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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여 다시 한번

사랑이여 다시 한번

Lillian Peak

 

1.

휘파람을 불며 동생인 제프가 계단을 내려와 거실 문을 활짝 열었다.

"홍차?"

". 지금 그쪽으로 가져갈게."

캐더린이 부엌에서 대꾸했다. 제프는 의자에 앉아 자기의 양손을 이리저리 살폈다.

"간신히 페인트가 지워졌군. 고마워, 누나. 마침 이게 마시고 싶었거든."

제프는 홍차 컵에 설탕을 듬뿍 넣으면서 말했다.

"쓰지 않고 두었던 방은 대단하던걸. 괜스레 시간만 잡아먹고 있었어. 도대체 이 집엔 빈방이 너무 많다니까. 거기다가 어느 방이나 손을 보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 됐으니..."

"그래, 야단이구나. 내가 외출하지 않는다면 거들어 줄 텐데."

"또 그 영감과 데이트야? 아차차...라트랜드씨와의 약속이라고 해야 되나?....."

"제프! 프랜시스를 '영감'이라고 부르지마."

"? 나만 '영감'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야. 어느 대학이나 학장에겐 별명이 있고, 그는 벌써 몇 해 전부터 '영감'이라고 불리고 있다구. 누나도 알잖아."

"그래, 나도 알아. 하지만..."

"하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누나는 당황하고 있어. 그 사람의 나이를 생각나게 할 테니 말이야. 안 그래?... 우린 그 사람 대해서 얘기를 많이 나눴지만, 난 아직도 납득이 잘 안가. 누나는,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말 알고 있는 거야? 누나는 아직 스물 여섯인데, 그는 쉰둘이라구. 세상에~! 25년차이야! 다시 한번 재고하는 게 좋을걸. 아버지라고 보일만 한 사내와 결혼하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인지 말이야..."

"그 얘기 같으면 이젠 신물이 나."

캐더린은 다이아몬드가 반짝이는 약혼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허튼 소리 마. 내가 필요한 건 평안이지 뜨거운 연애가 아니야. 그런 거라면 벌써 10년 전에 경험했어. 그리고.. 제프, 그 결말을 생각해봐....스물도 안 돼서 이혼재판이었어.."

"그건 누나 잘못이었다구. 누나는 존의 아내니까, 존과 미국으로 가야 했었어. 물론, 그때 누나는 아직 열일곱밖에 안 됐었으니 아주 철이 없었지. 하지만 누나가 있어야 할 곳은 남편의 곁이었다구. 할머니도 누나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영국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너도 잘 알고 있잖니. 할머니를 두고 갈 순 없었어. -아빠와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도 우리들에게는 더 없이 잘 해 주셨잖아. 게다가 넌 겨우 열다섯 살이었고, 엔지니어 시험에 붙을 때까지는 아직 몇 해를 더 공부해야 했었어. 그리고 잊지 마. 하숙비의 수입 외에 가족 중에서 돈벌이하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어... 어쨌든 존은 나에게서 해방되고 싶었던 거야. 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더라도 편지 한 장만으로 -좋은 사람이 나타났다면서, 버려진 아내로서 이혼을 제기했다고 한일은 너무 경솔했어. 줄곧 존을 사랑하고 있었으면서...."

제프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캐더린은 난롯불을 바라보면서 계속 말을 했다.

"존은 내 말을 믿어 줬어. 편지를 보내와서, 만일 자유가 필요하다면 해방시켜 주겠다고 했어.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는 아내를 언제까지고 붙들어 둘 수는 없다는 거였지. 자기는 아직 스물 둘이니, 나와 마찬가지로 결혼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으로 젊음을 즐기겠다고 했으니까."

캐더린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화려한 결혼은 그것으로 끝이 났지. 멋있는 6개월 동안이었어. 이 모든 일이 이젠 다 옛날 얘기가 돼버렸지만...."

제프는 여전히 고집을 세웠다.

"누나가 이번 약혼을 지키겠다면 말야... .진짜 그렇게 하고 싶은 건지 아닌지 잘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누나가 자기 인생을 두 번씩이나 엉망으로 만드는 걸 구경만 하고 있을 순 없어. 도대체가 '영감'을 사랑하다니... 그렇게 될 수는 없어. 자기 자신에게는 정직해야 한다구."

"난 프랜시스가 좋아."

"좋다구? !"

제프는 안절부절 하며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홍차 고마웠어. 저녁 식사는 헬렌네 집에서 먹을 거야. 데이트나 즐기라구. 즐길 수 있다면 말야. 하지만 영감이 너무 덤비도록 내버려두진 말아. 하긴, 나이가 있어서 그럴 염려는 할 필요도 없겠지만 ..."

제프가 큰 소리로 웃으면서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캐더린은 꽝 소리를 내어 문을 닫았다.

 

지금 이 빅토리아 왕조 스타일의, 덜렁 크기만 한 집에 살고 있는 것은 캐더린과 제프 두 남매뿐이었다. 예전에는 온 식구가 살고 있었지만, 12년 전에 양친이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18개월 전에는 하숙을 해서 남매를 키우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

캐더린은 의무교육을 마치자 곧 마을에 있는 공과대학의 비서양성 과정에 들어갔다. 자격시험에 합격하자 이 고장의 변호사 사무소의 속기사 겸 타이피스트가 되어, 거기서 같은 신입사원인 머젤리와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이 머젤 리가 캐더린에게 꼭 남자친구를 하나 소개해 주겠다고 고집이었다.

"차 마시러 놀러와. 오빠와도 만나 두는 게 좋을 거야. 존이라고 하는데 대학을 갓 나왔구, 훈장의 자격을 얻으려고 공부하고 있는 중이지. 오빠는 블론드에 아주 약하거든. 그러니까 틀림없이 너를 좋아할 거야. 게다가 여자친구에게 채인 지 얼마 되지 않으니까."

며칠 후, 캐더린은 핸섬하고 머리가 좋아 보이는 머젤리의 오빠와 만나 급속히 연애를 하게 되었고, 조금도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왜 결혼하지 않니? 집에는 존이 살 수 있는 방도 있어. 존의 장학금과 네 월급이 있을 테니 방값은 들지 않을 테고. 경제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잖니?"

그래서 둘은 결혼하고, 캐더린은 공과대학의 총무과로 직장을 바꾸어, 역시 타이피스트로서 일하게 되었다. 존이 폭탄선언을 한 것은 어느 여름의 해질 무렵이었다. -미국의 대학원에 1년간 유학할 기회가 나타난 것이다. 존의 재능을 믿고 있던 캐더린은 굉장히 기뻐하며 즉각 존을 붙잡아 두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신도 같이 가야지, 캐시." 하고 존은 말했다.

"당신이 없으면 살아가는 보람이 없다구."

그러나 캐더린은 도저히 같이 갈 수가 없었다. 반항기의 동생을 맡긴 채 할머니를 버려두고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가 있었다.

"혼자서 다녀와요, . 그리고 공부를 마치면 곧장 돌아와야 해요. 겨우 1년 동안이니까."

"불과 1년 동안이라고는 하지만 1년은 열두 달이고 52주나 되는 기간이라구. 이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길단 말이야. 달링, 365일이나 된다구. 함께 가. 당신을 놔두고 갈 수는 없다니까."

그러나 캐더린은 유혹에 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남편과 헤어져 살게 될 나날의 고통을 자기 가슴속에 간직한 채 간신히 1년이 끝나 가려고 할 때 존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유학을 1년 더 연기하면....어쩌고 하는, 여간 충격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존이 아직 일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너무나 일찍 젊은 아내와 충동적으로 결혼한것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다는 것은 이것으로 분명해진 것이다. - 캐더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존을 영원히 자유롭게 해 줄 수밖에 없다고- 캐더린은 그렇게 믿어 버렸다.

 

현관문의 육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와서 캐더린은 현실로 되돌아왔다. 프랜시스가 차로 마중하러 온 모양이다. 제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제프는 장래의 매형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대학에선 그 늙은이가 보스라는 것만으로도 모두 적지 않은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판이야. 그런데 이젠 집안으로까지 쳐들어오게 됐으니, 난 정말 견딜 수가 없다구........"

그러나 캐더린과 프랜시스는 그날 밤, 두 사람을 맺어준 친구인 크레스웰 가에서 쾌적하게 즐겼다. 연상의 어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 빨리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캐더린은 각오하고 있었다. 죠지 크레스웰은 쉰 살쯤으로, 머리는 엷어지기 시작했고, 변호사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현학적이고, 프랜시스와 같은 연배였다.

크레스웰은 캐더린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유산을 정리해 주고, 할머니가 작고했을 때도 남매의 후원을 맡아주셨으며, 캐더린의 이혼을 처리해 준 변호사다. 변호사 내외가 마음을 같이한 중매쟁이가 되어, 아내를 잃은 친구인 프랜시스 라트랜드와 캐더린 스웰을 결합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둘이서 얘기하던 집일은 어떻게 생각하오? 새 집을 산다는 생각은 마음에 들었소? 나는 아주 신이 나는데..."

돌아오는 차안에서 프랜시스가 말했다.

"저두요, 프랜시스. 아직 건축 중이죠? 언제쯤 볼 수 있는 거예요? 완성은 언제까지랬죠?"

"죠지는 최소한 6개월이면 된다고 하더군. 시가지에서 좀 떨어진 개발지구라서 주변에는 전원 풍경이 그대로 남아있고, 값도 적당해요. 게다가 필요하다면 설계 변경도 할 수 있다더군."

캐더린은 차안의 어두운 좌석에서 눈을 감고 막연하게, 10년 전의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크레스웰 부인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경이 안 쓰이는 건 아니다. 프랜시스는 캐더린의 이혼 얘기를 아직 한 적이 없고, 젊었을 때 남편과 사별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그것을 그대로 덮어두고 있었으니까. 크레스웰 부인은 다소 말이 많고 무슨 일에나 개방적이었으므로 언젠가는 프랜시스의 귀에 진실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내 입으로 고백해야지...

"신임 이학부장이 내일 부임하니 당신은 일찍 나오도록 해요."

프랜시스가 말했다.

"인사가 있을 테니, 학부장 비서로서 그와 익숙해질 때까지 여러 가지 도와주면 좋겠는데..."

"물론이죠, 프랜시스. 말을 듣고 보니, 전 학부장에 대해선 이름밖엔 몰라요. 어떤 분이세요? 결정한 날은 감기로 쉬었거든요. 여러 사람에게 물어 보았지만 아무도 알고 있는 분이 없더군요."

"그러니까,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고, 산업계 출신이지. 몇 해 전에 교수 자격을 땄지만 실제로 가르쳐 본 적은 한 번도 없대요. 다만 자격이나 추천자가 좋지. 두뇌 명석하고, 유학 경험이 있고. 전임자인 스미저 씨보다 훨씬 젊어요. 사이좋게 지내 줘요."

"저도 그러길 바라겠어요."

방금 들은 얘기가 머릿속에서 아직도 울려온다. 신호가 바뀌어 차가 섰다. 캐더린은 어두운 밤하늘에 떠 있는 붉은 신호에 왠지 마음을 빼앗긴 채 응시하고 있었다.

'이름은 라이트.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으니까 닥터 라이트군요.'하고 캐더린은 마음속으로 중얼대었다. '언제든지, 더 친해지면 학부장에게 이렇게 말하게 될 거예요 닥터 라이트, 우리들은 같은 성이던 때가 있었어요. 나는 결혼해서 라이트가 된 거예요. 라이트 부인이라고 말해야겠죠. 하지만 함께 일하게 되다니 이상하군요.'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자 차가 달려, 캐더린의 몸이 약간 흔들렸다.

'설마....설마....존은 아니겠죠? 유학 경험이 있고, 두뇌 명석, 몇 해 전에 교수 자격을 땄다니....'

캐더린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라이트 따윈 흔한 성이니까. 강사 중에도 라이트란 분이 있어. 미술학부에. 아니야, 존일 수는 없을 거야.'

프랜시스가 차 문을 열었다.

"그럼 안녕, 달링."

그리고 캐더린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편히 주무세요, 프랜시스."

손을 흔들어 멀어져 가는 차를 배웅하며, 캐더린은 프랜시스가 뻔뻔스럽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약혼하여 곧 두 달이 되는데도 아직 손 한번 잡아본 적이 없었다.

'만약, 그 이상의 짓을 했다면, 아마 참지 못했을 거야. 존 때처럼 느낄 수는 도저히 없을 거야....'

캐더린은 현관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추억도 함께 닫아버렸다.-결혼과 약혼과는 전혀 딴 것으로, 젊고 매력적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한 사내라면 누구건 가끔 볼에 가볍게 키스하는 정도로는 그치지 않는다는 진실을 그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이튿날 아침, 캐더린은 유달리 일찍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대학으로 갔다. 보관 입구의 시계탑을 쳐다보면서 신임 학부장을 만날 채비를 했다. 이층 계단을 오를 때, 다시 한번 어떤 사람일까, 생각했다.

'존일 리가 없겠지.'

캐더린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런 우연이 있을 턱이 없다.'

방에 들어서자 옆의 학부장실에서 얘기소리가 들려왔다. 캐더린은 코트를 벗고 화장을 고치며 머리에 빗질을 하고는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았다. 느닷없이 학부장실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두 남자가 들어왔다. 한 사람은 공학부장인 프레드 웰포드인데 다른 한 사람이 신임 학부장인 모양이다. 캐더린은 그 핸섬한 얼굴을 보고, 순간 눈앞이 흐려지는 듯했다. 저절로 손이 올라가 목께를 눌렀다.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을 손으로 쥐고 억누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스 스웰, 이분이 이학부장인 닥터 라이트-그러니까 당신의 새 상관이죠."

프레드는 미사여구를 써서 소개를 계속했다.

"닥터 라이트, 이 사람이 당신의 개인 비서가 될 미스 캐더린 스웰이예요. 운이 좋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제일 우수한 비서니까요."

눈앞에 서 있는, 키가 훤칠하고 갈색의 머리칼이 풍부한, 눈빛이 날카로운 사내를 응시 한 채 캐더린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존이었어. 틀림없는 존이야!'

캐더린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서 양손을 맞잡았다. 세월이 흘러갔어도 존은 조금도 달라진 데가 없었다.

캐더린의 시선은 존의 눈에 못 박힌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놀라움으로 소리도 없이 두 사람은 상대를 살폈다. 일순간, 거역할 수도 없이 타오르는 그리운 불꽃은, 어느 사이에 고통스러운 추억에 젖어 완전히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갑자기 암흑 속에 내던져진 듯이 그림자가 스쳐간 존의 눈에 이윽고 조롱하고 있는 듯한 빛이 떠오르더니, 목에까지 나온 캐더린의 인사말을 삼켜버렸다.

악수하는 존의 손은 차가웠고, 더욱이 캐더린의 손에 닿는 것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얼른 거두고 말았다.

"미스 스웰?"

존이 되묻는다.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떨리고 있다.

"미스 스웰......."

캐더린은 말없이 끄덕였다. 프레드 웰포드는 존의 반응을 오해하고는 호인스럽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요. 지금은 아직 미스 스웰입니다. 믿어지지 않죠?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동안이죠. 숙녀의 왼손을 보시면 아실 테지만, 이미 예약이 끝났죠. 하하... 학장과 말입니다. 그러니 눈독을 들여도 헛수고예요. 당신 아래 있는 건 잠시 동안이오. .. 2, 3개월 정도? 그렇죠?"

캐더린은 간신히 침착을 되찾으며 대꾸했다.

"적어도 몇 달은 있을 거예요. 그러니 닥터 라이트께서는 안심하셔도 돼요. 이곳에서 자리를 잡게 되실 때쯤에서야 제가 떠날 것 같거든요."

"그렇소. 그럼 당신 비서의 부드러운 손길에 일임하기로 하고 나는 물러서겠습니다."

웰포드의 등뒤에서 문이 닫히며 존의 소리는 도중에서 흐려졌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캐더린이 말문을 열었다.

"....., 용서하세요. 이렇게 됐으니... 하지만 미리 손을 쓸 수는 없었거든요. 그렇죠?"

존은 미간을 좁혔다.

"손을 쓸 수 없었다구? 어디 그런가 아닌가를 조사해 봅시다. 그편이 좋겠지?"

존이 나가려는 것을 보고 캐더린이 말을 건넸다.

"도와 드릴 게 없을까요?"

존은 칸막이 문가에서 멈춰 섰다.

"일이 있으면 부르겠소."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캐더린은 의자에 몸을 묻고, 머리를 팔로 고였다. 이렇게 되다니, 이 무슨 참혹한 일이야. 그에겐 용서하려 하거나 어울려 보려는 눈치가 조금도 없는데, 어떻게 함께 일할 수 있을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돌처럼 냉랭한 시선, 화강암으로 만든 비석처럼 인정하나 없는 듯한 느낌-그 전의 그는 그렇지 않았었다.

캐더린은 어떻게든 기분을 되찾아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자제심이 갈기갈기 찢긴 감정에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자동적으로 우편물을 분류하여, 새 학부장의 수고를 기다릴 것 없이 자기가 처리할 수 있는 편지를 선별해 놓고 회담에 필요한 파일을 꺼내어 타이프를 쳤다. 캐더린의 손은 의식적인 노력 따위를 하지 않아도 기계처럼 정확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무서운 악몽 속에 묻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타이프를 마치자 편지를 손에 들고 캐더린은 칸막이 문을 가볍게 두들기며 학부장실로 들어갔다. 존의 얼굴은 험악했다.

"무슨 일이오?"

캐더린은 책상에 다가갔다.

"반대는 하시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만, 학부장님 앞으로 온 서신중에 몇 가지를 골라 회담을 타이핑했습니다. 사인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당신이...뭘 했다구?"

캐더린은 상대의 음성에 스며 있는 노기에 질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두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가 보기도 전에 내 앞으로 온 편지를 몇 가지 골라서 회답을 썼다구? 내 허가도 얻지 않고? 그게 당신 하는 일이오?"

"...용서하세요. 다만 도와 드리고 싶어서 한 거예요. 전임자이신 스미저 씨께선 언제나 그렇게 해왔거든요."

"이봐요, 미스 스웰."

존은 의자에 바로 앉으며 말했다.

"시작부터 분명히 가릴 건 가립시다. 나는 이 대학에선 신참일 거요. 따라서 이 대학에서와는 다른 또 다른 방식을 가지고 있소. 전임자에 있어 옳은 일이 나에게는 거의 모든 경우에 옳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을 거란 말이오. 그러니까 앞으로는, 최종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될 학부장으로서, 무엇이건 당신이 손대기 전에 나와 상의해요. 맨 처음은 그 위치에 있는 인물이 행사함으로써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오. 그리고 내 의견은, 그 맨 처음을 행사할 인물이란 비서가 아니라 그 상관이란 말이오, 알겠소?"

캐더린은 양손에 힘을 주며, 몸이 떨려오는 것을 견뎌 냈다.

"알겠습니다, 닥터...닥터 라이프."

존은 성가시다는 듯이 책상 끝을 두들겼다.

"편지를 여기 놔요, 훑어보겠어. 필요하면 타이프를 다시 치도록 부탁할 거요. 아무튼 이번만은 사인해 두겠소. , 이젠 나를 혼자 있도록 해줄 수 없소? 문젯거리를 산더미처럼 가지고 있으니 말이오."

(재키: 밥맛..--++..정녕 이사람이 주인공이란 말입니까...)

 

겨우 집으로 돌아왔을 때 캐더린의 신경은 걸레 조각이 돼 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기분을 전환하여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내일 아침 이틀 동안의 강습을 받으러 런던으로 가는 제프를 위해서 가방에 짐을 챙겨 넣었다.

현관의 문이 열렸다.

"제프, 이층에 올라가기 전에 잠깐 나 좀 봐, 할 얘기가 있어."

", 왜 그래?"

누나의 얼굴을 보고 제프가 묻는다.

"누나, 뭐 잘못됐어? 얼굴이 왜그래?"

캐더린은 천천히 대꾸했다. 마치 말이 무엇인가에 걸려 제대로 나오지 않는 느낌이다. 머리가 잘 돌지 않았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신임 이학부장 만났니?"

"누나의 보스 말이군. 아직. 근데 그건 왜? 오후에 공학부에도 얼굴을 내민 모양이지만 난 강의에 들어갔었거든."

"이름은 알아?"

"이름? , 들었지. 아마 라이트라던가? 누나 결혼했을 때 성과 같더군. 하지만 라이트 따위의 성은 도처에 있잖아?"

"그의 이름은 닥터 라이트이야. 닥터 존 라이트라구."

"우와~! 그거 우연치고는.......?"

제프는 말을 끊고 누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존 라이트라구?! 설마 누나의 전 남편은 아니지?"

캐더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의 팔걸이에 기대어 앉았다. 제프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설마, 그 존이?! 몇 해를 지난 뒤에 말이지? 이거 멋있는데! 내일 맨 먼저 만나러 가야지. 아참, 안되겠군. 강습이 있잖아. 어쨌든 대환영이라고 전해 줘. 누나, 재회의 감상은 어때? 아니면 무슨 비밀이라도 있었어?"

제프는 캐더린의 두 눈에 넘치는 눈물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존이 재혼이라도 해 버린 거야? 아니면....."

캐더린은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존이 재혼했으리라는 가능성조차 생각해 보지 않았다.

"제프, 그는 나를 증오하고 있어. 그의 비서라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 있다구. 분명히 나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 직장을 바꿔야 겠어."

"하지만 그건 안 돼. 누나는 대학에서 가장 유능한 타이피스트라구, 그래서 대학에서도 제일 큰 이학부의 비서가 된 거잖아."

"우리는 그걸 알고 있지만 존은 모르고 있어. 그의 퉁명스런 태도를 볼때, 나에게서 달아나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을 바꿔놓기라도 할 것 같던걸."

"제기랄. 강습 따위! 돌아오면 곧 존에게 얘기해야지."

"아무런 소용도 없을 거야. 게다가 어쩜,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동생에게 캐더린이 소리를 질렀다.

"헬렌은 오니?"

"아니, 오늘 밤 과외가 있대. 학생에게서 해방되고 나면 너무 늦고 말이야. 사람들은 수업 후에도 교수에게 달라붙는다니까, 충고다 뭐다, 극성이 대단하다고."

"그럼 오늘밤은 우리들끼리 조용히 있게 되겠구나. 넌 공부할 거구, 난 피눈물을 흘리며 있겠지."

캐더린은 쓸쓸하게 웃었다.

"누나."

제프의 말투는 정말 안쓰러운 모양이었다.

"잘 될 거야, 누나. 누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거야, !"

"~. 고맙다, 제프. 그 말만 들어도 한결 마음이 놓이는구나."

 

2.

이튿날 캐더린은 아침 일찍 일어나 런던으로 떠나는 제프를 배웅하고, 아침식사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 버스로 대학에 갔다.

존이 먼저 와 있었다. 캐더린이 머리를 빗고 파우더로 얼굴을 두들기고 있으려니까, 칸막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존이 초조해 하며 기다리고 있는 앞에서 캐더린은 어색해 하며 화장 세트를 핸드백에 넣었다. 곧 존이 입을 열었다.

"내 방으로 와 줘요."

그리고 조롱기가 석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물론, 시간을 좀 낼 수 있다면 말이오."

마음이 울적해졌다. 또 시작했군. 캐더린은 타이프라이터의 커버를 벗기고, 연필과 노트를 손에 들고는 숨이 막힐 정도로 울렁이는 가슴을 누르며 존의 방으로 들어갔다.

", 속기 도구는 놔둬요. 지금은 필요 없으니. 앉아요. 당신에게 일러 둘 일이 있소."

캐더린은 존의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상대를 쳐다보았다.

존은 의자 곁에 서서 양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무표정으로 한숨 돌리고는 말을 꺼냈다.

"아마, 내가 이제부터 할 말을 당신도 짐작하고 있을 거요. 어떻게 하든 우린 현재 상황에 적응해야만 할 거요. 물론, 어느 쪽이든 책임 질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한밤중까지 해결책을 생각해 본 결과...내 결론은 이렇소..."

존은 잣대를 손에 들었다가 다시 책상 위에 놓고 흡인지의 주름을 폈다. 그러면서 느닷없이 캐더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캐더린은 상대가 이제부터 할 얘기를 생각하며 벌써 겁에 질려 있었다.

"먼저, 발단서부터 얘기해 두지. 만일, 내가 미리 내 개인비서가 누군지를 알았더라면 주저하지 않고 거절했을 거요. 하지만 이미 늦었지. 비서를 바꾸려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캐더린이 입을 열려고 존은 불쑥 한 손을 들었다.

"미안하지만 아직 내 얘기 안 끝났소. ......아무튼, 비서를 바꾸는 쪽으로 생각해봤지만, 만일 다른 비서로 바꾸어 달라고 말을 하자면 이유가 있어야 할 거고, 쓸데없는 억측까지 받게 된단 말이오. 더욱이 비서를 바꿔 달라다니...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열려도 없지 않거든."

존은 우롱하고 있는 듯한 웃음을 보였다.

"이젠 싫증이 날 정도로 남들이 운수가 좋다고 부러워하고 있으니까, 당신을 비서로 둘 수밖에 없소. 물론 나야 어쩔 수 없이 당신을 비서로 두기는 했지만 조건이 있소. 우리들의....관계는 그렇게 짧은 기간에 불과했으니... 사실 연애랄 것도 없이 잠깐 계속되었으니까, 그리고 또 10년쯤 전의 일이니 너무도 옛날 얘기고, 지금은 서로 타인이니 서로가 지금까지 만나 본 적 없는 인간들처럼 대하기로 합시다. 훨씬 더 오랜 친구였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좋지 않소. 쉽게 말을 바꾸어 하면, 서로가 10년이나 나이를 더 먹었으니 사실상으로도 전혀 딴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거요. 더욱이 당신에 대한 내 태도는, 비서를 대하는 것처럼 우호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하지만, 당신에 대한 쓰디쓴 추억이 나에게 있는 한, 어쩔 수 없다고 보오."

존은 말을 끊고 캐더린에게 반론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리가 잇게 말할 만한 정신이 아니었다. 그러자 또 존이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났지만, 당신에겐 나보다도 더 오랫동안을 깊이 사귄 남자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으니..."

캐더린은 그만 하라고 외치고 싶었다.

'애인이 생겼다는 말은... 그건 조작한 얘기였어요.' 라고...

하지만 존은 재빨리 제지했다.

"아니, 그 관계가 얼마큼 오래 계속됐다는 따위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좋소. 당신의 불결한 과거 같은 걸 소상하게 듣고 싶지는 않으니까."

분명히 존은 캐더린으로 하여금 변명할 기회 따위는 줄 생각이 없는 듯싶었다. 캐더린은 타는 듯한 목구멍에서 간신히 말을 짜내었다.

"조건은 그것뿐인가요?"

"아니, 또 있소. 당신도, 당신의 동생도.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이 학교 교수인 모양인데, 내 과거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나 한 마디도 해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해 줘요."

캐더린은 조용하면서도 명확하게 대꾸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 마세요. 저도 그러고 싶으니까."

"고맙군. 난 다만 내 과거의... 실수로 현재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소. 당신에겐 당신의 생활이 있고, 나에겐 내 생활이 있으니. 이제 두 사람의 생활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걸 기억해 두시오."

일어서려고 하는 캐더린을, 존은 몸짓으로 눌러앉게 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소."

존의 말투에는 비난의 빚이 깃들여 있었다.

"우리들의 상황은 당신이 학장과 약혼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복잡한 것이 돼 있소. 여기서 명확히 해 두고자 하는 바는, 내가 학장의 집무 태도나, 학장의 사고방식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건 절대로 당신 입을 통해 학장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거요. 내 비서로서 당신은 내 신뢰에 보답할 의무가 있는 거요. 자유롭게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상태이고 싶소. 비록 당신의... 약혼자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야."

존은 지겹다는 듯이 약혼자라는 말을 내뱉었다.

"어는 정도 새어나가는 가를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캐더린은 잔뜩 성이 나서 일어섰다.

"그러니까, 나에게 하고 싶은 욕설을 다 하고는 끝판에 가선 고자질이나 하는 사람으로 치부하는군요."

캐더린의 파란 눈이 존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 손에 든 노트를 꼭 쥐었다. 존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캐더린의 손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그렇게 흥분하는 걸로 보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제대로 전달된 모양이군, 그래."

"그럼 이젠 제게 볼일 없으신 거죠?"

존은 회전의자에 앉아, 좌우로 빙빙 돌리면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캐더린의 금발이 성이 난 볼에 부드럽게 물결치고 잇는 것과, 부드러운 파란색 털로 짠 드레스를 입은, 작지만 완벽한 몸을 바라보고 있었다. 굳게 다문 빨간 입술, 모욕을 받고 눈물을 머금은 푸른 하늘과 같은 눈동자. 존의 입 언저리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찌를 듯한 경멸에 찬 말씨.

"당신에게 볼일이 없느냐구? 그렇소. 수고했소."

둘의 시선이 날카롭게 부딪쳤다. 캐더린은 휙하니 등을 돌리고는 문을 쾅 닫았다.

그렇게 해도 상대의 입술에 떠오른 승리의 미소를 없앨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지런히 눈물을 훔치며 캐더린은 노트를 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신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술학부의 8층 교사의 창에, 1월의 부드러운 햇살이 반사하여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캐더린은 느닷없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 이 대학과 자기 인생이 얼마나 얽혀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제프나, 제프의 여자 친구인 헬렌에 대해서도.

그리고 지금, 캐더린은 학장의 약혼자인 동시에 예전에 열렬하게 사랑했던 남자의 비서인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예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을 정도의 폭군으로 바뀌어, 그녀를 괴롭히며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싫어하고 있다. 예전에 사랑했던 남자... 돌연 캐더린은 그에 대한 사랑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뿐만 아니라, 그 세월 동안에 사랑은 더욱 더 깊어져서 그가 새끼손가락을 까닥거리는 신호를 보내기만 해도 그녀는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고 그에게 달려갈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내선의 전화가 울렸다.

"닥터 라이트의 비서입니다. 용건을 말씀해 주세요."

"학장님 비서인 미스 스미드예요. 지금 바쁘신 가요? 학장님을 위해서 2, 3분 동안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겠어요?"

", 좋아요. 그쪽으로 갈까요, 아니면.."

"아니요, 미스 스웰. 5분 이내에 학장님께서 그리로 가시겠답니다."

프랜시스는 무슨 일이 있을까? 캐더린이 막연히 천장을 쳐다보며 생각하고 있는데 칸막이 문이 열렸다

"바쁠 텐데 미안하지만,"

캐더린은 또다시 가시가 돋친 존의 말에 넌더리가 났다.

"펜이 없어졌는데, 보지 못했소?"

"글쎄요. 못 본 것 같은데요."

캐더린은 미간을 좁혔다. 서랍을 열어 편지 다발이 있는 상자를 뒤지고, 핸드백까지 들여다보았다. 그 동안 바로 곁에 서서 조롱하듯이 웃으며 지켜보고 있는 존의 시선을 느끼면서. 마지막으로 확인을 하기 위해서, 전날 존의 책상에서 파일하기 위해 가지고 온 서류더미를 뒤적이다 펜을 발견하고, 캐더린은 멋쩍어져서 미소를 지으며 펜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존은 마치 처음으로 구경이나 하는 것처럼 정중하게 펜을 조사했다.

"내 우수한 슈퍼 비서도 언제나 슈퍼는 아니란 징조를 보여준 셈이군."

존은 칸막이 문께에서 돌아보며 거듭 조롱의 화살을 쏘아 댔다.

"프로이트 식의 숨겨진 동기가 있어서 내 펜을 훔치려고 한 건지도 모르겠군..."

캐더린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발끈 화를 내며 펜을 찾으려고 뒤지던 서랍을 세게 닫았다.

"캐더린?"

학장이 도어를 열고 들어왔다.

"바쁘오, 달링?"

프랜시스는 존의 모습을 보고 악수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 닥터 라이트. 이젠 익숙해지셨나? 물론이시겠지. 내 훌륭한 약혼자가 거들고 있으니까."

프랜시스는 안쓰럽다는 듯이 캐더린을 보았다. 존의 표정은 마치 목각된 가면 같다.

"그녀가 유능하다는 말은 누구에게서나 듣고 있습니다. .. 제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아무튼 그녀의 우수함에 대해서는 귀찮을 정도로 듣고 있습니다. 전부를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프랜시스는 상대의 반응 따위는 아랑곳없이 미소를 지었다.

"한마디 한다면, 유능하다는 것은 좋은 비서의 불가결의 조건일 뿐만이 아니라, 좋은 아내로서도 불가결의 조건이기도 하오."

