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에 대하여
가을
가을 나무로 서서
간경화꽃
갈대들
갈퀴
감나무
감자꽃
강가에서
강물 곁에서
강화일기
개심사(開心寺)
개펄
거미의 방
거울과 수건
걸어 다니는 호수
겨울나무
겨울나무로 서서
겨울 바다
겨울 선운사
겨울 숲에서
경쾌한 유랑
계란과 스승
고구마
고추
공중전화
공터
과수원
관계 혹은 사랑
관악에 올라
괄호()
구드레 나루터
구름
구절리 가는 길 – 길 잃으니 환하게 길 잘 보인다
국밥
국수
국화 앞에서
귀뚜라미
그 눈에 삼삼한 그리움
그리움과 욕망 사이
그리움은 풀잎으로 솟아오른다
금강
기다림
길
길 위의 식사
김수영을 위하여
깊은 눈
까치집
깡통을 위하여
꽃그늘
꽃들의 등급
꽃은 튀밥처럼
꽃잠
꿀물 – 아내에게
나는 나를 떠먹는다
나는 벌써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나무들 저렇듯 싱싱한 것은
나무와 물고기
나무 한 그루가 한 일
낙양에 와서
낙엽
남겨진 가을
남겨진 겨울
내 몸속에는
내 안의 적들
내 일상의 종교
냉장고
너무 큰 슬픔
너의 부재 이후
노래는 힘이 세다
누군가 나를 울고 있다면
누군가를 내가 울고 있다면
눈
눈사람
늘 푸른 소나무
늦은 밤의 시계 소리
단단한 고요
단풍
달밤
달빛 속에는
달의 궁둥이
대청댐
대천 어항에서
덕적도에서
덧나는 슬픔
도망가는 산
독백
돌
돌과 여울
돌로 돌아간 돌들
돌 속의 물
돌의 운명
동굴
돼지 감자탕
된장찌개
두계역
등이 가렵다
떼 까치
또 그렇게 봄남은 간다
라면을 끓이다
로드 킬
마른 혀가 남기는 얼룩
마음의 짐승
마포 산동네
마흔
말 없는 나무의 말
매미들
매실나무
먼 길
멍석
모닥불
모멘토 모리
목련꽃
목욕탕 수건
몰래 온 사랑
몸살
몽상
무덤
무덤에 누워
무덤에 대하여
무릎에 대하여
무서운 나이
무중력 저울
무청
무화과
묵묵한 식사
문(門)
물꽃
물 끓어 넘치게 하는 자
물소리는 언제나 맑다
물속의 돌
물수제비
물의 기억
물의 북
물자국
미역국을 끓이다
민박
바위
바퀴벌레
발을 씻으며
밥알
배드민턴과 사랑
백련사 동백꽃
버려진 구두 한 짝
버림받은 자
벌초
베트남에서 돌아온 P 시인에게
벼랑
벽창호
병
볕 좋은 날
보리
복숭아 – 유원지에서 생긴 일
봄날은 간다
봄날을 치우다
봄밤
봄밤, 아스팔트가 운다
봄비
봄을 달래다
봄을 앓는 것들
봄의 직공들
봄이여 잔인한 형벌이여
봄 참나무
부드러운 복수
부재에 대하여
부지깽이 – 서툰 것이 아름답다
부활을 꿈꾸며
북한강에서
북한산에 올라
분리수거
비
비, 바람, 눈, 별빛, 달빛이 되어
비가 되어
비밀이 사랑을 낳는다
비의 냄새 끝에는
비포장도로
빈 자리가 가렵다
빈집
빨래를 빨며
빨래집게
사라진 분노를 위하여
사람들은 도회에 와서 죽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
사발술 반 잔
산불
산성(山城)
산속에 핀 꽃
삶
삼류들
상처
서랍에 대하여
서울 오는 길
석모도의 저녁
서해
서해 개펄
섣달 그믐달
설야(雪夜)
세탁기
소리에 업히다
소리의 탄생
손
송가(送歌)
수직과 수평
수직에 대하여
수평과 고요
수평선
순간
숟가락의 운명
술이나 빚어볼거나
숨구멍
숫돌
스프링
슬리퍼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슬픔은 늙지 않는다
시(詩)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시간의 그물
시소의 관계
신도림역
신발을 잃다
신발이 나를 신고
쓰레기통
쓴다
아버지
아파트 신축 공사장
어느 지식인의 주말
어둠에 관하여
어린 새의 죽음
억새꽃
얼굴
얼음꽃
엄니
연주자
오래된 농담
오래된 슬픔
오후의 공원
오후의 구도
옥수수
온다던 사람 오지 않았다
우리 시대의 더위
우리 시대의 정원사
우리 집 선풍기는 고집이 세다
우물
우체국
운주사
울음소리
울음의 진화
웃음의 배후
웃음의 시간을 엿보다
위대한 식사
은행나무
은행알들
음악을 먹고 마시던 꽃들
의뭉스러운 이야기
이별
이슬
인간은 광활해, 너무나 광활해
인생 – 애월에서
자국들
자주색 울음소리
장다리꽃과 나비
장독대
장작을 패며
재식이
저 꽃들 수상하다
저녁 산책
저녁 6시
저 못된 것들
저수지
저울과 시(詩)
적막 한 채
절벽
젊은 꽃
제부도
정동진역
조그만 행복
종소리
좋겠다
좋겠다, 마량에 가면
주름 속의 나를 다린다
주름진 거울
지갑에 대하여
지조를 울고 싶은 개
지상의 양식
지하 계단
지하철 풍경
진공청소기
징
찔레꽃
첫인사
청승
추석
추석날 고향에 와서
출구가 없다
충치
측근, 이라는 말
침묵의 신자
큰비 다녀간 산길
큰절
클라우드
테니스 치는 여자
통나무
통조림
팽나무
팽나무가, 쓰러졌다
팽이
펜에 대하여
평상
폐선들
포장마차
폭설
폭우
푸른 거처
푸른 늑대를 찾아서
푸른 별 아래 두 손 모아
풍경
풍금
하루
한가위
한강
한강 철새
한 사람
항아리 속 된장처럼
해산(解産)
허공
호박
호출
혹
홍옥 혹은 시에 대하여
화구(火口) 앞에서
회한
흑산도 홍어
KTX
3월
5월
7월
가방에 대하여
이재무
늦은 밤 구석에 처박혀 우는
가방을 본다
가방을 끌어다 무릎에 올려놓고
지퍼를 연다
달짝지근한 나날의 욕망이 들숨날숨을 내쉬고 있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 가방을 바꾸게 되었다
운명처럼 만나고 보낸 여자보다 더 많이
그를 만나고 보내온 것이다
처음엔 주어진 것이었으나 어느 날 이후 그것은
선택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비닐에서 가죽까지 나를 다녀간
그 무수한 모양과 색깔의 가방들
그들은 늘 능력보다 비대한 주인의 기대로
제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버려지고는 하였다
조강지처같이 생의 어두운 통로 바지런히 오,
갔지만 그들의 헌신을 주인은 기억하지 않았다
세상에 가방처럼 흔한 것도 없다
주인은 이제 실용만으로 그를 선택하지 않는다
주인은 변덕을 자주 부린다
가방의 수명은 짧아져 간다
입을 꾹 다문 가방
그라고 해서 왜 인욕의 세월이 없었겠는가
늦은 밤 구석에 처박혀 우는
가방을 본다
끌어다 무릎에 올려놓고
사연 많은 생을 살다 간 무수한 얼굴들을 떠올려 본다
가을
이재무
반짝이던 소음이 가라앉고
저녁의 들숨날숨 손에 잡힐 듯 환한
창가에 앉아 귀가 큰 소처럼 서서
가을 속으로 걸어가고 있는 한 나무를
오래도록 바라다본다 저 나무는
참으로 바르게 시간의 주인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난 계절 환희의 알몸으로 시들고 지친
내 오후의 생에 넓고 시원한 그늘 드리웠던
저 나무에게 그러나 나는 한 바가지 물
한 삼태기의 거름 져 나른 적 없다
나무라고 해서 어찌 인욕의 시간이 없었겠는가
바람이 불고 많은 비가 내리고 또
종아리 다녀가는 회초리처럼 가문 날의 폭염이
그의 생의 멱살 움켜쥘 때도
저 나무는 크게 표정 바꾸지 않고
제 생의 영토 고스란히 지켜 오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저 붉은 잎잎은
울림이 큰 느낌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슬픔이 지혜를 가져오듯
깨달음은 몸을 부려야 가까스로 인색하게 찾아오는 것
푸르게 젖어가는 저녁의 창가에 앉아
직립으로 살아가는, 수백 수천의 푸르고 붉은 등
가지마다 내걸어 길 밝히는
내 오랜 정인 물끄러미 바라다 본다
가을 나무로 서서
이재무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잎들을 떨군다
여름날 생의 자랑이었던
가지의 꽃들아 잎들아
잠시 안녕
더 크고 무성한 훗날의
축복을 위해
지금은 작별을 해야 할 때
살다 보면 삶이란
값진 하나를 위해 열을 바쳐야 할 때가 온다
분분한 낙엽
철을 앞세워 오는 서리 앞에서
뼈 울고 살은 떨려오지만
겨울을 겨울답게 껴안기 위해
잎들아, 사랑의 이름으로
지난 안일과 나태의 너를 떨군다
간경화꽃
이재무
1
농약에 과로에 찌든 가슴은
간경화꽃의 비료입니다
설움에 원한에 멍든 가슴은
간경화꽃의 거름입니다
증각골 가득 간경화꽃이 피었습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지치고 힘 부친 가슴은
무엇이든 투정 없이 먹어댑니다
지금, 증각골 가득
섬뜩한 간경화꽃이 피었습니다
2
당신의 가슴 밭에 병 조각으로 꽂힌
간경화꽃 붉게 타오르던 날
젖은 장작처럼 늘 몸이 타오르던 날
젖은 장작처럼 늘 몸이 무겁던
당신의 생애 재 한 줌으로 남았습니다
그 밤, 당신 몸 살라 먹은
간경화꽃씨들이
담 너머 이웃 마을로 날아드는 것,
마당에 고랑 내며 흐르는
장대비 속에
오랜 동안의 불충
눈물 몇 방울로 보태던 나는
두 눈 똑똑히 보았습니다
갈대들
이재무
강변에 줄지어 서 있는 갈대들
불어오는 바람
세차게 몸 흔들어대도 갈 데가 없다
갈대라고 해서 왜 가고 싶은 곳이 없겠는가
깊숙이 내린 뿌리 악착같이 움켜쥔
진흙 터전 차마 떠날 수 없어
흐르는 강물에 제 그림자 드리우고
달빛 사무쳐도 별빛 영롱해도
제 몸 안에 고인 갈 빛 울음
밤새 퍼 올려 허공에 뿌리고 있다
갈퀴
이재무
흙도 가려울 때가 있다 씨앗이 썩어 싹이 되어 솟고
여린 뿌리 칭얼대며 품속 파고들 때
흙은 못 견디게 가려워 실성한 듯 실실 웃으며
떡고물 같은 먼지 피워 올리는 것이다
그럴 때 눈 밝은 농부라면 그걸 금세 알아차리고
헛청에서 한가하게 낮잠이나 퍼질러 자는
갈퀴 깨워 흙의 등이고 겨드랑이고 아랫도리고 장딴지고
가리지 않고 슬슬 제 살 긁듯 긁어주고 있을 것이다
또 그걸 내리사랑으로 알고 으쓱으쓱 우쭐우쭐 맨머리 싹들은
갓 입학한 유아들처럼 소란스럽게 재잘대며 자랄 것이다
가려울 때를 알아 긁어주는 마음처럼 애틋하고 고운 사랑
어디 있을까 갈퀴를 만나 진저리 치는 저 살들의 환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사는 동안 가려워서 갈퀴를 부른다
감나무
이재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 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보는 것이다
감자꽃
이재무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여자(女子)
자주색 고름 물어뜯으며 눈으로 웃고
마음으론 울고 있구나 향기는,
저 건너 마을 장다리꽃 만나고 온
건달 같은 바람에게 다 앗겨버리고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비탈
오지에 서서 해종일 누구를 기다리는가
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고
눈부신 생의 환희 앓고 있는데
불임의 여자(女子). 내 길고 긴 여정의
모퉁이에서 때 묻은 발목 잡고
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내 여자(女子). 노을 속 찬란한 비애여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여자(女子)
강가에서
이재무
아내와의 잠자리는 근친상간이라며 한 친구가 웃었다
모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의미심장하게 따라 웃었다
아파트 정문을 나서면 아내도 나의 여자는 아니며
요즘 아내들은 저녁 안 먹고 일찍 귀가하는 남편들을
가장 능멸한다는 말에 일행은 박장대소 하였다
여름의 하루는 비닐처럼 질기고 지루해서
우리는 부실해져 가는 중년을 보충하기 위해
가부시키해서 개 한 마리를 잡았다
가마솥에서 천대와 굴종과 구박의 한살이를 마친 잡종 개가
시펄시펄 끓는 동안 앉아서 하는 것 중 제일 재미있다는
화투패를 돌렸다 오래 끓인 육개장처럼 걸고 진한 음담패설
한 순배가 돌자 투자한 돈에 비례하지 않는 아이의
성적에게 습관성 짜증을 내고 정치인 몇 도마에 올려놓고
토막 치고 오장을 파 모랫바닥에 처박아 놓았다 실직한
친구에게는 간 맞지 않아 싱거운 위로 몇 마디를 건넸고
누군가 나이 드니 김치도 갓 담근 게 맛있다며
예의 영계론을 펼치자 술이 올라 더욱 벌게진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비록 한때일망정 그린벨트의 생을
살았던 우리 젊음은 속절없이 기울고 이제 썰물 뒤의,
콜라 캔이나 플라스틱 등속 어지럽게 널려 있는
개펄 같은 서로의 상처 들여다보며 쓸쓸히 웃었다
오후 들어 나무의 그림자는 급속도로 짧아지고 있었다
허리띠 느슨하게 풀고강변에 서서 한쪽 다리를 든 채
함부로 오줌 갈기고 다 익힌 개고기를 뜯으며
기름 묻은 손 아랫도리에 문질러 댔다
늦은 밤 고성방가하며 돌아오는 길 우리는 버려진 개가 되어
어둠 발기발기 찢으며 스스로를 향해 컹컹컹 짖고 싶었다
강물 곁에서
이재무
삶이란 그런 것인가
한때는 다만 아픔을 부리기 위해
찾아왔던 곳
오늘은 무연한 마음으로 들러
강물에 놀다 가는
햇살이랑 물새랑
산 그림자 곁에
밀가루 반죽 같은 생의 허무
한 주먹 떼어 슬그머니 풀어놓으니
기특도 해라
흙물 일으키지 않고
누가 보아도 눈썰미 있는
그림이 되네
강화 일기
이재무
1
강화 들판은 한창 수확하는 손들로 바쁩니다. 벼 베는 손들이 있고, 고구마 캐는 손들이 있고, 들깨 줄기 베어 넘기는 손들이 있고, 밤알 줍는 손들이 있고, 열무 잎 솎아주는 손들이 있고, 팔리지 않은 포도를 따 포도주를 담그는 손들이 있습니다.
농로를 따라 걸으며 좌우로 고개 돌려 번갈아, 벼들이 떠난 텅 빈 논들과 절정을 향해 익어가는 벼이삭들에게 눈을 줍니다. 벼가 떠난 논들은 성장한 아들, 딸을 여운 양주마냥 늙고 지쳐 보이는데 아직 벼이삭을 품고 있는 논들은 힘이 넘쳐 납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막바지 열매들을 영글게 하시고 하루 이틀만 남국의 햇볕을 베푸시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소리 내어 읽습니다. 벼이삭들이 바람과 햇살 빨아대는 소리가 여울 소리처럼 밝고 높게 들립니다. 강화에서는 내 손도 덩달아 바빠져서 괜히 공기를 쥐였다 폈다 합니다.
2
새벽 다섯 시, 들판의 벼 포기처럼 빼곡히 들어찬 어둠 헤치고 강화 들판을 두 시간 걷고 들어와 아침밥 지어 먹고 밀린 빨래하고 커피 내려 마신 후 침대에 누워 창밖 풍경 관조 중이다.
가는 비가 내리고 있다. 빗물이 유리창에 아라베스크 무늬를 남긴다. 무늬가 알 수 없는 상형 문자로 보였다가 암호처럼 보였다가 세잔의 정물화로 보인다.
빗방울과 유리는 겉도는 기표와 기의처럼 혹은 우리들의 사랑이 그러한 것처럼 연속하여 미끄러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창 너머 감나무가 방 안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나는 요새 타자는 지옥이라 명명했던 샤르트르의 세상에 대한 관점에서 타자의 시선을 포용하여 관계의 지평을 연 메를로-퐁티의 관점으로 인생의 열차를 갈아타는 중인데 과연 관념이 아닌 생활 세계 속에서도 그게 가능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감나무는 어쩌면 나를 봄으로써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감나무의 시선을 내 몸 안쪽으로 받아들인다. 이파리 하나가 가지를 떠나자 허공이 뒤를 받쳐 주고 있다. 허공 속에는 침묵이 우거져 있다.
개심사
이재무
1
개심사를 찾았네
마음 열기 전 마음 고쳐야 한다
배롱나무 가지 열고 나온
꽃, 마음을 전해주었네
네모난 주춧돌 위에 세워진
둥근 기둥과
사각의 기와로 이루어진
지붕의 능선을 바라보다가
해우소에 들러 근심 한 덩어리
떨어뜨리고 일주문을 나섰네
개심(改心)에서 개심(開心)까지
수만 리 길 아득하였네
2
아무래도 이 적요한 돌계단의 청결은
어느 두툼한 손이 쓸고 간 것임에 틀림없다
결 고운 흙무늬가 아름다운 산길을
나는 왜 마음의 뼈에 통증 느끼며 걸어야 하는 것인가
숭숭숭 바람이 새는 부실한 생의 울타리 때문인가
마음 자루에 담긴 것 중 나중까지 지녀야 할 것 있다면
내 유년의 샘물에 뜨던 눈빛, 달빛, 꽃잎, 풀벌레 울음,
그리고 어머니 지청구 같은 것
수목들 드리운 두껴운 그늘 속으로 불룩한 몸 깊숙이 들이민다
불쑥, 서늘한 기운 달려들어 몸 물었다 뱉는다
이렇게 자꾸 몸 고치다 보면 어느 순간 생의 빛갈도 달라지리라
마음 고치면 마음 열릴 날도 있을 것이다
개심사에 와서 마음의 자루 뒤집어 다 쏟아낸 뒤
나는 청송 사이 저 비속의, 쏟아져 내리는 바람의
물줄기나 한 동이 담아 갔으면 한다, 하는데
돌계단 안간에 흩어진 바싹 말라 약올라 있는 솔잎들
벌떡 일어서 무엇하러 몹쓸 후회로 벌개진 눈 찔러대는 것인가
무릎 관절이 시려 돌아갈 일 아득만 하다
개펄
이재무
사내는 거친 숨 토해 놓고 바자춤 올리고
헛기침 두어 번 뱉어 내놓고는 성큼,
큰 걸음으로 저녁을 빠져나간다
팥죽 같은 식은땀 쏟아 내고는 풀어진
치맛말기 걷어 올리며 까닭 없이
천지신령께 죄스러워서 울먹거리는,
불임의 여자. 퍼런 욕정의 사내는
이른 새벽 다시 그녀를 찾을 것이다
냉병과 관절염과 디스크와 유방암을
앓고 있는 여자. 그을음 낀 그녀의 울음소리
이내가 되어 낮고 무겁게 마을을 덮는다
한때 그 누구보다 몸이 달고 뜨거웠던
우리들 모두의 여자였던 여자
생산으로 분주했던 물기 촉촉한 날들은
가고 메마른 몸속에 온갖 질병이나 키우며
서럽게 늙어가는, 폐경기 여자.
그녀는 이제 다 늦은 저녁이나 이른 새벽
지치지도 않고 찾아와 몸을 탐하는
사내가 노엽고 무서워진다
그 여자가 내민 밥상에서는 싱싱한
비린내 대신 석유내가 진동을 한다
거미의 방
이재무
먹이에 눈먼 날파리로 달려가마
나의 온 생을 가두어다오
끈적끈적한 그대 사랑의 감옥 안에 갇히고 싶다
파닥거리는 동안이 님이 준 삶의 선물이리라
거미여, 보여다오
모습을 언제나 숨어서 내 생의 전부를 관장하는 그대여,
오늘도 나는 보이지 않는 그대 촘촘한 그물 속으로 투신한다.
갇히는 희망 그대여,
늘 깨어 아픈 내 야성(野性)을 잠재워다오
거울과 수건
이재무
속을 알 수 없어 궁금할 때는 길가에 쭈그려 앉아 풀잎을 오래 들여다본다. 풀잎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 투명한 거울에 때 낀 마음이 떠오른다. 속이 어두워 답답할 때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마음을 닦는 한 장의 수건. 세상을 흐리는 얼룩을 닦는다. 가을은 삼라만상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고 마음을 닦는 수건이다.
건들건들
이재무
꽃한테 농이나 걸며 살면 어떤가
움켜쥔 것 놓아야 새것 잡을 수 있지
빈손이라야 건들건들 놀 수 있지
암팡지고 꾀바르게 사느라
웃음 배웅한 뒤 그늘 깊어진 얼굴들아,
경전 따위 율법 따위 침이나 뱉어주고
가볍고 시원하게 간들간들 근들근들
영혼 곳간에 쟁인 시간의 낱알
한 톨 두 톨 빼먹으며 살면 어떤가
해종일 가지나 희롱하는 바람같이
걸어 다니는 호수
이재무
소의 커다란 눈은 호수 같다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는 호수
소가 눈 들어 앞산을 바라보니
앞산이 호수에 잠긴다
눈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이 잠긴다
소가 꿈벅,
하고 눈을 감았다 뜨니
산이 눈을 빠져나오고
소가 또 꿈벅,
하고 눈을 감았다 뜨니
구름이 빠져나온다
소는 느리게 걸어 다니는
호수를 가지고 있다.
겨울나무
이재무
이파리 무성할 때는
서로가 잘 뵈지 않더니
하늘조차 스스로 가려
발밑 어둡더니
서리 내려 잎 지고
바람 매 맞으며
숭숭 구멍 뚫린 한 세월
줄기와 가지로만 견뎌보자니
보이는구나, 저만큼 멀어진 친구
이만큼 가까워진 이웃
외로워서 더욱 단단한 겨울나무
겨울나무로 서서
이재무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잎들을 떨군다.
여름날 생의 자랑이었던
가지의 꽃들아 잎들아
잠시 안녕
더 크고 무성한 훗날의
축복을 위해
지금은 작별을 해야 할 때
살다보면 삶이란
값진 하나를 위해 열을 바쳐야 할 때가 온다.
분분한 낙엽,
철을 앞세워 오는 서리 앞에서
뼈 울고 살은 떨려 오지만
겨울을 겨울답게 껴안기 위해
잎들아, 사랑의 이름으로
지난 안일과 나태의 너를 떨군다.
겨울 바다 - 주문진에서
이재무
저무는, 겨울 먼바다
나는 한 마리 귀가 큰 소라가 되어
바다의 소리 쓸어 담는다
내 안에서 삐져나오는 비밀한 울음이
성큼 바닷속으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다본다
나는 이것을 평생 빛바래지 않는
기쁨으로 간직하여야 하리
맑은 소주잔에 스미는 어둠의 분말 가루
목덜미를 아프게 물었다 뱉고 가는 바람
먼 곳에서 끼룩대는 갈매기 한 쌍
저녁 안에 모여든 이 모든 것이 나는
태어나 처음인 양 전혀 낯설고 생소하기만 하다
열락과 고통이 한 뿌리인 저녁의 시간
이미 파도가 되어 달려와
길고 긴 혀 내밀어 모래 한 알과도 같이 사소한
나의 전 생애를 적시는 그대여
지금 바다는 온통 불이다
겨울 선운사
이재무
잿빛 스산한 오후에 당도하였다
허공으로 울컥, 설움 토하는
흰 눈꽃 송이
살(肉) 지워진 자리마다 눈물 홍건하였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시인을 울리던
막걸리 집 잔술 팔며 부르던
작부의 육자배기 설운 가락,
입춘 지났으나 때 일러 동백 피지 않았다
초경 맞은 소녀 젖가슴인 냥
가지마다 아프게 봉오리만 돋아 있었다
한눈 팔다가
이곳에 오는데 47년이 걸렸다
절정의 동백 눈으로 밟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가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선, 운, 사 하고
절 이름 입 속으로 가만히 떠올리면
소주 먹은 듯 소주 먹은 듯
온몸 상기도 달아올랐다
그러나 처자식을 부양하여야 하는, 나는
가난한 가장
빠르게 등 덮어오는 산 그림자 두려워
절간에 담군 생을 빼내어
되돌아 빠르게 발을 놀렸다
겨울 숲에서
이재무
겨울나무들의 까칠한 맨살을 통해
보았다, 침묵의 두 얼굴을
침묵은 참 많은 수다와 잡담을 품고서
견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겨울 숲은 가늠할 수 없는 긴장으로 충만하다
산 이곳저곳 웅크린 두꺼운 침묵,
봄이 되면 나무들 가지 밖으로
저 침묵의 잎들 우르르 몰려나올 것이다
봄비를 맞은 그 잎들 뻥긋뻥긋,
입을 떼기 시작하리라
나는 보았다
너무 많은 말들 품고 있느라 수척해진
겨울 숲의 검은 침묵을
경쾌한 유랑
이재무
새벽 공원 산책길에서 참새 무리를 만나다
저들은 떼 지어 다니면서 대오 짓지 않고
따로 놀며 생업에 분주하다
스타카토 놀이 속에 노동이 있다
저, 경쾌한 유랑의 족속들은
농업 부족의 일원으로 살았던
텃새 시절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가는 발목 튀는 공처럼 맨땅 뛰어다니며
금세 휘발되는 음표 통통통 마구 찍어대는
저 가볍고 날렵한 동작들은
잠 다 빠져나가지 못한 부은 몸을,
순간 들것이 되어 가볍게 들어 올린다
수다의 꽃 피우며 검은 부리로 쉴 새 없이
일용할 양식 쪼아대는,
근면한 황족의 회백과 다갈색 빛깔 속에는
푸른 피가 유전하고 있을 것이다
새벽 공원 산책길에서 만난,
발랄 상쾌한 살림 어질고 환하고 눈부시다
계란과 스승
이재무
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
6학년 학기 초
담임선생님이 부르셔서 갔더니
'내일부터 매일
계란을 갖다 바치라'는 거였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당시는
계란이 참 귀물이어서
물물교환으로
사용이 가능했었습니다.
어느 안전인데
선생님 말씀을
어길 수 있었겠어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식구들 몰래
계란을 훔쳐
선생님께 드렸습니다.
암탉들이 알 낳는 곳을
염탐하기에 열중했습니다.
이럭저럭 시간이 흘러
2학기 말 무렵이었습니다.
열 마리였던 닭들이
그새 하나 둘
제사용으로,
손님용으로
잡아먹히게 되어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계란을 빠뜨리는 날이 늘어나자
선생님이 부르셨습니다.
울먹이면서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가늘게 떠는 어깨를
감싸 안아 주셨습니다.
"관찮다.
이제 그만 가져오너라."
그리고는
책상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내 주셨습니다.
통장이었습니다.
"그동안
네가 가져온 계란값이다.
나도 좀 보탰다.
그거면 중학교에 갈 수 있을 게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중학교에 갈 수 있었고,
어찌어찌해서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구마
이재무
귀갓길
불현 발목을 감는
부드러운 내음의 물 젖은 목소리
돌아보니 골목 한 귀퉁이
부여나 공주
아니면 강원도 산골에서 걸어왔을까
부끄러운 듯 봉지 밖으로
고개를 내민 흙 묻은 얼굴
천 원짜리 한 장을 주고
소박한 웃음과 고향을 산다
마음의 화롯불 속
눈뜨는 불씨
여름 장마 가을 서리
밟아온 웃음과 고향
한입 크게 베어물으니
살 속 뼛속 파고드는 겨울바람도
내 오늘 하루만은 용서하고 싶어라
고추
이재무
푸르게 자라
붉게 익는다
너는 맵다
너는 붉다
푸르게 몸을 세운 자만이
붉게 생 태울 수 있다
공중전화
이재무
아날로그의 외고집이여,
자랑으로 붐비던 날들 아득한 전설 되었구나
한창때 너는 잘나가는 몸으로
식욕 또한 왕성해서
뜨겁고 짜고 맵고 싱겁고 차가운 수천,
수만의 사연 다 삼키고도 뜨거웠지만
늙은 창부가 된 오늘
식어버린, 허기진 몸으로 누군가 인색하게 떨군
은화 몇 닢의 동냥 허겁지겁 삼키는구나
시대의 모던보이 시민의 교양이었지만
뒤처진 애물단지가 되어
생의 수거만을 기다리게 되었구나
생각하면 창부 아닌 삶 어디 흔하랴
줄고 새는 영혼 부풀려 팔고 돌아오는 길
뚜쟁이처럼 서서 호객하는 너를 보는 일
편치 않다 너는 필요보다 크고 무겁고 느리다
네 고집은 불편하다 후불을 모르는
시대의 지진아 그나마
식은 몸일망정 찾아와 주린 정 채우고 가는
무일푼 고객마저 외면하는 날 올 것인가
미래의 골동품 아 답답한 순결이여,
우리 시대 다 낡은 서정시여,
추운 겨울 외투 깃을 세우고 발 동동
구르며 차례 기다리던 날들의 추억이여,
아날로그의 외고집이여,
공터
이재무
어둠이 졸졸졸 고이는 공터
구석에 널브러진 페타이어
속도의 중력에 실려 살아왔던 한 생애의
최후를 나는 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달려왔을 그 많은 길과 일별했던
풍경들을 그는 기억하고 있을까
누구에게나 한때 생의 절정은 있는 법이다
속도란 마약과도 같은 것
망가지고 부서져 저렇듯 버려져서야
실감되는 무형의 폭력인 것이다
가속의 쾌감에 전율했던 날들은 짧고
길고 지루한 남루의 시간 견디는
그대 생의 종착
생은 언제나 돌이킬 수 없을 때에야
깨달음을 준다
과수원
이재무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려 마음의 뜰 밝히는
저 많은 시월의 등불은 누가 다 켜놓은 것일까요
붉게 달아오른 둥근 얼굴들
자부로 가득한 표정입니다 단맛 가득 품고 있다가
누군가의 입 크게 웃게 만드는, 저 달디단 사랑이
다짐과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일까요
스스로 온전히 익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 환한, 잘생긴 웃음은 그러므로
나무의 고된 노동이 지어낸 것 아닙니다
한여름 자지러지게 울며 서럽던 벌레,
연한 꽃 살 파고들던 맑은 날의 별빛,
지붕의 기왓장 녹이고 건천의 자갈 구워 먹고는
언덕 오르며 땀 뻘뻘 흘리던 염천의 햇살과
걸핏하면 가지와 잎에 와서 희롱하던 바람과
비온 뒤에야 붐비던 냇물 등속 아닙니다
일등품으로 통통하게 볼 살肉 오르게 한 것
과수와 더물어 살며 한숨 깊던
농어민 후계자 김씨金氏의 걸쭉한 땀방울이 아닙니다
저 혼자서 스스로 온전히 깊은 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사람도 시월이면 더러 마음의 심지에 불 밝히고
사립 나서 하늘과 땅과 산과 먼 들녘 그윽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공연히 숙연해져서
무엇이고 눈 닿는 것에 합장 올려야 하겠습니다
저 잘 익은 둥근 지혜 헤아려
다녀갔거나, 함께 걷거나, 다가올 인연에게
부디 옷깃 여며야 할 것입니다
관계 혹은 사랑
이재무
못 박는다 벽은 한사코, 들어오는
막무가내의 순애보 밀어내고 튕겨낸다
그러나 망치 잡은 두툼한 손의 고집
벽은 끝내 막을 수 없다
일자무식하게 꽝꽝 박을 때마다 진저리치는
벽, 아주 인색하게 몸 열어 관계 받아들인다
단단한 살 헤집어 가까스로 뿌리내린 자의
저 단호하고 득의에 찬 표정을 보라
벽은 못 품고 살아간다
들어올 때 아파서 울던 울음 뒤
생긴 상처 아물면서
못은 비로소 벽의 일부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주 먼 훗날 못은 벽 떠날 날 올지 모른다
그날의 벽은 이제 제 안 깊숙이 박힌
사랑 내주지 않으려 끙끙 앓으며
또 한 번 검붉은 녹물의 설움 질질 짜낼 것이다
관악에 올라
이재무
산의 등허릴 타고
한 마리 딱정벌레로 헉헉 기어오른다
유월의 굵고 영근 보리알처럼 땀방울
발치에 떨어져 발등 아프게 하고 산길은
오를수록 더욱 깊어져
하늘 몇 장 숲 사이로 보였다 사라진다
우리의 희망도 저럴 것이다
산길은 조급함이 얼마나 몸을 불편케 하는지를,
생에도 우회의 지혜가 있음을 길로써 말해준다
정상에 올라 내 잠시 비워두고 온 서울을
바라다본다 이곳에서 보면 생활은 장난 같다
내가 뿌린 죄로 서울의 하늘이 널빤지같이 두껍다
시간과 놀다 십년생 갈참나무 한 그루 앞세워
내려온다 천천히, 가볍게, 놀면서,
서울을 살아가자고 주먹을 쥔다
괄호()
이재무
책 읽다 보면 괄호 만날 때 있다
주눅 들고 풀 죽은 표정, 괄호 속
말들 꼼꼼하게 읽는다
80년대 이후 나는 괄호 속 시인이었다
답답한 () 안에서 () 밖을 꿈꾸며
길고 지루한 소외와 비애의 시간 견뎌왔던 것이다
어둡고 칙칙한 풍경
()는 높고 견고해서 한 번 그 성에
갇히게 되면 여간해서는 탈주가 불가능하다
권력은 괄호를 선호한다
그들은 벽 쌓는 일에 골몰한다
괄호에 묶인 존재들 괄시하고 따돌린다
튀는 개성만이 ()에 갇히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간장이 그러하듯이
생활 우려낸 담백 수수한 개성이야말로
오랜 세월 말없이 지켜온 우리네 진짜 개성 아니냐
퓨전식 개성은 그 생명이 결코 길지 않다
차별이고 경계인 괄호
오늘도 누군가 ()를 치고 있다
구드레 나루터
이재무
열정과 그리움 빠져나간 시든 몸으로
주막에 앉아 술을 마신다
파산한 친구의 서러운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저물어 소리 더욱 투명한 강물을 본다
생의 어느 한 굽이 제 목숨에 위태로운 살 떨리는 소용돌이 격정도
하류에 이르면 높낮이 없이 겸허의 물결로 잔잔하리라
오후의 생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큰물 자주 다녀가는 강둑을 거처로 삼은 나무로 서서 사는 동안은
때로 줄기 떠나는 가지들의 아픈 내력을 묵묵히 견뎌야 한다
나이 들수록 마음의 마당 넓어지지 않고 뽑아낼수록
욕망의 잡초는 웃자라 무성해지는 것이냐
노을이 아름다운 날
어깨에 둘러멘 바랑에 조약돌 가득 담아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 내 젊은 날의 여승은
지금 저쪽 생의 어느 모퉁이를 걸어가고 있을 것인가
수북이 밤은 내려서
돌아갈 노잣돈까지 털어 마시고
문득 돌아갈 길이 끊기고
강과 마을과 산은 한 몸이 되어 낮게 출렁거린다
구름
이재무
구름으로 잠옷이나 한 벌 해 입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나무 밑
이마까지 그늘 끌어다 덮고
잠이나 잘까 영일 없었던 날들
마음속 심지 싹둑 자르고
생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적막의 심해 속 들어앉아
탈골이 될 때까지 실컷 잠이나 잘까
한 잎 이파리로 태어나
천년 바람이나 희롱하며 살까
구절리 가는 길-길 잃으니 환하게 길 잘 보인다
이재무
비 온 뒤 연달아 피어오르는 안개의 혀
큰 산의 나신 핥는다
뱀의 등허리가 되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되고
아아, 안개는 내 여인의 가는 허리가 되고
큰 산은 쑥스러워 청청(靑靑) 웃는다
가도가도 구절양장의 길 구절리
한 굽이 돌 때마다 거기, 우리에 아픈 생의
내력 있다는 듯 자동차 바퀴에 튀어
옆구리 퍽, 질러오는 묵언의 저 돌멩이들.
