그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마는... 깊이 사귀어보지는 못했지마는, 아이 딴은 쓸 만하기에 부탁한 게 아닌가. 일이란 성패간에 한 번 믿으면 딱 맡겨버리는 것이니까. 하루 이틀 새에 다른 사람 같으면 경솔하달만큼 쓸어 맡기고 가나 그래도 모든 게 염려 안 된달 수야 있나."
피혁의 말도 무리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아무려니 그까짓 돈 얼마에 타락할 사람도 아니요, 낸들 돈을 먹자면 먹을 데가 없어서 그까짓 것에 허욕이 동해서 일에 방해가 되게 할까요."
경애 말도 그럴듯하다고 피혁은 속으로 웃었다.
피혁의 말을 들으면 어제 병화와의 교섭이라는 것은 간단히 끝났던 모양이다.
피혁이란 이름도 물론 본성명은 아니지만 저기로 나가서 처음에 쓰던 이우삼이라는 이름을 듣자 병화도 그가 누구인 것을 알고 탁 믿는 것이었다. 이우삼이란 이름은 경찰의 '블랙 리스트'에는 물론이요 그동안 몇몇 사람 공판 때마다 재판소 기록에 오르내리던 이름이니만큼 바깥에 있는 사람 중에서는 한 모퉁이의 두목인 것은 사실이요, 따라서 여기 있는 동지간에도 본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름만은 잘 아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런 관계로 병화는 절대 신임을 하고 앞질러서 무슨 일이든지 맡으마고 나선 것이었다. 피혁만 하여도 경계가 점점 심해 가는 판에 머뭇거리고 있을 형편이 못 되었다. 자기가 맡아 가지고 온 두 가지 일중에 한편 일은 쉽사리 끝나고, 이편 일이 이때껏 미루미루 끌려내려온 것이었다. 물론 속일 알고 보면 한 계통의 한 종류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요, 후일 일이 탄로가 되는 날이면 너도 그런 일을 맡았던? 나도 이런 일을 맡았었다고 저희끼리 놀랄지 모르지마는 지금은 설사 한자리에 자는 내외간일지라도 서로 각각 비밀히 일을 안기고 가려니까 피혁으로서는 힘이 몹시 드는 것이었다.
하여간 일이 이만큼 무사히 낙착되었으니까 피혁은 피혁대로 불이시각하고 들고 빼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는 피혁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였지마는, 병화의 의견대로 조선옷을 입고 떠나기로 하였다. 그래서 병화는 어젯밤으로 필순의 부친과 의논을 하고 그이의 단벌 출입건을 내놓게 하고 필순의 모친은 밤을 도와서 버선 한 켤레까지 짓게 하여 지금 필순을 시켜 주어 보낸 것이다.
필순의 부친의 키도 그리 작은 키는 아니나 그래도 두루마기가 작았다. 바지저고리는 그대로 입을 수 있어도 두루마기의 화장과 길이가 껑충한 것은 흉하였다. 흉하다기보다도 남에게 얻어 입은 것이 뻔하여 급히 변장한 것이 눈치 채어질까 보아 안 되었다.
피혁은 그래도 관계없다고 하였으나, 경애가 가지고 안방으로 건너왔다.
"시골 사람들은 정갱이에 올라오는 것도 입는데 길이야 괜찮겠지. 화장만 좀 늘였으면 좋겠는데 그대루 두우. 어머니께 고쳐 줍시사 하지."
경애는 필순에게 보이기만 하고 그대로 못에 걸려 하였으나 필순은 예서 펴 놓고 고치기가 어려우니 가지고 가서 고쳐 오마고 빼앗아서 싸려 한다. 싸겠다거니 말라거니 하며 실랑이를 하는 판에 병화가 후닥닥 뛰어들어온다.
전신의 신경을 달팽이의 촉각같이 예민하게 하고 앉았던 피혁은 병화의 기색이 좀 다른 것을 보고 병화의 입만 치어다보았다.
병화는 안방으로 경애를 따라 들어가서 잠깐 수군수군하더니 피혁을 불러들여 갔다.
또 조금 잇다가 경애가 나와서 아이 보는 년을 불러서 부엌 뒤로 끌고 나가더니 현저동 집에 가서 주인 아씨께 잠깐 오시라고 전갈을 해서 뒷문을 열어주어 내보냈다. 뒷문은 그전에 누렁물을 쓸 때에는 열어놓고 썼었지마는, 위에 병원이 서게 되자 우물은 병원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병원 담과 이 집 사이에 토시짝 같은 골짜기가 생긴 뒤부터는 이 뒷문을 열어본 적이 일년에 한두 번 청결 때나 있을까말까한 터이다. 그러나 경애가 이 집에 온 뒤에 꼭 한 번 이문을 긴하게 쓴 일이 있었다. 그것도 상훈과 헤어진 뒤에 한창 달떠 다닐 때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까만 옛날 일이다. 그 남자도 경애 앞에서 스러진 지 오래다. 하여간에 아이 보는 년은 생전 여는 것을 보지 못하던 이 문을 열어 주고 이리로 나가라는 데에 좀 이상한 듯이 주인 아씨의 얼굴을 치어다보았으나 하라는 대로 그리 나와서 전찻길로 빠져 염천교 다리로 향하여 꼬불꼬불 걸어갔다.
뒤미쳐서 피혁도 이 문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셋째로는 필순이, 가지고 온 것보다도 더 큰 보따리를 끼고 나갔다. 그 동안 10분, 5분씩 격을 두어서 20분밖에는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피혁은 병화가 서두르는 바람에 줄이느니 늘이느니 하던 두루마기를 급히 꿰고 병화가 옷과 함께 사보낸 고무신을 신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무슨 일이 있다면 다른 사람은 상관없으나 어린 계집애년의 눈에 띄어서는 큰일이다. 계집애년만 붙들어 가면 그린 듯이 보고 들은 대로 아뢰어 바칠 것이요, 또 만일 잠깐 이년을 치운다 해도 앞문으로 내보냈다가 동구에서 서성대고 있는 사람이 정말 형사일 지경이면,
"얘, 얘, 너의 집에 지금 누구누구 있던?"
하고 물어본다든지 하여 일은 단통 당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창졸지간에 생각난 것이 급한 대로 현저동에나 쫓아보내자는 것이었다.
피혁은 두루마기 위로 속적삼이 허옇게 나오는 두 팔을 귀에 찌르고 정처없이 나섰다. '그 돈의 우수리'라는 삼백 원을 주머니에 넣었으니 가려면 어디든지 갈 것이나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세상 사람의 눈은 모두 자기의 얼굴만 바라보는 것 같다.
경애와 병화는 삼백 원을 떼내고 남은 2천 원을 신문에 싸서 피혁이 벗어 놓은 양복 외투와 함께 단단히 뭉쳐서 급한 대로 필순을 주어서 '바커스'로 보내 놓고 모친더러는 뒤미처 또 현저동으로 쫓아가서 아이년을 거기 그대로, 붙들어 두라고 이르게 하였다. 아이년이 오다가 붙들려도 아니 될 것이요, 얼마 동안은 그 집에 보내 두는 수밖에 없었다.
모친은 어쩐 영문인지를 분명히는 몰랐으나, 외국에서 들어온 조카의 신상에 급한 일이 생긴 것인 줄만은 짐작 못하는 게 아니니까 하라는 대로 부리나케 옷을 갈아입고 나섰다. 나서면서도 병화와 젊은것들만 남겨 두고 가는 것은 마음에 꺼림칙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경애와 병화는 우선 한숨 돌리고 마주 앉았으나 모든 것이 애가 쓰이고 무간 족으로만 눈이 갔다.
그는 고사하고 돈과 피혁의 양복을 필순의 집으로 가지고 가세하였다가 거기서 위태할지 몰라서 바커스로 가서 기다리라고 집을 일러주기는 하였는데, 거기 역시 또 어떨지 겁이 난다.
경애는 이때까지 파자마에 외투를 입은 채 옷도 갈아입을 새가 없었다. 세수도 하기 싫었다. 그대로 병화와 마주 앉아서 담배만 빡빡 피우고 있다. 아무도 입을 벌리는 사람은 없으나 똑같은 불안과 그 불안을 어떻게 모면할까를 궁리하고 앉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어떻게 대답을 하겠다는 것을 공론하지 않아도 피차의 생각은 똑 같았다.
"제발 덕분에 무사히 넘어서야지 붙들리는 날이면 우리도 납작해지는 판이구려."
경애는 아직도 남의 일처럼 웃는다.
"하는 수 있나. 그건 고사하고 바커스에 어서 가보아야 할 텐데. 내가 나가다가는 뒤를 밟히지 않을까? 나두 뒷문으로나 빠져 나갈까."
하며 병화는 웃는다.
"큰일날 소리! 그랬다가는 정말 야단나게! 앞으로 버티고 나가다가 붙들리면 붙들리구 말면 말지 그야말로 하는 수 있나."
경애 말을 듣지 않아도 그렇기는 그렇다. 뒷문으로 새어나간 줄을 알기만 하면 의혹을 더 낼 것이니 달아난 사람도 곧 뒤쫓기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정말 형사를 가지구 그러는지? 제 방귀에 놀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오?"
"제 방귀에 어째요? 말버릇 얌전하다!"
병화는 커다랗게 탄하면서,
"궁금하거든 좀 나가보구려."
하고 핀잔을 준다.
경애는 발딱 일어나서 나간다. 반쯤 열린 문을 닫는 척하고 내다보니 문소리가 씩걱씩걱 나니까 고개를 이리로 휙 돌리더니 다시 외면을 하고 누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길 밖을 내다보고 섰다.
경애는 말만 듣던 것과 달라서 딱 마주보니 가슴이 뜨끔하다.
"있어, 있어! 어떡하면 좋아요?"
나갈 때까지와 들어와서가 다르다.
"왜, 보니까 겁이 나지!"
"겁은 무슨, 죄졌나! 당신이나 벌벌 떨지 마우."
피차에 이런 실없는 소리나 하여 목줄띠에 닥친 불안과 공포를 서로 위로하려 하였다.
"이로너라..."
잠깐 있으려니 밖에서 소리를 치며 꼭 지친 문을 밀치고 우중우중 들어오는 구둣소리가 난다. 경애와 병화는 가슴이 덜컥하는 한순간이 지니니까 숨이 저절로 돌아나오며 마음이 제대로 가라앉는다. 머리끝까지 화끈 솟아올랐던 피가 쭉 내려앉는 것 같다. 중문간에서 환도가 절그럭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주인 있소?"
하고 소리를 친다.
경애가 마루 끝으로 나섰다.
"호구조사요. 홍경애가 누구요?"
장부를 손에 펴든 순사가 마룻가에 와서 서며 집 안을 휙 돌려다본다.
"나예요."
"이소사는?"
순사는 장부를 다시 들여다보며 묻는다.
"우리 어머님이세요."
"정례는?"
"딸년예요."
"애 아버지는 없소?"
"없에요."
"어디 갔단 말요?"
"돌아갔에요."
"그래 세 식구뿐이란 말요?"
"예..."
순사는 장부를 접어 들고 또 한번 이리저리 휘휘 둘러보다가,
"이 구두는 뉘 거요?"
하고 축대에 놓인 허술한 구두를 가리킨다.
"손님의 것예요."
"방문을 좀 열어보슈."
경애는 깔깔 웃으면서,
"호구조사하는데 손님 선도 보세요?"
하고 안방 문을 열어젖뜨리니까 병화가 모자를 쓴 채 앉았다가 헤헤 웃어 보이며 일어나 나온다. 순사는 병화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면서,
"호구 조사는 유행병 때문에 하는 거니까요."
하고 변명을 하면서 건넌방을 열어보아도 좋으냐고 묻는다.
"아무도 없에요. 열어보세요."
순사는 건넌방 앞창을 열고 두리번두리번 자세히 본다. 그러나 거기에는 낡은 구식 이층장과 자리가 쌓여 있고, 반짇고리니 다듬잇돌이니 요강이니 하는 모친의 세간이 깨끗이 치워놓였을 뿐이다. 순사는 다시 부엌으로 가서 기웃하면서,
"어머니는 안 계시우?"
하고 묻는다.
"요 앞에 나가셨에요. 장안에 무어 사려구... 그런데 이 겨울에 유행감기도 전염병처럼 취체를 하나요?"
경애는 생글생글 웃으며 오름 박듯이 물었다.
"누가 압니까. 하라니까 할 뿐이지요. 그런데 댁에는 이외에 다른 식구는 없소? 부리는 아이년이구 행랑 사람이구?"
순사는 웬일인지 비로소 얼굴빛을 펴며 놓은 낯으로 묻는다.
"아무도 없에요."
"조용해 좋소그려. 방해되어 미안하우."
순사는 젊은 남녀만 있는 것을 빈정대듯이 이런 소리를 하고 싱긋하며 나가 버렸다.
병화의 뒤를 쫓던 그 형사가 앞 파출소의 순사를 들여보낸 모양이었다. 그것도 병화의 얼굴을 아는 형사가 이 근처를 아침저녁으로 순행을 하다가 어제 깊은 밤에 병화가 무심히 파출소 앞을 지나는 것을 보았는데 오늘도 이른 아침에 이 근처에서 눈에 띄니까 뒤를 밟아 온 것이다. 저희의 소굴이 이리로 옮겨 왔나? 혹은 병화의 집이 자기 관내로 떠나왔나 하여 다만 그런 단순한 의미로 쫓아본 것이었으나 문패도 똑똑히 붙이지 않고 국세조사 때에 붙인 쪽지에 이소사라고만 쓰인 것을 보고 한참 동정을 보다가 파출소로 가서 순사에게 물어보고는 대신 들여보낸 것이다. 아까 경애가 문간에 나가서 본 사람은 형사는 아니었다. 제 방귀에 놀란 사람은 실상 경애이었다.
경애와 병화도 그만 짐작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정복 순사를 들여보낸 것을 보면 피혁을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닌 듯도 싶다. 만일 그렇다면 형사가 언제든지 달려들 것이 아닌가? 혹은 새벽녘에 자는 것을 에워싸고 들어와서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아슬아슬하였다. 이렇게 된 다음에는 어차피 경애도 주의 인물이 되기는 하였지마는, 그들이 둘의 연애관계로만 생각한다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또 어느 때 정말 형사가 달려들지 피차에 내놓고 말은 안 하나 마음이 놓이지를 않아서 바늘방석에 앉았는 것 같다. 어쨌든 우선 병화라도 나가 보고 싶었다.
나중에 바커스에서 만나기로 하고 병화는 필순을 만나러 바커스로 갔다. 길을 돌아서 아무쪼록 호젓한 데로만 골라 갔다. 뒤에서 따르나 안 따르나를 보려는 것이었다.
결국 따르는 사람은 없었다. 도리어 이상하다는 불안을 느끼면서 앞에서 또 한 번 주의를 해보고 들어섰다.
우중충한 속에 덩그러니 혼자 앉았던 필순은 반기며 일어선다. 얼었다 녹은 얼굴이 발갛게 피었으나 난롯불은 이제야 반짝거린다.
"퍽 기다렸지?"
"응, 복장 입은 놈이 하나 다녀갔지만 상관없어. 어서 집으로 가지."
하고 병화는 필순을 재촉해 보내려다가,
"잠깐 가만 있어."
하고 양복을 훌훌 벗고 갈아입은 후에 보자기에는 자기 양복만 다시 싸서 준다.
"가다가 종로로 돌아서 아무 양복집에나 갖다두고 뜯어진 것을 말짱히 꿰매고 고쳐 노라고 해 주게. 조금 비싸더라도 그대로 맡겨 두고 가요. 영수증은 받고... 혹시 집에도 누가 와 있으면 안 될 거니까 어디 다녀오느냐거든 공장에 가다가 배가 아파 다시 왔다고 하든지 잘 말해요."
병화는 이렇게 이르고 뒤로 빠지는 문을 열어주었다.
피혁의 양복을 그대로 지기 방에 갖다두면 혹시 가택수색을 당할지 모르니까 아주 자기가 입어버린 것이요, 자기 양복도 필순이 가지고 돌아가다가 어찌 될지 몰라서 처치를 하고 가게 한 것이었다.
주인 방은 그저 잘 리도 없는데 여전히 조용하다.
남은 외투를 쌀 신문지를 한 장 얻으려고 소리를 쳐보아야 감감하다. 방문을 두드리다가 열려니까 주부는 그제야 밖에서 뒷문으로 들어온다. 손에는 반찬거리를 사들었다.
"웬일예요. 이렇게 일찍들..."
하고 주부는 인사를 하다가,
"그 색시는 갔습니다그려?"
하고 홀 안을 돌아다본다.
"내 누이라우. 양복을 이리 갖다놔두라고 했는데... 너무 일찍이 미안하외다. 한데 이거 좀 맡아두슈."
하고 외투를 들어서 주부에게 준다.
그 속에는 2000원을 10원짜리와 100원짜리로 섞어 싼 뭉치가 들어 있다.
주부는 받아들다가 주머니 속에 무엇이 묵직하고 처지는 것 같으니까,
"여기 무에 들었기에 이렇게 무거워요? 벤또바꼬?"
하고 웃는다.
"에, 벤또. 그대로 넣어두슈."
병화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대꾸를 하여두고 물이 더워졌거든 술이나 좀 데워 달라고 청한다.
주부는 외투를 자기 방에 갖다가 걸어놓고 술부터 데울 자비를 한다.
외투도 여기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왕이면 어떤지를 분명히 몰라서 아직은 여기 앉아서 경애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두 시간이나 넘은 뒤에 경애가 겨우 왔다. 물론 별일은 없으나 모친이 돌아와서 아침을 차리고 나오느라고 그렇게 늦은 모양이다.
"오늘 일은 어떻게 그럭저럭 넘어갔다지마는 이젠 주의해요. 여기마저 발이 달려왔다가는 큰일이니까. 이젠 만날 것두 없구 좀 덜어져 지냅시다."
경애는 이런 소리를 하였다.
"그야 그렇지만 이젠 볼일 다 봤다는 말씀이시군? 무슨 말을 그렇게 야멸치게 하누? 하루 한 번씩이라도 안 만나고야 견디나."
병화는 비로소 바짝 죄었던 마음이 풀린 듯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려놓는다.
"만나서는 무얼 해요. 이젠 당신이 형사 같구 형사가 당신 같구..."하며 경애도 웃는다.
"유일한 동지요. 유일한..."
병화는 말끝을 끊고 또 웃어버린다.
"으응..."
하고 경애는 눈을 흘기다가 또 같이 웃어버렸다. 당면한 걱정이 덜리니까 새삼스러이 더 가까워진 것 같고 행복스러운 애욕이 부쩍 머리를 드는 것이었다. 경애도 내심으로는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이동 좌담회를 하루 두어 번씩만 열어봅시다."
병화의 발론이다.
"이동 좌담회구 뭐구 술두 이제 그만해요. 그이도 가면서 퍽 염려를 합디다."
"무어라구? 술 때문에?"
"술두 술이지마는 돈을 객쩍게 쓸 것도 걱정이요, 우리가 너무 친할까 보아서도 걱정이요..."
"허허허... 너무 친하면 어떻게 친한 건구?"
병화는 커다랗게 웃고 만다. 그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애는 좀 알 수 없어서 한 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병화는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새파란 젊은 의기에 그까짓 돈 몇 천 원에 욕기가 난다든지 일에 비겁하기야 하랴--하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참 그런데, 이때껏 잊어버린 게 있군."
병화도 무슨 생각을 하다가 별안간 눈을 번쩍이며 말을 꺼낸다.
"조군이 떠날 때 이 집 주인이 알아봐달라구 부탁하던 오정자라나 하는 일본 여자, 지금 감옥에 들어가 있다더군."
"그렇다나 봐요. 그런데 덕기한테서 그런 말은 왜 당신한테루 기별을 해 왔어요?"
"삼단논법으로 당신도 빨갱이가 되었을까 봐 애가 쓰인다구..."
하며 병화는 웃어버리다가,
"주인은 아마 빨갱인 모양이지?"
하고 묻는다.
"한 서너 잔 먹으면 발개질 때도 있지만 워낙 안 먹으니까 늘 하얗지."
경애는 웃지도 않고 시치미를 뗀다.
"어쨌든 이 집 주인이 주목을 받지는 않겠지?"
하고 다진다.
"아아니 왜?"
"주목을 받으면야 나두 올 수 없고 당시도 얼른 그만두어버리는 게 좋으니까 말이지. 당분간은 대근신을 해야지 않소."
경애는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별안간 발을 빼는 것도 문제이었다.
"어쨌든 돈을 쓰고 다니거나 하면 그것도 의심받기 쉬우니까 주의를 해야 해요."
경애는 병화가 요새 유행하는 마르크스 보이처럼 돈푼 생기면 금시로 헌털뱅이를 벗어버리고 말쑥이 거들고 다닐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으나 또 한 번 주의를 해두는 것이었다.
"별 걱정 다 하는군! 그런데 그 돈을 얻다 맡기면 좋겠소?"
"참 얻다 두겠소? 날 주슈. 내 처치를 해놓고 보고만 할게. 당신이 가지고 있으면 당장 발각되어요."
"외투 속에 넣어서 주인 방에 걸어놓았는데 어떡하든지 하구려."
"잘 됐군, 그대루 둬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말하지."
병화는 조금 더 앉았다가 간밤에 잠을 잘 못 자서 좀 가서 눕겠다고 하품을 연발하면서 일어나 버렸다.
답장
"홍경애란 카페의 그런 여자인 줄만 알았더니 퍽 얌전하고 좋은 사람이던데요?"
"어떻게 좋아?"
"모던 걸은 모던 걸이지마는, 얌전하고 싹싹해 보이지 않아요?"
병화도 필순이 경애를 칭찬하는 것이 반갑기는 하나 단순히 싹싹하고 얌전하다고만 칭찬하는 것은 미흡하였다. 그보다도 경애가 자기네 일을 용감하게 도와주는 점을 창찬하여 주었더면 더 좋았을 것이다.
"카페 계집애려니 하는 생각은 어떻게 해보았어? 뉘게 들었어?"
필순은 대답이 딱 막혔다. 덕기의 편지를 몰래 보고 알았다는 말을 해도 좋을 것 같기는 하나 그만두어버렸다.
"진고개 그 집에 다니지 않아요? 어쨌든 선생님이 행복이십니다. 그런 좋은 데가 있는데 왜 여기서 이 고생을 하셔요. 어서 떠나가셔요."
필순은 놀린다.
"당치 않은 소리 말어! 그런데 참 여기 좀 앉어요, 할말이 있으니."
병화는 벽에 기대어 섰는 필순이 가까이 앉기를 기다려서 은근히 말을 꺼낸다.
"공장도 이제는 멀미가 나지?"
"그저 그렇지요."
"흠..."
하고 병화는 잠깐 침음하다가,
"이젠 음력설도 얼마 아니 남았으니까 필순이도 열 아홉 살이 되나? 스물이 되나?"
"그것 왜 물으세요?"
하고 필순은 얼굴이 살짝 발개진다.
"아니, 내가 중매를 하나 들어보려고. 허허허 얌전한 신랑이 하나 있는데..."
병화는 또 금시로 실없는 소리를 꺼냈다.
"몰라요, 몰라요,"
하며 필순이 일어서려니까,
"잘못 했어. 다시는 그런 소리 안할게 앉어요."
하고 병화는 빌어서 앉히고 그런 실없는 소리는 안 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공장엘 다닌달 수도 없고 시집은 가기 싫다고 어떻게 하면 좋담? 그야 내가 걱정을 안 해도 아버지 어머니께서 더 걱정을 하실 것이요, 필순이도 생각이 있겠지마는..."
"무에 걱정예요. 귀찮은 세상 죽어버리면 그만이지요. 무에 알뜰한 세상이라구..."
필순은 이런 소리를 잘하였다. 이맘때 계집애는 이런 말이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가 싶었으나 어쨌든 가엾은 일이라고 병화는 생각하였다. 일전에 받은 덕기의 편지가 생각났다- 청춘의 꿈을 아름답게 꾸게 해 주어라...
병화는 코웃음을 무심코 쳤다.
필순은 병화가 혼자 실소를 하는 것을 말끔히 치어다보다가,
"왜 웃으세요?"
하고 시비조로 묻는다.
"아니- 죽는다니 말야. 죽기는 그렇게 쉰 줄 아나? 아예 그런 소리는 해 버릇 말어."
하고 병화는 덕기의 말을 냉소한 것이나 딴청을 하고 나서,
"그래 공부를 해보고 싶어?"
하고 물었다. 그러나 덕기의 말을 전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왜요? 무슨 도리가 있어요?"
필순은 덕기의 말이 나오고 마는 게다 하며 반색을 아니할 수 없었다.
"어쨌든 할 수 있다면 해보겠어?"
"글쎄, 어떻게 해요? 제일 집안 때문에?"
"집안 일은 어떻게 되었든간에."
필순은 덕기가 자기 집 생활까지 돌보아 주마고 하지나 않았나 하는 공상을 해 보고는 고마운 생각과 그 사람이 왜 그처럼 열심일까 하는 의혹과 겁이 뒤섞여 났다.
"그래 공부를 하려면 무얼 하겠누?"
"아무거나 하죠."
사실 이것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없다. 그러나 장래 취직할 수 있는 점을 첫째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말야. 좀 멀리 떨어져 가야 공부할 길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꾸?"
병화는 한참 주저하는 눈치더니 딱 결단했다는 표정으로 묻고 필순의 얼굴을 바라본다.
"멀리 어디요? 일본요?"
필순은 덕기가 있다는 경도를 생각하였다.
"아니, 그런 데는 아니고, 좀 가기 어려운 데야."
병화의 말에 필순은 자기의 공상이 깨어진 듯이 얼굴빛이 차차 변하여 간다.
붉은 나라 서울 모스크바로 공부하러 가지 않겠느냐는 말에 필순은 놀라움과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데를 내가 어떻게 가요? 단 세 식구에서 내가 빠지면 어머니 아버지는 어떻게 사시게요?"
필순은 그런 일은 생각만 하여도 눈물이 날 것 같다. 굶으나 먹으나 따뜻한 부모의 사랑에 싸여 있고 싶은 것이다.
예전에 잘살 때 집에 둔 개가, 새끼 하나가 축이 난 것을 보고 먹지도 않고 온종일 들락날락거리던 것이 생각난다.
필순은 그 생각만 하고도 눈물이 괸다. 노서아라면 첫대바기에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서백리아다. 망망무제한 저물어가는 벌판에 다만 하나 어린 계집애가 가는 듯 마는 듯 타박거리며 가는 조그만 뒷모양이 원경으로 눈앞에 떠오른다. 그것이 자기라고 생각할 제 또 눈물이 솟을 것 같다.
"왜 싫어? 어머니 치맛고리에서 떨어질 수가 없어? 이런 속에 들어앉으면 별수 있나? 시원하게 몇 해 동안 나돌아다니며 공부도 하고 구경도 하고 오면 좋지 않어? 이 좁은 천지에 들어앉었으려야 나는 싫어! 나도 뒤쫓아갈 테니까 적적하다거나 염려될 거야 없지. 가보기로 하는 게 어때?"
병화는 열심으로 권한다. 그러나 필순에게는 귓가로 들렸다. 덕기가 아무쪼록 그러한 데로 끌어넣지 못하게 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자기 집 사정을 보다시피 뻔히 알면서 이렇게 강권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무정한 것같이도 생각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나가면 뒤미처서 쫓아오겠다는 말을 듣자 필순은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일도 일이거니와 둘의 세계를 찾아 모스크바에 가자는 말인가? 그러면 이 사람이 이때까지 내게 대해서 남유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나 그렇다고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덕기의 편지로 보거나 이 때까지 서로 지낸 것으로 보거나 친하다는 남매간 같고 친구 같고 사제 간 같았을 뿐인데 저에게는 그렇게 말을 하여도 그것은 공연한 소리요, 자기 속생각은 따로 있었던가? 만일 그렇다면 홍경애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또 그만두고라도 정작 공부를 시키겠다는 덕기의 말은 지난 결에도 꺼내지 않으니 그것은 웬일일꾸? 혹시는 어제 달아난 피혁이라는가 하는 사람을 쫓아가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피혁의 일을 도우라는 말인가? 혹은 아까 중매를 서마느니 신랑감이 있다느니 한 것으로 보아서 피혁을 쫓아가면 자연히 공부도 되고 결혼도 하게 되리라는 계책으로인가?
