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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왕국(Kingdom of Dream) 2

7. 위험한 관계

해 뜰 무렵 천막이 전부 해체되었다. 5천 명의 기사와 용병, 그리고 시종들이 계곡을 빠져 나가는 소리가 아침 공기를 뚫고 울려 퍼졌다. 그 행렬 뒤에는 사석포(큰 돌멩이를 날리는 데 쓰는 무기)며 쇠뇌 등 성을 공격하는 데 쓰이는 온갖 무기를 실은 마차가 덜커덩거리며 따랐다.

제니퍼는 양쪽에 중무장한 기사들의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브렌나 옆에서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끄러운 소리와 먼지, 그리고 마음속의 혼란이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이 붕 뜬 것 같았고, 사람들이 전부 어딘지 달라 보였다. 오히려 브렌나가 의미 있는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가 그런대로 명석하다고 자신하던 제니퍼가 지금은 자꾸만 로이스 웨스트모어랜드에게 쏠리는 시선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로이스가 옆을 지나칠 때마다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가 낯설어 보였다. 검은 군마에, 건강한 어깨 너머로 휘날리는 검은 망토, 그리고 검은 구두, 온통 불길한 검은 색뿐이었다. 이제까지 제니퍼가 본 모습 가운데 가장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그는 그녀의 가족과 집안, 그리고 그녀가 아끼는 그 모든 것들을 파괴하러 나선 죽음의 이방인이었다.

그날 밤, 브넬나 옆에 누워서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던 제니퍼는 로이스 군대의 공격용 탑이 메릭 성의 고색창연한 벽을 무너뜨리는 장면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탑은 초원 위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었다. 전에도 그 탑을 수풀 사이로 언뜻 보긴 했지만 그때는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자신의 두려움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제임스 왕이 군대를 보낼 거라는 브렌나의 예언에 절망적으로 매달릴 뿐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전투가 정말로 벌어지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토록 열정적이고 부드럽게 키스를 하고 애무하던 사람이 돌변하여 그녀의 가족과 집안을 학살할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어젯밤 자신과 함께 웃고 즐기던 그 사람이 그럴 수는 없다고 믿는 것, 그것이 바로 그녀 마음 한쪽의 순진함이었다.

그러나 어젯밤의 일이 진짜 일어난 일이었는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때의 그는 정말 다정하고 감미로우면서도 집요한 연인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그는 그녀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잊은 듯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로이스가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행을 시작한 두 번째 날에도 그녀의 존재가 그의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팔에 안겼을 때 그녀가 보인 반응, 그 감미로운 키스와 애무의 기억이 두 번째 밤에도 생생하게 살아났다. 군사들의 대열을 따라가면서도 자꾸만 그녀를 힐끔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흠칫하곤 하는 것이 로이스의 낮의 일과였다.

지금, 대열의 제일 선두에서 달리면서도 로이스는 그녀의 음악소리 같은 웃음소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는 그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입가에 경쾌한 미소를 띠고 그를 쳐다보고 있는 제니퍼의 모습뿐이었다.

"네 생각엔 왜 내가 결혼하지 않은 것 같나?"

"당신을 원하는 아가씨 가운데 적당한 여자가 없어서 그랬나요?"

그랬다, 제니퍼는 그렇게 놀렸었다.

그녀가 짐짓 꾸짖는 척하며 웃음을 억지로 참던 모습도 눈앞에 떠올랐다.

"어떤 상황에서든 당신의 여신을 말재주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은 버려요. 당신한테는 그런 재주가 없어요........"

"내가 당신에 대해서 아는 걸로는 당신이 그 여자를 무릎에 엎어 놓고는 승낙하라고 때리는 장면밖에 상상이 안 가는군요."

로이스는 연약한 스코틀랜드 소녀가 그런 기쁨과 용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로이스는 자신이 그녀에게 점점 매혹되고 빨려 들어가는 것이, 그저께 밤 그녀가 지핀 욕망의 결과일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단순한 욕망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이름 자체만으로도 위험과 죽음이 연상되는 남자의 품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혐오감을 표출하든지 자극을 받는 여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제니퍼 메릭은 그렇지 않았다. 그날 밤 그가 그녀의 내부에서 이끌어 낸, 수줍지만 정열적인 반응은 공포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것은 부드러움과 욕망이 자연스레 표출된 것이었다. 그녀는 순진하게 그의 애무에 자신을 내맡겼다.

로이스가 그녀를 마음에서 지워 버릴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면 제니퍼가 그 온갖 소문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품위 있고 고결하며 다정한 꿈속의 기사로 여기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우울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로이스의 마음속에서 불쑥 화가 치밀었다. 그러다, 소녀다운 순진한 자아 도취였던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생각하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날 낮, 제니퍼는 늘 먹는 질긴 고기와 딱딱한 빵으로나마 끼니를 때우려고 막 브렌나 옆 풀밭에 앉으려다가 고개를 들었다. 애릭이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 바로 앞에 와 섰다.

"오시오."

꼭 필요할 때 이외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 그의 성격에 익숙해진 제니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렌나 역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애릭이 팔을 들었다.

"당신 말고."

애릭은 제니퍼의 팔 윗부분을 단단히 부여잡고 수백 명의 병사들 사이로 지나갔다. 모두들 자리를 잡고 스파르타식 식사를 하려 하고 있었다. 길 옆의 숲으로 그녀를 데리고 간 애릭은 로이스의 기사들이 서 있는 곳에 멈춰 섰다. 기사들은 로이스의 경비를 서고 있는 것 같았다.

고드프리 경과 유스테이스 경이 옆으로 비켜섰다. 언제나 쾌활하던 그들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해졌다. 애릭이 제니퍼의 몸을 가볍게 툭 밀었다. 등이 떠밀린 그녀는 조그만 공터 안으로 들어갔다.

백작이 넓은 어깨를 나무 등걸에 기대고 풀밭에 앉아 있었다. 한쪽 무릎을 세워 앉은 채 그는 그녀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외투를 벗고 긴 소매의 간편한 갈색 튜닉만 입고 있었다. 어제의 그 죽음과 파괴의 주인공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제니퍼는 그가 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그런 내색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의 차분한 눈길을 그대로 되받았다. 그러나 차츰 그의 침묵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녀는 최대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입을 열었다.

"나를 보자고 했나요?"

제니퍼의 말투가 어딘지 이상했다. 그는 입가에 비웃음을 날리며 대꾸했다.

"그랬지."

로이스의 야릇하게 비웃는 말투에 당황한 그녀는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물었다.

"왜죠?"

"물어 볼 게 있어서."

"우리가 지금 대화라는 걸 하고 있는 건가요?"

제니퍼의 말은 시무룩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가 고개를 젖히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시원한 웃음소리가 공터에 울려 펴졌다.

그녀의 얼굴에 사랑스런 당황함이 그대로 배어 나고 있었다. 로이스는 진지해졌다. 자신을 웃게 만들면서, 동시에 이틀 전보다 더욱 그녀를 원하게 만드는 그 순진무구함에 동정이 갔다. 그는 바닥에 깔린 하얀 천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 위에는 그녀가 먹던 고기와 빵 말고도 사과 몇 개와 치즈 덩어리가 더 있었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하고 같이 있는 게 좋아서 불렀어. 그리고 당신이 저기 군사들 틈에서 먹는 것보다는 여기서 나하고 같이 먹는 걸 더 좋아할 거라는 생각도 들고 해서. 내 말이 틀렸나?"

만약 그가 자기와 같이 있는 게 즐겁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제니퍼는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중하고도 굵직한 목소리로 보고 싶었다고 하는 데야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맞아요."

그러나 자부심과 신중함이 아울러 작용해 제니퍼는 로이스 가까이에 앉지 않았다. 그녀는 빨갛게 빛나는 사과 하나를 집으면서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쓰러져 있는 통나무 위에 앉았다.

몇 분 동안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그녀는 그와 함께 있다는 것에 대해 완전히 긴장을 풀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기분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제니퍼는 그 현상이 자신의 접근에 안심하게 만들고, 또 그날 밤의 사랑을 그렇게 무례하게 끝낸 자신의 행동을 잊게 만들고자 하는 로이스의 교묘한 노력의 결과라는 점은 추호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야 그의 다음 시도를 반사적으로 거부하지 않을 터였다.

로이스는 자신이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그녀의 아버지나 왕에게 보낼 때까지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었다. 이렇게 아늑한 곳에서 유쾌하고 느긋하게 점심을 즐기는 것만도 기분이 좋았다.

몇 분 동안 두 사람은 기사들에 관해서 일반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문득 로이스는 그녀의 전 청혼자에게 질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불쑥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는 자신도 놀랄 지경이었다.

"당신 기사하고는 어떻게 됐지?"

사과를 깨무는 제니퍼의 표정이 아리송했다.

"어떻게 되다뇨?"

"발더하고 어떻게 됐냐구? 아버지는 당신을 결혼시키고 싶어 했다고 그랬지? 그런데 발더가 왜 단념했을까? 어떻게 했길래."

그 질문에 제니퍼는 몹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대답을 생각할 시간을 벌려는 듯 그녀는 미끈한 두 다리를 가슴에 당겨 올리고는 팔로 감쌌다. 이어 턱을 무릎에 괴고는 웃음기 머금은 파란 눈으로 로이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나무 등걸에 기대어 지켜보고 있던 로이스의 마음이 그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어린 소년의 옷을 입은 숲의 요정이 빛나는 긴 머리를 휘날리고 있었다. 숲의 요정. 그 아름다움이 로이스의 마음속에서 노래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저러니 남자가 덤빌 수밖에 없으리라. 덕분에 두 나라 궁정의 이야깃거리는 더욱 풍성해지고.

", 질문이 너무 어려웠나? 좀 더 쉽게 물어 줄까?"

스스로에게 화라도 난 듯 로이스의 목소리가 꽤 날카로웠다.

"당신은 참 참을성이 없군요!"

제니퍼는 고귀한 집안의 여자다운 책망의 표정을 지었다. 로이스는 너무나 진지한 그 얼굴에 그만 쿡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감히 자신에게 설교를 하는 그 화난 작은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그러니 발더가 왜 물러났는지 말해 보라구."

"하라면 못할 것도 없죠.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문제까지 물어 보다니 정말 기사답지 못하군요. 그 질문이 사람을 얼마나 난처하게 만드는지를 잘 아시겠죠?"

"난처하다니? 누가? 당신, 아니면 발더?"

로이스는 그녀에게 망설일 틈도 주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거야 당연히 나죠. 발더 경은 화를 냈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그 사람이 약혼 서약을 하러 오기 전까지는 얼굴 한번 본 적이 없어요. 정말 무서운 경험 한번 한 셈이죠."

그러나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그 일이 무섭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먼저 이 점을 잊지 마세요. 그러니까 그때 내가 다른 열네살짜리 여자애와 똑같은 소녀였다는 점을 말이에요. 그 나이면 자기가 멋있는 젊은 기사의 신부가 될 거라는 꿈에 부풀어 있죠."

옛날 일을 생각하는 그녀의 얼굴에 우수에 가득 찬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금발머리에, 얼굴은 보기만 해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젊은 기사가 자기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푸른 눈에 왕자다운 기품이 있는 늠름한 사람이죠. 물론 권력도 있어야 돼요. 그래야 미래에 태어날 우리 아이들을 위해 땅을 보호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힐끗 로이스를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하여튼 그런 꿈을 갖고 있었어요. 나를 위해서 아버지나 오빠들은 발더 경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사전에 귀띔이라도 해 줬어야 했어요."

로이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멋내기 좋아하는 중년의 발더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드디어 홀에 나갔어요. 그 전에 내 침실에서 걸음걸이 연습을 몇 시간 했고요."

"걸음걸이 연습이라고?"

그렇게 되묻는 로이스의 얼굴에는 즐거우면서도 동시에 못믿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내 미래의 주인을 위해서 완벽한 그림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거죠. 홀 안에 뛰어 들어갔다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일 거고, 또 너무 천천히 걸어가면 마지못해서 그러는 것 같잖아요. 뭘 입느냐는 물론이고 어떻게 걷느냐도 정말 엄청난 문제더라구요. 그래서 이복 오빠인 알렉산더하고 말콤한테 남자의 입장에서 봐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윌리엄 오빠가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마침 새어머니와 함께 외출중이어서 집에 없었어요."

"그럼 오빠들이 발더에 대해서 귀띔을 해 주었겠군."

제니퍼의 눈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았지만, 로이스로서는 그녀가 고개를 흔들 때 느낄 동정심 또한 즐거움의 하나였다.

"아니, 정반대였어요. 알렉산더는 새어머니가 골라 준 옷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녹색 옷을 입으라고 했어요. 말이 충고지, 숫제 강제였어요. 새어머니의 진주 장식도 하라고 하더군요. 나야 그 말대로 했지요. 이번엔 말콤이 옆에 보석 박힌 단검을 차라는 거예요. 그래야 미래의 남편감한테서 악운이 옮지 않는다나요? 또 알렉산더는 내 머리가 너무 평범하고 붉다고 우기는 바람에 금색 베일에 사파이어 장식까지 했어요. 자기들 마음대로 치장시키고 나서야 걸음걸이 연습을 도와주더군요........"

그런 오빠들이었지만 그래도 집안에 대한 충성심 때문인지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 나한테 장난친 거였어요. 원래 오빠들은 여동생을 잘 놀리잖아요. 하지만 그때 난 너무 꿈에 부풀어 있어서 눈치도 못 챘어요."

로이스는 그녀의 말 뒤에 숨은 진실뿐만 아니라 그 속임수에 숨어 있는 매정한 악의도 간파할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이 앞에 있다면 주먹을 날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몰론 "장난" 으로 말이다.

"이것저것 하도 신경을 쓰다가 그만 늦고 말았어요."

이제는 생각만 해도 우스운지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한 그녀가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청혼자를 만나러 가는데 그렇게 늦은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거예요. 홀을 건너갈 때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그래도 알맞은 속도로 걸었죠. 목이며 손목, 또 허리에 진주, 루비, 사파이어, 금붙이들을 잔뜩 달았더니 그 무게도 만만치 않더라구요. 내가 앞에 섰을 때 나를 쳐다보는 새어머니의 표정을 봤더라면........그때 내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어요."

제니퍼는 명랑하게 웃었다. 그러나 로이스의 마음속에 일고 있는 분노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새어머니가 나중에 말씀하시는데 내가 꼭 걸어 다니는 보석 상자 같더래요. 그렇다고 무정하게 그러신 건 아니었어요."

제니퍼는 로이스의 얼굴에 떠오른 음울한 표정을 보고는 얼른 덧붙였다.

"새어머니는 정말 동정해 주셨어요."

그녀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로이스가 계속 파고들었다.

"당신 동생 브렌나는? 브렌나는 뭐라고 했는데?"

제니퍼의 눈이 반짝 빛났다.

"브렌나는 언제나 나한테 좋은 말만 하려고 하는 아이예요. 내가 아무리 엄청난 잘못을 저질러도, 또 내 행동에 아무리 화가 나도 말이죠. 그때 내가 태양과 달, 별처럼 빛났대요."

제니퍼의 입에서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즐거움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로이스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글쎄, 내가 반짝반짝 빛나더라나요."

로이스는 그녀를 쳐다보며 아주 진지하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보석 하나 없어도 빛나는 그런 여자도 있지, 당신처럼."

왜 그런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아주 굳어 있었다. 물론 일부러 그런 목소리를 내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제니퍼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냥 해 보는 말이죠?"

그녀가 자신을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으로 여기는 데 화가 난 로이스는 무뚝뚝하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렇게 대꾸했다.

"난 군인이야, 시인이 아니라구.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봐."

제니퍼는 부끄럽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해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의 종잡을 수 없는 변화에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쑥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녀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면서 용기를 내서 다시 얘기를 꺼냈다.

"하여튼 발더 경은 당신처럼 보석에 무관심한 사람은 아니더군요."

그녀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내 몸에서 번쩍이는 걸 보더니 거짓말 안 보태서 눈이 머리 앞으로 툭 튀어나오더라구요. 내 천박한 치장에 그대로 매혹돼서는 내 얼굴은 보는 둥 마는 둥 한번 쓱 훑어보더니 아버지한테 돌아서서 "데려가겠소" 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약혼하게 됐다?"

로이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나는 그때 졸도할 뻔했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처음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거든요. 쓰러지는 걸 윌리엄이 받아서는 의자에 앉혀 주었어요. 일단 의자에 앉아서 정신을 차린 다음에는 발더 경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더군요. 우리 아버지보다 더 늙은 데다가 나무 막대기처럼 말랐더라고요. 게다가 차림새가..........."

제니퍼는 말을 맺지 않고 주저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머진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하나도 빼먹지 말고 다 이야기해."

"다요?"

그렇게 묻는 그녀의 얼굴에는 마뜩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 전부 다."

"원하신다면. 하지만 별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에요."

"발더가 어떻게 차리고 있었지?"

한숨을 내쉬는 제니퍼의 모습에 로이스가 빙긋이 웃으면서 재촉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 차림새가......."

제니퍼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웃음을 거둔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글쎄 가발을 쓰고 있더라구요!"

제니퍼의 경쾌한 웃음소리에 맞춰 로이스의 입에서도 굵직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얼마나 우스웠는지 정신을 차리기 힘들더라구요. 그런데 이번엔 그 사람이 생전 보도 듣도 못하던 요리를 먹고 있는 거예요, 글쎄. 오빠들이 옷 입는 걸 도와줄 때 자기네들끼리 그런 얘기를 하긴 했어요. 발더 경이 식사 때마다 꼭 아티초크(국화과 식물, 그 봉오리로 마든 요리)를 먹는 별난 습성을 갖고 있다고 말이죠. 그 말이 생각나면서 발더 경의 접시에 쌓인 그 이상한 요리가 아티초크라는 걸 깨달았죠. 덕분에 난 그 자리에서 쫓겨났어요. 발더 경은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더군요."

발더가 정력제라면서 아티초크라는 것을 먹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로이스는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 가며 물었다.

"어떻게 됐길래?"

", 그때 난 정말 머리가 돌 것 같았어요. 그런 사람하고 결혼하는 걸 상상만 해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더라구요. 그 사람은 소녀의 악몽이었어요. 테이블에 앉아서 그 사람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 때는 정말 숙녀고 뭐고 간에 내 눈을 쥐어박고 싶었어요. 어린 아기처럼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뿐이더라구요."

제니퍼의 그 불같은 성미를 생각하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안 그랬죠. 차라리 그랬으면 더 나았을 텐데........"

제니퍼가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 행동은 더 지독했어요. 차마 그 사람을 쳐다볼 수가 없어서 생전 처음 보는 그 아티초크만 보고 있었어요. 그 사람, 그걸 게걸스럽게 먹더군요. 나는 저것들이 도대체 뭐고 저 사람은 왜 저런 걸 먹고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말콤이 내가 쳐다보고 있는 걸 눈치 채고는 발더 경이 왜 그걸 먹고 있는지 설명해 주더군요. 그 말을 들으니까 웃음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웃음이 가득한 눈으로 로이스를 쳐다보며 제니퍼는 쾌활하게 물었다.

"아티초크라니! 도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어요?"

로이스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서야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낼 수 있었다.

"아티초크가 남자의 용기에 도움이 된다고 믿지 않는다는 말인가?"

", ......."

제니퍼는 얼굴을 붉혔다. 그 질문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말인지 깨달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또 호기심이 나기도 했다.

"당신은 믿나요?"

"아니."

로이스가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다들 하는 말이 파하고 호두가 그렇다고는 하더구먼."

"파하고 호두가요!"

제니퍼의 입에서 어리둥절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그녀는 로이스의 어깨가 웃음을 참느라 들썩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책망하는 빛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하여튼 발더 경은 나를 아내로 맞는 것이 세상의 보석을 다 가지는 것보다 더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더라구요. 말이야 맞는 말이지 뭐예요. 그런데 몇 달 후에 내가 또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어요."

이번에는 훨씬 더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러고 나자 우리 아버지는 새어머니보다 훨씬 더 강력한 안내자가 내게 필요하다는 결심을 하시더군요."

"그때 저지른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은 뭐지?"

제니퍼가 진지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알렉산더 오빠한테 공개적으로 도전을 했어요. 나에 대해서 떠들고 다니는 말을 취소하라구요. 아니면 시합장에서 보게 될 거라구요. 메릭 근처 시합장에서 연례 경기를 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오빠는 거절했고."

"당연하죠. 어쨌든 오빠로서야 체면이 깎이는 일이죠. 내가 여자인 데다가 그때 기껏 열네 살이었고 오빠는 스무 살이었거든요. 하지만 난 오빠의 자존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어요. 오빠는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녀의 마지막 말에는 비통함이 잔뜩 배어 있었다.

"그래, 복수를 하긴 했어?"

로이스는 왠지 모르게 자신의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가에 쓴 미소가 언뜻 비쳤다.

"시합장 근처에도 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엄명이 있었지만 나는 무기 담당관을 설득해서 말콤 오빠의 갑옷을 빌렸어요. 드디어 시합 당일 날, 나는 남자처럼 하고는 경기장에 나갔어요.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라봤어요. 알렉산더 앞에 가서 섰죠. 알렉산더는 시합장에서 나서기를 잘 하거든요."

로이스는 어린 그녀가 창을 꼬나든 남자를 향해 말을 달리는 모습을 상상하자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을 받았다.

"말에서 떨어져 죽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자 제니퍼가 낄낄거렸다.

"말에서 떨어진 건 알렉산더였어요."

로이스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짐작도 안 가는 그 마에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이 오빠를 말에서 떨어뜨렸다구?"

"그랬다고 할 수 있죠. 알렉산더가 날 치려고 창을 드는 순간 내가 투구의 면갑을 들어 올리고는 혀를 날름했죠."

잠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입만 벌리고 있던 로이스가 이윽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니퍼가 신나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랬더니 자기가 자기 말에서 떨어지더라구요."

작은 공터 바깥에서는 기사와 시종, 그리고 용병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백작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숲을 쳐다보고 있었다.

겨우 웃음을 멈춘 로이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존경한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주 멋진 전략이었어. 나 같으면 그 자리에서 당신을 기사로 임명했을 거야."

"아버지는 감동을 받을 수가 없었죠. 사실 알렉산더의 마상 재주는 우리 집안의 자랑거리인데 내가 미처 그걸 생각 못했어요. 아버지는 날 채찍으로 때리셨어요. 하긴 맞아도 싸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 길로 수녀원으로 보내셨고요."

"거기서 2년 동안이나 가두었지."

로이스가 말을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걸걸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제니퍼는 짧은 거리에 마주앉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보고 있노라니 놀라운 사실 하나가 차츰 가슴에 와 닿았다. 그가 잔인하고 사나운 야만인이라고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 어리석은 소녀에게 동정심을 느낄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은 그의 얼굴에 드러난 부드러운 표정에 잘 나타나 있었다. 최면에라도 걸린 듯 그녀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눈은 강력하게 자신을 빨아들이고 있는 그의 눈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앞으로 다가오자 제니퍼는 자신이 뭘 하는지 의식도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속삭였다.

"내 생각엔 당신 소문이 아무래도 거짓말 같아요. 당신이 뭐 어떻게 했다고들 하는 말들은 사실이 아니에요."

그녀의 눈은 그의 영혼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그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아니, 다 사실 그대로야."

로이스는 간단하게 말을 잘랐다. 수없이 많이 치른 전투 장면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적의 시체와 부하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싸움터의 그 핏빛이 마음을 적시고 있었다.

제니퍼로서는 그의 황량한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온순한 마음은 그의 말을 거부하고 있었다.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자신의 죽은 말에게 보내던 그 고통의 눈빛과 달빛에 비친 비통한 표정만이 그녀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은 이야기에 동정을 보내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난 믿지 않아요."

