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오디션(Never trust a stranger)
Kay Thorpe
1
"안됐지만 여기서 내려 주겠어요?" 트럭 운전사가 도로 옆에 차를 세우고 아쉬운 듯이 말했다. "남쪽 행 램프웨이(ramp-way)는 바로 앞에 있어요. 곧 다른 차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운전하는 친구를 잘 보고 타세요. 요즈음과 같은 세상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아가씨!"
젬마는 마주 웃어 보였다.
"조심할게요. 일부러 멀리 돌아와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 즐거웠는걸요. 조만간 다시 이용해 주었으면 좋겠군요!"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으련만-달려 사라져 가는 트럭을 향해 손을 흔들며 젬마는 혼자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스트코스트에 있는, 틈새로 바람이 쌩쌩 들어오는 작은 극장의 무대에 여름 내내 출연했다고 해서, 그것이 본격적인 연극시즌을 맞고 있는 대극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될 리는 만무하다. 그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줄잡아 9월까지는 그 극장의 쇼에 출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날씨도 화근이었다. 그것은 요 몇 년 사이에 최악의 7월이었다. 오늘도 또 그 다음날도 거의 텅 빈 것이나 다름없는 객석을 앞에 두고 쇼를 공연해 봤자 호주머니에 찬바람만 일 뿐이다. 매니저는 그렇게 말하고는 쇼의 공연 중지를 선언했다.
경제적인 문제라면, 어머니가 뉴욕에서 은행구좌로 송금하고 있는 돈으로 충당해도 된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곤란한 때만 쓰기로 젬마는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어머니로부터는 연극학교 재학 시 내내 원조를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지나칠 정도로 충분하다. 스물두 살이나 되었으니 자신의 생활비 정도는 스스로 벌어야 한다. 무대의 일자리가 없다면 임시의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찾아봐야 한다. 단, 그런 자리가 있는 경우의 이야기지만. 댄스와 연극배우의 자격증 따윈 일반적인 일자리를 구하는 데는 거의 소용이 없는 것이다.
램프웨이를 향해 걷기 시작하는데, 비가 쏟아졌다. 짙은 갈색의 긴 머리를 아노락<anorak)의 두건에 쑤셔 넣고, 마침 다가오고 있는 차에 신호를 보내보았다. 하지만 차는 스피드를 줄이지도 않고 달려가 버렸다. 히치하이커를 태웠다가 금품을 강탈당했다거나 목숨을 빼앗겼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도는 작금에, 사람들이 바짝 경계를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165센티에 50킬로가 될까 말까한 체구로서는 강도 같은 짓은 하려야 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 텐데.
더욱이 이런 차림으로는 어림도 없다. 아노락은 다 낡아빠진 것이고, 진바지는 초라할 정도의 것이었으며, 헝겊으로 만든 숄더백도 꽤나 오래 된, 때가 묻은 것이다. 젬마는 옷차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연극학교에서 3년, 해안의 부두 가에 있는 극장에서 2개월. 그런 생활에 좋은 옷은 필요가 없었고, 그리고 한 칸짜리 아파트에는 많은 옷을 건사할 장소도 없었다.
양친이 이혼한 지 아직 5년밖에 되지 않았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아버지가 재혼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의 재혼상대인 셜리와는 잘 지내고 있다. 사우댐프턴에 있는 아버지의 새로운 집에 가면 언제라도 환영받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도 젬마는, 전에 한번 다녀오고는 그쪽으로는 발길도 돌리지 않았다.
문제는 질투인 것이다. 이 감정만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 사람은 나의 아버지란 말이야-직장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 매달리는 쌍둥이 사내아이들을 향해 젬마는 그렇게 외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었다. 그 아이들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그런 행동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아버지의 새로운 가족은 연대의식이 대단히 강했다. 하지만 예전, 젬마와 아버지가 가족으로서 함께 살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사실에 대해서 어머니를 탓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좀 더 객관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17세에 결혼해서 18세에 어머니가 되었으니 정신적으로 성장할 틈이 없었다는 것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테이지의 마력이 어머니를 가정에 있게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40세인 지금 어머니는 여배우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고 있다. 국제적 스타인 그녀는 지금, 브로드웨이에서 롱런하고 있는 뮤지컬의 마지막 주의 무대에 서 있을 것이다. 어머니와는 1년 가까이나 만나지 못했고, 조만간에 만날 예정도 없다. 지금의 무대가 끝나더라도 어머니에겐 곧 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당분간은, 어지간히 매력적인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는 한 어머니가 대서양을 건너 여기 영국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없다.
연극학교의 동기생들은 아무도, 젬마가 아델 베리스포드의 딸이라는 것을 모른다. 만일 그 사실을 알았다면 모두들, 어째서 그런 연줄을 이용하지 않느냐고 이구동성으로 떠들어댔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출세하는 것은 싫었다. 젬마는 될 수 있는 한 그 사실을 비밀에 부치려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처녀시절의 성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녀 사이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반드시 비교 당하게 된다. 아델 베리스포드는 훌륭한 여배우일 뿐만 아니라 대단한 미인이었다. 젬마자신도 차밍하다는 말은 듣고 있지만, 어머니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것이 틀림없지만, 그 사실과 그것을 이용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부모의 후광으로 성공한다면 과연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램프를 향해 달려오던 실버 그레이의 메르세데스가 왼쪽 방향 지시등을 깜빡이면서 속력을 떨어뜨렸다. 젬마는 어깨에 둘러맨 백을 추슬러 올리면서 앞으로 나섰다. 자신의 행운이 꿈이 아닌가 싶어 믿어지질 않았다. 이런 차가 히치하이커를 위해 멈춰 선다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다. 특히 그 히치하이커가 비에 흠뻑 젖어 있는 그런 경우에는. 제발 이 차가 런던으로 가는 중이었으면. 젬마는 아침신문에서 읽은 <오늘의 운수>를 믿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것은, <뜻밖의 일이 당신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운수>라는 것이었다.
문을 열고 조수석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자, 백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젬마는 운전사 쪽을 돌아보았다.
"어디까지?" 그가 차를 발진시키면서 물었다.
"런던이에요." 젬마는 시트 벨트를 매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운이 좋군. 바로 거기로 가는 참이거든요."
"어머나, 다행이네요! 이런 날씨에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이 못 되거든요."
남자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백미러를 보면서 핸들을 잡고 있었다. 약간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젬마는 흥미 깊게 남자를 관찰했다. 나이는 30대 초반쯤 되었을까. 그가 돈에 부자유스럽지 않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자동차는 차치하고라도, 세도우줄무늬의 다크슈트가 우람한 어깨에 딱 맞는 모양은, 그 옷이 최고급임을 말해 주고 있다. 키는 180센티쯤 될까. 곱슬거리는 숱 많은 검은머리는 남자다운, 윤곽이 뚜렷한 이목구비와 잘 어울렸다. 의지가 강해 보이며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사람이다. 입술이 이외에도 섹시해서, 젬마는 묘하게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아침 이 시간의 고속도로는 언제나 붐빈다. 남자는 기회를 놓칠세라 두 대의 트럭 사이를 빠져나가, 앞에 있던 차를 교묘하게 추월해서 다시 차량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운전솜씨도 상당히 뛰어난 것 같다.
"몹시 붐비는군요. 저라면, 이런 교통체증 속에서 속을 끓이기보다는 차라리 멀리 돌아가겠어요."
"두렵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테지. 신경질적인 사람에게는 차의 운전은 맞지 않아요. 특히 이렇게 차가 증가한 현대에는"
젬마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이야기를 걸 셈으로 그렇게 말해 본 것뿐인데. 히치하이커를 태워 줄 정도의 친절한 마음은 가지고 있어도, 사교적인 대화를 나누는 매너는 이 남자에겐 없는 모양이다. 이제부터는 입을 신중하게 놀려야지.
"이런 일을 곧잘 하나요?" 잠시 후에 남자가 여전히 앞을 향한 채 말했다.
"이런 일이라니-아, 히치하이크 말이군요? 네, 필요할 때는. 영국의 철도요금은 너무 비싸서 조만간 손님이 다 떨어져 나가고 말지 않을까요?"
"런던 행 장거리 버스가 대부분의 도시에서 출발하고 있을 텐데, 그쪽이 훨씬 싸지 않을까요?"
"그야 훨씬 싸지요. 하지만 귀중한 돈을 사용할 데는 그밖에도 많으니까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윽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런던에는 일자리를 찾으러?"
"네."
솔직한 것이긴 하지만 불완전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자신의 직업을 얘기할 마음은 없었다.
"런던이라고 해서 길이 온통 금으로 덮여 있는 건 아니오." 조소하는 듯한 말이 되돌아왔다. "런던에도 다른 데와 마찬가지로 좋은 일자리란 좀처럼 없어요. 당장 머무를 장소는 정해 두었소?"
"Y.W.C.A를 생각하고 있어요." 그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지당하지만, 그 말투에 젬마는 약간 울화가 치밀었다. "Y.W.C.A는 싸고 편리하니까요."
"그리고 안전하지. 젊은 여자가 혼자서 묵을 때는 그 점이 최대의 포인트가 되지요."
젬마는 웃었다. "자신의 몸을 지키는 방법쯤은 알고 있어요."
"정말? 만일 내가 당신을 덮친다 해도 잘 대처할 수 있다는 말이오?"
"필요할 때는요. 그리고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느낌이 드는 사람의 차에는 타지도 않으니까요."
"눈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거요?"
"적어도 악의는 눈에 나타나지요. 그리고 여차할 때는 무릎차기로 한방 먹이지요."
"그런 찬스가 있는 경우에는 그렇겠지. 하지만, 밀어 넘어뜨린 경우에는 그렇게는 할 수 없어요."
"그때는 또 상황에 따라 어떻게든 해내요. 아시겠어요, 미스터…?"
"델 포드, 로건 델 포드."
"미스터 델 포드. 호의에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저는 정말로 자신의 몸쯤은 스스로 지킬 수 있어요. 염려놓으세요."
"당신이 그렇다면 그렇겠지."
"네, 그렇다니까요." 젬마는 짐짓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이 사람에게는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예의바르게 대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는 혼자서 살아가는 데 익숙해 있어서요. 벌써 3년이나 그래 왔으니까요."
"양친은 돌아가셨나요?"
"이혼했어요. 하지만 저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 따윈 흥미가 없으실 텐데요." 젬마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런던까지 앞으로 얼마나 걸릴까요?"
"교통체증의 정도에 달렸지만, 두 시간에서 세 시간 사이겠지요." 혹시 젬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는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꼭 몇 시까지 도착해야만 하는 건 아닐 테지요?"
"네, 전혀 급할 건 없어요. 점심을 먹으러 어딘가에 들를 생각이세요?"
"아직 생각 안했어요. 당신은 배가 고픈가?"
"약간." 그렇게 말하고 나서 젬마는 황급히 덧붙였다. "점심 값 정도의 돈은 있어요."
남자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 말을 듣고 안심했소. 지금, 열한 시 반이오. 다음 휴게소에서 세울까요? 어쨌든 간에 휘발유를 넣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 뒤로 침묵이 이어졌다. 젬마는 라디오를 켜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대로 말없이 계속 간다면, 런던까지는 자못 지루하고 긴 여정이 되겠지. 뭔가 무난한 화제는 없을까? 젬마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남자는 저속으로 달리는 차도로 차를 몰아, 다음 출구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난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여기서 1킬로 정도 간 곳에 제법 괜찮은 퍼브(선술집)가 있다는 게 생각났어요. 휴게소에 있는 간이식당에서보다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주유소도 있으니까 일석이조지요. 30분이면 다시 고속도로에 들어설 수 있어요." 그가 설명했다.
젬마는 안도했다. 퍼브에서의 식사는 훌륭하고, 우선 값이 싸게 마련이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식사대는 자기가 지불할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로건 델 포드 씨에게는 충분히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묘하게도 그녀는 그 이름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만난 것은 처음이긴 하지만, 그렇게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다. 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그와는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아주 긴 1킬로였다. 얼마쯤 지나자 젬마는 불현듯 깨달았다. 차는 간선도로를 벗어나, 나무와 수풀밖에 보이지 않는 좁은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 퍼브는 마을에서 많이 떨어진 곳에 있는 모양이다. 비는 이미 그쳤지만 잿빛 구름이 낮게 깔려 있어서, 주변의 경치를 한층 쓸쓸하게 보이게 했다. 전형적인 영국의 8월이다. 이 나라의 맑게 갠 날씨는 다른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도 훨씬 화창하다. 그런 매력마저 없다면 아마 이 나라에 머무를 외국인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차가, 활짝 열어젖혀져 있는 문을 통해 차바퀴 자국이 나 있는 샛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젬마는 깜짝 놀랐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하면서 차를 후진시키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로건 델 포트가 차를 세우고 엔진을 끄는 바람에 이번에는 한층 더 놀랐다.
"설마 당신이 말하던 퍼브가 없어진 건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유감이군요." 젬마는 나지막이 웃었다.
"퍼브 따윈 없어요.-적어도 여기에는. 나중에, 그때도 먹을 마음이 있다면, 기꺼이 데려다 주겠소."
"나중에?"
젬마는 살짝 미간을 모으면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똑바로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잿빛눈이었다. 강철처럼 싸늘하고 어렴풋이 겁을 주는 듯한 눈길. 젬마는 불길한 예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말하는 뜻을 잘 모르겠는데요. 저는…"
"조금 전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을 테지? 내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고 생각하나?" 젬마의 둥그렇게 뜨여진 녹색 눈을 조소하듯이 마주 보면서 그는 시트 벨트를 끌렀다. "그렇게까지 자신 있게 말하다니."
남자가 손을 뻗어오는 것을 보며 젬마는 몸을 틀었지만 시트벨트가 그 움직임을 방해했다. 두 팔을 움켜잡은 손가락은 무쇠처럼 단단하다. 그의 얼굴이 다가왔을 때, 에프터세이브 로션의 내음이 살짝 풍겼다. 그녀의 팔을 잡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한쪽 손은 몸과 시트 사리에 눌려 옴쭉 달싹할 수가 없었다. 다른 쪽 손으로 그의 얼굴을 할퀴려고 했지만, 그것도 금방 눌려 버리고 말았다.
"반항하지 말아요. 그래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테니까."
"놓아요!"
그것은 단호하면서도 위엄에 가득 찬 명령이 되어야 하는데, 목소리의 떨림은 아무래도 감출 길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거예요!"
"당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 그것이지. 이 버튼을 누르면 의자는 뒤로 젖혀지지. 이래도 당신은 큰소리를 칠 셈인가?"
그렇구나!-이것은 과신을 경고하는 교훈이었던 것이다. 안심이 되는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제발 어서 손을 놓아주세요." 그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남자는 입을 삐죽거렸다.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알게 해주지. 이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경험인걸. 당신은 그 비트(beat)족 같은 옷차림 밑에 여성적인 매력을 숨기고 있어. 그것을 발견한 것은, 뜻밖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개봉하는 즐거움에 비길 만한걸."
강철같은 손이 시트 벨트의 버클을 끄르기 시작했다. 그가 등을 쓰다듬고 있다. 그는 진심인 거야! 틀림없는 제정신에서야! 그것보다 곤란한 것은, 그녀의 몸이 금방 반응을 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이 사람은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그만둬 주세요." 젬마는 이번엔 허세를 부리는 것을 그만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잘 알겠어요. 당신의 말 대로예요. 그러니, 제발 손을 치워주세요."
남자는 이내 손을 움츠렸다. 그러고는 시트에 기대어, 젬마가 옷매무새를 고치는 것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에겐 이런 게 필요했던 거요. 당신이 얼마나 세상물정을 모르는 풋내기 아가씨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해주기 위해서는, 당신같이 어리고 철없는 아가씨들이 세상이라는 것을 배우고 익히기까지는 많은 어려운 일을 겪어야 해요. 간혹 목숨까지 빼앗기는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하지만 당신은 저를 태워 주었어요."
"태워 주는 녀석이 있는 한 히치하이크를 하는 사람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건 맞아요. 다만 내가 당신을 태운 것은,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불행한 사고로부터 구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저는, 지금 당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사의를 표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아니. 다만, 기억해 준다면 그것으로 족해요. 지금 당신은 여기에 목을 졸리어 뉘어졌을 가능성도 있어요. 사람을 겉보기만으로 판단하지 말아요. 그것은 너무나 위험해요."
"당신의 말이 옳아요." 연기를 공부한 것이 이런 때 소용에 닿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가 얼마나 나의 감각을 뒤흔들어놓았는가는 절대로 알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젬마는 미소를 지으면서 가볍게 어깨를 움츠렸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어요. 점심을 먹으러 간다는 이야기는 아직 유효한 건가요?"
남자는 한참 동안 젬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묘한 표정이 그 얼굴에 떠올랐다.
"당신은 엔간한 일에는 좀처럼 두 손 들지 않을 사람이군. 그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몸을 일으키자, 시동을 걸고 시트벨트에 손을 뻗었다. "점심식사라."
남자가 차를 후진시켜 다시 길로 나서는 동안, 젬마는 잠자코 있었다. 묘하게도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두 팔에는 아직 그의 단단한 손의 감촉이, 그리고 입술에는 키스의 감촉이 남아 있다. 젬마는 요 몇 년이래 처음으로, 옷차림에 무관심했던 것을 후회했다.
<비트족>이라고 그는 말했다. 어지간히 시대에 뒤떨어진 표현이긴 했지만 칭찬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다. 평소에 그가 관심을 갖는 여자는 빛이 바랜 진 바지나 다 낡아빠진 아노락 같은 건 입지 않을 테지. 그녀들은 최신 유행의 헤어스타일에 빈틈없이 화장을 한, 아름답고 세련된 여성들일 테지. 다른 남자들이 선망의 눈으로 황홀하게 쳐다볼 만한 미인들뿐일 테지.
그런데 나는 이게 무슨 꼴이람? 이 남자는 방금 진짜로 나를 덮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동기야 어디에 있든 간에,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퍼브는, 반대방향으로 5킬로 정도 간 곳에 있었다. 자그마한 술집이었지만, 건너다보이는 테이블 위의 음식을 자못 식욕을 돋우었다.
카운터 옆에 세워 놓은 메뉴를 살피고 있는 동안, 젬마는 자기들이 주목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걸맞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한 쌍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 180센티가 훨씬 넘는 키의 로건 델 포드는, 손님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메뉴를 들고 있는 손은 가늘고 길었으며, 짧게 깎은 손톱은 깨끗이 손질되어 있었다. 웨하스(wafers)과자처럼 얄팍한 금시계가 새하얀 커프스버튼 아래, 검고 부드러운 털에 뒤덮인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 그 손이 바로 반시간 전에 나를…,
그 기억에 젬마는 몸을 떨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하다. 그는 나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뿐이니까. 이제부터의 나는, 한시라도 빨리 떨쳐버리고 싶은 귀찮은 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두 사람은 구석의 테이블에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아노락은 이곳에 들어올 때 벗어 놓았지만, 그제야 비로소 젬마는 자기가 입고 있는 체크무늬의 검정 셔츠의 소맷자락이 찢어져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감출 수는 없다. 로건 델 포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을 테지. 별로 개의치 않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나는 나다. 무슨 일이고 그의 생각대로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
식사 중에 그는 이야기를 하려고도 하지 않고, 무슨 일인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싶었다. 커피가 날라져 왔을 무렵에야 비로소 젬마의 존재가 생각났는지, 그는 의자 등에 기대고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분은 좋아졌소?"
"이제 배가 고프지 않느냐는 뜻이라면, 대답은 예스예요."
미소가 남자의 입술에 떠올랐다. "나는 사과할 생각은 없어요."
젬마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첫눈에, 어떤 경우에도 사과하는 법은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는걸요. 저 때문에 예의를 꾸밀 것까지는 없겠지요."
"말재주가 비상하군. 고무공처럼 잘도 튕겨오는걸."
"풀이 죽었을 걸로 생각했나요? 유감이지만, 저는 그렇게 칭찬받을 만한 아가씨는 아니거든요."
"한번 진짜 호된 맛을 보게 하는 게 좋을 뻔했는걸. 당신은 경험에서 배우려고는 하지 않나?"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경험이라면, 저는…" 젬마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해요."
"확실히 그렇군." 남자는 솔직히 그렇게 말함으로써 젬마를 놀라게 했다. "나는, 조금 역할에 깊이 빠져드는 경향이 있지."
그 말을 듣는 순간, 기억이 났다. 로건 델 포드. 그렇다! 금방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는 작년에 뮤지컬 <쿨 제너레이션(coolgeneration)>을 제작하였다. 연극학교의 친구들은 모두-젬마 자신을 포함해서-훌륭한 무대라고 생각했지만, 일반에겐 인기가 없었는지 관객이 없어서 7주만에 공연은 중지되고 말았다. 재정 면에서는 상당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젬마가 아는 한에서는, 그것은 델 포드의 첫 실패작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델 포드는 지금 신작인<키스 미 케이트(kiss me kate)>의 제작을 위한 자금을 준비하고 있는 단계라고 한다.
젬마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렸다. 별점에 나타난 오늘의 운수는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일까? 제작자는 보통 사소한 역을 배정하는데는 관여하지 않지만, 추천해 주는 정도의 일은 가능하다. 오디션(audition)을 받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다.
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오늘 자신의 태도가 그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에 대한 시비(是非)는 어쨌든 간에, 이제부터라도 좀 더 말에 조심하기로 하자. 젬마는 아양을 떠는 듯한 미소를 띠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너무 고집을 부렸다고 생각해요. 잊어버리기로 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도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시 한번 맨 처음부터 시작하자는 건가?"
"네."
"그거 괜찮군."
그는 의미심장하게, 마치 물건을 감정하는 듯한 눈길로 젬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신에게 한 가지 제안이 있어요. 아!-물론 이상한 제안은 아니지. 이를테면 아르바이트지. 나는 이번 주말에 나의 피앙세 역할을 해줄 사람을 구하고 있어요."
"뭐라고요, 제정신이세요?"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맑은 제정신이지." 로건은 금빛 담배 케이스를 꺼내 젬마에게 권하고,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자 자기담배에 불을 댕겼다. "물론,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오. 쌍방이 만족할 만한 계약을 맺을 생각이지."
"모를 일이군요. 어째서 가짜 피앙세 같은 것을 고용할 필요가 있나요?"
"간단히 말하면 이런 거요. 나는 지금, 다음 무대에 올릴 예정인 쇼의 후원자를 찾고 있어요. 연극의 세계에서는, 후원자는 천사 같은 존재거든. 이번 주말, 나는 천사 가브리엘을 내 손으로 붙잡을 작정이오.-운이 닿는다면 말이오. 그 남자는 최근 25세 연하의 여자와 결혼했지. 그는 자기 아내와 내가 이전에 교제하던 사이임을 알고 있어요. 그들 두 사람이 만나기 이전의 이야기지만. 그는 대단히 질투가 많고 독점욕이 강한 남자거든. 만일 내가 이번 주말에 연인을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그는 질투심으로 미쳐 버려서, 쇼의 후원 같은 건 당치도 않은 일이 되어 버릴 가능성이 있어요. 알겠소?"
"네."
젬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당신 주위에는 기꺼이 도와줄 만한 여자가 얼마든지 있을 텐데요. 오늘처음 만난 나에게 그런 일을 부탁하지 않아도."
로건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녀들은 댓가로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의 것을 요구하기 십상이거든. 당신이라면 순수하게 비즈니스로서 계약을 맺을 수가 있지." 그는 다시 한번 젬마를 훑어보았다. "물론 약간은 손을 보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이를테면 옷차림이지-머리도 손질해야 되겠고."
"그거 고맙군요." 젬마는 싸늘하게 말했다. "제가 그 역할을 하리라고 단정 짓는 건 아직 이르지 않을까요? 저는 받아들인다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당신은 할거요. 놓치기에는 아까운 이야기니까. 일자리를 찾기까지 한두 주일은 지낼 수 있을 만한 보수를 지불하겠소. 당신이 최적임자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 판에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릴 수는 없지. 적당히 손을 보면, 그 역을 해낼 만한 외양은 갖출 수 있겠지. 고작 이틀간의 일이오. 그 이틀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제각기의 길을 가는 거요."
그의 말은 옳았다. 젬마는 혐오감을 억누르면서도 그것을 인정했다. 이것은 놓치기에는 아까운 이야기다. 로건이 댄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무대 위에 나가기 전과 같은 오싹오싹하는 긴장감을 느꼈다. 만일 이 주어진 역할을 훌륭하게 해치울 수 있다면, 오디션까지의 목적지를 반 이상 간 거나 진배없다. 그것을 조건부로 이 일을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젬마는 황급히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로건 델 포드는 그런 식으로 강요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다. 차라리, 내가 여배우라는 것을 숨기고 먼저 나의 연기력을 인상 깊게 심어 주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만일 당신이 제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해보겠어요." 젬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으면서 덧붙였다. "실제로, 그 외에 달리 할 일도 없으니까요."
그 눈에 언뜻 떠오르는 표정으로 보아서, 로건은 이미 그런 제안을 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하고 있는 듯싶었다. 그는 불을 막 댕겼을 뿐인 담배를 유리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일어섰다.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면 빨리 출발하기로 하지. 바쁜 오후가 될 것 같군."
2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시간은 이미 세 시가 지나 있었다. 로건은 막 바로 킹 스 로드로 향했고, 길가에 차를 세우자 젬마를 2,3백 미터 앞에 있는 자못 고급스러워 보이는 부티크로 데려갔다.
부티크의 이름은 엘리자베스라고 했지만, 멋지고 매력적인 빨강머리의 여주인은 예상과는 달리 샐리 로저스라는 이름이었다. 그녀와 로건은 오랜 친구 사이인 듯 친근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간단하게 두 사람을 소개하고, 마찬가지로 간단하게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샐리는 미소하면서 젬마를 살피듯이 한번 슬쩍 훑어보았다.
"틀림없이 잘될 거예요. 몇 시까지 준비하면 되나요?"
"내일 오후면 돼요."
로건은 극히 사무적인 얼굴을 젬마 쪽으로 돌렸다. "오늘밤은 인터콘티넨탈 호텔에 당신의 방을 잡아놓겠소. 내일 오후 세 시에 로비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늦지 않도록 해요."
젬마는 과장되게 절을 해보일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쳤다. 그렇다면 연기는 내일 오후부터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천천히, 맡은 역의 분위기를 익히도록 하자.