존은 예의바르게 놀란 표정을 짓느라고 열심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또, 그 밖의.... 조건 쪽이 더 중요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캐더린은 몰래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명확하지 않았던, 반쯤은 감추어져 있던 진실이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일의 중대함에 캐더린의 마음이 떨려왔다. 작달막하고 뚱뚱한 프랜시스는 마치 만화의 인물과 같았고,

마르긴 했지만 키가 훤칠하고 힘이 세어 보이는 예전 남편과는 대조적이었다. 마음 속 깊이 묻어 둔 폭약과 같은 감정이 사슬을 끊고 해방되려는 것처럼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시 그 감정에 밝게 빛을 비추게 되면, 그때는 자기와 프랜시스의 미래를 지탱하고 있는 암석과 같은 기반이 하늘 높이 날아갈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건 그렇지 않소."

개구리처럼 아랫배를 내밀며 프랜시스가 말했다.

"경험이 없으니 당신은 잘 모를거요. 결혼한 적이 없다면서요? 그렇다면 앞으로 배울게 많을 거요, 닥터 라이트."

프랜시스는 애정이 깃든 몸짓으로 캐더린의 머리를 가볍게 두들겼다. 마치 어린애를 어르듯이.

"나는 결혼의 기쁨이라는 모험에 두 번째 출항을 하게 되오. 처음 때와 마찬가지로 즐겁고 멋있는 것이 되리라고 믿고 있죠."

존이 혐오를 숨기지 못하는 몸짓을 하자, 캐더린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약혼자의 신 바람난 얘기에 끼어 들었다.

"프랜시스, 무슨 용건으로 오셨죠?"

존은 등을 돌리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 그렇군. 달링, 저번에 말했던 집에 대한 얘기오. 조지 크레스웰이 전화를 했었는데 가계약이 잘 될 거라는 거요. 상대 쪽에서 연락이 있으면 가볼 수 있다고 합디다."

"어머...... 새 집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요."

보호를 받는다는 평안한 느낌을 주는 얘기라면 무엇이건 기뻐요, 하고 캐더린은 마음속으로 말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상처를 받은 뒤였었기 때문이다.

학장은 학부장실과의 칸막이 문을 열었다.

"근간에 둘이서 말할 기회를 만들어야겠소, 닥터 라이트. 당신의 부학장으로서의 임무에 대해서 말이오. 시간이 생기면 전화하겠소."

학장이 나간 순간 존이 방으로 들어왔다.

", 당신의 미래 남편과의 접견도 끝난 모양이니, 이번에는 이 사람의 방에 친히 오셔서 접견을 베풀어주실 수는 없겠소? 오늘 아침에 도착한 우편물을 가지고 와요."

 

"커피는 웨이트리스가 날아옵니다. 셀프 서비스는 점심 때만 이죠."

아침 커피 타임에 캐더린은 존을 안내하여 직원용의 식당을 들어갔다.

"어디 앉으면 되오?"

"아무 데나 좋으신 자리에."

캐더린은 존이 더 나가기를 기다렸으나, 상대는 발에 뿌리가 박혔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면 손을 잡고 안내해 드려야 할까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캐더린은 거역할 수 없는 충동에 지고 말았다. 물론, 모두가 보고 있었으므로 상대가 성을 낼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계산에 넣고 한 말이었다.

느닷없는 반격에 존은 캐더린을 노려보았다. 대꾸를 기다리지도 않고, 캐더린은 존의 곁을 떠나 본부의 동료 곁에 자리를 잡았다.

"안녕, . 어때? 크리스마스는 재미있었어?"

"재미있었지.... 캐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질이 덮어놓고 묻는다.

"같이 오신 사람, 그 남자가 새 보스야? 엘리트 같은데, 어떤 사람이야?"

캐더린은 식당을 둘러보고, 존이 창가에 앉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혼자서 말상대도 없이, 밖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쓰럽게 여길 건 조금도 없다고 캐더린은 자기를 타일렀다.

"훌륭한 분이셔. 게다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나는 그가 결혼했는지 안 했는지도 아직 몰라."

질이 나지막한 소리로 감탄했다.

"너나 나나 결혼맹세를 하고 싶어 혓바닥이 근질근질하는 하잖니.. ~."

캐더린은 다시 한번 몰래 존을 살폈다.

마치 1분이라도 빨리 제 방으로 가고 싶어 하는 꼴이다. 캐더린은 오늘 아침에 존이 억지로 고맙다고 말했을 때의 표정을 생각해 보았다. 캐더린 덕분에 쌓인 편지 뭉치를 정리한 뒤였다.

그런데 캐더린은,

"천만 에요, 이건 내가 할 일인 걸요. 그리고 가급적 도와드리라는 약혼자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라고 말했던 것이다.

식당을 둘러보고 있던 존의 시선이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캐더린의 시선과 부딪쳤다. 심장이 고동친다. 캐더린은 당황해하며 외면하고, 낭패를 감추기 위해서 동료에게 허튼 말을 건네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기도 알 수 없었으나, 동료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존이 소리를 내며 의자를 물리치고 일어서서 식당을 나갔다. 캐더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존은 아마 자기가 캐더린의 조롱거리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커피를 홀짝이면서 캐더린은 왜 아무도 존에게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 대학에서는 보통, 전부가 신임의 교수에게는 친절했기 때문이다. 캐더린은 동료를 남겨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수들의 그룹 뒤쪽을 지나려고 하는데 한 사람이 불러 세웠다.

"어떤 사내지, 당신의 새 보스는?"

"글쎄요.... 멋있어요."

캐더린은 간신히 보통 어조로 대꾸했다.

"왜 얘기를 나누지 않으세요? 직접 물어보실 수도 있잖아요."

"별로일 것 같아. 그는 부학장에, 학부장도 겸하고 있거든. 솔직히 말하자면 같은 동료랄 수는 없어. 산업계에서 들어와 곧장 톱으로 올라왔으니 말이야."

캐더린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렇다고 그렇게 따돌릴 필요는 없잖아요."

 

이튿날 커피 타임에 존은 식당에 가지 않았다. 캐더린은 일찍 커피를 마신 뒤, 식당에 가서 웨이트리스인 메리에게 귀띔을 해놓았다.

"새로 온 보스에게 줄 커피 주지 않겠어? 그 사람 여간 수줍어하는 게 아니어서 식당에 못 나온 데요."

친절한 메리는 아주 동정한 모양이었다.

"물론이죠, 캐스. 큰 컵이나 가지고 와요."

캐더린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흘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방까지 날랐다. 문을 가볍게 노크하고 존의 방으로 들어갔다.

"커피 안 드세요?"

한 방울도 접시에 흘리지 않고 방을 가로질러 살며시 그의 책상 위에 놓았다.

처음으로 보여 주는 존의 따사로운 미소가 눈앞에 있었다.

"당신은 천사요!"

의식의 제어를 빌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한 존의 말이었다. 존은 고마움에 넘치는 눈으로 쳐다보며, 마찬가지로 기뻐하는 캐더린의 눈을 보았다. 돌연 자기가 한 말을 후회하는 모양이다. 존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조롱기가 섞인 시선으로 돌변했다.

"거의 완벽한.... 비서의 행위라고 보아야겠지. 설마 내 비위를 맞춰 악녀의 멍에에서 빠져나가려는 수작은 아닐테지?"

캐더린의 눈에서는 연신 눈물이 넘쳐 나왔다. 이젠 숨기려는 생각도 없어졌다.

"어쩜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어요?"

캐더린의 음성은 젖어 있었다.

"심하다구?"

존은 점잖은 어조로 말했다.

"이런 말은 심한 것 중에 들지도 않아. 이 열배나, 아니 백배나 나는 심해질 수 있어. 특히 그 옛날, 당신과 함께 했을 때 나에게서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비참함을 맛보게 한 장본인에게 라면 말이야. 나는 항상 잊지 않고 있지."

존은 의자에 비스듬히 버티고 앉아 캐더린의 눈물어린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이 우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조금씩 옛날의 그 복수에 대한 빚을 갚고 있다고 생각해."

캐더린은 눈물에 흐려진 눈으로 존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당신이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단 말이지?" 존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스며 있지 않았다

"당신 방으로 돌아가요. 이래선 일을 못하겠군."

존은 손도 대지 않은 커피 잔을 이쪽으로 밀어버렸다.

 

그날 밤, 캐더린은 동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쨌든 동생만은 내 편이니까, 무거운 짐을 잠시 동안만이라도 나누어 짊어질 수 있는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제프는 그러나 밤늦게 되어서야 지쳐서 돌아왔다. 그뿐 아니라 저녁조차 굶었는지 캐더린은 가벼운 야식을 만들어 줘야 했다. 내일 아침 존을 만나러 간다는 동생에게, 옛날 두 사람이 결혼했었다고 하는 사실은 비밀이라는 약속을 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것이었다.

 

3.

캐더린이 봉투에 보낼 곳을 타이프하고, 그 곁에 존이 서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일을 중단하게 된 것에 신경질이 난 존이 성난 얼굴로 돌아보았다. 방해꾼이 누군지를 알게 된 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제프!"

존은 양손을 내밀며 제프를 맞이했다.

"!"

제프의 얼굴도 기쁨에 반짝이며 두 손을 내밀었다.

"다시 만나게 되다니! 정말 반가워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

"그래? , 넌 굉장히 많이 컸는걸. 어른이 다됐구나, 제프."

두 사람은 소리를 내어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캐더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존이 순식간에 변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몇 살은 더 젊어진 것 같았고, 전혀 딴 사람 같았다. 말투조차 동생을 대할 때는 도무지 딴 판이었다.

"내 방으로 가자, 제프. 시간은 어느 정도 있니?"

"좀 비어 있어."

존이 캐더린을 돌아다보았다. 갑자기 얼굴표정과 목소리가 일변했다.

"앞으로 30분간 그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아, 알겠소?"

캐더린은 끄덕였다. 이 음성으로 제프도 알았겠지. 하지만 동생은 이미 학부장실에 들어가서 듣지 못한 것 같다. 가끔 타이프 치는 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으나 웃음소리 외에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전화가 울렸다. 존의 의견을 묻고 있다. 그러나 지금 존에게 물어 봐야 할 것인지 아니면 자리에 없다고 대꾸해야 할 것인지 캐더린은 당황해 했다. 결국 노발대발 화를 내리라는 것을 각오한 끝에 물어 보기로 결정했다.

만일 여차하면 동생이 구원의 손길을 뻗쳐 주리라. 그래서 살며시 간만이의 문을 노크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존이 세퍼드처럼 덤벼들었다.

"아무에게도 방해를 받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텐데?"

", 실례했습니다, 닥터 라이트. 하지만 중요한 전화입니다. 청소년 노동국에서 학생에 대한 코맨트를 요청해 왔는데요...."

"제기랄, 귀찮게스리. 당신이 어떻게 처리할 수 없겠소?"

캐더린은 사카린과 같은 감미로운 미소를 띠며 좌우간 천진난만한 그대로의 어조로 되물었다.

"내 소관일까요, 닥터 라이트?" 존의 눈에 타오른 노기의 불꽃은 자기 손을 보고 있던 제프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곤란하군. 미스 스웰, 당신 소관인 것으로 치고 적당히 처리해요. 물론 수고스럽겠지만 말이오."

 

사무가 바빴으므로 캐더린은 늦게 모닝 커피를 마시러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죤이 동료들 그룹의 한 가운데 앉아 있었다. 동료 중에는 제프의 얼굴도 있었다. 더욱이 질 서머즈가 캐더린을 위해서 잡아 둔 자리와는 통로를 사이에 둔 옆자리였다.

"안녕, 캐스."

질이 말을 걸어왔다.

"마치 번개라도 맞은 사람 같아. 힘을 내요."

"그래? 이상할 것 없어. 만일 내가 기상도였더라면 온통 저기압으로 깔렸을 거야."

타이피스트들은 와아 웃음소리를 내자 존도 포함하여 다른 테이블 사람들까지 이쪽을 보았다. 질이 캐더린에게 귀띔해주었다.

"저 아네트가 말야. 새로 온 학부장의 손톱을 깎아 주고 있어요. 학부장도 본심으로 거절한 셈은 아닌 모양이라구."

역시 본부의 타이피스트인 리즈 윌리엄스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속삭였다.

"아네트는 말이야, 그에게 초록색 시그널을 보여 주었어요. 누군가가 저 순진한 학부장에게 충고해 줘야 해. 저 아네트에 관한 한, 빨강색일 때보다 초록색일 때가 더 위험한 신호라고 말이야. 내 그이조차도 저 여자와 함께라면 염려가 된다구. 캐스, 네가 주의를 주지 않을래? 네 보스 아니야? 더욱이 아네트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멋진 남성이란 말이야."

메어리가 커피를 가지고 왔다. 동료들은 제각기 자리에서 일어섰고, 캐더린은 아직 입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커피를 앞에 놓고 오직 혼자 테이블에 남게 되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옆 테이블에서의 대화가 귀에 들려왔다.

"사모님께서는 미들랜드에서 랭카셔로 옮기는데 짜증내시지 않았어요?"

아네트 린튼의 교묘한 유도 심문이 들려왔다. 존이 솔직한 대답에 아네트는 까무라칠 듯이 만족한 눈치다.

"아내 따위는 없습니다."

존의 대꾸는 캐덜린에게도 들려왔다. 어쩌면 캐더린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명확히 큰 소리로 말했을는지도 모른다.

'아내 따위'라고 했을 때, 존은 내뱉듯이, 거의 혐오감을 깃들여 발음했던 것이다.

아네트는 큰 눈동자에 더욱 친밀감을 담고 존을 바라보았다.

"조심하라구, 닥터 라이트."

멕스비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의자를 테이블 쪽으로 밀어 넣고 말했다.

"당신은 그녀의 레이다 망에 비쳤어. 자기가 어디 있는지 아직 모르는 사이에, 불기둥이 되어 낙하하게 될 거요. 아네트의 저 큰 두 눈동자의 레이저 광선에 말이야."

 

"요점만 말하면, 미스 스웰, 우리들 연극의 히로인을 맡아 달라는 거예요. 옛 러시아 희극의 번역물이에요. 그 전에도 나오신 적이 있잖아요? 부탁합니다."

미술학부 여학생인 모린이 꾸벅 머리를 숙였다. 그 뒤를 이어 학생회의 서기장을 맡고 있는 디비드 학술레이가 나섰다.

"미스 스웰이 열쇠를 쥐고 있죠. 주역의 여성 이미지와 잘 맞아요. 머리 빛깔, 스타일, 용모까지. 전원 일치로 추천된 겁니다. 꼭 맡아 주세요."

캐더린은 디비드의 공치사에 소리를 내어 웃었다. 바쁘게 식당에서 나오고 있는데 학생들에게 붙잡혀 마침내 방에까지 끌려 온 것이다.

"그렇다면.... 큰일을 맡게 되는 거 아니에요? 공연 날까지 대사를 다 외울 수 있을지?"

학생들은 입을 모아 당신만큼 뛰어난 사람이라면 훌륭히 해낼 거라고 보증했다. 설득과 간절한 부탁으로 학생들은 드디어 캐더린의 동의를 얻어 내고야 말았다.

"이제 결정됐으니,"

하고 귀엽게 생긴 모린이 말했다.

"상대역도 데리고 와야잖아요? 당신의 불가사의한 피앙세는 어떨까요? 이 대학의 선생님이시죠? 맡아 주실지도 모르잖아요?"

캐더린은 여학생의 말투에 말려들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윽고, 그 제안에 함축되어 있는 고통이 캐더린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학생들이 제멋대로 상상하고 있는 주역의 이미지와 현실의 약혼자의 이미지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만일 진실을 알게 된다면 이 학생들은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캐더린의 웃음소리는 거의 히스테리의 발작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때 곁방에서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학생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본다.

"누구죠? 당신의 보스?" 모린의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맡아 주지 않을까요? 부탁해 보시지 않을래요?"

캐더린은 곤혹스러웠다. 더욱이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웃을 수도 없다.

"절대로 안 돼요, 알겠어? 벌써 근무 시간이야. 너희들도 수업이 있지? 히로인 역은 내가 맡겠어요. 하지만 상대역은 너희들이 찾아보렴."

"하지만 우리가 멋대로 찾아내는 건 어쩐지.... 당신이 그를 유혹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최후에는 당신과 키스를 하게 되니까요."

"키스라구? 그런 약속은 하지 않았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히로인은 모두 상대역에게 키스하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웃으면서 캐더린은 학생들을 방에서 몰아내었다. 순간 칸막이 문이 열리면서 존의 초조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도대체 무슨 소란인가? 당신은 숨넘어갈 듯이 웃고 있었던 것 같던데."

캐더린이 설명하자, 존은 우스꽝스러울 만큼 화를 냈다.

"날더러 상대역을 맡으라고? 사양하겠소. 하지만 내가 맡는다고 하면, 조건이 하나 있소. 히로인을 지명할 권리 말이야.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히로인은 이미 정해진 모양이니. 게다가 말이야, 학생들의 취미는 내 취미와 정반대란 말이오."

캐더린이 입술을 깨물었을 때 전화의 벨이 울렸다. 허스키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닥터 라이트 계세요?"

"누구신가요?"

내가 모르고 있는 줄 아나 하고 캐더린은 마음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냥 전화 좀 바꿔 주시면 좋겠는데요."

캐더린은 존에게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여자 분이세요. 이름은 말하지 않는데요."

". 여보세요, 존 라이트입니다. , 아네트. ..... 오늘밤? 그래요, 별로 약속은 없는데요..... 당신 집에서? 그거 좋소. , 가정요리라니 고맙군. 이 몇해 동안 가정에서 만든 음식과는 인연이 없었으니까. 호텔 생활도 너무 길게 하고 보면.... 시간은?... 주소는?... 알겠어요. 찾아가 뵙죠."

존은 수화기를 놓는다.

"굉장하군, 이렇게 빨리! 성은 뭐라더라? 소개받았을 때 듣지 못했는데. 뭘 하는 사람이지?"

"아네트 린튼. 가정학부의 주임이죠."

캐더린은 저도 모르게 지껄였다.

"남성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여자로 유명해요."

존의 즐거워 못견디겠다는 듯한 미소가 캐더린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런 말을 듣고 보니 더더욱 기다려지는데. 사족을 못 쓴다 이거지?"

존은 허공에 눈을 주었다.

"아름답고, 아주 여성다운 여성에게 눈독 들이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말이오. 더욱이 순수하게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성이 굶주리고 있으면 그럴수록, 탐욕적이면 탐욕적일수록 더욱 좋단 말이야..."

캐더린의 손가락이 내리치듯이 타이프라이터의 키를 치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존이 너에게 무슨 말을 하던?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전부 얘기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있었잖아?"

", 여러 가지 얘길 들었어. 전부를 외울 수 없을 만큼."

캐더린의 거실 난로 곁에 앉은 제프는 왠지 그 화제를 피하려는 듯이 보였다.

"누나와....작별한 후에 그는 약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모양이야. 여자 친구를 연신 바꾸기도 하구 말이야. 그리고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서 영국으로 돌아와 공부하여 따 냈구. 산업계에 투신해서 계속 가티은 회사에 있었대. 막 승진해서, 아직도 젊은데 아주 대단한 인물이 된 모양이야. 그리고 이 공과대학으로 왔대. 요컨대 그런 얘기였을 거야."

제프는 여기서 말을 끊자, 곁눈으로 누님의 안색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뒤를 잇는다.

"존이 말이야.... 나에게 누나의 '또 다른 남자'에 대해서 묻더군."

캐더린은 불안스러운 눈으로 동생을 응시했다.

"그래서 뭐랬니?"

"그 무렵 나는 아직 어렸으니까 어떻게 돼갔는지 잘 모른다구 말해 뒀어. 그리고 내가 참견할 문제도 아니라고 말했어. 정말 알고 싶으면 당신이 직접 누나에게 물어보랬지 뭐."

"그랬더니 존은 뭐라고 하던?"

"입 안으로 우물쭈물, 누나에겐 누나의 인생이 있을 거라나?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화제를 싹 바꾸더군."

"절대로 진실을 얘기해선 안 돼. 알겠니? 제프, 결코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제프는 어깨를 들썩였다.

"누나는 정말 어쩌려구 그러지... 하지만 그건 누나 문제니까."

제프는 잠시 멈칫거리다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가 일요일 밤에 나를 식사에 초대해 주더군, 그의 호텔로."

"내 생일날? 그래 너, 가기로 했니?"

". 누나가 신경 쓰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거든. 안 그래? 누나는 '영감'집에 갈 거잖아."

"그렇지, 프랜시스 집에 가. 네가 초대받았다구 해서 신경 쓰진 않아. 존은 어디서 묵고 있다던?"

"모르고 있었어? 콘티넨탈 호텔이지."

"뭐라고? 이 고장에선 특급 호텔 아니야? 지불에 자신이 있는 걸까?"

"문제없는 모양이야. 10년 동안 따로 부양할 사람도 없었으니까 은행에 돈이 푹푹 쌓이더래. 그 사람 차 봤어? 흰색 재규어라구."

 

이튿날 아침, 캐더린은 오늘이야말로 존 보다 먼저 사무실에 도착하려고 일찍 집을 나왔지만, 코트를 옷걸이에 걸고 있는데 내선의 벨이 울렸다.

"닥터 라이트의 비서입니다."

"... 왠일이지?"

조롱하는 듯한 대꾸가 돌아왔다.

"만일 정말이라면 닥터 라이트가 즉시 만나고 싶다고 말해주고 싶군."

언제나와 같이 적의에 찬 실랑이로 시작된 일도, 대학의 교수 승진 제도를 설명하고 있는 동안에 점차 진지한 것이 되어 갔다. 존은 지금 있는 조교수를 공석이 될 교수의 후임에 심사 없이 승진시킬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학에서는 교수의 공석은 모두 공모하여 메꾸도록 되어 있습니다."

"가령 우리 대학에 적당한 인재가 있어도 그렇단 말이오?"

"그런 경우에도 역시 공개모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그 조교수에게 응모하면 어떻겠느냐고 권고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심사위원회가 다른 후보자를 지명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그 조교수는 다른 대학으로 자리를 바꿀 것이고 이 대학은 우수한 인재를 빼앗기는 결과가 돼요. 쓸모없는 제도라곤 생각지 앉히나? 산업계에선 보통 승진은 같은 사내에서 능력에 따라 테스트 없이 행하는데 말이야."

"닥터 라이트, 교육기관에서는 공모 제도가 낫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미래를 짊어질 인재를 기르는 교육에는 새로운 피를, 새로운 사고방식을 부단히 도입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스타크가 대학 내부에서 선발되어 차례로 승진해 간다면, 새로운 사람들은 피라밋의 맨 아래밖엔 들어올 수 없으니까, 그렇게 되면 경험이 별로 없는 젊은 사람들은 처지게 됩니다. 그것은 대학에 있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에요. 곧 동맥 경화 현상이 될 것은 누가 보아도 명확하거든요."

"그러니까 당신 말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부 승진제도는 교육의 근친결혼과 같이 건전한 것이 아니란 말이지?"

", 그렇습니다."

캐더린은 눈을 내리깔고 자기의 양손을 보고 있었다.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생긴, 대등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다는 느낌에 이상하리만큼 가슴을 울렁이면서. 살며시 얼굴을 들어보니, 평소와는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존의 시선과 부딪쳐 심장이 철렁했다. 캐더린은 숨을 몰아쉬며 제법 당돌하게 말했다.

"이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존이 대꾸를 하려 했을 때 내선의 벨이 요란스럽게 울려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깨트리고 말았다.

"."

전화는 받아 든 존의 어조는 무뚝뚝하고 불쾌한 듯했다.

", 그녀 같으면 여기 있습니다. 당신 약혼자에게서요."

캐더린은 존의 책상 건너에 손을 뻗쳐 수화기를 받았다.

"안녕, 프랜시스..... . 프랜시스. 그대로에요...... , 일요일에?..... 기꺼이. 고마워요. 프랜시스"

존은 대꾸밖에 하지 않는 캐더린의 전화에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의자를 발로 밀고 일어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금 곧이에요, 프랜시스? 그렇군요. 알겠어요. , 프랜시스."

캐더린은 수화기를 놓았다.

", 프랜시스. , 프랜시스. , 프랜시스. 당신은 그렇게밖엔 말할 수 없소?"

존이 창 밖에 눈을 준 채 물었다. 그리고 돌아보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단 한번 만이라도 말한 적이 있소? 아니요, 프랜시스하고 말이야."

"미안해요, 닥터 라이트. ....프랜시스가....그가 자기 방까지 와 달라는 군요, 지금 곧."

"지금 곧? 한참 바쁜데 말이오?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난 뭘 하고 있으란 말이오? 구내를 한 바퀴 뛰고 있으란 말인가?"

"그렇게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상관없겠죠?"

"상관 없을 리가 없지 안소. 어서 가고 싶으면 가요."

존은 성이 난 듯 손을 흔들었다.

 

"들어와요, 달링. , 앉아요."

캐더린은 아까까지 학장 비서인 미스 스미스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았다.

"전화로 확인했지만, 당신 생일은 일요일 이었지? 내 수첩에도 그렇게 씌어 있더군. 그래서 말이오, 이 서랍 속에 당신에게 보내는 선물이 들어 있다, 이거요."

프랜시스는 서랍 안을 뒤지더니 예쁘게 포장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이대로 일요일까지 둬도 되고, 지금 열어 봐도 돼요. 당신 좋은 대로 해요."

캐더린은 볼을 붉히며 떨리는 손으로 선물을 받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외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아니요, 받을 수 없어요. 당신은 참된 나를 몰라요. 그러나 캐더린은 그 외침을 묵살하고, 단호하게 그 소리에 거역하고 포장지를 풀었다. 얄팍한 상자의 뚜껑을 열고 캐더린은 어머 하고 숨을 삼켰다. 얼핏 보아도 값이 비싸게 보이는 아주 작은 금으로 세공된 팔목 시계였다. 캐더린의 눈은 감사의 마음으로 빛났다.

", 프랜시스. 아주 멋있어요! 고마워요. ....지금 차 봐도 될까요?"

"물론, 달링."

프랜시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내가 채워 드리리다."

프랜시스는 캐더린의 바로 곁에 서서 캐더린의 가느다란 손목에 시계를 채워 주고는 느닷없이 상체를 구부려 캐더린의 입술에 키스했다.

느닷없는 애정의 습격에 캐더린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필사적으로 견뎌 내려 했기 때문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가능하면 시계를 손목에서 빼내어 프랜시스에게 냅다 던져 주고 싶었다. 프랜시스는 지금까지 한번도 진짜 키스다운 키스를 해 준 적이 없었다. 캐더린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견딜 수 없었다. 죄책감과 자기혐오로 죽어버리고만 싶었다.

그러나 외면상으로는 캐더린은 상냥하게 미소를 지어보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 프랜시스의 볼에 키스를 하기도 했다. 프랜시스는 캐더린의 반응에 썩 만족해했다.

"일요일 밤에는 당신을 식사에 초대하겠소. 내 집으로 와요. 일곱 시 반에 같이 나가기로 합시다. 이제 나는 일을 해야겠소. , 그럼..."

캐더린은 문께로 걸어가서 돌아다보았다.

"참으로 고마워요, 프랜시스. 정말,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를 정도라구요."

"지금 그대로의 당신이면 족해요, 달링. 인사는 그것으로 충분하오."

 

캐더린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 자기 방으로 향했다. 존과는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그 조롱하듯 하는 존의 시선 앞에 자기를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존은 타이프라이터 곁에 서서 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캐더린의 빨갛게 상기된 볼과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그리고 또 새로 찬 손목시계를 보았다.

존의 차가운 손이 불쑥 캐더린의손목을 잡고는 프랜시스의 선물을 살폈다.

"굉장히 값비싼 물건이군. 이 선물을 받기 위해서 미스 스웰은 어떤 짓을 하셨나?"

존의 표정은 험악했다. 잡은 손에 힘이 주어져서, 아파 견딜 수가 없다. 캐더린은 사납게 비틀어 손목을 빼고 금세 빨갛게 부풀어 오른 손가락 자국을 문질렀다.

존이 내뱉듯 말했다.

"아니, 말할 것 없어. 그런 일은 알고 싶지도 않아."

 

4.

일요일 저녁, 캐더린은 정원의 오솔길을 지나 프랜시스의 집 현관에 섰다. 연지빛의 울 드레스를 고른 것은, 코트를 벗었을 때 흰 살결을 돋보이게 하는, 자그마한 몸집에 착 붙도록 한 디자인 때문이었다. 긴장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손을 뻗쳐 초인종을 눌렀다.

키가 큰 금발의 청년이 현관에 나타나서 놀랐다는 표정으로 캐더린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고다로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아서 캐더린은 당황해 하며 말을 꺼냈다.

"프랜시스는.... 라트랜드씨 계시나요?"

"있어요, 누구시라고 전할까요?"

"캐더린.... 캐더린 스웰이라고 전해주세요."

이 청년의 다소 냉랭한 마중에 캐더린은 약간 실망스러워 어리둥절해졌다. 이때 갑자기 청년의 표정이 활짝 밝아졌다.

"설마 당신이 아버지 약혼자일 줄은..."

"미안해요... 하지만 그게..그래요."

캐더린은 조그만 소리로 답했다. 문이 힘차게 열렸다.

"어서 들어오세요. 내가 누군줄 아시겠어요? 맥스에요. 아마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니면 저에 관해서는 다락에 숨겨 둔 해골바자기 쯤으로 치부하시고 말씀을 안 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캐더린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따뜻한 응접실에 안내받았다. 맥스가 손을 내밀었다.

"먼저 격식에 맞춰서 하자구요."

캐더린도 손을 내밀었다. 맥스는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고 캐더린을 바라보았다.

"미래의 어머니와 대면한다는 건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가만 있자, 지금 내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죠? 진심으로는 스웰양 앞에 서니까 당황하게 되는걸요? 놀랐어요. 평소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단 아버지의 취미가 훨씬 고상하신 것 같아서요."

맥스가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캐더린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친절히 대해 줘서 고마워요. 상처받은 내 자존심을 살리는 데 가장 적절한 말을 해 주셨거든요."

"코트를 주세요. 그리고 편히 앉아 계세요. 곧 아버지를 모셔 올게요. 지금 내 구두를 닦고 계시거든요."

맥스에게 미래의 모친에게 음료를 대접하도록 명받은 모양이었다. 셰리주를 건네주며 다시 캐더린을 훑어보았다.

"아시겠지만, 스웰 양은 아마 나보다 나이가 아랫니신 것 같은데, 나이를 물어봐도 실례가 안 될까요? 미래의 어머니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실례가 안 될는지?"

"아뇨. 실은 오늘이 27번째 생일이에요."

"이야~! 이거 우연인데요! 27번째 생일이 내일 모래 화요일이거든요."

"제가 어린 건 아니네요. 다행이도 이틀이나 위군요."

캐더린은 소리 내어 웃었다. 미래의 아들이 좋아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휴가 중이에요?"

캐더린은 미소를 지으며 맥스의 얼굴을 살폈다.

"아니요, 2,3개월 동안 여기에 머물러 있을 예정이에요. 확실히 온 세계를 떠돌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은 막간이라는게 있거든요."

"아버님 말씀으로는 화학기사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 방랑의 기사. 전 이 역할이 마음에 들어요. 오늘 밤, 데이트 약속을 하는 게 아닌데. 두 분의..."

"만약에 네 약혼이 있었다고 하면, 아마 나도 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프랜시스가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맥스는 아버지께 말했다.

"축하드려요, 아버지. 신부 선택에는 제가 할말이 없군요. 저로서는 이분 이상의 약혼자를 선택할 자신이 없네요."

", 과찬이세요."

캐더린은 잔을 비우고 맥스를 향해 들어보였다.

"나가죠, 프랜시스."

"달링, 아주 매력적이군. 이 고장에서 으뜸가는 호텔에 가도 잘 어울리겠소. 특히 오늘밤은 당신 생일 축하는 하는 거니까. 맥스, 캐더린에게 코드를 입혀 드리지 않겠니?"

캐더린은 맥스가 펼쳐든 코트에 플을 끼웠다. 맥스는 작별 인사로 내민 손을 잡고는 좀처럼 풀어 주질 않았다.

"물론 또 만나 뵐 수 있겠죠? 새 어머니, 약속이에요."

 

부드러운 융단에 발이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멋진 조명. 캐더린은 콘티넨탈 호텔의 호화로운 분위기에 황홀해졌다. 예약석은 식당의 거의 한가운데였다.

요리를 정하고 프랜시스가 주문을 마치자, 캐더린은 조심조심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어딘가에 존과 제프가 있을 것이다. 가까이의 식당에는 없었다. 캐더린은 점차 대답하게 시선을 돌리다가 딱 멈췄다. 두 사람은 저편 끝쪽의 식탁에 앉아서 캐더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프가 한 손을 들었지만 존은 이쪽의 두 사람을 노려보더니 곧 외면했다.

