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만나요
간발의 차이
강철로 만든 저녁
개 이전에 짖음
개인적인 불행
개폐
객관적인 아침
게릴라
겨울에 대한 질문
겨울의 원근법
결국
결정
경복궁
계단의 힘
괄호처럼
괴물과 함께 톨게이트
구름의 소비자
궤적
그라운드
극적인 삶
근하신년
금홍아 금홍아
기념일
기린과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사이에서
기울기가 사라진 뒤에
깊은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보기
꽃잎, 꽃잎, 꽃잎
나의 미완성 연인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내가 저질렀는데도 알지 못한 실수들
내 생물 공부의 역사
내 인생의 책
내일은 중국 술을 마셔요
내 잠 속의 모래산(삼 분 전의 잠)
녹는 사람
농담
늪
다섯 시에서 일곱 시까지의 먼 곳
당신과 나는 꽃처럼
당신의 활동 영역
당신이 말하는 순서
어 가깝고 외로운 리타
독심(讀心)
돌이킬 수 없는
동물 사전
동사무소에 가자
두 번째 강물
뒤
뒤늦게 이해되는 것들
등나무 아래의 한때
로맨티스트
마네킹
만일의 세계
먼지처럼
목격자들
몽매한 즐거움으로 한 생(生)을
무기여 잘 있거라
무지의 학교
반대말들
반딧불의 잔존
밤에는 역설
밤의 독서
밤의 상점
밤의 연약한 재료들
변절자의 밤
복화술사
불놀이야
불멸의 개
비열한 거리
뼈가 있는 자화상
사랑의 신비로운 표정
사물들과의 이별
사생활
사후의 일요일
삼미 슈퍼스타즈 구장에서
새들의 비밀
샌드페인팅
생각하는 물질들
생년월일
생활세계에서 춘천 가기
선한 의도들이 묻혀 있는 묘지
성(聖) 미아삼거리의 여름
소규모 인생 계획
소염제 구입
소음들
손가락 진화
손톱 바다
수요일의 인사
식물성
식물의 그림자처럼 우리는
신경정신과에서 살아남기
실종
아르헨티나의 태양
아이누
아프리카식 인사법
얼음처럼
엉뚱해
엘리베이터는 음악처럼
여름의 인상에 대한 겨울의 메모
여행자들
연장전
영원 회귀
예측 가능한 이야기
오늘도 밤
오늘은 당신의 진심입니까?
오늘의 날씨
오른손은 모르게
오전(午前)
오해
완전한 밤
외계인 인터뷰
외로운 이빨이 빛나는 아침 풍경
왼손의 돌멩이
용의자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우리 동네
우리 모두의 초능력
우연을 위한 장소
우울하고 감상적인 삼단논법
우편
웃으면 복이 와요
원숭이의 시
유리의 악마
은행 앞 네거리에서 질문의 없음
은행에서의 다다이즘
음악에게 요구할 수 있니?
의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겨울 잎
의자
이상한 나라
이탈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만을 적습니다
인파이터
일관된 생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잡담
재크의 골목
전봇대 뒤의 세계
전선(電線)들
전속력
절규
점 선 면
점성술이 없는 밤
정오의 희망곡
정주역(驛)
정확한 질문
조용한 의자를 닮은 밤하늘
좀비 산책
죠스
죽은 L에게
중독
중력의 소모
지나치게 낙관적인 변신 이야기
지나치게 사소한 딜레마
창문 아래 잠들다
채식주의자
천국보다 낯선
청소합시다
칼
코끼리
코인로커
클리셰만으로 봄날은
태양의 지식
토르소
토요일의 관심사
투우
튀어나온 곳
파충류 – 세계
판교
편집증에 대해 너무 오래 생각하는 나무
편집증 환자가 앉아 있는 광장
평균치
표백
피사체
핀란드
필연
혀
확산
흘러넘치다
10년 후의 야구장
19세기의 비
20세기 소년
가을에 만나요
이장욱
오늘은 인형처럼 걸어다녔다
광화문에서는 관절이 부드럽게 회전하였다
종로에서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나의 완성을 모두가 용서하였다
견고한 삶이 시작되자
나는 무한히 순결하였다
벌거벗는 것은 좋아
매우 아름다운 것도 좋지
나는 남의 사생활을 금방 잊을 수 있다
나는 어떤 편향도 없다
무슨 말인가 흘러나오려는 순간에
조용히 멈출 수 있다
사랑을 위해 옷을 갈아입었지만
혜화동의 가을은 정기적으로 흘러가고
생각은 플라스틱처럼 휘어졌다
네거리에서 좌회전하여 편의점이 보이자
나는 정지하여 당신을 기다렸다
드디어 당신의 미소를 느끼며
나는 전진하였다
당신을 향해
한 발 한 발
간발의 차이
이장욱
매일 간발의 차이로 살아가, 문밖과 문 안에서, 침대 위와
꿈속의 망망대해에서, 모퉁이를 돌자마자 급정거한 트럭과
나 사이에서,
나는 아이이자 노인이지. 여자와 비슷하고 구름과도 비
슷해. 눈 내리는 사망시각과 네가 없는 오후네시의 사이,
거기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안 사요, 안 믿어요, 시간 없어!
언제나 그런 겨울.
그 순간 너의 십년 후와 나의 십년 전이 만나는 순간은 온다
눈처럼 온다
무수한 사이를 만들며 온다.
너는 너를 그림자처럼 흘리고 다녔지만
나는 매번 미행에 실패하는구나
눈사람처럼 마음을 켜고
나는 문밖에 서 있었을 뿐인데
안 사요, 안 믿어요, 꺼져버려!
골목을 나오는 순간,
눈송이 1과 눈송이 2가 격렬하게 교차하는 순간을 목격했다. 간발의 차이로,
트럭이 급정거했다
운전석에서 누군가
십년 후의 나를 빤히 노려보았다.
강철로 만든 저녁
이장욱
어둠이 드리워지자
나는 잠깐씩 전능해진다
목련은 강철로 만든 꽃
강철의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비둘기
나는 밤의 구름을 믿지 않아도 좋다 그것은
무언가가 끝까지 축소된 형태
귓속의 구름이 무거워지고
몸속에 가시가 돋고
움직일 때마다 허파와
위와
창자에 상처가 돋았다 그렇게
너는 더 고요해진 후
나에게 오라
죽어 납작해진 비둘기와 친해진 후
뾰족한 십자가들과 친해진 후
악어와 친해진 후
그렇게
강철같은 저녁이 피어났다
날카로운 구름을 향해
구름을 떠나는 최초의 빗방울을 향해
나는 두 팔을 벌리고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하악과 상악을 최대한으로
어둠 속에서 나는 내내
강철로 만든 사람의 이야기를 상상하였다
개인적인 불행
이장욱
내 몸은 낯선 구름 위에, 네가 다른 시간의 너인 듯 나를 지나간 후
자꾸 뒤돌아보는 버릇이 생겼어.
가을 단풍이 추락하고 난 새벽의 횡단보도,
바로 그 자리를 시속 120킬로로 통과한 왜건에 의해 한 사내,
문득 정지 포즈로 허공에 떠 있었지.
그건 내가 우연히 밤하늘을 바라볼 때
이백오십만 년의 어둠을 지나와 내 눈에 꽂혀버리는 불빛 같은 것.
누군가 나를 불러 뒤돌아보면, 누군가 그의 기나긴 내력을 찬찬히 얘기해 줄 것 같아.
허공에 떠 있는 사내는 아직도 어제 본 동물도감의 짐승들을 생각하고 있을까.
새벽과 또 머나먼 가을 사이에 떠 있던 그 사내,
나는 오늘도 저 오래전의 별빛과 온전히 무관하네.
그 빛이 우연히 나를 통과하고 간 후 나는 잠시 뒤돌아보았을 뿐.
그러므로 모든 것은 개인적인 불행,
그리고 밤하늘을 바라보면 그곳은 텅 비어 떠 있기 좋은 허공.
개폐
이장욱
오후 두 시의 그림자를 닫고 네게 도착하였다.
지갑을 열고 지금 이곳의 태양을 쏟아냈다.
손바닥을 닫은 뒤에
죽은 이의 사진 속으로 들어갔다.
중국어를 들었다.
잠을 잠그고
베이징을 열고
낯선 이름을 대며 인사를 했다.
니 하오,
날개가 돋는 중국의 새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가능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에게 폐쇄된 너의 뒷모습을 사랑하였다.
거울 속에서도
공사현장에서도
그것을 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혼자 물끄러미 손을 넣어보는 시간이 있다.
수긍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누군가 중국어로 안타깝다 안타깝다,
라고 말한 뒤에
캄캄하게
나를 쾅,
닫아버렸다.
중국의 새들이 날아오르는 하늘과
손바닥으로 만든 차양과
가난한 햇살 아래
그림자를 열고 들어갔다.
새들이 나를 닫을 때까지
살아 있었다.
새들의 그림자를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열었다.
객관적인 아침
이장욱
객관적인 아침
나와 무관하게 당신이 깨어나고
나와 무관하게 당신은 거리의 어떤 침묵을 떠올리고
침묵과 무관하게 한일병원 창에 기댄 한 사내의 손에서
이제 막 종이비행기 떠나가고 종이비행기,
비행기와 무관하게 도덕적으로 완벽한 하늘은
난감한 표정으로 몇 편의 구름, 띄운다.
지금 내 시선 끝의 허공에 걸려
구름을 통과하는 종이비행기와
종이비행기를 고요히 통과하는 구름.
이곳에서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완강하게 사라진다.
지금 그대와 나의 시선 바깥, 멸종 위기의 식물이 끝내
허공에 띄운 포자 하나의 무게와
그 무게를 바라보는 태양과의 거리에 대해서라면.
객관적인 아침. 전봇대 꼭대기에
겨우 제집을 완성한 까치의 눈빛으로 보면
나와 당신은 비행기와 구름 사이에 피고 지는
희미한 풍경 같아서.
게릴라
이장욱
어쩌면 곧 눈이 내릴 것이다.
다시 폭설 속으로 발목을 빠뜨리며 걸어갈 수 있다면.
누군가 한량없이 그곳에 서 있었던 듯
아파트의 창문들은 오랜 침묵에 젖어 있다.
그리고 다시 습한 안개가 거슬러 올라오는 비탈,
나는 몸을 기울여 먼 곳의 소리를 듣는다.
서서히 젖어 드는 추위, 그때 내 입술은
이제 그만두고 싶다, 고 중얼거렸던가
혹은 죽어가는 어머니의 표정은 아름다웠어
그런데 눈은 내리지 않았지, 였던가
누군가 지나갔다고 생각하여 숨죽여 돌아보면
아주 오래전에 불던 바람이 거기 있다.
소실점 근처의 가로등 하나가 조용히 꺼진다.
메마른 어둠이 내 몸을 관통해 가는 동안
나는 몇 통의 편지를 떠올린다.
너무 희미한 어깨를 지닌 연인이었던가,
아니 옛친구였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떤 완고한 집착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나른한 긴장과 더불어
서서히 다가오는 공포를 향해 검은 총신을 겨눌 뿐.
그 경우 전방의 어둠은 지나치게 익숙하다. 아직
외곽 도로의 노란 선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있으나
곧 짙은 안개가 도시를 감쌀 것이다.
비탈의 추위, 나는 어떤 신호를 기다린다.
그리고 죽어가는 어머니의 표정은 아름다웠지,
라고 중얼거릴 것이다. 소실점 근처의 가로등처럼,
누군가 저 끝 바람 속에 깜빡인다.
겨울에 대한 질문
이장욱
함부로
겨울이야 오겠어?
내가 당신을 함부로
겨울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어느 날 당신이 눈으로 내리거나
얼음이 되거나
영영 소식이 끊긴다 해도
함부로 겨울이야 오겠어?
사육되는 개가 조금씩 주인을 길들이고
무수한 별들이 인간의 운명을 감상하고
가로등이 점점이 우리의 행로를 결정한다 해도
겨울에는 겨울만이 가득한가
밤에는 가득한 밤이?
우리는 영영 글자를 모르는 개가 되는 거야
다른 계절에 속한 별이 되는 거야
어느 새벽의 지하도에서는 소리를 지르다가
당신은 지금 어디서
혼자 겨울인가?
허공을 향해 함부로
무서운 질문을 던지고
어느덧 눈으로 내리다가 문득
소식이 끊기고
겨울의 원근법
이장욱
너는 누구일까?
가까워서 안 보여.
먼 눈송이와 가까운 눈송이가 하나의 폭설을 이룰 때
완전한 이야기가 태어나네.
바위를 부수는 계란과 같이
사자를 뒤쫓는 사슴과 같이
근육질의 눈송이들
허공은 꿈틀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네.
너는 너무 가까워서
너에 대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을 수는 없겠지만
드디어 최초의 눈송이가 된다는 것
점 점 점 떨어질수록
유일한 핵심에 가까워진다는 것
우리의 머리 위에 소리 없이 내린다는 것
나는 너의 얼굴을 토막토막 기억해.
네가 나의 가장 가까운 곳을 스쳐갔을 때
혀를 삼킨 입과 외로운 코를 보았지.
하지만 눈과 귀는 사라졌다.
구두는 태웠던가?
너는 사슴의 뿔과 같이 질주했네.
계란의 속도로 부서졌네.
뜨거운 이야기들은 그렇게 태어난다.
가까운 눈송이와 먼 눈송이가 하나의 폭설을 이룰 때
나는 겨울의 원근이 사라진 곳에서 너를 생각해.
이제는 아무런 핵심을 가지지 않은
사슴의 뿔이 무섭게 자라나는
이 완전한 계절에
결국
이장욱
내가 어느 이상한 날에 그를 지나 그녀를 지나 그대를 지나 내가 어느 이상한 날에 정오를 지나 새벽을 지나 오후 네 시를 지나
그리고 어느 이상한 날에 빈 공터와 당구장과 동대문 운동장을 지나 문득 흥겨운 술집의 죽은 친구의 화사한 여자들의 기나긴 과거를 걸어가는
어느 이상한 날에
어느 이상한 날에 결국 모든 것이 그러했을 것이네
중얼거리는 이상한 이상한 날에 잠자리가 타워 라이트 너머 저무는 햇빛 속을 흐릿하게 날아가는 풍경,
저건 뭔가를 단숨에 넘어버린 자의 포즈야 아주 단순한 리듬의 생,
그러므로 어느 이상한 날에 그를 지나 그녀를 지나 까마득한 플라이 볼을 바라보며 아득해지는 써드베이스맨의 비애를 이해하는 이상한 날에
이제 기나긴 바람은 낯선 방향으로 불고 나는 은퇴한 복서처럼 하릴없이 걸어가는 이상한 날에 대체로 흐리고 오후 한두 차례 소나기,
그런데 이곳에선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 자세히 보여, 자주 울던 가수는 끝내 무서운 침묵 속에 최후를 맞았으나 어느 이상한 날에
그를 지나 그녀를 지나 그대를 지나 문득 저 아득히 이상한 날에는 결국,
결정
이장욱
아침에 깨어나면 모든 것이 멈출 것이다.
사소한 돌멩이들이 차갑게 침묵할 것이다.
사물들은 후퇴할 것이다.
나는 약속을 취소한다.
세면과 식사준비와 출근을 취소한다.
창문이 얼어붙는다.
바깥과 안의 대기가 격렬하게
단단한 물방울을 만들고 있다. 서서히
모든 것이 정지한다.
이제 유리는 어느 먼 곳의 금속,
어지러운 지평선에서 이상한 마음이 불어온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반성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는 신비로운 과거가 없으며,
나에게는 늙으신 아버지가 있으며,
나는 오로지 지금 이곳에 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시작된다.
단 하나의 생각이
나를 결박한다.
나는 얼어붙는다.
오 분 전과 머나먼 미래가 한꺼번에 다가온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경복궁
이장욱
창식은 사실 살고 싶지 않았고 자주 잠이 들었다. 창식은 오늘따라 머리가 아팠는데 열심히 일을 했다.
퇴근 후에 창식은 취해서 떠들고 울다가 웃다가 이건 뭔가 이상한 삶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귀갓길에 창식은 전화를 걸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때마침 버스가 도착해서 여보세요 여보세요 소리치며 승차를 했다. 맨 뒷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는데 창식은 입이 닫히고 눈이 감기고 코와 귀가 막히고 웃음도 울음도 터뜨리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경복궁을 지날 때
형식은 창식의 전화를 받았다.
경복궁은 멋진 곳이라고 했다.
계단의 힘
이장욱
계단은 단 하나의 의혹도 가지지 않았으며
계단은 미래에서 온 음악과 같아.
당신이라면 탭 댄스도 가능하겠지만
계단은 정교하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을 지배하지.
마치 남을 의식하지 않는 힘으로 살아가듯이
마치 정확하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생각인 듯이
계단은 완전한 계단들로 이어져
홀연히 사라지지 않네.
지금 계단을 내려오는 당신은 계단으로 가득하며
당신도 모르게 계단이며
그로써 당신은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근사한 높이를 얻은 것이지만
한 번쯤 튀어 올랐다가
다른 세계로 사라진 빗방울처럼
당신은 홀연히 계단 속으로 스며들었네.
오늘도 우리는 차근차근
계단의 역사를 논의하지만,
괄호처럼
이장욱
(무언가를 보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내가 거기서 너와 함께 살아온 것 같았다.
텅 빈 눈동자와 비슷하게
열고
닫고
창문 너머로 달아나는 너를 뒤쫓는 꿈
내 안에서 살해하고 깊이 묻는 꿈
그리고 누가 조용히 커튼을 내린다.
그것은 흡,
내가 삼킬 수 있는 모든 것
오늘의 식사를 위해 입을 벌리고
다 씹은 뒤에 그것을 닫고
그 이후 배 속에서 일어나는 일
몸에 창문을 만들지 않아도 가능한 일
블라인드를 올리지 않아도
발을 헛짚어 푹,
꺼지는 구덩이가 되어 이제
모든 것이 너를 포함할 것이다.
너는 길을 걷다가 조금씩 숨이 막힐 것이다.
가만히 눈꺼풀을 열어보는 사람이 되어
무서운 어둠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지금 너의 모든 것을 품고 싶은 것이다.
커다란 기념 수건으로
잠든 네 입을 꼼꼼히 틀어막는
이 기나긴 시간처럼)
괴물과 함께 톨게이트
이장욱
괴물을 그리자 괴물의 꼬리는 낭창 휘어지다가 낭창 당신의 허리를 감고 괴물의 뾰족한 혓바닥은 유쾌해. 당신도 웃음을 터트리지.
차창 바깥으로 한강을 건너는 괴물을 그리자 역시 비는 내려. 괴물의 슬픈 눈가에 또 눈은 내려, 한 발자국을 내 딛으면 큰물이 지겠지만 한 발자국을 내딛으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네.
오늘도 괴물은 괴물, 마천루를 짓밟고 괴물은 괴물, 등이 부드러워. 낭창 휘어지다가 낭창 허물어지기가 십상 고개를 들어 무한한 아가리를 벌이자 세상의 음악들, 그의 입속으로 사라지네.
괴물의 다리 사이에서 우산 쓴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을 핥아요. 괴물은 역시 괴물, 나와 함께 영원히 톨게이트를 지나네.
구름의 소비자
이장욱
어제의 소비자로서 오늘은 구름을 팔고
구름의 음악을 구입하기 위해 개처럼 일을 하고
내일은 구름의 금치산자로서 나날이
소모하는 구름이 줄어들었다
생활필수품답게 구름은 영원을 모른다
지구에 도달한 뒤 사라진 햇빛들의 수집가
구름을 훔치는 사람의 고독
구름의 무수한 작명가들
꿈에서 구름을 본 적이 없다
구름은 비가 내릴 때도
눈이 내릴 때도 필요하다
우산을 쓰고도 자꾸 무언가가 필요해져서 우리는
구름처럼 흘러다녔다
궤적
이장욱
3점 슛을 쏘는 남자의 미세한 근육 안에서
공의 궤적과
공기의 저항이 충동할 때
다섯 갈래의 손가락들이
무언가를 향해
자신을 돌아볼 때
손끝과 링 사이의 허공이
지금 막 통과하는 공의 궤적을
마침내 기억할 때
그대에 대한 나의 중얼거림이 문득
아주 물리적인 것들로 가득할 때
이 완벽하게 수학적인 궤적 안에서
내 온몸이 내 온몸을
공이 돌아볼 때
그라운드
이장욱
야구장과 축구장에서는 언제나 극적인 승부가 벌어지지만 실은
동물원에서도
꿈속에서도
심판은 연민의 마음으로 선언한다, 승리와 패배를.
영원한 타협을.
리플레이를.
나는 목표물을 향해 공을 던지고
편지를 쓰고
애원한다.
공의 궤적이 툭
끊어지자,
갑자기 중력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코알라가 나무에서 떨어졌다. 코끼리가 풀밭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심판은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려 한다.
날씨와
아홉 시 뉴스와
사물들의 영향 관계를.
퇴장이 선언되는 순간 우리 모두의 죄책감은 어디로 가는가? 경기장 바깥에도 적들은 존재하는가? 울타리를 넘어 질주하는 동물들은 어디로?
꿈속에서도 선수는 그라운드를 달린다.
포효하는 짐승들
극적인 정지 장면
어디선가 날카로운 리듬으로 휘슬이 울렸다. 우리는 일제히 그라운드 바깥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누군가
길고 희미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늘하늘한 뿔과 같은
생시 같은
극적인 삶
이장욱
막이 내려올 때는 조용한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후의 해변이나
노인의 뒷모습 또는
혼자 깨어난 새벽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말의 눈을 찌르는 소년이었다.
요한의 목을 원하는 살로메였고
숲을 헤매는 빨치산이었다.
세일즈맨이 되어 핀 조명이 떨어지는 무대에서
독백을
여러분, 인생에는 기승전결이 없다.
코가 큰 시라노는 여전히 편지를 쓰고
빨간 모자를 쓴 늑대는 밤마다 문을 두드리고
맥베스는 예언에 따라 죽어가는 것
추억에 잠겨 혁명을 회고하는 자들은 이미
혁명의 적이 된 자들이지.
겨울 다음에는 가을이 오고 가을 다음에는
영구 미제 살인 사건이 시작된다.
우리는 결국 바냐 아저씨처럼 쓸쓸할 거예요.
고도를 기다리며 영원히
벌판을 떠돌겠지요.
자책하는 햄릿과 함께
드라마틱한 삶이란 출장 일과 두 시간짜리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인데
카라마조프는 검은 피와 택하신 자들이라는 뜻인데
인형의 집에서는 드디어 노라가 뛰쳐나오고
에쿠우스의 주인공은 자신의 눈을 찌르며 외친다.
머리가 열 개인 말들이여, 눈이 백 개인 말들이여, 반인반마의 신들이여!
붉은 막이 등 뒤로 내려오자
나는 배꼽에 두 손을 모으고 깊이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객석의 어둠 속에서 모자를 깊이 눌러쓴 살인자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하신년
이장욱
너에게 나는 소문이다.
나는 사라지지 않지.
나는 종로 상공을 떠가는
비닐봉지처럼 유연해.
자동차들이 착지점을 통과한다.
나는 자꾸
몸무게가 제로에 가까워져
밤새 고개를 들고 열심히
너를 떠올렸다.
속도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야.
사물과 사물 사이의 거리가 있을 뿐.
나는 아무 때나 정지할 수 있다.
완벽하게 복고적인 정신으로 충만하고 싶어.
가령 부르주아에 대한 고전적인 적의 같은 것.
나를 지배하는
기압골의 이동 경로, 혹은
저녁 여덟 시 홈드라마의 웃음.
나는 명랑해질 것이다.
교보문고 상공에
순간 정지한 비닐봉지.
비닐의 몸을 통과하는 무한한 확률들.
우리는 유려해지지 말자.
널 사랑해.
금홍아 금홍아*
이장욱
1
금홍아 금홍아 뒤척이건 마음일까 그림자일까 네 품에선 세상 어둠이 환해져 어둠의 흰 뼈들이 바스락거리지 금홍아 금홍아 눈감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어 누구나 긴 골목 끝에 집 한 채씩 지어두는데 아, 저 언덕빼기 내 헐한 창문은 캄캄히 젖어 있네 책보만 한 달빛도 안 드는 꽃무늬 방에서 하루 종일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아무리 되뇌어도 나는 한 구의 <에피그램>도 못 얻는데, 금홍아 금홍아아 왜 넌 돌아오지 않는 거야?
