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의 눈길은 부드러워
침실까지 들리던 소리들이 홀로 접근할수록 귀가 멍멍할 정도의 고함소리로 변하고 있었다. 남자들의 웃음소리에 소란스런 말소리들을 능가하는 음악소리가 합쳐져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기 전이었다. 그녀는 그 야단법석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가 어쩐지 망설여졌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홀 안에는 그녀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남자들이 가득 차 있을 터였다. 막대기에 매달린 거위처럼 로이스에게 건네지던 그날 밤 진지에 있던 사람들일 것이요, 개중에는 메릭에서 끌려 나오던 날 현장에 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오늘 낮 마을에서 그녀가 모욕을 받던 일을 목격한 사람도 있을 터였다.
반 시간 전만 해도 그녀의 남편이 굵직하고도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간직할 추억거리를 하나 만들자고 했고, 그 소리에 제니퍼도 연회가 멋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 막상 나와 보니 그 모든 기대가 산사조각이 나고 있었다. 제니퍼는 방으로 돌아갈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래 봐야 남편이 다시 찾으러 올 것이 뻔했다. 그녀는 단단히 마음먹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마주쳐야 할 사람들이었고, 메릭 사람은 절대 후퇴하지 않는 법이라고.
제피너는 차분히 숨을 길게 내쉬고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와 모퉁이를 돌아섰다. 횃불에 비친 광경에 혼란스러워진 그녀는 순간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홀에는 3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홀의 기녑ㄴ을 따라 차려진 테이블 주위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의자에 앉아 여흥을 즐기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었다. 여흥도 정말 다양했다. 계단 위에는 음유 시인 악단이 자리를 잡고 연주하고, 또 다른 음유 시인들은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흥을 돋우고 있었다. 또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네 명의 어릿광대가 방 한가운데에서 공을 천장 높이 던지기도 하고 자기네끼리 주고받기도 하면서 재롱을 피웠다. 홀 반대쪽에는 세 명의 무용수가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연단 위 넓은 테이블 뒤에서는 류트 주자가 홀의 무질서한 쾌활함에 감미로운 화음을 더했다.
제니퍼는 여자도 몇 명 있는 것에 약간 놀랐다. 약 서른 명 가량 되는 것 같았다. 기사의 부인이거나 이웃 사람으로 보였다. 제니퍼는 로이스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모인 사람 가운데 애릭 다음으로 키가 큰 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뭔가 말을 하고 있었다. 한 손에 술잔을 든 그가 주위 사람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그런 모습의 로이스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성의 주인으로서 긴장을 풀고 웃음을 짓는 그의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학살자라는 별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지금의 그는 강력한 귀족이자 위험할 정도로 멋있는 남자였다. 햇빛에 그을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속으로 한 줄기 자부심이 스치고 지나갔다.
문득, 홀의 소음이 뚝 끊어졌다. 제니퍼의 출현이 그 원인임을 알아챈 로이스는 잔을 내려놓고 손님들에게 실례를 구한 수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얼굴에 경탄의 미소가 천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상체는 몸에 착 달라붙고 치마 부분에는 황금빛 언더가운이 살짝 보이게 슬맅트가 터진 청록색 벨벳 예복을 입은 젊은 공작부인이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예복과 잘 어울리는 벨벳 망토가 어깨 너머로 늘어지고, 사피이어가 박힌 납작한 황금 사슬이 망토를 받치고 있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는 역시 사파이어로 장식된 황금색 공단 벨트로 감겨 있었다. 그리고 윤기 흐르는 머리는 가운데에서 가리마를 타서 뒤쪽으로 넘겼는데, 파도가 넘실거리듯 어깨를 타고 흐르면서 청록색 예복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 탐스러워 보였다.
지금 그 용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로이스는 얼른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중간에서 그녀와 마주친 로이스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양손으로 잡으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경탄의 빛을 그대로 드러낸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 아름다워. 사람들이 당신을 볼 수 있게 잠깐 그대로 서 있어 봐."
"공작님, 당신이 내가 스코틀랜드의 여왕이라 해도 나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내가 못생겨서였다는 걸 다 알고 있어요."
제니퍼는 그의 눈동자에 비친 놀라움과 당황함의 빛을 보았고 그것이 진정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왕하고 면담하면서 화가 나서 여러 가지 이유를 대긴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어. 물론 내가 단점이 많은 사람이긴 해. 하지만 눈이 멀진 않았다고."
"그렇다면 오늘 밤의 내 모습에 대한 당신의 고결한 판단을 믿기로 하죠."
제니퍼의 놀리는 듯한 대꾸에 그가 뭔가 의미심장한 뜻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다른 일에도 전부?"
그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젱에 찬성을 표시하는 당당한 여왕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뭐든지 다.......우리가여기 아래층에 있는 한 말이죠."
"이런 고집쟁이 같으니라구."
그는 짐짓 화가 난 듯 성난 얼굴을 지었다. 그리고 부드럽고 친밀한 눈빛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자, 지금은 신랑과 신부가 손님들과 어울릴 시간이지."
로이스는 팔에 그녀의 손을 끼고 뒤를 돌았다. 제니퍼는 로이스와 이야기하는 동안 그의 기사들이 로이스 뒤로 한 줄로 서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분명, 새 여주인을 공식적으로 소개받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일이었다. 그 줄의 맨 앞에는 스테판 웨스트모어랜드가 서 있었다. 메릭의 홀에서 안짢은 얼굴로 노려볼 때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스테판이었다. 그런데 지금, 스테판이 그녀의 뺨에 형제처럼 따뜻한 키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로 물러서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스테판이 형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점에 새삼 놀랐다. 특히 웃는 모습은 로이스와 너무나도 똑같았다. 스테판의 머리가 조금 더 엷고, 얼굴이 약간 더 부드러운 점은 있었다. 눈동자는 회색이 아니라 파란색이었지만 조심스레 눈웃음칠 때의 매력은 형이나 다름없었다.
"제가 얼마나 고생을 시켜 드렸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다 끝난 일, 언젠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를 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빌고 있습니다."
진정이 함빡 담긴 사과였다. 제니퍼는 이 저녁의 쾌활함과 훌륭한 예절이 명하는 대로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고, 그렇게 했다. 그러자 그녀의 시동생이 함빡 웃음을 지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제가 형한테까지 사과할 필요는 없겠죠? 내 덕분에 형은 횡재를 했으니까요."
너무나도 엉뚱한 그 말에 제니퍼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옆에 서 있던 로이스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느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의 회색 눈빛이 자부심과 동생의 말을 수긍한다는 뜻에서 따뜻했다.
다음 차례는 애릭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거구가 앞으로 걸어 나오자 돌 마루가 쿵쿵 울렸다.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됨직한 걸음걸이였다. 그 거한은 제니퍼가 기대한 것처럼 사과를 한다거나 활기찬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렇다고 절을 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그녀의 앞에 서서 그 높은 곳에서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무뚝뚝하게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뒤돌아서 물러났다. 제니퍼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가 그녀에게 복종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신이 그녀를 지배할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제니퍼가 깜짝 놀라며 당황하는 것을 본 로이스가 몸을 굽혀 그녀의 귀에 대고 낄낄거렸다.
"화내지 마. 애릭은 나 빼고는 아무한테도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으니까."
제니퍼는 그 웃고 있는 회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득, 오늘 밤이 따사로운 봄날의 밤처럼 화사하게 펼쳐질 것만 같은 기대감이 온몸에 퍼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로이스의 친위 경호대를 이루는 기사들의 차례였다. 20대 후반의 훤칠한 고드프리 경이 제일 먼저 나섰다. 그녀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손에 키스를 한 직후 그는 이전의 관계에서 파생된 긴장감을 완벽하게 풀어 버리는 행도을 취했던 것이다. 그는 주위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지금 살아 있는 여성 가운데 군대 전체를 속일 정도로 용기와 재치를 겸비한 여성은 제니퍼뿐이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서서 함빡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공작부인, 이제는 혹시 클레이모어에서 도망칠 일이 있다 해도 저희들 자존심을 살릴 수 있게 추적하기 쉬운 흔적을 남겨 주시겠지요?"
로이스가 그녀의 손에 쥐어 준 술잔을 들고 있던 제니퍼는 짐짓 엄숙한 태도를 지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이제는 여기서 탈출할 일이 있어도 제대로 계획을 짤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러자 고드프리 경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금발머리의 유스테이스 경 차례였다. 쾌활한 갈색 눈의 그는 그녀가 도망쳤을 때 머리만 감추지 않았어도 어디에 숨었든 금방 그 황금 불꽃 같은 머리를 알아볼 수 있었을 거라고 신나게 떠들었다. 그 말에 로이스는 감회가 새로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유스테이스 경이 몸을 내밀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저 표정 좀 보십시오. 질투가 나서 저러는 겁니다. 제가 원체 잘생기고 기사도에 맞는 이야기만 하거든요."
주인의 말 한마디만 떨어졌다면 그녀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숙련된, 죽음을 두려워 않는 기사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그녀 앞에 와 섰다. 그러나 이제는 목숨을 버려서라도 그녀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 것이다. 사슬로 엮은 갑옷과 투구 대신, 멋진 벨벳과 모직 옷으로 성장을 한 나이 많은 기사들은 그래도 젊은 기사들과 달리 정중했다. 젊은 기사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의 과거 행동이 마음에 걸려서 그러는지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젊은 축인 라이오넬 경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제 생각에는, 음, 공작부인께 결례를 저지른 일은 없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음, 팔을 잡고 끌면서........."
제니퍼는 소리 없이 웃으면서 눈썹을 치켜 올렸다.
"첫날 나를 천막으로 호위했을 때 말이죠?"
"네, 호위했을 때 말입니다."
라이오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로이스의 기사 견습생인 가윈이 새 여주인 앞으로 나왔다. 어린 나머지 기사들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목표인 티가 역력한 얼굴이었다. 가윈은 아주 구식으로 제니퍼에게 절을 한 다음 그녀의 손에 키스를 했다. 가윈의 얼굴에는 아직도 앙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때, 공작부인께서 담요를 산산조각으로 잘라 버리신 게 진짜 우리를 얼려 죽일 의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저 나름대로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제니퍼 옆에 서 있던 유스테이스 경이 냉소를 지었다. 유스테이스는 경멸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핀잔을 주었다.
"그게 네 나름대로는 정중한 행동거지인 모양인데, 그래 갖고서야 앤 양이 로드릭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 당연하지."
로드릭과 앤 양의 이름이 거론되자 가윈이 불쾌한 기색을 지으며 초조한 눈길을 홀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서둘러 제니퍼에게 사과를 하고는 젊은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 쪽으로 사라졌다. 제니퍼로서는 모르는 얼굴로, 언뜻 보아 인상이 쾌활하기보다는 호전적인 남자였다.
사실 제니퍼로서는 로이스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지 않은 사람들을 응대할 일이 두려웠다. 그러나 두 시간 동안 그 사람들을 소개받으면서 공포는 말끔히 가셨다. 로이스가 유례없이 계단에서 하인들에게 했던 경고가 널리 이웃 영지에서 온 손님들에게도 알려져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적개심 어린 눈길을 던지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중한 미소로 그것을 숨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인사가 끝나자 로이스는 제니퍼에게 저녁을 먹으라고 강권했다. 그것도 연단 위의 테이블에서 먹으라는 것이었다. 그곳은 유쾌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따금 주방에서 새로운 요리가 나왔음을 알리는 악단의 트럼펫 소리가 들리면 잠시 중단될 뿐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엘리너 숙모는 3백 명이 넘는 이야기 상대를 만나 한창 신이 난 모양이었다. 하긴 이제까지 애릭 말고는 다른 사람과 가까이 있어 본 적이 거의 없으니 오죽하겠는가. 사람들하고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는 엘리너 숙모의 모습을 보자니 제니퍼의 마음이 다 흐뭇했다.
"기대하던 음식인가요, 공작 각하?"
제니퍼는 대책없이 구운 공작 요리와 속을 채운 백조 요리를 두 접시째 비우고 있는 로이스를 쳐다보았다.
"괜찮아. 하지만 프리스험이 감독하면 더 좋은 메뉴가 나올 걸로 기대했었어."
바로 그 순간, 언제 나타났는지 시종장이 로이스 뒤에 나타났다. 제니퍼로서는 엘버트 프리스험의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이었다. 프리스험이 차갑고, 의례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 전 음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프리스험은 제니퍼를 힐끔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부드러운 수프 한 접시, 얇은 고기 한 점이면 만족합니다. 하지만 주인마님께서 직접 주방을 맡으신다면 훨씬 더 저하 마음에 드시는 메뉴가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니퍼는 메뉴나 요리법에 대해서 아는 게 없기도 하거니와 순간적으로 그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표식으로 허리에 금사슬을 매고 하얀 표정을 든 프리스험의 나무 꼬챙이처럼 비쩍 마른 모습을 보는 순간 혐오감이 치미는 것을 억누르는 것만 해도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턱은 하얗다 못해 유령 같은 피부를 뚫고 뛰어나온 듯 아주 뾰족했다. 그러나 제니퍼가 그에게 그토록 혐오감을 보이게 된 것은 단지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로이스를 쳐다보는 차가운 느낌 때문이었다. 프리스험이 조금 더 공손하게, 그러나 제니퍼에게와 마찬가지로 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볼 길 없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음식을 빼고는 다 마음에 드시는가 보군요?"
"아주 좋아."
막 홀 저편에서 무도회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로이스가 의자를 뒤로 물리며 프리스험에게 말을 건넸다.
"그건 그렇고, 내일 자네 몸이 좋아지면 장부를 한번 보고 싶군. 그리고 모레는 영지를 돌아봐야겠네."
"그렇게 하시지요. 그런데 모레가 23일로 연례적으로 판결의 날로 이어져 왔습니다. 연기하시길 바라십니까?"
그러자 로이스가 일어나라고 제니퍼의 팔꿈치 밑에 손을 집어 넣으며 황급히 대답했다.
"아니, 어떻게 치러지는지 보고 싶네."
그는 로이스에게 절을 하고 제니퍼에게는 가벼운 목례를 한 후에 뒤로 물러섰다. 그는 표장에 몸을 의지하고 천천히 자기 방 쪽으로 사라졌다.
로이스의 의도가 무도회에 합류하자는 것임을 안 제니퍼는 주춤 뒤로 물러나며 불안한 눈길을 던졌다.
"각하, 전 춤을 춰 본 적이 별로 없어요."
그녀는 마루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며 활기차게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들이 어떤 스텝을 밟고 있는지 라도 봐 두자는 심산에서였다.
"지금은 추지 않은 게 좋겠어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때는......."
"나한테 꼭 붙어 있기만 해."
로이스는 그녀를 품에 꼭 안으며 이끌기 시작했다. 익숙한 솜씨였다. 더욱이 훌륭한 선생이기도 했다. 세 번째 춤이 시작될 무렵에는 제니퍼도 다른 사람들의 몸놀림에 맞춰 제대로 스텝을 밟을 수 있었다. 이제 스테판이며 고드피리 경, 그리고 라이오넬 경 등 많은 사람이 앞을 다투어 그녀에게 춤을 신청해 왔다.
고드프리 경이 다른 춤을 추자며 청해 왔을 때, 제니퍼는 가쁜 숨을 내쉬며 더 이상은 못 추겠다고 사양했다. 여러 귀부인들과 춤을 추고 안 뒤 옆으로 물러나 손님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로이스는 제니퍼가 지친 것을 알아차린 듯 어느 틈엔가 그녀 옆에 나타났다.
"고드프리, 제니퍼는 좀 쉬어야 해."
그리고 로이스는 가윈 쪽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가윈은 앤 아가씨를 앞에 두고 로드리 경이라는 기사와 격한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대신 앤 아가씨와 추는 게 어떨까 싶은데? 어리석은 가윈이 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로드릭한테 결투라고 신청할까 봐 겁나는군. 그래 봐야 저만 죽지."
그러자 고드프리 경은 순순히 그의 말에 따라 문제의 아가씨한테 춤을 신청하기 위해 그쪽으로 걸어갔다. 로이스는 제니퍼를 후미진 곳으로 데리고 가 술잔을 내밀었다. 한 손으로 벽을 짚은 그는 제니퍼의 바로 앞에 서서 그녀가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가려 주었다.
"고마워요."
제니퍼는 행복한 얼굴에 뺨이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잠깐만이라도 쉬고 싶었어요."
로이스의 눈길이 오르내리는 그녀의 가슴을 훑고 있었다. 그 눈길은 어쩐지 흥분과 불안감을 주었다. 그녀는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말 춤을 잘 추더군요. 궁정에서 많이 춰 본 게 틀림없어요."
로이스가 내키지 않는 듯 눈길을 거두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대꾸했다.
"전장에서였어."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전장에서요?"
제니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그의 말을 되받자 로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화실을 피하고 창을 찌르는 모습을 보면 댄스 스텝과 발놀림이 어떤 건지 알게 될 거야."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그의 능력에, 안 그래도 여러 잔의 술과 힘겨운 춤으로 녹아
있던 제니퍼의 마음이 더욱 훈훈해졌다. 그녀는 괜히 어색해서 옆을 쳐다보았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애릭이 서 있은 것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웃고 마시고 춤추고 있었건만 애릭만은 팔짱을 끼고 다리를 벌린 채 앞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서 있었다. 그 표정 또한 무시무시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엘리너 숙모가 뭐라고 쫑알쫑알 대며 서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이라도 대꾸를 해야 자기 목숨이 살아날 것만 같은 필사적인 표정이었다.
로이스가 제니퍼의 눈길을 따라 그쪽을 보았다. 로이스의 입에서 놀리는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 엘리너 숙모가 위험을 자초하고 있는 것 같은데?"
술김에 대담해진 제니퍼가 미소로 되받았다.
"애릭이 말을 한 적이 있기나 한가요? 제대로 된 문장으로 말한 적이 있느냐는 거예요. 아니면 웃은 적은요?"
"저 친구가 웃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저 친구는 딱 필요한 말 빼고는 안 해."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자신이 안전하고 보호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그가 대답을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녀는 부드럽게 질문을 던졌다.
"애릭은 어떻게 만났어요?"
"우리는 제대로 소개한 적도 없어."
로이스의 놀리는 듯한 말투에 제니퍼는 가만히 기다렸다. 설명을 기다리는 그녀의 태도에 로이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내가 애릭을 처음 만난 건 8년 전, 일주일 동안 계속되던 어떤 싸움이 최고로 치열할 때였는데, 보니까 애릭이 여섯 명의 공격을 받으면서 쩔쩔 매고 있더라구. 그 여섯 명이 애릭을 노리고 집중 공격을 하고 있었던 거지. 내가 도와주러 갔고, 우리 둘이 적들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그 덕분에 내가 부상을 입었어. 그런데 애릭은 나한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않고, 힐끔 나를 쳐다보더니 그대로 다시 싸움판으로 뛰어들더군."
"그렇게 끝났어요?"
로이스가 침묵을 지키자 그녀가 설명을 재촉했다.
"그렇지는 않아. 다음날, 어둠이 깔릴 무렵이었는데 내가 다시 부상을 입었어. 이번에는 말에서까지 떨어졌지. 방패를 집으려고 몸을 숙이면서 위를 쳐다보니까 적 하나가 말을 타고 달려들면서 내 심장을 노리고 창을 막 찔러대는 참이더라구.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에 적의 머리가 날아갔어. 보니까 애릭이 피 묻은 도끼를 집어 들고 있더군. 그리고 애릭은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사라졌어.
부상이 워낙 심해서 나는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는데, 내가 중과부적으로 고생하고 있으면 그때마다 나타나서 나를 도와주더군. 다음날에는 적을 추격하는 중이었는데 보니까 애릭이 내 옆에 있는 거야. 그때부터 애릭은 죽 내 옆을 따라다니고 있어."
"그러니까 여섯 명의 적으로부터 애릭을 구해 주었기 때문에 애릭이 당신한테 평생 충성을 하고 있다는 거군요?"
제니퍼의 요약에 로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 생각에는 그 일주일 후, 애릭의 담요에 뱀 한마리가 기어 들어가는 것을 죽여 준 다음인 것 같아."
"설마.......그 거인이 뱀을 겁낸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제피너가 낄낄거리며 웃자 로이스가 짐짓 모욕당한 얼굴을 지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여자나 뱀을 무서워하지, 남자는 안 무서워해. 싫어하는 것일 뿐이야."
그러나 그의 단호함은 얼굴에 나타난 순진한 미소 때문에 전혀 효과가 없었다.
"하긴, 그게 그거 같기도 하군."
로이스는 그녀의 웃고 있는 파란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그가 농담을 하면서 까지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는 순간, 제니퍼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이 흘러 나왔다. 그녀 나름대로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의문이 불쑥 터져 나온 것이리라.
"정말 애릭한테 그 아이를 죽이라고 할 거예요?"
그의 몸이 약간 뻣뻣해졌다. 이어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위로 올라가야 할 시간이군."
왜 그가 갑자기 그런 결심을 했는지, 아까처럼 정말 이야기만 할 것인지 확신이 안 간 제니퍼는 의심스럽다는 듯 머뭇머뭇했다.
"왜요?"
"당신이 이야기하고 싶어 하니까. 그리고 나는 당신을 침대에 끌어들이고 싶고. 어떤 경우든 여기보다는 내 방이 더 알맞지 않을까?"
여기서 버텨 보아야 창피만 당할 뿐이라는 점을 깨달은 제니퍼는 그를 따라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막 첫 발자국을 떼려고 하는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로이스를 향하면서 애원했다.
"사람들이 우릴 따라올 거예요. 내 말은 첫날밤의 의식이 없느냐는 뜻이에요."
"있다 해도 해로울 건 없어. 그냥 옛날부터 내려온 풍습일 뿐이고. 이야기는 그 다음에 해도 돼."
"그 다음에" 라고 하는 말이 의미심장했다.
"제발, 그건 웃기는 일이에요. 세상이 다 알고 있어요. 우리가 이미.......이미 그걸 했다는 걸 말이에요. 괜히 올라갔다가는 소문만 날 뿐이에요."
그러나 로이스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두 사람은 애릭과 엘리너 숙모 앞을 지났다. 문득 로이스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애릭에게 다가가 뭐라고 말을 하고는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신부와 신랑이 위로 올라가려고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금방 눈치 챘다. 두 사람이 연단 위의 테이블을 지날 무렵, 사람들이 로이스에게 퍼붓는 음담패설에 가까운 충고에 제니퍼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녀는 남몰래 등 뒤를 돌아보았고, 적이 마음이 놓였다. 애릭이 계단 입구에 팔짱을 끼고 버티고 서 있었다. 로이스의 명령에 따라 흥에 겨워 뒤따라오는 사람들을 막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로이스가 자기 침실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완벽한 공포와 무력감에 빠진 그녀는 입이 딱 얼어붙은 채 그가 문을 닫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눈에 들어온 풍경에 그녀는 눈만 깜박거렸다. 네 개의 기둥이 버티고 있는 침대와 고운 공단 침대 커튼, 커다란 난로 앞에 거대한 팔걸이의자가 있는 그 방은 너무나도 크고 너무나도 화려했다.
벽에는 세 개의 정교한 서랍장이 붙어 있었다. 제니퍼는 열어 보지 않고서도 그 자물쇠의 크기만으로 하나는 옷장이요, 다른 것들은 금화와 다른 귀중품들을 넣는 장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촛불이 타고 있는 커다란 은 스텐드가 침대 옆에 하나, 또 난로 양쪽에 하나씩 서 있었다. 벽에는 태피스트리들이 걸려 있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마룻바닥에도 매트리스가 하나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창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납을 입힌 유리창이 만들어진 그 유리창은 낮에는 이 방의 분위기를 정말 화사하고 생기 넘치게 만들어 줄 것이 틀림없었다.
발코니로 통하는 왼쪽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의 문은 제니퍼의 방으로 통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침대에 눈길이 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머지 두 개의 문을 쳐다보았다. 순간, 로이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면서 머리에 떠오른 것을 얼른 입 밖에 냈다.
"저, 저 두 문은 어디로 통하는 거죠?"
하나는 사실로, 또 하나는 화장실로."
물론 로이스는 그녀가 교묘하게 침대를 피하면서 눈길을 돌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이어 그의 입에서 차분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당신의 설명을 듣고 싶어. 왜 나하고 자자는 말만 나와도 그렇게 놀라는지 말이야. 결혼도 안 했던 그때보다 지금이 더 심해. 그때는 잃을 거라도 있었지만 말이야."
"그때는 달리 방법이 없었을 뿐이에요."
제니퍼는 그를 향해 돌아서며 애써 변명했다. 그러자 로이스의 이성적인 반박이 곧 뒤따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제니퍼는 입이 바싹 타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추운 듯 팔을 둘러 가슴께를 감쌌다.
그녀의 눈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당신은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도대체 뭘 기대하는지 모르겠어요. 어떤 때는 친절하고 아주 이성적이에요. 그럴 때는 당신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 말은 정상적이라는 뜻이에요......"
제니퍼는 얼른 말을 정정하고 나서 계속 말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순식간에 돌변해서는 터무니없는 비난을 퍼부어대고 있어요."
제니퍼는 이해가 안 가느냐는 듯 팔까지 내밀며 말했다.
"나는 낯선 사람과 있으면 마음이 편하질 못해요! 소름끼치고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요!"
로이스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또 한 발자국. 제니퍼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드디어 다리 뒤쪽이 침대에 부딪히면서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침대 위로 올라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서 있다가 날카로운 경고를 말했다.
"나한테 손대지 말아요. 당신이 손대는 게 싫어요!"
로이스의 검은 눈썹이 한데 모아졌다. 이어 손이 앞으로 나와 제니퍼의 목 부분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가운뎃손가락이 자꾸만 밑으로 내려가 그녀의 가슴 사이 오목한 부분으로 들어갔다. 손가락은 그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그녀의 가슴 옆쪽을 톡톡 건드렸다. 제니퍼의 몸에 희미한 불길이 지펴지지 시작했다. 숨 또한 가빠졌다. 그의 손이 옷과 살결 사이로 밀고 들어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자, 어디 내 손길을 싫어한다고 말씀해 보시지."
로이스는 부드럽게 그녀를 재촉했다. 그의 눈은 그녀의 눈을 꼼짝 못하도록 사로잡고, 손가락은 딱딱해진 젖꼭지를 희롱하고 있었다.
제니퍼는 자신의 가슴이 부풀어올라 그의 손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벽난로의 불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신의 의지를 배반하고 있는 육체를 제어할 힘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그때 로이스가 불쑥 손을 뗐다.
"막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당신은 나를 놀리는 것을 즐기는 게 틀림없다고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당신만큼 나를 잘 놀리는 사람은 없어."
손으로 자신의 옆머리를 긁는 로이스의 표정은 스스로에게 화가 난 듯했다. 그는 난로 옆으로 가 술병을 들고 잔에 따른 후 돌아서서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차분하고, 제니퍼로서는 놀랍게도 사과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방금 전의 일은 내가 잘못한 거였어. 당신이 나를 "놀린다" 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당신이 이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내가 하고 싶던 일에 핑계를 댄 것일 뿐이야."
제니퍼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로이스는 화가 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제니퍼, 이 결혼이 우리의 선택은 아니었어.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우리는 그 결과와 조화를 이루며 살 길을 찾아야 해. 우리는 서로를 오해해 왔어. 그렇다고 그 사실이 변하진 않아. 나는 과거를 묻고 살고 싶어. 하지만 당신이 결심한 것이 있다면 일단은 그걸 듣는 게 제일 좋겠지."
이제 결론에 도달한 듯 그가 말을 맺었다.
"자, 아까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당신 불만을 밝혀 봐. 뭘 알고 싶어?"
"우선, 두 가지가 있어요.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게 언제죠? 그리고 어떻게 내가 당신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죠?"
"나중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싶군. 오늘 저녁, 당시을 보러 가기 전에 나는 이 방에서 당신이 이제까지 한 행동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두 시간을 보냈어. 그리고 모든 걸 다 묻어 버리기로 결심했어."
"아, 참 고결하시기도 해라. 그게 그렇게 된 거였군요.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용서를 바랄 것도, 당신한테 설명할 것도 없겠군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행동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으면 좋겠어요. 동의하시나요?"
화가 나서 공포를 잊어버린 제니퍼를 쳐다보는 로이스의 입이 웃음을 참느라 비틀어졌다. 그녀가 그를 두려워할 때 오히려 자신의 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웃음을 지우느라 애쓰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고 말고, 계속해 봐."
제니퍼는 이제 더 이상 격려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혹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까 애릭한테 그 아이를 죽이라고 할 생각이었나요, 아니었나요?"
"아니지,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어."
그의 단호한 대답에 제니퍼의 적개심과 공포가 스르르 녹기 시작했다.
"그럼,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애릭은 내 명령 없이는 절대 행동 하지 않아. 애릭이 동작을 멈춘 것은 당신이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 아니었어. 내 명을 기다리느라 그랬던 거야."
"다, 당신, 지금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제니퍼가 그의 불가사의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당신 생각은?"
제니퍼는 입술을 깨물었다. 멍청해지는 느낌이었다.
"사과하겠어요. 내가 무례했어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제니퍼의 사과를 받아들인 로이스는 정중하게 말했다.
"계속하자구. 다음 질문은 뭐지?"
제니퍼는 깊은 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신이 이제부터는 위험한 땅에 발을 내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메릭의 수비를 뚫고 나를 내 침실에서 납치한 것은 내 아버지와 내 집안을 모욕하는 행동이었어요. 도대체 왜 그러고 싶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요."
순간, 로이스의 눈에 번쩍인 분노의 빛을 무시하면서 제니퍼는 계속 밀고 나갔다.
"당신이 그런 일에 능하고 대담하다는 건 증명했어요. 하지만 만약에 당신이 진정으로 우리가 조화롭게 살기를 원했다면, 왜 그런 옹졸하고 속좁은....."
그러나 그녀의 말은 단호한 그의 말에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제니퍼, 당신은 이미 나를 두 번씩이나 바보로 만들었어. 덕분에 내 스스로 바보짓을 한 적도 한 번 있고. 정말 기록적인 일이야."
로이스는 자조적으로 박수까지 치면서 말을 이었다.
"자, 답례로 절을 해야지. 그리고 그 이야기는 그만둬!"
제니퍼는 술도 상당히 마신 터에, 원체 고집 센 성격이 발동해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말투가 자조적이기는 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지금 그가 말하려고 하는 그 "음모"라는 것이 단순히 분노 이상의 것이라는 점을 말해 주는 불쾌감이 깃들여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표정이 더욱 씁쓸했다. 그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한 이후 자꾸만 자석처럼 그에게 끌리는 위험한 감정을 애써 무시하면서 제니퍼는 가볍게 말했다.
