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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와 죽을 때 2

11

공동묘지에는 햇빛이 비추고 있었다. 그레버는 포탄이 명중했다는 것을 알았다. 깨진 십자가와 묘비가 길바닥이나 주위의 무덤 위에 흩어져 있었다. 나무가 거꾸로 뒤집어져서 뿌리가 가지처럼 보이고 나뭇가지는 땅바닥을 기는 녹색의 뿌리가 돼 있었다. 마치 해조를 그대로 붙인 채 바다 속에서 끌어올린 이상한 식물과도 같았다. 무덤 안의 뼈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한데 쌓여 있었다. 교회 옆에 움막이 세워져 있었는데 감독 한 사람과 묘지기 두 명이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감독은 그레버의 이야기를 듣자 손을 흔들면서 거절했다.

"틈이 없습니다. 점심 전에 열두 구의 시체를 묻어야 합니다. 당신의 부모가 여기 묻혀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소? 묘비도 없고 이름도 없는 무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체를 대량 생산하고 있는 셈이죠."

"사망자 명단이 없습니까?"

"명단?"

감독은 묘지기들을 돌아보았다.

"이봐, 이분께서는 명단을 보시겠데. 들었나? 당신은 낮에 얼마나 많은 시체가 뒹굴고 있는지 알고 있소? 자그만치 이백입니다. 며칠 전에 공습이 있었을 때는 오백이었소. 그리고 지난번 공습에는 삼백이고. 불과 사흘 동안이오. 언제 또 공습이 있을지 모를 지경이오."

그레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담뱃갑을 꺼내서 탁자 위에 놓았다. 감독과 묘지기들이 그것을 살짝 보았다. 그레버는 잠시 동안 기다리고 있다가 이번에는 잎담배를 세 개 나란히 놓았다. 그것은 그가 부친에게 드리기 위해서 소련에서 특별히 가지고 온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감독이 말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겠습니다. 이름을 적어 주십시오. 한 사람이 묘지 사무소에 가서 물어보지요. 그 동안에 아직 기록되지 않은 시체들을 조사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쪽 교회 옆에 눕혀 놓았습니다."

그레버는 교회로 걸어갔다. 시신 중에는 이름이나 관, 꽃다발까지 있는 것도 있었지만 대개 흰 광목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름을 읽어보다가 이름이 없는 것은 광목을 일일이 들춰보았다. 그런 다음에 임시로 마련된 천막에 안치되어 있는 시체를 향해서 걸어갔다.

그중에는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은 것도 있었지만 대개의 시체들은 발견된 상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팔은 몸에 바짝 붙여놓고 다리는 곧게 뻗도록 하여 되도록 자리를 조금씩 차지하도록 했다. 침묵의 행렬이 통과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창백한 얼굴로 죽은 가족들을 찾고 있었다.

그레버는 그 행렬 속에 가담했다. 그의 앞에서 가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묵묵히 그녀를 지나쳐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행렬이 끝났을 때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레버는 되돌아왔다.

"교회에 들어가 보셨습니까?"

감독이 물었다.

"아니오."

"수족이 절단된 시체들이 거기 있습니다."

감독은 그레버를 바라보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지만, 당신은 군인이 아닙니까?"

그레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체들은 너무도 많이 보았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시체의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이라는 사실조차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시체라면 넌덜머리나게 보아왔다. 소련인, 네델란드인, 프랑스인 수족이 없는 시체들도 지금 여기서 목격한 시체와 마찬가지로 두 번 다시 바라볼 수 없는 끔찍한 것이었다. 소련의 추위에 그대로 동결된 시체, 부풀어 오른 머리, 찢어진 입술, 게다가 오십 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교수형을 받은 것들이 지금 본 것보다 훨씬 끔찍했던 것이다.

"묘지 사무소에는 기록이 없었소."

감독은 말했다.

"시에는 시체 안치소가 두 개나 있습니다. 가보셨습니까?"

"."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집단으로 매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그런 것은 재난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했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기술도 따라갈 수 없고 또한 종교상의 규정이 있지요."

그는 묵묵히 있다가 그레버에게 손을 흔들고 움막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충실하고 열성 있는 주검의 관리인. 그레버는 몇 분 동안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장례의 행렬이 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목사는 무덤에 기도를 하고 친족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빈딩그의 하얀 집은 아름다운 정원이 딸려 있었다. 잔디에는 새들의 연못이 있어서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앞에 황 수선화와 튤립이 피고 있었으며 나무들 사이에는 대리석으로 된 소녀상이 빛나고 있었다. 가정부가 문을 열었다. 백발의 여인으로서 흰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레버씨죠?"

"그렇습니다.

"대장님은 지금 안 계십니다. 당의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셨습니다. 당신에게 메모를 남기셨습니다."

그레버는 그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잘 포장된 병이 놓였고 그 옆에 편지가 있었다.

'지금 상태로는 자세히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너의 부모님이 사망했다거나 부상당했다는 보고는 없다. 아마도 지방으로 이동하셨을 거다. 내일 다시 들려주게. 보드카는 자네가 멀리 소련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축하하는 뜻이니 오늘밤 실컷 마셔주기를 바란다.'

그는 술병과 편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크라이네르트 부인이 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님은 안부도 전하셨습니다."

"내일 다시 들러겠다고 전해주십시오. 보드카도 고맙다구요."

크라이네르트 부인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대장께서는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친절하신 분이니까."

그레버는 정원으로 나왔다. 친절하신 분. 알폰스는 자기가 강제 수용소에 집어넣은 수학강사 부르마이스터에게도 친절했단 말인가? 아마도 모든 인간은 어떤 사람한테는 친절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반대이겠지.

그는 술병과 편지를 만져보았다. 축하하기 위하여. 도대체 무엇을 축하한단 말인가? 부모님이 아직 살아계실 것이라는 희망? 그런데 누구와 함께 축하하라는 것인가? 병영의 48 호실 사람들과? 그는 보드카를 엘리자베스 크루제에게 가져가기로 했다. 그녀라면 자기와 똑같은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나에겐 아직 아르마냑이 남아있다. 여인이 문을 열었다.

"크루제양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레버는 그대로 여자 옆을 지나치려고 했다. 여자는 문을 막고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

"쿠루제는 지금 집에 없습니다.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잘 알고 있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녀가 당신에게 말하지 않던가요?"

"전혀. 몇 시에 돌아옵니까?"

"7."

그레버는 엘리자베스가 외출했을 경우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보드카를 놓고 갈까 망설였지만 이 여자 스파이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도 있었다.

"좋습니다. 그 시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밖으로 나와 시계를 보니 6시 조금 전이었다. 지루한 밤이 다시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휴가중이란 걸 잊지 마라.' 로이타는 말했었지. 물론 잊지는 않았지. 그러나 잊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칼스푸라츠 광장의 벤치에 앉았다. 엄폐된 방공호가 커다란 두꺼비처럼 움츠리고 있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엘리자베스와 다시 만나리라고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만약에 그녀가 집에 있었다면 아마도 보드카를 그녀에게 주고 그대로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한 지금은 7시가 될 때까지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직접 문을 열었다.

"당신이라고는."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난 또 당신의 성문을 지키고 있는 스파이 할멈인줄 알았지."

"주인은 지금 집에 없어요. 국가 사회주의 부인단의 회의에 참석했어요."

"그렇지.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이지!"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여자가 없으면 이 안의 분위기도 다르군."

"지금은 입구에 불이 켜져 있어서 그렇게 보이고 있어요. 전 그 여자가 나가자마자 곧 불을 켜놓는 걸요."

"그 할멈이 있을 때는?"

"잔소리가 심해요. 그것이 바로 애국심이라는 것이겠죠. 모두가 암흑 속에 있지요."

"맞았어. 우리를 그런 곳에 가둬놓고 싶은 거야."

그는 술병을 꺼냈다.

"보드카를 가지고 왔어. 어느 돌격대장의 술 창고로부터 가지고 온 거야. 옛 동창의 선물이지."

"당신에게 그런 동창이 있었어요?"

"그래. 당신이 원하지도 않는 사람과 한 집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말야."

그녀는 웃으면서 술병을 받았다.

"병따개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아야지."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검은 스웨터에 역시 검은 타이트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없군요."

그녀는 서랍을 닫으면서 말했다. 그레버는 병을 들고 밑바닥을 탁 쳤다. 마개가 빠졌다.

"군대에서는 항상 이렇게 하지. 컵이 있을까?"

"내 방에 있어요."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또 외로이 하룻밤을 지내야 했는데 엘리자베스와 함께 있게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벽장에서 컵 두 개를 꺼냈다.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은 방의 분위기가 다르게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로 돌아섰다.

"우린 얼마 만에 다시 만난 거죠?"

"백 년은 되었을 거야. 난 어렸었고 전쟁 같은 것도 없었지."

"그런데 지금은?"

"어린 시절을 훌쩍 뛰어 넘어 나이만 먹었어. 신념도 상실했고 때때로 슬픈 생각이 들어."

"그게 정말이세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도대체 진실은 어디에 있지? 당신은 알고 있나?"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해야 할까요?"

"그렇진 않겠지. 그건 왜?"

"모르겠어요. 저마다 자기가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걸 다른 사람들도 믿게 된다면 전쟁은 이미 끝났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레버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관용이 결여된 셈이군."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버는 그녀의 컵에 보드카를 따랐다.

"한 잔 더 안 하겠어?"

엘리자베스는 망설이는 것 같았다.

", 들겠어요."

그는 보드카를 다시 따르고 병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오세요. 관용의 모범을 보여드리겠어요."

그녀는 앞장을 서서 입구를 지나 문을 열어 보였다.

"스파이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문도 안 잠그고 나갔어요. 그 여자의 방을 구경해 보세요. 그녀는 내가 집을 비우면 항상 내 방을 뒤지니까 신뢰를 배반한 건 아니죠."

방은 다른 가정과 다름이 없었지만 한쪽 벽에 꽃다발로 장식된 히틀러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 밑의 테이블 위에는 검은 가죽 표지의 '나의 투쟁'이 놓여 있었다. 책의 양쪽에는 은촛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 주위에 총통의 사진을 올려놓았다. 게다가 명예의 단검과 당원 배지. 그것으로 진열품들은 무게를 더 했다.

"그녀는 여기서 고발장을 쓰겠군."

"아니에요. 저기 있는 아버지의 책상에서 쓰고 있어요."

그레버는 그 책상을 보았다.

"그녀가 박사님을 고발했나?"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그 전부터 방 하나를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끌려가신 후, 하나 더 사용하게 되었어요."

그레버는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방 하나를 더 쓰기 위해서 고발했는지도 모르겠군."

"모르겠어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럴 수도 얼마든지 있어요."

"그건 그래. 그녀도 광신도 중의 하나 같은데."

"에른스트."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광신은 개인적인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지. 실제로는 일치하는 때가 많아. 이상하게도 인간은 항상 그런 사실을 잊고 있어. 아마도 사나운 독사는 자기 아이나 남편 같이 자신에게 귀중한 모든 걸 사랑하고 있었겠지. 그런데 도대체 그녀는 왜 당신 아버지를 무턱대고 고발하였을까?"

"아버진 선량한 분이지만 오랫동안 감시당하고 있었어요. 자기 집이라 해도 하루 종일 당의 연설을 들으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인간이 나타나는 법이에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지?"

엘리자베스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버진 독일의 승리를 믿지 않으셨어요."

"지금도 그것을 안 믿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어."

"당신도?"

"물론이지. , 저쪽으로 가지! 우물쭈물하다가 그 스파이한테 발각될지도 몰라!"

엘리자베스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발각될 염려는 없어요. 복도 문을 잠궈 놓았거든요."

그녀는 문으로 가서 빗장을 벗겼다.

"여긴 공동묘지 같군. , 저리로 가서 한잔 더 하지."

그는 보드카를 가득 따랐다.

"어째서 우리가 무척 나이가 들어버린 것 같은가를 알겠어. 너무 지저분한 것만 보았기 때문이야. 나이가 많으면 당연히 현명해야 할 사람들이 긁어모은 오물 말야."

"전 별로 나이가 든 것 같진 않아요."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기뻐할 일이로군."

"전 감금당한 것 같아요. 나이가 많다는 것보다 더욱 나쁜 일이죠."

그레버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당신도 고발할지 몰라. 이 아파트 전체를 독점할 생각인지도 모르지. 빨리 집을 옮기도록 해. 지금 세상이 어떻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 잘 알고 있어요." 엘리자베스는 말했다.

"내가 여길 떠나지 않는 한 아버진 언제라도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내가 만일 이곳을 떠난다면 아버질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죠. 아시겠어요?"

"글쎄 어쩔 수가 없군."

"그래요."

그녀는 술 한 잔을 단숨에 마셨다.

"왔어!"

두 사람은 입구에서 들려오는 발자국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밖에서 무엇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파이 부인이 한 바탕 욕설을 퍼붓고 나서 문을 쾅 닫았다.

"불을 그대로 켜놓고 있었어요."

엘리자베스는 살며시 속삭였다.

"우리 밖으로 나가요. 때때로 견딜 수가 없을 때가 있어요. 밖에 나가서 다른 얘기를 해요."

 

거리는 적막했다. 그들은 시내 쪽으로 들어섰다. 아파트 앞을 지나갈 때 창문마다 검은 색 커튼들이 죽음의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여 마치 시내 전체가 초상을 당한 것 같았다.

"모두 어디 있는 것일까? 오늘은 다른 날보다 조용하지 않는가 말야."

"이미 이틀째나 공습이 없었지요. 그래서 지금은 안심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나오는 건 공습이 있고 난 후의 일이죠."

"그것도 이미 습관화되었군."

"일선에서도 그렇죠?"

"그렇지."

그들은 파괴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실같은 구름이 하늘 한가운데로 흐르다가 빛을 가리고 있었다. 갑자기 벽돌더미 속에서 새까만 그림자가 나왔다가는 다시 들어갔다. 고요를 깨고 어디에선가 접시 부딪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고마운 일이로군요! 누군가가 먹고 있어요! 아니면 커피를 마시고 있거나. 어쨌든 살아 있어."

잠시 후, 그레버는 걸음을 멈추었다.

"엘리자베스, 집에 앉아 있는 것보다 더 쓸쓸한 생각이 드는데. 보드카를 가지고 올걸. 우리 술을 마시자고. 이 근처에 마실만한 데가 없을까?"

"난 술집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 그곳은 창을 엄폐해서 마치 감금된 것 같아요."

"그럼 막사로 가지. 남아있는 보드카를 밖에서 마시면 돼."

"좋아요."

고요를 깨고 마차가 그들을 향해서 달려 왔다. 마부는 고삐를 끌어당겼다. 엘리자베스는 말이 자기 몸을 스치지 않고 지나갈 수 있게 벽돌더미 위로 올라갔다. 말이 그 앞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그들은 병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기다려, 엘리자베스. 술을 갖고 올게."

그레버는 연병장을 가로질러 48 호실로 갔다. 로이타는 노름꾼들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베차는 어디 갔지?"

로이타는 책을 놓았다.

"또 허탕이래. 그래서 홧김에 자전거로 벽을 들이받았어. 울상이더군. 지금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지. 왜 그래? 무척 지친 것 같은데?"

"또 나가야 해. 잠깐 찾을 것이 있어서."

그레버는 배낭을 더듬어보았다. 소련에서 보드카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 빈딩그에게 받은 아르마냑도 있었다.

"아르마냑을 가지고 가게."

로이타가 말했다.

"보드카는 한 방울도 안 남았어."

"?"

"우리가 전부 마셔버렸어. 네가 진작에 내놨다면 좋았을 거야. 전우들 생각도 해야지. 하여튼 맛이 좋던데?"

그레버는 아르마냑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넌 어떻게 술을 구할 수 있었지?"

"샀어. 또 물어볼 것은?"

로이타는 싱글싱글 웃었다.

"없어. , 아르마냑을 가지고 어서 가게. 이 원시적인 카사노바. 수줍어하는 건 시간의 낭비야. 휴가는 짧고 전쟁은 길다."

그레버는 담배와 잔을 챙겼다. 그는 나오면서 룸메르가 여전히 열중해 있는 것을 보았다. 룸메르 앞에는 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병영은 이미 소등나팔을 불고 있었다. 그레버의 발자국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그는 넓은 광장을 가로질렀다.

"저런 아가씨를 잘도 나꿔챘군. 저건 장교용이야."

보초가 말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는 담에 기대어 얌전히 서 있었다. 그는 보초의 어깨를 두드렸다.

"새로운 규칙이 정해졌어. 일선에서 4 년간 버틴 자에게는 훈장대신에 저것을 받을 수 있어. 모두 장군의 딸들이지. 너도 일선 근무를 지원하라고. 그리고 이 멍청아, 근무 중에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수칙을 모르는가?"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로 가까이 갔다.

"너야말로 멍청이지."

보초가 그의 등에 대고 투덜거렸다.

 

그들은 병영 뒤에 있는 언덕 위에서 벤치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시내 전체가 내려다보았다. 시내 어디서고 불빛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강물만이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레버는 아르마냑을 절반쯤 따라서 엘리자베스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잔을 돌려주었다.

"맘껏 마셔. 오늘밤은 술을 마시기에 적당하군. 우리의 따분한 인생을 위하여, 우리가 아직 살아있음을 위하여. , 쭉 들이키자고."

"좋아요. 모든 것을 위하여."

그는 컵에 넘칠 정도로 술을 부어서 들이켰다. 온몸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도 허전했다. 아직까지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런 고통이 없는 허전함이었다. 엘리스베스는 벤치에 앉아 다리를 모으고 두 팔로 무릎을 껴안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밤나무의 싱싱한 잎이 달빛을 받아 파랗게 빛났다.

"새까맣군요."

그녀는 손끝으로 시내를 가리켰다.

"그런 것을 보는 게 아냐. 뒤를 봐, 경치가 달라."

언덕의 반대쪽에는 달빛이 뿌려지고 있는 도로, 마을 교회의 철탑, 숲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 속에는 이 세계의 모든 평화가 깃들어 있을 거야. 안 그래?"

". 잠시 뒤를 돌아보고, 저쪽만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곧 그렇게 될 거야."

"당신은 믿고 있나요?"

"물론이지. 안 그렇다면 이렇게 살아 있지도 않을걸."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에게 어깨를 기댔다.

"우리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이대로 있어요."

"좋아."

그들은 침묵 속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한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레버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깜박 잠이 들었었어."

"나도."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레버는 수중의 바위에 해초가 흔들리듯이 자기가 편안히 잠들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소련에서 귀국한 후, 처음으로 평화를 느꼈다. 그들은 시내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다시 그들을 삼키고 싸늘한 취기가 몰려들면서 밀폐 당한 검은 창이 영구차의 행렬처럼 그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옛날에는 집이나 거리에 빛이 가득 차 있었어요. 난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었지요. 이제야 비로소 없어진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겠어요."

그레버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맑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비행사들에게는 좋은 밤이었다.

"유럽은 거의 모두가 이런 형편이지. 다만 스위스만이 아직 밤에도 밝을 뿐이야. 비행사들이 중립국이란 걸 알게 일부러 밤에 환히 밝혀 놓고 있지. 비행편대를 거느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전선에 출동했던 친구가 내게 말해줬어. 스위스는 산의 섬이자, 빛과 평화의 섬이라고. 한쪽은 이미 다른 한쪽을 갖고 있지. 그 섬의 주위에는 암흑으로 덮여 있어. 독일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들이 빛 대신 암흑을."

"빛은 우리를 인간답게 했어요."

엘리자베스는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거부하고 다시 혈거인이 되었어요."

빛은 과연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었을까? 그레버는 의심스러웠다. 너무 엄청나게 들리지만 엘리자베스의 말이 옳을는지도 모른다. 동물은 빛을 지니고 있지 않다. 빛도 없지만 불도 없다. 그리고 폭탄도 없다. 그들은 마리가에 서 있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를 보지 마세요. 술을 왜 마셨는지 난 술을 마시지 못해요. 긴장감이 풀리면서 어쩐지 자꾸만 슬픈 생각이 들어요."

"나도 마찬가지니까. 이것도 그 중의 하나야."

"어떤 것?"

"아까 우리들이 얘기한 것 말야. 뒤돌아서서 반대 방향을 보지 말아야 해. 내일 밤은 거리를 방황하는 건 그만두지. 어딘가 밝은 곳으로 가기로 하지. 내가 찾아볼게."

"그러면 나보다 더 명랑한 여자를 구해야 돼요."

"난 그런 것은 필요 없어."

"그럼 무엇이 필요하죠?"

"난 명랑한 상대는 필요 없어. 동정하는 건 정말 싫어. 그런 것들은 낮에 얼마든지 만났어."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래요. 잘 알고 있어요."

"우린 그들과 달라. 형식적인 건 싫어. 내일 저녁, 시내에서 가장 밝은 곳으로 가서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시자. 단 하룻밤만이라도 유쾌하게 지내는 거야."

그녀는 그를 보았다.

"그것도 그 중의 하나인가요?"

"그렇지, 그 중의 하나이지. 당신의 옷 중에서 가장 멋있는 것을 입고 나와."

"좋아요. 8시에 오세요."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입 언저리에 닿아 있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부드러운 바람 같았다. 그가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엘리자베스는 집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12

"좋아! 인정할 수 있어."

베차가 말했다.

"난 술집 여편네와 잤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지. 난 뭔가 해야만 했어! 아니면, 휴가고 뭐고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난 순진한 송아지새끼처럼 그대로 일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단 말야."

그는 펠드만의 침대에 걸터앉아 커피가 가득 든 반합 뚜껑을 들고서 두 발을 물통 속에 담그고 있었다. 자전거를 부수었기 때문에 발이 부르텄던 것이다.

"그런데 자네는?"

그레버에게 물었다.

"오늘은 무엇을 했어? 아침에 나갔었나?"

"아니."

"나가지도 않았단 말인가?"

"이 녀석은 잠만 잤어."

펠드만이 말했다.

"아침부터 아무리 떠들어대도 일어나지 않더군."

베차는 물통에서 다리를 빼고 발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발바닥이 잔뜩 부어오르고 있었다.

"이것 보라구! 난 기운깨나 쓰지만 발은 어린애처럼 부드러워.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지. 이런 발로 새 출발을 해야 되는데 말야."

"왜 그러지? 좀 더 기분을 낼 수 있을 텐데."

펠드만이 빈정거렸다.

"여주인을 정복하지 않았는가 말야."

"아아, 그 여편네! 집어치워!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어. 더구나 난 환멸을 느꼈어."

"일선에서 돌아온 자들은 처음엔 실망을 하지. 그건 누구나가 그래."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냐. 일이 제대로 되기는 했어. 그렇지만 썩 좋은 여자라고 할 순 없었어."

