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왕국(Kingdom of Dream)
Judith Mcnaught
1. 불길한 소문
"클레이모어 공과 신부를 위해 건배합시다!"
바로 이 순간, 메릭 성의 거대한 홀에 모인 남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환성을 울려야 한다.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건배를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스코틀랜드 남부의 거대한 성에서 거행되는 성대한 귀족의 결혼식이니 한층 더 흥청거려야 한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이 결혼식에서는.
아무도 환성을 지르지 않는다. 술잔을 지켜드는 사람도 없다. 다들 긴장된 얼굴로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 신부측도, 신랑측도, 손님도, 하인도, 심지어 주인을 따라온 개들도 잔뜩 긴장하고 있다. 저쪽 벽난로 위에 걸려 있는 초상화 속에서 메릭 가의 제 1대 백작마저도 긴장하는 것 같다.
"클레이모어 공과 신부를 위해 건배!"
신랑의 동생이 다시 소리쳤다. 천둥 같은 그의 목소리가 묘지와 같은 정적이 흐르는 홀에 부자연스럽게 울렸다.
"두 사람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오래 전부터 내려온 이 축하의 말이 떨어지면 당연히 반응이 있어야 한다. 신랑은 뭔가 멋진 일을 성취했을 때처럼 자랑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어야 한다. 신부 역시 신랑에게 그런 확신을 줄 수 있다는 기쁨에 미소를 짓는다. 귀족 사회에서 결혼이란 저명한 두 가문과 그 엄청난 재산이 합쳐지는 걸 의미하기에 손님 역시 웃음 짓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결혼은 엄청난 화젯거리이며, 그렇기 때문에 보통 때보다 더 흥청거릴 만도 하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1497년 10월 14일, 오늘만은 그렇지 않다.
건배를 하자며 잔을 치켜 든 신랑의 동생이 신랑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랑의 친구들 역시 잔을 들고 신부 가족들에게 억지웃음을 날렸다. 신부 가족들도 잔을 들었지만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단지 신랑만이 지금 홀 안에 가득 차 있는 적개심에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눈에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었다.
신부는 누구에게도 미소를 짓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잔뜩 치밀어 오른 화가 언제 떠질지 모를 얼굴이었다. 사실 제니퍼는 미칠 것만 같아서 옆에 누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제니퍼는 사력을 다해 신에게 절망적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신이 잠깐 한눈을 판 것일까? 아니면 흥미가 없는 것일까? 어떻게 나를 이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단 말인가.
제니퍼는 목구멍까지 치민 두려움을 겨우 삼키며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주여, 이 결혼을 중지시킬 생각이 있으시면 지금, 바로 지금 손을 써 주세요. 5분만 지나도 늦는다구요. 제가 이런 억지 결혼을 해야 하다니, 이건 말도 안 돼요. 제 순결을 빼앗아 간 저 사내에게 시집을 가야 하다니. 제가 원해서 순결을 준 게 아니라는 건 주님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신을 원망하다니.......그건 어리석은 짓이다. 제니퍼는 얼른 애원조로 바꾸었다.
"주님, 제가 언제 당신의 뜻을 거스른 적이 있었나요? 전 언제나 충실히 주님 뜻을 따랐어요."
"언제나 그랬던 건 아니지."
마음속에서 신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거의 언제나 그랬죠. 전 미사에 빠진 적이 없어요. 어쩌다 정말 아파서 참석하지 못한 적은 있지만 말이에요.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주기도문도 열심히 외웠어요. 참, 거의 매일 저녁 마다요."
제니퍼는 다시 양심에 거리끼기 전에 얼른 말을 수정했다.
"기도문을 외우다 잠이 들어 끝내지 못한 적이 없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수녀원에서 시키는 대로 착실한 수녀가 되기 위해서 정말 노력했다구요. 그건 주님도 잘 아실 거예요. 제발, 제가 여기서 도망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러면 다시는 제멋대로 하지 않을 게요."
이런 절망적인 말이 끝나자 의심스러운 듯한 신의 소리가 다시 들렸다.
"제니퍼야, 난 네 말을 믿지 않는단다."
"아니에요, 정말 맹세해요. 정말이에요. 시키는 대로 다할 게요. 지금 당장 수녀원으로 돌아가서 평생을 기도하고 그리고......."
"이 결혼은 정당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사제님을 모셔 오시오."
밸포어 경의 명령이 떨어졌다. 제니퍼의 숨결이 공포에 잠겨 헐떡거렸다.
신에게 헌신하려던 생각이 마음속에서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주님, 왜 저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 거죠? 정말 저를 이렇게 만드실 작정이세요?"
문이 활짝 열리자 홀에는 또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렇단다, 제니퍼야."
사람들이 사제를 맞기 위해 자발적으로 양편으로 갈라섰다. 그 순간, 제니퍼는 인생이 끝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랑이 옆으로 와 섰다. 제니퍼는 얼른 몸을 비틀어 옆으로 비켜섰다. 조금이라도 그와 떨어져 있고 싶었다. 그 사람이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참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적개심과 회한이 밀려들면서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부주의가 어떤 재난과 불명예를 가져올지 미리 알았더라면! 그렇게 충동적이고 무모하지만 않았더라면.......
제니퍼는 눈을 감았다. 그래야만 그 잉글랜드 사나이와 잡아먹을 듯한 얼굴을 한 스코틀랜드 친척들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눈을 감는 순간, 마음속에서 가슴 쓰린 진실과 마주쳐야 했다. 충동에 잘 휩싸이고 무모하다는 자신의 결점, 그 엄청난 결점이 지금의 이 비참한 결말로 이어졌다는 것을. 이 재앙은 자신의 결함이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이복형제들만 사랑하는 아버지에게서 사랑 받고 싶다는 절망적인 갈망에서 연유된 그 두 가지 결함이 이런 재난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열다섯 살 때 경박하고 흉물스런 이복 오빠에게 복수하려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름대로는 정당하고 명예스런 방법을 취했다. 몰래 갑옷을 입고 마상 창 시합장에서 오빠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행동으로 인해 오히려 그 자리에 계셨던 아버지로부터 불호령을 샀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복 오빠를 땅바닥에 곤두박질치게 만들었으니 만족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작년에 늙은 발더 경이 결혼을 신청했을 때도 그 성질을 못이기고 단번에 그의 청혼을 물리쳤다. 결국 은근히 두 가문의 결합을 바라던 아버지의 꿈을 산산조각 낸 대가로 2년 전에 벨커크 대 수녀원으로 유배당하다시피 쫓겨났다. 그리고 그 덕분에 "검은 늑대"의 군사에게 손쉽게 노획되고 만 것이다.
그 모든 일들이 축적된 결과 제니퍼는 지금 적과 억지 결혼을 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고향을 짓밟은 야만스런 잉글랜드 군인이자, 그녀를 포로로 잡고는 순결까지 빼앗아 명예를 실추시킨 바로 그 사나이와. 이제 와서 아무리 기도를 올리고 맹세를 한들 이미 때는 늦었다. 그녀의 운명은 7주 전의 그날에 결정되고 말았다. 축제날의 오리처럼 꽁꽁 묶인 채 그 건방진 야수의 발아래 던져지던 바로 그 순간에.
제니퍼는 침을 삼켰다. 검은 늑대가 이끄는 군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를 귀 넘어듣던 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지금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텐데. 하지만 그때 그 말을 믿은 바보가 어디 있어?
제니퍼는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늑대가 오고 있다!"
무시무시한 재앙을 경고하는 그 말은 지난 5년간 거의 매주 들려왔다. 그날, 7주 전의 그날은 놀랍게도 사실이었다는 것이 다를 뿐. 홀 안의 사람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신부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재니퍼만은 그날의 기억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그날, 정말 보기 드물게 날씨가 화창했다. 하늘은 높고 파랬으며, 바람결에는 향기가 실려 있었다. 대수녀원 건물에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 고딕식의 뾰족탑과 우아한 아치들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대수녀원과 두 개의 가게, 34채의 오두막집, 그리고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공동 우물로 이루어진 벨커크 마을이 따사로운 햇빛 속에서 졸고 있고, 일요일 오후면 으레 그렇듯이 마을 사람들이 우물가에 모여 있었다.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언덕 위에서 양치기가 양떼를 모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제니퍼는 우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터에서 대수녀 원장이 맡긴 고아들을 데리고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그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 희극이 시작된 것이다. 기억을 더듬으면 그 사건들이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제니퍼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갑자기 아이들과 공터에서 놀고 있는 7주 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제니퍼가 머리에 두건을 뒤집어쓰고 아이들을 쫓고 있었다........
"톰 맥거번, 어디 있지?"
제니퍼는 팔을 공중에서 휘두르며 소리쳤다. 신난다고 깔깔거리는 아홉 살짜리 아이를 도저히 못 잡겠다는 듯 헤매는 시늉을 하고는 있지만, 귀에 들리는 소리로 볼 때 아이는 오른쪽으로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었다. 두건 속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제니퍼는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괴물처럼 팔을 높이 치켜 들고 손톱을 사납게 세웠다. 그리고 귀신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댔다.
"넌 내 손에서 도망칠 수가 없어, 톰 맥거번."
"헤헤! 날 잡으면 용치!"
아이가 바로 오른쪽에서 소리쳤다.
"꼭 잡고 말 테다!"
제니퍼는 교묘하게 아이의 왼쪽으로 돌았다. 그러자 나무 뒤에 숨거나 수풀 옆에 납작 엎드려 있던 아이들이 신난다고 마구 웃어댔다.
"잡았다!"
몇 분 동안 못 잡는 척 헤매고 있다가 드디어 제니퍼는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깔깔거리며 도망가는 한 아이의 조그만 손목을 낚아챘다. 숨은 가빴지만 연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니퍼는 누굴 잡았는지 보려고 얼른 두건을 벗어 제켰다. 그 바람에 불타는 듯한 붉은 황금빛 머리카락이 어깨며 팔로 흘러내렸지만 그걸 다시 쓸어 올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메리를 잡았어요! 이젠 메리가 술래야!"
아이들은 신나는지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자그만 다섯 살짜리 계집아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니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두려움으로 가녀린 몸을 떨면서 제니퍼의 다리에 매달려 애원했다.
"제발, 전.......전 두건을 쓰고 싶지 않아요. 어두워서 무서워요. 제가 꼭 써야 돼요?"
제니퍼는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메리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전 어두운 게 무서워요."
아이는 불필요한 고백까지 했다. 아이의 좁은 어깨가 부끄러움으로 축 처졌다. 제니퍼는 아이들 팔로 꼭 껴안으며 달랬다.
"누구나 무서운 건 있단다. 난, 난 말이지, 개구리가 무섭단다."
그 거짓말에 아이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개구리를요? 난 개구리를 좋아해요. 개구리는 하나도 안 무섭다구요!"
"그럼 넌 정말 용감한 아이로구나. 나보다 훨씬 더 용감해."
"제니퍼 아가씨는 바보같이 개구리를 무서워한대!"
메리는 이쪽으로 달려오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냐, 아가씨는........"
톰이 잽싸게 아름다운 제니퍼 아가씨의 변호에 나섰다. 톰이 보기에 제니퍼는 고귀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무슨 일이든 해 주는 좋은 분이었다. 뚱뚱한 황소개구리를 잡아 준다고 스커트를 걷어 올리고 연못에도 들어갔고, 어린 윌이 나무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이 겁나 쩔쩔매고 있을 때면 고양이처럼 기어 올라가 데리고 내려오는 마음씨 고운 아가씨였다. 그러나 톰은 제니퍼의 얼굴을 보고 하던 말을 도로 삼켰다. 그리고 도리어 술래가 되겠다고 자청했다.
"이번엔 제가 술래를 하겠어요."
수련 수녀의 수수한 옷을 입고 있는 이 열일곱 살짜리 아가씨를 올려다보는 톰의 눈에는 경외의 빛이 가득했다. 수녀복을 입고는 있지만 수녀가 될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수녀처럼 행동하지도 않는다. 지난주일, 주교가 좀 길게 강론을 하자 제니퍼 아가씨는 머리를 앞으로 끄덕거리고 있었다. 만약 바로 뒤에 앉아 있던 톰이 때맞춰 기침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면 아가씨는 주교의 날카로운 눈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그래, 이번엔 톰이 술래를 해."
제니퍼는 얼른 맞장구를 치면서 두건을 톰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각자 숨을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아이들을 사랑스런 눈길로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술래를 하려고 벗어 두었던 쓰개와 짧은 회색 모직 베일을 도로 꺼냈다.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한창인 콘월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을 붙잡고 이것저것 열심히 물어 보고 있는 마을 사람들한테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개를 도로 쓰려고 막 펼치는 순간이었다.
"제니퍼 아가씨!"
마을 사람 하나가 큰 소리로 불렀다.
"빨리 이리 오세요. 영주님 소식이 있습니다."
제니퍼는 손에 든 베일과 쓰개도 잊어버리고 우물 쪽으로 내달렸다. 아이들도 뭔가 흥분되는 일이 있다는 걸 눈치 챘는지, 하던 놀이를 집어치우고 제니퍼 옆에서 같이 달렸다.
"무슨 소식이죠?"
제니퍼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어 보았다. 무리 지어 선 사람들이 무감각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공손하게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는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메릭 영주님의 따님이십니까?"
메릭이라는 이름이 거명되는 순간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던 두 남자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악의에 찬 시선으로 제니퍼를 흘끗 보았으나,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얼른 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아버님 소식을 알고 있나요?"
"네, 아가씨. 영주님께서는 지금 이리로 오고 계십니다요. 저희보다 별로 뒤처지지 않았습죠. 군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휴, 다행이군요."
제니퍼는 긴 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콘월의 싸움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이제 사소한 문제는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금 그녀가 신경을 곤두세울 문제는 스코틀랜드의 운명이 달린 콘월에서의 싸움이었다. 제임스 왕이 에드워드 5세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지지하며, 잉글랜드 왕인 헨리의 군대와 맞서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사나이의 얼굴에는 이미 답이 씌어 있었다.
"우리가 떠나 올 때쯤에는 거의 끝났습니다요. 코크에서도 그렇고 토턴에서도 우리가 거진 반 다 이긴 싸움이었습죠. 콘월에서도 그랬구요. 하지만 그 악마가 헨리의 군대를 지휘하고 나서부터는 사태가 역전되었습니다요."
"악마?"
그 사나이의 얼굴이 증오로 일그러졌다. 그는 땅에 침을 퇘, 뱉었다.
"검은 늑대라는 작자 말입니다요. 그 작자는 태어날 때부터 지옥 불에 튀겨졌을겝니다."
두 아낙네가 검은 늑대라는 말이 나오자 악귀를 쫓는 시늉이라도 하듯 성호를 그었다. 스코틀랜드인에게 있어 그 이름은 최고의 증오의 대상이자 고포의 대상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리라. 하지만 그 남자의 다음 말은 주위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든 공포 그 자체였다.
"검은 늑대가 지금 스코틀랜드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요. 헨리가 새 군대를 주어 에드워드 왕을 지지하는 자들을 쳐부수라고 했다나요? 아마 전번에 왔을 때보다 더 지독한 살육이 벌어질 겁니다. 제 말 잘 들으십시오. 모두들 집에 가서 단단히 준비해야 합니다. 검은 늑대가 메릭을 제일 먼저 공격할 게 분명해요. 콘월에서 잉글랜드 놈들을 제일 많이 죽인 게 메릭 사람들이니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다음 투구를 쓰고 말에 올랐다.
우물가에 있던 귀환병들은 각자 무리를 지어 황무지를 지나 언덕으로 난 길을 따라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두 사람은 길을 따라 가다가 일단 마을 사람들 눈에서 벗어나자 말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몸을 숨겼다. 두 말리의 말은 주인을 남겨 둔 채 숲 속으로 달려갔다. 만약 제니퍼가 계속 그쪽을 보고만 있었더라면 그녀 뒤쪽에 있는 길을 따라 늘어선 나무 뒤에 숨어 되돌아오는 그 두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니퍼는 그들을 보지 못했다. 잉글랜드와 메릭 성 사이에 있는 벨커크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아수라장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늑대가 온단다! 신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한 여인이 아기를 가슴에 꼭 껴안고는 울부짖었다. 하지만 벨커크도 가만두지 않을 거라구."
갑자기 화마와 죽은, 그리고 살육의 소름끼치는 예감이 주위를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제니퍼 주위에 모여 있던 아이들도 겁에 질린 듯 제니퍼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귀족이건 평민이건,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는 검은 늑대야말로 악마보다 더 무섭고 위험한 존재였다. 악마야 귀신일 뿐이지만 늑대는 피와 살이 있는 존재, 살아 있는 악마의 왕이었으며, 바로 이 땅 위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괴물이었다.
"늑대가 온다."
그 말이면 우는 아이도 뚝 울음을 그쳤고, 아무리 고집 센 아이도 시키는 대로 따랐다. 숲으로 놀러 가자고 보채던 아이도 그 말 한마디면 그만이었다.
떠도는 소문에 불과한 이야기에 사람들이 과민 반응하는 것이 안 그래도 못마땅하던 제니퍼는 아이들을 달래려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다 거짓말이란다. 걱정할 것 없어."
제니퍼의 목소리는 그 소동 속에서도 똑똑하게 울려 퍼졌다.
제니퍼는 늑대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자신의 주위로 몰려든 아이들을 껴안으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자기네 이교도 왕한테 돌아갈 거야. 그래야 우리 편한테 다친 데를 치료할 수 있거든. 그러면서 자기가 얼마나 공을 세웠는지 마구 거짓말을 해댈 거야. 아니면 메릭보다 약한 성을 골라 공격하겠다고 마음먹을 수도 있고, 자기가 당한 것을 복수할 기회를 잡으려고 말이야."
제니퍼가 짐짓 검은 늑대를 무시하는 말을 하자 아이들의 놀란 눈동자가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그 말과 유쾌한 말투는 허황된 용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메릭 사람은 절대 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녀는 메릭 사람이었다. 제니퍼는 아버지가 이복 오빠들에게 골백번도 넘게 한 그 말을 자신의 신조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더구나 아이들이 마을 사람들의 소란에 놀랐기 때문에 달래 줘야겠다는 생각이 앞선 것이다.
메리가 제니퍼의 치마를 잡아 당겨 주의를 끈 다음 떨리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물었다.
"제니퍼 아가씨는 검은 늑대가 무섭지 않으세요?"
"그럼, 하나도 안 무섭다다."
제니퍼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톰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끼어 들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검은 늑대가 나무만큼 크대요!"
"나무라고?"
제니퍼는 검은 늑대를 둘러싼 온갖 이야기들이 다 거짓이라는 듯이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 사람이 말을 타고 잇을 때 봐서 그런 거야. 시종 네 사람이 도와줘야 겨우 탈 수 있거든!"
그 광경을 상상하면서 우습다는 긋 낄낄거리는 아이들도 몇 있었다. 제니퍼가 바라던 바였다.
이번에는 윌이 몸서리까지 치며 말했다.
"맨손으로 벽을 부수고 사람들의 피를 마신대요!"
"소화불량에 걸려서 그런 난폭한 짓을 하는 거야. 만약 그 사람이 벨커크에 오면 우리 스코틀랜드 맥주 맛을 보여 주자."
제니퍼는 짐짓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꾸해 주었다.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그 사람 옆에는 애릭이라는 거인이 있대요. 그 거인은 도끼를 들고 다니다가 아이들을 보면 단번에 박살낸대요."
"그뿐만 아니라....."
제니퍼는 얼른 아이들의 말을 잘랐다.
"다 거짓말이야."
제니퍼는 아이들을 모아 대수녀원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수녀원은 산모퉁이를 돌아야 있기 때문에 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을 추스리며 제니퍼는 계속 쾌활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들은 이야기를 해 줄게. 그 사람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 뭘 볼 때면 눈을 이렇게 사팔뜨기처럼 뜬대."
제니퍼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눈을 모아 사팔뜨기 흉내를 냈다. 아이들이 재미있다고 깔깔거렸다.
대수녀원으로 가면서 제니퍼는 계속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댔고, 아이들은 나름대로 상상을 덧붙이면서 검은 늑대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와 쾌활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갑자기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여 어두워지더니 바람까지 불기 시작했다. 그런 악마를 입에 올렸다고 하느님이 화를 내시는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로 아이들을 계속 웃길까 궁리하다가, 대수녀원 쪽의 산모퉁이에서 말을 탄 사람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는 순간 제니퍼는 입을 다물었다. 제니퍼처럼 수수한 회색 가운에 하얀 쓸개, 그리고 수련 수녀의 짧은 베일을 쓴 아름다운 소녀가 맨 앞 말을 탄 사람 앞에 앉아 있었다. 안장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모습과 심약해 보이는 입가의 미소를 보는 순간 제니퍼는 그녀가 누군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소리 없이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한 제니퍼는, 몇 바자국 떼지 않아서 그것이 숙녀답지 못한 행동임을 깨닫고는 제자리에 섰다. 그녀의 눈은 한참 동안 아버지에게 고정되어 있다가 이윽고 다른 사람들을 언뜻 훑어보았다. 그들은 몇 년 만에 보는 그녀의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복 오빠가 제니퍼에 대한 거짓말을 퍼뜨리는 데 성공한 이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제니퍼는 아이들에게 곧바로 대수녀원으로 가라고 엄히 이른 다음 길 한가운데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 일행이 앞에 설 때까지의 시간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아버지가 이복 여동생인 브렌나를 데려온 것으로 보아 대수녀원에 먼저 들렸다 온 게 분명했다. 브렌나 역시 대수녀원에서 같이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먼저 말에서 내린 후 브렌나를 내리려고 몸을 돌렸다. 제니퍼는 조바심이 났으나 예의범절과 위엄을 중시하는 아버지의 변함없는 모습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드디어 아버지가 팔을 벌리며 제니퍼를 향해 섰다. 제니퍼는 아버지의 품으로 뛰어들어 아버지를 꼭 껴안으며 재잘거렸다.
"아버지, 얼마나 보고 싶었다구요! 2년 만인 거 아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그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으신 것 같아요!"
메릭 영주는 목에 감긴 딸의 팔을 점잖게 떼어 내며 그녀를 조금 앞에 세웠다. 그러면서 그의 시선은 딸의 헝클어진 머리며 빨개진 뺨, 그리고 엉망이 된 가운을 빼놓지 않고 보고 있었다. 제니퍼는 아버지의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에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대수녀원에 먼저 들른 게 확실하므로 대수녀원장의 말에 만족해서 지금 자신의 모습을 용서하기를 빌었다.
2년 전, 제니퍼의 행동에 화가 난 아버지는 그녀를 이곳 대수녀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브랜나는 1년 전 전쟁에 나가면서 안전을 위해서 이곳으로 보냈다. 대수녀원장의 엄격한 지도를 받으면서 제니퍼는 자신의 장점을 인식하게 되었고, 결점들은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니퍼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살펴보는 아버지의 얼굴에서는, 과연 아버지가 자신을 2년 전의 철없는 아이가 아니라 숙녀로 보고 있는지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파란 눈이 다시 그녀의 얼굴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제니퍼, 이젠 여자가 다 됐구나."
제니퍼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언제나 엄격한 아버지의 입에서 그렇게 칭찬하는 말이 나오다니. 제니퍼는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했다.
"아버지, 전 많이 변했어요. 정말 많이 변했다구요."
"하지만 네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많이 변한 것 같지는 않구나, 얘야."
메릭 영주가 하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지금 그는 베일과 손가락 끝에 달려 있는 쓰개를 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오!"
제니퍼는 웃음을 터뜨리며 열심히 설명했다.
"아까 아이들하고 술........술래잡기 놀이를 했었어요. 이걸 쓰면 두건이 맞지 않아서요. 원장님은 만나셨지요? 암브로스 원장님이 뭐라고 안 하시던가요?"
아버지는 그 담담한 눈에 웃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원장님 말로는 네가 언덕에 나가 풀을 뜯으며 공상을 하는 습관이 있다더라. 어째 많이 듣던 소리더구나. 그리고 네 생각보다 강론이 긴지 미사 중간에 존다고 하던데. 그 소리 역시 많이 듣던 소리고."
제니퍼는 자신이 그렇게 존경하는 수녀원장에게서 배신을 당한 것 같아 낙심했다. 암브로스 수녀는 수녀원의 엄청난 땅과 재산을 주무르는 영주라 할 수 있었다. 손님이 올 때면 언제나 자신이 직접 손님을 접대할 뿐만 아니라, 수녀원의 땅에서 일하는 평신도들을 비롯해서 그 답답한 벽에 갇혀 사는 수녀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처리하는 실로 막강한 힘을 가진 영주였다.
브렌나는 엄격한 수녀원장에게 질린 모양이지만 제니퍼는 그녀를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말에 제니퍼는 무척 실망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다음 말에 그 실망감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암브로스 수녀님이 또 이런 말도 하더구나. 네가 수녀원 하나 정도는 거뜬히 꾸릴 수 있을 정도로 분별력이 있다고 말이다. 또 넌 아무리 봐도 메릭 가문 사라이라면서, 자기 가문 정도는 충분히 이끌 용기가 있다고 하더구나. 물론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제니퍼가 가장 열망하는 꿈을 완전히 깨뜨리는 경고였다.
제니퍼는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 권리를 박탈 탕한 아픔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사내아이가 셋이나 딸린 과부였던 브렌나의 어머니와 재혼하기 전까지는 제니퍼에게 약속된 권리였다.
아버지는 이 아이들을 입적시켰고, 그 가운데 제일 나이가 많은 알렉산더가 제니퍼에게 갈 지위를 이어받을 게 틀림없었다.
알렉산더가 똑똑하거나 마음이라도 넓으면 그래도 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교활한 거짓말쟁이이었다. 아버지나 다른 일가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만 제니퍼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메릭 성으로 이사 온 지 1년도 채 안 돼, 알렉산더는 제니퍼에 대한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퍼뜨리기 시작했고, 결국 몇 년 만에 사람들은 전부 그녀로부터 등을 돌려 버렸다.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지만 알렉산더가 너무나 교묘하게 잘 꾸며댔기 때문에 안 본 사람이면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제니퍼로서는 친척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지금도 친척들은 그녀가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제니퍼로서도 이제 더 이상 자신이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 용서를 달라고 친척들에게 빌 마음도 없어졌고.
둘째 오빠인 윌리엄은 브렌다처럼 다정하고 소심했다. 그러나 막내 오빠 말콤은 알렉산더만큼이나 사악했다. 이복 오빠들에 대한 생각을 더듬는 동안에도 아버지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제니퍼는 이복 오빠들에 대한 불유쾌한 회상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수녀원장 말이 네가 인정많고 점잖기는 하지만 열정적인 기질도 역시 지녔다고 하더구나."
"정말 그런 말들을 했어요?"
"오냐."
