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서류? 잠깐만 기다리시오."
담당자는 안경을 벗으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러더니 창구와 실내를 구분하고 있는 벽을 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그레버는 그것을 지켜보다가 주위를 살폈다. 출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문 옆으로 가 있어."
그는 살며시 말했다.
"저기서 기다려. 내가 모자를 들면 즉시 폴만에게 가. 나도 곧 따라갈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망설였다.
"가라니까!"
그는 재촉했다.
"어쩌면 그 늙은이가 누군가를 부르러 갔는지도 몰라.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혹시 나에게 물어 볼 말이 있는지도 몰라요."
"그런 건 바로 알게 돼. 그럼 당신이 잠깐 밖에 나갔다고 말 할게."
그는 창가에 서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방긋 웃다가 이윽고 사람들 속에 묻혀버렸다.
"쿠루제양은?"
그레버는 뒤로 돌아섰다. 담당자가 자리에 앉고 있었다.
"곧 옵니다. 그런데 일은 제대로 되고 있습니까?"
담당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결혼할 계획이요?"
"가급적 빨리 할 생각입니다. 제 휴가가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즉시 결혼할 수도 있습니다. 군인인 경우에는 간단하고 신속합니다."
그레버는 그가 들고 있는 서류를 보았다. 담당자는 싱긋 웃었다. 갑자기 그레버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서류는 다 갖추어졌습니까?"
그는 말하면서 모자를 들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잘 되었소. 그런데 쿠루제양은 어디에?"
그레버는 모자를 창구에 놓고 뒤돌아서서 엘리자베스를 찾았다. 출입구에는 사람들로 북적댔기 때문에 좀처럼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순간 창구에 놓은 모자에 생각이 미쳤다. 모자는 두 사람만의 신호였었는데, 그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급히 말했다.
"곧 데려오겠습니다."
그는 재빨리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문 밖의 기둥 뒤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있었군! 모든 게 잘되었어, 엘리자베스."
그들은 창구로 돌아왔다. 담당자는 그녀에게 서류를 넘겨주었다.
"당신은 보건 고문이신 쿠루제씨의 따님이 맞습니까?"
"네."
그레버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나는 당신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제 아버지 소식을 들으셨나요?"
"그런 건 아니오. 당신도?"
"네."
담당자는 안경을 벗었다. 근시의 파란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희망을 잃지 마시오."
그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부디 행운을 빕니다. 당신이 제출한 서류는 내가 직접 처리했소. 당장이라도 결혼할 수 있소. 모든 건 내가 주선해 드리지요."
"오늘 오후에 하겠어요."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2시라도 괜찮겠어요?"
"그렇게 합시다. 장소는 초등학교 운동장이오. 지금은 거기에 호적과가 있으니까."
"고맙습니다."
그들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지금 당장하면 안 돼? 그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텐데."
엘리자베스는 미소를 지었다.
"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어요.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2시 15분 전에 데리러 오세요."
그레버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정말 간단하게 끝났어. 난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조마조마 했었지! 어째서 그렇게 겁을 먹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아?"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지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지나치게 조심하는 건 바보라고 생각하셨어요. 지금 세상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면서. 하지만 바로 그런 일을 당하고 말았어요. 우린 운이 좋았을 뿐이죠."
그레버는 거리를 걷다가 '옷 수선' 이라고 써 붙인 가게를 발견했다. 캥거루처럼 생긴 남자가 앉아 군복을 깁고 있었다.
"이 바지의 얼룩을 뺄 수 없겠소?"
주인은 고개를 들었다.
"여긴 수선하는 곳이지, 세탁소가 아닙니다."
"그건 알고 있소. 다림질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당신이 지금 입고 있는 옷 말입니까?"
"그렇소."
주인은 투덜거리면서 일어나더니 바지에 묻은 얼룩을 자세히 살폈다.
"피가 아니라 기름이오. 벤젠으로 쉽게 뺄 수 있소."
"그렇게 잘 알면 직접 해보시오. 이건 벤젠으로는 어림도 없소."
"그럴지도 모르겠소. 나보단 당신이 더 잘 알 테니."
주인은 커튼 뒤로 가서 헌 바지와 흰 셔츠를 가지고 나왔다.
"얼마나 걸리겠소? 결혼식에 입을 옷이오."
"한 시간이면 충분하오."
그레버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럼, 한 시간 후에 오겠소."
주인은 난처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로 알았던 것 같았다.
"내 옷이 훌륭한 보증이 될 것이오. 난 도망가는 게 아니오."
"당신의 군복은 국가의 것입니다. 좌우간 다녀오시오. 그 동안 이발이나 하시오. 결혼한다면 이발을 해야겠소."
"그런 것 같군요."
그레버는 밖으로 나와 이발관으로 갔다. 바짝 마른 여자가 혼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남편은 일선에 있지요. 그래서 제가 대신 맡고 있어요. 앉으세요."
"이발을 하고 싶소."
"전 솜씨가 좋답니다. 세발도? 고급 비누가 조금 남았어요."
"아, 부탁하오."
여자는 제법 솜씨가 있었다. 이발을 하고 나서 비누와 타올로 머리를 깨끗이 한 다음에 빗질을 했다.
"머릿기름을 바를까요? 프랑스제의 브리양딘느죠."
그레버는 깜박깜박 졸다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냄새는 어떻소?"
그레버는 알폰스의 욕실용 염제를 떠올렸다.
"그야 물론 머릿기름 냄새겠죠."
그레버는 병을 들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기름이 썩은 냄새 같은 게 풍기고 있었다. 승리의 시대는 이미 아득한 옛날이 되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머리는 짧게 깎지 않은 부분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좋소. 약간만."
그는 계산을 마치고 수선하는 집으로 갔다.
"아직 이릅니다."
주인이 말했다. 그레버는 잠자코 자리에 앉아 주인이 다림질하는 것을 구경했다. 일시에 긴장이 풀리면서 졸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파리가 날아다니고 아이론은 수증기를 만들어냈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주인은 그레버에게 바지를 건네주었다. 바지의 얼룩은 거의 지워져 있었다.
"좋소!"
그레버는 흡족했다. 바지에서 벤젠 냄새가 났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발은 어디에서 했소?"
"일선으로 출정한 군인의 아내가 했소."
"마치 자신이 깎은 것 같군요. 잠깐 기다리시오."
주인은 가위로 대충 손질을 했다.
"자, 이만하면 괜찮군."
"얼마요?"
주인은 사양했다.
"내고 싶거든 1000마르크를 내시오. 아니면 한 푼도 안 받겠소. 결혼 선물로 생각하구려."
"고맙소. 꽃집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겠소?"
"슈피헤른가에 한 집 있습니다."
꽃가게는 열려 있었다. 두 명의 여자 손님이 화환 값을 흥정하는 중이었다.
"이건 생화이기 때문에 값이 비쌉니다."
한 사람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점원을 보았다.
"그렇지만 터무니없군! 자, 밖으로 나가지. 다른 가게로 가서 싸게 사야겠어."
"사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여점원이 빈정거렸다. 두 여인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밖으로 나갔다. 여점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그레버를 보았다.
"손님께서도 화환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관에 덮으실 건지? 보시다시피 꽃은 얼마 안되지만 무척 아름답게 만들어졌지요."
"난 조화는 필요 없소."
"그러면?"
여점원은 깜짝 놀랐다.
"꽃이 약간 필요한데."
"꽃? 백합이 있지만."
"그것 말고. 결혼식에 사용할 것이오."
"결혼식에는 백합이 적격이죠. 백합은 무구한 처녀의 상징이랍니다. 요즘엔 꽃을 좀처럼 구할 수 없어요."
"그렇겠군요. 혹시 장미는 없소?"
"장미라뇨? 이런 계절에 무슨 장미가 있어요? 지금 온실은 야채만 재배해요."
그레버는 진열대를 유심히 보았다. 마침내 스와스치카 모양의 화환 그늘에서 황수선화 한 다발을 발견했다.
"이걸 주십시오."
여점원은 황수선화에 물을 뿌렸다.
"죄송하지만 신문지에 싸서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포장지가 없거든요."
그레버는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곧 꽃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모두가 꽃을 든 자신을 향해 흘낏거리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꽃을 밑으로 해서 꽃다발을 들다가 나중에는 겨드랑이에 끼고 걸었다. 꽃을 싼 신문지에는 노란 꽃 옆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사내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국민재판의 의장이었다. 그는 기사를 읽어보았다. 네 사람이 독일의 승리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해서 처형됐다는 기사였다. 그들의 목을 작두로 내리쳤다 그레버는 신문지를 막 구겨서 던져버렸다.
호적과는 초등학교의 운동장에 있었다. 그곳은 등산용 로프의 끝이 벽에 매여서 울타리를 만들고 있었다. 로프 사이에는 히틀러의 초상이 걸렸으며 그 밑에는 스와스치카가 있었다.
두 사람은 기다려야만 했다. 그들 앞엔 중년의 병사가 여자와 함께 서 있었다. 여자는 가슴에 돛단배 모양의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남자는 몹시 흥분해 있었으나 여자는 침착하게 행동했다. 여자는 우리는 공모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엘리자베스를 보고 싱긋 웃었다.
"결혼 증인."
호적과 서기가 말했다.
"당신의 결혼 증인은 어디 있소?"
병사는 어리둥절했다. 처음부터 증인은 없었다.
"전시 결혼에는 증인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소."
이윽고 그는 대답했다.
"그렇지만 형식은 갖춰야 합니다."
병사는 그레버를 돌아보았다.
"어떻습니까? 좀 도와주지 않겠소? 서명만 하면 됩니다."
"좋습니다. 그럼, 당신들은 우리의 증인이 되어 주시오. 나도 증인이 필요하단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걸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잊지 않았다면 당연한 것이오."
서기가 아니꼽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병사들의 말투에서 모욕감을 느낀 것 같았다.
"당신들은 총도 없이 전쟁터에 나갑니까?"
병사는 서기를 노려보았다.
"그건 얘기가 다르잖소. 증인은 총하고는 다르오!"
"그런데 증인은 있습니까?"
"여기 있는 나의 전우와 부인이 증인이오."
서기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레버를 보았다. 그는 아마도 문제를 간단히 처리하는 게 재미없는 모양이었다.
"신분증을 가지고 있소?"
그레버에게 물었다.
"물론. 우리도 결혼을 할 거요."
서기는 느릿느릿 서류를 들었다. 그는 엘리자베스와 그레버의 이름을 호적부에 기입했다.
"여기에 서명하시오."
네 사람이 각각 서명을 했다.
"총통의 이름으로 축하드립니다."
서기는 병사와 병사의 아내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레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의 증인은?"
"여기 있소."
그레버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서기는 고개를 저었다.
"한 사람만 증인이 될 수 있소."
"그건 왜 그렇죠?"
"당신들은 아직 독신이죠? 하지만 저들은 이미 결혼이 성립된 부부입니다. 증인으론 독립된 두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내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레버는 관리의 말이 사실인가, 아니면 생트집을 잡는 것인가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증인이 되어 줄 사람이 없겠소? 혹시 사무원이라도?"
"이런 직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서기는 냉정하게 말했다.
"증인이 없으면 결혼할 수 없습니다."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그러오?"
그들에게로 다가와 묵묵히 듣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물었다.
"결혼 증인이라면 내가 서 주겠소."
그는 엘리자베스 옆에 섰다. 서기는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신분증이 있소?"
"물론 있지."
중년 남자는 재빨리 신분증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서기는 그것을 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하이 히틀러! 친위대 대장님!"
"하이 히틀러!" 친위대 연대장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이제부터 연극은 그만해 둬. 알았나? 군인에게 그런 태도로 굴다니, 넌 도대체 뭐지?"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저 죄송하지만 여기 서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레버는 친위대 연대장인 힐테브란트가 자기의 증인이 됐음을 알았다. 첫 번째 증인은 크로츠 공병이었다. 힐테브란트는 그레버 부부와 악수를 나누고 크로츠 부부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서기는 교수형 집행을 위에서 늘어뜨린 것 같은 로프 뒤에서 히틀러의 '나의 투쟁' 두 권을 꺼냈다. 그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말했다.
"국가의 선물입니다."
서기는 힐테브란트의 뒷모습을 흘겨보고 있었다.
"사복을 입고 있으니 알아 볼 수가 있나."
두 부부는 평행봉 앞을 지나서 출구로 갔다.
"당신은 언제 출발하시죠?"
그레버는 공병에게 물었다.
"내일입니다."
크로츠가 대답했다.
"우린 국가에 기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전사를 하더라도 적어도 마리의 걱정은 조금 덜 수가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크로츠는 배낭의 끈을 풀었다.
"덕분에 무사히 결혼식을 마쳤습니다. 여기 브른스윅크 소시지가 있습니다. 받으십시오. 난 농촌 출신이라 이런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실은 서기에게 줄 생각이었는데 생각해 보십시오! 저런 녀석에게 줄 수 없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놈들에게 호의를 베풀 필요는 없습니다!"
그레버는 소시지를 받았다.
"대신에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결혼선물로 이것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그건 저도 한 권 받았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이것으로 당신은 두 배나 행복해 질 것입니다. 한 권은 부인께 드리십시오."
크로츠는 '나의 투쟁'을 들었다.
"정말로 주시는 겁니까?"
"제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집에 많으니까요."
"그럼 감사합니다."
그레버는 급히 엘리자베스의 뒤를 쫓았다.
"난 알폰스 빈딩그에게 알리지도 않았어. 녀석을 증인으로 세우고 싶지 않았어. 돌격대장의 이름을 우리 이름과 나란히 하고 싶지 않더군. 그 대신 친위대 연대장이 증인이 되었지."
그들은 마르크프트라츠를 가로질렀다. 마리 교회의 지붕 위로 비둘기가 날아다녔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보면서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한 만큼 행복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교외의 외딴 숲속 공지에서 뒹굴고 있었다. 빈터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 있고, 미풍이 가볍게 꽃잎을 흔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일어나 않았다.
"저쪽에 보이는 것이 무엇일까요? 마치 마법에 걸린 숲 같군요. 아니라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나무라는 나무는 모두 은빛으로 빛나고 있어요. 당신에게도 보이나요?"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뭐죠?"
"굉장히 얇은 알루미늄이야. 초콜릿을 싸는 은종이 같은 것이지."
"숲에 가득 걸려 있어요. 어디서 생겨났을까요?"
"비행기에서 다발로 뿌렸지. 무선통신을 방해하려는 의도지. 은박지가 공중에서 날아다니면 전파를 교란시키니까."
"어머나, 시시하군요. 내겐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보여요. 그런데 전쟁과 관련이 있다니! 우린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공지 주위의 수목에는 나뭇가지마다 은박지가 걸려 반짝반짝 빛났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며 그것은 평화의 축제가 되어 붕붕 떠다녔다. 엘리자베스는 그레버에게 기댔다.
"저 숲은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바라보기로 해요.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좋아."
그레버는 외투 주머니에서 폴만에게 받은 책을 꺼냈다.
"비록 신혼여행을 갈 순 없지만 스위스의 풍경이 가득 실려 있어. 전쟁이 끝나면 그곳으로 가서 우리의 보금자리를 꾸미는 거야."
"스위스! 밤에도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곳이죠."
그레버는 책을 펼쳤다.
"지금은 그곳조차 어두워. 병영에서 들었는데 우리 정부가 요구한 모양이야. 등화관제를 하라는 최후통첩을 받았으므로 어쩔 수가 없었겠지."
"그건 왜 그렇죠?"
"스위스의 상공을 아군기만 통과한다면 상관이 없겠지. 그런데 지금은 적기도 통과하고 있거든. 폭탄을 가득 싣고 말야. 불빛이 있으면 위치가 드러나잖아."
"그렇다면 틀렸군요."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해. 언젠가 전쟁이 끝나서 우리가 스위스로 가면, 그곳의 경치는 이 그림들과 똑같이 변함없지.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그림책이라면 결코 그럴 수가 없어."
"독일의 책도 그렇겠죠?"
"그래."
그들은 스위스를 구경했다.
"산뿐이군요. 스위스에는 산 말고는 없나요? 따뜻한 남쪽은 없나요?"
"물론 있지! 여기가 스위스의 이탈리아야."
"로카르노군요! 여기서 평화회의가 열렸었지요. 전쟁을 또다시 일으키지 않겠다고 결의를 한."
"그랬었지."
"그것도 오래 못 갔어요."
"그래. 이 그림이 바로 로카르노야. 종려와 오래된 교회들, 마조레 호수도 있어. 이곳의 섬에는 진달래가 피었어. 태양이 빛나고 평화가 있는 곳이지."
"아! 거긴 어디죠?"
"포르트론코라고 부르지."
"좋군요."
엘리자베스는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우리 그곳을 꼭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가기로 해요."
그레버는 책을 덮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빛나는 은빛이 눈을 가렸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안았다. 그녀는 숲 속의 풀과 섬세한 나뭇잎과 연약한 꽃잎이 되어 있었다. 나뭇잎이 차츰 크게 확대되면서 마침내 지평선을 덮었다. 그는 두 눈을 감았다.
바람이 멎더니 금세 어두워졌다. 멀리서 육중한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대포다 어디일까? 여긴 어딘가? 전선은? 그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근처에 포좌가 있을까? 사격 연습을 하는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가 몸을 움직였다.
"어디죠?"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여기를 폭격할까요?"
"비행기소리가 아냐."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레버는 몸을 일으키고 귀를 기울였다.
"저것은 포탄도, 대포도 아냐. 천둥소리야."
"천둥이 치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아요?"
"그건 일정한 시간이 없어."
이번에는 번갯불이 번쩍 빛났다. 인조의 폭풍우를 알고 있는 그들은 번갯불이 인공적이라고 생각했다. 천둥소리조차 비행기의 굉음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종려나무 밑으로 달려갔다. 머리 위로 나뭇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아득하게만 들렸다.
그들이 숲속에서 벗어나자 지붕이 있는 전차의 정류장이 보였다. 정류장에는 친위대원 세 사람이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었다. 젊은 친위대원 한 사람이 엘리자베스에게 곁눈질을 했다. 얼마 후,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분간할 수 없군. 어디로 갈까?"
"오른쪽으로."
그들은 어둠침침한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땅을 파고 있었다. 순간 엘리자베스는 긴장했다. 그녀는 노동자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옆을 걸어가면서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레버도 노동자들의 옷에 번호표가 붙어 있는 것을 알아챘다. 그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수인으로서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고 묵묵히 일만 했다. 두 사나이가 쓰러져서 매점 옆에 누워 있었다.
"야, 임마!"
친위대원이 소리를 질렀다.
"이리 와! 접근은 금지다!"
엘리자베스는 못 들은 척하고 더욱 서두르면서 수인들의 얼굴을 훑어갔다.
"야! 너 내 말이 안 들려?"
친위대원이 욕설을 퍼부으며 다가왔다.
"왜 그러지?"
그레버가 물었다. 그레버는 뒤에 다른 친위대원이 뛰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분대장이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불러 세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우린 무엇인가 찾고 있었어."
"무엇을? 빨리 말해 봐!"
"여기서 브로치를 잃어버렸어. 다이아몬드가 박힌 돛단배인데 어젯밤 이곳을 지나가다가 떨어뜨린 게 분명해. 혹시 못 보았어?"
"뭐라고?"
그레버는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엘리자베스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갔다.
"아무것도 못 보았어."
분대장이 대답했다.
"정신이 없군!"
친위대원이 말했다.
"신분증 있나?"
그레버는 그를 쏘아보았다. 당장이라도 때려눕히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친위대원은 스무 살이 채 안된 것 같았다. 슈타인브레너의 얼굴이 친위대원의 얼굴 위에 겹쳐졌다가 사라졌다. 이윽고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난 신분증명서뿐만 아니라 대단히 훌륭한 증명서도 있지. 게다가 친위대 연대장인 힐테브란트는 내 친구다. 흥미가 있다면 보여주지."
친위대원은 비웃었다.
"그것뿐인가? 아, 총통은 작은 아버지시겠지?"
엘리자베스는 대열의 끝에 당도해 있었다. 그레버는 천천히 시간을 끌면서 결혼 증명서를 꺼냈다
"잠깐 가로등 밑에 가 보게. 이걸 읽을 수 있겠지? 내 결혼 증인의 서명과 날짜를. 이제 알았겠지만 오늘이다. 또 물어 볼 것이 있나?"
친위대원이 증명서를 자세히 살펴보자 분대장이 가까이 와서 어깨 너머로 살짝 엿보았다.
"힐테브란트의 서명이군."
분대장이 인정했다.
"알겠소. 그러나 이곳은 금지되어 있지요. 우리도 방법이 없소. 브로치는 정말 안됐지만."
"정말 미안하게 됐소. 금지구역이라면 찾는 걸 포기하겠소. 어쨌든 명령은 명령이니까."
그는 엘리자베스를 향해서 뛰어갔다. 분대장이 그레버 옆으로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혹시 브로치를 찾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디로 전할까요?"
"힐테브란트에게. 그게 제일 간단하오."
"알겠습니다."
분대장이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
"찾아보았나?"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그녀는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몽롱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 잃은 브로치에 대해서 분대장님에게 얘기했어."
그레버는 급히 말했다.
"만약에 찾게 되면 힐테브란트에게 전해주시겠데."
"고맙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깜짝 놀라면서 대답했다. 분대장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믿어 보십시오. 우리 친위대는 모두 신사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수인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것이 분대장의 주의를 끌었다.
"만일 저 새끼들이 감추었다면 틀림없이 찾아내겠습니다." 분대장은 난폭하게 말했다.
"놈들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조사해보겠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기서 떨어뜨렸는지, 그게 분명치 않아요. 어쩌면 숲속에서 잃었는지도 몰라요. 아, 거기서 잃어버린 것 같아요."
분대장은 싱글싱글 웃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정말 숲속이 맞는 것 같군요."
그녀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분대장의 웃음이 얼굴 전체로 퍼졌다.
"물론 거기는 우리의 관할 밖입니다."
그레버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뼈만 남은 수인 곁에 서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꺼내자마자 재빨리 방향을 바꾸면서 수인에게로 떨어뜨렸다.
"감사합니다."
그는 분대장에게 말했다.
"내일 숲속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찾게 될는지도 모르겠소."
"하이 히틀러! 그리고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고맙소."
그들은 묵묵히 걷고 있었다. 마치 홍학의 무리가 날고 있는 것처럼 진주조개와 장밋빛이 어우러진 구름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전 정말 큰 실수를 했군요.
"괜찮아. 그게 바로 인생이야. 궁지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신은 브로치와 힐테브란트로 저를 구해주셨어요. 당신은 훌륭한 거짓말쟁이군요."
"그건 10년 동안 조국이 내게 가르쳐 준 거야. 자, 집으로 돌아가지. 나는 이제 당신의 아파트로 옮길 권리가 있으니까."
"저는 내일 공장에 나가지 않아도 돼요. 이틀 동안 휴가를 받았어요."
"그런 말을 지금에서야 하다니!"
"내일 아침까지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어요."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 놀라게 하지 마! 부탁이야. 우리에겐 지금 그럴 시간이 없어. 우린 지금 단 일분이 귀해. 이제부터 신혼의 기분을 만끽하는 거야. 아침식량은 충분한가?"
"충분해요."
"좋아. 내일은 요란하게 아침식사를 하기로 하지. 행진곡을 틀어놓고 말야. 그리고 루젤 여사가 도덕적 분개로 가슴이 탄다면 결혼 증명서를 내밀고 실망하는 꼴을 감상해야지. 그 여자가 친위연대장의 서명을 본다면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엘리자베스는 싱긋 웃었다.
"그다지 심술궂게 굴진 않을 거예요. 그저께 당신에게서 받은 설탕을 전해주면서 당신이 훌륭한 남자라고 칭찬하던데요. 왜 갑자기 변했는지 알겠어요?"
"난 모르겠는데. 아마도 매수되었겠지. 우리들의 조국은 지난 10 년 동안에 그것을 완전히 터득했으니까."