두 사람은 상황설정에 관해 의논했다. 젬마에게 어렴풋이 남아 있는 햄프셔 사투리로 해서 <가족>은 윈체스터에 있는 것으로 했다. 보스턴 엔터프라이즈라는 연극 사무실-이것은 실제 하긴 하지만-의 비서라는 직책을 통해 로건과 알게 되어, 3개월 전에 약혼한 것으로 하고, 적어도 어려운 일은 없다. 너무 간단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로건이 제시한 2백 파운드라는 금액을 생각하면 누워서 떡먹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번 일을 위해 그가 갖추어 줄 의상들도 나중에는 고스란히 내 것이 될 테니 더욱 그렇다. 만일 오디션까지 받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지금은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장래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샐리는 이해하는 것도 빨랐지만, 행동에 옮기는 것도 빨랐다. 로건이 돌아가자마자, 가게를 조수에게 맡기고, 무엇보다도 먼저머리 손질을 하기 위해 젬마를 미용실로 이끌고 갔다.
"확 달라 보일 정도로 멋지게 해주세요." 샐리는 재빨리 말했다. "한 시간 있다가 마중하러올게요. 다른 일은 그때부터예요."
젬마는 거울 앞에 앉아, 젊은 남자 미용사가 길고 묵직한 머리를 들어올려 이리저리 스타일을 바꾸어 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각오를 하고 있었으므로 미용사가, "자르는 게 좋겠어요. 쇼트커트가 이상적이에요"라고 말했어도 그녀는 그리 충격을 받지 않았다.
"아니오. 쇼트헤어가 대유행인 것은 알고 있지만, 전 긴 편이 좋아요."하고 딱 잘라 말했다.
"길면 얼굴의 윤곽이 살아나질 않아요. 지금도 멋있지만, 머리를 가볍게 하면 최고의 미인이 될 수 있겠어요."
완성된 헤어스타일은 좋은 선전이 될 테니까 전혀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최고의 미인이라니, 과장이 너무 지나치다고 젬마는 생각했다.
"쇼트커트는 싫지만," 그녀는 약간 망설이면서 말했다. "조금이라면 잘라도 괜찮아요. 조금 만요."
"물론." 미용사는 신이 나서 가위에 손을 뻗었다. "필요한 만큼 만요."
그가 말한 ‘필요한 만큼’은 젬마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약 50분 후에 자기 얼굴을 거울에서 보았을 때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의 생각이 옳은 것 같았다. 귀밑에 이르는 길이로 과감하게 잘라서, 약간 둥글게 감아올리듯 마무리를 했다. 앞머리도 눈썹 위에서 똑바로, 가지런하게 손질했다. 현대판 클레오파트라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 헤어스타일이 자아내는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기분까지도 달라져 있었다.
샐리 로저스도 마찬가지로 놀라움을 표시했다.
"로건은 틀림없이 당신을 몰라볼 거예요. 정말 멋지군요. 옷을 입혀 보는 게 즐겁겠어요."
아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군, 하고 생각하며 젬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샐리를 탓할 마음은 없었다. 젬마 자신, 새로운 자신에 대해서 매우 만족했다.
그 뒤로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엘리자베스의 탈의실에서, 샐리가 최종적으로 이거라고 결론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옷들을 입어 본 것일까? 몇 집 앞에 있는 상점에서 란제리도 배달되었고, 몇 켤레의 구두와 거기에 맞는 핸드백도 준비되었다.
호텔에 도착한 것은 여섯 시에서 15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핑크빛 슈트에 그레이의 핸드백과 구두라는 차림으로 로비를 가로질러 가면서, 젬마는 이미 연기가 시작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프런트의 젊은 남자가 던진 미소도 그녀의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었다. 젬마는 마주 생긋 웃어 보이고는, 새로운 슈트케이스를 나르고 있는 보이의 뒤를 따라갔다. 방에 도착하면 보이에게 주어야 하는 팁의 액수에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 주말이 지나면 당분간 돈에는 불편이 없을 것이고, 운이 좋다면 좀 더 오랜 기간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갖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널찍한 침실에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젬마는 어딘지 모르게 아쉬움을 느꼈다. 모처럼 멋을 부렸는데 아무데도 갈 데가 없다니.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혼자만의 길고 긴 밤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뿐.
젬마는 거의 무심코 수화기를 집어 들어, 호텔의 서비스 담당을 불러 어디든 대극장에서 상연중인 뮤지컬의 좌석 하나를 구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입장료의 액수를 듣고서도 그녀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쇼는 여덟 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옷을 갈아입고 가벼운 식사를 할 만한 시간은 있을 듯싶었다. 가는 길에 프런트에 들러 입장료 대금을 지불하기로 하자. 그것까지 로건 델 포드에게 부담시킬 수는 없다.
젬마는, 교외에서 지낼 주말을 위해 샐리가 골라 준 옷 중에서, 라일락 빛의 날아갈 듯 가벼운 크레이프지의 드레스를 선택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지만, 이 아름답게 치장한 여자가 오늘 아침 허름한 옷차림으로 히치하이크를 하고 있었다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내일 로건의 얼굴을 보는 것이 몹시 기다려졌다.
<이 판에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릴 수는 없지.>라고 그는 분명히 말했다! 젬마는 이미 전혀 다른 개성을 몸에 지니기 시작하고 있었다. 자신감이 모든 것을 변하게 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누구라 해도 나를 바보취급 못하게 할 테야!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택시로 극장으로 향했다. 도착한 것은 개막 10분전이었다. 그녀의 좌석은 2층 정면의 맨 앞줄에 있었다. 군데군데에 있는 따로 떨어진 좌석을 제외한다면, 객석은 만원이었다. 불이 꺼지고, 오케스트라가 개막을 알리는 연주를 시작했다. 젬마는 느긋하게 좌석에 앉아, 관객으로서의 순수한 환희에 젖어들었다.
제 1부는, 제 2부에 대해 강한 기대감을 갖도록 만든 채 막을 내렸다. 관객들은 모두가 열광하고 있었다. 젬마는 뭔가 마시고 싶었지만, 바의 혼잡을 생각하자 거기까지 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1층의 관객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젬마는 이렇게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그들이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는 더욱더 그랬다. 이를테면 왼쪽에 있는 저 남자-그는 극장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심각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기서도,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면 통로 쪽의 좌석으로 돌아온 몇 사람이 젬마의 시야를 가렸다. 다시 시야가 열렸을 때는 그 남자는 옆으로 향해서 이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두 줄 앞에 앉아 있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금발이, 움직이는 서슬에 불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그녀는 동반자에게로 얼굴을 돌리고, 그 동반자가 뭔가 우스운 이야기를 한 듯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고 있었다. 그 동반자인 남자에게로 눈길을 돌린 순간, 젬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밤을 보내는데 로건 델 포드와 같은 장소를 택하다니, 이 무슨 우연의 일치람. 게다가 로건 쪽은 오늘 갑자기 결정한 것은 아닌 듯싶었다. 정면 통로 쪽의 좌석은 사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잡을 수 없으니까.
로건도 웃고 있었다. 싸늘하게 다듬어진 얼굴이 저렇게 활짝 웃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떡 벌어진 어깨에 딱 맞는 연한 잿빛 슈트를 입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의 주위에는 여자가 득실거릴 정도로 많으리라는 것은 쉽사리 짐작이 갔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렇게도 우울해지는 것일까. 우리는 다만 비즈니스의 계약을 맺은 것뿐인데.
훌륭한 무대였는데도 불구하고 젬마는 쇼의 후반은 전혀 즐길 수 없었다. 공연이 끝난 뒤에 택시를 잡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었고,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혼자 타는 것도 무서워서, 그녀는 소형택시를 예약해 두었다.
사람들을 헤치며 자신이 예약한 차를 찾으려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그녀는, 맞은쪽 인도를 걸어가고 있는 로건과 그 동반자를 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로건은 고개를 돌려 똑바로 그녀 쪽을 쳐다봤지만, 그것이 젬마라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로건은 그녀의 얼굴에 1,2초 정도 눈길을 멈추었다가, 길을 건너 사라지고 말았다. 금발의 여자가 그 팔에 매달려 있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젬마는 약간 기분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 내일이 있는 것이다. 로건은 오늘 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의 일을 기억해 낼까? 그의 놀라는 얼굴을 보는 것이 즐거움으로 기다려진다.
이윽고 예약한 소형택시를 찾았고, 젬마는 열한시에 호텔로 돌아왔다. 이대로 자버린다는 것은 재미없을 듯싶어서 아래층의 바에라도 내려갈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늦은 시간에 여자 혼자서 술을 마시면 트러블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그만두었다. 역시 자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빨리 자면 그만큼 빨리 내일이 오게 마련이다. 그녀는 로건이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오는 순간이 안타깝게 기다려져 견딜 수 없었다.
오전도 그러했지만 오후가 되어서도 시간은 더디게 지나갔다. 두 시에 그녀는 준비를 끝마치고 핑크빛 슈트를 입고 기다렸다. 룸서비스에 커피를 주문하고, 라이팅데스크의 서랍에 있던 잡지를 훌훌 넘기면서 긴 40분을 보냈다.
세시 10분전이 되었을 때, 젬마는 가죽 슈트케이스와 그레이의 핸드백을 들고 들뜬 걸음걸이로 로비에 내려갔다. 오디션은 지금이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이 주말에 로건에게 주는 인상이, 나의 무대로의 길을 열어 주는 계기가 될는지도 모르니까 세 시 20분이 됐는데도 로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젬마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는 생각을 바꾼 것일까? 간밤에 동행했던 여자에게 이 역할을 부탁한 것일까-어쩌면 진짜 계약을 맺었는지도 모른다. 그 두 사람은 아주 친근한 사이로 보였으니까.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일자리를 찾아 방황하게 될 것이다. 슈트케이스에 가득 들어 있는 새 옷은 계약을 취소하는 댓가로서는 그리 나쁘지 않지만. 설마 그는 나를 이렇게 언제까지나 마냥 기다리게 할 생각은 아닐 테지.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욕심을 잔뜩 휘갈겨 쓴 긴 편지를 그에게 보내야지. 그보다는 전화를 하는 편이 효과적일까? 자택 전화번호가 전화번호부에 실려 있지 않다는 것은 조사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사무실 전화라면 알 수 있겠지.
그렇지만, 그런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 자신 잘 알고 있었다. 만일 로건 델 포드가 바람을 맞힌다 해도, 나는 웃으며 그냥 참아 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댓가로서 오디션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지. 그렇게 됐을 경우 자기가 여배우라고 고백하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만, 어렵기로 말하자면 어떤 상황일 때라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맞은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균형이 잡힌 체격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 젬마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에 쫓기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강한 것은 안도감이었다. 로건은 로비를 휘 둘러보고 있었다. 젬마는 일어서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로건은 금방, 여기 있었군,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어, 어젯밤의 연극은 재미있었나? 당신은 분명히…" 그는 갑자기 말을 중단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젬마?"
그의 입에서 나오면, 그 이름은 다르게 들린다. 어제도 그랬다. G의 발음이 부드럽기 때문이다. 이처럼 체격이 당당한 남자와 부드러운 G의 발음-그 언밸런스가 왠지 젬마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제가 마음에 든다는 이야긴가요? 청구서를 보고 깜짝 놀라지나 말아 주세요. 틀림없이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액수일 테니까요."
"그만큼의 가치는 충분히 있지. 당신은 마치…, 아니, 어떻게 형용해야 좋을지 모르겠는걸. 샐리의 실력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설마 그녀가 마술을 부릴 줄 아는 할망구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
젬마는 웃었다.
"하룻밤 자고 났는데도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은 걸 보니 마술을 부린 건 아닌 것 같군요. 당신, 아마 안 오는가보다고 생각했어요."
"길이 붐벼서. 슈트케이스는 한 개뿐?"
"이틀 밤 지내기엔 충분하지 않겠어요?"
"그거야 생각하기 나름이지. 길을 하나 건너가는 데도 옷장 안의 옷을 몽땅 가져가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것이 제 옷장 안에 있는 것 전부예요. 우연히도 모두 당신이 사준 거지만요. 너무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샐리에겐 필요한 것 만이라고 말해 두었어요. 그녀는 그런 것은 다 알아서 해줘요."
로건은 가죽 슈트케이스를 집어 들자, 다른 한 손은 젬마의 팔꿈치에 대면서 입구 쪽으로 향했다.
"입던 옷은 어떻게 했지?"
"샐리에게 맡겨 두었어요. 나중에 필요하게 되리라 생각되어서요."
"어째서지? 내가 보기엔, 그 옷가지들은 수명이 다 된 것 같던데. 그런데, 그런 것들이 배낭 속에 많이 들어 있나?"
"갈아입을 진 바지 하나에 티셔츠 몇 장이지요. 그것뿐이에요. 요즈음은 새 옷을 살 만한 여유가 없었으니까요."
이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어머니에겐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에게는 이 일도 언젠가는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만일 오디션이 순조롭게 잘 되었을 때는. 그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문제를 타개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독립심이 필요한 때는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린, 어디로 가는 거예요?"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젬마가 물었다.
"세븐 오크스지. 운이 좋다면 차 마시는 시간까지는 도착하겠지. 세븐 오크스는 알고 있나?"
"아니오. 어렸을 적에 턴 브리지 웨일스에 잠시 동안 산 적이 있지만, 어떤 곳이었는지는 잊고 말았어요."
"당신의 양친이 이혼한 것은 언제지?"
"5년 전이에요." 젬마는 될 수 있는 한 냉정한 어조로 말하려 했다. "그렇지만, 신상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던가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로건이 물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할 기분이 아닌가?"
"그래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안 되나요?"
"물론 상관없지. 당신의 문제니까. 다만, 때로는 가슴에 꼭 묻어 두기보다는 확 내뱉어 버리는 것이 개운해지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 해도 아마 당신의 생각이 옳겠지. 당신은 나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있으니까 속마음을 털어놓을 정도로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겠지."
하지만 나는 당신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젬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나 알고 싶은지 몰라요!
로건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점점 그에게 이끌려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로건의 외모라든지 프로듀서라는 직업과는 관계가 없다. 그에겐 성숙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그는 완전한 어른이다. 내가 지금까지 사귀어 온 젊은 남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어제 짧은 순간에 벌어졌던 일을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대담무쌍한 점도 그의 매력 가운데 하나였다. 그럴 마음만 있다면 그는 어떤 일이라도 해치울 수 있으리라. 아아, 만일 다른 상황에서 그와 만났더라면!
차가 혼잡한 도심을 벗어나자, 로건은 길옆에 차를 세우고는 안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보석 상자를 꺼냈다.
"저 쪽에 도착하기 전에 이것을 끼는 게 좋겠어." 로건은 케이스를 열면서 말했다. "나중에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거요. 사이즈가 맞으면 좋으련만."
훌륭한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젬마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케이스에서 꺼냈다.
"만일 제가 이것을 잃어버린다면?"
"보험에 들어 있어요. 어쨌든 끼도록 해요."
젬마는 침착하지 못한 기분으로 그 말에 따랐다. 약간 꼭 끼는 감은 있지만, 딱 맞는다고 해도 좋았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을 가리자 다이아몬드는 찬란하게 빛났다. 그것은 지금까지 젬마가 몸에 지녔던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가장 값비싼 보석이었다.
"아름답군요. 하지만, 끼지 않고 넘어갈 수 있으면 더욱 고마우련만." 젬마가 말했다.
"유감이지만, 반지가 없는 약혼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거요. 잘 어울리는군, 전의 당신보다 새로운 당신 쪽이 오히려." 로건은 입을 다물고 젬마를 쳐다보았다.
짙은 녹색의 나무숲에 둘러싸인 그 집은, 시내에서 수 킬로 떨어진 켄트 주(州)의 시골에 있었다. 두 사람은 이내, 아름답게 꾸며진 응접실에 안내되었다. 테라스의 창으로는, 비에 씻겨 더욱 새파랗게 보이는 잔디로 뒤덮인 드넓은 정원이 보였다.
캐더린 파웰의 아름답지만 차가운 블루의 눈과 마주쳤을 때, 젬마는 소스라치게 놀라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어째서 로건은 사전에 귀띔해주지 않았을까?
"로건 델 포드가 열을 올리고 있는 상대는 필시 멋진 미인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예상이 맞았군요."
로버트 파웰의 말에는 약간 북부 지방의 사투리가 섞여있었다.
"열을 올리는 거로 말하자면, 당신도 그렇지요?"
캐더린은 남편의 팔을 잡자 응석을 부리듯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사실을 알고 있는 젬마의 눈에는 그런 아양 떠는 몸짓은 기만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먼저 차를 시작해버려서 죄송해요. 몇 시에 도착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우선 손을 씻도록 하겠어요?"
젬마에게 향한 캐더린의 눈에는, 거의 분노와도 같은 것이 떠올라 있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렇게 긴 여행은 아니어서 손은 그리 더럽지 않으니까요."
젬마는 일부러 시치미를 떼고 얼떨떨한 체해 보였다. 로건이 날카로운 눈길을 흘끗 던지는 것을 느꼈지만, 개의할 바 있느냐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
로버트는 자기 옆 좌석에 젬마를 앉게 했다. 그는 핸섬했으며 몸가짐이나 차림새가 단정한 남자였다. 나이는 50대 중반쯤 되었을까. 백발이 드문드문 섞인 머리는 이미 빠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로건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실업가로, 이미 충분히 재산을 모아 놓고 있어서 결혼을 기회로 은퇴했다는 것이다. 캐더린이 그 은퇴를 환영했는지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다. 남편이 언제나 집에 있게 된다면 당연히 행동에 제한을 받게 될 것이다. 하긴 간밤에 로건과 밀회하던 모습으로 보아서는 그다지 제한받고 있는 것 같지도 않지만. 로건과 캐더린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은 충동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젬마는 누를 길이 없었다.
로건의 직업이 직업인만큼, 화제를 연극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젬마는 찬스를 노렸다가 이렇게 말했다.
"우린 간밤에 <캐츠(cats)>를 보았어요. 훌륭한 무대였어요. 아직 보시지 않았다면 꼭 권하고 싶어요."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체 순진한 태도로 시선을 로버트에게서 캐더린에게로 옮겼다.
캐더린의 블루의 눈에 당황한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젬마는 심술궂은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곧 후회했다. 이런 행동은 자신을 그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될 뿐이다. 그보다도, 로건에게 일의 손서를 밝히도록 하는 것이 선결 문제다. 나는 그들의 부정한 행위를 거들기 위해서 주말을 헛되게 보낼 생각은 없다.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로건 쪽이었다. 그는, 젬마가 안내된 방의 여기저기를 감탄하며 둘러보고 있을 때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
"아깐 그게 뭐지!? 빈정거리는 건가?" 로건은 문을 꼭 닫자 거기에 기댔다.
"설마. 저는 고용되어 있는 몸인 걸요. 하지만, 사전에 일의 내용을 충분히 설명해 주기를 바랐어요. 그런 줄 알았다면 이런 일을 맡지 않았을 텐데. 저는 이것을 순수한 비즈니스의 이야기로 생각했었어요."
"그렇다니까."
"정말? 그럼 일석이조를 노렸다는 뜻인가요?"
"어떤 목적을 지녔든, 나의 자유지." 로건은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건 다르지요. 당신이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제 도움을 바라고 있는 것이라면."
로건은 잠자코 몇 초 동안인가 젬마의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말했다. "당신은 몇 살이라고 했지?"
"스물 둘이에요." 젬마는 로건의 버릇을 흉내 내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게 어떻다는 거예요.?"
"아니, 별로. 당신은 가끔, 같은 나이 또래의 여자들보다 어른스럽게 보일 때가 있어서."
그는 이야기를 슬쩍 돌리는데 아주 능한 사람이다. 앞으로는 각별히 조심해야 하겠는걸. 로건은 전혀 빈틈이 없다.
"당신이 사적으로 어떤 일을 하든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나와 상관없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말이 조금 지나쳤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뱉어 버렸으니 취소할 수도 없다. 많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그것은 그렇다 치고, 즐기면서 그 남편으로부터 많은 돈까지 우려내려 하고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주말만큼은 제발 연애소동을 벌이지 말고 사업에 전념했으면 하는 거예요."
다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로건은 젬마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알고 있겠지만," 그가 입을 열었다. "만일 어제 아가씨가 그런 투로 말했다면 가만 놔두지 않았을 거야. 당신이란 여자는…"
로건은 서서히 방을 가로질러 왔다. 그가 끌어안았을 때도, 젬마는 저항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이렇게 해주기만을 안타깝게 기다리며 바라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그에게 응했다. 그러자 로건은 깜짝 놀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캐더린 파웰만이 여자가 아니야. 그것을 증명해 보일 테야!
로건이 몸을 땠을 때, 젬마는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촉촉이 젖은 눈으로 로건의 잿빛 눈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군 그래. 어제의 당신은 벌을 받아 마땅한 풋내기 계집애였지. 그런데 오늘은…" 로건은 그녀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의 당신은 어느 모로 보나 성숙한 여자야! 무척 아름다운걸."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젬마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종잡을 수 없는 투로 말했다.
"물론."
젬마의 본능은 고개를 쳐들며 예스라고 외치고 있었다. 지금 연기하고 있는 역할의 성격에 걸맞게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기란 어지간히 힘들었다.
"그렇지 않을 거예요. 지금의 당신에겐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요."
로건은 젬마가 떨어져 가는 것을 굳이 제지하려고 는 하지 않았다. 그는 헤아리기 어려운 표정으로, 젬마가 옷매무시를 고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가 빤히 바라보고 있는 바람에, 그녀의 손가락은 떨리고 말았다. 나는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 해도, 로건이 껴안는 것은 실제의 젬마 홀트가 아니고, 상상의 세계에서 그려보는 약혼자다. 그가 나 따위에게 흥미를 가질 리 없을 테니까.
"당신의 말이 옳아." 로건이 불쑥 말했다. "간밤의 일을 약간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는 듯 싶구만. 문제는, 캐더린이 다소 성미가 까다롭다는 데 있지. 그녀와 나는 2,3 개월간 함께 살았소.-굉장히 즐거운 나날이었지. 하지만 좋은 일에도 반드시 끝은 오게 마련이지. 로버트는 알맞은 시기에 나타나 주었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서. 로버트는 캐더린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어요. 그녀가 갖고 싶어하는 것, 흥미를 나타내는 것은 모두 준다는 식이었지."
로건은 말을 중단하고 갑자기 심술궂게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만한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후원을 부탁하기 위해서는 캐더린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 둘 필요가 있거든."
"당신들 두 사람이 자기를 배반하고 있다고 로버트가 굳게 믿게 될 위험성도 있잖아요?" 젬마가 그렇게 말하자, 로건의 심술궂은 표정이 금방 조바심으로 바뀌었다.
"마치 싸구려 3류 영화의 줄거리 같군! 만일 캐더린에게 아양을 떨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무대의 경제적인 원조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런 짓도 불사할 생각이오."
"만일 당신이 아직도 그녀와 교제를 계속하고 있다면, 그녀의 남편에게 원조를 청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해요."
로건의 눈에 위험한 빛이 번뜩였다. "내가 그녀와 교제를 계속하든 안 하든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지. 당신은 자신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여기에 온 거니까. 알겠소? 미리 돈을 건네주어야 분수를 지키겠나?"
젬마는 그를 말끄러미 마주 쳐다보았다.
"만일 제가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렇게 되면 당신은 저를 여기에 붙들어 둘 수 없을 거예요."
"그렇겠지." 로건은 조금 있다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머물러 있을 거요."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고, 이윽고 젬마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지금 떠날 수는 없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로건에게 이끌리고 있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렇게 되면 잃는 것이 너무나 많다.
"알겠어요, 약속에 따르기로 하지요. 하지만 전 캐더린에게 아양까지 떨지는 않겠어요. 그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말이 지나쳤다고 생각했지만, 로건은 그것을 가볍게 흘려버렸다.
"연기는 로버트에 대해서 만으로도 족해요. 캐더린은 당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러려니 생각은 하고 있었다. 애당초 이것이 그녀의 아이디어라고 말했다 해도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캐더린은 내가 여기에 온 것을 그다지 기뻐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 중으로 그녀가, 자기는 젬마의 입장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접근해 올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렇게 되면 재미있는 대결이 되겠지, 하고 젬마는 생각했다.
3
그날 밤의 디너에는, 그밖에도 몇 명의 손님이 초대되어 왔다. 젬마의 옆자리에는 로버트와 동년배의 남자가 앉았으며, 그의 유일한 화제는 양봉(養蜂)에 관한 것이었다. 젬마는 예의상 미소하면서 이따금 맞장구를 치고 있었지만, 만일 오른쪽 자리의 로버트가 자주 이야기를 건네주지 않았다면, 디너가 끝날 때까지 참지 못하고 지루한 나머지 하품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캐더린과 눈이 마주쳤을 때 젬마는, 그녀가 일부러 이렇게 좌석배치를 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적어도 왼쪽 사람에 대해서는, 이번에 캐더린이 이쪽을 쳐다볼 땐 무척 흥미 있는 체해 보여야지.
식사 후에 모두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고, 곧 커피와 리큐르가 나왔다. 젬마는 로버트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브랜디 글라스를 손안에서 돌리면서, 방 맞은쪽 구석의 소파에 로건과 캐더린이 나란히 앉아 다정하게 속삭이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려했다. 저런 식으로 단둘이 있거나 하면 트러블의 원인이 될 텐데. 저 사람들은 그런 것도 모르나?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로버트도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그는 떨떠름한 투로 말했다.
"나의 아내와 당신의 피앙세가 이전에 서로 아는 사이였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요?"
"네, 로건에게서 들었어요." 로버트 자신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젬마는 대답했다.
"3개월간 동거생활을 했었다는 얘기도 들었나요?"
로버트는 젬마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보고 웃었다.
"나는 무슨 일이나, 내가 모르는 데서 진행되는 것을 싫어하거든요. 캐더린은 28세고 미인이니까, 과거에 남자가 없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요."
"캐더린은 알고 있나요? 즉, 당신이 그녀가 동거생활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아니,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거요. 그 사실을 알면 내가 떠나 버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요."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보는 바와 같이. 그리고 우리가 만났을 때는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끝나 있었던 거요. 그 후 일주일도 못되어 그녀는 로건의 곁을 떠났어요."
그것은 그녀가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로건이 두 사람 사이에 장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일까? 어느 쪽일까? 오늘 로건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무래도 나중 쪽이 맞는 것 같다. 그는 3개월이나 함께 살던 여자를 깨끗이 차버릴 수 있는 남자인 것이다. 그의 내면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여자가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할까? 젬마는 치밀어 오르는 절망감을 삼켰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34세의 남자가 수도승 같은 생활을 해왔을 리 없지요."
