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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하는 곳에서부터 양쪽으로 작은 석탑이 달린 큰 철문을 빠져나가 느릿느릿 걷는 세라의 발걸음은 무겁고, 그 표정은 침울했다.
꿈을 너무 크게 가졌던 만큼 현실이 더욱 냉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이미 즐겁고 보람 있는 미래를 꿈꾸는 일 따위는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제니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 주었다면 사태는 다소 나아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니는 남자 친구 여럿과 놀러 다니기에 바빴다.
"나에게도 남자 친구가 생기면 하루하루가 좀 더 즐거울 수 있겠는데."
세라는 중얼거렸다. 거기다가 물론 다크가 지금보다 더 오래 함께 있어 준다면…
하지만 세라는 그 일에 별로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남편의 일을 생각하면, 그녀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세라는 개울의 둑을 따라 산보를 계속했다. 이럴 작정은 아니었는데. 마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이곳에 와서 아직 두 달도 안 되었는데… 세라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이토록 지루해 본 적은 없었다. 친구를 사귈 수만 있다면…
여기 오기 전에 마음에 그리던 것이 뭔지는 분명했다. 자기와 같은 또래의 친구들을 많이 만들고, 파티나 극장에 간다― 자유라는 이름이 붙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볼 셈이었는데.
하지만 지금 세라가 하는 일이란 그 작은 방에서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이렇게 도셋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 속을 산책하든가― 그것도 혼자서― 그 두 가지밖에 없었다.
모건 부인이 이따금 찾아와 주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자기의 생활이 있고 그날그날의 예정이 있었다. 새로 온 며느리를 위한 시간을 쪼개 달라는 편이 무리였다.
모건 부인은 드레스에 관해서는 조언해 주었지만 쇼핑까지는 돌봐 주지 않았다. 그래서 세라는 옷도 새로 장만하지 못했고, 다크가 주는 돈은 손도 안 댄 채 그대로 있었다.
세라는 갖고 온 레인코트를 펼치고 둑에 앉았다.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뭔가 할 일이 있을 텐데, 틀림없이…
세라는 맑은 물 위에 떠서 천천히 떠내려가는 나무 조각을 무심히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친척에 관해서는 아무 얘기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굿윈이라는 것이 어머니의 성이고, 미트랜드에 살았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다. 그곳은 넓은 지역일까? 세라는 한참 생각한 끝에 월샬이라는 지명을 기억해 냈다.
그날 아침, 다크가 런던에 간다고 말하지만 않았다면 세라도 일부러 친척을 찾아보려는 생각은 안했을 것이다.
"당신은 이틀 동안은 집에 있겠다고 하셨지 않아요. 집에서 할 일이 있어서 외출은 안하겠다고."
세라는 울상이 되었다. 속눈썹은 이미 젖어 있었지만, 세라는 재빨리 손으로 눈을 비볐다.
"혼자 있는 게 정말 쓸쓸해요."
다크는 버티고 선 채 까다로운 표정으로 세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라는 다크가 더욱더 핸섬해져 간다고 생각했다. 이따금 남편과 함께 외출할 수 있다면…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누가 봐주었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얼마나 자랑스러운 기분이 될 것인가?
"런던에 급한 볼일이 생겨서 그래."
남편은 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다크는 나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일까.
"제니는 이번 주에 한 번도 안 와봤어?"
"금주라니요? 제니는 이미 두 주일이나 안 왔어요."
"정말이오? 그럼 가서 한마디 해두지. 제니는 당신을 이렇게 내버려 두면 안 되는데."
세라는 주저했다.
"다크, 이따금 나를 좀 어디 데려가 주면 안 돼요?"
세라의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는 남편이 고개를 가로저었으므로 공허하게 사라져 갔다.
"그럴 마음은 없다고 처음부터 말해 두었을 텐데. 당신은 스스로 즐거움을 찾도록 해야 한다니까."
"그렇게 하죠. 하루종일 작은 방에서 책을 읽고 있겠어요."
세라의 말하는 태도와 어조에 다크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당신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지 않다는 거요? 당신은 여자가 동경하는 것 전부를 손에 넣었잖소! 거기다 당신은 처음의 감사하던 마음을 잊은 것 같은데."
"아니에요,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지금의 생활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죠."
"그건 무리가 아니지. 당신은 외국에 왔으니까, 거기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요."
세라는 눈물로 흐려진 시야를 통해 그를 보며 간신히 미소 지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모르시는군요."
"그럼 설명해 주겠소?"
다크는 짜증스러움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구석에 세워져 있는 기둥시계 쪽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세라의 심정을 헤아려 보고자 하는 마음 따위는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괜찮아요, 다크. 런던에는 얼마나 계실 건가요?"
"아마도 일주일쯤. 아냐, 어쩌면 두 주일쯤이 될지도 모르지."
두 주일 동안이라니! 그건 한평생과 같을 만큼 길지 않은가! 세라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함께 가면 안 될까요?"
남편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세라는 급히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나를 혼자 내버려 둬도 괜찮아요. 나는 혼자서 즐길 테니까요. 그리고 밤에는 호텔에서 꼼짝 않고 지낼게요. 나는 아주아주 얌전히 행동해서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게요. 제발 데려가 줘요."
"그건 안 된다니까."
다크는 딱 잘라 말하고는 세라에게 더 조를 틈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 서둘러 방을 나가 버렸다.
세라는 신문광고를 내기로 했다. 광고문을 생각하는 데 몇 시간이나 걸렸다. 만족할 만큼은 안 되었지만, 이 정도면 그런대로 의사는 통하리라고 생각되었다.
<최근 그리스에서 온 젊은 여성입니다. 외가 쪽의 친척과 연락을 취하고 싶습니다. 월샬 부근에 사는 굿윈이라는 성을 가지신 분은 연락을 주십시오. 미시즈 세라 모건, 도셋 주 포트퍼 드마그나, 샬컴 저택>
이 광고문은 그 지역에 한해서만 신문에 게재되었다.
사흘 후, 세라에게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로써, 그날밤 그녀는 완전히 지쳐 버렸다.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의 응대로 그날 하루 거의 수화기를 든 채 지냈기 때문이다. 집사인 프레스톤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명확했다. 세라 자신도 침실로 올라갈 무렵에는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거기에도 안식은 없었다. l0시 반까지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다.
다크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내일은 제발 이러지 않았으면. 그런데 그 기대도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거기다 아침 10시에는 프레스톤이 은쟁반 위에 여러 가지 형태와 크기의 봉투를 산더미처럼 쌓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편지입니다, 사모님."
프레스톤은 묘한 눈초리로 세라를 바라보며 빈정거리듯 덧붙였다.
"쟁반째 두고 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렇군요. 고마와요, 프레스톤."
세라는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다.
프레스톤이 이렇게 어렵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는 위엄이 있어 접근하기 어렵다. 역대 당주(當主)의 초상화와 함께 프레스톤의 초상화도 전시실에 걸어 놔야 하지 않을까 하고, 세라는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특별히 좋은 장소에 황금빛 액자에 넣어서.
하지만 문이 닫히자, 세라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모두 나의 친척? 그리스에서는 친척이 많은 게 보통이다. 그러나 영국의 가족은 훨씬 수가 적으리라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많은 친척 얘기를 어째서 어머니는 해주지 않으셨을까…
세라는 하나하나 봉투를 뜯어보았다. 잘생긴 젊은 남자의 스냅 사진이 함께 들어 있는 것도 있었다. 교양이 있는 사람에게서 온 것도 있는가 하면, 거의 읽을 수 없는 문장을 써 보낸 사람도 있었다. 노인에게서 온 편지에는 세라가 알 길이 없는 아주 옛날의 얘기가 씌어 있었다.
백 통쯤 되는 편지를 뜯어본 후 세라는 완전히 곤혹 속에 빠져 버렸다. 전부가 자기의 친척이 아니라는 것쯤은 세라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편지더미 속에는 괴짜나, 돈이 목표인 사람이나, 사기꾼조차 섞여 있다는 것에까지는 세라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또한 신문광고에 이 저택의 주소를 쓰는 것보다 사서함을 쓰는 쪽이 편리하다는 것도 생각해 내지 못했다.
점심을 다이닝 룸에서 혼자 들고 난 후, 세라는 분류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천진스럽게 골라낸 몇 통의 편지에 세라는 곧 답장을 썼다. 그동안에도 전화는 울려대고, 이튿날도 또다시 큰 편지더미가 배달되었다. 무표정한 집사가 날라오는 쟁반을 보며, 언제까지나 이런 일이 계속될 것인지 세라는 머리가 아팠다.
"고마와요."
세라는 되도록 무게 있게 말했다. '폐하'― 세라는 혼자서 프레스톤을 그런 별명으로 부르고 있었다―의 위엄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쟁반을 테이블 위에 놔둬요."
전화가 울려서 세라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지금 좀 바빠서."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프레스톤에게 끄덕여 보이며, 세라는 말했다.
프레스톤은 세라의 상기된 얼굴에서부터 지금 자기가 테이블 위에 놓은 쟁반으로 시선을 던지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겠군요."
그러고 나서 그는 언제나처럼 침착한 태도로 나가 버렸다.
나흘째에도 또다시 수많은 편지가 배달되었다. 세라는 그리스에서 가져온 쇼핑백에 그것을 전부 쑤셔 넣자 주차장 가까이에 있는 쓰레기더미 속에 집어던졌다.
"이것으로 끝난 거야."
세라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그 근처에 사는 굿윈 씨는 나타나지 않겠지."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며칠간, 수는 점점 줄어들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편지는 쏟아져 들어왔다. 그 편지들은 모두 쓰레기통 행이 되었다.
세라가 정말로 흥미를 갖기 서작한 것은 자기가 낸 편지의 답장이 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최초의 편지에 별로 많은 내용을 담지 않은 젊은 남자의 답장에 세라는 대단한 흥미를 느꼈다. 결국 세라는 그를 집에 초청하기로 결정했다. 로드릭 멜샴이라는 청년이 정말로 어머니 조카의 사촌이라면, 그밖의 친척에 관한 일은 그에게 물으면 대충 알 수 있을 것이다.
세라의 편지를 받은 로드릭은 이튿날 약속대로 찾아왔다. 프레스톤이 그의 도착을 알려 주었을 때 세라의 기분은 들떴다.
"접객실로 안내해 줘요, 곧 갈 테니까."
집사의 시선을 피하면서 세라는 지시했다.
프레스톤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하인들은 모두 산더미 같은 편지들과 자주 걸려오는 전화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이런 집 속에서 비밀을 갖기란 어려운 것이다. 알면 어때, 세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을 나섰다.
내가 무엇을 하든 그들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지. 쓸데없는 참견이라니까.
그 젊은 남자는 수수한 복장이었다. 하지만 그 복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 어딘지 모르게 그 남자에게는 있었다. 거기다 조금 전에 급히 면도를 한 듯 턱이 빨갰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온화하고 교양이 넘쳤으며, 웃는 얼굴도 매력적인 좋은 인상이었다. 로드릭이란 청년은 세라가 내미는 손을 쥐었다.
"거기 앉으시죠."
세라는 어색하게 의자를 권했다.
"당신은 정말로 나의 친척이 되시나요?"
"틀림없는 것 같은데요."
남자는 방 안을 둘러보고, 값비싼 물건의 하나하나를 확인하고 나서 눈을 세라에게로 돌리며 그녀의 왼손 가운뎃손가락에 시선을 멈췄다.
처음에 그는 세라의 어머니에 대해서 물었다. 세라가 거기에 대답하자, 그는 자기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세라가 야기한 것과 중요한 대목이 일치했으므로, 신문광고도 허사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세라는 기뻐했다.
로드릭은 세라의 남편에 관해서 물었다. 세라는 다크에 관한 얘기를 조금 하고, 당신과 만나게 되면 남편은 기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들은 로드릭이 묘한 얼굴을 했으므로 세라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다음에 그는 왜 당신은 그렇게 친척을 찾고자 애쓰느냐고 물었다.
세라는 당황했다. 지주의 아내가 친척을 찾기 위해 신문광고를 내다니, 그다지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세라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만약 다크와 의논했더라면, 남편은 변호사에게 의뢰한다든가 무슨 방법을 강구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어머니의 친척을 찾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죠'라고만 대답하고 화제를 바꾸었다.
"주인은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요. 일이 바쁘기 때문이죠. 그래서 만약 나의 친척을 찾아내면, 서로 왕래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세라는 로드릭에게 미소 지어 보였지만, 그는 감정을 죽이듯이 그냥 시선을 떨구었을 뿐이었다.
"당신은 나와 만나 주시겠어요? 나는 연극을 보거나 댄스도 하러 가고― 여러 가지를 해보고 싶어서요."
"주인께서 신경 쓰지 않으실까요?"
"전혀."
세라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두 사람 다, 아니, 주인은 내가 웬만큼 자유롭게 행동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로드릭은 앞으로 몸을 숙여 금으로 된 담뱃갑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들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는 라이터를 든 채 잠시 그것을 보고 있다가, 드디어 시선을 들어 세라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가냘픈 여자가 손을 무릎 위에서 움켜쥔 채 눈앞에 달랑 앉아 있다. 로드릭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담배연기를 확 내뿜었다. 연기가 큰 난로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고 나서, 그는 금으로 된 라이터를 테이블 위에 도로 놓았다.
"나는 기꺼이 부인의 외출에 동행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잠시 생각을 한 후에 그 남자는 덧붙였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이곳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그렇다면 우리 집에 와서 묵도록 하세요."
세라는 아무 주저없이 권유했다. 그리스에서는 친척끼리 서로 자고 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인 것이다.
"주말은 한가하시죠?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담배를 비벼 끄면서 로드릭이 대답했다.
"회사의 간부로 있어요."
세라는 감탄하여 눈을 크게 떴다.
"아주 중요한 일을 하시는 것 같군요."
"뭐, 그런 편이죠."
"어떤 집에 살고 계신가요?"
그는 아까 자기가 고아라고 말했었다. 그 말을 듣고 세라는 낙담했었다. 그의 가족이나 다른 친척과도 교제 범위를 넓혔으면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집은 아니죠."
그가 즉각 이렇게 대답했으므로, 세라는 웃었다.
"이런 저택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는 않겠죠."
"이렇게 훌륭한 신분의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니, 당신은 정말로 운이 좋은 분이군요. 부군과는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됐습니까?"
세라는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요컨데 우리는 만났어요. 그뿐이에요."
세라는 이렇게 대답하고, 곧 화제를 바꾸어 주말에는 한가하냐고 또 한번 물었다.
"네, 토요일, 일요일은 휴무지요."
"그럼 우리 집에 와서 묵으세요."
로드릭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세라를 보며 뭔가 생각에 잠긴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주인께서는 지금 안 계신가요?"
세라의 권유에는 대답을 않고, 그는 그렇게 물었다.
"네… 하지만 월요일이나 화요일에는 돌아오실 거예요."
"그때까지는 집이 비는군요? 그러면 말이죠. 내가 내일 저녁에 와서 일요일까지 머물도록 하겠습니다."
세라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멋지군요! 당신은 매우 친절한 분이에요. 달리 약속하신 일은 정말로 없으신가요?"
"있어도 상관없어요. 새로운 친척을 찾아내어서 나도 기쁜걸요."
"오늘 저녁식사를 함께 하시면 어떨까요?"
세라는 이렇게 말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귀가가 늦어져서 안 된다고 거절하고, 오후에 차를 마시러 내일 저녁 오겠다고 말한 후 돌아갔다.
한두 시간 후, 저녁식사를 위해 옷을 갈아입으면서 세라는 온 방 안을 춤을 추며 돌아다녔다. 진짜 친척을 찾아낸 것이다.
제니가 돌보아 주지 않아도 이젠 괜찮다. 로드릭이 친구들을 소개해 줄 것이며, 그렇게 되면 곧 나의 꿈은 실현된다. 나는 멋있는 친구들을 많이 갖게 되는 것이다.
다음날 오후, 세라가 친척이 오기로 되어 있으니까 방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 친척이 남자라고 알려 주었을 때, 프레스톤의 얼굴은 가히 볼 만했다.
"그분은 저녁식사 때까지는 도착할 것이니까."
될 수 있는 대로 당당하게 들리기를 바라면서 세라는 한마디 덧붙였다.
"저녁식사는 보통때보다 늦게 준비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부탁해요."
어때요, 폐하? 나도 당신에게 명령쯤은 할 수 있다니까요.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세라는 광고를 본 사람들에게서 산더미처럼 편지가 날아온 얘기를 했다. 로드릭의 눈은 순간 빛났지만 별로 놀란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나의 편지만을 골라내었지요?"
은 접시를 묘하게 감개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로드릭은 알고 싶어 했다.
"글쎄요,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잘 모르겠어요. 처음에 몇 통인가를 골라서 답장을 내었죠. 그러고 난 후 당신이 또 한 번 편지를 주신 셈인데, 어쩐지 그 편지가 마음에 들어서."
세라는 즐거운 듯 미소 지었다.
"지금 생각하니까 그토록 많이 온 편지 속에는 진짜가 아닌 것도 꽤나 많이 섞여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신의 편지에는 진실미가 있었고… 결국 그 느낌이 옳았던 셈이죠!"
로드릭은 몸짓으로 와인을 더 부탁하고, 거품이 이는 액체가 잔에 차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식사 후 두 사람은 정원을 산책하며 내일의 예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로드릭은 기차로 와서 역에서부터는 택시를 이용한 것 같았다. 세라는 차고에 있는 차를 써도 된다고 말했다.
"맘대로 사용해도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다크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고 했으니까."
응접실로 돌아오자, 로드릭은 스스로 마실 것을 따르고는 잔을 들고 앉으며 세라의 눈을 피하듯 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직 이 멋진 저택 안을 구경 못했군요."
세라는 미소 지으며, 내일 아침에 한번 둘러보자고 약속했다.
"여기에는 아주 멋진 것들이 많아요. 귀한 물건들을 다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해질 거예요."
"그럴 테지요."
그는 라이터를 집어 담배로 가져갔다. 그리고 또 한 번 라이터를 집어 찬찬히 그것을 살펴보고는 천천히 테이블 위에 도로 놓았다.
"지금 한번 둘러보고 싶군요."
"아주 넓어요. 시간이 꽤 걸릴 텐데요."
"그렇다면 더더구나 오늘 안에 봐두는 게 좋지 않겠어요? 내일은 아침 일찍 나가봐야 할 테니까요."
두 사람은 내일 본머드로 갈 예정이었다.
"좋아요."