필순의 공상은 끝간 데를 몰랐다.
"부모가 안 계시면 아무렇게도 좋겠지마는... 그것도 남같이 동기가 많으면 먼 데라도 가겠지마는 내가 없으면 어머니 아버지는 어떡허시라구!"
필순은 또 한 번 같은 말을 탄식하듯이 뇌었다.
"만일 어머니 아버지께서 허락하신다면 어떡할 텐가?"
"허락하실 리두 없구 또 그렇게까지 해서 공부하긴 싫어요. 나 같은 여자가 필요하면 홍경애를 보내시면 어때요? 아무것두 모르는 나 같은 여자가 것이 그런 데를 가서야 공부도 안 될 것이요, 일도 안 될게 아닙니까?"
필순은 아무래도 그런 일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유랑의 생애를 보낼 생각은 없었다. 부잣집 며느리가 되어가지고 호강하자는 것은 아니나, 벌어서 부모나 봉양하다가 시집을 가게 되면 갈라는 생각밖에 그리 큰 생각은 없는 것이다. 공부를 하겠다는 것도 직공 생활보다는 좀 더 수입 있는 직업을 얻자는 수단이다. 평소에 부친이나 병화에게 감화를 받기는 받았으나 그렇다고 가정을 버리고 부모를 떠나서 무슨 일을 해보겠다는 것은 아니요, 결혼이나 일생의 행복까지 바친다는 것은 아니다.
"글쎄 말이야. 홍경애도 나갈 것이니 더욱 좋지 않은가. 내가 먼저 나가든 홍경애가 먼저 나가든 할 게니까 우리 모두 함께 나가서 마음놓고 살아 보자는 말이지."
이 말에 필순은 다시 의심이 든다. 아까 말눈치로 보아서는 둘이만 나가자는 것 같더니 홍경애까지 데리고 가면 자기에게 무슨 애욕을 가지고 권하는 것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다만 일을 위하여서인 듯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리 깊은 뜻은 없었다.
병화가 피혁한데 맡은 일 가운데 남녀 학생을 수삼인 골라 보낼 것도 하나인 때문에 필순의 사정은 모르는 바 아니나 공부하지 못해 애를 쓰는 판이니 어쩌면 나설 듯싶어서 물어본 것이나, 의외로 가정적 보통 여자와 다름 없는 것을 보고 실망하였다. 경애도 가리라는 말은 실상 의논 해본 일도 아니거니와 경애에게는 자식이 매달렸으니까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자기 아는 여자 가운데서는 별로 고를 만한 사람이 없다. 어쨌든 병화는 자기 맡은 일을 엉구어놓고서는 뛰어나가고 싶으나 그전에 내보낼 사람을 내놓아야 할 것이요, 또 이왕이면 필순이나 경애 같은 잘 아는 여성 하나를 내보내 두고 싶은 것이다.
"공부는 하고 싶어도 일본 같은 데 가서 편안히 대어주는 학비나 받아 쓰고 할 자국을 구하자니 어디 그런 입에 맞는 떡이 있을라구."
병화는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이 비웃는 것 같은 데에 필순은 깜짝 놀라서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심사가 나서 잠자코 있다.
"그런 자국을 얻자면 돈 있는 늙은 놈의 첩 노릇이나 할 생각이 있으면 모르지마는 지금 세상에..."
병화의 불뚝심지는 또 이런 듣기 싫은 소리를 거침없이 하는 것이다. 필순은 듣기가 분하였다. 그러면서도 덕기의 말은 여전히 털끝만큼도 꺼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느니보다도 미웠다. 만일 덕기에게 시기를 해서 그런다면 더러운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러면 몸팔아가며 공부하자나요."
필순은 울고 싶은 감정으로 한마디하였다.
"그렇게 노할 게 아니라 지금 세상이 그렇다는 말이지. 지금 세상은 교육이라든지 학문이라는 것이 직업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데서 또 한 걸음 더 타락해서 결혼 조건이나 여자의 몸치장의 하나가 되었으니까 말이지. 여학생이라면 계집 자식 버리구 두 번 장가들려는 이런 세상이 아닌가. 허허허."
"그런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겠지요."
필순은 앙하는 소리로 대꾸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구야?"
병화는 덕기를 생각하며 물었으나 필순은 대답을 주저한다.
"그래 그렇지 않은 사람이 공부를 하라면 할 텐가?"
필순은 역시 대답이 없다. 대답이 없는 것은 그렇게 하겠다는 말 같다.
"조덕기군이 공부나 시켰으면 좋겠다고는 하지마는 남의 은혜란 무서운 것이요, 받으면 받으니만큼 갚아야 할 것이니 무엇으로 갚을 텐가? 갚기를 바리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필순은 그도 그렇기는 하다고 생각하였다.
"만일 조군이 독신이라면 나도 구태여 불찬성은 아니지마는 처자가 있지 않은가, 게다가 나이가 어리지 않은가?..."
필순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았을 뿐이다. 그 말도 옳은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병화는 말을 끊어버리고 필순을 내보낸 뒤에 버둥버둥 누웠다가 일전에 받은 덕기의 편지를 생각하고는 오늘 답장을 써볼까 하여 책상 앞으로 다가앉았다.
서랍을 우선 여니 덕기의 찢어진 편지가 나온다. 일전에 피혁과 만나게 되던 날 나갈 제 또 무슨 일이 있을까보아 휴지를 버리려고 아직은 둔 것이다.
혹시 필순이가 이 편지를 꺼내 보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니 이렇게 눈에 뛸 데에 넣어둔 것이 안 되었다는 생각도 하면서 두 쪽에 난 봉투에서 꺼내서 맞붙여 가며 다시 한 번 훑어보려니까 한편에는 제 차례대로 넣었으나 한 토막 편은 중간에 차례가 바뀌었다. 두 동강에 쭉 찢었다가 넣어둔 것이니 바뀌면 두 편이 다 바뀔 것이다.
"흐응, 꺼내 봤구나."
하며 병화는 하는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무료한 세월이 고치에서 실 풀리듯이 지리하게도 질질 끌려나가네. 우리 나쎄에 인생이 무료하대서야 나도 벌써 쓰레기통에 들어갈 인생일세마는 좀 더 긴장한 그날그날을 못 보내게 될지? 도리어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긴장한 항력과 풀려나갈 희망을 가지고 있을 터이니만큼 이따위로 죽지 못해 사는 생명을 주체 못하는 사람이 나뿐이겠나? 나뿐이 아니라고 결코 위로가 될 것도 아니지마는...
피혁을 떠나보낸 뒤로는 부쩍 신경이 더 날카로워지고 늘 신변에 검은 그림자가 쫓아다니는 것 같아서 앞뒤를 더욱 경계하고 조심조심하는 터이거니와 차차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할 터이니까 이 편지도 경찰에서 검열할지도 모르겠다는 짐작으로 일부러 이 말부터 쓴 것이다.
이런 편지도 실상은 한가로우니까 소견삼아 쓰는 것일세마는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할까보이. 바빠서 그런 게 아니라 결국 소용이 무어냐는 말일세. 자네가 아무리 나와 같은 시대에 숨을 쉬기로 자네야 미구에 할아버님이 그 유산과 함께 물려주실 시대의 꼬리에 매달려갈 사람 아닌가. 매달려간다기보다도 시대의 꼬리를 붙들고 늘어붙어 앉을 거 아닌가? 금고를 맡아 보게, 돈을 만져보게, 지금 생각으로는 뻗어가는 시대의 큰 수레에 탈 것 같을 듯싶지마는 그 육중한 금고를 안고 탈수야 없으니 시대의 꼬이나 붙들고 늘어질 수밖에 더 있겠나. 시대를 붙들어놓으려는 엉뚱한 생각은 다만 보수적일 뿐 아니라 당랑거철인 줄을 모르는 게 아니면서, 그밖에 갈 길이 없을 거니 내 설교쯤 마이동풍 아닌가? 쓸데없는 한문자의 유회는 해서 무얼 하겠나. 몇 해를 두고 길러내다시피 한 필순이도 실망일세마는 필순이 역시 결국에 시대의 꼬리를 붙들고 주저앉을 위인밖에 아니 되네. 여자란 원체 보수적이요, 새 시대의 선도자가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며 나이나 성격 관계도 없지 않겠지마는 필순이 하나도 내 힘으로는 시대의 수레에 집어올릴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제, 자네게 내가 천만 언을 하면 무엇하겠나. 자기가 무력한 탓이지? 나 닮으라고 설교를 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틀렸는지? 그것은 자네 판단에 맡기네마는 그러나 아직도 한 가지 믿는 것은 아무리 베돌던 닭도 때가 되면 홰 안에 제풀에 찾아들리라는 것일세. 필순이나 자네나 길을 돌아서라도 다시 만날 날이 있으리라는 말일세.
필순이는 지금 자네의 소원대로 그 소위 청춘의 꿈에 감잡혀 들어가는 판일세마는 여기에 안된 것은 자네의 편지를 골독히 쑤셔보았다는 사실이네. 이러한 객쩍은 편지는 그만두자고 한 동기도 거기에 있거니와, 내 시대로 걸어나오다가 자네의 시대에 주저앉아버린 중요한 암시를 준 것은 확실히 자네의 편지들이요, 자네의 그 값싼 동정인 것이 분명하이.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만 때 아이들로는 무리치도 않은 일이나 하여간 이제는 난 모르네. 필순이의 일은 자네가 알아 하게. 나를 중간에 세우지 말고 자네네 뜻대로 자네 힘대로 하게. 그러나 꿈이 깰 때, 현실로 돌아오면 반드시 또다시 나를 찾을 것을 믿네. 또한 자네만 하더라도 미구불원에 자네 할아버니께서 지키시던 모든 범절과 가규와 법도는 그 유산목록에 함께 끼여서 자네가 상속할 모양일세마는, 자네로 생각하면 땅문서만 이 필요할 것일세. 그러나 그 땅문서까지는 시대에 대한 민감과 양심이 있는 것을 내가 잘 아니까 말일세.
자네 부친- 그이는 자네 조부에게는 기독교도로서 이단이었지마는, 자네에게도 시대 의식으로서 이단일 것일세. 그에게는 얼마 동안 술잔과 19세기의 인형의 무릎을 맡겨두는 것도 좋은 일이나 아편을 정말 자시지나 않게 주의를 하게.
그리고 홍경애?- 이 여자는 아마 자네 부친의 것이라느니보다도 내 것이 되기 쉬울 가능성이 충분하이마는 그는 19세기가 아니라 20세기의 인형일세. 그 정도로 나는 사랑할지 모르네. 그만쯤 알아두게. 더 쓸 것도 없고 쓰기도 싫으니 부득요령의 잔소리가 되었네. 그러나 요령 있는 말을 하다가는 감수(減壽)가 될 것이 아닌가.
전보
영감의 병은 차차 눈에 안 띄게 침중하여 들어갔다. 따라서 지 주사, 창훈, 최 참봉 들 사랑 사람은 밤중까지 안방에 들어와 살다시피 되었다. 그러나 영감은 병이 더하여 갈수록 아들과는 점점 더 대면도 하기를 싫어하였다. 상훈은 인사를 차려서라도 아침부터 와서 밤에나 자러 가지마는, 사랑에서 빙빙 돌 뿐이다. 영감이 요새로 부쩍 더 그러는 데는 이유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돌아갈 때가 가까워서 그런지 덕기를 보고 싶다고 몇 번이나 편지를 띄우고 전보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회답이 없어서 영감은 가뜩이나 손자놈을 못마땅하게 생각은 하면서도 날마다 아침저녁 차 시간만 되면 기다리는 터인데, 상훈은 그런 줄도 모르고 시키지 않게 한다는 소리가,
"아버지 병환은 그렇게 침중하신 터도 아니요, 그애는 졸업시험이 며칠 안 남았으니 아직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요."
하고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이었다. 물론 그것은 앓는 부친이 자기 병에 겁을 내는 듯하여 안심을 시키느라고 한 말이요, 또 사실 덕기를 그렇게 시급히 불러낼 필요가 없어서 그렇게 한 말이나 부친의 불호령이 당장 떨어졌다. 전보를 치고 편지를 해도 답장조차 없는 것은 아비놈이 중간에서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기 때문이라고 야단을 하는 것이다.
영감이 덕기를 어서 불러다 보려는 것은 귀여운 생각에 애정으로도 그렇지마는, 한 가지 중대한 것은 재산 처리를 손자를 앞에 앉히고 하려는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들을 쏙 빼놓고 하려는 것은 아니나, 어쨌든 손자까지 앞에 앉히고서 유언을 하자는 생각이다. 그것도 자기가 이번에 죽으리라는 생각은 아니나, 사람의 일을 모르겠고 어차어피에 언제든지 할 일이니까 나중 자기가 일어나서 또 하더라도 어쨌든간에 이 기회에 대강만이라도 처리를 하여놓으려는 생각이 있느니만큼, 손자를 성화같이 기다리는 것이요, 따라서 상훈이 덕기를 못 오게 방망이를 드는 것이라고 넘겨짚고 아들에게 준금치산 선고까지라도 시키겠다고 야단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상훈으로서는 부친의 그런 속셈이야 알 리가 없다. 하여간에 부친이 그렇게 까지 하니까 자기라도 편지를 하든 전보를 놓겠으나, 창훈이 전보를 연거푸 세 번씩이나 놓았으니 다시 놀 필요는 없다고 한사코 말리기도 하고, 또 그만하면 저기서 벌써 떠났을 듯하여 오늘 내일 새로는 들어오려니 하고 기다리는 터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다. 창훈도 참다못해 또 한 번 전보를 영감 앞에서 써서 제 손으로 부치러 나갔다. 그러나 그 이튿날도 역시 답장은 없다.
"어머니, 그 웬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그려. 병이 났는지? 떠나서 오는 중인지? 그러기루 온다 못 온다 무슨 말이 있을 게 아닙니까? 제가 한 번 다시 놓아 볼까요?"
손주며느리는 하도 답답하여 시어머니에게 이런 의논을 하였다. 시어머니도 요새는 날마다 오는 것이다. 자는 날도 있다. 그러나 안방에는 하루 한 번씩밖에는 못 들어간다. 시아버님의 노염이 풀리지 않은데다가 덕기가 안 오는 탓이 건넌방 고식에게까지 간 것이었다.
"글쎄 말이다. 설마 전보를 중간에서 챌 놈이야 있겠니마는."
시어머니도 의아해하였다.
"누가 압니까. 무슨 요변들을 부리는지. 겁이 더럭 납니다그려."
고식은 이런 의논을 하다가 시누이가 학교에서 오기를 기다려 직접 나가서 전보를 놓고 들어오게 하였다.
경도에서 떠난다는 전보가 밤 11시에 배달되었다. 덕희의 이름으로 띄웠으니까 답전도 덕희에게 왔다. 노영감은 일본말은 몰라도 가나 글자를 볼 줄은 알았다. 손주며느리가 가지고 온 전보를 받아들고,
"온 자식두..."
하며 안심한 듯이 반가운 기색이 돌다가 주소씨명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이게 뉘게로 온 것이냐?"
하고 묻는다.
"아가씨한테로 왔에요."
"응? 아가씨? 덕희에게로?"
영감은 좀 의외이었다. 이 집으로 오는 편지는 조덕기 본제라 하고, 전보 같으면 어린 자식놈의 이름으로 하는 버릇이었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창훈이 전보를 여러 번 띄운 터이니, 창훈에게로 보내지 않으면 역시 자식놈의 이름으로 놓았을 터인데 어째 누이에게로 쳤을까? 영감은 또 의아하였다.
"아가씨가 아까 전보를 띄웠에요."
손주며느리의 말에 영감은,
"그 웬일일꼬?"
하고 뒤로 가라앉은 눈이 더 커진다.
손주며느리는 조부의 말을 알 수가 없었다. 웬일이라니 웬일 될 것이 없다.
"예서 아무 소리를 해야 그건 곧이들을 수 없어도 제 누이의 전보니까 그 무겁던 엉덩이가 이제야 떨어진 것인 게지요."
수원집이 옆에서 이렇게 씹는다.
"덕희더러는 누가 전보를 노라고 하던?"
조부가 못마땅한 듯이 묻는다.
"하두 답답하기에 제가 또 놓아보라고 했어요."
"하여간 온댔으니 좋다마는 어째 너희들의 전보를 보고서야 떠날 생각이 났단 말이냐?"
일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 간단한 일이 영감에게는 간단하지가 않았다.
"그 동안 놓은 전보는 주소가 틀렸는가? 하속을 옮겼다던?"
영감은 하숙을 옮긴 것을 자기에게는 알리지 않았던가 하는 의혹도 들었다.
"아녜요. 그대로 있나 봐요."
"그럼 웬일이냐? 시험으로 바쁘다는 아이가 그동안 어디를 갔었을 리도 없고... 너희들이 다른 사람의 전보나 편지가 아무리 가더라도 떠나지 말고 너희가 기별하거든 오라고 일러둔 게 아니냐?"
영감은 자기 추측이 조금도 틀림없다는 듯이 역정을 낸다.
"그럴 리가 어디 있겠에요. 번지수가 틀렸던지 해서 안 들어갔던지 한 게지요."
손주며느리의 말도 그럴듯하기는 하였으나 영감은 그대로는 그렇게 믿어서 집어치우려고는 아니하였다.
"그럼 전보가 아니 들어갔으면 돌아오기라도 하지 않겠니? 그만 두어라. 그 애가 오면 알겠지."
당자가 돌아오면 알리라고 벼르기로 말하면 영감보다도 건넌방 속에서 더 벼르고 기다리는 터이다.
이튿날 저녁에는 덕기가 부산에 내려서 전보를 쳤다. 이때까지 시치미 떼고 있던 것과는 딴판으로 부산에 와서까지 병환이 어떠냐고 전보를 친 것을 보면 퍽 조바심을 하는 모양이다. 영감은 내심으로 기뻐하였다.
하룻밤을 새워서는 겨울날이 막 밝아서 덕기가 들어왔다.
정거장에는 창훈과 지 주사가 마중을 나가 데리고 들어왔다.
창훈은 덕기가 그저께 덕희의 전보밖에는 받아본 일이 없다고 하는 데에 펄쩍 뛰며, 그게 웬일이냐고 덕기가 속이기나 하는 듯싶게 서둘러 댄다.
"낸들 알 수 있에요. 하지만 이상하군요. 아저씨의 그 서투를 일본말로 번지수를 썼으니까 그렇지 않을라구."
덕기는 신지무의하고 이렇게 웃어만 버렸다.
어쨌든 조부가 그만하다는 데에 마음이 놓였다.
"이것 봐. 할아버니께서 무어라고 하시거든 전보 봤다고 얼쯤얼쯤해 두어라. 전보 하나 똑똑히 못 놓는다고 또 꾸중이 내릴 테니, 학교에서 여행을 갔다가 와서 비로소 전보를 보고 마침 떠나려는데 덕희의 전보가 또 왔더라고 하든지, 무어라든지 잘 여쭈어주어야 한다. 그동안 전보 사단으로 얼마나 야단이 났었던지..."
창훈은 타고 오는 택시 속에서 연해 이런 당부를 하였다.
"그게 다 무슨 걱정이에요. 어쨌든 애들 쓰셨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만하시다니 이 고비를 놓치지 말고 약을 바짝바짝 잘 쓸 도리를 해야지요."
덕기는 창훈이 병환의 경과 이야기는 안하고 어느 때까지 전보 논래만 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치사는 하면서도 핀잔을 주었다.
병실에 들어서니 조부는 일어나 앉자고 하여 앞뒤에서 부축을 하고 손자의 절을 받았다. 허리만은 조금 거동할 수 있게 되었지마는 죽은 사람이나 누워서 절을 받는다는 미신이 기어코 일어앉히게 한 것이다. 병인은 죽을 사자만 눈에 띄어도 '사자'가 앞에 와서 막아선 것같이 질색을 하는 것이었다.
영감의 입에는 웃음이 어리었으나 보기에도 무서운 깔딱 젖혀진 두 눈은 노염과 의혹의 빛에 잠겼다.
"사람의 자식이 어디 그런... 그런 법이 있니?"
영감은 말 한마디에 세 번 네 번씩 숨을 돌려야 한다. 일어앉혔다가 뉘니까 담이 더 끓어오르고 기운이 폭 빠진 것 같다.
덕기는 조부가 허리를 쓰고 일어앉는 것을 보고 속으로 반기었으나 다시 누운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비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혈색 좋던 조부의 얼굴이 불과 한 달지내에 저렇게도 변하였을까 싶다. 누렇게 뜨고 꺼먼 진이 더께로 앉은 것은 고사하고 그 멀겋게 누런 빛이 살 속으로 점점 처져 들어가는 것 같은 것이 심상하지 않아 보였다. 여러 해 속병에 녹은 사람 같다.
"전보를 그렇게 치고 법석을 해야 편지 한 장은 고사하고 죽었다가 살아왔단 말이냐. 돈 30전이 없더란 말이냐?"
담이 글겅거리면서도 급한 성미에 말을 빨리 죄어치려니 숨이 턱에 받쳐서 듣는 사람이 더 답답하다.
"전보를 못 봤에요."
"전보를 못 보다니? 그럼 노자는 어떻게 해가지고 왔단 말이냐?"
영감은 펄쩍 뛴다.
"주인에게 취해가지고 왔어요..."
덕기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데, 창훈이 옆에서 눈짓을 하는 바람에 말을 얼른 돌려서,
"그 동안 스키를 하러 갔다가 와서 한꺼번에 전보를 받고 곧 떠났지요."
하고 꾸며대었다. 덕기 역시 창훈을 좋게 생각하는 터도 아니요, 또 조부를 속여 가면서 구차스럽게 변명을 하기가 귀찮아 이실직고를 하려다가 흥분된 조부가 그 위에 큰 소리를 내게 되면 모두다가 재미없을 것 같아서 창훈이 눈짓을 하는 대로 말을 돌려대어 버린 것이다.
"스키란 무어냐?"
"산에 올라가서 얼음지치는 거예요."
"산에 가 얼음을 지치다니 강에 가서 지친다면 몰라도!"
"일본에는 그런 게 있에요."
"일본이고 조선이고 얼음지치는 것은 매한가지겠지. 그만두어라. 그런 얼토당토 않은 거짓말을 듣자는 게 아니다."
조부는 역정을 내었다.
"허, 일본에 그런 게 새로 났니? 여기로 말하면 한강에서 얼음을 지치더라마는 시험 안 보고 얼음을 지치러 다녀?"
창훈이 옆에서 이런 밉살맞은 소리를 하니까 수원집도 생글하고 비웃어 보인다.
조부가 거짓말로만 밀어붙이는 것이 다행하여 옆에서 부채질을 하는 것이지마는, 덕기는 일이야 어찌 된 것이든지간에 일껏 자기 사폐를 보아 주느라고 꾸며대는 것인데 이 편을 거들지는 못할망정 그런 공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듣고는, 심사 나는 대로 하면 확 쏟아놔버리고 싶었지마는, 이 자리에서 큰 소리를 내서는 안 되겠다고 잠자코 말았다.
"그래 전보환으로 보낸 돈은 어떻게 했단 말이냐?"
"못 받았에요."
학비인 줄 알고 받아서 주인을 주었다가 다시 취해 가지고 왔다든지 무어라고 꾸며 대고 싶었으나 심사가 틀려서 그대로 내뻗어버렸다.
"아니, 그게 웬일일까? 자네 부치긴 분명히 부쳤나?"
"부치다뿐입니까. 영수증이 여기 있는데요. 참 드릴 것을 잊었습니다."
하며 창훈은 지갑을 꺼내서 한참 뒤적뒤적하더니,
"아마 집에 두고 왔나봅니다. 제 손으로 부치지는 못하고 큰놈을 시켰습니다마는 영수증이 있으니까 갈 데 있겠습니까?"
"그럼 이따가 가져오게."
영감은 어쩐 영문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갑갑하였다.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또박또박히 하지 않으면 마음이 안 놓이는 이 노인의 성미로, 이렇게 오래 누웠는 것도 화가 나는데, 일마다 모두 외착이 나는 것을 보고는 한층 더 화에 뜨는 것이다.
"영수증만 있으면 나중에 찾기라도 하지요. 잘 알아보지요."
덕기는 조부를 안정시키려고 더 길게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덕기가 시원스럽게 말을 안하는 것이 조부가 보기에는 모두 속임수로 얼쯤얼쯤 묵주머니를 만들려는 것 같아 또 화가 나나 멀리 온 귀여운 손주라 참는 수밖에 없었다.
열쇠 꾸러미
덕기는 한나절을 들어앉았는 동안에 머리가 지끈지끈하는 것은 고사하고 어쩐지 집 안에 무슨 이상한 공기가 떠도는 것 같은 감촉을 얻었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떠들썩한 기분과, 서로 속을 엿보려는 듯한 시기와 의혹과 모색의 빛이 덕기에게까지 전염되어 오는 것을 부지중에 깨달았다. 언제라도 서로 마음 주고 깔깔 웃는다거나 얼굴을 제대로 가지고 순편히 말 한마디라도 하는 사람들은 아니지마는 이번에 와서는 더욱이 거친 저기압이 집 안의 어느 구석을 들여다보아도 자욱하다. 그것이 무슨 까닭인지, 어디에 원인이 있는지 덕기는 알 수가 없다. 초상이 나려며는 까마귀가 깍깍 짖는다더니 조부가 참 정말 돌아가느라고 죽음의 음기가 솟아나서 그런지? 어른의 병환이 침중하니까 수심에 싸여서들 그런지? 그런 열녀가 효부는 가문에도 없으니 그럴 리도 없다. 그러면 그 동안에 또 무슨 대풍파가 있었던가? 덕기 자신이 늦게 왔다 하여 그러는 것인가? 그렇다면 죄는 창훈에게 있는 것이다. 세 번씩이나 쳤다는 전보가 왜 안 왔을꼬? 돈은 어디로 날아갔는고?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내의 말을 들으면 안방으로, 사랑으로 밤낮 몰려서 틈틈이 수군거리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 중간에 무슨 요변, 무슨 동티가 있을 법하다더니, 과시 우주 터무니없는 말은 아닐 것 같다.
이 음산한 공기가 모두 안방에서만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고 뒤꼍이고 그 몇 연놈들의 몸뚱어리가 쓸쩍하는 데서면 풍기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웬일일꼬? 돈? 돈 때문에? 돈 동록 냄새가 욕기의 입김에 서려서 쉬고 썩고 하여 나오는 냄새 같기도 하다. 그러나 돈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고...?
생각하면 뉘 집에서나 열쇠 임자의 숨이 깔딱깔딱할 때가 닥쳐오면 한 번은 겪고 마는 풍파가 이 집에서도 일어나려고 뭉싯뭉싯 검부잿불처럼 보이지 않는 데서 타오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덕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수원집의 태도도 퍽 이상하여졌다. 온종일 두고보아야 모친과는 으레 그러려니 하더라도 건넌방 식구와는 잇새도 어우르지를 않고 영감 옆에 꼭 붙어 앉았다. 그래도 예전에는 덕기에게만은 거죽으로라도 좋게 대하더니 이번에는 덕기가 무슨 말을 걸어도 귀먹은 사람처럼 모른 척하다가 두 번 세 번 재쳐야만 마지못해 대꾸를 한다. 더구나 못된 짓은 덕기가 안방에 들어가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눈치인 것이다. 낮이고 저녁결에 사람이 좀 비었을 때 혼자 누운 조부가 심심할까도 싶고 이야기할 것도 있어서 안방에를 들어서면 더욱 그런 내색을 보이나, 그렇게 못마땅하고 보기 싫으면야 앉았다가도 저만 휙 일어서 나가버리면 그만일 터인데 나가지도 않고 턱살을 치받치고 앉았다. 나가기는커녕 마루에나 뜰에 있다가도 덕기가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만 보면 쪼르르 쫓아들어와 지키고 앉았는 것이다.