"물론 행복하게 답례를 해야겠지요. 하지만 먼저 내가 과연 그런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겠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면서 왜 그래."
"나는 화나도 모르겠어요. 온당치 못한 찬사는 믿고 싶지 않아요."
제니퍼는 잔을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참 놀라운 여자군.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거짓말을 할 수 있다니. 좋아, 어디 당신 게임을 끝까지 밀고 나가보자구. 결과야 뻔하겠지만. 첫째, 당신 동생이 당신의 조연과 깃털 베개를 이용해서 도망쳤던 그 술책은 아주 그럴듯했어.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던 그 동생이 말이야.........."
"알고 있었어요?"
제니퍼는 웃음이 나오려는 젓을 억지로 참느라 술이 목에 걸려 켁켁거렸다.
"지금 웃음이 나와?"
"왜요, 못 웃을 것도 없죠. 당신한테나 나한테나 어이없는 일이긴 마찬가지예요."
로이스의 경고에 그녀는 비꼬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로이스는 말을 딱 잘랐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피어오른 홍조를 유심히 살폈다. 과연 그것이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거짓말을 하느라 그런 건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만약 내가 알고 있었다면, 그까짓 깃털하고 내 명예를 바꾸자고 그렇게 안달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제니퍼의 목소리가 신중해졌다.
"나야 모르지. 당신은?"
제니퍼는 잔을 내리고 심각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군요. 브렌나가 탈출하게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다른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이 섰을 때 그랬을 거예요. 그러니 그 일에서는 당신을 속였다는 찬사를 받을 수가 없군요. 다른 두 경우는 뭐죠?"
로이스가 잔을 탁 하고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니퍼가 그의 눈에 나타난 불길한 기색에 불안한 듯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얼른 말을 이었다.
"윌리엄하고 도망간 일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 일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때 윌리엄은 숲 속에 있었어요. 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맞아."
로이스가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또 당신은 내가 스코틀랜드 여왕 어쩌구 저쩌구 한 말은 알고 있지만 그때 한창 도망치느라 내가 그레이벌리에게 당신하고 결혼할 생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는 건 모를 거야. 그리고 메릭에서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당신이 수녀원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는 것도 모르겠지.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될까? 평생 당신한테 매여 있게 되고 후계자도 못 얻게 되지. 이왕 거짓말하는 참에 한 번 더 할 요랑이면......."
로이스는 제니퍼의 손에서 잔을 빼앗으면서 그녀를 홱 끌어당겼다.
"어떻게 하려고 했다고요?"
제니퍼의 입에서 여린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러자 로이스가 말을 잘랐다.
"의미도 없는 소리는 이제 그만 하자고."
로이스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니퍼는 반항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로이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푸른 눈동자가 그로서는 전혀 보지 못하던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가 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려고 했다고요?"
"아까 들었잖아."
로이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지금 그를 빨아들일 듯 쳐다보고 있는 제니퍼의 몸에 있는 숨구멍 전부에서 뜨거운 온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의지를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그녀의 입에서 여린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왜죠? 왜 나하고 결혼할 생각이라고 했죠?"
"미쳤었나 보지."
"나한테요?"
로이스의 차가운 대답에도 불구하고 제니퍼는 자신의 마음이 속삭이고 있는 것을 아무 생각없이 입 밖으로 토하고 있었다.
"당신의 몸에."
노골적인 그 말에도 불구하고 제니퍼의 마음 한구석은 뭔가 다른 것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나 예민한 그것을 그녀는 감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몰랐어요. 당신이 나하고 결혼하고 싶어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어요."
제니퍼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만약에 알았더라면 오빠를 보내고 나하고 하딘에 남아 있었을 거다?"
로이스가 비웃었다.
지금 제니퍼는 일생 일대의 위험을 맞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진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만약, 만약에, 당신을 떠나고 난 다음에 어떤 기분이 들지 알았더라면 그랬을 거예요."
로이스의 턱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제니퍼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손을 들어 그의 긴장된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그런 눈길로 보지 말아요. 나는 지금 거짓말하고 있지 않아요."
제니퍼의 손길은 부드럽고도 순진했다. 로이스는 그 손길을 무시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흉터에 키스하던 그때 생각이 더욱 또렷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로이스는 단호하게 물었다.
"그리고 당신 아버지의 계획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몰랐다?"
"수녀원에 갈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날 아침 당신하고 떠날 생각이었고요. 그렇게.......그렇게 비열한 짓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제니퍼의 끝없는 기만에 너무나 낙담한 나머지 로이스는 그녀를 홱 끌어당겨 키스를 했다. 그런데 그 거칠고 벌을 주는 듯한 키스를 그녀는 발끝을 치켜 들고 환영했다.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을 쓰다듬으면서 뒤로 돌아 목을 휘감고 있었다. 그녀의 벌어진 입술이 그의 입술에 딱 달라붙어 부드럽게 움직였다.
로이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지금 그를 달래고 있는 것이다. 로이스는 자신의 행동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자제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팔을 놓은 것은 이미 오래 전이었다. 그의 손은 그녀의 등을 쉼 없이 애무하다가 이제 목으로 올라가 허기진 입에 그녀의 입술을 더욱 세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정열이 거세어질수록 자신이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로이스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마치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었다. 로이스는 입을 떼면서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큰 숨을 토해 냈다. 겨우 말을 할 수 있게 자신을 추스린 로이스는 그녀의 몸을 약간 떼낸 다음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눈이 보고 싶었다.
"날 봐, 제니퍼."
그의 눈을 올려다보는 제니퍼의 눈동자는 순진무구했고, 신뢰를 듬뿍 담고 있었다.
"정말, 아버지의 음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지?"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다짐이었고, 제니퍼의 대답 또한 간단했다.
"음모 따윈 없었어요."
로이스는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너무나도 분명한 진실을 소리 높이 외치고 싶었다. 자신은 그녀의 탈출 이후 온갖 모욕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침실에서 빼내 잉글랜드로 끌고 왔다. 이제 모든 것을 과거지사로 돌리자고 했다. 그런데 지금 제니퍼는..........
아버지에 대한 제니퍼의 환상을 깨뜨릴 것이나, 아니면 자신이 몰인정한 미친 사람이 되고 마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로이스는 전자를 선택했다. 아무리 결혼한 사이라도 여자에게 쩔쩔 매고 싶지는 않았다.
로이스는 그녀의 비단결 같은 머리채를 톡톡 두들기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신뢰감을 던지고 있는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왜 그녀가 관계되는 일이면 이성을 잃고 마는지 자신도 의아스러웠다. 그의 입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이유가 있긴 해. 그렇지만 내가 그런 괴물은 아니야. 분명히 음모가 있었어. 내 설명을 들어 볼래?"
제니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로이스에게 보내고 있는 미소는 그녀가 로이스를 정말 엉뚱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었다.
"메릭 성으로 갈 때 나는 당신 아버지나 집안사람 가운데 하나는 분명히 스코틀랜드에서 내 안전을 보장하기로 한 협정을 깨뜨리려고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서 부하들을 메릭으로 가는 길에 배치하면서 어떤 사람이든 심문을 한 다음에 통과시키라고 명령을 내렸어."
"그리고 협정을 깨뜨리려는 사람은 하나도 못 보았을 거구요."
제니퍼가 확신에 찬 대꾸를 했다.
"그건 그래. 하지만 열두 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수녀원장 일행이 가는 것을 발견했지. 그런데 메릭 성으로 간다면서 어울리지 않게 아주 서두르고 있었어. 당신이 믿는 것하고는 달리 우리가 성직자를 괴롭히는 습관을 갖고 있는 건 아니야."
로이스는 찡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을 재촉했다.
"그렇지만 부하들은 명령에 따라서 그 일행을 심문했지. 그 수녀원장한테 내 부하들이 자기들을 호위하려고 한다고 믿게 만들면서 말이야. 그랬더니 그 수녀원장은 당신을 데리러 가는 길이라고 기분좋게 자백을 하더라는군."
제니퍼의 고운 눈썹이 한데 모아졌다. 로이스는 괜히 말했구나 하는 후회가 들 뻔했다.
"계속해요."
"수녀원장하고 그 일행은 북쪽에서 비를 만나 늦었다더군. 그래서 당신 아버지와 그 "독실한" 프라이어 수사가 예식을 바로 앞에 두고 아파서 지전할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꾸며대야 했던 거고. 그런데 수녀원장 말이, 제니퍼 메릭이라고 하는 아가씨가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돼서 수녀원에 들어가려고 한다는 거야. 수녀원장이 이해하는 바로는 그 여자의 "남편" 이 신에게 헌신하려는 그녀의 결심에 방해가 되고 잇다는 거지. 그래서 제니퍼 양을 메릭에서 탈출시키려는 그녀의 아버지를 도와 그녀를 남편의 무자비한 마수에서 구해 주려고 왔다는 거야. 비밀리에 말이지. 당신 아버지는 가장 완벽한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던 거야. 우리 결혼은 이미 사실상 확정된 거니까 나로서는 혼인 무효를 선언할 수도 없는 상태고, 이혼도 마찬가지였지. 그렇다면 나로서는 다시 결혼할 기회도 없는 거고, 합법적인 후계자도 얻을 수 없어. 이다음에 내가 죽고 나면 클레이모어를 포함해서 내 모든 게 왕한테 가 버리고 말아."
"믿을 수 없어요."
제니퍼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가슴이 찌릿했다. 자신의 말이 공평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얼른 말을 수정했다.
"물론 당신은 그렇게 믿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해요.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 아버지가 나를 평생 수녀원에 가두어 두지는 않으실 거라는 점이에요. 최소한 나한테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고 말이죠."
"당신 아버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고, 또 그러려고 했어."
제니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나 열렬히 흔들어대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로이스는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을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아버지는.......나를 사랑해요. 그럴 리가 없어요. 아무리 당신에 대한 복수가 중요하다 해도."
로이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그녀의 환상을 깨뜨리려고 노력하는 자신이 야만인인 것만 같았다.
"당신 말이 맞아. 내가 잘못 생각했어."
"그래요, 잘못 생각한 거예요."
제니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로이스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부드럽고도 달콤한 미소였다. 신뢰와 찬동, 그리고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가득한 미소였다.
제니퍼가 몸을 돌려 창문께로 걸어갔다. 그녀는 별빛이 교교한 밤하늘을 내려다보았다. 흉벽에 지펴진 횃불이 환했다. 그 오렌지색 불빛에 비친 경비병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마음은 별이나 경비병,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에게도 가 있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등 뒤에 서 있는 검은 머리의 키 큰 남자였다. 그가 자신과 결혼하려 했었다는 사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너무나도 강렬한 느낌에 그녀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에 비하면 애국심이니 복수니 하는 말들은 너무나 하찮았다.
하릴없이 손가락으로 차가운 술잔의 아름다운 조각을 더듬고 있는 그녀의 마음속으로 그 숱한 불면의 밤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메릭 성으로 돌아가서도 그를 떼어 버리지 못하고 뒤척이던 나날들. 그의 몸을 찾아 열에 들뜨던 나날들이. 그녀는 뒤에서 로이스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이제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신도 그녀를 용서할 것이다. 집안의 적을 사랑하는 그녀를.
이미 하딘에서도 그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했다. 그리고 두려워하기도 했고. 그녀를 일시적인 노리개 감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했다가 어떤 상처를 받을지 그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이제 제니퍼는 자신이 그를 사랑하며, 그 또한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로이스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 그 사실이 그의 분노, 웃음, 인내, 안뜰에서의 연설 등 그 모든 일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로이스의 손이 뒤에서 천천히 미끄러지듯 들어와 그녀를 감쌌다. 그러나 제니퍼는 그 훨씬 전부터 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창문에 비친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제니퍼는 그에게 자신의 사랑과 일생을 바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자유롭게 해 줄 단 하나의 약속을 받아 내고 싶었다. 온갖 감정이 실린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에게 절대 손을 대지 않을 거라고 맹세할 수 있나요?"
"맹세해."
그의 대답이 귀를 파도든 순간 제니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스르르 눈을 감으며 그의 품에 완전히 몸을 내맡겼다. 로이스가 고개를 숙여 입술로 그녀의 관자놀이를 쓰다듬는 한편, 천천히 소을 들어올려 그녀의 가슴을 손바닥 가득히 쥐었다. 그의 입술이 뜨거운 궤적을 남기며 그녀의 뺨에서 귀로 옮아 갔다. 혀가 귓바퀴를 탐색하는 동안 그의 손은 옷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그녀의 맨가슴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손가락은 딱딱해진 그녀의 젖꼭지를 문질러댔다.
관능의 바다에 완벽하게 빠진 제니퍼는 몸을 돌렸고, 로이스의 입술이 덥쳐 왔을 때 아무 반항도 하지 않았다. 옷이 엉덩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래도 그녀는 죄의식이니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로이스의 품에 안겨 침대 위로 옮겨졌다. 촛불에 어른거리는 그의 벌거벗은 몸이 그녀의 몸위로 올라왔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을 때 그녀는 항복의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손을 돌려 그의 목에 감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그의 입술을 격렬하게 끌어당기는 한편, 그녀의 혀는 그의 혀를 환영하며 감겨 들었다.
제니퍼의 순진한 열정은 그의 육체에 갈망의 불꽃을 지피고 있었다. 로이스는 팔로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며 잔뜩 긴장하고 있는 자신의 몸을 그녀의 몸에 격렬하게 비볐다. 또 다른 손은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있었고, 혀가 그녀의 입 안을 헤집고 있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제공하고 있는 쾌락을 그녀에게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몸짓이었다.
그런데 문득 제니퍼가 입을 뗐다. 로이스는 자신이 너무 정열에 사로잡혀 그녀를 겁먹게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실망감에서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눈에 들어온 그녀의 표정은 두려움도 혐오감도 아니었다. 그것은 환희였다. 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그녀의 부드러움에 로이스는 가슴이 뿌듯했다.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있었다.
제니퍼가 두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눈이며 턱을 경건하게 쓰다듬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는 로이스의 열정과 거의 필적할 정도로 열렬한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어 그녀는 그의 품에서 나와 그를 베개 위에 눕혔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벨벳 베일처럼 드리워졌다. 그녀는 그의 눈, 코, 귀에 뜨겁게 키스했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젖꼭지를 덮었을 때 로이스는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제니......."
로이스의 입에서 떨리는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손은 제니퍼의 등과 허리, 엉덩이를 쉴 새 없이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파고들면서 그녀의 입술을 열정에 들뜬 자신의 입에 갖다 붙였다.
"제니."
다시 로이스의 입에서 거친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의 혀가 제니퍼의 입 안에서 그녀의 혀와 얽혀 들어갔다. 로이스는 그녀를 다시 눕히고 그녀 위로 올라갔다.
"제니."
굶주린 사람처럼 제니퍼의 가슴과 아랫배, 비너스의 숲과 허벅지를 탐하는 그의 입에서는 그녀를 부르는 중얼거림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팔을 감으며 자발적으로 엉덩이를 들어 그의 남성에 맞출 때 로이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이름이 마치 음악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첫 번째의 격렬한 침입을 환영했을 때 그녀의 이름이 혈관 속에서 노래가 되고 있었다. 이어, 격렬하고도 몰아붙이는 피스톤 동작에 맞추어 그녀가 움직이면서부터는 그의 몸 구석구석까지 그 노래가 전달되고 있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 말이 귀에 울리는 순간, 그녀의 이름은 로이스의 몸속에서 최고조의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제니퍼가 손톱을 그의 몸에 박으며, 환희의 파도 속에서 온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로이스의 몸이 마지막 폭발을 앞에 두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로이스는 제니퍼의 입술에서 입을 뗴고 팔을 괴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녀의 흥분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게 된 로이스는 다시 움직임을 시작하며 거친 숨 사이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마지막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녀의 엉덩이와 입을 자신의 것에 바싹 끌어당기며 생명을 그녀의 몸 안으로 토해 내고 있는 그의 몸이 수없이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등에 기댄 그의 아내가 옆구리를 토닥거리고 있었다. 로이스는 그녀의 비단결 같은 살결을 어루만지며 천둥처럼 고동치고 있는 가슴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자신의 몸이 그렇게 폭발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숱한 섹스와 격렬한 농탕질을 해 온 터였지만 오늘처럼 터질 것 같은 절정감은 맛본 적이 없었다.
옆에 누웠던 제니퍼가 고개를 들었다. 로이스는 턱을 낮추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푸른 눈동자 깊숙이 자신이 느끼는 것과 똑같은 놀라움과 혼란이 깃들여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그의 미소에 응답하는 미소가 제니퍼의 입가에 떠올랐다. 손가락으로 그의 털복숭이 가슴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그녀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노라고 고백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입에 올렸다.
"만약 하딘에서도.......지금 같았다면.......아마........윌리엄하고 같이 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회한이 담긴 그녀의 목소리에 그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웃음으로 변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 같았다면 나도 당신을 찾아 나섰을 거야."
그의 욕망을 그렇게 쉽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제니퍼는 손가락으로 그의 단단한 아랫배 부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왜 그러지 않았죠?"
"그때 나는 체포당한 상태였어."
로이스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이어 그는 그녀의 손을 손바닥으로 눌러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게 막았다. 잠시 후 그녀의 손을 놓아주며 덧붙였다.
"당신을 그레이벌리한테 넘기지 않은 대가로."
제니퍼의 손이 허벅지 사이로 들어가자 로이스가 숨을 멈추었다.
"제니!"
그러나 때늦은 경고였다. 욕망이 다시 그의 온몸을 휩쓸면서 그를 뻣뻣하게 만들고 있었다. 제니퍼의 놀란 표정에 부드러운 웃음을 날리며, 로이스는 그녀의 엉덩이를 잡아 들어올려 팽팽하게 부푼 몸 위로 부드럽게, 그러나 똑바로 맞추었다.
"자, 마음껏 즐겨. 당신을 위해 완벽하게 서비스할 테니."
그의 아내가 몸을 숙이면서 그의 몸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었다. 그러면서 그의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21. 현명한 여주인
발코니의 창문 앞으로 가서 안뜰을 내댜보는 제니퍼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금 그녀의 머리에는 지난밤의 기억이 가득했다. 해가 솟은 각도로 보아 아침이 지나도 한참 지난 것 같았다. 그러나 잠자리에서 일어난 지 아직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늦게 일어난 적은 제니퍼 평생 처음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로이스는 그녀에게 긴 사랑을 퍼부었다. 그는 일부러 오래오래 끌며 그녀를 희롱했다. 그러나 황홀하고도 절제된 부드러움이 깃들인 그 사랑에 제니퍼의 맥박이 지금도 고동치고 있었다. 로이스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제니퍼를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사랑에 경험은 없지만 제니퍼는 분명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맹세를 할 수 있겠는가? 또 침대 위에서 그토록 조심스레 그녀를 다루겠는가?
생각에 잠겨 있던 제니퍼는 문득 아그네스가 방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알아챘다. 제니퍼는 여전히 미소 띤 눈으로 아그네스를 향해 돌아섰다. 아그네스가 옷을 내밀었다. 역시 급하게 만들었을 이번 것은 부드러운 크림빛 캐시미어였다. 하녀의 표정은 딱딱하고도 어두웠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제니퍼는 하인들과의 사이에 가로막힌 장애물을 깨뜨리고 친하게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늑대로 길들일 수 있는데 하물며 그의 하인과 친하는 일쯤이야.
아그네스에게 뭐라고 말을 붙일까 궁리하며 옷을 받아 들던 제니퍼의 눈에 구석방의 목욕통이 들어왔다. 별무리 없는 화제려니 하는 생각에 제니퍼는 입을 열었다.
"저 목욕통은 너무 커. 네댓 명이 한꺼번에 목욕해도 될 거야. 고향에서는 호수에 가서 목욕하던가, 아니면 허리가 겨우 잠기는 조그만 목욕통에서 했었거든."
"마님, 여기는 잉글랜드입니다."
아그네스는 제니퍼가 지난밤에 입었던 옷을 집어 들며 대답했다. 제니퍼는 놀란 눈길을 던졌다. 아그네스의 목소리에 우월감이 깔려 있는 건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그럼 잉글랜드의 큰 집에는 전부 저렇게 큰 목욕통하고 진짜 벽난로, 그리고......"
제니퍼는 팔을 들어, 벨벳 태피스트리가 벽에 걸려 있고, 두꺼운 매트리스가 바닥에 깔린 호사스러운 방을 가리키는 몸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이런 것들이 다 있단 말이야?"
"그건 아닙니다, 마님. 하지만 지금 마님께서는 클레이모어에 계십니다. 전 주인의 시종장이자 지금 주인의 시종장인 엘버트 경은 클레이모어를 왕궁처럼 관리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은기들은 일주일마다 한 번씩 빛이 번쩍번쩍 나게 닦게 되어 있고, 벽걸이에도 먼지 하나 끼면 안 됩니다. 마루 역시 마찬가지구요. 그리고 망가진 것이 나오면 즉시 내다버리고 다른 것으로 교체합니다."
"그러자면 일이 엄청나게 많겠는데?"
제니퍼는 조심스레 아그네스의 얼굴을 살폈다.
"네, 하지만 새 주인께서 앨버트 경한테 할 일을 지시하셨죠. 앨버트 경은 원체 완고하고 자존심이 센 사람이라 지시받은 대로 다 합니다.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요."
마지막의 그 놀라운 말에는 반감과 분노가 잔뜩 배어 있었다. 제니퍼는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귀가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몸을 돌려 하녀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썹이 한데 모아지고 있었다.
"아그네스, 그게 무슨 뜻이지?"
아그네스는 자신이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점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그리고 공포가 가득한 눈으로 제니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무 뜻도 없습니다. 아무 뜻도요! 새 주인께서 집으로 오신 것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적이 쳐들어온다면 우리는 곡식이고 친척이고 아이들까지도 전부 주인의 싸움을 위해 바칠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말고요. 그건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그 나지막하고 필사적인 목소리에도 분노가 여전히 깔려 있었다. 아그네스가 말을 맺었다.
"우리는 선량하고 충성심 있는 사람입니다. 주인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아무 감정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아그네스, 나를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네가 날 믿는 한 나도 널 배반하지 않아. 그 사람이 뭘 어떻게 했다는 거지?"
그 불쌍한 여자가 덜덜 떨고 있었다. 그때 로이스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제니퍼를 데리러 왔다. 아그네스는 얼마나 놀랐는지 손에 들고 있던 옷을 그대로 떨어뜨렸다. 아그네스는 얼른 옷을 집어 들고 바람처럼 방을 빠져 나갔다. 이번에도 아그네스가 문을 열면서 로이스를 힐끔 뒤돌아보며 손으로 성호를 긋는 것이 제니퍼의 눈에 들어왔다.
제니퍼는 캐시미어 옷을 들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멍하니 문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그녀의 이마가 생각에 잠겨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거대한 홀에는 지난밤의 시끌벅적했던 연희의 흔적이 깨끗이 지워졌다. 방을 가득 메우고 있던 테이블들은 전부 치워져 보이지 않았다. 다만 벽의 긴 의자에 열 몇 명의 기사들이 아직 잠에 빠져 있는 것이 지난밤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코고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하인들이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하인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렸고, 한 걸음 뗄 때마다 그들의 움직임에 선잠을 깬 기사들이 화가 나서 날리는 발길질을 피하느라 바빴다. 그런 하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니퍼는 가슴 한쪽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다.
제니퍼가 테이블로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던 로이스가 사뿐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재빠른 몸짓을 볼 때마다 그녀는 존경심을 금할 수 없었다. 그가 나지막하고도 친밀감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그녀를 맞았다.
"좋은 아침이야. 물론 잘 잤겠지?"
"그럼요, 잘 잤어요."
제니퍼의 목소리는 당황한 듯 가늘었다. 그러나 로이스 옆에 앉는 그녀의 눈동자는 반짝 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잘 잤니, 아가야!"
엘리너 숙모의 행복한 목소리였다. 엘리너 숙모는 앞에 놓인 접시 위의 차가운 사슴고기를 먹고 있다가 제니퍼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는구나."
"안녕히 주무셨어요, 숙모?"
제니퍼는 걱정 말라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스테판 경, 고드프리 경, 라이오넬 경, 유스테이스 경, 애릭, 그리고 그레고리 수사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모두들 편히 잤나요?"
다섯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핏기가 없고, 뭔가 켕기는 듯한 얼굴들이었다. 어디가 아픈지 잔뜩 찌푸린 사람에서부터 아직 정신도 못 차린 사람 등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마님."
정중하게 합창들을 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여전히 고개를 완전히 들지 않았고, 두 사람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늘 아침에는 애릭만이 정상이었다. 물론 아무 표정도 없고, 입도 떼지 않았다는 뜻에서이다. 제니퍼는 애릭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그레고리 수사를 쳐다보았다. 그레고리 수사의 얼굴도 다른 사람하고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녀는 로이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다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로이스가 하얀 빵과 차가운 고기를 집어 들었고, 다른 사람들이 주춤주춤 뒤를 따랐다.
"간밤에 과했지. 술을 그렇게들 마시고, 여자......어, 술이 너무 과해서."
로이스가 미소로 얼버무렸다. 제니퍼가 놀란 얼굴로 그레고리 수사를 쳐다보았다. 그레고리 수사는 맥주잔을 막 입에 갖다 대고 있었다.
"수사님도요?"
불쌍한 수사가 술이 목에 걸려 켁켁거렸다.
"나는 전자의 죄를 지었을 뿐입니다."
그레고리 수사는 뭐가 그리 원통한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후자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로이스가 재빨리 말을 바꿨기 때문에 뒷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제니퍼가 수사를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때, 엘리너 숙모가 새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들 속을 버릴 줄 미리 짐작했었지. 그래서 오늘 아침 일찍이 부엌에 갔었다우. 속 풀어 줄 거리를 만들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웬걸, 부엌에 가 보니 사프란 가루가 조금밖에 없더라구!"
부엌 말이 나오자 로이스가 주의를 집중했다. 처음으로 엘리너 숙모에게 대단한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주방에 뭐 또 필요한 건 없던가요?"
로이스가 음식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지금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은 지난밤에 먹다 남은 것들이었다.
"좀 더 맛있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믄요, 각하. 저렇게 뭐가 제대로 없는 주방은 처음 봐요. 로즈메리하고 사향초는 있는데 건포도며 생강, 오레가노, 정향은 아예 없고, 쭈글쭈글한 밤 한 톨 말고는 견과류가 하나도 없더군요! 견과류가 있어야 소스며 디저트를 제대로 맛있게 만들 수 있는데......"
"소스와 디저트" 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엘리너 숙모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역시 애릭만은 맛있는 소스고 디저트에 아무 관심이 없는 듯 앞에 놓인 차가운 거위 요리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로이스가 흘린 듯한 눈길로 재촉했다.
"재료가 제대로 갖춰지면 뭘 만드실 수 있습니까?"
"어디, 생각 좀 해 보아야겠수."
엘리너 숙모의 이마가 약간 찌푸려졌다.
"내가 내 아름다운 성에서 주방 일을 본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우. 하지만.......아하, 그렇지. 입에서 살살 녹는 고기 파이가 있지. 바삭바삭한 빵 껍질을 씌운 것 말이우. 그리고 저 닭고기 요리를 예로 들면......."
엘리너 숙모는 막 닭고기를 입에 넣고 있는 고드프리 경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숙모를 쳐다보는 고드프리 경의 표정이 그녀가 그 방면에는 전문가라고 인정하는 듯 아주 부드러웠다.
"저렇게 꼬치에 꿰어서 구운 다음 말리면, 질기기만 하고 맛은 하나도 없어요. 약한 불에 서서히 구우면서 술도 약간씩 붓고 정향, 회향, 그리고 후추를 뿌려야죠. 그런 다음 쟁반에 올려 놓으면 빵에 즙이 베면서 야들야들해진다우.
사과나 배, 마르멜로(장미과의 낙엽 교목. 열매가 맛이 달고 향기가 있어 날로 먹거나 잼을 만듦)가 있으면 만들 게 더 많지. 하지만 글레이즈를 만들자면 아먼드하고 대추야자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주방에는 그런 게 하나도 없다우."
로이스는 차가운 거위 요리는 잊어버린 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필요한 걸 성 안이나 마을 장에서 구할 수 있을까요?"
"그야 어렵지 않을 거유."
"그렇다면........"
로이스의 목소리가 위엄을 갖춘 명령조로 변했다.
"지금부터 주방은 부인이 책임을 지십시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엘버트 프리스험 경을 힐끔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명령을 내렸다.
"방금 엘리너 부인께서 주방을 책임지시도록 했네."
호리호리한 시종장은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하얀 지팡이를 잡은 그의 손은 단단히 주먹을 쥐고 있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한테는 음식이 별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당신도 음식에 신경을 써야 해요."
엘리너 숙모가 위엄 있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이제까지 음식을 잘못 먹어 왔어요. 통풍이 있는 사람은 무하고 지방질이 많은 음식, 그리고 딱딱한 치즈를 먹어서는 안 돼요."
시종장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부인, 저는 통풍이 없습니다."
"걸리게 될 거예요!"
엘리너 숙모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쾌활하게 예언을 했다. 한시라도 빨리 정원과 숲을 뒤지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를 무시하며 엘버트 경이 주인에게 말을 던졌다.
"영지를 돌아보실 작정이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실 수 있습니다."
로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장이 차갑게 덧붙였다.
"주방말고는 제가 성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꾸려 왔다는 점을 아시게 될 겁니다."
로이스가 시종장에게 묘하고도 날카로운 눈길을 던지고는 제니퍼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정중한 키스를 하며 그녀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낮잠을 충분히 자 두라구. 오늘 밤에도 잠을 재우지 않을 작정이니까."
제니퍼는 뺨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애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이스를 따라 순찰을 나설 모양이었다. 그런데 로이스가 그를 제지했다.
"엘리너 부인의 탐사에 동행하도록."
이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지 살피고."
나이 많은 숙모를 보호하라는 이 단호한 명령에 애릭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애릭이 발걸음도 요란하게 걸어 나갔다. 나가는 모습이 화가 잔뜩 난 모양이었다. 그의 발꿈치를 엘리너 숙모가 흥분한 모습으로 총총 뒤따라갔다.
"이보게, 아주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게야. 이 일이 하루 갖고는 모자라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야. 향신료뿐만 아니라 내 약에 넣을 재료도 같이 찾아야 한다구. 정향이 있어야 정력제를 만들 수 있지. 물론 육두구 가루도 넣어야지! 또 육두구 가루는 설사뿐만 아니라 산통에도 아주 좋아요. 그리고 육두구 종자는 감기하고 비장 나쁜 데 아주 특효예요. 그리고 내 특별히 당신 다이어트에도 신경을 쓸 작정이라우.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은 요새 몸이 좋지 않아요. 우울증 증세가 있어요. 한눈에 알겠더라구......."
