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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위기

사랑의 위기

Michelle Reid

 

1

쌍둥이를 겨우 재우고 내려오는데 전화가 울렸다. 레이첼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등에 업은 6개월 된 마이클을 한 번 추슬렀다. 그러고는 전화를 받으러 거실로 들어가다가 문득 전화 테이블 뒤에 있는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맙소사, 내 꼴이 이게 뭐야? 희끄무레한 금발은 땀으로 젖어 목덜미에 달라붙어 있고, 그 나머지는 얼굴 꼭대기에 묶어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세 아이를 목욕시키느라 앞이 흥건하게 젖었고 얼굴은 발그레해졌다. 게다가 마이클은 젖을 먹고 싶은지 필사적으로 셔츠 단추를 잡아당기고 있다. 배가 고프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한 것이다.

"안 돼. 조금만 기다려." 그녀는 단호하지만 부드럽게 아기의 손가락을 블라우스에서 떼어냈다. 그녀는 솜털 같은 이마에 키스해 주고 자신의 모습에 대해 여전히 불만을 품은 채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그녀는 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산만하기도 했다.

너무도 산만해 있어서 상대방이 대답을 하기 전에 잠시 긴장의 침묵을 보내고 있는 것도 몰랐다.

"레이첼? 나 아만다야."

", 웬일이니, 아만다?"

레이첼은 자신의 얼굴에서 주름이 펴지고 미소가 피어오르는 걸 느끼며 참으로 오랜만에 얼굴 주름살이 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이클, 제발 조금만 참아!" 그녀는 블라우스를 잡아뜯는 아기에게 한숨을 지었다.

불만의 소리로 끙끙거리는 아들을 장난스레 노려보는 레이첼의 눈동자는 사랑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 아이 중 가장 성질도 급하고 바라는 것도 많지만, 이 아이 역시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니얼과 똑같은 회색 눈동자로 날 뚫어지게 바라보는 데 어떻게 싫어 할 수 있겠어?

"말썽꾸러기들 아직 안 자니?"

아만다는 싫은 기색으로 한숨을 지었다. 아만다는 아이들을 노골적으로 싫어한다. 하지만 아만다는 남성들이 가로막고 있는 사회에서 치열하게 사는 여자다. 아이를 낳고 기를 시간은 그녀에겐 없었다. 큰 키에 붉은 머리로 항상 고개를 당당하게 치켜세우고 레이첼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레이첼이 인심 좋은 가정주부라면, 그녀는 아주 세련된 직업여성이다.

또한 레이첼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학창시절 이후로 유일하게 연락을 하고 지내는 친구이다. 런던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그녀와 레이첼, 그리고 대니얼뿐이고, 나머지 동창들은 첼시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둘은 뻗었고, 하나만 남았지. 마이클은 젖을 먹여야 해."

"대니얼은?" 아만다가 대뜸 물었다. "아직 집에 안 왔지?"

레이첼은 친구의 못마땅한 말투에 미소를 지었다. 아만다와 대니얼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 만나기만 하면 항상 티격태격하곤 한다.

"그래." 레이첼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실컷 욕해도 돼. 엿들을 염려가 없거든."

그건 대니얼이 없을 때 레이첼이 잘 쓰는 말이었다. 그녀가 대니얼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얘기를 친구에게 터뜨리게 하는 일종의 대리만족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상하게도 아만다가 침묵을 지켰고, 레이첼은 뭔가 일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그녀가 날카롭게 물었다.

"젠장." 아만다가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다고 봐야지. 잘 들어 레이첼 내가 이런 짓을 하는게 뒤꽁무니가 당기기는 해도 , 네가 꼭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바로 그때, <우편배달부 팻>이 그려진 파자마가 계단을 날아 내려오며 불이 번쩍거리는 칼을 휘둘렀다.

마이클은 형이 달려오는 걸 보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괴성을 질렀다.

"물 마시러 내려온 거예요." 아이는 엄마의 의심 섞인 눈초리에 대답하고는 쌩하니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 아만다는 초조한 목소리를 냈다. "너 바쁜가 보구나, 그럼 내일 다시 전화할까?"

"안 돼!" 레이첼이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끊을 생각 하지마." 아무리 주위가 산만하더라도, 아만다가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려 한다는 걸 눈치 못 챌 정도는 아니었다. "잠깐 이 상황만 정리하고 올 때까지 기다려."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부엌으로 큰아들은 쫓아 들어갔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세 아이를 낳았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늘씬한 몸매였다.

"잡았다, 이 녀석!"

그녀는 비스킷 바구니에 손을 넣고 있는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소리쳤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진 아이를 한참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럼 딱 한 개만 먹어. 케이트 것도 하나 가져가고. 침대에 부스러기 떨어뜨리지 마!"

엄마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후딱 과자를 집어 달아나는 샘의 뒤에 대고 그녀가 소리쳤다.

부엌은 아주 큼직하고 한 구석에는 아기 놀이 틀이 있다. 그녀는 마이클을 그 속에 넣고 무언가 빨 것을 준 다음 다시 전화기로 다가갔다.

"됐어." 그녀는 전화선을 길게 늘여 바닥에 편히 앉았다. "아직 안 끊었니, 아만다?"

"그래." 퉁명스럽고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파출부라도 좀 구하지 그러니? 애들 때문에 신경 쓰여서 어디 살겠니?"

"너 대니얼한테 이른다." 레이첼이 농담 삼아 위협했다.

확실히 아만다는 엄마 타입이 아냐. 그러나 레이첼은 타고난 가정주부였다. 그녀도 그걸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었다.

"사람은 쓰는데 뭐. 그냥 저녁땐 내가 집안일을 돌보는 게 좋아서 그래. 난 이상하게 아줌마가 늦게까지 있으면 손님이 있는 것 같아서 불편하더라."

"더 편해도 안 돼!" 아만다가 신랄하게 조롱했다.

"제발 레이첼! 이제 그만 잠에서 깨어나서 주위를 돌아봐!"

"무슨 잠에서 깨라는 거야?" 그녀는 아만다의 신랄한 공격에 당황하여 얼굴을 찌푸렸다.

거친 한숨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레이첼, 지금 대니얼 어디 있는지 알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야근하지 뭐."

"요즘 부쩍 야근이 많아졌지?"

"그래... 하지만 어쩌겠니, 하비 일 때문일걸. 너도 알잖아? 지난번 저녁 먹으러 왔을 때 둘이 의논하더니...."

"하비 일은 몇 달 전에 벌써 끝났어, 레이첼!" 아만다가 한숨을 지었다.

몇 달이라구? 아만다가 저녁 먹으러 온 지가 벌써 몇 달이 됐단 말인가? 그렇지, 마이클이 3개월일 때였으니까. 맙소사! 언제 그렇게 시간이 지난 거야?

"! 그럼 조만간 우리 집에 와서 저녁이나 같아 하자. 널 본지가 그렇게 오래 됐는 줄 꿈에도 몰랐다. 대니얼한테 말해서 언제가 좋을지...."

"레이첼!" 아만다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너한테 저녁이나 얻어먹자고 전화한 게 아니란 말야! 물론 네 음식 솜씨야 알아주는 거지만." 그녀는 비판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뻔히 알겠다. 하루 종일 집안일과 세 아이한테 매달려 사는데. 그 나쁜 자식은...."

아만다는 레이첼이 혼자서 집안일을 꾸려 나가는 걸 싫어했고, 대니얼이 전혀 거들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걸 레이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만다는 그가 얼마나 바쁘고 가정을 꾸려 나가느라 얼마나 힘들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가 그녀와 아이들, 그들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레이첼은 그 부분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더 이상은 입 못 다물고 있겠어, 레이첼. 결국 내 친구는 그가 아니라 너니까. 너도 네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좀 알아야 해. 어서 깨달으라구!"

"대체 뭘 깨달으란 소리야?" 아만다처럼 그녀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네가 결혼한 그 천하에 못된 녀석 말이야!" 아만다가 소리쳤다. "젠장, 레이첼! 넌 소곡 있어! 늦게까지 남아서 일하는 게 아냐.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다구!"

그 말에 마치 빰을 얻어맞은 것 같은 레이첼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 오늘밤에 말야?" 그녀는 너무도 어리석게 대꾸했다.

"아니, 오늘밤뿐만이 아냐." 아만다는 레이첼의 질문만큼 자신의 대답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는지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얼마나 자주 만났는지는 나도 몰라! 아무튼 그가 바람을 피우고 잇다는 건 너 빼고 런던 전체가 다 안다구!"

침묵이 흘렀다. 레이첼은 도저히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목이 날카로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고, 그 고통은 발끝까지 내려왔다.

"미안해, 레이첼..." 그녀의 충격을 눈치 챈 듯 아만다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갈라졌다. "내가 즐기려고 이런다고는 생각하지 마, 아무튼...."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대니얼을 싫어하는지, 그가 처참하게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은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꾹 참았다. 아만다와 대니얼은 서로를 아주 싫어한다. 다만 레이첼을 위해 서로 참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근거도 없이 이런 소리를 한다고는 생각하지 마." 레이첼이 계속 말을 잇지 못하자 그녀가 격렬하게 덧붙였다. "그 둘은 시내 어디에서도 볼 수 있어. 식당에서도 사무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친밀해. 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건 내 두 눈으로 목격했다는 거야. 내 남자 친구가 리디아 마스덴과 같은 아파트에 살아. 거기서 그 둘이 들락거리는 걸 봤어...."

더 이상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아만다의 말이 가심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도 신빙성이 있다는 걸 그녀도 깨달았다. 벌써 몇 주 전에 눈치 챘어야 할 일이지만 일상생활에 찌들어 너무 바빴기 때문에, 남편을 너무도 사랑하고 믿었기 때문에 전혀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알 수 있었다. 그가 최근에 왜 그렇게 침울한 얼굴이었는지를 . 왜 그렇게 그녀와 아이들에게 날카롭게 다하고 그녀와 함께 침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대신 서재에서 밤을 보내곤 했는지를.

욕지기가 밀려 올라오는 걸 참으며 눈을 감았다. 그가 사랑을 나누자고 말했을 때 피로에 지친 그녀가 얼마나 무심하게 반응했는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건 다 해결 됐는 줄 알았어! 지난주부터 마이클이 밤새 곤히 자기 시작하자 그녀는 좀 더 편해질 수 있었고,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대니얼이 그녀의 품안에서 전율하며 만족스런 사랑을 나누었던 것도 겨우 며칠 밤 전의 일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레이첼....."

아냐! 더 이상은 듣지 않을 거야.

"이만 끊어야겠어. 마이클이 자꾸 보채."

실은 더 이상 들을 수도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던 일들이 기억에 새롭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니얼의 셔츠에서 풍기던 희미한 여자 향수 냄새. 깃과 어깨, 두 곳에서 났었다. 대니얼이 퇴근하고 들어올 때 키스를 하면 가끔 나던 향수 냄새와 같은 것이었다. 그의 뺨과 머리에서.

이런 바보 같으니!

", 레이첼, 내 말 좀 들어 봐."

수화기를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다. 대니얼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 대니얼이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그 여자의 품에 안겨...

위장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아오르려는 것 같아 한 손으로 얼른 틀어막고 떨리는 입술로 이를 악물었다.

전화가 다시 울렸다. 지친 울음소리가 온 집안을 울렸고, 그녀는 이상하게도 침착함을 되찾고 일어서서 조용히 수화기를 들어 내려놓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마이클은 젖을 먹고 바로 잠이 들었다. 아기는 버릇대로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테디 곰 인형을 통통한 뺨 아래 댔다. 레이첼은 한참을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지만, 실제로는 그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은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쌍둥이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샘은 늘 하던 대로 이불을 다 걷어차고 두 팔을 베개에 내던지고 자고 있었다. 그녀는 큰아들의 뺨에 키스를 하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샘은 다른 두 아이보다도 제 아빠를 많이 닮았다. 검은 머리와 각진 턱. 나이에 비해 키가 크고 다부지다. 대니얼도 그 나이 때 꼭 그렇게 생겼었다. 시어머니의 앨범에서 그의 어렸을 때 사진을 보았다.

또한 샘은 여섯 살짜리치고는 무척 고집이 셌다. 제 아빠처럼.

가슴이 저려 왔지만, 그녀는 얼른 비참한 감정을 억누르고 다른 방으로 가서 잠자고 있는 딸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케이트는 한번 잠들면 다음날 깨어날 때까지 그 모습으로 자고 있다. 아빠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케이트. 대니얼은 이 푸른 눈동자의 공주님을 노골적으로 좋아한다. 그리고 여우 같은 공주님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대니얼은 자기 딸이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하지 못한 걱까? 그를 바라보는 큰아들의 숭배에 가까운 시선을? 이토록 소중한 모든 것을 섹스처럼 단순한 것으로 인해 파멸시키려는 걸까?

문득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쩌면 섹스가 전부가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라. 모든 걸 배신하고 빠져 버릴 수 있는 사랑.

어쩌면 이건 전부가 거짓말일지도 몰라. 내가 말을 잘못 듣고 그를 완전히 매도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하지만 그 향수 냄새는? 그리고 하비 계약 건을 들먹거리며 밤새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날들은?

빌어먹을 하비 계약!

그녀는 홱 돌아서서 케이트의 방을 빠져나와 그들의 침실로 들어갔다. 바로 지난주에 그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사랑다운 사랑을 나누었다.

지난 주. 왜 그가 지난주부터 내게 다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거니까? 내가 노력했기 때문이야. 우리 관계가 점점 멀어져 가는 게 두려워 내가 노력을 한 거야. 그날 밤 아이들은 시어머니에게로 보냈었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고, 제일 비싼 그릇과 촛대를 놓고, 야한 검은 드레스와 달콤한 키스로 그를 맞이했었지...

내가 너무 내 계획에만 빠져 있어서 그의 턱이 긴장되는 이유를 알아채지 못했던 거야. 그저 스트레스로 그러겠거니 했지. 하지만 이젠 알았어. 그녀는 침묵이 감도는 침실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그에게 유혹적으로 팔을 둘렀을 때 그의 마른 얼굴이 긴장되며 그을린 얼굴이 창백해지고 신경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이런, 욕지기가 다시 밀려 올라오자 그녀는 얼른 방을 뛰쳐나가 아래층 거실로 내려갔다. 어쩌면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

그녀와 떼어 놓으려고 어깨를 붙들던 그의 긴장감. 그녀의 유혹적인 입술을 내려다보는 그의 황량한 회색 눈동자.

"사랑해요, 대니얼. 그 동안 내가 너무 까탈스럽게 굴어서 미안해요."라고 말할 때 그는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고는 아픔을 느낄 정도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끌어당겨 와락 껴안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아무 말도,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만 그후 우린 아주 만족스런 사랑을 나눴어.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면 어떻게 내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건 모르는 일이지. 내가 남자들의 욕망에 대해 하는 게 얼마나 있다고? 난 열일곱 살 때 대니얼을 만났어. 그는 내 첫 번째 애인이고 유일한 애인이야. 난 남자들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어쩌면 내 남편조차도.

그녀의 시선은 하얀 대리석 벽난로 위의 거울에 멍하니 머물렀다. 새하얗게 질리고 입술이 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아주 평범하다는 것이었다. 그저 예전에 제임스 성을 썼던 레이첼 매스터슨일 뿐이다. 스물넷에 세 아이의 엄마, 전에는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사실을 직면할 때가 온 것 같다.

넌 그를 원했어.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넌 그를 가졌어, 그것도 6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난 순진한 열일곱 살이었고, 대니얼은 겨우 스물네 살이었어. 결코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나이는 아니었지.

대니얼을 만난 건, 친구들과 함께 나이를 속이고 처음으로 어른들의 진짜 나이트클럽에 놀러갔을 때였다. 레이첼은 그때 나이를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레이첼, 바보같이 왜 그래?" 친구들이 그녀를 놀렸다. "물어 보면 거짓말하면 되잖아, 우리처럼!"

그리고 그들이 가르쳐 준 가짜 생년월일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무사히 캄캄하면서도 번쩍거리는 나이트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도 그녀는 다른 사람이 스쳐가기라도 하면 토끼처럼 놀라 펄쩍 뛰었다. 그러나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추고 와인을 홀짝거리는 사이에 점점 분위기에 익숙해졌다.

그녀는 대니얼이 클럽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줄곧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만큼 매력 있는 남자였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며 검은 머리와 영화배우 같은 얼굴. 다른 아이들도 그를 찍어 두었는지 그가 그들 무리에 심상치 않은 관심을 보이자 키득거렸다. 그러나 그가 보고 있던 사람은 레이첼이었다. 곱슬거리는 긴 금발을 자연스레 어깨에 늘어뜨리고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은 줄리가 솜씨 있게 화장해 준 예쁜 얼굴에 줄리의 꼭 끼는 검정 미니스커트와 늘씬한 허리를 강조하는 빨간 조기. 만약 부모님이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셨더라면 그대로 기절해 돌아가셨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이 주말에 친척집을 방문하러 가시는 바람에 레이첼은 줄리와 함께 집에 남아 있었고, 부모님은 늦게 본 외동딸이 혼자 있으면 무슨 일을 벌일지 전혀 짐작도 못 하셨다.

음악이 느리게 바뀌자 대니얼이 레이첼에게 다가왔고, 그는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그의 미소는 역시 부드럽고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그녀는 한 마디 항의의 표현도 없이 그가 손을 잡아끄는 대로 나섰다. 남자의 단단한 몸에 처음으로 닿던 그 순간의 설렘과 수줍음을 아직도 기억할 수 있었다.

한 참 동안 춤을 추고 난 후에 그가 물었다. "이름이 뭐지?"

"레이첼." 그녀는 수줍게 눈을 내리깔고 숨 가쁘게 말했다."레이첼 제임스."

"안녕, 레이첼 제임스." 그가 중얼거렸다. "난 대니얼 매스터슨."

그녀가 그의 근사한 목소리에 취해 있는 동안 그는 그녀의 상의 아래로 살짝 손을 넣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레이첼은 맨살에 닿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전하는 뜨거운 감각에 그대로 숨을 멈췄다.

그는 키스를 하지도 않았고, 친구들은 놔두고 자기와 함께 나가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전화번호를 적어 가 곧 전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는 다음 주 내내 전화기 옆에 붙어 앉아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는 그들의 첫 번째 데이트 때 차를 몰고 데리러 나왔다. 빨간 포드였다. <회사 차> 라고 그는 설명하며 그녀로선 이해하지 못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조수석에 앉자마자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하게 했다. 그녀의 가족, 친구,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해 광고계로 진출하고 싶다는 야망까지. 그 말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몇 살이냐고 물었다. 거짓말을 하기엔 이미 늦은 것 같아 얼굴을 붉히며 사실대로 말했다. 그의 주름이 더욱 깊어지더니 한참이 지나도 말을 꺼내지 않자 그녀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기 시작했다. 그녀를 집에 대려가 줄 때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멍하니 작별 인사를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다. 버림받은 것이다. 며칠 동안 그녀는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일주일 후 그가 다시 전화를 걸어올 때쯤엔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그날 밤 영화관으로 그녀를 데려가 옆자리에 앉아 조용히 커다란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풍기는 희미한 향기와 살짝살짝 닿는 그의 허벅지와 어깨에 신경이 쓰여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오르고 모든 신경이 긴장되어 있어서,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자 레이첼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그녀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쥐는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긴장하지 마." 그가 중얼거렸다. "물어뜯지는 않을 테니까."

문제는, 그를 물어뜯고 싶은 사람은 그녀라는 것이었다. 남자에 대해 아무런 인식도 없던 레이첼은 그저 그를 원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표정을 읽엇는지 대니얼은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그녀의 손을 꼭 감싸 쥐고는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날 밤 그는 그녀에게 격렬하게 키스했다. 레이첼이 그 위력적인 힘에 거의 두려움을 느낄 무렵, 그는 거칠게 몸을 떼며 그녀를 차 밖으로 나오게 했다.

다음으로 그가 데리고 간 곳은 조용한 레스토랑이었다. 그는 식사 내내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신의 얘기를 했다.

큰 컴퓨터 회사의 세일즈맨인 그는 직업의 특성상 새로운 판로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닌다고 했다. 그것은 그가 몇 주일 동안 출장을 다닐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는 언젠가 자기 회사를 가질 거라는 야심을 보였다. 수당을 주식에 투자하고 생활비는 최대한 아껴 쓴다고 했다. 그가 워낙 조용히 말을 해 그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고개를 가까이 숙여야 했고, 그 동안 내내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집으로 돌아갈 때쯤 그가 자아낸 성적인 긴장은 폭발하기 직전까지 이르렀지만 그날 역시 그는 키스만 하고 그녀를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렇게 몇 번을 만났을까, 어느 날 그는 영화관에 가자고 약속해 놓고는 자기 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 후로는 바깥 외출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단둘이서 사랑을 나누는 일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대니얼은 그녀의 성적보다도. 야망보다도 그녀의 이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3개월 후 그가 몇 주 동안 런던을 비웠을 때였다. 그녀는 그가 돌아올 때쯤 그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그는 그렇게 물었다.

7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니 그는 그때 그녀가 그곳에 있었던 걸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얼굴은 피로하고 긴장되어 있었다. 요 몇 달 동안 그랬듯이.

"보고 싶어서요." 그녀는 말하며 그의 손을 살짝 잡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그와 사랑을 나누고 그가 샤워를 하는 동안 그녀는 커피를 만들었다. 침묵 속에 커피를 마시는 동안 그는 타월 가운을 입고 낡은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녀는 항상 그랬듯이 그의 무릎 사이의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임신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그는 멍하니 그녀의 머리칼과, 그의 허벅지에 기대고 있는 뺨을 어루만졌다.

한 참 후에 그는 길고도 무거운 한숨을 짓더니 그녀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혔다. 레이첼은 아이처럼 그의 품에 웅크렸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었다. 마치 케이트가 제 아빠에게 애교를 떨 듯이.

"확실한 거야?" 그가 물었다.

"확실해요."

그녀는 더욱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인생을 발칵 뒤집어 놓은 본인이 그였기 때문이다.

"생리를 한 달 걸러서 임신 진단 약을 사봤어요. 양성으로 나왔어요. 그게 잘못될 수 있어요?" 그녀가 순진하게 물었다.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 전에 의사에게 가봐서 확인할까요?"

"아니." 그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럼 임신한 게 확실하겠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지?" 그는 골몰히 생각했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잘못이에요. 그건 당신이 다 알아서 하기로 했잖아요."

"그랬지." 그가 시인했다. "아무튼, 최소한 동네 사람들이 알아채기 전애 결혼하기까진 시간이 좀 있겠어."

그의 결정은 그녀가 예상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대니얼은 모든 준비를 스스로 알아서 했다. 또한 딸에게 잔뜩 실망한 그녀의 부모님을 설득하고 모든 비난으로부터 그녀를 감싸 주었다.

7년이 지난 다음에야 <동네 사람들이 알아채기 전에> 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니얼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결혼을 결심한 것이다.

내가 그를 올가미로 얽은 거야. 어린 나이와 순진함으로, 내 유치한 믿음과 맹목적인 숭배심으로. 대니얼은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거야.

사랑은 애초에 없었던 거야.

현관에서 열쇠를 돌리는 소리가 나자 그녀는 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납덩어리가 온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지만 의외로 침착하게 고개를 돌려 놋쇠로 만든 마차 모양의 시계를 보았다. 830. 대니얼이 돌아올 시간은 아니었다. 일 때문에 저녁식사를 한다고 했지. 열린 거실 문가에 서서 그녀는 그의 변명을 조롱했다.

그의 등이 보였다. 그녀는 긴장하고 있었다. 검은 오버코트 아래의 어$깨와 목덜미가 긴장하고 있는 것이 역력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흘끗 보았다. 그녀는 긴장이 깃들인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그는 아직도 내려진 채로 있는 수화기를 쳐다보고는, 바닥에 검은 서류가방을 내려놓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제자리에 놓는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아만다가 전화를 건 거야. 내가 전화를 안 받으니까 놀라서 대니얼에게 자기가 한 짓을 말했을 거야. 고백과 비난, 공격과 방어가 난무했겠지.

그는 짙은 속눈썹 아래로 그녀를 돌아보았고, 그녀는 한동안 그의 시선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돌아서서 거실로 돌아갔다.

확실해. 그의 얼굴에 전부 씌어 있다. 확실한 거야.

 

2

몇 분 후에 그가 뒤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앉아서 끈기 있게 그를 기다리는 동안 앞으로 닥칠 일에 마음을 다졌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마음이 침착해지는 걸 느꼈다.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무릎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는 코트와 재킷을 벗고 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셔츠 윗단추를 몇 개 풀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지나쳐 그가 즐기는 위스키가 보관되어 있는 술장으로 다가갔다.

"한잔 할래?" 그가 물었다.

레이첼은 고래를 저었다. 그녀의 기분을 눈치 챈 듯 그는 다시 물어 보지도 않고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큰 컵에 위스키를 따른 다음 그는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는 한 번에 많은 양을 꿀꺽 삼켰다.

"아주 충실한 친구를 두었더군."

충실한 남편은 아니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의 눈동자는 감겨 있었다. 집에 들어온 이후로 그녀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 그의 긴 다리는 앞으로 길게 뻗어 있었고, 위스키 잔은 길고 강인한 손가락에 느슨하게 잡혀 있었다. 손톱은 언제나처럼 깨끗했다. 그는 그렇게 몸 전체가 길고 강하고 잡티하나 없이 깨끗했다. 고급 정장과 구두, 수제 셔츠, 값비싼 넥타이. 얼굴은 보통 때보다 잿빛이고 팔다리가 긴장으로 굳어 있긴 하지만, 깎아지른 듯한 코와 얇고 강해 보이는 입술....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는 항상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였지만 서른두 살이 되어가는 지금은 성숙미와 성공한 남자로서의 자신감까지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자제된 모습도. 대니얼의 자제력은 무척 강해 좀처럼 성질을 부리지 않았다. 일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될 때만 가끔씩 짜증을 내는 정도였다. 또한 문제의 부정적인 면은 옆으로 접어 두고 긍정적인 면만 다루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지금 그가 하려고 하는 방법이었다. 전화 한 통화로 그의 결혼생활이 위기에 처해지자 긍정적인 면을 찾아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런 능력으로 그는 지난 몇 년간 <매스터슨 홀딩>의 대표로 기록적인 신장을 거듭하며 작은 회사를 커다랗게 부풀려 놓았다.

모두 대니얼 혼자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가족에게 단 한 번도 걱정을 끼치지 않고 전혀 도움도 안 받은 상태에서 성공과 실패의 균형을 유지하며 그의 작은 왕국을 꾸려 왔다. 그는 그녀를 보호해 주고 따뜻하게 돌봤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남자의 의무에서 일 뿐이었던 것이다.

