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연극 (Fit for a King)
Diana Palmer
1
엘리사는 킹사이즈 침대에 누워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녀의 침대가 아니라 킹스턴 로퍼의 침대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친구에 지나지 않았고, 만일 그렇지 않았다던 그의 무리한 부탁을 엘리사가 들어주었을 리 없었다. 엘리사의 편안한 싱글 침대는 자메이카의 몬테고 베이와 가까운 해변에 있는 킹의 집에서 도보로 얼마 걸리지 않는 작은 코티지에 있었다.
지난 2년 동안에 엘리사는 킹에게 있어 눈에 거슬리는 이웃에서 마음을 털어놓는 유일한 친구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친구일 뿐 결코 연인 사이는 아니었다.
엘리사 글로리아 딘은 겉보기와는 달리 순정적인 여성이었다. 선교사를 지낸 부모로부터 따뜻하면서도 엄하기 짝이 없는 교육을 받은 그녀는 패션 디자이너라는 화려한 직업 세계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결코 사치스런 길에 들어서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늘 아침 섬에 도착한 엘리사는 킹이 집에 없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다음 시즌에 선보일 디자인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전에 킹이 전화를 걸어 어처구니없는 부탁을 하더니 이쪽에서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던 것이다. 어째서 그녀더러 자기 침대에서 기다리라고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어떤 여자가 귀찮게 따라다니는 바람에 자기에게는 이미 애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성을 다루는 데 익숙해 보이는 그가 취하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서투른 작전인 것 같았다. 하긴 이런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으로서는 킹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엘리사는 킹의 큼직한 침대에서 마음껏 기지개를 폈다.
매끈한 새틴 시트의 촉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지금 걸치고 있는 핑크빛 슬립은 양옆으로 거의 허리까지 트여 있어 쭉 뻗은 각선미를 유혹적으로 과시하고 있었다.
엘리사는 킹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녀는 어떤 남자와 친하게 지내다가도 상대가 자기를 유혹하기 쉬운 여자로 착각하고 접근해 오면 곧바로 딱딱한 껍질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심대 시절의 충격적인 경험이 그녀를 극단적일 정도로 조심성 있는 여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킹만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와는 2년 전부터 친구가 되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엘리사도 경계심을 품을 필요가 없었다. 이런 대담한 속옷 차림을 남앞에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으나, 킹은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으므로 잠시 연인 놀이를 즐기는 것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는 매력적인 표정으로 생긋 웃었다.
"킹스턴 로퍼." 엘리사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그는 종종 지금처럼 엉뚱한 행동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수완 좋은 사업가로서 석유와 가스, 그리고 이 밖에도 몇몇 다른 분야의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의붓아버지로부터 도산 직전이었던 회사를 물려받아 훌릉하게 경영 수완을 발휘한 끝에 돈을 모았던 것이다.
킹과 엘리사는 무슨 말이든지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이지만, 서로의 과거사에 대해서까지 시시콜콜히 털어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가 그의 가족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다른 동생인 보비와 그 의 아내가 조만간 이곳을 방문할 예정이라는 것은 킹에게 서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엘리사는 자기가 발표한 컬렉션이 순조로운지 알아보기 위해 미국에 돌아가야 힌기 때문에 별로 귀담아 듣지 알았다.
엘린사는 크게 성공을 거둔 자신의 컬렉션을 흐뭇한 마음으로 회상했다. 그녀의 이름을 딴 <엘리사>라는 상표명으로 많은 고객을 확보했다. 그녀가 디자인한 의상은 이국적이었고, 그 세련된 감각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대담한 배색을 좋아했고, 재단과 실루엣에 중점을 두었다. 그것이 이목을 끌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지만 일단 받아들여지자 무섭게 매상이 올라 지금과 같이 부유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코티지는 그녀가 바쁜 생활에서 겨우 해방되어 휴가차 자메이카에 왔을 때 우연히 발견하고 한눈에 반해 구입한 것이었다. 디자인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지 않거나 푹 쉬고 싶을 때, 그녀는 마이애미에 있는 부모의 집을 떠나 태양이 가득한 자메이카로 찾아오곤 했다.
그녀의 부모는 완고할 정도로 도덕적이면서도 독립심이 강한 자유주의자들로서, 외동딸인 엘리사에게도 똑같은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그 결과 엘리사는 현대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을 때가 종종 있긴 했지만, 거의 모든 면에서 -자유분방한 그녀의 디자인도 그렇지만-개성적인 생활 방식을 관철시키고 있었다.
엘리사는 자메이카에 올 때면 다른 무엇보다 킹을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2년 전 처음 알게 되었을 무렵의 그는 사업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듯 그녀 앞에서도 미소를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그가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던 모습을 떠올리며 엘리사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옆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덮개를 씌운 새장 안에서 워 치프가 투덜거리는 소리였다.
엘리사는 애완용으로 기르고 있는 목덜미가 노란 이 커다란 앵무새를 미국에 데려간 적이 없었다. 새의 섬세한 감정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리사가 없는 동안 자청해서 이 다섯 살 된 앵무새를 맡아주는 걸 보면 킹도 워치프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녀석이 감기에 걸렸기 때문에 움직여서 흥분시키면 좋지 않을 것 같아 덮개를 씌운 새장 안에 넣어둔 것이다. 하지만 전처럼 투덜거리는 것을 보면 곧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 워치프였다. 엘리사는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 전 주인으로부터 이 앵무새를 샀다. 워치프는 아파트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였다. 정확하게 아침과 저녁을 알려주기는 했지만,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울어대는 그 소리는 마치 인디언이 습격할 때 내지르는 소리 같았다. 워치프라는 이름도 거기서 연유한 것이다.
그 무렵의 엘리사는 앵무새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습성을 알 길이 없었다. 코티지에 데려온 워치프가 저녁 시간이 되어 괴성을 내지르자 그때서야 비로소 전 주인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열심히 앵무새를 팔려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새장에 덮개를 씌우자 순찰차의 사이렌을 연상케 하는 소리를 지르며 더 법석을 떨어대는 바람에 엘리사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정말 순찰차가 오는 건 아닐까? 이웃에 있는 주민이 자메이카 경찰에 신고라도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현관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엘리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용히 해, 워치프!." 그녀는 두 손을 모았다. 하지만 앵무새는 마치 탈옥하려는 죄수처럼 새장을 마구 흔들어댔 다. "제발 부탁이야."
엘리사는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소리로 애원하면서 문을 열기 전에 커튼 틈으로 살짝 내다보았다.
경찰은 아니었다. 그러나 경찰보다 더 무서운 상대였다.
해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크고 하얀 집에 사는 사나이였다. 그는 언제나 바위처럼 엄한 얼굴을 하고 산을 파헤치는 불도저 같은 기세로 걸었다. 지금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모양이었다. 집에 없는 척하는 게 좋지 않을까?
"어서 문을 열어요 그러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소." 서부 사투리가 섞인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엘리사는 단념하고 문의 빗장을 벗겼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의 사나이는 위압적으로 느껴질 만큼 키가 컸다. 흰 반바지와 대조적으로 짙은 갈색으로 그을린 긴 다리에서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가 풍겼다. 여자라면 누구나 반할 만큼 넓고 단단한 가슴엔 짙은 가슴털이 잘 다듬어진 허리 언저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은곽이 뚜렷한 얼굴에 곧은 콧날, 한일자로 꼭 다문 입술,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전신에서 남성다운 체취가 풍겼다. 엘리사도 키가 큰 편이 었으나 그 앞에서는 어린 아이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대관절 뭘 하고 있는 거요."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무슨 뜻이죠."
"외쳐대는 소리 말이오." 그가 칠흑 같은 눈으로 엘리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조용한 환경이 마음에 들어서 멀리 오클라호마에서 이곳까지 은 사람이오. 떠들썩한 파티 따위는 질색이오."
"어머나, 나와 똑같군요."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이때 워치프가 다시 귀청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저 여자는 왜 저런 소리를 지르는 거요? 도대체 당신 친구가 몇 명이나 와 있소?" 오클라호마에서 온 사나이는 허락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와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기 시작했다.
엘릭사는 한숨을 내쉬며 사나이가 침실을 지나 작은 부엌으로 걸어. 자는 모습을 문에 기댄 채 바라보고 있었다.
워치프가 사나이의 나직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웃다가 다시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오클라호마의 사나이는 순간 적으로 뒷걸음질 치면서 낯을 찌푸렸다. 그리고 덮개를 씌운 새장을 발견했다.
"살려줘!." 워치프가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사나이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시끄러운 파티의 정체는 바로 이거예요 떠들썩하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군요."
"우우." 앵무새가 외쳤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
사나이가 덮개를 벗기자 워치프는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목을 꾸룩거리며 횃대에서 새장의 철망으로 옮겨왔다. "안녕하세요. 나는 착한 아이, 너는 누구야?"
오클라호마의 사나이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앵무새로군."
워치프는 애조가들이 <불타는 듯하다> 표현하는 화려한 꼬리털을 펼치고 파닥거리며 연한 갈색 눈을 크게 뜨고 애처롭게 울었다. 사나이는 짙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것을 어떻게 요리할 생각이오? 구워먹을 거요, 아니면 찜통에 넣어 삶을 거요?"
"안 돼요. 새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앵무새가 다시 소름끼치는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내 귀는 아직 보험에 들지 않았어." 사나이가 말했다.
엘리사는 깔깔 웃었다. "대단하죠? 어째서 전 주인이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이 새를 팔려고 했는지 이제야 그 이 유를 알겠어요."
"조용히 하지 못하겠어!." 사나이가 앵무새를 보고 소리 질렀다.
"틀림없이 암놈일 거예요. 당신이 마음에 드는 것 같으니 말이죠."
그는 워치프를 노려보았다. "나를 쳐다보는 저 눈이 마음에 들지 않소 먹이를 노리고 있는 것만 같아서."
"절대로 물지 않는다고 전 주인이 말했어요." 엘리사는 자신 없는 듯이 말했다.
"행여나 그렇겠군." 그가 손을 내밀자 워치프는 얌전히 웃어 보이면서-엘리사에게는 그렇게 보였다-부리를 내밀어 그의 손가락을 지그시 물었다.
그러나 오클라호마의 사나이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워치프가 느릿하게 부리를 뗄 때까지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가 새장에 덮개를 도로 씌웠으나 놀랍게도 앵무새는 가만히 있었다. "누가 주인인지 알려줘야 하오. 물려고 덤벼도 절대로 손을 빼면 안 되고, 또 물려서도 안 되지. 못된 버릇이 들게 될 뿐이니까."
"새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전에 새를 길렀던 적이 있소. 하지만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서 친구에게 주어 버렸지."
"오클라호마 출신이라고 했죠?"
"그렇소."
"나는 플로리다에서 왔어요. 제 이름을 걸고 스포츠웨어를 디자인하고 있죠. 당신에게 제일 큰 사이즈와 수영복 을 선물할까요?"
그가 싼히 쳐다보았다. "그보다는 앵무새의 처리가 선결문제인 것 같은데. 아가씨와 전의 주인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질이 나쁜지 모르겠군."
"이 집을 판 사람 말인가요? 그녀가 어쨌는데요?"
"내가 수영할 때마다 꼭 나체로 일광욕을 하곤 했소." 엘리사는 이 집의 전 주인이었던, 키가 150센티미터 정도인 50세 가량의 여성을 떠올리고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별로 우스을 것 없지 않소?"
"아니, 우스워요." 엘리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아마 유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기 전에 세 시간 정도 일을 해야 하오." 그는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등을 돌렸다. "앞으로는 앵무새가 시끄럽게 굴지 않도록 주의해 줬으면 좋겠소. 그러다 보면 훈련이 될 거요. 그리고 밤샘은 절대 금물이오. 새한테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니까."
"알겠어요, 새 박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 충고는 또 없나요?" 엘리사는 현관으로 향하는 사나이 옆으로 다 가가면서 농담조로 말했다.
사나이는 걸음을 멈추고 검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아가씨는 도대체 몇 살이오? 결혼 승낙 연령은 지났소?"
"글쎄요 조만간 양로원에 들어갈 계획인데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스물넷이에요. 물론 댁보다 20년은 젊겠지만. 그렇죠, 아저씨?"
그는 난생 처음 그런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서른셋 ."사나이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마흔쯤으로 보여요. 매일 밤 돈이나 세고 있는 비참한 부자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돈은 있지만 비참하지는 않소."
"아뇨,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겠죠.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내가 있으니까요."
"나는 현재의 생활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소. 그러니 쓸데없는 짓은 하진 않았으면 좋겠소. 나는 시간이 남아도는 양장점 점원 아가씨에겐 관심이 없으니까."
"점원이 아니라 디자이너 예요."
"디자이너라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데." 그는 비로소 장난스러운 표정을 띠고 엘리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착한 아이니 어서 잠이나 자요."
"긴 턱수염을 밟고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아저씨." 엘리사는 이미 등을 보이고 걸어가는 그를 향해 소리 쳤다.
그는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걸어갔다.
그것이 기묘한 우정의 시작이었다. 그의 이름은 킹스턴인데, 엘리사 말고는 아무도 그를 킹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는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에만 매달렸다. 전세계를 사업 무대로 삼고 있었지만, 생활의 기반은 자메이카에 있었다.
남자라면 거의 신용하지 않는 엘리사였지만 킹만은 믿어도 좋다고 직감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여성으로서의 엘리사에게는 거의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만난 지 몇 주일이 지나도 그녀의 마음을 끌려는 태도를 나타내지 않는 것을 보고 엘리사는 안심했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세상 물정에 밝은 여성인 듯 행동할 수 있었다. 그녀는 때때로 그를 떠보기 위해 일부러 교태를 부리기도 하고 지나치게 새롱거려 보기도 했지만 그는 태연했다. 엘리사를 어린 아이처럼 취급하면서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거나 놀려줄 뿔이었다.
엘리사로서는 그것이 고마웠다. 그녀는 자기가 오늘날의 풍조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서 쉽게 아무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자들은 대부분 한두 차례 데이트를 하게 되면 으레 그러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자연히 남자와의 교제를 끊게 되고 말았다.
하긴 그녀에게도 갓 스물에 들어서 멋진 애인이 생겼었다. 집에 데려와 부모에게 소개시킬 때까지만 해도 정말 훌륭한 사람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는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녀의 부모는 일종의 기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도마뱀 수집이 취미였고, 어머니는 특별 보안관 대리를 지내고 있었다. 미워할 수 없는 부모였지만, 그녀의 가정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남자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엘리사는 일생 동안 독신으로 지낼 결심을 하고 있었다.
킹은 섬에 있는 동안 다른 남자들이 엘리사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했다. 따라서 엘리사에게는 그가 세상을 등진 사람처럼 되지 않도록 어느 정도 신경을 쓸 의무가 있었다. 여기에는 선교사의 피를 이어받은 엘리사만한 적격자가 없었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고독에 빠지면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일사병엔 걸리면 위험합니다>라고 쓴 메모를 그와 현관문에 꽃아 놓거나 그가 일몰을 바라보며 앉아 있기를 좋아하는 바위 맡에 놓아두거나 했다. 그러다가 이런 일이 점점 발전하여 그를 위해 과자를 굽기도 하고, 현관에 꽃을 놓아두기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킹은 엘리사가 정성을 다해 요리를 만들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아무리 무뚝뚝한 그도 이제는 엘리사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이후 킹은 일주일에 한번은 꼭 식사를 하러 오고, 때로는 함께 해변을 산책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자기가 먼저 접근하게 만든 것을 경계하던 엘리사였지만 옆에 침대가 있는데도 그가 유혹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후부터는 그와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되었다.
엘리사가 사업 때문에 미국에 돌아갈 때면 킹이 자청해서 워치프를 맡아주겠노라고 했다. 킹은 새를 잘 돌봐주었다. 그가 일 때문에 섬을 떠날 경우에는 가정부를 고용해서 새를 돌보게 할 정도였다. 겉보기에는 완고했으나 마음은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성질이 급하고 고집스럽기는 해도 엘리사에게는 다른 누구를 대할 때보다 참을성이 있었다.
한 가지 모를 것은 그의 여자 관계였다. 핸섬한 얼굴이나 나무랄 데 없는 체격, 뛰어난 사업 능력이나 확실한 사회적 지위로 보아 결혼했어야 당연할 것 같은데 아직 독신이라니. 어쩌다 데이트를 해도 상대를 집에 데려와 재우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순진한 엘리사이긴 해도 건강한 남자가 이렇게 오랫동안 혼자 있는 것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느 날 용기를 내서 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굳어진 표정으로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고 말았다. 그 이후 엘리사는 두 번 다시 여자 문제에 대해 묻지 않았다.
원래 호기심이 강한 엘리사였지만 지금으로선 킹이 한 번도 자신을 유혹하지 않았다는 데 만족하고 다른 호기심은 접기로 했다. 그녀는 전에 어느 파티에 갔을 때 아주 야한 포르노 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강한 거부감을 보이게 되었다.
엘리사는 지금 부모가 곁에 있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그의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부모가 보기라도 한다면‥‥ 엘리사는 그 장면을 머리에 그려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딸을 잘 아는 부모는 아마 무슨 연극을 하고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런 개성적인 부모를 가진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킹이 언제 돌아오건 상관없었다. 엘리사는 단지 침대에 누워 매력적으로 보이기만 하면 된다. 그가 무슨 이유로, 누구 때문에 이런 연극을 벌이는지 알 수 없지만, 전에 보험 회사의 세일즈맨이 끈질기게 따라다녔을 때 도움을 받은 일이 있으므로 이번에는 그녀가 도와줄 차례인 것이다.
틀림없이 보답으로 스테이크 정도는 대접하겠지
현관문이 열리고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킹이 돌아온 것이다. 엘리사는 애타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연인인 체하려고 했다. 전혀 무섭지 않은 게 이상했다. 무섭기보다 몸이 영문도 모르게 오싹오싹하는 게 엘리사는 더 신경이 쓰였다.
그때 침실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꿈에서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금발 머리 여자가 들어섰다. 그 뒤에서 킹이 엘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금발 머리 여자는 아주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엘리사를 바라보는 킹의 표정도 그녀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좀처럼 표정을 나타내지 않는 그가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어째서 킹은 이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실망시키려는 것일까?
"어서 오세요, 달링." 엘리사는 한껏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하고, 가만히 이불을 끌어당기면서 품위 있게 하품을 했다. "좀 더 자면 안 될까요?" 의미 있는 말을 던지며 금발 머리 여자의 반응을 살폈다.
2
"어머나!." 그 여자는 얼어붙은 듯이 멈춰섰다. 큰 눈으로 엘리사를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미, 미안해요."
"아직 여기 있을 줄 몰랐어, 엘리사." 킹은 억지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엘리사는 졸린 듯한 눈을 해보였다. "너무 오래 있어서 방해가 됐나요?"
"천만에 여기 있고 싶거든 언제까지 있어도 좋아. 베스, 당신은‥‥." 그는 금발 미인을 향해 말했다. "복도 저쪽에 손님용 욕실이 있소."
"네, 고마워요." 그녀는 가엾을 정도로 당황해하며 복도로 달려 나갔다.
킹은 문을 닫고 거기에 등을 기댔다. 검은 눈은 엘리사 쪽으로 향해 있었으나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지만 그을린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엘리사는 속옷 차림이라는 것도 잊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하긴 그녀가 무엇을 입었든 그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엘리사의 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까. 엘리사는 그 앞에 섰다.
"전부 말해주지 않겠어요? 잔재주를 부리려면 어차피 협력자가 필요할 테니까요." 그의 입술 가장자리가 일그러졌다.
"그녀는 베스라고 동생의 아내야. 동생은 지금 일 때문에 회의에 참석 중인데 한 시간쯤 있다가 이리 오게 될 거야."
엘리사는 전에 킹으로부터 보비와 베스라는 이름을 들은적이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또 그가 동생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러니까 두 사람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 열을 올리고 있는 모양이로군요." 생각나는 대로 말한 엘리사는 깜짝 놀라는 킹에게 미소를 던졌다. "내 상상대로라면 그녀가 당신에게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나더러 침대에 누워 있으라는 엉뚱한 부탁을 한 것 같은데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는 엘리사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중단했다.
"말해줄 수 없나요?" 엘리사가 독촉했다.
킹은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마침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보비는 호텔 건설 사업 때문에 두 달 전에 아내를 데리고 여기 왔어. 그는 계속 일에 몰려서 지금도 하청업자의 입찰 문제로 마지막 교섭을 벌이고 있는 중이지."
"그래서요?"
"베스는 여간 쓸쓸하지 않은 거야. 그래서 나를 상대로 심심풀이를 하려는 것 같았어."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그저께 밤에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지 벼랑 끝에 몰린 나는 그만 엘리사에게 빠져 있다는 핑계를 대고 말았어. 그러다가 오늘 엘리사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이 우스꽝스리운 연극을 생각해 낸 거야. 베스가 틀림없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괜히 아무 상관없는 당신을 끌어들여서 미안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유감이군요." 엘리사는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농담 을 했다. "상상해 보세요 당신 침대 위에 내가 태어났을 때의 모습 그대로 누워 있는 광경을. 그랬다면 그녀는 더욱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
기묘하게도 그 장면을 상상한 킹은 몸이 뜨거워졌다. 지금까지 엘리사를 여자로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는 젊을뿐더러 건드리면 당장 깨질 것처럼 섬세하고 연약하다. 여동생같이 생각하고 있었으나, 대담한 속옷 차림의 그녀는 자못 섹시해서 도저히 오빠 같은 기분으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당황했다. 나이 탓으로 호르몬의 분비 기능이 이상해진 게 틀림없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엘리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화근이었다. 그녀는 어깨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사는 깜짝 놀랐다. 처음으로 맨살에 와닿은 그의 손이 불쾌하기는커녕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그랬을 테지." 그는 속으로 당황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엘리사의 농담에 대답할 여유가 남아 있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대견스러웠다. "최소한 일시적인 방편은 될 수 있을 것 같아. 보비가 올 때까지 한 시간쯤 같이 있어 줄 수 있을까?"
"그래요. 친구란 그래서 좋은 거죠." 가볍게 대답하긴 했지만 엘리사는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과연 이 연인 놀이가 동생의 아내를 물리치기 위한 것인지 진의조차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킹, 그녀는 당신을 사랑하나요?"
그는 이미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는 보비에게 따돌림을 당해 외로워하고 있어. 그녀가 정말 나한테 흥미가 있는 건지, 아니면 보비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연극을 하는 건지, 그건 나도 몰라."
킹은 줄곧 동생의 아내에게 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행실이 나쁜 어머니 밑에서 불행하게 자랐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보비가 베스를 집으로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변변한 옷 한 벌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킹은 그녀에게 곧 호감을 느끼고, 지난 10년 동안 줄곧 친절하게 대해 왔다. 그것이 시아주버니로서의 사랑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엘리사는 킹의 괴로워하는 표정을 무시하고 계속 물었다. "보비보다 당신이 먼저 그녀를 알았나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혼했을 때 그녀는 열여덟 살로 보비와 동갑이었어. 나는 그녀보다 일곱 살이나 더 많았지. 결혼 초 보비의 사업이 여의치 못했을 무렵에는 두 사람 사이가 오히려 좋았어. 그 후 차차 생활이 넉넉해 졌지만, 다시 석유 사업의 경기가 나빠지면서 곤란을 받게 되었지."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보비는 지금까지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혹시 그녀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까 싶어 미친 듯이 일에 파묻혔어. 그런데 베스는 보비가 사업에만 열중하는 것을 보고 자기에게 등을 돌리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지."
"어쩜, 그럴 수가 있죠."
"농담이 아니야. 그 때문에 골탕을 먹은 게 누구일 것 같아?" 킹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보비는 내 도움으로 여기서 부동산 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밤낮없이 맹렬하게 일에만 몰두했어. 그러자 지난 몇 주 동안 베스가 나에게.... 틀림없이 쓸쓸했기 때문일 테지. 처음에는 보비의 관심을 다시 돌리기 위해 그의 질투심을 부추기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어."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어. 그 결과 엘리사가 등장하게 된 거지."
"그러니까 나더러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해 달라는 말이로군요?"
"맞아. 그래서 엘리사가 나와 말다툼을 하고 몇 달 동안 미국에 가 있었던 것으로 하면 어떨까 싶어. 지금은 다시 화해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하자는 말이야." "재미있군요. 선교사인 부모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내가 쉽게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는지 설명하면 어떨까요?"
"부모님 이야기는 그녀에게 하지 말아줘, 부탁이야, 또 당신 사업에 대해서도."
엘리사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하지만 3주 후에는 미국에 돌아가야 하니까 그녀를 빨리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 돼요."
"그 이전에 보비가 예전 상태로 돌아을 거야. 보비의 부탁으로 베스를 마중하러 나갈 때 당신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얼마나 안심했는지 몰라 출발하기 전에 당신한테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었어."
"운이 좋았어요 앞으로 2주 동안은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었거든요." 계속 신경이 쓰이던 그의 손을 어깨에서 지 연스럽게 떼어내면서 엘리사는 낯을 찌푸렸다. "참, 빨간 망토를 집에 두고 왔나 봐요 크게 S자를 수놓은 망토 말이에요."
"슈퍼우먼 같은 망토라면 필요없어. 내 손을 잡으면 되니까."
"롤렉스시계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그 손을 말인가요?" 그녀는 입술을 쑥 내밀었다. "도둑맞지 않도록 조심 하세요. 나는 그 정도로 부자는 아니니까요."
그는 싱긋 웃었다. "앞으로 그렇게 되겠지." 문 밖을 살피면서 그가 말했다 "이제 옷을 입지 그래?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무기력한 사람이야.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녀와 대결할 수 없다니 엘리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기운을 내세요. 나는 무술에 능해요. 그녀가 조금이라고 당신의 옷을 벗기려 들면 목숨을 걸고 당신의 명예를 지켜주겠어요."
킹은 웃음을 터뜨렸다. 새로운 이웃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등을 돌려 의자에서 옷을 집어 들고 욕실로 향했다.
"내 앞에서 갈아입어도 괜찮은데." 킹이 뜻밖의 말을 했다.
"안 돼요. 나는 그렇게 가벼운 여자가 아니에요. 주치의를 제외하고는 남자 앞에서 옷을 벗은 적이 없어요."
킹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한 번도?"
"그래요, 한 번도."
"왜지? 무슨 일이 있었어?"
"아버지가 선교사였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브라질에 선교하러 갔을 때 나는 마침 사춘기였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성에 개방적인 여자가 될 수 있겠어요?"
그녀의 한 마디에 지난 2년 동안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가 해결되는 것 같았다. 그는 투명한 슬립에 감싸인 엘리사의 몸을 처음으로 자세히 바라보았다. 가슴이 아주 풍만하고 아름다웠다. 가느다란 허리는 유연성이 있어 보였고, 길고 모양 있는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도 매력적이었다 도발하는 듯한 몸동작은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면 몸을 뺀다는 것을 그는 상기했다.
"그랬었군." 킹이 중얼거렸다.
"뭐가 그랬었군이죠?"
"좀 더 세속에 물든 아가씨인 줄 알고 있었어." 킹은 그녀가 때때로 보여주는 대담한 행동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행동이 처녀답지 않았기 때문에."
"처녀다운 행동이란 어떤 것인데요? 불 속에 뛰어들기라도 하나요?"
킹은 엘리사의 재치 있는 대답에 웃음을 참치 못했다. 그리고 엘리사를 알게 된 이후로 예전보다 자주 웃게 되었 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살아온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인디언의 피를 이어받은 그의 인생은 두 가지 세계와의 싸움이었다. 대부 분의 사람들은 그와 보비의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조차 알 지 못했다. 보비의 아버지는 두 사람에게 똑같이 사업을 물려준 석유업자였으나, 킹의 친아버지는 순수한 아파치족으로서 아내가 속한 사회에 융합하려다가 불운을 맞이했다. 부유한 백인 처녀와 가난한 인디언 남자의 결혼은 소설에서는 미담이 되겠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결국 킹의 아버지는 파티 도중에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아버지를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머니도 재혼하여 보비를 낳았을 무렵에는 장남에 대한 사랑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킹은 혼자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인생은 투쟁의 연속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투쟁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거의 웃지 않는군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다시 굳어진 그의 표정을 보고 엘리사는 갈아입을 옷으로 조심스럽게 가슴을 가리면서 말했다.
"아니, 때로는 웃기도 해. 엘리사와 같이 있을 때는." 그는 싱긋 웃었다. "어서 옷을 갈아입어요. 가짜 애인 아가씨,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엘리사는 잠자코 그의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베스 이상으로 그를 괴롭히는 무언가가 틀림없이 있다고 그녀는 직감했다. 두 개의 세계를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건 어떤 것일까? 그의 선조가 인디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호기심이 강한 그녀는 언젠가 한 번 어째서 피부색 이 그렇게 검은지 킹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질문에 대해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한 후 말을 흐리며 화제를 돌리고 말았다.
엘리사는 그에게 미소를 던지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욕실로 갔다. 그녀는 직접 디자인한 검정색 실크 점프 슈트를 입고 긴 머리를 브러시로 손질했다. 가슴이 너무 깊게 파인 것 같은데.... 이런 모습을 하는 것은 킹 앞에서만이야. 엘리사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립스틱을 핸드백에 두 고 온 것을 떠올리고 침실로 돌아왔다.
"어머나, 이런." 그녀는 핸드백을 뒤지면서 탄식을 내뱉었다. "립스틱도 잊어버리고 오다니." 엘리사는 그를 향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미안하지만 내겐 필요치 않은 거라서 갖고 있지 않은데." 킹은 손에 담배를 든 채 문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좀처럼 담배를 피우지 않는 그가 오늘밤엔 냉정을 잃은 것 같았다.
"예쁘게 화장하지 않으면 섹시한 당신의 제수에게 탄로 나게 돼요."
그는 엘리사 옆으로 다가와서 그녀의 등근 어깨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만일 립스틱을 칠했다 해도 내 키스로 지워졌을 거야."
그가 이렇게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엘리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검은 눈이 그녀의 얼굴에서 가슴으로 이동해 갔다. 좀 더 가슴을 가렸어야 했는데... 투명한 슬립 차림이 었을 때에도 별로 눈여겨보지 않더니 갑자기 왜 그러는 것일까?
"그녀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않아요?" 엘리사는 처음으로 그에게 경계심을 품었다. 그녀는 침착성을 잃고 킹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그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킹이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겼던 것이다.
"왜 이러세요?"
"좀 헝크러지게 해야 할 것 같아서. 너무 단정하면 정말 연인 사이인지 베스가 의심할지도 몰라."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요?" 엘리사는 머리를 마구 흐트려뜨렸다.
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정도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겠는데."
그의 시선이 엘리사의 부드러운 입술에 와서 멎었다. 그 입술에 키스하면 어떤 느낌이 들까?
"내가 두려운가?" 그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어조로 말했다. 나직하고 느릿한 그 목소리는 조롱하는 듯한 검은 눈과 마찬가지로 엘리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베스의 대역이 되기는 싫어요.."