20
정오에 공습이 있었다. 구름이 잔뜩 끼고 마침 점심시간이었으므로 거리에는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그레버는 공습 경비원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지하 방공호에 들어가도록 지시를 받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경보라고 생각했지만 최초의 폭발을 감지하는 순간, 재빨리 입구 가까이로 접근했다. 문이 활짝 열려지면서 그레버는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들어가!"
경비원이 밖에서 소리를 질렀다.
"거리에 있을 수 있는 건 공습 경비원뿐이야!"
"나도 경비원이다!
그는 공장을 향해서 달렸다. 엘리자베스를 만나게 될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장이 폭격의 중요 목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그는 길모퉁이를 돌았다. 그때 바로 앞에 서 있던 집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것은 공중에서 산산조각으로 분해되어 폭음 속에서 사방으로 내려앉았다.
그레버는 도랑 속으로 뛰어든 다음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두번째의 폭발이 그의 뒤에서 작렬했다. 돌조각이 우박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면서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귀를 잡아당겼다. 다시 이마를 두들기며 의식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순식간에 거리는 온통 불꽃의 바다로 변했다.
사람들이 공포에 들뜬 눈으로 입을 딱 벌린 채 그가 있는 쪽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결코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그들은 저마다 입과 귀가 막힌 사람들처럼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지르면서 그의 옆을 지나쳤다. 그 뒤를 의족을 한 사내가 이미 죽은 비둘기를 가슴에 안고 급히 달려오고 마지막으로 커다란 셰퍼드 한 마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길가의 집 앞에 다섯 살 가량의 여자아이가 한 명 서 있었다. 그 아이는 갓난애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레버는 뛰어가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서 방공호로 돌아가!"
그는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디 가셨지? 넌 왜 혼자 있지?"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레버는 경비원이 자신을 향해서 무슨 말인가를 외치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레버도 욕설을 퍼부었지만 자신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경비원은 몸짓을 하면서 계속 소리를 지르고, 그레버는 두 손으로 아이를 가리켰다. 마치 유령의 무언극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경비원은 한쪽 손으로 그를 잡으려고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아이를 안으려고 했다. 그레버가 그를 뿌리치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완전히 무중력 상태가 되더니 하늘을 향해 마음껏 뛰어오를 수 있을 것같이 발이 땅끝에서 떨어졌다. 문이 활짝 열린 옷장 같은 게 선사시대의 새처럼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강력한 선풍이 그를 사로잡고 빙빙 돌렸다.
그레버는 화염을 잔뜩 마셨다. 폐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그는 길바닥에 쓰러져서 머리를 땅에 대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윽고 머리가 파열할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면서 고개를 들었다. 잿더미가 된 집으로부터 빠져나온 층계 위에 계집애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갓난애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폭풍에 떠밀려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 공장이 있는 광장까지 당도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공장은 피해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공장의 오른쪽에 새로운 폭탄 구멍이 하나 생겼을 뿐이었다. 공장의 공습 경비원이 그를 가로막았다.
"내 아내가 여기 있어!"
그레버는 소리를 질렀다.
"제발 들어가게 해줘!"
"여긴 통행금지야! 방공호는 저쪽 끝에 있어."
"국가에서 금지 안 한 것이 있나? 비켜줘! 그렇지 않으면."
경비원은 안마당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철근 콘크리트의 토치카가 있었다.
"기관총과 감시대다!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 이 얼빠진 놈아."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었다. 기관총은 안마당을 완전히 제압하고 있었다.
"감시대라고!"
그는 흥분해 있었다.
"그따위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다음엔 변소에도 감시대를 배치해야 될 거야. 여긴 죄수라도 가두었단 말인가? 군용외투 공장에서 무얼 감시하겠단 말이냐?"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마어마한 것들이 있어."
경비원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선 군용외투만 만들지 않아. 그러니까 노동자만 있는 게 아니라구. 어떤 군수공장이나 강제수용소의 죄수들을 2~300 명씩 부려먹고 있어. 알겠나?"
"알았어. 그럼 여기 방공호는 어때?"
"방공호가 어떤지 내가 알게 뭐야? 난 밖에서만 근무해."
"방공호는 안전한가?"
"물론이지. 자, 이만 꺼져버려! 누구도 밖으로 나올 수 없어. 저 사람들이 벌써 너를 목격했어. 사보타주를 선동하는 자를 감시하는 거야."
폭격은 멎었지만 지상에서는 계속해서 고사포를 발사하고 있었다. 그레버는 광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방공호가 열리지 않아서 광장 한쪽 끝에 새로 생긴 폭탄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구덩이 속은 화약 냄새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는 가장자리로 기어 나와서 공장을 노려보았다.
'여기는 전쟁의 방식이 다른데.' 그는 생각했다. 일선에서는 각자가 자신만 걱정하면 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제각기 가족을 거느리고 있으며 또한 혼자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당하고 있다. 그는 다섯 살짜리 계집애의 시체를 떠올리고 자신이 본 수많은 시체들을 떠올리고 부모님을 떠올리고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이런 일을 빚어낸 인간들에게 증오를 느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악취가 풍기는 지상으로 부드러운 눈물처럼 떨어졌다. 비는 지면을 때리고 다시 튀어 오르면서 사방을 점점 어둡게 했다. 그때 제2의 폭격기 편대가 하늘에 나타났다.
마치 누군가가 가슴을 두 쪽으로 잘라내는 것 같았다. 굉음이 머리를 마비시키더니 공장의 일부가 부채꼴처럼 펼쳐진 불꽃 앞에서 까맣게 되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레버는 거대하게 치솟고 있는 불꽃을 노려보았다. 그는 다시 공장의 정문으로 달려갔다.
"넌 왜 또 왔어?"
"공장에 폭탄이 명중한 걸 모르나?"
경비원이 소리를 질렀다.
"나도 알아. 어디야? 혹시 외투부가 아닌가?"
"외투는 훨씬 뒤야. 바보 같은 녀석!"
"그게 정말인가? 내 아내는."
"네 아내고 뭐고 다 방공호로 피신했어. 부상자와 시체만 남아 있지. 자, 방해하지 말고 빨리 가!"
"모두 방공호로 피신했다면서 어째서 사상자가 생겼지?"
"강제수용소에서 온 놈들이야. 그들은 방공호에도 들어갈 수 없어. 그들을 위해서 특별 방공호라도 만들어야 하나?"
"아니."
"이제는 날 혼자 있게 해줘. 그래도 군인인데 겁쟁이로군! 폭격은 이미 끝났어."
그레버는 머리를 들었다. 고사포만이 여전히 포효하고 있었다.
"한 가지만 물어 볼게. 외투부가 무사한 지를 알고 싶어. 나를 들여보내 주든지 자네가 알아봐 주게. 도대체 당신은 결혼도 안했나?"
"물론 했지. 나도 아내 때문에 마음이 조마조마해."
"그러면 알아봐 주게. 그렇게 한다면 당신 아내는 무사하게 될 거야."
공습원은 그레버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 넌 머리가 돌았나? 네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냐?"
공습원은 전화가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전화를 해봤어. 외투부는 무사한 모양이야. 다만 강제수용소에서 온 자들이 직격탄을 맞았다더군. 넌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지?"
"5일."
경비원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지?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잖아."
이제 끝났다. 시내는 죽음의 냄새로 가득하고 온통 불바다로 변해 있었다. 빨간 불, 노란 불, 하얀 불, 붕괴된 건물 위로 쥐처럼 살살 기어 다니는 불. 하늘을 향해 타오르는 불, 불이 된 시체와 부상자. 사람이 집에서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와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 곤두박질친다. 살이 타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 퍼진다.
"인간 횃불이다."
그레버의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어떻게 할 수도 없어. 그대로 타버리는 거야. 살은 물론이고 뼈까지 모두 타버리는 거야."
"어째서 끌 수 없지?"
"전부 진화하려면 한 사람당 한 개씩의 소화기가 있어야 해. 비록 그것을 갖춘다 해도 얼마나 도움이 될까? 저 악마와 같은 약품은 모든 걸 태울 수 있지."
"살려줄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빨리 죽여주는 게 낫겠군."
"그런 짓을 하면 살인죄로 교수형을 받을 뿐이야. 미친 듯이 달릴 때 쏠 때면 쏴 보라구."
그레버는 그 남자를 보았다. 철모를 쓴 남자는 대부분의 이가 빠져나가서 입 주위가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럼,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으란 말인가?"
"이론적으론 그렇지. 아니면 담요를 덮어서 불을 꺼야지. 하지만 누가 모포를 들고 다니겠나? 그리고 자기 몸에 불이 붙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딨어."
"그야 물론. 그런데 대체 당신은 뭐야? 방공단인가?"
"난 시체 운반대야. 물론 부상자도 운반하지. 아, 겨우 마차가 왔군."
버는 말 한 마리가 불길 사이로 수레를 끌고서 허둥대는 것을 보았다.
"구스타프, 잠깐만!"
사내가 외쳤다.
"더 이상 마차가 들어 올 수 없어. 여기서부터 날라야지. 들것을 갖고 왔나?"
"두개야."
그레버가 사내의 뒤를 따라가 보자, 벽돌더미 뒤에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도살장은 차라리 질서정연하다. 여기서는 인간의 육체가 갈가리 찢어진 채 불에 타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시체에 걸려 있는 헝겊조각들.
한쪽에는 어린애들의 시체가 난잡하게 널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튼튼하지 않은 방공호에 피신했다가 폭격에 맞은 것이다. 산산이 흩어진 손과 발, 멋대로 흐트러진 책가방. 아! 죽은 고양이 앞에는 새까맣게 그슬린 시체가 있었다. 시신은 남녀의 구별을 도저히 식별할 수 없었다. 성기는 물론이고 가슴까지 불에 타서 만지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금반지가 하나가 타 들어간 손가락에서 반짝 빛났다.
"눈."
한 사람이 괴성을 질렀다.
"눈동자가 타 버리다니!"
시체는 마차에 자꾸만 쌓여갔다.
"린다."
여자가 들것 뒤에 따라오면서 부르짖었다.
"린다! 린다!"
태양이 나오면서 비에 젖은 거리를 비추고 쓰러지지 않은 나무들은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비가 그친 뒤의 햇빛은 신선하고 더욱 강렬했다.
"이런 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누군가가 말했다. 그레버는 뒤돌아보았다. 적색 모자를 쓴 우아한 여인이 아이들의 시체를 지켜보고 있었다.
"절대로! 언제까지나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경비차가 왔다.
"자, 저리들 가! 여기 서 있으면 안돼. 빨리들 가라구!"
그레버는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도대체 무엇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이 전쟁이 끝나면 용서해야 할 것과 용서받지 못할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집은 무사했으나 앞집에 소이탄이 떨어져서 지붕에 불이 붙고 있었다. 문지기는 거리를 서성거렸다.
"어째서 불을 끄지 않지?"
그레버가 물었다. 문지기는 시내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가리켰다.
"어째서 저것은 끄지 않지?"
이번에는 문지기가 반문했다.
"물이 없나?"
"물은 약간 있어. 그러나 수압이 약해. 도저히 물줄기가 지붕까지 올라갈 수 없어."
거리에는 의자, 슈트케이스, 새장에 넣은 카나리아, 그림, 옷, 보따리 등이 너절하게 널려 있었다.
"아래층까지 불이 옮겨 붙을까?"
그레버가 물었다.
"소방대가 빨리 안 오면 그럴 수도 있지. 다행히 바람이 잠잠하군. 우리는 수도꼭지라는 수도꼭지는 모조리 틀어 놓고 불길을 막고 있지만 더 이상은 도리가 없어. 그건 그렇고 잎담배는 어떻게 되었지?"
"내일 꼭 갖다 줄게."
그는 엘리자베스의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방은 당장에 위험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의 침실 앞 창문으로 루젤 부인이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보였다. 루젤은 흰색 보퉁이를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나도 짐을 꾸려야지. 그래도 괜찮지?"
"물론이지."
문지기가 대답했다. 아파트의 문은 열려 있었다. 복도는 여러 가지 물건과 보따리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루젤이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옆을 지나갔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문이 꽉 닫힌 방안에서 바깥의 세계와 격리된 평화로움을 느꼈다. 그는 잠시 그대로 창가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침대 밑에서 슈트케이스 두 개를 찾아내고 무엇부터 꾸릴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우선 엘리자베스의 옷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옷장에서 당장 입을 옷 몇 가지를 꺼내고 내의와 양말을 챙겼다. 그 동안에도 밖에서는 사람이 부르짖는 소리와 갖가지의 소음이 들려왔다. 밖을 내다보았다. 소방대는 아직 당도하지 않았고 분주히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모피외투를 걸친 여자가 작은 상자를 안고 맞은쪽의 폐허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상자에는 소중히 간직한 보석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의 보석을 찾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금팔찌와 브로치가 나왔다.
두 채의 집이 서서히 타올랐다. 소방대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가옥들은 그다지 중요한 재산이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도 급한 군수품 공장이 불타고 게다가 시내 곳곳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사람들은 가구와 물건들을 될수록 많이 끄집어냈다. 그들은 그것을 어디로 옮겨야 할 것인가 막막했다. 짐을 운반한 방법도 없지만 옮겨놓을 만한 장소도 없었다. 집 앞의 거리는 밧줄로 차단되고 그 양쪽에는 여러 가지 생필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어떤 가족은 식탁과 의자를 내놓고 둘러앉았고 또 다른 가족은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서 그곳은 자기들의 영토라는 듯이 사람들의 통행을 막았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의 방에서 가죽으로 된 의자를 갖다 놓고 거기에 앉아서 슈트케이스와 다른 짐들을 지키고 있었다. 피해를 입지 않은 한 집에 짐을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창문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지만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른 곳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레버가 체념해 버리고 자리로 돌아오자 빵과 음식을 싼 꾸러미가 없어져 있었다. 그는 나중에서야 식탁에 둘러앉아 있던 가족들이 음식을 뻔뻔스럽게 먹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엘리자베스가 비상선을 돌파해서 불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도 뒤를 돌아다보았으나 그레버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문앞에 까만 물체가 서 있고 오직 머리카락만이 타오르듯이 붉게 빛났다.
"여기야!"
그는 다시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그에게로 달려왔다.
"여기 계셨군요! 고마워요!"
그는 그녀를 힘껏 안았다.
"당신을 데리러 갈 수 없었어. 당신의 물건을 지켜야 하니까."
"저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몹시 걱정했어요."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녀는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미처 그 생각을 못했군. 난 당신만을 걱정하고 있었어."
그녀는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여기는 어떻게 되었죠?"
"지붕에 불이 붙었어."
그녀는 아직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길 한쪽에 물통과 컵이 놓여 있었다. 그는 컵에 물을 따라서 엘리자베스에게 주었다.
"이것을 마셔!"
"이봐요! 그건 우리 물이에요!"
뒤에서 여자가 악을 썼다.
"컵도 우리 거야."
이번에는 사내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마셔."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 말하고 나서 뒤돌아섰다.
"공기는 어때? 그것도 당신들 것인가?"
"이대로 돌려주세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아니면 통 속의 물을 저 사람들의 머리에 쏟아버리든지."
그레버는 컵을 그녀의 입술에 댔다.
"아냐, 마셔. 당신 줄곧 달려왔지?"
"그래요."
그레버는 물통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에게 소리를 지른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가족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다시 물을 따라서 들이키고 컵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그들도 조용히 있었다. 이윽고 그레버가 뒤돌아서자 꼬마가 즉시 달려와서 컵을 식탁에 옮겨놓았다.
"치사한 것들!"
문지기가 식탁의 가족을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일어나서 길게 하품을 하다가 다시 누워 버렸다.
"여기 옷 보따리가 있어. 모두 당신 옷이야. 당신 아버지 사진도 이 속에 있어.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가구도 꺼낼까?"
"다 타도록 내버려두세요."
"아직도 여유가 있는데?"
"그대로 두세요. 그러면 모든 게 끝나버릴 테니까."
"무엇이 끝나지?"
"과거가. 과거는 어쩔 수도 없어요. 다만 무거운 짐이 되어 우리를 억누르죠. 우리들은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돼요. 과거는 이미 타버렸어요."
"가구는 팔 수도 있어."
"여기서?"
엘리자베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리에서 경매를 할 순 없어요. 보세요. 모두들 가구에 둘러싸여 있어요."
커다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루젤 부인은 우산을 펼쳤다. 꽃이 달린 모자를 꺼낸 여자가 그것을 쓰고 있다가 급히 벗어서 옷 속에 감췄다. 문지기가 잠에서 깨어나 재채기를 했다. 그레버는 그의 배낭에서 개인용 텐트를 꺼냈다. 그는 외투를 엘리자베스에게 벗어 주고 텐트를 침대 위에 세우기 시작했다.
"오늘밤 잘 곳을 마련해야 돼."
"비 때문에 불이 꺼질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디서 밤을 새울까요?"
"글쎄."
"여기서도 얼마든지 잘 수 있어요. 당신의 텐트와 외투를 이용해서."
"그럴까?"
"피곤해서 어디라도."
"빈딩그의 집에 빈 방이 있는데, 거긴 싫지?"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폴만 선생님께 가도 되고."
"잠깐 기다려 봐요. 우리 방은 아직 타지 않았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군용외투를 입고 빗속에 서 있었다.
"뭐든 마실 게 있었으면 좋겠어."
"있어. 짐을 꾸릴 때 책장 뒤에서 보드카를 발견했어. 그걸 잊고 있었군."
그레버는 침구를 풀었다. 그 속에는 술병뿐만 아니라 술잔도 숨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않도록 해. 조심하지 않으면 국민의 불행을 비웃고 있다고 루젤에게 밀고를 당할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잔을 들고 쭉 마셨다.
"멋지군요! 제겐 이것이 필요했어요. 담배도 있어요?"
"전부 가지고 나왔지."
"그럼 우린 필요한 건 전부 갖춘 셈이군요."
"가구를 더 꺼낼까?"
"경비원이 길을 막고 있어요. 그리고 갖고 와 봤자 별수도 없어요. 오늘밤을 어디서 지내든 그걸 가져갈 순 없으니까요."
"한 사람이 피난처를 찾고 한 사람은 짐을 지키면 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며 보드카를 마셨다. 아파트의 지붕이 무너지더니 곧 이어서 층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리에서 지켜보던 거주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격렬한 불꽃이 창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우리 방은 아직 괜찮군."
"오래 걸리지 않을 걸세."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한 남자가 대꾸했다.
그레버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우리보다 당신들이 운이 좋으란 법은 없어. 난 저기서 23년이나 살았어. 그게 지금 불타고 있는 거야."
중년의 남자는 대머리가 벗겨져 있었다.
"나는 이건 우연의 문제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의의 문제야. 그 뜻을 알 수 있다면!"
"잘 모르겠지만 탓이라고 할 순 없으실 겁니다."
그레버는 웃었다.
"아직도 그것을 믿고 있다면 당신은 힘든 인생을 살게 될 겁니다. 보드카를 한 잔 드릴까요? 화를 내기보다는 이게 괜찮습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이제 당신 방이 내려앉으면 그게 필요할 테니까."
윗벽이 무너져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것은 엘리자베스 방의 바닥을 뚫고 밑으로 떨어졌다. 루젤 부인은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식탁에 앉아있던 가족들은 알코올 스토브에다 커피 대용품을 끓이는 중이었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여인은 의자의 등을 신문지로 가리고 비를 막아 보려고 애를 썼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우리의 2주간의 보금자리가 타고 있군."
"정의다!" 대머리가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내기를 했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군요. 당신이 이긴 게 틀림없으니까."
"난 유물론자가 아냐."
"그럼 어째서 불평을 하셨죠?"
"저건 내 집이야. 자넨 내 기분을 몰라."
"모르는 게 당연하오. 독일 제국은 나를 젊었을 때부터 세계 유람자로 만들었으니까."
"그것을 감사히 생각해야 돼."
대머리는 입에 손을 대고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보드카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지?"
"이제는 안 되오. 그보다는 기도나 올리시오."
루젤의 방에서 불꽃이 튀어나왔다.
"책상이 타고 있어요."
엘리자베스가 속삭였다.
"스파이의 책상 속에 든 보고서와 함께!"
"난 거기에 석유를 한 병 뿌려놓았지. 그런데 우린 이제 어떻게 하지?"
"잘 곳을 찾아야죠. 찾지 못하면 거리에서 자기로 해요."
"거리나 공원에서."
그레버는 하늘을 보았다.
"텐트로 비는 막을 수 있지만 의자와 책은?"
"여기 그대로 두고 내일 결정하는 게 좋겠어요."
그레버는 배낭을 지고 침구를 어깨에 둘러멨다. 엘리자베스는 슈트케이스를 들었다.
"이리 줘. 난 짐을 나르는 것에 익숙하니까."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루젤이 비명을 지르면서 깡충 뛰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숯불이 밧줄로 차단한 거리를 넘어서 그녀의 얼굴에 명중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방에서 화염이 솟구쳤다.
"그만 가요."
엘리자베스가 재촉했다. 그레버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컵을 가지고 달아났던 꼬마가 이미 그들의 의자를 차지해 앉아 있었다.
"루젤이 깡충깡충 뛰는 동안에 핸드백을 슬쩍했지. 서류가 가득 들어 있어. 불 속에 던져 버려야지. 누군가가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아도 될 거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레버는 오랫동안 서서 문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을 열리지 않았다. 그는 뒤돌아섰다.
"폴만 선생님은 집에 안 계셔. 아니면 소리를 못 들으셨든지."
"다른 데로 옮기셨는지도 몰라요."
"다른 데 어디로? 혹시나."
그레버는 다시 문 앞에 섰다.
"아냐. 게슈타포는 오지도 않았어. 어떻게 할까? 방공호로 갈까?"
"싫어요. 이 근처에 있을 곳이 없을까요?"
주위는 이미 어두워졌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하늘에는 타버린 건물의 까만 잔해가 세로로 서 있었다.
"여기 지붕이 약간 나와 있군. 한쪽으로 텐트를 걸고 다른 쪽엔 외투를 걸치기로 하지."
그레버는 대검으로 지붕을 두들겨 보았지만 내려앉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폐허에서 쇠막대기 두 개를 찾아냈다. 그것을 지면에 꽂고 그 위에 천막을 걸쳤다.
"이것이 커튼이야. 다른 한쪽에 외투를 걸면 텐트가 될 거야. 괜찮겠지?"
"도와줄까요?"
"아니. 짐이나 지키고 있어."
그레버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파편과 돌멩이를 치웠다. 그런 다음에 슈트케이스를 들여놓고 침구를 풀었다. 배낭은 머리맡에 놓았다.
"이만하면 훌륭해. 난 지금까지 이보다 훨씬 못한 곳에서 살고 있었어. 물론 당신에겐 그런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지만."
"저도 이제 익숙해지고 있어요."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의 레인코트와 알코올 스토브를 꺼냈다.
"빵을 도둑맞았지만 배낭 속에는 통조림이 두 개나 있어."
"요리할 냄비는?"
"반합이 있어. 그리고 빗물이 있고, 또 보드카도 남았지. 뜨겁게 스튜를 만들까?"
"그보다 보드카를 마시겠어요."
그레버는 스토브에 불을 붙였다. 창백한 불빛이 텐트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는 콩 통조림을 땄다. 그들은 그것을 데워서 결혼증인인 크로츠에게서 받은 소시지와 함께 먹었다.
"폴만 선생님을 기다려 볼까, 잠을 잘까?"
"자는 게 좋겠어요."
"옷을 입은 채로 자야 해."
"피곤해서 금방 잠들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는 구두를 벗어서 밤사이에 도둑을 맞지 않도록 배낭 앞에 놓았다. 그레버는 그녀에게 모포를 덮어주었다.
"어때?"
"호텔 같은데요."
그는 엘리자베스의 옆에 드러누웠다.
"집이 없어져서 마음이 아프지?"