유스테이스 경이 다른 기사들을 둘러보며 짓궂은 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막 나가고 있는 거인에게도 들릴 정도로 옆의 기사를 큰 소리로 불렀다.
"라이오넬, 방금 애릭 얼굴이 좀 우울해 보이지 않던가? 아니면, 화가 난 걸까?"
라이오넬 경이 우물거리던 입을 멈추고 애릭의 뻣뻣하게 굳은 등을 쳐다보았다. 그 눈길이 너무도 재미있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애릭은 지금 짜증이 나 있어."
고드프리 경이 뒤로 몸을 기대고는 뭔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가 결론을 내렸다.
"감정이 상했을 거야."
"어이구, 얼마나 배가 아플까?"
스테판이 마직막 일격을 가했고, 기사들이 전부 제니퍼를 쳐다보았다. 그녀에게도 동참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제니퍼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애릭이 돌아선 것이다. 자신을 놀리는 패거리를 노려보는 그의 얼굴은 자못 험상궂었다. 바위라도 깨뜨릴 듯한 기세였다. 그 표정을 보고 겁먹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이 순간만은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 기사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박장대소를 해대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문을 박차고 나가는 애릭을 뒤쫓아 퍼져 나갔다.
오직 어린 가윈만이 애릭의 역성을 들었다. 가윈은 애릭과 엘리너 부인이 출발하는 것을 바래다 주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테이블에 앉은 가윈이 다른 기사들을 둘러보며 인상을 썼다.
"그건 기사가 할 일이 아니죠. 노부인이 약초와 열매를 줍는데 동행하라니......그건 하녀가 할 일이지, 기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자 라이오넬 경이 아이의 뺨을 살짝 쳤다.
"아이구, 이놈아. 생각이 그 모양이니 앤 양이 널 탐탁찮게 보지. 아가씨가 꽃을 모으고 있는 데 따라가면 어떻게 해서든 잘해 보려고 해야지, 꼴에 남자라고 인상만 쓰고 있을래? 어젯밤처럼."
그리고 라이오넬 경은 제니퍼에게 말을 건넸다.
"이 반편이는 여자의 환심을 사는 게 아니라 그 여자한테 인상 쓰는 걸 더 좋아합니다. 그래야 더 남자답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아무리 인상쓰면서 노려보고 있어 봐야 로드릭이 앤 아가씨와 멋지게 춤추면서 환심을 사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놈한테 여자의 입장에서 좀 깨우쳐 주시지요."
가윈의 소년다운 당황함을 눈치 챈 제니퍼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앤 양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지만, 여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로드릭 같은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아마 다른 사람한테 고개가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가윈의 눈에서 감사의 정이 반짝였다. 가윈은 고개를 돌려 다른 기사들에게 불만스런 눈길을 던지고는 그 맛없는 음식을 열심히 퍼먹기 시작했다.
제니퍼는 오전과 오후 시간을 앨버트 경이 마을에서 보내 준 참모들과 함께 틀어박혀 보냈다. 제니퍼는 앞에 놓인 트렁크들에서 옷감들을 꺼냈다. 시종장이 참 유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능하지만 냉정한 사람. 왠지 딱 꼬집어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그녀는 시종장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 아침 아그네스가 한 말들에 기초해서 볼 때 클레이모어의 하인들은 그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존경하면서도 약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이곳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묘한 감정과 방안에 있는 사람들의 불편한 침묵에 화가 치밀었지만 꾹 참으면서 침대와 의자에 펼쳐져 있는 옷감들을 살펴보았다. 형용 색색의 옷감들이 마치 보석을 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금실과 은실, 그리고 금란으로 수놓은 루비색 비단, 보랏빛 벨벳, 사파이어색 태피터직, 그리고 진주 빛에서 에메랄드빛이 섞인 분홍빛, 그리고 마노 같은 검정색 등 온갖 색의 공단 등 없는 것이 없었다. 그 옆에는 부드러운 잉글랜드산 울이 밝은 노란색과 분홍색에서 크림색, 회색, 붉은 빛이 도는 황금색, 그리고 검정색의 온갖 색에다 갖가지 중량의 것들이 다 갖춰져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온 면직물은 수직과 수평으로 줄무늬가 있었고, 겉옷과 셔츠용으로 부드럽게 가장자리를 처리한 아마 직물과, 슈미즈와 속옷용으로 환상적인 수가 놓인 아마도 있었다. 그리고 장갑과 슬리퍼용의 버터처럼 매끈거리는 가죽도 있었다.
로이스와 자신, 그리고 앨리너 숙모의 옷을 다 맞춘다 해도 그렇게 많은 것을 도대체 어떻게 써야 할지 제니퍼로서는 난감했다. 해야 할 일이 너무도 엄청나고, 상상력과 패션에 대한 무지로 머리가 무거워진 제니퍼는 모피가 넘쳐 나도록 담겨 있는 두 개의 트렁크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호사스러운 짙은 흑담비 가죽을 한아름 집어 들면서 아그네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생각에 이거는 공작님의 진청색 벨벳 망토를 만들어 드릴 때 안감으로 쓰면 될 것 같아."
"크림색 공단이라야 해요."
아그네스가 거의 자포자기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어 그녀의 입이 굳게 닫혔다. 얼굴은 예의 버릇대로 잔뜩 찌푸리고.
제니퍼는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아그네스가 드디어 자발적으로 입을 연 것이다. 아그네스가 클레이모어의 전 여주인의 참모였다는 사실은 방금 전에 알았다. 제니퍼는 아그네스의 말에 별구미가 당기지 않았지만 애써 그런 기색을 감추며 또 말을 건넸다.
"크림색 공단으로? 정말? 공작님이 그걸 입으실 거라고 생각해?"
"공작님 옷이 아니라 마님 옷을 크림색 공단으로 만들어야 한다고요."
아그네스의 목소리는 잔뜩 부어 있었다. 흑담비 가죽을 잘못 쓸까 봐 걱정이 돼서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대답이었다.
"그래?"
제니퍼는 아그네스의 제안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그녀는 하얀 담비 가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저건?"
"그 흰 담비 가죽은 사파이어색 금란에 대야죠."
"공작님 옷은?"
"진청색 벨벳에 검정색, 그리고 저기 짙은 갈색 가죽을 쓰면 돼요."
제니퍼는 그 제안에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난 유행에 대해서 잘 몰라. 어릴 때는 관심이 하나도 없었고, 나중에, 요 몇 년 동안은 수녀원에서 살았거든. 그래서 내가 본 옷들이라고는 수녀원에서 입던 것밖에 없어. 하지만 네가 옷 보는 눈이 높다는 건 내가 벌써 알고 있었어. 네가 하자는 대로 할 거야."
제니퍼는 아그네스의 얼굴에 놀라는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미소에 가까운 그 표정은 아그네스의 취향에 대한 찬사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녀가 수녀원에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반응인 것 같았다. 평범한 얼굴의 젊은 두 아낙네도 약간은 긴장을 풀고 있었다. 요 몇 년간 경건한 수녀원에 있었다는 사실에 아무래도 치근감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아그네스가 앞으로 나와 옷감들을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 이미 어디다 쓸 건지 다 정해 놓은 것들이었다. 제니퍼도 같이 집으며 물었다.
"케이프하고 옷 디자인도 할 수 있지? 나는 어떻게 재단해야 하는지 잘 모르거든. 물론 가위질은 도와줄 수 있어. 바늘은 못 만져도 가위는 잘 쓰거든."
한 아낙네의 입에서 킥 하고 참고 참았던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니퍼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트루드라고 하는 이름의 참모가 깜짝 놀라 얼굴이 벌개지고 있었다.
"웃은 거야?"
제니퍼는 진짜 그랬기를 빌었다. 여자로서의 동류의식을 맛보고 싶었던 차였다.
거트루드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웃은 거 맞지, 그렇지? 내가 가위질을 잘 한다니까 웃은 거지?"
웃음은 터져 나오는데 참으려니 거트루드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눈이 툭 튀어나오려고 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그 불쌍한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제니퍼는 가위질에 관한 이야기가 뭐가 그리 재미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제니퍼의 입이 벌어졌다.
"그 이야기를 들었구나, 그렇지? 내가 그, 네 주인의 물건에 했다는 일 말이야, 그렇지?"
그 불쌍한 여자의 눈이 더욱 크게 벌어졌다. 그녀는 옆의 친구를 힐끔 쳐다보고는 꿀꺽 웃음을 삼키며 제니퍼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게 사실인가요, 마님?"
그 순간, 그 필사적이었던 행동이 제니퍼에게도 우습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엄청난 일이었어. 사실 말이지, 그 사람 셔츠의 팔구멍을 꿰매는 것보다 더 끔찍했어. 그리고......."
"그렇게도 했어요?"
제니퍼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두 침모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서로들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그네스까지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실룩거렸다.
두 젊은 아낙네가 간 후 제니퍼는 아그네스와 함께 로이스의 방으로 들어갔다. 새 옷을 만들자면 치수를 잴 옷이 필요했다. 그의 더블리트와 망토, 셔츠를 만지자니 새삼 정겨움이 가슴 가득히 밀려들었다. 아그네스에게 울 상의를 건네 줄 때는 그의 넓은 어깨에 자부심까지 느껴졌다.
그런데 이렇게 부유한 사람치고 옷은 정말 변변한 것이 없었다. 물론 최고급 옷들이었지만 하도 입어서 낡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가 옷보다는 일에 관심을 쏟는 남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셔츠의 손목이 해어진 것이 많았고, 단추가 하나도 없는 것도 두 벌이나 있었다. 문득 로이스에게는 꼭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ㄷ르자 제니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몇 달 전, 옷을 꿰매 주겠다고 했을 때 그가 그렇게 기뻐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니 미안한 마음이 가슴을 찔렀다. 옷도 별로 없는 사람한테 그렇게 하다니........하녀들과 달리 이제 제니퍼는 그 일이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다. 그 여자들이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또 그 일 때문에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도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상하게 생각할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클레이모어에는 뭔가 묘한 점이 많았다.
일단 과묵의 댐이 무너지자, 아그네스는 옷을 어떻게 만들거라는 둥 말이 많아졌다. 또 방에서 나가면서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제니퍼는 그 변화가 기쁜 한편으로 마음에 걸렸다.
아그네스가 나간 후 제니퍼는 로이스의 방에서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잠시 서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가벼운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에게서 해답을 얻고 싶었다.
유스테이스 경, 고드프리 경, 라이오넬 경이 안뜰의 낮은 돌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얼굴에 땀이 비오듯 흐르고, 검이 손에 대롱거리고 있었다. 하룻밤 떠들썩하게 놀로 나서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검술 연습을 한 게 분명했다.
"그레고리 수사님은 어디 계신가요?"
유스테이스 경의 말에 따르면 마부와 이야기하는 것을 본 것 같다고 했다. 제니퍼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성벽 안에서 엄청나게 넓은 공간을 메우고 있는 석조 건물들 가운데 어느 것이 마차 차고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본채 건물 바로 옆에 있는 주방은 높이 솟은 굴뚝으로 쉽게 분간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서 있는 곳의 건너편에는 대장간이 있었다. 말 한 마리가 말굽을 갈고 있었고, 가윈이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갑옷과 무기들이 잔뜩 쌓여 있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로이스의 방패를 열심히 광내고 있었다. 대장간 옆이 마차 차고였다. 마차 차고 너머에는 마굿간, 돼지 우리, 그리고 비둘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커다란 비둘기장이 있었다.
"누굴 찾고 계십니까, 부인?"
그레고리 수사의 목소리였다. 제니퍼는 깜짝 놀라며 돌아섰다. 그리고 괜히 놀란 것이 미안해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수사님을 찾고 있었어요. 음.......이야기할 게 있어서요."
그녀는 각자 자기 일에 바쁜 백여 명의 사람들을 힐끔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 말고요."
"그럼 성문 밖으로 산보나 나갈까요?"
그레고리 수사는 그녀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때 제니퍼는 충격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마님. 공작님과 함께가 아니라면 마님을 나가시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경비병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단호했다.
제니퍼는 믿을 수가 없어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뭐라고?"
"마님을 나가시지......."
"당신 말은 들었어요. 그럼 내, 내가 감금된 상태라는 건가요?"
분노가 억제된 제니퍼의 말이었다. 전쟁에는 이골이 났겠지만 귀부인과 맞닥뜨린 적은 한 번도 없을 그 경비병이 경비대장을 향해 놀란 눈길을 던졌다. 경비대장이 앞으로 나오면서 정중하게 절을 했다.
"그러니까, 에, 그건 마님의 안전 때문입니다."
어제 일이 있은지라 그녀가 마을에 가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러나 제니퍼는 손을 가볍게 내저으며 말했다.
"아, 난 저기 나무들 있는 곳 이상으로는 나가지......."
"죄송합니다. 공작님의 특별 명령이 있었습니다."
"알았어요."
그러나 제니퍼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자신이 죄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도 싫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발을 떼려다가 다시 그 불운한 경비대장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나지막하면서도 불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말해 줄 수 있겠죠? 그러니까........그........통행 제한이........모두에게 적용되는 건가요, 아
니면 나한테만 적용되는 건가요?"
경비대장의 눈길이 지평선 쪽으로 흘러갔다.
"마님한테만입니다. 그리고 마님의 숙모도요."
화가 치밀면서 모욕당한 기분이 들었다. 제니퍼는 몸을 돌렸다. 로이스가 애릭을 엘리너 숙모하고 같이 보낸 게 호위가 아니라 감시를 하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다른 곳으로 가죠.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그레고리 수사가 그녀의 팔을 끌어 다시 안뜰로 안내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지금의 내 처지가 죄수라니!"
제니퍼가 나지막이 분통을 터뜨리자 그레고리 수사가 거대한 안뜰을 감싸 안는 몸짓을 하며 말했다.
"이 얼마나 멋진 감옥입니까! 이제까지 본 성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데요."
미소까지 짓는 그레고리 수사의 감탄에 제니퍼는 톡 쏘아붙였다.
"그래도 감옥은 감옥이에요!"
그러자 그레고리 수사가 말문을 돌렸다.
"부인 남편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겝니다. 부인께서 생각 못하시는 점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인을 완벽한 보호 아래 두고 싶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고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와 보니 예배당이었다. 그레고리 수사가 문을 연 다음 제니퍼가 먼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무슨 이유가 있다는 거죠?"
실내는 어둠침침하고 서늘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며 질문을 던졌다. 그레고리 수사가 깨끗한 오크 의자를 권했고,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물론 아는 건 없습니다. 하지만 공작님처럼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 말에 제니퍼가 깜짝 놀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수사님은 그 사람을 좋아하는군요, 그렇죠?"
"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부인께서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겁니다. 그렇죠?"
제니퍼는 손을 내저었다.
"몇 분 전, 내가 안뜰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전이라면 그렇다고 대답했을 거예요."
그레고리 수사가 팔짱을 꼈다. 소매 안으로 손이 쑥 들어가면서 손목까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눈썹을 찡긋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럼 지금은요? 이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겁니다. 그래도 좋아하나요?"
제니퍼는 쓸쓸한 미소를 던졌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그 말 아닙니까?"
그레고리 수사가 그녀 옆의 의자에 앉으면서 말을 이었다.
"자, 은밀히 하고 싶다는 말씀이 뭐죠?"
제니퍼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언뜻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 혹시 사람들 태도가 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으세요? 나한테가 아니라 내 남편을 대하는 태도 말이에요."
"어떤 면에서 이상하다는 거죠?"
제니퍼는 하녀들이 로이스가 가까이 있을 때마다 성호를 긋는다는 이야기며, 어제 주인이 돌아왔는데도 아무도 환영하는 것 같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의 옷과 담요를 망쳤다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하자 하녀들이 아주 재미있어 하더라는 이야기도 했다.
제니퍼의 그런 이야기에 놀라기는커녕 그레고리 수사는 흥미와 존경심이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그랬습니까? 담요를 잘라 놓았어요?"
제니퍼는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퍼, 부인은 정말 놀라운 용기를 가진 여성입니다. 조만간 남편을 다루는 데도 그런 용기가 필요할 겁니다."
제니퍼가 쓴 웃음을 지으면서 대꾸했다.
"그런 용기가 아니었어요. 다음날 그 사람이 어떻게 나올지 두고 보겠다는 마음은 없었거든요. 새벽에 브렌나하고 도망칠 작정이었으니까요."
"어쨌든 그 사람들이 덮을 담요를 망친 건 잘못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부인이 그 점을 깨닫고 있는 것 같군요. 자, 그건 그렇고, 새 주인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그 이상하다는 반응에 대해서 답하도록 할까요?"
"네, 얼른 이야기해 주세요. 제 생각이 맞죠?"
그때 그레고리 수사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정교하게 새겨진 십자가 앞의 촛불들 쪽으로 걸어가 쓰러져 있는 촛불 하나를 한가로이 일으켜 세웠다.
"부인 생각은 맞지 않습니다. 나는 딱 하루 여기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1년 넘게 사제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수사가 얼굴을 찡그리며 제니퍼에게도 돌어섰다.
"혹시, 부인 남편께서 8년 전에 이 성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제니퍼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사가 적이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랬군요. 그런데 성을 공격하는 것을 본 적은 있나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뇨."
"그리 보기 아름다운 장면은 아닙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는 말이 있죠? 사실 그대로입니다. 두 귀족이 싸우면 성하고 그 주인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하인들도 똑같이 고통을 겪습니다. 공격하는 쪽이나 수비하는 쪽이나 마을 사람들의 곡식을 훔쳐 가기는 매일반입니다. 그 와중에 아이들도 죽지요. 그리고 집도 날아갑니다. 공격하는 쪽에서 성 주위의 들판에 불을 놓는 건 흔한 일입니다. 게다가 수비하는 쪽에 징발되지 않도록 일꾼을 아예 죽여 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전투중인 성에 있었던 적도, 전투가 휩쓸고 간 성에 있었던 적도 없었지만 제니퍼로서는 그 이야기 자체가 하나도 새로울 게 없었다. 자신이 지금, 과거에 로이스의 공격을 받았던 땅에 있는 성당 안에 있어서인지 그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부인 남편이 클레이모어를 공격했을 때의 일도 별반 차이가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비록 공작님이 사적인 동기에서 그런 것도 아니고 왕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것이었지만, 농민들 입장에서는 그런 고귀한 동기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얻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로지 잃기만 하는 전쟁 때문에 굶어 보십시오. 당연히 그렇게 됩니다."
제니퍼는 고지대에 사는 부족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잃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 불평 없이 그저 싸우고 또 싸우고 있었다. 그녀는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생각이 나지 않아 고개만 가로젓다가 겨우 한마디 대꾸했다.
"여기는 이상해요."
"고지대에 사는 부인 쪽의 부족들과는 달리 잉글랜드의 농민들은 승리의 대가를 나누어 받지를 못합니다."
그레고리 수사가 그녀의 딜레마를 이해한다는 듯 설명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잉글랜드의 법에 따르면 모든 땅이 왕의 소유로 되어 있습니다. 귀족이 특별한 공적을 세웠을 때 왕은 귀족들에게 땅을 하사합니다. 귀족들은 좋은 곳을 골라 자기 사유지로 삼습니다. 그런 다음 농민들한테 땅을 이용할 수 있게 허용합니다. 그 대가로 농민들은 그 귀족의 농노가 되어 일주일에 2, 3일은 영주의 땅이나 성에 와서 노역을 해야 합니다. 시시때때로 수확물도 바쳐야 하구요.
전쟁이나 기근 때는 영주가 하인과 마을 사람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건 도덕적인 차원의 일이지 법적인 것은 아닙니다. 가끔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본인들이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지요."
여기서 그레고리 수사의 말문이 닫혔다. 제니퍼가 느린 말투로 얘기를 꺼냈다.
"내 남편이 자기들을 보호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고 있다는 건가요? 아니면 클레이모어를 공격했기 때문에 증오하고 있다는 건가요?"
그 말에 대답하는 수사의 말에 후회하는 빛이 들어 있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농민들은 냉정하죠. 어차피 주인이 다른 귀족과 싸우면 자기네 땅이 불탄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인 남편은 경우가 다릅니다."
"경우가 달라요? 그게 무슨 말이죠?"
"부인 남편은 이제까지 평생을 싸움터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적이 오죽 많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복수를 하겠다고 클레이모어로 차례로 몰려올까 봐 걱정 들을 하는 겁니다. 아니면 전쟁욕심에 적수들을 불러들일지도 모르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맞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점을 깨닫자면 시간이 걸릴겝니다."
"나는 사람들이 남편을 자랑스러워할 줄 알았어요. 어쨌든 간에 잉글랜드로 봐서는 영웅이잖아요."
"물론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전의 주인과는 달리 부인 남편은 기꺼이 자기들을 보호해 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경우엔 남편의 힘과 권위가 남편에게 엄청난 이점이 됩니다. 요약하자면 경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내가 보기에는 공포의 대상인 것 같은데요?"
제니퍼는 하녀들이 로이스 앞에서 보인 반응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죠. 충분한 이유도 있고요."
"내가 보기에는 도대체 그럴 이유가 없어요."
제니퍼는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대꾸했다.
"그 사람들한테는 이유가 있습니다. 부인께서 그 사람들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자, 새 주인이 오기는 왔는데 검은 늑대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다. 늑대는 공격 목표를 정하면 끝까지 공격해서 요절을 내고 마는 사납고 사악한 동물입니다. 더욱이, 소문에는 자기를 거스르는 사람한테는 가혹하다고 합니다. 물론 소문이 그렇다는 거죠. 그런데 새 주인이 된 이상 그 사람이 어떤 세금을 어떻게 물릴지 결정할 것이며, 소송이 붙으면 재판관이 될 겁니다. 행실이 나쁜 사람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도 정할 것입니다. 그게 그 사람 권리죠. 자, 무자비하고 악독하기로 유명한 사람이 그 모든 일을 결정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사람을 환영하시겠습니까?"
제니퍼는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무자비하지도 악독하지도 않아요. 만약 그 사람의 품성이 소문의 반 정도라고 했더라도 나와 내 동생이 잡혀 갔을 때 훨씬 더 지독한 대우를 받았을 거예요."
"그건 그렇습니다."
그레고리 수사가 그녀를 보고 자랑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부인 남편이 앞으로 사람들하고 어떤 시가으 갖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나름대로 판단할 수 있게 말이죠."
"수사님은 아주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시는 군요. 결국 그럴수밖에 없겠지요. 되도록 빨리 사람들이 그 사람의 성품에 대해서......"
그때, 뒤에서 문이 활짝 열렸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며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로이스의 화난 얼굴이 문 앞에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르더군."
로이스가 두 사람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성당의 마룻바닥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만큼이나 불길한 그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앞으로는 어디 가는지 알리지도 않고 사라지지 말아."
그레고리 수사가 제니퍼의 찌푸린 얼굴을 힐끔 쳐다보면서 정중하게 실례를 구했다. 수사의 뒤로 문이 닫히자마자 제니퍼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내가 여기서 죄수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왜 나가려고 했지?"
"그레고리 수사님하고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안뜰에서 이야기하면 오가는 하인들이 다 보잖아요. 그건 그렇고, 이번엔 당신이 내 질문에 답하세요. 여기가 내 집인가요, 아니면 감옥인가요? 나는........"
"당신 집이지, 감옥은 무슨 감옥."
제니퍼의 말을 가로막은 그가 돌연 미소를 지었다.
"당신 눈이 세상에서 제일 파랄 거야. 화를 내면 꼭 파란색 벨벳이 물에 젖은 것 같아."
제니퍼는 그의 대답에 마음이 진정되려다가 이어지는 말에 그만 역겨움을 느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젖은 벨벳요? 젖은 벨벳이라고요?"
로이스는 하얀 이가 다 드러나도록 입을 벌리고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야? 그럼 뭐라고 해야 할까?"
그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니 제니퍼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분위기에 빨려 들어갔다.
"음, 그러니까, 무슨 색이냐 하면........."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십자가에 박혀 있는 커다란 사파이어를 보았다.
"사파이어색이라고 해야죠. 멋진 반지에 박혀 있는."
"아하, 하지만 사파이어는 차가운 느낌을 주는걸. 당신 눈은 따뜻하고 감동적인데 말이야.
어때, 내 표현이 더 좋지?"
제니퍼로부터 더 이상 반박이 없자, 로이스는 낄낄거리며 좋아했다.
"그런 것 같군요. 자, 계속하실까요?"
"아첨하기?"
"그래요."
로이스의 입이 웃음으로 일그러졌다.
"좋고말고. 당신 눈썹을 보면 거무스름한 빗자루가 생각나."
그 순간, 제니퍼가 꾀꼬리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고개까지 흔들어댔다.
"빗자루라고요!"
"딱 그거라니까. 그리고 당신 피부는 하얗고 부드럽고 매끄러워. 당신 피부를 보면......"
"보면?"
"달걀이 생각나지. 계속할까?"
"아니, 아니. 그만해요."
제피너는 웃음이 터져 나와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별로 잘하지 못하지?"
"영국의 궁정도 나름대로 어울리는 행동거지가 있을 텐데. 아마 당신은 궁정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을 거예요."
"되도록이면 안 가려고 노력했지."
로이스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이미 웃고 있는 그녀의 입술로 가 있었다.
갑자기 그는 아무 경고도 없이 그녀를 끌어안고 굶주린 입을 그녀의 입에 갖다 댔다.
제니퍼는 로이스의 달콤하고도 관능적인 욕구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겨우 추스렸다. 그녀는 간신히 그의 입으로부터 자신의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미 열정에 들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죠? 내가 성을 나가지 못하게 막은 이유 말이에요."
"몇 일만 참아........."
다시 키스를 퍼부으며 로이스가 중얼거렸다.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만........"
그의 대답에 만족한 제니퍼는 키스하는 즐거움에 완전히 빠져 들었다. 욕망으로 부풀어 오르는 그의 몸을 느끼는 것 또한 믿을 수 없으리만치 감미로웠다.
두 사람이 안뜰을 지나 홀로 향할 무렵에는 해가 벌써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제니퍼가 미소를 지으며 로이스를 올려다보았다.
"엘리너 숙모가 저녁으로 뭘 준비하고 있을지 무척 기대되는데요?"
"나는 아까부터 식사보다 다른 것이 더 하고 싶어.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당신 숙모가 진짜 그렇게 주방 일을 잘 보시나?"
제니퍼의 눈에 주춤하는 빛이 역력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숙모가 주방 일을 잘한다고 칭송받는 말을 들어 본 기억이 없어요. 숙모는 약 잘 만드시기로 유명한 분이에요. 스코틀랜드 방방곡곡에서 여자들이 연고며 약 만드는 법을 배우러 왔어요. 숙모는 제대로 요리한 음식을 제대로 먹으면 병에 걸릴 이유가 없다고 믿으세요. 그리고 어떤 음식은 치료에 특별한 효험이 있다고 생각하시죠."
로이스의 코가 찡긋거렸다.
"음식으로 약을 만든다? 글쎄, 그런 게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문득 로이스가 뭔가 생각이 난 듯 힐끔 그녀를 살폈다.
"당신도 물론 주방 일에 솜씨가 있겠지?"
"전혀요. 내 특기는 가위질이에요."
로이스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러나 엘버트 경이 안뜰을 가로질러 두 사람 앞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이자 로이스의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더 딱딱해졌다. 제니퍼 역시 기분을 망치고 말았다. 시종장의 차가운 눈, 호리호리한 몸, 그리고 얇은 입술이 거만하고 무자비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제니퍼는 그 사람만 보면 왠지 불편했다.
"공작 각하, 어제 발생한 진흙 투척 사건의 범인을 대령시켜 놓았습니다."
시종장이 안뜰 반대쪽에 있는 대장간 쪽으로 몸짓을 했다. 두 명의 경비병이 하얗게 질린 아이를 잡고 있었고, 주위에 하인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제가 처리할까요?"
"안 돼요!"
제니퍼는 그 남자에 대한 혐오감을 참지 못하고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시종장 역시 얼굴에 서린 반감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제니퍼는 무시한 채 로이스를 향해 돌아섰다.
"각하?"
"나는 일반인을 상대로 재판을 해 본 경험이 없어."
제니퍼에게 귓속말을 하는 로이스의 얼굴에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곳 가까이 와 있었다. 사람들의 숫자가 자꾸 불어나고 있었다. 제니퍼는 간절한 애원의 눈길을 남편에게 던졌다. 그레고리 수사의 이야기가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처리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당신 대신 할 수도 있어요. 아버지가 재판을 진행하시는 걸 본 적이 몇 번 있어요. 어떻게 하는 줄 안다고요."
로이스가 시종장을 향해 돌아섰다.
"일을 관례에 맞게 처리하되 최종 결정은 아내가 내릴 것이다."
엘버트 경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턱뼈가 살갗 바깥으로 삐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각하."
세 사람이 나아가자 군중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제니퍼는 로이스 쪽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빨리 물러서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 움직임에는 로이스로부터 멀찍이 있고 싶어 하는 마음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사람들이 둘러서서 만든 넓은 원 가운데에 도착하자마자, 엘버트 경은 한시가 아까운 듯 즉각 재판을 진행했다. 그의 얼음장 같은 눈길이 아이를 쏘아보았다. 두 팔을 두 명의 건장한 경비병에게 잡힌 아이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너는 클레이모어의 여주인을 사악하게 공격하는 죄를 범했다. 잉글랜드의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르면 그 죄는 가장 중한 죄의 하나로서 어제 그 자리에서 즉각 처벌을 받았어야 한다. 너로서는 그 편이 오늘까지 기다리다가 벌을 받는 것보다 더 쉬웠을지도 모르지."
시종장의 가혹한 연설이 끝났다. 제니퍼가 듣기에는 로이스가 처벌을 연기한 것이 교묘한 고문인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아이의 얼굴에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있던 여인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제니퍼는 한눈에 그 여인이 아니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여인의 옆에 서 있는 남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통에 가득 찬 눈길을 아들에게 던지고 있었다.
"자, 그 사실을 부인하느냐?"
앨버트 경이 매섭게 물었다.
말없이 울먹이고 있는 아이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아이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가로저었다.
"입을 열어!"
"아........"
아이가 어깨를 들고 더러운 옷으로 얼굴의 눈물 자국을 쓱 닦았다.
"아뇨."
"그러면 절대 안 된다."