"앞으로 성실해 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뜻인가요?"
로버트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신뢰라고 생각해요. 로건은 당신에게 결혼을 신청했으니 캐더린에게 질투할 필요는 없어요."
젬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질투하고 있는 것이 겉으로도 그렇게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나에겐 질투 따위의 감정을 느낄 권리는 없는 것이다. 로건은 나에게 키스를 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좀 더 깊은 것이 되었을는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로건에게 있어서 나는 많은 여자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지금은 예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약간 우위에 있는 것뿐이다.
"당신의 아버지뻘 되는 나이의 남자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소." 로버트는 여전히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그가 다른 여자를 필요로 하지 않게끔 해주지 않으면 안 될 거요. 인간이란 단순한 거요. 기본이 되는 본능만 만족하게 된다면 방랑하려는 마음은 사라지게 되지. 보석을 자기 손안에 갖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찾아 밖으로 나설 필요가 있겠소?"
젬마는 웃었다. "당신은 생각보다는 그렇게 짓궂은 분이 아니군요."
"그런가요? 나를 좀 더 잘 알게 된다면 당신도 생각을 바꾸게 될는지 모르지요. 당신은 어디서 로건과 만났나요?"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그녀가 두려워하고 있던 질문이다. 로버트를 속이는 건 괴로웠다. 그렇지만 달리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젬마는 로건과 둘이서 꾸민 대로 될 수 있는 한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질문을 피하기 위해서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당신은 쇼의 후원을 해줄 생각인가요?" 젬마는 솔직하게 말을 꺼냈다.
"단도직입적이군요. 대개의 사람들은 좀 더 완곡한 표현을 쓰는데." 로버트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로건도요?"
"아니, 그는 예외지요. 그가 당신을 훈련한 건가요? 그렇지 않으면 원래가 직선적인 성격인가요?"
"빙 돌려서 말하는 건 원래 좋아하지 않아요. 당신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이제 슬슬 어느 쪽이든 결정해야만 한다는 말이군요."
로버트는 입을 다물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손에 든 브랜디 글라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 간단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지요. 나는 요전에 그의 무대를 후원하다가 한 재산 날렸어요."
"그의 첫 실패작이었지요."
"그럴 거요. 하지만 <키스 미 케이트>라고 해서 꼭 성공한다고는 장담할 수 없어요. 또다시 대실패를 할 수도 있는 거요."
"성공여부는 캐스팅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요. 보컬(vocal)도 그렇지만, 댄스 요원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거든요."
로버트는 깜짝 놀란 듯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당신이 연극에 정통한 줄은 몰랐어요."
"정통한 게 아니고요-흥미가 있어요. 그것뿐이에요." 그녀는 뒤가 켕겼지만 거짓말을 했다.
로버트는 납득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머리도 좋군. 로건은 행운의 사나이야."
"로건은 제가 자세한 내용까지 알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런 이야기는 그다지 하지 않거든요."
"그것은 어째선 가요? 그는 당신이 사업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나요?"
"네, 저어, 그런 것 같아요." 젬마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건 알 만해요, 나도 그러니까. 하지만, 당신이 다소 이해하고 있다고 해서 로건이 기분상해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의심을 갖게 하는 것이 싫은 것뿐이라는 말은 로버트에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버트가 이 대화의 내용을 로건에게 전한다면, 그는 수상쩍게 생각하기 시작할 테지.
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로버트는 친구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긴 하지만, 이번 결혼에 대해서는 모두가 그다지 찬성하고 있지 않은 듯한 인상을 젬마는 받았다. 나이 차가 너무 난다는 것이 모두의 걱정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대단한 부잔 걸요. 젊은 여자에게 있어선 대단한 매력임에 틀림없지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아주 멋진 분인 걸요." 젬마는 그렇게 대꾸했다.
"아아, 그렇고 말고요. 물론 그렇지요.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이에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무리 그렇다 해도-젬마는 마음속으로, 지겹다는 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간밤의 일을 알게 된다면, 그 의심은 더욱 깊어질 테지. 만일 로버트 자신이 알게 된다면 캐더린과 로건은 어떻게 될까? 로버트는 조급한, 게다가 무자비한 수단을 쓰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 젬마는 생각했다.
로건이 젬마 곁에 온 것은 열한시가 지나서였다.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젬마 옆에 앉았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로버트와 아주 열심히 이야기를 하더군. 무엇에 관해서 이야기했지?"
"당신에 관해서요. 당신이 다른 여자와 다정하게 지낸다고 해서 일일이 신경 쓸 건 없다고 로버트가 충고해주었어요."
"제법 쓸 만한 충고라고 할 만하군." 로건은 조금도 유쾌한 것 같지 않았다. "그밖에는?"
젬마는 의자 등에 기대면서 사교적인 웃음을 띠었다. "저는 당신의 약혼자지 리포터(reporter)는 아니에요. 저는 로버트가 좋아졌고, 아마 그도 제게 호감을 갖고 있나 봐요. 우린, 그러한 기반 위에서 이야기를 한 거예요."
"당신은 고용된 몸이오. 그 2백 파운드가 탐이 난다면 주제넘은 참견일랑 집어치워요." 로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2백 파운드를 필요로 하고 있는 이상으로 당신은 저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로버트는 예의 주자에 관해서 아직 결심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전에 실패했던 경험이 있어서, 신중하게 된 게 아닐까요?"
그의 턱이 굳어지는 듯했다. "당신은 본격적인 조사에 나선 모양이군."
"로버트는 제가 당연히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가 신중하게 몸을 사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조금 망설이다가 젬마는 이렇게 덧붙였다. "캐스팅이 가장 중요하다고, 로버트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캐스팅은 중요하지. 연출과 맞먹을 정도로." 그는 바야흐로 완전히 분노하고 있었다. "당신 쪽에서 그 화제를 꺼낸 건가?"
"네." 부정해 봤자 소용이 없기에 젬마는 솔직히 시인했다.
"누가 그런 걸 허락했지?"
"허락을 받아야 하는 줄은 몰랐는걸요.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말아요, 로건. 당신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에서 그랬을 뿐이니까요."
"그렇다면 그런 짓은 더 이상 하지 말아 줘요. 당신은 다만 약혼자로서의 역할을 해주면 되는 거요."
"알겠어요." 젬마는 재빨리 입을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무서운 얼굴을 해선 안 돼요, 달링! 우린, 구경거리가 되고 있어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캐더린을 위시해서 방안의 모든 사람이 무슨 이유에선지 두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다.
로건은 똑바로 젬마의 눈을 응시했다.
"나중에 만나요."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 자주 놀라게 되겠군요." 젬마는 웃었다.
"두려울 건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런 말을 듣고도 그녀는 태연했다. 나의 방문에는 열쇠가 있다. 그것을 돌려 잠그기만 하면 안심이다. 젬마는 다시 웃으면서, "충분히 자신이 있는 걸요."하고 빈정거렸다.
"보란 듯이 다정한 사이임을 과시하는 건 그쯤 해두지 그래요, 두 양반."
로버트가 브랜디가 든 디캔터를 들고 다가왔다. "로건, 한 잔 더 하게나, 오늘밤은 운전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로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그만두겠어요, 이미 너무 마셨으니까."
로버트는 알 만하다는 얼굴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런가. 자기의 적량은 자신이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무리하게 권하지는 않겠네."
젬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버트는 우리가 당연히 밤을 함께 지낼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누군가가 로건의 곁으로 다가와 무대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으므로, 젬마는 화장실에 간다고 하면서 일어섰다. 잠시 한숨을 돌리고 싶었기 때문에, 그녀는 홀을 가로질러 도서실로 들어갔다.
안쪽 벽에 금테두리를 한 거울이 걸려있었다. 부분 조명의 부드러운 불빛을 등 뒤에 받고 있는 젬마의 모습이 그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넥 라인이 깊이 팬 드레스는, 살갗과 마찬가지로 크림 빛이다.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서 검은 머리칼은 젖은 듯 윤이 흐르며, 속눈썹이 짙은 눈은 시냇물처럼 맑았다.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젬마는 일순 생각했지만, 그것은 정말 한순간의 일이었다. 이렇게 멋지게 변신해 버린 자신을 보니 뭔가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허용된 시간이 이번 주말까지 뿐이지만, 최대한으로 그것을 활용하기로 하자.
젬마가 생각에 잠겨 마냥 그 자리에 서 있는데, 캐더린이 불쑥 들어왔다.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무얼 하고 있는 거지요?"
"좀 생각을 하느라고요." 젬마는 몽상에서 깨나,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쓰면서 대답했다.
"생각한다기보다는 소원을 빌고 있었다고 말하는 게 옳지 않을까요? 로건이 어디서 당신을 주워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주말이 지나면 당신은 당장 버림받는 신세가 될 거야!"
"로버트가 쇼를 후원하기로 결정하고 나면 당장 그렇게 될 테지요? 하지만 그가 이번 주말에 결심을 하게 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어요."
"물론 결정할 거예요, 그렇게 하게 만들 테니까."
"그렇게 될까요? 당신의 남편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만큼 어리석지 않아요."
"당신이 무얼 안다고 그러는 거지요?"
"당신이 남편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을 뿐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만일 당신이 로건 쪽을 택할 거라면, 그에게 매달리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일까요?"
"당신은 좀 주제넘구만." 캐더린은 눈을 번뜩였다.
그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로건과 캐더린의 일에 말려들고 만 것이다. 관계없다고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요? 당신의 주인에게 있어서 나는 로건의 약혼자예요. 당신은 주인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셈인가요?"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로건이 당신의 간섭을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을걸요."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겠어요. 그가 내릴 벌을 말이에요."
젬마는 일부러 도발하려는 듯이 말했다. 자신의 힘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캐더린의 태도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로건은 틀림없이, 그런 일에는 능숙할 테니까요. 당신이 아직 그를 못 잊어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누구라도 그에겐 정신을 못 차리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역시 당신은 침착해야 할 때에는 침착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로버트는 훌륭한 사람이고, 당신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믿고 있어요. 그를 실망시켜서는 안 돼요."
"그럴 생각은 없어요!" 캐더린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당신도 로버트를 실망시키지 않기 바라겠어요!"
"저는 그를 상처 입히거나 하지는 않겠어요. 당신이 아직 로건과 개인적으로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로버트가 알았을 때는, 그의 편이 될 생각이에요."
캐더린은 할말을 잊은 듯 잠시 잠자코 있었다.
"밉살스러운 사람이군!"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야!"
그렇겠지, 하고 젬마는 생각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로건은 조만간에 이 말다툼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캐더린이 당장 보고할 것이 틀림없으니까. 그 두 사람은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 캐더린이 영향력을 갖고 있는 건 확실한 사실이지만, 이번 투자문제에 관해서는 로버트는 자신의 생각대로 밀고 나갈 것이다. 로건이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다.
그날 밤에 손님으로 머무른 것은 로건과 젬마뿐이었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 로버트는 자기 전에 한잔 어떠냐고 젬마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녀가 피곤하다면서 거절하자 쾌히 받아들였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내일은 맑겠다나 봐요. 수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따스해질는지 몰라요. 수영복을 갖고 오지 않았다면 캐더린에게 빌면 돼요. 그럼 잘 자요, 젬마. 로건이 당신과 계약을 맺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로버트는 농담 삼아 한 말이겠지만, 그 말은 몹시 빈정거리는 것으로 들렸다. 애정이 깊은 피앙세라면, 로건에게 굿나이트의 키스를 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의 매서운 눈빛이 젬마를 뒷걸음질치게 만들었다.
침대 곁의 스탠드는 불이 켜져 있고, 모포와 시트는 개켜져 있었다. 메이드는 부드러운 검정 공단 잠옷을 서랍에서 꺼내 베개위에 확 펼쳐 놓았다. 이것은 샐리가 꼭 입으라고 권했던 것이다. 그것이 소용없게 된 것이 분했다. 그래, 확실히 그렇다, 로건과 나와의 사이에 미래는 없으니까. 그는 목적을 이루고 나면 떠나갈 테지.
문을 잠그고 났을 때 젬마는 열쇠가 없어진 사실을 알아차렸다. 근처의 바닥을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고의로 그것을 가져간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하녀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로건밖에 없다. 구멍을 응시하면서 젬마는 혐오감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를 기다렸지만, 이 두근거리는 가슴은 그 어느 쪽 감정과도 관계가 없는 듯싶었다. 나중에, 라고 로건은 말했지만 진정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문제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소동이 일어나겠지만 아래층으로 내려가 스페어 키를 빌든지, 그렇지 않으면 로건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딱 거절하든지 두 가지 중 하나다. 긴 안목으로 본다면 제 2의 방법이 좋겠지만, 위험할 것은 분명하다. 만일 그가 얌전하게 물러가지 않는다면?
젬마는 스탠드를 켜놓은 채 더블 침대의 한가운데로 파고들어, 양팔을 커버 위로, 몸에 붙이듯이 해서 단정하게 뻗었다. 마치 산 제물 같군. 그녀는 우스꽝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하고 기다린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다. 마음을 놓고 느긋하게 잠들면 될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정말 잠이 들고 만 모양이다. 그녀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옆에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느 틈에 로건이 들어와 있었다.
"잠을 잘 자더군."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다니."
"나가요!" 젬마는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그 다음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겠지? 조금은 더 독창성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젬마. 나를 실망시킬 생각인가?"
젬마는 있는 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그가 얼굴을 가까이해 왔다. 젬마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자제심을 잃은 것은 불과 몇 초 동안의 일이었다. 그녀는 로건의 팔을 물었으며, 그가 쩔쩔매는 틈을 이용해 몸을 빼어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로건은 간단히 그녀를 밀쳐 도로 끌어당겼고 꼼짝 못하게 했다. 스탠드의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악마나 진배없었다.
"지금 것은 그다지 칭찬할 만한 태도가 아닌걸. 좋은 매너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어야겠는데."
"당신한테서는 아무 것도 배울 생각이 없다고요! 로건, 그만! 방에서 나가요!"
"안 되겠는데. 오늘 하루 마음껏 제멋대로 행동한데 대한 답례지. 당신은 아까, 내게 뭐라고 물었지. 벌써 잊어버렸나!"
젬마는 자유로운 손으로 그의 어깨를 마구 두들겼지만, 그는 아랑곳없다는 듯이 다시 공격해왔다. 젬마의 있는 힘을 다한 저항도 그저 단순한 제스처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나는 무엇을 바라고 이러는 건가. 미래가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그가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 감정에서 도저히 몸을 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젬마가 얌전해졌기 때문에, 로건은 만족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젬마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에 오기 전에 수염을 깎은 듯, 애프터세이브 로션의 향기가 그에게서 풍겼다.
먼저 제정신을 되찾은 것은 로건 쪽이었다. 로건은 젬마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역시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어!"
그는 젬마의 손에 키스했다.
로건의 따스하고 묵직한 손은 젬마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이 꿈과 같은 귀중한 순간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젬마자신으로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하다는 것은 또렷이 느껴졌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어제 아침만 해도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있었는걸요." 젬마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께 아침이지, 벌써 두 시 가까이 됐으니까." 로건은 나지막이 웃으면서 정정했다.
그가 내심의 번민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바라면서 젬마는 베개 위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얼버무리지 마세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알고 있을 텐데요."
"모를 리 없지. 하지만, 그리 대단한 차이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언젠가는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이었어. 우리는 둘 다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거야."
"우리가 함께 있을 제한된 시간 안에서의 시간문제였다는 말이겠지요?"
이렇게 말하자, 로건이 어렴풋이 어깨를 으쓱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 그런 거지. 이 주말이 끝나면 우린 각기 자기 길을 가는 거요. 기억하고 있겠지?"
"기억하고 있어요." 젬마는 최대한의 의지력으로 목소리의 떨림을 눌렀다. "2백 파운드라는 액수를 제시했을 때, 당신은 이것도 계산에 넣고 있었나요?"
로건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정적 속으로 번져갔다. 그는 한쪽 팔꿈치를 짚고 몸을 일으키고, 다른 쪽 손으로 젬마의 턱을 잡고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다시 한번 그따위 말을 해봐, 다른 방법으로 잊지 않게끔 해주겠어. 나는 여자를 돈으로 사는 습관은 없다고!"
물론 그렇겠지. 긴 대열 속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픽업하는 것뿐일 테지. 젬마는 매서운 눈초리에도 겁먹지 않고 말끄러미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당신 말이 옳아요. 쓸데없는 말을 해서 미안해요."
잠시 동안 로건은 그 말의 진실성을 저울질하듯 물끄러미 젬마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후유 하고 숨을 내쉬었다.
"오케이. 잊어 줘요." 그러고는 그는 젬마의 입술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 그 얼굴에 떠올랐다. "다시 한번 사랑하고 싶어, 젬마."
"안 돼요!" 무심코, 날카로운 부르짖음이 튀어나왔다.
로건이 심술궂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어째 서지?"
"저어…" 젬마는 갑자기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로건, 제발…"
"조금 전에는 그런 인상이 아니었는데?" 로건은 젬마의 턱의 선을 따라 천천히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며 속삭였다. "내 눈을 속일 생각은 하지 말아요. 당신 얼굴에 당신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걸."
부정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몸이 마음을 배반하고 있다. 이미 때는 늦었다. 거부할 거라면, 맨 처음 일이 벌어졌을 때 그랬어야만 했던 것이다.
로건은 다시 젬마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그저, 로건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젬마는 새벽녘에, 로건이 침대를 빠져나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눈을 떴다. 그가 얇은 실크가운을 몸에 걸치는 모습을, 나른한 체념의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뒤돌아서며 내려다보았을 때, 젬마는 자는 체하지도 않았다.
"굿모닝" 로건은 다정하게 말했다. "로버트가 말 한 대로인 걸. 날씨가 좋을 것 같아."
날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설사 오늘부터 크리스마스까지 화창한 날씨가 계속된다고 해도, 그것으로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오후에 런던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지는 것이다. 간주곡(間奏曲)은 끝났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오디션을 받게 해달라고 말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는 내가 그것 때문에 몸을 내던진 것으로 생각할 테지.
로건은 몸을 굽혀 젬마에게 키스를 했다. 그 입맞춤은 뜻밖에도 다정하고 상냥하기가 그지없었다.
"당신은 이번 주말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었지. 알고 있어?"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는 상당한 의지력이 필요했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겠어요. 그럼 아침 식사 때."
로건은 잠시 동안 묘한 표정을 띠고 고개를 갸우뚱한 채 젬마를 응시하다가 이윽고 어깨를 으쓱하며, "그래요."라고 말했다.
문이 그의 등 뒤에서 조용히 닫히기까지 젬마는 꼼짝 않고 있었다. 그녀는 절망감으로 완전히 의기소침해지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로건을 두고두고 생각하게 될 테지. 아마도 몹시 괴롭겠지.
4
젬마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아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시계를 보니 일곱 시 반이었다. 바닥에는 잠옷이 내팽개쳐져있다. 젬마는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샤워를 하고 나서, 저것을 가방 속에 챙겨 넣어 버리자. 지금은 될 수 있는 한, 간밤의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아침식사의 자리에서 로건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때까지 차분하게 마음의 준비를 해두어야만 한다. 그에게 나의 감정을 알아차리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와 정신적인 유대를 갖게 되는 일 따위는, 로건이 가장 바라고 있지 않은 것일 테니까.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인간은 거의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간밤에 있었던 일은 다만 체험이었던 것이다-엄청나게 멋진 것이긴 했지만. 그것을 지금 별로 후회하고 있지는 않다.
오디션은 역시 문제다. 어머니가 유명한 배우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뿐이겠지. 로건에겐 맨 처음의 인상을 그대로 믿게 해두기로 하자-그렇게 되면 나는 얼마쯤이라도 프라이드를 지닐 수 있다.
면 슬랙스에 얇은 핑크의 셔츠로 갈아입고 젬마는 층계를 내려갔다. 쟁반을 든 메이드가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주인님은 풀 사이드에 계세요. 화창한 날씨군요, 아가씨."
"정말 아름다운 아침이군요. 풀은 어디로 가나요?"
가르쳐 준 길을 따라 가니, 로버트가 하얀 철제 테이블에 신문을 펼쳐 놓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여어, 일찍 일어났군요. 캐더린은 일요일엔 열한시가 되어야 일어나지요. 곧 아침식사를 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아메리카 식으로 주스를?"
"주스가 좋겠네요."
젬마는 맞은쪽에 앉자, 타원형의 풀과 로버트의 젖은 머리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물은 차지 않은가요?"
"쾌적하지요. 그럴 밖에요-언제나 수온이 22도를 유지하게끔 해놓았으니까."
젬마는 웃었다. "영국식의 성실하고 강건한 정신은 어디로 갔지요?"
"포기하고 말았지요." 로버트도 마주 웃었다. "나는 사치를 즐기는 인간이오. 그리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고요! 캐빈(cabin)안에 수영복의 여분이 있는지 어떤지 보고 와요. 풀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그 캐빈은 프리지어가 만발한 하얀 울타리 맞은쪽에 있었다. 안에는 몇 벌의 비키니가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연한 남빛의 비키니가 사이즈로 보아 꼭 맞을 성싶었다. 젬마는 재빨리 비키니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눈부신 햇살이 맨살이 드러난 어깨에 내리쏟아지고 있었다.
"빠르군요. 기다리게 했어도 그만한 보람은 있었을 텐데." 로버트는 솔직히 칭찬의 뜻을 표했다. "그 헤어스타일은 물에 젖어도 괜찮은가요?"
"글쎄요, 모르겠군요." 젬마는 실토했다. "이 헤어스타일을 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니까요."
그녀는 미소를 남기고 풀 사이드로 걸어가자, 날렵하게 몸을 날려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수면에 닿을락 말락하게 잠수하고는 몸을 마음껏 죽 뻗으면서 떠올랐다. 풀 가장자리를 붙잡고 머리를 한번 흔들자, 머리칼이 묵직하게 늘어뜨려지더니 자연스럽게 본래의 상태를 되찾았다.
"괜찮은 것 같군." 로버트가 말을 건넸다. "안심했어요. 당신의 그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가 엉망이 된대서야 유감천만이니까."
설마 내가 클레오파트라라고 해도, 로건은 안토니우스는 아니다. 비즈니스냐 여자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그는 의심할 것도 없이 비즈니스 쪽을 택할 테니까.
충분히 헤엄을 치고 테이블로 돌아오자, 오렌지주스와 커다랗고 푹신한 타월이 기다리고 있었다. 로버트가 그 타월로 젬마의 어깨를 열심히 닦아주고 있을 때 로건이 집에서 나왔다.
"재미가 좋으신 것 같군요." 그는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로버트는 이내 떨어지려고 하지도 않고, 웃으면서 대꾸했다. "멋적은 장면을 들키고 말았군. 나를 비난하지는 말아 주게나."
"물론이지요. 그녀는 아주 매력이 있는 여자니까요."
"바로 그녀가, 이제 곧 자네의 신부가 되는 거지. 결혼식은 언젠가?"
"이제부터 생각할 겁니다." 로건은 가볍게 슬쩍 받아넘겼다.
"3개월 이내에 하는 게 좋아요. 나는 이미 아기를 갖는 건 단념했지만, 자네에겐 아직 그 희망이 있지. 그런 일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착수하는 게 상책이니까."
"우린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어요. 아이가 생기면 생활의 스타일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니까요." 젬마가 거침없이 말했다.
로버트는 미간을 모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로건이 그렇게 말한다면 이해가 가지만, 당신은 오히려 모성적인 타이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사람은 겉보기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지요."
로건은 가벼운 어조로 말했지만, 굳어진 턱의 선이 본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결혼식은, 어쨌든 곧 결정하겠어요. 꼭 알리도록 하지요."
"그래주게나. 캐더린도 기뻐할 거야. 여자란 결혼식이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하니까. 그런데, 아침식사 전에 한바탕 헤엄을 치려나?"
로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시선은 젬마의 다리에서 얼굴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녀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그 눈을 마주쳐다보았다. 로건에게 속마음을 알아차리게 할까보냐는 심정이었다.
"오늘 아침, 잠시만이라도 의논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기쁘겠는데요. 그렇지 않으면, 이번 주말의 초대는 완곡하게 거절하려고 마련한 기회인가요?"
"실은 아직 결정을 못 내리고 있네." 로버트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서둘러 결론을 내릴 생각도 없네. 우선, 어느 정도의 자금이 필요한지 구체적인 숫자를 듣고 싶네만."
"좋고말고요." 이 지연전술에 내심으로는 조바심을 내면서도, 로건은 그것을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정확한 데이터를 종합하는데 하루나 이틀 여유를 주었으면 싶군요."
로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테지.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이 있네. 우리는 이번 수요일부터 2주간 요트를 빌기로 했는데 자네도 젬마와 함께 합류하지 않겠나, 로건? 그렇게 되면 의논할 시간도 충분할 테지." 로버트는 이번엔 젬마 쪽을 향해, "그리스의 섬들 사이를 요트로 여행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지요?"라고 유혹했다.
"2주간이나 시간을 낼 수는 없어요. 그런 무리한 이야기를 하면 곤란한데요." 젬마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로건이 매서운 어조로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일주일, 아니 3,4일간이라도 좋지. 우리는 수요일에 출발하지만, 자네들은 금요일편으로 떠나면 되네, 그리고 며칠이 됐든, 기분이 내키는 대로 머물러 주게나. 바다 공기를 마시는 것은 자네들 두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리 나쁘진 않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젬마가 오렌지주스를 마시다 목에 걸려 캑캑거리자 두 남자가 동시에 그녀 쪽을 쳐다보았다.
"죄송해요, 기관에 들어갔나 봐요." 그녀는 여전히 캑캑거리면서 말했다.
로건은 생각에 잠기면서 잠시 젬마를 응시했고, 그러고는 로버트 쪽으로 돌아섰다. "그것은, 조건인가요?"
"요컨대 나는, 때와 장소를 선택하고 싶다는 거지." 로버트는 늘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온 남자 특유의 고집스런 태도로 말했다. "요트는 필레프스에 정박하고 있지. 목요일엔 주위를 일주할는지 모르지만, 금요일에 자네들이 도착할 때까지는 어김없이 돌아와 있겠네."
젬마는 로건이 거절하기를 이제나저제나 하고 안타깝게 기다렸다. 그녀의 묻는 듯한 눈을, 로건은 무표정하게 마주 쳐다보았다.