"하고 싶은 말 없어?"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회색 눈동자를 그녀에게 맞추었다.

그러니까 부인하지도 않겠다는 거로군.

"당신이 말해 봐요." 여전히 침착한 상태를 유지한 채 그녀가 대꾸했다.

아만다가 말을 한 게 틀림없어. 내가 자기 말을 듣고 몰이라도 매달거나 약이라도 먹을 줄 알았나? 내가 그렇게 극적인 여자인 줄 알았어? 아만다가 놀라긴 놀랐나 보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니얼에게 전화를 걸다니!

"빌어먹을 계집!" 대니얼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의 생각도 레이첼과 거의 비슷한 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의자 앞으로 불쑥 튀어 올랐다. 위스키 잔이 약간 흔들렸다. 얼굴의 모든 근육이 불끈거렸다. 무릎 위에 팔꿈치를 누르며 불같은 시선을 발아래로 떨구었다.

"이미 끝난 일을 갖고 떠벌려서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날 그렇게 싫어하더니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내게 발톱을 세워 할 퀼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구! 하지만 당신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저질인 줄은 몰랐어!"

그래요, 아만다를 마음대로 비난하라구요. 그런다고 당신의 죄가 씻어지진 않을 테니까.

"제발 뭐라고 말 좀 해!"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그를 실제로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그녀의 감정처럼 억눌려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것을 풀어 놓을 때까지 그대로 억눌려 있을 감정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풀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 그렇게 되면 자신이 산산이 부서질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죽으면 이런 기분일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혼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대니얼만큼이나 놀랐다. 말하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짐을 싸서 나가요. 난 이 집과 아이를 가질게요. 양육비는 보내 주겠죠."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가 소리쳤다. "그건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걸 당신도 알겠지."

"소리 지르지 말아요. 애들 깨겠어요."

그는 자제심을 발휘해 벌떡 일어섰다. 유리컵을 벽난로 위에 소리나게 내려놓자, 위스키 방울이 하얀 대리석 위에 튀었다.

"이봐...."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참을 서성거리더니 목소리를 낮게 끌어내리려고 노력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었어. 그 계집이 말한 대로가 아니라구! 그건 단지...." 그는 소리 나게 침을 삼켰다. "잠시 한눈을 판 거야. 아무 일도 없었고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이미 다 끝났어!" 그는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격렬하게 말했다. "하비 건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있었어. 내가 쌓아 놓은 모든 게 무너질 수도 있었다구."

그는 위스키 잔을 집어들더니 사흘은 물을 못 마신 사람처럼 꿀꺽꿀꺽 들이켰다.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해야 했어. 당신은 마이클을 낳고 아직 회복이 덜 되었을 때고, 난 당신보다도 그녀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내는 셈이 되었지. 게다가 쌍둥이들은 홍역에 걸렸고, 당신은 가정부를 두라는 내말도 듣지 않았어!" 그가 비난의 소리를 높였다.

"당신은 볼 때마다 지친 얼굴이었고, 난 당신과 아픈 쌍둥이, 한 번에 30분도 자지 않는 마이클. 모두가 걱정됐어. 그러다 보니 내가 집에 없는 게 당신을 돕는 일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고, 집에 와서 해도 될 일도 사무실에 남아서...."

그는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진 몇 달 전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일이 그녀 자신에게도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꿈에도!

"레이첼...."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구!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당신이 내 곁에 없을 때 그녀가 그 자리에 있었어. 그리고 난 그저...."

"그만 입 닥치지 못해요!"

욕지기가 밀려오며 값비싼 카펫 위에 토하지 않으려고 주먹을 입에 틀어막았다. 다리를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그가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독기어린 시선에 그는 움찔하고 물러섰다. 레이첼은 그대로 술장으로 가서 떨리는 손으로 위스키를 따랐다. 평소엔 술을 안마시지만 지금은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몸이 버텨 내지 못할 것 같았다.

대니얼은 가만히 서서 그녀가 술을 들이켜고 눈을 질끈 감고 서서 자제력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더니 심장 고동 소리가 미친 듯이 격렬해졌다. 호흡이 가빠지며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그대로 기절 할 것 같았다.

"다 끝난 일이야, 레이첼!" 그는 레이첼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젠장, 다 끝났다구!"

"언제 끝났는데요?"고개를 똑바로 치켜세우며 그녀가 눈을 흘겼다. "내가 당신에게 다시 관심을 돌렸을 땐가요? 불쌍한 리디아." 위스키의 효과가 퍼지며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우리 중에 누가 더 바보죠?"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이미 일어난 일이야. 나도 후회하고 있지만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어. 내 자신이 무척 원망스럽다는 것도 인정해. 하지만 신에게 맹세할 수 있어,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다음 여자를 만날 때까지요?" 그녀가 중얼거리며 더 이상 이 상황을 견뎌 내지 못하겠다는 듯 방을 나가려고 했다.

"안 돼!" 그가 그녀의 팔을 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쳤다. "끝까지 내 말을 들어야 해, 제발! 당신이 상처 받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얼마나 됐어요?" 그녀는 이성을 잃고 그에게 덤벼들었다. "언제부터 당신의 옷자락에 그 여자의 향기를 묻혀 들어왔어요? 그 여자한테 빠진 후에 나랑 억지로 관계를 맺은 게 몇 번이죠?"

"아냐, 레이첼! 그렇게 심각한 관계까진 가지 않았어!" 몸부림치는 그녀의 몸을 강철 같은 팔로 끌어안으며 그가 소리쳤다. 그녀가 콧방귀를 뀌자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난 당신을 사랑해. 레이첼. 당신을 사랑한다구!"

마치 끈이 툭 끊어지듯이 자제심이 폭발해 버린 레이첼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그것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녀를 단번에 놓아 줄 수 있을 만큼, 레이첼은 그 누구도 여태껏 보지 못한 살의를 띤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니얼은 그 표정을 삼키며 돌처럼 굳은 채 서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녀는 몸을 홱 돌려 거실을 떠났다. 침실 앞에서 잠시 멈춰 선 그녀는 그대로 지나쳐 마이클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가 들어설 때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레이첼은 아기 침대 옆에 살짝 기대어 막내아들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드디어 막고 있던 댐이 터지고 말았다. 마이클이 크면 옮겨 줄 싱글 베드로 겨우 걸음을 옮긴 그녀는, 아기가 깨지 않게 푹신한 이불을 덮어쓰고 지쳐 잠이 들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마이클이 옹알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한참 후에야 왜 대니얼과 함께 쓰는 침대가 아닌 여기서 잠이 들었는지 알았다.

기억이 다시 돌아오며 잠시 날카로운 고통이 스쳤지만, 어젯밤에 실컷 울어서인지 의외로 침착을 되찾고 머리가 맑아진 것 같았다.

일어나서는 어젯밤 아만다와 통화를 할 때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걸 알고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를 더듬어 보니 헝클어진 머리끝에 아직도 밴드가 묶여져 있었다. 그것을 빼내어 긴 머리를 늘어뜨렸다. 꼴이 이게 뭐람. 신발까지 신고 자다니! 그녀는 침대 위에 앉아 불편한 신발을 벗어던졌다. 때마침 아기가 그녀를 알아보고 기쁨의 괴성을 질렀다.

이건 모두 내 거야. 그녀는 절박하게 생각했다. 그 누구도 내 인생을, 내 사랑하는 아이들을 빼앗아갈 수는 없어

기저귀가 잔뜩 젖어 있어 그것을 먼저 갈아 주고 침대에서 빼냈다. 마이클은 아침에 항상 이렇게 기분이 좋다. 그녀는 욕실로 아기를 데려가 욕조에 물을 조금 받고 세수를 시켰다.

아기를 수건으로 감싸고 다시 침실로 데려와 옷을 입혔다. 평소 같으면 잠옷 바람으로 부엌에 아기를 데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직장으로 나가고 학교에 간 후에야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쌍둥이들은 워낙 눈치가 빨라 그녀가 어젯밤에 입던 옷을 아직도 입고 있는 걸 분명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침실로 가서 아직 자고 있을 대니얼의 얼굴을 맞닥뜨리기엔 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녀는 문을 빼꼼히 열어 이불에 덮여 있을 큰 덩지를 찾아보았다.

그는 침대에 없었다. 그제야 그녀는 욕실에서 들리는 샤워 소리를 알아챘다. 잠시 후 그는 흰 셔츠와 날카롭게 주름 잡힌 회색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그는 그녀를 보고 우뚝 멈춰 섰다.

10년 가깝게 그를 알고 지냈건만 지금 이 순간만큼 그의 앞에서 나약하게 느껴진 적도, 자신의 초라한 몰골을 의식한 적도 없었다. 퉁퉁 부은 눈에 제멋대로 헝클어져 창백한 얼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머리칼.

그리고 그를 이토록 의식한 적도 없었다. 그의 큰 키, 길고 곧은 다리, 다소 긴장되어 있는 근육, 넓은 가슴, 평평한 배, 잘록한 엉덩이....

안 돼. 그녀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그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떼었다.

그는 별로 자지 못한 것처럼 피로해 보였다. 궁지에 몰려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꽤나 고심했겠지. 그 분야에 있어서는 전문가니까. 달리 사업에서 성공한게 아니야. 재앙헤서 성공을 이끌어 내는 그의 능력 때문이지.

그는 한 꺼풀 가면을 쓴 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방금 면도한 탓에 얼굴은 아주 말쑥했다. 레이첼은 그의 애프터세이브 향기를 맡고 잠시 감각이 그것에 반응하는 걸 느꼈다. 성적인 본능은 아무 때나 고개를 쳐드는군. 그녀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증오스럽고 경멸스러운데도 아직 그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들다니.

얼른 생각을 돌려 버린 그녀는 침대로 다가가 앉아 마이클을 가운데에 눕혔다. 그제야 그가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잔 흔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마이클은 아빠의 시선을 끌기 위해 활발하게 허공에 다리를 걷어찼지만, 그의 시선은 레이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기는 짜증스런 울음을 터뜨리며 일어나 앉으려고 얼굴과 몸이 벌개졌다. 레이첼은 그 모습을 보고 본능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대니얼이 침대로 다가와 아기의 다른 손을 잡자, 마이클은 앉은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아기는 만족스런 소리를 내며 두 손을 모두 뿌리치고 부드러운 이불을 톡톡 두드렸다.

레이첼은 대니얼의 서선이 자신에게 뚫어지게 머무는 걸 느끼며 아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레이첼, 제발 날 좀 봐." 그의 간절한 애원에 잠시 마음이 뭉클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어 그것을 물리쳤다.

"싫어요." 노력을 다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대니얼은 무거운 한숨을 짓더니 마이클을 안아들고 양 볼에 키스를 해주고는 다시 침대에 내려놓았다.

불안감을 느낀 레이첼은 얼른 일어나려고 했지만 대니얼이 빨랐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이래선 안 돼! 그녀는 그의 따뜻한 품에 안기고픈 마음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더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와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울지마...." 그가 불안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따뜻한 말투는 그녀를 더욱 자극했다. 감정을 추스릴 수 없엇던 그녀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심하게 흐느꼈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그는 끝없이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하지만 그걸론 충분하지 않아. 그는 모든 걸 파멸 시켰어. 사랑, 신뢰. 믿음, 존경... 그 모든 건 사과 한 마디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게 아냐.

"이젠 괜찮아요." 그녀가 중얼거리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의 팔이 더욱 죄어 왔다. "당신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걸 잘 알아, 레이첼." 그는 평온한 목소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당신이 한 번만 기회를 주면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야. 제발 내 한 번의 어리석은 실수로 모든 걸 내던지는 짓은 하지 말자구. 그 모든 걸 잃어버릴 수는 없어!" 그는 목매인 소리로 애원했다.

"내가 내던진 게 아니에요." 그녀가 대꾸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몸을 빼자 그도 놓아 주었다. 옷장으로 가서 새 옷을 고르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황량하고 어두웠다.

그와 결혼한 후 지금까지 그를 전폭적으로 신뢰해 왔고, 그가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도록 조용히 그를 이해해 왔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마치 그의 애완견처럼 집 안에 틀어박혀 그가 먹여 주고 입혀 주는 대로, 가끔 바깥 구경이나 하며 살면서도 만족했다.

바보가 따로 없어.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 바보천치 같으니라구!

마이클이 울음을 터뜨리자, 그들은 동시에 움직였다. 배가 고팠는지 잘 놀고 있다가 갑자기 시선을 끌었다.

레이첼은 옷을 들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먼저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 마이클을 봐야 하나, 간단한 문제였지만, 지금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대니얼이 아기를 품에 안고 침실 문으로 향했다.

"내가 볼게. 천천히 갈아입고 나와. 아직 이르니까."

그가 밖으로 나가자 레이첼은 탈진 상태였다.

아침식사는 끔찍했다. 케이트는 내내 종알거리고, 샘은 시리얼에 우유를 너무 조금 넣어 꼭 시멘트처럼 엉겨 붙었다. 레이첼은 필터에 커피를 너무 많이 넣어 거의 마실 수도 없었다. 결국 자신의 과민 반응에 화가 난 그녀는 어젯밤 게임팩을 방 안에 잔뜩 어질러 놓은 걸 기억해 내곤 샘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화풀이가 거의 끝날 즈음 샘은 완전히 굳어 창백해져 있었고, 케이트도 덩달아 풀이 죽었다. 대니얼은 내내 말없이 침통한 얼굴이었다. 마침내 대니얼이 학교 갈 가방을 챙겨 오라는 말을 하자 아이들은 해방되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샘에게 화풀이를 할 건 없잖아!" 쌍둥이가 부엌을 떠나자마자 대니얼이 소리쳤다. "그 애가 얼마나 잘 치우는 아이인 줄 당신도 알면서! 내게 화가 났다면 나한테 화풀이하라구. 왜 애들을 갖고 성화야?"

그녀는 그에게로 홱 돌아섰다. "언제부터 당신이 애들 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어요?" 그가 움찔하자 그녀는 씁쓸한 만족감을 느꼈다. "아침식사 때 단 한 번 마주치면서도 항상 신문만 보고 있었잖아요! 당신은 자기 자식이 셋이나 된다는 걸 잊고 사는 것 같아요!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로우리의 그림만큼도 아이들을 돌보지 않아요. 한 치에 쓸모도 없는 아버지면서 나한테 감히 내 아이들을 키우는 일로 왈가왈부하지 말아요!"

내가 어떻게 된 거야? 대니얼이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돌아 그녀에게 다가오는 걸 보며 레이첼은 뒷걸음질 쳤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아.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다른 일로는 날 욕해도 좋아. 레이첼." 그가 거칠게 중얼거렸다. "다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어. 하지만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어!"

"그래요?" 그녀는 신랄한 코웃음을 냈다. "처음부터 나랑 결혼한 이유는 실수로 날 임신시켰기 때문이죠? 마이클 또한 실수로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

그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는 소리에 레이첼은 깜짝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그가 그녀의 목을 조르기라도 할 기세로 성큼성큼 다가오자, 그녀는 한 순간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는 마음을 바꾸고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가 무척이나 자제를 하고 있다는 것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마이클은 어려서 당신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를 거야." 그는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마이클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격렬하게 말했다. "하지만 쌍둥이들이 엿들어서 내가 그 애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믿게 만든다면, ...."

그는 말을 맺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레이첼은 그가 무성을 위협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녀를 흘겨보고는 손을 떨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레이첼은 숨을 꿀꺽 삼키고는 본능적으로 마이클을 안아 품 안에 감쌌다.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대니얼을 공격하는 건 그에게 그녀가 쌓아 놓은 모든 것을 공격하도록 말미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3

쌍둥이들이 집안 분위기가 심상찮은 걸 눈치 채기 시작한 건 주말부터였다. 평소대로 눈썰미가 날카롭고 적극적인 케이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엄마, 왜 마이클 방에서 자요?" 모두가 식탁에 모인 늦은 아침에 아이가 물었다.

마이클이 아침 늦게까지 자고 그 옆에는 레이첼도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이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피로했던 탓에 오랜만에 늦잠을 자버린 것이다.

몇 시간 푹 자긴 했어도 기분은 여전히 찜찜한 상태였다. 상심과 분노, 씁쓸한 마음과 자기 혐오감이 떠나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대니얼은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 감상에 젖은 그녀는 그것을 마치 멍하니 넋 놓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무감각하게 지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대니얼 역시 나아진 것이 없었다. 얼굴의 긴장은 여전했다. 그들의 행복한 가정이 처참하게 깨어지고 난 이후 매일 630분이면 꼬박꼬박 퇴근했다. 바람피우는 이유가 아닌 아이들에 대한 무관심으로 그를 공격했던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이제는 일찍 들어와서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잠자리를 봐 주는 덕분에 레이첼은 저녁식사를 준비할 시간까지 생겼다.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문제를 감추기 위한 노력으로, 겉으로 보기엔 아주 정상적인 가정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편치 못한 침묵이 집안을 감싸고 돌기 전까지는.

식사시간조차 그들은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대니얼이 대화를 해보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그녀가 번번이 대꾸를 해주지 않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그는 식사를 끝내자마자 서재로 들어가 버렸고, 그녀는 거의 먹지 않은 식사를 치우며 자기 연민에 사로잡혔다.

마이클의 방에 들어가 자는 날이 갈수록 외롭고 우울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대니얼은 그런 그녀를 아무 말 없이 지켜보며 그녀가 마을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레이첼도 알고 있었다.

이제 딸의 물음 앞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며 겨우 그럴 듯한 대답을 이끌어 냈다. "마이클이 또 이가 나잖니."

대니얼이 읽고 있는 신문이 부스럭거리자 레이첼은 그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신문 너머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확인을 위해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가 뭘 하고 있는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엄마를 쏙 빼닮은 케이트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클이 이를 가는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는 그녀도 침대를 아기에게 가까이 놓은 후에야 알았다. 그러나 케이트의 관심은 이미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빠에게로 옮겨 가고 있었다.

"엄마한테 껴안아 달라고 하는 걸 잊었어요. 아빠?" 아이는 의자에서 내려와 대니얼의 무릎 위로 기어 올라가 아빠의 신문을 한 켠으로 치우고 그의 커다랗고 안전한 두 팔 안에 자리를 잡았다. "대신 내가 아빠 품에 안겼으니 됐죠?" 케이트가 앙증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이 다시 팽팽하게 감돌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공주님." 대니얼은 신문을 접어 아이를 품에 안았다. "공주님이 아니었으면 아빤 완전히 무시당할 뻔했어."

마지막 말은 레이첼이 들으라고 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무시해 버리고 묵묵히 커피를 마셨다.

그는 파란 타월 가운만을 입고 앉아 있어서 갈라진 깃 사이로 검은 가슴털이 곱슬거리는 것이 드러났다. 그는 딸의 보드라운 뺨에 키스를 했다. 사랑을 가득담은 그의 미소에 레이첼은 잠시 질투 비슷한 것을 느꼈다. 전에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놀란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딸을 질투하다니! 이건 완전히 충격의 후유증이야.

괜한 무안함에 몸 둘 바를 몰라 그릇들을 허겁지겁 치우기 시작했다. 대니얼의 시선이 줄곧 그녀를 따라 오는 바람에 결국 그녀는 고개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담긴 비통함을 읽었는지 그의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더 이상 들키기 전에 얼른 고개를 돌리고 계속 치우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만 외톨이가 되어 버렸다. 샘은 케이트와 아빠의 대화에 끼어들었고, 마이클마저 아기 의자에 앉아 대니얼의 무릎에 앉으려고 버둥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 평소 같으면 아름답기 그지없는 광경이 그녀의 신경을 고통스럽게 자극했다. 마치 제3자로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리디아가 거대한 벽을 만들어 그녀와 가족 사이를 가로막아 버린 것이다.

그릇을 깨뜨리기 전에 치우는 걸 포기하고는 부엌을 나가며 중얼거렸다. "침대를 정리하러 갈게." 아무도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걸 알고는 더욱 소외감이 느껴졌다.

멍하니 그들의 침실에 서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대니얼이 들어왔다. 무엇엔가 덴 사람처럼 펄쩍 뛰며 그녀는 욕실로 들어갔고, 그가 문을 열었을 때는 거기서 뭔가를 찾는 시늉을 했다.

다시 밖으로 나와 보니 그는 창문에 기대어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지우기 위해 그에게 뭐라도 던져 버리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가까스로 그를 무시하고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침대를 정돈하고 싶었지만 그가 있는 동안은 그쪽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아만다의 전화가 온 이후로 그것은 괴물처럼 느껴졌다. 아침마다 그녀는 베개와 이불을 팡팡 두들겨 대니얼의 향취를 없앴다. 그러나 대니얼에 대한 감정은 무뎌지기는커녕 더욱 날카로워지기만 했다.

그가 천천히 돌아서 방 주위를 돌아다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질실할 것만 같은 방 안의 공기를 못 견딜 정도가 되었을 즈음, 그가 그녀에게 다가와서 길을 가로막았다.

"레이첼..." 그의 나직한 말투는 그녀의 시선을 돌릴 만큼 흡인력이 있었지만, 그녀는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다음 주 내내 버밍엄으로 출장 가는 것 알고 있지?"

"뭘 챙길까요?"

리디아도 함께 가는 걸까?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인데도 함께 출장을 가는 걸까?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게 그에게 들킬까봐 염려될 정도였다. 여기서 한 걸음 물러나면 안 돼. 그에게 내 약점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녀는 고집스럽게 눈을 내리깔고 그 자리를 지켰다.

그날 폭탄이 떨어진 이후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의식하는 마음을 추스릴 수가 없었다.

"아무거나." 그는 초조한 투로 대꾸했다.

그가 출장을 갈 때면 그녀는 항상 정성스럽게 그의 짐을 챙겨 주곤 했다. 속옷에서부터 정장까지. 그리고 지금 현재 그가 조금 더 멀찍이 떨어져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자기 짐을 자기가 챙기라는 말을 내뱉고 싶으면서도 속으로는 항상 그가 가져가는 짐의 목록을 헤아리고 있었다.

정말 어쩔 수가 없구나, 레이첼! 그녀는 자신에게 혀를 찼다. 마치 로봇처럼 길들여져 있어.

그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들 사이의 긴장은 더욱 팽팽해졌다. "당신 괜찮아?"

결국 그가 먼저 내키지 않은 듯 물어 보았다. 그는 이번 주 내내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했다.

", 혹시 말동무가 필요하면 어머니더러 오시라고 할까 하는데...."

"내가 왜 말동무가 필요해요?" 그녀는 매섭게 눈을 흘겼다. "당신 출장 갈 때 내가 언제 누굴 부르기라도 했어요? 나 혼자서도 다 할 수 있어요."

그는 턱을 실룩거렸지만 그 이상의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당신 능력을 말하자는 게 아냐." 그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좀... 피곤해 보여서 그래. 모든 일이 힘들 테니까."

피곤해 보인다구? 피곤 정도가 아니라 실신 직전이야!

"당신 비서도 같이 가나요?"

젠장, 이런 걸 물어 보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래, 하지만....."

"그럼 당신의 침대가 적적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레이첼, 리디아는....."

"알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더 이상 대화를 끌고 갈 자신이 없어 그를 밀치고 나갔다.

"그럼 애초에 왜 물어 봤어?" 그는 으르렁거렸지만, 곧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레이첼, 우린 얘기를 해야 해!"

그녀는 침대를 정돈하고 있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곳이 치우지 않은 유일한 공간이었다.

"더 오래 끌 수는 없어. 당신도 그걸 알잖아! 케이트가 벌써 눈치 채기 시작했어. 그건 그 애가 지금부터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할 거라는 말이야. 당신이 언제까지 마이클의 침대에서 잘지...."

"그럼요. 당신의 사랑하는 딸을 혼란스럽게 하면 안 되겠죠?"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러고는 자신에 대한 경멸감에 치를 떨었다. 어떻게 자기 딸을 질투할 수가 있어? 자기 아빠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를!

"리디아에 대해 설명하게 해줘." 대니얼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오늘 집에 계속 있을 거예요?"

그 말에 그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그럴 거야. ?"

그는 당황한 얼굴로 찌푸렸다.

"좀 나가고 싶어서요. 당신이 집에 있으면 굳이 어머니를 불러 아이들을 봐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레이첼 자신도 모르겠다. 어딜 가겠다는 생각은 문득 떠오른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 말을 한 이상 철저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밖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가 제일 처음으로 꺼낸 옷은 레인코트였다. 대니얼은 멍청하게 서서 그녀가 코트를 걸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했다. "어딜 나가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하면 되잖아!"

지퍼가 오늘따라 잘 잠기지 않는다. 지퍼 갖고 씨름을 하려니 몸이 더워져 화끈거렸다. 감정에 질식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바로 지금 그녀의 느낌이 그랬다. 사람들이 그녀의 감정에 벽을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다.

"10분만 기다려, 나도 옷 입고 함께 나가자구,...."

신발! 신발을 안 신었잖아! 그녀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옷장 아래를 뒤지고 잇는 동안 대니얼은 여전히 어안이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 가죽 부츠를 신고 떨리는 손으로 청바지를 그 안에 쑤셔 넣느라 낑낑거렸다.

"레이첼... 제발 이러지 마!" 그녀가 정말로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걸 깨닫고 그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우리만 남겨 놓고 나갈 수는 없어. 잠깐만 기다려...."

그녀는 자기만의 생각에 잠겨 그의 말을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얼핏 그의 말이 들리기는 했다. 대니얼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누군가를 동반하지 않고는 그 어느 곳에도 나간 적이 없었던 것이다! 대니얼이 아니면 아이들, 아니면 시어머니와 항상 함께였다. 평생을 다른 사람의 날개에 싸여 살았던 것이다. 어렸을 땐 부모님과 친구들, 그리고 나서는 대니얼에게.

조금 있으면 스물다섯 살이 되는 나이에 그 동안 난 뭘 하고 산 거야? 세 아이를 돌보느라 지친 나머지 남편이 뭘 하고 다니는지도 모르는 바보...

"혼자 나갈 거예요!" 그녀가 소리쳤다. "당신이나 얘들이랑 한 번쯤 같이 안 나간다고 어떻게 되는 건 아니에요."

"그야 그렇지만, 레이첼, 당신은 한 번도...."

"맞아요!" 그가 그녀를 붙잡으려고 하자 그녀는 얼른 몸을 피했다. "당신이 야망을 키우며 무지개를 좇고 재미나 즐기는 동안 난 바보처럼 이 고리타분한 집 안에만 갇혀 있었어요!"

"그건 말도 안 돼!" 그는 그녀의 팔목을 붙잡는데 성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당신이 애들이야? 무슨 그런 말을...."

"하지만 그게 사실이잖아요, 안 그래요?" 그녀가 울부짖었다.