노변, 싸리나무꽃이 있었다
볼우물 수줍은 그녀
내 어릴 적 공부에 게으른 날
종아리 파랗게 아프게 하더니
오늘은 불룩해진 아랫배 쿡 찌르며 웃는다
길 좇다 길 잃고 길 잃으니
내 잠시 비워두고 온 세간
저렇듯 반짝이는 녹엽으로 멀리서도 환하다
산사가 차려주는 저녁 공양
달게 비우고 산심(山心)에 젖어 어둠이
어둠을 낳는, 밟을수록 더욱 싱싱해오는
산길 한 마리 산짐승 되어 꿈틀꿈틀
내려온다 이미 밤은 깊어서 광 속처럼
빼곡히 들어찬 어둠의 속살
나는 상장 받은 아이인 양
내일이 전혀 두렵지 않다
한낮에 본 사랑에 눈먼 철부지 안개 처녀들아
큰 산 데불고 다들 어디고 갔나 벌써 그것들
내 안에 들어와 꽃으로 웃고 있는지
내 몸은 산으로 의젓하고 또, 얇은
종잇장 되어 한없이 가볍게 날아오른다
국밥
이재무
매번 고인께는
면목 없고 죄스러운 말이지만
장례식장에서 먹는
국밥이 제일 맛이 좋더라
시뻘건 국물에 만 밥을 허겁지겁
먹다가 괜스레 면구스러워 슬쩍
고인의 영정 사진을 훔쳐보면
고인은 너그럽고 인자하게
웃고 있더라
마지막으로 베푸는 국밥이니
넉넉하게 먹고 가라
한쪽 눈을 찡긋, 하더라
늦은 밤 국밥 한 그릇
비우고 식장을 나서면
고인은 벌써 별빛으로 떠서
밤길 어둠을 살갑게 쓸어주더라
국수
이재무
늦은 점심으로 밀국수를 삶는다
펄펄 끓는 물 속에서
소면은 일직선의 각진 표정을 풀고
척척 늘어져 낭창낭창 살가운 것이
신혼적 아내의 살결 같구나
한결 부드럽고 연해진 몸에
동그랗게 몸 포개고 있는
결연의 저, 하얀 숨결들!
엉키지 않도록 휘휘 젓는다
면발 담긴 멸치국물에 갖은 양념을 넣고
코 밑 거뭇해진 아들과 겸상을 한다
친정 간 아내 지금쯤 화가 어지간히는 풀렸으리라
국화 앞에서
이재무
이 많은 국화 송이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봄에 우는 소쩍새와
먹구름 속의 천둥과
가을 무서리와
아무런 상관없이
공장에서 한꺼번에 부화되는 병아리같이
한날한시에 태어나
생의 긴 여정을 생략한 채
매캐한 향불 연기 자욱한
영정 사진 앞에 도열해 있는
순교의, 흰 모가지여, 모가지여, 모가지여
귀뚜라미
이재무
적막의 울타리 무너뜨리고
마음의 시멘트벽 긁느라
네 울음의 부리 다 닳는다
그러거니 너는 철저히도 섧게도 울어
마침내 묵은 피 다시 돌고
아릿아릿 몸이 앓은다
내 이제 네 울음의 꽁지 따라가다가
오래 전 나로부터 멀어진
별 하나 새로이 만날 것도 같다
그 눈에 삼삼한 그리움
이재무
아마 여섯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하루는 불장난에 재미 붙여 열중했는데
놀이 지나쳐 그만 울 밖 돼지우리
다 태우고야 말았다 불과 연기에 덴 돼지
길길이 날뛰고 그 소리에 놀란 엄니, 아부지
그리고 이웃들 몰려와
누구 짓이냐 대관절 어느 후레아들놈 장난질이냐
호통 하도 지엄해서 경황이 없는지라
때마침 뽀얀 흙먼지 이는 신작로 멀리
절둑이며 마냥 하세월로 걷고 있는 용천배기
눈에 뵈길래 저이여유, 저이가 동냥 왔다가
아무도 없다니께 부아김에 불질렀슈 지는
몰러유 울먹울먹 영악하게 잘도 둘러댔더니
저놈 잡아라, 저놈 때려잡아라
자꾸 미끄러지는 고무신 벗어 양손에 들고
고함은 수문 빠져나온 물살인 양 몰려 나가고
그인 죄도 없는데 게으르게 누운 길 세워
잡아댕기며 줄행랑치는 거였다
그날 홧김에 아부진 다 죽어가는 돼지 잡고
덕분에 나도 주린 배 실컷 채운 뒤 배탈을 앓았다
죄스러워 부모님께 언젠가는 고백하리라
조막손을 꼭 쥐고 다짐했지만
그 약속 끝내 지키지 못했는데
삼십 년도 더 지난, 괴롭고도 즐거웠던
그 일 나는 여직 잊히지 않는 것이냐
삼삼한 그리움으로만 떠오르는 것이냐
어쩌면 아부진 그날 다 알고 계셨을 것이다
어쩌면 이웃들도 다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날 이웃들도 아부지도 엄니도
어쩌면 내가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토록 맛있게,
쩝쩝 소리 하늘에 닿을 만큼 높았을 리 없다
그리움과 욕망 사이
이재무
갯벌이나 밀가루 반죽처럼
물컬물컹 감겨오는 살(肉)의 숫감각
혹은 소의 깊은 눈에 담긴 흑백 풍경처럼
그렁그렁 밟혀오는 것들에의
애틋하고 살가운 마음자리 밀어내고 들어선,
벌겋게 달아오른 화농
파스 바른 듯 후끈 달아오른 한여름 지열 같은,
살(肉)의 들쩍지근한 욕망을 차마
그리움이라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움은 풀잎으로 솟아오른다
이재무
소래 포구에서 부평 쪽으로 난 철도를 따라 걷는다
철도는 언덕 넘어온 잡풀로 뒤덮여 있다
먼 길 에돌아오는 기적의 추억 더듬으며
나는 바지에 흙을 묻힌다
버리려 왔으나 가슴에 담긴 돌멩이
걸음 더욱 무겁게 한다
버려진 철도에 녹슨 몸 부리고
바람 물결에 흔들리는 갈대밭 바라다본다
저곳에 마음 묶던 날이 있었다
그때 나는 슬펐던가 흔들린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속도에 실린 생은 끝내 알지 못하리
목표 없는 전진의 대열에서 이탈한 자의
이 불안과 고적 그리고 간장 종지만 한 평온이,
문득 오래된 신발처럼 나는 편하다
몸 밖으로 떠돌던 그리움
불쑥 도둑처럼 돌아와 둥둥 풀잎으로 솟아오른다
금강
이재무
모든 빛나는 것들은 추억으로만 남는 것인가
아침 햇살에 반짝이던 물비늘 보이지 않고
상류로부터 떠밀려온 더럽고 추한 것들만이
저녁 노을 속으로 부옇게 떠오르는 강
한때 그대는 모습만으로도
막 살[肉] 빠져나온 피처럼
마음 솟구치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대는 노동 잃은 늙은 소
걸음은 굼뜨고 몸에서 피는 썩은 내는
언덕과 읍내 몇 번이고 들었다 놓는구나
바다를 앞둔 얼굴 아니라
체념과 피곤에 찌든 부랑자
이미 죽은 바다 거듭 죽이러 가는
역겹고 추한 얼굴이다
오늘 그대는 모습만으로도
어둠 빨아들인 골짜기처럼
이리도 마음 캄캄하게 만드는구나
기다림
이재무
초겨울 인적 드문 숲속
앙상한 가지에 매달려
위태위태한 빨간 슬픔의 홍시
하나의 마음으로 기다린다.
아직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생애
꿀꺽 삼켜올 큰 입 가진 임자를
길
이재무
길은 어둠이 오면 이내 잠자리에 든다
낮동안 마을과 마을, 읍내까지 다녀오느라
먼지로 두꺼워진 몸 서늘한 달빛에 맡기고
온갖 짐승, 새소리 끌어들여
굳어진 근육을 푼다
밤이 이불 되어 거듭 길 덮고
별이, 깨알 같은 별이 소복이 내려 쌓이고
물소리 빗자루 되어 일과의 고역
쓸어내리는 동안
길은 잠꼬대 한번 없이 긴 잠을 잔다
잠자는 동안 길 안과
밖의 경계가 지워지고 천상의 것들
지상에 내려와 하나가 되고
새벽 서리가 톡, 톡, 톡, 이마를 치면
투덜대며 잠 털고 일어나
저를 밟으며 또 하루를 살아낼 이들 위해
길은 기꺼이 길이 된다
길 위의 식사
이재무
사발에 담긴 둥글고 따뜻한 밥 아니라
비닐 속에 든 각진 찬밥이다
둘러앉아 도란도란 함께 먹는 밥 아니라
가축이 사료를 삼키듯
선 채로 혼자서 허겁지겁 먹는 밥이다
고수레도 아닌데 길 위에 밥알 흘리기도 하며 먹는 밥이다
반찬 없이 국물 없이 목메게 먹는 밥이다
울컥, 몸 안쪽에서 비릿한 설움 치밀어 올라오는 밥이다
피가 도는 밥이 아니라 으스스, 몸에 한기가 드는 밥이다
김수영을 위하여
이재무
이 시대에 김수영 논문은 많아도
김수영을 인용하는 학자는 많아도
그를 칭송하는 시인들은 많아도
그를 사는 이들은 없다
너무 배워서 문제다
헤겔 라캉 데리다 미셀 푸코에 정통하면 뭐하나
다들 제 밥벌이를 위한 헤겔 라캉 데리다 미셀 푸코뿐인데
논문의 시녀가 되어버린 시여! 시대여!
깊은 눈
이재무
마을 회관 한구석 고물상 기다리며
한 마리 늙고 지친 짐승처럼 쭈그려 앉은,
흙에서 멀어진 적막과 폐허를 본다
젊어 한때 쟁기가 되어 수만 평의 논 갈아엎을 때마다
무논 젖은 흙들은 찰랑찰랑 얼마나
진저리 치며 환희에 들떠 바르르 떨어댔던가
흙에 생 담가야 더욱 빛나던 몸 아니었던가
논일 끝나면 밭일, 밭일 끝나면
읍내 장터에, 잔칫집에, 떡방앗간에, 예식장에, 초상집에,
공판장에, 면사무소에, 군청에, 시위 현장에
부르는 곳이면 가서 제 할 도리 다해온 그였다
눈 많이 내렸던 그해 겨울밤은 만취한 주인 싣고 오다가
멀쩡한 다리 치받고 개울에 빠져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저 또한 팔다리 빠지고 어깨와 허리 크게 상하기도 했던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노동의, 그 오랜 시간을
에누리 없이 오체투지로 살아온 그가 오늘은
바람이 저를 다녀갈 때마다
저렇듯 무력하게 검붉은 살비듬이나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몸의 기관들 거듭 갈아 끼우며
겨우 오늘에까지 연명해온 목숨 아닌가
올봄 마지막으로 그가 갈아 만든 논에
실하게 뿌리 내린 벼 이삭들 달디단 가을볕
쪽쪽 빨아 마시며 불어오는 바람 출렁, 그네 타는데
때늦게 찾아온 불안한 안식에 좌불안석인 그를
하늘의 깊은 눈이 내려다보고 있다
까치집
이재무
까치집은 볼 때마다 빈집
저 까치 부부는 맞벌이인가 보다
해 뜨기 전 일 나가
별 총총한 밤 돌아오는가 보다
까치 아이들은 어디서 사나
시골집 홀로 된 할머니에 얹혀사나
허공에 걸린 빈집
심심한 바람이나 툭툭, 발길질하고
달빛이나 도둑처럼 들렀다 가고
깡통을 위하여
이재무
비 퍼붓는 여름 오후의 공터
한구석 일가 이룬 풀숲
아무도 몰래 몰매 맞는 사내
진열장 반짝이는 구릿빛으로
섬섬옥수의 간택 기다리던
은성의 날들은 가고
추회의 얼굴 녹슨 시간을 사는
아, 쓸쓸한 노후여
흔히들 욕망 비우라지만 비우는
순간이 죽음인 삶도 있구나
섦게 울어도 그 울음
풀숲에 갇혀
불록담 넘지 못한다
꽃그늘
이재무
꽃그늘 속으로,
세상의 소음에 다친 영혼
한 마리 자벌레로 기어갑니다
아, 그 고요한 나라에서 곤한 잠을 잡니다
꽃그늘에 밤이 오고
달 뜨고
그리하여 한 나라가 사라져갈 때
밤눈 밝은 밤새에 들켜
그의 한 끼가 되어도 좋습니다
꽃그늘 속으로
바람이 불고
시간의 물방울 천천히
해찰하며 흘러갑니다
꽃들의 등급
이재무
어떤 꽃들은,
영화처럼 관람 등급 매겨야 하지 않을까
불온한 생각 불쑥 들게 할 때가 있다
백합 장미 칸나 아카시아 목련 같은
꽃들은 확실히 풍기 문란 혐의 같은 게 있다
가령 볕 좋은 유월 한낮
공중으로 번지는 향기 파문에
향 보라 일으키며 질주해온 한 떼의 벌들
거침없이, 아카시아
속치마 속 파고드는 행위를 보라
사행 부추기고 조장하는 관능들
철철 흘러넘쳐 하도 아찔해서
마음 발갛게 발기시킬뿐더러
몰두하는 현재의 일 무용하다는 것
일순간 환하게 드러낸 뒤
맹목의 벼랑으로 몸 부추겨 몰아가는 것을!
그러나 나는 이미 지천명을 넘긴 사내
꽃과의 싸움에서 매번 불행하게도
아슬아슬 고비 넘겨 가까스로 이기는 것은
감성 쪽이 아니다
지루한 평화가 날마다 폐지처럼 쌓여간다
꽃은 튀밥처럼
이재무
튀밥처럼 부풀어 오른 하고많은 꽃들 보면
까닭도 없이 왜 나는 몸이 가려워 오는 것일까
가려워, 참을 수 없이. 마구 긁어대는 것일까
어디라 할 것도 없이 가려워서 목과 팔과 다리를 긁고
손에서 가장 먼 등,
농한기의 우리네 소가 그러하듯이
벽에 대고 문대고 하는 것일까
긁어도 손톱 끝에 피가 맺도록 긁어도
도진 가려움 약이 올라 붉게 달아오를 뿐
자지 않고 내 지내 온 생의 어느 한 부분
흐르지 못한 시간의 묵은 때 쌓여
효자손이나 갈퀴손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 줄 몰라
늦봄 가지를 뚫고 나온 하고많은 환호작약은
한 겨울 내내 참아온 나무의 가려움이
절제 없이 마구 솟아 나온 것 아닌 줄 몰라
가려워 흐흐흐 참을 수 없는 흐벅진 웃음
남더러 보라고 지천으로 흩뿌리는 것 아닌 줄 몰라
꽃잠
이재무
꽃 피운 목련나무 그늘에 앉아
누군가 부쳐온 시집 펼쳐놓는다
아니, 시는 건성으로 읽고
행간과 행간 사이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햇살은 낱알로 내려 뜰 가득 고봉으로
소복 쌓이고 시집 속 봄볕에
나른해진 글자들
겯고 튼 몸 뒤틀다가 하나, 둘, 셋
느슨하게 깍지를 풀고
꼬물꼬물, 자음과 모음 벌레 되어 기어나온다
줄기와 가지 따라 오르고
꽃 치마 속 파고들기도 한다
간지러운 듯 나무가 웃고
꽃은 벙글벙글
이마에 책 쓰고 누워
배 맛처럼 달고 옅은 꽃잠을 잔다
꿀물-아내에게
이재무
참으로 달고 달고나
애정의 꿀물
마시면 그대로 살 되고 피 되는 꿀믈
고맙고 고맙고나
세상일 고달퍼
내일조차 막막해질 때
망가진 몸 두드려주며
아내는 정성으로 꿀을 타오고
나는 말 잘 듣는 국민학교 아이가 되어
아내의 마음 꿀꺽 잘도 마시는구나
나는 안다
삶의 내장 속에 잘못 끼여든
욕망의 찌꺼기 걸러내라는
그 깊은 속뜻
아내가 사랑의 수저 저어 녹인
꿀물 한잔 마시며
어제오늘의 추위 잊는다
가슴 뜨거워진다
나는 나를 떠먹는다
이재무
아내는 비정규직인 나의
밥을 잘 챙겨주지 않는다
아들이 군에 입대한 후로는 더욱 그렇다
이런 날 나는 물그릇에 밥을 말아 먹는다
흰 대접 속 희멀쑥한 얼굴이 떠 있다
나는 나를 떠먹는다
질통처럼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없어진 얼굴로 현관을 나선다
밥 벌러 간다
나는 벌써
이재무
삼십 대 초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오십 대가 되면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 사십 대가 되었을 때 나는 기획을 수정하였다 육십 대가 되면 일 따위는 걷어차 버리고 애오라지 먹고 노는 삶에 충실하겠다 올해 예순이 되었다 칠십까지 일하고 여생은 꽃이나 뒤적이고 나뭇가지나 희롱하는 바람으로 살아야겠다
나는 벌써 죽었거나 망해버렸다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이재무
나무가 이파리 파랗게 뒤집는 것은
몸속 굽이치는 푸른 울음 때문이다
나무가 가지 흔드는 것은
몸속 일렁이는 푸른 불길 때문이다
평생을 붙박이로 서서
사는 나무라 해서 왜 감정이 없겠는가
이별과 만남 또, 꿈과 절망이 없겠는가
일구월심 잎과 곷 피우고
열매 맺는 틈틈이 그늘 짜는 나무
수천수만 리 밖 세상 향한
간절함이 불러온 비와 바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저렇듯
자지러지게 이파리 뒤집고 가지 흔들어댄다
고목의 몸속에 생긴 구멍은
그러므로 나무의 그리움이 만든 것이다
나무들 저렇듯 싱싱한 것은
이재무
나무들 몸속으로는 푸른 피가 흐리고
벌레들은 껍질에 난 소로 따라
분주히 기어오른다
나무들 어깨 위 새들은
둥지 짓고 교미를 하고
뿌리는 흙살 파고들며
세계의 확장을 위해 안간힘이다
나무 하나가 거느린
저 넓고 깊은 세상
그러므로 나무 하나 쓰러지면
그가 세운 나라 함께 쓰러진다
나무들 저렇듯 싱싱한 것은
지키고 가꿔야 할 세상 때문이다
나무와 물고기
이재무
나뭇잎에 왜 물고기의 뼈가 새겨져 있는 걸까
메콩강에 가면 기원과 비밀을 알 수 있다
메콩강에 우기가 오면
물고기들은 강안으로 올라와
수피와 열매 먹으며 나날을 연명하지만
건기가 오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들 죽어 초목의 질 좋은 거름이 된다
순환으로 영생을 꿈꾸는 나무와 물고기들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들 팔랑팔랑 나부낄 때마다
물고기들 은빛 비늘이 반짝인다
나무 한 그루가 한 일
이재무
강물 내려다보이는 연초록뿐인 언덕 위의 집
홀로된 노인 과실수 한 그루 구해 심으니
바람 몰려와 우듬지 흔들다 가고 햇살 잎잎마다 매달려 잉잉거린다
가지 끝 대롱대롱 빗방울 무수한 벌레들의 남부여대 껍질 속 세 들어 살고
꽃 피자 벌 나비 붐비고 구름 커튼 두껍게 그늘 치고
불콰한 노을 귀가에 바쁜 걸음 문득 멈추게 하고
이슬 내린 밤 열매의 소우주에 둥지 틀다 가는 별과 달
나무 한 그루 불쑥 들어선 이후
강물 눈빛 더욱 깊어지고
갑자기 살림 불기 시작한 언덕
부산스레 허둥대기 시작하였다
낙양에 와서
이재무
박물관 한 바퀴 휑하니 돌고 나와
나는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실뭉치처럼 엉킨 햇빛 덩어리 한 가닥씩 풀어내어
달게 삼키고 있는 식물들의 왕성한 식욕을.
수천수만 군마 지나간 뒤 몸에서 떨어져 나온
시뻘건 머리통들 비명 지르며 황토밭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것을.
낙양의 여름은 온갖 풋것들로 무성하였다
기원 전후 기득 놓지 않으려 살상 일삼았던
무소불위 영웅호걸과 웃음 팔아 연명했던 절세가인들
살아서는 빛이었으나 죽어 지하 묘지
전시품으로나 진설되어 있는 것을.
시큰둥하게 앉아 저를 다녀가는 사람들의 마음 안쪽
재 속의 불씨처럼
아직 자지 않은 욕망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낙양을.
낙엽
이재무
시를 지망하는 학생(월영)이 보내온
시 한 편이 나를 울린다
세 행짜리 짧은 시가 오늘 밤
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
한 가지에 나고 자라는 동안
만나지 못하더니 낙엽 되어 비로소
바닥에 한 몸으로 포개져 있다
그렇구나 우리 지척에 살면서도
전화로만 안부 챙기고 만나지 못하다가
누군가의 부음이 오고 경황 중에 달려가서야
만나는구나 잠시 잠깐 쓸쓸히 그렇게 만나는구나
죽음만이 떨어져 멀어진 얼굴들 불러모으는구나
남겨진 가을
이재무
움켜진 손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語)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의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 난 조롱박으로 퍼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내 몸속에는
이재무
두 마리 서로 다른
짐승과 동물이 산다
그러나 이들이 사이좋게
이웃하며 산 적은 없다
순종이 안에서 한가롭게 어슬렁대면
야만은 밖에서 갈 데 없이 배회를 하고
광기가 저 홀로 미쳐 날뛰면
복종은 천애 고아가 되어 눈치만 본다
개와 늑대
이 오랜 유전의 숙명을 어쩔 수 없다
사랑의 손길에 길들여진
순한 귀와 탐스런 꼬리
분노의 발길질에도 순응을 모르는
성난 이빨과 이글거리는 눈
내 낡은 집 속에는
도무지 양보를 모른 채 으르렁대는
두 마리 서로 다른
인내와 충동이 산다
내 안의 적들
이재무
고양이의 폭정에 시달려 온 쥐들이 모여
숙의를 거듭한 끝에
다른 고양이를 자신들의 대표로 선출하였다
다음 날부터 쥐들은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보통의 인간은 엇비슷하던 이웃이
자신보다 잘나갈 때 고통과 불안을 느낀다
노예들은 주인을 경원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그들을 참기 힘들게 하는 것은
천출 벗은 자가 무리 앞에 우뚝 서 있을 때다
이때 이들은 모욕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열 마리 백 마리 천 마리 만 마리 누떼가
한 마리 사자를 당해 낼 수 없듯이
수백 수천만 노예가 주인 몇을 쓰러뜨리지 못한다
역사는 기록에 대한 수사를 발전시켜 왔을 뿐이다
진보 유전자를 지니고 산다는 일은
그 자체로 멍에이며 스스로 불행지수를 높이는 일이다
민중론자들 중에는 자신들보다 열등한 자들을
은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배제하려는
못된 버릇과 심리를 지닌 이들도 있다
내 안의 불편부당한 적들과 싸워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책 속에서나
반짝일 뿐 끝내 맨 얼굴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내 일상의 종교
이재무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란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에 기록된 여자들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일이다 외로움은 사람을 한없이 추하게 만든다 술이 과하면 전화하는 못된 버릇 때문에 살아오면서 얼마나 나는 나를 함부로 드러냈든가 하루에 두 시간 한강변 걷는 것을 생활의 지표로 삼은 것도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한 시대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전설적인, 위대한 스승께서 사소하고 하찮은 외로움 때문에 자신이 아프게 걸어온 생을 스스로 부정한 것을 목도한 이후 나는 걷는 일에 더욱 열중하였다 외로움은 만인의 병 한가로우면 타락을 꿈꾸는 정신 발광하는 짐승을 몸 안에 가둬 순치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강에 나가 걷는 일에 몰두한다 내 일상의 종교는 걷는 일이다
냉장고
이재무
한밤중 늙고 지친 여자가 울고 있다
그녀의 울음은 베란다를 넘지 못한다
나는 그녀처럼 헤픈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누구라도 원하기만 하면 그녀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그녀 몸속엔 그렇고 그런 싸구려 내용들이 진설되어 있다
그녀의 몸엔 아주 익숙한 내음이 배어 있다
그녀가 하루 24시간 노동을 쉰 적은 없다
사시사철 그렁그렁 가래를 끊는 여자
언젠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들처럼 흔한 것도 없으니
한밤중 늙고 지친 여자가 울고 있다
아무도 그 울음에 주목하지 않는다
살진 소파에 앉아 자정 너머의 TV를 노려보던 한 사내가 일어나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그녀에게로 간다
그녀 몸속에 두꺼운 손을 집어넣는다
함부로 이곳저곳을 더듬고 주물러 댄다
너무 큰 슬픔
이재무
눈물은 때로 사람을 속일 수 있으나
슬픔은 누구도 속일 수 없다.
너무 큰 슬픔은 울지 않는다.
눈물은 눈과 입으로 흘리지만
슬픔은 어깨로 운다.
어깨는 슬픔의 제방
슬픔으로 어깨가 무너진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너의 부재 이후
이재무
양파처럼 슬픔도 깔 수 있다면
깔수록 안과 밖이 없는,
슬픔도 까고 까서 흔적없이 사라진다면
불안도 옷가지로 걸 수 있다면
눈물 많은 사연 증발되고 증발되어
하얀 백지로 남을 때까지
슬픔의 굴렁쇠에 갇힌 마음
굴러굴러 어디까지 가야 하나
노래는 힘이 세다
이재무
엄니는 신명이 많았다
당신의 감정을 노래로 대신하였다
나는 엄니의 노래를 들으며
엄니의 내면을 읽었다
엄니가 노래를 부르지 않는 날은
까닭 없이 마음이 불안했다
노래는 엄니의 삶과 생의 양식이었고 경전이었다
그러나 엄니는 밝고 높고 경쾌한 노래보다는
어둡고 낮고 무거운 노래를 즐겨 불렀다
슬픔으로 슬픔을 문질러 닦아 내었다
나는 엄니의 노래를 곧잘 따라 불렀다
어린 몸속에 청승을 담고 산 것은
엄니 때문이었다
엄니는 내게 노래를 남기고 돌아가셨다
?
노래를 살다 가신 엄니
나는 오늘도 엄니의 노래를 부르며 살고 있다
노래는 힘이 세다
누군가 나를 울고 있다면
이재무
누군가 나를 울고 있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누군가를 내가 울고 있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인가
수박 속을 수저로 파먹듯 이내 뻔히 드러나는 바닥의,
달착지근한 서로의 생을 파먹다
껍데기로 버려지는 인연의 끝은 얼마나 쓸쓸하고 처참한가
변덕이 심한 사랑으로 마음의 날씨가 자주 갰다 흐렸다 한
사람은 알리라
때로 사랑은 찬란한 축복이 아니라 지독한 형벌이라는 것을
침략자처럼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사랑은
점령군처럼 삶을 제 맘껏 주무르다가
생의 안쪽에 지울 수 없는 화인을 찍어놓고
어느 날 홀연 도둑처럼 훌쩍 떠나버린다
여름날의 국지성 호우처럼 그것은 예고도 없이 내리거나
몰아쳐 가문 날의 미루나무 가지와 같이 수척해진 영혼을
은총처럼 지옥처럼 적시고 뒤흔든다
누군가를 내가 울고 있다면
이재무
누군가를 내가 울고 있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인가
수박 속을 수저로 파먹듯 이내 뻔히 드러나는 바닥의,
달착지근한 서로의 생을 파먹다
껍데기로 버려지는 인연의 끝은 얼마나 쓸쓸하고 처참한가
변덕이 심한 사랑으로 마음의 날씨가 자주 갰다 흐렸다 한
사람은 알리라
때로 사랑은 찬란한 축복이 아니라 지독한 형벌이라는 것을
침략자처럼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사랑은
점령군처럼 삶을 제 맘껏 주무르다가
생의 안쪽에 지울 수 없는 화인을 찍어놓고
어느 날 홀연 도둑처럼 훌쩍 떠나버린다
여름날의 국지성 호우처럼 그것은 예고도 없이 내리거나
몰아쳐 가문 날의 미루나무 가지와 같이 수척해진 영혼을
은총처럼 지옥처럼 적시고 뒤흔든다
눈
이재무
퍼붓는 눈발 바라다보면
괜시리 가슴 두근거리고 손끝 저릿하다
마음으로 바다가 가득 차서 출렁거린다
퍼붓는 눈발 삼만리
너와 더불어 이 밤내
서둘러 가야할 곳 있는 양
몸 안에 짐승이 들어와서
발바닥 뜨거워지고 팔뚝에 피 솟는다
눈발이여, 님은 어제의 냇물 되어
저만큼 흘러갔는데
몸에 피는 꽃
이 더운 숨을 어이할거나
눈사람
이재무
눈 내린 날 태어나
시골집 마당이나 마을회관 한 구석
혹은 골목 모퉁이 우두커니 서서
동심을 활짝 꽃 피우는 사람
꽝꽝 얼어붙은 한밤 매서운 칼바람에도
단벌옷으로 환하게 꼿꼿이 서서
기다림의 자세 보여주는
표리가 동일한 사람
한 사흘,
저를 만든 이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
마음의 심지에 작은 불씨 하나 지펴놓고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이
이 세상 가장 이력 짧으나
누구보다 추억 많이 남기는 사람
늘 푸른 소니무
이재무
평생을 푸르게 살다 간 이들,
그리하여 떠올릴 때마다 새삼 옷깃 여미게 하였던
이들에게는 참으로 안 된 말이지만
푸르게 사는 것이 자랑인 시대는 끝났다
이제 누구도 단심가를 읽으며 마음 달아오르지 않는다
한때 배우자와 자식을 빼놓고 다 바꿔야 살 수 있다고
대기업 광고는 우리의 무딘 감성 일깨운 적 있지만
그 카피조차 벌써 낡은 선전이 되어버린 지 오래
변신의 부저 먼저 누르기 위해
생존의 서바이벌게임에 달려드는 저 무수한 손들을 보라
푸른 지조는 무능이고 치욕이다
희로애학을 호들갑스럽게 격정의 잎으로 꾸밀 줄 아는
달변의 잡목 속
말의 화장을 모르는 저 낡은 유물의 독야청청을
누구라서 절로 섬겨따르겠는가
샛바람에 떨지 않고 저항의 푸른 몸으로
무욕의 생을 빛내던 광영의 시대가 가고
그것이 모욕인 줄도 모르고 초지일관
신념을 생의 문패로 내거는 옹고집의 딸깍발이여,
밤길 서툰 우리들에게 이정표이자 가둥이었으나
지금은 마시고 버린 빈병처럼 무용할 뿐인 늘 푸른
소나무의 삶이여, 울 줄도 모르는 솔방울이여,
늦은 밤의 시계 소리
이재무
건전지를 사다가 태업 중인 그의 입속에 넣어준다
건전지는 그가 일용할 양식이다
그는 어제 불행의 계곡을 지나
오늘 먼지 두꺼운 대로의 신호등을 건너고 있다
그의 보폭은 일정하다
아내의 슬픔이나 나의 분노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런 그가 무섭다
하지만 어느 날 건전지는 예정된 수명을 마칠 것이다
건전지를 갈아치우며 저 또한 서서히 늙어갈 것이고
마침내는 밥상을 물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의 표정은 한결같다
그를 보며 초조하고 불안한 것은 언제나 식구들이다
그의 분주한 일상 아래 추레한 얼굴의 달력이 있다
그녀는 내 눈빛이 가 닿을 때마다
내가 지키지 못한 언약, 지켜야 할 약속들이 있다는 것을
붉은 입술을 열어 말해준다
진흙탕 길을 긴 장화에 발목 감추고 걷는 사내의 거친 숨결과
미래의 불안을 향해 걷는 냉정한 그의 발자국이
줄의 한끝을 잡고 팽팽이 잡아당긴다
단단한 고요
이재무
일 년 중 고요의 힘이 세지는 때는
망종(亡種)에서 몸을 빼 소서(小暑) 쪽으로 느리게 걷는 절기의
빨랫줄 바지랑대 그림자의 키가 가장 작아지는 때
한동안 각축하듯 울어대던 매미 울음 뚝 그친 막간
어슬렁대던 개들도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가 오수 즐기고
숫돌 다녀온 왜낫처럼 날 선 햇살 따갑게 내려
축축한 생각의 물기 휘발시켜
백치의 순간에 이르게 하던,
살구씨처럼 단단한,
이제는 어데 먼 데로 귀양 떠나 죽었는지 소식조차 없는
단풍
이재무
목 놓아 펑펑 울려고
시간의 터널 무심하게 걸어왔다
초록의 지친 나날들
붉은 추억으로 남은 여자들
어깨 들썩이며 신명나게
울음의 잔치 벌이고 있다
눈치코치 보지 않고
안으로, 안으로 고이 쟁여온
울음 꾸러미 꾸역꾸역 꺼내놓은 뒤
명태처럼 잘 마른 몸
또, 한기 속으로 밀어 넣는 여인들
한 보름 가을을 활활 울어서
닦아놓은 놋주발인 양
저리 반짝, 하늘도 황홀하게 윤이 난다
달밤
이재무
낮밤 가리지 않고 지분 내
풍기며 술렁술렁 야산 들쑤셔대는
밤꽃들 끈끈이주걱 같은 암내에 취해
숲속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일벌들
덩달아 벌게져서는, 발정 난 수캐 되어
산야를 마구 싸돌아다니는 몽롱한 달빛
옛날 같으면 수절 과부가
목매달아 죽기에 딱 좋은 날이다*
* 옛성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또 하나 달같이 하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달아 죽은 밤에도 이러한 밤이었다 - 백석 「흰밤」 중에서
달빛 속에는
이재무
달빛 속에는 이스트가 들어있나 봐
달빛 받은 것들은 부풀어 오른다
강물이 부풀어 올라 출렁거리고
바다는 부풀어 올랐다 깊어지고
산길이 부풀어 올라 꿈틀거리고
지붕과 언덕과 산이 부풀어 올라
솟아오르고
꽃이 부풀어 올라 활짝 피고
항아리가 부풀어 올라 불룩하고
태어나 처음 사랑을 만난
소녀의 가슴이 부풀어 올라 봉긋하고
늦도록 잠 못 드는 사내의
회한과 슬픔이 부풀어 올라 범람한다
달빛 속에는 이스트가 들어있나 봐
세상은 달빛 받아
높아지고 넓어지고 깊어진다
달의 궁둥이
이재무
한밤중 시골길 걷다가 앞산 중턱 은륜 굴리며 오르고 있는 달의 살찐 궁둥이 어찌나 탐스러운지 나도 모르게 손 뻗어 더듬고 있는데 사방팔방에서 갑자기 수확 철 도리깨질에 쏟아져 내리던 깨알 웃음소리 까르르 까르르 놀라 둘러보고 올려다보니 창공에 총총총 떠있는 별빛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에구, 이놈의 손모가지! 누가 볼쎄라, 슬쩍 거둬들였다 나 죽어 하늘 법정에 설 날 오려나?