"믿어!"

로이스의 말에 실린 것은 경고의 뜻이었다. 그로서는 그녀가 자신을 잔인한 정복자로 생각하는 것도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품위 있고 빛나는 갑옷을 입은 기사로 생각하는 것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의 입에서 단호한 말이 이어졌다.

"대부분 사실이야."

제니퍼는 그가 지금 자신을 안으려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의 손이 벨벳 수갑처럼 팔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입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 육감적인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본능이 너무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다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공포가 밀려 왔다. 제니퍼는 얼굴을 홱 돌렸다.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내려앉기 바로 직전이었다. 마치 달리기라도 한 듯 그녀의 숨결이 거칠었다.

그러나 로이스는 개의치 않고 대신 관자놀이에 키스했다. 그는 그녀를 더욱 꼭 껴안으며 뺨에, 그리고 목의 육감적인 선을 따라 입술을 문질렀다.

"안 돼요."

제니퍼가 숨을 몰아쉬며 겨우 한마디 입 밖으로 냈다. 그녀는 얼굴을 더욱 돌렸다. 지금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아 그의 옷을 부여잡고 몸을 지탱하기도 힘들었다.

"제발."

그녀의 속삭임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로이스의 팔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고, 그의 뜨거운 혀는 귀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의 혀는 탐욕스럽게,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그 모든 곡선과 틈새를 탐색하고 있었다. 등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갈망을 느낀 그녀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제발, 그만해요."

제니퍼의 애타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로이스의 손은 더욱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허리를 자신의 몸에 바싹 당겼다. 그의 단단해진 허벅지가 그녀의 몸에 닿았다. 그것은 이제 그만둘 수도, 그만두지도 않겠다는 분명한 선언이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감미롭게 토닥거렸다. 키스를 할 수 있게 고개를 들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의 옷에 얼굴을 묻으면서 그의 부드러운 권유를 거절했다. 그러자 그녀의 목덜미에 와 있던 손에 힘이 가해졌다. 그게 명령이든 권유든 더 이상 거부할 수 없게 된 제니퍼는 천천히 얼굴을 들어 그의 키스를 받았다.

로이스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고, 뜨거운 입술은 그녀의 입술을 정열적으로 탐닉하고 있었다. 제니퍼는 뜨거운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은 그의 관능적인 입술과 손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것도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망각의 세계였다.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벌려 밀고 들어오는 그의 혀를 환영했다. 그녀가 그에게 더욱 몸을 밀착시키자 그가 훅 하고 가쁜 숨을 토해 냈다. 그의 손이 등과 옆구리, 그리고 가슴을 더듬다가 이윽고 밑으로 내려가 그녀를 자신의 더욱 딱딱해진 몸에 바싹 붙였다. 그의 손이 허리 사이로 밀고 들어와 엉덩이를 감싸는 순간, 그녀의 몸에 뜨거운 불덩이 하나가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의 단단하게 부풀어오른 남성이 살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자신의 달아 오른 맨살을 쓰다듬는 손의 자극적인 느낌과 자꾸만 살을 헤집고 들어오는 딱딱한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욕망에 제니퍼는 이제 제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의 가슴을 쓰다듬고 있던 손으로 목을 휘감은 그녀는 자신을 그와 쾌락에 내맡겼다. 그의 쾌락을 나눌 뿐만 아니라 한층 더 자극해 가며 제니퍼는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에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에게서 입을 뗀 로이스는 그녀를 으스러져라 꼭 껴안았다. 그의 숨소리는 아주 거칠었다. 눈을 감고 그의 목에 팔을 휘감고 있는 제니퍼는 귓전에 울리는 그의 고동 소리를 들으며 완전한 평화와 묘한 열정 사이에서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 신비로운 감정을 경험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러나 오늘, 그는 그 이상의 것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자신을 소중하게 다루면서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는 감정. 지금 제니퍼는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싶은 그 느낌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로이스의 단단한 가슴에서 얼굴을 떼고 고개를 드는 순간 뺨이 그의 부드러운 옷에 닿았다. 살갗에 와 닿는 그의 옷 감촉에도 제니퍼는 하늘이 도는 것 같았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녀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은빛 눈 속에는 여전히 뜨거운 열정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그의 입이 열리더니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당신을 갖고 싶어."

이번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의미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제니퍼의 입에서는 마치 머리에 담고 있던 것이 아니라 심장에 담고 있던 것처럼 곧바로 질문이 튀어나왔다.

"메릭 성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을 정도로요?"

"아니."

로이스가 냉정하게 대꾸했다. 일말의 주저도, 후회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원치 않는 식사를 거부하듯 아주 쉽게 거부했다.

그 한마디에 제니퍼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몸을 뒤로 뺐고, 그의 손도 떨어졌다.

수치와 충격에 휩싸인 채 제니퍼는 떨리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머리와 옷 매무새를 다듬었다. 지금 이 순간, 어서 여기서 빠져 나가고만 싶었다. 울음이 터져 나오면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제안한 것을 그가 거부했다고 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비참해지는 가운데서도 그에게 어리석은 것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뉘우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모든 것을 주려고 했는데 그가 그렇게 쉽게 거부했다는 사실이 못내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의 자존심, 명예, 육체, 이제까지 고귀하다고 믿어 온 모든 것들을 다 희생하려고 했는데 그토록 쉽게, 그리고 냉정하게 거부를 하다니.

제니퍼가 막 숲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그의 목소리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당겼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도록 냉혹한 권위를 풍기는 목소리였다.

"제니퍼, 이제부터는 내 옆에서 같이 가도록."

"그러지 않겠어요."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에게 자신이 지금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가 보여 주느니 차라리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더 나으리라.

제니퍼는 더듬거리며 덧붙였다.

"당신 부하들이 어떻게 볼까요? 가윈이 언제나 같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내내 당신 천막에서 잤는데. 내가 당신하고 같이 밥도 먹고, 말도 같이 타고 가면...... 오해할 거예요."

"부하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그러나 전적으로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은 로이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제니퍼를 "손님" 으로 대우하는 바람에 지쳐 있는 부하들한테 얼굴이 깎이고 있었다. 게다가 부하들이 모두 충성심에서 그를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용병 가운데는 도둑놈도 살인자도 있었다. 또 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에 따르는 자도 있고, 혹시 거역했다가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따르는 자도 있었다. 그는 힘으로 그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충성스런 기사든 평범한 용병이든 다들 로이스가 그녀를 쓰러뜨리고 그녀의 육체를 능욕하는 것이 그의 권리요, 의무라고까지 믿고 있었다. 적에게야 그렇게 대우하는 것이 당연할 터였다.

"물론 상관없겠죠."

제니퍼는 쓰디쓰게 되받았다. 그의 팔에 안겼던 순간이 또렷하게 되살아나면서 모욕감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박살나는 건 내 명예지 당신 명예가 아니니까요."

그러자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그가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부하들은 다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게 되어 있어. 말을 끌고 앞으로 오도록 해."

제니퍼는 말없이 백작에게 경멸의 눈초리를 던지고는 턱을 곧추세우고 공터에서 빠져 나왔다. 그녀의 가냘픈 허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아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숲을 빠져 나오기 직전 언뜻 보았을 뿐인데도 제니퍼의 머릿속에는 그의 눈에서 빛나던 묘한 눈빛과 입가에 떠오른,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미소가 뚜렷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것이 뭔지는 몰랐지만 그 미소를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가 치밀면서 자신이 더욱 비참해졌다.

스테판 웨스트모어랜드나 유스테이스 경, 또는 고드프리 경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면 그 표정이 무슨 뜻인지 그녀에게 이야기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들으면 그녀는 훨씬 더 당황했을 것이다.

로이스의 얼굴은 특별히 도전할 만한 성을 점령하려고 할 때의 바로 그 얼굴이었다. 저항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요, 이미 승리를 내다보고 있는 얼굴이었다.

사람들이 나무 사이로 두 사람이 껴안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로이스와 함께 웃던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제니퍼는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면서 포로가 된 후 받아 왔던 것보다 훨씬 더 심술궂은 눈초리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을 감내해야 했다.

잠시 후 로이스가 급할 것 하나 없다는 듯이 숲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애릭을 힐끔 쳐다보며 명령을 내렸다.

"저 여자를 우리하고 같이 가게 하도록."

로이스는 가윈이 고삐를 잡고 있는 말로 다가갔다. 그러자 기사들이 자동적으로 말에 올랐다. 많은 세월을 말 등에서 보낸 사람들답게 날렵한 몸짓이었다. 뒤이어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나머지 군사들도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도 그의 포로는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한 듯 앞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로이스는 그 용기가 가상했지만 불복종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애릭을 향해 돌아서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누르며 말했다.

"가서 데리고 오도록."

로이스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괜히 욕망에 맞서 더 이상 갈등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나니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하딘 성에 가는 동안 그녀를 구슬릴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하딘에 도착하고 나면 푹신한 침대를 하나 고른 다음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조용히 그녀와 단둘이 있을 작정이었다. 이제부터는 더할 나위 없는 쾌락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로이스는 자신의 품에 안겨 두 번이나 달콤한 쾌락을 선사했던 그 부드럽고 순진한 여인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는 그가 여자한테 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것도 자기 품 안에서 자기만큼이나 강렬한 욕구를 표현했던 바로 그 여자한테 말이다.

그는 일찍이 상상도 못했던 욕망을 그녀에게 느꼈고, 그 욕망을 누르고만 있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물론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그는 기꺼이 타협할 작정이었다. 수행원들이 그녀를 자신의 연인으로 대우하도록 적당한 존경심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멋진 모피와 보석도 줄 생각이었다.

좀 전에 헤어질 때 로이스가 보였던 웃음이 다시 생각나면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 바로 그 순간, 제니퍼는 거인이 대열 맨 끝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말을 홱 돌린 애릭이 바로 그녀 옆에 와 서면서 차갑게 눈썹을 올렸다. 자기와 함께 앞으로 가자는 말없는 명령이 분명했다. 그러나 분노가 극에 달한 제니퍼는 겁을 먹지 않았다. 그가 왜 나타났는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돌려 브렌나에게 말을 걸었다.

", 봤니........"

그러나 미처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애릭이 능숙한 솜씨로 제니퍼가 잡고 있던 암말의 고삐를 낚아챈 것이다.

"내 말에 손대지 마!"

제니퍼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의 고삐를 홱 잡아당겼다. 덕분에 말 머리가 하늘로 쳐들렸다. 말이 깜짝 놀란 듯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그녀는 그 거역할 수 없는 적의 사절에게 치솟는 분노를 대신 퍼부었다.

"손 치워!"

그녀는 애릭을 노려보며 쥐고 있는 고삐를 잡아당겼다. 창백한 푸른 눈이 냉담하게 그녀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입을 열지 않을 수는 없었고, 그것은 제니퍼의 작은 승리였다.

"이리 와!"

적의에 불타는 제니퍼의 눈동자가 그의 파란 눈에 가 꽂혔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명령을 따를 뿐인 그와 씨름한다고 해서 분이 풀리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매섭게 쏘아 붙였다.

"그럼, 공손하게 내 앞에서 비켜!"

대열의 맨 앞으로 가는 길은 그녀의 젊은 생에서 가장 모욕적인 사건이었다. 이제까지 그녀는 남자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는 곳에 있었고, 있다 해도 기사들의 호위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지나가자 남자들의 고개가 돌아오면서 탐욕스런 눈길이 그녀의 가녀린 몸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그리고 뭐라고 한마디씩 하는데, 다 그녀의 몸에 관한 외설스런 말이었다. 어디가 어떻고, 저기는 어떻다는 말들을 들으면서 그녀는 말에게 채찍을 가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녀가 앞으로 오는 것을 본 로이스는 미소를 금치 못했다. 경멸의 빛이 가득한 눈빛을 던지는 그 모습은 단도를 들고 덤비던 밤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의 입에서 놀리는 말이 튀어나왔다.

"어째, 내가 싫어진 모양이군."

그 말에 대꾸하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경멸이 듬뿍듬뿍 담겨 있었다.

"당신은 말상대할 가치도 없어요!"

", 그 정도야?"

로이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8. 그녀만을 원한다

다음날,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했다. 하딘성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로이스는 더 이상 정중한 얼굴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의 위트를 즐기고 싶다는 바람도 사라졌다. 로이스는 지금 아무리 놀려도, 혹은 심각하게 쳐다보아도 멍하니 공손한 눈길로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한 젊은 여자와 같이 달리고 있었다. 그 눈길을 보노라면 자신이 마치 모자에 종을 단 궁중의 어릿광대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제니퍼가 전략을 바꾼 것이다. 그녀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로서는 같이 토론할 수도 없고, 하려고도 들지 않는 문제만 물어댔다. 예를 들면 메리 성을 공격할 날짜라든가, 공격에 참가시킬 군사의 수, 그리고 자신을 언제까지 잡아둘 것인가 등이었다.

만약 그녀의 의도가 자신이 야만적인 힘의 희생물이라는 점을 가장 분명한 방법으로 보여 주자는 것이었다면 그 목표는 달성된 셈이었다. 또 그를 화나게 할 생각이었다면 그 역시 이제 막 성공이 눈앞에 있었다.

제니퍼는 자신이 그의 여행을 망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성공이 로이스의 추측만큼 신나지는 않았다. 사실, 성을 보려고 바위투성이 구릉지대를 둘러보는 순간, 그녀는 앞에 있는 이 불가사의한 남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오는 기장으로 인해 탈진 이상의 것을 느꼈다. 거기다 일일이 대꾸하는 것도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백작은 그녀를 원한다고 했고, 그녀가 이틀 동안이나 무례하게 구는 것을 참아 내는 것을 보면 상당히 절실히 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점 때문에 그녀로서는 상처 입은 자존심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사람들을 살려 줄 정도로는 원하고 있지 않았다.

암브로스 수녀는 제니퍼가 남자들한테 미칠 "영향" 에 대해서 경고한 바 있었다. 수녀원장이 말하는 그 "영향" 이라는 것이 어떤 남자든 제니퍼와 한 시간만 같이 있으면, 가증스럽고 거칠며 예측할 수 없는 미치광이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란 너무 어려웠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제니퍼는 한시 바삐 집으로 가고 싶을 뿐이었다. 아니면 수녀원에라도. 그곳에서는 최소한 사람들한테 뭘 기대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니.

제니퍼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브렌나는 스테판 웨스트모어랜드와 즐겁게 재잘거리느라 이쪽은 보지도 않고 있었다. 스테판은 제니퍼가 자기 형과 앞에서 달리고 있는 동안 내내 마치 그녀의 보호자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브렌나가 안전하며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만이 불길한 예감에 떠는 제니퍼의 가슴에 비치는 단 하나의 빛이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바로 직전, 하딘 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절벽 꼭대기에 높이 솟은 하딘 성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삼림 같았다. 저물어 가는 햇빛에 비친 석벽이 사방으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제니퍼는 가슴이 철렁했다. 메릭 성보다 다섯 배는 커보이는 성의 모습이 가히 난공불락이었다. 여섯 개의 첨탑에 펄럭이는 파란 깃발들은 이 성의 주인이 도착한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덜컹덩거리는 도개교 위를 건너간 일행이 외벽 안으로 들어 가자 하인들이 뛰어나와 말의 고삐를 잡으며 입성하는 사람들을 도왔다. 백작은 제니퍼가 말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준 다음, 홀 안으로 안내했다. 관리인이 틀립없는, 구부정한 초로의 남자가 다가오자 백작이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을 시켜서 쉴 곳을 준비하게 하도록. 나하고 내........"

그 순간 로이스의 머리는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말을 찾느라 바빴다. 관리인은 그녀의 옷차림새를 힐끔 훑어보았다. 경멸에 가득 찬 표정이 그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매춘부. 로이스의 말이 떨어졌다.

""손님" 한테도."

군대를 따라다니는 창녀로 오해받는다는 것은 제니퍼로서는 정말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다. 빤히 쳐다보는 노인의 얼굴에서 분노에 찬 시선을 홱 거둔 그녀는 거대한 홀을 검사하는 척했다. 로이스는 계속해서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의 말로는 최근에 하딘 성을 헨리 왕으로부터 받았지만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여자의 눈에도 성이 비록 크기는 하지만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루 위에는 오랜 세월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쓸모없는 것들만 잔뜩 널려 있었다. 높은 곳에는 거미줄이 매달려 있고, 나무 천장은 잿빛 커튼과 마찬가지로 빛이 바랬으며, 하인들의 옷차림도 누추했다.

"뭘 좀 먹겠소?"

로이스가 그녀에게로 돌아서며 물었다. 하인들 앞이라 그런지 말투도 달라졌다.

제니퍼는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 참모습이 아니라는 점을 늙은 관리인-그리고 그의 칠칠맞은 하인들한테도-에게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는 자존심과 분노가 교차하는 표정으로 백작에서 돌아서서 차갑게 대답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요. 먼저 이 홀보다 깨끗한 방을 봤으면 좋겠군요. 목욕도 해야 하고, 깨끗한 옷도 입어야겠어요. 하긴 이런 바위덩어리 안에 그런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만약 관리인의 표정을 보지 않았다면 그는 그녀의 말보다 더욱 심한 말로 대꾸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표정을 본 이상 성질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관리인에게 돌아서서 명령했다.

"메릭 여백작을 내 방 바로 옆의 방으로 모시도록."

그리고 나서 제니퍼에게 차갑게 말했다.

"두 시간 후에 여기서 저녁을 먹을 거요."

그가 호칭과 말투를 바꿔 준 데 대해서 고마운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방을 그렇게 지정하자 그녀는 그만 다시 분노가 치밀고 말았다.

"나는 내 방에서 먹겠어요. 문을 잠그고 말이에요. 안 그러면 아무것도 먹지 않겠어요."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쉰 명의 하인들이 입을 딱 벌렸다. 제니퍼가 이렇게 하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을 거부하고 나오자, 로이스는 지난 이틀간의 행동까지 포함해 더욱 단호한 보복이 필요하다는 결심을 굳혔고, 주저 없이 실천에 옮겼다.

"제니퍼, 그 태도가 공손해질 때까지 동생을 만나는 것을 금하겠다."

자신의 말이 얼마나 가혹한 처벌인지 안다는 차분하고도 단호한 목소리가 떨어지자 제니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막 스테판과 함께 홀 안으로 들어서던 브렌나가 애원의 눈길을 제니퍼에게, 그리고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던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스테판이 나섰다.

"로이스, 브렌나 양한테 너무 심한 벌입니다. 브렌나 양은 아무......."

그러나 그는 형이 던진 싸늘한 불쾌감에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상쾌하게 목욕을 하고 면도도 한 후 넓은 홀로 나간 로이스는 기사들과 동생과 마주앉았다. 하인들이 차려 놓은 접시 위에서는 사슴고기 스튜가 식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로이스의 관심은 그 맛없어 보이는 음식에 있지 않았다. 그는 이층의 침실로 이어진 좁은 나선형 계단을 쳐다보고 있었다. 올라가서 두여자를 끌고 내려와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두어야 하는지 생각 중이었다. 브렌나까지 언니의 반역에 동참해서 음식이 준비되었다는 하인들의 알림을 무시하고 있었다.

"저래 봤자 먹지 않고는 못 배기지."

이윽고 로이스가 결론을 내린 듯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나무 식탁이 해체 되어 다시 벽에 세워진 지도 한참 지났다. 로이스 혼자 넓은 홀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다리를 걸치고 앉아 벽난로에 지펴진 불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밤 제니퍼와 같이 있어야겠다는 마음은 산더미처럼 밀려든 일에 저만치 밀려나 있었다. 아까 저녁을 먹기 시작하던 순간부터 신경을 곤두세워서 일을 처리하다 보니 그 생각을 제쳐 놓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다시 그녀의 방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있었다. 그러나 기분 상 그녀를 부드럽게 달래기보다는 아무래도 힘으로 정복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진해서 팔에 안겼을 때의 그 짜릿한 쾌감을 경험한 이상 다른 방식을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드프리와 유스테이스가 들어왔다. 가슴이 풍만한 하녀와 기분좋은 시간을 보낸 듯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 순간 로이스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정문의 경비병한테 성 안으로 들어오려는 자가 있으면 일단 가둔 다음 나한테 보고하라고 하도록."

고드프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납득이 안 가는 표정을 지었다.

"메릭이 걱정됩니까? 그는 군대도 못 모을 뿐더러 여기까지 오려면 한 달은 넘게 걸릴 겁니다."

"공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야. 속임수를 쓸 것 같아. 하딘을 공격했다간 전투 와중에 딸들이 자기네 군사들 손에 죽을 수도 있고. 그야 물론 우리가 먼저 죽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말이야. 하여튼 이런 상황에서 공격은 생각하기 어려운 거고, 그렇다면 여자들을 빼낼 생각을 하겠지. 그러자면 먼저 부하를 이곳에 침투시키려고 할 거야. 관리인한테도 특별히 아는 마을 사람이 아니면 하인으로 쓰지 말라고 일러두었어."

두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이스는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 홀 끝에 있는 돌계단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뒤로 돌아서서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는 물었다.

"혹시 스테판이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그 동생한테 흥미가 생긴다든가, 아니면......."

스테판보다 나이가 많은 두 기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 로이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왜 그런 말을?"

유스테이스의 의아스런 물음에 로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 오후에 내가 두 여자를 떼놓으라고 명령하니까 그 여자를 두둔하고 나서길래."

로이스는 두 기사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침실로 올라갔다.

 

 

 

9. 사랑의 계략

다음날 아침, 부드러운 모직 잠옷으로 몸을 감싼 제니퍼는 침실의 작은 창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성벽 바로 너머에 숲이 울창한 구릉지대가 뻗어 있었다. 안뜰로 눈길을 돌린 그녀는 천천히 그 두꺼운 성벽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분명 탈출구가 있을 터였다. 물론 눈에 쉽게 띄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하나는 있어야 한다. 메릭 성에는 덤불로 가려진 문이 성벽에 숨겨져 있었다. 그녀가 아는 바로는 어떤 성이든 적이 바깥 방어선을 뚫으면 주민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둔 비상구가 하나는 있다. 그러나 그런 문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흔적은커녕 3미터 두께의 돌벽에는 몸이 빠져 나갈 틈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성벽 위에는 앞의 큰 길과 구릉지대를 번뜩이는 눈초리로 감시하고 있는 경비병들이 쉼 없이 오가고 있었다. 그 지역에서 모집한 병사들은 게으르고 규율도 엉망이었지만 백작이 성의 방어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6미터 간격으로 선 경비병들의 모습에 그녀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백작의 이야기로는 아버지가 브렌나와 그녀가 잡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5천 명이나 되는 군대를 뒤쫓아 하딘까지 올 리는 없었다. 제니퍼와 브렌나를 구출하기 위해 메릭에서부터 전속력으로 말을 몰면 이틀이면 이곳에 도착할 수 있다. 걸어서 온다 해도 닷새 이상은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이렇게 경비가 삼엄한 성에서 과연 자기들을 구출해 낼 수 있을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든 탈출해야 하는 것이다.

배에서 꼬드륵 소리가 났다. 어제 낮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제니퍼는 창문에서 돌아섰다. 옷을 입고 홀로 내려갈 작정이었다. 굶어 죽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신세가 스스로도 가련해서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오늘 아침 백작이 방으로 보내 온 옷 트렁크 쪽으로 갔다. 안 내려가겠다고 버텨 보았자 백작이 문을 부수고서라도 들어올 게 뻔했다.