세라는 일어섰다.
"그렇다면 지금 안내해 드리죠."
두 사람이 홀로 나가자, 프레스톤이 어디선지 나타나 말없이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저 남자는 항상 저런 식으로 어정거리나요?"
로드릭은 신랄하게 물었다.
"저 사람은 지금 어정거리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일하고 있을 뿐이죠."
세라는 그 집사를 싫어하고 있는데도 그가 그런 식으로 버릇없이 말하자 이상스레 불쾌했다.
세라는 로드릭을 훌륭한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는 특히 마이센 도끼와 아름다운 은촛대에 흥미를 가진 것 같았다. 그는 그림이나 가구, 장식품들을 조사하기도 하고, 18세기의 조각이 된 쟁반에 감탄하기도 했다. 다음은 '조찬실'이며, '차이나 룸'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가 가장 흥미를 가진 것은 '실버 룸'인 것 같았다. 그는 들어설 때 숨을 들이키는 것 같더니, 곧 가벼운 기침을 하여 동요를 감추었다. 거기에는 촛대, 쟁반, 조미료 세트 등 훌륭한 조지안 실버의 물품 등이 장식되어 있었다. 순금포트에 크림 용기, 설탕 용기가 여러 세트 있었다. 정교한 빵 그릇, 드레싱 용기도 있었다. 그러한 모든 것이 은으로 세공한 선반이나 테이블 위에 장식되어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보면서 세라는 미소 지었다.
"굉장하죠. 나도 처음 봤을 때에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어요."
"정말 그렇군요."
그도 인정했다. 그런데, 그때 그는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지 않아요?"
재빨리 문께를 돌아보는 그를 보고, 세라는 꽤 신경질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뇨,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어요."
"그 집사일 거야. 그 작자가 어슬렁거리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 작자는 자기 방이 없는가요? 공연히 노상 돌아다니고 있을 필요는 없을 텐데."
"그 사람이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잖아요."
세라는 공연히 불안해졌다.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자는 문 저쪽에 서 있는 게 틀림없어요. 무슨 참견이람! 하인인 주제에."
그가 집사의 흉을 보는 바람에 기분이 나빠진 세라는 얼굴을 돌렸다.
"응접실로 돌아가죠?"
이 이상 로드릭에게 집 안을 보일 마음이 없어져서, 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동의했다. 두 사람은 응접실로 돌아와 술을 마셨다. 약간 과음한 것 같다. 위스키가 이렇게 줄어서 다크가 화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주인께서 예정보다 빨리 돌아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까?"
로드릭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세라의 침묵을 깨뜨렸다.
세라는 얼른 그를 쳐다보았다.
"아뇨,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내일 돌아올지도 모르지."
로드릭은 자신에게 들려주듯 중얼거렸다.
"주인은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돌아오겠다고 말했으니까 예정을 바꾸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는데요."
로드릭은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세라는 내일의 일정을 화제로 삼았지만, 그는 이제 와서는 전혀 그 일에 흥미를 잃은 듯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내일 쓸 차에 관해서만은 자세히 물었다.
남편이 멜세데스를 타고 갔기 때문에, 로버나 재규어를 쓸 것이라고 세라는 대답했다.
"재규어? 차고에 있다고 했죠?"
"네, 아까 내가 가르쳐 준 그 건물이에요."
"하지만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을 게 아닙니까?"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하고 세라는 생각했다.
"그렇죠. 하지만 내일 프레스톤에게 말하면 열쇠를 줄 거예요."
잠시동안 침묵이 계속된 후 로드릭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전화를 걸어야 할 일이 생각났어요. 공중전화가 이 근처에 있나요?"
세라는 깜짝 놀랐다.
"전화라면 집에서 걸어요."
"좀 더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으니 산책삼아 공중전화 있는 데까지 갔다 오죠. 가까운 곳에 있나요?"
"네에, 길모퉁이에…"
세라는 자기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위도 아파오는 것 같았다.
"그럼, 갔다 오겠습니다."
로드릭은 일어서더니 세라에게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은 밝고 아무 구김살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다, 당신이 돌아올 즈음에는 이미 자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데요…"
"좋아요, 나의 방은 알고 있으니까. 안녕히 주무세요, 세라. 푹 자도록 하세요."
"그럼 편히 쉬세요. 내일, 우리는 거기 가는 거죠?"
"물론이죠. 기대가 커요."
그러면서도 로드릭은 세라의 시선을 피했다…
침대에 들어가서도 세라는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세라의 두려움은 점점 확대되었다. 드디어 그녀는 일어나 앉아서 스탠드를 켰다. 1l시였다. 프레스톤은 아직 자지 않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세라는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아무래도 세라는 로드릭이 실버 룸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자꾸 떠올리게 되었다. 그곳에서 여러 가지 은그릇을 주머니에 넣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의 침착하지 못한 태도나, 프레스톤이 문께에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하던 말을 세라는 상기했다. 자기도 로드릭도 프레스톤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로드릭은 집사가 그 언저리를 어정거리고 있는 것처럼 느낀 것이다.
정말로 프레스톤은 문 옆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프레스톤이 자기의 친척을 신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세라는 겨우 알아챘다. 당연히 기분이 나빠져야 할 텐데, 어쩐 일인지 세라는 묘하게도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그 안심이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세라는 자신도 모르게 전화기에 손을 뻗었다. 하나 도대체 누구에게 걸어야 된단 말인가.
'나는 바보야.'
그녀는 수화기를 놓았다. 어째서 로드릭은 전화를 걸러 밖으로 나간 것일까? 첫째, 갑자기 전화 걸어야 할 일이 생각났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세라의 두려움은 비로소 극에 달했다― 이제는 막연한 불안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로드릭에 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만약 로드릭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만약, 만약에 그가 악당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자, 세라의 심장은 멎어 버릴 것만 같았다. 세라는 남편의 일을 생각했다. 만약 또 한번 소동을 일으킨다면… 하고 그는 말했었지.
'너무 지나친 생각이야 괜찮을 거야. 로드릭은 그런 사람이 아닐 테니까.'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로드릭은 보기보다는 신사가 아니라는 사실과 맞부딪치게 되었다.
세라는 침대에서 빠져나왔지만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있다. 우선 옷을 입었지만, 방 밖으로 나가면 총격을 당하거나 얻어맞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세라는 할 수 없이 침실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세라는 몇 번이나 전화 쪽을 보았다. 경찰을 부를까. 설마? 프레스톤? 아냐, 프레스톤은 곤란하다. 시어머니? 그렇지, 시어머니가 좋겠다!
전화는 잠시 동안 신호만 울리더니, 이윽고 가정부가 나와 수화기를 들었다. 그녀는 아마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사모님은 안 계신데요. 사모님과 제니 아가씨는 파티에 가셨는데, 늦게야 돌아오신다고 했어요."
"그래, 알았어. 잠을 깨워서 미안해."
"천만에요,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요."
세라는 오랫동안 수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찰스! 그렇다, 찰스라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일러주겠지. 어째서 좀 더 일찍 그를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찰스의 집 전화번호는 모르지만 주소라면 알고 있다.
번호 안내에 문의하여 알아낸 세라는 이내 그 번호를 돌렸다. 신호는 계속 가는데 아무도 받지 않았다. 만약 찰스도 다크와 함께 간 것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프레스톤에게 일러서 다크에게 연락해 달라는 수밖에 없겠구나.
세라는 떨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프레스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프레스톤에게 묻지 않으면, 남편이 어디 있는지조차 나는 알지 못하니까. 그때 드디어 누군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미스터 커셔를 대 주세요."
세라는 부탁했다.
"어디신가요?"
그 목소리에 세라는 마음이 놓였다.
"미시즈 모건― 세라 모건이에요."
"잠깐 기다려 주세요."
오래 기다린 후 찰스의 졸린 듯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세라, 도대체 어찌 된 거요?"
세라는 잠시 동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후 세라는 단숨에 지껄이기 시작했다. 하긴 찰스가 질문만 해댔으므로 별로 요령 있는 설명이 되지는 못했지만.
"빨리 와줘요! 찰스, 지금 곧. 난 무서워요."
"그렇지만 프레스톤이…"
"당신이 와주면 좋겠어요."
"하지만 세라, 그 집과 우리 집은 굉장히 떨어져 있어요. 프레스톤은 그런 때를 위해 있는 사람 아니오. 도대체 어쩌다 이런 소동을 일으킨 거요? 다크에게 쫓겨날걸."
"어머나!"
세라는 몸서리를 쳤다.
"이런 때 그런 일을 생각하게 하다니 짓궂네요! 만약 와주지 않는다면, 나는 이제 당신과 말도 하지 않겠어요."
"알았어요. 그래도 역시 프레스톤에게 당신이 염려하는 바를 얘기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프레스톤이라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잘 알 테니까."
"그 사람은 나를 싫어하고 있어요."
"그것과 이것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요? 아무리 프레스톤인들 여주인이 싫다고 해서 자기 주인의 재산까지 도둑 맞히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 아니오?"
"다, 당신은… 와주시는 거죠… 그, 그렇지 않다면…"
세라의 목소리가 흐느낌으로 변했으므로, 찰스는 당황했다.
"알았어요. 가도록 하겠소… 하지만 어쩌면 나는 목뼈가 부러지든가 속도위반으로 체포되든가, 둘 중의 하나가 될 거요."
세라는 침대에 고쳐 앉아 시계를 보았다. 찰스는 바스에 살고 있다. 하지만 길은 텅 비어 있을 테니까 삼십 분쯤 지나면 와주겠지.
찰스가 달려온 것은 그로부터 이십오 분쯤 뒤였다. 세라는 차소리를 듣자 급히 창을 열었다.
"비상계단으로 올라와 주시겠어요?"
세라는 작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어째서 이런 멜로드라마를 연출하게 했소?"
몇 초 후 세라의 침실 창을 넘으면서 찰스가 불만스럽게 물었다.
"안 그래도 프레스톤은 나를 들어오게 한 텐데."
"프레스톤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뭔가 해결책을 찾아 주시겠죠. 그렇게 되면 다크가 모를 테니까요."
찰스가 와준 것만으로도 세라의 마음은 상당히 밝아졌다.
"와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럴 테죠. 하지만 이것은 비밀리에 끝내 버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 로드릭이란 자가 나쁜 놈이란 걸 알아낸 거요?"
"뚜렷한 이유는 없어요."
세라는 또 한번 처음부터 전부 설명했다. 전화로는 요점밖에 얘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착한 사람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무서워져요."
"지금 설명을 자세히 듣고 보니, 놈은 아무래도 수상한걸."
찰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도대체 어쩌다 그런 짓을 한 거요? 광고 얘기 말이오. 처음에 다크와 의논해 봤어야 하는 건데."
세라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크는 나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어요."
"다크는 어차피 이 사건으로 짬을 내어야만 될 거요! 다크에게 비밀로 할 수는 없어요."
"아니에요,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믿을 사람이라곤 당신뿐이에요, 찰스. 무슨 방법을 강구해 주세요!"
"그자는 지금 어디 있소?"
"방에서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요. 공범자에게 전화를 했는지 모르죠."
"그렇겠군."
찰스는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게 확실해졌어. 그자는 처음에는 내일 밤, 외출에서 돌아온 후 일을 시작하려고 생각했겠지. 차를 타고 나가 나중에 버리려고 생각했을 게 틀림없어. 그런데, 놈은 프레스톤이 수상히 여기는 것을 알아채고 주인이나 경찰에 연락이 닿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모양이오. 그래서 일을 서두르려 생각했겠지. 친구에게 전화해서 차를 가져오도록 일렀을 게 틀림없소."
찰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편보다도 더 무서운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생판 모르는 사람을 집에 끌어들여 안내하고 돌아다니니, 좀 어떻게 된 것이 아니오?"
"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사실이에요."
세라는 비참한 심정으로 동의했다.
"그리스에서는 서로를 다 믿고 살 거든요."
"그럴 리가 있소, 어느 나라든지 범죄는 있는 법인데."
"아직 그런 일을 당한 적 없었어요."
찰스는 절망적인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이제 와서 후회해 봐도 소용없지. 무슨 일이건 시작하기 전에 잘 생각해야지, 세라. 충동적이라는 점이 당신의 큰 결점인 것 같소."
세라는 순순히 시인했다.
"그래요."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쓸쓸해서였다면 변명이 되지 않겠죠."
찰스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더니 세라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친절한 동작이긴 했지만 다소 경솔한 행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때문에 세라의 팽팽히 긴장된 마음이 무너져 버려 그녀는 찰스의 가슴에 기대어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찰스는 감싸듯 세라를 안고 다정하게 말했다.
"자, 자, 울지 말아요. 아직 피해를 본 것은 아니니까…"
이렇게 말하다 찰스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침실의 문이 활짝 열리고, 거기에는 다크가 의아스럽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도대체…?"
다크는 방 한가운데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뒤돌아본 세라의 눈은 공포로 커질 대로 커졌다.
다크는 아내를 친구의 팔에서 거칠게 잡아떼었다.
"아마 두 사람 중의 하나가 이 일에 관해 설명해 주겠지?"
"다크! 여긴 어떻게… 아, 아파요!"
"아파? 목을 분질러 주고 싶은 심정이야. 도대체 어찌 된 거야. 이건!"
"좀 진정해, 다크."
찰스가 평상시의 온화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우선 어떻게 해서 자네가 돌아왔는지 말해 봐. 그렇군, 프레스톤이 전화한 게로군?"
다크는 코를 벌름거렸다.
"도대체 너는 내 마누라 침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깊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찰스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쳐 날뛰는 남편의 모습은 너답지 않아, 다크. 너는 편의상의 결혼을 했을 뿐 아냐?"
다크가 그 순간 말대꾸를 못하자, 찰스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스의 처녀는 그런 짓 안한다고 말한 것은 누구였지? 벌써 잊었어?"
"내가 전화해서 와달라고 했어요."
세라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었다.
"찰스보고 비상계단으로 올라와 달라고 했어요."
"그것은 또 무슨 괴이한 짓이람! 다른 남자 친구에게도 다 그렇게 하는 거야?"
세라가 노려보았지만, 다크는 개의치 않고 물었다.
"어째서 찰스를 불렀냐니까?"
"세라는 의심을 품은 거야, 그자에게… 세라의 사촌인가 하는."
"세라의… 뭐라고?"
"내가 설명하죠."
하지만 그는 설명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어디서 그놈을 끌어들였어?"
"내가 설명하지."
찰스가 세라를 대신하여 온건하게 말하면서 문을 닫으러 갔다.
"그전에 우선 대답해 줘. 프레스톤이 너에게 전화했지?"
"두 시간쯤 전에 프레스톤이 전화했더군. 오는 도중에 두 번이나 속도위반으로 붙들렸어."
세라는 두려운 듯 남편을 올려다보고는 찰스에게 다가섰다.
"운좋게 나는 그것은 면했지."
찰스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명이 끝났을 때, 다크는 폭발 직전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당신은 광고를… 그리고 내 주소를 신문에 냈다고? 당신은 상식이라는 것도 없어?"
세라는 울기 시작했다.
"너무 쓸쓸했어요."
세라는 대들었다.
"영국에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내가 알 수 있었겠어요? 그리스에서는 모두가 정직해요. 나는 그리스로 돌아가고 싶어요!"
"나도 그러길 바래!"
"당신은 클라리스와 결혼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정말 그래."
다크의 어조는 약간 누그러졌다.
그때 찰스가 참견을 했다.
"좀 더 건설적으로 생각하는 게 어때. 로드릭이 수상한 놈이라는 점에는 모두의 의견이 일치한 셈인데 증거는 하나도 없으니,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지."
"당신에게 연락하다니, 프레스톤은 나서기 좋아하고 짓궂은 사람이군요."
그렇게 말하는 세라를 남편은 노려볼 뿐이었다.
"당신은 프레스톤에게 감사해야 해. 프레스톤은 당신이 받았다는 그 편지더미를 수상하게 생각했던 게 틀림없어. 로드릭이라는 작자가 나타났을 때, 그것이 예의 편지와 뭔가 관계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겠지. 프레스톤은 아주 애매하고 조심스럽게 말했어. 정말이라니까."
프레스톤은 세라가 말하는 것처럼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든 납득시키려고 다크는 역설했다.
"프레스톤은 단지 그자의 거동이 신경 쓰여서 감시해도 좋으냐고 물어보았던 거야."
"쓸데없는 참견이에요."
"그렇게 생각하겠지. 찰스를 부른 것을 보니까, 당신은 이 사건을 나에게 비밀로 해두려고 생각했었을 테니까."
"다, 당신은 나, 나를 그리스로 돌려보낼 셈인가요?"
세라는 더듬거리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맞았어!"
다크가 즉각 대답하자 세라는 더욱더 슬퍼했으므로, 다크는 이런 세라 때문에 골치가 아픈 듯했다.
"두 사람이 서로 돌을 던지고 있는 사이에 그 남자는 가보를 전부 꾸려 갖고 도망쳐 버리겠는걸."
찰스가 끼어들었다.
"내가 언제 돌을 던졌어요."
세라는 찰스를 노려보며 항의했다. 하지만 세라의 머릿속은 다른 일로 가득 찼다. 요 모양으로 집에 쫓겨 간다면 아버지가 뭐라고 말할 것인가. 이런 일은 그리스에서는 들어본 적도 없다. 아그니 고모는 '그것 봐라' 하는 얼굴을 할 테지. 결혼 날짜가 결정된 뒤에도 '이 결혼은 실현되지 않을걸' 하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
'너와 그 영국 남자와는 성격이 정반대라 순조로울 리가 없을 거라고, 고모는 예언을 했었는데.'
"세라, 이번에 또 얘기를 방해하면 때려 줄 테야."
다크는 이렇게 말하더니 찰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놈은 이제 가보를 갖고 도망치지 못해. 이미 돌아가 버렸으니까."
"돌아갔다구?"
세라와 찰스가 동시에 외쳤다.
"겁이 난 거지. 그자가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프레스톤이 아직 서성거리고 있었고, 당신이 그놈을 위해 준비시킨 방― 바로 가장 고급스런 접객용 침실이지."
다크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 방에 그 작자가 올라갈 때에도 프레스톤이 뒤따라갔나 봐. 잠시 후 그자가 문을 열었을 때에도 낭하의 좌석에 프레스톤이 서 있었다는군. 몇 분 후, 그자는 짐을 챙겨 갖고 나가더니 이렇게 말했다는 거야. 친구에게 전화한 결과 급한 일이 생겨 당장 돌아가야겠다고. 프레스톤은 그자를 현관까지 따라나가 배웅하고 나서 문을 걸었다는 거야."