대청댐
이재무
저 간 큰 여자 보아라
마을과 산과 들과 하늘을
다 집어삼키고서도
성이 안 차 서슬 푸른 눈빛을 하고 있구나
제 손으로 제 몸 조르고 쳐서
퍼렇게 멍 든,
굽이치는 수천수만 슬픔의 이랑을 보아라
저 깊은 수심에서 부글부글 끓는 노여움을 보아라
박차고 나가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뜨거운 입술로 적셔야 할 것들
지척에 두고도
연신 치마폭 들썩이며
둥둥둥 시간의 물가죽이나 두들겨대는
저 불우하고 또 불우한
여인의 검붉은 울음의 포말 일 때마다
진저리치듯 바르르 떠는 인근의 수목들,
풀잎들 보아라
대천 어항에서
이재무
우리의 노동보다도
우리의 기다림보다도
언제나 먼저 지치는 것은
사람의 그리움이다.
덕적도에서
이재무
생소한 얼굴로 저녁이 오고
새로 맺은 인연에게 눈 맞추다
저녁해가 배음으로 깔리는 바다
수박처럼 둥둥 떠 있는 섬들
저 아름다운 간격 앞에 머리 숙이다
한 알의 모래알로 뒹굴며
낮동안 달구어진 바닷물 힘껏 끌어당긴다
덧나는 슬픔
이재무
당신이 나를 떠난 슬픔보다
당신이 내게 남긴 사랑이며 정성
내가 당신께 던진 아픔이며 절망
잊는 일이 더 어렵고 괴롭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난 슬픔이야
세월의 물결이 와서 다스려주겠지만
당신이 내게 남기고 간
아픈 삶의 교훈은
세월의 물결에도 자지 않고
자꾸 덧나는 고통이지요.
도망가는 산
이재무
사람들이 무서워
산은 마을 빠져나와 절뚝절뚝,
온갖 질병 앓는 몸으로 도망가네
담장이 무릎 아래 잔풀 품어 키우듯
으스러지게 마을 끌어안고
억척스럽게 온정 피워내더니
허리 깊숙이까지 들어오는
독 오른 욕망의 삽날 무서워
품속 가득 껴안은 것들,
나무와 새와 벌레와 해충과 독버섯과 쥐와
뱀과 바람과 어둠과 구름과 별과 달과 해
한때의 푸른 추억 풀어 먼저 챙겨 보내고
그렁그렁, 눈에 밟히는 듯 거듭
되돌아보며 쩔뚝쩔뚝 유배의 먼 길 가네
독백
이재무
저녁이 슬며시 다가와 옆구리를 찌른다
여 봐, 친구, 왜 표정이 어두운가?
난 저녁의 찬 손을 떼어놓고
신이 막 붓 칠을 끝낸 묵화를 바라본다
난 결심한 게 있다네
얼마 후 저 묵화 위에 달이 떠올라 낙관을 찍으리라
속이 시끄럽군
머릿속 자욱한 발자국을 지우게나
저녁은 가래를 뱉듯 핀잔을 던지고는
바삐 골목을 돌아나간다
돌
이재무
모름지기 시인이란 연민할 것을
연민할 줄 알아야 한다
과장된 엄살과 비명으로 가득 찬
페이지를 덮고
새벽 세 시 어둠이 소복이 쌓인
적막의 거리 걷는다
잠 달아난 눈 침침하다
산다는 일의 수고를 접고
살(肉) 밖으로 아우성치던 피의
욕망을 재우고 지금은 다만,
순한 짐승으로 돌아가 고른 숨소리가
평화로운 내 정다운 이웃들이여,
누구나 저마다의 간절한 사연 없이
함부로 죄를 살았겠는가
머리에 이슬 내리도록 노니다가
발부리에 걸리는
돌 하나 집어 주머니에 넣는다
돌과 여울
이재무
급하게 흐르는 여울이 큰 돌을 만나 아프다고 소리칩니다. 안쓰러운 나머지 돌에게 원망이 들고 여울을 위해 저 돌을 꺼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러다가 순간 여울 때문에 돌은 또 얼마나 부대끼고 고되었을까를 떠올리니 이번엔 여울에 시달려 온 돌이 안 돼 보이고 그의 생이 불쑥 서러워졌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돌이거나 여울입니다. 어제는 여울이었다가 오늘은 돌이고 오늘은 돌이었다가 내일은 여울인 셈이지요. 여울은 돌을 만나 여울 빛이고 돌은 여울을 만나 돌빛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스미어 만든 빛깔인 셈이지요
돌로 돌아간 돌들
이재무
돌 속으로 들어가 돌과 함께
허공 소리치며 날던 때가 있었다
번쩍이는 것들,
유리창을 만나면 유리창을 부수고
헬멧 만나면 푸른 불꽃 피워 올리며
맹렬한 적개심으로 존재를 불태웠던
질풍노도의 서슬 퍼런 날들이 가고
돌들은 흩어져 여기저기 땅 속에 처박혔다
돌 속에서 비칠, 어칠 사람들이 나오고
비로소 돌로 돌아간 돌들
저마다 각자 장단 완급의, 고요한
풍화의 시간 살고 있다
돌 속의 물
이재무
천차만별 형형색색의 돌 속에 물이 있다
돌의 형상과 무늬는
돌 속에 숨어사는 물이 안간힘으로 새긴 것,
뜨거운 여름날 햇빛 폭포 속에서
물이 슬어놓은 알을 담고 부화 기다리며
몰래 우는 돌 본 적 있는가
죽은 돌은 울지 못한다
돌 속의 물 깍지를 풀면
견고한 생도 푸석푸석 제풀에 숨 놓을 것이다
동굴
이재무
저 화냥년을
저 자본의 길들여져 빤질빤질한
크고 넓은 컴컴한 질 속을
쾌락의 거시기 되어 들어간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입장료 넙죽넙죽
삼키는 저 허기진 구멍의 식욕을 보라
박제되어 유품으로 전시된 신화와 전설
무료한 눈 길 오래 묶지 못한다
풀기 잃은 자궁 속에는 식순 자라지 않고
팔도에서 올라온 사투리들 붐빌 뿐
비밀을 낳는 박쥐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인공으로 뿜어내는 물줄기 장난처럼 솟다
그치고 그쳤다 솟는다
저 닳고 닳은 자본의 알몸
성녀로 포장하여 파는 이여,
생활의 불감증이여,
태백 천년 수령의 주목朱木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 듣고 있는가
입구가 출구인 동굴 어디에도
숨은 신은 없다
돼지 감자탕
이재무
한나절의 굴욕 견디고 돼지감자탕
먹으러 영등포 역정 앞 골목 들어서면
막 잡아 꺼낸 짐승의 내장처럼
비릿한 내음 넝쿨 아랫도리 휘어감는다
생각할수록 삶은 국물에 뜬
돼지고기 비계 같은 것,
버리기도 낼름 먹기도 망설여지는
누군가 넣어주는 구정물 뒤엎고
사각의 울 뛰어넘을 그날을 언제인가
뜨근뜨근한 국물에 입천장 데며
파리와 함께 뼈다귀에 아슬아슬한
살점 다투며 오후의 굴욕 예비하는
정오, 햇살은 포도에,
직선으로 경적 울리며 내려꽂힌다
된장찌개
이재무
이 구수한 맛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입천장을 살짝 데우고
한 바퀴 입속 헹궈 적신 뒤
몸 안으로 슴벅슴벅 들어가는
얼얼하고, 칼칼 텁텁하고, 매콤하며
씁쓸해하는 구성진 이것은
먼먼 조상 적부터 와서
여태도 우리네 살림을 떠나지 않고 있다
흐린 등불 아래 둥글게 모여 앉아
논밭에서 캐낸 곡물과 바다에서 난 산물과
산에서 자란 나물이 만나
우려낸 되직한 속정을
숟가락에 푹 퍼서 떠먹다 보면
바깥에서 묻혀온 냉기
햇살 만난 *는개처럼 풀리고
사는 일에 까닭 없이 서느런 마음도
저만큼 세상의 윗목으로 물러나 있다
무구하고 은근하며 우직한 이것은
우리네 피의 설운 가락을 타고 온다
두계역
이재무
그해 늦여름 하오
기차는 가고
두 줄의 적색 선로 사이
덩그라이 한 무데기 똥만이 남아
들 끓는 적요
풀잎들 세차게 몸 흔든 것
때마침 불어온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으리
등이 가렵다
이재무
버림과 비어있음의 경계선은 어디쯤일까
요즘은 자꾸 등이 가렵다
뒤꿈치 치켜들고 몸을 비틀며
어깨 너머 허리 너머 아무리 손을 뻗어도
뒤틀린 생각만 가려움에 묻어 손끝에 돋아난다
나와 내 몸 사이에도
이렇듯 한 치 아득한 장벽이 있다는 것이
두렵고 신비스럽다
빛과 어둠,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 정수리 어디쯤
죽음에 이르러야 열리는 문이 외롭게 버티고 있는 것 같고
때론 소슬바람에도 쉬 무너질 것 같은 그 무엇이
내 안 어딘가 덜컹거리고 있다
등이 가려울 때마다
둥줄기 너머 보이지 않는 길들이 그립다
떼 까치
이재무
독감에 걸린 아들
등짝에 달고
소아과병원 가는 길
새까맣게 잊고 지냈던
그날의 새 울음소리
크게 들렸네
울타리 산수유나무 가지마다에
새끼 잃은 원한의
피울음 널어놓다가
외려 돌팔매질에 혼났던,
돌아보면 그저 유년의
사소한 놀이감이었을 뿐인
새 울음소리
25년 멀고 먼 거리
순간으로 달려와서는
못 갚은 죄의 가슴
콕, 콕 찍어 왔네
또 그렇게 봄날은 간다
이재무
아내한테 꾸중 듣고
집 나와 하릴없이 공원 배회하다가
벤치에 앉아 울리지 않는 핸드폰 폴더
괜스레 열었다 닫고
울타리 따라 환하게 핀 꽃들 바라보다가
꽃 속에서 작년 재작년 죽은 이들
웃음소리 불쑥 들려와 깜짝 놀랐다가
흘러간 옛 노래 입 속으로만
흥얼, 흥얼거리다가 떠나간 애인들
어디서 무얼 지지고 볶으며 사나
추억의 페이지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스레 핸드폰 자지러진다
“아니, 싸게 들어와 밥 안 먹고 뭐해요?”
아내의 울화 어지간히 풀린 모양이다
라면을 끓이다
이재무
늦은 밤 투덜대는, 집요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신경 가파른 아내의 눈치를 피해
주방에 간다 입다문 사기그릇들
그러나 놈들의 침묵을 믿어서는 안 된다
자극보다 반응이 훨씬 더 큰 놈들이다
물을 끓인다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실업을
사는 날이 더 많은 헌 냄비는 자부가 가득한
표정이다 물 끓는 소리 요란하다
한 여름 밤의 개구리 소리 같다
모든 고요 속에는 저렇듯 호들갑스런 소음이
숨어 있다 어제 들른 숲 속 직립의 시간을 사는
침묵 수행의 나무들도 기실은 제 안에
저도 모르는 소리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찬장에서 라면 한 봉지를 꺼낸다
라면의 표정은 딱딱하고 각이 져 있다
그들이 짠 스크럼의 대오는 아주 견고하고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끓는 물 속에서
그들은 금새 표정을 바꿔
각자 따로 놀며 흐물흐물 녹아 내릴 것이다
저 급격한 표정 변화는 우리 시대의 슬픈 기표다
얼마 후 나는 저 비굴 한 사발로 허겁지겁 배를 채울 것이다
도마 위 양파, 호박, 파 등속을 가지런히 놓아두고
칼을 집는다
그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자다 그의 눈빛은 매섭고
날카롭다 그는 세상을 나누기 위해 나타난 자인 것이다
놓여진 것들을 다 자르고도 성이 안찬 노여운 그는
늦은 밤을 이기지 못한 내 불결한 식욕을, 지난한
허기의 관성을 푹 찔러올는지 모른다
냄비 속 부글부글 끓는 것은 그러므로 라면만은 아닌 것이다
로드 킬
이재무
한밤중, 누워 있던 검은 아스팔트가
벌떡 일어나 먹잇감을 찾아나선다
콜타르 칠한 벽처럼 빗물에 번들거리는 몸,
속에서 먹을수록 커지는 허기가
컹컹, 인접한 산을 향해 짖고 있다
나흘 끼니를 건너뛴 아스팔트
제 몸 무두질하며 달리는 차량들
돌돌 말아 혀 안쪽으로 삼키고 싶다
공복이 불러온 뿌연 안개 속
검은 아스팔트가 바퀴를 굴리며 달리고 있다
질주의 관성은 중력이 낳은 사생아
아스팔트 등에 올라탄 재규어와 쿠거, 바이퍼,
머스탱, 스타리온, 갤로퍼, 라이노,
포니 무소들이 꽥꽥 비명을 지를 때마다
와들와들 산천초목이 떤다
산을 빠져나온, 길 잃은 본능을 잡아먹고
점점 더 난폭해지는 아스팔트
고삐 풀린 저 무한질주를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마른 혀가 남기는 얼룩
이재무
한때 나는 냇물 꿈꾼 적이 있었다 냇물이 되어
마른 땅 적시는 꿈 생각해보라 이 얼마나
달콤하고도 위대한 사랑인가 풋것들이 내 젖은 혀
만날 때마다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 켜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 상상만으로도 즐겁지 않은가
냇물이 되어 갈지자로 흐르다가 더러 바위 만나는 일도
나의 즐거운 표정 바꾸지 못했다 소용돌이 속
날쌔게 나는 몇 마리의 싱싱한 물고기
내 품 안에 키운다는 것 그것으로도 내 인생은
충분히 유의미하고 벅차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내 뜻대로 오지 않았고 나는
지금 냇물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 있다
내 몸속은 구정물로 가득 차 있고 내 마른 혀는
곰팡이꽃 피어 세상의 백지 위에 지울 수 없는 얼룩 남기고 있다
마음의 짐승
이재무
몸의 굴속 웅크린 짐승
눈뜨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수성, 몸 밖의, 죄어오는 무형의 오랏줄에 답답한 듯
발버둥치네 그때마다 가까스로
뿌리내린 가계의 나무 휘청거리네
오랜 굶주림 휑한 두 눈의
형형한 살기에 그대가 다치네
두툼한 봉급으로 쓰다듬어도
식솔의 안전으로 얼러보아도
도박, 여자, 술로 달래보아도
오오, 마음의 짐승
세운 갈기 숙이지 않네
마포 산동네
이재무
늦잠 자던 가로등
투털대며 눈을 뜨고
건넛집 옥상 위
개운하게 팔다리를 흔들며
옥수수 잎새
낮 동안 이고 있던 햇살을 턴다
놀이에 지친 아이들 잠들고
한강을 건너온 달빛
젖은 얼굴로
불 꺼진 창들만 골라
기웃거린다 안간힘으로 구름을 밀며
바람이 불고
일터에서 돌아오는 남도의 사투리들
거리를 가득 메운다
하나둘 창마다 불이 켜지고
소스라쳐 빨개진 얼굴로
달빛 뒷걸움친다
비로소 가는 비 맞은 풀잎처럼
생기가 돈다, 마포 산동네
마흔
이재무
몸에 난 상처조차 쉽게 아물어주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이 겪는 아픔이야 오죽하겠는가
유혹은 많고 녹스는 몸 무겁구나
말 없는 나무의 말
이재무
이사 온 아파트 베란다 앞 수령 50년 오동나무
저 굵은 줄기와 가지 속에는 얼마나 많은,
구성진 가락과 음표 들 살고 있을까
과묵한 얼굴을 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마주 대하고 있으면 들끓는 소음의 부유물 조용히 가라앉는다
기골이 장대한 데다 과묵한 그에게서 그러나 나는 참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나도 모르는 전생과 후생에 대하여 말하기도 하는데
구업 짓지 말라는 것과 떠나온 것들에 연연해하지 말 것과
인과에는 반드시 응보가 따른다는 것을
옹알옹알 저만 알아듣는 소리로 조근거리며
솥뚜껑처럼 굵은 이파리들 아래로 무겁게 떨어뜨린다
동갑내기인 그가 나는 왜 까닭 없이 어렵고 두려운가
어느 날인가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불던 밤은
누군가 창문 흔드는 소리에 깨어 일어나보니
베란다 밖 그가 어울리지 않게 우람한 덩치를 크게 흔들어대며 울고 있었다
나는 그 옛날 무슨 말 못할 설운 까닭으로
달빛 스산한 밤 토방에 앉아 식구들 몰래 속으로 삼켜 울던 아버지의 울음을
훔쳐본 것처럼 당황스러워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했는데
다음 날 아침 그는, 예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시치미 딱 떼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가 데면데면 나를 대하는 것이었다
바깥에서 생활에 지고 돌아온 저녁 그가 또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
참 이상하다 벌써 골백번도 더 들은 말인데
그가 하는 말은 처음인 듯 새록새록
김장 텃밭에 배추 쌓이듯 차곡차곡 귀에 들어와 앉는 것인지
불편한 속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그의 몸속에 살고 있는 가락과 음표들 절로 흘러 나와서
뭉쳐 딱딱해진 몸과 마음 구석구석 주물러주고 두들겨주기 때문일 것이다
매미들
이재무
처서 지나 매미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땅속에서 7년 동안 자신의 몸속에
고이 쟁여온 울음을 아낌없이 쏟아붓다가
빈 껍질로 나뭇가지에 붙어버린 매미들
울다가, 울다가 빈 것인 채로
생을 마감하는 것 어디 매미뿐이랴
우리도 저와 같아서 울음이 마를 때까지
울면서 죽음을 살고 있다
매실나무
이재무
성급한 사람에게는
신맛을 주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는
단맛을 준다
먼 길
이재무
이 세상 가장 먼 길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길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걸어왔다
내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몸속 유숙하는 그 많은,
허황한 것들로
때로 황홀했고 때로 괴로웠다
어느 날 문득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날
길의 초입에 서서 나는 또,
태어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분홍빛 설레임과 푸른 두려움으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괜시리
주먹 폈다 쥐었다 하고 있을 것이다
멍석
이재무
몸은 무너졌으나 더운밥에 국물 뜨겁던
여름날 우리들의 저녁 식사여
냉수 사발에 발 담근 밤새 울음과
초저녁 별빛 몇 가닥도 건져올려
겉절이와 함께 밥숟갈에 걸치어주고
트림 한 번으로도 낮 동안의 잘못
용서되던 반찬 없이 배불렀던 저녁 식사여
모깃불 연기 사이로
달 속 계수나무며 은하수 토끼 한 마리
모두 정겹던 아, 옛날이여 흑백영화여
늦은 밤 홀로 먹는 저녁밥에 목이 막힐 때
마음의 허청 속 거미줄에 사지 묶인 채
추억과 함께 돌돌 말려진 너의 몸 꺼내
서울 천지에 펼치고 싶다
우리들의 둥그런 식사를 위해
모닥불
이재무
살진 이슬이 내리는
늦은 밤 변두리 공터에는
세상 구르다 천덕꾸러기 된
갖은 슬픔이 모여 웅성웅성 타고 있다
서로의 몸 으스러지게 껴안고
완전한 소멸 꿈꾸는 몸짓,
하늘로 높게 불꽃 피워 올리고 있다
슬픔이 크게 출렁일 때마다
한 뭉텅이씩 잘려나가는 어둠
노동 끝낸 거친 손들이
상처에 상처 포개며
쓸쓸히 웃고 있다
모멘토 모리
이재무
유성이 아름다운 것은 허공을 짧게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늘 정원에 꽃처럼 피어나 반짝이는 별들은 수억 년 죽은 것들이다
우리의 생이 거룩한 것은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목련꽃
이재무
내 몸 둥그렇게 구부려
그대 무명 치마 속으로
굴려놓고 봄 한철 홍역처럼 앓다가
사월이 아쉽게도 다 갈 때
나도 함께 그대와
소리 소문도 없이 땅으로 입적하였으면
목욕탕 수건
이재무
얼마나 많은 몸뚱어리를 다녀온 면수건인가
누군가의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와 등짝과 발바닥을
닦았을 면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얼굴을 닦는다
내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와 등짝과 발바닥을
닦은 이 면수건으로 누군가는
지금의 나처럼 언젠가 머리를 털고 얼굴을 닦을 것이다
목욕탕 면수건처럼 사람들의 속살을
구석구석 살갑게 만나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면수건처럼 추억이 많은 존재도 없을 것이다
면수건처럼 평등을 사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닦고 나면 무참하게 버려지는 것들이
함부로 구겨진 채 통에 한가득 쌓여 있다
몰래 온 사랑
이재무
밤사이 비가 다녀가셨다
우리가 잠든 사이 도둑처럼 오셔서 산과 들을 깨끗이 쓸고 가셨구나
?나는 이렇게 몰래 다녀간 것들이 좋다
몰래 온 비
몰래 온 눈
몰래 온 사랑
?몰래 와서는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가는 것들?
몰래 들어와 내 안에서 기숙하는 사랑아!
올 때처럼 갈 때에도 몰래 가거라
몸살
이재무
면역 생기지 않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감기와 사랑 그리고 구두에 달라붙는 진흙 같은 집착 등속
저만큼 밀어내면 한동안 잠잠하다가
어느새 슬그머니 스며들어와 생활을 물고 흔든다
지천명 코앞에 두고 찾아온 바이러스
벼르고 왔는지 가난한 집에 들린 식객처럼
좀체 나갈 줄을 모른다 바이러스도 진화를 한다
요즘 것들은 성깔이 지랄 같아서
성긴 이빨로 질긴 살가죽 잘근잘근 씹기도 하고
뼈마디 갉아대기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 몸에 장기투숙하며 긴한 약속 깨뜨리고
식욕 앗고 무엇보다 의욕 뿌리채 흔들어 놓는다
그들이 멀쩡한 나를 쓰러뜨리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저희 뜻대로 다스리고 주무르는 동안
아, 아무도 미워하거나 시기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간절히 그립지 않고
어지간한 것에도 분노할 줄 모른다
몸살에 치를 떠는 동안 나는 오직, 축축한
이불 훌훌 털고 일어나 그저
밥 한 그릇 맛있게 먹는 것만을 소원하는 것이다
생활이 피우는 애증의 불꽃 가물가물 시들어갈 때에야
그들은 활동을 멈춘다
그러나 사는 동안 도가 넘치면 바이러스는 잊지 않고 찾아와
허황으로 가득 찬 몸 또 아프게 채찍으로 내려칠 것이다
몽상
이재무
내 몸 물방울 되어
줄기와 가지 속 거침없이 파고 들어가
쭉쭉, 허공으로 팔 뻗는다
내 몸은 뿌리 타고 내려가
붉고 부드러운 흙 애인의 젖무덤인 양
꽉 움켜쥔다 아아악, 흙의 비명은 달콤하구나
나무들의 반란,
거대한 가지 휘둘러
도시의 빌딩 쓰러뜨리고 푸하푸하, 웃는
내 몸이 우람한 나무 되어
강물 숨 크게 들이마신 후
골목 속으로 쿵쿵쿵 걸어가는 꿈꾼다
숲으로 세운 나라 푸하푸하,
나무로 웃는 웃음바다처럼 시원하구나
무덤
이재무
아들아 무덤은 왜 둥그런지 아느냐
무덤 둘레에 핀 꽃들
밤에 피는 무덤 위 달꽃이
오래된 약속인양 둥그렇게
웃고 있는지 아느냐 너는
둥그런 웃음 방싯방싯 아가야
마을에서 직선으로 달려오는 길들도
이곳에 이르러서는 한결
유순해지는 것을 보아라
둥그런 무덤 안에 한나절쯤 갇혀
생의 겸허한 페이지를 읽고
우리는 저 직선의 마을길
삐뚤삐뚤 걸어가자꾸나
어디서 개 짖는 소리
날카롭게 달려오다가 논둑 냉이꽃
치마폭에 폭 빠지는 것 보며
무덤에 누워
이재무
무덤에 누워 흐르는 강물 바라다본다
먼 곳에서 바라보는 강물은 높낮이가 없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비늘만이 아득할 뿐
저기 어디쯤 내 초라한 생애도
애증의 물거품 튕기며 쫓기듯 어딘가로 흘러가리라
무덤에 누워 푸른 하늘 바라다본다
몇 마리의 구름이 강 건너 마을 쪽,
주인 잃은 소의 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저기 어디즘 나의 후생(後生)도 누워
회환뿐인 이승에서의 질긴 인연 한가로이 되새김하리라
무덤에 누워 눈을 감는다
감은 눈 속으로
나를 다녀간 아, 그리운 얼굴들.
무덤에 대하여
이재무
우리나라 야산에는
참으로 무덤이 많다
어머니 젖무덤 같기도 한
여름날의 고봉밥처럼 봉곳,
솟아있는 봉분 주위로는
바짝 마른 솔잎 같은 햇살
떼 지어 몰려와서 바글바글
적멸 한 솥 끓이고 있다
모처럼 한파가 풀려
볕 좋은 날
죽은 이도 무덤을 열고 나와
툭툭, 젖어 붙은 몸 털며
소음이 반짝이는 저 먼 마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무릎에 대하여
이재무
계단 오르내릴 때마다 투덜거리는 무릎 관절
이 이상 신호는 탄력 잃은 기관들의
이음새가 느슨해지고 녹 슬어간다는 징후이리라
누구는 칼슘 결핍에 운동부족이라 탓하고
혹자는 식습관을 고쳐라 처방하지만
나는 안다 이것의 참다운 기원은
설운 생활에의 마음의 굴절에 있다는 것을
썩지 않는 기억은 유구하다
세상은 내게 없는 살림에 뻣뻣한 무릎이 문제였다고
말 한다 내키지 않은 일에 무릎 꿇을 때마다
여린 자존의 살갗 뚫고 나오는 굴욕의 탁한 피
하지만 범사가 그러하듯이 처음이 어렵고
힘들 뿐 거듭되는 행위가 이력과 습관을 만들고
수모도 겪다 보면 수치가 아닌 날이 오게 된다
굴욕은 변명을 낳고 변명이 합리를 낳고
마침내는 합리로 분식한 타성의 진리를
일상의 옷으로 껴입고 사는 날이 도래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신하고 제가하는 동안 마음 연골이 닳아왔던 것
생의 계단 오르내릴 때마다 무릎은
뼈아픈 질책을 던져온다
지불한 수고에 대한 값 너무 헐하지 않느냐고
무서운 나이
이재무
천둥 번개가 무서웠던 시절이 있다
큰 죄 짓지 않고도 장마철에는
내 몸에 번개 꽂혀 올까봐
쇠붙이란 쇠붙이 멀찌감치 감추고
몸 웅크려 떨던 시절이 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새 한 아이의 아비가 된 나는
천둥 번개가 무섭지 않다
큰 죄 주렁주렁 달고 다녀도
쇠붙이 노상 몸에 달고 다녀도
그까짓 것 이제 두렵지 않다
천둥 번개가 괜시리 두려웠던
행복한 시절이 내게 있었다
무중력 저울
이재무
그는 달고 재는 일로 세상 이치 궁구하던 자
꼼꼼하게 저를 다녀가는 세세한 차이들
눈금으로 읽어내 존재들 가치를 증명해 왔다
슬쩍 바람이 몸 얹기만 해도
파르르 진저리 치며 파동 보이던,
바늘 촉수를 누구라서 감히 눈속임할 수 있었겠는가
경중에 따라 위계 매겨온 냉혈한
무게들은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해 왔다
그렇게 평생 판단하고 재단하는 일로 살아온 그가
어느 날 문득 중심축 잃고 난 뒤
기관들 신경 줄 끊어지고 감각들은 몸을 빠져 나갔다
이후 그는 자신이 지금껏 애써 지켜온
추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스스로 부인하였다
생의 위반과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무게의 차이는 가치의 서열일 수 없으므로
기능 상실한 추를 떼어낼 것
세계 안에 편재하는 사물은 각자 저마다의 무게로
고유한 최대치의 절대성을 지녀 살아간다는 것
그러니 무게의 이력들을 더 이상 개관하지 말 것
그리하여 그렇게나 많이 주렁주렁 길고
무거운 전력 담은 벽보와 전단지 인생들이 발길
끊어지고 철저히 버려진 채 그른 고립무원의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추수
끝난 벌판의 검불처럼 속진의 셈본으로부터
벗어나 생애 처음으로 무려한 자유가 주어졌다
무청
이재무
배고픈 소가
주인 몰래
무밭에 들어가
무청 하나
맛있게 씹고 있다
나의 시(詩)도
저 무청 하나와 같아서
그리움에 굶주린 사람
온전히 채워줄 수 있다면
무화과
이재무
술안주로 무화과를 먹다가
까닭 없이 울컥, 눈에
물이 고였다
꽃 없이 열매 맺는 무화과
이 세상에는 꽃 시절도 없이
어른을 살아온 이들이 많다
묵묵한 식사
이재무
바깥에서 시끄러운 하루 보내고
돌아와 저녁 식탁
가난한 소찬들 둘러보다가
사발에 담긴 묵을 본다
이 씁쓸한 맛의 물컹하고 연한
고동의 색은 어디서 왔는가
비바람과 벌레 견디고 이겨
차돌처럼 단단해진 동글납작한
남도의 얼굴
가지를 떠난 후
뭉개지고 녹아 쓰고 떫은맛 내려놓고
한 덩어리 담백한 살[肉] 될 때까지
누구의 귀에도 가닿지 못했을
소리 없는 절규와 비명 떠올려본다
젓가락 숟가락 앞에서 속수무책인 것
어찌 저녁 식탁의 묵 뿐이겠는가
문(門)
이재무
왜 있지?
시골 옛집 창호지 바른,
한밤중 달빛 흘러와
벽면에 벽화를 치고
산에서 뛰쳐나온 새 울음이
구멍도 없는데
방바닥으로 또르르 굴러오고
마실 꾼 발자국 소리도
환하게 들려주는,
그러나 마파람 고집은 들이지 않는,
한가운데 손바닥 크기의
창(窓)을 내어
바깥 동정 살피게 꾸민,
그런 문(門)
내 몸에 내어 살고 싶다 이 말여,
물꽃
이재무
비 오는 날 호수에 물꽃 핀다
수직으로 빗방울은 떨어져
수면에 동심원을 그린다
수평으로 잔잔히 퍼지는 물무늬
세모시처럼 가늘고 고운
저 아름다운 적막의 동그라미 속,
누대의 시간 흐른다
소란과 수다에 지쳐
두꺼워진 몸 가누고 싶다
그리하면 한지처럼 얇아져
녹아서 형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지은 죄가 많아
선한 것이 눈에 불편한 사람
물꽃은 뿌리 없으니
고통도 없을 것이다
졌다 피고 피었다 지는 경이
순간의 삼매경,
차마 어지러워서 땀에 전 작업복처럼
무거운 내 오후의 생
비틀거리며 흠뻑 젖는다
물 끓어 넘치게 하는 자
이재무
주전자에 물 한가득 부어 끓인다
비등점에 이르자 끓기 시작하더니
쉭, 쉭, 쉭 거친 숨 몰아쉬며 쉴 새 없이
뚜껑 열었다 닫기를 반복 한다
불을 줄이니 금세 다소곳해지는 물
불을 올리니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물
섭씨 4도의 체온을 지닌
물의 순한 성정 사납게 만드는 것은 불이다
세상 곳곳에 산재한 물들이
위험천만하게 끓어 넘치고 있다
누구냐?
물소리는 언제나 맑다
이재무
모양이나 색깔이 달라졌다 해서
물이 제 목소리까지 바꾼 적은 없다
들어보라, 도랑물이든 개천물이든 한강물이든
물은 다만 물소리로서
세상을 살지 않는가
흐린 세상 흐린 얼굴로 흐르는
물더러 더럽다 침을 뱉는 자 누구인가
돌아서 눈 닦는 자 누구인가
하, 수상한 시절에도
바뀐 적 없는 물의 깊고 높은 성정을
제 몸으로 세워 살지 못한 자들의
세상 불만이여, 도피여, 좌절이여,
물 보지 말고
물소리로 귀를 씻어라
물소리는 언제나 맑다
물속의 돌
이재무
동글동글한 돌 하나 꺼내 들여다본다
물 속에서는 단색이더니 햇빛에 비추어보니
여러 빛 온몸에 두루고 있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동글 납작한 것이 두루두루 원만한 인상이다
젊은 날 나는 이웃의 선의,
반짝이는 것들을 믿지 않았으며
모난 상(相)에 정이 더 가서 애착을 부리곤 했다
처음부터 둥근 상(象)이 어디 흔턴가
각진 서정 다스려오는 동안
그가 울었을 어둠 속 눈물 헤아려본다
돌 안에는 우리가 모르는 물의 깊이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이 그를 다녀갔을 것인가
단단한 돌은 물이 만든 것이다
돌을 만나 물이 소리를 내고
물을 만나 돌은 제 설움을 크게 울었을 것이다
단호하나 구족한 돌 물속에 도로 내려놓으며
신발 끈 고쳐 맨다
물수제비
이재무
아침이나 저녁 호수에 나가 물수제비를 뜬 적이 있다.