짐짓 친절한 듯이 변한 시종장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네가 거짓말을 하고 죽으면 그 죄가 영원히 너를 따라다닌단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의 엄마가 남편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를 가슴에 감싸 안고 쓰다듬으면서 울부짖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되라고 하세요!"
경비병들이 검을 치켜 들고 앞으로 나왔지만 그녀는 조금도 겁먹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한테 겁은 주지 마세요! 아이가 얼마나 겁을 먹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으세요......."
그 아이의 엄마가 울음을 터뜨렸고, 그녀의 울부짖음이 애절한 애원으로 변해 갔다.
"제발........아이한테.........겁주지만은 마세요........"
"수사님을 모셔 와라."
앨버트 경의 매서우 명령이 떨어졌다.
"잠깐, 왜 미사를 올려야 하지?"
로이스가 얼음장 같은 말투로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아이 엄마가 아이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면서 서글피 흐느꼈고, 로이스의 말이 이어졌다.
"이런 시간에 미사를 올릴 필요가 있나?"
"미사가 아니라 고해성사입니다."
시종장은 그레고리 수사를 부르라는 자신의 말을 로이스가 일부러 알아듣지 못한 듯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시종장이 아이 엄마를 향해 돌아섰다.
"네 아들이 비록 사악하긴 하지만 마지막 성사는 받고 싶어 하겠지?"
그 여인은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고 하릴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필요 없어!"
로이스가 매섭게 말을 자른 순간 아이의 엄마가 히스테리컬하게 소리를 질렀다.
"해야 해요! 그건 우리 아이 권리예요!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죽기 전에 종부 성사를 받을 권리는 있어요!"
"그렇게 껴안고 있다가는 네가 아이를 죽이겠다. 물러서서 아이 숨 좀 쉬게 해 주어라."
한 가닥 희망의 빛이 구겨진 여인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러나 군중의 어두운 얼굴을 둘러보는 여인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처벌을 받지 않게 될 거라는 자신의 바람에 아무도 공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어떻게 하실 작정이신가요, 나리?"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어제의 일을 생각하는 로이스의 머리에 새삼 분노가 치밀고 있었다. 로이스는 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이 때문에 고통을 받은 건 내 아내이므로 아내가 판결을 내릴 것이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아이 엄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손으로 새어 나오는 비명을 막았다. 그녀의 공포에 잠긴 눈이 제니퍼에게 날아가 박혔다. 제니퍼는 아이 엄마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얼른 눈길을 아이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차갑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이름이 뭐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 제니퍼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제, 제이크입니다, 마님."
"그래?"
제니퍼는 아버지가 이런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던가를 생각해 내려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처벌하지 않으면 범죄가 기승을 부릴 것이며, 남편의 권위도 약해진다. 그렇다고 엄치 처벌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특히 이렇게 어린아이에게는. 그녀는 어떻게든 아이에게 변명거리를 주고 싶었다.
"사람이 너무 흥분했을 때는 생각지도 않던 일을 하게 되는 법이란다. 네가 흙을 던질 때도 그랬지? 나를 꼭 맞히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지?"
제이크가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다시 꿀꺽 목울대가 여윈 목을 오르내렸다.
"저, 저는..........."
아이가 공작의 굳어 있는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이는 거짓말 대신 참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는 마음먹은 건 다 맞혀요."
"정말?"
제니퍼는 해결책을 찾을 시간을 벌어야 했다.
"네, 마님."
아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눈에 보이는 거리에만 있으면 토끼도 돌로 맞혀서 죽일 수 있어요. 절대 놓치지 않아요."
"정말?"
제니퍼가 감동을 받은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나도 마흔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는 토끼를 맞혀서 잡은 적이 있지."
"정말이세요?"
아이도 감동한 모양이었다.
"그럼.........음, 그 문제는 그만 하고."
제니퍼는 로이스의 꾸짖는 표정을 보고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
"그러니까, 너는 날 죽이려던 게 아니었어, 그렇지?"
그러나 그 어리석은 아이는 선뜻 제니퍼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급히 덧붙였다.
"내 말은 네가 평생을 따라다닐 영혼의 죄를 지으려고 했던 건 아니다 이거야. 그렇지?"
그 말에는 아이가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때 흥분해서 그렇게 했다 이거지, 그렇지?"
제니퍼는 아이를 윽박지르다시피 물었고, 다행히도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 돌팔매 기술을 자랑하고 싶었겠지? 사람들한테 뭔가 보여 주려고 말이야."
아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불쑥 고개를 끄덕였다.
"자, 다들 들었겠죠!"
제니퍼는 긴장된 얼굴로 둘러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아이가 무슨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려고 그랬던 건 아니에요. 범죄도 중요하지만 동기도 중요한 법이에요."
그리고 제니퍼는 아이에게로 돌아서서 엄하게 말했다.
"그래도 네 행동은 어떤 형태로든 속죄를 해야 하는 행동이야. 그런데 네가 돌팔매질을 잘하니까 그 재주를 좀 더 유익한 곳에 쓰도록 만들어야겠다. 그러므로 제이크야, 이제부터 너는 두 달 동안 매일 아침 사냥하는 어른들을 돕도록 해라. 사냥이 없을 때는 성에 와서 나를 도와야 한다. 물론 일요일은 빼고 말이다. 그리고 만약 네......"
제니퍼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아이의 엄마가 앞으로 뛰어나와 제니퍼의 발밑에 엎드리면서 제니퍼의 발을 껴안은 것이다. 아이 엄마가 울음을 토하면서 연신 고마움을 표시했다.
"고맙습니다, 마님. 고맙습니다요. 마님이야말로 성녀이십니다. 하늘의 축복이 내리기를! 고맙습니다........."
"아니, 이러지 말아요."
제니퍼는 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 엄마가 제니퍼의 치마를 걷어 올리고는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모자를 든 아이 아버지가 그녀를 떼어 냈다. 제니퍼를 쳐다보는 그의 눈이 눈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만약 당신 아들이 집안일을 해야 할 때는 대신 오후에 속, 속죄를 해도 좋아요."
"저는.........."
아이 아버지의 목이 메어 있었다. 그는 목을 가다듬은 후 어깨를 펴고, 아주 엄숙하게 말했다.
"제 평생 마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 말에 제니퍼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제 남편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세요."
순간 그 남자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그는 겨우 정신을 차려 제니퍼 옆에 서 있는 그 사납고 시커먼 사나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네, 그러믄요. 나리를 위해서도 해야죠."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아까보다 덜 진지했다.
사람들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조용하게 흩어졌다. 그러나 다들 어깨 너머로 제니퍼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제니퍼는 사람들의 눈길을 느끼면서 두 달이 너무 길었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홀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내 말이 없는 로이스에게 제니퍼가 걱정스런 눈길을 던졌다.
"아까 내가 두 달을 이야기하니까 놀라더군요."
"사실 놀랐어."
로이스가 재미있다는 듯한 묘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당신이 그 아이의 겨냥 솜씨가 훌륭하다고 칭찬한 다음 저녁에 초대하려는 줄 알았어."
"내가 너무 관대했다고 생각해요?"
그의 말에 적이 안심한 그녀가 물었다. 로이스가 문을 열어 한쪽으로 비켜서면서 대답했다.
"모르겠어. 농부들의 질서 유지 같은 일에는 경험이 하나도 없어서 말이야. 하여간 프리스험이 처형 같은 벌 말고 다른 이야기도 할 줄 알아야 할 텐데 말이지. 아깐 너무하더군."
"나는 그 사람이 싫어요."
"나도 그래. 전부터 시종장이어서 그냥 쓰고 있는 거야. 다른 사람이 있나 찾아봐야 할까 봐."
"제발 빨리요. 알았죠?"
그러나 로이스는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눈에 묘한 빛이 번쩍이는 것을 제니퍼는 보지 못했다.
"아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 아주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구."
"정말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당신을 침대로 데려간 다음 저녁을 먹는 거야. 여기서 순서가 아주 중요하다구?"
"일어나, 잠꾸러기. 저녁 시간이야."
로이스의 나른한 웃음 소리에 제니퍼가 똑바로 누워 노곤한 미소를 지었다.
"자, 사랑을 했으니 이젠 밥을 먹어야지."
로이스는 그녀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
두 사람이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는 대부분의 기사들이 이미 식사를 마쳤고, 접이식 테이블도 해체되어 벽에 정돈된 상태였다. 연단 위의 테이블에서 식사를 할 특권을 부여받은 기사들만이 한가로이 각 코스를 즐기고 있었다.
"숙모는 어디 계시죠?"
로이스가 내어 주는 테이블 가운데 자리에 앉으며 제니퍼가 물었다. 그러자 유스테이스 경이 복도 쪽으로 고갯짓을 하면서 대답했다.
"요리사들한테 내일은 양을 늘리라고 얘기해 주려고 부엌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유스테이스 경은 씩 웃으며 덧붙였다.
"맛있는 게 나오면 우리가 얼마나 먹어치우는지 이제야 아신 모양입니다."
제니퍼는 테이블의 접시들을 둘러보았다. 거의 다 비어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맛있긴 맛있나요?"
"귀신도 반할 겁니다. 아무나 잡고 물어 보세요."
"애릭만 빼고요."
고드프리 경이 못마땅한 얼굴로 그 거인을 힐끔 쳐다보며 끼어 들었다. 애릭은 거위 한 마리를 통째로 잡고 마지막 몇 점 남은 고기를 뜯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엘리너 숙모가 홀로 뛰어들었다.
"좋은 저녁이에요, 공작님. 제니퍼, 너도."
엘리너 숙모는 테이블 끝에 서서 사람들과 빈 접시, 심지어 먹고 남은 것들을 치우고 있는 하인들까지 죽 훑어보았다. 내 솜씨가 어떠냐는 표정이었다.
"오호, 다들 내 솜씨에 진짜 음식이 뭔지 맛을 본 것 같군요."
"형이 내려올 줄 알았으면 좀 더 남겨 놓는 건데 그랬어요."
스테판의 말에 로이스가 설마 하는 얼굴로 동생을 쳐다보며 대꾸했다.
"정말이냐?"
"아뇨.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자, 여기 과일 파이가 하나 남았네요. 이걸로 일단 시장기나 달래고 있으슈."
엘리너 숙모가 자신의 노력을 인정하는 그 찬사에 기분이 흡족한지 두 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주방에 가 보면 남은 게 있을 거예요. 찜질약을 가지러 가면서 살펴봐야겠군요. 과일 파이 먹고 식욕이 솟지 않을 사람은 없죠. 애릭은 예외지만."
그러자 스테판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사람들을 쳐다보며 덧붙였다.
"애릭 입맛을 돋우는 건 있을 수가 없죠. 소나무 가지도 안 되는걸요."
소나무 가지 말이 나오자 다들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니퍼가 본 로이스의 얼굴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엘리너 숙모가 하인 하나와 함께 작은 그릇과 수건, 그리고 뜨거운 음식을 부지런히 차리면서 그 해답을 내놓았다.
"아이구, 오늘 애릭하고 내가 그것들을 종류별로 모으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요. 돌아올 무렵쯤 되니까 애릭 팔에 고 예쁜 가지들이 한아름이었다우."
기사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야단이었다. 엘리너 숙모가 그런 기사들을 왜들 야단이냐는 듯 능청스런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어 벌어진 장면에 제니퍼는 깜짝 놀랐다. 숙모가 찜질약을 애릭의 어깨에 바르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재미있지 않았수?"
그리고 그녀는 애릭 옆에 그릇을 내려놓고 수건을 담그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하테 어쩌구저쩌구 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엘리너 숙모는 동정심과 미안함이 뒤섞이 얼굴로 애릭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제니펀 쪽을 바라보며 구슬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근데, 고놈의 거미를 만날 줄이야! 정말 세상에서 제일 악독한 놈이더구나! 운도 없지 그래."
수건을 그릇에 담는 엘리너 숙모의 모습을 곁눈질하는 애릭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벼락을 칠 것 같은 얼굴로 바뀌었다. 그러나 숙모는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고놈이 글쎄, 불쌍한 애릭을 깨물었지 뭐냐. 애릭이 뭐 저한테 해를 입힌 것도 아니에요. 그저 거미줄이 쳐져 있는 나무밑에 서 있었을 뿐인데 말이다."
그리고 엘리너 숙모는 붉으락푸르락 얼굴색이 변하고 있는 애릭에게도 돌아섰다. 그가 마치 여섯 살바기 어린아이인 것처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덧붙였다.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복수하다니 그건 너무한 거유."
숙모는 수건을 그릇에 담그느라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엄하게 나무랐다.
"주먹으로 거미줄을 부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쳐요. 그렇다고 나무까지 도끼로 찍다니! 그건 아무래도 지나쳤어요!"
엘리너 숙모가 왜들 야단이냐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드프리 경이 어깨까지 들썩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또 유스테이스 경은 웃는 얼굴을 감추느라 금발머리가 접시에 빠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가윈만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엘리너 숙모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 여길 봐요. 이걸 얼굴에 붙이기만......."
"안 돼!"
애릭의 두툼한 주먹이 무거운 오크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접시들이 춤을 추었다. 그리고 애릭은 벌떡 일어났다. 발걸음 소리도 요란하게 밖으로 나가는 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엘리너 숙모가 얼이 빠진 얼굴로 애릭의 등을 쳐다보다가 이윽고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슬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은 내 처방대로 하기만 하면 저렇게 화를 내지 않을 텐데 말이유. 그렇게만 하면 저 사람 창자......"
엘리너 숙모는 식사 분위기를 위해서 얼른 말을 고쳤다.
"소화 문제가 다 해결되는데 말이우. 오늘 그렇게도 알아듣게 이야기를 했건만."
식사가 끝난 후 로이스는 기사들과 함께 남자들만의 이야기로 빠져 들어갔다. 무기 담당관을 돕는 사람들을 몇 명이나 배치할 것인가가 먼저 화제에 올랐다. 로이스와 함께 돌아온 군사들의 투구며 갑옷을 수리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리고 투석기에 공급할 돌이 적당한가도 화제에 올랐다.
제니퍼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로이스의 말에 담긴 차분한 위엄이 듣기 좋았고, 바로 내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느낌이 새로웠다. 푸근하면서도 낯선 느낌에 잠겨 있는 제니퍼를 보고 로이스가 토론을 중단시킨 수 미안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바깥으로 나갈까? 정말 멋진 시월의 밤이야. 당신한테 이렇게 따분한 이야기만 듣게 하기엔 너무 상쾌한 밤인걸."
"따분하지 않아요."
제니퍼는 부드럽게 대꾸했다. 로이스의 눈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에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러자 로이스가 놀리듯 말했다.
"누가 알았겠어? 내 얼굴에 내 이름을, 그것도 내 칼로 새기려고 덤벼들었던 여자가 이렇게 좋은 아내가 될 줄 말이야."
그리고 로이스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제니퍼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사람들에게 내일 아침 식사 후에 사격장에서 만나자고 한 후 로이스는 제니퍼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간 후 유스테이스 경이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공작이 달밤에 산책을 다 나가다니!"
"적이 야밤에 방문을 할 거라고 예상하지 않는 한 그런 적이 없었지."
라이오넬이 웃으며 받았다. 그러나 일행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고드프리 경만은 웃지 않고 있었다.
"공작은 여기 도착한 후부터 한 번은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
22. 맹세는 깨어지고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저기 올라가서 전망을 구경하려고."
로이스의 손이 가리키는 곳은 성벽 위의 보도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이었다. 벽을 따라 돌출된 넓은 돌계단이 열두 개의 탑을 모두 이으면서 성을 휘감고 있었다. 경비병들이 성 전체를 돌며 순찰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리라.
제니퍼는 저 멀리 달빛 교교한 계곡을 바라다보았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순찰을 도는 경비병들을 못 본 체하는 일이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녀는 로이스에게 고개를 돌리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 보니까 더 아름답네요. 클레이모어는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잠시 말이 없던 제니퍼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공격하기 어려워 보여요. 성벽도 이렇게 높고 돌도 미끄러운데, 도대체 어떻게 타 넘었죠?"
로이스가 즐겁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눈썹을 찡긋했다.
"타 넘지 않았어. 성벽 밑으로 굴을 파고 기둥을 세운 다음 굴 속에 불을 놓았지. 기둥이 불에 타 무너지면서 성벽도 같이 무너졌지."
제니퍼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어 뭔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맞아요. 당신이 글렌케니 성에서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 작전은 정말 위험할 것 같은데요?"
"그야 그렇지."
"그럼, 왜 그렇게 했죠?"
로이스가 그녀의 뺨을 톡 튕기면서 가볍게 대답했다.
"그야 날 수가 없으니까. 이 안뜰에 들어오자면 그 방법밖에 없었어."
"그럴듯한 이야기로군요. 그럼 다른 사람도 똑같은 방법으로 이 안에 들어올 수 있겠네요?"
그러자 로이스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글쎄, 똑같은 방법을 쓸 수야 있겠지. 하지만 그래 봐야 어리석은 짓일 뿐이야. 성벽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 지하에 굴을 쭉 뚫어 놓았지. 내가 한 대로 해 보겠다고 덤비는 침입자가 있으면 그대로 무너지게 말이야. 여기를 다시 지으면서 그렇게 해 놓았지."
로이스는 제니퍼의 허리에 팔을 둘러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기면서 말을 이었다.
"설사 내가 공격하더라도 함락당하지 않게 설계를 다시 했어. 8년 전에는 이 돌들이 이렇게 매끈하지 않았어. 그리고 저 탑들도 그때는 정사각형이었던 것을 둥글게 만들었고."
로이스가 성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는 탑들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제니퍼가 말을 재촉했다.
"왜요?"
"그건......"
로이스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둥근 탑이라야 잡고 기어오를 게 없거든. 메릭의 탑처럼 네모난 탑들은 특히 타기 쉽지. 당신도 잘 알다시피........"
제니퍼는 그런 화제는 꺼내지 말라고 책망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탐닉하고 있었다.
"적이 벽을 탈 수도, 굴을 뚫을 수도 없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딱 하나, 화공을 하는 거지. 그래서 성 안의 건물들 지붕을 모두 지푸라기 대신 타일로 바꿨어."
제니퍼는 말 사이사이에 퍼붓는 그의 키스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대며 의미심장한 야유를 던졌다.
"철두철미하시군요, 공작 나리."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내 것은 내가 지켜야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제니퍼는 두 사람의 아이들에게 주어야 마땅한 것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일이 떠올랐다.
"왜 그래?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어?"
그녀의 표정이 우울하게 변하는 것을 본 로이스가 물었다. 제니퍼는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면서 대꾸했다.
"아니,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나서요. 당신이 아이들을 원하는 게 당연하고, 또......"
그러자 로이스가 제니퍼의 턱을 들어올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아이를 원해."
제니퍼는 가만히 기다렸다. 로이스의 입에서 "당신을 사랑해" 라는 말이 나올 차례였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 한 말이나 그 말이나 마찬가지라고 자신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보석 같은 것들이 많았어요.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거니까 당연히 우리 아이들한테 가야 하는데 지금 와서 아버지께서 주실지 모르겠어요. 결혼 계약서를 읽어 보았으면 알겠지만 나는 지참금을 하나도 갖고 오지 못했어요."
"부인, 당신은 지참금을 가지고 왔어요."
로이스의 말은 담담했다. 순간, 이 성 안에 들어왔을 때 입고 있었던 흙투성이 옷 한 벌밖에 가져온 것이 없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나 비참했다. 그녀는 로이스의 품에 안긴 채 몸을 돌려 건너편 계곡 쪽을 바라다보았다.
"나는 가진 게 하나도 없어요. 제일 가난한 하인보다도 더 비참한 신세로 당신한테 왔어요. 지참금으로 양 한 마리 못 가지고 왔으니."
"그래, 양은 한 마리도 없어."
로이스의 담담한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의 영지가 잉글랜드 전체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일 거야. 커다란 오크 나무들이 성문 앞에 서 있다고 해서 그랜드오크라고 불리는 곳이지."
제니퍼의 놀란 얼굴을 보고 로이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헨리가 당신한테 결혼 선물로 준 곳이야. 당신이 혼자 됐을 때 가라고."
"정말.......좋은........분이군요."
제니퍼로선 잉글랜드의 왕인 헨리에 대해 그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로이스가 힐끔 자조적인 눈길을 던졌다.
"나한테서 빼앗아서 말이야."
"오, 왜요?"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놀라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어떤 어린 스코틀랜드 여자애를 수녀원에서 납치한 행동에 대한 벌이었어."
"우리가 수녀원 땅에 있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수녀원장은 그렇다고 주장했지."
"정말요?"
그러나 로이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계곡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의 몸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요?"
그의 눈길을 따라 제니퍼도 계곡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일상적인 모습뿐, 이상한 점은 전혀 없었다.
"그런 것 같아."
마을 건너 저 멀리에 보일락말락 점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 농부들이 저녁을 방해받게 생겼군. 손님이 왔어."
여섯 개 이상의 작은 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어 열두 개로, 조금 있다가는 스물네 개로 많아졌다.
"최소한 백 명은 되는 것 같군. 아니, 그 이상이겠는걸? 다들 말을 타고 있고."
"손님이........"
그러나 제니퍼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녀 오른쪽 멀리에 있던 경비병 한 사람이 갑자기 호각을 불어댄 것이다. 귀청을 찢는 호각 소리가 삑하고 밤공기를 울렸다. 그러자 성벽 위의 보도를 따라 배치되어 있던 스물다섯 명의 다른 경비병들이 일제히 그 경비병 쪽을 향해 돌아섰다. 이어 그 장면을 확인한 다른 경비병들이 일제히 호각을 불어댔다. 평화스럽던 밤하늘을 뚫고 호각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불과 몇 초안 되어 무장한 군사들이 안뜰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뛰어나오면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제니퍼가 미칠 것 같은 표정으로 로이스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죠? 적이 쳐들어온 건가요?"
"글쎄, 메릭에서 파견대가 온 것 같은데?"
고드프리 경과 스테판이 계단에 나타났다. 긴 칼을 차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제니퍼의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앞에서 칼들이 춤을 추고 유혈이 낭자하게 흐르고 있었다.
로이스는 경비대장에게 명령을 내리러 갔다가 잠시 후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제니퍼는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반짝이는 불빛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제니퍼."
로이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그를 올려다보는 제니퍼의 눈에는 공포밖에 없었다. 그 눈을 보는 순간 로이스는 지금 당장 그녀를 데리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모습은 대대적인 전투를 준비하는 장면일 뿐이었다.
안뜰과 성벽에 수백 개의 횃불이 휘황하게 켜진 덕분에 안뜰이 마치 대낮처럼 환했다. 로이스는 그녀를 안고 계단을 내려와 홀로 들어갔다.
침실의 문을 닫고 나서 로이스는 그녀에게로 돌아섰다. 제니퍼의 눈에 근심이 가득했다.
"당신은 안 가도 돼죠?"
"그럼. 부하들은 이런 일을 수없이 연습했어."
그리고 로이스는 뻣뻣하게 굳은 제니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차분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니퍼, 내 말 잘 들어. 부하들은 내가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절대 공격하지 않을 거야."
그러나 제니퍼는 "공격" 이라는 말만 귀에 들어온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로이스는 그녀의 몸을 가볍게 한 차례 흔들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 들어. 부하들이 길 옆의 숲에 배치되어 있어. 조금 있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고 있는지 알게 될 거야. 당신 아버지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바보가 아닌 한 군대가 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게다가 당신 아버지가 당신네 성급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불러 모아 군대를 조직할 시간도 없었고.
저건 아마 헤이스팅스 경하고 더갈 경까지 포함해서 메릭에서 오는 사람들일 거야. 물론 당신 아버지도 있겠지. 내가 당신을 메릭에서 빼내 왔으니 당신 아버지 입장이 묘하게 됐을 거야. 그러니 여기 와서 시위를 하는 것도 당연해. 화평의 깃발과 잉글랜드의 성실 법원 사람을 앞세우고 온다 해도 클레이모어에 들어올 수만 있다면야 당신 아버지는 그런대로 체면도 세우는 거고 말이지."
"만약 그 사람들이 무장을 하지 않았으면 어쩔 작정이죠?"
울부짖듯 내뱉는 제니퍼의 목소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당연히 다리를 내려 안으로 초대해야지."
로이스의 담담한 말이 끝나지 제니퍼의 손이 그의 팔을 파고 들었다.
"부탁이에요.......사람들을 해치지 말아요......."
"제니퍼........"
그러나 로이스의 말은 제니퍼의 몸짓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녀가 팔을 벌리며 로이스를 세게 끌어안은 것이다. 그리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소리 질렀다.
"그 사람들을 헤치지 말아요. 당신은 나한테 약속했어요!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하겠어요........제발 그 사람들을 헤치지만 말아 줘요."
그러자 로이스가 벌컥 화를 내며 그녀를 떼 내고는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제니퍼, 오늘 밤 상처를 입을 건 내 자존심밖에 없어. 내 성문을 열고 다리를 내려 당신 아버지를 내 성에 들어오게 하는 건 나로서는 말할 수 없는 모욕이야. 알아?"
"당신은 내 아버지 자존심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는군요."
사납게 대드는 제니퍼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메릭에서 날 데리고 나올 때는 내 아버지 자존심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생각했던가요? 내 아버지 기분이 어땠을까요? 당신의 그 자존심이 너무나 위대해서 이번 한 번, 몇 시간 동안도 제쳐놓을 수 없다는 건가요?"
"그렇지 않아."
그 확실한 한마디에 제니퍼는 드디어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면서 그에게 몸을 기댔다.
"당신이 내 가족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요. 약속한 대로 말이죠."
"알았어."
그는 재차 확인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고 부드러운 키스를 퍼부었다.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가 그가 동작을 멈추었다. 그의 입에서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내가 사람을 보내기 전까지는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사람을 보내서 그레고리 수사를 데려오라고 했어. 우리가 아무 이상 없이 잘 지내고 있고, 결혼도 제대로 했다는 걸 수사가 증언해야 할 테니까. 하지만 왕의 사절들은 당신이 안전하고 무사한지를 직접 보고 확인해야겠다고 할 것 같아."
"알았어요."
그리고 제니퍼는 얼른 덧붙였다.
"아마 아버지는 보통 성이 난 게 아닐 거예요. 하지만 윌리엄 오빠는 점잖고 이성을 잃는 법이 없어요. 사람들이 떠나기 전에 오빠를 만나보고 싶어요. 브레나한테 전할 이야기도 있고요."
로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이 되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홀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잔뜩 화가 난 목소리가 침실까지 들려왔다. 제니퍼는 조용히 듣다가 기도를 하고는 다시 방안을 서성거리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격노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이어 오빠들의 목소리, 그리고 헤이스팅스 경과 더갈 경의 목소리가 뒤엉키고 있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불길하고도 가슴 죄게 하는 침묵이었다.
회랑에만 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제니퍼는 문께로 걸어갔다. 그러나 문 앞에서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로이스가 그녀의 가족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대신 요구한 것이 방에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어긴다는 것은 아무래도 잘못일 것 같았다.
손잡이에서 손을 떼 낸 제니퍼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멈칫 멈추었다. 방에서 나가지 않아도 문을 조금만 열어 놓으면, 로이스의 말도 들을 수 있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제니퍼는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려 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
"그레고리 수사가 두 사람의 결혼을 확인해 주었소. 그렇다면 클레이모어는 계약서에 충실했다는 것이 증명되었소."
헨리 왕의 궁정에서 온 잉글랜드의 사절인 헤이스팅스 경이 말하고 있었다.
"그 계약서의 정신에까지 부합했다는 말은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오. 그렇지만 메릭 경, 당신은 당신의 딸을 그녀의 합법적인 남편으로부터 숨기려는 음모를 꾸며 계약서를 정신적으로나 사실상으로나 어겼소."
스코틀랜드 궁정의 사절이 타협적인 말로 얼버무리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제니퍼의 아버지가 격분을 터뜨렸다.
"이 잉글랜드 돼지 같으니라고! 내 딸은 자기가 선택해서 수녀원에 들어가려고 했단 말이오! 물론 그 애 결혼 준비는 다 되어 있었소. 하지만 그 아이가 하느님을 섬기기로 했다면 그건 아무도 어쩔 수 없는 그 아이의 선택이오. 왕이라도 그 권리를 부인할 수는 없는 일임을 당신도 알 거요! 당장 그 아이를 데려오시오. 자기가 그 길을 선택했다고 그 아이 입으로 확인해 줄 거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제니퍼는 칼에 찔린 듯 가슴이 아파 왔다. 로이스의 말이 옳았다. 아버지는 그녀를 일생 동안 유폐시켜 놓을 작정이었던 게 분명했다. 미리 얘기도 해 주지 않고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 그녀의 일생을 희생시키려 했던 것이다. 딸에 대한 사랑보다 적에 대한 분노가 더 강했던 것이다.
"당장 그 애를 데려오라니까!"
아버지의 목소리가 홀 안에 울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이리로 데려올 것을 요구하는 바요. 저 야만인은 자기 처가 자기를 증오하고 있으며,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해 줄 거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 반대하는 거요."
"제니퍼는 이미 진실을 다 이야기했소."
로이스의 차분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제니퍼는 아버지의 배신에 대한 아픔과 함께 그에 대한 부드러움이 배어나는 것을 느꼈다.
"제니퍼는 당신의 음모에 협력하지 않았소. 만약 당신이 제니퍼에게 일말의 애정이라도 있다면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를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지는 못할 거요."
"거짓말! 제니퍼가 증명해 줄 것이다!"
말콤의 포효였다.
"당신 부인한테 불행을 끼쳐서 안됐소만......."
헤이스팅스 경이 모두의 입을 막으며 나섰다.
"더갈 경과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 직접 듣는 것이라고 생각하오. 더갈 경과 내가 부인을 이리로 모셔 와서, 음.......혹시 서로 자기편에서 유리하게 협박할 수도 있으니 그 일을 막자는 거요. 자, 우리를 부인의 방으로 안내하시오."
제니퍼는 문을 닫고 뺨을 강철 문틀에 대고 기대어 섰다. 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았다.
홀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과 적대감이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제니퍼는 천천히 홀로 들어섰다. 완전 무장을 갖춘 메릭의 기사들과 클레이모어의 기사들, 그리고 두 궁정의 사람들이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벽난로 옆에는 제니퍼의 아버지와 오빠들이 로이스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모두의 눈길이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여백작님........."
헤이스팅스 경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가 못 참겠다는 듯 끼어 들었다.
"얘야, 이 멍청이들에게 수녀원에 들어가는 게 네 소망이었다고 말해 줘라. 이, 이 야만인하고 사느니 말이다. 네가 그렇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고 말해 주렴. 그리고 알고 있었다........"
"전 아무것도 몰랐어요!"