"단 한 번에 생각대로 할 수 있는가. 여잔 우선 분위기를 맞혀줘야 한다구."

"넌 아직 내 말은 못 알아들었어. 그녀는 정말 굉장했어. 그러나 두 사람의 영혼까지 합쳐지진 않았단 말야. 우린 한 이불 속에서 열심히 일을 진행하고 있었어. 글쎄, 전투가 막 벌어지고 있는 판에 난 너무 열중한 나머지 아르마라고 부른 거야. 그녀의 이름은 루이제야. 아르마는 내 마누라고."

"저런!"

"그건 실책이야."

"꼴좋다."

노름 패거리들 중에서 한 사람이 말했다.

"그것을 보고 부정에 대한 천벌이라고 하는 거야. 그 여자가 널 실컷 두들겼으면 좋았을걸!"

"부정이라고 누가 말했지?"

베차는 두 다리를 내려놓았다.

"네가 말했지 않아! 아니면 바보냐?"

응수한 사내는 머리가 계란처럼 생기고 키가 작은 남자였다. 그는 독살스럽게 베차를 노려보았다. 베차는 잔뜩 약이 올랐다.

"저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는 주위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부정이란 말을 입 밖에 낸 것이 너 하나 뿐이야! 미련한 놈! 만약에 마누라가 곁에 있는데도 딴 여자가 잔다면 부정하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마누라는 여기 없어. 요는 그것이 문제야! 그것이 어째서 부정인가? 난 내 마누라만 만났더라면 그 여편네쯤 우습게 알았을 거야!"

"성인군자 같은 말씀에 일일이 신경 쓰지마."

펠드만이 베차를 위로했다.

"저 놈은 질투하는 거야. 한데 네가 루이제라고 부르니까 그 여잔 어쨌지?"

"루이제? 루이제가 여냐. 루이젠 그녀의 이름이야. 난 아르마라고 불렀어."

"그렇지, 아르마였지. 그래 어떻게 되었지?"

"여잔 도무지 알 수 없단 말야. 웃거나 수다를 떠는 대신 훌쩍훌쩍 울고 있었어. 악어 같은 눈물을 흘리는 꼴이라니. 생각해 보게. 몸집이 큰 여자는 우는 게 아냐."

로이타는 기침을 하면서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베차를 바라보았다.

"?"

"어울리지 않아. 몸집이 큰 여잔 울지 말고."

"네 마누란 네가 루이제라고 부른다면 웃을 거라고 생각하나?"

계란 머리가 독살스럽게 물었다.

"만약에 나의 아르마가 거기 있었다면."

베차는 태연하게 권위까지 내세우며 말했다.

"난 우선 내 앞에 있는 맥주를 마시지. 그런 다음에 다시 남은 술들을 모조리 마셔버리는 거야. 마지막에 내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녀가 어찌나 사랑해주는지 구두 한 짝밖에 남지 않았어. 나의 아르마였다면 그 정도는 된다, 요 계란 대가리야!"

계란 머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말에 압도당한 것 같았다.

"그래서 넌 그런 아르마를 배반했군."

마침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난 내 마누라를 배반하지 않았어. 내 옆에만 있었다면 그런 여자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단 말야. 이건 배반이라고 할 수 없어. 정당방위라구, 이 새끼야!"

로이타는 그레버를 보았다.

"넨 어젯밤 그 아르마냑으로 어떤 공로를 세웠지?"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펠드만이 물었다.

"그런데도 송장처럼 축 늘어져 잠만 잤나?"

"그럼 왜 그렇게 피로를 느꼈는지 악마가 아니라면 도저히 모를 거야.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잘 수 있지. 마치 일주일 내내 한잠도 못 잔 것 같아."

"그럼 또 잠이나 자게."

"현명한 충고지."

로이타가 말했다.

"뭐니 뭐니 해도 수면의 대가이신 펠드만 선생의 충고니까."

"펠드만은 당나귀야."

계란 머리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는 오로지 잠으로 휴가를 보냈어. 휴가를 오기나 했는지 모르겠군. 차라리 일선에서 잠이나 자면서 휴가를 가 꿈이나 꾸는 게 낫지."

"그건 네가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사실은 그 반대이지."

펠드만이 반격을 가했다.

"난 잠을 자고 있을 때는 일선에서 싸우는 꿈을 꾸고 있어."

"그런데 넌 실제로 어디 있지?"

로이타가 물었다.

"뭐라고? 그야 물론 뻔하지."

"너 그게 확실하니?"

계란 머리가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바로 그거야. 계속 잠만 잘 바에야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란 말야. 멍청한 놈, 그것도 모르니?"

"그래도 잠을 깼을 때는 달라." 펠트만이 갑자기 화를 내더니 그대로 침대에 벌렁 누웠다.

로이타는 그레버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넌? 도대체 너의 영혼을 위해서 오늘 무엇을 할 생각인가?"

"어디로 가면 훌륭한 식사를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나?"

"혼자서 가나?"

"아니."

"그러면 게르마니아에 가게. 거기밖에 없네. 다만, 곤란한 건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런 전투복 차림으로는 어림도 없어. 장교용 호텔인데 레스토랑이 있어. 아마도 웨이터는 너의 훌륭한 모습에 경의를 표하겠지."

그레버는 자기의 초라한 군복을 내려다보았다.

"상의를 빌려줄 수 없겠나?"

"좋아. 그런데 넌 나보다 훨씬 가벼워. 그런 꼴로는 도저히 입구를 통과시켜 주지 않을 거야. 내가 어디 네 몸에 맞는 하사 정복을 빌려 보지. 바지도 함께. 그 위에 외투를 걸치면 아무도 눈치 챌 수 없지. 한데 넌 어째서 아직도 졸때기지? 이미 소위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하사관으로 진급했었는데 소위를 때려서 강등 당했어. 그때부터 진급이 중지되어 만년 졸개 신세지."

"좋아. 그럼 넌 하사관의 복장을 할 만한 도덕상의 권리가 있어. 만약에 부인과 함께 게르마니아에 가면 와인은 G. H. 폰 뭄 제조의 1937 년산 요하니베르게르 콕스베르그를 주문하게. 이건 죽은 사람도 무덤에서 나오게 하는 최고급이지."

 

안개가 끼고 있었다. 그레버는 다리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강물은 쓰레기를 가득 띄우고 천천히 흘러갔다. 안개 저편으로 학교가 보였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리를 건너 교정으로 향하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습기가 차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커다란 철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교문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텅 빈 교정을 가로질러 강가로 갔다. 강을 마주보며 축축한 벤치가 놓여 있었다. 그레버는 항상 거기에 앉았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 무렵에 그가 꿈꾸고 있었던 것들은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는 학교에서 곧바로 전쟁터로 향한 것이었다.

그레버는 묵묵히 강물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침대조각이 강물에 떠내려와 기슭에 박혀 있었다. 그 옆에 물에 젖은 베개가 해면처럼 뒹굴고 있었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되돌아 와서 교사 앞에 서서 잠깐 망설이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레버는 현관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침한 층계와 강당, 회의실로 통하는 까만 문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감명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폴만을 생각했다. '가 봤자 해로울 뿐'이라고 했던 그 녀석의 말이 맞았어. 그는 어쩐지 허전해지고 있었다. 교문을 나온 이후에 스스로 터득한 것들을 교실에서 배운 것과 완전히 모순되고 있었다. 교육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입구 양쪽에 전사자를 위한 기념사진이 있었다. 오른쪽의 사진은 1차 대전 당시의 전사자를 기념하고 있는 것이었고, 왼쪽의 사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이번 전쟁에서 쓰러진 자들을 위해서 마련된 것이었다. 교정에서 수위를 만났다.

"무엇을 찾고 있소?"

노인이 물었다.

"아닙니다. 아무 것도 찾지 않습니다."

그레버는 그대로 걸어가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되돌아왔다.

"폴만 선생님의 주소를 알 수 없습니까? 여기서 교편을 잡던 분입니다."

"그분은 이미 그만두셨소."

"알고 왔습니다. 그런데 어디 살고 계실까요?"

수위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전에는 얀프라츠 6번지에서 살았는데 아직도 거기 계신지 잘 모르겠소. 당신은 이 학교 학생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심메르씨는 아직도 근무하십니까? 교장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수위는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물론 계시지요. 또 여기 계실 수 없는 이유도 없습니다."

 

그레버는 계속 걸었지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짙은 안개 때문에 폐허가 된 거리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폐허는 어디고 다 비슷비슷해서 거리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조금씩 안개에 잠기고 있었다. 마치 자기 자신이 자진해서 말려들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마침내 하겐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옛 집터로 가서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전갈도 없었다. 돌아서려는 순간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리에는 인적이 끊겨 있었다.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그레버는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습 경비원이다.' 그는 생각했다. 그 미치광이다. 틀림없는 것이다. 그는 정면만이 서 있는 건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사람이 안락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 의자는 그의 옛 집터에 있던 의자였다.

"왜 그래?"

공습 경비원은 깜짝 놀라 큰소리로 물었다.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저건 무슨 소리입니까? 어디서 들리고 있습니까?"

경비원은 축축한 얼굴로 그레버에게 가까이 댔다.

"군인 아저씨로군! 조국의 수호자! 저것이 뭐냐고? 자네에겐 잘 들리지 않나? 저건 생매장당한 영혼들을 위한 진혼곡이야. 구원을 청하는 부르짖음이야. 빨리 파내 줘! 빨리 파내 줘!"

"바보 같은 소리!"

그레버는 서서히 밀려가는 안개 속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전선 같은 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흔들릴 때마다 야릇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폐허의 높은 곳에 걸려 있던 뚜껑이 없는 피아노를 생각해 냈다. 전깃줄이 드러난 건반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피아노다!"

"피아노! 피아노!"

경비원은 그레버의 흉내를 냈다.

"넌 저게 무언지 알고나 있나? 이 비양심적인 살인자! 장례식을 알리는 종소리인데 바람이 치고 있는 거야. 바로 하늘이 종을 치게 하고 자비를 베푸는 거야. 이 지상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자비를. 너 같은 야만족들이 죽음이란 무엇인지 알기나 하나?"

경비원은 그레버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처에 시체가 있어."

경비원은 소근거렸다.

"어디를 가나 시체가 있네! 시체는 가슴을 딱 벌린 채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네놈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처치할 거야."

그레버는 거리로 나왔다.

"모조리 처치하는 거다."

경비원은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사자들을 위하여 하나하나 심판을 행하는 거다."

그레버는 더 이상 그를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소용돌이 치고 있는 안개 속에서 그의 쉰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레버는 무턱대고 걷고 있었다.

"죽어라."

그는 중얼거렸다.

"하루빨리 죽어서 네가 지금 머물고 있는 죽음의 섬에 묻혀 버려라!"

 

그레버가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즉시 문이 열렸다. 마치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어머나, 당신이었군요!"

루젤 부인이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그렇소."

그레버는 엘리자베스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이번에는 루젤도 아무런 소리 없이 물러갔다.

"들어오세요, 에른스트. 곧 준비하겠어요."

그는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이것이 당신의 옷 중에서 가장 멋있는 건가?"

그는 엘리자베스가 입고 있는 검은 스웨터를 가리켰다.

"오늘밤에 외출한다는 것을 잊었어?"

"그것이 정말이었던가요?"

"물론이지! 나를 봐. 이것은 하사관의 정장이야. 내 친구가 빌려주었어. 당신과 함께 호텔 게르마니아로 가라고 했어. 그런데 장교가 아니라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건 당신에게 달려 있어. 다른 옷은 없어?"

"있지만."

그레버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보드카를 보았다.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 그런 것 잊어 버려. 루젤도, 이웃들도 모두 잊는 거야. 당신은 가끔씩 이곳을 빠져나가야 돼.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거야. , 보드카를 한 잔 마시라구."

그는 보드카를 따라서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좋아요. 실은 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몰라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잠깐 밖에 계세요. 타락했다고 루젤 부인에게 밀고 당하기는 싫으니까."

"밀고를 해도 소용없어. 군인을 상대하는 건 애국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밖에서 기다리지."

그레버는 바깥에서 서성거렸다. 안개는 많이 걷혔지만 아직도 집들의 벽과 벽 사이에서 맴돌았다. 갑자기 2층의 창문이 열렸다. 양손에 드레스를 하나씩 든 엘리자베스가 어깨를 창밖으로 내밀었다. 드레스가 바람에 날렸다. 하나는 금빛이고, 다른 건 색을 잘 분간할 수 없는 검은빛이었다.

"어느 것?"

그는 금빛을 가리켰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창문을 닫았다. 그레버는 주위를 살폈다. 인적이 없는 거리는 몹시 어두웠다. 등화관제 위반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밖으로 나왔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색의 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녀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루젤 부인이 보았소?"

", 보았어요. 그녀는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어요. 그 여잔 내가 누더기를 걸치고 슬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난 어쩐지 마음에 걸려요."

"마음에 걸리는 건 오히려 그럴 필요가 없는 인간들이야."

"난 두렵기까지 해요. 당신은."

"아니, 난 아무 생각도 안 해. 오늘밤에는 모든 걸 잊어버려. 이제부터 우린 단 한 번이라도 유쾌한 추억을 남길 수 있을까 시험해 보는 거야."

호텔 게르마니아는 파괴된 건물들 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호텔은 가난한 친척들 사이에 끼여 있는 돈 많은 여자와 같았다. 벽돌더미는 깨끗이 치워져 있었기 때문에 폐허에서 죽음의 흔적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안내인은 손님의 가치를 파악하는 것 같은 눈초리로 그레버의 군복을 훑어보았다.

"주연실은 어디지?"

그레버는 상대방이 말하기도 전에 딱딱하게 물었다.

"홀은 오른쪽 끝에 있습니다. 지배인이신 프리츠씨와 말씀해 주십시오."

그레버와 엘리자베스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소령과 대위 두 사람이 그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레버는 경례를 했다.

"여기는 장군들이 우글우글하는 모양이야. 그리고 2층에는 군사기관이 있지."

엘리자베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다면 너무 당돌하지 않아요. 혹시 발각되면 어떻게 하지요?"

"발각된다고? 하사관의 흉내는 보통이야. 나도 전엔 하사관이었어."

빼빼 마른 여자를 동반한 육군 중령이 나타났다. 중령은 그레버의 머리 너머로 정면을 보면서 걷고 있었다.

"만약에 발각되면 어떻죠?"

"별게 아니지."

"혹시 총살당하는 건 아닌가요?"

그레버는 살며시 웃었다.

"엘리자베스! 설마 그럴 리가 있을라구. 일선에선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럴 순 없어."

"그러면?"

"별게 아냐. 2주일 정도 구류를 받겠지. 2주일 동안 휴식인 셈이지. 어차피 2주일 후에는 일선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조금도 겁나지 않아."

지배인인 프리츠가 오른쪽 통로에서 나타났다. 그레버는 지폐를 한 장 슬며시 손에 쥐어주었다. 프리츠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물론 주연실로 가시겠죠?"

그는 앞장서서 그들을 안내했다. 프리츠는 기둥 옆의 테이블로 안내를 한 다음에 공손한 태도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이 정도는 돼야지. 분위기에 익숙해지려면 다소 시간이 걸리겠군. 당신은 어때?"

그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당신은 틀리는데."

그레버는 경탄했다.

"당신은 마치 단골손님 같군."

학처럼 생긴 나이 지긋한 웨이터가 메뉴를 가지고 왔다. 그레버는 메뉴를 받았다가 지폐 한 장을 끼워서 돌려주었다.

"우린 메뉴에 없는 게 먹고 싶은데 갖다줄 수 있을까?"

학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메뉴에 적혀 있지 않은 건 없습니다만 ."

"알았어. 우선 G. H. 폰 뭄 제품인 요하니스베르게르 콕스베르그 1937년산을 한 병 갖다 주게. 너무 차지 않은 걸로 말야."

학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잘 알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경의를 표하면서 말했다.

"지금 오스텐드 카레이가 들어와 있습니다. 아주 신선하죠. 여기에 벨기에 샐러드와 파슬리 포테이토를 첨가하시면?"

"좋아. 그런데 오드볼은? 캐비어는 질색이야."

"물론입죠. 그 대신 슈트라스부르의 리비아가 있습니다."

학은 점점 신이 났다.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다음에 네델란드 치즈는 어떻습니까?"

"그것도 좋지."

학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처음에는 그들이 길을 잃고 우연히 들어온 군인쯤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에른스트, 당신은 어디서 그런 걸 다 알았지요?"

"병영에 함께 있는 로이타에게서 들었어. 오늘 아침까진 이런 건 모르고 있었지. 그 사람은 식도락가야."

"그렇지만 돈을 메뉴에 끼워주다니!"

"그것도 로이타에게 배운 거야. 그 녀석은 이런 방면으로 훤하지."

엘리자베스는 유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웃음소리는 무척 자유롭고 부드러웠다.

"난 당신이 그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나도 당신이 그렇게 차리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어."

그는 그녀를 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엘리자베스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웃으면 금세 표정이 달라지는 것이 마치 어둠에 싸여있던 창문이 활짝 열린 것처럼 보였다.

"옷이 잘 어울리는 군."

그는 멋적은 듯이 말했다.

"이건 어머니께서 입던 옷이에요. 어젯밤에 좀 고쳤어요."

그녀는 살짝 웃었다.

"사실 당신이 오기 전에 이미 준비를 마치고 있었어요."

"그럼 당신은 바느질을 할 수 있단 말이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얼마 전까진 할 줄 몰랐어요. 최근에 배웠지요. 난 군용외투를 매일 여덟 시간씩 깁고 있어요."

"정말이야? 그럼 근로봉사에 끌려 다니는군."

"그럼요. 스스로 지원했어요. 그렇게 하면 아버지를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아. 엘리자베스란 당신 이름도 그래. 누가 그런 이름을 지었지?"

"어머니가 지으셨죠. 어머닌 오스트리아의 남부 태생이었는데 이탈리아인 같았어요. 그래서 내가 파란 눈의 블론드로 태어나길 바라셨대요. 그리고 엘리자베스란 이름으로 정했지요. 어머니의 기대대로 안됐지만, 결국 이름만은 그대로."

학이 술을 가지고 왔다. 그는 보석을 다루는 것처럼 소중하게 병을 들고 조심스럽게 따랐다.

"고급 커트 글라스를 가져 왔습니다. 색깔이 잘 보이지요. 아니면 캐브레드가 좋을까요?"

"아냐, 이게 좋아."

엘리자베스는 웃었다.

"어머나, 너무 사치스러워요!"

"사치."

그레버는 컵을 들었다.

"사치라고? 그렇지! 엘리자베스, 우리 그것을 위해서 건배하는 거야! 2년 동안이나 반합으로 음식을 먹고 있었지. 끝까지 무사히 먹을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 말야. 그러니까 이건 사치가 아냐, 그 이상의 것이지. 평화이고, 안전이고, 기쁨이고, 축제이지."

그는 마셨다. 술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도 부드러운 분위기에 녹아 들어가고 있었다. 전선에서 죽음과 서로 노려보고 있던 그에게 술은 단지 술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화려한 은제 접시들이나 우아하게 흐르는 음악 역시 그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과 파괴가 없는 생활, 이미 신화가 되어 바랄 수 없는 꿈이 된 생활을 위한 하나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인간이란 때때로 자기가 살아 있다는 걸 잊는 법이야."

"그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엘리자베스가 웃었다. 학이 다가왔다.

"술은 어떻습니까?"

"참으로 훌륭해. 그렇지 않으면 오랫동안 단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들이 갑자기 되살아 날 수가 없지."

"그렇습니다. 마치 황금처럼 사면팔방으로 찬란한 빛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첫 잔에 알 수 있었지! 단번에 위장으로 가지 않고 바로 눈으로 가서 세계를 놀라게 한다!"

"당신은 술에 조예가 깊으시군요."

학은 비밀이란 듯이 그에게로 몸을 굽혔다.

"저기 오른쪽 테이블에서도 똑같은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걸 물 마시듯 하지요. 그런 자들은 차라리 우유를 마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학은 그들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물러났다.

"오늘은 사기꾼을 위해서 운이 좋은 날이군. 엘리자베스, 술이 어때? 당신에게도?"

그녀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난 꼭 감옥에서 탈출한 것 같아요. 그리고 사기죄로 즉시 체포당할 것 같은."

"그건 그래! 자기감정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학은 카레이와 샐러드를 날라 왔다. 그레버는 느긋한 마음으로 그가 시중드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학은 술병을 들었다. 그는 마치 아들을 보살피는 어머니처럼 굴었다.

"일반적으로 모젤 와인에는 생선이 따르는 법이지만 카레이는 다릅니다. 이것은 나무열매와 같은 풍미가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정말 그래."

학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물러갔다.

"에른스트, 이렇게 잔뜩 주문해 놓고 값을 치를 수 있어요? 엄청나게 비쌀 텐데."

"문제없어. 2년 치의 전투수당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돈은 오래 갖고 다닐 필요가 없어."

그레버는 웃었다.

"2주일 동안만 지니고 있으면 돼."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어느 새 바람이 멎고 안개가 몰려들고 있었다.

"당신은 언제 돌아가시죠? 2주일 후?"

"그렇지."

"금방이군요."

"길게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 너무 짧아져 있기도 하지. 전시에는 평화로울 때의 시간과는 다르지. 당신도 그만한 것은 알고 있을 거야. 여기도 일선과 마찬가지로 전쟁터야."

"똑같지는 않아요."

"아냐, 똑같아. 오늘밤 난 처음으로 휴가를 즐겼어. 학과 로이타, 그리고 당신의 금빛 드레스 덕분이지."

그녀는 그 앞에 서 있었다. 안개가 그녀의 얼굴을 이슬 머금은 과일처럼 적시고 있었다. 그레버는 이것들을 뒤에 남겨두고 병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하사관, 자넨 눈이 없나?"

하얀 턱수염을 기른, 작고 뚱뚱한 소령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아마도 고무창이 달린 구두를 신고 슬며시 다가온 모양이었다. 소령은 노후 정리로 예비군에 돌려진 군인의 골동품으로서 현재의 계급을 방패로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레버는 이 노인을 당장 집어던지고 싶었으나 그런 위험한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는 관록 있는 군인처럼 아무 소리도 않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노인은 그에게 회중전등을 비추고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려갔다. 그레버는 이것이 굉장한 모욕으로 생각되었다.

"특별복!"

노인은 언성을 높였다.

"안락의자에 앉아 군무를 수행하는 자가 아니면 입고 다닐 수 없을 텐데! 특별복을 입은 일선용사라! 대단하군! 넌 어떻게 후방에 있는 거지?"

그레버는 묵묵히 서 있었다. 자신의 초라한 상의에서 종군기장을 떼어 붙이는 일을 잊었던 것이다.