수면에 배를 깔고 수평으로 아슬아슬 날아가다가
물 속으로 가라앉는 돌멩이들
돌이켜보면 내 지난날이 그러하였고
오늘과 내일이 또한 그러할 것이다
물에 닿는 찰나의 경이가 사는 동안의 축복이리라
그러나 그 어떤 돌멩이도 수면과 영원히 동행할 수는 없다
나와 당신이 던진 돌들을 삼킨 호수가 저기 있다
물의 기억
이재무
가는 비 오는 초여름 오후
낮술로 마음의 도수 올리고
우산 벗어 대청호수 바짝 당겨 앉으니
잔물결 속 굼실굼실 누에머리 천지라
취중 졸음에 겨워 끄덕끄덕 조는 새
한 잠에 두 잠 자고 석 잠에 넉 잠
잔 누에들 섶에 올라 고치 짓더라
(나방 되기 전 번데기로 생 마감하는 줄 모르고)
하늘에서 연신 비의 유충 떨어져
새 뽕잎 대느라 점점 더 호수는 손발이 짧아지더라
저 수만 평 잠실은 잠농 삼킨 물의 기억이 만든 것일까
물 아래 내력이야
내 소관 아니어서 난 다만 우중 풍경을
눈(眼)에 넣었다 뱉었다 놀이 삼매에나 빠져나 있고
물의 북
이재무
무논의 수면이 바람도 없는데
무늬를 짓는 때가 있는데
공중을 나는 새가 떨어뜨린
울음이 북채가 되어
물북을 두드리기 때문이다
물 자국
이재무
물 자국은 물에 자국이 생겼다는 말
물에 상처, 물에 흉터가 생겨났다는 말
배 지나간 자리에 남는 자국이나 상처나 흉터를
재빠르게 꼬매고 지우는 물결
물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은
무수한 물의 상처, 물의 흉터 때문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를
물의 고통, 물의 신음으로 듣는다
미역국을 끓이다
이재무
외박하고 돌아온 날로부터
찬바람 도는 아내와 냉전의 사흘 보내고 나서
맞는 일요일 아침
식구들 몰래 일어나 미역국을 끓인다
엊저녁 물에 담가 두었던 마른 미역
한밤 새 통통 살이 올라
바가지를 흔들 때마다 철썩 철썩 파도를 부르고 있다
한 솥 가득 바다를 끓여내어
밥상에 올려놓고 늦은 아침을 먹는다
더운 국물 식은 몸 덥히는 동안
아내 가슴에 옹골차게 박힌 돌
슬그머니 자취 감출 것인가
거실에 훈기가 돌고
영하의 날씨 베란다 얼어붙은 유리창에 핀
성에꽃들 죽죽 눈물 흘리며 창문 떠나고 있다
생활의 한 굽이,
또 그렇게 애써 외면하며 돌아가고 있다
민박
이재무
내 생은 민박이었다
뜨내기 생들이 잠시 유숙하는 곳,
정(情)은 넝마와도 같은 것
미련이며 집착은 땀 흘린 등에
달라붙는 넌닝구처럼 갈 길에 불편할 뿐이다
사방 벽면에 누군가 남긴 얼룩과 낙서
읽으며 짐을 풀고 묶었다
새로운 풍경은 낯이 익기도 전에 진부해졌다
사연이 많은 여인과의 사랑은 아프고
절실했으나 맥주거품처럼 곧 시들해졌다
세상은 가도, 가도 바가지 요금이더라
외상은 허용되지 않고, 집요하게 주소지를
따라다니는 고지서들,
투명한 피부를 가진 생의 장기 투숙자들이
나는 부러웠다 마음이 정주할 집 한 채
평생 나는 짓지 못할 것이다
뜨거운 유목의 피, 불안한 영혼
인상적인 마을에서 나는 기록에 대한
강렬한 충동에 시달렸으나 이내
생각을 지워버렸다 마음의 골방에
알량한 허세와 자존의 족보책 한 권
구겨넣고 오늘도 몸이 쉴 곳을 찾아 떠돈다
바위
이재무
나에게서 의지와 묵언만을 읽어온
그대들이 알랴
고요 속에서
눈뜨는 뜨거운 관능의 춤을
내 몸속은 밤마다
염천의 늪 되어
온갖 회색의 감정 부글거리고
수천 수만 불의 혀가 타오르고
동해 그 큰 물결 숨차게 와서
겁없이 드나든다 또,
어떤 날은 길 잃은 바람 불러 모으고
떼지어 내리는 어둠 숨죽인 뒤
온밤을, 온산이 울리도록 뒤척인다
내 몸에 아픈 금과 무늬
그대들이 알랴
한낮의 묵중한, 서늘한 침묵 위해
요동치는 이 서러운 혼돈의 춤을.
바퀴벌레
이재무
30년 넘었다는 다 늙은 아파트로
이사 오게 되면서 성가신 일 생겨났다
벌레와의 지난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갑각류의 제왕답게 고감도의 감각으로
제 일용할 양식을 찾고
기막히게 기척 알아채고는 벽 틈이나
구멍으로 민첩하게 몸을 숨긴다
속수무책 당하며 그저 기함할 뿐
생존 위해 진화의 시간 살아온
저 오래된 본능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밥알 한 톨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청결의 강박에 잡혀 사는 일은 형벌처럼 고되다
수시로 출몰하여선 사랑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듯
타다 만 재 속의 증오를 깨워
한껏 느슨해진 생의 오후
팽팽하게 당겨오는 놈들은 힘이 세다
하느님도 어쩌지 못한
우리 내외 게으른 천성 그렇게 일거에 바꿔 놓다니!
누수와 방만의 삶 더 이상 새거나 넘치지 않고
위생의 약진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벌레와의 동거가 만든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만 한다
그 무엇을 지독하게 미워하다 보다 보면
내가 나를 혐오하는 날 오게 된다는 것을
발을 씻으며
이재무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는다
발가락 사이 하루치의 모욕과 수치가
둥둥 물 위에 떠오른다
마음이 끄는대로 움직여 왔던 발이
마음 꾸짖는 것을 듣는다
정작 가야 할 곳 가지 못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 기웃거린
하루의 소모를 발은 불평하는 것이다
그렇다 지난날 나는 지나치게 발을 혹사시켰다
집착이란 참으로 형벌과 같은 것이다
마음의 텅빈 구멍 탓으로
발의 수고에는 등한했던 것이다
나의 모든 비리를 기억하고 있는 발은 이제
마음을 버리고 싶은 가보다
걸핏하면 넘어져 마음 상하게 한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으며
부은 발등의 불만 안쓰럽게 쓰다듬는다
밥알
이재무
갓 지어낼 적엔
서로가 서로에게
끈적이던 사랑이더니
평등이더니
찬밥 되어 물에 말리니
서로 흩어져 끈기도 잃고
제 몸만 불리는구나
배드민턴과 사랑
이재무
오래 전 일입니다. 주말이면 아이와 나는 집 앞 공터에서 배드민턴을 쳤습니다. 지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아이를 위해 시합에 져주곤 하였는데 눈치 안 채게 져 주느라 여간 애 쓰지 않았습니다. 5전3선승제. 일 세트는 제가 이깁니다. 이 세트는 가까스로 집니다. 이 때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부러 진 것을 알면 아이가 화낼 게 빤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트에 가서 듀스를 거듭하다가 힘들게 집니다. 그리고는 연기력을 발휘하여 분하다는 듯 화를 냅니다. 건미역처럼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는 내게 아이는 미안한 표정 지으면서도 한결 업 된 기분 참을 수 없는지 탄력 좋은 공처럼 통통 튀면서 경쾌하게 집으로 돌아갑니다.
배드민턴을 치면서 나는 들키지 않게 져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의 셔틀콕이 네트를 넘어 널리 멀리 퍼져나가면 그것처럼 큰 사랑은 없겠지요?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겠습니까마는.
백련사 동백꽃
이재무
동백나무들은 장애수(障碍樹)였다 암병동 환자처럼 하나같이 괴롭고 불편한 육신들 성긴 자리끼리 스크럼을 짜, 밀린 육성회비로 교무실에 불려가 꾸중 듣고 나오던 그 해 봄날의 그 좁고 긴 낭하처럼 서늘한 그늘 드리우고 임종 지척에 둔 환자가 꾸역꾸역 토해내던 피를 뭉클뭉클 붉게 피우고 있는 꽃숭어리들 지병 안고 사는 자들 소리 죽여 우는 통곡으로 체한 듯 속이 먹먹하다 추(醜)가 만든 미(美). 추사 김정희 서체 백련사에 가지 말아야 했다 봉해 놓은 과거의 매듭 풀리고 불면의 방 안 가득 질펀하게 울음 쏟아붓는, 파란만장 시절의 곡절들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몸과 마음 꽁꽁 묶어오는 것들 지독히 불운한 인연들
버려진 구두 한 짝
이재무
공터 한구석 버려진 구두 한 짝에 주목한다
저 사내가 걸어온 생을 나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저이도 그 누구처럼 태어나 세상을 사는 동안
생의 매 순간 목숨값 치르며 살아왔으리
금 간 벽돌의 손으로
방 벽 치며 울던 때 있었으리
신목에 목맬 줄 달고 싶었던 때 왜 없었겠는가
생의 오후를 살던 어느 날 아내 따라
교회 십자가 앞 무릎꿇고 통한의 긴 기도 올리기도 하였으리
더러 꽃으로 활짝 펴서 다친 마음들
위무하던 날 있었으리
가지 말아야 할 곳 다녀와서 회한의 쓴 소주로
생나무 타듯 연기 자욱한 울분 달래고
꼭 다녀와야 할 곳 가지 못하여
물 묻은 종이로, 가슴 찢어지는 아픔 있었으리라
그는 참으로 바지런히 주어진, 제 운명의 가파른 길
걷고 또 걸으며 오래 입은 외투처럼 낡아갔으리
하지만 그가 지킨 약속 그가 행한 선행은
오늘 밤 순도 높은 별꽃 되어
누군가의 쓸쓸한 밤길 밝히리라
그러하니 그대여 그대의 가난은 결코 외롭지 않다
그대의 지난 생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공터 한구석 다 해진, 늘그막에 홀로 된 신을 주목한다
남루했으나 그런대로 보람 있었던
한 사내의 전기를 나는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버림받은 자
이재무
-그는 소음으로부터 고립되고 침묵으로부터도 고립되어 있다. 그는 버림받은 자인 것이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에서)
그는 버릇처럼 핸드폰 액정화면 들여다본다
문자 한 통 날아오지 않는다
메일엔 스팸 가득 차 있고
누구도 그를 호출하지 않는다
살뜰히 살림을 살고 블랙커피를 타면
벌써, 모퉁이 돌아가고 있는 오전의 뒤통수가 보인다
은행과 관공서와 시장 다녀와
죽은 지 오래되었으나
화분 떠나지 못한 화초와 나란히 서서
베란다 밖 질주하는 차량들에 눈 팔다 보면
불쑥, 불순한 충동 치밀어 오른다
세계의 소음으로부터 고립되었다, 그는
우리에 갇힌 짐승의 하루를 사는 동안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기고
내면은 온통 잡음의 부유물이 끓어넘친다
침묵으로부터도 고립되었다, 그는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인 것이다
벌초
이재무
무딘 날 조선낫 들고
엄니 누워 계신
종산에 간다
웃자란 머리
손톱 발톱 깎아드리니
엄니, 그놈 참
서러운 서른 넘어서야
철 제법 들었노라고
무덤 옆
갈참나무 시켜
웃음 서너 장
발등에 떨구신다
서산 노을도
비탈의 황토
더욱 붉게 물들이며
오냐 그렇다고
고개 끄덕이시고......
베트남에서 돌아온 P시인에게
이재무
친구여, 그대의 각진 얼굴에 수시로 드리우는 그늘을 나는
훔쳐보았네 하노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자네는 눌러쓴
모자 벗고 허리 숙여 침묵의 긴 목례를 올리더군
아오자이 처녀들이 숲속 뛰쳐나온 새처럼 밝게
웃으며 거리를 지날 때 자네 얼굴이 시월 햇살에 따가운
능금과 같이 붉어지고 눈빛 또한 햇살 만난 이슬같이
초롱 빛나던 것을. 어디를 둘러보아도 일망무제 초록 융단의
평원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뚝우뚝 수직으로 서서 탐스런
열매의 젖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야자수 그 큰 눈으로
쓸어 담으며 자네의 입은 벌어져 다물 줄을 모르더군 그것이
그렇게도 부러웠을까 하긴 꼬딱지같이 좁은 땅에서 네것 내것
다투어 온 우리였으니 그것처럼 부러운 것도 없었을 것이네만
친구여, 내가 자네를 훔쳐본 것은 이것만이 아니라네
나는 또 보고야 말았네 전쟁박물관, 위대한 영웅 호치민
생가 둘러보면서 쿠치 터널 속 두더지 되어 들고 나오며
우리를 괴롭힌 것은 더위만이 아니었네 두 눈에 흘러든 것
땀방울만은 아니었네 묵직한 돌처럼 단단하게 차오르는 울음
목 안으로 넘기며 애써 하늘 올려다본 것 감상만은 아니었네
우리들 아버지와 삼촌들이 야만과 광기의 청춘을 보냈던
이곳에 와서 어찌 관광과 유람으로만 소일할 수 있겠는가
철없이 크게 떠들고 방자하게 웃고만 간다면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그것처럼 큰 생애의 모독도 없었을 것이네
깊은 샘처럼 우묵하게 패인 월족의 눈동자들을 우리는 보지
않았나 나는 바로 알아차렸네 하늘 아래 가장 선한 웃음과
평화의 발원지가 그 눈동자였음을. 프랑스 중국 미국 등의
제국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이제 가난과 새롭게 투쟁하는
새 나라가 내미는 화해의 손 앞에 죄의 술잔으로 두꺼워진
나의 흰 손은 한없이 부끄러웠다네 친구여, 쌀국수를 먹으며
자네는 말했지 이 고장 음식은 마약 같아 먹을수록 중독된다고
난 그것을 사랑이라고 고쳐 부르고 싶네
사랑의 중독이 어찌 연인만의 전유물이겠는가 게릴라처럼
급습했다 사라지는 스콜이 야자수와 메콩강을 살찌우는
자존의 나라 베트남에 와서 나는 뒤늦게 사랑을 배웠다네
용서의 지혜를 읽었다네 그리고 늦게 찾아온 참회를
여기에 적네. 일본 교과서 왜곡 파동에 온나라가 분노와
격정으로 몸을 떨 때 함께 월남을 떠올려야 했다고,
월남을 잊고 일본만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들 아버지,
삼촌을 이어 또 한번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을. 오, 친구여,
베트남을 다녀와서 불쑥 어른으로 성장한 친구여,
벼랑
이재무
벼랑은 번번이 파도를 놓친다
외롭고 고달픈
저 유구한 천년만년의 고독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철썩철썩 매번 와서는 따귀나
안기고 사는 몰인정한 사랑아
희망을 놓쳐도
바보같이 바보같이 벼랑은
눈부신 고집 꺾지 않는다
마침내 시간은 그를 녹여
바다가 되게 하리라
벽창호
이재무
도배 위해 낡은 벽지 떼 낸다
오래된 벽지는 고집이 세다
벽에 찰싹 붙어서
벽과 한 몸으로 살아온,
지가 벽인 줄 아는 벽창호의
완강한 저항은 몸 지치게 하고
일 더디게 한다
동요하는, 고달픈 현재여,
가까운 미래를 위해 악착같이
과거의 아집을 떼 내야 한다
병
이재무
잊을 만하면 그대는 찾아와
내 생활의 안위와 평안에 시비를 건다
그대와 더불어 半生 살아오는 동안
위로는 짧았고 고뇌는 길었도다
지름길 버리고 우회의 생 살도록
끊임없이 허위 추궁하는 그대
나는 마음이 거처할 집
평생에 다 짓지 못할 것이다
권태에 친해져 아픔 없는 생이 견딜 만하면
그대는 찾아와 바람 부는 들녘,
흐느껴 우는 강을 보여준다
가혹한 운명의 주관자여 불안
비애만이 내 생의 온전한 재부임을 일깨우는,
빛보다는 어둠에 친화한 삶
다 살아낸 후에야 나를 떠날 그대
나는 오늘도 그대로 하여 큰도적이 되지 못하고
작은 슬픔 하나에도 위태로워져 크게 울고 있다
볕 좋은 날
이재무
볕 좋은 날
사랑하는 이의 발톱을 깎아 주리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부은 발등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리
갈퀴처럼 거칠어진 발톱을
알뜰, 살뜰하게 깎다가
뜨락에 내리는 햇살에
잠깐 잠시 눈을 주리
발톱을 깎는 동안
말은 아끼리
눈 들어 그대 이마의 그늘을
그윽하게 바라보리
볕 좋은 날
사랑하는 이의 근심을 깎아 주리
보리
이재무
보리밭 속에 들어가
보리와 함께 서 본 사람은
알리라 바람의 속도와
비의 깊이를.
보리밭 속에 들어가
보리와 함께 흔들리며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정확히 알리라
세상 옳게 이기는 길
그것은 바로
바르게 서서 푸르게 생을 사는
자세에 있다는 것을.
복숭아 - 유원지에서 생긴 일
이재무
백주대낮이다 관능의 분홍빛 살결에
눈 자주 빼앗기던 사내
몇 번을 망설이다 마침내 결심한 듯
살 통통 오르고 단물 가득 배인
그녀 두 손에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껍질 벗긴다
살 속 깊숙이 이빨을 박는다
비명도 없이 한 여자의 일생이
사내의 컴컴한 입 속으로 사라진다
사내의 얼굴에 미소의 잔물결이 번진다
오른손 들어 입을 훔친다
사내가 떠난 자리
굵고 단단한 씨앗만이 남는다
그녀의 생은 다시 출발선에 놓여 있다
봄날은 간다
이재무
봄날 오후 투명한 햇살
이런 날은 저승의 안방에까지도
훤하게 보일 듯하다
물오른 신입생들의 통통 튀는 종아리
반짝이는 소음으로 세상은 청년이 된다
점심 거르고 전투처럼 치러낸 강의
내 달변의 혓바닥에 실린
진실의 질량은 얼마나 될까
불쑥 허기 몰려와 몸, 휘청거린다
먼 곳에서 크고 작은 길들은
꼿꼿이 고개 쳐들고 어디론가 바삐
달리고 있다 내가 뱉어낸 그 많은
장식의 허언들은 붕붕거리며 긴 복도
서성이거나 휴게실 담배 연기 자욱한
소음에 갇혀 날개 다친 나비처럼 비틀,
부유하고 있을 것이다
봄날 오후 햇살은 투명해서
이런 날은 맨살에 비단을 걸쳐도
아플 것이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다 밥그릇
비워내지 못하는 날이 늘어갈 뿐,
체중은 줄지 않고
누구의 안부도 그리 간절하지가 않다
꽃처럼 화들짝 피어나 한 순간의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저 웃음의 화원 속으로
아직도 겨울을 다 보내지 못한
두꺼운 몸 밀어 넣으며
물 밖으로 아가미 내민 물고기처럼
헉, 가쁜 숨 몰아쉰다
모든 게 봄날 투명한 햇살 탓이다
봄날을 치우다
이재무
은밀하게 방에 들어와 수년을 살다가
죽어버린 사련을 봉지에 담아 치웠다
내게서 시를 밀어내고 걸핏하면
수면 장애를 일으키던 애련을 나는
참지 못하고 조금씩 죽여왔다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삼 줄기처럼 질긴
목숨의 끝이, 밑 터진 봉지가
한순간 우수수 내용물을 쏟아냈을 때처럼
마침내 옭아맨 매듭 풀어버리자
베란다 밖 오동나무가 꽃을 피웠고
꽃에서 보라색 종소리가 흘러나왔고
난 쉰한번째의 생일상을 받았다
여생에 나는 몇 번이나 춘사를 기념할 것인가
내 안에 기식하던 상열을 보내려 애써온
그, 오랜 시간 동안 어쩌면 나는
그의 기억의 방구석에서 이미
회색 먼지로 쌓였는지 모를 일이다
쉰내를 풍기며 봄날이 가고 있었다
봄밤
이재무
입덧 앓던 나무 몸 안쪽에 품었던
꽃송이 꾸역꾸역 토해낸다
아프고 환하게 태어나는 신생들
신호대기 앞에서 자동차가 그러하듯이
달려오던 시간 급브레이크 걸고 우뚝 멈춰 선다
갓 태어난 아이들로 봄뜰이 온통 시끄럽고 분주하다
저 순결의 자식들은 한 열흘 무겁고 칙칙한 세상,
날렵하게 날개 펴 경쾌한 스탭의, 황홀한 춤으로
맘껏 희롱하다가 소리 소문없이 잠적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몸은 식을 줄 모르는
더러운 쾌락의 관성으로 나날이 두꺼워져 간다
이 밤 누군가는 무덤까지 지고 가야 할
저만의 내밀한, 탕감 받을 길 없는
죄의 비밀로 몸서리치며
몸속에 쟁인 뜨건 울음의 긴 끈을
아무도 몰래 끝없이 꺼내고 있을 것이다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듯 봄밤이 흐르고 있다
봄밤, 아스팔트가 운다
이재무
비 오는 봄밤
간간히 지나는 자동차가 헤드라이트 비췰 때마다
찬피 동물 등껍질같이 차게 번들거리는
아스팔트가 울고 있다 얼굴에
그 어떤 표정도 어슬렁거리게 한 적 없더니
짓이기며 달리는 성마른 바퀴들
무두질에도 내색 없이 기껏해야
제 살 뜯어 빚은 검은 비듬이나 폴폴 날려쌓더니
삶아 헹군 국수발같이 치렁치렁 감기어오는 비
하염없이 몸에 두르고 얼굴 가득 글썽글썽,
유지 만난 물방울같이
눈물 구르게 하나 저 사내
봄비
이재무
1
봄비의 혀가
초록의 몸에 불을 지른다
보라, 젖을수록
깊게 불타는 초록의 환희
봄비의 혀가
아직, 잠에 혼곤한
초록을 충동질 한다
빗 속을 걷는
젊은 여인의 등허리에
허연 김 솟아오른다
2
사랑의 모든 기억을 데리고 강가로 가다오
그리하여 거기 하류의 겸손 앞에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게 해다오
살 속에 박힌 추억이 떨고 있다
어떤 개인 날 등 보이며 떠나는 과거의 옷자락이
보일 때까지 봄비여,
내 낡은 신발이 남긴 죄의 발자국 지워다오
3
나를 살다간 이여, 그러면 안녕,
그대 위해 쓴 눈물 대신 묘목을 심는다
이 나무가 곧게 자라서
세상 속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가지마다 그리움의
이파리 파랗게 반짝이고
한 가지에서 또 한 가지에로
새들이 넘나들며 울고
벌레들 불러들여 집과 밥을 베풀고
꾸중 들어 저녁밥 거른 아이의 쉼터가 되고
내 생의 사잇길 봄비에 지는 꽃잎으로
봄비는, 이 하염없는 추회
둥근 열매로 익어간다면
나를 떠나간 이여, 그러면 그대는 이미
내 안에 돌아와 웃고 있는 것이다
늦도록 봄비 싸돌아 다닌 뒤
내 뜰로 돌아와 내 오랜 기다림의 묘목 심는다
봄을 달래다
이재무
환하고 눈부신 봄날
까닭 없이 아픈 몸을 달래며
가까스로 잠이 드는데 난데없는 확성기 소리
어찌나 크게 짖어대는지
집요하게 달라붙는 잠의 검불 떼고 일어나
문밖으로 나선다 벚꽃 개나리 살구꽃
일열 종대 혹은 이열 종대로 서서
저마다 손나발 불며 주목해달라
꽃잎 한껏 부풀려 외치고 있다
아무렴, 지난겨울 추위는 참으로 혹독하였나니
살아남은 것들의 잔치 어찌 장하지 않으랴
그대들 꽃피운 언변은 귀에 달고 눈에 밝도록
화려하고 유려하구나
하지만 국수틀같이 지치지 않는 입술이여,
오는 봄 가는 봄을 다 헤아리지는 말아다오
화무십일홍이라 했느니라
부디 가지를 떠나는 날은, 새로이
열리는 한생을 다부지게 살아가거라
지난겨울은 참으로 혹독하였나니
나 또한 밤의 거리에서 성난 민심과 함께
자꾸 도지는 광기를 재워
마음의 불꽃 피우고 또 피웠나니
봄을 앓는 것들
이재무
꽃나무들 수다와 장광설
가량비 만난 도랑처럼 마음 시끄럽다
꽃잎 하나 필 때마다 봄볕 늘고
꽃잎 하나 질 때마다 봄볕 준다
살아있는 것들만이 봄을 앓는다
낱알 빠져나간 시간의 자루 홀쭉하다
나의 남루를 울다간 이가 있었다
채무상환을 재촉하는 꽃
뜨겁게 울지 못하고 또 봄을 보낼 것인가
봄의 직공들
이재무
파업 끝낸 나무와 풀들
녹색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줄기와 가지 속 발동기 돌려 수액 퍼 올리랴
잎 틔우랴 초록 지피랴 꽃불 피우랴
여념이 없는 그들의 노동으로 푸르게 살찌는 산야
이상하게도 그들은 일할수록
얼굴빛 환해진다고 한다
봄이여 잔인한 형벌이여
이재무
또, 아프게 봄은 오는구나
새벽 휘두르며
병든 몸에 불을 지르며
가까스로 다스려온 生
충동질하고 부채질하는구나
내 아직 몸 속의 너를 다 보내지 못했는데
이교도처럼 봄은 몰려와
사망을 재촉하는구나
가지마다 잎들은 돋아나
허공 속으로 입 내밀어
젖살처럼 통통한 햇살 쪽쪽 빨아대고
가지마다 꽃들은 봉긋 솟아나
내 몸 벌겋게 발기시키는구나
아무는 상처는 덧나게 하고
시작하는 사랑에는 고통 주려고
심술 사나운 저 봄
여기저기 죄의 불을 놓는구나
봄 참나무
이재무
보는가, 단단한 껍질 속 웅크린
화약 같은 푸른 욕망을
어느 날 다순 햇살 다녀가서
일순 폭발하는,
저 강렬한 순녹의 빛다발
몸 안의 모오든 실핏줄
팽팽히 당겨지는 내연의 숨가쁨
아는가, 참나무는 죽어서도
왜 숯이 되는가를
부드러운 복수
이재무
시(詩)는 삶에 대한 부드러운 복수라는데 혹, 나의 시(詩)는 내 가난한 삶에 대하여 너무 지독한 복수를 꿈꾸어 온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는 내 생을 지나치게 분식해 왔는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내 삶을 지나치게 연민해 왔는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떠난 사랑에 지나치게 집착해 왔는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한 시대 불같이 뜨거운 이념에 높고 푸른 이상에 창백한 미래에, 어쩌다 바람에 불려 가로수 가지에 매달리게 된 검은 봉지처럼 위태위태 휘둘러 왔는지 모른다 생의 바닥에 낡은 그물 고집스럽게 던져 오면서 우연히 행운의 대어가 걸려들기를 바라왔는지 모른다 시(詩)는 삶에 대한 부드러운 복수라는데 나는 목청 높여 과장되게 고함치고 울어 왔는지 모른다 언젠가 나는 죽을 것이고 내가 낳은 부실한 시편들 중 몇몇은 남아 죽은 나를 비웃을는지 모른다 생각하면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부재에 대하여
이재무
아픈 아내 멀리 요양 보내고
새벽 일찍 일어나
쌀 씻어 안치고 늦은 저녁에 사온
동태 꺼내 국 끓인다
나는 얼큰한 것을 좋아하지만
아이 위해 '얼' 빼고 '큰' 하게 끓인다
가정의 우환과 상관없는
왕성한 식욕 위해
나의 노고는 한동안 계속되리라
아내에게서 전화가 오면
함께 사는 동안 한 번도
하지 못한, 살가운 말을 하리라
갓 데쳐낸 근대같이
조금은 풀죽은 목소리로
부지깽이 - 서툰 것이 아름답다
이재무
일곱 살 때였던가
뒤꼍 울 안 가마솥 옆
부지깽이 하나로
엄닌 내게 쓰기를 가르치셨다
다리엔 몇 번이고 쥐가 올랐다
뒷산 밟아온 어둠이
갈참나무 밑둥을 돌며
망설이다 지쳐
모자(母子)의 앉은키
훌쩍, 뛰어넘을 때까지
그친 적 없었다 우리들의 즐거운 놀이
몇 해를 두고
화단 채송화꽃 피었다 지고....
내 문득 그날의 서툰 글씨 그리워
그곳으로 내달려가면
내 앉은키와 나란했던
그 시절의 나무들
팔 벌려야 안을 수 있게 되었고
그 자리
반듯하게 그을수록 더욱 삐뚤어지던
그날의 글자들이
얼굴 환한 꽃으로 피어
웃고 있었다
부활을 꿈꾸며
이재무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숨이 찬 것은
딱딱하고 두꺼워지는 공기 때문만은 아니다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내가 읽어야 할
저 벅찬 운문의 깊이
나뭇가지 하나 하나가 회초리 되어
내 부패한 살(肉)이 아프다
잘 여문 상수리 한 알 떨어져
발밑으로 구르다가 멈춘다
저 한 알의 침묵이 태산처럼 무거워
나는 웃옷 벗어 어깨에 걸친다
지난 계절 나는 스켄들로 지나치게
마음이 분주했고 수다스러웠다
슬픔과 상처는 약 되지 못하고
독이 되어 나를 쓰러뜨렸다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아픈 발의 투정이
더욱 심해진 것은 가팔라지는 길 탓만은 아니다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내가 들어야 할
저 절절한 푸른 사연과 고백
나뭇잎 하나 하나가 눈물이 되어
썰물 뒤의 개펄같은 마음을 덮는다
비탈에 오롯이 서서 暗香을
마을 쪽으로 흘려보내는 수국의
고요한 웃음이 하도 크고 넓어서
나는 불현 관절이 시리고 절로 무릎이 꺾이다
북한강에서
이재무
초여름 비 국수 가락 되어 주루룩 주루룩 쏟아지는 날
한 여인과 나는 강변 걷고 있었네
잡티 없이 곱게 살아온 여인의 얼굴 내게
낮은 선율의 음악 같은 평화 안겨주었네
강물은 낡은 치마처럼 선이 흐릿한 겹주름 만들었다 풀면서
제 품 안에 들어온 산 그림자 꼬옥 끌어안고 있었네
비리고 역한 내 풍기며 울컥, 치밀어올라온 감정 한 덩어리
물컹, 구둣발에 짓밟혀 으깨어지고 있었네
비 젖은 여인의 머리칼에서 사과 향이 번져왔네
살아오면서 불러온, 버드나무 검은 가지처럼 축축
늘어진 어둡고 칙칙한 가락들 나 이제 그만 부르고 싶었네
북한산에 올라
이재무
내려다보이는 삶이
괴롭고 슬픈 날
산을 오른다 산은
언제나 정상에 이르러서야
사랑과 용서의 길 일러주지만
가파른 산길 오르다 보면
그 길이 얼마나 숨차고
벅찬 일인지 안다
돌아보면 내 걸어온 생의
등고선 손에 잡힐 듯
부챗살로 펼쳐져 있는데
멀수록 넓고 편해서
보기 좋구나 새삼
생각하노니 삶이란
기다림에 속고 울면서
조금씩 산을 닮아가는 것
한때의 애증의 옷 벗어
가지에 걸쳐놓으니
상수리나무 구름 낀 하늘
가리키며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길 보챈다
분리수거
이재무
어젯밤 사소한 집안일로 아내와 크게 다퉜다
감정이 크게 상하여
그 까짓것 결혼 이십년 분리수거하고 싶었다
가까스로 분을 참고 자고 난 다음날
아침 아내가 끓여준 아욱국은 너무도 입에 달았다
분리수거하라는 아내의 심부름이 싫지 않았다
비
이재무
해종일 욕설 쏟어져 내린다
어머니 생전에 내게 퍼붓던 욕
급살맞을 놈, 호랭이 물려가 뒈질 놈,
환장할 놈, 가랑이 찢어 죽일놈, 염병할 놈
죽은 연년생 동생과 함께 밥보다 많이 먹은 욕
쏟아져 내려 먼지 푸석이는 생이 젖는다
그리운 얼굴들 쏟아져 내린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욕이었다
병을 앓으며 생각의 키가 자랐고
집과 멀어질수록 마음의 뜰 넓어졌다
거리에 분주한 바지氏 치마氏들아
귀 열어 욕설 담아보아라,
모처럼 정겹지 않느냐,
줄기차게 쏟아져 내리는 살뜰한 것들이여,
떠나서는 돌아오지 않는 간절한 것들이여,
불쑥 찾아와 얼룩의 생 닦아내는 지혜의 물걸레여,
줄기차게 잔소리 쏟아져 내린다
살가운 추억, 떠나버린 애인들
오후 강의도 작파해 버리고
에라, 욕에나 젖어 비에 젖어 술에나
젖어 사랑에 젖어
비가 되어
이재무
내리는 저 비 따라
나무의 가지와 줄기, 뿌리 속으로
스며들어 그의 살(肉)이 되었으면
내리는 저 비와 더불어
지는 꽃잎 데리고
땅속으로 입적하였으면
내리는 저 비 꼬드겨
반공 떠도는 매연 끌어안고 투신 하였으면
아, 그러나 무엇보다 마른 먼지 폴폴 날리는
그대 마음의 박토 촉촉히 적셨으면
아, 그러나 무엇보다 마음의 말뚝에 매인
육신의 고삐 끊고
천상천하 혈연도 없이 주유하였으면
저 내리는 비가 되어
비밀이 사랑을 낳는다
이재무
더 이상 비밀이 없는 삶은 누추하고 누추하여라
사랑하는 이여,
그러니 내가 밟아온 저 비린 사연을 다 읽지는 말아다오
들출수록 역겨운 냄내가 난다
나는 안다 내 생을
그대 호기심 많은 눈이 다녀갈수록
사랑이 내게서 멀어져 간다는 것을
오월의 금빛 햇살 속에서
찬연한 꽃 한 송이의 자랑을 자랑으로만 보아다오
절정을 위해 온 생을 앓아온 꽃의 어제에 더 관심이 많은 그대여
꽃이 아름다운 것은
꽃이 아직 우리에게 비밀이기 때문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살기 위해 소리 없는 처절한 절규를 쉬지 못한다
생의 이면이 늘 궁금한 그대여
그 어떤 갈애가 그대의 잠을 앗는 날은
어둠이 실비처럼 내리는 여름의 서늘한 숲 속으로
한마리 새의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걸어가 보아라
그대는 그대가 만들어내는 작은 발자국 소리에도
크게 놀라 두리번거릴 것이다
숲은 파고들수록 외경과 비의로 가득차고
그대는 문득 살아 있다는 것의 존엄과 두려움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생이 비루하지 않고
신성한 선물이라는 것을 보고 온 그대는 충분히 아름답다
내가 그대를 한없이 그리워하는 것은
그토록 간절했으나 여직 그대의 생에
내 기다림의 손이 가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 보아라
새의 비밀이 사라진 뒤
지상의 거리에 넘쳐나는 그 무수한 추문자
널브러진 사랑의 시체를
비. 바람. 눈. 별빛. 달빛이 되어
이재무
비가 되어 당신의 이불 적시고 싶었어요
바람이 되어 당신의 창문 두드리고 싶었어요
눈이 되어 당신의 뜰에 내리고 싶었어요
별빛이 되어 당신의 눈결에 뜨고 싶었어요
달빛이 되어 당신의 밤길 밝히고 싶었어요
비의 냄새 끝에는
이재무
여름비에는 냄새가 난다
들쩍지근한 참외 냄새 몰고 오는 비
멸치와 감자 우려낸 국물의
수제비 냄새 몰고 오는 비
옥수수기름 반지르르한
빈대떡 냄새 몰고 오는 비
김 펄펄 나는 순댓국밥 내음 몰고 오는 비
아카시아 밤꽃 내 흩뿌리는 비
청국장 냄새가 골목으로 번지고
갯비린내 물씬 풍기며 젖통 흔들며 그녀는 와서
그리움에 흠뻑 젖은 살 살짝 물었다 뱉는다
온종일 빈집 문간에 앉아 중얼중얼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혼잣소리 내뱉다
신작로 너머 홀연 사라지는 하지(夏至)의 여자
비포장도로
이재무
길의 맨 얼굴이 그립다
평지돌출한 돌멩이들 걷는 발 아프게 물었다 뱉던,
길게 휘어진, 들어서면 사람보다 제가 먼저
울퉁불퉁 두근거리는 길
저녁이면 먹다 남긴 면발처럼 풀기 없는 기색이다가도
아침이면 튀는 공처럼 탄력 되살아나던,
한밤 달빛 소복 쌓이고 달리는 바퀴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들던 풀벌레 울음이며
비 젖어 생각 깊던, 사람과 짐승이 함께 다니던 길
속으로, 백치가 될 때까지 길의 혀에 착착 감겨
길게 걷고 싶은 것이다
빈 자리가 가렵다
이재무
새해 벽두 누군가가 전하는
한 선배 암선고 소식 앞에서 망연자실,
그의 굴곡 많은 이력을 안주로 술을 마시며
새삼스레 서로의 건강 챙기다 돌아왔지만
타인의 큰 슬픔이 내 사소한 슬픔 덮지 못하는
이기의 나날을 살다가 불쑥 휴대폰 액정화면
날아온 부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벌떡 일어나 창밖 하늘을 응시하는 것도 잠시
책상서랍의 묵은 수첩 꺼내 익숙하게
또 한 사람의 주소와 전화번호 빨간 줄을 긋겠지
죽음은 잠시 살아온 시간들을 복기하고
남아 있는시간 혜량하게 할 것이지만
몸에 밴 버릇까지 바꾸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화제의 팔할을 건강에 걸고 사는 슬픈 나이,
내 축축한 삶을 건너간 마르고 창백한 얼굴들
자꾸만 눈에 밟힌다 십년을 앓아오느라
웃음 잃은 아내도 그러하지만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죽음을 사는 것인데
생의 종점에 다다를수록 바닥 더 깊어지는 욕망,
죽음도 이제 진부한 일상일 뿐이어서
상투적인 너무나 상투적인 표정을 짓고 우리
품앗이하듯 부의봉투를 내밀고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죽음의 세포가 맹렬히 증식하는 밤
빈 자리가 가려워 전전반측 잠 못 이룬다
빈집
이재무
빈집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출항 후의 항구처럼 쓸쓸한 빈집엔
자기 생각에 빠져 사는 식구들이
바깥에서 묻혀온 제각각의 먼지들
이리저리 낮게 출렁이다 바닥에 내려앉는다
문밖 소음이나 가끔 틈을 기웃거리고
창 너머 흐린 구름이나 더러 힐끗거리는
외양간 같은 빈집엔 살찐 고요 한 마리
들어앉아 아가리를 벌린 채
자꾸만 돋아나는 시간의 푸성귀
뜯어 저작하고 있다
빨래를 빨며
이재무
밀린 빨래를 빨다보면
사소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때의 정도
혹은 옷감의 종류에 따라
빨 때와 헹굴 때
각기 동작이 달라야 한다.
