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오페라(Innocent deception)
Rachel Lindsay
말을 마친 의사는 책상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았다. 맞은쪽 의자에 앉은 아가씨가 말없이 가만히 있자 다시 한번 설명을 되풀이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의사는 그녀의 눈이 반작 빛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그녀가 완전히 이해했음을 알았다.
"혹시나 싶으니 다시 한번 보아 주실 수는....." 아가씨는 어물어물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의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물론 선생님의 말씀이 틀림없어요. 벌써 몇 달 전부터 그런 징후가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좀 더 일찍 찾아오시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사정이 달라졌을까요?"
"역시 같은 충고를 했을 거요. 하지만 더 짧은 기간으로 끝났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6개월이란 금방 지나가게 마련이지요."
"그렇게 쉬운 일일 수는 없어요."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 앞으로 갔다. "거북도 아니니 6개월 동안 동면할 수도 없는 걸요."
"물론 가족은 있겠지요, 아니면 친척이나 사이좋은 친구라도? 개인적으로 나에게 진찰을 받으러 왔으니 생활이 어려운 것도 아닌 것 같고....."
"의료보험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웃음이 환자의 얼굴을 확 달라지게 만들어, 의사는 그 변화에 깜짝 놀랐다. 아마 그것은 환자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그것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름다운 여성-으로 그녀를 보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영국의 전원 풍경이 잘 어울릴 것 같은 귀여운 몸매였다. 장미빛을 띤 피부, 물들인 것이 아니라 타고난 골드브라운의 머리칼, 도도록하고 모양 좋은 약간 큼직한 입술, 보랏빛의 인상적인 눈망울-대학 시적에 이런 눈을 한 처녀와 사귀었지. 의사는 자신의 이런 생각에 당황하여 뭔가 의사다운 말을 생각해 내려고 헛기침을 했다.
"또 여기에 올 필요가 있을까요?"
"6개월 뒤에 오면 됩니다. 별다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6개월이 지나면 정말 좋아질까요?"
"완전히 좋아질 겁니다."
"재발의 가능성은요?"
"물론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내 충고를 어기면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수가 없지요."
하레 스트리트에서 본드 스트리트 쪽으로 걸어가면서 샤론 레인은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도 일을 계속할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일을 못하게 되어 버렸다. 겨우 6개월 동안이라지만, 만일 의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면 영원히 일을 못하게 될 것이다.
성대의 염증이 가라앉을 때까지는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리 심한 난관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그녀가 의탁하고 있는 에이전트는 이번 시즌에 지망 공연을 다니는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멤버는 모두 우수했으며, 잘디면 겨울의 런던 공연 계약이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이때에 이제는 그것도 거절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지방 순회를 싫어한다는 인상을 에이전트에게 줄지도 모른다. 전문의의 진단서를 제출한다고 해도 그녀를 위해서 일자리를 비워 두지는 않을 것이다. 경쟁이 치열한 이 세계에서는 하나의 역에 백여 명의 가수가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6개월 동안 어떻게 살아가야 좋단 말인가? 작년까지만 해도 정부 보조금이 나왔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끊어져 버렸고, 음악학교의 교수들을 찾아가 상의하자니 그들은 신입생을 가르치는 데 바빠 졸업생까지 돌봐줄 겨를이 없다.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면서 런던 교외의 조그마한 집들이 나란히 서 있는 거리로 들어선 샤론은, 이내 두 집이 한 동으로 되어 있는 주택의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뜰을 돌아 주방 문으로 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주방에서는 비슷한 나이의 젊은 여자가 무언가를 썰고 있다가 얼굴을 들고 샤론에게 미소를 띠었다.
"무척 일찍 돌아왔군." 그녀는 물을 끓이려고 전기포트의 스위치를 넣었다. "차를 마시고 싶다고 얼굴에 씌어 있어요."
"그보다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싶은 기분이에요."
"술이 어디 있는진 알지요? 얼마든지 드세요."
"농담이에요, 앤. 차를 들겠어요." 샤론은 두 개의 차잔을 준비하고 비스킷을 집었다.
"그래,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물이 끓자 찻잔에 차를 타르면서 앤이 물었다.
"생각했던 대로 앞으로 6개월 동안은 노래를 부르지 말래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앤은 차를 마시고는 볼에 흘러내린 금발을 쓸어 올렸다.
팀과 결혼한 지 6년이 지났으나 올케 앤은 신호 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6년, 고생이 많은 세월이었다. 샤론의 오빠 팀이 처음 취직한 회사에서 잉여 노동자가 되어 일자리를 잃게 되자 자기 자신의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 동안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빠듯한 생활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팀이 개발한 색다른 레코드플레이어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따라서 생활은 겨우 편해져 가고 있었다. 성공은 바로 요 앞의 모퉁이까지 와 잇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 그 모퉁이를 동아 온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리 기분 좋게 받아들여 준다 해도 샤론은 오빠 부부의 짐이 될 생각은 없었다.
"6개월이라면 별로 길지 않아요." 앤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1년이나 2년이 아닌 것이 다행이에요."
"차라리 그게 더 나은 지도 몰라요. 만일 그렇다면 완전히 노래를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을 테니까요."
"다른 일을 어떻게 할 수가 있겠어요? 내가 아는 한 샤론은 너무나 노래에 열중하고 있는 걸요."
"그러고 보면 앤은 무척 오래 전부터 날 알고 있었어요." 샤론은 웃었다. "늘 우리 집에 설탕을 비러 왔던 사람이 설마 올케가 될 줄을 몰랐죠."
"그것은 그저 핑계였어요." 앤이 말을 이었다. "사실은 팀을 만나고 싶었던 겨예요. 열두 살 무렵부터 그를 동경하고 있었는걸요. 그건 그렇고 샤론, 우리 쌍둥이와 같이 있어도 상관없다면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될 때까지 여기에 있어도 좋아요."
"고마워요, 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설령 노래는 부르지 못하더라도요! 임시 일자리를 찾을 생각이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
앤이 뭐라고 말하려고 했을 때 이층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사들이 깨어난 것 같군."
"내가 가서 데려오겠어요."
샤론은 이층으로 뛰어올라가 조그만 조카와 조카딸을 안아 올렸다. 둘은 두 살이라 돌보기에 제일 힘들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시기다.
"쉬를 했어요." 샤론은 두 어린아이를 안고 주방으로 돌아왔다. "우리 차를 마시자. 그리고 뜰에서 고모와 놀리고 할까?"
팀이 돌아오고 쌍둥이는 침대로 들어갔다. 저녁 뒷설거지가 끝나고 나서 샤론의 앞일이 다시 화제에 오른 것은 그날 밤 늦어서였다.
"밤낮 노래 의 레슨 밖에는 몰랐으니, 다른 일은 뭐 할 수가 있어야지." 팀이 바랬다. "하지만 판매 같은 일이 라도 좋다면 내 일을 거들어 주렴."
샤론은 고개를 저었다
"나를 위해 일부러 일자리를 만들 것은 없어요. 정말로 사람의 손이 필요한 데서 일하고 싶어요.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짐작도 가지 않지만."
"너는 얼굴도 예쁘고 대화법도 잘 알고 있어." 팀은 오빠다운 솔직성으로 말했다. "어디 접수계 같은 데서 일하는 것이 어떻겠니?"
"공기가 나쁜 실내에서 일하는 것은 목에 안 좋으니까 매점이나 사무실 근무는 그만 두겠어요."
"정원사 같은 일은 어때요?" 앤은 웃으며 말했다. 샤론이 거미나 지렁이라면 질색을 하는 것을 놀린 것이다.
샤론도 같이 웃었다.
"그것밖에 할일이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하니만 문제는 뜰일을 싫어한다는 것과, 정원 술의 지식이 제로라는 거예요."
"이런 것은 어떨까요." 앤은 석간신문을 집어 들었다. "구인 광고를 보니 이런 것이 실려 있어요." 그녀는 소리내어 읽었다. "일 많은 노신사. 현재의 메이드가 병으로 6개월 쉬는 동안 모든 가사를 맡아 줄 여자를 구함." 앤은 얼굴을 들었다. "어때요?"
"글쎄요. 가정부의 자격도 없고."
"하지만 요리 솜시가 좋고 다리미질도 일류가 아니에요? 아이들도 잘 다룰 수 있을 거예요."
"일 많은 노신사에게 어린아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 되지 않는데요."
"네가 노신사를 자극하지 않는 한 없겠지." 팀이 끼어들었다. "그건 그렇고, 그런 일자리를 찾아갈 것은 없어. 틀림없이 죽고 싶을 정도로 따분할 거야."
"그거야말로 나에게 필요한 일인지도 몰라요. 경쟁이 없는 단조로운 일, 게다가 장소는 런던 교외쯤 되겠지요?" 샤론은 신문에 손을 뻗었다. "주소나 전화번호가 실려 있나요?"
"소개소의 주소가 씌어 있어요, 하이 스트리트 44번지."
"내일 아침에 가볼 거예요."
"너무 급하게 덤비지 말아라." 팀이 충고했다. "서두르는 거지는 어떻다고 하는 말도 있지 않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도 있어요." 앤과 샤론이 똑같이 말하는 바람에 팀은 두 여자의 공격은 당해 낼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두 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신원은 확인해 두는 것이 좋아. 혹시 어쩌면 젊은 여자나 낚으려는 기운 좋은 50대의 남자일 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그런 충고는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튿날 아침 소개소에 가보니 이미 그 일자리는 다른 사람이 차지한 뒤였다.
"하지만 일자리는 다른 것도 많이 있어요." 잿빛 머리에 가슴이 풍만한 중년 부인 미세스 엘시가 말했다.
"될 수 있다면 시골에서 일하고 싶어요." 샤론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6개월 이상은 계속할 수가 없어요..."
"어마, 무척 정직하시네. 요즘의 아가씨들은 입으로는 십 년은 일할 것같이 말해 놓고는 일주일 만에 도망쳐 버리기 일쑤인데."
"만일 제가 일을 밭게 되면 계약은 틀림없이 지킬 거예요."
미세스 엘시는 혼잣말을 하면서 눈앞에 있는 장부를 쭉 훑어보았다.
"하이드 파크 옆 조그만 타운하우스에 일자리가 있어요. 젊은 독신 남자. 주말이면 거의 집에 없지만 평상시는 손님이 많은 것 같군요. 그가 구하고 있는 것은 젊고 미인이고..." 미세스 엘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 되겠어요. 이런 일은 할 수가 없을 거예요."
"그것은 거절하겠어요." 샤론은 야무지게 말했다. "난 침대의 상대로서 아니라 가정부로서 일하고 싶어요."
미세스 엘시는 깜짝 놀라 샤론을 쳐다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한테 안성맞춤의 일이 있어요. 시골이고, 많은 사용인들이 일하는 훌륭한 저택-겨울에는 쓸쓸할 만큼 조용하지만, 6개월만 일한다면 이상적일 거예요. 여름 동안은 여러 사람이 드나들어요."
"많은 사람이 일한다면 난 뭘 해야 하지요?"
"여덟 살 난 여자아이를 돌보는 거예요."
샤론은 실망했다. 조카와 조카딸을 돌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보다 큰 아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응석받이로 자랐을지도 모를 여덟 살의 소녀를 돌본다는 것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아무래도.... 아까도 말한 것처럼 6개월밖에는 일하지 않을 거고..."
"저쪽에서도 6개월이라는 조건부였어요. 그 아이는 가을부터 기숙학교에 들어가거든요."
"어머나, 그렇게 어린 아인데?"
"어머니가 없고 외동딸이기 때문에 미스터 샌더슨은 딸이 같은 또래의 친구오 함께 지내는 거이 더 즐거울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겨울 동안 미스터 샌더슨은 늘 여행으로 짐을 비우니까요."
가장 필요한 것말고는 모든 것이 주어져 있는 소녀에게 동정을 느껴 샤론은 희미하게 이마를 찌푸렸다.
"정말 아이를 돌볼 줄 몰라요? 페이링스는 참 아름다운 곳인데..."
"페이링스라고요?"
"네. 거기를 알아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페이링스를 알고 있지요. 그 일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겠어요?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니 다시 생각해 보겠어요."
"물론 할 수 있고말고요. 그 아이는 여덟 살이지만 나이보다 조숙하다는군요. 환경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늘 오페라 가스들이 드나드는 집에서 살기란 어른으로서도 자극이 너무 크거든요. 하물며 여덟 살의 아이로서는 더욱 그렇지요. 미스터 샌더슨은 마치 열여덟 살 난 딸을 다루듯이 그 아이를 대한다는 군요. 그 아이처럼 많은 옷을 가진 아이는 없을 거래요. 만일 내가..." 미세스 엘시는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방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지요?"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렇지. 당신은 그저 마가렛을 학교에 보내고 마중가고, 주말이나 휴일에 같이 지내 주면 되는 거예요."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군요."
"정말 간단해요."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사람이 붙어 있지를 못했을 까요. 가정교사가 이미 있었을 텐데요."
"자기가 그만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모두 미스터 샌더슨이 내보냈대요."
"미세스 샌더슨은 어떤 분이지요?"
"부인은 없어요."
샤론은 약간 실망했다. 그러나 페이링스에 머물면서 오페라만을 위해 세워진 극장에서 노래를 듣고, 여름 시즌 동안 거기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그처럼 까다로운 분이라면 나도 마음에 안 들어 할지도 모르겠군요."
"그것은 당신이 음악에 얼마나 관심이 있느냐에 달렸지요."
"그게 무슨 말이지요?"
"당신은 노래를 부르나요?"
"아니요." 샤론은 분명하게 부정했다.
"다행이군요. 요전에 소개한 아가씨는 글쎄 미스터 샌더슨이 방으로 들어올 때마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지 뭐예요! 그 아가씨는 2주를 넘기지 못했대요. 그전의 사람은 3주뿐이었구요."
샤론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자기가 놓인 야릇한 입장에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가정교사는 미스터 샌더슨에게 자기 노래를 인정받고 싶어서 가정교사가 되었군요? 그래서 쫓겨난 겨예요?"
"유감스럽지만 그래요." 미세스 엘시의 목에 걸린 모조 진주가 반짝 빛났다. "설마 당신까지 그런 목적으로 가정교사가 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이에요. 노래 부르다니 생각도 못한 일이에요."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군요." 미세스 엘시는 전화를 끌어당겼다. "바로 면접 약속을 해야겠군요. 언제라도 그 일을 시작할 수 있겠죠?"
"네, 지금부터라도요."
"됐어요." 미세스 엘시는 번호를 누르고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수화기를 놓았다. "오늘 정오에 이튼 스퀘어로 가주겠어요? 지금 출발하면 충분히 갈 수 있을 텐데요."
"하지만 페이링스에는...?"
"네, 하지만 그전에 면접을 받아야 해요. 미스터 샌더슨은 이 건에 관한 것을 모두 미국인 친구 미세스 맥클린에게 일임하고 있어요. 그는 너무나 바빠 사용인의 인선에까지 마음을 쓸 수가 없거든요. 이튼 스퀘어의 주소와, 시간에 늦어질 경우에 대비해서 전화번호를 써놓았으니, 이것을 가져가세요."
"늦지는 않을 거예요. 지금 바로 출발하겠어요."
"그럼 잘 가요, 미스 레인. 틀림없이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2.
이튼 스퀘어로 향하면서 샤론은, 페이링스 오페라에 대해서 듣고 읽고 한 것을 이것저것 떠올리고 있었다. 페이링스 오페라는 30년가량 전에 폴 샌더슨의 아버지가 취미로 시작한 것으로 아버지가 죽자 그 아들이 같은 정열을 기울여 이어받아 왔다. 그는 그것 말고도 사업을 크게 벌이고 있어서 오페라의 수입을 기대하지 않아도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따라서 오페라의 이익은 다시 오페라 극장에 재투자되어 설비를 더욱 좋게 하기 위해서 쓰인다는 것이었다.
며친 전의 일요판 신문에도 폴 샌더슨에 관한 기사가 길려 있었으며, 그 내용은 단편적으로나마 샤론의 머리에 남아 있었다. 그것에 의하면, 취미로 시작했던 오페라 공연은 이제 그에게는 집념에 가까운 것이 되어있는 것 같았다. 그 시즌의 오페라 상연 종목을 결정하고 가수를 뽑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감독을 지명하는 것도 그 자신이었으며, 높은 예술성을 지키고 될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오페라를 보게 하려는 이사에 불타는, 의욕이 왕성한 집단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페이링스 오페라의 지방 공연 그룹도 발족하였다. 거기서 재능 있는 신인들이 언젠가는 페이링스에서 노래 부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활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그룹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고벤트가든이나 메트로폴리탄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며, 샤론 자신도 폴 샌더슨의 오디션을 받을 기회가 있으면 바로 알려 달라고 이미 그녀의 에이전트에게 부탁해 놓았던 것이다.
"슈투트가르트 오페라나 유럽의 어느 다른 오페라라면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가 있겠지만." 에이전트인 맥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맥스는 전통적인 폴란드계의 기질을 가진 남자로, 자기 사무실에 소속되어 있는 가수를 마치 친자식처럼 다루며 기쁨도 슬픔도 나누어 가지는 열혈한이었다. 샤론이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듣자 그는, 자기가 일을 못하게 된 것처럼 애석해 하고, 일자리를 가지게 될 때까지 생활비를 대주겠다고까지 말해주었다. 그의 따뜻한 마음은 고맙기 이를 데 없었으나, 샤론은 누구의 신세도 지기 싫었기 때문에 그것을 거절했다.
"제 힘으로 서야지요. 정신적으로 자립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에요."
"먹는 것도 중요해." 맥스는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한 가지만은 약속해 주지 않겠어? 만일 뜻대로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우리 집으로 오는 거야. 그러면 굶어 죽지는 않을 테니까."
샤론은 맥스의 따뜻한 인정이 생각나 미소가 떠올랐다. 오페라 하우스의 주인 딸을 돌보러 페이링스에 갈지도 모른다고 하면 그는 어떤 얼굴을 할까? 동경의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적어도 페이링스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면접 때 상대방에게 좋은 이상을 주는 것이다.
고급 아파트의 최상층에 있는 방의 벨을 누르니, 유니폼 차림의 메이드가 문을 열고는 널찍한 거실로 샤론을 안내했다. 그 방은 미국식으로, 장의자 위에는 요란한 색상의 작은 쿠션이 포개져 있고, 여러 가지 모양의 작은 테이블 위에는 갖가지 잡지가 흩어져 있으며, 한쪽 벽을 따라 미국 독립 이전 양식의 가구가 늘어세워져 있었다. 창밖으로는 베란다가 있고, 그 보호 벽 위에는 갖가지 색깔의 히아신드가 흐드러지게 피어서 유리 이쪽까지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눈길을 빼앗기고 있으려니 두꺼운 카펫을 밟는 사람의 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30대 전반의 여자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가족 교제를 해온 오랜 친구 같은 이미지는 아니라고 샤론은 생각했다. 폴 샌더슨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가 페이링스의 저택의 사용인에 대한 면접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 벌써 그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스 레인이지요? 난 맥클린이라고 해요. 만나서 바가와요." 그녀는 보스턴 사투리로 자기소개를 하고 샤론에게 의자를 권하고, 자기도 우아하게 소파에 몸을 담았다. 늘씬한 키에 한 치의 틈도 없는 우아함. 그러나 갈색 두 눈 사이는 너무 좁았고, 연지를 넓게 말랐으나 입술은 얇았다. 이야기할 때 조금 콧구멍이 벌어지는 코의 선도 가늘고, 자신만만하게 움직이면서도 신경질적인 인상을 주었다.
"예상보다 훨씬 젊은 분이군요."
"스물 세 살이에요."
"나이보다 어려 보여요. 키가 작은 탓인지도 모르겠군요."
샤론은 의자 위에 몸을 고쳐 앉았다.
"158센티고 참 건강해요." 한 말이 우스워 샤론은 저도 모르게 미소했다.
미세스 맥클린도 미소를 지었으나 조금도 즐거운 기색은 아니었다.
"당신에 대해서 말해 주겠어요? 시골에 갈면서 응석받이 아가씨를 돌볼 그런 타이프는 아닌 것 같은데."
"시골에서 일하고 싶어요. 시골의 여름은 누부시다고 생각해요."
"페이링스라는 곳은 아시지요?" 미세스 맥클린은 살피는 것 같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전 노래는 한마디도 부르지 않으니까요."
"그래요?" 미세스 맥클린은 편안한 자세로 긴 다리를 꼬았다. 초록의 실크 스커트가 가볍게 떠오르더니 다시 무릎 주위에 가라앉았다. "그 점은 유리하군요. 미세스 엘시한테 들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지금까지는 무대 진출에 열중한 아가씨를 고용하여 난처한 꼴을 당했어요. 그 일로 난 책임을 느껴요. 그 세 아가씨를 채용한 것은 나였으니까요. 그래서 앞으로는 신중하게 면접을 하기로 했는데, 그리도 괜찮겠지요? 나로서도 다시는 가수 지망의 아기씨를 채용할 수가 없거든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가렛과 잘 지낼 수 있는 조용하고 분별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게도 다루기가 어려운 아인가요?"
"상당히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이제 겨우 여덟 살이라고 들었는데요?"
"겨우 여덟 살이라니요!" 미세스 맥클린은 흥 하고 코를 울렸다. "마가렛은 너무나 응석을 바다 줘서 버릇도 없는 되바라진 아이예요. 만일 내 딸이라면...." 그녀는 거기서 얇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뭐 현실로는 내 딸도 아니고, 어차피 반년 뒤에는 기숙학교에 들어가게 되어 있지요. 폴, 미스터 샌더슨은 다행히도 그 점에 있어서는 내 충고를 들어주었어요."
그렇구나, 아이를 기숙학교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미세스 맥클린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었구나. 첫 대면의 순간부터 가볍게 느껴지던 이 여자에 대한 저항감은 샤론의 마음속에서 더 부풀어올랐다. 여덟 살에 기숙학교에 들어가는 아이가 있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샤론은 그런 방식에 찬성할 수가 없었다. 1년 중 9개월 동안이나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떠맡긴 다는 것은 가정을 가지는 의미가 없는 것이나 같지 않은가.
미세스 맥클린의 목소리에 샤론은 고개를 돌렸다.
"달리 무슨 경험이 있나요? 신원을 보증할 만한 뭐가 있어요?"
그런 질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샤론은, 마음이 놓여 고개를 끄덕였다.
"고교 시절에 해마다 서머 캠프에서 아이들을 돌봐왔어요. 하지만 가정교사로 일한 경험은 없어요. 그뒤 대학에 진학해서는..."
"아이를 돌보는 것은 속기다 타이프하고는 달라요." 미세스 맥클린은 샤론이 비서학과에 진학한 것으로 멋대로 단정한 것 같았다. "오후 다섯 시가 되었다고 아이를 서랍에 집어넣을 수도 없고, 온종일, 더구나 주말에도 돌봐야 하니까요. 시즌 중에는 미스터 샌더슨은 마가렛을 위해서 시간을 낼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여덟 살 난 소녀와 잘 해나갈 자신은 있어요. 원래 아이를 좋아하고, 아이들도 절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아이를 돌보는 것은 그저 좋아하고 싫어하고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죠."
샤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아이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보통의 아이예요. 다만 극단적으로 성질이 나빠져 있을 뿐이에요. 지금까지 미스터 샌더슨은 그 아이를 한 여성으로 대해 왔고, 그 아이는 너무나 주제넘은 아이가 되어 버렸어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마가렛을 대하자면 애를 먹을 거예요."
"그것은 대하는 방법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 아이와 어떤 관계를 이루어 나가느냐 하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미세스 맥클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생각해 보겠어요, 미스 레인. 좀 더 경험이 있고 나이가 든 사람이 좋겠지만요. 당신처럼 젊고 매력 있는 사람이 조용한 시골 생활에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군요."
"시즌 중에는 페이링스가 조용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미세스 맥클린의 표정이 험악해졌고, 샤론은 자기가 한 말을 후회했다.
"설령 이 일을 당신한테 부탁하게 되어도, 당신이 거기에 모이는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는 없을 거예요. 미스터 샌더슨은 사적인 생활과 오페라 관계의 교제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으니까요."
"페이링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손님들 앞에 나갈 생각은 없어요. 난 그저 그런 분들이 자연스럽게 그 집에 드나들 거라 싶었을 뿐이에요."
"전에는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미세스 맥클린은 이야기를 마치려는 듯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생각이 바뀌면 미세스 엘시에게 연락하겠어요."
"테스트 기간만이라도 일하게 해줄 수 없을 까요?" 샤론은 간청 했다.
"생각해 보겠어요."
메인 스트리트 쪽으로 걸어가면서 샤론은 미세스 맥클린이 생각을 바꾸기는 틀린 노릇이라는 것을 느꼈다. 면접을 받으러 온 사람이 40대거나, 설령 젊어도 인물이 좋지 못한 아가씨라면 이야기는 달랐을 것이다. 성질이 나빠진 여덟 살 난 소녀를 돌보고 싶다는 것보다는, 일생의 일로 생각한 오페라의 세계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렬했다.
미스터 샌더슨을 직접 만날 수만 있다면! 그라면 젊고 매력이 있다는 이유로 가정교사를 거절하지는 않겠지. 그리고 소문대로 날카로운 인물이라면 상대방에게 무슨 속셈이 있는지 없는지쯤은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세스 맥클린에게 기대하고 있다가는 그를 만날 찬스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메인 스트리트로 들어서자 저 앞에 BOAC 터미널이 보였고, 또 그 앞에 빅토리아 역의 빌딩이 보이기 시작했다. 만일 미세스 맥클린과의 면접에서 패스했다면 내일이라도 페이링스행의 열차를 타고 빅토리아 역을 떠나게 되었을 텐데. 실망과 짜증으로 인해 샤론은 자기가 무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역 쪽으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점심 시간 무렵이기 때문에 개찰구 주위에는 사람이 없었고, 제일 가까운 플랫폼에는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기차가 만족스런 듯이 목청을 울리고 있었다.
"페이링스 왕복 2등." 샤론은 말하면서 유리 간막이 밑으로 돈을 밀어 넣었다.
열차가 페이링스에서 멈추는 것은 오페라 시즌뿐이었고, 요즘 같은 계절에는 헤이웓히스에서 내려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버스에 흔들리면서 갈 수밖에 없었다. 그 버스조차도 자주 지나다니지 않아, 마침 한 대를 놓쳐 버린 샤론은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3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 동안 초라한 카페에 들러 커피를 주문했는데, 값은 일류 카페 못지않았으나 맛은 형편없었다. 그리고 허술한 차림의 웨이트레스가 날라 온 퍼석퍼석한 샌드위치를 씹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버스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졸고 있던 샤론은 차장의 목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페이링스에서 내린다고 했지요?"
친절한 차장에게 샤례를 하고 샤론은 조그마한 마을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몇 채의 집과 조그만 가게가 늘어선 좁은 하이 스트리트가 오르막길이 되어 꼬불꼬불 이어지더니 이내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쪽은 저만치 달려가는 버스의 뒤꽁무니가 보였으나, 또한 길은 확 휘어 돌아가 있어 어디로 가는지 앞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퉁이에 서 있는 표지판이 페이링스 방향이라고 가리키고 있어서 샤론은 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손질이 잘 된 그 길을 따라 휘어진 모퉁이를 돌아가니 약 100미터 앞에 커다란 문이 보였다. 저것이 페이링스의 입구가 틀림없을 거야. 여기서 망설였다간 도망을 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샤론은 억지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기까지 와버린 지금, 자기의 무모한 행동이 후회가 되었다. 미스터 샌더슨이 면회를 거절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집에 있기는커녕 그는 지금 여행 중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전화로 그의 소재를 확인해 봤어야 했어. 하지만 만일 전화를 하기 위해 발을 멈추었더라면 여기까지 올 용기도 시들어져 버렸었을 것이다.
샤론은 돌대문을 지나 꽤 널찍하게 포장된 찻길 위에 섰다. 거기에는 또 하나의, 나무로 된 표지판이 서 있었으며, 오른쪽으로 가면 페이링스, 왼쪽으로 가면 하우스라는 것이 까만 글자로 간결하게 씌어 있었다. 하우스라는 것은 그의 저택이라는 뜻이겠지, 하고 짐작한 샤론은 표지판이 가리키는 외쪽으로 발길을 향했다. 찻길 양쪽으로는 아름답게 손질이 된 잔디가 펼쳐져 있고, 나무들조차도 매니큐어를 한 것처럼 깔끔하게 다듬어져 반짝이고 있었다. 머리 위로 가지가 넓게 펼쳐져 있는 커다란 나무 밑에서 나온 순간 눈앞에는 상상한 대로의 저택이 나타났다. 큰 저택이기는 했으나 너무 크다는 정도는 아니었고, 회색의 돌로 쌓은 벽은 초록빛의 덩굴로 덮여 있고, 창문은 봄의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집의 뒤쪽으로 나와 버린 것 같았다. 저택의 외벽을 따라 테라스가 뻗어 있고, 라운지체어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앞쪽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발을 옮기려는 순가, 아이의 목소리가 샤론의 발을 멈추게 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지요? 여기가 사람 사는 가정집이라는 걸 몰라요."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여기예요." 그 목소리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위를 봐요."
샤론은 가까이에 서 있는 밤나무를 따라 고개를 쳐들어 꼭대기 가지에 걸터앉아 있는 조그마한 모습을 보았다. 이파리 사이로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으나 진즈와 스웨트 셔츠를 입은 소녀였다.
"네가 마가렛이로구나?"
"매기예요. 난 마가렛이라고 불리기 싫어. 당신은 리나가 보낸 가정교사지요?"
"리나?"
"리나 맥클린 말이에요."
"아, 미세스 맥클린." 샤론은 망설였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지?"
"날 마가렛이라고 불렀기 때문에요. 그렇게 부르는 것은 그 사람뿐인걸요. 내가 그 이름을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아고 있으면서도."
조그마한 소녀의 마음속에 놀라운 적대감이 숨겨져 있는 것을 느꼈으나, 샤론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뭘 기다리지요?" 소녀는 물었다.
"네가 내려와 길은 안내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어. 집앞으로 돌아가 네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아빠는 당신이 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아니."
"그럼 만나지 않을 거예요. 약속하지 않은 사람은 만나지 않으니까."
샤론은 실망했으나 될수록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매기가 부탁하면 만나 줄지도 몰라. 자, 내려와서 안내해 줘."
"난 못해요."
"왜?"
"글쎄 내려갈 수가 없는 걸." 소녀는 갑자기 애처로운 목소리를 냈다. "움직일 수가 없어요. 소방대나 경찰을 불러 줘요. 이대로 있다간 굶어 죽을 겨예요."
"어머나, 무척 거창하구나." 샤론은 웃었다. "혼자서 거기까지 올라갔으니 못 내려올 것도 없잖아?"
"나무타기에 관해서는 통 모르는군요.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지 뭐예요!"
그제야 비로소 그 아이가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샤론은 깨달았다. 적어도 지상 6미터는 될 것 같았다. 기분 좋게 오른 것은 좋았으나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만 너무나 높아 겁이 났을 것이다.