다크가 얘기를 끝냈을 때 세라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세라는 이 결말에 매우 안심이 되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경찰까지 개입되어 신문에 나고, 다크의 친구들 사이에도 이 사건이 죄다 알려지면 어쩌나 하고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응접실에 가서 뭣 좀 마실까."
찰스가 제안했다.
세라는 감사의 눈길로 찰스를 바라보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아무것도 마시고 싶지 않아요. 나에게는 축하할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보다도, 내가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까요."
"난들 아나."
다크는 무정하게 내밸었다.
"첫째, 신경 쓰기도 싫어. 자, 가자, 찰스. 너는 좋은 제안을 해줬어. 하긴 아무리 마셔도 나의 이번 손실은 메워지지 않겠지만."
"그것은."
세라는 더듬으면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 여자 친구를 거기다 두고 왔다는 뜻인가요?"
남편은 세라를 힐긋 보고는 조금 주저하더니 '맞아' 하고 가볍게 중얼거렸다.
"나는 여자 친구를 두고 왔단 말이야."
6
이튿날 아침식사는 무거운 침묵 속에 끝났다. 그런 다음 곧 세라는 정원으로 나갔다.
벌써 한 시간쯤이나 걸어 다녔을까. 당장이라도 남편이 불러들여 빨랑빨랑 짐을 싸라고 명령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지금쯤 남편은 공항에 전화하여 오늘 그리스로 가는 항공편이 있는지 없는지를 문의하고 있겠지.
멀리서 나뭇잎이 흔들리며 말을 타고 저택 쪽으로 달려오는 처녀의 모습이 보였다. 세라는 곁에 있는 서머 하우스에라도 숨어 버리고 싶었지만, 제니는 이미 세라를 알아보고 멈춰 서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니는 미소 지으며 인사를 했다.
세라는 건성으로 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말해 버렸다.
"어젯밤에 늦었던 것에 비해서는 일찍부터 나오셨군요."
"어머, 어떻게 알죠?"
제니가 놀랐다.
"어젯밤에 전화를 했었으니까요."
세라는 할 수 없이 대답했다.
"뭔가 나에게 볼일이 있었나요?"
"아녜요… 어머님께 걸었더랬어요. 하지만 아무 일도 아니에요."
이렇게 급히 덧붙이면서 '제니가 이런 식으로 내려다보지 않으면 좋을 텐데' 하고 세라는 생각했다. 아주 잘난 듯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같이 보이니.
"그럼 나는 가보겠어요. 잠깐 산책하고 있었을 뿐이니까요."
"무슨 일이에요?"
제니는 말에서 훌쩍 내려섰다.
"운 것 같네요."
"그래요.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 어젯밤의 일이에요, 밤 사이에 말이죠."
이렇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흐느낌에 가까왔다.
"오빠 때문에?"
"뭐라고 했죠?"
세라는 눈을 깜짝였다.
"오빠가 어떻게 했어요?"
세라가 가만히 고개를 젓자, 제니는 더욱 추궁했다.
"오빠가 울렸군요?"
어째서 그런 것을 묻는 것일까, 지금까지 나한테 거의 관심도 없었으면서. 하지만 제니의 질문을 무시할 수도 없어서 세라는 짤막하게 어젯밤의 일을 설명했다.
세라가 얘기를 끝냈을 때 제니의 얼굴은 노여움으로 흐려졌다.
"오빠는 런던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대요?"
"모르겠어요…"
"오빠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었군요?"
"그래요. 하지만 할 수 없어요. 다크는 그런 것을 나에게 말할 의무가 없으니까요."
"그럴까요?"
제니의 눈이 빛났다.
"만약 병에 걸리거나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할 셈이에요?"
"그것과 다크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있고말고요. 아내는 적어도 남편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쯤은 당연히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요."
제니는 '적어도'란 말을 특히 강조했다. 사실은 다크가 어디에도 안 가고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당신은 우리가 결혼한 사정은 알고 있죠?"
이렇게 말하고 나서, 세라는 자신도 모르게 덧붙였다.
"어머님께서는 당신이 나를 돌봐 줄 것이며, 여기저기 데리고 가주기도 할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말해 놓고 나서 곧 세라는 아차 싶어 얼굴을 숙이고 말의 등을 쓰다듬었다.
세라도 승마를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요전에 다크에게 말했더니 그는 단지 '알았어, 기회를 봐서'라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내가 돌봐 주었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하고 싶죠?"
"아니에요, 그건! 그런 투로 들렸다면 미안해요."
세라는 힘없이 어깨를 움츠렸다.
"나를 비난하는 건가요?"
"아니에요, 비난할 리가 있나요."
세라는 눈물로 흐려진 눈으로 시누이를 보았다.
"나는 너무 쓸쓸했어요. 아무것도 할 일이 없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라는 선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모건 집안의 저택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너무나 크고… 친하게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나는 그리스로 돌아가게 되었거든요."
"뭐라고요?"
제니는 몹시 놀랐다.
"나, 난 그리스로 돌아가게 됐어요…"
눈물이 쏟아져 나와 세라는 말문이 막혔다.
"다크는 이제 나에게 진저리가 난대요…"
"그리스로 돌려보내겠다고요?"
제니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시누이의 태도는 세라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제니는 화가 나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내 편이란 말인가? 세라의 가슴은 뛰놀았다. 제니가 내 편이 되어 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빠는 집에 있나요?"
제니는 철책에 고삐를 잡아매면서 말했다.
"네, 하지만…"
"그러면 들어가서 오빠와 얘기해 봅시다!"
행진하는 것 같은 걸음걸이로 앞서 가는 시누이를 세라는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제니는 호리호리하여 약해 보이기조차 하는 몸매였다. 길고 곧은 머리는 목덜미에서 검은 벨벳의 리본으로 묶고 있었다. 얼굴은 윤곽이 또렷하지만 작은 편이고, 피부는 투명하도록 고왔다.
"제니."
집에 가까와짐에 따라 세라는 불안해졌다.
"내가 당신에게 전부 얘기했다는 것을 알면 다크는 또다시 화낼 거예요.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말아 주세요."
"그야 화내겠죠. 그래도 나는 얘기를 해야 해요. 괜찮아요, 내가 있는 한 겁낼 것 없어요."
다크는 이층에 있었다. 제니가 부르자, 다크는 얼굴을 내밀고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돌아가 봐, 나는 내 일만으로도 벅차니까."
"벅차다고요? 하지만 난 오빠에게 할 얘기가 있어요, 그것도 지금 당장!"
다크는 뭐라고 투덜거리면서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세라가 너에게 모든 걸 다 얘기한 게로구나."
다크는 아내 쪽을 흘깃 보더니 세라가 '작은 방'이라고 부르는 방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이 들어간 후 문을 닫은 다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니, 내가 부탁한 대로 네가 해주기만 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제니는 소파에 모자를 벗어던지며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내가 저분의 시중을 들어야 하나요? 언니는 오빠가 책임져야 하지 않아요?"
제니의 냉랭한 어조와 자기를 보고 남이기라도 한 듯 '저분'이라는 호칭에 세라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돌렸다. 자기가 형편없이 비참하게 생각되어, 될 수 있으면 남매 두 사람만 얘기를 하게 하고 자기는 나가고 싶었다.
"책임이라고? 책임의 소재는 아무에게도 없어. 세라는 자유를 원하고 있었던 거야. 영국에 오고 싶어 하니까 데리고 왔지. 나하고의 관계는 그것으로 그만이야."
제니가 즉각 뭔가 대꾸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세라가 끼어들었다.
"다크가 말하는 대로예요, 제니. 진짜 결혼이 아니니까 다크가 나에게 아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해도 당연해요. 그이가 나를 그리스에서 데리고 와서… 그래요, 그리고 나를 여기 두고 떠난 셈이지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오빠는 남편이라구요. 그러니까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져야 해요!"
다크의 눈은 노기로 불타올랐지만, 제니는 조금도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러한 남매를 견주어 보고 있는 동안에 세라는 어떤 사실을 점차 알게 되었다. 제니는 내가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도록 도와 주라는 어머니나 오빠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나를 팽개쳐 둔 것이다. 그것은 오빠의 생활을 바꿔 주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자기가 나를 내버려 두면, 다크가 나를 돌봐 주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지금까지 제니를 쌀쌀하고 거만한 처녀라고만 나는 생각해 왔었는데, 그것은 잘못이고 사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세라의 가슴에 갑자기 훈훈한 온기가 그득 퍼졌다. 그녀는 시누이에게 생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제니는 아직도 오빠와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제니, 이 일은 너와 관계 없는 일이라니까."
다크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세라가 말한 것처럼 내가 세라에게 관심을 가질 의무는 없어. 세라는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있어."
그러고 나서 그는 아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당신은 제니에게 모두 털어놓았소? 이 사건은 비밀로 해두고 싶었는데."
세라는 고개를 떨구었다.
제니는 잠시 세라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오빠를 마주보았다.
"오빠에게는 심장이라는 게 없나요? 세라는 이 나라에서는 전적으로 이방인이란 말이에요. 그런데도 두 달 이상이나 혼자 내팽개쳐져 있었으니…"
"그러니까 너에게 부탁했지 않니? 세라에게 필요한 것은 여자 친구지, 나는 아니라구."
"말해 보아요, 세라. 남편과 함께 있고 싶죠?"
제니의 예기치 않은 질문에 세라는 얼굴을 들었다.
다크와 시선이 마주치자 세라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네, 그거야 물론…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우리가 한 약속과 틀리니까요."
다크는 창가에 서서 두 여자를 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아주 약간이긴 했지만 누그러졌다. 세라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갔다. 다크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을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위협한 것도 당신은 제니에게 얘기해 버렸소?"
"그…"
"집이라구요?"
제니가 날카롭게 가로막았다.
"세라의 집은 여기라구요!"
"알았어, 제니. 부탁이야, 이 일은 잊도록 하자. 어쨌거나 나는 이 사람을 그리스로 돌려보낼 생각은 없어. 진정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
세라도 제니도 놀라서 다크의 얼굴을 보았다.
"다크, 어째서 그런 식으로 나를 위협하나요?"
세라의 마음은 기쁨으로 넘쳤지만 말은 막혔다.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실까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어요."
세라의 말에 이번에는 다크가 놀랐다.
"내가 정말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했소?"
"물론이죠! 세라는 정직한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도 모두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제부터는 진심이 아닌 것은 말하면 안 돼요, 오빠. 나도 오빠가 정말 그러려는 줄 알았으니까요."
세라는 기쁜 나머지, 그럼 클라리스에 관해 한 얘기도 진심이 아니었느냐고 물었다.
"클라리스?"
제니는 재빨리 오빠를 쳐다본 후 세라에게 물었다.
"클라리스를 아세요?"
"얘기만 들었어요."
세라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젯밤, 다크는 클라리스와 결혼할 걸 그랬다고 말했어요…"
"만약 클라리스와 결혼했더라면, 그런 식으로 아내를 두고 어디 가버린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을걸요."
"내가 클라리스와 결혼 안한 건 그 때문이지."
다크는 웃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진심이 아니었군요?"
다크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만한데."
"당신이 말한 것은 모두 진심이 아니었나요?"
비참한 생각에 밤새 한잠도 못 잔 세라는 비난하듯이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을 때려 주겠다고 위협한 것은 진짜였어. 만약 또 한 번 그런 일이 있으면 그때야말로 당신은 후회하게 될 거요."
"오빠가 하는 말에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세라의 뺨이 홍조를 띠는 것을 보며 제니가 조용히 충고했다.
"오빠는 입이 좀 험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제니는 소파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이렇게 말을 끄집어냈다.
"오빠, 물론 찬성해 주시겠지만 세라를… 누군가가 좀 보살펴야 하지 않겠어요?"
오빠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니는 말을 계속했다.
"나는 기꺼이 나의 역할을 해낼 거예요. 단 오빠도 남편으로서 세라를 돌본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죠. 교대로 하자구요."
제니는 생긋이 미소 지으며 오빠를 쳐다보았다.
"안 돼요, 제니. 다크는 자기 식으로 행동하겠다고 말한걸요. 그래서 나는, 저이가 결혼했다는 것조차 잊고 지낼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예기치 않은 웃음이 터지면서 다크의 언짢았던 기색도 깨끗이 사라졌다.
"오히려 결혼했다는 것을 노상 깨닫게 되는걸 뭐."
다크는 응수했다.
세라는 침을 삼켰다.
"여자 친구를 두고 오게 해서 정말 죄송해요. 프레스톤이 일부러 당신에게 연락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럼 오빠는 여자 친구와 함께 있었다는 얘기인가요?"
제니가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
도전하듯 오빠가 말했으므로, 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확실히 동생은 다른 누구보다도 다크의 일에 깊이 개입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제니조차도 개입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세라는 깨달았다.
"그런 여자들에게서 오빠가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나는 참말 알 수가 없군요."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아."
다크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놀리듯 동생을 보았다.
"오빠는 아버지와 같은 짓을 하고 있어요."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시더군."
하지만 제니는 오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오빠는 아버지처럼 심하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것은 단지 희망적 관측이겠지."
오빠는 얼른 대꾸를 했다.
제니는 얼굴을 돌리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오빠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동생이에요.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줄곧 오빠가 내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겠어요."
깊은 침묵이 찾아들었다. 잠시 동안 창밖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이윽고 다크가 기묘하게 감동을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날이 올 즈음에는 우리 두 사람은 꽤나 늙어 있겠지."
제니는 세라 쪽으로 눈을 돌렸다. 세라의 얼굴을 잠시 쳐다본 후 제니는 시선을 세라의 상큼한 목에서부터 매혹적인 가슴의 융기로, 그리고 놀랄 만큼 가는 허리로 옮겼다.
"어디 두고 보세요. 그렇게 먼 일은 아니리라 생각해요… 아니에요, 나는 오빠가 곧 생활태도를 바꿀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다크가 거기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므로, 제니는 화제를 바꾸었다.
"아까 하던 얘기지만, 교대로 세라를 돌봐 주자는 생각이 어때요?"
"나는 시간이 없어."
"그렇다면 나도 시간이 없어요."
세라는 제니 쪽으로 달려갔다.
"부탁해요… 난, 당신이 돌봐 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해요. 다크와 나 사이에는 나를 보살펴 준다는 약속은 없었던 거예요."
제니는 세라의 시선을 피했다.
"안 됐지만 만약 오빠가 당신을 위해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나도 사양하겠어요."
세라는 시누이의 심정을 알아챘다. 제니는 오빠가 어느 정도 만이라도 책임의 일단을 맡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빠가 방탕한 생활로 보내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다크는 동생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최후통첩이냐?"
"물론이죠."
다크는 웃기 시작했다.
"너는 내 생활을 바꾸게 하지는 못할 거야, 제니."
그렇다면 다크도 제니의 의도를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제니의 방식은 너무 직선적이었으므로.
"어떻게 하겠어요, 오빠?"
제니는 오빠를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좀 어떻게 되었던가 봐. 세라는 얌전하고 순종적이라서 나를 조금도 귀찮게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다크가 탄식했다.
"오빠의 예상이 너무 안이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혼자서 이렇게 넓은 집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책을 보거나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인생을 보내기를 원할 여자가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세라, 당신도 그런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나요?"
세라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 영국에 가고 싶다고만 생각했어요.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어서 쉽게 친구가 생기리라고 상상했거든요. 파티에 초대되거나, 춤을 추러 가거나… 거기다 멋있는 남자 친구도 생길 거라고 생각했죠."
세라가 고지식하게 이렇게 덧붙였으므로 다크는 얼굴을 찡그렸다.
"결혼하면 남자 친구는 사귀는 게 아니에요."
제니도 눈살을 찌푸렸다.
"제니는 도덕적이거든."
다크가 놀렸다.
"보편적으로는 제니가 말하는 대로죠. 하지만 우리의 결혼은 정상이 아닌걸요."
"정상이건 아니건 두 분은 결혼한 것이라구요. 그러니까 생활을 바꾸지 않으면 안 돼요, 오빠. 지금과 같은 형편없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으면 트러블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죠. 거기다가 만약 세라가 남자 친구라도 사귀기 시작한다면 오빠는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 그렇잖아요, 오빠?"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은 안 돼."
다크는 큰소리로 선언했다.
"달리 즐기는 방법이 있을 거야."
"그것은 무리예요. 열여덟 살이면 이성교제를 원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제니가 말했다.
다크는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찰스가 이따금은 세라를 데리고 나가 줄 텐데…"
그러나 제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요, 오빠."
오랜 침묵이 계속되었다. 나는 아무래도 좋아요, 하고 소리쳐서 그 침묵을 깨뜨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제니가 화를 낼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세라는 그냥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할 수 없군. 일주일에 이틀을 내보도록 하지."
다크는 마침내 승낙했다.
"사흘이에요. 오빠가 사흘, 내가 나흘."
제니는 소파 위의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제안했다.
"사흘이라니? 그러면 내 인생의 반이나 되지 않아. 말도 안 돼!"
제니는 어깨를 움츠리고, 모자를 집어들었다.
"더 이상 얘기해 봤자 허사겠군요. 세라, 너무 엉뚱한 일은 하지 마세요."
제니는 문께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제니, 부탁해요. 나는 다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당신만 내 상대가 되어 준다면…"
세라의 눈에 눈물이 넘쳤다.
"그래, 사흘로 해! 하지만 어째서 이 사람이 하루쯤 혼자 지내서는 안 된다는지 알 수 없군!"
"물론, 나는…"
"그럼 결정된 거예요."
제니가 가로막았다.
"나머지는 분담할 일을 결정하는 것뿐이군요. 나는 화요일은 안 돼요.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 있는 데이트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요일이라면… 먼저 결정하세요, 오빠. "
"그거 고마운 일이군!"
다크는 낙담한 듯 우울해서 말했다.
"나는 주말을 비워 놔야겠어."
결국 다크는 월, 화, 목요일에는 외출을 않고 세라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제니는 만족하여 생글생글 웃었다.
하지만 이 결정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세라는 저윽이 불안했다. 다크는 나와 함께 있는 일에 곧 싫증을 느낄게 틀림없어.
7
차는 브록스워드 히드를 경쾌하게 달려 나갔다.
브록스워드 히드는 북쪽에 하얀 봉우리들이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삼림지대였다.
다크가 재규어 승용차를 운전하고, 세라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거의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이따금 세라가 말을 걸면 다크는 다소 우울한 기색이긴 했지만 짧게 대답하곤 했다.