2
금홍아 금홍아 아침에 눈 뜨면 내 몸은 젖은 양말 금홍아 금홍아 머리맡 뒤적이면 딱딱한 방바닥과 재떨이, 담배 연기 올라가는 천장에 피고 지는 누런 꽃잎들과 생각으로 놀고 있으면 어쩐지 금홍아 금홍아 내 오랜 무릉도원 삼십삼 번지에 흐르는 화사한 화장품 냄새와 평생을 보내고 싶어 그럴 때나 내 정신은 은화처럼 맑네 위트도 패러독스도 지금 내겐 없으니 금홍아 금홍아아 꿈은 정말 가위 같아 왜 내 목젖이 서늘할까?
3
감정은 어떤 포우즈 금홍아 금홍아 마당귀 화단에 잘린 벽돌들 녹슬어 고요한 철대문, 어쩌다 딱딱한 것들과 친해졌는지 <중병에 걸려 누웠으니 얼른 오라>고 금홍아 금홍아 나는 네게 엽서를 띄우고 싶어 이십세기과 <짱깽뽕>을 해서라도 금홍아 금홍아 나는 네 품에 안기고 싶네 하루 종일 내 딱딱한 그림자는 어디 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에 골몰 중인지 다만 나 자신을 위조하는 것이 할만한 일일 뿐 금홍아 금홍아아 하지만 디테일 때문에 속는다거나 해서야 되겠니?
4
이 맑은 날 금홍아 금홍아 네가 없는 데서 긴 그림자 하나와 저녁을 맞네 빈 곳은 채우려 할수록 자라니까 빈 채로 두고 대문 밖 빈 하늘 바라보면 저것들, 어딘가 떨어지려고 날아가는 솜털 꽃씨들, 굿바이 굿바이 손 흔들며 나도 네게로 가고 싶어 그래도 금홍아 금홍아아 너는 노래 부르지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운운……그런데 금홍아 금홍아아 꿈은 정말 가위 같아 왜 내 목젖이 서늘할까?
* 금홍이는 시인 이상의 애인이다. 箱(1910∼1937)과 나(1968∼ )의 불편한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 그의 소설 {날개}, {逢別記}, {終生記} 등에서 몇 구절을 차용했다.
기념일
이장욱
식도에서 소장까지
기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우리는 꼭꼭 씹어 먹는다
위를 기념하고
쓸개를 기념하고
무엇이든 녹이는 침을 기념하고
오늘도 누군가의 기일이며
전쟁이 있었던 날
창밖의 구름은 지난해의 농담을 닮았고
농담에는 피가 부족하다
어제까지 어머니였던 이가
오늘은 생물이라고 할 수 없고
아이는 하루 종일 거짓말에만 흥미를 느끼고
식물들의 인내심은 놀라워
이빨을 드러낼 수 있는 것들에게는 반드시
식도가 있고
외로움이 있을 것이다
지구의 공전이 계속되자
지난해의 농담들이 잊혀졌다
흰 떡 위에 수많은 이빨들이 돋아나고
우리는 무엇이든 꼭꼭 씹어 먹고
모두들 별의 속도를
천천히 이해했다
기린과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사이에서
이장욱
나는 목이 긴 기린을 꺼냅니다. 호주머니에서가 아니고
당신과 마시던 술잔이라든가
휴대전화에서가 아니고
명백한
초원에서
나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을
내가 아닌 모든 것을
단지 이 골목의 무수한 갈림길들과 비슷해졌을 뿐
담장 바깥으로 넘어온 나무줄기를 느리게 씹으며 기린과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사이에서 조금씩
키가 자랐습니다만
나는 길어진 목으로 출근을 하고
서서 낮잠을 자고
먼지를 휘날리며 달려가고 저녁에는
해 지는 지평선에 가만히 서 있습니다.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모습으로
기린과 아주 흡사하게
한 시간
또는 조금 더 영원히
그때 기린이 나를 꺼냈습니다. 초원 밖의 세계에서
내가 아닌 모든 것과 나의
명백한
사이에서
기울기가 사라진 뒤에
이장욱
막 떨어지는 나뭇잎이 허공을 구성하는 각도
새벽의 꿈에서 깨어나자 스며드는 생시의 각도
추락하는 사람에 대한
사후의 각도
바라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기울기가 있어?
영원에는 기울어진 것이 없습니다.
수평과 수직이 사라진 뒤에
비스듬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을 뿐
저기 전화를 하는 저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갸우뚱히 바라보는 이유는
그림자 안에 해가 지고 있어서
조용한 말이 그이의 귓가에 스며들어서
그건 그렇게 갸우뚱한 상태로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
나뭇잎 하나가 떨어진 뒤에 나무가 스르르 기울었다.
거리의 행인들과 지금 듣는 음악의 각도가 바뀌었다.
수평선과 쏟아지는 빗줄기의 기울기가
오늘의 초침이 분침에서 멀어지려고 미친 듯이
당신이 고개를 기울이자 나뭇잎이 다른 곳으로 떨어졌네.
당신이 생시에서 사라지자 내가 깨어납니다.
그림자가 일어나 혼자 걸어가는 세계에서
분침과 시침이 겹치는 순간
날카로운 알람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누군가 나의 아주 가까운 곳으로 추락하고 있다.
깊은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보기
이장욱
깊은 어둠 속에는 무언가가 모자란다.
혹등고래 같은 것이
베네수엘라의 외로움 같은 것이
나도 모르게 세포 분열을 하거나
결승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이 침울한 영혼에 가깝다고
인생에 가장 가까운 어둠이란
엑스트라 배우가 카메라의 앵글을 벗어나 마침내
뒤를 돌아보는 순간
진단을 받고 치료를 포기하고 혼자
깨어나 천장을 바라보는 새벽
어둠이란 지도 위의 한 점이 아니다.
수평선이 아니다.
죽은 쥐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이 사라진 세계에 가까운
여행자는 떠나가서 다시 오지 않을 사람이지만
누구나 그곳에 가면 시제가 없는 편지를 쓰는 것이다.
나는 오늘 나의 더 먼 곳에 도착하다?
같은 상투적인 문장으로
베네수엘라에 가보지 못했는데도
오늘의 어둠 속에는 여행자들이 떠돌고 있다.
혹등고래가 배를 보인 채 떠오르는 새벽에
외로운 심판이 종료 휘슬을 길게 울리는 그곳에서
나는 어둠을 끄고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 멈추어 서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후보 선수처럼
꽃잎, 꽃잎, 꽃잎
이장욱
무섭다 결국 그곳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섭다 마음이 무섭고 몸이 무섭고 싹 트고 잎 피고 언제나 저절로 흐드러지다가 바람 불어 지는 내 마음속 꽃잎 꽃잎..
그대가 무섭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하나의 고요한 세상을 지니고 있으니.
무섭다 그러나 나는 나를 이끄는 매혹에 최선을 다해 복종하였으므로 내 고요한 세상에 피고 지는 아름다운 모반을 주시하였다
그대가 처연히 위날려 내 몸과 마음이 어지러울 때 단 한 번도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흘러가는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기억을 만나면 기억을 죽이고 불안을 만나면 불안을 죽이고
그러므로 이제 이 눈과 코와 입과 귈르 막아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시길 그대에게 익숙한 세상으로 나를 인도하여 그대 몸과 마음에 피고 지는 싹과 잎과 꽃이 디게 하시길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이 고요한 세상을 처연히 흩날리도록, 내 몸과 마음의 꽃잎 꽃잎 피고 지는 그곳에 기다리는 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나의 미완성 연인
이장욱
오늘 밤에 조각칼은 무슨 일을 하나.
조금씩 긁어내나.
긴 목이 생기나.
생년월일은?
손목은 만들어졌으나 손가락들은 아직.
입술은 있으나 선언은 아직.
편지를 쓰지만 굿바이, 라고는 인사하지 않네.
만들어지지 않은 발목과 함께
그 또는 그녀가 생기발랄해.
먼 곳에서 다가오는 그대,
한 발 한 발 아름다워져.
발끝부터 점점 분명해지지.
드디어 코가 뾰족해지자 그녀 또는 그,
이름을 붙이고 싶다.
망치로 부수고 싶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우리는 이미 만났던가, 아직 만나지 않았던가.
친구들은 어디로 여행을 떠났는지
완성되었는지
옛이야기들의 해피엔딩을 증오하다가
그리워하다가
그 또는 그녀,
귀가 없어도 모든 비명을 다 들을 수 있다.
흐흐흐 울어대다가
깔깔깔 웃어대다가
매일 긴 목이 부러지기 직전
나의 미완성 연인을 향하여
오늘밤에 망치는 무슨 일을 하나.
조각칼은 또 무슨 일을.
조금씩 조금씩 긁어내나.
피가 흐르나.
드디어 두근두근
심장이 뛰나.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이장욱
골목, 이라는 발음을 반복하자 서서히 골목이 사라진다. 골목이, 골목이, 골목이, 골목이, 사라진다. 하지만 창밖에 골목이 있다. 냉장고를 열고 우유팩을 꺼낸다. 내일은 선거일이다. 유통 기한이 지난 날짜가 찍혀 있다.
하지만 음악은 발라드, 시인 오장환이 "백석은 모던 보이"라고 적어 놓은 글을 읽었다. 통장에 입금된 아르바이트 급여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국민은행으로, 내일은 선거일이다. 백석은 모던 보이.
나는 아직 과부하 상태인지도 모른다. 소실점을 향해 맹렬히 사라지는 로러블레이드를, 골목이, 골목은, 골목과, 결국 골목을 ······ 나는 골목길을 걸어간다. 인터넷 카페의 초기 화면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肉에서 나온 것은 肉이며, 靈에서 나온 것은 靈이다."(요한 3:6)
한때 혁명가였던, 아직 혁명가인지도 모르는, 컴퓨터 수리점 사장 金을 먼발치로 발견하고, 나는 다른 골목을 택해 걷는다. 골목이, 골목을, 골목과, 결국 골목은······ 그는 나를 로맨틱한 동물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지만, 그날 밤 동해로 떠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아파트 신축 현장의 모래 바람이 골목을 휩쓸고 지나갈 때, 일당제 인부의 흰 모자에서 클로즈업되는 '안전 제일'. 백석은 모던 보이가 아니다. 통장에 아르바이트 급여는 찍히지 않는다. 눈을 가늘게 뜨면, 서서히 떠오르는 것들. 가령 골목은, 골목과, 골목의······ 도레미레코드점에서 울리는 음악은 발라드.
나는 肉이며 靈으로서 기한이 지난 골목을 통과한다. 내일은 선거일이다. 국민은행의 간판에 앉았다가 날아오르는 까치 몇 마리. 내가 걸어가는 골목을, 골목의, 골목에서, 골목을 향해, 어느 먼 하늘 쪽으로부터 점점이, 명백한 자세로 밀려오는 동해의 파도.
내가 저질렀는데도 알지 못한 실수들
이장욱
오늘은 종일 방에서 지냈는데도
실수를 저질렀네.
나는 혼자였고 어디다 전화를 하지도 않았고 SNS도 안 하는데 그러고도
실수를
인생은 이불 속에서…… 습관 속에서…… 소문 속에서…… 시위도 안 하고…… 지나가는데 매일
실수를
실수에 대해 생각을
가령 내가 당신에게 인사를 안 했다.
소주를 퍼마시고 무례한 말을 했다.
남의 남이 퍼뜨린 소문을 믿고 너만
알고 있어, 이건 확실한 얘긴데 말야……라고 말을 꺼냈다.
사실 나는 인사를 잘하는 사람이고
술은 입에도 못 대고
입에서 입으로 건너다니는 이야기는 다
아니 땐 굴뚝의 연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인데
제가 무슨 실수를 한 거죠?
제가 왜 경찰서에 있죠?
내 존재 자체가 실수라는 뜻이야?
내일은 출근을 못하겠다고 전화를 했다.
해가 지다가 멈춘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깊은 위로를 받았다.
왜냐하면 만물이
나와 같은 실수를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전화를 걸어 당신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실수를 저지른 것 같군요.
저는 하루 종일 혼자였고
친구도 없고
침묵을 지켰고
심지어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 생물 공부의 역사
이장욱
궁금해. 내 축축한 배를 가르면 뭐가 나올까.
어린 시절에는 개구리 해부를 했는데 그때마다 그런 생각을.
면도칼을 손에 든 채 소년은, 양서류와 포유류 사이에서 생각에 잠긴 소년은
교회에 갔다.
하느님은 어디에 속해요? 저는 계문강목과속종의 맨 끄트머리에 매달린 생물입니다만
악몽에 시달리는 미물입니다만
희로애락이 많은 단세포동물입니다만
혜화동에 전시관이 있잖아, 거기서
인체의신비전을 본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사랑,
새빨간 혈관과 근섬유와 신경세포와 텅 빈 두개골
그 한가운데 뻥 뚫린 두 개의 눈구멍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내 사랑,
그대는 오늘도 퇴근을 한다.
척추동물문 포유강 영장목으로서 그대는
버스를 타고 태그를 하고 외로운 밤의 거리를 바라보다가 전화를 하는 그대는
어젯밤 꿈속에 아마존 악어들이 나왔어. 브라질의 룰라는 좌파인데 아마존 개발을 밀어붙였지. 미친……
홍대 입구에서는 또 내 영혼이 맑다고
영혼이 맑으니까 신을 믿으라는 사람에게 나는 말했네.
이봐요, 나는 창세기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을 믿는답니다. 사실은
고릴라처럼 손을 내밀어 초콜릿을 요구하죠. 게다가
단세포동물답게 폭력적이지.
나는 내 슬픈 생물학책을 덮었다.
배가 갈라진 개구리의 자세로 관 속에 누워 있었다.
새빨간 혈관과 근섬유와 신경세포와 두개골 한가운데 뻥 뚫린 두 개의 눈구멍으로 나는
별들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주 작은 것으로는 거대한 것을 볼 수 없고 아주 거대한 것으로는 작은 것을 볼 수 없나니…… 아주 작은 시간으로는 거대한 시간을 느낄 수 없고 아주 거대한 시간으로는 작은 시간을 느낄 수 없나니……
시간이 개울처럼 흘러가는 동안에도 나는
졸졸 흘러서 이윽고 망망대해에 닿는 동안에도 나는
내 부드러운 배를 갈라 자꾸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컴컴하고 축축한 그곳을 향해 간절하게
간절하게 손을 뻗었다. 마치 그곳에
깊고 무서운 사랑이 갇혀 있다는 듯이
* 괴테의 「내 식물 공부의 역사」 변용
내 인생의 책
이장욱
그것은 내 인생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어디서 구입했는지
누가 선물했는지
꿈속의 우체통에서 꺼냈는지
나는 내일의 내가 이미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갔다.
일을 했다.
드디어 외로워져서
밤마다 색인을 했다. 모든 명사들을 동사들을 부사들을 차례로 건너가서
늙어버린 당신을 만나고
오래되고 난해한 문장에 대해 긴 이야기를
우리가 이것들을 해독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영
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
너무 많은 글자가 허공에 겹쳐 있기 때문
당신이 뜻하는 바가 무한히 늘어나는 것을 지옥이라고 불렀다. 수만 명이 겹쳐 써서 새까만 표지 같은 것을 당신이라고
당신의 표정
당신의 농담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이상한 꿈을 지나서
페이지를 열 때마다 닫히는 것이 있었다. 어떤 문장에서도 꺼내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당신은 토씨 하나 덧붙일 수 없도록 완성되었지만
눈 내리는 밤이란 목차가 없고
제목이 없고
결론은 사라진
나는 혼자 서가에 꽂혀 있었다. 누가 골목에 내놓았는지
꿈속의 우체통에 버렸는지
눈송이 하나가 내리다가 멈춘
딱
한 문장에서
내일은 중국술을 마셔요
이장욱
어젯밤의 거리에는 고양이들이 무한하게 숨어들고
숨고 달리다가 영원히
사라지고
우리는 작년에 복권을 사고
올해도 우리의 인생은
전문가들이 이끌어주겠지
나는 꿈 밖으로 새나가는 목소리를 막았으면 해
부디 당신이 내게 관대할 수 있도록
3년 후에는 조금씩 무능력해져서 행복하고
5년 후에는 아주 오랜만에 반성을 하네
오늘은 완벽하게 인간으로 살겠지만
내일은 그런 것들이 좋다
잠 속에 꽂힌 화살이 바람에 흔들리고
또 이 밤엔 영문을 모르고 깨어나겠지
내일은 중국술을 마시고
고양이들이 달리는 거리를 걷기로 해요
지구상에 단 하나뿐인 밤의 거리에서
하루 종일 유리창들은
투명하느라 바쁘고
우리는 고양이처럼 섬세하게
숨고 달리다가 영원히
사라지고
내 잠 속의 모래산(삼 분 전의 잠)
이장욱
용서를 빌러 그곳에 갔네 발밑으로 흘러내리는 모래들 내 잠 속에 쌓이고 있었네 삼 분 전의 잠에서 깨어 삼 일 전의 잠을 추억하는 자 삼 일 전의 잠에서 깨어 삼 년 전의 잠을 추억하는 자
그때 그 오래된 불행은 우연한 것이었으나 아, 이런 바람은 괜찮은데, 모든 우연을 우리는 미리 알고 있었네 삼 년 전의 문 열리고 삼십 년 전의 바람, 그대 허허로운 등 흘러가네 눈 감으면 그때인 듯 메마른 눈발 날리고 모래처럼 우연한 노래들 내 잠 깊은 모래산, 모래산에 쌓이네
용서를 빌러 그곳에 갔네 그곳에 오래 앉아 있었으나 깔깔한 모래들 아직도 내 잠 속 떠나지 않네 삼 분 전의 잠에서 깨어 삼 일 전의 기슭을 배회하는 자 삼 일 전의 잠에서 깨어 삼 년 전의 목마름을 기억하는 자 그리고 모래산 죽은 그대의 모래산
늪
이장욱
한 남자가 벌거벗은 채 누워 있어.
어디에? 우리 집 욕실에.
죽었나?
죽었다.
악어는 좋아했나?
20세기 소년은?
장래 희망은?
나는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뿐인데
난데없이
인생이 깊은 늪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악어가 된 것 같아.
깊숙이
더 깊숙이
습한 욕실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우리 집 욕실에 죽어 있는 남자는
아름다운 몸을 가지고 있더군요.
희고
차갑고……
점점 더 부풀어 올랐습니다.
시체는 괄호 속에 넣어 둘 수가 없다.
팔이 툭 튀어나오고
자꾸 혀를 내민다.
동거냐,
사육이냐,
사물이냐.
나는 갑자기 뛰어나가 대문을 열었다.
미친 듯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외치고 선언했다.
악어의 꼬리가 사라지도록
시체가 토막토막
거리로 흩어지도록
누구나 만져볼 수 있도록
공기처럼
늪처럼
다섯 시에서 일곱 시까지의 먼 곳
이장욱
너를 향해 자꾸 손가락들이 자라나.
손가락들은 편견으로 가득하다.
오늘은 광화문에서 만나지 않겠어?
발밑의 그림자들은 매일 다시 태어나고
손가락들은 오래 전부터 먼 곳을 좋아했네.
잠깐, 레종 하나 주세요.
하지만 네가 없는 토요일은 너무 거대해서
너를 빼고는 무엇이든 넣을 수 있다.
케이블 티브이의 우울한 개그맨들.
만우절의 진실과 그림자들의 시간.
마로니에 공원 주변 도로는 노점상연합회 시위로 정체중입니다.
정점을 향해 떠오르는 축구공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림자처럼 줄어들었네.
오늘은 모든 게 물질을 빌려 태어나는 오후,
죽음은 뼈가 되고, 휴대전화 이용료 1만 9천원,
외로움은 텅 빈 엘리베이터였다가, 채무변제 15만원,
너는 십 년 전의 바닷가가 되었네.
한낮의 그림자들이 피어나 밤을 이루고
아름다운 밤의 손가락들은 죄가 없고
편견이 없으면 사랑도 없네.
너를 안고 싶어.
아, 그런데 오늘은 명동에서 만나기로 하지 않았어
당신과 나는 꽃처럼
이장욱
당신과 나는 꽃처럼 어지럽게 피어나
꽃처럼 무심하였다
당신과 나는 인칭을 바꾸며
거리의 끝에서 거리의 처음으로
자꾸 이어졌다
무한하였다
여름이 끝나자 모든 것은 와전되었으며
모든 것이 와전되자 눈이 내렸다
허공은 예측할 수 없는 각도로 가득 찼다
누군가 겨울이라 외치자
모두들 겨울을 이해하였다
당신과 나는
나와 그는
꽃의 미래를 사랑하였다
시청각적으로
유장하였다
당신과 그는 가로수가 바라볼 수 없을 만큼
화사하고
그와 나는 날아가는 새를 조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신하였고
나와 당신은 유쾌하게 떠들다가
무표정하게 헤어졌다
우리는 일에 몰두하거나
고도 15미터 상공에 앉아
전화를 걸었다
창가에 서서 쓸쓸한 표정으로 바깥을 바라보자
다시 당신이 지나가고
배후에 어지러운 꽃이 피었다
당신의 활동 영역
이장욱
당신은 침대였다가
커튼처럼 활짝 열렸다가
운명론자의 웃음이 되었다가
도마 위의 고등어처럼
두 동강이 났다가
오후가 되자 당신은
신세계의 상품들 사이에 하루 종일 진열되었으며
말이 되어 나올 듯하다가 사라진
다른 세상이 되었으며
또 당신은 이빨 사이에 끼어
보이지 않게 부패해갔지만
어느덧 당신은 12층에서 추락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고
당신은 어두운 밤이 되어
희미한 옛사랑을 목놓아 부르다
부르다
세수를 한 뒤
홈 쇼핑 채널에 출연하였다가 문득,
다시 침대가 되어
당신이 말하는 순서
이장욱
당신이 입을 벌리는 순간
생일에 대한 이야기가 솟아난다.
그다음엔 언제나 불안에 대한 이야기
반드시 그 순서로
당신은 말한다.
당신은 길 잃은 개에 대해
사이즈가 맞지 않는 운동화에 대해
카드놀이의 불운에 대해
조금씩 넘친다.
골목 모퉁이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불쑥
춤을 추며 우리 앞에 나타나듯
당신은 말하는 법이니까.
뒤꿈치를 들고 걷다가도
개를 향해 중얼거리다가도
레비전의 늙은 정치가들을 경멸하다가도
생일 다음에는 불안,
드디어 당신은 기우뚱한 느낌이 든다.
만원버스 안에서 빽!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에게는
생일 다음에 불안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묻는다.
들은 평생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까?
대체 춤이란
몸의 어디서 탄생하는 것일까요?
당신은 곰곰 생각하고 생각한 후 간신히
생일 다음에 오는 영원한 불안에 대해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더 가깝고 외로운 리타
이장욱
만나러 와주세요.
여기가 북극이라서 여행이라도 하듯이
여기가 적도라서 탐험이라도 하듯이
매일 장례식이 열려요. 조의금을 주고받아요.
국가정책에 대한 토론회가 개최되었대.
우울증이 있음. 이어폰을 귓속 깊숙이 밀어 넣고
집에 갔다. 집을 나왔다. 집에 갔다.
나보다 더 가까운 곳에 북극의 펭귄과 적도의 새들
내 귓속에 내리는 겨울비
혈관 속을 흐르는 음악과 바이러스
이봐요, 펭귄은 북극이 아니라 남극에 산다고.
바이러스는 혈관이 아니라……
당신의 가까운 생물이 사라졌어요.
당신의 먼 사람이 앓고 있어요.
어제는 외로웠던 누군가가
내일은 지상에 없고
집을 나오지 않았다. 집을 나오지 않았다. 집을 나오지 않았다.
사라진 리타가 시를 읽고 있었다. 수유리에서
북극에서
내 귓속에서
여행자가 실종되었다는군. 열대야가 다가오고 있어요.
주가가 급등했대.
폭설이 시작되었다.
만나러 와주세요. 여기가 불가능한 곳이라도
만나러 와주세요. 먼 사람의 꿈속으로
열대우림에 내리는 폭설
북극에 쏟아지는 빗줄기
이곳에서 새들은 헤엄치고
펭귄은 날아다닌다.
좀 조용히 해줄래요? 음악이 안 들려.
내 귓속에서 자꾸 중얼거리는 리타 때문에
저기 저 빗속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더 가깝고 외로운 리타 때문에
독심
이장욱
너의 마음을 읽었는데
그랬기 때문에 너와 멀어졌다.
나의 잘못인가.
오늘은 나의 의지가 아닌 것들과 화해하려고 했다.
일기예보,
먼 도시의 우연한 사고,
잘못 걸린 전화
너는 이상한 옷을 입고 낯선 발음으로 부정하는 말을 했다. 심지어 우리는 국적도 인종도 달라진 것 같았는데,
나의 잘못인가.