샤론은 누구 도와 줄 사람이 없나 하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정원 손질하는 사람은 없어? 그 사람한테 사다리를 가져다 달라고 하면..."
"모두 점심을 먹으러 돌아가 버렸어요." 소녀는 말했다. "나도 점심을 먹고 싶은데. 배가 고파 눈앞이 아찔아찔해요."
꼭대기의 가지가 흔들려 샤론은 흠칫 놀랐다. 뛰어가 도움을 청해야 한다 싶었으나 소녀를 혼자 남겨 두기도 불안했다.
"당신이 도와주지 않겠어요? 내 손을 잠아 주면 살살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랫동안 나무에 올라 보지 않아서...."
그러나 숨을 삼키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샤론은 풀 위에 백을 내려놓고 나무 밑등에 발은 댔다.
"꼭 붙잡고 있어, 매기. 지금 가니까."
3
나무를 타는 솜씨는 걱정과는 달리 옛날 솜씨 그대로였다. 샤론은 생각보다 쉽게 나무의 반가량을 기어올랐다. 그 나무는 굵은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어 오르기에는 안성맞춤의 나무였다. 하지만 스커트 차림으로 으르기에는 힘이 들었고, 다시 땅 위에 내려섰을 때 어떤 꼴이 될지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을 걱정하기보다 하여튼 아이를 무사히 내려놓는 것이 선결 문제여서 샤론은 조심스럽게 계속 올랐다.
"매기, 어디 있지?" 대답이 없었다. "매기, 네가 안 보이는데."
"여기예요." 쾌활한 목소리가 아래에서 소리쳤다. "밑을 봐요."
가지를 꽉 붙잡고 샤론은 아파리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한 아래에-생각한 것보다 훨씬 아래에-얼굴빛이 좋기 않고, 머리를 뒤로 모아 묶은 마른 소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못 내려간다고 했잖아?"
"내겨오는 게 뭐가 어려워요!" 소녀는 즐거운 듯이 나무 둘레를 뛰어다녔다. "이번에는 당신이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군요. 사뭇 거기에 있으면 될 거예요. 그러면 리나도 가정교사를 보내는 것을 포기할 테니까. 그 여자는 너무 잔소리가 많고 남의 일에 끼어들기를 좋아해서 난 질색이야!" 그러더니 소녀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젖혀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쪽이 화를 터뜨리거나 공포를 나타내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샤론은 그 양쪽을 다 보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무척 사람을 속이는 솜씨가 좋구나. 뭣 때문에 이런 짓을 하지?"
"리나가 보낸 사람 같은 것 아빠를 만나게 하지 않겠어요. 그 여자가 우리 일에 간섭하는 것, 난 싫어요."
"미세스 맥클린이 날 고용한 줄 알아?" 샤론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지가 않아. 그래서 매기, 네 아빠를 직접 만나려고 하는 거야. 만나서 이야기하면 날 고용해 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당신도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은 거죠?" 소녀는 깔보듯이 물었다. "사람들이 다 그 모양이거든요."
"사실은 너와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다시 생각했어. 여기에서 내려가면 바로 런던으로 돌아갈 거야."
"어째서 여기 있고 싶지 않죠? 우리 집은 넓고 깨끗하고, 모두 당신을 여왕처럼 모실 텐데. 요전의 가정교사는 너무 먹어서 병이 날 지경이었어."
"그거 멋있군." 체중을 걸고 있는 가지가 흔들리는 바람에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 같았으나 그래도 샤론은 쾌활한 척했다. "하지만 아무리 여왕처럼 받들어 줘도 너와 같이 있고 싶지가 않아."
소녀는 한 발로 땅을 쾅 굴렀다.
"당신 같은 사람 싫어!"
"나도 그래." 샤론도 되받았다. "게다가 넌 미세스 맥클린과 생각이 똑같구나."
"어째서?"
"미세스 맥클린도 날 써줄 생각이 없었어. 너도 그렇지?"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샤론은 누구를 불러 달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그런 소리를 했다간 이 아이는 도망쳐 버릴지도 모른다. 누구도 모른 채 몇 시간이나 여기에 혼자 남겨져 보린다면?
"글쎄." 매기 샌더슨은 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찻길 쪽으로 걸어갔다. "정말 리나가 당신을 쓰기 싫어한다면 난 아빠한테 당신을 고용해 달라고 말할 거예요."
"먼저 내가 여기에서 내려갈 수 있게 해줘야지. 누구한테든 사다리를 가져오라고 해서...."
"사다리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어떻게 하면 내려올 수 있는지 가르쳐 줄게요. 나뭇가지가 두 갈래로 갈라진 데까지 가지를 따라 발을 내려요."
"두 갈래로 갈라진 데가 틀림없이 있니?"
"있어요. 난 늘 이 나무 위에서 사는 사람이에요."
샤론은 소녀의 대답에 미소를 띠며 몸의 힘을 빼고 천천히 발을 스쳐 내렸다. 매기의 말처럼 가지가 갈라진 곳에 발이 닿았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거기서 오른쪽 다리를 더 아래로 뻗어요. 하지만 너무 내려도 안 돼요, 당신은 키가 크니까. 그러면 발을 디딜 데가 있어요."
샤론은 시키는 대로 발을 뻗쳤다.
"다음은?"
"왼발도 똑같이 해요. 가지 반대쪽에 또 하나, 발을 걸 데가 있으니까."
이미 반쯤 내려오게 되어 샤론은 좀 자신을 되찾았다. 그때 멀리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구에게 흉한 꼴을 보일까 싶어 얼른 내려가려고 서두르는 순가, 까슬까슬한 나무껍질에 발이 미끄러져 굵은 가지를 붙잡은 것도 잠깐, 그녀는 풀 위에 그것도 방금 거기에 멈추어 선 남자의 발밑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으며 떨어져버렸다.
순간 숨이 콱 막혔다. 엉망으로 구겨진 드레스며 나뭇잎이 엉겨붙은 머리칼-이제 새삼스레 매무시를 가다듬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번쩍거리는 까만 구두와 회색의 슬랙스를 의식하고 샤론은 어떻게든 위엄을 갖추려고 일어섰다.
"밤송이를 찾기에는 아직 계절이 이른 것 같은데." 따뜻함을 느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아니면, 나무 위에서 명상이라도 하고 있었나?"
샤론은 얼굴을 들고 웃음의 흔적도 없는 잿빛 눈을 바라보았다.
"명상을 하려 했다면 좀 더 편한 자리를 택했을 거예요. 난...."
"날 도우려고 한 거예요, 아빠." 매기가 참견했다.
"그럼 넌 또 나무에 오르고 있었구나?"
"네. 그래서 그 사람이 날 내려 주려고 했어요."
"또 언제나처럼 <내려오지 못하는 불쌍한 아이>인 체를 했구나?"
소녀는 고개를 숙였고, 샤론은 그러는 아이를 보고 동정을 느꼈다. 어쩌면 잃게도 가는 몸매일까. 공기 좋은 시골에 살며 호사스런 식사를 하는 여덟 살 난 소녀라기보다 조그맣고 갸냘픈 요정과도 같았다.
"매기를 혼내지 마세요.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정말?"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바람에 샤론은 새삼 자기가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가 생각났다.
"혹시 괜찮다면 욕실을 좀 쓰고 싶은데요."
"내 방의 것을 쓰면 어때요?" 매기가 기운 좋게 말하며 샤론의 손을 잡아 끌었다.
샤론은 어깨너머로 그를 돌아보았다.
"샤론 레인이라고 해요. 매기를 돌보는 일을 맡고 싶어 당신을 만나려고 방금 런던에서 도착한 길이에요."
"이미 딸을 돌보고 있는 것 같군." 그는 나무 옆에 선 채 말했다. "이따가 객실에서 이야기합시다, 미스 레인."
집안으로 들어가 두 사람은 널찍한 계단을 올라 아동실로 통하는 복도를 걸어갔다. 그 방은 흰색과 금색으로 통일된 가구들과 꽃무늬 카핏, 역시 꽃무늬 벽지로 내장이 되어있었으며, 하얀 프릴이 달린 베드커버 위에는 아름다운 옷을 입은 인형들이 늘어 놓여 있고, 아동 사이즈의 소파 위에는 커다란 봉제 팬더가 앉아 있었다. 매기는 샤론의 손을 잡은 채 욕실로 안내했다. 여기도 역시 조그만 욕조에서부터 낮은 세면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아동 사이즈로 마련되어 있었다.
"어머나, 멋있는 방이로구나!"
"난 싫어요." 매기는 얼굴빛이 흐려졌다. "리나가 디자인한 거예요."
"이렇게도 좋은 것이 어째서 마음에 들지 않지?"
"어린아이 같잖아요. 난 이렇게 작은 세면데나 작은 욕조는 갖고 싶지 않아요. 제대로 된 보통 크기가 좋아요."
몸을 굽혀 손을 씻고 머리를 매만지면서, 샤론은 속으로 매기의 의견에 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기한테 딱 맞는 사이즈인데 뭘 그래." 하고 빈틈없는 대답을 했다.
"언제까지나 크지 말라는 법이 없잖아요." 매기의 입이 뾰로통해졌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그때는 또 다른 방을 쓰라고 아빠가 말씀하실 텐데 뭐."
"그럼 이 방은 어떻게 하죠? 아빠는 이제 결혼하지 않을 테니 동생이 태어나는 일도 없을 테고. 난 아빠가 절대 결혼하지 못하게 할 거야."
"타월은 어디 있지?" 샤론은 묘한 이야기의 진전에 얼른 그렇게 물었다.
"내 것을 써도 좋아요. 당신은 병에 걸린 것 같지 않으니까."
웃음이 터져나오려고 하는 것을 참고 샤론은 타월로 손을 닦았다.
"당신 몇 살이죠?" 매기는 서슴없이 상대방을 바라보며 물었다
"스물 세 살이야."
"가정교사를 안 할 때는 무엇을 하고 있지?"
샤론은 그 질문을 묵살하고 욕실을 나왔다.
"아래층으로 안내해 주겠어?"
매기는 끄덕이고, 앞서서 방을 나갔다. 샤론은 계단을 내려가, 한쪽 벽에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고 사방에 꽃이 많이 꽂혀 있는 널찍한 객실로 안내되었다.
폴 샌더슨은 수직의 호화로운 융단과 잘 어울리는, 핑크와 잿빛이 뒤섞인 대리석 벽난로 앞에 서있었다.
"앉아요, 미스 레인." 그는 말하고, 샤론이 시키는 대로하는 것을 보고나서 딸에게로 눈길은 돌렸다. "이제 됐어, 매기. 넌 저리 가서 놀아."
"나도 여기 있겠어요."
그는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긴 의자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흔들면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여덟 사리나 되는 딸이 있는데도 그는 생각보다 훨씬 젊었다. 검은 머리에는 잿빛이 석여 있기는 하나 이제 30대가 될까 말까 한 느낌이었다. 관자놀이께에 한결 두드러진 은회색의 머리칼은 쌀쌀하고 존대한 그의 동작에 어울리는 풍격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예의바른 그의 매너에서는 거만한 기식을 느낄 수는 없었다.
"딸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어 나를 만나러 왔다고 했지요?" 폴 샌더슨은 말했다. "미세스 맥클린한테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는데."
"그분은 내가 여기에 온 것을 모르세요."
"일을 맡을까말까 결정하기 정에 미리 알아보려 온 거요? 고용이 되기 전에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당신이 처음이군. 지금까지의 여자들은 이야기만 듣고도 이 일에 덤벼들었는데"
"그것은 모두 아빠를 만나고 싶고 페이링스에 오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매기가 끼여들었다.
"이 아이의 말이 맞아요." 폴 샌더슨은 샤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모두 신출나기 오페라 가수나 작고가 지망생이었으니까. 그러나 만일 당신이 미세스 맥클린의 면접에 패스했다면 그 점은 안심이겠지요?"
그 말에 양심의 가책을 받았으나 샤론은 묵살했다. 사실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자. 하지만 그것은 나에 대해서 이 사람이 좀 더 잘 이해하게 된 뒤의 일이야.
"그렇게 흉한 꼴은 보여서 미안합니다, 미스터 샌더슨."
"아니, 신경 쓰지 말아요. 적어도 당신은 내 딸을 도우려고 했어요. 지금까지의 가정교사였다면 이 아이를 나무에 매달려고 했을 거요."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아빠!" 매기는 항의를 하고는 응석을 부리듯이 아버지를 가볍게 쳤다.
"커피를 달라고 하지 않겠니, 매기? 미스 레인은 목이 마를 테니까." 딸이 밖으로 뛰어나가자 그는 다시 샤론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물어야 할지 모르겠군요. 요 몇 년 동안 이런 면접은 모두 리나-미세스 맥클린에게 일임해 왔으니. 가정교사를 구하기 전에는 나를 길러 준 유모가 저 아이를 돌보았었고."
"가정교사로서의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려야겠군요, 미스터 샌더슨. 미세스 맥클린에게도 말했지만, 고교 시절에 서머 캠프에서 아이들을 돌본 일이 있고, 오빠 집에서 둘 살 난 쌍둥이의 뒷바라지도 한 일은 있어요. 물론 매기를 두 살 난 아이를 다루듯이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특별한 훈련이나 자격보다는 상식이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는 애매하게 말했으나 그의 다음 말은 샤론에게 희미한 희망을 갖게 했다. "딸은 우수한 사립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집에서 공부를 가르칠 필요는 없어요."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비록 나무에서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는 웃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당신을 탓할 수 없어요. 그 아이의 장난은 너무나 잘 아니까요. 그보다, 그 아이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지 않았던 당신의 냉정함에 감탄했어요."
"그런 장난에 걸려든 내가 잘못이지요. 따분한 어린아이가 할 만한 장난인걸요."
"무척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인 것 같군."
그의 날카로운 말씨에 샤론은 얼굴이 붉어졌다. 관대함을 팔려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매기를 맞게 된다면 언제나 관대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의문이에요.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매기는 지금까지의 가정교사와는 별로 재미있게 지내지 못했다는 점이에요. 그리고 나와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아이는 다루기가 꽤 어려워요."
"미세스 맥클린한테 조금은 들었어요.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의 가정교사들이 매기보다 당신에게..." 거기서 말이 잠시 막혔으나 상대방이 거들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수없이 샤론은 계속해서 말했다. "매기를 돌보는 것보다 당신의 주의를 끄는 데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기를 잘 보살펴 주지 않는 다고 느낌 그 아이는 어른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 일부러 말썽을 피웠을지도 몰라요."
"아이를 떠받든다고 좋은 것도 아니지 않아요, 미스 레인?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그 아이를 대해 봐야 아마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할 거요."
"여덟 살의 소녀가 내 힘에 부친다고는 생각지 않는데요."
"그렇다면 끝까지 단념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은 있나요?"
"이 일은 계약 기간이 6개월이라고 들었는데요."
"그렇지. 적어도 내가..."
그때 매기가 커피와 아이스크림이 담긴 쟁반을 든 젊은 남자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왔다. 누구를 위한 아이스크림인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의자에 앉자 바로, 손은 스푼을 입으로 나르기에 바빴다.
"네 손님한테 권하지도 않고 혼자만 먹는 것은 예의가 아니야."
"내 손님이 아니에요. 아빠를 만나러 왔으니까."
이번에도 역시 폴 샌더슨은 딸에게 양보하여 커피를 따라 샤론에게 권했다. 음악적 환경의 혜택이 있는 이곳 생활은 매력이 있겠지만, 이렇게 버릇이 없는 계집아이를 돌봐야 하는가 싶으니 샤론은 왠지 오싹해졌다. 지금까지의 가정교사는 조금이라도 이 아이를 좋게 만들려고나 해봤을까? 아니면 자기의 장래를 꿈꾸느라 아이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샤론은 한숨을 쉬고 페이링스에서 일하기를 반은 포기해 가고 있었다.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군요." 폴 샌더슨이 말했다.
"음, 그러니까." 샤론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혹시 제가 여기서 일하게 된다면 매기를 완전히 제게 맡겨 주실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만일 보스가 두 사람이 된다면 매기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헛갈리게 될 것 같아서요."
"내 딸을 위해서 보스를 고용할 생각은 없어요, 미스 레인. 다만 가정교사를 고용하고 싶은 것뿐이오."
"매기는 지금까지의 가정교사를 그저 노예로 보아온 것 같아요." 그레이의 눈이 반짝하는 것을 보았으나 샤론은 상관 않고 말을 계속했다. "괜찮다면 단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그 말을 듣고 매기가 얼굴을 들었다.
"나 여기 있어도 좋지요, 아빠?"
"자리를 비켜야겠어."
"하지만 아이스크림을 다 먹지 않았는데..."
"가져가려므나."
"싫어, 난 여기 있을 거야."
"어서 가!"
매기는 아버지를 보고는 체념한 듯이 일어서서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따가 또 만나기로 해, 매기." 샤론은 상냥하게 말했다.
"난 만나기 실어요. 당신도 리나나 마찬가지로 싫은 사람이야!"
"매기" 폴 샌더슨은 딸을 야단쳤다. "어서 나가지 못해!" 방문이 닫히고, 그는 사과하듯이 샤론을 돌아보았다. "실례했어요. 사실이지 그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요. 응석을 받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엄하게 해보기도 하지만..."
"그 중간이 좋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난 별로 인내심이 있는 편이 못 돼서요. 오랫동안 그 아이 하자는 대로 끌려온 탓인지 아이의 성질이 나빠진 것 같아요. 그래서 다음 학기부터는 기숙학교에 넣기로 결정한 겨요."
"본인은 가고 싶어 하나요?"
처음으로 그는 유쾌한 듯이 웃었다.
"매기는 기숙학교에 불을 질러 선생들을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하고 있어요. 아니, 미스 레인, 그 아이는 가소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보다 일에 관한 이야기나 합시다."
"만일 백 퍼센트 매기를 저에게 맡겨 주신다면 이 일을 맡겠어요. 체벌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그 아이한테는 야무진 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는 것이 딸을 위한 일이라면 마음대로 하시오."
"즉, 나를 고용하겠다는 말씀인가요?"
"미세스 맥클린이 당신을 고용한 줄로 아는데요?"
"이니요, 실은..."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고, 화제의 주인공이 객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샤론은 얼굴이 붉어져 입을 다물었다.
"어머나, 미스 레인!" 리나 맥클린은 놀란 듯이 소리쳤다.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지요?"
"일을 맡기 전에 날 만나보러 온 거요." 폴 새더슨이 설명했다.
"일을 맡아요?" 리나 맥클린운 분노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미스 레인을 고용할 생각은 없어요. 도저히 적임으로 생각되지 않는데요."
난처해진 폴 샌더슨에게 샤론은 얼른 입을 열었다.
"미세스 맥클린은 재 나이나 경험 부족 때문에 이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전 직접 당신을 만나러 찾아온 거예요.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분을 여기 있게 해줘요!" 어느 사이에 매기가 객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사론의 허리에 팔을 감고, 아버지 옆에서 있는 키 큰 리나를 노려보았다. "미스 레인이 같이 지내 주면 좋겠어요."
"네 의견을 붇고 싶을 때는 부르겠어, 마가렛" 리나 맥클린이 말했다. "착한 아이니 밖에서 놀고 있으렴."
"싫어요. 여기는 우리 집이니까 당신이 나가게 어때요?"
"매기! 바로 사과해. 지금 바로야. 내 말 들려?" 폴 샌더슨이 엄격하게 나무랐다.
"안 들려요."
"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겠니!" 그는 억제된 목소리로 명령했다. "아빠가 갈 때까지 거기에 있어."
말없이 나가려고 하는 소녀의 눈에서 반짝 눈물이 빛났다. 샤론은 그때, 아무리 조숙하다 해도 매기는 겨우 여덟 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도 어머니가 없는 여덟 살 소녀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내가 같이 가도 괜찮겠지?" 샤론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매기를 뒤쫓았다. "손수건을 매기의 방에 놓고 온 것 같아. 가지로 가도 괜찮지?"
매기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자기 방에 들어갈 때까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저 사람 아빠한테 당신을 고용하지 말라고 말할 거예요. 아빠는 저 사람 하자는 대로만 한다고 사람들도 말하고 있었어요."
"쓸데없는 소문을 곧이 들으면 못써."
"그건 정말이니까 소문이라고 할 수 없어요. 미세스 구드윈도 그렇게 말했어요."
"미세스 구드윈?"
"요리하는 사람이야. 미스터 구드윈은 우리 집 집사고." 소녀는 눈물이 마른 눈으로 실내를 둘러보았다. "손수건은 없는 것 같은데, 정말 여기 놓고 갔어요?"
"핸드백 속에 있어."
"거짓말은 도둑의 시작." 매기는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 윌리엄스는 거짓말을 하면 혀가 빠져 버린다고 했어요."
"미스 윌리엄스는 매기의 가정교사였던 사람"
"요전번 가정교사예요. 당신의 혀도 빠져요?"
"아니. 거짓말을 해서 여가 빠진다면 윌리엄스도 틀림없이 혀가 달아나 버렸을 거야."
아까까지의 적대감을 잊어버리고 매기는 즐거운 듯 이 키득키득 웃었다.
"리나가 당신을 쫓아내지 못하게 할 수 없어요?"
"아빠에게 달렸어. 하지만 아까는 매기도 날 쫓아내고 싶어 하지 않았어?"
"그런 생각은 없었지만 괜히 신경질이 나지 뭐예요. 그것이 내 수명을 빼앗게 될 거예요."
샤론을 저도 모르게 웃었다.
"미스 윌리엄스가 그렇게 말했어?"
"네. 어떻게 알았어요."
"그저 그런가 싶었지." 샤론은 흰 오건디의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인형을 집어 들었다. 이 인형과 비교하면 자기가 얼마나 초라한지 새삼 느끼고 인형을 다시 침대에 내려놓고 그녀는 거울 앞으로 갔다. 드레스는 구겨지고 여기저기 흙이 묻어 있었다. 얼굴도 번들거리고 있어서 콤팩트를 꺼내어 콧등을 두드렸다. 아무리 보아도 미인이라고 할 수 없어-자기 얼굴을 보고 샤론은 생각했다. 잘 말해야 청초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귀엽다고 한다면 과분할 거야. 하지만 미세스 맥클린 같으면 나에 대해 다른 형용사를 쓸 것이 틀림없어. 독단적이고 빈틈없는 계집아이?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탓하는 것은 잘못이야. 방에 들어오자마자 고용한 적이 없는 처녀가 이 집 주인과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을 보았으니 그녀도 화가 날 것이 당연하겠지.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군." 샤론은 일어섯 매기를 보았다.
"좀 더 있을 수 없어요?"
"남의 집에 너무 오래 있는 것은 실례되는 일이야."
"당신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난 가출하겠어요."
"아기 같은 소리를 하면 못써. 매기는 이제 여덟 살이잖아."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폴 샌더슨과 리나 맥클린이 객실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마침 잘 만났군." 폴 샌더슨이 말했다. "방금 미세스 맥클린과 상의했는데, 당신한테 매기를 맡기기로 결정했어요."
"고마워요." 샤론은 맥클린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녀의 날카로운 눈초리는 아프게 느끼고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내일부터라도."
"알았어요. 내일 아침에 오겠어요."
"도착 시간을 미리 연락해 주면 역까지 운전사를 보내겠소."
샤론은 고맙다고 했다. 폴은 그녀를 까만 리무진이 있는 데까지 바래다주었다. 제복 차림의 운전사가 핸들을 잡고 대기해 있었다.
"헤이워드히스까지 밖에는 바래다 줄 수 없지만 타고가시오." 폴은 미소를 띠었다.
"폐를 끼쳐서 죄송해요."
"매기가 당신한테 한 일을 생각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오."
"매기에게 최선을 다하겠어요."
"잘 부탁해요." 그는 손을 내밀었다. "잘 가요, 미스 레인. 내일 봐요."
샤론은 차에 올랐다. 커브를 돌기 전에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현관문은 닫히고, 저택은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일부터는 여기가 내가 사는 곳이 되는 것이다.
4
새 일자리의 이야기를 듣자 오빠와 올케는 눈이 동그래졌다. 팀은 동생이 새 주인한테 자기의 진짜 직업을 밝히지 않은 것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샤론이 오페라 가수라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죠?" 앤이 남편에게 말했다. "가수로서 고용되는 것도 아닌데요."
"하지만, 그가 오페라에 관계하는 사람을 고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탄로가 났을 때 문제가 되지."
"나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게 되었을 때 사실을 이야기하겠어요." 샤론은 말했다.
"그런 말을 했다간 쫓겨날지도 몰라."
"내가 전의 가정교사와는 다르다는 것을 그에게 납득시킬 생각이에요. 이런 좋은 일자리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오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누구나 페이링스에 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거예요."
"노래 부르기 위해서라면 그렇겠지만, 가정교사로 간다 해도 그렇게 할까?"
"무엇을 하러 가는가는 둘째예요. 거기가 어떤 곳인지 오빠는 몰라요."
"대저택에서 일하고 싶다면 거기 말고도 얼마든지 있지 않니?"
"저택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오페라 극장에 대해서 말하는 거예요. 이번 시즌에는 거기서 바티스타 조지가 지휘를 한대요. 최고의 모차르트 지휘자래요. 그의 오케스트라를 들을 수 있다면 한 달분의 월급을 몽땅 쏟아넣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예요."
"네 마음은 알겠지만," 팀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방식에는 동감하지 못하겠는데. 어차피 탄로가 날 것이 아닌가."
"될수록 빨리 이야기할 생각이에요. 내 일하는 것을 인정받고 나서."
"그의 부인은 어떻게 되었나요?" 앤이 물었다.
"매기가 두 살인가 세 살 때 죽었다는 것 같아요."
"어째서 재혼하지 않지요? 그는 꽤 멋있는 사람인 듯한데."
"알고 있어요?"
"약혼중에 한 번, 팀과 페이링스에 가본 일이 있어요." 앤은 남편을 바라보았다. "당신, 그를 기억하지 않아요? 피아노 옆에 서 있던 키 큰 검은 머리의 남자."
"큼 키에 검은 머리의 남자가 이 세상에 한둘인가 뭐." 팀은 웃었다. "여자란 쓸데없는 것까지 잘도 기억하고 있으니 놀라와."
"남자보다 기억력이 좋으니 얼마나 편리해요." 앤은 말하며 샤론에게 웃어 보였다.
"그 사람한테 약호자라도 있나요?"
"미국인 여자가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요."
"그녀는 이혼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미망인인가요?"
"나도 몰라요. 하지만 우아하고 유능하고, 보기에도 꼭 페이링스 여주인 같은 느낌이 들어요."
여자끼리의 수다에 싫증이 난 팀은 차고로 가서 일이나 하겠다고 방에서 나갔다. 두 사람만 있게 되자 앤은 공범자 같은 웃음을 띠었다.
"참 좋은 일자리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어떻게 될지도...."
"난 그저 6개월 뒤에 오디션 전까지만 일하고 싶을 뿐이에요." 샤론은 분명하게 말했다. "그것 이상은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앞으로 그 일도 좀 생각해 보면 어때요?"
"그러지 말아요, 앤. 언제나 화려한 여자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미스터 샌더슨이 나 같은 여자를 쳐다보기나 하겠어요?"
"샤론도 누구 못지않게 예뻐요."
"같은 식구니까 그렇게 보이지요. 보통밖에 못 돼요. 죽자구나 하고 레슨이라도 쌓으면 그럭저럭 노래 부를 수 있는 여가수 정도나 되겠지요."
"샤론의 선생이 유망하다고 말했잖아요. 좀 더 자신을 자져요. 지금까지의 야심은 어디로 갔지요?"
"6개월 동안은 냉장고 속에 넣어 둘 생각이에요. 그것이 차라리 나아요. 노래 부르고 싶은 충동은 누르자면 자기가 오페라 가수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제일 좋지 않겠어요? 물론 언젠가는 가수로서 성공하고 싶어요. 하지만 앞으로 6개월 동안은 매기 샌더슨의 가정교사고,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튿날, 마중 나온 김에 올라 패이링스로 향하면서 샤론은 이 일을 다시 생각하며 마음에 다지고 있었다.
"역시 와주었어! 그 사람도 당신을 쫓아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차가 멈추자마자 매기가 집에서 튀어나와 계단을 기운 좋게 뛰어내려왔다. "짐은 미스 레인 방으로 나라." 소녀는 슈트게이스를 차에서 내리는 운전사에게 명령했다.
"날라다 줘요가 아니겠어?" 작은 소리로 나무라자 매기는 바로 고쳐서 말했고, 운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새 가정교사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우선 짐 정리를 좀 거들어 주겠어?" 샤론은 매기에게 말했다.
"그전에 점심을 먹어야지요. 아빠가 집에 못 있게 되어 미안하다고 당신한테 말해 달라고 했어요. 며칠 동안 여행을 하게 되었대요."
약간의 실망을 느꼈으나, 그를 만나기 전에 매기와의 생활에 익숙해져 얼마쯤의 우정을 쌓을 수 있게 되어 오히려 다행이라 싶었다.
두 사람은 점심을 마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샤론의 방은 아동실과 같은 복도에 문이 나 있으며, 이 집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오후에 뭘 하고 싶지, 매기?" 벽의 한쪽 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옷장에 의류를 걸고 나서 샤론은 소녀에게 물었다.
"텔레비전을 보겠어요."
"이렇게 좋은 날인데?"
"난 혼자 있을 때는 어제나 텔레비전을 봐요."
"내가 있으니 혼자가 아니잖아? 밖에 나가 산책을 하지 않겠어?"
"산책 같은 것은 재미가 없어요. 언제나 보아서 알고 있는 곳을 걸어 봐야 싫증만 날 뿐이에요."
"그렇다면 나 혼자 가겠으니 매기는 여기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어."
매기가 의심스런 표정을 지었으나 샤론은 모른 체하며 카디건을 집어 들고 방문을 열었다.
"산책에 데리고 갈만 한 개는 있어?"
"집 지키는 개는 있지만," 하고 매기는 말했다. "페트는 없어요."
"매기는 개 한 마리 갖고 싶지 않아."
"길러 본 일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이러게 아름다운 환경 속에 있으면서 페트를 기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니, 샤론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팀과 샤론은 어린 시절 교외의 조그마한 집에서 살았는데, 토끼며 거북, 고양이, 개, 새, 심지어 햄스터까지 길렀던 것이다. 여덟 살이 되던 생일에 선불 받은 래브라도 개가 생각났다. 만일 매기가 그런 선물을 받는다면 어떤 얼굴을 할까, 하고 샤론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가을부터 기숙학교에 가게 된다면 페트는 기르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집을 떠나는 것이 더욱 괴로와질 테니까.
"당신이 개를 기르고 싶다고 하면 틀림없이 아빠는 사줄 거예요." 매기가 말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왔다. 샤론은 더 이상 매기를 데리고 나가려고 하지 않고, 혼자서 객실을 지나 테라스로 나왔다.