요리가 운반되어 올 무렵 캐더린은 즐겁게 약혼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프랜시스는 누가 보아도 젊은 약혼자의 매력에 녹아떨어진 듯했다. 캐더린의 아름다운 용모와 지성과, 특히 기꺼이 자기 아내가 되겠다고 동의한 일이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당신이 싫어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프랜시스. 제가 학생들의 연극에 나가기로 승낙했거든요. 학생 때 연극부에 있었고, 연극을 여간 좋아한 게 아니어서."

"물론 반대할 리가 없어요, 캐더린. 무대 위의 당신을 보는 것도 좋으니까. 중요한 역이오?"

"히로인이에요. 하지만 더 재미있는 일이 있어요. 학생들이 절더러 제 상대역을 지명해 달라고 조르는 거예요. 약혼자는 누구냐고 캐묻더라구요. 그분께 주역을 부탁해 달라는 거예요."

프랜시스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웃어대더니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게 주역을 맡아 달라구? 그래 당신은 뭐랬소?"

"주역은 너희들이 찾아내라고 했죠. 왜냐하면 전 마땅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거든요."

프랜시스는 또 웃었다. 학생의 연극에서 주역을 맡을 학장. 그는 드디어 주변의 시선을 모을 정도로 기분이 썩 좋았다.

"좋아, 아주 멋진 아이디어가 생각났소. 맥스는 연극에 미친 아마추어 배우요. 그 아이 같으면 맡지 않을까? 특히 히로인을 맡은 여자배우가 누구인가를 알면 말이오."

캐더린은 약혼자의 제안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맥스 같으면 학생들이 구상하고 있는 주연 남우에 안성맞춤일 것이다. 키가 크고, 핸섬하고, 그리고 명랑하니까.

"당신이 한번 부탁해 보시겠어요? 맥스에게서 전화로라도 확답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물론이지. 그리고 얘기가 나오ㅆ으니 하는 말인데, 크레스웰에게서 언제든지 집 구경을 와도 좋다고 전화가 왔었소."

"어머, 수요일 아침에는 닥터 라이트가 교육학부에 있을 거예요. 같은 방향이니 데리고 가 달랠 수 있겠어요. 물론 당신이 승낙하신다면요."

"물론이지. 내 차를 쓰면 될 거요. 닥터 라이트에게 기름 값을 부담시킬 순 없으니. 또 하나 닥터 라이트에게 부탁이 있는데. 학부장 지명을 받았을 때, 이 학기 말 무렵에 더비셔 학회에 출석할 예정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가 그 쪽 조직위원의 한 사람인 모양이더군."

"저는 아직 듣지 못했는데요."

"곧 얘기할 거요. 학회 주제에는 나도 몹시 흥미를 가지고 있소. 그래서 말이지, 초대장을 나에게도 보내도록 부탁을 해주지 않겠소? 그리고 만일 나와 동행할 마음이 있다면 당신에게도 한 장 부탁해 보도록 해요."

"하지만...그런 학회가 저와 무슨 관계가..."

프랜시스가 가볍게 캐더린의 손을 두드렸다.

"내가 당신이 참석해 줄 것을 바라고 잇는 거요. 당신에게는 기분 전화도 될 거고. 나는 기쁨이 곱절로 더할 테니까. 당신은 옵저버로 가도 되고, 그게 무리라면 그의 비서로서도 명분도 있소."

프랜시스는 캐더린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주겠지? 나를 위해서 말이오. 그렇게 해주면 정말 기쁘겠소."

당신이 부탁하세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 같으면 나를 방패로 내세울 만큼 존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지 않아요, 라고.

"한번 해보죠. 잘 될지는 모르지만..."

 

다음 날 오후, 캐더린은 눈물을 머금고 눈으로 서류를 살피고 있는 존의 옆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제프에게서 들었지만, 존은 캐더린이 약혼자를 꼬셔 가지고 콘티넨탈 호텔에 와서 일부러 즐거운 장면을 보여 준 것으로 믿고 있는 모양이다.

"몹시 화를 내더라구."

존의 넓은 이마, 완고한 턱. 예전에는 사랑을 주고받을 때 언제나 손가락으로 존의 얼굴선을 매만지곤 했었다. 캐더린은 양손을 쥐고 자꾸만 생각이 떠오르고 있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몹시 화를 내더라구.

전화 벨이 울렸다. 존은 성난 것처럼 혀를 차며 수화기를 들었다.

", 미스 스웰이요? 누구시죠?....맥스라는 사람에게서 온 전화요."

"내 방에 가서 받을까요?"

"아니, 여기서도 괜찮소. 남자친구와 실컷 얘기 나누시오. 내 눈치 보지 말고."

"안녕, 맥스. 지금 좀 바쁜데..."

"그 대사는 나중에 써먹으라니까."

존이 안절부절 못하고 실내를 왔다 갔다 하며 소리를 죽여 말했다. 그와는 반대로 맥스의 소리는 캐더린의 귀에 기분 좋게 들렸다. 학생들의 연극에 대해서였다.

"일하느라 바쁘신 어머니, 저라면 그 배역에 잘 어울리지 않을까요? 학생들이 바라고 있는 조건에는 전부 충족될 거고, 그 이상의 것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해요. 하하. 좀 겸손했는지 모르겠군요."

캐더린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정도라면 효과 쪽도 도와줄 수 있겠네요. 나팔을 불면 어때요? 히로인은 누구냐구요? 나예요. 학생들은 키스신이 있다고 겁을 주더군요. 맥스는 두렵지 않아요?"

"두렵냐구요? 일이 이렇게 됐으니 전 필사적으로 상대역을 맡아야겠네요. 내일 낮에 상의해요. 대학으로 찾아 갈게요. 점심시간은 언제에요?...알았어요. 열두시 반 정각에. 어디 멋진데서 점심 식사를 하자구요. 멋진데 알고 있어요?"

도중에 방에서 나가버린 존이, 꽝하고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젠장, 아직도야?"

"...콘티넨탈 호텔이라면 맥스의 용돈으로는 무리겠죠?"

"멋있는 어머니여. 내일은 제 생일이라구요. 꼭 콘티넨탈이라야해요. 그럼 내일 뵙죠."

맥스는 전화를 끊었다. 캐더린은 존에게 사과했다. 이것으로 오늘이 세 번째다.

"죄송합니다."

"제길, 하루 종일 사과만 하는군. 귀에 딱지 앉겠어."

이번에는 내선의 벨이 울렸다.

"라이트입니다. , 아네트. ..., 가급적 빨리 가겠소. 그래요. 오늘 밤은 외식을 합시다. 내 호텔을 어떻소? 그럼, 여덟시에 저녁 식사를 돕기로 하죠. 마중 가겠소."

 

캐더린은 강의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열심히 들여다보고는, 살짝 루즈를 칠했다. 맥스가 정장을 해달라고 일부러 부탁했으니,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방에 돌아와 잠시 있으니,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너무 아름다우세요. 덕분에 제 코가 높아지겠는 데요."

새로 맞춘 엷은 파랑색 슈트를 입은 캐더린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고 맥스가 말했다.

"맥스도 여간 멋있는 게 아닌데요."

캐더린도 맥스의 양복에 꽂은 흰 꽃에 손을 가볍게 대며 말했다. 그러자 맥스는 뒤에 숨겨둔 감미로운 향기의 조그만 꽃다발을 내밀었다.

"어머, 예뻐라."

"핀 같은 거 없어요? 꽃아 드리고 싶어요."

캐더린이 핀을 찾아내자, 맥스는 그 꽃을 캐더린의 상의에 꽂았다.

"식사하러 나가기 전에 미스 스웰...."

등 뒤에서 말을 걸어온 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맥스가 꽃을 아직 다 꽂지 않았기 때문에 캐더린은 돌아볼 수도 없었다.

", 닥터 라이트."

"아무것도 아니야. 손님이신 모양이군. 나중에 얘기합시다."

", 됐어요."

맥스는 두세 걸음 물러서서 결과를 확인했다.

"아름다운 꽃은 아름다운 여인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 맥스... 이 분은 닥터 라이트에요. 이 사람은 제 약혼자의 아드님인 맥스 라트랜드에요."

존은 가볍게 끄덕였다. 맥스는 정중한 어조로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하고는 이내 등을 돌리고 말았다.

두 남자는 한 눈에 서로 적의를 갖게 된 모양이다. 이상하다고 캐더린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초면이 아닌 것 같은데...'

", 캐더린, 다른 사람 앞에서 실례일지 모르지만,"

캑스는 애매하게 존이 서있는 방향 을 턱으로 가리켰다.

"점심때는 내 생일 축하이기도 하니 특별히 점심 휴계 시간을 연장해 줄 수 없을까요? , 아버지한테서는 허락을 받았는데요."

캐더린의 존의 눈을 정면으로 보지 못했다.

"그렇게 해도 좋을까요? 닥터 라이트?"

"얼마만큼의 시간인지 물어봐도 괜찮겠소?"

", 30분 정도요?"

맥스는 존에 대해서가 아니라 캐더린을 향해서 말했다.

"그 정도라면 괜찮소."

"아뭏든 당신에게 부탁한 건 다만 형식에 불과할 뿐인 걸요."

맥스의 대꾸는 무뚝뚝했다.

", 두 양반 다 몹시 정중들 하시군."

존은 조롱하듯 말했다.

"그럼, 실례. 오후에는 회의가 있어서 그 전에 정리를 해둘 일이 있거든."

복도로 나온 순간 맥스는 폭발하고 말았다.

"저 괴물 밑에서 사무를 보고 있는 겁니까? 콧대를 한 대 치고 싶어 근질근질 했다구요. 왜 저따위 말버릇을 쓰게 내버려 두는 거죠? 알고 나서 얼마쯤 돼요? 불과 10일인데. 까불지 말라고 하세요."

"...이미 익숙해진걸요."

캐더린은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맥스가 화제를 바꿔 주기를 바라면서.

"미스 스웰. 잠깐 기다려요."

말을 건네 온 사람은 디비드 힉슬레이였다.

"상대역은 찾아내셨나요?"

"물론. 소개하죠. 이 분은 맥스 라이트랜드씨. 학장님의 아드님이시고, 아마츄어 배우 경험이 풍부...."

"맡아주시는 거예요? 두 분이시라면 우리 연극에 잘 어울릴 걸요. 지금 같이."

학생들은 저마다 찬성의 의견을 떠들어댔다. 이윽고 여학생 하나가 조심조심 캐더린에게 물었다.

"두 분께선.....이분이 당신의...?"

"아니요, 약혼자는 아니에요."

캐더린은 맥스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뭐라고 할까?"

맥스는 캐더린의 어깨를 끌어당기고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다만, 이렇게 말해 두죠. 우린 지극히 친한 친구 사이라고. , 이걸로 너희들 화제거리가 하나 더 늘었겠지?"

모두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때 찬물을 끼얹듯 불쾌한 소리가 등 뒤에서 날아왔다.

"실례. 잠깐 지나가게 해 주시겠소? 바빠서 말야."

존이었다.

 

5.

캐더린은 프랜시스의 차안에서 존이 현관의 도어를 거칠게 열고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존은 차 앞좌석에 앉아 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지간하군. 자동차 운전쯤은 배워두지 뭘 한 거야."

난폭하게 차를 출발시키고 존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캐더린은 이것도 아네트의 영향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담배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존이었다. 어제 이것에 대해 물었을 때 존의 대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물론 담배쯤은 피우지. 그 전에 당신과 헤어진 뒤 피우다 곧 그만 두었지만, 또 시작했어. 그런데...당신이 상관할 일은 아닐 텐데?"

시내의 반대 쪽 변두리에 있는 교육학부에 이르자, 존은 서류가방을 들고 캐더린에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차에서 내렸다.

혼자 차안에 버려진 채 캐더린은 힘없이 처음 존을 만났을 때의 생각을 떠올렸다. 달콤한 향수가 캐더린을 사로잡았다.

 

"오늘 밤 집에 오지 않을래, 캐스? 사촌누이 결혼식에 입을 신부 측 들러리 드레스를 보여 줄게."

변호사 사무실 동료인 머젤리 라이트가 말을 건넸다. 머젤리는 어머니를 설득해서 옷을 갈아입고 자기 방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다음은 캐더린이 입어 볼 차례였다.

"너무해. 나보다 더 잘 어울리잖아? 엄마한테 네가 얼마나 멋있는지 보여주자구."

"아주머니, 좀 봐주세요. 저 모델 같지 않아요?"

캐더린은 응접실을 무대로 간주하고 득의만만해서 포즈를 취하며 왔다 갔다 했다.

밖에 키가 크고 까만 눈을 가진 한 청년이 나타나, 실내를 살피더니 놀라서 휘둥그레졌다.

"캐더린, 우리 오빠 존이야. 옥스퍼드 대학을 갓 나온 이학사지. 현재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중이야. 지금은 여자 친구가 없다구~."

"안녕, ."

"안녕, 캐더린."

둘은 서로를 바라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는 걸 느꼈다. 단지 그뿐인 단순한 만남. 이튿날부터 데이트를 계속한 두 사람은 그 주 안에 약혼을 했다.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차 옆에서 들려오자 캐더린은 눈을 떴다. 존은 여전히 기분이 나빠 있었다.

"당신이 가고 싶은 곳엔 어떻게 가는 거요? 개발 지구는 전혀 모른단 말이야."

캐더린은 프랜시스가 빌려 준 지도에 의지하여 행선지를 가르쳐 주었다. 목적지인 집이 있는 근방은 마치 일요일의 시내처럼 냉랭한 공기에 싸여 있었다. 건축 중인 건물들의 기둥이 석재가 흩어져 있는 땅 위에 솟아 있었고, 밑부분만 칠한 벽은 황폐한 수도원 같았다. 정확히 구획된 흙투성이의 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같이 가시겠어요?"

존이 차를 인도 쪽에 댔을 때 캐더린은 주저하면서 물었다.

"뭐라구?"

존은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이 반문했다.

"이혼한 제 아내가 다른 남편과 살겠다는 집엘 무엇 때문에 내가 구경하러 가야 한단 말이야? 정말 웃기는군. 당신은 도대체가 무슨 심보가 그래?"

존은 뒷좌석에 손을 뻗쳐 가방을 거칠게 잡아당기자 서류뭉치를 꺼냈다.

"빨리 끝내 주길 바라오. 온종일을 당신과 보내고 싶진 않으니까."

캐더린은 자갈투성이의 작은 길을 지나 현관 앞에 멈췄다. 집은 아직 미완성인 상태로 완성된 뒤의 모양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응접실 같은 부분은 식당과 구별되지 않았고 부엌이라고 생각되는 공간은 또 너무 비좁았다.

캐더린은 계단-이라기보다는 위태로운 사다리를 찾아내고는 어쨌든 올라가 보려고 했다. 그런데 다 올라가 보니 이층 바닥은 아직 만들지도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아직 칠하지 않은 벽에 손을 뻗쳐 균형을 잡으며 한 계단 한 계단 조심스럽게 사다리를 내려왔다.

마침 맨 아래 칸에 이르려고 한 때였다. 한 쪽 다리가 석재더미에 닿자, 벽돌이 무너져 내리며 발목에 부딪쳐 심한 통증을 느꼈다. 너무나 고통이 심해 몸이 절로 비틀리며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억지로 참고 다리를 절면서 현관에까지 이르러 캐더린은 호소하듯 존의 이름을 외쳤다.

"!"

존이 요동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번에는 더 큰 소리로 외쳤다.

"?!"

그래서 상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일부러 못들은 척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닥터 라이트!"

"무슨 일이야?"

존이 냉정한 말투로 보아 벌써 들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안해요, 나 발목을 다쳤어요."

존은 억지로 차에서 내려, 현관 문설주에 몸을 부지하고 서 있는 캐더린에게 접근해 왔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요?"

캐더린은 존의 태도에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나를 좀 부축해서 아무데나 우선 데려다 주세요. 아마 곧 나아질 거예요."

그러나 존은 우뚝 선 채 의아하다는 듯이 캐더린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벽돌에 다쳤어요. 그래서 옛날에 다쳤던 상처가 더욱 아프다구요. , 어렸을 때 발목 삔 적이 있었거든요."

"정말이야?"

존은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띠었다.

"나는 당신의 십대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그런 얘길 들은 적이 없다구."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어요. 게다가 당신이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었다고는 할 수도 없고, 우리는 서로가 오랫동안 너무 모르고 지냈잖아요."

다른 한쪽 다리에 몸을 지탱하고 있었던 관계로 더욱 지쳐 있었다.

"당신 팔을 좀 빌려 줄 수 없나요?"

"지팡이가 될 만한 걸 찾아오겠어."

존은 캐더린의 부탁을 무시한 채 가버렸다.

"이걸 짚고 차까지 걸어가요."

존은 캐더린의 체중을 지탱할 수 있을 만한 막대기를 내밀며 차갑게 힐끔 보더니 돌아서 가버렸다.

캐더린은 눈을 감고 넘쳐흐를 듯한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이를 악물고 절름거리면서. 그 보기 흉한 꼴을 보고도 도와주기는커녕 눈도 주지 않고 존은 다만 차 뒷문을 열어 놓았을 뿐이었다. 대학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캐더린의 발은 부어있었고 따끔따끔하기 시작했다.

"부축해 주지 않으면 걷지 못하겠다고 그러겠지?"

"그래요."

캐더린은 슬프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존은 그 미소를 오해한 모양으로 만족스러워하는 빛이 눈에 나타났다.

"그게 못된 장난이란 걸 잘 알고 있어. 굳이 말하자면-당신은 정말 능숙한 여배우야."

존은 거칠게 차 문을 닫고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당신 약혼자에게 전해주지. 이건 그 사람이 해결해야 될 문제니까 말이야."

 

이튿날, 캐더린은 코트를 입고 반창고를 붙인 발을 스톨 위에 얹어놓고 신문을 읽으면서 종합병원에 데려다 주기로 되어있는 동생 제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제프가 집으로 데려다 주어 의사의 진단을 받은 뒤, 엑스레이를 찍어보도록 병원에 예약을 해 둔 것이다.

 

현관 열쇠를 여는 소리가 들리자 캐더린은 소리를 질렀다.

"여기야, 제프. 언제나 시간은 정확하구나."

", 언제나지."

신문을 접고 있던 캐더린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 존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 .... 제프인 줄 알았어요."

"실망했나?"

"아니, 그런 뜻이 아니에요. 여기엔 무슨 일로..."

"당신을 병원에 데려다 주려고."

존은 캐더린의 발을 내려다보면서 서 있었다.

"그것도 그렇고. 사과하러 왔어. ...어제의 태도를 용서받으려구. 제프에게 확인해 보았소. 아팠었지?"

", 굉징히.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믿지 않으셨죠."

캐더린은 불가사의하다는 듯이 존을 바라보았다.

"저를 병원에 데리고 가려는 건 일종의 보상인가요?"

"그렇게 말해도 무방하겠지."

존은 어렴풋이 미소를 띠었다.

"아뭏든 어떻게 차에까지 가지?"

캐더린은 스톨에서 발을 내리고 일어서려고 했지만, 조금만 힘을 주어도 극심한 통증이 왔다.

", 당신 팔을 좀 빌려야겠어요. 괜찮겠어요?"

순간 존은 캐더린을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겠는걸."

존은 양팔을 뻗어 캐더린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

"팔을 내 목에 걸라구. 그렇지 않으면 떨어져. 물어뜯진 않을 테니."

그 옛날 잠깐 동안 자기의 남편이었던 사내의 팔에 안기자, 캐더린은 왠지 수줍어졌다. 존은 캐더린을 내려다보았다. 그 숨결이 불그레한 캐더린의 볼에 닿았다.

"놀랐는걸. 몇 해 전으로 후퇴한 것 같군. 이런 때가 있었잖아. 지금도 눈처럼 가볍군."

존이 캐더린의 입술께를 보며 말했다.

"당신 입술 맛도 예전과 같을까?"

캐더린은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다.

", 염려 말아요, 미스 스웰. 둘 사이의 벽을 억지로 부수고 싶진 않아. 딴 사내의 영역을 침범하려고도 하지 않고."

", 빨리 가야해요. 예약이 1115분이에요."

존은 사잇길에 세워 둔 차까지 캐더린을 안고 가서 조심스러운 거동으로 곁자리에 앉혔다. 그런 존의 행동에 감격해서 캐더린은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했다.

대합실의 책상 앞에 앉아 존이 받아온 접수표의 성명란을 앞에 놓고 캐더린은 잠시 주저하고 있었다.

"당신 이름은 라이트야."

놀라면서 캐더린이 쳐다보자, 존은 미간을 좁혔다.

"당신이 결혼 전의 성에 복적하지 않고 있다면 말야."

캐더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라이트로군. 당신 이름은 미세스 캐더린 라이트야."

캐더린은 마음속에 무엇인가 걸리는 것이 있어 역시 주저했다.

"미안해."

존은 적지 않게 안절부절 하며 덧붙였다.

"내 성을 지금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건 냉혹한 법률 탓이지, 내 탓은 아니라구. 어쨌든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당신도 곧 재혼하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오."

접수표를 제출하고 조금 있으니 간호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세스 라이트?"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귀에 익지 않은 이름에 캐더린이 멍청하게 앉아 있자 존이 대신 대꾸했다.

"여깁니다."

존의 부축을 받으면서 엑스레이 촬영실로 갔다.

"남편분이 참 친절하세요."

간호사가 미소를 보냈다. 캐더린은 몰래 존을 훔쳐보았지만, 그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 존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차 안의 캐더린을 안아 올리고는 현관의 열쇠를 열고 거실에 들어가, 긴 의자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당신은 현관을 안고 들어와도 아무 말이 없더군."

존이 캐더린의 눈을 보며 말했다.

"내가 가도 괜찮겠소? 식사는 어떡하지?"

"어떻게 해 볼께요. 약간 절긴 하겠지만 부엌까지는 걸을 수 있겠어요."

"편히 쉬도록, 알겠지? 주말은 어떻게 보낼 예정이오?"

"제프가 있어 줄 거예요. 그리고 헬렌도 와 줄거구. 헬렌 아시죠? 제프의 여자 친구 말예요."

"아니, 아직 만나 보지는 못했어. 그럼 또 봅시다."

", 고마워요."

"천만에, 미스 스웰. 운전기사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뎁쇼. 나중에 청구서 보내겠습니다. 팁 대신에 10% 서비스료를 추가해서 말입니다. ....어쨌든 가야겠소. 점심 약속이 있거든."

당연히 물어서는 안 될 일이란 걸 알면서도 캐더린은 역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상대는 아네튼가요?"

"그렇소, 아네트. 이걸로 당신도 알겠지. 내가 서두는 까닭을."

캐더린은 상처 입은 쓸쓸한 감정이 얼굴에 나타나려는 것을 열심히 숨기며 미소를 지은 채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했다. 존은 어깨를 들먹였다.

"평판 그대로의 행동을 했을 뿐이야. 간호사가 한 말 당신도 들었잖아? 친절한 남편이라구 한 말 말이오. 하지만 10년이나 늦어버렸군."

존은 말을 남기고 돌아서 나가버렸다.

 

토요일 오후, 캐더린이 긴 의자에 앉아 잡지를 읽으려니까 이층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얘기소리, 서로 붙잡고 실랑이하는 소리,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발자국 소리.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하고 캐더린은 제프를 불렀다. 이번에는 현관문 소리가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아마 개 짓는 소린가보다고 생각한 순간, 확실히 날카로운 개 짓는 소리가 들리면서 "!"하고 제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캐더린은 위층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제프, 빨리 내려와!"

"곧 갈게, 누나."

무엇인가로 입이 막혀 있는 듯한 제프의 대꾸가 들린 후 10분쯤 지나서 방 앞의 발자국 소리가 멈췄다.

"그럼, , 나중에."

"곧 돌아올게, 제프. 행운을 빌겠어." 라고 속삭이는 소리. 존이라구? 캐더린은 날카롭게 외쳤다.

"거기서 뭐하니, 제프?"

제프가 문 뒤로 몸을 숨긴 채 말했다.

"부탁이야 캐스. 얘기가 끝날 때까지 신경질 내지 말기로 약속해 달라구."

"내가 왜 신경질을 내니? 아직 아무 소리도 듣지 않았는데."

제프는 곧 달아날 수 있는 자세를 취하며 문 가까이의 의자에 앉았다.

"이층에 빈 방이 있지? 요전에 내가 페인트를 칠한 방말이야. 부엌 말고."

제프는 조심스럽게 캐더린을 응시했다.

"그걸 빌려줬어."

그리고 기침을 하고나서 급히 덧붙였다.

"존에게말야."

"뭐라고?"

"존에게 그 방을 빌려줬다구."

"하지만.... 이 집에 존을 들이다니. 얼마나 얼빠진 짓이니! 어쨌든 공동소유자로 나에게도 권리는 있으니... 난 허락 못하겠어."

"하지만 이미 빌려 줘 버린걸, 누나. 존이 벌써 이사를 왔어, 오늘."

캐더린은 금속성의 쇳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존은 그러지 않을 거야."

제프가 크게 끄덕였다.

"모든 일이 끝났다구? 누나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다리 상처를 이용해서 내가 훼방을 놓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서 말이지?!"

"미안해, 누나."

제프는 어린 동생처럼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누나가 결국 반대할 것 같아서 상의하지 않은 거라구. 존은 방세를 많이 주던데. 내가 요구한 액수보다 훨씬 많이 말이야. 그 편이 서로가 도움이 된다면서 말이야. 존이 맨션을 빌릴 때까지 만이야."

캐더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데 개 짓는 소리는 뭐지?"

", 개를 기르고 있어. 예쁘던데. 금빛의 라브라들이야. 아마 누나도 마음에 들 거야. 누나는 원래 개를 좋아했잖아. 존이 호텔에 묵고 있었을 때는 수렵 본부의 개 우리에 맡겨두었는데, 진작부터 찾아오고 싶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이렇게 됐어."

"너와 존 둘이서 이 엉큼한 음모를 꾸민 게 언제지? 내 생일날 호텔에서 함께 식사했을 때니? 아마 그렇겠지. 나 몰래 한 건 어쨌든 제프, 네 책임이야. 어쨌든 나는 절대 반대야. 존과 한 지붕 아래서 살 수는 없어."

제프가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조용히 해, 그가 왔어."

"알게 뭐야. 나는 남에게 방을 빌려 주고 싶지 않아. 특히 존에겐. 물론 개도."

캐더린은 소리를 낮춘다.

"너도 알잖아, 제프. 가정부인 미세스 크로스비는 개가 있는 집에선 일하지 않는다구. 여기저기 마구 더럽히니까. 분명히 그녀는 그만둘 거야. 그렇게 되면 결국 존이 나가도록 네가 말하게 될 걸."

", 나는 손 들었어요. 좀처럼 누나를 설득할 수가 없어요."

제프는 이층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문을 열어 놓은 채 방을 나가버렸다.

잠시 후에 존이 현관에 나타나 천천히 방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캐더린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순간 캐더린은, 색이 바랜 파란 슬랙스와 낡은 흰 스웨터에 신경이 쓰여 침착성을 잃고 저 날카로운 눈에서 빨리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적군에 대한 정찰도 끝났고, 상대의 잠재능력도 대체로 파악했겠다."

존은 여기서 말을 끊고는 담배를 꺼내 서서히 라이터의 뚜껑을 열고 불을 붙였다.

"최초의 사격을 전개해 볼까."

존은 다시 한번 캐더린을 바라보고 나서 천천히 아까까지 제프가 앉아 있던 의자를 캐더린 곁으로 옮기더니, 옆으로 걸터앉아 한 팔을 의자의 등에 걸쳤다.

"내가 이 집에 세 드는 것을 반대한다면서?"

존의 심문에 캐더린은 겁에 질려, 혼란한 생각을 열심히 정리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저의....저의 첫째 반대 이유는 이 집의 공동소유자로서 제게는 아무런 상의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동의를 할 수 있겠어요? 더욱이 당신에게 빌려준다는데."

"당신은 우리들의 과거 문제에 구애를 받고 있는 모양인데, 그건 아주 옛날 얘기요. 더욱이 아무도 그걸 알고 있지 않소. 우리들 외엔 말이야."

"내 말은, 우리들은 정말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따라서 쾌적하지도 않구요. 중앙난방도 안 된다구요. 게다가 호화로운 대우도 해줄 수 없구요."

"하지만 나는 예전에도 이 집에서 잘 살았었다구."

"그건 사실이지만, 생활상태도 당신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잖아요? 당신의 사회적 지위가 달라졌으니까요."

"그러니까, 나는 그 나름으로 출세했지만, 당신네들은 옛날 그대로라고 말하고 싶다 이거요? 그렇담, 나로선 더욱 당신과 동생 문제를 생각해 줘야 하는 거 아닐까?"

캐더린은 말이 없다.

"내가 옛 친구에 대해서 신의를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어쨌든 나는 제프를 대단히 좋아했었고, 또 지금까지도 좋아하고 있으니까 알아서 해요."

"식사는 어떡하시겠어요?"

캐더린은 다른 이유를 들어 반대하려 했지만 자기 입장이 점점 무너져 내려 금방이라도 굴복할 것 같은 자기 자신이 싫어졌다.

"요리쯤은 내가 할 수 있소. 필요에 따라 지금까지 내가 해 왔으니까."

"당신...당신 세탁물은요?"

"전무 세탁소에 맡기겠소. 그러면 아주 간단하겠지?"

"가구는요? 여기엔 빌려 드릴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어느 정도는 가게에 맡겨 두었소. 지난 몇 해 동안 몇 가지 사들인 게 있어서."

캐더린에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존의 냉혹한 시선에 부딪치자 캐더린은 점차 거역할 힘이 없어졌다. 존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럼 반대 이유는 깨끗이 해결됐겠지?"

"아직이요. 개가 있잖아요?"

". 그렇군? 개를 싫어했던가?"

캐더린은 뭐라 말할까 하고 우물쭈물하다가 거짓말을 했다.

", 아주 싫어해요."

"그거 안됐군."

존은 실눈을 하고 캐더린을 음미하듯 바라보며 담배를 빨았다.

"그거 안됐어. 나는 개를 좋아하거든. 특히 내 개는 말이오. 그 개는 참 좋은 점이 많아. 여자와는 달라서 충실하고, 애정이 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단 말이야. 특히 결코 배신하지 않아서 더욱 좋지."

존은 일어서서 다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절대 당신 생활을 방해하지 않겠소. 맹세해도 좋아. 벌써 호텔에서 나와 짐을 모두 이 집으로 운반했고, 제프와의 계약서에도 서명해 버렸으니까. 최저 1년간, 그 후로는 두 달마다 쌍방의 동의를 얻는다는 요지의 계약이지. 이미 내겐 이 집에 들어와서 살 권리가 있단 말이오. 이제 와서 당신이 뭐라 해도 나를 내쫓을 수 없다구. 그럼 이쯤에서 실례하겠소."

존은 쾅하고 문을 닫고는 나가버렸다. 캐더린은 피곤이 덮쳐 와서 쿠션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 발만 아프지 않다면 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오만한 존의 앞가슴을 두 손으로 마구 두들겨 주고 싶었다.

 

 

6

캐더린의 화가 채 가시기도 전에 현관에 육중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지자, 제프가 달려 나가서 도어를 열었다.

"다알링, 마침 잘 왔어요. 누나가 히스테리야."

헬렌이 캐더린의 방의 도어에서 안을 살피며 말을 건네 왔다.

"캐스, 다리는 어때요?"

"고마워요, 좀 나아졌어. 렌트겐으로 골절상은 없다는 걸 알았으니 이삼 일 뒤엔 좋아진대요."

제프는 헬렌이 건네 준 큰 봉투를 들여다보더니 탄성을 발했다.

"굉장하군, 식료품이야. 우리는 하마터면 굶어 죽을 뻔했다구. 그런데 죤 것도 있나?" 제프는 곁눈으로 캐더린을 살폈다. "헬렌,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죤이 이사 왔어. 침대 같은 거 손보는데 도와주겠지, 다알링?" "물론이예요, 제프. , 오늘은 도와주려고 온 거예요."

제프는 이층을 향해서 말을 건넸다.

", 내 걸 프렌드를 소개하겠어요."

죤은 친절하게 헬렌과 첫 대면의 인사를 마치자, 잡지를 무릎 위에 펼쳐놓은 채 언짢게 돌아보고 있는 캐더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죤은 싱글 벙글했다.

"보아하니, 아직도 문제가 있으신 모양이로군."

캐더린은 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고는, 눈만은 헬렌을 보았다.

"마침 잘 왔어요, 헬렌. 당신도 친구로서 진짜 적과 대적해 주겠죠?"

제프의 손이 헬렌의 허리를 안았다. 헬렌은 그 눈을 응시하며 대꾸했다.

"나는 아내로서 대적해야 하지 않겠어, 제프?"

"다알링, 당신은 상관하지 않아도 돼요."