"여자를 끌고 다니는 재주밖에 없나?"

소령이 호령을 했다.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회중전등의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노인을 잔뜩 노려보다가 불빛 속에서 빠져 나와 그레버에게로 왔다. 소령은 헛기침을 하면서 그 자리를 물러났다.

"난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요!"

그레버는 어깨를 움츠렸다.

"저런 영감쟁이들은 어쩔 수가 없어. 부하들에게 경례를 받고 싶어서 거리를 방황하지. 그것이 그자들의 소일거리야."

엘리자베스는 웃으며 소령의 흉내를 냈다.

"넌 어째서 후방에 있지?"

그레버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특별복을 입었다고 천벌이 내렸어. 내일은 사복을 입고 나서야지. 빌릴 곳이 있으니까. 그러면 우린 게르마니아에서 마음 놓고 즐길 수 있어."

"또 거기로?"

"그럼 또 가야지. 엘리자베스, 나중에 일선에서 회상할 일은 그것뿐이야. 내일 여덟 시에 다시 오겠소. 우물쭈물하면 그 노인이 또 와서 이번에는 급료카드를 꺼내보라고 할지도 모르니까."

그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아무 저항도 없이 그에게 안겼다. 그는 그녀를 자기의 팔 안에 완전히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간절히 원했다. 오로지 그녀만을 원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힘껏 껴안고 키스를 했다. 오늘밤 그녀를 놓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하겐가의 옛 집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달이 갈라진 구름 사이로 화사한 빛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는 급히 돌 사이에서 종이쪽지를 끄집어냈다. 자세히 보니 한쪽에 연필로 무엇인가가 적혀 있었다. 그는 회중전등을 찾았다.

"본국에서 물어라. 창구 15"

그는 시계를 보았다. 이미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렇지만 내일 아침 여덟 시가 마침내 부모님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우체국에서 그 쪽지를 보이기 위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죽은 듯이 고요한 거리를 병영을 향해 걸어갔다.

 

 

13

우체국에 도착하니 건물의 일부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입구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붕괴되고 소실되어 있었다. 어디에나 사람들이 들끓었다. 그레버는 잠시 기다리다가 15번 창구로 가서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국원은 종이쪽지를 도로 그에게 주었다.

"신원을 확인할 무슨 증명이 있습니까?"

그레버는 급료카드와 휴가증을 제시했다. 국원은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전갈입니까?"

국원은 아무런 대꾸도 없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안으로 사라졌다. 그레버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를 무심히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국원은 구겨진 소포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그는 다시 한 번 소포에 적힌 이름과 그레버의 휴가증을 대조해 보았다. 이윽고 소포를 내밀었다.

"여기에 서명해 주십시오."

그레버는 소포에 적혀있는 어머니의 필적을 보았다. 어머니는 그것을 일선의 그에게로 보냈고, 그것이 또한 전선으로부터 회송된 것이었다. 발신인의 주소는 하겐가로 되어 있었다. 그는 영수증에 서명을 했다.

"이것뿐입니까?"

국원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제 부모님의 새 주소를 알 수 있을까 해서."

"여기선 모릅니다. 2층의 배달과로 가서 물어보십시오."

그레버는 지붕이 절반밖에 없는 2층으로 올라갔다. 무너진 천장사이로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새로운 주소는 없습니다."

창가에 앉아 있던 여직원이 대꾸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소포를 하겐가로 배달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신 구역의 배달부에게 알아볼 수는 있습니다."

"그 배달부는 어디에 있죠?"

여자는 시계를 보았다.

"지금 구역을 돌고 있어요. 오후 4시경에 들르면 만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모르겠는데 배달부가 알 수 있을까요?"

"물론 모르겠지요. 배달부도 우리에게 주소를 묻고 가니까. 그래도 배달부에게 알아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야 안심할 수 있대요. 사람들이란 대개 그렇지 않아요?"

"아마도."

그레버는 소포를 들고 층계를 내려왔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3주일 전에 발송한 것이었다. 전선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그곳에서는 빨리 도착한 것이다. 그는 거리에 선 채로 소포를 풀어 보았다. 안에는 건과자가 한 봉지, 모사양말이 한 켤레, 담배, 그리고 어머니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는 편지를 읽어보았다. 주소의 변경 사항이나 공습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는 편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거리로 나왔다. 이번에야말로 새로운 주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막막했다. 그는 빈딩그를 찾아가기로 했다. 반가운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들어오게."

알폰스가 맞이했다.

"지금 막 최고급의 술을 마시려던 참이었어."

빈딩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친위대원 한 사람이 루벤스 그림 아래에 있는 커다란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누런 얼굴과 블론드 머리의 빼빼 마른 남자였다.

"하이니야."

알폰스가 정중하게 소개했다.

"하이니! 이쪽은 내 친구인 에른스트, 특별휴가로 소련의 전선에서 돌아왔지."

하이니는 몹시 취해 있었다.

"소련의 전선이라!"

그는 중얼거렸다.

"나도 갔었지. 여기보단 재미가 좋았어!"

그레버는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빈딩그를 보았다.

"하이니는 벌써 한 병 해치웠어. 집이 폭격 당했어. 가족들은 무사했지만 집이 폭삭 무너졌지."

"방이 넷이야."

하이니는 소리를 질렀다.

"가구는 모두 새것이었어. 피아노도 그렇고. 참 멋있는 피아노였지."

"하이니는 반드시 피아노의 원수에게 복수를 할 거야."

알폰스가 말했다.

"자자, 에른스트. 자넨 무엇을 들겠나? 하이니는 코냑을 마시고 있지만 보드카도 있고 퀸메르도 있지. 자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다."

"난 필요 없어. 단지 뭘 좀 알아낸 게 있는지 궁금해서 들렀어."

"아직 새로운 소식은 없어. 자네 부모님께서는 이미 시내에서 떠나셨다고 봐야 해. 아마 어디론가 이동중일 거야. 요즘 사정은 잘 알겠지. 개새끼들의 폭격으로 통신이 거의 마비되었어. 회복되려면 며칠 걸려야 돼. , 한 잔만 하라구."

"좋아, 보드카를 약간."

"보드카?"

하이니가 투덜거렸다.

"우린 보드카를 놈들의 아가리 속으로 퍼붓고 불을 질러버려야 해. 놈들을 화염방사기로 만들어 버린 적이 있었지. 어린것들이 깡충깡충 뛰는 꼴이라니 얼마나 웃었던지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었어. 그때의 소련은 참 재미있었는데."

"뭐라고?"

그레버는 물었다. 하이니는 묵묵부답으로, 오직 정면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화염방사기!"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걸작이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그레버는 빈딩그에게 물었다.

"하이니는 여러 가지 일에 관계하고 있었다. 보안부에 있었으니까."

"보안부, 소련에서 말인가?"

"그렇지. , 한 잔 더 하게."

그레버는 술병을 들었다. 맑은 액체가 철렁철렁 흔들렸다.

"보드카는 몇 도나 될까?"

"상당히 도수가 높은걸. 70 퍼센트는 확실하겠지. 로스케 놈들은 독한 술을 좋아하니까."

알폰스는 웃었다. 독한 술을 좋아한다 그렇게 도수 높은 술을 목구멍에 처넣고 불을 지른다면 확확 타오를 것이다. 그는 하이니를 보았다. 친위대의 보안부에 관한 얘기는 전선에서도 듣고 있었기 때문에 하이니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보안부는 독일 국민에게 생활권을 마련해 준다는 구실아래 전방에서 한꺼번에 몇 천 명씩 학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시원찮은 건 닥치는 대로 섬멸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 집단살육이 너무 단조롭지 않게 친위대는 여러 가지 끔찍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레버도 그 중의 몇 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슈타인브레너에게 여러 가지를 들었지만 화염 방사기는 처음으로 듣는 얘기였다.

"왜 병만 노려보고 있지?"

알폰스가 물었다.

"물어뜯지 않을 테니까 잔을 놓게."

그레버는 가만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당장에 뿌리치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때, 한 잔 더 안 하겠어?"

알폰스가 물었다.

그레버는 하이니를 보았다. 그는 잠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 사람, 아직도 보안부에 있나?"

"아냐. 지금은 여기 있어."

"여기라니?"

"강제수용소의 대장이야."

"강제수용소의?"

"그럼. 한 잔만 더 하라구. 다음에 만날 땐 서로가 지금처럼 젊진 않을 텐데! 오늘은 달아나지만 말고 오래 놀다 가게."

"."

그레버는 하이니를 보면서 대답했다.

"난 이제 달아나지 않겠어."

"겨우 철이 든 모양이군. 보드카를 한 잔 더 할까?"

"퀸메르나 코냑을 줘. 보드카는 질색이야."

하이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보드카는 안돼."

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건 너무 아까워. 보드카는 우리가 마시고 벤젠을 사용했지. 벤젠이 훨씬 잘 타지."

 

하이니는 욕실에서 토하고 있었다. 알폰스와 그레버는 문 앞에서 있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먹구름이 떠 있었다.

"하이니는 미친놈이야. 안 그래?"

알폰스는 소년이 피에 주린 인디언 추장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공포와 찬탄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자는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사람에게만 미치광이 짓을 하는 거야."

그레버가 대답했다.

"저 녀석은 한쪽 팔을 못 써. 그래서 정규군이 될 수 없는 거야. 1932년에 공산당원들과 난투극이 벌어졌을 때 당하고 말았지. 그 당시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정말 굉장했어."

알폰스는 불 꺼진 잎담배를 쭉쭉 빨았다. 하이니가 소련에서의 공명담을 떠벌일 때 불을 붙였는데 너무 흥분해서 불이 꺼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참 멋있는 생각을 했어. 안 그래?"

"너 역시 거기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나?"

빈딩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진 않아. 한 번쯤이라면 또 모르지. 그렇지만 난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냐."

하이니가 창백한 얼굴로 문에 나타났다.

"근무 개시!"

입에 거품을 물고 말했다.

"이미 늦었다. 시작된 모양이야. 그 돼지새끼들의 코를 뽑아놓고 말아야지!"

그는 정원의 오솔길을 쓰러질 듯이 걸어갔다. 비틀거리다가 대문 앞에서 모자를 똑바로 쓰고 어깨를 펴더니 마침내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 KZ(강제 수용소)에서 저 손에 걸리는 놈은 혼이 빠져버릴 거야."

알폰스가 말했다. 그레버는 눈을 치켜들었다. 그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나, 알폰스?"

"놈들은 모두 조국에 대한 반역자야. 아무 죄도 없이 수용당한 게 아냐, 에른스트."

"부르마이스터도 국가에 대한 반역자인가?"

"그것은 사적인 문제지. 그리고 그 녀석에게는 별다른 일이 없었어."

알폰스는 웃었다.

"만약에 있었다면?"

"그건 그 녀석 운이 나쁜 탓이지. 요즘엔 재수없게 걸려드는 게 얼마든지 있어. 예를 들면 폭탄에 맞은 사람들이지. 이 도시에도 오천은 돼. 모두 강제수용소에 있는 인간들보다 훌륭한 인간들이지. 그러니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책임도 없어. 내 책임도 아니고 네 책임도 아냐."

참새들이 잔디 한가운데에 있는 수영장을 향해서 날아가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마리가 물에다 날개를 적시고 있었다. 알폰스는 그것에 매혹이라도 된 듯이 꼼짝도 않고 있었다. 하이니 따위는 이미 잊어버린 얼굴이었다. 그레버는 그의 만족스럽게 보이는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정의와 동정이 영원히 절망적이라는 것, 항상 이기주의와 무관심과 공포심에 부딪쳐서 난파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임이란 건 그리 간단한 게 아냐, 알폰스."

그는 우울했다.

"그렇지만 에른스트, 심각해지지 말게!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면 돼. 그것도 명령을 받지 않고 한 행동에 대해서만."

"우리가 포로를 총살할 때는 반대의 말을 하지. 당신들은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는 거라고."

"포로를 총살한 적이 있나?"

빈딩그는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레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질은 예외야. 그건 불가피한 예외야."

빈딩그가 말했다.

"무엇이든 불가피한 예외다."

그레버는 딱딱하게 말했다.

"자신이 하는 건 무엇이든지. 우리가 적국의 도시를 폭격할 때는 전략상의 필요 때문이야. 그러나 그들이 하는 건 비열한 죄악이지."

"맞았어! 제법 그럴듯한 생각을 하는데."

알폰스는 교활하게 웃었다.

"그것이 바로 정치라는 거야. 정의라는 것은 독일 국민에게 있어서 유용한 것이야.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야. 우리에게 책임은 없어."

그레버는 문득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하이니를 발견했다. 거리에는 인적이 끊겼고 보도와 접한 모래땅 위에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나풀거리고 있었다. 100미터 앞에서 하이니는 모퉁이를 돌았다.

그레버는 모래 위를 걷고 있었다. 모래는 발자국소리까지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약에 누군가가 하이니를 처치하고 싶다면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가 된다. 한 명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 거리는 마치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모래 위를 소리 없이 접근할 수 있다. 하이니는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때려죽이거나 목 졸라 죽이면 된다. 총을 쏘면 너무 소리가 커서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하이니 따위는 얼마든지 교살할 수 있다.

그레버는 걸음이 빨라졌다. 알폰스는 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하이니에게 보복을 가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그럴 만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누가 복수하든 절호의 기회이다. 하이니는 없어져야 할 인간이다.

그레버는 손에 식은땀이 흘렀다. 갑자기 온몸이 확확 달아올랐다. 어느 새 하이니를 30 미터 정도 따라잡고 있었다. 아직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모래 위를 잽싸게 뛰어가면 일 분 이내로 깨끗하게 처치할 수 있다. 하이니를 찌르고 그대로 달아나면 된다.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어째서 나는 이렇게 말려들어야만 했던가? 단순히 우연으로 시작된 일이 강박관념으로 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가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과거의 모든 것,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잊고 싶었던, 그가 했거나 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을 정당화시키고 있었다. 복수다. 그의 혼란된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는 내가 잘 모르는 인간이다. 나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인간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아버진 하이니의 희생자 중에서 한 사람이 아닐까?

그는 하이니의 등을 잔뜩 노려보았다. 목이 말랐다. 어디선가 개가 사납게 짖어대고 있었다. 그는 섬찟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너무 취했다. 그만두자. 하이니 따위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살금살금 앞으로 나갔다.

그는 미처 단안을 내리지 못한 채 하이니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그때 맞은편의 대문에서 한 여자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오렌지색 블라우스를 입은 그 여자의 손에는 시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그레버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레버는 우뚝 서 버렸다. 일시에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여자는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여자는 친숙한 어조로 인사를 했다. 그레버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등 뒤에서 여자의 발자국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눈앞에는 폐허가 전개되고 하이니는 벌써 다음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거리에는 다시 인적이 끊긴 상태였다.

그레버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가하게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왜 나는 달려가지 않는 것인가? 아직도 기회는 있다. 그러나 이미 틀려버렸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여자는 아마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안 된다. 만약에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일을 저질렀을까? 무엇인가 다른 구실을 만들지는 않았을까?

그는 하이니가 돌아간 십자로에 당도했다. 하이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 모퉁이에서 하이니는 다시 나타났다. 하이니는 거리 한 가운데에 서서 친위대 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집배원이 한쪽 모퉁이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바로 앞에서는 자전거를 끌고 나온 남자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끝났다. 그레버는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내 안에서 갑자기 빠져나간 것은 무엇인가? 나는 냉정하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레버는 신문을 사서 국방군 발표를 읽어보았다.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휴가기간만은 전쟁을 잊고 싶었던 것이다. 전선이 계속 후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문에 소개된 지도로 지금 자신이 소속된 연대가 있을 만한 위치를 대강 알 수 있었다. 신문만으로 자세한 사항까지 알 수는 없었다. 국방군 발표는 군단의 일만 보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고국에 오고 나서 전우들을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기억은 돌덩어리가 되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지면으로부터 고독이 소리 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전황 뉴스는 그레버가 소속돼 있는 연대의 치열한 전투상황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고독은 소리도 없고 색깔도 없었다. 그때 바구니를 가슴에 안은 여인이 그의 어깨에 부딪쳤다.

"당신은 눈이 없어요?"

여자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보입니다."

그레버는 꼼짝 않고 서서 대답했다.

"그러면 어째서 물러서지 않죠?"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는 자기가 왜 하이니를 미행했었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그가 일선에서 항상 느꼈던 암흑 같은 거였다. 자기가 단 한 번도 대답할 용기가 없었던 의문, 수없이 회피해 왔던 절망이었다. 그것이 마침내 그를 궁지로 몰았던 것이다. 그는 지금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결심을 굳게 했다. 폴만! 프레젠버어그는 폴만을 찾아가보라고 했다. 그것을 잊고 있었던 거이다. 폴만을 찾아가서 가슴속에 묻었던 이야기를 나누자.

"바보!"

무거운 바구니를 안고서 여자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걸어갔다.

 

얀프라츠는 절반 정도가 파괴되어 있었다. 나머지 부분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창문이 약간 부서졌을 뿐이었다.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청소를 하거나 취사를 하면서 그날그날의 생활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 반대쪽은 건물의 정면이 붕괴되면서 산산이 파괴된 방의 치부를 전부 보이고 있었다. 방에는 전투가 끝난 뒤 찢어진 깃발처럼 갈기갈기 떨어져 나간 융단이 늘어져 있었다.

폴만의 집은 파괴당한 쪽에 위치해 있었다. 위로부터 층계가 내려앉으면서 입구를 메워버린 그 집은 사람이 살고 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레버는 돌아서다가 집 앞에 널려있는 벽돌더미 위에 사람이 다닌 흔적을 발견했다. 그것을 따라서 들어가자 벽돌을 양쪽으로 밀어내고 파괴되지 않은 뒷문까지 통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문을 두드리자 조심스럽게 열렸다.

"폴만 선생님."

그레버는 반갑게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저는 에른스트 그레버입니다. 선생님의 제자였습니다."

"아아, 그래? 그런데 무슨 일로 왔나?"

"한 번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저는 지금 휴가 중입니다."

"나는 이미 학교를 그만두었다." 폴만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파면 당했다는 것도 알고 있겠군. 나는 이제 학생들을 만나지 않고 또 그럴 권리도 없네."

"저는 이제 학생이 아닙니다. 저는 군인입니다. 소련에서 돌아왔습니다. 프레젠버어그가 선생님께 안부를 전해달라고 해서 들렀습니다."

노인은 그레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프레젠버어그? 그 사람이 아직도 살아있나?"

"열흘 전까지는 살아 있었습니다."

폴만은 여전히 그레버를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들어오게."

그레버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복도를 지나고 부엌처럼 보이는 곳을 빠져나와서 짧은 통로를 걸었다. 폴만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문을 열고 큰소리로 말했다.

"어서 들어오게. 나는 자네를 경찰로 오해했지."

그레버는 깜짝 놀라서 그를 보았다. 비로소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폴만 선생은 누군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큰소리로 말한 것이다. 방에는 녹색의 갓을 씌운 작은 석유램프가 켜져 있었다. 창문은 모조리 부서졌지만 창 밖에는 벽돌을 높이 쌓아놓고 있었기 때문에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폴만은 방 가운데에 서 있었다.

"이제야 자네를 알겠네. 밖은 햇빛이 너무 강해서 말야.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햇빛에 눈이 부셔. 여긴 석유램프만으로 충분해. 그러나 석유가 부족해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지."

그레버는 그를 자세히 보았다. 폴만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더라고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방안에 있으니까 딴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벽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폴만은 그레버의 시선을 쫓았다.

"나는 그래도 운이 좋았어. 책은 전부 끌어냈거든"

"저는 오랫동안 책을 본 적이 없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거의 아무 것도 읽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책은 무거워서 배낭에 지고 다닐 수 없지."

"머릿속에 넣고 다니는 것도 힘에 겨웠습니다. 여러 가지 사건과 너무 동떨어져 읽고 싶지 않았습니다."

폴만은 부드러운 불빛을 통해서 그를 보고 있었다.

"자네는 왜 나를 만나러 왔지, 그레버?"

"프레젠버어그가 꼭 방문하라고 하던데요."

"자네는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나?"

"그 친구는 내가 일선에서 믿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 친구는 나에게 선생님을 뵙고 얘기를 나누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얘기를?"

그레버는 노인을 보았다. 이 노인에게 배우던 시절이 아득하게 멀리 느껴졌다. 그는 갑자기 자기가 다시 학생이 되어 개인생활에 대해서 질문을 받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어마어마한 장서로 가득하고 절반은 벽돌 속에 묻힌 이 작은 방안에서, 파면 당한 소년시대의 은사 앞에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친절, 관용, 학식을 새롭게 구현하고 있었다. 창밖의 벽돌더미는 현재가 과거를 통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저는 과거 10 년 동안의 죄악에 내가 어디까지 관계되어 있는가를 알고 싶습니다."

폴만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는 책을 한 권 꺼내 펼쳐보다가 도로 제자리에 놓았다. 이윽고 그레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을 해도 목을 잘려."

"일선에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인간들이 살해됩니다."

폴만은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다.

"죄악이란 건, 전쟁 말인가?"

"전쟁을 일으킨 온갖 것들입니다. 거짓과 압제, 불법과 폭력입니다. 그리고 전쟁과 전쟁을 하는 방법입니다. ^36^예 수용소, 강제 수용소, 비전투원의 대량학살을 자행한."

폴만은 오로지 침묵만을 지켰다.

"저는 제 눈으로 직접 목격을 하고 여러 가지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또한 전쟁이 패배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전쟁을 계속하는 건 다만 정부와 당과 전쟁을 일으킨 인간들이 좀 더 권력을 연장해 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폴만은 역시 묵묵히 있었다.

"자네는 그것을 모두 알고 있군?"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전부터 알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또 일선으로 가야하는군?"

"그렇습니다."

"무서운 일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다시 가야만 합니다. 저는 정말 공범자가 되는 것입니까?"

폴만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갔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것은 무슨 뜻이지?"

그는 거의 속삭이고 있었다.

"그 뜻은 선생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저희들에게 종교를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전쟁에 패한 사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예와 살인자, 강제 수용소와 친위대의 대량학살과 비인도적 행위를 중지시키기 위해선 전쟁에 패해야 된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2주일 후에는 다시 일선으로 가서 전투에 가담하게 된다면, 도대체 저는 어디까지 공범자가 되는 것입니까?"

폴만의 얼굴이 회색으로 변하며 핏기를 잃어갔다. 그러나 눈동자만은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그 눈빛은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았지만 어디서 보았는지는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자네는 다시 가야만 하는가?"

마침내 폴만이 물었다.

