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이육사(1904~1944)

강(江) 건너간 노래

광야

광인의 태양

교목(喬木)

근하석정선생육순(謹賀石庭先生六旬)

나의 뮤-즈

남한산성

노정기(路程記)

독백

만등동산(晩登東山)

바다의 마음

바치리

반묘(班猫)

서울

서풍(西風)

소공원(小公園)

소년에게

실제(失題)

아미(蛾眉) - 구름의 백작부인(伯爵夫人)

아편(鴉片)

연보(年譜)

일식(日食)

잃어진 고향

자야곡(子夜曲)

절정(絶頂)

주난흥여(酒暖興餘)

청포도

초가(草家)

춘수 삼제(春愁 三題)

파초

편복(??)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해조사(海潮詞)

해후(邂逅)

호수

화제(畵題)

황혼

 

 

 

강(江) 건너간 노래

이육사

 

섣달에도 보름께 달 밝은 밤

앞내강(江) 쨍쨍 얼어 조이던 밤에

내가 부른 노래는 강 건너갔소

 

강 건너 하늘 끝에 사막도 닿은 곳

내 노래는 제비같이 날아서 갔소

 

못 잊을 계집애 집조차 없다기에

가기는 갔지만 어린 날개 지치면

그만 어느 모랫벌에 떨어져 타서 죽겠죠.

 

사막은 끝없이 푸른 하늘이 덮여

눈물 먹은 별들이 조상 오는 밤

 

밤은 옛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

한 가락 여기 두고 또 한 가락 어드멘가

내가 부른 노래는 그 밤에 강 건너갔소.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1939년>

 

 

 

광인(狂人)의 태양

이육사

 

분명 라이풀선(線)을 튕겨서 올라

그냥 화화(火華)처럼 살아서 곱고

 

오랜 나달 연초(煙硝)에 끄스른

얼굴을 가리면 슬픈 공작선(孔雀扇)

 

거츠는 해협마다 흘긴 눈초리

항상 요충지대(要衝地帶)를 노려 가다

 

 

 

교목(喬木)

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근하석정선생육순(謹賀石庭先生六旬)

이육사

 

천수사옹유육순(天壽斯翁有六旬)

창안호발좌참신(蒼顔皓髮坐참新)

경래일세응다감(經來一世應多感)

요억향산입몽빈(遙憶鄕山入夢頻)

 

천수가 이 늙은이에게 육순이 되었으니

맑은 얼굴에 흰머리 앉음새가 새로워라

지내 온 한세상 느낌이 많을 텐데

멀리 고향산이 꿈에 자주 오더라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쟎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城)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나의 뮤-즈

이육사

 

아주 헐벗은 나의 뮤―즈는

한번도 기야 싶은 날이 없어

사뭇 밤만을 왕자처럼 누려 왔소

 

아무것도 없는 주제언만도

모든 것이 제 것인 듯 버티는 멋이야

그냥 인드라의 영토를 날아도 다닌다오

 

고향은 어디라 물어도 말은 않지만

처음은 정녕 북해안 매운 바람 속에 자라

대곤(大鯤)을 타고 다녔단 것이 일생의 자랑이죠

 

계집을 사랑커든 수염이 너무 주체스럽다도

취하면 행랑 뒷골목을 돌아서 다니며

복보다 크고 흰 귀를 자주 망토로 가리오

 

그러나 나와는 몇 천겁(千劫) 동안이나

바로 비취가 녹아나는 듯한 돌샘가에

향연이 벌어지면 부르는 노래란 목청이 외곬수요

 

밤도 지진하고 닭소리 들릴 때면

그만 그는 별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고

나는 촛불도 꺼져 백합꽃밭에 옷깃이 젖도록 잤소

 

 

 

남한산성

이육사

 

넌 제왕(帝王)에 길들인 교룡(蛟龍)

화석(化石) 되는 마음에 이끼가 끼어

 

승천하는 꿈을 길러 준 열수(洌水)

목이 째지라 울어예 가도

 

저녁 놀빛을 걷어 올리고

어디 비바람 있음직도 않아라.