그는 어떻게 할 생각일까? 설마 나에게 그 여행에 동행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한편으로, 로버트는 서둘러 결론을 내릴 마음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로건에게 있어서 로버트의 원조는 절대 필요한 것이다.
하녀가 아침식사의 주문을 받으러왔다. 젬마는 토스트와 커피를 부탁했고, 준비가 될 동안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테이블에 돌아와 보니, 로건이 혼자 앉아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멍하니 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소매의 면 셔츠에서 드러난 팔은 우람했고 햇볕에 그을어 있었다. 순간 그 팔에 안겼을 때의 일이 떠올라 젬마는 숨을 죽였다.
"전화를 걸러 갔지. 로버트는."라고, 묻기도 전에 로건이 앞질러 대답했다. "곧 돌아올 거요. 그런데, 그리스 여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젬마는 잠시 말없이 로건의 얼굴을 응시했다. 진의를 헤아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갈 수 없어요. 그렇지요? 로버트에 대해선 단념하고 다른 후원자를 찾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간단히 될 일이 아니오." 로건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요즘은 뮤지컬을 후원해 줄 사람이 그리 흔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당신이 그 위험을 맡는 게 어때요? 그렇게 되면 누구에게 머리를 숙일 필요도 없잖아요."
"나도 물론 일부는 부담하지. 그러나 짐을 몽땅 떠맡을 수는 없어."
"왜요? 또 실패할까봐 두려운가요?"
돌연 로건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며 젬마는 자기의 말이 지나쳤다고 후회했다. 사과할까 생각했지만,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단하군." 그는 물어뜯을 듯이 말했다. "간밤의 일은 어디까지나 서로 합의하에 이루어진 거요. 할말이 있다면, 그때 했어야지."
"누가 할말이 있다고 했나요? 간밤의 제 입장을 대신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불사할 여자가 자그마치 천 명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요."
"풀에 내던져지고 싶지 않다면 말조심하는 게 좋을걸. 좀 더 사리에 맞게 말하라고. 그래서야, 흡사 열여섯 살짜리 어린애같잖아!"
"그런지도 모르지요. 그렇다고 해도 법률상으로는 위법이 아니니까 염려 놓으시지요." 그녀는 그래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로건이 벌떡 일어섰다. 그 동작이 너무나도 재빨라서, 젬마는 뻗쳐오는 손길을 피할 사이가 없었다. 로건은 젬마의 몸을 가뿐히 들어 올리자 풀 속으로 내던졌다. 그녀가 가까스로 수면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는, 로건은 이미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아침식사를 날라 온 메이드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젬마가 간신히 풀에서 나왔을 때, 마침 로버트가 돌아왔다. 그는 머리가 돌기라도 한 게 아니냐는 듯 젬마를 훑어보다가, 이윽고 로건을 보고서야 알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인가? 사이가 좋구만 그래."
"뭐, 그런 셈이지요. 금요일의 일말인데, 우리도 참가하기로 하겠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설득시킨 모양이구만." 로버트는 재미있다는 표정이 되었다.
젬마는 있는 인내력을 총동원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의자에 앉자 태연자약하게 토스트에 손을 뻗었다.
"얼마나 차가울까?" 로버트가 감탄했다.
"차갑기는커녕 따스하던걸요. 언제나 22도로 수온을 유지한다고 하셨지요?" 젬마는 그렇게 말하고 로건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정말 충동적이네요, 달링!"
로건은 뜻밖에도 싱긋 웃었다.
"내가 젬마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가 이해되겠지요? 함께 있으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가 없어 재미있다고요!"
"그것은 인생의 스파이스(spice 향신료)가 되겠는걸."
로버트의 말속에 괴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젬마는 알아차렸다. 로버트는 캐더린이 돈 때문에 자기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 캐더린은 행운아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깊이 사랑해주고 있는 남편을 가졌으니.
그건 그렇다 치고, 그리스 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그 의문에 대답하기란 어렵다. 한편으로 그것은, 이겨내기 힘든 유혹이며,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위험한 덫이기도 하다. 로건과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별의 고통은 커질 테니까.
그렇지만, 로버트에게 의심을 품게 하지 않고 거절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직장의 일을 끄집어내 보기로 할까?
"금요일의 일말인데요, 직장에서 휴가를 받을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어요."
"그건 문제없어요. 사무실에는 내가 말해 두지. 뭣하면 임시 고용하는 사람의 급료를 내가 지불해도 좋고." 로건이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젬마는 버둥거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본심을 말한다면, 가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금요일까지 시간을 보낼 일이 걱정이지만, 그것은 로건이 생각해 주겠지. 옷도 더 필요할 테니까, 사달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무일푼의 신세다. 내가 그를 속이고 있다는 것이 들통 나게 되면 가차없는 보복을 당할 것은 뻔한 일이지만, 지금은 그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당하게되더라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다.
그런데, 나의 배우로서의 야심은 어떻게 된 거지? 지금은 그 문제 대해서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겨우 이틀 사이에 로건이 내 마음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되고 만 것이다. 그를 나의 마음속에서 몰아내 버리는 것이 선결문제다.
아침식사가 끝날 즈음에는 옷도 거의 말라 있었다. 하지만 계속 입고 있기에는 너무 구겨져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가겠다고 말하자, 로버트도 전화를 해야겠다면서 따라왔다. 도서실 앞을 지나가려 했을 때, 마호가니 책상 위의, 자그마한 액자 안에 든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누구라는 것을 이내 알았기에, 젬마는 숨을 죽이며 멈춰 섰다.
"아들 제이슨이오." 로버트가 그녀의 시선을 쫓으면서 말했다. "우린 지금 사이가 벌어져 있어요. 3년간 연극공부를 한 뒤에, 아들은 소위 연예인의 한 극단에 몸을 던졌지요."
"당신이 전에 결혼했었다는 것은 몰랐어요. 아까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앞으로 아이를 갖는 것은 무리라는 뜻이지요. 제이슨의 모친이 죽었을 때 나는 30대 중반이었어요. 만일 그 이후 바로 재혼을 했다면 아이도 생겼을 것이고 지금처럼 이렇게 외아들로 인해서 마음 졸이지 않고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단념하기엔 아직 빠르지 않을까요? 채플린은 70대에 아이를 가졌는걸요." 젬마는 그 자리의 분위기를 밝게 하려는 생각에서 그렇게 말했다.
"아내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한다면야 그럴 수도 있겠지요. 케더린은 아이는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 사실은 결혼 전부터 알고 있었지요. 나는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고 있어요." 로버트는 아들의 사진을 응시한 채 조용히 덧붙였다. "내가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 만큼은 아내가 나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녀가 나와의 계약을 지켜 주는 한, 그 사실은 감수할 생각이에요. 당신들을 요트로 초대한 이유 중 이것도 그 하나지요. 사이가 좋은 당신들 두 사람과 접촉하는 동안 아내가 혹시 로건에 대한 미련을 끊어주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지요. 당신은 로건이 정말로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이오, 젬마. 당신은 그를 단단히 정신 차리도록 뒷받침할 수 있어요. 당신은 로건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고, 편견에 말려들지 않을 만한 깊은 애정도 갖고있어요."
로버트의 지적은 맞는 것 같으나, 사실은 전혀 빗나간 것이었다. 젬마는 진실을 털어놓고 싶은 강한 충동에 몰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어떤 좋은 일이 있다는 거지? 나의 문제는 제쳐놓고라도, 로건의 성실성이 의심받게 된다. 일단 이 연극에 협조하기로 약속한 이상, 최후까지 밀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젬마는 침울한 기분으로 자기 방에 돌아왔다. 슬랙스와 셔츠를 벗자,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줄기를 맞으면서 젬마는, 방금 도서실에서 알게 된 사실이 자신의 신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공교롭게도 제이슨 파웰이 로버트의 아들일 줄이야! 그가 연극학교를 졸업한 것은 1년 이상 전의 일이고, 그 이후 그와는 만나지 못했지만, 한때는 그와 아주 친밀하게 지냈던 것이다. 파웰이라는 이름과 그와를 연결시켜 생각하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 마저 잊고 있었으니까. 유일한 위안은, 로버트와 제이슨 부자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상태라면, 제이슨이 이번 요트여행에 참가할 염려는 우선 없을 테지. 나의 신변은 안전한 것이다.
그렇지만, 또 하나의 비밀을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 괴로웠다. 이러다가는 스스로도 거짓과 진실의 구별을 못하게 되지나 않을까.
타월을 몸에 두르고 밖으로 나오자, 로건이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타월을 단단히 다시 여미고 있는 젬마를 보고 로건은 심술궂게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낮이라고 해서 뭐가 다르지? 나는 이미 당신을 알고 있는걸. 실제로는, 로버트도 본 셈이지. 풀에서 나왔을 때 젖은 셔츠가 당신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으니까."
"그게 누구 탓이었을까요?" 젬마는 분노를 억제하면서 말했다.
"그야 물론 당신이지. 원인을 만든 것은 바로 당신이니까." 로건의 말투가 바뀌었다. "로버트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손을 뻗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지."
젬마는 갑자기 바싹 타들어오는 입술을 혀로 축이려 했지만, 로건이 그 움직임을 눈으로 쫓고 있어서 급히 입을 다물었다. 겨우 한마디, 고작 한번의 눈짓으로 로건은 나를 불타오르게 만들고 있다.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이 정열에 몸을 맡기는 건 간단하다. 너무 간단할 정도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소유물이 아니야. 저 긴 손가락으로 살짝 신호했다고 해서 기꺼이 달려갈 생각은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그에게 알게 해주어야만 한다.
"당신은 그것 때문에 여기에 온 건가요?" 젬마는 찬바람이 돌도록 싸늘하게 말했다.
"아니지. 하지만, 그것 때문 만이라 해도 올 가치는 있었던 것 같은데." 젬마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뜨거운 상념을 꿰뚫어본 듯이 잿빛 눈에 조소가 어른거렸다. "뭔가 입는 게 어때? 그렇게 되면 나는 조금은 더 분별을 갖고 의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 입지 않은 유일한 옷은 실크셔츠와 심플한 잿빛의 스커트다. 젬마는 옷장에서 행거에 걸려 있던 셔츠와 스커트를 꺼냈고,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는 로건을 무시하고 서랍에서 속옷을 꺼냈다. 브래지어는 착용해 본적이 없다. 그 방침은 앞으로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단지, 움직이는 데 편하다는 이유 때문이며, 로건이 지레짐작하고 있듯이 섹슈얼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울화가 치미는 이야기다. 어째서 일일이 그에게 나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로건은 아까와 같은 장소에 서 있었다. 타월을 두르고 있을 때보다는 훨씬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으로 젬마는 로건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앉아요." 로건은 하나밖에 없는 의자를 가리키며 재촉했다.
"여긴 제 방이에요. 당신이야말로, 제발 앉으세요."
로건은 어깨를 움츠리며, 젬마가 말하는 대로 했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그것이 그의 의도였던 것이 틀림없지만.
"한두 가지 의논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랑이 있다고 생각해요. 다음 주말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 로건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제가 가기로 결정한 줄 아는 모양인데요, 저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요." 진작 결심하고 있었지만, 너무 선뜻 승낙하기가 분해서 젬마는 그렇게 말해 보았다.
로건의 얼굴 표정이 매서워졌다.
"당신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좀 더 많은 돈을 원하나?"
이번만큼은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젬마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덤벼들 듯이 말했다.
"돈은 당신이나 실컷 가지세요. 돈으로 뭐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고요!"
"대개는 살 수 있지"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하고는, 젬마의 상기된 얼굴을 심술궂게 훑어보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감정이 풍부하군. 무대에 설 생각이 있다면 말해 줘, 당신에게 딱 맞는 역이 지금 생각나는 것만도 두 개나 있으니까."
만일 사실을 털어놓아야만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기회를 이용할 마음이 우러나지 않았다.
"조금은, 말하는데 조심을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여길 떠날 수 있어요."
"돈이 아니라면 뭐지? 나를 위해 생각해 준다는 건가?"
"당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로버트를 위해서지요. 로버트는 어리석지 않아요. 케더린이 당신에 대해서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이미 꿰뚫어보고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보는 앞에서 우리 사이가 잘 진행되도록 격려하거나 우리 두 사람을 요트에 초대하거나 할 리가 없지요."
로건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주의 깊게 젬마를 관찰했다.
"당신은 필요 이상으로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캐더린과의 사이에 거리를 돈다면 가도 좋다는 뜻인가?"
"그래요, 당신이 그럴 생각이라면."
"나는 바로 그렇게 할 생각이지.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지만, 금요일까지는 오늘밤을 포함해서 닷새나 있어요. 그동안 호텔에 머무르기보다는 내 집에 머무르는 편이 지내기에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면 저를 감시할 수 있으니까?"
젬마는 가슴이 몹시 두근거리는 것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그밖에도 이점은 또 있지." 로건은 웃었다. "집에는 침실이 하나밖에 없거든."
"그럼 당신은 소파에서 잘 건가요?"
로건은 또 웃었다. "재미있군. 어쨌든 당신하고 있으면 지루하지가 않아, 달링!"
그는 일부러 나를 안달이 나게 하려는 거야.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젬마는 상대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의 집에 머무르라는 말을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은, 이젠 지긋지긋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잠시 후에 젬마는 말했다.
"로버트가 다 털어놓은 모양이군." 로건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저도 알아두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테지요. 어느 분과 달라서 그는, 새로운 관계는 과거를 깨끗이 청산한 시점에서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요."
"그에게도 청산해야만 할 일이 몇 가지가 있다는 뜻이겠지. 로버트 파웰을 성인군자같이 생각지 않는 게 좋아요. 현재의 지위를 쌓기까지 냉혹한 수단을 전혀 쓰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간에, 캐더린의 문제는 이 경우 관계가 없는 이야기지."
젬마는 아직 망설이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노라고 말한다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로건과 5일간 함께 있게 된다면, 일생을 두고 후회를 하게 된다 해도 좋다는 기분이 들었다.
"망설이고 있다면,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실을 말해주지. 당신에겐 달리 갈 데가 없어요. 그리고 예의 2백 파운드도 아직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지."
"공갈이나 다름없군요!"
"설득이지. 그리고 이것도 설득 안에 들어가지…"
그는 아쉬움이 뒤섞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젬마도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요. 그리고 점심식사 전에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면 캐더린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캐더린의 이야기는 그만두지 않겠나? 이미 끝난 것이니까."
그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것은, 결국 캐더린이 딱지를 맞았다는 뜻이다. 그녀가 그 사실을 깨끗이 받아들일지 어떨지가 문제라고 젬마는 생각했다.
5
두 사람은 점심식사 후, 두 시 반경 로버트의 집을 나섰다. 런던으로 드라이브하며 돌아가는 도중에 젬마는, 점심을 먹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고 있었다. 헤어지기 전에 캐더린이 한 말을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속이 메슥거렸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를 붙잡으려고 해봤자 안 될걸요." 캐더린은 젬마를 방구석으로 부르더니 그렇게 말했다. "당신은 로버트를 설득해서 그리스 행에 초대하도록 만든 모양이지만, 로건까지 마음대로 휘두를 수는 없을 거예요. 그는 볼일이 끝나면, 주울 때와 마찬가지로 간단히 당신을 차버릴 테니까."
젬마는 호된 말로 응수할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캐더린 같은 타이프의 여자에겐 침묵 작전으로 나가는 게 제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뒷맛은 씁쓸했다.
젬마에게 가장 상처를 입힌 것은, 캐더린의 말이 정곡을 찌른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로건은 나에 대해서 진지한 감정 같은 건 갖고 있지 않다. 로버트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나면 우리는 런던으로 돌아가게 되고, 따라서 계약도 끝나게 된다. 이제 와서는 돈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 그때가 오면 아무 말 없이 그의 앞에서 사라지리라.
로건의 집은 사자크 강을 굽어보는, 창고를 개조한 듯싶은 건물 안에 있었다. 넓은 거실을 지나 유리문을 열고 나무가 쥐를 둘러싸고 있는 테라스로 나가면서 젬마는, 이런 아파트는 집세가 어느 정도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로건은 여기보다 훨씬 좋은 곳에 살만한 경제력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물론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주방은 나무 칸막이 안쪽에 있어요. 이미 말한 대로 침실은 하나밖에 없고."
로건은 슈트케이스를 들고, 허공에 매달린 듯한 모양으로 뛰어나와 있는 가운데 2층으로 올라갔다. 커다란 더블 침대가 싫어도 눈에 들어왔다. 얇은 커튼만이 아래로부터의 시야를 차단하는 유일한 것인 듯싶었다. 욕실만은 좀 더 전통적인 스타일이기를, 하고 젬마는 기도했다.
"마음을 편히 가져요." 로건이 계단 위에서 소리쳐 말했다. "그런 곳에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지 말아요. 홍차가 마시고 싶으면, 주방의 갈색 깡통 안에 있어. 커피는 그 곁에 있고."
"당신은 뭘로 하시겠어요?"
"나의 희망을 우선적으로 해주다니 고맙군. 커피를 부탁해요, 짙은 블랙으로."
주방은 설비가 잘 되어 있고,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이탈리아계의 유리테이블 주위에는, 푹신한 쿠션이 깔린 철제의자가 여섯 개 놓여 있었다. 테이블 한가운데에 장식되어 있는 꽃은 금방 피어난 것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투명할 정도로 얇은 도기(陶器)의 꽃이었다.
독신자용의 주택으로는 이 집은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가정으로서 생각한다면 부족한 것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오늘밤의 일을 생각하자 가슴의 고동이 빨라졌다. 애당초부터 이런 역할을 맡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렇게 된 것을 후회해봤자 시간낭비일 뿐이다. 나는 로건과 일주일 혹은 2주일 동안 함께 지내게 된다. 그 시간을 최대한으로 즐기도록 하자. 그리고 작별의 시간이 오면, 그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기로 하자. 사람은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댓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거실로 커피를 가져가자, 로건은 통화 중이었다. 벨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가 전화를 건 모양이다. 젬마는 커피를 유리테이블 위에 놓고, 하얀 소파에 앉았다. 등받이에 바싹 기대어, 될 수 있는 한 전화의 통화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려본다. 하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시선은 맞은쪽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향해지고 만다. 그가 차분한 시선으로 마주쳐다보자, 젬마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빨개질 이유 같은 건 아무 것도 없는데도.
"그럼 화요일 일곱 시 반에 아메리칸 바에서."
로건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야기의 내용만으로는 전화의 상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밤의 약속이라면 상대는 틀림없이 여자겠지. 나를 혼자 남겨 두고 다른 여자와 만날 생각일까? 그렇게까지 할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스케줄이 빡빡해질 것 같은걸. 휴가를 얻는다는 건 예정에 없었으니까." 로건이 커피 잔에 손을 뻗으면서 말했다.
"비즈니스를 겸한 휴가일 테지요." 젬마가 가벼운 말투로 정정했다.
"그럴싸하군." 그는 수긍하면서, 젬마의 표정이 약간 변한 것을 보고는 눈을 번뜩였다. "당신의 장비를 구입할 필요가 있는걸. 다시 샐리 로저스한테로 가도록 해요."
"제가 직접 고르는 것은 신용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
"솔직히 말해서 그래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의 복장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지불하는 건 나니까, 내가 룰을 정하고 싶어."
"당신의 약혼자로서 걸맞은 차림새를 갖추라는 거군요."
"그렇지. 나도 조금은 평판이라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니까."
"물론 그렇겠지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만두어도 좋아. 나는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싫다면 지금 당장 여기를 나가도 좋아."
"알았어요. 그 말, 되풀이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 당장 나갈 테니까요." 젬마는 몸을 경직시키면서 일어섰다.
하지만, 계단에 이르기 전에 그녀는 로건에게 어깨를 붙잡혔고, 팔에 안기고 말았다. 그의 건장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의 온갖 분노도 원망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당신은 어디에도 갈 수가 없어. 있을 데라고는 이 집뿐이지." 그는 심술궂게 웃었다.
"로건…" 그녀는 떨고 있었다. "저는…,생각만 해도…"
"생각하지 않아도 좋아요. 다만 느끼고 있으면 돼. 그것이 중요한 거지."
로건은 젬마를 가뿐하게 안아 올리자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녀는 로건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갈색의, 군살이라고는 전혀 없는 손. 그의 하나하나의 동작에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어딘지 마음이 든든했다. 마치 몸의 무게가 없어지고 만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그는 나를 진심으로 대해 주리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꼼짝 않고 조용히 누워있었다.
어차피 로건 같은 남자에게 있어서 영원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그는 찰나 찰나를 살아가고 있다.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가 진심으로 자기를 생각해 주기를 원한다면,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년의 일을 생각하지 말고, 내주의 일도 생각하지 말고-내일의 일마저도 생각하지 않는 거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인 것이다.
계속되는 며칠 동안 젬마는 자주 그 말을 자기 자신에게 되풀이해 들려주었다. 로건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하게 될 때, 그녀는 언제나 그것을 생각하며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곤 했다.
밤 말고는 그는 거의 집에 있지 않았다. 언제나 무슨 일로 외출하곤 했다.-적어도 그는 비즈니스라고 말했다. 비즈니스가 비즈니스인 만큼, 언제나 정시에 끝날 수는 없다고 그는 설명했다. 젬마가 관계하고 있는 일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젬마로서도 믿어지긴 했지만….
목요일 오후엔 요트여행의 준비가 완전히 갖추어졌다. 나머지는 화장품 같은 사소한 일용품을 챙기는 일뿐이다. 샐리 로저스와 점심을 먹고 나서 세 시경에 돌아와 보니, 로건은 아직 돌아와 있지 않았다. 물론 돌아와 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지만.
요 4일 동안에 젬마는 샐리와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비록 수박 겉핥기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샐리는 로건의 출생이나 성장과정에 관해서 얘기해 주었다. 영국에서 출생했지만 10대의 태반을 아메리카에서 지냈고,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영국에 돌아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살아있지만,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샐리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도 어머니에 관한 얘기는 거의 입에 올리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샐리와의 관계는 5,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 역시 <불장난으로 끝난 사랑>의 하나라고 샐리는 말했다. 샐리는 그에 대해서 원망 같은 건 조금도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가 왔을 때는 자기도 저렇게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젬마는 생각했다.
우리의 관계는 정말 일시적인 것이라고 몇 번이나 자신에게 들려주어 보아도 젬마는, <어쩌면 혹시>하는 희망이 마음 한구석으로 파고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매우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두 사람이 함께 있는 때는 매우 드물지만,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데 헤어진다는 일 같은 것은 믿고 싶지가 않았다. 로건 자신도 간밤에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우리 두 사람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짝>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침실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많은 점에서 두 사람은 공명하는 것이 많았다.
젬마는 테라스에 앉아 강을 오가는 배들을 바라보면서 두 사람의 장래에 대하여 달콤한 꿈에 빠져들었다. 나는 그의 일을 도와줄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산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아이를 키울 수도 없으니까.
거기에서 그녀의 상상은 끝났다. 다른 것은 몰라도, 로건이 아이와 함께 있는 장면이라니,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여덟 시가 되었다. 로건이 저녁식사를 하러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젬마는 스테이크를 일인분 구워서, 그것을 약간의 샐러드와 함께 억지로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떤 남자 때문에 비참한 기분에 빠졌다고 해서 아무 것도 먹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다만, 로건이 그저 단순한 <어떤 남자>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전부인 것이다. 하필이면 나의 감정에 결코 반응해 줄 듯싶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다니,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이람. 만나던 그날 그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 이제 와서는 몹시 후회가 되었다.
<사람을 사랑하다 그 사랑을 잃은 자가 사랑하지 않는 자보다 오히려 행복하다>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열시 반에는, 자기 연민의 감정이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병째 갖다 놓고 마시기 시작한 와인도 분노의 감정을 돋우어 주었다.
사람을 자기 집에 초대해 놓고 이렇게 모른 체 내버려 둘 권리가 그에게 있는 것일까. 나는 손님인 것이다. 좀 더 마음을 써주어야 당연하지 않은가. 그가 모습을 나타낸다면, 반드시 그렇게 말해 주겠다. 그것도, 알아듣게끔 분명하게.
젬마는 한 시간 남짓을, 로건에게 퍼부을 대사를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보냈다. 하지만 시계바늘이 열두시를 가리켰을 때는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했다. 로건은 오늘 밤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 것이다. 그가 도대체 어디에-누구와 함께 있는지, 짐작조차가지 않는다.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침대로 가는 것이다. 더 이상 자지 않고 있어 봤자 소용없다.
와인 탓으로 머리가 가벼워졌다. 마치 몸에서 떨어져 나와 붕붕 떠다니고 있는 느낌이었다. 입고 있는 것을 벗어 던지자 젬마는 침대로 파고들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것이 있었다. 백조의 깃털이었다. 젬마는 몽롱한 머리로 생각했다. 나는 백조의 날개를 타고 두둥실 날아가고 있다. 멀리, 아주 멀리까지-
어깨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쓰다듬는 느낌에, 젬마는 지금 막 빠져든 것처럼 여겨지는 깊은 잠에서 깨났다. 그녀는 투덜투덜 불평의 말을 중얼거리면서 부드러운 시트 속으로 파고들려 했다.
"조금만 더, 자지 않고 버티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로건은 놀려대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난폭하게 젬마를 돌려 뉘었다.
그녀가 눈이 부셔서 팔로 가리자, 로건은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술 취한 다음의 치료방법이라면 잘 알고 있지."
그는 몸을 굽혀 뺨에 입술을 댔다. 재킷은 벗고 있었지만 셔츠는 아직 입은 채였다. 싸늘하면서도 매끄러운 옷감과 딱딱한 단추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녀를 쓰다듬는 손의 움직임에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뻔뻔스러움이 느껴졌다. 젬마는 난폭하게 그 손을 밀어냈다.
"언제나 제멋대로 아무 때나 여기에 와서,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는 생각일랑 그만두라고요!" 젬마는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거칠게 말했다. "당신 편리할 대로 이용당할 마음은 없으니까요."
로건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에 있는 동안은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겠어. 그 뒤에는 어떻게 하든 상관없지만."
그 말은 젬마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가 젬마에 대해서 조금도 깊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었다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젬마는 느닷없이 손을 올려, 거무스름하고 긴장된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려 했다. 그러나 로건의 동작이 좀 더 민첩했다. 그에게 손목을 꽉 잡히자, 젬마는 악문 이 사이로 나지막이 비명을 질렀다.
"두 번씩이나 이따위 짓을 하려고 들다니. 나는 한쪽 볼마저 할퀴라고 내밀 만큼의 관용은 갖고 있지 않아. 만일 싸울 생각이라면, 서로 평등한 입장에서 해야 한다고."