너는 비 내리는 거리도 아니고 상하이의 교통사고도 아니고 거기 중국집 아니냐고 묻는 한밤의 전화도 아니다.
나는 식물들을 모르고 펭귄과 거미를 모르고 반도체나 합성수지에 대해 영영 무지하겠지만
드디어 우산도 없이 낯익은 발음으로 수긍하는 말을 했다. 그것은 독한 마음이었다가
고독한 마음이었다가
오늘의 날씨가 급하게 바뀌었다.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달려온 자동차가……
밤하늘은 폭력적인 기호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너무 멀어서
이토록 가까이
너의 마음이 거대해진다.
나의 잘못인가.
너의 마음과 이렇게 오래 싸우고 있다.
나의 잘못인가.
돌이킬 수 없는
이장욱
내가 뒤돌아보자 당신이 나의 이름을 불렀네.
나는 미소를 짓고 나서
열심히 우스운 이야기를 떠올렸지.
놀라운 속도로 충돌한 두 대의 자동차가
서로 다른 곳에서 시동을 걸었어.
부릉부릉, 당신을 좋아한 뒤에
나는 당신을 처음 보았어요.
옥상에서 까마득히 저 아래를 내려다보던 여자는
핫 둘, 핫 둘,
뒤로 걸어서 계단을 내려갔지만.
환멸을 느끼기 전에 먼저
무심해진다는 것.
겨울이 가고 가을이 오면
당신이 거기 없겠구나.
어디선가 말 없는 소녀가 자라고 있겠구나.
모든 것을 이해할 것 같은 아침이 지나간 뒤에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밤이 오네.
혼자 앉아 있는 노인의
생후 첫 웃음같이.
내일 오후에 당신은 나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다가
아침의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연 뒤에는
캄캄한 새벽에 깨어났어.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천장을 바라보는 당신.
드디어 당신을 한꺼번에 깨닫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동물 사전
이장욱
움직이는 것들에 대해서라면 거기 있다가
거기 있지 않은 것
하지만 거기서 여전히
거기까지인 것
이동하는 것들에게 있는 것은 아흔아홉 개의 촉수라든가
내 것이 아닌 의지
그리고 적절한 분포
너와 헤어진 후 나는 움직이지 않았지. 거기서
태양의 주위를 어지럽게 돌고 있었을 뿐.
360도로 고개가 빙 돌아가는
인형처럼
아침에는 네 발로 점심에는 두 발로 그리고
여기 있지만 여기에 없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끝내
먼 곳까지인 것은?
그럴 때마다 내가 속한 종을 이해한다는 것
거대한 성기를 가진 물소들의 이동에 포함된다는 것
나도 모르게 무수한 동족들을 낳고
나를 기준으로
무한한 동서남북을 만든다는 것
그것이 보시기에
좋았지만
아무래도 나는 분포되지 않았다.
내가 있는 이곳에서
네가 있는 그곳까지.
여전히 거기 있다가 문득
네가 거기
있지 않을 때까지.
동사무소에 가자
이장욱
동사무소에 가자
왼발을 들고 정지한 고양이처럼
외로울 때는
동사무소에 가자
서류들은 언제나 낙천적이고
어제 죽은 사람들도 아직
떠나지 못한 곳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전생이 궁금해지고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공중부양에 관심이 생기고
그러다 죽은 생선처럼 침울해져서
짧은 질문 던지지
동사무소란 무엇인가
동사무소란 그 질문이 없는 곳
그밖의 모든 것이 있는 곳
우리의 일생이 있는 곳
그러므로 언제나 정시에 문을 닫는
동사무소에 가자
두부처럼 조용한
오후의 공터라든가
그 공터에서 혼자 노는 바람의 방향을
자꾸 생각하게 될 때
어제의 경험을 신뢰할 수 없거나
혼자 잠들고 싶지 않을 때
왼발을 든 채
굴금한 표정으로
우리는 동사무소에 가자
동사무소는 간결해
시작과 끝이 무한해
동사무소를 나오면서 우리는
외로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왼손을 들고
왼발을 들고
두 번째 강물
이장욱
나는 같은 강물에 두 번 손을 담글 수 있네.
그 강물이 왕십리에도 흘러 다니고
목포에도
오늘 신문을 보았는데 내일 신문이었어.
아침에는 거울을 빤히 보았지. 어제의 내가
사람이었는지
이미 죽었는지 알아보려고
나는 매일 물을 건너 다른 세계로 출근을.
익사체가 둥둥 떠 있는 강변에서 일을 하고
잠시 쉬고 또
일을 하고 당신을 만나기 위해 퇴근을.
카페 탁자 위에 물 글씨를 썼는데
사랑해. 라고 썼는데
손가락이 물속 깊이 들어갔는데
바닥에 닿지 않았다. 그곳에서 오래
살아온 것처럼.
숨을 쉬기 어렵다. 라고 내가 말하자
창밖이 움직이는구나. 라고 네가 말했다.
아마도 바다 가까운 곳으로
저편 강물에 손을 담그고 있는 사람이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았는데
어디서 본 듯한
나의 두 번째 얼굴
뒤
이장욱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지? 밤길을 걷다가 무슨 말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지? 캄캄해지다가,
캄캄해지다가,
캄캄한 곳을 향해 돌아설 수도 없을 때,
너는 괴물 같은 얼굴로, 십자가와 비슷한 자세로, 천둥 번개가 치는 밤하늘 아래,
자꾸 거대해졌다.
등 뒤의 세계는 어디에나 있구나. 매일 잠에서 깨어나기를 반복했는데도 다시 밤. 흩날리는 빗방울들을 기준으로 나는 중얼거리네. 궁금한 목소리로.
의심하는 목소리로.
돌이 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인가.
모든 사람인가.
뒤라는 곳은 무한해. 내내 타오르고 있구나. 나는 자꾸 무너지면서 또
발생하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빗줄기는 팔이 세 개였다가 다리가 열 개였다가 무수한 팔과 다리를 모아 못 박힌 채로
무한이 되는 사람.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오래 살아온 도시가 재가 되어 있었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처음 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뒤늦게 이해되는 것들
이장욱
아,
하고 나는 다른 세계를 깨달았다.
방금 지나온 세계를.
그 세계에도 너라든가
너에게서 먼 곳 같은 것이 있을 텐데
깃털도 있고
깃털이 있으니 새도 있고
저녁의 하늘 끝으로 쓰윽
사라져버린 것이 있을 텐데.
그러니까 그건 잃어버린 우산인가.
신용카드인가.
죽은 사람인가.
나는 만취한 채 택시를 타지도 않았다.
분실물 보관소가 어디 있는지 알게 뭐야. 후회라니,
그런 건 개에게나 줘 버려.
그 순간 불현듯,
나는 어둠이 매일 온다는 걸 처음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
다른 하늘의 새 떼를 깨달은 사람이.
내가 없는 너의 세계를
아,
하고 이해한 사람이.
차갑고 뒤늦은 곳에서 무엇인가 나를 불렀다.
목소리가 오래전의 것이었다.
등나무 아래의 한때
이장욱
내가 만난 여자는 한 여자,
그 여자는 바람 불듯 흘러가는 종이 봉지.
내가 만난 여자는 단 한 여자,
그 여자는 바람 부는 수유리에 스며 흔적 없는 그날, 오후의 쓸쓸한 빗물.
생(生)은 다른 곳에.
가령 수유리 수유시장 입구 수유분식집 앞을 지나는 오후 세 시의 바람.
바람 속을 지나는 저녁 일곱 시의 또 다른 바람.
내리는 어둠과, 더불어 펄럭이는 단 한 순간의 골목을 지나가는 아주 오랜 여행 속에서.
내가 만난 여자는 한 여자,
수유리 수유시장 입구 수유분식집 앞을 무심한 얼굴로 지나던 단 한 여자,
그 여자는 오후 세 시의 바람과 저녁 일곱 시의 또 다른 바람을 지나는 그날,
오후의 힘겨운 빗물.
그 여자 바라보며 등나무 아래 앉아 있는 새벽인데,
새벽이지만 내리는 비,
나는 바람이 태어나는 바람의 고향을 생각하여 어이없는 한때에 고여 있네.
어이없이 등나무 아래의 한때를 흘러가는 어느 다른 생의 여자,
저기 저 다른 생의, 단 한 여자
로맨티스트
이장욱
이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글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가시덤불 속을 누벼 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 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다닥 달아나겠지
아 하 하 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푸드득 푸드드득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둔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마네킹
이장욱
바람이 바람을 넘쳐 플래카드를 흔들고 잎 넓은 나무가 잎 넓은 나무를 넘쳐 푸르는 날,
나는 경건하였다. 나는 불순한 상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완벽하게 나를 조절하였다. 그러므로 나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 나의 침묵은 한없이 부활하여 견고하게 나를 은닉한다. 나의 시선은 당신을 의식하지 않으므로 이미 완성되어 있다.
격렬한 밤이 당신을 지나갈 때도 나는 기하학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내 시선 끝에 아파트가 무겁게 서 있다. 나는 그 정지 자세를 이해한다. 어느덧 나의 고요는 당신의 꿈과 무관하며 나의 午前은 당신의 산책과 무관하다. 나는 조금씩 사라지는 나무들이 지겹다. 나의 최후는 단호하다.
플래카드 아래로 당신이 당신을 넘치며 걸어온다. 당신이 당신에게서 흘러나와 긴 그림자를 이룰 때 잠시 공중에 머물렀던 낙엽이 당신의 배후를 횡단한다. 당신은 혼자 고개를 흔든다. 나는 당신이 지겹다.
만일의 세계
이장욱
만일……이라고 누가 말했다.
왼쪽 귀로 들어왔다가 오른쪽 귀로 흘러 나간 수많은 목소리들처럼
문득 다른 궤도로 들어선 기차처럼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만일……이라고 누가 말했다.
오후 내내 숨어있던 소년은 결국 캄캄한 다락을 나가지 않았다.
당신과 함께 간 외딴 바닷가에는 당신이 너무 많고
오른쪽 귀로 흘러나간 것을 왼쪽 귀로 모아 이야기를 지어내느라
할머니는 죽지도 못했네.
소년은 자라지 않고 어둠이 되었다.
어둠 속의 바퀴벌레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주었다.
수많은 당신들은 아직 그 바닷가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는 단 하나의 당신과 손을 잡고 돌아왔지.
연애하던 호시절을 이야기할 때 할머니,
할머니는 살아 계셨네.
하지만 만일……이라고 누가 말했다.
거기는 어둠뿐이야, 그것이 좋지, 라고 소년이 대답했다.
바닷가의 의자들은 거꾸로 서 있고 태양이 밤에 뜨는 곳,
수많은 당신들은 거기서 외롭게 앉아 있지.
긴 귀를 가진 할머니는 어둠처럼
파도처럼
끊이지 않는 이야기를 해주었네.
밤이 새도록 나는 낯선 길을 달려갔다.
다락에서 나온 소년은 두 귀를 잃어버렸다.
할머니는 오늘밤도 무덤 위에
산 채로 앉아 계셨다.
만일……이라고,
누가 힘겹게 말했다
먼지처럼
이장욱
나는 코끼리의 귀가 되어 펄럭거리고
너는 개의 코가 되어 먼 곳을 향하고
우리는 공기 중을 부드럽게 이동하였다.
활명수(活命水)를 마시고 있는 약국 안의 사내와 함께
머리를 말리고 있는 여자의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배경이 되어
무한히 지나갔다.
오늘 아침의 세계는 역사와 무관하고
어젯밤의 세계는 다만 어젯밤의 세계,
우리는 어지럽고 아름다웠다.
먼지처럼
음악처럼
오늘은 누군가 성수와 뚝섬 사이에서 사라지고
누군가 병든 유태인처럼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누군가 박물관의 입구처럼 조용해지고
아침에는 추리 소설 속의 탐정처럼 깨어났다.
노련한 사서들은 언제나 음악의 비유를 경계했지만
우리는 미래의 음표로 나아가기 위해 현재에
집중해야만 하는 피아니스트와 같이
나는 내일도 기린의 목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너는 모레도 하마의 입처럼 무거워졌다.
우리는 삼십 년 후에도 가득한 먼지처럼
천천히 이동하였다.
목격자들
이장욱
바퀴 달린 것들에게서 배울 수 있을까, 방향이라는 것을. 회전의 힘을. 뒤집힌 자동차 속에서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오늘의 운세를 믿습니다. 오늘은 동쪽에서 귀인을 만나고, 버스정류장에는 야자수 그늘이 드리워지고, 이제 곧 파도가,
파도가 밀려들겠지만
우리가 오늘 본 것은 무엇일까? 인생이란,
적절한 거리에 은행이 있다는 것. 누군가 인출기의 버튼을 누른다는 것. 모자를 눌러쓰고 있다는 것.
시체안치실의 위치는 알고 있나? 유령의 집은? 당신이 그라면,
어떤 수염을 붙이고 걸어가겠는가? 카이제르와 채플린 사이에서 당신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했을 뿐입니다만.
정류장이란 묵비권을 행사하기 좋은 장소. 범인의 은신처는 그늘이 그늘과 겹쳐지는 곳. 잠재적 범죄자들이 두 손을 내밀어 복권을 구입하는,
바로 그곳.
우리 중의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모든 것이 자명해지는 순간,
그때 이 남자는 거기에 있었고 저 여자는 여기에 있었습니다만……
나는 어디에?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의 등 뒤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있다.
몽매한 즐거움으로 한 생(生)을
이장욱
미안하다.
아주 정교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때로 터무니없이 이상한 평화가 저녁 구름과 더불어 흘러오는 거야.
왜 어쩌지 못해 비 뿌릴 듯한 그런 안쓰러운 날씨처럼.
아주 단순한 욕망을 이기지 못해 저기 차도로 뛰어드는 고양이.
상상해보게, 치명적인 것들이 귓전을 스칠 때는 소리조차 없는 법이지만 때로 그런 정적 속에서 맛보는 황홀한 절정을 혹시 아는지. 미안하다.
나야 몽매한 즐거움으로 한 생을 보내겠지만 가끔은 세상의 오래된 비밀이 내 어깨를 툭툭 칠 때가 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결승점에 꼴찌로 도착한 마라토너처럼, 나는 무심히 돌아보지.
무심하지 않으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때가 있다.
어쩌면 모든 게 무효일는지도 모르는 거야. 무효일는지도.
미안하다.
다시 땀이 흐르는군.
아주 정교한 자세가 필요한 거야.
나도 잊지는 않고 있다.
날 용서해다오.
무기여 잘 있거라
이장욱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고백이 놀라운 무기여서 벌판을 피로 물들인다면
대체 왜 고백을
긴 창 들고 적진을 향해 진군하기도 전에
크라이스트처치의 회전교차로에서는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서울의 창밖으로
눈 온다.
우리는 매일 창과 방패를 든 채
고백하고 설득하고 참회하는 벌판으로 나아갔습니다.
갑옷을 입은 채 온몸이 박살나고 뼈와 살이 튀어오르는 그곳으로
출근을
부서진 자동차에서 죽은 사람이 걸어 나왔는데
아무도 그것을 부활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내리는 눈이 허공에서 정지했는데
그것이 기적이 아니었다.
꿈이 괴로워서 꿈속에서 계속 자살을 한다면
대체 왜 꿈을
가련한 자여, 죽음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발생입니다.
어느 아침에 문득 깨어났는데
수많은 전투를 치른 몸이 마침내 쓰러져 있었다.
이렇게 혼자 버려질 거라면
대체 왜 부활을
늙은 사람이 다가와서 그것을
평화라고 불렀다.
창을 버리고 자동차를 버리고 눈보라 속에서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손톱 발톱 끝에서 핏방울이 흘러나왔다.
부활한 사람들이 거리를 걸어 다녔다.
누구에게든 고백을 하고 싶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것은 기적적인 세계였다.
무지의 학교
이장욱
김은 나를 잘 모르는데 내가 이러저러한 운명의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는 김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술을 마셨다.
김은 예언자의 피를 지녔지만 게임을 좋아했고 예언자가 뭘 하는 인간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그런데 네 말이 맞아, 이를 어쩌지. 이를 어째.
중얼거렸고
기묘한 실망과 쾌감에 휩싸인 채 김에게
사랑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에펠탑에서도 종로에서도 몽골의 사막에서도 나는
그런 기분에 잠겨 있었지. 당신이 한 말이 거의 우주에 가깝다는
우주가 당신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그런 기분에
김은 모든 것을 예언할 수 있다면 거기가 바로 지옥이라고 말했는데
지옥은 의외로 안락한 곳이라고
악마가 없다고
그럼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곳은 천국인가? 하고 내가 물었지만
그렇게 묻는 순간
지금 이곳이 천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천국에는 천사도 없고 베아트리체도 없고
교실과 운동장만이
한때 나를 사랑했던 박은 도쿄에서 술을 마시다가 브루클린에서 산책을 하다가 치앙마이에서 연애를 하다가 국제전화를 걸어왔는데
왜인지 네가 했던 말이 자꾸 생각난다고
처음에는 심드렁했는데 그 말이 점점 커져서
거의 우주에 가깝게 느껴진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이다.
이봐요, 나는 천국에서 살아가요. 천사와 악마가 구분되지 않는
구분할 필요가 없는
거의 지옥에 가까운
이곳은 아름다운 곳이고 선생님은 없어요
반대말들
이장욱
오른쪽의 반대편이 사라질 때
먼 곳에서 나의 뒷모습을 보게 될 때
회색으로부터 검은빛과 흰빛을 구분할 때
오늘의 반대말은 무슨 요일인가?
너의 반대말은 누구인가?
복잡한 예감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하지만 사랑해,
라고 말하는 사람이 칼을 만지작거린다면
밤이 점점 뾰족해진다면
한 그루의 부드러운 나무가
아가리를 벌린 채 자라난다면
의자는 책상의 먼 곳에서 타오르고
대답은 질문을 부수고
나는 왜 조금씩 내가 아닌가?
누가 내게서 자꾸 왼쪽을 가져가는가?
내 오른쪽의
무한한 반대편을
반딧불의 잔존
이장욱
마지막으로는 반딧불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병이었고
멈출 수 없었고
새벽에 깨어나 두려웠기 때문에
잘 지내나요? 요즘엔 미세먼지가 기승이에요.
반딧불은 착한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했다. 새해에는 복을 많이 받으라고 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외롭지는 말라고
실은
자신의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고
단순하기로 해요 모든 것이. 내가 나에게서 벗어난 뒤의 밤을 기준으로.
어디에서도 그런 것은 아름다웠는데요.
침묵 뒤에는 침묵
침묵 뒤에는 다시 침묵
침묵 뒤에는 더 단순한 침묵을 따라서 드디어
반딧불이 없는 새벽에 깨어나 나는 생각을 하였다.
생각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아서 구원에 가깝다고
마지막의 뒤에는 반딧불에게 내가 전화를 했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거짓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반딧불이 떠도는 밤을 하염없이 걷고 싶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멈출 수 없어서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미 멈추어 있어서요.
아무래도 전화는 받지 않았다. 새해에는 복을 많이 받으라고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에게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나는 단순해져서 중얼거렸다.
반딧불이 허공으로 반 뼘쯤 떠올라 빛을 내었다.
그것이 참 조용한 거짓말을 닮았는데
드디어 사라지지 않았는데
* 반딧불의 잔존 : 조르주 디디 - 위베르만
밤에는 역설
이장욱
당신을 잊자마자 당신을 이해했어.
닫혀 있기 때문에 들어가고 싶은 문 앞에서.
뜨거워져서 점점 더 뜨거워져서
드디어 얼어붙을 것 같았는데. 이봐,
노력하면 조금씩 불가능해진다.
바쁘고 외로운 식탁에서 우리는
만났으므로 헤어진 연인들처럼.
당신을 알지 못해서 당신에 대해
그토록 많은 말을 했구나.
어려운 책을 읽기 때문에 점점
단순한 식물이 되어서.
해맑아서
잔인한 아이처럼.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으니까
새벽마다 또 눈을 뜨네.
내가 조용한 가구를 닮아갈 때
그건 방 안이 아니라 모든 곳,
거기서
당신이 나타났다.
밤이라서 너무 환한 거리에서.
바로 그 눈 코 입으로
밤의 독서
이장욱
나는 깊은 밤에 여러 번 깨어났다. 내가 무엇을 읽은 것 같아서.
나는 저 빈 의자를 읽은 것이 틀림없다. 밤하늘을 읽은 것이 틀림없다.
어긋나는 눈송이들을, 캄캄한 텔레비전을, 먼 데서 잠든 네 꿈을
다 읽어버린 것이
의자의 모양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눈발의 격렬한 방향을 끝까지 읽어갔다.
난해하고 아름다운,
텔레비전을 틀자 개그맨들이 와와 웃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잠깐 웃었는데,
무엇이 먼저 나를 슬퍼한 것이 틀림없다. 저 과묵한 의자가, 정지한 눈송이들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내 쪽을 바라보는 개그맨들이
틀림없다. 나를 다 읽은 뒤에 탁,
덮어버린 것이.
오늘 하루에는 유령처럼 접힌 부분이 있다. 끝까지 읽히지 않은 문장들의 세계에서
나는 여러 번 깨어났다. 한 권의 책도 없는 텅 빈 도서관이 되어서.
별자리가 사라진 밤하늘의 영혼으로.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읽은 것은 무엇인가?
밤의 접힌 부분을 펴자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문장들이 튀어나왔다.
밤의 상점
이장욱
손가락은 외로움을 위해 팔고 귀는 죄책감을 위해 팔았다.
코는 실망하지 않기 위해 팔았으며
흰 치아는 한 개에 한 번씩
혐오감을 위해 팔았다.
아무것도 후회할 수 없었다.
이제 불 꺼진 네온사인을 위해서는 무엇을 팔아야 하나.
손목을 팔고도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 있나.
안녕. 잘 있나요?
새벽이 오면 여름의 저편으로 사라졌다가 돌아올게요.
이 비 그치면
이 비 그치면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혀를 팔아치우겠어요.
발끝에서 처음 보는 그림자가 피어나고
등이 휘어 외로운 곡선을 이루었다.
냄새와 모양을 상상하는 힘으로
끝나지 않는 편지를 이어갔다.
부디 악몽을 느끼는 근육은 그대로 남겨 줘.
솔직한 관절은 내 곁에 있어 줘.
발목의 뼈들을 모두 팔고도 힘이 남는다면
콩팥을 쥐고
폐를 쥐고
텅 빈 밤거리를 달릴 수 있도록
밤의 연약한 재료들
이장욱
밤이란 일종의 중얼거림이겠지만
의심이 없는
성실한
그런 중얼거림이겠지만
밤은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않고
맹세를 모르고
유연하고 겸손하게 밤은
모든 것을 부인하는 중
죽은 사람의 과거가 빈방에서 깊어 가고
소년들은 캄캄한 글씨를 연습하느라 손가락만 자라고
늙은 개의 이빨은 우우 짖을 때마다
설탕처럼 녹아가는데
신축건물이 들어서자
몇 개의 골목이 중얼중얼 완성되고
취한 남자는 검게 그을린 공기 속을 흘러가고
밤은 그의 긴 골목이 되었다가
그가 되었다가
드디어 외로운 신호처럼
보안등이 켜지자
개의 이빨은 절제를 모르고
갓 태어난 울음들이
집요하고 가득한 밤을 향해
오늘도 녹아가는 이빨을
필사적으로 세우고
변절자의 밤
이장욱
아침에 새로운 마음으로 깨어났는데
그것이 밤이었어요
그것도 아주 옛날 밤
옛날 밤 짧다.
너무 짧아서 잠들 수 없다.
마치 마치…… 하면서 조금씩 다가오는 이야기
설마 설마…… 하면서 점점 무서워지는 이야기
병든 노인들만이 알고 있는 마음으로
엄습하는 것이 있더군요
마침내 당신을 잊고 당신의 먼 곳에서 새롭게 깨어났는데
다시 옛날 밤
밀레니엄이 추억이고 4.19가 전생이고 꿈속의 해방을 거쳐 식민지의 새벽 두 시까지
나는 잤다.
옛날 밤에 잤다.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술이 깨고 술을 마시고 술이 깨고
관 뚜껑을 열고 일어나 아침을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백조와 창조와 폐허를 창간했다.
카프와 신간회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을 했다.
이봐요, 경성에서는 무서운 살인사건이……
당신과 함께 적진에 침투했는데
내가 변절자였어.
나는 왜 자꾸 적의 마음을 이해하는가.
나는 왜 나도 모르게 지혜로워지는가.
옛날 밤 짧다.
너무 짧아서 잠들 수 없다.