 

 

 

노정기(路程記)

이육사

 

목숨이란 마 - 치 깨어진 뱃조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을이 한구죽죽한 어촌보다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 매었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를 밀항하는 짱크와 같애

소금에 절고 조수(潮水)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릿한 밤 암초를 벗어나면 태풍과 싸워 가고

전설에 읽어 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 하는

그곳은 남십자성이 비쳐 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처럼 발목을 에워쌌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인 양

다 삭아 빠진 소라 껍질에 나는 붙어왔다

머-ㄴ 항구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을 들여다보며

 

 

 

독백

이육사

 

운모(雲母)처럼 희고 찬 얼굴

그냥 주검에 물든 줄 아나

내 지금 달 아래 서서 있네

 

돛대보다 높다란 어깨

얕은 구름 쪽 거미줄 가려

파도나 바람을 귀밑에 듣네

 

갈매긴 양 떠도는 심사

어디 하난들 끝간 델 아리

오롯한 사념을 기폭에 흘리네

 

선창(船窓)마다 푸른 막 치고

촛불 향수에 찌르르 타면

운하(運河)는 밤마다 무지개 지네

 

박쥐 같은 날개나 펴면

아주 흐린 날 그림자 속에

떠서는 날쟎은 사복이 됨세

 

닭 소리나 들리면 가랴

안개 뽀얗게 내리는 새벽

그곳을 가만히 내려서 감세

 

 

 

만등동산(晩登東山)

이육사

 

복지당천석(卜地當泉石) 상환공한양(相歡共漢陽)

거작과심대(擧酌誇心大) 등고한일장(登高恨日長)

산심금어냉(山深禽語冷) 시성야색창(詩成夜色蒼)

귀주나하급(歸舟那何急) 성월만원방(星月滿圓方)

여(與) 석초(石艸), 여천(黎泉), 춘파(春坡), 동계(東溪), 민수(民樹) 공음(共吟)

 

천석(泉石) 좋은 곳을 택하여

서로 즐겨서 서울에 같이 있더라

술잔을 드니 마음이 큰 것을 자랑하고

해가 다 지도록 높은 곳에 올랐더라

산이 깊으니 새의 지껄임이 차고

시(詩)를 이루매 밤빛이 푸르러라

돌아가는 배가 왜 이리 급한가

별과 달이 천지에 가득하다

 

 

 

이육사

 

흐트러진 갈기

후줄근한 눈

밤송이 같은 털

오! 먼 길에 지친 말

채찍에 지친 말이여!

 

수굿한 목통

축 처-진 꼬리

서리에 번쩍이는 네 굽

오! 구름을 헤치려는 말

새해에 소리칠 흰말이여!

 

 

 

바다의 마음

이육사

 

물새 발톱은 바다를 할퀴고

바다는 바람에 입김을 분다.

여기 바다의 은총이 잠자고 있다.

 

흰 돛(白帆)은 바다를 칼질하고

바다는 하늘을 간질러 본다.

여기 바다의 아량이 간직여 있다.

 

낡은 그물은 바다를 얽고

바다는 대륙을 푸른 보로 싼다.

여기 바다의 음모가 서리어 있다.

 

 

 

바치리

이육사

 

산아,

나는 너의 장엄함을 찬미하지 않으련다

 

바다야,

나는 너의 광대함을 노래하지 않을 것이다

 

바람과 파도야,

나는 너희들의 가없는 위력을 기리지 않으리라

 

그러나

저 눈 땅위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풀꽃

고통을 호소할 데도 없이

길가 어둠 속에 앉은 고아와 과부

 

사막의 열기에

죽어서도 고향에 가고 싶은 어린제비

 

그들에게는,

천지간에 모든 이름 없는 불행들에게는

 

바치리,

 

내 가슴의 열기와

혈관 속의 피와

영혼의 빛을 바치리

?

나의 시 노랫소리가 울리는 한순간

하늘밖 구름이 너희들에게 기쁨을 직조해주고

무지개다리를 놓아주며

영원한 소요(逍遙)를 가리켜 보일 것이니

 

맑게 울리는 노랫소리 안에서

끝없는 고통은 사라지리라

 

 

 

반묘(班猫)

이육사

 

어느 사막의 나라 유폐된 후궁(后宮)의 넋이기에

몸과 마음도 아롱져 근심스러워라

 

칠색(七色) 바다를 건너서 와도 그냥 눈동자에

고향의 황혼을 간직해 서럽지 않뇨.

 

사람의 품에 깃들면 등을 굽히는 짓새

산맥을 느낄사록 끝없이 게을러라.