"아니. 난 처음 공습을 당한 후로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어요. 그 뒤부터는 모든 소유물은 남에게 빌린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그래. 그러나 항상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희망이 사라진다면 또 모르죠."
그녀의 호흡이 규칙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레버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일선에서 병사들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소망이라고 말하던 것 중의 하나 지붕과 침대와 여자, 그리고 조용한 밤 바로 이것이었던가.
21
그는 문득 잠을 깼다. 희미한 발자국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모포에서 기어나왔다. 엘리자베스는 몸을 뒤척이다가 다시 잠들었다. 그레버는 텐트 밖으로 나갔다. 폴만이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혹시 도둑이나 게슈타포가 왔을 수도 있다. 그들은 이런 때에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에 게슈타포라면 미리 폴만에게 귀띔을 해야 한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는 숨을 죽이고서 그들을 뒤따라갔다. 그러나 도중에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벽이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그는 몸을 움츠렸다. 그림자 하나가 뒤를 휙 돌아다보았다.
"누구야?"
폴만의 목소리였다. 그레버는 얼른 모습을 드러냈다.
"폴만 선생님, 접니다. 에른스튼 그레버입니다."
"그레버? 자네가 웬일이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단지 집에 불이 나서 갈 곳이 없었습니다. 하룻밤만이라도 방을 빌릴 수 없을까 해서."
"누구와?"
"저와 제 아내입니다. 전 며칠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좋아."
폴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빛났다.
"내가 오는 걸 보았나?"
"네."
그레버는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지나친 조심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엘리자베스를 위하는 것도 아니며, 지금 폐허의 어딘가에 숨어 있는 사람을 위하는 것도 아니다.
"선생님, 저를 믿으셔도 괜찮습니다."
폴만은 이마를 문질렀다.
"그래." 그는 좀처럼 단안을 내릴 수 없는지 그대로 서 있었다.
"자네는 내가 혼자가 아닌 걸 목격했지?"
"그렇습니다."
폴만은 마침내 결심을 한 것 같았다.
"좋아, 들어오게. 오늘밤만이라고 했지. 그리 넓지는 않아."
두 사람은 모퉁이를 돌아갔다.
"괜찮아."
폴만은 앞의 그림자를 향해서 말했다. 폐허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폴만은 자물쇠를 열고 그레버와 그 남자를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폴만은 다시 안으로부터 현관문을 잠궜다.
"자네 아내는 지금 어디 있지?"
"밖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간단하게 천막을 만들었습니다."
폴만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레버, 미리 말해두겠는데, 혹시 누군가에게 발각되면 위험할지도 몰라."
"알고 있습니다."
폴만은 기침을 했다.
"나 때문에 위험하다는 거야. 나는 지금 혐의를 받고 있어."
"잘 압니다."
"자네 아내도?"
"그렇습니다."
그레버는 잠깐 사이를 두고 나서 대답했다. 또 한 사람의 남자는 그레버의 등 뒤에 묵묵히 서 있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폴만은 커튼을 내리고 작은 램프에 불을 붙였다.
"이름은 모르는 게 좋아. 이름을 모르면 누설할 우려도 없으니까. 에른스트와 요셉으로 충분하지."
요셉은 마흔 살 정도의 남자로서 유대인처럼 보였다. 그는 침착한 태도로 그레버에게 미소로 인사를 한 다음에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여기도 안심할 만한 곳이 못 돼."
폴만이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요셉은 오늘밤 여기서 지내야 해. 어제까지 거처하던 아파트가 없어졌기 때문이야. 내일은 다른 은신처를 찾아 보아야지. 여기도 위험해. 요셉, 이유는 그것뿐이야."
"알고 있습니다."
요셉이 대답했다. 뜻밖에도 목소리가 굵직했다.
"에른스튼, 자네는 내가 모종의 혐의를 받고 있는 걸 잘 알 것이다. 이런 시각에 내 집에 있다가 게슈타포에게 발각되면 어떻게 된다는 것쯤 잘 알고 있겠지?"
"네."
"오늘밤은 무사할 거야. 시내가 혼란하니까. 그러나 안심할 순 없지. 그래도 괜찮은가?"
그레버는 묵묵히 폴만과 요셉을 번갈아 보았다.
"저는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차피 2, 3일 후 일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아내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아내는 계속 여기서 살아야 합니다. 미처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나는 자네를 쫓아내려고 그러는 게 아냐."
"잘 알고 있습니다."
"밖에서 밤을 샐 수 있겠소?"
요셉이 물었다.
"가능합니다. 비를 맞지 않도록 텐트를 쳤습니다."
"그럼 거기 있도록 하시오. 당신과 우리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셈이 되지. 내일 아침 일찍 짐을 이리로 옮기시오. 당신이 가장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오? 짐은 카타리네 교회에 맡길 수 있소. 그 교회의 집사가 허락할 거요. 그는 참으로 훌륭한 인물이오. 낮엔 자유롭게 거처를 구하러 다닐 수 있소."
"그게 좋겠군, 에른스트. 요셉은 이런 일에 대해선 나보다 밝아."
옛날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이 노인에게 그레버는 무한한 애정이 솟구쳤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무엇이건 용건이 있으면 아침 일찍 오게. 처음에는 천천히 두 번, 그리고 재빨리 두 번 두들기도록. 조용하게 말이야."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레버는 텐트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아침 6시에 잠을 깼다. 짐마차가 크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전 아주 푹 잤어요.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얀푸라츠야."
"그렇군요. 오늘밤은 또 어디서 자죠?"
"그건 낮에 생각하기로 하지."
그녀는 다시 누웠다. 텐트와 외투 사이로 실오라기 같은 햇살이 들어오고 새들의 지저귐이 주위에 가득했다. 그녀는 외투를 걷어 올렸다.
"마치 집시같군요."
그녀가 말했다.
"안 그래요? 이런 생활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어젯밤 폴만 선생님을 만나보았어. 필요한 게 있으면 선생님을 깨우면 돼."
"필요한 건 없어요. 참, 커피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여기서 요리를 만들어도 괜찮겠죠?"
"그것도 금지돼 있겠지.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우린 집시니까."
엘리자베스는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집 뒤의 항아리 속에 깨끗한 빗물이 고여 있어. 세수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주위를 돌아보고 싶어요. 마치 시골에 온 것 같군요. 옛날 같으면 로맨틱하겠죠?"
그레버는 웃었다.
"지금도 그래 소련의 진창에 비한다면 말야. 결국은 비교하기 나름이지."
그는 침구를 똘똘 말았다. 재빨리 스토브에 불을 붙이고 물을 끓였다. 갑자기 엘리자베스의 방에서 그녀의 배급표를 두고 나온 게 생각났다. 세수를 하고 돌아온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
"당신 배급표를 갖고 있나?"
"아니. 책상서랍에 두었었죠."
"야단났군! 왜 그걸 빠뜨렸을까? 시간은 충분했는데."
"당신은 더 중대한 걸 생각했겠죠. 배급표는 새로 신청하면 되잖아요. 배급표를 불에 태운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죠."
"그러나 오래 걸릴 거야. 독일 관리들은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저울을 손에서 놓을 수 없어."
엘리자베스는 소리를 내고 웃었다.
"공장에서 조퇴를 하고 배급표를 받으러 가겠어요. 집이 타버렸단 보증은 문지기가 해주겠죠."
"당신 출근할 생각인가?"
"가야 해요. 집이 탄 건 사유가 될 수 없어요."
"그런 공장은 불이나 나버렸으면 좋겠어."
"그래요. 그래도 결국은 다른 공장에 배치되겠죠. 더 지독한 데로 갈지도 몰라요. 무기를 만드는 공장은 싫어요."
"그냥 빠지는 게 어때? 어제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니까. 크게 다쳤다고 하면."
"그것 역시 증명이 필요해요. 공장에도 의사와 경찰이 있어요. 만약에 거짓이 탄로 나면 처벌을 받아요. 시간 외의 노동이나 휴일을 취소하거나 심하면 강제수용소로 보내서 애국주의 교육을 시키죠."
엘리자베스는 반합 뚜껑에 뜨거운 물을 붓고 커피를 탔다.
"제가 이틀 동안의 휴가를 즐긴 사실을 잊지 마세요. 한꺼번에 무리한 부탁을 할 순 없어요."
그녀는 아버지를 위해서는 그럴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아버지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으면서 그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악당 놈들! 사람을 아주 달달 볶는군!"
"자, 커피. 절대로 화내지 말기! 우린 그럴 틈이 없어요."
"그러니까 화가 나는 거야, 엘리자베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알고 있어요. 우리는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요. 당신의 귀대 날짜는 다가오고. 당신이 있는 동안만이라도 일을 쉬었으면 좋겠지만."
"당신의 용기는 대단해."
그녀는 그에게 키스를 하고 살며시 웃었다.
"이제 출근을 해야지. 오늘밤에는 어디서 만날까요?"
"글쎄? 지금은 마땅한 장소도 없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지. 내가 공장으로 갈게."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공습이나 교통마비 같은.'
그레버는 잠시 생각했다.
"난 짐을 꾸려서 카타리네 교회로 가겠어. 그곳에서 만나도록 하지."
"밤에도 문이 열려 있나요?"
"밤에 올 생각인가?"
"그야 알 수 있나요. 언젠가는 여섯 시간이나 방공호 속에 갇혀 있었어요. 최악의 경우, 말이라도 전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안심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 중의 한쪽이 사고가 생길 수도 있단 말야?"
"그래요."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의 행방불명이 되고 있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폴만 선생님께 부탁할까? 아니야, 거긴 불안해."
"빈딩그다!" 그레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거기라면 안전해. 그 녀석 집을 알지? 그 녀석은 우리가 결혼한 걸 모르고 있지만 상관없어. 내가 미리 말해두지."
"또 식량을 징발하러 가나요?"
그레버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 생각을 미처 못 했는데? 정말이지, 우린 먹을 것이 필요해. 그러니 한 번 더 타락해야지."
"우린 오늘밤도 여기서 자나요?"
"그건 곤란해. 난 낮에 다른 장소를 찾아볼 생각이야."
"그럼, 전 출근을 하겠어요."
"선생님께 맡겨놓고 공장까지 나도 함께 가겠어."
"그럴 틈이 없어요. 늦어서 뛰어가야만 해요. 그럼 저녁까지 안녕!"
그는 그녀를 배웅했다. 폐허만 남은 자리에 아침 이슬이 수정처럼 반짝 빛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다가 늦었다는 시늉을 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뛰어갔다. 그레버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다보고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광장의 끝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레버는 전선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전선에서는 일단 작별하고 나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절대로 알 수 없다. 이런 긴장을 행복한 신혼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덟 시에 폴만이 집에서 나왔다.
"자네 먹을 거라도 있는가? 빵은 조금 있는데."
"고맙습니다. 우린 배불리 먹었습니다. 카타리네 교회에 다녀올 동안 짐을 맡아주시겠습니까?"
"좋아."
그레버는 짐을 옮겼다. 요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네가 돌아왔을 때, 내가 없을지도 몰라. 천천히 두 번, 그리고 재빨리 두 번 노크를 해. 요셉이 열어줄 테니까."
"집시의 생활과 마찬가지입니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폴만은 지쳤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었다.
"요셉은 그런 생활을 3 년간이나 계속하고 있어. 처음 몇 개월 동안은 전차 속에서 밤을 새웠지. 밤새껏 빙빙 도는 거야. 그것도 공습이 있기 전 얘기지,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어."
그레버는 배낭에서 쇠고기 통조림을 한 개 꺼내서 폴만에게 주었다.
"남은 겁니다. 요셉에게 주십시오."
"고기인가? 자네도 필요할 텐데?"
"괜찮습니다. 그에게 주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노인은 잠자코 있다가 구석에 놓여 있던 지구의를 빙그르르 돌렸다.
"여기를 보게. 이게 독일이야. 엄지손가락으로 가려버릴 수도 있어. 지구의 미세한 일부분이지."
"그야 그렇죠. 그렇지만 그 일부분이 세계의 큰 부분을 정복했습니다."
"비록 정복은 했지만 신망은 얻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정복한 부분을 그대로 차지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10년 내지 20년, 아니면 50년. 승리는 유력한 설득자도 등장시킬 겁니다."
"우리는 승리하지 못했어."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될 수 있다."
폴만은 지구의를 계속 돌리고 있었다.
"세계는 정지하고 있지는 않아. 일시적으로 자기의 조국에게 절망했다고 세계를 믿지 않으면 안된다. 일식이라는 게 있긴 하지만 밤이 영구히 지속될 수 없지. 적어도 이 지구상에서는 절대로."
폴만은 다시 지구의를 반대로 돌렸다.
"자네는 다시 시작할 만한 일이 남았느냐고 물었다. 교회는 소수의 어부들과 카타콤 안의 몇몇 충실한 사람들, 로마의 투기장에서 살아 남은 소수인들로 시작됐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치는 뮌헨에서 맥주를 마시던 소수의 광신자로부터 시작됐습니다."
폴만은 싱긋 웃었다.
"그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전제정치가 오래 계속되는 법은 없어. 인류는 편안한 대로를 걸어서 진보해오진 않았어. 항상 밀거나 찌르고 전진이나 후퇴, 경련을 일으키면서 한 발자국씩 내디딘 거야. 우리들 인간은 너무 교만했어. 우리는 피투성이의 과거를 정복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난 나가 봐야 해."
그는 모자를 들었다.
"이건 선생님께서 주신 스위스의 그림책입니다. 비에 젖었습니다. 전 꿈과 희망을 잃었었지만 이 책을 보고 되찾았습니다."
"잃어버린 꿈을 다시 찾을 필요는 없어."
"있습니다. 그밖에 또 무엇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신념이다. 꿈은 언제라도 새롭게 창조할 수 있어."
"그렇군요.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목을 매어 죽는 편이 더 현명할 것입니다."
"자네는 아직 젊어." 폴만은 외투를 입었다.
"이상하다 나는 청춘이라는 걸 전혀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봤어."
"저도 그랬습니다."
요셉의 말이 옳았다. 카타리네 교회의 집사는 짐을 맡아주었다. 그레버는 배낭을 그곳에 맡기고 주택과를 찾아갔다. 주택과는 학교의 표본실로 옮겨져 있었다. 표본실에는 지도와 진열품을 나열한 유리상자가 아직도 보존되어 있었다. 유리상자를 통해서 알코올병에 담긴 파충류들이 보였다. 직원은 매우 친절한 백발의 부인이었다.
"당신의 이름을 임시수용소의 명단에 기입해 두겠어요. 주소가 있나요?"
"없습니다."
"그러면 가끔씩 문의해 보세요."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어려워요. 당신보다 먼저 신청한 사람이 6000 명은 돼요. 직접 찾아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얀푸라츠로 돌아와 폴만의 방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남아있는 엘리자베스의 물건을 확인하기 위해서 마리가로 갔다.
엘리자베스의 아파트는 문지기가 살던 층까지 불에 타 있었다. 방금 소방대가 다녀갔는지 여기저기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엘리자베스의 소지품은 물론이고 밖으로 들어냈던 안락의자도 남아있지 않았다.
문지기가 자기 아파트의 커튼 뒤에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레버는 문지기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옛날의 일이었으며 이제 새삼스럽게 지킬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알폰스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양식이 필요했다.
단지 그 집만이 폐허가 되어 있었다. 황수선화가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으며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렸다. 그렇게 거리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빈딩그의 집만이 까맣게 타 정원에 생긴 폭탄구멍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었다. 구멍 속에는 더러운 물이 잔뜩 고여서 그 속으로 파란 하늘이 들여다보였다. 그레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꼼짝않고 서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알폰스에게만은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천히 건물에 접근했다. 그 화려했던 수영장은 형태가 완전히 무너지고 사슴의 뿔이 풀밭 위에 서 있었으며 고급 융단이 야만족 정복자의 깃발처럼 나뭇가지에 걸려 펄럭였다. 나폴레옹 브랜디 병이 화단에서 뒹굴었다. 그레버는 술병을 잘 살펴보고 나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뒤로 돌아갔다. 부엌의 입구는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문을 열자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크라이네르트 부인입니까?"
그는 큰소리로 물었다. 잠시 후, 대답 대신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더니 가정부가 밖으로 나왔다.
"불쌍하신 주인어른! 그렇게도 친절하셨는데!"
"왜 그러오? 그 사람이 부상이라도?"
"죽었어요. 그분은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좋은 분이었는데!"
"죽었어?"
"주인께서는 지하실에 피신해 계셨는데 그 지하실까지 파괴되었습니다."
"이 집 지하실은 대형폭탄엔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데 왜 사이델푸라츠의 방공호로 가지 않았죠? 여기서 얼마 걸리지도 않는데."
"주인께선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저."
크라이네르트 부인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여자 손님이 계셨어요."
"뭐요? 대낮에?"
"그날 밤부터 여기 머물고 있었죠. 블론드 머리의 몸집이 큰 부인이었지요. 대장님은 그 부인을 좋아하셨답니다. 제가 치킨 요리를 갖다 드리고 나서 공습이 시작됐어요."
"그럼, 그 부인도 죽었소?"
"네. 대장님은 파자마를 입은 채로, 부인은 얇은 잠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런 모습으로 발견되었지요. 저로선 어떻게 할 수도 없었죠. 대장님의 시체가 그런 식으로 발견되다니."
"그런 것은 상관없소. 그보다 더 훌륭하게 죽을 수 있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너무 갑자기 당한 일이라."
"그것은 90이 되어도 마찬가지요. 장례식은 언제요?"
"모레 9시입니다. 벌써 입관을 했지요. 보시겠어요?"
"어디 있소?"
"지하실 창고에 있습니다. 집의 뒤쪽으로는 정면에 비해 피해가 거의 없는 편이지요."
그들은 부엌을 지나서 지하실로 갔다. 지하실은 깨어진 유리조각들이 한쪽 구석에 모아져 있고 바닥에 쏟아진 포도주와 통조림 냄새로 가득했다. 지하실 한가운데에 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어떻게 관을 금방 구했소?"
"당에서 마련해 주셨습니다."
"장례식은 여기서 하오?"
"그렇습니다."
"나도 참석하겠소."
"돌아가신 대장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그레버는 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전에 대장님은 항상 당신을 좋아하고 반기셨지요."
"그렇소.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대장님을 시기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또 당신은 일선 군인이시고."
그레버는 잠깐 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조금 후회가 되었지만 아무런 느낌도 안 드는 자신이 울고 있는 여자 앞에서 부끄럽다는 생각을 잠깐 했을 뿐이다.
"이것을 모두 어떻게 할 생각이오?" 그는 저장품을 보았다.
"필요한 대로 얼마든지 가져가세요. 어차피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차지할 텐데요."
"부인이 보관하는 게 좋겠소."
"제 몫은 따로 두었어요. 그레버씨, 필요한 건 전부 고르십시오. 여기 오셨던 당원들도 깜짝 놀라고 있어요. 저장품이 많으면 절대로 좋지가 않아요. 꼭 혼자서 은닉한 것 같으니까."
"아마 그렇겠지."
"그러니까 많이 갖고 가세요."
"가족은?"
"아버지가 계십니다. 대장님께서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잘 알고 계시죠? 하여튼 물건은 다른 창고에도 많이 있어요. 무엇이든지 잔뜩 골라 보세요."
"필요한 건 무척 많소. 그런데 어떻게 운반을 하겠소?"
"몇 번이라도 다시 오세요. 어차피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갈 바에야 그레버씨, 당신은 군인입니다. 안락의자에 앉아 세월을 보내는 나치 당원들보다 더 많이 가질 권리가 있어요."
어쩌면 그럴는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도, 요셉도, 폴만도 분명히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사양한다면 바보밖에 안 된다. 얼마 후, 그 집에서 벗어났을 때 그는 비로소 자기가 알폰스와 함께 죽지 않은 것은 정말 우연의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요셉이 문을 열었다.
"빠르군요."
그레버가 말했다.
"자네가 오는 걸 보고 있었지."
요셉은 문에 뚫린 작은 구멍을 가리켰다.
"내가 아까 뚫어 놓았지. 다소 도움이 돼."
그레버는 테이블 위에 꾸러미를 놓았다.
"저는 교회에 갔었는데 집사가 오늘밤은 거기서 묵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젊은 사람이었나?"
"나이가 많던데요."
"그분은 나를 교회의 직원으로 꾸며서 일주일 동안이나 숨겨 주었어. 갑자기 검색이 있었는데 오르간 속에 숨었었지. 젊은 녀석이 밀고를 했기 때문이야. 그 녀석은 종교적 반유대주의자였어. 그런 것도 있지. 우리가 2000 년 전 옛날에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거야."
그레버는 꾸러미를 풀었다. 주머니에서는 정어리와 고기 통조림이 나왔다. 요셉은 그것을 보고 있었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상당한데!"
"나눕시다."
"나눌 정도로 여유가 있나?"
"보시다시피 유산을 상속 받았습니다. 돌격대장에게 말입니다. 마음에 걸립니까?"
"천만에. 오히려 입맛이 더 나는군. 자넨 이런 선물을 받을 만큼 돌격대의 간부들을 잘 아나?"
"어쨌든 대장만은 친했지요. 그다지 악의는 없는 사람이었죠."
요셉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인간은 동시에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으십니까?"
그레버가 물었다.
"자네는 그것을 믿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약해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경우엔."
"그렇게 해서 돌격대의 대장이 될 수 있을까?"
요셉은 웃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 살인자는 언제나 살인자지.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상식인데. 그런데 실제로는 그것도 존재의 일부분일 뿐, 살인자가 되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끔찍한 불행을 야기시키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단 말야.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하이에나는 언제나 하이에나지요. 하지만 인간은 더 다양한 존재인 것입니다."
요셉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 수용소의 대장 중에는 제법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 있어. 또 매우 친절한 친위대원도 있지. 또한 선한 면만을 보고 끔찍한 일에 눈을 가리면서 시대의 일시적인 소산으로 자신을 기만하는 사람도 있어. 그들은 탄력성 있는 양심을 갖고 있지."
"그리고 두려워하는 인간도."
요셉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버는 침묵을 지키다가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난 혼자야. 잡히지 않으면 살아남는 거지."
요셉은 마치 남의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족은?"
"있었지. 동생이 하나, 누이들이 둘, 또 아버지와 처자식이. 모두 죽어버렸지. 둘은 맞아죽고, 하나는 병으로 죽고, 나머지는 독가스로."
그레버는 그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강제수용소에서?"
"그렇지." 요셉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거기는 설비가 아주 편리하게 되어 있어."
"그래서 당신은 탈출한 겁니까?"
"탈출했지."
"당신은 우리를 얼마나 증오할까요?"
요셉은 어깨를 으쓱했다.
"증오한다! 그건 일종의 사치야. 증오한다면, 그야말로 경계심을 잃게 되니까."
그레버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에는 잿더미가 높게 쌓여 있었다.
"자네는 다시 일선으로 돌아가나?"
요셉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당신을 쫓는 악당들이 좀더 권력을 연장할 수 있도록 싸우기 위해 돌아갑니다. 당신을 체포해서 교수형에 처할 수 있게 말입니다."
요셉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않으면 총살될 것 같아서 가는 겁니다."
요셉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에 탈주를 한다면 놈들은 내 부모님과 아내를 강제수용소로 보낸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가야만 합니다."
요셉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저는 갑니다. 제 말이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백만 명의 인간에게 얽매인 이유입니다. 당신은 저를 경멸할 겁니다."
"그렇게 자책하는 게 아냐."
요셉은 타이르는 것처럼 말했다.
그레버는 그를 응시했다. 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도 자네를 경멸하지 않아. 단지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다면 난 폴만 선생님을 경멸해야 하나?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도와주는 사람을 경멸할까? 그들이 없었다면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자네는 아직도 순진해."
요셉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것은 마치 유령의 미소처럼 그의 얼굴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은 너무 떠들어 대면 못 써. 그리고 반성해서도 안돼. 지금은 더욱. 마음이 약해지니까. 그러기엔 아직 일러. 자기 자신을 위험에서 지킬 방법만을 생각해야 돼."