나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칼을 빼어 들었다.
이제 그만 그만…… 하면서 다가오는 결정의 시간에
모든 것이 바로 지금인 이야기
새벽 두 시에 깨어났는데 마침내
새로운 마음이었어요
그것은 당신에게 한 번도 얘기해보지 못한
무서운 감정
복화술사
이장욱
1
서랍 속으로 사라진 것들이
어느 날 문득 서랍 속으로 들어오듯
어느 날 다시 돌아오는
오래전의 목소리.
2
가령 골목을 따라가다 다른 골목을 만나면
두리번거릴 수밖에.
갑자기 나타난 곳에서
갑자기 살아가는 것들이 있다.
골목이 끝나면 펼쳐지는
오래된 신세계.
3
저곳인지도 모른다.
조금 낮은 지상이면 어디든 입을 벌리고 있는
다른 세계로의 통로,
가령 담 아래 수챗구멍들.
보이지 않는 개미 동굴들.
우리들의 벌린 입.
다른 세계로 사라진 것들이 자꾸 치밀어 오르는
밤과 호리병의 나라.
4
문득 공포 영화의 엑스트라처럼
나는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아봐.
내 표정은 가능한 한
어떤 의미도 담지 않으려 하지만.
내가 걸어 들어온 곳을 숨죽여 바라보면
어느새 마른 나무들의 윤곽이 바뀌어 있고
담장 위 깨진 병 조각들 속으로
어제의 달빛은 재빨리 스며든다.
5
이제 다른 세계가 돌아오는 시각.
욕실 하수구로 빨려 들어간 머리카락들
흑백사진 속으로 사라진 천연색
우이천 살얼음에 새겨진 물결
오 분 전의 구름
아무리 여행을 계속해도
둘러보면 다시 그곳인,
밤과 호리병의 나라.
6
나는 지구의 회전을 느낄 때가 있다.
세계는 무한한 골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순간 너를 습격하는 상형 문자들.
너의 내부에서 드디어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날이 있다.
혹은 돌아오는 날.
불놀이야
이장욱
무서워
아침마다 우스워
나를 반올림하면
내 몸은 천천히 떠오르겠지
나는 무서워 또
우스워
립싱크를 해볼까요
늙은 프로 레슬러가 갑자기 포효하듯
어디선가 맹활약하고 싶어
당신을 사랑할 때까지
능청스러워질 때까지
검은 팬츠를 입고
명동 사 차선 도로 한가운데
사랑을 꿈꾸는 자세로
사형당한 마녀의 영혼으로
두 팔을 벌리고
네게
운명을 건 윙크를 하는 거야
그 순간 메트로폴리탄의 가로등은 일제히 꺼지고
행인들은 얼어붙고
나는 가장 필연적인 종말을 떠올리네
드디어 두 팔을 벌리고
불놀이야 아 아 아
거대한 입을 벌리자
나는 무서워
나는 또 우스워
반올림 음계를 밟고 다가오는
첨단의 노을 아래서
불멸의 개
이장욱
막다른 골목인데도 커다란 개가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나지 않은 개는 긴 혀를 내밀지 않았고
이빨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이빨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 침도
나타나지 않은 개와 싸울 수 없었다.
귀를 물어뜯고 피를 흘리고 아가리를 찢고
존재의 끝까지
아주 단순한 마음이 될 때까지
그것은 불멸의 개였다.
옆집의 개였다.
개가 아니었다가
거의 진정한 개가 되어서
막다른 골목에서 커다란 개가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나지 않은 개가 내 목을 물고
나타나지 않은 개가 꼬리를 치고
나는 골목의 어둠 속에 서서
바로 그 개를 바라보았다.
아주 단순한 눈으로
비열한 거리 - 코끼리군과의 통화
이장욱
운전기사 최씨는 종점에 붙들려 있다. 종점이 그를 사로잡아 거대한 기계를 움직인다. 종점은 언제나 외곽에 있다.
응, 응. SK 아파트 앞에서 내릴 거야. 먼 데 저녁 산이 이동 중이다. 안 보이는 종점들이 6차선 도로에 자욱해.
좆 겉은 거, 최씨? 는 조금 침묵하다가 러시아워의 도로를 향해 침을 뱉는다. 그래도 우리의 전진은 계속되지. 가로수는 완고하게 지구와 연결돼 있잖아. 나무는 달리거나 총총, 뛰어내리지 않지. 우리가 이동한 거리를 다 합한다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가볍게 뒤돌아서서 휘파람을 불자. 핸들 옆에 매달린 프로렐러는 최씨의 머리칼을 향해 공기를 밀어낸다. 맹목적인 것들은 멈추지 않고,
우리는 눈을 감은 채 또 생각을 하지. 가을이 그 가을이 다시 온다면, 어린 시절의 자전거를 타볼게. 어디선가 손이 나타나 고무 핸들을 잡아줄 거야. 발은 문득 황금빛 페달을 돌려. 손과 발의 기억은 어디 숨어있던 걸까? 하지만 나는 조금도 균형을 무너뜨리지 못하겠지. 전방의 소실점이 나를 사로잡을 뿐. 그게 내 거푸집이다.
창밖의 가로수가 헤엄쳐 와 수족관 속의 나를 멀거니 쳐다보네. 저 유연한 표정, 지겹잖아? 그래서 聖者란 자들이 싫다는 거야. 너희 열둘은 내가 뽑은 사람들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이다(요6:70), 라고 그분도 말씀하셨지. 소파에 누워 8회 말의 프로 야구를 볼 때처럼 나는 필연적이고,
다음 정류장은 SK 아파트입니다. 최씨의 반명함판 얼굴은 출구 상단에 붙어 있다. 그는 오늘밤에도 심상한 표정으로, 좆 겉은 것, 이라고 뇌까릴 것이다. 술잔 속에서 먼 수평선을 향해 둥둥 떠가는 돼지기름,
그래, 맘대로 해. 나는 너를 피해 먼 곳을 돌아갈테다. 우리 만나지 말자.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영원히 연결되는 거야. 아름답쟈? 난 자꾸 웃음이 나와. 탕 탕, 끝내는 거야.
나의 이동을 같은 위도에서 따라오는 먼 산. 별로 할 말이 없다는 듯, 죽은 이들을 품고 흘러간다. 저 완벽한 균형이 지겹지도 않는가 봐. 그렇지?
뼈가 있는 자화상
이장욱
오늘은 안개 속에서 뼈가 만져졌다.
뼈가 자라났다.
머리카락이 되고 젖은 나무가 되었다.
희미한 경비실이 되자
겨울이 오고
외로운 시선이 생겨났다.
나는 단순한 인생을 좋아한다.
뒷모습은 없어도 좋다.
겨울에는 거미들을 위해
더 많은 구석을 가진 영혼이 필요해.
그것은 오각형의 방인지도 모르고
막 지하에서 돌아온
양서류의 생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먼 곳의 소문들.
개들에게는 겨울 내내
선입견이 없었다.
거미들도 조용한 꿈을 꾸었다.
오늘은 네가 보고 싶어.
안개 속에서 뼈들이 꿈틀거린다.
처음 보는 얼굴이 떠오른다.
사랑의 신비로운 표정
이장욱
길 잃은 개들처럼 사랑해
날아가는 총알처럼 사랑해
비 맞는 지붕처럼 사랑해
토요일에는 조금씩 늙어가고
일요일에는 시간 여행을 하고
월요일에는 돈을 세고
비 맞는 지붕처럼 무거워지다가
당신을 향해 곧장 날아가다가
길 잃은 개처럼 혀를 내미네
감정을 절약하고
장부를 정리하고
발자국들을 생략하고
낡은 기분으로 비가 내리네
퇴근시간의 살인을 꿈꾸네
이번 주에도 당신을 사랑해
여름의 나무 아래로 은행원들이 지나가고
누구나 은행원이 되고
어느덧 은행원들도
신비로운 표정으로
사랑을 하는 계절이 되고
사물들과의 이별
이장욱
내 잠 속의 먼 곳에 내리는 비. 이것은 내리는 비와 더불어 걷는 꿈속의 피크닉. 손 뻗으면 만져지던 그대들로부터 나는 머나먼 곳으로. 비와 음악의 숲을 지나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라고는 중얼거리지 않는 이 희망의 나라에서.
천천히 삭제되는 내 더운 몸. 에네르기가 떨어진 아톰처럼 애수에 젖은 자명종이, 낮고 길게 울리는 이 모호한 경계에. 서서히 잦아드는 빗속에서 나는 인사를. 멀어지는 당신께 인사를. 나는 손을 내밀어 당신의 명료한 손을. 지표면을 떠나며 모든 것을 흔드는, 저기 저 비 온 뒤 아지랑이.
사생활
이장욱
너는 사적인 표정으로
약간의 손짓을 섞어 내게 얘기하는 중.
너와 나를 투명하게 비추는 카페 프란츠
대형 통유리 너머로
사생활의 역사가 흘러간다
장엄하다
어떤 사생활이든 활보가 가능한 거리인 것이다
비둘기는 장엄한 자세로
지금 막 생애 최고의 활강을 마치고 안착한다
이 도시에서 지금 그것을 목격한 자는 나뿐
나는 그 활강의 자세를 정확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고요한 비둘기를 향해 아이는
아주 사적인 돌을 던지고
비둘기의 사생활은 가볍게 무너지고
나는 드디어 너를 바라본다
너와 나는 동지다
내일 아침에도 아파트에는
재활용 수거를 알리는 음악이 울려 퍼지겠지
동지들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우리는 장엄한 세계를 건너가리
그리고 또 장엄한 오후가 되면
추리닝에 쓰레빠를 끌고 당당하게
창림김밥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는 거야
생애 최고의 활강을 위해 다시 이륙하는 비둘기가
김밥집 창밖에서 나를 힐끗
바라보는 순간
사후의 일요일
이장욱
발목에 불이 켜지고 무릎에서 부부가 싸우고
성기쯤에는 소년이 울고 있지.
아령을 들고 핫 둘 핫 둘
외치는 것은 어깨쯤.
노인이 아파 누워 있는 심장은 보이지 않네.
목뼈는 황혼처럼 사라지는 중
아직 깨지지 않은 머리통은 어디로 갔나.
머리카락은 외롭게 타오르나.
검은 하늘로부터 눈 코 입이 꺼지고
치아들이 별처럼 사라지고
폐가 없다.
텅 빈 잠의 옥상에 저렇게
오래 서 있는 사람은 누구?
온몸이 피뢰침 같은
전두엽에 맺힌 이물질 같은
손가락마다 죽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그걸로 사물들을 가리키고
인간들을 가리키고
다음 주의 일정까지
발바닥보다 깊숙한 데서
비상등처럼 깜빡이는 것이 있다.
그것을 하루라고 부를 수 있다. 또는
사후라고
삼미 슈퍼스타즈 구장에서
이장욱
그때 야구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내리는 비를,
내리는 비를,
내리는 비를,
혼자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새들의 비밀
이장욱
너와 나 사이에 비밀이 있었다.
나는 침묵했다.
사소한 비밀들로 팽팽히 채워진 채
진군하는 행인들, 우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애.
나는 내 얼굴을 지우고
그 얼굴을 기억하는
다른 얼굴이 되겠지만
보이지 않는 별들 사이로
새들의 저공 비행은
영원히 감추어진다.
좌판에서 거스름돈을 세던 남자는 잠시
죽은 여자를 잊을 것이며 그 순간
여자의 어둠 속으로 일년생 나무의 뿌리는
천천히 가닿을 것이지만.
쓰레기차 한 대가 도시를 흘러 나가고
나는 민노당을 지지하고
지구는 정기적으로
회전 중이다. 내 머리 위를 횡단하는
인공위성들.
오늘은 날씨가 좋다.
또 내일도
그럴는지 모른다.
샌드 페인팅
이장욱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저녁에는.
소년은 날카로운 쇠못으로 자동차의 표면을 긁으며 걸어가고
가늘고 긴 선이 대안으로 건너가 교각을 이루고
교각이 무너지자 보고 싶은 얼굴이 자라고
얼굴이 무너져 황혼의 지평선으로
모든 것이 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사막이라고 부른다.
밤거리에 혼자 서있는 사람이
모든 것에 동의하는 중이다.
어디 안 보이는 곳에서 모래가 집요하게
나를 생각하고 있다.
생각하는 물질들
이장욱
종이 속으로 스며든 물기가 사라지고
휘어진 종이가 남았을 때
그림자는 땅의 굴곡을 이해했다.
마네킹은 인생을 기억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튼튼하게
우리를 생산했다.
벌린 입속의 공기들
뚫린 귓속의 곡선들
당신을 잊고
웃고
검은 하늘을 바라볼 때조차
우리는 가득해졌다.
그림자가 담긴 컵처럼.
깨어지는 그림자처럼.
모두 쏟아진 후에
하나의 물질로 서 있었다.
휘어진 채 정지한 종이와 같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아,
하고 캄캄한 입을 벌리고 있는
저 마네킹과 같이
생년월일
이장욱
이전과 이후가 달랐다. 내가 태어난 건 자동차가 발명되기 이전이었는데,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쾅!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뒤에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더군.
수평선은 생후 12년 뒤 내 눈앞에 나타났다. 태어난 지 만 하루였다가, 36년 전의 그날이 12년 전의 그날이다가,
수평선이다가,
저 바다 너머에서 해일이 마을을 덮쳤다. 바로 그 순간 생일이 찾아오고, 연인들은 슬픔에 빠지고, 죽어가는 노인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케이크를 자르듯이 수평선을 잘랐다. 자동차의 절반이 절벽 밖으로 빠져나온 채 바퀴가 헛돌았다.
생활세계에서 춘천 가기
이장욱
생활세계에서 춘천을 갔네.
진리와 형이상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생활세계에서 춘천을 갔네.
초중등학교 때는 우주의 신비와 시를 배웠지.
공부도 열심히 했고 연애도 했는데
또 독재자를 뽑았구나.
춘천에는 호수가 있고 산이 있고 깨끗한 길이 있지.
여자와 남자와 개들과 소풍이 있고
할머니도.
인사를 하고 밥도 먹었네.
나는 춘천에 들렀다가 그리스와 신라시대를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저는 종교적인 인간이라 매일 기도를 합니다만
고백성사를 한 뒤에 영성체를 모셔야 합니다만
아아, 유물론이 옳았다.
춘천에서 나는 죽어가는 시절의 고독을 떠올리고
사후의 무심을 떠올리고
길거리의 개들과 눈을 맞추었네.
생활세계에서 춘천을 가는 일
그것은 할인마트에 내리는 석양처럼 신비로운 일
낮잠에서 깨어난 오후처럼
비변증법적인 일
열차가 북한강의 긴 교량을 건널 때 옆자리의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어대자
바로 그 순간 온몸에 스며드는
정확한 일
선한 의도들이 묻혀 있는 묘지*
이장욱
당신은 착한 생각을 했고
내 심장은 아직 다 묻히지 않았다.
묘지에서는 매일 죽은 이들이 태어나는데
나는 모든 것이 묘지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사랑해서
누구를 죽였을까?
당신이 그토록 사악한 것은 그토록
선량해서였군요.
명동에서 강원 영동 산간까지
밤의 고속버스 안에서 끔찍한 꿈속까지
사람들이 조금씩 착해진다.
눈물을 흘리며
널 사랑해서 널 의심하는 거야.
대체 국민이 누구야, 국민이? 그런데 왜 당신은
나를 골목으로 데려가나요?
* 선한 의도들이 묻혀 있는 묘지: G. Debord
성(聖) 미아삼거리의 여름
이장욱
햇빛, 표정 없이 흩어진다.
어쩐지 이 거리의 건물들이 모두 성당으로 보여.
이 생에서 저 생으로 가볍게 건너가는, 화양리행 19번 버스 앞에 그림자만으로 바리케이트 치는,
저것들, 저것들이 나는 무섭다. 저 무념무상의 화상들. 지나온 것들이 모두 지난날이라니.
어제 아침엔 한 남자, 미아삼거리를 빨가벗고 횡단하였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모오두 후퇴하라.
흰 내의를 백기처럼 흔들며 그 남자, 햇빛 창창한 대로를 질주하였다. 몇 명의 경관이 몽둥이를 흔들며 그를 따랐다.
차창 밖을 흐르는 성화(聖畵).
가장 완벽한 것은, 가장 무의미한 것이다.
무의미함으로써만, 완벽한 세계. 의미 이전에, 행동하고 싶은 거야 이해해? 하지만 여자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난밤, 나는 완벽을 가장했던 것이다. 나는 숨겨온 열등감을 노출했다.
미아삼거리는 완벽하다.
햇빛 창창한 거리의 성당들 사이로 나의 걸음은 단호하다. 뿌리만으로 숨을 쉬는 나무들. 이건 묵계야, 이건 음모야, 나는 결론처럼 담배를 던진다. 아주 깊은 곳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목소리. 타, 탈출하라, 탈출하라, 모오두 탈출하라!
화양리행 남자 하나, 문득 빨가벗고, 흰 내의를 백기처럼 흔들며, 미아삼거리를 횡단한다. 몇 명의 경관이 몽둥이를 흔들며 나를 따른다. 무심히 성화(聖畵)를 바라보는 사람들.
미아삼거리는 완벽하다. 완벽한 것은 아름답다.
햇빛, 내 웃는 얼굴 위로 한량없이 쏟아지는.
소규모 인생 계획
이장욱
식빵 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 먹고
소규모로 살아갔다.
크리스마스에도 우리는 간신히 팔짱을 끼고
봄에는 조금씩 인색해지고
낙엽이 지면
생명보험을 해지했다.
내일이 사라지자
모레가 황홀해졌다.
친구들은 한 둘
의리가 없어지고
밤에 전화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사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 않았네.
우리는 하루 종일
펭귄의 식량을 축내고
북극곰의 꿈을 생산했다.
우리의 인생이 간소해지자
달콤한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 올랐다.
소염제 구입
이장욱
선생님, 대도시의 밤을 배회하는 산 죽음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교차로를 만날 때마다 좌회전을 하는 것이다.
그레고리오 성가가 흐르는 이어폰을 귀에 끼우는 것이다.
불신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침을 아무 데나 퉤!
선생님, 산 죽음이 배회하는 대도시의 밤을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이해할 수 없다면 상상을 하지 말아라,
동정도 공감도 하지 말아라.
그것이 저의 호소입니다.
선생님, 하늘에는 신이 없고
마음에는 심해어가 산다.
거실에는 가족들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고
모두들 나른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저
불멸의 풍경
선생님, 어째서 제 피부에는 두드러기가 나고
영혼에는 종양이 생기고
구멍이라는 구멍에는 모조리
희귀한 식물이 자라는 것입니까?
제가 드디어 어느 종착지에 닿겠습니까?
교차로를 만날 때마다 좌측으로 돌면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것이 불신자의 운명
저기 약국이 보입니다.
약국에서 선량한 선생님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약국은 좌측 모퉁이에 있고
너는 언제나 흰색 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저에게 약을 주십시오, 선생님,
돈이라면 은행을 털어서라도
사랑이라면 심장을 꺼내서라도
영혼이라면 대뇌의 전두엽을 주겠다.
선생님, 흰색 가운을 입은
나의 선생님
소음들
이장욱
오전 열한 시에 나는 소리들을 흡수하였다.
오전 열한 시에 나는 가능한 한 시끄러웠다.
창문을 열고 수많은 목소리가 되었다.
나는 음속으로 변형되었다.
네 안에 들어가서
삼십 초 동안의 기억이 되었다.
비 내리는 어머니의
썩어 가는 몸을 흘러갔다.
나는 소문이 흩어지는
무한한 형태가 되었다.
침묵하는
허무주의자들을 혐오하였다.
육식동물의
더러운 식욕이 되었다.
혈관 속을 지나가는 피와 피의
현란한 각도,
아이들이 자라는 소리,
우유가 상해가는 소리,
나는 무성영화 속의 주인공이
가장 크게 벌린 입이 되었다.
오전 열한 시에 귀를 막았다.
오전 열한 시에 눈을 닫았다.
나는 완벽하게 침묵하였다.
손가락 진화
이장욱
당신의 부드러운 손가락에 무슨 이유가 있나.
다섯 개로 펴지기 이전에는 무엇이었나.
그렇게 아름답고 사소할 수 있나.
가리키고 지울 수 있나.
스르르 흩어지는 순간에
무너지는 마음은 어떤 형태로 깃들이나.
그래서 새의 흉내를 낼 때가 있나.
무엇과 함께 추락할 수 있나.
가늘어지나.
땅을 긁었나.
애초에 그렇게 갈라져 있던 이유가
무섭게도 있지 않았나.
손톱 바다
이장욱
손톱이 끝까지 자라는 세계를
나의 가장 먼 곳에서 기다렸다.
규칙적인 생활과 함께.
캄캄한 하수도라든가 또
먼바다에서.
나는 자주 신념을 잃어버렸다.
열 개의 사례들 가운데 꼭
모자라는 것이 있었다.
말하자면 다 가리킬 수 없는 것이
이 세계라는 듯이.
나는 손톱을 기르고 또
길렀다.
나를 중지하고
적이 완성될 때까지
너무 환한 곳에서 드디어
툭,
까마득한 어둠을 향해 떨어지는 것이 그의 운명.
할퀴고 싶은.
핥고 싶은.
그것은 먼 바다의 해일이 시작되는 순간.
그가 막 외로운 밤바다에 도착하였다.
잘 손질된 생선과
음료수의 가까운 곳에.
그곳에서 태어나 영원히 출렁이는
검은 수평선으로서.
수요일의 인사
이장욱
나는 수요일을 가지고 있네.
수요일에는 주말의 당신이 없고
수요일의 잠은 나무와 같아.
팔이 자라고
다리가 돋아났으니
수요일의 아침에는 국민체조를.
그리고 집과 버스와 전봇대들을
수요일에 세워두고
처음인 듯 마지막인 듯 걸어보자.
거리의 수많은 뼈들은 삐걱거리다가
위치를 바꾸다가
먼 후일의 수요일에는 마른 잎을 피우네.
낡은 오후를 위해 비는 내리고
석간에는 신선한 부음이 실리고
수요일의 졸음이 오면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다.
오늘은 수요일이 흰떡처럼 부풀어.
수요일은 언제나 증발하네.
먼 후일의 당신은 자꾸 젊어지고
자꾸 어려지고
당신은 어느덧 수요일에 내리는 비.
수요일의 저녁은 자라고
캄캄한 수요일에
우리는 서로에게 인사를.
어둠 속의 나무처럼 조용한 인사를.
식물성
이장욱
햇살이 비닐하우스를 드리우자
우리들은 자란다.
이건 트릭이야.
너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외국인(外國人)처럼 묻지.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네 입속으로 기다란 물관들이 보여.
늙은 개가 허공에 코를 대고 머나먼 향기를 불러오듯
우리는 이곳을 떠나지 않네.
꽃은 발생(發生)하지만 나는 한 번도
혁명을 믿어본 적이 없잖아.
뿌리는 지하를 향해, 줄기는 태양을 향해,
또 꽃은 정기적으로.
그리고 원칙은 무한하다.
나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변해가잖아.
슬로 모션으로 생장하는 낙관주의자들.
추락하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내 친구들.
내 몸에도 꽃 피네.
나는 친구들이 피워 올린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외로운 짐승처럼
허공으로 뻗어간다.
기분이 좋다.
식물의 그림자처럼 우리는
이장욱
이게 누구의 팔인가.
잘 자란다.
조금씩 움직이는 손끝을 만들고
외로운 흔들림을 만들고
무섭게 무성해지는 것
행인 1을 안 보이는 손아귀로 휘감고
행인 2의 혼잣말과 비슷해졌다가
막 도착한 행인 3의 무심한 얼굴빛이 되는 것
어둠을 켰다가 깜빡
끄는 것
우리는 움직이지 않고도
벌레처럼 상상력이 깊다.
무한한 친구와 무한한 적이 동일하다.
평면과 깊이가 일치한다.
그것이 우리의 정의
저녁이 올 때마다 그대는
우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연락을 받을 것이다.
사투 중이라고 들을 것이다.
무심할 것이다.
여기는 조금씩 지상과 일치하고
공기가 희박하고
누워 있기 좋은 곳
그대는 모든 것을 밟는 자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무한한 친구가 되어간다.
우리의 가장 어려운 적도 도달한다.
이 모든 것은 그늘이
무섭게 깊어 가는 이야기
이윽고
완전한 밤의 이야기
신경 정신과에서 살아남기
이장욱
날씨는 화창하고 신경정신과에는 고객이 많지만 나는 무언가가 나의 잘못인 것 같았다.
창밖은 저렇게 완고한데 나는 여기 앉아 책이나 읽어도 되나.