그래도 뜨거운 물이 가득 찬 나무 욕조 속에 몸을 담그니 머리에서 발끝까지 깨끗해지는 느낌에 모처럼 상쾌했다. 지난 몇 주 동안 살을 에는 듯한 시냇물에 들어가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뜨거운 물과 비누가 있는 이곳은 천국이었다.

첫 번째 트렁크에는 이 성에 먼저 살던 부인과 딸들이 입던 가운들이 있었다. 엘리너 숙모가 좋아하는 귀엽고 별난 스타일이었다. 머리를 높이 올리고 길다란 베일을 마루에 끌며 거니는 여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비록 유행은 지난 것들이었지만, 비싼 공단과 벨벳에 비단으로 장식한 것으로 보아 옷에는 돈을 아끼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처지에는 맞지 않는 옷들이었다. 제니퍼는 다음 트렁크를 열었다. 곱디 고운 캐시미어 가운 하나를 집어 드는 그녀의 입에서 여자의 기쁨이 뭔지를 말해 주는 탄성이 튀어나왔다.

막 머리를 매만지고 났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공포에 사로잡힌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백작님께서 말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5분안에 홀에 내려와 식사를 하지 않으시면 백작님께서 직접 데리러 오시겠답니다요!"

제니퍼는 자신이 위협에 굴복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백작님한테 전해요. 안 그래도 내려갈 생각이니 몇 분 더 기다리라고."

제니퍼는 "" 분을 더 지체하다가 침실에서 나섰다. 침실에서 아래층의 홀로 내려가는 계단은 메릭 성의 계단과 마찬가지로 아주 가파르고 좁았다. 그래야 적군이 안으로 쳐들어왔을 때 좀 더 쉽게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좁고 가파른 계단에서 위를 향해 공격하는 것이 방어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은 여자인 제니퍼로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저기 거미줄이 늘어져 있는 것이 메릭과는 다른 점이었다. 거미줄 안에 살고 있을 징그러운 것들을 생각하니 걸음이 자연히 빨라졌다.

로이스는 몸을 뒤로 기대고 계단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턱을 바짝 당긴 그의 마음속에서는 시한폭탄이 째깍거리고 있었다. 기사 몇 명이 맥주잔을 홀짝거리고 있고, 하인들이 아침 식탁을 차리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을 뿐, 홀 안에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드디어 시간이 다 됐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로이스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의자 다리가 판석에 끌려 끽끽 거렸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박힌 듯 서고 말았다.

황금빛 햇살을 받으며 잘록한 허리선의 부드러운 가운을 입은 제니퍼 메릭이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껏 보아 오던 매력적인 요정이 아니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 나가고, 온 정신이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를 향해 걸어오는 여성은 이 땅 최고의 궁정에나 어울릴 당당한 여백작이었다. 가운데에서 가리마를 탄 머리가 불타오르는 황금빛 폭포처럼 어깨를 지나 허리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폭포의 끝은 굵은 컬을 이루며 말려 올라갔다.

V자로 팬 목 부분은 그 풍만한 가슴을 더욱 강조하면서 저 아래 우아한 엉덩이까지 부드러운 선을 그리고 있었다. 손목 부분이 꽉 죄어진 넓은 소매는 팔의 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로이스는 그녀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 파란 눈과 매혹적이 얼굴이 점점 다가오자 그녀가 제니퍼가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니퍼가 앞에 와 섰다. 그녀를 갖고야 말겠다는 그의 결심은 이제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필코 이루어야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더욱 굳게 다져졌다. 그의 얼굴에 찬탄의 미소가 천천히 떠올랐다.

"카멜레온 같군!"

"도마뱀 말인가요?"

무척 분개한 듯 그녀의 눈꼬리가 잔뜩 올라갔다.

로이스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가운 위로 드러난 그녀의 부드러운 육체가 풍기는 유혹에서 눈을 돌리려고 애쓰는 한편, 방금 전까지 얼마나 화가 나 있었나를 생각하니 겨우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변신도 잘 한다 이거지."

제니퍼는 그의 은빛 눈이 자신의 몸을 더듬으면서 야릇하고 정열적인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정말 멋있고 우아하다는 걱정스러운 발견 때문에 잠시 정신이 산란해졌다. 짙은 푸른 색의 최고급 모직 튜닉이 근육질의 넓은 어깨를 강조하고 있고, 손목 부근이 단단하게 죄어진 소매에는 은실로 수가 놓여져 있었다. 허리에는 납작한 은제 원반 벨트가 걸쳐져 있고, 손잡이에 굵은 사파이어가 박혀 있는 단검이 달려 있었다. 제니퍼는 그 아래로 쏠리려는 눈길을 거두었다.

로이스의 눈길이 그녀의 머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제야 제니퍼는 자신이 지금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손을 뒤로 뻗어 가운에 붙은 노란 색 베일을 앞으로 썼다. 바라던 대로 베일이 얼굴을 가리면서 어깨에까지 우아하게 드리워졌다.

"멋있군. 하지만 가리지 않았을 때가 더 보기 좋은걸."

로이스의 머릿속에서는 오늘은 기필코 그녀를 유혹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한편, 제니퍼의 기분은 착 가라앉고 있었다. 그녀는 서로 적의를 감추지 않을 때가 훨씬 그를 다루기 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에 한 가지씩 해결하기로 마음을 먹은 그녀는 머리를 가리지 말라는 그의 말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로이스가 빼주는 의자에 앉으며 그녀는 냉정하고도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 점을 아셔야 해요. 젊은 여자나 신부가 머리를 내놓는 건 옳지 못해요. 여자는 모름지기 감춰야......."

"매력을 말인가?"

로이스가 그녀의 머리와 얼굴, 그리고 가슴을 훑어보며 말을 가로챘다.

"그래요."

"아담을 유혹한 게 이브라서?"

로이스 나름대로는 자기도 종교적인 믿음을 안다는 점을 강조한 셈이었다. 그러자 제니퍼가 앞에 놓인 접시에 손을 뻗으며 대꾸했다.

"그렇죠."

"글쎄, 내가 보기에는 사과에 넘어간 것 같은데? 아담이 타락하게 된 건 욕망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이 먹으려고 덤볐기 때문이라구."

로이스의 눈은 그가 지금 이 대화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 두 번씩이나 이런 가벼운 대화를 즐기다 그의 팔에 안기고 말았던 제니퍼는 그의 이단적인 주장을 즐기거나 충격을 받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대꾸를 하는 것도 그의 화술에 말려 들어가는 길이었다. 그 대신 그녀는 아주 공손한 말투로 다른 화제를 꺼냈다.

"동생하고 나를 떼놓으라는 명령을 재고할 마음은 없나요?"

그러자 로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 눈길을 던졌다.

"성질은 죽였나?"

격앙된, 그러나 여전히 냉정한 반응에 제니퍼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목에 걸려 안 나오는 말을 꺼내려고 한참을 노력한 끝에 그녀는 겨우 한마디 내뱉을 수 있었다.

"그래요."

로이스가 만족한 얼굴로 옆에 서 있던 시종을 돌아다보며 명령을 내렸다.

"브렌나 양에게 언니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라."

그리고 다시 제니퍼에게로 몸을 돌리고는 그녀의 공손한 자태를 흐뭇한 표정으로 감상하며 말했다.

", 어서 먹으라구."

"당신이 먼저 먹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별로 배고프지 않군."

한 시간 전만 해도 정말 게걸스럽게 먹어대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로이스는 속으로 웃음지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유일한 욕구 대상은 바로 그녀였다.

스스로 선택한 단식 때문에 너무나 배가 고팠던 제니퍼는 포리지를 한 숟가락 가득히 떴다. 그러나 곧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눈길에 영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힐끔 불안한 표정을 던졌다.

"왜 그렇게 보고 있죠?"

그러나 로이스의 대답을 들을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시종이 제니퍼에게로 달려와 놀란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 것이다.

"아가씨, 동생분 말입니다요. 아가씨를 만나고 싶으시답니다. 동생분이 기침을 얼마나 심하게 하시는지 제 살이 다 떨릴 지경입니다요."

제니퍼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아니, 안 돼!"

그녀는 나직막하게 비명을 토했다. 몸은 벌써 의자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은 안 돼! 하필 여기서!"

"그게 무슨 소리지?"

전장에서 온갖 비상 사태를 겪은 터라 그런 일에는 익숙해진 로이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차분하게 물었다.

"브렌나는 가슴병이 있어요. 기침을 하다가 결국 숨도 못 쉬게 된다구요."

제니퍼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설명하면서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로이스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층으로 같이 올라갔다.

"동생을 치료할 방법이 있을 거야."

"여긴 없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말이 뒤죽박죽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너 숙모가 향료를 만들어요. 숙모는 약초에 관해서 많이 알아요. 어떤 병이든 스코틀랜드에서 제일 잘 치료하죠. 수녀원에 가야 그게 있어요."

"뭘로 만드는데? 아마......."

"난 몰라요!"

제니퍼가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서두르는지 그를 끌어당기다시피 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건 그 액체를 김이 나올 때까지 끓여야 한다는 것뿐이에요. 그 김을 쐬어야 브렌나가 진정돼요."

로이스가 브렌나 침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제니퍼는 브렌나의 침대 곁으로 달려갔다. 사색이 다 된 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어 가고 있었다.

"언니?"

브렌나가 제니퍼의 손을 꼬옥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기침이 다시 터져 나오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등이 침대에서 튕길 정도로 격렬한 기침이었다.

"또 아파."

"걱정 마."

제니퍼는 몸을 굽혀 브렌나의 앞이마에 흘러내린 금발의 고수머리를 쓸어 올려 주었다.

"걱정 마......"

브렌나의 걱정스런 눈길이 문 앞에 버티고 선 백작의 위압적인 모습에 가 닿았다. 브렌나는 백작에게 사정했다.

"제발 우리를 집에 보내 줘요. ..........."

발작적인 기침이 터지면서 그녀의 말이 중단되었다가 겨우 이어졌다.

"그 약이 있어야 돼요."

제니퍼는 점점 더해 가는 공포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어깨 너머로 로이스를 돌아다보았다.

"이 애를 집에 보내 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안 돼. 내 생각에는........."

두려운 나머지 정신이 나간 제니퍼는 브렌나의 손을 내려놓고 얼른 입구로 달려가면서 로이스에게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자신의 말에 브렌나가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 봐 문을 닫고 나서 납치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브렌나는 숙모의 약이 없으면 죽을 수도 있어요. 저러다가 심자잉 멎는단 말이에요!"

로이스는 그 금발머리 소녀가 진짜로 사경을 헤맨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제니퍼가 진짜 그렇게 믿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고, 브렌나가 그 기침을 가짜로 내지 않는다는 점도 확실했다.

제니퍼는 그의 굳은 얼굴에 망설이는 빛이 어리는 것을 보고, 그가 거절하려는 줄 알고 자신의 자존심을 버려서라도 그의 마음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내가 너무 거만하다고 했죠? 그래요, 난 그래요. 하지만 만약 브렌나를 보내 준다면 당신이 하라는 대로 뭐든지 다 하겠어요. 마루도 닦고, 당신을 위해서 요리도 하겠어요. 뭐든지 하라는 대로 다 하겠어요. 맹세할 게요."

제니퍼는 애원의 표시로 손을 그의 가슴에 얹고 애원했다.

로이스는 가슴에 놓인 그 자그마하고 섬세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옷 속에서는 땀이 솟고 치솟는 욕망으로 인해 하복부가 뻐근해지고 있었다. 손이 가슴에 와 닿았을 뿐인데도 왜 그녀가 자신에게 그런 폭발적인 효과를 미치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녀를 원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기꺼이 팔에 안겨 나긋나긋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했던 행동들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행동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장 귀중한 인질을 풀어 줄 각오를 한 것이다. 비록 제니퍼는 엄한 구석은 있지만 메릭 경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녀의 말 안에도 그가 이 "말썽꾸러기" 딸에게 어느 정도나 애정을 갖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제니퍼의 공포에 사로잡힌 커다란 눈이 그의 눈에 가 박혀있었다. 그의 침묵을 거절로 오해한 그녀가 속삭였다.

"제발, 부탁이에요. 뭐든지 다 하겠어요. 무릎을 꿇으라면 무릎도 꿇겠어요. 제발, 뭘 원하는지 말만 해요."

드디어 로이스가 입을 열었다. 제니퍼는 희망을 품고 그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그의 목소리에 담긴 묘한 뜻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뭐든지?"

로이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든지. 몇 주 안에 이 성을 왕을 대접해도 좋을 정도로 완벽하게 만들어 놓겠어요. 매일 당신을 위해 기도를........"

그러나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건 기도가 아니야."

그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합의를 할 생각으로 제니퍼는 얼른 말을 붙였다.

"그럼, 당신이 원하는 걸 말해 줘요."

무자비한 그의 말이 떨어졌다.

"당신."

로이스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제니퍼의 손은 스르르 그의 옷에서 떨어졌다.

"당신이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자진해서 내 침대에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싶어."

로이스가 브렌나를 보내 주려고 한다느 기쁨은 그 대가로 그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깨닫는 순간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브렌나를 풀어 주어도 그가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제니퍼가 인질로 남아 있을 테니까. 그런데도 그는 지금 제니퍼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녀의 명예를 자진해서 내놓으라고 한다. 매춘부가 되라고 한다.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그녀가 귀중하게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을 치욕 속에 몰아넣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제니퍼는 한때 자진해서 자신을 내놓으려고 한 적이 있었다. 아니, 거의 그렇게 될 뻔한 적이 있다. 그 대가로 그녀가 바란것은 수백, 아니 수천 명의 목숨이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

더욱이 그런 제의를 한 것은 그의 정열적인 키스와 애무에 반쯤 정신이 나갔을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계약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맨 정신으로 보고 있었다.

등 뒤에서는 브렌나의 기침소리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제니퍼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자신과 동생에게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럼, 계약이 성립된 건가?"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제니퍼는 조그만 턱을 치켜 들었다. 그 모습은 신뢰하던 사람의 칼에 찔린 뒤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자랑스러운 여왕의 모습이었다. 쓰디쓴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백작님, 내가 당신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군요. 이틀 전에 당신이 내 청을 거절했을 때, 나는 당신이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는 걸로 생각했어요. 내가 내놓은 것을 갖는 대신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말만으로라도 약속할 수 있었는데, 당신은 메릭을 공격하지 말아 달라는 내 부탁에 안 된다고 했었죠. 이제 보니 그건 명예심이 아니라 분노였어요. 하긴 야만인이 명예가 뭔지 알 리가 없지요."

자신이 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모습에 로이스는 감탄의 미소가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눌러야 했다. 그리고 폭풍이 이는 푸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내 제의가 그렇게 메스꺼운 건가?"

로이스는 그녀의 뻣뻣한 팔을 잡으면서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제니퍼, 당신도 알 거야. 나로서는 당신하고 굳이 계약을 맺을 필요가 하나도 없어. 그 동안 힘으로 당신을 가질 기회도 수없이 많았고."

화가 나는 일이지만 그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제니퍼는 곧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지탱하느라 젖 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야 했다.

"난 당신을 원해. 그게 그렇게 야만적으로 보인다면 마음대로 생각하라구. 하지만 만약 당신이 승낙한다면 우리 둘 다에게 좋은 일이 될 거야. 내 침대 위에 올라왔다고 해서 창피를 주지도 않을 거고, 고통도 주지 않겠어. 처음에는 아프겠지. 하지만 그 다음엔 환희뿐일 거야."

그 말이 다른 기사의 입에서 나왔다 해도, 아무리 똑똑한 궁중의 여자라 해도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잉글랜드 최고의 광포한 전사의 입에서 나온 그 소리가, 세상 물정 모르고 수녀원에서만 자란 스코틀랜드 소녀에게 미친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갑자기 그의 뜨거운 키스와 애무가 머리를 휘감으면서, 제니퍼는 뺨에 피가 몰리고 위가 약하게 떨리는 느낌을 받았다.

"계약이 성립된 거냐구?"

그의 손가락들이 자신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녀의 팔을 아래 위로 쓰다듬고 있었다. 로이스는 방금 자신이 여자에게 할 수 있는 말 중에서 최고로 부드러운 말을 한 것 같았다.

제니퍼는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지금 이 순간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러나 대안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어 자신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과연 자신이 진짜로 고개를 끄덕였는지 스스로도 의아스러웠다.

"계약은 지키겠지?"

제니퍼는 그가 지금 그녀가 자발적일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더 길었다. 그를 죽도록 증오하고 싶었다. 가만히 서서 그에 대한 증오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 작지만 끈덕지게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손에 잡혔으면 이미 그가 제안한 것보다 더 가혹한 운명을 겪어야 했을 것이라는 소리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치욕을.

로이스의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그녀는 나중에라도 그가 후회할 것이라는 단서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갑자기 자신이 지금 얼마나 고개를 젖혀야 그를 볼 수 있는지, 그의 몸에 비해서 자신이 얼마나 왜소한지가 가슴에 와 닿았다. 그의 덩치, , 그리고 불굴의 의지 앞에서 자신은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거대한 힘에 너무나 무력하고 완벽하게 포위당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고통스럽다기보다 패배감을 더욱 진하게 느꼈다.

그녀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의 눈길에 맞섰다. 항복하는 순간이었지만 자부심에 가득 찬 자세였다.

"계약을 지키겠어요."

"그 말 새겨 두지."

격렬한 기침 소리가 다시 들려 제니퍼의 주의가 브렌나에게로 돌아가려는 순간 그 말이 떨어졌다.

제니퍼는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좀전에 자신이 계약을 지키겠다고 할 때, 그는 그녀의 말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었다. 물론 놀랄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포함해서 남자들은 여자의 말에 아무 가치도 두지 않으니까. 그런데 웨스트모어랜드 경은 마음을 바꾼 것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 아주 불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기도 했다. 이번이 자신의 약속을 명예롭게 만들 첫 번째 기회였다. 그녀는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에요."

그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 지금부터 나하고 같이 가서 동생한테 수녀원으로 갈 거라고 이야기해. 이제부터는 동생하고 단둘이 있게 하지 않겠어."

"그건 왜요?"

제니퍼의 숨 가쁜 항의에 그는 즐겁다는 듯 대답했다.

"동생이야 하딘의 방어 문제에 대해서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겠지. 하지만 당신은 도개교를 건너면서 벽의 두께도 쟀을 거고, 보초병이 얼마인지도 세어 보았을 텐데?"

"싫어! 언니하고 같이 안 가면 나도 안 갈 테야!"

수녀원으로 돌려보낸다는 말을 들은 브렌나의 반응은 예상외로 강경했다.

"언니도 나하고 같이 가야 해요!"

그녀는 로이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를 질러댔다.

"언니도 돌려보내요!"

브렌나의 얼굴은 아프거나 놀랐다기보다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 시간 후, 스테판 웨스트모어랜드가 이끄는 백 명의 기사들이 말에 올라 성을 떠날 준비를 완료했다.

"난 언니도 같이 보내 줄 줄 알았어."

브렌나가 기침을 토하면서도 연신 백작을 노려보았다.

"말하지 마, 힘만 낭비하니까."

제니퍼는 브렌나 등 뒤로 손을 뻗어 베개를 그녀의 목과 어깨에 편하게 괴어 주었다.

로이스가 돌아서서 명령을 내렸다. 무거운 쇠사슬과 추 들이 작동을 하기 시작했다. 쇳덩이가 철커덕거리는 소리와 나무가 끽끽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못 박힌 내리닫이 창살문이 올라가고 도개교가 천천히 내려왔다. 기사들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제니퍼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대열이 도개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고 포효하는 검은 늑대의 머리가 그려진 파란 삼각기가 바람에 나부꼈다. 대열 맨 앞과 후미에 각각 그 기를 든 사람이 있었다. 국경선에 닿을 때까지는 검은 늑대의 기가 브렌나를 보호해 줄 것이고, 그 다음엔 대열이 공격을 받는다 해도 브렌나라는 이름이 그녀를 보호해 줄 터였다.

도개교가 다시 올라가면서 제니퍼의 시야가 가려졌다. 로이스가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홀 쪽으로 돌려 세웠다. 제니퍼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하얀 이를 드러낸 늑대가 그려진 그 사악한 기에 가 있었다. 이들이 이제까지는 황금 사자와 세 잎 무늬를 수놓은, 잉글랜드의 왕을 상징하는 기를 내세우고 다녔는데 오늘은 검은 늑대의 기를 내세웠다는 것이 못내 의아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쳐다보며 로이스가 입을 열였다.

"만약 그 계약을 지금 당장 이행하라고 할까 봐 걱정하고 있는 거라면 안심해도 좋아. 저녁 때까지는 할 일이 있으니까."

제니퍼는 그 계약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얼른 화제를 바꿨다.

", 난 방금 전에 나간 기사들이 왜 당신네 왕이 아니라 당신 기를 들고 나갔는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거야 그 사람들이 왕의 기사가 아니라 내 기사니까. 나한테 충성 서약을 한 기사들이지."

제니퍼는 성 안뜰에 우뚝 섰다. 소문에 의하면 헨리 7세는 귀족들이 자기 군대를 갖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의 귀족들은 자기 군대를 가질 수 없을 텐데요?"

"나의 경우엔 왕이 예외로 인정해 주었지."

"왜요?"

그의 냉소 띤 눈동자 위로 눈썹이 한껏 올라갔다.

"그만큼 나를 믿기 때문인가 보지?"

그녀에게 더 이상 알려 줄 필요가 없다는 투였다.

 

 

 

10. 유혹

저녁 식사는 벌써 끝났다. 로이스는 의자에 편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팔을 제니퍼의 등 뒤 의자에 걸치고는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남아 있는 네 기사를 이야기에 끌어들여 넋을 빼놓고 있었다. 네 기사는 벌써 식사가 끝났건만 테이블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고드프리, 유스테이스, 그리고 라이오넬이 이렇게 늦게까지 남아 있는 것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유를 찾자면 크림색 공단으로 장식된 하늘색 벨벳 가운을 입은 제니퍼의 모습이 정말 매력적이라는 점이었다. 또 하나, 식사 도중 제니퍼가 갑자기 생기를 되찾은 듯, 말도 많아지고 아주 유쾌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로이스로서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면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수녀원에서의 생활이며, 프랑스 출신 수녀원장이 제니퍼와 브렌나에게 스코틀랜드 사투리를 쓰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했다는 등 자기 주벼느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털어놓았다.

분명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마음껏 풍기고 있었다. 손가락에 술잔을 끼우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로이스로서는 즐겁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오트밀 죽과 같은 느끼한 스튜와 파이 외에도 구운 양고기, 거위고기, 참새고기가 나왔던 지루한 식사 시간을 그녀는 아주 즐거운 시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딘의 음식은 전장에서 먹던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만약 제니퍼가 아니었다면 기사들은 그냥 배만 채우고 사라져 버렸을 것이 뻔했다.

로이스는 그녀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가 바로 그 계약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와 위층으로 올라가는 시간을 어떻게든 미뤄 보려는 심산이었다.

제니퍼가 뭐라고 하자 고드프리, 라이오넬, 그리고 유스테이스가 함빡 웃음을 터뜨렸다. 로이스는 우연히 애릭의 자리로 눈을 돌렸다. 역시 애릭은 애릭답다는 사실을 발견한 로이스의 마음이 즐거워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제니퍼의 마법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애릭뿐이었다. 애릭은 다리를 발걸이에 걸치고는 의심스런 눈길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굵은 팔로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은 그가 제니퍼의 표면적인 거동에 속지 않으며 그녀를 한순간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로이스는 그녀의 비위를 맞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즐기면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기대하며 그 기대감을 충분히 맛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기대만 하면서 기다리기가 싫었다.

"로이스........"