킹의 안색이 변했다 "그럴 생각은 없어." 그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손을 놓았다.
"알았어요. 어디까지나 연극이라면 잘할 수 있어요." 엘리사는 일부러 가볍게 말했으나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순간적인 접촉일 뿐이었는데도 그의 남자다운 체취에 취할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접근하게 하면 위험하다. 엘리사는 얼른 화제를 바꿨다. "보비는 당신과 닮았나요? 그러고 보니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군요."
"별로 닮지 않았어. 곧 눈으로 확인하게 되겠지."
"두 사람 사이에 아기는 없나요?"
킹은 낯을 찌푸렸다. "사업에 대한 전망이 설 때까지 기 다리자고 보비가 말한 모양이더군." 그는 엘리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사치스럽게 살긴 하지만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야. 베스는 지금 다이아몬드와 스포츠카를 가지고 있지만 내일이면 연기로 사라져 버릴 수 도 있어. 보비는 그게 불안한 거야. 당연한 일이지. 지금 그가 관계하고 있는 자메이카에서의 사업은 그를 떠오르게 할지도 모르고 파멸시킬지도 몰라. 보비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지."
엘리사는 베스를 동정했다. 아내로서 가장 괴로운 일은 남편에게 무시당하는 일일 것이다. 엘리사의 부모는 각각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집에서는 언제나 뜻이 맞았다. 몸은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에게 향하는 눈길을 보면 두 사람이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잠시 후 킹이 말했다. "혹시 이런 연극을 하는 게 싫은 건 아니겠지?"
"오, 전혀 그렇지 않아요. 나는 항상 연극 무대를 동경 하고 있었는걸요." 엘리사는 손등을 눈에 대고 포즈를 취하면서 짐짓 과장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를 혼자 있게 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요 장난꾸러기 같으니라구." 킹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재미있는 여자야, 엘리사는. 지금까지 아무도 유혹하려 들지 않았다니 믿어지지가 않아."
엘리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젊은 남자라면 선교사의 말 따위는 유혹하려 하지 않아요. 한 번 우리 가족에게 심한 말을 한 남자가 있었어요. 그땐 상처를 입었지만 곧 다시 일어섰지요."
"정말? 그렇다면 어째서 아직까지 처녀로 있지?"
"26년이나 걸려서 쌓아올린 것을 당신이 무너뜨리지 않았기 때문이죠. 만일 유혹을 받게 된다면 상대가 당신 같은 남자였으면 좋겠어요."
킹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몸이 떨리고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엘리사는 자기가 한 대담한 말에 놀라 몸을 뺐다. "미안해요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에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여자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 사람이란 의미였어요. 틀림없이 당신은 나보다 섹스에 대하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테지만요."
"그건 사실이야, 아가씨." 킹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어."
엘리사의 손이 그의 강하고 따스한 손에 감싸여 바르르 떨었다. 고개를 들자 마음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눈 과 마주쳤다. 그녀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네." 그녀는 겨우 대답했다. 꼭 다문 그의 입술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킹은 엘리사의 눈에 시선을 못 박은 채 그녀의 긴 머리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는 엘리사가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슴으로 시선을 옮긴 그는 유두가 도드라져 얇은 옷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순간 그녀의 가슴에 손을 대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그녀의 따뜻한 입술을 맛보고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몸이 떨려요."
"가슴을 보지 말라는 뜻인가?"
엘리사는 놀란 나머지 그만 숨을 죽였다. 그가 이런 식으로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했을까? 그는 후회했다. 상대는 오랫동안 편안한 친구 사이로 지낸 엘리사가 아닌가? 어째서 지금까지 이 장난꾸러기 아가씨가 이토록 귀여운 얼굴과 멋진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농담이야." 그는 등을 돌리고 새로 담배에 불을 붙였 다. "어서 나가자구. 빨리 정리해 버려야겠어."
"네." 엘리사는 마음이 산란한 채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취한 것일까? 그래서 그런 이상한 말을 한 것일까? 틀림없이 베스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럴 것이다. 그러니 별로 걱정할 것 없다.
"괜찮지?" 킹이 문을 열기 전에 물었다.
"물론이에요."
"좋아. 그럼 시험해 봐야겠는걸." 그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엘리사는 망설이면서도 그의 듬직한 손에 자그마한 자기 손을 가져갔다. "됐나요?" 그녀는 고개를 들고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뜨며 말했다. "어머, 킹스턴! 당신은 정말 섹시하군요!."
킹이 큰 소리로 웃었다. "됐어. 틀림없이 그녀는 믿을 거야."
"좌우간 해볼 수밖에 없잖아요?"
두 사람이 거실로 들어갔을 때 베스는 의자에 걸터앉아 복도 쪽을 보고 있었다. 베스의 푸른 눈에 순간적으로 적의가 떠올랐으나 곧 사라졌다.
"킹스턴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다니, 난 전혀 몰랐어요." 베스는 머뭇거리면서 말하고 품위 있게 미소를 지었다 "그와 다투고 플로리다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벌써 화해를 한 건가요?"
"네,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요 그렇죠, 달링?" 엘리사는 긴 속눈썹을 매혹적으로 깜박거리면서 그에게 윙크를 보냈다.
킹이 섹시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물론."
"플로리다의 어디에 사세요?" 베스가 다시 물었다.
"주로 마이애미에 있어요." 엘리사는 킹의 손을 놓고 아름다운 연상의 여자에게 미소를 보냈다. "킹의 동생과 결혼하셨다죠?"
베스는 앞에 놓인 술잔에 시선을 떨구었다. "네, 보비의 아내예요."
"아, 아름다워라!." 워치프가 외치면서 새장을 마구 흔들었다.
베스가 앵무새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어머, 아부가 심한 새로군요." 앵무새를 노려보는 시늉을 했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엘리사는 약간 안도했다. 새를 좋아하는 것을 보니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워치프는 여자를 좋아해요 하지만 킹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요. 집에 데려가면 슬퍼하거든요."
"그럼, 이 앵무새는 당신 건가요?"
"네. 미국에 갈 때만 킹에게 맡겨두곤 하죠. 나는 오늘 아침에 돌아왔어요."
킹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엘리사, 뭘 좀 마시겠어?"
"네, 고마워요." 엘리사는 애교스럽게 대답했다 킹의 의도는 잘 알고 있었다. 함부로 말을 하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그녀는 다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베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애완동물을 기르지 않나요, 베스?"
베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완동물도 없고, 아이도 없어요. 나와 보비뿐이에요. 보비가 집에 있을 경우에는 말이에요."
"보비는 무척 바빠요, 베스." 저쪽에서 술을 따르던 킹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만일 그가 일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다이아몬드를 단념해야 할 거요."
"다이아몬드가 필요해서 그와 결혼한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는 이해해 주지 않아요." 베스는 고개를 들었다.
"옛날 일을 기억하세요? 보비와 자주 유원지에 갔었죠. 킹스턴, 당신도 함께 간 적이 있었잖아요? 아이스크림과 솜사탕을 잔뜩 사들고.."
"자꾸 과거만 되돌아보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오." 엘리사에게 보드카를 건네주며 그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미래만 바라보면서 현재를 희생하는 것도 현명한 일이 라고는 할 수 없어요. 내가 하는 일이라곤 고작 호텔 방이나 집에 앉아 있는 것뿐이에요 알코올에 중독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라니까요."
"관심을 집중시킬 만한 다른 일이 없을까요, 베스?" 엘리사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으나 베스가 분한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얼른 덧붙였다. "미안해요 당신을 비판하려고 한 말은 아니에요. 단지 취미 생활이나 다른 일에 관심을 기울이면 혼자 있어도 덜 외로울 것 같아서‥‥."
"나는 아무 재주도 없어요." 그녀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결혼했기 때문에 아무 기술도 없어요."
엘리사는 베스를 동정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가능한 것이 있을 거예요 그림을 그린다거나 악기를 연주한다거나 수예를 하거나‥‥."
"전에는 피아노를 쳤어요 제법 솜씨가 있었죠. 하지만 보비가 피아노 소리를 싫어해요 당신은요?"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요." 엘리사는 킹의 굳어진 표정을 보고 답답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 했다.
"옷을 디자인한다면서요?" 베스는 엘리사의 점프 슈트 에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면서 물었다. "이 옷은 직접 디자인한 건가요?"
"네. 마음에 드세요?" 엘리사가 힘 있게 말했다. "하지만 부모님에게는 보여드리지 않았어요. 부모님은‥‥." 그 대목에서 킹이 노려보는 바람에 그녀는 얼른 말을 바꿨다. "내가 디자이너가 된 것을 기뻐하세요."
"물론이지. 딸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시오." 킹이 얼른 말을 받았다.
"부모님이 하시는 일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베스가 물었다.
"그, 그러니까‥‥ 옛날 역사를 연구하세요." 성서 역시 인간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어머, 멋지군요." 베스는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다이아몬드가 박힌 시계를 흘끗 들여다보았다. "보비가 늦어지는 군요 회의가 오래 계속되는 모양이에요 그의 말이 사실이 라면." 그녀는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차라리 내가 서류 가방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언제나 그와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지금이 보비에게는 아주 중요한 시기요, 베스. 하청 계약에는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법이거든." 킹이 말했다. "자메이카는 외부 투자를 필요로 하는데, 보비가 계획하고 있는 호텔은 많은 사람을 고용해서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사업이오. 그러나 건축 사업은 신중을 기해야 하지.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거요."
"벌써 몇 달이나 지났어요."
"곧 끝나게 될 거요 그러면 오클라호마로 돌아갈 수 있게 되겠지." 킹이 말했다.
베스가 얼굴을 들었다. "그때가 기다려지는군요. 호텔 벽을 바라보는 대신 내 방의 벽을 바라보며 지낼 수 있을 테니 말이에요." 그녀는 힘없이 말하고 킹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않겠죠, 킹스턴 거의 여기서 지내게 될 테니까요."
킹은 위스키 잔을 들고 다른 한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베스는 의미 있는 시선을 엘리사에게 보내면서 말했다.
"난 자메이카가 아주 마음에 들어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잔을 비운 베스는 킹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더 주실래요?"
"그 정도로 끝내는 게 좋겠소." 킹은 잔을 옆으로 치우고 베스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하면 모두에게 기운을 북돋아 줄 수 있을까 하고 엘리사가 생각하고 있을 때 자갈길을 달려오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보비가 돌아왔어요." 베스가 말했다.
현관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나가는 킹의 뒷모습을 베스의 슬픈 시선이 뒤따랐다.
"남편은 어떤 사람인가요?" 베스의 기분을 가라앉히려 고 엘리사가 물었다.
베스는 의외의 질문에 놀란 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보비 말인가요? 그는 전형적인 사업가예요 킹스턴과는 어머니가 같지만 닮은 데가 전혀 없어요. 킹스턴의 친아버지는 인디언이에요."
"알고 있어요." 엘리사는 베스에게 미소를 보냈다. "당신은 참 귀여운 사람이에요."
베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은 아주 솔직하군요."
"덕분에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죠." 엘리사가 대답했다.
"보비와는 어떻게 알게 됐죠?"
베스는 가볍게 웃었다. "상상하기 어려을 거예요 보비는 우리 학교 미식 축구팀의 쿼터백으로 대단한 스타였어요 나는 치어리더였구요."
"10년 전에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아직 아기가 없다면서 요? 원하지 않았나요?"
베스는 한숨을 내쉬고 시선을 떨구었다. "보비에게 그럴 시간이 있겠어요? 언제나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거나 전화를 거는 것이 고작이었죠." 그녀는 부아가 치민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나는‥‥ 아니, 아이 같은 것은 원치 않아요." 베스는 엘리사의 시선을 피하면서 몸을 뒤척였다. "아이는 귀찮을 뿐이에요. 나는 피아노를 다시 치고 싶어요. 하지만 보비는 자기가 집에서 일하고 있을때 내가 피아노 연습을 하면 싫어해요."
"원, 저런.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사는 보람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베스는 낯을 찌푸렸다. "어떤 일을 하느냐는 당신의 질문을 받고 사실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거든요."
그때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킹과 보비가 왔다는 것을 알고 엘리사는 안도했다.
"킹스턴과는 언제부터 연인 사이가 되었나요?" 베스는 고통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엘리사는 말문이 막혔다. 때마침 거실 입구에 킹보다 약간 키가 작은 남자가 들어서는 바람에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이제야 오는군요." 베스는 남자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고는 곧 시선을 돌렸다. "사업은 잘 됐나요?" 말은 상냥했지만 어딘가 나무라는 듯한 투였다 보비가 말하는 <사업>이 정말 사업인지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이지." 보비는 아내의 기색을 살피며 대답했다.
그는 조금도 킹과 닳은 데가 없었다. 머리는 짙은 금발 이었고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수수하면서도 밝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피로에 지쳐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하청업자가 결정된 모양이오." 킹이 빙긋이 웃으며 거 들었다. "입찰도 예산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것 같소. 다시 예전처럼 멋지게 생활할 수 있게 될 거요, 베스."
"잘 됐네요." 베스는 쌀쌀하게 말했다. "당장 밍크를 사러 가야겠군요."
"튼튼한 우리와 장갑도 필요하겠어요." 엘리사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며 덧붙였다.
베스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떠올린다. "우리라구요? 그리고 장갑?"
엘리사가 말한 농담의 뜻을 알아듣고 보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 게 아니라 살아 있는 밍크를 사다 키우려면 튼튼한 우리와 장갑이 필요하겠군."
"네, 그래요. 말하자면 포근하게 감싸줄 상대가 필요하다는 말이죠." 엘리사가 마지막으로 일침을 날렸다.
엘리사를 바라보는 킹의 눈이 빛났다. 그는 동생에게 말 했다. "그녀는 나보다 눈치가 더 빨라."
"그건, 아저씨‥‥ 아니, 달링." 엘리사는 킹에게 눈을 깜박여 보였다. "당신이 언제나 올가미를 쳐놓고 있다는 것 을 알기 때문이에요."
"그것 참, 처음 듣는 기분 좋은 표현이로군." 보비가 이번엔 형이 당할 차례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라고 했죠? 형한테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 같은 생각이 듭니다. 형으로부터 어떻게 몸을 지키고 있는지 내게도 가르쳐 줬으면 좋겠군요."
"간단해요." 엘리사는 장난스런 눈으로 킹을 쳐다보았다. 킹이 자기 이야기를 동생에게 했다는 말을 듣고 왠지 기분이 좋았다. "텔레비전에서 특수 부대가 훈련하는 것을 보고 연구했어요."
"아, 그런가요?" 보비는 껄껄 웃고 킹에게 윙크했다.
"킹스턴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베스가 끼어 들었다. "킹스턴 덕택에 이 섬에서 지루하지 않게 지냈는걸요. 그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요."
보비는 킹에게로 항한 베스의 뜨거운 시선도 깨닫지 못하고 엘리사를 보고 있었다. 아내 따위는 관심 밖이라는식이었다. "형이 말한 대로 당신은 정말 유쾌한 여자로군요, 엘리사."
엘리사는 미소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뜻하지 않은 사태의 전개와 베스의 초조해하는 시선에 당황하고 있었다.
3
"엘리사가 돌아와서 정말 다행입니다. 킹스턴이 얼마나 울적해 있었는지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어요." 보비가 엘리사를 보고 말했다.
킹이 낯을 찌푸렸으나 엘리사는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쓸쓸했나요?" 엘리사는 킹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물론 쓸쓸했지." 킹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보비, 뭘 좀 마시겠어?"
"아뇨, 됐어요." 베스가 대신 대답하고 남편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서 호텔로 돌아가요. 좀 피곤하군요."
"네 시간 동안 내내 회의를 계속한 사람도 이렇게 견디고 있잖아?" 보비가 말했다. "우린 내일이면 돌아가게 돼. 그러면 킹스턴과 몇 주 동안 만날 수 없어. 그러니 새로운 사업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구."
"전화로도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베스는 뽀로퉁하게 말하고 천천히 일어났다. 뒤축이 7센티미터는 족히 되는 하이힐을 신은 그녀는 남편과 거의 맞먹을 정도로 키가 컸다. "당신에게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시간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나하고는 예약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다는 거로군요."
보비는 단념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그럼, 돌아가자구."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킹과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술은 대접받지 못했지만 초대해 줘서 고마워. 내일 아침에 전화할게, 형."
"그래,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킹이 대답했다.
"가는 길에 잠깐 드라이브할 수 있을까요?" 보비가 옆에 왔을 때 베스가 물었다.
"드라이브? 당신, 정말 생각이 없군. 나는 지금부터 입찰 가격을 조사해야 돼." 보비가 내뱉듯이 대답했다.
베스는 무슨 말을 할 듯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현관으로 향하면서 어깨 너머로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킹스턴. 그리고 엘리사도." 인사를 건넨 그녀는 후덥지근한 저녁 바람이 부는 밖으로 나갔다.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니까." 보비가 변명하는 어조로 말했다. "여기 온 이후로 계속 기분이 저조하거든 그렇다고 내가 사업을 그만둘 수는 없잖아? 석유 시장은 경기가 나빠 도저히 그것만으로는 생활하기가 어렵게 됐어. 그러니 그녀만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지 않겠어? 아마 부동산 사업에 손을 대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공영 주택에 살고 있을 거야!." 그는 형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베스는 요즘 무슨 일을 하건 짜증만 부리고 있어. 내가 오클라호마에 가 있는 동안 형이 일주일 정도 그녀를 좀 맡아줄 수 없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보비는 아내를 부탁했다.
현관에서 킹의 옆에 서 있던 엘리사는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 엘리사와 나도 플로리다에 있는 그녀의 집에 잠시 가 있기로 했는데‥‥." 킹은 뜻밖의 말을 하고 엘리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눈짓을 보냈다. "베스가 내 집을 쓰면 곤란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보비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뿐이야. 참, 당신 가족은 플로리다에 살고 있나요?"
"네, 마이애미에 살고 있어요." 킹이 다급한 나머지 얼떨결에 한 말일 테지만 그를 집에 데려간다는 이야기에 엘리사는 크게 당황했다. 나의 디자인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수적인 부모가 킹과의 우정을 이해할 리 없다. 그를 플레이보이로 단정할 것이다. 그리고 킹이 기인이나 다름없는 부모와 같이 지내다니! 생각만 해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엘리사는 킹이 난처한 입장을 모면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러니까 진심이 아닌 것이다.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보비가 다시 물었다.
"아버지는 선‥‥." 킨이 옆구리를 쿡 찌르는 바람에 엘리사는 얼른 말을 돌렸다. "고대사를 연구하고 계세요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시구요."
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는?"
"없어요."
"자, 그만 가도록 해." 킹은 보비가 엘리사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을 가로막았다. "꾸물거리고 있으면 베스가 혼자 떠날지도 몰라."
"알았어. 그럼, 잘 자."
"그래, 조심해 가도록 해." 킹이 대답했다.
"두 사람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 것 같군요." 야자나무 그늘로 자동차의 후미등 불빛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엘리사가 말했다.
"전에는 좋았어. 생활이 어려웠을 때는 오히려 둘 사이가 원만했지. 그런데 돈이 생기기 시작하자 베스는 무엇이든지 값비싼 것이 아니면 만족하지 않았어. 그래서 보비는 그 비용을 충당하려고 점점 더 일을 많이 하게 됐고, 그 결과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지." 킹은 말을 끊고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계속했다. "보비는 언제나 나에게 경쟁심을 품고 있었지만, 최근에 와서 그게 더 심해졌어. 자연히 베스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는데, 그녀는 별로 가사 일을 좋아하지도 않고‥‥ 그들이 아이를 원치 않은 것이 무엇보다도 큰 잘못이었어."
그는 엘리사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 눈길을 돌렸다. 베스가 본심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 걸까? 엘리사는 잠깐 대화를 나눈 것뿐이지만 베스가 얼마나 아이를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킹은 마시던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당신도 한 잔 더 마시겠어?"
"고마워요. 그런데 보비는 어째서 당신과 경쟁하려는 걸까요?"
"아마도 녀석의 성격 때문일 테지." 그는 엘리사의 잔에 술을 따르고 바다로 향한 테라스 문을 열었다
안마당 저쪽에서 눈부시게 흰 파도가 부서지고 해변이 물거품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시원한 바람이 가볍게 쓰다듬고 지나갔다
"녀석은 아버지가 나에게도 사업을 물려준 게 못마땅한 거야. 아버지와 나는 최소한 사업에 한해서만은 의견이 맞았는데, 녀석은 그게 분했던 거지."
"그와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라면서요?" 엘리사는 킹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고 조금 망설이면서 물었다. "다른 가족은 없나요?" 그의 곁으로 다가가면서 덧붙여 물었다.
"보비의 아버지는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유료 양로원에 들어가 계셔. 알츠하이머병에 걸리셨거든. 문병을 가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지."
"안 됐군요 당신도, 어머니도."
"음, 그래." 킹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친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의 부자 친구들이 싫어서 우리를 두고 가출했어." 그는 위스키 잔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멕시코 출신인데 오클라호마의 유전에서 일하다가 어머니를 만났지, 어머니는 눈이 파랗고 보비와 같은 금발인데, 사치스런 생활을 즐겼어. 어머니로서는 돈이 전부였지만, 아버지는 소박한 생활을 좋아했다더군."
"그런 것을 물어볼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가 자발적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엘리사로서는 의외였다. 베스 때문에 정신이 산란해졌거나, 아니면 알코올 때문일 것이다.
엘리사는 넥타이를 풀고 단추를 끄른 그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흰 셔츠 때문에 피부가 더욱 검게 보였다. 그녀의 시선은 단단한 가슴에 자리 잡은 짙은 털에 못 박혔다.
엘리사가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킹이 돌아보았다. 그는 엘리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엘리사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의식하는 순간, 그가 금방 불을 붙인 담배를 자연스럽게 내던지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가슴이 그의 맨가슴에 닿았다. 점프 슈트 속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의 봉오리가 딱딱해진 것을 깨닫고 당황해서 몸을 뗐다.
"남자와 이러는 것이 정말 죽기보다 싫은 모양이군." 그는 엘리사의 행동을 오해하고 이렇게 물었다. "나라면 안심할 수 있다고 말했잖아? 그러니 내 몸을 상대로 해서 수양을 쌓는 게 어때?"
"싫어요!." 엘리사는 숨이 찼다. 테라스 문에 몸이 밀어 붙여졌기 때문에 차디찬 유리와 뜨거운 그의 몸 사이에 끼여 아무래도 그의 맨가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려워할 것 없어. 절대로 난폭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 킹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엘리사는 손으로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가슴 털에 손이 닿는 순간 저절로 동작이 중단되었다. 순식간에 저항할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보드카 때문에 자제심을 잃은 것 같았다. 몸이 달아오르고 쾌감마저 느껴졌다.
"번거로움을 잊게 해줄 사람이 필요해. 즉 나의 상대가 되어 줄 사람이...."
"나는 당신의 상대가 되고 싶지 않아요." 엘리사는 단호하게 말하려 했으나 목소리에 힘이 없고 다리가 떨렸다.
"나는 처음부터 엘리사를 상대하고 있었어. 탓하려거든 자신을 탓하도록 해."
"그때와는 달라요 그때는 당신이 외로워 보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뿐이에요." 엘리사는 애써 말했다. 청결한 그의 체취를 가슴에 들이마시자 보드카 이상으로 취할 것만 같았다.
"내가 외로워했다구?" 빈정대는 듯한 미소를 띠고 그가 물었다.
"당신은 외톨이였어요." 엘리사는 그의 시선을 피해 태연을 가장하면서 대답했다. "그래서 동정심을 느꼈죠. 나도 외톨이였으니까요. 나는‥‥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당신에겐 워치프가 있잖아?" 킹은 낄껄 웃으며 말했다. "워치프로 말하자면‥‥." 그가 돌아보자 커다란 앵무새는 한 발로 횃대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덮개도 안 덮었는데 자고 있다니 보기 드문 일이로군. 틀림없이 아까 먹인 항생제 때문일 거야."
"이젠 재채기를 하지 않더군요." 엘리사는 화제가 바뀐 것에 안도했다. "상당히 좋아졌어요. 졸린 것뿐이에요. 당신이 없으면 늘 초저녁부터 자요. 그는 당신을 그리워하는 모양이에요."
"그가 아니라 그녀겠지." 킹은 웃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시선을 돌려 점프 슈트 차림의 가슴을 내려다보고는 익숙한 동작으로 가슴과 가슴을 밀착시켰다. 엘리사는 예리한 쾌감이 엄습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귓불까지 발갛게 되었다. "왜 이러세요!."
"놀랐나? ."그가 물었다.
킹과 시선이 마주친 엘리사는 호기심이 당황으로 변하는 걸 느꼈다. 그는 시선을 그녀에게 못 박은 채 엘리사의 허리를 안은 손을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엘리사의 귀에 들리는 것은 밀려갔다 다시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자신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떨구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숨소리 역시 거칠었다.
킹의 손이 엘리사의 허리에서 가슴으로 이동했다. 마치 그녀의 부드러운 촉감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이 나른하게 움직였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군." 엘리사의 귓전에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얇은 옷이라서 마치 벌거벗은 몸을 껴안고 있는 것 같아."
엘리사는 신음 소리가 새어나오려는 것을 입술을 깨물어 억지로 참았다. 다리의 힘이 빠져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았지만 그의 어깨에 손톱을 세우고 겨우 버텼다. 생전 처음 느끼는 어지러운 감각에 몸이 마구 떨렸다.
"엘리사.. ."거친 숨을 토해내며 킹이 중얼거렸다.
그의 입에서 풍기는 위스키 냄새까지도 기묘하게 흥분을 부추겼다. 배가 으스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가 꼭 끌어안았을 때 엘리사는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남자의 향기를 가슴에 빨아들였다. 이런 느낌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단단한 그의 가슴에 자기 가슴을 밀어붙였다. 그는 엘리사의 귀를 가볍게 깨물면서 부드러운 귓불을 혀로 애무했다.
엘리사는 킹의 목에 감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얼굴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그가 뺨을 비볐다. "떨고 있군." 엘리사를 더욱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어때, 기분이 좋지?"
"네."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아, 아‥‥킹!." 경계심이나 공포감보다는 미지의 것을 알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했기 때문에 그녀는 꼭 밀착된 그의 촉촉한 살갗의 감촉을 즐겼다.
"엘리사, 엘리사‥‥." 그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녀의 얼굴에서 목덜미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킹의 입술이 가슴까지 내려왔을 때 그는 별안간 볼록한 봉오리의 정상을 얇은 옷감 위에서 입에 물었다.
엘리사는 쾌감을 어쩌지 못하여 탄성을 내지르며 몸을 뒤로 젖혔다.
엘리사의 탄성을 듣는 순간 킹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얼른 얼굴을 들고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미쳤어." 그가 괴로운 듯이 말했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엘리사를 원하게 될 줄은 지금까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킹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엘리사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킹은 테이블로 가서 거의 비어 있는 위스키 잔을 들어 나머지를 들이켰으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 이럴 생각은 정말 아니었어." 그는 지금 내게 사과하고 있다. 대관절 무엇을? 나를 원했다는 것을?
"나는‥‥ 괜찮아요." 엘리사는 자신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심 놀랐다. 그의 요구에 황홀할 정도로 흥분했던 것이다.
"왜지?"
"모르겠어요." 엘리사는 그의 가슴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직도‥‥ 꿈틀거려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속삭였다.
킹은 숨을 쉬기조차 괴로운 듯 입을 열었다. "다른 남자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나?" 이것을 아는 것이 지금 가장 중요한 것처럼 그가 물었다.
"없었어요."
킹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 줄 것인가, 아니면 침대로 안고 가서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지 가르쳐 줄 것인가?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술을 겨우 두서너 잔 마셨을 뿐인데 취한 걸까?
엘리사는 그의 눈에 망설이는 기색이 떠오른 것을 보고 곧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당신과 잠자리를 같이할 수는 없어요." 쉰 목소리로 말했다.
킹은 엘리사의 몸을 훑어보았다. 조금 전의 부드러웠던 감촉이 떠올라 몸이 쑤셨다. "그럴 마음이 들도록 해줄 수도 있어." 그는 엘리사가 처음 듣는 유혹의 말을 입 밖에 내었다.
"그다음에는요?" 엘리사가 물었다.
킹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아,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당신은 피곤해 보여요." 엘리사는 더 이상 심각해지기가 싫었다. "나는 이만 돌아가겠어요."
"바래다주지."
"아니, 괜찮아요. 염려하지 마세요." 엘리사는 당황해하며 말했다.
"참을 수가 없었어. 내 말, 이해할 수 있겠지?" 그는 엘리사가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고는 빙긋 웃었다. "남자의 육체는 언제나 거짓말을 하지 못해. 그렇다고 엘리사가 거기에 말려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엘리사는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조그맣게 웃었다.
"당신은 미운 사람이에요!."
"나는 약한 남자야." 그는 현관문을 열고 비켜서서 엘리사를 먼저 나가게 했다. "남자란 명예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돼. 나도 언젠가는 결혼을 하게 될 테지, 상대는 자기가 내게 첫 번째 여자가 되기를 바랄 거야."
"그 여자는 열다섯 번째 안에도 들지 못할 거예요." 엘리사는 빈정대면서도 자신의 대담성에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가슴이 두근거렸는테, 그 순간이 지나자 이런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태연하게 나눌 수 있다니.
"그렇게 많지는 않아." 따뜻한 해풍이 야자나무의 커다란 잎사귀를 흔들어대는 한적한 길을 따라 걸으며 킹이 말했다.
"아까와 같은 행동을 책에서 읽고 알았을 리는 없잖아요?"
킹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가만히 웃었다. "물론 그렇지는 않지." 그는 걸음을 멈추고 엘리사의 턱을 손으로 살짝 쳐들었다. "당신은 정말 귀여운 아가씨야."
엘리사는 입술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성난 듯이 그녀의 팔을 붙들고 다시 달빛이 비추는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내가 좀 취했나 봐. 오늘밤의 일은 너그럽게 봐줘. 아까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 말은 사실이다. 지금의 그로서는 말하는 것조차 무리였다. 제정신이 들도록 찬물로 샤워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갑자기 그는 엘리사의 점프 슈트를 벗기고 바닷가에 쓰러뜨려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대담한 슬립을 입고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던 그녀의 섹시한 모습을 떠올리자 소리내어 크게 외치고 싶었다.
취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변명했다. 제정신이라면 두 사람이 결합한다는 것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심리적인 장애를 가진 그녀와 베스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
"왜 잠자코 있죠?" 집에 도착했을 때 엘리사가 물었다.
"내가 한 짓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래."
"피로와 술 때문이에요."
"아, 그래. 우리 모두 잊기로 하자구."
"그래요. 그게 제일 좋겠어요." 엘리사는 불안을 감추고 짐짓 명랑하게 말했다.