평소 같으면 그 대답에 제니퍼는 아주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다른 어떤 때보다도 훨씬 더 수심이 쌓이고 긴장된 얼굴이었다. 이제는 목소리까지 꽉 잠겨 있었다.
"그래, 네가 그 이교도 같은 짓들을 안 한다니 정말 잘됐구나."
그리고 아버지는 말을 더 할 수가 없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제니퍼는 부드럽게 물어보았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아버지는 길고도 격한 숨을 들이쉰 후 말을 이었다.
"그건, 이제 내가 묻는 말에 네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우리 집안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말이 제니퍼의 가슴에 나팔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제니퍼는 흥분과 기쁨에 겨워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집안의 미래가 너에게 달려 있다......."
제니퍼는 자기가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기뻤다. 마치 수녀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 자기가 항상 꿈꾸던 일이 실현된 것 같았다. 그 꿈에서는 항상 아버지가 자신에게 다가와 "제니퍼야, 우리 집안의 운명이 네게 달렸단다. 오빠들이 아니라 바로 너한테 말이다." 라고 말하곤 했었다.
바로 지금이 집안사람들에게 자신의 용기를 보여 주고 그들의 애정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였다. 제니퍼는 그 동안 이런 기회를 꿈꾸어 왔다. 공상의 나래를 펼 때면 뭔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수행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예를 들면 검은 늑대의 성에 혼자 들어가 그자를 생포해 오는 일 등은 용기가 필요하고 위험한 것들이었지만, 제니퍼는 한 번도 머뭇거리거나 왜냐고 묻지 않고 분연히 나섰다.
제니퍼는 아버지의 얼굴을 살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말씀만 하세요. 말씀대로 할게요. 어떤 일이라도....."
"에드릭 맥퍼슨하고 결혼하겠느냐?"
"뭐, 뭐라구요?"
제니퍼의 상상 속의 여주인공이 공포에 질려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에드릭 맥퍼슨은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다. 남자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사람은 제니퍼가 어린아이에서 숙녀로 성장할 무렵부터 소름끼치는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었다.
"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제니퍼가 살짝 미간을 찡그리자 가느다란 적갈색 눈썹이 한데 모였다.
"왜죠?"
꿈속의 주인공은 입 밖에도 내지 않던 말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뭔가에 홀린 듯 이상하게 어두워졌다.
"콘월 전투에서 우리가 졌단다. 군사의 반을 잃었지. 알렉산더도 전사했고. 그 아인 메릭 가문의 사람답게 죽었단다."
아버지는 우울한 자부심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끝까지 싸웠지."
"아빠가 무사해서 기뻐요."
제니퍼는 자신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든 이복 오빠에 대해서는 한 조각의 동정심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과거에도 종종 그랬듯이 아버지가 그녀를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얘기를 하고 싶었다.
"아빠가 오빠를 친아들처럼 사랑하셨다는 걸 알아요."
딸의 동정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아버지는 방금 전에 꺼냈던 문제로 돌아갔다.
"제임스 왕을 위해 콘월 싸움에 참전하는 일을 반대한 사람들도 많았지. 하지만 결국은 다 나를 따랐단다. 다른 집안이 콘월에 모인 것은 내 영향력 때문이란 거야 잉글랜드 사람들도 잘 알지. 그래서 잉글래드 왕이 복수를 하려고 하는 게고. 메릭 성을 공격하라고 검은 늑대를 보냈다는구나."
고통을 자제하는 듯한 깊은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만약 맥퍼슨 집안이 와서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로서는 그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단다.
맥퍼슨 집안은 다른 가문들도 동원할 수 있는 영향력이 있는 집안이지."
제니퍼의 머리가 빙빙 돌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죽었고, 검은 늑대가 진짜로 그녀의 고향을 공격하러 오고 있다.......
그때 아버지의 사나운 음성이 현기증이 이는 제니퍼의 귀를 때렸다.
"제니퍼, 내가 말한 걸 이해하겠느냐? 맥퍼슨은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단 네가 자기 아내가 되는 조건 하에서만 말이다."
어머니의 작위를 이어받은 제니퍼는 이미 여백작의 작위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맥퍼슨의 땅과 맞먹는 엄청난 땅도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았다.
"제 땅을 원한대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물어 본 소리였다. 제니퍼의 머릿속에는 1년 전 "사교 차 방문"한 에드릭 맥퍼슨이 자신의 몸을 그 징그러운 눈초리로 훑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래."
"그럼 도와주는 대가로 그 땅을 주면 되잖아요?"
제니퍼는 절망적으로 매달렸다. 엄청난 재산이었지만 그런 것쯤이야 가족을 위해서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 조건에는 동의할 수 없다!"
아버지의 화난 목소리가 이어졌다.
"친척을 위해서 싸우는 거라면야 영예로운 일이다만,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사람들을 보낼 수는 없는 거다. 게다가 그 대가로 네 땅을 받을 수는 더더욱 없는 게고."
"하지만 그토록 제 땅을 원한다면 다른 방법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바로 너야. 콘월에 있을 때 전갈을 보냈더구나."
아버지의 눈길이 제니퍼의 얼굴을 훑어보고 있었다. 앳된 소녀의 얼굴에서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내뿜는 여인의 얼굴로 변한 제니퍼의 놀라운 변모를 하나하나 새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버지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얘야, 넌 꼭 네 엄마를 닮았구나. 나이든 사람의 구미에 딱 맞게 말이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너한테 그렇게 하라고 하지도 않았을 게다."
그리고 아버지는 퉁명스럽게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넌 언제나 네 이름에 영주의 작위를 붙여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네가 집안을 위해 못 할 일이 뭐가 있느냐면서....."
제니퍼는 위가 뒤틀리는 듯했다. 이제 자신의 육체와 인생을 생각만 해도 뒷걸음질 쳐지는 남자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에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제니퍼는 고개를 들고 용감하게 아버지의 눈길에 눈을 맞췄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알았어요, 아빠. 그럼 지금 아빠와 함께 가는 건가요?"
아버지의 얼굴에 나타난 자부심과 안도의 표정은 제니퍼의 희생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브렌다와 함께 여기에 남아 있는 게 제일 좋을 것 같구나. 말도 없는데다가 우리는 지금 빨리 메릭으로 가서 싸울 준비를 해야 하니까 말이다. 맥퍼슨 가문에 사자를 보내 네가 결혼에 동의했으니 데려갈 사람을 보내라고 하마."
아버지가 말에 오르려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제니퍼는 자신고 같이 싸우러 가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이렇게 옆으로 물러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한때는 친했으며 함께 놀아주던 집안사람들과 나란히 말에 올라 같이 가고 싶었다. 자기가 맥퍼슨 가문에 시집가기로 한 일로 그녀에 대한 경멸감이 조금은 누그러졌기를 기대하면서, 제니퍼는 혈색 좋은 빨간 머리 남자가 탄 말 옆으로 가 섰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웃으면서 말을 붙였다.
"레널드 가빈, 좋아 보이네요. 부인도 안녕하시겠죠?"
그의 턱이 굳어지면서 차가운 눈길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잘 있을 게다."
쌀쌀한 말투였다. 제니퍼는 낚시를 가르쳐 주다가 자신이 물에 빠지면 크게 웃곤 하던 그 남자의 차가운 반응에 침을 꿀꺽 삼켰다.
제니퍼는 몸을 돌려 레널드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간절한 눈길을 보냈다.
"이게 누구예요? 마이클 맥클러드 아니에요? 아직도 다리가 아픈가요?"
역시 차갑기만 한 파란 눈이 그녀를 언뜻 보다가 이내 앞을 향했다.
제니퍼는 뒤쪽의 사람에게 갔다. 증오로 가득 찬 그 눈을 보면서 그녀는 손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애원조가 역력한 말투였다.
"개릭 카마이클, 베키가 물에 빠진 지 벌써 4년이 됐네요.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맹세하지만 전 절대 베키를 떠밀지 않았어요. 우린 싸우고 있지 않았어요. 다 알렉산더가 꾸며 낸 거짓말......."
개릭은 돌처럼 딱딱한 얼굴을 한 채 한 번도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그대로 말을 몰아 앞으로 지나갔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늙은 조시만은 그러지 않았다. 가문의 무기 담당관인 그는, 눈에 익은 말을 정지시키고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지나가게 했다. 그리고 몸을 숙여 그 못 박인 손바닥을 그녀의 머리에 올렸다.
"그래, 난 네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안단다."
그 변함없는 충성심에 제니퍼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그의 부드러운 갈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넌 성미가 급해. 그거야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지. 하지만 아주 어렸을 때도 자기 성질을 잘 억제했었지. 개릭이나 다른 사람들은 알렉산더의 천사 같은 얼굴에 다들 속았지만 이 조시만은 안 속아. 알렉산더가 죽었다고 해도 난 하나도 슬프지 않단다. 윌리엄이 가문을 이끄는 게 훨씬 더 나을 거야. 다른 사람들도 네 결혼이 영주님뿐만 아니라 자기들도 위해서라는 걸 알게 되면 널 다시 생각하게 될 게다."
그 이야기만 하고 있다가는 아무래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제니퍼는 화제를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죠?"
"다른 길로 오고 있어. 혹시 검은 늑대한테 습격당하면 안 되니까 말이야. 콘월에서 떠날 때부터 아예 헤어져서 오고 있단다."
조시는 한 차례 더 제니퍼의 머리를 토닥거려 주고는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갔다. 제니퍼는 사람들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멍하니 그 자리에 돌처럼 서 있었다.
"어두워지고 있어. 수녀원으로 돌아가야 해."
브렌나가 옆에 와 섰다. 동정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수녀원, 세 시간 전만 해도 제니퍼는 상쾌한 기분으로 생기 있게 그곳을 나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살아 있는 것 같지다 않았다.
"먼저 가. 난, 난 돌아갈 수가 없어. 지금 기분으론 말이야. 저기 언덕에 가서 잠깐 앉아 있다가 갈게."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지 않으면 원장님이 화를 내실 거야. 봐, 벌써 어두워지고 있잖아."
브렌나가 걱정스레 말했다. 두 소녀는 언제나 그랬다. 제니퍼는 규칙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인데 반해 브렌나는 부드럽고 유순하며 아름다웠다. 글발머리에 적갈색 눈, 그리고 상냥한 성품은 제니퍼가 보기에도 여성스러움 그 자체였다. 제니퍼가 충동적이고 두려움이 없는 데 비해서 브렌나는 온순하고 소심했다. 제니퍼가 없었다면 브렌나는 모험 한 번 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꾸중도 듣지 앟을 것이다. 또한 걱정해 주고 보호해 주는 브렌나가 없었다면, 제니퍼는 더 많은 모험을 했을 것이다. 물론 꾸중도 더 많이 들었을 거고. 그 결과 두 소녀는 서로를 무척이나 위했다. 두 소녀는 각자의 결점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결과로부터 가능한 한 사로를 보호해 주려고 노력했다.
브렌나가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용기를 냈다.
"나도 같이 있을게. 언니 혼자 있다간 시간도 잊어버리고 말거야. 그러다 혹시 곰한테 당할지도 모르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커다란 곰의 모습이 제니퍼의 머리를 스쳤다. 이제부터의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지 뻔한 지금, 차라리 그렇게라도 됐으면 하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탁 트인 벌판에서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나중에 수녀원장 앞에서 벌벌 떨 브렌나 생각에 제니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냥 돌아가자."
그녀의 말을 무시하면서 브렌나는 제니퍼의 손을 이끌어 왼쪽으로 돌았다. 그리고 수녀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비탈진 곳으로 향했다. 브렌나가 앞장서고 제니퍼가 따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둘은 길옆의 나무숲 속으로 들어갔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언덕 위로 길게 늘어졌다. 가파른 길을 반쯤 올라갈 때쯤, 제니퍼는 너무나 비참한 기분에 폭발할 것만 같았다.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겨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은 제니퍼는 힐끔 브렌나를 쳐다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한테 뭔가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안 그래? 집안을 위해서 맥퍼슨 가문에 시집을 간다, 이거야."
"사람들을 이끌고 승리를 향해서 나아가는 잔다르크처럼 말이지."
브렌나가 열심히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내가 에드릭 맥퍼슨하고 결혼한다는 것만 빼고."
"잔다르크보다 훨씬 더 가혹한 운명이지!"
그 감동적인 말에 제니퍼의 눈가에 웃음이 번졌다. 브렌나는 진정 진심에서 그 말을 한 것이었다. 제니퍼가 웃음을 되찾는 기색을 보이자 브렌나는 제니퍼의 기분을 되살리려고 이것저것 우스운 이야기를 던졌다. 아름드리 나무들로 가려진 언덕마루에 거의 다 올라갔을 때 불쑥 브렌나가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언니보고 "꼭 네 엄마처럼 생겼구나" 라고 한 건 무슨 말일까?"
"나도 몰라."
그때 제니퍼는 누군가 자신들을 엿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제니퍼는 몸을 돌려 오던 길을 조금 내려가 마을을 살펴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따뜻한 난로 곁으로 들어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옷을 파고드는 찬 바람에 제니퍼는 망토를 치켜 올렸다. 그리고 별 관심 없는 듯 말을 이었다.
"수녀원장님이 그러는데 내 생김새가 남자들을 자극하게 생겼대. 수녀원 바깥에 나가면 남자들한테 미칠 영향을 생각해서 얼굴을 잘 보호해야 한다고 하더라."
"그게 무슨 말인데?"
"나도 몰라."
제니퍼는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정상을 향해 걷던 제니퍼는 아직도 쓰개와 베일을 손가락에 걸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쓰개를 도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불쑥 브렌나에게 혼란스런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그런데 네가 보기에는 어떠니? 난 2년 동안 내 얼굴을 본적이 없어. 물가에 가서 비춰 본 적은 있지만 말이야. 정말 내가 많이 변했니?"
"그럼."
브렌나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알렉산더 오빠도 이젠 더 이상 언니를 말라깽이라거나 못갱겼다고 놀리지 못할 거야. 머리가 당근 색이라고 하지도 못할 거고."
"브렌나!"
제니퍼는 브렌나의 무심한 말에 깜짝 놀라 말을 가로막았다.
"넌 알렉산더 오빠가 죽었는데 슬프지 않니? 오빠가......."
순간 브렌나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그 이야긴 더 하지 마."
브렌나가 애원하듯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그 말을 했을 땐 울었어. 하지만 눈물이 별로 나오지 않는 거야. 내가 오빠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들어. 하지만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오빠를 사랑할 수가 없어. 오빤 비열한 사람이었어. 죽은 사람을 나쁘게 말하는 게 잘못인 줄은 알아. 하지만 좋은 말을 해 줄만 한 일이 생각나지 않는걸."
브렌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브렌나는 축축한 바람에 망토를 치켜 올렸다. 제니퍼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화제를 바꾸자는 애원이 간절하게 실려 있었다. 제니퍼는 얼른 동생을 껴안았다가 풀어 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 봐."
두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비탈길 앞에는 나무가 꽉 들어차 있어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복 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브렌나의 아름다운 얼굴에 사려 깊은 미소가 천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브렌나의 갈색 눈동자가,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적갈색 눈썹과, 그 아래에서 검푸른 수정같이 도드라지게 빛나는 제니퍼의 눈동자를 거쳐 얼굴을 더듬어 나갔다.
"음, 언닌 정말 예뻐!"
"좋아, 그런데 나한테 뭐 이상한 점은 없니?"
제니퍼는 베일을 쓰면서 암브로스 수녀의 말을 머리에 떠올리곤 다시 확인해 보았다.
"남자를 이상하게 만드는 데는 없어?"
"아니, 전혀."
브렌나는 그 순진무구한 눈으로 제니퍼를 요모조모 뜯어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자라면 다른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제니퍼 메릭은 전통적인 개념으로 봐서는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의 생김새는 충격적이면서 도발적이었다. 입은 키스해 달라고 유혹하는 듯했고,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두 눈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타오르는 듯한 붉은 빛을 띤 황금색이었다. 게다가 그 호리호리하고 관능적인 몸매는 남자의 손에 딱 맞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언니 눈은 파래."
제니퍼의 모습을 설명하려고 애쓰던 브렌나의 말이 제니퍼의 웃음으로 끊어졌다.
"2년 전에도 내 눈은 파랬어."
그 말에 브렌나는 뭔가 대꾸하려 했지만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외마디 비명이었다.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브렌나를 잡은 남자는 그녀를 뒤편 우거진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제니퍼는 뒤에서 공격이 있을 거라는 예감에 본능적으로 휙 몸을 피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장갑을 낀 남자의 손에 붙잡힌 제니퍼는 비명을 지르며 발길질을 해댔지만 그 남자에게 가볍게 들려 역시 숲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브렌나는 마치 밀가루 포대처럼 들어 올려져 말에 실렸다. 축 늘어진 폼이 기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제니퍼는 쉽사리 항복하지 않았다. 얼굴 없는 적이 자신을 말 위로 던져 올리자 제니퍼는 얼른 몸을 옆으로 둘렸다. 낙엽이 쌓인 땅에 떨어진 그녀는 말 뒤로 기어가 벌떡 일어섰다. 상대가 다시 그녀를 붙잡는 순간, 그녀는 몸을 뒤틀며 그의 얼굴을 손톱으로 확 할퀴었다.
"망할 것!"
적은 화가 난 듯 한마디 내 뱉고는 그녀의 사지를 다시 붙잡으려 했다. 제니퍼는 소름끼치는 비명을 지르면서 힘껏 발로 적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수련 수녀들이 신는 단단한 검정색 부츠를 신고 있었기 때문에 제법 힘이 들어갔다. 금발머리의 적은 한순간 그녀를 놓으며 고통에 찬 신음을 질렀다. 그녀는 발딱 일어나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츠가 나무뿌리에 걸려 채 몇 미터도 가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로프를 줘."
"검은 늑대"의 동생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동료를 힐끔 쳐다보았다. 스테판 웨스트모어 랜드는 제니퍼의 망토를 위로 벗긴 다음, 그 망토로 그녀의 팔과 몸을 두른 뒤에 동료에게서 받은 줄로 몸 한가운데를 꽁꽁 묶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말 위에 휙 얹었다. 엉덩이가 하늘로 치솟은 굴욕적인 자세였다. 이윽고 스테판 웨스트모어랜드는 말에 올랐다.
2. 적진에서의 첫 대면
"우리가 얼마나 큰 행운을 잡았는지 로이스 형은 믿지 않을 거야."
스테판은 옆의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 동료의 말 위에도 역시 꽁꽁 묶인 포로가 안장에 걸쳐져 있었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걸. 메릭의 딸들이 그 시간에 그 나무 뒤에 서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이젠 메릭 성을 정탐할 필요도 없이, 그냥 항복할 텐데, 뭘."
자기 망토로 꽁꽁 감긴 채 말 위에 실려 있는 제니퍼는, 안 그래도 말이 뛸 때마다 머리가 덜렁거리고 위가 짓눌려 죽을 판이었다. 그런데 "로이스" 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정말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로이스 웨스트모어랜드, 클레이모어의 백작, 바로 "검은 늑대"였다. 이제까지 검은 늑대에 관해 들은 이야기가 하나도 허튼 것이 없었다. 지금 브렌나와 그녀는 성 앨번스의 규울에 대해 전혀 경의를 표할 줄 모르는 불한당 같은 자들에게 잡혀 있는 것이다. 아직 서원을 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수녀복을 입고 있는 자신들을 이렇게 대하는 것을 보면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감히 수녀에게, 아직 정식 수녀는 아니더라도 수녀의 옷을 입고 있는 여자한테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을 보면, 양심도 없고 천벌도 무서워하지 않는 자들임이 분명했다. 사람이라면 이럴 리가 없었다. 악마와 그 제자들이나 이러리라!
"이건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인데."
토마스가 음흉한 웃음을 날리며 말을 이었다.
"노획물을 시식해 볼 시간이 없다는 게 유감 천만이야. 그런데 네 담요에 싸인 것이 더 맛있어 보여, 스테판."
그러자 스테판의 차가운 대꾸가 이어졌다.
"예쁘기는 네 게 더 예뻐. 하지만 로이스 형이 이것들을 어떻게 할 건지 결정하기 전까지는 딴 맘먹지 말아."
제니퍼는 담요에 싸인 채 공포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항의의 고함을 지른다고 질렀지만 들리는 건 목에 걸린 가느다란 비명소리뿐이었다.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신에게 벼락을 쳐 달라고 빌어 보았지만 신도 그녀의 기도에 아무 응답이 없었다. 말은 여전히 잘 달렸다. 탈출 계획이라도 짜 볼까 했지만 검은 늑대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떠오르면서 정신이 도무지 모아지지 않았다.
"검은 늑대는 죄수를 실컷 고문한 다음 죽여 버린다더라."
"죄수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데 검은 늑대는 태연히 웃고 있단다."
"검은 늑대는 죄수의 피를 먹는데........"
속에서 시큼한 것이 올라왔다. 이제 도망갈 기회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니퍼는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도망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죽음이 한순간에 오기를, 그리고 자랑스러운 가문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기를 빌었다. 메릭 성의 홀에 서서 오빠들을 가르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적의 손에 죽는 것이 신의 뜻이라면 용감하게 받아들여라. 전사답게 싸우다가 죽어야 한다. 메릭 가문의 일원답게 당당하게 싸우다 죽어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얼마나 왔을까? 제니퍼는 오로지 아버지의 가르침만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엔가 말이 속도를 늦추었다. 제니퍼는 저 멀리서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제니퍼의 가슴속에서 분노가 공포를 이기고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난 아직 젊어. 죽기엔 너무 이르단 말이야!"
그리고 착하디 착한 브렌나도 죽을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분명 제니퍼의 잘못이었다. 이 죄과는 후일 신 앞에 갔을 때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야 하리라. 피에 굶주린 악마가 방해물들을 다 쓸어버리면서 대지를 헤매게 놓아둔 것도.
말이 제자리걸음을 하기 시작하자, 안 그래도 쿵쾅거리던 심장이 더욱 빨리 뛰었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가면서 내는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요란했다. 그리고 포로인 듯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비를 갈구하는 측은한 목소리였다.
"검은 늑대여, 제발 자비를! 검은 늑대여......."
제니퍼가 말에서 내려질 즈음에는 그 두려움에 찬 목소리들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로이스 형, 잠깐만요. 우리가 가져온 걸 좀 보십시오."
제니퍼를 잡아 온 사나이의 목소리였다.
머리에 망토가 씌워져 있어 제니퍼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팔도 묶여 있는 상태였다. 제니퍼를 잡아 온 사나이는 그녀를 어깨에 들쳐 메었다. 앞으로 옮겨지는 동안 브레나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용기를 내, 브랜나."
제니퍼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망토에 덮인 그 소리를 공포에 사로잡힌 동생이 듣지 못하리라는 건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제니퍼는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내려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제니퍼는 다리가 마비되어 비틀거리다가 그만 푹 쓰러지고 말았다.
"메릭 가문의 사람답게 죽어라. 용감하게 싸우다 죽어라."
가슴속에서는 계속 그 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제니퍼는 똑바로 일어서려고 노력했으나 도저히 설 수가 없었다. 머리 위에서 검은 늑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울렸다. 그 목소리는 신경질적이면서 금세 분노가 폭발할 듯한 어조였다. 마치 지옥 한가운데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이게 뭐야? 먹는 건가 했더니."
"사람들이 그러는데 검은 늑대는 자기가 죽인 사람의 고기를 먹는대요........."
브렌나의 신음소리와 자비를 구하는 포로들의 외침과 섞여, 제니퍼의 가슴속에서는 다시 분노가 일었다. 갑자기 토마스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팔을 감고 있던 줄이 느슨해졌다. 공포와 분노의 감정이 뒤범벅된 상태에서 제니퍼는 볼품없이 세워졌다. 망토를 벗으려고 발버둥치는 유령 같았다. 망토가 벗겨지는 순간, 제니퍼는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녀의 주먹이 앞에 서 있던 시커먼 악마 같은 괴물의 턱에 명중했다. 그를 보더니 브렌나는 다시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괴물! 이 악당!"
제니퍼는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강철 같은 손아귀에 잡혀 버렸다.
"악마!"
제니퍼는 바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악마의 자식! 무고한 사람을......."
그리고는 그의 정강이를 힘껏 내찼다.
"이런........!"
로이스 웨스트모어랜드가 고함을 지르며 손을 내밀어 습격자의 허리를 잡았다. 그리곤 그녀의 몸을 휙 비틀어 하늘로 들어 올렸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제니퍼의 부츠가 다시 허공을 가르더니 그의 허벅지에 정확하게 꽂혔다. 그의 몸이 거의 구부러지다시피 휘청거렸다.
"이런 고얀 것!"
벽력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로이스는 놀라움과 고통과 분노에 못 이겨 그녀를 땅바닥에 내려놓고는 제니퍼의 베일을 움켜쥐고 뒤로 홱 젖혔다. 머리카락 한 줌이 쓰개와 함께 뒤로 당겨졌다. 그는 그녀의 얼굴 앞에서 다시 소리를 질렀다.
"가만있지 못해!"
산천초목조차도 그의 고함에는 꼼짝 못하는 것 같았다. 간절한 애원소리를 내던 포로들도 입을 다물었고, 쇠붙이들도 철렁거리던 소리를 멈췄다. 넓디넓은 야영지에 어둠 같은 적막이 내렸다. 제니퍼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검은 늑대에게 잡혔던 머리가 아팠다.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 제니퍼는 눈을 꾹 감고는 그의 주먹이 날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두려움과 함께 위험한 호기심에서 제니퍼는 천천히 눈을 떠 보았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이었다. 자기 앞에 우뚝 선 그 악마 같은 모습을 본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엄청난 거구였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살아 있는 듯 바람에 휘날리는 검은 망토, 불빛이 흔들리는 데 따라 여기저기 그림자기 지는, 매처럼 날카롭게 생긴 거무름한 얼굴은 영락없는 악마였다. 묘하게 생긴 눈 속에서 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수염이 텁수룩한 얼굴 한가운데서 은덩어리가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턱 벌어진 어깨며 가슴은 못 믿을 정도로 넓었고, 팔에는 우람한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 사악한 행동들을 능히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 용감하게 죽는 거야. 되도록 빨리."
제니퍼는 고개를 돌려 그의 강인한 손목에 이빨을 깊이 박았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이 순간 번쩍 하더니 손이 위로 올라갔다. 무자비한 손이 제니퍼의 뺨에 작열했다. 제니퍼의 고개가 홱 돌아가면서 그녀의 가녀린 몸은 그대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추스리고는 눈을 꼭 감고 이윽고 떨어질 주먹을 기다렸다. 온몸에 공포가 휩쓸고 지나갔다. 떨지 않으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 괴물의 목소리가 위에서 들렸다. 이번엔 분노를 억지로 참으며 내뱉는 소리이기에 더욱 공포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짓거리들을 한 거야!"
동생을 나무라는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문제투성이라 골치 아파 죽겠는데. 군사들은 지치고 배가 고파서 야단인데, 불만을 더 부추기려고 이것들을 데려왔나?"