고드프리가 신나게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정말 재미있지 않습니까?"

"아주 재미있군."

로이스는 지금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사교 활동에 종지부를 찍기보다는 조금 더 교묘한 수단을 택했다. 고드프리에게 식사가 끝났다는 눈짓을 해 보인 것이다.

자신의 말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제니퍼는 사람들의 눈길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는 로이스에게 얼굴을 돌리고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 그녀의 머리는 사람들을 좀 더 자리에 묶어 둘 이야기를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의자 다리들이 긁히는 소리가 나더니 기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부리나케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는 불 가까이에 있는 의자로 옮겨 갔다.

"좀 이상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불쑥 일어나다니."

"글쎄, 그대로 있으면 더 이상할 것 같은데?"

"왜요?"

"내가 가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니퍼는 오늘 내내 두려워하던 바로 그 순간이 닥친 것이다. 손을 내밀면서 바라보는 그의 침착한 눈길 속에는 제니퍼도 일어나야 한다는 신호가 들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머뭇머뭇 손을 내밀다가 홱 거두었다.

", 나는 가라고 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요?"

"제니퍼, 나는 아주 신중한 사람이야."

이층에 올라갔을 때 로이스는 그녀 방 옆의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제니퍼가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가 들어간 방은 아무 장식도 없이 검소하기만 한 제니퍼의 방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넓고 호사스러웠다. 네 기둥이 선 커다란 침대에 안락의자가 네 개가 있고, 황동 장식이 달린 트렁크가 여러 개 있었다. 벽에는 태피스트리가 늘어져 있고, 벽난로 앞에는 두꺼운 매트리스까지 깔려 있었다. 벽난로에는 불이 지펴져 있어 방안이 따뜻하고도 환했다. 침대 맞은편의 창문에서는 달빛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고, 그 옆에는 조그만 발코니로 통하는 듯한 문이 하나 더 있었다.

등 뒤에서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와 함께 제니퍼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할 행동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킬 수 있는 것이 뭘까 궁리한 그녀는 침대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의자로 냉큼 달려갔다. 의자에 앉은 그녀는 무릎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한 미소를 띄웠다. 그의 흥미를 끌 이야깃거리를 생각해 낸 그녀는 곧바로 질문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무척 흥미가 있다는 듯 몸까지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소문으로는 당신이 한 번도 말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던데, 맞나요?"

그러나 백작은 아까 저녁 때 기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무훈에 관한 이야기에 빠지지 않았다.

대신, 그녀 바로 맞은편에 앉아 부츠를 신은 긴 다리를 포개고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문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 전, 그의 손을 뿌리칠 때부터 제니퍼는 불안했다. 그녀는 속으로 이 계약을 지키지 않아도 될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또 그런 바람을 그가 알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가 그런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다시 그를 대화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목소리도 즐겁게.

"그게 사실이에요?"

"뭐가?"

그의 대꾸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싸울 때 말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는 소문 말이에요."

"아니야."

"정말요?"

그녀는 짐짓 감탄까지 해 가며 말을 이었다.

"그럼,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어요?"

"두 번."

"두 번밖에요!"

스무 번이라고 해도 놀랄 일이었다. 제니퍼는 이제 곧 이런 사람을 친척들이 상대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랬군요. 당신이 얼마나 많은 전투를 했는지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죠.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전투에 참가했죠?"

"제니퍼, 나는 그런 걸 세고 다니지는 않아."

"그렇겠죠. 하지만 난 셀 수 있어요! 참가했던 전투를 하나하나 생각해서 얘기해 봐요. 그럼 내가 셀 테니까."

그의 굳게 다문 입술에 점점 더 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조금 흥분한 말투로 재차 물었다.

"지금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나는 그럴 마음이 없는데."

제니퍼는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이제 시간이 다 갔고, 구원의 천사가 창문을 뚫고 들어와 그녀를 구해 줄 것이라는 희망도 허망한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럼 시합장에서는요? 시합장에서 떨어진 적도 없나요?"

"나는 그런 데서 싸워 본 적이 없어."

순간적으로 자신의 관심사를 잊어버린 제니퍼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왜요? 당신네 기사들이 당신하고 겨뤄 보고 싶어 하지 않던가요? 도전해 오는 사람이 없었나요?"

"있었지."

"그렇지만 당신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건가요?"

"나는 전투를 하지, 마상 시합은 하지 않아. 그건 장난이야."

"그야 그렇죠. 하지만 사람들이........그러니까........당신이 거절하는 것이 비겁해서 그런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소문처럼 그렇게 뛰어난 기사가 아니라서 그런다고 생각할 수도 있구요."

"그럴지도 모르지. , 이번에 내가 한 가지 묻지."

로이스가 부드럽게 말을 자르면서 말문을 돌렸다.

"당신이 갑자기 내 전투와 기사로서의 명예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게 우리가 한 계약하고 관계가 있는 건가? 이제 와서 지키고 싶지 않다?"

로이스는 제니퍼가 뭔가 다른 핑계를 대며 거짓말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니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무기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지금 너무 두려워요. 이제까지 이렇게 두려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녀가 어떻게든 그를 조종해 보려고 하는 모습에,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치밀고 있던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쩔 줄 모르고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날 일을 인정하고, 자신의 매력으로 로이스를 유혹하면서 그의 손길을 기다리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궁정에서 잠자리를 같이 했던 경험 많은 궁정의 여자들하고는 틀렸다.

로이스는 손을 내밀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제니퍼, 이리로 와."

제니퍼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겨우 가누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양심에서는 그녀의 행동이 죄악이요, 배반이라고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제니퍼는 지금 자신이 하려고 하는 행동이 꼭 그렇지는 않다고 변명하고 싶었다. 자신을 희생하여 동생을 구했으니 실제로는 고귀한, 어떤 면에서는 숭고하기까지 한 행동이라고 믿고 싶었다. 잔다르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잔다르크는 순교를 했고 자신은 지금........

제니퍼는 머뭇머뭇 그의 따뜻한 손바닥 위에 차가운 손을 올려 놓았다. 그의 길고도 그을은 손가락들이 자신의 손을 감아 쥐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제니퍼는 그의 따뜻한 손과 감동적인 눈빛 속에서 이상하게도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로이스의 팔이 제니퍼를 안으면서 단단한 근육질의 몸에 그녀를 끌어당겼을 때, 그리고 그의 단단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와 닿았을 때, 정말 이상하게도 그녀의 양심이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제까지 했던 키스와는 전혀 다른 키스였다. 그건 로이스가 이 키스의 끝이 어디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교할 정도로 절제된, 그러나 굶주린 듯한 키스였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꼭 다물고 있는 그녀의 입술을 열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녀의 입술이 드디어 열리는 순간, 그의 혀가 그녀의 입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 사이에도 그의 손은 그녀의 등과 가슴을 계속해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윽고 허리로 내려간 손이 그녀를 자신의 부풀어 오른 몸에 바싹 끌어당겼다. 그녀의 모든 감각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춤을 추면서 천천히 열정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윽고 그녀는 나지막한 항복의 신음소리를 토하면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제니퍼의 마음 한구석에서 가운이 벗겨지는 것과 이어 부풀어 오른 가슴을 쓰다듬는 그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맨살에 뜨거운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확 지펴지고 있었다. 쇠사슬처럼 몸을 휘감은 그의 팔이 그녀를 들어올려 침대로 데려가, 차가운 시트 위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그의 팔과 몸, 그리고 입술이 주던 따뜻함과 안온함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제니퍼의 의식이 피난처가 되어 주던 꿈결 같은 몽롱함에서 깨어나면서, 피부에 와 닿는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그 순간 자신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눈이 떠지고 말았다. 로이스가 그녀를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침대 옆에 서서 옷을 벗고 있었다. 제니퍼의 입에서 경악과 탄성이 섞인 비명 소리가 나지막하게 터져 나왔다.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빛에 비친 그의 피부가 청동빛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허리끈을 풀 때는 팔이며 어깨, 허벅지의 강인한 근육이 꿈틀했다. 그의 모습은 늠름하면서도 멋있고 우아했다. 공포와 감탄을 꿀꺽 삼키며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트 가장자리를 꽉 움켜잡았다. 그가 마지막 남은 옷을 벗기자, 그녀는 시트를 끌어당겨 발가벗은 몸을 가렸다.

그의 몸무게에 침대가 푹 껴졌다. 제니퍼는 눈을 꼭 감고 얼굴을 돌린 채 가만히 기다렸다. 더 이상 한기가 현실을 일깨우기 전에 그가 자신을 취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로이스는 하나도 서두르지 않았다. 온몸을 편하게 쭉 뻗어 본 그는 제니퍼를 향해 돌아누워 귀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러나 가차없이 시트를 벗겼다. 발가벗은 그녀의 나신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만 탁 숨이 멎었다. 윤기 흐르는 매끄러운 그녀의 살갗이 머리에서 발끈까지 발갛세 물들어 있었다. 핑크빛 꼭지가 톡 튀어나온 싱그러운 가슴, 가는 허리, 수줍게 부풀어오른 비너스의 언덕, 부드럽게 곡선을 이룬 엉덩이, 그리고 미끈하게 쭉 빠진 길다란 다리. 완벽했다. 그의 입에서 아무 생각 없이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각해 본 적 있어?"

거칠게 숨을 토해 내며 로이스는 눈길을 천천히 그 매혹적인 얼굴로 옮겼다. 그리고 베갯머리에 현란하게 흐트러져 있는 적황색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더듬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원하는지는?"

제니퍼는 여전히 얼굴을 돌리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턱을 감싸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리게 했다. 나른한 미소가 아직도 남아 있는 그의 입에서 거친 벨벳 같은 속삭임이 흘러 나왔다.

"귀여운 사람, 눈을 떠."

제니퍼는 쭈뼛쭈뼛 그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삼킬 듯 쳐다보고 있는 은빛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손이 뺨에서 미끄러지듯 내려가 목을 어루만진 다음 가슴을 감싸쥐었다.

"겁내지 마."

로이스는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깊게 잠긴 유혹적인 그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그의 능숙한 손가락이 벌이는 애타는 탐험에 제니퍼는 이미 정신없이 빠져 들고 있었다.

"전에는 날 무서워한 적이 없잖아. 새삼스럽게 그러지 마."

로이스는 손바닥을 펴서 제니퍼의 어깨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정교하게 깎은 대리석 같은 그의 관능적인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용의주도하게 내려왔다. 그 입술이 닿는 순간 제니퍼는 온몸을 관통하는 쾌감에 그만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의 혀가 입술을 벌리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저항해 보았자 오히려 자신이 더 괴로울 뿐이었다.

"제니퍼, 나한테 키스해 줘."

제니퍼는 로이스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가 키스하듯이 에로틱하게 키스했다. 그의 입에서 열락의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면서 더욱 깊은 키스가 퍼부어졌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겨 단단해진 몸에 바싹 붙였다. 키스에 정신이 팔린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과 어깨, 이어 목을 어루만지다가 턱수염을 비비기 시작했다.

드디어 로이스가 그녀의 입에서 입을 뗐다. 거칠게 흘러 나오는 그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제니퍼는 온몸이 녹아 드는 것 같았다. 심장이 뛸 때마다 욕망이 혈관을 터뜨릴 듯 함께 부풀어올랐다. 이글거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그의 뺨과 입가, 그리고 입술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내부에서 낯선 감정이 나래를 펴면서 격렬하게 폭발했다. 가슴이 터질 듯 아파 왔다. 턱을 더듬던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이 입혔던 흉터를 만지는 순간 잠시 멈칫했다.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그녀는 눈을 들어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속삭였다. 진심으로 아파하는 목소리였다.

"미안해요."

로이스는 그 푸른 눈이 내뿜는 마력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 그녀의 목소리에 욕망이 거침없이 팽창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믿을 수 없이 달콤한 그녀의 손길을 아직은 더 즐기고 싶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가슴을 더듬다가 긴 흉터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잠자리를 같이 했던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그녀가 그 흉터를 보고 혐오스러워 움칠하지 않는다는 것을. 더 심한 경우, 그가 위험 속에서 살고 있음을 상징하는 그 명백한 증거에 천박하게도 더욱 흥분하는 여자까지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팔에 안겨 있는 음탕한 천사에게서 다른 것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로이스는 또한 자신이 그 일에 그런 반응을 보이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흉터들을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나 있는 흉터로 옮아갔다. 지금 당장 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그의 근육이 그녀의 손길에 따라 꿈틀거렸다. 드디어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로이스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고, 아름다운 얼굴이 창백하게 빛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격렬하면서도 고통스러운 듯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상처를........."

그리고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미처 상상도 하기 전에 그녀의 고개가 수그러졌다. 그녀의 입술이 마치 치료하도 하듯이 흉터들을 일일이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팔은 미끄러지듯 그의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다. 로이스는 그만 자제력을 읽고 말았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채를 파고 들어갔다. 로이스는 제니퍼를 똑바로 눕혔다.

"제니........"

로이스는 깊이 잠긴 쉰 목소리로 신음하듯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눈에, 뺨에, 이마에, 그리고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제니......."

로이스는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로이스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 그의 잠긴 목소리, 그의 입술에 제니퍼의 몸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의 혀가 그녀의 가슴으로 옮아가더니 빳빳하게 솟은 젖꼭지를 희롱했다. 잠시 후, 그의 입술이 젖꼭지를 덥석 깨물어 세게 잡아당기자 그녀의 입에서 헉 하고 숨 가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등이 활처럼 휘면서 손은 그의 머리를 가슴으로 더욱 세게 끌어당겼다. 등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허리로, 이어 허벅지로 내려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그의 입에서 숨죽인 짧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제 그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로 돌아와 뜨거운 애무를 퍼붓고 있었다.

"그러지 말아, 내 사랑."

뜨거운 속삭임이었다. 로이스의 손가락은 그녀의 허벅지 사이 곱슬곱슬한 삼각주 사이에서 입구를 탐색하고 있었다.

"아프지 않아."

쾌감과 공포가 동시에 온몸을 꿰뚫고 있었지만 제니퍼는 그 두 느낌과는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 그의 말 속에 들어 있는 요구 사항대로 반응한 것이다. 그녀는 힘겨운 노력 끝에 다리 근육에서 겨우 긴장을 풀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낯익은 손가락들이 그녀의 꽃잎을 헤치고 축축하고도 따뜻한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 손가락들은 부드럽고도 익숙하게 그녀를 쾌락으로 인도하면서 정열적인 침입을 위해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힘줄이 불거진 그의 목에 얼굴을 묻고 매달려 있는 제니퍼는 온몸에 불이 붙으면서 녹아 들어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열락에 들뜬 흐느낌이 그녀의 온몸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속에 쌓여만 가는 쾌감 때문에 터져 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순간, 그의 무릎이 그녀의 허벅지를 갈랐고, 그의 몸이 정확하게 그녀의 몸에 실렸다.

제니퍼는 눈을 뜨고 자기 위에 올라와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 이름만으로도 뭇사람을 떨게 만드는 전사. 그러나 그 남자가 그토록 격렬하면서도 부드럽게 그녀를 어루만지면서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열정에 휩싸인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그의 관자놀이가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로이스의 손이 아래로 내겨가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그녀의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제니퍼는 딱딱하고도 뜨거운 것이 입구를 겨냥하고 탐색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 잡힌 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운명에 용감하게 맞섰다. 그녀는 눈을 감고 지금 자신 안에 침입해 해를 가하려고 하는 남자를 꽉 껴안았다.

그 자세에 감동한 로이스의 마지막 이성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녀가 팔에 안겨 오는 순간 그는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떤 다음 흥분한 몸을 믿을 수 없으리만치 따뜻한 그녀의 몸으로 조금씩 밀어 넣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고통을 줄지 걱정이 밀려오면서, 되도록이면 그 고통을 줄이고자 안간힘을 썼다. 드디어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들어가고 나자 비단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몸이 그를 따뜻하게 감싸 왔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드디어 부서지기 쉬운 최후의 장애물에 다다랐다.

로이스는 후퇴했다가 다시 앞으로 밀고 들어가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지금 그의 목표는 그 장애물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녀 안에 자신을 묻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고통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는 그녀의 고통을 빨아들이기라도 하듯이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히을 주면서 그녀의 입술에 대고 말을 던졌다.

"제니.......미안해."

그러고 난 다음 로이스는 몸 전체를 그녀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의 팔이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 꽉 죄어들면서 귀에는 그녀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파고 들어왔다.

로이스는 제니퍼의 고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안으로의 행진을 시작했다. 부드럽게 앞으로 움직였다가 다시 후퇴하면서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갔다. 자신을 억제하느라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는 엉덩이를 교묘하게 돌렸다. 그녀의 기쁨에 찬 부드러운 신음소리와,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더욱 끌어당기는 손길에 그의 열정이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리드미컬한 움직임에 맞추어 그는 안으로 더욱 밀고 들어갔고, 그녀의 몸이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주고 있는 쾌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이 그의 단단하게 팽창한 몸을 그런 식으로 감싸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것은 그녀가 본능에 따라 움직이면서 가하는 달콤한 고문이었다.

욕망이 제니퍼의 몸을 리드미컬하게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주려고 하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 그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피스톤 운동이 빨라질수록 그것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그녀의 내부 저 안쪽에서 뼈를 녹이는 듯한 환희가 터져 나와 온몸을 꿰뚫었고, 그녀의 몸은 관능의 파도를 타고 부서지고 있었다. 그녀의 발작이 그의 잔뜩 부풀어오른 남성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로이스는 거친 숨을 연신 제니퍼의 뺨에 토하면서 그녀를 꼭 껴안고 그녀가 환희의 여운을 느낄 수 있도록 가만히 있었다. 그는 호흡을 고른 다음 다시 그녀의 안에서 피스톤 운동을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의 온몸이 부르르 떨었다. 그의 따뜻함이 그녀 안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쾌락의 바다에 떠 있는 제니퍼의 몸이 여전히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움직이고 있었다.

로이스가 옆에 눕는 것을 느끼면서 제니퍼의 의식이 천천히 되돌아왔다. 그녀의 눈꺼풀이 깜빡거리더니 방의 그림자들이 모양을 되찾기 시작했다. 장작 하나가 떨어지면서 불꽃이 확 피어올랐다. 그 불꽃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의 팔에 안전하게 안겨 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고독감과 공포밖에 느낄 수 없었다. 방금 전의 행동들은 순교도 아니요, 고귀한 희생도 아니었다. 그건 다만 세속적인, 하늘을 떠다니는 듯한 쾌락일 뿐이었다.

그의 가슴이 아직도 세차게 뛰고 있는 소리가 뺨 저편에서 들려 왔다. 그녀는 울컥 치미는 괴로운 감정을 억지로 삼켜 버렸다. 지금 그녀가 여기서 찾아낸 것은 절대 존재해서도 안 되고, 존재할 수도 없는 감정이었다. 느껴서는 안 되고 위험하기도 한 감정인 것이다.

그 모든 공포와 죄의식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것은 그가 아까의 그 숨 가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니" 라고 불러 주는 것이었다. 아니면 어떤 말투로라도 좋으니 "사랑해" 라고 하던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전달된 걸까?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그녀가 듣고 싶어 했던 말도, 그 말투도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그리고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내가 너무 아프게 한 건 아니지?"

제니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입을 열려고 두 번이나 노력한 끝에 가느다란 목소리나마 겨우 입 밖으로 낼 수 있었다.

"아뇨."

"만약 그랬다면 미안해."

"그러지 않았어요."

"누가 널 처음으로 취하든 어차피 아프게 되어 있어."

눈물이 솟았다. 그리고 목이 메였다. 그녀는 등을 돌리고 누웠다. 그의 팔에서 몸을 빼려고 했지만 그가 놓아주지 않았다. 로이스는 그녀의 등과 다리를 가슴과 허벅지로 꼭 누르고 있었다. "누가 널 처음으로 취하든" "사랑해" 라는 말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이었다. 너무도 비참하게만 느껴졌다.

로이스가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말을 떠올리는 것, 지금 그 말을 해 버린다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점만큼이나 똑똑히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 때가 아니다. 아니, 아직은........ 그는 얼른 자신을 다잡았다.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여자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제니퍼와 사랑을 한 데 대해서는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었다. 아직 약혼도 하지 않은 상태니. 헨리 왕이 조바심을 내면서 직접 나서서 메리 해멀 양과의 일을 벌여 놓지만 않았어도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바로 그 순간, 설령 약혼을 했다 하더라도 하나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메리 해멀의 사랑스럽고 해맑은 얼굴과 은빛 도는 금발머리가 눈앞에 떠올랐다. 침대 위에서 메리는 정말 정열적이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가 그를 원하는 이유도 두 사람 사이에서는 비밀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그의 눈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웃으면서.

"백작님, 당신은 힘, 격렬함, 그리고 권력 그 자체예요. 여자한테는 그런 게 제일 강력한 최음제이지요."

로이스는 벽난로에 눈길을 던지며, 과연 왕이 이달 말께 돌아갈 예정인 자신을 기다리지도 않고 약혼을 추진 중일까 하는 한가로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점령을 통해서 왕좌를 차지한 강력한 군주답게 왕은 금방 정치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을 개발해 냈다. 로이스가 보기에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습관이었다. 가능하다면 적대적인 가문끼리 결혼을 시키는 정략적인 수단을 개발한 것이다. 왕 자신이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최초로 모범을 보였다.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그가 1년전, 전투에서 왕을 죽이고 왕좌를 빼앗은 바로 그 왕의 딸이었다. 더욱이 만약 자기 딸이 나이가 조금만 더 들었어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와 결혼시켰을 거라고 공언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면 두 나라 사이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도 마감할 수 있다는 것이 왕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로이스 자신은 그런 비우호적인 동맹을 맺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유순하고, 말을 잘 듣는 아내였다. 그는 그의 침대를 따뜻하게 해 줄, 그리고 그의 홀을 빛내 줄 여자를 원했다. 지겨울 정도로 많은 싸움을 겪은 그였다. 자신의 영역 안에서까지 그런 싸움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제니퍼가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이젠 내 방으로 돌아가도 되겠지요?"

"그건 안 되지. 우리 계약이 성립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데."

그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너무 독단적인 자신의 말을 완화시키기 위해 몸을 돌려 그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묻었다.

그의 끝없는 키스에 그녀는 점차 무아지경으로 빠져 들어갔다. 어느 순간인가부터는 그에게 매달리면서 달콤하고 거리낌 없는 열정으로 그의 키스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었다.

 

 

 

11. 꿈의 왕국

달빛이 창을 통해 스며들고 있었다. 로이스는 잠결에 모로 누우며 손을 뻗어 옆자리를 확인했다. 그러나 손에 닿은 것은 차가운 시트일 뿐 따뜻한 살갗이 아니었다. 평생을 위험 속에서 살아온 사람답게 순식간에 번쩍 눈이 떠졌다. 그는 똑바로 누우면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희미한 달빛에 비친 가구들이 유령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얼른 침대 아래로 내려선 그는 재빨리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계단에 경비병을 세웠어야 했는데......자신의 불찰을 탓하는 소리가 입에서 저절로 새어 나왔다. 습관적으로 단검을 빼어 든 그는 문께로 걸어갔다. 설마 제니퍼가 탈출을 꿈꾸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기 옆에 꼭 붙어 있으리라는 안이한 판단에서 잠에 빠져 버린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하긴 제니퍼 메릭은 그 이상의 일도 저지를 수 있는 여자였다. 도망가기 전에 그의 목을 따지 않은 것만도 그로서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빗장을 부수듯 풀고는 문을 홱 열어 제쳤다. 복도의 임시 침대에서 잠자고 있던 가윈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백작님?"