"난 커튼을 치고 텔레비전을 보겠어요." 매기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러다 머리가 아파져도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 샤론은 그렇게만 말하고 계단을 내려가 잔디밭으로 나갔다. 그런 일을 하면 머리가 아파진다고 미스 윌리엄스가 겁을 준 모양이었다. 지금까지의 가정교사는 짧은 동안이지만 어린 마음을 반항적으로 만들 만한 말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이래라 저래라 하고 명령하게 되면 매기는 도리어 반항적으로 된다. 아이에게 사리를 이해시키자면 그 아이의 자주성에 맡기는 것이 제일 좋다. 그러자면 밀고 당기는 일종의 흥정의 솜씨가 있어야 한다. 앞으로는 인내력이 시험을 받게 되겠지만, 어떤 경우를 당해도 절대로 침착을 잃지 말자고 샤론은 마을을 다졌다. 지금 보기에는 매기는 고분고분한 것 같지만, 그것은 리나 맬클린의 콧대를 꺾었다는 것으로 우쭐해져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멀지 않아 아이와의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으며, 지금부터 그 마음의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아직도 카디건을 벗어 던질 수 없는 봄의 오후였다. 샤론은 한 시간 가량 부지 안을 거닐었다. 그러고는 차를 마시고 싶어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아직 누구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이쪽에서 찾아가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 그녀는 테라스를 돌아 가 뒷문을 통해 돌바닥의 홀로 들어섰다. 거기에도 문이 여러 개 있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으려니, 왼쪽 방에서 오동통한 중년 부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하얀 에이프런을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여자가 가정부인 미세스 구드윈이 틀림없었다.
"전 샤론 레인이라고 해요. 미세스 구드윈이시죠?"
"네. 그런데... 새로 오신 아가씨 가정교사세요?" 중년 부인은 흥미 깊게 샤론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문을 잘못 들어오셨어요. 앞문으로 들어오셔야지요."
"당신을 만나 이사를 하려고요."
미세스 구드윈은 깜짝 놀란 모습이었으나 샤론이 주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 주었다.
"어머나, 어쩌면 이렇게도 깨끗한 주방일까!" 전통적인 농가를 생각나게 하는 정감 있는 분위기와 청결하고 근대적인 편이시설이 보기 좋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데에 샤론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시골풍의 판자바닥, 소나무 식기장. 조리대는 대리석이고, 문이 달리지 않은 선반에는 약초 병이며 번쩍거리는 구리 냄비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작년에 개장한 거예요." 미세스 구드윈이 말했다. "마침 차를 마시려고 하는데 괜찮다면 같이 드시겠어요."
샤론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이닝체어에 앉아서, 미세스 구드윈이 차를 따르고 홈 메이드의 케이크를 잘라 가지고 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집에는 일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지요?" 샤론이 물었다.
"입주한 사람이 네 명이고 마을에서 다니는 여자가 셋 있어요. 이 넓은 집으로 보면 별로 많다고는 할 수 없지요. 시즌 중에는 주방에서 일할 메이드를 한 사람 더 고용해요. 미스터 샌더슨은 이곳에 묵는 예술가들을 위해서 매주 주찬회를 열고 있거든요. 게다가 않은 사람들이 날마다 야식을 먹으러 와요. 무대에 서기 전에는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모양이지요?"
"정말 애를 많이 쓰시는 군요."
"시즌 중에는 눈이 핑핑 돌 정도예요."
"예술가들은 여기에서 묵게 되나요?"
"아니요, 이 집에서는 묵지 않아요. 극장 옆에 그들 전용의 별관이 있어요. 거기는 7년 전에 미세스 샌더슨이..." 거기서 가정부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차를 마셨다.
그녀는 미세스 샌더슨이 죽기 전이라고 말하려고 한 것일까? 그렇다 해도 왜 어색한 태도로 입을 다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혹시 폴 샌더슨은 아내를 여의 홀아비가 아니 게 아닐까? 샤론은 호기심을 이길 수가 없었다.
"미스터 샌더슨은 부인과 이혼하셨나요?"
"부인은 5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매기가 두 살 때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요...."
가정부는 망설였다.
"부인이 집을 나가셨을 때 아가씨는 겨우 두 살 난 아기였어요."
"그랬어요?" 완전히 납득이 간 것은 아니었으나 상대방이 이 화제를 꺼리는 것을 느끼고 샤론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미세스 샌더슨은 죽기 1년 전 남편과 헤어졌던 모양이다. 어느 쪽에 애인이 생겼던 것일까? "미세스 맥클린은 자주 오시나요?" 그 물음이 저도 모르게 입 박으로 튀어나와 샤론은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자주 다니고 있어요." 미세스 구드윈이 말했다. "그 분은 이혼하신 분이에요. 헤어진 남편은 미국의 대부호였는데 훨씬 나이가 많았던 것 같아요. 미세스 맥클린은 3년 전에 극장의 손님으로 처음 페이링스에 오셨는데, 그 뒤로 여기가 무척 마음에 드시는지 자주 드나들게 되었죠."
"아마 오페라를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오페라를 조아해? 혹시 오페라 극장의 소유주를 좋아 하는게 아닐까? 샤론은 이상한 상상을 하는 자기 자신이 놀라와 얼른 차를 마셨다. "매기가 뭘 하고 있는지 보고 오겠어요."
"아직 텔레비전을 보고 있겠지요. 아가씨는 온종일 텔레비전 앞에 붙어 있으니까요."
"그런 모양이군요. 별로 좋은 일은 못 되지만 첫날부터 이러쿵저러쿵 금지 사항을 늘어놓아 봐야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거예요."
거실에 들어가 보니, 매기는 반은 빈 초콜릿 상자를 앞에 놓고, 포장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카핏에 배를 깔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차 시간에 아무것도 못 먹어요, 그러면."
"오렌지 주스와 비스킷밖에는 주지 않는 걸요. 아빠가 계시면 저녁식사는 너무 늦어지고."
"아빠가 안 계실 때는?"
"그때는 먹고 싶은 것을 먹어요. 미세스 구드윈은 케이크 만드는 솜씨가 그만이에요."
"케이크만 먹으면 클 수가 없어."
"야채를 먹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야채 같은 것 안 먹어도 끄덕없어요."
"야채가 몸에 필요하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증명이 된 사실이야."
"뭐라고 했지요? 못 알아듣겠군요."
"매기는 배워야 할 것이 많은 것 같군."
"날 가르쳐 주러 온 것이 아니에요. 날 돌보러 왔잖아요? 난 명령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아요."
"나도 명령할 생각은 없어." 그러면서 샤론이 초콜릿 상자를 집으려고 했더니 매기는 재빠르게 그것을 낚아챘다.
"내 초콜릿이야! 내가 먹고 싶으면 다 먹을 수 있어요."
"그러면 병에 걸릴 거야."
"걸려 봤자지 뭐."
샤론은 어깨를 추썩이고 의자에 앉았다. 그때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가 담긴 쟁반을 들고 미스터 구드윈이 들어왔다.
"뭘 드시겠어요, 미스 레인?"
"아니에요. 아까 미세스 구드윈과 차를 마셨아여/"
"집사람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저녁식사는 몇 시에 드시겠느냐고 물어 달라고 하던데요."
"식사는 필요 없어요." 매기가 끼어 들었다. "프루츠 샐러드와 아이스크림으로 해줘요. 스트로베리와 바닐라로 말이에요."
"알았어요."
새론은 입술을 깨물고 자기가 어린 시절에는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미세스 구드윈에게 야채는 필요 없으니 스테이크와 프렌치프라이를 만들어 달라고 말해 주시겠어요? 그리고 잼을 바른 팬케이크하고요."
이상한 주문에 놀랐겠지만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아이스크림 때문에 무슨 말이 나올 줄 알았던 매기는 샤론이 아무 말이 없자 다시 바닥에 배를 깔고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다. 어린이를 위한 만화는 벌써 끝났고 따분한 다큐멘터리 프로가 방영되고 있었다. 도저히 아이의 흥미를 끌 만한 내용이 아닌데 매기는 텔레비전을 끄라고 하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버티고 있는 느낌이었다.
"매기가 텔레비전만 볼 생각이라면 난 내 방에 돌아가 다른 일을 해야겠는데, 그래도 괜찮겠어?"
"좋아요." 화면에서 누도 떼지 않고 대답했으나, 샤론이 정말로 나가려고 하자 톤 높음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뭘 하려는 거지요?"
"드레스의 재단이라도 할까 해."
"드레스?" 소녀는 벌떡 일어섰다. "어떤 거예요. 그게?"
"이브닝드레스야."
"색깔은?"
"푸른 바탕에 초록빛 꽃무늬가 있는 천이야."
"재단하는 거 옆에서 구경해도 괜찮아요?"
"텔레비전은 안 보고?"
"재미없어요. 그보다 드레스 만드는 것을 보고 싶어요."
샤론은 매기와 같이 방으로 와서 카펫 위에 형지를 펼쳤다. 밤의 자유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던 끝에 몇 종류의 천을 짐 속에 챙겨 왔던 것이다. 서랍 속에 들어 있는 그 천을 발견한 매기는 환성을 지르고 마음에 드는 천을 몸에 감고 거울 앞에서 맵시를 내 보는 것이었다. 되바라졌다고 하나 역시 여덟 살의 소녀가 아닐 수 없었다.
"옷을 좋아해?" 샤론은 물었다.
"리나가 사주는 것은 싫어요. 하지만 내가 고르는 것은 좋아요."
"어떤 것을 고르지?"
"진즈하고 샤쓰. 팔랑거리는 장식이 달린 것이 제일 싫어요."
맥기는 천을 서랍 속에 구겨 넣고 뛰어나가더니 소매며 가슴에 레이스나 리본이 달려 있는 루비 색의 빌로드 드레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것은 미국의 잡지에 잘 실리는 것 같은 빅토리아풍의 원피스로, 심플한 옷이 어울리는 맥기가 입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본인도 그렇게 느꼈는지 드레스를 침대 위에 내던지고 아니꼽다는 듯 노려보는 것이었다.
"지난주에 리나가 사주었지만 난 절대로 입지 않겠어요."
"귀여운 드레스 인데 왜 그래? 혹시 레이스하고 리본을 떼 내면 좋아질지도 모르겠군."
"그런 일을 하면 옷이 망가지지 않아요?"
"절대 입지 않겠다면 망가져도 상관없잖아?"
"그렇군요. 지금 바고 떼 내고 싶어요. 샤론의 옷은 나중에 하고."
샤론은 베드에 걸터앉아 매기에게 레이스 끝을 잡고 있으라고 하고 조심스럽게 가위로 꿰맨 실을 뜯어 나갔다. 조금씩 레이스와 리본이 떨어져 나갔으나 다행히 빌로드 천에는 거의 자국이 남지 않았다. 샤론은 드레스를 옷걸이에 걸어 욕실로 들고가 커튼 걸이에 걸었다.
"왜 그러지요?"
"빌로드 주름은 펴자면 김을 쐬는 것이 최요야. 한이틀 이렇게 놔둬 봐. 금방 사온 물건처럼 될 거야."
"휠씬 나아졌네. 아빠가 돌아오면 입겠어요. 이런 드레스는 절대로 입지 않겠다고 말했었으니 아빠는 깜짝 놀랄 거예요."
"아마 기뻐하실 거야. 미세스 맬클린이 매기를 위해 사다 준 드레스인걸."
"그 사람이 산 게 아니에요." 매기의 입이 뾰쪽해졌다. "돈은 아빠가 치렀어. 그 사람은 글쎄 올 때마다 아빠한테 청구서를 내밀어요."
샤론은 난처해져 얼른 화제를 돌렸다.
"식사 전에 드레스의 재단을 마칠까? 그러면 점심을 먹고 나서 가봉을 할 수 있어."
두 사람은 다시 일은 시작했다. 매기는 이런 작업에 남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천 위에 어떻게 형지를 놓으면 좋을지 직감적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천은 자르고 저마다 부분을 바늘로 맞추어 나가는 것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으며, 목욕을 하라고 해도 쉽게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 드레스의 가봉을 봐도 좋아요?"
"시간이 너무 늦어질 것 같은데."
"난 언제나 늦게 자요. 자기 싫으면 언제까지나 일어나 있어도 괜찮고요." 맥기는 발을 굴렀으나 샤론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아홉 시에는 자는 것이 좋을 거야. 하지만 자기 싫다면 마음대로 해. 난 아홉 시가 되면 침실로 돌아올 거니까."
"나 혼자 거실에 있으라는 거예요?"
"네가 거기 있고 싶다면."
"이상한 사람이군요." 매기는 어른스런 말투로 한마디하고 킥킥거리며 껑충껑충 뛰면서 방에서 나갔다.
지금까지의 승부는 비긴 거나 같다. 그러나 아직 싸움은 남아 있다.
"그 프렌치프라이 나도 먹겠어요." 저녁 식탁 앞에 앉아, 먹음직스러운 프루츠 샐러드와 산 같은 아이스크림을 앞에 놓고 매기는 딴소리를 했다. "스테이크도 맛있게 보이는데."
"안됐지만 1인분밖에 없어. 넌 네가 주문한 것을 먹으면 되잖아."
"이건 식사가 아니라 과자야. 난 스테이크하고 프렌치프라이가 먹고 싶어요."
"그럼 내일 저녁 미세스 구드윈한테 부탁하면 어때?"
"지금 바고 먹고 싶은걸. 난 배가 고파요."
"빵과 버터가 있잖니?"
"빵 같은 것은 싫어요."
"그렇다면 아이스크림과 프루츠 샐러드를 먹을 수밖에 없어."
"아이스크림도 프루츠도 질색이야!" 매기는 벽 앞까지 뛰어가더니 미세스 구드윈이 입구에 모습을 나타낼 때까지 벨을 눌렀다. "나도 스테이크와 프렌치프라이를 갖다 줘! 프렌치프라이는 특히 많아."
미세스 구드윈은 흘끔 가정교사를 보더니 상황을 이해한 것 같았다.
"그것은 무리한 주문이에요, 미스 매기. 스테이크는 냉동실에 들어 있어서 녹이는데 여덟 시간은 걸릴 거에요."
뜻밖의 말에 당황하여 매기는 두 어른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나 배가 고파요."
"오믈렛은 어때?" 처음 마음먹은 계획보다 좀 마을이 약해져 샤론은 물었다.
"오믈렛은 싫어요. 스테이크가 아니면 아무것도 안 먹겠어."
"그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참을 수밖에 없겠군." 샤론은 태연하게 말하고 미세스 구드윈에게 나가도록 손짓했다.
매기는 사이드보드 옆에 서서 아이스크림을 먹느냐 자기 입장을 지켜 아무것도 먹지 않느냐 망설이는 것 같았다. 샤론은 식사를 계속했으나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으며, 될 수 있다면 스테이크와 포테이토를 소녀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면 맥기를 위해서 좋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팬케이크를 나누어 줄까?"
"필요 없어요."
샤론은 한숨을 쉬었다.
"이라 와서 앉아요. 포테이토를 나누어 주겠어."
소녀는 의심스런 듯이 테이블에 다가가 샤론이 프렌치프라이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렇게 많이 주어도 좋아요?"
"배가 고프다고 했잖아? 하지만 다음부터는 아이스크림이나 프루츠를 부탁했으면 그것을 먹어야 해."
"스테이크도 나누어 주겠어요?"
"아니." 샤론은 꺾일 것 같은 마음을 채찍질했다. "이것뿐이야. 자, 어서 앉지 않으면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
"흥, 당신은 그렇게 심술쟁이가 아니면서 뭘 그래요." 매기는 의자에 앉아 포크를 집어 들었다.
다 먹고는 빈 접시를 밀어내면서 매기가 말했다.
"내일은 나도 스테이크와 프렌치프라이를 부탁하겠어요. 그러면 우리는 같은 것을 먹을 수 있지요?"
"아틀 계속 같은 것을 먹고 싶지는 않아. 그보다 미세스 구드윈한테 어떤 요리를 할 수 있는지 물어 보고 정하기로 하지."
"미세스 구드윈은 요리 솜씨가 참 좋아요. 아빠는 식사 메뉴를 언제나 그 아주머니한테 맡기고 있어요."
"그럼 우리도 그렇게 해. 하지만 정찬은 점심때 들고 저녁에는 가볍게 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때는 저녁마다 아빠와 같이 식사해요. 당신이 뭐라고 하든 난 앞으로도 아빠와 먹겠어요."
"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참견할 생각을 없어, 그렇게 늦은 시간에 네가 식사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면."
"반대는 왜 하겠어요!" 소녀는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샤론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이상한 듯이 눈치를 보았다. "소리 지르는 것은 얌전하지 못하다고 하지 않아요?"
"내가 그렇게 말하면 더 큰 소리를 지를 텐데 뭐."
매기는 킥 웃었으나 팬케이크를 날라온 미세스 구드윈을 보고는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팬테이크를 나누어 먹고 나자 매기는 바로 거실로 들어가 텔레비전을 켜고는 또 바닥에 배를 깔고 몸을 뻗었다. 한동안 사론도 같이 있었으나 아홉 사가 되자 일어섰다.
"잠깐 기다려 줘요." 매기는 방을 나선 샤론을 뒤쫓아 왔다. "이제부터 드레스를 꿰내는 거예요?"
"정하지 않았지만 아마 그럴 거야."
"옆에서 봐도 좋아요?"
"아니, 시간이 늦었어."
"침대에 들어가라는 거예요?"
"그러라고는 하지 않았어. 물론 그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매기 하고 싶은 대로 해." 샤론은 자기 방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잘 자." 그렇게 말하고 몸을 굽혀 소녀의 볼에 키스했다.
그 순간 매기는 몸이 굳어졌으나 몸을 빼려고는 하지 않았다. 매기는 가정교사가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5
그 주도 끝나 갈 무렵에는 샤론도 페이링스의 생활에 거의 익숙하게 되었다. 오빠 집에서의 생활에 비하면 이곳에서 산다는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호화로왔다. 거리낌 없이 쓸 수 있는 전용 욕실, 밤이나 낮이나 평평 쏟아져 나오는 더운물, 아무말이 없어도 모든 일을 알아서 척척 해주는 유능한 사용인들.
매기에 관해서는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제일 얘가 탔던 것은, 여기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오후에 아이가 몇 시간 어디로 사라져 버린 일이었다. 샤론은 넓은 뜰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호수 한 복판에 울긋불긋한 색깔의 공이 떠 있는 것을 보았다. 매기가 공을 잡으러 호수에 들어갔다가 우거진 갈대에 발이 걸린 줄 알았던 것이다. 그 순간 조그만 소녀가 나무 사이로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샤론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 매기라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나자 매기가 반항적인 태도로 잔디를 짓밟으면서, 가정교사가 정신없이 자기를 찾아다니던 일은 모른 체하며 돌아왔다.
"또 이렇게 모습을 감추었다간 널 온종일 방안에 가두어 두고 일주일은 밖에 못 나가게 하겠어."
"당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어요!"
"왜 내가 못해? 네 안전에 대해서 난 책임을 지고 있고, 쓸데없는 장난을 참을 생각도 없어."
그 이후 매기는 다시는 그런 장난을 치지 않게 되었고 솔직하고 밝은 아이가 된 것 같았다. 특히 드레스의 재단을 거들 때는 기분이 매우 좋았으며, 이런 분야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듯했다.
금요일 오전에 두 사람은 매기의 옷을 만들기 위해서 천과 형지를 사러 헤이워드히스까지 나갔다.
한 시간 가량 시간을 들여 목면 천 몇 종류와 심플한 디자인의 형지를 두세 벌 샀다.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오면서 매기는 어떤 드레스를 만들 생각인가를 흥분하여 지껄여 댔다. 역에서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서 줄지어 서 있으려니, 열차가 역에 도착 했는지 구내에서 여행자의 한 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몇 명은 놀랄 만큼 해에 그을어 있었고, 여자들 중에는 한눈에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우아한 차림의 사람도 있었다. 포터가 슈트케이스며 트렁크를 날라와, 포도 위는 금방 짐들로 뒤덮여 버렸다.
"모드 페이링스에 가는 사람들이에요. 주말에 온다고 아빠기 말했어요."
샤론은 가슴이 설렜다. 리허설을 시작한다면 그들은 오페라 가수나 오케스트라 멤버, 또는 그 밖의 스테프로서 여기에 도착한 제일진이 틀림없었다.
역전에 차가 두 대 섰고, 포터가 앞차에 짐을 싣기 시작했다. 여행자들은 뒷차인 소형 버스에 올랐으며, 책임자 같은 젊은이가 승객의 수를 세고 있었다.
"피켓이야. 사람들을 마중 나왔어요." 매기는 샤론의 손을 잡았다. "우리도 태워 달래요."
"자리가 없는 거야."
"걱정없어요. 피켓!" 매기는 큰 소리로 젊은이를 불렀다. "우리도 타도 돼?"
젊은이는 길 건너편에서 이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출발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소녀를 안아들어 버스에 태웠다.
매기는 좁은 통로를 깡총깡총 오가며 낯익은 몇 명에게 안녕을 연발했다. 샤론은 처음 눈에 띈 빈자리에 앉아 옆자리의 30대 후반의 여자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리허설 때 피아노를 치고 있어요, 잘 부탁해요." 그녀도 미소를 되돌렸다. "매기를 돌보는 분인가요?"
"네, 여기에 온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아요."
"당신도 가수 지망생이에요?"
"난 그저 매기만을 돌보러 와 있어요." 샤론은 대답했다.
"지금까지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요."
"페이링스에는 매년 오세요?"
"네, 5년 전부터 매년."
"그렇다면 미세스 샌더슨을 아세요?"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바람에 샤론은 설명을 해야겠다고 느꼈다. "매기의 어머니에 대해서 알아 두고 싶어서 그래요. 매기는 절대로 자기 어머니에 대해서 말하려 들지 않아요. 그 아이가 그 분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조차 몰라서... 하지만 그런 화제를 사뭇 피하고만 있는 것도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난 미세스 샌더슨을 만나 본 일은 없어요. 그녀는 내가 여기에 처음 온 전년에 페이링스를 떠났으니까요. 무척 미인이었지만 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하여튼 일이 첫째였고, 그것이 부부가 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더군요."
표정은 바꾸지 않았으나, 샤론은 열심히 피아니스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분은 페이링스에서 노래를 불렀던가요?"
"그것이 인연이 되어 미스터 샌더슨과 만났다더군요. 당신이 오페라 팬이라면 그녀의 레코드를 들었을 거예요. 에르가 소다스트롬... 아세요?"
"물론이에요." 샤론은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무척 유명한 분인걸요. 스웨덴 사람이지요?"
"네. 하지만 여기서 모차르트를 노래하게 되면서부터는 한번도 모국에 돌아가지 않았을 거예요.... 적어도 결혼 생활이 파탄 날 때까지는."
"자기 몸으로 낳은 아이를 두고 어떻게 떠날 수가 있었을까요?"
"재정 상태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아무리 그렇다 해요..."
"결혼 생활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에요."
페이링스 마을을 통과할 때 버스는 스피드를 떨어뜨렸고 이내 하이 스트리트를 벗어났다. 표지판이 서 있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꺾어든 버스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꼬불꼬불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달렸다. 여기까지 와본 일이 없는 샤론은 차창 밖의 풍경을 지켜보았다. 나무들이 서 있는 저쪽으로 이따금 저택의 굴뚝과 지붕의 일부가 보였다. 그곳에서 여기까지는 직선거리로 별로 멀지 않은 것 같은데, 숲이 가로막은 탓인지 상당히 멀게 느껴졌다. 멤버들의 숙소도 돌과 목재로 중세풍으로 지어져 있었으며, 주위의 시골 풍경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극장은 그 왼쪽에 있고, 홀로 이어지는 아치형의 통로 양쪽에는 주연 가수며 유명한 예술가들 전용의 원룸식의 객실이 줄지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매기가 즐거운 듯이 까치걸음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이 많아져서 좋아요. 리허설은 월요일부터 시작한대요."
"아버지는 그때까지 돌아오실까?"
"아빠는 오늘 저녁 돌아오신대요. 엽서에 그렇게 씌어 있었어요."
샤론의 가슴에 불안과 기대가 솟았다. 그 동안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이 집에 살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매기에 대해서는 그로부터 전권을 넘겨받고 있으나, 그 말이 그의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멋대로 아이의 생활 패턴을 바꾸는 것이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매기가 앞장서서 두 사람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두 사람은 시내에서 사온 천과 형지를 거실 바닥에 펼쳤다. 설명을 이해했다기보다 직관적으로 그러는 것이겠지만, 매기는 도저히 여덟 살로는 생각되지 않는 솜씨로 천을 커트해 나갔다. 이윽고 두 사람은 시침질을 시작했고 너무나 그 일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에 딸깍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자기네를 줄곧 지켜보고 있는 암자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매기는 아빠를 쳐다보더니 좋아라고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다녀왔다." 그는 딸을 곡 껴안아 주고는 샤론에게 웃어 보였다."어떻게 하고 있는지 물을 것도 없는 것같군. 아주 즐거워 보여서 그대로 살며시 돌아갈까 했지."
"드레스를 만들고 있어요, 우리." 매기가 나서서 말했다. "샤론과 같이 천과 형지를 사와 지금 재단한 거예요."
"넌 드레스를 싫어하는 것 같던데?"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요전의 것은..."
"바늘을 치우기로 하자." 샤론은 그 다음을 말하게 하지 않으려고 얼른 끼어들었다.
매기는 순순히 쪼그리고 앉았으며, 샤론은 수그린 소녀의 몸 너머로 폴 샌더슨을 쳐다보았다. 머릿속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그는 눈부신 남자였다. 밝은 색 트위드 자케트 탓인지 첫 대면 때보다 젊어 보였다. 머리는 올백으로 빗어 넘기고는 있으나 자연스럽게 웨이브 진 앞머리가 자꾸 흘러내려, 그는 자주 그 머리를 쓸어 올리곤 했다. 그의 눈이 이토록 엷은 잿빛이라는 것을 샤론은 잊어버리고 있었다. 매기의 눈망울보다 훨씬 엷은 빛깔- 그 속에는 그러나 불쾌할 때는 금방 어름으로 바뀌는 차가움이 있었다. 조용하고 침착한 분위기지만 그에게서는 다른 사람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데 익숙해 있는 남자의 힘이 느껴졌다.
"앞으로 2,3개월은 집에서 지내게 되니까 무슨 볼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상의하고 싶은 일이 몇 가지 있어요." 샤론은 바로 그 즉시 말했다.
"안됐지만 나중에 해주지 않겠소? 지금은 우선 바빠서요. 사실 앞으로 몇 주 동안은 대혼란이 계속된다고 할 수 있어요. 리허설이 시작되면 날마다 사람들이 북적대죠. 모두가 안착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서로 충돌하는 것은 심벌즈뿐이 아니라서... 예술가 특유의 격렬한 성질이 맞부딪치는 모습이란!"
샤론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도착한 분들을 보았는데, 모두 참 조용한 사람들이던데요."
"그들은 뒷전에 자리할 사람들이지. 성질이 격한 것은 솔로 가수 쪽이고, 그들이 도착하는 날부터 치열한 불꽃이 튀길 것은 틀림없는 일이요."
"하지만 지금까지는 별로 화상도 입지 않고 해 오신 것 같군요!"
"난 늘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있으니까요. 오페라 계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럴 필요가 있지."
"오페라는 취미로 시작하신 건가요?"
"지금은 취미 이상이지. 거의 내 필생의 사업이라고 할 수 있을 거요."
"하지만 좋아하지 않으면 계속할 수가 없을 거예요."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어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니오.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 낸 시스템에 꽁꽁 묶여 꼼짝을 못하게 되는 법이지. 나는 매년 모든 일을 누구 다른 사람에게 맡겼으면 하고 바라지만, 어디 그게 쉽게 되는 일이오?"
"페이링스를 떠나서요?"
"아니, 이 집하고 극장을 분명하게 갈라 놓고 싶지만 그게 불가능하단 말이오."
"아빠는 언제나 저렇게 말해요." 매기가 일어섰다. "바늘을 치웠어요, 샤론. 미싱을 꺼내도 좋아요?"
"그전에 가봉을 해야지. 아버지가 돌아오셨으니 다음은 아동실에서 하기로 해."
"난 여기서 하겠어요."
"여기서 해도 상관없어." 폴 샌더슨은 두 삶에게 미소 지었다. "난 집에서 일할 때는 서재에서 하니까 방해가 되지 않아요."
"아빠가 언제 집에서 일 같은 걸 했어요? 언제나 오페라 사람들과 별관에 있으면서."
"아빠한테 그렇게 말하면 못 쓰는 거야, 매기."
"하지만 아빠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겨야.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의 흠을 잡는 것은 실례가 아니겠어?"
"뒤로 돌아가서 흉을 보는 것보다 나아."
폴 샌더슨은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리고, 샤론은 자기의 패배를 인정하고 화제를 바꾸었다.
"그럼 여기서, 가봉을 할 수 있게 시침질을 마칠까?"
매기는 얌전하게 바닥에 주저앉아 주위에 재단한 천을 펼쳤다.
"내 딸과 아주 친해진 것 같군." 일에 열중하고 있는 딸을 내려다보며 폴 샌더슨이 중얼거렸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요. 매기는 고독하고, 주목과 애정을 바라고 있었으니까요."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지, 안 그래요?" 그는 한숨을 쉬고 방문으로 다가갔다.
"저녁식사에 관해선데," 샤론은 나가려고 하는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매기는 저녁마다 아빠와 같이 식사하겠다고 하는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돌아서서 가만히 샤론을 바라보았다. "그게 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 시에 저녁을 드시느냐에 달렸지요."
"대개 여덟 시인데."
"매기에겐 너무 늦지 않을까요?"
"매기가 불평한 적은 없는데."
"그만한 나이의 아이들은 될수록 자지 않고 일어나 있으려고 해요."
"요즘은 방학 중이라 늦게 자도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전 다만 매개하고 저는 일곱 시에 식사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당신이 출타하고 안 계실 때는 우리는 점심에 정찬을 들고 저녁은 가벼운 것을 먹도록 하고 있어요. 그게 매기에게 낫다고 생각해서요."
"매기는 이제 여덟 살이오." 폴 샌더슨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구태여 아동실에서 맛없는 것을 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 아이는 나와 함께 식사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고, 사실 나도 딸과 같이 식사하는 것이 즐거워요."
자기의 분수를 알라고 하는 것 같아서 샤론은 더 이상은 말씨름을 하지 않고 그에게 등을 돌렸다. 잠시 후 돌아보니 이미 그의 모습은 없었으나 그의 존재감은 강렬하게 남아서 매기에게 주의를 돌리는 데 힘이 들었다. 이 소녀가 고집이 세고 독단적인 것도 알만했다. 모범이 되는 아버지가 저렇게 고집쟁이고 독단적이니...