고개를 들어 구름이나 멀거니 바라봐도 되나.
저기 저 무책임한 알라딘 램프를
나는 나를 죄인의 위치에 놓는 버릇이 있어요. 모든 죄인은 스스로를 구름으로 만들어요.
피아노가 되었다가 낙타가 되었다가 사자가 되어 먼 곳으로 흘러가요. 이곳에서 나가고 싶습니다만
나는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나의 불면과 나의 환각과 나의 약물치료조차도 유신시대를 기준으로
식민지 시대의 산물로서
드디어
위화도 회군까지
한 마리의 토끼는 어떻게 역사적인가. 낙타의 영혼은 어디까지 구성되는가.
알라딘 램프에서는 또 무엇이 튀어나오나. 무슨 소원을 어떻게 빌어야 당신에게 닿나.
저는 매일 기도를 합니다만, 사랑과 증오의 끝에는 늘 선생님이 있잖아요.
언제나 고객이 많은 선생님,
달나라에서 오신 선생님,
토끼 같은 선생님,
귀여워서 뼈를 토막 내고 싶은,
낙타가 낙타를 용서할 수 없고
사자가 사자를 구원할 수 없고
창밖의 구름은 피아노를 치면서 폭풍이 되어갔네.
리듬은 알레그로
거기서 바라보니까 좋아? 책상 너머에서
천국에서
이 문장 바깥에서?
곧 램프의 정령이 튀어나와 우아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램프의 정령은 마법사였다가
회계사였다가
압록강에 홀로 남은 고려의 병사였다가
나는 스툴에 앉은 채 정면을 노려보았다.
나는 고백을 하지도 않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도 않았다.
창밖에서 수류탄이 터지고 유리창이 박살나고 드디어 낙타와 사자와 독립군들이 난입하고
우리의 피가 사방으로 튈 때까지
실종
이장욱
나는 조금씩 너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내 바깥에서 태어났다.
나는 아무것도 회상하지 않았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길을 걸어가는데
누군가의 기억이
내 머리카락을 들어올렸다.
내 발이 지상을 떠나가는 풍경을
행인들은 관람하였다.
내 눈썹과 입술과 또 어깨가
격렬하면서도 고용하게 실종 중일 때
알 수 없는 먼 곳에서
누군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햇살 속에서
두 팔을 한껏 벌렸다.
아르헨티나의 태양
이장욱
나는 아침마다
지구 반대편을 기준으로
깨어났다.
당신이 탱고를 추는 오후는
잠 속의 내가 리듬을 잃는 시간
손끝이 천천히 지워지는 당신의 자정은
내가 오늘의 사건사고란을 읽는 시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오에는 그림자의 목이 사라지고
그늘 속의 눈 코 입이 자정의 내 얼굴을 닮아가고
우리는 서로 발바닥을 맞댄 채
지구를 움직였다.
오늘은 하루종일 내가 삼킨 혀끝에
당신의 긴 식사 시간을 더하도록 하자.
갓 잠에서 깬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창문을 열면
하루의 근무를 끝낸 당신이 밤하늘을 쳐다본다
거기는 별자리를 잃은 별들이 하나
둘
아홉
지금은 그늘 속으로 사라진 나의 목을 달고
당신이 깨어나는 시간
태양이 지구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오늘도 정교하게
그림자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
아르헨티나의 태양이
아이누
이장욱
이상한 소문이 돌았어. 내가 이미 죽었다고 한다. 볕 좋은 곳에 묻혔는데도 뭐가 그리워서 무덤을 나와 홀로 산책을 하고 전화를 하고 스쿠터를 타고 질주하는 걸 보았다는 사람들이
이상한 소문이 돌았어. 내가 아이누인이었다고 한다. 나는 북해도의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잠시 이 도시에 들렀을 뿐이라고
주식은 바다 연어
전생은 코뿔소
하지만 지금은 서울시민으로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어. 내가 노숙자가 되고 신앙을 설파하고 모르는 아이들을 마구 낳고 하하하 웃으며 놀이 공원을 뛰어 다니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는
당신과 눈이 마주쳤다는
맞아요. 사실 나는 아이누 사람인데 스쿠터를 탈 줄 안다. 나는 바다 위를 달릴 수도 있고 코뿔소처럼 포효할 수 있다.
나는 북해도의 해변에서 아내와 소박한 삶을 살아갔을 뿐인데
나는 어째서 이곳에서 장례식도 다 끝나고
볕 좋은 오후에
잘 묻혀 있었다.
아프리카식 인사법
이장욱
계단들은 차분하게
중력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자꾸 높은 곳으로
또 낮은 곳으로
이동했다
리듬이 없었다
그해 겨울에도 전철 노선도는 더 복잡해지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더
지하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신문들은 매일 검고 두터운 헤드라인을 필요로 하고
각자 혼자가 되어 우리는
흰 빨래들이 흔들리는 옥상에서
멀리 지나가는 일요일을 바라보았지
그러니까 이제 더 가벼운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대기권을 향해 전속력으로 상승하는
풍선의 사랑과
너무 말이 없었던 하루
그리고 아프리카식 인사법 같은 것
나는 매일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처럼 두려워지고
나는 내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는 이들을 사랑하고
나는 흩어지는 연기를 한 시간 동안 바라볼 수 있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계단을 내려다가다
나는 너를 만나고
우리는 아프리카 식으로
안녕,
하고 인사를
우리는 그렇게 코를 맞대고
얼음처럼
이장욱
나는 정지한 세계를 사랑하려고 했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세계를,
나는 자꾸 물과 멀어졌으며
매우 다른 침묵을 갖게 되었다.
나의 내부에서
나의 끝까지를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나의 저 너머에서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들을.
그것은 꽉 쥔 주먹이라든가
텅 빈 손바닥 같은 것일까?
길고 뾰족한 고드름처럼 지상을 겨누거나
폭설처럼 모든 걸 덮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가위 바위 보는 아니다
굳은 표정도 아니다
내부에 뜻밖의 계절을 만드는 나무 같은 것
오늘 밤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는 생각 같은 것
알 수 없이 변하는 물의 표면을 닮은
조금씩 녹아가면서 누군가
아아,
겨울이구나.
희미해.
중얼거렸다
엉뚱해
이장욱
갑자기 흥겨워지는 사람이 있고
갑자기 지쳐버린 사람이 있고
내일이 오자
문득 내 인생에서 사라지는 사람이 있고
아침에는 사심(私心)이 없어졌다
긍정의 힘으로 나아갔다
중력은 고마워, 그게 없으면
십 년 전은 어디로 갈까
어제는 또 어디로
나는 펭귄처럼 무심해졌다
뒷골목을 헤매도 삐라가 없고
인공위성의 고도를 상상할 수 없고
북극의 밤은 길어
우리는 엉뚱하게
年金을 부었다
갑자기 미래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믿어요
저 앞에서 뒤뚱거리며
펭귄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엉뚱해 역시
펭귄이란
엘리베이터는 음악처럼
이장욱
희고 신선한 냉장고가 올라가는 곳에서
녹슨 냉장고가 스르르 내려가는 곳까지
아가씨와 맥주와 양념치킨과 모자를 눌러 쓴 배달원 그리고
등 뒤에 감춘 것
여기서 우리가 매우 밀접해지는군요.
목덜미에 점이 있구나.
냄새가 이상해.
순환하는 별들과
뜻밖의 기상현상과
송전탑의 끝 그리고 우리는 문득
허공에 정지했다.
이토록 깊은 어둠 속에서 가까워졌는데도 마침내
쿵쾅거리는 위층으로
주차장으로
십 년 후로
연인은 키스를 하며 올라갔기 때문에
노인은 혼자 거울을 보며 내려왔다.
옷매무새를 잘 고치고
흰 머릿결은 한쪽으로
음악도 나온다.
여자의 목소리가 스르르
천상에서 내려오는 올가미처럼.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는
위층 아래층으로 이어진
환한
밤의 손목들과 함께.
여름의 인상에 대한 겨울의 메모
이장욱
내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도시가 불타고
인생은 끄덕끄덕 흘러갔다.
정직한 날씨였다.
가급적 멍하니 존재하기 위해
자세를 낮추는 개가 있고
뜨거운 잎새들 사이로는
제설차가 지나갔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두터운 외투를 입고 여름의 아지랑이 속으로 들어가면
바그다드의 폐허를 걸어가는 펨므가 있고
폭격기가 날아가고
여름의 아이들이 있었다.
수평선 너머에서 어제의 잠 속으로 파도가 밀려우자
우리는 서로를 등진 채 힘껏 달렸다.
정직한 날씨였다.
우리는 겨울에 다시 만나
지친 개처럼
뜨거운 혀를 내밀었지만.
여행자들
이장욱
후포에 가자 / 후포에 가서 / 가장 단순한 표정으로 지상에 내리는 / 음악이 되자 / 사소한 흔들림들을 모아 수평선을 이루면 / 아지랑이처럼 늙은 고래들이 느리게 이동하는 곳 / 결국 우리는 후포에 가자
여행은 즐거워.
오늘은 개미들이 대열을 이루어 행진 중이예요.
본능은 향기롭고, 뜨거운 매미는 죽었고, 여름이에요.
내비게이터 위를 깜빡이며 이동하는 점. 여름의 내가 눈을 감자 겨울의 당신은 영원히 전방을 주시합니다. 우리는 나란히 떠났다가, 깜빡이며 돌아옵니다.
하지만 어지러워.
나는 무서운 속도로 자전하는 행성을 여행했네.
너무 오래 빙빙 돌아서 젤리가 된 고양이처럼
우리는 매일 미래에 닿았던 거지. 당신은,
내 사랑, 어디 있니?
짐승의 살이 위장에서 형체를 잃어가듯
나는 여행 중이고 자꾸 몸이 지워져.
내 죽은 여자의 아침을 따라.
러시아와 인도와 샴을 나는 다 돌아다녔어요.
쿠바에 가면 로맨틱한 혁명가들을 볼 수 있을까요?
아바나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에 데려다줘요.
거기서 두 손을 동그랗게 모아 목청껏 불러보겠어요.
쿠바는 쿠바, 아바나는 아바나,
그런데 오늘은 자꾸 다른 방향으로 머리카락이 자라. 내가 널 사랑했을까?
소년의 표정을 지우고 수많은 이발사들을 잊고 이제 마지막 일몰을 향해 머리카락은 자라네. 머리카락은 명랑해.
꿈과 또 꽃피는 침대가 사라지자 유일하게 창조적이지.
내게 비 내릴 때 네게 이상한 아침이 오고 내게 소중한 것이 없을 때 너는 어쩔 수 없이 눈을 깜빡이고 내가 유물론자로서 시를 읽을 때 너는 마침내 마지막 여행을 결심했다.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우리는 만나겠지. 우리는 어디선가.
깜빡이며 이동하는 은하수가 블랙홀로 사라지는 장관을 본 적이 있어요? 그곳이 소실점일까요? 그 밤내 우리는 청평 호반을 걷고 있었잖아요.
연장전
이장욱
야구장과 축구장에서는 언제나 극적인 승부가 벌어지지만 실은
동물원에서도
꿈속에서도
심판은 사랑의 마음으로 선언한다, 승리와 패배를.
또는 영원한 타협을.
리플레이를.
나는 목표물을 향해 공을 던지고
편지를 쓰고
애원하고
정지한다.
공의 궤적이 툭 끊어지자,
갑자기 중력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코알라가 나무에서 떨어졌다.
코끼리가 풀밭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심판은 사물들을 정확히 바라보려 한다. 수첩과 시계와
또 가족관계를.
퇴장이 선언되는 순간 우리 모두의 죄책감은 어디로 가는가?
정거장 바깥에도 적들은 존재하는가?
울타리가 무너지면 순한 동물들은 어디로 달려가는가?
내가 찬 공은 아직도 다른 시간을 향해 나아가네.
이것이 무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넓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승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것이,
나의 오늘밤이라는 것입니다.
이별과 망각이 선언된 뒤에도 선수는 질주한다.
포효하는 짐승들
극적인 정지장면
어디선가 날카로운 리듬으로 휘슬이 울린다.
기나긴 연장전이 시작된다.
영원회귀
이장욱
우리가 어디서 보았더라? 또 다른 얼굴로.
조금 더 어려운 곳에서.
견딜 수 없이.
술을 한잔할까.
뼈부터 녹아갈까.
우리에게 가능한 농담의 종류는 몇 개?
호주머니 속의 불안은?
어제 꿈에는 누가 죽었나?
아 그래서 내 입술이 걔 입술에 닿았는데
입술만을 기억하는 거대한 입술이 되었는데
입술들은 무한하고
서로 닮았지만
자살한 사람들은 누구나
아직 자살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지.
어느 휴일의 잠에서 깨어 어리둥절하던.
나는 그게 이상해서 중얼거려.
조금씩 돌아와달라고.
농담처럼.
잠처럼.
가능한 한 단순해져서.
하지만 마주 앉은 네 얼굴은 또 먼데 있구나.
그것이 인체의 골격.
나와 비슷하게
커다란 눈구멍이 뚫려 있는.
술집을 나오자 비가 내렸다.
나는 우산이 없어서
유한한 빗방울들을 세었다.
아흔하나 열둘 일흔일곱 백구십팔......
네가 화를 냈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언젠가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예측 가능한 이야기
이장욱
꽃들은 많은 것을 예언하고 사라졌다
밤이 밤마다 그리는
밤의 자화상에 대해
꽃이 있던 자리의 허공에 대해
당신이 나에게
흥미를 잃는다는 것에 대해
하지만 개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을 향해서 짖고
나는 예측할 수 있는 것들만을 떠올렸다
꿈속에서는 눈을 감고도
아주 무서운 것을 볼 수 있다는 것
당신이 조금씩
먼 구름을 닮아간다는 것
어느덧 나는 개들의 꿈속을 달려갔다
개들의 꿈속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꼬리를 세우고
최후인 듯 짖어댔다
꽃들의 예언을 위해
무거운 구름을 위해
우리의 발밑에 그려지는 무수한 동심원들
하나하나를 향해
*개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을 향해서 짖는다(헤라클레이토스)
오늘도 밤
이장욱
밤의 인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요괴들처럼 말이 없었네.
여덟 개의 발을 가진 것들이 고요히 이동하듯이,
밤하늘에 깜박이는 것들의 저편을 상상하지 않는 힘으로,
우리는 나아갔네.
불쾌한 비가 내려요.
나는 당신의 혈액형이 궁금하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내일은
모래는
어젯밤 도로에서 깔려죽은 고양이는
멀어져요.
우리는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음악이 부죽하지 않았다.
어떤 사소한 운명으로부터 곧 연락이 오기라도 할 듯
몰두하였다.
저는 이제 밤 자체인 듯 캄캄해지고
당신은 참으로 정직해집니다.
그것이 우리의 오랜 불운이겠지만,
생각이 많아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결국 도로 위의 고양이처럼 낡고 현명해.
네게는 번식의 욕망이 없고
내게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우리는 생각난 듯 잠이 들었네.
우리는 결국 요괴들처럼 눈 들 것이네.
밤의 인간들로서
유쾌하고 정기적인
밤의 인간들로서
오늘은 당신의 진심입니까?
이장욱
외국어는 지붕과 함께 배운다.
빗방울처럼.
정교하게.
오늘은 내가 누구입니까?
사망한 사람은 무엇으로 부릅니까?
비가 내리면
낯선 입 모양으로 지낸다.
당신은 언제 스스로일까요?
부디 당신의 영혼을 말해 주십시오.
지붕은 새와 구름의 의문문
그리고 소년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누구든 외롭다는 말은 나중에 배운다.
시신으로서,
사전도 없이.
당신은 마침내 입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매우 반복합니다.
지붕이 빗방울들을 하나하나 깨닫듯이
진심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지금 발음한다.
모국어가 없이 태어난 사람의
타오르는 입술로.
나는 시체의 진심에 몰두할 때가 있다.
이상한 입 모양을 하고 있다.
오늘의 날씨
이장욱
제네바에서 모스크바까지
모스크바에서 또 서울까지
우리들은 잠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지워진 몸으로 연결되었다. 이제야
수많은 손가락들은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잠 속의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
모든 사랑은 건전한 일상 속으로 사라져요.
어째서 우리는 견딜 수 있는 거지?
하지만 오늘은 저녁 약속이 있어요.
종로 3가 횡단보도 옆에 주저앉아,
석양을 받으며,
끄덕끄덕 졸고 있는 남자.
엘리베이터처럼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우리는 동시에 떠올렸다.
우리의 내부에서 무엇인가 하강해.
우리는 지친 잠 속에서 만나겠지만
오늘의 날씨는 서울에서 제네바까지
제네바에서 또 모스크바까지
변동이 없었다.
오전에서 내일의 다른 오전까지는
날 잊어줘.
우리는 물구나무를 서서 장엄한 아침을 맞자.
물구나무는 외로워.
당신이 거꾸로 보이고
나는 오늘의 날씨 속으로
영원히 하강 중이지만
오른손은 모르게
이장욱
왼손은 수십 개의 사소한 실망들을 알고 있다.
왼손은 조금 더 가까운 데서 생각한다.
왼손은 먼저 떨린다.
지붕 위에 내려앉는 새들의 무게와 함께
밤의 이동속도로
나의 왼쪽에서는 무언가
꿈틀거리는 기색.
왼손에겐 친구가 필요해.
아주 분명한 친구.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목으로
악수를 청하는 친구.
왼손이 좋아하는 것은
갑자기 왼손이 되는 것.
안개야 양떼처럼 흩어질 수 있겠지만
그 순간 왼손은 사냥개가 되는 것.
그것에 꽂히는 것.
매일 오른손도 모르게
왼손이 사라진다.
세어야 할 것들이 많은데
가리켜야 할 것들이 많은데
스르르 펴진 뒤에 왼손은
낯선 이에게 인사하는 데 천재.
쥐락펴락 혼자 손금을 만들다가 불현듯
그것이 되는 것 역시.
한낮의 거리에서 당신과 손을 잡고 걸어가다가
당신의 손바닥을 뚫고 튀어 나간
나의 왼손은.
오전(午前)
이장욱
나는 나의 꿈속에서 당신을 보고
당신은 당신의 꿈속에서 나를 보았다
우리는 자주 지나친다
손을 스치려다가
손을 거둔다
급수차가 아스팔트에 흘린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순간
나는 당신의 섬세한 명암을 떠올린다
그 아침이 약간 지나자
나는 당신을 잊는다
내 시선 끝, 지하철 창밖으로 희끗 지나가는 것,
나는 깜빡깜빡 사라진다
당신은 나의 짧은 꿈속에
가볍게 손을 집어넣는다
오해
이장욱
나는 오해될 것이다. 너에게도 바람에게도 달력에게도.
나는 오해될 것이다. 아침상 위에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나긴 터널을 뚫고 지금 막 지상으로 나온 전철 안에서, 결국 나는, 나를 비껴갈 것이다.
갑자기 쏟아지는 햇빛이 내 생각을 휘감아 반대편 창문으로 몰려가는데, 내 생각 안에 있던 너와 바람과 용의자와 국제면 하단의 보트 피플들이 강물 위에 점점이 빛나는데,
너와 바람과 햇빛이 잡지 못한 나는 오전 여덟 시 순환선의 속도 안에 약간 비스듬한 자세로 고정되는 중. 일생을 오해받는 자들, 고개를 기울인 채 다른 세상을 떠돌고 있다.
완전한 밤
이장욱
이 밤은 아홉 시에서 열한 시까지 흘러가요
아홉 시에서 열한 시까지의 이 밤은
주공아파트 8층에서 몸을 던진 여자가 2층 난간에 걸려
그 긴 머리가 늘어져 있는 밤이에요
이 밤에는 음악이 없어요
나는 아홉 시에서 열한 시까지
역전 다방의 커다란 수족관 앞에 앉아 긴 머리를 매만져요
나는 이상한 시간에 대해 생각하지만
형광등 아래의 열대어들, 후회 없이 하늘거려요
또 긴 머리의 그녀는
아홉 시에서 열한 시까지의 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귤껍질이 마르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해요
그녀는 꿈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지만
이 밤은 아홉 시에서 열한 시까지 흘러가요
오로지 이 밤은 아홉 시에서 열한 시까지의 밤이라서요
외계인 인터뷰
이장욱
나는 가벼운 유머를 들은 듯
미소 짓는다
그건 나의 방식
예컨대 나는 고양이나 개와는
다른 종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들이 곁에 있으면
먼 산만 쳐다보게 되잖아요
언제나 미봉책만이 가능하니까
내가 말하는 속도는 속도가 아니라
나의 변신,
나는 나에게 연루되어
나에게서 나에게로
끝까지 이어진다
중독자들을 사랑해요 개들은 쉽게
우리에 대해 차가워지니까
나는 매순간 개조되지만
어중간하게 당신을 신뢰하는 목소리를 내어보고는
멋쩍게 웃는다 언젠가는
먼 산을 위해
희대의 유머를 하나 날리고 싶어요
세상의 고양이
개
지구인들이 한꺼번에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나는 먼 산과 또 당신을 위해
안간힘을 다해 천천히,
변신 중이다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외로운 이빨이 빛나는 아침 풍경
이장욱
새벽에 눈을 뜨면 붉은 등의 횡단보도를 느리게 건너오는 늙은 개의 이빨을 느낀다 나는 집을 나와 외곽의 도로를 따라 걷는다 한 여자의 눈빛이 안개 저 편에 깜빡이며 저물어간다 안개가 섬을 만든다 이것은 그리운 명제이다
한 여자의 발자국이 안개의 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으나, 나는 한 여자의 발자국만을 따라 이곳에 왔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붉은 등의 횡단보도를 건넌다 도대체 무엇을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파리바게뜨 안에서 낯선 사내가 흐느끼고 있다
그는 멸종을 앞둔 마다가스카르 거북의 사진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거북의 눈으로 안개가 내리는 녹천역을 바라본 적이 있다 고개를 든 사내의 얼굴에 번지는 것은, 이상하게도 냉소적인 미소였던가 여전히 안개는 섬을 만든다 섬은 그러므로 존재한다
외로운 이빨은 그렇게 빛나는 것이다 붉은 등의 횡단보도를 건너간 늙은 개가 안개 너머 먼 지평선 쪽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의 마른 뒷모습을 바라본다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 그 끝의 해안에서, 이제 마지막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가 있다 나는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다 안개는 섬을 만든다
왼손의 돌멩이
이장욱
갖고 싶은 게 있나?
골라 보렴.
오른쪽 주먹과 왼쪽 주먹 중에서
이 상자와 저 상자 가운데서
오른쪽 주먹을 펴면 꽃들이 피어오른다. 일생을 화사하게 덮어버리지.
하지만 왼손에는 차가운 돌멩이
외로움조차 사라진 마음
빗소리. 수많은 각자의 시간들이 떨어지는 빗소리.
나는 검고 커다란 망토를 휙!
펼쳐서 너를 가리네. 너를 덮어버리네. 밤의 망토 속에서 너는 문득 생명을 얻고
점점 더 생생해지고 마침내
생활을
나는 경쾌한 리듬에 맞춰 무대 앞으로
전 세계의 관람객들이 보는 앞에서 탭댄스를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우아한 포즈로 만주 벌판의 역사를 바꾸고
십 년 전의 빗소리를 바꾸고
어젯밤 굳게 먹었던 마음을 바꾸었네.
아아, 하지만 모든 것은 망토 속에 있었다.
빨간 구두가 혼자 춤을 추는 아홉 살
먼 나라의 수평선을 표류하는 열아홉 살
스물아홉에서 쉰아홉의 변치 않는 사랑까지
오늘은 마법에 가까운 아흔둘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망토를 휙!
걷어내자.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허공
누구든 처음부터 알고 있던 바로 그것
하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처럼 비명을 지르자.
네가 사라졌다!
여러분, 이것은 마술이 아니다.
망토 속에는 허공이 아니라
빗소리
수많은 각자의 시간들이 떨어지는 빗소리
그리고 나의 아름다운
왼손의 돌멩이
용의자
이장욱
#천변여관
삭제. 나는 지우는 자이다.
#낡은 욕실
이빨을 닦을 때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거울. 그 순간 나는 유일하게 이빨에 사로잡힌 자. 나는 어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지나치게 집요하다. 누군가 내게 완고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려준다면. 나는 복종하는 자의 평화와 더불어. 그러나 오늘은 약간 어지러운 아침.
#산동반점
알리바이를 위해 당신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당신을 만나자 나는 소리 없이 사라진다. 여전히 내 앞의 당신은 나를 의심하지 않고. 그것은 일종의 습관이다. 나의 행방은 일간스포츠와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YTN의 머나먼 소문 속으로 사라진다. 때로는 담배 연기 속으로.