"그런 일시적인 위안의 말은 하지 않아도 돼." 킹은 이유도 없이 신경질이 나서 하지 않으려 했던 말을 토해냈다. 자제력을 잃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내가 얼마나 엘리사를 바닷가에 쓰러뜨리고 싶어 했는지 알아?" 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러니 내가 냉정을 되찾을 때까지 내 옆에 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오늘밤의 일은 베스 때문이야‥‥ 베스가 탐이 나서‥‥ 그 점을 기억해 두기 바라겠어."
거짓말이었다. 그는 머리가 혼란스러워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베스 때문에 엘리사를 희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무뚝뚝하게 대하는 것은 엘리사를 위해서인 것이다. 자신의 혼란스런 욕망 때문에 엘리사의 순결을 짓밟아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싸늘하게 대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언젠가는 엘리사도 나의 냉정한 태도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엘리사는 이를 악물었다. 자기가 베스의 대용물이 아닐까 내심 두려워했던 일을 그가 인정한 데 대해서는 그리 충격을 받지 않았으나, 이렇게까지 냉담하게 대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음, 어서 들어가."
엘리사는 문을 열려고 돌아서서 어깨 너머로 킹을 돌아보았다. "오늘밤은 고마워요. 아주 즐거웠어요."
"나한테 안겼던 것까지를 포함해서 하는 말인가?" 그는 일부러 도발적인 말을 던졌다.
"나도 취했던 것 같아요."
"다시는 그런 실수가 없을 거야."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엘리사도 언제까지나 취해 있지는 않을 테고."
어째서 그녀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말만 골라서 하는 걸까? 킹은 자기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자기가 한 일은 생각지도 않는군요! 오늘 일은 당신이 먼저 도발한 거예요."
"엘리사 역시 반대는 하지 않았잖아?"
그녀는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다음번에 도움을 청할 일이 있으면 다른 여자를 구하도록 하세요. 나는 두 번 다시 이용당하지 않을 테니까."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
"그건 내 마음이에요 그리고 워치프를 돌려주세요!."
"병이 다 나으면 돌려주겠어." 그가 대꾸했다.
엘리사의 아랫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금세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두 주먹을 꼭 쥐고 양 옆구리에 갖다 대었는데도 떨림은 멎지 않았다.
"당신 같은 사람은 정말 싫어요!."
킹은 엘리사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게 정말이야, 엘리사?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감정이 고조되었다. "찬물로 샤워를 하는 대신‥‥." 그는 속삭이듯 말하고 그녀 쪽으로 몸을 굽혔다.
엘리사는 그의 키스에 몸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사정없었다. 잠시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더욱 손에 힘을 주어 얼굴을 받쳐 들고 혀를 들이밀었다.
"엘리사, 입을 열어‥‥."
엘리사는 몸을 떨면서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무릎에서 힘이 빠져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킹은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놈의 위스키 때문에! 대관절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는 몸을 빼고 엘리사를 떠밀었다.
"당신이 원한 게 바로 이건가?" 킹은 그녀에게 상처를 주려고 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 아가씨. 그리고 앞으로는 다른 남자를 찾아보도록 해. 처녀에게 손을 대는 것은 내 취미에 맞지 않으니까."
엘리사는 숨을 죽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킹은 주먹을 쥔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부탁한 기억이 없는데요." 그녀는 가까스로 대꾸했다. 킹 같은 사람은 정말 싫다, 정말‥‥ 엘리사는 안에 들어가 손을 뒤로 하여 문을 쾅 닫고 자물쇠를 잠갔다. 밖에서 욕을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사는 몸을 벽에 기댔다가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정맡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자기가 기대한 것은 키스가 아니었고, 지금까지 그에게 키스당한 일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말다툼을 한 적도 없었다. 그녀는 소중한 친구를 한 사람 잃었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조여드는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킹의 발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이제 들리는 것이라고는 카리브 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엘리사는 조금 전의 격렬했던 키스 때문에 부풀어 오른 입술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남아 있는 그의 체취를 음미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오늘밤의 킹은 전혀 그 사람답지 않았다. 하긴 그 점에서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그가 동생의 아내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면, 과연 다른 여자에게 그런 정열을 쏟을 수 있었을까? 엘리사는 자신이 남자의 생리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여간 분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킹이 자기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베스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베스를 대하는 그의 부드러운 시선을 보았을 때 무뚝뚝한 킹의 가면 속을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베스는 그에게 있어서 특별한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베스를 동생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한 여자로서 보고 있는 것이다.
엘리사는 킹에게 안겼을 때의 감미로운 감각을 상기하고 한숨을 지었다. 그가 자신에게 한 행동이 모두 베스에 대한 욕망에서 온 것이라는 게 정말일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순수한 우정에 금이 가고 말았다는 사실 외에는.
건성으로 샤워를 마친 엘리사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불을 끄려고 하자 다시 킹의 그 따뜻한 입술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그때의 킹을 떠올리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옐리사가 그에게 몸을 맡긴 것에 대해 책망했다. 그 말에 그녀가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지 그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지난 2년 동안 오늘처럼 자제심을 잃은 킹을 본 적이 없다. 애당초 그가 어이없는 부탁만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잘못은 킹에게 있다.
엘리사는 퍼뜩 무대 의상으로 사용했던 섹시한 슬립을 그의 침대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돌아누워 눈을 감고 파도 소리를 가면서 잠을 청하려 했다.
"킹스턴 로퍼, 다시는 도움을 청해도 소용없어요." 화가치민 엘리사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4
킹의 손이 부드러운 그녀의 곡선을 따라 움직이면서 엘리사에게 새로운 기쁨을 가르친다. 쾌락의 리듬을 새겨나가는 동안에 흥분으로 고양된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근육이 꿈틀거린다‥‥
엘리사는 땀에 흠뻑 젖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꿈의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억제해 온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버린 것일까? 지금까지 품고 있던 섹스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고, 난생 처음으로 적극적인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 보드카 탓이다. 엘리사는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자기가 몸을 맡기려 했을 때 킹이 책망한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 정말이야> 엘리사는 바다가 내다보이는 거실로 갔다. <그에게 안기고 싶었어. 키스를 나누고 싶었어‥‥> 엘리사는 문득 가슴의 봉오리가 경직되는 것을 깨닫고 숨을 죽였다. 도대체 이게 웬일인가? 자존심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녀는 커피를 타서 마시면서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큰 스케치북에 새로운 디자인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그 일도 따분해져서 안마당으로 나갔다. 엘리사는 긴 머리를 나부끼면서 수평선 멀리서 떠다니는 범선을 바라보았다. 파도 소리가 어느 정도 마음을 달래주었다.
자메이카는 꿈으로 가득한 섬이다. 해적의 전설과 마법을 사용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한‥‥ 엘리사는 섬의 정상에 있는 로즈홀이라는 저택 너머의 언덕으로 시선을 옮겼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 사람들이 로즈홀의 흰 마녀라고 부르는, 그 저택의 소유자였던 에니 파머는 주술을 부리고 노예들을 학대했을 뿐만 아니라 세명의 남편과 수많은 애인을 죽였다고 한다.
엘리사도 전에 그 저택을 탐사하고 돌아와 며칠 밤이나 악몽에 시달렸던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가위눌려 큰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조금 후 문을 탕탕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킹이 잠옷 바람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자 그는 큰 소리로 웃으며 엘리사를 어린 아이처럼 달래주었다 그때 역시 마음만 있었다면 침대 가장자리에 무방비 상태로 앉아 있는 그녀를 껴안을 수도 있었는데, 킹은 그녀를 성숙한 여자로 취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젯밤의 그 일 이후로 엘리사는 그를 남성으로서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변으로 나간 엘리사는 킹의 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로 간 것일까? 어쨌든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다 엘리사는 머리를 쓸어넘기고 다시 바다 위의 범선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도회지의 때가 묻지 않은 이 해변이 마음에 들었다. 호화 여객선을 타고 섬에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여기서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다.
엘리사는 커피잔을 손에 들고 햇빛을 받아 따스하게 느껴지는 모래밭에 앉아 무성한 야자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천국이다. 평화롭고 조용하며 문명에 전혀 오염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곧 은은한 달빛 아래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는 킹과 자신의 모습이 눈에 떠올랐다.
뜻밖의 공상에 놀란 그녀는 얼른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커피를 뒤집어쓸 뻔했다. 그녀는 허둥지둥 집에 돌아와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만족할 만한 디자인을 서너 점 완성할 수 있었다
너무나 긴 하루였다. 저녁 때 공습 사이렌 소리 같은 워치프의 울음소리를 듣고 가서 데려올까 생각했으나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엘리사는 워치프가 거실에 매어놓은 커다란 T자형 횃대에 앉아 그녀가 일을 중단하고 가벼운 식사를 하는 모습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던 것을 회상했다. 과일과 빵을 나누어 주면 앵무새는 아주 기뻐하면서 받아먹곤 했었다.
엘리사는 창에서 시선을 떼고 가만히 한숨지었다. 워치프가 그리웠다. 킹은 더더구나 그리웠다. 그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원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기부할 만한 이성이 남아 있었던 게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유리문에 밀어붙여졌을 때 자기가 한 행동을 생각하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모두 잊어야 한다.
엘리사는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해가 진 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부엌 창문너머로 킹이 보비 부부와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부부는 오늘 이 섬을 떠날 예정이었을 텐데.
잠시 후 전화벨이 울렸다.
"지금 막 돌아오는 길인데‥‥." 나직하고 섹시한 킹와 음성이었다. 엘리사는 이것이 어제 연극의 연장이라는 것을 대뜸 알아차렸다.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하지 않겠어? 베스와 보비가 여기 와 있어."
엘리사는 구실을 찾았다. "소라게에게 먹이를 줘야 하고, 새우의 물통도 밖에 내놓아야 해요. 그리고‥‥."
"그럼, 5분 후에." 킹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엘리사는 어이가 없어 수화기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다시 전화를 걸어 그의 횡포를 나무라고 싶었으나, 일단 수락한 연극인 이상 끝까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녀는 어깨끈이 달린 검정색 드레스에 하이힐까지 꺼내 신고 킹의 집으로 걸어갔다.
엘리사의 모습을 본 워치프가 반갑다고 날개를 파닥이며 큰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그래야 착한 거야." 엘리사는 앵무새를 달래고 나서 보비와 얌전하게 서 있는 베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었어." 엘리사는 워치프의 머리에 코를 비볐다.
"자, 이제 그만 자도록 해." 앵무새가 만족해하며 눈을 감을 때까지 엘리사는 앵무새의 녹색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엘리사는 킹 옆에 있기가 불안해서 워치프의 새장에 덮개를 씌워주면서 시간을 벌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치기가 거북했다.
"여기 계실 줄 알았는 데요?" 베스가 말했다. 그녀는 금발에 잘 어울리는 노란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할 일이 있었어요." 엘린사가 대답했다.
"일을 할 땐 아무래도 자기 집이 편하니까." 고개를 돌리고 있는 엘리사 쪽을 보면서 킹이 변명했다.
보비는 엘리사와 인사를 나누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커피 테이블에 가득 펼쳐놓은 재무 보고서에만 마음이 쏠려 다른 것은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베스는 못 말릴 사람이라는 듯이 그를 흘겨보고 나서 킹과 엘리사에게 탐색하는 눈길을 돌렸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군요."
킹은 헛기침을 하고 엘리사를 노려보았다. "과연 예리하군, 베스. 사실은 약간 말다툼을 했소 뭐, 심각한 건 아니고."
"그래요."엘리사도 그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별 거 아닌 일로 신경질이 나서 그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킹이 그녀의 팔을 끌고 침실로 데려갔다.
"어머, 강간을 당할지도 모르겠군요!." 엘리사가 연극조로 외치자 보비가 큰소리로 웃었다.
침실로 들어온 킹은 낯빛을 바꾸고 손을 뒤로 하여 문을 닫았다. "그만둬. 내목에 비수를 꽃을 생각이야?"
"틀림없이 얼음같은 피가 흐를 것 같군요." 엘리사는 이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어제는 그런 말을 해서 미안해.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어."
"취했던 거예요 당신도 나도."
"겨우 두서너 잔 마셨을 뿐인데?"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해요." 엘리사가 변명했다.
"짐작이 맞는지는 몰라도 당신 역시 별로 술에 강하지 못한 것 같더군요."
그가 어깨로 숨못 몰아쉬었다. 흰 바지에 빨강과 흰색이 섞인 니트 셔츠 차림의 그는 탄성이 나을 정도로 핸섬했다. 그는 엘리사를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훑어보았다.
어제 껴안았던 감촉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엘리사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보비가 출발을 내일로 연기했어." 잠시 후 그가 말했다. "넷이 같이 돌아가면 즐거을 거라고 하면서."
"그건 무리예요 워치프가...."
"전처럼 돌봐줄 사람을 구하면 되잖아? 내가 여기 있으면 베스는 편두통을 호소하든지 다른 구실을 대서 여기 남아 있으려고 할 거야. 동생 녀석은 보다시피 일에만 열을 올리고 있으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당신도 큰일이로군요." 엘리사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흠‥‥." 엘리사는 한숨을 쉬며 등을 돌렸다. "베스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거예요."
킹은 엘리사에게 다가가 그녀의 두 팔을 꼭 붙들었다.
그녀는 몸을 떨면서 고통스러을 정도로 그의 몸을 의식했다. 그의 손이 실크 같은 피부의 감촉을 즐기듯이 나른하게 움직였다. 엘리사에게 느껴지는 그의 숨결이 거칠면서도 따뜻했다.
"마이애미까지는 모두 함께 비행기로 가고, 거기서 당신 부모님 댁까지는 내가 차로 데려다 주겠어. 그러면 일석이조가 되지 않을까? 어쨌든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베스를 멀리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당신도 조만간 미국에 다녀올 예정이었잖아."
킹은 여기 남아 있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예정보다 빨리 돌아온 나를 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할까? 어째서 휴가를 중단했는지, 왜 남자와 같이 왔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더구나 이런 연극이 자연스럽게 계속될 리 없다. 그렇다고 곤경에 빠진 킹을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잠시 고민하던 엘리사는 플로리다에 잠시 다녀온다고 해서 일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자신을 납득시켰다.
그리고 어떻게든 킹과 부모가 부딪칠 일이 없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좋아요. 가겠어요."
"정말 착한 아이로군."
엘리사는 돌아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요. 나는 착한아이예요. 다음에도 나를 유혹하려거든 그 점을 상기하세요."
킹은 엘리사의 푸른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나와 엘리사는 흥분하기 쉬운 위험물인 모양이지?"
엘리사는 킹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셔츠 위로 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어제까지는 남자가 섹스하려는 것을 어째서 여자가 막지 못하는지 몰랐어요. 알고 보니 막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막을 수가 없는 거더군요. 그렇죠?"
킹은 빙긋이 웃었다. "여자는 남자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애를 태우곤 하지."
"하지만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 거예요." 엘리사는 그의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베스처럼 되고 싶어요 세련되고 여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그런데 나는 남자가 옆에 오면 그 순간 몸이 굳어지고 말아요."
킹은 엘리사의 고개를 쳐들었다.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엘리사는 남자를 조롱하는 게 아니라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뿐이야."
엘리사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엘리사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어제는 왠지 화가 나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어."
"나도 그랬어요. 나는... 몸이 꿈틀거려서‥‥."
"나 정도는 아니었을 거야." 킹은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넘기며 말했다. "어젯밤에는 벌거벗은 엘리사가 해변에서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떠올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어."
"어머, 나도‥‥? ."엘리사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부끄러워할 것 없어." 킹이 다정하게 말했다. "엘리사도, 나도 인간이야. 두 사람 모두 약간 과음을 하고 다투었던 것뿐이니까."
"킹, 이제는‥‥ 나를 유혹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나요?"
"내가?"
"그래요." 시선을 내리깐 엘리사는 그의 몸에 나타난 확연한 변화를 발견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킹이 당혹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바보로군."
"킹‥‥." 엘리사는 자기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속삭였다.
그는 숨을 들이마시고 엘리사의 입술에 얼굴을 가져갔다.
그는 혀로 그녀의 입술을 여는 한편 그녀의 몸을 꼭 껴안고 부드러운 감촉을 즐겼다. 그는 그녀를 안아들어 침대에 뉘고 자기도 옆에 누웠다. 눈이 무서울 정도로 빛났다.
그는 엘리사의 이마에서 목덜미까지 젖어 있는 뜨거운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묶은 데가 어디야?" 어깨끈의 매듭을 찾으면서 그가 물었다.
엘리사의 입술이 열렸다. 그녀의 몸은 기쁨으로 떨렸고 피가 무섭게 흐르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너무나 솔직한 눈을 가졌어." 킹이 속삭였다.
그의 손이 어깨 바로 뒤에 있는 작은 매듭을 발견하고 천천히 풀었다. "눈을 들여다보면 엘리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거든."
"그럼, 알아맞혀 보세요." 엘리사는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를 원하고 있어." 그는 볼록한 가슴이 약간 드러날때까지 엘리사의 드레스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내 입술도."
그는 엘리사의 매끄러운 살갗에 입술을 대고 쇄골 바로밑까지 천천히 애무했다. 옆구리에 닿은 두 손이 드레스 위로 미끄러지면서 엄지손가락이 마치 우연인 것처럼 가슴에 닿았다. 엘리사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 쥔 손을 머리 옆에 놓은 채 숨을 죽였다.
"떨고 있군." 풍만한 가슴으로 손을 가져가면서 그가 말했다. "정말 아름다워." 킹은 그녀의 눈을 응시하면서 손을 움직였다. 드레스가 허리까지 흘러내린 엘리사는 가슴에 싸늘한 밤기운을 느꼈다.
"아아!."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신음을 토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가슴으로 옮겨졌다 핑크빛 유두가 굳어지고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처음이로군." 킹이 속삭였다. "얼마나 멋진지 모르겠어." 그의 커다란 손이 다정하게 가슴의 윤곽을 어루만지다가 살짝 정상을 건드린 순간 엘리사는 기쁨으로 몸을 떨었다.
킹이 몸을 구부리고 속삭였다. "엘리사, 괜찮겠지?" 하지만 엘리사는 긴장한 나머지 입을 열 수 없었다.
킹은 손으로 그녀의 한쪽 가슴을 덮고 다른쪽 가슴의 봉오리를 입에 물었다. 엘리사가 가만히 소리 질렀다 그는 한 손으로 가슴의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면서 엘리사의 입을 키스로 막아 소리를 죽였다.
"이대로 삼켜 버리고 싶어." 킹은 다시 키스해 주길 바라는 엘리사의 입술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옐리사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킹은 머리를 들고 침대 옆에 놓인 라디오에 시선을 보냈다. 손을 뻗어 라디오의 스위치를 켜자 강렬한 레게음악이 들려왔다.
"자, 이제 마음껏 소리를 질러도 괜찮아."
그는 엘리사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다시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입 속에서 혀를 천천히 움직이면서 무릎을 그녀의 두 다리 사이에 들여놓았다.
엘리사는 그의 머리를 힘껏 부둥켜안고 풍성한 머리카락의 감촉을 즐겼다. 몸은 그를 갈망하며 불타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남성에게 욕망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의 일부가 되어 그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그의 입술이 엘리사의 가슴에서 허리, 허리에서 배로 옮겨감에 따라 신음 소리가 격해졌다.
별안간 킹은 움직임을 멈추고 거칠게 숨을 토하면서 셔츠를 벗어던졌다. 엘리사는 자기 눈앞을 가로막은 그의 모습에 숨을 죽였다. 짙은 가슴 털, 근육질의 구릿빛 피부. 엘리사는 그의 몸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불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아." 그가 말했다.
엘리사가 무릎을 꺾자 킹이 그녀를 힘껏 가슴에 끌어앉았다. 엘리사는 기쁨에 못 이겨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킹은 그 자세 그대로 그녀의 몸에 뜨거운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그만 킹의 목에 손톱을 세웠다.
"아‥‥ 당신을 원해요." 엘리사는 허리를 그의 허리에 밀어붙이고 몸을 떨면서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을‥‥ 원해요."
킹이 엘리사의 허리에 손을 대고 강하게 자기 배 위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하반신을 뜨거운 충격이 꿰뚫었다. 그녀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옆으로 돌아누워." 킹이 억눌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밑으로 오는 거야. 떨림을 멎게 해주겠어. 당신을 나의 일부로 만들어 주겠어."
"문은‥‥ 잠갔나요?" 엘리사는 그의 손이 쉴 새 없이 몸을 더듬는 것을 느끼면서 물었다.
"문?"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엘리사의 불타는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엘리사‥‥ 나는 엘리사를 임신시킬 수도 있어."
엘리사는 숨을 몰아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 킹을 사랑하고 있다. 그것을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니. 그는 친구 이상의 존재, 나의 모든 것이다. 그의 아기를 낳게 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엘리사는 킹의 우람한 몸에 시선을 보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른 누운 채로 그의 몸에 혀를 가져가 그의 신음 소리를 이끌어 냈다.
"안 되겠어, 엘리사. 그만둬야겠어."
"왜죠?"
"보비와 베스가 옆방에 있는데 그럴 수는 없잖아? 이렇게 되기 전에 냉정을 찾아야만 했어." 킹은 그녀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재빨리 입술에 키스했다. 그리고는 일어나 눈에 감탄의 빛을 띠고 그녀의 가슴을 살짝 만졌다. "정말 놀라워. 나 못지않게 뜨겁군. 같이 타오르고 싶었는데." 너무나 안타까운 듯한 어조였다.
뜻하지 않은 일에 당황해하면서 엘리사도 일어나 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옷을 입으려 했으나 그의 손이 제지했다.
"아직이야." 그는 엘리사의 등에 손을 대어 그녀를 뒤로 젖히고 돌출된 가슴을 애무했다.
엘리사는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입술을 꼭 깨물고 몸을 떨었다. 그의 입술이 가슴의 봉오리를 천천히 더듬었다.
이것은 그가 이끌어 낸 아픔 중에서도 가장 감미로운 아픔이었다. 그의 손이 다른 쪽 가슴을 감쌌을 때 엘리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의 머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킹이 겨우 머리를 들었다 "해변에서 포옹하고 싶어. 꿈에서 본 것처럼."
엘리사는 목덜미까지 발갛게 물들었다. 그녀도 하루 종일 어젯밤 꿈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손이 아쉬운 듯 가슴을 쓰다듬었다. "너무 하얗군. 일광욕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벌거벗고 헤엄치는 거야."
"당신처럼?"
킹은 싱긋 웃었다. "아, 때때로 부엌의 창을 통해 바라보곤 했었군?"
엘리사는 더욱 얼굴을 붉혔으나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는 호기심이 많아요. 달이 떴을 때 당신은 자주 코티지 바로 옆의 해변에서 올라오곤 했어요 남자의 몸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인 줄은 미처 몰랐었죠. 그런데 당신이 내가 쳐다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니 놀랐어요."
킹이 엘리사의 눈꺼풀에 가만히 키스했다. "보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어."
엘리사는 킹이 일어나 어깨끈을 묶어준 후 일으켜 세울 때 까지도 떨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귀여운 여자야." 그는 땀이 송송 맺힌 엘리사의 이마에서 머리를 쓸어넘겨 주고 등을 돌려 셔츠를 집어 들었다.
옷을 입으려고 하는 킹을 이번에는 엘리사의 손이 제지했다.
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좋아. 마음대로 해."
"혹시 싫지는 않으세요?" 엘리사는 평셍 처음으로 대하는 가슴털의 감촉을 즐겼다.
"싫어하냐구? 전혀 그렇지 않아. 자, 내가 가르쳐 주지."
엘리사는 어떤 식으로 키스하고 어떤 식으로 애무하면 그가 즐거워하는지를 배워 차차 자신을 갖게 되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방법으로 남성의 육체를 애무했다.
마침내 그가 나직하게 신음을 내뱉으며 허리에 그녀의 손을 가져오게 했다.
"때때로 엘리사가 처녀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있어." 그는 뺨을 비비고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엘리사가 그렇게 만드는 거야. 이렇게 꼭 껴안고 있으면 모든 것을 잊게 돼."
하지만 엘리사는 알고 있었다. 킹은 베스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의 마음을 더욱 원해요> 2년 동안 친구로 지냈지만, 그가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와 잠자리를 같이할 수도, 나아가 일생을 같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지금 확실하게 깨달았다.
입술을 겹친 채 눈을 뜬 엘리사는 그 역시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 혀가 입 안을 깊숙이 파고들고 두 손이 가슴을 더듬고 있어서 엘리사는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눈을 감고 고통스럽게 신음 소리를 토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뜨거운 키스를 퍼붓고 그녀를 떼어놓았다. 엘리사는 등을 꼿꼿이 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머리는 그대로 두는 게 좋겠어." 엘리사가 브러시를 집어 들려 하자 킹이 말렸다.
"왜요? 엉망이 되었는걸요."
"베스에게 당신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립스틱이 지워지고 머리도 흩어지고 살갗에 윤이 나고 있어. 우리가 사랑을 나누었다는 걸 그녀에게 일깨워 주고 싶어."
"잔인하군요."
"그래야만 해. 알고 있잖아? 그녀는 내 동생의 아내야 ."
"네, 알아요."
"엘리사가 처녀라니 정말 유감이야."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 건데요?"
"침대로 데려가 베스를 잊어버릴 정도로 사랑해 주었을거야. 지금까지 이렇게 탐이 나는 여자는 없었어."
"그렇게 해주고 싶어요, 킹 사랑을 나눈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지군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니 기뻐. 이상적인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라고 생각해, 엘리사와의. 그런 생각이 들어. 잘은 모르겠지만‥‥ ."
엘리사는 그제서야 방 안에 울리는 라디오 소리를 의식했다. 그녀는 라디오를 켠 이유를 떠올리고 얼굴을 붉히면서 스위치를 껐다.
"얼굴까지 붉힐 필요는 없어."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이 킹이 말했다. "손님만 없으면 이 집이 떠나가도록 소리 질러도 상관없어."
"내가 그럴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어요."
"좋은 현상이야."
엘리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문을 열고 먼저 나왔다.
베스는 어디에도 없었다. 보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베스는 해변으로 산책을 나갔어. 그런데 벌써 화해한 거야?"
엘리사는 얼굴이 발갛게 되었으나, 킹은 즐겁게 웃으면 서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어.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나는 괜찮아. 하지만 베스는 여전히 신경질적이야." 그는 펜을 놓았다. "우리도 전에는 형과 엘리사 같았지만, 차차 그녀가 내게서 멀어져 갔어. 무슨 모임이니 파티니 하면서 거의 집에 붙어 있을 때가 없다니까."
"되도록 함께 지내는 게 중요해." 킹이 충고했다.
"물론 그래야지. 그런 뜻에서 나도 잠시 산책이나 하고 와야겠군."
"커피를 끓여둘게." 동생을 격려하듯 말하며 킹은 엘리사와 함께 부엌으로 갔다.
"베스는 상처를 입은 거예요." 주전자에 물을 따르면서 엘리사가 말했다.
"나도 알아." 킹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의 눈은 창을 통해 베스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엘리사는 킹에게 다가가서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볍게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당신도 상처를 입었을 거예요 미안해요 도움이 되지 못해서."
"어째서?"
"당신에게 주지 못했으니까요."
"그렇지 않아. 내가 기동을 건 거지. 임신 이야기를 했을 때조차 엘리사는 중단하지 않았어."
"임신하는 것은 두렵지 않아요."
"두렵지 않다니?" 킹은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그녀는 임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기는 같은 생각이라는 사실에 킹은 다시 한번 놀랐다.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킹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5
"베스가 아기를 원치 않는다는 게 사실인가요?"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본인이 그렇게 말하더군." 킹은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처음에는 자식에게 구속당하기 싫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지. 그녀의 어머니는 아이를 일곱씩이나 낳았으니까. 베스는 넷째로 태어나 어린 동생들을 돌보면서 자랐어. 그녀로서는 소녀 시절이 쓰라렸을 테고, 그 점은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엘리사는 술에 취한 아버지를 아이들이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모른다고 한 베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긴 자식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결혼 생활이라고는 할 수 없지. 자식들 때문에 행복한 결혼이 깨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킹이 냉소적으로 덧붙였다.
"당신 이야긴가요?"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머니는 늘 내가 태어나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전까지는 아버지와 행복했었다고 푸념을 늘어놓았지."
"자식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너무 심하군요." 엘리사는 커다란 은쟁반 위에 커피 잔을 준비하면서 표정을 굳혔다.
"어머니는 자식을 별로 귀여워하지 않았어. 만일 의붓아버지가 절실히 원하지 않았다면 보비는 태어나지 못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참 아이러니하군. 어머니는 머리가 좋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과거의 세계에 살고 있으니 말이야."
"자주 만나러 가세요?"
"시간이 나는 대로 자주 가려고 하는데, 어머니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해."
엘리사는 커피가 끓기를 기다리면서 킹의 어두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불행한 소년 시절이었을까?
"그렇지만 별로 괴롭지는 않았어." 그는 엘리사의 마음을 읽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도리어 내 힘을 보여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지. 역경을 딛고 일어나 성공한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겠지?"
"그럼요. 한데 아직까지 결혼하지 알은 게 그 때문인가요? 소년 시절의 체험 때문에?"
"이것 봐, 엘리사도 참, 별말을 다 하는군."
"이상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킹은 예쁜 꽃무늬가 있는 잔에 커피를 따르는 그녀를 보며 얼마나 가정적이고 귀여운가 하고 생각했다. 요리 솜씨도 좋고, 옷을 입는 감각도 디자이너답게 뛰어나다. 마음도 착하고, 게다가 육체적으로는 대담한 반응을 보여 그를 놀라게 만든다.
"만일 내가 결혼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엘리사뿐일 거야." 킹이 뜻하지 않은 말을 했다.
엘리사의 손이 떨려 그만 커피가 쏟아졌다. "영광인데요. 고마워요."
"정말이야. 진심이라니까." 킹이 엘리사 곁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엘리사하고라면 즐겁게 생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엘리사는 히스테릭하지도 않고 유머도 있어. 무엇보다도 엘리사의 몸이 탐나서 견디지 못하겠어."
마지막 말에 그녀가 눈을 흘겼기 때문에 킹은 웃고 말았다. 물론 그 말은 농담이었다. 지금까지도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한 적이 많았지만.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허, 밤에 창을 통해 벌거벗은 남자를 훔쳐보지 않고는 못 견디는 여자가 바로 당신이잖아?"
엘리사는 두 손을 내저었다. "자꾸 그런 말을하면 벌거벗은 다른 남자를 찾아볼 거예요!."
"왜들 그러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보비가 입구에서 웃고 있었다. 그 뒤에서는 베스가 두 사람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엘리사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당신 때문에 보비가 나를 왈가닥인 줄 알겠어요."
"사실이 그렇지 않아?" 킹이 빙긋이 웃었다.
엘리사는 토라진 얼굴을 하고 그에게 쟁반을 건넸다.
"문을 열어주지 않겠소?" 그가 베스에게 말했다.