"물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교수형이나 총살을 당할 것입니다. 아니면 탈주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 즉시 체포될 것입니다. 탈주를 막기 위한 경찰망과 스파이망은 철통과 같습니다. 성공한다 해도 어디에다 몸을 숨길 수 있단 말입니까? 나를 숨겨 주는 사람은 총살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제 부모님께도 보복을 가할 것입니다. 죄가 아주 가벼워도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거기서 죽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일선으로 복귀해서 총알을 피하지 말까요? 그것이야말로 자살행위입니다."

시계가 울렸다. 방에 파묻힌 고요를 둔탁한 음향이 망령과 같이 깨뜨렸다.

"또 다른 방법은 없냐?"

"스스로 자신의 몸을 불구로 만드는 겁니다. 대부분은 발각이 됩니다. 처벌은 탈영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본국으로 전근할 수는 없나?"

"안됩니다. 저는 무척 건강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 해도 제 의분은 어쩔 수 없습니다. 사무실에 있다고 해서 공범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게 아닙니까?"

"그렇지."

폴만은 두 주먹을 쥐었다.

"죄악."

마침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악이 어디서부터 오고 어디서 끝나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모든 곳에서 시작되지만 어디서나 끝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공범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하느님뿐이지."

그레버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하느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원죄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을 테니까. 원죄는 수천 세대에 걸쳐 확대된 공범입니다. 그렇지만 개인으로서의 책임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다만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의 그늘에 숨어서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강제야."

그레버는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스도교 시대의 순교자들은 압제에 굴복하지 않았다."

폴만은 주저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순교자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공범은 어디까지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까? 보통 영웅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언제 살인자가 되는 겁니까? 명분이 목적을 믿지 않을 때 입니까? 그 부분은 무엇입니까?"

폴만은 고뇌에 찬 눈초리로 그레버를 응시했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말할 수 있지? 그것은 너무나도 책임이 커. 나는 자네를 위해서 그것을 결정할 수 없네."

"모두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그레버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왜 항상 질문의 화살만 던지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이 노인을 괴롭히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 노인에게 그가 일찍이 강의한 것과 나 혼자서 터득한 것에 대해서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폴만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면직 당하고 체포의 불안과 싸우면서 책에서나마 위로를 받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폐허더미에 숨어서 램프 곁에 앉아 있는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선생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답을 구하는 건 결정을 회피하는 것밖에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실은 스스로를 향해서 질문한 것입니다. 타인에게 먼저 묻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물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폴만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에게는 질문할 권리가 있어. 공범!"

그는 갑자기 말했다.

"공범이라고 하지만 자네가 무엇을 알고 있나? 자네들은 아직 어려서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기도 전에 거짓으로 중독 되고 말았어. 그렇지만 우리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도 잠자코 있었어!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는가? 나태한 마음? 무관심일까? 이기주의? 절망이라고 할 것인가? 자네는 내가 이 일에 대해서 모른 척한다고 생각하나?"

그레버는 폴만의 눈동자를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총살한 소련인 포로의 눈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모자를 들었다.

"그레버, 벌써 가려고 하나? 자넨 어떻게 할 생각인가?"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볼 시간이 아직 2주일이나 있습니다. 순간순간 생사의 기로에 있던 거에 비하면 아주 긴 시간입니다."

"또 오게. 출발하기 전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해 주게."

"약속하겠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지."

폴만이 중얼거렸다. 그레버는 벽돌로 가려진 창가의 책과 책 사이에 작은 사진이 있는 것을 보았다. 자기와 같은 또래의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폴만에게 외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나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프레젠버어그에게 내 안부도 좀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말한 대로 그 친구에게도 말씀하셨습니까?"

"그래."

"제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게 프레젠버어그에게 도움이 됐을까?"

"아닙니다. 아마 더욱 곤란했을 겁니다."

폴만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자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 그러나 변명에 지나지 않는 답변은 하고 싶지도 않았어. 그런 답은 얼마든지 할 수도 있지. 하지만 모두가 입만 살아서 그럴듯하게 속이고 있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까?"

폴만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교회에서는 멋있게 하고 있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살인하지 마라.' 이 말에 대해서는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라는 말이 가장 적절하지. 이것만 있으면 어떠한 연극도 해낼 수 있지."

그레버는 싱긋 웃었다. 폴만의 신랄한 입담이 아직 살아있었군. 폴만은 그를 보았다.

"자네는 침착하게 웃고 있군. 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지 않지?"

"저는 지금 부르짖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들리지 않을 뿐입니다."

눈부신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그레버는 천천히 광장을 가로질렀다. 그는 오랫동안 질질 끌다가 마침내 판결을 받은 죄인이면서도 그 판결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간 같았다. 겨우 끝났다. 그는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휴가기간 동안 생각하기로 했던 것. 이제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절망이었다. 그는 폭탄으로 생긴 구덩이 옆에 앉아 있었다. 서서히 긴장이 풀리면서 마음이 허전해졌다. 그는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레버는 눈을 떴다. 그의 앞에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파괴된 집 앞에 서 있는 보리수를 바라보았다. 보리수는 꿋꿋하게 서서 거대한 나뭇가지들을 벌려놓고 있었다. 그는 보리수 옆을 지나서 파괴된 집들로 이어진 거리를 걸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간절히 원했다. 마치 휴전을 갈망하는 것처럼 밤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4

"오늘은 최고급인 위이너 슈니설이 있습니다."

학이 말했다.

"좋아."

그레버는 대답했다.

"그리고 당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조리 갖고 와.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기겠어."

"술은?"

"그것도 당신 마음대로 해."

웨이터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밖은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을 것이다. 2주일, 2주간의 생명. 보리수가 빛을 포착하는 것처럼 2주일 동안의 생명을 붙잡아야 한다. 학이 돌아왔다.

"오늘은 요하니스베르게르 카렌베르그를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것에 비하면 샴페인 정도는 소다수 같은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으로 가져 와."

"알겠습니다. 신선한 야채샐러드도 곁들이겠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의 최후의 만찬이다.'

그레버는 생각했다. 사형수, 2주일 동안의 식사. 그는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직 휴가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고 앞으로도 더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신문을 읽고 폴만과 이야기를 나눈 후, 그는 휴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리자베스의 눈은 학의 뒤를 쫓고 있었다.

"당신의 친구 로이타씨는 참으로 고마운 분이군요. 덕분에 우리는 상류층의 인간이 되었어요."

"엘리자베스, 우린 단순히 상류층이 아닌 그 이상이지. 우리는 모험에 뛰어든 기사야. 평화의 기사란 말야. 전쟁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고 말았어. 단지 얼빠진 부르주아의 상징이었던 것이 지금은 위대한 모험이 되고 있어."

엘리자베스는 웃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된 것이죠."

"우리가 아냐. 바로 시대지. 그러나 불평할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지. 그것은 권태와 단조로움이야."

그레버는 엘리지베스를 보았다. 그녀의 머리가 작은 모자 밑에 가려져 있었다. 마치 귀여운 사내아이 같았다.

"단조로움. 그렇다면 당신은 오늘밤 신사복을 입을 예정이었지요?"

"바꿔 입을 만한 데가 없었어."

그는 돌격대장 알폰스의 집에서 갈아입을 생각이었지만 폴만과 이야기하다가 그대로 왔던 것이다.

"우리 집에서 갈아입어도."

"당신 집에서? 루젤 부인이 있잖아?"

"루젤 부인 따윈 문제가 안돼요."

웨이터가 와인을 가지고 오더니 뚜껑만 열고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 잔뜩 귀를 기울였다.

"또 왔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순간 방안의 모든 소음을 죽이며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엘리지베스의 컵에 든 물이 찰랑거렸다.

"가장 가까운 지하실이 어디지?"

그레버는 학에게 물었다.

"호텔 안에 있습니다."

"그곳은 호텔 손님의 전용 아닌가?"

"당신도 손님이십니다. 지하실은 매우 견고합니다. 보통 지하실보다 안전하게 만들어졌지요."

"알았어. 그건데 위이너슈니설은 어떻게 되지?"

"그건 염려 없지만 지하실에서 드릴 수는 없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잘 알지."

그레버는 학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잔에 가득 부어서 엘리자베스에게 주었다.

"이것을 마셔."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빨리 대피해요."

"아직 시간이 있어. 저건 최초의 경보니까 아무 것도 아닐는지도 몰라. , 술이나 마셔. 조금도 겁낼 필요가 없어."

"이분 말씀이 맞습니다."

학이 말했다.

"이런 귀중한 와인을 한 번에 마셔버리긴 아깝지만 이것은 특별한 경우니까."

학은 창백한 얼굴로 억지웃음을 지었다.

"손님."

그는 그레버를 똑바로 쳐다봤다.

"전에는 하늘에 대고 소원을 말했지만 지금은 저주하고 있습니다. , 큰일입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서 마셔! 시간은 아직도 많아. 한 병쯤은 충분히 비울 수 있어."

엘리자베스는 술잔을 들더니 천천히 마셨다. 어떤 결연한 각오가 선 듯한 그러면서도 쫓기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그녀는 컵을 놓고 싱긋 웃었다.

"조금도 겁나지 않아요. 나도 이런 일엔 익숙해져 있어요. 보세요. 그런데 내 몸이 왜 이렇게 떨리지요?"

"당신이 떨고 있는 게 아냐. 떨고 있는 건 당신이 지닌 생명이야. 그건 용기와는 관계가 없어. 용기는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을 때 솟아나는 거야. 그밖에는 모두 쓸데없는 허영이지. 우리에게 부여된 생명은 우리 자신보다 훨씬 이상적이지."

"알겠어요. 내게도 나눠주세요."

"저의 집에서는."

학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리 애는 지금 폐병을 앓고 있습니다. 겨우 열한 살입니다. 마누라가 그 애를 지하실로 데리고 내려갈 때마다 무척 애를 먹지요. 그래도 저는 마누라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여기를 떠날 수 없으니까."

그레버는 다른 테이블에서 술잔을 집어다가 술을 가득 부어서 학에게 권했다.

", 우리 건배하자구. 고참병들의 사고방식은 모두 같지. 급할수록 침착하게 행동하라. 그렇지 않은가?"

"입으로 말하긴 쉽지만."

"맞았어. 우린 목석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니까. , 한 잔 쭉 들이켜 보세."

"근무 중에는 술을 못 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야. 아까 당신이 말한 것처럼."

학은 주위를 살피고 나서 잔을 받았다.

"당신의 승진을 축하하는 뜻에서 건배를 해도 좋겠습니까?"

"무엇을 축하한다고?"

"하사관으로 승진한 것으로 축하하겠습니다."

"고맙군. 당신은 너무 날카로운 눈을 가졌군."

웨이터는 잔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단숨에 마셔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최고급 술을 그렇게 할 순 없지요. 아무리 특별한 경우라 해도 말입니다."

"과연 당신은 도사야. 그럼 그대로 가지고 가지."

"고맙습니다."

그레버는 엘리지베스의 잔에도 다시 와인을 따랐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냉정한가를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공습을 받을 때는 있는 대로 모조리 마셔버려야 돼."

엘리자베스는 그의 군복을 쳐다보았다.

"지하실에 장교들이 우글우글할 텐데 괜찮을까요."

"그런 걱정은 마, 엘리자베스."

"왜죠?"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되지."

"그러면 발각되지 않나요?"

"쉽게 발각되지 않아. 남의 눈치를 보면 오히려 쉽게 발각되는 수가 있어."

 

술 저장고의 일부를 시멘트로 보강해 방공호로 만들어 놓았다. 의자와 테이블이 여기저기 놓였고 바닥에는 융단이 깔려 있었다. 벽은 새롭게 흰칠을 하고 라디오까지 갖추었으며 식기 선반에는 술잔과 함께 술병이 놓여 있었다. 그야말로 일류호텔의 방공호다웠다.

그들은 구석의 빈자리로 갔다. 손님들이 자꾸 몰려들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흰 야회복을 입은 아름다운 부인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녀는 등을 완전히 노출시키고, 양쪽 팔에는 번쩍거리는 팔찌를 하고 있었다. 잉어처럼 얼굴이 조잡스러운 사내가 부인의 바로 뒤에 붙어서 오고 웨이터와 그들의 조수가 나타나서 병을 따기 시작했다.

"우리도 술을 가지고 올걸 그랬지?"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연극이 지나치군."

"그럴 필요는 없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이 옳다. 쟁반을 돌리고 있는 웨이터를 성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것은 용기가 아니라 경박한 짓이다. 위험은 너무나도 분명하므로 저런 경박한 행동으로는 가려지지 않는다. 그것이 어느 정도로 심각하느냐는 무수한 죽음이 따른 후에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두 번째 경보다."

누군가가 말했다.

"쳐들어온다!"

그레버는 그의 의자를 엘리자베스에게 밀었다.

"난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무섭기만 해요."

"나도 그래."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몹시 긴장 돼 있었다. 그는 갑자기 보호본능이 일어나서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위험을 깨닫고 몸을 도사리는 연약한 새에 불과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그녀는 불안감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그는 금발의 여인과 함께 들어왔던 사내가 자기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얼굴이 깡마른 중위였다. 금발의 여인이 웃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여자에게 쏠렸다.

약한 진동으로 지하실이 떨렸다. 뒤따라 폭발의 굉음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딱 멎었다. 그러자 일부러 내는 듯한 웃음소리가 크게 이어지더니 세 번의 폭발음이 연달아서 들려왔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꼭 껴안고 있었다. 금발 여인의 웃음소리도 그쳤다. 격렬한 충격이 지하실을 심하게 진동시켰다. 웨이터는 쟁반을 바닥에 놓고 배선함의 나선형 기둥에 매달렸다.

"당황하지 마!"

한 사람이 크게 외쳤다. 갑자기 벽이 흔들리더니 길게 금이 그어졌다. 소리를 내면서 전등이 깜박거렸다. 경련하는 불빛 아래로 모여 있는 사람들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불빛이 빛났을 때, 야외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시 번쩍거렸을 때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세 번째는 암흑 속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네 번째는 모두가 여자를 붙잡고 있었으며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때 불은 완전히 꺼져버리고 수없이 메아리치면서 반항하는 굉음 속에 지구의 전 중력이 빨려 들어가 지하실이 둥둥 뜨고 있는 것 같았다.

"전기가 나갔을 뿐이야, 엘리자베스."

그레버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디서 전선이 끊어진 거야. 그뿐이야. 호텔은 아직 괜찮아."

그녀는 그에게 찰싹 붙어 있었다.

"양초! 성냥!"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어디 양초가 있을 텐데. 제기랄, 어디 있지? 회중전등은 어디 있나?"

성냥불이 몇 개 켜졌다. 그것은 지하의 거대한 공간에서 작은 도깨비불처럼 보였다. 성냥불은 얼굴만을 겨우 비추고 있었다.

"이 호텔은 비상용 전등을 준비하지 않고 있나? 웨이터는 어디로 갔어?"

여기저기서 불빛이 움직이며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야외복을 입은 여인의 등, 번쩍번쩍 빛나는 보석, 멍청하게 벌린 입이 드러났다.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흐느끼는 소리가 차츰 강해지면서 미칠 것 같은 신음이 되어 견딜 수 없게 했다. 마치 거대한 강철의 유성이 일직선으로 지하실에 부딪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격동했다. 불꽃이 흔들렸다가 금방 껴졌다. 지하실은 이미 허공에 떠 있지 않았다. 요란한 굉음이 모든 것을 분쇄하여 공중에 집어던지는 것 같았다. 그레버는 머리가 천장으로 튀어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두 팔로 엘리자베스를 힘주어 껴안았다. 그는 몸을 그녀에게 던져 바닥으로 쓰러뜨리면서 그녀의 머리 위로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런 다음에 의자를 벽에 붙이고 천장이 내려앉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허물어지고 쪼개지고 하면서 우르르 쾅 폭음이 들려왔다. 거대한 괴수의 손아귀가 지하실을 송두리째 집어 던져서 폐나 위장이 몸집으로부터 빠져 나가는 듯 했다.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최후의 암흑과 질식이 몰려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 대신 거짓말처럼 지하실 안이 환해졌다. 바닥으로부터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야외복을 입은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난 죽고 싶지 않아! 사람 살려! 살려 줘요."

여자는 깡충깡충 뛰면서 두 손으로 몸을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손 밑으로 불꽃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군복이 여자의 몸에 덮여지며 그녀를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여자는 몸을 뒤틀며 울부짖었다. 그것은 어떤 굉음보다도 요란스러운, 도저히 인간의 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괴성이었다. 그레버는 그의 밑에 깔려있는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가까이 끌어당기고 두 손으로 그녀의 귀를 막아 주었다. 마침내 화염이 사라졌다. 비명과 흐느끼는 소리는 의복과 살, 머리카락이 타는 냄새로 변했다.

"의사, 의사를 데리고 와! 의사는 어디에 있나?"

"뭐라고?"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해! 제기랄! 앞을 볼 수 있어야지. 이 여자를 여기서 끌어내야 해."

"지금 바로?"

누군가가 물었다.

"어디로?"

모두들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밖에는 고사포가 미친 듯이 포탄을 쏘아댔다. 그렇지만 폭격은 이미 끝나고 있었다.

"가버렸다! 끝났다!"

"잠깐 동안 이대로 있어."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움직이면 안 돼. 폭격은 이미 끝났어. 그러나 잠시 기다려 봐야 해. 또 다시 적기가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그때 초등학교 선생님 같은 엄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밖은 안전하지 않다. 고사포의 파편이 위험해!"

둥근 빛이 입구로부터 들어오고 있었다. 회중전등의 불빛이었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여지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안돼요! 안돼요! 불을 끄세요!"

"불이 아니라 회중전등이야."

암흑 속에서 꺼질 듯한 불빛이 흔들렸다.

"여기야. 이리로 오란 말야! 누구야?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빛은 재빨리 방향을 돌리며 당황하고 있는 얼굴들을 비추기 시작했다.

"지배인 프리츠입니다. 식당이 무너져서 더 이상 여러분을 모실 수 없습니다. 계산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뭐라고?"

프리츠는 회중전등의 불빛이 자신의 얼굴을 보이게 했다.

"공습은 끝났습니다. 그래서 계산서를 가지고."

"뭐야!"

"여러분."

프리츠는 암흑을 향해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레스토랑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어디 있어!" 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우리를 사기꾼으로 아나? 네 얼굴만 비추지 말고 이리로 와! 부상자가 있어."

프리츠는 다시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불빛이 벽과 바닥 위를 방황하다가 군복 덩어리 위에서 정지했다.

"이게 뭐야!"

사내는 고함을 질렀다. 와이셔츠의 소매가 창백하게 보였다. 사내는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사내의 두 손을 비췄다. 지배인이 후들후들 떨고 있는 게 눈에 띄였다. 군복을 들어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 사내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보지 마."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흔히 있는 일이야. 어디서나 벌어지고 있지. 공습은 아무 관계도 없어. 그러나 당신은 시내로 가서는 안 돼. 공습이 없는 시골로 내가 데려다 주겠어. 내가 잘 아는 마을인데 그곳 사람들이 당신을 보호해 줄 거야. 우린 거기서 살 수 있어."

"들 것 갖고 와!"

무릎을 꿇고 있던 사내가 말했다.

"호텔에 들것이 있나?"

", 그런데 저, ."

지배인은 그 사내의 계급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입고 있던 군복의 상의는 다른 것들과 함께 여자 옆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는 지금 허리에 단검을 차고 있을 뿐이었다.

"계산서 얘기는 죄송합니다."

프리츠는 풀이 죽어 있었다.

"부상자가 생겼으리라고 미처."

"빨리 들것이나 갖고 와! 아니, 내가 직접 가겠어. 밖으로 빠져 나갈 순 있나?"

"."

사내가 바닥에서 일어나 상의를 걸치자 순식간에 소령으로 변했다. 불빛이 꺼졌다. 그와 함께 희망도 사라져 버리고 오직 여자의 흐느껴 우는 소리만이 남았다.

"완더!"

격렬한 남자의 목소리가 났다.

"완더, 우린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제는 나가도 되겠지?"

누군가가 물었다.

"해제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어."

학교 선생의 목소리였다.

"해제고 뭐고 알게 뭐야, 불은 어디에? 불은."

"의사가 필요해."

"완더!"

다시 격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벨하르트에게 뭐라고 말하면 되지? 뭐라고 말야."

"싫어! 싫어! 불은 싫어!"

여자가 부르짖었다. 불빛이 반짝했다. 이번에는 소령이 직접 램프를 들고 있었다. 그 뒤로 연미복을 입은 웨이터 두 사람이 들것을 들고 따라왔다.

"전화도 안 돼."

소령이 말했다.

"전화선이 끊어졌어. 들것을 이리로!"

그는 램프를 바닥에 놓았다.

"완더!"

역시 그 사내였다.

"비켜!"

소령이 명령했다.

"그런 것은 나중이야."

그는 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만하면 됐어. 곧 잠이 들겠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피하 주사 한 대를 남겨 놓고 있었지. 조심해서 들것에 태워!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구급차를 세워야 해!"

"알겠습니다. 소령님."

프리츠는 굽신거리며 말했다. 들것이 흔들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불에 타서 머리카락이 없어진 새까만 얼굴이 들 것 위에 실려 있었다. 여자의 몸은 테이블 덮개로 가려졌지만 움직일 때마다 유난히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죽었나요?"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아냐. 위기는 면했어. 다시 머리카락이 나겠지."

"얼굴은?"

"눈은 뜨고 있었어. 상처는 별로 대단치 않아. 곧 깨끗해질 거야. 난 화상 입은 사람들을 많이 봤지만 이건 그리 심한 게 아냐."

"도대체 어떻게 저런 끔찍한 일이 생겼지요?"

"옷에 성냥불이 붙은 거야. 너무 가까이 대고 성냥을 켰어. 이 지하실은 정말 훌륭해. 직격탄을 견뎌냈으니까."

그레버는 엘리자베스 머리맡에 세워놓았던 의자를 치우다가 깨진 유리조각을 밟았다. 주바의 문이 파괴되고 술병이 깨져 도처에 흩어지고 술은 검은 기름처럼 온 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잠깐만."

그는 엘리자베스를 기다리게 하고 외투를 들었다. 그는 술 저장고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 가 볼까?"

호텔 밖에 여자를 태운 들것이 서 있었다. 웨이터들이 휘파람을 불어서 구급차를 불렀다.

"도대체 에벨하르트는 뭐라고 할까?"

뒤따라오던 사내가 역시 격렬하게 말했다.

"아아, 참으로 재수가 없군! 그에게 무슨 말을."

에벨하르트는 그녀의 남편일 것이라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그는 어느 웨이터의 어깨를 짚었다.

"주연실의 웨이터는 어디 있지?"

"누구 말입니까? 오토입니까, 카알입니까?"

"학처럼 생기고 키가 작달막한 노인인데."