#거리
담배와 신문을 사야 한다. 습관의 내부를 관찰할 것. 완벽하게 나를 은닉 할 수 있는 그곳.
#담배와 신문
나를 의심하는 자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편의점의 여자를, 가판대의 사내를, 유심히 관찰한다. 그 표정이 나를 영원히 삭제하는 순간이 있다. 변화는 아주 미세하다. 그때를 기다려 나는 편의점과 가판대를 떠난다. 삭제된 것들이 내 뒤를 추적하지만, 나는 슬쩍 몸을 돌려 골목으로.
#내발산동
증거인멸을 위해 몸을 바꾸는 낮과 밤. 아직 모든 것은 혐의일 뿐. 그렇다. 나의 우울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다. 지겨워.
#황혼
그러므로 이상한 동감의 순간이 있다. 지금 누군가가 내가 바라보고 있는 황혼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나는 당황한다. 방금 스쳐온 골목길의 그림자, 그것이 당신이라면. 다시 말하지만 나는 황혼을 통해 내게 건너온 당신과 무관한 자. 황혼이란 아주 사소한 우연일 뿐.
#방백, 혹은 삼성 파브
결국 나는 길가의 돌. 나는 극도로 천천히 발견될 것이다. 우연히 발에 치여 당신의 눈앞에 그 사소한 전모를 드러낸다는 것. 쇼윈도우에 진열된 삼성파브.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화면이 스프링복의 뿔을 클로즈업하는 순간. 뿔의 배경으로 보이면서 보이지 않게 이동하는 초원의 태양.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이장욱
서로 다른 사랑을 하고
서로 다른 가을을 보내고
서로 다른 아프리카를 생각했다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드디어 외로운 노후를 맞고
드디어 이유 없이 가난해지고
드디어 사소한 운명을 수긍했다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모여들었다
그가 결연히 뒤돌아서자
그녀는 우연히 같은 리듬으로 춤을
그리고 당신은 생각나지 않는 음악을 찾아 바다로
우리는 마침내 서로 다른 황혼이 되어
서로 다른 계절에 돌아왔다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으면 물이 돼버려
그는 零下의 자세로 정지하고
그녀는 간절히 기도를 시작하고
당신은 그저 뒤를 돌아보겠지만
성탄절에는 뜨거운 여름이 끝날 거야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모여들어
여전히 사랑을 했다
외롭고 달콤하고 또 긴 사랑을
우리 동네
이장욱
여러분 우리 동네에는 미친, 미친, 미친
사람이 있다. 완전히 미치지는 않아서
사람들을 보면 멀쩡한 척 인사를
마트에도 가고 이발소에도 가고 백반집 오락실 수영장에도 가고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지만 저것은 거짓이다 여러분!
저 사람은 지금 우리 모두의 공동생활에 치명적인 위해를
저이는 곧 바늘을 찾아서 바늘을 품고
식칼을 찾아서 식칼을 들고
망치라든가 휘발유라든가 권총 같은 것을 품에 숨기고 저이는
저이는 골방을 나와서 골목을 나와서 광장을 나와서 망상을 집착할 미로를 전망을 회고를 전염병처럼
저이는 버스정류장에 멍하니 서 있고 지하철을 환승하고 야구장에 도착하고 뜨겁게 응원을 하고
영화관 같은 데서는 두 시간 내내 침묵을 하는 저이는
마트에서는 결국 가격표를 꼼꼼히 확인하고 이발소에 앉아 머리를 맡긴 채 드디어 눈을 감고 실내수영
장에서는 마침내 마침내 잠수를
배영을 할 수 있다면 천장만 보여서 좋을 텐데.
물을 좍좍 가르며 외롭게 인생을 흘러갈 수 있을 텐데.
백반은 오늘따라 맛이 좋았네.
꼬마들은 왜 귀여워.
학교 정문을 지나 마트에도 가고 문구점에도 가고 이발소와 편의점에 들렀을 뿐인데
누가 지나가면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식칼이 없고
권총은 더더구나 없는데
실은 진실이나 거짓도
미친, 미친, 미친
이라고 중얼거리며 누가 내게서
천천히 멀어져 갔다.
우리 모두의 초능력
이장욱
오래전에 우리는 순서대로 태어났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뒷모습을 볼 수 있고
흘러간 시간을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다.
수많은 사건들을 창조하자 스르르 얼굴이 변하고
누구나 문득
살인자의 밤을 맞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먼 곳에서 잠든 채
새로운 과거를 생산했다.
어제보다 나쁜 자화상을 발명한 뒤에는
지난해의 잡담을 반복하고
희미한 손바닥으로
새벽에 내리는 눈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느낄 때에는
아침 뉴스의 화면을 향해 드디어
짐승의 욕을 내뱉을 때에도
우리는 매일 그림자를 창조할 수 있고
조용히 그림자와 손바닥을 마주할 수 있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비명을 지를 수 있고
우연을 위한 장소
이장욱
우연한 비는 일요일의 생각이었다가
우연한 비는 두 발의 친구였다가
우리는 진흙탕 속에서 일제히
전진하였다.
너와 나 사이의 빈 공간은 자꾸 움직이는 세계
오프싸이드는 너를 기준으로
전력 질주는 그를 기준으로
화해도 절교도 있을 수 없는
아주 정교한
공 속에서는 많은 것을 꺼낼 수 있다.
공의 생각
공의 뒷모습
공의 논리
우리가 일생일대의 패스를 하는 순간
느린 화면 속을 질주하며 너 따위는,
이라고 외칠 수는 없지만
사랑해,
라고 쉽게 내뱉을 수도 없는.
누군가 센터링한 공이 정점에 도달하는 일요일.
나는 어디까지가 나인가,
힘껏 발을 뻗어보기도 하는.
달려간다는 것에는 수많은 허공이 필요하다.
근육질의 허공이.
드디어 둥근 공이 나의 발끝에 도달하자
나는 결정적으로
모든 우연들을 잃는다.
오늘은 비가
유일한 비가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을 향하여
우울하고 감상적인 삼단논법
이장욱
기린은 자전거가 아닙니다. 진리는 푸른색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텔레비전은 삼거리식당이 아닙니다.
창문은 실망이 아니며, 실망은 사자의 네 발이 아니며, 따라서 지금 초원을 달리는 것은 오늘의 창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침묵하는 사람이 서랍일 수 없고,
탁자가 죽은 동물들일 수 없고,
그래서 개인은 토성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외투는 호주머니나 그리움이 아닙니다.
약속시간이 은하계를 모릅니다.
걸어서 12월이 오지 않습니다.
아주 먼 곳은 등 뒤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손은 당신의 안구가 아니기 때문에
당신의 뒷모습이 없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편
이장욱
모든 것은 이미 배달되었다.
그것이 늙은 우편배달부들의 결론,
당신이 입을 벌려 말하기 전에 내가
모든 말을 들었던 것과 같이
같은 계절이 된 식물들
외로운 지폐를 세는 은행원들
먼 고백에 중독된 연인들
그 순간
누가 구름의 초인종을 눌렀다.
뜨거운 손과 발을 배달하고 있다.
우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바로 그 계절로
단 하나의 답장이 도착할 것이다.
조금 더 잔인한 방식으로
웃으면 복이 와요
이장욱
내가 모를 무엇이 그대에게는 있어서
내가 모를 무엇이 밤 열 시의 종로 3가에는,
내가 모를 무엇이 지하상가 제5호 점포의 나른한 텔레비전에는,
또 은퇴한 코미디언에게는 내가 모를 무엇이 있어서
그대와 내가 헤어진 지 삼 분 후에는,
다시 삼십 년 후에는,
내가 모를 무엇이 아직
그 거리와 음악에는 있어서
지금 대나무 지팡이에 턱을 고이고
젖니 난 어린애처럼 웃는 저기 저 늙은 사람은
아주 오래 전의 사랑과 이별을
방금 떠올린 것인지도 모르지만,
아니면 후두엽의 세포가 그저
쓸모 없게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모를 그대는 까마득한 地下를 무서운 속도로 달려
삼 분 전의 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으니
나는 삼십 년 후에 그대를 아주 잊은 채
웃으면 복이 오는 밤하늘을 쳐다보겠지만,
또 그 밤하늘에는 생각난 듯 내가 모를 무엇이,
무섭게 반짝이겠지만
원숭이의 시
이장욱
당신이 혼자 동물원을 거니는 오후라고 하자.
내가 원숭이였다고 하자.
나는 꽥꽥거리며 먹이를 요구했다.
길고 털이 많은 팔을 철창 밖으로 내밀었다.
원숭이의 팔이란 그런 것
철장 안과 철창 밖을 구분하는 것
한쪽에 속해 있다가
저 바깥을 향해 집요하게 나아가는 것
당신이 나의 하루를 관람했다고 하자.
당신이 내 텅
빈 영혼을 다녀갔다고 하자.
내가 당신의 등을 더 격렬하게 바라보았다고 하자.
관람 시간이 끝난 뒤에 드디어
삶이 시작된다는 것
당신이 상상할 수 없는
동물원의 자정이 온다는 것
당신이 나를 지나치는 일은
바로 그런 것
나는 거대한 원숭이가 되어갔다.
무한한 어둠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꽥꽥거리며
외로운 허공을 날아다녔다.
이것은 사랑이 아닌 것
그것보다 격렬한 것
당신의 생각이나 의지를 넘어서는 것
여기 한 마리의 원숭이가
있다는 것
원숭이의 시에 당신이 등장한다고 하자.
내가 그 시를 썼다고 하자.
내가 동물원의 철창 밖을
밤의 저편을
당신을
끈질기게 바라보고 있다고 하자.
유리의 악마
이장욱
그런 건가요,
하고 내가 쓸쓸하게 중얼거리자 당신은
천사는 관념론자고 악마는 유물론자예요,
라고 말했네.
당신은 은행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지.
돈을 빌리려고
상투적인 문장처럼 앉아 있었지.
통유리 저편으로 오후의 햇살이 가득했는데
당신은 유리의 저편이 아니라
유리 자체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
그건 대단한 재능이에요,
라고 나는 말했는데 마치 그것은
유혹을 느끼지 않고 악마를 만나는 놀라운 능력 같은 것이라고
당신은 웃었네. 그 웃음이 아름다웠네.
햇빛에는 형이상학이 없어요.
천국도 지옥도 없죠.
햇빛의 근육 때문에 모든 것이 파괴되어서……
당신은 그렇게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
나는 행복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의 시간은 햇빛 속에 부서질 뿐이니까.
유리의 저편은 언제나
악마들이 만드는 것
디테일이 훌륭한 것
당신은 커다란 통유리로 스며든 햇빛 속에 물질적으로
물질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지.
유리의 저편에서는 희고 아름다운 얼굴의 천사가
평화롭게 날아다녔네.
당신은 길고 아름다운 문장처럼 앉아서 또 무어라 말을 했고
그런 건가요,
하고 나는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은행 앞 네거리에서 질문의 없음
이장욱
당신은 거기서 왜 혼잣말을 했다.
자동차들은 어째서 자꾸 경적을 울렸다.
밤마다 구름의 자리에서 당신이 어떻게 잠들었는데
낮에는 횡단보도가 없는 길로 나아가 어디로 걸어갔는데
은행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대체 무엇을 요구했는데
당신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가까웠다.
당신의 얼굴이 어떻게 친근해졌다,
우리는 국민체조를 하고 산수를 배우고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서로의 머나먼 어디로 떠났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불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만
의혹들은 언제부터 확신의 형태로 자라납니다만?
질문이란 왜 형식만 필요했던 것입니다.
텅 비어 있는 것을 텅 비어 있지 않은 것으로 채우기
그런 것이 어째서 우리의 일생이었던 것입니다.
체조를 할 때는 팔 다리를 가장 멀리 휘두르기로 하자.
대화를 할 때는 초과량의 욕설을 사용하기로 하자,
당신은 어째서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들을 향하여
당신은 은행 앞 도로 한복판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대체 무엇을 요구했다.
아주 명료한 곳에서 당신과 나는 왜
은행에서의 다다이즘
이장욱
그 사람은 총을 쥐고 은행에 들어갔다.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번호표를 뽑고
성실하게
총을 난사하고
고독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태어나기 이전을 상기하고
자꾸 고백했다.
은행에서
슬픔에 빠진 마임배우는 어디까지
희미해지나.
창구를 향해 가늘고 긴 팔을 내뻗는 이 사람은.
떨리는 손끝에서 흩어지는 총알들은.
오늘은 죽은 사람의 세금을 납부하고
지급할 만한 외로움을 산출하고
막 깨어난 얼굴로
폭탄선언을
나는 65%나 자살합니다!
나는 내일 또 태어나고
나는 점점 더 채무에 시달리고
나는 유언을 할 수 있습니다!
은행에서
직원이 친절하게
나갈 곳을 알려주었다.
그 사람은 신중한 표정으로
총을 난사하며
조금 더 깊은
의심에 차서
* 나는 65%나 자살한다 : 트리스탄 차라
음악에게 요구할 수 있니?
이장욱
그런가, 당신에겐 매일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생기고
나는 자꾸 일치하는 밤.
그것을 음악에게 요구할 수 있니?
신축건물 옥상의 다른 연주법,
반음계가 어긋난 교차로,
죽은 사람의 귀에서 태어나는 수천 개의 옥타브
밤들은 언제나 하나씩의 방을 만들었다
누가 그 방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음악이 되어 나왔다
그는 명령을 모르고
그는 작은 동물들의 직감을 닮았고
그는 긍정하는 맥박을 지녔지만
지금은 옥상을 제외한 모든 것.
조금 더 불가능한 바로 그것.
그것을 음악에게 요구할 수 있니?
살인자가 음악을 사랑하고
대통령이 음악을 사랑하고
누가 죽어간다는 것.
리드미컬하게 다가오는 건 언제나
가까운 곳과 먼 곳이 바뀐다는 것.
이제 가능해진다는 것.
자정의 옥상에 서서
빗방울들을 하나하나
세어보는 방식으로.
도미솔이라든가 솔시레 같은 것으로만 존재하는
이 무서운 세계로부터.
의상
이장욱
한 벌의 옷을 사고도 인생을 산 것 같았다.
내가 지금 토끼 가죽을 입은 것인지
다른 사람을 구입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 짠 관에 누운 것인지
그것을 입고 외출을 했다.
버스를 타고 꾸벅꾸벅 졸다가
간을 꺼내 바위에 널어 말리고 다시
해변으로
옷은 흔한 비유지만 그것이 겉과 속은 아니다.
현실과 꿈이 아니다. 현상과 본질도 아니다.
제발 진심과 가면이
온몸이 다 삭아지고 녹아지고 지워질 때까지
그것이 되어가는 것이다.
택시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다.
용왕을 만나는 것이다.
아, 넌 유행을 몰라.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현실과 현상과 가면을
지나갔다. 혜화역이라든가
산호초 곁을
심해의 승강장에 서 있는데
너무 오래 살아온 자라 한 마리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는 임무가 있다고 했다.
의상에 손을 대고
깊고 깊은 두근거림을 느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겨울 잎
이장욱
나는 뚜레쥬르 베이커리를 지나간 것이다. 뚜레쥬르 베이커리를 지나가는 下午의 육신 쪽으로 수직 낙하하는 겨울 잎, 겨울잎 안에서 천천히 사라져간 햇빛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내가 겨울 잎의 풍경 속을 지나간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나.
그것은 무성하고 울울한 저 너머, 횡단보도 앞에서 푸른 신호를 기다리는 여자가 오래도록 통과할 숲의 풍경. 나무에 깃들어 사라진 벌레들을 나는 보지 못했지만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지나가는 아이의 어젯밤 꿈속을 나는 거닐었는지도. 말하자면 그 꿈속의 눈내리는 거리를.
그러므로 이곳은 겨울잎과 햇빛과 벌레들이 이루는 세계. 뚜레쥬르 베이커리의 문을 열고 나오는 늙은 사내는 어젯밤의 아주 쓸쓸한 手淫에 대해 생각했던 것이다. 그와 나는 떨어지는 겨울 잎에 눈을 두고 지나쳐갔으나, 우리가 그 겨울 잎이 기억하는 햇빛과 벌레와 바람을 떠올렸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는 나뭇잎. 십일월의 下午, 뚜레쥬르 베이커리 앞으로 수직 낙하하던 잎새가 내 생에 무성하여 다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나무와 나뭇잎. 그 잎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 햇빛도 그대의 생에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저 꿈속의 눈 맞는 겨울숲이.
의자
이장욱
의자가 만든 허공에서
태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등의 구조, 두개골의 위치, 늘어뜨린 여름의 팔로부터
겨울의 다리에 도달하는 곡선.
이것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명령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일어서다가
목뼈가 무너지자
순식간에 자신으로 돌아오는,
의자의 계획을 이해한 뒤에도
다시 무엇이 되어 의자에 앉는 것이 있습니다.
의자는 의자의 지구력을 믿는 듯하지만
한 마리의 새가 심장과 폐를 지나서 날아가는 아침도 있습니다. 마음속에 긴 겨울을 켜고
서성거리는 이유를 만들고
이윽고 다른 계절에 도착하는
가득하면서도 텅 빈 그것을 의자 위에 쌓아놓기로 합니다. 구름조차 앉을 수 없도록. 막 변하려는 그것을.
먼 후일로부터 지금 이 순간을 향해
서서히 도착하는 것의 자리에.
의자에 오래 앉아 있는 그것.
불현듯 일어서는 그것.
척추의 생각, 관절의 의문, 목뼈의 결정, 그 모두가 일제히
그것이 되어
이상한 나라
이장욱
당신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 속의 당신. 하지만 당신 속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 이야기는 힘겨워서 밤눈 내리는 월계동 언덕길은 아득하던 그 이상한 겨울. 겨울의 길섶 어딘가 나는 이 곳에 있고 당신은 그곳에 있으며 그곳과 이곳 사이가 자욱해서 두 그루 전신주로만 위태롭던 산동네. 두 그루 전신주는 아름답고 밤눈은 내리고 녹슨 제 땅에서 제 어둠을 파내려갔으므로 단 한번도 송신할 생애를 갖지 못한 그 오래된 이야기.
당신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이야기는 언제나 끝이어서야 시작하는 이상한 나라. 그 나라의 당신. 하지만 당신 속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 겨울의 길섶 어딘가 나는 이곳에 있고 당신은 그곳에 있으며 그곳과 이곳 사이가 자욱해서 두 그루 전신주 같던 이야기. 다시 두 그루 전신주는 아름답고 밤눈은 내리지만 아, 문득 당신이 없고서야 시작할 수 있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 이야기는 문득 끝이어서야 시작할 수 있는 이상한 나라. 당신에게 이제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정말로
이탈
이장욱
조그만 나사는 천천히 회전한다
한 바퀴를 돌아가는 아주 오랜 동안
구멍 깊은 곳으로 그가 빠져나간 만큼 바람 든다
안 보이는 그곳을 메우기 위해
사기그릇이 놓인 선반은 느리게 기울어진다
너를 보내고 돌아오면서 나는
시속 일백 킬로로 질주하는 택시 안에 있었다
나는 밤하늘에 젖어들었지만
추락에 대해 상상하는 별들은 없었다
별 하나가 보이지 않게 궤도를 바꾸는 순간
실내의 난은 무거워진 몸을 낮춘다
너는 나를 생각하며 내게서 멀어져갔다
소파에 누운 네 몸의 빈 곳으로
잠은 별빛처럼 스며든다
하지만, 모든 게 바뀔 수는 없어요
그것은 술을 마시며 네가 한 말이었다
붉고 긴 선들이 사차선 거리 일백 킬로의 택시를 바라보는 동안
사기그릇이 놓인 선반은 어떤 추락에 대해 상상한다
조그만 나사는 천천히 회전한다
구멍 깊은 곳으로 천천히 바람은 든다
밤거리의 저편으로, 나는 조금씩 기울어진다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만을 적습니다
이장욱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영원을 잃어버렸다.
자꾸 잃어버려서 믿음이 남아 있지 않았다.
원래 그것이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이제 달라지지 않고 누워 있다.
원인이 사라진 풀밭에 자전거를 버려두었다.
바퀴의 은빛 살들이 빛나는 강변을 바라보았다.
서로에게 불가능해지는 일만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였다.
풀밭에는 아주 작은 생물들의 우주가 펼쳐져 있고
그것을 아는 것은 쉽다.
그것을 진실로 느끼는 것은 모로 누운 사람들뿐이지만
누구의 왕도 누구의 하인도 아니어서
외롭고 강한 사람들뿐이지만
은륜이 떠도는 풍경을 바라보면 알 수 있는 것
햇빛에도 인과관계가 있고 물의 일렁임에도 인과관계가 있고 달려가다가 멈추어 서서 잔인한 표정을 짓는 일에도 인과관계가 있겠지만
사람이라면 죽은 사람의 입술에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의 손금에만
기도를 하지 않아서 좋았다.
나는 매일 나의 우주에서 부활하려고 했다.
거대한 존재가 내 곁에 모로 누워 있기라도 한 듯이
사랑을 하려고 했다.
나는 명확한 것만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바라보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텅 빈 주위를 둘러보았다.
*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만을 적습니다.' :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만을 적습니다 : 사망진단서 모음집』, 김지현 편, 자연사연구회, 2019.
인파이터
이장욱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벙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텝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일관된 생애
이장욱
태어난 뒤에 일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눈코입의 위치라든가 뒤통수의
방향 같은 것인가
또는 너를 기다리는 표정
나는 정기적으로 식사를 했다. 같은 목소리로 통화를 하였다. 갑자기 슬픔에 빠졌다.
변성기는 지났습니다만
저는 살인자이며 동시에
이웃들에게 아주 예의바르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사회의 덕목,
정중하게 넥타이를 매고 예식에 참석했다가
취한 뒤에는 술잔을 던지고
가로수가 언제나 거기에 서 있는 것을 좋아하였다. 길고양이가 지나다니는 골목의 밤을 깊이 이해하였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매우 일관되었다고
오늘도 변함없이
죽은 사람들에게 조금 더 가까워집니다.
어렸을 때부터 독재자와 신비주의자가 싫었어요.
제게도 미친듯이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누구였더라.
내가 어느 날 당신의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다.
술집에서 떠들다가 문득 침울해질 것이다.
살아가다가
이제는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어제의 옷을 다시 입고
오늘의 외출을 하는 것이었다.
거짓된 삶에 대하여 계속
무언가를 떠올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장욱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둠이 무서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당신을 좋아합니다.
무명용사의 묘에도 시체는 묻혀 있을 것이다.
십자가와 뼈 사이에 어둠이 곱게 쌓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미쳐갑니다.
그 정신병원에서는 환자들이 의사 가운을 입고 다닌대, 그러면
누구나 정확하게 병명을 알게 되는 것일까?
당신의 질병은 나의 질병입니까?
탕, 탕, 탕, 괴물들을 향해 총을 쏴대는 오후의 오락실
나는 너를 알고 있다 나는 너를 알고 있다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괴물들은 언제나 그렇게 외치지
하지만 원한이 자기도 모르게 진리에 기여할 수 있을까요?
인류의 역사란 그런 것들의 총합입니까?
미친 새끼, 넌 죽었다 꺠나도 사랑을 몰라.
우리의 대화는 그토록 영원한 것
그러니까 이제 무엇이든 얘기해보자.
그 이후는 두개골과 척추뼈에 맡기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묘역의 봄꽃은 환하게 피어나네.
무명용사들은 깨어나
나를 향해 몰려오네.
탕, 탕, 탕,
당신을 좋아해도 좋습니까?
잡담
이장욱
나는 복도에서
나는 자판기 곁에서
나는 버스 안에서
분수처럼 흩어졌다
흩어져서
아무 곳으로나 스며들었다
나는 손톱이 자라는 속도와 함께
지루한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짧은 침묵과 함께
길을 걷다가 누군가 부른 듯하여
그 시선이 가닿은 곳에서 마주친
지나가는 사람의 눈빛과 함께
그 눈빛의 잊혀짐과 함께
격렬하게 통화 주인 사내의 머리카락 끝에서
다시 머리카락 끝을 밀어 올리며
정교하게 성장하는 검은 빛 속으로
문득 비 내리는 허공이 이루는
빗줄기와 빗줄기 사이의
수학적인 간격괴 더불어
저무는 간격과 더불어
저무는 하늘 저편에서
서서히 번져오는
어둠에 의해
당신과 내가 주고받던
아주 짧고 떠올릴 수 없는 이야기처럼
아주 짧고 떠올릴 수 없는 이야기들의
종국(終局)에는
나는 버스 안과
나는 자판기 곁과
나는 보도블록 위에서
결국 분수처럼
재크의 골목
이장욱
골목은 술래잡기나 오해로 만들어져 있다
또는 밤하늘,
달콤한 과자로는 만들지 않는다
모퉁이에서는 매일 무서운 비밀이 발생하고
재크가 콩나무를 키우는 곳
깨진 유리로 금 긋기 좋은 곳
부드러운 손목이나 시멘트 바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재크의 골목,
목숨을 건 수수께끼의 답은 왜 언제나 동일한가?