"난 아이예요. 누군가에 의해 잘 길들여진 아이라구요! 난 어른이 될 수 없었어요. 그럴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난 열일곱 살 때 당신하고 결혼했어요!" 목이 꽉 잠겼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을 때예요! 당신이 나타나기 전엔 엄마 아빠가 날 철저하게 감싸고 돌았죠. 맙소사,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딸이 어디서 잘 알지도 못하는 덩치 큰 사악한 늑대와 잠을 잤다는 사실을 아셨을 때 기분이 어떠하셨을까!"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대한 그녀의 묘사가 너무도 정확했기 때문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난 아기를 가졌어요." 그녀는 호응하지 않고 야멸차게 계속했다. "그리고 당신과 당신 어머니의 보호 아래 다시 감싸이게 됐죠."

"그건 사실이 아냐, 레이첼. 난 당신을 아이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

"거짓말!" 그녀가 반박했다. "이 위선자! 당신은 내가 홀로 시간을 보내는 걸 두려워하기 시작한 거예요. 당신이 케이트에게 할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야 하니까!"

"정말 미쳤군!" 그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씩씩거렸다.

"미쳤다구요?" 그녀가 되풀이했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요? 난 당신이 날 바보로 만드는 걸 멍하니 받아들였을 뿐이에요. 그런데 이게 뭐예요? 겨우 스물네 살에 세 아이의 엄마에다 내 남편은 벌써부터 내게 마음이 멀어져 버리다니! 제발 날 가만 놔둬요!"

격렬한 몸짓으로 그의 손을 뿌리친 그녀는 성큼성큼 문으로 향했다. 현관으로 나가며 거실의 테이블에 놓여 있는 지갑을 홱 낚아챘다.

대니얼의 검은 BMW가 그녀의 하얀 에스코트를 가로막고 있었다. 잘 됐어.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드라이브 웨이를 다려 내려와 런던의 부촌에 자리 잡은 집을 빠져나왔다. 5년 전에 이사 온 이 집은 전에 살았던 비좁은 집에 비해 무척 넓었다. 그녀는 처음 본 순간부터 이 집을 사랑했다.

그러나 이제는 대니얼이 쫓아 나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 집으로부터 되도록 빨리 빠져나오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애들을 다 챙겨서 나오려면 아마 꽤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녀는 런던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비참한 마음으로 버스 창밖을 내다보았다. 빗방울이 말라붙으며 만들어진 먼지가 그녀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아이들을 자주 데리고 오는 공원이 흘끗 보였다. 아니면 아이들이 날 데리고 온 건가? 더 이상은 모르겠다.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었다.

9월의 싸늘한 바람에 옷깃을 세웠다.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숙인 채 정처 없이 런던 거리를 배회했다. 비참한 마음으로 레이첼 매스터슨의 참모습에 점점 눈을 뜨며 자신만의 생각에 잠겼다.

열일곱 살의 감정적인 집착에 빠져 버린 스물네 살의 여자. 그녀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환상에 빠져 대니얼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했다고 철없이 믿었고, 그 사랑에 대해 단 한 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단지 책임감으로 임신한 그녀와 결혼했다는 걸 깨달았다. 대니얼은 순진한 어리 아이와 관계를 가진 데 대한 의무를 이행한 것뿐이다.

그리고 그 가정에 대한 의무를 다했을 뿐. 그는 자신의 질서 정연하고 평온한 결혼생활의 경계를 너머 좀 더 빠른 템포의 흥분된 삶을 그녀와 함께 나누지 않았다는 걸 그녀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가 그녀를 위해 창조한 결혼생활은 그저 평범한 아내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원한 것이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걷고 또 걸었다. 생각하고 자신의 비참함에 상처받으며, 완전히 몸이 녹초가 될 즈음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피곤해서 택시를 잡아탔다. 춥기도 했고, 갑자기 집이야말로 그녀가 있어야 할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패배감을 시인하게 했다. 손 끝에 잡힌 자유가 결굴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4

집으로 들어가 보니 대니얼은 거실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얼굴에 책을 덮은 채 그녀를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기다리다가 아무 말이 없자 그대로 문을 닫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무관심한 척하지만 실은 택시 기사에게 요금을 줄 때 거실 커튼이 흔들거리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그가 근심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걸음걸이를 가볍게 했다.

커피가 주전자 안으로 뚝뚝 떨어지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코트는 부엌 의자 뒤에 걸쳐져 있었고, 부츠는 문가에 가지런히 세워 두었다.

그는 신발로 신지 않고 먹이를 구하는 고양이처럼 슬금슬금 부엌으로 들어왔다. 진녹색 티셔츠는 면바지 안으로 아무렇게나 쑤셔 박혀 있었다.

"아만다한테 전화해." 그는 의자를 툭 차서 앉으며 중얼거렸다.

"왜요?" 레이첼은 그를 흘끗 보고는 심드렁한 말대꾸와 함께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당신이 거기 있는데 안 바꿔 주는 줄 알고 내가 하루 종일 괴롭혔거든."

"내가 거기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는 한참 후에 내키지 않는 듯 말했다. "어머니한테 아이들을 맡기고 내가 직접 아만다의 집으로 갔지."

"그럼 어머니나 아만다도 내가 밖으로 도망쳤다는 걸 알겠군요." 그녀는 씁쓸하게 대꾸했다.

커피가 다 끓자 그녀는 찬장에서 예쁘게 그려진 머그잔을 꺼냈다.

"그렇게 하고 나갔으면서 내가 걱정하지 않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마." 그는 우락부락한 얼굴로 투덜거렸따.

잘 됐군! 날 어린 아이처럼 다루지 말라는 경고로 받아들였겠지. 내가 어린 아이일지는 몰라도 그렇게 취급당하고 싶진 않아. 아무튼 고분고분한 마누라가 전혀 고분고분한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거야.

그녀는 뜨거운 머그잔을 두손에 쥐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대니얼은 팔을 테이블 위에 놓고 불안한 듯 손가락을 계속 비틀어 댔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하루 종일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것처럼.

이렇게 헝클어진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다.

"당신 부모님들도 아셔." 그가 돌연히 말했다. "당신이 어디 갔을지 짐작을 할 수가 없어서 거기도 전화를 했지. 아마 당신이 그곳에 갈 줄로 생각하고 계실 거야. 무사히 집에 왔다고 전화를 드리는 게 좋을 거야."

그러니까. 날 찾으러 겨우 세 군데에만 전화를 했다는 소리군. 내가 갈 데가 거기밖에 없다는 거 아냐?

"대니얼, 걱정을 끼친 건 처음부터 당신이었으니 전화도 당신이 걸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머니와 아만다한테는 당신이 전화해요. 난 개인적으로 할 말 없어요." 그녀는 냉당하게 말했다.

"누구, 우리 어머니?" 그는 깜짝 놀란 듯했다.

"아만다요." 그녀는 신랄하게 대꾸했지만 속으로는 놀랐다. 그가 그런 실수를 할 정도로 마음의 평정을 잃고 있었다는 건가? 대니얼은 결코 어리석은 짓을 할 사람이 아닌데. "당신이 걔를 다시 이 난장판 속으로 끌어들였잖아요. 걔가 그렇게 걱정되면 당신이 전화해요."

"내가 걱정한 건 당신이야!" 그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내가 자살이라도 할까 봐요?"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가 신경을 곤두세울수록 그녀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당신한텐 내가 속도 없는 바보로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내 남은 인생을 빼앗길 수는 없어요."

"누가 당신더러 바보래! 난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그가 발악을 하듯 외쳤다.

"아뇨,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어디 갔는지 찾느라 시간 낭비한 것만 봐도 날 바보로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그녀는 메마른 투로 말했다.

그는 미끼에 걸려들지 않으려는 듯 숨을 가다듬었다. "어디 갔었어?"

"런던이요." 그녀가 말하자 그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런던 어디? 뭘 하고 있었어? 아침 10시에 나갔으니 꼬박 12시간이야.! 런던 시내 가게들도 다 문을 닫았는데 대체 12시간 동안 어디에 가 있었다는 거야?"

"남자를 만났을 수도 있죠!" 그녀의 조롱에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남자 고르는 거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나도 당신이 지겨워져서 다른 남자를 찾아 나섰어요. 집이라면 아주 지긋지긋 해서요!"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만 해! 다른 사람을 상처 주며 즐거워하는 건 당신답지 않아, 레이첼." 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또 쓸어 넘겼다.

맞아. 참 우습지. 어떻게 사람의 성격이 이렇게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있을까. 내가 다른 사람을 이렇게 매정하게 공격할 수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 부모님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조차 전혀 신경 쓰이지가 않아! 대니얼의 어머니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집에서 사랑스런 며느리가 무사히 돌아왔을 지를 걱정하는 것도.

"가서 전화나 해요." 그녀는 따뜻한 머그컵으로 시선을 돌리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이 지겨운 대화를 더 이상 끌지 않아도 되겠죠."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더니, 놀랍게도 거친 한숨을 내쉬고는 방을 나갔다. 그녀는 그의 서재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그가 전화를 걸고 있는 사이에 위층으로 올라가 머리에 샤워캡을 쓰고 빨리 샤워를 했다. 그가 들어오기 전에 재빨리 타월 가운의 벨트를 매며 욕실을 나오다가 그의 짐을 아직 챙기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속으로 불평의 말을 늘어놓으며 그녀는 침실로 와서 그의 검은 가죽 여행백을 꺼내어 침대 위에 놓았다.

"필요 없어." 문가에서 그의 팽팽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후에 취소했어."

"저런." 그가 침실문을 닫을 때 그녀가 말을 늘어뜨렸다. "리디아가 섭섭하겠네요."

그만 해! 그는 그렇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그의 몸이 움찔했다. 레이첼이 미처 경악감을 느끼기도 전에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끌어당겼다.

"더 이상은 못 참아." 그가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해도 당신은 나에 대한 마음을 바꾸지 않고 있어!"

"아뇨, 이미 바꾼지 오래예요!" 그의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불길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것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난 당신이 성자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알고 보니 아주 몹쓸 불한당이군요!"

"그럼 불한당으로 생각하라구!" 그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그녀에게 입술을 겹쳤다.

그 어떤 부드러움도 느낄 수 없는 거친 키스였다.

그녀는 항의의 신음을 냈고, 그의 손가락이 연약한 어깨에 파고들며 뒤로 물러나려는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속으로 밀려들어오자 그녀는 깨물어 버리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예상한 듯 그녀의 이에 그것을 단단하게 누르고 있다가 관능적으로 그녀의 혀를 휘감았다. 그녀는 몸서리를 치며 주먹을 꼭 쥐고 그의 갈비뼈를 눌렀지만 헛된 시도였다. 금세 끓어오르는 혈관은 그녀가 그에게 너무도 약하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토록 미운 사람이건만 아직도 이렇게 반응을 하고 있다니.

다시 신음을 내며 그를 발로 걷어찼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놓아 줄 생각이 없었고, 그녀 또한 점점 가운 안의 몸이 달아오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건 불공평해! 그녀는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고 있었다. 이 남자가 아직도 내게 이럴 수 있다는 건 너무 불공평해! 이 남자한테 반응하는 내 자신이 너무도 싫어.

"지옥으로나 가요!" 마침내 그가 입술을 떼자 그녀가 소리쳤다. 그의 뺨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씁쓸한 고뇌를 담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이글거렸다.

"그래, 얼마든지 욕하라구."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당신은 날 원해. 날 너무도 원하고 있어. 대체 왜 이런 악몽을 스스로 자초하는 거야?"

그녀는 그의 말에 움찔했다. 그가 정곡을 찌른 것이다. 벌써 며칠 밤을 고통과 외로움으로 악몽처럼 지샜던가. 내가 스스로 악몽을 자초한다구? 내게 악몽을 가져다 준 건 바로 당신이야, 당신이라구! 그녀는 고개를 홱 치켜들어 그의 손아귀에 잡힌 머리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톱을 세우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다행히도 재빠르게 피해 얼굴을 할퀴는 건 막을 수 있었다. 그녀의 손톱자국은 그의 목덜미에서 턱 아래까지 약간 스쳐 지났을 뿐이다.

"이런 암캐 같으니!" 그는 캑캑거리며 그녀의 머리칼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목덜미를 만졌다.

"당신을 증오해요!"

"좋아." 그는 험악하게 말하더니 그녀를 다시 끌어당겼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갖는 방법은 어떤 것이 되어도 상관이 없겠군."

"그렇겠죠!" 그녀가 빈정거렸다. "왜요. 아예 폭력을 쓰시지?"

"폭력?" 그는 잔혹하게 웃었다. "내가 왜 폭력으로 당신을 가져야 하지? 당신처럼 적극적인 여자는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걸!"

"그래요? 그럼 리디아는요?"

그녀는 그의 두 팔을 홱 뿌리쳤고, 그는 두 팔을 버둥거리더니, 마치 그녀를 한 대 칠 것을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불타는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만해, 레이첼." 그가 꽉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우리 둘 다 후회할 짓을 하기 전에!"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 빨리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걸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깨달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증오를 보여 주고 싶었다. 아만다의 전화를 받은 후로 그녀가 겪은 충격과 실망, 상처와 비참함, 고통, 분노, 그 모든 것을.

그녀는 마치 길고 어두운 터널의 끝에 서 있는 것처럼 그의 화를 부추겼다. "그럼 나가면 되잖아요!"

그녀가 격렬하게 소리쳤다. "당장 나가라구요! 내가 언제 당신을 붙잡던가요? 아무도 당신을 붙잡지 않아요! 리디아에게나 가보라구요!"

"그 빌어먹을 이름 좀 그만 말할 수 없어?" 그가 이를 갈았다.

"리디아, 리디아, 리디아, 리디아!" 그녀가 되받아쳤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뭔가가 번뜩였다. 분노일까? 그녀가 미처 알아내기도 전에 그는 그녀를 잡아채어 거칠게 끌어당겼다.

"못 참아." 그가 중얼거렸다. 한 순간 그는 그녀를 툭 밀었고, 그들은 뒤에 있던 침대로 털썩 쓰러지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아무리 너그럽게 봐주려고 해도 사랑은 아니었다. 차라리 전투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서로 물어뜯고 할퀴고 잡아먹는 짐승들처럼. 대니얼이 이토록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너무도 순식간에 변해 버린 그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에게 손을 뻗으며 다급하게 그의 몸을 갈구했다. 폭발할 것 같은 절정에 함께 다다른 후 털썩 쓰러져 공처럼 동그랗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점차 이성을 찾은 그녀는 자신이 너무도 역겹게 느껴졌다.

결국 누가 이긴 거지? 그녀는 자신에게 황량하게 물었다. 아무도 이기지 못했어. 그녀는 자신의 까닭 없는 행동과 그를 잃을 것 같은 두려움-그가 무슨 짓을 했건 간에-과 그가 그녀의 안에서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그저 정신이 아득해질 뿐이었다. 리디아가 그와 얼마나 오랫동안 관계를 가졌는지는 몰라도, 따분한 레이첼이 여전히 그에게서 욕망을 이끌어 낼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녀가 모든 자존심을 내던질 수 있을 만큼 그를 원하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나 지난 주 내내 그녀를 괴롭혔던 고통과 배신감을 완전히 치유해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마지막 승자라는 시인을 거부할 만큼 그녀의 영혼은 상처 입은 것이다.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르 뺨을 흘러내렸다. 그에 대한 내 믿음은 완전히 사라졌어.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당해 버렸어.

그것은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고, 그녀를 두렵게 했고, 그가 그녀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외로움을 느꼈다. 지금으로선 그와의 사이가 달라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이첼?" 그녀는 베개에서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진지하게 빛났다. "미안해." 그가 조용히 말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나와 함께 다시 잠자리에 들게 되어서? 이 모든 소동을 벌여서? 무슨 상관이야. 이젠 아무것도 상관없어. 내 영혼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고, 그 어떤 사과의 말로도 내 기분을 낫게 할 순 없어.

다시 눈물이 차오르며 속눈썹을 적셨다. "내 자신이 부끄러워요." 그녀는 목메인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리더니 무거운 한숨과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리 와." 그가 말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몸이 그녀를 소중하게 감쌌다.

"이렇게 비참해 분 적도 없어, 레이첼." 그는 실크 같은 그녀의 머리칼에 대고 중얼거렸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맹세해."

과연 내가 그를 믿을 수 있을까? 그를 믿도록 나 자신을 내버려 두기는 쉬울 것이다. 용서해 주고 잊어 버리자는 마음이 희망과 함께 떠올랐다.

"사랑해."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사랑해, 레이첼."

"아뇨!" 그 말에 누그러졌던 마음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날 사랑한다면 감히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없어! "나한테 사랑이란 말은 하지 말아요." 그녀가 목멘 소리로 외쳤다."지금 일어난 일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당신이 나와 결혼한 이유처럼요!"

 

다음날 아침식사는 아주 어색한 분위기였다. 쌍둥이들은 걱정과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줄곧 그녀의 눈치를 봤다. 아이들이 어제 갑자기 사라진 엄마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마 대니얼에게 아무것도 물어 보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케이트가 입을 비쭉거리며 뭔가 물어 보려다가 대니얼의 경고의 시선을 보고 다시 입을 다무는 걸 보며 레이첼은 싱긋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샘은 달랐다. 계속 그녀에게 눈살을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은 그게 걱정이었다. 아이는 식사 내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서 먹어, ." 레이첼은 시리얼을 뒤적거리는 아이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안 먹으면 몇 시간도 안 지나서 배고프다고 할 거 아냐."

찡그린 눈썹 아래의 제 아버지와 똑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어제 어디 갔었어요?" 그는 아버지가 읽는 신문으로 조심스레 시선을 보내며 갑자기 말했다.

레이첼도 그쪽을 흘끗 보았다.", 엄마가 하루 쉬었어." 그녀는 밝게 말하며 안심시키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괜찮지?"

아이는 불편하게 몸을 움직였고, 레이첼은 가슴이 아팠다. 샘은 수다쟁이 쌍둥이 동생과 달리 모든 걸 속으로 삭이는 성격이다. 이 정도로 얘기를 하는 건 엄마의 평소답지 않은 행동에 무척 아이가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딜 갔었어요?" 아이는 끈을 놓지 않았다.

레이첼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반사적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었다. 평소의 아이의 성격으로 보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엄마가... 좀 피곤했어." 그녀는 여섯 살짜리가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말을 고르느라 애썼다. "기분이 좀... 안 좋고 불편했어. 그래서 엄마 혼자 나갔다 온 거야."

"하지만 항상 우리랑 같이 나가지 않고는 아무 데도 안 갔잖아요!" 그는 신문을 낮춘 아버지에게 이제는 그냥 물러설 수 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누가 꼭 그래야 한 대?" 그녀는 농담조로 대꾸했지만, 속으로는 여섯 살짜리조차 그녀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엄만 어른이야. 엄마 혼자서도 잘 다닐 수 있어."

"아빤 그렇게 말 안 했어요." 케이트가 끼어들었다.

"아빠가 할머니한테 말했어요. 그리고 온 집안을 다 휩쓸었어요. 아래층 위층. 뒷마당까지요." 케이트는 말하지 말았어야 할 걸 발설해 버렸고, 결국 신문이 완전히 아래로 내려졌다. "하루 종일 아만다 아줌마한테 소리쳤어요."

"그만 해라, 케이트." 대니얼은 조용히 말했지만 그의 말투는 커다랗고 순진한 눈동자를 휘둥그레지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아빠가 그랬잖아요!" 아이가 고집했다.

"아빤... 미친 황소처럼 굴었어요!"

"뭐라고?" 그가 어안이 벙벙하여 물었다.

"미친 황소요." 아이는 입을 비쭉거리며 반복했다.

"우리 선생님이 우리가 교실을 막 돌아다니면 그렇게 말해요. <들판을 휘젓고 돌아 다니는 미친 황소>라고요." 아이는 선생님의 엄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아빠도 어제 하루 종일 집 안을 돌아다녔잖아요. 하지만 엄만 내 말대로 무사히 돌아왔다구요!"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내가 혼자서도 다닐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 최소한 하나는 있군! 고맙다, 케이트. 레이첼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아침 먹어라." 그녀는 이렇게 대꾸했다. "네 말대로 엄마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이제 이 일에 대해선 잊자, 알겠지?"

"당신 급한 일이면 버밍엄에 가요." 아이들이 가방을 가지러 올라가자 그녀가 대니얼에게 말했다.

그는 서류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그는 잠시 손놀림을 멈추더니 뚜껑을 닫고 잠갔다.

성공한 사업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벨 것같이 단정한 흰 셔츠와 잿빛 수트, 가족들이 모여 북적거리는 어질러진 부엌과는 참 안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이라면 우아한 조지 시대의 저택에 딱 맞을 것 같다. 그러자 갑자기 7년 동안 그녀는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는 달리 대니얼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것처럼 느껴졌다.

"굳이 내가 안 가도 돼. 잭 브라이스가 처리할 거야."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그럼 왜 처음부터 자기가 간다고 했어? 그러나 그녀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결론은 리디아로 끝날 테니까.

"당신이 가 있는 동안 내가 도망이라도 칠까 봐서요?"

그녀는 진심으로 그의 대답이 듣고 싶었다. 대니얼이 그녀와 아이들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알지만, 우리들이 더 이상 그의 인생의 일부가 아닐 때라도 그것이 비극이 될까?

그는 홱 돌아서서 장난감이 이리저리 널려 있는 앞마당이 내다보이는 부엌 창문을 내다 보았다. 두 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맞아." 그가 이윽고 시인했다.

레이첼은 그의 대답에 안도감이 밀려드는 걸 느끼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그녀의 약점을 노출시키는 결과이기 때문에 더욱 화가 났다.

"여긴 내 집이에요. 선택권은 당신에게 있죠." 그녀가 지적했다.

"맞아." 그는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다시 서류 가방을 뒤적이고 있었다. "내게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짐을 챙겨 집을 나가고 당신의 자존심을 지켜 줬을 거야. 하지만 난 떠나고 싶지 않아. 우리가 나눴던 모든 것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 내 자신을 당신에게 다시 증명해야 한다는 걸 알아.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것도 알고, 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진 않을 거야, 레이첼." 그제야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의 눈동자는 결의에 차 있었다. "날 지옥에 던져 넣을 수는 있지만, 난 그 구덩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진 않을 거야."

"당신에게 별거 명령을 내릴 수도 있어요." 그녀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대꾸했다. "당신을 강제로 나가게 할 수도 있어요."

대니얼이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게 그런 걸 잘 알아?" 그는 그녀가 이미 어디선가 상담을 한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 그럴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그의 의구심에 찬 시선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왠지 자아가 한껏 드높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신랄한 투로 대꾸했다. "텔레비전에서 봤죠."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는 거야?" 그가 물었다. "결혼생활을 끝내자구?"

영리한 사람이야. 모든 책임을 다 나한테 전가시키려는 생각이야.

"당신이 우리의 결혼생활을 모두 망쳐 놓은 거예요, 대니얼." 그녀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뇨, 난 그럴 생각 없어요. 아직까지는."

"그럼 지금은?" 그는 거칠게 한숨을 짓더니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그의 왼손가락에서 금반지가 반짝 빛났다. 이미 그에겐 분신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아주 평범하고 값싼 반지였다. 결혼할 때만 해도 돈이 없어서 그 이상 좋은 반지를 갖고 있고, 몇 년 후 형편이 나아진 다음 약혼반지를 선물 받았다. 다이아몬드만 달랑 박힌 것이지만, 그녀의 가는 손가락에는 잘 어울렸다.

그걸 끼워 주며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었지."사랑해, 레이첼. 당신과 아이들이 없인 내가 열심히 일하는게 아무 의미가 없어."

그러나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그는 두 배로 성공했을 거라고 레이첼은 확신했다.

그는 그의 지룬에 그녀가 대답해 주기를 바라며 뚫어지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그 눈동자를 한참 쳐다보다가 컵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모르겠어요."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피를 흘리는 걸 보고 싶어요."

놀랍게도 그는 미소를 지으며 어젯밤 그녀가 공격한 목의 자국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이미 그렇게 했는걸." 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요."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결심하면서도 얼굴이 빨개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난 지금부터 복수의 시대로 들어가는 거로군." 그는 다시 미소를 짓더니 마이클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어디 해보자구." 그는 그렇게 말하고 당당하게 부엌을 빠져나갔다.

레이첼은 한방 얻어맞은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일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를 차가운 시선과 독설로 마주치는 대신 그녀는 말썽이 될 만한 모든 것을 피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음 몇 주는 마치 그들의 결혼생활이 혼수상태에 빠진 것처럼. 미래를 위해 서로 얼굴을 마주치기 전에 회복할 시간이 주어진 것처럼 지나갔다.

그녀는 마이클의 방에서 자지 않았다. 그러나 왜 다시 대니얼과 함께 잠을 자기로 생각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올 때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이라는 것을 나눴는지는 몰라도 서로에게 만족이라는 상태를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그가 그녀를 애무하고 키스할 때마다 리디아에게도 이랬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 분노가 치밀어올라서 그를 밀쳐내 분위기를 깨뜨리기 일쑤였다.

마치 리디아가 침대 위로 기어올라와 그들 사이에 누워 있는 것만 같았다. 배신감과 질투심이 밀려오면 레이첼은 그가 그녀에게 손을 대는 것조차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대니얼도 더 이상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하는 것이 그를 리디아에게로 다시 보내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날이 갈수록 걱정이 되었다. 아마도 대니얼은 이것이 그에 대한 그녀의 복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손을 뻗어올 때 그녀에겐 복수심 같은 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알면서 그가 사랑을 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그녀는 더욱 긴장했고, 그가 손을 대려고 할 때마다 자존심이 고통받았다. 시작되기도 전에 그를 뿌리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원했다. 아무리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 시큰둥하다고 해도. 그의 단편적인 사랑을 조금이나마 원했고, 대니얼이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5

낮 동안 대니얼의 어머니는 그녀와 전보다 더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다. 그녀는 일요일에 레이첼이 밖으로 뛰쳐나갔던 사실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의심이 갈 때면 항상 짓는 그 조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니 매스터슨은 아들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는 대니얼처럼 성공한 남자가 당면할 수 있는 유혹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기민하고 영리한 사람이다. 그는 서른둘에 이미 사회적인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그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여자들은 당연히 그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잘생긴 얼굴에 돈까지 있으니, 왜 갑자기 아들의 결혼생활이 흔들리고 있는지 아무도 이유를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제니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렇게 때문에 레이첼과 더욱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도덕적인 지지를 해주려 하는 것이다. 레이첼은 지금 살고 있는 낯선 세상에서 제니가 유일한 친구라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때문에 더욱 두렵고 자기 자신에게도 만족할 수가 없었다. 한때 그녀의 자랑이자 기쁨이었던 가정은 이젠 모든 면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에겐 편안하고 좋은 곳이었지만 대니얼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출세를 했고, 그만큼 생활수준도 높아져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이제 새로운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니 그가 집에 회사 동료들을 한 번도 데려오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집이 창피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가 이미 들어간 고급 세계에 자신을 끼워 주지 않은 것에 화가 났다. 7년 동안 거의 발전이 없었던 자신을 스스로 나무라야 하기도 했지만, 그 역시 자신의 성공한 이미지와 부합되지 않는 그녀를 숨기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분노가 불안으로 변하며 안달과 짜증이 났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가 없었다.