그는 통조림을 책 뒤에 감추어 놓았다.
"이건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될걸세. 고맙네."
그의 그런 행동이 몹시 서툴러서 자세히 살펴보니 손가락의 관절 부분이 하나도 보이지를 않고 손톱은 모두 빠져 있었다. 요셉은 그레버의 시선을 느꼈다.
"강제수용소에서의 기념이지. 거기 소대장의 휴일놀이의 희생이 되었지. 그 소대장은 크리스마스에 양초 대신 이 손가락에 불을 붙였어. 차라리 발가락을 사용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남의 눈에 쉽게 발각될 우려는 없지. 항상 장갑을 끼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헌 군복과 급료부를 드린다면 도움이 되겠지요? 불에 타버렸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고마워.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어. 난 루마니아인으로 변장할 생각이니까. 폴만 선생이 그런 묘안을 생각했지. 난 '철의 전선'의 일원으로 당원 행세를 하는 거야. 내 얼굴은 제법 루마니아인과 비슷해. 상처도 공산당 놈들에게 당했다고 하지. 자네는 침구와 가방을 다 가지고 가겠는가?"
그레버는 자기가 방에서 나가기를 요셉이 바라고 있음을 알았다.
"당신은 여기에 계시겠죠?"
그레버는 자기 몫으로 남겨놓았던 통조림을 모두 그에게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많이 갖고 다닐 수도 없어. 난 곧 이곳을 떠나야 해."
"담배. 담배를 잊고 있었다. 거기에는 담배가 많습니다. 갖고 올까요?"
요셉의 표정이 변했다. 그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풀리며 입 언저리에 잔주름을 만들었다.
"담배?"
마치 친구의 소식이라도 듣는 것처럼 반갑게 말했다.
"그거라면 얘기가 다르지. 담배는 양식보다도 중요해. 물론 기다려야지."
22
카타리네 교회의 회당에는 이미 많은 군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슈트케이스나 보따리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그레버는 침구와 가방을 들고 사람들 틈에 섞여 있었다. 말상을 한 노파가 그의 옆에 앉았다.
"피난민이라고 쫓아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러 가지 소문을 들었어. 먹을 것이 별로 없다느니, 농부들이 아주 인색하다는 얘기를."
"저는 그래도 상관없어요."
깡마른 아가씨가 대꾸했다.
"전 여기서 빠져 나갈 수만 있다면 좋겠어요. 무슨 일을 당할 진 모르지만 죽음보단 낫겠죠. 우리들은 소유물을 모두 잃었으니까, 도움을 받는 게 당연해요."
"며칠 전에 라인란트에서 피난민을 태운 열차가 이곳을 통과했는데 정말 처참했지요. 피난민들은 멕크렌부르그로 보내졌어요."
"그곳은 부농들이 많이 사는 곳인데."
"부농!"
노파는 성난 듯이 소리를 내고 웃었다.
"농부들과 함께 살려면 뼈빠지게 일해야 돼. 그래도 배불리 먹을 수 없지. 이런 사실은 총통님께 알려야 해!"
그레버는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등 뒤로 교회에 딸린 정원의 녹음이 눈부시게 빛났다.
"우린 무료로 숙소를 제공받아야 해요. 우린 전쟁의 희생자니까요. 전쟁의 희생자!"
아가씨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붉은 코의 집사는 어깨가 축 늘어지고 바짝 마른 남자였다. 그에게 게슈타포의 수배를 받는 사람을 숨겨 줄 수 있는 용기가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집사는 사람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번호표를 나누어주고 나서 같은 번호가 적힌 번호표를 일일이 짐에 붙였다.
"오늘밤, 너무 늦지 마십시오."
그는 그레버에게 말했다.
"교회는 그다지 여유가 없습니다."
카다리네 교회는 대단히 큰 건물이었다.
"여유가 없다고요?"
"그렇습니다. 건물은 크지만 숙소로 사용하는 건 아랫방과 복도뿐입니다."
"늦게 온 사람들은 어디서 잡니까?"
"회당에서도 자고 마당에서도 잡니다."
"교회의 방들은 모두 방공시설을 갖추고 있습니까?"
집사는 부드러운 눈길로 그레버를 보았다.
"교회를 처음 세울 때는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암흑의 중세시대였으니까요."
그레버는 정원을 지나서 밖으로 나왔다. 교회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교회의 꼭대기에 높게 세워져 있던 탑이 쓰러지고 유리창도 대부분이 부서졌다. 참새들이 그 창가에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완전히 무너져버린 신학교 바로 옆에 방공호가 있었다.
그레버는 안으로 들어갔다. 방공호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던 옛날의 술창고를 보강한 곳이었으므로 술통을 놓던 받침대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공기가 축축하고 싸늘했다. 방공실 안 깊숙한 곳에 무거운 쇠고리와 사슬들이 사각으로 새겨진 천장의 돌에 걸려있는 게 보였다. 지하실은 술창고가 되기 전까지는 이단자나 마녀의 고문실로 사용되었던 사실을 그레버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손은 쇠사슬로 묶여 천장에 매달려서 자백할 때까지 새빨갛게 달군 부젓가락으로 고문을 당했다. 고문에 견디지 못하고 자백을 하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적인 사랑의 이름으로 처형을 당했던 것이다. 모는 것이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다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강제수용소의 고문자들은 훌륭하신 선배들로부터 그대로 전수를 한 셈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똑같은 제자를 대대로 갖게 될 것이다.
그레버는 아드러가를 거닐고 있었다. 저녁 6시였다. 그는 하루 종일 방을 찾아 헤맸지만 허사였다. 지칠 대로 지쳐서 오늘은 단념하기로 결심했다. 이 지역은 그야말로 잿더미만 남아 있었다. 그는 무작정 걷고 있다가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폐허 한복판에 작은 2층집이 서 있었던 것이다. 약간 기울어졌지만 아직도 모든 게 그대로인 채로. 그는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기뻤다.
어느 쪽으로 가든지 조금만 걸어가도 딴 세계에 온 것처럼 폐허만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아담한 정원 속에 서 있는 이 집은 기적적으로 구원된 것이다. 정면의 문에는 '위테 여관 겸 레스토랑'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는 열려져 있는 정원의 문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는 유리창 한 장 깨지지 않은 것을 보고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문 옆에는 하얀 반점이 있는 갈색 사냥개 한 마리가 잠들어 있고 화단에는 꽃들이 활짝 핀 모습으로 반기고 있었다.
홀은 텅 비어 있었다. 선반에는 잔 서너 개가 놓여 있을 뿐, 술병은 보이지 않았다. 벽쪽으로 붙은 세 개의 테이블이 있고 그 주위에 의자들을 놓았으며 가운데 테이블 위에는 티롤 지방의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히틀러의 초상화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중년의 부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색이 바랜 푸른색 브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하이 히틀러' 대신에 '구텐 아벤트'라고 인사를 했다. 그레버는 그녀의 인사를 받으면서 실제로 그런 기분을 느꼈다. 저녁에는 누구나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는 다만 마실 것을 얻을 생각이었다. 목이 타는 것처럼 갈증이 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밤 엘리자베스와 함께 이곳에서 지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여기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습니까?"
부인은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배급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급히 말했다.
"여기서 식사를 할 수 있다면 근사한 추억이 될 겁니다. 뜰에서라면 더욱. 나는 곧 일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와 아내의, 2인용 배급표를 갖고 있습니다. 만약에 좋으시다면 통조림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집에는 콩 요리밖에 없습니다."
"좋습니다. 오랫동안 먹어보지 못했지요. 여덟 시쯤 와도 되겠습니까?"
"언제라도 오세요. 준비해 놓을 테니까."
그레버의 옛 집터에 있던 표찰 밑에 편지가 꽂혀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온 편지로 전선으로부터 반송된 것이었다. 그는 겉봉을 뜯었다. 편지의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일 시를 떠난다.'
편지에는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다.
'너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조심하기 위한 안전조치에 지나지 않는다. 날짜를 보았다. 그가 귀국하기 일주일 전에 부친 것이었다. 편지에는 공습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항상 검열을 경계하고 신중을 기하셨다. 편지를 부친 그 다음날 폭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훨씬 전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모님께서 지방으로 옮기실 리가 없다.
그는 편지를 읽고 나서 천천히 주머니에 넣었다. 양친은 살아 계시다 이번에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하겐가도 역시 폐허가 된 다른 거리와 똑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18번지를 에워싸고 있던 공포와 고뇌는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고요와 깨어진 벽돌더미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아무런 기쁨도 느낄 수 없었다. 항상 지고 다니던 무거운 짐이 벗겨졌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두 분은 살아 계시다. 이것으로 무엇인가가 끝났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마지막 공습이 있던 날, 이 거리에도 폭탄이 떨어졌다. 입구의 정면만이 위태롭게 남아있던 그 집도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언제나 '사람 찾기' 구실을 해주었던 문짝이 벽돌더미 속에 박혀 있었다. 그레버는 머리가 돌아버린 공습 경비원이 궁금했다. 마침 그 당사자가 거리를 가로질러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군인 아저씨, 아직도 여기 있었나?"
"그렇소. 당신도 여기 있었군."
"자네에게 온 편지를 보았나?"
"보았소."
"어제 오후에 왔어. 이제 자네 편지를 떼어버려도 되겠지? 다섯 사람이나 그 자리를 기다리고 있어."
"아직은 곤란하오. 2, 3일만 참아 주시오."
"지금이 중요해."
공습 경비원은 선생님이 학생을 꾸짖기라도 하는 듯이 날카롭고 준엄하게 말했다.
"자네는 내가 많이 봐줬어."
"당신은 신문의 편집인이라도 되오?"
"공습 경비원은 질서유지를 위해서 여러 가지를 한다. 요전에 공습이 있고 난 후, 세 아이를 잃어버린 미망인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발표할 장소가 없다."
"그럼 내 자리를 사용하시오. 내 우편물은 옛집으로 오니까."
경비원은 그레버의 종이쪽지를 뜯어서 그에게 주었다. 그레버가 그것을 찢어버리려고 하자 경비원이 급히 막았다.
"군인 아저씨, 돌았는가? 그런 건 찢는 게 아냐. 그건 자기의 행운을 찢는 거나 마찬가지야. 한번 구원을 받으면 언제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지. 그 쪽지를 지니고 있는 한은."
"그 말이 맞는 것 같군."
그레버는 쪽지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나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소. 당신은 어디서 살고 있소?"
"나는 떠나야만 했지. 으슥한 창고를 하나 발견했어. 지금은 거기서 쥐들과 함께 재미나게 살지."
그레버는 고개를 들었다.
"나는 협회를 하나 만들 생각이야. 가족이 폐허 속에 묻힌 사람들을 위해서다. 우리는 협력해야 돼. 안 그러면 시에서 아무 대책도 세워주지 않아. 적어도 사람이 묻혀있는 장소라면 어디든지 목사가 기도를 올려야 해. 신성한 장소가 되도록. 어때? 내 말을 알아듣겠나?"
"알겠소."
"그런 짓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 물론 자네는 아니지만. 자네는 따분한 편지를 받았어!"
그의 초췌한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고뇌와 격조의 표정이 나타났다. 경비원은 다급히 돌아서더니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레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는 부모님이 살아계신 것을 엘리자베스에게는 당분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엘리자베스는 혼자서 공장 앞 광장을 가로질러서 그레버에게로 걸어왔다. 그녀의 키가 훨씬 작게 보였다.
"전 휴가를 얻었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얼마나?"
"사흘. 마지막 사흘이죠."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사정 얘기를 했더니 휴가를 허락했어요. 나중에 작업시간을 충당해야하지만, 그런 건 조금도 상관없어요. 일거리가 많을수록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죠."
그레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는 헤어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서로 마주보았다.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적이 없는 광장에 서서 언제까지나 그렇게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진실한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레버는 공장에서, 방공호가 아니면 방안에서 고독하게 기다리고 있을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믿을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다시 위험 속으로 떠나야 하는 그레버를 보고 있었다. 절망감이 그들을 엄습했다. 그와 동시에 무한한 애정이 두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마법에 취해서 그 자리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없이 무력했으며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럼, 우린 앞으로 사흘 동안 함께 있게 되었군."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그래요. 내일 밤부터."
"고마운 일이군. 우리에겐 2주일이나 마찬가지야. 전처럼 날짜를 계산한다면 말야."
"그래요."
"우린 어디로 가죠? 그리고 어디서 자죠."
"교회의 회당에서. 날씨가 따뜻하면 뜰에서 자도 돼. 이제부터 우린 콩으로 근사한 저녁식사를 하는 거야."
폐허 한가운데에 꿋꿋이 서 있는 위테 레스토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레버는 그 건물이 무사하게 서 있는 게 순간적으로 이상하게 생각되어서 마치 신기루처럼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들은 정원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섰다.
"어때?"
"전쟁이 들어올 수 없는 평화의 집 같군요."
"오늘밤부터는 계속 그럴 거야."
꽃밭에서는 그윽한 꽃향기가 풍겨오고 있었다. 주인이 화단에 물을 뿌린 것이다. 사냥개가 꼬리를 흔들면서 돌아다녔다. 위테 부인이 다가왔다. 부인은 깨끗하게 세탁된 흰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뜰이 좋으시겠어요?"
"네, 뜰에서. 그리고 전 세수를 하고 싶은데"
"이리로 오세요."
부인은 엘리자베스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2층으로 안내했다. 그레버는 부엌을 지나서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에는 적색과 흰색의 테이블 덮개를 덮은 탁자와 의자 두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위에 접시와 컵들이 놓이고 물주전자도 있었다. 그는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서 마셨다. 물은 차고 포도주보다 달콤했다. 정원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넓고 아늑했다. 엘리자베스가 왔다.
"이런 곳을 어떻게 알았죠?"
"우연이지."
"참으로 아름답군요. 그런데 이상해요. 전 이곳이 전혀 낯설지가 않아요."
"나도 이곳을 처음 보았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었어."
"모든 게 옛날처럼 보존되어 있는 것 같아요. 당신과 나, 이 정원이 그렇지만 무엇인가, 눈에 띄지 않는 어떤 게 빠진 것만 같아요. 그것만 있으면 모든 건 옛날 그대로의 모습일 것 같아요."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부인이 콩 수프를 가지고 왔다.
"배급표를 드리겠습니다. 많진 않지만, 이만하면 충분할 겁니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요."
부인이 말했다.
"완두는 항상 있는 거니까 소시지 값만 받겠어요. 그리고 뭘 좀 마시겠어요? 맥주가 약간 남아 있는데."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맥주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부인이 곧 맥주를 가지고 왔다. 그레버는 두 개의 잔에 맥주를 가득 부었다. 그들은 맥주를 마셨다. 맥주는 굉장히 차고 맛이 좋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면서 천천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두워졌다. 탐조등의 불빛이 어두운 하늘에 길게 줄을 그었다. 그 빛은 구름을 뚫고 더 높은 곳을 향해서 올라갔다. 부인이 수프를 더 가지고 왔다.
"많이 드세요. 젊은 분들은 많이 드셔야 합니다."
"저희들은 아주 훌륭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샐러드와 치즈를 가져오겠어요."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게 갖춰졌군요."
"달과 정원이 있고, 음식은 풍족하게 있고 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멋져요!"
"사람은 항상 이렇게 생활하고 있었어. 모두들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여기선 폐허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군요. 정원의 나무들이 폐허를 가려주고 있어요.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었다니!"
"전쟁이 끝나면 그런 나라로 가야지. 어디를 가나 파괴되지 않은 거리, 밤이 되면 불을 환하게 밝히고 공습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나라로."
"우리들을 받아줄까요?"
"스위스 같은 나라는 받아주겠지."
"그럼 스위스의 화폐가 필요하겠군요. 어떡하죠?"
"카메라를 갖고 가서 거기서 팔면 돼. 그러면 2, 3주일은 충분할거야."
엘리자베스는 허리를 잡고 웃었다.
"그렇지 않으면 보석이나 모피외투를? 우리가 갖고 있지도 않는."
부인이 샐러드와 치즈를 가지고 왔다.
"여기가 마음에 드세요?"
"네, 대단히. 더 있어도 괜찮겠죠?"
"물론, 오랫동안 계셔도 좋습니다. 그럼 커피를 갖고 오겠어요."
"커피까지? 오늘은 우리가 왕이라도 된 것 같군."
엘리자베스가 또 웃었다.
그레버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공장에서 나올 때의 지친 표정과는 정반대로 밝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생활한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죠. 우린 그것을 거의 모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에겐 당연한 일도 우리에게는 멋진 모험이에요. 배급표가 필요 없는 식사,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상점, 주위를 돌아보지 않아도 얘기를 할 수 있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든가 이를 위하여 긴 세월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공포심은 차츰 사라지고 가끔씩 떠오른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들의 기쁨으로 변할 거예요."
"그래."
그레버는 겨우 대답했다.
"그럴 거야, 엘리자베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앞날에는 많은 행복이 기다리고 있군."
그들은 그 집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 동안에 위테 부인은 잠들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단 둘만의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달이 높게 떠 있었다. 대지와 싱싱한 푸른 잎의 냄새가 한층 더 강렬하게 전해졌다. 그 향기가 잿더미에서 나는 냄새를 몰아내고 있었다. 관목의 사이사이로 고양이가 쥐를 쫓고 있었다. 시내에는 쥐가 들끊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화의 섬을 떠나는 것만 같았다.
"몹시 늦었군요."
그들이 교회에 당도하자 집사가 말했다.
"잘 곳이 없소."
오늘 아침에 만났던 사람이 아니었다. 젊은 집사는 깨끗이 이발을 하고 있었으며, 그의 태도는 완고하고 도도했다. 요셉을 고발한 자가 바로 이 녀석임에 틀림없다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마당에서 잘 수도 없겠습니까?"
"거긴 피난민들이 더 많소. 그런데 당신들은 어째서 임시수용소에 가지 않소?"
자정이 다 됐는데 이런 질문을 하다니.
"우린 하느님을 더 믿고 있습니다."
집사는 날카롭게 그레버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자겠다면 푸른 천장 아래서 자야 하오."
"상관없습니다."
"당신들은 결혼했소?"
"그렇습니다. 왜 그러시죠?"
"여기는 하느님의 집이오. 결혼하지 않은 남녀는 함께 잘 수 없소. 회당에는 남자부와 여자부가 따로 마련되어 있소."
"부부도 마찬가지입니까?"
"물론이오. 회당은 교회의 소유니까. 여기서는 육적인 욕망이 존재할 수도 없소. 그리고 당신들은 결혼한 것 같지가 않소."
그레버는 결혼 증명서를 꺼냈다. 그는 니켈로 된 테의 안경을 걸치고 나서 달빛에 그것을 비추고 읽어 보았다.
"며칠 안됐군."
"종교문답 가운데 기간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조항은 하나도 없소."
"교회에서 식을 올렸소?"
"이보시오, 우린 몹시 피로하오. 내 아내는 하루 종일 공장에서 중노동을 했소. 이의가 있으시다면 우리를 쫓아내보시오. 그러나 그리 간단하진 않을 것이오."
"무슨 일이지?"
소리 없이 다가온 신부가 뒤에 서 있었다. 집사가 두세 마디 설명하자 신부가 제지했다.
"베벨, 전능하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게 아냐. 이분들이 여기서 밤을 새워야 하는 것만도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신부는 그레버를 보았다.
"내일 지낼 곳이 마땅치 않으면 밤 9시에 제7관으로 오시오. 나는 비덴데이크라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그 자리를 떠났다.
"자, 우리를 안내해 주시오! 하느님의 하사관님, 소령님이 당신에게 명령을 내리셨소. 당신은 복종해야 돼. 교회는 몇 세기에 걸쳐 성공한 유일한 독재체제다. 마당이 어디요?"
집사는 성기실을 지나 그들을 뜰로 안내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미사용의 법의가 살짝 드러나고 있었다.
"신부님의 묘 위에서 잠을 자면 안 되오. 알겠소?"
베멜이 투덜댔다.
"저기 회당 옆에서 자란 말이오. 그리고 절대로 함께 잘 수 없소. 따로따로 자야 하오. 옷도 벗을 수 없고."
"구두는?"
"구두도 안 되오."
그들은 회당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레버는 텐트와 모포를 잔디 위에 깔고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는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우습지?"
"그 집사의 하는 짓이 너무 우스워서. 그리고 당신도."
"알겠어."
그레버는 가방을 벽에 기대어 놓고 그 앞에 배낭을 베개처럼 놓았다. 그때 갑자기 여자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싫어! 싫어요! 아아 아."
비명은 숨가쁜 절규로 변했다.
"조용히 하라고!"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여자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조용히 하라니까!"
다시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순간, 비명소리가 뚝 그쳤다.
"저러니까 우리는 지배자적 민족이지. 꿈속에서도 명령에 복종하고 있으니."
그들은 자리에 누웠다. 그들이 차지한 벽쪽으로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폭탄으로 파괴된 탑 뒤로 둥근 달이 걸려 있었다. 신부들의 오래 된 무덤가에도 한줄기의 빛이 내리고 있었다. 뜰 중앙의 장미넝쿨 속에 커다란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23
교회의 무너진 탑 주위에 제비가 날아다녔다. 아침햇살이 모든 것들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레버는 스토브를 싼 보따리를 끌렀다. 취사가 허가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병사들의 습관에 따르기로 했다. 그는 반합을 들고 수도를 찾아다녔다. 수도는 석상 뒤에 있었는데 붉은 턱수염의 사내가 입을 딱 벌린 채 거기에 잠들어 있었다. 그는 외발이었다. 사내가 벗어 놓은 의족이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그레버는 회당 안을 슬쩍 들여다봤다. 과연 집사가 말한 대로 잠자리는 남녀가 따로따로 마련되었으며 남쪽에는 여자들만 모여 있었다. 그가 돌아오자 엘리자베스가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회당 안에서 보았던 혈색 없는 얼굴들과는 달리 생기가 돌았다.
"세수할 곳을 발견했어. 사람들이 모여들기 전에 가지. 종교단체는 언제나 위생시설들이 불충분해. 신부들의 세면장을 알려줄게."
그녀는 웃었다.
"당신은 여기서 커피나 끓이세요. 어쩜 도둑맞을지도 몰라요. 어느 쪽으로 가면 되죠?"
그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녀가 뜰을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찌나 잠을 곱게 잤는지 옷은 금방 다림질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사랑스런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하, 주님의 마당에서 음식을 끓이는군!"
집사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더구나 슬픔의 면류관 상 앞에서!"
"기쁨의 면류관은 어디 있소? 있다면 그리로 가겠습니다."
"여긴 전부 신성한 땅이오. 당신은 신부님들이 잠들어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가?"
"난 지금까지 공동묘지를 돌아다니며 밥을 지어 먹었소."
그레버는 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로 가면 좋은지 말하시오. 여기에도 주보나 임시 취사장 같은 게 있소?"
"주보?"
집사는 마치 썩은 과일이라도 씹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여기에 말이오?"
"나쁘진 않을 것 같소."
"당신 같은 이단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리스도의 성역에 음식점이라니! 그야말로 신에 대한 모독이다!"
"그건 모독이 아니오. 그리스도가 약간의 빵과 생선으로 몇 천 명을 배불리 먹게 했다는 건 당신도 잘 알 것이오. 자, 비키시지. 지금은 전시야."
"주임 사제 비덴데이크님께 너의 모독을 고하겠다!"
"마음대로 하라구, 이 살쾡이 같은 놈아. 난 쫓겨나면 그만이야!"
집사는 짐짓 위엄을 보이면서 물러갔다. 그레버는 빈딩그의 유산 가운데 하나인 커피 봉지를 뜯고 냄새를 맡았다. 그는 커피를 끓일 준비를 서둘렀다. 그윽한 향기가 피어오르며 즉시 반응을 일으켰다. 무덤의 그늘에서 잠들어 있던 사내가 재채기를 하면서 가까이 왔다.
"한잔, 어때?"