베스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광경을 목격한 엘리사는 빌딩 꼭대기에서 투신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행히도 보비는 앞장 서 걷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시선을 보지 못했다. 킹을 바라보는 베스의 눈길은 정감과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베스는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가끔 시선을 들어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화장이 지워진 얼굴과 흐트러진 머리를 보고 모든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오늘밤 우리 때문에 방해가 되진 않았나요?" 베스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혀 그렇지 않소." 킹이 대답했다. "엘리사는 오늘밤 코티지를 정리하고 짐을 꾸려야 돼요. 그렇지, 베이비?"
"네, 그래요." 엘리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으나 내심 킹이 베이비라고 부르는 바람에 당황했다. "아침에 떠나려면 그만 돌아가야겠어요. 출발은 몇 시죠?" 엘리사가 일어나면서 물었다.
"8시에 출발할까 생각하고 있어." 킹도 천천히 일어났다. "내가 바래다주지." 그가 의미 있는 미소를 띠고 동생에게 말했다. "보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나도 오늘밤엔 일찍 자야겠어요." 베스가 싸늘하게 말했다.
"나 역시 그랬으면 좋겠는데." 보비는 계속 서류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상태라면 새벽까지도 끝내지 못할 것 같아 도와줄 생각은 없나?" 그가 베스에게 물었다.
"네가요? 어림도 없어요. 하나 더하기 하나도 못하는걸요."
"유감이로군." 보비는 무슨 말을 더 할 듯했으나 어깨만 으쓱했을 뿐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그럼 내일 봅시다, 엘리사."
"안녕히 주무세요." 엘리사는 인사하고 킹과 함께 어두운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엘리사의 코티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따뜻하고 기분좋은 밤이었다.
코티지의 뒷문에 이르렀을 때 킹은 담배를 비벼 껐다 "이번 여행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엘리사를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어."
"괜찮아요. 어차피 새로운 디자인도 뜻대로 되지 않고 있으니까요. 한두 주일 푹 쉬면서 고향에서 옛 친구나 만날 생각이에요."
"지금도 부모와 함께 지내고 있나?"
"집을 나올 이유가 없는 걸요 마이애미에서 혼자 살겠다고 하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섭섭해하실 테고 뉴욕은 너무 멀어요. 우리는 언제나 함께 살았어요."
"가족의 굴레가 어떤 건지 나는 상상도 못 하겠어. 보비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진실한 애정을 갖고 있지는 않아 가족 중의 누구한테도 그런 감정을 가져보지 못했어."
"안 됐어요 가족이란 정말 좋은 건데 말이에요."
"그렇겠지." 그는 허리를 구부려 엘리시에게 가만히 키스했다. "잠시 산책이나 하다가 돌아가야겠군. 앞으로 한 시간쯤은 전화가 와도 받지 않는 게 좋겠어. 혹시 베스가 상황을 알아보려고 전화할지도 모르니까."
엘리사는 등을 돌리려는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핫 초콜릿이라도 마시고 가지 알겠어요?"
"그러다가는 엘리사를 잠자러에 끌어들이게 될지도 몰라."
"킹‥‥."
"내 말을 들어 봐, 엘리사. 섹스란 탄환이 장전된 총과도 같은 거야. 일단 방아쇠를 당기면 뜻하지 않은 곳으로 탄환이 날아가게 돼. 나는 처녀와는 그럴 수가 없어."
"한 번 경험하면 이미 처녀가‥‥ ."
킹은 화가 난 듯이 한숨을 쉬었다. "한 번 경험한 후에 후회하게 되면 어쩌지? 엘리사는 결혼 이외의 섹스는 죄악이라는 생각을 고수해 왔어. 만일 내가 일을 저지르면 엘리사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나? 그리고 임신할지 모른다는 위험도 있어. 우린 아무런 대책도 없는 상태잖아?"
엘리사는 고개를 가로젓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가 그렇게 우습지?"
"당신이 처음 여성과 관계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어요." 엘리사는 계속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킹은 잠시 어리등절한 표정이더니 이윽고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맨 처음에는‥‥ 너무 빨리 끝나서 아마 상대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했을 거야." 엘리사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보고 킹은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처음부터 최고의 기쁨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나? 남자 역시 태어날 때부터 섹스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건 아니야. 종이 울리고 대지가 진동하려면 경험이 필요해. 최초의 시도 후에 다시 도전할 때는 용기가 필요하지 ."
"도저히 상상할 수 없군요."
킹은 한숨을 쉬고 자신의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지그시 갖다 댔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을 당신 앞에서는 술술 털어놓게 되니."
"나도 당신과 같이 있으면 마음이 놓여요 그래서 곧 당신과 친해진 거예요. 당신은 날 유혹하지 않았잖아요."
"지금까지는 그랬지." 킹이 정정했다.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신이 상대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당신을 거부할 수 없어요. 너무 멋지니까요."
킹은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리고 그려의 얼굴을 감싼 두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확실하게 말하면 안 되는 거야. 나도 남자야. 하룻밤 사이에 깊이 빠지게 될지도 몰라."
엘리사의 입에서 감미로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잠자리에서는 틀림없이 멋질 거예요." 부끄러운 듯이 속삭였다.
"다들 그렇다고 하더군." 그는 짐짓 가벼운 투로 말하면서 엘리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섹스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지 골치아픈 일이 생길 테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요." 엘리사는 그에게 키스하려고 발돋움했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눈꺼풀에 닿는 순간 놀랍게도 그의 몸이 굳어졌다. 입술을 떼려 하자 그의 손이 엘리사의 허리를 붙잡았다.
"계속해 줘."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그가 말했다. "최고야."
"정말?" 엘리사는 다정하게 키스를 되풀이하면서 짙은 눈썹과 단단하게 솟은 광대뼈, 그리고 좀 더 민감한 부분으로 입술을 옮겨 나갔다.
킹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지자 엘리사는 가슴 깊은 곳에서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기 몸이 뜨거워졌을 때 그가 한 말을 떠올리고 입술에 닿을까 말까한 거리에서 유혹적으로 속삭였다. "입을 여세요."
그 속삭임은 바싹 마른 나무에 성냥을 그어대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는 당장에라도 타오를 것 같았다. 엘리사를 힘껏 끌어안고 혀를 깊숙이 들이밀었다. 전신을 떨며 자제심을 잃은 그 모습은 엘리사에게 공포와 기쁨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아, 좋아요." 킹이 몸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문에 기대게 하자 그녀가 속삭였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의 손이 밑으로 내려와 스커트를 걷어 올렸다. 안타까운 듯 움직이는 손이 그녀의 뜨거운 살에 닿아 싸늘하게 느껴졌다.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별안간 킹이 머리를 들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떨리는 몸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럴까!." 킹은 반은 웃고 반은 신음했다.
킹이 몸을 뗀 뒤에도 엘리사는 여전히 문에 기대고 있었다. 입술엔 미소를 띠운 채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거지?"
"당신을 잠자리에 끌어들이려는 거예요 이리 오세요." 엘리사는 자신만만하게 도발했다.
킹은 아연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엘리사가 라이터를 빼앗아 불을 붙여주었다.
"자못 자랑스러운 기분이겠군?" 그가 싸늘하게 물었다.
미소는 띠고 있었으나 즐거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신을 유혹할 수 있다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에요." 엘리사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온몸이 쑤셔요. 아주 행복한 기분이에요."
"나는 그렇지 못해."
엘리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도무지 알 수 없군요."
"나는 알아." 그는 담배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시고 해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그 뒤를 따라갔다. "이유를 말해주세요."
킹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엘리사의 관자놀이를 향해 묵직하고 고뇌에 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역시 몸이 쑤셔. 어느 선까지 다다르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다는 말, 내가 이미 했지?"
"돌이킬 생각은 없어요."
"가족이 보고 있는 해변에서 섹스를 하잔 말이야? 킹이 소리쳤다. "오늘밤엔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일이에요. 욕망으로 꿈틀거리는 내가 바로 옆에 있는 게 싫은 모양이군요!."
그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못 말릴 아가씨로군."
엘리사는 그의 목에 매달렸다. "나를 바치겠다는데, 그런데도 당신은 마다하는 건가요?"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통탄할 거라고 생각지 않나?"
"아버지나 어머니도 내가 성인이 되기를 바라실 거예요."
"결혼반지를 끼고 나서 그러는 걸 더 기뻐하실 텐데?"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결혼 반지가 내 몸을 식혀주지는 않아요."
그는 담배를 옆으로 던지더니 그녀를 번쩍 안고 파도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렇다면 내가 식혀주겠어."
다음 파도가 밀려왔을 때 그는 엘리사를 풍덩 떨어뜨렸다. 물거품을 뒤집어쓴 그녀는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순식간에 드레스가 몸에 착 달라붙고 머리가 흠뻑 젖어 등에 늘어졌다.
"야만인!." 엘리사가 꽥 소리를 질렀다.
"섹시한 말괄량이!." 킹이 대꾸했다. "때리고 싶어? 좋아, 어디 덤벼 봐!."
엘리사가 씩씩거리며 주먹을 쥐고 휘둘렀다. 하지만 킹이 얼른 몸을 피하는 바람에 그녀는 균형을 잃고 물속에 넘어지고 말았다. 일어나려고 하는 것을 그가 다시 쓰러뜨렸다
킹의 눈은 엘리사가 처음 보는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의 강한 팔이 그녀를 흥분시켰다. "이대로는 기분이 안 좋겠지? 옷을 벗도록 도와주겠어."
"싫어요! 여기선 안 돼요!." 엘리사는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 질렀단.
"아니, 상관없어." 킹은 그녀의 젖은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부서졌다.
엘리사와 달아오른 몸을 싸늘한 파도가 시원하게 어루만졌다. 그의 손이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천천히 더듬어 내려갔다. 시선이 풍만한 가슴에 와서 멎었다.
"정말 아름다워. 이런 짓을 하게 만든 엘리사가 죽이고 싶도록 예뻐."
"당신이 옷을 벗겼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 반대가 아니에요."
"내 나체는 전에 본 적이 있잖아?"
"그래요." 엘리사는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단둘이 되고 싶어요."
"유혹할 생각은 그만둬."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아쉬운 듯이 드레스를 도로 입혀주고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의 팔은 억세고 밤바람은 상쾌했다. 엘리사는 그의 목을 꼭 부둥켜안았다. 킹은 다정하게 키스하면서 해변으로 올라갔다.
"옷을 갈아입고 좀 자도록 해. 나는 현관에서 실례하겠어."
"왜요?"
"섹스는 아기를 만들게 돼. 지금은 엘리사를 지켜줄 것을 갖고 있지 않아."
"상관없어요." 엘리사는 아직도 고집을 부렸다.
"아침이 되면 후회할 거야." 현관에 도착한 킹은 엘리사의 몸을 가만히 어루만져 그녀를 관능의 예감에 젖게 하고는 조용히 내려놓았다. "얼마나 섹시하고 귀여운 아가씨인지 모르겠어. 그 속에 몸을 묻고 싶어. 자, 어서 들어가 자도록 해."
"가지 마세요." 엘리사는 애원했다. "당신도 흠백 젖었어요."
"나는 옷 없이는 돌아가지 못해." 그가 껄껄 웃었다.
"어서 들어가."
엘리사는 몸을 떨었다. "그럴 수 없어요."
"어째서?"
"열쇠를 당신 집에 두고 왔어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덧붙였다. "나올 때 깜박 잊어버렸어요.."
킹이 기가 막히다는 듯 위를 쳐다보았다.
"자, 여기 있어." 그는 하이비스커스 나무 밑에 숨겨두었던 예비 열쇠를 찾아냈다. "엘리사는 잊어버렸는지 몰라도 나는 기억하고 있어."
엘리사는 킹을 쳐다보았다. 그는 놀라운 사람이다. 아주 크고 강하며 머리가 좋다. 엘리사는 평생 처음으로 그가 지켜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다. 밤새도록 그의 곁에 있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단지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
킹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켰다. 물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을 통해 엘리사의 매혹적인 몸의 곡선이 그래도 드러나 보였다. 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엘리사 때문에 수명이 단축될 것 같아. 신사의 품위를 유지하려 들다가는 심장 발작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내 탓이 아니에요."
킹은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키스했다. "자, 어서 자도록해. 내일 아침엔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네."
킹은 마른 수건을 찾아 건네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왜 갑자기 나를 원하게 됐지? 2년 동안이나 무감각했었는데, 어째서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거야?"
"나도 내가 이렇게 격해질 수 있는 여자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나도 놀랐어. 엘리사는 내가 아는 다른 여자들과는 전혀 달라."
"그래서 나를 원하는 건가요?"
킹은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어. 한 가지 확실한 건 지난 24시간 동안 내 머리 속에는 엘리사밖에 없었다는 것뿐이야. 하지만 냉정해져야 해. 엘리사는 나중에 죽고 싶을 정도로 자책감을 느낄게 뻔하니까."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친구이기 때문에." 그를 잃는다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흘렀다.
"울지 마, 엘리사. 당신이 울면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돼."
"미안해요. 장래를 생각했어요. 때가 되면 어느 한 쪽이 결혼하게 될 거예요." 그것은 틀림없이 킹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이도 끝장이 나겠죠."
킹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를 잃다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옳다. 엘리사는 언젠가 결혼하게 될 것이다. 그 미래의 남편이 두 사람의 기묘한 우정을 인정할 리 없다. 자메이카의 해변을 함께 산책하는 것도, 대화할 상대가 그리워 새벽 2시에 전화하는 것도, 돌 밑에 편지를 놓아두는 엘리사를 조롱하는 것도 다시는 할 수 없게 된다.
"이야기할 상대가 없어지면 쓸쓸할 거예요." 엘리사는 정직하게 말했다.
"나 역시 그래. 엘리사가 없으면 나는 외톨이야." 엘리사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그는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잘 자."
문이 닫히고 현관에는 엘리사만 홀로 남겨졌다. 현실의 냉담한 세계에 내던져진 그녀는 자기가 한 행동을 생각하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젖은 옷을 벗고 가운을 입었다. 그리고 머리를 말리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만일 킹의 애인이 된다면? 곧 나에게 싫증을 느끼고 떠나 버리는 건 아닐까?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지만, 그는 내 몸을 원하고 있을 뿐이다. 좀 더 먼 장래를 내다보아야 한다. 하지만 킹의 곁에 있으면 그것이 불가능하다. 역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이때 문득 킹이 돌아가면서 던진 말이 떠올랐다. <엘리사가 없으면 나는 외톨이야> 그건 무슨 뜻일까?
침대에 누운 뒤에도 엘리사는 계속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6
공항으로 가는 길이 마치 지옥으로 통하는 길 같았다.
엘리사는 킹과 나란히 앞좌석에 앉았으나, 그의 눈은 계속백미러를 통해서 베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비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시선을 나누는 상대는 베스였다
킹과의 격렬한 사랑을 꿈꾸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로서는 단순한 불장난에 불과했던 것이다. 틀림없이 그는 의무에 속박당하는 일 없이 지금까지 수십 명의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했을 것이다 남자는 여자와 달라서 사랑이 없이도 얼마든지 섹스를 나눌 수 있다. 엘리사는 슬퍼졌다 얼마나 킹을 사랑하는지 새삼스럽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메이카에 오는 것이 즐거웠던 것은 섬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이웃, 즉 킹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인생을 적당히 즐기자는 생각에 동조할 수 없는 자신이 슬펐다. 그녀는 자신이 남자와 가볍게 사랑놀이를 벌일 수 있는 여자가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킹이 말했듯이 아무리 그를 원한다고 해도 일단 잠자리를 같이하고 나면 양심의 가책으로 고민할 것이 뻔했다.
한 번 관계를 갖고 난 뒤에도 킹은 예전과 같이 스스럼없는 친구로 남아 있을까? 일단 맺어진 뒤에 그를 잃게 된다면 그야말로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베스는 어떨까? 정말 킹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결혼 생활을 위협할 염려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일까? 엘리사는 한숨을 내쉬며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남국의 나무들과 눈이 부실 것 같은 모래사장, 푸른 카리브 해를 내다보았다. 그리고는 킹에게로 시선을 옮겨 그의 옆얼굴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핸섬하고 또 부유하다. 그를 좋아하지 않을 여자가 있을 리 없다.
엘리사는 가슴이 답답해져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만일 그와 베스가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두 사람은 분명히 아기를 낳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엘리사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길게 줄을 서서 출국 절차를 밟고 나서 네 사람은 비행기에 올랐다. 베스는 킹의 옆좌석에, 엘리사는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았는데 비행기가 이륙 자세를 취했을 때 베스가 킹의 손을 잡는 것이 보였다.
"무섭소?" 킹이 다정하게 손을 맞잡으며 베스에게 물었다.
"이젠 무섭지 않아요." 베스는 눈에 가득 미소를 띠고 속삭였다
엘리사는 그들이 미소를 나누는 것을 보고 시선을 돌렸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보비는 서류에만 정신이 팔려 다른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이애미에 도착했을 때 엘리사는 가만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킹과 베스의 옆에 앉아 있어야 하는 고문에서 벗어나게 된다. 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다시는 고 싶지 않다. 비록 그 코티지를 팔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하지만 킹을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건 참을 수 없다! 엘리사는 이렇게까지 자신의 마음을 빼앗아 버린 그가 미웠다.
네 사람은 세관을 통과해 공항 청사로 나왔다. 킹이 보비와 베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동안 엘리사는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자, 여기서 헤어져야겠어. 일주일 정도 있다가 목장에 돌아갈 예정이야. 그동안 브레이크 도노반과 힘을 합쳐 목장을 잘 돌보도록 해. 감독이 휴가 중이라도 그가 잘 관리해 줄 거야."
"도노반에게 그럴 시간이 있을까?" 보비가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난번 이야기로는 그의 삼촌이 세상을 떠나 정신이 없는 것 같던데. 그 탐욕스러운 조카들이 소송을 제기하는 바람에‥‥."
킹이 피식 웃었다. "결국 도노반이 이겼지. 아직 얘기 못 들었어? 대단한 사업가야."
"그리고 플레이보이구요." 베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도 독신이에요. 왜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았을까요? 누군가에게 보답 받지 못할 사랑이라도 품고 있는 걸까요?"
아무도 베스의 농담에 대답하지 않았으나, 엘리사는 킹의 표정이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미소를 떠올리며 보비와 악수를 나누었다. "자, 그럼 몸조심해."
"고마워. 주말에는 승마라도 할까 생각하고 있어." 보비는 깜짝 놀라는 베스에게 살짝 웃어 보이며 덧붙였다. "베스와 피크닉도 겸해서."
"피크닉? 거기에도 계산기를 가져갈 건가요?"
"실없는 소리 하면 못써." 보비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봅시다, 엘리사. 형한테 종종 외출하자고 조르세요."
"네, 감사합니다." 엘리사는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베스는 엘리사에게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보비보다 앞장서서 걸어갔다.
킹은 꼼짝도 않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엘리사는 가방을 들고 출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야?" 킹이 쫓아와 그녀의 가방에 손을 내밀었다.
"집에 가지 어디 가겠어요! 바래다주지 않아도 괜챦아요 당신은 어느 호텔에 묵으면서...."
"바래다주겠다고 했잖아? 그가 명령조로 말했다. "차를 수배하는 동안 여기서 기다려."
엘리사는 하라는 대로 했다. 냉정해져야 한다. 그를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됐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돌아온 나를 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떻게 생생할까? 킹이 두 분을 만나게 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마이애미 교외에 있는 따분한 집에 데려다주고는 그대로 돌아갈 테니까.
그런데 집에 도착한 뒤에도 그는 해변에 천천히 밀려오는 대서양의 파도와 모래밭을 바라보며 좀처럼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집과 이어지는 차도를 따라 피어 있는 하이비스커스와 엘리사의 어머니가 정성껏 심어놓은 야자나무를 바라보다가 흰색으로 칠해진 창틀과 테라스에 놓인 가구에 시선을 옮기면서 그가 말했다. "자메이카에 있는 당신의 코티지를 연상시키는군."
"비슷해요.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짧게 대답한 엘리사가 차에서 내리려 하자 킹이 손목을 잡았다.
"왜 아까부터 잠자코 있지?"
엘리사는 손을 뿌리쳤다. "보비가 서류에만 정신이 팔려 당신들의 관계를 눈치 채지 못한 게 정말 다행이에요. 그는 얌전한 사람이지만 유사시에는 다짜고짜 권총을 들이댈 타입이에요 전신이 벌집처럼 된 당신과 베스의 사진이 신문의 1면을 장식할 뻔했어요."
"그렇게 되면 기분이 좋겠어?"
엘리사가 대꾸하려 했을 때 빨간 무늬의 옷을 입은 백발의 어머니가 맨발로 뛰어나왔다.
"엘리사!." 어머니는 반가움에 눈을 빛내며 딸을 꼭 끌어안았다. "대관절 무슨 바람이 불었어? 아버지가 기뻐하실 거야! 마침 새로운 파충류를 구입했거든. 누구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데 당신은 누구세요?" 엘리사를 따라 차에서 내리는 킹을 보고 그녀가 물었다.
"킹스턴 로퍼라고 합니다. 엘리사의 어머님이시군요?"
"네, 그래요. 티너 딘이에요." 엘리사의 어머니는 푸른 눈에 잔뜩 호기심을 띠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떤 사이지?"
"킹은 자메이카에서 이웃에 사는 사람이에요 공항에서여기까지 바래다주었어요. 그의 동생 부부와 같은 비행기로 왔거든요." 엘리사는 어머니가 킹의 맞춤 양복과 수제품 구두, 실크 넥타이와 롤렉스시계를 재빨리 훑어보는 것을 눈치 챘다. 그리고 한눈에 부자처럼 보이는 이 남자가 딸과 어떤 관계인지 알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아이스티가 있는데, 한 잔 하겠어요, 로퍼 씨?"
"킹은 곧 돌아가야 해요. 그렇죠?"
"아니." 킹은 얄밉게도 싱글벙글하면서 대답했다.
"전혀 바쁠 것 없습니다.."
"잘 됐어요." 티너는 환하게 웃었다. "혹시 파충류를 좋아하나요?"
"네. 전에 뿔도마뱀을 기른 적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벌써‥‥ 엘리사는 두 손을 뺨에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킹은 엘리사에게 의아한 눈길을 보내고 티너를 따라 집 안에 들어갔다.
아버지인 엘리어스는 진귀한 도마뱀을 수집해 놓은 서재에 있었다. 은발에다 머리가 약간 벗겨져 이마가 넓었고 도수가 높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딸을 반갑게 맞이하고 낯선 손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서 오시오. 그런데 누구신지?" 엘리어스는 커다란 녹색 도마뱀을 손에 든 채 사육 상자 앞에서 일어섰다.
킹은 도마뱀을 보고도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빙긋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킹스턴 로퍼입니다. 엘리사의 아버님이시군요?"
"아, 그렇소. 한데 도마뱀을 좋아합니까, 로퍼 씨? 도마뱀 수집이 내 취미요." 엘리어스는 쭉 늘어선 사육 상자를 만족스럽게 둘러보았다. "아직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현재 커리테일이 열 마리, 스프링리저트가 몇 마리, 영원, 도롱뇽‥‥ 이것들은 내 자랑인 동시에 기쁨이기도 하지."
엘리어스는 온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안에는 무성한 잔디가 있고, 그 주위를 화분에 심은 열대 식물이 둘러싸고 있었다. 형광등의 조명을 받고 있는 돌 위에는 공룡과 비슷하게 생긴 루드비히라는 네 발 달린 이구아나가 있었다. 녀석은 잠시 눈을 뜨고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이구아나입니까?" 킹이 흥미 있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요 예쁘지 않소? 이 녀석을 처음 잡았을 때는 아주 어렸는데, 스스로 과일이나 야채를 먹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내가 직접 먹이를 먹여 키웠다오. 개구리도 키워보면 재미있지. 나는 큰 아프리카 개구리가 한 마리 있었으면 하는데, 마누라는 개구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는 가엾다는 듯이 티너를 바라보았다.
티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도마뱀을 싫어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저 비단뱀은 정말 싫어요. 도마뱀은 참을 수 있어도 뱀은 소름이 끼쳐요."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에게는 취미가 필요해. 그렇지 않으면 더 심한 일을 할지도 몰라. 아마존 하류에서 만난 주술사를 기억하고 있겠지? 그는 두개골을 수집하고 있었어."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요." 티너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했다. "여보, 차를 들지 않겠어요? 엘리사와 이‥‥ 로퍼씨에게 차를 대접하려고 하는데."
"곧 가겠소. 먼저 가엾은 이 늙은 루드비히에게 먹이를 주고 나서."
"가엾은 이 늙은 루드비히에게 말이군요." 티너는 짓궂게 남편의 말을 따라 하면서 두 사람을 데리고 부엌으로 갔다. 바다에 면한 테라스의 미닫이문이 열려 있어 시원한 해풍이 불어왔다.
"엘리어스는 이구아나의 목에 끈을 매고 해변을 산책하곤 해요." 티너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설명했다.
"아버지는 기인이에요." 엘리사가 킹에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바위를 수집하셨다더군. 할아버지는 곰의 기름이 든 단지로 날씨를 예보했고. 거기에 비하면 도마뱀을 기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킹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엄마, 심심할때 어떻게 소일하는지 이 사람에게 말해 주세요." 엘리사는 티너가 목이 긴 유리잔에 아이스티를 따르는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티너는 아이스티를 식탁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보안관의 일을 돕고 있어요."
"보람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킹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티너는 자기 아이스티를 들고 의자에 앉았다.
"선교사를 지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약간은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는 여자도 있지요 그런 여자들을 다루는 데는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내가 적합해요 마약 파티나 총격전이 벌어지는 현장에 투입되기 도 하고 잠복근무를 한 적도 있어요. 담장을 뛰어넘어 젊은 마약 밀매자와 격투를 벌인 끝에 잡아서 보안관에게 넘긴 일까지 있는 걸요 아주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나중에 그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해 주기도 하죠." 그녀의 눈에 따스함이 떠올랐다.
"몇 사람은 일요일 예배에도 참석하게 됐어요 한 사람은 지난 일요일에 세례까지 받았구요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일 테지만."
"아닙니다." 킹이 진지하게 부정하는 것을 보고 엘리사는 깜짝 놀랐다.
"저는 오클라호마 교외의 잭스 코너라는 작은 마을에서 침례교도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아파치였지만 백인의 관습에도 공감하는 게 있다고 하셨어요. 교회는 인간의 마음을 충족시켜 준다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킹이 어머니와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놀랐다. 더구나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았던 혈통에 대해서까지 말하다니.
"아파치?" 티너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눈동자가 검고 광대뼈가 나왔‥‥."
"엄마, 사람을 앞에 놓고 그러시면 어떡해요." 엘리사가 나무랐다.
킹이 괜찮다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엘리사는 제가 혈통 이야기에 신경질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죠. 그러나 순수한 호기심이라면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 부근에선 인턴을 만날 기회도 별로 없었을 테구요."
티너가 싱긋 웃었다. "우리 어머니 쪽은 세미놀족의 피를 받고 있어요."
"엘리사,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잖아?" 킹이 엘리사를 돌아보며 항의했다.
엘리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 혈통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던가요?"
킹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이 옳다. 엘리사의 가족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세미놀이라는 성을 계속 갖고 있었는데, 아버지 대에서 바꿨어요." 티너는 말을 계속했다. "<로퍼>는 아버지의 원래 성인가요?"
킹은 <로프를 던지는 사람> 이란 의미의 아파치어를 이야기했다. "그래서 로퍼라고 한 겁니다."
"낚시를 좋아하오, 로퍼 씨?" 엘리사의 아버지가 부엌에 들어오면서 물였다
"바다낚시는 싫어하지만, 강에서 낚시 바늘에 미끼를 끼워 잡는 것은 좋아합니다." 킹이 대답했다.
"잘 됐군. 여기서 차로 두 시간 정도 가면 기가 막힌 늪지가 있어요. 좀처럼 볼 수 없는 큼지막한 송어와 메기를 잡을 수 있지."
"빈 방도 있어요." 티너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차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조용해요. 엘리사는 불안해 할지 모르지만 당신을 도마뱀의 먹이로 삼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피로할 때는 무엇보다도 기분 전환이 필요해요. 그렇지 않나요, 로퍼 씨?"
엘리사는 당황했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그를 멀리 하고 싶었던 것이다.
킹은 엘리사의 표정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 "엘리사가 싫다면 나는 사양하겠어."
부드러운 어조가 엘리사의 가슴에 동요를 가져왔다.
"나는 상관없어요." 그녀는 씁쓸하게 말했다.
"그럼,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됐군!." 엘리어스가 빙긋이 웃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야겠는걸."
"나는 당신을 위해 푸짐한 요리를 준비해야겠어요. 영양이 좀 부족한 것 같으니까." 티너가 말했다.
엘리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는 말라보이지만 셔츠를 벗으면 누구보다 단단하고 우람한 골격이다. 코티지의 창을 통해 그가 벌거벗고 헤엄치는 모습을 훔쳐봤다고 말하면 부모님은 뭐라고 하실까? 엘리사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억지로 미소를 띠고 차를 마시는 동안 어머니는 그의 직업에 대해 물었다. 킹은 석유와 가스에 관계되는 일을 한다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엘리사는 어머니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나중에 알았다.
"그렇게 잘생긴 사람이 자동차 수리 공장에서 일하다니." 티너가 저녁을 준비하면서 말했다.
"뭐라구요?" 엘리사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값비싼 옷을 입고는 있지만 아마 빌렸을 거야. 시계나반지도 모두 고급스러워 보여도 모조품임에 틀림없어 너한테 훌륭한 결혼 상대자라는 걸 과시하려고 그랬을 테지. 하지만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아버지도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더라. 수리 공장에서 일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 않니? 아마 부모가 경영하는 공장일 거야. 자메이카의 집도 부모의 것일 테구."
어머니는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엘리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도리어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킹이 부자라는 것을 모르는 게 마음 편하다. 그를 대하는 부모의 태도도, 부모에 대한 그의 대응도 엘리사의 마음에 들었다. 그것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킹이 돌아간 뒤에 이야기하면 되니까.
엘리사는 눈을 감았다. 불안하기는 하지만 베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게 기뻤다.
마치 꿈만 같았다. 겨우 하룻밤을 묵고 가는 것뿐인데도 얼마나 기쁜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비록 그가 베스와 결혼한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니까.
7
저녁 식사 후 킹과 엘리사는 해변을 산책했다. 자메이카에서의 그 밤과 마찬가지로 파도가 밀려와 부서지고, 흰 물거품이 속삭임을 나누고 있었다.
"여기 있어도 괜찮을까?" 킹이 물었다.
"네." 엘리사는 반바지와 긴 소매 셔츠로 갈아입고 있었다. 맨발로 밟는 흰 모래가 상쾌했다. 그녀는 긴 머리를 등 뒤로 늘어뜨리고 평화로운 풍경에 황홀해 있었다.
킹은 낮의 차림 그대로였는데, 셔츠의 단추를 반쯤 끌러놓고 발에는 샌들을 신고 있었다. 도저히 대부호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순수한 차림이었다.