제피너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랑과 정직을 가장한 아버지의 얼굴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니퍼는 로이스가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회색빛 눈에 차분한 확신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잠깐!"
제니퍼의 아버지가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분노와 불신이 혼합된 얼굴로 제니퍼에게 한 발 다가섰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무것도 몰랐다니? 네가 이 짐승 같은 작자하고 결혼해야 한다고 내가 얘기했을 때, 네가 벨커크 수녀원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더냐?"
순간, 제니퍼의 얼굴이 하얘졌다. 공포와 혼란 속에서 내뱉았던 그 말들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수녀원에 돌아가게 해 주세요. 아니면 엘리너 숙모한테 보내줘요. 아버지가 가라는 대로 어디든 가겠어요......."
"그, 그 말은 해, 했어요."
그녀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러나 그ㅕ의 눈길은 로이스의 얼굴로 날아가고 있었다. 거기엔 차가운 분노로 빚은 가면 같은 얼굴이 있었다.
"자, 보시오! 그거면 충분하지 않소!"
제피너는 헤이스팅스 경이 팔을 잡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얼른 그의 손을 뿌리쳤다.
"아니, 잠깐만요! 내 말을 들어 봐요!"
그녀는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은 뺨이 씰룩거리는 로이스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 눈동자에.
"내가 아버지한테 그렇게 말한 건 사실이에요. 당신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요. 왜냐하면........"
그녀의 고개가 아버지에게로 홱 돌아갔다.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저 사람하고 먼저 결혼한 다음에 수녀원으로 도망친다는 그런 비열한 계획엔 절대, 절대 찬성하지 않았어요. 그에게 말해 주세요! 제가 동의하지 않았다구요!"
"제니퍼야.........."
그녀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비통함과 경멸감이 엇갈리는 눈길이었다.
"나한테 벨커크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애원했을 때 이미 동의한 거다. 나는 그저 더 안정하고 먼 수녀원을 골랐을 뿐이다. 나는 그때 저 돼지하고 결혼하라는 왕명을 네가 거역할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너도 그걸 알고 있었고. 너의 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제니퍼의 눈길이 아버지의 꾸짖는 얼굴과 로이스의 돌 같은 얼굴 사이를 필사적으로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제니퍼는 처참하리만치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몸을 돌리고 치마를 들어올려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흐느적흐느적 홀을 가로질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헤이스팅스 경이 목을 가다듬고 그녀의 아버지와 로이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번 건은 양쪽 모두 심각한 오해를 한 것 같소이다. 클레이모어, 객실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시오. 우리는 내일 아침에 출발하겠소."
홀에서 빠져 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요란했다. 제니퍼가 계단 맨 꼭대기에 막 발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비명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그리고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그녀의 귀를 찢었다.
"이 노옴! 이 애를 죽이다니! 네 놈을 죽이고야......."
제니퍼는 자신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뒤로 돌아서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테이블을 지나 뛰어 가는 그녀의 눈에 문께에 뭔가가 넘어져 있고, 사람들이 몸을 숙이고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아버지와 말콤, 그리고 로이스가 서로 칼을 겨누고 있었다.
이어 문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뒤로 물러섰다........
윌리엄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가슴에 칼이 꽂힌 채. 그리고 가슴에서 쏟아져 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바닥에 누워 있는 윌리엄을 향해 달려가며 토한 제니퍼의 비명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윌리엄!"
제니퍼는 시신 옆에 몸을 던졌다. 그녀는 연신 윌리엄의 이름을 부르면서 맥박이 뛰나 만져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팔과 얼굴을 쓰다듬으며 울부짖었다.
"윌리엄, 안 돼! 윌리엄, 제발! 윌리엄!"
제니퍼의 눈이 단검에 가 꽂혔다. 단검 손잡이에는 늑대 문장이 뚜렷했다.
"저놈을 체포하시오!"
제니퍼의 아버지가 헤이스팅스 경에게 잡혀 있는 로이스를 찌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헤이스팅스 경이 날카롭게 되받았다.
"당신 아들의 단검이 바닥에 떨어져 있소. 당신 아들이 그걸 뽑은 게 분명하오. 그러니 체포할 이유가 없소."
그리고 헤이스팅스 경은 부하들에게 잘라 말했다.
"클레이모어에게서 손을 떼라."
로이스가 제니퍼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니........"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제니퍼가 바닥의 단검을 집어 들었다.
몸을 돌려 윌리엄의 단검을 집는 동작이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당신이 오빠를 죽였어!"
제니퍼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천천히 칼을 겨누는 그녀의 눈에 고통과 눈물, 그리고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로이스는 이번만큼은 그녀의 능력이나 의도를 과소평가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칼을 휘두를 순간을 기다리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칼을 내려놔."
제니퍼는 칼로 그의 심장을 겨누며 더 높이 치켜 들었다.
"당신이 오빠를 죽었어!"
칼이 허공을 가르면서 흰 빛을 뿌렸다. 순간 로이스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면서 비틀었다. 뗑그렁 칼이 바닥에 굴렀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제니퍼를 꼭 붙잡는 일뿐이었다.
슬픔과 고통에 정신이 반쯤 나간 제니퍼가 로이스에게 붙잡힌 몸을 비틀어대며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마구 쳤다.
"이 악마!"
사람들이 윌리엄의 시신을 바깥으로 옮기는 동안 그녀의 입은 단말마의 비명만 토하고 있었다.
"이 악마! 악마! 악마!"
"내 말 들어 봐."
이윽고 로이스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를 올려다보는 제니퍼의 눈물이 흐르지 않는 눈 속에 증오가 번득이고 있었다.
"당신 오빠한테 당신하고 이야기하고 싶으면 남아 있으라고 했어. 위로 데려가려고 돌아서는 순간, 당신 오빠가 단검을 뺐어."
온 힘이 담긴 제니퍼의 손이 로이스의 뺨에 작열했다.
"거짓말쟁이! 내가 아버지하고 같이 음모를 꾸몄다고 생각하고 복수하려고 그랬던 거야! 당신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었어. 당신은 복수를 하려고 했고, 그 복수에 제일 방해가 되는 인물을 처치한 거라구!"
"오빠가 단검을 뺐다니까!"
로이스가 쓰디쓴 말투로 내뱉았다. 그러나 그 말은 제니퍼를 진정시키기보다 더욱 격분시킬 뿐이었다.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요, 나도 당신한테 단검을 겨눴어요. 하지만 당신은 장난감 빼앗듯 빼앗았어요. 윌리엄은 당신 반만큼도 안 돼요. 그런데도 당신은 칼을 빼앗지 않고 죽였어요!"
"제니퍼........"
"당신은 짐승이에요!"
나지막이 내뱉는 제니퍼의 눈은 더 이상 로이스를 보고 있지 않았다.
죄의식과 회한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로이스가 다시 한번 더 그녀를 납득시키려고 입을 열었다.
"맹세코 나는........."
그러나 제니퍼의 경멸 가득한 말이 더 빨랐다.
"맹세? 당신이 나한테 마지막으로 맹세한 말이 뭐였죠? 내 가족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나요!"
제니퍼의 두 번째 손길이 그의 뺨에 작열했다. 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갈 정도로 온 힘이 실린 손이었다.
로이스는 그녀가 올라가게 놔두었다. 그녀의 방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로이스는 난롯가로 걸어갔다. 장작 하나를 밟고 서서 손가락을 허리춤에 꽂았다. 그리고 불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제니퍼의 오빠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로이스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문 옆에 서 있을 때, 윌리엄은 로이스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때, 단검이 칼집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왓고, 로이스의 몸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만약에, 만약에, 판단할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었거나, 윌리엄이 그렇게 바로 뒤에 있지만 않았어도, 로이스는 본능보다는 의식적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하여튼, 그 당시 로이스는 윌리엄에게 남아 있다가 제니퍼를 보고 가라고 하기 전에 이미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공격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로이스는 고개를 들고 엄지와 검지로 콧마루를 눌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엇이 진실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윌리엄이 단지 위협 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 순간의 본능이 잘못된 것이었거나, 혹시 자신이 속임수를 쓸지 몰라 단검을 빼냈을 뿐인 어린 사내를 무참히 죽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회의가 깊어지면서 죄책감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지고 있었다. 로이스는 지난 30년 동안 사람과 위험을 보이는 대로 판단해 왔고, 그 판단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 밤, 그는 윌리엄이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했었다.
23. 마음의 상처
일주일이 흘렀다. 로이스는 도저히 깨뜨릴 수 없는 벽과 마주서 있었다. 제니퍼가 스스로를 격리시키기 위해 쌓아 올린 차가운 벽 앞에서 로이스는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저께 밤, 로이스는 제니퍼에게 갔다. 혹시 사랑을 한다면 열정에 그녀의 얼음벽이 녹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고, 그저 얼굴을 돌리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침대에서 내려오며 로이스는 그녀가 부른 대로 짐승이 된 것 같은 느낌에 몸을 떨어야 했다. 어젯밤에도 화도 나고 낙담이 돼서 무작정 그녀 방에 쳐들어갔다. 억지로라도 같이 자고 나면 화를 내며 무슨 말이든 하지 않을까, 그러면 말다툼이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제니퍼는 말싸움의 경지를 넘어서 있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있다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지금, 점심을 먹으면서 로이스는 옆에 앉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그렇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긴 그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다른 기사들이 로이스와 제니퍼 사이의 침묵을 의식하고는 억지로 쾌활한 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너 부인과 애릭 두 사람만이 이런 분위기를 모르는 것 같았다.
"여러분이 내 사슴고기 스튜를 좋아할 줄 알았다우."
엘리너 숙모가 빈 그릇과 접시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물론 로이스와 제니퍼 앞의 접시들은 예외였다. 그러나 엘리너 숙모는 개의치 않고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애릭을 쳐다보았다. 애릭은 거위고기를 두 마리째 뜯고 있었다. 엘리너 숙모는 한숨까지 가볍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당신만 빼고 말이지. 이봐요, 당신은 거위고기를 먹어선 안 된다니까! 그래 봐야 속만 자꾸 나빠진단 말이우. 그렇게 당부했는데도 말을 안 들으니 원. 이 사슴고기 스튜는 바로 당신을 위해서 만든 건데 건드리지도 않다니."
"부인,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고드프리 경이 말을 받았다. 그는 그릇을 한쪽으로 치우며 배를 두드렸다.
"우리가 먹었잖습니까? 정말 맛있었습니다."
"맛있다마다."
유스테이스 경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라이오넬 경이 질세라 한마디 거들었다.
"굉장한데요."
"최고급입니다."
스테판이 형을 걱정스런 눈길로 힐끔 쳐다보면서 진정으로 공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애릭만은 쓰다 달다 말이 없었다. 하긴 원체 말이 없는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엘리너 숙모가 테이블을 떠나는 순간, 고드프리 경이 화난 얼굴로 애릭을 노려보았다.
"아니, 최소한 맛은 봐야지. 부인께서 특별히 자네를 위해서 만든 건데."
아주 천천히, 애릭이 거위 다리를 내려놓으면서 그 거대한 머리를 고드프리에게로 돌렸다. 파란 눈이 차갑디차가운 빛을 던지고 있었다. 제니퍼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래도 뭔가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부인,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니퍼가 불안해하는 것을 보고 고드프리 경이 말했다.
식사가 끝난 후 로이스는 홀에서 나가 별용무도 없이 경비대장과 잡담하며 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다시 들어가 보니 난롯가에서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제니퍼의 옆모습이 보였다. 화제는 거윈의 연애 건인 게 분명했다. 제니퍼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로이스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본 것이 실로 일주일 만에 처음이었다. 괜히 끼어 들었다가 그녀의 기분을 망칠 것 같아 로이스는 그녀가 볼 수 없는 벽에 기대어 서서 하인을 불렀다. 맥주라도 한잔하면서 구경하는 게 좋을 듯했다.
"제가 만약 기사라면......."
가윈이 몸까지 약간 내민 채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앤 아가씨에 대한 열정으로 자못 심각했다.
"로드릭한테 마상 시합에서 한판 붙자고 결투를 신청할 수 있겠는데 아쉬워 죽겠습니다."
"멋진 생각이야. 그럼 앤 아가씨가 쓰러진 자네 몸뚱어리를 붙잡고 울어 줄 텐데 말이지."
고드프리 경이 농을 던지자 가윈이 발끈 성을 냈다.
"로드릭 정도는 문제 없어요!"
"어느 마상 시합을 말하는 거죠?"
로드릭 경에 대한 가윈의 풀 길 없는 적개심이 너무도 가여워 제니퍼는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매년 수확이 끝난 다음에 저기 계곡에서 열리는 시합 말입니다. 아주 멀리서도 기사들이 옵니다. 네닷새 걸리는 데서도 참가하겠다고 오는 걸요."
"어머, 그 정도예요?"
하인들한테서 시합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은 그녀였지만 모르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 모두가 참가할 건가요?"
"당연하죠."
스테판이 대답했다. 다음 순간, 그는 제니퍼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알고 싶은 게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얼른 덧붙였다.
"로이스 형은 참가하지 않습니다. 형은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제니퍼의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윌리엄의 죽음 이후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그의 핼쓱하고 꺼칠한 얼굴을 볼 때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고통의 원인을 제공한 그에게 그 고통을 치료해 달라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뻔히 알면서도, 조금 전 점심을 먹을때 그의 소매가 팔을 스치는 순간, 그녀는 그의 팔에 뛰어들어 울고 싶었다.
"공작부인이나 엘리너 부인께 잘 보이면 앤 아가씨의 마음을 사로잡을 방법을 가르쳐 주실지도 몰라. 로드릭하고 시합하는 것 같은 위험한 방법 말고 말이야."
유스테이스 경이 제니퍼의 우울한 생각을 덜어 주려는 듯 눈썹을 찡긋하며 제니퍼에게도 고개를 돌렸다.
"잠깐, 생각 좀 해 보구요."
제니퍼는 오빠의 죽음과 남편의 배신 행위 말고 달리 생각할 거리가 생겼다는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엘리너 숙모, 뭐 좋은 생각 없으세요?"
엘리너 숙모가 수 놓던 것을 옆으로 치우며 머리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손바닥을 치면서 입을 열었다.
"있지! 내가 처녀일 때 "오래 서 있기" 라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게 정말 가슴 설레더구나."
"정말요? 그게 어떻게 하는 건데요?"
가윈의 재촉에 엘리너 숙모가 옛 추억이 되살아나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앤 아가씨네 성 앞에 가서 큰 소리로 외치는 거야. 앤 아가씨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말이지."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가윈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재촉했다.
"그러면 자네는 그 성 안의 어떤 기사한테건 도전할 수 있는 거야. 그 말이 듣기 싫다고 나서는 기사가 있으면 말이지. 여러 기사가 자네 도전을 받아 주겠다고 나설 게야. 당연하지. 자기 성 안에 사는 아가씨한테 얼굴을 세워야 하니까. 안 그렇수?"
그리고 엘리너 숙모는 유쾌한 말투로 말을 맺었다.
"자네한테 당한 기사는 앤 아가씨한테 가서 무릎을 꿇고 이러는 거예요. "저는 아가씨의 아름다움에 복종합니다." 라고 말이지."
"아유, 엘리너 숙모. 그때 정말 그랬었나요?"
제니퍼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끼어 들었다.
"그렇고 말고! 최근까지도 그렇데들 했어요."
그러자 스테판이 쾌활하게 떠들어댔다.
"아하, 안 봐도 알겠습니다. 부인의 씩씩한 구혼자에게 당한 기사들이 떼 지어 나타나서는 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하는 장면이 눈앞에 선합니다."
"아이고, 말도 이쁘게 하는구려! 말이나마 고마우이."
그리고 엘리너 숙모는 가윈에게 못을 박듯이 덧붙였다.
"그럼 그렇지, 기사도가 어디 가는 겐가!"
"글쎄요, 저한테는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데요."
가윈이 한숨까지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아직 기사가 아니라서 기사한테 도전할 자격이 없거든요. 만약 그랬다가는 로드릭이 날 비웃어도 할 말이 없을 거예요."
"싸움 말고도 그 아가씨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제니퍼가 동정심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멀리서 듣고 있던 로이스의 귀가 번쩍 하는 순간이었다. 혹시라도 그녀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무언가가 걸릴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뭐가 있는데요, 마님?"
가윈의 목소리가 가히 불쌍했다.
"그러니까, 음악이나 노래 같은 게.........."
제니퍼에게 노래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 아무래도 아니라는 듯 로이스의 눈이 저절로 가늘어졌다. 그 굵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다가는 저 멀리 잘 자고 있는 동네 아이까지 깨우고도 남을 터였다.
"혹시 류트나 뭐 그런 악기 배운 적은 없나요?"
"없는데요, 마님."
"정말요?"
제니퍼의 놀란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견습생일 때는 악기를 배우는 줄 알았는데요?"
"저는 로이스 각하 밑에서 견습을 하도록 배치 받았습니다."
그 사실이 자랑스럽다는 듯 가윈이 목소리도 높게 떠들었다.
"결혼한 영주나 귀부인 밑에서 견습을 하는 게 아니죠. 로이스 각하 말씀이 그런 건 날 없는 칼자루만큼이나 아무 쓸 데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걸 휘두르며 적하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유스테이스 경이 제니퍼의 눈에 로이스에 대한 비난의 빛이 어리는 것을 눈치 채고는 가윈에게 인상을 썼다. 그러나 가윈은 지금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 어떻게 해야 그 여자를 사로잡을 수 있을 까요?"
"방법이 있어요. 시! 그래요, 시를 읊는 거예요. 그 여자를 불러 낸 다음 그 여자한테 바치는 시를 읊는 거예요. 당신이 특히 좋아하는 시를 말이죠."
로이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시를 기억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짜도 겨우 한 가지 시가 생각날 뿐이었다.
어린 아가씨가 있었다네.
메이라고 이름도 예뻤지.
건초더미에서 뛰놀던 그 시절.......
가윈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요.......아하! 있습니다! 전에 로이스 각하가 읊어 준 것이 있어요. 어떤 거냐 하면, 어린 아가씨가 있었다네........"
"가윈!"
미처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생각도 하기 전에 로이스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제니퍼의 얼굴이 꽁꽁 얼어 버렸다. 로이스가 이번에는 훨씬 더 부드럽게 말했다.
"그건 마님이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시가 아니야."
"그럼 어떡해야 되죠?"
자신의 우상이 뭔가 좀 더 남성다운 방법을 알려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서 가윈은 로이스에게 계속 물었다.
"처음으로 여자를 감동시키고 싶었을 때 각하께서는 어떻게 하셨죠? 아니면 이미 기사가 되고 나서 결투장에서 용기를 보여 주신 건가요?"
몰래 제니퍼를 살필 희망이 사라지고 말았다. 로이스는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와 사람들 틈에 끼었다. 난로의 굴뚝에 어깨를 기대고 보니 제니퍼 옆자리였다.
"아직 기사가 아니었을 때였어."
하인이 건네주는 맥주잔을 받아 들며 로이스가 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제니퍼는 즐거운 표정이 스테판에게서 로이스에게로 옮아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가윈이 더 자세히 묻는 것이 고마웠다.
"얼마나 어렸을 때요?"
"음, 여덟 살이었을 거야."
"그러니까, 음........스테판하고 고드프리하고 같이 시합을 벌였지. 그때 내가 자랑하던 기술이 있었거든. 그걸로 그 여자애를 혹하게 만들려고 했지."
"무슨 시합이었수?"
이번에는 엘리너 부인이 안달을 하며 이야기를 재촉했다.
"침 뱉기 시합이오."
로이스가 간략하게 대꾸했다. 지금 그의 눈길은 제니퍼의 옆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어릴 적 철부지 짓에 과연 그녀가 웃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래, 이겼습니까?"
유스테이스 경이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그야 말할 필요도 없지. 그때 잉글랜드에서 나보다 더 멀리 침을 뱉을 수 있는 아이는 없었을 거야. 게다가 사전에 스테판하고 고드프리한테 뇌물을 써서 꼬드겨 놓았거든."
"이젠 그만 물러가야 겠어요."
제니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중하게 입을 뗐다.
그 순간 로이스는 모두 있는 자리에서 그 소식을 알려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이왕 그 이야기가 나온 참이니 제니퍼에게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는 제니퍼의 절제된 행동에 어울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니퍼, 올해의 마상 시합은 토너먼트 식으로 열리게 될 거야. 두 나라 사이의 새 평화 협정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두 왕이 스코틀랜드 사람도 초청하기로 결정했어."
두 기사의 솜씨 자랑인 마상 창 시합과는 달리, 토너먼트는 전쟁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참가자가 양편으로 나뉘어 들판 반대쪽에 서 있다가 한꺼번에 달려 나와 겨루는 경기였다. 무기의 종류와 크기에 제한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진짜 무기를 들고 하는 시합이라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4백 년 전부터 역대 교황들이 그 경기를 금지시키고자 애를 써 와서 그 경기는 두 세기 동안 금지되고 있었다.
"오늘 헨리 왕한테서 다시 한번 확인 전갈이 왔어."
제니퍼의 얼굴은 여전히 정중하지만 무관심했다. 로이스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 결정은 협정을 맺으면서 기사들 사이에서 내려진 거였지."
그러나 역시 아무 변화가 없었다.
"나도 참가할 거야."
지금 로이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안 모양이었다. 그녀는 한껏 경멸스런 눈길을 던지고는 등을 돌려 홀을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로이스의 얼굴에 낭패감이 가득했다. 그는 후다닥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녀가 막 자기 침실의 문을 열려는 순간 로이스는 그녀 앞에 섰다.
로이스는 문을 열어 그녀가 들어가게 한 다음 자신도 따라 들어가 문을 닫았다. 기사들이 있는 곳에서는 침묵을 지킨 제니퍼였지만, 지금 두 사람만 있는 자리에서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윌리엄이 죽던 날보다 훨씬 더 지독한 회환이 배어 있었다.
"그럼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오는 기사들도 이 축제에 참가하겠군요?"
"그래."
"그리고 단순한 시합이 아니라 토너먼트라고요? 당신이 참가해야만 할 이유가 있군요."
"명령이라서 참가하는 거야!"
제니퍼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졌다. 대신 절망감만 남으면서 창백하게 변해 갔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한테는 오빠가 또 있어요. 물론 윌리엄만큼은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오빠예요. 하지만 당신한테 죽기 전에 오빠가 당신을 약간 운동을 시키겠군요. 당신 몸집하고 어울리는 편이니까요."
제니퍼의 뺨이 덜덜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물은 밖으로 흘러 나오지 않고 그대로 맺혀 있을 뿐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있죠. 당신보다 나이야 한참 많지만 그래도 기사로 세월을 보내신 분이에요. 그분이 죽으면 당신이 얼마나 기쁠까요? 다 당신 마음대로 되겠지만 내 여동생만은 어쩌지 못할 거라는 점을 깨닫기를 바라요."
그를 마음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려는 말투가 역력했다.
"이제 나한테는 그 애만 남겠군요."
제니퍼가 지금 자신을 감동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면서도 로이스는 저절로 뻗어지는 팔을 어쩔 수가 없었다. 로이스의 품에 안긴 그녀의 몸이 뻣뻣했다. 그러나 저항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가슴에 품었다. 비단결 같은 그녀의 풍성한 머리가 그의 손 안 가득히 잡혀 왔다. 그의 목이 메이고 있었다.
"제니, 제발, 제발 이러지 말아! 자학하지 말고 그냥 울어버려. 나한테 뭐라고 해도 좋아. 하지만 날 살인자처럼 보지는 말아."
로이스는 그때 깨달았다.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순간이 언제였는지 로이스의 마음에 분명히 떠오르고 있었다. 기사 견습생 같은 옷을 입은 천사가 나타나 파란 눈을 반짝이며 부드럽게 말을 던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서 하는 말들, 당신이 했다고 하는 일들,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나는 믿지 않아요."
지금 제니퍼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믿고 있다. 그리고 그럴 이유도 충분했다.
그 사실을 깨닫는 로이스의 가슴이 아파 왔다. 전장에서 입었던 그 숱한 상처보다도 더욱 아프게 그의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울어, 그럼 기분이 좋아질 거야."
그녀의 반짝이는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속삭이고는 있지만 로이스는 자신의 말이 별의미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가 헤쳐 온 그 숱한 역경들, 눈물을 참아야 했던 그 오랜 세월들. 어떤 것도 그녀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들 수 없으리라.
제니퍼는 죽은 친구, 베키 이야기를 할 때도 울지 않았다. 윌리엄의 죽음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그녀였다. 열네살의 나이에 결투장에서 오빠에게 덤빌 정도로 당찬 용기를 지닌 그녀가 증오하는 남편 때문에 눈물을 흘릴 리가 없었다. 친구나 오빠를 위해서도 울지 않은 그녀였다.
로이스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믿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분명히 약속하지. 그 시합에서 당신 가족이나 친척, 어느 누구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하겠어. 맹세해."
"날 가게 해 줘요."
제피너의 목 메인 소리였다. 그러나 로이스는 그녀를 놓아줄 수 없었다. 그는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제니........."
제니퍼는 그의 입술에서 자신의 이름이 정겹게 흘러나오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이율배반.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어 버렸으면.
"다시는 날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로이스가 길고도 고통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면 도움이 될까?"
"당신이 돕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군데요?"
제니퍼가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더 이상 분노는 없었다.
로이스의 팔이 축 늘어졌다.
"그래, 당신이 옳아."
이틀 수, 제니퍼는 그레고리 수사와 이야기한 후 예배당에서 나왔다. 그레고리 수사는 정식으로 부임하는 신부가 올 때까지 클레이모어에 남아 있기로 하고 교회 일을 보는 중이었다. 로이스의 기사들이 여느 아침처럼 훈련을 하고 있었다. 말을 타고 구덩이와 모래주머니 더미를 뛰어넘는 훈련과, 고삐를 잡지 않고 안장에 뛰어오르는 훈련이 주였다. 그리고 과녁 맞추기도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과녁은 말뚝 위에 긴 막대기를 올려 놓은 것인데, 조금만 건드려도 빙글 돌게 되어 있었다. 막대기 한쪽 끝에는 기사처럼 방패를 든 인형이 서 있고, 반대쪽에는 무거운 모래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기사들이 줄을 지어 안뜰 저쪽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와 그 인형 기사를 창으로 찌르는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매번 다른 각도에서 말을 달렸다. 만약 그 인형 기사의 가슴을 정확히 맞추지 못하면 반대편에 달려 있던 모래주머니에 맞아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모래 머니는 목표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기사들이 이따금 각도와 과녁 앞의 장애물에 따라 실수를 하곤 했다. 모래주머니에 맞아 안 떨어지는 기사가 없었다. 그런데 로이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로이스는 과녁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는 주로 제우스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지금도 그는 제우스와 함께 있었다. 제니퍼는 곁눈으로 안뜰 저쪽에 있는 그를 훔쳐보았다. 웃통을 벗어 제친 그의 우람한 어깨가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제우스를 높이 뛰어오르게 한 후 여덟 팔 자를 그리도록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제니퍼는 전에만 해도 이런 일상적인 훈련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시합 날짜가 다가오고 있는 지금, 전에는 그저 훈련에 불과했던 것이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 있는 치명적인 기술로 보였다. 로이스의 부하들은 지금 그 기술을 완벽하게 몸에 익히기 위해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남편의 모습을 훔쳐보느라 정신을 뺀 나머지 고드프리 경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말았다. 제니퍼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리며 고드프리 경이 말을 건넸다.
"제우스가 제 아비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1년 정도 훈련을 시키면 겨우 흉내나 낼까."
제니퍼는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말을 받을 수 있었다.
"내, 내가 보기에는 아주 훌륭한데요."
"아, 그야 그렇죠. 하지만 로이스의 무릎 좀 보세요. 제우스한테 방향을 알리려고 얼마나 힘들게 무릎을 쓰는지 보이죠? 토르는 힘 하나 안 들여도 다 알아들었는데. 어느 정도냐 하면, 이 정도만 건드려도 됐어요........"
고드프리 경이 엄지손가락으로 제니퍼의 팔을 정말 톡 건드렸다. 그녀는 자기가 주인 거나 다름없는 그 말을 생각하자니 괜히 죄스러웠다. 고드프리의 다음 말에는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로이스가 시합장에서도 저 놈을 탈텐데, 만약 시합장이 아니라 전쟁터였다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방금 말에서 내린 유스테이스 경과 가윈이 다가왔다. 고드프리 경의 말을 들은 가윈이 잽싸게 로이스의 역성을 들고 나섰다.
"마님, 걱정하지 마세요. 로이스 각하는 이 세상 최고의 전사입니다. 시합장에서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부하들이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아챈 로이스가 제우스를 한 번 더 회전시킨 후 천천히 다가왔다. 제니퍼의 모습은 고드프리 경과 가윈에게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로이스는 바로 앞에 올 때까지 그녀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런데 가윈이 갑자기 소리를 냅다 질렀다.
"마님께 과녁 맞추는 솜씨를 보여 주세요!"
"글쎄........"
로이스는 아내의 정중하지만 무관심한 얼굴에 어떻게 하겠느냐는 눈길을 던지면서 말을 이었다.
"마님은 우리가 훈련하는 모습을 이미 실컷 보았을 것 같은데?"
"그야 그렇지만 당신이 놓치는 모습은 보지 못했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그게 어떻게 되는 건지 한번 보여 주십시오."
고드프리 경이 싱긋 의미 있는 웃음을 날리며 가윈의 청을 뒷받침하자, 로이스가 내키지 않는 고갯짓을 하고는 제우스를 제자리에서 홱 돌렸다. 그리고 출발선을 향해 달려갔다.
"일부러 못 맞힌단 말인가요?"
제니퍼는 못 맞힌 기사들이 모래주머니에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볼 때마다 마치 자기가 맞는 것처럼 아팠던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보세요, 저렇게 할 수 있는 기사는 세상에 없을......"
바로 그 순간, 로이스의 창이 인형 기사의 방패가 아니라 어깨를 맞히면서 모래주머니가 번개처럼 홱 돌았ㄷ. 그러나 백발백중이던 것이 이번에는 로이스를 맞추지 못했다. 로이스가 재빨리 몸을 굽히면서 말의 갈기 쪽으로 바싹 붙은 것이다.
제니퍼는 너무나 놀라우면서 감탄스러워 한순간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처음에는 유스테이스 경을, 이어 고드프리 경을 쳐다보았다. 설명을 해 달라는 무언의 요구였다. 그러자 가윈이 눈치를 채고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저게 바로 로이스 각하의 반사 신경입니다. 근육이 발달했기 때문에 눈 깜짝할 새에 반응을 할 수 있는 거죠."