이를테면 방망이를 대야 할 놈들이 있다.
이를테면 푹푹 삶아야 할 놈들이 있다.
이를테면 구제 불능인 놈들이 있다.
이웃들의 피와 땀,
눈물나는 생애를
갉아먹고 토막내온
흡혈귀 기생충 같은 놈들
제놈들의 권력과 지위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냉전과 극우의 담을
높여온 파렴치한들
놈들이 더럽혀온
때 낀 조국의 세월을 빨 때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자세가 있다.
정도 또는 종류에 따라
방망이를 대야 할 것.
푹푹 삶아야 할 것.
폐기 처분하여 확실히 버려둘 것.
이 원칙과 자세야말로
우리들 생존을 위한
윤리요 도덕이요 법칙이다.
빨래찝게
이재무
옷을 집고 있지 않을 땐
제 몸을 넌다
몸뚱이가 되어 허공을 입고
허공을 걷던 옷가지들
떨어지던 물방울의 시간
입아귀 근력이 떨어진
입 다무는 일이 일생인
빨래집게가 물고 있는 허공
물 수 없는
시간을 깨물다
철사 근육이 삭아 끊어지면
툭, 그 한마디 내지르고
흩어지고 말
온몸이 입인
사라진 분노를 위하여
이재무
나는 내가 시인인 것이 자랑스럽다
바닥에 떨어진 새의 시체와도 같아 나의
심장은 싸늘히 식어 버렸다 나는 이제
분노할 줄을 모른다 지난날 내 생을
다스려온 그 아름다운 분노는
부지런히 죄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내 생을 떠나버렸다 나는 이제
울지 않고도 크게 세상을 말할 줄
알게 되었다 더러운 추문과 스캔들에
두 눈 반짝이는 나는, 시집을 다섯 권이나
낸 시인이다 거듭 실패하는 동안
제법 독자들의 취향이나 입맛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분노는 내 생을
불편케 할 뿐이다 매향리가 미군에
폭격을 당해도 나는 화가 나지 않는다
나는 북한 어린이가 굶어죽어도 눈물은 커녕
비웃음만 나온다 동남아시아 가난한 나라
밀입국한 나이 어린 노동자들이 산재당해
오 년치 칠 년치 임금 고스란히 병원비로
날려버려도 그것은 그들 개인의 불운일 뿐
나는 이제 가슴이 벌집인 양 숭숭 뚫리지도
매맞은 개구리 뒷다리마냥 벌벌
떨리지도 않는다 나 이제 살 만하다
그러니 청승을 강요하지 말라
나는 이제 길바닥 아무렇게나 놓인
돌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내 몸을
토막 난 막대기로 잘못 알고 함부로
걷어차도 인내에 익숙한 나는 아마
진정한 도인처럼 허허허, 웃을 것이다
사람들은 도회에 와서 죽는다
이재무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도회로 와서 살다가 죽는다
도회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도회에서 살다가 죽는다
도회에서 살던 사람들은 죽어서야 도회를 빠져 나간다
도회는 죽음이 성시를 이루는 곳
도처에 죽음이 즐비하게 도사리고 있다
죽기도 전에 유령이 된 사람들이 도시 곳곳을 누비고 있다
도시에 낀 안개가 날마다 두꺼워져 간다
안개 낀 도시에 사람들이 부표처럼 둥둥 흘러 다닌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재무
배가 고파 달걀 18개를 훔친 사내가
18개월 형을 받았다
달걀 하나에 한 달 형을 받은 것이다
곰국에, 계란프라이, 멸치볶음에, 시금치나물로
아침을 먹은 나는 참을 수 없는
굴욕과 부끄러움과 설움이 솟구쳤다
누가 저 사내의 가난에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저 사내가 받은 형벌에 너와 나의 무관심도 가담한 것이다
18개월 형을 때린 검사는
아내가 차려준 더운밥을 먹고
기사 딸린 고급차를 타고 뻣뻣하게 목을 세운 채
출근하여 그것이 거룩한 사명이라도 되는 양
죄 지은 자들에게 엄한 벌을 내릴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이 없으면 누구나 짐승이 될 수 있다
18개의 계란이 하나, 하나가 낱개의 돌이 되어
구형을 내린 자의 얼굴을 향해 날아가리라
사랑
이재무
낮에도 별은 반짝이고
낮에도 별똥별은 떨어지고
낮에도 달은 떠 흐르는데
어둠을 바탕으로 피는 것들은
낮에는 볼 수 없다네
사랑도 이와 같아서
너랑 나랑
한낮을 살 때는 뵈지 않다가
네가 지고 홀로 깜깜해지면
네가 내 생을 반짝였거나
내가 네 생을 흘렀다는 걸
뒤늦게 회한처럼 알게 된다네
사발술 반 잔
이재무
아부지가 마시다 남긴 사발술 반 잔
윗목 한쪽에 쭈그려 앉아
목마른 것들 조용히 부르고 있다
맨 먼저, 왼종일 보리밥 빨다
입 안이 껄끄러운 듯 파리란 놈이
목을 축이고 촉수 낮은 형광등 냉큼 내려와
잠들기 전 한 잔 해야겠다고
천천히 깊게 갈증 달래고
앞산을 넘어왔더니 목이 탄다고
달빛까지 맨발로 걸어들어와
벌컥벌컥 들이키는데
아무리 마셔도 줄지 않는 술이여
오늘따라 아부지의 곤한 숨소리
징소리 북소리로 들리는 것은
밥 사발에 가득 뜨는 아부지의 생애
내, 보는 듯
읽는 듯해서인가
산불
이재무
산 하나 통째로 삼키고도
식지 않는 저 무서운 식탐을 보라
붉은 혀들이 빨고 할퀴고 뱉을 때마다
꾸역꾸역 연기 토해내며 진저리치는 산
불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검붉은 상흔
산불은 방심의 한순간에 피어나
몇 십년 혹은 몇 백년 가까스로 다스려 지녀온
살림의 목록들 흔적도 없이 태워버린다
불알 두 쪽만 달랑 남은 산 그러나
제 생을 차압해간 불 원망하지 않고
적막 우려낸 이파리들 돋을 때까지
길고 긴 고생대의 시간 묵묵히 견딜 것이다
미친 사랑의 불길이여, 오거라
물기 바짝 말라 타기 좋은 산으로
내 기꺼이 너를 맞아 즐거운 밥이 되리니
건조한 반복보다는 황홀한 재앙 살고 싶으니
산성(山城)
이재무
아직 스크럼 풀고 있지 않지만 그들에게서
그날의 긴장 읽을 수 없다 어떤 놈들은 벌써
대열로부터 벗어나 풀섶 저 혼자 비스듬히 누워
좌선에 들어갔거나 흙과 더불어 나뒹굴며 시월
달아오른 햇살에 살비듬이나 풀풀풀 날리고 있다
사각의 단단한 표정도 어지간히 풀어져 둥근 웃음을
하고 어떤 놈들은 천진하기가 서산 마애불 같다
山城이여, 그대에게서 나는 증오와 불신 대신
차라리 관용을 읽고 간다 한 시절 무엇인가
지킬 것 있고 앗을 것 있어 城은 세워지고
적의의 깃발 세상 덮었겠지만 시간 이길
미움은 없는 것이다 살다 보면 막힌 하수구처럼
생은 뚫어야 할 일로 매양 분주한 것이어서 모처럼
山城이나 왔으면 향토 사학자와 같이 근면한
표정이나 짓고 갈 일이 아니다 산 아래 멀어서
근심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마을
담아 사진이나 찍고 얼큰하게 풍경에 취해서
삐뚤삐뚤 돌아갈 일이다
산속에 핀 꽃
이재무
산 속에 핀 꽃들 보며
말(言語)의 부질없음을 본다
온몸이 그대로 언어인 꽃
저 빨간 아름다움 속에는
뿌리로부터 줄기를 거쳐 온
땀과 피가,
무엇보다도 간고한 세월의
고독이 수액되어 흐를 것이다
삶
이재무
어느 날 너는 내 속으로 들어와
나를 한없이 눈부시게 하더니
어느새 지금은 내 속을 여러 해 살다 간 이들의
그 많은 흔적들 지워내고 있구나
이 겨울, 내 몸의 묵은 가지에
새잎 돋는 아픔이여, 기쁨이여
삼류들
이재무
삼류는 자신이 삼류인 줄 모른다
삼류는 간택해준 일류에게, 그것을 영예로 알고
기꺼이 자발적 헌신과 복종을 실천한다
내용 없는 완장 차고 설치는 삼류는
알고 보면 지독하게 열등의식을 앓아온 자이다
삼류가 가방 끈에 끝없이, 유난 떨며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이 성희롱인 줄도 모르고 일류가 몸에 대해 던지는 칭찬
곧이곧대로 알아듣고 우쭐대는 삼류,삼류는 모임을 좋아한다
그곳에서 얻을 게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류와 어울려 사진을 박고 일류와 더불어 밥을 먹고
일류와 섞여 농담 주고받으며 스스로 일류가 되어간다고 착각하는 삼류
자신이 소모품인 줄도 모르고 까닭 없이 자만에 빠지는
불쌍한 삼류 사교의 지진아
아 그러나, 껍질 없는 알맹이가 없듯
위대하게 천박한 삼류 없이 어찌 일류의 광휘가 있으랴
노래를 마친 삼류가 무대를 내려서자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삼류의 얼굴에 꽃물이 든다
삼류는 남몰래 자신이 여간 대견하고 자랑스럽지가 않은 것이다
사실 열렬한 박수갈채는 노래 솜씨보다 월등한
그녀의 미모에게 보낸 것인데 그 사실을 그녀만 모르고 있다
삼류는 일류들이 앉아 있는 맨 앞줄을 겸손하게 지나서
이류들이 앉아 있는 중간을 우아하게 지나서
삼류들이 뭉쳐 있는 후미에 뽐내듯 어깨 세우고 앉는다
삼류는 생각한다 이렇게 열심히 노래 부르다 보면
언젠가 저 중간을 넘어 저 맨 앞줄에
의젓하게 앉아 있는 날이 올 거야
삼류는 가슴을 내밀어 숨을 크게 마셨다 내뿜는다
그러나 그날은 언제 올 것인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삼류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온다
그녀도 세상은 이미 각본대로 연출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 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삼류는 어제 그러하였고 오늘 그러하였듯
내일 또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를 것이다
그러다 자신의 자리와 역할이 일류를 위한 영원한 들러리요, 삐에로요,
악세사리라는 것을, 뼈저리게 무슨 회한처럼 문득 깨달을 것이다
상처
이재무
참, 나무가 앓고 있다
신음도 없이 표정도 없이
참나무의 허리
그의 몸, 저 깊은 곳으로부터
진물이 흐르고 있다
진물이 먹여 살리던 식구들을 기억한다
가장의 진액은 그러므로 울음이 아니다
식량이다
나무도 상처가 아물 때
가려움을 느낄까
가려워서 마구 잎을 피우고
가지 흔들어댈까
상처 없이 미끈한 나무가 떨군 열매 믿을 수 없다
가려워서 어디든 몸을 문대고 비비고 싶은
생의 상처여,
낫지 말아라
몸 속의 너를 보낼 수 없다
상처는 기억이고 반성이고 부활이다
서랍에 대하여
이재무
저 서랍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수시로 열리고 닫히는 서랍 속에는 귀중품이 없다
어쩌다 인색하게 자신의 속
내 보이는 서랍 안에야 들어있는 비밀하고 값진 것들
아, 나는 너무 쉽게 열리고 닫히는 서랍이었다
서울 오는 길
이재무
막차가 떠났다 뽀얀 먼지가 일고
나이 든 누이와 막내
품앗이 마치고 집으로 가던
아낙들 서넛
저녁바람에 고즈넉이 흔들리는
미루나무와 나란히 서서
오래도록 손 흔들어 주었다
멀리, 사립에 쪼그리고 앉아
어머니 누워 계신 먼 산 보며
아버지 청자담배 피워 무셨고
남녘서 돌아온 새 한 마리
가난에 매맞아 죽은
둘째 동생 재식이와의 추억이
솔잎으로 돋아나는
서편 숲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아리랑 부르며 울며 넘던 고갯길을
숨가쁘게 차가 달렸고
인가의 불빛은 꽃잎처럼 피어나는데
철들어 품은 기다림 그리움은
멀고 아득하기만 해서
마음의 심지에 타오르는 희망의 등잔불
바람 앞에 언제나 서럽고 위태로웠다
마을 사람들 마음의 손이
꽁꽁 동여맨 간절한 기구의 보따리
허리에 차고
평생을 가도 가 닿지 못할
그러나 기어이 가야만 하는
멀고 험한 길가며
바닥을 잊은 가슴샘에서
솟는 눈물은 또 얼마나 더 퍼 올려야 하는 것인가
멀미가 일어
달게 먹은 점심의 국수가락 토해내면서
서울 오는 길
고향은 끝내 깍지낀 내 몸
풀지 않았다
서해
이재무
물결의 잔주름 타고 오는, 결 고운,
어둠의 실로 몸을 휘감고
저무는 서해를 본다
내 정든 얼굴들은 저 먼바다를 건너가서
부드러운 바람이 되어 돌아오거나
숨찬 별이 되어 이마에 뜨곤 하였다
내 가슴속에는 몇 개의 모난 돌들이
박혀 있다 바다가 잠든 아기처럼
순할 때가 사실은 위험하다
가랑잎처럼 위태로운 섬 하나
자맥질 끝에 수평으로 몸을 눕힌다
둥둥, 아직 임자를 만나지 못한
죽음이 떠다닌다 바다의 얼굴은
다 식어버린 국물처럼 흐리다
두 손으로 바다를 떠서
머리카락을 건져 올리며 한 아낙이 울고 있다
출렁거리는 저 여자의 수기를
오늘 밤, 나는 마저 다 읽지 못하리라
나는 쥐고 있던 뜨거운 돌을,
바다에 몸을 내주고 있는 개펄 깊숙이
내려꽂는다 살[肉]에 와 거듭 스미는
이 뭉클한 진흙의 슬픔을 나는,
사는 동안 내내 놓지 않으리라
서해 개펄
이재무
나이가 들면서부터 내가 부쩍 찾게 되는 곳 서해
그녀가 베풀어준 그 깊고 긴 뻘의 뭉클한 젖무덤
속 나는 한 마리 키 작은 염낭게 되어 들고난다
밀물 때, 그녀 점액의 길고긴 혀 개펄 물고
뱉을 때마다 어디선가 신열에 들뜬 신음소리
배어 나온다
썰물 때, 그녀가 아쉬운 듯 입맛
다시며 그 긴 혀 거두면 개펄은, 새로 밴 생명의
새 씨앗들 싹 틔우느라 비탈 기어오르는 뱀의
등허리처럼 높고 낮게 꿈틀거린다
서해는 아무래도 분주해서 생활의 창틀에 먼지
잔뜩 낀 날보다는 그 무슨 상실의 적막으로
마음의 문풍지 요란스레 울어재는 날 찾아야 한다
어느 날은 늦가을 홍시처럼 붉게 물든 얼굴로
사는 일의 스산함 저도 함께 흐느끼며 고개
끄덕여주고 어느 날은 늙어서 홀로 된 아낙으로
다가와 내 하얀 발목 부여잡고 유행가 한 가닥
멋들어지게 불러줄 줄 안다 서해개펄,
그녀의 깊고 내밀한 몸 속 염낭게로 자맥질하며
새삼 내가 흙과 물로 태어나 더불어 살다
돌아갈 것을 믿는다
석모도의 저녁
이재무
비 오는 날의 바다는
밴댕이회 한 접시, 도토리묵 한 사발 내놓고
자꾸만 내게 술을 권했다
몸보다 마음이 얼큰해져서
보문사 법당을 오르며
생에 무늬를 남긴 인연들을 떠올렸다
비를 품고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
저녁 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비 오는 날의 바다가 쓰는
생의 주름진 문장들을 읽는 동안
마음의 자루가 터져
담고 온 돌들이 하나 둘 빠져 나갔다
얼마나 더 큰 죄를 낳아야
세상에 지고도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섬에 와서도 내내 뭍을 울고 있는 내가 싫었다
자애로운 저녁은 어머니의 긴 치마가 되어
으스스 추워오는 몸을 꼬옥 안아주었다
섣달그믐날
이재무
오늘은 섣달 그믐날
아침 나절 나무나 한 짐 지고
일일랑 쉬자
부뚜막 가득 관솔 향기 지피며
콩가루, 참기름 내음에 취하다가
모처럼 읍내 장터에 나가
검불머리 이발을 하자
돌아가신 엄니의 밥맛을 위해
나물을 사고
장흥정을 마치면 뒷뜰에 나가
빛깔 좋은 대추 씨 좋은 알밤을
추리자 세무서원 몰래
담궈 논 쌀술 사랑채에 꺼내 놓고
할머님 피부색 같은 띠 다듬으며
일년 내 살다가 쪄든 땟물쯤
물 데워 닦아 버리자
샛때 쯤에는 고향 향해 몸 달아 있을
공장 다니는 누이 혹시나 올까
신작로 너머 그리운 안부 기다리면서
설야(雪夜)
이재무
눈 내리는 겨울밤
담배 한 대 피우고
동치미 한 그릇 뚝딱 비우고
까칠까칠한 얼굴 마른 손으로 거푸 쓸어내리고
창문 열었다 닫고
들숨 날숨 길게 마셨다 내뿜고
갱지 한 장 꺼내
생을 반죽했던 물컹물컹한 말들 써본다
봉해 놓은 묵은 서랍을 연다
몽당연필, 부러진 양초, 향나무 한 토막, 소인 찍힌 편지봉투, 미완성 초고 시편, 쓰다 만 연애편지, 고장 난 손목시계, 촉 없는 만년필, 녹슨 못, 세금 고지서, 고인 된 선배와 함께 시골 간이역 배경 삼아 찍은 흑백사진, 마른 꽃가루 등속
요술 상자인 양 어제가 불쑥불쑥 맨 얼굴 내밀어 온다
험한 잠자는지 아내의 잠꼬대 소리 요란하고
코밑 거뭇해진 아들 녀석
덮어준 이불 걷어차며 잠이 달기만 한데
지정 너머의 시간 새하얗게 덮으며
분분분 눈은 내리고
내려서는 층층층 쌓이는데
마음의 국경지대 배회하며
오래 굶주린 적막이라는 짐승,
부욱북 광목 찢듯 하늘 찢는 울음소리 요란하다
세탁기
이재무
내 서재 뒤 다용도실에는
세탁기가 놓여 있어
세탁기가 세탁하느라 끙끙대는
소리를 자주 들어야 한다
끙끙, 그 소리는 어찌나 규칙적인지
한참을 듣고 있으면
나도 함께 끙끙거리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 집 빨래는 세탁기만 하는 게 아니다
어떤 땐 소리에 취해 내가 나를 두들겨
빨 때가 있는데 잠시 잠깐 머릿속이 맑아지기도 한다
어깨가 쑤시고 목이 뻐근하고
손발이 저린 것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식구들은 내가 얼마나 고되게 사는지 모른다
어쩌다 쓰는 시에도 소리가 들어와 음을 짓는다
소리에 업히다
이재무
자지러지는 풀벌레울음의 들것에 실려
둥둥, 풀밭을 떠내려간다
장대비로 쏟아지는 매미울음의 수레에 실려
후끈 달아오른 자갈길 시원하게 내려간다
젖어 무거운 생 가볍게 업고 가는
소리의 뒷등 멀찍이 바라다본다
소리의 탄생
이재무
이른 아침 일어나 창문을 여니 소리들이 방 안으로 앞다투어 뛰어든다. 깃털같이 가벼운, 송판처럼 딱딱한, 깨진 유리처럼 날카로운, 향수 바른 얼굴처럼 촉촉한, 숲속 뛰쳐나온 계곡물처럼 명랑한, 그쳐가는 아이의 울음처럼 가느다란, 숫돌 다녀온 못처럼 뾰족한, 구두의 뒷굽처럼 뭉툭한 소리들. 소리는 날마다 태어나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소리들은 서로 밀치고 껴안고 손잡는다. 침대와의 포옹을 풀자 작고 낮은 소리가 태어나 허공으로 아장아장 걸어간다. 오늘도 나는 번잡하게 하루를 살아내면서 무수한 소리 들을 낳을 것이다
손
이재무
새삼 두 손을 번갈아 바라본다
참 죄가 많은 손이다
여자 손처럼 앙증맞은 이 손으로 나는
얼마나 큰 죄를 저질러 왔던가
불의한 손과 악수를 나누고 치솟는 분노로
병을 깨고 멱살을 잡고, 음흉하게 돈을 세고
거래를 위해 술잔을 잡고
쾌락을 위해 성기를 잡고, 잡아왔던가
왼손이 한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오른손이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다본다
펼친 손에는 내가 걸어온 크고 작은 길들이
지울 수 없는 금으로 새겨져 있다
손을 잘라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손 없이 밥을 먹고 손 없이 책을 읽고
손 없이 사람을 만나 뜨겁게 포옹하며
사는 날이 오리라
송가(送歌)
이재무
모두들 그렇게 떠났다
눈결에 눈물꽃송이 몇 개
띄운 채
입으론 쓸쓸히 웃으면서
즐거웠노라고
차마 잊을 순 없겠다는
말 바늘 끝 되어
귓속 아프게 하고
인연의 매듭 풀면서
가늘게 떠는 어깨
두어 번 두드리고 떠난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아도 돌아오리란
믿음 지키며 저무는 강가
물살에 닳은 조약돌로 앉아
가는 해를 보내고
오는 밤을 맞았다
그런 날들의 먼 인가의 불빛은
물빛으로 반짝거렸고
살아온 생이
뿌리에서 떨어져나온 나뭇잎처럼
쓸쓸했다 강물은 뭍으로 올라와
생의 출발을 서두르고 재촉했지만
사소한 바람에도
낮고 축축한 울음을 낳던
갈대의 몸에 묶인 마음을
끝내 움직이진 못했다
조약돌에 이끼가 살고
물때가 제법 무성해지자
어느 먼 마을에서 온
개망초 하나
눈물인 듯 울음인 듯
내 곁에서 꽃을 피웠다
수직과 수평
이재무
수평은 수직이 만든 것이다
산의 수직 하늘의 수평을
해저의 수직 바다의수평을
기둥의 수직 천장의 수평을
언덕의 수직 강물의 수평을
꽃대의 수직 꽃의 수평을
동이에 가득 담긴 물
이고 가는 그대의,
출렁출렁 넘칠 듯 아슬아슬한
사랑의 수평도
마음속 벼랑이 이룬 것이다
수직의 고독이 없다면
수평의 고요도 없을 것이다
수직에 대하여
이재무
수평은 수직이 만든 것이다
산의 수직 하늘의 수평을
해저의 수직 바다의 수평을
기둥의 수직 천장의 수평을
언덕의 수직 강물의 수평을
꽃대의 수직 꽃의 수평을
동이에 가득 담긴 물
이고 가는 그대의,
출렁출렁 넘칠 듯 아슬아슬한
사랑의 수평도
마음 속 벼랑이 이룬 것이다
수직의 고독이 없다면
수평의 고요도 없을 것이다
수평과 고요
이재무
날개를 가진 것들은
날 때나 착지할 때
날개 움직여 수평 잡는다
아슬아슬 수평이 이루어질 때
고요는 심해처럼 깊다
날개 없는 것들은
수평의 고요를 모른다
수평을 견디지 못해
무너뜨리고 깨뜨린다
수평은 넓이가 아니라 깊이다
수평선
이재무
수평은 고요가 아니다
수평은 정치가 아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라
선 안팎 넘나들며 밀려갔다
밀려오는 격렬한 몸짓,
소리 없이 포효하는 함성을
저, 잔잔한 수평 안에는
우리가 어림할 수 없는
천연의 본성이 칼날을 숨긴 채
숨, 고르고 있는 것이다
저 들끓는 정지와 고요가
바깥으로 돌출하는 날
수평은 날카롭게 찢어지리라
제 속 들키지 않으려
칼날의 숨 재우고 있는
저 온화한 인품의
오랜 침묵이 나는 두렵다
순간
이재무
저항과 체념의 터널 간신히 빠져나와 순응으로 편안한
말기 암환자 머리맡 착한 죄로 마음 무거운 식솔들에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뼈아픈 유언 남기고 있을 것이다
어미 자궁 빠져나온 아기 서툰 자랑의
배냇짓으로 인척들 구겨진 종이 같은 얼굴 펴고
모처럼의 감동과 웃음으로 맘껏 환할 것이다
사람의 한 살이
얼마나 많은, 크고 작은 일들 태어나 성장하고 죽는 것인가
시끄럽게 달아올라 분주한 내면 식히려
하릴없이 공원 배회하는 푸른 저녁에
이별 뒤에도 상처가 없는* 나무와 풀잎 오랫동안 바라다본다
숟가락의 운명
이재무
밥집에 앉아 밥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상 위에 놓인 숟가락 골똘히 들여다본다
숟가락 맨 처음 세상에 내놓은 이는 누구일까
출생년도와 출신지를 알 수 없는
이 숟가락 든 손 얼마나 될까
한탄과 눈물로 숟가락 든 이가 있을 것이다
겸허와 감사로 숟가락 든 이도 있을 것이다
이 숟가락 애인처럼 반가운 이,
사자처럼 저주로 보인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뜨고 퍼 나르며 평생을 살다가
숟가락은 어느 날 홀연 밥상을 떠날 것이다
내가 모르는 수많은 입과 손 다녀왔을
숟가락 앞에 놓고 숟가락 놓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온 날들 떠올리는 동안
소찬들이 나오고 밥과 국이 나온다
천천히 밥 한 그릇 달게 비운다
숟가락 앞에서 밥은 비로소 밥이 된다
술이나 빚어볼거나
이재무
올 가을엔 만사 젖히고
내 고향 부여군 석성면 현내리에나 가서
철없던 유년 소풍 갔다가 보물찾기로 받은
호루라기 종일 불다가 잃은 뒤로
빛과 색 더욱 무성해진 풀밭에 빈 항아리로 누워
산그늘 덮고 한 달포 자다 깨다 하면서
저 잘난 세월에 농이나 걸까
그러다 여우비 내리걸랑 고스란히 아껴 두었다
한량 같은 구름 몇 살 오른 별 몇
동동, 동치미처럼 띄워 놓고
산달 앞둔 여자 둥근 배 같은 달도 푹 담가 띄우고
떼로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삼태기로 쓸어 담아
꾹꾹 눌러 쟁이고
오명 가명 수박씨인 냥 툭툭,
내뱉는 누룩 내 나는 사투리도 몇
함께 절여서 도수 높은 술이나 빚어볼거나
명리에 밝은 샌님들 불러들여
인사불성 될 때까지 대작할거나
숨구멍
이재무
영하의 아침 숲 속 계곡
펄펄 끓는 솥뚜껑 들썩이는 김같이
하늘하늘 물 연기 날리고 있다
아무렴, 살아 있으니 김을 내지
투명한 물의 피부에 난 숨구멍들
근면한 노동으로 물나라 주민들
들숨날숨 잘 쉬고 있다
숫돌
이재무
내 어린 날의 시골집
수채 구멍 한 구석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무딘 날 기다리며
예순 살 아비와 함께 살아온
하늘 빛 숫돌 하나
살면서 녹슨 정신의 날
힘겹게 간다
갈면 갈수록 뼈와 살 닳는 아픔
몸 부쳐 지치지만
날 하나 날세게 세워
일상의 토양으로 뿌리내리는
병든 고염나무의 뿌리와 가지
온전히 버릴 수 있다면
아픔의 칼이 내미는
사랑은 크나큰 기쁨일지니
추억의 가장자리에
외롭게 빛나는 숫돌이여,
오늘처럼 불쑥불쑥 찾아와
나날의 빈틈 용서치 마라
스프링
이재무
스프링의 힘은 반동, 밀도의 크기는 속도에 비례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몸속에 스프링을 지니고 있다
만발하는 꽃들도 줄기와 가지 속 샘물이 피운 것이다.
갓 태어난 스프링이 뿜어내던 싱싱한 탄력은 얼마나 눈부셨든가
누르는 힘 크면 클수록 되받아 솟구쳐 오르는
쾌감으로 무거운 세상 경쾌하게 들어 올렸지
그러나 영원한 반동을 사는 스프링은 없다
탄력의 숨 놓아야 할 때가 온다
새로운 봄으로 태어나기 위해 태초의
자연, 캄캄한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슬리퍼
이재무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슬리퍼처럼
편하고 만만했던 얼굴이 떠오른다
슬리퍼는 슬픈 신발이다
막 신고 다니다 아무렇게나 이곳저곳에
벗어놓는 신발이다 언감생심 어디
먼 곳은커녕 크고 빛나는 자리에는
갈 수 없는 신발이다
기껏해야 집 안팎이나 돌아댕기다
너덜너덜해지면 함부로 버려지는 신발이다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안개꽃같이
누군가의 배경으로 살았던
오래된 우물 속처럼 눈 속 가득
수심이 고여 있던 얼굴이 떠오른다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이재무
어항 속 물을
물로 씻어내듯이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
슬픔은 늙지 않는다
이재무
내 나이 올해로 오십이니 단명했던 가계사로 앞날 예측한다면 삼십 년 혹은 사십 년 후엔 필경 나는 이미 죽은 이거나 죽어가는 이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날에는 늘 체중보다 윗돌았던 생활의 등짐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작고 사소한 풍경되어 세재 풀어 놓은 듯 거품 들끓는 세계 물끄러미 관조할 수 있을 것인가 욕망의 과부하로 크게 앓던 육체의 기관들도 건강의 이음새 느슨하게 풀어놓고 제멋대로 따로 놀다가 기꺼이 벌레들 한 끼니 밥이라도 될 수 있을 것인가 발동기가 내뿜는 물처럼 혈관 속 뜨겁게 역류하던 검붉은 피 모조리 빠져나간 몸 추수 끝난 볏단처럼 순하게 말라갈 수 있을 것인가 애증과 집착으로 숯불처럼 이글거리던 눈 차갑게 식어버린 뒤 물 떠난 연못 되어 산비탈 감자꽃 만나고 온 삐적 마른 바람이나 품고 있을 것인가 산 자에 대하여는 평가 인색한 사람들도 죽음에는 대체로 관대한 법이니 내 지은 허물과 죄 크게 탓하지는 않을 것인데 늙지 않은 슬픔은 가까스로 뿌리내린 생 자주 흔들고 있는 것인가 가까운 훗날 일생에 기식했던 그 모든 선악과 미추는 다만 갱지 한 장의 풍경으로 남아 누렇게 바래다가 문득 흔적도 없이 스러져갈 것인데 오늘 나는 사소한 이별 하나로 내가 벗어난 치어라도 되는 냥 벌떡벌떡 일상의 비늘 뒤집어대며 호들갑 떨어대고 있는 것인가
시(詩)
이재무
돌이켜보니 내 애인들은
내 못된 술버릇 때문에 모두 나를 떠났다
술은 때로 관계의 공든 탑 일시에 무너뜨린다
제 딴에는 간절하고 심각해져서
술 힘 빌어 중언부언 제 속내 목청껏
무한대로 펼쳐놓는 것이지만
이미 물 먹은 솜 물 빨지 못하듯
인내의 임계점 이른 애인들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말의 폭주
끝내 못 견뎌했던 것이다
모름지기 연애할 때 마시는 술은
적당한 도수에 적당한 주량이 좋다
많이 마셔 저 혼자 지껄이는 푼수로는
애인의 변심 잡을 수 없다
술은 정서의 피톨 뜨겁게 달구어서는
달콤새콤한 밀어 애인의 귀에 퍼부어대기도 하나
과하면 수위 넘은 말의 홍수로
상대 질식시키기도 하는 거여서
말 잘 부릴만큼만 마셔주는 게
연애의 격에 맞다
떠난 애인들 애터지게 호명하는 詩여,
너무 취하지 마라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이재무
늦도록 내 눈을 다녀간 시집들 꺼내놓고 다시 읽는다
한때 내 온몸의 가지에 붉은 꽃 피우던 문장들
책 속 빠져나와 여전히 흐느끼고 있지만
울음은 그저 울음일 뿐 더 이상 마음이 동요하지 못한다
마음에 때 낀 탓이리라 돌아보면 걸어온 길
그 언제 하루라도 평안한 날 있었던가
막막하고 팍팍한 세월 돌주먹으로 벽을 치며 시대를 울던,
그 광기의 연대는 꿈같이 가고 나 어느새 적막의 마흔을 살고 있다
적을 미워하는 동안 부드럽던 내 마음의 순은 잘라지고 뭉개지고
이제는 적보다도 내가 나를 경계하여야 한다
나도 그 누구처럼 적을 닮아버린 것이다
돌멩이를 쥘 수가 없다
과녁이 되어버린 나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고 아파트를 장만하는 동안
뿌리 잃은 가지처럼 물기 없는 나날의 무료
내 몸은 사랑 앞에서조차 설렘보다는
섹스 쪽으로 기울고 있다 질 좋은 밥도
마음의 허기를 끄지 못한다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늦도록
잘못 살아온, 지울 수 없는 과거를 운다
시간의 그물
이재무
굴속 웅크린 짐승으로 누워
봄 한철을 보냈다
냉장고 안에는 아내가 퇴근 때마다 사온
푸성귀가 가득했으므로 배가 고프진 않았다
베란다 밖으로 펼쳐진 세상을 읽기에도
나는 힘에 부쳤다
나라의 기둥이 무너지고 서까래가 날아가도
나는 아프지 않았다
내 몸이 시들수록, 아내의 눈은 생기로 빛났고
나는 이상하게 먼 곳의 친구조차 그립지 않았다
시간의 그물에 갇혀 나는 행복했다
시소의 관계
이재무
놀이터 시소 놀이하는
아이들 구김살 없이 환한
얼굴 넋 놓고 바라다본다
저 단순한 동어반복 속에
황금 비율이 들어 있구나
사랑이란 비율이 만드는 놀이
상대의 무게에 내 무게를
맞출 줄 알아야 한다
엇나가기 시작한 관계들이여,
놀이터에 가서 어린아이로
시소에 앉아보라
놀이에 몰두하는 아이들은
그러자는 약속, 다짐도 없이
서로의 무게를 받들 줄 안다
신도림역
이재무
검고 칙칙한 지하선로
살찐 쥐 한 마리 걸어간다
누군가 검붉은 침을
아직 불이 살아 있는 담배꽁초를
그의 목덜미께로 뱉고 던진다
쥐는 동요하지 않는다
전방 오백 미터 화물열차가
씩씩거리며 달려오고 있다
그는 동요하지 않는다
선로를 가로질러 태평하게 저 갈 곳을 가는
그는 나보다도 서울을
잘 살고 있다
한 무리의 쥐들이 열차에 오르고 있다
신발을 잃다
이재무
소음 자욱한 술집에서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한참을 즐기다 나오는데 신발이 없다
눈 까뒤집고 찾아도 도망간 신발 돌아오지 않는다
돈 들여 장만한 새신 아직 길도 들이지 않았는데
감쪽같이 모습 감춘 것이다 타는 장작불처럼
혈색 좋은 주인 넉살 좋게 허허허 웃으며 건네는
누군가 버리고 간 다 해진 것 대충 걸쳐
문밖 나서려는 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찬바람,
그러잖아도 흥분으로 얼얼해진 뺨
사정없이 갈겨버린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구멍난 양심에 있는 악담 없는 저주 퍼부어대도
맺혔던 분 쉬이 풀리지 않는데
어느 만큼 걷다보니 문수 맞아 만만한 신
거짓말처럼 발에 가볍다
투덜대는 마음 읽어내고는 발이 시키는 대로
다소곳한 게 여간 신통방통하지가 않다
그래 생각을 고치자
본래부터 내 것 어디 있으며 네 것이라고 영원할까
잠시 빌려쓰다가 제 자리에 놓고 가는 것
우리네 짧고 설운 일생인 것을.