아침에는 네 발로 점심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것은 골목의 결론일까?
모퉁이를 돌면 남자의 성기가 나타나고
아무리 걸어가도 큰길은 나오지 않네
재크는 열심히 늙었지만 아직도 골목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
골목에서는 누구나 극적인 승부를 벌이고
연장전 끝에 막다른 하늘에 도달하네
콩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이 깨진 소주병을 들고 있다면 그것은
손목이 위험한 순간,
재크의 골목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다
욕설과 날아다니는 밥상 그리고
수수께끼로 가득한 밤하늘까지.
운구차가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는 곳
누구나 술래가 되어 뒤돌아보는 곳
오늘도 재크는 콩나무를 키우네.
전봇대 뒤의 세계
이장욱
호기심의 끝에 있는 것.
킁킁거리는 코와
전봇대의 깊이 너머에.
거기서 자꾸 달아나는 중인 것.
냄새가 없는
내일이 없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과 흡사한.
우리는 오래전에 술래잡기를 한 적이 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머리카락 보인다.
머리카락,
점점 무성해지는 그림자들의 자리에
밤의 전봇대 뒤에
누가 계속 숨어 있다.
개의 목줄을 쥔 채
개에게서 숨으려는 사람처럼.
점점 커지는 머리통을 감추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저녁 무렵에 가만히 내어다본다.
숨어 있는 사람이 아직도 숨어 있는
적막한 골목을.
거대한 머리통이 아직도 자라고 있는
밤의 전봇대 쪽을.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전선(電線)들
이장욱
우리는 완고하게 연결돼 있다
우리는 서로 통한다
전봇대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배선공이
어디론가 신호를 보낸다
고도 팔천 미터의 기류에 매인 구름처럼
우리는 멍하니
상공을 치어다본다
너와 단절되고 싶어
네가 그리워
텃새 한 마리가 전선 위에 앉아
무언가 결정적으로 제 몸의 내부를 통과할 때까지
관망하고 있다
전속력
이장욱
타조처럼 튼튼한 다리로
공포를 표현하자.
두 다리가 최대한 엇갈리는 순간
누구나 전속력에 도달한다는 것.
모든 죽음이 우연으로만 이루어지는
아주 단순한 세계를 상상할 때가 있어요.
당신은 그 세계에
참을 수 없는 호감을 느끼겠지만.
타조의 다리들은 지금
서서히 예감하는 중.
예감이란 연기와 같다가
갑자기 튀어오르는 검은 표범과 같다가
우리는 요이,
땅!
드디어 타조는 화면 속을 질주하고
발자국을 마구 흘리고
모두들 있는 힘껏
무서운 웃음을 터뜨렸다.
변치 않는 식욕은 두려워.
한없이 이동하는 초원 역시.
저는 거리를 걸어가다가 가위눌린 적이 있습니다.
질주하는 표범도 가위에 눌릴까요?
달리는 타조는?
우리는 전속력으로 정지했다.
절규
이장욱
모든 것은 등 뒤에 있다.
몇 개의 그림자,
그리고 거리의 나무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만 몸을 떨었다.
곧 네거리에 서 있는 거대한 주유소를 지나야 할 테지만
나는 아무래도 기나긴 페이브먼트,
이 낯선 거리의 새벽 공기가 다만 불안하였다.
천천히 붉은 구름이 하늘을 흐르기 시작했으며
흐릿한 전화 부스에는 이미 술 취한 사내들
어디론가 가망 없는 통화를 날리며 한량없었으므로
나는 길 끝에 눈을 둔 채 오 분 후의 세계를
다만 생각할 수 있을 뿐,
어느 단단한 담 안쪽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믿을 수 없는 고음역의 레퀴엠,
등 뒤를 따라오는 몇 개의 어두운 그림자,
쉽게 부러지는 이 거리의 난간들,
나는 온 힘을 다해 아주 오래된 멜로디를 떠올렸으니
네거리의 저 거대한 주유소,
그리고 붉은 불빛의 편의점 앞에서 결국 뒤돌아보게 되리라,
결국 되돌아보는 그 순간 나는 어떤 눈빛을 지니게 될는지
두 손으로 두 귀를 막고 어떻게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를는지
다만 몇 개의 그림자, 그리고
등 뒤의 세계,
점 선 면
이장욱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저녁에는.
저 먼 데 황혼의 교각이 무너진다.
원자로 하나가 터진 계란처럼 번져간다.
소년이 날카로운 쇠못으로 자동차의 표면을 긁는다.
그 뾰족한 선들을
면들을
원들을
너와 나 사이의 세계라고
모든 것이 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사막이라고 부른다.
목적지를 가득 실은 교각이 그것을 닮아간다.
쇠못으로 긋자마자 미친 듯이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가
누구든 직선을 허물며 걸어간다.
밤거리에 서 있는 사람이 모든 것에 동의하고 있다.
어디 안 보이는 곳에서 모래가 집요하게
나를 생각하고 있다.
점성술이 없는 밤
이장욱
별들은 우리의 오랜 감정 속에서
소모되었다.
점성술이 없는 밤하늘 아래
낡은 연인들은 매일 조금씩 헤어지고
오늘은 처음 보는 별자리들이 떠 있습니다.
직녀자리
전갈자리 그리고
저기 저 먼 하늘에 오징어자리가 보이십니까?
오징어들,
오징어들,
밤하늘의 오징어들,
말하자면 새벽 세 시의 아파트에서
밥 말리를 틀어 놓고
혼자 춤추는 남자
정오의 희망곡
이장욱
우리는 우호적이다.
분별이 없었다.
누구나 종말을 향해 나아갔다.
당신은 사랑을 잃고
나는 줄넘기를 했다.
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넘실거리는 음악,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우리는 언제나
정기적으로 흘러갔다
누군가 지상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움직였다.
거리에는 키스 신이 그려진
극장 간판이 걸려 있고
가을은 순조롭게 깊어갔다
나는 사랑을 잃고
당신은 줄넘기를 하고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냉소적인 자들을 위해 우리는
최후까지
정오의 허공을 날아다녔다.
정주역(驛)
이장욱
삶을, 무슨 조서(調書) 쓰듯 했구나.
이미 너도 놓여 있는 궤도를 따라가는 여행. 나와 같은 궤도로, 너도 핑핑 돌고 있지.
역사를 나오면 어디든 사람들이 보이고, 사람들도 또 가판대에서 석간을 살 뿐. 그걸 깨닫기 위해,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을 기차에서 보냈다.
석간 기사 안을 소리 없이 통과하는 내장산행 막차.
행간(行間) 속으로 들어가면 뭐가 보인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신비주의는 삶을 유연하게 만들지. 그런데 이를 어째. 여긴 왜 아무것도 없는 거야. 곁길. 혹은 길 바깥만 있네.
가령 사슴 싸롱. 정주 여인숙.
그 뒷골목. 내 사랑.
그대와 청소년 금지 구역에 들어가는 게 목표였던 아, 그리운 한시절. 금지된 저 너머에서만이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믿던 때. 근데 믿음이 생을 망쳐요, 이루어지는 순간이 바로 종말이지.
종말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온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순간에, 그 사랑이 끝이었어. 이를 어째, 여긴 또 왜 아무도 없는 거야
온통 비어 있네. 내장산행 막차는 떠나고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러므로 아무도 없는 몇 편의 드라마를 석간신문은 보여 주는 것이다. 가령 사회면, 애인을 살해하고 자살한 박모씨(朴某氏)(29)의 1단짜리 평생.
내장산.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는 2면.
지워진 생애들이 몇 줄의 문장으로 정리될 때, 나는 신문의 시학(詩學)을 외경에 가까운 심정으로 읽는다. 아아, 이게 해탈이군.
물론 아무도 행간(行間)은 읽어주지 않는다. 뻔한 <사이>들만 창궐하는 정주역 부근. 허리를 껴안은 저 남녀들은 모두 노골적이다. 뼈가 다 보인다. 하지만 오늘은 저 흰 뼈들로써 아름다우나니, 저기 아득히 손들고 하늘을 우러르는 겨울나무들.
용서해 줘. 나는 행간(行間)만으로 너를 이루려 했지. 누군가 키 작은 시계탑에 기대 길 끝을 보고 있다. 그를 실루엣으로 만드는, 모텔 캘리포니아, 라고 적힌 붉은 네온.
사람들은 신문을 접어들고 정류장을 떠난다. 막차는 이미 지나갔다.
다만 저무는 어느 날, 나는 결국 안개 낀 내장산을 흘러갈 것이다. 이기적인 몸, 어디다 부리고 보면 제일 편한 곳이었지. 새벽의 자욱한 행간(行間)을, 나는 안개가 되어 거니는 것이다
정확한 질문
이장욱
자꾸 다르게 보여
당신은 이미 태어났는데
당신은 사랑을 했었는데
당신은 지난해의 가을을 여행 중인데
당신은 오래 잊고 있었던 무엇인가를
막 떠올려 미소 지었는데
오늘은 자꾸만 다르게 보여
당신의 월요일은 조용하고
눈을 감으면 당신의 창밖으로
명랑한 코끼리들은 쿵쿵
음악처럼 흘러가네
당신의 취미는 어제와 다르고
당신의 비 내리는 西海는 그제와 다르고
당신의 아침은 신비로워
당신의 신앙과
당신의 주말 드라마와
당신의 외로운 잠이 모두
다르게 보여
하지만 정확한 질문만 던질 거야
당신을 향해
금방 식사를 마친 듯한 표정으로
조용한 의자를 닮은 밤하늘
이장욱
가을이라서 그럴까? 나는
의자를 잊은 채
의자에 오래 앉아 있었다.
잠을 완전히 잊은 뒤에
잠에 도착한 사람 같았다.
거기는 아이가 아이를 잃어버리는 순간들이
낙엽처럼 쌓여 있는 곳
우산도 잃어버리고 공책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잃어버린 물건들에서 점점
멀어지는 순간을 살아갔다.
숲 속은 잃어버린 나무 같은 게 없는 곳인데
푸른 하늘과 검은 우주가
같은 곳인데
조금씩 다른 빗방울들이 떨어져서
나는 새로 산 우산을 펴 들었다.
그것이 잃어버린 우산과 같지 않았다.
빗방울들이 모두 달랐다.
이 비 그치고
지금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밤하늘을 내가 바라보자
거기 어딘가의 별들 가운데
깊은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조용한 의자를 닮은
그런 밤하늘이라고 중얼거렸다.
좀비 산책
이장욱
비가 내리자
나는 드디어 단순해졌다
당신을 잊고
잠깐 무표정하다가
아침을 먹고
잤다
낮에는 무한한 길을 걸어갔다
친구들은 호전적이거나 비관적이고
내 몸은 굳어갔다
한 사람을 살해하고
두 사람을 사랑하고
잠깐 울다가
음악을 들었다
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나의 죽음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금욕적이며
장래 희망이 있다
1968년이 오자
프라하의 봄이 끝났다
레드 제플린이 결성되었다
김수영이 죽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여전히 태어나지 않았다
비가 내리자
나는 단순하게
잠깐 울다가
전진하였다
죠스
이장욱
수면의 위와 아래는 거의
여름과 겨울인데
천국과 지옥인데
사랑해
라고 말하는 입술과
죽어버려
라고 뇌까리는 입술인데
상어의 이름이 죠스인데
나는 수영을 했다.
분명히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
옛골목에서 누구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과태료를 납부하기 위해 은행을 방문했다.
노인이 길을 물었다.
당신과 절교를 하고 이별을 하고 그토록 가맣게 잊었는데도
나는 수영을 하고 있었어요 결국
수영을
죽은 뒤에는 무서운 것이 없는데
악몽도 생시도 없는데
죠스는 검고 달콤한 아이스바의 이름인데
나는 거의 수평선에 가까워졌어요
술을 많이 마셔서 새벽에 깨어났을 뿐이에요. 그런데
천장이 반짝이는 수면 같아서 천천히
떠올랐다.
물 위로 목을 내놓고
길을 물었는데 당신은 왜 대답이 없나.
주식도 부동산도 고리대금업도 존나게 번성하는구나.
피묻은 칼을 손에 쥐고 골목을 나왔다.
내가 사는 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닙니다만
저기 먼 곳에서 좌우로 몸을 흔들며 다가오는
어두운 것이 있다.
죽은 L에게
이장욱
마침내 나는 나를 만지지 못한다. 거의 완전한 하루가 시작된다. 내 잠에 대해 무한히 개방적인,
하나의 세계가 태어났다.
아침에는 흰 밥을 먹었다. 너에게, 라고 말하고 너의 입에 밥을 떠 넣었다.
소화된다는 건 무엇을 만진다는 뜻일까, 이것은 나의 의문,
당신은 죽은 자의 뱃속에서 태어났네. 이것은 너의 농담.
나는 농담을 좋아하는 무생물.
나는 언제나 책상이나 바위의 자세를 궁금해 했지.
방에 누워 최대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나는 식물을 키울 수도 있고 물고기를 키울 수도 있네.
두려움에 대해서는,
그게 대체 무엇일까 아무런 편향도 없이.
담장의 꽃은 피어난다.
허공을 계단으로 삼는 생물로서
계단을 질주하는 맹수로서
오늘은 무얼 먹나?
모든 수수께끼는 너의 것, 파도처럼 거친 마음으로,
우리는 얼마나 빨리 나에게 도착하는가? 너의 달빛에 따라 움직니는 바다를 좋아하고, 나는 조금
더 날카로운 낚시바늘을 향해 헤엄쳐가고,
저녁에도 흰밥을 먹었다. 영원한 안식은 영원한 물음표로부터
내 입 속의 바늘로부터,
생활이란 어떤 종류의 촉감인가?
장미와 전봇대와 거친 파도는 너에게 같은 종류
미안해.
나는 너를 어루만진다.
나는 더욱 완전해진다.
너는 무서운 농담을 좋아해서
오늘도 내 입에 밥을 떠 넣는다.
중독
이장욱
오늘은 어제의 거리를 다시 걷는 오후.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이건 거의 중독이야. 하지만 어제는 또 머나먼 일몰의 해변을 거닐었지.
이제 삼차원은 지겨워. 그러니까 깊이가 있다는 거 말야. 나를 잘 펴서 어딘가 책갈피에 꽂아줘. 조용한 평면, 훗날 너는 나를 기준으로 오래된 책의 페이지를 펴고. 또 아무런 깊이가 없는 해변을 거니는 거야.
완전한 평면의 바다. 그때 바다를 바라보는 너로부터 검은 연필로 긴 선을 그으면, 어디선가 점에 닿는 것. 그 점을 섬이라고 하자. 그리고 그 섬에서 꿈 없는 잠을. 너는 나를 접어 종이비행기를, 나를 접어 종이배를, 나를 접어 쉽게 구겨지는 학을.
조용한 평면처럼 어떤 내부도 지니지 않는 것들과 함께. 그러므로 모든 것이 어긋나 버렸는지도 모르지. 서서히 늪에 잠겨가는 사람처럼,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일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백화점 옥상에서, 지금 막 우울한 자세로 이륙하는 종이비행기.
중력의 소모
이장욱
드디어 중력이 다 소모되어서 둥둥
떠오르는 사람들
상계동에서도 베이징에서도 스무 살에서도
주소가 사라지는 사람들
허공이 집이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만
구름은 침대가 아니다.
누워서 악몽을 꿀 수도 없고
밖에 나가 배드민턴을 칠 수도 없고
네거리에 멈춰 서서 신호등을 기다릴 수도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사이에서 유영을 했다.
상공에서 당신과 간신히 손끝을 맞대었다.
자이아파트와 국회의사당과 동해물과 백두산이
둥둥
흘러가고 있군요.
식사는 했나?
아아, 지각이야, 지각.
당신에게로 가는 길과 당신에게서 돌아오는 길이
무한해집니다.
깊이와 너비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무인칭이 되고
의혹과 함께
당신을 사랑했던 나날은?
셔틀콕이 뭉게구름을 뚫고 나를 향해 날아왔다.
폭탄처럼
나는 저것을 칠 수 있다.
나는 힘껏 도약한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변신 이야기
이장욱
내 얼굴이 안경을 찾아 쓰고 천천히 단단해지는 아침, 창밖 가로수의 애벌레는 마침내 나비가 된다. 내 발이 15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을 때, 멀리 인수봉 암벽에 가파른 바람 한 줄기 지나간다. 내 몸이 기어나가 어느 사립대학 담 아래를 걷고 있을 때, 아주 먼 항성에서 드디어, 천천히, 지상에 도착하는 빛.
그 순간에 나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변신에 대해 생각한 것이다. 가령 나는 바위 틈으로 화사하게 일렁이는 산철쭉. 절벽에 사선으로 그어진 그 가지 아래서 막 처음 편 제 날개에 놀란 호랑나비. 그러므로 나는 햇빛 속에 눈 감고 최초의 바람을 느끼는 자.
지나치게 낙관적인 변신 이야기라고 나는 중얼거린다. 외포의 갈매기들이 부리를 적시는 저녁에, 나는 더 이상 당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근해에 저물어가는 수평선. 까마득한 上空의 구름이 작은 빗방울로 변신하는 순간에, 나는 비상구 앞에 멈춰 움직이지 않는 구두.
내 몸은 불 꺼진 방에 안장된다. 지상의 빛이 녹아 사라진 시간, 내가 문득 눈을 뜨면 내 곁에 누군가 모로 누워 있다. 나는 짐짓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깨운다. 이봐, 누군가 널 부르는군. 창 바깥 지나치게 낙관적인 하늘에 비는 내리는데.
지나치게 사소한 딜레마
이장욱
언제나처럼 해답은 지극히 간단한 데서 온다.
타조가 날지 못하는 이유는, 요컨대 몸이 너무 무겁다는 것. 열대의 황혼 쪽으로 한없이 날아가는 것들을, 날아가는 것들을, 날아가는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타조.
딜레마는 이런 것이다.
15층 아파트 창틀에 끼어 가볍게 죽어 있는 잠자리. 텅 비어 마른 날개. 어느 오후 쓰레빠를 끌고 비디오 빌리러 동네 언덕을 내려갈 때마다,
그때마다 인수봉에 내리는 황혼 쪽으로 날아가는 것들을, 날아가는 것들을, 날아가는 것들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네. 나는 아무 때나 끔찍해진다. 퉁퉁 불어버린 생(生)의 부기를 확인시키는, 저 거대한 거울.
나는 그 거울 속으로 아예 터벅터벅 들어와버린 타조처럼. 열쇠를 안에 두고 열리지 않는 문, 한량없이 두드리고 있네.
이 삶은 코믹한가, 트래직한가. 언제나처럼 해답은 지극히 간단한 데서 온다. 다만,
더듬이만으로 일생을 기어가는 벌레, 벌레의 없는 눈 위로 가득한, 가득한, 가득한, 노을.
창문 아래 잠들다
이장욱
무엇을 바라보다 잠들었던 것일까.
저기 두 사람이라는 말과 저기 숲이라는 말 중에
그가 더 슬퍼했던 풍경은 어느 쪽이었을까.
마음을 정리했다는 말보다 두렵고
마음을 잃었다는 말보다 막연한 날들이 그에게 오리라.
그가 사랑해선 안 되는 이들에게 곧 오리라.
하지만 잊었다고 노래하며 영원히 기억하는 동안
저울과 시계 곁을 서성이던 청춘은
묻힐 만한 한 뼘의 어둠이 없어
기억되지 않아 잊히지도 못하는 소실점이 되었다.
그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상처만큼은 아름다워야 겨우 추억이라고 수줍어할 수 있는 것처럼
난국이 사무쳐 꽃이 되어 버린 청춘을 그는 그리워하기나 했던 것일까.
다만 꽃들의 술책과 기만을 견디며
결코 정리되지 않는 고통 속에서 자라나
결국 천천히 잃어 가듯 늙어 가는 그가
언젠가 절벽 끝에 서서 바다라는 거대한 수사학을 한껏 조롱했던 그가
이제 불꽃과 함께 잠든 모든 청춘들에게 전한다.
저기 두 사람이라는 말도
저기 숲이라는 말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다.
눈물이 남아 있다면 눈물 앞에서 선회하라.
아는가. 알 수 있겠는가.
거대한 바다가 거대한 바다가 있는 창문이 되었다.
치욕이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문신 같은 것.
무엇을 기다리다 잠들었던 것일까.
천국보다 낯선
이장욱
더 나쁘게 말할 수 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백화점에 대해서.
그건 너무 쉬워서.
너무 쉬워서
에스컬레이터의 안정된 속도로 하강하는 것이 가능하다.
너무 쉬워서
적절한 높이의 계절들이 가능하다. 5층에서는
남성용 정장을.
3층에서는 여성용 겨울을.
옥상에서는 누가 툭
떨어지고,
형이상학은 지하에서만 가능하다. 커다란 목소리로,
천국이 지옥을 만들었다고!
당신이 나의 천국이라고!
외쳤다,
백화점에서.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면서도
좋아할 수 있어? 팔짱을 낀 채
선과 악이 사라진 통로를 우리는 걸어가고
마음에 드는 것과 안 드는 것 사이에서 점점 격렬해지고
드디어 도달했다,
죽을 때까지.
죽은 뒤의 계절처럼.
구름과 밤의 표정으로
누가 나를 불렀다.
아주 친절하게.
천국보다 낯선 목소리로.
그건 너무 쉬워서
채식주의자
이장욱
우리는 채식주의자였다.
일생 동안 자라는 손톱이 있고
어제보다 조금 늙은 여자를 만나고
해와 달이 겹쳐지는 신비한 날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채식주의자였다.
이빨이 유달리 긴 개를 보면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내 뺨을 때리고 떠난 네가 그리워.
하지만 인구밀도 낮은 도시에 가서
해변은 어디지요?
라고 흥겨운 표정으로 물어볼 때도
우리는 결정적으로
채식주의자였다.
정오가 되자 해와 달이 영원히 겹쳐지고
교외의 도살장에는 죽은 모차르트의 음악이 흐르고
우리는 일제히
핏물이 떨어지는 식육점의 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라다가 스르르 멈추는 손톱들
일생 동안 젖어 있는 내장들
그리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음악은 있다.
갑자기 이빨이 날카로워지는 밤이 오면
달빛이 사라진 해변을 달리기로 해요.
채식주의자의 자세로
경쾌한 스텝으로
청소합시다
이장욱
아침의 청소가 시작되자 먼지들은 어디론가 이동했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돌아오고
어제도
10년 전도
자꾸 더러워지고
나는 유통기한이 있다.
너는 변질되었다.
깨끗한 악몽
남은 인생을 합친 것보다 더 더러운 연애
혼자 하는 욕설
우리는 위생적인 생각에도 소질이 있다.
악수하고
고개를 흔들고
숨을 멈추고
한참 후에는
혼자 운다.
그림자들은 깨끗한가?
그대의 먼 잠은?
밤이 되자 우리는 어디론가
점점이 이동했다가
자명종이 울리자
돌아왔다.
칼
이장욱
칼을 들면 보이는 것,
이 빛나는 첨단이 지나갈
뼈와 뼈 사이의 교교한 공간.
우리는 결국 고독할 거야.
다른 것이 몸속에 들어오면 알게 되지.
미성빌라 1층 계단에는 노란 리본이
바리케이트처럼 어둠을 가로지르고.
리본에는 접근 금지, 강북경찰서, 라고.
자정의 아파트는 놀이터에만 나가도 어지러워.
무능력하게 회전하는 별들.
어딘가 잠복해 있는 유령과 만나고 싶다.
아니면 죽은 어머니는.
내가 겨냥할 수 있는 것들이란 겨우
고도를 낮춘 밤의 구름들.
나는 저 구름을 찌른 적이 있네.
황혼이나 바다 역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내부란.
아주 구체적으로
미성빌라의 여자를 찌른 사내.
그 칼의 내부에는 구름과,
황혼이나 바다가 일렁이지 않는다.
나는 칼을 들어 칼이 반사하는
여자의 마지막 표정을 바라보지.
별들은 길 건너 미성빌라의 노란 리본을 향해,
어떤,
우울하고 교교한 공간을 지나.