"오토로군."

웨이터가 그레버를 바라보았다.

"오토는 죽었습니다. 주연실의 천장이 내려앉아 밑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그레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아직 계산을 안 했는데. 술 한 병이야."

웨이터가 이마에 땀을 닦았다.

"제가 받기로 하겠습니다. 무엇을 드셨지요?"

"요하니스베르게르 카렙베르그."

"최고급으로?"

"그래."

웨이터는 주머니에서 가격표를 꺼내 회중전등을 비췄다.

"4 마르크입니다. 팁을 포함해서 4 마르크 반입니다."

그레버는 그것을 지불했다. 웨이터는 돈을 받아서 급히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레버는 그가 돈을 횡령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폐허를 따라 걸었다. 시가지 한 쪽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늘은 회색과 진홍으로 뒤섞이고 바람은 검은 연기를 사방으로 보냈다.

"당신 집이 괜찮나 가 볼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우린 휴식이 필요해요."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 함께 들어간 적이 있는 방공호가 있는 광장으로 나왔다. 그곳은 마치 지하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처럼 암흑 속에서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들은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배가 고프지? 당신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았어."

"괜찮아요. 지금은 먹을 수가 없잖아요."

그는 외투를 펼치고 주머니에서 술병 두 개를 꺼냈다.

"무엇을 들고 왔는지도 모르겠군. 이건 아마 코르크인가 봐."

엘리자베스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어디서 가지고 오셨어요?"

"술 저장고에서 가지고 왔지. 문이 파괴되고 술병이 모두 박살나 있었어."

"몰래 들고서?"

"물론이지. 활짝 열려져 있는 술 저장고를 보고도 모른 척하는 병사는 좀 모자라지. 군대는 십계 같은 게 해당 안 돼."

"그렇겠군요."

엘리자베스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울리지 않는 건 또 얼마든지 있어요."

그녀는 웃고 있었다.

"당신에 대해서 과연 난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당신은 이미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어."

"당신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요. 내 앞에 있는 당신은 원래의 당신이 아니에요."

그레버는 외투에서 병 두 개를 더 꺼냈다.

"이건 병따개가 필요 없어. 샴페인이야."

그는 마개를 감고 있는 철사를 벗겼다.

"이것을 마실 때 도덕적인 자책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그런 건 조금도 느끼지 않아요."

"우린 지금 목이 마르고 이것밖에 마실 것이 없으니까 이것을 마시는 거야. 우리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씽긋 웃었다.

"그걸 일부러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다른 얘기를 해요. 당신은 술병을 네 병씩이나 몰래 갖고 왔으면서 왜 홀에서 마신 건 지불을 하셨죠?"

"그것은 처음부터 술값을 내기로 하고 주문한 것이니까. 그 값을 내지 않으면 떼어먹게 되는 셈이지."

 

주위는 정적에 싸였다. 붉은 노을이 점점 번져가고 있었다. 이 특이한 빛이 모든 것을 비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잠깐 저기 있는 나무를 보세요."

"꽃이 나고 있어요."

그레버는 그 나무를 보았다. 폭격으로 인해 거의 땅 속에서 뽑혀져서 뿌리의 일부가 허공을 향해 늘어지고, 나뭇가지가 잘려져 나간 나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얀 꽃이 활짝 피고, 그것은 저녁놀을 받아 적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저 나무 옆에 있는 집이 불에 탔어. 아마도 그 열기가 꽃을 피울 수 있었을 거야."

엘리자베스는 일어나 나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벤치의 그늘에서 붉은 빛 속으로 들어갔다. 마치 무용수가 조명이 켜진 무대에 등장이라도 하듯이. 빛은 바람 속에 그녀를 밀어넣고 세계의 종말이나 구세주의 탄생을 고지하는 중세기의 혜성처럼 그녀의 등 뒤에서 타올랐다.

"활짝 피었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 나무는 지금 완전한 봄이로군요. 다른 건 전혀 문제가 안돼요."

"그래. 나무는 우리에게 중요한 걸 가르쳐 주고 있어. 오늘 오후 난 보리수에게서 많은 걸 느꼈는데 이번에는 이 나무에게 배우는군. 나무는 자라서 잎을 만들고 꽃을 피게 하지. 비록 찢기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땅 속에 뿌리를 뻗고 성장을 멈추지 않아. 결코 불평을 하거나 자기 자신을 동정하는 일이 없어."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그레버에게로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은 광선에서 빠져나오듯이 암흑 속에 던져진 그의 곁에서 다시 따뜻하고 싱싱한 숨결을 내뿜었다. 그는 그녀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나무는 하늘을 향해 힘차게 가지를 뻗고 만개한 꽃은 눈을 가리고 보리수가 되고 대지가 되고 하늘이 되고 엘리자베스가 되었다. 그는 그녀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15

48 호실은 매우 동요되고 있었다. 계란 머리와 도박에 빠져 있던 두 사내는 일선으로 복귀할 준비를 했다. 그들은 병역 가능자로 판명되어 수송대와 함께 전선으로 출발하려는 중이었다. 계란 머리는 새파랗게 질려서 로이타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멀쩡한 다리를 하고 있으면서! 기피자! 넌 남게 됐지만 한 집안의 가장인 난 전선으로 끌려가게 되었어!"

로이타는 침묵을 지켰다. 펠드만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봐! 넌 로이타 대신에 일선으로 끌려가는 줄 아나. 넌 병역 가능자이기 때문이야. 알았나? 바보 같은 소린 그만두시지."

"난 하고 싶은 말은 참지 못한다."

계란 머리는 소리를 질렀다.

"난 죽으러 가니까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네놈들이 여기 남아서 먹고 싸고 놀음을 하는 동안 난 일선으로 끌려가서 전투를 해야 돼. 난 일가의 가장이야! 그런데 저기 앉아 있는 저 꾀병쟁이는 다리를 불리려고 물만 잔뜩 퍼 마시고 있어!"

"그건 너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로이타가 물었다.

"내가? 천만에! 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책임을 회피한 적이 없어."

"그렇다면 불평할 게 없잖아."

"?"

계란 머리는 허점을 찔리자 얼굴을 붉히며 씩씩댔다.

"넌 네 스스로 비겁하지 않다는 걸 자랑으로 알지. 그런데 왜 불평만 일삼지? 그 자랑을 위로 삼아서 얌전히 좀 계시지."

"뭐라고? 뭣 때문에 걸고 늘어지는 거야! 넌 그런 짓밖에 할 수 없지. 이 돼지새끼야! 그러다가 너도 걸려들 줄 알아. 내가 네 놈을 가만둘지 알아?"

"제발,"

병영 가능자로 편입된 또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 빨리 나가봐야지!"

"저 주정뱅이 대신 가장인 내가 일선으로 끌려가야 하는 법이 있는가 말야. 난 다만 공평하게 처리해 주기를 바랄 뿐이야."

"공평 좋아하네. 넌 군대에서 그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 가자. 이것 봐, 우린 뭐 그렇다고 해서 기피자들을 고발할 생각은 없어. 그저 입으로만 떠들고 있을 뿐이야. 그럼 잘 있게! 몸조심들 하라구."

도박을 하고 있던 두 사내는 미친 듯이 날뛰는 계란 머리를 질질 끌고 나갔다. 창백한 얼굴에 식은 땀을 흘리며 뒤돌아서서 욕설을 퍼붓는 계란 머리를 두 사내가 밖으로 밀어냈다.

"바보 같은 놈!"

펠드만은 로이타에게 말했다.

"일류 배우답게 연극도 잘도 하는군! 내가 휴가를 잠으로 채운다고 놈이 떠들어대던 일을 기억하지?"

"그잔 많이 잃고 있었어."

갑자기 룸메르가 말했다. 그때까지 그는 구경만 하고 있었다.

"33 마르크야! 그 돈을 돌려주려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수송대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으니까."

"뭐라고?"

"그 녀석은 아직도 밖에 있어.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돈을 돌려주면 되잖아?"

룸메르는 밖으로 나갔다.

"저 녀석도 돌았군."

펠드만이 말했다.

"전쟁터에서 돈으로 대체 무엇을 하지?"

"또 도박을 하면 되지."

그레버는 창가로 갔다. 분견대가 집합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들과 노인만 보이는군."

로이타가 말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사람만 만나면 남김없이 사로잡았지."

분견대는 정렬을 했다.

"룸메르는 왜 그러지?"

펠드만이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저 녀석, 또 떠들어대기 시작했어!"

펠드만은 잠옷 차림이었다.

"계란 머리가 저기 서 있는데, 잠을 자면서 전선의 꿈을 꾸는 것과, 전선에서 고국을 꿈꾸는 것 중에서 어느 편이 좋은지 직접 체험할 수 있겠지."

"우리도 곧 그렇게 된다!"

로이타가 말했다.

"다음은 내 차례야. 군의관 녀석은 '참다운 독일 민족은 도망가기 위한 다리는 필요 없어. 앉아서라도 싸워야 된다.'고 하더군."

구령 소리가 들리더니 마침내 분견대는 출발했다. 그레버는 마치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보는 것처럼 그것을 바라보았다. 점점 멀리 사라져 가는 병사들은 어느새 장난감 총을 지닌 인형이 되어 있었다.

"계란 머리가 불쌍하군."

로이타가 말했다.

"그 녀석은 나에게 화를 냈다기보다 자기 아내에게 화를 낸 거야. 일선으로 떠나면 아내가 자기를 배반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 마누라가 결혼수당을 받는 걸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 마누라가 정부와 놀아나는 동안 한 푼도 남지 않을 테니까."

"결혼 수당? 그런 것도 있었나?"

그레버가 물었다.

"도대체 넌 어디 가 있었나?"

펠드만이 고개를 흔들었다.

"200 마르크라는 돈이 여자 손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지. 굉장하지? 여자들은 그것 때문에 군인하고 결혼하기를 원해."

로이타가 창가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자네 친구인 빈딩그가 왔었어."

"무슨 일로? 혹시 남긴 말이라도?"

"집에서 파티가 있다고 꼭 참석해 달래."

"그것뿐이야?"

"그래."

룸메르가 들어왔다.

"계란 머리를 만났나?"

펠드만이 물었다. 룸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어."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을 했다.

"그런데도 전쟁터로 가야 하다니."

그는 얼른 돌아서서 침대에 몸을 던졌다.

"계란 머리가 저런 꼴을 본다면!"

펠드만이 속삭였다.

"저 녀석은 내버려 둬."

로이타가 나무라듯이 말했다.

"너도 언제 우는 소리를 하게 될지 몰라.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몽유병자 역시도."

그는 그레버를 보았다.

"넌 얼마나 남았나?"

"열흘."

"열흘! 아직도 그렇게 많이!"

"지금까지는 지루했지만 오늘 아침에 눈을 뜨니 너무 짧더군."

 

"아무도 없어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루젤 부인도, 아이들도 모두 없어요. 오늘은 우리가 독차지했어요."

"좋았어! 오늘밤 그녀가 한마디라도 잔소리를 한다면 죽이려고 작정하고 있었어. 어젯밤에도 말다툼을 했나?"

"그 여잔 나를 매춘부 보듯 해요."

"어째서? 어젯밤 우리가 여기서 한 시간밖에 같이 있지 않았을 텐데!"

"그저께 당신이 여기서 밤을 지샌 일이."

"우린 단단히 잠그고 축음기를 틀고 있지 않았는가 말야,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모르겠어요."

엘리자베스는 살며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그레버의 눈과 마주쳤다. 처음 만났을 때, 내 눈은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암늑대는 대체 어딜 간 거야?"

"아이들을 데리고 농촌으로 갔어요. 구호모금을 위해서죠. 내일 밤까지 돌아오지 않아요. 오늘밤과 내일 낮 동안은 우리만의 세상이에요."

"내일까지! 당신 공장에서 일해야 되겠지?"

엘리자베스는 웃었다.

"내일은 일요일인걸요. 일요일엔 쉬고 있어요."

"일요일! 난 전혀 몰랐어! 그러면 밝은 대낮에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군. 우린 언제나 밤에만 만났지."

"정말! 그랬었군요."

엘리자베스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나도 밝은 낮에 당신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우린 열에 들뜬 것 같은 생활을 하고 있어요."

"다른 수가 없잖아?"

"그렇긴 해요. 내일 대낮에 서로의 모습을 마주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하느님에게 맡기기로 하지. 오늘밤은 어젯밤 갔던 레스토랑으로 갈까? 게르마니아가 문을 닫아서 아쉽군."

"집에서 보내기로 해요. 내가 요리를 만들어 드릴게요."

"여기서?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

"루젤만 없으면 여긴 낙원 같아요."

"그럼, 여기 있기로 하지. 음악이 없는 밤이라 아마도 멋질 거야. 난 당신을 두고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저녁식사는 어떻게 하지? 당신, 정말로 요리를 할 줄 아나?"

"해 볼게요. 배급을 조금 받은 것 외엔 요리할 만한 게 없거든요."

두 사람은 부엌으로 갔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가 배급받은 것을 바라보았다. 거의 아무 것도 없었다. 약간의 빵과 꿀벌 대용품, 마가린과 계란 두 개, 사과 몇 개가 전부였다.

"아직 배급표가 남아 있으니까 받아 올 수도 있어요."

그레버는 서랍을 닫았다.

"배급표는 그냥 두라고. 필요할 때가 있을 테니까. 오늘은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지."

"집안에선 아무 것도 손을 댈 수 없어요." 엘리자베스는 놀란 것 같았다.

"루젤 부인은 자기 물건을 훤히 알고 있어요."

"난 절대로 도둑질할 생각은 없어. 적국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처럼 징발하러 나갈 뿐이야. 알폰스 빈딩그란 사내가 나를 파티에 초대했어. 파티에 참석해야지! 날 위해 준비한 음식을 잔뜩 안고 오겠어. 30분 후에 돌아오지."

 

알폰스는 두 팔을 벌려서 그를 환영했다.

"잘 왔네. 어서 들어오게! 오늘은 내 생일이야! 친구들이 몇 명 와 있지."

실내는 담배 연기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알폰스."

그레버는 복도를 지나면서 급히 말했다.

"난 곧 돌아가야만 해."

"돌아간다고? 에른스트, 도대체 그런 말이 어딨어?"

"자네가 초대했다는 걸 알기 전에 선약을 한 사람이 있어."

"무슨 상관인가! 갑자기 공식적인 회합에 출석하게 됐다고 하면 돼."

알폰스는 크게 웃었다.

"게슈타포의 장교 두 사람이 와 있어! 당장 소개해 주지. 약속한 친구에게 게슈타포에 끌려갔었다고 들러대게. 그러지 말고 이리로 데려오든지."

"그건 안 돼."

"어째서? 우리에게 불가능은 존재하지 않아."

그레버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알폰스, 벌써 짐작했을 텐데. 네가 생일축하 파티를 열 줄은 전혀 몰랐어. 난 네게 먹을 것 좀 얻으려고 들른 거지. 난 지금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여기로 데리고 올 수는 없어. 이제 짐작하겠나?"

빈딩그는 잇몸까지 보이면서 웃었다.

"알았어. 영원히 행복을 약속한 여성인가?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군! 자넨 틀렸다고 체념했는데 그만하면 알겠어. 그래, 좋아. 그렇지만 여기도 괜찮은 여성이 둘이나 있어. 어때, 한번 만나보지 않겠어? 아르마란 여성은 참으로 유쾌한 여자야 저기 하이힐을 신은 금발말야. 그녀는 부인 강제수용소의 소장이야. 네가 마음에 있다면 오늘밤 톡톡히 재미를 볼 수 있지. 저 여잔 일선 장병이라면 누구라도 좋으니까. 참호의 냄새가 그녀를 흥분시키는 모양이야."

"난 그렇지도 않아."

알폰스는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아르마의 몸뚱이에서 풍기는 강제 수용소의 냄새를 맡으면 자네도 참을 수 없을걸. 슈테게만이란 녀석은 완전히 빠져 있어. 소파에 앉아 있는 저 뚱보가 바로 그 주인공이야. 내 취향은 아니지. 저기 구석에 있는 아담한 아가씬 어떤가?"

"일류인데."

"그래? 마음에 든다면 얼마든지 양보하겠네."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어."

"알았어. 그렇다면 자네가 발견한 여성은 확실한 상류층이겠군. 좋아, 양해하지. 이 알폰스도 신사야. 우선 부엌으로 가서 자네가 좋아하는 걸 찾아볼까? 그런 다음에 축배를 드는 거야. 딱 한 잔이라구. 어떤가?"

"좋아."

부엌에는 크라이네르트 부인이 흰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야유회의 진수성찬이다! 자넨 운이 좋아! 뭣이든 좋아하는 걸로 가지고 가게. 아니 크라이네르트가 멋지게 포장해 놔요. 우린 지하실에 갔다 올 테니까."

지하실에는 구경하기도 힘든 물건들이 잔뜩 저장되어 있었다.

"모든 건 알폰스에게 맡겨."

빈딩그는 싱글싱글 웃었다.

"만족스럽게 해주지. , 첫 개시로 프랑스제 통조림 두 개를 받게나."

그레버는 통조림을 받았다. 알폰스는 여기저기를 뒤졌다.

"네덜란드에서 온 아스파라거스가 두 통. 그대로 먹어도 되고 데워 먹어도 좋아. 그리고 여기 프라하의 햄이 한 통. 복숭아 통조림도 있군. 그것보다도 딸기가 좋지 않을까?"

그레버는 번쩍번쩍 빛나는 장화를 신고 앞에 서 있는 짧은 다리를 보았다. 그 다리를 사이에 두고 특산품과 통조림이 높게 쌓여 있었다. 문득 엘리자베스의 초라한 배급품이 떠올랐다.

"두 가지 다 가져갈 수 있다면 좋겠지."

알폰스는 이를 드러냈다.

"맞았어! 마침내 자네도 옛날도 돌아갔군. 에른스트, 세상을 비관해 봤자 별수 없어. 안되는 건 어차피 안돼. 손에 들어오는 건 꽉 움켜잡아. 걱정 따윈 목사에게 맡겨 두라구."

알폰스는 사닥다리에서 내려와 다른 지하실로 갔다. 거기에는 술병이 가득 저장되어 있었다.

"여기에도 멋진 전리품이 많아. 우리들의 적군이 이런 것 미시면 술의 신에게 노여움을 사지. , 무엇으로 할까? 보드카? 아르마냑? 폴란드산 매실주도 있어."

술은 게르마니아에서 갖고 온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빈딩그의 말이 옳다 전리품은 전리품이다. 네게로 가는 것은 놓치지 마라.

"샴페인도 있어. 난 이런 건 좋아하지 않지만 로맨스엔 어울리는 술이지. 한 병 가지고 가게. 이게 있다면 오늘밤은 성공이야!"

빈딩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즐기는 술이 무엇인지 아나? 퀸메르야. 그것도 한 병 주지. 퀸메르를 마시면서 알폰스도 생각해 주게."

두 사람은 다시 부엌으로 갔다.

"크라이네르트, 꾸러미를 둘로 나눠요. 하난 음식물, 하난 술병으로. 병과 병 사이에는 종이를 끼워서 술병이 깨지지 않도록. 이만하면 됐나, 에른스트?"

"이걸 다 가지고 갈 수 있을까?"

빈딩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알폰스는 무엇이든지 도중에 그만두는 법이 없지."

빈딩그의 눈은 번들거리고 두 뺨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새의 둥지를 발견한 소년이 흥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레버는 그의 친절에 감동했지만 알폰스가 하이니의 소련에서의 체험담을 듣고 있을 때도 지금과 같은 표정이 되었던 것을 상기했다. 빈딩그는 그레버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최고급 커피도 준비했지. 그건 내일 아침 몫이야.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절대로 서두르지 마라. 그럼 들어가 볼까? 내 친구를 소개하지. 게슈타포에 있는 슈미트와 호프만이야. 저들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인간이지. 잠깐이면 돼. 그리고 나를 위해서 건배해 주게. 내가 가진 모든 걸 그대로 보존할 수 있도록!"

 

"저것을 부엌에 놓아둘 순 없어요."

엘리자베스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감춰야겠어요. 루젤이 보고 나를 암매상으로 밀고할 거예요."

"미처 생각을 못했군! 어떻게 매수하는 방법이 없을까? 우리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주든지."

"필요 없는 것?"

그레버는 웃었다.

"당신의 소중한 벌꿀 대용품. 아니면 마가린."

"그러나 어려울 걸요. 그 여잔 배급표만으로 살아가는 것을 자랑으로 아니까."

"내일 밤까지 먹어치우기로 하지."

"그래도 전부 먹을 수는 없을 테니 나머진 어떻게 하지?"

"내 방에 숨겨두기로 해요. 책이나 옷 속에."

"그녀가 냄새를 맡는다면?"

"난 아침마다 자물쇠를 채우고 나가는 걸요."

"그녀가 똑같은 열쇠를 갖고 있다면?"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었다.

", 그것을 생각 못했군요."

그레버는 술병을 들었다.

"그것은 내일 걱정하기로 하고 지금은 먹는 일에나 열중해 보자고. 우리의 생일로 알고 테이블 가득히 차려. 파티를 하는 거야!"

"통조림도?"

"통조림은 장식용이야. 뚜껑을 열 필요는 없어. 우선 상하기 쉬운 것부터 먹어 치우기로 하지. 술병도 나란히 세워놓고. 도둑질과 뇌물로 당당하게 입수한 전 재산을 말이야."

"게르마니아에서 갖고 온 것도?"

"물론이지. 그건 충분한 대가를 치른 거야."

그들은 테이블을 방 한가운데로 옮긴 다음에 포장지를 전부 벗기고 매실주와 코냑과 퀸메르의 마개를 땄다. 샴페인만 그대로 두었다.

"멋지군요! 그런데 무엇을 축하하지요?"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 술잔을 넘겼다.

"우린 모든 것을 축하하는 거야. 여러 가지로 따로따로 축하할 시간이 없어. 첫째는 당신과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또 이틀간이나 둘만이 지낼 수 있게 된 것을 축하하는 거야!"

그는 테이블을 돌아서 엘리자베스를 가슴에 안았다. 그는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제2의 자신이 끝없는 생명력으로 잠겨드는 것 같았다. 더욱 새롭고 가슴 벅찬 희열이 그의 내부에 퍼졌다.

 

창은 활짝 열려 있었다. 바로 맞은 편에 보이는 집에 어젯밤 명중된 직격탄의 파편으로 엘리자베스 방의 창문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녀는 등화관제용의 검은 종이로 창문을 가리고, 그 위에 엷은 커튼이 쳤다. 커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방안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간간이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기침을 했다.

"도시는 거의 잠들었군요. 난 몹시 취했고요."