로이스는 동생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두 여자를 풀어 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발아래 쓰러져 있는 두 여자를 쏘아보았다. 하나는 기절해 있었고, 또 하나는 잔뜩 웅크린 채 발작이라도 일으킨 양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로이스는 기절해 있는 여자보다 떨고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더욱 화가 났다.
"일어나!"
로이스는 부츠 끝으로 제니퍼를 툭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용감하더니, 이젠 그 용기가 다 사라졌나? 일어나!"
제니퍼는 천천히 몸을 풀면서 땅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섰다. 그러나 자꾸만 다리가 후들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로이스가 동생을 보고 다시 소리쳤다.
"스테판, 네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제발 뭐라고 하지 말아요. 그러면 하나를 줄 테니까. 이 여자들은........"
"수녀야!"
로이스의 눈길이 제니퍼의 목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고정되면서 비명소리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윽고 그의 눈길이 흙이 묻어 지저분해진 쓰개와 베일로 옮겨졌다. 자신이 깨달은 사실에 놀랐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세상에.....여자가 없어서 수녀를 창녀로 쓰겠다고 데려왔다는 거냐?"
"수녀라고요?"
스테판 역시 놀란 모양이었다.
"창녀로 쓴다구?"
제니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악을 썼다. 하지만 검은 늑대가 자신들을 진짜로 군사들에게 창녀로 줄 정도로 하늘의 무서움을 모르는 자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테판, 이런 짓을 하다니.......내가 널 죽여도 할 말이 없을 게다. 그러니 제발......."
"이 여자들이 누군지 알면 형도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스테판은 제니퍼의 회색 옷과 십자가에서 겁먹은 눈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엔 생기를 되찾은 목소리였다.
"형 앞에 있는 여자가 바로 메릭 경이 애지중지하는 맏딸 제니퍼입니다."
로이스는 제니퍼의 더러운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눈길을 돌려 동생을 바라보았다.
"바보 같기는.......이 멍청아, 그럼 메릭의 딸이 이 세상 최고의 미녀라는 말이 헛소문이라는 거냐?"
"아니에요, 저 여자는 진짜 메릭의 딸입니다. 자기 입으로 그랬습니다."
로이스는 엄지와 검지로 제니퍼의 떨고 있는 턱을 들어올려, 흙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불빛에 비춰 자세히 뜯어보았다. 그의 눈썹이 찡그려지더니 입가에 비웃음이 떠오르면서 모욕적인 언사가 튀어나왔다.
"이렇게 널 보고 미인이라고들 할까? 스코틀랜드의 보석이라며?"
자신의 그 말에 제니퍼의 얼굴 가득히 분노가 피어오르는 것을 로이스는 빤히 지켜보았다. 제니퍼는 얼굴을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 용기는 오히려 로이스의 화를 돋울 뿐이었다. 그는 메릭이라는 이름만 들어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도 그의 내부에서는 복수심이 부글부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제니퍼의 창백하고 지저분한 얼굴을 움켜쥐고는 자기 앞으로 홱 당겼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대답해!"
브렌나는 히스테리에 가까운 상태에 있었지만, 자신이 받아야 할 모욕을 제니퍼가 대신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렌다는 제니퍼의 가운을 부여잡고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일어나서는 태어날 때부터 한몸인 쌍둥이인 양 제니퍼 오른쪽에 딱 붙어 섰다.
"제니퍼 보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브렌나는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제니퍼가 저 무서운 사내로부터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만 같았던 것이다.
"날 보고 그러는 소리예요."
그러자 그 남자가 노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넌 또 누구냐?"
"그 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니퍼가 벼락같이 나섰다. 혹시 브렌나를 진짜 수녀라고 얘기하면 풀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여덟 번째 계율까지 어긴 것이다.
"그 애는 그저 벨커크 수녀원의 브렌나 수녀라구요!"
"사실이냐?"
로이스가 브렌나를 보고 물었다.
"그래요!"
"아니에요."
제니퍼의 앙칼진 목소리와 브렌나의 희미한 목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로이스는 양 주먹을 꼭 쥐고는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힘든 행군을 한데다가 식량도 떨어졌다. 더구나 어디 변변하게 잠잘 데도 없는 판이라 인내심이 한계를 벗어날 지경이었던 것이다. 지금 당장 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두 여자에게서 정직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사흘 밤낮을 눈 한번 못 붙이고 행군해서 그런지 정말 피곤했다. 이젠 선택할 시간이었다.
그는 거무스름한 얼굴을 돌려 브렌나를 쏘아보았다. 아무래도 둘 중에서 브렌나가 더 쉽게 겁을 먹을 것 같았고, 거짓말을 꾸며댈 가능성도 더 적어 보였던 것이다.
"자, 한 시간이라도 더 살고 싶으면 내가 묻는 말에 지금 당장 사실대로 말해!"
로이스의 찌르는 듯한 눈빛이 브렌나의 겁에 질린 적갈색 눈을 꼼짝 못하게 붙들었다.
"너는 메릭 경의 딸이냐, 아니냐?"
브렌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말을 하려고 해 보았지만 입술이 떨려서 도대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낭패감에 젖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다. 로이스의 얼굴에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그는 수녀복을 입은 성미 고약한 고양이를 죽일 듯 쳐다보았다. 로이스는 스테판에게 무뚝뚝하게 명령을 내렸다.
"저것들을 묶어서 천막에 가둬라. 그리고 군사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애릭한테 지키게 해. 내일 아침까지는 살려 둬야겠다. 물어볼 게 있으니까 말이야."
"내일 아침까지는 살려 둬야겠다. 물어 볼게 있으니까 말이야....."
천막 안에서 가죽 끈으로 묶인 채 땅바닥에 누워 있는 제니퍼의 가슴속에 그 말이 맴돌았다. 불쌍한 브렌나 역시 손과 발이 묶여 있었다. 천막 천장에 난 구멍으로 별이 반짝이는 하늘이 보였다. 검은 늑대가 뭘 물어 볼까? 지친 나머지 두려움은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무슨 고문을 할까? 어떤 대답을 원할까? 어쨌든 내일이면 죽을 것이라는 건 확실했다.
브렌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니, 내일 우릴 죽이진 않겠지?"
"그럼."
제니퍼는 단호하게 거짓말을 했다.
3. 검은 늑대, 로이스
새벽별이 미처 지기도 전에 검은 늑대의 진지가 벌써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니퍼는 밤새 한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녀는 이불 삼아 덮고 잔 얇은 외투 아래 몸을 웅크린 채 검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수많은 죄를 회개하면서 불쌍한 브렌나를 살려 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이 일은 어제 황혼 무렵 언덕으로 가자고 한 자신의 어리석은 충동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밖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제 진지가 완전히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제니퍼는 목소리를 낮추어 브렌다에게 말을 걸었다.
"브렌나, 깼니?"
"응."
"검은 늑대가 뭘 묻거든 나한테 대답을 미뤄, 알았지?"
"알았어."
브렌나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 사람이 뭘 물어 볼지 확실치는 않지만 말해선 안 될 것들을 물어 볼 게 뻔해. 그 사람이 왜 묻는지 나는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 엉뚱한 대답으로 골탕 먹일 수도 있을 거야."
새벽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면서 동이 틀 무렵, 두 사나이가 들어와 줄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넓은 개활지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가더니 아주 잠깐 동안 볼일을 보게 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제니퍼는 도로 묶고, 브렌나를 그대로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들의 의도를 깨닫는 순간 제니퍼는 숨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잠깐, 잠깐만요. 제발 날 데리고 가요. 내 동생, 내 동생은.......지금......몸이 안 좋아요."
두 사나이 가운데 소문으로 듣던 거인, 키가 2미터도 넘을 것 같은 애릭이라는 자가 소름끼치는 얼굴로 제니퍼를 한번 쏘아 보고는 그대로 가 버렸다. 다른 감시병이 불쌍한 브렌나를 끌고 저만치 걸어가는 모습이 천막 자락 틈새로 보였다. 제니퍼는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끌려가는 브렌나를 탐욕스런 눈초리로 훑어보는 군사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브렌나가 끌려간 지 30분......그 30분이 제니퍼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브렌나는 고문을 당한 흔적 없이 되돌아왔다.
"괜찮니? 해코지를 당하진 않았지?"
감시병이 밖으로 나간 후 제니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 보았다.
브렌나는 침을 꿀꺽 삼킨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곤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신경질적인 울음이었다.
"그래......하지만 그 사람이 얼마나 화를 냈는지 몰라. 너무너무 겁이 나서 울음밖에 나오지 않는데 어떡해. 그렇게 크고 사나운 사람은 정말 처음 봤어. 그냥 울음만 계속 나오는 거야. 결국 그 사람 화만 돋우고 말았어."
"울지 마. 이젠 다 끝났어."
거짓말이었지만 제니퍼는 브렌나를 달랬다. 이제는 거짓말이 너무나도 쉽게 나오고 있었다.
스테판은 로이스의 천막 자락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세상에, 정말 대단한 미인이던데요. 수녀라니 정말 아까워요."
방금 보낸 브렌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로이스는 통명스럽게 말을 잘라 버렸다.
"아니야. 질질 짜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기가 수련 수녀라고 설명은 했다."
"그게 뭔데요?"
로이스 웨스트모어랜드는 싸움터에서 단련된 전사였다. 그래서 종교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싸움터에서 세월을 보냈고, 싸움터가 그가 아는 전부였다. 그래서 그는 브렌나의 눈물에 찬 설명을 자신이 이해하는 군사 용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수련 수녀란 아직 훈련을 마치지 못했거나 군주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하지 않은 지원자 같은 게다."
"그 여자가 말한 게 사실이라고 믿는 겁니까?"
로이스는 얼굴을 찡그리고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여자는 너무 겁을 먹어서 감히 거짓말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야. 하긴 말도 제대로 못 했지만 말이다."
스테판의 미간이 좁아졌다. 형이 그 여자에게서 더 많은 정보를 빼내지 못한 것이 그 여자에 대한 경계심 때문인지 단순히 무관심 때문인지 생각해 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너무 예뻐서 거칠게 다룰 수가 없었다, 이거죠?"
로이스는 조소 어린 얼굴로 동생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메릭 성의 무장 상태가 어떤지, 또 지세는 어떤지 알고 싶다. 도움이 되는 거라면 뭐든지 알아내야지. 안 그러면 네가 어제처럼 또 정찰을 나가야 할 테니까."
로이스는 컵을 탕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딱 잘라 말했다.
"언니를 데려와."
애릭이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 거한이 발을 옮길 때마다 땅이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브렌나는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절망적인 신음 소리를 냈다.
"제발, 제발, 날 그 사람한테 도로 데려가지 말아요."
하지만 에릭은 곧바로 제니퍼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우악스런 손아귀로 제니퍼를 들어올렸다. 그 순간 제니퍼는 소문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거인의 도끼 손잡이가 커다란 나무 등걸 만큼이나 굵었던 것이다.
검은 늑대는 널찍한 천막 안을 안절부절 못하며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니퍼가 안으로 떠밀려 들어오자 우뚝 그 자리에 섰다. 그의 은빛 눈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제니퍼는 양손을 뒤로 결박당했으면서도 당당하게 똑바로 서 있었다. 비록 얼굴에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지금 로이스는 내심 겁없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제니퍼의 파란 눈에서 경멸감을 읽어 내고는 놀라고 말았다. 경멸감만 가득할 뿐 눈물 자국 하나 없는 얼굴......문득 메릭의 맏딸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둘째 딸은 "스코틀랜드의 보석" 이라고들 했지만, 이 여자는 냉정하고 콧대 높은 상속인이라고 했다. 지참금도 많고 혈통도 좋아서, 아무도 감히 그녀를 넘보지 못한다는 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괜찮은 청혼을 모두 퇴짜 놓다가 아버지에 의해 수녀원으로 보내진 못생긴 여자라고 했다. 비록 흙이 묻어 엉망이라고는 하지만 그 얼굴을 두고 "못생겼다" 고 할 수는 없었다. 물론 동생처럼 처사 같은 아름다움과 마음씨는 갖기 못한 것이 분명했다. 아까 동생은 애처롭게 흐느꼈는데 지금 이 여자는 자신을 겁 없이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이런.......너희 둘은 정말 자매냐?"
제니퍼의 턱이 위로 올라갔다.
"그래요."
"놀랍군!"
로이스의 비꼬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다시 물었다.
"친자매인가?"
제니퍼가 아무 대꾸가 없자 로이스는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대답해!"
겉보기와는 달리 제니퍼는 속으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녀는 문득 이런 무의미한 심문으로 시작한 뒤, 마지막에는 고문을 하거나 죽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복동생이에요."
제니퍼는 순순히 인정했다. 이어 반항심이 고개를 들더니 공포를 몰아냈다.
"손이 뒤로 묶여 있으니까 도대체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군요. 아프기도 하지만 불필요한 일 아닐까요?"
"그건 그렇군."
로이스는 그녀에게 허벅지를 걷어차인 생각을 하면서 생각없이 말을 이었다.
"묶어야 할 쪽은 발인데 말이지."
아주 언짢은 모양이었다. 로이스의 목소리에 담긴 기분을 느낀 순간 제니퍼의 입이 만족감에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본 로이스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남자들, 심지어 전사들조차도 자신의 앞에서는 다들 움츠러들었다. 그런데 이 어린 소녀가 똑바로 서서 턱을 곧추 세운 채 자기를 무시하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돌연 호기심과 인내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만하면 예의는 다 차림 셈이군."
로이스는 날카롭게 말하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순간, 제니퍼의 즐거움은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녀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제자리에 우뚝 섰다.
"몇 가지 물어 볼 테니 대답해라. 먼저, 네 아버지가 평소 메릭 성에 배치하는 병사가 몇 명
이지?"
"몰라요."
제니퍼는 간단하게 대꾸해 버렸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뒤로 몇 발자국 더 물러나는 바람에 자신의 허세를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다.
"네 아버지는 내가 공격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나?"
"몰라요."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대신 네 동생한테 물어 볼까?"
그 불길하게 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라던 효과를 나타냈다. 제니퍼의 뻣뻣하던 태도가 금세 절망적으로 변한 것이다.
"아버지가 왜 당신이 공격할 거라고 믿지 않겠어요? 벌써 몇 년째 그럴 거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당신은 지금 꼬투리를 찾고 있군요. 그럴 필요가 뭐 있어요!"
제니퍼는 겁에 질려 소리를 질러댔다. 그가 다시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짐승이에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게 취미인가 보죠?"
로이스가 그녀의 말을 부인하지 않자 제니퍼의 기가 한풀 꺾였다.
"이젠 날 알 만큼 알았으니 네 아버지의 병사가 얼만지 말할 수 있겠군, 안 그래?"
제니퍼는 얼른 계산해 보았다. 최소한 5백명은 있을 것 같았다.
"2백 명이에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넌 내 반 주먹감도 안 돼. 그런데도 계속 거짓말을 해?"
로이스는 그녀의 팔을 잡고는 마구 흔들어댔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나요? 아버지를 배반하라고요?"
제니퍼의 몸은 덜덜 떨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완강했다.
"내 약속하지. 이 천막을 나가기 전에 넌 아버지의 계획에 대해 아는 건 다 말하게 될 거야. 자발적으로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너야 즐기지 않겠지만 내 도움을 약간 받고서 할 수도 있지."
"아버지가 군사를 얼마나 모았는지 정말 몰라요. 정말이에요. 어제 아버지를 2년 만에 처음 봤어요. 그리고 그 전에도 아버진 나한테 말도 잘 하지 않았어요."
제니퍼는 온몸을 마구 흔들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 말에 로이스는 깜짝 놀랐는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째서?"
"아버지 기분을 상하게 했거든요."
제니퍼는 사실을 실토하고 말았다.
"충분히 짐작이 가는군."
로이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이제까지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처음으로 그녀의 입술이 어느 여자보다도 부드럽고 매혹적이라는 점을 알아차렸다. 그처럼 맑고 파란 눈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몇 년 동안 말도 건네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는데, 넌 하나뿐인 생명을 걸고 아버지를 보호하겠다 이거지?"
"그래요."
"왜?"
굳이 말한다면 더 사실에 가깝고 편리한 이유는 많았다. 그러나 분노와 고통이 그녀의 머리를 멍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을 경멸하니까. 그리고 당신의 모든 것을 경멸하니까요."
로이스는 제니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놀라움, 그리고 제니퍼의 용기에 대한 감탄이 복잡하게 엉키고 있었다. 지금 죽여 봤자 바라는 대답은 얻지 못할 것이다. 두 여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목을 졸라 죽였으면 시원할 것도 같지만 그건 말도 안 되고. 어쨌거나 메릭의 딸들을 포로로 잡고 있으면 메릭이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나가."
가증스런 로이스의 얼굴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어 제니퍼는 얼른 뒤돌아섰다. 그러나 천막이 내려져 있어서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가라고 했잖아!"
로이스의 불길한 경고에 제니퍼는 홱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나에겐 그 이상 기쁜 일이 없지만 천막을 뚫고 나갈 수는 없잖아요?"
로이스는 말없이 손을 내밀어 장막을 걷어 주었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모욕적인 몸짓으로 절을 했다.
"저는 아가씨의 하인입니다. 저희하고 계실 동안 편안히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내 손을 풀어 줘요."
"그건 안 돼지."
로이스는 간단하게 말을 잘랐다. 그리곤 잡고 있던 천막 자락을 놓았다. 천막이 제니퍼의 등을 철썩 내리쳤다. 순간 제니퍼는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손에 팔을 잡히는 순간, 제니퍼는 분노와 놀라움이 뒤섞인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손의 임자는 검은 늑대의 천막을 지키는 12명의 호위병 가운데 하나였다. 제니퍼가 천막으로 돌아와 보니 브렌나의 얼굴이 두려움에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니퍼는 털썩 땅바닥에 몸을 뉘며 안심하라고 달랬다.
"걱정 마. 괜찮아."
4. 기막힌 탈출 계획
그날 밤, 검은 늑대의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계곡에서는 불길이 주기적으로 솟아올랐다. 손이 뒤로 묶인 채 제니퍼는 천막 입구에 서서 그들의 일과를 유심히 살폈다.
"브렌나, 만약 우리가 탈출......."
"탈출? 우리가 탈출할 수 있을까?"
브렌나가 말을 가로챘다.
"글쎄, 꼭 그럴 수 있다는 건 아냐.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빨리 탈출해야 한다는 건 분명해. 병사들이 이야기하는 걸 엿들었는데, 아버지의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해 우릴 미끼로 쓰려는 것 같아."
"정말 그 사람이 그렇게 할까?"
제니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거야 모르지. 알렉산더가 메릭에 오기 전까지는 집안사람들이 내게 해가 되는 일을 하느니 싸움을 포기하겠다고 한적이 있어. 지금이야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겠지만 말이야."
브렌나는 제니퍼의 목소리에 담긴 기분을 알 수 있었다. 뭐라고 위로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알렉산더가 메릭 가문의 사람들과 그들의 어린 아가씨 사이를 얼마나 벌려 놓았는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제니퍼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건 뻔했다.
"그래도 넌 사람들이 사랑하니까 모르지. 지금 여기서 아무리 생각해 봤자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아버지가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어. 그건 그렇고, 만약 우리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어떤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메릭에 도착해야 해. 우리가 할 일은 바로 그거야."
만약 탈출에 성공한다 해도 넘어야 할 장애물은 수없이 많았다. 제니퍼로서도 가장 걱정되는 일은 메릭까지 어떻게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어림잡아서 여기서부터 말을 탄다 해도 이틀은 걸리는 길이었다. 길을 따라 간다는 건 그야말로 위험을 부르는 일이었다. 도둑떼가 곳곳에서 포진해 있고, 더군다나 여자둘만 길을 가는 것을 보면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달리 먹을 수 있다. 길뿐만 아니라 여인숙도 안전하지 않다. 안전한 곳이라고는 수도원이나 수녀원뿐이리라.
"문제는 손이 묶여 있어서 탈출할 기회조차 없다는 거야."
제니퍼는 부산한 진지를 내다보며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들을 안심시켜서 우리 손을 풀어 주게 하거나, 아니면 식사 시간 동안에는 손을 묶지 않으니까 그때 숲 속으로 도망가는 길뿐이라는 뜻이지. 하지만 식사 시간 때 도망쳐 봤자 그릇을 가지러 왔다가 금방 우리가 없는 걸 알게 될 거야. 그 시간으로는 얼마 도망가지 못하겠지. 그래도 어차피 그게 유일한 방법이고, 내일이나 모레밖에 기회는 없어."
"숲 속으로 도망갔다 쳐. 그다음은?"
브렌나는 숲 속에서 밤을 지샐 생각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공포를 용감하게 억눌렀다.
"글쎄, 잘 숨어 있어야겠지. 저들이 우릴 찾는 걸 포기할 때까지 말이야. 아니면 우리가 북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갔다고 속일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만약 말을 훔칠 수만 있다면 숨기는 어려워도 저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아질 텐데..... 두 가지 다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몸을 숨기면서 동시에 저들보다 앞설 방법을 찾아야 해."
"어떤 방법이 있을까?"
브렌나의 이마가 무의미한 생각으로 찌푸려졌다.
"몰라. 하지만 노력은 해 봐야지."
생각에 골몰하느라 제니퍼는 기사에게 열심히 이야기하던 수염난 사내 하나가 말을 멈추고 자신을 유심히 쳐다보는 것을 보지 못했다. 화톳불이 점점 사그라졌다. 병사들이 두 사람의 식기를 내간 다음 다시 묶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럴듯한 계획을 짜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수없이 많이 주고받았지만.
"검은 늑대가 우릴 인질로 이용하도록 잡혀 있을 수는 없어 도망쳐야 해."
나란히 누웠을 때 제니퍼가 불쑥 소리쳤다.
"언니, 만약에, 만약에 도망가다 잡히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봤어?"
제니퍼는 잠깐 골똘히 생각한 다음 자신있게 말했다.
"우릴 죽이진 못해. 만약 우리가 죽는다면 인질로 이용할 수가 없을 테니까 말이야. 아버진 항복하기 전에 우릴 확인하려고 하실 거야. 그러니까 우릴 살려 둬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가 그 작자를 갈가리 찢어 버리실 거야."
제니퍼는 그를 검은 늑대가 아니라 클레이모어 백작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덜 무서웠기 때문이다.
"맞아."
브렌나는 한마디 하더니 금세 잠에 빠졌다.
그러나 제니퍼는 벌써 몇 시간째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겉으로는 용감하고 자신 있게 행동했지만 이렇게 끔찍한 일은 생전 처음이었다. 브렌나와 자신, 그리고 집안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너무 무서웠다. 탈출할 묘안은 하나도 없고, 단지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만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설령 도로 잡힌다 해도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점은 거의 확실했다. 도망친 데 대한 보복으로 대신 죽일 사람이야 널리 있을 터였다. 최소한 두 주일은 깎지 못한 수염으로 뒤덮인 거무스레한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밤, 너울거리는 불꽃에 비친 그 은빛 눈을 생각하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오늘은 그 눈에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분노의빛이 역력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그녀의 입으로 옮겨 간 순간 뭔가 변화가 일어났었다. 뭐라고 꼭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눈빛이 훨씬 더 위협적이 되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제니퍼는 용기를 내어 자신을 달랬다. 그 사람이 그렇게 무서워 보이는 건 바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시커먼 수염 때문일 것이다. 그 수염만 없으면 그 사람도 그냥 다른 나이든 사람처럼 생겼을 게 틀림없었다. 서른다섯? 마흔? 세 살 땐가 네 살 때 그 사람 소문을 들었으니까 더 늙었을지도 몰라.
"그래, 아주 늙은 사람이야!"
그가 늙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내자 제니퍼는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그렇게 무서워 보이는 건 단지 그 수염 때문일 뿐이다. 제니퍼는 스스로 자신에게 확신을 불어넣었다. 그 수염, 사람 기를 죽이는 그 엄청난 덩치, 그리고 묘한 빛을 뿜어내는 은빛 눈.
아침이 왔다. 아직도 그럴듯한 방안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몸을 숨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망도 쳐야 하고, 또 도둑떼로부터도 안전한 방법을 생각하자니 정말 어려웠다. 하긴 더 나쁜 상황을 맞을지도 모른다.
"남자 옷을 구할 수만 있으면 탈출해서 성까지 가기가 훨씬 쉬울 텐데."
제니퍼가 했던 얘기를 되풀이했다.
"혹시 경비병한테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브렌나가 혹시나 하는 투로 말했다. 그리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내 반짇고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진정이 안 돼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난 바늘을 들고 있으면 생각도 잘 되거든. 내가 아주 부드럽게 얘기하면 경비병이 갖다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글쎄,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제니퍼는 멍하니 대꾸했다. 제니퍼는 지금 전투를 한 흔적이 역력한 옷을 입고 오가는 병사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실과 바늘이 필요한 건 바로 저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설령 바늘이 있다고 해. 그걸로 뭘........."
순간 제니퍼는 입을 다물었다. 머리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브렌나를 향해 돌아서는 제니퍼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제니퍼는 나지막이 브렌나를 불렀다.
"브렌나, 경비병한테 바늘 하고 실을 좀 갖다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괜찮겠어. 그 사람 괜찮아 보이더라. 그 사람도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게 될 거야. 한번 불러 봐. 그리고 바늘은 두 개가 필요하다고 하고."
브렌나가 천막 입구 쪽으로 가 경비병에게 몸짓하는 것을 보며 제니퍼는 속으로 웃었다. 조만간 계획을 말해 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브렌나가 거짓말을 했다가는 금방 들통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실망에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다른 경비병이야. 처음 보는 얼굴인걸. 그 괜찮은 경비병을 불러 달라고 할까?"
"무슨 수단을 쓰든 그렇게 해."
제니퍼는 생긋 웃어 주었다.
경비병이 부르러 갔을 때 유스테이스 경은 로이스, 스테판과 함께 지도를 살피고 있던 중이었다. 전갈을 들은 로이스가 불같이 화를 냈다.
"고 건방진 것이 분수를 모르는군!"
그건 제니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경비병한테 심부름을 시키지 않나, 거기다 경비병이란 자들이 그대로 따르고 있으니!"
자신이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로이스는 얼른 말을 줄였다.
"자네를 보낸 게 더러운 얼굴에 파란 눈을 한 계집이지?"
그 말을 듣고 라이오넬 경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로이스. 내가 보니까 둘 다 깨끗했습니다. 그리고 나한테 말을 붙인 건 갈색 눈이지 파란 눈이 아니었습니다."
"알았어, 알았어."
로이스는 비꼬는 투로 말을 이었다.
"자네를 자리에서 이탈하도록 만든 게 고 오만한 것이 아니라 예쁜 쪽이었다 이거지. 그런데 뭘 요구해?"