제프는 헬렌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에게 있어 죤이나 캐더린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오랫동안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던 죤은 심술은 눈을 캐더린에게 돌렸다.

"저 두 마리 귀여운 새를 봐요. 우리가 인생에서 잃어버린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생각하게 하지 않아? 둘이서 저렇게 깊이 사랑하면 어떻게 느껴지는 것일까?"

곧 헬렌이 돌아보았다.

"어머, 지금까지 사랑 같은 것 해 보지 않으셨나요, 닥터 라이트 -- 가 아니라, ?"

그러자 죤은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턱을 어루만졌다.

"글쎄! , 있었지. 벌써 오래 된 얘기지만."

"그래서 어찌 됐어요?"

"- 그러니까 문제의 여성은 말이지, 멋지게 나를 차버린 거지. 지금은 아주 잊어버렸기 때문에 추억조차 하지 않고 있지만." 죤은 곁눈질로 처량하게 앉아 있는 캐더린의 표정을 바라보며 적지 아니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 무렵, 그녀는 너무 어려서 제 마음을 정확히 몰랐던 것 같아." 캐더린이 두 손을 굳게 쥐고 있는 것을 보자 죤은 더욱 재미가 난 듯했다.

"안됐어요." 제프의 팔 안에서 헬렌이 말했다. "사랑이란 진짜로 멋있어요. 두 분 다 언젠가는 시험해 보셔야 할 거예요. 잘 어울릴걸요."

"헬렌, 부탁이야!" 충격을 받은 캐더린의 격한 음성에 헬렌은 제프에게서 몸을 떼고, 당황해 하며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어머, 미안해요, 캐스. 난 프랜시스에 대해서 잊고 있었어요."

제프가 참견을 했다.

"헬렌, 말이 너무 많아. , 이층으로 올라가자구."

제프는 헬렌의 등을 밀치듯 하면서 방에서 데리고 나갔다. 죤은 도어에 기대어, 일부러 걱정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나는 일찌감치 여기서 후퇴해야겠군. 그러잖았다간 이쪽으로 뭐가 날아올 지 알 수 없으니까 말야."

그리고는 도발적으로 싱글벙글하며 나갔다. 혼자 남겨진 캐더린은 무릎위의 잡지에 눈을 주었지만, 건성이었다. 이층에서는 즐거운 웃음소리나 얘기소리와 더불어 가끔 장난을 치고 있는 듯한 개 소리까지 섞여서 들려왔다. 저 모두와 같이 행복하고 싶다 - 다리의 자유를 잃은 채 캐더린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수요일 아침에 캐더린은 현관에서 죤과 만났다. 죤은 양피의 반코트를 입고 손에는 서류 케이스를 들었다. 캐더린은 아침식사의 설겆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르시네요."

"언제나 그렇지." 죤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차에 태워 주지. 채비 마칠 때까지 기다려줄께."

"차로? 아니에요, 염려마세요. 고마워요."

"단번에 거절하시는군. 마치 내가 부도덕한 얘기라도 한 것 같지 않아. 당신 발이 겨우 나아졌으니 기뻐할 줄 알았는데."

"글쎄요.... 하지만 괜찮아요. 나는 버스로 가는 편이 좋아요. 언제나 그랬으니까요. 이제와서 바꿀 필요는 없지 않아요. 게다가... 어쨌든 이상하게 보이지 않겠어요?"

죤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 말 무슨 뜻이지?"

"글쎄, 우리가 매일 같은 차로 출근하게 되면... 아마 소문이 날걸요. 프랜시스도 좋아하지 않을 거구."

죤은 어깨를 들썩해 보였다.

"멋대로 하시지. 앞으로 다신 권유하지 않을 테니까."

 

캐더린이 대학에 도착하니, 질이 책상 위의 우편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질은 캐더린이 쉬고 있는 동안 대신 배치된 것이다.

"당신이 나와 줘서 정말 기뻐요, 캐스. , 나는 인사를 하고 물러서야지. 편지는 이대로 두고, 나머지는 당신에게보다도 죤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지."

질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소리를 낮추었다. "죤은 벌써 나와 있어요. 언제나 일찍 나와 있다니까." 캐더린이 오늘까지의 사무 인계를 받자, 질은 코트와 핸드백을 손에 들었다. 이때 내선의 벨이 울렸다.

"미스 스웰, 설마 커피 타임까지 당신 친구와 쓸데없는 농담을 할 셈은 아니겠지? 당신이 결근한 덕분에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당신 머리에 녹이 슨 것을 떨어버리기 위해서 말해 두지만, 오전 중에 수업이 있소. 그전에 이 서류를 정리해 줘요." 내선의 저편에서 수화기를 찰칵 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시작했어." 질이 속삭인다. "당신은 잘도 견뎌내네요, 캐스. 너무해. 그와의 일은 두번이라면 사양하겠어. 그럼 또 나중에."

캐더린은 노트와 연필을 들고 죤의 방으로 들어갔다.

"앉아요." 죤은 보지도 않는다. "너무 늦은 것 같아. 부르고 나서 시간이 상당히 지났어." "질에게서 오늘까지의 사무를 인계받았습니다, 닥터 라이트."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지 말아요."

, 또 시작했구나! 캐더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죤이 헐레벌떡 오전 수업에 나가자, 캐더린은 몹시 지쳐서 의자에 몸을 내던졌다. 그래도 출근했다는 것을 프랜시스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기분을 가라앉히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프랜시스는 의자에서 일어서자 양손을 벌리며 캐더린을 맞이했다.

"건강한 몸으로 나와 주어서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 다리는 괜찮소?"

"고마워요. 이제 괜찮아요, 프랜시스." 캐더린은 프랜시스의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지금 생각이 났는데, , 아직 집 얘기 하지 않았었죠?"

프랜시스는 만족스럽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당신은 두 번 다시 집 얘기를 하지 않을 거라고 염려했어요. 거기서 재난을 당했으니 말이오."

"어머, 기분이 좋은 집이었는 걸요. 완성되면 말이예요. 하지만 설계도를 한번 봐 두고 싶어서요."

"죠지 크레스웰에게 물어 봅시다. 어딜가면 설계도가 있는지 가르쳐 줄 거요. 그런데 집은 우리에게 어울릴 것 같소?"

캐더린은 프랜시스와 얘기하면서, 동요해서는 안 된다,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감정을 꽉 붙잡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

"이상적이었어요. 뒤뜰에서 보이는 전원 풍경은 특히 멋있었어요...."

 

저녁 식사 뒤에, 캐더린은 흰색과 옅은 파랑의 스트라이프의 스웨터와 흰 슬랙스를 바꿔 입고 소리를 내며 활활 타고 있는 난로 앞에서 뜨개질을 시작했다. 그러나 죤이 없는 이층 방에만 신경이 쓰였다. 도대체 죤은 매일 밤 어딜 나가는 것일까? 아네트의 포로가 되어 벌써부터 붙들려 있는 것일까? 이 고독감은 견딜 수 없었다. 특히 개의 낑낑대는 낮은 소리가 이층에서 들려오기라도 하면 뛰어 올라가서 개의 볼에 키스라도 해 주면서 같이 놀아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현관 열쇠를 여는 소리가 들려와 캐더린은 심장이 멈춰 서는 것 같았다. 제프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제프에게는 이날 밤 야간부의 수업이 있어 아직 끝날 시간이 아니었다. 물론 죤이다. 급하게 계단을 올라가는 발자국 소리에 이어 휘파람 소리, 주인을 맞이하여 흥분하며 짖어대는 개 소리.

이윽고 다시 계단에서 소리가 들려오자 캐더린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도어를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에 조심스럽게 뜨게질 하던 것을 무릎에서 내려놓고 방을 가로질러 도어를 열어 주었다.

"들어가도 되나?" 죤의 눈은 캐더린의 몸 위를 굴러 갔다. 캐더린이 안으로 맞이하기 위해서 두세 걸음 물러서자 죤은 안으로 들어왔다. "그 차림새가 여간 잘 어울리는 게 아닌데. 사내들의 눈을 붙잡으면 절대 놓지 않겠소."

"진짜? 그런 말씀을 하시러 일부러 여기까지 내려오신 건가요?" 캐더린은 생글생글 웃었다. 죤이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일어나는 기분 좋은 흥분을 감추려고.

"당신의 빈정거림은 나에겐 통하지 않아요, 미스 스웰. 앉아도 되겠소?"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죤은 난로 곁의 캐더린을 마주보는 의자에 앉았다. "프랜시스의 풀오버?"

"아니에요, 내 스웨터예요."

"그래? 풀오버는 짤 수 있소?"

". 왜요? 필요해요?"

", 그렇지." 어린 소년이 보채는 듯한 말투다. 캐더린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시다면 아네트에게 부탁해야 하잖아요?"

죤은 사이를 두었다가 대꾸했다.

"이미 부탁했다구. 당연한 거 아니야?"

캐더린은 편물의 코를 셈한 뒤 그것을 아래에 내려놓았다.

"차 가져 올까요?"

부엌으로 가는 캐더린의 뒤를 죤이 따라갔다.

"결혼하려는 마음은 있어요?" 포트에 물을 부으면서 캐더린은 눈가에 미소를 띠고 물었다.

"어쩌면 할 것 같아. 그런데 누구와 결혼할까?" 죤은 식기 선반에 기대어 캐더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알고 있는 여자라면 누가 있나? , 헬렌이 있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벌써 제프가 딸려 있다. 질 뭐라던가 하는 여자도 있구나. 아니, 그녀는 나와 어울리지 않아......"

캐더린은 포트의 물이 끓어 넘치고 있는 것을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군, 당신이 있었군 그래. 그렇지?" 죤이 천천히 다가왔다. 캐더린은 돌아선 채 등 뒤로 죤의 체온을 느끼며, 이윽고 두 어깨에 손이 놓이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우리들은 한번 경험했었지?" 죤이 속삭이는 소리.

어깨 위의 양손이 서서히 위쪽으로 이동하더니, 손가락이 나비처럼 가볍게 목덜미를 애무했다. 죤의 호흡으로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캐더린은 돌아선 채다. 금방이라도 몸을 돌려 죤의 양팔 속에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과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죤의 입술이 캐더린의 귀에 살짝 닿았다.

"그런데 잘 되지 않았단 말이야, 캐스. 잘되질 않았어요."

물론, 아주 잘 되질 않았었지. 캐더린은 엉엉 울고 싶었다. 우리들의 사랑이 격렬했던 것을 죤, 당신은 잊으셨단 말인가요?

"그래요, , 잘 되지 않았어요." 캐더린이 속삭이듯 대꾸하자 죤은 느닷없이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결혼 후보자의 얘기를 하자면 소수의 후보 리스트 중에서는 역시 아네트가 유력할 거요."

그 소리는 평소 때와 같은 어조로 되돌아 가 있었다.

두 사람은 난로 곁에서 차를 마셨다. 죤은 다리를 쭉 뻗고 양손을 머리 위에서 꼬고는 캐더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있으니 어쩐지 옛날 생각이 자꾸 나는군. 이봐요, 당신도 도발적인 행위만 취하지 않으면 정말 얌전하고 평화스러워 보이는군." 캐더린이 대답을 하지 않자 죤은 계속했다. "온 몸이 가시가 돋힌 것 같은 자극적인 아네트와는 딴 판이라니까."

"여긴 뭣하러 오셨죠?" 캐더린은 딱 잘라 말했다. "설마 아네트의 미덕과 악덕을 늘어놓으려고 오신 건 아니겠죠?"

"악덕이라. 내가 썩 좋아하는 말이지. 특히 여성을 논할 때 잘 어울리는 말이라구."

캐더린은 발끈 성을 내며 눈을 들었으나 죤은 싱글벙글이다.

"진지하게 말씀하실 수 없어요?"

다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죤은 뜨개질을 하고 있는 캐더린의 날렵한 손가락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캐더린은 자기 손가락을 보고 있다. 마침내 죤이 입을 열었다.

"낮에 잠깐 얘기해 두었지만 나머지 일말인데, 내일과 금요일의 밤에 해줄 수 없을까?"

"이틀 동안이나?"

"백스톤에서 개최되는 회의를 위한 일이 적잖이 쌓여 있어요." 죤은 손가락 하나하나를 굽혀 헤아리기 시작했다. "조직위원회의 세목을 기록할 것. 편지를 몇 통 쓸 것. 내가 구술한 것을 타이프할 것. 그리고 내 퇴고가 끝나면 다시 한번 타이프를 해 줘야 해요." 죤은 무릎을 내밀었다. "내주도 시간외 근무를 해 주지 않으면 정리가 되지 않을 거요. 해 주겠소?"

죤의 눈에는 호소의 빛이 있었다.

"알았어요. 내주는 화, 수요일이 한가해요. 하지만 월요일에는 연극의 첫 번째 리허설이 있어요."

죤은 가볍게 기침을 한 뒤 덧붙였다.

"돈 얘기를 꺼내는 건 좀 뭣하지만 물론 공짜로 일을 시키진 않아요..."

캐더린의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모욕하지 말아요."

죤이 미간을 좁히며 점잖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설마 사랑의 봉사를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말씀 그대로예요." 캐더린은 뜨게질에 다시 눈을 떨구었다. "더욱이 보상이 없을 짝사랑이에요."

죤은 짧게 호흡을 하고는 캐더린을 살폈다.

"캐스, 나를 봐요."

그러나 캐더린은 여전히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캐더린." 죤이 날카롭게 불렀다.

어쩔 수 없이 캐더린은 얼굴을 들었다. 그 장난스러운 웃는 얼굴에 죤은 노기를 폭발시켰다.

"제기랄!" 죤은 안절부절 하며 방안을 왔다 갔다했다. "지금도 음악을 자주 듣나?"

"시간이 있을 땐."

"레코드플레이어는?"

"있어요. 우리가 예전에 쓰던 거...."

"그 낡은 것 말이지? 아직 쓸 수 있나?"

"물론이죠. 어쨌든 나는 새 것을 살 만한 여유가 없었으니까요."

"이층에 스테레오를 가지고 있지. 언젠가 들으러 와요. 밤에도 상관없어. 아 참, 밤엔 대체로 아네트와 시간을 보내지만."

캐더린은 뜨개질하던 것을 들어 제 몸에 대보고 길이를 재보며 열심히 생각했다. 죤이 자기에게 상처를 주게 되면 나도 보복을 해야지...

"프랜시스가 말했다구요. 결혼하면 최고급의 플레이어를 사 주겠대요. 자기가 음악을 좋아하건 않건 그분은 먼저 내 취미를 생각해 주거든요."

이 분위기를 구제라도 하려는 듯이 제프가 돌아갔다.

", 두 분이 같이 있네요." 분명히 놀란 표정이다. "옛 정을 확인해 보자 이거지." 제프는 두 사람 사이에 서서, 한 사람씩 심문하려는 듯 얼굴을 노려보았다. ", 그렇군. 마치 예전과 같은데."

"그런 말 따위 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실망시켜서 안됐지만."

제프는 한숨을 쉬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제 서서히 실례하는 편이 좋겠군." 죤도 일어서서 도어 쪽으로 갔다.

", 개 이름은 뭐라고 하죠?

"프롭. 그 녀석은 언제나 얌전히 앉아 있지." 죤의 얼굴이 밝아졌다.

"소개해 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그건 안됐군. 그럼... 잘 마셨어요, 미세스 라이트."

죤은 이렇게 말하고 황급히 방에서 나갔다.

 

다음 날, 맨 먼저 죤이 학장에게 불려 갔다. 돌아왔을 때는 커피 타임이 다 돼서다.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죤은 캐더린에게 자기 방으로 오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책상 위에 서류를 내동댕이쳤다.

"일을 시작해야지."

그러나 캐더린이 곁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죤은 한 통씩 편지를 들쳐보고는 다시 팽개칠 뿐이었다. 분명히 글씨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돌연 죤은 일어서서 창가로 가서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잠깐 밖을 무심히 내다보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침에 당신 약혼자와 의논이라고 할 만한 일을 하고 왔소. 장시간에 걸쳐 실로 예의바르게 말이야."

캐더린의 심장은 갑자기 멈춰서는 듯했다. 마치 제어장치가 고장 난 엘리베이터처럼. 그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두 사람의 과거의 업적이나 미래의 전망이 각각 다를 테니까. 그뿐 아니라 나이만을 보아도 다른 세대에 속하고 있는 것이며, 두 사람은 서로 상대에게 양보하는 성격이 아니므로 논점(論點)이 무엇이건 충돌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프랜시스의 마음속에는 마치 과일의 심지와 같이 견고한 핵이 있다는 것을 캐더린도 잘 알고 있었다. 한편 죤도 중심에 바위와 같이 단단한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파장(波長)이 전혀 맞지 않았어요. 학장의 태도 전반에 걸쳐, 또 기본적으로도 나와는 맞지 않아. 열에 아홉가지 의견이 합치될 수는 없겠지. 앞으로 어떻게 같이 일을 해 나갈 수 있을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다니까."

죤은 캐더린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당신 결혼 상대가 어떤 사나인지 정직하게 보아서 당신은 알고 있는 거요? 결혼의 동기는 도대체 뭐요? 그 사나이를 정말 사랑하고 있는 거요? 그렇잖으면 그 사나이가 지니고 있는 세속적인 지위나 재산이 필요했던 거요? 아니면, 빅토리아 왕조의 요새와 같은 집을 갖고 싶기 때문이오? 불쌍하도다! 그 젊음을 가지고 아버지쯤 되는 노인에게 앞으로의 전 인생을 바치다니!"

캐더린은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마음 속 깊이 사랑하고 있는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심문하듯이 하는 죤의 질문은 어쩔 수 없이 캐더린의 눈을 감아버릴 수밖에 없게 하였다. 마치 화산의 분화구 앞에서처럼 마음 저 밑바닥에서 간헐적으로 솟아오르는 의문이나 공포에 대해서 그녀는 요동도 못하고 서있는 실정이었다. 캐더린의 침묵에, 죤은 퍼뜩 자기가 지껄인 말을 의식하고는 재빨리 사과했다.

"이런 말은 앞으로 결코 하지 않겠소. 당신의 인생은 당신 자신이 결정한 거니까. 당신도 이제는 자기 마음쯤은 다 알 만한 어엿한 어른이니까."

그래도 캐더린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양손을 머리 뒤에 꼬고 맥 없이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든지 죤을 위로해 줄 수는 없을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다. 양팔로 꽉 껴안고 키스를 퍼부으며.

 

7

캐더린과 죤은 커피를 앞에 놓고 학생식당의 긴 식탁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주 좋은 곳인데."

죤은 처음으로 들어온 학생식당을 둘러보면서 가구나 커튼의 화려한 빛깔이나 벽에 걸린 현대품의 그림을 칭찬하고 있었다. 캐더린이 다섯 시에 정상 근무를 마치고, 근무 외 일을 시작하기 전에 차를 마시러 가려고 하는데 죤도 따라온 것이다. 지금 열려 있는 곳은 셀프서비스의 학생식당밖엔 없었다.

학생들이 웃거나 식기 따위를 부딪치며 떠들썩하게 같은 식탁 앞에 앉자, 두 사람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그룹의 한 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헬로우, 미스 스웰. 월요일의 리허설은 안심해도 좋겠죠? 주역의 남성도 틀림없이 와 주시겠죠?" 데이비드였다.

"물론이죠, 데이비드. 주역도 염려 말아요. 내가 전화만 해 주면 어디든지 가겠대요."

"어머! 그 남자, 당신 뜻대로 움직이는 사람 같군요." 여학생인 수지가 참견했다. "나도 그런 보이프렌드가 있었으면!"

"이봐, 잠깐 기다려, . 미스 스웰의 진짜 애인은 곁에 앉아 있는 분인지도 모르잖아. ... 선생님이 피앙새이신가요?"

"내가?" 죤은 크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그녀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구."

"그러구 보니 실망하신 것 같은 어조시네요." 데이비드가 농담을 했다. "미스 스웰은 그 남성의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구요. 그렇죠, 미스 스웰?"

"글쎄, 난 언제나 남을 궁금하게 하는 것이 취미거든요." 죤이 일부러 어딘지 수상쩍다는 눈으로 보자, 캐더린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식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계단을 향하는 모퉁이를 돌아오는 순간, 죤이 금방 나타난 아네트에 부딪치자 당황해 하며 양팔을 아네트의 허리에 감았다.

", , 달링. 온통 당신을 찾아다녔다구요."

"당신이? 난 여기 있잖소."

"오늘 밤 우리 집에 오시는 거죠?"

"물론이지. 하지만 오늘 밤은 좀 늦어지겠어. 내 방에 와서 기다려주겠소?"

죤은 아네트의 어깨를 안고, 아네트는 죤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두 남녀는 정답게 복도를 걸어갔다. 매일 저녁마다 식사를 준비하다니, 영리한 아네트야. 눈독을 들인 남자를 함락시키는 수법은 뭣이든 알고 있다니까. 캐더린은 어깨를 치켜 올리며 두 사람 앞을 달리 듯이 가버렸다. 죤은 캐더린의 성난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그 모습이 사라지자 상대편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캐더린은 울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타이프를 치고 있었다. 곁방에서는 죤과 아네트의 즐거운 듯한 얘기소리며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신경을 쓰면서 일하고 있는가를 알아줘야한다는 둥 죤의 큰 음성이 도어 안에서 들려와 캐더린의 마음은 벌써부터 갈기갈기 찢기어져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부터 곁방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이다. 두 사람은 다른 도어로 해서 돌아간 모양이다 캐더린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칸막이의 도어가 열렸다. 죤은 곧장 서류 캐비닛 앞으로 가더니 점잖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걸프렌드가 말이야. 내 비서가 나에게 반했다지 않겠어.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거야. 그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나에게 묻는 거예요? 내가 당신에게 반했다구요? 천만에. 나 당신보다 더 큰 물고기를 낚았는데 왜 그러실까? 그렇지 않아요?"

캐더린은 재빨리 응수하고는 죤에게 다이아반지를 자랑해 보이고 그것을 자못 귀엽다는 듯이 제 볼에 가지고 갔다.

죤의 방에서는 그 후 아무 소리가 없다. 일곱 시 반까지 잔무를 처리하던 캐더린은 오늘은 이쯤 마치기로 하고 갱의실(更衣室)로 갔다. 돌아가는 복도에서 프랜시스와 만났다.

"달링, 아직도 안 갔소?" 캐더린의 팔을 잡으며 프랜시스가 묻는다.

캐더린의 팔을 잡으며 프랜시스가 물었다.

"아까 커피는 마셨어요. 집에 가서 먹겠어요."

캐더린이 자기 방의 도어를 열자, 벌써 돌아갔으리라고 믿었던 죤이 책상 곁에 서서 타이핑을 마친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죤은 두 사람을 보자, 곧 제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학장이 말을 건넨다.

"닥터 라이트, 잠깐 기다려 주시겠소?"

죤은 그 자리에 섰다.

"달링, 나와 같이 우리 집에 가서 저녁식사하면 어떻겠소? 맥스도 있을 거고.... 게다가 집 설계도에 대해 할 말도 있고."

"글쎄요. 오늘 밤은 별로 딴 용무도 없으니 그렇게 하겠어요, 프랜시스."

"이것으로 얘기는 끝났고, 당신이 채비를 하는 동안 나는 닥터 라이트와 잠깐 할 말이 있어요." 프랜시스는 죤에게로 돌아섰다. "내 약혼자가 부탁했는지, 어떤지...."

".....회의 입장권 말씀이군요. 분명히 들었습니다. 좌석을 둘 잡아두었습니다."

"그거 고맙소이다. 물론 입장료는 내가 지불하겠소."

"그 점은 염려하실 게 없습니다. 미스터 라트랜드."

"그러나 그럴 수는 없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입장권 두 장쯤이니까요. 호텔예약도 자동적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건 맡아 주셔도 됩니다. 그편이 좋으시다면....."

"물론이죠. 여러 가지 수고를 끼쳤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죤의 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한 얘기 말인데, 당신 제안을 검토하여 일단 교육학부에 얘기를 해 두었는데, 당신의 아이디어의 몇 가지는 받아들여질 것 같아요."

캐더린은 날 듯이 기뻤다. 프랜시스는 죤의 아이디어를 몽땅 무시하진 않았군. 아마 지금, 죤은 여간 기뻐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니 캐더린은 우스우리만큼 행복감에 저어 오는 것이었다.

 

이날 밤 캐더린은 맥스의 배웅으로 집에 돌아왔다. 맥스가 배웅하는 것을 프랜시스는 처음에는 내키지 않은 모양이었으나, 캐더린은 동생과 그 약혼자를 소개하기 위해서 맥스더러 잠깐 들렀다 가라고 말했다.

"알고 있었는지 몰라요, 맥스? 우리 집엔 세든 분이 있었어요."

맥스는 입구 계단에서 멈춰 섰다.

"아니요, 누구죠?"

"그는 제프의 친구인데.... ... 닥터 라이트예요."

"뭐라구? 그 괴물이? 어떤 바람이 불었기에 그 자식 뻔뻔스럽게 여길 정한 거죠?"

"제프가 권한 거예요. 나는 전혀 몰랐지 뭐예요."

"비겁한 자식! 그건 그렇다 치고, 당신은 그걸 어떻게 참고 있어요? 낮에도 들볶이고, 또 집에 돌아오면....."

"나는... 솔직히 말해서 별로 얼굴을 대하지 않거든요. 어쨌든 그 분은 매일 밤 나가니까요. 오늘 밤도 아직일 거예요."

제프의 거실에서 서로 인사 소개가 끝나자 제프가 의자에 앉고, 그 무릎에 기대듯이 헬렌이 앉았다. 캐더린과 맥스는 나란히 긴 의자에 앉았다. 헬렌이 처음부터 솔직하게 물었다.

"결혼하셨어요? 미스터 라트랜드?"

"맥스란 이름이예요, 헬렌. 결혼? 아직 프로포즈조차 한 적이 없어요. 언젠가는 나도 결혼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보다시피 이렇게 혼자 살고 있죠. 댁과 같은 여자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내 약혼자에겐 눈독들이지 말아요." 제프의 항의에 모두 웃어버렸다.

"댁이시죠, 맥스? 이번 학생 연극에 출연한다는 사람말예요. 키가 크고 금발에다 핸섬하다고 직원실에까지 소문났어요. 벌써 여자들 간에 떠들썩하답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나도 기쁜데요. 내 선전담당이 열심히 모두에게 정확히 정보를 전해주고 있는 모양이죠! 미래의 미세스 프랜시스 라트랜드는, 나를 위해 뭘 해 주고 있을까요?"

"그건, 맥스. 학생들에게 나팔을 불어뒀어요. 모두들 만나고 싶어 해요."

"그것 참 멋있는 얘긴데!"

맥스는 캐더린에게 가까이 가서 그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내 미래의 어머님께서 미래의 아들 자랑을 해 주시다니, 고마워요."

또 모두가 소리를 내며 웃는 동안 아무도 도어가 열리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적의를 노골적으로 표시하며 죤이 서 있었다. 죤은 캐더린과 맥스에게 증오의 시선을 보내며, 맥스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의자 등받이에서 캐더린의 어깨에 얹고, 다른 한 손은 캐더린을 지키려는 것인지 아니면 도발적인 몸짓이었는지, 캐더린은 잘 모른다.

두 사나이는 손과 눈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 사내는 냉랭한 조롱이 담겨져 있고, 다른 한 남자는 싸울 자세이다.

말이 없는 조용한 결투는 헬렌조차도 눈치를 채고 있어, 의식적으로 밝은 어조로 물었다.

"오늘 밤은 즐거웠어요, ?"

"멋있었어, 헬렌. 아네트는 참으로 멋이 있었고, 요리도 여간 잘 하는 게 아니었거든."

"나에게 무슨 용무라도?" 제프가 헬렌을 옆으로 밀어 냈다.

"개에게 저녁을 주지 않았나 싶어서. 모두들 놀다가 말이야."

"염려 말아요, ." 헬렌이 대꾸했다. "내가 주었어요."

"고마워요. 그럼, 안녕."

죤은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나갔다.

도어가 닫힌 순간, 맥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푸우! 하고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나 같은 어르신네를 마치 똘만이처럼 겁을 주는데. 저런 눈초리는 아무데서도 볼 수 없다고. 빨리 여기서 나가요, 캐더린. 빨리, 어머니."

맥스는 캐더린의 손을 잡고 나가면서 도어께에서 속삭였다.

"잠깐 밖을 내다 봐 줘요. 활주로엔 장애물이 없는지."

모두가 또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맥스와 손을 잡은 채, 캐더린이 앞에 서서 계단을 내려가 현관에 이르렀을 때 위쪽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맥스가 걱정스럽게 위를 쳐다보았다.

"캐더린, 작별인사는 밖에 나가서 할게요. 여긴 사람들이 너무 많아."

맥스는 캐더린을 어둠 속으로 데리고 나갔다. 10분쯤 뒤에 캐더린이 돌아오자, 죤이 계단에 서 있었다. "잠깐!"

캐더린은 돌연 몸을 숨기고 싶은 충동에 쫓기며 침실로 서둘러 달아나려고 했다.

"기다리라고 했어."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캐더린이 무의식중에 멈춰 서자, 죤은 서서히 계단을 내려왔다. 얼어붙은 듯한 죤의 시선에 부딪치자, 맥스의 말 그대로라고 캐더린은 생각했다. 죤은 계단의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캐더린을 내려다보았다.

"마침 좋은 기회라서 말해 두지만, 당신이 결혼할 상대는 아버지 쪽이지 그 아들 쪽이 아닐 것이며, 더욱이 돼먹지 못한 사내 녀석과 연애 따위를 한다는 건 썩 바보스러운 짓이란 것을 지금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는데." 죤의 표정이 더욱 냉랭해졌다. "한 사나이와 결혼하는 한편, 딴 사내를 또 꼬셔보는 것은 너무 비겁해. 스스로 경험한 바 있으니 잘 알거요. 잊어버렸다는 건 천만부당이야. 좌우간 몇 해 동안에 당신의 도덕관이 그처럼 팍 썩어버렸나?"

뱀처럼 집요하게 죤의 입에서 내뱉아진 독설은 너무 심한 것 같다.

캐더린의 침묵을 자기 죄를 인정한 것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하고 죤은 불쾌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지적한 것이 맞아든 모양이군. 나는 당신과 결혼한 경험이 있어 그 고통스러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이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 - 캐더린은 침실로 뛰어 들어가서 도어를 쾅 닫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녹이 슨 열쇠를 돌렸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캐더린에게 있어서나 죤에게 있어서도 같은 사무실에서 일한다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직무에 사사로운 일을 개입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캐더린은 약속한 대로 잔무를 처리하고 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부엌의 도어를 여는 순간 식탁 위에서 종이쪽지와 열쇠를 발견했다. 파출부인 미세스 크로스비의 것이었다 - 개는 이층의 부엌에 가둬 두었어요.

캐더린은 단숨에 계단을 올라갔다. 이층의 부엌이라고 하면 죤의 가장 비좁은 방으로, 조그만 환기 장치밖엔 없는 방이다. 캐더린은 죤과의 말다툼 따위는 모두 잊고, 먹을 것이나 마실 것도 없이 비좁은 방에서 몇 시간이나 갇혀 있었을 개밖엔 염두에 없었다.

도어를 여니까 프롭은 테이블 밑에 길게 누운 채 캐더린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꼬리를 약간 흔들더니 캐더린 가까이까지 왔다. 그녀는 몸을 굽혀 살며시 개를 어루만졌다.

"헬로우, 프롭. 지금까지 만난 적은 없지만 난 너를 좋아한단다." 개는 조심조심 접근하여 냄새를 맡았다. 몇번 맡더니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었다.

캐더린이 부산히 우유나 개밥을 찾는 동안 프롭은 참을성 있게 앉아 기다렸다. 프롭이 잔뜩 먹은 뒤, 캐더린은 애완견용의 브러시를 찾아내어 털 손질을 해주었다. 개는 그녀의 손을 핥아대는 둥, 새로운 친구에게 연신 호감이 간다는 신호를 보냈다. 미세스 크로스비가 그만둔 지금 캐더린은 기묘하게도 안심이 되었다. 이 귀염둥이를 이젠 멀리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현관 도어가 열리는 소리에 캐더린은 무의식중에 몸을 움츠렸다. 제프의 방으로 달아날 사이도 없이 성난 죤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내 부엌에서 뭘 하고 있소? 누구에게서 방안을 뒤지라는 허가를 받은 거요?"

캐더린의 심장이 심하게 고동쳤다. 눈은 겁에 질려 용서를 빌고 있었다.

", 방을 뒤지다니. 믿어 줘요, 여기 온 것은 프롭 때문이예요."

"남의 흠을 파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개가 어느 정도 가구나 집을 못 쓰게 만들었는지 조사하러 온 거 아니야?"