자위가 폭 가라앉은 무서운 두 눈만 껌벅거리고 누웠는 조부와 무슨 비밀한 이야기나 할 줄 알고 그 안달을 하는 것인지? 덕기는 눈살을 한층 더 찌푸려지건마는 내가 이제는 이 집의 줏대다! 하는 생각을 하면 얼굴빛 하나 말 한마디라도 한만히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모든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쉬쉬하여가며 건드리면 터질 듯한 큰 소리가 나오지 않게 주의를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저러나 대관절 사랑축들이 안방에를 왜 이렇게 꾀어드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지 주사는 한집 식구요, 약을 자기 손으로 지으니까 말 말고라도 제일 눈에 거슬리는 것은 최 참봉과 창훈이다. 어떤 때는 일가의 아저씨니 형님 아우니 말이 위문 옵네 하고 몰려들어서는 잔칫집 모양으로 떠들썩하니 안에서도 거기 따라서 더운 점심을 짓네 어쩌네 하고 한층 더 부산한 것은 고사하고라도 사랑에들만 몰려도 좋을 것을 병실에까지 무슨 종회나 가족회의 하듯이 몰려서 뒤집어엎는 데는 머리가 빠질 일이다. 그러나 당자인 병인이 그렇게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니 어찌하는 수도 없다. 그래야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벌제위명으로 큰일이나 보아주는 듯시피 입으로만 떠들어대고 수군거렸지 누구 하나 기는 부친이 좀 다잡아서 엄숙하게 집안을 휘둘러놓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은 하나 역시 하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어린 자기는 성검도 안 서고 공부하는 애가 무얼 하느냐는 듯이 도리어 휘두르려고만 든다.
"아저씨, 그 영수증 가져오셨나요?"
덕기는 안방으로 건너가서, 저녁 먹고 와서 앉았는 창훈에게 전보환 부친 표를 채근하여보았다. 세 번씩 놓았다는 전보가 한 장도 들어오지 않은 것도 이상하거니와, 돈 부친 것까지 중간에서 횡령을 당하지 않았나 의심이 드는 것이었다.
"응, 여기 가져왔는데 그애가 잘못 부치지나 않았는지 문기가 들어오면 자세히 물어보고 오려 했더니 아직 안 들어왔어."
창훈은 눈에 잠이 어린 듯이 어름어름하며 지갑을 꺼내서 훔척거리더니, 착착 접은 종이를 꺼낸다. 등을 주황빛으로 인쇄한 것이 분명히 우편국에서 받은 돈 부친 표이기는 하다. 덕기는 받아서 펴면서,
"이게 웬일예요?"
하고 놀라며 웃는다.
"왜 그러나?"
"이건 바로 돈표가 아닙니까. 이것을 보내야 돈을 찾아 쓰는 게 아닙니까."
"응? 그럼 영수증하고 바꾸어 보냈단 말야?"
"그렇지요. 그건 그렇고, 전보환으로 보냈다면서 이것은 통상위체가 아닙니까?"
"무어? 통상위체? 통상위체란 어떤 건가?"
"통상위체면야 편지에 넣어보내는 게 아닙니까?"
"엉..."
하고 창훈은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눈이 뚱그래지다가,
"온 자식두, 빙충맞은 못생긴 자식두 다 보겠군."
하며 아들을 혼자 나무란다.
"이리... 이리 다오."
조부는 눈을 감고 누워서 삼종 숙질간의 수작을 듣다가 눈을 뜨고 손을 내밀어 돈표를 받아들고,
"그 왜 (에구에구) 얼빠진 그애를 (에구에구) 시켰더란 말인가? (에구구) 그앤 그렇다 하기로 (에구) 자네... 자네두 이때껏 그런, 분간이 없다... 없단 말인가?"
하며 당질을 나무란다.
"할아버니 돈은 여기 이렇게 표가 있으니 염려 마시고 어서 주무세요. 숨이 더 차신가 뵈온데!"
덕기는 주부의 앓는 소리가 듣기에 애처로웠다.
"그러니까 돈하고 네게서 온 편지 겉봉을 안동해주고 전보환을 부치라 했더니 이른 말은 까먹고 아무거나 돈표면 되는 줄 알고 받아서 그거나마 영수증 쪽을 찢어서 봉투에다가 부친 게로구나."
창훈은 이런 변명을 하고 웃는다.
영감은 몸이 덜 아프면 좀 더 따졌을 것이나, 오늘은 저녁때부터 점점 더 기함이 되어가는지 다시는 말이 없이 돈표를 덕기 앞으로 던지고 다시 눈을 감아 버린다.
그것을 보다 덕기는 이 판에 그까짓 논래를 더 할 경황도 없어서 잠자코 돈표만 주머니에 집어넣고 창훈에게도 나가자고 눈짓을 하여 가만히 나와 버렸다. 밤 10시- 정한 시간에 또 하번 온 의사는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나 영양이 없는데다가 오늘은 조금 흥분이 되어서 열이 생긴 것이니 그대로 안정하여 자는 대로 두라 이르고 갔다.
이튿날 아침에는 문기가 와서 안방에 건성으로 잠깐 다녀나오더니 건넌방에서 내다보는 덕기를 보고,
"아버니께 들으니까 무어 돈을 잘못 부쳤다구? 난 그런 게 처음이라 무언지를 알겠던가? 일본놈이 돈표를 해주기에 급하기는 하고 어떻게 부칠지 몰라서 우편국에서 봉투를 사다가 넣어서 등기로 부쳤네그려. 여기 이렇게 등기 부친 표가 있지 않은가."
하며 서류 부친 쪽지를 내어주고 열없는 듯이 웃는다.
"상관 있소. 이왕지사 그렇게 된 것을..."
하며 덕기도 좋을 낮으로 웃어버렸으나 아무리 시골 생장이기로 그런 반편일 수야 있을까? 암만해도 곧이 들리지를 않았다.
"너 아범은 내가 어서 죽었으면 시원할 것이다. 너도 못 오게 하느라고 저희끼리 짜고 전보까지 새에서 못 치게 한 게 아니냐?"
조부가 이런 소리를 할 제 덕기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고 하기는 하였지마는 덕기도 의아는 하였다. 부친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랴 싶으나 창훈 아저씨라든지 최 참봉이 부친에게 되돌아 붙어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그도 모를 일이라고 의심도 난다.
그러나 아무래도 수원집과 부친이 한편이 될 리는 없고 창훈과 부친의 새가 금시로 풀렸을 리도 없으니 십중팔구는 수원집이 중심이 되어서 무슨 농간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제 아무리 그래야 밥이나 안 굶게 하여주지. 그 외에는 막무가내다."
조부는 이런 소리도 하였다.
"왜 그런 말씀 하셔요. 그까짓 재산이 무업니까. 그런 걱정은 모두 병 환중이시니까 신경이 피로하셔서 안하실 걱정을 하십니다. 얼마 있으면 꼭 일어나십니다."
덕기는 조부를 안위시키려고 애썼다.
"네 말대로 되었으면 작히나 좋으랴만 다시 일어난대도 나는 폐인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 금고 열쇠를 맡아라. 어떤 놈이 무어라고 하든지 소용없다. 이 열쇠 하나를 네게 맡기려고 그렇게 급히 부른 것이다. 하지만 맡겨 노면 이제는 나도 마음놓고 눈을 감겠다. 그러나 내가 죽기까지는 네 마음대로 한만히 열어보아서는 아니 된다. 금고 속에는 네 도장까지 있다마는 내가 눈을 감기 전에는 네 도장이라도 네 손으로 써서는 아니 된다. 이 열쇠는 맡아 두었다가 내가 천행으로 일어나면 그대로 내게 다시 다오."
조부는 수원집까지 내보내놓고 머리맡의 조그만 손금고를 열라고 하여 열쇠 꾸러미를 꺼내 맡기고 이렇게 일러 놓았다.
"아직 제가 맡을 것이야 있습니까? 저는 할아버니 병환만 웬만하시면 곧 다시 가야 할 텐데요? 그리고 아범을 제쳐 놓고 제가 어떻게 맡겠습니까?"
덕기로서는 도리로 보아도 그렇지마는 공부를 집어치우고 살림꾼으로 들어앉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시 간다고?... 못 간다. 내가 살아난대도 다시 못 간다."
조부는 절대 엄명이었다.
"하던 공부를 그만둘 수야 있겠습니까. 불과 한 달이면 졸업인데요."
"공부가 중하냐? 집안 일이 중하냐? 그것도 네가 없어도 상관없는 일이면 모르겠지마는 나만 눈 감으면 이 집 속이 어떻게 될지 너도 아무리 어린애다만 생각해 봐라. 졸업이고 무엇이고 다 단념하고 그 열쇠를 맡아야 한다. 그 열쇠 하나에 네 평생의 운명이 달렸고 이 집안 가운이 달렸다. 너는 그 열쇠를 붙들고 사당을 지켜야 한다. 네게 맡기고 가는 것은 사당과 그 열쇠- 두 가지뿐이다. 그 외에는 유언이고 뭐고 다 쓸데없다. 이 때까지 공부를 시킨 것도 그 두 가지를 잘 모시고 지키게 하자는 것이니까 그 두 가지를 버리고도 공부를 한다면 그것은 송장 내놓고 장사 지내는 것이다. 또 공부도 그만큼 했으면 지금 세상에 행세도 넉넉히 할 게 아니냐."
조부는 이만큼 이야기하기에도 기운이 푹 빠졌다. 이마에는 허한이 쭉 솟고 숨이 차서 가슴을 헤치려고 한다.
"살림은 아직 아범더러 맡으라고 하시지요."
덕기는 그래도 간하여보았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싫거든 이리 다오. 너 아니면 맡길 사람이 없겠니. 그 대신 내일부터 문전걸식을 하든 어쩌든 나는 모른다."
조부는 이렇게 화를 내면서도 그 열쇠를 다시 넣어버리려고 아니하였다.
덕기는 병인을 거슬려서는 아니 되겠기에 추후로 다시 어떻게 하든지 아직은 순종하리라고 가만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으려니까 밖에서 버석버석 옷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수원집이 얼굴이 발개서 들어온다. 이때까지 영창 밑에 바짝 붙어앉아서 방 안의 수작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엿듣고 앉았던 것이다.
덕기는 수원집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앞에 놓인 열쇠를 얼른 집어들고 일어서 버렸다.
"애아범, 잠깐 거기 앉게."
수원집의 얼굴에는 살기가 돌면서 나가려는 덕기를 붙든다.
수원집은 열쇠가 놓였으면 우선 그것부터 집어놓고서 따지려는 것이라서 덕기가 성큼 넣어버리는 것을 보니 이제는 절망이다. 영감이 좀 더 혼돈천지로 앓거나 덕기가 이 집에서 초혼 부르는 소리가 난 뒤에 오거나 하였더라면 머리말 철궤 안의 열쇠를 한 번은 만져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금고 열쇠를 한 번만 만져볼 틈을 타면 일은 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틈을 탈 새가 없이 이 집에 사자가 다녀나가기 전에 덕기가 먼저 온 것이다. 덕기의 옴이 빨랐든지 저희가 굼된 탓이었든지? 어쨌든 이제는 만사휴의다!
"이 댁 살림은 누가 맡든지 그거야 내 아랑곳 있나요. 하지만 지금 말씀 눈치로 보면 사림을 아주 내맡기시는 모양이니 이왕이면 나더러는 어떻게 하라시는지 이 자리에서 아주 분명히 말씀을 해 주시죠."
수원집은 암상이 발끈 난 것을 참느라고 발갛던 얼굴이 파랗게 죽는다.
"무엇을 어떻게 해달라는 말인가?"
영감은 가슴이 벌렁벌렁하며 입을 딱 벌리고 누웠다가 간신히 대꾸를 한다.
"지금이라도 이 댁에서 나가라면 그야 하는 수 없이 나가지요. 그렇지마는 영감께선 안할 말씀으로 내일이 어떠실지 모르는데 영감만 먼저 가시는 날이면 저는 이 집에 한시를 머물 수 없을 게 아닙니까. 저년만 없으면야 영감이 가시면 나도 뒤쫓아가기로 원통할 게 무에 있습니까마는요 알뜰한 세상에 무얼 바라고 누구를 믿고 더 살려 하겠습니까마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제 사정도 생각해 봐 주셔야 아니합니까!"
수원집의 목소리는 벌써 울음에 젖었다.
"그 왜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슈?"
덕기가 탄하였다.
"내 말이 그른가? 자네도 생각을 해보게. 할아버니만 돌아가시면 이 집안에서 나를 누가 끔찍이 알아줄 사람이 있겠나?"
수원집은 코멘소리를 하며 눈물을 씻는다. 덕기도 아닌게아니라 그렇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였으나 어쩌면 눈물이 마침 대령하고 있었던 것처럼 저렇게도 나올까 싶었다. 그러나 지어 우는 것이 아니라 계획이 틀린 데에 분통이 터져 나오는 진짜 울음이다.
"하지만 지금 할아버니께서 돌아가시는 거요? 또 내가 살림을 떼맡는 자국인가요? 이 자리에서 그런 소리는 도무지 할 게 아니에요."
그래도 덕기는 타이르듯 달래었다.
"쓸데없는 소리들 말고 어서들 나가거라. 무슨 소리를 어디서 듣고 공연한 잔말이냐?"
영감은 기운도 없거니와 수원집의 말을 듣고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눈을 감고 듣기만 하다가 한마디 순탄히 나무란다.
"이렇게 말씀하면 엿들은 거 같습니다마는 지금 애아범에게 모두 살림을 내맡기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애아범 듣는 데라도 제 일까지를 분명히 말씀해 두셔야 하지 않으셨습니까? 실상은 집안 사람을 다 모아 놓고 일러두셔야 할 게 아닙니까?"
"글쎄, 딱한 소리도 퍽 하슈. 지금 할아버니께서 돌아가시니 걱정이슈? 또 설사 할아버니께서..."
덕기는 돌아간다는 말을 입밖에 내긴 싫어서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돌린다.
"...할아버니께선들 어련하실 게 아니오. 내나 아버니께서나 무엇으로 생각하든지 조금치라도 부족하게야 할 리가 없지 않소. 사람을 지내 보았으면 아실 거 아니겠소?"
덕기는 조용조용히 일렀다.
"내가 무슨 욕기가 나서 이런 소리를 하면 이 자리에서 벼락이라도 맞고, 우리 어머니 뱃속에서 아니 나왔네. 다만 하나 이것 하나(발치께서 자는 딸년을 눈으로 또 가리킨다) 때문에 앞일을 생각하면 캄캄하니까 그러는 게 아닌가."
영감은 깜박하고 들려던 혼곤한 잠에서 깨인 듯 몸을 틀며 눈을 번쩍 뜨더니 푹 꺼진 그 무서운 눈으로 휘휘 돌려다 보고 나서,
"그저 잔소리야? 떠들지들 마라. 어서들 자거라."
맥없는 소리를 잠꼬대같이 하고 또다시 눈을 스르르 감다가, 세 번째 눈을 번쩍 뜨고 안간힘을 쓰면 말을 잇는다.
"염려들 마라. 내가 내 생전에 이런 꼴을 볼까보아 다 마련해놓았다. 옷 마르듯이 다 공평히 나눠놓았다. 누가 뭐라든지 소용없다. 우리 아버니께서 살아 오셔도 할 수 없다. 치수에 맞추어서 말라논 옷감을 누가 늘이고 줄일 수 있겠니! 내 앞에서 다시 누가 그댓말을 꺼내면 내 손으로 불질러버리고 죽는다."
영감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덕기가 나온 뒤에도 안방에서는 수원집의 흑흑 느끼며 종알종알 암상맞은 말소리가 어느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제 말마따나 이따 어떨지 내일 어떨지 모르는 등신만 남은 영감을 조르는 것이나, 조르는 것이 아니라 숨이 넘어가는 사람을 들볶는 것이다.
제 생각에는 한 반이나 내주었으면 좋을 듯싶은 터이나 정이야 있든 없든 남편이라 이름진 사람이 숨을 모는 그 자리에서까지 빚쟁이보다 더 하고 물건 흥정보다 더하게 조르다니- 그야 자식이 못되면 운명하는 아비를 내던져두고 형제끼리도 게걸거리며 싸우는 세상이지마는- 하는 생각을 하다가 덕기는 다시 건너가서 수원집을 몰아대고 싶은 것을 참고 뒷일은 아내에게 일러놓고 훌쩍 밖으로 나와버렸다. 돌아온 후 이들 만에 처음으로 문밖에 나서는 것이다.
변한 병화
어둔 지는 아직도 초저녁이다. 음력 섣달 그믐이 내일 모레라서 그런지 그래도 이 동네는 부촌이라 이집 저집에서 떡치는 소리가 들리고 거리가 질번질번한 것 같다. 떡도 안 치고 설이란 잊어버린 듯이 쓸쓸한 집 안에 있다가 나오니 딴 세상 같다. 덕기는 전차에 올라탔다. 오는 길로 병화에게 엽서라도 띄울까 하다가, 분잡통에 와도 변변히 늘고 이야기할 경황이 없을 것 같아 틈나면 가보지 하고 그대로 두었었다. 지금도 새문 밖으로 갈까, 경애를 찾아서 바커스로 갈까 망설이며 그대로 전차에 올라탄 것이다.
전차가 조선은행 앞을 오니 경성 우편국이 차창 밖으로 내어다보인다. 불을 환히 켠 유리창 안에 사람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자 덕기는 속으로 내릴까 말까 하며 그대로 앉았다가 사람이 와짝 몰려들어오며 막 떠나려 할 제 뒤로 비집고 휙 내려버렸다.
우편국 옥상 시계를 치어다보니 아직 8시가 조금 지났을 뿐이다. 덕기는 그대로 우편국으로 들어섰다. 창훈의 말이 자기 손으로 경성 우편국에서 전보를 놓았다 하니 물어보면 알리라는 생각을 하였던 터에 지금이 앞을 지나니 생각이 다시 난 것이다. 우편국에서는 귀치않아 하였으나 조 한가한 때라 그런지 그래도 돈 부쳤다는 날짜에서 전후로 일주일간이나 경도로 띄운 전보라고는 덕희가 친 것밖에 없었다.
덕기는 분한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라도 단단히 족쳐서 이제는 꼼짝을 못하게 만들리라고 단단히 별렀다. 조부는 부친만 가지고 의혹을 하나 창훈이 앞장을 서고 최 참봉은 수원집을 충동이고 하여 무진 짓이든지 꾸미려다가 제패에 떨어진 것이 이제는 의심할 나의 없다고 생각하였다. 어지중간에 부친만 가엾다. 주부가 그대로 돌아가면 조부는 영원히 부친을 오해한 대로 돌아갈 것이요, 부친은 아무 영문도 모르고 이 집안의 객식구처럼 베도는 양을 생각하면 더 딱하다. 하여간에 시험은 못 보게 되더라도 잘 왔기도 왔고 수원집이나 부친에게 얼마씩 떼어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마는 조부의 처사도 옳다고 생각하였다. 부친에게 전부 상속을 안하는 것은 자기로서는 죄송스러웠으나 요즈음의 부친 같아서는 역시 자기가 맡아놓고 부친이 돈에 군색치 않게만 하여드리는 편이 부친의 신상을 위하여서나 집안을 위하여 도리어 다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덕기는 병화를 찾아서 새문 밖까지 나가기는 좀 늦고 집에도 10시에 의사가 오기 전에 들어가야 하겠기에 거기는 단념하고 잠깐 경애에게나 들러보려고 본정통으로 들어섰다.
바커스에는 경애는 없고 전에 보지 못하던 미인이 하나 늘었다. 얼른 보기에도 일본 여자 같다. 주부는 반색을 하며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이상요? 요새 좀 난봉이 났지마는 이제 오겠지요."
주부는 이렇게 웃으면서 정다이 군다. 덕기는 너무 그런 데에 도리어 얼떨얼떨하였지마는, 오정자의 소식을 알아 기별해주고 한 일이 있어 그러려니 하였다. 주부의 말을 들으면 경애는 요새 이 집에 전같이 육장 붙어 있지도 않고 놀러다니는 눈치다. 병화도 가끔은 오나 그리 자주 오지는 않는다 한다.
어쨌든 경애도 기다릴 겸하여 잠깐 불을 쬐며 오정자 이야기를 하여 들려 주기도 하고 오정자의 내력도 듣고 앉았으려니까 경애가 소리를 치며 들어온다.
"아, 이거 누구라구! 언제 왔소?"
경애는 반가이 인사는 하였으나 속으로는 그리 반가운 것도 아닌 기색이었다.
덕기가 가까이 있다고 병화의 일에 쌩이질을 할 것도 아니요, 또 병화에게 마음이 쏠렸기로 들의 행동을 감시한다거나 방망이를 놀 것은 아니겠지마는 그래도 전번과 달라서 상훈이 뒤를 쫓게 된 오늘날에는 덕기마저 한 축에 어울리게 된다는 것이 이편에나 저편에나 창피하고 성이 가신 일이다.
"응, 할아버니께서 그렇게 위중하셔?"
'내 어쩐지 상훈이를 요새 며칠 볼 수사 없더라니!'
하는 생각을 하며 경애는,
-나두 머리 풀 일 났군!
하고 속으로 웃었다.
"김군을 좀 만나야 하겠는데, 오늘 여기 오지 않을까?"
덕기는 말을 도리고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이두 요새는 별로 볼 수 없습니다. 머리나 좀 깎구 다니는지."
경애는 지금 당장 만나고 헤어져 오는 길이나 딴전을 해버렸다.
"그래, 아이는 이젠 몸 성하우?"
"에, 이젠 괜찮아."
덕기는 금고 속을 잠깐 생각해보았다. 같은 조가건마는 그 속에는 그 애의 몫으로는 오리 동록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걸 보면 수원집 소생이 얼마나 팔자 좋을지 모르나 나중에 어찌 될는지는 자라봐야 알 것이 아닌가도 싶다.
아까 홀에서 보던 계집애가 들어오더니 경애에게 소곤소곤하니까 웬일일까? 하는 듯이 고개를 비꼬다가 생글 웃으며,
"잘 되었군! 당신이 만나시겠다는 친구 양반이 왔다는데."
하고 덕기더러 먼저 나가보라고 한다.
경애는 조금 아까 참닿게 헤어져 가던 사람이 왜 또 왔누? 하고 의아도 하였지마는 별일이 있겠니 술이 못 잊어서 그렇겠지 하고 속으로 웃었으나, 병화 역시 요새로 부쩍 몸이 달아서 아우 타는 젖먹이처럼 한시 한때를 안 떨어지려고 하는 눈치를 생각하면 나무랄 수만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좀 더 삼가주었으면 좋을 것 같기는 하다.
"야아..."
"야아, 여전하이그려?"
"난 자네가 여기 온 줄 알고 찾아왔네."
밖에서 두 청년이 인사를 하느라고 떠들썩하다. 병화는 덕기가 뛰어 나올 줄은 천만 뜻밖이나 이렇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내가 온 줄 어떻게 알았나? 우리집에 들렀던가?"
"내 귀를 보게. 좀 큰가. 한데 아주 위중하신가?"
"그저 그만하시지만... 참 자네 편지 보구 왔네. 그 무슨 잔소린가? 다시는 안 만날 것같이 서둘러대더니, 두었다가 만날 것을 괜히 만났네그려!"
그러나 덕기는 필순이 이야기는 건드리지 않았다. 병화도 픽 웃고만 만다. 무엇에 정신이 팔린 사람 같다.
"헌데 자네 웬일인가? 무슨 수가 있나?"
"왜?"
하며 병화는 머리를 쓰다듬는다.
"머리가 말쑥하고, 양복이 보지 못하던 거요, 아마 크림도 바른 모양이지? 하하하..."
"응, 크림도 바르기는 발랐네마는 보지 못하던 양이라니 고물상에서 사 입은 양복인 줄 아나?"
병화도 껄껄 웃는다.
"그러나 크림 값은 대관절 어디서 났나?"
"허, 별걸 다 묻는군."
"이로오도꼬(미남자)! 축배나 한잔 올리고 싶으이마는 곧 가야 하겠어. 섭섭하이."
덕기는 앉지도 않고 가려 한다. 병화도 잡을 생각은 없으나 어쨌든 잠깐 앉으라고 붙들었다.
덕기는 감정으로나 기분으로나 퍽 멀어진 것같이 보인다. 동문수학하던 사람이 몇십 년 후에 만남 것처럼 무관하면서도, 서운한 그런 감정이었다. 어째 그럴까? 덕기는 생각하였다. 돈에 꿀리지 않는 모양이기 때문인지 버젓하게 응대하는 그런 기색도 없이 무엇에 달뜬 사람처럼 건성건성 수작을 하는 양도 이상하다. 궁하던 사람이 금시로 가면 기죽을 펴는 바람에, 너무 지나쳐서 있는 사람보다도 주짜를 빼는 수도 없지 않지마는 꼭 그런 것도 아니요, 그저 서성대는 것이다. 경애도 나와서 서로 변변히 인사도 아니하고 무슨 말끝에인지, 서로 눈짓을 하는 것을 보니 그것도 전과는 다른 눈치다. 그러고 보면 달뜬 기분은 연애를 하느라고 그렇다고나 하려니와 돈도 경애에게서 나온 것인가? 덕기는 모든 것을 경애와의 연애에 밀어붙이려 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렇다면 덕기의 처지는 대단 우스웠다. 경도에 앉아서 편지로 실없는 말을 들을 때와 달라서, 이렇게 둘의 새가 좋은 꼴을 면대해놓고 보니, 속이 느글느글하기도 하고 창피스럽기도 하다. 저희끼리 좋아하면 했지, 내야 어쩌는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부친을 생각하면- 더구나 딸아이를 생각하면 이 현상을 무어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몰랐다. 어쨌든 자기로서는 눈감아버리고 영영 모르는 척하는 것이 상책이요, 금후로는 경애와 만나지 말아요, 더욱이 두 남녀가 무주 않은 자리에 끼이지 않도록 기회를 피하여야 무슨 의논이 있어 온 눈치 같기도 하여 덕기는 자리를 뜨며,
"내일이라두 놀러 좀 오게."
하니까,
"응, 틈나면 가지"
하고 탐탁치 않은 대답이다. 말눈치가 요새는 매우 바쁜 모양이나 전 같으면 몇 시에 온다든지 꼭 기다려 달라든지 하며, 긴하게 대답이 나올텐데 이제는 잔돈에 꿀리지 않아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하며, 덕기는 조그만 불만과 함께 혼자 냉소를 하였다.
금고
이튿날 영감은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덕기 부자는 수술을 할 병도 아니니 그만 두자고 하였고, 의사도 고개를 비꼬았으나 수원집은 시중들기가 싫어 그랬던지 앞장을 서서 찬성이었고, 병인도 그리 탐탁치 않은 말눈치면서 그래 보았으면 좋을 것 같은 의견이기 때문에 저녁때 입원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추위에 숨이 넘어갈 듯한 노인을 끌어다가 병원에 둔다는 것은 마음이 실죽들 하였고 병원 구석에서 객사나 시키지 않을까 애가 씌었으나, 덕기 부자는 반대할 수도 없었다. 병원에 쫓아갔다가 온 수원집은 손주며느리에게 상냥스런 웃음을 띄어가며 병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삼동을 두고 양미간에 누벼놓았던 내 천자도 오늘은 스러졌다.