"나한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유스테이스를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돌아가서 자리를 지켜. 기다리라고 하고."
"로이스, 그 두 여자는 그냥 불쌍한 여자들입니다. 그리고 체구도 작구요. 그런 여자들을 지키는 데 애릭과 우리밖에 믿지 못하다니......"
라이오넬 경이 말하는 우리란 로이스의 정예 호위대 기사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의 힐난투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를 떼려 눕히고 도망이라도 칠 수 있는 위험인물처럼 그 여자들의 손을 묶고 경비까지 세우는 건 지나칩니다."
"그 여자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로이스는 멍하니 목 뒤를 주물렀다. 그러다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막 안에만 있자니 피곤하군. 같이 가서 뭘 요구하는지 들어보자구."
"나도 갈 게요."
스테판도 끼었다.
제니퍼는 백작이 그 긴 다리로 힘도 들이지 않고 성큼성큼 자신들이 있는 천막으로 오는 모습을 보았다. 두 명의 호위 기사와 동생이 같이 오고 있었다.
"자, 이번엔 무슨 일이지?"
세 사람과 함께 천막 안으로 들어온 로이스가 제니퍼를 보고 물었다. 가슴에 손을 얹은 브렌나가 공포에 질려 한순간 휘청했다. 그를 화나게 한 책임을 자신이 떠맡겠다고 나서는 그녀의 얼굴에 순진무구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저 사람을 불러 달라고 한 건 저였어요."
브렌나는 유스테이스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쉰 로이스는 제니퍼로 부터 눈길을 거두어 그녀의 바보 같은 동생을 바라보았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말할 수 있나?"
"네."
로이스는 지금 브렌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 말해 봐."
"저는.......우리는......."
처연한 눈빛으로 제니퍼를 힐끔 쳐다본 그녀는 용기를 내어 계속 말했다.
"우리는......실과 바늘을 얻고 싶었어요."
로이스의 눈길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의 불편함을 해소하려고 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인물에게 가 꽂혔다. 그런데 제니퍼 메릭 양이 자신의 눈길을 침착하게 되받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약간은 긴장이 풀린 얼굴로. 한편으로는 그녀의 용기가 그렇게 빨리 사라진 데 대해 묘한 실망감을 느꼈다.
"바늘을?"
로이스의 눈길은 제니퍼를 향하고 있었다.
"네."
제니퍼는 도전적이거나 순종적인 느낌이 들지 않도록 주의깊게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되도록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잖아요. 내 동생 브렌나가 바느질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자고 해서요."
"바느질이라도 하자?"
순간 로이스는 아직도 두 여자를 묶어 두고 엄중히 감시하게 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라이오넬의 말이 옳았다. 제니퍼는 기껏해야 조그만 여자에 불과하다. 어리고 무모하고 고집 센 계집애. 센스는 없지만 용기는 가상하다. 자신을 친 포로를 처음 본 까닭에 그녀를 과대평가한 것이다.
"여기가 무슨 여왕의 응접실이라도 되는 줄 아나? 우리는 그런......."
그런데 로이스는 궁정의 여인들이 시간을 보내면서 수를 놓는 그 둥그런 것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제니퍼가 도움을 준답시고 끼어 들었다.
"자수판 말인가요?"
로이스의 눈이 진저리를 치며 그녀를 훑었다.
"음, 우린 자수판 같은 건 가지고 다니지 않아."
"조그만 누비질 판이라도 없나요?"
제니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며 천진난만하게 눈을 크게 떠 보였다.
"없어!"
"그래도 바느질을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있을 거 아니에요?"
제니퍼는 그가 나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얼른 덧붙였다.
"벌써 며칠째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으니까 미치겠어요. 바느질을 할 만한 게 없나요? 혹시 필요한 게 있을지도........"
순간 로이스가 놀란 얼굴로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단순히 놀랐다기보다는 기쁨과 의심이 뒤섞인 그런 얼굴이었다.
"그럼 우릴 위해서 수선 일을 자원하겠다는 말인가?"
브렌나의 얼굴이 그의 제안에 사색이 되고 말았다. 제니퍼도 그런 브렌나의 얼굴을 흉내 내려고 애썼다.
"아니, 수선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래, 여기야 백 명의 재봉사가 1년 동안 낑낑 맬 일이 쌓여 있지."
그 순간 로이스는 침구를 수선하는 것도 곧 돈이라는 계산이 섰다. 즉시 고드프리를 향해 명령했다.
"갖다 줘."
브렌나는 자신의 제안이 결과적으로 적을 돕는 결과가 되었다는 생각에 너무나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제니퍼는 애써 평온을 가장했다. 그러나 네 사람이 자신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사라진 순간 팔을 활짝 벌려 동생을 와락 껴안았다.
"우린 방금 전에 탈출 계획의 세 가지 장애물 가운데 두 개를 해결한 거야. 봐, 손도 풀리게 됐지, 또 위장복도 구하게 됐어."
"위장복이라고?"
브렌나는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제니퍼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이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이번에는 자기가 언니를 꼭 껴안았다.
"그래, 남자 옷! 저 사람이 우리한테 선물한 거야!"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두 사람이 갇힌 천막 안에는 산더미 같은 옷가지 두 더미와 담요류 한 더미가 쌓였다. 전장에 나선 남자들의 물건이었다. 한 꾸러미는 로이스와 스테판 형제의 옷가지였고, 다른 하나는 로이스의 기사들 것이었다. 그들은 덩치가 그리 크지 않아 훨씬 마음이 놓였다.
그날 밤, 제니퍼와 브렌나는 깜빡거리는 불빛에 눈이 피곤했지만 늦도록 일했다. 제일 먼저 손을 댄 일은 자신들이 입고 도망치려고 고른 것들이었다. 지금 두 사람은 로이스의 옷가지를 부지런히 손보는 중이었다.
"지금 몇 시쯤 됐을까?"
손목 부분을 바느질하며 제니퍼가 물었다. 손목이 들어가지 않게 꿰매는 중이었다. 옆으로 교묘하게 손을 본 로이스의 옷가지가 쌓여 있었다. 양말들은 끝에서 몇 센티는 발이 들어가지 않게 꿰매져 있었다.
"10시쯤 됐을 거야."
브렌나가 이빨로 실을 끊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백작의 셔츠 하나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등 뒤에 검은 실로 해골과 뼈다귀 두 개를 수놓은 것이다.
"언니 말이 맞아. 입고 나면 뒤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
제니퍼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브렌나가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제니퍼를 쳐다보았다.
"맥퍼슨 일을 생각해 봤는데........"
공포에 질려 있지 않을 때 브렌나가 얼마나 영리한지를 아는 제니퍼는 바짝 주의를 기울였다.
"언니가 맥퍼슨하고 꼭 결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어째서?"
"아버지는 우리가 수녀원에서 유괴되었다는 사실을 제임스 왕한테 알릴 거야. 교황한테도 알렸을지 모르지. 그건 엄처안 문제라고. 제임스 왕이 메릭을 지키라고 군대를 보낼 정도로 큰 문제지. 수녀원은 신성한 곳이고 우리는 그곳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이거야. 그러니 만약 제임스 왕이 우리를 구하러 온다면 맥퍼슨 집안의 도움은 필요 없게 될 수도 있을 거야."
한 가닥 희망의 빛이 제니퍼의 눈에서 번뜩였다가 이내 스러졌다.
"실제로는 수녀원 안에 있지 않았잖아."
"아버진 그 사실을 몰라. 그러니 우리가 그 안에 있었다고 믿으실 거야. 그러면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믿는 거지 뭐."
로이스는 눈썹을 찌푸렸다. 영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천막 바깥으로 나온 그는 진지 저편의 작으 천막으로 눈길을 보냈다. 두 인질이 있는 곳이었다. 방금 유스테이스가 라이오넬과 교대해서 지키고 있었다. 천막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아직 두 여자가 자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교교한 달빛이 내린 진지가 고요히 잠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로이스는 오늘 아침 그 천막에 간 것이 호기심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니퍼의 얼굴이 깨끗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의 머리카락 색이 궁금했다. 가느다란 적갈색 눈썹을 보면 머리카락 역시 적갈색이거나 갈색일 것이다. 브렌나 메릭이 금발인 것은 확실했지만 동생에게는 흥비가 생기지 않았다. 제니퍼에게 자꾸 흥미가 당겼다. 제니퍼는 한 번에 한 가지밖에 보여 주지 않는 퍼즐 같았다. 매번 전보다 더 놀라운 것을 보여 주는 퍼즐.
그녀 역시 떠돌아다니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남자들도 덜덜 떠는 자기 앞에서, 그녀는 겁을 내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것이 그 퍼즐의 첫 번째이자 가장 흥미를 끄는 면이었다. 그 용기와 대담함이라니!
게다가 벨벳을 연상시키는 그 눈, 깊고도 푸르디 푸른, 적갈색의 긴 속눈썹과 잘 어울리는 맑고도 순수한 눈이었다. 처음 그 눈을 보았을 때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얼굴을 확이하고 난 지금은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쩌다 못생겼다는 소문이 났을까?
물론 아름답지는 않았다. 아름답다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오늘 천막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을 봤을 때, 로이스는 한순간 멍했다. 정교하게 깎은 듯한 광대뼈, 눈처럼 흰 피부, 연한 장미빛이 도는 뺨, 그리고 귀여운 코. 그런 섬세한 면에도 불구하고 조그마한 턱은 그 주인이 얼마나 고집이 세고 무뚝뚝한 여자인지 잘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미소를 지을 때면 분명 두 개의 보조개가 앙증스레 패었다. 맹세하라면 맹세할 수도 있으리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매혹적인 얼굴이었다. 매혹 그 자체였다. 거기다 그 부드러운 입술은.........
제니퍼 메릭의 입술 생각에서 벗어난 로이스는 유스테이스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 뜻을 알아챈 유스테이스가 자기 모습이 잘 보이도록 화톳불을 약간 더 키웠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바느질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것도 한참을.
로이스는 두 소녀가 오래도록 바느질을 하고 있다는 뜻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경험한 부잣집 여인들은 가족들을 위한 특별한 것들을 직접 바느질을 했다. 그러나 수선은 하녀들 몫이었다. 로이스는 천막에 비친 제니퍼의 모습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열심히 바느질을 하는 부잣집 여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늦게까지 하지는 않으리라.
메릭 가문의 딸들이 저렇게 부지런하다니. 로이스는 믿을 수도 없거니와 한마디 비웃어 주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사로잡힌 주제에 적의 옷을 말끔히 수선하다니. 얼마나 좋은 여자들이고, 얼마나 관대한 여자들인가!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특히 제니퍼 메릭의 경우 그 적개심이 어떤지 직접 경험한 바였다.
로이스는 외투를 이불 삼아 아무렇게나 땅바닥에서 자고 있는 병사들 사이를 걸었다. 지치고, 전투의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모습이었다. 여잗르의 천막으로 다가서는 순간, 두 여자가 갑자기 바늘과 실을 달라고 한 이유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저주의 말을 내뱉으며 발걸음을 빨리 했다. 옷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검은 늑대가 천막 자락을 들치고 안으로 성큼 들어서자 브렌나는 깜짝 놀라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제니퍼는 흠칫 놀랐을 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가닥 의아해하는 빛이 있긴 했지만 공손한 표정이었다.
"어디, 뭘 하고 있는지 좀 볼까?"
로이스는 차갑게 명령했다. 그의 눈길이 손으로 목을 매만지고 있는 브렌나에게서 제니퍼에게로 옮겨졌다.
"어서!"
"그러세요. 이 셔츠는 막 손질을 하려던 참이었어요."
짐짓 태연하게 제니퍼가 대답했다. 방금 전에 팔구멍을 꿰매 버린 셔츠를 조심스레 저리로 밀쳐놓으면서 자기가 입으려고 하는 옷가지에서 두꺼운 양말을 하나 내놓았다. 아주 교묘하게 자기 발에 맞게 발끝 부분을 꿰매 놓은 양말이었다.
순간, 로이스는 당황했다. 바느질이 아주 잘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자만심 세고, 오만하며, 교양이 없다는 거야 이미 알고 있는 바였지만 뛰어난 재봉사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니퍼의 즐거움이 담긴 목소리가 대답을 재촉했다.
"백작님, 이만하면 검사에 통과한 건가요? 하던 일을 계속해도 되겠어요?"
만약 그녀가 포로에다가 적의 딸만 아니라면 로이스는 그녀를 팔에 안고 키스라도 해 주고 싶었다. 기대도 안 하던 일을 해 주다니.
"아주 잘했군."
인정할 것은 인정했다. 로이스는 밖으로 나가려다 천막 자락을 잡은 채 돌아섰다.
"안 그래도 추위는 오고 있는데 부하들이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어서 걱정이었지. 겨울 옷이 오기 전에 그래도 입을 만한 옷을 입게 돼서 당행이군. 부하들이 아주 기뻐할 거야."
제니퍼는 자신과 브렌나한테 가위를 준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로이스가 곧 깨달으리라는 점을 예견하고 있었다. 또 뭘 하고 있나 조사하러 오리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양말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솔직하게 칭찬을 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최소한의 인간미는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보이자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로이스가 나가고 나서 두 소녀는 옷가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에......."
브렌나가 좀전에 갈가리 찢어 놓은 담요더미를 쳐다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여기 병사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제니퍼는 자신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우리 적이야, 적. 아버지의 적이고 제임스 왕의 적이야."
제니퍼는 스스로 그렇게 다짐해 보았지만 가위를 잡으려던 손이 움찔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마으을 다잡아먹고는 가위를 들고 다른 외투를 좍 찢어 버렸다. 지금은 내일 아침의 탈출 계획을 완벽하게 세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브렌나가 피곤에 지친 나머지 잠에 곯아떨어진 후에도 제니퍼는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일들
을 생각하느라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5. 굴복하지 않는 여인
풀잎 위로 밤새 내린 서리가 이제 막 퍼지기 시작한 새벽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제니퍼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브렌나를 깨울 필요는 없었다. 모든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검토한 끝에 가장 실현성이 있는 계획을 정해 놓은 터였다. 이제 제니퍼는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낙관적인 기분까지 들었다.
"지금이야?"
언제 깼는지 브렌나가 이쪽으로 돌아누우며 속삭였다. 제니퍼가 벌써 두꺼운 양말에 남자 셔츠, 그리고 조끼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는 목소리였다. 감시병이 아침마다 볼일을 보라고 숲속으로 데려갈 때 수녀복 밑에 입기로 한 옷들이었다.
"그래, 지금이야."
제니퍼는 용기를 내라고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브렌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난 왜 이리 겁쟁이일까."
브렌나가 떨리는 가슴에 한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로 조끼를 집으며 속삭였다.
"아냐, 넌 겁쟁이가 아니야."
제니퍼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을 이었다.
"단지 네가 하는 일의 결과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일 뿐이지."
제니퍼는 셔츠의 목에 끈을 매며 용기를 내는 시늉을 해 보이면서 덧붙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네가 나보다 더 용감해. 내가 너만큼 결과에 대해서 두려워한다면 난 손가락 하나 까닥할 용기도 내지 못할 거야."
브렌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칭찬에 고마워하는 무언의 반응이었다.
"모자는 있지?"
브렌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니퍼는 검은 모자를 집어 들었다. 조금 있다가 긴 머리를 감출 때 쓸 것이었다. 그녀는 회색 수녀복을 들어올리곤 모자를 양말 속에 쑤셔 넣었다. 해가 비죽이 머리를 내밀면서 하늘이 뿌옇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 그 거인이 숲으로 데려가기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두 사람은 안에 입은 남자 옷이 안 보이게 수녀복을 더욱 헐렁하게 늦추고는 그 거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탈출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제니퍼는 더욱 목소리를 낮춰 계획을 다시 한번 일러 주었다. 혹시 브렌나가 놀란 나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잊어버릴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잊어버리지 마. 1초 1초가 다 중요해. 너무 빨리 걷는 것처럼 보이면 안 돼. 괜히 의심을 살지도 모르니까. 일단 옷을 벗어서 덤불 속에 잘 감추는 거야. 우리 희망은 저 사람들이 두 남자 아아기 아니라 수녀 둘을 찾아 나서도록 하는 데 있어."
브렌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제니퍼는 계속 설명했다.
"일단 옷을 벗은 다음엔 날 놓치지 말고 숲으로 얼른 빠져 나가는 거야. 무슨 소리가 나도 절대 한눈을 팔면 안 돼. 저들이 우리가 없어진 걸 알면 소리를 지르겠지만 신경 쓸 것 없어. 고함소리에 겁 먹으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
그러나 브렌나의 눈에는 이미 공포가 가득했다.
"숲 속에서 남쪽으로 돌아 말들이 있는 울타리 쪽으로 가는 거야. 저들은 우리가 다시 진지 쪽으로 돌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 할 거야. 반대쪽, 그러니까 숲 속으로만 찾아 들어갈 거라구. 일단 울타리 가까이 가면 넌 그냥 숲 속에 남아 있어. 내가 가서 말을 몰고 올 테니까. 아마 다들 산 쪽만 쳐다보고 있을 거야."
브렌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제니퍼는 이제 나머지 말을 어떻게 전달해야 좋을까 궁리했다. 만약 발각되면 자신은 브렌나만이라도 탈출할 수 있게 반대쪽으로 달려야 할 터였다. 그러나 브렌나한테 혼자 도망가도록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을것 같았다. 제니퍼는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자, 만약에, 만약에 말인데 우리가 헤어지게 되면......"
"안 돼!"
브렌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 안 돼. 우린 헤어질 수 없어."
"내 말 잘 들어!"
제니퍼는 브렌나가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만약 우리가 헤어지게 되더라도 네가 나머지 계획을 알고 있어야 내가 나중에 따라갈 수가 있어."
브렌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제니퍼는 자신의 용기가 동생에게 전달되기를 빌면서 동생의 두 손을 꽉 잡았다.
"북쪽이 저기 높은 언덕 쪽이야. 말 우리 뒤쪽에 있는 언덕. 내가 어느 쪽을 말하는지 알지?"
"응."
"좋았어. 내가 말을 몰고 오면 말을 타고 숲 속으로 해서 북쪽으로 가는 거야. 저 언덕 위에 오를 때까지 말이지. 일단 저기 도착하면 아래로 내려가면서는 서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거야. 그때도 절대 숲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걸 잊지 말아. 길이 나타나면 길을 따라서 달리되 그때도 숲 속으로만 달려야 해. 물론 클레이모어가 길을 감시하라고 사람을 보냈을 거야. 하지만 수녀 둘이 오나 안 오나 감시하지 젊은 남자한테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걱정할 것 없어. 만약 운이 좋아서 여행자들이라도 만나게 되면 그 사람들하고 합류하는 거야. 그러면 훨씬 더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 브렌나, 한 가지 더 있어. 만약 발각당해서 추격을 당하면 넌 무조건 내가 방금 말한 방향으로 달려야 해. 나는 다른 방향으로 달려서 추격자들을 너한테서 떼어 놓을 거니까. 그렇게 되면 넌 최대한 숨어 있어야 해. 여기서 수녀원까지는 대여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아. 내가 잡혀도 넌 꼭 가야 해. 알았지? 지금 우리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몰라. 잉글랜드 경계선 안에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야. 하여튼 북서쪽으로 해서 곧장 달리다가 마을이 나오면 벨커크로 가는 길을 물어 보면 될 거야."
"난 언니를 놔두고 갈 수 없어."
브렌나가 나지막이 소리쳤다.
"아니, 꼭 가야 돼. 그래야 아버지하고 집안사람들을 데려와 날 구할 수 있지."
브렌나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궁극적으로 보면 제니퍼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돕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제니퍼는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토요일이면 우리 둘 다 메릭 성에 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데?"
"메릭 성에? 수녀원에 있으면서 사람을 보내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하고 싶으면 넌 그렇게 해도 돼. 하지만 난 도착하자마자 수녀원장한테 호위를 붙여 달래서 집에 갈 거야. 아버지가 저들의 말을 듣기 전에 되도록 빨리 아버지한테 소식을 알려야 해. 또 여기 병사는 얼마나 되고 무기는 어떤 건지 직접 가서 알려 드려야지."
브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게 제니퍼가 혼자라도 메릭 성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의 전부가 아님은 둘 다 알고 있었다. 제니퍼는 아버지와 집안사람들이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황금 같은 기회였다. 만약 성공만 한다면 성에 가서 그들의 눈빛에서 그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밖에서 호위병의 발소리가 들렸다. 제니퍼는 자리에서 일어나 만면 가득히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보면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브렌나는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상을 하고 일어섰다. 고드프리 경이 두 사람을 데리고 숲으로 향했다.
"상쾌한 아침이군요. 하지만 우린 지난밤에 잠을 잘 못 잤어요."
30대인 것 같은 고드프리 경이 묘한 눈길을 던졌다. 제니퍼는 이제까지 자신이 그런 예의바른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이어 그의 눈길이 수녀복을 향하면서 찌푸려지는 것을 보는 순간 제니퍼는 그만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런 것 같군."
고드프리 경의 대꾸였다. 지난밤 두 사람이 늦게까지 바느질을 했다는 것을 의식하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발밑에 밟히는 풀이 축축했다. 제니퍼는 고드피리 경의 왼쪽에서 걸으면서 브렌나를 자기 옆으로 따라오게 했다. 일부러 크게 하품을 한 제니퍼는 곁눈으로 고드프리를 힐끔 쳐다보면서 말을 붙였다.
"내 동생이 밤늦게까지 일하더니 오늘은 더 피곤한 모야이에요. 저, 몇 분만 더 여유를 주시면 안 될까요? 개울에 가서 좀 씻을 수 있게 말이에요."
그의 깊게 주름진, 그을린 얼굴이 제니퍼를 쳐다보았다. 의심과 설마 하는 마음이 교차하는 눈길이었다. 그러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5분을 주겠다. 하지만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의 머리는 내가 볼 수 있어야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제니퍼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고드프리 경이 숲가에서 감시를 했다. 비록 그의 얼굴이 두 사람을 향하고는 있지만 제니퍼는 그의 눈이 머리 아래로는 내려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두 사람이 어떤 상태로 있든 감시하는 기사가 탐욕스런 눈길로 훔쳐보는 경우는 없었다. 그 점이 오늘은 특히 더 감사했다.
"침착하게."
제니퍼는 브렌나를 끌어 곧바로 개울가로 갔다. 개울가에 도착하자마자 제니퍼는 고드프리가 따라오지 않을 정도로 내려갔다. 그런 다음 낮은 수풀 위로 솟은 나무 아래에 섰다.
"브렌나, 물이 찬 거 같아."
제니퍼는 고드프리한테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야 더 가까이 와서 감시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터였다. 제니퍼는 나뭇가지 아래에 서서 조심스레 베일과 쓰개를 풀기 시작했다. 눈으로는 브렌나에게도 따라하라고 시키면서.
베일을 다 벗은 제니퍼는 조심조심 몸을 숙이면서 마치 머리가 안에 있는 것처럼 베일을 위로 들었다. 그 다음엔 바로 위의 나뭇가지에 걸었다. 자신이 봐도 그럴듯했다. 그녀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얼른 브렌나에게로 기어갔다. 브렌나는 베일을 손에 들고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제니퍼는 브렌나의 떨리는 손에서 베일을 받아 덤불에 걸었다.
2분 후, 두 소녀는 수녀복을 벗어 덤불 아래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흙을 덮은 다음 눈에 띄지 않도록 낙엽을 흩뿌렸다. 그러고 났는데 언뜻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제니퍼는 다시 흙더미를 파헤쳐 손수건을 꺼냈다.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면서 브렌나에게 한쪽 눈을 깜박인 후 몸을 구부리고 15미터 정도 아래로 기어갔다. 그쪽은 도망가려는 쪽과 반대 방향이었다. 마치 놀라서 떨어뜨린 것처럼 손수건을 옆의 가시덤불에 붙였다. 그리고 다시 브렌나에게로 돌아왔다.
"저렇게 해 놓으면 저쪽으로 쫓아갈 거야. 그럼 우린 시간을 더 벌 수 있고."
브렌나는 의구심과 희망이 교차하는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 마주보며 상대방의 매무새를 살펴 주었다. 브렌나가 제니퍼의 모자를 더 깊이 눌러 씌우면서 머리카락 나온 것을 집어넣었다. 고마움과 격려의 뜻이 담긴 미소를 지어 보인 제니퍼는 브렌나의 손을 잡고 숲 속으로 들어가 말 우리를 목표로 북쪽으로 향했다. 고드프리가 약속했던 15분을 다 주기만을 빌 뿐이었다. 혹시 더 준다면 더더욱 좋은 일이고.
몇 분 후, 두 사람은 말 우리 뒤에 접근했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이며 수풀 속에 납작 엎드렸다.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제니퍼는 우리를 지키고 있을 보초가 어디 있나 둘러보앗다. 보초가 말 우리 건너편 땅바닥에 앉아 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보초가 졸고 있어."
제니퍼는 브렌나를 돌아보며 유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얼른 덧붙였다.
"만약 보초가 깨서 나를 잡으러 오면 걸어서 계획대로 가. 숲 속에 숨어 있다가 뒤에 있는 저 높은 언덕으로 가는 거야. 알았지?"
제니퍼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기어 나가기 시작했다. 숲 끝에 이른 그녀는 잠깐 멈춰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사들이 다 깨지 않아 아직은 조용했다. 하늘이 어두워 모두 새벽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바로 눈앞에 말이 있었다.
제니퍼가 조용히 가가가 말 두 마리의 굴레를 잡을 순간, 보초가 한 번 몸을 뒤척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말이 순순히 따라오지는 않았지만 제니퍼는 우리 삼아 쳐 놓은 줄까지 말을 끌고 왔다. 발끝을 곧추 세운 어색한 자세로 그녀는 줄을 높이 들어 올려 말이 지나가게 했다. 그리고 2분이 채 못 되어 브렌나의 손에 말 한 마리를 넘겨주었다. 두 사람은 숲 속으로 더깊이 들어갔다. 말발굽 소리는 이슬을 흠뻑 먹은 낙엽 덕분에 하나도 나지 않았다.
제니퍼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느라 즐거운 고역을 치러야 했다. 두 사람은 넘어진 나무를 이용해서 말에 올라탔다. 뒤에서 비상사태를 알리는 경고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을 때는 두 사람은 이미 언덕을 향해 한참 올라가고 있었다.
고함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이제 더 이상 조용할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발 뒤꿈치로 말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다. 말이 숲을 뚫고 바람처럼 날기 시작했다. 두 사람 다 말에는 자신이 있었고 안장 없이 타는 것에도 익숙했지만, 그래도 안장이 없으니 아무래도 불편했다. 군마가 무릎을 꼭 붙여야만 속도를 내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말의 굴레를 놓쳤다가는 그대로 끝장이었다. 앞에 높은 언덕이 나타났다.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길이 있고 수녀원이 나올 터였다. 몰론 메릭 성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잠시 멈췄다. 제니퍼는 이제 여기서부터 어디로 향할 건지 생각을 해야 했다. 앞에는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숲이 가로막고 있었다. 제니퍼는 궁리를 포기하고 본능적으로 길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브렌나."