저녁식사를 위해 꼼꼼하게 드레스업 하고서 매기를 데리러 갔더니 아동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마 아버지한테 먼저 간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샤론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객실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났다. 그녀는 입구에서 한순간 주저했다. 폴 샌더슨은 피아노 옆에 서서 리나 맥클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샤론의 가슴은 무거워졌다. 그 아름다운 미국 여자는 늘씬한 키, 큰 몸을 이국적인 시퐁 드레스로 감싸고, 실버 브론드의 머리칼을 머리 꼭대기에서 코로넷으로 틀어 올리고 있었다. 가는 목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의 광물질의 빛은 나이 어린 가정교사를 서슴없이 쳐다보는 눈의 차가운 빛과 한 쌍을 이루고 있었다.
"뭘 마시겠소, 미스 레인?" 폴 샌더슨이 말을 걸었다.
"셰리요." 특별히 세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나 샤론은 처음 생각난 것을 입에 올렸다.
"매기는 어디 있지요?" 샌더슨은 글라스를 건네면서 물었다.
"먼저 여기에 와 있는 줄 알았어요. 찾아오겠어요."
방문으로 걸어가려 할 때 매기가 들어왔다. 샤론은 저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외침을 삼켰다. 예의 루시색 드레스! 샤론이 레이스와 리본을 떼내 준 것만으로는 모자라 매기는 다시 레이스로 된 깃과 커프스까지 뜯어냈는지 첫 이미지와는 아주 다른 심플한 드레스가 되어 있었다.
"그 옷, 도대체 그 꼴이 뭐야!" 리나 맥클린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샤론이 레이스를 떼어 주었어."
"어머나, 그게 무슨 짓이야! 미스 레인!" 암갈색의 눈이 노여움으로 불탔으나, 리나 맥클린이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전에 매기가 참견했다.
"내가 떼어 달라고 한 거예요. 그대로라면 절대로 입지 않았을 거야!"
"그렇게도 귀여운 드레스였는데..." 리나 맥클린의 입가가 굳어졌다. "무척 비싼 옷이에요."
"값은 얼마가 됐든 상관없어요." 매기가 즉시 받았다. "그렇게 펄렁펄렁한 옷은 싫어요!"
"이렇게 고마움을 모르는 아이가 또 있을까. 최고급의 드레스를 사주었는데..."
"아이들은 옷의 값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미세스 맥클린." 샤론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매기는 프릴이 없는 것이 자기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 거예요."
"당신이 꼬드긴 거지요!"
"절대로 입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드레스를 적어도 지금은 입고 있어요."
"어쩌면 이렇게 뻔뻔스런 사람이 있을까!"
"난 그저..."
"이제 그만둬요!" 폴 샌더슨이 소리를 한번 꽥 지르자 두 사람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리나 맥클린은 쌀쌀한 눈초리고 가정교사를 노려보았고, 샤론은 떨리는 손으로 셰리 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미세스 맥클린 앞에서는 이 드레스를 입지 말라고 매기에게 말해 두었어야 했는데. 아마 그녀는 이 일을 자기를 놀리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녀뿐 아니라 폴 샌더슨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샤론은 노여움을 띤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화제는 오페라로 옮겨 갔고, 샤론은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이번 시즌에 테라지니가 밤의 여왕 역을 맡을 수 있을 지 아직 분명치가 못해." 폴 샌더슨이 말했다. "그녀의 남편이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는 일을 거절하라고 말하고 있는 모양이야. 문제는 어느 쪽 의견이 강하냐지."
"테라지닐 거예요." 리나 맥클린은 단언했다. "그녀만한 야심가를 난 본 적이 없거든요."
"성공한 여성들은 모두 그렇지."
"남자들도 모두 야심가가 아니겠어요?" 샤론은 자기의 입을 누르기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나가는 바람에 연회색의 눈길과 마주쳐 볼을 물들였다.
"남자라면 야심을 가져도 문제가 되지 않지."
"그것은 편견이에요."
"내가 편견이 없다고 말한 기억은 없는데."
샤론은 더욱 얼굴이 붉어졌고, 리나 맥클린은 기쁜 듯이 키들키들 웃었다.
"폴, 순진한 아가씨를 곯리는 게 아니에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것이 안 보여요?"
"곯리는 것은 아니야." 폴 샌더슨은 샤론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만일 당신이 한 여름을 여기에서 지낼 생각이라면, 내가 가정보다 일을 앞세우는 여자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두는 게 좋을 겨요. 여자는 직업보다 남편이나 아이들을 아껴야 마땅해요."
"결혼을 하기 위해서 일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는 어깨를 추썩였다.
"그렇게 해석해도 좋지."
"그 여자에게 재능이 있어도?"
"버려서 아까울 말한 재능을 가진 여자를 만나본 일이 없는데. 남자 같으면 얼마든지 들 수 있지만."
샤론은 입술을 깨물고, 어떻게 항변해야 좋을까 애써 머리를 짰다.
"여자가 인권을 인정받게 된 것은 겨우 50년 정도에 지나지 않아요. 재능을 꽃피우기에는 아직 역사가 너무 짧아요. 하지만 만일 백년 뒤에 같은 질문을 한다면, 몇 명이라도 여자의 이름을 대는 데 어려움이 없을 거예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위대한 재능의 소유자를 철재나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타고나는 것이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선천적으로 남자에게만 부여된 것이지."
"퀴리 부인이나, 브론테 자매, 제인 오스틴 같은 여자들은요?"
"재능은 있었지. 그러나 천재라고는 할 수 없어요."
"폴의 말이 맞아요." 리나 맥클린은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와 토론을 벌여 봐야 승산이 없어요, 미스 레인. 그는 옥스퍼드에서 학생 회장직을 맡아 했었어요."
"그만한 일로 미스 레인이 겁을 먹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지금까지와는 딴판으로 쾌활하게 그는 말했다. "어쨌든 마주 덤벼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군. 예스맨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은 따분하니까."
"그 말 잊지 말기 바라요." 리나 맥클린은 장난스럽게 그를 흘려보고 그의 팔에 자기 팔을 감았다.
식사 중에 미세스 맥클린과 매기 사이에 더 이상의 트러블이 생길까 싶어서 샤론은 아이의 옆에 앉았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트러블은 일으키기는커녕 매기는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든 상태여서 샤론은 폴 샌더슨에 대해 노여움이 치밀었다. 아이는 밤 아홉 시에 많은 음식을 차려 놓은 테이블 앞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되며, 벌써 오래 전에 침대에 들어가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가정교사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폴은 딸을 보더니 오라고 손짓했다.
매기는 묵직한 의자를 밀어내고 일어서서 걸어가더니 아버지에게 몸을 기댔다.
"식사에 거의 손을 안 대는 것 같구나." 폴은 조용히 말했다.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은걸요."
"그런 모양이구나, 이제 침대에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어나 있어도 좋다고 했잖아요."
"시간이 많이 늦었고, 앞으로도 줄곧 아빠는 네 곁에 있을 거야. 자, 얌전하게 가서 자려무나."
"샤론과 같이 가도 좋아요?"
"미스 레인은 아빠들과 같이 식사를 해야지. 너도 켰으니 혼자 침대에 들어갈 수 있겠지?"
매기가 그렇게 할 생각이 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때 리나 맥클린이 끼어들었다.
"그러지 말아, 마가렛. 아기처럼 떼쓰지 말고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내가 왜 아기예요!" 매기는 소리를 지르고는 왁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너는 지금 피곤한 거야. 리나의 말처럼 어서 가서 자야 해."
"저 사람 말 같은 것 들을 게 뭐야! 난 아빠의 아이야. 저 삶은 엄마가 아니야... 나한테 듣기 싫게 잔소리할 수 없어!"
샤론은 얼른 아니 옆으로 뛰어갔으나, 그보다도 먼저 폴이 번쩍 딸을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샤론은 조금 떨어져서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아동실로 들어가자, 훌쩍이는 딸을 바닥에 내려놓고 폴 샌더슨은 당황과 화가 뒤섞인 표정으로 가정교사를 돌아보았다.
"뒤는 내게 맡기세요." 샤론이 말하자 그는 깊은 한숨을 쉬고는 나갔다.
아이가 조용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약간 마음이 가라앉은 뒤에도 매기는 아버지가 한 일은 이정 했지만 미세스 맥클린에 대해 자기가 실례를 한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남의 일에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매기는 반항적으로 말했다. "그 사람이 나보고 이래라저래라 할 게 뭐예요. 우리 엄마도 아닌데!"
"처음부터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면 미세스 맥클린도 나서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네가 그렇게 떼를 썼기 때문에..."
"나도 돌아와 잘 생각이었어요."
"알고 있어. 자아, 이제 누워야지. 나도 가서 식사를 마쳐야겠으니."
"벌써 다 치워 버렸을 거예요. 배가 고픈 채 잘 수밖에 없게 되었군요."
"그렇다면 몰래 주방에 들어가 한밤중의 잔치를 벌이면 되지 뭐."
그 말을 듣자 매기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샤론은, 쓸데없는 농담을 하지 말걸, 하고 후회했다.
"우리 오늘 한밤주의 잔치를 벌이지 않겠어요?" 매기는 조금 전까지 울고 있었던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침대 위에서 팔딸팔딱 뛰었다.
"농담이었어. 자아, 어서 누워."
매기를 지우고 식당으로 돌아갔으나 식탁은 이미 치워져 버린 뒤였다. 객석에서 커피를 마시는 두 사람을 방해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샤론은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으나 부르다고 할 수도 없어서 그녀는 핸드백을 열어 아침 산책 때 먹다 만 초콜릿을 찾았다. 이것을 먹고 나서 목욕이나 하자. 더운 물에 몸을 담그면 뭘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잠이 올 거야.
도대체 몇 시나 되었을까? 집안은 조용히 가라앉았고, 방문 빛으로 복도의 불빛이 스며들지도 않았다. 샤론은 돌아 누우며 다시 한번 잠을 청하려고 했으나 눈이 말똥말똥해지며 잠이 들 것 같지가 않았다. 할 수 없이 샤론은 스탠드 스위치를 켰다. 새벽 한지. 왜 이런 시간에 눈이 뜨였을까? 배가 고파서? 잘 자기 위해서는 뱃속에 뭔가 좀 채워 넣을 수밖에 없겠군.
샤론은 가운을 걸치고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 속에서 포테이토 샐러드와 햄, 우유를 꺼내고 홈 메이드의 빵을 얇게 썰어 테이블로 날라 갔다. 폴 샌더슨의 날카로운 시선과 리나 맥클린의 딱딱한 눈초리를 의식하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이 좋으냐. 만일 그 여자가 앞으로 줄곧 이 집에 머물게 된다면 매기와 단둘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부탁하는 것이 나을 거야. 그렇게 하면 그 미국 여자오 매개 사이에 오늘 저녁과 같은 트러블은 생기지 않을 것이고, 또 폴 샌더슨도 가정교사가 미국 손님과 동석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샤론은 포테이토 샐러드를 입에 잔뜩 넣고 씹어 먹었다. 체중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은 고마운 일이야.-샤론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운의 허리띠를 꼭 매었다. 이 핑크빛의 헐렁한 가운은 그녀가 스무 살이 되는 생일에 오빠가 선물해 준 것이다.
"당신한테 샤론에게 줄 선물을 고르게 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앤은 웃으면서 남편의 안목이 좋지 못한 것을 비난했다. "아주머니 같아 보이는 옷이에요!"
"아니, 난 이런 것을 갖고 싶었어요." 샤론은 말했다 "겨울 여행은 무척 추우니까 디자인이야 어떻든 따뜻한 가운이 있어야 해요."
"따뜻하고도 디자인이 멋있는 것이 얼마든지 있어요."
"핑크빛은 참 섹시하다고 생각해요."
"알았어요, 알았어." 앤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팀이 고른 것이라니까 특별한 가운으로 생각되는가 보죠. 참 마음씨 고운 누이동생이기도 하지!"
추억에 미소를 띠며 샤론은 우유와 함께 포테이토 샐러드를 넘겼다. 그러나 글라스를 놓았을 때 희미한 발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그녀는 등이 굳어졌다. 토닥토닥 하는 발소리가 더욱 가까와지더니 방문 살며시 열렸다.
"매기!" 파자마 바람의 소녀가 얼굴을 들이밀어, 샤론은 엄격하게 말했다. "이런 시간에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지?"
매기는 잠깐 난처한 얼굴을 했으나,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는 까치걸음으로 주방에 들어왔다.
"한밤중의 잔치에 나도 끼워 줘요!" 소녀는 입에 손을 대고 인디언 같은 환성을 질렀다. "우리 인디언 텐트에서 잔치를 벌여요, 테이블 밑에서 먹기로 해요."
"안 돼, 바로 돌아가 자!"
그 명령이 절대 명령은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챘는지 매개는 멋대로 냉장고를 열고 피클즈를 껴냈다.
"알았어." 샤론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접시를 가져와, 햄을 잘라 줄 테니."
"비스킷하고 우유면 돼요." 매기는 테이블에 앉았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당신이 와주어서 난 참 좋아." 갑자기 매기가 그렇게 말했다. "지금까지의 사람들보다 훨씬 좋아요."
"그렇게 말해 주니 반갑군, 고마워."
"당신은 나의 엄마가 될 만큼 커?"
샤론은 깜짝 놀랐으나 태연한 체 말했다.
"조금 나이가 적을지도 몰라. 왜 그런 말을 묻지?"
"당신이 엄마라면 좋겠어. 진짜 엄마는 나를 좋아하지 낳았어요." 상대방이 난처해하는 것도 모르고 매기는 소리를 내며 우유를 마셨다. "엄마는 나와 놀아 준 일도 없고, 이야기를 해 준 일도 없어. 노래 부르는 것밖에는 생각하지 않았어. 아빠가 여기에서 엄마에게 노래를 못 부르게 했더니 나가 버렸어."
화제를 바꾸어야 할지 어떨지 망설였으나, 이 아이가 자기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샤론은 하고 싶을 만큼 이야기하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엄마를 싫다고 하는 것은 나쁜 일이에요?" 소녀는 불안한 듯이 샤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누가 너한테 그렇게 말했었니?"
"미세스 구드윈이, 아이는 부모를 사랑해야 한대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저 부모라고 해서 사랑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한테 잘해 주기 때문이 아니겠어? 만인 네가 강아지를 기르는데 먹이를 주고 산책에 데리고 나가고 해주지 않으면 그 강아지가 널 사랑하겠니? 네가 강아지에게 애정을 기울여야 비로소 그 강아지도 너를 사랑하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
"당신은 엄마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럼, 사랑하고 있지. 하지만 지금은 안 계셔."
"당신이 어렸을 때는 비에 있으면서 길러 주었어?"
"그랬지. 우리 엄마는 피아노를 가르쳤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배우러 왔어. 이따금 너무 바빠서 마를 돌볼 수가 없을 때도 있었지만,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곁에 와 주었어."
"난 아빠를 길러 준 유모가 키워 주었어." 매기는 우유 잔을 비웠다. "그 사람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지금도 여기 있을 텐데."
그 목소리에는 슬픈 울림이 들어 있었고, 아버지를 닮은 눈망울에 눈물이 반짝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있어." 샤론은 얼른 말하고 소녀의 손을 잡고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자아, 이제 방을 돌아가기로 할까?"
그때야 처음으로, 방문의 문설주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는 키 큰 남자를 보고 샤론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 언제부터 여기에 와 있었을까?
"우리 한밤중의 잔치를 벌이고 있었어요." 매기는 바로 보고했다. "아빠도 끼려고 온 거예요?"
"아니, 자기 전에 뭐 뜨거운 거나 만들어 마시려고 왔어."
그는 아직도 디너 자케트를 입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의 뒤쪽으로 눈길을 주는 샤론을 보고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미세스 맥클린은 이미 잠들었을 거요."
그는 몸을 수그려 딸을 안아 올리더니 홀을 빠져나가 계단을 올라갔다.
샤론은 주방에 남아 우유를 불어 얹고 비스킷과 찻잔을 준비했다. 그가 무엇을 마시고 싶어 하는지 몰랐지 때문에 샤론은 자기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만들어 객실로 가지고 갔다.
"초콜릿을 넣어 만들었는데요."
폴은 객실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말하고 나가려고 하는 샤론을 불러 세웠다.
"괜찮다면 나와 이야기 좀 하지 않겠소?"
샤론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소파에 앉아서는 소녀처럼 겁을 내는 자신을 나무랐다. 그리고 자기가 입고 있는 옷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미소를 띠었다.
"오늘 밤의 일은 어느 한쪽이 꼬드긴 것이지요?" 폴 샌더슨은 조용하게 물었다.
샤론은 눈까풀 밑으로 슬쩍 그를 쳐다보았다. 무표정하기는 했으나 펼그레이의 눈망울에는 희미한 번쩍임이 있었다.
"제가 나빴던 거예요. 매기를 재울 때 깜빡 쓸데없는 말을 지껄여 버렸어요."
"그 아이는 그런 일이라면 좋아라고 덤벼들지. 기숙학교에 가면 조금은 나아지겠지만."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 말투로 미루어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군."
"기본적으로, 아이는 부모 밑에서 양육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매기의 경우, 학교에 가서 나아지는 점도 있겠지요. 아버지가 늘 집을 비우기 때문에 쓸쓸해했으니까."
"그 아이가 어렸을 때는 언제나 여행에 데리고 다녔지." 그는 차갑게 말했다. "딸을 위해서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기숙학교에 보내려고 하지는 않을 거요. 그 아이는 요즘 손쓸 수 없게 되어가고 있으니, 역시 같은 또래와 어울리는 것이 필요할지도 몰라요."
"주간만 다니는 학교는 안 될까요."
"그러면 그 아이는 나한테 응석을 부리려고 들 거요. 나도 아주 받아 주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알았어요. 매기는 어머니가 없어서..."
"어머니가 없어도 그 아이는 행복하오."
그가 감정적인 말은 할 것은 이버니 처음이었다. 그 거센 기세에 샤론은 쇼크를 받았다.
그녀가 난처해진 것을 눈치 챘는지 그는 마로 사과했다.
"내가 한 말이 거슬리더라도 양해해요. 난 무엇이나 분명하게 말하는 성미가 되어서."
"그 점은 저도 지지 않을 거예요, 아시겠지만!"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웃었다. 그가 웃으면 훨씬 젊어 보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것은 유전인가, 아니면 불행한 결혼 탓인가, 하고 샤론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입고 있으니 핑크의 토끼 같군." 그는 느닷없이 그렇게 말했다. "길고 햐얀 귀만 있으면!"
샤론은 웃었다.
"전에는 사람들한테 좀 나은 찬사를 들었는데요."
"토끼를 싫어하오?" 그는 진지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폭신폭신하니 보드랍고 참 귀엽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토끼는 따뜻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돼요. 귀를 잡고 들 때는 엉덩이를 받쳐 줘야지요." 샤론은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당황하여 얼른 의자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이만 실례하겠어요."
"내가 당신한테 겁을 주었나? 귀를 잡고 들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그의 생각에 말려든 것을 알았으나 샤론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무서워할 게 뭐가 있겠어요, 미스터 샌더슨. 다만 지금까지의 가정교사들처럼 자기를 팔려고 하는 줄 알까 싶어 그랬지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요. 매기가 당신을 무척 따르는 것을 보니 나도 안심이 되는 군." 폴 샌더슨은 말했다. "그런데, 오늘 저녁 식사 중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나에게 뭐 하고 싶은 말이 없소? 당신의 얼굴은 마치 내 뺨이라도 갈기고 싶은 것 같았는데."
"그 정도가 아니라 당신의 귀를 잡아 흔들어 주고 싶었어요!"
순간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 되었으나, 그는 바로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런 때는 내 엉덩이를 받쳐 주는 것을 잊지 말아요, 미스 레인."
샤론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고, 그를 만난 후 처음으로 누그러진 느낌이 들었다. 그는 샤쓰의 단추를 몇 개 풀어 놓고 까만 타이를 늦추고 있었기 때문에, 젠체하지 않는 모습이 여느 때답지 않게 매력적이었다.
"매기에게는 규칙을 강요하기는 힘들어요." 그는 다시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편부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응석을 받아 주게 되지."
"만일 그대로 응석을 받아 주기만 하면, 나중에 큰 변화가 있을 때 매기가 적응하기 어렵게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래요?" 비판을 받는 것이 호가 나는지 그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만일 그 아이가 기숙학교에 들어가서도 지금처럼 멋대로 굴려고 한다면 다른 아이들이 받아들여 줄까요?"
"그렇기 때문에 기숙학교에 넣으려 하고 있지."
"하지만, 그러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요? 기숙학교의 규칙을 여기에 들여놓으라는 거요?"
"좀 더 엄격하게 하셔야 해요. 어떤 종류의 습관은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 아이가 알도록 할 필요가 있어요."
"이를테면?"
"취침 시간이라든지, 늦게까지 자지 않고 어른과 같이 식사하는 것을 인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특별한 경우에는 모르지만 평상시에는 가벼운 저녁식사를 들고 여덟 시에는 침대에 들어가 늦어도 여덟 시 반에는 불을 끄는 것이 상식이 아닐까요?"
"그밖에는?"
"먹고 싶은 것을 멋대로 골라 먹게 하는 것도 문제예요. 내가 여기에 오기 전에는 매기는 초콜릿 비스킷이나 아이스크림, 혹은 프루츠 같은 것만 먹고 지낸 것 같아요. 또 한 가지, 그 아이는 예절을 배울 필요가 있더군요."
"그것이 된다면 걱정이 없게? 그 아이는 예절이란 말도 몰라요."
"그것은 당신이 놓아기르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리나도 그렇게 말하더군."
"미세스 맥클린의 말이 맞아요." 그렇게 인정해 주기는 약이 올랐으나 사실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매기는 그분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크게 떠들어도 좋다고 할 수는 없어요."
"만일 매기가 조금이라도 미세스 맥클린에게 예의를 나타내게 된다면 난 당신한테 모자를 벗겠소."
"그보다, 제 제안을 인정해 주시겠어요?"
폴 샌더슨은 한숨을 쉬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만일 매기가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낀다면 생각을 바꿀지도 몰라요."
"그 아이를 슬프게 만들 생각은 없어요. 처음 며칠은 신경질을 부릴지도 모르지만 이내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먼저 꺾이지 않는 한." 샤론은 일어섰다 "난 그 아이가 좋아요, 미스터 샌더슨. 매기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요."
6
처음에는 애를 먹었지만, 매기는 조금씩 새로운 룰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따금, 이제 침대로 가야 한다고 하면 투덜거리기는 했으나, 결국 샤론에 대한 호의가 아이로 하여금 응하게 했다. 거리에 더욱 도움이 된 것은, 리나 맥클린이 두 사람을 다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매기가 눈치 채고 있는 일이었다. 아이로서는 가정교사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리나 맥클린의 약을 올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5월로 들어서자 그때까지 계속되던 맑은 하늘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줄곧 비가 찔끔거리게 되었다. 숙사에 갇힌 가수들은 악천후가 목에 나쁜 영향이라도 미칠까 싶어 신경이 날카로와져서 분위기는 하루하루 험악해져 갔다. 잿빛 구름이 하늘에 들어찬 지 일주일이 되자 폴 샌더슨은 가수나 스테프들을 위해서 뷔페 파티를 열겠다고 발표했고, 그 소식은 그들의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튿날이 되자 파티를 위한 출장 서비스의 차가 식기며 의자, 테이블을 산처럼 싣고 런던에서 당도했다.
"뭣 때문에 저렇게 많이 날라온 거지요?" 샤론은 미세스 구드윈에게 물었다. "별관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 것 같지도 않은데."
"시즌 중에는 여기에 레스토랑을 열기도 하기 때문에 거기에 필요한 것도 날라온 것이겠지요."
"어머나, 레스토랑까지? 마치 여기만으로 완성된 소우주 같군요."
"그렇지, 완성된 소우주지." 폴 샌더슨이 들어와 그들의 옆에 섰다. "앞으로는 상당히 바빠질 거요."
"시즌은 언제부터 시작되지요?"
"6월의 첫 주부터."
"몇 주나 전부터 리허설을 할 수 있다니, 은혜 받은 사람들이군요."
"겨울 일주일 전에 오는 가수도 있지."
"할일 없는 사람은 마치 휴가라도 오는 기분으로 오요." 미세스 구드윈이 불만스런 듯이 말했다. "사치스런 곳에 살게 된고 한에서 열까지 다 돌봐 주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미세스 구드윈." 폴 샌더슨이 웃으면서 나무랐다. "여기에 모이는 예술가들은 저마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데요. 밤늦게까지 귀찮게 굴요, 뭐 눈곱만큼이라도 거슬리면 큰일이나 난 것처럼 야단야단하고."
"예술가란 그런 거요."
"최근의 예술가들은 꼭 그렇다고 할 수 없어요." 샤론은 대학에서 같이 지낸 진지하고 온화한 친구들이 생각나 그렇게 반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계의 경쟁은 전보다 휠씬 격렬해졌는걸요. 예술가라고 해서 멋대로 굴 수 있는 시대는 지났어요."
"오페라계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군?"
"오빠가 필립스의 녹음 기사였으니까요." 샤론은 거침없이 말했다. "오페라 가수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때 볼 샌더슨은 짐을 싣고 온 운전사에게 불려 계단을 내려갔다. 샤론은 매기를 데리고 신책을 나갔다. 빗속을, 젖은 오솔길을 따라 우산을 들고 한가롭게 걸어가 호수가 보이는 정자까지 왔다.
"많은 손님들이 이 호숫가에서 도시락을 먹을 거예요." 매기가 말했다. "난 레스토랑에서 먹는 것이 훨씬 맛있다고 행각하는데."
"그것은 매기가 이 뜰에 너무나 익숙해 있기 때문이지. 만일 도시에 살고 있다면, 매기도 이런 데서 도시락을 먹는 것이 참 즐거울 거야."
"미세스 맥클린은 도시에 살면서도 피크닉이라면 질색이에요."
"그런 사람도 있겠지."
"아빠가 그 사람하고 결혼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미세스 구드윈은 결혼할 거라고 말하고 있지만."
"매기의 아빠와 미세스 맥클린 사이의 일은 본인들 밖에는 알 수가 없는 거야."
"아빠한테 물어 봤더니 왠지 이상한 말을 하더군요."
샤론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소녀는 흙투성이가 되 오리 새끼에 마음을 빼앗겨 물가로 뛰어갔다. 폴은 딸의 물음에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아니면, 애매하게 말을 흐렸을까? 도시적인 늘씬한 미국 여성을 페이링스의 여주인으로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아름다운 환경과 오페라 시즌의 호화로운 생활에 정말 어울리는 여자라고 할 수 있었다.
매기가 오리 새끼를 안고 돌아왔다.
"이 아이 다쳤어. 어떻게 해줄 수 없어요?"
샤론은 아직 솜털이 남아 있는 조그만 오리를 내려다보았다.
"엄마한테서 떼어놓으면 못써."
"엄마와 같이 있었던 게 아니에요. 혼자 갈대밭 속에 있었어요. 다리가 부러진 것이 아닐까?"
샤론은 살며시 오리 새끼를 만져 보았다.
"지쳐 있을 뿐인지도 몰라."
"어떻게 하면 좋지요? 호수에 도로 놓아 주면 물에 빠져 죽을지도 몰라요."
"오리가 빠져 죽다니 들어 분 일도 없는 일인데." 샤론은 웃었으나, 소녀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그녀의 조그만 몸을 안아 주었다. "그럼 집에 데리고 가서 몸을 씻어 주자. 그러고 나서 기운이 나면 호수에 놓아 주면 될 거야."
아동실의 욕조에서 한동안 오리 새끼는 베이지색 털실 뭉치처럼 떠 있었다. 조금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아마 물에 빠져 죽을 거야." 솜털에 덮인 조그만 생물이 욕조 가장자리고 떠오니까 매기는 걱정스러운 듯이 소리쳤다. "수의사를 불러 줘요!"
"수의사가 와봐야 별수가 없을 것 같은데." 샤론은 일어섰다.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하면 좋은지 물어보겠어."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매기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욕실로 들어가 보니, 소녀는 창백한 볼을 눈물로 적시며 욕조 위에 수그리고 있었다.
"죽어 버렸어요, 샤론. 저것 보라구요."
오리 새끼는 성냥개비 같은 다리를 위로 한 채 물에 떠 있었다. 샤론은 얼른 작은 몸을 건져 올렸다.
"내가 나빴어요." 매기가 울면서 소리쳤다. "호수에서 데리고 왔기 때문이에요... 거기 가만 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차피 죽었을 거야. 갈대 덤불에 발이 걸려 있었는걸. 자, 이제 그만 울어. 뜰에 묻어 주자."
"제대로 장례를 치뤄 줄 수 있어요?"
"매기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두 사람이 뒤뜰로 나가니, 마침 벽에 기대 놓은 커다란 삽이 있었다. 구덩이를 파서 오리 새끼를 뉘어 놓았을 때, 바로 옆에 웰링턴 부츠가 서 있는 것이 샤론의 눈에 띄었다.
"보물찾기요?"
얼굴을 든 샤론은 드리워진 구름과 같은 색의 잿빛 는을 쳐다보았다.
"오리의 장례식이에요." 매기가 옆에서 설명했다. "목욕탕 속에서 죽어 버렸어요."
"오리를 집으로 데리고 오면 못써."
"다쳤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데리고 왔더니 죽어 버렸나?"
"네, 그래요. 이제부터 샤론이 기도하는 거예요."
그는 눈썹을 치켜 올렸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샤론은 서둘러 오리 새끼위에 흙을 덮었다.
"자, 이제 돌아가자."
"하지만 아직 기도를 안 했어! 제대로 장례식을 해준다고 약속했잖아."
"불쌍도 해라." 폴 샌더슨은 딸의 포니테일로 빗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기도가 없어도 틀림업이 새끼 오리는 천국에 갈 거야."
소녀는 입술을 떨었다. 샤론은 할 수 없이 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 마음속으로 기도하자." 그렇게 말하면서도 바로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매혹적인 남자의 존재가 자꾸 마음에 걸려 어쩔 수가 없었다. 잿빛이 섞인 머리에 은빛 빗방울을 반짝이며, 벨트를 곽 죄어 맨 매킨토시의 호주머니에 두 손을 깊숙이 찌로고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기도의 말을 중얼거리고 나서 일어서서 샤론은 비에 젖은 흙을 무릎에서 털어냈다.
매기는 아직도 울고 있었다.
"안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난 페트가 하나도 없는데."
"오리는 페트가 될 수 없는 거야." 샤론은 따뜻하게 소녀를 안았다. "살았다 해도 호수에 놓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어."
"난 어째서 페트를 기를 수 없죠? 언제나 곁에 있어 줄 페트를 갖고 싶어."
"너는 9월부터 기숙학교에 가게 되어 있어." 폴 샌더슨이 말했다. "네가 가면 누가 페트를 돌보겠니?"
"미스터 구드윈한테 부탁하겠어요. 페트도 못 기르게 하는 아빠는 싫어요! 모두 리나 탓이에요!" 매기는 가정교사의 손을 뿌리치고 집 쪽으로 뛰어갔다.