"당신이 침례교도인 줄은 전혀 몰랐어요." 엘리사는 바다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엘리사야말로 세미놀족의 피가 섞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
엘리사는 생긋 웃었다. "아일랜드와 독일의 피도 조금 섞였어요."
"나도 아일랜드의 피를 받고 있지." 킹은 조그마한 모래구멍에 숨으려는 작은 게를 발견하고 엘리사에게 밟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전에 기른 적이 있어. 아주 귀여운 녀석이야."
"저렇게 집게가 있는 데도요?"
"집게? 응,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어. 물어도 별로 아프지는 않아."
"당신의 큰 손에는 그럴 테죠."
킹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여기는 참 좋은 곳이야. 부모님도 훌륭하시고, 엘리사가 자립심이 강한 이유를 알겠어. 부모님이 솔직하시기 때문일 거야."
엘리사는 가만히 웃었다. 그와 단둘이 있다는 것이 기뻤고 서늘한 바람도 기분을 더욱 상쾌하게 해주었다. "어머니가 한 말을 들었더라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킹이 걸음을 멈췄다. "뭐라고 하셨는데?"
"당신이 자동차 수리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줄 알고 계세요 자메이카에 있는 집도 부모에게 빌렸을 거라나요. 시계와 반지도 모두 가짜고, 옷도 틀림없이 빌렸을 거라고 하시더라구요."
킹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윽고 웃기 시작했다. "내가 자동차 수리공이라고?"
"석유와 가스에 관계되는 일을 한다고 했잖아요? 어머닌 자동차 수리공이라면 많이 알고 있지만, 석유업자는 만난 적이 없거든요."
"아, 그렇겠군. 그 말을 들으니 여간 유쾌하지 않아. 나는 어른이 된 이후로 보통 사람 취급을 받은 적이 없어. 특히 성공한 이후에는."
"내가 언제 당신을 거물로 취급했던가요?"
킹이 환한 얼굴로 웃었다. 그을린 얼굴과 대조되어 더 하얗게 보이는 이가 달빛을 받아 빛났다. "그게 바로 엘리사한테서 제일 마음에 드는 점이야. 내가 부자라서 사귀는 건 아니니까."
빈정대는 듯한 그의 어조에 엘리사가 반박했다. "정말로 내가 그래서 당신한테 접근하는 줄 알았나요? 어이가 없군요."
"계속 여자들에게 시달림을 당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엘리사도 그런 여자인 줄 알았어. 하지만 곧 내 재산 따위에는 아무 흥미도 없다는 것을 알았지. 그리고 또‥‥." 그는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장난스런 눈으로 엘리사를 보았다.
"엘리사의 목표는 내 육체에 있다는 것을 알았어."
"착각하지 마세요."
"기억하고 있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을 유혹하려는 듯한 가벼운 몸짓을 취한 적이 있었지. 그러자 당신은 얼른 몸을 빼고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봤어. 그 눈은 일생 동안 잊지 못할 거야. 틀림없이 심한 곤욕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남자를 무서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유혹하려는 생각을 완전히 단념한 거야."
"며칠 전까지는 그랬을 테죠."
킹이 엘리사 쪽으로 홱 돌아섰다. "모두 다 내 탓으로만 돌리면 곤란해. 그날 밤 침대 위에서 엘리사도 멋지게 반응했잖아?"
엘리사는 어둠 때문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파도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발이 시렸으나 집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말다툼을 하게 된다고 해도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내 도덕성을 칭찬해 줘서 고맙군요 그렇게 하면 남자들이 말하는 가벼운‥‥ 아니, 왜 이러는 거예요!."
킹이 그녀의 두 팔을 꽉 붙들고 마구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 엘리사는 가벼운 여자가 될 수 없어. 자신을 값싸게 보면 안 돼."
"당신이야말로 나를 그런 여자로 취급하고 있잖아요?"엘리사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말했다.
킹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얇은 셔츠를 통해 그의 힘이 전해져 엘리사를 흥분시켰다.
"나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킹은 뜻밖의 말을 했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지면서 감미로운 애무로 변했다. 숨결이 조용해지면서 엘리사를 다정하게 끌어당겼다. 그의 따스한 체온과 강렬한 체취에 감싸인 그녀는 풍성한 머리채에 그의 얼굴이 파묻히는 것을 느꼈다.
위안을 얻고 싶은 모양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의 마음은 혼란스럽고 상처를 입은 게 분명하다. 베스와 보비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베스에 대한 감정을 억제하고 있을 것이다. 좋아, 그가 혼란에 빠져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주어야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불안해 지는 법이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엘리사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어둠 속에서 고동치는 규칙적인 심장 소리를 들었다.
"인간은 예로부터 손에 넣을 수 없는 많은 것을 원해 왔어요. 꿈의 세계에 사는 나처럼 말이죠. 멜로드라마의 여자들같이 기쁨만 맛볼 뿐 아무 고통도 없는 생활을 하고 싶어요 하지만 나는 겁쟁이라서 그렇게 하지 못해요 언제나 결과를 걱정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까 신경을 쓰게 돼요." 엘리사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당신하고라면 부담을 느끼지 않아요 타락할 염려가 없이 날개를 펴고 날 수 있어요."
"어느 날 밤 불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귀여운 날개를 태을 때까지는." 그가 놀리는 투로 말했다. "당신도 우리 사이에 흐르는 묘한 감정에 깜짝 놀랐지?"
"네, 전혀 예상하긴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런 유혹에 약할 줄은 몰랐거든요."
"나는 알고 있었어." 킹이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그동안 정열을 억제해 왔어. 그러니 언젠가는 폭발할 수밖에. 마침 그것이 두 사람에게 똑같이 일어났던 거야." 그는 태연하게 말을 계속했다. "다른 남자에게 기회가 있었다면 끝까지 유혹했을지도 몰라."
엘리사는 얼굴을 붉혔다. "다른 남자에게는 허락하지 안았을 거예요." 그녀는 정직하게 율했다.
킹은 거창하게 황송하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 난 엘리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유혹에 약해."
"베스가 가버렸기 때문인가요?"
킹은 입을 다물었다. 얼마 후 다시 입을 열었으나 싸늘한 어조였다. "그래. 엘리사에게 무슨 짓을 하건 그건 베스에 대한 욕망 때문이라고 전에 말했잖아, 그렇지?"
"키스하기에 바빠서 듣지 못했어요." 엘리사는 시치미를 떼고 태연하게 말했다.
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왈가닥 같으니라구!." 그는 엘리사를 꼭 끌어안았다. "나하고 키스하기를 좋아하는 모양이군."
그녀는 꿈꾸는 듯한 기분으로 머리를 뒤로 젖혔다. "당신의 키스가 너무 멋지니까요."
"엘리사의 키스도 그리 나쁘진 않아." 킹이 그녀의 입술에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 그녀의 뺨을 쓰다듬고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집이 가까워서 유감이야. 벌거벗고 수영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알면 당신을 루드비히의 먹이로 삼을 거예요." 엘리사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잠깐 생각해 보았을 뿐이야. 엘리사의 옷을 벗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거든."
순간 엘리사는 깜짝 놀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미 봤잖아요?"
"허리 위는 봤지." 그는 지체 없이 대답하고 숨을 죽이는 엘리사를 보며 웃었다 "당신을 놀리는 건 정말 재미있어. 잔뜩 약이 올라 어쩔 줄 모르거든. 오랫동안 여자가 당황해하는 걸 보지 못해 거의 잊고 있었어. 내 주위의 여자는 모두 섹스에 무감각해졌거든."
"그거야 이미 모르는 게 없기 때문일 테죠." 엘리사는 그로부터 멀어지려 했으나, 킹은 그녀의 턱에 손을 받쳐 고개를 들게 했다.
"내가 무서워? 사람을 부르고 싶거든 소릴 질러도 좋아."
엘리사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전에도 말했지만 베스의 대용물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굉장히 신경을 쓰는군."
"만일 내가 당신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체하고 키스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어요?"
"이 귀여운 목을 부러뜨리고 싶을 거야." 그는 바로 대답했다.
엘리사는 큰 소리로 웃었다. "알겠어요? 그게 제 보복이에요."
킹이 그녀의 뒤에서 때리는 시늉을 했다. 엘리사는 얼른 몸을 피하며 장난스럽게 소리쳤다.
"때리기라도 하면 아버지한테 일러바치겠어요."
"좋아, 어디 그래 보시지?"
"각오하는 게 좋을걸요. 아버지는 높은 사람을 친구로 가지고 있다구요."
엘리사가 한 말의 뜻을 알아채고 킹은 빙긋이 웃었다
"엘리사와 같이 있으면 지금까지 사는 동안 웃은 것보다 더 많이 웃게 되는 것 같아."
그는 이렇게 말하며 불이 켜져 있는 집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 당신이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무서웠죠. 사업에만 몰두하는 얼음같이 차디찬 사람으로 보였거든요."
"겉은 차지만 속은 뜨거워." 킹이 들으라는 듯이 말했으나 그녀는 못 알아들은 척했다.
"내일 아버지와 낚시하러 가기로 했나요?"
"응, 같이 가겠어?"
"가고는 싶지만, 엔젤 마호니에게 연락해서 새로 디지인을 하는 데 일주일만 더 여유를 달라고 부탁해야 해요 엔젤은 시웨어 컬렉션의 부사장인데, 내 디자인을 처음으로 채택해 주었어요. 너무 전위적이라 아무도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엔젤은 기발한 디자인이니까 틀림없이 팔릴 거라고 했어요 그 말이 적중한 셈이죠. 나도 내 디자인으로 이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데." 킹은 엘리사의 옷에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내면서 말했다.
"나는 단순한 친구 앞에서는 잘 차려입지 않아요." 엘리사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내가 단순한 친구에 속하는 모양이지?"
"네, 그랬으면 좋겠어요."
"어째서?" 킹은 엘리사의 허리에 팔을 돌려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물었다.
"왠지 그 이유는 알고 있을 텐데요." 그녀는 짜내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그의 따뜻한 팔에 안기니 이성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가만히 몸을 떨면서 눈을 감았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그녀는 킹의 손을 뿌리쳤다. "우리, 커피나 마시기로 해요."
킹은 단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앞에서 냉정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엘리사와 같이 있을 때는 베스를 완전히 잊게 된다. 이것 또한 뜻밖의 일이었다.
생각에 잠긴 채 엘리사를 따라 집에 들어가자 그녀의 부모가 커피를 마시면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킹은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드레스를 허리까지 내린 엘리사의 환상과 밤새도록 싸우게 될 것 같았다.
이튿날 아침 킹과 엘리사의 아버지는 해도 뜨기 전에 낚시를 하러 떠났다. 엘리사와 어머니가 일어났을 때는 두 사람 모두 이미 집을 떠난 후였다.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끝내고 티너가 집안일을 돌보는 사이에 엘리사는 바다로 수영을 하러 나갔다. 수영으로 어느 정도 기분 전환이 되었다 싶자 이번에는 곁눈도 팔지 않고 디자인에 몰두했다.
그런 보람이 있어 참신하고 시원스러워 보이는 디자인이 완성되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그녀는 어머니와 점심을 먹고 나서 다시 바닷가로 나갔다. 검은 원피스 수영복 위에 꽃무늬 랩 스커트를 걸친 모습으로 타월 위에 드러눕자 오후의 나른함이 몰려왔다.
태양이 구름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해가 구름에 가려 조금 시원해지자 엘리사는 한숨을 쉬면서 눈을 감았다.
어느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뭔가 이상한 감각에 눈을 뜨자 스커트가 밀려 올라가서 노출된 다리에 언제 왔는지 킹의 눈길이 머물러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기다 수영복의 어깨끈이 벗겨져 한쪽 가슴이 보일락 말락 했다.
"너무 섹시해."킹이 중얼거렸다. "해변에 올라온 인어 같아.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걸 행운의 별에게 감사해야 할 거야."
"어머, 말솜씨가 여간 아니군요." 엘리사는 킹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누운 채로 웃었다.
킹은 그녀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셔츠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그가 셔츠를 모두 벗어던지자 엘리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킹은 그것을 보고 욕망이 솟구쳐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엘리사가 욕망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 그를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잠깐 수영을 하고 싶어서." 킹은 벨트로 손을 가져갔다.
"안 돼요." 엘리사는 부모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렸다.
"수영복은 입었어." 이렇게 말한 킹은 벨트를 끄르고 천천히 지퍼를 내렸다. 긴 다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엘리사의 가슴은 더욱 무섭게 두방망이질 쳤다.
"어쩌자고 이러는 거예요?" 그가 돌아보자 엘리사는 부자연스럽게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옷을 벗는 모습을 바라보는 엘리사의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서." 킹은 천연덕스럽게 그녀의 눈을 보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농담을 하고 있는 눈이 아니었다.
그는 엘리사에게 다가와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자기 가슴에 가만히 갖다 댔다. 달아오른 가슴을 그녀의 싸늘한 손이 서툴게 쓰다듬었다. 킹이 심호흡을 하자 근육이 그 움직임에 맞춰 꿈틀거렸다.
"아‥‥ 아버지는?" 엘리사는 사방을 둘러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잡아온 물고기를 손질하고 계셔."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면서 킹이 대답했다. "어머니는 식사 준비에 바쁘시고."
킹은 그녀 옆에 앉아 재빨리 스커트의 단추를 끌렀다. 수영복에 감싸인 화사한 몸이 나타났다. 킹의 손이 거의 흘러내린 어깨끈에 닿았다. 서서히 더듬어 내려온 손길이 마침내 수영복을 벗기기 시작했다.
"안 돼요, 킹." 엘리사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킹의 손목을 잡았으나 그의 손놀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엘리사의 수영복을 헤치면서 터질 듯이 고동치는 가슴을 대담하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말할 수 있거든 어서 해 봐." 허리를 구부리며 킹이 속삭였다 "나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이야."
"베스는 어떻게 하고‥‥."엘리사는 그를 떠밀려고 했다.
그가 뭐라고 중얼거렸으나 엘리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킹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밀어붙이고 핑크빛 봉오리를 입에 물었다.
엘리사는 별안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어떻게 자신을 억제하면 좋을지 몰라 당황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그의 욕망을 더욱 부추겼다. 킹은 엘리사의 등에 팔을 감고 강하게 끌어안았다.
엘리사는 그의 애무에 저항하지 못하고 떨고만 있었다. 킹은 가슴을 혀로 애무하면서 한 손으로 부드러운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들어 엘리사가 냉정을 잃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울지마." 킹은 눈꺼풀에 입술을 맞추며 그녀를 달랬다.
"당신이 미워요." 그녀는 울면서 호소했다.
킹이 달래듯이 미소를 떠올렸다. "그렇지 않을 거야. 저항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미울 테지. 나 역시 마찬가지야. 우리 둘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은 너무 격렬하고 감미로운 것 같아."
"하지만‥‥ ."
킹은 엘리사의 입을 키스로 막으며 천천히 그 입술을 열기 시작했다. 몸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녀는 저항하려 했지만 킹이 더 깊숙이 키스하는 바람에 미칠 듯한 쾌감으로 몸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 이런 키스는 처음이었다. 섹스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그 이상이다. 엘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킹은 비어 있는 손을 그녀의 턱에 대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태양을 가린 채 그녀를 덮은 그의 몸이 어느 때보다 거대해 보였고, 약간 상기된 그의 얼굴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음, 엘리사..." 그는 입술에 키스를 되풀이하면서 엘리사가 기쁨으로 신음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알아 엘리사는 나를 받아들이고 싶을 거야. 그렇지? 완벽하거 나의 것으로‥‥ 아아, 엘리사."
그의 혀가 서서히, 그러나 날카롭게 입 안으로 들어와 엘리사의 혀와 격렬하게 뒤엉켰다.
그녀는 절규하면서 떨리는 손으로 그의 머리를 휘어잡고 목에 손톱을 세웠다. 감미로운 고통에 몸을 활처럼 뒤로 젖히자 킹은 솟아오른 가슴의 정상을 입에 물고 다정하게 핥기 시작했다. 그 순간 엘리사는 이대로 숨이 끊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이런 흥분에 휘말린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뛰어든 것 같았다.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지만 그 떨림을 제지할 수도, 숨길수도 없었다. 그녀는 흐느끼면서 그의 팔에 몸을 맡겼다.
"엘리사." 킹은 엘리사가 처음 듣는 다정하고 애정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떨고 있는 엘리사에게 몸을 얹고, 이번에는 가만히 키스해 왔다. 다음 순간 그녀는 자기 가슴에 그의 맨가슴이 직접 닿는 것을 느꼈다. 따스하면서도 억센 그의 근육이 부드러운 가슴을 덮었다.
"날 안아줘." 킹이 속삭였다. "좀 더 힘껏."
엘리사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는 킹의 뜨거운 목덜미에 입술을 누른 채 그의 몸 아래서 떨고 있었다. 그의 정열이 불타오르는 것이 그녀에게도 전해져 왔다.
"놀라워." 그는 엘리사의 등에 돌린 손에 힘을 가하며 속삭였다. "정말 놀라워, 엘리사."
엘리사는 자기도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그녀가 토해내는 신음 소리가 그의 흥분을 더욱 부추겼다.
킹의 손이 엘리사의 뺨을 쓰다듬으며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한 손으로 허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면 서 침착하라고 타일렀다.
엘리사의 떨림이 멎고 킹의 몸에서 긴장이 풀렸을 무렵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엘리사를 안은 채 그녀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엘리사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는 잿빛 구름을 배경으로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하늘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그만 돌아가야겠어." 마침내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이러고 있으면 안 돼."
엘리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오고 말았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 다음은 생각할 수 없었다.
"알았어요." 엘리사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가 키스한 가슴이 자극을 받아 발갛게 되어 있었다.
"아아, 엘리사." 킹은 그녀가 손으로 가슴을 가리는 것을 보고 숨을 삼켰다.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으면 좋겠어."
"안 돼요."
"요즘 내가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 모르겠어." 킹은 그녀를 억지로 자기 쪽으로 돌려놓았다. "당신을 소유하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아, 엘리사." 그녀의 매혹적인 어깨를 킹은 찬탄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어 엘리사를 갖지 못하면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아."
"나도 그래요. 하지만 결국엔 당신을 미워하게 될 거예요. 당신과 어떻게 살아가면 될지 나는 모르니까요." 그녀는 킹의 가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정직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요."
킹이 일어나서 엘리사를 안아 일으켰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와 함께 오클라호마에 가지 않겠어?"
그녀는 깜짝 놀라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절대로 임신은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어. 앞으로 일어날 일은 장담하지 못하지만, 그것만은 반드시 지켜줄게 ."
"아뇨, 나는‥‥ 네, 가겠어요." 엘리사는 바다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뭐라고 말씀드리죠?"
"나와 약혼할 생각이라고 말씀드리면 돼. 그리고 오클라호마에서는 우리 가족과 함께 지낼 거라고."
그녀는 눈을 빛냈다. 이것을 본 킹은 와락 엘리사를 껴안았다.
"그래‥‥ 결혼하는 거야." 갑자기 그가 말했다. "베스와는 결혼할 수 없고, 엘리사를 갖고 싶어. 우리, 정식으로 결혼하는 거야."
엘리사는 하마터면 그러겠다고 대답할 뻔했다. 그러나 곧 냉정을 되찾았다. 두 사람이 결혼하더라도 베스는 틀림없이 그에게 접근하려 들 것이다. 결혼하면 도리어 문제가 복잡해질 뿐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상처가 크다고 해도 자존심을 버리고 그를 만족시켜 주고 싶었다.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다만 며칠 동안이라도 그와 함께 꿈같은 시간을 보내면 된다 그 추억을 가슴에 안고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결혼은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같이 가겠어요."
"나는 그런 뜻에서‥‥."
엘리사는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아니에요. 결혼은 신성한 거예요. 욕망을 합리화시키는 수단이 아니라구요 결혼하면 틀림없이 후회하게 될 거예요."
"하지만 결혼 서약 없이 관계를 맺게 되면 당신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될 거야."
"아니, 당신의 양심이 상처받겠죠." 엘리사는 킹의 아픈 곳을 찔렀다. "베스는 언제 자유로운 몸이 될지 몰라요. 그때 나와 결혼해서 유부남이 되어 있다면 당신은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의 찌푸린 얼굴이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당신에게 그런 부탁을 하다니, 떳떳하지 못한 일이군."
"인생이란 본래 떳떳한 것이 못 돼요." 엘리사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사랑을 담아 그를 쳐다보았다. "아아, 킹."
엘리사의 팔을 붙든 그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목장을 보러 가는 거야." 그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뿐이야."
킹의 말에 엘리사의 기분이 밝아졌다. 그렇다면 부모에 게도 설명하기가 쉽다. 그녀는 생긋 웃었다. "좋아요."
킹은 엘리사의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눈이 빛나고 표정이 아름답다. 실제로 그녀는 몸도 마음도 아름답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의 몸이 정직하게 반응했다. 킹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옷을 입는 게 좋겠어." 이렇게 말하고 그는 등을 돌렸다. 바다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등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킹이 청바지를 입는 것을 보고 그녀도 스커트를 걸쳤다. 그가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이 더 이상 당황스럽지 않았다. 그의 일부분이 된 듯한 아주 자연스런 기분이었다. 그를 미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킹은 황홀한 표정의 그녀를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 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던질 각오를 하고 있다. 어째서일까? 나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니 몸이 꿈틀거렸다. 킹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셔츠를 집어 들었다. 그는 옷을 입고 엘리사의 손을 꼭 잡았으나 베스에 대한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만일 거부할 수 없는 일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첫경험이 되도록 해주겠어."
"잊지 않아요,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엘리사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어조로 대답했다.
킹은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다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마치 키가 3미터쯤 되는 거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킹은 엘리사가 자신의 일부가 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녀의 가냘픈 몸을 내려다보았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한꺼번에 달아올랐다.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이 엘리사의 복부로 향했다. 저 안에 두 사람의 아기가 자리 잡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가 아플 정도로 손을 꼭 쥐자 엘리사는 의아한 듯이 얼굴을 들었다. "왜 그러세요?" 킹이 베스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엘리사가 물었다.
그는 엘리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엘리사‥‥ 아기를 좋아하나?"
엘리사는 바로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그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 줄기 서광이 비쳤다 그녀는 생긋 웃고 집 쪽으로 돌아섰다. "네, 물론이에요. 적어도 둘은 갖고 싶어요. 그런데 왜 묻죠?"
킹은 대답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베스는 아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킹은 자기가 아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더구나 엘리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기를.
티너와 엘리사가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그는 엘리어스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면서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 킹이 전화를 걸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티너는 엘리사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가 목장으로 나를 초대했어요. 그래서 두 분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티너는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너, 그를 사랑하는구나?"
엘리사는 한숨을 쉬었다. "네. 하지만 그는‥‥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는 몰라요."
"내가 보기엔 그도 너를 원하는 것 같아." 티너는 미소 지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란 앞으로 계속 사랑할 마음이 없어도 육체적으로는 얼마든지 열중할 수 있는 거란다."
엘리사는 비참한 기분이 들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요."
"가엾어라." 티너는 딸의 이마에 키스했다. "자기가 갈 길은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어, 엄마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어떤 행동을 하든 이 마음은 변하지 않아. 아버지나 내가치관이 고루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믿고 있고, 생활은 그것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욕망이란 순간적인 거야. 하지만 사랑은 영원하고, 순간적인 육체적 욕망을 초월하는 거란다. 그러니까 섹스는 결코 불멸의 사랑을 대신하지는 못해."
"엄마가 그런 상스러운 말을 입에 올리다니 이상해요." 엘리사가 쑥스러움을 지우려는 듯 가볍게 말했다.
"네 말이 맞아." 티너는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어.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스커트 길이가 무릎 위로 3센티미터만 올라가도 퇴학을 당했단다. 천박스럽다고 말이야." 티너는 입을 오므리고 가만히 웃었다. "그때에 비하면 요즘의 생활은 어찌나 시끄러운지 때때로 아마존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구나. 거기라면 안심할 수 있으니까."
"아마존까지 가실 필요 없어요. 워치프를 데려다 놓으면 아마존에 들어간 기분이 들 거예요."
워치프에 대해 알고 있는 티너는 낯을 찌푸렸다. "사양하겠어. 귀가 밝은 이웃이 있기 때문에."
"제일 가까운 이웃이라 봐야 여기서 1킬로미터나 떨어져 살잖아요."
"하지만 소리란 바람을 타고 퍼지는 게 아니겠니? 더구나 앵무새는 날아다니는 새이기도 하구. 나는 작은 모기에도 얼마나 시달렸는지 몰라. 그런데 날개가 있고 무게가 5백 그램이나 되는 새가 덤벼드는 모습을 상상해 보렴."
워치프를 거대한 모기라고 생각하시다니. 그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킹에게 이야기해 줘야지. 킹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엘리사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티너가 엘리사의 손등을 살짝 때렸다. "인생이란 그런 거야. 신은 우리를 사랑해 주셔. 아무리 못된 아들이나 딸이라도."
상투적인 말이었지만 엘리사는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일어나서 식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8
오클라호마의 평원을 처음 본 엘리사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킹은 공항의 주차장에 맡겨두었던 잿빛 링컨을 몰고 목장으로 향했다. 대도시인 오클라호마는 유전의 망루가 여기저기에 높이 솟아 있었다. 멀리 지평선을 향해 푸른 평원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것을 바라보는 엘리사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넋을 잃고 있는 엘리사를 돌아보다가 킹은 하마터면 핸들을 잘못 꺾을 뻔했다. "이런 곳은 싫어할 줄 알았는데 엘리사는 해변에서 쭉 살아왔으니까."
엘리사에게는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원의 인디언은 어쩌다 이렇게 먼 곳까지 왔을까요? 수족이니 샤이언족 말이에요."
"오클라호마는 다섯 개의 인디언 부족이 1830년부터 1840년 사이에 정부에 의해 강제로 이주당한 곳이야. 그들 중에는 남북 전쟁 때 남부 연합군을 위해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더군. 그 때문에 정부는 일종의 보복으로 이주를 강요한 거야. 치카소족, 초크트족, 글리크족, 그리고 세미놀족이 그때 이주해온 인디언 부족이지."
엘리사의 얼굴이 빛났다. "조상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틀림없이 우리 조상도 여기 왔을 거예요."
"세미놀족은 거칠었기 때문에 정부에 대항해 싸웠지."
"아파치족도 상당히 용감했다고 하던데요." 엘리사는 그에게 미소 지었으나 곧 완만한 구릉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어요. 무척 넓기도 하고."
"나도 여기가 마음에 들어. 무엇보다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기 때문에 공간이 충분한 곳이라서 말이야. 석유와 가스와 소가 있고."
"석유 채굴이 어려워졌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그래서 보비와 내가 경영을 다각화시키기 시작한 거야." 킹은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아, 저쪽이야." 킹은 작은 숲과 그 옆의 커다란 목조 건물을 가리켰다
"저것이 당신의 목장인가요?" 엘리사는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응, 마음에 들어?"
"네, 너무너무." 엘리사는 푸른 숲과 여기저기에 만발해 있는 야생화에 넋을 빼앗겼다.
"해바라기도 있네요."
"여기엔 야자나무가 없는 대신 떡갈나무와 히커리나무가 있지. 물론 야생 동물도 있고. 처음 보는 동물도 많을 거야."
"빨리 보고 싶어 못 참겠어요."
"그렇게 흥분할 거 없어." 킹은 베스가 못장을 아주 싫어한다는 걸 상기했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반대급부로 우아하고 세련된 생활을 동경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보비는 킹과 마찬가지로 평원을 사랑했고 소박한 목장 생활을 즐겼다.
"엘리사는 도시 사람이야. 이곳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걸."
"나는 시골 처녀예요." 엘리사가 대답했다. "마이애미에서 자랐다고 도시 취향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나는 해변이나 언덕 같은 곳이 좋아요. 마음 내키면 언제나 산책해도 될까요? 아니면‥‥."
"야만적인 인디언이 살고 있을 것 같아서 걱정되나?" 킹이 장난스런 미소를 띠고 말했다.
"늑대가 있을지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엘리사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여기 한 마리 있는데." 킹은 한쪽 눈을 찡긋 하면서 자기를 가리켰다.
엘리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여기 데려온 이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직 엘리사를 원하고 있었다. 엘리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베스가 이 근처 어딘가에‥‥
"보비는 어디 살고 있나요?" 별안간 엘리사가 물었다.
킹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저기 저쪽에."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현대적인 모양새의 이층집을 가리켰다. "하지만 베스는 주로 시내에 있을 때가 많아. 그곳에도 집이 있거든. 보비 말로는 시골 생활에도 차차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하던데. 하지만 파티만 열고 있으면 곤란해. 마음만 먹으면 여러 가지 사회 활동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킹은 차를 곧바로 현관 앞까지 몰았다. 엘리사는 테라스에 놓인 커다란 녹색 안락의자와 안마당에 매어진 그네를 보고 환성을 올렸다.
"멋져요! 저 그네를 탈 수 있나요?"
"아직까지는 탈 수 있어." 그는 차에서 내려 옛날식으로 정중하게 그녀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때 문이 기세 좋게 열리면서 중년 여성이 달려 나왔다. 흰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60세 가량의 뚱뚱한 여자로 가정부인 마가렛 프로이드였다.
"드디어 돌아왔군요." 그녀는 두 손을 굵은 허리에 얹고 당당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시간 지각이에요. 비행기 납치라도 당했었나요? 모처럼 준비한 저녁 식사가 다 식어 버렸잖아요 그런데 이분은 누구죠?"
"이쪽은 엘리사 딘." 킹은 엘리사를 꼭 붙들고 소개했다.
"아, 그러세요? 마가렛의 넓적한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빛났다. "드디어 배필을 찾았군요."
마가렛이 끌어안자 엘리사는 밀가루와 사과 냄새에 감싸였다.
"이렇게 같이 올 줄은 몰랐어요." 마가렛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아가씨로군요. 자, 어서 들어가서 식사를 하셔야죠? 맛있는 로스트 비프와 직접 만든 롤빵이 있어요. 애플파이도 구어놓았구요."
킹은 마가렛에게 들리지 않도록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짐을 가지러 갔다. 마가렛은 음식 솜씨는 훌륭할지 모르지만 철판 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거리낌 없이 마구 질문을 퍼붓는다.
겨우 마가렛을 몰아낸 뒤에야 두 사람은 조용히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엘리사의 얼굴은 질문 공세로 발갛게 되어 있었고, 킹도 몹시 난처해하고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마가렛의 따뜻한 환대를 받은 여자는 베스뿐이었다. 마가렛은 킹이 예전에 종종 데려왔던 타입의 여자에게는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으나 베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자란 환경을 알고 마음으로부터 동정했기 때문이었다.
"아주 맛있어요." 엘리사가 어색한 침묵을 깨고 말을 건넸다.
"그래, 맛이 있군." 킹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엘리사는 그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뒤 짐을 풀어야겠다면서 마가렛에게 이층으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킹은 식탁에서 일어나 곧 마가렛의 남편이자 목장 감독인 벤 프로이드를 만나러 갔다.