새 신 신고 갔으니 구린 곳 밟지 말고
새 마음으로 새 실 걸어 정직하게 이력 쌓기 바란다
나는 갑자기 새로워진 헌 신발로, 스스로의 언약을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새 눈
인주 삼아 도장 꾹꾹 내리찍으며
영하의 날씨 대취했으나 반듯하게 걸어 집으로 간다
신발이 나를 신고
이재무
주어인 신발이 목적인 나를 신고
직장에 가고 극장에 가고 술집에 가고 애인을 만나고
은행에 가고 학교에 가고 집안 대소사에 가고 동사무소에 가고
지하철 타고 내리고 버스 타고 내리고
현관에서 출발하여 현관으로 돌아오는 길
종일 끌고 다니며 날마다 닳아지는 살[肉]
끙끙, 봉지처럼 볼록해진 하루
힘겹게 벗어놓고
아무렇게나 구겨져 침구도 없이 안면에 든다
쓰레기통
이재무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것들 마다하고
더러워서 차라리 아름다운 것들
그득 품어 사람 사는 곳 환하게 하는
너는 사람 위해 바쳐진 생명 다하고서도
구박은 구박대로 다 받는구나
사람들 심심풀이 구둣발에 채여
낯짝은 가래로 먹칠당해도
이런저런 표정 애써 만들지 않고
그저 묵묵히 타고난 천품대로 사는 걸 보면
제 한 몸 가꾸기에 세월 보냈던
우리들 하루하루 부끄럽고 민망스럽다
쓰레기통, 이제 알겠다
너의 고된 하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의 일상이 버리는 하찮은 것들
네 몸 안에서 하나로 뭉쳐 있다가
새 힘의 밑거름으로 뿌려진다는
평범하나 새로운 진리의 속뜻
이제 알겠다, 욕심의 창고마다
겉포장 번지르르한 그러나 실속은 없는
개인의 영화 위해 그득 품어온 그 모든 것들이
이제 네 품으로 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네 뜻으로 우리 마음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쓴다
이재무
식전에 일어나 마당을 쓴다
찬물 뿌려 아직 잠 묻어 잇는 바닥 깨운 뒤
손주 볼 알뜰히 문질러 닦는 할미의 손길로
살뜰하게 구석구석 마당 쓸다보면
아직 보내지 못한 애증과 집착
왜 이리도 많은 것인가
돌에 스민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은 것들
마당은 패고 싸리비 끝이 울며 부러진다
싸리비 다녀간 뽀얀 얼굴의 마당에
갓 태어난 햇살과 순진한 참새들 내려와 앉는다
손 씻고 방에 앉아 새삼 생가하노니
한 칸 한 칸 시간의 공백 채워가는 일처럼
두렵고 또 경건한 일이 있을까
안절부절 생각을 풀어놓다가 방문 여니
울타리 밖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던
감나무그늘 그새 백지 마당 한 획 한 획
다는 채우지 않고 넉넉히 적시고 있다
아버지
이재무
어릴 적 아버지가 삽과 괭이 들고 땅을 파거나
낫 세워 풀 깎거나 도끼 들어 장작 패거나
싸구려 담배 피며 먼 산 바라보거나 술에 져서
길바닥에 넘어지거나 저녁 밥상 걷어차거나
할 때에, 식구가 모르는 아버지만의 내밀한
큰 슬픔 있어 그랬으리라 아버지의
큰 뜻 세상에 맞지 않아 그랬으리라
그렇게 바꿔 생각하고는 하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버지의 무능과 불운 어찌 내 설움으로 연민하고
용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날의
아버지를 살고 있는 오늘에야 나는 알았다
아버지에게 애초 큰 뜻 없었다는 것을
그저 자연으로 태어나 자연으로 살다 갔을
뿐이라는 것을 채마밭에서 풀 뽑고 있는 아버지는
그냥 풀 뽑고 담배 피우는 아버지는
담배 피우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늦은 밤 멍한 눈길로 티브이 화면이나 쫓는
오늘의 나를 아들은 어떻게 볼까
그도 나를, 나 이상으로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들아, 자본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란 아버지는
자본 속을 살다 자본에 지쳐 돌아와 멍한 눈길로
그냥 티브이 보고 있는 거란다
나를 보는 네 눈길이 무섭다
아버지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오늘까지
연장으로 땅을 파거나 서류를 뒤적이거나
라디오 연속극 듣고 있거나
배달되는 신문 기사 읽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에게서 아버지 너머를 읽지 말아다오
이후로도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일 뿐이다
아파트 신축 공사장
이재무
베란다 너머 신축 중인 공사장 바라다본다
지리한 공사도 얼마 후면 끝을 보게 될 것이다
봄이면 싹 내밀던 저곳 수천의 방들은 층층마다
사각의 얼굴로 들어설 것이고 새로운 입주자들의 생활은
보람으로 분주해질 것이다 그곳에 별, 바람, 햇볕, 구름,
비, 눈, 신문과 광고지와 인터넷과 삐삐와 드라마와 비디오
등속이 다녀갈 것이고 크고 작은 인연들이 다녀갈 것이다
농작지였던 저곳 아파트가 들어서면 시작은 새롭되
끝은 지리멸렬한 삶이 낙서처럼 어지러울 것이다
방은 그렇게 추하게 늙어가면서 무수한 흔적들
그 무슨 훈장처럼 주렁주렁 온몸에 달고 있을 것이다
어느 지식인의 주말
이재무
그는 오늘도 산속의 지혜
찾아 나설 것이다 8기통 코란도에 시동을 걸고
국토 신성론자인 그가 빼어난 경관
구석구석 밟지 않는 곳이란 없다
가파르다가 완만한
오르가슴의 능선에 오를 때마다
기억의 배낭 속 담고 간
신성(神聖)의 비유 꺼내
도시인의 불감증을 탓할 것이다
물통엔 교훈의 생수 가득 차 있고
온몸의 가지엔 잎 돋고
꽃망울 맺힐 것이다
그리고는 돌아와 밟을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모범인 생활의 페달.
뒤처지는 것들을 경멸하면서
어둠에 관하여
이재무
어둠의 두루마기 안에 마른 몸 끼고 걷던
어제의 들길 그런 날 숲속 뛰어나온 새 울음은
석간수처런 맑고 이마 위 별빛 투명하고
바람의 혀 다녀간 살갗마다 환희의 불꽃
돋곤 했었지 먼 마을의 등불 다숩고 얼굴 감춘 돌들
길에 익숙한 발목 걸어와도 상처가 아프지 않았지
어둠의 치마폭에 한 마리 살쾡이로 숨어들면
세상은 밤 사이 내린 눈처럼 고요하고 산허리 돌아오는
완만한 기적소리에도 까닭없이 가슴이 봉긋 솟곤 했었지
내 생의, 한때 아비와 어미였던 어둠이여 그러나
그대의 한없이 넓고 깊었던 두루마기와 치마
내 다시 입지 못하네 사나운, 도회의 인조 불빛 칼날에
찢겨 신음하는, 도마 위 양파처럼 얇아지는,
저 구멍난, 너덜너덜한 어둠의 런닝구 속으로
살진 몸 밀어넣지 못해 헉헉거리네
바람의 때 낀 손톱이 납빛 얼굴 할퀼 때마다
나를 향한 증오의 소름꽃 피네
어린 새의 죽음
이재무
아침 숲길 걷다가 푸른 죽음을 본다
벌써 굳어 선지가 되어버린 피,
송판처럼 딱딱해진 죽음 손 위에 올려놓고
경건한 눈으로 들여다본다
그가 남긴 짧지만 두꺼운 서사를 읽는 동안
수목 사이 응얼응얼 걸어오는 바람의 기도와
청량하게 흐르는 물의 독경 소리
추워 가늘게 떠는 어깨를 감싼다
죽음을 살아오는 동안 새는 자유를 껴입고
즐거웠을까 아니 새장 속 먹이가 부러웠을까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말하지만
자유 없는 비참과 양식 없는 고통
저 흔한 인습의 저울추로 잴 수는 없다
짧게 살다간 투명한 영혼들
풀잎마다 이슬로 맺혀서는
마음에 묘비명 하나 또 걸어둔다
곧 부패의 시간이 새를 다녀가리라
그는 이제 한마리 벌레 한그루 나무
한포기 풀로 몸 바꿔 또 다른 생 경영하리라
그의 때 이른 죽음에 내 지나온 생과
다가올 생 포개 심고 돌아와
정결히 손 씻고 밥 한 그릇 달게 비운다
억새꽃
이재무
차창 너머 능선이나 계곡
허옇게, 머리칼 나풀거리며
초겨울 속으로 걸어가는 그대
그대의 메마른 피부
굽은 등 위에 분분한,
마분지 같은 오후의 햇살 눈물난다
무성했던 여름 그대와 함께였던
날벌레, 길벌레들 땅, 나무껍질 속으로
동면 취하러 간 지 오래고
억새꽃, 그대만이 지금 맨가슴으로
폭풍이 물러간 바다 보고 있다
문득 건초같이 물기 없는 문장이
눈시울 젖게하던 기억 눈을 때린다
생의 무게는 결코 화려한 수사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
담백했던, 그날 그 책의 감동
저기 저렇듯 하얗게 다시 나부끼고
먼곳에서 그리운 사람아
우리가 저 수묵 같은 억새꽃의
한 생애로 온전히 저물 수 있다면
지닌날 서로에게 상처였던 무수한 과오인들
어찌 허물일 수밖에 없겠는가
불어오는 바람에 저를 맡기며 걷는
억새꽃, 나의 내일이여
얼굴
이재무
주름 가득한
더운 날 부채 같은
추운 날 난로 같은
미소에 잔물결 일고
대소에 밭고랑 생기는
바람에 강하고
물에 약한 창호지 같은
달빛 스민 빈방 천장 같은
뒤꼍에 고인 오후의 산그늘처럼
적막한
공책에 옮겨 쓴 경전 같은
얼음꽃
이재무
문배마을 구곡폭포는 가히 절경이었다
높이와 폭 모두 이름값을 하였고
때마침 얼어 있어서 그 위세는 더 당당하였다
빙벽은 추상같아 바라만 보아도 숨차올랐다
생동하는 추사 김정희 필체, 절대 위엄
하지만 그 앞에서 새삼스레 경의를 표하고
주눅든 어제오늘 읽는 일 따위는 접었다
거듭 눈길 묶는 빙벽 위의 거미인간들
저들의 무용한 놀이야말로 지극한 아름다움 아니냐
목숨 거는 일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절경은 말 한마디 없이 사람을 빨아들였다
영하의 날씨 매섭게 눈과 바람 몰아왔지만
그럴수록 나는 홍역 앓는 듯 신열로 달아올랐다
어쩌면 위세 당당한 것은 폭포가 아니라
무기교의 동작으로 순간의 방심도 허용치 않는
빙벽에 매달린 저 투명한 정신,
매 순간의 인간 생사를 로프에 걸어두고
안간힘으로 내딛는 발걸음마다 하얗게
얼음꽃이 피었다 사라지는 게 보였다
엄니
이재무
마흔여덟 옭매듭을 끊어버리고
다 떨어진 짚신 끌며
첩첩산중 증각골을 떠나시는 규
살아생전 친구 삼던 예수를 따라
돌아오리란 말 한마디 없이
물 따라 바람 따라 떠나시는 규 엄니
가기 전에 서운한 말
한마디만 들려달라고 아부지는 피울음 쏟고
높은 성적 받아왔으니
보아달라고 철없는 막내는 몸부림쳐유
보시는 규, 모두들 엄니에게 못 갚은 덕을
한꺼번에 풀고 있는 이웃들의 몸 둘 바 모르는 몸짓들인데
친정집 빚 떼먹은 죄루다
이십 년 넘게 코빼기도 안 보이던
막내 고모도 갚지 못한 가난
지 몸 물어뜯으며 저주하구유
시집오면서 청산 과부 올케에게
피눈물로 맡겨놨다던 열 살짜리 막내 삼촌도
어른 되어 돌아오셨슈
보시는 규, 엄니만 일어나시면
사는 죄루다 못 만난 친척들의
그리움 꽃 활짝 필 흙빛 얼굴들을
연주자
이재무
사월에 나는 생을 조율하는 한 연주자를 만났오
시도때도 없이 몸의 안쪽에서 드럼을 치다가
플롯을 불다가 첼로를 켜기도 하는 이여,
길 위 시간의 현 느슨하게 풀었다
팽팽하게 조이는 당신의 연주로
온갖 사물은 발효된 술에 취한 듯 흥분으로 발랄하다오
좌우로 흔들던 고개
앞뒤로 끄덕이게 만드는, 신명나는 가락에 맞춰
비 온 뒤 통통 살 오른 냇가 거슬러오르는
송사리떼처럼 힘차게 거리를 활보하는 날 많아졌다오
내 몸을 빠져나와 거리로 번지는 음악
새롭게 태어나는 저 말랑말랑한 것들
세상은 환하고 젊어졌다오
오래된 농담
이재무
-물은 본디 소리가 없다 물이 소리 있음은 곧 그 바닥이 고르지 못한 까닭이다(‘채근담’). 내 고르지 못한 생의 바닥 때문에 물처럼 고요했던 그대들이 내지른 그 모든 소란이여. 두루두루 미안하다
바위의 허리에 매달려 소용돌이치며 크게 울고 있는 물방울은 어제 바닥이 험한 냇가를 걸어왔다
그러나 나는 안다 먼 훗날 저 물방울은 아주 고요한 얼굴로 강의 하류를 한가롭게 걸어갈 것이란 것을 삼일수하(三一樹下) 떠돌이 건달인 나는 어제 강의 상류에서 허리가 반쯤 꺾인 채 생을 접고 울고 있는 꽃 한 송이 보고 왔다
그런데 오늘 바람도 없는데 길가 풀 한 포기 웃자란 키 우쭐거리며 방자하게 웃고 있다 오,님이여,
새삼 생각하노니 삶이란 얼마나 넓고도 깊은 농담인 것인가
오래된 슬픔
이재무
슬픔을 만나러 민둥산 간다
천의(天衣)를 입고 떠난 그들은
산꽃으로 돌아와 웃고 있다
톡톡, 바람의 발길질에
향기의 종소리가 번진다
후회와 번민의 날들이 가고
나도 꽃 한송이로 다시 살아
누군가의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물고기 몇 마리가 흔들어
만든 물 무늬 속, 지나온
내 굴곡의 한 생애가 담겨 있다
오래된 슬픔은 아름답다
오후의 공원
이재무
공원은 텅 비어 있다
울타리 넘어온 바람만이 비에 젖어 너덜너덜한
낡은 휴지 조각 구석으로 내몰고 있다
지난여름은 정말 위대했다
구청 주관의 구민을 위한 화려한 축제가 있었다
그때 달빛 받은 수목의 잎잎은 얼마나 빛이 났던가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분주했던 사흘의 잔치는 꿈같이 가고
그는 버려진 몸으로 먼지와 놀며 살았다
현수막은 내려지고 함성 사라진 지 오래 그러나
누구처럼 그것을 그는 휴식이라 말하지 않는다
검고 칙칙한 나목 속으로도 수액은 끊임없이 흐르듯
그는 다시 올 위대한 여름 묵묵히 기다릴 뿐이다
살다 보면 견디는 것조차 싸움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공원이여 비어있다는 것은 아직 희망인 것이다
오후의 구도
이재무
떡쌀처럼 부신 햇살 분분히 날리는 풀밭,
안짱다리 회색 나무 의자가 쭈그려 앉아 있고
누군가 읽다 던진 책 한 권 가랭이 벌리고
누워 호기심 많은 눈 다녀가길 기다리고 있다
오전 내내 둑 너머 골짜기에서 솜털 보숭보숭한 이파리들과
노닥거리다 주둥이 파래진 소소한 바람 달려와
정색하고 페이지를 넘긴다
책 속, 자극과 충동의 언어들은 이음새가 느슨한
수사의 고리를 풀고 행간 빠져나와
풀잎의 겨드랑이 혹은 뿌리에 가 닿는다
바람은 독서광이다
페이지가 숨, 차, 한다
나무 의자가 앞뒤로 또는 좌우로 흔들리며
밑줄 긋기도, 도리질을 치기도 한다
책 한 권이 다 읽혀져 갈 즈음
풀밭의 그늘은 훨씬 길어지고 두꺼워졌다
풀밭에 머리 박고 분주히 일용할 양식 구하던 한 마리 새
날개에 묻은 흙먼지 털며 공중으로 날아가자
서쪽 하늘, 발이 뜨거운 다리미가 밟고 간 광목처럼
팽팽히 당겨지다가 붉게 홍조를 띤다
오늘 밤 풀들의 키는 불쑥, 자라서
날것들 불러들여 뜨겁게 품에 안을 것이다
옥수수
이재무
열병식 하는 병사들처럼 밭두둑
줄지어 서서 어느 날은 햇빛의 폭우에
어깨 축 늘어뜨리고 어느 날은 폭풍으로
땅에 닿을 듯 사지 휘어져 흔들어대다가도
달 푸른 밤이면 쫑긋, 둥근 잎사귀 열어
하늘의 말 경청하는 옥수수들 보고 있자면
나의 미래 불쑥 얼굴을 내밀어 올 것도 같다
한 여름 달아오른 지열의 적막 속에서
촘촘하게 박혀서는 누렇게 익어가는
옥수수 알들의 묵언을 나는 새겨읽는 것이다
온다던 사람 오지 않았다
이재무
온다던 사람 오지 않았다, 밤 열차
빈 가슴에 흙바람을 불어넣고
종착역 목포를 향해 말을 달렸다
서산 삭정개비 끝에서
그믐달은 꾸벅뿌벅 졸고 있었고
주먹의 불빛조차 잠이 들었다
주머니 속에서
때묻은 동전이 울고 있었고
발끝에 돌팍이 울고 있었다
온다던 사람은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오지 않았고
내 마음의 산비탈에 핀
머루는 퉁퉁 젖이 불고 있었다.
우리 시대의 더위
이재무
우리 시대의 더위는 갈 곳이 없다
백화점에서 쫓겨난 더위가,
식당가 커피숍 사우나 지하상가에서 문전 박대당한 더위가,
은행가 의사당 법원 도청 시청 군청 동사무소 관공서에서 내몰린 더위가,
교회와 성당과 절에서 부정당한 더위가,
버스 전동차 기차 승용차에서 거절당한 더위가,
극장 도서관에서 거부당한 더위가,
학교 학원 회사에서 퇴학 퇴원 퇴출당한 더위가,
꽃집 빵집 어린이집 예식장에서 내쫓긴 더위가
유기견 혹은 좀비가 되어
악에 받친 채 거리로,
골목으로 공원으로 역전 대합실로 광장으로 고시원으로 벌방으로
떼 지어 다니고 있다
언젠가 더위가 미쳐 날뛰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 시대의 정원사
이재무
정원사가 들어서자
꽃밭 속의 꽃들 방자하게 웃고 있다
화들짝 놀라 입 다문다
일순 무거운 정적
몇 겹의 울타리치고
정원사는 자신이 내는 발소리에 놀라 두리번거린다
한여름의 늪과 같이
부글부글 고요가 끓는다
사레들린 꽃들 기침 소리 요란하다
웃음은 전염이 강하다
폭죽처럼 터지는 꽃들의 함성
가위 쥔 손 부들부들 수전증을 앓는다
정원사는 곧 해고될 것이다
우리 집 선풍기는 고집이 세다
이재무
그이가 우리 집에 들어온 게 신혼 초니까
벌써 이십 년, 결코 작은 세월이 아니다
물건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 노년에 든 셈이다
처음 청년의 몸으로 들어올 때는
구릿빛 근육이 참으로 탐스러웠다
그러나 누구든 세월의 횡포를 이길 순 없다
그의 몸도 이제 여기저기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요사이는 부쩍 관절염과 신경통이 심해졌는지
앓는 소리가 잦고 요란하다
그러면서 성정도 예전과 달리 강팔라졌다
그렇게 순하게만 굴던 그에게
전에 없는 치매성 고집이 생긴 것이다
그래도 달래면 곧잘 듣더니 근자에 들어서는
달랠수록 더 심통 부리며 엇나가기만 한다
저라고 왜 인욕의 시간이 없었겠는가
우물
이재무
찰랑찰랑 넘칠 때는 깊이를 몰라
낮밤 없이 은빛 수면 다녀가는 것들
짚새기로 닦아낸 노주발처럼
은밀한 추억 되어 반짝, 반짝이더니
오랜 가뭄 끝의 바닥
사소한 부주의가 하나 둘 시나브로 빠뜨린
온갖 애중의 잡동사니 그득하구나
가지 떠난 꽃 되어 냄새 피우는 사랑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지는 추문, 추문들
우체국
이재무
우체국 옆 지날 때면
다 풀지 못한 밀린 숙제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
불쑥 솟아나 발걸음 앞에
덫을 친다 마음의 서랍 속에는
부치지 못한 편지,
잘못 배달된 푸른 사연 몇장
눈을 뜨고
내 가슴 읽고 간 기러기는
강바람 거슬러 날아간 뒤
돌아오지 않고 있다
우체국 옆 지날 때면
몸 속의 소년
비 온 뒤 초록으로 일어서고
가슴의 처마 끝으로
늙지 않는 설렘의 물방울
듣는 소리 또렷하다
운주사
이재무
다 늦은 봄날, 눈은 내려서
길도 마음도 젖은 흙이 되어서
사는 일 문득 부질없고 아득해져서
생각의 배 맞는 지기 몇 더불어
운주사 가니
큰 배 한 척 산중에 정박중인데
크고 작은 선실마다에
성도 이름도 없이 촌부들 저희끼리
누워 혹은 기대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어디서 메주 뜨는 내음 솔솔 풍기고
점심 거른 배 하도나 출출하여
통성명 없이 情人된 절간 속 장삼이사들
데불고 가서 추어탕 한 그릇
탁주 한 발로 요기와 한기 풀며
거하게 취해 천 년을 살다 오는 길
마음도 길도 미풍에 날려
볼에 와 닿는,
춥지 않은 춘설 되어서
사는 일 문득 달빛 받은 창호지같이
환하고 까닭없이 그저 고맙고
울음소리
이재무
올여름엔 시골집에 내려가
개구리 울음소리
실컷 듣다가 오고 싶다 다 늦은 저녁 마당에
멍석이 깔리고 두레밥상에 식구들 둘러앉으면
밥상머리에 겁 없이 뛰어들던 울음소리
된장국에도 물김치에도 물그릇에도
둥둥, 참외같이 노랗게 떠있던 울음소리
밥 먹고 나선 마실 길에 지천으로 깔리던
울음소리 논둑 미루나무 가지에도 우물 옆 팽나무
가지에도 주렁주렁 열리던 울음소리
이슥한 밤 소등한 마을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들판에 울음이 번쩍이고
어느 날엔 꿈속까지 뛰어들던 울음소리
툭툭, 발길에 차여
아무렇게나 나뒹굴던 울음소리
뜰팡 벗어놓은 신발 속에 눈물처럼 고이던
개구리 울음소리
울음의 진화
이재무
모처럼의 휴일
거실 바닥에 누워
낮잠 한숨 붙이려는데
난데없이 창문 무너뜨리며
달려드는 한 떼의 울음소리가
안면을 방해한다
저 금속성의 날카로운
울음들은 더 이상 자연의
연주가 아니다 두껍고 높은
자동차 소음의 장벽 너머에 있는
자신들의 짝들을 향해
처절하게 사투를 벌이듯
구애를 펼치고 있는 저들의
피울음 어찌 음악일 수 있으랴
종족 보존을 위해
낮밤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저, 자연의 집단 농성을
물대포로 강제 해산시킬 수는 없는 일
해마다 야생 열매들 껍질이 두꺼워지듯
매미 울음이 높고 가파르게 진화하고 있다
웃음의 배후
이재무
웃음의 배후가 나를 웃게 만든다
자꾸 웃음이 나온다
밥 먹으면서 웃고 길 걸으며 웃는다
앉아서 웃고 서서 웃고 누워서 웃는다
수업하다가 웃고 차 타면서 웃는다
잠자다 깨어 웃고
소리 내어 웃고 소리 죽여 웃는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몸에 난 사만팔천 개의 구멍을 열고
비어져 나오는 웃음의 가래떡
찡그리면서 웃고 이죽거리며 웃는다
웃는 내가 바보 같아 웃고
웃는 내가 한심해서 웃는다
이렇게 언제나 나는 가련한 놈
웃다가 웃다가 생활의 목에
웃음의 가시가 박힐 것이다
백지의 공포 앞에서 볼펜이 웃고
웃음의 인플루엔자에 전염된
꽃들이 웃고 새들이 웃고
애완견과 밤 고양이가 웃고
가로수가 웃고 도로가 웃고 육교가 웃고
지하철이 웃고 버스가 웃고 거리의
간판들이 웃고 티브이, 컴퓨터가 웃고
핸드폰, 다리미, 냉장고, 식탁,
강물, 들녘이 웃고 산과 하늘이 웃는다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가는
웃음의 장판 무늬들
그리다가 돌연 사방팔방 안팎에서
떼 지어 몰려와
두부 같은 삶 물었다 뱉는,
가공할 웃음의 저 허연 이빨들
웃음의 감옥에 갇혀 엉엉 웃는다
그 언제나 즐겁고 신나는
옛날 같은 새날이 와
눈치 보지 않고
눈물 콧물 흘리며 실컷 울 수 있을까
웃음의 시간을 엿보다
이재무
서산 마애석불 돌 속에 새겨진
저 웃음이야말로 꽃 아니고 무엇이랴
무늬도 색깔도 냄새도 없는 저 꽃은 그러나
잔물결인 양 온몸에 번지는 웃음 하나로
보는 사람 문득 적막 속에 가둬버린다
저 인화의 웃음 속에는 시간이 출렁거린다
보는 이 가슴에 활짝 천진을 꽃피우는
저 웃음이야말로 무소불위 힘 아니고 무엇이랴
태어나 천년을 지지 않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피어 있을 웃음의 잔주름
몸 속에 스며 생활의 퍼런 독이 녹는다
저 꽃 낳은 이는 어쩌면
저도 어쩔 수 없는 설움을 살았을 것이다
저도 어쩔 수 없는 미움을 살았을 것이다
돌 속에 핀 꽃은 한동안 저를 다녀간
사람의 생 안으로 불쑥 얼굴 내밀고
활짝 웃기도 할 것이다
위대한 식사
이재무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허청에 함부로 널브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 있고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베어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트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쁜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
은행나무
이재무
서늘한 바람 부는 가을이 오면
나는 왜 죄도 없이 작아져 부끄러운가
성실, 근면하게 한 해를 살아온 나무 앞에서
나는 누군가 부실한, 얇은 내 生 훔쳐볼 것만 같아
쫓기는 도적처럼 걸어온 길 자꾸 되돌아본다
내가 지금 마주 보는 잘 익은 은행잎 하나하나는
일 년 내내 나무가 착실하게 부어온 적립금 같다
저 많은 황엽
나무는 신용 좋은 은행처럼 부자로구나
그러나 나무는 누구처럼 욕망에 집착하지 않는다
바람 불면 바람 분다고
날 저물면 날 저문다고
애써 모은 재물 검불 털 듯 뚝뚝 떨어뜨린다
지난 세월 무거운 시간도 있었다고
서러운 때도, 기뻤던 날도 있었다고
동그란 웃음 지상에 떨어뜨린다
아, 여기저기 발에 채이는 生의 느낌표!
은행알들
이재무
인도에 떨어진 은행알들
행인들 구둣발에 짓이겨져
구린내 물씬 풍기고 있다
굴러다니는 저 질펀한 구린내들은
참을 수 없는 절규와 비명
씨줄과 날줄로 엮어
스크럼 짜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밤을 밝히는 가등의 심정처럼
쫄깃하고 알싸한 맛 감싸는,
저 구린내들은 얼마나 숭엄하고 위대한가
둥근 모성을 함부로 짓밟는,
난폭한 구두들이여
저 구린내들은 얼마나 어질고 지극한가
음악을 먹고 마시던 꽃들
이재무
화단에 핀 봄꽃들
햇살과 비와 바람이 피우기도 했지만요
갓 부임한 선생님 방과 후 교실에 남아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치는 피아노
소리가 피우기도 한다는 것을 아셨는지요
어둑한 복도를 걸어나와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내밀어오는,
깨꽃 봉숭아 사루비아 칸나 등속의
얼굴 촉촉이 젖은 손으로
만지고 더듬고 두드리던 피아노 소나타
그렇게 한 식경쯤 낮고 높고 짧고
길게 선율의 물 뿌리고 나면
제 세상 만난 듯 생기발랄한 꽃들
깔깔깔 웃는 소리 하늘에 가 닿았지요
봄 소녀들 한 열흘 그렇게
음표 먹고 마시며 놀다
왔던 봄비 따라가고 나면 피아노 소나타
턱없이 높아지거나 낮아지기 일쑤였지요
아이들은 왜 갑자기 숙제가 많아졌는지
그 까닭을 끝내 몰랐지요
의뭉스러운 이야기
이재무
1
한여름 주말 오후 고속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하였다. 어느 주말 오후 충청도 예산 출신 L씨는 모처럼 고향의 부름을 받고 서둘러 현관을 나섰다. 차가 톨게이트를 빠져나가는 데만 무려 시간 반을 넘기고 있었다. 마음이 까닭 없이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이상 기온으로 사람의 체온에 육박하는 섭씨 34도에 이른 기온에 아스팔트는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L씨의 고물차는 에어컨이 고장난 상태였다. 차 안의 열기는 찜질방을 무색케 할 정도였다. 울컥, 몸 속 울화라는 짐승이 몸 밖으로 자꾸 뛰어나오려 발광을 해대고 있었다. 가뜩이나, 정체에다가 몰려드는 더위로 머리 뚜껑이 열릴 지경인데 아까부터 자꾸 뒤차가 클랙슨을 눌러 대고 있었다.
눈구멍이 막히지 않았다면 저도 뻔한 도로 사정을 모르지 않을 텐데 저 작자의 머릿속은 무엇이 들었길래 저리도 속알머리 없이 잔망을 떨어내는 것일까. 그러거니 말거니 L씨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애써 길이 뚫리기만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차는 그런 L씨의 심사는 아는지 모르는지 거듭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눌러 대며 화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참다 못한 L씨는 차를 갓길에 세워 두고 뒤차에게로 갔다. 그리고는 앞문을 열게 한 후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운전자를 향해 금강 하류처럼 느려 터진 말투로 한 마디 일갈하였다. “여보슈, 보면 몰러, 왜 그렇게 보채는 거유,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잖유, 그렇게 급하면 어제 오지 그랬슈.”
씨근벌떡하며 웃통을 벗고 손부채로 더위를 쫓는 연방 담배 한 대를 피워 문 후 L씨는 한결 느긋한 자세로 운전대를 잡았다. 거짓말처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막히고 얽혔던 찻길이 시나브로 풀려 가고 있었다.
2
보령댁은 일 년 한두 번 서울에 있는 딸네 집에 갈 때마다 버릇처럼 큰 보따리를 이고 간다. 보따리 속에는 고향 산천에서 난 온갖 나물이 들어 있다. 산도라지며 더덕, 고사리, 곰취, 냉이, 달래, 머위, 산미나리, 씀바귀, 엉겅퀴, 느릅치, 두릅, 삿갓나물 등속 그때그때 철 따라 나는 산지 나물을 뜯어 싸가지고 가는 것이다. 딸 내외는 그때마다 몇 푼이나 한다고 그 고생이냐고 질색이지만 어찌 이것을 값으로만 매길 수 있겠는가. 불쑥 고까운 마음이 어나 아니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보령댁은 아직 한 번도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걸 딸네 집에 가기 전에 지하철 지하도에 좌판으로 깔아 놓고 팔기로 하였다. 외손주 외손녀 주전부리값이나 할 요량이었다.
오후 내내 쭈그려 앉아 있자니 무릎 팔다리가 쑤셔 오고 머리도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래도 애쓴 보람이 있어 저녁 퇴근 시간 즈음해서는 거의 절반가량이 팔려 나갔다. 이제 좌판을 거둬들여야 하나 기왕 벌인 판인데 더 기다려 마저 팔아야 하나 하고 속으로 셈하고 있을 때 말쑥하게 차려 입은 한 청년이 다가와 흥정을 붙여 왔다.
“저기, 할머니 여기 있는 나물 전부 사 드릴게요. 값이 얼마에요?” 아니 요즘 세상에도 이런 건강한 싸가지가 다 있나? 보령댁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올려다보니 깎아놓은 배처럼 잘생긴 청년이 배시시 웃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총각이 알아서 주셔유.” “아니 그러지 말고 말씀해 보세요. 할머니 보기에 안돼 보여서 사 드리는 거예요. 어려워하지 마시고 말씀하세요.” “총각이 알아서 달랑게요. 냄새스럽게 워치게 값을 말한댜 떨이를 가지고.” “알았어요. 할머니 오천 원이면 되겠어요? 오천 원 드릴게 여기 있는 거 전부 싸 주세요.”