제니퍼의 머릿속에서 로이스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녀의 생애에서 최고로 행복했던 그 순간들이 환영처럼 지나갔다.
"전사들이 창을 피하려고 몸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댄스 스텝에 대해 알게 될 거야."
"각하는 단검이나 칼보다 더 빠릅니다."
가윈은 손가락까지 퉁겨 가며 강조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제니퍼의 기억이 윌리엄의 가슴에 꽂혀 있던 단검으로 옮아갔다. 다른 모든 달콤씁쓸한 기억을 다 지워 버리면서.
"멋진 속임수로군요."
아무 감정도 실리리 않은 그녀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싸움에서는 별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갑옷을 입고 말 옆에 붙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가윈이 신나게 소리쳤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이 수그러졌다. 제니퍼가 저쪽으로 가기 시작한 것이다.
"가윈, 넌 정말 몰라도 어떻게 그렇게 모르냐! 가서 입 닥치고 갑옷이나 닦아!"
고드프리 경이 소리를 꽥 질렀다. 그는 진저리난다는 표정으로 유스테이스 경을 쳐다보며 덧붙였다.
"아니, 가윈 저놈은 전쟁터에서는 그렇게 똑똑하면서도 다른 일에는 어떻게 저리 멍청할까?"
24. 고통스런 선택
"마님,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요?"
성벽 위의 보도를 거니는 제니퍼 옆에서 아그네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제니퍼는 지난 주 내내 아그네스가 너무나 힘들게 일한 것 같아 바깥바람을 쐬라며 그녀를 억지로 데리고 나온 참이었다.
조그만 시골의 마상 창 시합에 불과했던 것이 헨리 왕에게서 검은 늑대의 참가 명령이 떨어지자 엄청난 규모의 행사로 변해 가히 볼 만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제니퍼는 고개를 들어 멀리 계곡 쪽을 쳐다보았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심지어 프랑스에서까지 몰려 온 귀족이 수천 명을 헤아리고, 도착할 때마다 각기 편할 대로 세운 온갖 색깔의 천막과 임시 가설물들이 계곡과 그 주변의 야트막한 구릉을 새로 뒤덮고 있었다. 제니퍼의 눈에는 그 광경이 각종 무늬와 깃발로 장식된 색의 바다 같았다.
아그네스의 질문에 뭐라고든 대답해야 할 것 같아서 제니퍼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한 6, 7천은 되는 것 같은데? 더 많을지도 모르고."
제니퍼는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헨리가 자랑하는 전설적인 인물, 검은 늑대와 한번 겨루어 보겠다는 일면에서 온 게 분명했다.
"저기 봐, 또 사람들이 오고 있어."
제니퍼가 동쪽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말을 탄 사람과 시종들이 비탈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백 명 남짓한 그룹들이 근 일주일 동안 속속 도착했다. 이제는 제니퍼도 잉글랜드의 귀족들이 어떻게 행차하는지 그 관습에 익숙해져 있었다. 처음에는 몇 명의 작은 일행이 선발대로 오고 개중에 나팔수가 있어서 자신의 고명하신 주인이 도착한다는 것을 알리는 나팔을 불어댄다. 이 첫 번째 일행의 임무는 성에 들어와서 주인이 곧 도착한다는 것을 알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객관의 넓은 방에서부터 제일 구석진 다락방까지 귀족들로 들어찬 지 오래라 그래 봐야 대우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귀족만 방에 들뿐 수행원과 시종들은 전부 성 밖으로 나가야만 했고, 천막으로 임시 가설물을 세워 그 안에서 지내고 있었다.
하여튼 그 나팔수를 포함한 일행들이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앟아 규모가 더 큰 일행이 도착한다. 호사습게 치장한 말을 탄 영주와 부인, 그리고 수행원 일행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시종과 마차의 일행이 도착한다. 마차에는 천막을 비롯해서 식탁보며, 접시, 보석, 단지, 팬, 침대, 심지어는 태피스트리까지, 귀족들의 생활에 필요한 가재도구 일체가 실려 있다.
지난 나흘 동안 제니퍼는 그런 광경을 숱하게 보았다. 일이라고는 자기 소유의 성을 돌아다니는 것밖에 없어 그런 여행에는 익숙해진 귀족들이, 일생일대의 구경거리가 있는데 이 정도 여행하는 것을 마다할 리 없었다.
"이런 광경은 정말 처음 봐요. 마을 사람들 전부 다요."
"사람들이 내가 명령한 대로 하고 있겠지?"
"그럼요, 마님. 저희는 언제나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거예요. 일주일 만에 벌써 평생 벌어도 갖지 못할 돈을 모았는걸요. 전에 시합에 참가하러 왔을 때는 우리를 잘도 속이더니만 올해는 아무도 감히 속이려 들지 않아요."
제니퍼는 미소를 지으며 목덜미 근처에서 찰랑거리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 시월의 산들바람이 시원했다. 처음에 열두 가족이 계곡에 천막을 세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요구에 따라 가축을 내 줄 수밖에 없었다. 가축을 빼앗기고 상심한 마을 사람 앞에 던져진 것은 보잘것없는 액수의 동전 몇 닢뿐이었다.
제니퍼는 마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계곡의 오두막이며 가축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늑대가 그려진 배지가 붙어 있다. 제니퍼가 경비병과 기사의 옷, 그리고 갑옷 등 그것이 붙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찾아가 빌려 온 것들이었다. 그 배지가 붙어 있는 것은 검은 늑대의 소유물이거나 검은 늑대의 보호 하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제니퍼는 마을 사람과 하인들을 안뜰에 모아 놓고 그 배지를 나누어 주며 설명했다.
"내 남편은 자기 사람들이 어떤 사람한테서든 그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걸 용납하지 않을 거예요. 원한다면 팔아도 좋아요. 하지만 내가 여러분이라면......"
제니퍼는 미소를 지으며 충고를 덧붙였다.
"누구든지 탐낼 만한 물건을 갖고 있을 경우, 맨 처음 나타나서 뭘 주겠다고 하는 사람한테보다는 신경 써서 보고 있다가 제일 많이 내놓겠다고 하는 사람한테 팔 거예요."
이제, 제니퍼가 아그네스의 말에 대꾸했다.
"이번 행사가 끝나고 나면 전에 말했던 대로 새 베틀 기계를 들일 장소를 알아볼 거야. 이번 행사 동안 그걸 살 만큼 돈을 벌 수만 있다면 그 기계를 이용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어. 그리고 또 이 행사가 매년 열린다는 점도 생각해 볼 만한 문제야. 마을에서 가축이며 필요한 물건들을 더 준비해 두었다가 다음 행사 대도 파는 거야. 그러면 훨씬 더 많이 벌 수 있지 않겠어? 내가 공작님하고 관리인들한테 그 문제를 의논해서 도울 방법을 찾아볼게. 사람들이 좋다고만 하면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든지 도울 거야."
아그네스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영주님께서 마님을 이곳에 모시고 온 건 저희들에겐 정말 축복이에요. 우리 모두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이곳에 처음 오셨을 때의 그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 죄송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마님께서 제 말을 귀담아들어 주시고, 또 제가 마님 시중을 들고 있다는 걸 아니까 사람들이 저만 보면 마님이 좋은 분이라고 야단이에요."
"고마워."
제니퍼는 아그네스의 수다에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아그네스, 너한테는 얘기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사실 말이지, 마상 시합을 이용해 이윤을 보고 베틀 기계를 사고 하는 건 다 스코틀랜드 사람 머리에서 나온 거야. 너도 알겠지만 우리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검소하거든."
"마님은 이제 잉글랜드 사람이에요. 죄송해요, 건방지게 이런 말씀을 드려서. 하지만 우리 주인님하고 결혼하셨으니 마님은 이제 우리 사람이에요."
"나는 스코틀랜드 사람이야. 그 사실은 변할 수 없어."
제니퍼의 조용한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나도 그걸 원치 않고."
그러자 아그네스가 초조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야 그렇겠죠. 하지만 내일 시합장에서는 마님께서 우리편에 앉기를 빌고 있어요. 성 안에 사는 사람이건 바깥에 사는 사람이건 다들 한마음이에요."
제니퍼는 성 안의 모든 하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날인 내일, 시합을 구경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흥분으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것이 요즈음의 성 안 분위기였다.
지금 아그네스는 제니퍼가 어디에 앉을 건지를 묻고 있었다. 이때 그녀를 호위할 기사들이 안뜰에 나타나 그녀는 그 무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피할 수 있었다.
계곡의 북쪽 언덕에 있는 메릭 가문의 임시 가설물에 가고 싶다는 제니퍼의 말에 로이스는 순순히 동의했다. 물론 로이스가 반대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호위대"를 대동하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로이스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호위대"는 그의 개인 경호대 열다섯 명 전부였다. 애릭, 스테판, 고드프리, 유스테이스, 그리고 라이오넬 등 모두가 무장을 단단히 갖추고 말에 올라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천막이며 임시 가설물들의 화려한 색상이 성벽 위에서 볼 때보다 더욱 울긋불긋하고 생생했다. 공터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연습이 한창이었다. 기사가 머무르는 천막 앞마다 그 기사의 깃발과 창이 땅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어디에나 형용 색색의 색깔들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빨강, 노랑, 파랑색의 넓은 때 무늬가 그려진 천막들. 문장과 방패, 배지들에는 빨간 매, 혹은 찬란한 황금빛 사자, 혹은 녹색의 막대기 무늬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어떤 것들은 온통 무늬로 뒤덮여 있어 제니퍼는 웃음을 금할 수 없었다.
제니퍼는 휘장이 올려진 좀 더 커다란 천막의 안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안쪽에는 어마어마한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고, 하얀 식탁보가 씌워진 식탁 앞에서 기사와 그 가족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은 은쟁반에 담긴 점심을 들면서 보석이 박힌 잔으로 물을 마셨다. 비단 쿠션 위에 앉아 있는 가족도 있고, 클레이모어 홀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최고급 의자에 앉아 있는 가족도 있었다.
이따금 로이스의 기사들의 친구들이 뭐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렇다고 호위대가 멈춘 것은 아니었지만 계곡을 지나 북쪽 경사면에 닿기까지 한 시가은 족히 걸렸다. 계곡을 온통 잉글랜드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자, 증오의 대상인 잉글랜드 사람들과 같이 있기 싫어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북쪽 경사면에 자리를 잡았다. 서쪽 경사면은 프랑스 사람들의 영역이고. 그녀의 집안사람들은 클레이모어에 제일 마지막으로 도착했기 때문에 북쪽 경사면의 후미진 곳에 천막을 쳤다. 아니면 그녀의 아버지가 클레이모어 성이 서 있는 자리와 맞먹는 높이에 천막을 치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는 한가한 생각이 제니퍼의 머리를 스쳤다.
제니퍼는 "적들의 진지" 속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자니 감개가 무량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수세기 동안 쌓아 온 적대감을 잠시 젖혀 두고, 마상 시합에 참가하는 기사에게 안전한 통행과 숙박을 보장하던 전래의 관습에 다라 모든 파벌들이 평화롭게 동거하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스테판이 입을 열었다.
"세 나라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 모여 있으며너 싸우지 않는 건 정말 수십 년 만에 처음일 겁니다."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제니퍼는 그가 말을 붙이자 깜짝 놀랐다. 요즈음, 스테판은 겉으로는 정중하게 행동하고 있지만 그녀가 자기 형을 멀리하고 나서는 그녀를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제니퍼를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여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스테판을 볼 때마다 로이스를 보는 것 같아 괴롭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않다면 고드프리 경이나 유스테이스 경, 라이오넬 경과 맺은 정도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노력했을 터였다. 지금 그 세 사람은 그녀와 로이스 사이에 벌어진 간격 때문에 조심스레 운신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행동을 볼 때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또 로이스와 그녀의 불화가 비극적이긴 하지만 치유될 수 없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해다. 그러나 스테판은 지금 로이스가 그 불화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오늘 스테판이 유달리 부드럽게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제 그녀의 아버지가 도착한다는 전갈이 왔을 때, 그 안에 스테판에게 보내는 브렌나의 편지가 있었던 것이다. 제니퍼는 그 편지를 고스란히 스테판에게 전달해 주었다.
제니퍼는 아버지에게 오늘 방문하겠노라는 답신을 보냈다. 그녀는 수녀원에 보내려고 했던 아버지의 계획에 그렇게 감정적이고 온당치 못한 반응을 보인 데 대해서 설명하고 용서를 빌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윌리엄의 죽음에서 자신이 행한 역할에 대해서 용서를 빌고 싶었다. 로이스에게 윌리엄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한 것은 바로 그녀였다. 그리고 그때 윌리엄이 당황하고 로이스가 분노한 것도, 수녀원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녀가 보인 격렬한 반응 때문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아버지나 집안사람들이 그녀를 용서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설명하고 싶었다. 어떤 대접을 받을지는 뻔했다. 그런데, 그녀가 메릭 가문의 천막들 앞에 섰을 때 생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스테판이 말에서 내려 미처 그녀를 내려 주기도 전에 그녀의 아버지가 몸소 앞으로 나와 그녀를 내려 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천막 안에서 우르르 몰려 나왔다. 개릭 카마이클과 홀리스 퍼거슨이 그녀를 껴안고 등을 두드렸다. 말콤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주기까지 했다.
"제니퍼 언니."
드디어 브레나의 차례였다.
"얼마나 보고 싶었다구."
"나도 보고 싶었어."
상종 못할 천민 대하듯 할 거라고 생각했던 제니퍼는 예상치 못한 환대에 목이 메었다.
"자, 이리 들어오너라."
제니퍼의 아버지가 그녀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너무나 놀랄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녀원에 가지 않고 남편과 같이 있겠다고 한 그녀의 의도를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아버지의 말이 제니퍼의 귀를 울렸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기분이 좋아지기보다 더욱 죄의식을 느껴야 했다.
"이건 윌리엄 거란다. 그 애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다들 알지. 제니퍼, 윌리엄은 이것을 네가 갖고 있기를 바랄 거다. 내일 시합장에서 네가 이걸 차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 애가 얼마나 기뻐할까."
윌리엄의 단도를 받아 든 제니퍼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네.......그러고 말고요."
이어 윌리엄을 성지가 아닌 평범한 묘지에 묻었으며, 미래의 메릭 영주가 채 피지도 못하고 가 사람들이 얼마나 애석해 했는지 설명하는 아버지의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의 말이 끝나갈 무렵, 제니퍼는 윌리엄이 눈앞에서 죽어 가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너무나도 생생한 장면이었다.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아버지가 천막 한쪽 구석에 있는 트렁크를 가리켰다.
"얘야, 저건 네 엄마의 물건이란다."
아버지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베키의 아버지와 말콤이 트렁크를 바깥으로 옮겼다.
"네가 저것들을 가지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단다. 네 오빠를 죽인 자와 같이 살아야 하니 네 심정이 오죽하겠느냐. 저걸 보면서 마으을 달래려무나. 그리고 네가 녹번의 여백작임을 한시도 잊지 말고."
이제 떠나야 할 순간이었다.
"내가 네 깃발을 가져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 놓았단다. 녹번의 기 말이다. 내일 시합 때 우리 관람석에 꽂아 놓을 게다. 네가 그렇게 하기를 바랄 거라고 생각했지. 우리가 윌리엄을 죽인 놈과 맞서 싸우는 동안 네 머리 위에는 그 깃발이 나부끼고 있을 게다."
제니퍼는 회한과 죄의식에 너무도 괴로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제니퍼는 천막 바깥으로 나왔다. 이제 중천을 지나 지기 시작하는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런데 도착했을 때는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메릭 근처의 마을에서 아버지 쪽 친척이란 친척은 다 모인 것 같았다. 무기 담당관이 말을 던졌다.
"얘야, 보고 싶을 게다."
그러자 전에는 그녀를 좋아하지도 않았던 먼 사촌 하나가 말을 받았다.
"내일 우릴 보면 너도 자랑스러우울 거야.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자부심이 어떤 건지 네가 보여 준 대로 우리도 할 테니까......."
"제임스 왕께서........"
아버지가 큰 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아주 큰 소리였다.
"너에게 특별한 관심을 표명해 달라고 하셨단다. 그리고 네가 조국의 산과 물을 결코 잊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 하셨단다."
"잊다뇨? 제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제니퍼가 목이 메인 목소리로 가냘프게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껴안았다. 길고도 강렬한 포옹이었다. 제니퍼는 그만 정신을 잃고 클레이모어로 돌아가지 앟게 해 달라고 빌 뻔했다. 아버지는 그녀를 말로 데리고 가며 다시 말했다.
"믿고야 있다만 엘리너 숙모가 모두들 잘 돌봐 주고 있겠지?"
"우리를요?"
"음........"
멈칫, 제니퍼의 아버지는 애매모호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하고 같이 있을 때 약초랑 약을 만들지 않니? 네 건강을 위해서 말이다."
제니퍼는 멍하니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코 말콤의 칼을 쳐다보는 그녀의 머릿속에 엘리너 숙모가 약초를 구하러 숲으로 자주 나간다는 사실이 떠오르고 있었다. 막 말에 오르는 순간, 제니퍼는 브렌나의 필사적이고 애원하는 눈길과 부딪혔다. 그 표정에 어젯밤 그녀가 보냈던, 조심스런 편지 글귀가 생각났다.
"아빠........"
제니퍼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섰다. 굳이 숨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저, 브렌나를 저와 같이 가게 해 주실 수 없을까요? 오늘 밤은 클레이모어에서 보내고 내일 같이 나올 게요."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굳는 듯했다. 그러나 곧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후 덧붙였다.
"저 아이 안전을 책임질 수 있겠지?"
제니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 후 브렌나와 제니퍼가 호위대와 함께 떠났고, 메릭 백작은 천막 앞에서 말콤과 함께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서있었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제니퍼의 등에 가 꽂히는 말콤의 눈길에 냉담함과 경멸감이 가득했다. 메릭 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저 애는 자기 의무가 무엇인지 알게 됏어. 그 살인마한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다 해도 의무감이 앞설 게다. 내일 틀림없이 잉글랜드 것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 관람석에 앉을 게야."
그러나 말콤은 이복 여동생에 대한 경멸감을 숨기려 하지 않고 빈정거렸다.
"하지만 우리가 그놈을 죽이는데도 기뻐하고 있을까요? 글쎄요, 그럴 것 같지가 않습니다. 전번에 클레이모어에 갔을 때 그놈한테 매달리는 꼴을 보셨잖습니까? 수녀원에 보내 달라고 애원해 놓고는 이제 와서는 그놈한테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메릭 경이 몸을 홱 돌렸다. 그의 눈이 차가운 얼음처럼 냉기를 내뿜고 있었다.
"내 피가 저애 몸속에 흐르고 있다. 저애는 나를 사랑해. 내 뜻에 따르게 되어 있다. 저애는 깨닫지 못하고 있겠지만 이미 그렇게 했어."
횃불이 활활 타오르면서 안뜰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안뜰은 손님과 하인들로 인산인해였다. 미소와 경탄이 가득한 모두의 눈길이 고드프리 경의 기사 견습생에게 쏠려 있었다. 6백 명의 손님과 3백 명의 하인들을 위해 의식의 이 부분은 예배당에서 하지 않고 안뜰에서 하기로 했었다.
제니퍼는 앞 줄 근처에 조용히 서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의식과 그 장관에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슬픔도 잠시 잊었는지 이따금 엷은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피어오르곤 했다. 바드릭이라고 하는 근육질의 젊은이가 로이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긴 흰색 겉옷과 빨간색 망토, 그리고 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상징적이었다. 스물네 시간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예배당 안에서 기도와 명상으로 밤을 세운 바드릭은 그레고리 수사에게 고해성사를 한 다음 미사를 올리고 나서 성찬까지 마쳤다. 그리고 이제 기사 작위를 부여 받기 위해 의식을 올리는 중이었다.
손님으로 와 있던 다른 기사들과 귀부인들이 바드릭의 새 갑옷을 한 가지씩 가지고 나왔다. 그들은 바드릭의 "무장" 의식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한 번에 한 가지씩 로이스의 발아래, 바드릭의 옆에 갑옷을 내려놓앗다. 갑옷이 모두 놓였을 때 로이스가 제니퍼를 건너다보았다. 지금 제니퍼는 기사 작위의 절대적인 상징물인 황금 박차를 들고 있었다. 황금 박차는 기사가 아닌 사람은 찰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차고 있다는 것은 곧 그가 기사임을 의미했다.
제니퍼는 녹색 벨벳 가운의 치맛단을 들어올리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로이스의 발아래 풀밭에 황금 박차를 내려놓는 그녀의 눈에 로이스의 가죽 부츠가 들어왔다. 문득, 보스워드의 전쟁터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을 때도 그가 저렇게 멋있는 황금 박차를 차고 있었을까 하는 무심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 고드프리 경의 차례였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이야말로 장비 가운데 가장 중요하면서 가장 최종적인 것이었다. 검이 바드릭 옆에 놓이자 로이스가 몸을 숙이고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바드릭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제니퍼는 똑똑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바드릭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로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 그 대답에 만족한 모양이었다. 이어 전례대로 로이스가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그러나 그 전례에 제니퍼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로이스가 손을 들어 크게 휘두르더니 바드릭의 얼굴을 때린 것이다. 철썩 하는 소리가 요란햇다.
그 뒤를 이어 그레고리 수사가 재빨리 새 기사에 대한 교회의 축복을 공표했다. 드디어 바드릭 "경" 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순, 분위기가 들뜨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이끌려 나왔다. 바드릭 경은 전통에 따라 고삐를 잡지 않고 말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사람으로 붐비는 안뜰을 최고의 속도로 말을 몰았다. 이어 그가 말 위에서 뿌리는 돈을 주우려는 하인들도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캐서린 멜브룩 부인이 제니퍼에게 다가왔다. 캐서린은 제니퍼보다 약간 나이가 많은 미인이었다. 그때 제니퍼는 음악가들의 뒤를 따라 행진하고 있는 바드릭 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난 한 주는 제니퍼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자신이 잉글랜드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극적인 변화는 그들이 보여 주었던 행동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제니퍼는 반신반의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캐서린 멜브룩만은 예외였다. 제니퍼는 맨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부터 그녀를 믿을 수 있었다. 캐서린은 처음 만나자마자 아주 친근하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하인들 이야기가 당신이 천사나 성인이 환생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이틀 전에 당신 하녀를 때렸다고 시종장을 호되게 나무랐다면서요? 돌팔매질 잘하는 말썽꾸러기도 아주 자애롭게 처리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이 나오자마자 두 사람은 친해졌고, 캐서린은 정기적으로 제니퍼를 찾아왔다. 캐서린은 제니퍼나 엘리너 숙모가 바쁠 때면 하인들을 부리고 일을 정리하는 것도 기꺼이 도와주고 있었다.
제니퍼의 주목을 끈 캐서린이 놀리듯 말했다.
"당신 남편요, 있잖아요, 어머나 지금도 당신을 보고 있네요. 저 눈길을 보고 내 남편이 뭐라고 한 줄 아세요? 글쎄, 낭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양반이 "감미로운 눈길" 이라고 하더라구요."
제니퍼는 자신도 모르게 캐서린이 보고 있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로이스가 멜브룩 경을 포함해서 여러 손님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손님들과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 당신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어요."
캐서린이 킥킥거리며 말을 이었다.
"브론튼 경이 당신 꽁무니를 따라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당신 남편 눈이 다른 데로 가지를 않더라구요. 보통 질투가 난 얼굴이 아니에요. 누가 알았겠어요? 사납기로 세상이 알아주는 검은 늑대가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고양이처럼 순해질지 말이에요."
"내 남편은 고양이가 아니에요."
미처 제어하기도 전에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가 버린 말에 제니퍼 자신도 당황했다. 그러나 그 격한 말투에 캐서린의 얼굴이 수그러졌다.
"미, 미안해요, 제니. 당신 기분이 안 좋은지 알면서도. 다들 이해해요. 이해하고말고요."
제니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로이스에 대한 자신의 은밀한 감정을 공공연하게 알고 있다니. 일주일도 더 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예상치 못한 손님이 왔을 때는 손님 앞에서 두 사람의 불화를 절대 내색하지 않기로 합의한 바 있었다. 제니퍼는 조심스레 물었다.
"다들 이해한다구요? 뭘 이해한다는 말이죠?"
"아, 그거야 당신이 내일 얼마나 어려운 입장에 놓일지 다 안다는 거죠. 자기 남편이 친척들과 싸우는 걸 남편 쪽에 앉아서 응원해야 하는 심정이 어떤 건지 왜 모르겠어요?"
"나는 그럴 생각이 없어요."
제니퍼의 차분하고도 단호한 목소리에 캐서린이 펄쩍 뛰었다.
"제니, 다른 쪽에 앉을 생각은 아니겠죠? 스코틀랜드 쪽에 말이에요."
"나는 스코틀랜드 사람이에요."
그러나 그 말을 내뱉는 제니퍼의 속은 끊어질 듯 쓰라렸다.
"제니, 당신은 이제 웨스트모어랜드 가문 사람이에요. 하느님도 여자는 남편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구요!"
미처 제니퍼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캐서린이 그녀의 어깨르 잡고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제니, 만약 당신이 다들 보는 앞에서 남편의 적 편에 앉았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여기는 잉글랜드고, 당신 남편은, 음, 전설적인 인물이에요. 그런 사람을 웃음거리로 만들겠다니! 이제 다들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랬다가는 모두 다 당신을 경멸할 거예요. 안 그래도 자기 아내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고 당신 남편을 비웃는 판에. 제발, 내가 이렇게 애원해요. 그러면 안 돼요!"
"나, 나는 얼른 가서 남편한테 시간을 알려 줘야 해요."
제니퍼의 당황스런 대답이 이어졌다.
"이렇게 많은 손님이 올 줄 모르고 오늘 밤 클레이모어의 하인들한테 서약을 하라고 했거든요."
제니퍼 뒤에 서 있던 두 하녀가 한 대 맞기라도 한 듯 제니퍼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어 두 하녀는 마부들과 같이 서 있는 대장장이한테로 달려갔다. 한 하녀가 걱정과 불신이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마님이 내일 스코틀랜드 것들하고 같이 앉는대! 우리 반대편에 말이야!"
"헛소리!"
한 젊은 마부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제 제니퍼가 직접 화상을 치료해 주고 붕대를 감아 준 청년이었다.
"그분은 절대 그러지 않아. 우리 편이라구."
"공작 각하, 일전에 말한 걸 잊지는 않고 계시겠죠?"
제니퍼는 멜브룩 경과 이야기하고 있는 로이스 옆에 가서 말을 건넸다. 그러자 로이스가 멜브룩 경의 말을 자르고는 얼른 돌아섰다. 그녀는 로이스의 눈길에 대한 캐서린의 말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그의 눈빛 속에 뭔가가 있기는 있었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
"시합이 있기 전날은 다들 일찍 물러간다고 했잖아요."
제니퍼는 자세와 얼굴을 가다듬었다. 윌리엄의 죽음 이후 로이스를 볼 때면 갖추는 정중한 자세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서약식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왜, 기분이 안 좋아?"
로이스의 가늘어진 눈이 그녀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제니퍼는 거짓말을 했다.
"아뇨, 좀 피곤해서요."
드디어 홀에서 로이스의 하인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충성 서약식이 열렸다. 제니퍼는 한 시간 가까이 캐서린, 브렌나, 스테판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서서 구경했다. 하인들이 한 번에 한 사람씩 로이스 앞으로 나왔다. 하인들은 전래의 관습대로 무릎을 꿇고 로이스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고는 고개를 숙여 충성을 맹세했다. 가신들과 함께 서 있는 귀족의 그림에 나오는 장면 그대로였다. 제니퍼는 메릭에 있을 때 보았던 장면이라 눈에는 익숙했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불필요하게 하인들에게 비굴한 느낌을 주는 일 같았다. 조용하게 구경하고 있는 캐서린 역시 그런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인들 입장에서는 아주 비참한 기분이 들 거예요."
"그런 면도 없진 않아."
그러나 멜브룩 경의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아내와 달리 싫어하는 기색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나도 헨리 왕 앞에서 저렇게 똑같이 했다구. 당신네 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모욕적인 건 아니야."
멜브룩 경이 잠깐 생각을 한 다음 덧붙였다.
"물론, 귀족이 왕 앞에 무릎을 꿇는 것하고는 좀 다르겠지만 말이야."
마지막 하인이 맹세를 끝내자마자 제니퍼는 양해를 구한 후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그네스가 잠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빨간 장미가 수놓인 부드러운 흰 잠옷이었다. 막 허리끈을 매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나더니 로이스가 들어왔다.
"저는 엘리너 부인께 가서 도와드릴 일이 있나 보겠습니다."
아그네스가 로이스에게 재빨리 절을 하고는 방을 빠져 나갔다.
잠옷이 속이 다 비칠 정도로 얇다는 점을 의식한 제니퍼는 얼른 벨벳 가운을 걸쳤다. 전에 두 사람 사이가 좋았을 때면 로이스는 분명 그런 그녀를 놀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얼굴은 완벽하게 무표정했다.
"이야기할 게 있어서."
제니퍼가 허리끈을 매고 나자 로이스가 입을 열었다.
"먼저, 당신이 마을 사람들한테 나눠 준 배지 말인데........"
"그 일에 대해서 화를 낸다면 뭐라고 할 말이 없어요. 당신이나 앨버트 경하고 먼저 상의를 했어야 하다는 걸 알아요. 당신 이름으로 나눠 주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그때 당신은 시간이 없었고, 그리고 앨버트 경하고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요."
"제니퍼, 내가 화를 내다니, 말도 안 돼. 안 그래도 이번 시합이 끝나면 프리스험을 해고할 생각이야.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 당신이 현명하게 처리해 준 데 대해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온 거야. 무엇보다, 당신이 나에 대한 증오심을 하인들한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너무도 고마워."
증오심이라는 말이 로이스의 입에서 나오자 제니퍼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로이스의 부드러운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 당신 행동은 정반대지."
로이스는 아그네스가 나간 문을 힐끔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내 앞을 지나가면서 성호를 긋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당신 하녀도 안 그러고 말이지."
로이스가 그걸 언제 알았을까? 제니퍼는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로이스는 머뭇머뭇하다가 자괴하듯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 아버지, 오빠, 그리고 메릭 사람 셋이 내일 시합에 도전해 왔어."
캐서린이 말하던 로이스의 그 관능적인 느낌에 제니퍼는 자신도 모르게 전염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진 다음 말에 그 느낌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승락했고."
"당연하죠."
제니퍼는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자 로이스가 굳은 목소리로 받았다.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만약 당신네 가족이 도전하면 피하지 말라는 왕의 특별 명령을 받고 있어."