대체 넌 뭐야, 레이첼? 며칠 일찍 들어오다가 도저히 안 되겠던지 야근을 하기 시작한 대니얼이 밤늦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던 어느 날 밤, 그가 곁에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도무지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잘못된 책임을 대니얼에게만 전가시킬 수는 없어. 넌 망각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거야. 자기만의 작은 세상에 폭 둘러싸여 그가 뒤에서 무슨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지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 넌 그가 사업상 저녁식사를 자주 갖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가 좀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도 그와 함께 높은 지위로 올라가거나 그를 돕고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넌 아만다가 말해 주기 전까지 하비 인수 건이 끝났는 줄도 몰랐어. 대체 언제부터 결혼생활이라는 게 집과 침대와 세 아이들뿐이라고 결론 짓게 되어 버렸을까?

"난 예쁘지도 않아!"

어느 날 아침 그녀는 거울을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물론 세 아이의 엄마라는 것에 비해서는 괜찮은 용모지. 다리도 그다지 나쁘지 않아. 하지만 내 얼굴은 전혀 교통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 눈은 너무 크고, 코는 너무 작고, 입술은 너무 도톰해. 게다가 이 머리는! 치렁거리는 머리를 들어 올리니 정전기가 일어났다. 내가 케이트 나이 때부터 이 머리를 짐처럼 달고 살아왔어!

그렇게 싫으면 한번 변화를 줘봐. 그녀의 마음속에서 도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못 할 것도 없지. 그녀는 반발심이 일었다.

"마이클, 엄마 말 잘 들어." 그녀는 침실 카펫 위에서 행복하게 놀고 있는 아기에게 말했다. "엄마는 지금부터 옷 사러 나갈 거야. 네 할머니가 널 돌봐 주실 수 있는지 여쭤 봐야겠다. 만약 안 된다면...." 그녀는 케이트가 무슨 결정을 할 때면 하는 표정처럼 입술을 오므렸다. "네 아빠한테 던져 놓고 가지 뭐. 잠깐 보라고 하는데 뭐라 그러겠어!"

그러나 대니얼의 어머니는 흔쾌히 아기를 봐주시겠다고 했다. 다행이야. 대니얼의 초현대식 사무실에 성큼성큼 막내 아들을 던져 놓고 가는 건 별로 유쾌한 생각이 아니니까. 택시를 타고 런던으로 나가며 자신은 그럴 만한 위인도 못 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현모양처가 된다는 것 외에 야망이 없다는게 그렇게 나쁜 건 아니잖아? 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들의 얘기를 들어 주는 게 좋은 걸. 그냥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워.

대니얼 역시 경쟁이 치열한 일터에서는 사자처럼 걸어 다닐지 모르지만, 그가 집 안에 들어오면 긴장을 풀고 가족들이 그에게 함께 고민을 풀어 달라고 하는 걸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힘든 얼굴을 하고 저녁 늦게 들어와도 30분 후면 아이들과 함께 바닥에 뒹굴며 게임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며 아들과 같이 소년의 미소를 짓곤 했다. 마치 그가 들어갔던 바깥을 모두 털어 버리고 가족들이 제공하는 안락함에 빠져들 듯이.

하지만 지금은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을까하고 의문이 들었다. 대니얼이 집 밖을 나가면 남편과 아빠로서의 책임을 쉽게 벗어던져 버릴까? 그가 짜릿한 흥분을 느낄 수 있는 그쪽 세상으로 들어가면 안도감을 느낄까?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되는 그런 세상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더 좋을까? 그 세련된 세상에 들어가면 집에 있는 한없이 작은 여자와 세 아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라지게 될까?

 

오후 6시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대니얼의 BMW가 세워져 있지 않은 걸 보고 그녀는 안심했다. 그녀는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 낑낑거리며 팔꿈치로 초인종을 눌렀다.

"아이고 세상에!" 대니얼의 어머니가 문을 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이게 웬일이야!" 그녀는 바닥에 물건을 내려놓고 고개를 드는 레이첼의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어때요?" 레이첼은 망설이듯 물었다.

남편이 출근한 후 1시간도 안 되어 밖으로 나갔던 레이첼은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시어머니의 의견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치렁치렁했던 금발은 사라져 버렸다. 무자비하다싶을 정도로 커트를 해 그녀의 갸름한 턱선과 맞춘 보브 스타일로 변신했다. 게다가 자연스러우면서도 그녀의 장점을 모두 살려 주는 화장까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레이첼이 늘 입던 푸른 더블 코트와 빛 바랜 진은 벗어던지고 종아리까지 늘어지는 값비싼 크림빗 울 코트가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앞에는 둥근 갈색 단추 두 개로 여미게 되어 있고, 같은 단추가 소매에도 장식되어 있다. 거기에 약간 굽이 있는 갈색 스웨이드 앵글 부츠와 지갑이 단추의 색상과 매치되었다.

"얘야." 이윽고 제니 매스터슨이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아들이 오면 아주 독한 술을 만들어 줘야겠다."

제니는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그녀의 말은 레이첼이 가장 바라던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d아직도 그녀에게 적개심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었으며, 밖에 오래 나가 있을수록 적개심 또한 강해졌다.

거실 문이 휙 열리며 샘의 "우와!" 하는 소리가 들리자 실없게도 레이첼은 의기양양해졌다. 그러나 아이들이 새로워진 엄마에게 거부감을 느낀다면 말짱 헛것이 되는 것이다.

"이 안에 다 뭐가 들어 있어요?" 그는 새로운 레이첼을 전과 다름없는 엄마로 대해 주었다.

10분 후엔 거실 전체가 반쯤 열린 상자 쓰레기들로 가득 찼다. 케이트는 레이첼이 충동적으로 산 구슬이 잔뜩 박힌 빨간 드레스를 입고 폼내고 있고, 벽돌 상자를 선물 받은 마이클은 마분지 상자를 좍좍 뜯고 있고, 새로 나온 컴퓨터 게임팩을 받은 샘은 이미 위층으로 시험해 보려고 올라갔다. 바로 그때 대니얼이 들어왔다.

그는 우뚝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와 함께 부산스럽던 방 안의 모든 것이 우뚝 멈췄다. 새 옷을 입고 깡충깡충 뛰던 케이트도 멈춰 섰고, 어질러진 마룻바닥을 치우던 그의 어머니도 멈춰 서서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보고, 레이첼은 막 일어나다가 우뚝 멈춰 서서 적의감과 속절없는 이끌림으로 대니얼을 바라보았다.

마법의 주문을 푼 건 그의 어머니였다. 헐레벌떡 마이클에게로 다가가 아기를 카펫에서 안아들고, 케이트의 손을 붙잡더니 얼른 거실을 나가 버렸다.

"애들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 줄 아니?" 며칠 전 제니가 레이첼에게 귀띔 했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부모에게 할 수 없는 말을 할머니에게 모두 털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레이첼은 아이들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찌푸린 시선으로 그녀를 평가하고 있는 대니얼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그의 입술이 약간 뒤틀린 미소를 짓자 그녀는 더욱 긴장되었다. 그 미소는 그가 7년 전 처음으로 나이트클럽에서 만났을 때 짓던 미소와 똑같은 것이었다. 씁쓸하고 신랄한 것으로 해석한 그녀는 더욱 고개를 당당히 쳐들고 그의 표정에 맞섰다.

"이런, 이런." 그가 이윽고 중얼거렸다. "2단계가 시작된 것 같군."

2단계라구?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어디 좋은 데 가?" 그녀가 물어 보기도 전에 그가 물었다. "당신이 오늘밤 나갈 계획이라는 걸 내게 알려 줬나? 이거 기억하고 있지 못해 미안하군."

그녀의 눈살이 더욱 찌푸려졌다. 왜 저렇게 딱딱거리는 거야? 내가 아무 데도 나갈 생각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2단계는 뭐고<좋은 데>는 또 뭐야?

내 바뀐 외모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할 참이군!

마음에 들지 않나 보지. 내가 얌전히 그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는 걸 좋아할지도 몰라.

내가 이렇게 변할 수도 있다는 걸 상상도 못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승리감이 회복되었다. 어딜 나가느냐는 말은 정말로 물어 본 걸지도 모르지.

"내가 나가면 어떻게 할 건데요?" 그녀가 물었다.

그의 삐딱한 미소는 그녀의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물론 누구하고 나가느냐고 묻겠지." 그는 말을 늘였다.

"그럼 내가 어떤 남자나 여자랑 나가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남자?" 그 말에 그가 날카롭게 반응하자 그녀는 충분히 만족했다. "그가 누군데?" 그는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도 저녁 먹으러 나갈 때 일일이 나한테 누구랑 간다고 보고하진 않잖아요." 그녀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고, 눈동자에 잠깐 경고의 빛이 번뜩였다. "어서 말해. 이름을 대라구."

이렇게 유치한 대화는 처음이야! 그녀는 갑자기 깨닫고는 한숨을 짓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름 같은 거 없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루 종일 흥분되었던 기분을 그가 일시에 무너뜨리는 게 화가 났다. 그녀의 시선은 이제 아무런 재미도 없어져 버린 포장지와 물건들을 두리번거렸다.

"난 나가는 게 아니라 들어오는 길이에요."

대니얼은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와서 가장 가까운 상자를 집어 들었다. 아직 아무도 뜯어보지 않은 것이었다. 레이첼은 그가 가로막은 문이 열린 틈을 타 백을 집어 들고 나가려고 했다. 그녀의 입술은 실망감으로 꼭 다물어져 있었다.

"이 안에 뭐가 들어 있어?"

그녀는 기대했던 대로의 반응을 얻지 못했을 때의 케이트처럼 뾰로통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장이요." 그녀는 내키지 않은 듯 말했다.

"이건?" 그는 다른 상자를 가리켰다.

"속옷이요." 그 안에는 레이첼이 처음 구경해 보는 화려하고 야한 속옷이 담겨 있다.

"이건?"

"새로 산 드레스요!" 그녀의 눈빛이 그를 향해 번쩍거렸다. "왜요. 훈계라도 하게요? 신용 카드를 만들어 준 건 당신이라구요! 그것도 런던에서 제일 큰 백화점으로만!"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대신 쾌활하게 말했다.

"런던의 가장 고급스런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나중에 춤도 추러 갈 만큼 근사한 드레스인가?"

그 말에 그녀는 문가에서 홱 돌아섰다. 그의 표정은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나보고 나가자고 말하는 거예요?" 그녀는 한 순간 방심하고 순진한 투로 물었다.

"그래." 그는 조롱의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첼은 그가 자신을 갖고 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새빨개지기 시작하며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이런 얼간이!

"그래, 레이첼." 그는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알아차리고 미안한 듯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밤 나와 함께 저녁식사 하러 나가도 좋은지 물어 보는 거야."

"." 완전히 한 대 얻어맞은 기분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순간 샘이 쿵쿵거리며 내려와 제 아빠의 가슴에 펄쩍 뛰어오른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를 정도였다.

"아빠!" 아이는 아빠와 똑같은 얼굴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엄마가 새 컴퓨터 팩을 사주셨어요." 그는 잔뜩 상기되어 소리쳤다. "갖고 내려와서 큰 TV에 꽂고 해도 돼요? 토네이도 제트기를 제가 직접 운전하는 거예요!"

"그러렴." 대니얼은 아들에게 미소를 지으면서도 레이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할머니가 허락하시면 말야. 아빤 엄마랑 저녁 먹으러 나갈 거거든."

"엄마랑 나간다구요?" 아이는 레이첼만큼이나 놀란 듯했고, 대니얼은 그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샘은 이미 레이첼에게 활짝 웃고 있었다. "잘 됐어요! 엄마 혼자 나가지 않고 아빠가 함께 나가면...."

"." 아빠의 조용한 경고에 아이는 입을 다물었고, 레이첼은 뻣뻣하게 굳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봐 주실까 모르겠어요." 그녀는 변신을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신이 측은해서 그가 괜히 한번 해본 소리라는 걸 알고 말했다.

"오늘 하루 종일 여기 계셨단 말이에요."

"난 상관없다. 레이첼을 아주 좋은 데로 데리고 가렴." 복도에서 또 하나의 소리가 났다.

레이첼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어머니와 케이트가 그곳에 서 있는 걸 보았다. 우리가 한 말을 모두 들었을 거야. 이 집엔 도무지 사생활이라곤 없어!

레이첼은 짜증스런 한숨을 지었다. 난 동정 받고 싶지 않아.

"전 나가고 싶다는 말도 안 했어요!"

"당연히 나가야지 무슨 소리니!" 제니는 며느리의 말을 일축했다. "어서 위층으로 올라가, 이 상자들 갖고." 그녀가 명령했다. "케이트, , 엄마랑 같이 이걸 들고 올라가렴." 그녀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동안 레이첼은 항복의 한숨을 지었다. 대니얼과 함께 나가고 싶지 않은 이유를 명확하게 대지 못하는 한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할머니의 명령에 좋아라 하고 상자들을 모아 위층으로 올라갔고, 레이첼은 나머지를 챙겼다. 계단을 막 올라가려고 할 때 제니의 엄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이렇게 함께 외출하는 것도 너무 늦은 거야! 너도 이제부턴 그애를 사업상 약속에 함께 끼워 줘야 해."

계단에 서서 레이첼은 대니얼의 대답을 들으려고 했으나 그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제니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쓸데없는 소리! 네가 그 애에게 스스로를 찾아볼 기회도 주지 않고 싫어할 거라는 건 어떻게 아니? 대니얼, 넌 그앨 너무 감싸는 게 문제야. 그앤 한 번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의 인생을 살아 보지 못했어!"

그게 어머니의 생각일까? 레이첼은 호기심이 일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이 원하는 바가 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엄마가 되는 것이다. 그것뿐이었다. 환상도 없었고, 야망도 없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내와 끔찍히 아끼는 아이들의 엄마가 되는 것뿐.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말이 난 김에 좀 더 해야겠다." 제니가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무슨 일로 그 착한 애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누구 때문인지는 알고 있어!"

레이첼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만다의 전화가 왔을 때만 생각하면 끔찍한 고통이 마음을 휘젓고 지나갔다.

"내 충고 잘 들어라. 지금부터 아주 신중해야 해. 혹시 만약 레이첼이,..."

레이첼은 뛰어 올라갔다. 그뒤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일만으로도 근심은 충분했다.

 

6

무슨 말을 하신 걸까? 대니얼이 샤워를 하고 있는 동안 마이클의 작은 욕실에서 서성거리며 그와 마주 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레이첼이 그의 다른 여자를 알아내면? 그건 이미 알아냈으니까.

레이첼이 어른이 되기로 결심하면? 그녀는 냉소적으로 생각하며 거울에 비친 새로운 자신을 바라보았다. 마치 전혀 낯선 사람 같았다.

네 자신을 좀 봐! 넌 욕실에서 볼일도 없으면서 숨어 있잖아? 넌 새로운 헤어스타일이 망가질까 봐 목욕도 못해. 넌 잘 꾸며 놓은 화장이 지워지면 그대로 따라하지 못할 까 봐 세수도 못 해. 대니얼이 널 데리고 나가는 이유는 자신의 죄스러운 양심을 조금이나마 회복해 보려고 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는 아래층에서 만난 다른 사람을 데리고 나가기를 기대하고 있어. 바로 네 앞에 서 있는 새로운 너를 . 이건 나의 환상일 뿐인에도! 이건 가장된 레이첼일 뿐이고 진짜 레이첼은 그뒤에 숨겨져 있어!

그녀는 문이 열리고 닫히며 대니얼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문고리에 걸어 둔 새로 산 드레스를 입었다.

검은 실크에 짙은 붉은 레이스가 대어진 다소 섹시한 느낌의 드레스였다. 윗부분은 끈이 달린 하트 모양의 보디스로 되어 있고, 가슴 언저리가 레이스로 처리되어 있었다. 팔과 어깨는 드러나고 등부분도 시원스럽게 패어 있었다.

이 옷이 얼마나 살갗을 많이 드러내는지를 레이첼이 깨달았을 때 점원이 그녀의 못 미더운 표정을 보고는 긴 팔이 검은 벨벳 볼레로를 급하게 가져왔다. 그것은 작은 깃에 가슴이 살짝 드러나는 루비색 레이스로 가장자리가 처리되어 있었다.

정말 내가 이 옷을 입은 건가? 대니얼과 밖에 나갈 때 늘 입는 검은 드레스로 갈아입을까?

케이트가 베이비파우더 향기를 풍기며 침실로 들어왔다. 아이는 레이첼 옆에 서서 새로운 드레스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거 입고 나갈 거예요? ." 아이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도 모르겠어." 레이첼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냥 전에 입던 검은 걸로 입을까...." 그녀가 다른 드레스로 손을 뻗자 케이트가 말렸다.

"그 옷은 안 돼요! 아빤 벌써 펭귄 옷을 입고 나비넥타이를 맸다구요! 얼마나 멋있는데요!"

레이첼의 입술이 뒤틀렸다. 케이트의 멋진 아빠가 검은 드레스보다 더한 걸 기대하고 있는 건 확실하군.

"옛날 검정 드레스는 너무 지겨워요." 그녀의 딸이 덧붙였다.

지겹다. 요 몇 주간 그녀에겐 아주 낯익은 단어였다. "그럼 빨간 걸로 입지 뭐." 옛날의 레이첼은 지겹다. 새로운 레이첼은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이제 가서 할머니를 도와 드려라, 엄만 준비를 좀 더 할게." 그녀는 딸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는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케이트가 옳았어. 검은 디너 재킷을 입은 대니얼의 모습은 정말로 근사했다. 그러나 단지 옷 때문은 아니었다. 모든 걸 다르게 보이게 하는 건 바로 그 안에 있는 남자였다. 그의 성숙함과 세련됨이 매력을 한층 더 했다. 그는 드링트 트레이 옆에 서서 토닉을 마시고 있었다. 아직 그녀가 방으로 들어온 걸 모르고 있었다. 다행이야, 그의 매력에 넋이 나간 내 모습을 들키지 않아도 되니까.

그의 숱 많은 검은 머리는 늘 그랬듯이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게, 유행에 뒤지지도 않고 너무 앞서지도 않은 정갈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그의 성격을 말해 주는 것이다. 대니얼은 항상 전통과 비전통의 사이에 서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절대로 누군가에게 좌지우지되지 않는 확신에 가득 찬 남자.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그런 면에 압도되는 것이다.

그녀 역시 볼레로의 깃을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압도되고 있었다. 이런 식의 기분은 처음이었다. 대니얼을 사랑하는 사람 이외의 면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7년이나 함께 살아온 남자에게 새삼 위협을 느끼는 건 그녀가 싸워야 할 또 하나의 문제점이었다.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는 고통스럽게 그것을 인식했다. 한 지붕 아래 사는 이방인. 항상 이런 식이었을까? 그 대답이 똑똑하고도 잔인하게 그녀를 강타하는 순간. 그녀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 버렸다. 그래, 항상 이런 식이었어. 대니얼은 내가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7년간 맹목적으로 같이 살아온 이방인이었다.

그는 내가 그의 참모습을 몰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만약 그가 알고 있었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아니면 집 안의 평범한 가장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침해하지 않는 역동적인 독재자의 두 가지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던 걸까?

그때 그가 돌아서서 그녀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천천히 그녀를 훑어내리는 그의 표정 없는 눈동자가 찌푸려지는 걸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다시 고통스럽게 뒤틀렸다.

내게 자신을 감추고 있어. 그녀는 깨달았다. 그는 항상 그랬다. 지금도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더욱 강조하는 헤어스타일과 화장한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드레스는 그녀가 전에 입었던 것보다 훨씬 세련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길고 늘씬하고 우아한 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대니얼은 그 모든 것을 보면서도 온화한 가면 뒤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속눈썹이 깜빡거리더니 아주 살짝 그의 감정이 내비쳤고, 그는 다시 그것을 감추었다.

아픔이었다. 그의 표정에 아픔이 깃들인 것이다! 왜 아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 모습을 보고 아픔을 느끼는 걸까?

아냐, 아픔이 아닐지도 몰라. 죄책감일 수도 있지.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은 것에 충격을 받았을지도 몰라. 내가 스스로 변신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연민을 느꼈는지도 모르지!

"가기 전에 한잔 하겠어?" 그가 물었다.

그녀는 풍선이 핀에 찔려 서서히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뇨, 됐어요." 그녀는 갈라지는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거절했다.

"지금 이 시간에 예약되는 곳이 있어요?"

그는 짓궂게 입술을 뒤틀었다.

"겨우 겨우 했지." 그가 말했다. "그럼 갈까?"

좋아, 걱정은 그만 하자구! 분노에 찬 레이첼은 몸을 돌려 거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경직된 자세로 자리에 앉아 그의 긴 손가락이 BMW를 능숙하게 몰고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이들과 함께 나가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땐 아이들에게 보다 안전한 그녀의 에스코트를 타고 나갔기 때문에 이 차를 타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BMW를 타고 있는 기분은 아주 낯설었다. 사실은 모든 게 낯설지. 나 자신을 포함해서.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녀는 별로 열의를 띠지 않고 물었다.

그의 시선이 흘끗 그녀를 스치더니 다리 앞으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레스토랑의 이름을 대자 그녀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깜짝 놀랐다. 유명 인사와 부자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다. 그런 곳에 들어가려면 굉장한 신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항상 믿었다. 사실 대니얼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곳을 대는 곳이 그녀에게는 더욱 충격이었다.

"음식이 맛있어." 그는 무심히 말했다. "아주 입맛이 없는 사람들도 유혹을 느낄 만큼...."

나더러 하는 말인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녀가 최근 식욕을 잃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목구명에 커다란 혹이 붙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인데 음식이 제대로 들어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전에도 와봤다는 소리네요." 그녀가 짐작했다.

"한두 번."

리디아와 함께? 그녀는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연히 말문이 막혀 버리게 되었고 기분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녀의 기분을 눈치 챘는지 사치스럽고 화려한 식당 안으로 그녀를 안내하는 대니얼의 기분도 과히 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 매스터슨 씨." 작고 통통한 대머리 남자가 마술처럼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예의바르게 레이첼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녀는 대답으로 경련에 가까운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클로드." 대니얼은 아주 친근감 있게 말했고, 그 모습을 보며 레이첼은 눈살을 찌푸렸다.

"짧은 시간에 자리를 내줘서 고맙소."

클로드는 전형적인 유럽식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매스터슨 씨 같은 분께는 언제나 자리를 내드려야죠. 이쪽으로 오십시오...."

대니얼의 손가락이 그녀의 허리를 살짝 감았다. 주위의 화려한 외양에 너무 놀라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녀는 한 번도 와보지 못한 휘황찬란한 레스토랑을 둘러보았다.

대니얼이 평소에 그녀를 데려가는 레스토랑은 인도나 중국, 아니면 이태리 레스토랑으로, 두 사람 다 캐주얼한 복장으로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아무 좌석에나 앉아 즐겁게 먹기만 하면 되는 곳이었지만, 여기서는 감힝 아무 자리에나 앉을 수도 없엇다. 그곳에서는 서로에게 자신의 음식을 먹여 주고 그가 그녀의 손가락을 탐욕스럽게 빨아도 그 누구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감히 그런 분위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사실 그녀는 왠지 경멸감마저 들었다. 음식을 먹으러 오는 게 아니라 분위기를 먹으러 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안 드나 보군." 대니얼이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글세... 좋네요."

"좋다구?" 대니얼이 빈정대는 투로 그녀의 말을 따라했다. "런던에서 제일 좋은 레스토랑을 두고 그냥 좋다구?"

"미안해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대단히 감동받아야 하는 거죠?"

"아니." 그의 턱 근육이 실룩거렸다.

"아니면 당신의 급한 예약도 받아 주는 능력에 감동을 받아야 하는 건가요? 조심해요, 대니얼. 당신이 날 감동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할지도 모르니까."

"그게 너무 우스워서 받아들이기도 싫다는 건가?"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우아한 장소에서 우아한 옷을 입고 우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 그녀는 다시 대니얼을 돌아보았다.

"솔직히, 그래요.." 그녀는 조소를 머금었다. "내게 감동을 줄 필요가 없다는 건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잖아요."

그는 초조하게 한숨을 지었다."레이첼, 당신이랑 싸우자고 이리 온 건 아냐. 난 다만...."

"특별한 대접을 해주고 싶었나요?" 그녀가 신랄하게 대꾸했다.

"아니, 당신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어.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구!"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

"당신의 나머지 반쪽 인생을 보여 주면서요?" 그녀가 조롱했다.

"내 나머지 반쪽?" 그는 정말로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야?"

"내가 전혀 모르는 반쪽이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런 곳에 아주 잘 어울리는 나머지 반쪽이요."

그의 회색 눈동자가 짜증스럽게 그녀를 흘겼다.

"그럼 이렇게 입고 중국 요릿집에라도 갔으면 좋겠다는 거야?" 그가 비아냥거렸다. "오늘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느라 당신이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아. 여긴...."

그는 주위를 훑어보았다. "당신의 새로은 이미지와 아주 잘 맞아. 좋아하고 말고는 당신 자유지만."

좋지 않아. 그 대답은 즉시 튀어나왔다. 아무리 옷을 맞게 입었다고 해도 여긴 나와 어울리는 곳이 아냐. 그러나 물어야 할 대상은 대니얼이었다. 우리 사이에 아직도 공통점이 남아 있긴 한 건가?

"그럼 당신은 좋아요?" 그녀가 호기심으로 물었다. "새로운 이미지가?"

그는 의자에 기대더니 야릇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리는 마음에 들어." 그는 한참 후에 시인했다. "하지만 당신이 머리를 자른 이유까지 좋은지는 모르겠어. 드레스도 좋아." 그는 그녀가 대꾸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아주 아름다워. 당신도 알겠지만, 하니만 난....."

웨이터가 그녀의 옆에 다가와 서자 자연히 대니얼의 말은 중간에서 끊겨 버렸다. 그는 레이첼의 앞에 시원한 음료를 내놓더니 대니얼에게도 같은 걸 내놓았다.

"메뉴입니다."