제니퍼는 자신이 타고 있는 거대한 검은 군마의 탐스러운 목을 톡톡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검은 늑대에 관한 소문 중에 말에 관한 이야기 들어 봤지? 이름이 토르(북유럽 신화에서 벼락, 비, 농업을 관장하는 신의 이름) 이고 세상에서 제일 빠른 말이라며? 사납기도 제일이고."
"응."
브렌나는 새벽 공기가 찬지 약간 몸을 떨고 있었다. 말이 우거진 숲을 뚫고 길을 찾으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은 아주 새카만데 이마에 하얀 별 무늬가 있다지?"
"응."
"이놈 좀 봐. 이게 그 무늬 같지 않아?"
브렌나가 얼굴을 돌려 살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브렌나, 내가 검은 늑대의 토르를 훔친 거야!"
제니퍼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
검은 늑대라는 이름이 나오자 말이 귀를 쫑긋했다. 그 모습을 본 브렌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이놈이 다른 말들하고는 떨어져서 묶여 있었던 게 틀림없어."
제니퍼는 그 멋진 말을 감상하듯 훑어보며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달릴 때에도 이놈이 네가 타고 있는 놈보다 훨씬 더 빠르더라. 그래서 일부러 속도를 늦춰야 했다니까."
제니퍼는 몸을 기울여 다시 한번 더 말의 목을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예쁘기도 해라."
말 주인이 나쁘지 말까지 나쁘게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로이스......."
고드프리 경이 로이스의 천막 앞에 서서 로이스를 불렀다. 얼마나 분한지 목소리가 꽉 잠겼고, 두꺼운 목이 벌개져 있었다.
"여자들이 약 45분 전에 도, 도망쳤습니다......지금 애릭, 유스테이스, 그리고 라이오넬이 숲 속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들이 뭐 어쨌다고?"
로이스가 셔츠를 찾던 손을 멈췄다. 자신의 기사 가운데서도 가장 용맹하고 노련한 기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로이스의 얼굴이 차라리 우습다는 듯 일그러졌다. 점차 분노가 드러나는 얼굴에 믿기지 않는다는 미소가 섞여 있었다.
그는 어젯밤 두 여자가 손질한 옷가지 더미에서 셔츠를 낚아채듯 뽑았다.
"그러니까 연약한 여자애 둘한테 당했다, 이건가?"
그는 팔을 소매에 쑥 밀어 넣었다. 그러나 소매가 중간에 막혀 있어 팔이 들어가지 않았다. 로이스는 깜짝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소매를 쳐다보았다. 눈에 분노의 불길이 확 일어나고 있었다. 나지막이 사나운 욕을 해대며 다른 옷의 소매를 확인한 그는 얼른 옷을 걸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팔 전체가 마술에서나 나오듯 스르르 떨어졌다.
"이 망할 계집애들! 내 기필코 고 파란 눈의 계집을 잡아서........"
이빨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였다. 그는 그 셔츠를 홱 던지고 나서는 큰 궤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거기서 새 옷을 꺼내 재빨리 걸친 그는 너무 화가 나서 말을 미처 끝맺지도 못했다. 기계적으로 손을 뻗어 단검을 잡아 허리에 찬 그는 거친 발걸음으로 고드프리 경 앞을 지나면서 매섭게 말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그것들을 본 곳이 어디지?"
"저기 숲에서였습니다."
고드프리 경은 두 개의 베일이 가지에 걸려 있는 숲으로 안내했다.
"로이스......이 일을 다른 사람한테는 알릴 필요가 없겠죠? 제발 그렇게 해 주십시오."
로이스의 눈에 언뜻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 덩치 큰 사나이가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었으며, 이번 일을 비밀로 해 두고 싶어 한다는 것은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물론, 경보를 발할 필요는 없겠지."
로이스는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개울가를 따라 걸었다. 매서운 눈이 나무며 수풀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그것들 잡는 거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지."
그러나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로이스는 자신의 말에 확신이 가지 않았다. 수색의 즐거움이 사라지면서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그 여자들은 인질로 꼭 필요한 존재였다. 피 한 방울, 사람 하나 다치는 일 없이 메릭 성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였다.
다섯 사람은 숲을 이잡듯 뒤지면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아갔다. 가시덤불에 걸린 손수건이 한 여자가 놀라서 떨어뜨린 것이 분명하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쪽을 아무리 수색해도 더 이상 흔적이 발견되지 않자, 로이스는 두 계집 가운데 하나-분명 그 파란 눈의 계집-가 추적자들을 따돌리려고 그 천조각을 일부러 떨어뜨린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다니.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것이 사실일 것 같았다.
고드프리 경과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한 애릭을 양쪽에 거느리고 로이스는 두 개의 베일이 걸려 있는 곳으로 가 그것들을 사납게 홱 떼어 냈다.
"경보를 내리고 추적대를 편성해서 숲을 샅샅이 뒤지도록. 틀림없이 저 숲에 숨어 있을 것이다. 숲이 너무 조밀하니 걸어서 수색하도록 한다."
마흔 명이 양팔을 벌려 간격을 맞춘 다음 한 줄을 형성해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개울가에서 출발해 앞으로 나아가면서 수풀이고 넘어진 통나무고 간에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면서 벌써 오후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 여자들이 목격된 개울가에 서서 로이스는 숲이 우거진 구릉지대를 건너다보았다. 북쪽의 구릉지대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포로들을 못 잡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과 비례해서 험악해져 갔다. 언제부터인가 바람이 잠잠해지고 하늘도 나른하게 졸고 있었다.
지난밤에 사냥을 나갔다가 막 돌아온 스테판이 나타났다.
"그 여자들이 오늘 아침에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테판의 걱정스런 눈길이 북쪽의 제일 높은 언덕을 바라보고 있는 로이스의 눈길을 따라 그쪽으로 옮겨졌다.
"그 여자들이 저 산으로 올라갔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걸어서야 거기까지 가지 못했겠지."
분노로 거칠어진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을 택했을 가능성을 생각해서 사람들을 보내 도로를 지키도록 했다. 지금까지 들어온 보고로는 젊은 여자 둘을 본 여행자는 없다고 하더구나. 한 마을 사람이 두 사내아이가 말을 타고 구릉지대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는 게 전부다.
하긴 저 구릉지대로 들어갔다면 길을 잃었을 게다. 햇빛이 들지 않아서 방향을 알 수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 여자들은 여기가 어딘지 모르니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도 모를 테고."
스테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저 멀리 구릉지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로이스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보냈다.
"방금 들어와서 잘 모르지만 어젯밤에 사냥을 나갔었습니까?"
"왜?"
로이스의 짧은 대꾸에 스테판은 잠시 머뭇거렸다. 로이스가 그 군마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는 터였다. 토르의 용맹심과 충성심은 정말 대단했다. 로이스가 웬만한 사람보다 더 아끼는 말로, 경기장과 싸움터에서 보여 주는 토르의 용맹은 주인과 거의 맞먹을 정도로 전설적인 것이었다.
궁정의 어떤 부인이 친구에게 만약 로이스 웨스트모어랜드가 자기 말에 쏟는 애정의 반이라도 보여 준다면 정말 행운이겠노라고 불평을 했다. 그 말을 들은 로이스의 대답이 더 걸작이었다. 만약 그 부인이 자기 말의 충성심과 진심을 절반이라도 갖고 있다면 그녀와 기꺼이 결혼하겠노라고 특유의 신랄한 야유를 던진 것이다.
헨리의 군대 안에 감히 로이스의 말을 우리 밖으로 데려가 산보를 시킬 배짱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끌고 나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형......"
로이스는 동생의 목소리에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 순간, 그의 눈길이 스테판이 서 있는 자리 바로 옆의 땅바닥에 가 머물렀다. 낙엽과 나뭇가지들이 덤불 바닥보다 높은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뭔가 와 닿는 것이 있었따. 로이스는 군화 끝으로 그곳을 파 보았다. 보였다. 분명 회색 수녀복임에 틀림없었다. 그가 몸을 굽혀 옷가지를 끄집어낸 것과 스테판이 이 말을 한 것이 거의 동시였다.
"다른 말들은 있는데 토르가 없습니다. 그 계집들이 보초 몰래 토르를 가져간 게 분명합니다."
로이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버려진 옷가지들을 보는 그의 턱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제까지 걸어가고 있는 두 수녀를 찾았다만 이제는 내 말을 타고 있는 두 아이를 찾아야 할 것 같구나."
로이스는 발길을 돌려 말 우리 쪽으로 걸어갔다. 두 여자를 가두어 두었던 천막 앞을 지나면서 그는 들고 있던 옷가지들을 열린 자락 안으로 홱 던졌다. 분노와 경멸이 가득 담긴 몸짓이었다. 그리고는 뛰기 시작했다. 그 뒤를 스테판이 따라 뛰었다.
거대한 말 우리를 지키고 있던 보초가 주군을 보고는 경례를 했다. 그리곤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검은 늑대의 손이 조끼 앞부분을 잡고 그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오늘 새벽에 누가 보초를 섰느냐?"
"저, 접니다, 저하."
"자리를 벗어난 적이 있느냐?"
"아, 아닙니다, 저하. 절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 벌이 왕의 군대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을 잘 아는 보초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대답했다.
로이스는 진저리를 치며 보초를 옆으로 내던졌다. 몇 분 후, 12명의 추격대가 만들어졌다. 당연히 로이스와 스테판이 선두에 섰다. 추격대는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질주했다. 진지와 북쪽 도로 사이에 있는 가파른 구릉지대에 도착했을 때 로이스는 고삐를 당겨 급히 말을 멈췄다.
두 여자가 무슨 변을 당하거나 길을 잃지 않았다면 벌써 저 쪽으로 내려간 다음 언덕을 향해 가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 해도 이쪽을 수색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라 로이스는 네 사람을 보내 뒤지게 했다.
스테판과 애릭, 그리고 나머지 다섯 명의 기사와 함께 로이스는 말에 박차를 가해 질풍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두 시간 후, 그들은 그 언덕을 돌아 북쪽 길로 나왔다. 길이 북동쪽과 북서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생각을 하던 로이스는 부하들에게 멈추라고 지시했다. 과연 어느 길로 갔을까?
만약 두 여자가 추적자들을 따돌리려고 손수건을 남길 정도의 머리가 없었다면 부하들을 당연히 북서쪽으로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두 여자는 반나절은 더 걸릴 길을 택했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길이 시간은 더 걸리지만 더 안전할 것이라는 점을 로이스로서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두 여자가 집으로 가는 방향을 알고나 있을까 하는 의심이 갔다.
로이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두 시간 남짓 지나면 어두워진다. 북서쪽 길로는 저 앞에서 구릉지대로 올라가야 했다. 가장 빠른 길이기는 했지만 밤에는 지나가기 어렵다. 두 여자가 남자 옷을 입고 있다고는 하지만 두렵기도 하고 공격을 당하기도 쉬운 만큼 더 먼 길이라 해도 안전하고 쉬운 길을 택할 터였다. 결론이 나왔다. 그는 애릭과 나머지 부하들을 북동쪽으로 뻗은 길로 보내 수색하게 했다.
한편 로이스 자신은 북서쪽으로 말을 몰면서 스테판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마음속에서는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 오만하고 꾀많은 파란 눈의 계집이 용감하게 구릉지대로 갔을지도 몰랐다.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계집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난밤 옷을 수선해 준다기에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생각하니 새삼 화가 치밀었다. 고마움을 표시하는 자신에게 또 얼마나 점잔을 떨었는지, 두려움을 모르는 계집. 그러나 그의 손에 잡히기만 하면 두려움이 뭔지 알게 되리라. 검은 늑대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알게 되리라.
제니퍼는 흥겹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더 올렸다. 지난밤 바느질을 할 때 초에 불을 붙인다고 얻어 낸 부싯돌로 피운 모닥불이었다. 숲 속에서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달을 보고 짖어대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제니퍼는 더욱 큰 소리로 흥얼거렸다. 그리고 불쌍한 브렌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별이 총총한 하늘에 둥근 황금빛 달이 떠오르는 것으로 보아 비가 올 위험성은 별로 없었다. 제니퍼는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이었다. 비가 온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아까 울었던 짐승이 다시 울었다. 그러자 브렌나가 담요를 더욱 깊이 둘러쓰며 제니퍼를 쳐다보았다. 언니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길에는 믿을 데라고는 언니밖에 없다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언니, 저게 무슨 동물의 울음소린지 맞춰 봐."
그 말을 하고 나서는 브렌나의 창백한 입술이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듯 "늑대"라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제니퍼는 한 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렸다.
"부엉이 소리잖아?"
"부엉이 아니야."
제니퍼는 동생이 발작적으로 기침을 해대는 것을 보고 한순간 움찔했다. 어릴 적부터 브렌나를 괴롭혀 온 폐병이 오늘 밤 찬 공기와 공포로 인해서 재발한 것이다.
"그래, 부엉이는 아닌 것 같구나. 하지만 불이 있으니까 사나운 짐승이 달려들지는 못 해. 정말이야. 옛날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 개릭 카마이클하고 베키하고 같이 애버딘에 갔다가 돌아올 때였어. 눈이 지독하게 내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야영을 하게 됐는데, 카마이클이 불을 피우면서 그랬어."
그 순간, 불을 피우는 것이나 늑대가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제니퍼의 머리를 스쳤다. 특히 숲 속에서는 아무리 작은 불빛이라도 멀리까지 비치는 법이다. 길에서 멀리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추적자들이 아직도 찾아다니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제니퍼는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당기고는 뺨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토르를 보고 고갯짓을 했다.
"너 저렇게 멋진 동물을 본 적이 있니? 오늘 아침 저놈을 타면서 처음에는 저놈이 날 떨어뜨릴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우리 급한 사정을 눈치 챘는지 금방 진정하더구나.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오늘 내내 저놈은 내가 뭘 원하는지 제가 알아서 움직였어. 내가 시키기도 전에 말이야. 아빠가 얼마나 기뻐하실지 상상해 봐. 우리가 검은 늑대의 소굴에서 도망쳐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 말까지 가지고 왔으니!"
"저게 그 사람 말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브렌나는 저런 엄청난 말을 어떻게 훔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아니, 저건 그 사람 말이 맞아!"
제니퍼는 자부심에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음유시인들이 부르는 노래에 나오는 놈하고 똑같아. 그리고 내가 그 사람 이름을 말하면 꼭 날 쳐다본다니까?"
제니퍼는 자신의 말이 맞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 그러자 말이 고개를 들고 제니퍼를 쳐다보았다. 그 눈이 꼭 사람 눈 같았다.
"저 봐!"
제니퍼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나 브레나는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니."
그 큰 담갈색 눈이 언니의 용감하고 과단성 있는 미소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왜 언니는 용기가 있고 나는 이렇게 용기가 없을까? 그 이유가 뭘까?"
"그거야 우리 주님이 공평하시니까 그렇지. 너한테는 아름다움을 듬뿍 주셨으니 나한테도 뭔가 주셔야지."
"하지만....."
브렌나의 말은 토르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밤공기 속으로 한바탕 히힝대는 바람에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순간, 제니퍼는 벌떡 일어나 토르에게로 갔다. 그리고 코를 토닥거리며 말을 진정시켰다.
"브렌나, 불 꺼! 얼른! 담요로 덮어 버려!"
가슴 뛰는 소리가 귀에서 울리고 있었다. 제니퍼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말 달리는 소리가 나나 들어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이 바로 코앞에 닥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곧 숨이라도 넘어갈 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토해냈다.
"내 말 잘 들어. 내가 토르를 타는 순간에 넌 네 말을 풀어 줘. 그리고 저쪽으로 달리게 해. 그런 다음 이쪽으로 와서 저 넘어진 나무 뒤에 숨어. 거기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꼼짝하지 말고 숨어 있어. 숨소리도 내선 안 돼. 알았지?"
말을 마친 제니퍼는 통나무를 받침대 삼아 토르의 등에 올라탔다.
"지금부터 난 토르를 몰고 길로 나갔다가 저기 산등성이로 올라갈 거야. 그 악마 놈의 백작이 있다면 당연히 날 쫓아오겠지."
그리고 제니퍼는 숨도 돌리지 않고 덧붙였다. 이미 말머리를 길 쪽으로 돌린 후였다.
"만약에 백작한테 잡히면 난 돌아오지 못해. 그러면 계획대로 수녀원으로 가. 그리고 날 구하러 아빠를 보내 줘."
"하지만........"
"그렇게 해! 제발!"
제니퍼는 애원의 말을 남기고는 곧장 말을 몰아 도로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숲속을 뚫고 달리면서도 되도록이면 추적자들이 브렌나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교묘하게 소리를 냈다.
"저기다!"
로이스가 저쪽 높은 산등성이를 향해 달려가는 검은 점을 손으로 가리키며 스테판에게 소리쳤다. 이어 두 사람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두 여자가 야영을 했던 장소에 가까이 갔을 때 두 사람은 방금 끈 불 냄새를 맡고는 급히 말을 세웠다.
"저길 수색해 봐."
로이스가 다시 말을 전속력으로 몰면서 외쳤다.
"동생은 저기 있을 거야. 안, 말도 탈 줄 아네!"
경의에 가까운 소리였다. 로이스의 눈길은 3백 미터 정도 앞에 달려가는 토르의 목에 매달려 있는 작은 체격의 인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로이스는 지금 자신이 쫓고 있는 인물이 제니퍼지 동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말이 토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토르는 전력을 다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높은 장애물이 나타날 때마다 제니퍼가 그것을 뛰어넘지 않고 돌아가는 덕분에 로이스는 조금씩 다가갈 수 있었다. 하긴 안장이 없는 상태에서 높이 뛰다간 말에서 떨어질 위험성이 높았다.
이제 두 말의 거리는 50미터 정도까지 좁혀졌고 더욱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거의 잡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토르가 넘어져 있는 나무를 뛰어넘지 않으려고 이제껏 달리던 길에서 옆으로 비켜났다. 뭔가 위험을 감지했으며 자신과 기수를 보호하려는 신호가 분명했다. 경고와 경악의 비명소리가 로이스의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 나무 너머에는 가파른 낭떠러지와 보이지 않는 심연이 있을 뿐이었다.
"제니퍼, 안 돼!"
그러나 제니퍼는 경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거의 발작 직전의 공포에 사로잡힌 그녀는 말을 다시 돌려 뒤로 몬 다음 말 옆구리에 구두 뒤꿈치를 힘껏 박았다.
"가!"
제니퍼의 고함소리가 났고, 잠깐 주춤하던 말이 몸을 잔뜩 웅크렸다가 붕 하고 앞으로 뛰어올랐다. 밤공기를 뚫고 외마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니퍼의 몸이 균형을 잃더니 말에서 떨어져 그대로 밑의 나뭇가지에 처박혔다. 그리고 또 다른 소리가 났다. 쿵 하고 거구의 짐승이 가파른 벼랑 밑에 처박히는 소리였다. 죽음을 의미하는 묵직한 소리였다.
제니퍼는 몸에 뒤엉킨 나뭇가지에서 몸을 빼 냈다. 그때 로이스는 말에서 내려 벼랑 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눈앞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1미터도 안 되는 곳에 시커먼 허공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추적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벼랑 아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돌처럼 굳어 있는 모습이었다. 너무 당황하고 겁이 난 나머지 그가 팔을 꽉 잡고 벼랑 아래로 끌고 내려갈 때도 그녀는 한마디 항의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제니퍼는 그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었다. 토르! 그는 지금 자기 말을 찾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 멋진 짐승이 아무 해가 없기를 빌면서 온통 바위뿐인 주위를 훑어보았다.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눈길이 쓰러진 토르에 가 닿았다. 머리와 목을 부딪친 바위 몇 미터 앞에 시커먼 몸뚱이가 꼼짝도 하지 않고 쓰러져 있었다. 로이스가 잡았던 팔을 거칠게 밀었다. 제니퍼는 자신의 잘못으로 죽고 만 그 아름다운 짐승을 쳐다보며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양심의 가책과 번민으로 온몸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마치 꿈 속의 한 장면 같았다. 그녀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사나운 전사가 죽은 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천천히 말을 쓰다듬는 모습을 마치 꿈을 꾸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뭔가 나지막이 중얼거리고는 있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니퍼는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러나 로이스가 일어서서 몸을 돌리는 순간 공포가 밀려왔다. 본능적으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머리카락을 휘어잡는 손길이 있었다. 로이스의 손이 그녀의 머리와 등을 잡아채더니 홱 돌려 세워 자신의 얼굴을 보게 만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머리 깊숙이 아프도록 파고 들어왔다.
"이 망할 것!"
사납게 내뱉는 그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네가 죽인 그 말은 사람보다 더 용감하고 더 충성스러웠어! 너무나 용감하고 충성스러웠기 때문에 네가 사지로 모는데도 네 말을 따른 거야!"
슬픔과 공포가 제니퍼의 백지장 같은 얼굴에 그대로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추적자에게는 아무 느끼미 없는 듯 머리카락을 휘어잡은 손에서는 힘이 빠지지 않았다.
"저 말은 나무 뒤가 허공이라는 것을 알고 너한테 경고까지 보냈건만 넌 그대로 사지로 몰았어. 저 말은 충성심 때문에 바보처럼 네 말을 그대로 따랐고."
로이스는 더 이상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지 그녀를 옆으로 밀쳤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질질 끌려갔다. 문득 제니퍼는 그가 자신을 밑으로 데려간 이유가 다시 말을 훔쳐 달아날까 봐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때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기회가 있었다 해도 그럴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이제 그녀는 이성을 되찾고 있었다. 그가 말 뒤에 그녀를 앉힐 때 드디어 기회를 포착했다. 그녀를 말에 먼저 올리고 백작이 말에 올라타려고 발을 든 순간 그녀는 고삐를 힘껏 잡아챘다. 그러나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백작이 달리는 말에 힘 하나 들이지 앟고 훌쩍 올라탄 것이다. 그는 팔을 돌려 그녀의 허리를 끊어져라 감았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한 번만 더 엉뚱한 짓을 해 봐."
분노를 씹는 그 목소리에 제니퍼는 몸을 움츠렸다.
"한 번만 더 날 화나게 하면 그때는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알아들어?"
"알았어요!"
제니퍼의 입에서 숨 막히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녀의 갈비뼈를 누르고 있던 그의 팔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제니퍼가 숨어 있으라고 한 나무 뒤에 꼼짝 않고 있던 브렌나는 스테판이 그녀의 말을 끌고 이쪽으로 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브렌나가 숨어 있는 곳에서는 말의 다리와 숲만 보였다. 이윽고 스테판이 말에서 내리자 그의 다리도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숲 속 더 깊숙이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또 제니퍼가 그대로 있으라고 한 말이 생각나 다른 행동을 취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까지 이런 경우가 있으면 브렌나는 제니퍼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라온 터였다.
남자의 다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불 앞에 멈춰서서 장화 끝으로 사위어 가는 불을 툭 건드렸다. 브렌나는 그의 눈이 지금 자신이 숨어 있는 수풀 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갑자기 그녀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슴이 콩당콩당 뛰기 시작하면서 숨조차 쉬기도 힘들었다.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참으려고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구두 끝이 바로 눈앞에 와 섰다.
"자, 이제 그만 나오시지."
좁은 개활지에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덕분에 사냥 한번 즐거웠어. 하지만 이젠 끝났어."
브렌나는 그 말이 함정이기를, 진짜로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를 바라면서 좀 더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스테판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좋아, 내가 직접 꺼내 드려야 할 것 같군."
스테판은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후 커다란 손 하나가 나뭇가지를 뚫고 들어와 브렌나의 가슴에 와 닿았다.
브렌나의 목에 분노 섞인 공포의 비명소리가 차 올랐다. 그의 손이 활짝 퍼졌다가 천천히 오므라졌다. 뭘 발견한 건지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손에 닿은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순간 그는 화들짝 놀라며 팔을 홱 움츠렸다. 이어 다시 손을 밀어 넣어 브렌나의 팔을 잡고는 그녀를 끌어냈다. 스테판이 아무 표정의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아하, 아거. 숲의 요정을 잡은 것 같은데?"
그러나 얼굴은 웃고 있지 않았다.
브렌나에게는 제니퍼가 그의 형에게 했던 것처럼 한 대 치거나 깨물 용기가 없었다. 불쾌한 얼굴로 노려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스테판은 그녀를 그녀의 말에 태웠다. 그리고 그녀의 말고삐를 잡고는 자신은 자기 말에 올라탔다.
숲 속에서 나와 길에 올라섰을 때 브렌나는 제니퍼가 도망쳤기를 빌면서 저쪽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저쪽에서 제니퍼가 검은 늑대와 함께 같은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브렌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스테판이 형 옆으로 말을 몰아 보조를 맞췄다.
"토드는요?"
그러나 로이스의 표정에 이미 그 답이 나와 있었다.
"죽었다."
로이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말없이 달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토르를 잃었다는 슬픔 외에도 피곤하고 배가 고팠다. 그리고 정말 분통터지는 일이었다. 이까짓 빨강머리-그는 지금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의 어린 계집애 하나-지금은 그녀를 모양 사납지 않게 제대로 안고 있다-가 그 경험 많은 기사를 속이고 군대 절반을 혼돈 속으로 볼아넣다니. 또 하루 낮밤을 추적해서야 잡을 수 있었다는 사실도 너무나 분통터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를 격분시키는 것은 그녀의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그 뻣뻣한 허리 하며 오만한 자세였다. 마치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 빽빽 울어대는 망나니 아이 같았다.
그들이 진지로 들어서자 모두들 그들을 쳐다보았다. 표정이야 펴졌지만 환호성을 지르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두 포로가 도망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여자들이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요, 창피한 일이었다.
로이스와 스테판은 말 우리 쪽으로 말을 몰았다. 로이스가 먼저 말에서 내린 뒤 불퉁스럽게 제니퍼를 내렸다. 제니퍼는 자신의 천막 쪽으로 가려고 몸을 돌리려다 말고 고통 섞인 비명을 질러야 했다. 로이스가 그녀의 팔을 난폭하게 낚아채 꽉 잡은 것이다.
"어떻게 경비병한테 들키지 않고 말을 꺼내 갈 수 있었는지 알아야겠다."
이제까지는 제니퍼가 보이지 않는 듯 행동하던 주위 병사들 뿐만 아니라 저 멀리 있는 병사들까지 일제히 숨을 죽이고 제니퍼를 쳐다보았다. 긴장된 눈빛으로 쳐다보는 수많은 얼굴을 느끼며 제니퍼는 잠시 머뭇거렸다.
"대답해!"
"경비병을 속일 필요도 없었어요. 졸고 있었으니까."