가윈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침대에서 뛰어내릴 자세였다.

그때 발코니 쪽에서 뭔가 이상한 것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로이스의 고개가 그쪽으로 홱 돌아갔다.

"백작님, 무슨 일인데요?"

그러나 가윈의 놀란 얼굴 앞에서 문이 다시 쾅 닫혔다.

그녀가 도 한밤의 추적을 벌이지 않게 한 것만도 다행이라고 혼자소리를 중얼거리며 로이스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제니퍼가 발코니에 서 있었다. 밤바람에 긴 머리를 휘날리며 팔로 몸을 감싼 채 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두 번째의 안도감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표정으로 보아서는 발코니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거나 처녀성을 잃은 일에 대해서 울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더욱이 괴로워하거나 화를 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뭔가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제니퍼는 생각에 빠진 나머지 혼자라는 생각도 잊은 지 오래였다. 가을답지 않게 포근한 밤바람의 부드러운 애무는 정신을 가다듬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오늘 밤 세상이 완전히 뒤집힌 것 같은 느낌만은 어쩔 수 없었다. 브렌나가 그 부분적이 이유였다. 브렌나가 제니퍼의 "고귀한" 희생의 이유였다. 그러나 막 잠들기 직전 무서운 사실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그만 잠이 달아나고 말았다.

그녀는 브레나의 쾌차와 무사한 여해을 비는 기도를 잠결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때, 베개의 감촉이 브렌나의 머리에 베개를 받쳐 주던 순간의 기억을 일깨워 주었다. 브렌나는 얼굴이나 몸에 깃털이 닿으며 무섭게 기침을 한다. 그래서 언제나 조심했다. 그날 브렌나는 베개를 치우는 대신 그녀 나름대로 머리를 짠 것이 틀림없었다. 백작이 두 사람을 보내 줄 것이라고 믿고는 마치 곧 죽을 것처럼 기침이 나올 때까지 그 베개를 베고 잔 것이다.

정말 무지할 정도로 순진한 브렌나였다. 그러나 제니퍼 자신이 짠 것보다는 나은 계획이었다. 생각대로 꼭 들어맞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효과는 있었다. 제니퍼로서는 운명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제니퍼의 생각이 브렌나를 떠나 자신의 미래로 옮아 갔다. 꿈 속에 그리던 그 미래가 이제는 영영 날아가 버린 것이다.

"제니퍼."

로이스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제니퍼가 뒤돌아섰다. 그 굵직한 목소리에 자신의 마음이 배반을 일으킨 것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자니 무척 애를 써야 했다. 도대체 모를 일이었다. 왜 아직도 그의 손이 자신의 살갗 위를 더듬는 것 같고, 왜 그의 얼굴을 보면 그 부드럽고도 거친 키스가 생각나는 걸까? 그래도 목소리나마 침착하게 꾸밀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런데 왜 옷을 다 입었지요?"

"당신을 찾아 나서려던 참이었어."

로이스는 그림자 속에서 빠져 나오며 대답했다. 그의 손에 단검이 들려 있는 것을 본 그녀가 다시 물었다.

"날 찾으면 어쩔 생각이었어요?"

"이 발코니가 있다는 걸 깜빡했지."

로이스가 칼을 벨트에 다시 꽂으며 말을 이었다.

"방을 빠져 나간 걸로 생각해서."

"당신 견습생이 바로 문 앞에서 자고 있지 않나요?"

"잘 봤군."

"다리를 쭉 뻗어서 당신 방 입구를 막고 자는 습관이 있더군요."

"그 점 역시 잘 봤어."

그의 대꾸는 퉁명스러웠다. 로이스는 지금 다른 가능성을 검토해 보지도 않고 문을 열고 나갔던 자신의 불찰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제니퍼는 자신을 발견했으니 그가 그만 가 주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의 존재가 그토록 갈구하는 마음의 평온을 산산이 부수고 있었다. 그녀는 그만 가 달라는 표시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달빛 내린 밤 풍경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녀가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로이스는 그녀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단지 그녀의 이상한 분위기 때문인지, 그녀 곁에 있고 싶거나,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몸에 손을 댔다간 싫어할 것이 너무나 뻔했기 때문에 그는 한 발자국 떨어진 난간에 기대어 섰다. 제니퍼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로이스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 그녀가 지금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든지 하는 어리석은 짓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는 자기 생각을 확인하고 싶었다.

"조금 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그 말에 제니퍼의 몸이 약간 굳어졌다. 그녀는 두 가지 문제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하나인 브렌나의 순진한 계획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다. 어쨌든 얼버무리는 수밖에.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래도 이야기해 봐."

그녀는 힐끔 곁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바로 옆에 있는 그의 널찍한 어깨, 달빛이 새겨진 그의 깎은 듯한 얼굴에 그녀의 가슴이 또 배반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를 의식하는 자신을 추스리기 위해서라도 무슨 이야기든 해야 했다. 기꺼이.

"메릭 성에서도 발코니에 나가 황야를 바라보면서 왕국을 생각하곤 했어요."

"왕국?"

로이스의 입에서 놀람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무슨 엄청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풍성한 머리채도 같이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손을 비단으로 감싸인 그녀의 몸에 묻고 그녀의 얼굴을 돌리고 싶은 욕망을 억눌러야 했다.

"무슨 왕국인데?"

"내 왕국이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어리석기도 하고, 그가 이 문제를 파고들 것이라는 생각에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기도 했다.

"나는 나만의 왕국을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불쌍한 제임스!"

그는 그녀의 왕 이름을 거론하며 그녀를 놀리고 있었다. 그의 놀리는 듯한 말투가 이어졌다.

"그래, 제임스의 왕국을 어떻게 빼앗을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책망의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목소리는 슬픔에 젖어 있었다.

"내 왕국은 땅과 성이 있는 실제 왕국이 아니에요. 꿈의 왕국, 그래요, 내 왕국은 꿈의 왕국이에요.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곳."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로이스의 마음에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돌아서서 팔꿈치를 나간에 괴었다. 제니퍼가 보고 있는 방향으로 눈길을 던지면서 그는 조용히 공감을 표시했다.

"그래, 나도 전에. 정말 오래 전에 내가 설계한 왕국을 상상하던 때가 있었어. 당신 왕국은 어떻게 생겼지?"

"별로 말할 거리는 없어요. 그냥, 평화롭고 윤택한 곳이에요. 물론 가끔은 소작인이 지독한 병에 걸려서 쓰러지기도 하고, 우리의 안전에 심각한 위협이 닥치기도 하죠."

"그 꿈의 왕국에 병도 있고, 싸움도 있다?"

로이스가 깜짝 놀라며 끼어 들었다.

"그야 물론이죠!"

제니퍼는 서글픈 듯한 미소를 흘리면서 말을 이었다.

"있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내가 달려가서 사람들을 구하죠. 내 왕국을 만들어 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예요."

", 영웅이 되고 싶다 이거군."

이해할 수 있다는 미소를 지으며 로이스가 결론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미소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아뇨. 난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한테서 사랑을 받고 싶을 뿐이에요. 나를 아는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면 주었지, 도움을 받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게 다야?"

제니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아주 경건했다.

"그래서 난 꿈의 왕국을 만들어 냈어요. 그곳에서는 내가 위대한 일, 해 볼만 한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멀지 않은 곳, 성에서 제일 가까운 언덕 위에 한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가 바로 다음 순간 달이 구름 뒤로 숨자, 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다른 때라면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로이스는 사람을 보내 조사를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사랑을 포식한 직후요, 매력이 철철 넘치는 미인과 나란히 서 있는 지금, 그의 머리는 방금 전 눈에 포착한 광경에 주의를 기울일 공간이 없었다. 정말 맛보기 힘든, 포근한 신뢰로 가득한 밤이었다. 그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위협에 신경을 쓰기에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밤이었다.

제니퍼의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생각하는 로이스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스코틀랜드 사람 하면 씨족법보다는 영주의 법에 따라 사는 저지대 사람들조차도 지독한 충성파였다. 그녀의 백성들이 제니퍼의 아버지를 백작이라고 부르든 영주라고 부르든, 메릭과 그의 온 가족들은 메릭 가문으로서 완벽한 헌신과 충성을 받을 터였다. 그러니 제니퍼를 경멸하거나 그녀의 결점을 찾아내려 하지도 않을 터였다. 당연히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신만의 왕국을 꿈꿀 필요도 없었다. 드디어 로이스가 말문을 열었다.

"당신은 용감하고 아름다운 아가씨야. 그리고 당당한 여백작이고. 당신 백성들은 당신이 바라는 대로 생각하고 있을 거야.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

제니퍼가 로이스에게 주던 눈길을 거두어 다시 시선을 먼 곳으로 향했다. 이윽고 아주 절제된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사실은, 사람들은 날 일종의.........미운 오리새끼로 생각하고 있어요."

"아니,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그런데 놀랍게도 제니퍼는 그들을 변호하고 나섰다.

"그 사람들로서는 당연하죠. 이복 오빠가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대서 얘기를 하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어떤 일인데?"

제니퍼는 몸을 팔로 감싸고 한 차례 몸을 떨었다. 그가 처음 발코니에 나와서 보았을 때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었어요."

로이스는 가만히 제니퍼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계속 하라는 무언의 재촉이었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베키가 물에 빠져 죽은 일이 제일 심했어요. 레베카하고 나하고는 먼 친척간인 데다가 제일 친한 친구였어요. 나이도 같았고요."

제니퍼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잠깐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열세 살 때였어요. 레베카의 아버지인 개릭 카마이클은 홀아비였고, 레베카가 유일한 자식이었어요. 아저씨는 물론 우리도 아껴 주었지만 그 애를 정말 끔찍하게 생각했어요. 그 애는 정말 상냥하고 예뻤어요. 브렌나보다도 훨씬 더 예뻤죠. 누구든 한 번만 그 애를 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죠. 문제는 아저씨가 그 애를 너무 끔찍이 사랑해서 그 애한테 아무것도 못 하게 했다는 거예요. 혹시 다칠까 봐 그런 거죠. 그 애는 강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어요. 물에 빠질지 모른다고 아저씨가 못 가게 하신 거예요. 그런데 레베카가 아버지한테 안전하다는 걸 보여 드리기 위해서 수영을 배우기로 결심했어요. 우리는 매일 아침 일찍 몰래 강에 나갔죠. 내가 레베카한테 수영을 가르쳤어요.

그 애가 죽기 하루 전날, 시장에 나갔다가 우린 말다툼을 했어요. 내가 마술사 하나가 이상하게 쳐다본다면서 그 애를 놀렸거든요. 그런데 옆에 있던 알렉산더하고 말콤 오빠가 그 말을 들었어요. 물로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다 들었죠. 알렉산더 오빠는 내가 그 마술사를 보고 있었고 그래서 내가 레베카한테 질투를 한다고 하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레베카는 화를 냈어요. 사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 화를 낸 거지만 말이에요. 하여튼 헤어질 때 내일부터는 아침에 강에 오지 말라고 했어요. 자기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말이죠. 하지만 그 애는 아직 수영을 제대로 할 줄 몰랐어요. 그리고 정말 나오지 말라고 하는 말은 아니려니 했어요."

여기서 제니퍼의 목소리가 더욱 가늘어졌다.

"다음날 아침 내가 거기 갔을 때 베키는 아직도 화가 안 풀어졌더군요. 자기 혼자 있고 싶다고 소리를 지르길래 나는 언덕 위에 있다가 그냥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첨벙 하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 있다가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큰일 났구나 싶어서 언덕을 뛰어 내려갔어요. 하지만 그 애 모습은 보이질 않았어요. 언덕을 반쯤 내려가니까

머리만 내놓고 허우적거리는 베키가 보였어요. 나한테 살려 달라고 소리치더군요......"

제니퍼가 몸을 떨면서 무의식적으로 팔을 문질렀다. 그녀의 나지막한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물살이 너무 세서 그 애는 자꾸 떠내려가고 있었어요. 물 속에 들어가 그 애를 찾으려고 해 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더군요. 나는 잠수하고 또 잠수하고 또 잠수했어요. 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말았어요. 베키는 다음날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물에 떠밀려 와 있는 시체로 발견됐어요."

로이스는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지금 그녀는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으며, 괜히 달래 주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말 것이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냥 부드럽게 말을 건네는 것이 좋으리라.

"사고였군."

제니퍼가 긴 숨을 들이쉬었다.

"알렉산더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사람들한테 레베카가 내 이름을 불렀다고 말하는 걸 보면 가까이 있었던 게 분명해요. 그런데 내가 레베카하고 싸운 다음 그 애를 물속에 밀어 넣었다는 거예요."

"당신 옷이 젖은 건 뭐라고 하고?"

로이스의 간결한 물음에 제니퍼의 입에서 지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그 애를 밀어 넣은 다음에 한참 기다리다가 구하러 뛰어 들었다고 하더군요. 알렉산더는 자기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받을 거라는 말을 이미 들었는 데도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오빠는 내 명예를 짓밟아서 멀리 쫓아버리고 싶어 했어요. 그 일이 있고 난 다음에는 아주 쉬웠죠."

"어떤 식으로?"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살짝 들먹였다.

"거짓말 몇 개만 더 하면 되는 거죠, . 오빠가 곡식 자루를 창고로 나를 때 내가 누가 더 무거운 걸 들 수 있나 시합을 하자고 했죠. 그랬는데 마침 그날 밤 소작인 집에 불이 나더군요. 그런 식이었어요."

제니퍼가 눈물 맺힌 눈을 천천히 들었다. 로이스는 그 눈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녀의 눈이 미소를 지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내 머리 보았죠?"

로이스는 몇 주 동안 보아 왔던 황금빛 빨간 머리에 눈길을 주었다. 그 동안 얼마나 애를 태우며 보던 머리인가. 지금 새삼 볼 필요도 없었다. 로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니퍼가 목 메인 소리로 말했다.

"내 머리는 원래 색이 지독히 안 좋았어요. 지금 이 머리 색은 레베카의 머리 색깔이었어요. 레베카는 알아ㅛ.........내가 얼마나.......자기 머리를 좋아했는지."

제니퍼의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나는 이걸 그 애가 나한테 남겨 준 걸로 생각해요. 내가 얼마나 자기를 구하려고 노력했는지 그 애는 안다는 걸 보여 주는 거라고 말이죠."

로이스는 가슴이 아프면서 답답해 왔다. 전에는 별로 느끼지 못하던 감정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향해 내미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니퍼는 뒤로 물러나 그의 손길을 피했다.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도, 닦아 내지도 않았다.

바로 그 순간, 로이스는 깨달을 수 있었다. 왜 이 사랑스러운 소녀가 울지 않는지, 그렇게 때렸건만 왜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바로 지금 깨달았다. 그렇다, 제니퍼는 눈물을 안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의 자존심과 용기가 눈물을 흘리거나 닦아 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겪은 일에 비하면 그까짓 매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로이스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침실로 들어가 포도주를 한 잔 따랐다. 그리고 다시 발코니로 나와 그녀에게 잔을 내밀었다.

", 이걸 마셔."

로이스는 생각과는 달리 퉁명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제력을 회복한 것을 보니 안도감이 들었다. 그의 본의 아닌 퉁명스러움에 그녀의 입가에 애교스런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백작님, 당신은 언제나 내 손에 술만 쥐어 주는 것 같군요."

"내 나름대로 음흉한 이유가 있을 때면 언제라도 또 줄 거야."

그의 농담에 제니퍼가 살짝 웃음을 지었다.

제니퍼는 한 모금 들이켠 후 잔을 옆에 놓았다. 그녀는 발코니 난간 위에 팔을 걸치고 다시 저 멀리로 눈길을 던졌다. 로이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지금의 심정을 표현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런대도 당신이 집안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싶어 하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 걸?"

제니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즉각 대꾸했다.

"나는 정말 그러고 싶었어요. 저렇게 하면 안 될텐데 하는 일들이 정말 많았어요. 여자 눈에는 남자가 못 보는 것도 보이거든요. 수녀원장님 말씀도 그랬어요. 당신네 나라에는 새 베틀이 있더군요. 우리 것보다 훨씬 좋은 걸로 말이에요. 경작법도 훨씬 신식이고. 새롭게 바꿔야 할 게 정말 많아요."

로이스로서는 베틀이며, 새로운 경작법의 이점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거리가 없었다. 그는 얼른 다른 문제를 끄집어냈다.

"집안에서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일생을 보낼 수는 없어."

"난 할 수 있어요."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무슨 일이든 할 거예요. 집안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여 주기만 한다면 말이죠. 그 사람들은 내 핏줄이에요. 그 사람들 피가 내 몸 속에 흐르고 있고, 내 피는 그 사람들 몸속에 흐르고 있어요."

"글쎄, 포기가 최상일 것 같은데? 아무리 애를 써도 승리는 요원한 원정길에 나선 기사같이 막막해."

"당분간은 그렇겠죠. 지난 며칠 같아서는요. 하지만 알렉산더 오빠가 죽었으니 언젠가는 윌리엄 오빠가 가문을 이을 거예요. 윌리엄 오빠는 친절하고 훌륭한 소년, 아니 스물 살이니까 어른이에요. 알렉산더 오빠나 말콤 오빠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똑똑하고 현명하고 또 성실해요. 윌리엄 오빠는 내 입장을 이해해 줄 거예요. 전에 작위를 받은 직후에도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밤, 그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군요."

그녀의 아름다운 옆모습이 침울해 보였다.

"그 문제가 오늘 밤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제니퍼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로이스는 상처 입은 사슴을 생각했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차분하고 담담했다.

"오늘 밤 나는 우리 가문 최악의 적하고 어울렸어요. 내 백성의 적의 연인이 되고 말았어요. 전에는 내가 하지 않은 일로 나를 경멸했지만 이제는 내가 한 행동을 놓고 비난할 거리가 생긴 거죠. 나 자신도 스스로를 경멸하는데 그 사람들이야! 이번에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어요. 하느님도 날 용서하시지 않을 거예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잃어버린 인생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죄의식도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힘껏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돌려 세운 다음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강제로 그녀의 눈을 자신의 눈에 맞추었다. 입을 열려고 하는데 걱정과 동정 속에서도 그의 몸은 그녀의 접근을 눈치 챈 듯 딱딱해지고 있었다.

"제니퍼, 당신이 집안사람들하고 어떤 관계였는지 몰랐어. 하지만 이미 당신과 잠자리를 같이 했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반항의 빛이 역력한 그녀의 목소리가 대꾸했다.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건가요?"

로이스의 눈길이 그녀를 향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불붙듯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차분하면서도 정직한 대답이 흘러 나왔다.

"아니."

"그럼 후회하는 척하지 말아요."

찬바람 도는 대꾸에도 그의 입가에는 즐거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손이 그녀의 뺨에서 목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내가 후회하는 것으로 보여? 아니, 그렇지 않아. 내가 후회하는 건 당신을 모욕할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이지, 한 시간전에 당신을 가졌다는 사실을 후회하는 건 아니야. 그리고 몇 분 후에 당신을 다시 가져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지금 다시 가지려고 하는 중이고."

그의 선언에 담긴 오만함에 제니퍼는 그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러나 로이스는 하고 싶은 말을 계속 내뱉었다.

"나는 당신 하느님이든 뭐든 믿지 않아. 하지만 당신의 하느님이 공정한 신이라고 하는 말은 들었어. 당신 하느님은 당신한테 아무 잘못도 없다는 점을 확실히 해 줄 거야. 누가 뭐라고 하든 당신은 동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내 계약에 동의했을 뿐이야. 그건 당신 의지가 아니고, 내 의지였어.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은 당신 의지와는 반대되는 일이었어. 안 그래?"

로이스는 그렇게 묻고 나서 금방 후회했다. 너무나 후회스러워서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의 하느님 앞에 가서라도 자신이 그녀를 혹평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 역시 두 사람의 잠자리에서 쾌락을 느꼈다는 사실은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원하는 만큼이나 그녀 역시 그를 원했다는 사실만은 그녀가 부정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녀의 정직성과 자신의 본능적 감각을 시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계속 밀고 나갔다.

"그렇지? 당신 하느님은 당신한테 아무 잘못도 없다고 하실 거야. 당신은 당신 의지와는 달리 나를 따른 것뿐이니까 말이야."

"아니에요!"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에는 부끄러움과 무력감이 한데 엉겨 있었다. 그리고 로이스로서는 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감정도 함께 얽혀 있었다.

"아니에요?"

로이스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되받았다. 속으로 터져 나오는 안도감을 숨기며 그는 낮게,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말 어디가 틀렸다는 거지?"

제니퍼가 대답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로이스의 목소리에 담긴 명령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에 떠오르는 그의 손길 때문이엇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도 강렬했던 그의 손길 때문이었다. 처녀성을 깨뜨릴 때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며 괴로워하던 모습, 자신을 위해 욕망을 억누르려고 애쓰면서 내뱉던 그 거친 호흡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그를 가득 채워 주고 싶고, 그가 느끼게 해 준 그 관능을 되돌려 주고 싶어 갈망하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는 순간, 그녀는 대답을 하고 싶었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가 앗아간 그 모든 행복만큼 그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었지만 양심상 그 말들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 좀 전의 사라에서 그녀는 치욕보다 영광을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 그녀는 말문을 열었다.

"당신의 침대에 간 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요."

제니퍼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이 메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의 어두운 회색빛 눈에서 눈길을 거두어 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일단 올라간 다음, 그대로 있었던 것은 내 의지였어요."

제니퍼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미소에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부드러움이 떠오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을 껴안는 그의 팔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의 손이 허리를 감싸면서 딱딱해진 몸에 그녀를 바싹 끌어당겼다. 그의 입이 그녀의 입을 덮쳤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이어 그녀의 숨결을 앗아 갔다.

 

 

 

12. 배신

"손님이 오고 있소."

고드프리가 홀 안으로 들어오며 점심 식탁에 앉아 있는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스물네개의 손이 모두 동작을 멈추었고, 그 얼굴들은 잔뜩 긴장되었다.

"왕의 기를 든 군사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데 수가 아주 많아. 평범한 전령치고는 너무 많아. 라이오넬이 길에서 언뜻 봤는데 그중에 그레이벌리가 있었다는군."

그의 이마가 더욱 찡그려졌다. 그는 위층의 복도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백작은 어디 있소?"

"인질하고 같이 산책나갔는데 어딘지는 잘 모르겠어."

유스테이스의 말을 애릭이 이어받았다.

"내가 아니까 내가 가지."

선 자세 그대로 뒤돌아선 애릭이 홀을 빠져 나갔다. 땅이 울릴 정도로 성큼성큼 걷는 그의 발걸음은 그대로였지만, 표정이 전혀 없던 그의 얼굴이 푸른 눈 사이에 생긴 주름살로 조금 달라 보였다.

제니퍼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돌풍에 놀란 종처럼 울려 퍼졌다. 로이스는 옆의 나무 등걸에 힘없이 기대는 그녀의 모스을 보고 웃음지었다. 얼마나 신이 나는지 그녀의 어깨가 연신 들썩거리고, 뺨에는 연한 장미빛 물이 들어 있었다. 그녀가 눈가에 맺힌 즐거움의 눈물을 닦아 내며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믿을 수가 없어요. 방금 전에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죠?"

"그럴지도 모르지."

로이스는 그 긴 다리를 쭉 뻗으며 대꾸했다.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나왔다.

오늘 아침, 시종들이 줄줄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 제니퍼는 그의 침대 위에서 잠이 깼다. 그런 모습을 보인 그녀가 움츠러드는 모습은, 보는 사람이 더 가슴 아플 정도였다. 제니퍼가 그의 여자가 되었다고 온 성 안의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을 것이 분명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얼버무릴까, 아니면 잊어버리라고 권유할까 하다가, 로이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몇 시간 동안만이라도 그녀를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출 수 있을 것이었다. 지금 그녀가 눈을 반짝이고 쾌활함을 되찾는 것을 보고 그는 그게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신은 내가 그런 엉터리에 속아 넘어갈 바로라고 생각하는군요?"