"어떻게 말하면 믿어 주겠어요?"

캐더린은 엎드려 비단결처럼 고운 프롭의 털에 얼굴을 묻었다. 마치 미친 사람으로부터 자기 몸을 지키려고 하는 것처럼.

"당신은.. 개를.. 싫어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리둥절한 죤은 캐더린의 거동을 멍청하게 지켜 보았다. "전혀 거짓말이었군!"

", 싫은 척했을 뿐이라고요, . 가정부가 집에 개를 기르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내 방에만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어쩌다가.. 맹세해도 좋아요."

그래도 죤은 믿지 않았다. 캐더린은 손을 들고 말았다.

"미안해요. 두번 다시 당신에게나 당신 개에게나 누를 끼치지 않겠어요."

캐더린은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다시 한번 개에게 볼을 비볐다.

"안녕, 프롭"

 

캐더린이 부엌에서 다리미질을 하고 있는데, 도어 밑에서 낑낑거리는 소리와 함께 코를 식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롬이다.

"네 주인은 네가 여기 온 걸 아니? 아마 모르고 있을 텐데."

케더린은 개를 살며시 거실로 끌어들이고 도어를 닫았다. 이틀 전에 그런 사건이 있은 후 프롭을 곁에 둘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죤이 책상에서 일을 하고 있는 동안은 잠시이기는 하지만 개가 어디 갔는지를 모를 것이다. 캐더린이 의자에 앉자 프롭도 그 앞에 단정히 앉아 턱을 캐더린의 무릎에 얹어놓았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얘기를 하면 그때마다 꼬리를 흔들며 대꾸한다. 잠시 후, 프롭은 난로 앞의 깔개 위에 눕더니 잠이 들었다. 캐더린도 그 옆에 누워 책을 읽었다.

이제 프롭을 주인에게 돌려줘야지. 캐더린이 개를 깨우려고 할 때였다. 죤의 외침이 현관에까지 울려왔다.

"개 어딨소?" 뚜벅뚜벅 방안으로 들어온 죤에게 프롭은 머리를 들고 꼬리를 한번 흔들어 보이더니 또 눈을 감았다. 죤은 잠시 동안은 어이가 없어 하는 듯했으나, 마침내 악을 써댔다. "이제 정말 당신은 믿지 않겠어. 그렇잖아? 내 개까지도 훔쳐 왔으니까."

"제 스스로 온 거라구요."

"그렇다 하더라도 왜 이층으로 돌려보내 주려고 하지 않았소?"

제프가 도어에 나타난 것을 알고는 캐더린은 죤의 도전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히 프롭을 돌려보내지는 않았으니까.

"거 봐, 부정하지 못하고 있잖나!"

죤은 마치 승리자나 된 것처럼 말하고는 뚜벅뚜벅 방을 가로질러 걸어와 개의 목띠를 끌어당겼다.

"잘 들어 둬." 가기 싫다고 낑낑거리는 프롭을 타일렀다. "너는 여기 와선 안 돼. 오면 안 되는 거야."

"하지만, ."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누님을 보고 견디다 못하여 제프가 참견했다. "왜 그래, 캐스는 개를 여간 좋아하지 않아요. 싫은 척했을 뿐이야. 왜냐하면...."

"다 알고 있어. 짐승을 싫어하는 가정부 때문이겠지. 그녀 자신의 입으로 들었어"

"그 얘기는 진짜예요. 캐스의 말 그대로야. 개 때문에 가정부가 그만 뒀다구."

죤은 남매의 얼굴을 번갈아 응시하고 있다가 누님 쪽으로 돌아섰다.

"어째서 당신은 그 얘긴 안했지?"

캐더린은 고개를 숙인 채 카펫의 벌레 먹은 자국에 눈을 주고 있었다.

"말할 기회가 없었죠."

"프롭, 이리 와." 죤은 개를 도어 쪽으로 끌고 갔다. "두번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오면 안 돼. 너를 이층에 둘 좋은 방법을 생각해야겠다."

", 모르겠어? 캐스는 개를 좋아한다구. 평소부터 개를 기르고 싶어 했다니까. 다만 우리는 개를 살 돈이 없었을 뿐이야."

죤은 열심히 누님을 옹호하는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눈물로 얼룩진 누님을 보았다. 캐더린은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않아, 될대로 되라는 듯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제프, 쓸데없는 짓이야. 난 예전부터 알고 있었더. 내 전남편과 같이 돌덩이 같은 남자에게 인간적인 감정이나 동정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란 걸 말이야."

죤은 무의식중에 개 목띠에서 손을 놓았다. 프롭은 곧 난로 곁의 깔개 위로 돌아가 앉았다. 죤은 방을 가로질러 도어 쪽으로 갔다.

"캐더린, 당신은 정말 그렇게도 개를 갖고 싶소?"

"무엇 땜에? 나와는 관계없어요."

"저건 당신 거요. 당신이 길러요."

죤은 개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고는 등을 보이며 방에서 나갔다. 캐더린은 당황하여 일어서서 뒤를 쫓았다.

", 그러지 말아요. 당신은 자기 개를 버리지 못해요."

"그 개는 당신 거라니까."

"하지만 죤." 캐더린은 죤의 팔을 붙잡으며 프롭 쪽으로 돌아서게 했다.

"당신이 저 개의 주인이야." 죤은 그 손을 뿌리쳤다.

", 들어 봐요. 그럼 이렇게 해요. 저 개를 둘이서 길러요. 당신과 너와. 내가 ..... 결혼하기 전까지 말이에요."

호소해 오는 캐더린의 눈이 마침내 죤을 움직이게 한 듯했다.

"알았어. 당신이 결혼할 때까지 그렇게 하지."

"진짜죠, ?"

캐더린은 죤의 손을 꼭 쥐었다. 죤은 밀치듯 잠깐 쥐어 주고 나서 계단을 큰 걸음으로 올라갔다.

 

8

이튿날 리허설에 나가기 전에 캐더린은 급하게 몸을 씻었다. 적어도 욕실에 들어 있는 동안만은 느긋하게 시간이 흘렀다. 맥스와 함께 연극을 하리라는 것을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설레었다. 맥스는 멋진 친구요, 멋지게 말을 했다. 특히 죤의 심한 복수 뒤의 맥스의 말은 캐더린에게 자신을 갖게 하였다.

 

옷가지를 챙겨들고 부산하게 제 방으로 돌아왔다. 슬립은 하늘빛을 택했다. 드레스를 욕실의 도어에 걸어두고 온 것이 생각나서 다시 돌아가 보니, 욕실의 도어가 안쪽에서 열렸다. 죤이었다. 위 아래로 캐더린의 몸을 훑어보았다.

"오우, 여간 멋진 스타일이 아니군."

캐더린은 얼굴이 빨개졌다.

"! 일찍 돌아왔네요. 설마 이렇게 빨리 돌아오리라고는...."

"뭘 찾으러 왔소?"

"."

단정한 복장이 아닌 것에 신경이 쓰였다. "잠깐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겠어요? 잊은 물건이 있어서요."

"정말로 기분이 좋은 여자다운 내음을 남겨두었더군. 혼자 즐기고 있었지.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돌아오지 않은 게 유감이야."

캐더린은 상대의 눈에 비친 심술은 웃음을 모른 채했다.

"부탁이에요, . 잠깐 들어가게 해 달라니까요."

죤은 입구의 문설주에 기대어 양팔을 꼬고 캐더린의 당황해 하는 모습을 즐기면서 몸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 겉으로 보기에는 그 동안 당신은 변한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기본적으론 -- , B, W, H의 수치로 본다면 달라지지 않았군. 예전과 같이 몸집은 작지만 여간 매력적인 몸매가 아니야."

"부탁이에요, 들어가게 해 줘요. 드레스가 안에 있다구요."

"도어에 걸려 있는 그거 말이오? 지금 외출하려는 거요?"

", 학생 연극의 첫 리허설이 있어요. 그러니 부탁해요, . 그렇지 않으면 밀어제치고 들어갈까요?"

 

천천히 죤은 몸을 옆으로 비켜섰다. 욕실에 미끄러져 들어갈 때 죤의 옷이 캐더린의 드러난 살갗에 닿았다. 드레스를 내리고 있는 동안 가까이서 유심히 보고 있는 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죤의 옆을 빠져나가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죤의 웃음소리가 뒤쫓아 왔다.

"맥스가 마중온대요.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요."

캐더린이 돌아보며 말하자 갑자기 상대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밝은 빨간색 스포츠카를 타고 맥스가 마중 왔다. 엔진 소리도 높게 어둠 속을 질주하면서 캐더린은 죤에게 이 소리가 들리면 자못 기분이 그만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초의 리허설은 썩 잘한 것은 아니었다. 주역 이외는 아무도 자기 역을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결국 맥스는 연출까지 도와야 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캐더린을 에스코트한 맥스는 잠깐 들렀다 가라는 권유를 거절했다. 잠잘 시간이니 그런 도깨비 같은 자식과는 대면하고 싶지 않단다. 맥스와 즐거운 밤을 지낸 뒤에 죤의 무언의 비난이 담겨진 조롱하는 듯한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죤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캐더린을 제 방으로 맞이했다. 이 갑작스런 변화는 어떤 원인에서일까? 아마 아네트 때문이겠지 하고 캐더린은 생각했다. 여자의 포로 따위는 되지 않는다고 자랑했으면서 아네트에게 사로잡히고 만 것이 아닌가!

죤의 활짝 핀 기분은 하루 종일 지속됐으며, 집으로 돌아갈 때는 자기 차로 가자고 권유할 정도였다.

"왜 이러실까? 매일 밤 비공식의 집에 들르시면서 오늘은 공식적인 자기 집으로 직행하시겠다니."

"아네트가 너무 독점욕을 부린단 말이야. 게다가 잠시 동안 여자를 둥둥 떠 있게 만들어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게임에 유리한 입장이 될 수 있으니까. 이 정도는 나도 그 동안에 배워서 안다고."

차를 마신 뒤에 캐더린은 흰 스웨터와 스랙스로 바꿔 입고 화장을 고치고 머리에 빗질을 했다. 결국 죤의 초대를 받아들여 이층의 그의 방에 레코드를 들러 가기로 한 것이다. 도어를 노크한 순간 프롬이 소란을 떨었다.

죤의 방은 아주 달라져 있었다. 죤이 가지고 온 가구는 어느 것이나 훌륭한 것들뿐이어서 그 전부터 있던 커튼이나 융단은 완전히 퇴색해 보였다. 캐더린은 정직하게 감상을 말했다.

"부럽게 여길 건 없어. 당신도 몇 달 지나면 자기의 새 가정의 실내 장식에 마음대로 솜씨를 보일 수 있을 게 아니오?"

"그럼요."

"썩 기분이 나진 않는 모양 아니야?"

죤은 힐끔 쳐다보고는 무엇인가 물으려 하다 말고 레코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뭘 들어 볼까? 당신이 골라요."

 

캐더린은 죤의 바로 곁에서 데크의 레코드를 살피며 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건 어때요, 브람스의 제1 교향악. 난 그 서곡을 여간 좋아하지 않거든요."

"좋지." 죤은 한동안 캐더린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면서 말을 계속했다. "만약에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해요. 우리들은 이 곡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 줄지어 선 적이 있었지? 그때는 결혼 전이었지만."

"어머,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요. 좌석표를 살 돈이 없어 입석표를 샀었죠."

"이번엔 앉아서 들어요. 그 의자가 가장 편안할 거요. 둘 다 최고로 스테레오 효과가 있는 위치에 둔 거니까."

최초의 화음이 들려오자 캐더린은 눈을 감았다. 스테레오를 듣는 것은 처음으로 웅장하고 관능적인 음향이 캐더린의 온 몸을 기쁨으로 가득 차게 했다. 곡이 끝날 때까지 거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캐더린." 겨우 눈을 뜨니까 죤이 자기 쪽으로 몸을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았다. "당신은 딴 데로 가버린 것 같았소. 잠을 자고 있었나? 아니면 울고 있었소?" 죤은 캐더린의 눈에 반짝이는 것을 본 것이다.

"생각한 대로 눈물이 보이는군. 왜 그래, 캐스? 행복한 추억 때문이야?"

어렴풋한 미소가 캐더린의 입술을 스쳐갔다. "행복한 추억이라면 울 까닭이 없지 않아요?"

"슬플 때 행복한 추억이 떠오르면 오히려 눈물이 나오는 법이야. 그러한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것만으로도 뛰어난 음악에 감사해야지." 죤은 캐더린이 이번에는 분명히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일어섰다.

"이리 와요."

캐더린이 죤의 양손을 잡자 죤은 그 손을 잡아당기며 일으켜 세워 껴안았다. 양팔로 캐더린의 몸을 감고 캐더린의 파란 눈을 지켜봤다.

"여보,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지 않을 테야?" 죤은 이렇게 중얼대곤 캐더린의 머리를 매만지며 입술을 가볍게 볼에서 눈시울로 가져가더니 이윽고 입술에 포개었다. 캐더린이 몸을 굳히자 죤은 얼굴을 들었다.

"왜 그래요?"

"몰라서 묻나? 알고 있을 텐데."

죤은 다시 캐더린에게 키스했다. 캐더린이 죤의 팔 안에서 완전히 굳어버리자 죤은 입술을 뗐다.

"미안해요." 캐더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죤의 몸을 밀쳐내면서. "하지만 나, 이건 싫어요. 아네트를 시험해 보시는 게 어때요? 만일 아직이었다는 얘기였다면 그녀 쪽이 잘 맞을 거예요."

죤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팔을 내리자 천천히 등을 돌렸다.

"내가 한 말을 잊어 줘."

캐더린은 무심코 도어를 향해 걸었다. 개가 일어나서 따라왔다. 캐더린은 허리를 굽혀 개를 쓰다듬으며 그 머리에 볼을 부벼 주었다.

"안녕, 프롬."

"정말 개를 사랑하고 있군. 저 놈은 주인을 몰라본다니까."

캐더린은 조용히 일어서서 도어를 열었다.

"편히 쉬세요, . 스테레오를 들려줘서 고마워요."

"천만에, 미스 스웰. 언제나 또 와요. 방에까지 보내 줄까?"

캐더린은 겨우 미소를 되찾았다.

"혼자서 갈 수 있을 거예요, 안녕."

 

다음날, 캐더린은 강의하러 나가려는 죤에게 아네트로부터의 전갈을 건네주었다.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꼭 닥터 라이트에게 전해 주세요. 어젯밤은 나, 당신을 만나고 싶어 죽을 뻔했어요. 당신이 오시지 않아서 여간 쓸쓸하지 않았어요 - 라고. 오늘 밤, 기다려도 되는지 어떨지 닥터에게 물어봐 주세요."

"뭣 때문에 당신은 이 따위를 일부러 적어 둔 거지? 입으로 전하지 못하나?"

"그 쪽에서 필기해 달라고 말했단 말이예요. 그러는 편이 효과적이래요."

"그래요? 그럼, 다음엔 미스 린튼에게서 전화가 오면 오늘은 바빠서 만날 수 없고 밤에는 선약이 있다고 전해 줘요. 그럼, 강의에 들어갔다 오겠소."

죤과 다시 대면한 것은 오후 늦게였다.

"미스 린튼에게서 전화는?"

"없었어요. 하지만 말은 전했어요. 식당에서 키피 타임에."

"뭐라고? 여러 사람 있는 데서 말이오?"

"."

"그런 짓을, 계산이 된 고양이 족속의 수작이라 하는 거요!"

캐더린은 생긋 웃었다.

"전달 효과는 무척 볼 만하던데요."

"그걸로 입수염을 움직이며 꼬리를 흔들어 준다면 당신은 실지로 고양이가 되는 건데."

"그 쪽 얘기를 전해 드릴까요? 그러면 우리 둘 중 누가 고양인지 아시게 될 걸요."

"그래, 좋아서 못 견디시겠는 모양이군."

"그녀는 이렇게 말했죠 - 할퀸 자국 없이 나에게서 도망친 남자라고는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었데요."

"그렇게 말했어? 일부러 가르쳐 줘서 고마워. 위대하시군."

이렇게 내뱉고 죤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날 밤, 죤은 캐더린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학회의 준비 때문에 근무 외의 일을 시켰다는 이유로. 죤의 차를 같이 타고 집으로 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콘티넨탈 호텔의 식당에서 조용한 한 구석의 식탁에 앉아 있었다. 와인을 주문하고 식사의 주문도 끝났다. 잠시 사이가 있었다. 캐더린은 이 호텔에서 맥스와 점심을 먹었을 때와 같은 파랑색 슈트를 입고 있었다.

", 가족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누이동생은 어찌 됐나요?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께선?"

"두 분 다 건강하셔. 아버지는 곧 은퇴하셔서 런던의 교외로 나가실 거요. 머젤리는 몇 해 전에 결혼하여, 맨체스터에 살고 있고. 벌써 세 아이의 엄마가 됐지. 분명 두 살과 네살, 여섯 살일 거야. 사내 하나에 여자아이 둘."

"머젤리에게 어린애가 셋이나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아주 귀여워. 가끔 찾아가 보지만, 나를 여간 따르지 않지. 언제나 선물과 과자를 사들고 가거든. .... 어린애들은 순진해요."

요리가 왔고, 한참동안은 서로가 아무 말도 없었다. 먼저 말을 한 것은 캐더린이었다.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걸 독 느꼈지만 말이 먼저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네트는 애들을 싫어해요."

", 아네트가 애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내가 알고 싶어 했나?"

"하지만... 당신은 열심히 쫓아다니고 있잖아요?"

"그럴까? 그럼, 아네트의 마음이 바뀌지도록 나도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그렇지?"

캐더린은 입을 다물었다. 다음 접시가 오자, 겨우 캐더린이 깨뜨려버린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앞날을 위해 건배합시다. 서로... 각자의 앞날을 위해서." 죤은 흰 와인글라스를 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가 같이 하는 앞날을 위해서일 수가 없잖아, 그렇지?"

"우리들 각자의 미래를 위해서."

두 사람은 글라스를 부딪쳤다.

"각자의 인생이라니까 말이야, 캐더린, 좀 물어 볼 말이 있는데.. 왜 프랜시스 라트랜드와 결혼하려는지 가르쳐 줄 수 있어?"

기습을 받은 캐더린은 말을 더듬고 말았다.

"왜라니요... 그건... 프랜시스를 좋아하니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몇 해나 불안정하고 가난뱅이 생활을 하다 보니, 무엇인가 확실한 것이 그리워졌구요. 프랜시스라면 그 안정을 줄 수 있어요."

"당신은 그를.... 사랑하고 있지는 않군?"

캐더린은 죤의 눈을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어 얼굴을 숙였다.

"방금 말했잖아요. 프랜시스를 좋아한다고요."

"대학에서의 소문으로는, 당신의 결혼 동기는 순전히 단순하게 돈 때문이라던데."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유감이군요. 하지만 달라요."

"내가 당신의 결혼동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볼까? 당신이 어렸을 때 여읜 아버지의 이미지를 그가 갖추고 있기 때문일 거요."

캐더린은 금방 대꾸할 수 없었다.

"캐더린, 그에게 내 얘기를 해 주었소?"

"아니요. 나는 미망인으로, 남편은 몇해 전에 죽은 걸로 알고 있어요. 내가 오랫동안 혼자 있었기 때문에."

죤은 당황해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재미있어 했다.

"그러니까 나를 싹 죽여버린 셈이군. 이거 아주 대단하신데!"

잠시 얘기가 끊겼다. 커피가 왔을 때 죤이 포켓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당신에게 줄 게 있어. 비서에 대한 감사의 뜻이니 받아줘요, 기꺼이. 게다가 훌륭하게 학회 일을 도와 주었으니까. 그리고 늦어졌지만, 당신 생일 선물로서 말이야. 잊고 있어서 미안해요."

"어머! 하지만 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어쩌구 하여, 모처럼의 선물을 망치진 말아요. 열어봐요, 마음에 들면 좋겠는데."

캐더린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포장지를 풀고 상자 뚜껑을 열고는 숨을 삼켰다.

"어머, . 당신 이러시면..." 조그만 꽃을 본딴 다이아의 브로치가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래요, 진짜라구. 보험에 가입해 두는 게 좋을 거요."

"하지만 거짓말 같애. , 나는 말도 안 나와요.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캐더린은 손을 뻗쳐 식탁 너머로 죤의 손을 잡았다. 죤은 그 손에 다른 한 손을 얹었다.

"보통으로 대해도 돼요. 다만, 여기서 말고 차 안에서."

캐더린은 빨개지면서 손을 빼냈다.

"여기서 달아 봐도 돼요?"

"그러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지만 난 당신의 보이프렌드처럼 내가 달아주진 않을 거요. 그리고, 캐스." 죤은 나즈막한 소리로 덧붙였다. 캐더린이 옷깃에 단 브로치를 가리키며. "프랜시스에겐 어떻게 설명할 거요?"

조용히 공포가 캐더린의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이윽고 도전하듯 선언했다.

"아무 말 않겠어요. 받은 것조차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겠어요."

"뭐라고? 남편에게 비밀로 한다고? 착실한 결혼이란 것은 말이에요, 남편과 아내 사이에 그런 비밀이 있어서는 안되는 거요." 죤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자기 인생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분명히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해요, 캐더린. 이번이야말로 잘 생각해야 해.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니까 첫걸음 때 말이오. 두 번 다시 실패를 되풀이하면 안 돼."

집 앞에서 차를 세우고 엔진을 끄자, 죤은 캐더린 쪽으로 고쳐 앉았다.

"차를 내리기 전에 약속을 상기해 줄 수 없겠어? 고맙다는 키스. .. , 기다리겠소. 필요하다면 하룻밤 내내라도 좋아."

"하지만 죤, ....." 캐더린은 조심스럽게 죤의 볼에 키스했다.

"그렇게 해선 안 돼. 나는 당신 오빠가 아니야. 알겠소? 이렇게 하라고."

죤은 캐더린의 팔을 잡자 자기 목에 감았다. "이렇게 하고." 그리고 양팔을 캐더린의 허리께에 돌렸다. "..."

"고마워요, . 멋진 브로치를 주셔서."

캐더린은 천천히 입술을 갖다 대고, 두 번 살며시 입술에다 키스했다.

"더 잘 할 수는 없을까? 그것까지 가르쳐줘야 하나?"

캐더린은 몸을 굳히며 죤에게서 떨어졌다.

"좋아요."

"그만 두지. 완전한 신사 시늉을 하는 거나 점잖은 체하는 일이나 모두 나에겐 무리야. 그러니 당신을 해방시켜 주지. 그러나 누구나가, 당신은 벌써 몇 해나 키스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정말 하지 않았는걸요. 당신이....."

"내가 떠난 뒤부터는.....?" 죤은 놀란 모양이었다. "설마, 그 말을 날더러 믿으라는 건 아니겠지? 왜냐하면 당신은 약혼자가...."

캐더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런 잠꼬대 같은 소리 집어칩시다. 우린 집으로 들어가야 해."

죤이 계단을 다 오른 순간 전화가 울렸다. 캐더린이 수화기를 들었다.

"잠깐 기다리세요." 캐더린은 계단 위의 죤을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예요, 미스 린튼에게서."

죤은 계단을 뛰어 내렸다.

"아네트야? 나야. 뭐라고? 방금 사람이 누구냐고? 미스 스웰이야. ? 내가 비밀로 하는 여성을 당신은 절대로 몰라요. 사실은 방금 그녀의 방에서 돌아왔어요." 죤은 캐더린을 돌아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당신에게 모두 보고해야 할 의무는 없잖나, 달링? 당신도 나에게 모두를 보고하고 있진 않았으니까 말이야. 피차 일반이지. 그건 어쨌든, 전화의 용건이 뭐지? 어둠 속에 있다고? ? 퓨즈를 모두 태워 버렸다고? 도대체 어쨌길래? 그러니까 타 버렸겠지. 한꺼번에 모두 사용하면 안 돼요. 글쎄, 10분이면 도착하겠소."

죤이 나간 뒤에 현관의 도어가 쾅 닫혔다.

차가 요란스럽게 엔진 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아네트가 이긴 셈이군. 죤은 결국 함정에 빠져 들어가는구나...

 

9

이튿날, 대학에서 집으로 돌아오자 캐더린은 흰 하이네크의 스웨터로 갈아입고, 긴 펜단트를 걸치고 짝으로 된 팔찌를 양 손목에 끼었다. 연극의 리허설에 나올 맥스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맥스의 말과 같이 주역인 두 사람이 솔선하여 다른 연기자들을 이끌고 나아가지 않으면 성과는 기대할 수 없을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어서 오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캐더린은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미소를 띠며 맥스를 맞이했다.

"." 맥스는 캐더린을 위 아래로 훑어본 뒤에 차분하게 말했다. "이렇게 멋진 여성을 만나게 되어서 더욱 멋있군요." 그리고 힐끔 계단 쪽에 눈을 주더니 겁에 질린 몸짓을 했다. "당신 혼자? 아니면 내가 싫어하는 맹수도 집에 있소?"

"내 보스는 지금 없어요. 매일 밤 걸 프렌드를 만나러 가거든. 안심해도 좋아요."

맥스는 일부러 테이프 레코더를 가지고 왔다. 테이프를 들어보니까, 자기가 맥스에게 끌리어 가면서 점차 나아져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전부의 대사를 세 번이나 되풀이한다. 그 후, 대본 없이 연습을 한번.

"하룻밤에 이 정도면 충분해." 맥스는 미소를 지으며 캐더린을 보고는 테이프레코더의 버튼을 눌렀다. "이봐, 들어봐요."

스피드가 빠르게 작동돼 있다. 마치 원숭이의 지껄임과 같았다. 맥스는 볼륨을 올렸다.

캐더린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시 한번 맥스. 재밌어요!"

맥스가 다시 한번 테이프를 돌리고, 캐더린은 먼저보다 더 크게 웃어댔다.

"마치 애 같군, 적어도 마음은. 그렇죠?"

맥스는 일어서서 캐더린의 양손을 끌어당겼다. "와요, 참 예뻐. 이번엔 포옹 연습이야."

맥스가 캐더린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 순간이었다. 도어가 쾅하고 열리며 소테잎을 씹은 듯한 죤의 얼굴이 나타났다.

"훼방을 놔서 실로 죄송하게 되었지만, 마침 나는 이 위에서 일을 하고 있거든." 죤은 캐더린을 노려보며 조롱했다. "이렇게 떠드시니 조용히 생각할 수가 있어야지. 만일 그 소음의 볼륨을 보통 잡음 정도로 낮추어 주신다면 실로 감사하겠는데 말씀이야."

죤은 도어를 쾅하고 닫으며 나가버렸다. 맥스는 눈에 노기를 띠며 불필요하게 큰소리로 외쳤다.

", 달링, 이번에는 키스신을 해요."

맥스의 손이 허리를 감더니 캐더린을 끌어당겼다. 캐더린은 그 손을 뿌리치고 달아났다.

"지금은 싫어요, 맥스. 그런 기분이 아닌걸."

캐더린은 조용히 말했다. 정말로 몸이 무거워옴을 느끼면서.

"어떻게 해야 그 자식한테 복수가 되지. 혼자서 화를 내며 지랄이야! 제가 무슨 통뼈라구!"

"화 내지 말아요, 맥스. 지금 커피를 줄께."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고 겨우 기분을 가라 앉히자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얘기를 시작했다.

"맥스, 어머님 얘기 좀 들려줘요. 그런 얘기하는 거 싫어요?"

"내 엄마 말이죠. 글쎄 고분고분하고 친절하고, 생각이 깊고, 어머니로서는 최고야. 아내로서는, , 어른이 되어 알게 되었지만 너무 고분고분하신 게 아니었는가 싶어요. 아버지에게 맹종했었지. 언제나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으니까. 아버지는 그걸 그렇게 고맙게 여기시진 않았지만. 그러니까 아버지가 지금처럼 되신 건 어머니 책임일 거야. 까다롭고 현학적이구, 때로는 진절머리가 난다고. 아마 그런 면은 아직 당신에게 보여 주지 않았겠지만. 그러나 조심해요, 캐스. 아버지가 당신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와 같은 역할일 테니까 말이오. 온순하고, 결코 비판적인 말은 일체 하시지 않았으니까."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말할 수 있을까, 맥스? 아버님을 좋아하지 않아요?"

"물론, 아버지는 좋아하죠. 그러나 진실을 알고 싶은 거라면 방금과 같은 질문은 하지 말아야 해요." 맥스는 캐더린을 응시했다. "이번엔 내 차례요. 어째서 당신과 같이 매력적인 젊은 아가씨가 그렇게 오랫동안 사내에게 붙잡혀 가지 않았죠?"

"? 나도 맥스를 믿고 정직하게 말하겠어요. 나 이혼한 적이 있어요. 몰랐어요?"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요, 캐스. 아버진 알고 계시나요?"

"아버님께는....." 캐더린은 입을 다물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버지는 내가 미망인인 줄 아실 거예요. 하지만 아니에요, 맥스. 난 남편과 헤어졌어요. 원인은 그가 아내를 유기했기 때문이었죠."

"그래요?" 맥스는 진심으로 염려했다. "아버지가 이혼이란 걸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나요? 아직 들어 보지 못했나요?"

"들은 적 없어요." 캐더린의 목소리는 꺼져갈 듯했다.

"아버지는 이혼은 절대 반대죠. 그 점에 있어선 여간 완고하시지 않죠. 신앙과는 관계가 없고, 단순히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지만. 그건 문젠데, 아주 큰 문제라구요." 맥스는 일어서서 상의의 단추를 단정하게 끼웠다. "그 얘기는 될 수 있으면 빨리 해두는 게 좋을 거예요. 이것이 내 충고입니다. 지금이라면 용서할지 모르지만, 너무 끌면 결혼한 뒤 당신 인상이 엉망이 될지도 몰라요."

"무엇보다 잘못된 일은, 우리들을 성사시킨 변호사인 미스터 크레스웰은 내 이혼재산을 담당한 본인이란 점이예요. 그러니 내 일이라면 전부 알고 있다구요."

"당신은 도마 위를 걷고 있는 셈이오, 미스 캐더린 스웰." 맥스는 캐더린의 볼에 손을 대고 물었다. "그렇다면 이것도 본명이 아니군. 당신은 누구요? 미세스.. 뭐요?"

"용서해요. 그것만은 말하지 않기로 약속이 돼 있어요."

"지금도? 수수께끼는 수수께끼를 불러들인다, 이거군. 나 돌아가겠소." 맥스는 다짜고짜로 코트 소매에 팔을 끼우면서 현관으로 나갔다. "작별의 키스해도 돼요, 캐스?"

캐더린은 가만히 볼을 내밀었다.

"미래의 아들의 키스라면."

"미래의 아들 좋아하시네!" 맥스는 캐더린의 어깨를 잡고 나꿔채듯 끌어당기자, 재빨리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강하고, 깊게. 그리고 다시 한번. "안녕, 귀여운 캐스."

캐더린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맥스는 조용히 웃었다. 얼굴이 몹시 창백하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지 마, 달링. 제대로 할 때가 되면 더 잘해야죠. 염려할 거 없어요. 연습만 하면 곧 익숙해질 테니까요."

"그럼 안 돼요, 맥스."

캐더린은 간신히 이 말을 짜 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맥스는 다시 한번 웃었을 뿐으로, 힐끔 승리에 도취한 눈으로 계단 위쪽을 쳐다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방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계단에 죤이 서 있었다. 그래서 맥스가 그런 짓을 했구나! 캐더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사생활에서 뭘하든 당신과는 관계없지 않아요?"

"그럼 자기 방에서 하라구, 현관에서 말구 말이야." 죤은 계단을 내려오면 말했다. "그리고 역시 한 마디 충고해 둬야겠어. 당신은 남성 경험이 풍부한 모양이지만, 각오는 해둬요 - 불장난을 할 때 화상을 입는 건 대체로 여자 손가락이지 남자 손가락이 아니란 말이야."

"뭣 땜에 내 손가락 걱정까지 하시죠? 당신은 내 보호자가 아니잖아요? 지금은 난 당신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 점에 대해선 전혀 딴 의견이 있을 수 없지만, 다만 나는 여자가 - 어떤 여자이건 간에 지금의 당신과 같이 자기 자신을 너무 경솔하게 다루고 있는 건 보기 싫어하니까 하는 말이라구."

캐더린은 죤의 눈에 비친 모진 경멸의 빛에 무의식적으로 두세 걸음 물러났다.

"그런데도 어젯밤은, 내 차 안에서 뻔뻔스럽게 처녀 연기를 해 보였다니까. 눈을 깜빡거리구, 겁에 질려 수줍은 척하구.... 제기랄! 하마터면 속을 뻔했지 뭐야! 물론 나는 당신 행위의 근본에 있는 충동을 잊고 있었지만. 당신 취미는 - 연극이야, 신파야? 어제 연기는 실로 박진감이 있더군!"