제니퍼는 가능한 한 최대의 위엄과 경멸을 섞어 대답했다.
로이스의 화난 눈동자에 믿을 수 없다는 고통의 빛이 어렸다. 그러나 애릭에게 고갯짓을 하는 표정은 아주 담담했다. 도끼를 손에 든 그 금발머리의 거인이 사람들 사이를 뚫고 반항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경비병에게로 다가갔다. 제니퍼는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장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과연 그 불쌍한 경비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했다. 태만의 죄를 범했으므로 틀림없이 처벌받으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심한 벌은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로이스가 팔을 잡아 끌고 가기 시작하는 바람에 그녀는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로이스가 그녀를 앞세우고 진지 한가운데를 지나는 동안 제니퍼는 병사와 기사들의 눈초리에서 적개심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탈출한데다가 그렇게 멀리까지 도망가 자신들을 우롱했으니. 그녀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얼마나 매서운지 제니퍼는 얼굴이 확확 타는 것 같았다. 백작의 분노도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팔을 잡아당기기 전에 보조를 맞추려고 거의 뛰다시피 그를 따라갔다.
그런데 더욱 무서운 재난이 닥칠 것이라는 예감에 그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생각하고 있던 머리가 확 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로이스 웨스트모어랜드가 그녀를 자기 천막으로 데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싫어요!"
제니퍼는 뒷걸음질을 쳤다.
백작은 나지막이 욕을 내뱉으며 그녀를 번쩍 들어올려 밀가루 포대처럼 어깨에 맸다. 엉덩이가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가고 머리는 백작의 장딴지까지 흘러내렸다. 백작이 그녀를 공공연하게 모욕하는 것을 본 병사들 사이에서 음흉한 웃음소리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제니퍼는 분노와 굴욕감에 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참아야만 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간 백작은 제니퍼를 모피 양탄자 더미 위에 던졌다. 그리고는 제니퍼가 몸을 추스려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제니퍼는 마치 고양이에게 몰린 생쥐처럼 그를 쳐다보았다.
"내 몸에 손댈 생각일랑 하지 말아요. 그랬다간 당신을 반드시 죽일 거예요."
그렇게 소리 질렀지만 속으로는 그의 얼굴과 눈에 이글거리는 분노에 움칠했다.
"널 건드린다고?"
경멸감이 가득 찬 목소리였다.
"그래, 그 말 한번 잘했다. 네 말 덕분에 내 욕망이 살아나는 것 같구나. 넌 이제 이 천막에 있을 거야. 여기는 원래 경비가 삼엄한 곳이니까 다른 부하들의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지. 게다가 진지 한가운데에 있고. 허튼 수작을 했다간 부하들이 널 단칼에 죽여 줄 거다. 알아들었나?"
제니퍼는 성난 얼굴로 그를 노려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수그러들 줄 모르는 그녀의 태도에 로이스는 더욱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는 양손을 불끈 쥐고 말을 이었다.
"이 천막 안에서 나나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행동을 했다간 네 평생 지옥 구경을 하며 살게 해 주겠다. 알아들어?"
그 험상궂은 얼굴에서 제니퍼는 그가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답해!"
그의 분노가 이성을 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제니퍼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러나 그는 더 말을 했다간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모르겠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돌아서서 테이블 위의 포도주 병을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막 마시려고 하는 순간 기사 견습생인 가윈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가윈의 팔에는 여자들의 천막에서 가져온 담요가 잔뜩 들려 있었다.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었다가 갈가리 찢겨 있는 것을 발견한 터였다. 소년의 얼굴에는 분노와 의혹이 가득했다.
"뭐가 잘못됐느냐?"
로이스가 입가에 가져가던 술병을 든 채 사납게 물었다.
가윈이 주인을 향해 어리지만 화가 잔뜩 난 얼굴을 들었다. 그리곤 제니퍼를 흘겨보았다.
"저하, 저 여자가 담요를 완전히 못쓰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안 그래도 사람들이 이 담요만으로는 추워서 벌벌 떠는데, 이제는......."
제니퍼의 가슴이 두려움으로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백작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술병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나지막하면서 분노가 그대로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와."
제니퍼는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다, 이거지? 이리 오라고 했어."
제니퍼는 차라리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천막의 장막은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도망갈 방법이 없었다. 로이스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병사들이 이제 곧 터져 나올 울음소리나 애원소리를 기대하며 천막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로이스가 가윈에게 명령을 내렸지만 그의 비수 같은 눈길은 제니퍼에게 그대로 꽂혀 있었다.
"가윈, 바늘하고 실을 가져오너라."
"네, 각하."
가윈이 얼른 구석으로 가 꺼내 왔다. 그는 바늘과 살을 로이스 옆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로이스가 한때는 담요였던 쪼가리들을 빨강머리에게 주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지금부터 이것들을 전부 고치도록."
부자연스럽도록 차분한 목소리였다.
순간 제니퍼는 온몸의 긴장이 탁 풀렸다. 그녀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안도감이 도는 얼굴로 백작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루 낮밤을 추적으로 날리게 했고 애마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옷까지 망쳐 놓았는데 담요를 도로 꿰매 놓으라고? 그럼 살려 준다는 뜻일까?
"담요를 전부 기워 놓을 때까지는 절대 잠을 자서는 안 돼. 내 말 알겠지?"
시퍼런 칼날처럼 매끈하면서도 단호한 음성이 이어졌다.
"내 부하들이 따뜻한 담요를 덮을 때까지 넌 떨면서 일을 해야 한다."
"아, 알았어요."
제니퍼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태도가 너무나 절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짓을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앞으로 걸어가 그의 손에서 쪼가리들을 받아 들 때는 그의 잔인함에 대한 소문들이 과정된 것이라는 생각까지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 생각은 바로 다음 순간에 깨졌다.
"악!"
로이스의 커다란 손이 마치 뱀처럼 쭉 뻗어 나와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그리고는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홱 끌어당기면서 머리를 뒤로 제쳤다.
"이 망할 계집. 어렸을 때 네 고집을 꺾어 놨어야 하는 건데. 그때는 못 잡았더라도 난........."
제니퍼가 미처 어떤 반응을 보일 새도 없이 그는 앉으면서 그녀를 무릎 사이에 꼭 끼웠다.
"안 돼!"
그녀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마구 몸부림을 쳤다. 무슨 소리가 나려나 하고 천막 주위에 둘러서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분노와 경악이 뒤범벅되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감히 이럴 수가!"
그녀는 온몸을 바닥에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백작은 다리로 그녀의 두 다리를 감고 허벅지로 누르면서 손을 들었다.
"이건 내 말을 위해서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힘껏 내리쳤다.
제니퍼는 고통의 파도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며 숫자를 셌다. 터져 나오려는 흐느낌을 막으려고 꽉 깨문 입술에서는 끝내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백작의 손은 계속해서 사정없이 등을 내리치고 있었다.
"이건 네가 어리석은 탈출을 시도한 대가다...... 이건 네가 망가뜨린 담요의 대가고....."
만약 제니퍼가 울음을 터뜨리며 제발 그만하라고 사정한다면 그만 때릴 작정이었기 때문에 로이스는 계속 때렸다. 그러나 결국 손바닥이 아파서 더 이상 때리고 싶어도 때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이따금 손바닥을 피하려고 꿈틀했을 뿐 단 한마디의 비명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손이 등을 닿을 때마다 몸뚱이라도 움찔하지 않으면, 혹시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였다.
로이스는 다시 손을 들었다가 멈칫했다. 그녀의 엉덩이가 단단해지면서 손이 내리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도 비명은 한마디도 지르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경멸감이 엄습함과 동시에 그녀를 울려서 용서를 빌게 만들어야겠다는 만족감도 잃어버린 그는 다리를 풀고 일어섰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지금도 제니퍼는 자존심 때문에 로이스의 발 아래 쓰러져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손으로 땅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비틀거리면서 일어선 그녀는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가누면서 로이스 앞에 섰다. 고개가 앞으로 숙여져 있어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는 그녀의 가녀린 몸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나 작고 가냘퍼 보여 로이스는 양심에 일말의 가책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제니퍼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제니퍼........"
제니퍼가 고개를 드는 순간 로이스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나 놀라웠다. 아니, 경외스럽기까지 했다. 황금빛으로 불타오르는 불길처럼 머리카락은 얼굴 주위에 넘실거렸고, 증오만 가득할 뿐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눈은 분노에 사무친 집시 여인을 연상시켰다. 그녀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단검........좀전에 그에게 맞으면서 그의 군화에서 빼낸 게 분명했다.
제니퍼가 손을 높이 쳐들어 칼을 겨누는 지금, 마치 꿈 속인 것만 같은 이 순간, 로이스 웨스트모어랜드는 그녀가 이제껏 본 여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칠고 아름답고 분노에 찬 심판의 천사가, 격분을 못 이겨 가슴을 들먹이며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에게 용감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모욕을 줄 수는 있어도 그 정신만큼은 굴복시킬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과연 그녀를 굴복시키고 싶어 하는지 의심이 든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제니퍼, 칼 이리 줘."
그녀는 칼을 더 높이 들었다. 분명 그의 가슴을 겨냥하고 있었다.
"다시는 너한테 손을 대지 않겠다."
그가 말을 하는 동안 가윈이 몰래 그녀의 등 뒤로 움직였다. 주인의 생명을 지킬 준비를 하는 가윈의 얼굴에는 살의가 번득이고 있었다.
"안 그러면 흥분한 견습생이 단칼에 네 목을 날려 버릴 거야. 가윈이 지금 네 등 뒤에 있다는 걸 잊지 마라."
그 말은 가윈에게 내리는 명령도 포함된 말이었다.
제니퍼는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자신이 견습생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그녀의 모욕을 본 아이! 그 사실이 저 안에서 화산처럼 폭발했다.
"칼을 줘."
제니퍼가 칼을 내놓으리라는 것을 확신한 로이스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단검은 전광석화처럼 허공을 가르며 똑바로 그의 심장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순간,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러 칼을 피한 그는 단단히 움켜쥔 그녀의 손아귀에서 칼을 떨어뜨리면서 그녀를 홱 끌어당겼다. 그러나 어설프게 휘두른 그녀의 칼에 귓가의 얼굴을 베여 시뻘건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흡혈귀 계집 같으니!"
로이스의 입에서 나지막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얼굴에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는 순간, 좀 전에 느꼈던 경외감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만약 네가 남자였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었을 거다!"
주인의 상처를 쳐다보는 가윈의 얼굴에 떠오른 분노는 주인의 분노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제니퍼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가윈의 눈에는 살기가 활활 불타고 있었다.
"경비병을 부르겠습니다."
제니퍼에게 역겨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돌아서는 가윈을 로이스가 불러 세웠다.
"바보짓 하지 말아! 넌 내가 일개 수녀한테 당했다는 말이 사방에 퍼지면 좋겠느냐? 적이 감히 나한테 대항할 마음도 못 먹는 것은 바로 나, 내 전설이 무서워서 그러는 건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 여자를 풀어 주면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풀어 준다구? 우릴 풀어 줄 생각이었나요?"
제니퍼는 공포에 질려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러나 눈은 로이스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피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언젠가는 그렇게 해야겠지. 널 죽여야 할 일만 없다면."
검은 늑대가 말을 잘랐다. 그리곤 그녀를 떠밀었다. 그녀는 그 힘에 밀려 천막 구석의 헝겊 쪼가리 더미에 쓰러졌다. 검은 늑대는 술병을 낚아채듯 들어 한 모금 길게 들이켰다.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던 경계의 눈길이 테이블 위에 있는 긴 바늘을 언뜻 스쳤다.
"작은 바늘을 찾아 보거라."
제니퍼는 그가 왜 저러나 의아해하면서 꼼짝 않고 있었다. 이제 겨우 이성을 되찾은 그녀는 왜 그가 좀 전에 자신을 죽이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내뱉은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적이 감히 나한테 대항할 마음도 못 먹는 것은 바로 나, 내 전설이 무서워서 그러는 건데."
그렇다면 검은 늑대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잔인하지는 않다는 걸까? 그녀의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 떠오른 의문이었다. 아니, 그녀는 이미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만약 그가 이야기의 반만큼만 나쁜 인간이었다면 그녀는 이미 고문을 당하거나 몸을 더럽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브렌나와 그녀를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가윈이 작은 바늘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제니퍼는 바로 몇 분 전만 해도 죽이려고 했던 그 남자에 대한 긴장이 거의 풀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가 폭력을 휘두른 점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도 없거니와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도 그의 몸과 자부심에 상처를 주었으니 따지고 보면 그런대로 공정한 편이었다. 술병을 들이키며 술을 마시는 그를 쳐다보면서,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은 그가 마음을 바꾸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화를 돋우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수염을 깎으셔야 겠습니다. 상처가 보여야 꿰매지요."
"그럼 깎아 버려. 보여도 제대로 꿰매지 못하면서 뭘 그래. 내 몸의 상처가 다 그 증거물이야."
"그런데 이번엔 얼굴이군요."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제니퍼는 자신이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윈이 날카로운 칼과 물을 준비하면서 덧붙였다.
"안 그래도 많이 자라서 깎으셔야겠습니다."
수염을 깎으려고 견습생이 앞에 서는 바람에 검은 늑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제니퍼는 언제부터인가 그 검은 수염에 가려진 진짜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강한 호기심에 고개를 이리저리 빼면서 몸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혹시 유리턱을 숨기려고 그런 것은 아닐까? 얼굴을 보려고 제니퍼는 왼쪽으로 몸을 더 기울였다. 그래, 틀림없이 유리턱일 거야. 견습생의 몸을 피해 얼굴을 보려고 왼쪽으로 몸을 더 숙이다가 제니퍼는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로이스는 자신을 죽이겠다고 덤벼든 그녀의 조재를 잊지도, 신뢰하지도 않고 있었다. 얼마나 대담한 여자인지는 익히 경험한 터였다. 그래서 감시의 눈을 떼지 않고 있었고, 그녀가 아까부터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비웃는 목소리로 견습생에게 명령했다.
"가윈, 좀 옆으로 비켜라. 그래야 저 여자가 내 얼굴을 제대로 보지. 저러다 넘어질라."
오른쪽으로 몸을 잔뜩 기울이고 있던 제니퍼는 안 보는 척하려고 했지만 몸의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끼면서 얼른 눈길을 돌렸지만 허사였다. 제니퍼의 눈과 그의 눈길이 그대로 마주치고 말았다. 그 순간, 검은 늑대가 생각보다 젊다는 사실에 제니퍼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또 유리턱도 아니었다. 가운데가 묘하게 움푹 패였지만, 강인하게 생겼고 네모진 턱이었다. 그 이상의 것은 그녀가 알 수 없는 일이고.
"이리 와서 보지 그래. 수줍은 척하지 말고."
로이스의 목소리는 분명 비꼬는 투였다. 그러나 술이 기분을 풀어 주고 있었다. 게다가 살인도 두려워하지 않는 감심장에서 호기심 많은 소녀로의 놀라운 변화에 혼란스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자, 방금 전에 이름을 새겨 넣으려고 했던 그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봐 두라구."
로이스는 그녀의 새침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강요하다시피 했다. 그때 가윈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상처를 꿰메야겠습니다. 너무 깊이 찢어져서 그래도 뒀다간 아주 흉할 것 같은데요."
"제니퍼 양한테 보기 싫은 꼴로 만들지는 말아."
여전히 비꼬는 투였다.
"장군님, 전 견습생이지 침모는 아닙니다."
가윈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바늘을 관자놀이 부근에 갖다 댔다.
"침모"라는 말을 듣는 순간 로이스는 양말을 교묘하게 꿰맸던 제니퍼의 솜씨가 생각났다. 그는 가윈을 옆으로 물리치고 제니퍼에게로 사색에 잠긴 눈길을 던졌다.
"이리 와."
그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묵직한 울림과 함께 거역할 수 없는 힘을 담고 있었다.
그가 두 사람을 풀어 주기로 한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이제 더 이상 그를 거역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제니퍼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그의 말을 따랐다. 떨리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자니 등이 지끈거렸다.
"더 가까이."
그녀가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멈추어 서자 그는 또 명령을 내렸다.
"네가 망친 거면 뭐든지 다 수선해야 사리에 맞겠지. 자, 내 얼굴을 꿰매라."
두 개의 촛불에서 나오는 불빛에 그녀는 그의 얼굴에 난 상처와 찢긴 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을 바늘로 꿰맨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뜩했다. 속에서 울컥 치미는 것을 겨우 삼켰다. 그리고 바짝바짝 타들어오는 입술 사이로 겨우 몇 마디를 밀어낼 수 있었다.
"할, 할 수 없어요......."
"넌 할 수 있고, 하게 될 거야."
로이스는 뒷말을 잘라 버렸다. 그 말을 하기 1초 전만 해도 그녀한테 바늘을 주어 가까이 오게 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일까 하는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한 짓의 결과를 보고 떠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굳혔다. 그 상처를 보게 하는 것-만지게 하는 것-이야말로 멋진 응보이리라!
바늘을 그녀에게 건네주는 가윈의 얼굴에는 못마땅해 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바늘을 받아 든 제니퍼는 로이스의 얼굴에 그것을 갖다 댔다. 막 그의 얼굴에 손을 대려는 순간 로이스가 그녀의 손을 꽉 잡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쓸데없이 아프게 만들 정도로 바보는 아니겠지?"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제니퍼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이스는 만족한 얼굴로 그녀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자, 이걸 마시고 시작해. 훨씬 안정이 될 게야."
그 순간, 만약 그가 독약을 권하면서 안정이 될 거라고 했어도 그녀는 그대로 받아 마셨을 것이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목에 불덩이가 넘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술병을 받아 들어 세 번이나 길게 들이마셨다. 사레가 들어 잠시 쉰 후 조금 더 마셨다. 만약 백작이 단단히 움켜쥔 그녀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지 않았더라면 더 마셨을 것이다. 그는 손에 힘을 주어 술병을 빼앗고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무 많이 마시면 눈앞이 잘 안 보일 거야. 내 귀까지 꿰매는 꼴을 당하고 싶진 않군. 자, 시작하지."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내맡겼다. 가윈이 제니퍼 바로 옆에 붙어 서서 해로운 짓을 하지 않는지 감시했다.
이렇게 사람의 살을 꿰매어 본 적은 없었다. 그녀는 백작의 살갗 속으로 바늘을 집어넣을 때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소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괴로운 항변의 신음소리였다. 곁눈으로 그녀를 살피고 있던 로이스는 몸을 움츠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졸도할지 모른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제일 큰 걱정이었다.
"암살자치고는 비위가 약하군."
그 말은 고통을 잊기 위해서 한 말인 동시에 그녀의 주위를 피비린내 나는 일에서 돌리고자 하는 노력의 소산이었다.
제니퍼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바늘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져 나가고 있었다. 로이스는 또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수녀가 되어야겠다는 소명 의식을 느낀 건 무슨 일 때문이었지?"
"소명 의식 같은 건 없었어요."
"그럼 벨커크의 수녀원에서 뭘 하고 있었나?"
"아버지가 보내서 있었을 뿐이에요."
그녀는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소름끼치는 일이라 구역질이 자꾸 나오려고 했다.
"그럼 네 아버지는 너를 수녀로 만들 생각이었나?"
로이스는 못 믿겠다는 투로 말을 던졌다. 그는 여전히 곁눈질로 그녀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네가 나한테 보여준 면말고 다른 성질을 본 모양이로군."
로이스의 곁눈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면서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고 말고요."
그렇게 대꾸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화가 나 있거나 호위병이 곁에 없을 때의 그 부드럽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 놀랍도록 서정적인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당신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아버지가 날 거기 보내신 건 내 성질 중에서 당신의 성질하고 같은 면을 보셨기 때문이라고 말이에요."
"정말? 너도 네 아버지를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나?"
진짜로 기분 상했다는 듯한 그 말투에 제니퍼는 그만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게다가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속에 들어간 술이 온몸을 돌면서 훈훈한 온기를 뿜어냈다.
"그래?"
로이스가 대답을 재촉했다. 그는 제니퍼의 뺨에 조그만 보조개가 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제니퍼는 단호하게 대꾸하며 한 땀 더 꿰맸다.
"그럼 뭘 잘못했길래 수녀원으로 추방당했지?"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버텼거든요."
"정말인가?"
로이스는 진정으로 놀랐다. 전에 헨리 왕의 궁정에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거기서 들은 소문에 의하면 메릭의 맏딸은 못생기고 새침한데다가 차가운 여자여서 수녀로 만들 노처녀라고 했다. 로이스는 누가 그런 말을 했던가 머리를 짜 보았다. 그래, 에드워드 발더였지. 로치로든의 백작으로, 제임스 왕의 대사였던 그가 한 말이었다. 하긴 아주 드물게 나오는 이야기였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못생기고 새침한데다가 차가운 여자라서 수녀로 만들 노처녀" 라고. 더 들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생각나지 않았다. 로이스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불쑥 물었다.
"나이는 몇이지?"
그 말에 제니퍼는 화들짝 놀랐다. 당황한 표정이었다.
"열일곱이에요. 그리고 2주 더 지났어요."
내키지 않아 억지로 대답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많이?"
놀라움과 동정심으로 로이스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여자는 대게 열넷에서 열여섯 사이에 결혼을 한다. 하지만 열입곱이면 그렇게 늙은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노처녀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일부러 노처녀로 늙었다?"
제니퍼의 깊고 푸른 눈 저 안쪽에 당황과 부인의 빛이 어른거렸다. 그는 궁정에서 또 무슨 이야기를 들었었나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얼른 떠오르는 것은 없었지만 한참 기억을 더듬은 끝에 겨우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동생인 브렌나에 비하면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었다. 브렌나의 얼굴을 보면 해도 별도 무색해진다고 했다. 로이스로서는 왜 사람들이 이 불 같은 성미의 유혹자보다 온순하고 창백한 금발머리를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긴 자신도 천사 같은 금발머리의 안온함을 점점 더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나?"
그러나 지금은 기다리는 것이 현명했다. 그녀는 막 새 땀을 뜨려고 하는 중이었다. 대답을 들으려고 재촉할 때가 아니었다.
제니퍼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앟고 한 땀, 한 땀, 상처를 꿰매면서 갑자기 머릿속을 파고드는 생각을 지워 버리려고 노력했다. 그가 멋있고 박력 있는 남자라는 사실이 자꾸만 의식을 헤집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가 정말 멋있는 남자라는 점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깨끗하게 면도하고 나니 남자다운 매력이 한껏 풍기고 있었다. 제니퍼로서는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었다. 각진 턱은 강인해 보였고, 광대뼈는 넓고도 높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풀어지게 만든 것은 가장 늦게 발견한 사실, 그 이름 하나로도 적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클레이모어 백작의 눈썹이 이제까지 본 것 가운데 가장 짙고 굵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정보를 전해 주면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냐구?"
약간 참을성이 없어진 목소리였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죠. 수녀원에 보내면서 아버지께서 경고하셨거든요. 만약 내가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렇게 될 거라고요. 나한테 딱 어울리는 혼처라고 하셨죠."
"누가 청혼했지?"
호기심이 이는 모양이었다.
"로치로든의 백작인 에드워드 발더였어요. 아직도 유효하다나요!"
제니퍼의 말이 얼마나 당돌했던지 로이스가 깜짝 놀라며 몸을 꿈틀했다.
"움직이지 말아요. 그러다가 잘못돼도 날 원망하지 말아요."
날카로운 책망의 소리가 호리호리한 소녀, 그것도 포로에 불과한 여자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로이스는 어이없다는 듯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몇 바늘이나 꿰맬 생각이지? 조그만 상처 하나 갖고 말이야."
로이스가 자신의 비난을 사소한 불평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아 제니퍼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뒤로 빼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이게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아요? 보기만 해도 징그러워 몸이 떨린다구요!"
로이스는 뭐라고 대꾸해 주려고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고 말았다. 눈길이 옷 위로 불룩 솟아 있는 제니퍼의 가슴에 가닿는 순간 할 말을 잊고 만 것이다. 그녀의 몸이 얼마나 풍만한지,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어 그 가는 허리 하며, 둥그스름한 엉덩이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으로 깨달은 사실은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그녀가 뭘 입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보면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너무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몇 시간 전에 입고 있던 볼품없는 수녀복을 계속 입고 있으려니 착각하고 있었다. 아예 신경 쓸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 풍만한 몸매가 눈에 가득 들어오고 있다. 저 안에서 욕망이 솟구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몸이 꿈틀했다. 그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만 끝내."
제니퍼는 그가 갑자기 무뚝뚝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로서는 그가 왜 그러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기분이 언짢아졌나 추측할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도 어떤 때는 그가 괴물처럼 느껴지다가 다음 순간에는 오빠처럼 느껴지는 등 변덕스러웠다. 그녀의 몸 역시 그의 기분만큼이나 변덕스러웠다. 천막 안에 불이 지펴져 있기는 했지만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몸이 차가웠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더웠다.
하여튼 제니퍼로서는 조금 전의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 물론 그와 친구 사이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그러는 게 그가 훨씬 덜 무섭기 때문이었다. 제니퍼는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로치로든 백작 이야기를 하니까 놀라는 것 같던데요?"
"그랬지."
로이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왜죠?"
로이스로서는 그녀에 관해 런던에 돌아다니고 있는 약간은 불공평한 소문이 에드워드 발더 때문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허풍쟁이인 에드워드 발더가 청혼을 거절당한 이상 자신을 거부한 여자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가장 알맞은 대답이 생각났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서."
"천하기도 하구요."
"그 말도 맞군."
무심하게 받기는 했지만 로이스로서는 그런 늙은 호색가에게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는 아버지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또 그 문제 때문에 딸을 수녀원에 가두어 두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메릭 백작이 딸에게 순종을 가르치려고 몇 주 동안 보낸 게 틀림없었다.
"벨커크 수녀원에는 얼마나 있었지?"
"2년 동안이오."
자신도 모르게 입이 딱 벌어졌다. 로이스는 흠칫하며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 덕분에 얼굴이 너무나 아팠다. 점차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네 아버지도 나처럼 네가 고집 세고 도대체 말이 안 통한다는 걸 안 모양이군."
로이스는 괜히 화가 치밀었다. 술을 쭉 들이켜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당신 딸이었으면 당신 기분은 어땠겠어요?"
제니퍼의 말투 역시 곱지 않았다.
"무슨 헛소리!"
로이스는 제니퍼의 얼굴에 나타난 불쾌한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요 이틀 동안 너는 내가 힘으로 점령했던 두 개의 성에서보다 더 지독하게 덤볐어."
"내 말은 만약 내가 당신 딸이고 당신은 철천지원수가 나를 납치했다면, 내가 어떻게 행동하기를 바랄 거냐는 뜻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고, 허리께에 가있던 손이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순간, 로이스는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녀를 빤히 노려보기만 했다. 그렇다. 그려는 헤프게 웃지도 않았고, 자비를 구걸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그를 이기려 했고, 도망치려 했으며,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렇게 심하게 때렸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또 울고 있는가 했더니 그를 죽일 계획을 짜고 있었다. 울 줄을 모르는 여자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한쪽에서는 만약 그녀가 자기 딸이라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수녀원에서 납치된 가여운 내 딸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만, 네 말이 맞다."