 

그 적은 포효는 어느 조선(祖先) 때 유전이길래

마노(瑪瑙)의 노래야 한층 더 잔조로우리라.

 

그보다 뜰 아래 흰나비 나즉이 날아올 땐

한낮의 태양과 튤립 한 송이 지킴직하고

 

 

 

산(山)

이육사 

 

바다가 수건을 날여 부르고

난 단숨에 뛰여 달여서 왔겠죠

천금(千金)같이 무거운 엄마의 사랑을

헛된 항도(航圖)에 역겨 보낸 날

그래도 어진 태양(太陽)과 밤이면 뭇별들이

발아래 깃들여 오오

그나마 나라나라를 흘러 다니는

뱃사람들 부르는 망향가(望鄕歌)

그야 창자를 끊으면 무얼하겠오

 

 

 

서울

이육사

 

어떤 시골이라도 어린애들은 있어 고놈들 꿈결조차 잊지 못할 자랑 속에 피어나 황홀하기 장미빛 바다였다.

밤마다 야광충들의 고운 불 아래 모여서 영화로운 잔체와 쉴 새 없는 해조(諧調)에 따라 푸른 하늘을 꾀했다는 이야기.

온 누리의 심장을 거기에 느껴 보겠다고 모든 길과 길들 핏줄같이 엉클어서 역마다 느릅나무가 늘어서고

긴 세월이 맴도는 그 판에 고추 먹고 뱅-뱅 찔레 먹고 뱅-뱅 넘어지면 맘모스의 해골처럼 흐르는 인광(燐光) 길다랗게.

개아미 마치 개아미다 젊은 놈들 겁이 잔뜩 나 차마 차마하는 마음은 널 원망에 비겨 잊을 것이었다 깍쟁이.

언제나 여름이 오면 황혼의 이 뿔따귀 저 뿔다귀에 한줄씩 걸쳐 매고 짐짓 창공에 노려 대는 거미집이다 텅 비인.

제발 바람이 세차게 불거든 케케묵은 먼지를 눈보라마냥 날려라 녹아내리면 개천에 고놈 살무사들 승천을 할는지.

 

 

 

서풍(西風)

이육사

 

서릿빛을 함북 띠고

하늘 끝없이 푸른 데서 왔다.

 

강(江)바닥에 깔려 있다가

갈대꽃 하얀 위를 스쳐서.

 

장사(壯士)의 큰 칼집에 숨어서는

귀양 가는 손의 돛대도 불어 주고.

 

젊은 과부의 뺨도 희던 날

대밭에 벌레 소릴 가꾸어 놓고.

 

회한을 사시나무 잎처럼 흔드는

네 오면 불길할 것 같아 좋아라.

 

 

 

소공원(小公園)

이육사

 

한낮은 햇발이

백공작(白孔雀) 꼬리 위에 함북 퍼지고

 

그 너머 비둘기 보리밭에 두고 온

사랑이 그립다고 근심스레 코고을며

 

해오래비 청춘을 물가에 흘려보냈다고

쭈그리고 앉아 비를 부르건마는

 

흰 오리 떼만 분주히 미끼를 찾아

자무락질 치는 소리 약간 들리고

 

언덕은 잔디밭 파라솔 돌리는 이국소녀(異國少女) 둘

해당화 같은 뺨을 들어 망향가도 부른다.

 

 

 

소년에게

이육사

 

차디찬 아침 이슬

진주가 빛나는 못가

연꽃 하나 다복히 피고

 

소년아 네가 낳다니

맑은 넋에 깃들여

박꽃처럼 자랐어라

 

큰 강 목 놓아 흘러

여울은 흰 돌쪽마다

소리 석양을 새기고

 

너는 준마 달리며

죽도(竹刀) 저 곧은 기운을

목숨같이 사랑했거늘

 

거리를 쫓아다녀도

분수(噴水) 있는 풍경 속에

동상답게 서 봐도 좋다

 

서풍(西風) 뺨을 스치고

하늘 한가 구름 뜨는 곳

희고 푸른 지음을 노래하며

 

노래 가락은 흔들리고

별들 춥다 얼어붙고

너조차 미친들 어떠랴

 

 

 

실제(失題)

이육사

 

하늘이 높기도 하다

고무풍선 같은 첫겨울 달을

누구의 입김으로 불어 올렸는지?