"아주 바쁜 하루가 되겠군요."
제니퍼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에서 최고의 기사를 뽑아서 로이스와 맞붙인다는 건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거기다 또 메릭 가문에서 다섯 사람이......
"도대체 몇 번을 싸우기로 했죠?"
"본 경기 말고 열한 번."
"열한 번!"
로이스의 말을 되풀이하는 제니퍼의 차가운 목소리에 당혹감과 고통이 잔뜩 배어 있었다.
"보통은 세 번 하잖아요? 하긴 당신이야 자기가 얼마나 용감하고 힘이 센지 자랑하려면 보통 사람 네 배는 싸워야겠지요."
로이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특별히 도전을 받아들이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만 승락한 거야. 2백 명도 더 넘게 도전해 왔지만."
제니퍼의 입술에 자조적인 미소가 흘렀다. 그러나 그녀는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쳐다보고 있자니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로이스가 몸을 돌리는 순간, 장롱 위에 놓여 있는 윌리엄의 칼이 제니퍼의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죽은 오빠의 행동을 변호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윌리엄 오빠가 칼을 쓰려고 단도를 뽑은 건 아니었어요. 당신하고 단둘이 홀에 남게 되니까 자기 안전을 위해서 그랬던 거지. 아님, 내 안전이 걱정됐을지도 모르고요. 그때 당신이 나한테 화가 나 있었던 건 분명하니까요. 하지만 오빠는 당신을 공격할 마음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것도 등 뒤에서는 말이죠."
제니퍼의 말은 비난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생각한 결론을 말한 것일 뿐이었다. 로이스는 몸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대꾸했다. 그러나 제니퍼는 그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는 것으로 보아 지금 그가 고통을 삭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를 꺼낸 것이 차라리 후련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날 밤, 나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어. 눈가에 언뜻 등 뒤에서 단도가 번뜩이는 걸 보고는 본능적으로 행동한 거야. 반사작용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미안해, 제니퍼."
그가 결혼한 이 여인은 그의 말과 그의 사랑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도 그의 사과는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빠가 비겁한 살인자였다고 믿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점이 고맙군요. 앞으로는 좀 더 쉽게......나하고 당신이........."
제니퍼의 목소리가 끝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과연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만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때 두 사람이 공유했고, 그리고 지금은 잃어버린 것이었다.
"우리가 서로를 정중하게 대할 수 있겠군요."
그녀는 겨우 말을 맺을 수 있었다. 그러자 로이스가 힘든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중하게 대한다? 그게 당신이 바라는 건가?"
무수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제니퍼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눈길에 실린 것은 분명 고통이었다. 자신의 것보다 훨씬 더 무겁게 느껴지는 고통이었다. 제니퍼는 그 무게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든 입을 열어야 했다.
"그거면 돼요."
로이스의 목 아래 부분이 꿈틀 움직였다. 뭔가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로이스의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순간, 제니퍼는 침대의 기둥을 부여잡았다. 드디어 두 눈에 맺힌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깨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참고 참아 왔던 울음이 흐느낌으로 변해 마구 터져 나오고 있었다.
가슴을 찢고 터져 나오는 오열에 그녀는 기둥을 껴안았다. 그러나 무릎이 그녀의 몸뚱이를 지탱해 주지 못하고 있었다.
25. 그대 앞에 무릎을 꿇고
거대한 시합장의 사면을 관람석이 에워싸고 있었다. 차양이 드리워진 관람석에는 의자들이 계단식으로 놓여 있고, 그 의자 위에 보석을 치렁치렁 매단 귀부인과 신사들이 앉아 있었다. 제니퍼와 브렌나, 엘리너 숙모, 그리고 애릭이 도착할 무렵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시합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각 관람석 꼭대기에는 관람석을 차지한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이 휘날렸다. 제니퍼는 자신의 깃발이 어디 있나 둘러보았다. 캐서린이 말한 대로였다. 그녀의 집안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잉글랜드 사람들과 마주보는 곳에 있었다. 잉글랜드 사람들에 대한 반감을 전혀 숨기지 않은 모습이었다.
"얘야, 저기 네 문장이 있구나."
엘리너 숙모가 가리키는 곳은 시합장 건너편 관람석이었다.
"네 아버지 깃발 옆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순간, 애릭이 입을 열었다. 세 여인은 그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목소리에 놀라 기절할 뻔했다.
"저기 앉으시오."
애릭이 가리키는 곳은 클레이모어 가문의 문장이 휘날리는 관람석이었다.
제니퍼는 로이스가 그렇게 명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릭, 나는 내 깃발 아래에 앉을 거예요. 당신하고 말씨름 하는 덕분에 우리 관람석에 자리가 비어 있잖아요? 클레이모어의 관람석은 사람이 다 찼구요."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클렝이모어의 관람석 중에서도 가운데 왕좌 같은 의자가 비어 있었다. 그 자리가 제니퍼 자신을 위한 것임을 그녀도 알 수 있었다. 그 자리 앞을 지나는 순간 제니퍼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 아픔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클레이모어 관람석에 앉아 있던 6백 명의 손님과 저 멀리서 구경하고 있던 하인들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이어 실망하는 표정으로 바뀌었고, 경멸감을 숨기지 않는 이도 많았다.
메릭 가문의 관람석은 맥퍼슨 가문과 더건 가문 사이에 있었다. 제니퍼가 자기네 쪽으로 오는 것을 확인한 스코틀랜드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일었고, 그 환호성은 그녀가 가까이 갈수록 더욱 커졌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더욱 쓰리기만 했다. 그녀는 멍하니 앞만 바라보면서 오로지 윌리엄 생각만 하기로 마음을 다졌다.
제니퍼는 맨 앞줄, 엘리너 숙모와 브렌나 사이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집안사람들, 베키의 아버지를 포함해서 다들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환영하는 소리를 질러댔다. 관람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그녀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전에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지면을 확인하고자 했고,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소개를 했다. 한때 그토록 바랐던 대로 그녀의 집안사람들이 그녀를 받아들여 준 것이다. 오늘, 그녀는 1천 명이 넘는 스코틀랜드 사람들로부터 찬양과 애정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제니퍼가 해야 했던 일은 자신의 남편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배신하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생각할수록 제니퍼는 더욱 괴로웠다. 창자가 뒤틀리고 손에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10분도 채 앉아 있지 않았건만 이제 몇 분만 이대로 더 있다가는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직도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잉글랜드 쪽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의 눈길이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 그 어느 곳에 있는 사람도 다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단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그녀를 가리키는 사람 등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다.
"저길 봐라."
엘리너 숙모가 분노에 찬 눈길을 던지고 있는 잉글랜드 사람들을 향해 고갯짓을 하며 즐겁다는 듯 말을 이었다.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저 눈길들! 내가 기대하던 게 바로 저런 거였단다. 소싯적에는 나도 최신식 옷을 입고 그날 최고의 주인공이 되는 게 꿈이었단다."
제니퍼는 억지로 고개를 세웠다. 색색의 차양과 깃발이 파도치고 있는 시합장을 멍하니 둘러보았다. 베일이 땅바닥까지 끌리는, 뽀족 지붕처럼 생긴 모자가 보였다. 거대한 날개처럼 양쪽 끝이 솟은 모자도 있었다. 휘장이 달린 염소뿔처럼 베일로 심장 모양을 만들어 단 모자도 있었다. 심지어, 두 장의 넓은 베일로 머리에 뿔이 난 것처럼 보이게 만든 모자를 쓴 부인도 있었다. 제니퍼는 아무 생각 없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장면들을 보고 있었다. 엘리너 숙모의 말이 귀에 울리고 있었다.
"얘야, 선택을 한 이상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는 그 선택이 그르다만 이제는 끝까지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지."
제니퍼의 고개가 홱 엘리너 숙모에게로 돌아갔다.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묻지 않아도 말하려고 했다만 네가 있을 자리는 네 남편 옆이라는 게다. 어쨌든 나는 네 옆에 있어야 하니 이렇게 여기 있는 거고. 그리고 브렌나도 네 옆에 있다만 저애가 네 남편의 동생하고 음모를 짜고 있다는 것도 알아요."
브렌나의 머리가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엘리너 숙모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제니퍼는 지금 죄책감과 혼란에 사로잡혀 브렌나의 문제에까지 신경이 가지 않았다.
"숙모는 윌리엄 오빠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세요. 나는 오빠를 사랑했어요."
"오빠도 언니를 사랑했고."
브렌나의 충심이 담긴 목소리에 잠시나마 제니퍼는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어진 브렌나의 말에 머리가 더 어지러워졌다.
"아빠하고 다른 점이 있다면 오빠는 적에 대한 복수심보다 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했다는 거야."
제니퍼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속삭이듯 애원했다.
"제발, 그만해요. 뭐가 옳은지는 나도 알아요.........."
그러나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갑자기 나팔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나팔수들이 탄 말이 들판에 나타났다. 이어 전령이 입장했다. 전령은 주위가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규칙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먼저 세 번의 마상 창 시합이 있을 예정이었다.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여섯 명의 기사가 겨루는 시합이었다.
제니퍼는 숨을 멈추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첫 번째 시합은 이름도 낯선 프랑스 기사와 스코틀랜드 기사가 겨루는 시합이었다. 두 번째 시합이 로이스와 뒤몽이라는 프랑스 기사 사이에 벌어지고, 세 번째 시합도 로이스와 이안 맥퍼슨, 즉 제니퍼의 전 "약혼자"의 아들이 겨루는 시합이었다.
규칙은 외견상 아주 평범했다. 세 점을 먼저 얻은 기사가 이기는 시합인데, 보호구가 깨질 정도로 맞수를 맞힌 기사에게 한 점을 주는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다섯 차례의 격돌이 있어야 한 기사가 세 점을 얻을 터였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위에서 창을 똑바로 겨누어 상대를 정확하게 맞힌다는 것은 이미 묘기의 차원을 넘는 일이었다. 갑옷 표면에는 창이 잘 미끄러지라고 특별히 매끄럽게 기름을 발라 놓은 터였다. 그리고 만약 상대를 말에서 떨어뜨리면 당연히 그 경기를 이기게 되어 있었다.
이어진 두 가지 규칙 선포에 군중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제니퍼는 움찔했다. 마상 창 시합을 프랑스식이 아니라 독일식으로 한다는 것이다. 즉, 나무 창이 아니라 무거운 정규 창을 쓴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창끝에 보호대를 달지 않는다고 했다.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성이 떠나갈 듯 장내를 뒤흔들었고, 그 열광이 가라앉기를 한참 기다린 후에야 마지막 규칙이 선포되었다. 본 경기는 세 차례의 마상 창 시합이 끝난 후에 있을 것이며, 나머지 마상 창 시합은 그 뒤 이틀간 열린다고 전령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경기 뒤에 열리는 마상 창 시합은 참가하는 기사들의 지명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관중들은 다시 환희의 아우성을 질러댔다. 별로 이름도 없는 기사들의 시합을 보면서 기다리지 않아도 먼저 최고의 구경거리를 즐길 수 있다니 그럴 만도 했다.
시합장 바깥에서는 진행관들이 안장을 검사하고 있었다. 말을 얼마나 잘 모는가와 체력이 얼마나 좋은가도 관심사의 하나였기 때문에 가죽 채찍을 쓰지 못하게 검사하는 중이었다. 진행 책임관이 만족한 얼굴로 신호를 보내자 전령들이 시합장을 빠져 나갔고, 이어 군악대가 등장했다. 이제 시합에 참가하는 기사들이 전부 등장하는 퍼레이드가 있을 순서였다.
이어 시합장에서 벌어진 장관에는 제니퍼조차도 마음이 들뜨는 것만 같았다. 여섯 명의 기사가 나란히 선 뒤로 참가한 기사 전부가 대오를 이루어 시합장을 빙 돌기 시작했다. 갑옷을 완벽하게 차려 입은 기사들이나, 그 기사들을 태우고 의기양양하게 힝힝거리는 말들 역시 볼 만했다. 말을 치장한 은제 마구와 종들이 번쩍거리고 색색의 머리 장식도 요란했다. 그리고 기사의 문장을 수놓은 비단과 벨벳 장식이 휘황찬란했다. 거기다 광나게 닦은 갑옷이 번쩍번쩍 햇빛에 빛나면서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태버드(갑옷 위에 걸쳐 있던 옷)와 방패에 새겨진 문장에는 온갖 동물들이 위엄을 자랑하고 있었다. 사자와 호랑이, 매, 그리고 곰에서부터 기발하게 생긴 용과 일각수 등 상서로운 동물은 다 등장하고 있었다. 또 줄무늬와 사각형, 반달, 별로 이루어진 문장도 있었고, 꽃이 들어간 문장도 있었다.
관중들의 끝없는 환호성과 그 밝디밝은 색깔의 잔치에 엘리너 숙모는 너무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엘리너 숙모는 세 마리의 사자와 두 송이 장미, 매 한 마리, 그리고 녹색의 반달이 들어간 태버드를 입은 잉글랜드 기사가 지나가자 그에게 손뼉까지 쳐 주었다.
제니퍼는 매 순간마다 생전 처음 보는 장관에 놀라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이복 오빠는 4백 명쯤의 기사가 지나간 다음에 앞을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첫 번째 마상 창 시합을 벌일 두 기사가 탄 말이 입장할 즈음해서는 관중들이 "검은 늑대! 검은 늑대!" 하면서 실망 어린 고함을 질러댔다.
드디어 두 기사가, 대적하기에 앞서 자기 부인이나 연인이 앉은 관람석 앞에 가 섰다. 기사가 자기 여인에게 창을 내밀자 그 여인은 스카프와 리본, 베일, 심지어 소매까지 풀어서 그의 창 끝에 매달아 주었다. 자신의 여인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두 기사가 각자 시합장 반대편에 가 섰다. 이제 시합 시작 나팔을 불 차례였다. 드디어 나팔이 울렸다. 두 기사는 쏜살같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내달렸다. 프랑스 기사의 창이 상대방의 방패를 약간 빗나가게 맞히자 스코틀랜드 기사가 말 위에서 휘청하다가 이내 중심을 되찾았다. 다섯 번째의 격돌에서 프랑스 기사가 창에 얻어맞고 땅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강철 보호대가 땅바닥에 구르면서 번쩍임과 동시에 귀가 멍멍할 정도로 환호성이 일었다.
한편, 제니퍼는 너무나 가슴이 죄어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바로 발아래에 말에서 떨어진 기사가 나뒹굴고 있었지만 그녀는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주먹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나팔이 울리면서 군중들은 더욱 흥분했다. 제니퍼는 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고개를 들고 말았다. 시뻘건 장식을 온몸에 감은 말이 힝힝거리고 있었다. 그 말의 주인은 행진 도중에 특히 그녀의 눈길을 끌었던 프랑스 기사였다. 그 엄청난 덩치도 덩치려니와 팔꿈치 보호대에 마치 박쥐 날개 같은 철판이 달려서 보기에도 엄청난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목에는 남작임을 상징하는 멋진 목걸이가 달려 있었고, 가슴 보호대에도 무섭게 생긴 뱀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제니퍼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기발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게 보였다. 그 기사는 말을 돌려서 자기편 관람석 쪽으로 갔다. 그가 축하를 받고 나서 말머리를 돌렸다, 소란스런 소리들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순간, 제니퍼는 온몸을 관통하는 충격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입구에서 눈길을 거두었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로이스가 등장한 것이다. 관중들이 옆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팔 소리가 마치 죽음을 알리는 조종 소리처럼 고요를 뚫고 울려 퍼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들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들뜬 분위기에 형형색색의 깃발이 나부끼는 시합장 분위기와는 달리, 그녀의 남편은 검은색 일색이었다. 말의 몸통이며 머리를 온통 검은색으로 장식했으며 방패에도 문장 대신 포효하는 검은 늑대 한 마리만 그려져 있었다.
그를 안다는 제니퍼조차도 그 순간의 느낌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가 자기편 관람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지금 그가 가운데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고 순간적으로 착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쪽으로 달리지 않았다. 또 지금 그를 향해 베일이며 리본을 흔들어대고 있는 물경 천 명은 넘을 여자들 어느 누구를 향해서도 가지 않았다. 그는 정반대 쪽으로 제우스를 몰았다.
로이스가 지금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제니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군중들 역시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메릭 가의 사람들이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고, 로이스는 창을 내밀면 제니퍼가 닿을 거리에 와 섰다. 그러나 그는 창을 내밀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것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안다는 것이리라.
그런데 그가 창을 내미는 대신 이상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행동을 보는 순간, 제니퍼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행동이었다. 제우스가 로이스를 태운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가운데 그가 그녀를 쳐다보며 능숙하게, 그러나 천천히 창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창 끝은 땅을 향하고 있었다.
경배! 그렇다, 그것은 경배의 행동이었다. 제니퍼의 가슴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지금 로이스가 그녀에게 경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과 감동이 한꺼번에 그녀의 몸을 후려쳤다. 그 어떤 것보다 더 강렬한 느낌이 그녀의 온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윌리엄의 죽음을 보았을 때보다도 더 강렬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뭘 하려는지 뚜렷한 생각도 없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가 채 일어서기도 전에 그 순간은 지나가 버렸다. 로이스가 제우스를 돌려 가 버린 것이다.
로이스는 시합장의 자기 자리에 가 섰다. 그의 상대자가 투구의 면갑을 더욱 단단히 고정시키고 있었다. 이어 창의 무게를 시험해 보는 듯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로이스가 상대를 향해 말을 세웠다. 그리고 면갑을 내리고 창을 들었다.........그리고 정지. 말 그대로 완벽한 정지 상태였다. 거칠고도 냉정하며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자세. 다음 순간을 위해 잔뜩 억제하고 있는, 그러나 한치의 빈틈도 없는......
나팔 소리가 터져 나오자마자 로이스는 몸을 웅크리면서 제우스의 배에 박차를 박았다. 제우스가 곧바로 상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로이스의 창이 상대의 방패를 정확히 맞혔고, 그 힘에 방패가 옆으로 젖혀지면서 상대의 몸이 붕 떠서 말 뒤로 떨어졌다. 다리 하나가 구부려진 채 그대로 땅에 떨어진 자세로 보아, 아무래도 그 다리가 성할 것 같지 않았다. 한편, 로이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몰아 다시 자기 자리에 가 섰다. 입구를 쳐다보는 그의 자세는 이번에도 역시 발끝 하나 까딱 않는 정지 상태 그대로였다.
제니퍼는 전에도 이안 멕퍼슨이 마상 창 시합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멋있는 기사였다. 드디어, 로이스만큼이나 죽음을 부르는 듯한 모습의 이안 맥퍼슨이 등장했다. 가문의 색인 짙은 녹색과 황금색으로 치장한 그의 말이 터벅터벅 흙을 날리며 걸어 들어왔다.
제니퍼는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어서 곁눈으로 로이스를 보았다. 로이스는 이안 맥퍼슨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로이스가 이안 맥퍼슨을 쳐다보는 눈길에서, 지금 그가 이안 맥퍼슨을 맥퍼슨 가의 미래의 수장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안의 위협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문득, 로이스와 이안 두 사람만이 독일식 갑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갑옷이 사람의 몸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로이스의 옷에 붙은 것이라고는 양쪽 어깨에 붙은 두 개의 놋쇠판 뿐이었다. 그것도 주먹 크기만 한 작은 것이었다.
제니퍼는 로이스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이안을 쏘아보는 로이스의 눈길에 비웃음과 무자비함이 번뜩이고 있었다. 제니퍼는 로이스를 훔쳐보는 일에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이안 맥퍼슨이 앞에 와 서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안이 그녀에게 창을 내밀고 있었다........
"제니퍼!"
베키의 아버지가 제니퍼의 어깨를 잡아 이안에게 주의를 돌리게 만들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제니퍼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온몸이 마비되는 것같았다. 그때, 엘리너 숙모가 짐짓 유쾌한 비명을 지르며 나섰다.
"이안 맥퍼슨! 왕년에는 당신이 최고로 재미있었지."
엘리너 숙모가 노란 베일을 창에 매어 주는 동안 이안 맥퍼슨의 얼굴은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다.
이안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을 때, 제니퍼는 로이스의 자세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은 로이스의 몸이 약간 앞으로 나와 있었다. 잔뜩 웅크린 자세가 몹시도 위협적이었다. 감히 자기 아내한테 호의를 구한 적을 향해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고 싶어 안달인 자세였다. 드디어 나팔이 울렸고, 군마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먼지를 일으키며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창끝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었다. 로이스가 막 찌르려는 순간, 이안 맥퍼슨이 오싹 소름끼치는 포효를 지르며 창을 내질렀다. 창 하나가 방패에 부딪혔고, 그 다음 순간, 이안과 그의 멋진 회색 말이 함께 무너지면서 먼지 속으로 나자빠졌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환호성이 일었다. 그러나 로이스는 그 광란의 찬사를 즐길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그는 자기 견습생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고 있는 적에게 경멸의 눈길을 던지고는 제우스의 머리를 돌려 시합장 밖으로 빠져 나갔다.
이제 본 경기가 벌어질 차례였다. 제니퍼가 고향에 있을 때부터 한 번은 보고 싶어 했던 경기였다. 기사들이 두 패로 나뉘어 시합장 양쪽에서 진격하는 모습이 큰 규모의 전쟁과 흡사한 경기였다. 단지 몇 개의 규칙으로 전면적인 학살극이 되는 것을 방지한 것일 뿐 나머지는 전쟁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전령이 이번 시합에 적용될 규칙을 발표하는 것을 듣고 있는 제니퍼의 두려움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끝이 날카로운 무기는 반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등을 돌린 사람이나 말을 치는 일도 금지되었다. 또 휴식을 취하기 위해 투구를 벗은 사람을 치는 것도 금지되는데, 말에서 떨어지지 않는 한, 두 번까지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끝까지 말에 타고 있거나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이 많은 쪽이 이기는 경기였다.
그러나 그 외에 일단 싸움이 시작되고 나면 아무 제한도 없었다. 시합장도 단지 입장을 위한 곳일 뿐 그 어느 곳에서든 싸움을 벌일 수 있었다. 제니퍼는 숨을 죽이고 또 하나의 규칙이 선포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있었다. 오늘은 참가 기사들이 특히 노련하고 명망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날이 넓은 칼도 허용된다는 것이다.
각기 백 명의 기마대가 반대편 입구를 통해 시합장에 입장하기 시작했다. 한쪽은 로이스가, 다른 편은 뒤몽이 이끌고 있었다. 각 기사 뒤에는 칼과 창을 든 기사 견습생이 따랐다.
뒤몽 쪽 기사들의 면면을 살피는 제니퍼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와 말콤, 맥퍼슨, 그리고 문장이 눈에 익은 사람들이었다. 즉, 잉들랜드 사람이 한편이고, 프랑스와 스코틀랜드가 상대편을 이룬 것이다. 경기장에서조차도 진짜 상황과 마찬가지로 편을 짜다니.........제니퍼의 가슴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 경기는 무예에 뛰어난 개인이 기량을 뽐내는 자리지, 적대적인 사람들끼리 승리를 얻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적대적인 사람끼리 경기를 벌이다가 유혈극으로 번진 예도 있었다. 제니퍼는 불길한 예감을 억누르려고 애썼지만 그녀의 본능 전체가 일어나 이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세 번의 경고 나팔 소리가 울렸고, 제니퍼는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이 제발 무사하기를 빌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합장을 반으로 가르고 있던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어 네 번째 나팔이 울리면서 밧줄이 치워졌다. 2백 필의 말이 땅을 박차고, 칼과 창을 들어 올리는 소리가 하늘을 메웠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다. 제니퍼의 집안사람 스무 명이 아버지와 오빠의 뒤를 따라 그대로 로이스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복수의 칼을 높이 치켜 들고.
제니퍼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으나 로이스가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집중 공격을 받는 것을 본 잉글랜드 사람들의 분노 섞인 고함소리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라운 장면이 벌어졌다. 로이스가 보여 주는 칼 솜씨와 체력은 꿈에도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칼을 휘둘렀고, 엄청난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여섯 명의 적이 말과 함께 땅바닥에 나뒹굴었고, 로이스 자신도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악몽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사람과 칼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난장판을 조금이라도 더 잘 보려고 발꿈치까지 들먹이는 그녀의 귀에 쨍그랑 쨍그랑 칼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게 된 로이스의 기사들이 로이스에게 가려고 길을 뚫기 시작했고, 조금 후에는 제니퍼의 눈에도 전세가 바뀌고 있었다. 악귀 같은 형용의 로이스가 사람들 틈에서 솟구쳐 양손의 칼을 휘둘러 대고 있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내리쳤다. 바로 그녀의 아버지를 향해서.
제니퍼는 로이스의 손목이 약간 비틀어지면서 그녀의 아버지 대신 고지대 사람 하나를 향해 칼날이 날아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벌써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던 것이다. 비명 소리가 손바닥 안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또 이복 오빠가 숨기고 들어간 단검으로 로이스의 투구와 가슴판 사이 목 부분의 취약한 곳을 찌르는 것도 보지 못했고, 로이스의 갑옷 바깥으로 피가 흐르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얇은 갑옷뿐인 허벅지를 마구 찌르는 것도, 로이스가 돌어섰는데도 등이며 어깨, 머리를 마구 두들겨대는 것도 보지 못했다.
손을 떼고 얼굴을 들었을 때, 제니퍼가 본 것은 아버지가 아직 서 있고, 로이스가 이안 맥퍼슨과 다른 다 사람을 미친 사람처럼 맹렬하게 몰아붙이는 장면뿐이었다...... 그에게 맞은 사람은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고.
제니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으나 옆에 있던 브렌나에게 쓰러질 뻔했다. 브렌나는 아예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녀가 일어난 것을 본 엘리너 숙모가 소리쳤다.
"제니퍼, 너 설마........"
그러나 제니퍼는 듣지 않았다. 울컥 한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눈물이 솟으면서 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놀란 하인의 손에서 고삐를 빼앗아 들었다.........
"마님, 보세요!"
하인이 열띤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는 그녀가 안장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며 시합장의 로이스를 가리켰다.
"저런 장면을 본 적이 있으세요?"
제니퍼는 한 번 더 시합장을 보았고, 로이스의 칼이 스코틀랜드 사람의 어깨에 내리꽂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아버지, 오빠, 베키의 아버지, 그리고 스무 명의 다른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시합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시합장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침실의 열려진 창문 앞에 서 있어도 그 장면이 떠올라 괴롭기만 했다. 제니퍼는 창백해진 얼굴을 창틀에 기댔다. 가슴을 파고드는 고통과 공포를 조금이라도 누를 수 있을까 해서 가슴을 안아 보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녀가 시합장을 떠난 지 한 시간이 흐른 지금, 마상 창 시합이 최소한 30분은 진행되고 있을 터였다. 로이스는 열한 번의 도전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는 본 경기 전에 두 번을 싸운 바 있었다. 전령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본 경기 뒤의 마상 창 시합은 최고로 능숙한 기사부터 시작한다고 했으니 로이스의 시합이 곧바로 이어졌을 게 뻔했다. 아무리 지친 상태라고 해도 자신의 최고 전사가 스코틀랜드 멍청이쯤은 능히 처치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헨리 왕의 처사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쩐지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제니퍼는 다섯 번의 시합이 끝난 것을 알 수 있었다. 패배자가 시합장을 떠날 때 관중들이 질러대는 고함의 횟수로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 네 번만 더 싸우고 나면 로이스가 시합장에서 이리로 올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달려와 로이스가 얼마나 많은 그녀의 친척을 불구로 만들었거나 죽였는지 알려 줄 터였다. 손으로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로이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그는 무적이었다. 본 경기 전의 마상 창 시합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었다. 그리고........신도 용서하시리라....... 그녀는 그가 자랑스러웠다. 그가 이안 맥퍼슨과 마주섰을 때도 그녀는 남편이 자랑스러웠다.
그녀의 마음과 정신이 충성심을 어디에 보내야 할지 몰라 황폐화되다시피 어지러웠다.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시합장을 볼 수 없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들을 수는 있었다. 매 시합이 끝날 때마다 군중들이 질러대는 야유의 고함소리가 더 커지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는 점잖게 박수 한번 쳐 줄 수 없다는 분위기가 분명했다.
갑자기 방문이 활짝 열리더니 벽에 가 쾅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홱 돌아보았다. 스테판 웨스트모어랜드였다.
"외투를 입으세요!"
다짜고짜 외쳐대는 그의 목소리가 불길했다.
"지금 당장 시합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니면 제가 억지로라도 끌고 갈 거고!"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제니퍼는 다시 창문을 향해 돌아서며 말을 이었다.
"내 남편이 내 가족을 산산조각 내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할 비위는 없어요."
스테판이 제니퍼의 어깨를 잡고 홱 돌려 세웠다. 그의 목소리가 매서운 채찍처럼 그녀를 때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려 드릴까요! 지금 형이 저기 시합장에서 죽어 가고 있습니다! 죽어 가고 있다 이겁니다! 형은 형수님 가족한테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맹세했죠. 형수님 가족들이 아까 본 경기 도중에 그걸 알아채고는 정확하게 형을 찔러댔습니다."
이빨을 앙다문 스테판이 그녀의 몸을 잡고 흔들어대고 있었다.
"벌서 경기 도중에 형을 갈가리 찢어 놓았단 말입니다. 그리고 형은 또 마상 창 시합을 하고 있습니다. 저 소리가 들리세요? 사람들이 비웃고 있죠? 바로 형을 비웃고 있는 겁니다. 형은 지금 상처가 심해요. 아까 말에서 떨어졌을 때 형은 이미 더 이상 싸울 수가 없는 상태였어요. 자기 마음으로야 거뜬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열 네 명이 넘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도전을 지금 그 상태로는 도저히 받아 낼 수가 없다구요."
제니퍼는 그저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발이 마루에서 붕뜬 듯, 끝없이 달리는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니퍼! 형은 지금 그들이 자기를 죽이라고 놔 두고 있는 거예요."
스테판의 손이 아프게 제니퍼의 팔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고뇌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형이 형수님을 위해서 저기서 죽어 가고 있단 말입니다. 형수님 오빠를 죽였기 때문에 그 대가를 지불하려고........."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제니퍼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개릭 카마이클이 의기 양양하게 말을 몰아 퉤 하고 로이스 옆 땅바닥에 침을 뱉았다. 그러나 로이스는 그런 모욕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겨우 몸을 일으킨 로이스의 귀에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천천히, 그리고 불가사의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손을 뻗었다. 투구를 벗은 그는 그것을 왼손에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 팔은 쓸모없이 매달려 있는 것에 불과했고, 투구는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가윈이 달려오고 있었다.........아니, 그것은 가윈이 아니었다. 파란 외투를 입은 사람이었다. 그는 눈을 깜박거리며 초점을 모으려고 노력했다. 벌써 다음 도전자가 나온 것일까?