그의 입에서 무뚝뚝한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제니퍼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스로서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우아한 자태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로이스는 그녀의 진짜 미소를 처음으로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변화는 실로 놀라웠다. 천천히 눈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미소가 이윽고 그 길고 푸른 눈에서 강렬한 광채를 발했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입술이 점점 부드러워지면서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보였고, 양쪽 뺨에 핀 보조개가 그를 향해 열렸다 닫혔다.
로이스는 자칫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일 뻔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가윈의 얼굴에 나타난 경멸의 빛을 보았다. 포로, 아니 더 중요하게는 적의 딸에게 이성을 잃고 추근대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 머리를 스쳤다. 무엇보다도 오늘 밤 부하들을 담요 한 장 없이 추위에 시달리게 만든 괘씸한 여자에게 이럴 수는 없었다. 그는 깔개 더미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만 자도록. 그리고 내일은 네가 망친 담요를 다 고쳐 놓아야 해."
그의 냉정한 반응에 제니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뒤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좀 전에 말한 대로 넌 담요를 다 고칠 때까지 담요 없이 자야 한다."
로이스는 그녀에게보다는 자신에게 더 화가 나 있었다.
제니퍼는 그가 자주 봐 온 거만한 자세로 턱을 곧추세우고는 그가 침대로 쓰는 깔개 더미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녀가 움직이는 모습은 로이스의 눈에 수녀가 아니라 궁정의 창녀처럼 도발적으로 보였다.
제니퍼는 그가 촛불을 휙 불어 끄는 사이 모피 위에 몸을 뉘었다. 몇 분 후 백작이 그녀의 옆에 누우면서 모피를 끌어 가버렸다. 갑자기 아까 마신 술이 퍼지면서 제니퍼의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졌고, 지친 마음속에서는 오늘 하루 그 끝없이 긴장되던 일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어둠 속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그녀는 가장 끔찍했던 장면을 되새겨 보았다. 오늘 밤 내내 잊으려고 했지만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눈앞에 토르가 서 있었다. 그 위엄 있는 모습, 숲 속을 거침없이 뚫고 내달리던 모습, 장애물을 뛰어넘으며 산등성이를 내달리던 토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바위 위에 나뒹굴어진 토르의 우아한 몸뚱이와 달빛에 빛나던 그 갈기도.
눈에서 눈물이 솟았다. 눈물을 참으려고 숨을 죽여도 보았지만 그 아름답고 용기 있는 짐승에 대한 비통함은 가시질 않았다.
제니퍼가 잠들기 전에 먼저 잠들까 봐 내심 걱정하고 있던 로이스는 그녀의 숨결이 고르지 못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이어 뭔가 탐색하듯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마음을 풀고 모피 속으로 끌어들여 주기를 바라면서 눈물을 흘리는 척하는 것이 분명했다. 로이스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렸다.
"너무 추워서 눈물을 참고 있는 겐가?"
로이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던졌다. 그는 천막 중앙에 피워 놓은 화톳불의 희미한 불빛에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노력했다.
"아뇨."
제니퍼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왜?"
그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녀의 그 완고한 자존심을 깨뜨리고 울음을 터뜨리게 할 수 있을지 막막한 마음에 대답을 다그쳤다.
"당신 말 때문이에요."
그녀는 진정 가슴이 아픈 듯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제니퍼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대답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 말은 그로서는 기대하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토르의 의미 없는 죽음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어쩐지 덜 슬픈 느낌이었다.
그녀의 잠긴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토르는 내가 본 것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짐승이었어요. 만약 오늘 아침 내가 데려가서 죽게 만들 줄 알았더라면 난 그냥 여기 있었을 거예요. 다른 방법을 찾을 때까지 말이에요."
백작의 감은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던 제니퍼는 그가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떼면서 주춤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네가 떨어진 건 정말 기적이었지. 안 그랬으면 둘 다 죽었을 테니까."
제니퍼는 몸을 돌려 얼굴을 모피에 묻었다. 그리고 비탄에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낙마한 게 아니에요. 토르가 날 떨어뜨렸어요. 하루종일 더 높은 장애물도 다 넘고 다닌걸요. 그 나무도 쉽게 뛰어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토르가 뛰어오르면서 한 순간 갑자기 몸을 세웠어요.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죠. 그러니까 일부러 날 떨어뜨린 거예요."
"제니퍼, 토르는 새끼를 두 마리 낳았어. 애비하고 아주 닮은 놈들이지. 하나는 여기 있고 또 하나는 클레이모어에서 훈련시키고 있어. 그러니 토르가 나를 완전히 떠난 건 아닌 셈이지."
그런대로 부드러운 그의 말에 제니퍼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면서 간단히 대꾸했다.
"고마워요."
달빛 교교한 계곡에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차가운 포옹에 잠자던 병사들의 이빨이 딱딱 소리를 내며 떨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반갑지 않게 일찍 찾아온 가을이 마치 겨울처럼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천막 속에서 잠을 자고 있던 로이스는 따뜻한 모피 속에서 몸을 돌리다가 얼음장 같은 손이 팔에 와 닿는 익숙치 못한 감촉에 눈을 번쩍 떴다.
제니퍼가 그 가녀린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고 덜덜 떨고 있었다. 무릎을 가슴까지 바싹 끌어당긴 것을 보니 어지간히 추운 모양이었다. 사실 로이스는 잠을 깊이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더구나 그녀가 부하들에게 입힌 피해를 다 보상할 때까지 그녀에게 담요를 주지 않기로 한 것을 잊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떨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충성스런 부하들이 바람을 가려 줄 천막도 없이 훨씬 더 떨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분명히 났다. 그러므로 그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정당화할 건덕지는 전혀 없었다. 그는 팔꿈치를 세우고 몸을 일으켜 제니퍼의 몸 건너 저만치에 있는 모피 끝 자락을 당겨서 그녀를 덮어 주었다.
로이스는 다시 누운 후 눈을 감았다.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부하들이야 어떤 어려운 상황도 이겨 낼 수 있게 훈련된 사람들이었지만 제니퍼 메릭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녀가 몸을 꿈틀거리며 모피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엉덩이가 로이스의 무릎에 닿았다. 모피가 가로 막고는 있었지만 그 순간 그의 마음은 바로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는 여체가 제공할 쾌락을 상기하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의 끈질긴 노력 끝에 겨우 그 생각을 지울 수 있었다.
제니퍼는 사내의 손을 타지 않은 순진한 소녀에서, 황금 머리카락을 지닌 열정적인 여인으로 순식간에, 그리고 동시에 변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기분을 아무것도 아닌 양 쉽게 물리칠 수 있는 아이이면서, 또 "미안해요" 라는 속삭임 하나로 고통마저도 달래 주는 여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든 여인이든 그는 감히 그녀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어차피 보내야 할 여자였다. 안 그랬다간 적어도 한 달 후에 펼쳐질 자신의 미래를 위해 준비한 모든 계획을 다 포기해야 할 터였다.
제니퍼의 아버지가 항복하든 말든 그건 이미 로이스의 관심 밖이었다. 1주일이나 2주일 안에는 그녀를 자기 아버지에게 넘겨 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가 헨리 왕을 따르기로 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그래도 헨리 왕에게 넘겨주면 된다. 그러므로 그녀는 헨리 왕의 소유물이지 로이스의 소유는 아니었다. 괜히 그녀를 건드렸다가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생겨 복잡해지는 건 딱 질색이었다.
메릭 백작은 홀 가운데 피워져 있는 불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두 아들과 그가 가장 절친하게 여기는 네 명의 사나이로부터 들은 제안이 너무나 어처구니없어서였다.
"그럴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제임스 왕이 곧 지원 병력을 보내 줄 겁니다. 검은 늑대한테 두 사람이 잡혀 갔다는 말을 왕에게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개릭 카마이클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막내아들인 말콤이 침까지 퇘 뱉으며 열을 올렸다.
"그 다음에 그 악당을 공격해서 쳐부수는 겁니다. 지금 그놈은 우리 경계선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콘월까지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그자가 중간에 우릴 방해할 염려도 없습니다."
"그자가 얼마나 가까이 있건, 우리 병사가 얼마나 되건, 그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브렌나와 제니퍼를 구출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맏아들인 윌리엄이 차분하게 반론을 폈다. 그러자 말콤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도대체 무슨 수로 그 애들을 구출한다는 겁니까? 그 아이들은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방법이 없잖습니까? 다만 어떻게 복수하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양아버지나 동생보다 덩치도 작고 기질도 훨씬 온순한 윌리엄이 이마에 흘러내린 적갈색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동생을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제임스 왕이 아무리 많은 군대를 보낸다 해도 두 사람을 구할 수는 없다. 그 애들은 전투 중에 죽음을 당할 거야.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죽일지도 모르지."
"그만들 둬라! 고작 그런 이야기뿐이냐!"
백작이 고함을 질렀다.
"아닙니다,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윌리엄이 차분하게 대답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힘으로는 아이들을 빼내 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은밀하게 손을 쓰면 통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군대를 보내서 그자와 맞서는 것보다는 제가 몇 명을 데려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장사꾼이나 수사 같은 걸로 변장을 하고 검은 늑대의 군대를 따라다니다가 아이들한테 접근하는 겁니다. 아마 제니퍼도 제가 말하는 걸 깨닫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오지 않나 살펴보고 있을 거구요."
제니퍼의 이름을 말하는 윌리엄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실려 있었다.
"공격해야 한다니까요!"
말콤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검은 늑대와 맞서고 싶은 마음이 이성을 압도하고 있었다. 동생들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두 젊은이가 동시에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아버지가 결정을 내릴 차례였다. 백작이 즐겁다는 듯 말을 꺼냈다.
"말콤, 이제 네가 진짜 남자가 되어 가는 모양이구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복수하는 것, 그것이 남자의 길이지. 그래, 제임스 왕이 지원 병력을 보내면 네 말대로 공격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게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여기서 그는 윌리엄에게 새삼 놀라움의 눈길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네 형의 계획이 최선이다."
6. 감미로운 첫 키스
그날 이후 닷새 동안 제니퍼는 부대의 일상을 관찰하면서 지냈다. 동이 튼 바로 직후면 병사들은 잠에서 깨어나 몇 시간 동안 훈련을 했다. 벌판과 계곡에 칼과 방패, 창과 창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설적인 솜씨를 지닌 검은 늑대의 궁사들도 튕 하고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연습에 열중했다. 말도 매일 우리에서 나와 조련을 받았다. 기사들은 말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몰아대면서 가상의 적과 맞서는 훈련을 했다. 군사들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훈련을 마친 한 참 뒤에까지도 그녀의 귀에는 무기들이 쟁쟁거리는 소리가 남아 있었다.
로이스의 천막 안에 앉아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 담요를 꿰매면서도 제니퍼는 귀를 파고드는 끝없는 함성에 걱정이 커져만 갔다. 제니퍼는 그 걱정을 잠재우려 노력했지만 다 헛수고였다. 아버지의 군대가 어떻게 검은 늑대가 만들어 낸 저 "전쟁 기계" 에 맞설지 걱정이었다. 메릭 성도 예정된 대공격에 속수무책일 것만 같았다. 브렌나도 걱정거리 중의 하나였다.
그 불운한 탈출 실패의 밤 이후 제니퍼는 브렌나를 딱 한 번 언뜻 보았을 뿐 이야기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있었다. 로이스가 제니퍼를 천막에 책임지고 가두어 놓듯이 백작의 동생인 스테판이 브렌나를 책임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백작은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절대 금지시켜 놓고 있었다. 제니퍼는 기회 있을 때마다 백작에게 동생의 안전에 대해서 물어 봤지만 백작은 언제나 같은 대답이었다. 겉으로 봐서는 정직한 듯한 말투였다. 브렌나가 완벽하게 안전하며 자기 동생의 손님으로서 대우 받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바느질감을 옆으로 밀어 놓은 제니퍼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입구로 걸어갔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9월 초순시고는 기가 막힌 날씨였다. 비록 밤에는 추웠지만 낮에는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벌판 저쪽에 검은 늑대의 정예 호위대-오로지 검은 늑대의 안위에만 신경을 쓰는 열다섯 명의 기사-가 기마 연습을 하는 것이 보였다. 햇빛 속으로 걸어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것마저도 엄금된 일이라 감히 나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검은 늑대의 태도는 나날이 딱딱해지고 있었다. 기사들의 태도 또한 딱딱했다. 특히 고드프리 경과 유스테이스 경은 전에는 그래도 점잖았는데 이제는 그녀의 존재를 참아 내는 것조차 고역이라는 듯 그녀를 완전히 적 취급하고 있었다. 하긴 브렌나와 그녀가 두 사람을 속였으니 그들로서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고, 용서할래야 용서할 수가 없으리라.
그날 밤 저녁을 먹은 후 제니퍼는 언제나 마음에 품고 있던 문제를 또 꺼냈다. 나름대로는 그의 냉담함에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말을 붙였다.
"저, 동생을 보고 싶어요."
"그럼 부탁을 해 보시지. 요구하지 말고."
제니퍼는 그의 말투에 온몸이 굳는 것 같았지만 잠시 자신의 신세를 생각해 보았다. 목적을 이루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말에 수긍한다는 듯 고갯짓을 하고는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좋아요, 그럼. 제 동생을 보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안 돼."
"도대체 왜요?"
순간 제니퍼는 자신의 처지도 잊고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눈에 웃음이 퍼지고 있었다.
"그건 벌써 말했듯이 네가 동생한테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지."
로이스는 그녀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언제나 손쉽게 잡을 수 있는 위치에 두기로 결심했지만 그녀와의 말싸움을 즐기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의 즐거운 말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동생 혼자 두면 탈출을 계획할 용기도 없거니와 그럴 상상력도 나오질 않아. 그리고 너도 동생을 놔두고 혼자 떠날 생각은 못 할 테고."
제니퍼는 그의 귀를 뜨겁게 만들 온갖 욕들을 퍼부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 봐야 기회만 사라진다는 것 또한 분명했다.
"내가 다시는 탈출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도 당신은 믿지 않겠죠?"
"정말인가?"
"그럼요. 그러면 동생을 만나게 해 줄 건가요?"
"아니, 그렇게는 안 되지."
그의 대답은 정중했다.
"그렇군요. 정말 놀라워요."
제니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아하고 당당한 경멸의 말을 계속 퍼부었다.
"완벽하다는 잉글랜드의 군대로도 여자 둘을 제대로 지킬 자신이 없다니 정말 놀랍군요. 그게 아니면 너무 잔인하기 때문에 내 청을 안 들어주는 걸까요?"
그의 입이 일자로 굳게 다물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둘러 밥을 먹은 후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제니퍼가 잠들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제니퍼는 브렌나가 천막을 향해 이끌려 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에 시냇물가에 숨겼던 수녀복은 너무 더러워져서 입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브렌나도 제니퍼처럼 견습생에게서 빌린 튜닉에 양말, 그리고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제니퍼는 동생을 따뜻하게 껴안고는 옆에 앉혔다. 막 탈출 계획을 이야기하려는 순간 천막 아래에 나타난 남자의 구두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황금 박차가 달린 구두는 기사밖에는 못 신는 것이었다.
"언니, 어떻게 지냈어? 대우는 어때?"
"아주 좋아."
제니퍼는 밖에 서 있는 기사가 과연 누구일까 생각해 보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으라는 명령이 정말 내려졌는지도 궁금했다. 제니퍼의 얼굴 표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신중한 표정이었다. 제니퍼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렇게 대접을 받을 줄 알았더라면 탈출 같은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 거야."
"뭐?"
브렌나의 얼굴빛이 홱 변했다.
제니퍼는 브렌나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다음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그녀의 눈길을 천막 바깥의 검은 구두에 맞추어 주었다. 제니퍼는 들릴락 말락 하는 소리로 속삭였다.
"저 사람들한테 다시 탈출할 마음이 없는 것처럼 보여야 탈출할 기회가 많아져. 브렌나, 우린 반드시 도망쳐야 해. 아버지가 항복하시기 전에 말이야. 아버지가 항복하고 나면 그땐 만사 끝이야."
브렌나는 알아들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퍼는 계속 말을 이었다.
"처음 잡혔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방법이 없어.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그때 너무너무 겁이 났었어. 늑대 울음소리를 들었을 땐........"
"늑대라구! 그때는 부엉이라고 했잖아."
"아냐,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아무래도 늑대 같아. 하여튼 문제는 여기 있으면 안전하다는 거야. 애당초 내가 생각했던 대로 이 사람들이 우릴 죽이거나 욕보이지는 않을 것 같아. 그러니 우리가 굳이 고생하며 탈출할 필요는 없어. 조금만 기다리면 아버지가 우릴 구해 주실 거야."
"그래, 맞아!"
브렌나가 찬성하라는 제니퍼의 몸짓에 따라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제니퍼가 바라던 대로 천막 바깥에 서 있던 사람은 스테판 웨스트모어랜드였다. 그는 형에게 자신이 엿들은 말을 보고했다. 로이스로서는 상당히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제니퍼가 겉으로나마 현재의 위치를 인정한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제니퍼가 감금 상태를 조용히 감내하기로 한 이상 동생한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본능은 뭔가 미심쩍다고 경고하고 있었지만 로이스는 천막을 지키는 호위대의 수를 넷에서 하나로 줄이라고 명령했다. 이제 애릭이 포로들을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그 명령을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로이스는 자신이 이제 더 이상 언제나 천막 쪽을 주시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에는 헝클어진 붉은 머리가 어떻게든 바깥에 나와 보려고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이 놓이던 그였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고 제니퍼가 조용히 천막 안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하루에 한 시간씩 두 사람이 같이 있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물론 그게 잘한 일인지는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난 까닭을 훤히 알고 있는 제니퍼는 어떻게 해서든 백작의 신뢰를 더욱 굳힐 방도를 찾는 데 머리를 짰다. 그래야 감시를 더욱 늦추도록 할 수 있을 터였다.
다음날, 운명이 그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고 제니퍼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천막 주위-운동을 할 수 있게 허락된 구역-를 산책하겠다고 애릭에게 말하려고 브렌나와 함께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제니퍼의 눈에 두 가지 사실이 동시에 들어왔다 하나는 애릭과 검은 늑대의 호위대 기사들이 병사들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을 구경하느라 25미터도 넘게 떨어진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왼쪽 저 멀리에서 백작이 몸을 돌리고 두 사람을 유심히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백작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제니퍼는 브렌나의 손을 잡고 곧장 숲 속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도를 했다가는 금방 백작의 눈에 띌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좀 더 나은 방법을 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제니퍼는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면서 브렌나의 팔을 끼고 딴 곳에 정신을 팔고 있는 애릭에게로 갔다. 물론 천막 주위에서 벗어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숲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려고 노력했다. 감시병이 없어도 도망칠 생각을 안한다는 확신을 백작에게 심어 주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그 계략이 멋지게 들어맞았다. 그날 밤, 로이스와 스테판, 애릭, 그리고 검은 늑대의 호위대가 모였다. 내일 야영지를 떠나 하딘 성까지 50킬로미터를 행군할 계획을 짜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그곳에서 런던에서 오기로 한 새 병력을 기다리면서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다. 토론과 그 뒤에 이어진 식사 시간 동안 제니퍼를 대하는 로이스의 태도는 여느 여자를 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다들 나가고 나자 그는 제니퍼를 향해 돌아서서 차분히 말했다.
"이제부터는 동생하고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 만나도 좋아."
막 모피 더미 위에 앉으려던 제니퍼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낯선 정중함에 멈칫 제자리에 서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자부심 넘치는 귀족적인 얼굴을 쳐다보는 그녀의 몸에 뭔가 불편한 느낌이 관통하고 지나갔다.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마음이 불편했다. 그의 얼굴에 씌어진 것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테니 그녀도 같이 대해 달라는 뜻 같았다. 그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언뜻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은빛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휴전 제안이 서로 적으로 대할 때보다 더욱 위험할 수도 있다는 본능의 경고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그 경고를 묵살했다. 어차피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두 사람 사이에 표면적으로나마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어야 득을 볼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상처를 꿰맸을 때처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게 즐겁기도 했다.
제니퍼는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다가 도로 다물었다. 자신을 납치한 사람한테 관대하게 대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는 것이 배신 행위처럼 느껴진 것이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친구가 되자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더욱이 그가 자신을 믿게 만드는 데 성공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지만, 한편으로는 속임수를 썼다는 게 어쩐지 부끄러웠다.
제니퍼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직선적이고 개방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의 미움을 샀다. 또 비양심적인 이복 오빠한테 덤비다가 명예를 잃고 말았다. 차라리 오빠가 부리는 속임수를 되받아치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개방성과 정직이 그녀를 수녀원으로 몰아놓은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속임수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노력한 만큼 성과도 있고. 제니퍼는 자신의 대의는 옳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취하고 있는 행동은 아무래도 부끄러웠다. 자존심과 정직, 그리고 절망감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양심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제니퍼는 암브로스 수녀원장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우선은 위엄 있는 수녀원장을 이런 상황에 끌어들인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밀가루 포대처럼 말 등에 얹히던 일부터 시작해서 이곳에 와서 겪은 일들을 감히 수녀원장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암브로스 수녀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백작이 그녀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우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제니퍼는 그의 마음을 그의 따뜻한 눈빛 속에서, 정중한 바리톤 목소리에서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녀로서는 그가 보내는 신뢰를 감히, 그리고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녀 집안의 미래가 그녀의 탈출 여부나 구출 계획에 달려 있었다. 항복하기 전에 구출을 시도하리라는 건 확실했다. 그러므로 제니퍼로서는 진지 안에서 가능한 한 최대로 자유를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다. 부끄럽든 말든 그녀는 공정할 수도, 그의 신뢰를 경멸할 수도 없었다. 또한 그의 신뢰를 잃지 않고서는 우정의 제스처를 거부할 수도 없는 형편에 놓이고 말았다. 그러나 최소한 어느 정도는 진지함과 정직함으로 그의 우정에 대응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있었다.
한참 동안을 생각한 끝에 그렇게 결심한 제니퍼는 백작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얼굴이 풀리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관대함을 그녀가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착각한 로이스는 화가 나기보다는 즐거웠다. 그는 팔짱을 끼고 엉덩이를 테이블에 기댔다. 무언가 즐거운 일을 생각하는 듯 그의 한쪽 눈썹이 호를 그렸다. 그는 제니퍼가 모피 위에 앉아 매끈한 다리를 구부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말을 걸었다.
"제니퍼,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수녀원에 있을 때 7대 죄악에 대해서 배웠겠지?"
"그럼요, 물론이죠."
"거만하지 말라고도?"
어깨까지 흘러내린 그녀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촛불에 반짝이는 모습에 마음이 어지러운 듯 그는 말을 제대로 맺지 못했다.
"난 절대 거만하지 않아요."
제니퍼는 매력적인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녀로서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지금 자신의 휴전 제의를 그녀가 그렇게 오래 뜸을 들이고, 또 우아하지도 않게 받아들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난 나 자신이 의지가 강하다고 생각해요. 고집도 세구요. 하지만 거만하지는 않아요."
"소문하고 내가 직접 겪어 본 걸로는 아닌데?"
그의 비꼬는 말투에 제니퍼는 그만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로이스는 그 웃음에 실린 유쾌한 울림과 아름다움에 빠져 들었다. 그녀에게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웃음소리였다. 모피 더미 위에 앉아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제니퍼 메릭의 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로이스는 지금 그녀에게로 걸어가 옆에 앉기만 하면, 그녀가 저항하지 못하게 할 길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는 상상에 사로잡혔다. 순간, 그는 지금 있는 자리에 꼼짝 않고 있어야 할 온갖 이유를 생각하며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행동은 생각과 반대로 나타났다.
마음속의 생각은 깊이 감춘 채 손을 뻗어 잔 두 개와 술병을 든 그는 모피 더미 옆으로 걸어갔다. 잔에 술을 따른 후 하나를 그녀에게 권했다. 그리고 관능미 넘치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네 별명이 거만한 제니퍼라는 걸 알고 있어?"
자신이 지금 위험한 미지의 영역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제니퍼는 눈동자를 즐겁게 빛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소문일 뿐이에요. 발더 경하고 한 번 만난 후부터 그런 소문이 돈 것 같아요. 그런 그렇고, 사람들은 당신을 "스코틀랜드에 내린 저주" 라고 부르죠. 어린 아기들을 죽여서 그 피를 마신다면서요?"
"정말인가?"
로이스는 그녀 옆에 앉으며 과장된 몸짓을 했다. 그리고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
"잉글랜드의 훌륭한 성에서 나를 기피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군."
"정말이에요?"
제니퍼는 곤혹스러웠다. 또 한편으로는 불쑥 솟아오르는 동정심을 억눌러야 했다. 비록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는 적이지만, 잉글랜드를 위해 싸우는 그를 자기 나라 사람들이 싫어하다니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제니퍼는 잔을 들어 몇 모금 들이켰다. 신경이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잔을 내리고는 천막 저쪽 탁자 위에 세워 둔 촛불에서 퍼지는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가윈은 반대편에 앉아 있었는데, 겉으로 보아서는 주인의 무기를 모래와 식초로 광을 내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니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영국의 귀족이 정말 이상했다. 스코틀랜드에서라면 지금 자기 옆에 앉아 있는 남자는 뛰어난 영웅으로 평가될 터였다. 결혼하지 않은 딸이 있는 성에서라면 대환영을 받을 것이고. 물론 그의 얼굴에 뭔가 어두운 느낌을 주는 오만한 구석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단호하고 매서운 느낌을 주는 턱이 굵은 선을 이루고 있었다. 어찌 보면 냉혹하고 무정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남성답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나이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바람과 태양 아래서 보낸 세월이 그의 눈가와 입가에 굵은 선을 그려 넣고 있었다. 검은 늑대의 전설을 들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것으로 보아 그가 겉모습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었을 거라고 추측될 뿐이었다.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전쟁으로 젊음을 다 보내며 왜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지금쯤이면 엄청난 재산도 모았을 테고, 그러면 후계자도 있어야 하는데.
"왜 결혼하지 않기로 했죠?"
불쑥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에 그녀는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자기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이 자신도 믿어지지 않았다.
스물아홉의 나이였다. 그 나이에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로이스의 표정엔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그가 결혼 적령기를 한참 넘긴 나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윽고 평온함을 되찾은 로이스가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네 생각엔 왜 내가 결혼하지 않은 것 같지?"
"당신을 원하는 아가씨 가운데 적당한 여자가 없어서 그랬나요?"