"아파요!" 젬마는 손목을 움켜잡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떼어내려 했다. "로건…!"
"당신이 시작한 일이야." 그는 여유 만만했다.
분노가 뜻밖의 엄청난 힘을 젬마에게 주었다. 로건이 허를 찔려서 당황하고 있는 틈에, 그녀는 손을 뿌리치고 침대에서 뛰어내려 문을 잠글 수 있는 유일한 장소를 향해 달려갔다. 욕실에서 밤을 새운다는 것은 쾌적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하는 수 없다. 날이 밝으면 이 집과는 영원히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그는 틀림없이 후회할 테지.
그러나 로건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스피드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욕실의 문이 닫히기 직전에 활짝 열리면서, 젬마는 끌려나와 그대로 카펫 위에 쓰러뜨려지고 말았다.
젬마는 이미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가 바라고 있는 것-그가 요구하고 있는 모든 것을 젬마 또한 바라고 있었다.
얼마 후, 로건이 젬마를 침대로 데려다주었다. 믿음직스러운 억센 팔에 안겨 어둠을 응시하면서 젬마는, 자의로 이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사라질 수는 도저히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로건을 사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 어째선 지는 잘 모른다. 그는 결코 친절한 사람은 아니다. 다정한 감정마저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그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잘 자요." 로건의 중얼거림에 젬마는 깜짝 놀랐다. 그가 이미 잠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심장이 파동치고 있는 것이 내게까지 전해져 오는군."
무엇이 나의 심장을 파동 치게 하고 있는지를 그는 분명히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는 그다지 마음에 두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를 사랑에 달라고는 부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되는 말을 노상 해오지 않았던가. 나는 혼자서 이 무거운 짐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젬마는 비행기에 타고 있는 시간을 지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건 옆에 있으니 시간이 나는 듯이 지나가고 있었다. 조금씩, 젬마는 그에게서 연극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나지 않도록 조심은 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이따금 깊은 관심과 지식으로 뒷받침된 의견을 말해 보기도 했다.
"당신은 머리 돌아가는 게 빠른데. 내 비서가 머지않아 그만두게 되어 있는데, 당신에게 그 대신을 부탁하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달리 일자리를 찾지 않아도 되고, 나도 면접시험에서 해방될 수 있지."
로건은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의 타이핑 실력은 손가락을 두 개밖에 사용하지 않는, 낙숫물 떨어지는 식의 형편없는 것인데. 그 사실에 대해서는 슬쩍 넘어가고, 그녀는 로건의 윤곽이 뚜렷한 옆얼굴을 흘끗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일주일이나 2주일 후에는 우린 각자 자기의 길을 가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것과 이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지. 잠자리를 같이한 사람끼리는, 그 이외의 장소에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건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았는걸."
그가 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면, 분명히 그것은 수긍할 만한 것이다. 그에 대한 샐리의 태도에서 적의라고는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샐리만이 로건의 과거의 상대는 아니다.
"캐더린의 경우도?" 젬마는 얼빠진 얼굴로 말했다.
잿빛 눈이 번쩍 빛났다.
"당신은 뭐라 할까, 툭하면 캐더린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나쁜 버릇이 있군. 나는 비서가 필요하다고. 그 비서한테 일일이 설교를 들어야 한대서야 견디어 낼 재간이 없지. 이것은 그다지 좋은 아이디어 같지 않은걸."
어리석은 아이디어라고 젬마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다면 프라이드 따위는 개의치 않고 그 이야기에 얼씨구나 하고 덤벼들었을는지도 모른다.
간밤의 일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의 고동이 빨라지는 느낌이었다. 요트에선 어떻게 재내게 될까? 약혼자 사이니까 하나의 방이 할당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상대가 캐더린인만큼, 우리를 따로 떨어져 있게 할는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각기 다른 방에서 잔다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로건이 밤에 와준다 하더라도, 역시 함께 자는 것과는 다르게 마련이다.
"그 요트의 크기는 어느 정도나 되지요?" 젬마는 그만 무심코 물었다.
"여덟 명의 손님과 세 명의 승무원을 태울 만한 크기지. 상상해 보라고."
"여덟 명? 손님은 우리들 네 사람뿐이 아닌가요?"
"또 한 부부가 오나 봐. 나도 모르는 사람들이지. 그게 어쨌다는 거요?"
역시 가지 않는 건데, 하고 젬마는 생각했다. 이제는 연기가 거의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가까워지고 있다고? 젬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미 연기 같은 건 하고 있지 않아.
두 사람은 아테네 공항에서 택시로 곧장 필레프스 선착장으로 향했다. 오후의 무더위는 대단한 것이었다. 젬마는 창을 열고, 얼굴에 와 닿는 시원한 바람을 즐겼다. 머리를 한 번 흔들기만 하면 머리칼이 본래의 모양을 되찾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안심이었다. 여행용으로 그녀는 엷은 크림빛깔의 팬츠슈트를 입고 있었다.
해안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남쪽을 향해 정박하고 있는 애형의 요트는, 새하얗고 근사하고 화려한 것이었다.
두 사람을 마중하러 온 젊은 그리스인 선원은, 노골적인 찬사의 눈길로 젬마를 바라보았다. 로건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스피로스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용무가 있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오겠다고 말했다. 그 말에 내포되어 있는 뜻은, 그가 젬마를 바라보는 무례한 눈초리로 보아도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로건이 호되게 한마디 해주기를 젬마는 어느 정도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은 얼굴로 요트 쪽을 보고 있었다. 뭔가를-혹은 누군가를 찾고 있는 눈치였다.
로버트가 트랩에서 두 사람을 마중했다. 하얀 티셔츠와 반바지 밖으로 나온 팔다리는 이미 새카맣게 그을어 있었다.
"캐더린은 지금 방에서 쉬고 있어요. 햇볕에 너무 지나치게 드러낸 탓이라고 생각해요. 곧 두 사람을 각자의 선실에 안내할 테니까,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도록 해요. 여기에선 수영복에 반바지가 제일이에요."
두 사람 각기의 선실-역시 그렇구나. 젬마는 침울한 기분이 되었다. 캐더린의 소행이겠지. 로버트라면, 두 사람을 따로 떨어져있게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까.
로건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겠지. 자기가 가든지 아니면 내가 오면 되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실내복 차림으로 복도를 어정거리는 것은 딱 질색이다.
예상한 대로, 선실도 훌륭하게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침대는 싱글이었지만, 접는 식의 침대를 잡아당기면 어김없이 더블이 되는 것이었다. 나라면 이 방을 그와 공동으로 사용하는 편이 오히려 즐거운데. 그와 함께라면 즐거울 것이다.
로건의 선실은 같은 복도에 면하고 있지도 않았다. 단, 배의 구조상 두 개의 선실이 한 장의 벽을 경계로 이웃해 있었다.
"모르스 신호를 가르치든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로버트가 가고 나자, 로건은 웃으면서 말했다. "짧은 소리 세 번, 긴소리 세 번, 그리고 짧은 소리 세 번-이것이 지금 당장 간다는 신호지. 단, 목적은 당신의 생명을 구하는 데 있는 건 아니지."
"잘도 그런 농담을 지껄일 수 있군요. 캐더린이 일부러 이런 식으로 방을 배치한 것이 틀림없어요."
"아마 그렇겠지. 다만, 선내에는 더블 침대가 있는 침실이 두개 밖에 없는데, 그것이 이미 찼다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지. 어쨌든 간에 대단한 일이 아니잖아, 우린 몇 광년(光年)이나 떨어져 있을 것도 아니잖아."
"제 쪽에서 당신 방으로 가는 것은 사양하겠어요."
"나는 마음 내킬 때 여기에 오도록 하지. 당신은 그저 여기에 있으면 돼요. 그 이외의 것은 부탁하지도 않겠어." 로건의 대답은 신랄했다.
젬마는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푹 숙였다. 로건은 그녀의 팔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나의 짐이 되지 않도록 해줘. 집요하게 달라붙는 여자는 딱 질색이야."
그는 조용하게 그렇게 말하고는 젬마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턱에 손을 받쳐서 얼굴을 젖히고는 안개가 낀 듯한 녹색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당신은 변화무쌍하여 매일 보고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걸."
하지만 언젠가 내가 곁에 있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있어서 더 이상 매력적인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우리가 헤어지는 날이 될 테지? 젬마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러나 역시 그것을 입에 담을 용기가 없었다.
"전, 여행으로 약간 피로해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 다시 갑판에 나갈게요."
"그거 좋지. 함께 하는 게 어때?"
"로버트가, 차 준비가 됐다고 말했어요." 젬마는 얼굴에 닿은 그의 손가락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감정의 흥분과 싸우면서 말했다.
"차 시간은 다섯 시겠지. 지금은 네 시를 막 지났을 뿐인걸."
젬마는 이미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6
넓은 후갑판의 일부는 하얀 차양으로 뒤덮여 있고, 그 밑의 그늘에 둥근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자그마한 타원형의 쿨 주변에도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지만, 그 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서늘한 그늘 쪽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로건과 젬마가 마지막으로 갑판에 나온 모양이다. 일어나서 두 사람을 맞이하는 로버트는, 늦은 이유를 알만하다는 듯이 심술궂게 눈을 번뜩였다.
"아크라이트 부부를 소개하지-클렘과 베리루요." 로버트가 말했다. “그리고 이쪽은 젬마 홀트와 로건 델 포드."
아크라이트 부부는 둘 다 40대 중반 정도로, 아내 쪽은 금방이라고 터져 버릴 것 같이 뚱뚱한 몸을 투피스에 감싸고 있는, 다갈색 머리칼의 여자였다. 남편 쪽은 철사처럼 바싹 마른 남자로, 더부룩한 모래 빛 머리칼을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갯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유쾌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데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로버트도 그들과는 허물없는 친구로서 친숙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캐더린이 그 부부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는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 그녀는 대화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 세 사람에게서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검은 초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젬마가 입고 있는 밝은 노란빛의 수영복은 촌스럽게 보였다.
캐더린은 젬마를 무시하고 로건을 향해, "여행은 어땠어요?"라고 물었다.
"언제나 마찬가지지." 로건은 젬마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이륙하고 착륙하는 거지. 그 사이의 일은, 언제나 큰 차이는 없어요."
"하지만 차밍한 동반자와 함께일 때와 그렇지 않을 때와는 크게 다르지요." 클렘이 말했다.
"그건 그렇군요."
"로건은 여자를, 바라보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하는 대상으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젬마는 가벼운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 로건을 향해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그의 눈빛이 짙어지면서, 입가가 의미 있게 살짝 치켜 올라갔다. 조금 전의 한 시간 남짓한 사이의 일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친밀한 유대감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젬마는 다시 한번, 지금 당장 그에게 안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절실한 바램이었다.
캐더린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젬마는 이미 마음을 쓰고 있지 않았다. 과거에야 캐더린이 로건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였든, 그것은 이미 끝난 일인 것이다.
"뜻밖에도 식구가 한 사람 늘었는걸. 저기 <잠자는 미녀>가 잠을 깨면 끼워주지 않으면 안 되겠지. 저 녀석은 아무래도 유랑극단에 싫증이 난 모양이야. 다음에 하고 싶은 일이 발견될 때까지, 라면서 바람처럼 집에 돌아온 거요."
"하고 싶다는 것과 그 찬스가 있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지요." 로건이 시원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시도해 보려는 것은 나쁜 게 아니거든." 로버트는 로건의 빈정거리는 말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젬마는 두 사람의 대화를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몸이 얼어붙는 듯이 되어 버려서, 손발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정말 자고있는 건지, 그 머리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다. 마침내 제이슨 파웰과 얼굴을 마주치게 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짐작도 거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로건에게 사실을 알리게 해선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더워서 한바탕 헤엄치고 오겠어요."
젬마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태연자약하게, 여유 있는 동작으로 일어섰다.
"올라오면 곧 마실 수 있도록 다이키리를 준비해 놓겠소." 로버트가 뒤에서 소리쳤다.
"고마워요,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하겠어요."
풀의 물은 몸도 마음도 개운하게 해주었다. 젬마는 팔다리를 쪽 뻗으면서 떠올랐고, 천천히 물을 가르며 목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모두가 이쪽을 쳐다보지 않는 때를 틈타서 몸을 세우자, 제이슨이 누워 있는 라운지체어 바로 가까이까지 물속을 걸어갔다.
그는 새빨간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길고 가냘픈 팔다리는 이미 완전히 햇볕에 그을어서 구릿빛을 띠고 있었다. 좀 긴 듯싶은 고수머리 밑의 얼굴은 지나치게 아름답다고 해도 좋을 만큼 이목구비가 수려해서, 턱수염이 없다면 여자로 잘못 볼 정도다. 그는 아버지와는 전혀 닮은 데가 없었다.
"제이슨!" 젬마는 낮은 소리로 불렀다.
감은 눈이 나른하게 떠지면서, 갈색의 눈동자가 천천히 이쪽을 향하고 있다. 그는 젬마를 금방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의례적인 미소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뀌기까지, 좋이 몇 초간은 걸렸다.
"젬마 아니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쉿, 조용히! 제이슨, 부탁이 있어요. 꼭 들어 주기바래."
제이슨은 의아심과 호기심이 뒤섞인 얼굴로 젬마를 잠시 말끄러미 응시했다.
"설마 당신이 델 포드가 데려온 약혼자는 아닐 테지? 도대체 그와는 어디서 알게 된 거야?"
그 말을 듣는 게 가장 난처했다.
"그것은 나중에 이야기할게요. 그래서 부탁인데, 우리 처음 만나는 걸로 해줘요."
"어째서?" 갈색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것을 설명하자면 길어요." 젬마는 어깨너머로 차양 밑에 있는 사람들을 흘끗 뒤돌아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이쪽에 주의를 돌리고 있지 않다. 하지만 서두르는 편이 좋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린 초면이고, 나는 연극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것으로 해줘요. 기회가 닿는 대로 까닭을 모두 이야기할게요. 지금은 내가 말하는 대로 해줘요, 제발!"
"오케이. 당신이 그 정도로 말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중요한 일인 모양이니까."
"그래요,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둘은 벌써 친구가 된 모양이군." 로버트가 풀 맞은쪽에서 소리쳤다. "젊은 친구들은 의식 같은 건 없이도 바로 허물없이 어울릴 수 있다는 걸 잊고 있었지. 슬슬 이쪽으로 오는 게 어떠냐?"
"곧 가겠어요."
제이슨은 선뜻 일어서자, 라운지체어에 걸쳐두었던 타월을 집어 들고 젬마 쪽으로 내밀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요, 내가 닦아 줄 테니까."
"새 타월은 저쪽에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젬마는 타월 정도는 손수 알아서 사용해요." 아버지는 약간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는 재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뿐이에요."
제이슨은 농담 비슷이 그렇게 말하자, 타월을 의자 등받이에 도로 걸쳐 놓고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풀장을 헤엄쳐 돌아오는 수고를 덜어 주지."
사다리는 바로 거기에 있었으므로, 제이슨의 손을 빌지 않아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거절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길 것으로 생각되어 젬마는 웃으면서 제이슨에게 손을 맡겼다. 제이슨은 금방 손을 떼려 하지 않고, 젬마의 팔꿈치를 받쳐 주어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헤어스타일을 바꾸었군." 그는 팔꿈치를 잡은 채 말했다. "나는 옛날의 젬마 쪽이 오히려 좋은걸."
옛날의 젬마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나쁘다. 돌연 대화가 끊기고,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젬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이슨의 손을 놓자, 미소를 띠면서 걸어갔다. 제이슨도 약간의 사이를 두고 따라갔다.
타월로 머리와 몸을 닦고 있는 사이에 차츰 기분이 가라앉았다. 로건의 조용한 눈길과 마주쳤을 때도 무심한 체할 수 있었다. 애당초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더라면 이것저것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을. 그러나, 이미 늦었다. 제이슨이 약속을 지켜 주기를 기도할 뿐이다.
하얀 반바지에 면 셔츠를 입은 30대 후반의 여자가 마실 것을 서브하기 위해 다가왔다. 이 요트의 선장의 아내로, 아이다로크라고 하며, 여기서의 식사 일체를 책임지고 있다는 것이다.
10월말이 되면 이들은 월동을 하기 위해서 로도스 섬까지 항해하고, 거기서 선주가 주말을 지내기 위해서 오는 것을 기다린다고 나중에 로버트가 설명했다. 무척 한가롭고 낭만적인 생활방식이라고 젬마는 생각했다.
어두워질 때까지 모두는 갑판에서 마시기로 하고 잡담도 하면서 지냈다. 저녁식사는 여덟 시 반부터라고 했다.
"정장할 필요는 없어. 이런 기후와 넥타이는 걸맞지 않으니까." 로버트가 말했다.
"그거 고맙군요. 사실을 말하면, 넥타이는 하나밖에 갖고 오질 않았거든요."
제이슨은 글라스를 놓고 일어서자 젬마에게 말을 건넸다. "나의 선실은 당신 선실 옆이에요. 볼일이 있을 때는 주저하지 말고 노크해 줘요!"
그가 가고 난 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자식놈은 그저 농담을 한 거야. 신경 쓰지 말게나." 로버트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로건에게로 돌렸다.
"그럴 테지요." 로건은 가볍게 어깨를 움츠렸다.
선실로 돌아온 젬마는, 요 한 시간 동안 로건이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건네지 않은 것은 일부러 그런 걸까, 하고 생각했다. 그의 태도가 변한 것은 분명히, 제이슨이 풀에서 끌어올려 준 이후부터였다.
질투라는 것은 성가신 감정이다. 로건은 그런 감정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그는 내가 살며시 제이슨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 이후에 제이슨이 허물없이 친숙하게 군것은 내가 계기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된다. 돌아왔을 때의 로건의 싸늘한 눈초리도 납득이 간다. 하지만 그것은 질투에서라기보다는 소유욕에서라는 편이 맞을 것이다. 자기 것은 자기 혼자만의 것이다. 그런 사고방식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젬마로서도 그러한 감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그녀의 경우는 그 감정이 영속적이라는 것이다.
샤워를 하고 거울을 마주보고 앉아 눈 화장을 하고 있는데 문을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실내복의 벨트를 다시 꼭 매면서 문을 열자, 제이슨이 들어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제이슨은 면 팬츠의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단호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만일 나더러 연기를 하라는 거라면, 어떻게 된 사정인지 설명을 해줘야지."
"이야기가 길어요." 젬마는 어지간히 절망적인 심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간단히 요약해서 말해 봐요."
젬마는 될 수 있는 한 간단하게 개요를 설명했다. 얘기를 다 듣고 나자 제이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했다.
"내가 아는 한 델 포드는, 속는 것을 참지 못하는 타이프의 사나이야."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말할 기회를 놓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이렇게 되고 만 거예요."
"그리고 이제 와선 당신은 그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고 말아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거지?"
"그런가요?" 젬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그렇게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돈가요?"
"당신은 적어도,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가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마음을 쓰지 않을 테니까. 불평을 하고 있는 건 아니야,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어쨌든 간에, 지금은 그럴싸하게 속이고 있다 해도 로건은 조만간에 사실을 알게 될 거야. 문제는, 그렇게 됐을 때 어떻게 하느냐 하는 거요."
"다른 방법으로 그가 아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이야기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군요?"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는 편이 좋겠지. 그것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거요."
"하지만 그는, 내가 배역을 탐내서 그와 잠자리를 같이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그에게 잘 설명해야지. 당신의 탁월한 테크닉이, 나의 머리에서 그런 유의 야심을 싹 흩날려 버리고 마는걸."
제이슨은 웃었다. "당신은 재능이 있는 여배우요, 젬마. 적어도 전에는 그랬지. 당신이 아직 그 실력을 지니고 있다면, 이번의 뮤지컬에서 배역을 맡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을까?"
"고마워요. 당신이 있어서 마음 든든해요."
"나는 당신을 궁지에서 구해 줄 수는 없어요.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될 수 있는 한 당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뿐이지."
"아까 풀장에서 그랬듯이?" 젬마는 빈정거리면서 말했다.
"아아, 그거야 극히 자연스러운 동작이지. 아프로디테를 파도 사이에서 끌어올린 자의 맨 첫 충동은, 인사의 키스를 보내는 것이었지. 그렇지?"
젬마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란 사람은 할 수 없군요. 제이슨. 그전부터 그랬지요."
"하지만 조금은 사랑해 주었을 테지?"
제이슨은 윙크해 보이고는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델 포드는 만만치 않은 사나이요. 행운을 빌겠어."
정말이지, 난관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연기력뿐만 아니고 운도 필요하다고 젬마는 생각했다.
저녁식사는 후갑판의 차양 아래에 준비되었다.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서 주위의 난간에는 휘장이 둘러쳐졌고, 벌레를 쫓기 위해서 방향성(芳香 性)의 촛불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젬마의 자리는 클렘과 제이슨 사이에 마련되어 있었다. 이것 역시 캐더린이 꾸민 일임에 틀림없다. 로버트는 자리 배치가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무관심이 표면상의 것에 지나지 않음을 젬마는 알고 있었다.
캐더린은 로건을 단념하기는커녕, 옛날의 관계로 되돌아가고자 점점 기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로버트를 위해서라도 나는, 로건이 이미 그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캐더린에게 알려 주어야만 한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젬마는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테이블이 치워지고 댄스 음악이 테이프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그녀는 맞은쪽 해안의 불빛을 보는 체하면서 로건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케더린은 로건의 귓가에 대고 뭐라고 열심히 속삭이고 있었다.
젬마는 심호흡을 하고 난 뒤 앞으로 나서며, 그의 팔에 살짝 손을 대고는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우리 춤 춰요, 달링."
한순간 침묵이 흐른 뒤, 로건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입가를 실룩거리며 싱긋이 웃었다.
"신청을 받을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리는 것을, 언젠가 당신에게 가르쳐 주기 않으면 안 되겠는걸." 그는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실례해요, 캐더린."
캐더린의 화난 얼굴을 흘끗 곁눈질로 쳐다본 젬마는, 심술궂은 만족감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저한테 뭔가 화를 내고 있어요?" 플로어에 나섰을 때 젬마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무슨 일로?" 그는 무표정하게 반문했다. "뭔가 켕기는 일이라도 있는 건가?"
"제가 당신에게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게 있느냐는 뜻이라면, 바로 맞았어요. 지금까지 이야기할 찬스가 없었다고요."
"그렇다면 지금 말해 보시지."
"네…, 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요."
"그럼, 우선 제이슨의 이야기부터. 당신들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지?"
"어떻게 알았지요?" 젬마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 당신이 그렇게 잽싸게 그에게 접근한 것은 무슨 까닭이 있어서라고 생각했지. 제이슨은 분명히 매력 있는 남자지만, 등을 돌린 채 새를 유인하는 재주까지는 없을 테니까."
"그런 말투 실례예요. 당신의 입장에서 본다면야 제이슨은 사나이 중이 사나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요. 그렇다고 해서 놀림감으로 삼아도 되는 건 아니에요."
"그에게 달리 장점이 있기라도 한 건가?"
"적어도 그는 남의 이야기에 귀는 기울여 줘요."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라면야.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두지. 당신이 어떻게 제이슨과 알게 되었는지 에는 흥미가 있어. 하지만, 그렇다는 것뿐이지. 과거는 상관없어."
그리고 미래도 그렇겠지. 젬마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그럴 생각이라면, 나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그렇다면 이제 이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 앞으로 당신이 제이슨과 일정한 거리를 두겠다고 약속한다면."
젬마는 로건의 윤곽이 뚜렷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언제나 이렇게 독점욕이 강한가요?"
"남과 무엇인가를 공유한다는 것은 질색이지. 당신 역시 그럴 텐데?"
젬마는 그 말속에 내포되어 있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건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는 상상만 해도 마음이 아파온다. 젬마는 상념을 떨어버리려고 갑자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손을 그의 등 뒤로 돌리자, 어깨를 꽉 움켜잡고는 몸을 찰싹 붙였다. 이것이 중요한 거다-둘이서 이렇게 있다는 것이. 앞으로의 일 같은 건 될 대로 되라지.
젬마는 그 뒤에 클렘과도 춤을 추었으며 제이슨과도 추었다. 제이슨과 일정한 거리를 지켜 달라고 로건은 말했다. 하지만 꼭 그대로 지키지 않아도 되겠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제이슨이 필요 이상으로 꽉 끌어안았을 때는 젬마는 약간 걱정이 되었다.
"로건에겐 이야기했나?" 제이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초면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는걸요. 그 밖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나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로건에게 있어서 과거 따위는, 다 읽고나서 책장을 덮어버린 책이나 진배없다고요."
"이번 뮤지컬에서 배역을 맡아보겠다는 꿈은 이제 완전히 단념하고 말았나? 한 남자가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는걸."
"그런가 봐요. 언젠가 다른 배역이 우연하게 걸려드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로건에게 깊이 빠져든 일로 해서 그 밖에 어떤 희생을 치르게 될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떤 배역이든, 어느 때나 지원자는 초만원인걸.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어이없이 찬스를 놓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라고."
"그래요, 나는 바보라고요."
젬마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당신은 로건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여기에 왔겠지요. 누가 가르쳐 주던가요?"
"아버지지. 순회공연의 마지막 날에 전화를 해서, 오지 않겠느냐고 그러시더군. 우리가 어느 도시에서 공연하는가를 아버지가 어떻게 알았느냐 하는 것은 수수께끼지만. 공연스케줄에 대해서는 우리 내부에 있는 사람도 이틀 전에야 알게 되어 있는데 말이야."
"당신은 어떤 배역을 노리고 있나요?"
"남성 리드 댄서지, 달리 뭐가 있겠어? 노래는 시원찮으니까 주연은 무리지. 어쨌든 간에 트레버 설리반이 벌써 맡은 모양인걸. 그와 베리스포드가 공연하게 되니까 손님이 모여들 것은 우선 틀림이 없겠지."
제이슨은 미간을 모으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젬마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저어, 아델 베리스포드로 결정되었단 말이군요?"
"물론이지, 달리 누가 있겠어? 마침 브로드웨이의 공연이 끝난 참이었기 때문에 운 좋게 오케이를 받아낸 거지. 그 사실을 알고 나자, 아버지도 어지간히 마음이 동하게 되었지."
제이슨은 젬마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그녀를 갑판 구석으로 끌고 갔다.