샤론은 복잡한 기분으로 안쓰러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패트를 갖고 싶어 하는 줄 몰랐군."
"페트를 기리기 싫은 이유라도 있나요?" 샤론은 물었다. "만일 미스터 구드윈이 페트의 뒷바라지를 맡아 준다면...."
그는 어깨를 추썩이더니 뭐 불쾌한 일이라도 생각난 듯이 표정이 험악해졌다.
"한번은 세인트버너드 개를 기르고 싶지 않으냐고 물어 보았지. 하지만 그 애는 큰 개는 싫다고 하더군."
"어린아이들은 대개 작은 개를 갖고 싶어해요. 작은 개를 길러 보면 큰 개도 갖고 싶어 하게 될 거예요."
"집안을 동물원으로 만들 생각은 없소."
"겨우 개 두 마리로요?"
"아내는 요란스럽게 짖어대는 포매라니안을 세 마리나 길렀었소. 난 다시는 개는 기르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아하, 일이 그렇게 도니 거로구나. 그건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매기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당신이 매기를 슬프게 만들지 않아도, 그 애는 어미니 때문에 충분히 괴로워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당신의 의견이 듣고 싶을 때는 내가 묻기로 하겠소, 미스 레인. 딸의 버릇을 가르치는 것은 당신한테 맡겼지만 나한테까지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말아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샤론은 비위가 틀려서 대답했다. "당신은 개를 기르지 않기 다행이군요. 거침없이 개를 걷어찰 타이프인 것 같으니까요."
그는 그 자리를 떠나려는 샤론의 어깨를 거칠게 잡았다.
"개를 걷어 차? 내가?" 위엄을 담은 목소리로 말하고 그는 가만히 있는 샤론을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개를 걷어차고, 싫어하는 여자한테 무리하게 키스를 하는 그런 타이프의 남자로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당신을 실망시켜서는 안 되겠군...."
그는 느닷없이 두 손으로 샤론의 얼굴을 끼더니 입술을 겹쳤다. 버둥거리면 버둥거릴수록 격정은 거세어갔다. 두 팔로 꼭 그녀를 끌어안는 바람에 얇은 스웨터를 통해 비에 잦은 매킨토시의 싸늘한 감촉이 전해왔다.
자기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샤론의 몸은 바싹 다가든 그의 존재에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비에 잦은 몸의 온기에 뒤섞인 아프테셰이브의 향기. 그것은 워라고 말할 수 없는 남자다운 향기였으며, 사론은 이상한 취기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남자에게 이처럼 감각이 들쑤셔져 본 일이 없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쌀쌀하고 초연하던 이 집의 주인이라니! 하긴 지금의 그는 전혀 쌀쌀하지도 초연하지도 않다.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그는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강렬하고 정열적인 남자다. 샤론이 저항을 멈추자 그도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거친 키스도 차츰 부드럽게 바뀌어 갔다.
샤론은 곧 얼굴을 돌렸다.
"부탁이에요. 놔줘요."
갈라진 속삭임은 어떤 저항보다도 더 효과가 있었다. 샌더슨은 그녀를 놓아 주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미스 레인. 당신을 무서워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울컥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자세심을 잃어버리고..."
"자제심을 잃으면 언제나 가까이 있는 여자한테 키스를 하나요?" 샤론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되받았다.
"언제나 이렇게 하는 건 아니야. 방금 카리바니와 격론을 벌이고 오는 길인에," 그는 어제 피이링스에 도착한 몸매가 좋은 매조소프라노 가수의 이름을 들었다. "그녀한테 키스하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야!"
샤론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한테는 토론보다 키스가 더 효험이 있을지도 모를 텐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도저히 그럴 마음이 나지를 않는걸."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미안하다고 한 것은 진심이었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겠소."
"믿겠어요, 미스터 샌더슨." 샤론은 주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서재 쪽으로 향했고, 샤론은 자신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혼란된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미스터 샌더슨은 외출하셨어요." 점심을 들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미세스 구드윈이 말했다. "점심은 밖에서 드신다는군요."
"파티는 몇 시부터예요?"
"여덟 시부터예요."
"나도 일어나 있어도 괜찮아요, 샤론?"
"아홉 시가지는 아래층에 있어도 좋아."
"만일 내가 아홉 시 후에도 잠자리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아무 것도 안해."
"그렇다면 왜 당신의 말을 따라야 하는 거지요?"
"네가 그렇게 해주기를 내가 바라기 때문이야. 그리고 너를 위해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일찍 침대에 들어가는 것이 왜 나를 위하는 일이 되지요?"
"아홉 시는 이르지가 않아. 너만 한 나이 적에 나는 매일 여덟 시에 잠자리에 들었어."
"당신의 아빠는 파티를 열지 않았어요?"
"너의 아빠가 하는 것 같은 파티는 열지 않았어. 우리는 이 집보다 훨씬 작은 집에 살고 있었어."
"나도 작은 집에서 살고 싶은데." 소녀는 치킨을 우물우물 먹으면서 중얼거렸다. "같이 놀 친구가 이웃에 많이 살고, 길 양쪽으로는 귀여운 집이 늘어서 있는 그런 곳에."
"이곳 학교 친구를 부르면 어떨까?"
"모두 아기들 같아서 재미가 없어요."
"네가 너무 어른 티가 나는 것이 아니니?"
"어른 티가 나서 싫어요?"
샤론은 손을 뻗어 혈색이 좋지 않은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니, 난 네가 참 좋아."
점심을 마치자 매기는 위상을 디자인한다면서 방으로 들어갔고, 샤론은 파티 준비가 한창인 대식당으로 구경을 하러 갔다.
벽에 가까운 테이블은 풀을 먹인 하얀 크로드로 덮여있고, 그 위에는 은 나이프며 포크가 산처럼 쌓인 접시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작은 테이블과 금색의 의자도 여러 개 배치되어 있었다. 상당히 규모가 큰 파티가 도리 것 같았다. 생각해 보나, 오페라 가수나 그 밖의 스태프는 거의 와 있었으며, 남은 몇 명은 오늘 오후에 도착한다고 했다. 폴 샌더슨은 헤이워드히스까지 그들을 마중 나간 것일까? 샤론은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된 객실로 들어가 창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아침에 내리던 이슬비는 억수 같은 비로 바뀌어 있었다. 그 빗줄기 저쪽에서 엔진 소리가 들리더니 회색의 콘버터블이 미끄러지듯이 시계로 들어왔다. 폴 샌더슨이 핸들을 잡고 있었다. 샤론은 왠지 그와 얼굴을 마주치기 싫어 얼른 창문에서 몸을 뗐다.
빠른 걸음으로 홀을 가로질러 계단의 손잡이에 손을 얹는 순간 샤론은, 현관에서 들어온 폴 샌더슨이 부르는 소리에 발을 멈추었다.
"매기는 어디 있소?"
"방에서 디자인을 한다는군요. 이번 돈 조반니의 의상에 관해 무슨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모양이에요."
그의 입술이 꿈틀 움직였다.
"설마 그 아이더러 의상 디자이너가 되라고 꼬드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매기는 뛰어난 소질이 있어요. 그렇게 작은 아이치고는 너무나 예리한 센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혹시 어쩌면 이것이 그 아이를 보통의 아이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는 발 밑에 놓인 바스켓을 내려다보았다. 바스켓 속에서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나서 샤론은 쭈그리고 앉아 뚜껑을 열어 보았다.
"어머나, 귀여워라!" 그녀는 크림색의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예쁠까. 설마 당신이 개를... 언제 사셨지요?"
"오늘 오후. 하지만 줄곧 후회하고 있던 중이지."
"후회라니 당치도 않아요!"
강아지는 샤론의 팔에서 벗어나 폴 샌더슨의 주위를 돌아다녔다. 그는 살며시 강아지를 안아 바스켓 안에 내려놓고 뚜껑을 닫았다.
"왜 바스켓의 뚜껑을 닫지요?" 샤론은 비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매기한테 이 바스켓을 열게 하려고."
샤론은 납득이 되어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되었다.
"틀림없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를 거예요."
매기는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크레용을 움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기울어진 머리와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옆얼굴을 지켜보았다. 조그만 몸의 어디에 저 같은 기백과 열성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매기." 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좋은 걸 가져왔다."
그런 뒤로 한동안은 축제 같은 소동이었다. 매기는 흥분하여 새 페트를 크게 환영했고, 강아지는 좋아서 깽깽 짖어댔다.
"크면 무엇이 될까?" 강아지와 놀고 있던 매기는 일어서더니 아버지한테 물었다.
"개가 되겠지."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무슨 개지?"
"래브라도."
"잘됐군요, 엄마가 기르던 포메라니안이 아니어서."
표정은 바꾸지 않았으나 폴 샌더슨은 한순간 몸이 굳어졌다.
"뜰에서 같이 놀고 산책에 데리고 나갈 수 있는 개가 좋다고 생각했지."
"이름이 뭐지?"
"네가 지어 줘야지."
"샤론이라고 하면 어떨까?"
"유감스럽지만 이 개는 수캐야."
"벌꿀색을 하고 있으니까," 샤론이 제안했다. "하니라고 부르면 어떨까?"
"하니보다는 바닷가의 샌디(모래) 빛깔인데."
"그럼 샌디는?"
매기는 기쁜 듯이 손뼉을 쳤다.
"그레 좋겠어, 샌디!"
자기으 새 이름을 알아들었는지 강아지는 소녀에게 달려들었고, 매기는 귀여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샌디를 안아 들어 볼을 비볐다.
"바스켓 속에 목걸이와 사슬이 있다. 이것이 설명서야. 돌보는 방식이 씌어 있으니 이것을 잘 앍고 미세스 구드윈과 상의하는 게 좋을 거야. 처음에는 하루에 네 번씩 먹이를 주어야 하니까 먼저 이 집의 쿡 양반한테 샌디를 소개해야 마땅하지 않겠니."
"사람의 심리를 잘 아시는 군요." 샤론이 중얼거리자 그는 웃음 띤 눈길을 그녀에게 향했다.
"그렇지, 미스 레인. 나는 빈틈없는 외교관이오."
"샤론이라고 부르면 어때요, 아빠? 미세스 맥클린도 리나라고 부르고 있잖아요?"
"그녀와 나는 달라." 샤론은 얼른 말했다. "미세스 맥클린은 샌더슨 집안과 가까운 분인걸."
"당신도 가가와." 그는 조용히 말했다. "매기의 말대로 당신을 샤론이라고 부르겠어. 그래도 좋겠지?"
"물론이에요."
"당신도 아빠를 폴이라고 불러요."
"그럴 수는 없어.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걸."
"당신을 사용인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니 딱딱한 호칭을 주장할 필요는 없지." 멀리에서 클랙슨 소리가 났다. 그는 흘끔 손목시계를 보았다. "마지막 멤버가 도착한 모양이군."
그는 밖으로 나갔고, 샤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라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미스터 샌더슨이라고 부르고 있는 동안은 적어도 그와의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폴이라고 부르게 되면....
그날 저녁, 무엇을 입을까 하고 옷장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매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뜻 밖에도 벌써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어요."
"아홉시까지는 일어나 있어도 괜찮은데."
"나도 실은 그렇게 하고 싶어요."
샤론은 매기를 꼭 껴안았다. 강아지 선물에 대해 이런 형식으로 사례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럼 아홉시까지는 불을 켜고 있어도 좋아. 이따가 아이스크림이나 무슨 디저트를 갖다 주겠어."
"주방에서 맛있어 보이는 피치거터를 보았어. 초콜릿과 너트를 앉은 거예요."
"그럼 피치커터로 하겠어."
"당신이 드레스를 다 입을 때까지 여기 있어도 괜찮아요?"
"물론이지." 샤론은 옷장 문을 활짝 열고 매기와 함께 거기에 걸려 있는 드레스를 살펴보았다. 샤론의 눈망울 빛깔과 같은 보랏빛 캐시미어를 택했다. 심플한 롱 드레스지만 입으면 스타일이 좋은 싱싱한 몸매를 한결 돋보이게 해주는 옷이었다. 다행히 그 점에서는 다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드레스의 지퍼를 올리고 두 손 안에 잡힐 것 같은 가는 웨이스트에 벨트를 맸다. 그렇지, 폴의 두 손안에...
샤론은 기운 좋게 머리칼을 브러시하고 아이새도우를 칠하고 마스카라를 했다.
"당신은 화장을 하지 않아도 참 예쁜데." 매기가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이러면 더 예뻐보일 것 같아서." 샤론은 화장대에 등을 돌리고 이브닝 백을 집어 들었다.
"피치커터 잊지 말아요."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샤론은 계단을 내려갔다.
객실은 거의 사람으로 메워져 있었다. 샤론은 기가 꺾여 입구께에 서서 망설였다. 폴 샌더슨의 모습을 찾아 방안을 둘러보니, 그는 소년처럼 순진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와 뭔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신사는 유명한 지휘자 캐빈니고, 소문에 의하면 외모와는 거리가 먼 성질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다음에 샤론의 시선은 미세스 맥클린에게로 가서 멈추었다. 까만 실크 저지의 드레스에 다이아몬드가 반짝이고 있으며, 언제나처럼 우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샤론은 자기가 시골 쥐처럼 느껴져 캐시미어 울을 입고 나온 것이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고래를 쳐들어 그녀는 몸을 꼿꼿이 펴고 걷기 시작했다.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미세스 맥클린이 돌아보았으며, 다가온 샤론을 보자 표정이 굳어졌다.
"매기에게 개를 기르게 했다지요? 그것이 경솔한 짓인 줄 몰라요?"
"왜 경솔하지요?"
"그 아이가 기숙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서로 이별을 고해야 해요."
"하지만 방학이 되면 즐거움이 불어날 게 아녜요?"
"방학 때는 아버지를 만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면 돼요. 개 같은 건 필요가 없어요."
"어린아이에게는 페트가 필요해요."
갈색의 눈이 노여움으로 불타고 있었다. 샤론은 그녀로부터 물러나 뷔페 테이블로 다가갔다.
"뭘 마시겠습니까, 마담?" 죽 늘어서 있는 글라스 뒤에서 웨이터가 말을 걸었다. "샴페인, 위스키, 셰리, 진..."
샴페인 글라스를 손에 들고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만한 자리를 눈으로 찾았다. 커다랗고 하얀 꽃병 저쪽에 마침 좋은 장소가 있어서, 샤론은 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막 몸을 숨기려고 할 때,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문득 쳐다보니, 정열적인 갈색의 눈과 시선이 부딪쳤다. 글라스를 든 손이 떨렸다. 토니! 설마 이런 데서 마주칠 줄이야!
"샤론!" 그는 소리쳤다. "당신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 당신이 페이링스 오페라에 와 있다니."
"그게 아니에요." 샤론은 당황하여 말했다. "난 여기에서 미스터 샌더슨의 딸을 돌보고 있어요."
"농담은 집어치워요. 당신은 가수가 아니오!"
샤론은 겁이 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서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난..."
"그렇다면 어디 다른 데로 갑시다."
샤론은 마지못해 앞서서 객실을 빠져나가 거실로 향했다. 거기도 몇 명의 손님이 있었으나 혼잡한 정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조용한 창문 앞에 섰다.
"자, 당신이 왜 페이링스에 와서 아기보기 같은 일을 하는지 설명해 주겠소?"
샤론은 여기에 오게 된 경위를 간단히 이야기하고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강조했다. 하나는 아직도 앞으로 5개월은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 또 하나는 가수로서의 신분을 절대로 이 집 주인한테 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넌센스란 말이야." 젊은 테너 가수는 말했다. "당신은 뛰어난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을 미스터 샌더슨한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직업소개소에 가수는 절대 고용하지 않겠다고 언명한 거예요."
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여기에 왔을 때, 가정교사와의 사이에 뭔가 트러블이 있는 것 같았어."
"그래요. 그래서 이번에는 가수 지망자는 절대로 고용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건 모양이에요."
"안됐군." 토니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입술에 댔다.
"지금까지의 얼빠진 여자들 때문에 당신이 어려운 입장에 몰리게 되다니."
"어렵기는커녕 무척 사치스런 입장이에요!" 샤론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매기는 참 귀엽고, 넓고 아름다운 집에 살면서 최고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걸요."
집요한 갈색의 눈길에 샤론은 다시 불안감이 커졌다. 이런 이상적인 상태가 오래 계속될 턱이 없었다. 에덴의 동산에는 뱀이 숨어든다는 사실을 생각했어야 했던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요." 청년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누구한테도 지껄이지 않을 테니."
"어쨌든 이것은 나 이외의 누구에게도 관계가 없는 일이에요."
"당신으로서는 중대한 문제요?"
"그게 무슨 뜻이지요?"
"여기서 쫓겨나면 곤란해요? 거짓말이 밝혀지면 그렇게 되는 거지요?"
"물론 곤란해요. 좋은 일자리고, 매기는 참 착한 아이라 마음에 쏙 들어요."
"아버지도 마음에 쏙 든 게 아니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토니. 난 그에게 그저 고용되어 있을 뿐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사랑을 느끼지 말라는 법도 없지."
토니의 말에 흠칫 놀랐으나, 샤론은 가까스로 웃어 보였다.
"다행이군. 난 질투가 심하니까."
"바보군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바보라는 말이오?"
"부탁이니 이제 그만둬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말했잖아요...."
"그것은 6개월 전, 내가 이탈리아로 돌아가기 전의 이야기지."
"지금도 생각은 바뀌지 않았어요."
"누구 달리 좋은 남자라도 있소?"
"아니요. 하지만 당신을 좋아하게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부탁이에요, 그걸 알아줘요." 샤론은 한숨을 쉬고 글라스로 눈길을 떨구었다. 일년 가량 같은 선생 밑에서 배운 사이였다. 처음에는 그의 쾌활함이나 말씨가 즐거웠으나, 차츰 그의 태도가 끈덕지게 되어 가서 샤론이 다른 학생과 친해지기라도 하면 질투를 하요 마침내 샤론은 그와 말을 하는 것도 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졸업한 뒤로는 예전의 정으로 몇 번 만나기는 했으나 그것뿐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어." 토니는 중얼거렸다. "지난주 영국으로 돌아와 바로 당시의 오빠 집에 전화를 했지."
"몰랐어요." 오늘 아침 앤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으나 그런 일은 씌어 있지 않았다.
"내 이름까지는 대지 않았기 때문이지. 주말에라도 직접 만나러 갈 생각이었어."
"날 탐지하러?"
"왜 그런 잔인한 소리를 하지?" 토니는 분개하여 말하고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잔인한 말이 아니에요." 샤론은 손을 뽑았다. "사실일 뿐이지.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며,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당신 자신도 행복해질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믿지도 않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어. 다시 한번 생각해 주지 않겠어? 그저 친구로서 어울려 줘도 좋아."
"그건 무리란 말이에요."
"만일 폴 샌더슨에게 당신이 가수라는 것을 들통 내면 당신은 여기에 있을 수 없게 돼... 안 그래?"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그에게 말하라구요!" 사론은 그의 속이 뻔한 으름장은 무섭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를 쫓겨나도 좋다는 거야?"
"상관없어요."
토니는 두두룩한 입술 주위에 희미한 웃음을 띠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리나와 나란히 폴 샌더슨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토니도 깊이 있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그 쪽으로 돌렸다.
"그럼 지금 그에게 이야기하겠어." 토니는 즐거운듯이 말하고 걸어가려고 했다.
"가만히 있지 못해요!"
그 말에 토니는 의기양양한 듯이 발을 멈추었다.
"사실은 여기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은 거지?"
"급료도 좋고, 리허설도 구경할 수 있고, 오페라도 들을 수 있어요."
"가수라면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기회군."
"왜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지 알겠지요?"
"알고말고. 당신이 나에게 잘해 주면 아무말도 하지않겠어." 샤론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토니는 기분이 안좋은 듯이 고개를 저었다. "친구야... 더 이상은 바라지 않아."
그의 협박에 굴하기는 싫었으나 샤론은 어쩔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라면 좋아요."
"여어, 토니." 폴 샌더슨이 쌀쌀한 눈을 샤론에게 향했다가 이어 토니에게로 옮겼다. "페이링스에서도 제일 차밍한 아가씨를 잽싸게 찾아낸 것 같군."
"직감이라는 것이 있지요." 토니는 하얀 이를 보이며 웃었다.
"젊은 테너 가수에게 조심하라구." 폴은 샤론에게 말했다.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차가왔다. "플레이보이로 유명해."
"충고를 들을 것도 없이 벌써 알고 있어요." 샤론은 농담으로 얼버무리며 말했다.
"식사 준비도 거의 다 되어가는 것 같군." 폴은 리나에게 식당 쪽으로 가자고 했고, 토니는 샤론의 팔을 잡았다.
"미세스 맥클린이 이미 그를 손에 넣었을 줄 알았지." 토니는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작년에 우리 모두 내기를 했었어."
"그가 그녀하고 결혼할지 어떨지?"
"결혼하는 것은 틀림없어. 리나가 한번 겨냥했다 하면 그녀의 아름다운 손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남자는 없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 그녀가 언제 결혼하느냐에 걸었었지."
"만일 미스터 샌더슨이 미세스 맥클린을 사랑한다면 벌써 결혼했을 게 아니에요?"
"그는 재혼을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더군. 나도 그와 똑 같은 결혼을 했었다면 당연히 결혼 같은 건 다시 하고 싶지 않을 거야. 당신도 그 경위를 알고 있지?"
"미세스 샌더슨이 가수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녀가 자기를 위해 오페라 극장을 세우겠다고 약속한 스웨덴의 부자와 가버린 것은?"
"아니, 페이링스가 있는 데?"
"샌더슨은 딸이 태어난 뒤로 아이를 위해서 그녀를 여기서 노래 부르지 못하게 했어. 아내는 일을 버리고 남편과 딸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지."
폴 샌더슨의 생각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아내의 재능을 덮어 누르려고 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페이링스에 살면서 가수인 아내보고 노래 부르지 말라고 하는 것은, 화가를 하얀 캔버스 앞에 세워 놓고 붓을 손에 들지 말라고 하는 거나 같지 않은가.
"누구나 겉보기와 다른 데가 있게 마련이지." 토니는 말했다. "합리적일 것 같은 샌더슨도 일종의 집념을 숨겨 가지고 있어."
"당신은 어때요?"
"나의 유일한 집념은 당신이야."
샤론은 그의 뜨거운 말투에 오싹했다. 그는 테너 가수로서는 눈부신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나, 인간으로서는 신뢰할 수 있는 남자가 못 되었다.
"그런 슬픈 얼굴을 하지 말라구." 토니는 속삭였다. "앞으로 몇 달은 우리에게 장미빛 날들이 계속될 거야, 틀림없어."
7
운 나쁘게도 토니는 시즌의 처음을 장식하는 오페라에서는 역을 맡지 못했다. 시간을 주체 못하여 그는 샤론을 만나러 저택에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끈질기게 쫓아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 샤론은 결국 도망치기보다는 그를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왠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군." 어느 날 오후 극장으로 향한 오솔길을 산책하며 토니가 말했다."
"여기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신경이 곤두서 있어여."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는 언제나 저 모양이지. 일단 시작되면 마음이 진정 되지만."
"페이링스에서 노래 부를 수 있다니 당신은 운이 좋군요."
"운이 아니야, 실력이지." 토니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여기에 오기를 잘했어.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을 만날 수가 없었을 테니 말이야."
"이탈리아로 돌아간 뒤에도 줄곧 날 생각하고 있었다고는 못할걸요? 내가 여기에서 매기를 돌보고 있지 않았다면 우린 재회하지 못했을 거예요."
"당신한테 전화했었다고 했잖아?" 토니는 원망스러운 듯이 말했다. "당신을 잊을 수가 없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답장도 주지 않는 당신한테 무엇 때문에 편지를 계속 띄웠겠어?"
샤론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탈리아에서 부친 여러 통의 편지를 받았으나 그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답장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데도 이런 데서 만나다니, 운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마음을 끌려고 하는 여자는 얼마든지 있을 텐데요?" 샤론은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단 말이야. 나에게 무관심한 척하면 할수록 더욱 당신을 갖고 싶어져."
"척하긴 누가 척해요. 사실이 그런 걸"
"어쩌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토니는 샤론의 손을 잡고 손가락에 키스했다.
그때 극장에서 폴 샌더슨이 나와 토니에게 말했다.
"의상계에서 자네를 찾고 있더군. 의상 준비를 해야 하는 모양이야."
깜박 잊고 있어다, 미안하다며 토니는 좀 과장된 태도로 사과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샤론은 마음이 놓여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토니의 마음을 끌려고 하는 것은 삼가 해 줬으면 좋겠소." 폴이 차갑게 말했다. "그는 여기에 노래 부르러 왔지 로미오 역을 하러 온 게 아니니까."
"그의 마음을 끌 생각은 없어요." 샤론은 부당한 비난에 화가 났다.
"당신의 손에 키스하고 있던데."
"갑작스런 일이었어요!"
"당신에게도 얼마간은 받아들일 마음이 있었던 거요." 폴은 쌀쌀하게 말했다. "절대로 저택으로 찾아오지 말라고 분명하게 그에게 말해 둬요."
"말했어요. 하지만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내가 말해겠어."
"안 돼요." 그렇게 되면 토니는 사실을 털어놓을지도 모른다. "내가 말하겠어요."
"당신이 할 테면 하라구." 폴은 그렇게 말하자 자리를 떴다.
샤론은 동요되는 마음을 누르고 극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은 없어도 극장 안은 노래와 연주와 갈채가 가득 차 뒤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소리는 사라져 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작고 약해져 가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누구였더라? 발밑을 조심하면서 샤론은 감독 자리에서 몇 줄 뒤의 시트에 살며시 앉았다. 몇 개의 의자가 놓여 있을 뿐인 무대 위에서는 여자 가수 두 명과 남자 가수 한 명이 리허설 중이었다. 그들과 감독 사이에 뭔가 열띤 말이 오가더니 프리마돈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베르칸트, 섬세하고 점잖은 프레징. 샤론은 아직도 배올 것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여기에 앉아 일류 오페라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듣고 싶었지만 매기와 같이 차를 마실 시간이 되어 샤론은 홀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눈앞이 잘 안 보여 샤론은 문밖에 서 있던 남자와 정면을 몸을 부딪쳤다. 아프테세이브의 냄새로 눈을 들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직도 여기에 있었나?" 폴 샌더슨이 말했다.
"리허설을 듣고 있었어요. 마치 독창회 같아서 멋이 있어요."
"대개의 사람은 요란한 의상이나 무대 장치로 음악을 즐기고 싶어 하는데."
"난 순수한 음악회가 더 좋아요. 의상이나 무대 장치는 노래로부터 사람의 주의를 돌리게도 하니까요."
"그렇다면 레코드를 들으면 되지 않나?"
"레코드로는 혼을 들을 수가 없어요."
폴 샌더슨은 미소했다.
"페이링스 오페라는 크리스마스 때 페스티벌 홀에서 콘서트를 열 예정이지. 당신만 괜찮다면 당신을 데리고 가겠어."
"그 무렵 난 페이링스에 없을 거예요."
"그렇다고 못 만날 것도 없지."
그 말에서 무슨 약속을 찾아내고 싶었지만 그러는 것이 무섭기도 했다.
"아마 너무나 바빠서 나 같은 건 잊어버릴 거예요, 틀림없이."
"여기에 있었소?" 다가오는 토니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파고들었다. "날 기다리고 있었나?"
"아니에요." 샤론은 얼른 말했다.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인정하는 여자는 없어. 그렇지 않습니까, 미스터 샌더슨?"
폴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샤론은 놓치지 않았다.
"매기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 집을 나올 때, 당신을 찾아 달라고 부탁하더군."
"마침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당신은 매기를 돌보러 온 거요.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해줬으면 싶어요."
샤론의 볼이 확 붉어졌다.
"매기가 혼자 있게 해달라고 한 거예요. 내게 줄 프레젠트를 만들겠으니 다 될 때까지 보면 안 된다나요."
"그건 몰랐군."
"그렇게 생각하다니 뜻밖이군요."
샤론은 두 남자 사이를 빠져나갔다.
"샤론!"
토니가 불러 세우려고 했으나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아동실에는 이미 차의 주비가 다 되어 있었고, 매기는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이 크림케이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시에 돌아온다고 해놓고!"
"리허설을 듣다가 깜빡 시간을 잊었어, 미안해." 샤론은 샌드위치에 손을 뻗으면서 사과했다. "하지만 아빠보고 나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거나 하면 못써."
"내가 부탁한게 아니에요. 차 시간에 아빠가 오더니 당신이 없는 것을 보고 찾으러 가겠다고 하며 나갔어요." 매기는 흘끔 방문 쪽을 보았다. "아빠와 같이 온 게 아니에요?"
"응. 아빠가 같이 차를 마시기로 한 줄은 몰랐었지."
"아마 이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매기는 쓸쓸한 듯이 말했다. "아빠는 한번 극장에 가면 여간해서 돌아오지 않아요."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깊이 있는 남자다운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폴이 아동실로 들어왔다. 지금의 그는 다정한 웃음을 띠고 있어서 매기뿐 아니라 샤론까지도 그 따뜻함에 감싸이는 느낌이었다.
샤론은 조심스렙게 홍차를 따를까 했지만 왠지 손이 떨려 가만히 있었다. 폴이 눈치 빠르게 옆에서 티포트에 손을 뻗었다.
"당신은 가만히 앉아서 이따금 나에게 아버지 역할을 시키고 싶은 모양이군."
"아빠는 아빠잖아요." 매기는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렇군. 깜빡 잊고 있었어." 폴은 홍차를 따르고 나서 얇은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보며 눈을 크레 떳다 "아빤 배가 몹시 고픈데 아빠가 먹을 것이 겨우 이것뿐이야?"
"아빠고 같이 드는 줄 미세스 구드윈이 몰랐지요." 매기는 키들키들 웃었다. "샤론한테 부탁해서 버터 바른 빵을 갖다 달라면 어때요?"
"농담이야." 샤론이 일어서려고 하는 것을 말리며 그는 말했다. "차 한 잔이면 충분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에클레어 하나를 입어 넣고 또 하나를 집으려고 손을 뻗었다.
"살이 찔 염려가 없어서 아빠는 좋겠어요."
"아빠로 그렇게 생각해."
"샤론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이래요." 매기는 어른스럽게 말했다. "샤론은 친구 토니는 다이어트를 하고 있어서, 차를 마시러 와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밀크도 안 마셔요."
순간 폴 샌더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샤론은 마음이 떨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토니에게 질투하고 있다. 그 외에 달리 어떻게 해석할 수 있으랴.
"토니가 그렇게 두 사람과 가까워진 줄은 몰랐군." 폴은 딸에게 말했으나 실제로는 샤론에게 도전하고 있었다.
"토니는 런던에서 알게 되었어요. 작년에 파티에서 만나..."
"그래서 당신은 여기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한 거요?"
"토니가 여기에서 노래 부르는 줄은 몰랐어요. 갑자기 만나 깜짝놀랐어요."