'분담의 결정'이 이루어진 후 두 사람의 첫 외출이었다.
월요일과 화요일에 다크는 세라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집 주위를 산책하거나 했다. 하지만 다크가 너무나 지겨워하는 듯했으므로, 세라는 이제 두번 다시 다크와 함께 지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은 날씨가 좋았으므로, 다크 쪽에서 드라이브 가자고 제의를 했다. 세라는 동의를 했지만, 가고 싶지 않다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만약 다크가 자기의 의무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성공하면 제니가 노할 게 뻔했다.
"멋진 경치군요. 나는 녹색을 아주 좋아해요."
바다가 가까와졌을 때, 세라는 황홀한 듯 중얼거렸다.
"포들랜드 아일랜드까지 가보도록 하지. 그 뒤에 랄워스 만(灣)까지 가서 구경하는 게 좋겠어."
다크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듯이 말했다.
포틀랜드 아일랜드는 딱딱한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바위 땅인데, 고대 바다의 생활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그대로 화석화되어 남아 있었다. 다크는 차에서 내리자 세라와 함께 해안의 뒤쪽으로 언덕처럼 솟아 있는 돌비알을 향해 걸어갔다. 본래의 암벽에서 떨어져 나온 큰 바윗덩이가 해안의 이곳저곳에 널려 있기도 하고 절벽 가까이에 쌓여 있기도 했다. 그 바위 중에는 해변에 부딪치는 강한 파도 때문에 바다 쪽에서 밀려온 것도 있었다.
포틀랜드 갑(岬)은 바다로 튀어나와 있고, 거기에는 초기 큐비스트의 조각을 생각케 하는 오벨리스크 형의 팔피트록이 솟아 있었다. 또한 그 옆에는 색채도 선명한 등대가 도셋의 하늘에 푸른색의 뚜렷한 아우트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뒷쪽의 거대한 절벽은 거칠게 패였으며, 그 절벽의 윗쪽 부분은 군데군데에 크게 벌어진 틈세가 있는 넓은 대지(臺地)로 되어 있었다.
다크와 세라는 절벽을 올라가 대지 위에 섰다. 거기서부터는 멋진 해안선이 멀리까지 바라다보였다.
"저것이 세실 비치, 이쪽이 웨이머드야."
"저기서 헤엄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하지만 그리스의 따뜻한 바닷물에 익숙해 온 당신은 여기서 헤엄칠 마음은 나지 않을걸."
"그렇게 차가운가요?"
"당신은 아마도 그렇게 느끼겠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요. 물론 오늘은 아니고 언젠가."
"그럼 기회 봐서 수영을 합시다."
다크는 약속했다.
세라는 살며시 웃었다.
"다크…"
"왜 그래?"
"당신, 지금 즐거워요? 그, 말하자면, 나를 이런 식으로 데리고 다니는 게 무척 비참한 심정이 아닐까 해서 나는 걱정이에요."
바다가 저 멀리 아래쪽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크는 세라를 보고 미소 지었다.
"나는 비참하지 않아, 세라. 그 반대야, 정말 이상하게도."
"그래도 내가 당신의 짐이란 점에는 변함이 없죠?"
다크는 웃더니 세라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자기혐오에 빠진 거요? 그렇지 않다면 후회하는 거요?"
세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양쪽 다 조금씩' 하고 대답하고는 다크와 함께 웃었다.
포틀랜드 아일랜드로부터 랄워스 만을 향해 그들은 또다시 드라이브를 계속하여 펄베크 갑으로 활 모양으로 패어져 있는 더들도어에서 차를 세웠다.
랄워스의 경치는 도셋에서도 가장 장관이다. 약간 높은 초원에 다크와 나란히 서서 아름다운 바다의 침식 광경을 눈앞에 보자, 세라는 놀라움으로 숨이 막힐 듯했다. 거품이 이는 물결이 만을 싸안듯이 하며 둘러싸고 있는 양쪽 끝의 반도에 부딪쳤다가는 흩어지고 있었다.
"이 후미가 나는 아주 마음에 들어요."
풀 위에 앉으면서 세라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새로운 장소를 보는 것은 정말로 즐거운 일이군요!"
다크는 세라 쪽으로 고개 돌려 그 사랑스러운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운전을 배울 수 있도록 마련해 줄까? 그렇게 되면 당신은 가고 싶은 때 어디든지 갈 수 있을 테니까."
세라의 눈이 순간 흐려졌다.
"그럼, 당신은…"
"아냐, 그렇지 않아. 나는 앞으로도 당신을 데리고 다닐 거야. 하지만 당신이 차를 운전할 수 있다면 더 즐거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세라는 마침내 기쁜 듯 미소 지었다.
"얼마나 멋질까! 당신이 가르쳐 주실래요?"
다크는 약간 당황했다.
"누군가 가르쳐 줄 만할 사람을 달리 찾아보는 게 좋을 거야. 내일 자동차 학원에 전화해서 필요한 수속을 밟아 주지."
"나에게 가르쳐 주려면 당신은 짜증이 나겠죠?"
"짜증이 난다는 정도의 간단한 일은 아닐 거야. 나는 자기 인내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지."
다크는 싹싹하고 얘기도 잘했다.
세라는 솟아오르는 행복감을 맛보고 있었다.
"좀 걸어볼까."
다크가 잠시 후 말했다.
"네, 나는 걷는 것을 아주 좋아해요."
"그럼 숲을 지나서 동쪽의 랄워스까지 슬슬 걸어가 보지."
바위뿐인 해안은 울퉁불퉁하고, 파도가 쳐들어와서는 흰 거품이 되어 튀어 오르곤 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시골 냄새가 풍기는 주막에서 함께 차를 마셨다.
방 안은 중세풍으로 장식되어 있고, 안쪽에는 큰 난로가 있어서 굵은 떡갈나무로 된 대들보가 낮은 몰타르 천장에 격자(格子) 모양으로 박혀 있었다.
그날 밤, 다크의 어머니가 와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물론 어머니는 제니에게 들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일의 되어가는 모양을 재미있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라는 그날 밤, 모건 부인에게 전화한 얘기를 했다.
"저는 어머님께서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를 가르쳐 주시리라고 생각했어요. 그… 악당을 말이죠."
다크도 어머니도 웃었다.
"나도 악당을 다루는 데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걸."
어머니는 익살스럽게 대꾸했다.
"네,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니죠. 뭔가 힌트를 주시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거죠. 다크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나도 알 만하구나. 그리고 다크가 돌아온 뒤는 어땠었니? 그때의 일은 제니에게도 말하지 않았지. 그 얘기를 꼭 들려주렴."
남편을 올려다보니 그도 즐거운 듯한 모습이었다. 그날 밤의 무섭던 남편과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약간의 자랑스러움이 세라의 가슴 가득이 퍼졌다. 다크는 상당한 미남이었다. 누그러진 표정이 그의 남자다운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찰스가 제 방에 있었더랬어요. 그 일은 제니에게 얘기했을 텐데요?"
모건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으므로 세라는 얘기를 계속했다.
"제가, 아니 찰스가… 들어왔을 때 다크는 오해를 했어요."
세라는 빨개져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참말로 얄궂은 일이구나. 찰스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지 않니. 놀랐다, 다크에게. 친구를 의심하다니 말도 안 돼."
"어머니! 요번에 세라가 일으킨 소동은 그런 농담으로 끝내 버릴 수 있는 일은 아니었어요. 가보인 은그릇을 도둑맞을 뻔했으니까요."
모건 부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끄덕여 보였다.
"너에게도 좋은 교훈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해, 다크. 제니도 말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너는 결혼했으니까 아내를 하루종일 혼자 있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되는 거야. 친척을 찾기 위해 그런 식으로 신문광고를 내다니, 세라는 몹시도 외로웠었나 보다."
이번에는 며느리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더 얘기해 봐, 아주 재미있구나."
세라는 불안스레 시어머니를 보고 나서는 더욱 불안한 듯 다크를 쳐다보았다.
그는 스테이크를 먹는 데 열중해서 얘기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찰스는 다크에게 비상계단으로 올라온 경위를 설명하고…"
"어머나, 찰스가 비상계단으로 올라왔다구? 마치 멜로드라마 같구나!"
"찰스도 그렇게 말했어요. 하지만 저는 집사인 프레스톤에게도 알려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죠."
"그것은 무리야. 프레스톤은 이 집을 자기 집처럼 지켜 주고 있는 사람이야. 그에게는 어떤 낯선 사람도 수상한 인물로 보일걸. 결백이 완전히 증명되기까지는 말이다. 자, 얘기를 계속해라, 세라. 얘기가 샛길로 흐르고 말았구나."
"그밖에는 별달리 말씀드릴 것이 없어요. 찰스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러고 나서 다크가 로드릭이 도망쳐 버린 사실을 알려 주었던 거예요."
"어이없는 결말이었구나. 하지만 가장 좋은 결말이었던 셈이지."
"정말로 잘되었다고 생각해요. 경찰까지 개입하게 되어 만약 신문에라도 난다면 어쩌나 하고 매우 걱정했었으니까요."
다크가 얼굴을 들었다.
"그 지경이 되었다면 때려 주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거야!"
모건 부인이 깜짝 놀라서 눈을 치떴다.
"뭐라고?"
"지금 말한 대로예요, 어머니."
"제니는 다크가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했어요."
세라는 얼른 변명했다.
"만약 다크가 한번이라도 손찌검을 한다면 당장 나한테 와서 일러라!"
모건 부인이 단호히 말했으므로, 다크는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은 아무래도 어머니와 동생 양쪽 다 자기편으로 만들어 버린 것 같군!"
다크는 웃었다. 눈가에 부채꼴 모양의 잔주름이 졌다.
그것을 보는 세라의 가슴이 이상하게 설레었다. 그것은 세라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얼마 후 모건 부인은 우연히 생각이 난 듯, 세라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다크의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결혼하기로 결심했던 거냐? 자유로운 몸이 되고 싶다는 소망 이외에도 뭔가 있었던 건 아닌지?"
"그건 바로 제 목소리라는군요, 어머니."
다크가 열의 없는 어조로 설명했다.
"제 목소리라면 함께 살아도 견딜 만하대요."
시어머니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므로 세라는 웃고 나서, 결혼 얘기가 진행되고 있을 때에 옆방에서 들려온 피보스의 목소리가 아주 싫었던 얘기를 했다.
"확실히 듣기 싫은 목소리는 짜증이 나게 되지. 세라가 말한 대로 다크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지… 물론 화를 내고 있을 때 이외에는."
보온머드로 쇼핑을 갔던 제니가 식후에 놀러왔다. 난로 앞에 앉아서 잡담을 하는 동안에 밤은 이슥해져 갔다.
어머니와 제니가 잘 자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돌아간 뒤, 다크는 난로 곁에 서서 오랫동안 세라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멋있고 사랑스러운 여자야."
마침내 다크는 이렇게 말했다.
세라는 놀라서 다크를 쳐다보았다.
"고마와요. 그럼, 오늘 하루종일 나랑 같이 있어도 그다지 싫지 않았다고 판단해도 괜찮은 거죠?"
다크는 웃고 나서 하품을 삼켰다.
"매우 즐거운 하루였어."
다크는 이렇게 말하고는 세라의 턱을 쳐들고 키스를 했다.
"굿나잇, 세라. 푹 자도록 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세라의 상기된 얼굴에 떨리는 듯한 미소가 스쳐갔다.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세라는 만족스러운 듯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마바지에 흰 폴로스웨터를 입은 세라는 우아한 젊은 숙녀였다. 윤곽이 뚜렷한 고전적인 얼굴은 발그레하고 길고 곧은 까만 머리가 풍성하게 어깨에서 출렁거렸다.
제니가 승마를 가르쳐 주기 시작한 지 삼 주일이 지났다. 세라는 대담하고 민첩한 생도였으므로 시누이와 비슷할 정도로 능숙해지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저택을 둘러싼 정원이나 숲속을 매일 아침 말을 타고 산책했다.
다크의 분담일이 되면 이번에는 다크와 함께 말을 탔다. 다크는 여러 차례 세라를 칭찬하고, 세라는 그때마다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였다. 그런 그녀를 보고 다크는 재미있는 듯 미소 짓는 수도 있으나, 대개의 경우는 찌푸린 채 옆을 보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았다.
세라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홀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크는 세라를 천천히 싸안듯 바라보고 있었다. 세라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고 뺨을 손으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갑시다."
다크가 느닷없이 말했다.
"비가 올 것 같군. 내리기 전에 한바탕 돌 수 있으면 좋겠는데."
광대한 정원은 주로 풀밭으로 되어 있고, 군데군데 아치 모양의 입구로 통하는 주목(朱木) 숲이 있었다. 숲속의 길은 자갈길로 이어지고, 그 자갈길 끝에는 대개 연못이 있어서 수련(睡蓮) 따위 물풀이 떠 있었다.
다크와 안장을 나란히 하고 달려가면서 세라는 이따금 그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다크의 옆얼굴은 조각처럼 굴곡이 지고, 견고한 턱에는 굳건한 의지가 엿보였다. 그의 이 얼굴과 그 방종한 생활과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세라는 생각했다. 다크는 이 광대한 저택과 그것을 둘러싼 마을들의 지주인 것이다. 그는 지금도 일을 하고는 있지만, 그가 할 마음만 가지면 더 많은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술과 여자에게 도피할 틈은 없을 것이다.
두 주일 전에도 그는 친구의 요트로 놀러갔다. 떠들썩하고 흥겨운 파티였으며 예쁜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고 다크는 얘기했다.
다크가 다른 여자들과 놀고 침대에서 함께 지낸다는 상상을 하면 묘한 아픔이 세라의 가슴을 찔렀다. 요트에 모여든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그도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세라는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생활태도였다.
그런 생활을 당분간은 바꾸지 않겠지. 지난번 주말에도 같은 패들과 같은 요트로 또다시 놀러갔으니까. 언젠가 남편이 그런 생활을 그만두고, 지금처럼 모든 것을 토지 관리인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 땅의 관리를 하도록 된다면 좋을 텐데, 하고 세라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비는 아직 내릴 것 같지 않았다. 분수가 있는 연못 가까이 가자, 다크는 말에서 내렸다. 세라가 말에서 뛰어내리자, 다크는 그녀 쪽으로 와서 그 팔을 잡아 주었다. 다크의 손이 미끄러져 내려와 자기의 손목을 잡았을 때, 세라는 강한 힘과 따뜻함을 느꼈다.
다크는 묘한 표정을 띠고 그대로 세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누군가 당신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한 남자가 있었소?"
그가 물었다. 세라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보자, 그의 눈에 불길이 번졌다.
"없었어요. 그리스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찬사를 보내거나 할 기회가 없는걸요."
"그래? 그렇다면 연애할 기회 같은 것도 없었다는 뜻인가?"
세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상상한 적은 있어요.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셨을 때의 일이죠. 어머니는 내가 어른이 되면 자신이 결혼 상대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나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그 사람과 나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그리스 식의, 그냥 보고 호감을 느낀다는 것이 아니고 말예요. 어머니는 언제나 말씀하셨더랬어요, 아버지가 아무리 반대하셔도 나의 결혼에 관해서만은 어머니의 방식을 관철하시겠다고요."
동경에 가까운 씁쓰레한 감정이 세라의 목소리에 섞였다. 깊은 침묵… 다크는 옆에 서서 길고 섬세한 손으로 세라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당신은 그러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찬스를 영원히 잃고 말았군."
다크의 어조는 다정했다.
세라는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충동적으로 그저 정신없이 외쳤다.
"전혀 상관없어요, 다크. 나는 누구보다도 당신과 결혼해서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크는 약간 놀란 듯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사랑이 전혀 없는 생활로 평생을 보내게 되어도 괜찮다는 거요? 거기다 아기를 낳지 않아도?"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세라는 시선을 내리깔고 그의 손을 응시했다… 눈물이 가득 괴어나왔다.
"나는 어린애 생각은 한 적이 없어요."
세라는 얼굴을 들어 잠시 분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아주 좋아해요. 친척들 중에는 애들이 많아요. 사촌이나 큰어머니, 큰아버지들에게 언제나 아기가 있었거든요."
"큰아버지에게도?"
다크는 익살스럽게 말했지만 언제나처럼 재미있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세라는 웃으려고 했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아니에요, 나는 어린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아기를 갖고 싶다고 생각지는 않소?"
"그야 갖고 싶지만…"
세라는 길게 떨리는 듯한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당신과 결혼해서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크는 세라의 손을 놓고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당신한테 과연 공정하게 대했는지 모르겠소. 여자가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거야. 만약 피보스와 결혼했다면 당신은 몇 명쯤은 아기를 낳을 텐데."
"나는 피보스를 싫어해요, 그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아녜요, 어린애에 관한 일은 별로 신경 안 써요. 제니가 언젠가 결혼해서 아기를 낳겠죠. 그렇게 되면 나는 외숙모가 되잖아요. 아이가 전혀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죠."
다크는 또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 만족하는 사람이군. 하지만 제니 애의 외숙모노릇만으로 정말 만족할 수 있을까?"
"물론이죠."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세라는 어떤 생각이 떠오른 듯 침묵해 버렸다. 그녀는 사치스런 정월을 둘러보고는 시선을 저택 쪽으로 옮겼다. 당당한 정면의 경관(景觀), 그리스 식의 원주(圓柱), 화려한 상인방(上引榜)과 삼각형의 지붕.
"당신은 대를 이을 자식이 필요치 않으세요?"
자기도 모르게 입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뺨이 뜨거워졌다. 세라는 고개를 떨구고 그의 곁을 떠나 가까운 벤치 쪽으로 걸어갔다.
다크도 와서 거기 앉았다. 두 마리의 말은 고개를 떨구고 풀을 뜯고 있었다. 다크의 관심은 그쪽으로 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라는 그의 표정을 살피려 했지만, 다크가 세라의 시선을 붙잡았기 때문에 그의 시선을 피해 또다시 말을 보았다.
"제니의 아기가 뒤를 잇게 되겠지."
이렇게 얘기를 하다 다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 얼굴에는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니야, 나는 후계자도 필요 없어."
이번에는 힘을 주어 말했다.
"거기다 이미 늦었어. 그렇지 않소? 나는 편의상의 결혼을 해버렸으니."
"그렇군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가 좀 더 원숙해지면, 그때 가서 그는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만약 생각이 달라지면…?