코끼리
이장욱
코끼리를 천천히 허물어지는 코끼리를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날 저녁 14인치 브라운관을 황홀하게 적시던 사바나의 석양과, 코끼리의 한 生 너머에서 이제야 다른 生을 꿈꾸듯 너울거리던 코코 야자수들의 풍경을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의 거대한 육체가 황폐하지 말라 황폐하지 말라 중얼거리듯 무심하지만 지극히 섬세한 자세로 무너져가는 그 아늑한 풍경을, 멀리 있는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제 천막 바깥은 간신히 기억해 낼 수 있는 이름들처럼 잦아들고 잦아드는 섬들. 그렇군요,
보도블럭을 들어 보라 그곳에 해변이 있다, 라는 저 불란서 68세대의 구호에는 이상한 미신이 스며 있습니다.
미신(迷信). 혹은 미로(迷路). 헤매면서 붉어가는 바다에 일렁이는 섬들.
지금 인천에서 출항하는 바지선에 시선을 두고 온 밤을 공포로 소진하는 유약한 사내에게도 미신은 있습니다.
그의 술병에 떨어지는 쓸모없는 유성(流星) 하나,
그리고 그만두라 그만두라 중얼거리듯 일생을 해변에 묻은 初老의 여자, 여자의 낮은 휘파람.
이제 무심히 온몸을 그을린 그녀의 피조개 몇 점과 더불어 황혼은 부두 쪽의 검은 공장들 뒤로 인천 하늘을 적십니다.
문득 그의 생(生)을 관통한 납탄이 아주 오랜 세월의 오장육부를 지나 천천히 의탁할 무엇도 없는 황홀한 황혼으로 내리는 풍경을 그대는,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토록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다리가 그토록 섬세하게 구부러질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위하여 누군가는 더러운 황혼녘의 부두로 스며든다는 것은.
그러므로 멀리 있는 그대여 그대 멀리 있는 이여,
가장 단순하므로 애절한 자세로 무너져가는 것들을 한 번만 보아주세요. 서해 바다의 14인치 브라운관 속에서 처연히 무너지는 것들을, 무너져서, 무너짐으로써,
고요히 무너져가는 것들을.
코인 로커
이장욱
두 시간 동안 코인 로커 속의 어둠에 몰두했다.
어디에도 빈틈이 없는 세계는 서류와 비슷한가.
사과와 비슷한가.
사각형인가. 얼마나 붉은가.
어둠은 소중한 것과 훔친 것을 구분하지 않고
무심한 것과 슬픈 것을 가리지 않고
죽은 사람을 움직여서
생각하는 사람에게 겹쳐놓는다.
모퉁이마다 낯선 얼굴이 서 있는 밤
어둠의 입장에서 보면 목적지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계단 쪽일까. 비상구 쪽일까.
혹은 환승역.
오늘도 사람들에게는 자꾸 맡길 것이 생긴다.
의심스러운 봉투와 검은 가방.
음식물.
시신의 일부
코인 로커 속에서는 어둠이 모든 것을 만들지만
모든 것에 유통기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터널 속을 달리는 나와 그대와 신문들
오해와 농담과 말다툼들.
어디에도 빈틈이 없는 세계란 그러니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나
사망신고서
손가락이 들어 있는 가방의 모습
나는 어둠 자체를 발견하기 위해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코인 로커 속에서 가장 슬픈 자세는 무엇일까.
지금은 붉은 사과가 무릎을 모은 채
어둠에 몰두하고 있다.
캄캄해지는 것은
사과인가.
목적지인가.
누군가 코인 로커의 비밀번호를 누른다.
사각형의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
물건을 회수해 간다.
클리셰만으로 봄날은,
이장욱
봄날은 간다.
사랑과 이별과 아픔과 또
새로 이사온 옆집 부부와 함께
봄날은 간다.
여보, 인생은 무상하고 강물은 유구한데
어젠 누굴 만난 거야?
그대는 부인하고 부인하고 부인하여 베드로가 되었으니
어째서 진실은 멀리 잇는 것인가.
이봐요, 잇이 아니라 있, 입니다만.
진실은 진실로 잇닿고 이어져서 결국 참을 수 없는 것
맞춤법이 틀리고 오탈자가 의미를 바꾸어도 봄날은,
봄날은 간다.
이것은 성서의 문장이 아니고
비문의 미학도 아니고
신조어도
문자표의 새로운 기호도 아닙니다만………
단지 상투어구라는 것을.
그 심연에서 몸이 상하고 영혼이 잦아들 때까지 살아갈
우리의 공동 주택이라는 것을.
여러분 모두가 주님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철물점과 미용실과 마트와 성당 사이에서 봄날은,
봄날은 간다. 우리의 사랑과 이별과
상처 속으로.
옆집에는 새로 이사 온 부부가 살아가고요.
태양의 지식
이장욱
나뭇잎 하나가 제 그림자를 서서히 넓히며 着地하자
그림자는 뒤늦게, 사라진다.
벤치에 누운 사내의 표정이 그림자를 따라 문득 지워지고
아주 오래 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내부에 잠복해 있던 고요가 누설되고
나는 어느덧 사내의 표정에 갇힌다. 그의 곁에서,
‘필림 있슴’이라고 적힌 채 나부끼는 깃발.
사내의 표정이 태양을 정면으로 인화하려는 듯 신중하게 움직인다.
제발 뭔가 찍어 봐.
환한 빛으로 가득한 그 텅 빈 인화지 속에서
나는 안 보이는 태양을 찾아 헤맨다.
거대한 건물이 그의 잠과 태양의 사이에 일어나고
때로 황혼에 젖은 잠 속을 횡단하는 오토바이.
사라진 것들은 모두 그의 공원에 들러
김치, 하며 웃어본 적이 있지.
하지만 태양의 지식은 떠오르고 지는 것뿐.
나는 사내의 각도로 누워
그의 잠에서 저무는 태양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을
약간 피로한 눈으로
추적하는 중.
토르소
이장욱
손가락은 외로움을 위해 팔고
귀는 죄책감을 위해 팔았다.
코는 실망하지 않기 위해 팔았으며
흰 치아는 한 번에 한 개씩
오해를 위해 팔았다.
나는 습관이 없고
냉혈한의 표정이 없고
옷걸이에 걸리지도 않는다.
누가 나를 입을 수 있나.
악수를 하거나
이어달리기는?
나는 열심히 트랙을 달렸다.
검은 서류가방을 든 채 중요한 협상을 진행하고
밤의 쇼윈도우에 서서 물끄러미
당신을 바라보았다.
악수는 할 수 없겠지만
이미 정해진 자세로
긴 목과
굳은 어깨로
당신이 밤의 상점을 지나갔다
헤이,
내가 당신을 부르자 당신이 고개를 돌렸다.
캄캄하게 뚫린 당신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는 순간,
아마도 우리는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
아마도 내가
당신의 그림자였던 적이,
당신이 나의 손과
발목
그리고 얼굴이었던 적이.
토요일의 관심사
이장욱
오늘의 푸른 하늘은 마치 어제의 푸른 하늘 같애.
진부하고 아름다워.
뭐랄까,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 상태랄까.
1루로 뛸 수도 없고 뛰지 않을 수도 없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문장은 비문인가 아닌가?
나는 허무주의자,
오타쿠,
각종 폐인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오늘 화양리 뒷골목에서 박복순씨(82)가 모은 폐지의 양은
15.5kg, 근래 최고였지.
하지만 내 인생에 흥미로운 것이라곤 없다.
휴대폰을 껐는데도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지 않네.
침묵의 기술을 연마한 자만이
눈물을 흘릴 자격이 있다.
늦어도 정오까지는 일어나자.
어제의 푸른 하늘이 떠 있을 테니까.
우울한 야구선수들이 게임을 시작할 테니까.
박복순씨의 리어카를 향해
늙은 개들이 짖어댈 테니까.
오늘은 또 모든 것이
토요일의 관심사.
투우
이장욱
우리 사이에 어떤 기미가 있었다.
우리 사이에 꽃이 피었다.
우리 사이에 물이 얼었다.
적어도 나는
명료하다.
나의 몸은 집중적으로
지속된다.
나는 끝내
외향적이다. 끊임없이
나의 유일한 외부,
당신을 향해
이송 중이다.
단 하나의 소실점이 확장될 때
내가 단 하나의 소실점에 갇힐 때
그것은 확률인가?
볼록 렌즈를 통과한 햇빛이
검은 점을 이루는 순간,
나의 첨단은 나를 떠나
드디어 당신을 통과하였다.
나의 질주는 뜨겁고
결국 완성될 것이다.
나는 타오오른 얼음과 같다.
수많은 발자국들이 허공을
질주 중이다.
튀어나온 곳
이장욱
세상에는 튀어나오지 않은 곳과 튀어나온 곳이 있는데 아차,
넘어지려는 순간
나는 밤처럼 완전히 흩어지지 못하고
목적지처럼 자꾸 멀어지지 못하고
그저 조금 기울어진 채
이상한 마음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무언가 모자란 꿈을 꾸었다
진지하게 자살을 상상한 뒤에 또
널 만나서 웃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라면 길이나 부피도 있고
인생이라는 것도 있을 텐데
어째서 이곳은 높이만 존재하는가?
나는 심지어 기울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완전히 세계에 포함된 것이다
외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드디어 이곳에서
발끝에서
무너지지 않는 각도로
파충류 – 세계
이장욱
오늘은 파충류의 눈을 가졌다.
네가 분할되었다.
감정이 사라지자
밤이 빈곤해졌다.
내 긴 혀는 아름다워
날아가는 것들을 향해 날카로운 혀를 발사하고
내 피부색은 무한해
나는 나의 배경과 구분되지 않지.
나는 나 자신에게 일종의
트릭이다.
바람 속에서
먼 곳의
더 먼 곳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첨예하고
나는 경계한다.
나는 언제나 잠시 나였다.
한때의 격렬한 시절을 생각하자
나는 나 자신을 쉽게 포기한다.
나는 너를 피해 달리고
팔을 떼고
다리를 떼고
혀를 떼고
어디론가 스며들었다.
나는 다양한
아름다운
늙은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판교
이장욱
길을 걸어가는데 누가 고구마……라고 중얼거렸다
그렇다는 것이 내 안에서 자꾸 웃음을 터뜨리고 갑자기 화를 냈다
멈추어 서서 오래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사람들이 하나 둘
나를 따라하였다 그렇게 해서 외롭지 않았지만
나는 나의 친구들을 과거에 두고 왔으니까
꼭 과거로부터 전화가 올 것이다
무덤에서 요람까지
나는 고구마를 생각하였다 잠깐 떠오른 생각이 내가 살아온
모든 것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를 낼 때가 있다 웃음을 터뜨릴 때가 있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오늘도 하늘에는 몇 개의 고구마가 떠 있고
그건 당신과 내가 어제 나눴던 대화와 비슷하고
고구마는 결국
맛있는 것
길을 걷다가 고구마……
라고 내가 중얼거리자
걸어오던 사람이 내 쪽을 바라보며 뭐라
말을 하려 했다
편집증에 대해 너무 오래 생각하는 나무
이장욱
밤새도록 점멸하는 가로등 곁,
고도 6.5 미터의 허공에서 잠시 생장(生長)을 멈추고
갸우뚱히 생각에 잠긴 나무.
제 몸을 천천히 기어오르는 벌레의 없는 눈과
없는 눈의 맹목(盲目)이 바라보는 어두운 하늘에 대하여,
하늘 너머의 어둠 속에서 지금
더 먼 은하(銀河)를 향해 질주하는 빛들에 대하여,
빛과, 당신과, 가로등 아래 빵 굽는 마을의
불 꺼진 진열장에 대하여,
그러므로 안 보이는 중심을 향해 집요하게 흙을 파고드는
제 몸의 지하(地下)에 대하여.
텃새 한 마리가 상한선(上限線)을 긋고 지나간 새벽 거리에서
너무 오래 생각하는 나무.
편집증 환자가 앉아 있는 광장
이장욱
헛것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 자세로 소나기, 내린다. 문득 허공에 그어지는 사선 사이, 황혼의 시청 앞을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는 사람들. 지나가라 지나가라 가능한 한 빨리 지나가라. 견딜 수 없이 느린 속도로 생애 너머를 지나는 구름. 물론,
누구나 제 삶을 의심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가던 길을 가기 위해 문득 유턴하는 관광버스. 지금 당신이 나를 의심하듯, 나도 나를 의심한다. 한 여자가 머나먼 골목의 나와 의아한 표정을 길 끝을 바라본다. 헛것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 자세로,
비 내린다. 새한빌딩의 가장 아래 계단에 앉아 광장을 바라본다. 깜빡깜빡 졸며 회상하는 일생. 이쯤이면 괜찮을 것이다, 이쯤이면 괜찮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혹은 집도 길도 아닌 오후의 술청에 들어 죽은 애인과 술 한잔하는 꿈. 우리를 위한 비,
내린다. 저것은 헛것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 자세다. 그러므로 당신은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며 굽 높은 신발을 고쳐 신는 것이다. 나는 시선을 돌려 잠시 하늘을 바라본다. 뒤돌아보는 자들에 대한 혐오. 그러므로 지나가라, 가능한 빨리 지나가라. 내가 나를 의심하는 만큼 집요한 자세로, 구름을 향해 날아가는 광장의 비둘기. 비에 젖은 날개.
평균치
이장욱
집을 나서는 길에 점점 키가 줄어들었네. 나는 장다리도 아니고 꺼꾸리도 아니지만 자꾸 비틀거리다가 결국은…… 조금 낯선 높이에서 당신을 보게 되었지. 모두가 동의하는 높이에서,
오늘의 강수량을 측정하는 방법은 이렇다. 수많은 빗방울들에게 계급과 역할을 분배하고, 모든 빗방울들 가운데 가장 빗방울다운 것을 선택한 뒤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거야. 언제나 조금 늦거나 빠르게 오는 것들이 있네. 가령 당신…… 고백…… 죽어가는 사람들은 조금씩 늦거나 빠르게 죽어갔다. 평균수명은 점점 늘어났으나,
나의 미래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먼저 도달해 있을 거야. 가까운 친구, 왕자와 거지, 파푸아뉴기니 인, 세상의 모든 사람들일지도 모르지. 나의 사랑스러운 인파들, 인파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겠다. 나아가고 또 나아가겠다. 당신을 찾아내겠다. 이제 막 공항의 탑승구로 사라지려는 당신을……
정오와 자정 같은 단어로만 이루어진 그런 시간이 흘러가. 밤과 낮의 길이가 똑같아져. 중력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구름은 표준고도로 떠오르고 그 순간 두터운 구름장을 뚫고 비행기 한 대가, 음속으로 날아갔다.
표백
이장욱
나는 어딘지 몸의 빛깔이 변했는데
내가 많이 거무스름하였다. 끌고 다닐 수가 없어서
잘 표백을 시키고
너무 백색이 된 뒤에는 침묵하였다. 당신이 추측을 했는데 저것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존재해도 허공을 닮을 뿐입니다. 저런 것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도 나를 의아해하였다. 있다가 점점 보이지 않는 것이
모든 것에 흡사하다고.
그래도 나에게는 많은 것이 떠오르는데 가령
당신의 키와 면적
호주머니 속의 빈손
먼 불행의 접근
죽은 친구
결국 발바닥이 온몸을 지탱하는 것이다. 발끝은 아니지만 발끝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거울은 아니지만 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골목이 아니지만 막다른 곳에 이르러 한꺼번에 거대해지는 것이다.
밤과 비슷한 것들로서. 소리라든가 공기라든가 시간과 같이 무섭게 스며들어 고요하다가
뜻밖의 곳에서 확대되는 것들로서.
나는 천천히 표백되었다. 조금씩 모든 것이 되었다. 나는
나를 끌고 다닐 수가 없어서
피사체
이장욱
우리는 고정되었다.
우리는 분별없이 떠들다가 김치,
라고 외치는 순간 하나의 점으로
수렴되었다.
우리는 책임감이 점점 강해졌다.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하기로 했다.
우리의 배경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웃고 있는 남자는 웃지 않는 여자를 사랑했지. 갈색 구두를 신고 있는 사람이 곧 죽었어. 둘째 줄의 콧수염이 문상을 갔네. 또각또각,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동안, 그녀의 선언에서 꺠어나지 못한 건 모자를 쓴 남자.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돌이키는 중. 당신이 이쪽 세계를 바라보는 순간,
아, 거기! 뒤에 가려진 사람!
얼굴이 안 보여.
당신의 이야기도.
터지는 기침을 막으려고 당신은 얼굴을 찌푸렸다.
김치!
라고 외치며 우리가 일제히
정면을 바라보는 순간,
불현듯 우리는 또 다른 세계를 이해하였다.
그 긴 시간 동안 우리의 머리 위에
바늘처럼
쏟아지는 것이 있다.
핀란드
이장욱
손 대신에 발을 넣을 수 없을까.
그곳에.
호주머니의 깊은 곳에.
핀란드의 어두운 겨울에.
두 눈이 감기고
두 발이 깨어날 수 있도록.
월요일의 핀란드라는 것은 촛불처럼 조용해서
소리들도 나무처럼 자라니까.
누군가의 손수건이 하늘에서 타오르고
길들은 문득 북극에 이르는 곳,
아이들이 하나 둘
다른 아이들의 잠 속으로 흩어지는 밤이 오면
태양이 동전처럼 빛나는
그런 밤이 오면
이제는 식물들이 안개를 생산하는 화요일
안개를 열고 누구나 이방인을 맞이하는 수요일
이곳에서 지폐의 일은 단지
깃발처럼 펄럭이는 것.
목요일의 주민들은 다섯 갈래의 운명을 감추고
가위나 바위
또는 보를 감추고
마침내 금요일과
또 유배자의 마음으로.
아무래도 이곳은 관광지가 아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도 아니다.
누구나 차가운 공중을 동그랗게 쥐고 있다.
한숨도 잠들지 못하는
태양의 밤,
거대한 손가락들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필연
이장욱
나는 야위어가면서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필연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것을 애인이라고
생일이라고
신문사에 편지를 쓰고
매일 실망을 했다.
고체가 액체로
액체가 에테르로 변하는 세계를 사랑하였다.
강물이 피어오르고
돌이 흘러갈 때까지
산천초목이라고 적고
밤과 수수께끼라고 읽었다.
최후라고 읽었다.
토성에는
토성의 세계가 있다고.
칼끝이 우연히 고독해진 것은 아니라고.
그런 밤에는 인기척이 툭
떨어졌다.
누가 지금 막 내 곁에
태어났다는 듯이.
마침내 이 세계에
도착했다는 듯이.
오래 전에 자신을 떠나
검디검은 우주공간을 지나온 별빛의 모습으로.
말할 수 없는 모양으로 누워 있는데
누군가 그 검은 공간을
내 이름으로 불렀다.
혀
이장욱
혀를 내밀어봐
각설탕을 올려 줄게
에나멜 치아에서 부드러운 위장에 이를 때까지
무엇이든 변형의 과정이 필요하다
영양이 풍부해지도록
모든 것이 하나가 되도록
아이스크림을 파는 남자 앞에서
어린 혀들은 차갑게 불타오르고
동물들의 이빨이 딱딱해진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누구나 무서워지지
혀 위에서
마름모는 동그라미가 되고
사랑하던 이가 문득 낯선 표정을 짓고
웃고 울다가 해가 지고
어제의 모든 것과
오늘의 모든 것 사이
달고 무서운 것들은
혀 위에서 태어난다
각설탕
타오르는 각설탕
이제 긴 혀를 내밀어봐
온몸에 뿌리를 내린
붉고 축축한
당신의 혀를
확산
이장욱
그는 아주 빠르게
증발하였다.
아무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그가 당신과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그의 손목은 지워졌다.
그의 팔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당신은 한일전 승부차기에 대해 말했다.
그의 다리가 지워지고 그의 허리와
그의 어깨가
삭제되었다.
그의 입술이 사라지자
당신은 침착하게
대화의 절정에 도달했다.
그는 익숙하게 형태를 버렸으며
창밖으로 마른눈이 내렸다.
당신에게 스며드는 그를
당신은 식사 중에
당신은 은행에서
당신은 섹스에 몰입하다가
당신은 살인의 충동에 시달릴 때
깨닫는다.
당신은 조간신문의 경제면에 대해
당신은 전화기 저편의 목소리에 대해
당신은 당신에 대해
갑자기 눈물겨웠다.
당신은 무한히 퍼져가는
그를 생각하였다.
그가 당신을 이해하여
당신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흘러넘치다
이장욱
남자는 뚜껑으로 닫을 수 없다.
모자라든가 자동문
오늘의 뉴스로도.
마치 여름으로 만든 의자처럼
누군가 거기 앉으면 풍덩,
빠져버릴 것처럼.
햇빛이 남자를 넘치고 그녀의 말이 남자를 넘치고
가정의 불화와 교우관계 역시.
남자는 수정된다.
메뉴판의 메뉴들을 꼼꼼히 읽어가듯이
비밀번호를 입력하듯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듯이
그의 정오를 닫을 수도 있겠지만
잠자는 사람이 터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인사하는 입
불판 위에서 타오르는 돼지의 살
혼자 밥 먹는 사람의 일요일 역시.
조용히 모자를 쓴 뒤에
행인이나 군중이 될 수 있다.
빙하처럼 녹아가는 것은 북극에도
청량리에도 있으니까.
창밖의 풍경이란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니까.
어디에나 뚜껑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북극곰의 밤이 닫히지 않는다.
아무리 신중하게 앉아 있어도
내부는 이미 내부가 아니다.
지금 남자의 앞에 흘러넘치는 찻잔이 있다.
잔은 기울어지지도 않았다.
10년 후의 야구장
이장욱
오늘은 개인적인 관계로 가득하다.
오늘은 10년 후의 야구와 같다.
당신은 나에 대해 불쾌한 목격자이며
당신은 나에 대해 유예된 자,
10년 후의 3루수를 생각하며 자세를 낮추자
긴 가을은 비로소 끝난다
알고 있지만 떠오르지 않는 생각처럼 우리는,
뭐라고 말할 수 없이 낯익은 오늘의 날씨 아래,
최선을 다해 개인적인 관계들을 생각하자
드디어 당신과 나는 10년 후의 야구를 이해한다.
누군가 플레이 볼―이라고 외치자
나는 있는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그리고 10년 후의 1루 베이스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갔다.
19세기의 비
이장욱
19세기의 비가 내리면
목요일에 전화할게.
목요일,
유일한 목요일에는 전화할게.
오늘은 순교자들이 싫어져
자꾸 고개를 저었네.
어제부터는 모든 게 비대칭이야.
골목 모퉁이를 돌면 또 모든 게 새로워지는,
그런 마법을 아는,
중세의 여자를 만나고 싶네.
사랑과 햇빛을 위해서라면 부디
안락사를 허용해 줘요,
밤거리를 걷다가 문득
영원한 음악 따위가 흐르지 않도록.
나는 미친 듯이 변신 중이고
나는 사라진 빗방울을 찾아 헤매네.
동그라미를 사랑해서
벌써 동그라미가 되어 버린
무정한 여자에게는 전화를.
나는 변신을 사랑하는 마법사,
모퉁이를 돌면 마법처럼
목요일은 나타나겠지.
순교자들이 싫어,
아홉시 뉴스의 순교자들이 싫어,
나는 빗속에서 전화를 하겠지.
달콤한 목요일,
유일한 목요일에는 또
19세기의 비가 내리면
20세기 소년
이장욱
네거리에서 우연히 오래 알던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이미 죽은 사람인 것도 같았는데
이봐요, 나는 당신의 장례식에도 갔었습니다. 대체 당신은…
나는 외면을 받았다.
나는 주판알처럼 조용히 지내다가 외출을 하였다. 거리에는 또 죽은 사람들이 흘러 다니고
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빗방울들이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기분이 그리웠다.
누구든 개가 바라보는 세계, 구름 너머의 세계, 대기권 너머 휘어진 시간의 세계보다는
지금 이곳에 가깝다.
나는 나를 처음으로 자각하게 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건 확실히 부정적인 기분이었지. 이미 다 망가진 뒤의 느낌에 가까운
미래의 세계에는 탄생과 몰락이 없었다.
인간이 사용되지 않았다.
나는 주판알처럼 조용히 지내다가
모든 이들의 최후에서 돌아왔다.
개들이 짖지 않았다.
빗방울들이 스르르 떠올라 구름이 되었다가 개의 모습으로 어슬렁거리다가 무수한 생물의 전생이 되었다.
아무도 주판알을 튕기지 않았다.
그런 존재가 없었다.
네거리에서 우연히 당신을 만났는데
당신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당신의 장례식에서 나는…이라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