"너두 내일 아침결에 한번 가뵈어야지."
"예에."
"그 길에 아주 친정댁에도 묵은 세배 겸 좀 자녀와야 하지 않겠니?"
"예에."
손주며느리는 편찮으신 할아버니께서 안 계시다고 어쩌면 저렇게도 금시도 변할 수가 있을라구? 하고 얄밉기는 하였으나 친정에 묵은 세배까지 하고 오라는 말은 반갑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안방이 금시로 환하여진 것이 수원집을 또 웃겼다. 얼굴이 피었을 뿐아니라 몸도 가벼워졌다. 평생에 들어보지 못하던 빗자루도 들고 나오고, 걸레질까지 손수 치는 것이었다.
"이런 구살머리 적은 속에 누우신 것보다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더라. 모두 정하고 조용하고 수증기 난로를 훈훈히 피워서 안방은 후끈거리구 예쁜 색시들이 오락가락하구..."
늙은 병인에게 예쁜 색시가 무슨 아랑곳이냐고 어멈은 깔깔 웃었다. 어멈도 안방마마에 못지 않게 낄낄대고 좋아한다. 그러나 손주며느리만은 너무나 속이 빤히 보이는 데 눈살을 찌푸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병이 안 나으려야 안 나으실 수 없겠더라. 설두 못 차려 먹고 하였으니, 정월 보름 안으로 나으셔서 잔치를 한번 하면 오죽 좋겠니."
수원집은 이런 소리도 하였다. 저녁도 안방에서 모여서 먹었다. 수원집만 아니라 집안 식구가 누구나 무거운 짐을 내려논 것같이 한숨을 돌릴 것 같고, 침울한 기문이 확 풀려나간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수원집처럼 요렇게도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해할 수야 있나. 대보름 안으로 나아서 이 집에 들어오기는커녕 그 안에 이 집 문전에 발등거리를 내어 달고 곡성이 났으면 춤출 것같이 서둔다.
그래서 수원집은 저녁 후에 병원 간다고 어멈을 데리고 나갔다. 덕기가 병원에서 묵으려다가 자리도 만만하지 않고 하여 창훈과 상노놈을 남겨 두고 자정에나 서모를 데리고 돌아왔다. 덕기의 말을 들으면 집에서는 저녁 7시에 나간 서조모가 병원에는 10시 가까이나 왔더라 한다.
"그 동안에 어디를 갔었더람?"
하고 아내가 물으니까,
"낸들 아나!"
하고 덕기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하지만 최 참봉이 병원에 한 30분 먼저 오고 서조모가 나중 들어온 것으로 보아도 저희끼리 모여서 무슨 의논을 분주히 하고 다니는 눈치다.
이튿날 개동에 덕기는 병원으로 달아났다. 수원집도 아침 전에 잠깐 다녀오마 하고 병원으로 갔다.
"너두 친정댁까지 다녀오려면 일찍 서둘러야 할 것이니 내 다녀올 동안에 얼른 밥을 해치우고 차비를 차리고 있거라."
고 일러 놓고 나갔다.
손주며느리는 별안간 왜 저렇게 인심이 좋아졌누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하라는 데로 치장을 차리고 있었다.
10시나 가까워 수원집이 돌아와서,
"서방님은 거기서 아침 사먹었다. 어서 가보아라. 어쩌면 오늘 저녁때나 내일엔 수술을 하시게 된다더라."
고 하며, 손주며느리를 늦는다고 재촉재촉하여 내보냈다.
"무어 이번에는 어른도 안 계시고 다례도 안 지내실 모양인 아주 설을 쇠고 와도 좋다만... 병원에 가건 서방님더러 물어보렴."
대관절 수원집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도 마음이 내켰는지 덕기댁은 도리어 의심이 들어갔다.
덕기 처가 병원에 가보니 오늘이 섣달 그믐이라 묵은 세배꾼이 입원한 문안을 겹쳐서 아침결부터 몰려들어 생사람도 조금만 앉았으면 머리가 내둘릴 지경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계시고 한데 별로 할 일은 없다 하여도 곧 빠져나오기가 어려워서 손님들이 모여 있는 곁방에 잠깐 앉았으려니까 남편이 오더니 어서 집으로 가자고 한다.
"다례를 잡숫게 하라시는데 어떻게 하나. 얼른 가서 간단히 차려 지내야지."
덕기 내외는 모친을 모시고 나서면서 지 주사에게 돈을 내주어서 배우개 장으로 흥정을 하러 보냈다. 창훈 아저씨와 같이 보내려고 찾아보았으나 어디를 갔는지 눈에 띄지를 않았다.
별안간 다례를 지내게 된 것은 일전에 시골서 올라온 당숙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에 와서 병 위문을 하고 섣달 그믐날 수술을 하는 것은 아니 외었으니, 오늘 내일 이틀을 연기하여 초하루나 지낸 뒤에 하는 것이 좋겠다고 병인 앞에서 발론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감은 오늘이 그믐날이라는 말을 듣자 자기 병 이야기는 고사하고 손자를 돌려다보며,
"응? 오늘이 벌써 그믐이냐? 그럼 내일 다례 지낼 분별은 해놓았니?"
하고 놀라서 물었다.
"이 우환중에 올해만은 안 잡숫기로 어떻겠습니까?"
덕기가 이런 소리를 하니까 조부는 소리를 지르고, 내가 살아서도 이럴 제야 죽은 뒤에는 어쩌려느냐고 야단을 치는 바람에 예예 하고 나온 것이다.
세 식구가 애 업은 년을 앞세우고 꼭 지친 대문 안을 들어서니 행랑에서
"누구요?"
소리를 경풍을 하도록 치며 뛰어나온다.
"에구, 어떻게들 오세요. 안방마님은 출입을 하시나보던데요."
어멈은 무슨 반가운 손님이나- 반가운 손님이라느니보다도 이 집 주인이 따버리라고나 한 불길한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못 들어오게 하느라고 막아내려는 듯이 앞장을 서서 허둥지둥 뛰어 들어간다.
-미친 년두 다 많다. 제가 어째 앞장을 서누?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쫓아들어가니 대청이 텅 빈 것같이 인기척 하나 없고, 금방 뛰어 들어온 어멈도 어디로 갔는지 눈에 안 뛴다.
수상하다는 생각에, 마치 도둑이 들어와서 집 안을 돌아다닐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선뜻한 마음이 들며 마주들 치어다보았다.
"모두들 나갔나?"
덕기는 모친이나 아내가 무슨 기미를 챌까보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크게 내며 마루로 앞장을 서 올라왔다.
그러나 여자들도 마루로 올라오려니까, 수원집이 사랑 편에서 고무신을 끌고 나릇나릇이 놀란 기색도 없이 들어오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어째들 이렇게 함께 몰려왔누? 너는 안 가니?"
하고 방에 들어가려다 말고 마루 위에 섰는 손주며느리를 치어다보며 올라온다.
-웬일일꾸?...
누구나 이런 의심이 들어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사랑에 아무도 없어요?"
덕기가 건넌방에서 모자를 벗고 나오며 말을 걸었다.
"아무도 없더군. 무얼 좀 가지러 나갔더니 얻다 두셨는지 눈에 안 띄어."
수원집은 여전히 심상하고 침착하다.
"무언데요?"
"응. 할아버니 잘두루마기가 눈에 안 띄게 사랑에 그저 걸어두셨나 하구..."
"할아버니 잘두루마긴 병원에 입고 가시지 않았나요?"
덕기 처가 대꾸를 하였다.
"응, 참 내 정신두."
하며 수원집은 풀없이 웃어버린다. 어제 침대차로 영감을 모실 때 담요를 덮다가 잘두루마기를 내오라고 할 제 의걸이 속에 있다고 자기 입으로 해서, 손주며느리가 꺼내다가 경인 위에 덮고, 그 위에 또 담요를 덮던 것을 그렇게 잊어버렸을까? 사실 그렇다면야 어째서 어멈이 곤두박질을 해서 뛰어들어갔던 것인가? 그건 그렇다 하고, 지금 어멈은 쥐구멍으로 안 들어간 다음에야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
덕기는 사랑으로 나갔다. 사랑에는 금고가 놓였다... 사랑에 아무도 없다는 말은 또 웬 말인가?
사랑에는 과시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사랑문을 지쳐만 둔 것은 웬일인가?
덕기가 사랑 앞문을 열고 소리를 치니까 어멈이 이번에는 안에서 긴 대답을 하며 안쪽 문으로 나온다. 숨바꼭질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데 문을 이렇게 열어 두면 어떻게 하나?"
"제 방에 잠깐 나가느라고 열고 나갔에요."
덕기는 문을 걸라고 하고는 큰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주머니의 열쇠를 꺼내서 다락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서 내닫듯이 마주 치는 것은 금고다. 이 집을 사서 들 제 금고를 들여놓으라고 다락을 뜯어고치고 밑바닥에 기와집 서까래 같은 강철 기둥을 세우고 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 몇 해가 지나갔다. 이 금고를 지키기에 소모되고 만 것이다. 언젠가 일고 여덟 살 적에 조부는 금고를 열고 무슨 일을 하다가,
"덕기야, 너 이 속에 들어가보고 싶으냐? 말 안 들으면 이 속에 놓고 딱 잠가 버린다.."
고 실없는 소리를 하며 웃던 것이 생각난다. 이제는 키가 곱절이나 되었으니 이 속에 들어가 갇히지는 않겠지마는 조부는 역시 자기를 속에 가두고 가려 한다. 덕기의 일생은 이 금고 앞에서 떨어져서는 안 될 것을 엄명하였다. 그리고 이 금고지기의 생애는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왜 의심이 부쩍 들었나? 왜 지금 이 금고를 보살피러 나왔는가?
-내 일생에 하지 않으면 안 될 가장 중대한 일은 이 금고 여닫는 것과 사랑문을 여닫는 것 두 가지밖에 없단 말인가? 마치 간수가 감방 문을 여닫듯이. 그리고 그리 중대(?)한 사업이 오늘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덕기는 금고가 전에 어떻게 놓여졌던지는 모르나 누가 건드렸다 하였어도 놓인 그대로 있을 것이요, 열쇠를 목에 지니고 있는 다음에야 누가 손을 댄대야 별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속에 무엇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증이 더 난다. '판도라'의 비밀 상자도 아니니, 조부의 엄명을 어길지라도 잠깐 열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전에 조부에게 배워둔 대로 호수를 맞춰서 열어보려 하였다. 조부는 집안 중에서 덕기에게만 금고여는 비밀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덕기는 묵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금고의 배꼽을 뱅뱅 돌리다가 문턱에 부연 재가 떨어진 것이 눈에 힐끈 띄자,
-웬일일까?
하며 자세히 보았다. 문 닫는 바람에 올크러졌기는 하나 분명 담뱃재다. 조부가 떨어뜨린 것일까? 조부가 누운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이 재가 한 달 묵은 재일까? 그러나 조부는 담뱃대 외에는 궐련을 아니 피운다. 조부가 담뱃재를 물고 금고 문을 열었을까? 이 재가 담뱃대의 재일까?...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어멈의 행동부터 수상하였다. 집안 시구를 어디로 내쫓았는지 안방 애보기년까지 눈에 안 띄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사랑문이 열려 있는 것이 의아하였다. 어멈이 제 방에 불이 붙기로서니 안으로 돌아나가지 않고 닫은 사랑문을 여고 나갈 필요가 무언가? 잘두루마기를 가지러 나왔더란 말도 어설프지마는 서조모가 무슨 인심이 뻗쳤다고 자기 처더러, 본가에 묵은 세배를 다녀오라고 하였던고? 다른 때 같으면 병원에 가 묵는 것도 바쁜데 어디를 나가느냐고 핀잔을 주었을 터인데 핑계 좋겠다 제가 간다 하여도 못 가게 하였을 것이 아닌가? 결국에 집안 식구를 다 내쫓고 집 지킨다는 핑계로 혼자 들어앉아서 무슨 짓을 하려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창훈 아저씨가 아까 병원에서 눈에 안 띄던 것도 다시 의심이 난다. 최 참봉 역시 아침에만 잠깐 보이더니 없어졌다.
-흥! 저희들이 나를 옆에 두고 무슨 짓을 할 것 같은구? 다락문은 맞은 쇠질을 할지 모르지만, 금고까지 맞은 쇠질을 할 재주가 있더람! 또 열어 보면 어쩌려던 건고? 도둑질을 못 할 게 아니지마는, 그런 섣부른 짓이야 할 리 없고 은행 통장을 꺼내낸대도 당장 발각될 것이요... 땅문서의 명의를 고쳐서 감쪽같이 넣자는 것인가? 유서 같은 것이 들었으면 변작을 해놓자는 것인가? 그랬다가 만일 할아버니께서 살아나신다면 어쩔 텐구...-
얼굴이 비칠 듯이 어른거리는 금고 문에 손자국이 몹시 난 것을 자세자세 들여다보다가 덕기는 별안간 겁이 버쩍 났다.
사랑문이 열린 것을 보면 어떤 놈이든지 뺑소니를 쳤을 것 같기는 하나, 이 넓은 속에 또 누가 어디 숨어서 엿보고 있는지도 모를 것 같다. 뒤로 달려들어서 깩 소리도 못 치게 하고 나면 금고만 멀뚱히 서서 모든 사실, 모든 비밀을 알 것이다. 돈이란--재산이란 이렇게도 무서운 것이요, 더러운 것인 줄을 덕기는 비로소 깨달은 것 같다. 금고 문이 유착스럽게 뻐끗이 열리자 덕기는 차근차근히 뒤지기 시작하였다.
첫번째 손에 잡히는 것이 유서- 유서라느니보다도 발기를 적은 것이었다. 그 속에는 집안 식구의 이름이 거의 다 씌어져 있었다. 그리고 여남은 개가 되는 봉투에는 가가 임자의 이름을 써서 단단히 봉하여 두었다. 덕기는 급한 대로 그 발기에 씌어진 이름과 봉투를 대조하여 보니 축난 것은 없다. 수원집의 몫과 덕기 자신의 몫도 그대로 있고, 봉투를 뜯었던 자국도 없다. 그 외에 은행 통장이라고 씌어진 봉투도 그대로 있고, 덕기와 조부의 큰 도장도 있다. 결국 저희들이 금고를 못 연 것이다.
덕기는 가슴이 뻐근하면서도 후련한 것을 깨달으면서 그 발기를 자세자세 들여다보고 앉았다...
필자는 여기에 조씨집 재산이 어떻게 분배되었는가를 잠깐 공개할 필요가 있다.
귀순이(수원집 소생)- 오십석
수원집- 이백 석
덕희(덕기 누이)- 오십 석
덕희 모(며느리)- 백 석
덕기 처- 오십 석
상훈- 이백 석
덕기- 천오백 석
창훈- 현금 오백 원
지 주사- 현금 이백 원
이것은 물론 대략 쳐서 그렇다는 것이니, 그 중에 수원집 한 사람 몫이 이백 석 같은 것은 실상 상훈의 이백석의 거의 갑절이나 될 것이요, 또 덕기의 천오백 석이라는 것도 나머지는 다 쓸어 맡긴 것이니 실상은 2000석까지는 못 가더라도 1700-800석은 될 것이다.
그 외에 은행 예금 중 큰 것으로 1만 원과 지금 들어 있는 집이 덕기 차지요, 수원집은 태평통에 있는 열 다섯 간 집을 줄 거이요, 북미창정 집은 상훈의 소생이 있다 하니 그에게 내줄 것이며, 현재 자기가 수중에 넣고 쓰는 예금 통장에는 얼마가 남든지 장비를 쓴 뒤에 남은 것으로 창훈과 지 주사들의 상금을 주고, 나머지는 두 집의 용으로 쓰라고 하였다. 그것도 한 1만 원 가량 되었다. 그러나 남대문 안 정미소를 어떻게 처치하라는 말이 별로이 없는 것은 영감이 깜박 잊었는지, 대소가의 생활비를 그것으로 충용할 것인즉 특별히 몫을 짓지 않은 것인지 좀 모호하다.
그 외에 주의 사항으로는 미성년자의 소유와 덕기 모친과 덕기 처의 몫은 두 계집애 귀순과 덕희가 자라서 시집갈 때까지, 또 모친과 처는 죽을 때까지 덕기가 감독하고 보관할 것을 써놓았다. 이것으로 보면 수원집이 이 집에서 죽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귀순의 장래를 덕기에게 부탁한 것이요, 또 며느리나 손주며느리의 몫을 따로 정한 것은 장래 이혼을 한다든지 무슨 풍파가 있을 경우까지를 염려하고 한 것 같았다.
산(産)을 남겨줌이 도리어 후손에 화를 끼치는 수도 없지 않기로, 내 생전에 이처럼 분배하여 놓은 것이니, 이는 나의 절대 의사라 다시는 변통하지 못할 지며, 지어 덕기 하여는 장래 조씨집의 문장이라, 덕기 자신에게 줌이 아니라 조씨 일문에 대대로 물려내려갈 생활의 자료를 위탁함이니 덕기 된 제 모름지기 푼전이라도 소홀히 하지 못할지니라...
운운한 유언도 끝에 씌어 있다.
그리고 이 재산 처분은 자기가 죽은 뒤 안장을 마치고 여러 사람 앞에 공개하여 분배해주되 특히 여자들의 몫만은 3년상을 마친 뒤에 내줄 것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수원집 하나를 특히 구속하려는 뜻인 모양이다. 수원집이 딴 남편을 해갈지라도 3년이나 마치고 가게 하자는 것이요, 그러느라면 네 살 먹은 귀순도 학교에 갈 나이도 될 것이니 아무의 손으로나 기르게 될 것이니까, 그것을 생각하고 한 것인 듯하다.
유서에 씌어진 날짜는 불과 십여 일 전, 즉 방으로 들어오기 전이니, 그 침중한 가운데서도 만일을 염려하여 오밤중에 혼자 일어나 엉금엉금 금고에 매달려서 꺼내고 넣고 하였을 것을 생각하니, 덕기는 조부가 가엾고 감격한 눈물까지 날 것 같다. 조부의 성미와 고루한 사상에 대하여서나, 부자간에 그처럼 반목하는 것은 덕기로서도 불만이 없지 않으나 자손을 위하여 그렇게 다심하게도 염려하는 것을 생각하면 고맙기 그지없다. 분배해논 것이야 일조일석에 한 것이요, 몸이 편할 때에 시름시름하여 두었겠지마는, 늙은이가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죽은 뒤의 마련을 하던 그 쓸쓸한 심정이나 거동을 상상하여 보면 또 눈물이 스민다. 남들은 노래에 수원집에게 홀딱 빠졌으니 그 재산이 성할 수야 있겠느냐고, 덕기가 듣는데서까지 내놓고 뒷공론들을 하였지마는 결국 수원집 모녀 편으로는 250석이니, 상훈의 단 300석밖에 차례가 안간 것을 생각하면 많은 편이나, 적은 셈이다. 원체 상훈에게 300석이라는 것은 너무나 가엾고 이것이 모두 영감의 고집불통 때문이지마는, 봉제사 안하는 예수교 동티다. 결국 영감의 봉건사상이 마지막으로 승리의 개가를 불러보는 것이다. 그러나 덕기가 재산은 상속하였을망정 조부의 유지도 계승할 것인가? 그는 금고 문지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사당 문지기로서도 조부가 믿듯이 그처럼 충실할 것인가 의문이다.
단서
덕기가 서류를 금고에 다시 집어넣고 섰으려니까 수원집이 어느 틈에 나왔었던지 축대 위에서 유리 구멍으로 들여다보며,
"병원에 가는데, 무어 가져오라시는 거 없던가?"
하고 소리를 치다가 채 고무신을 벗을 새도 없어 툇마루로 올라서며 미닫이를 와락 연다. 병원 간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금고가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은 것이요, 아까 후다닥 뛰어나온 뒤가 애가 씌어서 눈치를 보러 나왔던 차에, 금고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눈에 쌍심지가 올라서 뛰어들려는 것이다.
덕기가 금고 문을 땅 잠그며 뒤를 돌아보니 수원집은 회색 외투에 두 손을 찌르고 매서운 눈치로 노려보는 것이 싸우려는 사람 같다.
"응, 좋구먼! 이젠 맘대루 금고를 여닫구!"
이렇게 비아냥거리는 수원집은 금고 열쇠 구멍에서 제그럭하고 빼어내는 열쇠 꿰미를 독살스러운 눈초리로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 눈과 마주치자 덕기는,
'이 열쇠 때문에 내 명에 못 죽겠다!'
는 생각을 또 한 번 하며 저그럭하고 포켓에 넣고서,
"병원엔 잘두루마기 가져갔것다, 무어 다른 것은 없어요."
하며 비꼬듯이 코대답을 하였다.
"그래 금고 속은 어떻게 됐어?"
금시로 낯빛이 달라지며 빌붙듯이 교활한 웃음이 입가에 떠오른다.
"무에 어떻게 돼요?"
덕기가 성을 내며 후뿌리는 소리를 하니까 수원집은 자기의 말이 어색하였던 것이 분하기도 하고, 이 젊은 애의 위압적 태도에 반발적으로 다시 입이 뾰족해지며,
"대관절 내 몫은 얼마를 떼노셌는지 그걸 알잔 말야."
하고 덤벼드는 기새다.
"그래 지금 그런 말을 또 꺼낼 땐가 생각을 해보슈."
"애아범은 꺼낼 때가 돼서 꺼내보았던가... 이때고 저때고간에 나두 살려니까 그러는 거지 지금 멀거니 앉았다가 돌아가신 뒤에야 입이 열이 있으면 무얼 하누. 보따리까지 뺏구 내몰기루 별수 있겠던감!"
"당장 용돈을 꺼내쓰려구 열어봤지마는 그래 몫이 얼만 줄 알면 수술을 하시는 양반께 가서 덧거리질을 하시려우?"
"못할 건 뭐야?"
하고 점점 포달을 부리다가,
"난 몰라! 어쨌든 500석은 줘야 해! 나두 어린 자식하구 살아야지! 젊으나 젊은 년이 이 집 들어와서 기죽을 못 펴구 갖은 고생 다할 제야..."
하며 말을 채 맺지도 않고 축대로 내려서니까 장에 흥정 갔던 지 주사가 치룽을 멘 아범은 안으로 들여보내고 자기도 무엇인지 종이 봉지를 들고 들어온다. 수원집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힐끈 치어다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마루로 올라오다가,
"참 병원에 지금 가슈?"
하고 뜰로 내러서는 수원집에게 말을 건다.
"왜요?"
하고 돌쳐서던 수원집은 포달을 부리던 끝이기는 하지마는 아무 죄 없는 지 주사에게도 쏘는 소리를 한다. 지 주사가 제 편이 아니요, 매사에 이 등신 같은 영감의 눈까지 기어이야 하는 것이 평소에 성이 가시고 못마땅도 하기는 하였던 것이다.
"지금 장에 가보니까 귤이 하두 탐스럽고 먹음직스럽더라니 영감님 좀 갖다드릴까 하구 샀는데, 난 여기 일 땜에 지금 갈 새가 없으니..."
하고 지 주사는 손에 든 봉지를 추켜들어다가 방에서 마루로 나서는 덕기를 건너다보며,
"그러나 여보게, 이것은 내 돈으루 산걸세."
하고 한마디하니까,
"온 천만에, 아무 돈으로 사셨거나 어떻습니까? 잘 사셨습니다."
하고 덕기는 말을 가로막는다.
"아냐. 셈은 셈대루 해야지. 하여튼 이것은 내가 특별히 마음먹고 산 건데,
내가 오늘 또 가게 될지 모르니."
"무얼 그러세요. 귤을 잡숫구 싶으시다면 지금 가다가 사가지구 갈 테니 그건 영감님이나 두구두구 잡수세요."
수원집은 말을 채 다 듣지도 않고, 구살머리적다는 듯이 퐁퐁 쏘고 나가려 한다.
"아냐. 그야 돈이 없나, 물건이 없겠나마는 이건 내가 사 보내는 것이라니까 그래!"
하고 그렇게 유순하고 꿈속 같던 지 주사도 '늙은이의 역정'으로 며느리나 나무라듯이 강강한 소리를 꽥 지르며,
"20년 가까이 노영감님 옆에 있다가 입원까지 하신 걸 보니... 허어. 내가 먼저 가야 할걸."
하고 금시로 눈 속이 뜨거워지는지 안경 속의 눈을 꿈뻑꿈뻑하며,
"보자기에 싸드릴 거니 가시는 기로 컬컬한데 벗겨드리시교."
하고 지 주사는 저편이 듣거나 말거나 모른 척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수원집은 눈살을 아드등 찌푸리고 섰으나 덕기는 지 주사의 그 말에 콧날이 시큰하는 것을 깨달았다. 지 주사의 그 '마음먹고...'라는 말이 고맙고도 가여웠다.
-할머니가 사셨더면?...
하는 생각도 난다.
방으로 들어간 지 주사는 귤 봉지 대신에 누르스름한 목도리를 창밖으로 내밀며,
"이게 어째 여기 떨어졌나? 창훈이 목도리 같은데 이 추운 겨울날 목도릴 왜 두고 다니누?"
하고 혼잣소리를 한다. 수원집은 그 목도리를 보고 깜짝 놀라는 기색이 더니,
"주실 테건 어서 싸주세요."
하고 방에다가 소리를 친다.
"아까 아저씨 왔습니까?"
아침에 창훈이 병원에 목도리로 얼굴을 푹 싸고 왔던 것을 보았던 바에야 물어 볼 필요도 없지마는 수원집의 망단해하는 기색이 수상쩍어서 물어 본 것이다.
"몰라."
수원집의 대답이 떨어지자 사랑문이 삐걱하고 마침 대령하고 있었던 것처럼 창훈이 들어선다. 아닌 게 아니라 시퍼렇게 언 턱 밑에는 목도리가 감겨 있지 않다.
"웬일들인가?"
우중우중 나선 것을 보고 먼저 말을 붙인다.
"어디를 가셨었나요?"
덕기는 좋은 낯으로 대꾸를 해주었다.
"응, 집을 내몰리게 되어서 좀 돌아다녔으나 어디 있어야지. 사글셋집이라곤 여간 몇백 원 보증금을 준대도 구하는 도리가 없고... 그 큰일났어."
창훈은 혀를 찬다. 별안간 집 논래는 금시초문이다.
"지금 댁도 사글셋집이던가요?"
"그럼 별수 있나, 하여간 과동이나 한 뒤에 내쫓겼으면 좋으련마는 주인이 일본놈이라 김장해 논 뒤고 섣달 대목이요 한, 그런 조선 사람의 사정이야 알아 주나."
"그러기로 음력 섣달 그믐인, 정초에 내쫓을라구."
별안간 집 논래를 꺼내는 것도 역시 까닭이 있어 그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 사람도 할아버지 생전을 노리는 모양이다.
"압다. 시원한 소리두 또 한다. 일본놈이 우리 구력 설이야 생각한다던가?"
창훈은 덕기가 차차 이 집 주인이 될 테니까 그런지 별안간 '하게'를 붙이면서,
"이런 때 자네 할아버니께서 어떻게 집이나 한 채 내주셨으면... 더두 말고 조그마한 오막살이라도 한 채 주셨으면 사람을 살리시는 일체이겠건만..."
하고 혼잣소리처럼 껄껄 웃는다.
"할아버지께서 웬걸 집을 사두신 게 있을라구요."
"흥, 자네는 한층 더하이그려. 허허... 이제 자네두 살림을 맡을 테니까 그두 그렇겠지마는 지금 할아버니께서 척 맡으신 것만 해두 서울 안에 5, 6채는 될 것일세. 이 집이나 화개동 집, 북미창정, 태평통, 그런 것까지 합하면 십여 채일세. 아무러면 자네가 더 잘 알겠나."