그들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테이블에는 음식 찌꺼기와 마시다 남은 술병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치우지 않고 다시 배가 고파질 때까지 기다렸다. 보드카는 마셔버리고 코냑은 침대 밑의 바닥에 세워놓고 있었다. 그레버는 침대 옆의 작은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평화로운 마을에 있는 듯 했다. 샘물이 솟아나고 보리수에는 꿀벌들이 윙윙 거리며 몰려든다. 멀리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곧 달이 뜨겠군."

이제 달이 뜰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부드러운 달빛, 단순한 생물의 행복, 그것은 이미 여기에 존재한다. 잠들지 않고 순환하는 우리의 피 속에 있다. 그는 폴만과의 대화를 떠올렸지만 그것은 아득한 옛날로 느껴졌다. 그토록 처절하게 절망하고 나서 다시 이런 정열을 발산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나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의문에 잠겨있는 동안은 그것 이외의 사실은 깨닫지 못하기 마련이다. 열렬히 기대했던 것이 사라져버릴 때, 비로소 새로운 눈이 뜨이고 공포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한 줄기의 빛이 창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빛은 재빨리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벌써 달이 나왔을까?"

"그럴 리가 없어요. 달빛은 저렇게 하얗지 않아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용 슬리퍼를 신었다. 그녀는 창가로 가서 살며시 밖을 내다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나신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방공단의 작업반들이에요. 삽과 곡괭이를 들고 맞은 편 집에 모여 있어요. 지하실에 사람들이 묻혔을까요?"

"전신주를 수리하는 중인지도 모르지."

"맞아요."

엘리자베스는 그레버에게로 돌아왔다.

"난 때때로 공습이 있고 난 다음에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차라리 아파트가 불에 타 버렸길 바라고 있어요. 집도 가구도 옷도 그리고 기억조차도! 당신은 이해할 수 있겠죠?"

"이해하고말고."

"그렇다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까진 아니에요. 다른 것들 공포라든가, 실망이라든가, 증오 같은 것. 집이 타 버리면 그 모든 것이 끝나버리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응시했다. 밖에서 스며든 창백한 빛이 그녀의 어깨까지 이어졌다. 곡괭이를 내려찍는 둔탁한 소리와 삽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찬물에 담궈 둔 술병을 가져와요."

"게르마니아에서 가지고 온 것?"

"터져 버리기 전에 마셔야지. 그 대신 빈딩그가 준 술병을 담그고. 공습이 언제 있을지 몰라. 이런 탄산가스가 가득 찬 병은 쉽게 폭발하지. 집안에선 수류탄만큼이나 위험해. 잔은?"

"물 마시는 컵밖에."

"샴페인은 그게 어울려. 우린 파리에서 그렇게 했지."

"당신은 파리에도 갔었군요."

"전쟁 초에 거기 있었지."

엘리자베스는 잔을 들고 그의 곁에 앉았다. 그는 천천히 뚜껑을 뽑았다. 샴페인이 컵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거품이 일었다.

"파리에선 얼마나 계셨죠?"

"2주일간."

"프랑스인들은 당신들을 증오하고 있었겠죠?"

"글쎄, 잘 모르겠는데. 우릴 환영하진 않았겠지. 난 그런 건 신경쓰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어. 다만 우리가 배운 사실만을 믿고 있었던 거야. 하루 속히 전쟁이 끝나 노천카페의 양지에 앉아 이국의 포도주를 음미하고 싶었지. 그때 우리들은 아주 젊었으니까."

"젊었으니까? 마치 오래된 옛날 얘기를 하는 것 같군요."

"실제로 그렇게 생각되는 걸."

"그럼 당신이 늙었나요?"

"아직 젊지. 하지만 그 시절에 비하면 무척 늙은 것 같아."

엘리자베스는 창가에서 흔들리는 빛 한가운데로 컵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컵을 흔들며 거품이 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레버는 그녀의 어깨에 파도치는 긴 머리카락, 잔등에서 부드럽게 이어진 척골의 선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는 없다. 이 사람은 옷을 벗고 있을 때는 이 방도, 루젤 부인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사람 역시 바깥의 공포, 잠들지 못하는 밤, 지금 막 발굴하려는 사자들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우연이나 공허, 무의미한 세계의 인간이 아니다. 이미 그렇지는 않다.

"나도 당신과 함께 파리에 가보고 싶어요."

"전쟁이 끝나면 갈 수 있겠지."

"프랑스인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줄까요?"

"그럴 거야. 파리는 조금도 파괴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다른 나라처럼 많이 파괴되지는 않았어. 곧 끝나버렸으니까."

"그렇지만 증오를 받을 만한 것을 파괴했는지도 모르죠."

"그럴지도 모르지.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되면 여러 가지를 잊게 되니까. 프랑스들도 우리를 증오할 수 있지."

"다른 나라로 가고 싶어요. 전혀 피해가 없는 나라로."

"그런 나라는 거의 없을 걸. 아직 마실 것이 있나?"

", 아직도 많이. 또 어디에 갔었지요?"

"아프리카에."

"아프리카에도? 당신은 많은 걸 보셨겠군요."

엘리자베스는 두 개의 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그레버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은 술 때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지만 모두 무의미하게만 들렸다.

"또 다른 나라에도?"

돛단배였다. 강물에 둥둥 떠 있는 돛단배를 구경한 것은 어디였을까?

"네덜란드에도 갔었지. 그것은 전쟁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어. 운하에 배가 다니고 있었어. 그 배는 돛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나갔어."

"네덜란드. 우린 전쟁이 끝나면 그곳에 갈 수 있어요. 코코아를 마시고, 빵과 네덜란드산 치즈를 먹고, 해가 질 무렵의 돛단배도 구경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레버는 그녀를 보았다. 먹는 것. 전시 중에 인간의 행복은 먹는 것과 결부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네덜란드엔 갈 수 없겠지요."

"우리 군대는 그곳을 유린하고 아무 경고도 없이 노트르담을 파괴했으니까. 3만 명의 사상자가 났어. 네덜란드에선 우리를 받아주지 않을 거야. 엘리자베스."

그녀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갑자기 컵을 바닥에 힘껏 팽개쳤다.

"결국 아무 데도 갈 수 없군요! 우린 어째서 한낱 꿈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거죠? 우린 갈 곳이 없어요. 우리는 감금됐으며 저주를 받았어요!"

그레버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는 바닥을 살펴보았다.

"불을 켜고 유리조각을 모아야 돼. 잠깐 기다려요. 우선 창문을 닫을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전등을 켜고 가운으로 몸을 가렸다. 방안이 밝아지자, 그녀는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나를 보지 마세요.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훌륭해. 당신 말이 옳아. 당신은 이런 곳에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알고 싶어요."

그레버는 웃었다.

"그건 나도 몰라. 어쩌면 서커스가 적당할지도 모르지. 아니면 바로크식의 대저택이나. 강철로 만든 가구에 둘러싸여 있거나 천막 안에. 어쨌든 소녀의 방은 아니지. 난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당신을 보호해 주고 싶었어!"

"난 정말 보호를 받고 싶어요."

"모두들 그럴 거야. 우린 보호도, 원조도 없이 살아왔지."

그는 신문지를 바닥에 펼쳐놓고 유리를 쓸어 모았다.

'전선, 다시 단축되다. 오레르 주변의 격전.'

그레버의 눈에 신문의 제목이 크게 확대되어 들어왔다. 그는 재빨리 신문지를 뭉쳐서 휴지통에 버렸다. 밖에서 수색대의 해머소리가 높게 들려왔다. 테이블 위에는 알폰스에게 받은 선물들이 늘어 서 있었다.

"이것을 정리해야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

"어디에다?"

"부엌에. 루젤이 오기 전에 나머진 숨겨야 해요."

"내일 밤엔 많이 줄어 있을 거야. 루젤 부인이 앞당겨서 돌아오면 어떻게 하지?"

"그래도 상관없어요."

그레버는 깜짝 놀라면서 그녀를 보았다.

"내가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에 나 역시 놀라고 있어요."

"하루하루가 아니라 매 시간마다 달라지고 있어."

"당신은?"

"나도 마찬가지야."

"그것이 좋은 현상일까요?"

"그래.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다는 건가요?"

"그렇지."

엘리자베스는 불을 껐다.

"난 숨이 막힐 것 같아요."

그레버는 창문을 열었다. 순식간에 들어온 바람으로 인해 커튼이 춤을 추었다.

"달이 떴어요."

지붕 위에 잔뜩 부풀어 오른 노란 공이 걸려 있었다. 그레버는 두 개의 잔에다 코냑을 절반쯤 따랐다. 그 중에 하나를 엘리자베스에게 권했다.

"이번에는 이걸 마시기로 하지. 어두운 곳에서는 포도주 맛이 제대로 안 나."

달이 차츰 높이 떠오르면서 금빛을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돌렸다.

"우린 어떻게 될까요? 행복과 불행 중에서."

그레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양쪽 다 해당되겠지. 이런 시대에는 당연할 거야. 행복만을 누리고 있는 건 동물밖에 없어. 아니, 동물의 행복도 완전할 순 없겠지."

"그런 게 어떻든 상관없어요."

"맞아."

"중대한 일이 있기는 해요?"

"물론!"

그레버는 온 방안에 퍼지고 있는 싸늘한 빛을 느꼈다.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어."

 

 

16

일요일 아침이었다. 그레버는 하겐가에서 서성거렸다. 주위가 약간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물통이 없어지고 층계가 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의 통로는 벽을 돌아서 안마당으로 바뀌었고 안마당에서 사선으로 건물의 잔해를 향해서 통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작업반이 정리 작업을 시작한 듯했다. 그는 몸을 움츠리고 입구를 통과하여 절반쯤 묻혀 있는 방으로 왔다. 그곳은 원래 이 집의 세탁실이 있던 자리였다. 거기서부터 낮고 어두운 통로가 이어졌다. 그는 성냥불로 앞을 비춰 보았다.

"거기서 뭐해?"

갑자기 등 뒤에서 고함소리가 났다.

"빨리 나와!"

그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지만 어두워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지팡이를 짚은 사내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사내는 사복 차림에다 군용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넌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소리를 질렀다.

"난 여기에 살던 사람이오. 그런데 당신은?"

"바로 내가 여기 살고 있어. 알았나? 물론 너 같은 건 여기 살 수도 없어. 무엇을 훔쳐내려고 왔나?"

"그런 소리하지 마라."

그레버는 지팡이와 군용외투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내 부모님도 여기 살고 계셨고, 난 입대하기 전까지 여기 살았어. 알겠나?"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지."

그레버는 사내의 지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그를 밀어내면서 통로를 빠져 나왔다. 그레버가 밖으로 나오자 한 여자가 어린애를 데리고 다가왔다. 그 뒤를 또 다른 사내가 곡괭이를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여자는 집 뒤에 세워져 있던 창고에서 나온 듯했다. 지팡이를 든 사내는 반대쪽에서 접근해 왔다. 그들은 그레버를 사이에 두고 섰다.

"왜 그래?"

곡괭이를 들고 있던 사내가 절름발이 사내에게 물었다.

"저 놈을 여기서 잡았어. 이 근처를 배회하는 게 수상쩍단 말야. 자기 부모가 여기 살고 있었다나."

곡괭이를 든 사내가 적의를 품은 웃음소리를 냈다.

"또 할 말이 있나?"

"없다."

그레버가 말했다.

"그런 건 갑자기 생각해 낼 수도 없겠지, 안 그래?"

사내는 곡괭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내가 셋 세는 동안 여기를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골통을 부셔놓을 테니까. 하나."

그레버는 측면으로부터 덤벼들면서 그에게 일격을 가했다. 사내가 맥없이 쓰러졌다. 그레버는 사내의 곡괭이를 빼앗았다.

"이제야 속이 시원하시겠지. , 경찰을 부르고 싶으면 큰소리로 불러 봐!"

사내가 천천히 일어났다. 코밑으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만 두는 것이 좋을걸."

그레버는 말했다.

"난 군대에서 격투하는 방법을 훈련받았어. 자네들은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거야. 어서 말해 봐!"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저희들은 여기 살고 있어요. 그것이 왜 나쁜 일인가요?"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 난 부모님께서 여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찾아온 것 뿐이야. 그건 나쁜 일인가?"

"그럼, 그게 사실인가?" 지팡이의 사내가 물었다.

"물론이지! 도대체 여기에 훔칠 만한 것이라도 있단 말인가?"

"난 휴가로 돌아왔기 때문에 다시 가야 하오. 문 앞에 꽂아놓은 종이쪽지를 보았소? '아버지와 어머니의 소식을 알고 싶습니다.' 라고 적혀 있는 것. 내가 쓴 것이오."

"그건 당신의 필적이었군."

절름발이가 말했다.

"물론이오."

"그렇다면. 당신도 짐작했겠지만 우린 폭격으로 집을 잃었소. 때문에 이곳에 형식적인 잠자리나마 마련했던 것이오."

"그럼, 정리도 당신들이 했소?"

"일부분이지. 모두가 일을 도와주었소."

"모두라니?"

"도구를 갖고 있는 친구들이오."

"시체가 나왔소?"

"아니오."

"정말!"

"그렇소. 전에는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린 한 구의 시체도 발견하지 못했어."

"내가 알고 싶은 게 바로 그것이었소."

"그렇다면 남을 구타할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요."

여자가 말했다.

"이 사람은 당신의 남편이오?"

"그런 건 당신이 알 필요가 없잖아요? 남편이 아니라 오빠에요. 어머나! 피를 흘리고 있네."

"코피정도야."

"입에서도 피가 나요."

그레버는 곡괭이를 들었다.

"이 사람은 이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었소?"

"당신을 치려던 건 아니었어요."

"난 얻어맞을 때까지 마냥 기다릴 바보가 아니란 말이오."

그는 재빨리 곡괭이를 벽돌더미 속으로 던져버렸다. 모두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가 곡괭이를 가리키며 벽돌더미 위로 기어 올라갔다. 여자가 얼른 아이를 붙잡았다. 그레버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가건물 옆에 놓인 물통이 눈에 띄었다. 나무로 된 층계는 훌륭한 장작이 되었을 것이다. 이 일가가 폐허를 정리하면서 가건물을 세운 것이다. 그들은 지금 분명히 벽돌더미 속에서 긁어모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물려주신 양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이는 건강해 보였다. 이렇게 죽음은 극복되었으며 폐허더미 위로 다시 꽃이 필 것이다.

"빨리도 해치었군."

"머리 위에 지붕이 없을 때는 동작이 빨라야지." 절름발이가 대꾸했다.

그레버는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혹시 고양이를 못 보았소? 흑백의 반점이 박혀있는 고양이인데."

"우리 로오자인걸."

아이가 말했다.

"아냐!"

여자가 깜짝 놀라며 경계를 했다.

"우린, 고양이 같은 건 구경도 못했어요."

그레버는 그대로 돌아섰다. 가건물 속에는 다른 인간들도 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짧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일을 해치울 수가 없다. 아마도 의용단들도 협력했을 것이고 또 한 밤에는 강제 수용소의 죄수들이 정리 작업을 위해 시내 도처에 파견되고 있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초라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레버는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은 거리로 나왔다. 상점에는 대형 진열장의 유리조차 깨끗했다. 멍청하게 걷고 있던 그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가 자기를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마치 유령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한 발자국만 더 내밀면 금세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존재했었던 기억만이 남을 듯이.

그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간신히 두 눈동자만 툭 튀어나와 있을 뿐, 얼굴의 형태는 창백한 빛으로만 남아 있었다. 싸늘하고 야릇한 공포가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그것은 공황이 아니며 끔찍한 혐오도 아니었고 도망에로의 절박한 부르짖음도 아니었다 그것은 만성적이면서도 비개인적인 공포,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는 진공의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공포였다.

그는 거리에 서 있었다. 도대체 뒤에 남겨지는 것은 무엇일까? 만약에 내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 무엇이 남게 되는가. 그것은 무다. 몇 명의 사람들, 부모님이 살아있다면 그들과 약간의 친구, 그리고 엘리자베스 그들만이 기억 속에 잠시 머물다가 없어질 것이며 그것조차 얼마나 오랫동안 남을 것인가는 미지수이다.

"에른스트."

그의 이름이 들린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목발을 한 사내가 거기 서 있었다. 하겐가에서 만난 절름발이 사내다! 그때 지나가던 자동차의 불빛이 그 사내의 얼굴을 비췄다가 사라져갔다. 그는 절름발이가 아니라 동급생이었던 뮤치히였다.

"! 너였군 그래. 네가 여기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벌써 반년이나 되었어."

그들은 서로의 모습을 보았다.

"설마 이런 꼴이 되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겠지?"

뮤치히가 말했다.

"무엇을?"

뮤치히는 목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바로 이것 말이야."

"그래도 넌 지옥에서 빠져 나온 셈이야. 난 다시 돌아가야 해."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 만약에 전쟁이 2, 3년 더 계속된다면 운 좋은 셈이지. 그러나 6주 일만에 끝나버리면 굉장한 불행이야."

"어떻게 6주 일만에 끝날 수 있지?"

"난 다만 만약에 그렇다면."

"물론 그렇겠지."

"언제 한 번 들르지 않겠나? 벨그만도 함께 있어. 두 팔을 잃었지."

"지금 어디들 있나?"

"시립병원의 절단자 병실에 있어. 거긴 전부 우리가 점령했지. 한 번 오라구."

"알았어. 곧 찾아갈게."

"정말? 모두들 말은 잘 하지만 한 녀석도 얼굴을 안 내민다."

"난 정말이야."

"그래 우린 무척 재미있게 지내. 적어도 우리 방에 있는 녀석들은 모두가 그렇지."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미 3 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던 친구였다.

"그럼 잘 가, 에른스트."

", 너도."

두 사람은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넌 지베르트가 죽은 걸 알아?"

뮤치히가 물었다.

"아니, 전혀!"

"6주일 전이었지. 그럼 라이너는?"

"라이너? 난 정말 몰랐어."

"라이너와 링겐. 그들은 같은 날 아침에 죽었지. 브류닝은 머리가 돌았고, 홀만도 죽었어. 넌 전혀 모르고 있었군."

"몰랐어."

"벨그만이 소식을 들은 모양이야. 그럼, 조심하게 에른스트! 우릴 잊지 말고 꼭 찾아 주게."

뮤치히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반대쪽으로 갔다. 죽은 사람들에 비하면 자기의 불행은 아무 것도 아니다 불행이 확실히 가벼워졌겠지. 그레버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무릎 위에서 절단 당했다. 뮤치히는 전쟁이 나기 전, 동급생들 중에서는 가장 우수한 단거리 선수였다. 그레버는 그를 동정해야 할지, 부러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뮤치히의 말은 옳았다.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정해진다.

 

그가 돌아서자 엘리자베스는 흰 가운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타올을 터번처럼 머리에 돌려서 감은 그녀의 자태는 무척 아름다웠다.

"난 일주일 분의 목욕물을 다 써 버렸어요. 아마 루젤 부인이 잔소리를 할 거예요."

"멋대로 하라지. 그 여잔 목욕물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거야. 참다운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목욕을 자주 안 해. 그들에게 청결은 유대인적인 악덕이야."

그는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회색으로 변한 하늘과 폐허,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마주 보이는 창가에서 한 남자가 하품을 하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에 섞여서 발성연습을 하는 여자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버는 양장점의 거울 앞에서 느꼈던 공포와 의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뒤에 남는 건 무엇일까?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완전한 나의 것일까? 그녀를 만나서 사랑한 시간은 짧다. 나는 다시 일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몇 년 후, 그녀는 나를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엘리자베스, 우린 결혼해야 돼."

"결혼한다구요! 왜죠?"

"왜냐고? 우린 서로를 안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며칠 후에 난 전선으로 돌아가야 해. 우린 진정으로 서로를 원하는 가도 모르고 있고, 또 그걸 알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그러니까 결혼해야 돼."

그녀는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우리는 너무 고독하기 때문인가요?"

"아니."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만은 아니지."

"그럼?"

그는 그녀의 호흡이 고르게 되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젖가슴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녀의 팔과 손목은 내 것이 아니듯이 그녀의 생각과 생활도 나 자신과 같을 수도 없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도 어째서 갑자기 결혼할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녀가 알 수 있을까?

"만약에 결혼한다면 당신은 루젤 부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지. 군인의 아내로서 보호를 받게 되니까."

"그래요?"

"물론이지."

그녀의 쏘는 듯한 눈길을 느끼자 그레버는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다소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거야."

"그런 건 결혼의 이유가 될 수 없어요. 루젤 부인 따위, 조금도 겁나지 않아요. 결혼이라고요? 그럴 시간이 어딨죠?"

"왜 없지?"

"서류와 허가증과 아리아인의 혈통증명서, 건강진단서 그런 걸 다 만들려면 몇 주일이나 걸려야 해요."

몇 주일. 그녀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지껄였다. 그때 나는 또 어디에 있을까?

"군인은 달라. 전시의 결혼은 특별 대우를 받지. 하루 이틀이면 끝나. 막사에서 얘기를 들었어."

"당신은 거기서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그렇진 않아.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그런 생각이 들더군. 그렇지만 막사에선 이런 문제를 놓고 토론들을 하지. 휴가 나와서 많이들 결혼했어! 당연하지. 일선에서 돌아온 병사가 결혼을 하면 그 아내는 매달 수당을 받게 돼. 200 마르크나 되지. 그것을 고스란히 국가에 기부할 필요가 있나? 자기의 목을 내놓았다면, 자기의 권리는 왜 포기하지?"

"그리 생각한다면 그렇겠죠."

"내 말이 바로 그런 뜻이야."

그레버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세대주는 대부금을 받을 수도 있어. 1000 마르크는 될 거야. 당신은 결혼하면 외투공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에요. 그건, 또 다른 얘기죠. 공장에 가지 않는다면 하루 종일 집에서 무엇을 하죠?"

"그렇군."

순간 그레버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도대체 놈들은 어떻게 할 셈인가? 우리는 아직 젊으며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우리들의 어버이가 일으킨 전쟁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린 곧 헤어져야 해. 결혼을 하면 떨어져 있어도 덜 외로울 거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나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

"그래도 고독이 반으로 줄지는 않아요. 우린 더욱 고독해질 거예요."

발성연습을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음계가 높아지자 소리가 갈라져서 듣기에 거북할 정도였다.

"나중에 취소할 수도 있어.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면 이혼을 해도 되지."

"그럼, 왜 결혼을 하지?"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 어제와 몹시 다르군요."

"어떻게 다르지?"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만하기로 해요. 우린 지금 함께 있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해요."

"당신은 결혼하고 싶지 않군."

"그래요."

그는 그녀를 보았다.

"난 모든 걸 선의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엘리자베스가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때때로 그것으로 난처해질 때가 있어요. 아직 술이 남았을까요?"