세라는 또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존심과 강한 성격을 겸비한 남자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이런 사람이 지금과 같은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니 이상했다. 제니는 얼마 전에 다크가 가까운 시일 안에 생활을 바꿀 것 같은 마음이 든다고 말했었다. 그렇게 되면 아주 좋겠는데.
만약 다크가 가정적인 남자가 되어 준다면 언제나 둘이서 이런 식으로 지낼 수 있다. 다크가 집에 있게 되면 나도 자유로이 놀러 다닐 수 없게 되니까 곤란하다는 이전의 생각을 떠올리고 세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다크와 이렇게 함께 지낼 수 있게 되고 나서부터, 세라는 이제 즐겁게 놀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운전연습은 어떻소?"
다크는 침묵을 깨뜨리고 화제를 바 꾸었다.
"제니의 얘기로는 상당히 잘 해내고 있다던데."
"교습소의 지도원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는 내가 운전석에 앉아 있으면 마치 내가 차의 일부 같다고 하던데요."
"여자와 차, 그림이 되겠는데. 당신 마음에 드는 차를 골라 놔요, 사줄 테니까."
세라는 눈이 둥그레졌다.
"차를 사 주신다구요…?"
세라는 칭찬을 들은 어린애처럼 기뻐서 다크를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당신은 친절하시군요. 고마와요. 나는 아주 감사하고 있어요, 다크. 이런 행운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요!"
"우리 두 사람 다 행운을 잡은 거야. 그러니까 나에게 감사할 필욘 조금도 없어. 나는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고. 거기다…"
다크는 농담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죄하는 것도 아닌 눈길로 세라를 보고 미소 지었다.
"내가 전에 뭐라고 말했건 간에 클라리스보다 당신과 결혼해서 정말로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세라는 또다시 칭찬을 들은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기뻐요. 그 일이 정말로 걱정스러웠어요.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나는 당신에게 적합한 아내가 아닌 것 같았고, 그럴 때마다 나와 이혼하여 클라리스와 결혼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죠."
"우리 집안 내력에 이혼한 사람은 없어. 그래서 나는 결혼하고 싶지 않았던 거요. 최근에는 생활의 양식이나 페이스도 점점 달라져 가고 있어. 이제 한 사람에 대한 헌신을 평생 지속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남자에게는 언제나 유혹이 뒤따르니까. 여자들은 쉽사리 남자에게 몸을 맡기고, 그것도 상대가 결혼했건 안했건 개의치 않고 말이야. 나는 자유를 누리고 싶었어.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는 일 없이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서 말이야."
다크는 다시 침묵했다.
말은 연못 주의를 서성거리더니 또다시 풀을 뜯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결혼해야만 될 사정이었으니까, 이 형태는 이상적이지. 나는 아내를 다치게 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으니까."
세라는 잠자코 그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크는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 지조가 바른 사람인 거야. 세라의 마음은 훈훈해졌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 다크는 또다시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는 전혀 새로운 설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숨이 가빠오고 맥도 고르지 못했다. 다크는 말 쪽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세라는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쫓아갔다.
도중에서 갑자기 다크는 보조를 늦추며 세라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근사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야."
다크는 전에 한 말을 또 한 번 되풀이했다.
"어째서 당신은 투정을 하지 않는 거요?"
"투정이라뇨?"
"내가 너무 빨리 걷는다고."
"아무려면 어때요."
다크는 아직도 세라의 손을 쥐고 있었다. 그 따뜻함과 강한 힘이 세라를 행복감으로 뿌듯하게 했다. 불현듯 세라는 처음으로 남편과 외출했던 밤에 나눈 키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순간 다리가 갑자기 공중에 뜬 것처럼 느꼈다. 풀밭에서 자갈길 쪽으로 몇 단계 내려서야 하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넘어질 것 같아서 세라는 다크 쪽으로 쓰러졌다.
"왜 그래?"
"발밑을 보지 못했어요…"
세라는 다크의 억센 팔 안에 있었다. 다크는 세라의 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라의 눈은 수줍은 듯, 그러나 별처럼 빛나고 그 입술은 떨리며 반쯤 열려 있었다. 한쪽 말이 울어댔다. 서쪽에서 한차례 바람이 불어와서 나뭇잎을 흔들어 대고, 이윽고 비가 오기 시작할 것을 예고하고 갔다.
그러나 다크도 세라도 서로의 모습만이 눈에 보였고, 서로의 호흡만이 귀에 들려올 뿐이었다. 황홀한 듯, 그는 세라의 유혹하는 듯한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포갰다. 열정과 욕망이 담긴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마침내 다크는 세라를 놓아주었다.
"아름다워, 정말 아름다워."
다크의 어조는 다정했다. 하지만 그 직후에는 전혀 엉뚱하게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야. 흠뻑 젖기 전에 돌아가야지."
다크는 말을 매어 놓은 곳으로 달렸다. 조금 전과는 달리 세라가 자기 뒤를 쫓아 달음질치는 것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
8
두 주일 후, 모건 부인이 재니의 스무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기로 되었다.
토요일이었지만, 다크도 그 파티에는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 전 주일에 제니는 세라를 보온머드까지 데려가 주었다. 세라는 새로이 자기 것이 된 작은 스포츠카의 운전석에, 그리고 제니가 조수석에 앉았다. 교습소 지도원이 문제없다고 보장해 주긴 했지만, 아직 시험에는 합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누이의 조언을 받아 세라는 멋있는 터키 풍의 칵테일드레스를 샀다. 몸에 착 달라붙는 치마 길이가 짧은 것이었으므로 세라의 사랑스러운 얼굴과 몸의 곡선이 매우 두드러져 보였다.
의상실의 갱의실에서 그 드레스를 입은 세라를 제니는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멋있어요… 만약 이것을 입은 당신을 보고도 오빠의 눈이 떠지지 않는면, 그는 가망이 없는 인간이에요."
세라는 뒤돌아보았다.
"무슨 의미죠?"
그러나 장미빛으로 물든 뺨이 세라의 본심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당신은 오빠가 당신에게 반하는 걸 원치 않나요?"
"제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걸요."
세라는 신경질적으로 스커트를 잡아당기면서 몸을 떨었다.
"다크에게는 자기가 선택한 생활방식이 있으니까요."
"누구든지 자기의 생활방식을 선택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생활방식을 지킨다고만은 할 수 없죠."
"당신은 다크가 안정되기를 원하세요?"
"물론이죠. 오빠는 대지주이니까. 자기 토지를 잘 관리하고, 소작인이나 고용인에게 모범을 보여 줘야 하는걸요."
제니는 세라가 드레스의 지퍼를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오빠가 당신에게 반하기를 바라지 않느냐고 아까 물었는데요?"
제니가 대답을 독촉했다.
세라는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그래요, 제니. 나는 다크가 나를 사랑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이가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해 준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럴 수가 없거든요."
세라는 남편과 둘이서 말을 타고 나갔을 때 나눈 그 키스와 남편이 '아름다워'라고 말하던 때의 기분좋은 어조를 상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황홀한 추억에도 곧 의혹의 그림자가 비쳤다. 어쩌면 다크는 키스한 상대방 전부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세라의 얼굴은 흐려졌다.
"왜 그래요?"
제니가 언제나 그렇듯이 눈치 빠르게 금방 물었다.
"그이는 나에게 키스를 했어요."
세라는 짤막하게 대답했지만, 그것이 시누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란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나, 그래요! 언제?"
"우리는 말을 타고 산책을 나갔었죠. 그때, 내가 넘어질 뻔했어요. 다크는 나를 팔에 안고는… 그리고 나에게 키스를 했어요… 아주 멋지게."
세라는 천진스럽게도 이렇게 덧붙였다.
제니가 웃었다.
"그 키스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군요?"
세라도 웃고 그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때 이후 다크가 한 번도 키스해 주지 않았다는 것을 세라는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가 교제하는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인 거죠."
세라는 벽걸개에서 블라우스를 집어들면서 제니의 얼굴을 보았다.
"다크가 당신에게 키스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 거예요. 당신은 그가 교제하고 있는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걸요. 다크는 당신을 아주 신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걸요."
"그럴까요?"
세라는 제니의 칭찬에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들떴다.
"오빠는 순진한 처녀와 교제한 경험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세라가 블라우스의 단추를 채우는 것을 보면서 제니가 말했다.
"거기다 그가 교제한 여자 중에서는 당신이 제일 예쁘리라고 생각해요."
"제니!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으로 이런 말 하지는 않아요."
점원이 들어왔으므로 대화는 거기서 중단되고, 세라는 드레스를 점원에게 넘겨 주었다.
돌아오는 도중에 두 사람은 식당에서 오후의 차를 마셨다.
밤에는 다크가 없으므로, 세라는 별관에서 시어머니와 시누이와 함께 저녁식사를 들었다.
세라는 행복했다. 하지만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감정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만약 내가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할까. 지금에 와서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아파지니. 이 아픔은 얼마 안 있어 큰 고뇌로 변하는 것이 아닐까.
생일 파티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은 세라를 소개받자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그 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평판이 자자한' 다크의 모습을 찾아 눈을 굴렸다.
다크의 아버지는 평생 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므로 아들에게 자기와 같은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아들의 방종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하는 형태로 유언을 남겼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또한 노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라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세라 자신도 이 결혼으로 득을 보았으니까, 하는 것이 대부분의 견해였다.
클라리스에게 세라를 소개한 것은 제니였다. 클라리스가 자기에 대해 갖고 있는 악의를 세라는 즉각 감지했다.
"잠깐 실례하겠어요. 곧 돌아올 테니까요."
제니는 새로 들어온 손님 쪽을 향해 걸어가면서 올케를 보고 미소 지었다.
세라와 클라리스는 응접실의 창가에 놓인 소파에 걸터앉아 있었다. 까만 슈트를 입고 새침한 표정을 한 하녀가 손님들에게 마실 것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손님들은 각기 마음에 드는 장소에 앉아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 세라는 이런 들뜬 분위기와 차례차례 소개되는 새로운 친지들과의 만남으로 가슴이 설레고 있었다.
클라리스는 살결이 고운 금발의 여성인데, 머리를 우아한 업스타일로 꾸미고 있었다. 세라의 아름다운 드레스도 클라리스의 한 점 나무랄 데가 없는 복장 옆에 나란히 서니까 뒤떨어지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결혼을 축하해요."
클라리스의 낮은 음성은 냉랭했다.
"월척(越尺)을 하셨군요."
"네에?"
세라는 그런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울림에서 어쩐지 싫은 것을 느끼고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가요?"
냉소에 가까운 웃음이 클라리스의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클라리스는 세라의 질문을 무시하고 물었다.
"당신은 그리스의 어디서 오셨나요? 아마도 시골의 조그만 마을이겠죠?"
세라는 조그맣고 뾰족한 턱을 들었다. 그때 세라의 눈이 방 저쪽에 있는 다크의 눈과 마주쳤다. 아내가 자기와 결혼할 예정으로 있던 여자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아무래도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나의 친정은 아테네예요― 서울이죠."
세라는 강조하듯 대꾸했다.
"이상하게도 아테네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나는 그런 곳은 지루하던데요."
"아테네는 주로 예술적인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만 매력적이죠."
세라가 얼른 응수했으므로, 클라리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피차 마찬가지지. 당신도 꽤나 실례를 했지 않아요.
하지만 세라는 클라리스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나가 다크와 클라리스는 결혼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크가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클라리스는 단지 실망뿐만 아니라 아마 모욕감도 느꼈을 게 틀림없었다.
클라리스는 이번에는 좀 부드러운 어조로 또 입을 열었다.
"다크하고는 언제부터 사귀었나요? 다크에게 그리스의 친구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는데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사실대로 얘기해 줄까? 다크와 나는 아크로폴리스에서 서로 헌팅한 거죠, 라고. 클라리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볼 만하겠다. 그러나 또다시 남편의 시선과 마주쳤으므로, 세라는 그것만은 얘기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 알게 된 지 별로 오래 되지 않아요."
세라는 제니를 눈으로 찾으며 말했다.
"어느 정도죠? 여행중의 로맨스인 셈인가요?"
비양거리는 이 말에 세라의 뺨은 노여움으로 새빨개졌다. 그때 다크가 경고하는 눈길로 다가와서 아내의 맞은쪽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아무래도 수상쩍으므로, 아내가 또다시 쓸데없는 소리를 할까 봐 걱정이 되어 온 것 같았다.
"다크."
클라리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제 당신이 예의를 갖추고 나한테 와주시려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죠."
다크는 눈빛을 치켜 올렸다.
"어머니가 연 파티인걸. 내가 손님 사이를 돌아다닐 의무는 없소."
다크가 손을 들자 곧 마실 게 왔다.
"클라리스, 뭐 한 잔 더 마시겠소?"
클라리스는 다크의 서슬에 눈길이 험해졌었지만, 그래도 미소 지으며 자기가 마시고 싶은 음료의 이름을 대었다.
"지금 세라에게 당신들은 어느 정도 교제를 했느냐고 묻고 있었지요. 그런데 대답을 안해 주는군요."
클라리스의 얼굴이 더욱더 환해졌다. 다크를 적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은 아무래도 없는 것 같았다.
"폭풍같이 대단한 연애였지."
다크는 웃음기가 전혀 없는 얼굴로 대답했으며, 클라리스는 도전적으로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어머나 멋지군요. 그래서 당신은 세라를 나꿔채 왔군요."
클라리스는 놀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또 한번 세라는 턱을 치켜들고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다크가 나와 결혼한 이유는 모두 잘 아시지 않아요. 억지로 그럴 듯한 얘기를 만들 필요는 없을 텐데요!"
무서운 얼굴로 남편이 흘겨보는 것을 무시하면서 세라는 계속 말을 이었다.
"만약 당신들 두 사람이 결혼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면 내가 없는 데서 실컷 하시죠."
그러고는 일어서서 일부러 정중하게 '실례합니다' 하고 당당히 맞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노여움과 상심과 불안이 세라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중에 남편에게 단단히 혼이 날 게 틀림없었다.
만찬석상에서 다크는 세라의 맞은쪽에 앉았다. 테이블은 고급스런 은그릇과 세이블의 오지그릇으로 꾸며졌고, 머리 위에는 은으로 된 샹들리에가 빛나고 있었다. 큰 테이블 위에는 각등(角燈)처럼 생긴 조명등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자리에 놓여 있었다.
세라는 남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이따금 그의 시선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혼내 주겠다는 뜻을 보이고 있었다.
만찬이 끝난 후 조명이 휘황찬란한 홀에서 댄스파티가 열렸다.
다크는 얼른 클라리스에게 춤을 신청했다.
그러고 나서 한 시간 이상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다크는 클라리스와 춤을 추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손님들이 흘금흘금 세라를 보므로, 그녀는 비참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서 세라도 미남인 버나드 힌드와 춤을 출 때는 그에게 명랑하게 웃어 보이며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버나드가 테라스로 나가자고 속삭였을 때에도 기꺼이 응낙했다. 다크가 그 육감적인 파트너와 춤을 추면서 자기들 두 사람 쪽을 보고 있는 것을 깨닫자, 세라는 아주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당신은 참으로 아름다운 여자요."
버나드가 찬사를 보냈다. 그가 이름난 바람둥이라는 것을 물론 세라는 알 리 없었다.
"다크가 어떻게 이런 보물을 찾아냈지?"
홀에서 춤추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의자를 찾아낸 버나드는 세라에게 앉도록 권했다.
"하지만 다크는 자기의 행운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니…"
세라는 진실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이 남자와 테라스로 나온 것을 이미 후회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가 바싹 다가왔으므로, 세라는 몸을 빼었다.
"좀 더 당신에게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거지요. 언제나 어딘가로 날라버리지 않소. 당신이 만약 똑같이 행동하기 시작하면 그는 틀림없이 후회할 거요. 봐요, 저 클라리스… 다크는 하룻밤 내내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지 않소."
버나드는 또다시 다가왔다. 그의 입김이 얼굴에 닿았을 때, 세라는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키스해요, 아름다운 그리스 아가씨!"
눈 깜짝할 사이에 세라를 팔 안에 품어 안았다.
세라는 필사적으로 허덕였다.
"놔줘요! 놔줘요!"
하지만 강제로 입술을 눌러댄 버나드는 숨이 차서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놔주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주인이…"
세라는 일어서서 발을 굴렀다.
"신경쓸 것 없어요."
버나드도 일어섰다. 세라는 뺨이 빨개져 아직 키스의 감촉이 남아 있는 입술을 손으로 북북 문질러대면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세라의 팔을 잡자 또 한 번 가슴 깊이 껴안았다.
"부끄럼쟁이고, 내성적이고…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도 신선할까. 내가 당신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소."
"사랑이라고요? 나는 당신 같은 사람 아주 싫어해요! 놔줘요. 큰소리로 사람을 부르겠어요."
"그런 짓 하지 말아요. 아까는 나와 꽤 다정하게 지냈지 않았소. 지금, 당신은 이런 식으로 부끄러워하고 있지만 멀지 않아…"
버나드는 갑자기 말을 그치며 세라를 놔주었다. 웬 사람 그림자가 이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만둬요, 버나드. 세라는 당신이 상대할 사람이 아니라구요. 세라, 이리 와요."
"아, 제니. 와줘서 고마와요."
몇 분 후, 제니와 어머니만이 쓰는 작은 프라이비트 룸으로 들어가서야 세라는 한숨 돌렸다. 머리를 매만지면서 세라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저 양반은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인가요?"
눈에 비난의 빛을 띠면서도 제니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결혼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에게 키스를 했으니까요. 다크가 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왜 안하지요?"
아직 그 키스의 징그러운 감촉이 없어지지 않은 것 같아, 세라는 입술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아마 그는 오빠가 당신들이 나가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줄 알았겠죠. 그렇지만 오빠는 알았어요. 좀 더 있었으면 다크가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앞질러 가서 당신을 도와 줘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왜냐하면 오빠가 얼마나 화를 낼지 모르겠고, 나의 생일날에 대판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싫으니까요."
제니는 이제 아주 침착하고, 눈에는 웃음조차 띠고 있었다.
"내가 버나드와 정다와 보였나요?"
부정해 주기를 바라면서 세라는 물었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버나드가 그렇게 말하는 게 들렸어요. 그런 남자에게는 다정하게 대하면 안 돼요. 얘기를 걸어와도 적당히 상대해 두는 거예요. 그는 자기가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는 절대적인 매력을 지녔다고 착각하는 남자라구요. 그의 여동생과 내가 친구이기 때문에 할수없이 초대해 주었을 뿐이에요."