"그건 고사하고, 그래 정말 섣달그믐날 집을 보러 다니시니 보여드리는 데도 있던가요?"
덕기는 웃어버렸다.
"그럼 내가 거짓말인 줄 아나? 무엇하자고 거짓말을 하고 또 병원은 내버려 두고 온 식전 이 추위에 나돌아다니겠나? 틀렸군! 다 틀렸어! 나는 자네게 청이나 해서 할아버니께 말씀을 좀 해달라렸더니..."
"섣달그믐날 집 보러 다니다니 그 말 같지 않은 소리 그만하게. 그따위 얼뜬 짓 하러 다니느라구 이 추위에 목도리까지 빠뜨리구 다니나?"
지 주사는 과일 봉지를 꽁꽁 뭉쳐가지고 나오면서 핀잔을 준다.
"어참, 목도리가 여기 떨어졌던가?"
창훈은 좀 어색한 낯빛이다.
"집을 두 번만 보러 다녔더면 목까지 빼놓고 다녔겠네그려."
지 주사는 또 비꼬며 그동안 안으로 들어간 수원집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섰다. 덕기도 픽 웃고 말았다.
말눈치가 지 주사 역시 무슨 낌새를 챈 모양인가 싶어 덕기는 통쾌도 하다.
"하여간 올라오십쇼 내일 대례를 지낼 텐데 좀 분별을 해주십쇼."
지 주사 말에 머쓱해서 어틈더듬하던 창훈은 이 말에 기운을 얻은 듯이.
"그것 보게. 할아버니께서 안 계시니까 벌서 이렇지 않은가. 집안에는 아무래도 늙은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야."
하고 자기 아니면 못할 소임이나 맡은 듯이 입찬 소리를 하면서 들어오는 길에 방문 밑에 내던져둔 목소리를 얼른 집어 목에 걸고 모자는 벗어 못에 건다.
안으로 흥정해온 것을 보러 들어갔던 수원집이 나오니까, 지 주사는 과일 봉지를 내어 주고 방으로 들어와서 창훈과 마주 앉아 부시쌈지를 꺼내 놓고 곰방대에 한 대 담는다. 담뱃대를 문 지 주사는 성냥불을 그으려다가 말고 마주 붙은 커다란 유리창 밖을 멀끔히 내다보더니 물었던 담뱃대를 빼고 혀를 끌끌 찬다. 혀를 차기 위해서 일부러 담뱃대를 뺀 것이다. 덕기와 창훈도 무언가 하고 내다보니 수원집이 나가다가 문턱에서 만난 아이 보는 년도 한 개 주고 섰는 것이었다.
"영감은 그거 무얼 그렇게 역정을 내나?"
창훈은 집은 몰린다면서 그래도 피존갑을 꺼내서 한 개 붙인다. 늙은이로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
"요새 젊은 사람은 너무 늙은이 공궤할 줄을 모르니 말야. 정성이 있어야 하는 거야."
지 주사는 자기가 침이 넘어가는 것을 한 개도 축을 내지 않고 정성껏 보내는 것인데, 그것을 자식새끼나 애보기년에게까지 봉지를 찢고, 숫으로 축을 내는 것이 분해 못 견디겠다는 기색이다.
"상관 있나. 영감 자실 것 귀한 따님이 먼저 맛보기로."
아까 목도리의 보복을 예서 하려는지 창훈이 추근추근히 대꾸를 한다. 지 주사는 못마땅한 것을 꽁꽁 참고 앉았다가 창훈의 목에 두른 목도리로 눈이 가더니,
"그래, 방 속에서까지 두르고 앉었는 목도리를 무엇에 몰려서 떨어뜨리고 다녔던가?"
하고 또 목도리 논래를 꺼내며 실소를 한다.
"글쎄 집에 몰린다지 않던가..."
창훈은 농쳐버린다.
"난 조금 전에 병원에서 본 목도리가 여기 떨어져 있기에 어느 틈에 목도리가 제 발로 걸어왔는가 했지."
"허어, 목도리 목도리 하니 그렇게 탐이 나면 후무려 넣을 일이지, 세찬으로 줄까?"
하고 창훈은 목도리를 벗으려는 듯이 손이 올라간다.
"후무려 넣다니? 그따위 말버릇은 자네끼리나 통하는 말이겠지."
지 주사는 점잖게 냉소를 한다. 걸불병행이라 하지마는 남의 집에서 신세 지고 사는 사람들이란 공연히 서로 못 먹어서 하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 더구나 주인 영감에게 거의 반생을 바치고 충직할 대로 충직한 이 영감으로서 보면, 창훈이나 최 참봉 따위는 사람 값에도 아니 가는 것이다. 그러나 또 창훈은 창훈대로 지 주사쯤은 이 조씨집 마루 구멍의 늙은 개새끼만도 여기지를 않는 것이다.
"허어, 오늘 욕보는군. 아까 하두 춥기에 선술 한잔 하구 잠깐 들어와 누웠다가 나갔는데, 얼한 김에 떨어뜨렸더니만..."
창훈은 조카를 돌아다보며 변명삼아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참 그런데 종용하니 여쭈어봅니다마는 전보는 누구를 시켜 쳤기에 한 장도 안 들어왔에요?"
덕기는 지 주사와의 말다툼을 막으려는 듯이 말을 돌렸으나 실상은 덕기대로 생각이 따로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두 시키구 한 번은 바로 내가 가서 쳤는데..."
"그거 이상한 노릇이지, 지나는 길에 경성 우편국에서 노셨다기에 가서 물어 보니까 전부 뒤져봐두 없던데요."
"그럴 리가 있나. 하루 수백 장 수천 장 되는 것을 어떻게 일일이 뒤져보고 안다던가?"
"배달이 안 되어서 되돌아온 것을 조사해보면 알거든요. 경도에 가면 또 한 번 알아 보겠지마는, 하도 이상하기에 말씀예요."
"글쎄말일세."
창훈은 덤덤히 앉았다.
"전보구 전보환이구 분명한 사람한테 시켜야지! 전보지를 우편국 속편지통에다 넣구 부쳤다는 건 아닌가?"
지 주사가 이런 소리를 하니까 덕기는 실소를 하였다. 창훈은 눈을 흘기며 일어나서,
"집에 잠깐 다녀옴세."
하고 모자를 떼어 쓰고 나간다. 좌우 협격을 받자니 성이 가셔서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모양이다.
"하여간 이번에 잘 왔네. 허나 조심하게. 앞뒤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창훈이 나간 뒤에 젊은 주인 앞에 덤덤히 앉았던 지 주사는 무슨 생각을 하였던지 이런 소리를 한다.
"왜들 그래요? 쳤다는 전보두 안 오구."
"별거 있나? 모두들 눈이 벌개서 노리는 게 저거지?"
고 지 주사는 눈으로 다락을 가리킨다.
"그래야 별수 있나! 공연한 허욕이지마는, 아까들두 필시 그자들이 여기 모여서 쑥덕거렸던 게지."
"누구 누구들예요?"
"뻔하지 않은가. 최가, 창훈이, 수원집, 게다가 바깥것 내외... 지금 내가 저이들의 눈엣가시로 소리 없는 총이 있으면 쏘아 죽이고 싶으리마는, 내가 아무리 늙어두 그런 어리배긴가?"
지 주사는 한번 뽐내 본다.
"창훈 아저씨두요?"
덕기는 일부러 놀라는 기색을 보인다.
"최가나 수원집과는 또 딴 배포일 거요. 서로 이용하는 것이겠지마는, 제일 무서운 것이...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거북하이마는, 수원집 아닌가 보이. 주의하게."
"그래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만일 자네가 오기 전에 돌아가셨다면 저 속을 뒤집어놓고, 송두리째 훔쳐낼 수야 있겠나마는, 유서든지 무슨 문서든지 뒤집어 꾸며놓고... 큰 변 날 뻔하였네. 물론 아버니께서두 눈치는 채셨나 보네마는, 누가 있나. 나 혼자 애도 좋이 썼네."
지 주사는 공치사는 아니겠지마는, 자기의 노심을 자랑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애쓰셨습니다."
"애랄 거 무어 있나마는, 아까만 해두 병원에서 흥정 가는 길에 아범을 데리러 왔더니, 사랑문이 안으로 걸려는 있는데 들어가려니까 아범이 들어가실 건 무엇 있습니까, 곧 차리고 나옵니다 하고 가로막는 듯한 거동이 수상쩍기에, 아범이 나올 동안에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암만해두 방 속에 인기척이 있던 거 같애."
"설마... 그러면야 밖에 신발이라두 있었겠지요."
"그러기에 말이지. 또드락 소리도 없는데 유리 구멍으로는 다락 앞에 사람 그림자가 얼찐거리니, 간데 없이 불한당이 든 셈 아닌가. 암만 생각해두 애가 쓰이더니 들어와 본즉, 목도리가 윗간방 문턱에 떨어져 있데그려. 그래 목도리 논래를 안하려 하겠나? 하여튼 창훈이가 그 틈에 끼였다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최 참봉보다도 괘씸하지 않은가?"
"그야 그렇죠마는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난봉꾼이나 있었더면 그 이상 별의별 일이 다 나지 않았겠습니까."
덕기는 태연히 웃는다.
"허어..."
하고 지 주사는 감탄하는 기색으로 덕기를 한참 치어다보다가,
"자네 생각이 그렇게 드는 것을 보니, 조씨 댁 염려 없네... 흠, 자네 그런 줄 몰랐네!"
하며 지 주사는 별안간 덕기를 극구 칭찬하였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나두 불시에 이런 큰 살림을 맡게 되어 어리둥절합니다마는 잘 보살펴주십쇼."
덕기는 부친에게도 말 못하던 고독하고 불안하던 심중을 이 여생이 미칠 안 남은 노인에게 피력하는 것이었다.
"그야 내가 이 댁에 신세진 것으로 생각하기로 여부가 있나마는 내야 뭘 아나! 그럴 기력두 없구."
지 주사는 이렇게 겸사하면서도 이 어린 청년과 주객이 간담상조 하게 된 것을, 그리고 틈이 벌어가고 한 모퉁이가 이지러져 가는 이 집을 바로 붙드는 데 자기가 한 몫 거들어야 하게 괸 것에 깊은 감격과 자랑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 외에 무어 들으신 말씀 없에요?"
덕기는 이 노인의 입에서 좀 더 무슨 자세한 말을 끌어내고 싶었다.
"들은 게 있나마는, 그 뒤에는 매당집이라는 무슨 고등 밀가루라고 한다던가 하는 년이 또 있다네그려. 자네 어르신네도 거기 가서 술잔이나 자시고, 수원집과 맞장구를 친 일도 있다데!..."
이 말에 덕기는 귀가 번쩍 띄는 눈치다.
"...하여간 그년의 집이 저의 패가 모이는 웅덩인 눈친데, 여기서 쑥덕거리지 않으면 틈틈이 거기로 모여 갖는 흉계를 꾸며 가지곤 모든 일을 잡질러놓는가 보데."
"매당집이란 어디기에 아버니도 그런 축에 끼실까요? 같이 어울려 다니시지는 않나요?"
덕기는 부친을 그렇게까지 의심하는 것이 못내 죄가 되겠다고는 생각하였으나 그래도 못 미더웠다.
"아냐, 자세는 몰라도 그럴 리는 없지. 그러나 매당이란 위인이, 나는 보진 못했지만, 은군자의 주름을 잡고 앉아서 남의 등쳐먹기로 장안에 유명짜한 년이라니까, 나네 어른과 수원집을 좌우로 끼고 안팎 벽을 치는 것인가보데그려. 주 군데서 다 얻어먹든지 그렇지 못하면 어디든지 한쪽 등이라도 쳐먹자는 게지."
"응! 그래요?"
덕기는 자기의 이해 관계보다도 세상 물정을 또 하나 알게 된 것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건 고사하고 이런 말은 자네만 알아두게마는, 애초에 최 참봉이라는 자가 수원집과 한퉁이 되어서 한밥 먹어보자고 계획적으로 수원집을 들여앉혀나 보데. 거기에 창훈이가 툭 튀어든 것이나 그놈들이 헉하고 나가자빠질 날이 있을 것이지."
지 주사는 고지식한 마음에 절치부심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탕을 내맡겨 두었으니 병환이 나으시려야 나으실 수가 있겠어요."
"여부가 있나!..."
약시시를 잘못하였으리라는 말에 지 주사가 신이 나서 여부가 있느냐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니 덕기는 가슴이 다 찌르르하며 놀랐다. 그러나 지 주사는 거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예를 드는 것은 모피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덕기는 어제 무심결에 들었던 아내의 말이 다시 머리에 떠오른다. 약은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고 꼭 행랑어멈만 맡아 달이라 해서 안방에 들어가는 시중만은 자기(덕기의 아내)에게 시키는데, 그나마 조부가 듣는 데서 손주며느리가 약을 안 달이느니 정성이 없느니 하고 들컹거리지나 않았으면 좋으련마는 사람을 미치게만 만드니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다고 아내가 하소연할 제 수원집의 예증이거니 하고 들어만 두었으나, 지금 생각하니 그것도 의심이 난다.
어멈이란 위인이 너름새 좋게 뉘게나 굽실대고 일도 시원스럽게 하여 주는 바람에, 처음에는 모두 좋아하였으나 두고 볼수록 뚜쟁잇감이나 기생집 어멈같이 능글능글하고 수다스러운 점이 뉘게나 밉살맞게 보여왔다. 어쨌든 그 어멈에게 약을 맡겨 달이게 하였다는 것이다. 덕기에게는 실쭉하다.
-두고 보면 알리라!
이미 입원한 뒤니까 이런 청처짐한 생각이겠으나 덕기는 속으로 눈을 흡떴다.
일대의 영걸
여편네들만 빼놓고 남자들은 병원에 모여서 과세를 하였다. 낮전에는 번하던 병인이 저녁때부터 혼수 상태에 빠지면 새벽녘이나 조금 정신을 차리는 것이었다.
의사는 어차어피에 원기가 돋아야 수술을 할 것이니까 며칠 연기하는 것이 도리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수술이래야 큰 절개수술을 하는 것도 아니요, 좌우쪽 갈빗대 사이에 물이 든 것을 뽑아낸다는 것이나, 원체 허약해져서 선뜻 손을 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의사도 왜 이렇게 탈진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고 의아해하였다. 돈 있는 사람이니 아무리 노쇠는 하였더라도, 보약도 상당히 먹었을 것이고 한데 이렇게까지 의식이 혼몽하도록 몸이 몹시 깎였다는 점을 의아해 했다.
초하룻날 차례도 지내고 3,4일은 무사히 넘어갔다. 그래도 의사는 수술에 착수를 못 하고 있었다. 병인이 어디가 어떤지를 모르게 까부라져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영양분이라고는 들어가기가 무섭게 되받아 나왔다.
-중독인가? 그렇다면 무슨 중독일까?... 비소 중독?
의사는 우연히 이런 의문이 떠오르며 고개를 기웃하였다.
"암만해도 알 수가 없는데... 아마 무슨 중독이 되셨나보외다."
의사는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중독이실까요?"
덕기는 눈이 뚱그래져서 바짝 채쳐보았다.
"글쎄. 그야 좀 더 두고 증세를 봐야 알겠지만요."
의사의 대답은 그밖에 없었다. 주사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딴딴히 굳어진 노인의 혈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영양분 대신에 주사로 명맥을 버티어 가는 것이다.
덕기는 위보를 듣고 위문 겸 병원을 찾아온 이때까지의 주치의와 병원의 박사와 대면을 시켰다. 될 수 있으면 입회 진단을 하여달라는 것이다.
두 의사는 피차의 경과를 보고하고 각기 그 동안 투약한 처방전(약방문)을 가져다가 서로 바꾸어 보았다. 진단이 틀렸으면 틀렸지 처방으로 보아서는 결코 중독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배설물을 검사한 결과를 주치의에게 보이니까 주치의는,
"허-?"
하고 놀라며 고개를 비꼬았다.
이렇게 되니 남은 의문은 한방의에게로 돌아갔다. 두 의사는 한참 상의한 결과 덕기에게 한약방문과 약 찌끼가 있으면 그것을 가져다달라고 하였다. 의사들은 한약에 유의하느니만큼 한약재의 연구에 대하여 흥미를 더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덕기도 여기서 무슨 단서가 나올까 하는 생각으로 아무도 시키지 않고 자기가 한방의에게로 갔다. 약 찌끼도 그대로 있다면 자기 손으로 긁어모아 가지고 올 생각이다.
한방의는 덕기를 따라 병원에 가서 양의들에게 자기의 진단을 개진하고 방문을 내보였다. 한방의가 내상 외한으로 집중을 하여 다스려 나왔다는 것은 그럴 듯하나, 신열이 보통 감기의 열이 아니요 폐렴으로 해서 내발하는 열인 것은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 하여간에 한약에서도 중독될 만한 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더구나 약 찌끼라는 것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
하여간에 병인은 해독제로 완화는 시켜놓았으나, 이 때문에 신장염과 위장 카타르가 병발하고 시력이 점점 쇠약하여 갔다. 이만하면 비소 중독이란 진단은 결코 오진이 아닌 결정적 사실이요, 또 이것은 의학상 귀중한 연구 재료로 아직 보류하려니와 당장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의사는 거진 절망이었다.
이 법석통에 수원집은 감기 몸살이라 하여 꼼짝을 안하고 드러누워서 병원에도 사흘이나 아니 갔다. 그래도 수술한다는 날에는 수원집도 깽깽 일어나서 병원에 나왔다. 그러나 그 앓는 소리는 옆의 사람이 듣기에도 송구스러웠다. 앓는 소리만 들으면 영감보다도 이 젊은 마누라가 먼저 갈 것 같았다.
"하두 오래 병구완하시느라고 저렇게 지쳤구려. 병구완하다가 먼저 돌아가리다."
일갓집 아낙네들은 이렇게,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놀렸다.
"대신 나를 잡아갔으면 작히나 좋겠습니까."
수원집은 숨이 턱에 닿는 소리로 이런 대답을 해서 여러 사람을 웃겼다.
하여간에 수술은 하였다. 수술이래야 가슴의 물을 빼내는 것이다. 그 덕으로 병인은 신열이 쑥 내려갔으나 그 대신에 기함이 심하여 혼수 상태에 빠져 버렸다.
이틀 동안을 눈을 한 번도 못 떠보고 그대로 자지러져 들어가던 숨을 마지막 들이걷고 말았다.
의사는 이해 못하는 가족들이 수술을 잘못하였다고 청원할까 보아 비소 중독을 앞장세우고 또 누구나 의사의 말을 믿었으나, 그 정통 원인이 어디 있었느냐는 점에 이르러서는 의사의 말 못하는 거와는 딴 의미로 아무도 개구를 못하였다. 의사는 다만 의학상 과학적 문제로만 생각하나, 친근한 여러 사람은 법률 문제- 형사 문제로밖에 아니 보이는 거시었다. 그러나 누구나 입을 봉하였다.
의사가 연구 재료로 해부를 해보아도 좋을 듯이 말을 꺼낼 제 맨 먼저 찬동의 뜻을 표시한 사람은 상제인 상훈이었다. 덕기는 실상은 그렇게 하자고 하고 싶었으나 일가의 시비가 무서워서 대담히 입을 벌리지는 못하였다.
과연 당장에 우박이 상훈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자네 환장을 했나? 자네 이제는 기를 쓰나? 조가의 집에 이제는 마지막으로 똥칠을 하려는 건가?"
첫 우박이 창훈의 입에서 쏟아졌다.
나이 오십이나 된 놈이 지각 반푼 어치 없이 어서 분별을 해서 빈소에 모시고 발상을 할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황송한 말씀이나 푸줏간에서 소 잡듯이 부모의 신체를 갈가리 찢어발기려는 그런 놈이, 집안 망할 자식이, 천지개벽 이후에 있겠느냐고, 욕설이 빗발치듯 하고 구석구석이 모여서는 대격론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부모가 아니라 원수더란 말인가? 생전에 뼈진 소리를 좀 하셨다고 돌아가시기가 무섭게 칼질을 해서 부모를 욕을 보이자 하니 성한 놈이면 육시처참을 할 일이요, 미쳤다면 그놈부터 오리간을 짓고 가두어두든지, 아주 조씨 문중에서 때려잡아 버려야 할 일이라고 은근히 떠들어놓은 사람은 창훈이었다.
그런 놈이니 제 아비에게 비상이라도 족히 먹였을 것이요, 제 죄가 무서우니까 시신도 안 남게 갈가리 찢어발겨 없애서, 증거가 안 남게 만들어 가지고 불에 살라버리든지, 약병에 채워서 우물주물 만들려는 그런 무모한 생각도 하는 것이라고, 봉인첩설을 하는 것도 최 참봉과 창훈이다. 누구나 또 그럴듯이 듣는 것이다. 이러느라니 수원집은 제각기 한 마디씩 떠들어놓고 병원은 한 귀퉁이가 떠나갈 지경이다.
상훈은 주먹맞은 감투가 되어서 잠깐은 우선 물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할말이 없는 게 아니요, 입이 없어 말을 못하는 것은 아니로되, 공격의 칼날이 날카로운 때는 은인자중하여야 할 것이라고 돌려 생각한 것이다. 만일 금고열쇠가 상훈에게로 왔던들 이 사람들이 상훈을 이렇게까지 무시는 못하였을 것이다. 무시는커녕 창훈부터 '아무렴 그 이상하니 해부해보세' 하고 서둘러댔을 것이다. 상훈으로 말하면 해부를 꼭 하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연놈들의 악독한 음모가 있었다면 그것을 밝히겠다는 일념으로 선뜻 찬성은 하였으나 기위 의사가 두 사람이나 증명하는 바에야 해부까지 할 필요는 없고 또 후일 문제삼자면 오늘날 안장하고서라도 다른 도리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라고 돌려 생각하였다. 그야 더운 김도 가시기 전에 부모의 시신에 칼을 댄다는 것은 비록 묵은 관념이 아니기로, 차마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니 창훈들의 주장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니요, 또 누구나 듣든지 옳다고 하겠으니 한층 더 기고만장을 하여 상훈만을 못된 놈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나 계제가 좋아서 하기 쉬운 옳은 말 한마디를 하였다고 그 뒤에 숨긴 큰 죄악이 감추어지고 삭쳐질 것은 아니라고 상훈은 별렀다.
-두고 보자. 언제까지 큰소리들을 할 것이냐!
고 상훈은 이를 악물었다.
시체는 발상 안한 대로 침대차에 옮겨서 집으로 모셔다가 빈소를 아랫방으로 정하고 안치하였다. 발상에 상훈은 곡을 아니하였다. 이것이 또 문젯거리가 되었으나, 상훈은 내친걸음에 뻗대버렸다. 사실 눈이 보송보송하고 설운 생각이라고는 아니 났다. 그래도 울지 않는 자기가 눈이 통통히 붓도록 눈물을 짜내는 수원집이나 '어이, 어이' 하고 헛소리를 내는 창훈보다는 월등히 낫다고 상훈은 생각하는 것이다.
상훈의 존재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덕기는 깃옷만 안 입었을 따름이지 승중상을 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상꾼도 상훈에게는 절 한 번 뿐이요, 덕기에게로 모여들어서 이야기를 하고 모든 분별을 창훈이 휘두르면서 덕기에게 허가를 맡거나 사후 승낙을 맡는 형식만 취하였으나, 상훈에게는 누구나 접구를 안하려 하였다. 상훈은 꾸어다놓은 보릿자루 모양으로 사랑 안방 아랫목에 멀거니 앉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덕기로서는 부친에게 일일이 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무시를 당하는 부친이 가엾어서도 그렇고 도리로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상훈은 절대 무간섭주의였다. 무슨 말을 물으나,
"너 알아 하려무나, 의논들 해서 좋도록 하렴."
할 뿐이다.
거죽은 좋으나 그만큼 속은 토라졌던 것이다.
그러느라니 덕기가 중간에서 성이 가시었다. 성이 가신 것은 고사하고 일이 뒤죽박죽으로 두서를 차리지 못하고 돈만 처들어갔다. 주인 부자가 이 모양이니, 누구나 먹을 콩 났다고 눈을 까뒤집고 덤비는 축들 뿐이라, 나중에는 저희끼리 으르렁대고 저희끼리 헐어내기에 상두꾼들이 악다구니들을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이럭저럭 7일장으로 발인을 하게 되었다. 누가 보든지 호상이었다. 상제는 프록 코트를 입으려 하였더니 역시 제복을 입고 삿갓가마를 탔다. 그 외에는 200여 대의 인력거가 뱀의 꼬리같이 뻗쳤다.
"잘 나간다. 팔자 좋다! 세상은 고르지두 못하지. 나 죽어 나갈 제는 열두 방맹이 아니라 스물 두 방맹이는 되렷다!"
아침밥도 못 먹고 모여 선 구경꾼들이 허튼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얼마나 크고 작은 죄악과 불평과 원성이 따르고 남는지를 뉘라 알랴.
이리하여 조부의 일대는 오늘로 영결하였다.
새 출발
"서방님 계신가요?"
병화는 사랑 마루 끝에 와서 소리를 치다가, 큰사랑 아랫목에 앉은 서방님이 유리로 내다보니까, 허리를 굽실한다. 그래도 덕기는 미처 못 알아 보았는지 내다보던 고개가 없어지고는 두런두런 자기네들 이야기 소리만 난다.
"식료품상이올시다. 댁에 용달을 터 주셨으면 하는뎁죠?..."
"그만 두우."
방 안에서 다른 사람 목소리가 난다.
"적으나 많으나 전화만 하시면 금시로 배달해드리고 즉전이나 다름없이 본값으로 해 드립니다."
덕기는 목소리가 귀에 익어서,
"어느 집이오?"
하고 다시 한 번 내다보다가 문을 활짝 열며,
"사-람은! 이게 무슨 장난인가? 연극하나?"
흰 두루마기를 입은 덕기는 일변 놀라며, 웃으며 뛰어나온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늘이 개신데, 한 자국 떼주십쇼그려."
병화는 싱글거리며 연해 허리를 굽실거린다.
"정말인가? 허허허... 사람두!"
덕기뿐 아니라 방 안 사람이 번갈아가며 내다보고 빙긋빙긋 웃으나 병화는 반죽 좋게 버티고 서서 조른다.
"그런데 이건 별안간 어디서 얻어 입었나? 지금 무슨 연습을 하는 건가? 이러고 어디를 갈 모양인가?"
덕기는 여러 가지 의혹이 창졸간에 들었다. 닷새 전의 장삿날 반우터에서 잠깐 만난 후로는 못 보았지마는 그때도 멀쩡히 양복을 입고 왔었는데, 그 동안에 또 무슨 객기를 부리고 이 꼴로 돌아다니는지 우스운 것보다도 궁금하다.
"어서 올라오게. 도무지 왜 그리 볼 수가 없나?
"가만히 계십쇼, 내 일부터 하고요."
하고 병화는 가슴에 찔렀던 광고를 쓱 빼내어서 한 장 준다.
"흥, 정말인가? 자네가 허나?"
"서방님 같은 분이 한밑천 대주시면야 모르겠습니다마는, 두 불알만 가진 놈이 웬걸 제 손으로 하겠습니까. 배달꾼입죠."
"말씀 좀 낮춰 하시지요."
"황송한 처분입니다."
"허허... 그만하면 주문도리로는 급젤세. 자, 그만하고 이젠 좀 올라오게."
"바빠서 올라갈 새는 없어와요. 그럼 통장 하나 두고 갑니다."
하고 가슴패기에서 이번에는 통장을 꺼낸다. '조' 자까지 미리 쓰고 한 장 넘겨서는 3전 수입인지까지 붙여서 도장을 딱딱 찍어놓은 것이다.
"이력차이그려? 언제 다 이렇게 배워두었던가?"