"매실주가 있지."

"폴란드산? 전리품이 아닌 것?"

"퀸메르가 한 병 있을 거야. 그건 독일제야."

"그럼, 그걸로 한 잔 주세요."

그레버는 부엌으로 가면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잠시 동안 빈딩그의 선물 앞에 서 있다가 돌아섰다. 엘리자베스는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하늘이 회색으로 변했어요. 비가 올 것 같아요. 아이, 따분해!"

"따분해?"

"오늘은 우리의 첫 번째 일요일이고 우린 외출할 수도 있었는데, 교외는 이미 봄인걸요."

"나가고 싶나?"

"아니, 전 루젤이 집에 없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당신은?"

"난 아무래도 좋아. 내가 늘 생각하던 자연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따뜻한 방이야. 난 지금 그곳에 있지. 당신은 밖으로 나가고 싶겠군. 극장에라도 갈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집에 있기로 하지. 밖에 있으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 버릴 거야."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어리석었지?"

"아니에요."

"그럼 당신은 왜 눈물을."

그는 그녀를 안은 두 팔에 힘을 주면서 창문 너머로 눈길을 돌렸다. 파괴된 집의 지하실로 통하는 방공호 속에서 전쟁놀이를 하는 아이들 몇 명이 눈에 띄었다.

"우린 조금도 슬퍼할 필요가 없어."

발성연습을 하던 가수가 다시 목청을 돋우더니 사랑의 노래를 미친 듯이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노래는 불안정한 음성으로 계속 이어졌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세월이 가고 고통이 있을지라도 이 몸은 그대를 사랑한다!"

"그래요. 우린 슬퍼하지 않아도 돼요."

엘리자베스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더욱 짙어지면서 한 곳으로 뭉치고 있었다. 그들은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레버는 단조로운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쯤 소련에서는 온갖 것들이 수렁 속에 빠지는 흙탕물의 계절이 시작됐을 것이다.

"그만 가야겠군. 루젤이 올 시간이야."

"상관없어요." 엘리자베스는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비가 오기 때문에 예정보다 빨리 오게 될지도 몰라."

"비가 오니까 오히려 늦을 수도 있어요."

엘리자베스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혹시 빗길에 차가 그렇다면 운이 좋은 편이지."

"당신, 박애주의자가 아니군요."

엘리자베스가 속삭였다. 그레버는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만약에 결혼하게 되면 난 일선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지."

엘리자베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 저와 결혼하겠단 생각을 했지요?"

그녀가 다시 속삭였다.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걸요."

"난 당신을 일 년 이상이나 알고 지냈어."

"어째서 일 년이나 되죠? 우리의 관계를 어린 시절부터 헤아릴 수는 없어요. 그건 옛날 얘기니까."

"지금 그런 식으로 날짜를 따지고 있는 것이 아냐. 내가 이곳에 도착한 지 거의 2주일이 돼. 이것은 일선의 15개월에 해당되지. 난 당신을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느낌이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었다.

"난 그렇게 생각해 보진 않았어요."

"나 역시. 방금 깨달았어."

"언제?"

"당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 비가 내리니까 어두운 방안에서 갖가지 상념이 떠오르더군."

"무슨?"

"인간이 자기 손을, 총을 쏘거나 수류탄을 던지는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 것인가 뭐, 이런 생각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낮엔 왜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죠?"

"차마 할 수가 없었지."

"수당이라든가 대부금 얘기보다는 오히려 그게 나을 것 그랬군요."

그레버는 고개를 들었다.

"결국 그게 그거야. 다만 표현 방법의 차이지."

그녀는 무엇인가 알아들을 수 없게 중얼거렸다.

"말이란 중요한 것이에요. 적어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난 표현력이 부족해. 시간이 지나면 당신도 깨닫게 될 거야."

"시간!"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쉬었다.

"별로 없지요."

"없지. 어제는 많았어. 그러나 또 내일이 오면 어제는 시간이 많았었다고 생각하겠지."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나요?"

"글쎄 그걸 알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들을 우린 함께 보내야해."

"그런데 왜 결혼하겠단 말을?"

"하지만 난 이미 당신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 없어."

엘리자베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은 당신과 다른 사람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아마도 그러나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어. 그리고 나도 또한 지금에 와서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없고."

엘리자베스는 그의 팔에 안긴 채 고개를 그에게로 했다.

"당신은 차츰 의식이 뚜렷해지는군요. 이제 낮에 했던 말은 하지 않고 있어요. 물론 지금은 밤이니까 그럴 수도 있죠. 그 때문에 난 일생 밤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그럴 리는 없겠지."

"그래도 우린 역시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무엇을?"

"수당."

순간 그레버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럼, 당신은 결혼을?"

"우리가 일 년 동안이나 사귀어 왔다면, 결혼은 당연하잖아요? 거기에다 이혼도 가능하다니까."

그녀는 그에게 안겨서 편히 잠들었다. 그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오랫동안 눈을 뜨고 있었다.

 

 

17

"필요한 건 무엇이든지 갖고 가게."

빈딩그가 문 옆에서 말했다.

"내 집처럼 드나들란 말이야."

"알겠어."

그레버는 욕탕 안에서 서서히 온몸을 폈다. 한쪽 구석에 던져진 군복은 몹시 초라하고 더러웠다. 그 옆에 로이타가 빌려준 양복이 걸려 있었다. 빈딩그의 욕실은 벽을 녹색의 타일로 박고 자기의 니켈판으로 번쩍번쩍 빛이 나게 꾸며져 있었다. 소독제의 악취가 나는 막사의 목욕탕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프랑스제의 목욕용 타올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뜨거운 물은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그레버는 모든 잡념을 잊고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있었다. 사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것은 따뜻함이나 물, 지붕, , 고요,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같이 극히 단순한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남은 휴가를 전쟁 따위는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보내리라고 생각했다.

로이타의 말이 옳다. 휴가는 쉽게 오지 않는다. 그는 군복이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의자를 구석으로 밀어붙였다. 그런 다음에 욕실용염제를 한 움큼 집어 즐거운 듯이 탕 속에 뿌렸다. 그것은 전시의 사치이면서 동시에 한줌의 평화였던 것이다.

그는 몸을 말리고 나서 천천히 옷을 입었다. 군복 대신에 입은 신사복은 몹시 산뜻하고 가벼웠다. 그는 거울에 자기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이대로 일선에 나타난다면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을 것 같은 미숙한 젊은이가 깜짝 놀란 듯이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 처음으로 성찬식에 참석하는 미성년자같군."

알폰스가 말했다.

"전혀 군인답지 않군. 갑자기 왜 그러지? 결혼이라도 하나?"

"물론이야."

그레버는 깜짝 놀라면서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지?"

"자네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어. 전과는 달라. 전엔 빼앗긴 뼈다귀를 찾아 헤매는 개 같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군. 그런데 정말로 결혼할 생각인가?"

"그럼."

"에른스트, 잘 생각해 봤나?"

"아니."

빈딩그는 당혹한 것처럼 그레버를 보았다.

"이미 몇 년 동안이나 심각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네."

알폰스는 잇몸까지 드러내고 웃더니 고개를 들어 냄새를 맡았다.

"무엇일까?"

다시 코를 벌름거렸다.

"자넨 욕실용 염제를 사용했군!"

그레버는 손을 코에다 댔다.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는데?"

"자네는 모르겠지만 난 알 수 있어. 즉시 발산시켜야 해.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점점 꽃 향기 같은 게 온몸에 퍼져. 코냑을 마시면 냄새가 사라질 거야."

빈딩그는 술병과 잔 두 개를 가지고 왔다.

"에른스트! 마침내 결혼을 하나? 진심으로 축하하네! 난 계속 독신으로 남겠지만 말이야. 그런데 자네의 아내가 될 여잔 내가 만난 적이 있나?"

"아니."

그레버는 코냑을 들이켰다. 그는 결혼을 인정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한 잔 더 하게. 매일 결혼할 순 없을 테니까."

"아니."

빈딩그는 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 알폰스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도움이라니? 이런 건 간단히 끝나고 말 텐데."

"자넨 그렇지. 군인이니까."

"우린 전시의 결혼이니까 아무런 서류도 필요 없어."

"그러나 자네 아내는 다를 거야. 일을 서두르다 보면 알 수 있지. 만약에 너무 오래 걸리게 되면 내가 도와주겠어. 자네도 알겠지만 내 친구들 중에 게슈타포의 장교도 있으니까."

"게슈타포가 전시의 결혼과 무슨 상관이 있지?"

알폰스는 싱긋 웃었다.

"에른스트, 게슈타포가 관여하지 않는 건 하나도 없어. 자넨 병사라서 잘 몰라. 그러나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자네가 유대인 아가씨와 결혼하진 않을 테니까. 공산당원의 딸과 결혼하는 것도 아니겠지? 그렇지만 일단 조사하는 것이 규칙이야."

그레버는 애써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다. 만약에 조사가 시작되면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강제수용소에 있는 사실이 알려질 것이다.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폰스, 그게 정말인가?"

빈딩그는 다시 잔에 술을 따랐다.

"물론. 그렇지만 조금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 자넨 설마 자네의 고귀한 아리아인의 피를 야반적인 인간이나 국가의 적이 더럽히게 할 생각은 없겠지. 안 그래?"

그는 싱글싱글 웃었다.

"그것은 그래."

"에른스트! 전에 게슈타포 친구들을 만난 적이 있지? 너무 시간을 끌 것 같으면 그들이 도와줄 거야. 약간 압력을 가해야지. 그 녀석들은 거물급이야. 특히 리제는. 그 코안경을 낀 깡마른 친구 말이야."

그레버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주장으로 오늘 아침에 서류를 갖추기 위해 시청으로 갔다. 만약에 놈들이 그녀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된다면 그렇지만 날씨가 사나워지면 몸을 숨긴다는 것이 옛날부터의 관습이 아닌가? 만약에 게슈타포에게 발각된다면 아버지가 끌려갔다는 이유만으로 엘리자베스를 강제수용소로 보낼는지도 모른다. 그는 몸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만약에 놈들이 그녀를 조사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른스트, 왜 그래? 자넨 아직 잔을 비우지도 않았군. 너무 행복에 겨워서 그러나?"

그는 스스로 자신의 농담에 만족해서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레버는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몇 분 전까지 그는 좋은 친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권력의 대표자로 변하고 있다.

"에른스트, 어서 술이나 들어."

그레버는 잔을 놓았다.

"알폰스, 부탁이 있어. 설탕을 2파운드 가량 주지 않겠나? 두 포대로 나누어서 1파운드씩 말이야."

"각설탕 말인가?"

"아무것이나 상관없어."

"그건 얼마든지 줄 수 있지. 그런데 왜 설탕이 필요하지?"

"실은 그것으로 어떤 인간을 매수할 생각이야."

"매수하겠다고?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 더욱 좋은 방법이 있어. 내가 한 번 해 볼까?"

"아니, 그런 게 아냐. 설탕은 도움을 좀 받은 사람이 있는데, 선물하려고."

"좋아. 그럼 결혼 축하 파티는 우리 집에서 하도록 해. 알폰스가 훌륭한 증인이 되어 주겠어."

그레버는 그의 제의를 생각해 보았다. 15분 전이었다면 그 그늘에 숨을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모든 일은 이 알폰스에게 맡겨두게! 자넨 오늘밤 여기서 자는 거야. 알겠나? 다시 군복을 입고 병사로 돌아갈 필요는 없어. 내가 열쇠를 주고 갈 테니까."

그레버는 망설였다.

"알겠네, 알폰스."

빈딩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좋아, 좋아. 우린 여유 있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눌 수도 있지. 아직 그런 기회가 없었으니까. 이리 오게, 자네의 방을 안내해 주지."

그는 그레버의 군복을 들고 상의에 달린 훈장을 바라보았다.

"자네, 훈장 탄 얘기를 내게 해주어야 돼. 아주 대단한 공로를 세웠겠지."

그레버는 고개를 들었다. 빈딩그의 얼굴은 언젠가 친위대의 하이니가 술에 취한 채 보안부에서의 공로담을 자랑할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변하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얘기할 것도 없어. 그건 다만 연공으로 받은 것뿐이니까."

 

루젤 부인은 그레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침내 말끔한 신사복이 그레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신이었군? 쿠루제양은 지금 없어요. 그만한 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를 적의에 찬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그녀의 자색 유니폼 상의에는 스와스치카를 꽂은 핀이 빛나고 있었다. 기름이 번들번들한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져 있고 오른손에는 걸레가 들려 있었다.

"쿠루제양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데, 이것을 좀 전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루젤은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이윽고 설탕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실은 쿠루제양에게 당신은 모범적으로 당과 공공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에 설탕 1파운드가 있는데 마침 아주머니에게도 단 것을 좋아할 만한 나이의 아이가 있으시죠? 이것을 드리고 싶습니다."

루젤의 얼굴은 공식적인 표정을 띠고 있었다.

"우린 그런 물건은 필요 없어요. 우리는 총통께서 허락하신 물건만을 자랑스럽게 받고 있어요."

"당신의 아이도?"

"그렇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레버는 자색의 상의에다 시선을 고정시켰다.

"후방에 있는 부인들이 모두 부인과 같다면,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은 더욱 든든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부정한 게 아닙니다. 이것은 휴가로 귀향하는 병사들이 가족에게 선물할 수 있도록 총통께서 하사하신 것입니다. 제 가족은 행방불명입니다. 그러니까 거절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루젤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당신은 일선에서 오셨나요?"

"물론입니다."

"소련에서?"

"그렇습니다."

"제 남편도 소련에 있습니다."

그레버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무척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소속은 어디죠?"

"중앙군단에 배속되어 있습니다."

"거기는 지금 평정합니다."

"평정하다구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중앙군단은 지금 치열하게 전투하고 있어요. 남편은 최전방에 있어요."

최전방! 마치 전선이라는 것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것같이 말하고 있군! 그는 순간적으로 명예로운 총통의 조국에 대한 저쪽의 설정은 어떤지 이 부인에게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꾹 눌렀다.

"휴가를 오신다면, 기쁘시겠습니다."

"남편은 때가 되면 옵니다. 애당초 특별한 은혜 같은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저 역시."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2년 만에 나왔습니다."

"그러면 계속 거기에 계셨나요?"

"그렇습니다. 물론 부상당했을 때는 제외하고."

그레버는 확고부동한 당의 여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대체 나는 왜 이 여자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여자는 차라리 사살하는 쪽이 훨씬 낫다. 루젤의 아이가 나왔다.

"어째서 갑자기 사복을 입으셨죠?"

"군복은 세탁소에 맡겼습니다."

"그래요? 나는 또."

루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레버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그런 루젤 부인이 끔찍했다.

"그렇다면 좋아요. 우리 애를 위해 설탕을 받기로 하겠어요."

그녀는 꾸러미 두 개를 받았다. 그레버는 그녀가 두 손으로 무게를 비교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나가면 틀림없이 엘리자베스의 꾸러미를 뜯어 볼 것이다. 그리고 설탕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것이다.

"하이 히틀러!"

그레버도 루젤이 하는 대로 따라서 했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문지기가 문 옆에 서 있었다. 돌격대원의 바지와 장화를 신은 작달만한 사내였다. 그레버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러한 허수아비조차 위험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군."

그는 담배를 꺼내 한 개비를 뽑아 그에게 권했다. 문지기는 투덜거리면서 그것을 받았다.

"제대했소?"

그레버의 옷차림을 흘낏거리며 물었다.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엘리자베스에 대한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망설이다가 그만 두었다.

"일주일 후에는 다시 가야 해."

문지기는 담배가루를 토했다.

"맛이 없소?"

그레버가 물었다.

"아니, 나는 잎담배를 더 좋아하거든."

"잎담배는 귀할 텐데?"

"그렇소."

"난 고급 잎담배를 갖고 있는 사람을 잘 알고 있는데, 기회가 되면 구해다 주겠소."

"최고급이오?"

"물론, 그 사람이 바로 돌격대장이오."

"돌격대장?"

"그렇소. 알폰스 빈딩그라고 나와 가장 친한 친구요."

"빈딩그가 당신의 친구라고?"

문지기는 그레버를 쳐다봤다. 그레버는 그의 눈초리가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빈딩그와 친한 친구라면 어째서 보건 고문관인 쿠루제가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오해도 풀리고, 만사가 제대로 해결될 거야."

"그렇겠죠." 문지기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레버는 시계를 보았다.

 

그레버는 거리를 거닐었다. 매수의 일보는 우선 성공적이었으나 곧 새로운 불안이 그를 사로잡았다. 어쩌면 오늘 한 행동은 가장 서투른 짓일는지도 모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갑자기 사복이 원망스러웠다. 모든 게 옷 탓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잠시라도 군대의 규칙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순식간에 불안과 근심의 세계로 빠져버렸다. 밤까지는 엘리자베스를 만날 수도 없었다. 서류신청을 서둘렀던 게 후회스러웠다. 어제 아침에는 결혼이 그녀를 보호할 것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것이 위험이 되고 있었다.

"축제 기분을 내서 어떻게 할 작정이지?"

그는 눈을 치떠서 올려다보았다. 키가 작은 소령이 눈앞에 서 있었다.

"국가의 비상시국이란 것을 넌 모르는가!"

그레버는 갑자기 어리둥절해서 소령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마침내 겨우 그 이유를 깨달았다. 자기 자신이 사복을 입은 사실을 잊고 소령에게 경례를 했던 것이다. 노인은 자기를 놀리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절대로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뻔뻔스러운 놈 같으니라구! 넌 왜 군대도 안 갔지?"

그레버는 노인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는 언젠가 엘리자베스와 함께 만난 적이 있었던 바로 그 소령이었다.

"너 같은 병역 기피자는 하루 속히 땅 속으로 꺼져버리란 말이야!"

소령은 소리를 질렀다.

"너를 체포하겠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잘 알고 계실 텐데. , 이제는 나를 내버려 두시오. 난 걱정거리가 많은 사람이니까."

"뭐라고?"

소령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더니 코를 벌름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군복을 입지 않았군! 이 남창 같은 놈! 남자가 향수나 뿌리고 나다니니, ."

노인은 침을 탁 뱉고 나서 그레버를 노려보다가 사라져버렸다. 그는 게슈타포 본부가 보이는 거리에 서 있었다. 입구의 복도에서 젊은 친위대원이 하품을 하면서 서성거렸다. 친위대의 장교 두 사람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그때 한 사나이가 주저하면서 정문을 올려다본 다음에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냈다. 그것을 읽고 난 그는 주위를 돌아보고 마치 작별을 고하는 것처럼 하늘을 쳐다보다가 위병소를 향해서 걸어갔다. 친위대원은 그의 호출장을 읽고 나서 통과시켰다.

그레버는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힐슈만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에 최고 훈장을 받게 되면 아버지는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을 것이란 믿음으로 최후를 지원했던 힐슈만. 그는 힐슈만에게 양친을 찾아보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주소를 적은 쪽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지금 당장 힐슈만과의 약속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것이 엘리자베스와 관련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주머니를 뒤졌다. 마침내 급료부 속에서 쪽지를 찾아냈다.

힐슈만의 집은 아담한 3층집이었다. 그는 3층으로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이윽고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창백한 얼굴이 밖을 내다보았다.

"힐슈만 부인을 만나고 싶습니다."

"바로 접니다."

"저는 댁의 아드님과 같은 중대에 있습니다."

여인은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그것은 궁지에 몰린 동물의 모습과 흡사했다.

"댁을 방문해 달라는 아드님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저는 휴가 중이라서 사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래요?"

여인은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오세요. ."

"에른스트 그레버입니다."

여인은 앞장서서 그레버를 거실로 안내했다. 그녀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걷고 있었다. 거실에는 벽 쪽으로 긴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그레버가 그 의자에 앉으려고 하자 부인은 재빨리 다른 의자를 권했다.

"여기가 더 편해요. 저것은 침대 대신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레버는 작은 의자에 앉았다.

"저는 2주일 전까지 아드님과 함께 근무했습니다."

부인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냉정했지만 손은 안정감을 잃고 후들후들 떨렸다.

"저 좋으시다면 뭣 좀 드실거라도?"

그레버는 갑자기 갈증을 느꼈다.

"고맙습니다. 물이나 한잔."

", 그럼."

힐슈만 부인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알겠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방에서 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왜 그러지? 공포에 질려있는 인간들은 얼마든지 보았지만 이건 정말 지나칠 정도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았다. 모두 복제였다. 하나는 꽃이 만개된 밤나무 그림이었고, 다른 하나는 플로렌스 소녀의 옆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그때 힐슈만 부인이 돌아왔다. 그녀는 적색 와인을 담은 작은 잔과 빵 두 조각이 놓인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레버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드님께서는 무사히 있습니다. 제가 휴가 올 무렵에는 예비대로 배치되고 있었죠."

부인은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는 다시 포도주를 마셨다. 아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식사는 어떤가, 위험하지 않은가 등등 어머니들이 당연히 궁금해 할 것들을 질문하지 않은 데에 그레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요. 잘 있단 말이죠?"

마침내 그녀는 겨우 한 마디 했다.

"지금은 일선이나 여기나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위험하기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은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레버는 혼자서 그림을 구경하다가 한 아이를 발견했었다. 긴 의자 밑의 종이상자에 숨겨놓은 것을 보았던 것이다. 혹 눈치라도 채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입니다."

마침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인은 소리도 없이 그레버와 함께 문이 있는 곳까지 따라 왔다.

"아드님에게 전할 말씀이 없으십니까? 저는 일주일 후에 출발합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전해드리겠습니다. 편지나 선물이 있으시면 제가 다시 오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레버는 깜짝 놀라 그녀를 보았다. 그는 부인이 자신을 믿지 않는 게 분명하다고 단정하고 급료부를 꺼냈다.

"제 증명서입니다. 저는 지금 사정이 있어서 사복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급료부를 뿌리치기라도 할 듯이 손을 치켜들었다.

"그 애는 죽었습니다."

그녀는 거의 속삭이고 있었다.

"뭐라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아드님과는 며칠 전에 얘기를 나누었었는데."

"죽었습니다."

그녀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사흘 전에 통지가 왔어요."

그레버가 더 물으려고 하자, 그녀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를 혼자 있게 해주세요. 그 아인 제발!"

그녀는 문을 닫았다. 그레버는 하나하나 층계를 내려갔다. 그는 힐슈만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그에 대해서는 힐슈만이란 성만 알 뿐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는 도중에 층계 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 집에서는 힐슈만의 동생이 그의 어머니에 의해서 숨겨져 있다. 아마도 그 아인 유대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강제수용소가 두려워 그렇게 숨은 것이리라. 절망적인 암흑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만한 일로 몸을 숨긴다면 엘리자베스의 신변에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모른다!