"당신은 비앙카 역을 훌륭하게 해낼 거요. 우리는 멋진 한 쌍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학년말의 쇼에서 함께 추었던 곡을 기억하고 있어?" 젬마를 부둥켜안은 채 제이슨은 두 번 스텝을 밟아 보였다. "스텝에 조금 변화를 준다면, 지금 유행하고 있는 곡이라도 출 수 있어요. 한번 해보지 않겠어?"
"안돼요!"
젬마가 그만 무심코 큰 소리를 내고 말아서, 모든 사람이 일제히 이쪽을 쳐다보게 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볼 용기도 없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리석은 짓은 집어치워요. 당신은 나의 인생을 망칠 생각이에요?"
"그 아주 일부만이겠지? 당신은 델 포드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아버지와 그는 이미 오랫동안 교제해왔어. 그의 여성편력은 유명해. 당신 설마 이 거짓약혼을 제정신으로 받아들인 건 아닐 테지. 그는 아버지에게서 원하는 약속을 받아내면 즉시 당신에게서 멀어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요. 하지만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오디션을 받을 수 있게 되기만 하면 되잖아요."
"아아, 물론 오디션은 받게 될 거라고 생각해. 그것은 걱정하지 않고 있지, 아버지는 그런 점에서는 실수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후원해 주는 조건이란 말인가요?"
"오디션까지는 그렇지. 거기서 잘 해내느냐 어떠냐는 전적으로 나의 능력에 달려 있는 거고."
"수염은 깎는 게 좋겠어요."
"깎지, 또 자랄 테니까. 나는 전진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지. 경쟁상대가 같은 목적을 노리고 덤벼든다고 생각하면, 멍하니 허송세월하고 있을 수는 없어. 우린 이전에 같은 야심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젬마?"
"그랬지요. 지금도 그렇고요…" 젬마는 불행한 기분이 들어 말꼬리를 흐렸다. "당신은 사랑의 경험이 없으니까요, 제이슨"
"이성을 잃을 정도의 사랑 말인가? 나중에 뒤돌아볼 때, 그만한 값어치가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기를 당신을 위해 진심으로 빌겠어."
나야말로 빌고 싶다고 젬마는 생각했다. 미래에 대해서뿐이겠는가. 현재의 일마저도 이제 와선 아슬아슬할 정도로 위태롭게 되어가고 있다. 어머니까지 관련이 되어 있다면, 조만간에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가장 안전한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지금 여기서 모든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리허설이 시작되는 것은 몇 주일 후의 일이다. 그때쯤이면 나와 로건과의 관계도 이미 끝장이 나 있을 테지. 장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지금 있는 것까지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그것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지.
제이슨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오겠다고 하면서 젬마의 곁을 떠났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로버트를 보고 그 곁으로 가 조용히 앉았다.
"춤을 추지 않으시나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이것도 나의 결점 중의 하나지요." 로버트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에서 다정함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하고 있는지, 젬마는 이내 알아차렸다.
"그게 결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혼 전에 부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테지요?"
"아내는 결혼 전에 많을 것을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용이하게 해주진 못했어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내에겐 따분한 남자지요."
"그럴 리가!"
"아니, 그렇다니까요. 아내는 나와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도 마지못해 하거든." 로버트는, 젬마가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알아챘는지, 급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약간 과음을 해서 긴장이 풀린 탓이오. 제발 도망가지 말아줘요."
"도망가다니요. 당신은 혼자 있고 싶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이미 지겨울 정도로 혼자 있었지. 그 탓인지 기분이 우울해지고 말았군요. 진을 마신 탓이기도 하지만."
"그럼 이제 그만 마시는 게 어떻겠어요?" 젬마는 로버트가 들고 있는 글라스를 보고 말했다.
"그렇군. 약과 함께 마시는 것은 좋지 않을지도 모르지."
"약? 무슨 약인데요?"
"아, 별것 아니오, 그저 수면제인걸. 줄곧 불면증에 시달렸지요. 너무 신경을 혹사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로버트는 돌연 화제를 바꾸었다. "어때요, 즐겁게 지내고 있나요?"
"네, 무척요. 그리스에 온 것은 처음이거든요. 돌아가기 전에 파르테논 신전을 구경하고 싶어요.-만일 시간이 있다면."
"시간은 만들어야지요. 누구라도 평생에 한번은 구경해 두는 게 좋아요. 특히, 달빛에 비추인 파르테논 신전은 정말 멋진 구경거리지요. 오늘밤은 이미 늦었지만, 언제라도 떠날 수 있어요. 혹은 섬 일주를 끝낸 뒤에 들러도 되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어요."
"그렇다면 섬 일주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계획을 변경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 젬마는 말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겠어요."
"그럼 나는 슬슬 물러나기로 할까." 로버트는 아내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캐더린은 조금 떨어진 곳에 베리루와 로건과 함께서 있었다.
"캐더린?"
남편의 부르는 소리에, 캐더린은 미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곧 갈게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의 눈엔, 그런 그녀가 양순한 아내의 모습으로 비칠 테지. 하지만, 아름다운 블루의 눈에 일순 초조함이 떠오른 것을 젬마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젬마는 로건의 시선을 포착했다. 그녀의 말없는 물음에, 로건은 살짝 윙크로 응수했다. 그 눈은 <나중에 갈게>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시각은 한밤중이 지나 있었다. 젬마는 풀장 안에 있는 제이슨에게 손을 흔들고 베리루와 캐더린과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로건은 여전히 글라스를 손에 들고 클렘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있어주는 편이 좋겠다. 그가 오기 전에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침대 곁에 놓여있는 시계의, 쉴 새 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주는 시계바늘을 응시하면서 젬마는, 자기가 아델 베리스포드의 딸이며 자기 자신도 햇병아리 배우라는 것을 고백할까 어쩔까 망설이고 있었다. 더 이상은 비밀을 간직한 채 지낼 수 없다. 나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것을 로건은 틀림없이 이해해줄 것이다. 이해해 주지 않으면 어쩌나! 나의 행복은 그 일에 걸려 있는데.
시계의 긴 바늘이 문자반을 한 바퀴 돌았을 때 젬마는, 로건은 오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 나는 그의 사인을 잘못 해석한 모양이다. 그가 오지 않으면 내 쪽에서 가는 수밖에 없다. 지금은, 어느 쪽이 상대의 방을 찾아가느냐 하는 것에 구애받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이 문제의 해결을 더 이상 뒤로 미룰 수는 없다.
젬마는 로건의 방을 목표로 통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선내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따금 들리는 것은 뱃전을 치는 파도소리와, 발전기의 윙윙거리는 나지막한 소리뿐이다. 어딘가에서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서, 젬마는 흠칫하며 멈춰 섰다. 머리 위의 불빛이 희미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그녀는 벽에 찰싹 몸을 밀착시키고, 누군가가 맞은쪽의 통로를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군지를 금방 알았다. 다음 순간, 캐더린이 누구의 방에서 나왔는가에 생각이 미쳤을 때, 젬마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7
젬마가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기까지는, 좋이 몇 분은 걸렸다. 그녀는 자기 선실로는 돌아가지 않고, 갑판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지 않고서는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갑판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라이트는 2개소에 켜져 있었다. 젬마는 난간 곁에 서서 은빛 바다를 바라보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로건이 오늘 밤 나의 방으로 올 생각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캐더린과는 댄스를 하는 사이에 약속을 했을 테지. 로버트는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을 테니까, 그에게 눈치 채일 걱정은 없다. 하지만 나에 대해선 어떻게 할 셈이었지? 로건은 내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생각지 않았단 말인가? 내가 그의 방으로 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까?
젬마는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화낼 마음도 나지 않았다. <남과 공유하는 것은 질색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만의 일방적인 주장일 줄이야! 나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담? 이렇게 간단히 나를 배반할 정도로 그가 나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면, 더 이상 그와의 관계를 계속할 의미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여태까지 숨기고 있었던 것을 모두 털어놓고, 사실은 나는 당신을 이용하고 있었던 거예요, 라고 말해 버린다면 조금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불고 있던 미풍은 이미 그치고, 가라앉은 공기는 후텁지근했다. 타월지의 실내복밖에 몸에 걸치고 있지 않았던 젬마는, 충동적으로 그것을 벗어 던지고 풀로 뛰어들었다. 크롤(crawl)로 몇 번 물을 가르자, 풀끝에 이르렀다.
몇 번이나 풀을 왕복했는지 모른다. 단지 몸을 지치게 하려는 목적으로 젬마는 수영을 계속했다. 그것만이 마음의 아픔을 누그러뜨리는 약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이윽고 수영을 끝낸 젬마는 풀 가장자리를 붙잡고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것으로 만족인가?" 풀 맞은 쪽 끝에서 로건의 목소리가 났다. "아니면, 기네스북에 도전할 생각인가?"
젬마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로건은 아까 제이슨이 앉아 있었던 라운지체어에 걸터앉아 있었다. 실크의 실내복 아래로 맨발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얼마 동안이나 거기에 있었을까. 지금 한 말로 미루어 보아서는, 퍽 오랫동안 있었던 듯싶다.
"몸을 움직이고 싶었던 거예요."
"그렇게 보이는군." 로건은 빤히 젬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더니, 이윽고 벌떡 일어섰다. "나도 참가하지."
그가 실내복을 벗어 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 젬마는 머리로부터 물속으로 잠수하려 했다. 하지만 로건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에게로 헤엄쳐 와서 얼굴을 수면 위로 드러내면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젬마는 그를 쳐다보았다. 젖은 채 뒤로 넘겨진 검은 머리칼, 가늘게 뜬 눈, 물방울이 흐르고 있는 갸름한 얼굴… 로건을 원하는 마음에 젬마는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버렸다.
"이 배신자!" 젬마는 이를 악문 채 그렇게 말하자, 있는 힘을 다해 무릎을 걷어찼다.
물속이기 때문에 힘이 없긴 했지만, 명중된 모양이었다. 로건이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셨다. 젬마의 허리를 움켜잡고 있던 손에는 한층 힘이 가해졌고, 이를 무서울 정도로 꽉 악물고 있었다. 풀 벽에 밀어붙여진 젬마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지?" 로건이 물었다.
"어째서라니, 알고 있을 텐데요! 전, 그녀가 당신의 선실에서 나오는 것을 봤어요. 봤다고요!"
젬마는 로건이 시치미를 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이렇게 반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분노가 불안으로 바뀌고 있었다. 몸을 움츠리며 젬마는 탐색하려는 듯이 로건의 잿빛 눈을 응시했다.
"그녀가 거기서 나왔다는 것은,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는 뜻이에요. 전 당신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으니까, 당신과 캐더린이 둘이서 트럼프를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요!"
"당신은 나에 대해서 잘 몰라. 당신에게 설명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번에 한해서 양보하기로 하지. 믿고 안 믿고는 자유지만."
"우선, 여기서 나가지 않겠어요?" 젬마는 갑자기 오한이 나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안 되겠는걸. 설명이 끝나기까지는 어디에도 보낼 수 없어." 로건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당신이 방으로 돌아간 뒤 30분 정도, 나는 갑판에서 클렘과 이야기를 했어. 그러고 내 방으로 돌아가 보니 캐더린이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아직 나머지 30분이 있어요. 그 사이에 무엇을 했지요?"
"아무 것도. 캐더린을 설득하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지."
"그런 일 같으면 2분간이면 될 테데요!"
"예의를 갖고 그녀가 상처입지 않도록 이야기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지. 캐더린은 나를, 사적인 감정보다 사업상의 야심을 우선적으로 앞세우는 남자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설명했지-당신과 깊은 관계를 가진 결과 로버트가 자금을 대지 않게 된다면 곤란하다고. 설사 내가 그것을 죽도록 원하고 있다 해도 말이오!"
"캐더린은 그 말을 믿던가요?"
"믿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 내가 캐더린을 끌어들였다고 당신이 믿고 싶어했듯이."
"저는 믿고 싶어했던 게 아니었어요. 다만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뿐이에요."
물은 따스했는데도 불구하고 젬마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로건…, 전"
"이제 자는 편이 좋겠어." 그는 말했다. "두 시간만 있으면 날이 새겠지."
젬마가 풀에서 나왔을 때는, 로건은 이미 실내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젬마에게 실내복을 입혀 주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까 말할 용기가 사라지는 것 같았지만, 젬마는 결심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저는 오해를 하고 말았어요."
"누구한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로건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가 가버리고 난 뒤에도 젬마는 잠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목구멍에 톱밥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마침내 끝장나고 말았다. 끝장나고 만 것이 틀림없다. 일을 서두르다가 묘한 억측을 하고 만 탓으로, 겨우 손톱만큼 있었을지 모를 그의 나에 대한 상념을 산산이 부숴 놓고 만 것이다. 이것으로 이제 한 가지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 셈이다.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어머니의 일이나 나에 대한 것을 그에게 털어놓을 필요는 없어졌다. 나는 다만 여기에 있으면서 그의 약혼녀로서의 역할을 계속 연기하면 되는 것이다. 그뿐이다. 단,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인내력을 총동원해야 하겠지만.
젬마는 느릿느릿 선실로 내려가자,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문을 닫았다. 젖은 머리를 타월로 훔치고, 실내복을 벗고는 시트 사이로 파고들었다. 날이 새기까지는 두 시간이라고 로건은 말했다. 두 시간이 평생처럼 길게 생각되었다.
선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을 때, 젬마는 아직 잠들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로건은 조용히 문을 닫고, 심술궂은 웃음을 띠며 젬마를 내려다보았다.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까? 그러니까, 얼굴을 할퀴는 것부터지."
젬마는 한쪽 팔꿈치를 세우고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알아듣도록 이야기해 주세요."
"간단한 일이지. 나를 믿어 준다면-나를 새로운 각도에서 봐주면 되는 거요. 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해볼 만한 가치는 있지."
젬마는 이미 더 이상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그녀가 자기의 생의 일부분이 되고 만 이 남자를 원하는 정도로 한 사람의 인간을 원했던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이름이 그녀의 내부에서 외쳐졌다가 메아리쳐졌고, 귓속에서 앵앵거리다가 희미해졌다. 그리고 젬마는 끝없는 심연으로 깊숙이 떨어져 갔던 것이다.
한참 후,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가까스로 이렇게 속삭일 수 있었다.
"어째서 지금이어야 하는 거죠? 하필이면, 어째서 지금인가요?"
"어째서라니, 당신이 나의 내부에 들어와 자리 잡았기 때문이지. 전에는 얼마든지 당신 앞을 지나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 와선, 나는 이미 덫에 걸린 거나 마찬가지야."
"앞으로 얼마나 그럴 건가요?"
"그걸 누가 알 수 있겠어? 내년이 되면 우린 둘 다, 오늘의 일을 잘못이었다고 여기게 될지도 모르지."
지금의 젬마로는 내년이 아득히 먼 미래처럼 생각되었다. 예의 괴로움이 다시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젬마는 그것을 마음 밖으로 몰아내 버렸다. 이 한때를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아,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로건은 나를 사랑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무척 친밀한 관계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사실을 고백할 즈음에는 한층 친밀하게 되어 둘의 결합도 공고해져 있겠지.
1,2주면, 되는 것이다. 1,2 주간의 여유만 있다면.
요트는 아침식사 전에 출항하기로 되어 있었다. 갑판에 나와 보고 요트가 아직 항구 안에 정박해 있음을 안 사람들은 모두 다소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로버트는 모든 사람의 질문에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손님을 한 사람 더 맞기로 했어요. 아침 일곱 시까지는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었지요. 아니, 이름은 말하지 않기로 하겠어요. 여러분을 모두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거든요. 출발은 정오쯤 되겠지만, 스케줄에는 아무런 차질이 없어요."
새로운 손님이란 도대체 누굴까 하는 화제로 아침식사의 자리는 떠들썩했으나, 로버트는 힌트마저 주려고 하지 않았다. 로버트는 언제나 비밀주의니까, 라고 캐더린은 투덜거렸다.
그녀는, 로건이 말한 거절의 이유를 그대로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꽤나 침착하고 여유만만 한걸, 하고 젬마는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내가 그 입장이라면 도저히 저럴 수 없을 것이다.
캐더린을 생각해서 젬마는 될 수 있는 한 로건과 시선을 맞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가 미소라도 보내온다면 나의 표정은 단번에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나중에 단둘이 있게 되면, 몇 시간 전의 일을 다시 한번 재현하고 싶다. 우리가 이렇게 시 퀸 호에 타고 있는 한, 시간은 무한히 있는 것이다.
스피로스는 열한시에 란치(launch)로 새로운 손님을 마중하러 갔다. 모두는 난간에 기대어, 그 손님이 선창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스피로스가 택시와 란치 사이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보아, 짐의 양이 상당히 많은 것 같았다.
"여자임에 틀림이 없군, 바지를 입었든 안 입었든 간에!" 클렘이 말했다.
그 여자의 얼굴은 소프트 모자의 차양 그늘에 가려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란치가 요트 가까이까지 오자 그 여자는 모자를 벗어 그것을 요란하게 흔들어댔다. 밝게 빛나고 있는 빨간 머리와 잘 알려진 얼굴이 드러나자 일동은 숨을 죽였다.
"빨강머리의 케이트요!" 로버트는 이 헤로인의 인상적인 등장에 아주 만족한 듯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타이밍이 좋은걸, 로건"
로건도 싱긋이 마주 웃었다. 이 24시간 동안, 젬마는 두 번째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윽고 다가온 것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어머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자리를 잘 넘길 수 있담.
방법은 없다.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란치는 벌써 요트 가까이까지 와 있었다. 로건은 앞으로 나서며, 아델이 내미는 가냘픈 손을 잡으며 여유 있게 입술에 키스를 했다.
"아델! 오래간만이군요."
"정말! 너무 오래간만이네요."
미소로 아름다운 얼굴이 확 밝아지는 것을 모든 사람들은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이내 사라졌다. 녹색의 눈이, 난간 옆에 잠자코 서 있는 딸의 모습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젬마? 젬마가 아니냐?"
젬마는 로건의 표정이 천천히 변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알아차린 것이다-어머니와 딸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거기에 의심할 바 없는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순간 그의 턱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것은 불길한 징조 같았다. 젬마의 얼굴에 와 닿는 시선은 강철처럼 싸늘했다.
"아무래도, 아닌 밤중의 홍두깨는 하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아델은 이내 침착성을 되찾고 미소를 띠었지만, 그것은 입가에 희미하게 감도는 정도의 웃음이었다.
"너는 도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니? 아직 이스트코스트에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날씨 탓으로 공연이 중지됐어요."
이제 와선 어떤 속임수를 쓴다 해도 소용이 없다. 어쨌든 모든 게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 테니까. 젬마는 말없이 애원의 눈초리로 로건을 쳐다보았지만, 그에게 자신의 의도를 이해시킨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단념했다. 무슨 말을 해도 그는 믿지 않겠지.
"한두 가지 일에 관해 의논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 로건은 젬마에게 말했다. "아델, 잠시만 실례하겠어요."
"나도 한두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지만, 좌우지간 좋아요, 먼저."
아델은 로버트 쪽을 향해 역시 가냘픈 손을 내밀었다. "당신이, 친절하게도 나를 초대해 주신 분이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마침 기분전환을 했으면 싶던 참이었거든요."
로건과 젬마는 선실로 내려갔다. 로건이 문을 닫고 거기에 기대는 것을 보면서 젬마는 간밤의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번만은 해피앤드로 끝날 것 같지 않다.
"먼저, 당신 어머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군. 당신은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할 생각이었지?"
젬마는 침대에 앉았다. 다리에서 힘이 빠져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무엇을 하다니요, 이상한 의도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당신이 저를 차에 태워 준 그날, 전 연극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인 일자리를 <공연중지> 때문에 잃었던 거예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이름과 직업을 분명하게 밝힌 뒤에도 말인가? 그런 모양이군. 당신은 아주 눈치가 빠르니까, 내가 길에서 주운 아이에게 쉽사리 마음이 우러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거지. 내가 당신에게 제의한 일은, 당신에게 있어서는 하늘에서 내린 선물 같은 것이었겠지. 자신의 연기력을 증명해 보일! 한 가지만은 칭찬해 주겠어. 당신은 전신전령을 다해 그 역할을 해낸 거요!"
"당신은 이야기를 멋대로 꾸며내고 있어요." 젬마는 대들었다. "그렇지가 않았어요. 당신에…, 당신에 관한 한은."
"아무렴. 내가 타고난 매력을 발휘하는 바람에 당신은 완전히 제정신을 못 차리게 된다, 그런 뜻이군."
젬마는 그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계속해 말했다. "저는 그날 밤 당신을 진심으로 원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나를 원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때는, 다른 일은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어요."
"허어, 그랬나?" 그의 자제심이 일시에 무너지면서, 상처 입은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것은 당신에게 있어서 일생일대의 오디션이었지. 참으로 잘 해냈어요."
"로건," 콱 막힌 것 같은 목구멍에서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일로 우리의 관계를 끝내진 마세요. 당신과 이렇게 되고 나서부터는 전, 오디션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오디션을 꼭 받고 싶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것이 당신을 잃는 결과가 된다면."
"당신은 많은 것을 상실했지. 어떤 사람이라도, 속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요. 나도 예외는 아니지. 이 사실을 로버트에게 어떻게 말해야 좋담? 당신의 어머니가 누군지 몰랐다고 말한다고 해서, 로버트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나? 우리는 약혼한 지 3개월이 지난 걸로 되어 있어. 물론 이것은 내가 꾸민 거지. 하지만, 선의(善意)에서 우러나온 것임은 믿어 줄 테지."
"로버트가 모르는 곳에서 그의 부인과 계속 만나고 있는 것도 선의인가요? 저는, 당신들이 함께 있는 장면을 극장에서 봤어요. 기억하세요?"
"당신이 무엇을 보았든 무엇을 생각했든 알 바 아니야. 전에는 그런 것이 당신과 조금은 관계가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아무 관계도 없다고!"
더 이상 애원해 봤자 소용없다. 이번에야말로 모든 게 끝장난 것이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깨를 움츠리며 물었다.
"저는 어떡하면 좋지요? 당장 추방?"
"그것은 로버트가 생각할 문제지. 당신은 그의 손님이지 나의 손님은 아니니까. 당신이 아델의 딸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로버트는 그런 경솔한 행동은 취하지 않겠지.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는 게 되겠지."
"당신의 어깨는 그렇게 떡 벌어졌는걸요. 충분히 그 책임을 질 수 있어요."
그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 가는 편이 좋을 것 같군. 그러지 않으면 당신을 후려갈기게 될 것만 같아."
무리도 아닌 이야기다. 젬마는, 로건이 방에서 나가는 것을 우울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나 넘어서는 안 될 하나의 선이 있다. 그런데 나는, 요 일주일 사이에 몇 번이나 그 선을 넘고 말았다. 정말 겨우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마치 일생이라는 시간을 살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엔진소리와 진동이 젬마를 몽상에서 깨나게 했다. 시계는 정오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요트가 항구를 떠나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도망칠 수도 없다.
선실을 나설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승객의 태반은 후갑판에 나와 해안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트는 스니온 갑(岬)을 목포로 출항한 것이다.
"저어, 할 이야기가 있어요. 막상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서요." 젬마는 로버트에게 말했다.
"나에게도 설명해 줘야 할 게 있지. 두 사람에게 한꺼번에 이야기해 준다면 시간절약도 된다." 어머니가 옆에서 말참견을 했다.
로버트는 갑판 맞은쪽에 있는 벤치를 가리켰다. "그럼 저기에 앉읍시다."
세 사람이 앉자, 로버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말해 두지만, 로건은 모든 것을 고백했어요. 그가 곤경에 빠져 있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인데, 그는 아주 괴로워하는 것 같았소." 로버트는 웃음을 참을 길 없다는 듯이 눈을 번쩍였다.
"그런데, 로건은 어디에 있나요? 혼자 방에 틀어박혀 괴로워하고 있는 건가요?"
"당신이 한 행동은 그다지 잘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어떤 남자라도 그런 것을 좋아할 리 없겠지."
"네, 알고 있어요.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어쨌든 설명해 보려무나." 아델은 딸이 곤혹스러워 하는 것이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나도 알고 싶구나. 너,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구나, 젬마. 너한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설명은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첫째로, 어째서 히치하이크 따위를 한 거냐?" 아델이 다그치듯 물었다. "나는 네게 충분한 돈을 보내 주었잖니."
"프라이드라는 것 때문이었소? 자신에게 필요한 돈은 스스로 벌겠다는?" 로버트가 이해성 있는 말로 말했다.
"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줄곧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왔으니까요. 앞으로는 스스로 길을 열어 헤쳐 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만일 누군가의 주목을 끌게 된다면, 그 후에는 잘 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비앙카 역이 안 된다면, 그 외에 무엇이라도 좋아요."
아델은 웃었다.
"어머니와 딸이 같은 쇼에? 그거 괜찮겠구나."
"정말이오." 로버트는 생각에 잠기면서 말했다. "그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군요. 첫째로, 선전이 되거든. 명우인 어머니와 신인의 딸. 관중은 열광할거요."
"농담이겠지요." 아델은 이미 웃고 있지 않았다. "내게 22세의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될 수 있는 한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에요."
"딸의 데뷔 찬스를 빼앗게 되는 데도요? 나는 아델 베리스포드가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이기적이라서가 아니라, 이것은 자기방위예요. 이 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18세였지만, 누가 그런 걸 생각이나 해주겠어요. 모두 내 나이를 6,7년 위로 보겠지요."
"설사 그렇다 해도, 당신의 인기는 흔들리지 않아요. 첫째로, 당신은 서른 살 남짓으로밖에 보이지 않거든요."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아요." 아델은 웃었다. "서른다섯으로 봐주면 충분히 만족해요."
"자아, 그럼 됐어요." 로버트는 마주 웃었다.
"저어, 미안하지만 두 분 다 그쯤에서 저의 의견도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만"
젬마가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깜짝 놀라 그녀 쪽을 돌아다보았다.
"당신은 기꺼이 승낙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좀처럼 없는 찬스가 아닌가?"
"아직 결정된 게 아니에요. 우선, 로건이 저를 오케이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 문제라면 내게 맡겨요." 로버트가 장담했다.
"그것을 후원의 조건으로 제시할 셈인가요? 그건 공평치 못해요!"
"비즈니스에 공평해야만 한다는 법이라도 있소? 현금이 걸려 있는 이상, 나도 계산은 해야지요."
"당신은 제게 그 역을 해낼 만한 능력이 있는지 어떤지조차 모르고 있잖아요!"
"좋소! 그럼 먼저 그것을 보여줘요."
"안 돼요! 로버트, 제발 저를 그런 궁지에 몰아놓지 말아 주세요."