그는 중얼거리며 진녹색의 가죽 메뉴판을 두 사람에게 내놓았다.

"고맙소." 대니얼은 그렇게 말하고 웨이터에게 빨리 물러나라는 듯 퉁명스럽게 손가락을 튕겼다. 웨이터는 예의바르게 꾸벅 절을 하고 사라졌다.

"왜 그렇게 무뚝뚝하게 대해요?" 레이첼이 물었다.

"당신을 칭찬하려는데 내 말을 가로막잖아."

그녀는 비웃음을 지었다. "그게 칭찬이라면 난 하나도 감동받지 않았어요. 대니얼?"

그는 씁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좋아." 그가 결론을 지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당신에 대해 난 아무런 말도 해줄 수가 없어, 레이첼....." 그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다급한 시선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아름다워. 내가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지. 제발 내게 뭔가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당신의 옛 모습을 잃지 말아 줘!"

"당신을 위해 이러는 게 아니에요, 대니얼." 그녀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날 위해 이러는 거죠. 나도 어른이 될 때가 된 거예요."

"아냐, 달링." 그가 감정이 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 말은 틀려!...."

"대니얼 매스터슨, 이게 얼마 만인가!" 부드럽고도 신랄한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젠장!" 대니얼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레이첼의 손을 꼭 쥔다음 재빨리 놓고, 다시 위장된 가면 속으로 표정을 숨기고는 훼방꾼을 올려다보았다.

"." 그는 아는 체를 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넨 미국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상대방 남자와 악수를 했다. 레이첼은 대니얼과 비슷한 나이의 매력적인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비쩍 마른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의 날카로운 눈매를 갖고 있었다.

"돌아온 지 몇 주 됐지." 그가 대꾸했다. "요즘 종적을 감춘 건 자네 아닌가...." 그의 시선이 레이첼을 휩쓸더니 역력한 관심을 드러냈다. "이 아름다운 숙녀분이 이유였군?"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고는 대담하게 대니얼에게 물었다. "그럼 예전의 리....."

"내 아내일세." 대니얼이 재빨리 남자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레이첼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고도 남았다. "레이첼이야." 그는 내키지 않게 몸을 뒤틀어 문제의 장본인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잭 칼럼이야. 같은 법률 회사를 이용하고 있지." 그는 부루퉁한 투로 말했다.

잭 칼럼은 대니얼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것뿐이야?" 레이첼은 대니얼의 뻣뻣한 몸을 지나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며 그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기억해 내는 데 정신이 팔려 그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진 못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선데이 글로브>지의 정치 만화가였고, 아주 날카로운 위트를 가진 사람이었다. 사람의 약점을 잡아 꼬집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고, 그래서 TV에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가끔 퀴즈쇼에 나와 특유의 유머를 선사하곤 했다.

"대니얼이 몇 주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인 걸 이해하겠군요." 그는 레이첼의 손을 잡은 채로 중얼거렸다. 길고 남자로서는 무척 가는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 "아내라." 그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자네 취향이 확실히 고급스러워졌군, 대니얼."

리디아를 말하는 거겠지. 레이첼은 속으로 분을 삭였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대니얼을 대신해 말했다. 그는 너무도 긴장을 하고 있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당신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요, 칼럼 씨." 그녀가 수줍게 말했다. "당신의 작품을 좋아해요."

"팬인가요?"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좀 더...." 그는 비어 있던 의자를 끌어당겼다.

", 뭐하는 거예요?" 짜증 섞인 목소리가 끼어 들었다.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일어나서는 그의 바로 뒤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여기 아주 중요한 사건이 벌어져서 말이야, 이 친구가 글세 결혼이라는 덫에 항복을 하고 말았지 뭐야." 그의 한숨 소리는 솔직했고, 대니얼에게 조소를 보냈다. "클레어야." 여자의 날씬한 허리에 손을 감으며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 친구는 대니얼 매스터슨이야, 당신도 알고 있지?"

"물론이죠." 그녀가 메마른 투로 말했다. "우리 모두 하비 입찰의 결과를 숨죽이고 기다렸는걸요."

하비 입찰. 레이첼은 눈을 내리깔았다. 나만 모르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 줄 알고 있었군.

"반가워요." 클레어가 말하는 동안 대니얼은 아주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주었을 뿐이다. 그는 여전히 레이첼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잭 칼럼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고정시켰다.

"같이 합석하자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주문을 해서 말일세." 대니얼은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그는 말을 다 하지 않았지만, 대니얼이 그들과 합석을 원하지 않는 건 명백했다.

"걱정 말게." 잭이 웃음을 터뜨렸다. 빈정거림이 섞여 있는 웃음이었다. "우리도 신혼의 단꿈을 깨뜨리고 싶지 않다구."

대니얼이 반박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레이첼의 시선을 보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제발 사실대로 말하지 말아요! 그는 리디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걸 아는 남자에게 결혼 한 지 7년이 됐고 아이가 셋이나 있다는 말로 날 비참하게 만들지 말라구요.

그는 험상궂은 시선을 내리깔았고, 입은 한일자로 꼭 다물어졌다.

그녀는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굴욕감과 비참함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대니얼이 이상한 행동을 했다. 그녀에게 손을 뻗더니 턱을 잡고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러고는 런던에서 가장 유명하고 세련된 레스토랑에서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것도 아주 정열적으로. 그가 그녀의 깜짝 놀란 입술을 풀어 주었을 때 그의 눈동자에 담긴 고통이 너무나 끔찍했다. 그것을 본 그녀는 눈물이 핑 돌았다.

"신혼여행이 아직 안 끝났나 보군." 잭 칼럼이 빈정거렸다. "가자, 클레어. 아무래도 이 원앙 한 쌍을 단둘이만 내버려 둬야 할 것 같은걸."

"뭘 먹겠어?"

대니얼의 갑작스런 키스에 당황하고 그의 눈동자에 드러난 표정에 마음이 뭉클한 레이첼은 그가 한 말에 거의 신경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느새 자리에 앉아 전과 다름없는 얼굴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 그녀는 앞에 있는 메뉴를 내려다보았지만, 눈물로 앞이 가려 버렸다. "...." 그녀의 심장은 아직도 요란하게 고동치고 있었고, 입술은 여전히 열기를 머금은 상태였다. "당신이 주문해 줘요." 결국은 메뉴판을 옆으로 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퉁명스럽게 웨이터를 불러 딱딱한 목소리로 주문을 했다. 웨이터는 테이블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을 의식한 듯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웨이터도 대니얼이 내게 키스한 걸 보았을까? 이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레이첼은 주위를 둘러보고 사람들이 그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살구색 테이블보를 손으로 휘감으며 정상적인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잭 칼럼은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별 관심없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버지에게서 작은 회사 하나를 물려받았거든." 그가 설명했다.

"별로 쓸모없다고 생각해서 나한테 팔았지."

"그의 작품을 좋아해요." 그녀가 말했다. "내가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이 멋있어 보여요."

"그의 외모가 멋있어 보이는 건 아니구?" 대니얼이 부루퉁하여 물었다.

레이첼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대니얼이 내게 관심을 보이는 다른 남자를 질투하고 있다니?

"그래서 내게 그런 식으로 키스한 거예요?"

그의 시선에 쌀쌀맞은 빛이 얼핏 스쳤다. "마치 새로 나온 요리처럼 당신을 쳐다보고 있었어."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당신이 누구 소유인지 그에게 단단히 일러두고 싶었어."

소유라구? 난 대니얼에게 소유되어 있을지 몰라도 리디아가 가운데 끼어 있는 한 대니얼은 나의 소유가 될 수 없었다.

"이 다른 세계에서는 당신에게 아내와 아이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없나요?" 그녀는 무거운 투로 물었다.

그는 그의 다른 세계에 대한 언급에 대해서는 전혀 대꾸하지 않았다. "내 사생활은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들과는 사업상 만날 뿐이야. 이제 그만 화제를 바꾸자구." 그가 딱딱거렸다. "물론 나와 함께 있는 것보다 잭 칼럼과 있는 게 더 재미있다면야 얼마든지 그를 불러 주지. 어디 한번 재미있게 놀아 보라구!"

그가 질투를 하고 있어! 그녀는 왠지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최소한 그는 여자 친구가 입을 열 때마다 퉁명스럽게 대꾸하지는 않는군요." 그녀는 달콤한 투로 빈정거리며 그의 뺨이 짙은 붉은빛으로 변하자 의기양양했다.

그때 고맙게도 첫 번째 코스가 나왔다. 서로에게 독설을 퍼붓고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뭐라도 먹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가 그녀에게 시켜 준 연어 무스는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입맛이 전혀 없었음에도 아주 맛있었다. 반쯤 먹고 있는데 대니얼이 손을 뻗어 와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잡았다.

"레이첼." 그의 갈라진 목소리는 그녀의 조심스런 시선을 이끌었다. "최소한 오늘 저녁을 즐겁게 만들어 보려고 노력이라도 할 수 없을까?" 그가 애원했다.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아, 난 다만...."

"대니얼, 이거 정말 반갑네!"

그의 얼굴이 짜증으로 어두워졌고, 레이첼은 실망감을 느꼈다.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다급함이 서리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기 시작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년 부부와 인사를 나누기 위해 일어서지도 않았다. 그녀를 소개시켜 주지도 않았다. 다만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을 뿐, 얼른 그들을 떠나게 했다.

"내가 왜 이런 곳에 당신을 데리고 오지 않는지 이제는 이유를 알겠지?"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 저녁 내내 이런 식으로 방해당할 거야."

"그게 뭐 어때서요?" 그녀는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다.

"당신을 데리고 나가면 나 혼자 독차지하고 싶다구!" 그렇게 대답하는 그의 표정은 그녀의 심장을 한없이 두근거리게 할 만큼 진지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옳았다. 그들은 식사 도중 세 번 이상 방해받았고, 결국 대니얼은 한숨을 짓고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가자." 그가 말했다. "클럽으로 가서 춤추는 게 낫겠어. 최소한 춤을 출 때는 건드리지 않겠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그는 식당 안을 가로질러 한손으로 문을 열었다. 그곳은 더욱 어두웠다. 정문에서 그녀는 방의 맞은편을 볼 수 있었다. 바와 재즈를 연주하는 밴드가 서 있는 작은 무대가 있었다.

대니얼은 그녀를 플로어로 데려가 그의 품에 안았다. 그녀는 즉각적으로 신경질적인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가 마치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낯선 사람이 그녀의 감각을 자극하여 그녀 스스로가 여자임을 느끼게 했다.

이게 바로 대니얼이야. 그가 음악에 따라 그녀에게 리듬을 맞출 때 그녀는 자신에게 상기시켰다. 낯선 사람이 아닌. 네가 7년 동안 함께 살아왔던 그 사람이야.

그러나 이 대니얼은 그녀에게 낯설었다. 그의 다른 세계에 함께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남편과 아내로서 함께 살고 있긴 해도 이미 몇 주 전부터 남남처럼 느껴졌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의 슬픔이 그에게도 전해졌는지 그의 옷깃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꼭 쥐며 다른 손은 그녀의 허리로 내려와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손가락이 맨살을 쓰다듬기 시작하자 두 사람 모두 숨도 쉬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그 순간, 그녀는 등이 깊게 패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워낙 달리 신경 쓸 곳이 많아 거의 생각도 안 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고, 감흥의 물결이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따뜻한 목덜미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를 거부하고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며 다시 그를 바라보게 했다.

"옛날 일이 기억나는군." 대니얼이 속삭였다. 그녀는 그의 말을 알아듣고 가쁜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처음 그들이 만나 춤을 추었을 때 그녀는 깊이 패인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그는 그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었다.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는 그때 것보다 세련되었지만, 그녀의 반응은 똑같았다.

그녀는 아득해지는 마음의 끝자락에 서서 대니얼의 몸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한숨을 지었다.

그의 고개가 그녀의 목덜미로 파고 들었다.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군, 그렇지?" 그는 숨을 쉬듯 말했다. "우린 아직도 서로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어."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결국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지으며 그녀는 그를 향한 모든 감각에 항복하고 말았다. 몇 주 만에 처음으로 그에게 자발적으로 움직이자 그는 그것을 감지하고는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집으로 가자."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이러고 싶지 않아."

"...." 이번에는 그녀로서도 그를 물리칠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걸 인정했다. 그러나 낯익은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며 그녀의 마음은 산산조각 나 버렸다.

"돈 후안이 살아오셨군요. 그것도 새로운 애인을 동반하고...."

 

7

레이첼은 그 목소리를 듣고 무의식중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대니얼의 빳빳하게 긴장되어 있는 몸에 기댔다.

"물론 이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건 알겠죠." 잔혹한 목소리가 비아냥거렸다.

아만다는 대니얼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가 레이첼이라는 걸 모르는 게 분명했다.

"벌써 7년이나 됐어요." 그녀는 무자비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얌전히 집에 앉아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을 예쁜 아내가 있죠. 남편이 아무 여자나 데리고 놀고 있는 동안에."

"아니, 아무 여자는 아니지. 아만다." 대니얼이 차갑게 대꾸했다. "항상 당신을 거절하기는 쉬웠어."

아만다가 대니얼을 원했다구? 레이첼은 고개를 들어 그의 신랄한 눈동자와 마주치며 마음의 신뢰가 처참하게 깨지는 모습을 그에게 고스란히 들키고 말았다. 그는 그것을 쳐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대니얼과 아만다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서로 잘 맞지 않아서이겠거니 하고 무심하게 넘겼다. 하지만 이젠 그 이유를 알았어. 욕지기가 밀려왔다.

"남자들은 원래 오만한 여자를 경계하게 마련이죠, 대니얼." 아만다가 잘난 척하며 경고했다. "그건 아주 파괴적인 무기가 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당신은 그걸 아주 교묘하게 이용했지?" 대니얼이 빈정거렸다. "사람의 약점을 잡아 공격하는 것 말야."

"아무튼, 레이첼은 좀 어때요?" 그녀가 받아쳤다.

"그 불쌍한 것이 당신이 벌써 리디아의 후임자를 찾아냈다는 걸 알기나 할까요?"

이만하면 충분해, 충분히 들었어. 대니얼의 팔 안에서 몸을 비튼 레이첼은 한때 가장 친한 친구였던 여자에게 돌아서며 아만다의 안색이 서서히 창백해지는 걸 보았다. 아만다는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우아하게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분위기른 삽시간에 엉망이 되었고, 저녁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클럽을 떠나 주차장으로 갈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됐어요?" 런던의 복잡한 거리로 들어섰을 때 그녀가 물었다.

"몇 년 됐지." 그는 단번에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고 대답했다.

"그애와 사귀었나요?"

그녀는 핸들을 잡고 있는 그의 관절이 하얗게 변하는 걸 보았다. 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 한일자로 입을 다물었지만, 아내로서 물어 볼 권리가 있다.

"아니."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생각도 안 해봤어."

"왜요?"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니까."

"그럼 왜 그 애가 그런다는 걸 나한테 말 안 했어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에 대한 믿음이 무너질 텐데?" 그는 험상궂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난 아만다를 싫어한다고 노골적으로 당신한테 말했어." 그가 상기시켰다.

"하지만 우정에 금이 갈 정도는 아니었잖아요. 한마디만 했어도 오늘과 같은 일은 피할 수 있었을 거예요."

"당신이 상처받을 걸 뻔히 알면서?" 그의 표정이 차 안의 어두운 조명 아래 험악하게 빛났다. "난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어, 레이첼."

"그렇겠죠." 그녀의 한 마디가 허공에 걸려 있었다. 그는 그 말의 다른 의미를 알아챘을 것이다.

 

그녀는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제니를 만나 볼 생각도 않고 그대로 계단을 올라갔다. "머리가 너무 아파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많은 아픔이 밀려들었고, 두통은 그 중 하나였다. "어머니에게 죄송하다고 전해 줘요."

대니얼이 어머니를 모셔다 주고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는 자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는 척하며 그가 잘 준비를 하는 몸놀림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알몸으로 잠자리에 들어와 두 손으로 머리를 베고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몇 주 전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에게로 손을 뻗고 싶었다.

그러나 운면은 그렇게 자애롭지 못했고, 레이첼은 어둠 속의 무거운 긴장에 질실할 것만 같았다. 그때 대니얼이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고, 그만큼 다급하게 서로를 찾았다.

그러나 그날 밤도 어김없이 리디아가 그녀를 찾아 왔다. 대니얼은 그녀의 변화를 감지하며 그녀가 몸 안의 악마와 사투를 벌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힘겹게 싸웠다. 질끈 감은 눈 밖으로 눈물이 흘러내렸고, 키스로 부드러워진 입술은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단단한 근육을 파고들었다.

"레이첼." 그가 그녀의 안으로 들어오며 속삭였다. 그녀가 방금 싸워 이긴 전투를 이해하고 그녀가 그를 위해 그것을 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한 마디였다.

그러나 함께 절정에 다다랐어도 그녀의 마음은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그 허무함은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대니얼은 또 다른 인수 건 때문에 다시 바빠졌고, 허더스필드 근처의 작은 회사와 협상을 하느라 며칠 동안 집을 비웠다. 레이첼은 그의 말에 입을 봉하는 것으로 대꾸했고, 그는 잔뜩 분노를 안고 떠났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믿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결혼생활을 더욱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 몇 주는 더욱 참을 수 없는 날들이 되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역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그녀의 맥박을 뛰게 만드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잭 칼럼이 그날 저녁 지역 미술 대학에서 그의 작품에 대해 강의를 한다는 것이었고,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참서갈 수 있었다.

대니얼은 출장 중이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겨 놓고 가도 되겠지?

무엇보다도 대니얼에 대한 복수심이 그녀를 자꾸만 밖으로 내몰고 있었다.

다 그가 잘못해서야. 그녀는 센터 밖에 에스코트를 세우며 자신을 방어했다. 잭 칼럼 같은 남자에게 질투심을 내보인 그가 잘못한 거라구. 그런 것만 보지 않았더라도 내가 감히 이럴 생각도 못 했을 거야!

강연이 개최되는 작은 강당으로 들어간 그녀는 잭이 그녀를 알아보리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뒤쪽에 앉았다. 어차피 우린 잠깐 스쳤을 뿐이니까.

그러나 그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는 연단에 올라서서 미소를 지으며 가득 찬 객석을 둘러보다가 그녀가 있는 곳을 포착하고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가 환한 미소를 지어 모두가 그녀를 돌아보게 하자 그녀는 얼굴이 벌개지며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녀는 수줍게 미소로 대답하고는 푸른 더블 코트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그가 강연을 시작하자 다시 긴장이 풀렸다. 그녀는 희생자의 약점을 어떻게 잡아내는지에 대해 재치 있게 설명하는 그의 말에 빨려 들어갔다. 그는 훌륭한 연설가인 동시에 웃는 얼굴에 좌중을 웃기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사람들과 함께 웃는 그녀를 포착하고는 윙크를 했고, 그와 안면이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몇 주 만에 들뜬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강연이 끝난 후 그는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레이첼." 그의 따뜻한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와줘서 정말 반가워요."

"저도 그래요." 그녀는 다시 수줍움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강의 정말 재미있었어요."

"이 대학 강좌를 들어요?"

그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아뇨!" 그가 설마 그런 착각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이 근방에 살아요. 신문에서 강연이 있다는 걸 보고 충동적으로 온 거예요."

"당신 혼자서?"

"." 그녀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이 남자에게 화장도 제대로 안 한 가정주부로서의 모습을 자꾸만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대니얼은 사업 때문에 출장 갔어요."

"." 그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정치에 관심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미술에요. 캐리커처에 관심이 있어요. 믿지 않겠지만 나도 한때 내게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그녀는 부끄럽게 시인했다. "아내와 아이들의 엄마가 되기 전에요."

이런, 실수했어. 잭은 내가 신혼이라고 알고 있을 텐에. 그는 혼란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고,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

다행히 잭을 만나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레이첼은 더 이상 이 남자에게 개입되기 전에 떠나자고 생각하고 더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돌아섰다. 그러나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아 세웠다.

"가지 말아요." 그가 말했다. "관계자들과 잠깐 작별 인사 나눈 후에 지나오다 본 펍 (영국의 선술집)에서 간단하게 한잔 합시다."

그녀는 유혹이 밀려 올라오는 걸 느끼며 망설였다. 대니얼이 아닌 남자와 펍에서 t술을 마셔도 될까? 못 할 것도 없지. 대니얼도 나 아닌 다른 여자와 그럴 텐데 뭘! 요즘 같은 시대에 그게 뭐 흠인가? 내가 누구랑 술을 마시든 무슨 상관이야?

대니얼이 가만 있지 않겠지.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녀의 적의감이 그것을 무시하게 만들었다. 난 잭을 좋아해. 그의 작품에 관심이 많아.

"고마워요." 그녀는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재미있겠네요."

우습게도 이번엔 그가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팔을 놓아 주었다.

"5분만 기다려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양심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그녀를 남겨 두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펍에서의 시???을 즐겼다. 아내와 엄마의 신분을 벗어나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웠다. 그의 허물없는 태도가 좋았고, 고등학교 때 이후로 꼭 닫아 두었던 희망을 수줍게 꺼내는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 주는 그가 좋았다.

그들이 헤어질 무렵 잭이 결국 대니얼의 이름을 내밀었다. "대니얼과 결혼한 지는 얼마나 됐어요, 레이첼?"

그녀는 저녁 내내 즐겁던 기분이 바람이 빠져 버리는 걸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7년이요." 그렇게 말하고는 컵을 살짝 치켜들었다. "아이도 셋 있어요. 아들 둘에 딸 하나요. 샘과 케이트는 쌍둥이죠."

그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지만, 유머가 담겨 있지는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실례한 걸 사과해야겠군요."

대니얼의 다른 여자에 대해 언급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레이첼은 가슴이 움찔하는 걸 느꼈지만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털어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솔직했을 뿐인걸요. 음흉한 건 나와 대니얼이었어요. 잘 가요, ."

그녀는 그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말했다. 그날 밤에 대해 얘기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알고 싶지 않았다.

"오늘 저녁 정말 재미있었어요, 고마워요."

그녀가 돌아서서 차 문을 열려고 할 때 그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들어 봐요." 그가 말했다.

"1주일에 한 번씩 12주간 이 대학에서 캐리커처 강좌를 할 생각이 있는데, 관심 있어요?"

관심이 있냐구? 레이첼이 다시 그를 돌아보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왠지 그가 충동적으로 그 결정을 내렸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무슨 이유로?

"모르겠어요." 당연히 그녀의 대답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이곳에 올 이유가 있나요?"

그의 빈정거리는 미소가 그녀의 순진함을 조롱했다. 그는 유명 인사다. 그가 무슨 일에 관심을 갖든 사람들이 관심을 둘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당신도 재미있을 거요, 레이첼."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건 확실하게 약속할 수 있어요."

자그마한 흥분이 끓어오르며 그가 말한 그 약속이라는 건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그녀에게 이끌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그녀가 그 위험한 생각을 같이 품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니, 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에게 대꾸했다.

잭 칼럼 같은 남자와 연루되지 않아도 지금 내 인생은 충분히 복잡해. 사실 스케치북과 연필을 들고 있지 않을 때의 그의 모습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뭘 가르치실 건지 말씀해 보세요." 이윽고 그녀가 얼버무렸다. "그럼 한번 생각해 볼게요."

 

"잭 칼럼이 지방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친다구?" 대니얼은 잔뜩 조롱을 담아 말했다. "그가 웬일로 그런 하찮은 일을 다 한 대?"

"좋으니까 그러겠죠." 대니얼의 조소에 괜히 기분이 상한 레이첼이 대꾸했다.

그는 그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날 밤 나간 것에 대해 심드렁했으나, 잭 칼럼 때문에 나갔다는 걸 알고는 잔뜩 심통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가 강연을 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지역 신문에 나왔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밥은 먹었어요?" 그녀는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필요 없어! 잭 칼럼과 함께 나간 얘기나 해봐!" 그가 짖어대듯 말했다.

"그와 함께 나간 게 아니에요." 그녀가 부정했다.

"그의 강연을 들으러 간 거라구요!" 그것과 대니얼의 말이 의미하는 것에는 차이가 많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대니얼?" 그녀는 참을성을 잃고 반박했다. "우리가 만날 약속이라도 했다는 거예요?"

그의 볼이 빨개지는 걸 보고 그녀는 그가 바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야.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한 눈빛을 보냈다구!"

맙소사, 천하무적의 대니얼 매스터슨이 한없이 수준 낮은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무슨 짓이라도 할 까 봐 겁에 질리다니!

"우리 사이를 믿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그녀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당신은 복수를 시작했어."

"당신의 죄의식 속에서 편집증을 일으키고 있어요."

그녀가 매몰차게 대꾸했다. "날 당신과 같은 붓으로 검게 칠하려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녀는 자신이 전적으로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양심의 목소리를 다시 무시해 버렸다.

"난 그런 적 없어." 그는 한숨을 지으며 술장으로 다가갔다.

"그럼 뭘 하려고 했던 거예요?"

"사실...." 그는 다시 한숨을 지으며 지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내가 뭘 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어." 그가 고백했다. "강의를 들을 거야?"

"그러고 싶다면 남편의 권위로 못 하게 막을 건가요?" 그녀는 작은 턱을 치켜들며 도전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내 말을 들을 건가?" 그가 씁쓸하게 물었다.

"아뇨."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내가 시도해 볼 필요도 없겠군?" 그렇게 말하고는 거실을 나갔고, 그녀는 분노와 짜증과 그보다 처리하기 힘든 감정 속에 남겨졌다. 상처였다. 그와 다투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그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든 간에 그가 그녀을 남겨 둔 채 밖으로 휭하니 나가 버리면 그녀는 사랑을 잃은 아이처럼 상처를 입었다.

문제는 내가 너무도 오랫동안 그를 위해 살아왔기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잭이 모든 준비가 되었다고 전화를 했을 때 그녀는 흔쾌히 강좌를 듣겠다고 약속했다.

대니얼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2주후 강의를 들으러 밖으로 나갈 때 그는 침실로 들어오자마자 그녀의 팔목을 잡아 침실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둘중 아무도 그런 관계에 만족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몇 주가 지나가며 그녀의 캐리커처 실력은 꽃을 피웠다. 대니얼도 그녀가 그린 익살스런 그림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잭은 아주 열의가 다분한 선생이었다. 수업 중에는 절대로 개인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펍에 잠깐 들러 그녀에 대한 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녀는 그에게서 배울 것을 더 얻어내기 위해 대부분 그것을 무시하려고 애썼지만, 그가 너무 강하게 나올 때는 모든 걸 포기해야 했다.