보령댁은 순간 눈에 불꽃이 튀었다. 아니, 이런 괘씸한 싸가지를 봤나. 이게 오천 원밖에 안 돼 보인단 말여, 아무리 떨이라도 그렇지. 늙은 삭신으로 저걸 캐오고 다듬느라 사흘이나 걸렸구먼. 사흘 품삯이 겨우 오천 원이란 말여. 생긴 것은 기생오래비같이 멀쩡해가지고 말은 똥구녕같이 냄새나게 헌다냐. 보령댁은 자신도 모르게 벌컥 소리를 내질렀다.
“냅둬유, 개나 주게.”
서울 청년은 멀뚱멀뚱 보령댁을 쳐다보며 어안이 벙벙하고 있었다.
3
한내댁은 후닥닥 냉물에 찬밥 말아 텃밭에서 따 온 깻잎과 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고 사립을 나섰다.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산 날멩이 산밭을 찾아가고 있었다. 오늘 중으로 콩밭을 다 매놓고 내일부터 동서네 버섯 일을 도우러 갈 참이었다. 곡식들은 농사꾼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듯이 그것들도 생명이라고 정성 들인 만큼 표를 내는 것들이라 한시도 소홀할 수가 없었다. 소출 때가 되면 허망한 것이 농사일인지라 그 생각만 하면 이까짓 거름값도 못 건지는 밭일 당장 때려치우고 싶지만 어디 그게 맘같이 되는 일이던가. 농사짓는 이에게 땅 놀리는 일처럼 콘 죄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쇠못이 되어 직선으로 내리꽂히는 햇살을, 동여맨 수건으로 간신히 버텨내며 고랑을 타고 앉아 콩밭 매기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부릉부릉 하는 차 소리가 들려 왔다. 그냥 지나가는 차려니 하고 별 괘념하지 않고 밭 매는 일에 더욱 열중하고 있는데 어라, 이 차가 밭가에 세워진 채 도통 움직이질 않고 있는 게 아닌가.
슬그머니 호기심이 동해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밭고랑을 빠져나와 다가가 보았던 한내댁은 못 볼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가슴이 벌렁벌렁 콩닥콩닥 숫처녀로 돌아간 것처럼 마구 뛰었고 얼굴은 번철처럼 달아올랐다. 차 안에서 새파랗게 젊은것들이 뱀처럼 엉켜 자반뒤집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말로만 듣던 ‘카섹스’란 것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런 숭악한 것들을 봤나, 벌건 대낮에 저게 무슨 벼락맞을 짓이랴, 하면서도 한내댁은 소주 먹은 듯 마음과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도무지 일할 기분이 아니었다.
호미를 밭고랑에 팽개치고 급한 일이나 만난 것처럼 발걸음을 재게 놀려 집으로 가고 있었다. 남편은 한갓지게 대청에서 대자로 누워 서까래가 들썩이도록 드렁드렁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한내댁은 자는 남편의 옆구리를 찔러 깨웠다. “여보, 여보, 저기 우리 밭길서 젊은것들이 차 안에 누워 그 짓을 하고 있슈. 그게 서울것들 유행이라든디 우리도 한번 해 봐유.” “아니, 이 여편네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여, 뭐이 어째, 카섹스 그걸 해 달라고, 미쳤나.” 하면서도 남편은 저도 모르게 아랫도리가 불쑥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임자, 그게 그렇게 부러워, 까짓것 하지 못할 것 뭐 있어, 하자구 그런디 어디서 혀, 경운기서 할까. 가마니나 두어 장 깔아 봐.”
염천의 햇볕이 벌겋게 마을의 지붕을 달구고 있었다.
이별
이재무
마음 비우는 일처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그리움 깊어갈수록
당신 괴롭혔던 날들의 추억
사금파리로 가슴 긁어댑니다
온전히, 사랑의 샘물
길어오지 못해온 내가
이웃의 눈물
함부로 닦아준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요
가슴 무덤에 생뗏장 입히시고
가신 당신은
어느 곳에 환한 꽃으로 피어
누구의 눈길 묶어두시나요
마음 비우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신은 내 곁에 없었습니다
아픈 교훈만
내 가슴 무덤풀로 자랐습니다
이슬
이재무
풀잎 속 집 한 채
누가 누가 사나
한낮 내내 빈집이다가
비오는 날 내내 빈집이다가
맑은 날 밤이면 분주하더군
달과 별 들러 노독을 풀고 가더군
숲 속 뛰쳐 나온 밤새 울음
불콰한 얼굴을 하고 와서는
슬그머니 문고리 열고 들어서더군
풀잎 속 집 한 채
누가 누가 사나
보석같이 반짝이는 푸른 방에는
피가 뜨거운 여자가 살고 있더군
인간은 광활해, 너무나 광활해*
이재무
마돈나의 이상을 가진 사람이 소돔의 이상으로 끝을 맺고
소돔의 이상을 가진 사람이 마돈나의 이상을 불태운다는 사실이 끔직하다*
열 살, 스무 살, 서른 살의 나를 떠올려 본다
마흔 살, 쉰 살, 여생의 나를 떠올려 본다
어느 세월의 굽이에서
마돈나의 이상을 버리고 소돔의 이상으로 몸과 마음이 바뀌었을까
부모, 형제, 친인척, 이웃, 해, 달, 별, 물, 불, 공기, 흙, 구름, 바람, 나무, 산, 강, 바다, 논, 밭, 언덕, 길, 꽃, 벌레, 풀, 새, 돌, 밥, 반찬, 옷, 집, 물건, 친구, 연인, 학교, 직장, 목욕탕, 모텔, 노래방, 부동산, 책, TV, 영화, 비디오, 컴퓨터, 핸드폰, 버스, 비행기, 기차, 지하철, 여행지......
우주 안에 편재하는 것들과의 관계가 나를 만든다
삶이 종착에 이르는 날
내 이상의 추는 진자 속 마돈나와 소돔 사이 어디에서 멈춰 있을 것인가
*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드미트리의 말
인생 - 애월에서
이재무
저무는 먼바다 먹빛으로 잔잔한데
방파제 둑 위, 할머니 한 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네, 유모차 밀며.
흑백의 풍경 속 몇 겹으로 주름진 시간
고여 출렁이고 있었네
저무는 먼바다 하늘로 이어지는 수평선에서
노을은 가지를 떠나는 꽃잎같이 점으로
흩어져 선홍이 낭자한데
거북처럼 낮게 몸 웅크린, 지금은 다만
묵직한 침묵으로 밤을 기다리는,
밤이 오면 어화 피고 먹물 튀기며
비린내 땀내 진동할 오징어잡이 선박들
등뒤에 두고
방파제 둑 위, 등이 활같이 휜 할머니 한 분
천천히 실루엣으로 걸어가고 있었네,
아주 먼 미래를 밀며.
자국들
이재무
내 다니는 회사가 세 들어 있는 건물
입구 유리문에는 익명의 손자국들이 어지럽다
손자국을 힘껏 밀어야 문이 열린다
그러니까 아침에 나는 저 손자국들에
손을 대고 출근을 하고
저 손자국들에 손을 포갠 뒤
점심 하러 나왔다 들어가고
저 손자국들에 내 자국을 묻힌 뒤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저 손자국들 속에는 분명 내 것도 들어 있을 것이다
손자국들은 서로 포옹하거나 클린치하거나
후배위하거나 부둥켜안고 있기도 하다
놀랍지 않은가, 내가 얼굴도 모르는 이들
손자국들이 난교처럼 한 몸으로 엉켜 있다니!
저토록 은밀하게 서로의 체온을 공유하고 있다니!
자주색 울음소리
이재무
나는 숲속을 뛰쳐나온 새 울음소리의 빛깔을 본 적이 있다. 파란 빛깔이었다. 화살처럼 직선으로 날아오던 새 울음소리는 뽕나무 숲에 들어가 오디를 탐하다가 활처럼 휘어졌는데 그 바람에 빛깔이 자주로 변하는 것이었다. 들녘을 걷다가 우연히 손안에 한 송이 두 송이 떨어지던 자주색 울음소리. 나는 그것으로 지독한 생의 여름을 달랠 수 있었다.
장다리꽃과 나비
이재무
텃밭 장다리꽃 피어
나비 눈부시네
이 집 살림은 어떤가?
저 집 곳간이 났나?
이 꽃 저 꽃 치마폭
한나절 내내 들춰보더니
살림살이 모두 고만고만해
더는 흥미 없는 듯
발 재게 놀리며
둑 너머로 사라지네.
장독대
이재무
이제 다시 그처럼 깨끗한 기도 만날 수 없으리
장독대 위 정한수 담긴 희 대접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둠은 도둑걸음으로 졸졸졸 고여오다가
흰빛에 닿으면 화들짝 놀라 내빼고는 하였다
어머니는 두 볼에 홍조 띠고
두 손 가지런히 모아
천지신명께 일구월심 가족의 소원 대신 빌었다
감읍한 뒷산 나무들 자지러지게 잔가지를 흔들고
별꽃 서너 송이 고개 끄덕이며 더욱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런 새벽이면 어김없이 얼어붙은
비탈에 거푸 엎어져 무릎 까진 밤새 울음이 있었다
풀잎들은 잠에서 깨어 부스럭대고
바지런한 개울물 들을 깨우러 가고 있었다
촘촘하게 짜여진 어둠의 천 오래 입은 낡은 옷 되어
툭툭 실밥이 터질 때 야행에 지친 파리한 달빛
맨발로 걸어들어와 벌컥벌컥 마셨다
광석들 가로 지르는 서울행 기차 목쉰 기적이
달아오른 몸 담가오기도 하였고 밤나무의,
그중 실한 가지가 손 뻗어오기도 했으나
정한수는 줄지 않았다
장독대, 내 생의 뒤뜰에 놓여 있는,
생활이 타서 갈증으로 목이 마를 때
흰빛 내밀어 권하시는,
내 사는 동안 내내 위안이고 지혜이신 어른이시여,
장작을 패며
이재무
장작을 패며 나는 배운다
싸움꾼의 원칙과 자세에 대하여.
두 눈 부릅떠 결을 겨눌 것.
옹이는 절대로 피할 것.
순서는 마른 것에서 젖은 순으로.
한두 시간이 아니라
하루 이틀이 아니라
평생을 도끼질할 때
원칙과 자세가 바로 생명이라는 것을.
재식이
이재무
아비의 평생과 죽은 엄니의 생애가
고스란히 거름으로 뿌려져 있는
다섯 마지기 가쟁이 논이 팔린 지
닷새째 되는 날
품앗이에서 돌아온 둘째 동생 재식이는
한동안 잊었던 울음 쏟고 말았다
맷돌 같은 손으로 흘러넘치는 눈물 찍으며
대대손손 가난뿐인 빛 좋은 개살구의
가문의 기둥 찍고 찍었다
동생의 아이구땜으로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자"
가훈이 덜컹 마루 끝으로 떨어지고
동네 허리 감싸안은 야산도
함께 울었다 여간한 슬픔
끝모를 절망의 늪에
온몸 빠졌을 때도, 눈물에 인색하면서
선웃음 잃지 않던 뚝심의 동생이
섞은 새로 무너지며 터뜨린 눈물로
텃밭 푸성귀들을 자지러지게 흔들던 날
예순의 머슴 아비도
죽은 엄니 초상화 꺼내 들고
아끼던 눈물 한 방울
방바닥으로 굴리셨다
팔려버려 지금은 남의 논이 된
그 논에 모를 꽂고 온 동생의 하루가
내 살아온 부끄러운 나날에
비수되어 꽂히던 달도 없던 그날 밤
건너 집 흑백TV 브라운관 뛰쳐나온
프로야구의 들끓는 함성이
허름한 담벼락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저 꽃들 수상하다
이재무
저 꽃들 수상하다
종일 햇살 낚시에 입질하더니
가지의 밖으로 끌려나와 허공 가득 피 냄새 풍기고 있다
수십 년을 이 공원과 함께 살아온 나무
검붉은 줄기 속 몇 겹의 나이테는 이제 연륜도 자랑도 아니다
그 층위에 썩지 않는 기억들 쌓여 있을 뿐이다
오랜 세월 저 나무 아래에서는
신문과 티브이가 비켜간 비밀스런 사건들이 있었다
지난겨울의 묵은 추문 아프게 발설하고 있는 봄꽃들 ,
더디게 와서 빠르게 달아나는 春日의
사보타지엔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내력과 곡절이 있다
저녁 산책
이재무
숲 가운데 앉아 서산낙일 바라다본다
저곳은 내 미래의 거처
누군가 부르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밭 일궈 골라낼 들 아직 수북한데
벌써 홑이불 되어 고랑 덮어오는 산그늘 서늘하다
삶은 여윌수록 두껍게 죽음을 껴입는다
달군 쇠처럼 뜨겁던 속도 다 한때,
불 떠난 굴뚝처럼 식어 가는데
그렇게 오래 떠돌았으나
결국 나 또한 붙박이 나목에 지나지 않았던 것
맨살 추워 보이는 건초들아
너희도 사랑 잃고 추위 떨며
신음처럼 낮게 노래 불러본 적 있느냐
저녁 6시
이재무
저녁이 오면 도시는 냄새의 감옥이 된다
인사동이나 청진동. 충무로, 신림동,
청량리, 영등포 역전 골목이나 신촌 사거리
저녁의 통로를 걸어가보라
떼지어 몰려오고 떼지어 몰려가는
냄새의 폭주족
그들은 성정 몹시 사나워서
날 선 입과 손톱으로 행인의
얼굴 할퀴고 공복을 차고
목덜미 물었다 뱉는다
냄새는 홀로 있을 때 은근하여 향기가 높고
맛도 그윽해지는 것을, 냄새가 냄새를 만나
집단으로 몰려다니다 보면 그것들은 때로
흉기가 되고 치명적 독이 되기도 한다
저녁 6시, 나는 범죄의 충동 가까스로 견디며
울긋불긋 냄새의 숲 비틀비틀 걸어간다
저 못된 것들
이재무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멘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저수지
이재무
1
갇혀 사는 동안 그의 몸은 늙고 지쳤다
수목의 품 안에서 몸을 키워
골짜기 뛰쳐나오던 날의 광휘를
그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사육되는 물고기들이 그의 몸
거칠게 다루어도 노여울 수가 없다
가뭄에 노래진 풀이 눈에 선해도
그는 손 뻗어 적실 수 없다
어쩌다 수문이 열려 자유의 몸이 되어도
그는,이제 진창의 하수도 외엔
갈 곳이 없다
2
그녀 스스로 속 내보인 적 없다
아무도 그녀의 나이를 모른다
나는 그녀가 크게 웃거나 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잔주름 많고 검푸른 눈엔
그렁그렁 수심이 고여있다
수심 깊어서 한낮엔 앞산 뒷산을 담고
밤에는 천상의 것들 넉넉히 품는다
어느 해인가 빚에 쫒겨 도망다니던,
성실했으나 불운했던 사내 끌어들여
서방으로 삼았다는, 구설 끊이지 않는
무서운 여자, 비밀 많은 그녀가 딱 한 번
궁금한 속 내비친 적 있다
지독한 가뭄이 있던 그 해 여름
화냥년 되어 가랑이 쩍 벌리고 누워
소문 듣고 온 남정네들 설레게 했다
그녀 진흙 같은 자궁 속에는 팔뚝만한
잉어며 붕어들이 나뒹굴며
쩍쩍 입 벌리고 있었다
수심 깊은 여자
위기의 사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는 여자
저울과 시(詩)
이재무
나는 그의 정직이 때로 싫고 무섭다
사우나탕에 들러 습관처럼 몸 올려놓으며
나는 그가 깜빡 속아주기를 기대해 보지만
그의 정직에는 에누리가 없다
한 주일간의 방만과 일탈과 게으름을
그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눈금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비굴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때로 그를 턱없이 의심하기도 하고
그에게 사정해 보기도 하고
나는 또 그에게 변명을 늘어놓기도 해보는 것이지만
그의 대답은 한결같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탐욕이 마침내 그대를 쓰러뜨릴 것이다'
부끄러워 퉁퉁 부어오른 몸 슬며시 내려놓는 내게
그는 마지막 일침을 가한다
'몸을 부려야 사유가 반짝인다'
나는 그의 정직이 때로 무섭고 싫다
적막 한 채
이재무
빈집 장광에 놓여있는 금 간 항아리
사나흘 전 다녀간 비가 바닥을 간신히 적시고 있다
구름이 얼비췄다 가고
달빛 혀 내밀어 맛보다 내빼고
엊그제 헛청에서 건너온 늙은 거미가
입구에 쳐놓은 그물엔 새벽 별 몇 송이 파닥거린다
한때는 얼마나 뜨거운 몸이었던가
사철 내내 짠 간장과 되직한 된장과
맵고 뜨거운 고추장 담고도 내색 없이 살았던 살(肉) 아니었던가
다 비워낸 자연으로 들어앉아
지금은 다만 산그늘, 산새 울음,
길 잃은 바람이나
들렀다 가는
적막 한 채
절벽
이재무
몸속으로 들어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 위태롭게 하는
그대여 차라리 나를 밀어뜨려
그대 발등에 고인 한 방울 피이게 하든지
그대 이마 위 아슬아슬 붉게 핀
한 송이 꽃으로 세워놓으시든지
젊은 꽃
이재무
그의 피부는 검다 그도 한때 남부럽지 않은
푸른 몸의 빛나는 광휘를 지닌 적이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는 가혹한
시간의 시련을 그 또한 벗어날 재간은 없었다
검은 피부는 지나온 생의 무늬일 뿐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하루의 팔 할을 사색으로 보내는 그는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목선처럼 낡고 지쳐 있지만
바깥으로 드리운 그늘까지 늙은 것은 아니다
주름 많은 몸이라 해서 왜 욕망이 없겠는가
봄이면 마대자루 같은 그의 몸에도 연초록
희망이 돋고 가을이면 붉게 물드는 그리움으로
깡마른 몸 더욱 마르는 것을
사랑에 노소가 없다
늙은 나무가 피우는 저 둥글고 환한 젊은 꽃
찾아와 붐비는 나비와 별들 보라
제부도
이재무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그러나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인가? 이별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면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하루에 두 번 바다가 가슴을 열고 닫는 곳
제부도에는 사랑의 오작교가 있다네
정동진역
이재무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라는 시조의 구절이 있다. 그러나 이제 이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인걸이 간 데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의구한 산천조차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정동진역을 다녀왔다. 20여년만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동진역은 조그만 시골 간이역이다. 그러나 풍경은 옛날의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나는 군 3년을 보냈다. 동경사 제 57연대 4대대 인사서기병으로 근무할 당시 난에게 유일한 낙이 있었다면 한 달에 한번 군 막사를 빠져나와 정동진역을 통과하는 기차를 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주요 래퍼토리가 있다. 그곳(군 복무지)을 향해서는 오줌발도 세우지 않겠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이다. 그만큼 군생활이 저마다 각자에게 떠올리기조차 끔찍한 형벌로서 각인된 때문이리라.
그러나 시간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 연옥과도 같은 형극으로서의 체험의 얼룩도 시간의 풍화작용에 의해 다 색이 바래져 문득문득 의식의 표층을 뚫고 아련한 추억의 실루엣을 드리우니 말이다.
인사 서기병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는 군 병력이 먹고 타고 쏘고 할 수 있는 일체의 물품 보급을 서류상으로 상급부대에 가서 타오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해 나는 연대가 있는 삼척에 한 달에 한 번 싫어도 가야 했떤 것이다. 한 부대에서 적량을 초과해서 타가면 다른 부대의 부식이나 기타 물품이 모자라게 된다. 따라서 ‘로비’를 해서라도 더 많이 타기 위해 상급부대 인사병에게 뇌물을 먹여야만 한다. 나는 이 일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나 이 죽기보다 싫은 일을 다른 인사병에게 떠넘기지 않았던 것은 단 하루만이라도 숨막힐 듯한 통제와 규율의 긴장으로부터 이 일이 놓여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산비탈의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키 작은 길을 군화발로 톡톡 차면서 걸으며 나는 모처럼의 한유를 즐겼던 것이다. 부대 막사에서 정동진역까지는 대략 시오리쯤 된다.
나는 그 길을 무척 아껴 걸었을 게 틀림없다. 내 발길질에 길은 게으르게 일어나 기지개를 펴고 화답으로 길섶 꿩들을 날려보냈다. 꿩, 꿩, 꿩, 울음소리는 다리미가 다녀간 풀 먹인 광목처럼 팽팽한 하늘 한쪽을 찢어 놓았다. 사계마다 자태며 모양이며 색깔이며 운향이 다른 꽃들의 오랜 침묵을 우려낸 향기를 보내와 내 들창코는 연신 벌름대고 있었을 것이다.
아껴 먹는 음식일수록 금세 바닥이 나듯 그 시오리 길은 걷자마자 금세 동이 나곤 했다. 어느새 정동진역이 불쑥 얼굴을 내밀어 오는 것이다.
정동진역이 소란으로 분주한 관광의 명소로 바뀐 것은 다 아는 바처럼 근래에 와서의 일이다. 세간의 화제를 모은 드라마 〈모래시계〉의 덕분이다. 적막하기 이를 데 없고 고요가 먼지처럼 쌓이던 시골 마을이 번잡하고 분진의 시장터로 바뀐 것이다. 자본이 다녀간 곳은 어디나 똬리를 튼 욕망의 뱀들만이 득실거린다.
그날의 정동진역은 언제나 오롯이 서서 승객을 맞고 보냈다. 결코 오늘처럼 사람 맞는 일에 호들갑을 떨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엔 허름한 입성의, 서넛되는 승객이 연착하기 일쑤인 서울행 열차를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역사 주변엔 키 작은 꽃들이 피어 이따금 생각난 듯 여린 몸을 흠들기도 했고, 폐지처럼 낡은 낙엽이 뒹굴기도 했으며, 간간이 소금기 배인 낮고 축축한 바람이 빗물철검 얼굴에 달라붙기도 했다. 겨울엔 역사 한 중앙에는 조개탄 난로 위에 올려진 입 큰 주전자가 센 콧김을 휙휙 내뿜기도 했고, 권태를 이겨내기 힘들다는 듯 역장이 과장되게 하품을 내쉬는 바람에 깜빡 잠든 승객이 벌떡 일어나 두리번거리다 벽시계에 눈을 주기도 했다.
연대에서 일을 마치고 다 늦게 사제밥도 사먹고 한잔 술로 얼큰히 몸을 달군 다음 자대로 돌아오는 길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유일한 위안거리는 바다였다. 차창 밖 바다는 꿈결처럼 아득하여 코끝을 맵게 했다. 지평선 너머 칸델라 불빛을 반짝이며 위태롭게 흘러가는 소형어선들.
정동진역은 내 기억의 장에 편지지의 우표처럼 그리움의 표상으로 남아있는 시골 간이역이다. 제대 이후 나는 꼭 한 번 그곳을 들르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23년만에 그 소망을 이루었다. 하지만 정동진역은 변해버렸다. 차라리 아니 간만 못했다. 솔밭 사이로, 그 은은한 종소리와 같이 오던 운향 대신 역한 소음이 거리를 휩쓸고 어선의 칸델라 불빛을 압도하는 모텔과 술집의 천박하게 분칠한 네온사인 밤거리를 대낮보다 더 붉게 비치고 있었다.
드라마여, 자본이여, 경관을 더 이상 헤치니 마라. 그대들이 다녀간 이후 인심은 사나워지고 풍광은 타락하여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된다. 서울의 유곽을 옮겨 놓은 듯 본향을 잃은 내 청춘의 간이역, 정동진이여! 지금도 아침해 떠오르는가. 어떤가. 뜰 때 부끄럽지 않던가.
조그만 행복
이재무
쑥국이 올라온 저녁 밥상
국물 한 방울도 아껴 먹는다
밥 두 숟갈에 국물 한 숟갈
식도를 타고
짜르르르 내리는 더운 맛
소름 돋는다
감기에 막힌 코가 뚫리고
낮에 다퉜던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종소리
이재무
오래 우려낸 침묵 동그랗게 퍼져서 간다
저 소리 어찌 저토록 맑고 깊을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두툼한 손길 닿는 곳마다
새순 불쑥 키가 자라고
또래끼리 왁자지껄 떠들며 흐르는 냇물
쑥스러워 한 박자 숨소리 낮추는 것을
꽃들은 홍조 띠며 더욱 붉어가고
가지에 걸터앉은 꽁지 짧은 새
서산낙일에 눈시울 붉어지는 것을
고달픈 한 생애가 소리의 원 안에 들어와
귀 씻고 제 안 골똘히 들여다보는
다 늦은 저녁 천년 잠든 돌 고요히 눈을
뜬다 저 자애로운 소리의 상호 앞에서
누군들 열린 단추 여미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바다에 다 와 가는 강물처럼 당신은,
山寺 떠나 숲 사이 우렁우렁 걸어오셔서
빠진 이처럼 춥게 서 있는
마을의 지붕 위체 괜찮다, 괜찮다, 고
잔기침 흩뿌리신다
좋겠다
이재무
분별없이 대취해 장광설 늘어놓던
젊은 날의 술자리보다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 귀에 쓸어 담으며
위로 대신 더운술 따라
슬며시 밀어놓는 술자리 가졌으면 좋겠다.
술을 마시는 동안 폭설이
내려 돌아갈 길 끊겼으면 좋겠다.
잠이 모자란 주모가 주방을
맡기고는 슬그머니 잠자리 찾아 들어가고
달빛 선율만이 우리의 지친 어깨
주무르는 자정 너머의,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을 마주했으면 좋겠다.
좋겠다, 마량에 가면
이재무
몰래 숨겨놓은 여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먼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 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에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 던져두고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 얻어 타고 휭, 먼 바다 돌고 왔으면,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 냈으면,
주름 속의 나를 다린다
이재무
일요일 밤 교복을 다린다
아들이 살아낼 일주일 분의 주름
만들며 새삼 생각한다
다림질이 내 가난한 사랑이라는 것을
어제의 주름이 죽고 새로운 주름이 태어난다
아하, 주름 속에 생활의 부활이 들어 있구나
아들은 내가 다려준 주름 지우며
불량하게 살아가리라
주름은 지워지기 위해 태어나는 것
주름을 만들며 나를 지운다
주름진 거울
이재무
거울 속 굵게 팬 주름들 곁,
갓 태어난 잔주름들
어느새 일가를 이루었구나
저 굴곡과 요철은
시간의 밀물과 썰물이 만든 것
주름 문장을 읽는다
주름 속에는 눈 내리는 마을이 있고
눈에 거듭 밟히는
윤곽 흐릿한 얼굴이 있고
만지면 촉촉이
손에 습기가 배는 풍금 소리가 있다
이마에서 발원한 주름 물결
번져서 온몸을 덮으리라
지갑에 대하여
이재무
어릴 적에는 호주머니가 지갑이었지
구슬이나 딱지 그리고 때 묻은 손이 드나들 적마다
함께 따라 들어온 먼지 한 움큼이 들어있었지
쏘다니고 싶은 곳 많아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휘파람 불며 집 밖을 자주 떠돌아다녔지
나이 들어서 생긴 가죽 지갑 속에는
사진과 명함, 주민증과 카드들이 한 가득 들어있었지
갈 곳 많아도 지갑 없이는 함부로 집 밖 나설 수 없었지
한 생을 끌고 다니는 지갑
두툼해질수록 내 영혼 여위어갔지
지조를 울고 싶은 개
이재무
지조를 울고 싶었다
늑대의 유전인자 몸 속에 지니고
세상과 불화하며 광목 찢듯 부우북
하늘 찢으며 서슬 푸른 울음 울고 싶었다
곧게 꼬리 세우고 드러낸 송곳니만으로
울타리 침범하는 무리 기함하게 하고 싶었다
하늘이 내린 본성 거스르지 않고
통 크게 울며 생의 벌판 거침없이 내달리고 싶었다
배고파도 풀 먹지 않는 호랑이처럼
출처 불분명한 밥은 먹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불온하고 궁핍한 시간을
나는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목에는 제도의 줄이 채워져 있고
줄이 허락하는 생활의 마당 안에서
정해진 일과의 트랙 돌고 있었다
체제의 수술대에 눕혀져 수술 당한 성대로
저 홀로 고아를 살며 자주 꼬리 흔들고 있었다
머리 조아리는 날 늘어갈수록 컥, 컥, 컥
나오지 않는 억지 울음 스스로를 향해 짖고 있었다.
지상의 양식
이재무
마음은 거지 되어 山(산) 속으로 동냥 간다
山(산)은 회초리 되어 종아릴 아프게 하고
山(산)은 악기가 되어 귀를 즐겁게 하고
山(산)은 죽비 되어 등허릴 따갑게 한다
山(산)은 엄니의 두툼한 손 되어 쓰린 배 슬슬 문질러 주고
山(산)은 아버지의 호탕한 웃음 되어 괜찮다 처진 어깨 툭툭, 치신다
마음의 거지 되어 山(산) 속으로 양식 구하러 가면 山(산)은 거기
언제나 따뜻한 둥우리 되어 새끼알로 아슬아슬한 우릴 넉넉히
품어 주신다 그러나 山(산)이여, 더 이상 우리에게
내용 없는 카드와 같은 비유와 수사 주지 말아라
희망이 때로 삶의 감옥이듯 그대가 주신 그 짧은 위안에
우리 길고 긴 生의 여정이, 잠시
목까지 차오른 가쁜 숨 고를 뿐인 것을.
山(산)이여, 보아라, 그대에게서 빌려 온
싸구려 지혜가 떨이로, 거짓 슬픔이 됫박으로 팔리는
한 시대의 기막힌 저자 풍속을.
山(산)이여, 우리가 저 자상하고 우람한 山(산)을 속옷으로 껴입고
살 수 없다면 삶이 우릴 속일 때마다
차라리 슬퍼하거나 분노케 하라 山(산)이여,
지상의 양식은 거리에서 구하게 하라 아픈 몸은 아프게 하라
지하 계단
이재무
계단 오르며 나는 아직 세상 버리지 않는다
이 정직한, 한결같은 보폭은 언젠가 내 몸을
지상으로 인도할 것이다
계단처럼 단순하고 확실한 것이 어디 있으랴
계단 오르는 이들은 고개 들지 않는다
그것이 결코 발에 대한 불신 때문만은 아니다
목표는 언제나 우리를 조급하게 만든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희망은 또 한 번 뻔뻔한 얼굴로
검은 가래를 우리들의 수고 앞에 던질 것이다
그러나 계단을 오르며 나는 세상을 믿는다
그것은 계단을 걷는 자의 의무이기도 하므로
지하철 풍경
이재무
무료한 시선 속으로 걸려든
검은 새 한 마리 한동안 파닥이다가
죽음이 흐르는 전선 사이사이
낮은 포복의 날개짓으로 통과해간다
그가 날아가면서 회색 도화지에 남긴 선
오래토록 지워지지 않는다 가지가 버린
나뭇잎 한 장 블록담 너머로
쨍그랑 떨어뜨리고, 목에 와 엉켜서는
떠나지 않는, 콜타르처럼 끈적끈적한 바람
승차객은 사소한 실수에도 목숨을 건다
진공청소기
이재무
먼지도 밥이 된다
삼시 세끼가 아니라
일주일 한두 번
폭식하는 그녀의 장기
투명하여 먹은 양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녀는 생활의 바로미터다
날마다 태어나 자란 먼지들
살집 불리면 발동하는 시장기
그녀의 식탐은 식을 줄을 모른다
고봉의 밥 싹싹 달게 비워내며
청결을 과신하던 그녀도
그러나 식구와 더불어 산 지 십 수 년
근년 들어서는 근력 부치는지
식사량 주는 대신 식사 시간이 늘고
음식물 흘리기도 하고
먹은 것 도로 게워내기도 하더니
평생 안 하던 밥투정을 다 한다
먼지의 유구한 힘을
누군들 당해낼 수 있겠는가
이 세상 한결같은 것은
먼지밖에 없는 것 같다.
징
이재무
징은 울고 싶다
다시 한번 옛날을 울며
울음의 동그라미 속에
나무며 꽃, 사람을 가두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그의 울음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의 울음은
이미 어제이고 충분히 낡았으므로
새 악기의 향내에 취하다 보면
한때 신명으로 몸 흔들며
목청껏 부르던 노래
왠지 시들하고 구차해진다
징 속에서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징 속에 들어가
징의 일부가 되어버린 몇 사람만이
광 속 어둠 안에서
퍼렇게 녹슬고 있다
징은 울고 싶다
쩌렁쩌렁 천년을 한결같던 솜씨
울음의 곡괭이 휘둘러
거만한, 저 위선의 모래기둥
흔들고 싶다
찔레꽃
이재무
바라만 보아도 눈부셔
차마 다가갈 수 없었던 사람을
뒤에 두고 세상 가설무대를
떠돌며 돌처럼 단단한 눈물
속으로 삼키어 왔다
간간이 꽃 소식 들려왔지만
그럴수록 더 멀리 달아나려 애썼다
시간의 마디는 더디고 아팠으나
돌아보니 어느새 그날로부터
아득히 멀어져
나의 강은 바다에 다 와가고 있다
해마다 피어 가슴을 붉게 물들이고
통점을 불러오는 꽃
지금도 눈부셔 멀리서 안타까이
눈짓으로만 지켜보는
오월의 찬란한 눈물
첫인사
이재무
초면인 사람과 통성명 주고받은 뒤
고향이 어디십니까? 대신에
어디 사세요? 하는 인사 더 자주 받는다
이 질문의 변화는 심상한 것이 아니다
마음의 평지에 불쑥 돌 솟아오른다
여의도에 삽니다
아하, 좋은 데 사시는군요
나는 망설이고 망설인다
오해 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청자는 내 초라한 입성 재빠르게 훑어본다
속내 들킨 이의 발개진 얼굴,
서리 맞은 배춧잎같이 시들어가는 목소리로
아, 예, 전, 전세인데요
그러면 그는 그런다 겸연쩍다는 듯
전세라도 어딘데요? 여의도잖아요
마음의 평지에 불끈 돌 솟아오른다
청승
이재무
몸 늙으면 마음도 함께 늙었으면 좋겠다
몸 늙어도 마음 늙지 않으니 문제로다
코앞이 지천명인데 웬 되지도 않는 청승이란 말인가
역사의 광기가 낳은 너무 아픈, 녀남의 사랑 다룬
주말 드라마 보며 울컥, 선지피처럼 붉게 치밀어오르는
설움 덩어리 끝내 감추지 못해 식구들 몰래
복도에 나가 쓴 담배 연거푸 피워문다
시간의 고무개로 거듭 지워온, 잘 못 쓴, 서슬 푸른 사연들
되감기 장면처럼 새록새록 되살아와 잠시
목메이고 말라 퀭한 눈에 천천히 추억의 즙 고인다
설레임이니 그리움이니 기다림이니
생활의 장애일 뿐인 밥 찌꺼기만도 못한 감상 따위
애써 외면하고 살아온 세월 하, 얼마인데
철 지난 옷같이 칙칙한 신파, 어긋난 인연들이 애달파
몸속 울먹거리는 귀때기 파란 청년
젊은 날은 세상 다 산 것처럼 일마다 뻔하고 시들하더니
오늘에사 이토록 절제 없이 마음 심란하고 분주하단 말인가
추석
이재무
쉰다섯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아부지의 나이. 엄니 돌아가신 뒤
두어 해 뒤꼍 그늘처럼 사시다가
인척과 이웃 청 못이기는 척
새어머니 들이시더니
생활도 음식도 간이 안 맞아
채 한 해도 해로 못하고 물리신 뒤
흐릿한 눈에
그렁그렁 앞산 뒷산이나 담고 사시다가
예순을 한 해 앞두고 숟가락 놓으셨다.