"그는 당신하테 꽤 마음이 있는 것 같던데."
"토니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해요. 나쁜 마음은 없겠지만요."
샌디가 발밑에서 응석 담긴 목소리를 내어, 샤론은 강아지를 안아올려 복슬복슬한 몸에 볼을 비볐다.
"샤론의 머리칼, 샌디와 또 같은 색이에요." 매기가 느닷없이 그렇게 말했다.
"내 머리는 샌디보다 짙은데."
"빛을 받으면 밝아지지." 폴 샌더슨은 좀 전의 좋은 기분을 되찾고 말했다. "당신은 여기에 온 뒤로 휠씬 기분이 좋아진 것 같군."
"날마다 휴가처럼 즐겁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해 준 것은 당신이 처음이야."
"지금까지 고용된 사람들이 우연히 이 일에 맞지 않았던 것 아니에요?"
"당신은 우리 식구나 똑같은걸요." 옆에서 매기가 끼여들었다.
"매기의 말이 맞아. 가족의 일원이라면 언제까지나 날 미스터 샌더슨이라고 부르는 건 우습군."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면 어때요?" 매기는 눈을 빛냈다.
"천만에! 샤론에게는 아빠를 그렇게 나이가 많다고 생가각하게 하고 싶지 않아."
"나이가 많다고 생각한 일도 없어요."
"그렇다면 폴이라고 불러 주지 않겠소?"
샤론은 어쩔 줄 몰라, 강아지에 마을을 빼앗긴 시늉을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자기의 직업에 대해서 그를 속이고 있는 것이 마음에 켕겨, 매기가 방을 나가기만 한다면 지금 그에게 사실을 털어 좋고 싶어졌다.
"대학에는 다녔소?"
갑작스런 질문에 깜짝 놀라 샤론은 하마터면 강아지를 떨어뜨릴 뻔했다.
"아니요."
"취직을 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싶지는 않았소?"
백퍼센트 거짓말을 하는 것이 망설여져 샤론은 진실의 반을 말했다.
"무대에 서고 싶었어요."
"그렇게 되지 않기를 잘했군. 난 여배우 타이프는 싫어서 말이야."
"여자는 누구나 배우예요." 샤론은 즉시 받았다. "남자와 잘해 나가자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어떤 의미지?"
"남자들은 여자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니까요.
폴은 조그맣게 웃었다.
"아내, 쿡, 어머니, 연인, 좋은 친구- 자기 자신이 될 겨를이 없다 그 말인가?"
샤론이 미소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폴은 딸이 그린 디자인에 주의를 돌렸다.
"참 잘 그렸어." 그것은 돈 조반니를 위한 의상으로, 멋드러진 호색가에게 어울리는 우아한 디자인이었다. 그석을 입고 있는 남자는 짙은 눈썹위에 한 가닥의 고수머리가 늘어져 있고, 한눈에 새더슨의 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야무진 턱을 하고 있었다.
"아하, 이것이 딸이 본 아버지 상인가. 페이링스의 돈 조반니... 당신도 나를 그렇게 봐요?" 폴은 놀리듯이 물었다.
"아니요. 여자를 닥치는 대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섬세함이 없는 걸요."
"내게 그 섬세함이 있다고 생각해 주다니 영광이군."
"그리고 프라이드도 있어요. 프라이드는 사람을 고집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내가 고집스럽다고 생각하오?"
"초연하다고 할까... 미치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나도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있소. 다만 지금까지 내게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지"
"부인은요?"
"내 아내처럼 내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도 없었소." 그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분과 결호하셨잖아요."
"유감스럽지만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은 실수를 하게 마련이오."
그가 뭐라고 하든,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결혼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내가 떠난 것으로 이렇게 사람이 신랄해졌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역시 어떤 깊은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샌디가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해요." 샤론은 더 이상 그의 과거를 캐 물을 마음이 나지 않아 매기에게 강아지를 안겨 주며 말했다. "뜰에 내놓아 착하게 굴면 꼭 칭찬해 줘."
"안고 있을 때 실수를 하면 야단을 쳐 줄 테야." 매기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고는 서둘러 방에서 나갔다.
"내 이름이 뭐지?" 단둘이 있게 되자 폴 샌더슨이 뚱딴지같은 질문을 했다.
"폴." 샤론이 반사적으로 말했다.
"다시 한번."
"싫어요. 말하지 않겠어요. 날 놀리고 계시군요."
"내 이름을 부르기가 얼마나 쉬운지 당신한테 알게 하고 싶었소. 토니를 퍼스트 네임으로 부를 수 있다면..."
"토니와 당신을 똑같이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은 칭찬이요?"
샤론은 미소했다. 그 이탈리아인을 얼마나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러나 지금은 아직 진실을 말 할 때가 아니다.
"여기가 마음에 들어요?" 등 뒤에서 폴이 물었다.
"네, 참 좋은 곳이에요."
"겨울에는 쓸쓸해지는데."
"겨울이 되면 난 여기에 있지도 않아요."
"만일 여기에 있게 된다면 쓸쓸하게 생각할까? 오페라 하우스는 닫히고, 크리스마스나 신년 콘서트를 연다고 해도 집안은 조용하게 가라앉아만 있어요."
"그런 때는 당신도 떠나게 되겠죠?"
"페이링스 오페라에 아주 이상적인 환경이라고 생각해요."
"페이링스라는 땅이 없었다면 취미로 오페라 하우스를 시작하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을 거요. 이제 와서는 취미 이상, 필생의 사업이 되어 버렸지만."
"후회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 집념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행복을 망쳐 버릴 수도 있으니까."
"재능을 추구하는 집념... 부인이 하신 것처럼요."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 샤론은 자기의 말이 지나친 것을 깨달았다. "미안해요, 쓸데없는 말을 해버려서."
"아니, 괜찮소."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답지 않게 감정적이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난 오해를 푸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탓할 수가 없군. 누구한테도 설명하지 않은 것도 예의 자존심인가 하는 것 때문이었겠지만."
"나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샤론은 다시 차잔을 치우기 시작했으나, 어깨에 그의 손길을 느끼고 얼굴을 들었다.
"당신한테는 설명하고 싶어." 그는 샤론을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나의 아내는 에르가 소다스트롬 - 10년 전에는 오페라 팬들 사이에 그 이름이 알려진 가수였지."
"그녀의 노래는 나도 들어 본 일이 있어요. 아름다운 소프라노였어요."
"절정기에는 눈부신 목소리였지. 그녀가 여기에 노래 부르러 오게 되자 나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지. 그때는 페이링스에서 막 오페라를 시작했을 때였는데, 시즌이 끝날 무렵에는 난 그녀와 결혼해 있었소. 그때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해서 어디에도 보내고 싶지가 않았지."
질투가 톱날이 되어 가슴을 에어 샤론은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참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인정하기를 거부해 온, 그리고 더 이상 피하고만 있을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눈을 감고 그의 말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9개월이 지나자 매기가 태어났지." 폴은 말을 이어갔다. "오페라 시즌이 시작되면서, 아이가 태어났는데도 그녀는 무대를 쉬려고 하지 않았소. 그녀에게는 노래가 전부였던 거요.-다른 무엇보다도, 자식이나 남편보다도 중요한 것이었소. 노래에 그토록 쏟아 붓는 정열을 나는 집념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신 같으면 그것을 예술가의 누를 길 없는 충동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가수가 되자면 너무나 큰 노력이 필요해요. 가까스로 정상에 올라섰는데, 그 지위를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예요."
"하여튼 그런 이유로 해서 에르가는 바로 노래 부르기 시작했지. 그런데, 본인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예전의 파워를 느낄 수가 없었어요. 임신에서 오는 피로감 때문인지 모른다 싶어 나는 몇 달을 쉬라고 권해 보았소. 하지만 그녀는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지. 몇 명의 전문의에게도 보여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로, 노래 부르기를 쉬라는 충고였어요. 그런데 그녀는 내가 뒤에서 농간을 부리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소."
"설마 그렇게 까지 생각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군요." 샤론은 이렇게 말하다 얼른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요, 실례되는 말을 해서"
"당신의 말이 맞소. 이제 생각하면 에르가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요." 폴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다음 시즌에는 목소리가 더 형편없이 되어 버렸어요. 어떤 의사는 인후암의 의심이 있으니 다시 한번 검사를 하러 오라고 말했어요. 그녀에게 전하자, 그런 공갈에는 넘어가지 않겠다며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했소.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의사를 만날 때까지는 페이링스에서 노래 부르게 하지 않겠다고 말했소. 에르가는 불처럼 화를 내고 런던으로 가서 다른 오페라 하우스에서 일자를 찾아냈소. 코벤트 가든은 그녀를 고용하지 않았지만, 다른 극장은 기꺼이 그녀의 이름을 이용했소. 물론 내가 그대로 놓아 둔 것은 아니었소. 뒤쫓아가 다시 생각해 보라고 설득했지. 의사의 말에 따랐으면 그녀는 나았을 거요. 노래를 부를 수는 없게 된다 해도 목숨은 건졌을 거요."
"그래서요?"
"그녀는 늘 사기꾼이라고 비난하고, 다시는 나한테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서 이혼을 제기해 왔소." 폴은 말을 이었다. "그러고 스톡홀름에 에르가를 위한 오페라 하우스를 세워 주겠다고 약속한 스웨덴인과 같이 가버린 거요."
"그분은 에르가의 목이 안 좋은 것을 몰랐던가요?"
"무기 공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니 총소리로 귀가 이상해졌던 게지요." 그는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로서는 미모와 육체가 있으면 그만이지 그녀의 목소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어요. 난 그를 만나 에르가의 병세를 설명했으나 역시 믿어 주려고 하지 않았소. 그로부터 일년 뒤에 에르가는 죽고 말았지." 폴은 잠시 말을 끊고 침묵에 잠겼다. "내가 에르가와 결혼한 것은 잘못이었소. 그녀는 노래 부르는 것밖에는 흥미가 없었고, 그 때문에 생명을 잃었소. 그렇게 때문에 난 다시는 직업여성과 관계를 갖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진 거요."
"알겠어요." 샤론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모든 직업 여성이 다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을 까요?"
"직업을 가진 여자에 대해 근거도 없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오. 에르가의 사후 5년 사이에 페이링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소. 그리고 여기에 오는 가수들은 예외 없이 단 한 음이라도 성역을 넓히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여자들이었어요." 폴은 두 손을 펄쳐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오. 이 분야에서 성공하자면 철저한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으니까. 여러 해의 노력 끝에 운 좋게 톱에 올라섰다 해도 그 지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은 단기간밖에 되지 못해요. 그 동안은 노래 부르는 것 말고는 뭣 한, 누구 한 사람 중요할 수가 없겠지요."
"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오페라 가수도 있어요."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게지."
"그렇지가 않아요. 전에도 말했지만 한 여자만 보고 여자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여자 전체가 아니야. 오페라 가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요."
"그러면 오페라를 그만두고 회계사 일에만 전념하시는 게 어때요?"
"그리고 비서와 사랑을 한다?" 폴은 후후 하고 웃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나는 그저 오페라에 야심을 불태우는 여자를 가까이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요. 그래도 여자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샤론은 조금도 우습지 않았다. 자기도 오페라 가수의 한 사람이니까.
"가수를 사랑하면 안 된다고 자기 마음에 명령할 수가 있을까요?"
"할 수 있지. 나는 줄곧 그렇게 해왔으니까."
"만일... 만일 내가 가수라고 한다면 당신은 뭐라고 하시겠어요?"
그의 표정에서 웃음이 지워지고 연회색의 눈이 멀 과거를 회상하듯 색깔이 짙어졌다.
"그러나 당신은 가수가 아니오. 만일 그렇다면 매기를 돌보고 있을 턱이 없지."
"거짓말을 둘러대고 여기에 고용되어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이 거짓말을 할 턱이 없어. 정직하고, 돌려서 말할 줄도 모르고, 공평한 사람이지. 난 당신의 그런 데가 좋아."
샤론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아직 진실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에르가의 추억이 이처럼 선명하지 않을 때가 좋을 거야. 그는 지난날의 자기 아내가 망집을 안고 있었다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에게도 들어맞는 말이었다. 폴이 미워하는 것은 오페라 가수를 지망하는 모든 여성이 아니라, 노래 없이는 자기의 존재가 없는 것이나 같다고 믿고, 그 불안 때문에 노래를 빼앗기기를 거절한 한 여성인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했을 때야 비로소 그는 결혼과 직업을 양립시키려고 하는 여자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러지?" 폴이 조용히 물었다. "당신을 슬프게 할 생각으로 에르가의 이야기를 한 게 아니오. 그저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랐던 거요. 내가 당신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나에 대새서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잖아요."
"아니, 난 알고 있어. 하지만 좀 더 잘 알고 싶어."
샤론은 강인한 팔에 몸이 감싸여 건강한 심장의 고동을 느끼면서, 겨우 자기가 있어야 할 장소를 찾아낸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입술과 입술이 포개졌다. 샤론은 자케트 안으로 손을 밀어넣어 실크 샤쓰를 통해서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폴의 몸이 꿈틀하고 경련했다. 그는 이제 언제나의 냉정한 고용주가 아니라 정열에 불타는 한 남자였다. 나긋나긋한 등을 애무하던 그의 손길은 어느새 허리께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샤론은 강열한 동경으로 몸이 타는 것을 느꼈다.
폴은 입술을 떼고 작은 소리로 웃었다.
"마침 안 좋은 때 키스했군. 매기가 금방이라도 돌아올 텐데."
"다녀왔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아이의 목소리가 났다. "샌디는 틀림없이 잔디 위에서 쉬했어. 이렇게 얌전한 개가 없지?"
샤론은 흘끔 폴을 쳐다보고 얼른 몸을 뗐다.
"아빠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폴이 나가자 매기가 물었다. "당신 얼굴이 빨개요. 아빠가 또 당신한테 신경질을 부렸어요?"
"아니, 그렇지 않아. 아빠는 점잖은 분이니까 신경질을 부리거나 하지 않잖아?"
"아니야, 아빠는 신경질장이에요."
샤론은 천천히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이것으로 세번째 -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떠올려 매기의 의심스런 눈길을 받았다.
"뭐가 우습지?"
"우습지는 않아." 매기는 꿈꾸듯이 중얼거렸다. "그저 너무나 행복한 느낌이야."
8
그날 밤 폴은 드레스 리허설에 입회하기 위해 극장에 나가 있었고, 샤론은 객실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에게 안겼던 생각에 젖어 앉아 있으려니, 마룻바닥을 울리는 하이힐 소리가 나더니 리나 맥클린이 들어왔다.
"폴은 어디 있어요?"리나는 그렇게 묻고는 소파에 앉더니 롱 드레스의 스커트를 잘 매만졌다.
"극장에 갔어요. 당신이 왔다고 전화할까요?"
"아니, 오늘 밤은 여기에서 묵을 테니 서둘 것 없어요. 시즌 중에는 마음이 내키면 찾아와요. 난 여기가 거의 제2의 집이나 같아요."
슬쩍 돌려 자기 입장을 알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샤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가렛은 많이 달라진 것 같군요." 리나는 또 말했다. "전처럼 나한테 덤벼들지도 않게 되었고."
"매기는 애정을 필요로 하고 있었어요."
"그 아이의 아빠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응석을 받아 주기만 할 게 아니라 사랑의 채찍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흥미 없는 화제에 싫증이 난 리나는 하품을 참으며 말했다.
"극장에 가서 구경이나 해야겠군."
"나도 같이 가겠어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 나온 말에 샤론은 자신도 깜짝 놀랐다. 리나도 노란 듯이 가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 계절로는 드물게 따뜻한 밤이었으며, 주차장에 깔린 자가이며 뜰의 화초가 밤이슬에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사이로, 히드로 공항으로 날아가는 비해이의 빨간 라이트가 까막거리고 있었다. 테라스를 통해 잔디밭으로 나와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 왕조풍의 정원으로 나가는 사립문을 지났다. 나무들은 아름다운 조명을 받고 있어서 그곳은 마치 <한여름 밤의 꿈>의 무대와 같았다.
주위의 아름다움에 눈길을 빼앗기는 일도 없이 리나 맥클린은 단호한 발걸음으로 극장에 이르러 안으로 들어서자 객석의 통로를 따라 무대 바로 밑까지 곧장 걸어갔다. 폴은 무대 옆에 있는 계단을 내려 그녀를 맞이했다. 샤론은 벌써 여기에 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하고 있었으므로 사람의 그늘에 숨어 조금씩 출입구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방금 저택으로 전화했지." 등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돌아볼 것도 없이, 샤론은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식사를 하러 나오라고 말하려교."
"유감스럽지만 그것은 안 돼요, 토니."
"왜? 저녁마다 그 집에서 식사할 필요는 없잖아?"
"난 이곳에 일하러 와 있는 거예요."
"하지만 24시간 구속될 건 없잖아. 매기가 잠든 뒤는 자유로울 거야. 도대체 왜 그러지? 대학에 있을 때는 이렇게 차갑지 않았는데."
"부탁이에요. 날 내버려 둘 수 없어요?"
"당신이 차갑게 나오면 나올수록 난 더욱더 당신을 갖고 싶어지는데 어떻게 해."
"싸구려 멜로드라마 같은 대사는 듣기도 싫어요!"
토니의 얼굴에 울컥 핏대가 올랐고, 자존심이 상하여 겨우 조금 남았던 점잖음도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는 상대방이 자기를 원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샤론은 이제 와서야, 토니를 멀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에게 마음이 있는 척해 보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 시적, 토니는 자기에게 열중하는 여자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냉담한 여자의 꽁무니만 따라다녔었다.
"토니, 그러지 말아요." 샤론은 얼른 전술을 바꾸었다.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몰라요/ 당신 같은 적극적인 남자한테는 익숙하지 않은 거예요."
아니나다를까, 토니의 부은 얼굴은 금방 기쁨으로 반짝였다.
"그랬었나? 당신이 그렇게 수즙은 성질인 줄 올랐군. 대학에서는 언제나 쾌활하게 즐기고 있었고, 많은 보이프랜드에 에워싸여 있었으니까."
"많은 것이 안전해요... 안 그래요?"
토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날 무서워할 것 없어. 절대로 상처를 주기 않을 테니까.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샤론."
그때 폴과 리나가 다가왔다. 토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고, 샤론은 얼른 혼을 뽑았다.
"당신네를 방해할 생각은 없어요."
리나 맥클린은 미국 악센트로 말했다.
"샤론을 식사에 초대하려는 겁니다. 헤이워드히스에 맛있는 라자니아를 내놓는 레스토랑을 찾았기 때문에..." 토니는 손가락을 딱 튀겼다. "그렇지, 두 분도 오늘 저녁 제 손님으로 같이 가시지 않겠어요? 30분 뒤로 예약해 놓겠어요."
"유감스럽지만 오늘 저녁은 사양하겠소." 폴이 말했다. "집에서 먹겠다고 말해 놓아서."
"하지만 샤론을 데리고 가는 것은 상관없겠지요? 그녀는 매기를 혼자 둘 수 없다고 말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토니, 부탁이에요. 이러지 말아요!" 샤론은 간청 했으나, 말을 더 계속하기도 전에 폴이 끼여들었다.
"물론 샤론이 가는 것은 상관없쇼." 연회색의 눈이 보랏빛 눈을 쏘아보았다. "만일 그렇게 하고 싶다면 저녁마다 외출해도 괜찮소."
"보라구, 내가 뭐랬어?" 토니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난 가고 싶지 않아요!" 샤론은 차갑게 말했다. "이건 매기를 혼자 두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토니에게 화를 내고, 자기를 어려운 입장으로 몰아넣은 폴에게 상처를 받은 샤론은 획 몸을 돌리자 극장에서 뛰쳐나갔다.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로비에서 발걸음을 늦춘 그녀를 폴이 따라잡았다.
"샤론, 도대체 왜 그러지?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다면 사과하겠어. 하지만 토니의 말투로는 당신이 사실은 같이 가고 싶다고 하는..."
"토니가 멋대로 한 말이에요. 난 당신 옆에 있고 싶어요... 그것도 모르세요?"
폴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샤론을 바라보았다. 그 한순간 두 사람은 주위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오아시스에 있었다.
난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샤론은 기쁨에 몰려 생각했다. 이 이상 사람을 사랑하기란 불가능랄 만큼. 이 사랑은 그의 이름이나 지위와는 아무 관계도 없어. 그것은 나무에서 미끄러져 그의 발밑에 떨어진 순간부터 싹텄고,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광기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이 사랑이 보답을 받을 수 있는지 어떨지는 문가 아니다. 어떤 신분으로든 가능한 한 페이링스에, 그의 곁에 머물고 싶다.- 사론은 너무나 강렬한 열망에 압도되어 말도 못하고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바보였던 모양이지?"
"네, 그래요." 샤론은 속삭이고, 힘찬 손에 에스코트를 받으며 걷기 시작했다.
리나 맥클린과 토니가 뒤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토니는 노여움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샤론은 그에게서 도망쳐 오는 바람에 아까 그 전술이 무효가 되어 버린 것을 알았다. 어쩔 수가 없어. 비밀을 지켜 달라고 다시 한번 그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겠어. 그에의해 망쳐져 버리기에는 지금의 생활은 너무나 귀중했다. 샤론은 다가오는 토니에게 망설이면서 웃음을 띠어 보였으나 그의 험악한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같이 식사하지 않겠소?" 폴이 토니에게 말을 걸었다. "모처럼의 자네 초대를 거절한 사죄의 표시로."
"아무쪼록 그렇게 해요." 리나가 거들었다. "라자니아는 다른 기회에 들면 될 거예요."
토니는 금방 웃는 얼굴이 되었고, 네 사람은 저택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샤론은 폴과 나란히 걸었고 리나와 토니는 뒤에서 천천히 걸어왔기 때문에, 이내 그들의 거리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벌어졌다.
"이런 경우에는 토니를 식사에 초대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했지." 폴이 설명했다. "그렇게 하면 그의 기분도 나아지고, 당신이 괴로움을 받을 것도 없지."
"더 이상 그에게 괴로움을 받을 생각은 없어요."
"지금까지는 그에게 괴로움을 받았다는 말인가?"
샤론은 그의 날카로운 직감에 혀를 내둘렀다. 사실을 말해 버리고 싶은 충동이 강렬했고, 금방이라도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단둘이 있을 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이야기하자고 가까스로 생각을 돌렸다.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화를 낼까? 아니면, 왜 거짓말을 해야 했는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줄까?
"그를 런던에서 알게 되었다고 했지?"
"네, 그는 라돌 음악 학교의 학생이었고..."
"그리고 당신은 무일푼의 핸섬한 테너 가수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폴이 그 다음을 받아서 말했다. "무리도 아니지. 배우네 가수네 하는 직업은 남 보기에는 화려하게 보이거든 그러나 무대 뒤를 들여다보면 동경하는 스타도 사실은 보통의 사람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알고 있어요."
"다행이군. 당신이 지금도 여배우 지망생이라면 유감스런 일이니까. 지금의 당신 마음은 인간으로서 가장 가치 있는 것에 향하고 있소. 아이를 사랑하고 아름다운 전원을 사랑하고, 페이링스의 내 집을 사랑하고 있어요."
"페이링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데."
"당신은 이곳을 사람이 사는 집으로서 사랑하고 있소. 자기의 직업을 성공시켜 주는 오페라 하우스가 아니라."
"당신은 아직도 부인 한 분을 기준으로 여자 전체를 판단하고 게세요."
"옛 상처란 그렇게 쉽게 낫지 않는 법이지." 폴은 긍정했다. "에르가가 떠난 뒤로 여러 명의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났었소. 하지만 모두 오페라 가수 지망이고 내 이름으로 유명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날 사랑했을 뿐이었소.
"당신이 그렇게 생각했을 뿐, 참다운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쳤는지 누가 알겠어요?"
"참다운 사랑인지 계산에 의한 사랑인지쯤은 판단할 수 있소."
"그 차이를 아세요?"
"안다고 생각하오... 지금은." 어둠 속에서 손과 손이 맞닿고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혀졌다.
"당신한테 이야기하고 싶을 일이 있어요, 폴."
"지금도 하고 있지 않소."
"단둘이서..."
"폴." 리나가 뒤에서 그를 불렀고, 폴은 뒤돌아 서서 두 사람이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방금 토니에게 이번 겨울에 건축한 새 연습장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분명 이근처에 세우기로 되어 있지요?"
"숲 저쪽이지." 폴은 잔디 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하도로 지금의 연습장과 이어지게 돼요."
"어디서 그렇게 많은 자금이 나오는지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이제는 완전히 기분이 좋아진 토니가 말했다. "오페라 극장의 소유자와 자본가, 그 두 일을 병행시킨다는 것은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닐 텐데요."
"만일 내가 자본가라면 오페라 같은 것에 손을 내밀지 않을 거요." 폴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가 토니의 존재를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샤론도 알 수 있었다.
"페이링수는 지금이 제일 좋은 시즌이지." 집의 물빛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폴은 뒤의 두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겨울의 페이링스를 보면 당신은 실망할지도 몰라."
"조용하고 평화로운 페이링스는 틀림없이 지금보다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글렇게 생각해 준다면 좋겠지만."
폴은 샤론의 팔을 가볍게 잡고는 곧장 잔디를 가로 질러 테라스를 향해 걸어갔다.
그날 밤 폴과 단둘이 있게 되면 사실을 털어놓을 생각으로 있었는데, 그 기회는 찾아와 주지를 않았다. 식사가 막 끝나자 뮌헨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래서 내일 첫 비행기로 폴은 독일로 떠나게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안개 속에 차를 몰고 가기보다는 오늘 밤 공항으로 가서 가까운 호텔에 묵는 게 낫겠군." 폴은 자리를 비우는 것을 사과하고 짐을 꾸리기 위해 방에서 나갔다.
샤론은 불안한 마음으로, 객실을 나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뒤, 다른 두 사람에게 매기를 보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서재로 그를 찾아갔다.
폴은 책상 앞에서 바쁘게 서류를 추리고 있다가 문득 얼굴을 들고, 입구에서 멈칫거리고 있는 샤론을 보았다.
"뭘 볼 일이라도?"
"아니에요, 별로" 그의 마음이 이미 뮌헨으로 날아가 있는 지금, 사랑을 고백하고 자기가 가수라는 사실을 털어 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생각되었다.
"뭐 거들 일이 없는가 해서요...."
"아니, 아무것도 없소." 그는 브리프케이스에 서류를 챙겨 넣었다.
"언제쯤 돌아오세요?"
"2,3일 뒤면 돌아올 거요. 그런 얼굴을 하지 말아요, 땅끝으로 떠난 것도 아니니까."
"당신이 가버리면 쓸쓸해질 거예요."
"오페라 가수나 오케스트라패들이 저렇게 많은데?" 브리프케이스를 탁 닫고는 손목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이제 겨우 아홉 시에요." 샤론은 애원하듯이 말했다.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지요?"
"한 시간 뒤에 공항 호텔에서 칼 프랑켈과 만나기로 되어 있어요. 뮌헨으로 떠나기 전에 타합을 할 일이 있어서."
"급한 일인가요?"
"에밀리 슈미트와의 계약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이름을 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3년이나 기다렸소. 에이전트 멋대로 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다른 오페라 하우스에서 좋은 조건의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우리와의 계약을 저버리는 것을 가만 둘 수 있겠소?" 폴은 방을 가로질러 와 샤론의 볼을 손가락으로 찔렀다."다녀오겠소. 매기를 부탁해요."
샤론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더 이상 그와 이야기를 할 기운은 없었다.
"공항까지 바래다 드릴까요?" 리나가 문을 열고 들어오려다가 샤론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눈에 노여움의 불길을 태울 뿐이었다.
"내가 운전하고 가겠소. 호텔에 차를 맡겨 놓으면 되니까."
폴은 현관으로 걸어가 문의 손잡이를 잡고 힐끔 샤론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뿐, 그는 문을 열고 말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깊은 실망을 눈치 채이지 않으려고 샤론은 서둘러 이층으로 올라갔다. 아까 아래층의 두 사람에게 말한 것처럼 매기를 보러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소녀는 모포에 파묻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사론은 살며시 이불을 고쳐 덮어 주고는 베개 위에 흩어져 있는 금발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여기에 온 뒤로 매기의 딱딱한 마음은 많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이 아이는 강아지처럼 애정에 반응하고, 강아지보다 더 조심스럽게 돌보아 주고 주목해 주기를 필요로 하고 있다. 가정과 부모-비록 편부라 할지라도 - 를 가장 필요로 하는 이시기에 기숙학교에 아이를 넣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결과를 맺을 것 간지 않았다. 폴을 설득해 보자. 그는 딸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딸에게 제일 좋다고 생각되는 방법을 취하겠지.
어둠 속을, 폴이 스피드를 내며 자기로부터 멀어져 간다고 생각하니 샤론은 갑자기 공포에 휩싸였다. 그가 떠나기 전에 가슴속의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 살이 일방적인 것에 진지 않는지 어떤지 그의 마음을 알아 두고 싶었다. 오늘 오후의 뜨거운 키스. 만일 그녀에 대해 아무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런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라는 것은 한때의 기분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기도 하는 법이다.
동요되는 마음을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객실에서 리나와 토니가 뭔가 열심히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두 사람은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이내 짐짓 쾌활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샤론은 왠지 두 사람이 그때까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토니는 어색한 기색으로 샤론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토니가 작별을 고하자 리나는 그를 현관까지 바래다 주더니 곧, 아이스크림이 담긴 접시를 본 고양이 같은 눈매를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대단히 멋있는 청년이에요. 그와는 상당히 친했다지요?"
"토니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에요."
이 여자에게 사실을 말해야 할까 어떨까 망설였으나 폴보다 먼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꺼림칙했다.
"난 이제 자야겠어요." 리나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폴이 없으면 여기에 있어 봤자 별수가 없으니 내일 아침 런던으로 돌아가겠어요."
샤론도 다소 마음이 놓였으나 얼굴에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출발하기 전에 만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으니 지금 인사를 해두겠어요. 잘 가세요."
"주말에 또 오겠어요. 폴이 돌아올 무렵에."
이튿날 아침 일찍 눈을 떴으나 리나 맥클린과 얼굴을 마주치기가 싫어 샤론은 아홉 시가 되도록 침실에서 나오지 낳았다. 그러다가 매기를 보러 가니, 그녀는 이미 아침식사를 마치고 밖에서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아빠는 갔대요." 샤론의 모습을 본 매기는 뛰어왔다.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내 테이블 위에 쪽지가 놓여 있었어요."
"알고 있었어. 주말에 돌아오신다고 하셨어."
"아빠가 없어도 당신이 있으니 난 쓸쓸하지 않아요."
"고마워,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군."
"날 두도 가버리지는 않겠죠?"
"가을이 되면 매기는 날 두고 갈 거야. 기숙학교에서는 새 친구들이 많이 생길 테고..."
"기숙학교 같은 덴 가기 싫어! 당신과 여기에 있는 것이 좋아. 아빠한테 그렇게 말했더니 생각해 보겠다고 약속해 주었어."