어느새 12월이 다가왔다. 레이첼은 크리스마스 준비로 한층 바빠졌다. 쇼핑을 하고 모든 이들의 군침을 돌게 하는 쿠키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놓았다. 대니얼은 더욱 바빠지고 더욱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규칙적으로 레이첼을 데리고 나가는 일은 잊지 않았다. 극장, 영화관, 클럽과 레스토랑 등. 그녀의 옷장은 보다 고급스런 옷들로 가득 찼지만, 그녀는 곧 간편한 캐주얼 의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헤어스타일은 그대로 놔두었다. 긴 머리보다 손질하기도 쉽고 모양도 예뻤다.

그러나 결혼생활의 긴장은 그녀로 하여금 다른 국면에 처하게 했다. 작은 일에도 지나치게 반응하여 쉽게 피로하고, 아무 이유도 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일이 잦아졌다. 가족들도 걱정을 하며 항상 밝게 웃던 레이첼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강의를 들으러 가려는데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대니얼은 허더필드에 가서 밤 늦게야 돌아올 예정이었다. 제니는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밖은 진눈깨비가 몰아치고 있었고, 레이첼은 하는 수 없이 안으로 다시 들어가 택시를 부를까 했지만, 방금 도망쳐 나온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도망이라구!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자 자신이 어느 새인가 집을 정신적인 감옥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거운 한숨을 지으며 그녀는 코트 깃을 세우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내려갔다.

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젖어 있었고, 얼굴은 추위로 인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강의를 듣는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말려 주려고 다가왔다. 어떤 사람은 종이 타월로 그녀의 머리를 닦아 주었고, 어떤 사람은 부츠를 빼내고 젖은 양말을 벗겨 주었다.

"이 양말 좀 봐!" 누군가가 경악에 질린 척 소리쳤다. "숙녀가 부츠 안에 남자 양말을 신고 있다니!"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고, 레이첼도 웃었다. 그러자 마음이 가벼워지며 그 동안 그녀를 짓눌렀던 짐이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블라우스는 젖어 있었다.

잭은 입고 있던 검은 스웨터를 벗어 그녀에게 입으라고 주었다. 그녀는 블라우스를 벗고 여자들이 빈틈없이 막아선 안에서 스웨터로 갈아입었다.

그녀의 옷을 모두 라디에이터에 올려놓았을 즈음 그녀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잭의 스웨터 외에 속옷만 입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젖어 있던 옷은 떠날 때가 되어도 마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잭이 곧바로 집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제의를 할 때 레이첼은 그의 눈동자에 서린 표정을 보았지만, 마음속의 강력한 경고를 무시하고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새로 뽑은 포르세를 눈 속에서도 매끄럽게 운전했다. 히터가 꽁꽁 얼어붙은 다리를 녹이자 레이첼은 만족스런 신음 소리를 냈다.

잭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좀 나아졌어요?"

"." 그녀가 중얼거렸다. "펍에 들르는 즐거움이 없어서 어떡해요?"

"괜찮아요. 이렇게 당신과 함께 있는 게 더 좋아요."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레이첼은 눈을 깜빡거렸다. 경고의 전율이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 "다음에서 좌회전이에요."

그는 그녀의 말대로 따랐다. "수요일 밤마다 날 만나는 걸 대니얼이 어떻게 생각해요?" 그가 물었다.

레이첼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니얼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경계심을 늦추고 싶지도 않았다.

"아주 좋아해요."

그렇게 말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니얼은 끔찍이도 싫어했다. 요즘은 거의 스케치북도 보지 않는다. 그녀가 끔찍이도 사랑하는 그림을 가르쳐 주는 상대가 누군지 떠올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직 그를 그려 보진 않았죠?" 잭이 조용히 물었다. "집안 식구 모두를 그리면서도 그는 아직도 안 그렸어요."

"그는 별로 좋은 주제가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다음 교차로에서 우회전이에요."

"대니얼이?" 그의 목소리는 조롱으로 가득 찼다.

"그처럼 이상적인 주제가 어디 있소? 일터에서는 끔찍하다 싶을 정도로 무자비한 인간이 집에서는 평범한 가장이라니, 그 두 이미지를 섞어서 우습게 표현하면 되잖아요."

그러나 레이첼은 동의하지 않았다. 더 이상 대니얼에게서 우스운 면을 발견 할 수가 없었다. 한때는 그랬을지 몰라도 이제는 아니다.

"그럼 언제 한번 그려 볼게요." 그녀는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 가볍게 말했다. "여기에요. 밖에 검은 BMW가 세워져 있는 곳이요."

그러니까 대니얼이 집에 있다는 소리군. 그녀는 몸서리를 쳤지만,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잭은 드라이브웨이 아래쪽에 차를 세웠다. 시동이 꺼지고 두 사람은 가만히 앉아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고, 레이첼도 그에게 돌아앉았다.

"... 태워다 줘서 고마워요." 그러나 그녀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잭의 표정에 차 안의 따뜻함에 그의 눈동자에 서린 어두운 빛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을." 그는 공허하게 대꾸했다.

그의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곧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녀는 반응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않았다. 심장이 울컥 뛰더니 요란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불장난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에게 정말로 이끌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두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키스를 계속했고, 그녀의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건 이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물러났다. 그는 순순히 그녀를 놓아 주었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번뜩이고 있었다.

"미안해요." 그녀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뭐가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이안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문의 손잡이를 더듬는 그녀의 손이 떨렸다.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키스해 주기를 원했소, 레이첼." 잭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의 마음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건 변함없는 사실일 거요."

그의 말이 옳았다. 그녀의 뺨이 죄책감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가 키스해 주기를 바랐다. 대니얼이 아닌 다른 남자의 입술을 느끼는 건 어떤 기분일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에 화가 날 따름이었다. 잭에게 그녀의 인생에 비집고 들어올 공간을 내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젠장.

빗속을 뚫고 집 안으로 들어오던 그녀는 대니얼이 그들이 도착하는 소리를 들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창문을 보니 커튼이 젖혀져 있지 않았다. 제발 잭과 키스한 장면만은 보지 않았기를.

그는 거실에 있지 않았다. 서재 문이 살짝 열려 있었지만 그곳에도 그는 없었다. 그녀는 그를 부엌에서 찾아냈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네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는 주전자가 끓기를 기다리며 등을 지고 서 있었다.

"어머니는 집에 가셨어."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티백 위에 뜨거운 물을 붓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차가 집에 있는데 당신이 안 보인다고 걱정 많이 하셨어. 차를 가져가지 않는다고 말씀을 드렸어야지."

"시동이 안 걸려서 버스를 탔어요. 미안해요." 그녀는 당황하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실 거예요. 내가 내일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면....."

침묵. 그의 시선은 오로지 차 쟁반에만 머물러 있었다. 대니얼이 무슨 일인가에 무척 화가 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목의 근육이 긴장되어 있고 모든 동작이 자제되고 있었다.

본 걸까? 그녀는 떨리는 웃음을 살짝 터뜨리며 말했다. "흠뻑 젖었지 뭐예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얘기하려고 했지만, 죄책감이 얼굴을 붉혔다. "가서 뜨거운 목욕을 해야겠어요." 점점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고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 뭘 좀 먹었어요? 뭐라도 만들어 줄까...."

"필요 없어!"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레이첼은 깜짝 놀라 뛰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녀는 그의 절제된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긴 한숨을 쉬었고, 주전자에서 시선을 돌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 부엌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는 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먹었어. 신경 써줘서 고마워."

"그럼 난...." 그녀는 잠시 어쩔 줄을 모르고 그의 경직된 등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뛰쳐나와 버렸다.

본 거야. 뜨거운 물이 욕조에 담기는 걸 바라보며 그녀는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이나마 자신의 것을 찾은 스릴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바탕 말싸움이 오고 갈 걸 예상하며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대니얼은 나타나지 않았다. 밤새도록.

 

8

그리고 흘러간 몇 주는 최악이었다. 대니얼은 찌뿌둥한 얼굴로 아예 입을 다물고 살았고, 그가 그녀에게 손길을 뻗지 않는 밤은 차갑고 어둡기만 했다. 아이들은 시무룩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크리스마스가 곧 다가오기 때문이다. 레이첼과 대니얼의 사이가 벌어진 것이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준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도무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대니얼에게 솔직히 잭과의 사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지만 선뜻 그럴 수가 없었다. 도저히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첼은 몸이 아주 안 좋았다. 하루 종일 몸이 묵직하고 배가 살살 아픈 걸 느끼며 집안을 서성거렸다. 쌍둥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온 후에 떠드는 소리는 그녀의 머리를 거대한 망치로 두들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대니얼이 퇴근하자 안도의 한숨을 짓고는 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왜 진작 전화하지 않았어?" 발을 질질 끌고 계단을 올라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프다고만 했으면 바로 왔을 텐데."

그녀는 힘없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계속 올라갔다. 그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불을 덮고 누우며 그녀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7년 동안 한 번도 그의 사무실에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대니얼은 집에 자주 전화했지만 그녀는 한 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한 번 가장으로서의 대니얼과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업가로서의 대니얼 사이에 보이지 않는 높은 장벽이 드리워져 있음을 실감했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그 장벽을 넘으려고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튼 지금은 가장으로서 아이들을 돌봐 주고 있으니까 걱정할 건 없지. 아이들의 소리가 잠잠해지자 그녀는 안심하고 몇 분 안에 잠이 들었다.

 

한참 자고 일어나 보니 이미 아침이 되어 있었고, 그가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이거 좀 먹어." 그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말을 하며 그것을 협탁에 내려놓았다. "기분은 좀 어때?" 그가 냉랭하게 물었다.

"좀 나아졌어요." 그녀는 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키며 배가 움찔거리지 않게 무척 조심했다. 창백한 얼굴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는 컵을 잡았다.

"고마워요."

대니얼은 머뭇거리며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원한다면 오늘 쉴게. 집에서 일해도 돼."

레이첼은 고개를 저었디. "그럴 필요 없어요. 좀 힘들어도 참을 수 있어요."

"그러면...."

이상하긴 했지만 그녀는 그가 무엇인가와 무던히 싸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오늘밤엔 강의 들으러 가지 않는 게 좋겠어, 날씨도 추운데....."

차는 아주 뜨거웠다. 그녀는 김을 후후 불었다. "오늘밤에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기로 했는 걸요." 그녀는 되도록 가볍게 말하려고 애썼다. "잭이 수업 끝난 다음 우리 모두를 데리고 나가기로 했어요. 꼭 가보고 싶어요."

그의 뜨거운 적의감에 그녀는 질실할 것 같았다.

곁눈으로 살짝 그의 턱근육이 꿈틀거리는 걸 보았다. 그는 빈정거리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녀의 기분은 끔찍했다.

"나중에 나아지는 걸 보자구." 그렇게만 말하고 그는 돌아섰다.

갑자기 그녀는 그를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에 휩싸였다. ", 우리 부모님이 크리스마스 때 오실 거예요." 그녀는 그가 문가에 우뚝 멈춰 서는 걸 바라보며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당신이나 나나 문제가 있으니...." 그는 등을 돌린 채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작년엔 마이클이 없었으니까 그 방에서 주무시게 하면 됐는데, 올해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소파에서 쭈그리고 주무시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녀는 농담이라고 했지만 대니얼이 천천히 돌아보았을 때 그가 미소를 짓지 않고 있는 걸 알았다. 그녀의 마음은 축 가라앉으며 차갑고 황량한 곳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나더러 어떻게 하라구?" 그가 물었다. "큰 집으로 이사가자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그때마다 그럴 필요 없다고 한 건 당신 아냐? 결국 당신이 만든 문제니까 당신 스스로 해결해 봐!"

레이첼은 그가 돌아서서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리는 걸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날 밤 그녀는 수업을 들으러 갔다. 몸이 나아져서도 아니었고, 가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대니얼에게 너무도 화가 나서 그녀가 집에 가만히 있으면 그가 만족하는 꼴을 보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기분은 완전 엉망이었다. 그냥 집에 있을 걸 하고 후회하며 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지만, 도무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는걸 보고 잭은 내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항상 청바지만 입던 그가 검은 실크 정장에 흰 셔츠를 입은 모습을 보니 무척 매력적이었다. 레이첼은 대니얼이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고 나서 처음으로 충동적으로 산 검은 드레스를 입었다. 어깨가 드러나고 짧은 드레스는 뭇 남성들에게 도발적인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잭의 시선은 영 불편한 것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그녀가 그렇게도 잊으려고 노력한 그날 밤에 나눈 키스를 자꾸만 연상하게 했다. 키스 자체는 잊을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한 것은 죄의식이었다.

그들은 강의 후에 외곽 나이트클럽으로 갔다. 전에 영화관이었던 것을 클럽으로 개조한 곳이다. 이미 예약해 둔 클럽 안으로 들어가니 엄청나게 큰 노랫소리 때문에 대화조차 할 수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녀도 무척 즐겼을 것이다. 대니얼이 데리고 가는 곳은 너무 점잖은 곳뿐이었다. 그와 아침에 다투고 난 후라 신나게 놀자고 마음먹고 왔다.

그러나 속이 메슥거려 주문한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고, 노랫소리 때문에 머리가 둥둥 울렸다. 잭은 의자를 그녀에게 가까이 끌어대며 그녀의 시선을 독차지하려고 했다. 그가 너무도 조용히 말하는 바람에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몸을 아주 가까이 대야만 했다.

그러더니 그가 그녀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팔과 어개, 머리칼을 아주 살짝씩 건드렸다. 그녀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속으로 끙끙거리고만 있는 데 다행히 그가 춤을 추자고 했다.

최소한 춤을 추면 몸이 닿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그것은 레이첼의 착각이었다. 플로어로 내려가자마자 그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안 돼요, ." 그녀는 몸을 빼려고 했다.

"실없는 짓 하지 말아요, 레이첼. 이건 그냥 춤일 뿐이오."

그렇지 않아.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몇 주 동안 비교적 조용하게 지내던 그가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나오기로 결심한 것이다. 지금 이 남자를 뿌리치지 않으면 난 정말로 대니얼을 배신하게 될 거야.

"안 돼요." 그녀는 단호하게 손을 뿌리치고 플로어를 내려왔다. 여기 오는 게 아니었어. 잭에게 나의 세계에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어야 했다.

그는날 원하지만 난 그를 원하지 않아. 난 대니얼만을 원해. 오로지 대니얼만을. 그런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아파오며 울고 싶어졌다.

출구로 빠져나오는 그녀의 뒤로 잭이 따라 나오는 걸 느꼈지만 무시하고 공중전화로 가서 택시 회사에 전화를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금은 크리스마스 시즌이고, 예약을 하지 않고서 외출한다는 건 정신 나간 생각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전화를 했다. 대니얼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배가 꿈틀거렸다.

"나예요."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대니얼의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야?" 이윽고 그가 물었다.

", 집에 갈 수가 없어요." 그녀가 털어놓았다. "택시 회사에 전화를 해봐도 이미 다 예약이 되어 있다고 하고.... 어떻게 하죠?"

결국 난 예전의 레이첼로 다시 돌아온 거야. 모든 문제를 대니얼에게 떠넘기고 그가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레이첼로. 그녀는 뒷짐을 지고 서서 그가 제시해주는 해결책만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다시 침묵이 흐르자 그녀는 수화기를 꼭 쥐고 그가 대답해 주기를 기다렸다.

"당신의 로미오가 데려다 주기로 한 거 아니었나?"

그가 빈정거렸다.

"그는 내 로미오가 아니에요!" 그녀가 부인했다. "...." 그녀는 마음을 바꿨다. 그녀가 잭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서 대니얼을 의기양양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잘 놀고 있는 그를 끌고 나올 수는 없잖아요. 날 데리러 와줄 수 없어요, 대니얼?"

"얘들은 어떡하고?" 그가 신랄하게 대꾸했다. "애들은 놔두고 어떻게 나가?"

"." 이런 바보 같으니. 그 문제는 생각도 못 했어.

"유모를 두자고 했을 때 죽어도 싫다던 사람이 누구였지?" 그가 조롱했다.

"잭더러 데려다 달라고 할게요." 그녀는 즉각 반박했다. 유모 얘기는 오래 전부터 두 사람의 신경전을 이끌어 온 것이었다. 대니얼은 더 큰 집과 가정부와 아이들을 위해 유모를 두기를 원했었다. 레이첼이 알고 싶은 건 과연 그렇게 됐을 경우 그의 인생에서 그녀가 할 일이란 무엇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럼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애들을 봐달라고 하지."

대니얼의 목소리는 방울뱀처럼 경고의 표시로 꼬리를 흔드는 것 같았다. "아마 주무시는 걸 깨워야 할 거야. 그래도 할 수 없지 뭐. 그래도...."

"그건 안 돼요!" 레이첼은 짜증을 터뜨렸다. "당신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잭에게 부탁하는 게 낫겠어요!" 그러고는 대니얼이 대답하기도 전에 수화기를 쾅하고 내려놓았다.

"일이 잘 안 됐소?" 몸을 돌려 보니 잭이 바로 뒤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호기심이 가득 담긴 그의 눈동자는 분노로 검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대니얼과의 대화를 얼마나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에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 그녀가 냉랭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택시 회사에 다시 전화를 걸어서 기다려야 할까 봐요."

"내가 태워다 주겠소." 그가 제안했다. 레이첼은 의혹의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와는 30분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지만 언제까지 택시를 기다릴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잭은 그녀를 대신해 결정을 내리고는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갑시다. 내가 데려다 주겠소."

그들은 함께 그녀의 코트를 가지러 갔다가, 12월의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붉은색 포르세가 세워져 있는 주차장으로 갔다. 레이첼은 두꺼운 모직 코트 속에 몸을 파묻고 차가 천천히 도로로 진입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이기적인 남자와 왜 참고 사는 거요?" 잭이 갑자기 내뱉었다.

"남자들은 다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신랄하게 대꾸했다.

"모두 대니얼 같지는 않죠." 그가 중얼거렸다. "왜 그 친구가 당신 같은 여자와 결혼했는지 모르겠소." 그는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리다아 마스덴 같은 여자가 더 어울리는데."

그 말은 그녀의 심장과 얼굴을 세게 후려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리디아 마스덴이 대니얼과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지. 비록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판단할 수는 없지만. 보고 싶지도 않았다.

리디아 마스덴은 밤마다 그녀를 찾아오는 얼굴 없는 유령이었다. 그 고통은 참을 수 없는 시련이었다.

"그리고 아만다 세일즈라든지." 그가 잔혹하게 덧붙였다. "그날 밤 춤추다가 그녀의 정체를 다 알았을 것 아니오?"

"당신도 들었어요?" 레이첼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 방에 있던 사람 중 절반은 들었을 거요." 그가 빈정거렸다. "대니얼 매스터슨이 아내와 세 아이를 가진 가장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제일 충격을 받은 건 리디아 마스덴이었죠. 그와 결혼을 하려고 안달이었으니까. 그녀 같은 변호사에겐 대니얼은 이상적인 배우자감이었소."

그러니까 리디아는 대니얼의 비서가 아니었군. 그것은 그녀에게 새로운 충격이었다. 평범한 비서라면 그래도 싸울 만하지만, 능력 있는 여변호사라면?

같은 생각을 한 듯 잭이 중얼거렸다. "7년 전에 결혼했다면 그가 돈을 벌기 이전에 그를 잡았다는 소린데. 그럼 어떻게 결혼하게 된 거요. 레이첼? 젊은 시절 객기의 보상으로?"

굴욕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그녀 역시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뭐라고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입다물고 차나 세워요. 당신이 후회할 말을 하기 전에 내리겠어요."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놀랍게도 그는 그녀의 말대로 커브길에 차를 세우더니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보려보았다. "난 이미 갈데로 다 갔소. 당신을 그 동안 날 갖고 놀았어. 젠장! 내게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던 거지?"

"그래요."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깊은 관계가 되기 전에 왜 진작 말하지 않았소?"

"깊은 관계? 무슨 깊은 관계요?" 그녀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를 보았다. "우린 입술 한 번 스친 것밖에 없어요!"

"우린 그보다 더한 걸 나눴소. 당신도 그걸 알 거요." 그가 그녀의 말을 일축했다. "하지만 당신은 날 갖고 놀았어. 내가 당신에게 반해 있는 걸 알고 날 갖고 논 거야. 그렇게 해서 자존심이 조금 회복됐나? 변호사와 바람이 난 남편에게 버림받는 자존심이?"

그 순간 그녀는 그의 뺨을 때렸다. 그러고는 손잡이를 잡고 한 손으로 안전벨트를 풀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잭이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았다. "그렇게 쉽게는 못 가지."

그는 단번에 그녀를 품에 안고 입술을 겹쳤다. 마치 독사의 혀가 입 속으로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그가 그녀를 놓아 주었을 때는 욕지기가 울컥 솟아올랐다.

다행히도 문을 곧 열렸고, 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그의 얼굴 앞에 문을 쾅 닫고 나와 버렸다.

그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바로 시동을 걸더니 쏜살같이 날아가 버렸다. 그녀는 살을 엘 것 같은 차가운 바람 속에 서서 빨간 꼬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레이첼은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아직 입 속에 남아 있는 소름끼치는 느낌을 지우려고 애썼다. 망할 놈의 인간! 망할 놈의 아만다! 내 인생을 이렇게 파멸시키다니! 망할 놈의 대니얼! 망할 놈의 리디아! 다들 용서할 수 없어! 그리고 내 자신이 싫어서 더욱 견딜 수가 없어!

고맙게도 집까지는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현관문에 다다랐을 즈음 그녀의 발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1시군. 따뜻한 집 안으로 들어와 계단을 오르며 그녀는 시계를 흘끗 보았다. 그녀의 머리 끝에 잭과의 추한 장면이 계속 맴돌았다. 대니얼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현관에서도 날 맞아 주지 않은 사람인걸.

그러나 그가 완전히 그녀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천근만근처럼 느껴지는 몸에서 옷을 벗고 잠옷을 걸쳤을 즈음 그가 침실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 그녀가 벗어 놓은 신발이 매달려 있었다.

"이걸 잊어버렸더군." 그는 문을 닫고 그 옆에 구두를 내려놓았다.

"잊지 않았어요." 그녀가 야멸차게 말했다. "그냥 놔두고 왔을 뿐이에요."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픈 발을 주물렀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머리칼이 앞으로 쏠리는 바람에 얼굴을 가렸다.

"그가 집까지 데려다 주지 않았더군." 그가 의혹이 담긴 투로 물었다.

또 커튼 틈새로 엿봤나 보지? "맞아요."

"거기서부터 걸어온 것치곤 너무 빨리 왔는걸."

그만큼만 해도 많이 걸었어요! 그녀는 아픈 발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반박했다.

"연인끼리 말다툼을 했나 보지?" 그는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그의 자제력이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떨어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맘대로 생각하시죠."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욕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의 두 팔을 붙잡고 홱 돌려세웠다. 그는 화가 나 있을 뿐만 아니라 위험스러울 정도로 분노에 차 있었다.

"그래? 그 말다툼이 뭐였지?" 그가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의 집엔 왜 안 갔지? 재미를 볼 기분이 아니었나?"

그녀의 눈동자는 쓰라림과 실망감으로 번뜩였다. 날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다니!

"내가 그의 집에 가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어디서 전화를 했는지 알게 뭐예요?"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여전히 그녀의 팔을 잡은 채 마치 증거물을 찾듯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그 녀석이 당신 입술을 멍들게 했어!"

"당신은 내 팔을 멍들게 하고 있어요!" 그녀가 소리쳤다. "제발 좀 놔줘요." 그녀는 팔을 빼내려 했지만 그의 팔힘은 더욱 세질 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레이첼?"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다그쳤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냐구!"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그 동안 쌓여 왔던 감정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잘 됐군요. 기왕 말 나온 김에 우리 어디 털어놔 보자구요. 당신이 리디아와 있었던 일을 말해 주면 나도 잭과 있었던 일을 말해 주겠어요!"

"그만 해!" 그는 질끈 눈을 감았고, 그의 얼굴에 고통이 스쳤다. 레이첼이 뜨거운 눈물이 솟아오르는 걸 억지로 참으며 주먹으로 그의 팔을 치자 풀려나게 되었다.

"당신만 보면 욕지기가 나요. 그거 알아요?" 그녀는 씁쓸하게 속삭이고는 욕실로 성큼성큼 들어가 버렸다.

다소 침착해진 마음으로 나와 보니 대니얼이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요즘은 모든 일이 다 고통스러웠다. 이 집 안에서 웃어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나 자고 싶어요." 그녀는 나약해지는 자신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동안 그녀는 가만히 서서 그에게로 다가가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래도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난 정말 어쩔 수 없는 바보야! 그녀는 단념의 한숨을 짓고 그의 앞에 앉아 그의 두 팔목을 잡고 얼굴에서 끌어내렸다.

"오늘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알고 싶어요?"

그녀가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날 유혹했지만 내가 거절하자 리디아를 갖고 날 괴롭혔어요! 감상적이고 보잘 것 없는 레이첼보다 대니얼 매스터슨에게 훨씬 잘 어울리는 능력 있는 변호사 말이에요!"

"그건 아니야." 그가 긴장된 투로 말했다.

"아니라구요?" 눈물이 앞을 가리며 가슴의 근육에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엔 맞는 것 같은데요. 우린 이미 멀어졌어요. 대니얼! 당신이 질주해 나가고 있는 사이 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이젠 리디아가 당신에게 더 맞는 것 같아요!"

놀랍게도 그는 웃음을 터뜨렸고, 그녀가 한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당신에게서 멀어진 것처럼 보여? 내가 당신을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어느새 그는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리디아는...."

"리디아는 이 일과 상관없어. 이건 당신과 내 문제야!"

"죄의식이겠죠!" 당신은 죄의식 때문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물론 그것도 하나의 이유이긴 하지." 그는 씁쓸하게 동의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냐. 난 순교자가 아냐. 레이첼. 우리의 결혼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이혼을 했을 거야. 하지만." 그는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내가 떠나지 않는 이유야." 그는 그녀를 끌어당겨 강렬하게 키스했다. "난 당신을 원해. 7년이나 지났지만 난 아직도 당신만 보면 온몸이 뜨거워져. 당신을 더 이상 만족시킬 수 없을 때에도 난 내 자신을 추스릴 수가 없어."

그는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당신이 날 저버린 이유를 그것이라고 단정 할 수는 없어.." 그는 험악하게 묻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레이첼? 내가 당신을 아프게 하고, 당신의 믿음을 깨뜨리게 하고, 당신의 인생을 비참하게 하도록 놔둘 수가 있었어? 왜 진작에 나더러 나가라고 하지 않았냐구?"

"...."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미 모욕을 당한 그녀의 영혼에 다시 한 번 상처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끝내자는 소리야?" 그가 조용히 떠보았다.

"날 내쫓고 싶어?"