제니퍼가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지만 터지는 웃음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로이스는 미소로 화답하면서도 그녀의 비난을 인정할 수 없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부인. 다 틀리셨습니다."

"다 틀렸다구요? 그게 무슨 뜻이죠?"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는 로이스의 얼굴에 미소가 환하게 퍼졌다.

"내가 말한 건 거짓말도 아니고, 또 당신은 아무한테나 쉽게 속는 사람이 아니지."

그는 잠깐 말을 멈추고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당신의 멋진 센스에 대한 불평일 뿐이었어."

"아하!"

처음에는 놀란 표정이더니 이윽고 그녀가 못 믿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고맙군요."

"둘째, 당신을 바보로 생각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나는 당신이 정말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자 그녀가 냉큼 받았다.

"고맙기도 해라."

"사실 그건 불평이 아니었어."

그렇게 말을 정정하는 로이스에게 제니퍼는 호기심 어린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것은 설명을 요구하는 무언의 항변이었다. 로이스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그리고 그 부드럽고 섬세한 살결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만약 당시이 모자라는 사람이었다면 나의 연인이 된 뒤에 올 모든 결과를 그렇게 오래 생각하지 않았겠지. 그리고 그냥 당신의 입장을 받아들였을 거야. 거기에 따르는 혜택도 있으니까 말이야."

로이스의 눈길이 그녀의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를 의미심장하게 훑어 내려갔다. 오늘 아침 보석 상자를 통째로 넘겨주면서 꼭 걸라고 강권했던 목걸이였다.

제니퍼의 눈이 분노로 커다래졌다. 그러나 로이스는 개의치 않고 냉정하게 계속 퍼부었다.

"만약 당신이 보통 수준의 여자였다면 보통 여자들이 그렇듯이 평범한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을 거야. 이를테면 유행이라든가 가사일, 그리고 아이들 양육 같은 일 말이지. 충성이니 애국이니 하는 것 따위로 골치 썩지는 않을 거야."

제니퍼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역겹다는 듯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입장"을 받아들인다고요? 백작님, 나는 지금 어떤 "입장"에 있는 게 아니에요. 나는 한 사내와 죄를 짓고 있는 거라구요. 내 가족의 바람, 내 나라의 바람, 그리고 신의 바람을 다 거부하면서요."

제니퍼의 말이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당신이야 나한테 여자다운 문제만 생각하라고 쉽게 말할 수 있죠. 가사일이니 아이 양육, 말은 좋죠. 하지만 당신이 그걸 가질 권리를 빼앗아 갔어요. 당신의 아내가 당신의 집을 돌보겠죠. 그 여자는 틀림없이 내 인생을 산 지옥으로 만들고 말거예요. 그리고......"

"제니퍼,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아내가 없어."

로이스는 얼른 그녀의 말을 잘랐다.

로이스는 그녀가 말하는 것이 대부분 사실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며 유혹하는 듯한 입을 보노라니 정신을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은 오직 그녀를 품에 안고 화난 아이 달래듯 그녀를 달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금이야 그렇죠. 하지만 언젠가는 신붓감을 고르겠죠."

쓰디쓴 목소리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녀의 말투가 홱 변했다.

"잉글랜드 여자로! 얼음처럼 피가 차갑고 쥐털 같은 머리색에다가 코는 낮아서 언제나 끝이 빨갛고, 언제......"

로이스의 어깨가 차마 소리는 내지 못했지만 참을 수 없는 웃음에 들썩들썩 야단이었다. 그리고 위험한 물건이라도 날아 오는 듯 우습게 팔을 치켜 들었다.

"쥐털 같은 머리색이라고? 그게 내가 고를 수 있는 최고의 여자야? 그래도 난 최근까지 금발머리에 커다란 초록빛 눈동자를 가진....."

"핑크색 입이 크고, 또 큰........"

그녀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손을 가슴께까지 들어올리고서도 지금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로이스가 놀리듯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래, 큰 뭐?"

"귀요!"

그녀가 사납게 소리를 버럭 내지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어떻게 생긴 여자인가가 무슨 문제예요. 그 여자가 내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 거라는 점이 중요하지."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로이스는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이며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키스를 하며 속삭였다.

"당신하고 약속하지. 내가 신부감을 고를 땐 우리 둘 다 좋아하는 여자를 고르겠어."

그 말을 뱉는 순간, 로이스는 제니퍼에 대한 집착으로 자신의 사고가 정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도 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제니퍼를 곁에 두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비록 조금 전에 제니퍼를 놀리기는 했지만, 자신은 메리 해멀이나 다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정도로 성인군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제니퍼에게 자신의 연인으로만 남아 있게 해 불명예를 당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젯밤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가 짧은 인생에서 얼마만한 고통을 견뎌 내야 했는지 알게 된 후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의 마음은 그녀가 "사랑하는" 가족에게로 돌아갔을 때 적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사실로 해서 어떤 대접을 받을까 하는 생각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나 후계자 없이 사는 것도 하나의 대안은 될 수 있었지만, 그것은 마음에 들지도 않고 또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유일한 대안-그녀와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와 결혼한다는 것은 적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 찬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인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불구대천의 원수들을 인척으로 얻는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 결혼은 오직 평화와 조화만 있기를 바라는 자신의 홀을 전장으로 삼는 일일 뿐이었다. 단순히 그녀가 침대에서 정열과 헌신으로 그에게 쾌락을 선사했다고 해서 평생 싸움 속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는 전설이 아닌 그의 모습과 사랑을 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리고 어느 여자도 웃게 만들지 못하던 그를 웃게 만든 여인이었다. 그녀의 용기, 지혜,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은 그를 매혹시키고 있었다. 더구나 그 정직성과 솔직함은 그를 완벽하게 사로잡아 버렸다.

지금도 로이스는 지난밤 그녀가 자존심보다는 정직을 선택하던 때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다. , 일단 침대에 올라가고 나니 떠나고 싶지 않았다고 그녀가 솔직히 인정하던 때의 느낌도 되살아났다. 그 정직성은 특히 여자의 경우 정말 귀했다. 그것은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있다는 점을 뜻했다.

물론 그런 것들이 그가 이제까지 조심스레 쌓아 온 미래를 포기할 정도의 이유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그는 그녀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때 긴 트럼펫 소리가 났다. 로이스는 힐끔 성벽 위의 경비병들을 쳐다보았다. 적대적이지 않은 방문객들이 왔다는 신호였다.

"저게 무슨 뜻이죠?"

"왕한테서 전령이 온 모양인데?"

로이스가 팔꿈치로 몸을 기대며 고개를 들었다. 만약 왕의 전령이 맞다면 생각보다 일찍 온 셈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는 한가로이 해를 쳐다보았다.

"누가 왔든 적은 아니니까 걱정할 건 없어."

"당신 왕은 내가 인질로 있다는 걸 아나요?"

"그래."

그는 화제를 돌리고 싶지 않았지만 미래에 대한 그녀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설명을 덧붙였다.

"당신을 잡은 후 며칠 뒤에 연락했지. 월례 보고 하는 길에."

"그럼 난........"

제니퍼는 떨리는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날 어디론가 보내겠군요. 지하 감옥이나 아니면......."

"아니, 당신은 내 보호 하에 있을 거야. 언제까지나."

그녀의 말을 재빨리 자르고 나선 로이스였지만 끝의 말에는 힘이 없었다.

"하지만 왕이 다른 명령을 내린다면요?"

"그러지 않아."

로이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깨 너머로 그녀를 쳐다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헨리는 내가 어떻게 싸워서 승리를 거두는지는 관심이 없어. 내가 이기는 한은 말이지. 내가 당신을 인질로 잡고 있으니 당신 아버지가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기만 하면 가장 좋은 승리가 되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승리를 거두는 셈이니까."

지금의 이야기에 그녀가 긴장하는 것을 눈치 챈 로이스는 말을 돌려 아침 내내 머리를 맴돌던 질문을 던졌다.

"이복 오빠가 집안사람들과 당신 사이를 이간질할 때 왜 아버지한테 이야기하지 않았지? 꿈의 왕국이나 상상하면서 도피하지 말고 말이야. 당신 아버지는 강력한 영주니까 당신 문제쯤이야 쉽게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나처럼 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구."

"그래, 당신은 어떻게 해결할 건데요?"

그렇게 묻는 제니퍼의 입가에 예의 그 도발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로이스는 그 미소만 보면 그녀를 안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러니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생각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다.

"당신을 의심하지 말라고 명령하면 되지."

"전사나 그렇게 말하는 영주는 그러지 않아요. 사람들의 생각을 이래라 저래라 명령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래 봤자 입밖에 내지 못하고 겁만 먹게 만들죠."

"그럼, 당신 아버지는 어떻게 했는데?"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녀의 관찰에 시비를 거는 게 분명했다.

"베키가 익사했을 때 아버지는 어디선가 당신하고 싸우고 계셨을 거예요."

"그리고 돌아와서, 나하고 싸우고 나서 말이야........"

로이스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땐 어떻게 했지?"

"그때쯤엔 나에 관해서 별의별 소문이 다 떠돌고 있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과장된 소문이라고 생각하셨고, 금방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셨죠. 그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로이스의 얼굴이 찬성할 수 없다는 듯 찡그려지는 것을 보고 그녀는 얼른 덧붙였다.

"아버지는 아버지 표현대로 "여자들" 문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도 나는 무척 사랑해 주셨어요."

제니퍼의 남편으로 발더를 선택한 것을 생각하면 그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하긴 그녀도 충성심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의 말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자들......그러니까 남자만큼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재혼한 이유도 새엄마가 먼 친척인 데다가 건장한 아들을 셋이나 두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작위를 먼 친척한테 넘겨주는 게 더 좋았던 모양이군. 당신한테 잇게 하면 손자한테로 이어질 텐데 말이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한 로이스의 말이었다. 그러자 제니퍼는 충성심이 더욱 발동하는 모양이었다.

"아버지한테는 가문이 최고였어요. 그러니 당연하죠. 제임스 왕이 내가 승계하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여자인 내가 사람들의 충성심을 이끌어 내고 지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그럼 문제가 될 수밖에 없지요."

"아버지가 제임스한테 청원서는 냈나?"

"아마 안 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냈다 해도 나는 아니에요. 여자인 나한테는 가야 할 길이 따로 있다는 게 아버지 생각이니까요."

아니면 다른 쓸모가 있거나........그런 생각을 하니 로이스는 괜히 화가 치밀었다.

"당신은 우리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요. 단순히 아버지를 몰라서 그렇다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는 위대한 분이고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모두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 놓을 수 있어요. 만약 아버지가......"

순간 제니퍼는 지금 자기 정신이 어떻게 된 건지, 아니면 눈이 먼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저기 숲 속에서 조용히 하라고 입가에 손을 대고 있는 사람은 분명 윌리엄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면 말이죠."

제니퍼는 큰 숨을 토했다. 그러나 로이스는 그녀의 갑작스런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엉뚱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억제하느라 자신과 한창 싸우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이토록 완벽한 충성심을 불어넣었다는 사실에 불끈 질투심이 솟은 것이다.

제니퍼는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자세히 살펴보았다. 윌리엄 오빠가 나무 그늘 사이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래도 그의 녹색 조끼 한 자락은 볼 수 있었다. 오빠가 여기 나타나다니! 그녀를 구하러 온 것이다. 그녀의 가슴이 기쁨과 안도감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제니퍼......"

로이스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제니퍼는 윌리엄의 숨어 있는 곳에서 얼른 눈길을 거두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

그녀는 대꾸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아버지의 군대가 숲에서 쏟아져 나와 로이스를 그 자리에서 죽이는 광경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자예요! 그 소리가 목까지 치밀어 올랐다가 도로 내려갔다. 그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되도록 숲에서 멀리 떼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과 아버지의 군대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메우고 있었다.

로이스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갑자기 왜 그래? 당신 얼굴이........"

"피곤해요! 산책을 좀 해야겠어요. 나는........."

그녀는 큰 소리로 말하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로이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왜 안절부절못하는지 이유를 물어 볼 생각이었지만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언덕을 올라오는 애릭의 모습이었다.

"제니퍼, 애릭이 오고 있어. 애릭이 여기 도착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제니퍼는 뒤를 돌아보았다. 언덕을 올라오는 애릭의 모습에 그녀의 눈길이 날아가 박혔다. 기이한 안도감이 그녀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애릭이 있는 한 로이스는 최소한 자기와 함께 싸워 줄 사람도 없이 죽지는 않게 된 셈이다. 그러나 싸움이 벌어지면 그녀의 아버지나 윌리엄, 또는 집안사람 가운데 하나도 죽어야 될 터였다.

"제니퍼........."

그녀의 주의력이 흩어져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로이스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쨌든 제니퍼는 그를 향해 돌아섰고, 주의해서 들으려고 하는 얼굴이었다.

"?"

만약 아버지의 군대가 로이스를 공격할 생각이라면 지금은 숲에서 나와야 한다. 지금은 공격하기 딱 좋은 시기였다. 제니퍼의 머리가 휙휙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윌리엄이 혼자이고, 애릭을 보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침착하게 있으면서 가능한 한 빨리 숲으로 들어갈 방법을 궁리해야 할 터였다.

"아무도 당신을 감옥에 넣지 않아."

그의 부드럽고도 단호한 목소리에 제니퍼는 눈을 들어 그의 저항하기 어려운 눈빛을 바라보았다. 순간 제니퍼의 머릿속에 자신이 이제 곧, 아마 한 시간 이내에 그의 곁을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동시에 그 생각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로이스가 그녀의 납치를 용인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납치자라면 응당 가했을 잔인무도한 짓은 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그녀의 고집센 행동을 보고도 욕하는 대신 그 용기를 칭찬한 유일한 남자였다. 그의 말을 죽였고, 그를 칼로 찔렀으며, 탈출을 감행해 그를 바보로 만들었는데도 그는 어느 신사보다도 더 친절하게 그녀를 대했었다.

그만의 독특한 신사도로써. 그 모든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눈이 너무도 아렸다. 사실 집안이나 나라의 일만 아니라면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친구? 아니, 그는 이미 그 이상의 존재였다. 그는 그녀의 연인이었다. 목이 메었다.

", 미안해요.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방금 뭐라고 했죠?"

"그러니까........."

그녀의 공포에 잠긴 표정을 보고 걱정이 되는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어떤 위험도 당하게 하지 않을 거야. 집에 보내야 할 시간이 될 때까지는 내가 보호해 주겠어."

제니퍼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 고마워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온갖 감정이 다 실려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감사의 목소리로 착각한 로이스는 한가로이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면 그 답례로 키스를 해 주지 않겠어?"

로이스는 그녀를 설득하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었다. 놀랍게도 그녀가 그의 목에 자진해서 팔을 감고는 열렬하게 키스를 해 온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그의 입술에 바싹 붙이고 반은 이별의, 반은 두려움의 뜻이 담긴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의 손은 그의 울퉁불퉁한 근육을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 등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잠시 후 로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팔은 여전히 그녀를 꼭 안고 있었다.

"세상에......."

로이스가 나지막이 감탄사를 토한 후 다시 고개를 숙이다가 멈췄다. 애릭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런, 애릭이 오는군."

로이스는 제니퍼의 팔을 들어 애릭을 가리켰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애릭이 있는 곳으로 가자 애릭은 로이스만을 데리고 옆으로 갔다.

제니퍼에게로 돌아온 로이스의 얼굴이 밝지 않았다.

"돌아가야겠어."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비참한 표정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오늘 아침 밖으로 나가자는 말을 하자 촛불처럼 환해지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얼마나 기뻐했던가!

"이제까지 천막 안에만 갇혀 있든가, 경비병의 감시를 받고 있었어요. 언덕 위에 앉는다는 생각만 해도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에요!"

방금 전의 감미로운 키스를 생각해 보면 여기 나와 있는 시간이 그녀에게 바람직한 효과를 미친 게 틀림없었다. 그녀를 여기 혼자 두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타고 갈 말도 없으니, 걸어서 도망가 보았자 성 주위에 주둔하고 있는 5천 명의 군사한테 한 시간 안에 도로 잡힐 것이라는 점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더욱이 성벽에 서 있는 경비병에게 그녀를 감시하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입술에 아직도 남아 있는 감미로운 키스의 여운과 며칠 전 그녀가 다시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일이 아직도 생생했다.

"제니퍼.........."

자신이 꺼낼 말이 과연 현명한지 자신할 수가 없어서 그의 목소리는 아주 딱딱했다.

"여기 남아 있어도 좋다고 허락해도 이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을 거라고 믿을 수 있을까?"

못 믿겠다는 듯 제니퍼의 얼굴에 떠오른 즐거운 표정은 그의 관대함에 대한 보상으로 충분했다.

"그럼요!"

제니퍼는 탄성을 질렀다. 이런 기회가 찾아오다니 믿을 수 없었다. 로이스의 얼굴에 나른한 미소가 번졌다. 덕분에 그의 얼굴이 더욱 멋있어 보였다. 마치 어린애 같은 미소였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로이스는 그 약속을 남기고 애릭과 함께 사라졌다.

제니퍼는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머리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길은 그의 모습을 하나하나 기억에 품고 있었다. 갈색 조끼에 싸인 넓은 어깨, 가는 허리를 느슨하게 감고 있는 갈색 벨트, 높은 구두 위로 강인한 근육을 그대로 드러내는 긴 다리, 언덕을 내려가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미간을 찡그리며 나무들을 훑어보았다. 숲 속에서 뭔가 위험을 감지한 듯했다. 만약 그가 뭔가를 보았거나 들었다면 그는 제니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 순간, 제니퍼는 제일 먼저 마음에 떠오른 행동을 취했다. 손을 살짝 흔들어 그의 주의를 끈 다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렇게 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었지만 그 행동은 입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가 새어 나오려는 것을 막아 주는 부수적인 효과도 낳았다.

그러나 로이스에게는 그 행동이 키스를 보내는 것으로 보였다.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는 손을 들어 인사를 보냈다. 옆에서 애릭이 뭐라고 날카롭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제니퍼와 숲에서 주의를 돌려 애릭의 말을 주의깊게 들었다. 언덕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는 그의 마음에는 제니퍼의 열렬했던 키스가 가득 차 있었다.

"제니퍼!"

윌리엄의 나지막하고도 다급한 목소리가 뒤쪽의 숲에서 들렸다. 제니퍼의 온몸이 임박한 탈출로 인해 잔뜩 굳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숲으로 뛰어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정도로는 주의력이 살아 있었다. 백작이 하딘 성을 에워싸고 있는 두꺼운 성벽에 뚫린 비밀 문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녀는 구르다시피 낮은 언덕길을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숲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구원자를 찾아 미친 듯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윌리엄 오빠, 어디......."

그러나 그녀의 말은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불쑥 밑에서 올라온 우람한 팔들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 땅바닥에 눕힌 것이다. 그녀의 몸이 오래된 오크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외진 곳으로 끌려갔다.

"제니퍼!"

윌리엄의 목멘 속삭임이었다. 그의 얼굴이 불과 몇 센티미터 앞에 있었다. 회한과 걱정이 교차된 얼굴이었다.

"불쌍한 것....."

윌리엄의 눈이 그녀의 얼굴을 탐색하고 있었다. 아까 목격한 키스 장면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불쑥 그가 이렇게 물었다.

"저 놈이 너한테 애인이 되라고 강요했지, 그렇지?"

", 나중에 설명할 게요. 서둘러야 해요."

제니퍼는 애원했다. 그들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도망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급한지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브렌나는 이미 집으로 가고 있어요. 아버지는 어디 계시죠?"

"아버님은 메릭에 계시고 여긴 여섯 명밖에 오지 않았어."

"여섯이라고요!"

제니퍼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탄성이 터졌다. 순간, 신발이 나무 덩굴에 걸려 그녀의 몸이 휘청했다. 얼른 몸을 바로잡은 그녀는 윌리엄의 등 뒤로 달려갔다.

"그래, 힘보다는 계략을 쓰는 게 널 구해 내기 쉬울 것 같아서."

로이스가 홀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레이벌리는 홀 한가운데 서서 그 뾰족한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천천히 하딘 성의 내부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의 가느다란 코에는 숨길 수 없는 적의와 탐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왕의 자문관이요, 유력한 기관인 성실 법원(Court of the Star Chamber)의 영향력 있는 인사인 그레이벌리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 때문에 그는 그토록 탐내는 작위와 영지를 가질 수 없었다.

헨리는 왕위를 차지한 후 전임자들이 맞아야 했던 운명을 피하기 위한 순서를 착착 밟아 나갔다.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강력한 귀족들이 곧 군주에게 불만을 품고 그 군주를 몰아낸 것이 이제까지의 역사였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헨리 왕은 성실 법원을 원상태로 복귀시켰다. 그리고 그레이벌리같이 귀족 계급이 아닌 사람들을 자문관과 행정관으로 충원했다. 자문관들은 귀족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엄청난 세금을 매겼다. 이러한 행정으로 헨리 왕은 자신의 금고를 두둑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반란에 필요한 귀족들의 재원을 빼앗는 이중 효과를 톡톡히 거두고 있었다.

자문관 가운데서도 그레이벌리가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철두철미했다. 왕의 신임과 후광을 뒤에 업고 그레이벌리는 브리튼의 귀족들 대부분을 거세하거나 무력화시크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이스 웨스트모어랜드 백작만은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백작은 전쟁을 치를수록 더욱더 강력해지고 부유해지고 있었다.

로이스 웨스트모어랜드에 대한 그레이벌리의 증오는 궁정 사람들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그에 대한 로이스의 경멸 또한 맞먹고 있었다.

30미터 앞에 서 있는 상대를 향해 걸어가는 로이스의 얼굴은 극히 무표정했다. 그러나 곧 벌어질 일이 분명 유쾌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려 주는 미묘한 징후만큼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읽어 두고 있었다. 제일 먼저, 그레이벌리의 얼굴에서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또 하나, 그레이벌리 뒤에 꼿꼿하게 서 있는 서른다섯 명의 근위대 얼굴이 아주 험악했다. 고드프리와 유스테이스가 이끄는 로이스의 군사들 역시 잔뜩 경계를 하고는 긴장된 표정으로 연단 부근 홀 끝에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그레이벌리의 예고없는 방문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로이스가 앞을 지나가자 부하들은 로이스 뒤로 대오를 형성해 정상적인 호위대의 모습을 갖췄다. 로이스는 그레이벌리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오, 그레이벌리. 이렇게 헨리의 왕좌 뒤의 은신처에서 나오다니 무슨 일이오?"

그레이벌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무덤덤한 목소리에 가시가 잔뜩 박힌 것은 마찬가지였다.

"클레이모어, 개명된 세상이라 세상 사람들이 피와 시체 썩는 냄새를 즐기는 당신의 쾌락에 동참하지 못해서 유감이오."

", 인사는 주고받은 셈이고, 무얼 원하시오?"

"당신 인질. 왕께서는 내 충고에 귀를 기울여 제임스 왕과 평화 협정을 맺으려고 노력하셨소. 한참 어려운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데 당신이 스코틀랜드 최고의 영주 가운데 한 사람의 딸들을 사로잡은 거요. 당신의 행동 때문에 평화 협상이 결렬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오. 당신이 그 야만스러운 취미대로 포로들을 학살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가정 하에, 폐하께서는 나에게 즉시 제니퍼 메릭 양과 동생을 책임지고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내리셨소."