그도 반 너머 서쪽에 기울어졌다

 

행랑 뒷골목 휘젓한 상술 집엔

팔려 온 냉해지(冷害地) 처녀(處女)를 둘러싸고

대학생의 지질숙한 눈초리가

사상선도(思想善導)의 염탐 밑에 떨고만 있다

 

라디오의 수양강화(修養講話)가 끝이 났는지?

마-장 구락부 문간은 하품을 치고

삘딩 돌담에 꿈을 그리는 거지새끼만

이 도시의 양심을 지키나 보다

 

바람은 밤을 집어삼키고

아득한 까스 속을 흘러서 가니

거리의 주인공인 해태의 눈깔은

언제나 말갛게 푸르러 오노

 

 

 

아미(蛾眉)

이육사

 

향수(鄕愁)에 철나면 눈썹이 기나니요

바다랑 바람이랑 그사이 태어났고

나라마다 어진 풍속에 자랐겠죠.

 

짙푸른 깁장(帳)을 나서면 그 몸매

하이얀 깃옷은 휘둘러 눈부시고

정녕 왈쓰라도 추실란가 봐요.

 

햇살같이 펼쳐진 부채는 감춰도

도톰한 손결야 교소(嬌笑)를 가루어서

공주의 홀(笏)보다 깨끗이 떨리오.

 

언제나 모듬에 지쳐서 돌아오면

꽃다발 향기조차 기억만 서러워라

찬 젓대 소리에다 옷끈을 흘려 보내고.

 

촛불처럼 타오른 가슴속 사념은

진정 누구를 애끼시는 속죄라오

발아래 가득히 황혼이 나우리치오.

 

달빛은 서늘한 원주(圓柱) 아래 듭시면

장미(薔薇) 쪄 이고 장미(薔薇) 쪄 흩으시고

아련히 가시는 곳 그 어딘가 보이오.

 

 

 

아편(鴉片)

이육사

 

나릿한 남만(南蠻)의 밤

번제(燔祭)의 두렛불 타오르고

 

옥돌보다 찬 넋이 있어

홍역이 만발하는 거리로 쏠려

 

거리엔 노아의 홍수 넘쳐나고

위태한 섬 위에 빛난 별 하나

 

너는 그 알몸동아리 향기를

봄마다 바람 실은 돛대처럼 오라

 

무지개같이 황홀한 삶의 광영(光榮)

죄와 곁들여도 삶직한 누리.

 

 

 

연보(年譜)

이육사

 

`너는 돌다리에서 줘 왔다'던

할머니 핀잔이 참이라고 하자

 

나는 진정 강언덕 그 마을에

버려진 문받이였는지 몰라?

 

그러기에 열여덟 새봄은

버들피리 곡조에 불어 보내고

 

첫사랑이 흘러간 항구의 밤

눈물 섞어 마신 술 피보다 달더라

 

공명이 마다곤들 언제 말이나 했나?

바람에 붙여 돌아온 고장도 비고

 

서리 밟고 걸어간 새벽길 위에

간(肝)잎만 새하얗게 단풍이 들어

 

거미줄만 발목에 걸린다 해도

쇠사슬을 잡아맨 듯 무거워졌다

 

눈 위에 걸어가면 자욱이 지리라고

때로는 설레이며 파람도 불지

 

 

 

일식(日食)

이육사

 

쟁반에 먹물을 담아 비쳐 본 어린 날

불개는 그만 하나밖에 없는 내 날을 먹었다

 

날과 땅이 한 줄 위에 돈다는 그 순간만이라도

차라리 헛말이기를 밤마다 정녕 빌어도 보았다

 

마침내 가슴은 동굴보다 어두워 설레인고녀

다만 한 봉오리 피려는 장미 벌레가 좀치렸다

 

그래서 더 예쁘고 진정 덧없지 아니하냐

또 어디 다른 하늘을 얻어 이슬 젖은 별빛에 가꾸련다.