"비켜주게. 여기는 하느님의 집이야. 여긴 시주를 주진 않아, 받기만 하지."
엘리자베스가 오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경쾌한 걸음걸이로 걸었다.
"어디서 커피를 얻었죠?"
그녀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빈딩그의 유산이지. 빨리 마시지 않으면 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밟히고 말거야."
태양은 어느새 슬픔의 면류관 석상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레버는 배낭에서 빵과 버터를 꺼냈다. 주머니칼로 빵을 자르고 버터를 발랐다.
"진짜 버터군요. 이것도 역시 빈딩그의?"
"모든 것을 거기서 얻었지. 이상해 그는 내게 무척이나 친절했는데 난 녀석이 결코 좋아지지 않았어."
"그럴 수도 있어요."
엘리자베스와 그레버는 나란히 배낭 위에 앉았다.
"저는 일곱 살 때 이런 식으로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난 빵장수가 되고 싶었어."
그녀는 유쾌하게 웃었다.
"대신에 빵을 공급하는 사람이 되었군요. 지금 몇 시나 되었을까요?"
"짐을 정리해 놓고 공장에 바래다줄게."
"아녜요. 그보다는 되도록이면 이 양지쪽에 오래 있도록 하세요. 짐을 싸려면 시간이 너무 걸리고, 또 전부 맡기려면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니까. 회당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요."
"알았어. 여기서 담배를 피워도 되겠지?"
"글쎄요? 그렇지만 당신에겐 상관없겠죠."
"쫓겨날 때까지 나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오늘은 옷을 홀랑 벗고 잠을 잘 수 있는 곳을 찾아내야겠어. 비덴데이크 사제에게 가고 싶지 않지?"
"폴만 선생님 쪽이 낫겠어요."
"8시 10분 전이야. 당신 출발해야 돼. 공장으로 마중 갈게. 만약에 무슨 일이 있을 경우, 위테 부인의 정원이나 바로 이 자리야."
"알겠어요."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의 휴가기간 동안에 하루 종일 떨어져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군요."
"오늘밤은 뜬눈으로 새우는 거야. 그러면 허무하게 보낸 하루를 충당할 수 있지."
그녀는 그에게 키스를 하고 급히 나섰다. 그레버는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듣고 화가 나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젊은 여자가 사내아이를 붙잡고 원기둥 사이에 서 있었다. 아이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잡고, 여자는 아이를 부둥켜안고서 킬킬거리고 있었다. 그는 짐을 꾸리고 반합을 닦으러 갔다. 의족의 사내가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봐."
그레버는 걸음을 멈추었다.
"커피를 마신 건 자네가 아니었나?"
"맞아. 우린 남김없이 마셔버렸지."
"그것은 나도 알아."
사내는 커다란 파란색의 눈을 갖고 있었다.
"내가 말하는 건 찌꺼기야. 그걸 버리려거든 나를 주게. 재탕을 할 수 있으니까."
"좋아."
그레버는 찌꺼기를 모조리 그에게 주고 짐을 맡기기 위해 예치소로 갔다. 경망한 집사와 한바탕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처음으로 대하는 붉은 코가 나와 있었다. 그는 성찬식의 포도주 냄새를 풍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지기는 불에 탄 아파트의 창가에 앉아 있다가 그레버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레버는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편지 온 게 없나?"
"있지. 당신 부인 앞으로. 수취인이 쿠루제로 되어 있어. 그러니까 틀림없겠지."
그레버는 편지를 받았다. 그는 문지기가 묘한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챘다. 그것은 게슈타포로부터 온 편지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봉투를 뒤집어보니까 이미 뜯어 본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언제 왔지?"
"어젯밤."
그레버는 문지기가 읽어 보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엘리자베스에게 오전 11시 30분까지 출두하라는 통지서였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11시가 거의 다 되고 있었다.
"좋아, 겨우 도착했군! 이 편지가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지."
그는 편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또 없나?"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문지기는 무엇인가를 찾는 듯한 눈초리로 반문했다. 그레버는 웃었다.
"우린. 아파트가 필요하지. 적당한 곳이 없나?"
"몰라. 당신은 계속 있을 건가?"
"곧 떠나야지. 그러나 내 아내는 방이 필요해."
"그래?"
문지기는 고개를 흔들었다.
"만약에 구해준다면 수고한 값을 톡톡히 낼 텐데!"
"그래?"
문지기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레버는 그곳을 떠났다. 문지기의 시선이 등에서 느껴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건물의 잔해를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는 척하다가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는 길모퉁이를 돌자 재빨리 편지를 꺼냈다. 인쇄물이었기 때문에 편지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엘리자베스의 이름과 날짜만이 찍혀 있었다. 그는 종이쪽지를 잔뜩 노려보았다. 거기서 죽음의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그레버는 카타리네 교회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른스트!"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요셉이 군용 외투를 입고 서 있었다. 그는 그레버를 못 본 것처럼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느릿느릿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성기실 옆 빈자리에 앉아 있었다. 요셉이 조심스럽게 눈짓을 했다. 그레버는 제단 앞으로 갔다가 다시 주위를 살펴보고 나서 그의 옆에 앉았다.
"폴만이 잡혔어."
요셉이 속삭였다.
"뭐라고요?"
"오늘 아침에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어."
그레버는 문득 폴만의 체포가 엘리자베스의 출두 통지서와 무슨 관련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요셉을 보았다.
"폴만 선생님이!"
그는 겨우 한 마디를 했다. 요셉이 고개를 들었다.
"또 무슨 일이 있나?"
"아내에게 호출장이 왔습니다."
"언제 출두하라고 했지?"
"오늘 11시 30분입니다."
"호출장을 갖고 있나?"
"네."
그레버는 요셉에게 편지를 넘겨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잡혀가셨죠?"
"잘 몰라. 돌아가 보니까 문 앞의 돌이 다른 곳에서 뒹굴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걸 짐작할 수 있었지. 폴만이 끌려가면서 그 돌을 걷어찼던 거야. 그게 암호였어. 한 시간 후에 폴만의 책들을 자동차에 싣고 있는 것을 보았지."
"뭔가 선생님과 관련될 만한 게 있었습니까?"
"그런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해.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건 모조리 묻어버렸어. 물론 통조림도."
그레버는 요셉이 들고 있는 쪽지를 보았다.
"마침 선생님께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쭤 볼 생각이었지요."
"그래서 나도 여기로 온 거야. 게슈타포의 끄나풀이 잠복해 있는 게 확실해."
요셉은 호출장을 돌려주었다.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모르겠습니다.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망가지."
요셉이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나 혼자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볼 생각입니다."
"만일 자네 부인에게 용건이 있다면 자네에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걸세."
그레버는 등골이 서늘했다. 그러나 요셉은 사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만약에 아내를 체포할 생각이라면 폴만 선생님의 경우와 똑같은 식으로 체포했을 겁니다. 무엇인가 다른 일이 있을 수도 그래서 일단 제가 먼저 갈 생각입니다."
그는 자신이 없게 말했다.
"그렇다면 달아날 필요는 없어."
"부인은 유대인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지. 유대인이라면 달아나야 해. 부인이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할 순 없을까?"
"안됩니다. 근로봉사자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자네 말대로 다른 일인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구태여 호출장을 보낼 필요가 없을 텐데."
"장인이 강제수용소에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한집에 살고 있던 여자가 밀고했는지도 모릅니다."
요셉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장인의 체포와 관련이 되는 서류들은 모두 찢어버리게. 편지라든가 일기 같은 걸 말야. 그런 다음에 혼자 가 보게. 자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지?"
"그렇습니다. 아침에 받았기 때문에 공장에 있는 아내에게 연락할 수가 없었다고 말할 생각입니다."
"그게 좋겠군. 자네야 어차피 일선으로 돌아갈 몸이니까. 자네에겐 손대지 않겠지. 부인의 은신처가 필요하다면 내가 알려주지. 좌우간 다녀오게. 우린 오후에 여기서 다시 만나세."
요셉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비덴데이크 신부님의 고해실이야. '외출' 이란 표찰이 걸려 있는 곳이지. 그 표찰이 걸리면 한두 시간 동안 편안하게 잘 수 있지."
그레버는 밖으로 나갔다. 지금까지 교회 안의 싸늘하고 어둑한 곳에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자 햇빛에 눈이 부셨다. 따가운 햇빛은 게슈타포의 도구가 되어 그에게로 쏟아졌다. 그는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달아난 것 같았다.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남자는 자기로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평화의 상징처럼 보였다.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웃음을 터트리는 것은 그에게는 이미 별세계의 풍경이었다.
그레버는 게슈타포의 건물로 들어가서 호출장을 제시했다. 친위대원은 호출장을 대충 보더니 그를 부속 건물로 데리고 갔다. 통로는 어디에나 환기되지 않는 사무실 특유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지정된 방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그 방에는 이미 세 사람의 남자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내는 안마당을 향한 창가에 서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뒤로 돌리고 피아노라도 치듯이 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쪽 손등을 두드렸다. 다른 두 사내는 의자에 앉아 정면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레버가 들어서자,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다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안경을 쓴 친위대원이 들어오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레버는 문에서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자네가 여기에 무슨 볼일이지?"
친위대원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일반적으로 군인은 군법회의의 권한 밑에 놓여 있었다. 그레버는 편지를 제시했다. 친위대원은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이건 당신에게 보낸 게 아냐. 쿠루제양 앞으로 발송했어."
"그녀는 제 아내입니다. 우린 얼마 전에 결혼했습니다. 지금 아내는 군수품 공장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대신 출두했습니다."
그레버는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가지고 온 결혼 증명서를 꺼냈다. 친위대원은 단안을 내릴 수 없는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기 시작했다.
"좌우간, 지하실의 72 호실로 가 보게."
그는 그레버에게 서류를 돌려주었다. 지하실은 게슈타포의 건물 중에서도 가장 평판이 나쁜 곳이었다. 그는 계단을 하나씩 내려갔다. 그를 향해서 걸어오고 있는 두 명의 남자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모든 위험이 시작되고 있는 사람과 자유의 몸이 되어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서로 교차되었다.
72 호실은 굉장히 큰 방이었는데 칸막이를 이용하여 몇 개의 사무실로 나뉘어져 있었다. 직원이 그레버에게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 대신에 출두한 이유를 설명하고 결혼증명서를 제시했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을 대신해서 서명하겠소?"
"네"
직원은 두 통의 서류를 책상 너머로 건네주었다.
"여기에 서명을 한 다음에 이렇게 쓰시오. 엘리자베스 쿠루제의 남편이라고. 그리고 결혼한 날짜와 호적과의 이름을 기입하도록. 서류 한 통은 가져가도 좋소."
그레버는 아주 천천히 서명을 했다. 인쇄물을 읽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무슨 내용인지도 전혀 모르고 서명만 하기는 싫었다.
"그런데 그 재는 어디로 갔지?"
그는 마침내 호통을 쳤다.
"홀트만, 넌 또 엉망진창이로군. 빨리 쿠루제의 꾸러미를 가져오란 말야."
칸막이 저쪽에서 누군가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레버는 자신이 검속중인 수인 베른하르트 쿠루제의 유골 수령증에 서명했음을 알게 되었다. 서류에는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사인을 밝히고 있었다. 직원은 칸막이 뒤쪽으로 갔다가 담배상자를 가지고 나타났다. 상자는 밤색 종이로 포장을 한 다음에 끈으로 묶여 있었다.
"이것이 재다."
직원은 졸린 눈으로 그레버를 응시했다.
"자네는 군인이니까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는 없지만 절대 침묵을 지켜야만 한다. 사망통지는 일체 허락되지 않는다. 신문에 내거나 우편으로 알릴 수도 없다. 장례식도 물론 금지다. 알겠나?"
"알았습니다."
그레버는 담배상자를 받아들고 그곳에서 벗어났다. 그는 엘리자베스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그녀가 나중에 알게 되느냐는 우연에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알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게슈타포는 더 이상 통지를 하지 않을 테니까. 현재의 고민, 그녀를 혼자 남겨두어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지금 그녀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잔인한 짓이다.
그는 카타리네 교회로 걸음을 재촉했다. 거리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위협이 사라지고 그것이 주검으로 변해서 돌아왔다. 그렇지만 낯선 인간의 주검이었다. 그는 이미 그런 주검에 익숙해져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몇 번 보았을 뿐이다.
그는 옆구리에 낀 담배상자를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쿠루제의 유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재일 것이다. 홀트만이 다른 재를 내놓을 수는 얼마든지 있다. 강제수용소 직원들이 이런 일에 일일이 신경을 쓰는 일은 절대로 없다. 대량 소각에 있어서 개개인의 재를 따로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화부가 삽으로 떠서 봉지에 담으면 그것으로 끝나버린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지 그레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잔학한 행위와 관료주의가 결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망설였다. 어딘가의 폐허에 묻어 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공동묘지에 묻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허가를 얻어야 하고 또 묘 자리도 필요하다. 그러면 엘리자베스가 눈치를 채게 된다.
그는 교회로 들어서서 베덴데이크 사제의 고해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고해실에는 '부재중'이라는 표찰이 걸려 있었다. 그는 녹색의 커튼을 젖혀 보았다. 요셉이 그를 보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그레버를 걷어차며 달아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레버는 그곳을 지나쳐서 성기실 옆의 좌석으로 갔다. 이윽고 요셉이 왔다. 그레버는 담배상자를 가리켰다.
"이것이었습니다. 장인의 유해입니다."
"이것뿐인가?"
"네. 그런데 폴만 선생님의 소식은?"
"아니."
그들은 함께 유해상자를 보았다.
"담배상자로군. 흔히 봉지에 넣어 주는데 이건 실제로 관인 셈이지. 어디에 모실 생각인가? 이 교회에?"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회당의 뜰로 하겠습니다. 거긴 공동묘지와도 같으니까."
"그런데 당신은?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저 옆문으로 빠져나가서 혹시 수상한 자들이 없는가 보고 오게. 난 이곳을 떠나야 해. 이제부터 반유대주의자인 집사가 당번이야."
"알겠습니다."
그레버는 태양 아래에 서 있었다. 잠시 후에 요셉이 밖으로 나와서 그레버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행운을!"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행운을 빕니다."
그레버는 되돌아갔다. 때마침 회당의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날개에 빨간 반점이 있는 두 마리의 나비가 흰꽃이 만발한 나무 주위를 날아다녔다. 그레버는 묘지를 조사하기 위해서 그쪽으로 갔다. 무덤은 세 개나 폭삭 허물어져 있었다.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카톨릭 교도의 유해임을 쪽지에 적어 상자에 넣었다. 나중에라도 상자가 발견될 경우를 생각해서였다.
그는 대검으로 잔디를 자르고 바닥을 파서 상자를 묻은 다음에 흙을 뿌렸다. 다행히도 이 유해가 베른하르트 쿠루제의 것이라면 그는 성역에서 안식처를 얻은 셈이다.
그레버는 회당의 돌담에 기대고 앉았다. 돌담은 햇볕을 오랫동안 받아 따뜻했다. 어쩌면 신을 모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베른하르트 쿠루제는 카톨릭 신자였다. 신자들은 화장이 금지되어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전시니까 교회에서도 묵인할 것이다. 아니다. 쿠루제의 유해가 아니라 개신교 교도나 정통파 유대인을 포함한 다른 희생자들의 유해일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 없을 것이다. 여호와의 신도, 개신교의 신도도 굳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리에서 무명용사의 묘를 본 적이 있었다. 무명용사의 묘는 프랑스의 위대한 전투를 기념한 개선문 밑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도록 장식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신부 브류멜의 묘비가 세워져 있고 그 밑에 담배상자가 묻혀 있는 잔디밭이 그것과 동등하게 느껴졌다.
"우린 오늘밤 어디서 자죠? 교회?"
"아냐. 기적이 일어났어. 오늘 위테 부인에게 갔었어. 거기서 빈 방을 하나 얻었어. 부인의 딸이 거주하던 방인데 며칠 전에 시골로 간 모양이야. 우린 거기서 묵을 수 있어. 그리고 내가 떠난 후에도 당신은 그 방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짐은 벌써 옮겼어. 당신의 휴가는 어떻게 됐지?"
"네, 받았어요. 이제 당신은 나를 기다리지 않아도 돼."
"고마워! 오늘밤은 밤이 새도록 얘기하다가 내일 낮에 실컷 자기로 하지."
"응. 별이 나올 때까지 정원에 앉아 있어요. 전 그전에 모자를 사야 해요."
"모자를?"
"오늘 같은 날은 모자를 사야 해요."
"모자는 왜? 오늘밤에 쓸 작정인가?"
엘리자베스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것도 그렇죠.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모자를 사는 상징적인 행동이죠. 모자는 깃발을 의미해요. 행복할 때도 사고 불행할 때도 살 수 있는. 당신은 이해 못할 테죠."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하나 사기로 하지. 그리고 당신의 자유를 축하해야지. 그것이 저녁식사보다 더욱 중요해. 그런데 모자를 파는 가게가 있을까? 아, 의료권은?"
"갖고 있어요. 그리고 전 모자를 파는 가게를 알고 있어요."
"좋아. 당신의 금빛 드레스에 어울리는 모자를 사지."
"어떤 모자이든지 사기만 하면 돼요."
진열장의 유리가 부서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들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모자 두 개가 걸려 있었는데 하나는 조화가 꽂혀 있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새깃으로 장식을 한 모자였다. 어느 것도 엘리자베스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레버는 그녀와 모자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백발의 부인이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상점은 창문마다 등화관제가 되어 있었다. 그레버는 두 여자의 대화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문 옆에 놓인 다 부서져가는 의자에 앉았다. 여주인은 전등을 켜고 상자에서 재료를 끄집어냈다. 회색의 어두컴컴하던 가게가 마술의 동굴로 변했다. 파란색, 빨간색, 장미색 등 현란한 모자의 색깔이 확 타올랐다가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모자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 축제라도 즐기는 것처럼 현란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림 속에서 방금 빠져 나온 것처럼 빛의 홍수 속을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그레버는 묵묵히 그런 색의 세계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두 여자의 속삭이는 듯한 대화를 내용도 모르면서 듣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샘물이 조용히 흘러가는 소리처럼 평화롭게 들렸다. 그레버는 이 현실과 동떨어진 행복 속에 서서히 잠기고 있었다.
24
하늘에는 무수한 별이 떠 있었다. 돌담을 기어오른 야생의 포도넝쿨이 소리 없는 시계의 추처럼 바람에 휘날렸다.
"전 지금 울지 않아요. 혹 눈물을 보이더라도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우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그렇게 시키고 있는 거예요. 때때로 울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러나 그건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죠."
그녀는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고 가슴에 안겨서 눈을 감고 있었다. 침대는 검은 호두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똑같은 호두나무로 된 화장대가 구석에 있고, 창가에는 작은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전 몹시 행복해요. 지난 2주일 동안에 너무 많은 일이 생겨서 내 안에 모두 채울 수 없을 정도라고요."
"난 당신을 어느 시골에 있게 하고 싶어."
"당신이 떠난 다음에는 전 어디에 있으나 마찬가지에요."
"그렇지 않아. 시골은 공습을 받을 우려가 적으니까."
"곧 여기도 폭격이 끝나겠죠. 시내도 이제 폐허가 다 됐으니까요. 전 이 방이 몹시 마음에 들어요. 더구나 위테 부인도 있고."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전 곧 안정을 찾을 거예요. 제가 지금 흥분해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전 지금 몹시 행복해요. 단조롭고 지루한 암소의 행복에는 비할 수도 없어요."
"암소의 행복? 그런 건 아무도 바라지 않아."
"그래야 오랫동안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아요."
"난 다만 그것을 인정할 수 없을 뿐이야."
엘리자베스는 그레버를 보았다.
"당신, 졸리지 않아요? 실컷 자고 싶지 않으세요? 내일 밤이 지나면 그렇게 할 수도 없어요."
"기차 안에서도 얼마든지 잘 수 있어. 도착하려면 2, 3일 걸리니까."
"침대에서 잘 수 있을까요?"
"아니, 내일밤만 지나면 야전용 침대나 건초 위에서 자야 해. 곧 익숙해지지. 이제 더워지잖아. 겨울이 견디기 힘들지."
"또 겨울을 소련에서 보내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식으로 후퇴만을 계속하다가 겨울까지는 폴란드나 독일에 주둔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그다지 춥지는 않아."
이번에는 '언제 다시 휴가를 오시나요?' 하고 물을 차례다. 이제 그런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물어야 하고 나는 대답할 의무가 있다. 빨리 끝내는 것이 좋다. 나는 지금 완전히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그때였다. 밤의 정적을 깨고 사이렌 소리가 크게 들렸다.
"여기 있기로 해요. 전 옷을 입고 허겁지겁 방공호로 달려가긴 싫어요."
"알았어."
그레버는 테이블을 한쪽으로 밀어붙이고 밖을 내다보았다. 밤하늘은 맑고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현실과 동떨어져서 마치 꿈속의 밤을 맞이한 것처럼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밤이었다. 위테부인이 문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부인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그는 창문을 열었다.
"지금 막 깨우려던 참이었어요."
부인은 소음 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공호 라이프니츠가."
토막토막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손을 흔들었다. 부인은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기다려 보았다. 부인은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녀도 집에 남아 있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는 오히려 그게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부인은 이 집을 떠날 필요가 없다. 정원과 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의 보호를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무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으며 포도넝쿨조차도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평화의 작은 섬은 파괴의 폭풍을 거부라도 하듯이 화사한 달빛 아래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레버는 뒤돌아섰다. 엘리자베스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그녀의 구부러진 부분에 부드러운 그늘이 지고 유방이 실제보다 더 크게 보였다. 그녀는 갑자기 먼 곳에서 온 사람처럼 밖의 소음에도 아랑곳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세계의 종말에 직면해 있는 정원처럼 신비로운 베일에 싸여있는 듯이 보였다.
"위테 부인도 그대로 집에 남았어."
"이리 오세요."
그는 침대를 향해 걸어가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거울 속에 있는 얼굴은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어서요."
그는 그녀에게로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가슴에 그를 안았다.
"난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오늘밤에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믿음은 정원이나 집, 엘리자베스의 어깨와 그를 충만시킨 고요한 달빛과 연결된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그녀는 몸을 덮은 천을 바닥에 던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누워 있었다. 그녀의 허리에서부터 탄력있는 긴다리가 죽 이어졌다. 나신은 어깨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면서 가늘어졌다가 다시 배꼽 근처에서 오목해지고 있었다. 넓적다리는 살이 잔뜩 부풀어올라 양편으로부터 검은 삼각형을 향하여 돌입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젊은 여자의 성숙한 육체로서 이미 소녀의 신체는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몸을 바짝 대고 다리를 감았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손이 서로 얽혀서 상대를 사로잡고, 깊은 곳으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약간의 틈도 없이 오로지 두 육체만이 존재했다. 그것은 최초의 요란한 격정이 아니었다. 서서히 흐르다가 한곳에서 범람하여 모든 게 소용돌이치면서 마침내 자기를 잊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아득한 곳으로부터 돌아와 있었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얼마나 멀리 떠났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밖은 조용했다. 무엇인가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옆으로 누운 채 다시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폭발하는 소리도 안 들리고 고사포도 날지 않는다. 그는 눈을 감고 똑바로 누웠다. 다시 눈을 떴다.
"오지 않았어. 엘리자베스."
"왔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들은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레버는 바닥에 버려진 흰 천과 활짝 열려진 창문을 바라보았다. 밤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은 원래의 고요 속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창밖의 포도넝쿨이 다시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그림자가 거울 속에서 움직이고, 밖에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눈을 감은 채 입을 벌리고 깊은 숨을 쉬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오랫동안 먼 곳에 가 있다. 그도 그렇게 자신을 망각하고 싶었다. 그녀에게서 두려움 같은 게 느껴졌다. 그녀는 어딘가에, 그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를 두렵게 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혼자만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는 엘리자베스 옆에서 고독감을 느꼈다. 엘리자베스가 눈을 떴다.
"비행기는?"