제니퍼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비웃음이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그 당돌한 행동이 로이스에게는 오히려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결혼 이야기야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로이스는 그저 빙긋이 웃고만 있었다.
"이젠 늦었다고 생각하나?"
"우리는 둘 다 노총각, 노처녀로 늙어야 할 운명인가 봐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지. 너야 되고 싶어서 노처녀가 된 거니까 나하고는 틀리지."
로이스는 너무나 즐거웠다. 팔꿈치를 세우고 몸을 뒤로 기댄 그는 술로 뺨이 붉게 물들고 있는 제니퍼의 얼굴을 감상하다가 다시 말을 건넸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네 생각은 어때?"
"그거야 알 수 없죠. 하지만 충분히 상상은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생각한 다음 말을 이었다.
"전쟁터만 돌아다녀서야 어울리는 아가씨를 만나 볼 기회가 없죠."
"맞아. 난 이제까지 전쟁터에서 살다시피했지.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말이야."
"평화가 오지 않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당신이 군대를 끌고 싸움을 벌이면서 평화를 어지럽히기 때문이에요. 잉글랜드 사람들은 다른 사람하고 어울릴 수가 없는 족속들이에요."
"정말 그럴까?"
로이스가 제니퍼의 은근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되물었다. 지금 그는 좀 전에 그녀의 웃음을 즐겼듯이 그녀의 기질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고 말고요. 왜 당신네 군대는 콘월에서 우리와 싸우다가 그냥 돌아왔......."
"그래, 나는 콘월에서 싸웠어. 거긴 잉글랜드의 땅이야. 우리가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건 네가 사랑해 마지 않는 제임스 왕, 참, 그 사람 턱이 유리턱이라고 하더군. 그건 그렇고, 그 이유는 제임스 왕이 자기 사촌의 남편을 왕위에 올리려고 우리를 침략했기 때문이야."
"흥, 퍼키 워백이 잉글랜드의 적법한 왕이에요. 그 사람은 에드워드 4세의 후손이라구요!"
제니퍼가 야무지게 쏘아붙였지만 로이스는 담담하게 되받았다.
"퍼킨 워백은 플랑드르 지방의 한 뱃사공의 자손이지."
"그건 당신 의견일 뿐이에요."
그가 이 문제에 관해 더 이상 논쟁을 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짓는 순간, 제니퍼가 그의 흉터투성이 얼굴을 흘낏 쳐다보며 불쑥 질문을 던졌다.
"정말 제임스 왕이 유리턱이에요?"
"그렇다니까."
로이스가 싱긋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잘라 말했다.
"뭐, 우리가 제임스 왕 얼굴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 건 아니죠."
그러나 제니퍼는 속으로 이 정보를 새기고 있었다. 들리는 말에는 아주 잘생긴 미남이라고 했는데.........그녀는 얼른 말을 이었다.
"우린 지금 당신의 그 끝없는 전쟁에 대해서 토론하고 있었어요. 당신은 아일랜드하고도 싸웠고, 그 다음엔......."
그녀는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로이스가 비웃음을 날리며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래, 난 아일랜드하고 싸웠어. 그건 말이지, 그들이 램버트 심넬을 왕으로 앉힌 뒤 헨리 왕의 자리를 뺏으려고 우리를 침략했기 때문이야."
지금 그는 마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가 잘못한 것처럼 교묘하게 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제니퍼로서는 그 문제를 더 토론할 지식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이 왜 여기, 우리 땅 바로 옆에 있는지는 뻔해요. 당신은 지금 더 많은 군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죠? 헨리 왕은 당신을 스코틀랜드에 보내서 우리를 공격하겠다는 거겠지요. 여기 진지에 있는 사람은 다 알아요."
로이스는 대화를 원래의 가벼운 주제로 돌리려고 이렇게 말을 돌렸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던 문제는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그 전쟁터를 돌아다니느라 아내를 찾지 못한 내 무능력이었던 것 같은데?"
제니퍼는 화제가 바뀌는 것이 기뻐서 얼른 그 문제로 주의를 돌렸다.
"당신은 헨리 왕의 궁정에 간 적이 있을 거고, 거기서 아가씨들도 많이 만났겠죠?"
"그랬지."
제니퍼는 조금씩 술을 넘기면서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키 큰 사나이를 조용히 관찰했다. 다리를 구부려 손을 무릎에 얹은 그 자세는 전장의 천막 속에서치고는 아주 편안한 자세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것은 그가 전사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몸에서는 약탈자의 냄새가 풍겼다. 떡 벌어진 어깨 하며, 파란 모직 튜닉 위로 그대로 드러나는 팔과 가슴의 근육, 그리고 구두 위 검은 모직 양말 위로 솟아나온 강인한 다리의 근육은 약탈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갑옷과 칼 속에서 보낸 세월이 그를 더욱더 단련시키고 있었다.
제니퍼는 그런 생활을 하던 로이스가 궁정에 갔을 때 그곳의 분위기나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릴 수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비록 궁정에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그곳이 얼마나 호화스럽고, 그곳 사람들이 얼마나 세련된 사람들인가 하는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 온 터였다. 문득 이 전사가 그곳에서 얼마나 불편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물어 보았다.
"궁정 사람들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죠?"
"글쎄, 그렇게 편하진 않아."
로이스는 무수한 감정을 담고 있는 그녀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의 시인이 제니퍼의 부드러운 가슴에 돌을 던졌다. 그녀는 마음 한구석이 아파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꼭 끼고 싶은 사람들 속에 어울리지 못할 때의 모욕감과 고통이 어떤 건지 너무나 잘 아는 그녀였다. 목숨을 걸고 잉글랜드를 위해서 싸우는 그를 궁정의 사람들이 기피한다는 건 공정치 못했고 잘못 된 일 같았다. 그녀의 입에서 부드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럼 뭐가 잘못된 걸까? 나는 왜 궁정에 가면 마음이 편치 못하지?"
흉터 자국이 선명한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아가씨나 신사분들하고 있을 때 당신 기분이 어떤지부터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그를 도와주고 싶다는 충동이 솟구치고 있었다. 동정심 탓도 있고, 강한 술기운 탓도 있었다. 그리고 그의 흔들림 없는 은빛 눈빛에 대한 순간적인 반응이기도 했다. 제니퍼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아가씨들의 경우라면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내 조언을 듣고 싶지 않으세요?"
"아니, 아니. 꼭 듣고 싶어."
로이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채근했다.
"아가씨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말해 줘. 네 말만 들으면 다음번에 궁정에 갔을 때는 기필코 나를 남편으로 받아들일 아가씨를 건질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고 당신하고 꼭 결혼할 거라고 장담하는 건 아녜요."
로이스는 술을 쭉 들이켠 후 입가의 술을 쓱 닦아 내고는 말을 이었다. 여전히 웃음기가 섞인 말투였다.
"만약 네 말을 믿게 하려고 그렇게 망설이는 거라면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아니, 그, 그러니까 내 말은........사실은......"
제니퍼가 불쌍하게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러자 로이스가 즐겁다는 듯 말을 받았다.
"이렇게 하자구. 우리가 서로 도움이 될 말을 교환하는 거야. 너는 좋은 가문의 아가씨가 어떤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지 말하고, 나는 남자의 신뢰를 깨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야. 자, 한 잔 더 하고."
로이스는 손을 뒤로 뻗어 술병을 집은 다음 그녀의 잔에 술을 더 따랐다. 그리고 어깨 너머로 가윈을 힐끗 쳐다보았다. 잠시 후 가윈은 손보고 있던 방패를 내려놓고는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자, 충고를 해 줘야지. 진지하게 들을 테니까."
로이스는 그녀가 술을 들이켜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 내가 궁정에 있다고 하자고. 막 왕의 접견실에 들어갔더니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많이 있는 거야. 그 중에서 하나를 내 아내로 삼을 결심을 하고......."
그 순간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다.
"당신은 까다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요?"
로이스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못 들어 보던 소리에 놀란 호위병 셋이 무슨 일인가 하고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무뚝뚝하게 손짓으로 그들을 내보낸 후 그녀의 오똑한 코를 빤히 쳐다보았다. 제니퍼의 코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지금도 찡그려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그녀에게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러나 그웃음을 억지로 목 안으로 삼킨 후 그는 반성한다는 투로 말했다.
"아까 그 아가씨들이 전부 다 예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 말에 그녀의 표정이 퍼졌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랬어요. 내가 남자한테는 미인이 최고라는 걸 깜빡 했군요."
"아니, 일단은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거지. 자, 그건 그렇고, 이젠 어떡한다지? 그 중에서 한 아가씨를 골랐는데......."
"보통 때는 어떻게 했어요?"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
그를 관찰하면서 대답을 생각하는 제니퍼의 고운 눈썹이 한곳으로 모아졌다. 입가에는 즐거움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아는 걸로는 당신이 그 여자를 무릎에 엎어 놓고는 승낙하라고 때리는 장면밖에 상상이 안 가는군요."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이건가?"
로이스가 비록 정색을 하긴 했지만 그의 눈에는 웃음기가 돌고 있었다. 그녀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로이스의 귀에 울리는 그 음악 소리가 천막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가씨들......그러니까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가씨들은......."
여기서 그녀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분명 이제까지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여자와는 전혀 다른 여자들밖에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의미가 함축된 표정이었다.
"그런 아가씨들은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어요. 자기가 마음을 주고 싶은 남자한테서 어떤 대접을 받고 싶은지 말이에요."
"고귀한 집안의 아가씨는 어떤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데?"
"그거야 기사다운 남자를 원하는 거죠.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그녀는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에서 반짝 빛을 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 아가씨는 자기 기사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오로지 자기한테만 눈을 주기를 바라요. 그 기사가 자기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있기를 바라는 거죠."
"그랬다가는 자기 칼에 걸려 넘어지고 말걸?"
그렇게 대꾸를 하는 순간 로이스는 지금 제니퍼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점잖게 꾸짖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하죠. 당신하고는 거리가 먼 그런 사람 말이에요!"
"나야 낭만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어쨌든 실내로 들어갈 때는 장님처럼 더듬거려야겠군. 그건 그렇고 또 다른 건 없나?"
"충성심과 헌신이 있죠. 그리고 말, 특히 말이 중요해요."
"무슨 말?"
"아가씨들은 달콤한 사랑과 존경의 말을 좋아하죠."
꿈꾸는 듯한 제니퍼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가씨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그 기사가 오로지 자기만을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의 아름다움을 노래해 주는 말도요. 자기 눈을 보면 바다나 하늘을 보는 것 같다라든가 입술을 보면 빨간 장미 꽃잎이 생각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죠......"
얼이 빠진 것처럼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로이스가 입을 열었다.
"정말 그런 말을 해 주는 남자가 나타날 거라고 꿈꾸고 있어?"
순간 그녀의 얼굴이 한 대 얻어맞은 듯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의 말을 잘못 이해한 듯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되받았다.
"아무리 못생긴 여자라도 꿈은 있는 법이랍니다."
"제니퍼......."
후회와 놀라움이 가득한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넌 못생기지 않았어. 넌........"
그 순간 그는 그녀에게 더욱 끌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그녀의 매력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생각해 보았다. 분명 그녀의 얼굴이나 육체만은 아니었다. 그를 푸근하게 감싸 주는 제니퍼 메릭의 놀라운 부드러움과 감히 그에게 도전했던 불굴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점점 더 강력하게 자신을 빨아들이는 발랄함에서 나오는 매력이었다.
"못생기지 않았어."
그녀는 아무 악의 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당신의 여신을 말재주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은 버려요. 당신한테는 그런 재주가 없어요."
"때려서 승낙을 받아 낼 수도 없고, 말로도 어떻게 안 된다면 천상 내 유일한 기술로 해 보는 수밖에 없겠는데..........?"
로이스의 눈이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일부러 말을 마무리 짓지 않았다. 마침내 호기심을 참지 못한 제니퍼가 그의 술수에 말려들고 말았다.
"무슨 기술이 있다는 거예요?"
그의 눈이 제니퍼의 눈을 보며 번쩍 빛을 발했다. 그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상한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아."
"순진한 척하지 말아요."
제니퍼는 비난의 말을 던졌다. 그러나 호기심에 휩싸인 그녀는 그의 손이 등 뒤로 돌아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다시 채근했다.
"뭘 그렇게 잘하길래 아가씨가 그것에 넘어가서 당신하고 결혼할 마음이 생긴다는 거죠?"
"내가 잘하는 건......"
로이스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
"바로 키스야."
"뭐라구요? 키스요? 당신이 그런 걸 자랑해요?"
제니퍼는 입에서 침이 튈 정도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연달아 내뱉었다. 그녀가 웃으면서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그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졌지만 그녀는 거의 의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허풍이 아니야. 나는 내가 정말 그걸 잘한다고 믿어 왔어."
기분이 상했다는 듯한 그의 말에 제니퍼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려고 애썼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입술이 웃음을 참느라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 내린 저주" 가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창이나 검이 아니라 기껏 키스라니......너무나 우스웠다.
"내 말이 우스운 모양이군."
딱딱하게 굳은 로이스의 눈길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세게 흔드는 바람에 불타는 듯한 황금빛 머리카락이 어깨위에서 파도를 쳤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웃음이 넘쳐 나고 있었다.
"아니, 그냥......"
우스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침을 한번 하고 나서야 그녀의 목이 겨우 틔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당신 이미지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그러는 거예요."
이번에는 아무 신호도 없이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안고 힘껏 끌어당겼다. 그러나 말은 부드러웠다.
"그럼 직접 판단을 해 보셔야겠군."
제니퍼는 몸을 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소리를 질렀다.
"바보짓 하지 말아요! 안 돼요! 그래요, 당신 말을 믿겠어요. 정말 믿는다구요!"
갑자기 그녀의 눈길이 그의 입술에 가 닿았다. 제니퍼는 그의 입술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난 꼭 증명해 보이고 싶어."
"그럴 필요 없어요. 난 이제까지 한 번도 키스해 본적이 없어요. 그러니 내가 어떻게 당신 기술을 판단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그 말은 잠자리 기술이 자신과 맞먹는 여성만 상대해왔던 로이스의 욕망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그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팔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더욱 가해지면서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을 그녀의 어깨로 끌어올렸다.
"안 돼!"
제니퍼는 필사적으로 몸을 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무지막지한 그의 힘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난 꼭 해야겠어."
제니퍼는 뭔지는 모르지만 육체적인 모욕을 당하는 것 같아 정신을 가다듬었다. 공포에 질린 신음소리가 목까지 치밀고 올라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무서워 떨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술에 와 닿는 그의 입술은 차가웠다. 그리고 꼭 다문 자신의 입술 위를 가볍게 문질러대는 그의 입술 감촉이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머리가 텅 비면서 모든 것이 정지하는 것 같았다. 양손을 그의 어깨에 대고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자신의 몸을 그에게서 떼어 놓고 있었지만,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맥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키스를 당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음미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로이스가 손의 힘을 풀었다.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로부터 겨우 밀어내었다.
"아무래도 내가 혼자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는 능숙하지 못한 것 같군."
로이스는 솟아오르는 즐거움을 조심스레 감추며 말을 이었다.
"키스하는 동안 네가 정신이 안 빠진 걸 보면 말이야."
온몸의 힘이 쭉 빠지면서도 뭔가 위험이 느껴졌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제니퍼는 지금의 이 깨지기 쉬운 우정을 지키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그게 무슨 말이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머리를 모피에 대고 몸을 쭉 늘이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관능적이라는 것을 똑똑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좀 전의 키스가 고귀한 집안의 아가씨들이 꿈꾸는 그런 것이었느냐 이거야."
"날 놔 줘요."
"난 네가 너 같은 고귀한 아가씨와 결혼할 수 있게 도와줄 마음이 있는 줄 알았지?"
"그래요, 당신은 키스를 아주 잘해요! 아가씨들이 꿈꾸는 바로 그런 거였어요!"
제니퍼는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는 의심스런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 놓아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확신이 안 가는데?"
로이스는 제니퍼의 짙푸른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번쩍이는 것을 보면서도 그녀를 놀리고 있었다.
"그럼 다른 사람한테 해 봐요!"
"저런, 불행하게도 애릭하고 할 마음은 없는걸."
제니퍼가 뭐라고 항변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로이스는 얼른 작전을 바꾸었다.
"이제야 알았다. 너한테 육체적인 고통으로 위협해 봐야 쓸모가 없지만 통하는 게 있다는 걸 드디어 발견했어."
"그게 무슨 말이죠?"
"그러니까, 앞으로 널 굴복시키고 싶으면 그저 키스만 하면 된다 이거야. 넌 키스를 무서워하거든."
키스를 당한다. 그것도 그의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격렬하게 반응해 봐야 말의 진실성만 떨어질 뿐이다. 되도록 침착하고 조용히 말하는 것이 이로울 것 같았다. 제니퍼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무서워하는 줄 알아요?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그저 흥미가 없을 뿐이지."
로이스는 지금 제니퍼가 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재미있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은 그녀의 반응을 떠보고 싶은 마음을 더욱 부채질할 뿐이었다.
"정말?"
굵은 눈썹 아래 빛나는 로이스의 눈이 제니퍼의 촉촉한 입술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다시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고개가 숙여지면서 두 사람의 숨결이 서로 엉켰다. 그의 눈길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겁에 질린 그녀의 눈동자는 더욱 매혹적이었다. 그 눈동자를 꼼짝 못하게 자신의 눈 안에 가둔 후 그는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살포시 포갰다. 제니퍼의 온 신경이 경련을 일으켰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감겼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서 관능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부드러운 곡선, 그 떨리는 윤곽을 하나하나 탐욕스럽게 맛보면서.
로이스는 그녀의 입술이 점차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팔에서도 힘이 빠지고 있었다. 가슴이 그의 가슴에 와 닿으면서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입술에 가했던 힘을 조금 늦추면서 동시에 머리를 감싸 안았던 손의 힘도 약간 뺐다. 로이스는 그녀를 뉘면서 그녀의 몸에 자신의 몸을 실었다. 그리고 더욱 깊숙이 그녀의 입술을 헤집으면서 손으로는 제니퍼의 옆구리와 엉덩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혀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더듬으면서 안으로 들어갈 입구를 찾았다. 드디어 꼭 닫혀 있던 그녀의 입술이 살포시 벌어졌다. 달콤한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간 그의 혀가 천천히 뒤로 후퇴했다가 다시 밀고 들어갔다. 위험한 결정을 내린 순간이었다.
제니퍼는 그의 밑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환희가 몸 전체에서 작열하면서 몸을 감싸고 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빠져 나가고 있었다. 로이스는 자신의 뜨거운 욕망을 자제하면서 능숙하고도 교묘하게 그녀의 몸을 달구어 놓았다. 제니퍼는 그의 능숙한 키스에 취해 자신이 포로라는 것을 잊어 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그녀의 연인이었다. 헌싡거이고 부드러운 기사, 바로 꿈에 그리던 기사였다. 로이스의 끈질긴 탐사로 부드러워진 그녀의 입에서 자신을 내맡기는 항복의 신음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돌려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녀의 입술이 고조되어 가는 열정과 함께 그의 입술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로이스의 입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혀가 뭔가를 찾아 헤매는 사이, 손 역시 그녀의 옷 위에서 쉼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던 손이 어느 순간엔가 밑으로 내려가더니 그녀의 벨트를 풀고는 옷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제니퍼는 입술을 빨아들일 듯한 키스에 푹 빠져 있다가, 갑자기 맨 가슴에 그의 못 박힌 손바닥이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온몸에 흐르는 짜릿한 감각에 제니퍼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로이스는 손바닥에 전해져 오는 그녀의 따스하고도 불룩한 가슴과 자랑스럽게 솟아오른 젖꼭지를 느끼는 순간 터져 버릴 것만 같은 욕망에 몸을 떨었다. 그는 손가락을 앞뒤로 움직여 그 거만한 꼭지를 문지르다가 꼭 집어서는 비틀어 보았다. 기쁨에 겨운 그녀의 한숨 소리가 입 안에서 터지고 어깨에서는 그녀의 손가락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그가 주고 있는 쾌락에 보답이라도 하듯 그녀가 더욱 깊은 키스를 퍼부어 왔다.
제니퍼의 격렬하면서도 달콤한 반응에 놀란 로이스가 입술을 떼고는 그녀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그녀를 풀어 주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그가 잠자리를 같이 한 여자들은 부드럽게 유혹되거나 정중하게 다뤄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전설의 일부인 힘과 스테미너, 격렬함을 원했다. 전설의 검은 늑대한테 정복당하고, 짓눌리고, 거칠게 다뤄지고 싶어 했다. 침대 위에서 "날 죽여주세요."라고 애원하는 여자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성적인 정복자의 역할이 주어진 것이었고, 그 자신도 그런 기대를 당연시했다. 그러나 그 역할이 갈수록 짜증스러웠고, 최근에는 역겹기까지 했다.
로이스는 제니퍼의 부풀어 오른 가슴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이제 그녀를 그만 놓아주어야 한다는 소리가 모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지금 그만두지 않으면 내일이면 이 일을 후회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왕 후회할 일, 후회할 거리나 만들자는 생각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오늘 밤 함께 발견한 쾌락인데 좀 더 즐긴들 어떠랴 싶은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로이스는 고개를 숙여 입술을 포개면서 그녀의 옷을 열어 제쳤다. 눈앞에 드러난 진수성찬에 그는 그만 정신을 잃을 뻔했다. 정교하게 다듬어 놓은 풍만하고 봉긋한 봉우리 위에 분홍빛 젖꼭지가 욕망으로 잔뜩 굳은 채 떨고 있었다. 크림처럼 부드러운 피부는 아무의 손길도 닿지 않은 갓 내린 눈발처럼 불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격렬하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숨을 고른 로이스는 그녀의 가슴에서 눈길을 거두어 입술을 탐색하다가 이어 빨려들 것만 같은 그녀의 눈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는 동안 그는 그 백설 같은 봉우리를 맨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의 옷을 벗고 있었다.
그의 뜨거운 키스와 눈길, 그리고 술기운에 거의 감각을 잃을 정도로 매혹된 제니퍼는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향해 내려오는 그의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감겼다. 그의 입술이 굶주린 듯 그녀의 입술 윤곽을 더듬고는 혀가 안으로 파고 들어오는 순간, 온 세상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감싸 안고 부드럽게 문지르자 그녀의 입에서는 환희의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윽고 털이 북슬북슬한 그의 맨가슴이 그녀의 가슴에 와 닿았고 이어 그의 단단한 몸이 그녀의 나긋나긋한 몸 위에 실렸다.
그의 감미로운 키스가 입에서 귀로 옮아갔다. 그의 혀는 민감한 틈을 타고 정교한 탐사 작업을 끈질기게 벌였고, 제니퍼가 더 참지 못하고 몸을 비틀 때서야 끝이 났다.
그는 입을 다시 그녀의 입술로 옮겼다. 그리고 천천히 관능의 유혹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내 제니퍼의 목에서는 낮은 신음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더욱 벌려 갔다. 이윽고 그녀의 혀를 포착한 그는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 안으로 끌어들여 꿀이라도 나오는 듯 핥았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의 혀를 그녀의 혀에게 맡겼고, 그녀의 혀는 본능적으로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격렬하게 움직였다. 두 사람의 혀가 뒤엉키면서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제니퍼의 팔은 세상이 뒤흔들리는 것 같은 키스 속에서 그의 목에 더욱더 휘감기고 있었다.
그가 하반신을 일으켜 다리를 그녀의 다리 사이에 넣어 무릎을 벌렸다. 그의 딱딱해진 몸이 허벅지에 와 닿는 순간 제니퍼는 격렬한 예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열정이 더더욱 그리워진 그녀는 그에게 더욱 매달렸다.
그가 입술을 떼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실망의 신음을 토했다. 그러나 그의 입술이 미끄러져 내려가 가슴에 닿는 순간 너무 놀라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의 입술이 젖꼭지에 닿았고, 그의 혀가 단단하게 솟아오른 그녀의 젖꼭지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그는 입술로 딱딱하게 굳은 젖꼭지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가 꼭 깨물고는 다시 세게 끌어당겼다. 그녀의 몸이 그의 몸을 갈망하며 활처럼 휘었다.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의 물결이 그녀의 온몸을 전율에 떨게 만들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는 으스러지게 그녀의 몸을 껴안았다. 그녀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로이스는 얼굴을 돌려 다른 봉우리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마구 휘저으면서 정신없이 그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제니퍼가 쾌락에 빠져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막 했을 때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살과 닿았던 부분이 차 공기에 노출되자 뜨거웠던 그녀의 몸에 오싹 한기가 느껴졌다. 제니퍼는 그를 따라 거닐던 무아지경에서 반쯤 깨어났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길이 팽팽해진 그녀의 가슴을, 그의 혀와 입술과 이빨의 애무에 보란 듯이 오똑선 그녀의 젖꼭지를 뜨겁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몸이 욕망으로 잔뜩 부풀어 올라 그녀의 몸을 향해 강력한 힘을 보내는 것을 느낀 제니퍼는 마침내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다. 제니퍼는 무기력하게 그의 머리가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제니퍼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제발......."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긴장할 대로 긴장한 상태였다.
바로 그때였다. 천막 바깥에서 경비병의 목소리가 났다.
"백작님, 죄송합니다만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로이스가 아무 말 없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후다닥 옷을 꿰고는 천막을 나가 버렸다. 붕 떠 버린 갈망과 혼란스런 감정에 사로잡힌 채 제니퍼는 그가 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이윽고 정신이 맑아졌다. 마구 헤쳐진 옷을 내려다보는 순간 왈칵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서둘러 옷깃을 여미고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었다. 만약 그가 억지로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더라면 상황은 더욱 나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가 오히려 마법에라도 걸린 듯 기꺼이 그 행동에 동참했다. 자신이 뭘 했던가, 아니, 뭘 하려 했던가에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엄청난 충격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를 비난하려 해도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돌아오면 뭐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 대해야 할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역시 그녀는 순진했다. 그가 아까 그 순간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의 가슴이 공포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니퍼는 그 사람보다 오히려 자신의 반응이 더 무서웠다.
시간이 자꾸 흘러 어느덧 한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포는 놀라움으로, 그리도 드디어는 탈진으로 이어졌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모피 더미 위에서 몸을 구부린 채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누군가 굽어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제니퍼는 조심스레 로이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까 천막을 나갔던 "연인" 이 다시 유혹을 시작할 마음은 없다는 것이 잠에서 채 덜 깨어난 눈에도 훤히 보였다. 오히려 그녀가 더 그러고 싶은 마음인지도 몰랐다.
"아까 일은 실수였어. 우리 둘 다 말이야.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나지막한 그 말은 그녀로서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리고 그는 돌아서서 천막을 나갔다. 어둠 속에서 멀어져 가는 로이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제니퍼는 그가 무뚝뚝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는 사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입이 놀라움으로 약간 벌어졌다. 하지만 곧 가윈이 들어와 침대에 눕는 것을 보고는 얼른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