덕기는 친구의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이 멀끔히 치어다보며 웃는다. 바커스에서 잠깐 만난 뒤로는 초상 중에 조상 왔을 때 보았고, 반우터에서는 고개만 끄덕하고 헤어졌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들을 새도 없었기는 하지마는, 어떻게 된 셈인지를 알 수가 없다. 경애와 같이 벌였나? 바커스의 한 끄트머리로 밑천을 얻었을까?
"자네 같은 위험 인물을 가외 일본 사람이 쓸 리도 없고, 누구하고 시작을 했나?"
"따금나리 보증으로 벼슬 한 자리 했습죠."
"이젠 어른께 말공대할 줄도 알고 하여간 제법 됐네."
덕기는 아까부터 병화의 깍듯한 존대가 듣기 싫었다.
"백만장자와 반찬 장수는 너무 왕청 떨어지기도 하지마는, 장사꾼의 분수를 잊어서야 되겠습니까. 서방님! 이 김병화는 어제까지의 김병화가 아니라, 산해진 식료품 상점 배달꾼 김병화입니다. 그쯤만 통촉해두시고 물건이나 많이 팔아 주십쇼. 소인은 물러갑니다."
병화는 빙글빙글하며 꾸벅 인사를 한다.
"응, 잘 가거라, 옛날 임성구가 살아왔구나!"
덕기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기만 하다가,
"쓸데없는 소리 말고, 좀 자세한 이야기나 듣세그려. 대관절 조선 사람에게 팔아먹자면야 일본 반찬 가게를 할 필요도 없고, 일본 사람에게 팔자면야 자네 같은 불겅이는 문전에도 얼씬을 못 하게 할 거니 장사가 될 리가 있나?"
하고 덕기는 우선 그 점을 염려하는 것이다.
"불겅이라니요? 저의 상점에는 막불겅이는 아직 안 갖다 놓았습니다마는 마른 고추, 실고추는 갖추갖추 있습니다. 그 외에 붉은 것을 찾자면 홍당무가 있삽고, 일년 감도 있삽고, 연시도 좋은 놈이 있습니다마는 일본 집에는 형사 데리고 다니며 보증을 하고 팔면 될 게 아닙니까?"
병화는 웃지도 않고 주워삼킨다.
"흥, 팔자는 좋으이! 보호 순사를 데리고 다니며 팔면 뜨일 리도 없고 십상일세그려."
"한번 놀러옵쇼. 예전 매동학교 근처올시다."
"응, 감세."
병화는 덕기의 웃음을 뒤에 남겨놓고 풍우같이 나왔다.
이 모양으로 오늘은 친구의 집, 안면 있는 집 안 한 바퀴를 돌고 상점에 돌아와 보니 경애가 와서 앉았다.
"그럴 듯하구려. 우리집에도 콩나물 일전 어치하고 두부 한 채만 배달해 주구려."
"예! 그럽죠. 댁이 어딥니까?"
"남산골 솔방울 구르는 집이오. 고명파도 잊어버리지 마우."
경애는 깔깔 웃고 말았다. 필순도 옆에 섰다가 따라 웃으며,
"선생님같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는게 아니라 끌고 다니시면야 배달은 다 하셨지."
하고 필순은 두 팔을 내저으며 자전거 타는 어설픈 흉내를 낸다.
"그래두 책상물림의 서방님으로서는 제법이지. 대관절 주판질이나 할 줄 아우?"
경애는 또 옆에서 농을 건다.
"주판은 여기 졸업생이 계신데!"
하고, 병화가 필순을 가리키니까 필순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꼬고 웃는다. 필순은 사실 일주일이나 주판 놓는 것을 배워 가지고 왔다.
"그런데 벗고 나와서 일을 좀 하든지 어서 가든지 하우. 양장 미인이 떡 버티고 앉았으면 영업 방핸데."
"나 같은 사람이 앉았어야 영업이 잘되어요. 일본 사람은 담뱃가게와 목욕탕에는 간반무스메(간판으로 계집애를 두는 것)를 내앉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주 지붕 위에 올라가 앉았지 않으려우?"
이런 실없는 소리를 하고 있으려니까, 일본 하녀가 통장을 들고 와서 파 한 단과 멸치 한 근을 가지고 간다.
몇 집 걸러 일본 하숙에서 온 것이라 한다. 뒤미처서 일본 노파가 달걀 세 개에 팥 닷 곱을 사러 왔다. 싸전은 아니지마는 일본식으로 잡곡을 놓아 둔 것이다. 팥은 병화가 되어주고 달걀은 필순이 집어주었다. 이것은 맞돈이라 노파가 일원짜리를 내주니까 필순이 주판을 재꺽재꺽하더니 조그만 철궤를 쩔그렁 열고 79전을 거슬러 준다.
"얼마를 거슬러 주었어?"
"79전요. 팥이 9전, 달걀이 4전씩 12전이죠?"
"응!"
하고 병화는 웃었다.
경애는 두 사람의 일거일동을 빤히 노려보고 있다가 깔깔깔 웃는다.
"똑 갈맞는 양주 같구려. 아주 익숙한 품이 몇 해 해본 사람들 같은데!"
경애는 둘이 젊은 내외처럼 은근성스럽게 의논을 해가며 물건을 파는 양을 보고, 저러다가 아주 떨어지지 않게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투기가 나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서투른 솜씨로 잘못 팔까보아 애들을 쓰는 것이 가엾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술이나 먹고 게걸거리고 다니던 병화가, 이렇게 벗어부치고 나서서 서둘러대는 것을 보니 이번 일이야 영리 사업이라기보다도 까닭이 있어서 하는 일이지마는, 어쨌든 무얼 시키나 쓸모가 있고 평생 굶어죽을 사람 같지 않다고 속으로 기뻐했다. 지금 세상에 이만한 활동력이 있고 게다가 돈이나 살림에만 졸아붙을 위인이 아니요, 무어나 큰일을 해 보려는 뜻을 가진 청년도 드물겠다고 생각하면 한층 더 믿음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솟는 것이다. 뜻 맞은 손아래 오라비 같은 귀여운 생각도 든다. 그럴수록 필순에게 대한 막연한 질투심이 머리를 드는 것 같아서 겉으로는 웃음으로 그런 잡념을 쓱쓱 지워버리나 속으로는 애가 쓰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경애 자신이 이 상점을 잡아차고 들어앉고 싶은 생각은 아무래도 아니 났다. 실상은 경애가 먼저 앞장을 서서 찬성하고 서둔 일이나 벗고 나설 용기가 나지는 않는다. 발론의 시초는 조그만 화장품상이나 잡화상- 그렇지 않으면 털실이나 레이스니 하는 것을 주로 삼고 어떤 여학교 하나를 끼고서 학용품상을 벌여볼까 한 것이었다. 물론 자본금은 상훈에게 기댈 작정이었다. 상훈도 경애가 나서서 한다면 대어줄 듯이 찬성이었다.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면- 급히 돌아가지 않으면 이것도 저것도 허사겠지마는, 돌아가만 놓으면 돈 몇천 원이고 못 들리랴 싶어서 아무려나 해보라고 반승낙은 한 것이었다.
그러자 마침 지금 이 상점자리가 난 것이다. 이 상점은 400원에 쌌다. 바커스의 주부가 새어 든 것이다.
방물장사니 잡화상이니 하고 의논이 분분한 판에 주부가 아는 일본 사람으로, 얌전하게 반찬 가게를 하다가 남편이 노름에 몸이 달아서 거절이 나니까, 홧김에 넘기려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사서 해보겠느냐고 지나는 말로 한 것이 의외로 얼른 낙착이 난 것이다. 처음에는 집값이 2000원, 전화 300원, 현물 500원이란 금이었으나, 집은 사글세 30원, 전화도 세로 정하고 남은 물건만 400원에 넘겨 맡은 것이다.
등이 달아서 넘기는 것이니, 사는 사람으로서는 손은 안 되었다. 그러나 집은 다른 작자라도 나면 팔 작정이라는데, 일본 사람 촌이 되어가는 이 좌처를 빼앗기면 안 될 터이니 이왕이면 곧 사는 것이 유리하였다. 400원은 병화가 덜컥 치렀으나 집을 사저면 상훈이 셈이 피어야 할 것인 즉, 결국에는 조 의관이 돌아가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여기도 또 하나 있는 셈이었었다. 이제는 돌아갔으니 집을 사게 될 듯도 하다.
병화의 400원은 물론 피혁이 주고 간 속에서 나온 것이나, 경애의 명의로 치렀고 이 상점의 명의도 경애로 되어 있다.
피혁이 그 돈을 줄 때 반찬 장사를 하라고 한 것이 아니면야 병화도 그 돈을 헐어서 첫 번에 쓴 다는 게, 하고많은 장사 중에 하필 반찬 가게를 벌였으니 양심이 있는 놈 같으면 낯이 뜨뜻하였을 것이다. 피혁은 보도 듣도 못하던 김병화더러 애인과 같이 반찬 가게라 벌이고 생활 안정이나 하여서 살이나 피둥피둥 찌라고, 수륙 만리의 머나먼 길을 갖은 고초를 다 겪고 다녀간 것은 아니었다.
피혁이 그 돈을 줄 때 다만 홍경애의 손만을 거쳐 넘어가게 한 것이 실수라고도 할 것이다. 병화와 서로 철주할 만한 또 한 사람을 맞붙여 놓고 부탁을 하였더면, 저희끼리 헐고 뜯고 하여 지금쯤 병화는 얻어맞아도 상당히 얻어맞고서 경향간에 소문도 파다할 것이니, 병원 아니면 경찰서에 들어가 앉았을 것이요, 산해진의 간판도 비거 서남풍하였을 것이다.
사실인즉 산해진의 간판은 아직 안 붙였으니 동지간에 내용은 고사하고 병화가 일본 반찬 가게를 냈다는 소문도 아는 사람이 아직은 없다. 찾아오는 사람이 있더라도 두 번 부터는 절대로 발그림자도 못하게 단 거절할 적정을 병화는 단단히 하고 있는 판이다.
필순은 그게 걱정이었다.
"어제까지 오던 사람을 어떻게 야멸치게 못 오게 할 수야 있겠어요. 그러면 심사가 나서라도 짓궂이 더 와서 성이 가시게 할 것이요, 입을 모으고 무슨 훼방이라든지 놀걸요."
필순은 병화가 교제도 다 끊는다는 말을 들을 제, 자기도 자기도 아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찾아오는 사람을 냉대를 해서 보낼까가 적지않은 걱정이었다.
"아무러면 어떠리? 제까짓 놈들 뉘게 와서 흑책질을 할라구!"
병화의 팔심은 믿음직하기는 하지마는, 필순더러 모스크바로 달아나라고 한 지가 한 달도 채 못 되는 사람의 말이 이러하다. 필순은 안심이 지나쳐서 겁이 도리어 났다. 병화를 경멸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필순의 집은 이리 옮겨 왔다. 필순을 공장에서 들여앉히기 위하여 이 장사를 하는 것만도 아니요, 필순의 집에서 없는 살림에 공밥을 2,3 년 먹고 신세를 진 값으로 이 집 세 식구에게 살 도리를 차려주느라고 급히 벌인 장사도 아니다. 그러나 필순의 집 세 식구는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 또 필순은 가게를 보게 하고 부모는 안에서 살림을 하며 뒷배나 보아달라 하기에 십상 알맞았다. 경애는 처음에는 필순네는 식구가 많다고 반대하였으나 남의 사람보다는 나은 점이 쓸모라고 찬성하고 말았다.
필순은 요새 같은 깊은 겨울에도, 첫차가 나오는 소리가 뚜르르 나자 일어나서 가겟방에서 자는 병화가 깰까보아 조심조심 빈지를 열고 가게를 내느라면 병화도 지지 않고 같이 일어나서 남대문 장으로 서투른 자전거를 빙판 위에 달리는 것이다. 필순 부친도 조선옷은 안 어울린다 하여 고물상에서 주워온 헌 양복바지에 재킷을 푸근히 입고, 가게 속에 놓인 화로 앞에 나와 앉는다. 모든 것이 아직 초대요 연습이었으나, 평화롭고 전도에 빛이 보이는 것 같아서 흥이 났다. 필순은 첫차 소리를 듣고 일어나면 막차가 들어간 뒤라야 자리에 눕지마는, 고단은 하면서도 자릿속에서까지 물건값을 외고 파는 솜씨를 연구하기에 어느 때까지 잠이 아니 왔다. 요새는 공부하겠다는 생각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가다가다는 덕기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상점 구경을 오면 부끄러워서 어떻게 볼꾸? 하는 생각을 하고 혼자 얼굴이 붉어지다가도 파르스름한 점원복을 입고 익숙한 솜씨로 물건을 파는 양을 보여주고 싶은 충동도 일어난다. 그러나 벌겋게 얼어서 터진 팔목을 걷어올린 것도 보일 것이 걱정이다.
진창
덕기는 오늘 병화의 상점 구경을 나섰다.
초상 이후로 처음 출입이다. 복재기지마는 상제 대신 노릇도 하여야 하고, 집안 처리도 할 일이 많아서 바쁘기도 하였고, 정초에 나다닐 필요가 없어서 들어앉았다가 오래간만에 길 구경을 하는 것이다.
전차가 효자동 종점에 가까워졌을 때 덕기는 차 속에 일어서서 박람회 이후로 일자로 부쩍 는 일본집들을 유심히 보았으나 산해진이란 간판은 눈에 아니 띄었다. 차에서 내려서 되짚어 내려오며 차츰차츰 뒤지다가 좌등상점이란 간판이 붙은 가게의 유리문 안을 기웃해보니, 과실이 놓이고 움파니 미나리니 하는 것이 눈에 띈다. 담배도 있다. 담배나 한 갑 사며 물어보리라 하고 문을 득 여니 여점원이 해죽 나온다... 필순이다! 덕기는 주춤하며 뒤로 물러설 뻔하였다. 필순도 가슴에서 두 방망이질을 하며 얼굴이 화끈 취해 올라와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여기 계신 줄을 몰랐군! 김군은 있나요?"
덕기는 하여간 들어섰다.
"이리 올라 앉으세요. 이제 곧 오시겠죠."
조그만 다다밋방에는 이전 병화 방에서 보던 일깃거리는 밥상만한 책상이 놓이고, 화로 앞에는 방석 한 개가 깔려 있다.
덕기는 신기한 듯이 상점 안을 이 구석 저 구석 돌려보다가,
"어디 배달 나갔나요?"
하고 방문턱에 걸터앉았다.
"아녜요. 서대문 감옥에 나가셨에요. 이제 곧 오시겠지요."
필순은 부리나케 방 안을 치우고 방석을 내놓으며 권하였다.
"감옥에는 왜?"
"저번에 들어간 이들을 면회도 하고, 식사 차입도 하려고요. 벌써 가셨으니까 좀 있으면 오시겠죠."
필순은 덕기가 곧 간다고 할까보아 애를 쓰면서, 복제 당한 인사를 하고 싶으나 무어라고 한지 몰라 얼굴이 또 발개졌다.
감옥 친구에게 차입을 할 만큼 셈평이 핀 것도 고마운 일이지마는, 셈이 좀 돌렸다고 감옥 친구들을 잊지 않고 없는 돈에 차입이라도 하는 것은 무던하다고 덕기는 생각하였다.
"그런데 좌등이란 간판이니, 일본 사람 것을 샀나요?"
덕기의 이 말에 필순은 좀 의아하였다. 병화는 돈이 덕기에게서 나온 듯이 말을 하던데 덕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수작이다. 필순도 피혁이 돈뭉치를 두고 간 줄을 알기 때문에 이 상점도 그것으로 하는 줄 알았더니 병화는 절대로 그 돈이 아니라고 부인하여 왔다.
"그전 사람 이름인데 아직은 그대로 둔다나 봐요. 이 동네 단골이 떨어질까 봐서요."
그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대관절 돈은 누가 대는 것일꼬? 덕기는 역시 궁금하였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구지레한 양복쟁이 둘이 길거리에서 원광으로 기웃거리는 것이 내다보이다가 없어지더니, 또 조금 있다가 한 청년이 성큼 들어서며,
"좌등이 있소?"
하고 우락부락히 묻는다.
옷꼴이라든지, 길게 자란 머리라든지, 사꾸라 몽둥이는 아니지마는 이 겨울에 우악스런 단장을 짚은 것이라든지, 험상궂은 눈을 잠시 한때 가만두지 않고 두리번거리는 것이라든지, 형사도 아닐 것 같고, 전일의 병화가 다시 온 것 같으나, 필순도 보지 못한 사람이다.
"좌등이는 떠났습니다."
"그럼 주인이 누구요?"
"홍경애 씨예요."
"홍경애? 남자요? 여자요?"
"여자예요."
"그의 남편은 누구요? 바깥주인은 없소?"
"일보는 이 있어요."
"누구요?"
"김청 씨예요."
"그 김청이는 어디 갔소?"
"어디 나갔에요."
"당신은 누구슈?"
"나도 일보는 사람예요."
"당신이 김청이 부인이슈?"
"아뇨."
하고 얼굴이 발개지며 눈을 찌푸린다.
"그럼 김청이는 언제 들어오우?"
"모르겠어요."
청년은 첫마디부터 끝마디까지 훌닦아세우는 소리를 하다가 휙 나가버린다.
"누구세요? 왜 그리세요?"
필순은 쫓아나가며 물었으나, 그 괴상한 청년은 대답도 없이 뺑소니를 친다.
"일본 사람을 찾아온 것 같지도 않고 김군을 아는 모양도 아니요, 얼른 보기에는 쌈하러 다니는 장사패나 주의자 같지 않은가요?"
"글쎄 말씀입니다."
필순은 눈을 깜짝거리며 얼굴이 해쓱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섰다.
"친구들은 여전히 쫓아다니겠지요?"
"별로 오는 이도 없에요. 얼마 동안은 관계를 끊겠다 하시는데."
"그래 김청이라고 행세를 하는군요? 형사들은 안 오나요?"
"예, 형사들은 이렇게 맘을 잡고 실속을 차리게 되어서 마치 환자가 병이 나면 의사가 파리채를 날리듯이, 저의 벌이가 안 되겠다고 놀리면서도 어쨌든 고마운 일이라고 저희들 집에도 통장을 트자 하고, 친구들도 단골을 몇 군데 소개까지 해주다시피 좋아들 하지요."
"흥, 그러나 으레 형사들의 버릇으로 다른 데 가서 김 아무개는 이젠 아주 전향해서 돈벌이에 맛을 들이고 어쩌고 한다고 선전을 할 것이니까, 친구들이야 변절한이라고 가만 있지 않을걸요."
덕기는 지금 왔던 청년이 병화를 문책하러 온 동지일 것이라는 말눈치를 보인다.
"선생님은 그런 것도 벌써 짐작하고 계셔요?"
"흐흥!"
덕기는 친구가 무슨 봉변이나 아니 당할까 염려가 되었다. 그러나 병화가 정말 경애가 시키는 대로 겸노상전으로 반찬 가게의 배달도 못할 것은 아니요. 또 먹고살자면 사내답게 벗고 나서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는 것이지마는 그렇다고 동지를 배반하고 형사들의 도움까지부터 형사의 도움을 받자는 것이 아니요, 또 이용할 수 있으면야 이용한대도 상관이 없는 일이지마는, 병화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문제를 삼자면 얼마든지 삼을 수 있는 것이다.
"홍경애가 돈을 내놓았어요?"
덕기는 주인이 경애라고 하던 말을 생각하고 물었다.
"그렇다나 봐요."
얼마나 들었는지는 모르지마는 경애에게 이만큼 벌일 돈이 있을까? 결국에 부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병화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는가? 알은척하기도 싫은 일이나 역시 궁금하다.
"하여간 어떠슈? 고되시지요?"
덕기는 한참 제 생각에 팔렸다가 은근히 물었다.
"고될 거야 무엇 있어요. 처음 해보는 일이라 손 서투르고 애가 쓰여서요..."
서로 이런 퉁사정을 할 만큼 어느 틈에 친해졌는가? 하고 필순은 신기한 일 같고 남자의 얼굴이 다시 치어다보인다.
"실상은 좀 더 공부를 하시게 하였으면 하는 생각들을 했지마는 아무거나 경험 삼아 해볼 데까지는 해보는 것도 좋겠지요. 하지만..."
덕기는 또 한참 만에 말을 꺼내면서 병화의 편지에 필순의 일은 너 알아 하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모처럼 재미를 붙여서 하는 것을 또 다시 마음을 헛갈리게 하면 안 되겠다 생각하고 말을 끊어 버렸다.
필순은 덕기의 뒷말을 기다리고 한참 섰다가,
"공부를 할 처지도 못 되죠마는, 저 따위가 무슨 공부를 하겠어요."
남자의 말을 다시 끌어내려 하였다.
"어쨌든 필요한 때 말씀만 해주시면 좋을 대로 의논이라도 해 드리지요."
덕기는 퍽 대담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어쨌든 마음 먹은 대로 한 마디 표시를 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이런 호의를 필순이 혹시 의심하거나 오해하지나 않을까 염려도 되었다.
필순은 확실히 반기는 낯빛이다. 얼굴이 발개지며 입 속으로 무어라고 대답을 하는 모양이나, 덕기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아마 고맙다는 말일 것이다.
"야아, 어려운 출입 했네그려."
병화는 문전에 자전거를 세우고 소리를 치며 들어온다. 오늘은 양복 외투에 의관이 분명하다.
"오늘은 신사가 되어서 말공대가 변하였다.?"
"물건을 사러 와보게그려."
"그럼 마마콩 일전 어치 사 볼까."
하고 덕기는 지갑을 꺼내는 체한다.
"예예, 고맙습니다. 그러나 저희에게는 그런 구멍가게 물건은 없습니다."
필순은 생글생글 웃다가,
"그런데 조금 아까 수상한 사람이 왔어요. 형사 모양으로 으르딱딱거리고 갔는데 또 올 눈친가 봐요."
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병화는 다 듣지도 않고,
"응, 알았어. 염려 없어."
하고 말을 막는다.
"오시다가 만나셨에요?"
"아니, 만나지는 않았지마는 별일 없는 거야."
병화는 태연히 웃어 보이나, 별일 없는 것이라는 그 말이 별일 있다는 반어로 들리었다.
"뭉둥이찜을 하러 온다네. 누구라든가 하는 일본 형사하고 동사를 한다든가- 형사가 돈을 대주어서 한다는 소문이 났다네그려."
덕기가 실없이 넘겨짚는 소리를 하니까 병화는,
"잘 들어맞혔네."
하고 웃다가 덕기를 끌고 안으로 들어간다. 상점방에 연달린 방은 다다밋방이요, 다시 곱들어서면 거기는 온돌방이다. 덕기는 거기서 필순의 모친을 만났다. 바느질을 하고 앉았다가 반색을 하며 일어나서, 복제 인사를 하고 피해 나간다.
필순의 집까지 이리로 떠나온 것을 보고 덕기는 또 의아했다. 얼른 보기에 변화는 이 집 사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었나?"
필순의 모친을 내쫓고 둘이만 마주 앉아 병화가 말을 꺼낸다.
"왜? 사실은 사실이지?"
덕기는 자기의 실없는 말이 들어맞았는가 싶어서 도리어 속으로 놀랐다.
"설마 그럴 리야 있나마는, 일부에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가 보이. 지금 감옥에를 갔더니 그 속에 들어앉은 사람까지 벌써 내가 이일을 벌인 것을 알지 않겠나. 누가 면회를 가서 내 말을 했던가 보네마는 아까 왔다는 게, 물론 그 축일 듯하기에 말일세."
"애초에 그자들과 발을 뚝 끊어버린 것이 잘못 아닌가. 양해를 얻어둘 일이지."
"그까짓 자식들과 양해는 무슨 양해인가. 공연히 헐고 다니는 축은 우리 편과는 또 다른 xx파니까. 말하자면 기분적 테러-폭력단-들이거든."
"그럼 자네 패에서는 어떤 모양인가?"
"우리 패야 얼마 남았나. 하지만 그 사람들도 지금 와서는 옹호한다느니보다는 방관하는 모양이지. 어쩌면 직접 내게 맞닥뜨릴 수가 없으니까, 저자들이 떠들고 다니는 것을 속으로는 도리어 좋아라 하고 구경이나 하거나, 부채질을 하는 모양일 터이지."
"그러니 말일세. 왜 별안간 고립을 해버리나? 게다가 형사들의 주선을 받고 하니까, 더 의심을 받게만 되지 않겠나?"
"그야 상관 없어. 의심을 받거나 말거나, 그놈들이 와서 두들겨 패거나 말거나... 그렇지만 자네에게 하나 부탁할 게 있네..."
"무어?"
"내가 이걸 시작할 때 벌써 1000원 가까이나 쓰고 앉었네. 이 점방을 넘겨오는 데는 400원밖에 안 들었지마는 무슨 물건이 변변히 있던가. 그래서 5,600원 어치나 우선 들여놓았는데..."
덕기는 돈 말이 나오는구나 하고 들을까 말까 하는 것부터 속으로 생각하며,
"그래 그 돈은 불시에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하고 말허리를 자른다.
"어디서 나왔든지간에 말일세. 어쨌든 그 돈이 자네에게 나왔다고 누구에게든지 해왔으니 무슨 일이 있어서 조사를 당하든지 또는 무릎맞춤을 할 경우에는 전향하고 장사를 한다기에 자네가 1000원을 무조건으로 나를 취해 주었다고만 대답해주게. 그리고 1000원의 수수(주고받은 것)는 자네 조부가 돌아가시기 전에 조부가 가지셨던 현금을 꺼내다가 병원에서 주었다고만 해 주게."
덕기는 혼자 깔깔 웃었다.
"그거 어렵지 않은 일일세. 그런 헛생각이면야 얼마든지 내줌세마는, 그래 그 1000원이란 것을 어디서 나온 것이기에 그렇게 쉬쉬 하는 건가?"
"그걸 말한 지경이면야 자네게 이런 얼뜬 부탁을 하겠나!"
"형사- 저쪽에서 돌아나왔다는 게 사실인가?"
"자네두 미쳤나? 설마 그렇게 사귀었단 말인가?"
하며 병화는 분연해 보이면서,
"그럼 자네는 어서 가게."
하며 창황히 일어선다.
"왜 이리 축객인가? 좀 더 이야기하세."
"그자들이 또들 올 거니까 자네가 있으면 재미없네."
"그러면야 더구나 갈 수 없지 않은가?"
"흥! 자네 따위 샌님이 한몫 거들어주려나? 자네 같은 부르주아는 어설피 걸리기만 하면 뼈도 추리기 어려울걸세. 허허..."
하며 병화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양복을 벗고 점원 옷으로 부덩부덩 갈아입는다.
"부르주아는 두부살에 바늘뼈던가! 그는 하여간 자네 지금 편쌈판에 나가나?"
덕기는 구두를 신고 내려서며 웃었다.
"편쌈도 하고, 일도 보고..."
병화는 유산태평으로 껄껄 웃는다.
덕기는 그래도 그대로 갈 수가 없어서 잠깐 서성거리니까 문이 드르르 열리며 아까 왔던 청년이 문밖에 우뚝 서서 병화를 건너다보고 고갯짓으로 불러낸다. 병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나서며 덕기더러,
"그럼 자넨 어서 가게. 내일 모렛새 만나세."
하고 나가다가 문안에 진흙 발자국이 드문드문 몹시 난 것을 보자 필순을 돌아다보며,
"이거 웬 흙이 넉절했나. 좀 쓸어버려요."
하고 소리를 친다. 필순은 대답을 하며 쫓겨나왔으나 이런 것 저런 것 경황이 없었다.