"모르겠는데."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배가 고파요."
"나도 그래. 먹을 건 얼마든지 있어."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나 빈딩그의 통조림을 갖고 왔다.
"이것은 치킨이야. 토끼고기, 설탕에 조린 과일도 있어."
그레버는 통조림을 땄다. 엘리자베스가 가만히 누워서 기다리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그녀는 아직도 신비로운 어둠 속에 있었으므로 재빨리 분주한 주부로 변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물건을 볼 때마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난 알폰스에게 나쁜 짓을 한 것만 같아."
"그 사람도 남에게 악한 짓을 했었어요. 그것으로 상쇄할 수 있어요. 당신 장례식에 갔었나요?"
"아니. 제복을 입은 당원들이 들끓어서 그만두었지. 다만 힐테브란트 연대장의 조사를 들었을 뿐이야. 힐테브란트는 우리 모두 알폰스를 본받아 그의 유지를 완수해야 한다고 말했어. 적군과 싸울 때는 냉혹하고 무자비해야 한다더군. 그러나 빈딩그의 최후의 소원은 그게 아니야. 알폰스는 파자마 바람으로 잠옷만 걸친 채 블론드의 여자와 창고에 있었으니까."
그레버는 고기와 과일을 위테 부인이 빌려준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빵을 자르고 포도주를 땄다. 엘리자베스는 옷을 입지 않고 침대 앞에 서 있었다.
"당신은 군용외투나 깁고 있는 여자 같지는 않아. 마치 매일같이 체조라도 하는 것 같군."
그녀는 웃었다.
"체조라고요? 체조는 절망했을 때 하는 게 아닌가요?"
"그런가? 난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절망했을 때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체조를 하거나, 지칠 때까지 뛰어다니거나 방 청소를 하고, 머리가 아플 때까지 머리를 빗기도 해요."
"효과가 있나?"
"절망이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말이죠. 최후의 절망에 빠지면 쓰러지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리고 생명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숨을 쉴 수 있을 만큼의 알량한 생명이죠. 생활을 위한 목숨이 아니구요."
그레버는 잔을 들었다.
"우린 우리의 나이에 비해 너무 많은 절망을 알고 있어. 잊어버리도록 해야지."
"우린 또 잊는 거에 너무 능숙하거든요. 그것도 함께 망각하고 싶어요."
"좋았어. 토끼고기를 먹게 해준 크라이네르트를 위하여!"
그들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레버는 두 개의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달빛이 술잔 속에 들어 와 있었다.
"모두들 잠든 밤에 일어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정말 좋군요."
"그래. 당신은 젊고 건강한 하느님의 딸이야. 군용 외투의 노예가 아니고. 나도 이 순간만은 군인이 아냐."
"그런 뜻에서 또 한 잔!"
"마셔야지."
엘리자베스는 잔을 내밀었다.
그레버는 웃었다.
"그와 동시에 우린 비탄에 잠기고 심각한 대화를 나누어야만 했어. 그런데 우린 토끼 한 마리를 거의 다 먹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거든."
"그게 좋아요."
"만약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게 선물이라고 할 수 있어."
"그건 일선에서 배운 철학인가요?"
"아니지. 여기서 배웠지."
"어쨌든 좋아요. 우리가 그것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약간의 행운이 필요할 뿐이지."
"우린 그것도 발견했나요?"
"그렇지. 우린 지상에 있는 걸 모두 찾아냈어."
"이미 끝나버렸으니까 당신은 슬프시겠죠?"
"끝난 게 아냐. 약간 변했을 뿐이지."
그녀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슬퍼. 내일 당신과 작별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아. 비탄에 잠기지 않으려면 한 가지 해답밖에 없어 당신을 만나지 않았던 것으로 하는 거지.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난 슬픔 대신에 공허함을 안고 떠나겠지."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표현 방법이 서툴렀는지도 몰라.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겠지?"
"응. 당신은 멋지게 표현하셨어요. 그 이상 더 어떻게?"
그녀는 일어나서 그에게로 왔다. 그는 그녀를 느끼는 순간 견딜 수 없는 불꽃이 온몸에 타올랐다. 그는 모든 것은 하나이고, 출발은 귀환이며, 소유는 상실이며, 삶은 죽음이며, 과거는 미래임을 알았다. 항상 닿는 곳마다 돌처럼 변하지 않는 영원의 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무것도 말소할 수 없다 그때 그는 대지가 활처럼 팽창해지더니 순간적으로 튕겨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꼭 안고서 그녀와 함께 오로지 한곳을 향해서 뛰어들고 있었다.
마지막 날 오후였다. 그들은 정원에 앉아 있었다. 고양이가 살며시 그 앞을 지나갔다. 새끼를 밴 고양이는 주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느릿느릿 걸었다.
"전 아기를 낳고 싶어요."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말했다. 그레버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기? 어째서?"
"어머나! 왜라니요?"
"어린애! 이렇게 소란한 시대에! 당신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럼요?"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보았다.
"엘리자베스, 난 지금 당신에게 키스하고 부드럽게 굴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돼. 난 아직 어린애에 대한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당신은 그런 생각을 하실 필요가 없어요. 그것은 당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저도 확신은 없어요."
"어린애! 우리가 이 전쟁에 알맞게 성장한 것처럼 그애도 자라면 새로운 전쟁을 겪어야 되겠지."
또 고양이가 다가오더니 부엌으로 통하는 길을 살금살금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거의 매일 태어나고 있어요."
그레버는 히틀러 유겐스트나 자기 부친을 고발했다는 어린이가 떠올랐다.
"왜 그런 말을 하지? 결국 희망에 지나지 않겠지. 그렇지 않을까?"
"당신은 아이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잘 모르겠어. 평화의 시대라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 난 이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우리 주위는 모두 황폐하였고 대지는 몇 년이고 방치될 거야. 이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어린애를 바랄 수 있지?"
"그러니까 필요하죠."
"그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교육시키기 위해서죠. 만약에 이런 사태를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야만인들만 애를 낳아야 하나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누가 이 세상에 참다운 정의를 실현할 수 있죠?"
"당신은 그런 뜻에서 애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아요. 이건 지금 막 떠올랐어요."
그레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의견에 반대할 만한 이유는 한 가지도 없었으며 너무도 지당한 말이다.
"당신은 어찌나 머리가 비상한지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아직 결혼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어. 그런데도 당신이 불쑥 어린애 얘기를 끄집어내니."
엘리자베스는 웃으면서 일어났다.
"당신은 이 문제의 가장 단순한 면을 모르고 있는 거죠. 결국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의 아이라는 거라구요. 그럼 전 위테 부인과 밤참을 상의해보겠어요."
그레버는 정원에 혼자 앉아 있었다. 하늘은 온통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오늘 하루도 끝나버렸다. 오늘은 시간을 훔치고 있었다. 휴가를 24시간이나 넘긴 것이다. 그는 출발계는 제출했지만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한 시간 후에는 출발해야 한다.
그는 다시 한 번 우체국에 가 보았다. 그러나 부모님으로부터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위테 부인은 엘리자베스를 계속 머물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 집의 지하실을 조사해 보았다. 지하실의 깊이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었으나 퍽 견고한 편이었다. 라이프니치의 공설 방공호도 가 보았다. 그곳은 시내에 있는 방공호에 못지않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평온 속에서 있었다. 부엌에서 냄비와 접시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긴 휴가였다. 그에게는 3주간이 아니라 3 년이었다. 두 사람은 대지를 꾹 딛고 서 있는 것 같았지만 언제나 위태위태했다.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갑자기 벽이 쓰러지면서 벽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먼 미래가 흔들렸다. 처음에 휴가를 나왔을 때는 자기 자신을 지탱해 줄 무엇인가를 찾아내 소유하고 싶다고 희망했었다. 그렇지만 아기 같은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는 나뭇잎 사이로 차츰 짙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다. 아기에 대한 생각은 끝이 없을 것이다. 벽에 묶인 생명이 그것을 초월할지도 모른다는 것,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이 자신이 볼 수도 없는 미래의 생명에 전달하기 위한 확실한 소유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그는 불가사의함을 느꼈다.
"기차는 6시에 출발해. 짐은 다 꾸려놓았어. 그럼, 난 여기서 헤어지고 싶어.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며 떠나고 싶어. 요전에 왔을 때는 어머니가 정거장까지 따라왔었지. 부득이 따라오시겠다는 거야. 나나 어머니나 무척 힘든 일이었어. 난 그것을 잊기 위해 긴 시간을 소모했지. 언제나 역에서 울고 있는 여자만 보였어. 당신, 내 심정을 이해하겠어?"
"네."
"좋아. 그럼 내 말대로 하는 거야. 당신은 내가 다시 군대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지 말란 말야. 난 여기서 이대로 작별하고 싶어. 이 돈을 받아. 일선으로 가면 돈 같은 건 필요 없어."
"저도 돈은 필요 없어요. 에른스트, 내게 필요한 돈은 스스로 벌어서 쓰겠어요."
"일선에선 돈을 쓰고 싶어도 쓸 데가 없어. 이것으로 우선 옷을 사라고. 당신 모자에 어울리는 멋진 옷으로."
"저는 이 돈으로 당신에게 선물을 보내겠어요."
"아무것도 보내지 마. 거기에는 여기보다 먹을 것이 많아. 그보다 당신 옷을 사라고. 이것으로 부족할까?"
"충분해요. 구두까지 살 수 있는 걸요."
"그럼 됐어. 이왕이면 금색 구두를 사요."
"알겠어요. 금색으로 사서 두었다가 당신이 돌아올 때 신고 마중 가겠어요."
그레버는 배낭에서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가지고 왔던 흙색의 성상을 꺼냈다.
"이건 내가 소련에서 얻은 거야. 당신이 갖고 있어."
그녀는 성상을 받지 않았다.
"싫어요. 그건 다른 사람에게 주세요. 이만 가 보세요. 그걸 받으면 마지막 이별이 될 것만 같아요."
그는 성상을 바라보았다.
"이건 파괴된 집에서 얻었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군."
그는 성상을 도로 배낭에 넣었다. 그것은 많은 천사들을 새겨 넣은 성 니콜라이 상이었다.
"상관없다면 교회로 가지고 가겠어요. 우리가 하룻밤 잔 적이 있는 카타리네 교회로."
"거기서는 받지도 않을 거야. 서로 종교가 다르니까.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위임 받은 사람들이 서로 배척하고 있지."
그는 이 성상을 쿠루제의 유해와 함께 브류멜 신부의 묘 속에 묻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이중으로 신을 모독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걸었다. 그의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배낭은 무겁고 역까지의 길은 멀기만 했다. 첫 번째 모퉁이를 돌고 난 후, 많은 거리를 지나쳤다. 아직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에서 나던 향수 냄새가 그의 몸에서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이내 후덥지근한 공기 속의 썩은 냄새와 뒤섞여버렸다.
둑을 넘었다. 린덴 거리의 안쪽 가로수들은 새까맣게 그슬려 있었다. 그 반대쪽은 개울로 막혀 있었으며 지푸라기와 부서진 침대의 조각들이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만약에 지금 당장 공습이 시작된다면 나는 대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발차 시각에 늦어도 구실이 생기는 셈이다. 내가 다시 엘리자베스에게로 돌아간다면 그녀는 뭐라고 할 것인가?'
그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정거장에서 기차의 발차 시간이 늦어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대화를 다시 시작해야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 공습 중에는 기차도 떠날 수 없으므로 그는 예정대로 기차를 탈 수 있을 것이다.
기차는 이미 출발 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 몇 개의 객차에는 '군 전용차'라고 씌여 있고 보초가 서류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레버가 하루 늦은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버는 기차에 올라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에 다시 세 명의 병사가 승차를 했다. 하사관과 상처가 남아있는 병장, 나머지 한 사람은 포병이었다. 포병은 자리에 앉자마자 무엇인가를 먹기 시작했다. 임시 취사차가 역 구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젊은 학생 간호사가 철제 스와크치카를 브로치 대신 단 연상의 간호사와 함께 나타났다.
"커피!"
하사관이 말했다.
"잠깐만 보자고!"
"우리가 아냐."
병장이 대답했다.
"저것은 처음으로 출정하는 보충병 수송대에게 주는 거야. 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마 연설도 있는 모양이야. 우리에겐 그런 게 필요 없지만."
피난민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짐을 들고 두 줄로 서서 커피가 끓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친위대 장교 두 명이 멋진 승마복 차림에 장화를 신고 학처럼 구내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휴가를 끝내고 돌아가는 병사들 세 명이 객실로 들어섰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창문을 열고 상반신을 밖으로 내밀었다. 밖에는 아이를 안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레버는 아이에게 눈길을 주고 나서 여자를 바라보았다. 색깔이 바랜 여름 옷 밖으로 여자의 주름 잡힌 목덜미와 축 늘어진 유방이 드러나 있었다.
"그럼, 하인리히!"
여자가 말했다.
"그래. 조심해, 마리. 그리고 사람들에게 안부 전해요."
"네."
그들은 묵묵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악기를 든 사나이들이 그 여자의 옆에 서 있었다.
"멋있는데!"
병장이 말했다.
"젊으나 젊은 대포밥들이 음악의 전송을 받으며 출전한다. 이런 건 이미 옛날에 집어치워야 했는데."
"우리에게도 커피 한 잔쯤 선심 쓸 수 없을까?"
하사관이 말했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는 고참병의 자격으로 출전하는 거다!"
"밤까지 기다려야지. 그러면 나오는 게 있을 거야."
행진의 발자국소리와 구령이 들려왔다. 보충병이 도착했다. 그들은 거의 전부가 연소자들로 채워져 있었으며 건장한 연장자는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연장자들은 돌격대나 친위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수염을 깎을 필요가 없지."
병장이 말했다.
"저것 좀 보게, 저 젊은이들을! 어린애가 아닌가 말야. 일선으로 가면 저 사람들을 안고 싸워야 되겠지."
보충병들은 정렬을 했다. 하사관이 큰 소리로 구령을 하자 곧 정숙해졌다. 누군가가 연설을 시작했다.
"창문을 닫아!"
병장이 창밖의 아내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사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연설자의 음성은 마치 양철 성대에서 나오는 것처럼 꽝꽝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레버는 좌석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하인리히는 계속 창가에 서 있었다. 병장이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슬픈 눈빛으로 마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리도 똑같이 남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연설이 끝났다. 악기를 든 사나이들이 '독일 국가'와 '홀슈트 뷔셀'을 연주했다. 차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보충병들이 지정받은 객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커피를 들고 그들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잠시 후 간호사가 기차에서 내릴 때에는 손에 빈 통이 들려져 있었다.
"갈보년 같으니라구!"
병장이 말했다.
"고참병을 말려죽일 작정인가?"
구석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허겁지겁 먹고 있던 포병이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갈보라고 했다. 그건 그렇고 넌 대체 뭘 먹고 있는 거냐?"
포병은 샌드위치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돼지고기."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돼지고기라." 병장은 객실 안에 있는 병사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동의를 구했지만 포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인리히는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숙모님께도 안부 전해."
그는 간신히 말했다.
"네."
그들은 다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왜 출발을 안 하지?"
누군가가 물었다.
"벌써 6시가 지났어."
"아마 장군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장군이라면 비행기로 가시겠지."
그들은 다시 반 시간을 더 기다렸다.
"이제는 그만 가 보라구." 하인리히는 기다리는 동안 가끔씩 되풀이하여 말했다.
"기다리겠어요."
"꼬마에게 저녁을 먹여야지."
"천천히 먹여도 괜찮아요."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요셉에게도 안부를."
하인리히가 말했다. 포병은 잠들어 있었다. 이윽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잘 있으라구. 마리."
"당신도, 하인리히!"
기차의 속도가 차츰 빨라졌다. 마리는 기차를 따라 함께 뛰어오고 있었다.
"꼬마를 잘 키워야 해."
"알았어요. 하인리히, 당신도 조심하세요."
"알았어! 알았어."
그레버는 객차의 옆에 바짝 붙어서 달리고 있는 여인의 수심에 찬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남은 몇 초 동안만이라도 하인리히를 볼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듯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때 그는 언뜻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는 정거장의 창고 뒤에 서 있었다. 그때까지 기차 안에서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믿어지지 않았지만 오직 그녀의 얼굴만이 뚜렷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하인리히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잠깐만 비켜!"
그레버는 갑자기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어째서 정거장까지 혼자 왔는지 이유 같은 것은 알 필요도 없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말을 잊고 있었다. 그는 하인리히의 목덜미를 뒤로 끌어당겼다.
"리자에게도 안부를 전해!"
하인리히는 소란한 차량의 굉음을 누르겠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비켜줘! 내 아내가 저기 있어!"
그레버는 한쪽 팔로 하인리히의 어깨를 잡아서 세게 당겼다. 하인리히는 뒷발질로 그레버의 무릎을 걷어찼다.
"조심하라고!"
하인리히는 소리를 질렀다. 여자의 목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그레버는 하인리히의 무릎을 걷어차고 어깨를 흔들었다. 하인리히는 한쪽 손으로 창문을 잡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기차가 방향을 바꾸었다. 그레버는 하인리히의 어깨 너머로 간신히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자꾸만 작아지면서 그대로 창고 앞에 서 있었다. 그레버는 하인리히의 지푸라기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흔들었다. 아마도 그녀는 흔드는 손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손인지는 끝내 모르고 말 것이다. 정거장은 이미 보이지 않고 멀어지기만 했다. 하인리히는 맥없이 창가를 떠나버렸다.
"이 새끼."
그레버는 하인리히에게 충동적으로 달려 들려다가 멈추고 말았다. 하인리히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레버는 올렸던 손을 내렸다.
"악당!"
"그게 무슨 소리야?"
병장이 물었다.
25
이틀 후, 그는 소속 연대의 소재지를 찾아내고 중대본부에 보고했다. 특무상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다만 사무병이 홀로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마을은 그레버가 전에 보았던 위치보다 120 킬로미터나 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긴 어때?"
"지독하지. 휴가는?"
"그저 그렇지. 뭐 달라진 것이라도 있나?"
"그야 많지. 우리가 지금 어디 위치하고 있는지 보면 알걸."
"모두들 어디 갔지?"
"일개 소대는 참호를 파고 있고 또 한 소대는 시체를 묻고 있어. 오후에 돌아올 거야."
"여러 가지 변했나?"
"차차 알게 되겠지. 자네가 여기를 출발했을 때 누구누구 있었는지 난 잘 몰라. 보충병들이 많이 왔어. 모두 어린애들이야. 마치 겨울철 파리새끼처럼 맥없이 죽어가고 있지. 전쟁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 음, 중사 하나가 새로 왔어. 선임 하사관이 죽어버렸거든. 뚱보 마이네르트 말야."
"일선에서 전사했나?"
"아니야. 변소에 앉아 있다가 비계 덩어리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갔어."
사무병은 하품을 했다.
"형편이 어떤지는 곧 알게 될 거야. 그런데 자넨 왜 고국에서 다리에 파편이라도 맞지 않았지?"
"글쎄. 그럼 좋았을 텐데. 가장 좋은 생각은 살아있는 동안엔 떠오르지 않는 법이야."
"나 같으면 며칠 더 놀다 오겠어. 네 하나 빠졌다고 해서 신경을 쓰는 자는 아무도 없어."
"그것도 돌아오고 나서야 생각나던걸."
그레버는 마을을 살펴보았다. 마을은 그가 전에 주둔하고 있던 전방이나 다름이 없이 어디나 황폐되어 있었다. 한가지 다른 게 있다면 눈이 녹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것이 축축했다. 진흙은 마치 구두를 벗기려는 것처럼 꽉 잡고 놓지 않았다. 그러므로 큰길에는 송판을 길게 깔아놓았고 사람들은 그 위로만 다녔다.
날씨는 따뜻했다. 그레버는 고국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전방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그는 전선의 굉음에 귀를 기울였다. 격렬한 포성이 높아졌다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사무병이 지정한 방공호를 찾아서 빈 자리에 소지품을 놓았다. 그는 한 이틀 늦게 귀대하지도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마을의 전면에는 참호가 여기저기에 있었지만 지금 그곳은 물로 채워졌고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물에 젖어 있었다. 그레버는 되돌아왔다. 거리에서 중대장인 라에를 만났다. 라에는 안경을 걸친 학의 모습을 하고서 송판 위를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레버는 그에게 보고를 했다.
"자네는 운이 좋았어. 자네가 출발하고 나서 모든 휴가가 취소되었지."
그는 그레버를 보았다.
"어때, 다녀온 보람이 있었나?"
"네, 있었습니다."
"잘됐군. 여기는 흙탕물 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지. 모두 일시적일 거야. 곧 강화된 예비진지로 후퇴하겠지. 예비진지를 보았나? 그곳을 지나왔겠지."
"아닙니다."
"보지 못했나?"
"네."
"여기서 40 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지."
"그곳을 통과한 것은 어젯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겠지."
라에는 그레버의 표정을 집요하게 살폈다. 그는 무엇인가를 그레버에게 묻고 싶은 눈치였다.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네 소대장이 전사했어. 뮬러 소위 말야. 신임 소대장은 마츠 소위야."
"알겠습니다."
라에는 지팡이로 축축한 땅을 쿡쿡 찔렀다.
"이 모양으로 땅이 질면 소련군도 대포와 전차를 앞세우고 전진하지는 못할 거야. 덕분에 우리는 부대를 재편성할 수 있지. 모든 게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야. 안 그래? 돌아와 줘서 고맙네. 지금은 젊은 보충병을 훈련해야 할 고참병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그는 흙탕물을 건너뛰었다.
"그곳은 어때?"
"여기와 비슷합니다. 공습이 빈번합니다."
"그렇게 심한가?"
"다른 도시는 잘 모르겠지만 하루건너 한 번씩 공습이 있었습니다."
라에는 그에게 확실한 정보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레버는 침묵만을 지켰다.
오후에 분대원들이 돌아왔다.
"휴가병!"
임메르만이 말했다.
"왜 이런 난장판으로 돌아왔지? 어째서 탈영하지 않았어?"
"어디로?"
임메르만을 머리를 긁적거렸다.
"스위스로."
"그걸 모르고 있었군. 탈영병을 위한 특별 호화 열차가 매일 스위스로 출발하고 있어. 폭격을 받지 않도록 지붕에 적십자를 새기고 말야. 그리고 스위스 국경에는 '환영'이라고 쓰인 개선문이 나란히 서 있는데 말이지? 그런데 넌 언제부터 그런 말을 마음대로 하게 되었지?"
"나는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은 해. 우린 지금 후퇴하는 중이야. 패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100 킬로미터씩 퇴각할 때마다 말이 조금씩 자유로워지지."
임메르만은 옷에 묻은 진흙을 털어냈다.
"뮬러는 죽었어. 마이네케와 슈나이더는 후송을 했고. 뮤케는 엉덩이를 맞았는데 바르샤바에서 죽은 모양이야. 그리고 또 베르닝! 그는 오른쪽 다리를 잃고, 출혈이 너무 심해 죽어버렸어."
"힐슈만도."
그레버가 말했다.
"힐슈만? 그 녀석이 왜?"
"녀석도 죽었지?"
"바보 같은 소리 마! 그래, 저기 앉아 있잖아."
그레버는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과연 임메르만의 말대로 힐슈만은 술통 위에 앉아 반합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맙소사!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니, 저 녀석 어머니는 힐슈만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레버는 힐슈만에게로 갔다.
"네 어머니를 만났었지."
"그게 정말인가? 그럼 약속을 잊지 않았군? 난 네가 찾아가리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어."
"어째서?"
"난 여지껏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기대한 적이 없거든."
그레버는 그가 거의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우리 어머닌 어떠셔? 내가 잘 있다고 전해드렸나?"
"힐슈만, 네 어머니는 네가 전사한 걸로 알고 있어. 중대로부터 통지가 왔었나 봐."
"뭐라고? 그런 일이 어떻게?"
"네 어머니가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어."
힐슈만은 그레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난 거의 매일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고 있는데?"