그런 무능한 아비가 싫어
담 바깥으로만 싸돌았는데
아, 빈 독에 어둠 같았을 적막
오늘에야 왜 이리 사무치는가.
내 나이 쉰 다섯, 음복이 쓰디쓰다.
크게 병들었는데 환부가 없다
추석날 고향에 와서
이재무
골짜기의 옆구리 차며 흐르던 물방울들이
냇물에서 만나 하나로 뭉쳐 내리듯
우리들 이렇게 만나 명절의 오곡 들판을
참새 떼 되어 키득거리며 걷는구나
그간 살아온 안주 구절구절 걸어온 눈물 내력
벽공에 걸어두면서
늘 설레임으로 남는 사랑 얘기로
툭툭 채이는 돌팍에도 아프지 않고
코스모스 만개한 신작로길 걸으며
고향의 흙 향기에 몸을 묻는다
어릴 적 스스럼없이 어깨 치던 손장난으로
계장이 된 경중이 농협 직원 명호 기능공 장환이도
오랜 외출에서 돌아온 우정의 겨드랑이에
간지럼을 먹이는구나
누구는 장가를 가서 콩잎 같은 딸애를 낳았다더라
누구는 시집을 가서 보리알 같은 머슴애를 기른다더라
고향 떠나 멀리 사는 동무들
떠올리며 간절한 그리움에 설레다 보면
하늘 말없이 높고 걸어야 할 들길 끝없어
한 잔 술 걸친 발길 삐뚤어져도
우리들 살아갈 내일 앞산 보듯 숨차고나
이만큼 가깝고 확실하구나
비록 우리 가진 것 없이 빈 몸으로 돌아온 고향이지만
비록 우리 가진 것 없이 빈 몸으로 돌아갈 고향이지만
출구가 없다
이재무
사람아, 사람아
통발에 든 물고기같이
평생을 수인으로 살다가
죽어서야 자유로운 사람아
늦가을 빈 밭
홀로 남은 수수깡처럼
깡말라 수척해진 영혼아
사람 안에 갇혀
출구를 잃어버린 사람아
탕진의 세월 속
황홀한 고통을 앓는 사람아
충치
이재무
사십 년 전부터 시리기 시작한
오른쪽 왼쪽 사랑니
오늘은 아픔의 뿌리
귓속까지 파고들면서
아픔의 병든 열매
한 됫박씩 털어내면서
단 것 밝힌 사십 년 생활
호되게 꾸짖는다
전에도 더러 앓아 본 충치인지라
세월 지나면
제풀에 가시겠거니 맘 놓았는데
이 뿌리 한꺼번에 들쑤시는
오늘은 통증은, 아무래도
근본적 치료책 없이
자지 않을 것 같다
음식물 하나 삭히지 못하면서
살 찢는 아픔으로 태어나
날 갈수록 푹푹 썩어가면서
온 이의 뿌리를 흔들어대며
나날의 생활 갉아먹는
병든 시대의 샛노란 사랑니여
네 속에는
살아온 날의 치욕이
들끓고 있어, 아무래도
오늘 나의 경제 더 이상 바닥나기 전
뽑아야겠다 갈아야겠다
측근, 이라는 말
이재무
측근이라는 말 참 정겨워
측근, 측근, 하다 보면 무슨 큰 백이나
지닌 듯 턱없이 배짱 두둑해지고
까닭 없이 측은지심 생겨나기도 한다
내 측근에는 누가, 누가 있나
나는 누구, 누구의 측근인가
사는 동안 측근만큼 든든한 게 어디 있으랴
그러나 다정(多情)도 병이 되는 양
측근이 화 부르고 독 낳기도 하니
사람아, 사람아,
꽃과 나비 나무와 새 비와 바람과 눈
그리고 하늘과 구름과 음악과 시(詩)를
평생의 측근으로 두어 살면 어떻겠는가
침묵의 신자
이재무
까닭 없이 심사가 어지러운 날
숲속에 들면 나무들은 저마다
우뚝 선 채 바람에 맞서고 있다
사람의 손 타지 않은 저마다의
형상으로 허공을 움켜쥐고 있는
나무들은 각자가 신성한
나라이고 거룩한 종교이다
하늘과의 거래만을 꿈꾸며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일정한
간격 속에서 우아한 조화와
자유로운 동맹과 끈끈한 우애와
단단한 결속과 아름다운 연대를
이룬 신성한 영토에서 나는
저자거리의 수다를 내려놓고
침묵의 신자가 되어 옷깃 여민다
큰비 다녀간 산길
이재무
큰비 다녀간 산길 걸을 때 나는
작은 山이 된다 산꽃이 된다
돌맹이 거칠고 많아도 맨발 아프지 않고
넘어져 무릎 다쳐도 생피 겁나지 않는다
공기는 탁구공처럼 둥글고, 탄력이 있고
내 몸은 바람 많이 든 공처럼 자주 튀어오른다
맘먹고 구르면 어쩌면 하늘까지 솟아오를 것 같다
이렇게 큰 비 다녀간 산길, 그 어떤 발자국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최초의 길을 오롯이
걸을 때만큼은 마을에 두고 온 잡사며 그토록
오랫동안 마음 끓인 이별이며가
길가 풀잎에 남은 물방울처럼
조금 안쓰러울 뿐, 이제 방금 가지 떠나
저 길 안쪽으로 울음 흩뿌리며 사라지는
새의 날갯짓처럼 그저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이 된다 그렇게 영혼에 남은
부스럼딱지가 여물어 떨어지는 것이다
큰절
이재무
산길 오르다가 주인 모르는 낯선 무덤을 만난다
석 삼 년 벌초 하지 않았는지 군데군데
봉분은 헐어 있고 사방팔방 웃자란 잡초 사이
근근이 살아남은 잔디 일가 새근대는 숨결 안쓰럽다
무덤의 주인을 나는 모르고 일찍 와서 더디게 가는
산 속 가을은 생전 아비의 얼굴처럼 온통 벌겋게 취해 있다
누구나 살아서는 죄를 사느라 시끄럽고 요란하지만
갓 끓여낸 곰국처럼 사철 뜨겁던 몸
냉동실에 든 건어물처럼 바짝 말라 식어가는 날엔
뒤꼍 크기만 한 적막 한 채에 들게 마련인가
산길 내려오다가 자석에 달라붙는 쇠붙이처럼
절로, 낯선 무덤에 끌려가 큰절 올린다
클라우드
이재무
나 한때 구름을 애모한 적이 있지
하늘 정원에서 장엄한 몽상이 감미롭던
황금의 시간대에는 지상의 가난이 슬프지 않았다
나 한때 구름의 신자로 산 적이 있지
신전에 꿇어앉아 세상 주유를 설교하는 구름의 복음 새겨들었지
변신의 귀재인 그녀들을 재빠르게 마름질해
입은 바지로 숨차게 들길 기다리던 시절
갑작스럽게 찾아온 열애로 내 몸은 자주 꽃을 피웠지
구름밭엔 얼마나 많은 비밀의 씨들이 살고 있는지
날마다 다른 형상을 꽃 피우는 공중을
꿈꾸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자유로이 넘나들었지
그러나 아 이제 구름을 꿈꾸지 읺네
이교도처럼 불신하며 구름에 속지 않으려 애쓸 뿐이네
2011년 3월 13일 이후
구름은 내게 저주의 신이 되었네
내 마음속 어머니의 나라에서 평화롭게 뛰놀던 몽상의
아이들 한꺼번에 자취 없이 사라져버렸네
테니스 치는 여자
이재무
테니스 치는 여자는 물속 유영하는 물고기 같다
그녀의 동작은 단순하지만 매우 율동적이다
물오른 그녀의 종아리는 자작나무의 허리처럼 매끄럽다
땀 밴 등허리에 낙지발처럼 와서 안기는 햇발
통통, 바람 많이 든 공처럼 그녀의 종아리가 튀어 오르면
수음하는 소년처럼 나는 숨이 가쁘다 두 팔에 힘을 주어
그녀가 라켓을 휘두를 때 깜짝깜짝 놀라며 파랗게 몸을 뒤집는
이파리들, 내 마음의 사기그릇들 반짝반짝 웃는다
네트를 넘어오는 발 빠른 공에 시선을 집중하는
그녀의 눈 속으로 오후의 낡고 오래된 시간들이 갑자기
생기를 띠고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가고 있다
날마다 오후 세 시 공원에 나와 하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테니스를 치는 여자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내 마음의 뜰에 그리움의 풀씨 내려와 싹을 틔운다
알맞게 달구어진 그녀의 팔뚝이 지나간 허공에
몰려드는 파란 공기 입자들 그녀가 테니스를 치는 동안
세상은 발칙한 소녀와 같이 건방지고 젊어진다 그녀가 간간이
터뜨리는 웃음으로 세상은 환하고 눈부신 꽃밭이 된다
테니스 치는 여자는 공중을 나는 새처럼 가볍다
저 가벼움이야말로 무거운 세상을 이기는 힘이 아닐까
세상의 짐을 내려놓고 풍경이 되어 풍경 속을 거닌다
통나무
이재무
뿌리 없으니 고통 없고
슬픔 없고 즐거움 없는
톱 오면 잘리고
도끼 오면 찍히고
못 오면 박히다가
불 오면 태워져
흔적없이 사라지는 생
한때는 사철 싱싱한 생나무의
쭉쭉 자라는 줄기와 가지로
마구 하늘을 찌르던 그들
오늘도 지하철은 칸칸마다
빽빽히 통나무를 싣고 달린다
통조림
이재무
깡통의 내용물은 사체,
사체는, 해체를 목표로
기관들 틈새 벌리며 일정한 속도로
운동중인 몸의 윤활유
냉장고에는 싱싱한, 딱딱한, 물컹한,
시든 시체가 칸칸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욕망과 잉여를 둘러싼 각축이
때로 세상의 모든 이론을 회색으로 만든다
통 속 뿌연 국물에 싸여
등둥 떠 있는 송장 덩어리들 꺼내
냄비에 넣고 가스 불 올린다
소리 없이 증식하던 균들
부글부글 끓다가 죽는다
시간에 쫓기며 허겁지겁 사체를 먹고
우리는 죽음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가고 있다
팽나무
이재무
어릴 적, 아부지의 회초리가 되어
공부나 심부름에 게으른 날엔
종아리 파랗게 아프게 하고
식전부터 일 나가신 엄니 아부지
기다리다 지치는 날엔
동무보다 재미있는 장난감되어
하루해전 무료 달래어주던
나의 선생 나의 누이인 나무
지금도, 안부 챙기러 고향 갈 적에
반쯤 허리 숙인 채
죽은 엄니 살았을 적 손길로
등 두드리는
이 세상 가장 인자한 어른
기쁠 때 쏟은 한 말의 웃음
설을 때 쏟은 한 가마 눈물
뿌리로 가지로 쑥쑥 자라는
우리 동네 제일로 오래된 나무
팽나무가, 쓰러지셨다
이재무
우리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 쓰러지셨다
고집스럽게 생가 지켜주던 이 입적하셨다
단 한 장의 수의, 만장, 서러운 哭도 없이
불로 가시고 흙으로 돌아, 가시었다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내부의 텅 빈 몸으로 보여주시던 당신
당신의 그늘 안에서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고
이웃 마을 숙이를 기다렸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아이스께끼 장수가 다녀가셨고
방물장수가 다녀갔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부은 발등이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
우리 마을의 제일 두꺼운 그늘이 사라졌다
내 생의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
팽이
이재무
오늘 나는 한 방향만을 고집하는
저 낯익은 사내에 대해 다시 노래하련다
회초리가 와서 자신의 몸을
때리면 때려댈수록 더욱
돌고 돌면서 미쳐 날뛰면서 그는
회초리가 빨리 더 빨리
다녀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맹렬한 속도로 돌고 도는 관성은
바라보고 있으면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직립의 회전을 보이기도 하나
주기적인 매질이 없으면
언제라도 바닥에 내팽개쳐질 가련한 신세
그러기에 팽이는 돌면서 매를 부르고
회초리는 팽이의 몸에 척척 감기며
가학의 쾌감에 전율한다
저 현기 속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오, 저것은 얼마나 지독한
자존의 마조히즘과 사디즘이란 말인가
펜에 대하여
이재무
마른 땅 파 들어가는 삽이여,
묵은 논 갈아엎는 쟁기여,
고랑 타고 앉아 풀 매는 호미여,
돌멩이에 날(刀) 찍혀 우는 쇠스랑이여,
이마에 한 톨 두 톨 돋는 땀이여,
경작의 노고보다 헐한 소출이여,
평상
이재무
땀내 나는 가장을 벗고
헐렁한 건달로 갈아입는다
누워 부르던 노래들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
앉아 듣던 슬픔들은
기꺼이 생의 거름 되어주었고
엎드려 읽고 쓰던 말들은
나무와 꽃이 되었다
안방에서 엄하시던 아버지도
더러 농을 거셨고
부엌에서 근심 잦던 엄니도
활짝 웃곤 하였다
졸음 고인 눈두덩 굴러
머리맡에 낙과처럼 떨어지던
저녁 종소리 우련하다
폐선들
이재무
신발장 속 다 해진 신발들 나란히 누워 있다
여름날 아침 제비가 처마 떠나 들판 쏘다니며
벌레 물어다 새끼들 주린 입에 물려주듯이
저 신발들 번갈아, 누추한 가장 신고
세상 바다에 나가
위태롭게 출렁, 출렁대면서
버린 양식 싣고 와 어린 자식들 허기진 배 채워주었다
밑창 닳고 축 나간,
옆구리 움푹 파인 줄 선명한,
두 귀 닫고 깜깜 적막에 든,
들여다볼 적마다 뭉클해지는 저것들
살붙이인 양 여태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포장마차
이재무
포장마차는 술 취한 승객들을 싣고 달린다
마부는 말 부리는 틈틈이 술병을 따고
꼼장어를 굽고 국수를 말아
승객들의 허기를 채우느라 여념이 없다
술 취한 승객들은 마차의 속도를 모른다
하지만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러니까 포장마차는
시간의 도로나 레일 위를 달리고 있는 셈이다
수시로 포장을 열고 닫으며 승차와
하차하는 사람들 후끈 달아오른 실내에서
계통 없이 떠들어대는 사람들
바깥은 찬바람이 불고
빈 술병은 한구석에 쌓여 작은 산을 이룬다
이윽고 종착역인 새벽에 도착한 마차가
마지막 승객을 토해놓고
마부는 두 손을 어깨 위로 올려 기지개를 켠다
어디 먼 데서 기적 같은 말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폭설
이재무
한 열흘 독감 앓고 나서
가벼워진 몸으로 문을나선다
앓는 내내 눈은 내려서
세상은 백지 한 장으로 크게 펼쳐져 있다
지키지 못한 약속, 멀어진 인연들을
떠올린다 제작년 백두산 가는 길에 만났던
가는 허리의 자작나무들
새삼 자꾸만 눈에 밟혀온다
내 몸에 유숙하며 육신 물어뜯던
바이러스 그 사나운 심술에 대하여도
나는 어느새 너그러워지고 있다
그들은 내내 생에 신중할 것과
겸허할 것을 주문해오지 않았던가
한열흘 앓고 나니
덩달아 세상도 수척해 보이고
사람들의 표정 넉넉하고 유순해 보인다
나는 지금보다 헐씬 더 단순하게 살아가야 하리
잠든 휴대폰 꺼내 전언을 연다
사소한 오해로 멀어진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폭우
이재무
하늘이 벌컥 화를 내셨다
평생을 욕에 인이 박혀온 내가
화들짝 놀랄 만큼
노여움을 퍼부어대는 하늘
2011년 칠 월 하순
막무가내 말썽 피우는 아이 어르고
달래다 끝내 참지 못해 매를 든
어미의 심정처럼 회초리가
방만한 생활의 종아리들을
아프게 다녀가셨다 어지간하시더니
하늘은 요즘 들어 걸핏하면
화를 내시고 욕설에 매질이시다
크게 성정이 달라지신 것이다
습관화된 망각이 재앙을 부르고 있다
푸른 거처
이재무
나무 속으로 내 사랑 들어갔네
나무 속으로 들어간 내 사랑
잎으로 돋고 꽃으로 피어나
사계를 살았네
나무 속에는 푸른 방이 있고
나무 속에는 푸른 나무가 있고
나무 속에는 푸른 창이 있다네
어느 날은 서럽게 울고
어느 날은 환하게 웃고
어느 날은 명주 올보다 더
가늘게 귓속 골목을 파고드는 노래
저 나무속 내 미래의 거처엔
오래전 내 곁을 떠나간
사랑이 살고 있다네
푸른 늑대를 찾아서
이재무
내 생전 언젠가는 찾아갈 거야, 푸른 고독
광도 높은 별들 따로 떨어져 으스스 춥고
쩡쩡 우는 한 겨울 백지의 광야
방랑과 유목의 부족 찾아갈 거야 처음 그들은
낯선 이방인 두려운 적의로 맞겠지만
청동 빛 근육에서 동족의, 굽이치는 피의 유전과
마음의 시장기 무청처럼 퍼런 얼굴에서 읽어내고는
네 발 달린 짐승 하나 불쑥 적선하겠지
푸른 별 아래 두 손 모아
이재무
우는 풀잎 마주 볼 수 없어라
하늘의 푸른 별 바라볼 수 없어라
물음 없이 걸어온 저 먼길
지우고 싶어라 모든 잘못은 네게 있다고
내 슬픔은 너로부터 비롯되었노라
함부로 말해온 이 두꺼운 입 뭉개고 싶어라
우는 풀잎 앞에 무릎 꿇고
푸른 별 아래 두 손 모아
통곡 대신 기도를 하자
시작은 언제나 늦지 않다고
풍경
이재무
흐르는 물에 상춧잎 씻듯 시간의 상처
씻어주는 것들, 풍경 속에 약손이 있다
우수 경칩 지나 몸 푼 강물과 초롱초롱
눈 뜬 초록별 그리고 지상으로 기어 올라와
부신 햇살 속으로 얼굴 디밀고는
어리둥절한 지렁이의 가는 허리와
꿈틀거리는 봄날의 오솔길
등속이 피워내는 적막의 부드럽고 따뜻한
혀가 쩍, 벌어진 진애의 살을 핥는다
풍경 속으로 풍경 되어 걸어가면
순간의 열락으로 몸은 한지처럼 얇고 투명해진다
풍경은 붕대다
늙고 지친 생을 감고 부옇게 떠오르는
생활의 거품 천천히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언젠가 새살 돋아 가려워진 생은
풍경의 울타리를 벗어나 스스로 걸어 나올 것이다
풍금
이재무
당신의 목소리엔 물기가 묻어 있었지요
낭하를 걸어나와 화단에 줄지어 피어 있는
봉숭아 채송화 칸나 깨꽃들을 어루만질 때
당신의 손길에 부끄러워 꽃들은 더욱 붉게 봄을
울었지요 하학종 소리,
솔숲 잔가지 흔들어 새를 날리고
밭둑, 소리의 손에 멱살 잡힌 풀잎들
불쑥 내미는 몸에 가슴 문지르며
가벼워진 책보 등에 메고
때 낀 손톱 깨물며 갈 때
"서울 가신 오빠는 비단옷감....."
바람에 채어 끊어질 듯 이어지던
당신의 부름 소리에 돌멩이 매단 듯
발길 무겁고 가슴 둠벙엔 뜻 모를 울음
차올랐지요.
돌아보면 집채보다 더 크고
무겁게 단신(短身)의 생애 덮어오던 그날의
어둠의 추억 속 홀로 빛났던
내 유일의 위안이었던 동반자
당신의 목소리엔 물기가 묻어 있었지요
하루
이재무
어느 날 새벽 나는 숲속에서 나무의 한 가지를 박차고 공중으로 솟구쳐 날아가는 새를 보았습니다. 그 바람에 밤사이 딱딱하게 굳어있던 공기가 과자 부스러기처럼 잘게 부서져 내리고 때마침 숲 한쪽을 붉게 물들이며 해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새 한 마리가 열어놓은 하루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습니다.
한가위
이재무
밤송이에 살 박히며
굴뚝보다 두어 뼘은 더 솟은
살진 달
장광 뒤
십오 촉 전구알 같은 감들이
얼굴 붉혔다
십 년 전 친정 오라비 따라
먼 소풍 나갔다
저승 풍광에 넋이 팔려서
이승 막차 영 놓치어버린
스무 살 누이
그간 잘 지냈느냐고
빙긋, 코스모스로 피어
웃고 있었다
한강
이재무
1
내 남루한 생에
저기 하얗게 물거품을 일으키며
흐르고 있다
큰 물살에 등 밀려
쫓기듯 흐르다가
아니다, 이게 아니다
고개를 흔들며 몸부림을 치는가
물거품을 뒤덮는 더 큰 포말
실타래처럼 엉킨 물살 속으로
해가 주문다
2
그를 만나러 갈 때
한강을 건너야 한다
그와 헤어져 돌아올 때도
한강을 건너야 한다
어느 날은 한강이 손을 뻗어와
아직 마르지 않은
두 눈의 눈물을 닦아주지만
어느 날은 한강이 주먹 뻗어와
반성에 게으른 삶의 옆구리
아프게 치고 또 친다
3
강 복판 속을
산맥처럼 우뚝 서서
달리는 물줄기를 보고 있으면
덩달아 마음이 급해지면서
어디든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그러나 금새 마음은 변덕을 부려
갓 걸음 배우는 아이처럼
서툴게 걷고 있는
여리고 부드러운 물살을 보고 있으면
덩달아 마음이
고구마순처럼 유순해지며
소홀했던 소중한 작은 약속들
수면 가득 떠올라온다
역사 이래 계절의 꽃 피워온 것은
강기슭에 볼 비비며 걷는
작은 물살이었다
한강 철새
이재무
어둠은 습기처럼 차오른다 저물 무렵
지하터널 통과하고도 전철은 철교 위에서
더듬이 잃은 갑각류처럼 더듬거린다
나는 바라다본다 차창 밖
수면에 누워 긴 여행의 노독을 푸는
침묵의 그대들
문득, 다변의 하루가 부끄럽다
목까지 채워진 단추가 답답하다
한 사람
이재무
생애 최초로 그리움을 심어준 사람
결락의 고통을 안겨주고
부재의 허무를 살게 하여
나를 깊이 만든 사람
세계가 비밀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우친 사람
바람을 예민하게 느끼고
구름과 별과 달에 오래
시선이 머무는 습관을 심어준 사람
자주, 비와 눈 속을 걷게 한 사람
그 흔한 달개비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하고
기차와 여관과 해안선을 좋아하게 만들고
바다의 수평선과 인연을 맺어준 사람
슬픔이 거름이고 힘이고 지혜를 준다는 것과
나를 울게 한 이는 결국 나라는 것을 알게 한 사람
모국어와 사랑에 빠지게 하고
마침내 시를 쓰게 한 사람
항아리 속 된장처럼
이재무
세월 뜸들여 깊은 맛 우려내려면
우선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자는 거야
햇장이니 갑갑증이 일겠지
펄펄 끓는 성질에 독이라도 깨고 싶겠지
그럴수록 된장으로 들어앉아서 진득허니 기다리자는 거야
원치 않는 불순물도 뛰어들겠지
고것까지 내 살(肉)로 풀어보자는 거야
썩고 썩다가 간과 허파가 녹고
내장까지 다 녹아나고 그럴 즈음에
햇볕 좋은 날 말짱하게 말린 몸으로
식탁에 오르자는 것이야
해산
이재무
늦은 밤 산속 임자 없는 밤나무들
다 익어 영근 밤알 연달아 토해놓느라
날 새는 줄 모른다 도토리나무도
덩달아 바빠져서 바람을 핑계로
몸 흔들어댄다 아람 벌어져 떨어지는
열매들 이마 때릴 때마다 끙, 하고
산은 돌아눕는다 설핏 잠에서 깬 다람쥐
두리번거리다 곧 귀를 열어젖혀
토독토독 열매를 세다 다시 잠든다
저 멀리 인간의 마을은 불 꺼진 지 오래
신혼방 엿보고 오는 길인지
얼굴 불콰한 달빛
숨가쁜 소리로 환한 숲속
나무들 몰래 일어나 바심하느라 여념이 없다
내일 다산(多産) 마친 나무들 눈빛 더욱 맑고
몰라보게 몸은 수척해 있으리라
허공
이재무
1.
허공을 찢어 꽃이 피어날 때 파문이 일고 공중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2.
공중에서 팔랑팔랑 떨어져 내리고 있는 나뭇잎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뒤를 받쳐주고 있는 허공.
나뭇잎 지나간 자리 파문이 일다 지워진다.
3.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허공에는 고요가 우거져 있고 무가 들어차 있고 무한이 펼쳐져 있고 허와 공이 있다. 허공은 무너지지 않는다. 모든 존재의 어머니이자 고향인 허공. 고뇌에 찬 그대가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4.
종지기의 마음과 자세에 따라 종소리의 색감과 강도가 다르다. 기도가 간절할수록 더 푸르게 더 멀리 가는 종소리. 염원이 깊을수록 더 푸르게 더 높이 나는 종소리. 먼저 나온 종소리가 나중 나온 종소리를 이끌고 나중 나온 종소리가 먼저 나온 종소리를 밀면서 소리는 더 높아지고 깊어진다. 청동의 벽을 박차고 나온 종소리, 종소리들 허공에 활짝 꽃을 피우고 있다
호박
이재무
모두들 그늘에 발 담구고도
푹푹 찌는 더위에 설설 긴다만
너는 여름의 아랫배 부둥켜안고
속 꽉찬 생명 하나 키워내고나
실팍한 네 뿌리
무엇이든 삭힐 힘 있어
척박한 땅이야 가리지 않고
힘살 좋은 잎줄기 엮어 놓으니
누가 널보고 못생겼다 핀잔을 주랴
미욱한 호가야 너는
너의 못생긴 우매함으로
흔하며 알량한 지혜들 모두
설쳐도 당할 수 없는 땡볕 모진 비바람
억세게 견뎌 내느니
내, 투박한 얼굴들 바라볼수록
아랫도리 불끈불끈
모가지가 화끈화끈
팔팔팔 넘치게 힘 솟아라
뚝배기 허리에 몸배 걸친 듯
신명나는 어여쁨이여
누가 널보고 못생겼다 핀잔을 주랴
호출
이재무
영정 앞에 엎드려 큰절을 올린다
그와 나는 한때 정자나무가 있고
큰 내가 벌판 가로지르는, 아침저녁으로
굴뚝에서 청솔 연기가 엉킨 새끼줄처럼
빠져나와 산속으로 기어드는 마을에서
함께 산 적이 있다 그는 어떠한 사소한 것도
단위로 묶어 사고하기를 즐겨하였다
나와 또래들은 그런 그 앞에서 까닭 없이
머리 조아리고 마음이 번철에 놓인
콩처럼 두근거렸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더 이상 그의 훈시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늙어 매우 외롭고 불우한 노년을 살았다
그가 호출한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와
꾸벅꾸벅 그러나 외경과는 상관없는 절을
올린다 이산의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는 내일 오후에 선산에 가 묻힐 것이다
정중하고 겸손했으나 단호했던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한 죽음이 불러모은 저 울긋불긋한 생의 빛깔들은
또 흩어져 저마다의 생활에 골몰할 것이다
밤이 깊어 풀숲에 벌레들 자지러지게 울고
낮에 쳐놓은 차일 위로 푸른 달빛 소복이 쌓이고 있다
미래의 어느 날 죽음은 또 일상 속으로
불쑥 얼굴 내밀어 방만과 누수로 보내는
생의 멱살 채갈 것이다
혹
이재무
난쟁이의 등에 난 혹을
사람들은 흉측하게 여겨
떼어냈으면 하는 발칙한 생각도
하는 모양이더라만 아서라,
혹을 캐내면 그는 죽은 목숨
뿌리는 그의 몸 전체에 뻗어 있다
누구나 존재의 혹을 지니고 산다
다혈질인 나도 내성적인 너도
홍옥 혹은 시에 대하여
이재무
홍옥이 사라지고 있다.
신맛을 꺼려하는 사람들 입맛 때문에
점차 홍옥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과의 대명사였던 홍옥의 처지가 딱하게 되었다.
기호와 취향의 변덕 때문에 사라지는 것 어디 홍옥뿐이랴.
화구(火口) 앞에서
이재무
배화교도 되어 타오르는 불 숭배한 적 있다
주황빛에 청색의 손 적시며 축축한 생각
꼬들꼬들 말리다 보면 영혼의 동굴 안쪽에까지
비단실 같은 빛 새어 들어오곤 하였다
잡념의 비린 생선 던질 때마다
고양이의 혀 되어 날름 삼키던 불
생의 궁극은 완전한 소진에 있는 것
화구 앞에서 생의 완주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씨름 기술이 부족한 사람
번번이 생활의 샅바 놓쳐 허둥지둥 나가떨어지기 일쑤였지만
아직 시간의 끈 놓아서는 안 된다.
타다 만 흔적처럼 추한 것 어디 있으랴
덜 마른 아집의 생목 한 짐 던져 넣으니
검붉은 손톱 불쑥 솟아나 눈 찌르고 얼굴 할퀸다
불의 지청구 달게 받은 뒤
자세를 고쳐 앉아 젖은 신발 벗어 말린다
회한
이재무
사랑은 서로가 서로의 집이 되는 거지요
사랑은 서로가 서로의 언덕이 되는 거지요
사랑은 서로가 서로의 가슴으로 물방울 되어 스며드
는 것이지요
그대는 내게 집과 언덕이 되어주었고
그대는 내게 물방울로 스며와 체온 덥혀주었지요
그러나 나는 그대의 집과 언덕이 되어주지 못했고
그대의 가슴에 돌멩이로 달려들며 젖어들지 않는다
고 앙탈뿐이었지요
흑산도 홍어
이재무
목포에 가면 흑산도산 홍어를 먹을 수 있지
묵은 김장 김치 한 장 넓게 펴서
푹 삶은 돼지고기에다가 거름에 삭힌
홍어 한 점 얹혀 한입 크게 삼켜
소가 여물을 먹듯 우적우적 씹다보면
생활에 막힌 코가 뻥, 뚫리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다네
빈 속 싸하게 저릿저릿 적셔가며
주거니 받거니 탁배기 한 순배
돌리다 보면 절로 입에서 남도창 한 자락
흘러나와 앉은 자리 흫을 더욱 돋기도 하지만
까닭 없이 목은 꽉 메면서 매캐한 설움
굴뚝 빠져나온 연기처럼
폴폴 새어나와 콧잔등 얼큰, 시큰하게도 하지
사투리가 구성진 늙은 여자 허리를 끼고
소갈머리 없는 기둥서방으로 퍼질러 앉아
잠시 잠깐 그렇게 세월을 잊고
농익은 관능 삼키다 보면 시뻘겧게 독 오른
생의 모가지쯤이야 한숨 죽여 삭힐 수 있지
KTX
이재무
밤 기차, 속도는 연애와 같아
처음의 낯설고 설레는 탐색의 시간 지나면
먹다 남은 면발처럼 불어버리거나
습기 잃은 꽃처럼 이내 시들해진다
KTX는 키 작은 도시 비웃으며 크게 달린다
반성을 모르는 속도는 풍경에 불친절하고
생활에 무용한 것들을 추문화시킨다
현재는 미래를 위한 재물,
유보될 뿐인 희망을 위해 피 흘리는 시간, 시간들
구멍은 팔수록 더 커지고
어제를 떠올리는 자는 이미 패배한 사람
새 애인과의 쿨하고 심플한 연애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게 녹는다
까닭도 없이 모든 게 빨라지고
‘금남여객’은 흑백 사진첩에 잠든 지 오래
고속버스와 새마을호도
지나간 사랑처럼 벌써 낡은 추억이 된다
3월
이재무
늦은 밤이나 새벽 숲속에 가면
나무들 수액 빨아올리는 소리 우렁차다
나무들 벌써 그렇게 일 년 농사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곧 울퉁불퉁한 수피
부드러운 햇살 툭 툭 툭 치고 가면
가지 밖으로
병아리 같은 주둥이 내밀며 초록들
온통 파랗게 하늘을 물들이며 재잘대겠지
근육질의 사내들 팔 뻗으며
숲을 살찌우고
다산성의 여인들은 두근, 두근거리는 가슴 열어
씨앗들 토해낼 거야
3월은 즐거운 노동으로 분주한 달
사람들의 몸속으로도 맑고 뜨거운 피가 솟는다
늦은 밤이나 새벽 숲속에 가면
나무들 희망 빨아올리는 소리 산을 흔든다
5월
이재무
겨우내 마른 논이,
벌컥벌컥 수문을 따라 천천히 들어오는 물을 마실 때
논의 몸속으로 들어와 가득 차는 것은 물만이 아니다
보라, 산날맹이 너무 자주 형상을 바꾸며 저희끼리 시간을,
희희낙락 즐겨 해찰해대던 구름 몇 마리도 불현 생각난 듯
물 따라 겅중겅중 들어와서는 논바닥 이곳저곳에
제 가벼운 그림자들 길게 떨어뜨리는 것은
그러면 어느새 새로이 생겨난 물벌레들은
흙탕 일으켜 흙의 뭉친 근육 풀어주는 것을
논둑 저 혼자 펄럭이며 심심하게 서 있는 미루나무도
나른한 정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배추 속처럼 뽀얗게 차오르는 수면 안으로
길게 손 뻗어오는 것인데 그리하여 그,
기지개 덕에 키가 한 자는 더 웃자라는 것인데
오후 들어서는 골짜기 박차고 나온 꽁지 붉은 새 울음소리도
바닥에 떨어져서는 푸르게 무늬 지며 찰랑대는 것을 또,
직선으로 내려꽂히는 햇살 되받아내며
은빛 사방팔방으로 튕기는 것 보라,
겨우내 마른 명태처럼 누워 있던 논
벌떡 일어나 그 큰 입으로,
도랑의 옆구리 비집고 나오는 물로 오, 오래 해갈하실 때
하늘 더욱 청명하여 드높고
삽자루 어깨에 메고 논둑 걷는 예비군복 바지의 걸음이
오늘따라 겁도 없이 풍선처럼 가볍고
세상은 잘 닦은 유리알처럼 투명, 투명하여서
갑자기 생이 눈부셔 어리둥절해지는 오월 한때를
7월
이재무
송아지의 혀같이 부드러운 바람의 혀가
먼지와 매연으로 두꺼워진 살[肉] 구석구석
핥고 핥는다
여름의 그늘은 넓고도 깊다
수면의 유혹은 마약처럼 강렬하고도 집요하다
나는 키 큰 땅강아지 되어 땅속으로
몸을 묻는다
발 뿌리를 타고 오르는 수액
몸의 가지에 비늘 같은 잎 돋는다
미루나무 그 미끈한 줄기 기어오르다
자꾸 미끄러지는 매미 울음 어느 순간에
하늘이 뻥, 뚫린다
달아오른 남근처럼 뜨겁고 굵은 햇살
강물에 거듭 내려꽂힌다
부푼 강물은 출렁, 출렁거리며 강안(江岸) 풀들을
흠뻑 적신다 불현,
나는 하늘이 부끄러워
두 눈을 꼬옥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