한 시간 후, 마가렛은 가축 우리 너머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저택엔 엘리사만 혼자 남겨졌다. 그녀는 킹이 나가면서 늦을 거라고 미리 말해두었기 때문에 기다리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목장에서의 첫날밤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것들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엘리사는 귀에 익지 않은 소리에 눈을 떴다. 소가 울고 수탉이 목청을 돋워 소리 지르는가 하면 개가 멍멍 짖고 아래층에서는 투닥투닥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엘리사는 침대에서 일어나 하품을 하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저런 소리들만 들리지 않는다면 플로리다 해안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날씨에 맞게 반소매 블라우스와 청바지를 입었다. 화장은 하지 않고 머리도 늘어뜨린 채로 두었다.
아래층에 내려가니 킹이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엘리사가 늘 보아온 킹이 아니었다. 전형적인 서부의 사나이였다 엘리사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며 문 앞에 서 있었다.
빛바랜 청바지에 먼지투성이인 부츠, 하늘색 웨스턴 셔츠를 입은 그는 마치 딴 사람 같았다. 복장만이 아니라 얼굴까지 달라 보였다. 평생을 고향에서만 살아온 사람의 얼굴이었다.
킹이 신문에서 눈을 들었다. "편히 잤어?"
"네, 푹 잤어요 당신은요?"
"겨우 잠자리에 들고 나서는 잘 잤어. 벤이 다섯 시간이나 걸리는 일을 맡겼기 때문에."
"이웃 사람이 일을 좀 나누어 해주지 않던가요?"
"물론 그러기는 했죠." 입구에서 빈정거리는 듯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수표에 사인할 수 있는 사람은 킹스턴뿐이라서요."
엘리사는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희미한 연녹색 눈에 짙은 속눈썹을 가진, 머리가 덥수룩한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한쪽 뺨에 상처 자국이 있고 코도 몇 번이나 부러진 것 같았다. 아무리 보아도 킹의 친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엘리사가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는 아직도 그녀가 알지 못하는 면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이 친구는 브레이크 도노반." 킹이 소개했다. "그리고 이쪽은 친구인 엘리사 딘."
"만나서 반가워요, 도노반 씨."
도노반은 그녀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나 역시 반가워요." 그는 킹 쪽으로 돌아섰다. "더 이상 용무가 없으면 나는 돌아가겠네. 그 지긋지긋한 변호사가 기다리고 있거든. 서류에 사인만 하면 소송은 완전히 끝나게 돼."
킹이 커피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메러디스 캘러언이 새로운 저서로 상을 받았다는군."
도노반의 눈이 번쩍 빛났다. 어떤 작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도노반에게는 버거운 상대인 듯했다.
"나는 일이 있어 그만 가보겠네, 로퍼. 잘 있어요. 딘양." 도노반은 무뚝뚝하게 말하고 돌아갔다.
"메러디스 캘러언이 누구예요?"
"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곤란한데.." 킹은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도노반이란 분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군요."
"환경 때문이지. 그는 사생아인데 어머니도 출산 때 돌아가셨어 갓 태어난 그는 성을 잘 내는 늙은 삼촌에게 맡겨져 양자가 되었지. 삼촌도 작년에 죽고, 그 뒤 도노반은 재산 때문에 법정 싸움을 벌여야 했어."
"그가 이긴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엘리사는 킹이 불행한 과거를 가진 친구를 깊이 동정하는 것을 보고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그 동정심이 베스에게도 적용된 것이 분명했다‥‥
"당신보다 젊어 보여요."
"응, 나보다 여섯 살인가 적어. 곧 서른이 될 거야. 왜? 그가 마음에 들어?"
엘리사는 깜짝 놀랐다. 그가 질투하고 있다. 베스를 사랑하고 있을 그가 어째서?
엘리사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가 일어섰다. "일이 밀렸기 때문에 이만 나가봐야겠어."
"사무실에서 일하는 게 아닌가요?"
"목장에서 일해." 그는 허리를 구부려 엘리사의 입술에 따뜻하게 키스했다. "내겐 바쁘게 움직이는 게 가장 좋은 휴양법이거든. 목장에는 자잘한 일들이 항상 널려 있어."
"카우보이 같군요."
"응, 나는 카우보이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다가 별 아래서 잠드는 일이지. 나중에 목장을 안내할게. 괜찮다면 말도 한 마리 선물하지."
"어머, 고마워라." 엘리사는 생긋 웃었다.
"웃는 모습이 마치 요정 같군." 킹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다시 한번 키스했다. "그럼, 낮에 다시 만나. 참, 마가렛과는 너무 많이 얘기하지 마."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어요."
"나도 아가씨가 꼭 마음에 들어요." 언제 왔는지 계란바구니를 든 마가렛이 입구에 서서 킹에게 이를 드러내며 살짝 웃어보였다. "당신은 행운아예요."
킹이 얼굴을 붉혔다. "자, 어서 가서 일을 해야지." 그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발소리를 내면서 나갔다.
"내가 보기 싫을 때는 언제나 저런 걸음걸이로 걸어요." 마가렛이 호탕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아가씨에겐 홀딱 반한 얼굴이네요. 하지만 안심하면 안 돼요. 그는 성가대 소년이 아니니까. 마음만 먹으면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이에요."
엘리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가렛은 정말 재미있는 분이로군요. 하지만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단순한 친구일 뿐이거든요."
마가렛은 의자에 앉아 엘리사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아가씨 얘기를 해주지 않겠어요? 옷을 디자인 한다면서요?"
그녀의 질문은 마치 중세의 이단 심문 같았다 엘리사가 겨우 해방되어 집 밖으로 나왔을 때는 마가렛이 이미 엘리사가 좋아하는 향수나 가족의 역사 같은 것을 모두 알아낸 뒤였다. 킹이 선교사의 딸을 데려왔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그녀는 환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엘리사에게는 목장이 처음이었다. 잘 손질된 말 사육장에는 아름다운 아파루사 종의 말이 있었다. 그리고 도처에 소가 풀을 뜯고 있었고 수소 전용인 축사가 있었다. 적갈색과 흰색 얼룩 무의의 수소는 살이 통통하게 올랐고 엄청나게 컸다. 킹이 점심을 먹으러 돌아왔을 때 엘리사는 축사에서 소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 녀석의 이름은 <킹의 자랑 4120>이라고 해. 보비의 할아버지가 헬레포드종을 개량한 것이지."
"왜 번호가 붙어 있죠? 체포되기라도 했나요?"
"어려운 질문을 하는군."
킹은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집으로 향하면서 배태 이식과 감별 등 질이 좋은 식용소로 개량하기 위한 복잡한 작업을 설명해 주었다.
"마가렛이 비프 샐러드를 만들고 있어요."
"그녀가 무슨 질문을 했는지 말해줄 수 있어?" 킹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속옷 색깔을 묻기 전에 말인가요? 아니면 그 후에 말인가요?" 그녀는 웃으면서 반문했다.
킹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식사가 끝난 후 그는 송아지를 구경시켜 주겠다면서 말을 타고 나가자고 제의했다. 자메이카에서도 함께 말을 탔던 적이 있기 때문에 엘리사도 어느 정도는 승마에 익숙해 있었다.
"무서운 속력으로 해변을 달리다가 엘리사가 바다에 빠졌던 날, 기억하고 있어?"
"오늘은 꼭 붙들고 있겠어요." 엘리사는 고삐를 단단하게 쥐면서 대답했다. "먼저 출발하세요, 카우보이 아저씨. 절대로 놓치지 않을 테니까요."
"좋아." 킹은 아파루사 종의 말이 너무 빨리 달리지 않도록 가만히 말 옆구리를 걷어찼다. 엘리사도 온순해 보이는 암말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며 킹의 뒤를 좇았다. 그와 함께 넓은 초원을 달리는 것이 꿈만 같았다.
송아지는 헬레포드 종이었으나 엘리사가 기대했던 것처럼 갓 태어난 송아지는 아니었다. 킹의 설명에 따르면 송아지들은 품종 개량 프로그램에 맞추어 주로 2월과 3월에 출생시킨다고 했다. 그 다음 살을 토실토실하게 찌워서 일정한 체중에 도달했을 때 판다는 것이다.
"이 송아지를 키워 잡아먹는다는 생각을 하니 인간이 정말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엘리사는 송아지의 순한 갈색 눈 위에 자란 흰 털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킹은 모자를 뒤로 젖히고 목책에 기대섰다. "소가 얼마나 주인을 따르는가 하는 옛날이야기가 있어. 한번은 어느 카우보이가 소를 도살장에 데려갔어 거기에 소를 두고 돌아가려고 하자 소들이 큰 소리로 울더라는 거야."
엘리사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감상적으로 행동한 자신이 부끄러워서 이를 숨기려 했으나 킹의 눈에 띄고 말았다. 그는 엘리사를 가만히 안고 말을 매어놓은 데로 데려갔다.
"미안해요."
"마음씨 착한 신참내기로군." 킹은 빙긋이 웃으며 다정하게 키스했다.
그냥 위로하기 위해 시작한 키스였는데 엘리사가 반응을 보이며 입술을 열자 킹은 숨을 죽였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다음 순간 그녀를 길게 자란 잔디 위에 뉘고 그 위에 체중을 실었다
"킹!." 그녀는 당황했다.
"엘리사."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며칠 동안이나 참아온 그녀에 대한 욕망이 한꺼번에 폭발하여 격렬하게 키스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그는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른 여자에게는 한 번도 이런 욕구를 느껴본 적이 없어." 그는 엘리사의 손을 입술로 가져갔다.
"우리 결혼해, 엘리사."
"생각할 여유를 주세요." 엘리사는 좋다고 외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냉정해져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그에게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그에게 무엇이 가장 바람직한지를 생각해야 한다. 킹은 엘리사의 손에 키스를 퍼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알았어."
"보비는 우리가 여기 와 있는 걸 알고 있나요?"
"응, 한 시간쯤 전에 전화했어. 베스는 내일 아침까지 시내에 머물 거라고 하더군. 보비가 같이 말을 타자고 하던데?"
"언제?"
"내일 오후에." 킹은 그녀의 턱으로 손을 가져갔다.
엘리사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나는‥‥ 당신이 좋아요."
"그럼, 결혼하는 거야. 그러겠다고 대답해 줘."
엘리사는 한숨을 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성이 어디론가 달아나 버린 것 같았다.
"네‥‥ 좋아요."
킹은 엘리사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나는 엘리사를 원한다. 엘리사가 마음에 든다. 엘리사도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것이 나와 베스를 영원히 격리 시키는 마지막 장벽이 될 것이다.
킹은 엘리사에게 다정하게 키스하고 그녀를 일으켜 말에 태웠다. 그는 집에 돌아올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9
오후에 엘리사는 마가렛을 도와 부엌일을 했다 킹은 목장 일을 돕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엘리사의 안절부절 못하는 태도를 보고 마가렛은 의아하다는 듯이 시선을 던졌다.
"왜 그래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가렛이 물었다.
"킹에게 결혼 신청을 받았어요."
"어머, 축하해요!."
"하지만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걸요."
마가렛은 킬킬 웃었다. "아가씨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진짜예요 나를 믿으세요."
엘리사의 몸이 굳어졌다. 그렇다, 마치 최상품 디저트를 보는 듯한 눈이다 하지만 아직 베스가 있다. 엘리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빨리 승낙하세요. 결혼식 준비는 내가 모두 맡을 테니까."
엘리사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걱정이 태산 같아 마가렛과 수다나 떨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저녁 식사는 마가렛과 단둘이 했다. 설거지가 끝난 뒤 마가렛은 들뜬 기분으로 돌아갔다. 엘리사가 킹의 저녁을 차려놓고 식탁을 정리하고 있을 때 그가 뒷문으로 들어왔다.
아주 피곤해 보였다. 그는 헐렁한 흰색 카프탄을 입고 크림색으로 칠해진 벽을 뒤로 한 채 앉아 있는 엘리사를 카우보이모자 차양 밑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림 같아.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에 큰고 푸른 눈.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옷 색깔과 잘 어울려."
엘리사는 일어나며 쑥스럽게 웃었다. "당신이야말로 카우보이 같아요."
"그 말은 칭찬인가, 아니면 조롱하는 건가?"
엘리사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카우보이 같은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마가렛은?"
"집에 돌아갔어요. 배가 고프세요? 저녁은 다 준비됐는데 ."
킹은 흙투성이인 부츠를 내려다보면서 잠시 망설였다.
"짐과 같이 있었어. 작업 중에는 짐이 요리사 노릇을 하지. 냄비 가득히 스튜를 끓이고 토르티아(옥수수 가루를 이겨서 구운 빵)와 푸딩을 만들어 주었어." 그는 엘리사에게 의미 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가렛이 만든 저녁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서 버려주지 않겠어? 마가렛에게는 비밀로 해줘, 알겠지? 만일 그녀가 알게 되면 최소한 일주일은 까맣게 탄 비스킷만 먹어야 되니까."
엘리사는 가만히 웃었다. "알았어요."
"샤워를 하고 내려올게. 인사치레는 그때 하기로 하고." 킹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검은 눈과 시선이 마주친 엘리사는 가슴이 뛰었다 복도로 나가면서 그가 윙크를 던졌다. 엘리사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푸는 동시에 묘하게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킹은 계단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커피를 끓여주지 않겠어? 케이크가 있으면 더욱 좋고."
"알겠어요. 그보다 샤워하다가 물에 빠지지나 않게 조심하세요." 엘리사는 긴장을 풀기 위해 싱거운 농담을 건넸다.
"헤엄을 칠 줄 아니까 걱정할 것 없어." 그는 빙긋이 웃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엘리사는 커피와 케이크를 담은 쟁반을 거실로 옮긴 후 소파에 앉아 킹을 기다렸다. 얼마 후에 내려온 그는 깨끗한 데님 바지에 푸른 체크무늬 셔츠로 갈아입고 있었다.
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고, 상큼한 비누 향기가 풍겼다. 엘리사는 그가 듬직한 몸으로 옆에 앉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따라 드릴게요." 엘리사는 떨리는 자기 목소리에 놀랐다.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려고 서둘러 커피를 따랐다. 그런데 무거운 은제 포트에서 커피를 따르기 위해 테이블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 바람에 그의 무릎 바로 앞에 앉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긴장하고 있군. 왜지?"
"글쎄요."
그는 손을 내밀어 엘리사가 그의 두 다리 사이에 위치하도록 방향을 바꾸고 그녀의 달아오른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킹은 그녀의 시선에 반응하는 자신이 놀라웠다. 숨이 끊어질 정도로 엘리사가 탐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섹스만이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낯을 찌푸렸다 이런 기분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여자 앞에서는 이렇게 되지 않는다. 엘리사와 결합하고 싶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
엘리사 위로 몸을 구부린 그는 망설이듯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가져갔다. 그녀의 체취를 가슴에 받아들이면서 엘리사의 수줍은 듯하면서도 격렬한 키스에 빠져들었다. 그녀와는 언제나 이렇다. 샴페인 거품처럼 가볍게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든다. 입술이 닿는 순간부터 엘리사는 그의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도 그녀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서서히 키스의 깊이를 더해 가면서 엘리사를 무릎에 안아올렸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키스에 엘리사는 감동했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열어 그에게 뜨거운 키스를 재촉했다.
킹의 손이 허리에서 점차 가슴의 언덕 쪽으로 올라왔다.
그녀는 카프탄 속에 레이스 팬티밖에 입지 않고 있었다.
그의 능숙한 애무에 엘리사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지고, 귀에 들리는 것이라곤 그의 거친 숨소리와 애무당할 때마다 토해내는 자신의 나직한 신음 소리뿐이었다.
킹이 얼굴을 들었을 때 엘리사는 처음 대하는 그의 불가사의한 표정을 보았다. "왜 그러세요?" 그녀는 불안을 느끼며 물었다.
그는 엘리사의 가슴에 원을 그리면서 환희에 떠는 그녀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을 소유하고 싶어." 그는 신음하듯 말했다. "완전하게 엘리사와 하나가 되고 싶어."
"네, 좋아요." 엘리사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가말한 의미를 깊이 생각해 봤더라도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얼마 후 그를 잃게 될지도 모르지만, 이 순간만은 그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엘리사에게 첫 경험이라는 것 을 그도 알고 있다. 이 사실이 그에게는 특별한 일일 것이다‥‥‥‥
엘리사가 카프탄의 지퍼를 허리까지 내리자 킹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오랫동안 엘리사의 눈을 응시하다가 그녀에게 체중을 싣고 입술로 천천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엘리사의 가슴에서 배로, 배에서 허리로 그의 뜨거운 입술이 관능적으로 더듬어 내려갔다. 이런 식으로 애무당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엘리사는 당황하면서도 중심을 관통하는 듯한 전율에 몸을 비틀었다. 킹이 카프탄과 팬티를 벗겼을 때는 완전히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킹이 검은 눈을 욕망으로 불태우며 옷을 벗으려고 몸을 일으키자 엘리사는 불만의 소리를 내뱉었다. 킹이 다시 소파에 앉아 엘리사와 마주하여 무릎을 나란히 했을 때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부드러운 피부와 단단한 근육, 하얀 살갗과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가 직접 닿는 순간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두려워할 것 없어." 킹은 애를 태우듯 천천히 가슴과 가슴을 밀착시키며 속삭였다. 그의 탄력 있는 가슴을 느낄 때마다 엘리사는 입술을 떨었다.
엘리사는 그의 팔을 붙잡고 불안한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킹의 가슴에 얼굴을 밀어붙이며 물었다. "아플까요?"
"아니, 그렇게 아프진 않을 거야." 킹은 두 손을 그녀의 허리에 대고 대답했다. "키스하게 해줘."
킹의 손이 엘리사의 욕망을 부채질하듯 배와 엉덩이를 다정하게 애무했다. 두 몸이 빈틈없이 밀착되는 순간 그녀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안한 엘리사는 그의 허리를 꼭 부둥켜안았다.
"아아, 킹." 엘리사는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킹은 배를 꼭 댄 채 똑바로 엘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처음 보는 긴장된 표정을 띠고 있었지만, 검은 눈을 마주보고 있는 동안 그녀는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긴장이 서서히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애무당하는 동안 엘리사의 불안이 차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킹의 두 손이 실크처럼 매끄러운 피부를 더듬어 나갔다. 애를 태우듯이 가슴을 쓰다듬으며 굳어진 뾰족한 봉오리를 살짝 건드리자 엘리사의 몸은 정열의 불길에 휩싸여 바들바들 떨렸다. 그는 엘리사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목덜미와 어깨, 그리고 부드러운 가슴에 키스를 퍼부었다.
엘리사는 숨도 쉴 수 없었다. 등에 싸늘한 공기를 느낀 그녀는 눈을 감고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킹이 몸을 뒤로 젖혔다. 그 순간 엘리사는 딱딱해진 그의 중심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킹은 계속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두 손을 그녀의 허리에 대고 완만한 리듬으로 자기를 향해 끌어당겼다. 엘리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그의 허리 움직임이 점차 빨라지자 그녀는 신음 소리를 내지르며 킹을 부등켜안았다.
"킹‥‥ 어떡하죠?" 엘리사는 신음하면서 겨우 들리는 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아.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하지만‥‥ 이렇게..."
킹은 욕망으로 몸을 떨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엘리사의 굳어진 봉오리를 내려다보며 짙게 털이 난 가슴을 밀어붙였다. 엘리사의 신음 소리가 더 높아졌다. 그 소리가 킹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마음껏 소리 질러도 괜찮아." 그는 엘리사의 아랫입술을 가만히 깨물며 그녀의 가슴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하복부로 한 손을 미끄러뜨렸다.
엘리사는 본능적으로 홱 몸을 뺐다. 그러나 곧 그녀의 몸은 그가 하는 대로 맡겨지고, 그가 이끌어 내는 기쁨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눈물이 치솟아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킹은 촉촉이 젖은 엘리사의 중심을 조심스럽게 애무하면 서 그녀의 홍조 띤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려워하지 말고 몸에서 힘을 빼. 이제부터 마법을 보여주겠어. 엘리사를 여자로 만들어 주겠어."
킹이 약간 몸을 들었다가 단호하게 그녀의 중심을 향해 돌진했다. 엘리사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평생 처음 느끼는 찌르는 듯한 아픔에 놀라 그녀는 킹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잠시뿐이야." 킹은 그녀의 안에서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마음을 펀하게 가져. 이제 아프지 않을 거야."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두 손으로 엘리사를 힘껏 끌어당겼다.
두 사람이 완전하게 맺어졌을 때 킹은 그녀에게 다정하게 키스했다. 엘리사는 그의 어깨에 손톱을 세우고 입술을 깨물면서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지만 곧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킹은 그녀의 입술을 찾아 입을 맞추고 천천히 태고의 리듬으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혀 뜻하지 않았던 기쁨에 엘리사는 호흡을 멈췄다. 몽롱해진 머리로 이건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자 다시 예리한 쾌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또‥‥ 엘리사는 마구 몸을 떨면서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 역시 떨고 있었다.
"놀라워." 그가 속삭였다. "거칠고도 자유분방해. 처음엔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괜찮지?"
"네." 엘리사는 힘겹게 속삭였다. 그가 손을 음직이자 엘리사는 소리를 지를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참을 필요 없어." 킹은 불타는 눈으로 숨을 헐떡이면서 리듬을 빨리했다.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아. 참지 말고 소리 질러도 좋아, 아무리 큰 소리라도."
킹은 엘리사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번쩍 눈을 떴다. 이렇게 격렬한 기쁨이 있을 줄은 정말 상상하지 못했다. 엘리사의 흐릿해진 시야에 절정에 다다른 듯 몸을 젖힌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몹시 격앙되어 있었고 사랑의 기쁨에 빛나고 있었다.
엘리사는 소리 질렀다. 뜻하지 않은 끌은 충족감에 몸을 떨면서 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 경험하는 기쁨일 텐데도 그녀가 절정에 다다른 것을 보고 킹은 자부심을 느꼈다. 이윽고 자신도 처음 느끼는 황홀감에 사로잡혀 엘리사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며 끝을 향해 돌진했다.
잠시 후 엘리사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기쁨의 여운에 떨면서 엘리사의 몸을 달래주듯 어루만지고 있었다. 사랑에 넘치는 그 행동에 엘리사는 울고만 싶었다.
킹의 몸은 아직도 떨고 있었다. 엘리사의 감은 눈에 그가 따스하게 키스하자 그녀는 다시 애무를 원했다. 사랑받는 충족감에 감싸여 엘리사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킹이 엘리사의 귓불을 가만히 깨물었다. "엘리사가 느꼈다는 걸 알았어. 처음인 경우에는 대개 그렇지 못한데."
"나는 처음이에요. 하나님께 맹세해도 좋아요."
"혹시 충격 받지 않았어?" 그의 눈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엘리사의 마음이 변치 않았으면 좋겠는데."
엘리사는 그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감촉을 즐겼다. 킹의 몸이 긴장하는 걸 깨닫고 그녀는 자신이 미치는 영향력에 만족감을 느꼈다. "당신은 정말 능숙하더군요."
그는 지금까지 몇 명이나 되는 여자들을 상대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기쁨이 반감되고 가슴이 쓰라렸다. 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그와 맺어지고 싶은 이유는 충분하지 않은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던 오늘밤의 일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엘리사는 그 이상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몸을 움직여 킹의 가슴에 가만히 키스하면서 속삭였다. "당신을 즐겁게 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겠어요?"
그는 엘리사를 안아들고 이층의 침실로 옮겨 욕실로 데려갔다. 두 사람은 입술이 부어오르도록 키스를 나누고, 새로운 욕망에 불탈 때까지 서로를 씻어주며 애무했다.
"나는 지금 가임기가 아니에요." 킹이 침대에 뉘었을 때 엘리사가 말했다. "좀 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괜찮아. 아기가 생겨도 문제될 것 없어."
아기를 원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죠?" 엘리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조금 전 아래층에서 했던 것처럼 하면 돼." 킹이 키스하는 틈틈이 대답했다. "미칠 듯이 사랑을 나눈 두 사람이 이번에는 최고로 다정해지는 거야‥‥ 이렇게."
그의 말대로 킹은 완벽하게 다정한 연인이었다. 그는 깨지기 쉬운 유리 그릇 다루듯 조심스럽게 엘리사의 몸에 키스했다. 그녀와 하나가 되었을 때도 그 다정함은 변하지 않았다. 사랑의 기쁨이 밀려와 눈이 멀 정도로 정열이 극에 달했을 때도 두 사람은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엘리사는 까닭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킹은 땀에 절은 몸으로 그녀를 껴안고 키스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놀라웠어. 이렇게 큰 만족감을 느낀 건 처음이야."
"당신의‥‥ 그 사랑의 행위도 놀라웠어요."
"엘리사도 마찬가지였어." 킹은 그녀를 감싸듯이 껴안았다. "함께 잠들고 싶어, 엘리사. 보내고 싶지 않아."
엘리사는 그의 믿음직한 가슴에 편안하게 몸을 맡겼다. 마음 어딘가에서 안 된다는 경고가 들려왔으나 피곤에 지친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를 미워하진 않겠지?"
"왜 당신을 미워하겠어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었으니까."
"내가 원해서 그런 거예요."
"그래? 내가 몰아붙이는 바람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건 아니고? 킹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만약 임신하게 되면 곤란하겠지?"
"아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조금 전의 행위는 그럴 위험성을 가지고 있어."
엘리사는 그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나를 미워할 건가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
"아기가 생기면 까다로운 문제가 발생해요."
"아기는 신의 축복이야. 자, 그만 자도록 하지. 피곤해서 겨우 숨을 쉴 정도야. 만족을 모르는 작은 악마 같은 아가씨!."
"내가 작은 악마라구요?"
킹은 빙긋이 웃으며 엘리사를 끌어안았다. "어서 자도록 해."
얼마 잔 것 같지도 않은데 바깥에서 들리는 경작 기계 소리에 엘리사는 눈을 떴다. 옆에서 벌거벗은 채 잠들어 있는 킹을 보고 그녀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아침이에요." 그의 귀에 속삭였다.
"음?" 킹은 눈을 뜨더니 바로 손을 뻗쳐왔다. "당신을 원해."
엘리사는 몸을 밀어붙였다. "네, 나도 원해요." 그녀는 부끄러운 듯 속삭이면서 킹의 입술에 키스했다.
킹이 시간을 오래 끄는 바람에 충족감을 느끼고 일어날 생각이 났을 때는 이미 해가 상당히 높이 떴을 무렵이었다. 그는 기지개를 펴고 엘리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쪽을 봐. 옷을 입으면서 엘리사를 바라보고 싶어."
엘리사는 미소를 지으며 그가 옷장에서 청바지와 셔츠를 꺼내 입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옷을 입는 당신만 봐도 가슴이 뛰는군요."
"나는 옷을 입지 않은 엘리사를 보는 게 더 좋은데." 킹은 허리를 구부려 그녀의 가슴에 키스했다.
"옷을 입거든 아래층으로 내려와. 링컨으로 드라이브를 시켜줄게. 승마는 이제 그만이야." 그가 싱긋 웃자 엘리사는 얼굴을 붉혔다.
"좋아요."
킹은 그녀의 손을 자기 입술로 가져갔다. 밤새 사랑을 나누었는데도 다시 그녀를 안고 싶다. 이제 베스에 대한 생각은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엘리사와의 관계가 어떤 것이든 단순한 욕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가 울면 곁에서 위로해 주고 싶다. 킹은 한숨을 쉬었다 베스를 어떻게 해야 할까?
킹은 엘리사와의 결혼을 생각하자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매일 밤 잠자리에서 마법을 걸어올 것이다. 그는 가슴이 뛰었다.
엘리사가 그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죄책감 같은거 갖지 말아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
"그럼요. 정말이에요."
"나를 사랑하나?" 얼굴을 붉힌 엘리사를 보고 그가 물었다. "당신이라면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몸을 맡기진 않았을 거야. 엘리사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킹은 그녀의 턱에 손가락을 대서 고개를 쳐들게 했다. 엘리사의 얼굴에 <당신을 사랑한다>고 씌어 있었다. 킹은 깜짝 놀랐다. 왜 갑자기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지 어떤지에 신경이 쓰이는 걸까?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자유롭게 행동한 거야? 그래서 처음인데도 내게 기쁨을 줄 수 있었던 걸까? 그리고 당신도 절정을 느꼈잖아."
"당신은 모를 거예요, 왜, 마음이 쓰이나요?"
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엘리사는 내게 특별한 사람이야."
"연인은 아니라도‥‥." 엘리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계속 친구가 되어줄 수 있나요?"
그건 너무 잔인한 말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엘리사를 무릎에 끌어안았다. "바보로군. 어젯밤의 일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해?"
"그렇자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우리는 결혼할 사이야. 어젯밤의 일도 단순한 하룻밤의 유희가 아니고. 엘리사는 이미 나의 일부가 됐어. 믿어줘."
그의 단호한 말에 엘리사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킹의 목에 입술을 대고 키스했다.
"고마워요."
"그런 인사는 듣고 싶지 않은걸." 그는 엘리사의 눈을 들여다보고 나서 천천히 가슴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보수적인 남자 같아." 그는 자신도 뜻밖이라는 듯이 말했다. "다른 녀석이 엘리사에게 손가락하나라도 대는 날에는 녀석의 목을 꺾어 버리겠어."
"어머나!." 엘리사가 놀라서 입을 벌리자 킹의 입술이 그녀의 것을 탐욕스럽게 덮쳤다.
"엘리사는 내 사람이야." 그는 입술을 겹친 채 속삭였다. "결혼하게 되면 앞으로 80년은 어젯밤처럼 즐길 수 있어."
엘리사는 킹의 목을 끌어안고 그가 얼굴을 들 때까지 계속되는 뜨거운 키스를 즐겼다.
"자, 이제 옷을 입어. 그렇지 않으면 또 사랑하고 싶어지겠어." 킹은 아쉬운 듯 입술을 떼며 말했다.
"대단하군요."
"당연하지." 킹은 자기가 엘리사를 처음으로 만족시킨 남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자신감이 여간 아니군요."
킹은 그녀를 침대에 쓰러뜨리면서 강력하게 입술을 밀어붙였다. "물론이야. 자, 일어나."
킹은 그녀에게 싱긋 웃어 보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행복한 기분이 든 적은 없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사는 얼른 옷을 입고 가만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를 정리하려고 둘러보니 언제 했는지 킹이 이미 손질을 한 뒤였다. 엘리사는 사랑받고 있다는 행복감에 감싸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킹은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부엌으로 들어서는 엘리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턱을 치켜들고 사나이다운 미소를 떠올렸다. 엘리사의 몸에 시선을 던지는 그의 검은 눈이 불타올랐다.
엘리사는 그의 다정한 키스에 반응하고 옆에 앉았다.
"자, 이거‥‥." 킹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그는 엘리사의 약지손가락에 조심스럽게 에메랄드 반지를 끼워주었다. 금으로 세공한 고풍스러운 반지는 그녀의 손가락에 꼭 맞았다. 엘리사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할머니의 반지야. 우리 집안의 장남에게 물려주는‥‥."