"어머니는 그 편지는 네가 전에 보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어.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나? 힐슈만은 딱 한사람뿐이야."
"그건 그래. 누군가 고의로 그런 짓을 한 게 아닐까?"
"일부로 그런 장난을 할 녀석이 있을까?"
"혹시나 슈타인브레너가."
"그 녀석, 아직도 살아 있었나?"
"물론이지. 그 녀석은 특무상사가 죽고 나서 이틀간 본부에서 근무한 적이 있지. 마침 사무병이 입원을 했고."
"만약에 그런 짓을 했다면 그야말로 악랄한 문서위조 행위지."
"그렇지."
"그런 문서에는 라에가 서명하도록 되어 있어."
"우리 어머닌 그것을 알지 못해. 우리 어머니에겐 어떤 서명이나 마찬가지야."
그레버는 슈타인브레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악질적으로 장난을 했군. 도저히 믿을 수 없는데. 그런데 그 병신 같은 새끼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나를 교육시키기 위해서겠지. 난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어. 우리 어머닌 뭐라고 말씀하셨지?"
"의외로 침착하셨어. 넌 즉시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야 돼. 내가 말한 것을 그대로 쓰는 거야. 내가 방문했던 일을 기억하실 테니까 말야."
"어머니에게 편지가 도착하려면 오래 걸리겠지."
그레버는 힐슈만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다.
"함께 중대본부로 가지. 본부에서 정정 전문을 치게 하는 거야."
"그건 안 돼."
"왜? 그 이상의 일도 할 수 있어. 우리는 슈타인브레너를 고소할 수도 있는 거야."
"안 된다. 난 도저히 할 수 없어. 난 그것을 증명할 수가 없어. 더구나 고소도 할 수 없단 말야. 넌 그것을 모르겠어?"
"알겠어, 힐슈만."
그레버는 거칠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을 거야."
그레버는 저녁을 먹고 나서 슈타인브레너를 만났다. 슈타인브레너는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이 재빠르게 무엇인가를 탐색하고 있었다.
"고국의 사기는 어때?"
그레버는 반합을 내려놓았다.
"우리는 국경에 도착해서 친위대 장교로부터 국내의 정세를 한마디도 발설해서는 안된다고 경고를 받았어. 그렇지 않으면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슈타인브레너는 웃었다.
"난 친위대 소속이야. 내게는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어."
"그렇다면 더욱 말할 수 없지. 엄벌이란 군의 계획을 사전에 내통한 자로서 총살형을 받는 거야."
슈타인브레너는 웃음을 딱 그쳤다.
"넌 그럴듯하게 말하고 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다만 대위가 우리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을 뿐이야."
슈타인브레너는 교활한 눈초리로 그레버를 훑어보았다.
"너, 결혼했지?"
"어떻게 알았지?"
"난 무엇이든지 알고 있지."
"본부에서 보았군. 알면서 왜 묻지? 넌 본부는 잘 가지 않았잖아?"
"난 내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는 언제든지 본부에 있을 수 있어. 나도 이번에 휴가를 가게 되면 결혼할 생각이야."
"정말인가? 그런데 누구하고?"
"결혼 상대자는 친위대 사령관의 따님이야."
"그야 그렇겠지."
그레버가 빈정거렸지만 슈타인브레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혈통이야 서로가 일급이지."
그는 자신의 말에 열중해 있었다.
"난 노르딕 프리지안 계이고 여자 쪽은 라인 섹슨 계이지. 우린 양친으로부터 모든 원조와 인종상의 연금을 받기로 돼 있어. 아이들은 당연히 교육상의 특권을 받는다. 당에서 부여하는 이익의 일체를 수령할 수 있어. 5 년이 지나면 내 아내는 모범적인 어머니로서 부인 부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있지. 만약에 쌍둥이나 세쌍둥이를 낳는다면 총통께서 직접 이름을 지어주시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난 일생을 보장받는 거지. 자, 상상해 보라고!"
"지금 상상하는 중이야."
"바로 민족의 품종개량이지. 우리는 유대인을 근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혈종인 게르만인도 개조해야 돼. 새로운 지도자상의 민족으로 말야."
"넌 유대인을 많이 근절시켰나?"
슈타인브레너는 히죽히죽 웃었다.
"만일 네가 내 행동기록을 본다면 그런 걸 물어보는 게 미안할거야. 그 무렵에는 참 멋있었지!"
그는 비밀이라도 털어놓을 듯이 그레버에게로 몸을 내밀었다.
"난 말야. 전속 신청을 했어. 친위대 사단으로 복귀하려고. 거기로 가야 멋지게 솜씨를 발휘할 수 있지. 또 출세할 수 있는 기회도 많고. 아주 규모가 대단하지. 더러운 소련 놈들에게는 일일이 군법회의 같은 게 필요 없어. 그냥 송두리째 처치해 버리는 거야. 전엔 한나절 만에 폴란드인과 소련인 배반자들을 300 명이나 해치웠지. 그래서 여섯 사람이나 공로훈장을 받았어. 여기서 체포하는 건 시시한 게릴라들뿐이야. 그런 건 아무리 죽여 봤자 훈장을 받을 수 없어. 네가 없는 동안에 고작 6, 7 명을 처치했을 뿐이야. 소탕부대나 친위대의 보안부에선 하루에도 몇 천 명씩 잡아들이고 있지. 그러니까 출세를 하려면 그리로 가야 돼."
그레버는 대평원의 붉은 노을을 바라보았다. 새가 저녁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슈타인브레너라는 사나이는 완전한 당의 소산물이다. 녀석은 건강하며 완벽하게 육체적 단련을 받았지만 자기 자신의 사상은 찾아볼 수 없고 완전히 비인간적으로 훈련됐다. 이 녀석에게는 총기 수입이나 체조나 살인이나 모두 똑같은 일에 속한다.
"너, 힐슈만의 어머니에게 사망통지서를 발송했지?"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난 이미 알고 있었지."
"그래? 네가 무슨 수로?"
"알고 있어. 장난치고는 그럴듯하던데."
슈타인브레너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는 남이 비웃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언제나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만족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너 역시 그렇게 생각하나? 통지서를 받아 든 그 할멈의 상판을 상상해 봐!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냐. 힐슈만 녀석은 무서워서 끽 소리도 못할 테니까. 사무적인 착오라고 해명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거야. 흔히 있는 일이니까."
그레버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용기가 대단해."
"용기? 그만한 일에 무슨 용기가 필요하겠나! 장난으로 할 수도 있지."
"그렇지 않아. 반드시 용기가 필요하지. 그런 짓을 하면 다음에는 자기가 죽게 되니까."
슈타인브레너는 통쾌한 듯이 웃어댔다.
"바보 같은 소리 마라! 그건 할머니들이 지껄이는 미신이야."
"절대로 미신이 아냐. 그런 짓을 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고 있는 거야.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봐, 설마 그게 진실이라고 단정하는 건 아니겠지."
"난 진심으로 믿고 있어. 너도 믿어야 해. 이건 옛날부터 전해지는 게르만 민족의 신앙이야. 난 네 장화를 신고 싶지는 않아."
"머리가 돌았군!"
슈타인브레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제 웃지 않았다.
"난 그런 못된 짓을 한 녀석을 둘이나 알고 있어. 둘 다 죽어버렸지. 한 놈은 그래도 운이 좋았던 편이야. 실탄이 사타구니에 명중했으니까. 덕분에 성불구자가 되었지. 너도 그 정도로 면죄를 받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쌍둥이나 세쌍둥이는 낳을 수 없어. 그야 물론 다른 녀석이 대신 수고 좀 하면 되겠지만. 당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 피가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니까. 개인은 전혀 문제가 안 되는 거야."
슈타인브레너는 그레버를 잔뜩 노려보았다.
"이봐, 너 정말 이상해졌구나. 넌 전에도 그랬었나?"
슈타인브레너는 꼼짝않고 서 있다가 이윽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레버는 상체를 약간 뒤로 젖혔다. 일선으로부터 굉음이 들려오고 까마귀가 어지럽게 날아 다녔다. 그는 전방을 한 번도 떠나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자정에서 2시까지 척후를 나갔다. 그의 순회 구역은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곳곳마다 파괴된 건물의 잔해가 전선의 포화를 배경으로 새까맣게 서 있었다. 포구에서 토해내는 섬광으로 명암이 공존하면서 깜박깜박 하늘이 흔들렸다. 아무런 예감도 없이 일시에 고통이 밀려왔다. 그는 여행 중의 며칠 동안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마비되고 허탈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 온몸을 갈가리 찢어 놓는 것처럼 고통이 되어 새롭게 각인되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서서 기다렸다. 이런 마음의 흐트러짐은 적어도 냉정하게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평정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고 다만 모든 것을 상실했다는 고통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영구히 잃어버린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가교는 없었다. 그는 그의 내부로 온 신경을 돌렸다. 미세하나마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진창에 빠진 구두를 빼내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구두의 밑창에 축축한 흙뭉치가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소리 없이 흘렀다.
"지치겠는데."
샤우워였다. 그는 파괴된 가옥 앞에 서 있었다.
"적어도 사방 1 킬로미터 이내는 엿들을 수 있지. 그런데 넌 무엇을 하는 거야. 체조라도 하나?"
"샤우워, 결혼은 했을 테지."
"물론이지. 농장을 갖고 있는데 결혼을 안 할 수 있지. 여자가 없으면 농장은 지탱할 수 없어."
"결혼한 지 얼마나 됐지?"
"15 년 그런데 왜?"
"결혼하고 나서 그런 긴 세월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무슨 소리야! 도대체 무엇이 어떻다는 말인가?"
"자네를 항상 묶고 있는 쇠사슬 같은 것 말야. 무엇인가 항상 가슴속에 머물고 있으면서 언제나 그곳으로 가고 싶어 하나?"
"쇠사슬이라니, 무슨 뜻인가? 물론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지. 솔직히 오늘도 종일 그런 생각을 했어. 지금은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심어야 하는 시기지! 그런 생각을 하면 미칠 것만 같아."
"난 자네의 농장에 대해서 묻는 거 아니라 마누라에 대해서 묻는 거야."
"그것도 마찬가지야. 아까도 말했지만 농장은 여자가 없으면 절대로 안 돼.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됐다는 거야? 물론 걱정이야 되지. 더구나 임메르만은 전시의 포로들은 혼자 있는 여자와 동침한다는 말을 멋대로 지껄이고 있어."
샤우워는 코를 풀었다.
"그 녀석은 이렇게 떠들어대지. 여자가 한 번 남자 맛을 알게 되면 남자 없이는 도저히 안된다는 거야. 반드시 다른 사내를 찾는다는 거야."
"아아, 바보 같으니라구!"
그레버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그 쓸개 빠진 놈은 여자란 다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야말로 바보의 온상이지."
26
그들은 이미 구별할 수 없었다. 얼굴은 물론이고 군복조차 제대로 분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병사들은 철모를 보거나 목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아군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참호는 이미 오래 전에 무너져 내렸다. 유산탄의 구덩이와 방어진지의 꾸불꾸불한 선이 바로 전선이었다. 전선은 항상 변하고 있었으며 이미 비, 굉음, 야음, 폭발의 섬광, 흙탕물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드디어 제공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적군의 비행기가 분쇄한 것이다. 굵은 빗발이 사납게 뿌려지고, 그와 함께 폭탄이나 수류탄이 유성처럼 날아들었다.
탐조등의 불빛은 흩어진 구름 사이를 요란하게 왔다 갔다 했으며 고사포의 포화는 격동하는 지평선의 굉음을 뚫고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불덩이가 된 비행기가 순식간에 추락하고, 예광탄이 불을 토하는 비행기를 쫓아서 먼 곳으로 사라졌다. 황백의 낙하산 조명탄은 허공을 밝히고 있다가 벼랑에서 떨어져나가 듯이 사라졌다. 그러면 다시 맹렬한 사격이 발사된다.
12일째였다. 처음 사흘은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철조망을 가설한 진지는 포격을 잘 견뎌냈다. 마침내 외곽의 진지가 붕괴되었다. 방어선에는 적군의 전차가 돌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몇 킬로미터 후방에서 대전차포가 전차대의 돌파작전을 저지시켰다. 미명의 하늘 아래에서 전차가 마치 뒤집어진 딱정벌레처럼 전복되어 바퀴를 공전시키고 있었다.
징벌대대는 길을 정비하고 무전을 복구하기 위해서 투입되었다. 그들은 거의 엄호도 받지 않고 작업을 해야 했으므로 두 시간 동안에 반 이상이 희생되었다. 전투기의 엄호도 없는 폭격기가 철조망 진지를 향하여 저공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6일째는 진지의 절반 이상이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진지는 단지 엄폐물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군은 야습을 기도했으나 그대로 격퇴되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노아의 대홍수가 시작된 것 같았다. 병사들은 이제 동료의 얼을 보고도 구별조차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제각기 포탄 구덩이의 질퍽한 속을 같은 보호색을 지닌 벌레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다.
중대는 간신히 두 개의 기관총을 장치한, 파괴된 진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곳의 배후에는 소수의 투척병이 서 있었다. 다른 병사들은 포탄 구덩이와 파괴된 돌벽의 잔해 뒤에 잠복하고 있었다. 라에가 한쪽 진지를, 마츠가 다른 하나의 진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사흘이나 사수했다.
이틀째, 탄약이 거의 바닥났다. 소련군은 간단하게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잠잠했다. 해가 기울어 질 무렵, 독일군의 비행기 두 대가 날아와서 탄약과 식량을 투하했다. 병사들은 그중의 일부를 끌어당겨서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야간에 원군이 도착했다. 공병대가 통나무 길을 완성했다. 한 시간 후에는 포병에 의한 준비 포격도 없이 기습적으로 공격이 감행되었다. 전방 50 미터 거점에서 소련군이 갑자기 공격을 개시했다. 소련군이 던진 수류탄 중에는 불발탄도 여러 개 있었다.
작렬하는 섬광 속에서 그레버는 눈앞에서 철모를, 그 밑의 하얀눈, 크게 벌린 입 뒤로 수류탄을 던지려고 움직이는 적군의 팔을 보았다. 그는 재빨리 보충병의 수류탄을 빼앗아 움직이는 팔을 향해서 던졌다. 수류탄이 폭발했다.
"안전핀을 뽑으란 말야!"
그는 보충병에게 호통을 쳤다.
"당기지 말고 젖히라구!"
두 번째의 수류탄은 불발이었다. 그는 다시 수류탄을 던지면서 적군의 수류탄이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가 바닥에 바짝 엎드리는 것과 동시에, 등에 채찍으로 두들겨맞는 듯한 충격과 흙덩어리가 내려덮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뒤로 뻗으면서 고함을 질렀다.
"빨리, 빨리! 수류탄을 내 놔!"
그는 수류탄이 넘겨지지 않자 비로소 뒤를 돌아다보았다. 뒤에 있던 보충병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의 손에 잡힌 것은 물컹한 살덩어리였다. 그는 수류탄을 찾아서 마지막 두 개의 안전핀을 뽑았다. 적군의 그림자가 포탄 구덩이를 살며시 기어오르다가 훌쩍 뛰어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진흙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제는 잡혔다. 잡혀버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구덩이의 한쪽으로 달라붙었다. 이대로 있으면 진흙더미가 보호해 줄 것이다. 낙하산 조명탄의 빛이 보충병의 사지가 갈가리 찢겨져서 사방에 흩어진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었다. 수류탄이 보충병의 배에 맞아 폭발한 것이다. 그의 몸이 그레버를 구해준 셈이다.
그는 포탄 구덩이 속에서 머리를 내밀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오른쪽 진지에서는 기관총을 발사하고 있었다. 드디어 왼쪽 진지에서도 사격을 개시했다. 진지가 활약하고 있는 한 절대로 절망할 필요가 없다. 양쪽의 진지에서는 이 지점에 빗발 같은 탄알을 퍼붓고 있다. 적들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아군 진지의 일부분이 겨우 돌파됐을 것이다.
그는 진지의 뒤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머리가 지근지근했지만 의식만은 점점 또렷해졌다. 선명한 상념이 의식 속에 있었다. 이것이 노련한 병사와 보충병의 차이였다. 보충병은 지레 겁을 먹고 당황하기 때문에 한층 위험하다. 만약에 소련군들이 전진해 온다면 죽은 척하고 있으면 된다. 진흙탕 속에서 사람을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구덩이에서 기어 나와 다음 구덩이 속으로 재빨리 뛰어들었다.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다시 기어 나왔다. 그 구덩이 속에는 시체가 둘 있었다. 그는 앉아서 기다렸다. 그때 수류탄 소리가 들리고 왼쪽의 진지 근처에서 폭발하는 게 보였다.
소련군이 진지를 돌파해 양쪽에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기관총이 불을 토하고 있었다. 이윽고 수류탄의 폭발음이 잠잠해지더니 이번에는 사격을 개시했다. 그레버는 순식간에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적군은 또 공격을 가해 올 것이다. 놈들은 큰 구덩이부터 하나하나 병사들을 찾아낼 것이다. 작은 구덩이 속에 들어가 있는 게 안전하다. 갑자기 사나운 빗발이 쏟아졌다. 기관총에서 불이 번쩍번쩍 하다가 잠시 중단되더니 내리 포격이 시작되었다. 오른쪽 진지에 직격탄이 명중했다. 비가 내리는 전선의 아침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그레버는 여명이 떠오르기 전에 탈출할 수 있었다. 그는 무작정 뛰어가다가 움직일 수 없게 된 전차 뒤에서 샤우워와 두 사람의 보충병을 만났다. 샤우워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보충병은 배가 찢어져서 창자가 나와 있었다. 상처를 동여맬 만한 게 전혀 없었지만 설사 붕대를 감는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차라리 빨리 죽는 편이 좋았다. 다른 보충병은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그는 포탄 구덩이 속에 추락을 했는데 질퍽질퍽한 바닥에서 왜 다리가 부러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전차 속에는 새까맣게 탄 승무원들의 해골이 보였다. 연락 장교가 왼쪽 진지에서 빠져나왔다.
"진지 옆으로 집합!"
그는 목이 쉬어 소리가 재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 구덩이 속에도 누가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위생병이 있습니까?"
"모두 죽었거나 부상당했다."
장교는 진지로 갔다.
"군의관을 데려올게."
그레버는 배에 빗물이 스며들고 있는 보충병을 향해서 말했다.
"없으면 붕대라도 갖고 오겠어."
보충병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진흙위에 누워 있었다.
"들것에 태워서 너를 끌고 갈 수는 없어."
그레버는 다리가 부러진 병사에게 말했다.
"이런 진창을 끌고 다닐 수는 없어. 우리에게 매달려서 성한 다리로 깡충깡충 뛰란 말야."
그들은 양쪽에서 부상자를 부축하면서 구덩이 쪽으로 조금씩 옮기고 있었다.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한 발자국도 걸음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보충병을 진지 근처에 있는 벽의 잔해 뒤에 세우고 위생병이 발견할 수 있도록 벽에 철모를 걸어놓았다. 그 근처에 소련병이 두 명 엎어져 있었다. 한 사람은 목이 달아나 버렸으며 다른 사람은 땅에 쓰러져서 주위를 온통 빨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더욱 많은 소련병들의 시체를 보았다. 그에 못지않은 아군의 시체도 발견되었다. 라에는 왼쪽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한 시간 후에 보급기 한 대가 하늘에서 여러 개의 상자를 투하했다. 그러나 너무 앞쪽으로 떨어뜨렸기 때문에 적군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다시 7명으로 숫자가 늘어났다. 오른쪽 진지에도 몇 명인가가 모여 있었다. 마츠 소위는 전사했다. 라이네케 특무상사가 지휘를 대신해서 하고 있었다. 탄약은 조금밖에 남지 않았고 수류탄 투척병들은 모두 전사하였다. 그러나 중기관총은 아직 쓸 만했다.
징벌 중대로부터 열 명의 지원병이 왔다. 그들은 탄약과 통조림 등을 운반해 왔고 들것을 가지고 와서 부상병들도 실어갔다. 그중의 두 사람은 미처 전진하기도 전에 공중으로 날아가버렸다. 포격으로 오전 중에는 일체의 연락이 차단되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비가 그치고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전방의 날씨는 순식간에 무더워지고 진흙이 말라 딱딱해졌다.
"적은 경탱크로 공격해 올 거야."
라에가 말했다.
"제기랄, 대전차포는 어디 있지? 대전차포가 없으면 우리는 전멸이다!"
폭격은 멈추지 않았다. 오후에 융카 보급기 한 대가 다시 날아왔다. 보급기는 메사슈미트기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적군의 슈트르 모빅기가 나타나서 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적기 두 대가 격추됐다. 이어서 메사슈미트기가 두 대 떨어졌다. 융카기는 앞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보급상자는 훨씬 후방으로 떨어졌다. 메사슈미트기가 적기에 맞서 공중전을 전개하였다. 아군기는 소련기보다는 훨씬 속력이 빨랐다. 그러나 공중에는 아군기의 세 배에 해당하는 적기가 까맣게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아군기는 부득이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튿날, 시체 썩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레버는 진지 안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22 명이나 남았다. 라이네케도 이와 비슷한 숫자의 병사들을 반대편에 집합시켜 놓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전사했거나 부상당했다. 처음에는 120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그레버는 식사를 마치고 총기를 닦고 있었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단지 한 개의 기계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거기에 앉아서 대기하고 잠을 자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방어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적군의 탱크가 급습했다. 대포와 기관총 때문에 진지는 밤새껏 고립되어 있었다. 한밤중에 끊긴 무전은 몇 번이나 복구했으나 연결되는 즉시 절단되었다. 중대로부터 약속된 지원병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독일의 포병은 조금씩 약화되어 갔다. 소련군의 포화는 치열했다. 진지는 두 번이나 직격탄을 받았지만 견뎌내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진지라고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서 폭풍우를 만난 배처럼 흙탕물 속에 잠겨있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레버는 어깨에 경상을 입었지만 상처에 코냑을 약간 뿌렸을 뿐이다. 진지는 이제는 폭풍우를 만난 선박이 아니라 대해의 밑바닥에서 흔들리고 있는 잠수함이었다.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어둠 속에 뭉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레버는 불과 2주일 전에 거닐었던 고국의 도시는 이미 까맣게 잊었다. 휴가와 함께 엘리자베스라는 여인도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죽음과 죽음 사이에 내재한 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오로지 진지가 있을 뿐이었다.
소련군의 경탱크대가 전진을 개시했다. 보병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중대는 탱크를 그대로 통과시키고 뒤따르던 보병에게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달아오른 기관총의 총신이 병사들의 손에 화상을 입혔다. 그들은 쏘고 또 쏘고 마구 갈겨댔다. 소련군의 대포는 이미 그들을 포격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탱크 두 대가 반전을 하면서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기관총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병사들은 틈을 노려 간간이 저격했다. 진지가 비틀거린다고 느끼는 순간 콘크리트가 갈라졌다.
"수류탄!"
라이네케가 고함을 질렀다. 그는 한 다발의 수류탄을 어깨에 걸치고 입구 쪽으로 갔다. 그는 사격이 일제히 끝나자 진지의 엄호를 받으며 밖으로 기어나갔다.
"기관총 사수는 저 탱크를 공격하라!"
라에가 명령했다. 기관총은 불꽃을 내며 라이네케를 엄호했다. 라이네케는 한 다발의 수류탄으로 탱크를 폭파할 목적으로 천천히 우회하면서 탱크에 접근해 갔다. 그러나 그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소련군의 기관총이 다시 불을 뿜어댔다. 이윽고 한 대의 전차가 사격을 멈췄다. 아무도 탱크가 폭발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해치웠다!"
임메르만이 소리를 질렀다. 기관총은 다른 탱크를 향해 실탄을 퍼부었다. 드디어 탱크는 방향을 돌리더니 자취를 감췄다.
"여섯 대를 격파했다!"
라에가 외쳤다.
"놈들이 되돌아온다. 기관총은 일제히 사격 개시!"