로이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그레이벌리의 독설을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멍한 그의 귀에는 그 말들이 멀리서 들리는 듯 웅웅거리고 있었다.

"아니, 그럴 수 없소."

잔뜩 힘을 주어 말한 그레이벌리의 말에 대한 로이스의 대답은 냉랭하고도 간단했다. 그것은 왕명에 대한 반역을 뜻했다. 거리낌없이 로이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말은 보이지 않는 투석기에서 날아온 거대한 바윗돌처럼 엄청난 힘으로 방안의 공기를 때렸다.

근위대가 자동적으로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로이스를 노려보았다. 반면, 로이스의 부하들은 깜짝 놀라며 긴장된 얼굴로 로이스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메릭만은 여전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레이벌리를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레이벌리까지도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로이스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왕의 명령을 전달한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명령 그 자체를 감히 거부한다는 건가?"

그러자 로이스의 입에서 즉각 차가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당신이 학살 어쩌고 하면서 날 비난한 데 대해서 도전하는 거요."

"클레이모어, 당신이 그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민감할 줄은 몰랐소."

그레이벌리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로이스로서는 시간을 번 셈이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포로들은 전부 헨리의 행정관들에게 보내졌고, 그 사람들의 운명은 거기서 결정되었소."

"말 돌리지 마시오. , 왕명에 따르겠소, 안 따르겠소?"

그레이벌리가 말을 잘랐다.

기대에 어긋난 운명과 예측 불가능한 왕이 허용한 그 몇 분의 시간 동안, 자신이 왜 제니퍼 메릭과의 결혼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이유와, 왜 그러려고 하는지 몇 개의 부득이한 이유를 생각하느라 로이스의 머리가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방방곡곡을 돌며 전장에서 세월을 보내고 또 그에 해당하는 승리를 거두오 온 그였지만, 바로 자신의 침대에서 애교스러운 열일곱 살짜리 소녀에게 지고 만 것이 사실이었다. 그녀는 로이스가 지금까지 대해 왔던 열 명의 여자들보다도 더 용기가 있고 재치가 있었다.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해도 이제는 도저히 보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암호랑이처럼 그에게 덤볐다. 그러나 그 반면 천사처럼 품에 안겼다. 또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찔렀으면서도 그 흉터를 보고는 키스를 했다. 담요를 갈가리 찢어 놓았고 셔츠도 입지 못하게 꿰매 놓았다. 그러나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그녀는 그를 들뜨게 만드는 달콤하고도 열렬한 키스를 퍼부어 왔다. 그녀는 그의 마음 어두운 곳을 밝혀 주는 미소를 간직하고 있었고, 마주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웃음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또 정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그 정직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문제에 정신을 집중하거나 "사랑" 이라는 말을 생각하기는 싫었다. 그것은 자신이 그녀에게 육체적으로 빠져 있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요, 그로서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로이스는 전시에 결정을 내릴 때 으레 쓰던 방법을 동원했다. 공정하고, 전광석화 같은 판단이 요구될 때 유용한 방법이었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그녀의 아버지나 메릭 일가가 그녀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로 볼 때 설사 돌아간다 해도 희생자가 아니라 배반자로 대접받을게 뻔했다. 적과 함께 잔 여자이니 아이를 가졌든 안 가졌든 수녀원에 갇힐 터였다. 그녀는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사랑받는 꿈의 왕국이나 상상하면서 일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존재할래야 존재할 수 없는 꿈의 왕국에서.

그 어떤 여자보다도 침대 위에서 자신과 잘 어울렸다는 점과 그녀가 처할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 로이스로서는 자신에게 허용할 수 있는 한계였다.

일단 생각이 그에 미치자 그는 예의 그 신속함과 단호함으로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우선 그녀가 그레이벌리의 제안에 맹목적으로 따르기 전에 단둘이 몇 분간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 몇 분 동안 그녀를 납득시켜야 했다. 그는 억지로나마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적수에게 제안했다.

"부하들이 제니퍼를 데려오는 동안 잠깐 긴장을 풀고 뭐라도 들면서 기다리지 않겠소?"

로이스는 팔을 들어 한 번 흔들고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의 신호가 떨어지는 순간, 하인들이 잽싸게 움직였다. 언제라도 내놓을 수 있게 준비해 놓은 차가운 음식들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레이벌리의 눈썹이 의심스럽다는 듯 잔뜩 위로 올라갔다. 로이스는 헨리의 호위대를 훑어보았다. 한때는 같은 전장에서 함께 싸운 적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과 과연 서로 목숨을 내놓고 싸울 수 있을까? 로이스는 그레이벌리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매섭게 물었다.

"어쩌겠소?"

제니퍼가 남아 있겠다고 해도 그레이벌리가 억지로 그녀를 데리고 가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를 설득해야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로이스는 목소리에 유쾌한 기색이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말을 이었다.

"브렌나 양은 이미 내 동생의 호위를 받으면서 집으로 가고 있소."

그레이벌리가 이야기에 약하다는 점을 알고 있는 로이스는 자신의 말이 효과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진심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이 들으면 틀림없이 재미있어 할 이야기가 있는데......"

그레이벌리의 호기심이 의심을 이긴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의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몸이 테이블로 향했다. 로이스는 그를 안내하는 척하다가 멈추어 섰다.

", 제니퍼 양을 데려오라고 해야지."

그의 몸은 벌써 애릭을 향하고 있었다.

"고드프리하고 같이 가서 그 사람을 찾아 이리로 데려오도록."

그 거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이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하고 단둘이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그레이벌리의 제안을 믿거나 받아들이지 말라고 전해. 이 말을 분명히 전해야 한다."

제니퍼가 자신의 제안을 듣고도 가겠다고 고집할 가능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려고 하는 동기가 욕정이나 열정 이상의 것이라는 점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전투에 나설 때면 그는 적의 동기가 얼마나 강한가를 파악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지금도 자신에 대한 제니퍼의 감정이 그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침대에서 그렇게 완벽하게 자신을 내맡길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할 리도 없었다. 또 불과 몇 분 전, 언덕 위에서 그렇게 키스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감정을 숨기기에는 너무 상냥하고 또 정직했다.

물론 먼저 제니퍼와, 그리고 이어 그레이벌리와 약간 소동이 있겠지만, 결국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서 마음이 한결 느긋해졌다. 로이스는 걸음도 가볍게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레이벌리는 이미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그럴 수가."

몇 분 후 그레이벌리가 입을 열었다. 브렌나가 이미 떠났다는 이야기에 이어, 시간을 벌기 위해 로이스가 별의미도 없는 이야기까지 가능한 한 자세히 기억을 되살려 이야기한 후였다. 그레이벌리가 고상하게 빵 한쪽을 씹으며 말을 이었다.

"예쁜 여자를 보내고 그 고집센 여자를 데리고 있다 이거요? 거 참,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구려."

로이스는 그의 말을 거의 듣지 않고 있었다. 하딘에 남아 있겠다는 제니퍼의 결심을 그레이벌리가 인정하지 않을 경우의 대안들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대안을 갖고 있는다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의 대안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 그에게 승리를 아겨 주는 요인이었다. 로이스가 생각한 최후의 대안은 그레이벌리가 제니퍼의 결심을 이정하지 않을 경우 왕으로부터 직접 칙령을 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레이벌리를 "믿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반역이 아니다. 그리고 비록 왕이 화를 낼 것은 뻔했지만 그렇다고 로이스의 목을 매달겠다고 하지는 않을 터였다. 제니퍼가 로이스와 결혼하고 싶다고 그 부드러운 입술로 이야기하는 것을 직접 들으면 왕이 그 의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왕 자신도 위험한 정치적 상황을 정략결혼으로 해결하는 것을 선호하는 바니까.

로이스가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왕이 마지못해 인정하면서도, 그 즉시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장면이 그렇게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로이스로서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느니 그렇게 상상하는 편이 훨씬 더 기분이 좋았다. 교수대에 끌려가 사지를 찢기거나, 목숨을 걸고 얻은 땅과 재산을 빼앗기는 것 같은 일들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것 말고도 기분 나쁜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아니면 이것저것 조합되어서 나타날지도 모른다. 지금 적수 앞에 앉은 로이스의 머릿속으로 그 모든 가능성들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등을 돌리는 순간 제니퍼가 도망가려고 하면서도 그 입술과 가슴, 그리고 그 몸으로 키스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미인이라면 왜 보냈소?"

"아까도 말했다시피 아픈 여자를 데리고 있어 봤자 뭘 하겠소."

더 이상 그레이벌리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 로이스는 배가 엄청 고픈 시늉을 하고는 손을 뻗어 빵 접시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위가 빵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아우성이었다. 쉰내가 물씬 풍기는 거위고기와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빵이었다.

25분이 지났다. 이제 더 이상은 쇼를 하기에도 힘든 시간이었다. 애릭과 고드프리가 이미 말을 전했을 시간이 지났으니 그녀가 주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왜 같이 가자고 하는지 그 이유를 말했을 테니까. 그런데 그녀가 오기를 거부하면? 만약 그녀가 안 오겠다고 버티면 애릭이 어떻게 할까? 로이스는 그 충직한 기사가 제니퍼에게 물리적인 힘을 쓰는 광경을 상상하자니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애릭이라면 다른 남자가 가느다란 막대기를 부러뜨리는 힘 정도로도 그녀의 팔쯤은 손쉽게 부러뜨린다. 그 생각을 하는 로이스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대충 다듬은 널빤지로 만든 테이블 건너편에서 그레이벌리가 로이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여기는 표정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그레이벌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 기다릴 만큼 기다렸소!"

불쾌한 얼굴로 로이스를 노려보며 그레이벌리가 천천히 다가갔다.

"웨스트모어랜드, 당신은 지금 날 바보로 만들고 있소. 그 여자를 데려오라고 부하를 보낸 게 아니오. 만약 그 여자가 여기 있다면 어딘가 숨겨 놓았을 거요. 그리고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바보요."

그리고 그레이벌리는 로이스를 가리키며 근위대를 향해 소리쳤다.

"이자를 체포하고 성을 샅샅이 수색해서 메릭 가의 여자를 찾도록. 필요하다면 이 성을 완전히 분해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여자를 꼭 찾아야 한다.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두 여자를 벌써 며칠 전에 죽었을 거다. 그의 부하를 심문하되 필요하면 칼을 써도 좋다. 지금 당장 실시하라!"

근위 기사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근위 기사이므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로이스를 체포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움직이는 순간 로이스의 부하들이 칼에 손을 대면서 재빨리 로이스를 에워쌌다. 근위 기사와 로이스 사이에 장벽을 친 것이다.

왕의 부하와 자신의 부하가 충돌하는 것은 로이스로서는 전혀 원하지 않은 바였다. 특히 지금은.

"중지!"

그의 입에서 벼락 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로이스는 근위 기사들을 방해하는 것만으로도 부하들이 반역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홀 안에 있는 아흔 명의 기사들이 그의 고함에 모두들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각기 자신들의 상관 얼굴을 쳐다보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이스의 눈길이 그레이벌리를 훑었다. 경멸이 가득한 그 눈길에 그레이벌리의 안색이 싹 변했다.

"당신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구려. 내가 죽여서 숨겼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 여자는 행복하게 산책을 즐기고 있소. 경비병 하나 없이 말이오. 제니퍼 양은 이곳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며, 완벽한 자유를 누리고 있고, 모든 편의를 다 제공받고 있소. 그녀를 직접 본다면 그녀가 이 성의 여주인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당신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될 거요. 그리고 그녀는 아주 귀한 진주 목걸이까지 하고 있소. 물론 그것도 전 여주인의 것이지만."

그레이벌리의 입이 벌어졌다.

"아니, 당신이 그 여자한테 보석을 주었다고?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검은 늑대, "스코틀랜드에 내린 저주" 가 자신이 약탈한 재물로 포로를 치장하게 했다고?"

"보석함째로 주었소."

로이스의 느릿하고도 부드러운 말투에 그레이벌리의 얼굴이 경악의 표정으로 변했다. 그 표정이 너무도 우스워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는 한편으로는 그 얼굴에 주먹을 한 대 날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 로이스는 잠시 갈등했다. 하여튼 지금 이 순간, 로이스의 관심사는 홀 안에서의 충돌을 막는데 있었다. 그러자면 애릭이 제니퍼를 데리고 나타나기 전까지는 무슨 말이든 계속 떠들어야 했다. 로이스는 확신이 있다는 자세로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며 말했다.

"더구나 만약 제니퍼 양이 구하러 와 주어 고맙다고 당신 발밑에 엎드려 눈물이라도 흘릴 거라고 기대했다면 실망이 클 거요. 그녀는 나와 함께 있으려고 할 테니까."

"그 여자가 왜?"

그레이벌리가 전혀 화가 나지 않는 듯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 묻고 있는 순간에도 상황을 반전시킬 거리를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 로이스와 마찬가지로 그레이벌리 역시 대안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설사 제니퍼 양이 자발적으로 남아 있겠다고 하더라도, 또한 로이스가 왕을 설득해서 모든 허물을 용서받는다 하더라도, 로이스가 포로를 부드럽게 다루더라는 사실 하나로도 잉글랜드의 궁정을 몇 년 동안 충분히 웃길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었다.

"당신이 말하는 분위기로 봐서는 제니퍼 양이 당신 침대에서 한바탕 활약한 모양이로군. 그 정도 되니까 그 아가씨가 자기 가족과 나라도 기꺼이 배반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아니겠소?"

재미있어 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레이벌리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당신이 침대에서 굉장히 뛰어나다고 하는 이야기를 당신 스스로도 이제는 믿기 시작한 모양이구려. 아니면 그 여자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당신이 그만 총기를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지. 혹시 그렇다면 나하고도 한번 어떻게 해 보자고 초대를 해야겠는걸. 어떻소, 그래도 괜찮겠소?"

그에 대꾸하는 로이스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나는 그 여자하고 결혼하려고 하니 당신 혀를 자른다 해도 부당하다고는 하지 못할 거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소!"

로이스는 더 말하려고 했지만 그레이벌리의 눈길은 그의 어깨 너머에 꽂히고 있었다.

"저기 충직한 애릭이 오는군. 그런데 당신의 그 정열적인 신부는 어디 있소?"

로이스가 뒤돌아섰다. 잔뜩 긴장된 애릭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도망쳤습니다."

일순, 방안에 얼어붙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깨고 고드프리의 보고가 이어졌다.

"숲 속에 여섯 사람과 일곱 필 말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반항했다는 흔적은 없습니다. 그자들 가운데 하나가 오늘 백작님과 그 여자가 있던 곳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절대 내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듯 키스하던 바로 그 자리 근처에서? 그 입술, 그 몸, 그 미소로 혼자 있고 싶다고 유혹하던 그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러나 그레이벌리는 못 믿겠다고 명해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몸을 홱 돌려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먼저 고드프리를 향했다.

"내 부하를 그 장소로 안내하시오."

그리고 자기 부하 한 사람에게 명령을 내렸다.

"고드프리 경하고 같이 가서 정말 경 말대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라. 사실로 확인되면 부하 열두 명을 데리고 메릭 일가를 따라잡도록.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절대 무기를 꺼내지 말라. 어느 누구도. 그리고 폐하의 인사를 전한 다음 스코틀랜드 경계까지 호위해 주도록. 알겠지?"

그레이벌리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로이스에게로 돌아섰다. 그의 목소리가 홀 안에 불길한 메아리를 남기기 시작했다.

"로이스 웨스트모어랜드, 잉글랜드 국왕 폐하의 권위로 본관과 함께 런던으로 갈 것을 명령한다. 당신은 메릭 가문의 여자들을 유괴한 데 대해서 심문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폐하의 명령을 수행하려는 본관을 교묘하게 방해하려고 한 데 대해서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당신 스스로 우리 보호에 들어오겠는가, 아니면 힘으로 제압해야 하는가?"

로이스의 부하들이 수적으로는 그레이벌리의 군사들을 능가하고 있었다. 지금 그들의 충성심이 주군인 로이스에 대한 맹세와 왕에 대한 맹세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로이스의 마음 한구석에서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곤경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짧은 고갯짓을 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부하들이 일제히 무기를 내려놓았다.

아무 저항이 없는 것을 본 그레이벌리의 부하 하나가 로이스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로이스의 양팔을 잡아 뒤로 돌린 다음 뻣뻣한 가죽 포승으로 손목을 묶었다. 포승이 로이스의 손목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로이스는 아무 감각이 없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불 같은 분노에 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분노가 끓어오르면서 활화산처럼 터져 올랐다. 그의 눈 앞에는 매력적인 스코틀랜드 여자의 환상이 지나기고 있었다.

제니퍼가 그의 팔에 안겨 오고 있다.......제니퍼가 그를 보고 웃고 있었다....... 제니퍼가 그에게 키스를 날리고 있었다..........

로이스는 이제 그녀를 믿은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반역죄. 반역죄를 범했다고 인정될 경우 재산과 작위를 빼앗기는 것 정도는 가벼운 벌이며, 최악의 경우 목숨까지도 빼앗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로이스는 걷잡을 길 없는 분노에만 휩싸여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13. 피할 수 없는 운명

로이스는 창가에 가 섰다. 작지만 그런대로 잘 갖춰진 방이었다. 런던에 도착한 후 런던 탑에 있는 이 방에 갇힌 지 벌써 두 주가 지났다. 런던의 저택들 지붕 너머로 멀리 눈길을 던지는 그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손은 뒤로 가 있었지만 지금은 묶여 있지 않았다. 제니퍼 메릭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가 반응할 능력을 앗아 가 버린 첫날 이후 손은 다시 묶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날 밤 이후 그의 분노는 무시무시한 침묵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날, 저녁 식사를 끝내자 그레이벌리는 다시 로이스의 손을 묶으려고 했다. 그러나 로이스에게 다가가는 순간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로이스를 묶어야 할 가죽 포승이 자신의 목에 감겨 있었다. 로이스의 얼굴이 그의 얼굴 바로 앞에 와 있었다.

"다시 나를 묶으려 든다면 왕과의 알현이 끝난 후 5분 안에 당신 목을 잘라 주지."

이빨 사이로 새어 나오는 로이스의 위협과 목에 감긴 포승 때문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지만 그레이벌리는 그래도 입을 놀렸다.

"왕하고 알현하고 나서 5분이면......당신은 갈 데로 가고 있을 거요. 교수대로!"

로이스는 더 생각하지 않고 그레이벌리의 목에 감긴 줄을 잡아당겼다. 그레이벌리의 안색이 바뀌는 순간, 그는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경멸에 가득 찬 몸짓으로 그를 풀어 주었다. 그레이벌리는 몸을 가까스로 간며 일어섰다. 그 눈에 불꽃이 튀고 있었지만 근위 기사들에게 로이스를 잡아 묶으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그 순간, 로이스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왕의 총애를 받는 귀족의 권리를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자신 역시 위험한 지경에 빠질 수도 있다는 점을 그레이벌리가 깨달았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로이스가 왕의 소환을 기다린 지 벌써 두 주가 지나고 있었다. 헨리가 실제로 자문관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창가에 서서 어두워져 가는 런던의 밤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언제나 런던의 공기에 섞여 있는 하수와 쓰레기, 그리고 배설물의 악취가 밴 밤공기를 맡으며, 그는 왕이 왜 자신을 만나기를 꺼려하는지, 또 왜 자신이 연금된 이유를 알아보기를 꺼려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로이스는 헨리 왕과 12년 동안 알고 지내왔다. 보스워드 필드 전투에서는 헨리 왕과 나란히 싸웠으며, 왕이 그 전투에서 승리한 후 바로 왕위에 등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전투에서의 로이스의 공적을 인정한 왕은 바로 그날 열일곱의 로이스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사실, 그것이 왕으로서의 첫 번째 공식 행사이기도 했다. 그 후 12년의 세월 동안 왕은 다른 귀족들은 불신하면서도 로이스는 점점 더 신임했다.

로이스는 왕을 위해 싸웠고, 매번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 덕분에 헨리 왕은 쉽게 잉글랜드의 적수이자 개인적인 적수들에게서 자신이 잉글랜드의 왕이라는 승인을 끌어낼 수 있었다. 로이스는 열네 개의 영지와 엄청난 재산을 포상으로 받았다. 이제 로이스는 잉글랜드에서 제일 부유한 귀족 가운데 하나였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왕이 로이스를 신임해서 클레이모어 성을 요새화하고 독자적인 군복을 입는 사병을 두는 것을 허용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 관대함 뒤에는 왕 나름대로 전략이 있었다. 왕의 적에게는 검은 늑대의 존재 자체가 바로 위협이었다. 포효하는 검은 늑대가 그려진 기가 나타나면 미처 덤비기도 전에 전의를 잃고 그대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었다.

로이스에 대한 왕의 신뢰와 감사를 나타내는 한 가지 증거는 헨리 왕이 그에게 그레이벌리나 다른 성실 법원 구성원의 간섭 없이 속을 터놓을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특권이 로이스로서는 너무나 아쉬웠다. 왕이 이렇게 오래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이제까지의 관계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알현이 있다고 해도 그 결과를 낙관하기 힘들다.

열쇠가 구멍 속에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로이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음식 쟁반을 든 경비병이 나타나는 순간 이번에도 희망이 사라졌다. 로이스가 아무 말 없이 뭔가 묻는 얼굴로 쳐다보기만 하자 경비병이 나름대로는 대답한다고 대답했다.

"양고기입니다, 백작님."

"이런!"

이제는 조그만 일에도 참을성이 없어진 로이스의 입에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사실은 저도 양고기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는 경비병도 로이스의 반응이 사실 음식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경비병은 쟁반을 내려놓은 후 앞에 똑바로 섰다. 비록 연금되었다고는 하지만 검은 늑대는 그래도 위험한 인물이었고, 더 중요한 것은 진짜 남자라면 다 인정할 진정한 영웅이라는 점이었다.

", 다른 게 필요하십니까?"

"새 소식!"

로이스는 짧게 내뱉었다. 그의 표정이 너무 사납고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경비병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늑대는 언제나 소식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그는 사나이답게 터놓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오늘 밤 경비병은 검은 늑대가 좋아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야기할 거리가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백작님, 새로운 소식이 있는데 믿어도 좋을 듯합니다. 알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러자 로이스의 얼굴에 금방 생기가 돌았다.

"무슨 이야기인가?"

"백작님 동생 분께서 어젯밤에 폐하께 불려갔다고 합니다."

"내 동생이 런던에 와 있다고?"

경비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제 여기 도착하셨답니다. 백작님을 뵙자고 요청했고, 만약 못 만나게 한다면 공격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했답니다."

불길한 예감이 로이스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어디 있다던가?"

경비병이 얼굴을 왼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한 층 아래, 서쪽으로 몇 방 건너서라고 들었습니다. 경비가 붙어 있답니다."

로이스의 입에서 걱정 섞인 우려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스테판이 이곳에 온 것은 지극히 무모한 짓이었다. 왕이 화가 났을 때는 화가 풀릴 때까지 잠시 비켜나 있는 것이 최고의 전술이었다.

"고맙군, ......"

경비병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래러비입니다, ......."

그때 갑자기 활짝 열리는 문으로 눈길을 던지며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벌리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문 앞에ㅔ 서 있었다.

"폐하께서 당신을 데려오라고 하셨소."

스테판에 대한 걱정과 함께 안도감이 흘렀다. 로이스는 그레이벌리 앞을 지나면서 어깨로 그를 한쪽으로 밀어붙였다.

"왕은 어디 계시오?"

"알현실에 계시오."