샤론은 기대로 가슴이 뛰었으나 짐짓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결정된 일이니 바꾼다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취소하면 되는 거예요." 매기는 아버지와 영락없는 눈망울로 샤론을 쳐다보았다.
"강아지가 사슬을 물어뜯고 있군. 자, 이제 가서 샌디와 놀다 와." 샤론은 매기를 꼭 안아 주고 나서 아침식사를 들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딸을 기숙학교에 보내는 일어 관해서 폴이 생각을 고칠지 모른다 싶으니 마음이 밝아졌다. 샤론은 결심을 하고 별관으로 토니를 찾으러 갔다 자기가 오페라 가수라는 것을 말할 결심이 선 이제는 토니의 존재는 위협이 못 되었다. 그가 솔직하게 나온다면 서로 친구가 될 수는 있으나 더 이상 그의 말에 끌려 다닐 생각은 없었다 애당초 페이링스의 객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에게 약한 구석을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싶었다. 그의 입을 보해 두기보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현명했다. 토니와 만나 이야기해 보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그는 이번주의 리허설에는 나오지 않아요." 피아니스트인 그라디스가 말했다. "미세스 맥클린과 런던에 간 듯해요. 그녀의 차로 떠나는 것을 보았어요."
그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토니가 미인이고 생각이 예리한 미국 여성에게 관심을 갖는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건 그렇지만, 리나 맥클린만한 여자가 토니 같은 타이프에 흥미를 가질 줄은...
"미스터 샌더슨도 떠났다고요? 에밀리 슈미트와 트러블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나도 자세히는 몰라요." 샤론은 방어선을 쳤다.
"말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녀는 나중에 후회할 거예요. 미스터 샌더슨을 적으로 돌리면 오페라계에서 살아나갈 수가 없게 되는 걸요."
"그는 그렇게 냉혹한 사람은 아니에요."
"분명 매력적인 남자기는 하지만 겉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엄격한 데가 있으니 당신도 조심해요."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요?" 샤론은 될수록 쾌활하게 그렇게 물었다.
"이제 새삼 충고해 봐야 늦은 일일지 모르지만 어젯밤 극장에서 그와 당신을 보았어요. 당신들 사이에 불꽃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내가 그를 좋아하면 어째서 안 된다는 거지요?"
"당신이 상처 받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는 당신보다 나이가 훨씬 위에요."
"여덟 살 차밖에 안 돼요."
"하지만 훨씬 세상 경험이 많은 남자에요. 부인이 여기에서 나갔을 때 그가 어떻게 했는지 난 잘 알고 있어요."
"안됐군요 - 그의 태도를 탓하기보다 그가 다시 한번 행복해졌으면 하고 생각지는 않나요?"
"그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요." 피아니스트는 놀란 듯이 말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돈, 호화로운 집, 좋아하는 일,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취미... 더 이상 뭣이 필요하지요?"
"사랑하는 파트너."
"미세스 맥클린이 있잖아요?"
"만일 미세스 맥클린을 사랑한다면 그는 벌써..." 더 이상 말을 계속하다간 자기의 감정이 드러날까 싶어 샤론은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보스에게 열중하지 말라고 당신한테 충고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이미 늦은 이야기였다. 샤론은 벌써 폴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아래충의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샤론은 약간의 자신감을 가졌다. 리나 맥클린인의 우아함도, 폴의 주위에 몰려드는 여자들의 화려함도 없지만, 자기를 되쳐다보는 거울 속의 젊은 여성에게는 표면적인 아름다움이 사라진 뒤에도 남는, 워라고 설명 할 수 없는 내면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 있다고 느껴졌다, 골드브라운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밀어 넣자 느껴지는 탐스럽고 윤기 흐르는 그 감촉이 샤론에게 더욱 자신감을 주었다. 폴이 돌아올 때까지 이 자신감을 간직 할 수 있다면....
"그를 사랑한다." 샤론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도 나에게 무관심할 턱이 없어... 하지만 그것은 사랑일까, 아니면 일시적인 심심풀이일까? 혹시 어쩌면 매기를 돌봐 주는 몇 달 동안만 편리한 관계를 즐기고 싶은 건지도 모르고, 반대로 인생을 나누어 가질 파트너로 생각해 주는지도 몰라. 그것은 폴밖에는 대답할 수 없는 문제 였다. 샤론은 그의 귀가가 애타게 기다려졌다.
9
매기와 둘이서 레코드를 듣고 있을 때 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한동안 말을 주고받다가 매기가 수화기를 내밀었다.
"아빠가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대요."
샤론은 설레는 가슴으로 수화기를 받았다.
"전화로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군." 폴이 말했다. "어쩐지 여느 때와는 다른 느낌이오."
"어떻게요?"
"소녀 같군. 하긴 나보다 여덟 살이나 아래니 소녀라고 해도 이상하진 않지만."
"그런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이보다 어른스러워서, 아니면 내가 젊게 보여서?"
"양쪽 다라고 생각해요"
폴은 기분 좋게 웃었다.
"내가 없어 쓸쓸해요?"
"물론이에요."
"당신을 못 만나 쓸쓸한지 어떤지 나한테는 묻지 않소?"
"어떻게 그런..."
"당신이 그렇게 수줍음을 타는 줄은 몰랐군."
"내성적일 뿐이에요."
"돌아가면 그 내성적인 것을 어떻게 해야겠군."
"언제 돌아오시지요?"
"이틀 뒤에. 나를 만날 것이 기다려지나?"
"네, 우리 둘 다."
"당신은?"
"물론이에요. 아시잖아요?"
"아, 샤론!" 폴의 목소리가 갑자기 떨렸다. 몇백킬로나 떨어져 있다 해도 샤론은 그의 모습을 분명히 떠올릴 수가 있었다. 잿빛이 섞인 머리를 수화기에 기울이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눈이 뭔가를 묻듯이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떨어져서 당신과 이야기하는 것은 고문이군." 그는 뜨겁게 속삭였다.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돌아가겠소."
전화는 딸깍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매기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샤론은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가정고사로서가 아니라 한 여자로서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 그녀는 지금까지 없었던 확신을 갖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에 폴이 돌아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점심식사 전에 샤론은 좋아하는 실크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햇볕에 그을은 피부와 맑은 누에 잘 어울리는 라임그린. 시골 생활은 샤론에게 잘 맞았다. 그리고 행복한 기분은 더욱 그녀에게 어울렸다. 지금까지 이처럼 생기 있게 반짝이는 나를 몬 적이 있었나? 매기조차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그 원인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눈으로 샤론을 바라보았다.
점심을 마치고 샤론은 테라스에 앉아 햇빛이 벨벳 같은 잔디밭에 쏟아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워 - 잘 깎인 잔디, 패치워크 같은 색색으로 눈부신 화단, 찻길을 따라 늘어서서 과시하는 듯한, 병사를 생각케 하는 나무들. 샤론은 자기가 이곳 이땅에 깊이 이어져 있다는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여기에 온 지 아직 얼마 되지 않는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민일 목이 아프지 않았다면 페이링스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설령 여기에 올 기회가 있었다 해도 가수로서 별관에 머물고, 폴이 스태프를 위해 매주 여는 칵테일 피티에서 이 집을 아는 데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가족의 일원처럼 폴의 집에 살며 그와 날마다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 오페라 가수의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사생활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서는 토지 개발의 일과 함께 오페라 하우스를 해나간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 틀림없다. 불행한 결혼을 잊어버리려고 저토록 일에 마음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일까? 에르가를 생각하자 샤론은 질투로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다시는 오페라 가수를 사랑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금도 바꾸지 않고 있다면 폴은 이만저만 에르가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뒤미처 켕기는 마음이 부풀어 질투를 뒤덮었고, 그녀는 갑자기 자기 신분을 속이고 온 자기 조에 가슴이 떨렸다. 그것은 이제 폴의 눈으로 보면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교활하게 그에게 가까이 오려고 한 음흉한 사기 행위인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공포에 몰려 벌떡 일어섰다. 석판을깐 테라스의 바닥이 의자에 긁혀서 불쾌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엔진 소리와 겹쳐졌다. 잘 닦인 보네트를 햇빛에 반짝이며 차가 커브를 돌았을 때, 비로소 샤론은 폴이 돌아온 것을 알았다.
"아빠가 오셨다!" 잔디에 드러누워 책을 읽고 있던 매기에게 말하자, 소녀는 벌떡 일어나 차를 맞이하러 뛰어갔다.
폴은 차에서 내려 지친 듯 팔을 뻗어, 뛰어온 딸을 따뜻하게 안았다. 그러고는 테라스 쪽으로 시선을 돌려 천천히 잔디를 밟으며 샤론에게 다가왔다. 눈 밑에는 검은 테가 나 있고 입가에는 피로가 새겨져 있었다.
"오늘 돌아오실 줄 알았어요." 상기된 목소리가 정말 자기 목소리일까? 샤론은 헛기침을 했다. "아직 점심을 안 드셨지요?"
"비행기 안에서 먹었소. 커피라도 한잔 마실까."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샤론을 폴이 붙잡았다. "매기가 가져오라고 할 거요." 그는 딸을 주방으로 보냈다. 소녀는 주방으로 뛰어갔다.
뜨거운 시선을 아프도록 느끼면서 의자에 앉아 샤론은 그를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떨구었다.
"달링, 나를 좀 봐요." 폴이 뜨겁게 발했다. "그 아름다운 보랏빛 눈망울 보고 싶소."
그가 달링이라고 부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샤론은 몸이 떨려 젤리처럼 금방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자, 어서." 폴이 속삭였다.
샤론은 내면의 불실을 반영하여 반짝이는 잿빛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팔을 내밀려고 할 때, 매기가 까치걸음으로 테라스로 왔다.
"커피를 가져오랬어." 소녀는 즐거운 듯이 보고했다. "도착 시간을 알았다면 공항까지 마중갔을 텐데."
"어젯밤 늦게까지도 돌아올 수 있을지 어떨지 몰랐어. 아슬아슬하게 직행편을 놓쳐서 도중에 갈아타고 온 거야."
"왜 그렇게 서두르셨지요?"
"어서 돌아오고 싶어서지."
"날 만나고 싶어서?" 매기는 아버지의 허리에 팔을 감고 응석을 부렸다.
"그렇지, 만나고 싶어서." 딸의 머리 너머로 샤론을 바라보는 폴의 눈은, 그 말이 샤론에게 향해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아빠, 샌디한테 재주를 가르쳤어요. 보시겠어요?" 매기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빠는 지금 피곤하셔. 커피를 마시고 좀 쉬신 뒤에 보여드리는 게 어떨까?"
"싫어요. 지금 바로 보아 주세요." 아버지가 돌아왔기 때문에 흥분한 탓인지 매기는 드물게 데를 썼다. "자, 어서 뜰로 내려가요, 아빠."
"샤론의 말처럼 조금 쉬고 나서 보겠어."
"심술쟁이 아빠는 싫어!"
"네가 심술쟁이라도 아빠는 네가 좋아." 폴이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얌전하게 굴지 않으면 엉덩이를 때려 줄지도 몰라."
매기는 깜짝 놀라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날 한 번도 때린 일이 없잖아요?"
"그렇다고 앞으로도 안 때린다고는 할 수 없어."
"아빠는 매기를 놀리고 계시는 거야." 매기의 입술이 떨리는 것을 보고 샤론이 얼른 달랬다. "매기는 그저 아빠한테 조금 응석을 부렸을 뿐이지, 안 그래? 자, 샌디의 볼과 밧줄을 가지고 와. 조금 쉬시면 아빠도 샌디의 재주를 보고 싶어 하실 거야."
매기는 기부니 좋아져 뜰로 뛰어갔고, 폴은 의자등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저 아이에게 당신은 나보다 훨씬 인내심이 강하군. 좀 더 일찍 당신이 와주었다면..."
그때 커피가 날라져 왔다. 폴의 뜨거운 눈길은 느끼면서 샤론은 서투르게 차잔에 커피를 따랐다.
"아빠만 좋다면 준비는 오케이예요." 매기가 뜰에서 말을 걸었다.
"역시 저 아이는 기숙학교에 넣어야 할 것 같군." 딸에게 바로 가겠다고 손짓을 보내고 폴은 말했다.
"당신이 돌아오셔서 좀 흥분해 있을 뿐이에요. 다른 때는 좀 더 말귀를 잘 알아듣는 데요."
"당신이 와준 덕분에 저 아이는 아주 딴 아이처럼 달라졌소." 폴은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나까지도 바꾸어 놓은 것 같아."
샤론은 어쩔 줄 몰라 고개를 숙였다.
"사랑해, 사론." 그는 속삭이고 받침 접시 위에 딸가닥 소리를 내며 차잔을 내려놓았다. "이런 데서 고백을 하다니! 오늘 밤 단둘이 되면 말하려고 했는데."
"아빠, 어서 오세요!" 매기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내가 하고 싶은 말 알겠소?"
"시간은 넉넉해요." 샤론은 고개를 들고 행복감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 폴! 나도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폴은 힘을 주어 샤론의 손을 잡았다.
"매기를 일찌감치 쫓아 버려야겠군. 그 아이가 잠들 때까지는 키스는 미루어야겠지만, 참을 수가 없어."
꿈같은 행복감에 싸여 샤론은, 계단을 내려가는 그를 발보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기만 하면 이 행복은 완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 까, 하고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으려니, 클랙슨 소리가 나고 한 대의 차가 폴의 차 옆에 와서 섰다. 문이 열리고 먼저 리나가, 그리고 토니가 내려섰다.
"달링." 리나가 쾌활하게 폴에게 다가갔다. "미침 좋은 때 온 것 같군요."
"텔레파시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폴이 물었다.
"뮌헨에 전화를 했었어요. 언제 돌아올지 결정했으면 전화를 주실 줄 알았는데."
"내가 그렇게 주목을 받고 있는 줄은 놀랐군."
"헬로, 샤론." 폴과 리나는 테라스로 올라왔고, 몇 발짝 뒤에 토니가 따랐다. "당신이 마침 여기 있어 다행이군요. 깜짝 놀래 줄 일이 있어요."
왠지 불안감이 느껴져 토니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샤론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것을 꺼내 줘요, 토니."
리나의 명령에 토니 호주머니에서 녹음 테이프를 하나 꺼냈다.
"이것을 들어 보세요." 리나 맥클린은 받아 든 테이프를 폴에게 건넸다. "신인 발굴했어요."
폴은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언제부터 당신이 탤런트의 스카우트를 시작했지?"
"내가 아니에요. 토니가 발견한 거예요."
폴은 젊은 테너 가수에게 시선을 옮겼다.
"자네와 같은 테너인가?"
"아니, 여잡니다."
그때 샤론은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공포에 사로잡혀 그 테이프를 폴의 손에 낚아채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한다면 모든 것이 폭로되어 버린다.
폴은 테라스에서 서재로 들어갔고, 토니와 팔을 낀 리나가 그 뒤를 따랐다.
"같이 와요, 샤론." 미세스 맥클린이 어깨너머로 말했다.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샤론은 입을 꼭 다물고 말없이 그들의 뒤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폴은 전원을 넣고 레코더에 테이프를 세팅했다.
"누구의 노래지?"
"이따가 가르쳐 주겠어요." 리나가 의미 있게 말하고 우아하게 소파에 몸을 묻었다.
피아노의 전주가 흐르고, 풍부하고 아름다운 소프라노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피가로의 결혼>의 일부로, 이제는 사랑해 주지 않는 남편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노래한 백작 부인의 아리아였다.
감미로운 기쁨에 물들었던
그 행복한 나날은 어디로?
입 끝에서만 놀던 거짓 맹세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일절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은 음악 학교의 마지막 학년 때, 토니가 백작을 샤론이 백작 부인을 노래 불렸을 때의 테이프였다.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어요." 리나는 레코드의 스위치를 껐다.
"다시 한번 켜주지 않겠나?" 폴은 조용히 말했다. "끝까지 듣고 싶어."
"이따가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지요, 폴?"
"백작은 토니지? 하지만 상대역으 목소리는 처음 듣는데."
"그녀는 스타가 도리 소질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코러스걸의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될까요?"
"틀림없이 스타가 될 거야. 눈부신 목소리야. 내 생각으로는..."
"이제 그만두라구!" 그때 토니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참견했다. "나는 못해.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에 끌려드는 게 아니었어." 그는 홱 리나를 돌아보았다. "당신의 사주를 받다니 내가 바보였어."
"어차피 알게 될 일이잖아요. 그것이 지금 알려졌다고 뭐가 어떻다는 거지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거야?" 폴은 토니에게 물었다. "이 테이프를 나에게 들려준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가수는 어디 다른 오페라 하우스와 계약이 끝났다던가 그런 문제라도 있나?"
"그녀는 프리입니다." 토니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노래 부르지 않아요."
"일시적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뿐이에요." 리나가 말을 받았다. "그녀는 목이 아파서 6개월 동안 노래 부르는 것이 금지되고 있어요. 하지만 그 뒤로는 그전처럼 노래 부를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렇다면, 목소리가 좋아지면 테스트해 보자구. 토니, 그녀의 거처를 알고 있나?"
"나는... 요컨대..."
"당신의 눈앞에 있어요." 리나가 대신 대답했다.
폴은 눈살을 찌푸리고 리나에게서 토니로, 그리고 샤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당신이!" 그 목소리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조용했다. "이것이 당신 목소리야?"
말도 할 수 없어. 샤론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 방식으로 여기에 들어오다니, 샤론은 머리가 좋아요." 리나는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비록 6개월을 노래 부르지 못한다 해도, 여기에 오면 리허설도 구경할 수 있고 줄도 만들 수 있어요. 그 투지에는 머리가 숙여져요. 안 그래요, 폴?"
"정말 그렇군." 폴은 일어서서 레코드에서 테이프를 꺼냈다. "당신 목소리는 눈부시군, 샤론."
두 사람은 시선이 맞부딪쳤다. 차가운 잿빛의 눈은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처럼 쌀쌀했다. 사실의 폭로가 얼마나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는지, 물을 것 까지도 없었다.
"난... 사실을 말할 생각이었어요." 등뒤에 토니의 무거운 숨결을, 리나의 의기양양한 눈길을 느끼면서 샤론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이제 그럴 필요는 없어. 이 테이프는 당신한테 돌려줘야 하나? 아니면 토니한테?"
샤론은 몸을 뒤로 뺐고, 토니가 그것을 받았다.
"그녀는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토니가 폴에게 말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매기를 돌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날 놀리는 줄 알았어요."
"놀림을 받은 것은 나인 모양인데."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샤론은 어떻게든 자기 마음을 알리려고 애를 태웠다. "6개월 동안 노래 부르면 안 된다는 진단을 받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했어요. 이곳의 일을 소개 받았을 때, 운명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당신의 입장에 섰다면 누구든지 이곳에 올 찬스에 덤벼들겠지.- 설령 거짓말을 해야 한대도."
"비밀에 부쳐 둘 생각은 없었어요. 여기서 일을 하면서... 나를 이해해 주게 된다면 사실을 말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째 됐든 내가 놀림을 받고 있었던 것에는 변함이 없어." 폴은 냉담하게 말하고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극장에 다녀오겠소. 예약 상황을 알고 싶으니."
"나도 같이 가겠어요." 리나가 뒤를 쫓았다.
"그럼 같이 가요." 폴의 입술은 미소와 같은 곡선을 짓고 있었으나 눈은 엄격한 그대로였다.
두 사람이 가버리고 나자 토니는 테이프 레코더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저 장난으로 그랬을 뿐이었는데."
"나에 대한 화풀이였겠지요?"
"처음에는 그랬지." 토니는 인정했다. "당신에겍 화가 나는 바람에 당신이 가수라는 것을 리나에게 말해버렸어. 나와 같이 식사하러 가지 않겠다고 당신이 거절한 그날 저녁."
"잘도 이런 심한 짓을 할 수가 있군요!"
"하지만 당신의 목이 회복되면 폴은 당신을 여기에서 노래 부르게 해줄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성공은 틀림없지 않아."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는 나를 미워하고 있는 거예요!"
"자존심이 상처를 받았을 뿐이야. 하루나 이틀 지나면 기분이 나아지겠지."
"그에 대해서 조금도 모르는군요." 샤론은 왁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6개월 동안 노래 부를 수 없게 되었을 때의 비참한 느낌도 지금의 고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폴은 틀림없이 용서해 줄 거야. 당신이 뭐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니까." 토니는 걱정스럽게 샤론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설령 속았다 해도, 그는 재능 잇는 오페라 가수를 쫓아 버리거나 하지 않아요."
"아니, 그는 틀림없이 나를 쫓아 버릴 거예요." 샤론은 울부짖으며 말했다. "그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런 데도 당신은 그로하여금 날 미워하게 만든 거예요!"
"모처럼의 기회인데, 노래 부른다는 것을 숨겨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거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것이 여기에 있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어요. 오늘 저녁에 그에게 사실을 말할 생각이었어요. 하다못해 당신네가 내일까지만이라도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눈물이 냇물처럼 흘러 샤론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토니는 서투른 솜씨로 샤론의 골드브라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당신이 그렇게 심각한 심정인 줄은 몰랐군."
"그를 사랑하게 되어 버린 거예요. 이렇게 될 생각은 없었는데."
"폴도 당신을 사랑하나?" 샤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토니는 눈물에 젖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렇다면 하나도 걱정할 것 없잖아? 당신이 한 일을 부끄러워 할 것 없어." 토니는 무릎의 먼지를 떨어내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일어섰다. "당신이 그토록 진지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미세스 맥클린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그래서 당신을 몰아내기 위해서 날 이용한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요. 같이 극장에 가서 폴한테 이야기합시다."
"아니, 난 단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몇 초 동안 토니는 괴로운 듯이 샤론은 바라보고 있더니 체념함 듯 손을 떼고 방에서 나갔다.
샤론은 얼굴을 씻고, 폴이 돌아오기를 기다라며 서재의 창문 앞에 섰다. 거기에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는지 모른다. 키가 큰 늘씬한 몸매의 남자가 찻길을 걸어오는 것이 모일 무렵에는, 너무나 오래 서 있어서 등이 아파오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싶었지." 현관홀에 마중 나온 사론에게 폴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한테 할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소."
"설명을 하게 해줘요. 왜 내가..."
"왜 당신이 여기에 왔는지 알고 있소. 그리고 왜 날 사랑하는 척했는지도."
"아니, 시늉으로 그런 게 아니에요. 정말로 당신을 사랑한 거예요." 샤론은 두 손을 그에게 뻗었다. "믿어 줘요,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페이링스 오페라의 소유자로서 나는 사랑을 받아 마땅한 입장에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 말이 아이에요!"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유감이지만 나는 숙맥이 아니야. 오페라계의 실력자고 가수를 성공시킬 수 있는 남자야."
"그것 때문에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니까요!"
"그렇다면 뭣 때문에 오페라 가수라는 것을 숨기고 있었지?"
"가수라면 고용해 주지 않을 것 같았지 때문이었어요. 미세스 맥클린이..."
"그녀가 어떻게 말했는가는 문제가 아니야. 처음 신분을 속인 이유는 알겠어. 그러나 그 뒤에 사실을 이야기할 찬스가 있었을 거야."
"무서웠던 거예요."
"내가 아직 당신한테 사로잡히지 않았는가 싶어서? 사실을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당신을 사랑해 버리면 일은 간단하지." 폴은 샤론의 어깨를 힘껏 움켜잡았다. "내가 당신한테 끌리고 있는 것을 알자 당신은 그 것을 이용했어. 그러나 백 퍼센트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은 기다린 거야."
"당신이 나한테 끌리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하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고 말았어요... 토니와 말다툼을 한 그날 밤, 사실을 말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뮌헨으로 떠나 버려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거짓말 작작하라구!" 폴은 샤론의 어깨를 거세게 흔들었다. "내가 당신과 결혼할 때까지 당신은 입을 다물고 있을 작정이었어."
"결혼? 아, 폴, 난..."
"그렇게 나를 보지 말라구. 모든 것이 끝난 거야! 나의 마음속에 있었던 당신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어."
"존재하고 있어요! 내가 가수라는 것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어요."
"아니, 바꿔 버렸어."
폴은 붙잡고 있던 샤론의 어깨를 놓고 서재를 들어가 버렷다. 샤론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으나 그는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의 미래를 바라보는 것처럼, 불기 없는 썰렁한 벽난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르가가 떠난 뒤로 난 다시 가수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마음에 다졌어. 성공의 야심을 가진 여자는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 만일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무엇보다도 남편과 가정을 아끼는 여자를 사랑 할 생각이었어." 폴은 말을 끊고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당신이 매기를 바꾸어 놓았고, 집안 누구나 당신한테 마음을 열게 되었어. 그리고 나는 마침 내 찾고 있던 여자를 발견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그게 맞아요." 샤론은 속삭이고 폴 옆으로 다가갔다. "날 믿어 줘요."
"믿어?" 폴은 내뱉듯이 말했다. "거짓말로 만들어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에요!"
"이젠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가 없어."
만일 그가 격정에 몰려 있다면 희망을 가져도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무서울 만큼 냉정했다.
"난 악몽에서 깨어난 거야. 만일 조금이라도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있다면, 지금 바로 짐을 챙겨 가지고 여기에서 나가 주었으면 싶어."
"알았어요." 샤론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자만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은 정말이에요." 신음소리와도 같은 흐느낌을 남기고 샤론은 비틀거리며 방을 나왔다.
10
오빠의 집으로 돌아가 해고되었다고 말할 때의 샤론은 눈물도 다 말라 버렸고, 얼굴은 유령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팀과 앤은 그 이사의 무슨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페이링스에서는 아무 소식도 없이 2주가 지났다. 그제야 폴한테서는 다시는 연락이 없을 거라고 샤론은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폴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여튼 런던을 떠나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것이 그녀에게 남겨진 유일한 길로 생각되었다.
의사를 찾아가니, 앞으로 2개월만 지나면 다시 노래 부를 수 있게 되고 재발의 염려도 없을 거라고 보장해주었다. 샤론은 바로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떤 일이라도 상관없어요. 외국에 가는 일이라도 기꺼이 맡겠어요."
"주구든 기꺼이 맡지 않을 사람이 있겠어?" 에이전트인 맥스는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아직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 나가기에는 일러!"
샤론은 웃었으나 그것은 다른 사람의 웃음소리처럼 귀에 울렸다. 페이링스를 떠난 뒤 웃은 것은 - 이것이 웃음이라고 할 수 있다면 - 처음이었다.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작은 오페라단을 바라는 거예요. 언어에는 곤란이 없고, 보수가 적어도 좋아요. 다만 영국을 떠나고 싶어요."
"그것이 재능 있는 가수가 할 말인가? 당신은 런던의 큼직한 오페라 하우스에서 노래 불러야 마땅해. 비평가들에게 꼭 당신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 당신이 나이를 먹어 뚱뚱보가 되기 전에!"
"나이를 먹으면 빼빼 말라깽이가 될 건데요." 샤론은 되받아 주고 전화를 끊었다.
일자리를 찾자면 몇 달이 거릴 것 같았다. 줄곧 오빠네 신세를 지고 있을 수도 없어서 샤론은 해변의 호텔로 일시적인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마침 그 일을 찾은 날, 팀은 회사로부터 3개월 동안 캐나다의 뱅무버로 출장을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주일 뒤에 가족은 모두 런던의 집을 떠났다.
샤론도 바로 호텔에서 일을 하기 위해 런던을 떠났다. 이제는 누구를 사랑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저 끝없는 고독만이 계속되는 것이다. 에이전트나 성악 교수가 말한 것처럼 오페라 가수로서 성공할 가능성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 특정의 남자만이 줄 수 있는 행복은 영원히 빼앗긴 것이다.
호텔에서 접수 일을 본 지 3주 가량 지난 어느 날, 에이전트인 맥스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것은 좀처럼 없는 기회야!" 그는 흥분해서 지껄여댔다. "당신한테 좋은 일을 찾아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행운이 굴러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단 말이야!"
"그렇게 좋은 일이에요?" 샤론은 그의 열변에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스잔나를 노래 부를 수 있단 말이야."
그 오페라의 제명이 너무나 선명하게 폴을 생각나게 하여 샤론은 한순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맥스는 그녀의 침묵에는 아랑곳없이, 스잔나 역을 하던 가수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진 거라고 설명을 계속했다.
"그녀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당신으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야. 신인 가수가 페이링스에선 노래 부르다니, 좀처럼 얻어걸릴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야."
페이링스! 그 한 마디는 샤론의 기쁨을 지워 버리는 애도의 종처럼 들렸다.
"모레 당신을 데리고 가겠다고 오페라 감독한테 말해놓았어."
"페이링스에서는 노래 부를 수 없어요."
"어떻게 되기라도 했나? 찬스를 놓치지 말라구! 만일 아직 그만한 실력이 없다고 걱정하는 거라면, 내가 보장하겠어. 당신은 훌륭해..."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저..." 모든 것을 고백할 수는 없다 해도 어떤 설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난... 저... 폴 샌더슨을 알고 있어요." 샤론은 어색하게 말했다. "우리는 의견 충돌이 있어서... 그는 내가 거기서 노래 부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개인적인 감정을 오페라에까지 들고 나오는 남자가 아니야. 만일 당신의 노래가 그 역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면 당신을 쓸 거야."
"아니, 안 돼요!"
"무척 큰 싸움이 있었던 모양이군. 그것은 다시 말하면, 당신은 샌더슨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가 되나? 두 사람이 그렇게 친한... 아니, 서로 말도 하지 않는 사이인 줄은 몰랐군."
"미안해요, 미리 말해 두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폴은 나를 보자마자 쫓아 보릴 거예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 그는 지금 일 관계로 뉴욕에 가 있고, 3주 동안은 돌아오지 않는데. 그가 돌아올 무렵에는 당신은 데뷔를 마치고 페이링스를 뒤로 하고 있을 거야. 당신이 무대에 나가는 것은 꼭 세 번뿐이고, 그 다음은 빈에서 오는 가수에게 바통을 넘기는 거야. 샤론, 내 말을 들으라구. 당신이 페이링스에서 노래 부른다는 것은, 샌더슨이 돌아올 때까지 그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거야."
"폴이 모르는데 페이링스에서 노래 부르다니, 난 못해요."
"이런 기회를 거절하려고 하다니, 제정신이야!" 맥스는 화가 난 듯이 말했다. "<피가로의 결혼>은 이번 시즌의 새로운 연출 물이고, 거의 대부분의 비평가가 들으러 간단 말이야. 절대로 거절하면 안 돼!"
뉴욕에 있는 폴을 생각하며 샤론은 맥스의 설득을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지금쯤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 까? 호텔방에서 편안한 잡을 자고 있을까?
"자, 내 말에 따라. 거기를 그만두고 이리 오라구. 당신은 가수야. 호텔의 프런트는 어울리지 않아."
"정말 그렇게 짧은 동안이라면..."
"리허설이 일주, 무대 상연이 일주, 딱 그것뿐이야. 그 다음의 일은 반드시 내가 찾아 주겠다고 보장하겠어. 알았지? 얼른 짐을 꾸려 거기를 떠나오라구."