밖은 한나절 녹인 땅이 벌써 꺼덕꺼덕 얼어간다. 두 청년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 눈치도 없이 넘어가는 햇발을 비껴 받으며 전차 종점으로 걸어간다. 필순과 덕기는 쓸쓸한 뒷모양을 바라보다가 전차 종점에서 오른쪽을 꼽드려 가는 것을 보자 덕기는 잠깐 다녀오마 하고 따라선다. 필순은 덕기마저 걸려들까 보아 애가 쓰이기도 하나 말릴 수도 없었다.
그들이 추성문으로 돌쳐서려 할 제 병화가 휙 돌려다보더니 덕기가 뒤를 밟는 줄 알자 가락 손짓을 하며 멈칫 섰다. 덕기가 줄달음질 쳐 가는 것이 멀리 보인다. 기다리고 섰던 병화와 잠깐 무어라고 하더니 덕기는 돌쳐서 다시 온다.
"무어라고 해요?"
모녀가 나란히 보고 섰다가 소리를 친다.
"추성문 안으로 해서 삼청동 친구의 집으로 간다는군요. 삼청동 110번지로 가는데, 한 시간 안으로 올 것이니 아무 염려 말라기는 하나 내가 쫓아간대도 별수는 없을 거요, 집에 좀 가 봐야는 하겠고..."
덕기는 집에서 저녁 상식을 안고 지내고 자기를 기다릴 것을 생각하면 어서 가 보아야는 하겠다. 한 번쯤 상식 참례를 안하기로 상관없을 듯하나 첫 삭망도 안 지낸 터에 아직은 여편네들에게만 맡겨서 지내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슨 핑계같이 알 것이 안 되기도 하였다.
"암 그러시죠.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필순의 모친은 이렇게 대꾸를 하여주면서도 속으로는 역시 애가 쓰여서,
"너 아버니는 어디 가서 이때껏 안 오시니?"
하며 걱정을 한다.
"하여간 오시거든 곧 좀 가보시라 하시지요. 나도 집에 가서 상식만 지내고 도 오지요.
덕기는 자기 집에 전화를 걸어놓고 갔다.
필순이 한소끔 모여드는 손님을 혼자 치르고 나니까, 벌써 전등불이 들어왔으나 간 사람은 감감하고, 부친도 돌아오지를 않는다. 모친은 저녁밥을 지어 놓고 나와서 마주 붙들고 걱정을 할 따름이나, 어떻게 하는 수도 없다. 무슨 일을 꼭 당하는 것만 같아서 입의 침이 바짝바짝 마를 뿐이다.
필순은 시시각각으로 문밖에 나가서 병화가 가던 추성문 쪽을 뿌연 열사흘 달빛에 비쳐보고 서서, 검은 그림자만 가까이 와도 가슴이 덜렁하고 올라오는 전차 속에 비슷한 사람만 띄어도 반색을 하였으나 모두 눈속임이었다. 6시나 되어 덕기에게서 전화가 왔다. 상식을 지내고서 거는 모양이다. 그저 감감 무소식이란 말을 듣고 누구나 사람을 얻어서라도 보내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자기는 밥을 먹고 오마 한다. 여기서도 사람을 구해 보낼 생각은 있으나 아주 낯 서투른 사람을 보낼 수 없이 부친만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판이었다.
"어머니, 암만해두 제가 갔다 와야 하겠어요."
필순은 또 모친을 졸랐다. 벌써부터 필순이 나서겠다는 것을 모친은 날이 저물었는데 달은 있다 하여도, 어린 딸을 내놓아서 삼청동을 헤매게 할 수가 없어서 조촘조촘하고 붙들어둔 것이다. 필순 역시 가게를 모친에게만 맡겨 두어서는 손님이 와도 담배 한 갑을 변변히 팔 수가 없을 것이 걱정이 되어 멈칫거렸으나, 부친도 이렇게 늦은 것을 보니, 어디서 섰다. 이제는 모친도 잡지를 않았다.
이런 때 경애나 와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나 오늘 온종일 경애는 얼씬도 안 하고 하루 해가 졌던 것이다.
필순을 내보내 놓고 모친은 안절부절을 못하며 문을 열고 내다보고 섰으려니, 전화가 또 따르르 운다. 이번도 덕기에게서 온 것이다. 덕기는 필순이 갔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삼청동으로 다녀서 오마고 한다. 그만만 해도 적이 마음이 놓인다.
그런 후에도 얼마 만에 우비 씌운 인력거 한 채가 쭈르르 오더니 상점 앞에 뚝 선다. 쓰러질 듯이 내리는 사람은 홍경애다.
이 여자가 언젠가처럼 또 취했나보다 하는 얄미운 생각이 나면서도 반가웠다.
"어디루 오슈?"
"병화씨, 병화씨 없에요?"
두 사람의 말은 동시에 마주쳤다.
"병화씨는 벌써 아까 해 있어서..."
하고 필순의 모친은 대답을 하다가 깜짝 놀라며,
"이거 웬일이요?"
하고 경애의 왼편 뺨을 가까이 들여다본다. 한쪽 볼이 부풀어오른 데가 퍼렇게 멍이 들었다 불빛에 자세히 보니 부은 편도 눈도 충혈이 되고 작아졌다.
필순의 모친은 가슴이 서늘해지며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자기 딸의 얼굴이었다.
"그럼 그 때 나가서 안 들어왔에요? 누구 하구?"
경애의 목소리는 울음 섞인 것처럼 콧소리로 약간 떨었으나 주기도 없지는 않았다.
"글쎄, 그래서 지금 필순이를 쫓아보내고 기다리는 중인데, 대관절 어디서 저렇게 되었소?"
경애는 입을 악물고 눈물이 글썽글썽하다가, 거기에는 대답을 안하고,
"인력거꾼부터 보내주셔요."
하고 방문턱에 주저앉아 버린다.
인력거꾼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화개동 청요릿집에서 왔다고 한다. 저 부르는 대로 80전을 한푼 깎지 않고 주고, 급히 들어와서 그 청요릿집에 누구 누구 있었더냐고 물어보았으나 경애는,
"아실 것 없에요. 나 혼자 있었에요."
할 뿐이다. 경애까지 이렇게 된 것을 보니 나간 사람들이 모두 무사하지는 않으리라는 또한 가지 애가 늘었다.
아무리 물으나 경애는 잠자코 앉아서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다가 눈물이 똑똑 떨어뜨린다. 지금 욕을 보던 것을 생각하고 분에 못 이겨서 쓴 눈물이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 따님은 어디로 찾아나선 것인가요?"
경애는 한참만에 목소리를 가다듬어가지고 묻는다.
"삼청동 110번지라던가요?"
경애는 발딱 일어선다. 두 눈은 금시로 마르고 어쨌든 찾아나서겠다고 살기가 쭉 내솟은 눈치다.
"에구 천만에! 이러고서 또 어디를 가신단 말요. 조덕기 씨도 간다고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십시다."
필순의 모친은 지성으로 말렸으나, 이 근처 인력거방이 어디냐고 연해 물으며 쏜살같이 달아난다.
필순의 모친이 쫓아나가 보니 경애는 인력거방을 찾아가는지 종점 편으로 종종걸음을 쳐 간다. 아까 인력거에서 내릴 때는 곧 쓰러질 것 같더니, 저렇게 생기가 돋아난 것을 보면 악이 받쳐서 그렇기도 하겠지마는 자기만 곤욕을 당한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병화가 붙들려갔다는 바람에 발악이 난 모양이다.
경애는 인력거방을 찾느라고 진명 여학교 편으로 꼽드리려는 모양이더니, 주춤 서며 멀리 바라보는 거동이다. 이것을 본 필순의 모친도 정신이 홱 돌며 큰길로 나서서 부연 달빛에 비쳐보니, 검은 그림자 한 떼가 이리로 향하여 온다. 설마 이 밤중에 추성문으로 넘어오랴 싶었으나, 경애가 곧장 달아나는 것을 보고는 필순의 모친도 정신없이 뛰기 시작하였다.
의외다! 좌우로 부축을 해서 앞에 선 사람은 분명히 자기 남편이다. 그 뒤에 경애가 달아나서 매달리듯이 붙드는 사람은 병화이었다.
"이게 웬일이냐? 에구머니 생사람을 이게 무슨 이리냐?"
모친은 숨이 턱턱 막히며 우는 소리를 떤다.
"떠 떠 떠들지 마라..."
딸과 외투 입은 원삼에게 부축이 되었는데, 그래도 걸음은 싱싱히 걷는다.
"먼저 가셔서 자리를 펴노셔요. 방에 불이나 때 노셨는지?"
배두루마기 위에 외투를 입은 덕기가 병화 옆에서 걸으며 주의를 시킨다.
필순의 모친은 허둥지둥 앞서 달아난다.
"처음엔 청요릿집에 갔었습디까?"
하고 경애가 묻는다.
"청요릿집이라니?"
병화는 코피가 나서 손수건을 오려 막았기 때문에 코먹은 소리를 하나 흥분한 기운꼴 찬 음성이다.
"그럼 청요릿집 안 가셨구려? 망할 놈들."
"청요릿집에 붙들려갔던 게로군?"
"그렇다우. 어떤 놈들이 바커스로 와서 당신이 급히 오란다고 하기에 따라갔더니 세 놈이나 앉아서 찧구 까불구 마냥 먹구..."
경애는 치가 떨리는 소리를 한다.
"그러기로 당신까지야 그럴 게 무어 있나."
덕기가 한마디한다.
"손은 대지 않았겠지?"
병화가 천천히 묻는다.
"동네 건달 같은 놈들이데 무슨 짓은 안하겠기에!"
경애는 악을 바락 쓴다.
"어떻게 합디까? 때립디까?"
병화는 자기 맞은 것은 여하간에 경애에게까지 손찌검을 했다는 데에 가슴이 아프고 분통이 터졌다.
"차차 이야기하죠. 한데 어디를 다쳐셨소? 결리거나 쑤시진 않우?"
"쑤시긴... 아무렇지두 않지마는 코피가 좀 나서..."
병화는 의외로 태연하다.
"어디서 뒹굴었기에 모두 진흙투성이슈? 몇 놈이나 돼요?"
"모두 여섯 좀이나 되지마는 술 먹은 세 놈이야- 아마 그놈들이 청요릿집에 온 놈이겠지마는- 도리어 혼 좀 났을걸..."
겨우 상점 앞에 와서 불빛에 보니 그 꼴이란 당사자들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을 두고 녹인 수렁이 거죽만 살얼음이 잡힌 데서 30분 넘어나 뒹굴었으니, 양복은 진흙으로 배접을 한 거나 다름없고 손과 얼굴이란 차마 볼 수가 없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필순의 부친은 오히려 얼굴은 상한 데가 없으나 병화의 양복은 넉절을 한 진흙 위에 선지피가 고랑을 져서 흐르고, 입가는 사람 잡아먹은 범의 입이 저럴까 싶었다. 오른손등은 깨물렸는지 살점이 뚝 떨어져 나가고 그저 피가 줄줄 흐른다. 문전에 구경꾼이 모일까보아서 옆 골목으로 해서 안으로 데려다 놓고, 씻기고 벗기고 하기에 한창 부산하였다. 그 동안에 덕기는 이때껏 따라온 인력거꾼에게 후히 행하를 하여 돌려보냈다. 이것은 수하동서 타고 간 인력거꾼이다. 인력거는 삼청동 편 돌층계 아래에 놓아두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다시 추성문 안으로 넘어가서 끌고 갈 모양이다. 덕기는 인력거를 타고 화개동으로 가서 '바깥애' 원삼을 불러가지고 앞장을 세웠으나 무슨 일이 있을까 보아 인력거꾼까지 응원대로 데리고 다닌 것이었다.
그다음에 덕기는 원삼을 시켜서 가게 빈지를 얼른 들이게 하고 일변 전화통에 매달려서 자기 집 단골 의사를 불러냈다.
그들은 일곱 사람의 작당이었다. 실상 그중에서 한 사람만이 모든 내용을 알고, 이 한 사람이 지휘를 한 것이다.
한 사람에게 두 사람씩 매달려서 붙들어갔다. 맨 먼저 출입한 필순 부친이 근처에서 장맞이를 하던 사람에게 붙들려갔고, 병화를 지키던 한 패는 병화가 상정에서 뛰어나와서 내려가는 전차를 휙 집어타는 바람에 놓치고서 돌아올 때까지 반나절이나 장맞이를 하여 잡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도 제일 곤경을 치른 사람은 경애이었다. 보지도 못한 사람이 와서 병화가 술이 몹시 취했는데 당신만 데려오라고 야단이니 잠깐만 가자고 서두르는 바람에 쫓아나섰던 것이라 한다. 안국동서 전차를 내려서 화개동 마루턱의 조그만 더러운 청요릿집으로 끌고 들어가는 대로 따라 들어갔더라 한다.
"병화 어디 갔나?"
"병화? 그놈 벌써 지옥 갔네. 만나고 싶건 지옥 가서 찾게."
저희끼리 이런 수작을 할 때는 겁이 또다시 더럭 나고 불한당 굴에 붙잡혀 왔구나! 하며 떨리었다. 경애는 어떡하든지 빠져나오려고 앙탈도 해 보고 꾸짖어도 보고 강권하는 대로 고분고분히 술잔도 들어보고 하였으나 기회를 엿보다 일어서려면 한 놈이 문부터 가로막는 데에 하는 수가 없었다. 그런 중에도 듣기 싫은 것은 병화에 대한 욕설이요, 또다시 놀란 것은 무턱대고 돈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돈이라는 말에 경애는 어찔하였다. 모든 비밀이 탄로된 줄로만 알았었다. 병화도 그 때문에 벌써 붙들려가지나 않았나 애가 쓰이고 이 사람들이 형사들의 끄나풀이 아닌가도 싶던 것이었다. 그러나 경무국의 기밀비를 먹은 것을 내놓으라고 얼러대는 데에 가서 경애는 겨우 안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경무국에 드나들었나? 5000원 나왔다더구나? 김병화에게 2000원 주어서 장사시키면야 3000원은 남았겠구나? 우리들에게 그것만 슬쩍 주면 우리 대장에게고 뉘게고 시치미를 떼고 눈감아버릴 것이요, 당장에라도 보내주꾸나."
이렇게 얼러도 대고 달래기도 하는 것을 듣고는 비로소 안심도 되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었다 한다.
"김병화에게로 가십시다. 그러면 김병화하고 의논을 해서 결정집시다그려."
경애는 곧 들을 듯이 좋은 낮으로 선선히 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를 않았다. 나중에는, 뺨을 갈기며 위협을 하였다. 이러기를 두세 시간이나 하다가 저희도 하는 수 없던지, 수군거리고 나서 병화를 부르러 간다고는 하였으나 이제는,
"너 가라- 난 싫다."
하고 저희끼리 서로 밀고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에 경애를 데려온 지가 술이 덜 취하였다 하여 어름어름 나가더니, 얼마 만에 데려온다던 병화는 안 오고, 또 다른 나이 지긋한 청년을 데리고 들어왔더라 한다. 주정꾼에게 또다시 실랑이를 받고 앉았던 경애는 하여간 맑은 정신을 가진 청년을 만난 것만 다행하였으나 이번에야말로 불한당의 두목이 들어온 것 같아서 속이 떨렸다.
이 청년이 쑬 들어서면서 배반이 낭자한 것을 보고 두 주정꾼을 나무랐다.
"무슨 술들을 웬 돈이 있어서 이렇게 먹는 거야? 저리들 나가!"
하고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치니까, 두 청년이 쥐구멍을 찾듯이 슬슬 피핸 나가는 것을 보고 경애는 어쨌든 마음이 시원하고 이 청년이 도리어 믿음직한 것 같기도 하였었다.
"언제 오셨나요?"
그 청년은 경애더러 앉으라 하고 점잖이 말을 붙였다. 경애는 이자가 시킨 일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밉고 분하면서도 점잖은 수작에 더욱 마음이 놓이기는 하였다.
"당신이 나를 꾀어 왔소? 당신이 누구요?"
하고 경애는 덤벼들었다.
"나는 김병화군의 친구요. 미안하게는 되었습니다마는 묻는 말씀을 한마디만 분명히 대답을 해주시면 곧 가시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꺼내놓고 병화의 쓰는 돈의 출처를 대라는 것이었다.
"남의 돈 쓰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까요? 그까짓 말 묻자고 바쁜 사람을 속여서 이런 데로 끌어오셨나요?"
"그까짓 말이 아니라, 필요하니 이실직고를 하슈!"
"난 몰라요."
"그럼 이것부터 말을 하슈. 저번에 댁에 와서 묵고 간 사람 아시겠구려? 지금 어디 가서 있나요..."
경애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었다.
두 청년이 기밀비 5000원 논래를 하며 등을 쳐먹으려고 하는 것과는 달라서, 정통을 쏘며 족치는 데에 경애는 진땀이 빠졌었다. 달래고 어르고 하는 품이 여간 형사에 질 바가 없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서너 번 뺨까지 후려갈기며,
"너 같은 년이 농락을 부려서 김병화를 유혹하고 타락시킨 것이니까, 너부터 그대로 둘 수는 없다!"
고 곧 사람을 잡을 것같이 서둘렀다. 그런 말을 들으면 확실히 병화나 필순의 동지 같기도 하나 혹시는 동지인 척하고 속을 뽑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요, 설혹 동지라도 발설을 할 일이 못 되니 경애는 맞아죽는 한이 있어도- 하는 비장한 결심을 하였던 것이라 한다.
이렇게 부대끼기를 또 한 시간이나 하였을 때쯤 되어서 또 다른 보지 못하던 청년 하나가 기웃이 들여다보니까, 가만히 있으라 하고 나서는 수군수군하고 들어와서 '나는 바빠서 가기는 가지만 일간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게니, 잘 생각해 두었다가 그 때는 바른 대로 대야 돼!' 하고 의외로 뒤가 물게 총총히 가버리더라 한다.
이것은 병화를 불러다놓았다는 기별이 왔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병화는 일장 설화를 가만히 돋고 누웠다가,
"미안하우. 애썼소."
하고 위로를 할 따름이다.
그러나 경애는 그러고도 또 주정꾼들에게 붙들렸더라 한다.
"막 나오려는데 어디 숨었었던지 그 두 놈이 화닥닥 나오는 것을 보고는 참 정말 눈물이 핑 돌아요. 그래 하는 수 없기에 이번에는 취한 사람을 덧붙여서는 안 되겠다 하고 또 얼마 동안을 살살 달래고 빌고 한 뒤에 셈을 해오라고 해서 요릿값을 선뜻 치러주니까 그제야 좀 마음이 풀리겠지요."
"그럼 술 사먹여가며 매맞은 셈쯤 되었구려?"
필순의 모친은 옆에서 남편의 허리를 주물러가며 분해 못 견딜 듯이 한 마디한다.
"그건 어쨌든지 저희끼리도 말이 외착이 나니 그 웬일예요?"
하고 경애는 부은 뺨을 쓰다듬으며 묻는다.
"응, 하편에서는 기밀비니 어쩌니 하고, 두목가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하니까 말이지?"
병화가 얼른 알아듣고 대답한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한두 사람 이외에야 아나. 그 아래서 노는 사람들이야 제멋대로 떠들 것이 아니겠소. 그뿐 아니라, 그 두 사람은 진정한 동지도 아니요, 말하자면 여기 집적 저기 집적 하고 돌아다니는 덜렁꾼이거든."
"내 그저 그런 듯싶더군! 기밀비 3000원이 어디 있는지 저희들이 먹겠다고 허욕이 나서 덤비는 수작이 왜 그리 덜 익었누 했지."
경애는 비로소 생긋 코웃음을 쳐 보인다.
"그따위 위인들이 무얼 하겠다고 하는 건가? 거기도 직업적 브로커가 있군."
덕기가 분개를 하며 비꼰다.
"그러게 누가 탐탁히 일을 시키나! 그렇지만 그런 사람도 있어야 되거든! 무슨 일이나 혼자 하는 줄 아나? 우선 오늘 일만 해도 경애씨를 후림새 있게 불러오는 데 난봉깨나 피어보고, 덜렁대는 그런 모던 보이가 적임자요, 또 김병화가 기밀비를 먹었다- 하는 소문을 내놓자면 말일세. 그런 위인이란 저희 집 재산을 다 까불리고 이제는 요릿집은 고사하고 술 먹을 밑천도 없고 기생집에 가야 푸대접이요, 다마쓰기도 돈 들고 집에 들어앉았자니 갑갑하고 하니까, 일이 있으나 없으나 서울이 좁다고 싸지르는 축이니 발은 넓어서 안 가는 데가 없으니까, 필요한 때 무슨 말 한마디만 들려 내보내면 신문 호외 이상으로 당장 그 소문이 짝 퍼지네그려. 따라서 또 그 대신에 소문을 알아들이는 데도 그만큼 유용한 정보망이 없다네. 내가 이런 장사를 벌인 것도 그런 사람을 먹여 기르자는 것일세."
"흥, 붉은 맹상군일세그려? 하지만 아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고 모가지 두엇 가자고 다녀야 하지 않겠나?"
"그야 주의를 해야지. 하지만 그 대신에 잘 양성만 해놓으면 그중에서 정말 동지를 얻을 수도 있거든.“
장훈
필순의 부친의 신음 소리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하던 이야기를 가다가다 뚝 그치고 시계들을 치어다보며 그만 하면 올 때도 되었는데- 하고 의사를 기다리곤 하였다.
필순의 아버지는 실상 아무 까닭도 없이 볼모로 붙들려가서 이런 횡액에 걸린 것이다. 병화가 늦기 때문에 공연히 거래를 한 것이지마는 원래 그 축에서는 이 사람을 무능은 하여도 원로격으로 대접하는 터이므로 그 집 속에서는 경애와 같은 곤경은 치르지 않았었다. 묻는 것이 있으면 아는 대로 대답할 뿐이요, '산해진'에서 점방을 보살펴주는 것도 상말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해서 전후 체면 없이 앉았는 것이 아니라, 병화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모르되 그것을 도와주는 셈이라고 병화의 변명도 하여주었다. 병화가 와서 주인과 단둘이 격론을 하고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에 무사히 병화와 함께 풀려 나왔던 것이다.
나와서도 큰길로 총독부 앞을 돌아만 왔더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야기가 무사타첩된 데에 마음도 놓였고 밤이 든 터도 아닌데 경무대 앞만 빠지면 바로 거기니 길을 돌 묘리가 없어서 추성문으로 들어서려고 마악 돌층계를 올라서자니까 우선 비쓸하는 놈과 병화가 딱 마주치며 어깨를 서로 스치고 지나쳤던 것이다. 물론 병화는 자기는 자신이 있으나 필순의 아버지를 위해서 잠자코 층계를 올라섰었다.
"되지 않은 놈, 어디서 빌어먹던 놈이야?"
주정꾼이 모른 척하고 지나려는 병화의 고작을 낚아채는 바람에 싸움은 시작된 것이다. 컴컴한 속에 어디에 매복을 하였었던지 이것을 군호로 서너 명이 소리도 없이 우중우중 나서는 것을 병화는 벌써 알아차리고 닥치는 대로 집어쳤으나 그러는 동안에 필순의 아버지는 대번에 나가 자빠져서 저 지경이 된 것이라 한다.
요행히 행인이 오락가락하고 동네에서 뛰어나오고 하여 법석을 하는 통에, 마침 일이 되느라고 필순과 덕기의 일행이 달려들어서 뜯어말려 가지고 온 것이다.
필순은 삼청동 110번지를 허위단심 겨우 찾아가니, 손님이 금방 나갔다는 말에 일편 마음이 좀 놓이기도 하나 기운이 풀어지며 되돌아 나오려는데, 인력거에서 내린 덕기가 인력거 등불을 앞세우고 원산과 이리저리 집을 찾는 것과 마주쳤던 것이다.
필순은 세상에 나와서 이때같이 남의 정이 고마운 것을 몰랐고, 이 때같이 덕기에 대하여 감사와 감격에 남 몰래 가슴을 떤 때가 없었다.
"아무리 술들이 취하고 입을 모으고 헌 계획적 테러기로 대로상에서 광고를 치고 그게 뭔가. 바로 조금 가면 다리 건너 파출소가 있는데, 순사를 부르러 가느니 하고 법석들인가보던데 결국 누워서 침 뱉기 아닌가? 주책없는 것들!"
이야기 끝에 덕기가 이런 소리를 하니까 부친의 어깨를 주무르고 앉았던 필순은 덕기를 말끔히 치어다본다. 그 눈에는 점점 영채가 돋아오르며 입가에 웃음이 피어오르다가, 눈이 마주치자 찔끔하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자기도 한 마디, 아까 그 컴컴한 골목 속에서 타박타박 나오다가 덕기와 만났을 제의 감격을 이야기하려다가 만 것이다. 입밖에 내느니 보다도 그 기쁨, 그 감격을 가슴 속에 혼자만 깊이 깊이 간직해두는 것이 더 행복스러운 것을 느긋이 느끼는 것이었다.
의사가 왔다. 그이 시선은 우선 자리보전하고 누운 사람에게로 가더니, 다음에는 뺨이 부풀어오른 경애에게로 갔다. 안팎에 사람이 늘비하고 백만장자의 손자인 덕기가 앉아서 부르는 터이라 도대체 어쩐 영문인지 몰라서 의사는 눈치만 슬슬 보며 환자에게로 다가앉은다.
"허어, 늑골이 두 개가 상했군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원체 쇠약하신 모양인데, 바로 왼쪽 폐 위가 되어서 허..."
의사는 덕기의 얼굴을 치어다보며 기색을 살핀다. 덕기가 탐탁하게 뒷배를 보아 주어서 고쳐주려는지 그 기미부터 떠보려는 것이다.
"허어 그래요? 그럼 댁으로라두 곧 입원할 수 있을까요?"
덕기가 다가앉는다. 방 안은 긴장하여졌다. 의사는 알아차린 듯이,
"그게 좋겠죠. 우선 뢴트겐을 좀 봐야 하겠는데, 가까운 의전에 교섭해 볼까요?"
"어디든지! 보다시피 여기는 착박하구 한시가 급하니까."
덕기가 동독을 하는 바람에 의사는 몸이 가벼워져서 점방으로 나가 전화를 걸어 본다.
"밤중이라 뢴트겐은 어려우나 입원은 될 듯합니다. 어떠면 급한 대루 나하구 수술도 되겠죠. 이대루 두면 아무래두..."
의사는 여러 사람이 열좌하여 있느니만큼 대단한 의협심을 보인다.
이리하여 병화는 피가 난 턱밑과 손등에 약만 발라 달래서 일어나고, 필순의 부친은 서둘러서 입원을 시키게 하였다.
의사가 의전 병원에 있었던 관계로 전화로 당직인 친구를 불러내가지고 당장 입원을 시키고 밤을 도와 수술을 하게 되었다. 약관 조덕기의 한 마디 말이지마는 친석지가 된 조덕기의 소개다! 범연할 리가 없다.
병화도 입원하는 사람을 따라간다고 나섰으나 좌우에서 말려서 주저앉았다. 사실 몸도 아프거니와 필순 모녀가 따라가니까, 경애더러 혼자 집을 보랄 수도 없으니, 자기가 처지는 수밖에 없었다.
"누웠게. 자네 대신 내 감세."
덕기가 나서는 것은 의외이었다. 필순 모녀는 마주 보며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듯싶었다. 의사까지 따라 타고 택시는 떠났다. 집에서는 경애가 병화를 간호하며 묵을 차비를 차리었다.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앉으니 이제야 시장기가 든다. 필순의 어머니는 이때껏 아무도 손을 댄 사람이 없는 저녁 밥상을 내놓고 갔으나, 흥분된 끝이라 두 남녀는 저를 들려고도 아니하였다.
"병원은 어찌 됐누? 전화나 걸어볼까?"
하고 병화가 일어서니까,
"그만두세요. 내가 걸게. 찌개가 식기 전에 어서 잡수세요."