"킹." 엘리사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녀는 몸을 떨면서 킹의 가슴에 몸을 던졌다.
아아, 이렇게 된 책임감과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그는 나를 좋아하고 또 내 몸을 즐기고는 있지만 날 사랑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사랑해 줄 날이 올지도 모른다.
"사랑해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엘리사가 말했다.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눈이 기쁨으로 빛나는 것을 그녀는 보지 못했다. "사랑해요, 너무너무."
킹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엘리사를 껴안고 달래듯이 가만히 흔들어 주었다. 얼마나 부드러운 몸인가! 정말 멋지고 귀여운 여자다. 그는 꽃향기와도 같은 엘리사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하루 종일 이렇게 있고 싶다. 킹은 눈을 감았다.
"저, 방해해도 될까요?" 마가렛이 입구에 서서 두 사람에게 애정어린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이것 보세요." 엘리사는 킹의 무릎에 앉은 채 자랑스럽게 손을 쳐들어 보였다.
"어머, 정말 멋져요!." 마가렛이 외쳤다. "드디어 결혼이로군요!."
"흠, 그래요." 킹이 활기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벤에게 말해줘야겠어요." 마가렛은 싱글벙글 웃으며 나갔다.
엘리사가 뭐라고 입을 열려 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받지." 킹은 엘리사를 무릎에서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복도로 나가 수화기를 들고 잠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다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도대체 보비가 어떻게 됐다는 거요? 그가 조급하게 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베스. 내 잘못이요‥‥이것 봐은 침착해야 돼요 곧 갈 테니 거기 가만히 있어요‥‥괜찮아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킹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호주머니를 뒤져 자동차 열쇠를 꺼냈다. "보비가 말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연락이야. 어제 저녁에 돌아온 베스와 둘이서 아침부터 승마를 했다는군. 뇌진탕을 일으킨 데다 한쪽 다리가 부러진 것 같대. 곧 병원으로 가봐야겠어. 베스가 빨리 와달라는군."
킹은 이 말만 남기고 서둘러 나가 버렸다. 엘리사는 망연자실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방금 결혼을 신청한 여자를 이렇게 내버려두고 베스에게 달려가다니. 엘리사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이것이 두 사람의 미래를 암시하는 거라면 그야말로 지옥이 아닐 수 없었다.
10
잠시 후에 돌아온 마가렛은 싸늘해진 커피잔을 들고 멍하니 앉아 있는 엘리사를 발견했다.
"킹스턴은?"
"보비가 말에서 떨어졌대요. 그래서 병원에 갔어요."
그러나 마가렛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어요. 보비는 승마에 능숙하지 못하거든요. 그래,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고 하던가요?"
"모르겠어요. 베스가 확실하게 말하지 않았나 봐요."
마가렛은 의자에 앉아 엘리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젊은 아내는 시간이 남아돌고, 남편은 너무 바쁘고‥‥ 나는 든 도련님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쭉 지켜봤어요. 보비는 형에게 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에요. 여기 와서 식사를 할 때도 사업에만 넋이 빠져 있죠 베스는 그런 남편을 슬픈 눈으로 지켜보고 있구요. 베스는 가정적으로 고생을 많이 겪은 사람이기 때문에 애정에 굶주려 있죠."
마가렛은 그 뒤로도 30분이나 수다를 떨었다. 엘리사도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생활력 없는 어머니 사이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빈곤을 겪으며 자란 베스에게 연민을 느꼈다. 하지만 베스가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는 말을 듣고 킹이 한달음에 달려갔다는 사실이 엘리사에게는 더 중요했다 베스를 향한 그의 마음이 과연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일까?
"그가 베스에게 갔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나요?" 느닷없이 마가렛이 물었다.
"네, 물론이에요 만일 킹이 부탁했다면 나도 함께 갔을거예요." 엘리사는 눈물을 참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베스에게 용기를 줘야 하니까요."
"베스는 보비를 사랑하고 있어요 너무 외로운 나머지 때때로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끌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킹스턴은 아가씨에게 결혼을 신청했잖아요."
"네. 하지만 그건‥‥." 엘리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책임감을 느끼는 거죠."
"그럴 거예요.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내가 늘 가르쳤어요." 마가렛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정교육은 내가 맡아 했지. 그의 친아버지는 그가 꼬마였을 때 집을 나가 버렸거든요. 부인의 얼빠진 눈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말이에요 좋은 분이었죠."
"킹의 친아버지는 살아 계신가요?"
"물론 살아 계세요 페닉스에 있는 양로원에. 괜찮은 곳이에요 한 달에 한 번쯤 그곳을 찾아가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곤 해요."
"왜 킹에게는 그 얘길 하지 않으셨어요?" 엘리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면 킹스턴은 펄쩍 뛸 거예요.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일부러 알릴 필요가‥‥."
"하지만 킹도 알아야 해요 어쨌든 친아버지인걸요."
"나는 그 역할을 하기에 적당한 사람이 못 돼요." 마가렛은 엘리사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가씨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킹스턴도 아가씨의 말이라면 들을 거구요."
"그럴까요?" 엘리사는 힘없이 웃으며 에메랄드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그 싸늘한 감촉이 두 사람의 관계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킹의 책임감을 만족시키기 위한 형식적인 관계‥‥
"그를 원한다면 싸워야 해요 그는 아가씨를 좋아하고 있어요. 베스에겐 연민을 느끼는 것뿐이에요. 보비와 막 결혼했을 때의 베스는 꼭 어린 아이 같았어요. 킹은 두 사람의 싸움을 노상 중재해 왔죠."
엘리사는 가느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연민만으로도 부족하죠." 마가렛은 이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자, 아침 식사를 하고 힘을 내세요 그나저나 보비의 입원이 길어지면 손님들이 밀어닥치겠군요."
엘리사는 마가렛의 등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킹이 베스를 여기 데려온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베스에게는 킹과의 응어리를 풀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두려워했던 대로 킹은 창백한 얼굴로 흐느껴 우는 베스를 데리고 돌아왔다. 가슴을 깊게 판 값비싼 실크 블라우스에 승마 바지 차림의 그녀는 아주 멋지고 섹시했다. 곱게 다듬은 금발 머리를 어깨예 늘어뜨리고 마치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이 킹에게 바싹 기대고 있었다.
"이층에 데려다 주고 오겠어." 킹이 엘리사에게 말했다.
"마가렛에게 옷을 갈아입도록 도와주라고 좀 전해줘. 그리고 엘리사의 가운을 좀 빌릴 수 있을까?"
"네, 좋아요." 엘리사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보비의 상태는 어때요?"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킹은 베스의 어깨를 다정하게 안고 말했다. "다리의 골절과 심한 두통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지만, 며칠만 지나면 퇴원할 수 있다더군."
"그만하길 정말 다행이에요." 엘리사는 진심으로 말했지만, 두 사람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두 벌밖에 없는 가운 중에서 푸른색을 연적에게 빌려주기로 했다. 그녀는 천천히 아래층으로 돌아왔다. 마가렛은 베스에게 수프를 먹이고 있었고, 킹은 밀렸던 일을 다시 시작한다. 역시 그는 베스를 좋아하는 것이다. 엘리사는 절망에 빠졌다.
저녁 때, 킹이 엘리사를 내버려두고 베스의 방에서 식사를 했기 때문에 마가렛은 잔뜩 성이 났다.
"어쩌면 그럴 수가!." 그녀는 엘리사 앞에 스튜 접시를 내려놓았다. "눈이 멀었다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요." 엘리사는 약지에 낀 허황된 사랑의 증표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마이애미로 돌아가겠어요."
"그건 안 돼요." 마가렛은 화가 난 듯이 말했다. "그러면 이 집엔 킹스턴과 베스 두 사람만 남게 되고, 그러면 온 마을에 소문거리가 될 게 뻔해요. 아가씨의 부모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실 거예요 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식사를 하세요."
소문거리가 되건 말건 나는 여기를 떠날 것이다. 킹과 베스가 같이 있는 걸 보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 그녀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층에 올라갔을 때 킹은 아직 베스의 방에 있었다. 마가렛이 일부러 열어놓은 문틈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킹이 행복한 듯이 베스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충격이었는데,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책임감을 느껴요." 베스가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킹. 그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잘 알고 있잖아요? 나는 너무 쓸쓸했어요."
"당신 탓이 아니오. 그 종마는 위험하니까 타지 말라고 했었는데 ‥‥ ."
"아뇨, 내가 이혼하자고 했기 때문이에요." 베스가 킹의 말을 자르며 소리쳤다. 엘리사는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아, 킹. 사랑해 주지 않는 사람과는 더 이상 살 수 없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엘리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문을 두드렸다. 별안간 나타난 엘리사를 보고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좀 어떠세요?" 엘리사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물었다 .
베스는 멋쩍어하면서 킹의 손을 놓았다 "네, 한결 좋아졌어요. 고마워요.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잊고 있었어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무리가 아니죠." 엘리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비의 일은 정말 유감스러워요. 하지만 곧 회복될 거예요."
"며칠이면 퇴원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베스는 말하고 나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면 다시 서류와 전화에만 매달리겠죠. 지금도 사방에 전화를 걸라고 야단이거든요."
엘리사는 킹의 시선을 피하면서 끝까지 의연하게 말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어요. 몸조심하세요."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으로 방을 나섰으나 킹이 뒤따라 나오기 전에 베스에게 잠간만 기다리라고 속삭이는 것을 듣고 몸이 굳어졌다. 엘리사는 자기 방 앞에서 등을 꼿꼿이 펴고 그를 기다렸다.
"베스가 건강해서 다행이에요." 엘리사는 억지 웃음을 띠고 말했지만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플로리다에서 그와는 절대로 결혼하기 않을 거라고 맹세했을 때의 예감이 들어맞았다. 언젠가는 베스가 자유의 몸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예감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킹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아직 혼란에 빠져 있어.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해."
"그럴 테죠."
"엘리사‥‥ ."
엘리사는 짐짓 미소를 띠고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죠?"
"어젯밤의 일 말인데‥‥."
"어젯밤의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엘리사는 에메랄드 반지를 빼 킹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의 손을 보니 피부에 와 닿았던 따스한 감촉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부끄러운 나머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이 원하던 대로 되었군요."
킹은 깜짝 놀랐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어젯밤에 그토록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었고,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우리는 결혼할 사이다. 그래서 안심하고 베스를 데려왔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내가 뭘 원했다는 거지? 그리고 내가 언제 반지를 되돌려달라고 했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거예요." 엘리사는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베스가 하는 말을 들었어요. 보비와 이혼한다면서요? 그게 가장 좋을 거예요 당신과 베스, 두 사람이라면 원만할 수 있을 거예요."
킹의 넓은 가슴에 시선을 보낸 엘리사는 셔츠의 첫 번째 단추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베스 역시 그 가슴의 감촉을 즐긴 것일까? 엘리사는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 울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추스렸다.
정신이 나간 게 아닌가 싶어 킹은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젯밤에 승낙한 결혼을 벌써 취소하다니. 물론 베스는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는 없어질 것이다. 베스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물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원하는 것은 엘리사뿐이다. 그런데도 엘리사는 반지를 되돌려 주었다. 킹은 별안간 화가 치밀었다.
"엘리사, 어떻게 생각해?" 킹은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차갑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다니, 뭘요?"
"당신은 임신했을지도 몰라."
"임신했더라도 그것은 내 문제이지 당신과는 관계가 없어요."
"뭐라고!." 킹이 분개해서 소리쳤다. "내 문제이기도 해. 그 사실을 잊어선 안 돼."
책임감 때문에 하는 말인 줄 알고 엘리사는 점점 더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어쨌든 나는 내일 이곳을 떠나겠어요."
킹은 심호흡을 하면서 분노에 타는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래? 하룻밤뿐인 연극을 끝내고 이제 나는 간다, 이 말인가? 엘리사, 나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잖아?"
"그건 어젯밤의 얘기고,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요. 사랑다운 사랑도 받지 못하면서, 아내의 존재조차 잊고 있는 사람에게 묶여서 살 수는 없어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아요. 베스에게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당신이 달려가는 그런 결혼 따위는 하기 싫어요."
"보비가 사고를 당했어. 달려가지 않을 수가 없잖아?"
"그에게가 아니라 그녀에게 달려간 게 문제죠."
"베스는 위기에 처하면 어쩔 줄을 몰라서 쩔쩔 매는 타입이야. 동생이 돌볼 수 없다면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어." 그는 자기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심리 분석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엘리사가 하는 말은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알고 있어요. 확실하게 눈을 떴어요. 이젠 지긋지긋해요. 베스는 연약해서 보호가 필요하지만, 나는 강하고 무감각하기 때문에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는 논리로군요. 어서 베스한테 가서 마음껏 위로해 주세요 나는 짐을 꾸려야겠어요." 엘리사는 방문을 열고 한 발 들여놓으면서 소리쳤다.
엘리사의 완강한 저항에 킹은 버럭 화를 냈다. "부모님에게는 대체 뭐라고 설명할 거지?"
"향수병에 걸렸다고 하겠어요." 엘리사는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손을 뒤로 해서 문을 쾅 닫았다. 멀어져 가는 킹의 발소리를 듣고 그녀는 자선의 어리석음에 얼굴을 붉혔다. 베스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그가 내 편이 되어줄 리 없다. 엘리사는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몸을 던지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펑펑 울었다.
다음날 아침, 엘리사는 상당히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디자인한 순백색 바지 정장에 빨간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긴 머리를 틀어 올린 뒤 정성들여 화장해서 세련된 여성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눈물 자국을 감추기 위해 장밋빛 선글라스를 썼다.
"좋은 아침이에요." 식당에 들어선 엘리사는 깜짝 놀라는 킹에게서 창백한 얼굴을 한 베스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짐짓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행하기에는 정말 좋은 날씨예요. 마가렛, 전 토스트와 커피만으로 충분해요 너무 많이 먹고 비행기를 타면 속이 거북하거든요."
마가렛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 돌아갈 생각인가요?" "물론이죠. 두 시간 안에 공항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는데 택시를 좀 불러주세요."
"내가 데려다 주지." 킹이 얼른 나섰다.
"괜찮아요. 당신은 병원에 가서 보비를 돌봐야죠." "나는 이혼할 생각이에요." 베스가 뜬금없이 엘리사에게 말했다.
"그럴 것 같았어요." 엘리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아마 이혼인 가장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르죠." 보비보다 더 당신에게 어울리는 상대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는 너무 당신에게 무관심했어요."
"사업 때문에 바빠서 그랬던 거예요." 예상 외로 베스가 보비를 감싸듯이 말하는 것을 보고 킹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가렛이 토스트와 블랙커피를 가지고 왔다.
"머리가 아픈가?" 킹이 엘리사의 선글라스를 쳐다보며 물었다.
"네, 조금." 엘리사는 선글라스에 손을 가져가면서 말했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심하지는 않으니까 걱정 마세요."
별안간 킹이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치는 바람에 베스는 깜짝 놀랐다. "나는 돌아가라고 말한 기억이 없어!."
"나는 바보가 아니에요 당신도 방해물이 어서 사라져 주기를 바라고 있잖아요?" 엘리사가 냉정하게 대꾸했다.
"나는 당신에게 결혼을 신청했어!."
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결혼? 당신과 결혼하느니 차라리 브레이크 도노반과 하는 편이 낫겠어요!."
"좋아, 그렇게 해. 그는 혼자 사니까."
엘리사는 몸을 부르르 떨고 일어섰다. 그의 머리에 의자를 던지고 싶었다. 인디언 추장처럼 오만하게 노려보는 검은 눈의 악마. 더 이상 그의 위협에 겁먹지 않을 것이다.
"허락해 줘서 고맙군요 그렇게 하죠." 엘리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홱 등을 돌려 이층으로 올라갔다. 커피와 토스트에는 손도 대지 못했지만, 킹과 베스가 함께 있는 모습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잠시 후, 마가렛이 올라와 택시가 도착했다는 말을 전한다.
"엘리사, 제발 가지 마세요." 그녀는 엘리사가 생각을 바꾸도록 권했다.
"베스와는 싸워서 이길 수가 없어요. 킹은 그녀를 사랑하니까요. 어쩔 도리가 없어요."
"당신은 그를 사랑하잖아요? 마가렛이 다정하게 묻는 바람에 엘리사는 그만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킹스턴도 곧 눈을 뜨게 될 거예요. 남자들이란 때때로 눈이 멀 때가 있어요. 지금은 곁눈질을 하고 있지만, 아가씨가 없어서 쓸쓸해지면 깨닫게 될 거예요 나를 믿어주세요."
"그럴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엘리사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코를 푼 다음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내 얼굴이 심한가요?"
"전혀 안 그래요. 얼굴을 똑바로 드세요. 희망을 버리면안 돼요. 가엾게도 보비는 병원에서 아무 일도 못하고‥‥."
"일단 일에서 벗어나면 그도 사태를 깨닫게 되겠죠."
"그래요,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네. 그동안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마워요."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기란 쉬운 일이에요.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마 어려울 거예요. 하지만 당신의 따뜻한 마음은 잊지 않을게요."
엘리사는 여행 가방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킹의 서재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문 앞을 지날 때 킹에 게 안긴 베스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그를 쳐다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 이상의 충격이 또 있을까? 엘리사는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항해 걸어갔다.
"누구지?"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킹이 말했다.
커튼을 열고 내다보니 마침 엘리사가 택시에 오르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택시가 기세좋게 출발했다.
"원, 이런." 킹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봐야겠소."
"지금요?" 베스가 불안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 이야기는‥‥."
"나중에 얘기해도 되잖소." 킹이 다급하게 말을 잘랐다.
베스도 틀림없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즉 그의 태도는 책임감과 연민에서 나온 것이고, 그녀의 행동은 어쩌지 못할 고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결론 말이다.
킹은 베스의 금발을 쓰다듬었다. "베스, 당신은 좋은 사람이오. 하지만‥‥."
"알아요 다만... 나는...."
"돌아와서 자세한 얘기를 나눕시다. 그리고 보비한테 가는 거요 알았소?"
킹은 링컨에 올라 제한 속도를 위반하면서 빠른 속력으로 공항을 향해 달렸다. 틀림없이 베스와 같이 있는 것을 보고 오해했을 것이다. 빨리 오해를 풀지 않으면 안 된다.
서두른 덕분에 그는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는 엘리사를 만날 수 있었다.
고개를 든 그녀는 급히 달려온 기색이 역력한 구겨진 청바치 차림의 킹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지만, 마음의 상처가 치유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쓴 채로 낯선 사람을 쳐다보듯 그를 바라보았다.
킹은 탑승 수속을 밟는 사람들을 곁눈질하면서 엘리사 옆에 앉았다. "할 얘기가 있어."
"이미 끝난 일이에요." 엘리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엘리사는 오해하고 있는 거야."
"당신의 사생활에는 흥미가 없어요."
"잠자코 내 말을 들어 봐. 시간이 없어."
"그러면 짧게 말하세요."
킹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심호흡을 했다. 그는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결혼하지 않겠다면 그래도 좋아. 하지만 만약 임신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곧 알려줘. 연락하겠다고 약속해. 아니면 엘리사의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이 추잡한 사건에 대해 모두 털어놓겠어."
추잡한 사건!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추잡한 하룻밤의 장난 같은 것은 베스와 결혼하면 곧 잊어버리게 된다는 말이로구나. 엘리사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겨우 조금 남아 있던 자존심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킹은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이 그녀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었다.
"연락할 일이 있으면 하겠어요." 엘리사는 겨우 말했다.
"행여나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마세요. 사랑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었으니까."
킹의 몸이 굳어졌다. "거짓말!."
"그것은 <건초 더미 위에서의 가벼운 유희>였어요."
"그렇지 않아."
엘리사는 가방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그녀가 타려는 비행기의 탑승을 재촉하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그만 가야겠어요."
킹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엘리사, 부탁이야‥‥ ."
"가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카우보이 아저씨."
"부탁이야. 잠깐만 내 말 좀 들어 봐." 지나가던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말했다.
"아뇨." 엘리사의 푸른 눈은 내 마음을 바꿀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도전을 단고 있었다.
킹이 한두 마디 속삭이는 말에 엘리사는 귀까지 발갛게 물들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킹은 모자를 벗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바보 같으니리구! 그리고는 발소리도 요란하게 공항을 나왔다. 대체 그녀가 뭐란 말인가! 가고 싶다면 얼마든지 가도 좋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것이 <건초 더미 위에서의 가벼운 유희>였다고?
킹은 자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경험에 대해 엘리사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내뱉은 한 마디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집에 돌아오자 이번엔 마가렛이 마치 적에게 도전하는 듯한 기세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쫓아 버리고 왔나요?" 그녀는 킹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그것 참 축하할 만한 일이로군요. 처음으로 재산이 아니라 도련님을 사랑한 여자를 쫓아 버렸으니까요 이제 어떻게 되든 난 더 이상 모르겠어요. 여기서는 보비의 부인이..."
"제발 입 좀 다물어요!." 킹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 질렀다.
"위협해도 소용없어요! 베스라면 겁을 먹겠지만 나는 달라요."
킹이 마가렛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겁을 먹다니 그게 무슨 뜻이오?"
"도련님이 돌아온 걸 보고 그녀는 이층으로 도망갔어요. 도련님과 엘리사가 싸움을 시작했을 때 그녀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어요. 베스는 엘리사와는 달라요. 술주정뱅이 아버지에다 집안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는지 도련님도 기억하고 있잖아요? 베스는 깊이 상처받고 있어요. 도련님 같은 남자는 베스에게는 아무런 필요도 없어요!."
엘리사가 사라진 데다 마가렛마저 이 모양이다. 킹은 저도 모르게 가정부를 노려보았다.
"모자는 어떻게 했나요?"
"공항에서 쥐를 잡을 때 사용했죠." 그가 대답했다.
"그렇겠군요. 정상적인 모자라면 도련님 머리 위에 올려져 있을 리 없죠."
킹은 위스키가 필요했으나 아쉬운 대로 블랙커피가 든 잔을 손에 들고 자리에 앉았다. 허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베스는 아직 이층에 있다. 어쩌면 그녀는 나를 무서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리사는 다르다. 그녀는 킹이 화를 내도 움츠려들지 않으며, 다른 점에서도 그와 대등하게 행동한다. 킹은 눈을 감고 그날 밤의 엘리사를 떠올렸다. 눈에 정열을 불태우며 그에게 몸을 맡기던 엘리사, 절정에 다다르자 신음 소리를 내며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그녀를 말이다.
킹은 몸이 뜨거워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제서야 베스가 문 앞에 서서 망설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베스는 금발이고 미인이었으나, 그의 눈에는 미소 짓고 있는 엘리사의 푸른 눈과 검은 머리만 어른거렸다.
"왜 그러고 있소? ."그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내게 화가 났나요?" 베스가 주눅 든 목소리로 조그맣게 물었다.
킹의 얼굴에서 엄한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어린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는 베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킹은 다정하게 말했다. "엘리사를 제지하기 못했소. 그녀는 당신이 나와 결혼하기 위해 보비와 이혼하려는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오. 게다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런 그녀를 이해시키지 못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그렇소. 단지 그것뿐이오."
"내 탓이에요 그렇죠?" 베스는 그의 눈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나는 외로웠던 거예요 당신은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고, 친절하게 내 하소연도 들어줬어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일부러 취했던 적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의 인생을 망치게 했다면 정말 미안해요."
"신경 쓸 것 없어요. 어떻게든 될 테니까."
베스는 그의 가슴에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엘리사는 당신을 사랑하는군요?"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한데 지금은 잘 모르겠소."
베스는 알겠다는 듯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어요. 당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니까요."
"받은 것만큼 되돌려 주는 여자지. 그게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이오." 그는 베스의 눈을 들여다보며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정말 이혼할 생각이오?"
베스는 한숨을 쉬었다. "아뇨. 보비는 따분한 사람이지만죽고 싶을 만큼 사랑하고 있어요. 내가 돈 때문에 결혼한 게 아니라는 사실만 알아준다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보비에게 이야기하면 되지 않소?"
"이야기하다니, 뭘 말인가요?"
"뻔한 것 아니오?"
베스는 난처한 듯이 머뭇거렸다. "하지만.."
"기운을 내요." 킹은 검은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네, 노력해 보겠어요.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으니까요." 베스가 결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이오." 킹은 중얼거리면서 엘리사에 대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의 행위를 가벼운 유희라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부터 확실하게 절차를 밟았어야 했는데. 그녀를 안고 교회에 데려갔어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내가 베스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째서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킹은 베스가 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엘리사가 냉정을 되찾아 두 사람이 서로 떨어져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엘리사는 틀림없이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11
엘리사는 마이애미로 돌아가지 않았다. 냉정한 마음으로 부모를 대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메이카행 비행기를 탔다. 더 이상 킹과 이웃해서 살 수는 없으므로 코티지를 정리해야 했던 것이다.
맨 먼저 킹의 집으로 가서 워치프를 안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두 번 다시 이 집을 찾지 않을 것이다.
워치프는 엘리사에게 아양을 떨듯이 시선을 맞추고, 그녀가 짐을 꾸리는 동안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었다. 하루에 모든 일을 끝낸다는 것은 무리였다. 앵무새를 미국에 데려갈 허가 신칭서를 쓰고, 부동산 업자와도 만나야 했다. 코티지를 팔고 다시는 자메이카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마치 고향을 떠나는 듯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자메이카에 다시 돌아올 수는 없었다. 임신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더구나 그러했다. 부모에게 어떻게 말할지는 아직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엘리사는 사흘 동안 섬에 머물면서 모든 준비를 끝내고 튼튼한 이송용 새장에 넣은 워치프와 함께 자메이카를 떠났다.
몇 시간 후 엘리사는 마이애미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아버지는 매주 금요일에 열리는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부엌에 있다가 엘리사가 앵무새와 함께 들어서는 걸 보고는 그만 비명을 질렀다.
"아니, <녹색 모기>로구나!."
"괜찮아요. 곧 마음에 들게 될 거예요."
"걱정했던 일이 현실로 되다니." 티너는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엘리사는 새장을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위치프가 눈을 빛내며 귀여운 소리로 울었다.
"사랑해. 너는 귀여워, 귀여워!." 그리고는 휘익 휘파람을 불었기 때문에 티너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허리를 구부려 새장을 들여다보았다. 워치프는 다시 휘파람을 불며 눈을 빛냈다.
"그런데 이 새는 자메이카에 있었잖니? 오클라호마에 간 네가 자메이카에 있던 새를 데리고 오다니 영문을 모르겠구나. 킹스턴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좀 긴 얘기가 될 것 같아요. 우선 차에서 짐부터 내리고 옷을 갈아입어야겠어요. 커피를 끓여주겠어요? 그때 이야기할게요."
"무슨 일이 있었구나." 티너는 한숨을 쉬었다.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죠."
"원, 이를 어쩌나."
"일찍 깨닫게 된 게 다행이에요. 하마터면 결혼해서 그의 인생을 망칠 뻔했거든요."
"그 사람이 프로포즈하더냐?"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지를 줬어요." 그녀는 힘겹게 미소를 띠었으나 다음 순간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되돌려 주었어요." 그녀는 어머니의 팔에 안겨 흐느꼈다. "킹은 동생의 아내인 베스를 사랑해요 그녀는 남편과 이혼할 생각인데, 킹은 내게 반지를 준 뒤에 그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나는 그를 자유롭게 해줬어요. 무리하게 구속하면 미움을 받게 될 것 같아서요."
티너는 흐느껴 우는 엘리사를 보고 딸이 마음으로부터 킹을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단념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티너는 조용히 미소를 떠올렸다.
"얘야, 그만 울음을 그치렴. 네 결정이 옳았어. 단념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야."
"자메이카에 가서 집을 부동산 업자에게 처분해 달라고 부탁하고 워치프를 데려왔어요. 잠시 여기 있어도 될까요?"
"그야 물론이지. 안 될 이유가 없잖니? 여기는 네 집이기도 해."
엘리사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었다.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끝까지 말할 자신이 없었다. 엘리사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티너는 딸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아버지에게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구나." 그녀는 다시 조용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어려움에 처해서야 비로소 인간을 알게 된다는 격언을 알고 있니? 너는 지금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배우고 있는 거야. 자, 나하고 같이 가자."
엘리사는 망설이면서 서재로 갔다. 아버지는 책상 앞에 앉아 근엄한 얼굴로 성경책과 씨름하고 있었다.
"여어, 엘리사." 엘리어스의 눈이 빛났다. "놀러온 거니?"
"잠시 여기 있게 될 것 같아요." 엘리사는 대답과 함께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원, 이런." 엘리어스는 당황해하면서 아내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소?"
티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젊은 목사와 미혼모 이야기를 해주지 않겠어요?"
그는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물론이지 커피를 마실 수 있을까?"
"어렵지 않은 부탁이에요." 티너는 서재를 나가면서 가만히 문을 닫았다.
엘리어스는 딸을 의자에 앉히고 애정이 넘치는 눈으로 미소를 떠올렸다.
"엘리사, 지금부터 내가 아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해주마. 그러니까 벌써 26년 전의 일이구나. 스물세 살의 부랑자 같은 젊은이가 있었어. 노상 싸움질만 하고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이 없는 젊은이였지. 그는 알코올 중독자처럼 되어 베트남에서 돌아온 뒤 식료품점에 강도질을 하러 들어갔다가 그만 붙들렸어." 엘리어스는 잘 닦인 검정색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교도소에 들어가 신과 인간 모두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한 순회 목사가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됐지. 그 죄수에게는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정사>로 인해 그녀는 임신한 몸이었지. 아기가 곧 태어날 텐데도 연인이 교도소에 갔기 때문에 그녀는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었어. 목사는 그 젊은이를 변호해 줄 유능한 변호사를 찾았지. 목사는 초범이었던 젊은이가 석방되자 일라리를 구해주고, 서둘러 두 사람을 결혼시켜 작은 아파트에 살도록 했어."
엘리사는 혹시 그 젊은 목사라는 사람이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눈물은 거의 말라 있었다. "정말 훌륭한 분이 시군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목사의 행동에 마음으로부터 감동한 젊은이는 신학교에 들어가 좋은 일을 해서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했어."
"그 목사는 젊은이의 결심에 기뻐했겠군요."
아버지는 슬픈 표정을 떠올렸다. "글쎄, 그건 알 수가 없구나. 예비역이었던 목사가 베트남 전쟁에 소집되었거든 그 젊은이는 찰과상 하나도 입지 않고 돌아왔는데, 목사는 다낭에 도착한 바로 그날 지뢰를 밟았어." 아버지는 분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목사는 자신이 구한 젊은이가 달려와 성직에 종사하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눈을 감고 말았어."
"그럼, 바로 그 젊은이가 아버지로군요?"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와 네 어머니란다. 나는 스물세 살이었고, 네 어머니는 갓 스물이었어." 그는 엘리사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자,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겠니? 힘이 될지도 모르니까."