"그랬군요. 도와 줘서 고마워요. 나를 형편없는 바보라고 생각하죠?"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이런 일에 대해서 너무나 순진한 것 같아요. 당신은 좀 더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을 키워야 해요. 지금처럼 누구든지 쉽게 믿어 버리면 안 돼요."
"그리스에서는 누구든지 믿을 수 있었어요."
세라는 슬픈 듯이 속삭였다.
"말하자면 그리스 남자들은 젊은 처녀에게 키스하려 들지 않는단 말인가요?"
"물론이죠. 남자들은 모두 얌전한 처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 여자를 존중해 주지요."
제니는 그런 사실이 아무래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남자란 종족은 이 세상 어디나 같으리라고 생각하는데."
"그리스 남자들에게도 그야 여자 친구가 있긴 하죠. 하지만 그런 여자들은 대개 결혼할 생각을 안하는 여자들뿐이에요. 또 실제로 거의 결혼을 안하죠."
"하지만 남자가 처녀를 유혹하지 않다니, 역시 나로서는 믿어지지 않아요. 찬스가 있어도 말이죠."
하지만 그런 찬스가 없는 것이다. 처녀들은 아버지나 형제들에게 완전히 호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세라는 설명했다.
제니는 어깨를 움츠리더니 화제를 바꾸어, 이제 홀로 돌아가도 괜찮을 만큼 진정이 되었느냐고 물었다.
세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도와 줘서 고맙다고 또 한 번 인사를 했다.
"내가 한 일이 잘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일이 돼가는 대로 놔두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내가 다른 남자의 품안에 있는 것을 오빠가 봤다면 어떤 얼굴을 할지 볼 만했을 텐데."
"다크는 틀림없이 노발대발했을 거예요, 제니. 다크가 오기 전에 와줘서 당신은 정말로 좋은 일을 해줬어요."
"글쎄, 어떨지. 오빠가 노발대발할 것은 틀림없지만, 문제는 그가 왜 화를 내느냐 하는 거죠."
제니는 혼자말처럼 말했다.
세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나의 남편이기 때문이죠. 망신을 당한 느낌이 틀림없이 들 테니까요."
"망신? 이봐요, 세라. 오빠는 지금까지 망신을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구요… 그래, 나는 역시 일이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게 좋았을 걸 그랬나 봐.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인걸 뭐. 이제 와서 후회해 봤댔자 소용없죠. 이제 포트퍼드마그나의 돈환과 만난 충격이 완전히 회복되었나요?"
세라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의 웃음소리에는 은방울 같은 부드러운 울림이 있었다. 마치 마법의 악기가 연주하는 요정의 음악 같았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의 끝은 어느덧 떨리는 소리로 변해 버렸다. 다크가 말없이 문을 열어젖혔기 때문이다. 세라는 침을 삼켰지만, 제니는 침착하게 미소 지으며 들어오라고 다크를 재촉했다.
다크의 까만 눈이 반짝 빛났다. 이렇게 엄격하고 무서운 남편의 얼굴을 세라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너는 선수를 친 셈이구나, 제니. 거기서 뭘 봤지? 말해 줘."
"무엇을 봤냐구요?"
제니는 눈을 깜빡거렸다. 제니가 다크의 옆에 서니까 너무나 작게 보이는 것이었다. 세라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목은 바싹 말라 버렸다.
"제니, 네가 테라스에 나갔을 때,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지?"
다크는 제니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의 험악하고 위협하는 듯한 시선은 아내의 창백한 얼굴 위에 못박혀 있었다.
"버나드와 세라에 관해서인가요, 오빠?"
제니가 눈썹을 치켜 올리고 되물었다.
시미치를 떼고 묻는 제니에게 다크는 이를 갈다시피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제니를 때려줄 기세였다.
다크가 방 한가운데로 다가왔으므로, 세라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세라는 밭은기침을 한번 하고는 제니 쪽을 흘깃 보았다. 시누이가 이 질문에 적당한 대답을 할 계기를 어떻게든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걸 즉각 알아차린 다크는 더욱더 언성을 높였다.
"대답해! 지금 곧!"
또 한번 밭은기침을 하고 나서, 천성적인 정직한 성격 탓으로 세라는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렸다.
"그는 나에게 키스했어요."
두려운 침묵이 찾아왔다. 제니는 속눈썹 밑으로 살짝 오빠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못된 놈이 당신에게 키스를 했다고?"
노기로 떨리는 목소리로 다크는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었다.
"나는 싫었어요, 비위가 상했어요."
다크가 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남편의 노여움이 너무나 큰 데에도 세라는 놀라고 있었다.
잠시동안 다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제니가 함께 있어 주지 않았다면 아마 이 정도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당신은 싫었다고?"
다크가 또다시 한 발짝 다가왔으므로 세라는 또 뒷걸음질 쳤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신은 그놈과 춤출 때 수작을 했느냔 말야!"
"세라는 수작을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제니가 나섰다.
"그럴까? 그럼 어째서 놈은 세라를 테라스로 끌고 나갔지? 세라가 그 놈팽이와 다정하게 군 것은 파티의 손님 전부가 알고 있는 일이야."
"당신은 그래서 화나셨어요?"
세라가 사죄하듯이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다정한 체하면 그야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어차피 모든 사람이 우리의 결혼 이유를 알고 있는 거고, 거기다 당신은 클라리스와 정답게 지내고 있으니까…"
"나는 클라리스와 정답게 군 일 없어!"
"그래도 그렇게 보인걸요. 버나드도 말했어요, 당신은 아마 밤새껏 클라리스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요."
"그럼 당신과 그놈은 나를 화제로 삼았단 말이오? 당신들의 천박한 대화 속에서!"
다크는 금방이라도 폭발한 것 같은 기세였다.
"천박한?"
그 말이 귀에 설었으므로 세라는 이상한 듯 남편을 보았다. 남편은 마치 성난 말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도대체 어쨌다는 것일까.
"당신은 내가 마음대로 행동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세라는 그에게 그 약속을 일깨워 주려고 했다. 하나 그것은 아무 효과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내가 받는 피해가 어떤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었어."
세라는 이 말에는 대꾸할 말이 없어 잠자코 고개를 떨구었다.
"당신은 나에게 아무런 폐도 끼치지 않겠다고 말했어. 기억해?"
세라는 눈을 들었다. 크게 떠진 그 눈은 깊은 후회의 빛을 담고 있었다.
다크는 세라를 쏘아보았다. 다음 순간 노여움을 잊고 세라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세라가 너무 상심하고 순진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제니는 만족한 듯이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그 홀로 돌아갈까요? 우리 셋이 다 안 보이면 어머니가 걱정하실 것 같아요."
다크는 아직도 아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노여움은 금방 풀어졌다. 찰스가 충고했듯 다크는 아무래도 유머 센스를 지니게 된 것 같았다.
더군다나 세라가 야단맞는 어린애처럼 조그매져서 오도카니 서 있는 것을 보면 다크로서도 언제까지나 화를 내고 있을 수도 없었다. 세라는 자기 잘못이 그런 노여움에 해당하도록 큰 것인지조차 몰라서 어리둥절해 있었기 때문이다.
"음, 그렇다면 홀에 돌아가지. 당신은 이제부터 파티가 끝날 때까지 나와 춤추는 거야. 이 이상 말썽을 피우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지!"
모건 부인은 예상대로 그들을 찾았던 것 같았다. 세 사람이 홀로 돌아왔을 때, 안도한 것 같은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다크와 세라는 한차례 춤을 춘 뒤 모건 부인의 테이블로 찾아가서 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니?"
어머니는 아들 쪽을 힐끗 보고 나서 세라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세라는 고개를 흔들고, 남편에게 뭔가 묻고 싶은 듯한 눈길을 보냈다.
다크는 한숨을 쉬고는 웃었다.
"세라가 버나드와 함께 테라스 쪽으로 나갔지 뭡니까."
다크가 어머니에게 설명했다.
"그 일에 관해서는 제니가 다 알고 있으니까, 파티가 끝난 다음에 언제든지 어머니께 말씀드리겠죠.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지만, 결혼함으로써 가족들에게 재미있는 화제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세라의 뺨은 빨개졌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는 행복했다. 다크가 클라리스에게 가 있던 때의 실의에서는 적어도 해방이 된 것이다.
"너와 버나드는 테라스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모건 부인이 이상한 듯이 물었다.
세라는 대답을 못하고 침을 삼켰다.
"그 자식이 키스를 하게 내버려 뒀대요, 몰상식하게."
이번에는 다크도 웃지 않았다.
"글쎄, 버나드가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요."
세라는 원망하는 듯한 눈으로 남편을 보았다.
"그때까지 그는 아주 친절했어요… 비행기를 태우기는 했지만."
"칭찬해 줘서 기뻤겠군?"
"아녜요, 그는 진심으로 말하는 게 아니었어요."
"그런 것까지 알고 있었으면 왜 당신은 곧장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더랬소?"
"왜냐하면 그 사람은 눈깜짝할 사이에 나에게 키스했거든요. 못된 사람!"
다크는 웃었지만, 어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세라, 대개의 여자애들은 버나드가 키스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더라구."
다크가 말했다.
"그리고 황홀해져서 더 해달라고 조른다나 봐. 하지만 그 작자는 세라에게는 구역질만 나게 했을 뿐이었지. 세라는 걸핏하면 곧잘 비위가 상하곤 하니까 고질병 같은 것이지."
"놀리고 있군요, 당신은."
세라는 비난했지만, 그 웃는 얼굴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다크의 목 근육이 씰룩거렸다. 어딘지 성숙한 어른의 분위기를 오늘 밤의 그에게서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춤을 출까?"
그는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9
집에 돌아오자, 다크는 세라가 클라리스한테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물어보았다.
"당신은 아주 무례했었다고 하던데, 나중에 가서는."
"그 사람에게는 그 정도로 대하는 게 알맞다고 생각했어요."
"어째서… 그 여자가 당신에게 뭐라고 했소?"
다크는 흥미가 생기는 모양이었다.
"클라리스는 내가 월척을 했다고 말했어요."
"당신은 기뻐해야 하는 건데."
"나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어요."
"클라리스에게 의미를 모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소?"
다크는 팔걸이의자에 기대앉아 반쯤 감은 눈으로 세라를 보았다.
"똑똑히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클라리스도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고 나서 클라리스는 내가 작은 시골에서 왔느냐고 물었어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며 세라의 눈은 빛났고, 다크의 입술은 일그러졌다.
"그래서 당신은 아테네에서 왔다고 말했소?"
"그래요. 그랬더니 그 여자는 아테네를 싫어한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말이죠…"
세라는 도전하듯이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아테네는 주로 예술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에게나 매력적인 도시라고 나는 말해 줬어요. 그랬더니 클라리스는 화를 내더군요. 나는 통쾌했고요."
"당신은 마음만 먹으면 신랄해지기도 하는군."
다크는 생각이 깊은 어조로 말했다. 그는 탐색하듯이 세라를 보았지만 그 눈에는 유머가 서려 있었다.
"그러니까 클라리스는 뭐라고 했소?"
"내가 무례하다고요. 하지만 나는 말대꾸를 안했어요."
세라는 유감스러운 듯했다.
"그건 이상한 일이군. 당신이 대꾸를 안했다니."
"그러고 나서 클라리스는 내가 언제 당신과 알게 되었으냐고 묻더군요."
세라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고백해 버릴까 생각했어요, 우리들은 아크로폴리스에서 서로서로 헌팅했다고."
"설마 그런 얘기를 하지는 않았겠지? 조마조마하다니까."
"당신이 화낼 것 같아서. 그렇지 않았다면 말했을 거예요."
"당신은 좀 더 조심성이 있었어야 했소."
"하지만 뭔가 신랄한 대꾸를 하려고 생각은 했었어요. 그런데 그때 당신이 왔기 때문에 찬스가 없어져 버렸죠."
"내가 때를 잘 맞춘 셈이군."
다크는 하품을 하고 시계를 보았다.
"이제 잠자야 될 시간이군."
세라는 미소 지으며 일어섰다.
"오늘은 즐거웠어요. 특히 후반에 가서요, 계속 당신과 춤추었을 때."
세라는 꿈꾸듯이 계속 중얼거렸다― 그의 온기가 몸을 통해서 전해져 온다. 멋진 분위기와 음악이 마음을 취하게 한다. 그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 울렁이는 가슴설렘, 마음이 떨려오는 이상하고 안타까운 생각―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막연하고 종잡을 길 없는 감정이었다.
"나와 춤추는 게 즐거웠소?"
다크도 일어서서 다정하게 물었다.
"나로서는 벌을 주려는 셈이었지. 당신이 더 이상 말썽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한 방위수단으로써."
세라는 그를 올려다보고 눈을 깜박였다. 다크의 눈길은 서서히 밑으로 내려와서 세라를 바라보았다. 세라의 마음은 설레였다. 남편은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두번 다시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을 거예요. 이제부터는 절대로."
세라는 맹세했다.
침묵이 찾아오고, 이윽고 다크가 익살스럽게 입을 열었다.
"두번 다시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그가 말하는 의미를 깨닫고 세라는 얼굴이 빨개졌다. 다크는 역시 정답고 익살스러운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짓은 뭐요?"
"나는… 나는…"
장밋빛으로 뺨을 물들인 채 세라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재빨리 다크가 그녀를 자기 팔 안에 품었다. 세라는 남편의 정다운 까만 눈을 쳐다보았다― 바람둥이의 눈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 세라가 남편의 눈 속에서 본 것은 무르익어가는 사랑이 아니었을까? 이 뜻 깊은 순간은 물론이고, 그것은 항상 확실히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지금 나와 가깝게 붙어 있잖소?"
다정한 말과 함께 청결하고 상쾌한 숨결이 이마에 닿았다.
"확실히 그렇잖냐구."
다크의 입술이 세라의 것에 포개졌다. 길고도 다정하고 따뜻한 입맞춤이었다. 붙잡힌 참새처럼 세라는 몸을 떨었다.
"아니에요, 달라요."
겨우 입술을 떼었을 때, 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다크는 다정하게 웃었을 뿐이었다. 그는 아직 세라를 안고 있었다.
대리석 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낼 뿐인 조용하고 우아한 방에서 세라는 지금 확실히 알았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어머니는 나에게 사랑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지만, 나는 그 의미를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지. 왜냐하면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결국엔 아버지가 선택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체념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결혼을 하든가 혹은 노처녀가 되든가 하는 길밖에 없었잖아. 그리고 지금…인데, 다크는 내 사랑에 호응해 주지는 않는다. 다크는 여러 여자에게 관심을 나누어 주고 있는 거야. 그리고 어떤 여자도 그에게는 육체적인 기쁨을 주는 존재 이상이 못돼.
"이제 너무 늦었어요. l시가 지난걸요."
세라는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아침 늦도록 자면 돼."
그는 속삭였다.
"오늘 나는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어."
세라는 믿을 수 없었다.
"당신은 언제나 일요일에는 나가셨잖아요. 주말에는…"
"지난 주말에는 나가지 않았잖소?"
"그건 그렇지만, 오늘은 나가시는 줄 알았는데요."
"글쎄, 안 가겠어."
"제니가 나랑 화석(化石) 채집을 가겠대요."
그 말을 듣자, 다크는 못마땅한 얼굴이 되었다.
"제니는 화석에 미쳐 왔지."
"화석 채집을 하기는 이 근처가 영국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나 봐요."
"가장 좋은 장소 중의 하나지."
그는 정정했다.
"좋아, 그럼 함께 화석 채집하러 가기로 하지."
"당신도 정말 우리와 함께 가나요?"
세라는 기쁨에 몸을 떨었다.
"몇 시에 가기로 했소?"
세라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다크가 물었다.
"정심식사 후에요. 제니가 피로해서 늦잠을 자고 싶다고 했거든요."
"그렇다면 같이 가지."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의 입술이 살며시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도 어떤 충동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잘 자요, 꼬마 아가씨."
다크가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세라의 작은 소망은 무너져 버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다크."
다크는 미소 짓고 문께로 걸어가 세라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두 사람은 함께 이층으로 올라갔다.
세라의 침실 앞에서 다크는 잠시 멈춰 섰고, 세라가 문을 열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지붕이 달린 큰 침대에는 주름 잡힌 금빛 새틴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침대 커버는 반쯤 접혀 있고, 흰 베개 위에는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아름다운 세라의 나이트 드레스가 놓여 있었다. 그 매혹적인 나이트 드레스는 환히 비치는 장미빛의 명암(明暗)이 어우러져 있었으며, 아랫단 쪽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그 색은 엷어져 맨 윗부분은 부드러운 핑크빛이었다.
다크의 시선은 그 침대에서 눈앞의 아름다운 처녀에게로 옮아갔다. 자기 아내인 이 처녀― 자기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는 이유로 선택한 처녀.
세라는 눈부신 듯이 남편을 보았다. 세라의 눈은 새끼사슴처럼 온화하고 신뢰에 차 있었다. 그녀는 다크가 꿀컥 하고 침을 삼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라는 눈을 깜박였다. 그 자리의 분위기가 어떻게든 졸린 눈을 뜨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분이 들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라의 눈두덩은 무겁게 내리덮이려 했다. 그것을 본 다크는 얼른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세라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 자요… 꼬마 아가씨. 푹 자도록 해요. "
세라의 무거운 눈두덩에 가볍게 키스를 한 다크는 옆방의 문을 열었다. 다크는 햇볕에 탄 섬세한 손을 들어 인사했고,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각각 자기의 침실로 들어갔다.
세라는 살짝 문을 닫고, 거기 기대섰다. 그렇다, 이게 바로 사랑인 것이다. 이 감미롭고 고귀한 감각, 이 따뜻함과 황홀감. 처음에는 남편될 사람이 찰스라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한 것이 기억나서 세라는 혼자 웃었다.
"마리아님, 그이가 찰스가 아니어서 고맙습니다."
세라는 경건하게 중얼거리고 드레스를 벗기 시작했다.
다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일행은 라임 레기스로 향했다.
해변 가까운 곳에서 주차할 장소를 찾아낸 세 사람은 차를 내려 피네 만(灣)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 여자는 바지에 셔츠 차림이었고, 지질(地質) 조사용 망치를 들고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다크도 낡은 바지와 오픈 셔츠를 입고 있었다.
오빠가 화석 채집에 함께 가려고 준비하는 것을 본 제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속눈썹 밑에 표정을 감추고 오빠의 색다른 행동에 잠깐 놀라 보였을 뿐이었다.