런던 탑에 여러 번 초대된 적이 있는 로이스는 이곳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레이벌리 앞

에서 그는 성큼성큼 계단을 향했다. 두 층을 돌아가는 계단을 내려간 다음 그는 미로처럼 얽혀 있는 복도를 지나갔다.

호위 겸 감시병이 따르는 가운데 그는 회랑을 지났다. 주위 사람들의 눈길이 전부 자신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얼굴들에서 유추해 보건대, 자신이 이곳에 연금되어 있으며 왕의 눈 밖에 났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장을 한 엘링턴 경 부부가 앞을 지나는 로이스를 보고 인사를 했다. 로이스는 다시 한번 그들의 이상야릇한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자신이 궁정에 나타나면 모두들 뭔가 두려워하고, 의혹에 싸인 눈길로 쳐다보곤 했다. 그런데 오늘 밤은 다들 즐거운 미소를 숨기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다들 비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레이벌리가 그 이상한 표정들에 대한 해답을 기꺼이 제공했다.

"제니퍼 양이 악명 높은 검은 늑대의 손에서 탈출했다는 이야기가 여기서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오."

로이스는 턱을 바싹 당기고는 걸음을 빨리 했다. 그러나 그레이벌리 역시 걸음을 빨리 하며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비웃음이 가득한 그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우리의 위대한 영웅께서 못생긴 스코틀랜드 계집한테 빠졌는데, 그 여자는 검은 늑대가 준 보석까지 달고 그대로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에 다들 재미있어 죽는다오. 검은 늑대하고는 결혼 못 하겠다고 도망을 갔으니 원."

로이스는 몸을 홱 돌렸다. 그 빙글거리고 있는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먹일 참이었다. 그러나 제복을 입은 시종이 이미 알현실의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왕이 총애하는 자문관을 죽이면 자신뿐만 아니라 스테판의 미래까지도 위태롭다는 사실을 머리에 떠올리며 분노를 억누른 로이스는 문지기가 열어 놓은 문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헨리 왕은 방 저 끝에 공식적인 군주복을 입고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참을성 없이 팔걸이를 톡톡 치고 있었다.

"물러가시오!"

왕은 그레이벌리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차갑고도 냉담한 눈길을 로이스에게 던졌다. 로이스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동안 왕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알현의 결과가 별로 좋지 않을 것 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싸늘한 침묵이었다. 길게만 느껴지는 몇 분간의 침묵이 흐른 후 로이스가 침착하게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폐하, 보자고 하실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조용!"

왕이 벼락같이 말을 자르고는 대신 자신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라고 할 때까지는 입을 열지 말도록!"

일단 침묵의 댐이 무너지자 헨리의 입에서 채찍이 나와 춤추기 시작했다.

"그레이벌리의 주장에 따르면 경의 부하들이 내 부하들에 대항해 무기를 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 내 명령을 교묘하게 어기고는 메릭 가문 여자들을 풀어 주려는 그의 노력을 방해했다고 한다. 이 반역죄에 대해서 뭐라고 해명할 건가, 로이스 웨스트모어랜드?"

로이스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계속 분노를 퍼부어댔다.

"경은 메릭 여자들의 유괴를 용인했다. 그 일은 이제 내 왕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국가적인 일이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게다가 두 여자를 놓치는 바람에 온 잉글랜드가 그 이야기로 농담을 하고 있는 판국이다. 그건 도대체 어떻게 해명할 텐가? ?"

왕은 아예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 ?"

"어느 비난부터 먼저 해명하기를 바라십니까, 폐하? 반역죄 고발 건입니까? 아니면 멍청하게 당한 그 이야기부터 할까요?"

로이스는 여전히 정중하게 물었다. 왕의 눈이 불신과 분노, 그리고 약간의 즐거움까지 곁들여져 등잔만 해졌다.

"이 건방진 늑대 놈! 채찍으로 칠 수도 있어! 목을 매달 수도 있고! 아니면 네 목에 칼을 씌워서 구경거리로 만들어 줄 수도 있고!"

", 맞습니다. 하지만 먼저 어느 죄목으로 처벌할 건지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이제까지 10년이 넘게 싸워 오면서 인질을 잡은 적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직접 인질을 평화로운 승리를 얻는 수단으로 사용하라고 하신 적도 있습니다. 부하들이 메릭 여자들을 데려왔을 때 저는 폐하께서 이렇게 갑자기 제임스와 평화 협정을 맺기로 결심하실 줄은 짐작도 못 했습니다.

제가 콘월로 출발하기 전, 바로 이 방에서 폐하와 제가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제가 스코틀랜드를 향해서 출발하면 스코틀랜드는 금방 주눅이 들 거다. 제가 스코틀랜드 국경선에 가까이 가서 기다리다가 새 군사를 받아서 지휘해 그 병사들을 하딘 성에 배치한다. 적에게 우리의 위용을 과시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런 다음의 일에 대해서 폐하하고 저하고 분명히 합의하기를 그때는 제가......."

"그래, 그랬지."

왕이 화난 목소리로 말을 가로챘다. 로이스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더 듣고 싶지 않고, 또 두 인질을 잡은 데 대한 로이스의 설명이 틀리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어디, 설명해 보시오. 하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레이벌리는 경을 체포하려고 하자 경의 부하가 경의 지시에 따라 내 부하들을 공격하려고 했다던데. 물론 경의 설명은 무척 다르겠지. 그레이벌리가 경을 싫어하는 거야 다들 아니까."

로이스는 왕의 말 가운데 마지막 부분은 무시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반론의 여지가 없게 논리를 펴기 시작했다.

"제 부하가 폐하의 부하보다 배가 넘는 수였습니다. 만약 제 부하들이 폐하의 부하들을 공격했다면 아무도 살아 남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이 상처 하나 없이 이렇게 절 잡아서 온 것이 다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왕의 얼굴이 약간 풀어졌다. 왕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레이벌리가 자문회의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자 조르도도 똑같이 말하더군."

"조르도요? 조르도가 제 편을 들어 줄 줄은 몰랐습니다."

"당연하지. 조르도가 경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레이벌리를 더 싫어하니까. 조르도가 그레이벌리의 자리를 노리고 있지만 경의 자리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거든. 내 주위엔 똑똑하다 못해 야망과 악의에 가득 찬 작자들뿐이니, ."

로이스의 몸이 생각지도 못한 모욕에 뻣뻣해졌다.

"폐하, 전부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왕은 로이스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동의할 기분이 아니었다. 왕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왕은 보석이 박힌 술잔과 술병이 얹혀 있는 쟁반이 있는 테이블을 향해 몸짓을 했다. 지금 현재의 기분상 로이스를 달래겠다는 자세와 가장 비슷한 태도였다.

"술을 따르라."

왕은 손목 관절을 비비며 멍하니 덧붙였다.

"겨울에는 정말 여기 있기 싫어. 찬 습기에 관절이 쿡쿡 쑤셔서 말이야. 경이 일으킨 이 소동만 아니라면 어디 따뜻한 곳에 가서 지내고 있을 텐데."

로이스는 잔을 들어 왕에게 바친 다음 자신도 한입에 털어 넣고 다시 왕좌로 향하는 계단 아래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용히 와인의 맛을 음미하면서 왕이 엉뚱한 회상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왕이 로이스를 힐끔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번 일에서도 소득은 있어. 솔직히 말해서 나는 경에게 클레이모어 성을 강화하고 사병을 두라고 허락한 일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었네. 하지만 경은 반역죄 명목인데도 얼마 안 되는 내 부하에게 순순히 잡혀 와 나한테 반기를 들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어. 차라리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텐데 말이지."

왕의 말투가 약간 부드러워지면서 화제도 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충성이 중요하다 해도 제니퍼 메릭 양을 그레이벌리의 보호 하에 집으로 돌려 보낼 생각은 없었다, 이건가?"

왕이 새삼 쓰라린 기억을 되살리자 로이스의 몸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로이스가 잔을 내려놓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그때 그녀가 갈 마음이 없고, 그 사정을 그레이벌리에게 설명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왕이 입을 딱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왕의 손가락에 잡힌 잔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위태위태했다.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레이벌리가 사실대로 말했군. 두 여자가 다 경을 속였어."

"둘 다요?"

"그렇다니까."

즐거움과 분노가 반반씩 섞인 왕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 방 옆에는 제임스 왕이 보낸 사절이 있지. 그 사람들을 통해서 제임스하고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어. 제임스는 메릭 백작과 이번 소동에 연관된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었고. 제임스가 약간 신이 나서 전해 온 바에 의하면 그 동생, 경이 진짜 죽음의 문턱에서 헤매고 있는 것으로 믿은 그 여자는 깃털로 된 베개에 얼굴을 대면 기침을 한다더군. 그래서 경한테 진짜 폐병이 난 걸로 속이고 집으로 보내 달라고 속인 거야. 언니인 제니퍼 양은 그 속임수대로 맞장구를 치면서 하루쯤 더 있다가 경한테 혼자 있게 해 달라고 한 다음 이복 오빠하고 도망을 친 거고.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미리 어디서 만나자고 말이 전달된 모양이더군."

왕의 목소리가 더욱 딱딱해지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내 챔피언이 어린 여자애 둘한테 속았다며 신난다고 야단이야. 여기서는 또 어떤 줄 아나? 다들 자기 마음대로 꾸며서 더 호들갑이라니까. 다음에 적을 만나면 적이 경의 얼굴을 보고 웃을지도 몰라. 무서워서 떠는 게 아니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로이스는 제니퍼가 도망치던 날보다 자신이 더 화가 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브렌나 메릭이, 자기 그림자만 보아도 그렇게 울어대던 브렌나 메릭이 자기를 속였다는 사실에 이가 저절로 갈리고 있었다. 동생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제니퍼의 행동도 전부 거짓이었다니! 그 모든 것을 숨기고, 동생의 "목숨"을 위해서 자신의 순결을 내놓겠다고 하던 그 순간에도 밤이 지나기 전에 자신이 구출될 거라고 믿었다니!

불쑥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천천히 오가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연이 얼마나 복잡했는지 경은 모를 거야. 여기저기서 온통 난리였지. 처음에 인질의 인적 사항에 대한 경의 보고를 받고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하더라구. 내가 지금까지 경을 만나지 않은 것은 경의 그 참을성 없는 동생이 나타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야. 그래야 그 여자들을 잡은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 직접 물어 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말이지........."

여기서 왕은 큰 한숨을 토하고 난 후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 여자들이 살고 있던 수녀원의 땅 안에서 일이 벌어진 것 같단 말씀이야? 그 여자들 아버지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고. 로마에서는 당장 원상회복시키고 보상하라고 야단이더군. 성스러운 수녀원에서 여자들을 잡아갔다고 로마와 스코틀랜드에서야 소란이 있을 수 있지. 그런데 맥퍼슨 아나? 그자까지 나서고 있다더군? 고지대 사람들을 다 동원해서 우리와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거야. 자기 약혼녀를 욕보였다나?"

"자기 뭐라구요!"

로이스의 코웃음에 왕이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노려보았다.

"경은 자신이 순결을 빼앗고 나서 보석을 퍼부은 그 여자가 스코틀랜드에서 제일 강력한 영주와 약혼한 사이라는 걸 몰랐나?"

로이스의 눈에 시뻘건 핏발이 섰다. 제니퍼 메릭이 세상 최고의 거짓말쟁이라는 확신이 마음에 단단히 박히는 순간이었다. 로이스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수녀원에 보내진 사정을 이야기하던 그 순지무구하던 눈, 그 미소띤 눈을 지금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제니퍼는 결혼 직전에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어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꿈의 왕국이니 뭐니 하면서 늘어놓던 그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더 참기 힘든 분노가 그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녀가 그 모든 것을 꾸며 낸 것이다. 하프 연주자가 연주하듯 그의 동정을 얻으려고 교묘하게 꾸며 낸 것이다.

"클레이모어, 잔 찌그러지겠어."

로이스의 손이 은으로 된 잔을 우그러뜨리는 것을 본 왕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건 그렇고 부인하지 않는 걸 보니 경이 그 메릭 여자와 자긴 잔 모양이지?"

로이스는 분노로 떨리는 턱을 억지로 잡아당기며 보일락말락 고개를 끄덕였다.

", 이야기는 할 만큼 했고......"

갑자기 왕의 목소리에서 친밀감이 사라졌다. 왕은 화려하게 무늬가 새겨져 있는 은을 입힌 오크나무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고 왕좌로 걸음을 옮겼다.

"제임스는 우리가 수녀원을 침범한 데 대해서 신하들이 분노하고 있다면서 협정을 맺을 수 없다고 하더군. 로마도 돈으로 만족할 것 같지 않고 말이지. 그래서 제임스와 나는 해결책이 딱 하나밖에 없다는 데 공감했네. 그리고 그렇게 하기로 완벽한 합의를 보았지."

여기서 왕은 자신의 말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 어법도 왕가의 법도대로 바꾸었다. 그리고 반대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짐은 이렇게 결정을 내렸다. 경은 지금 즉시 스코틀랜드로 가서 양쪽 궁정의 외교 사절, 그리고 양 가문 사람들이 다 참석한 가운데 제니퍼 메릭 양과 결혼식을 올리도록 하라. 짐의 궁정에서 파견되는 사절이 경의 여행에 동반할 것이다. 짐의 사절이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은 잉글랜드 귀족 전체를 대표해서 경의 아내를 동등한 귀족 서열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말을 마친 왕은 앞에 서 있는 키 큰 사나이에게 염려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로이스는 분노로 얼굴이 새하얘진 채 시커먼 뺨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겨우 입을 연 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끓는 솥에서 새어 나오는 김 같았다.

"폐하께서는 지금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전에 전투중일 때도 내가 요구하면 경은 거절하지 않았다. 경은 지금 그럴 이유도, 그럴 권리도 없다."

다시 왕의 말투가 딱딱해졌다.

"더욱이 짐은 요구하지 않았다. 이건 명령이다. 거기다 인질을 풀어 주라는 짐의 명령을 전한 사절을 따르지 않은 책임을 물어 짐은 경의 그랜드오크 영지를 몰수한다. 그곳에서 나온 그 동안의 모든 수입도 마찬가지고."

그 교활하고 가증스러운 빨강머리 마녀와 결혼해야 한다는데 대한 분노 때문에 왕의 뒷말은 로이스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왕의 목소리가 약간 부드러워졌다. 로이스가 더 이상 어리석고 용납할 수 없는 반대를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 탓일 것이다.

"그 영지가 완전히 경의 손을 떠나지는 않아. 경의 신부에게 결혼 선물로 줄 거니까."

금고를 두둑하게 만들 필요성을 마음에 새기고 있는 왕이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그 동안 그곳에서 나온 수입은 역시 몰수야."

왕은 손을 들어 왕좌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있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가리켰다.

"저 두루마리는 제임스의 사절 손에 들려서 한 시간 안에 떠날 거야. 제임스에게 직접 전해지게 되어 있어. 이제까지 내가 말한 게 적혀 있지. 제임스와 내가 이미 합의한 내용이고 말이야. 내 수결도 들어갔고, 봉인까지 된 문서지. 제임스는 저걸 받자마자 메릭에 사절을 보내 즉시 딸과 경의 결혼을 준비하라고 할 거야. 앞으로 2주 후가 되겠군."

왕은 말을 다 마치고 난 후 앞에 선 신하로부터 정중한 대답을 듣고자 기다렸다.

그런데 그 신하로부터 아까와 같은 김 솟는 분노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폐하, 말씀 다 끝나셨습니까?"

인내심이 극에 달한 듯 헨리의 눈썹이 한일자를 그었다.

"나는 복종하겠다는 경의 말을 들어야겠다. 선택하라. 교수대로 갈 건가, 아니면 만사 제치고 메릭 여자하고 결혼할 건가?"

"하겠습니다!"

로이스의 앙다문 이빨 사이로 쓰디쓴 소리가 새어 나왔다.

"좋았어!"

왕이 무릎을 치면서 탄성을 질렀다. 모든 것이 정리되자 그의 선의도 완벽하게 복구된 모양이었다.

"이보게,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경이 결혼 대신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까 걱정했다네."

"그러지 못한 걸 종종 후회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헨리는 껄껄 웃으며 옆에 놓아둔 잔을 다시 들었다.

", 결혼을 축하하는 뜻에서 건배를 해도 되지 않을까?"

잠시 후 왕은 새 잔을 던져 주었다. 로이스의 성미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고자 하는 뜻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동안 충실하게 봉사했는데 이렇게 억지 결혼을 시키다니 그 보상치고는 너무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경이 그 동안 별로 얻을 게 없을 때부터 내 옆에서 싸운 걸 내가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은 알기 바라네."

"제가 얻고자 했던 것은 잉글랜드의 평화였습니다, 폐하. 도끼와 투석기 같은 낡은 방법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보다 나은 생각을 가진 강력한 왕을 바랐습니다."

냉소를 제대로 감추지 못한 로이스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폐하의 방법 가운데 하나가 적대적인 가문을 서로 결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알았더라면 전 차라리 리처드의 편에 섰을 겁니다."

반역에 가까운 말에 왕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보게, 내가 결혼을 아주 좋은 타협책으로 간주한다는 건 경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야. 보스워드 필드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자네와 단둘이 앉아 있었던 적이 있지? 만약 경이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 기억을 되살려 보면 내가 그때 평화를 얻을 수만 있다면, 내 동생이라도 제임스한테 주겠다고 한 말이 기억날 거야."

"폐하는 여동생이 없습니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대신 경이 있지."

그 말은 왕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로이스조차도 그 말에는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로이스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내려놓고 멍하니 오른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거렸다. 왕은 혼자 신이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휴전 협정과 마상 시합이야말로 평화로 가는 지름길이야. 협정을 맺으면 지켜야 하고, 마상 시합을 하면 적대심이 없어지지. 이번 늦가을에 클레이모어 근처에서 마상 시합을 하자고 제임스에게 제안했어. 그쪽 사람들하고 명예롭게, 그리고 서로 아무 피해 없이 한번 붙는 거지. 아주 재미있을 거야."

그리고 왕은 그 주제에다 처음의 관심을 덧붙였다.

"물론 경은 참가할 필요가 없어."

왕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로이스의 입이 열렸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물러가도 좋다는 허락을 내려 주시겠습니까?"

"그러고말고."

왕의 기분 좋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일 아침에 오게. 더 이야기하자구. 그리고 동생한테 너무 심하게 굴지 말게나. 경을 구하겠다는 일념에서 그 동생하고 결혼하겠다고 자원하고 나선 동생이니. 그런데 그게 말이지, 하기 싫은 기색이 하나도 없더군. 하지만 불운하게도 그건 안 되게 되어 있어. , 해멀 양한테 파혼 이야기를 어떻게 하나 걱정하지 말게. 내가 벌써 다 해 놓았으니까. 불쌍한 것, 아주 넘어가더군. 그 앤 내가 시골에 보냈네. 혹시 아나, 풍경이 바뀌면 기분전환이라도 될지."

왕이 그 약혼을 추진했었고, 자신의 악행 덕분에 메리가 엄청난 모욕을 느꼈을 거라는 사실이 로이스가 그날 밤에 들은 마지막 나쁜 소식이었다. 그는 간단히 목례를 하고는 뒤로 돌아섰다. 시종이 문을 열었다. 몇 걸음 못 가서 왕이 부르는 소리에 그는 걸음을 멈췄다.

"경의 신부는 여백작이야."

왕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작위인데 경의 작위보다 훨씬 높단 말이야. 알고 있었나?"

"그 여자가 스코틀랜드의 여왕이라 해도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작위가 뭐든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나도 동감이야.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게 결혼 생활에 장애가 될 것 같은데?"

로이스가 그저 바라보고만 있자, 왕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그 어린 여백작이 내 최고의 전사를 속였는데 작위까지 높게 놔둔다는 건 아무래도 전술적인 실수가 될 거야. 그래서 로이스 웨스트모어랜드, 경에게 공작의 작위를 수여해야 하지 않을까........."

로이스가 알현실에서 나오자 대기실에 가득 모여 있던 귀족들의 눈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알현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의 얼굴을 보고 짐작이라도 하려고 다들 안달이었다. 그런데 그 대답은 알현실에서 뛰어나온 시종에게서 나왔다.

"공작 각하, 잠깐만요."

로이스는 왕이 미래의 신부에게 개인적인 경의를 전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대기실에 있던 귀족들의 귀에는 그 말과 "공작부인" 이라는 말만 들어갔다. 그렇다면 로이스 웨스트모어랜드가 잉글랜드 최고의 작위를 받았으며 곧 결혼할 것이라는 점을 뜻했다. 그것이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두 사건을 알리는 왕 특유의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은 로이스의 입가에 쓴 미소가 떠올랐다.

애멀리아 윌데일 부인가 그녀의 남편이 최초의 충격에서 깨어났다. 윌데일 경이 로이스에게 절을 하며 말을 붙여 왔다.

"이거, 축하를 드려야겠군요."

"내 생각은 다르오."

로이스는 말을 잘라 버렸다.

"그 운좋은 아가씨는 누구죠? 해멀 양은 아닌 게 분명한데."

애버리 경이 선의에서 묻는 순간 로이스의 몸이 뻣뻣해졌다. 로이스는 천천히 돌아섰다. 일순 방안이 긴장과 기대감으로 술렁거렸다. 그런데 미처 로이스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복도에서 왕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니퍼 메릭 양이지."

모두들 충격을 받아 한동안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커다란 웃음소리가 하나 터졌고, 이어 여러 사람이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못 믿겠다는 사람, 놀랐다며 탄성을 지르는 사람 등등 방안이 소란해졌다.

"제니퍼 메익이오? 미인이라는 아가씨가 아니고 못생긴 여자?"

엘리자베스 양이 로이스를 쳐다보며 다시 확인했다. 그녀의 관능적인 눈을 보자니 마음 한구석에서 두 사람이 가졌던 한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로이스는 한시 바삐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로이스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의 등에 엘리자베스의 말이 와 꽂혔다.

"나이가 많다던데, 안 그래요?"

"그래도 치마만 걷어붙이면 검은 늑대한테서 도망도 못 칠 정도로 늙지는 않았지."

그레이벌리의 매끈한 말투였다. 그가 군중 속에서 앞으로 나오며 계속 말했다.

"공작께서는 두들겨서라도 그 여자를 항복시키고 말걸? 공작께서 약간만 손을 봐 주면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릴것 같은데?"

그 느글거리는 악한에게 한 대 먹이고 싶어서 로이스의 손이 꽉 쥐어졌다.

그때, 누군가 웃으면서 농담을 던지는 바람에 긴장됐던 방안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풀어졌다.

"클레이모어, 이거 잉글랜드 대 스코틀랜드의 결전이오. 침실에서의 전투라는 점만 빼면 꼭 그런데? 나는 경이 이기리라 믿겠소."

"나도."

"나는 그 여자한테 걸겠소."

이번에도 역시 그레이벌리였다.

저 뒤쪽에 있던 나이 많은 귀족이 귀에 손을 대고 공작 가까이 있는 친구에게 물었다.

"여보게, 무슨 일이야? 클레이모어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공작이 메릭 창녀하고 결혼하게 됐다는군."

그 친구가 목소리도 크게 대답했다.

"뭐라는 거예요?"

한 부인이 목을 길게 빼며 물었다.

"클레이모어가 메릭 창녀하고 결혼하게 됐대."

한바탕 소동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대기실에 있던 귀족 가운데 두 사람만은 조용히 있었다. 제임스 왕의 사절인 맥리시경과 더갈 경 두 사람은 오늘 밤 스코틀랜드로 가져갈 결혼 계약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시간이 채 못 되어 그 말이 귀족의 입에서 시종에게로, 그리고 경비병에게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클레이모어가 메릭 창녀하고 결혼하게 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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