그녀의 몸이 칼에 찔린 것처럼 움찔했다. "아뇨." 그녀는 눈물이 복받쳐 올라오는 걸 느끼며 대답했다.

"왜지?" 그가 잔혹하게 추궁했다. "나와 한 집에 사는 걸 어떻게 참을 수 있어? 나와 한 침대에서 자는 걸? 내가 당신을 안는 걸 어떻게 참을 수 있어?"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이 바보! 그녀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대니얼은 한숨을 지었다. 그의 깊은 상처에서 스며 나오는 소리였다. 그는 그녀의 팔목을 풀고 그녀를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세게 끌어안았다.

"우리가 헤어지면 이런 느낌도 잊게 될까? ." 그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그의 품은 그녀가 유일하게 원하는 안식처였다.

"그럼 다시는 그런 얘기 꺼내지 마."

그렇게 말하고 그는 길고도 강렬한 키스를 하며 그녀가 아무런 생각도 못하게 했다.

"당신, 그 자식에게 손을 대게 했어?" 거친 목소리가 막 보금자리에 둥지를 틀려는 그녀를 다시 끌어냈다.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설마 그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아서 그의 눈동자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었다. "그랬나?" 그녀가 아무말도 하지 않자 그가 추궁했다. "알고 싶어. 알아야겠어!"

레이첼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경멸스런 시선을 보냈다. "지옥으로나 떨어져요."

그는 그녀의 말대로 지옥으로 가는 듯했다. 그러나 혼자는 아니었다. 분노와 질투심으로 눈이 먼 그는 그녀의 가운을 거칠게 열어젖히고는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그녀를 가졌다.

그녀는 침대의 자기 자리로 가서 힘없이 누웠고, 대니얼은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는 한참을 그곳에 있었다. 그가 침대로 돌아와 보니 그녀는 이불을 덮어쓰고 잠이 들어 있었다.

 

다음날 저녁, 아이들의 식사를 치우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거실로 걸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한동안 상대 편에선는 아무 말이 없더니 냉정한 목소리로 대니얼을 찾았다.

"아직 퇴근 안 하셨는데요." 그녀가 대답했다. "전화 왔었다고 전해 드릴까요, 아니면 다시 거시겠어요?"

다시 침묵이 이어지자 레이첼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스테이크를 그릴에 올려놓았는데, 이 여자가 빨리 말을 하지 않으면.

"전 리디아 마스덴이에요." 냉랭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울리자, 레이첼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9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에도 레이첼은 넋이 나간 듯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대니얼이 들어왔다. 그는 문가에서 그녀를 발견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무슨 일이야?" 그녀가 충격 상태에 있는 걸 보고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의 차가운 손은 그녀의 뺨을 감쌌다.

"리디아가 방금 전화했어요." 그녀가 멍하니 말했다. "당신더러 전화해 달래요."

그를 바라보니 입을 굳게 다물고 창백해진 채 코를 실룩거리고 있었다. 그는 서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이를 악물고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레이첼을 스쳐 지나 서재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레이첼은 닫힌 문을 쳐다보며 다시 한 번 가슴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리디아의 이름만 들어도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나를 밀치면서까지?

목이 메어 왔지만 꾹 참았다. 내가 울면 지는 거야. 거실에서 마이클을 보고 있는데 대니얼이 들어왔다. 끔찍한 표정은 가셨지만 아직 창백한 얼굴이었다.

케이트는 평소처럼 안아 달라고 그에게 뛰어들었지만 그는 머리를 쓸어 줄 뿐이었다. 샘은 흑백 영화에 빠져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마이클은 피곤한지 제 아빠를 한 번 흘끗 보고는 엄마의 품에 폭 안겼다.

대니얼의 시선은 레이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미안해. 다시는 여기로 전화하지 말라고 했어."

"상관없어요."

"상관이 있어."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세 아이는 깜짝 놀라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한숨을 지었다. ", 케이트, 엄마랑 얘기 좀 하게 마이클을 잠깐만 봐주겠니?"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마이클을 그녀의 품에서 들어내더니 샘의 다리 사이 바닥에 내려놓고는 주위에 장난감을 잔뜩 갖다 놓았다. 는 아이들을 안심시키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돌아서서 레이첼의 손을 잡아 일으키더니 서재로 데려와 문을 닫았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전화를 걸다니!"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상관없다고 말했잖아요."

"상관이 있대도!" 그가 짜증을 폭발시켰다. "그 여자가 당신을 괴롭히고 있잖아!"

"그렇다면 애초에....." 그녀는 독설을 퍼부으려다가 입을 닫고 그의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은 무언가를 급히 찾으려 했던 것처럼 서류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어떻게 아직도 그녀와 함께 일을 할 수가 있어요? 다 끝났다고 했잖아요." 리디아가 아직도 그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꽤나 큰 충격이었다.

"나하고 일하는 게 아냐."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고용한 변호사와 함께 일하는 거지." 그는 당혹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 몇 주 전에 내일을 모두 그녀의 파트너에게 넘겼어."

그를 믿을 수가 없다. 리디아에게서 전화 왔었다고 했을 때 그의 표정이 아직도 얼굴에 남 아 있다.

레이첼은 몸서리를 쳤다. "그럼 왜 전화했대요?"

대니얼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팩스로 급한 전언이 왔대. 나한테 빨리 전해 줘야만 했던 정보야. 그곳에서 팩스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은 그 여자밖에 없었고."

"그래요? 그렇다면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세요." 그녀는 담담하게 말하며 이 화제을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며 그외에도 뭔가가 더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옳았다. "문제는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지금 바로 나가 봐야 한다는 거야. 허더스필드 인수의 법적 문제가 진행되고 있고, 난 그걸 개인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사무실로 나가 봐야 해."

하비 인수든 허더스필드 인수든, 무슨 차이가 있겠어?

"물론 그러시겠죠." 그녀의 신랄한 말은 그의 뺨을 한 대 올려치는 것과 같은 효과였다. "난 애들을 재우러 가겠어요."

그를 밀쳐내며 그녀는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대니얼이 그녀을 멈춰 세웠다. "안 돼." 그는 그녀를 잡아 자기 앞에 세웠다. "난 내 사무실에 가는 거야. 레이첼. 리디아의 사무실에 가는 게 아냐."

그가 강조했다. "난 그 여자를 만나지 않을 거야. 만나고 싶지도 않아. 그 여자와 내 사무실은 런던 끝에서 끝이야. 내 말 이해하겠어?"

이해하겠냐구? 나에게 자기 말을 믿으라고 강요하고 있군.

그녀는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영원히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마이클이 날 찾겠어요." 그녀는 중얼거리며 방을 나왔다.

 

금요일이었다. 대니얼은 월요일에 허더필드로 가서 크리스마스 휴가가 오기 전에 일을 끝내고 올 예정이었다. 주말은 끔찍했다. 그의 손이 다가오지 않나 신경을 쓰느라 그녀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가 싫거나 두려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감싸 주고 원하는 마음이 비참한 마음을 뚫고 자꾸만 고개를 들기 때문이었다.

리디아, 그녀는 리디아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점점 상처를 깊게 하는 효과를 잃고 있었다.

다음 며칠간은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녀는 침실을 다시 정돈하는 작업을 하며 뱃속에서 욕지기가 자꾸만 일어나는 것을 참았다. 그러나 대니얼이 오기로 되어 있는 저녁이 다가올 때쯤 그녀는 너무나 힘이 들어 포기하고, 침대에서 함께 자는 것도 그다지 나쁜 생각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들이 모두 거실에 앉아 방금 배달된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있을 때 대니얼이 들어왔다. 네 사람이 끙끙거리며 트리를 세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의 험상궂은 얼굴이 씁쓸한 미소로 다소 펴졋다.

"여기도 내가 할 일이 있네." 그가 농담을 하자 네 사람의 고개가 놀라서 돌아보았다.

아이들은 레이첼을 버리고 대니얼에게 뛰어갔다.

그는 기쁨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져 쌍둥이들과 카펫 위를 뒹굴었다.

레이첼은 솔잎이 손가락을 찌르는 것도 잊고 그 장면을 마냥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어느때도 느껴 보지 못했던 달콤한 감정이 그녀를 감싸며 왜 자신의 인생을 이대로 지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얻었다.

가족이야. 가족 간의 사랑. 서로가 서로를 아껴주는 사랑이야말로 식구들을 결속시키는 힘이야.

지금의 대니얼은 바로 예전의 그의 모습이다.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뒹굴며 레슬링을 해주는 아빠. 아이들의 장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남자.

마이클은 그의 옆에 앉아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치고 있었다. "그만 항복... 항복!" 샘이 그의 두 팔을 잡고 케이트가 겨드랑이를 간질이자 그가 소리쳤다.

"레이첼, 도와 줘!"

그녀는 트리를 쓰러지지 않도록 고정시키고는 얼른 뛰어가 마이클을 한 팔에 안아들고 케이트를 잡아끌었다. 샘 하나는 거뜬히 해결할 수 있는 대니얼은 얼른 몸을 빼고 일어나 아이를 품에 끌어안으며 소리 나게 뽀뽀했다.

"으악!" 샘은 꿈틀거리며 소리쳤다.

대니얼은 재미로 더욱 세게 뽀뽀를 했고, 아이는 역겨운 체하며 품에서 벗어났다. 대니얼은 껄걸 웃으며 이번에는 케이트를 잡으러 나서기 시작했다. 케이트는 잡기가 쉬웠다. 아예 팔을 벌리고 아빠의 뽀뽀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마이클은 잔뜩 흥분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레이첼은 아기를 끌어안고는 내심 다음 차례가 자기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대니얼은 케이트를 내려놓고 레이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수줍어진 레이첼은 눈을 내리깔고 대신 마이클을 넘겨주었다. 그는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막내아들을 땅바닥에 눕혀 비명을 지르게 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갑자기 끼익거리더니 레이첼이 미처 붙잡기도 전에 쓰러지려고 했다. 뒤에서 대니얼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나무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걸 막았다. 그녀는 부드럽지만 단단한 손에 의해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뺨을 긁혔군." 대니얼이 나직하게 속삭이며 입가의 긁힌 자국에 살짝 키스했다. 그의 혀끝이 닿자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안녕." 부드럽게 말하는 그의 회색 눈동자는 수줍게 빛나고 있었다.

"안녕." 그녀는 그의 시선을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살짝 피했다. 그러자 그의 고개가 수그러지며 따뜻하고도 깊은 키스를 했다. 다부진 그의 몸과 함께 그녀에겐 너무도 낯익은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짜릿한 포옹을 음미했다.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 그들은 아쉽게 떨어졌다. 쌍둥이들이 뛰쳐나가더니 곧 대니얼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당신 어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크리스마스 자선 행사에 가신다고 했어요." 레이첼은 숨 가쁜 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는 무심코 대답했다. "잘 됐군." 그는 중얼거리며 다시 키스했다. 그들은 어머니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키스를 나눴다.

레이첼은 한동안 잃어버렸던 사랑이 다시 피어오르는 걸 느끼며, 손을 들어 그의 팔을 잡고 그의 숱 많은 머릿속에 손가락을 넣었다.

이윽고 둘은 가쁜 숨을 몰아쉰 채 떨어졌다. 대니얼은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눈으로 어머니가 서 있는 쪽으로 돌아서서 미소를 지었다. 제니 매스터슨은 희망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그들에게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은 어머니와 함께 내보낸 후 대니얼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망설이듯 말했다. "내가 옷 갈아입는 동안 함께 있어 주겠어?"

그녀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를 따라 올라갔다.

대니얼은 만족스런 한숨을 쉬고는 그녀를 놓아 주고 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문가에서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다. "...."

그는 개의치 않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고다 뛰쳐나와서는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우리 부모님 때문에 그랬어요." 그녀는 방어 태세를 취하며 변명했다. "이러는 수밖에 없다구요!" 욕실은 이미 그들의 세면도구를 치워 놓은 상태였다. 그녀의 옷장 하나를 비워 대니얼의 것에 넣었고, 그렇게 되면 옷이 서로 눌려 온전하게 입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럼 당신과 나는 어디서 자지?" 그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

그녀는 다른 침실을 가리켰다. "침대 두 개를 새로 사서 하나는 샘의 방에 넣고 하나는 케이트의 방에 넣었어요. 당신 어머니는 케이트와 함께 주무시면 되구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난 마이클의 방에서 자고 당신은 샘의 방에서 자요. 겨우 이틀뿐이잖아요!"

"젠장!" 그가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내가 왜 당신 부모님을 위해 내 침실을 포기해야 해? 당신 일부러 나한테 이러는 거 아냐? 만약 그렇다면 경고하겠어. 이만하면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구!"

레이첼은 억울하게 당할 수만은 없었다. "우리 부모님이 당신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래요? 내일 가게 문을 닫고 곧바로 내려오실 텐데, 그러면 얼마나 피곤하시겠어요? 굳이 애들과 같이 주무시게 할 필요는 없잖아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그는 너무나 화가 나서 그녀의 말을 거의 듣지 않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뼈 빠지게 일해서 이제 겨우 집에 와서 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집이 좀 컸더라면 이런 불상사는 생기지 않잖아. 내가 그렇게 큰 집을 사자고 했건만, 당신 때문에 난 편안히 쉴 곳도 없어져 버렸어!" 그는 험악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돈만 많이 벌면 뭐해, 좁아터진 집에 살면서 시끄러운 조무래기들과 아내...."

그는 갑자기 입을 닫더니 레이첼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험상궂게 바라보았다.

"젠장." 그는 한숨을 지었다.

", 그럼 리디아에게나 가보지 그래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했고, 목이 메어 울먹였다. "그 여자라면 편안히 쉴 곳을 제공해 주겠죠!"

그러고는 홱 돌아서서 그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얼른 방을 나가 버렸다. 날 완전히 복수의 화신으로 매도하는군! 우리의 집을 좁아터졌다구? 내 사랑하는 아이들더러 조무래기라구?

그녀는 거품이 사방으로 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이 먹은 접시를 소리 나게 씻었다. 잠시 후 두 손이 그녀를 양쪽으로 막아섰다. 따뜻한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미안해." 대니얼이 중얼거렸다. "괜히 한번 해본 소리야."

레이첼은 코웃음을 치며 그릇 위의 꽃무늬가 다 지워질 것처럼 접시를 박박 문질렀다. "그럼 애초에 그런 말을 왜 해요?"

"실망했으니까." 그는 거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일주일 내내 당신과 한 침대를 쓰는 일만 생각했어. 당신 부모님이 오신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말이야. 하지만 난 죄책감도 무시해 버렸어." 그는 무겁게 한숨을 지었다. "난 샘의 방에서 자고 싶지 않아. 당신과 자고 싶어. 크리스마스 아침에 일어나 당신이 내 옆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 내가 그토록 원하고 있는 일을 당신이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화가 났던 거야. 난 당신이 필요했어, 정말로."

갑자기 눈물이 울컥하고 쏟아져 나오자 그녀는 접시를 싱크대 안에 떨어뜨리고는 몸을 돌려 그의 품으로 안겼다. ", 대니얼, 난 너무 비참해요!"

"알아." 그는 한동안 그녀를 끌어안고 실컷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녀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그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더니 얼굴을 살폈다.

"당신 이런 모습 보면 우리 어머니가 날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변명도 듣지 않고 나만 다그치실걸."

레이첼은 코를 훌쩍이며 미소를 지었다. 시어머니는 항상 그녀의 편이라는 걸 대니얼도 잘 알고 있었다.

"날 용서해 주는 거지?" 뺨에 붙은 실 같은 금발을 떼어 내며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우리 휴전하고 크리스마스를 즐기자구. 당신이 행복하다면 내 침대를 포기할 수도 있어!"

"그렇게 하면 행복하다고 누가 그래요?"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여 울었고,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우리 아이들을 조무래기라고 하고는!"

"내가 그랬어?" 그는 정말로 놀란 얼굴이었다.

"그거만 있는 줄 알아요?"

"내게 뭘 던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군." 그가 후회하듯 중얼거렸다. "날 용서해 주고 휴전하자구."

그녀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기분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당신 정말로 그렇게 부자예요?"

"내가 그 말도 했어?" 그의 짙은 눈썹이 아치를 그렸다."그래, 당신이 백만장자를 찾고 있다면 어디 다른 데 가서 찾을 필요는 없어."

그는 가볍게 말했지만 그녀는 그가 그토록 부자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자신에게 새삼 놀라고 있었다. 그녀에게 대니얼은 대니얼일 뿐, 돈이 있기 때문에 대니얼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휴전할 거지?"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가를 관능적으로 애무했다.

"그래요." 그녀는 중얼거리며 달콤한 쾌락에 눈을 감았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내 돈 때문에?"

"그럼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그 이유 말고 내가 포기할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럼 내가 옷 갈아입는 동안 같이 있어 줘." 그의 부탁과 함께 두 사람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침실은 복숭아 빛 조명으로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오늘은 이 침대에서 잘 수 있어요." 레이첼은 장난스럽게 말했고, 그들은 예전처럼 웃음을 터뜨리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크리스마스는 행복하고 즐거웠지만 곧 끝나고 말았다. 레이첼은 잭의 수업을 다시 들으러 가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대니얼은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만 보면 얼굴을 찌푸리는 그의 표정에서 모든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휴전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있었다. 레이첼은 그것이 침실에서의 불만족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의심과 절망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그것이 그를 받아들이는 데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졌다. 또한 그가 만족하지 못하면 다른 곳으로 한눈을 팔까 봐서 걱정이 되었다.

또다시.

언제쯤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있을까? 대니얼 역시 자신의 외도로 인해 그녀만큼이나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를 믿고 싶지만 따라 주지 않는 마음은 여전했다. 배가 묵직한 기분은 그런 이유에 대한 부작용일까....

그러나 갑자기 어떤 가능성에 대해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는 경악했다.

 

10

수요일 오후 2, 대니얼이 다음 회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서류??? 가지런히 모으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여자분의 전화인데요, 매스터슨 씨. 매스터슨 부인이라고 하십니다."

차가운 소름이 등골을 타고 내렸다. 레이첼은 한번도 회사로 전화를 한 적이 없는데, 사고일까? 아이들이 다쳤나?

"연결해 줘요." 그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며 말했다.

비서가 연결을 하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수만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전화를 받고 보니 레이첼의 목소리가 아니었고, 상대방은 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당황하고 긴박했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머니,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는 또 다른 매스터슨 부인에게 묻고 있었다.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몇 분 후 그는 차에 올라타고는 집으로 내달렸다. 그가 차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현관문이 열렸고, 그는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에 있어." 제니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아들에게 말했다. "아주 심란해하고 있어."

그는 거실로 들어가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레이첼을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은 쿠션에 파묻혀 있었고, 작은 체구가 흐느끼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재킷을 벗고 타이를 풀었다.

"레이첼?" 그는 그녀의 앞에 앉아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 가버려요." 그녀는 쿠션에 고개를 파묻은 채 말했다.

그는 당황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이렇게 처참한 그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대체 누가 레이첼을 이렇게 만들어 놨을까? 혹시 잭 칼럼이.... 그렇다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겨우 내게 받은 상처를 회복하고 있는 차에 그 자식이 상처를 건드렸다면...

"레이첼...." 그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다가 그녀의 몸에서 열이 많이 나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언제부터 이랬던 거지? "레이첼, 제발 얘길 해봐."

헝클어진 머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숨만 삼키고 있었다. 그는 결심을 굳힌 듯 그녀을 안아들어 그의 무릎에 앉혔다. 쿠션과 함께.

최소한 그녀는 저항하지는 않았지만 쿠션에 여전히 고개를 묻은 채 울고 있었다.

"다 당신 때문이에요."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내 탓이라니? 도무지 영문을 모르는 그는 한숨을 짓고, 그녀가 입고 있는 점퍼를 벗겨 냈다. 열이 너무 많이 아는 것 같아서였다. 곧 얇은 블라우스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자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 그가 말했다. "이제 얘기해 봐. 대체 뭐가 내 잘못이라는 거야?"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울먹거리는 표정을 보고 그는 하마터면 미소를 지을 뻔했다. 케이트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하지만 레이첼은 아이가 아냐. 아무리 나약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레이첼은 강하고 용감해.

"그만 울어."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레이첼, 얘기를 해야 내가 도와 줄 거 아냐."

"당신이 도와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아무도 도와 줄 수 없어요! 난 임신했다구요! 임신이요!" 그렇게 외치고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모두 당신 잘못이에요! 아무리 잘 나가는 사업가면 뭐해요? 난 겨우 스물다섯이라구요! 서른이 될 때쯤이면 온 집안이 애들 울음소리로 울릴 거라구요!"

대니얼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미소를 그녀를 끌어안는 것으로 가렸다. "쉬잇." 그가 속삭였다. "일단 진정해."

그러나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레이첼은 그의 무릎 위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난 애 낳는 공장이 아니라구요. 대니얼! 당신 회사 동료들이 우리 집에 와보면 애들이 줄을 선 걸 보고 깜짝 놀랄 거예요! 야구팀을 만들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축구 팀을 만들고 싶은 거예요? 대체 왜 날 이렇게 만들었냐구요!"

"그만 해, 레이첼!" 그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자꾸 속사포??? 쏘니까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잖아."

"그렇다면 이거 하나만 알아 둬요." 그녀는 울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 임신했어요. 그리고 난 그걸 원하지 않는다구요!"

"얼마나 됐어?" 그는 한참 동안 침묵한 후에 물었다.

"3개월이요." 대답을 하는 그녀는 얼마나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아침에 의사에게서 소식을 들은 레이첼만큼 놀라는 것 같았다.

"그래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리디아에 대해 알고 난 후 처음으로 그와 관계를 가졌을 때였을 것이다.

"맙소사, 난 생각도 못 했어."

각기 자신들의 생각에 잠기며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기대어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고, 그는 무심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언젠가 이와 똑같은 소식을 그에게 전했을 때도 그들은 이렇게 서로에게 기대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대니얼은 분노를 전혀 느끼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그가 갑자기 말하며 그녀의 고개를 돌려 이마에 키스를 했다. "좀 더 큰 집을 사야겠군. 태어날 아기가 잘 침실이 없어서야 되겠어?"

쌍둥이를 낳았을 때도 그는 비슷한 말을 했다. 쌍둥이를 낳은 데 대한 놀라움보다는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쪽으로 대니얼은 항상 이런 일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미술 강좌에는 가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그림 그리는 일은 정말로 좋아하지만 잭이 아직도 그곳에서 가르치고 있는 한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 아무런 동의도 없었지만 대니얼은 수요일에 그런 일이 생긴 후로 그녀를 다시 데리고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가 잃은 것을 보상해 주고 싶기라도 하듯. 그러나 그녀는 그림 그리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집도 보러 다녔다. 모두에게 걸맞은 집을 찾으려면 백년은 걸릴 것 같았다. "왜 그렇게 큰 집만 고르는 거예요?" 한번은 차를 타고 돌아오며 레이첼이 불평했다. "좀 크면 됐지 그렇게 대저택을 살 필요는 없잖아요. 당신 회사 동료들이 와서 놀고 갈 파티장을 찾는 거라면 모를까." 그는 여전히 일과 가정을 철저하게 분리했고, 그녀는 여전히 그것에 상처를 받았다.

"파티장이 있는 집을 사려면 더 큰 걸 봐야지." 그는 놀리듯 말했다. "난 다만 열심히 일하고 들어와 편안한 집에서 쉬고 싶을 뿐이야."

결국 그들은 이상적인 집을 찾아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거대한 집으로, 긴 창문이 나 있어 햇살이 환하게 집 안으로 들어왔다. 대니얼의 고급스런 취향과도 맞고, 레이첼이 생각하는 따뜻한 집의 이미지와도 들어맞았다. 쌍둥이들도 뒷마당에 수영장이 있어 무척 기뻐했고, 그 옆에는 작은 별채가 딸려 있어 대니얼의 어머니가 거처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20년 동안이나 그 집을 돌봐 온 부부가 있었는데, 그들은 집이 팔리면 자신들도 쫓겨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마음 약한 레이첼은 그들을 그대로 두자고 대니얼에게 말했고, 사람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대니얼은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레이첼은 봄에 이사 갈 생각으로 새 집을 수리하고 다시 꾸미는 기쁨에 빠졌고, 대니얼은 또 다른 인수건-맨체스터의 작은 엔지니어 회사-에 손을 댄 후 그쪽에 머무르는 일이 많았다.

리디아는 차츰 그녀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아직 대니얼에게 반응하는 일이 두렵긴 해도 그들의 관계는 전처럼 끔찍하지 않게 되었다. 최소한 그들의 결혼을 깰 뻔하게 만든 배신에 대해 어느 정도 타협을 봤다고 할까.

이제는 그를 떠날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인생은 그와 아이들에게 복잡하게 얽혀 있어 발을 뺄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대니얼과의 새로은 관계에 보다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어느 날 오후 침실에 있는데 대니얼이 예고도 없이 맨체스터에서 돌아왔다. 그는 바닥에 앉아서 오래된 옷들을 쌓아 놓고 정리하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는 일로 인해 짜증이 났던지 별안간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것 좀 다른 사람한테 시킬 수 없어?"

그는 재킷을 벗고 타이를 풀고 씩씩거리며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어떻게 우리 물건을 남에게 맡기라는 거예요? 뭘 버리고 뭘 다시 챙겨야 하는지도 모를 텐데!" 그녀가 반박했다.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욕실 문을 쾅 닫았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스케치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대니얼이 수건을 허리에 두른 채 다시 나올 즈음 레이첼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연필로 그림을 끄적이고 있었다.

"이런 악녀 같으니!" 그는 그녀가 그린 것을 보고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머리에 뿔이 난 채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는 악마로 묘사해 놓은 것이다.

"나쁜 여편네!" 그는 씁쓸하게 말하며 그녀의 스케치북을 홱 잡아챘다.

그녀가 다시 빼앗으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팔을 한 손으로 잡으며 페이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림을 훑어보는 그를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그 속에는 샘의 잔뜩 찌푸린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과 자신의 예쁜 얼굴에 만족하여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케이트의 얼굴을 특징 있게 잡은 그림이 있었다. 마이클의 모습은 쿠션을 배에 깔고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그대로를 묘사했다.

"훌륭해." 대니얼이 조용히 말했다.

레이첼은 멈췄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 다음에 올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더욱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그녀는 그에게서 스케치북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그는 곧바로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그 다음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그림이나 가족을 그린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바로 그녀 자신의 모습이었다. 어린 레이첼, 몇 년이 지나도 별로 변한 것이 없는 레이첼,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는 영혼까지 파괴되어 버린 슬픔을 가득 담고 있었다. 자신의 초상화임에도 그녀는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다 완성은 했지만 그 모습이 싫었던 그녀는 그 위에 커다랗게 X자를 그어 놓았다.