하고 경애가 앞장을 섰으나, 병화는 가만 있으라 하고 나가서 전화통에 섰다. 경애는 하는 수없이 외투를 들고 나와서 걸쳐두고, 방으로 다시 들어와 찌개를 화로에 놓는다.
"아무래도 지금 곧 수술을 할 모양이라눈군. 암만해도 좀 가 봐 주어야 하겠는데..."
전화를 걸고 들어온 병화는 망단해서 밥 먹을 생각도 없어졌다.
"그렇게 위중하대요?"
"수술만 하면 별탈은 없다지마는, 까닭 없는 조군이 밤을 샌다는데 내가 가만 있을 수야 있나! 조군은 또 어쨌든, 수술을 한다는데 모른 척할 수 있나."
"그두 그렇지만 어디 성하슈? 무정해 그런 게 아니라 하는 수 없는 사정이요, 덕기가 있어주마는 데야 당신이 가신다고 수술이 더 잘될 것도 아니요..."
경애는 아무래도 내보내지는 않을 작정이다.
"그야 그렇지만 인사가 되겠나."
"정 하면 내가 대신 갔다 오지. 그건 고사하고 성한 사람들이나 이 추운데 무얼 먹어야지요. 아주 여기서 무얼 시켜 보낼까?"
"응, 우선 그렇게 하는 게 좋겠지. 먹을 경황들도 없겠지만."
이번에는 경애가 점방으로 나가서 '소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소바' 집은 여기와 병원 새에 있으니까, 시켜 보내기에 뚝 알맞았다. 그 길에 병원에도 전화를 걸고 덕기를 불러내서 저녁을 시켜 보내니 필순 모녀를 먹이라고 일러 놓았다.
병화는 경애는 전화를 거는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필순네를 언제 친하였다고 저렇게 다정히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 고마웠다.
"벌써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15분만 하면 끝난다는군. 그리고 다아 간정되면 덕기가 이리 올 테니 아예 야기 쐬고 올 것 없다구!"
경애는 전화를 끊고 들어와서 이런 소리를 하며 상에 마주 앉는다.
병화는 가만히 듣고 만 앉았다가 눈물이 글썽글썽하여졌다. 모든 사람이 가엾고 불쌍하고 그리고 다정하고 고마운 생각을 하면 저절로 창연하면서도 기쁘고 감격에 넘쳐서 눈물이 나는 것이다. 경애의 기구한 신세도 가여웠다. 그 경애가 오늘 자기 때문에 반나절이나 발발 떨며 감금을 당하고 얻어맞고 죽었다 살아난 듯이 고초를 겪은 것을 생각하면, 미안한 것은 둘째요 애처롭다. 또 경애가 지금 이 앞에서 저 시장한 줄도 모르고 도리어 자기를 위로하고 필순 모녀의 걱정을 해 준다. 그 마음부터 귀여우면서 가련한 것이다.
필순네 세 식구- 현저동 아래턱 오막살이를 면하고 나온 지가 걱정은 않게 되었다고 좋아한 것도 꿈이 되고 남편은 갈빗대가 부러져서 생사가 오락가락한다. 살아나기로 성하게 다니는 꼴을 볼지 알 수가 없는 이 지경을 당한 두 모녀의 마음을 생각하면 측은도 하고 눈물이 아니 나올 수 없다. 또 그 당자는 어떤가! 감옥살이에 지치고 나와서는 허구한 날 굶주리고 들어앉았다가 어쨌든 처자나 굶기지 않게 된다는 바람에 마음에 없는 장삿속을 배우겠다고 터덜거리고 다니다가 죄 없이 뭇매를 맞았으니 그 꼴도 마주 볼 수 없이 가엾고 딱하다.
덕기- 이 사람은 금고지기다. 그러나 금고지기로 늙지 않겠다고 보채는 배부른 서방이니만큼 그에게도 또 숨은 고통이 있겠지마는, 팔자에 없는 고생을 하느라고 자기 대신 밤을 새워주는 것을 생각하면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병화는 모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에 넘치었다.
"장개석도 결코 나쁜 놈이 아니야. 나쁘기는커녕 그놈의 본심은 오늘 알았어! 알고 보니 그만한 놈도 없어!"
병화는 젓가락을 들다가 별안간 이러 소리를 혼잣말처럼 중얼중얼한다. 경애는 뭐요? 하는 듯이 고개를 쳐들고 멀뚱히 바라본다. 이 사람이 잠꼬대를 하나? 너무 들볶여서 실성을 했나... 겁도 났다.
"그게 무슨 소리슈? 장개석이가 어째요?"
"하하하..."
이제야 제정신이 든 듯이 웃는다. 병화는 여러 사람들의 심성과 사정을 생각해 보다가 거기 연달아서 무심하고 나온 말이었다.
"장개석이 몰라? 하하하..."
또 웃는다.
"무에 씌셨소? 왜 이리슈?"
경애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따라 웃지 않을 수 없다.
"이 때껏 우리를 괴롭히던 장개석이 말이야? 장훈이 말이야!"
"그 사람이 장훈이래요? 장개석이야?"
두 사람은 마주 웃었다. 두 두목가는 청년은 조선에는 희성인 장가이었다. 그래서 별명이 장개석이라 한다.
"그래 장개석이가 어쨌단 말예요?"
"자식이 의뭉하단 말이야."
병화는 밥을 두어 젓가락 떼어 넣는다.
"무에 의뭉해요?"
경애는 너무나 의외의 소리에 눈이 똥그래진다.
"우리가 결국 그놈한테 한수 넘어갔어..."
시장한 줄도 몰랐던 장위를 건드려 놓으니까, 무작정하고 들어오라는 모양이다. 젓가락도 안 드는 경애에게 권하기만 하면서 연해 퍼 넣는다.
"천천히 잡수세요. 이야기나 해가며..."
몸 아픈 사람이 체할 것도 걱정이지마는 이야기를 듣기도 경애는 급하였다.
그러나 병화는 먹기가 급하다. 밥 한 그릇을 후딱 먹고 나는 것을 보고 경애는,
"에그 체하시겠소."
하고 애를 쓰면서,
"그래 이야기를 하세요."
하고 말뒤를 채친다.
"무어?"
잊은 듯이 딴청이다.
"장개석인가 장훈인가 말예요!"
"응, 그건 그쯤만 알아두어요."
"누구를 놀리슈? 못할 말이면야 왜 애초에 꺼냈더란 말씀요?"
경애는 병화가 그래도 자기를 못 믿고, 어느 한도 이외에는 실정을 토하지 않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
병화는 담배만 피우고 앉았다가 가만히 누워버린다. 한 팔은 뻐근하고 속으로 아프고 한 손은 쑤시고 부어올라왔다.
"여자라고 해서 못 믿으시지만, 그런 것은 구식- 봉건사상이에요! 구태여 알자고 애를 쓰는 것도 아니지마는, 영문을 시원스럽게 알고서나 얻어맞아가며 다녀야지! 그것도 아주 처음부터 내가 관계 안한 것이면 모르지만."
경애는 토라진 수작을 하며 밥상을 내다놓고 자기 주머니에서 해태표를 꺼내어 화롯불에 뱅뱅 돌려가며 골고루 붙인다.
똑똑 똑똑... 담배 파우, 담배 파우...
남자의 목소리다. 눕고 앉고 한 사람은 귀를 세우며 마주 보았다.
"어렵지만 좀 나가보우."
말이 떨어지기 전에 경애는 벌써 방문으로 나갔다.
"무슨 담배예요?"
안에서 소리를 치며 질러놓았던 조그만 안빗장을 빼니까 빈지짝에 달린 샛문이 밖으로 펄썩 열리며 찬바람이 확 끼치고, 뒤미쳐서 꺼먼 두루마기를 입은 자가 꾸부리고 기어들어온다.
경애는 머리끝이 쭈뼛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마터면 소리를 칠 뻔하였다.
거기에 미소를 띠고 우뚝 선 사람은 아까 청요릿집에서 시달리고 족치던 그 무서운 청년이다--지금 병화가 금방 말하던 '장개석'이다. 장훈이다.
검정 두루마기에 꾀죄죄한 목도리를 비틀어 끼우고 흰 고무신에 중같이 덧버선목이 대님 위로 올라오게 신은 양이 변장한 형사 같으나 분명히 아까 본 그 사람이다.
사람을 놀리는 듯한 미소를 여전히 머금고 턱으로 안을 가리키며,
"김군 있나요?"
하고 제잡담하고 올라가려 한다.
경애는 아까 병화에게 들은 말이 있는지라 다소 안심은 되나, 이 밤중에 별안간 달려든 것을 보니 그래도 미진한 것이 있단 말인가? 또 작당을 해 오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도 나서,
"가만히 계시오"
하고 제지를 하여놓고 밖에 누가 또 있나 없나를 보려고 문을 다시 열려니까, 그 동안에 병화가 부스럭부스럭 일어나 나온다.
"어서 올라오게."
병화는 놀라는 기색도 없고 그렇다고 반기는 양도 아니다.
"응, 마침 잘됐네. 올라갈 건 없고 궁금해서 잠깐 들렸네."
하고 붕대 처맨 손으로 눈을 주며,
"과히 다친 데는 없나?"
하고 웃는다.
아프냐고 물어가며 때리는 사람도 이 세상에는 있는지? 덜 다쳤다면 더 때려주마고 쫓아왔는지? 때려놓고 위문 오기란 술 먹여놓고 해장 가자 부르러 오기보다도 더 친절한 일인지?... 병화의 대답이 또 요절을 하겠다.
"나는 그만하면 겨우 연명은 되네마는, 이 동무(필순의 부친)는 갈빗대가 단 하나 부러졌다네."
하고 병화는 손가락 하나를 쳐들어 보인다.
"허허..."
'장개석'군은 염치 좋게 너털웃음을 내놓더니,
"그래 누워 있나?"
하고 묻는다.
"부러진 갈빗대는 두면 무얼 하나? 성이 가시다구 아주 빼내버리려 갔네."
"허허허..."
또 허허허...다.
"자네 소위증 안 나나? 가는 길에 의전 병원에 들러보게. 지금쯤 오려 내놨을 테니 물고 가서 쟁여를 먹든 구워를 먹든..."
병화도 빙긋해 보인다.
"허허허... 자네 노했나?"
"노할 거야 있나마는 어린애들을 시켜서 늙은이를 그게 무슨 짓인가?"
병화는 눈을 찌푸리고 입을 삐쭉해 보인다.
"게다가 백정놈들 모양으로 연장까지 가지구!"
"여보게 형평사 사람 들으리! 하지만 이 세상 놈들 쳐놓고 어떤 놈은 인백정 아닌가?"
'장개석'군은 코웃음을 치다가,
"하여간 미안하이. 그렇게까지는 하지 말라고 단속을 하였건만 그예 그렇게 되고 말았네그려. 하나 지난 일을 어쩌나. 자아, 난 가네. 어떻게 됐나 궁금해서 잠깐 들른걸세. 아까 내 말대로 오해는 결코 말게."
장훈은 훌쩍 나가버렸다.
옆에 섰던 경애는 어이가 없어 말이 아니 나왔다. 이 사람들이 참 정말 실성들을 하였단 말인가? 자기네 딴은 운치 있는 농세상으로 알고 있는 짓들인가? 서로 약은 체를 하고 서로 딴죽을 걸어 넘기는, 패를 쓰는 것이란 말인가? 귓구멍이 막힐 노릇이다.
"사람이 죽네 사네 하는데 그것들이 희락요? 무엇들요?"
경애는 문을 단단히 잠그고 들어와 앉으며 시비를 한다.
"저도 겁이 났든지 애가 쓰이든지 해서 위문을 온 모양이지."
병화는 번 듯이 누우며 웃어버린다.
"꼬락서니 하고 할 일이 무척 없는가봐. 사람 죽여놓고 초상 치러 주러 다닐 놈 아닌가! 그게 고작 한다는 일이야?"
경애는 분하고 미워 죽는 모양이다.
"그런 게 아니야. 제 딴은 나를 위해서 기밀비를 먹었다고 소문을 내놓은 것이라서, 젊은 애들이 들고 일어나서 너무 날뛰니까 끌어간 것이오. 손찌검을 하지 말라구 당부한 것도 사실은 사실인 모양이야."
"어림없는 소리두 퍽 하우. 면에 못 이겨서두 그렇구 뒷일이 무서워두 그렇게 말한 거지. 누가 내가 시켰다고 할까. 또 돈만 해두 하필 경무국 기밀비만 돈일까. 정말 당신 일을 위해서 헛소문을 내어준다면 친구가 대어준 것이라든지, 하고많은 말에 꼭 기밀비 문제를 꺼낼 게 무어란 말씀요?"
"응, 그런 게 아니지. 피혁이가 여기 들어와서 실상은 나보다도 장훈이를 먼저 만난 건 사실인 모양이야. 장훈이의 말은 이렇거든- 어디서 뉘게 얼마를 주었는지 나는 안다. 아는 사람은 주고받은 사람 외에 두 사람이 있다. 홍경애와 자기다. 그런데 그 돈으로 별안간 홍경애와 반찬 가게를 열었으니, 둘이 먹어버리고 입 쓱 씻으면 그만인 줄 아냐?- 장훈이의 첫째 문제가 이거란 말이야."
먹어도 소리도 없이 슬금슬금 먹어버리거나 뒤떠들고 가게를 벌이고 하면 당국에서나 동지간에 기밀비가 아니면 밖에서 들어온 돈이라고 단통 떠들 것이니, 그러고 보면 남의 일까지 방해될 것이다. 벌써 냄새를 맡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턱 걸리기만 하며 이따 어떻게 될지, 내일 어떻게 될지 마음을 놓고 일을 할 수가 없다. 병화가 붙들려 들어가서 피혁의 사건이 단서가 난다면 장훈도 단박에 경을 치는 판이다. 그러고 보니 첫째는 장훈 일파와
읍각부동이라는 것을 저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전기를 절연체로 막아 버리듯이 딱 끊어버리면 장훈에게 불똥이 튀어올 리는 없다. 또 만일 외국에서 들어온 때문에 시비가 난 것을 당국이 노려보더라도 얻어맞은 놈이 먹었다 할 것이요, 때린 놈은 못 얻어 먹은 분풀이를 나 것이라 할 것이니, 장훈에게는 유리한 발뺌이 될 것이다. 장훈은 앞질러서 변명을 해두자는 것이다.
둘째는 김병화를 반성시키자는 것이니, 계집에게 빠져서 그렇든지 돈에 팔려서 그렇든지간에 둔마된 투쟁욕을 각성시키고 회복시키자는 것이다. 또 그리 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해가는 다른 동지에게 볼모를 보이고 징계를 하는 방부제로 쓰자는 것이다.
셋째는 기밀비를 먹었다고 소문을 내놓아야 장훈 일파와 충돌이 일어날 이유가 생기기도 하지마는 한편으로는 병화에 대한 경찰의 의혹이 엷어질 것을 생각한 것이다. 기밀비란 한 군데서만 나오는 것도 아니지마는 저희끼리도 어느 구멍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이 생기지 않으면 세상에서 떠드는 대로 그런가보다 하고 내버려두거나 도리어 저의 끄나풀로 이용하려 드는 것이다. 사실 지금 병화가 이용당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이용이 된대도 설마 피혁이 다녀갔다는 것까지 알려 바칠 리가 없겠고, 또 만일 병화가 무슨 일을 은근히 한다면 당국의 주의가 엷어지느니만큼, 일시 오해를 받는 것이 성이 가시기는 해도 도리어 편한 점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만일의 경우에 병화의 뒷길을 터 주자는 것이다.
물론 장훈은 제 비밀을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장훈의 말은 간단하였었다.
"자네 그 돈 내게 주게."
장훈은 맡긴 돈처럼 만나는 길로 손을 내밀었다.
"돈이 무슨 돈인가?"
"두말 말고 내놓게. 반찬 가게 하라고 준 것도 아니요, 홍경애 용돈 쓰라고 준 것도 아니니까."
"자네 언제 내게 돈 맡겼나?"
장훈은 아물 말 안하고 벽장에서 뚤뚤 뭉친 봇짐을 꺼내서 툭 던지며,
"그럼 이걸 사가게!"
하였다.
"무언가?"
"무어나마나 풀어보게그려. 그 값어치는 될 게니."
병화가 안 펴보니까 장훈이 폈다. 검정 두루마기와 구두 한 켤레와, 그리고 조그만 백통 권총 한 자루.
"이 두루마기 눈에 익겠네 그려?...이 구두도 보았겠네그려?"
장훈은 셋째로 권총을 가리키며,
"이것은 자네가 쓰자는 것은 아니었으나 자네가 이것도 안 사간다면 그 값에 자네 목숨을 내가 사겠네. 그 대신 그 돈은 홍경애에게 유산으로 주면 그만 아닌가!"
이 때의 장훈의 입가에는 그 독특한 쌀쌀한 미소가 떠올라 왔었다.
"알았네! 그러나 지금 사지는 못하겠네. 돈으로 사지는 못하겠네."
"무엇으로 사겠나..."
"목숨으로!"
"그럼 자네 지금 하는 일은 무언가?"
"보호색! 사람에게도 보호색은 필요한 걸세."
두 사람의 문답은 간단 명료하였다.
"그럼 두 말 안 하네. 이 두루마기와 구두만 해도 자네가 변장을 시켜서 내보낸 증거는 확실하니까, 아무리 변심을 하는 한이 있어도, 후일 자네 입으로 탄로는 못시키렷다? 자네만 아니라 두루마기 임자며 그 딸 그 아내... 여러 사람이 엇갈렸으니까! 그러기에 내가 이렇게 한만히 자네게 보이는 것일세..."
"어쨌든 어서 집어넣게. 그리고 자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위험하니 잘 처치를 하게."
아까 삼청동에서 만나서 한 이야기는 이것뿐이었다.
병화가 장훈과 만나던 일장 설화를 듣다가 경애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런데 그이가 게다가 벗어놓고 갔을까?"
하고 눈만 깜박거린다.
"두루마기가 원체 작아서 장훈이 것과 바꿔 입었더군. 그때 바로 서울을 떴을 줄 알았더니, 어디 가서 앉아서 장훈이까지 만나고 간 거야."
경애는 고개를 끄덕여만 보인다.
피혁은 경애집에서 달아날 때, 병화가 사다가 준 고무신이 대가래 같아서 걷기 어렵기도 하고, 급한 판에 조선 버선을 바꿔 신고 하기가 거추장스러워서 그대로 신던 구두를 신고 갔는데, 그것도 장훈에게 벗어 맡기고 간 모양이다. 그러나 육혈포가 웬 것인지? 그것만은 장훈도 그 다음 말을 안 하였다.
장훈은 언제 무슨 일로 가택수색을 당할지 모르니까, 두루마기와 구두는 집에서 입고 끌던 것이요, 무기만 다른 데 감추어두었던 것을 찾아다가 오늘 활극에 잠깐 쓴 것이었다.
"제가 정말 그러면야 부하를 시켜서 사람을 죽도록 패기까지 할 거야 무어 있겠소?"
경애는 그래도 미심쩍었다.
"그렇지 않아도 헤어질 때 혹시 그놈들이 가만 있지 않을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은근히 일러주더군."
"참, 당신두 왜 이렇게 어림이 없으슈? 뒤로 일러주기까지 할 테면야 부하를 그리 못하게 말릴 게 아니겠소."
"응, 그렇게만 나하고 수군거린 뒤에 당장 표변을 해서 도리어 말리면 그 놈의 기밀비인가를 둘이 나누어 먹기로 타협이 되었다고 부하들이 들고 일어날 테니까, 장훈이 역시 암만 부하라고 그 당장에는 어찌 하는 수 없거든. 그뿐 아니라 장훈이로서는 어느 때든지 육박전이 한번 나서, 우리 둘 새는 영영 갈라섰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자는 것이거든! 그래야 서로 일을 하기가 편하고 나 역시 기밀비를 먹고 반동분자로 회에서 제명을 당하였다는 소문이 나는 것이 해롭지 않은 판에 도리어 잘된 셈이지. 당신하구 필순이 어른만은 좀 가엾게 되었지마는..."
"좀만! 요행 나는 갈빗대만 안 부러졌을 뿐이지 그런 봉변은 난생 처음이니까!"
하고 경애는 암만해도 분해서 핀잔을 준다.
"그는 그렇다 하고, 아무러면 당장 칼부림이 날 줄 알면서 멍텅구리처럼 어슬렁어슬렁 이 밤중에 그 무서운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요?"
"그렇지 않아도 돌아올까 하다가 그놈들 주정꾼을 마침 만났는데, 그놈들도 오늘 그 일에 한통속일 줄야 알았나, 애초에 나를 부르러 온 놈들 역시 테러배(폭력단)들이기에 걸렸고나 하는 생각은 하였어도 장훈이가 시킨 것일 줄은 천만 의외이었거든! 딱 가보니 그놈이겠지."
"에이 듣기 싫소! 그 천치 같은 얼빠진 소리 그만허구 정신 좀 차려요. 장가에게 한수 넘어갔다지만 한수는커녕 두 수 세 수... 나중에는 몇백 수나 넘어갈지? 참 수났소!"
경애는 열이 나서 퍼붓고 코웃음을 친다.
"왜?"
"왜가 뭐예요! 안팎 벽을 치고 알로 먹고 꿩으로 먹고 하자는 수작 뻔하지! 그래도 정신이 덜 나신 게로구려?"
경애는 혀를 찬다.
"설마..."
병화는 자신 없는 눈초리로 빙그레하며 눈을 껌벅거리고 천장만 바라보다가,
"그럼 그 두루마기고 권총이고는 어디서 났더람?"
하고 경애의 얼굴을 귀엽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구하며 치어다본다.
"그리게 알로 먹고 꿩으로 먹는단밖에! 그이(피혁)는 벌써 반죽음은 되어서, 지금쯤 어느 유치장 속에든지 끙끙 앓아 누웠을 것이요. 장가야 말로 그 신이야 넋이야 하는 기밀비를 먹어도 상당히 먹었을 게지!"
"설마..."
"설마가 사람 죽여요! 이 밤이 못 새어서 오토바이 한패가 달려들 테니 두고 보슈!"
경애는 입술을 뾰족해서 내던지듯이 핀잔을 준다.
"결단코 그럴 리 없지!"
병화도 마음이 오락가락하였으나 조금 있다가 용기를 뽐내어서 단연히 이렇게 한 마디하였다. 그러나 경애는 귓가로 듣는다.
"어쨌든 오늘 예서 주무시지 맙시다."
"별소리를! 정 그렇게 마음이 안 뇌거든 집으로 가서 자구려."
병화가 도리어 핀잔을 준다.
"당하면 같이 당하지! 2집에 가서 자면 마찬가지 아닌가?"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전화가 따르르따르르 하고 불만 환한 점방에서 울린다.
"병원에선가?"
경애의 입으로는 이런 소리를 하였으나 도깨비 이야기 한 뒤에 밖에 나갈 때처럼 가슴이 설레며 머리가 으쓱해졌다.
"긴상 있습니까?"
전화통을 떼어든 경애의 얼굴은 해쓱하여졌다. 일본말 발음이 조선 사람 같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세요? 왜 그러세요?"
경애의 혀는 뻣뻣하여졌다.
"나는 금천이올시다."
경애도 상점을 벌인 뒤로 이 사람을 몇 번 만나서 안다. 그러나 부전부전히 인사할 경황도 없어 그대로 수화기를 앞턱에 놓고 뛰어들어갔다.
"누구? 금천이?"
병화는 누운 채 묻는다.
"어떻게 하시려우? 없다고 할까?"
경애는 놀란 기색을 감추려 하였다.
"받지!"
하고 병화는 낑낑 일어난다. 경애도 없다고 한들 소용없을 것을 돌려 생각하였다.
"허허, 용하게 아셨구려?..."
"아--니, 손등을 좀 다쳤지만..."
"무얼 취해서들 그런 거지요..."
"글쎄--하하하... 그렇게 흔한 기밀비면야 나 같은 놈도 좀 주었으면 고마울 일이지만 핫하하..."
저편에서 껄껄 웃는 소리도 수화기 옆에 붙어 섰는 경애에게까지 들린다.
"내일 아침 9시? 예, 가지요. 그러나 거기서 잴 필요야 없지요? 아무쪼록 깨어서 내보내 주시지요."
"예--, 그럼 내일 뵙지요. 안녕히 주무십쇼."
전화는 탁 끊었다. 병화의 '하하하'가 연발되면서부터 경애도 얼굴을 펴며 따라서 상긋하고 섰다가, 전화통에서 떨어지자 병화의 성한 손에 매달리듯이 붙들며,
"내일 오래요?"
하고 묻는다.
"응, 그런데 그 취한 패가 붙잡혔다는구먼!"
"어떻게서?"
"모르지. 그런데 궐자가 나를 놀리는데, 기밀비를 혼자만 먹지 말고 한턱 낼 일이지 동냥도 아니 주고 쪽박 깨뜨리는 셈으로 때려만 주었느냐는군."
"헌데 그놈들이 경찰서에까지 가서 기밀비 논래를 한 게지."
"그야 취중에 오죽들 쌌을라구. 그러나 오늘은 유치장에 재고 안 내보낸다는데."
"고소해라!"
경애는 자기 감정을 과장하여 입으로는 이런 소리를 해도, 유치장에서 잔다는 것이 그렇게 고소할 것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내일 왜 오라나 그것이 경애에게는 또 걱정이었다. 당장 와서 데려가지 않는 것을 보면 사건을 중대시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기는 하나, 어디로 뛸 염려가 없으니까 슬며시 늦춰 주어 놓고 거동을 보아가며 차츰차츰 옭아 넣으려는 술책이나 아닐까, 경애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병화도 그런 염려가 아주 없지는 않으나 경애를 안위시키느라고도 도리어 경애의 신경과민을 웃어 주었다.
덕기는 자정 가까워서 전화만 걸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늦기도 하였지마는 경애와 단둘이만 있는데 오기가 싫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수술한 경과는 양호하다 한다.
흥분과 혼란과 신음 속에서 밤을 드새고 나서 신새벽에 병화는 경애만 남겨 두고 병원으로 달아났다. 병 위문도 급하고 손등의 붕대도 갈아 매야 하겠지마는 9시에는 경찰서에 출두할 것이 커다란 일이었다.
오늘은 가게도 못 열었다. 며칠 안 되는 터에 안 열어서는 안 되었으나, 사람도 없고 자고 나니까 손이 쑤시고 저려서 빈지부터 여는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병화가 나서자 필순이 달려들었다.
아침밥 후에 모친과 교대하기로 하고 가게를 내려온 것이다.
병화는 길에서 만나서 역시 가게를 쉬자고 하였으나, 필순은 들어오는 길로 가게를 부랴부랴 내었다. 경애도 벗고 나서 한몫 거들었다.
"선생님은 나 혼자만 맡겨두는 게 미안하다고 그러시지마는, 안 열면 되나요. 단골도 있고 한데, 이런 때일수록 할 건 제대루 해야지요."
필순은 이런 소리를 한 제 경애는 필순이 다시 한 번 치어다보였다. 고맙기도 기특하다고.
"한 시간만 견습을 하면 나 혼자도 볼 수 있으니 물건 값부터 가르쳐 주고 병원에 어서 가 보우."
"천만에요, 나 무얼 아나요."
두 여자는 다른 걱정을 다 잊어버린 듯이 깔깔대어가며 의초 좋게 가게를 보았다. 조금 있으려니 원삼이 터덜터덜 온다. 병화가 가다가 오늘만 일을 보아달라고 불러 보낸 것이다. 원삼은 오는 길로 벗어부치고 달려 들었다.
"이래봬두 무어든지 할 줄 압니다. 밥두 짓구 국두 끓이구 배달을 나가라시면 자전거도 탈 줄 압니다. 그러나 여기 서방님같이 사람은 치고 다닐 줄 모릅니다."
원삼은 여자들을 웃겨가며 빗자루부터 들고 나서 서둘러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