제니는 오빠와 세라를 견주어 보고 만족스러운 듯 조그맣게 웃었다.
"이제 시작해도 될까요?"
세라는 전에 제니의 멋진 수집품을 구경했기 때문에 빨리 자기의 화석을 찾아내고 싶었다.
물론 그러한 수집품은 상점에서도 살 수 있다. 그러나 사서 모으는 것은 아마튜어가 하는 일이고 프로가 하는 것은 아니라고 제니는 말했다. 아마추어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은 나로선 요원한 일이라는 세라를, 제니는 이렇게 격려했다.
"언제까지나 아마추어로 있지 못할걸요. 나처럼 당신도 열중하게 되면 암석이나 그 속에 있는 멋진 보물에 관해서 점점 더 상세히 알고 싶어진다니까요."
"아냐, 아직 멀었어. 제니는 우선 가장 멀리까지 가서 되돌아오는 길에 채집하는 식을 좋아하니까. 하긴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운반할 짐의 무게를 생각하면 말이지."
"전에도 제니와 간 적이 있나요?"
세라는 놀라서 남편을 보았다.
그는 그러한 세라의 표정을 보고 웃었다.
"한때는 함께 잘 갔더랬어."
다크는 동생 쪽을 돌아보았지만, 또다시 얼른 시선을 돌렸다.
제니는 말이 없었다. 즐거웠던 그때를 추억하는 것일까. 지금의 오빠는 전혀 다른 즐거움을 추구하게 되어 버렸다고, 제니는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당신도 수집한 것을 갖고 있나요?"
세라는 남편에게 물었다.
그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가 채집한 것은 모두 제니가 보관하고 있어."
세 사람은 잡담을 하면서 지질학자가 푸른 석회석이라고 부르는 돌비알까지 왔다. 그것은 석회석과 혈암(頁岩)이 변화하여 이루어진 지층이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 볼까, 어때?"
다크가 제니에게 물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보아요, 세라. 저것 좀 봐, 혈암 속에."
세라는 열심히 돌아다니며 눈여겨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라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짙어졌다. 드디어 세라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없었어요."
세라가 낙담한 듯 말하자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하고 웃었다.
"잘 봐야지. 이리 와요, 가르쳐 줄 테니까."
다크는 가는 손가락을 유연하게 움직여서 혈암 속에 있는 화석을 차례차례 끄집어 내었다. 마치 요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작은 것은 어비큐라라고 부르지."
다크는 그 화석화된 조개를 보여 주기 위해서 아내의 옆에 섰다.
"이것의 변종(變種)도 있는데, 이것은…"
다크는 여기까지 말하고 제니 쪽을 보았다.
"프테로펠라 코스타추러였던가?"
제니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눈은 화석이 아니라 세라 쪽을 향하고 있었다. 세라도 남편이 곁에 서 있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잠시 동안 세라의 귀에는 다크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듣고 있는 거요?"
다크가 엄한 목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세라는 머리를 숙이고, 1억 5천만 년 이상이나 옛날의 그 작은 생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채집을 계속했다. 세라는 점점 '잘 볼 수 있게' 되어, 이따금 뭔가를 발견한 세라의 환성이 해변에 울려 퍼졌다.
화석을 바위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망치와 끌도 준비했다. 그러나 화석을 다치지 않고 끄집어 내는 기술에는 숙련이 필요하여, 세라는 서너 개의 조개를 망쳐 버리고는 마침내 두 사람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차 할 수 있게 될 거요."
세라가 끌을 남편에게 넘겨주면서 낙담한 표정을 짓자, 다크는 웃었다.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어. 이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니까. 점점 요령을 터득하게 될 테니까 참을성이 있어야 해. 이것 봐… 예쁜 것을 찾아냈는데 그래?"
새파란 하늘에서 눈부신 햇살이 내려 비치는 속을 세 사람은 걸어갔다. 해안은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그다지 혼잡하지는 않았다. 화석 채집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은 약간의 주목을 끌었지만, 그런 모습은 이 근처에서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도 이 지역은 화석이 많기로 유명하니까.
푸른 석회석 가운데는 극피(棘皮)동물의 척추뼈도 묻혀 있고, 패총(貝塚)의 흔적도 있었다. 세라는 오스트레아를 수집품으로 보태었다.
그들은 소풍용 점심을 준비해 갖고 왔다. 채집을 계속하기 전에 잠깐 쉬고 샌드위치를 먹자고 제니가 제안했다.
"그것 좋은 생각이야."
다크는 배낭에서 깔개를 꺼내 모래밭에 펼쳤다. 그새에 여자들은 보온병과 샌드위치, 종이접시와 컵을 끄집어냈다.
"일요일을 이렇게 지내다니, 아주 즐겁군요! 데려와 주셔서 고마워요."
세라는 즐거운 듯 두 사람에게 미소를 보냈다.
"고맙다는 인사 같은 것 안 해도 돼요. 나는 화석 채집을 굉장히 좋아하니까. 오빠 역시 그래요, 한동안 뜸하긴 했지만."
세라가 내미는 커피를 받아들면서 다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맞아, 전에는 이런 일을 아주 좋아했었어. 오늘 와보고 새삼 그 재미를 재발견했어. 언제 다시 한번 오도록 하지."
"언제 한번이라고요?"
"너희들 사정이 좋다면 다음 일요일이라도."
다크는 동생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동생을 응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제니는 현명했다. 오빠는 고집쟁이이고, 거기다 제니가 바라는 변화는 오빠의 마음속에서 이제 겨우 싹트기 시작했을 뿐이지 않은가. 아직 승리의 기쁨을 나타내서는 안 된다, 오빠의 항복이 더욱 뚜렷해진 뒤가 아니면.
"다음 일요일이라구요?"
세라의 얼굴이 환히 빛났다.
"당신은 이번 주말에도 외출 안하실 거예요?"
다크의 나른한 눈은 세라의 얼굴 위에서 깜박거렸다. 마음속 깊은 속에서 기쁨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라의 표정, 길게 뻗친 속눈썹 밑에서 남편을 올려다보는 세라의 빛나는 눈을, 다크는 이윽히 바라보았다.
"응, 나는 이번 주말에도 나가지 않을 거요."
다크는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다가 다크의 눈이 동생의 눈과 마주쳤다. 동생은 곧 외면했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지, 제니?"
제니는 어깨를 움츠리더니, 오빠가 먹는 것을 잊고 있는 샌드위치 접시를 앞으로 쑥 밀었다.
"생각은 개인의 비밀이라구요. 뭐든지 알고 싶어 하는 우리 오라버님!"
다크는 샌드위치를 집었지만 눈은 동생에게서 떼지 않았다.
"생각이란 것은 날개가 달려 있어서 간단히 붙잡히는 수가 흔히 있거든."
"내 것도 붙잡았나요?"
이 이상의 변명은 필요 없는 거라고 체념하고 제니는 도전하듯이 말했다.
"아주 쉽사리."
다크의 눈이 빛났다.
"너는 나를 변화시키지는 못해."
다크의 어조는 냉랭했다.
"전에도 그렇게 말했었지?"
"물론 나는 할 수가 없겠죠. 하지만…"
의미심장하게 제니는 말끝을 흐리더니 토마토를 잘라서 나누기에 여념이 없는 올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의 의미를 눈치챈 다크는 천천히, 그러나 힘있게 단언했다.
"아무도 나를 변화시키지는 못할걸."
세라는 얼굴을 들고 그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다크는 고집스러웠다. 도셋의 울퉁불퉁한 백악층(白堊層)에서 떨어져 그 주변에 온통 널려 있는 부싯돌처럼 딱딱했다.
세라는 침을 삼키며 시선을 떨구었다. 잠시동안 세라는 손 안의 접시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그것을 다크 쪽으로 내밀었다.
"포크를 드릴게요."
토마토를 먹는 데 필요한 뭐가 없나 하여 다크가 휘둘러보는 것을 알아챈 세라가 말했다.
"고마와."
두 사람의 손가락이 닿았다. 세라는 눈속 깊은 곳을 바늘로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다크의 손에 닿는 것이 이제 와서는 몹시 괴로와서 세라는 울고 싶었다. 다크는 자기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언제까지나 방탕아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과 고집스런 눈길에 깊은 상처를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천성적인 쾌활한 성격 탓에 마음의 아픔을 쉽게 극복한 세라는 조금 쉰 뒤 아까보다도 더 한층 화석 채집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암모나이트 속에서도 상태가 좋은 커다란 스네이크스토운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뒤에도 그라이페어를 두 개, 그러고 나서 이 지방 사람들이 '거북 암모나이트'라고 부르는 돌을 하나 찾아냈다. 그것은 구멍에 순수하게 흰 방해석(方解石)이 꽉 찬 것이었다.
"이것은 꽤 진기한 것인가요?"
그 조각을 첼시의 도자기를 다루듯이 소중하게 들고 세라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다지 진기한 것은 아니에요… 어머, 미안해요."
세라가 몹시 낙담한 얼굴을 했으므로 제니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이 근처에는 이제 별로 신기한 것은 없을 것 같아요."
"세라가 어룡(魚龍)의 뼈 화석이라도 찾아내기 전에는."
다크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것도 별로 진기하지 않아요. 푸른 석회석 안에는 곧잘 파묻혀 있는걸요."
제니가 말했다.
"하지만 개인 수입가가 찾아내는 일은 드물다구."
"거기다가 끄집어 내는 것도 어려워요. 50센티쯤 되거든요."
제니는 세라 쪽을 보고 설명했다.
세라는 갓 캐낸 것들을 신문지에 싸고 있었다.
"언젠가는 찾아내고 싶어요."
세라는 희망적으로 대답하며 끈을 꺼내어 뭉치를 묶었다. 그러고 나서 종이에 날짜를 써넣은 다음 그것을 끈에 달았다.
"체계적이군."
세라의 보물이 배낭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다크가 놀렸다.
"찾아낸 장소와 날짜들을 기억해 두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세라는 다크를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다크는 그 눈길 속에서 어떤 의미를 읽었다. 오늘은 세라에게 특별한 날인 것이다.
일행이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는 저물어 가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잔잔한 파도로 흔들리고 녹아드는 듯한 하늘의 색을 반영하여 마치 진홍색 카펫 같았다. 정적에 싸인 마을 위에 져가는 새빨간 태양이 반투명의 빛을 던져 주고, 언덕 위의 목초지에는 호박색의 빛이 온통 뿌려지고 있었다. 풀을 뜯는 양떼들은 알록달록한 적동색으로 물들고, 퍼벳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교회는 석양을 받아 금빛으로 채색되어 빛나는 보초처럼 우뚝 서 있었다.
"아이, 피곤해."
제니는 그러고 나서 자기 차에 올라탔다.
"그럼 안녕, 또 봐요."
세라와 다크는 둘이서 저녁식사를 하고 난 뒤 '작은 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다크에게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고집스럽고 접근하기 어려웠으며, 처음 만났을 때의 그를 생각케 했다.
그날 밤 침대에 들어갔을 때, 세라는 어젯밤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발치께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세라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마리아 님."
세라는 열심히 기도했다.
"제발 다크가 저를 사랑하도록 해주세요."
10
날이 감에 따라 세라는 다크가 점점 더 멀어지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다크는 나와의 결혼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결혼할 때 그는 어떤 형태건 간에 속박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확실히 속박되어 있다. 그리고 그 속박이 점점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다크를 해방시켜 주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가 잠시 그리스로 돌아가는 것이다. 전에 다크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도 된다고 했었으니까, 지금 그 말을 한다 해도 이상한 일을 아닐 것이다.
내가 없는 사이에 다크는 완전히 자유로왔던 독신생활로 돌아가면 된다. 그리고 내가 돌아온 후에도 그대로의 생활을 계속하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제니는 아마도 화를 내겠지만, 그녀까지도 전에 한 말에 구애되어 다크와 마찬가지로 나를 팽개쳐 두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다크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세라는 집에 갔다 오려고 결심했다. 다크가 결혼을 부담으로 느끼고 나를 귀찮게 여기기 시작하는 것보다는 전처럼 멋대로 내버려 둬 주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그 말을 하려고 테이블 너머로 다크의 얼굴을 보니, 그는 미간을 모은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라는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오늘은 어디를 가지?"
마침내 다크가 입을 열었다.
그 퉁명스런 어조에 세라는 주춤했다.
"만약 당신이… 나가기 싫으시다면…"
이렇게 말하는 세라를 다크가 가로막았다.
"당신은 헤엄치러 가고 싶다고 했었지? 오늘 가기로 하지."
"네, 좋아요."
세라는 들고 있던 토스트를 옆으로 밀어 놓았다. 집에 돌아가기로 마음을 정하자 세라는 가슴이 뻐근해져서 아무것도 목에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세라가 자기의 차를 운전하고 다크는 조수석에 앉았다. 남편을 태우는 것은 처음이므로 세라는 약간 긴장했지만, 다행히 운전을 잘할 수 있어서 다크는 만점을 매겨 주었다.
세라가 바닷가에 차를 세웠을 때 남편은 칭찬해 주었다.
"당신도 남과 같이 숙련이 되었군. 오전시험은 단번에 패스할 거야."
맑디맑은 푸른 바닷속을 둘이서 헤엄치는 동안에 다크의 저기압은 점점 사라지고, 때로는 농담도 한두마디 하게끔 되었다.
"바다에는 자주 갔었소?"
다크가 묻자, 세라는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가져온 깔개를 모래사장에 펴고 앉았다.
"아버지가 수영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나는 운이 좋았죠."
"다른 사람과 헤엄치러 간 적은 없단 말이오?"
"달리 함께 갈 사람은 없었어요. 여자애들끼리 가지는 못하는걸요. 아버지나 오빠, 남동생하고만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별로 기회가 없어요. 부부끼리 가는 일은 이따금 있지만, 그리스에서는 대개의 경우에 남자들만 헤엄을 치는 일이 많아요. 관광객 이외에는 말이죠."
"그건 참 우스운 얘기군. 그렇다면 그리스에는 귀엽고 순진한 처녀로 가득차 있다는 얘기요?"
세라의 얼굴이 빨개졌다.
"확실히 여자애들은 보호가 아주 잘되고 있어요, 전에도 말한 것처럼."
다크는 흥미깊게 세라를 보았다. 그의 시선은 아내의 매력적인 얼굴에서부터 귀여운 가슴, 길고 날씬한 다리, 모양이 좋은 발에서부터 발톱 끝까지 이동해 갔다. 페디큐어를 한 그 발은 신체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완벽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세라는 남편을 흘깃 쳐다보았다. 남편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미간을 모으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더니 드러누워 일광욕을 시작했다.
그리스 행 얘기를 꺼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세라는 잠시 주저한 후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도 될까요, 다크?"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만약 다크가 아무런 반대도 안하고 열심히 그리스 행을 권한다면, 그야말로 그가 나 같은 것은 대수롭지 않다는 증거일 테니까.
다크가 이쪽을 향했다.
"그러고 싶은 거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다니까요!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과 함께 있는 거예요. 마음속에서 세라는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버지께 한번 뵙겠다고 말씀드려 놨고, 전에 당신도 승낙하셨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제니와 함께 가기로 했었잖아? 혼자 여행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것 아니오?"
"네, 전에는 그랬어요. 아버지도 찬성하시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지금은 나도 영국인인걸요. 혼자서 여행해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해요."
세라가 자신을 영국인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다크는 빙그레 웃었다.
"가고 싶다면 제니가 함께 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텐데. 제니는 틀림없이 내주쯤에는 여행을 간다고 말했었지?"
"그래요, 두 주일간의 예정으로."
"그럼 제니가 그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함께 가는 게 어떻겠소?"
"제니는 나와 함께 가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제니가 오면 내가 부탁해 보지."
세라는 끄덕였다. 하지만 만약 제니를 기다린다면 그리스 행은 석주일 후가 되어버린다. 그러면 너무 늦다. 하루라도 빨리 출발하고 싶다. 왜냐하면 나와 함께 있으므로써 다크는 나날이 짜증스러워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빨리 가보고 싶어요… 이삼 일 안에. "
그가 가지 말라고 말해 준다면 얼마나 좋으랴. 허전해서 안 되겠다고…
"그렇다면 내일 비행기 예약을 해주겠소. "
세라는 목에 걸려 있던 것을 삼켜 버렸다. 눈이 젖는 것을 감추기 위해 당황스레 눈을 내리깔았다.
"고마와요."
세라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크는 아내의 풀이 죽은 어조에는 신경이 미치지 못했다.
사흘 후, 다크와 제니가 공항까지 세라의 환송을 나와 주었다.
물론 제니도 세라의 이 급작스런 출발에는 놀란 것 같았지만 반대는 하지 않았다. 제니 역시 내가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다크가 전보를 쳐놓았으므로 아버지가 공항까지 마중나와 있었다. 아버지는 세라를 끌어안으며 건강해 보인다고 말해 주었다.
"자, 이것저것 다 얘기해 봐."
이국적인 꽃들이 피어 어우러진 그리운 아버지의 집 안뜰에서 차를 마실 때 아버지가 재촉했다.
"너의 새 집에 대한 일― 보내 준 사진은 보았지만 좀 더 상세히 얘기해 봐라."
세라는 자신의 심정이 생각했던 것만큼 침울하지 않은 것을 깨닫고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라는 어버지를 사랑하고 있었고, 이렇게 재회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아그니 고모가 때마침 사촌을 방문하러 가고 없었기 때문에 한층 더 안성맞춤이었다.
"집은 말이죠, 굉장히 커요. 아름답고 넓은 정원 가운데에 서 있는데, 분수와 잔디, 나무들로 둘러싸인 산책길이 있고, 조각도 있어요… 그야말로 굉장히 많은 조각들이 있어요."
"그래서 너는 행복하냐? 아기는 아직 없고?"
뺨이 빨개졌다.
"네, 아직 없어요, 아버지."
아버지는 비난하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영국인들은 시간이 걸리는군. 그리스 인이라면 첫날밤에 만들어 버릴 텐데."
세라는 더욱 얼굴이 빨개졌다. 웃으려 했지만 지금 웃으면 히스테리칼한 웃음소리로 변해 버릴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얘기하시는 것을 들으면 다크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제니에 관해 제가 편지에다 썼죠?"
세라는 화제를 바꾸었다.
"그녀는 아주 친절하고 나를 잘 돌봐 주어요. 이곳 저곳에 데려가 주기도 하고요… 물론 다크도 그렇지만."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영국 남자는 언제나 아내와 함께 있다고 들었는데, 그는 이따금 너를 안 데리고 나가는 일도 있니?"