땀과 피, 그리고 고통으로 눈앞이 흐렸다. 정신까지 어질어질 흐려지는 것 같았다. 로이스는 흐려지는 눈길 사이로 언뜻 한 여자가 달려오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모자를 안 썼는지 그여자의 머리가 휘날리고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그 머리카락은 타오르는 듯한 황금빛이었다. 제니퍼!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냥 쳐다보고만 있는 가운데 귀를 찢는 관중들의 고함 소리가 더욱 높아져 가고 있었다.
로이스는 안으로 신음 소리를 삭이며 부러지지 않은 오른팔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애썼다.
그렇다, 제니퍼가 돌아온 것이다. 그의 패배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아니면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렇다 해도 로이스는 땅바닥에 뒹굴면서 죽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 짜내어 일어섰다. 그리고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 그제야 눈앞이 환해졌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모습이 상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제니퍼가 달려오고 있고, 이제는 관중들이 숨을 죽이고 구경하고 있었다.
로이스의 팔이 건들건들 겨우 매달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곳까지 다가온 제니퍼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그의 앞에 와 섰다. 그때 그녀의 아버지가 외치는 고함 소리에 제니퍼의 고개가 돌아갔다.
"창을 집어! 제니퍼, 창을 사용하거라!"
그녀의 눈길이 로이스 발치에 떨어져 있는 창에 가 꽂혔다.
로이스는 그녀가 왜 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친척들이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가 그녀의 오빠에게 한 일을 그에게 되갚아 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으면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수그리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제니퍼는 창을 집는 것도 아니요, 칼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입술을 갖다 댔다. 로이스는 고통과 혼란으로 정신이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지금 그녀가 무릎을 꿇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니, 이러지 말아......"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 제대로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남편의 말을 듣지 않았다. 7천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우데 제니퍼 메릭 웨스트모어랜드, 녹번의 여백작이 남편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한 복종의 맹세를 하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어깨가 격렬한 흐느낌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녀가 일어섰을 때 관중들 가운데 그녀의 행동을 보지 못한 사람은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서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로이스의 엉망진창이 된 얼굴에 자부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왕으로부터 작위를 수여받는 기사처럼 당당하게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바로 왕의 얼굴이었다.
스테판의 손에 어깨가 잡혀 꼼짝도 못하고 있던 가윈이 손의 힘이 빠지는 순간 냅다 앞으로 달렸다. 로이스가 가윈의 어깨에 팔을 걸고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경기장을 빠져 나가는 그의 뒤로, 그가 뒤몽이나 맥퍼슨을 말에서 떨어뜨렸을 때처럼 환호성이 일고 있었다.
로이스는 내키지 않았지만 천천히 눈을 떴다. 시합장 한편의 자기 천막 안이었다. 의식과 함께 밀려올 엄청난 고통을 생각하니 정신이 돌아온 것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바깥에서 들려 오는 소리로 봐서 마상 시합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른손을 누군가 잡고 있어서 가윈이려니 하면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순간, 로이스는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제니퍼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뒤쪽의 열려져 있는 천막 사이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그녀를 눈부시게 감싸고 있었다. 또 그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너무나 감미로워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돌아온 걸 환영해요, 내 사랑."
문득, 지금 제니퍼가 왜 그리 눈부셔 보이는지, 왜 하나도 안 아픈지,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이 왜 저리 감미로운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로이스는 그 이유를 크게 외쳤다.
침울한 목소리로.
"난 죽었어."
그런데 위에서 어른거리는 그 환영이 고개를 가로젓더니 침대 옆에 내려와 앉았다. 몸을 숙인 그녀가 로이스의 앞이마에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주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속눈썹에는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놀렸다.
"만약에 당신이 죽었다면 아마 내가 저기 나가서 이복 오빠를 헤치웠을 거예요."
이마에 와 닿는 제니퍼의 손가락이 너무 차가웠다. 그리고 옆구리에 느껴지는 그녀의 엉덩이 감촉도 분명 사람의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천사인 건 아니리라. 로이스는 자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 하는지나 알아?"
그 질문은 하나의 시험이었다........제니퍼의 방법이 영적인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의 것인지 확인하려는.
"그거야......."
눈앞의 환상이 몸을 숙여 자신의 입술로 그의 메마른 입술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전번에 시합에 나갔을 때.......면갑을 벗은 다음........이렇게 했죠........."
그녀의 혀가 감미롭게 로이스의 입 안으로 파고드는 순간 로이스의 입에서 헉 하고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분명 죽은 게 아니었다. 천사는 이렇게 키스를 하지 않는다. 그의 다치지 않은 오른팔이 그녀의 어깨를 타고 올라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런데 다른 생각이 떠오르면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죽은 게 아니라면 왜 아프지 않지?"
"엘리너 숙모 덕분이에요. 숙모가 특별한 약을 만들어서 억지로 당신 입에 흘려 넣었다구요."
로이스의 마음속에 있던 마지막 거미줄이 걷히면서 환희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는 제니퍼의 몸을 끌어당겨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의 키스에 열렬히 응해 오자 그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는 환희의 송가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그녀의 몸을 풀어 주었을 때는 두 사람 모두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군중들의 함성으로 흔들리는 이 천막 안에서가 아니라 더 은밀한 장소에서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은 표정이었다.
잠시 후 로이스가 차분하게 물었다.
"내가 얼마나 심하게 다쳤지?"
제니퍼는 아무 말 없이 꿀꺽 침을 삼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그의 고통을 대신 받는 것처럼 고통으로 어두워졌다.
"그 정도야?"
"왼쪽 팔과 손가락 세 개가 부러졌어요. 목하고 쇄골에 있는 상처는 스테판과 가윈 말로 말콤의 작품이라는데 아주 길고 깊어요. 하지만 다행히 피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아요. 다리의 상처도 끔찍할 정도지만 지혈 조치는 다 했어요. 투구가 벗겨졌을 때 머리에도 한 방 맞았구요. 하여간, 어디 성한 데가 하나도 없어요."
그의 눈썹이 즐겁다는 듯 둥글게 올라갔다.
"별로 심하지 않다는 이야기 같은데?"
제니퍼가 그 엉뚱한 결론에 미소를 짓기 시작하는 순간, 로이스가 나지막하고도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젠 어떡하지?"
제니퍼는 지금 로이스가 무얼 묻고 있는지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한 번 더 시합에 나갔다가 입을 추가적인 손상에 대해서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그 손상과 나가지 않았을 경우에 받을 자존심의 손상을 저울질해 보았다.
"당신이 결정할 문제예요."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저기 우리 가족이 더럽힌 "명예의 장" 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사가 있어요. 말콤 메릭이라고, 한 시간 전에 당신한테 공개 도전을 했어요."
로이스가 손가락 관절로 그녀의 뺨을 문지르면서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 말이, 방패로 잘만 보호하면 내가 이길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말 같은데? 팔하고 어깨 쪽 말이야."
제니퍼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나갈 수 있겠어요?"
"그럼."
로이스의 관능적인 입가에 여유만만 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로이스가 가윈으로부터 창을 건네받고 있었다. 애릭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제니퍼를 쳐다본 로이스가 잠시 머뭇거렸다. 뭔가 말하고 싶은 몸짓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 없이 제우스의 머리를 돌려 시합장으로 향했다. 그 순간, 제니퍼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가 말은 안 했지만 무얼 바라고 있는지 깨달은 그녀는 기다리라고 소리쳤다.
제니퍼는 로이스의 천막으로 뛰어들어가 그의 상처를 동여매기 위해 천을 자를 때 썼던 가위를 집어 들었다. 얼른 뛰고 싶어 앞발로 땅을 긁으며 안달을 하고 있는 제우스 옆으로 달려간 그녀는 미소짓고 있는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몸을 숙여 파란 비단 옷 한 자락을 잘라 냈다. 그리고 그 옷 조각을 로이스의 창 끝에 매달았다.
애릭이 제니퍼 옆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로이스가 시합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군중들이 떠나갈 듯한 환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제니퍼의 눈길은 그의 창에 매달린 옷 조각을 따라가고 있었다. 로이스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변함이 없지만 지금 그녀의 목구멍에는 통곡 한 자락이 걸려 있었다. 방금 전 옷을 잘랐던 가위가 그녀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상징하는 것처럼 그녀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자신의 기를 로이스의 창에 달아 주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조국과 연결되는 그 모든 것을 잘라 버린 것이다.
그녀의 울음 삼키는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울렸다. 순간, 제니퍼는 깜짝 놀라며 움칠했다. 애릭의 두툼한 손이 그녀의 머리 위에 놓인 것이다. 망치처럼 무거운 그 손이 잠시 그 자리에 머물다가 그녀의 뺨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옆구리에 갖다 붙였다. 그것은 포옹이었다.
"얘야, 저 사람은 저대로 몇 시간 더 잘 거야. 이런다고 깨지 않아."
엘리너 숙모가 걱정 말라며 제니퍼를 안심시켰다.
회색 눈 한쌍이 살며시 떠지더니 방안을 둘러본 다음 붉은 황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에게 가 꽂혔다. 자기 침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숙모의 말을 듣고 있는 그 용감한 여인을 쳐다보는 눈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내가 준 약이 없었다 해도 다섯 번 이상이나 시합을 한 사람은 밤새 자게 되어 있어. 거기다 부상까지 당했잖니."
엘리너 숙모가 트렁크 위에 놓인 약병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존경스럽다는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 평생 그렇게 능숙하고 참을성이 많은 사람은 처음 봤다. 그 많은 사람을 눈 깜짝할 새에 다 헤치우다니."
로이스가 다시 시합장으로 들어갔을 때 제니퍼는 로이스의 몸이 더 걱정이었다.
"저분이 깨고 나면 정말 아파할 거예요. 전에 주셨던 약을 좀 더 주셨으면 좋겠어요. 다시 시합장에 나가기 전에 말이에요."
"그래, 그래, 그것도 괜찮기야 하지만 현명치는 못하지. 게다가 저 사람 몸에 난 흉터들로 볼 때 고통을 참는 데는 익숙한 사람 같구나. 그리고 이미 말했다시피 약을 더 쓰는 건 위험해요. 이런 말을 하긴 싫지만 약을 더 쓰면 부작용이 나타난단다."
"무슨 부작용이오?"
그래도 제니퍼는 그를 도울 수 있는 길이 있기를 바랐다.
"음, 한 가지, 저 사람이 일주일 동안 침대에서 힘을 쓸 수 없게 된다는 거지."
"엘리너 숙모, 걱정거리라는 게 그거였어요? 그럼 더 넣어 줘요."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응당 사랑의 기쁨 정도는 희생해야 한다는 결의가 필요 이상으로 묻어 나고 있었다.
엘리너 숙모가 약간 머뭇머뭇하다가 이윽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트렁크 위에서 하얀 약병을 집어 들었다.
"거기다 다른 걸 더 넣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브렌나가 여기 남아 있고, 스테판하고 그 애가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걸 이야기해야 하거든요. 그 이야기를 할 때 저분이 가만히 듣기만 하게 만드는 약을 넣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죠."
제니퍼가 힘없는 얼굴로, 그러나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저분은 정말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해요. 나한테 눈길을 준 다음부터는 정말 혼란의 연속이었어요."
"네 말이 맞다."
그러나 엘리너 숙모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투로 계속 말했다.
"하지만 고드프리 경의 말로는 공작이 그렇게 잘 웃는 건 널 안 다음부터라더라. 이제까지 살아온 게 격변의 연속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실컷 웃으면서 살기를 빌어 주는 수밖에 없지."
제니퍼는 아버지로부터 전달되어 온 서류를 힐끔 쳐다보았다. 괴로움으로 그늘진 눈빛이었다.
"최소한 저분은 아버지께서 저와 브렌나를 빼내 가려고 공격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서는 벗어나게 되었어요. 아버지는 우리 둘과 의절하셨으니까요."
엘리너 숙모가 조카에게 동정 어린 눈길을 던졌다. 그리고 다소 현학적인 말투로 말을 꺼냈다.
"그 사람은 사랑보다 증오에 더 익숙해져 있어. 네가 그걸 몰랐을 뿐이고. 그 사람이 제일 사랑하는 건 바로 자기 자신이란다. 그렇지 않다면 널 그 발더 늙은이한테 시집보내려고 하지 않았을 거고, 맥퍼슨한테도 마찬가지야. 그 사람은 자기 이기심을 채울 수 있을 때만 너한테 관심을 가졌어. 브렌나는 친아버지가 아니라 그걸 알고 있었고, 너처럼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눈이 멀어 있지도 않았지."
"아버지는 제 아이들과도 관계를 끊으셨어요."
제니퍼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당신 손자하고도 의절할 정도로 절 미워하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 문제는 말이다, 그 사람이 네 자식한테까지 그런 건 오늘 일 때문이 아니야. 네 아버지는 공작에게 후계자가 생기기를 원하지 않아."
"믿, 믿을 수 없어요, 숙모. 아이가 생기면 제 자식도 되는데........"
제니퍼는 자책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네 아버지한테는 아니지."
엘리너 숙모가 불빛에 잔을 비쳐 들고는 잔 속의 약을 가늠해 본 다음 조금 더 넣었다.
"이 약을 몇 주일 동안 조금씩 먹이면 남자를 불능으로 만들 수 있단다."
엘리너 숙모는 잔에 와인을 부으며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가 처음에 날 여기에 같이 보내려고 했던 게 바로 그 이유에서란다. 네 남편이 너한테 아이를 가지게 하지 못하도록 만들자 이거였지. 그때 나도 말했지, 그러면 너도 자식이 없게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더구나."
순간, 제니퍼는 숨이 멎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행동이 놀라웠고, 이어 혹시 숙모가 진짜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숙모......설마 제 남편 먹는 것에 넣고 있었던 건 아니겠죠?"
침대 위의 휘둥그레진 눈에서 날아오는 긴장된 눈길이 등에 꽂히는 것도 모른 채 엘리너 숙모는 천천히 숟가락으로 잔을 젓고 있었다.
"맹세코 그러지 않았단다. 하지만 네 아버지가 날 클레이모어에 보내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는 뭔가 다른 계획을 세웠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단다."
그리고 엘리너 숙모는 조심스레 침대 쪽으로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자, 그만 가서 자거라. 너도 잠을 좀 자 두어야지."
단호한 명령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가 진짜로 그녀를 평생 수녀원에 가두어 둘 생각이었다는 점을 확인한 제니퍼는 마음이 더욱 아파오고 있었다.
엘리너 숙모는 제니퍼가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조카가 그래도 조금은 휴식을 취할 것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놓인 그녀는 이제 공작에게로 돌아섰다. 그 순간, 헉 하고 그녀의 숨이 멎으면서 손이 목으로 올라갔다. 언제 일어났는지 공작이 심상치 않은 눈길로 그녀가 든 잔을 쏘아보고 있었다.
"부인, 차라리 아픈 게 더 좋소. 당장 그 약을 내 방에서 치우시오."
그 말로는 모자랐는지 그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
"아니, 내 땅에서 아예 없애 버리시오."
침착을 회복한 엘리너 부인이 알아들었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내 그럴 줄 알았다우."
엘리너 부인은 즐겁다는 듯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막 나가려다 다시 돌아섰다. 이번에는 그녀의 흰 눈썹이 한일자를 긋고 있었다.
"내 약이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한다 해도 오늘만큼은 상처를 꿰멘 부위를 조심하도록 해요."
부러진 왼팔과 손가락들로 옷을 입자니 수월치 않은 일이었다. 로이스는 몇 분을 낑낑 댄 연후에야 실내복을 입고 허리끈을 맬 수 있었다. 그는 제니퍼의 침실로 통하는 문을 소리 안나게 열었다. 지금쯤은 그녀가 잠에 빠졌거나, 아니면 어둠 속에 앉아 오늘 일어났던 일을 곰곰이 되씹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제니퍼는 그의 예상과 전혀 다른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로이스는 문 앞에 못 박힌 듯 서고 말았다.
벽을 따라 등잔불이 환하게 켜진 가운데 제니퍼가 창가에 조용히 서 있었다. 얼굴을 약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저기 횃불이 환한 계곡 쪽을 보고 있는 듯했다. 어깨에 흘러내린 황금빛 머리카락과 섬세하게 깎인 옆 얼굴이 이탈리아에 갔을 때 본 여신상을 보는 것 같았다.
로이스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새삼 그녀의 용기와 불굴의 영혼에 자신이 겸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 그녀는 7천 명의 관중이 보는 앞에서 가족과 조국을 버리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상속권도 빼앗긴 그녀였다. 그런데도 창가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니. 그것도 입가에 미소까지 띠고.
로이스는 어떻게 그녀에게 다가가야 좋을지 몰라 머뭇머뭇 망설였다. 오늘 시합장에서 돌아올 때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 지금까지 제대로 얘기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녀가 그를 위해 희생한 것들을 생각해 볼 때 "고마워" 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사랑해" 하고 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불쑥 그런 말을 꺼낸다는 것도 어쩐지 어색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녀가 가족과 조국을 잃었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고 있는데 괜히 생각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로이스는 그녀에게 선택권을 넘기기로 작정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그림자가 창 옆에 드리워졌다.
옆에 다가서는 로이스를 쳐다보는 눈길에 걱정이 가득했다.
"당신이 침대에 누워 있는 게 나한테는 최고로 좋은 일이라는 걸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로이스는 성한 어깨를 벽에 기댔다. 얼른 같이 침대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억누르며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창문을 내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질문에 그녀가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었어요."
"그럼 뭘 하고 있었지?"
씁쓸한 미소가 제니퍼의 고혹적인 입술에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힐끔 그를 쳐다보고는 다시 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음......주님하고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습관이죠, 뭐."
로이스가 놀라면서도 약간은 즐거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정말? 하느님이 뭐라고 하셨지?"
""걱정 말아라" 하고 하시는 것 같았어요."
"무슨 걱정을?"
제니퍼가 시선을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엄숙하게 대답했다.
"당신 걱정이오."
로이스의 얼굴에 즐거움이 퍼져 나갔다. 그는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제니."
제니퍼의 향기로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는 그의 속삭임이 거칠었다.
"제니, 사랑해."
제니퍼의 몸이 그의 품 안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벌려 그의 격렬하고도 빨아들일 듯한 키스에 열렬히 응했다. 그녀는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면서 파란 눈을 그의 눈 깊숙이 던졌다.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속삭임이 흘러 나왔다.
"내 생각에는 내가 당신을 더 사랑해요."
그의 성한 어깨에 머리를 얹은 제니퍼를 쓰다듬으며 로이스는 포만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손이 그녀의 허리를 한가로이 더듬는 가운데 그의 눈길은 불에 비친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시합장에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에게 달려오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선 그녀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눈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그리고 부끄럽지도 않은 듯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번쩍이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진짜 전쟁터에서 수백 번도 넘게 싸워서 승리를 얻은 그였다. 하지만 꿈꾸지도 못했던 최고의 승리가 가짜 전쟁터에서 찾아오다니...... 그것도 싸움에서 져 말에서 떨어진 채 멍하니 서 있던 그 순간에.
오늘 아침만 해도 로이스는 인생이 지옥 같았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한아름 기쁨을 안고 있다. 운명인지, 아니면 제니퍼의 신인지, 하여간 누군가가 오늘 아침 그를 굽어보고는 그의 고통을 알아본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제니퍼를 그에게 돌려준 것이다.
로이스는 눈을 감으며 제니퍼의 부드러운 이마에 입술을 비볐다.
"고맙소."
그런데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분명 누군가가 대답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26. 클레이모어의 후계자
"홀이 이렇게 텅 비다니 이상한 걸?"
스테판이 주위를 둘러보며 농을 던졌다. 스물다섯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막 호화스러운 저녁 식사를 마친 로이스의 개인 경호대를 이루는 열다섯 명의 기사들도 당연히 끼어 있었다.
"오늘 밤에는 춤추는 곰들이 다 어디 갔을까?"
로이스가 제니퍼의 의자 뒤로 팔을 돌리며 놀렸다. 곰 이야기를 꺼내기는 했지만 로이스 자신은 이번 같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즐겨 본 적이 없었다. 그러자 제니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배를 만지며 대꾸했다.
"글쎄요, 내가 한 마리를 삼킨 것 같지 않아요?"
배가 불러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니퍼는 클레이모어의 모든 주민들이 크리스마스이브에서 공현 축일(천주교의 축일, 1월 6일) 까지 14일간 전통적인 방식대로 축제를 즐겨야 한다고 고집했다. 전통적인 방식이란 곧 집의 개방을 의미했다. 그결과 지난 여드레 동안 축제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고 그동안 클레이모어의 성 앞에 도착한 여행자는 매번 한 가족이 되어 대접을 받고 있었다. 어젯밤은 여행자뿐만 아니라 특히 로이스의 하인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성 전체가 축제장이었다. 악단이 동원되어 음악이며 캐롤이 흥겹게 울려 퍼졌고, 가운데에서 벌어진 곰 놀리기 놀이며, 곡예, 성탄극까지 동원될 수 있는 놀이란 놀이는 모두 동원되어 모든 사람들이 축제를 즐겼다.
제니퍼가 로이스의 인생에 웃음과 사랑을 채운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 두 사람의 첫 아기를 선사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로이스는 만족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오늘 밤에는 그가 가윈의 익살극에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있었다. 이번 시즌을 전통적인 방식 그대로 축하한다는 제니퍼의 결정에 따라 가윈이 악독한 영주의 역할을 하는 중이었다. 즉, 사흘 동안 가윈이 높은 의자에 앉아 주인을 흉내내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리는 등 평소 같았으면 클레이모어 밖으로 추방될 짓을 골라서 하는 것이 가윈의 역할이었다.
그때, 가윈은 테이블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로이스의 의자에 몸을 묻고 건들거리고 있었다. 팔은 로이스가 제니퍼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을 흉내내어 엘리너 숙모의 등에다 뻗고.
"공작 각하."
로이스가 즉각적인 수행을 요구할 때 내는 목소리를 흉내낸 가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어 합니다."
로이스가 가윈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곧 질문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아니면 거짓말입니까? 그러니까, 각하께서 검은 늑대라고 불리게 된 것이 여덟 살 때 늑대를 잡아서 저녁 식사로 그놈 눈알을 먹었기 때문이라는 말 말입니다."
제니퍼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자 로이스가 짐짓 화난 얼굴을 지었다.
"부인, 지금 당신은 설마 내가 그 나이에 그 정도로 힘이 셌을까 의심스러워서 웃는 게요?"
"아닙니다, 나리."
제니퍼가 낄낄거리면서 고드프리 경, 유스테이스 경, 그리고 라이오넬 경과 알 만하다는 눈길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맛없는 식사를 먹느니 차라리 굶고 말겠다는 사람이 무슨 눈알이라고 못 먹을까
요?"
"아무렴."
로이스가 싱긋 웃으며 화답했다.
"각하!"
못 참겠다는 듯 가윈이 대답을 재촉하고 나섰다.
"대답을 하셔야죠. 어느 부위를 먹었는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것을 잡았을 때의 나이입니다. 각하에 관한 전설이 네 살에서 열네 살 사이로 집중되어 있다 이겁니다."
"그렇던가?"
오히려 로이스가 능청을 떨었다. 그러자 제니퍼가 아리송한 눈길을 던지며 나섰다.
"나는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었어요. 어린아이일 때 늑대를 잡았다는 부분 말이에요."
로이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헨리 왕이 보스워드 필드에서 검은 늑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는걸."
"바로 거기서 한 마리를 잡았기 때문이죠!"
가윈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로이스가 사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때 싸움이 너무 오래 계속되는 바람에 사람이 모두 가죽밖에 안 남았어. 싸움이 끝나고 나서 왕이 날 보더니 배고픈 늑대 같다고 한 말이 퍼져서 그렇게 된 거야."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가윈이 끼어 들었다.
그러나 로이스가 그만드라는 얼굴로 가윈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만하면 오늘 저녁은 충분하다는 표정이었다.
이따금 엄습해 오는 산통을 느끼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던 제니퍼가 엘리너 숙모를 쳐다보면서 고갯짓을 했다. 그리고 로이스에게로 기대면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만 가서 쉬어야겠어요."
로이스가 그녀의 손을 꽉 쥐어 주고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엘리너 숙모가 따라 일어났다. 그러나 속모는 애릭 옆을 지나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봐요, 아직도 선물을 풀지 않았네."
벌써 다들 선물을 주고받았지만 애릭만은 저녁 식사 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애릭은 접시 옆에 놓인, 비단으로 감싼 물건을 그 큰 손으로 덮고 있었다. 그는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자 불편한 듯 후다닥 비단을 벗겼다. 자그마하고 둥근 것이 달린 은사슬이었다. 그는 그것을 얼른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릭 나름대로는 "깊은 감사의 정"을 의미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엘리너 숙모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애릭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엘리너 숙모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건넸다.
"그 안에는 말린 포도 꽃이 들어 있다우."
애릭의 짙은 눈썹이 한데 모아졌다. 그리고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걸 왜요?"
엘리너 숙모가 그의 귓가에 대고 짐짓 위엄 있게 속삭였다.
"하인들이 포도 꽃을 싫어해서. 정말이우."
엘리너 숙모는 제니퍼를 따라가는 바람에 애릭의 얼굴에 이상한 변화가 생기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그 변화를 보았고, 입을 딱 벌렸다.
애릭의 얼굴이 한 순간 굳는 것 같더니 바로 다음 순간 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눈가에 주름살이 지더니 주름살 아래로 살이 모여 들었다. 그리고 그 꾹 다문 입술이 떨렸다. 처음에는 한쪽 구석이 벌어지는가 싶었는데 이어 다른 쪽도 벌어지면서 하얀 이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세상에!"
고드프리 경이 고함을 질렀다. 그의 팔꿈치가 오른쪽에 앉은 라이오넬 경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고, 왼쪽의 브렌나 옆구리까지 툭 쳤다.
"저거 봐! 스테판, 저 친구가 미소를 짓고 있어! 우리 애릭이......."
그러나 고드프리 경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로이스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제니퍼가 불가로 가서 앉으려나 보다 하고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로이스가 맥주잔을 든 채 부리나케 회랑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제니퍼, 어딜 가는 거지?"
뭔가 심상치 않은 점을 감지한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회랑 위에서 엘리너 숙모가 고개를 내밀고 쾌활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공작 각하, 그 애가 지금 애를 낳으려고 하는 중이라우."
홀 안에 있던 하인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뜩였고, 하인 하나는 그 소식을 알리러 부엌 쪽으로 부리나케 사라졌다.
"오지 말아요!"
로이스가 막 계단을 밟으려 하자 엘리너 숙모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난 이런 일에 노련한 사람이라우. 당신은 방해만 돼요. 그리고 제니퍼 엄마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고 하지만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엘리너 숙모의 말에 로이스의 손에 들려 있던 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잔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홀을 울렸다.
이틀 후, 클레이모어의 모든 하인, 마을 사람, 그리고 기사들이 안뜰에 모여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러나 클레이모어의 후계자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며 이틀째 철야 기도를 올리는 그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지는 오래였다. 아기는 아직도 태어나지 않고 있고, 홀을 드나드는 하인들의 얼굴도 잔뜩 어두워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들을 통해서 흘러 나오는 소식은 그저 암울한 것뿐이었다. 예배당에 발을 들여 놓는 적이 거의 없던 공작이 네 시간 전에 예배당으로 들어갔고, 그 얼굴이 너무나 괴로워 보였다는 것도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홀의 문이 왈칵 열렸다. 기대 가득한 얼굴들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가 엘리너 숙모가 예배당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얼어붙었다. 잠시 후 공작이 홀의 문을 열어 제치고 뛰어 들어갔다. 그 수척한 얼굴에서도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제니."
로이스가 그녀의 베개 양쪽을 감싸면서 속삭였다.
제니퍼의 파란 눈이 살며시 떠지면서 졸리는 듯한 미소가 번졌다.
"아들이에요."
로이스의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도 들렸다. 그의 손이 제니퍼의 뺨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고마워."
아직은 이틀 동안의 공포가 채 안 가신 목소리였다. 로이스는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덮었다. 그의 부드러우면서도 거친 키스는 그녀의 무사함에 대한 안도감과 사랑을 담뿍 담고 있었다.
"아기 봤어요?"
로이스는 아기가 자고 있는 나무 요람으로 걸어갔다. 요람 앞에 선 그는 손가락으로 그 작은 손을 톡 건드려 보았다. 제니퍼를 건너다보는 그의 눈에 놀란 빛이 역력했다.
"음, 애가 작아 보이는데?"
제니퍼가 숨죽인 목소리로 웃었다.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듣자마자 로이스가 손잡이에 루비를 박은 검을 만들라고 명령한 일을 생각하니 웃음이 저절로 나오고 있었다.
"그 아기가 검을 들자면 아직은 좀 작은 셈이죠."
제니퍼가 놀리자 로이스의 눈에 즐거운 빛이 번쩍였다.
"물론 애릭의 검을 들어올릴 수야 없겠지만 말이야."
제니퍼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수심 어린 표정으로 바뀌었다. 해질녘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인데 수백 개의 횃불이 안뜰을 밝히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자기 아버지가 클레이모어에 왔을 때도 저렇게 횃불이 커졌다는 사실이 생각난 것이다.
그러자 로이스가 마지못해 아기 곁을 떠나 창가로 갔다가 다시 그녀 옆으로 왔다.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어."
그리고 약간 혼란스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 숙모를 내려보내서 사람들한테 다 잘됐다고 알리라고 했는데, 아마 중간에서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모양이야. 하긴 조금 전에 당신 숙모가 나한테 왔을 때 내가 예배당에서 뛰어 나오는 모습을 봤다면 걱정마라고 해도 잘 안 믿을 거야."
로이스가 후회하는 표정으로 말을 마치는 것을 본 제니퍼가 미소를 지으며 팔을 내밀었다. 로이스는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감기 들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로이스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이불로 단단히 감싼 다음 일으켜 세웠다. 잠시 후 그는 그녀를 데리고 발코니에 가 섰다.
안뜰에 있던 대장장이가 발코니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눈물로 기도를 올리던 얼굴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소 띤 얼굴로 제니퍼를 올려다보는 그들의 입에서 성이 떠나갈 정도의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니퍼 메릭 웨스트모어랜드는 그녀의 백성들을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어 답례를 했다.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더 높이, 그리고 더 가까이 끌어안을수록 함성이 더욱 높아져 갔다. 누가 보더라도 클레이모어 성의 공작부인이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는 제니퍼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