 

그레버는 퇴근시간이 되기 훨씬 전부터 공장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나올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혹시 공장 안에서 체포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고 있는데, 그녀의 모습이 입구에 나타났다. 그녀는 양복 차림의 그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나, 아주 젊어졌는데요."

"난 젊다는 실감이 나질 않아. 오히려 100 년은 더 늙은 것 같아."

"왜 그렇죠? 예정보다 빨리 출발해야 하나요?"

"아냐. 그것은 걱정 없어."

"그럼, 양복을 입어서?"

"모르겠어. 좌우간 난 이 양복과 함께 온 세상의 고통을 혼자서 짊어진 것 같은 기분이야. 그건 그렇고 서류는 어떻게 되었지?"

"됐어요."

엘리자베스는 말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했어요."

"이미 제출했단 말이지? 그럼, 어쩔 수 없군."

"왜 그러시죠?"

"아무 것도 아냐. 다만 걱정이 되니까. 어쩌면 우리가 실수를 저질렀는지도 몰라. 당신에게 불리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

"?"

그레버는 망설였다.

"게슈타포가 결혼 신청자의 신원조회를 하는 모양이야."

엘리자베스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당신 무슨 소리를 들으셨군요?"

"아니, 아무 것도 듣지 못했어. 갑자기 두려워졌을 뿐이야."

"우리가 결혼을 하면 내가 체포된다는 말인가요?"

"그런 건 아냐."

"그럼 뭐죠? 아버지가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사실이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뜻이죠?"

"그것도 아냐."

그레버가 말했다.

"그건 다 알고 있어.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신이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어. 게슈타포가 무슨 짓을 할는지도 모르고 놈들이 무슨 속임수를 쓸지 알 수 없어.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 게슈타포에게 정의를 기대하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라고."

엘리자베스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럼, 우린 도대체 어떻게 하죠?"

"나도 하루종일 생각했어. 정말 속수무책이야. 만약에 신청한 서류를 취소하면, 그땐 의심 받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야릇한 눈초리를 했다.

"그래도 역시 취소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 이미 늦었어. 이제는 모든 것을 운에 맡기는 수밖에."

그들은 무작정 걷고 있었다. 그레버는 광장을 끼고 공장이 들어서 있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여긴 한 번도 폭격을 당하지 않았나?"

"."

"공장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겠군."

"커다란 지하 방공호가 몇 개나 있어요."

"안전해?"

"아마도."

그레버는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정면만 바라본 채 걸음을 빨리 옮겨 놓고 있었다.

"제발! 내 말의 진의를 알아줬으면 좋겠어. 난 다만 당신이 걱정되어서 그래."

"내 걱정은 마세요."

"당신은 걱정이 안 돼?"

"이제는 걱정할 일도 없고,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난 그렇지 않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걱정이 자꾸 생겨나거든."

엘리자베스는 그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그는 웃는 그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어제 열변을 토했어. 그것은 잊지 않아. 자신의 사랑이 진실인지를 알기 위해선 우선 걱정부터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글쎄, 잘 모르겠군요."

"이놈의 양복은 다신 입지 않겠어. 난 일반 시민들의 생활이 부러웠었지."

엘리자베스가 또 웃었다.

"그게 어디 양복 탓인가요?"

그녀는 그의 옆에서 태평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이 사람은 매일매일 달라지고 있다. 전에는 이 사람이 두려워하고 내가 태연했었는데, 지금은 그와 반대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히틀러 광장을 통과했다. 저녁노을이 한층 더 짙어져서 그들의 얼굴과 손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레버는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자기의 운명을 지고 바쁘게 걸어간다. 사람들은 갖은 게 아무 것도 없을 때는 쉽게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용감하게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무엇인가를 지니게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버린다. 그것은 모든 일을 간단하게 바꾸거나,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전보다 안전해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 당장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18

베차는 소지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동료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러면 찾았단 말인가?"

그레버가 물었다.

"물론 그렇지만."

"어디서?"

"거리에서 만났어. 게라와비르가의 모퉁이에 있는 우산가게 앞에 서 있었어. 난 처음엔 그녀인지도 몰랐지."

"그 동안에 어디 있었을까?"

"에르후르트 근처의 수용소에 있었던 모양이야. , 들어보게! 난 우산가게 앞에 있었으면서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어. 내가 그대로 지나가려니까 아내가 나를 부르는 거야. '베차, 저를 모르겠어요?' 하면서 말야."

베차는 말을 끊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렇지만 체중이 80파운드나 줄어든 여자를 내가 어떻게 알아보겠어?"

"수용소 이름이 뭐지"

"잘 모르겠어. 임간 캠프 2 호라고 생각되는데 아내에게 물어보지. 하여튼 들어보라구. 난 그녀를 멀뚱멀뚱 바라보면서, '아르마, 당신이었군.' 했어. '저예요!'하고 아내가 대답했지. '베차! 전 당신이 돌아왔을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곳에 돌아왔어요.'하는 게 아니겠어. 난 언제까지나 아내를 쳐다보고만 있었지. 전에는 맥주공장의 살찐 말처럼 뚱뚱하던 여자가 반으로 줄어서 서 있는 거야."

"키는 얼마나 큰가?"

펠드만이 흥미 있다는 듯이 물었다.

"160센티미터 정도는 되지."

"그러면 표준이라고 할 수 있겠군."

"표준? , 바보 같은 소리 말아."

베차는 펠드만을 노려보았다.

"내겐 아니야! 내가 보았던 그녀는 옥수수 대처럼 보잘것없었어. 난 네 기준의 표준적인 체중 같은 건 흥미없어. 난 아내의 엉덩이에 깔리고 싶단 말야. 그런데 대체 우린 왜 싸웠지?"

"넌 말이야. 우리들의 경애하는 총통과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서 싸우진 않았어."

로이타가 말했다.

"3년이나 일선에 있었으면, 그만한 것쯤 이미 옛날에 알았어야 돼."

"내 아내의 체중을 놓고 왜들 야단을 떨지?"

베차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날뛰었다.

"그만둬!"

로이타가 한쪽 손을 들어 경고했다.

"네가 멋대로 생각하는 건 자유지만 그걸 함부로 입밖에 내놓지 마! 넌 네 마누라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돼."

"그야 물론 나도 기뻐. 그러나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느냐 말야."

"그렇지만 베차!"

펠드만이 말했다.

"네가 다시 뚱뚱하게 살찌우면 되지 않겠어."

'"그럴까? 그런데 무엇을 먹여야 뚱뚱해지지. 배급표? 그 참새눈물만한 식량."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

"말로는 쉽지!"

베차는 비통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휴가는 사흘밖에 남지 않았어. 사흘 안으로 어떻게 뚱뚱해 질 수 있겠어? 그녀가 한가롭게 목욕이나 하고 하루에 일곱 번씩 먹는다 해도 그건 불가능해. 고작해야 몇 파운드?"

"그러나 지방이 문제라면 네겐 그 비계 덩어리 여주인이 있잖아?"

"문젠 바로 그거야! 난 아내만 만난다면 그 여잔 거들떠볼 생각도 안 했어. 원래가 난 성실한 남편이지 바람둥이가 아냐. 하지만 지금은 그 여주인이 낫겠군."

"넌 정말 둔한 인간이야."

로이타가 말했다.

"난 둔하지 않아. 난 무엇이든지 완전하게 느낄 수 있어. 그게 나의 결점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도저히 그 여자에게 만족할 수 없었어. , 시골뜨기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베차는 마지막으로 남은 소지품을 배낭에 꾸렸다.

"당신 부부는 어디서 숙박할 예정이지?"

그레버가 물었다.

"혹시 아파트라도?"

"물론 갈 수 없어. 모조리 타 버렸으니까! 그래도 여기보다는 폐허가 된 지하실이 더 편해. 하나 불행한 건 아내가 전처럼 날 즐겁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지. 물론 난 아내를 사랑하고 있어. 그러나 그런 체중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휴가는 얼마나 남았나?"

"사흘."

"그 동안 어떻게 즐기는 척할 수 없을까?"

"이봐."

베차는 나지막이 말했다.

"여자라면 침대에 누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남자는 틀려. 차라리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오히려 만나서 괴롭군."

그는 배낭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로이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레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넌? 네 계획은 어때?"

"난 보충대로 가 보겠어. 또 무슨 서류가 필요한지 알아볼 생각이야."

로이타는 히죽히죽 웃었다.

"넌 베차의 불행을 보고 실망을 한 모양이군. 안 그래?"

"내가 두려워하는 건 그런 게 아냐."

 

"엉망진창이다."

보충대의 사무병이 말했다.

"일선은 엉망진창이야.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

"물론 몸을 숨겨야지. 그런 건 애들도 알고 있어.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지? 난 휴가 중이야."

"나도 그건 알고 있지."

사무병은 그레버를 응시했다.

"오늘 하달된 명령을 본다면 그게 과연 가치가 있을까?"

그레버는 담배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위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저기압이야."

사무병은 사무적으로 말했다.

"막대한 손실. 보충병을 즉시 보내라. 긴급한 사유가 없는 휴가병은 즉각 송환하라! 이만하면 알겠나?"

"알겠어. 긴급한 이유란?"

"가족의 사망 및 중대한 가정문제의 처리, 그리고 중병..."

사무병은 담배를 집었다.

"그러니까 자취를 감추란 말이야! 널 찾아낼 수 없다면 송환할 수도 없어. 휴가가 끝날 때까지 숨어있는 거야. 그럼, 난 보고하는 거야. 주소 변경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처벌은 않겠지. 어차피 일선으로 복귀하면 그것으로 끝나."

"난 결혼하는데 그것도 이유가 될까?"

"결혼한다고?"

"그래. 그래서 찾아왔어. 급료부 외에 어떤 서류가 필요하지?"

"결혼! 그건 충분한 사유가 된다."

사무병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긴급한 사유에 해당하지. 그런데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너와 같은 일선 돼지들은 서류 같은 건 필요없어. 그러나 필요한 경우엔 날 찾아와. 몰래 만들어 줄게. 그런데 넌 그럴듯한 옷이라도 있나? 설마 그런 누더기를 걸치고 장가갈 생각은 아니겠지?"

"여기서 교환할 수 있나?"

"보급계의 특무상사를 찾아가서 사정해 봐. 좌우간 내 얘기를 하라고. 이런 좋은 담배가 또 있나?"

"없지만 구할 수는 있어."

"내가 아냐. 특무상사에게 주는 거야."

"알았어. 한데 전시결혼에 여자는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 알고 있나?"

"잘 모르겠는데. 별로 까다롭지는 않을 거야. 하여튼 빨리 해치워야 하니까."

사무병은 시계를 보았다.

"보급계로 가게. 지금 상사가 있을 거야."

그레버는 보급계가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보급계는 다락방에 있었다. 특무상사는 몹시 뚱뚱했으며, 안경알의 색이 좌우가 다른 걸 끼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을 흘끔흘끔거리는 게 아냐."

그는 호통을 쳤다.

"안경알을 본 적이 없나?"

"있긴 하지만 이렇게 색깔이 다른 건 처음이군요."

"이건 원래 내 것이 아냐."

특무상사는 파랗게 빛나는 눈을 가리켰다.

"친구에게 빌렸어. 내 것은 어제 깨졌지. 이런 건 셀룰로이드로 만든 게 안전하지."

"그건 불에 약하지요."

상사는 그레버의 훈장을 보면서 실쭉거렸다.

"그건 그렇고, 자네에게 줄 옷은 없어. 모두가 자네가 입고 있는 것보다 못한 것들뿐이야."

그는 파란 눈으로 날카롭게 그레버를 쏘아보았다. 그레버는 빈딩그에게 받은 담배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상사는 그것을 흘끔 보고 나서 상의 한 벌을 꺼내 왔다.

"이것밖에 없어."

그레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안주머니에 소중하게 간직한 코냑을 꺼내 담배의 옆에 놓았다. 상사는 자리를 비우더니 더 좋은 상의와 거의 신품에 가까운 바지를 내보였다. 그는 바지를 뒤집어 보았다. 가장자리에 미세한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레버는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코냑병을 쳐다보았다.

"피가 아니라 고급 올리브유지. 그 옷의 주인은 이탈리아에서 돌아왔어. 그런 건 벤젠을 사용하면 금방 지워진다구."

"그렇다면 직접 지워서 입을 것이지 어째서 교환을 했을까?"

상사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말을 제법 잘하는군. 그 녀석은 전선의 냄새가 풍기는 군복이 필요했었어. 지금 네 군복처럼 말이야. 밀라노의 사무실에서 2 년간이나 자기 약혼자에게 일선에서 전투에 참가하는 것처럼 편지를 써 보냈다는 거야. 그래서 샐러드를 엎지른 바지를 입고 사랑하는 약혼녀를 만날 수 없었던 거지. 그건 여기 있는 것 중에서 최고로 좋은 옷이야."

그레버는 상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교환 조건을 더 유리하게 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 교환하지 않아도 돼. 너의 너절한 군복도 가지고 가. 넌 특별복이 생긴 셈이지."

"수량을 채우려면 헌 옷이 필요하지 않소?"

상사는 그런 것쯤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창문으로 스며든 햇살이 그의 파란 안구에 비쳤다.

"수량 따위가 맞았던 적이 있었나? 알고 있으면 말해보시지?"

"나 역시."

"그럼 좋아. , 가보라구."

 

그레버는 시립병원 앞을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뮤치히가 갑자기 떠올랐다. 한 번 찾아가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선행을 하면 뜻밖의 행운이 찾아올는지도 모른다는 미신같은 게 그를 병원으로 떠밀었다. 지체 절단병들은 2층에 있었다. 아래층은 중환자나 수술을 받고 아직도 누워 있는 병사들이 수용돼 있었다. 그것은 공습을 받을 때 즉시 지하실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지체절단병들은 혼자서 피신할 수도 있고 서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다리를 절단한 자는 팔이 없는 병사 두 명의 목에 팔을 감고서 지하실로 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자네였군!"

뮤치히가 말했다.

"설마 자네가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어."

"실은 나도 그랬지."

"고맙네, 에른스트. 슈트크만도 여기 있어. 넌 그 녀석과 함께 아프리카에 갔었지?"

"."

슈트크만은 오른팔을 잃은 동료들과 카드를 하고 있었다.

", 에른스트. 네가 도대체 웬일이지?"

슈트크만은 이상하다는 듯이 그레버를 훑어보았다. 불구가 된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과 같은 상처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어."

모두가 그레버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슈트크만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휴가를 왔지."

그는 멋쩍은 듯이 말했다. 육신이 멀쩡하다는 게 무슨 죄악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난 또, 네가 아프리카에서 호되게 당했으니까 아예 귀국이라도 한 줄 알았지."

"거기서 소련으로 쫓겨 갔지."

"그래도 넌 운이 좋았군. 다른 녀석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어."

슈트크만은 한쪽 팔을 흔들어 보였다.

"이만해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한가운데에 앉아 있던 사나이가 들고 있던 카드를 바닥에 팽개쳤다.

"도대체 카드를 하는 건가, 잡담을 하는 건가?"

그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그레버는 그의 양쪽 다리가 절단된 사실을 알았다. 더구나 오른손에는 손가락이 두 개나 없었다.

"계속하게."

그레버가 말했다.

"난 괜찮아."

"한 판만 끝낼게."

슈트크만이 말했다. 그레버는 뮤치히와 나란히 창가에 걸터앉았다.

"아놀드는 모른 척해. 저 녀석 오늘 몹시 저기압이야."

"저 한복판에 앉아있는 사내?"

". 마누라가 어제 면회를 왔었지. 그러면 저 녀석은 이틀씩 언제나 저기압이야."

"너희들 거기서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아놀드가 소리를 질렀다.

"우린 지금 옛날 얘기를 하고 있어. 왜 안 되는가?"

아놀드는 중얼거리면서 도박을 계속했다.

"여긴 언제나 재미있어."

뮤치히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여러 가지 재미있는 놀이로 시간을 보내. 아놀드는 비밀 공제 조합원이었지. 간단치 않아. 그런데 저 녀석의 아내가 그를 속이고 있거든. 아놀드의 어머니가 귀띔해 주었어."

슈트크만은 카드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제기랄! 크로버로 단단히 잡으려고 했더니, 한 사람이 잭크를 석 장이나 잡고 있을 줄이야."

아놀드는 계속 투덜거리면서 카드를 섞었다.

"결혼상대로 한쪽 팔이 없는 게 나을까, 한쪽 다리가 없는 게 나을까?"

뮤치히가 물었다.

"슈트크만은 외팔이가 더 낫다는데 말야. 하지만 한쪽 팔로는 여자를 안을 수 없잖아?"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중요한 것은 살아있다는 사실이야."

"그건 그래. 하지만 그것만으로 일생을 지탱할 수는 없어. 전쟁만 끝나면 모든 사정이 달라져. 그땐 우린 영웅이 아니라 불구자로 전락하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의수나 의족의 보조술이 상당히 발달했잖아?"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냐.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

"우린 전쟁에 승리해야 돼." 아놀드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그는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듣고 있었다.

"기분 전환을 해야겠다. 이건 이제 지겨워졌어."

그는 적의를 품고 그레버를 보았다.

"기피자들이 모두 일선으로 가게 된다면, 이렇게까지 후퇴할 필요가 없을 거야."

그레버는 묵묵히 있었다. 불구가 된 인간과 싸움을 할 수는 없다. 수족을 잃은 자들의 주장이 항상 옳은 것이다. 폐를 관통했거나 포탄의 파편이 위장 속에 들어간 병사라면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구자들과는 싸움이 안 된다. 아놀드는 다시 카드를 계속했다.

"넌 어떻게 생각하나?"

뮤치히가 물었다.

"문스터에 여자 친구가 있어. 우린 편지를 계속 주고받고 있지. 그녀는 내가 다리를 부상당한 줄로 알고 있어. 절단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

"두 번 다시 일선으로 돌아가지 않게 된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물론 그렇지.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

"너희들 얘기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울적해지는데."

노름을 구경하던 한 남자가 말했다.

"술이나 잔뜩 퍼먹고 사내답게 굴란 말야!"

슈트크만은 웃었다.

"넌 왜 웃어?"

아놀드가 물었다.

"잠깐 이런 생각을 해 봤어. 만약에 오늘밤 우리들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진다면. 그리고 그 자리에 재만 남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아군의 고사포는 어떻게 된 거야?" 아놀드가 그레버를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전부 일선에 가 있나? 여긴 하나도 없어."

"거기도 없어."

"뭐라고?"

그레버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일선에선 신무기를 감추고 대기해 있어."

아놀드는 그레버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넌 우리가 패전한 것처럼 말하잖아. 바보 같은 놈. 넌 내가 1차 대전 후의 상이군인들처럼 휠체어에 앉아 성냥이나 팔라는 게냐? 우린 당당한 권리가 있어. 총통께서 약속하셨어!"

그는 흥분해서 테이블에 카드를 던졌다.

"라디오를 틀어!"

두 다리가 없는 사내가 말했다.

"음악을."

뮤치히가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에선 불쾌한 금속성의 연설의 홍수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는 다이얼을 얼른 돌렸다.

"그대로 둬!"

아놀드가 거칠게 말했다.

"왜 그러지? 항상 듣는 연설인데."

"그대로 두란 말야! 당의 연설이야. 열중한다면 나의 사정도 호전될 거야!"

뮤치히는 한숨을 쉬더니 다이얼을 돌려놓았다. 승리를 예찬하는 연설자의 외침이 온 방안에 울려퍼졌다. 아놀드는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슈트크만이 그레버에게 눈짓을 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버는 그에게 가까이 갔다.

"조심하게, 슈트크만."

그레버가 속삭였다.

"난 이제 가야겠어."

"무슨 좋은 일이라도?"

"그런 건 아냐."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 있던 병사들의 눈길이 일제히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는 마치 발가벗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되도록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렇게라도 해서 흥분한 불구자들을 진정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그는 모두들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폴만에게 갔다. 노인은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즉시 문을 열었다.

"그레버, 자네였군?"

"그렇습니다. 잠깐 여쭐 게 있어서 들렀습니다."

"어서 들어오게. 다른 사람에게 알릴 필요가 없지."

그들은 램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폴만이 피운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말인가?"

그레버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방은 이것뿐입니까?"

"?"

"2, 3일 동안 어떤 사람을 숨겨야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가능할까요?"

폴만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지명 수배된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나?"

"선생님 외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레버는 왜 폴만을 찾아왔는지를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최악의 경우, 은신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게 누구지?"

"제 약혼녀입니다. 그녀의 부친은 지금 강제수용소에 있습니다. 그녀도 혹시 체포될까 봐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요즘은 조심하는 게 상책이지. 필요하다면 이 방을 사용하게."

"정말 감사합니다."

폴만은 싱긋 웃었다.

"고맙습니다."

그레버는 다시 인사를 했다.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들은 책장 앞에 서 있었다.

"자네가 적당한 걸 뽑게."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책은 제게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일치되고 있습니까? 이 책들, 시나 철학이 돌격대나 강제수용소, 무고한 인간들의 대량 학살과 같은 비인도와 말입니다."

"그건 절대로 일치할 수 없어. 그저 동시에 공존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여기 있는 책들을 저술한 사람들이 살아있다면 대부분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겠지."

"그럴 겁니다, 선생님."

폴만은 그레버를 응시했다.

"자네, 결혼할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노인은 책 한 권을 뽑았다.

"자네에게 줄 것이 없네. 이걸 갖고 가세. 읽을 필요가 없어. 그림이 있을 뿐이지. 좀처럼 책이 읽히지 않을 땐 그림만 뒤적이면서 밤을 새운 적이 있지. 그림과 시만으로도 램프에 석유가 있는 한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 그러다가 불이 꺼지면 기도밖에 할 수 없었지만."

"그렇군요."

"난 자네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지. 자네가 한 말도 곰곰이 생각해 봤어. 하지만 그에 대한 해답은 없네."

폴만은 주저하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믿음 하나만은 꼭 지니고 있어야 돼. 아니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하느님이야. 또 인간의 마음에 있는 선이지."

"선생님께선 그것을 의심한 적이 없으십니까?"

"물론 없지."

 

그레버는 공장으로 갔다. 바람이 불면서 구름이 지붕 위를 흘러가고 있었다. 어두운 광장을 가로질러 일단의 군인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배낭을 메고 있었다. 일선으로 귀대하는 도중이었던 것이다. 그는 파괴된 집의 정원에 솟아있는 잿빛 보리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이 나무를 처음 대했을 때 느꼈던 잔뜩 부푼 생명의 소용돌이가 어깨와 근육으로 전해졌다. 이상하다 나는 폴만 선생님을 동정하고, 선생님은 나를 도울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생명의 환희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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