 

 

 

잃어진 고향

이육사

 

제비야 너도 고향(故鄕)이 있느냐

그래도 강남(江南)을 간다니

저노픈 재 우에 힌 구름 한 쪼각

제 깃에 무드면

두 날개가 촉촉히 젓겠구나

가다가 푸른 숲 우를 지나거든

홧홧한 네 가슴을 식혀나가렴

불행(不幸)이 사막(沙漠)에 떠러져 타죽어도

아이서려야 않겠지

그야 한떼 나라도 홀로 높고 빨라

어느 때나 외로운 넋이였거니

그곳에 푸른 하늘이 열리면

엇저면 네 새 고장도 될 범하이

 

 

 

자야곡(子夜曲)

이육사

 

수만 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날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라 치잖으면 못 살리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 소리

 

숨 막힐 마음속에 어디 강물이 흐르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맘에 들리라

 

수만 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

 

 

 

절정(絶頂)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주난흥여(酒暖興餘)

이육사

 

주기시정양양란(酒氣詩情兩樣란)

두우초전월성란(斗牛初轉月盛欄)

천애만리지음재(天涯萬里知音在)

노석청하사아한(老石晴霞使我寒)

여(與) 춘파(春坡), 석초(石艸), 민수(民樹), 동계(東溪), 수산(水山), 여천(黎泉) 공음(共吟)

 

술기운과 시정(詩情)이 두 가지 한창인데

북두성은 돌고 달은 난간에 가득하다

하늘 끝 만리 뜻을 아는 이 있으니

늙은 돌 맑은 안개가 나로 하여금 차게 하더라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淸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초가

이육사

 

구겨진 하늘은 묵은 얘기책을 편 듯

돌담울이 고성(古城)같이 둘러싼 산기슭

박쥐 나래 밑에 황혼이 묻혀 오면

초가 집집마다 호롱불이 켜지고

고향을 그린 묵화(墨畵) 한 폭 좀이 쳐.

 

띄엄띄엄 보이는 그림 쪼각은

앞밭에 보리밭에 말매나물 캐러 간

가시네는 가시네와 종달새 소리에 반해

빈 바구니 차고 오긴 너무도 부끄러워

술레짠 두 뺨 위에 모매꽃이 피었고.

 

그네줄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더니

앞내강(江)에 씨레나무 밀려 내리면

젊은이는 젊은이와 뗏목을 타고

돈벌러 항구로 흘러간 몇 달에

서릿발 잎 져도 못 오면 바람이 분다.

 

피로 가꾼 이삭에 참새로 날아가고

곰처럼 어린놈이 북극을 꿈꾸는데

늙은이는 늙은이와 싸우는 입김도

 

벽에 서려 성에 끼인 한겨울 밤은

동리의 밀고자(密告者)인 강물처럼 얼붙는다.

 

 

 

춘수 삼제(春愁 三題)

이육사

 

1

이른 아침 골목길을 미나리 장수가 길게 외고 갑니다.

할머니의 흐린 동자(瞳子)는 창공에 무엇을 달리시는지,

아마도 ×에 간 맏아들의 입맛을 그려나 보나 봐요.

 

 

2

시냇가 버드나무 이따금 흐느적거립니다,

표모(漂母)의 방망이 소린 왜 저리 모날까요,

쨍쨍한 이 볕살에 누더기만 빨기는 짜증이 난 게죠.

 

 

3

삘딩의 피뢰침에 아지랑이 걸려서 헐떡거립니다,

돌아온 제비 떼 포사선(抛射線)을 그리며 날아 재재거리는 건,

깃들인 옛 집터를 못 찾는 괴롬 같구려.

 

 

 

파초

이육사

 

항상 앓는 나의 숨결이 오늘은

해월(海月)처럼 게을러 은빛 물결에 뜨나니

 

파초 너의 푸른 옷깃을 들어

이닷 타는 입술을 축여 주렴

 

그 옛적 사라센의 마지막 날엔

기약 없이 흩어진 두 낱 넋이었어라

 

젊은 여인들의 잡아 못 논 소매 끝엔

고운 손금조차 아직 꿈을 짜는데

 

먼 성좌(星座)와 새로운 꽃들을 볼 때마다

잊었던 계절을 몇 번 눈 위에 그렸느뇨

 

차라리 천년 뒤 이 가을밤 나와 함께

빗소리는 얼마나 긴가 재어 보자

 

그리고 새벽 하늘 어디 무지개 서면

무지개 밟고 다시 끝없이 헤어지세

 

 

 

편복

이육사

 

광명을 배반(背反)한 아득한 동굴에서

다 썩은 들보라 무너진 성채(城砦) 위 너 홀로 돌아다니는

가엾은 박쥐여! 어둠의 왕자여!