 

다음 날 캐더린에 대한 죤의 태도는 아주 달라져, 마치 북극의 얼음처럼 차가웠다. 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캐더린을 비판하고, 마침내는 몇 번인가 눈물을 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도 죤은 캐더린이 손수건을 꺼내어 노트에 떨어진 눈물 자국을 닦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캐더린에게 있어 그 날은 언제까지고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오후에 한번 아네트에게서 전화가 있었다. 죤은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무뚝뚝하게 해대는 것이었다.

"미스 린튼과 얘기할 때는 좀 제 방으로 돌아가요."

"내일 밤 여덟 시경은 어때, 달링? 당신이 먹을 걸 가지고 있다구? 그건 멋있소."

전화 소리가 싫도록 들려온다. "식기는 이곳에서 어떻게 마련될 거요. 물론 마실 건 준비하겠어. 내가 차를 가지고 가겠어, 알겠지?"

파티를 하는가, 하고 캐더린은 생각했다. 비참한 생각으로 창 밖을 바라보면서. 죤의 긴 전화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청소를 하기 위해서 캐더린은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긴 소매의 점퍼와 슬랙스로 갈아입고, 청소기를 가지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죤의 방 앞에서 잠깐 주저했으나 내일의 파티를 생각하니 팽개칠 수도 없다.

청소기의 요란한 소리 때문에 캐더린은 죤이 돌아와 있는 것도, 침실에 들어가 침대에 앉아서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융단의 청소를 마치고 스위치를 끄자 갑자기 인기척이 있어 돌아다보았다.

"내가 여기 있는 것에 대해 딴 생각은 하지 마세요. 가정부 대신을 하고 있으니까요."

"변명할 거 없어요. 당신이 집안 살림을 하고 있는 걸 보는 것도 괜찮군 그래."

죤은 싱긋 웃었다. "청소를 계속하기 전에 좀 물어볼 게 있어요 -- 우리가 같이 살던 방은 아마 이 방이었지?"

"그래요." 캐더린은 시무룩해 하며 대꾸했다.

". 이 방에는 흥미 있는 여러 가지 일이 스며 있겠군." 캐더린은 빨개지면서 다시 청소기의 스위치를 넣으려고 했다. 죤이 당황하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 당신은 바느질을 할 줄 알던가?"

"할 수 없이 하는 정도예요. 왜요?"

"이걸 부탁할 수 없겠소?"

죤은 단추가 떨어진 상의를 들어보였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했죠?"

", 언제나 기꺼이 해 주는 걸 프렌드가 있었지."

"지금도 있잖아요? 왜 그녀에게 부탁 안해요?"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어서. 그래 어떻게 할테야?"

캐더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청소기의 스위치를 넣었다. 줄곧 따라다니는 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가구 밑을 청소한 뒤 몸을 일으켜 세워 스위치를 껐다.

"당신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더욱 아름다워지는군. 예전과는 전혀 달라졌어." 캐더린은 어리둥절하다가 청소기의 손잡이를 떨어뜨렸다. 죤은 분명 자기를 놀리고 있느 거라고 생각했다. 입 언저리에 심술은 웃음이 떠있다. "그런데 그 모두를 늙은이에게 주겠다니... 나는 당신을 놓아 주어서는 안?거야. 내 부재중에 당신이 찾아낸 <아무개들>과 전력을 다하여 싸워야 했던 거야. 말해 주지 않겠소? - 그 녀석은 핸섬했었소? 그 전에 나를 사랑했던 것처럼 당신은 그 녀석과도 죽고 못 살았지?"

캐더린이 입을 열려고 하자, 죤이 한 손을 들고 제지했다.

"아니, 듣고 싶지 않아요. 라이벌과 무슨 짓을 했느냐고 묻는 사내란 얼마나 못난 것일까? 난 바보였어. 당신을 놓아주기 전에 잘 생각했어야 했던 거지. 그렇게 했으면 당신과 좀 더 즐길 수 있었을 건데 말이야. - 당신의 진짜 사랑이 아니었더라도 말이야." 죤은 말을 끊고, 싸울 듯이 캐더린을 노려보았다.

"결국은, 사내란 어떤 경우에도 미인이라면 즐기는 법이니까 - 비록 부드러움과 자극을 주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아도 말이야."

캐더린의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을 보고 죤은 만족해했다. 캐더린은 플러그를 빼고 청소기를 끌며 서둘러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러나 도어를 닫은 순간, 다시 열리며 죤이 상의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부탁해."

캐더린은 잠깐 망설이다가 상의를 나꿔채자 계단의 손잡이에 걸었다.

"단추는 안주머니에 있어요, 친절하신 분."

그리고 죤은 캐더린의 코앞에서 쾅, 하고 도어를 닫았다.

단추를 달기 위해서 상의를 뒤집은 순간, 주머니 속에 있던 물건들이 융단 위에 흩어졌다. 주워서 다시 주머니에 넣고 있으려니까 지갑 밑에 편지 같은 것이 보였다. 캐더린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주워 올렸다. 제 눈이 믿어지지 않았다. - 이것은 캐더린 자신이 쓴 것이었다.

소인 날짜로 보아 10년쯤 전의 것이었다. 수신지는 미국. 죤이 영국을 출발한 후 얼마 있다가 쓴 편지 중의 하나였다. 충동적으로 읽어 내려갔다. 읽어가는 동안 얼굴이 빨개졌다. 정열적인 러브레터였다. 정성들여 쓰여 있었다. 고독과 절망과 상대가 돌아올 날이 그리워 몹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엿보였다. 어느 사이 캐더린은 10년 전의 자기와 같은 생각에 젖어 들고 있었다.

편지를 포켓에 쑤셔 넣자 상의를 들고 이층에 올라갔다. 죤은 책상을 마주보고 앉아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의? 고마워요." 그는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미안해요. 뒤집으려다가 포켓 속의 것이 떨어졌어요. .. 편지가 있던데요."

"무슨 편지?"

"오래된 거예요. 내가 미국에 있는 당신에게 부친 편지......"

", 그거. 아직도 가지고 있었나? 아무 소용도 없는 건데. 그렇지?"

죤은 바로 곁에 서 있는 캐더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필요하다면 그건 별도지만."

"아니에요, 그건 당신 건데."

캐더린은 양손을 뒤로 감추었다. 죤은 어깨를 들썩했다.

"그럼, 둘 중 아무에게도 필요 없는 셈이군."

죤이 쓰레기통에 편지를 던지니 멋지게 들어갔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털더니 또 일로 되돌아갔다. 캐더린은 곁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입술을 떨면서, 말도 없이. 마치 죤이 자기 심장을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린 느낌이었다.

"왜 그렇게 서 있어! 난 고맙다구 인사했는데?"

죤이 캐더린을 쳐다보니 그 눈에 눈물이 넘치고 있었다.

"당신은.... 인간의 마음이 없는... 냉혹한 사람이에요!"

캐더린은 훌쩍이며 방에서 뛰쳐나갔다.

 

"제프, 너는 죤의 파티에 초대받았지?"

밤늦게 야식을 들면서 캐더린이 물었다.

", 헬렌이랑 같이. 누나는 초대받지 않았어?"

"그래. 파티 건은 그가 아네트와 전화로 얘기하고 있는 걸 곁에서 들었을 뿐이야."

"누나도 초대한 줄 알았는데." 제프는 놀란 것처럼 말했다.

"초대를 받았더라도 나는 갈 수 없단다. 프랜시스가 오는 걸. 죤은 내가 전화로 약속한 걸 들어서 알고 있어. 그러면 딴 사람은 누가 오니?"

"죤이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을 때의 친구 몇과 그 부인들이라든가 걸프렌드가 아닐까. 적어도 열두 명, 아니 더 될 거야. 캐스, 식기를 빌어 가도 되지?"

캐더린은 하마터면 거절하려다 고쳐 생각했다.

"우리가 쓸 것만 남겨 두고 얼마든지 가지고 가렴."

 

10

죤의 파티날 밤, 현관은 연신 손님으로 붐비고 있었다. 프랜시스는 죤과 대면했었으나, 예의 바르게 서로 인사를 나누며 캐더린의 거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누구지?" 친구의 한 사람이 죤에게 무든ㄴ 것이 들렸다. "그녀 말이야? , 다만 대가라는 거지." 와 하고 폭소가 터졌다. 캐더린은 입술을 깨물고, 어떻게 든 약혼자에게 신경을 집중하려 했다.

"프랜시스, 닥터 라이트에게 방을 빌려 준 걸 얘기했던가요?"

"당신에게서 들었는지 어땠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맥스에게서는 들었소."

"개를 기르거든요, 그 때문에 나가겠다구 말하고 있죠. 지금 맨션을 찾는 중인가 봐요."

"당신은 닥터 라이트에게도 인상이 좋은 모양이더군. 비서로 그냥 두는 건 아깝다고 그럽디다. 결혼하면 야간부의 수업에 나와 더 나은 자격을 얻도록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하더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글쎄, 잘 생각해 보겠어요, 프랜시스."

죤은 이미 자기를 프랜시스 라트랜드 부인으로서 생각하고 있다 - 이렇게 생각한 순간, 왠지 캐더린의 마음은 어두워졌다.

이층의 파티는 들뜬 분위기가 되어 소음이 더욱 심해져 왔고, 아래층의 두 사람은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는 이상 상대편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체스를 하게 되었고, 캐더린은 선전했지만 패하고 말았다. 그 뒤에는 둘이서 커피를 마셨다. 이층의 파티의 흥은 최고조에 도달하여, 죤의 웃음소리에 잇달아 아네트의 소리가, 그리고 모두의 웃음이 들려왔다.

누군가가 레코드를 얹은 모양으로 천장이 마치 거대한 드럼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너무 시끄러워서 미안해요. 당신과 약속했을 때는 이층에서 파티를 한다는 걸 몰랐었거든요."

"상관없어요, 달링.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오. 분명히 약간 시끄러운 건 나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프랜시스는 파이프의 재를 난로에 떨어버리자, 긴 의자로 은근히 접근해왔다.

"캐더린."

프랜시스는 한 팔로 캐더린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캐더린의 머리를 매만지며 눈을 응시했다.

"캐더린." 프랜시스는 다시 한번 불렀다. 조금 전보다 더 열정을 품고, 그리고 살며시 입술을 가까이 가져 왔다.

드디어 현실에 부딪치게 됐다는 것을 캐더린은 명확히 깨달았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참을성이 있었고 고분고분했다.

"우리 다같이 기다립시다. 시간이 필요하겠지. 얼마나 오랫동안 미망인으로서 괴로와해왔소. 충분히 알 수 있어요. 게다가 나는 참을성이 있는 사내요. 언젠가는 꼭 잘 될 때가 올 거요."

그러나 그 <언젠가>는 결코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캐더린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연극의 리허설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가끔 맥스가 와서 주역들끼리의 연습을 거듭하였다. 결국 캐더린도 설득당해서 키스신의 연습도 하게 되어, 맥스에게 스테이지 키스를 하는 요령도 배웠다. - 가장 중요한 점은 상대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일이었구나. 제법 진짜같이 보이도록 해야지. , 사실은, 당신은 멋지다는 말만 하고 있으면 되는 거지만.

맥스가 오면 언제나 죤은 집을 비우게끔 돼 있었다. 그는 현관에 맥스의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상의를 걸치고, 캐더린이 거실의 도어를 닫기 전에 벌써 밖에 나가 있었다.

모든 일이 평정해서 캐더린이 안심한 순간, 그러나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가지는 않았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바이러스균이 원인이었다. 먼저 죤이 감기에 걸렸는데 하루도 쉬지 않고 대학에 나왔기 때문에 비서에게 옮았다. 캐더린은 상연 당일이 되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여, 여학생인 모린이 대역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후로는 아직도 비틀거리는 캐서린을 자택의 저녁 식사에 초대한 프랜시스에게 감기가 옮겨진 것이다.

그 동안에도 계절은 돌고 돌아, 봄은 문 앞에까지 와 있었다. 날씨는 회복되기 시작했고 태양은 대지를 따사롭게 비춰 주었다. 토요일 아침, 물건을 사력 밖에 나온 캐더린은 공기의 상쾌함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돌아보니까 이층의 창문에 죤의 얼굴이 보였다.

"쇼핑가는 거요? 잠깐 기다려요, 내가 같이 가 줄께."

캐더린을 곁에 앉히고 뒤 창을 열어 주니 개가 뛰어 올라탔다. 프롭은 기쁘다는 듯이 캐더린의 목덜미에 코끝을 대었다. 캐더린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어차피 외출할 참이었지. 그래서 상점가까지 데려다 주려구."

상점가에서 차를 내려, 아직 도어가 닫히기 전에 캐더린은 맥스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반갑게 말을 건네 왔다.

"헬로우, 달링."

"맥스, 잠깐. 수퍼마켓에 가는 길이예요. 시장가방 좀 들어 줘요."

"좋아요. 쇼핑하고 나서 커피 마십시다."

"핸드백은 필요 없어?" 무뚝뚝한 소리로 죤이 말했다.

"어머, 이리 줘요. 태워 줘서 고마워요."

"천만에."

죤은 상체를 움직여 쾅, 하고 도어를 닫았다. 맥스는 의미 있는 눈으로 캐더린을 응시하며 시장백을 받아 들자,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 가게로 건너 가게로 갔다. 죤은 엔진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달려갔다.

쇼핑을 마치고 레지에 늘어서 있으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스 스웰, 이런 데서 만날 줄이야."

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공은 알 수 있다.

"어머, 안녕하세요, 미스 린튼. ..... 아직 모르셨던가요? 이분은 맥스 라트랜드로 학장님의 아드님이시죠. 맥스, 이분은 아네트 린튼, 대학 가정과의 주임이세요."

아네트는 주저 없이 상대방을 재 본다. 맥스도 결코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학장님에게 아드님이 있다고는 생각해 보지도 못했네요. 더욱이 이렇게 장성하신 분이 있다고는!"

맥스는 아무 말 없이 상대방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은 무엇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맥스가 말문을 열었다.

"우리들은 커피 마시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시겠어요, 아네트?"

"어머, 내가 커피를 마시고 싶은 것까지 벌써 아셨나 봐, 맥스. 잠깐 밖에서 기다리시겠어요? 작지만 아주 맛있는 커피를 끓여 주는 가게로 안내할게요."

대금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오자, 두 사람은 얌전하게 아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고로 말해 두지만, 맥스......"

맥스는 한 손을 들어 캐더린을 제지하는 시늉을 했다.

"염려 말아요. 저런 여자와 만났을 때는 대체로 남성은 자기 입장을 명확히 알고 있는 법이죠."

캐더린은 깜짝 놀라며 상대를 응시했다.

"어머, 죤과 같은 말을 하시네..... 그녀는 지금 죤의 걸 프렌드예요. 저 봐요, 나왔어요. 한 마디만 해 두겠는데....."

"염려 놓으시라니까."

커피에 대해서만은 아네트의 말 그대로였다. 맛이 있었다. 그러나 두 남녀는 캐더린을 버려둔 채 유언(有言), 그리고 또 무언의 대화에 열중했다. 맥스는 캐더린이 몰랐던 일면을 보여 주었다. 아네트가 맥스를 바꿔 놓은 것이다. 죤조차도 아네트와 같이 있으면 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겨우 두 남녀는 캐더린의 존재를 의식한 모양이다.

"미안해요, 미스 스웰. 우리들끼리만 얘기해서. 심심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렇게 멋진 남자와 만나는 것은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거든요." 아네트는 짙은 갈색 눈을 또 맥스에게 돌렸다. "내주 토요일에 파티를 열 예정이예요. 맥스, 물론 미스 스웰도, 두 분이 같이 오시면 좋겠는데요. 아시겠죠?"

호소하는 듯한 눈초리는 곧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분명히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취소하면 됩니다." 맥스는 미소를 지었다. "기꺼이 초대에 응하겠어요. 캐스, 당신은 파티에 가겠소?"

아네트는 미간을 찌푸리고 두 사람의 친숙해 보이는 사이를 의심스럽게 지켜 보았다.

"기꺼이."

아네트는 일어서서 핸드백과 장갑을 손에 들었다.

"그럼, 내주 토요일 여덟 시쯤에 뵙죠. 안녕, 맥스."

아네트의 모습이 사라진 순간, 맥스는 또 한 손을 들어보였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돼요. , 가십시다."

 

아네트의 파티에 갈 것을 생각하니 캐더린은 기묘하게도 기분이 들뜨는 것이었다. 단 한 벌밖에 없는 파티용 드레스를 시행할 터 네크로 등을 로우 커트한 흰 실크의 드레스는, 캐더린의 흰 어깨를 강조해 주면서 그 위에 치렁대는 금발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캐더린은 그 다이아몬드의 브로치를 핀으로 꽂았다. 마중온 맥스는 현관 도어를 연 순간 브로치에 눈을 주었다.

"이건 뭐죠? 숨겨둔 부자집 영감이라도 있수? 당신을 못쓰게 만드는군 - 이런 값비싼 선물 따위를 하구 말이야."

"그래요. 부잣집 영감이 있다우. 맞았어요."

맥스는 불가사의하게 캐더린을 보고 있다가 더 이상 묻지 않고 이렇게만 말했다.

"코트는?"

흰 레이스의 숄을 어깨에 걸치고 코트를 입었다.

"아네트가 꼭 데리고 오라고 신신당부 하던데. 맥스, 기분 좋죠?"

"그야 나쁘지는 않지. 하지만 그렇게 말한 사람이 당신이었다면 더욱 기분이 좋았을 텐데."

아네트의 맨션은 그렇게 멀지 않았다. 입구에서 아네트가 모두를 맞이했다. 몸에 찰싹 붙는 빨간 빌로드의 드레스. 까맣게 물들인 머리를 엷은 빨강색 스카프로 뒤에서 묶고, 긴 금빛 펜던트와 이어링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 손목에 팔찌. 이를 데 없이 매력적이었다. 아네트의 눈은 다만 맥스만을 보고 있었다. 한 팔은 맥스를 감았다.

모두들 삼면경이 붙은 화장대에서 몸치장을 했다. 헬렌은 곧 거실에 있는 제프에게로 가버렸다. 현관에 혼자 버려진 캐더린은 살며시 죤의 모습을 찾았다. 죤은 난로 곁의 벽에 기대어 있었다. 캐더린은 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방 중앙을 향하여 걸었다. 늪지대의 안개처럼 소용돌이치고 있는 담배 연기에 눈을 가늘게 뜨고.

죤은, 수줍어하면서 그냥 서 있는 캐더린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곁으로 오지는 않았다. 마침내 맥스가 가까이로 와서 캐더린에게 손을 내밀며 대화에 끌어들였다.

캐더린은 주위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의지와는 달리 눈이 자연히 이별한 남편 쪽을 보게 됨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저만큼 혼자 떨어져 서서 모두를 관찰하고 있다. 그 죤이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자기를 보고 있는 눈과 눈이 마주치자, 캐더린은 빨게지며 얼굴을 외면하고 사람들에게 신경을 집중하려 했다.

"뭘 마시겠소, 캐스? 셰리?"

", 부탁해요."

맥스가 캐더린에게 마실 것을 건네 주는 순간, 아네트가 맥스에게 말을 건네왔다.

"고마워요, 맥스. 파티가 잘 돼가는 것도 당신 덕분이에요."

맥스는 아네트의 눈에 넘치는 애교에, 장난기가 있는 인사로 대꾸했다.

"놀랐어요, 미스 스웰." 아네트가 위 아래로 캐더린의 드레스를 훑어보며 떠들어댔다.

"얼마나 멋있는 브로치예요. 이런 말을 해도 상관없다면 나한테 가르쳐주시겠어요, 어떻게 해서 손에 들어오게 됐는지? 빌렸어요? 훔친 건가요? 아니면 딴 수단을 쓰셨는지?"

"...... .........."

캐더린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자 겁에 질리고 말았다.

"그녀의 말로는 부자집 영감이 선사했대요."

맥스가 모두에게 말했다. 화제의 물건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한꺼번에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녀의 설명이지? 그녀는 분명히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지." 죤의 음성에 사람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낭패해 하는 모양을 보니까, 나는 딴 무엇이 있었다고 생각되는군."

캐더린은 죤의 배신에 절망하고 말았다. 죤의, 자기 자신에 대한 조롱을 즐기고 있는 듯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도무지 구원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캐더린은 억지로 웃음소리를 냈다.

"글쎄요? 설마 어느 분도 내가 진실을 고백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겠죠?"

"그런 말투는 삼가해요." 맥스가 상을 찌푸렸다. "당신에 대한 평가를 바꾸어야 하잖아? 나를 실망시키지 말라구."

"어머, 맥스." 아네트가 웃는다. "당신은 설마, 아직도 우리들 여성들에 대해서 꿈을 가지고 있다구 말할 셈은 아니겠죠? 아다시피 우리들 마음은 모두 같거든요."

"아네트. 당신은 특수한 데에서 총론을 끄집어내는 건 잘못이란 것을 더 연구해야겠어." 제프가 가까이 오면서 참견했다. "당신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을 하건 상관할 바 아니지만, 누나까지 그런 식으로 처리하진 말아요." 그리고 자기 말을 좀 더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헬렌의 어깨를 안아 끌어당겼다.

"더욱이 내 걸 프렌드까지 끌고 들어가진 말라구요."

죤의 눈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캐더린은 알아 차렸다. 맥스도 역시 그것을 눈치 채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두 사람의 표정을 비교하더니 캐더린을 지키려는 듯이 팔을 돌렸다. 아네트도 그것을 놓치진 않았다.

"맥스, 이리 와요. 내 친구를 소개해 줄께."

"곧 돌아오겠어." 맥스는 캐더린의 귀에 속삭이고는, 아네트의 뒤를 따라 가버렸다.

"부자집 영감이 대신 상대해 드릴깝쇼?"

캐더린은 깜짝 놀랐다. 어느 사이엔가 죤이 바로 곁에 와 있었다. 그 말에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말없이 빈 글라스를 건넸다.

", 내 조카야."

"고마워요, 죤 아저씨."

캐더린은 죤을 쳐다보고 미소를 띠며 신파조로 대꾸했다. 죤은 지금까지 맥스가 앉아 있던 캐더린의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아, 한 손을 노출된 어깨에 얹고 얼굴을 대고 속삭였다.

"벌써 누군가가 당신이 얼마나 예쁜지 말해 주었겠지?"

"아니요."

"그럼 지금 내가 말하겠소. 이렇게 멋있는 조카가 생겨, 나는 기쁘니라."

캐더린도 죤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저씨께서도 여간 멋있지 않으시네요."

"캐더린, 이리 와요." 맥스가 가까이 오면서 캐더린을 의자에서 끌어당기려고 했다.

"내가 당신의 약혼자가 아니라 미래의 아들이라는 것을 여러분께 설명해줘요. 아무도 믿으려 들지 않는다구."

캐더린은 미안하다는 듯이 죤을 쳐다보았다. 죤은 노골적으로 맥스에 대해서 얼굴을 찌푸려 보이고 있는데, 맥스 쪽에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캐더린을 웃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고 갔다.

", 말해 줘요, 캐더린. 당신은 아버지와 결혼한다구. , 부탁이야."

"맥스의 말 그대로예요. 나는 맥스의 아버님의 아내가 된다구요. 그래서 맥스가 아들이 될 거예요. 아가야, 그렇지?"

"그럼 그럼 마미!"

맥스가 악을 쓰며 어린애 목소리를 내자, 모두 일제히 와, 하고 웃었다. 맥스가 허리를 굽혀 캐더린을 쳐다보며 호소하듯이 이렇게 말했을 때는 웃음이 그칠 줄 몰랐다.

"마미, 젖 줘!"

"그만 해, 맥스." 누군가가 말했다. "네가 그따위 말을 하면 더욱 오해하게 되잖아."

모두가 또 일제히 와 하고 웃자, 맥스는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상관없어요. 당신은 어때?"

맥스는 팔을 캐더린의 허리에 감았다. 캐더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럼, 당신들은 믿지 않아?"

"난 보통이예요." 캐더린은 미소를 띠었다.

"맥스는 남매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 멋진 남매!"

", ." 맥스는 자기의 이마를 쳤다.

"절망으로 죽어버리겠다. 남매라면 그건 거절이야."

"이제 겨우 당신다워졌어요." 아네트가 맥스의 곁에서 말했다. "나를 시험해 봐요. 결코 남매라곤 믿지 않을 거예요."

"당신 같음 그럴 거야." 캐더린의 바로 뒤에서 제프가 거들었다.

맥스는 냉정하게 위에서 아래까지 아네트의 몸을 훑어보았다.

"유혹의 말로 받아들여도 될까, 아네트?"

"뜻대로 생각하셔, 맥스."

죤은 아네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 뭣 좀 먹자구."

"그럴까요, 달링?" 아네트는 죤의 팔에 매달렸다. "물론 채비하는 걸 도와주시겠죠? 우리 부엌은 누구보다도 당신이 잘 아시니까 말예요."

"부엌만 잘 알까?" 제프가 중얼댔다. "제프, 얌전히 있어 줘. 딴 사람이 들으면 어쩔려구?" 헬렌이 재빨리 제프의 볼에 키스하며 말했다.

 

11

아네트의 뛰어난 요리도 거의 없어져 갈 무렵, 캐더린은 죤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알았다. 이윽고 아네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신경이 쓰여 주위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어려웠다. 두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도대체 둘이서 뭘 하고 있을까?

", 너무 했다!" 맥스의 외치는 소리가 캐더린의 생각 속에 뛰어 들었다.

"상의에 커리를 흘려버렸다구."

"아네트라면 자국을 없애는 약이 있을 거예요." 한 여자 손님이 말했다.

"빨리 찾아 와요."

맥스가 캐더린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마미, 이리 와요. 내 옷을 말끔히 해 줘요."

웃음소리가 방 바깥까지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현관에 나오니, 마침 죤이 아네트의 입술에서 입술을 떼는 순간이었다.

"훼방 놔서 미안해, 아네트. 당신 같음 얼룩없애는 약이 있을 거라구 해서." 맥스는 상의의 갈색 얼룩을 보여 주었다.

"알았어, 맥스. 내 침실 화장대 위에 있어요. 라벨이 붙어 있을 거예요. 도와줄까?"

"천만에, 괜찮아. 나는 남의 사랑을 훼방 놓는 걸 절대 싫어하니까." 맥스는 의미 있게 죤을 보고 계속했다. "내 걸 프렌드를 대신 데리고 가겠어. 그녀가 해 줄 거야.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 주니까. 그렇지, 달링?"

"어머, 맥스!" 아네트는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 "그런 일을 생각한다면 도어를 잠가놓겠어요. 난 상관 말아요. 캐더린도 장해물이 끼어드는 건 원치 않을 테니까."

"아네트의 말 들었지, 달링?" 맥스의 말투는 느릿느릿했고 딴 의미가 있었다. "권고에 따라 도어를 잠그자. , 가요, 달링. 더 참을 수 없어요." 맥스는 죤에게 싱긋 웃어 보이더니 캐더린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맥스와 캐더린이 침실로 향하자, 아네트는 또 한 차례 팔을 죤의 목에 감고 얼굴을 들며 키스를 기다렸다. 돌연, 죤은 상대편의 팔을 억지로 떼놓고 홱 등을 돌리며 거실로 돌아갔다.

현관에는 깜짝 놀라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아네트가 혼자 서 있었다.

맥스는 침실의 도어를 닫았다.

"저 둘이는 뭘 하고 있을까? 누가 누굴 뒤쫓는 건지 알 수 없군." 어깨를 들먹이며 화장대로 접근했다. "이거로군." 재빨리 상의를 벗어 캐더린에게 건네주었다. "깨끗이 해 줘요, 친절하신 우리 엄마."

캐더린은 손수건에 용액을 적신 뒤 옷자락을 잡고 문질렀다. 차차 얼룩이 사라졌다.

"이제 생각하니,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걸 내가 얘기했던가요?"

"아니, 맥스. 또 감기가 드셨나요?"

"유감이지만 그런가 봐요. 오늘은 일찍 주무시겠댔어."

"맥스, 왜 진작 그 말을 해 주지 않았죠? 일찍 알았으면 파티 따위에 나오지 않고 병문안을 갔을 텐데."

"그래서 말하지 않은 거야. 아버지도 와선 안된다구 말씀이 있었구."

"하지만 내일은 가 뵙겠어요. 간호해 드려야지. 내가 잘못이야. 너무 가까이 해선 안됐던 건데...... 하지만 맥스에게 옮지 않아 다행이야."

"옮겨지기를 바랐는데. 실패였어." 맥스는 손가락을 캐더린의 입술에 갖다 대었다. "내 키스, 기억하고 있겠지?"

맥스는 점점 들떠가는 모양이었다.

"아직이야? 그 정도로 해 둬요. 어차피 크리닝에 보낼 거니까." 맥스는 상의를 입었다.

"고마워요, 캐스. 당신은 좋은 아가씨야. 아무튼 나는 가겠는데, 같이 오겠어?"

"머리를 고치고 가겠어요."

맥스는 자기 손수건을 꺼내어 젖은 자국을 눌렀다.

"아직 좀 눈에 뛸까?"

도어를 열자, 죤이 밖에서 도어의 손잡이에 손을 뻗치려는 참이었다. 맥스는 미간을 좁히며 캐더린을 돌아보고 손에 든 손수건으로 입술을 닦았다.

"말끔히 닦였나, 달링?"

"무슨 얘기죠?" 캐더린은 거울에서 시선을 맥스 쪽으로 돌리며 죤을 바라보았다.

"당신 루즈말이지, 물론."

"하지만 맥스, 당신 아무런...."

맥스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 잘 지워졌군. 그럼, 달링." 그리고는 아주 친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빨리 내 곁으로 와 줘. 알았지?"

맥스는 죤의 옆을 빠져나가면서 싱긋 웃어 보이고, 침실 쪽으로 손을 흔들며 나갔다.

"이번은 댁 차롄가요?"

죤이 맥스를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고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도어가 닫히며 안에서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거짓말이에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게 아니라구요, . 믿어주세요. 난 상의에 흘린 커피 자국을 닦아 주었을 뿐이에요."

그러나 죤에게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경멸에 찬 얼음과 같은 시선이 캐더린의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 만큼, 추호도 용서없이 돌부처가 얘기하듯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의 도덕적 수준은 이 10년 동안에 거의 진보되지 않았군. 변했다고 할 수 있다면, 더욱 정도가 나빠졌을 뿐이야."

", 당신은 설마 현관에서 아네트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건 아니겠죠? 부탁이에요, 아네트의 독살스럽게 빗대어 한 말을 믿지 마세요. 다 계산을 해놓고, 치명상을 주려는 거예요. 아네트의 수법에 말려들지 말아요."

죤의 말투는 위험스런 냉담을 담고 있었다.

"이제 와서 당신은 내 눈으로 목격한 것조차도 믿지 말라는 거야?"

"하지만 죤, 당신은 아무것도 본 게 없어요. 당신은 마음이 잘못된 증거를 따라 사실을 왜곡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나 죤은 천천히, 용서 없이 접근해 왔다.

"두 번 다시 속을 줄 아나. 그 따위 잠꼬대 같은 소리엔 이제 면역이 됐어."

캐더린은 겁에 질려 있었다. 지금, 죤이 눈앞에서 극도로 성이 나 미쳐 있는 것이다.

"당신은 약혼하고 있는데도, 다른 사내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가볍게 당신을 손아귀에 넣으려 하고 있는데, 어째서 내가 - 누구보다도 당신을 절실하게 갖고 싶어 하는 내가 - 당신을 소유하려는 기쁨을 참아야만 한단 말이오?"

죤의 양팔이 어거지로 캐더린을 끌어 들였다. 강펄과 같은 힘 앞에 캐더린은 어쩔 수도 없었다.

"당신이 요구하는 것이 정열적이며 화끈한 육체라면, 구태여 미래의 아들 따위를 유혹할 건 없는 거야. 내가 기꺼이 그 역할을 할 거요. 당신 같은 여자라도 항복할 수 있도록 실컷, 당신이 필요한 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죤은 다시 한번 캐더린을 힘껏 안아 들이자, 난폭하게 용서 없이 키스를 퍼부어대며 그녀를 침대에 밀어 쓰러뜨렸다. 갑자기 캐더린의 온몸을 강렬한 환희가 달려갔다. 드디어 자기가 정말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왔다는 감각. 조금도 주저할 것 없이, 남자를 요구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복종하고 싶은 욕망. 언제까지고 남자에게 매달리고 싶은 소망. 상대의 입술과 두 손의 애무에 몸을 맡기고, 마찬가지로 애무를 돌려보내 주겠다는 정열이 넘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무엇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캐더린을 사로잡았다. 죤의 품안에 있으면 안 된다. 나는 다른 남자와 약혼한 몸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죤은 분명히 과거에 있었을 몇몇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가지고 놀려는 것이 아닌가. 단순한 충동적 기분으로.