"달링, 너 좀 이상해졌구나. 야심이라는 것은 깡그리 없어지고 만 거냐?" 어머니가 말참견을 했다.
"남에게 뭔가를 강요하면서까지 야망을 달성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리고 어머니는 그 아이디어에 반대했잖아요?"
"손님을 모으기 위한 의미뿐이라면, 내가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버트가 말 한대로, 친딸에게 영광의 일부를 나누어주어도 좋지 않겠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단다."
"그 친딸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요?"
"그것은 믿어지지 않는데." 로버트가 끼어들었다. "당신은 로건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걱정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제와서는 어느 쪽으로 사태가 바뀐다 해도 큰 차이는 없지 않겠소?"
로버트는 아픈 데를 찔렀다. 사실은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겐 이미 잃어버릴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일만이 나에게 남겨진 유일한 삶의 보람인 것이다.
8
젬마의 설명을 말없이 다 듣고 나자, 제이슨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해가 잘 안 되는군. 연극학교에도 양친이 연극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은 제법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비밀로 하진 않았어. 어머니가 유명인이라는 것 때문에 당신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거나 나쁜 인상을 갖거나 하진 않았을 거야, 사람들은."
"역시 얼마간의 영향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젬마는 고집스럽게 우겼다. "유명한 사람이 부모라면, 어딘지 모르게 사람들이 꾀어드니까요. 난 그게 싫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내가 연극학교에서 사귄 친구들은 진실한 친구들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어요."
"그야 물론이지! 하긴, 내가 그 사실을 알았을 경우 이용하려 하지 않았으리라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제이슨은 평소의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로건의 반응은 어때?"
"예상한 대로예요."
"그렇다면 당신들 관계는 끝장이라는 뜻인가?"
"그런 셈이지요." 젬마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켜버렸다. "다만, 당신의 아버지에 관한 한, 깨끗이 끝난 것으로는 되지 않았지요. 아버지가 내건 조건은, 당신만은 아니었던 거예요."
"그건 무슨 뜻이지?"
젬마는 짤막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제이슨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거 잘됐군. 당신은 물론 그 이야기에 응했을 테지?"
"응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어요?" 저도 모르게 몹시 불쾌한 말투가 되었다. "무대 뒤에서 정실 관계가 난무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까요."
"당연하지.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함께 춤출 수 있다는 이야기로군. 나로서는 꿈같은 일인걸."
그가 진심에서 말하고 있음을 젬마도 알 수 있었다. 연기에 관한 한 그는 아부하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상대역과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공연할 수 없다고 제이슨이 말하는 것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에고이스트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정당한 변명으로도 생각되었다. 여태까지 찬스를 잡지 못했던 것은 그에게 재능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앞으로의 나에게 필요한 것은, 연기에 대해 편협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제이슨과 같은 태도다. 지금의 나에겐 연기하는 것밖에 남아 있지 않으니까.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 나타난 로건은, 언뜻 보아서는 오늘아침에 벌어진 사태로 조금도 동요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우연히 눈이 마주쳤을 때도, 로건의 얼굴에는 전혀 무관심한 표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간단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할 수 있다면, 그가 나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감정도 그리 깊은 것은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나도 마음이 편하다. 다만, 몸의 반쯤이 떨어져 나가 버린 듯한 절망감만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지만.
오전 중에 제이슨이 줄곧 곁에 있어 준 것이 젬마에겐 고마웠다. 항해 중에는 풀장에 커버를 씌우기 때문에 수영하는 것은 자연히 제한되었다. 두 사람은 갑판에서 링 던지기 게임을 했으나, 한 시간 남짓 하고 나니 너무 무더워서 포기하고 그늘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젬마는 될 수 있는 한 로건에게서 떨어진 장소에 앉았다.
지금으로서는 로버트가 그에게 예의 조건을 제시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로건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임에는 틀림없지만, 로버트로부터의 자금원조가 중단된다면 그는 한층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공연의 일정도 이미 결정되었으니, 이제부터 다른 후원자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에게는 노라고 말할 만한 여유 같은 건 허락되어 있지 않다.
저녁식사는 살롱(saloon)에 준비되었다. 모든 사람은 제각기 정장으로 갈아입었다.-단, 제이슨만은 예외였다. 젬마는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진홍색의 실크드레스를 골랐다.
"뭔가를 주장하고 싶을 때 이것을 입으세요."라고 샐리는 말했었다. 살롱에서 로건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주장이 확실히 그에게 미쳤다는 것을 젬마는 느꼈다.
"그 드레스, 나의 머리칼과 충돌하겠다." 아델이 어느 정도는 진심에서 항의했다. "나에게 쏠리는 스포트라이트를 나누어주는 건 상관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조화라는 것은 생각해 주어야지."로건의 턱이 갑자기 굳어진 것으로 보아, 아델이 말한 의미를 그는 정확하게 알아차렸음이 틀림없다. 로건은 로버트 쪽을 쳐다보았지만, 로버트는 시치미를 때고 모른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폭탄선언을 하는 시기를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겠지. 그 일을 가능한 한 내가 없을 때 했으면, 하고 젬마는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젬마의 입장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녀와 제이슨은 각각 테스트를 받은 뒤에 함께 추어 보도록 지시를 받게 될 것이다. 이전에 두 사람은 호흡이 맞는 짝을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신장이 썩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무가가 지시하는 스텝이라면 거의 무엇이든 해낼 자신이 있다. 로건의 개인적인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만 있다면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브리지 놀이를 하자고 말을 꺼낸 것은 캐더린이었다. 젬마와 제이슨은 카드놀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사양했다.
"나도 사양하겠어, 아델과 의논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로건이 말했다.
"당신들이 그렇게 친하다니, 전혀 몰랐어요." 캐더린이 빈정거렸다.
"5년 전, 내가 처음으로 브로드웨이의 무대를 제작했을 때 아델에게 많은 신세를 졌지. 아델이 없었다면 나는 그대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거요."
"아주 겸손한 분이네요, 달링!" 아델은 로건의 칭찬을 듣는 것이 그리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는 거예요. 당신과 나와 둘이서 말이에요!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케이트>를 세기의 대히트 작품으로 만드는 거예요!"
젬마는 입술을 깨물며 외면했다. 저 로건의 미소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저 특별히 은근한 미소는, 단둘만이 친밀하게 지낼 때의 기억을 떠올려 주는 것이다. 설마 로건과 어머니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연령차는 겨우 6년이다. 그리고 5년 전이라면, 그 차는 좀 더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을 것이다.
5년 전이라면, 양친이 이혼한 해다. 로건이 그 계기가 됐던 것일까? 뉴욕으로 출발하는 어머니를 공항에서 전송하던 때의 아버지의 공허한 얼굴을 떠올렸다. 우리는 말없이 집에 돌아왔다. 다시는 온 가족이 한자리에 있을 수 없게 된 집으로. 아니, 그전에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는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다른 남자들도 있는 것 같았으며, 다른 원인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 봐도 가슴의 응어리는 가시지 않았다.
"갑판에 데려다 줄래요? 여기는 너무 무더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젬마는 제이슨에게 속삭였다.
냉방이 잘 되어 있었으므로 제이슨은 묘한 얼굴을 했지만, 젬마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로건은 젬마가 나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어머니와 단둘이 이야기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마치 단둘만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밤공기는 향기로웠고, 바다는 잔잔했다. 최초의 목적지는 크레타 섬의 이라크리온이다. 거기에서 지중해의 섬들 사이를 일주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도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떠난 여행인데, 이제는 모든 것이 바래 버린 느낌이다. 마실 것을 가져오겠다는 제이슨에게 제의를 거절하고, 젬마는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잠시 바깥 공기를 쐬고 싶었던 거예요."
"로건에게서 떨어지고 싶었던 것일 테지?" 의미 있는 침묵 끝에 제이슨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면-내 추측이 아마 맞을 성싶은데-그렇다고 해서 어떻다는 거지? 그때, 로건은 당신들이 모녀간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당신은 그의 편을 들 생각이에요?"
"별로. 다만, 이성적인 눈으로 사물을 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지. 당신은 조금 전에 그를, 그가 마치 근친상간 정도의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것 같은 그런 눈초리로 보던걸."
"당신이 지금의 내 입장이라면 어떨까 생각해 봐요. 기분이 어떻겠어요?"
"알았어. 그야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비참하게 되는 건 아니지. 오디션을 받을 생각이라면, 차분히 마음의 정리를 하는 게 좋아요. 감정적인 연관성을 지닌 채 오디션에 임하는 건 좋지 않으니까."
일깨워 주지 않아도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 이 세상에 남자가 로건 한 사람만은 아니지 않은가. 될 수 있는 한 빨리 그에 대해 잊도록 하자.
살롱에 돌아갈 기분이 아니었기에, 젬마는 곧바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시각은 열한시 15분. 아직 잘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젬마는 라디오를 듣기로 하고, 책에 정신을 집중해 보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도저도 다 실패했다. 마침내 단념하고 잠잘 준비를 했다.
커튼을 등 뒤로 하고 샤워를 하고 있을 때, 나오던 뜨거운 물이 갑자기 끊어지고 타월지의 실내복이 어깨에 걸쳐졌다.
"나와요!" 로건의 목소리였다.
젬마는 순순히 따랐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질질 끌려나갈 게 뻔하니까. 로건은 바지의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었다. 하얀 턱시도의 상의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행동으로 옮기기 전의 준비?" 젬마는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용건은 뭐예요?"
"두서너 가지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게 있어. 당신은 케이트 역에 어머니가 결정된 사실은 몰랐겠지. 그렇다면 당신은 순간적으로 그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거겠지. 그 순간적인 재치에는 두 손 들었어요. 로버트가 재빨리 그 계획에 덤벼든 것도 무리는 아니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비앙카 역을 하고 어머니가 케이트 역을 한다는 것 말이오. 설마, 그 아이디어가 당신에게서 나온 게 아니라고 말할 작정은 아닐 테지."
일이 그렇게 됐구나! 어머니는 언제나 책임을 남에게 떠맡기는 데는 뛰어난 솜씨가 있다. 어머니는, 젬마가 자기와 함께 출연하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식으로 로건에게 말한 것이 틀림없다. 부정해 봤자 시간의 낭비일 뿐이다. 그리고 이젠 그런 것은 어떻게 되었든 상관이 없다. 나에 대한 로건의 평가는 이미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말았으니까.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라는 것은 인정하겠지요? 작년에 관객을 모으지 못했다는 이미지를 깨끗이 씻어버리기 위해서도 뭔가 선전이 될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될 텐데요."
"유명한 스타를 기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 작년에 주역으로 픽업했으나, 실패란 있을 수 없지."
"하지만 조연급도 언젠가는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비앙카 역에 누군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공모해서 오디션으로 뽑을 심산이었지. 이제는 돌아가서 연출가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두 중요한 조연을 결정하고 말았다고 보고해야만 하겠지."
젬마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연고관계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제오늘에 시작된 일이 아니다. 연극의 세계에서는, 실력이 어떠냐 하는 것보다는 적절한 시기에 힘이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어지간한 바보다.
"저를 테스트해 보고 나서 결정하는데 로버트는 찬성하고 있어요. 제이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저희들에게 오디션을 받을 찬스는 주세요. 우린 함께 춤춘 적이 있는 걸요."
"침실도?"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분노로 젬마의 볼에 금세 빨간빛이 떠올랐다.
"당장 나가요! 당신한테서 그 따위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요!"
로건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만일 당신이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나갈 생각이라면. 무쇠 갑옷이라도 입고 무장하는 게 좋을 거요. 예상 밖의 일이 여러 가지 일어날 테니까."
젬마는 몹시 상처를 입었다.
"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어요. 당신은 자신의 프라이드가 손상되어서, 그것이 참을 수 없는 거지요. 특히, 당신이 턱 끝으로 부릴 수 있다고 얕보았던 인간이 그 프라이드에 상처를 입힌 장본인인 거예요. 당신은 저를 이용하려 한 거지요? 그렇다면, 제가 거꾸로 당신을 이용하려 했다고 해서, 왜 안 된다는 걸까요? 과거에 제 어머니와 관계를 가졌었다는 것이, 당신에게 꺼림칙하게 생각되던가요?"
"꺼림칙한 생각? 그건 무슨 뜻이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해도 좋아요. 매스컴에서 그 사실을 알았다간 잠자코 있지 않겠지요."
"내가 로버트의 제의를 거절한다면, 이번엔 그것을 무기로 삼을 셈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저,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와 버린 것뿐이다. 그리고 마음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 의혹을 풀어 버리고 싶다는 기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따지고 드는데 야 부정할 수도 없었다.
"어째서 안 되나요? 모녀 2대를 상대로 하는 <패밀리 맨(family man)>이라는 것도 좋은 선전거리가 되지 않을까요?"
로건이 움직이기까지는 정확하게 10초가 걸렸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오히려 그 동작은 원만했다. 내디디는 한 걸음한 걸음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젬마는 같은 속도로 뒷걸음질 쳤지만, 이내 칸막이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공포심은 없었다. 다만,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고 가슴이 무서울 정도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어깨를 움켜잡은 손가락은 강철처럼 단단했고, 입술은 잔혹했다. 희한 저항의 외침소리도 사정없이 내리누르는 힘에 짓눌리고 말았다. 그의 억센 팔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도망치고 싶은지 어떤지는 분명치 않았다.
먼저 제동을 건 것은 로건 자신이었다.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들었다.
"분명히 해두지. 당신에게 찬스를 주겠어, 당신과 제이슨 두 사람 다에게. 단, 한 번 뿐이야. 실패하면, 당신의 음모도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거지. 알겠나, 젬마!"
로건이 상의를 집으러 가는 것을, 젬마는 몸을 경직시킨 채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결국 로버트가 이긴 것이다. 나는 자신의 실력을 보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사실을 말하면, 로건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았지만.
밤사이에 크레타 섬에 도착한 모양으로, 아침에 눈을 뜨자, 뒤로 낮은 구릉과 야자 숲이 펼쳐져 있는 새하얀 백사장이 시야에 뛰어들었다.
"여기서 이라크리온까지 한 시간 걸려요." 로버트가 아침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설명했다. "여기는 크레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해안의 하나지요. 오전은 여기서 지내고, 점심식사 후에 이라크리온을 향해 출발할까 하는데, 어떻소?"
"책임자는 당신이니까요." 로건이 말했다. "나 개인으로서는 해야만 할 일이 산적해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마시면서 천천히 이야기하지 않겠나. 조금은 편하게 쉬게나, 로건. 자네는 아무래도, 충분히 느긋하게 쉬는 것같이 보이지 않는군 그래."
"그가 완전히 느긋하게 쉬는 때란 없는 걸요." 아델이 알은체하는 얼굴로 말참견을 했다. "젬마, 너와 제이슨은 런던에 도착하는 대로 오디션을 받게 되었단다. 고맙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돼. 이런 찬스란 좀처럼 있는 게 아니야."
"로버트가 깊이 관여하면 무슨 일이고 가능하지요. 최근에야 겨우 그 사실을 알게 됐어요." 캐더린은 이렇게 말하자, 남편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고 일어섰다. "해안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오겠어요. 15분 정도 있으면 스피로스가 보트를 낼 테니까, 가고 싶은 분은 함께 가시지요. 한 번으로 무리라면 몇 번 왕복시킬 테니까요."
"란치를 내는 방법도 있어요."
로버트가 말했지만, 캐더린은 거기에 대해서 대꾸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로버트는 손안에서 빵을 부스러뜨리면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부부사이의 사소한 의견차이요-대수로운 건 아니지."
로버트가 가고 난 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아델이 입을 열었다. "많은 결혼의 문제점은, 주고받는 관계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있지요."
"한쪽은 주기만 하고 한쪽은 받기만 하는 결혼은 곤란하지요." 클렘이 드물게 시니컬한 어조로 말했다.
"거기에 우리도 포함되는 건 아닐 테지요?" 그의 아내가 웃으면서 물었다.
"물론 포함되지 않지. 우린 공통점을 많이 갖고 있지 않나."
나이도 그 중 하나겠지, 하고 젬마는 생각했다. 만일 내가 비슷한 나이의 연인을 가졌더라면, 그 관계는 보다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물론 그런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애당초 로건의 성인남성으로서의 매력에 이끌렸으니까. 그 때문에 동년배의 남자에게는 완전히 흥미를 잃고 말았다.
마침내 모두가 해안에 도착했다. 스피로스는 자기도 해안에 남고 싶어 했지만, 아이다가 요트에서 돌아오라고 부르는 바람에 마지못해 보트로 돌아갔다.
"이런 날에 일해야 하다니, 가엾은 스피로스! 게다가 다시 우리들을 요트로 나르기 위해서 몇 번이나 왕복해야 하다니." 베리루가 말했다.
"젊은 청년에게 있어선 너무 한가할 정도의 일거리지요, 이것은. 게다가, 시즌이 끝날 즈음에는 여태까지 만져 본 적도 없는 정도의 돈을 손에 쥘 수 있지요." 로버트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헤엄칩시다." 제이슨이 이끌었다. "물은 크리스털처럼 투명한데. 저 바위까지 갑시다."
젬마는 후미진 곳의 입구에 있는 그 자그마한 섬을 목표로 팔을 번갈아 뻗으며 헤엄쳤다. 제이슨은 먼저 헤엄쳐 가서, 평평한 바위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규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연습을 시작하지 않겠어? 일주일 동안 게으름을 피우며 지냈더니 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져 버렸지 뭐야."
정말 그렇다고 젬마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 하지요?"
"아침 일찍, 갑판에서. 달리 방법이 없지 않겠어? 여섯 시에 일어나면 그런대로 연습할 수 있을 거야. 올 텐가?"
"가겠어요."
그러는 편이 침대 안에서 안달을 하며 뒤치는 것보다는 한결 나을 것이다. "내일부터 시작할래요?"
"오케이" 제이슨은 상반신을 일으키며 젬마의 몸을 훑어보았다. "당신은 변했군. 살이 찐 것도 아닌데 어딘지 모르게…, 여자다운 내음을 물씬 풍기고 있는걸."
"나이 탓이에요. 벌써 스물 둘 인 걸요."
젬마는 제이슨의 손이 뻗어오는 것을 살며시 밀어냈다. "그만둬요, 제이슨."
그는 이내 손을 움츠리고는, 다시 벌렁 드러누웠다.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평생을 혼자서 살 셈인가? 그 사람만이 남자가 아니라고, 정말이지!"
"알고 있어요. 언젠가는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그리고…"
"나는 역부족일 것 같은가?" 제이슨은 그녀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알았어, 그 사실은 받아들이기로 하지. 다만, 당신한테 좀 더 투지를 불태우라고 권하고 싶군. 무슨 일이 있어도 비앙카 역은 따놓고 보는 거야. 안무를 담당한 진스코트는, 자기 생각과 극단적으로 충돌하지 않는 한 댄서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사람이지. 그녀와 일하는 것은 즐겁다고 생각해. 어쨌든, 최선을 다해 보는 거요."
제이슨은 경쾌한 동작으로 일어섰다. "그럼, 다시 해안에서 만나요."
젬마는 바위 위에 앉은 채, 제이슨이 바다에 뛰어드는 것을 보고 있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해안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요트로 이라크리온으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젬마가 있는 곳에서, 모두가 하얀 백사장에 흩어져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캐더린은, 아델과 로건과 이야기하고 있는 로버트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들의 결혼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캐더린은 젊고 아름다우니까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사람은 몇 사람이고 생기게 마련이겠지만, 로버트가 사랑한 만큼 그녀를 사랑해 줄 사람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으리라.
젬마가 해안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점심식사는 시작되고 있었다. 음식물과 와인이 휴대용 아이스박스로 요트에서 날라져 온 것이다. 한 손에 치킨 다리를, 또 한 손에는 와인글라스를 들고 젬마는 백사장을 거닐었다. 그녀는 자그마한 언덕을 올라가 커다란 야자나무의 그늘을 발견하고 거기에 앉았다. 젬마는 결코 고독을 즐기는 타이프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시 혼자가 되어 자신을 차분히 바라보고 싶었다. 내일이 되면 나는 냉정한 현실과 대처할 수 있게 되겠지. 정말 몇 시간의 여유가 나에겐 필요하다.
무더위와, 헤엄을 치고 난 뒤의 피로가 밀려와 젬마는 그만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깜빡 졸았던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눈을 떴을 때 치킨과 글라스는 반쯤 모래에 파묻혀 있었고, 그 주위에는 개미떼가 새카맣게 우글거리고 있었다.
당황해서 일어선 젬마는 주위가 묘하게 조용한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 새나 곤충의 울음소리, 파도소리 등은 들려오고 있었지만,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야자나무 그늘에서 나와 보니, 백사장에는 사람이라고는 그림자조차 없었고 요트도 사라지고 없었다.
시계를 요트에 두고 왔기 때문에, 얼마나 잤는지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있는 위도 상에서는 태양의 높이도 판단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내가 없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가버리다니. 처음엔 울화가 치밀었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점차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오늘오전 중 나는 줄곧 혼자 있기를 좋아했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허용해 주고 있는 눈치였다. 내가 요트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앞으로 얼마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지루하고 쓸쓸한 오후였다. 바다 쪽을 향한 채 젬마는 누가 데리러 와주기를 이제나저제나 안타깝게 기다렸다.
혼자서 이라크리온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간밤에 얼핏 본 지도에 따르면, 확실히 북쪽 해안선을 따라 도로가 뻗어있다고 생각된다. 거기까지 나갈 수 있다면, 그 다음엔 히치하이크로 시내까지 갈 수 있을 테지.
상식이 이내 그 생각을 몰아냈다. 설사 길에 나설 수 있다 해도, 차는 그의 다니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꼴로는 히치하이크 같은 걸 할 수도 없다. 애당초 히치하이크가 이런 트러블을 야기 시킨 원인인 것이다. 과오는 반성해야만 하는 것이고, 두 번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가 내가 없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고, 무슨 조치를 강구해 주겠지. 그때까지 얌전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모터보트의 소리가 들려와 젬마는 황급히 일어섰다. 유선형의 날씬한 하얀 선체가 갑(岬)을 돌아오고 있었다. 보트가 엔진의 파워를 떨어뜨리며 가까이 다가왔을 때에야 핸들을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을 어떻다고 하기 전에, 그 얼굴에서 걱정하고 있었던 기색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까지 걸어와요!" 엔진을 끄지 않은 채 보트를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추고 로건이 소리쳤다.
정말 그는 그럴 생각인 것일까? 사과할 생각도 없고, 위로의 말을 건네려고도 하지 않고…, 당연한 복종을 전제로 하는 명령뿐이다. 뭔가가 젬마의 내부에서 들끓으며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분노로 몸이 떨려왔다. 만일 이 실수가 나의 탓이라고 한다면, 좀 더 비난받을 불씨를 만들어 줄 테야!
젬마가 홱 등을 돌려 야자나무숲 쪽으로 걷기 시작하자, 로건은 깜짝 놀란 듯이 외쳤다.
"젬마! 도대체…?"
엔진 소리에 지워져서, 그 뒤의 말은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가 나를 그냥 내버려두고 가도 좋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마중하러 와주겠지-내가 어떤 기분으로 이 몇 시간을 지냈는가를 조금은 생각해 줄 만한 사람이.
엔진 소리가 사라졌는가 싶었는데, 바다의 모래밭을 걸어오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젬마는 오기로라도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의미도 없는 압박감이 가슴을 죄어왔다.
야자나무숲 언저리에 막 도달했을 때, 로건은 젬마를 따라잡았다. 그는 무쇠 같은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더니, 홱 돌려세웠다.
"도대체 어쩔 셈이야? 당신이 남들에게 얼마만큼 폐를 끼치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
내가 폐를 끼쳤다고! 젬마는 느닷없이 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로건의 팽팽한 볼에 빨간 생채기가 떠오르면서, 눈에는 난폭한 빛이 어른거렸다.
이번만큼은 그도 절대 양보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젬마의 몸은 반쯤 모래 속에 파묻혔다. 그녀도 지지 않고 난폭하게 화를 내면서 저항했지만, 마침내 로건에게 양손을 붙잡혀 움쭉달싹 못하게 되었다. 젬마의 몸속에서 분노가 다른 형태의 감정으로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태양 빛은 계속 야자나무 잎 사이로 두 사람 위에 내리쏟아지고 있었다. 녹색에서 금색으로 그리고 눈부신 빛으로 바뀌었다가 이윽고 서서히 사라졌다.
로건은 이 일로도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겠지, 나는 그의 자제심을 완전히 빼앗아 버리고 말았다. 그의 남자로서의 프라이드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젬마가 원했던 것이긴 하지만, 그 원하던 일이 이루어진 지금도, 그녀는 거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떨어졌을 때, 로건은 이미 자기 자신을 되찾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보트에서 기다리고 있겠어." 그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서둘러요. 곧 어두워질 거고, 이 주변의 해안선엔 생소하니까."
"로건, 기다려요!"
그는 멈춰 섰지만 뒤돌아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기다리라니, 뭐를?"
"물어 볼게 있어요. 어째서 당신이 나를 데리러 온 거지요?"
"어째서라니, 애당초 당신이 여기에 온 것은 나로 인해서기 때문이지."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빨리 준비를 해요."
젬마가 보트까지 걸어가자, 로건은 전혀 남을 대하듯 서먹하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도와 올라타게 해주었다. 그러고는 운전석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앉았다.
"엔진의 시동이 걸리면 시끄러울 테니까, 지금 설명해 두지. 우린 처음에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여기에 왔던 거야. 돌아갈 때도 그렇게 했지. 로버트와 당신의 어머니, 그리고 나는 나중에 떠나는 그룹에 속해 있었지. 선발대가 떠날 때 우리는 잡담을 하고 있었으며, 당연히 당신은 먼저 떠난 걸로 생각했지. 그런데 선발대 쪽에서는 당신이 우리와 함께 오는 걸로 생각했던 거요. 오늘 아침 당신의 태도로 보아서는, 당신은 아마 선실에 틀어박혀 지낼 모양이라고 우린 멋대로 해석했지. 이라크리온에 도착하고 나서 제이슨이 당신의 형편을 살피러 갔을 때 처음으로, 당신이 요트에 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요. 자아,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은 거지. 다음에 산책을 갈 땐 반드시 누군가에게 말하고 가도록 해요."
"산책을 간 게 아니에요. 야자나무 그늘에서 잠이 들었던 거예요."
"그렇다면, 어지간히 깊이 잠들었었던 모양이군."