여름의 햇살 속에 갖가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화단과 초록빛의 잔디밭에 에워싸인 평화로운 페이링스를 보았을 때, 샤론은 여기에 처음 온 날의 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무렵은 어쩌면 그렇게도 평화로 왔는지! 여기에서 사랑을 알고 그것을 잃어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한번도 자기 손안에 없었던 것에 대해 잃어버렸다는 표현은 이상할지 모른다. 만일 폴이 샤론은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다면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한 까닭을 이해해 주고 불행한 과거는 어찌 되었든 용서해 주었을 것이다.
샤론은 폴을 생각하지 말자고 눈을 꼭 감았다. 이제부터 며칠 동안은 바빠질 테니 과거 속에서만 살고 있을 구가 없다. 6개월 동안의 공백이 있은 뒤에 처음으로 일을 맡아, 같이 일하는 오케스트라나 가수들과 새 작품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이제 괸찮아?" 런던에서 차를 몰고 오면서 약간의 사정을 알게 된 맥스는 일부러 저택 앞에 차를 세우고 그렇게 말했다.
"네, 고마워요." 샤론은 대답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일에 그러게 마음을 쓰면 주름이 늘어날 거예요."
맥스는 투덜투덜하면서 차를 후진시키더니 극장 쪽의 길로 핸들을 꺾었다.
객석은 어두웠으나 샤론은 저 앞자리에 앉아 있는 몇 명의 스태프며 무대에서 무언가 타협을 하고 있는 감독을 볼 수 있었다. 토니도 무대 옆에 모습을 나타냈으나 객석에 있는 샤론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무대에 올라가 감독에게 인사하라구." 맥스는 흥분을 감추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걱정스런 얼굴을 하지 말아요. 틀림없이 멋지게 해낼 수 있을 테니까."
"줄곧 그렇게 말해 줘요, 맥스. 당신의 지원이 없으면 무너져 버릴 것 같아요."
맥스의 뒤를 따라 완만한 내리막길로 된 통로를 걸어가 계단을 밟아 무대에 올라가니, 감독은 물론 토니도 눈을 둥그렇게 뜨고 샤론을 바라보았다.
"샤론!" 토니는 소리쳤다. "이게 놀랍군. 여기서 또 당신을 만나다니, 생각지도 못했어. 그가..."
"난 스잔나를 노래 부르게 됐어요." 폴이 다시 불러 들였느냐고 그가 묻기 전에 그녀는 얼른 말했다.
토니는 깜짝 놀란 모습이었으나 더 이상 질문할 찬스가 없었다. 감독이 바로 그녀의 역할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벌써 2주 동안이나 리허설을 해왔어요. 그것을 따라잡자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거요."
"새로운 해석에 의한 상연이라고 들었는데요." 샤론은 물었다. "지금까지의 연출과는 많이 다른가요?"
"백작 부인의 존재는 확대했지만 스잔나에 관해서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았어요. 테레사 바센티가 스잔나를 노래 부르게 되어 있었던 것은 알고 있죠? 그녀는 목소리는 좋지만 배우로서는 호박이야!"
"연기에는 다소 자신이 있어요." 샤론은 약간 자신감을 되찾고 말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리허설을 시켜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을 샤론은 더 이상은 불가능 하리만큼 연습을 거듭했다. 자유 시간은 밥 여섯 시부터 여덟 시까지였다. 그 동안은 매기와 지냈다. 여기에 와 있으면서 매기를 만나려고 하지 않은 것을 알면 어린 가슴이 얼마나 상처를 받을까.
왜 갑자기 페이링스를 떠났는지 매기는 물으려고도 하지 않고 샤론을 환영했다. 그러나 그 주말에 하룻밤의 휴가를 바다 소녀를 재우러 저택에 갔을 때, 사론은 처음으로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그들 사이에 일어난 일을 폴은 얼마쯤 딸에게 이야기해 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빠가 꼭 당신을 돌아오라고 할 줄 알고 있었어요." 매기는 말했다. "아빠의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러나 2주 뒤에는 샤론은 다시 여기를 떠나고, 매기는 새 학교에 들어갈 것이다. 둘이서 지낸 나날이 아무리 즐거웠다 해도 같은 또래의 친구가 생기면 아이는 이내 가정교사를 잊어버릴 것이 틀림없다.
"당신이 돌아온다고, 왜 아빠는 가르쳐 주지 않았을 까요?" 침대에 들어가면서 매기가 말했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을 아빠는 모르시는 거야." 깜빡 그렇게 말해 버리고 나서 샤론은 얼른 나이트 테이블위의 그림책을 집어 들어 훌훌 책장을 넘겼다.
"당신이 온 것을 아빠가 몰라요? 그러면 아빠는 아직도 화를 내고 있어요?"
"화를 내고 계시지는 않아. 그저 우린... 서로 생각이 엇갈렸을 뿐이야."
"하지만 아빠는 샤론은 좋아해요."
"나도 매기의 아빠가 좋아." 샤론은 될수록 침착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은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아빠가 미국에서 돌아올 때까지 여기에 있어 주겠어요?" 매기는 상대방의 질문을 무시하고 물었다.
"아니, 아빠는 날 만나고 싶어 하시지 않아."
"아빠는 이제 화를 안 내고 계세요. 부탁이에요. 계속 여기에 있어 줘요!" 매기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
샤론은 갸냘픈 아이의 몸을 꼭 안았다.
"울지 말고 내 말 들어. 내가 여기에 온 것은 <피가로의 결혼>에서 스잔나 역을 맡았기 때문이야. 아빠는 모르시는 일이야. 그리고 일이 끝나는 대로 나는 런던으로 돌아가야 해."
"우리 이제 다시는 못만나요?"
"물론 만나지. 학교에 편지도 보내고, 뭐 맛있는 것도 보내 주겠어."
"그런 것 필요 없어." 매기를 왁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싫어요!"
짧은 동안에 이 조그만 아이가 얼마나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왔는가를 새삼 알게 되어 샤론은 소녀를 꼭 끌어안았다.
"내가 좋아하는 매기, 다시는 만나지 못하다고 생각하지 마, 꼭 연락하겠다고 약속할게."
매기는 그제야 안심한 듯이 베개에 머리를 얹고 샤론이 읽어 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귀를 기울였다.
가까스로 침실을 나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다. 그것도, 오페라의 첫날 공연을 볼 수 있도록 매기를 위해서 자리를 잡아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의 일이었다.
"뭘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시나?"
별관으로 돌아가자 누군가가 말을 거는 바람에 흠칫 놀라 눈을 들었다. 바로 옆에 토니가 서 있었다. 시즌 중에 그는 낡은 숙사에 묵고 있었다. 거기에 같이 가서 한잔하지 않겠느냐고 그는 샤론을 끌었다.
"오늘 저녁은 일찍 쉬고 싶어요."
"레오는 당신을 상당히 혹사하고 있는 것 같더군."
"그것을 위해서 왔는걸요."
"당신으 목소리가 그토록 훌륭한 적은 없었어. 박수로 오페라가 중단되지 않으면 좋겠는데."
"빈말이라도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요."
"빈말이 아니야." 토니는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들은 스잔나 역 중에서 최고야. 사실 당신의 실력은 백작 부인을 부르기에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그 말은 레오한테 해야죠."
"레오가 그렇게 말했어." 깜짝 놀라는 샤론의 표정을 보고 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는 다음 시즌에도 당신을 출연시킬 생각으로 있어. 당신이 와주어서 그가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물론 알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줄 전혀 몰랐어요."
"그것은, 당신의 머릿속에는 폴 샌더슨밖에 없기 때문이야."
샤론은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러나 바로 토니도 뒤따라왔다.
"화 내지 말아, 샤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할 수는 없어. 내가 한 일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이제 잊어버려요."
"하지만 그렇게 된 것은 내 탓이었어. 만일 내가 아니었다면 리나도.."
"그만두라니까요! 그 일은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아요. 폴과는 이미 끝나 버렸어요."
"당신은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폴이 날 사랑하지 않는데, 무슨 소요이에요!"
별관 앞까지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리나가 미국에 가 있는 것은 알고 있어?" 토니가 갑자기 그렇게 물었다.
"몰랐어요." 가슴을 콱 찔린 것 같았으나 샤론은 조심스럽게 마음의 동요를 숨기고 중얼거렸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폴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은 당신도 알겠죠?"
"그가 리나와 같이 있으니까? 그런 건 아무 관계도 없어. 남자에게는 여자가 필요한 때가 있어. 만일 폴이..."
"제발 그만두라니까요!" 샤론은 소리를 지르고 얼른 "잘 자요." 라고 덧붙이고는 별관 홀로 뛰어들어갔다.
리나 맥클린이 미국에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폴과 같이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은 거미줄같이 가냘픈 마지막 희망마저 끊어 놓았다. 샤론은 계단을 올라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남자라는 것은 그토록 쉽게 다른 여자의 가슴에서 위안을 찾아내는 법일까? 진실한 애정이 없어도 욕망만 채워지면 만족하는 것인가? 샤론은 한숨을 쉬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동안만은 폴을 잊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감독이 다른 스태프를 지도하고 있을 때도 토니의 협력을 얻어 쉬지 않고 연습을 계속했다.
공연을 하루 앞둔 저녁이었다. 레오는 샤론에게 쉬라고 말했다.
"더 이상 연습을 계속했다간 프로에 영향을 주겠어. 내일 저녁때까지 노래 부리지 말고 목을 쉬어요."
"딱 한 번만 연습하고요."
"안 돼." 레오는 양보하지 않고, 샤론은 식사에라도 데리고 나가라고 토니에게 일렀다. "만일 가고 싶다면 런던으로 가도 좋아. 앞으로 열 두 시간 동안은 그녀에게 스잔나를 잊어버리게 해야 해."
"그거 잘 됐군." 토니는 샤론에게 웃음을 띠었다. "헤이워드히스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엔 아직 가보지 않았지?"
그의 말은 불쾌한 추억을 생각나게 했다. 샤론의 생각이 분명하게 표정에 나타났는지 토니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정정했다.
"런던에 가자구."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가요." 겉으로만은 침착하게 샤론은 말했다. "사람은 과거 속에서만 살고 있을 수는 없어요."
토니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바로 얼굴이 환해졌다. 샤론에게는 과거 속밖에 살 곳이 없었다. 폴이 없다면 현재도 미래도 없는 것이나 같으므로.
토니와 식사를 하고 돌아온 것은 한밤중이 지나서였다. 그날 밤 토니는 샤론을 즐겁게 해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몇 시간 동안을 그녀는 폴을 생각하지 않고 지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페이링스로 돌아와 어둠 속에 당당히 솟아 있는 저택을 본 순간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여기에 있는 한 마음의 평화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샤론은 새삼 느꼈다.
이튿날 매기와의 약속을 지켜 관람석에 자리를 잡아 놓고, 저택에 전화를 걸어 혼자 오가지 말고 누구든 함께 오라고 다짐했다.
"누가 바래다주지 않아도 갈 수 있어요." 매기는 말했다.
"밤늦게 혼자 오면 못써."
"하지만 여기는 내 집인데."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어. 자, 누구와 같이 오겠다고 약속해 줘, 매기."
"걱정하지 말아요." 소녀는 뭐가 즐거운지 키들키들 웃었다. "혼자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어요."
"뭔가 장난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샤론은 의심스럽게 물었다.
"장난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아요. 난 줄곧 착하게 지냈단 말이에요."
"그럼 그렇게 해줘. 적어도 오늘 저녁 공연이 끝날 때까지는."
"무서워요?"
"무서워 죽겠어." 샤론은 정직하게 대답하고, 소리를 죽인 이상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수화기를 놓았다. 앞으로 몇 시간 후면 첫날의 막이 오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손바닥에 촉촉하게 땀이 배어 나왔다. 샤론음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필요 이상으로 일찍 대기실로 들어갔다.
개막 시간보다 훨씬 전에 샤론은 무대 옆에 나오 대기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주위는 개막 전의 흥분고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백작 부인 역의 몸매가 좋은 스웨덴인은 유난히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으며, 평상시는 마음이 좋은 백작 역의 스코틀랜드인은 의상 담당이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심하게 야단을 쳤다. 다행히 토니는 언제나처럼 기분이 좋았으며, 막의 틈새로 객석을 내다보며 들어오는 청중의 모습을 일일이 샤론에게 말해 주었다.
"바트람 드루가 오는군." 그는 유명한 비평가의 이름을 들었다. "그리고 이름은 잊었지만 타임즈의 기자도."
"더 이상 말하지 말아 줘요. 몸이 더 떨려 와요."
토니는 웃었다.
"BBC의 벡스터가 자리에 앉는군. 설마 그와 같이 온 것은..."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누구에요? 중요한 인물이에요?"
"아니, 마음 쓸 필요는 없어." 토니는 막을 닫았다. "오케스트라가 입장했군. 앞으로 10분 후면 서곡이 시작될 거야."
"매기는 와 있어요?"
"레오가 박스 안에 아동용의 자리를 확보해 놓았으니까 안심해요."
샤론이 개석은 내다보려고 하자 토니가 그녀의 팔을 잡아 뒤로 끌었다.
"초연 전에 객석을 내다보면 재수가 없대."
그런 징크스는 들어 본 일이 없어서 그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토니는 그녀를 무대 옆으로 끌고 갔다.
"매기는 걱정 없어. 제 자리에 잘 앉아 있어."
레오가 무대의 최종적인 체크를 마치고 샤론 옆으로 다가왔다.
"침착해 보여 안심이 되는군." 레오는 샤론의 표면적인 침착을 그대로 믿고 말했다. "첫 아리아에서 템포를 정확하게 잡도록. 운이 좋게도 폴이 객석에 와 있어. 그가 당신의 노래를 높게 평가한다면 다음 시즌의 계약은 답은 거나 같아."
샤론은 귀를 의심했다.
"폴이요? 하지만 그는 지금 미국에 있을 텐데요."
"한 시간 전에 예고도 없이 돌아왔어."
"왜요?" 샤론은 감독의 팔을 잡았다. "그는 내가 스잔나를 부르는 것을 알고 있나요?"
"물론 전화로 이야기해 주었지."
"그러니까 그가 뭐라고 했어요? 화를 냈지요?"
"화를 낼 필요가 뭐가 있겠어? 도대체 왜 그러지? 얼굴색을 보니 브랜디를 봄 마시는 게 좋겠군."
"아니, 적정 없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샤론은 몸을 떨었다.
"폴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마. 당신은 최고야."
샤론의 머리에 갖가지 생각이 밀려들었다. 폴이 뭐라고 하든 이제 새삼 스잔나 역을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샤론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데뷔를 싫어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저녁은 그를 위해서만 노래 부르자. 오페라의 프로라면 아무리 그 가수를 싫어한대도 그 목소리를 평가하는 데 개인감정을 개입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모든 공포는 살지고, 타고난 아름다운 목소리와 몇 년 동안의 엄격한 훈련의 성과를 폴에게 인정받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오케스트라 박스에서는 악기의 소리를 고르고 있었다. 이따금 들리는 헛기침 소리 말고는 객석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서곡이 시작되기 전에 높아지는 언제나의 조용한 기대감. 최대의 시련을 앞에 두고 샤론은 숨을 삼켰다. 스커트를 매만지고 모자를 고정시킨 핀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스잔나 역은 본 적이 없어요.' 의상계 여자는 그렇게 말해 주었지만 폴도 그렇게 생각해 줄까? 심호흡을 하고 나서 스테이지의 정해진 위치에 섰다. 서곡이 끝나기 직전에 얼른 신에게 기도를 하고 나니, 막이 조용히 올라 오페라가 시작되었다.
샤론은 완전히 스잔나가 되어 노래 불렀다. 청중이 저녁식사를 들도록 마련한 긴 휴게 시간에 조차도 오페라 외의 현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마시는 것도 거절하고 대기실에 앉아 이미 외고 있는 악보를 다시 한번 죽 훑어보고 다음 무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폴이 무대 왼쪽 박스에 앉아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 1막이 끝나 우레와 같은 박수에 답하면서도 그쪽으로는 단호히 눈길을 주지 않았다.
"방금 바트람 드루와 이야기하고 오는 길이야." 레오가 들어와 기분이 좋아서 말했다.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더군. 지금까지 왜 당신의 존재를 몰랐는지 이상해 하고 있었소."
"그에게 뭐라고 했어요?"
"폴이 당신을 찾아냈다고 했지." 레오는 최고로 기분이 좋았다. "지금도 신인을 찾아내는 데는 폴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앞으로는 더욱 그 명성이 높아지겠지."
"그런 말을 듣는다고 폴이 좋아할 턱이 없어요."
레오는 싱긋 웃었다.
"천만에. 내가 바트람 드루한테 그 야야기를 할 때 폴도 옆에 있었는데, 당신을 어디에서 발견했는지 열심히 그에게 설명하더군."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듣고 싶군요." 설명할 수 없는 노여움을 느끼고 샤론은 중얼거렸다. 냉혹하게 사람을 몰아내 놓고는 이제 와서 신인을 찾아낸 공로자인 척하다니, 도대체 신경이 어떻게 돼 있는 사람일까? 그러나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청중이 자리로 돌아오고 객석은 다시 어두워졌다. 실컷 울고 싶은 이때 무대에 올라 밝고 쾌활한 연기를 해야 하다니, 이런 얄궂은 운명 있을까.
"자, 나갈 차례야." 레오가 재촉했다.
샤론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스포트라이트 속으로 나아갔다.
열 번이나 되는 커튼콜이 있은 뒤에도 샤론은 아직도 현실로 돌아 올 수가 없었다. 관객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보내는 아낌없는 박수. 그것은 경험이 적은 가수에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명예로, 샤론은 아직도 그 행운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운이 아니야." 레오가 말했다. "빛나는 목소리가 인정받았을 뿐이야. 당신에게 이것은 겨우 스타트에 지나지 않아. 오늘은 페이링스, 내일은 메트로폴리탄, 코벤트가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는 거야. 에이전트인 맥스는 출현 의뢰를 거절하는 데 애를 먹겠지."
"그런 고생 같으면 기꺼이 맡아 줄 거예요." 샤론은 어색하게 웃고 대기실로 걷기 시작했다.
"서둘러 갈아입어요. 폴이 우리를 샴페인 파티에 초대했어."
"나는 못 간다고 전해 줘요." 자신도 놀랄 정도로 냉정을 가장하고 샤론은 돌아보았다. "오늘 저녁은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의 권유를 단념시키려고 이렇게 덧붙였다.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파서 도저히 사람을 만날 수가 없어요."
"아스피린을 먹어야겠군."
"아니, 누워서 좀 쉬면 좋아질 거예요."
"이따가 와 보겠어."
"파티에는 나가지 않는 다니까요."
"누가 파티에 대해서 말했어? 당신이 걱정이 되서 그러지."
레오는 떠났고, 샤론은 대기실로 들어왔다. 파티에 나가지 않는다면 스태프들 사이에 좀 소문거리가 되겠지.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어. 자존심과 침착을 되찾을 때까지는 폴고 얼굴을 대할 수 없어.
구실에 지나지 않았던 두통이 차츰 진짜로 되어 샤론은 관자놀이를 마사지했다. 입에 아무것도 넣지 않은 지가 벌써 몇 시간이나 되고 있었다. 식욕은 없었으나 이대로 있는다면 몸의 컨디션이 나빠질 것이 뻔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나더니 의상계의 여자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그 위에는 물이 들어 있는 글라스와 알약, 그리고 홍차가 담기 포트와 샌드위치가 놓여 있었다.
"당신한테 이 샌드위치를 모두 먹이고 두통약을 먹게 하래요."
샤론은 힘없이 웃고 시키는 대로 했다.
조금 지난 뒤에 레오가 상태를 보러 와서 파티에 나가라고 설득할지도 모른다. 그 전에 자기 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작정을 한 샤론은 서둘러 옷을 벗고 화장을 지웠다.
별관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따라 뻗어 있는 화단에는, 낮에는 선명한 색으로 눈이 부시게 빛나던 꽃들이 달빛을 받아 여러 층의 잿빛의 색조를 띠고 피어 있었다. 샤론은 주위에 떠도는 향긋한 공기를 마시려고 발을 멈추었다. 그때 하바나의 짙은 내음이 풍겨와, 조용한 발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바로 옆에 폴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천천히 얼굴을 들고 그를 보았다. 오랜만의 재회가 얼마나 그녀의 마을을 뒤흔들어 놓고 있는지. 이 달빛 속에서는 표정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 싶어 샤론은 마음이 놓였다.
"안녕하세요, 폴."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이런데서 만날 줄은 몰랐군요."
"그것은 이쪽의 대사인데."
억양이 없는 목소리에 샤론은 순간 혀로 입술을 축였다.
"나, 여기에 올 생각은 없었어요. 에이전트가 정한 일이 되어서... 어떻게든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그 이야기는 에이전트한테 들었어." 폴은 말했다. "당신이 여기에 오구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도."
"우리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 했어요." 샤론은 어색하게 말했다. "그러나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않았어요."
"이야기 않길 잘했군."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왜 당신을 내보냈는지 누구에게도 알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겠지요." 그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당신이 날 발견했다고, 레오가 비평가한테 말했다면서요?"
폴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페이링스를 위해서동 좋은 PR이 되겠지요."
"페이링스." 폴은 처음으로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내가 오페라를 그렇게까지 걱정하고 있는 줄 아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야. 당신의 장래야!"
"내 장래에 대해서는 에이전트가 생각해 주고 있어요. 만일 당신이 내일 나보고 여기에서 나가라고 하신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아!" 폴은 샤론의 팔을 잡고 잔대를 가로질러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정자로 억지로 끌로 갔다. 마침 거기에는 통나무를 짜서 만든 벤치가 있어서, 샤론은 떨리는 다리로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 거기에 앉았다.
"더 이상 고집 피우지 말라구." 폴의 목소리는 이제는 냉정하지 않았으며 여느 때답지 낳게 감정적이었다. "당신을 쫓아낸 것은 잘못이었어. 일이 그렇게 충격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나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거야. 사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기 때문에 그 밖의 행동은 취할 수가 없었어. 그 순간 당신을, 내가 그리고 있던 당신을 생각하기도 전에 에르가가 머리를 차지해 버렸어. 과거를 기준으로 장래를 판단하는 과오를 저질러 버린 거야. 그 바람에 당신한테 그런 말을 해버렸어."
생각지도 못한 고백이었다. 샤론은 그 말이 기쁘기는 했으나 왠지 행복감은 솟아나지 않았다.
"듣고 있소?" 폴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 가만히 있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르겠나? 사랑하고 있어. 앞으로도 계속 당신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
폴이 벤치에 다가오자 샤론은 일어서서 거리를 두었다.
"아니, 그것은 안 돼요. 너무 늦었어요."
"무슨 뜻이지?"
"너무 늦었어요." 그녀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어." 폴은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아니면, 마음이 바뀌었나?"
"너무 늦었단 말이에요." 그에 대한 사랑을 부정한 다는 것은 불가능하여 샤론은 그 말만을 고집했다.
"도대체 어떻게 되었다는 거지?" 그는 좁은 그녀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어째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나한테 보복을 하고 싶다면..."
"그런 일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끊어진 실을 원래대로 만들 수는 없는 거예요. 우리는 끝났어요!"
"그런 말을 내가 믿을 줄 알아? 내 얼굴을 보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 한 믿지 않겠어."
"사랑과는 관계가 없어요." 샤론은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성실성, 신뢰..."
폴은 잡았던 어깨에서 손을 떼었으나 샤론이 도망칠까 염려하는 듯이 발을 벌리고 서서 앞을 가로막았다.
"성실성? 신뢰?"
"그것이 없으면 어떤 사랑도 무의미해요."
"나의 사랑을 그렇게 생각하나? 무의미하다고?"
샤론은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떡 벌어진 어깨 저쪽을 힐끔 보았다.
"대답을 해봐!" 폴은 다그쳤다.
"꼭 대답을 해야 하나요?" 샤론은 격정에 몰려 소리를 꽥 질렀다. "당신이 왜 날 찾는지 내가 몰를 줄 알아요? 그것은 사랑과는 다른 거예요!"
"그럼 내가 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지?"
"날 필요로 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s를 손에 넣고 싶어 하고, 그 때문에 날 미워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신분을 속이고 페이링스에 온 것을 당신은 언제까지나 잊지 않겠지요."
"그럼 단순한 욕망에 지나지 않다는 말인가?" 그는 당시 강철 같은 힘으로 샤론의 어깨를 잡았다. "미워하는 여자로 참을 만큼 내가 여자에게 굶주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큼 착오야."
그는 신랄한 말을 던지면서 샤론의 어깨를 거세게 잡아 흔들었다. 그 바람에 샤론이 무대에서 달고 있다가 벗어 놓는 것을 깜빡 잊었던 컬이 된 부분가발이 땅에 떨어졌다. 폴이 너무나 놀라는 모습을 했기 때문에 샤론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웃음은 멈추려 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웃음은 입술 위에서 떨고 목 속에서 요동을 치면서 히스테릭한 외침이 되어 터져 나왔다.
"그만두지 못해!" 폴이 다시 힘껏 샤론을 흔들었다. 그러나 웃음은 더욱 커지고 높아져 갔다. "그만두라구!" 간청과 함께 폴의 커다란 손이 샤론의 볼을 때렸다.
단박에 웃음은 그쳤고, 볼의 아픔은 보랏빛 눈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게 만들었다.
"달링." 폴은 괴로운 듯이 신음소리를 냈다. "아아, 달링, 당신을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어." 저항할 겨를도 주지 않고 폴은 샤론을 와락 끌어안더니 입술을 포개고, 마치 그녀의 존재를 몸으로 확인하려는 듯이 두 손으로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샤론은 그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샤론은 한숨과 함께 우람한 그의 몸에 두 팔을 감았다.
"사랑하고 있어." 폴은 매끄러운 그녀의 뒷덜미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당신이 가버린 뒤로 내 생활이 어떠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거야."
그 말은 차가운 현실을 되돌려 놓았다. 샤론은 몸을 떼려고 했으나, 폴은 조금 몸을 떼었을 뿐 포옹을 풀어 주려고는 하지 않았다.
"날 사랑하고 있지? 안 그래? 당신의 눈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어."
"하지만 안 돼요, 폴."
"왜 그런 말을 하지?"
샤론은 망설였으나 결심하고 이야기하고 시작했다.
"만일 당신이 이번에 페어링스에 돌아와 날 만나는 일이 없었다면, 여전히 상처 받은 자존심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에르가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나에 대해서도 씁쓸한 느낌을 안고 있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 해와 달이 다른 만큼 당신과 에르가는 닮지 않았어. 당신은 진짜 여성, 따뜻한 피가 통하는 여자야. 아닌 게 아니라 당신은 드물게 보는 재능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그것뿐 아니라 따뜻하고 성실한 마음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그날, 당신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 것 같던데요."
"왜 내가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아까 말한 그대로야, 난 화가 나 있었고, 상처를 받아 제대로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어."
"그렇다면 내일 또 만났을 때도 제대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어요?"
폴은 몸을 수그려 핏기 없는 샤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당신을 만나 쇼크로 내가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줄 아나?"
"그렇지 않을까요? 돌아와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보고 큰 쇼크를 받은 게 틀림없어요."
"내가 돌아온 것은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야."
"알고 있었어요?"
"그렇진, 알고 있었지. 이틀 전에 매기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말해 주더군. 당신을 만나기 위해 더 일찍 돌아오고 싶었던 거야."
"뭣 때문에 날 만나고 싶었지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무서웠다. "당신 몰래 내가 여기에 온 것을 알고 화를 낸 거겠죠?"
"내가 없는 동안에 당신이 와서 화가 났어. 몇 주 동안이나 런던을 뒤져 당신을 찾았으나 당신의 거처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
잠깐이나마 마음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을 곧이 듣는 것은 어리석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직업소개소의 미세스 엘시는 내 거처를 알고 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가가스로 소개소를 알아냈을 때는, 사무실은 1개월 휴가에 들어가 문을 닫고 있었어." 그는 샤론을 다시 한번 벤치에 앉히고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내 설명을 들어 주겠어? 내 말을 꼭 믿어 줘."
분명한 목소리로 폴은, 샤론이 속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의 괴로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당신이 떠나 버린 뒤의 몇 주 동안은 지옥과도 같았어. 그러나 그것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지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 작은 악마와 같은 내 딸을 귀여운 소녀로 바꾸어 놓았고, 나를 비참한 패배자에서 다시 장래에 대한 희망을 지닌 남자로 변하게 해주었어. 따뜻하고 매력 있는 당신의 참모습을 깨닫고 난 당신을 찾기 시작했어. 그러나 그때는 이미 직업소개소는 휴가에 들어가 있었던 거야. 그리서 극장이란 극장은 모두 찾아 다녔지. 하지만 누구 하나 당신의 이름조차도 몰랐어. 맥스에게 연락한다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지." 폴은 이야기를 줄여서 매듭을 지었다. "그는 일류 가수밖에 상대하지 않으니까."
"그와 계약하고 있는 가수 중에 이름 없는 사람은 나뿐일 거예요."
"오늘 밤부터 당신은 무명의 가수가 아니야." 폴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매기로부터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다시는 당신을 놓치지 않으려고 될수록 빨리 돌아왔지. 계약을 위해서 다시 한번 뉴욕으로 가야 하는데, 우리 이번 여행을 허니문으로 하지 않겠어? 어때?"
샤론은 몸이 떨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러나 폴은 그 침묵을 이해했다.
"나를 용서해 주겠어?" 그는 샤론의 몸을 안고 관자놀이에 입술을 댔다. "다시는 질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어... 적어도 당신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오페라를 그만 두기를 원해요? 만일 그렇다면 그만두겠어요. 노래 부르는 것보다 당신과 같이 있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걸요."
"당신은... 날 위해서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었나? 화려한 성공을 앞에 두고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고?"
"사랑해요, 폴. 나의 행복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지 노래 부르는 것이 아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게속 노래를 불러 주었으면 좋겠어. 노래를 위해서 나한테서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만 해준다면."
샤론은 충족된 마음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늘 아침 잠이 깨었을 때, 하루가 이렇게 끝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녀는 웃었으나 한 가지만은 마음에 걸렸다. 그와 리나 맥클린의 관계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질투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거짓말쟁이군, 당신은." 폴은 그녀의 말을 막으며 그녀를 가만히 흔들었다. "질투할 필요는 없어. 그녀와 결혼할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 하니만 프로포즈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어. 그녀가 가지고 있는 냉정함... 그것을 난 참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뉴욕에서 같이 있었잖아요?"
"그녀가 멋대로 찾아왔을 뿐이지.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어."
"아아, 폴! 나는 행복해서 울고 싶어요."
"노래 부르고 있을 때만큼 행복하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내일 허기를 내서 우리 주말에는 결혼하지구."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정말 결혼하는 거죠?"
"막이 내려도 끝나지 않는 진짜 결혼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