캐더린은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며 죤의 팔에서 빠져 나와 일어섰다.

"제기랄." 죤은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다른 녀석에게도 이렇게 다루었다면, 이번이야말로 하고 당신에게 늘어 붙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겠군."

캐더린이 손을 올렸다. 그러나 죤의 뺨을 치기 전에 손목이 잡히고 말았다. 그 손목을 죤이 힘껏 잡았다. 눈물이 솟구쳐 캐더린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를 뭘로 알고 있죠? 난 아네트가 아니에요! , 기분이 내키면 주워 올렸다가 내동댕이치는 당신의 걸 프렌드도 아니구요!"

캐더린은 죤의 손을 뿌리쳤다. 필사적으로 상대의 눈을 노려보려고 하는 것이지만, 거기엔 동정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고, 다만 조소와 모멸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캐더린?" 둘 사이에 장막을 치고 있던 침묵을 깨뜨리고 맥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달링, 어디 있지?"

죤이 조롱하듯 웃어 보였다.

"당신 보이 프렌드가 찾으시는군. 어디 있다구 알려 주시지."

캐더린은 움직일 수 없었다.

"당신이 알려 줄 수 없다면 내가 알려주지."

"그러지 말아요, , 부탁이야."

캐더린은 죤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죤은 그 손을 뿌리치며 도어께에 가서 자물쇠를 빼고 도어를 열고 외쳤다.

"캐더린은 여기 있어. 나와 함께 있다."

맥스가 입구에 모습을 드러내어 둘의 얼굴을 번갈아 견주어 보았다. 희롱하듯 웃어 보이는 죤과 캐더린의 흐트러진 의복을.

"실례한 모양이군요." 맥스는 삥 돌아 천천히 걸어 나갔다.

"눈에는 눈으로, ." 죤이 만족스럽게 말하자, 캐더린은 머리를 푹 숙였다.

"안녕, 미스 스웰..... 고마워."

죤도 방에서 나가 도어를 조용히 닫았다. 소형의 스포츠카가 어둠 속을 질주했다. 맥스는 드라이브의 처음부터 말이 없었다. 캐더린은 지끈지끈한 머리를 시트의 등받이에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죤이 가버린 뒤, 캐더린은 겨우 안정을 되찾아 옷매무새를 바로 잡고는 맥스를 찾았다. 아네트와 얘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네트는 한 손을 맥스의 팔에 얹고, 맥스도 상대의 반응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대화의 중단을 기다리던 캐더린에게는, 아네트가 맥스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는 보통이 아닌 상대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맥스보고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죤이 부엌에서 나왔으나, 캐더린에게는 눈을 마주 칠 용기가 없었다. 아네트에게 해명했다. "미안해요, 기분이 좋지 않아서요. 아마 감기가 완전히 낫지 않은 모양이에요. 아네트도, 얼굴빛이 좋지 않군요," 하고 캐더린에게 말했다. 그리고 맥스에게 말했다. "나중에, 파티에 돌아와요. 우리들 서로가 더 잘 알지 않으면 안 되잖아......."

차가 캐더린의 집 앞에 섰다. 엔진 소리가 사라지자 침묵이 찾아왔다. 맥스가 팔을 돌려서 힘없이 앉아 있는 캐더린의 머리를 자기 어깨에 얹어 주었다.

", 캐스, 왜 그래요?"

", 맥스." 캐더린은 볼을 맥스의 볼에 갖다 대었다. 또 눈물이 나온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캐더린은 흐느꼈다. 맥스는 캐더린을 꼭 안고, 손수건을 꺼내어 캐더린의 손에 쥐어 주었다.

", 눈물을 닦고 얘기해 봐요."

"죤 말이예요, 맥스. 나를 아주 못된 여자로 알고 있어요."

"그게 어쨌다는 거야, 달링? 그 자식이 어떻게 생각하건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맥스, 당신이 모르고 있는 일이 있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지만 당신에게만은 얘기해야겠어. , 한 번도 진짜 성을 말하지 않았었죠? 사실은 라이트예요. 미세스 죤 라이트."

캐더린은 맥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침묵이 있은 뒤, 실로 조용한 어조로 맥스가 물었다.

"죤 라이트의 그 전 아내였었군? 지금도 그 밑에서 일하며 당신 집에 세 들고 있는 그 사내가? 그러나 왜 그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어?"

"죤이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 거예요. 당신 아버지도 아직 모르세요."

"그리고는 몇 주 동안이나 그 사내와 얼굴을 맞대고 있었군.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집에서까지도 그런 비밀을 안은 채." 맥스는 캐더린의 머리에 볼을 얹었다.

"그리고 당신은......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다. 맞았지?"

그래요, 맥스. 미안해요." 캐더린은 속삭이듯 말했다. "프랜시스에겐 안됐지만, 죤과 재회한 순간 그걸 알았어요."

"왜 또 한 번 결혼하지 않는 거요? 재혼하지 않은 이유는 뭐예요?"

"그가 내키지 않는 모양이에요, 이혼은 내 쪽에서 서둘러 했거든요. 그는 1년간 유학이란 약속을 하고서는 2년이나 연장했어요. 우리들은 여간 젊지 않았구, 그는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하고 있찌 않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는 그에게 딴 애인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도 이혼하겠다면 반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답장이었구.... 그래서 헤어졌죠. 하지만 난 계속 그를 사랑해 왔어요." 캐더린은 눈물을 닦았다. "지금, 그는 나에 대해서 아주 나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나 봐요. 도덕성이 조금도 없다는 거죠."

"뿐만이 아니라, 그 자식이 있을 때는 언제나 내가 의식적으로 못된 짓만 해보이곤 했으니.... 그 자식을 자극하여 일부러 우리들 사이를 오해하도록 만들었으니까. 어쩌면 오늘 밤 일이 최후의 일격을 가했을 거야."

"오늘 밤엔 너무했어요." 캐더린은 울음을 삼켰다. 맥스의 팔이 더욱 힘세게 캐더린을 안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한 대의 차가 뒤에서 접근하여, 눈부신 헤드라이트로 소형의 스포츠카를 감쌌다. 그리고는 급격하게 커브를 꺾더니 캐더린의 집현관으로 향했다. "죤이에요." 캐더린이 중얼댔다. "이것으로 최악의 일을 믿을 거예요." 또 눈물이 솟구쳤다. "맥스, 나 이젠 더 견딜 수 없어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아마 반드시 무슨 일이 있을 거요, 달링. 내가 말하죠. 한번 말해보겠어. 그러니 당신도 곧 잊어 줘요.... 당신을 사랑해요, 캐더린. 눈치 채지 못했어? 아이러니컬한 얘기지.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여성 중에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당신 하나뿐이야. 그런데 재수 없게시리, 상대는 결혼을 원치 않는단 말이야."

", 맥스. 나는 뭐라고 말해야 되죠?"

"아무 말하지 말아요, 달링. 한마디도 하지 않아도 돼. 나는 꼭 말해 두고 싶었을 뿐이니까. 아마 아버지도 눈치챘을 거요. 입 밖에 내진 않으셨지만."

맥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제군. 어떻게 해야 될지 나도 도무지 모르겠어."

"이제 집으로 들어가야지. 죤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제프도 없구.... 맥스, 부탁해도 돼요? 파티에 돌아가면 제프와 헬렌을 데리고 와줘요. 죤이 돌아왔으니 차가 없잖아요."

"그대 분부라면 뭣이든 하지. 작별의 키스해도 돼요?"

캐더린은 얼굴을 들었다. 맥스는 우아하게 키스했다.

"이제 울지 말아요. 나도 좀 생각해 볼께."

"안녕, 맥스. 내일 아침에 당신 아버지께 문병 가겠어요. 우리들 사이가 어찌 되건 그것만은 하겠어요."

"알았어, 캐더린. 열 한 시경에 올께."

캐더린은 차에서 내렸다. 맥스는 손을 흔들며 다시 아네트의 맨션으로 달렸다.

 

일요일, 캐더린은 하루종일 약혼자 집에서 보냈다. 캐더린을 집에 데려다 준 맥스는 이윽고 외출한 뒤, 저녁 때가 되어 다시 돌아와 캐더린을 바래다주었다. 캐더린은 눈물이 글썽해 있었다. 프랜시스가 고마워하던 것이 언제까지고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이튿날 밤도 프랜시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수화기에 나온 사람은 맥스였다.

"아버지 건강은?"

"나아지셨어요. 아직도 내일의 학회 참석을 단념하지 않으시는가 봐요. 역에서 당신과 만나시겠대요. 열차 시간을 알려 달랬으니까."

캐더린은 시간을 가르쳐 주며, 기다릴 만한 장소를 전했다.

"아버님께 안부 전해요, 맥스. 사랑하고 있다구. 빨리 완쾌하시길 빈다구요."

"당신이 그렇게 말하라면 전해 두지, 캐스. 그쪽 문제는 어찌 되었어?"

캐더린은 소리를 낮추었다.

"좀 나아졌어요, 맥스. 생각했던 것처럼 심한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안심이 되는군. 아주 기뻐요. 안녕, 캐스."

"안녕, 맥스."

 

캐더린은 열차 밖에서 약혼자를 기다렸다. 모피의 깃을 세우고, 이른 아침의 냉기에게서 볼을 지킨다. 역의 시계는 출발하기까지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음을 가리키고 있다. 역에는 죤들과 같이 와서, 그 차를 제프가 운전하여 돌아가고, 죤도 친구들과 함께 열차에 탈 거라고 일러 놓고 가버렸다.

5분 전이 되자 맥스가 개찰구를 빠져나와 달려왔다.

"미안, 캐스." 맥스는 헐떡이며 말했다. "아버지는 못 오셔. 아침에 일어나긴 하셨지만 역시 여행은 무리야. 당신만 가라는 거야. 기분전환도 할 겸."

"가고 싶지 않아요, 맥스." 캐더린은 슈트케이스를 들며, 맥스와 함께 돌아가려 했다.

"가지 않으면 안 돼요, 캐스. 가지 않음 아버지가 실망할 거요. 당신에겐 휴양이 필요해요." 맥스는 팔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가야지. 이틀 뒤에 나도 떠날 거요, 또 해외로. 그게 내 일이니까. 캐더린.... 마지막으로 작별의 키스해도 좋겠어?"

캐더린은 얼굴을 들었다.

"누가 봐도 알 바 아니야." 맥스는 중얼거리면 캐더린을 양팔로 안았다.

"당신이 어느 길을 택하건 행복해 줄 것을 기도하겠어."

길고, 다정한 키스였다. 캐더린의 눈에는 눈물이 넘쳤다.

"안녕, 맥스. 당신과 그 동안 재미 있었어요."

맥스는 아무도 승차하지 않은 객실에 캐더린을 태우자, 슈트케이스를 선반에 얹어 주고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천천히 열차는 움직였다.

 

12

<타워 호텔>이 학회 관계자의 숙소였다. 회색의 석조로, 크고 당당한 건물이다. 설계의 모티브가 큰 탑과 작은 탑의 결합으로 된 모양이어서, 외관은 견고한 성을 연상하게 했다. 그러나 한 걸음 그 안에 들어서면, 쾌적한 현대식 호텔이다.

열차 안에서 죤이 학장에게 인사하러 나왔다가 캐더린 혼자뿐인 것을 알고, 곁의 자기네 객실로 데리고 가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래서 줄곧 죤과 같이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죤의 애인으로 오해되어 자주 놀림감이 되었다. - 저것 봐, 둘 다 뭘 보나 싱글벙글 아니야? 저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지. 어쩌구 하면서.

캐더린은 화장을 고치고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다. 흰 테이블보를 씌운 많은 식탁과 번쩍이는 식기의 열에 어리둥절해졌다. 죤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고 식탁은 모두 만원이다. 할 수 없이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말을 건네 왔다.

"미스 스웰."

돌아보니 열차에서 알게 된 학자들의 아내 중 한 사람인 베티 우즈였다.

"댁의 자리를 마련해 뒀어요. 나는 남편에게서 쫓겨났는데 댁도 죤이 팽개쳐 버렸군요."

충심으로 감사를 표하며 캐더린은 베티의 옆 자리에 앉았다. 베티가 같은 식탁의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 주었다.

"댁께서도 우리들과 같나요?" 왼쪽에 앉아있는, 멋진 파란 테의 안경을 걸친 화사한 젊은 여자가 물었다.

"아니에요, 비비안느." 베티가 대신 대꾸했다. "우리와 같아요, 여기선. 학자님이 아니시니까."

"혼자서 오셨나요?" 하고 비비안느가 또 물었다.

"아니, 죤 라이트와 함께예요. 그의 친구예요. 그렇죠, 미스 스웰?"

". 케더린이라 불러 주세요."

"난 베티라고 해요. 이 분은 비비안느 그레이. 총명한 학자 중의 한 분이시죠."

"그래요, 죤의 친구세요?" 비비안느는 갑자기 흥미를 보였다. "죤과는 어디서 만나셨나요?"

캐더린은 반문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럼, 죤을 아세요?"

"닥터 라이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이 학회의 숨은 실력자의 한 분이거든요."

"두뇌가 명석하대요, 캐더린." 베티는 죤 쪽을 바라보며 말해따. "미래의 스타라고 말한 사람도 있어요. 물리학의 교과서도 두 권이나 썼죠. 모르셨나요?"

베티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하긴 같이 있을 땐 그런 얘기 할리 없겠죠. 그렇죠?"

비비안느는 불가사의하다는 듯 캐더린의 반지를 살피고 있었다.

"약혼하셨군요! 언제 죤과 결혼하시나요?"

베티가 도와주었다.

"오는 도중에도 여러 가지 물어 봤지만 두 분 다 그 점에 대해서만은 입을 다물어 버렸어요. 아마 비밀인가 봐요."

그 뒤, 식탁의 화제는 개인적인 문제로부터 멀어져 갔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가 오자, 비비안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죤의 테이블에 접근해 갔다. 비비안느가 무엇인가 말을 건네자 그 테이블의 전원이 캐더린을 응시했다. 어떡하지? 캐더린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두가 죤과 자기와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죤은 내가 온데 대해서 또 화를 낼 거야.

"죤의 곁에 앉아 있는 매력적인 젊은 여자 분을 보세요. 물리학자로는 보이지 않겠죠? 미들랜드의 여자대학 물리학과의 주임교수예요. 벌써 몇 달 전부터 죤에게 작용을 미쳤죠 - 자기의 두뇌 이외에도 관심을 갖도록 말이에요. 그러나 지금까지는 잘 되지 않은 것 같아요. 같은 용어를 상용할 수 있게는 되었지만.. 그리고 저쪽 빨간 머리의 젊은 여성은, 그녀는 수학자이지만 아주 예전부터 죤의 꽁무니를 쫓고 있어요. 죤도 근무처가 같았으니 몇 번인가 데이트한 모양이지만, 그뿐이에요. 안됐어요...... 죤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는 여자를, 나는 이 방에 있는 분 중에서도 반 다스나 알고 있죠. 모두 총명하신 분들이죠. 지적 수준도 대등하고, 그런데도 죤 편은 모른 체하고 있답니다."

캐더린은 베티의 말 하나하나에 놀라고 있었다.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게도 캐더린에게 자랑하던 걸 프렌드들은 모두 어디있는 것일까? 그렇게 많은 <여자친구>는 모두 미궁 속의 여자가 되고 만다. 베티가 믿고 있는 것처럼 죤이 이성에 대해서 그렇게 신중하다고 하면, 도대체 아네트와의 일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베티가 뒤를 잇는다.

", 이걸로 왜 우리가 댁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아시겠죠?"

이때, 모두가 거의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장으로 가는 거야." 베티가 말했다.

"우리들도 갑시다. 회의가 아니라 쇼핑하러."

"당신은 뭘 하겠소?"

"나와 함께 가기로 했어요, . 내가 도와주기로 했어요."

캐더린은 좀 수줍어하며 죤을 쳐다보았다. 죤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나중에."

죤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동료들과 합류했다.

캐더린은 새 여자 친구들과 즐거운 오후를 보냈다. 함께 윈도우 쇼핑을 하거나, 선물을 사거나, 뒷골목의 그림엽서와 같은 다방에서 차를 마시거나 하면서. 그리고 학회의 파티 전에 호텔로 돌아왔다.

시간이 좀 있었으므로 급하게 샤워를 하고 디너를 위해서 옷을 갈아입었다. 짙은 핑크의 드레스가 다이아몬드의 브로치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화장을 마치고 머리를 빗은 뒤, 잠시 창가에 앉아 주변의 산들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풍경이 될 것이다. 상쾌한 봄날, 산꼭대기가 저녁노을을 받아 불타고 있었다.

방을 나가기 전에 약혼반지를 빼낼 결심을 했다. 오해를 받으면 자기나 죤이 난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억측에서는 해방돼야 한다. 캐더린은 라운지까지 가서 멈춰 서서 죤의 모습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불안해졌다. 베티는 남편과 함께 다른 사람들과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비비안느도 동료들과 열심히 무엇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캐더린은 돌아서자, 방금 내려온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이때 죤이 계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딜 가?"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까 당신 방을 들여다 보았는데..... 뭐 잊은 거라도 있어?"

"아니요."

"그럼, ."

"...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구, 그래서."

"달아날 셈이군? 맞지?" 죤은 캐더린의 팔을 잡았다. "그렇다면 나와 같이 있어요. 미아처럼 외롭게 보이는 당신을 방치할 순 없으니까. 혼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을까 싶었는데."

함께 라운지까지 내려오니까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열심히 살폈다.

"이리 와요, 캐더린. 내가 데리고 온 <친구>와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캐더린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어느 이름이나 얼굴도 제대로 일치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 친절했다. 서로가 건배했다. 한 남자가 옆의 사나이를 꾹꾹 찌르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젠 시간 문제군, 프랭크. 우리들의 죤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갖게 된 거야, 틀림없어."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한 말이었으나 그런데 음성은 유달리 큰 것이다. "그의 선택에는 찬성해. 하긴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였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프랭크가 끄덕였다.

"이 방에서 실연한 여자가 많이 나타나겠는 걸. 젊은 닥터 라이트가 드디어 한 여자의 포로가 됐다는 걸 알게 되면 말일세."

죤은 난처해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둘에 둘을 플러스 해서 다섯이 되게 하는 건 좋지 않아. 나는 여자들의 수작에는 몇 해 전부터 면역이 돼 있다구. 지금도 마찬가지야. 네 말마따나 포로가 되진 않았어. 여전히 프리라구." 죤은 캐더린의 얼굴을 보았다. "우리들은 단순한 친구 사이라구. 그렇지, 캐스?"

"." 캐더린도 미소를 지었다. "단순한, 하지만 아주 친한 친구예요."

모두가 정답게 웃었다. 동료들이 죤을 존경하고 있는 것을 캐더린도 잘 알 수 있었다. 붙잡고 죤의 의견을 묻는 사람도 있고, 찾아다니며 어드바이스를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디너 땐 내 테이블에 와요, 캐더린." 식사를 알리는 벨소리가 울리자 죤이 말했다.

자리에 앉자 죤은 캐더린에게, 오후 내내 어떻게 보냈느냐고 묻고는 대꾸에 귀를 기울이며, 베티와 친구가 된 걸 자기도 기쁘게 생각한단다. 그리고 이번에는 친구들의 활발한 전문 분야의 토론에 참가하여, 캐더린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캐더린은 죤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식사를 마치자 전원이 살롱으로 옮겨가서 교환회가 시작되었다. 베티가 경고한 대로 모두들 덮어놓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 잠시 동안 죤의 곁에 있다가, 슬며시 일어나서 살롱을 돌아보았다. 죤은 캐더린이 없어진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베티가 방황하는 캐더린을 찾아내고는 곧 자기 옆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

"또 버림을 받았군요? 나도 봅이 어디 있는지 몰라요. 토론에 열중하여 우리들의 존재를 망각해 버린 모양이에요."

베티가 오늘 가보지 못한 곳은 내일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

"공원에 들렀다가, 동산에 올라 경치를 구경합시다. 박물관에도 가고 싶구요. 어딘가 밖에 나가 점심을 들지 않을래요?"

캐더린도 대찬성이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곧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고는 시간이 상당히 늦어져 피로했으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죤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친구들의 그룹의 중심에서 활발하게 토론하고 있는 중인 모양이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잠자코 방으로 돌아갔다.

 

이튿날은 일찍 잠에서 깨었다. 푸른 하늘과 봄의 향기에 끌리어 아침식사 전에 호텔의 뜰을 한 바퀴 돌았다.

캐더린은 계단을 달려 올라가서 호텔의 정면 입구에 뛰어 들었다. 볼은 빨갛게 물들었고 전신에 생기가 솟아났다. 죤이 캐더린을 찾고 있었다. 초조한 모양이다.

"어디 갔었소? 당신 방에 가 보았는데, 또 사라지고 없지 않아."

"산책 갔었어요. 밖은 참 멋있더군요."

"미리 말해 주었으면 같이 갔을걸." 어쩐지 성이 난 것 같은 말투였다. "그리고 어젯밤엔 어딜 갔었소?"

"방으로 돌아와 잤었는데, 왜요?"

"나한테 말을 하고 가야지. 밤 인사도 하지 않구서."

"토론에 열중하신 것 같아서 방해될까봐 그랬죠."

"좋아. 이리 와, 식사가 시작됐어요."

이번에도 캐더린은 죤의 곁에 앉았다. 사방을 둘러보고 베티를 찾아내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늘은 하루종일 베티와 같이 있을 거예요. 같이 구경가기로 했어요!"

"미아는 되지 마." 죤은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치자, 죤은 캐더린에게 이렇게 이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밤, 디너 때 또 만나도록 하지."

멋있는 하루였다. 베티와 함께 산책을 하며, 동산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고 공원에서 쉬었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미상불 지쳐 있었으나 둘 다 행복했다.

디너의 자리에서, 죤에게 언제 강연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금요일 오전 중에." 죤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도 방청할 거요?"

같은 식탁의 베티가 놓칠세라 끼어들었다.

"물론 듣고 싶어 하죠, 그녀는. 그리고 아무리 박사께서 성과가 나빠도 그녀만은 훌륭하다고 생각할 거구요."

"그럼, 어쨌든 얻어 둔 입장권도 한 장만은 사용하게 되는군. 금요일에는 나에게 말해 줘. 베티, 댁에선 어쩔 셈이에요?"

"캐더린과 마찬가지예요. 나두 입장권을 강매 당했거든요."

이날 밤, 죤은 캐더린을 방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캐더린, 내일 오후와 저녁은 자유 토의와 간담회가 있어요. 별 일 없으면 나와 함께 보내지 않을 테야?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면 그렇게 말해요."

죤의 평소와는 달리 자신이 없는 듯한 말투에 캐더린은 오히려 감동을 받았다.

"기꺼이 그렇게 하겠어요, ."

"파피리온 가든에 가보려는 거예요. 회의장에 갈 때마다 잠깐씩은 보아 왔지만 한번 본격적으로 봐 두고 싶거든. 그럼 약속했어요, 알겠지?"

캐더린은 끄덕여 보였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럼 안녕, 캐스."

"편히 쉬세요, ."

죤은 도어께에서 돌아다 보며, 미소를 짓고 방을 나갔다.

 

이날 오후는 날씨도 좋았다. 두 사람은 따뜻한 햇볕 속을 거닐었다. 잔디밭 사이의 오솔길을, 꽃봉오리가 잔뜩 열린 나무 아래를. 두 사람의 손이 서로 닿고, 혹은 서로 잡으며. 정처없이 걷고 있는 동안에 죤의 마음이 풀리어 가고 있다는 것을 캐더린은 알 수 있었다. 자기를 바라보는 죤의 눈동자에 이상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따라서 캐더린의 고동소리도 높아갔다.

"어디 좀 앉을까, 캐더린? 너무 걸었더니 피로하군."

두 사람은 오솔길을 약간 벗어난 곳의 초지를 발견했다. 죤이 코트를 펴고, 둘이는 그 위에 앉았다. 이윽고 캐더린은 벌렁 누워 양손을 잡고 머리에 감쌌다. 줄곧 지저귀는 새소리. 이대로 그냥 잠이 들 것 같다. 죤이 바로 곁에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캐더린은 행복했다.

"무슨 생각에 그렇게 잠겨 있지, 캐스. 맥스 생각?"

한 팔을 짚고 반쯤 상체를 일으킨 죤이 내려다보았다. 캐더린은 깜짝 놀라 회상에서 깨어났다.

"어째서 내가 맥스에 대해 생각해야 하나요?"

"달리 아무도 없지 않아?" 죤은 나지막하게 이었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어. 그렇잖아?"

캐더린은 외면했다.

"알고는 있었어요. 맥스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으니까요."

"기분은 나쁘지 않지? 결국 여성은 모두, 자기가 사랑하고 있는 남성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행복을 느끼지 않소?"

", 그건 그렇겠군요."

죤은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더니, 이윽고 또 묻는다.

"왜 약혼반지를 빼버렸지, 캐스?"

"여러 사람이 연신 당신과 약혼했느냐구 묻지 않아요. 그래서 빼버렸죠."

"그렇게 내가 싫어?"

"아니에요. 나는 다만 당신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좋아하지도 않는 약혼자 역할까지 짊어지도록 할 수는 없지 않아요."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캐더린은 어째서인지 죤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마침내 죤이 입을 열었다.

"10년 전, 당신이 나에게 좋아하지도 않는 아내를 짊어지도록 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오?"

캐더린은 반사적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제프가 얘기했던가요?"

"그렇지 않아." 죤은 미소를 지었다. 찾아 헤매던 복잡한 문제에 대한 답변을 이제 간신히 발견하기나 한 것처럼. "허구 많은 중요한 과학상의 발견을 성취한 방법을 응용해 보았을 뿐이야 - 직감으로 겨냥을 맞히고, 어둠 속에 부딪쳐 본 거지."

죤은 만족스럽게 숨을 내뿜더니 잔디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나 곧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서로 포옹하고 있는 연인들을 보고 있으니까, <봄의 피버>란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납득이 될 것 같군."

죤이 몸을 굽혀 왔다. 캐더린은 눈을 뜬 채 3센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상대의 눈을 정면으로 보았다.

"피버는 전염되지, 캐스. 난 벌써 전염되고 말았어. 당연히 당신에게도 이 열병을 옮겨줘야겠는걸."

실로 조용히 죤의 입술이 접근해 와서 캐더린의 입술에 겹쳐졌다. 오랜, 아득한 시간이 흐르고 겨우 죤은 얼굴을 들었다. 죤의 눈빛이 캐더린에게는 눈부셨다.

"이번에는 당신이 키스해 줘." 죤이 속삭였다. "답례로 당신이 키스할 차례야. 캐스."

캐더린은 상대의 요구를 거역할 힘이 이미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수줍은 듯이 양손을 죤의 뒷덜미에 감고 살며시 끌어당겼다. 캐더린은 스스로 입술을 가지고 가서 키스했다.

캐더린은 눈을 감은 채 잔디밭 위를 뒹굴었다. 겨우 용기를 내어 죤을 정면으로 바라보니 죤은 캐더린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죤은 일어서자, 캐더린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일어서!"

죤이 코트를 다 입자,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고 천천히 공원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도중의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고 둘은 벤치에 앉았다.

"회의에서 빠져나온 건 우리 둘만이 아니군." 죤이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오후에,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제법 많은 사람을 만났는걸."

죤의 말을 들은 순간, 뭉게뭉게 의혹의 구름이 피어올랐다. 캐더린의 따사로왔던 마음속은 갑자기 싸늘해져 갔다. 불길한 망령을 내쫓을 힘이 캐더린에게는 없었다. 그에게 명확히 물어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그 중에는 당신이 떨쳐버리고 싶었던 여자들도 있었을 텐데? 그래서 나에게 키스한 게 아니었나요?

캐더린은 소리를 내어 울부짖고 싶었다. 마음속에서 자기 자신을 나무랐다 - 왜 오늘 같은 날에 죤에 대한 감정을 털어놓았을까! 죤은 다만 여성들에게서 쫓겨 다니는 것이 귀찮아서, 다만 자기를 지키기 위한 연막으로 나를 이용하고 있는 있는 것이다!

호텔로 돌아오자 두 사람은 정면의 입구에서 헤어졌다.

"옷을 갈아입고 올게요."

겨우 죤이 놓아 주어 캐더린은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라운지의 입구께에서 캐더린은 또 다시 죤에게 붙들렸다. 죤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리 와, 부끄러워하지 말구."

"당신들을 공원에서 봤어, ." 톰 브레드폼이 스쳐 가면서, 의미 있는 눈초리를 하고 말을 건넸다.

"나두요." 베티도 의미 있게 맞장구를 쳤다. "이미 이렇게 되면 변명해 봤자 소용없겠어요, 그렇죠? 두 분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시늉은 그만 내세요."

죤은 그들에게 어쩔 도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다정한 눈빛으로 캐더린을 보았다.

"알았소, 알았어요."하며 팔을 캐더린의 허리에 감았다. "인정합니다." 그리고 캐더린의 귀에 속삭였다. ", 캐스, 최고의 연기를 부탁해요. 그들의 소망에 대응해 줘야지 않아. 오랫동안 이 장면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캐더린은 죤의 눈에 미소를 보냈다. 비록 죤에겐 연기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캐더린에겐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죤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캐더린도 죤의 허리에 팔을 감아? 그런 자세로 두 남녀는 라운지를 가로질러 긴의자 쪽으로 갔다. 젊은 여성들이 일제히 목을 길게 빼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질투하고 있군! 캐더린은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진실을 알게 되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텐데!

두 사람은 곁에 나란히 앉아 손을 마주 쥐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이거 한 잔 마셔야겠는 걸. 축하해 줄 가치가 충분히 있다구. 우리들의 죤이 드디어 포로가 됐으니."

"그러나 말이야," 죤이 한 손을 들고 상대를 바라봤다. "아직 결혼한 건 아니야. 아직도 사고의 가능성이 지대하도다, 일세."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모두에게 술이 돌려졌고, 전원이 <행복스런 커플을 위해서> 건배했다.

"알겠지, 모두." 마침내 죤도 연극이 도를 지나쳤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나는 아직 약혼조차도 하지 않았다구. 서둘지 마! 레이디가 노할지 모르잖아."

"레이디의 표정을 살펴보건대, 염려 놓아도 좋겠다!"

모두가 와,하고 웃었다.

"명연기군." 죤이 살짝 속삭였다. "너무 박진력이 있어서 사실, 내 자신까지도 진짜로 받아들여질 정도야."

디너가 끝나자 죤이 캐더린의 귀에 속삭였다.

"산책하러 나가지 않겠어, 캐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걸 - 아니, 모두들 기대하고 있으니까."

캐더린은 끄덕이고 코트를 가지러 계단을 뛰어갔다.

손을 잡고 두 남녀는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캐더린은 잡았던 손을 놓고, 코트를 여미고는 양손을 포켓에 꽂았다. 몸이 조금 떨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밤의 냉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추워?"

"조금."

"좀 더 가까이 오면 내가 따뜻하게 해 줄께." 죤은 양팔로 캐더린을 안으려 했다.

"이젠 그런 시늉 낼 거 없어요, ." 캐더린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여기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잖아요."

죤은 말없이 캐더린을 포옹한 채였다.

"당신을 이런 궁지에 몰아넣어서 미안하오. 이렇게 되리라고까지는 생각지 못했어요. 하지만 염려 마. 내일 점심때쯤 학회는 끝날거고 그렇게 되면 연극을 할 필요가 없게 되니까. 원상태로 돌아가는 거지. 좋지?"

이번에도 캐더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학회가 끝난 후 나는 맨체스터의 누이동생에게 갈 거니까."

"그럼, 나와 같이 돌아가는 게 아닌가요?"

캐더린의 마음은 침울해졌다.

"그래, 안심했지?"

캐더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둘이는 어두운 거리를 걸으며, 집과 가게와 뜰을 지났다. 두 사람 다 어디를 걷고 있는지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캐스, 가르쳐 주지 않을래? 옛날에 내가 미국으로 가버렸을 때, 당신은 이혼할 결심을 하고 그리고 나서 어떻게 했지?"

"잠깐 생각해 보구요. 아주 옛날 얘기잖아요. 그렇군요, 계속 일하러 나갔죠. 제프의 공부를 계속시키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구요. 할머니께선 하숙할 사람을 늘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겨우 살아갈 정도였으니까요."

죤이 사방을 둘러보며 멈춰 섰다.

"어쩐지 우리들은 미아가 된 것 같은데."

"호텔의 여러분이 좋아할 거예요. 아마 이것도 증거가 된다고 하면서 말예요."

둘이는 소리를 맞춰 웃었다.

"되돌아가서 돌아갈 길을 묻는 수밖엔 없겠어."