쥐는 너를 버리고 부잣집 곳간으로 도망했고

대붕(大鵬)도 북해로 날아간 지 이미 오래거늘

검은 세기(世紀)의 상장(喪章)이 갈가리 찢어질 긴 동안

비둘기 같은 사랑을 한번도 속삭여 보지도 못한

가엾은 박쥐여! 고독한 유령이여!

 

앵무와 함께 종알대어 보지도 못하고

딱다구리처럼 고목을 쪼아 울리도 못하거니

마노보다 노란 눈깔은 유전(遺傳)을 원망한들 무엇하랴

서러운 주문일사 못 외일 고민의 이빨을 갈며

종족의 홰를 잃어도 갈 곳조차 없는

가엾은 박쥐여 영원한 보헤미안의 넋이여!

 

제 정열에 못 이겨  타서 죽은 불사조는 아닐망정

공산(空山) 잠긴 달에 울어 새는 두견새 흘리는 피는

그래도 사람의 심금을 흔들어 눈물을 짜내지 않는가!

날카로운 발톱이 암사슴의 연한 간을 노려도 봤을

너의 머-ㄴ 조선(祖先)의 영화롭던 한 시절 역사도

이제는 아이누의 가계(家系)와도 같이 서러워라!

가엾은 박쥐여! 멸망하는 겨레여!

 

운명의 제단에 가늘게 타는 향불마저 꺼졌거든

그 많은 새짐승에 빌붙일 애교라도 가졌단 말가?

상금조(相琴鳥)처럼 고운 뺨을 재롱에 팔지도 못하는 너는

한 토막 꿈조차 못 꾸고 다시 동굴로 돌아가거니

가엾은 박쥐여! 검은 화석(化石)의 요정이여!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이육사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꼭 한 개의 별을

십이성좌(十二星座) 그 숱한 별을 어찌나 노래하겠니

 

꼭 한 개의 별! 아침 날 때 보고 저녁 들 때도 보는 별

우리들과 아―주 친하고 그중 빛나는 별을 노래하자

아름다운 미래를 꾸며 볼 동방의 큰 별을 가지자

 

한 개의 별을 가지는 건 한 개의 지구를 갖는 것

아롱진 설움밖에 잃을 것도 없는 낡은 이 땅에서

한 개의 새로운 지구를 차지할 오는 날의 기쁜 노래를

목 안에 핏대를 올려가며 마음껏 불러 보자

 

처녀의 눈동자를 느끼며 돌아가는 군수야업(軍需夜業)의 젊은 동무들

푸른 샘을 그리는 고달픈 사막의 행상대도 마음을 축여라

화전(火田)에 돌을 줍는 백성들도 옥야천리(沃野千里)를 차지하자

 

다 같이 제멋에 알맞는 풍양(豊穰)한 지구의 주재자(主宰者)로

임자 없는 한 개의 별을 가질 노래를 부르자

 

한 개의 별 한 개의 지구 단단히 다져진 그 땅 위에

모든 생산의 씨를 우리의 손으로 휘뿌려 보자

영속처럼 찬란한 열매를 거두는 찬연(餐宴)엔

예의에 끌림 없는 반취(半醉)의 노래라도 불러 보자

 

염리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신이란 항상 거룩하시니

새 별을 찾아가는 이민(移民)들의 그 틈엔 안 끼어 갈 테니

새로운 지구에단 죄 없는 노래를 진주처럼 흩이자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다만 한 개의 별일망정

한 개 또 한 개 십이성좌(十二星座) 모든 별을 노래하자.

 

 

 

해조사(海潮詞)

이육사

 

동방(洞房)을 찾아드는 신부(新婦)의 발자취같이

조심스리 걸어오는 고이한 소리!

해조(海潮)의 소리는 네모진 내 들창을 열다

이 밤에 나를 부르는 이 없으련만?

 

남생이 등같이 외로운 이 서―ㅁ 밤을

싸고 오는 소리! 고이한 침략자여!

내 보고(寶庫)를 문을 흔드는 건 그 누군고?

영주(領主)인 나의 한 마디 허락도 없이.

 

코-가사스 평원을 달리는 말굽 소리보다

한층 요란한 소리! 고이한 약탈자여!

내 정열밖에 너들에 뺏길 게 무엇이료

가난한 귀양살이 손님은 파려하다.

 

올 때는 왜 그리 호기롭게 몰려와서

너들의 숨결이 밀수자(密輸者)같이 헐데느냐

오-그것은 나에게 호소하는 말 못 할 울분인가?