엘리사는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태어난 이후 지금처럼 아버지의 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신이 지켜보신다는 사실이야. 인간이란 절망의 밑바닥에 빠졌을 때에야 비로소 도움을 구하게 마련이란다."
엘리사는 아버지를 꼭 껴안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평안한 마음이었다. "나도 도움을 구하게 될지 몰라요."
"우리가 있지 않니? 언제라도 힘이 되어주겠다."
엘리사의 이야기를 듣고 난 아버지는 그녀를 부엌으로 데려가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했다. 나무라는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티너는 남편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딸에게 사랑을 담아 미소를 보냈다. "괜찮아.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어."
엘리사는 두 손을 움켜쥐고 불안해하며 말했다. "임신했을지도 몰라요."
"그는 알고 있니?" 어머니가 물었다.
"네. 만일 임신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반드시 연락하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그는 베스를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사람을 임신했다 는 이유로 구속할 수는 없어요."
"현명한 생각이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러나 사랑이란 가꾸지 않으면 곧 시들어 버리게 돼. 그가 지금은 베스라는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해도 아기가 태어나면 곧 잊어버리게 될 거다."
"아니에요. 두 사람은 맺어질 거예요 그녀는 지금의 남편과 이혼할 예정이거든요." 엘리사가 말했다.
"과연 그럴까?" 아버지는 안경 너머로 엘리사를 바라보고 빙긋이 웃었다. "음,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어서 저녁을 먹으렴."
엘리사는 부모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티너가 가느다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무엇 때문에?"
"혹시 아기가 생기면‥‥ ."
"나는 아기를 무척 좋아해."
"나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만‥‥."
"우리는‥‥." 티너가 엘리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몇 년 전부터 미혼모를 교회에 데려와 함께 아기들을 기르고 있어. 아기에게는 죄가 없잖니? 그리고 아기들은 모두 귀엽구. 자, 이 햄을 먹어보렴. 뱃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아기의 몫까지."
엘리사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럴 때는 어떤 설교를 하세요?"
"신이 용서하시거든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돼 우리는 신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벌하려는 경항이 강해."
아버지는 어떻게 내 마음을 아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엘리사는 얼굴을 붉혔다. "모두가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엘리어스가 아내에게 윙크했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단다."
워치프는 그 후 엄청난 소란 끝에 새장에 옮겨졌다. 엘리사는 앵무새를 방으로 데려가 경고를 주었다. "조용히 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쫓겨날지도 몰라."
"살려줘!." 워치프가 외쳤다. "새장에서 나가고 싶어!."
"어서 자거라." 엘리사는 워치프의 부리를 끌어당겨 머리에 키스했다. 워치프는 아양을 떨 듯이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엘리사는 다시 한번 키스해 주고 새장에 덮개를 씌웠다.
엘리사는 잠자리에 누워 지금쯤 킹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행복할까?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또한 그녀는 임신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의 아기를 낳고 싶었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그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다. 엘리사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사랑해 주는 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신에게 감사드리며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다짐했다.
그러나 기도는 통하지 않았다. 6주 후, 몸이 나른하고 기분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임신이라고 했다.
엘리사는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다. 힘이 되어줄 것은 알고 있었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그녀는 조용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임산부에게 커피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두 시간 후의 일이 었다. 다이어트 음료로 바꾸었으나 이번에는 첨가물이 마음에 걸렸다. 커피, 홍차, 그 밖의 대부분의 탄산음료에는 카페인이 들어 있고, 맹물은 좋아하지 않는다. 결국 카페인을 뺀 커피나 우유밖에 남는 게 없었다. 앞으로는 이것만 마셔야 할 것이다.
엘리사는 실감하지 못하면서도 계속 아기에 대해 생각했다. 사내아이일까, 아니면 계집아이일까? 피부색은 킹을 닮았을까? 갈색 피부에 검은 눈을 가진 아기를 안고 있는 자기 모습을 생각하니 묘한 전율이 느껴졌다.
임신을 했더라도 디자인 일은 계속할 수 있으니 경제적인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딸이 미혼모라는 사실이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지나 않을까 해서 두려웠다 아버지 나이에 새로운 일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지난 몇 주 동안 엘리사는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눈을 번쩍 떴다 집 근처에 주차된 낯선 차를 보면 가슴이 설레었고, 매일같이 우편배달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오클라호마에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전화나 편지도 없었다. 킹은 역시 베스를 택한 모양이었다. 엘리사는 계획을 실천하기로 했다. 부모는 물론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야지.
이때 엘리사는 킹이 친아버지한테 버림받은 것을 한스럽게 여기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 아버지로서 자식에 대해 알 권리를 빼앗을 수는 없다. 아무리 괴롭더라도 의무는 다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베스는 아직 이혼 수속 중일 테니까 남의 이목을 생각해서라도 목장에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시내에 머물면서 결혼식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엘리사는 약간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서 킹이 가르쳐 준 목장 전화번호를 돌렸다.
신호음이 네 번 울렸다. 막 수화기를 놓으려 했을 때 귀에 익지 않은 목소리가 응답했다.
"여보세요?"
"베스‥‥?" 엘리사는 머뭇머뭇 물었다.
"어머, 엘리사로군요?" 긴장이 감도는 대답이 돌아왔다.
"킹스턴은 지금 없어요. 아마도‥‥."
엘리사는 잠시 망설인 끝에 물었다.
"어디 있는지 모르세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용건은 전해줄 수 있어요."
"아니, 괜찮아요." 이혼이 성립되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말을 돌렸다. "보비도 잘 있나요?"
"네. 벌써 일을 시작했어요." 왠지 베스의 음성이 부드럽게 울렸다. "깁스도 떼고 목발도 필요 없게 됐어요. 저, 그런데 용건을 킹에게 전하지 않아도 될까요? 오늘밤에 돌아올지 알 수 없지만‥‥."
"괜찮아요. 모두들, 보비가 회복되었다니 기뻐요 안녕히 계세요."
"잠깐만‥‥ ."
엘리사는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몸이 마구 떨렸다.
역시 베스는 킹과 살고 있는 것이다.
엘리사는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좋을까 생각하다가 그것은 무기력한 자가 하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 킹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사무실에도 없었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비서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제대로 전할지 의문이었다. 엘리사는 짧은 편지를 써서 오클라호마에 있는 킹의 사무실로 부쳤다. 아무리 바빠도 편지 정도는 읽을 시간이 있겠지.
엘리사는 마음을 잡고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다. 겨우 완성된 것을 엔젤 마호니에게 우송하고, 세인트 어거스틴과 가까운 거리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옮겨가기로 했다. 그녀는 부모님 몰래 짐을 꾸렸다 내일 아침에 떠날 생각이었다. 킹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일주일 전이 었다.
워치프는 요즘 시끄럽게 굴면 쫓겨난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주 얌전해졌다. 간혹 엘리사에게 어리광을 부리기는 했지만 아침저녁으로 시끄럽게 울던 소리를 뚝 그쳤다. 엘리사는 혹시 워치프의 상태가 나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상태가 나쁜 것은 엘리사 쪽이었다. 입덧이 통 가라앉지 않고 몸은 점점 불어났다. 그녀는 임신을 실감했다. 지금은 아기가 너무나 기다려졌다.
그날 밤 엘리사는 부모보다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하늘에는 둥근 달이 떠 있었고,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킹도 오클라호마에서 저 달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 옆에는 아마도 베스가 다정하게 서 있겠지. 엘리사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와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에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
새벽 2시쯤 되었을 때 엘리사는 현관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녀는 부리나케 흰 가운을 걸치고 눈을 비비면서 문으로 달려갔다. "누구세요?"
"킹스턴 로퍼야." 거친 대답이 들렸다.
엘리사는 얼른 문을 열었다. 아무렇게나 재킷을 걸친 그는 수염이 덥수룩한 데다 피곤해 보였지만 여전히 멋있었다.
"들어오세요." 엘리사는 그의 가슴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면서 태연을 가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심장이 파열되는가 싶을 정도로 가슴이 뛰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는 엘리사가 문을 닫는 동안 검은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오고 있었다. 마치 뿌리가 내리기라도 한 듯이 꼼짝도 않고 서서.
"무슨 일이 있니? 어머나, 로퍼 씨." 소리를 듣고 나온 티너는 킹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주 피곤해 보이는데요. 엘리사, 카페인을 뺀 커피를 내 오거라. 내가 만든 케이크도 있어. 만일 로퍼 씨가 원하면 객실로 안내하고. 그럼, 편히 쉬도록 해요."
어머니가 서둘러 침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엘리사는 말했다. "커피 드시겠어요?"
킹은 자기가 온 것을 엘리사가 기뻐하는지 어떤지 알아내려는 듯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킹의 눈에서 기대의 빛이 사라졌다. 그는 엘리사가 자신의 참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 일부러 지금까지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킹은 얼어붙은 마음을 안고 엘리사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12
킹은 엘리사가 권한 의자에 앉아 케이크를 자르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어딘가 빛나고 있었다. 그래, 흔히들 임신한 여성의 얼굴은 광택이 난다고 하지.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약간의 희망이 솟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다시 찾고야 말겠어.
"당신이 올 줄은 몰랐어요."
"오늘밤에야 사무실로 돌아왔어." 엘리사가 커피와 케이크를 식탁에 올려놓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가 말했다. "자메이카에 다녀왔거든."
"어머, 그래요?" 엘리사는 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갔다.
"엘리사의 코티지에는 어떤 빨간 머리 여자가 살고 있더군. 그녀의 부모가 엘리사로부터 집을 샀다고 하면서. 워치프도 보이지 않았어."
"여기 데려왔어요." 엘리사는 여전히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다면 어제서야 제 편지를 봤겠군요?"
"서류더미 속에 묻혀 있더군." 그는 커피 잔을 들고 의자에 기대어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 편지는 무슨 뜻이지? <시간이 있으면 할 이야기가 있어요>라고 되어 있던데."
엘리사는 얼굴을 붉혔다. "그 전에 목장과 사무실로 전화를 했었는데 아무도 당신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더군요. 그래서 편지를 쓴 거예요."
지난 몇 주 동안이 마치 지옥 같았다는 이야기를 킹은 하지 않았다. 그의 이유없는 호통에 유능한 직원 두 사람이 사표를 내던졌다. 만나지 않고 있으면 더욱 그리워진다는 실험은 더 이상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입덧은 하지 않나?"
엘리사는 그만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임신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연락을 취했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한밤중에 달려왔어."
"걱정할 것 없어요. 모든 게 순조로워요. 그리고 부모님도 알고 계시구요." 엘리사는 침착하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아기의 양육비 정도는 나도 벌 수 있으니까요. 아기를 만나고 싶거든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하지만 앞으로 얼마 동안은 참아줬으면 해요 쓸데없는 소문에 시달리고 싶지 않으니까요 당신 역시 결혼을 앞두고 스캔들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을 거예요."
킹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비와 베스가 화해한 것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내 아기이기도 해. 두 사람의 뒷바라지는 내가 하겠어."
"고맙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요." 엘리사는 애써 태연을 가장한 채 말했다. 7주 동안이나 아무 연락도 않고 베스와 같이 지낸 그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킹은 분연히 몸을 앞으로 내밀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 책임이야. 내 잘못은 내가 책임지겠어."
"당신을 탓할 생각은 없어요. 임신하면 알리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연락한 것뿐이에요."
킹은 잠시 숨을 죽였다. "정말 그것뿐인가?"
"그 밖에 다른 이유가 있겠어요?"
킹은 손에 닿는 대로 아무 거나 집어던지고 싶었다.
"엘리사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어." 그는 신음하듯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내뱉듯이 말하고 그녀는 커피 잔과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복받치는 눈물을 삼키면서 등을 돌린 엘리사는 냉정하게 말했다. "나는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였고, 당신은 사랑의 테크닉이 놀라운 남자였어요. 매력적인 남자 앞에서는 어떤 여자라도 황홀해져요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한 것뿐이에요 정말 그것뿐이에요 당신이‥‥." 뒤를 돌아본 엘리사에게 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현관문이 조용히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엔진 소리가 요란하다 싶더니 차가 달려 나갔다.
그녀는 냉정하게 대처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킹은 내가 이토록 슬퍼하는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차라리 그것이 낫다. 이번에는 그도 단념하지 않을 수 없겠지. 나는 아기와 둘이서 살아갈 것이다. 그러면 킹은 나와 아기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베스를 버리지 않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엘리사가 생각에 잠겨 망연히 서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엘리사는 부모님의 잠을 깨울까봐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여보세요." 눈물을 닦고 대답했다.
"엘리사?"
베스였다. 엘리사는 수화기를 노려보았다. "킹을 찾는다면 그는 방금 당신한테 돌아갔어요. 아무 걱정 마세요.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을 테니까요. 아기와 둘이서 당당하게 살아가겠어요."
"아기라구요?" 베스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킹이 설명해 줄 거예요. 나는 이미 그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그럼‥‥." 엘리사는 아직 감정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전화를 끊으려 했다.
"끊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베스가 서둘러 말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요 하지만...."
"아니, 그렇지 않아요.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당신과 킹스턴까지 끌어들여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다니 엘리사, 우리는 이혼하지 않았어요.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보비에게 진심을 말했어요 지금은 같이 살고 있죠. 나는 당신이 킹스턴에게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전에 말하려고 했는데 당신이 급히 전화를 끊는 바람에 하지 못했죠. 지금 나는 보비와 둘이서 그를 찾아갔다가 오는 길이에요."
옐리사는 숨을 몰아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찾아갔었다구요?" 쉰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난 몇 주 동안 킹이 한 행동을 봤다면 그가 나에겐 관심이 없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을 거예요 정신없이 일만 하고, 위험하게 새로 산 스포츠카를 몰고 다닌다고 마가렛이 걱정하더군요. 그녀는 당신을 만나러 가라고 권했지만 마구 성을 내더래요. 당신이 아직 자기를 사랑한다면 꼭 연락을 할 거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당신이 없으면 그는 미쳐 버릴 거예요 정말이에요."
엘리사는 아직도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난‥‥ 조금 전에 그를 몰아냈어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당신과 결혼할 줄 알았기 때문에 임신했다고 해서 그의 행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아, 내 잘못이 너무나 커요!." 베스는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그를 좇아가세요."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걸요." 엘리사는 흐느껴 울었다.
"만일 오클라호마로 돌아오면 당신한테 가보라고 전하겠어요." 베스는 약속했다. "좀 자도록 해요. 너무 걱정하면 아기에게 좋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보비와 나는 숙부와 숙모가 되겠네요. 멋져요. 엘리사, 이제 그만 자도록 하세요.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예요."
친절한 말에 엘리사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고마워요."
엘리사는 전화를 끊고 욕실로 가 차가운 물로 달아오른 얼굴을 씻었다. 그래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뒷문을 통해 해변으로 나갔다. 잠시 걸으니 마음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목욕 가운 차림으로 정처 없이 걸었다.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 멀리서 달려온 사람을 쫓아 보내다니...
엘리사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인기척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가 감기에 걸리겠어." 등 뒤에서 낯익은 나직한 목소리가 말을 건넸다.
그녀는 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킹이 모래톱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아닌가! 흰 셔츠의 앞자락이 열려 있었고, 검은 머리는 바람에 온통 흐트러져 있었다.
"거기서 뭘 하세요?" 엘리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돌아간 줄 알았는데."
"그럴 생각이었지만‥." 그는 씁쓸하다는 듯 말했다. "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
"시내에 호텔이 있어요." 엘리사는 팔짱을 끼고 어둠 속에 떠오르는 늠름한 육체의 윤곽을 바라보았다.
"아직 모르고 있군. 엘리사가 바로 내 집이야. 달리 갈 곳이 없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렸다. 엘리사는 왠지 믿기지 않던 베스의 말을 그로부터 직접 확인하게 되자 기쁨이 치밀어 올라 그에게 달려갔다. "베스를 좋아하는 줄로 알았어요."
킹이 다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그랬어. 엘리사가 나에게 도전하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몸으로, 다음에는 마음으로 당신은 내게 도전해 왔지. 결국 나는 베스에 대한 감정이 단순한 연민이었다는 걸 깨달았어. 엘리사가 떠날때 그 말을 하려 했지만, 당신은 귀를 기울이지 않더군." 그는 쉰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지난 7주 동안 꾹 참고 엘리사가 다시 나를 찾아주길 기다렸어. 그러다가 편지를 보고 이렇게 달려왔지. 한데 엘리사는 나를 상대해 주지 않았어."
엘리사는 그의 입을 키스로 막았다 상처받은 킹이 너무나 가엾었다. 두 팔을 그의 목에 감고 가만히 몸을 밀어붙이자 그의 단단한 육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킹이 무게를 못 이겨 모래 위에 드러눕자 엘리사가 그 위에 몸을 포갰다. 눈물 때문에 눈은 발갛게 충혈되고 입술은 찝찝했지만 그녀는 너무나 행복했다. 킹은 신음 소리를 내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엘리사의 입술이 열렸다. 킹의 혀가 깊숙이 파고들자 심장의 고동이 격해졌다.
"그대로 가만히 있어요. 나를 원하고 있죠? 숨겨도 소용없어요."
"한 번 더 키스해 줘." 그가 속삭였다.
그녀는 다시 다정하게 키스하며 놀리는 투로 말했다.
"해변에서 사랑을 나눌 생각인가요?"
"그것밖에 당신을 품을 방법이 없다면 할 수 없지." 그가 성난 듯이 대답했다.
정말 못 말릴 사람이야. 엘리사는 애정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엘리사는 몸을 일으켜 가운의 앞자락을 열었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저쪽에서 부모가 자기를 찾고 있는 모습이 보였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가운 안에는 푸른색 팬티밖에 입고 있지 않았다.
킹은 그녀의 모습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이 당신이 한 일의 결과예요." 엘리사는 다정하게 속삭이며 그의 손을 잡아 배에 갖다 대고 표정을 살폈다.
"내 아기...." 그는 감동한 듯이 말했다.
엘리사는 그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그는 목욕 가운 안으로 손을 미끄러뜨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힘껏 껴안았다. 사랑받고 있다는 실감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녀의 따스한 목덜미에 코를 대고 킹이 속삭였다. "오클라호마까지 이렇게 끌어안은 채로 가고 싶어."
킹이 다정하게 가슴에 키스하자 엘리사는 숨을 죽였다.
그의 손이 더 풍만해진 가슴을 감쌌다. 이윽고 그는 아기가 자리 잡은 엘리사의 몸을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그녀를 가만히 모래 위에 뉘었다.
"우리의 아기." 킹이 속삭였다. 어둠 속에서 그의 손이 떨렸다. "베스는 외롭긴 하지만 아직도 보비를 사랑한다는 걸 인정했어. 지금 두 사람은 사이좋게 지내고 있지. 아기를 갖자는 상의까지 하고 있어."
엘리사는 웃었다. "조금 전에 베스한테서 전화가 왔었어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하더군요."
"아주 잘 됐어. 대찬성이야." 그는 엘리사의 눈을 들어 쳐다보았다.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겠어? 말로 표현해 주길 바라나?"
"전에도 한 말인가요?"
"아니, 지금까지 알고는 있었지만 표현은 하지 않았어."
"언제부터 알았는데요?"
"자메이카에서 엘리사가 내게 몸을 맡기려 했을 때부터." 그녀의 놀라는 표정을 보고 킹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이야. 엘리사보다 먼저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땐 베스도 있고 해서 엘리사와 그런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그 섹시한 속옷을 입고 침대에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내 몸이 화끈 달아올라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그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엘리사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 뒤부터 제정신이 아니었어. 목장에서는 엘리사를 유혹할 생각이 아니었는데도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말았어."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엘리사는 그의 코에 뺨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 "그런 기분으로 지내는 게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어요."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없을까?" 킹은 그녀의 배를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며 물었다. "빨리 결정해야 돼. 아기는 이 순간에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구."
엘리사는 행복에 젖어 환하게 웃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치 지난 7주 동안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것 같군요 너무 심해요." 엘리사는 그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킹은 별안간 정열이 타올라 그녀의 입술에 입을 밀어붙였다. "너무 심한 사람은 엘리사야. 평생 처음으로 그렇게 격렬한 사랑을 나누었는데, 그것을 <건초 더미 위에서의 가벼운 유희>라고 부르다니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심정이었어. 그래도 나는 엘리사를 찾아 자메이카로 갔어. 하지만 엘리사는 코티지를 팔고 워치프와 함께 사라졌더군. 나는 오클라호마로 돌아와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퍼마시고, 모든 것을 잊으려고 일에 파묻혔어."
"그땐 정말 당신이 베스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도 지옥을 헤맸다구요."
킹은 그녀에게 다정하게 키스했다. "한 번 사랑을 나눈 것만으로 나는 완전히 엘리사의 포로가 됐어. 다른 여자와는 그렇지 못했어. 순진하고 때 묻지 않은 엘리사에게 진정한 만족감을 얻었던 거지."
그녀는 자랑스럽게 미소 지었다. "앉아서 사랑을 나눈 것도 아마 처음이었을걸요." 말하고 나서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나는 매일 밤 당신이 임신하기를 기도했어." 킹이 고백했다. "그러면 연락을 해을 거라고 믿었어. 당신의 자존심이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테니까. 그때 달려와서 내 진심을 털어놓으면 다시 사랑을 받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는 엘리사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달빛 아래서 핑크빛 유두가 뾰족하게 곤두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부모님이..." 엘리사는 그의 애무에 황홀해하면서 속삭였다. "이리로 오고 있어요."
"나도 알아. 두 분을 더 이상 화나게 해서는 안 되겠지?" 그는 엘리사에게 목욕 가운을 입히고 무릎 위로 끌어안았다.
"손주의 아빠에게 화를 낼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을까요? 우리 아기는 틀림없이 아빠를 닮았을 거예요 키가 크고 핸섬하고 정이 많고‥‥."
"그리고 푸른 눈을 가진 아기."
"아니, 검은 눈이에요." 엘리사는 정정하고 다시 입술을 포갰다.
이윽고 킹이 머리를 들었다. "엘리사?"
"네?"
"이 해변에서 정다운 연인은 우리만이 아닌 것 같아."
엘리사는 킹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가운 차림의 아버지가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선 어머니가 같은 모습으로 앉아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멋진 밤이로군." 엘리어스가 말했다.
"정말이에요." 티너가 대답했다
킹과 엘리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결혼 허가서와 반지가 제 호주머니에 들어 있습니다." 킹이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남은 것은 혈액 검사와 조용한 결혼식뿐입니다. 식은 두 분에게 부탁드리고 싶군요." 그는 익살스럽게 덧붙였다. "약간 순서가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순서가 바뀐 것 같다고 하는군." 엘리어스가 아내에게 말했다.
"네, 듣고 있어요." 티너는 생긋 웃었다. "전 지금 아기의 눈이 어떤 빛깔일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여자 아이였으면 좋겠는데." 엘리어스가 말했다.
"남자 아이면 안 되나요?" 티너가 물었다.
"양쪽 모두일지도 모르지. 엘리사는 식욕이 왕성하니까." 엘리어스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말했다.
"저도 쌍둥이였으면 좋겠습니다." 킹은 팔에 안은 엘리사를 보면서 눈을 빛냈다. "좀 더 올바른 순서를 밟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저희는 먼저 사랑하는 법부터 배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 모양이군." 엘리어스가 짐짓 엄한 어조로 말했다.
"이 사람 탓이 아니에요. 내가 유혹했어요." 엘리사가 킹을 두둔했다.
"그렇지 않아." 킹이 당황해하며 정정했다.
"난 당신이 엘리사에게 성교육을 시킨 줄 알았는데." 엘리어스가 짓궂게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가르칠 줄 알았어요." 티너가 지지 않고 대답했다.
"자, 돌아가서 커피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하지." 엘리어스는 아내의 허리를 껴안고 일어서며 말했다
"네, 그래요." 티너는 킹이 엘리사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뭐,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그녀는 낯빛을 흐리면서 킹에게 말했다. "수리 공장에서 일하면서 우리 딸과 손주를 잘 돌볼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군, 만일 도움이 필요하다면 가능한 한 힘을 아끼지 않겠어."
킹은 웃음을 터뜨렸다. 엘리사를 꼭 끌어안고 걸으면서 킹이 속삭였다. "커피를 마시면서 석유 사업 이야기를 좀 해야겠는걸."
2주 후, 킹과 엘리사는 자메이카에 있는 그의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주인들이 해변으로 나간 뒤 워치프는 행복한 듯 새장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자메이카로 출발하기 얼마 전에 엘리사는 양로원에 계시다는 킹의 친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킹은 오랫동안 잠자코 허공만 쳐다보다가 전화를 하러 나갔다. 돌아온 그의 표정이 여간 밝지 않았다. 나중에 엘리사는 킹이 친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을 알았다.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획기적이라면‥‥ 해변을 걸으면서 엘리사는 망설였다.
"남들이 봐요." 주저하는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킹은 엘리사의 가운을 벗겼다.
"볼 사람이 있다면 코티지에 사는 여자밖에 없는데, 그녀는 일주일 동안 집을 비웠어. 이미 조사해 놓았지." 킹은 껄껄 웃으며 입고 있던 가운을 벗었다. "자, 이리 와요."
그에게 이끌려 따뜻한 바다로 들어간 엘리사는 마치 실크에 감싸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파도를 타고 헤엄치면서 그 상쾌한 해방감에 저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이제야 당신의 기분을 알겠어요. 정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느낌 이에요."
"그렇지?" 하지만 그는 바다를 보고 있지 않았다. 물속에서 그녀의 몸을 애무하는 그의 손길을 느끼면서 엘리사는 신음을 토하며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는 임신으로 더 민감해진 그녀의 몸을 뜨거운 혀와 강한 손으로 더듬어 나가며 정열을 불타오르게 했다. 호흡이 가빠진 그는 엘리사를 안고 모래밭으로 나와 큰 타월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당신을 원해." 킹이 속삭였다.
"나는 당신의 아내예요." 엘리사는 쉰 목소리로 대답하고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킹은 머리 위로 엘리사의 두 팔을 올리고 그녀의 몸 위에 자기 몸을 실었다.
"처음과 똑같군요."
"그때도 엘리사를 소유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어." 킹은 엘리사의 입술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그가 얼굴을 들었기 때문에 엘리사는 애가 탔다. "사랑을 나누기 전에 할 이야기가 있어."
"빨리 말하세요." 엘리사가 재촉했다.
그는 엘리사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혀로 애무했다. 손을 허리에서 아래로 옮겨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엘리사의 몸을 불타게 만들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그의 넓은 어깨를 부둥켜안았다.
그는 엘리사의 늘씬한 다리가 떨리고 숨소리가 변하는 것을 느끼고는 만족한 표정을 떠올렸다.
"정상에 도달하는 데는 수십 가지 길이 있지. 이건 새로운 방법이야." 그는 몸을 구부려 엘리사의 가슴에 키스했다.
"먼저‥‥ 이야기부터‥‥ 하기로 했잖아요?" 그가 딱딱해진 봉오리를 입에 무는 바람에 그녀는 신음을 토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겠어. 아아, 엘리사." 킹은 물어뜯듯 그녀의 입술을 빼앗고 몸을 공격했다.
엘리사는 고조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울음이 터질 것 만 같았다. 그녀는 손톱을 세우고 신음했다. "아아, 나는...."
"깨물고 할퀴고 소리 지르고 마음대로 해도 좋아. 무엇이든 괜찮아."
엘리사는 그의 말대로 했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부끄러운 말을 내뱉으며 환희의 비명을 질렀다. 그를 쳐다보자 눈에 사랑이 빛나고 있었다. 최초의 절정이 파도처럼 밀려 왔을 때 엘리사는 절규할 뻔했다.
엘리사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의 움직임을 느끼고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 감미로운 경련을 맛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침착을 되찾은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별이 보이고, 따스한 바람이 땀에 젖은 엘리사의 살갗을 스쳐 지나갔다.
"아담과 이브도 지금 우리처럼 사랑을 나눴을 거예요." 엘리사가 속삭였다. "하늘 아래서 단둘이 맺어지는 거죠."
"맺어진다?" 그도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래, 서로 베풀고 하나가 되는 거지." 그가 엘리사의 배에 가만히 키스했다. "아기가 괜찮을까? 거칠게 다를 생각은 아니었는데."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엘리사는 미소 지었다.
"내 아기가 이 안에 있어. 내가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생각하니 힘이 솟는군." 킹은 사랑스럽게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아까 말하려던 건,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단순한 섹스가 아니라는 얘기였어."
"네, 나도 알아요." 그를 쳐다보자 다시 흥분이 되살아났다.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말이죠, 킹? 나는 처음부터 그랬어요."
"엘리사의 부모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두 분은 위대해요."
"나도 동감이야. 어쨌든 두 분을 초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아버지의 도마뱀과 어머니의 범죄 박멸운동을 포함해서 말이야."
"워치프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기쁜 나머지 눈물까지 흘렸어요 어머닌 그 녀석을 녹색의 거대한 모기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킹은 싱긋 웃었다. "가끔 물어뜯기도 하니까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그런데 워치프가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한걸 알고 있었어?"
"내가 가르친걸요." 엘리사가 말했다. "아이가 둘 이상 있었으면 해서요. 내가 한 아이를 돌보는 동안 워치프가 다른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면 되잖아요."
킹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나는 아이가 많을수록 좋겠는데."
엘리사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자 그가 반응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 그녀는 눈에 사랑을 담아 속삭였다. "사실은 나도 그래요. 이번에는..." 엘리사는 유혹적인 눈길을 보내며 그의 어깨를 밀어 위로 향해 눕게 하고는 그 위에 몸을 실었다. "내가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 주겠어요."
"엘리사‥‥ ."그는 머뭇거리며 그녀의 허리를 부여잡았다.
"힘을 빼세요." 엘리사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아프게는 하지 않을 테니까." 엘리사가 혀를 움직이자 그는 신음을 토했다. 저항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는 엘리사의 조용한 읏음 소리를 들으면서 몸이 격렬하게 쳐들리는 것을 깨닫고 애써 자신을 억제하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킹이 눈을 떴을 때 엘리사는 자부심에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것이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게 어떨까?" 그는 농담을 건넸다. "그리고 결혼하면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거야."
"점잖은 체하는군요." 엘리사는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밀어붙였다. "이런 스타일로 임신하는 게 두려운 모양이죠."
킹은 껄껄 웃으며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사랑해. 너무 사랑해서 숨도 쉬지 못할 정도야."
그가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에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엘리사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녀는 킹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사랑해요, 나도." 속삭이면서 눈을 감았다. "앞으로도 계속."
킹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한 손으로 그들을 이불처럼 포근히 둘러싸고 있는 하늘을 가리켰다. "아까 별을 쳐다봤을 때 하늘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아뇨, 지금 비로소 알았어요."
"나도 그래." 킹은 엘리사의 배에 손을 대고 다정하게 키스했다.
반달 위로 은빛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멀리서 워치프가 맑은 소리로 부르는 브람스의 자장가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