간신히 호텔에 도착한 두 사람은, 내부의 조명에 눈부셔 했다.

"길을 잃어버려서."

죤이 모두에게 말했다. 그로서는 관객 앞에서의 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캐더린은 진심으로 상대역을 맡아 했다.

"정말이에요. 하지만 멋있었어요."

모두가 와!하고 웃었다. 코트를 방에 두고 돌아오니까 당연하기나 한 것처럼 죤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바로 난롯가였다.

죤이 캐더린의 몸에 팔을 돌리자, 캐더린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얼마나 진지한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죤은 캐더린의 머리에 볼까지 부비고 있었으니까. 캐더린이 죤의 얼굴을 쳐다보니, 이번엔 죤이 이마에 키스했다.

라운지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 연기는 여간 흡족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언의 갈채를 보내며 더 계속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였다. 캐더린은 죤이 너무 무리하게 연기하지 말라고 속삭일 줄 알았는데, 아무 말이 없다. 이윽고 귓가에 속삭였다.

"더 계속해요, 달콤하게. 모두 황홀한 모양이오."

너무나도 부드러운 말씨에 캐더린의 볼이 빨개졌다. 그러나 마침 화제가 또 학회 얘기로 바꾸어진 때였으므로 아무도 캐더린의 당혹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죤도 즉각 토론에 참가했다. 오늘 밤은 캐더린은 다만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였다. 죤의 옆에 앉아 죤의 팔에 안겨 있기만 하면 그밖의 일은 이미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밤이 깊어오자 가벼운 야식과 홍차가 나왔다. 그것이 끝나자 사람들은 방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캐더린은 하품을 깨물며 참았다. 이 위장된 연애극의 멋있는 마력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죤이 곧 눈치 채고 물었다.

"졸려?"

캐더린이 끄덕이자 죤이 긴 의자에서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 자세로 손을 놓지 않고 둘이는 계단을 항하여 걸어갔다.

"놀랐어." 누군가가 말했다. "둘 다 아주 녹아버렸군."

"내일 아침에 뵙겠어요, 캐더린." 베티가 말을 건네왔다. "내일은 회의장에서 굉장히 어려운 강연을 들을 각오를 하세요."

캐더린은 열쇠를 꺼내어 방의 도어를 열고, 돌아서서 죤을 마주 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안녕, ."

캐더린이 방으로 들어가려 하니까, 죤이 그 손을 끌어당기려고 했다. 캐더린은 거절했다.

"이미 연기는 필요 없어요, ."

"그러지 마, 캐스." 죤은 말을 끊고 어깨를 들썩였다. "그렇다면, 안녕."

죤은 서둘러 자기 방까지 가서 도어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캐더린은 방에 불을 켜지 않았다. 창가에 서서 오랫동안 밤의 어둠을 지켜보았다. 눈에 가득 눈물이 고인 채.

캐더린과 베티는 학회의 마지막 행사에 만족했다. 내용에 있어서는 거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죤의 화술은 썩 교묘했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청중의 반응을 가지고 판단하자면 정확하고 훌륭한 내용이었던 모양이다. 박수가 회의장에 울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캐더린 자신도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거의 한 마디도 이해를 하지 못했으면서도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베티가 캐더린의 열중한 태도를 놀렸다.

"난 하마터면 댁도 학자의 한 사람인가 생각할 뻔했어요. 그렇게도 열렬한 박수를 보냈으니 말이예요. 댁의 이해력도 나와 같겠죠? 만일 그렇다면 영점일 텐데.."

캐더린은 긍정했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죤이 멋있었다는 사실만은 절대적이라구요!"

점심 뒤, 죤이 고집을 세워 캐더린의 계산을 지불하고 함께 역까지 갔다. 그는 베티 내외와 함께 남쪽으로 가기로 돼 있다.

"멋진 주말을 즐기세요." 캐더린은 플랫폼에서 죤에게 말했다. "그리고 대학엔 언제 돌아오시나요?"

"월요일 오후가 될 거야. 그때까지 휴가원을 제출해 뒀어요."

"오전 중으로 가급적 잡무을 다 처리해 두겠어요."

죤은 싱긋 웃어보였다.

"고마워요, 미스 스웰. 내가 평소에 말했지않아, 당신은 제일급의 비서라구. 당신 없인 어찌할 바를 모르겠단 말이야."

죤이 손가락을 캐더린의 턱에 대고, 얼굴을 들게 했다. 다른 사람들이 두 사람을 불렀다.

", 두분도 마침내 작별이군. 안녕해야지, 2분 뒤엔 열차가 출발하니까."

"월요일까지 이별이야, 캐스. 당신에게 키스해야 할 시간이야. 염려 마, 이게 마지막이니까."

캐더린은 죤의 팔에 안겼다. 언제 끝날지 모를 것 같은 오랜 키스. 얼굴이 떨어졌을 때, 캐더린의 눈엔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진짜야?" 죤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니면 연극이야? 만일 그렇다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명배운데."

"안녕, ."

캐더린은 객실로 들어가 창에 느슨하게 기대었다. 열차는 움직이자 곧 속력을 냈다. 죤이 플랫폼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차바퀴가 고통에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마찰하는 소리를 내며, 결정적으로 캐더린을 죤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았다. 죤의 모습은 금방 조그마해지고, 이윽고 시계에서 완전히 사라져 갔다.

 

13

지쳐서,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은 채 캐더린은 집으로 돌아왔다. 월요일까지 죤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때까지의 긴 시간을 생각하는 것조차도 무서웠다. 마치 일생동안을 기다리는 느낌일 것 같았다.

이층에 올라가 제프에게 백스톤의 여행 얘기를 들려 주었다. 물론 그 짧은, 위장한 약혼에 대해선 비밀로 해 두었다. 남에게 얘기해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소중했던 것이다.

제프가 헬렌에게로 가버리자 캐더린은 우울한 마음으로, 돌아오면 전화하겠다고 한 프랜시스와의 약속을 상기했다.

"프랜시스? 이제 돌아왔어요. 캐더린이예요."

", 건강은 괜찮소, 달링? 잠깐동안의 휴가도 즐거웠구?"

"아주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프랜시스. 생각한 것보단 훨씬 멋있었어요."

"지금 돌아왔소?"

", 방금 차를 마셨어요."

"나도 마침 나가려던 참이오. 죠지 크레스웰에게서 초대를 받았지. 당신은 피로할 테니까 못 갈 거라구 말해 두었는데, 잘 했는지 어떤지? 아니면 같이 가겠소?"

"그건 무리예요, 프랜시스." 캐더린은 당황해서 말했다. "완전히 지쳐 있거든요. 거절하신 건 잘 하신 거예요."

"월요일까지는 당신을 만날 수 있을지 어떨지 확실치 않군. 주말에는 동생네 집을 방문할 약속을 했거든. 회복한 후의 기분전환도 겸해서."

"잘 하셨어요, 프랜시스. 휴양이 중요하죠. 즐기시고 오세요."

", 달링. 전화 고맙소. 그럼 안녕."

"안녕, 프랜시스."

캐더린은 조용히 수화기를 놓고 불기 없는 난로 옆의 의자에 느슨하게 앉았다.

이제야 말로, 자기 마음 속에 죽치고 앉아 있는 의혹과 대결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견고하게 가둬 둔,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밀과 대결하지 않으면 - 캐더린은 자기 마음을 완전히 해부하듯 하여, 의혹과 비밀을 후벼내어, 하나하나를 살펴갔다. 결론은, 어떤 조건이 있어도 프랜시스 라트랜드와는 결혼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확신이었던 것이다.

캐더린은 프랜시스에게서 받은 팔목 시계를 만지며 반지를 잡아당겼다. 빼내어 버리고 싶었다. 이때, 명확히 캐더린은 알 수 있었다 - 자신이 월요일 오전 중에 해야 할 일을. 죤이 돌아오기 전에 프랜시스를 찾아가 자기 결심을 전하는 일. 용서하세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해해 주세요, 라고.

 

일요일 밤, 잠결에 캐더린은 현관의 도어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눈을 떴다. 방금의 소리는 죤의 것이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프롭이 저렇게 낑낑대고 있으니까. 아니, 프롭만이 아니다. 캐더린도 그냥 누워 있을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었다. 죤이 예정보다 빨리 돌아온 것이었으니까. 이층에서 남자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캐더린은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대학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캐더린은 옆방에 죤이 있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브러시로 머리를 단정히 빗고 루즈를 약간 짙게 칠했다. 거울 속에서 반짝이는 눈동자가 쳐다보고 있다. 역의 플랫폼에서 작별의 키스를 했을 때의 감각이 그대로 살아났다. 죤이 바로 곁에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만으로도 벌써 캐더린의 마음은 설레는 것이다.

내선의 벨이 캐더린을 현실로 끌어들였다. 죤의 음성이다.

"미스 스웰? 방으로 와 줘요."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죤은 정말 이런 차가운 음성으로 말한 것일까? 장난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캐더린은 미소를 띠며 도어를 열었으나 죤은 얼굴을 들지도 않았다.

"앉아."

캐더린은 상대의 초조한 말투를 모른 체하고 상냥하게 응대했다.

"일찍 돌아오셨군요, ."

"."

"주말은 어땠어요? 즐거우셨죠?"

", 앉으라니까."

죤이 책상에서 눈을 들었다. 소태잎을 씹고 있는 듯한 얼굴은, 눈 아래 그늘이 진 탓인지 더욱 엄격하게 보였다. 캐더린은 너무나 뜻밖이어서 훅 숨을 삼켰다.

"몸은 괜찮아요, ? 어디 나쁘지는 않아요?"

"아아니, 아무데도. 그리고 내 건강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는 당신에게는 전혀 없어요. 그 전에도 분명히 말해 두었잖아."

캐더린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죤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드는 것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무심히 상대의 불쾌한 얼굴을 모른 척하고 캐더린은 이렇게 묻고는, 아차, 묻지 말 것을 하고 곧 뉘우쳤다.

"또 담배를 시작하셨군요, ? 당신... 여행 중엔 한 번도 피우시지 않으셨잖아요, 그렇죠?"

천천히, 침착하게 죤은 불을 붙인 담배를 재떨이에 놓고는,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상체를 내밀었다. 그 표정은 차돌과 같이 냉랭했다.

"알겠어? 분명히 해 두지. 앞으로 두 번 다시 말 시키지 마. 나는 자유의 몸이야. 알겠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 여행 중의 일을 집요하게 생각해 내고 있는 모양인데, 지금은 아무도 보고 있질 않아. 따라서 이미 연기할 필요가 없어졌지. 우리는 평소의 상태로 되돌아 온 거예요. 내가 내 건강이나 생활을 어떻게 하건, 그건 분명히 내 문제인 것이지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야. 그러므로 이후, 당신이 결혼하여 이 직장에서 떠날 때까지 당신은 단순히 내 비서에 불과하다고만 생각해 줘요. 내 보호자도 아니요, 내 아내도 아니요, 내 걸프렌드도 아니야. 알겠어?"

캐더린은 창백해지며 눈을 내리깔았다.

"문제가 나온 김에 지금 말해 두는 게 좋겠어. 이사할 준비가 끝나는 대로 나는 당신네 집을 나와 가구가 있는 맨션으로 갈 거요. 오늘 아침, 편지로 알려온 물건은 나에게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해요. 오늘 밤에 그걸 보고 나서 마음에 들면 수속을 마칠 셈이니까."

내선의 벨이 울렸다. 캐더린에게는 이미 수화기를 들 기력도 없었다. 절망에 온 몸이 마비된 느낌이었다. 죤의 철저한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돼버렸는가? 누이동생이 뭐랬을까? 설마, 그럴 리는 없다. ..... 전화의 상대는 아네트였다.

"학회? 고마워요, 즐거웠소. 유쾌한 막간의 신파라고 해 둘까. 아니, 로맨틱한 건 아니었어. 전에 말한 대로 말이오. 천만에. 나는 어떤 여자의 포로도 되지 않아요. 오늘 밤 가기는 가겠는데 그 전에 맨션을 봐 둬야지. 가능성은 있지. , 같이 가 봐도 돼요, 당신만 상관이 없다면. 그럼, 다섯 시쯤 사무실로 내가 가지."

죤은 쾅,하고 수화기를 놓았다.

", 일을 시작해야지."

그러나 캐더린은 슬픔 때문에 선 채 떨고 있었다. 죤은 얼굴을 들고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미안해요, 닥터 라이트. 누구에게나 인내의 한계란 것이 있는 법이예요. 나도 그 한계에 이르렀어요. 새 비서를 찾아보시는 게 좋겠어요. 나는 다른 직장을 찾겠어요."

죤은 손에 든 펜을 응시하며 뱅뱅 돌리고 있다가, 이윽고 포켓에 넣었다.

"그건 당신 혼자서 결정할 문제인데... 그러나 나도 당신 말이 옳다고 생각하오. 우리들의 어느 편에 있어서나 당신이 직장을 바꾸는 것이 좋아요. 과거의 관계가 끊임없이 공무에 개입하여...견딜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까."

또 벨이 울렸다. 죤이 받고는 수화기를 캐더린에게 건네주며, 학장의 비서로부터라고 했다.

", 열 시에 뵐 약속이신가요? . 그땐 시간이 날 거예요."

캐더린은 수화기를 놓았다.

"그때까지 일을 좀 해 둬야겠는데, 미스 스웰. 열한 시에 교육학부에서 회의가 있을 예정이니까."

어쨌든 두 사람은 일에 들어갔다. 캐더린은 이미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아무런 느낌도 없었으며, 또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죤의 말을 기계처럼 자동적으로 받아쓰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편지를 타이핑했다. 죤은 회의에 갔다.

 

프랜시스의 방에 들어간 순간, 캐더린은 평소와는 다른 얼음과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앉아요."

프랜시스가 의자를 가리켰다. 양손을 마주쥐고, 잠시 동안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까하고 망설이는 것 같았다. 이윽고, 무거운 어조로 조용히 시작했다.

"당신도 아다시피 금요일 밤에 친구인 죠지 크레스웰을 찾아갔소. 전혀 우연히, 나는 이삼일 동안 당신이 여행했다는 얘기를 했소. 행선지도......"

프랜시스는 눈을 크게 뜨고, 표정을 감춘 얼굴로 캐더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에 약간 핏발이 선 것도 캐더린은 느끼고 있었다.

"누구와 같이라는 것도. 그런데 부인께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어요 - 몇 해 전엔가 캐더린이 결혼하곤 곧 이혼한 상대가 아니냐구 말이오. 나는 그런 얘기는 모른다니까, 부인은 당황해 하면서, 당연히 아시고 있는 줄 알았다는 거요. 죠지가 그 이상 얘기하는 건 잘못이라고 부인에게 주의를 주었소. 진실을 말하는가 않는가는 내 약혼자의 마음에 달렸다는 겁니다. 나는 두 분에게서 그 이상의 말을 들어내지 못했소. 그러니, 아무쪼록 당신 입을 빌어 얘기해 줄 수 없겠소? 지금 곧 이 자리에서. 그 내외가 한 말이 사실이오?"

캐더린은 말을 더듬으며 얘기했다.

"죄송해요, 프랜시스.... 사실입니다. 당신이 나를 미망인이라고 믿으신 것을 그대로 두고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도 죄송스럽게 생각해요. 몇 번 얘기하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것만은 믿어 주세요. 맥스에게서 당신이 이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신지 벌써 들었습니다......"

"그 전 남편과는 얼마동안 같이 살았나요?"

프랜시스의 음성은 굳어 있었다.

"결혼 생활은 6개월이에요. 유기를 이유로 이혼을 신청하여, 판결이 내릴 때까지 명목상으로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만. 그는 유학을 했었거든요... 두 번 다시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말씀드리면, 지금까지 계속 나는 남편과 이혼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어요. 그를 사랑하니까요."

캐더린은 크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이렇게 돼서도, 또 앞으로도 계속 후회할 거예요."

캐더린은 반지를 뺐다.

"우리들의 약혼은 틀림없이 끝장입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려서, 이 주말 동안에 이미 결심했었습니다."

반지를 받으면서 프랜시스는 목쉰 소리로 말했다.

"나두 말이야, 몇 번인가 의심한 적이 있었어요. 당신과 맥스가 같이 있을 때를 보면, 실로 불쾌한 일이지만 우리들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 사표를 내겠습니다. 대학에서 떠나려고 합니다."

프랜시스는 조용히 끄덕였다.

"모든 상황을 생각해 본즉, 나도 당신이 취하는 길은, 가급적 일찍 이 직장에서 떠나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이 마을을 떠날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바요."

캐더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목에서 시계를 끌렀다.

"이것도 내가 가지고 있을 물건이 아닙니다. 선사해 주신데 대해서 감사합니다. 프랜시스, 모든 일 고마웠어요. 안녕히 계세요."

상대는 대꾸가 없었다. 다만 의자에 앉아, 아직도 마주 쥐고 있는 자기 양손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캐더린은 제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같은 아침에 두 사나이에게서 냉정하게 떠밀려 상처를 입은 것이다. 생각을 이리저리 정리해 보는 것이었으나 하나도 질서가 서지 않았다. 결정적인 한 생각이 다른 모든 생각을 밀어내고 있었다. - 될 수 있는 한 빨리, 될 수 있으면 멀리 이곳에서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

, 가자. 오후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바로 지금.

타이프라이터에 종이를 끼고 사표를 쳤다. 사전 통고기간을 일하는 것보다는, 이달의 봉급의 전체를 포기한다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추가했다 - 수신처를 학무처장 앞으로 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투함하기로 결심했다.

코트를 입고 사물을 정리했다. 제프를 만나려고 직원실을 들여다보았으나 눈에 띄지 않았고 그 대신 헬렌이 달려왔다.

"웬일이야, 캐스? 안색이 나빠요."

"대학을 그만 두겠어, 헬렌."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이유는 말할 수 없어요, 지금은. 다만 제프에게 그렇게 전해줘, 알겠죠."

"어머, 잠깐이라도 앉아요."

캐더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말조차도 할 수 없었다. 복도를 달려가, 계단을 거쳐 현관으로 나왔다. 도어를 밀치며 밖으로 나오자, 순간 멈춰 서서 대학 건물을 돌아다보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일해온 직장이었다. 그리고 캐더린은 버스 정거장을 향하여 달려갔다.

현관의 도어를 연 순간 프롭이 달려와 발밑에서 애교를 부렸다. 캐더린은 쪼그리고 앉아, 개를 양팔에 안았다. 정말로 불행의 밑바닥에서, 이 개만이 따뜻하게 맞이하여 애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캐더린은 간소하게 점심을 개와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개를 집 안으로 밀어넣고, 현관도어를 닫고 밖으로 나갔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직업소개소에 가면 관청이나 회사의 구직 조건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나, 금방은 마땅한 직장이 없다. 담당 계원은 캐더린의 자격과 이력을 듣고나더니, 염려마세요, 불원간 당신에게 합당한 직장이 나타나리라는 것을 보증해 주었다.

캐더린은 해외에도 비서의 공석이 있는지 없는지 조사를 부탁할 예정이다. 신청서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와, 차를 마시면서 조사해 보았다.

얼마큼 시간이 경과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전화벨이 울리자 자동적으로 수화기를 들고 대꾸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캐더린은 수화기를 놓고 말았다. 아무와도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는데 - 죤이 상대라면 더욱 그랬다.

그 사람에게서 될 수 있으면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결심하고, 책상을 마주보고 앉아 몇 번이고 소개소의 신청서를 되풀이 읽었다. 이윽고 기재하기 시작했다. 성명 - 이 얼마나 장난스러운 운명이냐. 라이트라고 적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캐더린 라이트라고. 결혼은? 예스, 노우, 물론 노우지. 이혼이라고 써 넣어야지. 캐더린은 오랫동안 자기가 써 넣은 글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이 넘쳐 와서 손수건을 찾았다. 그래도 기입하는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연령, 학력, 경력, 희망 월급액 등등. 천천히, 정확하게, 소상하게 써 넣었다. 손을 멈추자 프롭이 찾아와서 무릎 위에 머리를 얹었다. 방심한 채 캐더린은 개를 쓰다듬다가 슬픔이 북받쳐 올라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은 이미 희망의 찌꺼기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개가 몸을 일으키며, 귀를 쫑긋 세우더니 현관을 향하여 달려갔다. 제프겠지, 하고 그녀는 중얼댔으나 그냥 선 채 요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프가 아니라 죤이었던 것이다. 죤이 개에게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돌아보니까 도어께에 죤의 모습이 있었다. 성이 나서 벌개진 얼굴로. 캐더린은 다시 또 비참한 꼴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당신은 어째 그렇소? 물론 나에게 한마디 예고나 설명도 없이 나가버린 걸 무슨 죠크쯤으로 여기고 있겠지?"

죤은 말을 중단했다. 그러나 캐더린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마, 내가 아침에 다른 직장에 가면 어떻겠느냐고 한 말을 곧이곧대로 해보이는 것이 재미있었겠지."

그래도 캐더린은 말이 없다. 죤은 더욱 심술이 난 모양이었다.

"어떻게 나 혼자서 일을 할 수 있겠어! 지난주부터 쌓인 일을 어떻게 혼자 처리해 나갈 수 있겠느냔 말이야!"

"그런 일 따위는 벌써 나와는 관계가 없지 않아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말조차도 힘이 없었다. ", 그만 두겠어요. 오늘 아침으로 사직했어요. 압력이 걸려 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아요?"

"압력이라구? 내가 압력을 넣은 건 아니야. 당신이 꺼낸 말 아니냔 말이야? 잊지 않았겠지? 나는 다만 당신 의견에 찬성했을 뿐이었다구!"

"당신이 그랬다는 게 아니에요. 학장이 내가 취할 길은 그것 밖에 없다는 거였어요."

"학장이? 도대체 무슨 못된 짓을 했길래 당신을 그따위로 해고시켰느냔 말이야."

"옛날에 당신과 결혼한 것 때문이에요. 이혼한 여자는 학장에게 있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우연히 결혼했던 상대도 알게 됐구요."

캐더린은 말을 끊었다. 그러나 죤은 대꾸는커녕 움쩍도 하지 않았다.

"난 물론, 내가 스스로 말할 참이었어요. 하지만 어느 편이었거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학장의 이혼에 대한 태도가 변하지 않는 이상, 일이 어떻게 진척되었다 하더라도, 결혼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건 어쨌든, 내 편에서도 그와의 결혼은 할 수 없었어요. 근래는 나 ..... 거의 그를 혐오하고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캐더린의 음성이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낮아 있었다.

"이 주말에, 당신이 계시지 않은 동안에 나는 약혼을 취소하려고 마음속으로 결심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학장이 먼저 말해왔을 뿐이죠. , 이것으로 내 얘기는 다 끝났어요."

죤이 가까이 걸어와서 캐더린의 왼손을 들었다. 반지도 없고 손목에는 시계도 없었다.

"그럼, 그 늙은이는 기념품까지 빼앗아 갔군."

죤은 캐더린이 기재한 용지를 훑어보았다.

"이런 짓을 하고 대체 어쩔 셈이오?"

"아까 직업소개소에 다녀왔어요. 돈이 없지 않아요. 직장을 빨리 구해야죠. 임시라면 있는 모양이지만, 그러다가 해외에 직장을 알아보고 나가겠어요. 물론 당신이 추천장은 써주셔야겠지만... 그것도 훌륭한 것으로. 해외의 경우에는 추천장이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니까요."

"그러면 당신은, 내가 훌륭한 추천장을 써 줄 의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만일 내가 거절한다면?"

캐더린은 힘 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안되면 직장을 못 구해요."

캐더린은 막연한 눈으로 죤을 쳐다보다가, 상대의 표정에 어리둥절해졌다. 잠깐 있다가 죤이 또 한 번 물었다.

"그렇게 해서 가급적 나에게서 멀리 달아나 있겠다, 이거지?"

"왜 그러면 안 되나요? 오늘 아침 말씀하신대로 지금의 나도 자유의 몸이잖아요. 언제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갈 수 있어요. 아무도 참견 못해요."

캐더린은 머뭇거리다가 곁에 있는 개를 쓰다듬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당신은 단순한 세든 사람으로 생각하심 돼요. 내 보호자도 아니구, ..... 더욱이 남편도 아니구, 보이 프렌드조차도 아니에요."

캐더린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얼굴을 개의 등에 대고 부드러운 털로 소리를 죽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개는 움쩍도 하지 않은 채, 다만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동물이면서도 이 여자가 얼마나 외로워 몸서리치고 있는가를 알고 있는 듯하였다.

죤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는 가급적 거리를 두려는 것이 당신의 버릇이야?"

"그게 어쨌다는 거예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캐더린의 소리는 흐려 있었다. 죤은 그 곁에 허리를 굽히고 앉아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 어떻게 그걸 안단 말이오? 단 한번이라도 물어본 적이 있어?" 캐더린은 움쩍도 하지 않았다. "물어봐요, 캐스. 지금 당장 물어봐요."

그러나 캐더린은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그 사나이가,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 물어봐요. 지금도 같은 방안에 있으면서, 죽고 싶도록 당신을 양팔에 안고 싶은지 어떤지 물어보라구."

캐더린은 그래도 움쩍도 하지 않았다. 죤은 일어서서 강한 어조로 말했다.

"캐스, 당신이 언제까지고 그렇게 고집을 세우겠다면, 마치 사나운 바다에 떠 있는 구명보트에서처럼 내 개에게만 매달려 있겠다면, 당신이 자진해서 내 품안에 뛰어 들려고 하지 않겠다고 하면, 나는 내 개를 당신에게서 뺏아야 하겠어 - 그런 짓을 하면 달링, 개가 부상을 입을지도 몰라요."

캐더린은 몸을 떨면서 왁 하고 울면서 일어서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채 죤에게 가서, 있는 힘을 다 하여 사내의 가슴을 두들기면서 매달렸다.

"! !.... ......."

캐더린은 속삭이듯 말하자, 그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죤의 팔이 강하게, 더욱 강하게 캐더린을 포옹했다. 그녀는 죤의 눈을 보며, 그눈 속에서 자기에의 깊은 사랑을 읽었다.

", 당신은 돌아오셨군요. 10년 만에! 나에게 돌아오셨어요...."

"그럼! 달링, 이제 돌아왔소. 그것도 영원히 당신 곁에서 떠나지 않을 채비를 마치고....."

죤의 입술이 캐더린의 입술에 겹치자, 이 세계는 이미 두 남녀 앞에서 멀리 사라져 가고 없었다.

 

제프가 현관에 들어서면서 소리를 질렀다.

"캐스. 도대체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제프는 누님의 거실을 들여다보았다.

"어이쿠 미안."

제프는 멈춰 서서, 다시 한번 소파에서 굳게 포옹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미안이라구? 이거 참 내가 그 따위 사과를 할 필요가 있었던가? 도대체 난 뭘 지껄이고 있는 거지? 가장 신나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는데 말이야. , 프롭, 이리 와. 헬렌에게 전화로 기쁜 소식을 알려줘야 하잖아. 그리고 나서 샴페인을 사자. , 이리 오라니까. 이 자식... 꼭 성대한 축하파티를 열어야 할 게 아니야!"

 

"당신은 아마 알고 있을 거요. 왜 오늘 아침에 그런 말을 당신에게 했는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주말을 누이동생의 가족과 함께 지냈지만 말할 수 없이 비참했었어. 당신 얘기를 했고, 당신에 대해서 생각했고,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구하면서 말이야. 불과 며칠 동안이었지만 학회에서 당신과 보낸 시간은 마치 파라다이스 같았어요. 정거장에서 헤어졌을 때, 나는 그 파라다이스에서 영원히 추방되는 기분이었소. 누이 집에서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것도 당신과 헤어져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아침에 당신을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당신을 친근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나는 머지않아 당신이 영원히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가 버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 이런 상태는 견뎌 낼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된 거요. 두 사람 중 누군가가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지. 당신을 내쫓든가, 내가 미쳐버리든가, 둘 중 하나라고 믿은 거요. 알아주겠지?"

", 당신은 몇 번이나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거예요. 그 편지만 해도......"

"그 편진 말이야, 달링, 다 내 지갑 속에 들어 있다구요. 당신은 진심으로 그런 일을 내가 저지를 줄 안 거요? 10년 동안이나 소중히 간직한 물건이었다구."

"왜 그럼, 그런 시늉을 했어요, ?"

"왜 그럼, 그런 시늉을 했느냐구? 그건 내가 물어 보고 싶은 말이오. 당신의 나에 대한 기분을 밝혀 보려고 여러 가지 수작을 연기했다구 생각하고 있는 거요? 제프에게서 당신은 아직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었는데."

"정말? 언제 일이예요?"

"당신이 처음으로 리허설에 나가던 날 밤. 그때 욕실에서 만났지 않아? 나는 도저히 제프의 말을 믿을 수 없었어. 하지만 제프의 말을 증명해 보고 싶었어. 왜냐면, 제프가 잘못 알지 않았다는 것을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그런데 당신은 끄덕도 하지 않았어. 처음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부터 당신 마음을 알려고 온갖 짓을 시도해 봤어요. 당신을 안아보기도 했고, 키스도 했고. 당신의 질투를 불러 일으켜 보기도 했고, 마침내는 당신을 모욕하여 내 팔 안에서 울려도 보고 싶었던 거요. 그러나 당신은 내 가슴 속에 파묻혀 울어주진 않았어. 그뿐 아니라, 내가 바라던 것을 나의 라이벌의 팔 안에서 한 거요. 적어도 그 당시는 그렇게 믿을 수밖엔 없었어."

"왜 맥스가 싫으세요?"

"그렇게 노골적인 질투를 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했소? 처음부터 맥스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건 알고 있었소. 당신도 정녕 맥스를 사랑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파티가 있던 밤, 나는 맥스에게 패배당했다고 생각한 끝에 미쳐버렸어요. 아네트의 침실에서는 당신에게 진짜 미안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지."

"하지만 죤, 그날 밤 나는 다시 살아났어요. 내가 구하던 곳에 되돌아왔다는 것을 명확히 의식했다구요. -- 당신 팔 안에서 말예요. 10년 전에, 당신이 없어진 뒤에 마음속에서 사라져 간 감각이 일제히 환호성을 올리며 되살아났으니까요."

"내가 키스할 때마다 차가운 얼음장이 조금씩 녹아든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 그랬었지?"

"그래요. 얼음의 여자에게 조금씩 따사로움이 살아나는 것 같았어요."

"당신은 알 수 없었어. 때로는 아주 순진한 여자라고 생각되기도 했고, 또 때로는 악녀의 표본 같기도 했구 말이야...."

", <또 하나의 사내>는 전혀 있지도 않았어요. 내가 지어낸 사람이었어요."

"달링, 그 일이라면 벌써 알고 있었어. 맥스가 찾아 왔었어. 파티의 다음 날에, 당신이 그의 부친에게 문병 갔었을 때 말이야. 맥스는 당신과의 사이에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맹서했어요. 당신 그의 차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도 얘기해 줬어요. -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도. 그리고 불쑥, 이런 말을 하더군 - 당신의 마음에는 자물쇠가 잠겨 있다구. 그 마음을 여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남자가 정말 부럽다는 거야."

둘이는 잠시 말이 없는 채 포옹하고 있었다. 이윽고 캐더린은 갑자기 몸을 떨치자 상대의 눈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 아네트는 어찌 되었죠?"

"아네트? 그녀는 고분고분한 여자로, 소문과는 딴판이야."

"하지만 플레이 걸 아니었나요?"

"이봐, 당신이 믿고 있는 플레이 걸이란 건 모두가 전설에 지나지 않아요. 자기는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걸 나에게 믿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전설을 만들어낸 거라구. 그런 소문을 퍼뜨려 이성을 끌어들이려는 거지. 증거가 있잖아. 아네트는 아직도 남편감을 붙잡지 못했거든."

죤은 상대의 눈에서 아직 불안이 가시지 않은 것을 보고 계속했다.

"알았어. 모든 걸 고백해야만 직성이 풀리겠단 말이지? 글쎄, 우리가 떨어져 살고 있는 동안, 그야 완전무결하진 못했겠지. 하지만 당신이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주착없는 플레이보이는 아니었다구. 물론 걸 프렌드는 있었지. 그녀들은 와서는 곧 떠나갔어요. 나는 한 번도 깊이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그 여자들은 나에게서 떠나가지 않았을 거야. 그렇잖아? 내 말 알아듣겠소?"

캐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죤의 음성이 귀 속에서 속삭였다.

"캐스, 내 비밀을 가르쳐 주지. 당신이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화강암으로 만든 돌부처 따위는 아니야. 나에게도 심장이 있어요, 달링. 그건 맥박치고 있어. 강하게, 사납게. 만져 봐. 피가 온 몸을 뛰며 달리고 있어요. 격렬하게, 강하게, 따사롭게, 달링. 얼마나 화끈한지 당장 보여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