"피보스와 결혼했더라면 언제나 그랬을 텐데요, 뭐."
"그야 그렇지. 하지만 너는 피보스와 결혼한 것은 아니지 않아. 너의 어머니는 언제나 내가 혼자서 나가려고 하면 투덜거리곤 했었지. 영국 사람하고 결혼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고 언제나 투덜대더라."
"다크는 일이 있는걸요."
그러고는 앞서 한 말을 후회하면서 세라는 얘기를 맞추기에 안간힘을 썼다.
"나하고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은 불가능해요."
아버지는 또 어깨를 움츠렸다.
"너는 지금 행복한 거냐?"
"물론이지요, 아버지."
세라는 고개를 숙이며 거짓말을 했다.
"다크도 함께 왔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것은 무리예요. 지금 말했지 않아요, 그에게는 일이 있으니까."
또 거짓말이다. 언제까지 거짓말을 계속해야만 되는 걸까?
"네 남편은 너를 혼자 떠나게 하고도 태연하단 말이냐? 영국 남자란 아내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을 안 쓰는 모양이군. 여자들의 그런 자유를 나는 별로 찬성 못하겠어."
"저쪽에서는 다 그래요. 여자들은 자유로와요. 평등을 얻은 거죠. 앞으로 그리스에서도 그렇게 될 거예요."
"그것이 정말이라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이 아니기를 빌겠어."
아버지는 힘을 주어 말했다. 그 어조 속에서 무엇인가를 느낀 세라는 후딱 얼굴을 들었다.
"아버지, 혹시 재혼하실 작정은 아니시겠죠?"
"사실은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아버지는 어느 정도 마음이 찔리는 듯, 그러나 얼마간 도전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재혼 같은 것은 그리스에서는 좋은 일이 아니지 않아요."
"확실히 모두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재혼한 사람도 있지."
"친척들이 아버지 일을 수치스럽게 생각할 거예요."
"그럴 테지."
"그런데 어째서 아버지는 그렇게 재혼을 하고 싶어 하세요?"
"아직 확실히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에게 상당한 지참금이 있단다. 담배밭에다 집이 두 채나 된단다."
세라는 역겨운 듯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볕에 탄 얼굴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강한 햇볕 때문일까… 어쩌면 쓸쓸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 점을 세라는 갑자기 깨딜았다.
"그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만나보면 네 마음에 들 거야. 오늘 밤의 식사에 초대해 놨다."
세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후에도 아버지는 마리아라는 이름의 그 여자는 서른여덟 살 미망인이며 아이가 셋 있다는 것 등도 설명해 주었다.
"아그니 고모는…"
세라가 이렇게 말하려 하자 아버지가 가로막았다.
"누님 때문에도 재혼을 결심하게 된 것이란다. 전부터도 굉장했지만, 특히 네가 가버리고 나서는 말이야― 어찌나 잔소리가 심한지! 너희 고모를 집에 돌아가게 할 좋은 핑계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고모는 나의 결혼을 아직도 못마땅해 하시는군요?"
"누님은 내가 네 어머니와 결혼한 것조차 결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었지. 네 어머니가 영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고모는 영국인을 싫어하시는군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네가 하는 일에 간섭할 권리는 없지. 거기다 누님도 기회만 있었다면 영국인이든 누구든 붙잡았을 테니 말이야."
아그니 고모에게 청혼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라는 고모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불쌍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스 여자에게는 결혼과 자식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마리아라는 분을 사랑하고 계신가요?"
세라는 다소 주저하며 물었다.
"나는 그녀를 아주 좋아해. 하지만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고 할 정도는 아니야. 내 말 알았지?"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
세라는 중얼거려 보자 약간 슬퍼졌다. 나는 어째서 다크를 뜨겁게 사랑하게 된 것일까?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만둘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랑은 갑자기 찾아왔다. 그리고 점점 커져서 마침내는 세라의 몸도 마음도 사로잡아 버린 것이다.
"너는 다크를 굉장히 사랑하지? 누가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가 웃음 머금은 어조로 말했다.
누가 보아도? 하지만 다크는 별도다. 만약 그가 내 마음을 눈치챈다면 나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것인가? 눈물이 솟구쳐 오므로 세라는 눈을 감았다. 다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베이루트에서 함께 있던 아름다운 금발 여자를 지금 세라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참을성있게 기다리면 그는 언젠가는 그런 아름다운 처녀들에게 싫증이 나서 집에 있게 될지도 모른다. 최후에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제니는 말해 주었다.
"그러한 경쟁 상대가 전부 없어지면, 그는 나에게 눈을 돌리게 될지도 몰라."
세라는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려 보는 것이었다.
세라는 단박에 마리아가 마음에 들었다. 마리아는 호리호리하고― 결혼 후 몇 년이나 지난 그리스 여자로서는 드문 일이었지만― 얼굴의 생김새도 온화하고 착한 성격이 그 표정에 나타나 있었다.
마리아도 세라가 좋은 것 같았다. 세라에게 진정이 어린 축하를 해주고, 남편과 영국의 집에 관해 물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아버지가 자리를 떴을 때에, 마리아는 조금 걱정스러운 듯 세라에게 얘기를 했다.
"우리가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아버님한테 들었겠지? 많은 사람들이 비웃겠지만, 우린 두 사람 다 아주 외롭거든요."
"그건 잘 알아요."
"사람들의 평판은 신경이 쓰이지만, 우리는 서로 좋아하고 있고 함께 살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가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아버지가 처음 그 말씀을 하셨을 때에는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반대했어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고, 이렇게 만나뵙기까지 한 지금에 와서는 나는 아주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마리아는 몸을 내밀어 세라의 손을 잡았다.
"고마와요, 세라. 정말로 고마와. 친척의 비판은 신경 쓰지 않기로 하겠어요. 자신들이 행복해지는 길을 택하겠어."
세라는 아버지에게 이삼 주 동안 여기 있을 작정이라고 얘기해 두었다.
아버지는 놀랄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 영국인이란 자들이 하는 짓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세라는 다크와 모건 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니가 여행에서 돌아올 즈음에는 제니에게도 썼다. 제니는 곧 답장을 띄워 주었고 세라가 좀 더 그리스에 오래 머물도록 권했다. 이유는 씌어 있지 않았다. 이상하게 수수께끼 같은 편지였다.
세라는 그것을 읽고 쓰디쓴 눈물을 흘렸다. 다크는 다시 내가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와 마리아는 마리아가 사는 마을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세라는 같은 또래의 처녀와 둘이서 폭이 넓은 리본을 묶은 1미터 가까이 되는 다색 촛불을 손에 들었다. 모두들 일단 반대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식에 참석해 주어 언덕 위의 흰 교회까지 들뜬 행렬이 계속되었다.
식이 진행되는 중에도 잡담은 계속되고, 주인공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면 신부는 예배를 중단했으며, 두 사람은 싱글벙글하며 포즈를 취했다. 예배가 재개되었다가도 잠시 후 사진사의 요청으로 또 식이 중단되곤 했다.
결혼식의 피로연은 마리아의 집 과수원에서 베풀어졌다.
긴 테이블에는 새하얀 클로드가 깔리고, 그릇마다 음식물이 넘칠 정도로 듬뿍듬뿍 담아져 나왔다. 포도주 병이 흔해빠지게 나오고, 신랑 신부는 가운데 의자에 앉아서 손님들에게 혼례용 비스킷을 나누어 주었다.
많은 사람이 세라에게 말을 걸어오며 남편과 집에 관해 묻고 싶어 했다. 처녀들은 세라더러 남편을 사랑하느냐고 물었고, 그러면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아무도 남편이 세라를 사랑하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결혼식이 끝난 후 열흘쯤 지났을 때, 아버지가 세라더러 언제 돌아가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비로소 확실히 곤혹스러워진 것 같았다. 슬슬 돌아갈 생각을 해야지. 하지만 일주일 전쯤에 도착한 제니의 편지에는 역시 좀 더 그리스에 머물도록 하라고 씌어 있었다.
"어쩌면… 내주쯤에요."
남편이 자기를 원하지 않는데 어떻게 돌아간단 말인가? 다크도 편지를 보내기는 했지만, 그것은 냉담하고 감정이 담기지 않은 내용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이라니?"
아버지가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여, 여기가 좋아요."
세라는 더듬거렸다.
"하지만 네 남편은 부자니까 또 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올 수 있지 않니?"
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내에 나가서 비행기 편을 알아보고 올게요."
"비행기라면 언제든지 있어. 네 결혼생활은 정말 행복한 거냐?"
"물론이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납득을 했는지 어쨌는지 아버지는 그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이튿날, 비행기의 예약을 위해 아테네로 떠나면서 세라는 오후의 차 마실 시간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아버지에게 말해 두었다. 아크로폴리스에 가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다음 토요일 비행기의 예약을 끝낸 세라는 플라카 신전 쪽으로 슬슬 걸어갔다.
출발 날짜가 결정되자 불행은 보다 확실한 형태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었다. 다크가 자기가 없는 것을 쓸쓸하게 생각하고 빨리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내지 않을까 하는 조그만 소망이 세라의 마음 한구석에는 있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난 후, 그것은 덧없는 소망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장래는 어찌 되는 것일까. 앞으로 고독하고 허무한 인생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갈등이 세라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다크의 분위기는 확실히 이전보다 원숙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거기다 다크가 곧 생활방식을 바꾸게 될 것이라는 확신… 다크 자신도 종종 유연함을 보여 주었다. 키스도 해주었고, 세라와 함께 있는 게 즐겁다고도 말했었다. 그 디너 파티가 있던 밤의 빛나던 확신과 이튿날 아침의 넘치던 행복감… 하지만 그것도 다크가 고집스런 어조로 이렇게 말했을 때 무너져 버렸다.
"아무도 나를 변화시키지는 못해."
세라는 눈을 감았다. 다크가 너무나 고집스럽다고 누가 책망할 수 있을 것인가? 원래 남편은 강한 성격과 의지를 가진 인간이다. 동생이 그를 틀에 끼워 넣으려고 들면 그가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 역시 제니와 같은 짓을 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플라카에 도착하자, 세라는 거대한 석회석을 몇 번이나 올려다보았다. 그 큰 돌은 이교(異敎)의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것 같아 언제나 세라를 사로잡았다. 올려다볼 때마다 세라의 가슴은 욱신거렸다. 이런 때 아크로폴리스에 들르다니, 정말 나는 어떻게 된 것이 아닐까.
세라는 신전으로 이어지는 삼나무가 우거진 사이를 걸어갔다. 대개의 관광객은 버스나 택시로 오기 때문에 이 장소를 지나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고대의 엄숙한 행렬이 지나간 길을, 세라도 또다시 더듬어 갔다.
잠시 걸어서 파르테논에 도착하자 세라는 계단에 주저앉았다. 여러 가지 사건이 차례차례로 뇌리를 스쳐갔다. 눈에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한 시간 남짓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마침내 세라는 일어섰다. 낙담하면 안 돼. 부자 영국인과 결혼한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던 거야. 처음에 다크가 약속해 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날은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신전은 해지기 전의 변화가 많은 빛을 받아 원주와 삼각형 지붕이 레이스처럼 하늘거리는 황금빛과 낙엽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서풍이 세라의 머리카락을 살랑거리게 하고 뺨을 스치며 그것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그녀 주변의 두세 사람은 코트 깃을 세웠지만, 세라는 바람 부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렸다. 바람은 강하게 불어 세라의 긴 머리를 나풀거리게 했다.
갑자기 세라는 눈을 깜박거렸다. 이것은 환영(幻影)이야! 세라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다리가 후둘거렸다― 마치 그때처럼.
세라를 찾아낸 다크는 한순간 멈춰 선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거대한 신전을 등지고 서서 가볍게 떨고 있는 아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다크의 태도는 확신에 차고 그 걸음은 신속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은, 결심을 한 지금,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는 것이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러나 세라의 눈앞에 멈춰 섰을 때, 그는 한순간 주춤했다. 다크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것을 세라는 이상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크로폴리스에 남아 있던 몇 사람은 사당 쪽으로 걸어가더니 이윽고 모습이 사라졌다.
다크는 아직 거기 서 있는 채로였다. 무한한 다정함과 사랑을 그 검은 눈에 담고 아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기의 말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라도 하듯, 다크의 눈은 아내의 얼굴 위를 맴돌았다. 세라의 떨리는 듯한 미소 속에서 그 답을 보자, 다크는 승리의 미소를 보였다. 세라는 이 기적에 망연해져서 남편을 바라볼 뿐이었다.
"와주셨군요… 나를 데리러…"
마지막 말은 키스로 막혀 버렸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뜨거운 키스였다. 남편의 힘센 팔에 꽉 안겨서, 세라는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묻고 싶은 말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지만 이 황홀한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다크는 세라에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키스를 했다. 이 불안했던 며칠간인지 몇 주일간인지의 보상을 하려는 듯이.
겨우 세라를 풀어준 그는 손을 잡아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녀가 앉아 있던 장소로 그녀를 데려갔다. 곁에 바싹 다가앉아 다크는 세라에게 자기 마음속의 갈등과 가정적인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한 주저에 관해서 얘기했다.
"하지만 나는 훨씬 전부터 당신에게 이끌리고 있었어. 나는 자신의 그런 감정에 대해서 줄곧 싸워 온 거야. 솔직히 말하면 어제까지도 나는 싸웠지. 그러나 드디어 나는 깨달았어. 내가 원하는 것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에게 사랑받는 것뿐이라고."
다크는 얼굴을 아내 쪽으로 돌렸다. 그 얼굴에 넘치는 사랑에 세라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방금 그것을 당신의 미소 속에서 보았던 거야. 그러니까 내 소망은 이루어진 거야. 나도 당신을 마음속으로부터 사랑하고 있으니까…"
다크는 감동 때문에 말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러한 그를 보게 되리라고는 세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당신과 이 아테네 신전에서 만난 건 참으로 크나큰 행운이야."
다크의 입술이 세라의 뺨을 다정하게 스치자, 세라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어제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로 결정했을 때…"
세라는 잠시 후 말했다.
"결정했다고?"
다크는 유쾌한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독특한 표현이군! 나는 훨씬 이전부터 당신을 사랑했다구! 내 귀여운 아내!"
세라는 웃었다. 그 목소리는 아직 떨며 수줍어하고 있었다. 자기의 인생을 한순간에 완전히 바꾸어 놓은 이 사실을 세라는 아직 믿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제, 당신이 내가 필요하다고 깨달았을 때, 어째서 당신은 돌아오라고 편지를 띄우지 않았나요?"
세라는 조그만 손을 그에게 내밀며 이렇게 물었다.
"그것이 가장 분별이 있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겨우겨우 광명을 찾았을 때― 아냐, 그보다도 찾았다고 인정했을 때― 나는 갑자기 당신과 아테네에서 휴일을 함께 지내고 싶어졌어. 우리의 신혼을 말이지. 그래서 곧장 오늘의 비행기를 예약하고 이리 날아온 거지. 닿자마자 택시로 아버님 댁에 갔더니, 아버님은 당신이 이곳에 있을 거라고 가르쳐 주시더군."
다크는 세라의 손을 잡아 자기의 입술께에 가져갔다.
"어째서 이렇게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은 거요?"
세라의 손을 입 가까이 댄 채 다크가 물었다.
"제니가…"
무심결에 말하다가 세라는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제니?"
"… 제니가 좀 더 오래 있다 오라고 편지했더군요. 당신은 내가 없는 편이 더 행복해 보이니까 그렇게 편지한 것이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지요."
지금에 와서는 시누이의 의도를 세라는 잘 알 수 있었다. 다크가 진실을― 그가 아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제니는 생각한 것이겠지.
"그랬었군. 제니가 배후에 있었던 셈이로군. 나는 전부 스스로 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화나셨어요?"
세라는 걱정스러운 듯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냐, 여보. 화나지 않았어. 제니가 결국 나 자신보다도 나에 관해 잘 알고 있었던 셈이지. 이제 모두가 행복해진 셈이야. 당신은 당신 눈 속에 사랑이 있으니까. 나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으니까. 그리고 제니는 오빠가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말이야."
세라는 머리를 남편의 어깨에 기대고, 남편의 뺨은 세라의 이마에 포개어졌다.
주위는 온통 정적에 싸여 있었다. 태양은 급속히 떨어져 곧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에 보랏빛 관을 씌워 줄 것이다. 하지만 그 직전, 짧은 순간 황혼의 간주곡처럼 유적 위의 구름은 빨갛게 물들고 저 멀리 있는 산이 불타오르듯 주홍색의 심연 속으로 녹아들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지구는 천천히 돌아 태양을 또 한쪽 반구(半球)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붉은색의 그림자는 이제 얼마 남지 않게 되고, 신전의 계단 위에 앉아 있는 세라와 다크 위에만 모여들고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
깊고 엄숙한 침묵 속에서 다크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춥지 않소?"
다크는 아내를 끌어안아 그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살짝 대었다.
"아니에요, 춥지는 않지만 슬슬 돌아가야죠."
정적 속에 만족스러운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아요."
"나의 귀여운 사람, 그러지 말아요."
세라는 웃었다.
다크의 다정한 손이 세라를 일으켜 세웠다. 다크는 세라를 품안에 안고 조용하면서도 감동이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의 아내가 다른 여자들 전부를 합친 것 이상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어째서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을까 하는 듯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사랑하는 사람…"
다크는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 세라는 수줍어하며 거기 호응했다. 그러나 이윽고 그의 열정이 세라의 내부에 새로운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세라는 자기의 사랑을, 그리고 욕망을 그에게 알리려는 듯 뜨거운 키스를 끝냈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떠나는 거야, 오늘 밤부터!"
다크의 목소리는 갈라지긴 했어도 끝없는 정다움이 서려 있었다. 행복감이 세라의 몸 전체에 넘쳤다.
"아테네에서 계속 지내겠소, 그렇지 않으면 베이루트로 가보겠소?"
세라의 눈은 빛났다.
"나는 한 번 더 베이루트에 가보고 싶어요."
그의 눈은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장난스럽게 깜빡거렸다. 그 의미를 깨달은 세라의 은방울 같은 웃음소리가 조용한 신전에 울렸다.
"이번에는 나에게 신경을 좀 써주세요."
그때의 슬펐던 일을 생각하고 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아주 영원토록…"
그는 아내의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은 바싹 다가서서 보랏빛으로 물든 정적 속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별이 빛나기 시작하고, 두 사람의 뒤에서는 거대한 신전과 이교의 신들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