"라이네케는 어디 있지?"
엠메르만이 물었다. 모두들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 라이네케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후에도 저항을 계속했다. 양쪽의 진지는 무너진 지 오래됐지만 사격은 멈추지 않았다. 탄약이 바닥이 나 있었다. 병사들은 휴대용 식량을 먹고 구덩이 속에 괴인 흙탕물을 마셨다. 힐슈만은 손에 관통상을 입었다.
태양이 구름을 뚫고 빛을 쏘아댔다. 진지는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진동했으며 평원에 버려진 시체들은 잔뜩 부풀어 올랐다. 잠들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잤다. 진지가 현재 고립되어 있는지, 후방과의 연락이 가능한지도 알 수 없었다.
밤이 되자 포격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 점점 소리가 커지던 포격이 갑자기 딱 그쳤다. 그들은 적군의 대습을 예상하고 밖으로 기어나갔다. 부동자세로 두 시간 이상을 기다려도 적군은 조용하기만 했다. 이 초조한 두 시간이 대격전보다 병사들을 더욱 애타게 했다.
드디어 소련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중대는 두 대의 기관총으로 싸워야만 했다. 그들은 포탄 구덩이 속에 진을 치고 그것으로 간신히 사수하고 있었다. 적군은 다시 후퇴를 했다. 소련군은 그들을 실제보다 강력하게 보고 있었다. 그 덕분에 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두 번째의 공격으로 샤우워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샤우워의 주검 앞에서 힐슈만이 허리를 구부리고 달리다가 푹석 넘어졌다. 그레버는 그를 구덩이 속으로 끌어당겼다. 총탄에 명중된 그의 가슴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그레버는 그의 상처를 살피다가 피에 젖은 지갑을 발견하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미 그의 어머니가 받았던 전사통지서는 이제 사실이 되어 버렸다.
아군은 제2의 방어선에 당도했다. 잠시 후, 또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예비진지가 제1선이 되었다. 그들은 다시 후방에서 집결했다. 중대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30명 정도였다. 이튿날은 지원을 받아 원래의 120 명으로 충원되었다.
그레버는 야전병원에서 프레젠버어그를 만났다. 막사에 임시로 설치된 병원은 시설도 아주 빈약했다. 그레젠버어그는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있었다.
"먼저 자르고 보겠다는 거야. 그래서 내일 후송되게 손을 써 놨지. 경험 있는 의사에게 보이고 싶어서."
프레젠버어그는 쇠로 된 틀을 무릎에 끼고 야전용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의 간이 침대는 활짝 열린 창가에 있었다. 창 밖에는 대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온 야생화의 향기와 병실의 썩는 냄새가 대비를 이루었다.
"라에는 어떻게 되었니?"
프레젠버어그가 물었다.
"팔을 맞았어. 경상이지."
"입원했나?"
"중대에 남았어."
"그렇겠지."
프레젠버어그의 얼굴이 움직였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절반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많이 있어. 라에도 그렇지."
"어째서?"
"체념이지. 희망도, 갈 곳도 없으니까."
그레버는 양피지처럼 창백한 프레젠버어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자네는?"
"글쎄 모르겠어. 우선 이것부터 어떻게 해야지."
그는 쇠틀을 가리켰다. 평원으로부터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상한데."
프레젠버어그가 말했다.
"눈이 내리고 있을 때, 이 나라에는 절대로 여름이 오지 않을 것 같았어. 하지만 여름은 어김없이 왔고 벌써 지긋지긋하단 말야."
"그래."
"고국은 어때?"
"글쎄 도저히 양쪽을 결부시킬 수 없어. 휴가와 전투를. 전에는 그게 가능했는데 지금은 안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어.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겠어."
"그걸 아는 사람은 없어."
"나만은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지. 그곳에 있을 때는 이만하면 됐다고 만족했었는데 이제는 모든 게 뒤죽박죽이야. 고국에서 나는 다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결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해."
"자넨 고통이 심하겠군."
프레젠버어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에는 생각지도 못한 게 있었어. 모르핀. 한 대 맞았는데 아직도 효과가 있어."
"병원 열차가 오나?"
"구급차지. 그게 가장 가까운 역까지 부상병들을 수송하는 거야."
"여긴 1명도 남지 않게 될 거야. 이제 자네마저 가 버리는군."
"아마도 놈들은 다시 우리를 만나게 할 거야. 그때 다시 와야지."
그들은 서로 마주보았다. 두 사람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난 그것을 믿어. 적어도 모르핀이 떨어지지 않는 한."
그는 그레버에게 손을 내밀었다.
" 조심하게."
그레버는 겨우 한마디 했다.
"물론이지. 지금은 물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야지. 생명의 원시적인 충동이야. 옛날엔 이렇지 않았어. 그것도 일종의 기만에 지나지 않을 거야. 그래도 그 속에는 희망의 조각이 묻혀 있었어."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젠버어그는 야릇한 미소를 절반만 보였다.
그레버는 중대가 배치돼 있는 마을로 돌아왔다. 짙은 저녁놀이 하늘의 색깔을 바꾸고 있었다.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질퍽하던 땅이 굳어졌고 버려진 밭에서 이름 모를 꽃들과 잡초가 자라났다.
일선에서 포성이 울려 퍼졌다. 불현듯 모든 것들이 낯선 존재로 다가오며 각각의 결합체가 산산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그레버는 이런 느낌을 왕왕 느꼈었다. 한밤에 문득 눈이 떠지고 자기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 분명치 않을 때, 이런 기분에 사로잡혔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인간은 언제든지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그레버는 두 손을 주머니에 감추고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늘 대하는 광경이었다. 황폐한 논과 밭, 소련의 석양, 그리고 아득한 전선에서 번쩍이는 섬광 변함이 없는 전선의 풍경과 함께 절망의 오한이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엘리자베스의 편지를 떠올렸다. 그녀의 따뜻함과 사랑의 감정이 손바닥으로 퍼져서 가슴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그것은 말끔히 정리된 방안을 밝히는 램프가 아니라 늪가의 어지러운 도깨비불이었다. 그 뒤를 따라가면 갈수록 수렁은 점점 깊어질 뿐이었다. 그는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하여 불을 밝히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집을 세우기도 전에 불을 먼저 밝혔던 것이다. 그는 그 불을 폐허더미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빛은 폐허를 더욱 쓸쓸하게 장식하였을 뿐이다. 그는 고국에 있을 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 빛을 열심히 뒤쫓았다. 따라가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믿으면서.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착오였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편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석양의 붉은 노을이 똑같은 색으로 종이를 물들였다. 그는 편지의 내용을 암기하고 있었지만 또 다시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는 그럴수록 자꾸만 고독해졌다. 휴가는 그토록 짧았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도 길었다.
그는 편지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편지를 본부에 와 있던 부모님의 편지와 함께 소중하게 간직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부질없는 일이다. 프레젠버어그의 말이 옳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다. 나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데 세계의 고민까지 떠맡을 수는 없다. 엘리자베스! 어째서 자기는 그녀를 마치 잃어버린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올렸을까? 나는 그녀의 편지를 갖고 있다. 그녀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마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마을을 재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거리에는 가로수가 폐허를 따라서 길게 이어졌다. 옛날에는 폐허 대신에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을 것이다. 이제 옛 자취는 간 데 없고 보충병이 버찌를 줍고 있었다.
27
"게릴라!"
슈타인브레너는 입술을 씹으며 소련인들을 주시했다. 그들은 마을 광장에 서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2 명씩 있었는데 여자 한 명은 무척 젊게 보였다. 그들은 모두 오늘 아침에 끌려왔다.
"게릴라 같진 않은데."
그레버가 말했다.
"틀림없다. 왜 아니라고 하지?"
"가난한 농부처럼 보이는데!"
슈타인브레너는 히죽히죽 웃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죄인은 하나도 없어."
'그건 그렇다. 네 녀석이 훌륭한 증거지.'
라에가 왔다.
"이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중대장이 물었다.
"여기서 체포했습니다."
특무상사가 대답했다.
"일단 감금하고 나서 명령을 기다릴까요?"
"여긴 할 일이 산더미 같다. 왜 연대로 보내지 않았지?"
라에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연대는 이미 일정한 위치가 없었다. 본부에서는 사람을 파견해서 포로들의 말을 들어 보고 나서 그들에 대한 지시를 내리는 게 고작이었다.
"마을에 영주의 저택이었던 집이 있습니다."
슈타인브레너가 말했다.
"거기에 창고가 있는데 문도 단단하고 쇠창살도 있습니다."
라에는 그를 보았다. 슈타인브레너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맡기면 포로들은 탈주를 기도할 것이고, 그것이 곧 그들의 최후가 될 것이다. 라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레버, 자네가 이들을 감시하게. 슈타인브레너에게 창고의 위치를 파악해서 안전 여부를 조사하도록. 그리고 반드시 보초를 세우고 나에게 보고하라."
포로 중의 한 사람은 다리를 절뚝거렸으며 젊은 여자는 맨발이었다. 슈타인브레너가 젊은 사내의 등을 툭 쳤다.
"이 새끼야! 빨리 도망가!"
사내가 뒤돌아섰다. 슈타인브레너는 키들키들 웃으며 팔을 들었다.
"달아나! 달아나라구! 넌 자유의 몸이다!"
인이 무슨 말인가를 소련어로 빠르게 말했다. 젊은 사내는 달아나지 않았다. 슈타인브레너는 장화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달아나란 말야! 이 바보새끼야!"
"그만둬!"
그레버가 제지했다.
"넌 라에의 명령을 들었지?"
"이놈들을 여기서 달아나게 하면 어떨까?"
슈타인브레너가 속삭였다.
"남자만 말야. 10미터 가량 갔을 때 뒤에서 쏘는 거야. 여자들은 감금했다가 어두워지면 젊은 여자를 끌어내는 거지."
"더 이상 간섭하지 말고 어서 꺼져! 포로들의 지휘는 내가 맡았어."
슈타인브레너는 젊은 여자의 풍만한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자의 짤막한 치마 아래로 미끈한 다리가 보였다.
"놈들은 어차피 총살당할 거야. 우리가 아니면 보안부가 직접 처치하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저 젊은 여자를 즐겁게 해줄 필요가 있어. 넌 휴가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되니까."
"닥쳐! 넌 네 신부감이나 생각하고 있어! 친위대 사령관의 따님 말야. 라에가 너에겐 창고의 위치를 알려주라고 했을 뿐이야!"
그들은 하얀 집으로 통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여기야."
슈타인브레너는 말끔히 수리된 작은 건물을 가리켰다. 건물은 석조물로서 쇠창살 문은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게 돼 있었다. 그레버가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마구간이나 창고로 사용했던 게 분명했다. 포로들은 도구가 없으면 밖으로 탈출할 수 없었다. 그는 일일이 검사를 해서 도구가 없는 것을 확인해 두었다. 그는 문을 열고 포로들을 한 사람씩 들어가게 했다. 따라온 두 명의 보충병이 총을 겨누면서 보초를 섰다. 그레버는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물에 빠진 원숭이새끼 같군."
슈타인브레너가 눈동자를 굴리면서 말했다.
"바나나! 바나나! 야, 이 원숭이들아! 바나나가 먹고 싶지 않나?"
그레버는 보충병들을 돌아다보았다.
"너희들은 이곳을 지키는 거야. 만약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모두 너희들 책임이다. 나중에 교대시킨다."
"너희들 가운데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는가?"
그는 포로들에게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중에 짚을 보내주기로 하지. 가자."
그레버는 슈타인브레너에게 말했다.
"푹신푹신한 침대도 바치지."
"가자! 너희들, 철저히 경계해야 돼. 알겠나?"
그는 창고가 안전하다는 것을 라에에게 보고했다.
"두 사람을 차출해서 감시하도록! 며칠 후, 정세가 호전되면 처리할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인원이 더 필요한가?"
"아닙니다. 창고는 안전합니다.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좋아, 그렇게 하자. 보충병은 빠른 시일 내에 전투 기술을 습득해야 된다."
라에는 도중에 말을 중단했다. 그는 무척 불안해 보였다.
"전황은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그럼 가 봐."
그레버는 소지품을 챙겼다. 그의 소대에는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밖에 없었다.
"간수가 되나?"
임메르만이 물었다.
"그럼, 거기서는 실컷 잘 수 있겠지. 보충병들을 훈련시키는 것보다 훨씬 낫지."
"잘 틈이 어딨어. 일선이 어떤지 알고 있나?"
"엉망진창이겠지."
"소련군이 여러 개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있어. 겨우 한 시간 동안 별별 소문이 다 떠돌고 있지 적들이 대공세를 취했어. 또 후퇴하게 될 거야."
"독일 국경을 넘어 퇴각한다면 이 전쟁이 중지될 것 같나?"
"넌?"
"아니."
"나도 역시. 도대체 조국의 누가 전쟁을 중지시킬 수 있지? 물론 참모본부는 어림도 없고. 절대로 책임을 떠맡지 않을 거야."
임메르만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앞서 전쟁때는 급히 임시내각을 수립해 뒷처리를 시킬 수도 있었지. 불쌍한 바보들은 목을 내밀며 휴전에 서명을 하고 일주일만에 조국을 배반했다고 비난을 받았어. 그러나 그런 일은 두 번씩이나 있을 수 없지. 전체주의 정부의 전면적인 패전뿐이야. 교섭상대가 될 당이란 게 없어."
"공산당을 제외한다면 말이지."
그레버가 씁쓸하게 말했다.
"난 잠이나 자겠어. 내 멋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소망이야."
그레버는 배낭을 들고 야전 취사장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수프, 빵, 소시지 등을 받았다.
이상할 만큼 조용한 오후였다. 보충병들이 짚을 갖다 놓았다. 일선에서 계속 포성이 들려왔지만 그것도 오늘만은 기세가 꺾인 것처럼 느껴졌다. 창고 앞에는 잔디가 깔리고 옛날에 산책을 하던 길의 가장자리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그레버는 창고의 맞은편에 보이는 정원 속에서 작은 집을 발견했다. 그곳에서도 창고를 감시할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책도 꽤 여러 권 있었으나 모두 비에 젖어서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그중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을 한 권 찾아냈다. 그는 이내 책을 덮었지만 삽화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움이었다. 본문이 프랑스어로 시작되는 책에는 무척 낭만적인 삽화가 들어 있었다.
그는 산책길을 따라서 걷다가 연못가로 나왔다. 연못에는 피리를 부는 반인반양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 석상도 책과 마찬가지로 제1차 대전 이전부터 존재한 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레버가 태어나기 이전의 시대였다. 전쟁도 또한 시대의 소산물이었다.
그는 연못가를 한 바퀴 돌고 나서 포로들을 가둔 창고로 되돌아왔다. 그는 쇠창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나중에 따로 만든 것이었다. 어쩌면 이 저택과 정원의 소유자가 저 쇠창살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파는 잠이 들었고 젊은 여자는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남자들은 선 채로 기울어 가는 태양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레버를 쳐다보았지만 여자는 결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포로 중에서 가장 연장자가 그레버의 거동을 일일이 주시했다. 그레버는 그곳을 떠나 풀밭에서 마음껏 뒹굴었다.
저녁이 되자, 보충병이 포로들의 식사를 운반해 왔다. 저녁식사는 완두콩 수프에 멀겋게 물을 탄 것이었다. 보충병은 포로들이 그것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접시를 가지고 돌아갔다. 잠시 후 돌아온 보충병이 그레버에게 보급된 담배를 내밀었다. 담배는 다른 날보다 훨씬 많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나쁜 징조였다. 훌륭한 식사와 담배의 다량 보급은 절박한 전투 전날에 한해서 지급이 되었다.
"오늘밤은 두 시간 이상 교육받을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보충병이 말했다. 그는 심각한 눈초리로 그레버를 보았다.
"전투 연습과 수류탄 투척과 총검술입니다."
"중대장님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무엇을 벌하기 위해서 그러는 게 아냐."
보충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치 동물원에 갇힌 짐승이라도 구경하는 것처럼 소련인들을 쳐다보았다.
"저들도 역시 인간이야."
그레버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소련인입니다."
"그래, 소련인이다. 총을 겨누고 여자만 한 사람씩 밖으로 나오게 해."
그레버는 지시를 내렸다.
"모두 구석으로 가. 그리고 할머니 혼자서 나오도록 해. 나중에 모두 나오게 해줄 테니까."
연장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을 했다. 포로들은 시키는 대로했다. 보충병이 총을 겨눈 가운데 노파가 앞으로 나왔다. 그레버는 물을 열어 노파를 밖으로 끌어내고 다시 잠궜다. 노파가 통곡을 했다 노파는 총살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 여자에게 말해. 다만 용변을 보게 하는 것뿐이라고."
그레버는 연장자에게 말했다. 연장자가 얼른 노파에게 말했다. 노파는 이내 조용해졌다. 그레버와 보충병은 저택의 한쪽으로 노파를 데리고 갔다. 노파가 그곳에서 나오자, 이번에는 젊은 여자를 밖으로 나오게 했다. 젊은 여자는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다. 남자들의 경우는 더욱 간단했다. 그는 그들을 창고 뒤로 끌고 가서 한눈 팔지 않고 지켜 서 있었다. 젊은 보충병은 사투라도 벌이는 듯한 태세로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레버는 다시 문에 자물쇠를 단단히 채웠다.
"가슴이 두근거리던데요."
보충병이 말했다.
"그래?"
그레버는 총을 내려놓았다.
"돌아가도 좋다."
그는 보충병이 눈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담배를 한 개비씩 나눠 필 수 있도록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성냥불도 쇠창살 안으로 넣어 주었다. 포로들이 모두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담뱃불이 어둠 속에서 빛나며 그들의 얼굴을 밝혀주고 있었다. 그레버는 젊은 여자가 눈에 띄자 엘리자베스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당신, 참으로 좋은 사람."
노인이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아주 천천히 말했다. 노인은 쇠창살에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전쟁 졌다. 독일군 당신은 좋은 사람."
"바보 같은 소리 마라."
"상관없소. 갑시다. 우리들과 가겠소?"
주름투성이의 얼굴이 젊은 여자를 향했다가 다시 그레버에게로 돌아왔다.
"우리 함께 갑시다. 그리고 숨어서 우리와 좋은 생활, 우리는 아무 죄 없어."
그 말은 매우 선명하게 전해졌다. 그레버는 그곳을 떠났다. 그들은 아무런 죄도 없을 것이다. 무기도 발견되지 않았고, 게릴라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만약에 그들을 풀어준다면 나는 무엇인가 보람 있는 일을 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죄 없는 인간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달아날 수는 없다. 그쪽으로는 갈 수 없다. 언제나 탈출하고 싶다고 갈망하는 그만의 세계로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샘터까지 거닐다가 다시 돌아왔다.
"가세요. 좋소. 우리와 함께."
그레버는 담배와 성냥을 노인에게로 디밀었다.
"이거 피라고. 오늘밤은."
"삽시다. 당신은 젊어. 그러면 당신은 전쟁, 끝입니다. 당신, 좋은 사람 우린 죄가 없습니다."
그것은 비록 낮았지만 결의가 든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살아요' 하는 말을 암거래 상인이 '버터'하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매춘부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절박한 심정으로 속이려는 것처럼. 마치 그것을 흥정이라도 하고 있는 듯이. 그레버는 그 소리에 차츰 이끌려가는 자기 자신을 느꼈다.
"닥쳐!"
그는 노인에게 호통을 쳤다.
"다시 한 번 그런 소리를 했다간 상부에 보고하겠다."
그는 주위를 순찰했다. 일선은 더욱 소란해지고 있었다. 첫 번째 별이 나타났다. 갑자기 고독에 사로잡히면서 차라리 참호의 악취 속에서 전우들과 함께 자는 편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을 청하기 위해 정원의 작은 집에 짚을 깔았다. 잠이 든 사이에 포로들이 탈출을 시도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선은 굉음으로 요란했다. 비행기가 요란스럽게 하늘을 날고 기관총이 콩 볶는 소리를 연달아서 냈다. 거기에 뒤섞여서 폭탄이 폭발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레버는 귀를 기울였다. 그야말로 대전투가 벌어진 것 같았다. 만약에 놈들이 창고를 파괴하고 탈출한다면 그는 밖으로 나와 창고로 갔다. 포로들은 모두 잠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노인의 창백한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 창고에서 벗어났다.
밤이 깊어졌다. 그는 일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음을 알았다. 대포는 아군 진지를 훨씬 넘어서 포격하고 있었다. 이제는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서도 포탄이 터졌다. 그레버는 아군 진지가 얼마나 약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교전의 단계를 하나하나 분석해 볼 수도 있었다. 곧 전차대의 총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그레버는 깜짝 놀라 잠을 깼다. 포탄은 이미 마을 위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는 창고를 바라보았다. 쇠창살로 소련인들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멀리서 슈타인브레너가 달려오고 있었다.
"후퇴다!"
슈타인브레너가 고함을 질렀다.
"소련군이 방어선을 돌파했다. 전원 마을에 집합! 모두 소지품을 휴대하고."
그는 그레버에게로 달려왔다.
"저 안에 있는 놈들을 즉시 처치해야지."
그레버는 자신이 긴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명령서는?"
"명령서?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냐! 넌 적군이 공격해 오는 소리도 안 들려?"
"들린다."
"그럼, 잘 알겠군. 놈들을 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대로 처치하자구."
슈타인브레너의 눈이 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안 돼. 여기 책임자는 나야. 명령서가 없으면 어서 꺼져!"
슈타인브레너는 웃었다.
"알겠어. 그럼, 네가 놈들을 쏘아라."
"싫다!"
"너나 나, 한 사람은 놈들을 처치해야 돼. 함께 끌고 갈 수는 없어. 이 병신아, 빨리 하란 말야. 자, 나도 협력하지."
"안 돼. 쏘지 마."
"안된다고?"
슈타인브레너는 눈을 치떠 보았다.
"안 돼?"
그는 천천히 되뇌었다.
"넌 네가 한 말을 알고 있나?"
"알고 있어."
슈타인브레너의 안색이 변했다. 슈타인브레너가 권총을 잡는 순간, 그레버는 총을 들고 그를 쏘았다. 슈타인브레너가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쓰러졌다. 그는 아이처럼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손에서 권총이 미끄러졌다. 그레버는 물끄러미 시체를 바라다보았다. 포탄이 정원 위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창고로 걸어갔다. 이윽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활짝 열었다.
"가라!"
그레버는 말했다. 소련인들은 그를 웅시했다. 그들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총을 떨어뜨렸다.
"가. 어서 나가란 말야!"
그는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말했다. 젊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밖으로 내딛었다. 그레버는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슈타인브레너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왔다.
"살인자."
그는 말했다. 그러나 누구를 향한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슈타인브레너를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살인자!"
그는 다시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것은 슈타인브레너와 자기 자신과 그밖에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의 희생자가 된 숱한 사람들을 향한 병사의 절규였다. 그때 여러 가지 상념이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의 안에서 돌멩이가 하나 튀어나간 것 같았다. 무엇인가가 영구히 결정되고 말았다. 이미 아무런 실체도 느낄 수 없었다.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탈진한 몸이 허공으로 날아오르지 않도록 꼭 붙들고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있었다. 그 무엇인가 중대한 일을 저질러야 한다!
그는 소련인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젊은 여자를 앞세우고 한 덩어리가 되어 허겁지겁 달아나고 있었다. 젊은 사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내는 뜻밖에도 총을 들고 있었다. 그는 총을 치켜들고 겨누었다. 그레버는 검은 총구를 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차츰 확대되었다. 그는 크게 부르짖고 싶었다. 급히 소리를 질러야 할 것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레버는 총에 맞은 것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그의 시야에 잡초가 들어왔을 뿐이다. 밟혀서 짓이겨진 한 포기의 풀이 점점 키가 커지고 있었다. 그는 전에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이 언제였을까? 그는 도저히 기억해 낼 수 가 없었다. 마침내 풀이 무럭무럭 자라나 온 하늘을 가리게 되었다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