"왜 이런 거야?" 그는 살며시 손을 들어 그녀의 입가를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레이첼은 일어나서 그에게서 몸을 떼었다. "그녀는 내가 아니에요." 그녀는 간단하게 말했다. "난 그녀가 싫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그 그림을 쳐다보고 있었다. 레이첼은 불안한 마음에 침대를 떠나 옷을 정리하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내 건 없네."대니얼은 씁쓸하게 말하며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그곳엔 그녀가 방금 그려 놓은 악마의 모습이 있었다.

레이첼은 왜 그를 그리지 않았는지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말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대니얼은 달랐다. 가족의 일원이긴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이제 그는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날 사랑하지 않아. 대니얼은 끊어진 다리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다시 스케치북으로 손을 뻗었고, 이번에는 그도 순순히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허리에 수건을 걸친 채로 침대에 털썩 누웠다.

"마이클은?" 그가 물었다.

"어머님이 봐주고 계세요."

그들의 시선이 마주치며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의 눈동자가 불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햇살이 환하게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그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쳐다보게 되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의 감정을 부정하고만 싶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에게 오라는 표시를 했고, 그녀는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천천히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하자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다급해진 욕망에 휩싸였다. 그 다음은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뜨거운 키스를 갈구 했다.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 그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시 시작되었다. 그의 뜨거워진 몸을 느끼며 열정에 가득 한 시선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에게 다시금 유령이 찾아들어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른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 대니얼은 그녀에게 수도 없이 일어났던 일이 반복되는 걸 알아채고는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날 봐!" 그는 거친 목소리로 그녀를 다그쳤다. "제발 눈을 뜨고 날 봐!"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는 자신과의 사투를 벌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고, 그를 완전히 쳐다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그녀를 원하고 있다는 뚜렷한 시선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대니얼이 날 사랑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날 원하고는 있어. 비록 우리의 결혼이 8년이 다돼가고 있고, 내가 또다시 임신을 했다고 해도 어쩌면 그걸로 충분한 건지도 몰라...

"안 돼!" 그녀가 다시 눈을 감으려고 하자 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안 돼. 이번엔 그렇게 놔둘 수 없어!"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붙들고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뜨일 때까지 흔들었다.

"당신은 날 원하고 있어." 그가 격렬하게 말했다.

"하지만 눈을 똑바로 뜨고 내가 누군지 받아들이기 전엔 안 돼. 난 나야. 레이첼. 잘못을 했든 안 했든 나라구. 당신을 실망시키기 전의 그 남자고 지금도 변한건 없어!"

"내가 그 사실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면요?" 그녀는 절망적으로 속삭였다.

"그렇다면 다시는 날 갖지 못하게 될 거야."

그는 험악하게 대꾸했다. "눈을 감고 나이길 거부하는 여자와 사랑을 나눌수는 없어."

그는 그녀를 밀쳐냈다. 그가 다시 욕실로 걸어가는 걸 보며 그가 최후 통첩을 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 대가를 치를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녀에게 그를 다시 믿든지 그들의 결혼에 있어 육체적인 부분을 잊든지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토록 쉽게 주객이 전도될 수가 있을까! 그녀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지만 그의 말이 옳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이 파경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는 잘못을 했든 안 했든 그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일주일 후 그녀가 아직도 이 생각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그 모든 일을 한 순간에 잊어버릴 만한 사건이 터졌다.

쌍둥이들이 없어진 것이다.

 

11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걸 안 순간 레이첼은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일주일 내내 집 안에 긴장이 감돌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대니얼 역시 그녀에 대한 미운 감정을 역력하게 드러냈고, 부활절 방학을 보내던 아이들에게 레이첼은 짜증 이외는 별다른 것을 보여 주지 못했다.

짐을 키만큼 높이 쌓아 챙기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리더니 이윽고 샘과 케이트가 방 안으로 들어왔었다. "아빠 전화였어요." 샘이 뾰로통하여 말했다. 부엌 바닥에 오렌지 주스를 엎질렀다고 소리를 질러댄 엄마를 아직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맨체스터에서 돌아오는 중이래요. 먼저 사무실에 들렀다가 밤에야 돌아오신다고 했어요."

맘대로 하라지! 사무실로 가든 집으로 들어오든.

사무실로 숨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겠다고 생각했다.

"아빠한테 일찍 돌아와서 놀아 달라고 했어요." 케이트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안 된다고 하곤 전화를 끊었겠지!" 레이첼은 대니얼에 대한 미문 감정으로 내뱉은 것이지만, 상처를 입은 쪽은 쌍둥이였다.

"아니에요!" 아이가 울먹였다. "아빠도 와서 하루 종일 우리랑 놀고 싶다고 했어요. 엄마 나빠!"

레이첼은 딸아이가 몸을 홱 도려 나가기 전에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걸 흘끗 보았고, 샘이 그 뒤를 따라나갔다.

한숨을 지으며 그녀는 부풀어 오른 배에 한 손을 대고 다른 한 손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댔다. 그러고는 아이들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보는 척하며 그녀를 무시해 버렸다.

레이첼은 혼자서 벽돌 놀이를 하고 있는 마이클을 안아들고 쌍둥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계속 그들이 눈을 맞춰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매정하게 엄마를 무시하는 아이들의 태도에 또 화가 나서 그냥 훌쩍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후 한 시간쯤 지난 다음 아이들이 없어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네를 타고 놀고 있기를 바라며 공원으로 차를 몰고 나갔다. 제니가 친구들을 만나느라 하루 종일 집을 비우는 걸 아이들이 모를 것 같아 그 집에도 가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몇 번으로 뒤져 봐도 아이들은 없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또 찾고 결국 경찰에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황급히 수화기를 잡아챘다.

"매스터슨 부인이세요?" 불확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녀는 떨리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매스터슨 부인, 전 매스터슨 씨의 비서예요......"

레이첼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 "그가 돌아왔나요?"

"아뇨, 아직 안 오셨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이리와서 아버지를 찾는데...."

"애들이 거기 있어요?" 레이첼은 쇳소리를 내며 물었다.

", 여기 있어요."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를 알아차린 비서가 확실하게 대답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뜨거운 안도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애들은 괜찮죠?"

", 걱정마세요."

레이첼은 그대로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제가 지금 데리러 갈게요. 그 동안 잘 돌봐주시겠어요?"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은 다음 웃음과 울음이 섞인 신음을 내며 마이클에게로 달려갔다.

점심 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 <매스터슨 홀딩>에 도착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비집고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마이클을 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레이첼은 복도 끝에서 젊은 남자와 노닥거리고 있는 젊은 아가씨를 발견했다. "실례해요." 그녀는 숨찬 목소리로 말했다. "전 레이첼 매스터슨이에요. 우리 아이들...."

"매스터슨 부인!" 젊은 아가씨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레이첼을 보았다. 그녀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자기 행색이 얼마나 초라한지는 스스로도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레이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어서 케이트와 샘을 찾을 수 있기만을 바랐다.

"애들은 어디에 있죠?" 그녀는 복도 주위의 사람들이 전부 그녀를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걸 느끼며 물었다.

"매스터슨 씨가 조금 전에 도착하셨어요." 젊은 아가씨가 말했다. "지금 사무실에 계시는데...."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젊은 남자가 제의했다.

레이첼은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러고는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갔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더니 두꺼운 회색 카펫이 깔린 층에 그들을 내려 주었다. 레이첼은 천천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사지가 점점 늘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젊은 남자가 노크를 하고 잠시 기다리더니 문을 열고 레이첼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처음으로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가슴에 팔짱을 끼고 커다란 회색 책상에 기대어 서 있는 대니얼이었고, 곧 긴 가죽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쌍둥이들이 보였다. 그러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마이클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목멘 소리로 외쳤다. ", 케이트!"

그러고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눈을 떠보니 자신은 소파 위에 누워 있고, 머리 위에 차갑고 축축한 것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다들 비슷하게 생긴 네 사람이 쭈르르 서서 그녀를 걱정스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힘없이 웃었고, 네 사람이 차례로 미소를 되돌렸다.

대니얼은 마이클을 물릎에 앉힌 채 그녀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샘과 케이트는 그의 뒤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영원히 그 순간을 붙잡아 놓고 싶을 만큼.

"좀 어때?" 대니얼이 물었다.

"멍해요." 그녀는 씁쓸하게 말하며 두 아이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미안해." 그녀는 고통스럽게 속삭이며 훌쩍거리고 있는 아이들을 품에 안았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사과를 하고는 이곳까지 오게 된 모험을 얘기했다. 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차곡차곡 모아 둔 용돈을 털어 이곳에 도착했지만 아빠가 없는 걸 알고 모두를 경악케 한 일을.

"엄마를 기절하게 만들면서 말이지." 대니얼이 따끔하게 그들을 나무랐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케이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없을 때 당신이 애들을 학교로 보내는 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엄마가 아파서 날 데리러 가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내 명함까지 줬다는 거야. 이 맹랑한 애들이."그는 케이트를 노려보았다. 그런 영악한 생각를 할 아이는 케이트밖에 없었다.

"잘못했어요." 케이트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흐느꼈다.

레이첼은 대니얼을 바라보았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에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그도 그녀의 시선을 알아 채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 비서가 커피를 준비하고 있을 거야. 커피가 오면 애들을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뭘 좀 먹이고 오라고 할 거야. 그 다음 얘기 좀 하자구."

왠지 조짐이 나빴다. 레이첼은 시선을 내리깔고 일어나 앉았고, 때마침 비서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마이클을 안은 채 대니얼은 일어서서 그녀에게로 다가가 뭐라고 나직이 말했다. 그러고는 쌍둥이들을 내보냈다. 아이들은 호되게 혼난 듯 순순히 비서의 뒤를 따라갔다. 마이클은 비서의 품에 안겨 나갔다.

대니얼은 레이첼에게 진한 커피를 건네고는 그녀가 한 잔을 모두 비우는 걸 바라보았다.

"좋아, 어떻게 된 거야?"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죄의식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너무 짜증을 부렸어요. 오늘은 좀 더 심했죠. 내가 아이들을 몰아낸 거나 다름없어요. 이리저리 다 둘러봤지만 정말 이리로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괜찮아." 그가 그녀의 손을 감쌌다. "너무 자책하지 마. 애들도 다 무사하잖아."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뭐가?"

"당신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요." 그녀가 말했다."여기까지 와서 방해해서요."

"가끔 당신과 아이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아." 대니얼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애들을 때렸어요?"

"아니, 겨우 참았지. 하지만 케이트가 많이 놀랐을 거야. 그렇게 소리쳐 본 적은 처음이거든."

"당신을 용서해 줄 거예요." 레이첼이 안심시켰다.

"그애의 엄마랑 똑같다면 용서 안 해줄 거야." 그가 툴툴거렸고, 레이첼은 고개를 떨구었다.

", 그건 용서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난 단지 잊지 못할 뿐이라구요. 당신은 내 인생을 산산이 부숴 버렸어요, 대니얼!"

"나도 알아." 그는 그들의 겹쳐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인생 역시 산산이 부서져 버렸어. 물론 난 그래도 당연하지만."

"그렇다면 왜 그런 짓을 했어요?" 그녀는 당황하여 물었다.

대니얼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여자가 거기 있었으니까."

" 그 여자도 당신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겠군요."

"그 여자가?" 그의 입술이 신랄하게 뒤틀렸다. "그 여자는 당신 같지 않아, 레이첼. 리디아 같은 여자들은 낯가죽이 두껍다구. 그렇게 쉽게 상처받지 않아. 그리고 그 여자가 내 감정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한 그 여자에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레이첼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대니얼은 그 표정을 보고 다시 한숨을 지었다. "내가 설명해 주면, 들어 주겠어?"

그럴 수 있을까? 그 모든 얘기를 내가 다 감당할 수 있을까? 그녀의 황량하고 고통스러운 시선은 먼곳을 응시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힘있게 쥐었다.

"제발,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여자는 오로지 당신 하나야.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제발 내 얘기를 들어 줘."

"그렇다면 왜 리디아와?"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왜냐하면 작년에 잠시 내가 이성을 잃었었지. 리디아는 적극적이고 단순한 여자였어."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난 지독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 여자를 이용한 거야."

대체 무슨 말로 날 안신시키려는 걸까? 레이첼은 은근히 분노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니까 난 용서하고 잊어야 한다는 거로군요."

그녀가 말했다. "그럼 다음에 당신이 또 스트레스를 받을 때 누군가 당신을 위안해 줄 거라는 걸 지금부터 예상해야겠군요?"

"아니." 그녀와는 달리 대니얼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처음부터 잘 되지 않았으니까." 그는 그녀의 상처받고 분노에 찬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가 이해했기를 바랐지만, 그렇지 못한 걸 보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당신과 당신의 영원한 순진함 앞에서는."

"난 순진한 거 이제 안 하기로 했어요, 대니얼. 열일곱 살 때 그걸 가져간 건 당신이었다구요!"

"당신이 내게 준 거야, 레이첼."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 그대로 그에게 몸을 내던졌었다.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난 정말로 당신을 원했었지. 겨우 열일곱 살짜리 소녀를 말이야! 난 다 자란 스물네 살이었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기 전에 당신과 헤어져야만 했지.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어. 날 만나기 전에는 올 A를 받던 당신이었는데, 당신 부모님에게 얼마나 비난을 받았는지 몰라...."

새로운 사실을 들은 그녀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땐 대니얼에게 항상 미소를 지으시곤 했던 부모님이었다.

"실망을 하신 거지." 그가 계속 말했다." 나 역시 당신 때문에 내 계획을 수정해야 했고."

"하지만 결국 꿈을 이뤘잖아요." 그녀는 씁쓸하게 대꾸했다.

"당신의 희생을 대가로 치렀지. 그래서 난 8년 전 당신이 임신했다고 말할 때 당신과 헤어지려고 했어."

그가 침울하게 말하자 레이첼은 눈을 감고 그의 비난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난 그날 밤 몇 군데 면접을 보고 왔었어. 외국으로 떠나려고. 당신에게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

예상했던 대로야. 난 그를 임신이라는 덫에 걸리게 한 거라구. 대니얼은 나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이지.

"아니." 그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꼭 쥐었다. "내 이유를 오해하지 마. 난 당신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당신의 인생을 위해 떠나려고 한 거야. 당신은 너무 어렸고, 그런 당신을 나한테 묶어 둘 수는 없었어. 내가 당신에게서 떨어져 주는 게 당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는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듯 말을 멈췄다. "그런데 당신이 집 앞에 있었어. 난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도 또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말았어. 바로 몇 분 후면 당신과 헤어져야 한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도 말이야. 그런데 당신이 기적 같은 말을 했지. 임신을 했다고. 난 죄수의 목에 두른 밧줄에서 해방된 기분이었어! 내가 당신을 가질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거야!"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결혼해서 처음엔 돈은 없었지만 그때처럼 행복했던 적은 없었어. 하지만 당신 몰래 주식을 사둔 게 있었어. 그게 두 배 이상으로 폭등하면서 난 돈 걱정은 안 해도 되게 되었지." 그는 그녀에게 말을 안 한 것이 미안한 듯 죄책감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부터 시작해 난 회사를 차리고 점점 규모가 불어나며 일을 더 많이 해야만 했어. 돈을 더 많이 벌며 상류사회의 사람들과 어울려야 했지만, 당신만큼은 그 속에 끼게 하고 싶지 않았어. 너무도 추한 면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지. 당신만큼은 온실 속에서 곱게 자라는 장미처럼 돌봐 주고 싶었어."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한결 같은 건 오로지 당신뿐이야. 처음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아직까지도 사랑하고 있어."

대니얼은 꽁꽁 숨겨만 두었던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쑥스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마이클을 임신하고부터 당신은 너무나 바빠졌어, 나 역시 법적 소송 때문에 몇 달 동안 지친 상태였고, 난 당신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집에 있기보다는 밖에 나가 있는 쪽을 택했어. 당신은 사람을 쓸 수 있는데도 내 말을 듣지 않았고, 우린 모두 인내의 한계에 다다랐어.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리고 난 리디아에 대한 얘기를 알게 되었군요."

그러나 대니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내 인내의 한계의 결과였어. 난 내가 겪었던 가장 추한 인수건에 완전히 넌덜머리가 나 있었지. 하비는 내가 경영에서 손을 떼기를 원했고, 내게 사기죄를 덮어씌우기까지 했어."

 

12

"하비 인수 건 말인가요?"

그녀는 항상 인수하는 쪽이 대니얼이라고 생각했지, 그 반대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는 생각하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끔찍했지, 다 끝났을 땐 온몸의 기력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어. 난 언제나처럼 당신에게 기대고 싶었은데, 당신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어. 아이 셋을 데리고 씨름하는 당신을 보고 나만 챙겨 달라고 말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았지. 그런데... 리디아는 내 곁에 있었어." 그는 분노의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뱉었다. "리디아의 도움을 얻어서 하비 소송에서 이겼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안도감이 내 몸을 훑고 내려가며 그대로 그녀에게 안기고 말았어."

"얼마나요?"

그는 당황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얼마나라니?"

"당신의 정부와 얼마나 오랫동안 사귀었냐구요."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랬던 적은 없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로는. 몇 번이고 당신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당신은 듣지 않았어. 물론 당신을 탓할 수는 없어. 잘못은 내가 저지른 거니까. 그녀와 술을 마시고, 식사를 한 것도...."

"당신이 리디아의 집에서 나오더라고 아만다가 말하던데요." 레이첼이 갈라진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비 건이 끝난 후에 내가 좀 이성을 잃었지. 술을 마시다 보니 차를 운전하고 집으로 갈 수가 없었어. 리디아가 자기 집으로 가자고 꼬시더군. 물론 난 그녀가 뭘 기대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지." 그는 황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어. 아무리 술에 취해 있어도 그녀는 당신이 아니었어. 그녀의 손이 내 몸에 닿은 것조차 소름이 끼쳤어. 그녀도 봤을 거야."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바로 방을 나갔으니까. 난 술에 완전히 절어 뻗어 버렸고, 그대로 그녀의 집에서 잠이 들었어. 그녀가 언제 방으로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아침에 깨어 보니 날더러 술에 취해도 그다지 나쁘진 않았다고 말하더군. 난 전날 내 행동에 대해 구역질이 나기 직전이었는데 말야."

대니얼은 침을 삼키려고 말을 멈췄다. 레이첼은 사색이 되었고, 그녀의 심장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몇 달 동안이나 날 자기혐오로 고통 받게 만들고는 결국 사실대로 말하더군. 아마 자기 나름대로의 나에 대한 복수였을 거야. 내가 일을 다른 변호사에게 맡겼거든. 그날 밤 당신에게 전화한 건 그런 식으로 내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야. 결국은 내가 자기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걸 털어놨어. 그게 다는 아니었지, 남자로서 듣기 힘든 모욕을 내뱉었지만, 나한테는 천상의 음악 소리처럼 들렸어.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말은 전부 사실이야. 당신이 믿어 주지 않는다 해도 나로서는 당신을 탓할 수가 없어."

레이첼은 눈을 내리깔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를 믿고 싶었다. 정말로. 그러나...

", 권력.... 당신은 그걸 가질 수 있어."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용서해 주기만 한다면."

"이미 그건 다 가졌잖아요." 그녀는 도저히 의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럼 내가 무슨 소리를 해주길 바래?" 그는 짜증스런 한숨을 지었다. "난 당신의 기억을 잊게 할 수는 없어! 그건 당신만이 할 수 있는 거야!"

그 말에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우리 결혼의 문제를 내게 돌리려는 것 아냐? 그는 많은 것을 말하고 자신에 대해 드러냈지만, 그녀의 생각과 느낌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내부의 레이첼에 대해 드러내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게 내 문제일지도 몰라. 그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나 역시 그에게 나에 대해서 거의 드러낸 것이 없어.

이젠 그럴 수 있을까? 우리의 결혼을 지속시키기 위해 지난 몇 달 간의 고통을 잊고 내 실체를, 그에 대한 사랑을 감히 드러낼 수 있을까?

무거운 침묵에 한숨을 내지으며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려다가 그의 머리 위로 걸려 있는 액자 하나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은 멎는 것 같았다.

샘과 케이트, 마이클과 그녀였다. 고급 액자로 표구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그린 그림이 대니얼의 사무실에 걸려 있는 것이다.

"내가 훔쳤어." 그가 고백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보려고.... 괜찮겠지?"

레이첼은 문득 가슴이 저며 왔다. "용케 훔쳤네요." 그녀는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나하고 비슷하지 않아요."

"당신이야." 대니얼이 고집했다. "진짜 당신이야. 내겐 모두가 그렇게 보여." 그는 뿌듯하게 말했고, 그 말에 그녀의 마음도 따뜻해졌다. "가족 화랑 같잖아."

"당신만 빠졌군요."

"그래." 그의 미소가 사라졌다. "왜 그랬지, 레이첼? 왜 당신의 스케치북엔 내 그림이 하나도 없는 거야?"

스케치북 전부를 봤단 말인가?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진실을 말할 때가 온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날 사랑해요." 그녀는 아이들의 얼굴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당신을 그려보려고 했어요."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얼른 덧붙였다.

"하지만 자꾸 영상이 흐려져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어요...."

"칼럼도 이걸 보았나?"

"?" 그의 험악한 말투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칼럼이 누군지 한참 생각해야 했다. ", 아뇨. 당신 말고는 아무도 안 봤어요."

"두 사람 사이는 얼마나 가까웠지?"

"가까울 것도 없었어요." 그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나 대니얼은 그대로 물러설 수가 없었나 보다

"하지만 그와 키스했잖아! 내가 봤다구!"

"차 안에서 서투르게 한 번 입 맞춘 것 말인가요?"

그녀는 그의 질투를 빈정거리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것뿐이었어요."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거칠게 잡았다. 레이첼은 한숨을 지었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안흔 일에 대해 겁을 먹는 자신이 너무도 우습게 느껴졌다. 결국 자신의 실없음에 피식 미소를 짓고 말았다.

"다시 악마처럼 변했군요."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당신에게 키스할 거야." 그가 으르렁거렸다.

"뭐라구요? 당신 사무실에서요?" 그녀가 조롱했다.

"여긴 우리 무대가 아니에요, 달링. 난 당신의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는 걸 몰라요?}

그는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노여움과 정열을 담아서. 그녀가 그의 품 안에서 아찔해질 때까지 키스했다. 그녀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되어 그를 간절히 찾을 때까지.

"사랑해, 레이첼." 그는 간절하게 말했다.

"알아요." 그녀는 부드럽게 그의 부풀어 있는 입술에 입술을 눌렀다. "다시 당신을 믿을 수 있을 것도 같아요."

그는 안도의 한숨을 지으며 다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대니얼은 그것을 노려보더니 그녀를 책상으로 함께 끌고 갔다. "잠깐 기다려." 그러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레이첼은 정열적인 연인에서 냉정한 사업가로 변신하는 그의 능력에 감탄했다. 그의 눈동자는 그녀에게서 전혀 떨어지지 않았지만 아까와는 다른 냉정함을 갖고 있었다. 입술 또한 강인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고, 그는 전화를 걸며 의문의 표시로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그녀의 안에 있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손을 뻗어서 그의 허벅지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는 깜짝 놀라 펄쩍 뛰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눈동자가 번뜩이더니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걸겠습니다." 그는 나직하게 말하고는 수화기를 쾅하고 내려놓았다. "중요한 고객이었단 말야!" 그는 그녀를 끌어당기며 비난했다. "일부러 그랬지?"

"사랑해요, 대니얼."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숨을 삼켰다. "다시 말해 봐." 그가 잠긴 목소리로 요구했다.

레이첼은 발꿈치를 들어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사랑한다구요." 이제는 훨씬 말하기가 쉬워졌다.

대니얼은 마치 그 말을 모두 흡인하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당신의 그 말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그 말을 하며 당신이 환한 얼굴을 하는 걸." 그는 한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열일곱 살 때부터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때 이후로 당신을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다만 좀.... 멍이 들었을 뿐이지."

"그럼 그걸 모두 숨기고 우리의 밤을 지옥으로 만든 거로군." 그는 고통스런 한숨을 지었다.

"집으로 가요." 그에 대한 갈망을 숨기지 않고 그녀가 말했다. "이대로 떠나도 괜찮아요?"

"물론이지, 내가 사장인데!"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문으로 이끌었다. "집으로 가자. 새 집으로. 아이들은 가정부에게 맡기고 다 정리된 침실 하나를 잠깐 쓰자구."

"재미있겠는걸요."

"재미있는 정도가 아닐 거야." 그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는 잘 알죠?" 그녀가 상기시켰다.

"전에도 그걸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나?" 그가 태연히 말했다. "오히려 당신은 그때 더 민감한 것 같던데."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세 아이들이 밀려들어왔다. 대니얼은 그의 발아래서 넘어지려는 마이클을 안아들고 모두들 함께 건물을 나왔다. 그들이 주차장을 빠져나오 때 <매스터슨 홀딩> 의 건물 유리창 밖으로 직원들이 고개를 내미느라 아우성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 결혼한 줄은 알았지만 아이가 셋이라니!" 한 남자가 말했다.

"난 몇 년을 이 직장에 다녀도 그가 결혼한 줄은 꿈에도 몰랐어! 무뚝뚝하고 냉정한 줄만 알았는데 언제 저렇게 예쁜 아내를 두었지?" 누군가가 끼어 들었다.

"지금은 무뚝뚝하게 보이지 않는걸." 처음 남자가 말했다. "집에서는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지."

"내 차는 어떻게 하구요?" 레이첼이 물었다.

"오후에 가져 오라고 하면 돼." 대니얼이 대꾸하며 아이들을 차 뒤에 태우고 그녀를 위해 조수석을 열어 주었다.

"몇 달 전에 리디아하고 무슨 일 있지 않았나?"

창 밖을 내다보던 누군가가 물었다.

"설마, 리디아하고!"

또 다른 사람이 받아쳤다.

"말도 안 돼."

"부럽다." 누군가가 말했다.

"다들 빨리 들어가 일하지 못해!" 다른 목소리의 남자가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당신 위를 올려다봤어?" 대니얼이 물었다.

"아뇨, 왜요?" 그녀는 그제야 위를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빼곡히 내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당신을 놀리면 어떡해요?"

"뒤에서 말하는 거야 내가 뭐랄 수 있나."

"신경 쓰지 말아요." 레이첼은 그의 허벅지에 따뜻하게 손을 얹었다. "우린 모두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회사에서 어떤 독재자이든."

"그 손을 집에 다 도착할 때까지 얌전히 제 자리에 놔두는 게 좋을걸." 그는 고통의 신음을 내며 중얼거렸다. "무사히 도착하고 싶다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