내 고성(古城)엔 밤이 무겁게 깊어 가는데.

 

쇠줄에 끌려 걷는 수인(囚人)들의 무거운 발소리!

옛날의 기억을 아롱지게 수놓는 고이한 소리!

해방을 약속하던 그날 밤의 음모를

먼동이 트기 전 또다시 속삭여 보렴인가?

 

검은 베일을 쓰고 오는 젊은 여승(女僧)들의 부르짖음

고이한 소리! 발밑을 지나며 흑흑 느끼는 건

어느 사원(寺院)을 탈주해 온 어여쁜 청춘의 반역인고?

시들었던 내 항분(亢奮)도 해조처럼 부풀어 오르는 이 밤에.

 

이 밤에 날 부를 이 없거늘! 고이한 소리!

광야를 울리는 불맞은 사자의 신음인가?

오 소리는 장엄한 네 생애의 마지막 포효!

내 고도(孤島)의 매태 낀 성곽을 깨트려 다오!

 

산실(産室)을 새어 나는 분만의 큰 괴로움!

한밤에 찾아올 귀여운 손님을 맞이하자

소리! 고이한 소리! 지축이 메지게 달려와

고요한 섬 밤을 지새게 하는고녀.

 

거인의 탄생을 축복하는 노래의 합주!

하늘에 사무치는 거룩한 기쁨의 소리!

해조는 가을을 불러 내 가슴을 어루만지며

잠드는 넋을 부르다 오-해조! 해조의 소리!

 

 

 

해후

이육사

 

모든 별들이 비취계단(翡翠階段)을 내리고 풍악 소리 바로 조수처럼 부풀어 오르던 그 밤 우리는 바다의 전당을 떠났다

가을꽃을 하직하는 나비 모양 떨어져선 다시 가까이 되돌아보곤 또 멀어지던 흰 날개 위엔 볕살도 따갑더라

머나먼 기억은 끝없는 나그네의 시름 속에 자라나는 너를 간직하고 너도 나를 아껴 항상 단조한 물결에 익었다

그러나 물결은 흔들려 끝끝내 보이지 않고 나조차 계절풍의 넋이 같이 휩쓸려 정치 못 일곱 바다에 밀렸거늘

너는 무슨 일로 사막의 공주(公主) 같아 연지 찍은 붉은 입술을 내 근심에 표백된 돛대에 거느뇨 오 - 안타까운 신월(新月)

때론 너를 불러 꿈마다 눈덮인 내 섬 속 투명한 영락(玲珞)으로 세운 집안에 머리 푼 알몸을 황금 정쇄(頂鎖) 족쇄(足鎖)로 매어 두고

귓밤에 우는 구슬과 사슬 끊는 소리 들으며 나는 이름도 모를 꽃밭에 물을 뿌리며 머-ㄴ 다음날을 빌었더니

꽃들이 피면 향기에 취한 나는 잠든 틈을 타 너는 온갖 화판(花瓣)을 따서 날개를 붙이고 그만 어디로 날아갔더냐

지금 놀이 내려 선창(船窓)이 고향의 하늘보다 둥글거늘 검은 망토를 두르기는 지나간 세기의 상장(喪章)같애 슬프지 않은가

차라리 그 고운 손에 흰 수건을 날리렴 허무의 분수령에 앞날의 깃발을 걸고 너와 나와는 또 흐르자 부끄럽게 흐르자

 

 

 

호수

이육사

 

내어달리고 저운 마음이련마는

바람에 씻은 듯 다시 명상하는 눈동자

 

때로 백조를 불러 휘날려 보기도 하건만

그만 기슭을 안고 돌아누워 흑흑 느끼는 밤

 

희미한 별 그림자를 씹어 노외는 동안

자줏빛 안개 가벼운 명모(瞑帽)같이 내려 씌운다.

 

 

 

화제(畵題)

이육사 

 

도회(都會)의 검은 능각(稜角)을 담은

수면(水面)은 이랑이랑 떨여

하반기(下半期)의 새벽같이 서럽고

화강석(花崗石)에 어리는 엽아(葉兒)의 찬꿈

물풀을 나근나근 빠는

담수어(淡水魚)의 입맛보다 애닳어라

 

 

 

황혼

이육사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맘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 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 십이성좌(十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할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을까

 

고비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인디안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 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오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정정(情情)이 사라지는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