"로건, 방금 있었던 일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지.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그럴 수는 없어요. 만일 당신이…"
"말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평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양보라는 것을 해보는 게 어때?"
엔진의 시동이 걸리고, 보트는 바깥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젬마는 참담한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불현 듯, 와인글라스를 놔두고 온 것에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그가 보트를 돌려서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9
모터보트가 항구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해는 졌고, 주위는 어두워졌다. 로건은 별빛을 의지하여 깎아지른 듯이 솟아 있는 암벽을 따라 바위와 바위 사이를 누비며 보트를 조종해 가고 있었다. 해가 지고 나서 한참이 지나 겨우 시 퀸 호의 모습이 보였을 때는 두 사람 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 보트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올 테니까, 당신은 먼저 돌아가 쉬도록 해요." 로건이 말했다.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조심해요."
젬마는 한시라도 빨리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머리칼은 바닷물의 물보라를 뒤집어써서 끈적끈적했고, 몸은 바닷바람에 싸늘해져 있었다.
제이슨이 트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없는 걸 알고 모두들 얼굴이 창백해졌지. 아버지는 요트를 돌리겠다고 말했지만, 로건이 그것을 거절하고 이내 모터보트를 빌러 뛰쳐나갔지. 이것저것 의논할 틈도 없었어."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요?"
"모두 방에 틀어박혀 있지. 겸연쩍어서, 당신과 얼굴을 대하는 것은 모두가 함께 있을 때 하려는 생각에서지. 우린 모두, 당신을 남겨 두고 와버린 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어. 그 일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통할 수 없으니까."
"나도 잘못한 거예요." 젬마는, 모두가 걱정해 주었다는 것을 알자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 일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잊도록 하겠어요."
"모두에게 그렇게 전하겠어. 어머니도 안심하겠지. 어떻게 당신을 마중해야 좋을지 망설이고 있는 눈치니까. 특히, 당신을 남겨 두고 온 것은 그녀 잘못이라고 로건에게 야단을 맞았으니까."
젬마는 잠자코 있었다. 어머니만 명배우인 줄 알았더니, 로건도 그에 못지 않은걸!
"오늘밤은 밖에서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는데, 갈 텐가? 뭣하면 나도 당신과 함께 요트에 남아 있어도 좋고."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출발은 몇 시?"
"아직 앞으로 한 시간은 남았군. 옷을 잘 차려입을 필요는 없어. 아버지가 이 고장 토박이들이 모이는 집회장소를 알고 있지. 그리스의 전통적인 춤을 구경할 수 있어."
"아버지는 전에도 여기에 온 적이 있군요?"
"응. 나도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1년에 두 차례는 왔었지."
선실 문 앞에 멈춰 서자, 제이슨은 젬마의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안색이 나쁜데, 정말 괜찮아?"
"괜찮다니까, 걱정 말아요. 그럼 이따가."
선실에서 혼자가 되자 겨우 마음이 놓였다. 오늘밤엔 무엇을 입고 가지? 정장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제이슨은 말했다. 그렇다면 하얀 면 팬츠에 홀더를 입는 게 좋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우선, 몸에 달라붙은 모래를 씻어내야지.
30분 만에 준비는 끝났다. 머리는 샴푸로 감아 말렸기 때문에 반짝이는 윤기를 되찾았다. 살갗은 햇볕에 그을어 금빛을 띠고 있었다. 면 팬츠는 몸에 딱 맞았고, 맵시 나는 곡선미를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것은 틀림없는 댄서의 육체였다. 나긋나긋하고 날씬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모였음직한 시간에 젬마는 후갑판으로 나갔다. 환성과 질문, 그리고 변명의 집중포화를 받으면서 젬마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어깨를 움츠렸다.
"염려 마세요, 앞으로는 여러분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 테니까요."
"정말 깜짝 놀랐지 뭐냐. 바다에라도 떨어진 게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어서." 아델이 말했다.
로건은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자, 천천히 입술로 가져갔다.
"그것은 좀 과장되었는데요, 달링!"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언젠가 당신이 아이를 갖게 된다면, 어버이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거예요, 틀림없이."
언제부터 그렇게 나에 대해서 걱정해 준 것일까? 어렸을 때부터 나는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아버지한테로 가곤 했다. 어머니는 전혀 상대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이슨이 재빨리 윙크를 보내왔다. 그것을 보자 젬마는 어깨의 힘을 뺐다. 그렇다, 이런 생각은 접어 두자. 뭐라고 해도 어머니는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주연 여배우니까.
일행은 항구에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생선요리와 샐러드로 저녁식사를 하고, 그러고는 두 대의 차에 분승해서 바다로부터 떨어진 내륙의 마을로 향했다.
그것은 차도에서 좀 벗어난 곳에 있는 작은 마을로, 외줄기 포장도로를 따라 바가 두 집에 가게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하얀 벽의 집들이 구릉의 비탈진 곳에 밀집해 있었고, 그 맞은쪽에 목표인 집회장소가 있었다. 마을사람 전체가 거기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시끌시끌한 소리와, 음악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돌이 깔린 안뜰 양쪽에 좁고 긴 테이블과 벤치가 놓여 있고, 많은 손님들이 거기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은 마당 뒤쪽에 있는 석조건물에서 날라 오는 모양이었다.
로버트는 그중 몇 사람인가와 서로 이름을 부르며 포옹하고 재회를 기뻐하고 있었다. 모두가 자리를 좁혀 주었기 때문에 젬마일행도 전원이 앉을 수 있었다. 전통적인 현악기인 부즈키를 손에 든 두 남자가 새롭게 애수를 띤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하자이내 젊은 남자들이 전원 일어섰다. 팔을 끼고 서로 원을 만들고는, 놀라울 정도로 우아한 동작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스텝은 단순해도,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춤이었다.
셔츠와 바지라는 것이 남자들의 일반적인 복장인 듯싶었으며, 여자들은 제각기 빛깔이 요란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젬마는 맞은쪽에 앉아 있는 중년의 여자에게 더듬거리는 그리스어로 말을 건네 보았다. 여자는 기쁜 듯이 미소를 지으며, 흐르듯이 빠른 말투의 그리스어로 대답을 해왔다. 젬마는 웃으면서, 전혀 뜻을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실토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의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은 아니었다.
춤을 추는 것은 대개 남자들이었다. 두 시간 사이에 여자들이 일어선 것은, 연주자들이 영국인도 알고 있는 대중가요를 연주했을 때뿐이었다. 젬마는 검은 눈동자의 멋쟁이 남자에게 댄스의 신청을 받았다. 댄스 하는 동안, 그 남자는 젬마의 귀에 뭐라고 계속 속삭이고 있었다.
"사랑의 말을 속삭인 거야!" 자리에 돌아왔을 때 제이슨이 귓속말을 했다.
곡이 바뀌고, 이번엔 그리스인 남녀가 한 사람씩 나오더니 짝이 되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저 정도라면 우리도 출 수 있어요." 춤을 끝낸 두 사람이 열광적인 환호와 칭찬의 소나기를 받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제이슨이 말했다. "해보지 않겠어? 우리의 실력을 보여줄 절호의 찬스요!"
만류할 사이도 없었다. 제이슨은 앞으로 나서더니, 부즈키를 들고 있는 남자들에게 뭐라고 말했다. 그가 손짓을 하며 불렀을 때 젬마는 얼굴이 빨개졌고, 그러고는 곧 창백해졌다. 설마! 하지만 제이슨은 진정이었다.
누군가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옆 사람에게 속삭였고, 그 속삭임은 차례차례로 전해졌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격려의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의젓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영국인이 우리에게 춤을 추는 법을 가르친다고? 아무래도 웃기는 이야긴데!
제이슨이 다시 한번 손짓해서 부르자, 젬마는 당황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게 추고 싶다면 혼자서 출 것이지!
"가 봐요." 로버트가 말했다. "아들은 하나의 도전을 하고 있는 거요. 이제 와서 물러설 순 없지요."
"해보세요." 캐더린의 눈은 심술궂게 빛나고 있었다. "적어도 당신들은 훈련을 받은 댄서예요. 저 사람들은 그저 아마추어가 아니던가요?!"
로건에게 도움을 청해도 허사였다. 그는 젬마 쪽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젬마는 용기를 내서 일어서자,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한가운데를 미소하면서 앞으로 나갔다. 나중에 제이슨을 실컷 혼내 주더라도 지금은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제이슨이 맞으러 나오며 자신만만하게 웃어보였다.
"처음부터 패배를 인정할 건 없어요.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자고."
"나는 스텝도 모르는 걸요!"
"나는 알고 있어. 나한테 맞춰 주기만 하면 돼. 당신이 감을 잡았을 즈음에 변화를 주도록 하지."
말다툼을 해보았자 소용없다. 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할 바에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제이슨은 젬마의 손을 잡자 높이 들어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균형을 잡았다. 자동적으로 젬마는 그의 포즈를 흉내 냈다.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천천히 스텝을 밟는다. 원 투 쓰리, 원 투 쓰리, 왼발을 뒤로, 중심을 옮기고, 다운(down), 글라이드(glide), 그리고 이것을 되풀이한다. 어려울 거라곤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식이라면.
리듬을 타는 데 따라 긴장감은 사라져갔다. 힘도 들이지 않고 하나의 착오도 없이 젬마는 파트너의 리드에 맞추어 가고 있었다. 제이슨은 웃으면서 연주자들을 부추겼다. 템포는 점점 빨라져 가고, 움직임은 점점 광범위하게 리드미컬하게 되어갔다. 이윽고 클라이맥스가 왔다. 째지는 듯한 박수소리와 환성 속에서 연주자와 무용수, 네 사람 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덕분에 영국과 그리스의 우호관계는 일단 깊어졌어요." 테이블을 돌아온 두 사람에게 로버트는 칭찬의 세례를 퍼부었다.
"이 두 사람이 발군의 한 쌍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 로건?"
"그렇겠지요." 로건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남은 것은 연출가와 안무가를 납득시키는 것뿐이군. 자네들은 수요일에 런던으로 돌아갈 예정이니까, 금요일에 오디션의 일정을 마련하기로 하지."
"당신은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나요?" 젬마는 애써 싹싹한 어조로 물었다.
"아아, 내일 아침 비행기로 돌아갈 생각이오."
"어머나, 유감이네요. 겨우 막 도착한 참인데." 베리루가 말했다.
"나도 로건과 함께 돌아갈까 하고 생각했지만, 모처럼 나를 위해 멋진 환대를 계획해 주셨는데 그러는 것은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아델이 생글거리며 끼어들었다.
"그건 사실이지요. 우린 할 수 있는 한의 일은 다 하고 있는 셈이거든요." 캐더린은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슬슬 요트로 돌아가지 않겠어요?"
개인적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싶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집회장소를 떠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가까스로 차에 올라탔을 때는 열한시 반이 지나 있었다. 요트로 돌아와, 자기 전에 한잔하겠다는 남자들과 헤어져, 여자들은 각자 자기의 선실로 돌아갔다.
젬마는 침대 곁의 로커에서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는 가죽케이스를 꺼냈다. 좀 더 빨리 돌려줬어야 하는 건데 찬스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밤엔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을 돌려줘야 한다.
어머니가 로건과 함께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조금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 제의를 거절한 것은 로건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이제부터 바빠지게 될 테니, 그러한 형태로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은 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칸막이벽의 저쪽에 사람의 기척이 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젬마는, 될 수 있는 한 자기와는 관계가 없는 생각을 하기로 했다.
-현창(舷窓)주위에 박힌 대갈못의 수를 헤아린다거나, 통기구멍의 격자무늬의 눈금을 헤아린다거나 하는. 로건이 떠난 뒤의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는 생각지 말자. 이제부터의 며칠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긴 날들이 되겠지.
가볍게 노크하자, 로건은 이내 대답을 하고 문을 열었다.
"이것을 돌려주려고 왔어요." 긴장으로 젬마의 목소리는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잘 가세요, 로건. 당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결과가 되고 만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젬마는 곧 등을 돌리고 방을 나오려했으나 로건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이런 식으로 헤어질 수는 없어. 좀 더 여기에 있어줘요."
"그런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서로 오해한 채 헤어지는 것은 좋지 않아요. 한두 가지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어요. 시간을 많이 빼앗지는 않겠어."
젬마는 방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도저히 그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로건은 아직 밝은 빛깔의 셔츠와 바지를 입은 채였다. 막 셔츠를 벗으려던 참이었던 모양으로, 커프스의 단추는 끌러져 있었다. 젬마는 가슴이 죄어들었다.
"당신 어머니와의 일말인데, 당신의 추측은 맞지 않았어, 젬마. 나와 당신 어머니와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지. 간밤에 당신이 그런 식으로 말했을 때 즉시 부정하고 싶었지만…"
젬마는 즉석에서 로건의 말을 믿었다. "기뻐요. 그 말을 듣고 안심했어요."
"그런 일은 털끝만큼도 생각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오." 로건은 심술궂게 입을 삐죽거렸다. "나에겐 스스로 정해 놓은 철칙이 있지. 일과 즐거움을 혼동하지 않는다는 룰이오. 나는 본의 아니게 단 한 번 그 철칙을 어겼어-그 결과가 이런 꼴이지, 보다시피!"
"즉, 당신은 바라고 있지 않은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거군요. 만일 제가 그 역을 사퇴한다면, 조금은 당신을 위하는 게 될까요?"
잿빛 눈이 가늘어졌다.
"그럴 마음이 있나?"
"가능하다면 사퇴하고 싶지는 않아요." 젬마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찬스란, 그렇게 흔하게 있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로버트의 방식에는 찬성할 수 없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그래도 밀고 나갔지."
"하지만, 제게 그밖에 뭐가 남아 있다는 거지요?" 젬마는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우리의 관계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저는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하겠어요. 그 무렵 저는 연극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전에도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이에요. 언젠가 당신은, 이미 나의 앞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지요. 그런 감정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 버렸나요?"
"그렇지 않아." 로건의 어조가 돌연 몹시 거칠어졌다. "오늘 오후, 당신은 그것을 내게 증명해 보이려 한 건가?"
"모르겠어요, 오늘 오후 제가 무엇을 증명하려고 했는지." 젬마는 한 발짝 내디디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로건?"
"그런 수법은 이젠 먹혀들지 않아요. 아마 영원히 그럴 테지. 우리 사이의 갭은 너무나 커요."
"연령의 차 말인가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조금은 관계가 있지. 당신은 나에게 무리한 주문을 하고 있는 거요. 나는 <결혼, 아이, 그리고 영원히 행복한 생활>이라는 것들과는 맞지가 않아."
"제가 그런 것들을 바라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시죠?"
"지금은 바라고 있지 않다 해도 언젠가는 원하게 되지. 당신을 처음 봤을 때 직감으로 알았어요."
"그렇게도 직감력이 뛰어나다면, 지금의 제 심정이 어떤지도 아시겠군요.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돼도 좋아요. 내일, 저도 함께 데리고 가 주세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바빠서 도저히 당신을 데리고 갈 수가 없어." 그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만일 선실에 돌아갈 생각이라면, 지금 돌아가는 게 좋아."
젬마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룻밤 더 함께, 그렇지만 속박은 일절 없이>라는 뜻이겠지. 거절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그밖에 아무 것도 없다 해도, 적어도 나는 그에게 다정했던 추억을 남길 수는 있을 것이다.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뜬 젬마는, 일순 템스 강변의 그의 집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비좁은 침대가 그녀를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게 했다.
앞으로 한두 시간만 있으면 로건은 가버리고 만다. 하지만 젬마는 이것이 최후의 작별이 된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간밤에 나는 천국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나 혼자만이 그런 경험을 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로건도 이내 눈을 떴고, 젬마의 눈을 말끄러미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턱에는 수염이 조금 자라 있었지만, 그런 것에도 젬마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가 가만히 입술을 겹쳐왔다. 젬마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로건은 마음속에 단단히 새겨 두려는 듯이 젬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있어서 이 순간만은 이 세상에 상대방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 조용한 동안에 방으로 돌아가는 게 좋아요." 여섯 시쯤 해서 로건이 말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재촉하듯 다시 말했다. "아홉 시까지 공항에 나가지 않으면 안돼."
전송하러 가도 되느냐고 묻는다는 것부터가 어리석은 짓이다. 우선, 자신이 그것을 바라고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있다. 작별인사는 지금 여기서 하는 수밖에 없다.
"런던에 돌아간 뒤에는 어떻게 되나요?" 젬마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계획은 다 짜여져 있다고 말했을 텐데?"
"아니, 무대의 일이 아니고 우리의 일말이에요. 이제는 개인적으로는 당신을 만날 수 없나요?"
잠시 침묵이 흐른 끝에 로건이 입을 열었다.
"상황으로 판단컨대, 극장 밖에서는 만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
"만일 제가 배역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 당신도 제이슨도. 당신들은 서로의 파트너로서 태어난 사람들처럼 보이더군. 게다가 선전효과도 있을 테니까, 어떤 연출가라도 오케이 할 거야."
"달리 정해 놓은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르지요."
"그런 경우에는 내가 설득하지.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상한 소문을 내고 싶지 않은 이유는 거기에도 있어요." 로건은 딱 잘라 말했다. "당장 당신이 머무를 장소는 내가 물색해 보기로 하지. 어머니와 함께 호텔생활을 할 마음은 없겠지?"
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그것을 바라고 있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전 살 곳을 스스로 찾고 싶어요."
"어머니가 송금해 준 돈으로? 거기엔 손대고 싶어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요. 하지만 우선 빌려 쓰고, 나중에 갚으면 되겠지요."
로건은 거기엔 대꾸하지 않고, 어깨를 움츠리면서 말했다.
"샐리의 가게 위에 있는 아파트가 아직 비어 있는지 어떤지 확인해 보지."
젬마는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그 제의까지 거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방을 구한다는 것은 언제나 고생스러운 일 중의하나니까.
"당신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쓸쓸하겠는걸."
로건은 젬마의 어깨를 껴안고 입술에 키스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이 그리 길게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로건은 또 다른 누군가를 찾게 되겠지, 그가 언제나 그렇게 했듯이. 나도 누군가를 찾게 될 것이고, 그리고 모든 것은 과거의 일로서 잊혀지고 말 것이다. 시간은 어떤 생생한 기억이라도 희미하게 만들고 만다고 한다. 그것이 진실이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다.
그가 짐을 꾸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젬마는 방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니, 마음은 어떻든 간에 몸은 상쾌해졌다. 셔츠와 토퍼를 입고 났을 때, 문을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열어보니, 제이슨이 서 있었다.
"샤워하는 소리가 들리더군. 조금 전에 노크했을 때 당신은 아직 자는 것 같았는데. 준비는 됐어?"
"준비라니? 무슨? 아직 여섯 시 반밖에 안 됐는데?" 젬마는 아직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트레이닝이지. 설마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어마, 미안해요, 잊고 있었어요."
"어쨌든 좋아, 아침식사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막대기 대신에 로프를 아주 적당한 높이로 묶어놓았지."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대안(對岸)의 도시 전경이 찬란한 아침햇살 아래 드러나 있었다. 그 이후 한 시간 동안, 두 사람은 한 마음으로 트레이닝에 열중했다.
"아침 한 시간 만으로는, 연습시간으로선 너무 짧은걸." 완전히 지쳐 가지고 라운지체어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제이슨이 말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요." 젬마는 이마의 땀을 훔쳤다. "머리를 감아야겠어요. 땀투성이에요."
두 사람이 선실로 돌아가려고 할 때, 로버트와 로건이 갑판으로 나왔다. 로건은 슈트케이스를 들고 있었으며, 3일 전에 여기 왔을 때와 똑같이 바지에 얇은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아침식사는?" 젬마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물었다.
"공항에서 뭐든 먹지." 로건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택시가 온 모양인데,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말하지."
로버트가 부두를 향해 걷기 시작하려 하자, 로건이 웃는 얼굴로 제지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우린 이미 작별인사를 했으니까. 그럼, 젬마, 건강히 지내요. 다시, 스테이지에서 만나요."
<스테이지에서만>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마치 간밤의 일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은 말투였다. 로건은 젬마의 뒤에 있던 제이슨에게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네도지. 트레이닝, 열심히 하게."
그가 걷기 시작하기에, 젬마는 그대로 선실로 내려왔다. 떠나는 그를 보는 것은 너무나도 괴로웠다.
아침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로건이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자 아델은, 작별인사쯤은 하고 싶었는데, 하면서 불만스러워했다.
"2주일만 있으면 다시 만날 텐데요." 로버트가 위로했다. "그는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그는 나의, 객석을 메우는 힘을 필요로 하고 있을 뿐인 걸요. 그리고 나는 그 힘을 갖고 있어요. 속임수 따위를 쓰지 않고서도 말이에요." 아델은 딸 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젬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시선을 받았다.
"물론이에요, 엄마는 스타인걸요. 줄곧 스타로서 군림해 왔는걸요. 엄마는 노래, 저는 댄스. 경쟁할 필요 따윈 없다고요."
아델은 웃었다.
"달링, 엄마와 딸 사이에는 언제든지 경쟁이 있게 마련이란다. 너는 나에게 5,6년 부질없이 나이를 더 먹게끔 만들어준 셈이니까. 가능한 한 조금이라도 더 나이를 숨기고 싶었는데 말이야. 40이라는 연령과 정면으로 맞선다는 것은 여자에게 있어서 매우 괴로운 일이지. 너도 그 나이가 되면 이해하게 될 거야."
앞으로 18년. 그때 나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만일 배우로서 성공했다 하더라도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머니는 지금, 무엇을 지니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것을 저렇게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마음이 평안하지 못한 증거라고 젬마는 생각했다.
10
제이슨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가 온갖 기회를 이용해서 레슨으로 이끌어 주지 않았다면, 젬마가 나머지 여정을 잘 견디어낼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여러 섬을 방문했지만 모두 안개가 낀 듯 어렴풋하게 밖에 비치지를 않아서, 어느 광경이 어느 섬의 것이었는지조차도 분명치 않았다. 필레프스에 돌아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젬마는, 다시는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모를 장소에 대한관심이 너무 부족했다는 것을 후회했다.
필레프스에 도착하니, 로건의 전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젬마는 조바심이 나는 마음을 억제하며, 서둘러 봉투를 뜯었다. 하지만 전보내용은 간단한 것이었다. 샐리의 아파트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끝났으며, 개인적인 오디션은 금요일 열시로 결정되었다는 것뿐이다. 로건은 그런 일 외에 젬마와 사적으로 만날 생각 같은 건 털끝만큼도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로건은 떠나기 전에 모든 것을 분명하게 하지 않았던가. 어째서 나는 그 사실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남은 인생에 대처하려 하지 않는 거지?
왜냐하면,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해답이었다. 그리고 사랑은 그렇게 간단히 단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앞으로 줄곧 마음속에 희망을 품고 살아갈 테지.
전원이 같은 비행기로 히스로 공항을 향해 날았다.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젬마는 일부러 지리를 바꾸어 달라고 해서 어머니 옆에 앉았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지만, 그리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이슨과 함께 앉지 않아도 되는 거냐? 로건이 떠난 이후, 너희들은 언제나 붙어 다녔지 않니?"
젬마는 웃으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우린. 첫째로, 그에겐 분명한 걸프렌드가 있는걸. 그런데, 영국에 돌아가면 어디에 머무를 작정이세요?"
"사보이 호텔의 늘 묵곤 하는 스위트룸이지. 뉴욕을 떠나기 전에 예약해 두었는걸."
"<케이트>가 롱런할 것으로 예상하세요?"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출연한 뮤지컬이 롱런하지 못했던 예는 없었는걸."
언제나 예외란 있게 마련이라고 젬마는 생각했다. 로건은 이번에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한 무대 효과나 멋진 의상에 정성을 쏟아, 호화찬란한 무대를 만들려 하고 있다. 경비가 엄청나게 많이 드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최초의 몇 주간 객석을 만원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지상의 과제다.
"네게 아파트를 빌려 준다는, 그 샐리 로저스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어머니가 물었다.
"로건의 친구에요. 부티크 주인이지요. 내가 갖고 있는 옷은 모두 거기에서 샀어요.-로건이 사준거긴 하지만요."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지. 그 점이 이해가 잘 안 가는구나. 그런 짓을 할 바에야, 어째서 내가 송금한 돈을 쓰지 않았지? 처음 만난 사람과 이상한 계약을 맺기보다는 훨씬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되는데."
절망감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젬마는 안간힘을 다했다.
"돈을 받게 되면, 그가 나를 위해서 쓴 돈을 마지막 1페니까지 갚을 작정이에요."
"지금 당장 그러는 게 어떻겠니? 로건에게 빌기보다는 자기 어머니의 돈을 쓰는 편이 낫지 않겠니? 대략 얼마쯤 되는지는 알고 있겠지? 모르겠으면 그 샐린가 하는 사람한테 분명한 액수를 물어서 수표를 보내도록 해라. 그러면 모든 게 처리되는 셈이지."
"그렇겠네요…, 그렇게 할게요. 로건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니까요."
"빠를수록 좋은 거야. 그래야만 후련할 게 아니냐."
어머니의 말이 옳다. 돈 관계만이라도 깨끗이 청산된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자신이 돈을 벌수 있게 되기까지는, 샐리에게 집세를 지불하기 위해 예금에 손을 대지 않으면 안 되니까.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이 지겹다면서 손을 꼭 쥐어달라는 어머니의 요구에 응해주며 젬마는, 지금까지 자신이 어머니에 대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다는 것을 적지 아니 반성했다. 우리는 보통의 모녀 사이처럼 친밀하게 되지는 못 한다 해도, 어느 정도 서로의 이해를 깊게 할 수는 있을는지도 모른다.
일행은 공항에서 해산했다. 제이슨은 아버지와 캐더린과 함께 세븐 오크스에서 이틀 밤을 묵고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귀찮은 놈이 한 사람 늘어서, 캐더린은 못마땅한 눈치야. 아버지에게는 그녀가 없는 편이 행복하다고 생각해.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 뭐야."
"그것은 아버지의 문제에요."
"즉, 아버지 스스로 알아차리기를 기다리라는 거군. 그게 좋겠지!" 제이슨은 웃으면서 젬마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금요일에 극장에서 만나."
샐리는 젬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가게를 조수에게 맡기고 이내 젬마를 2층으로 안내했다. 그것은 아담하고 조촐하며, 살기에 편해 보이는 아파트였다.
"여기가 빌 때마다 많은 사람에게서 빌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밖에 빌려주지 않았어요. 얼마나 있게 될 것 같아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우선, 첫 달치 집세는 지불하겠어요."
"그 문제라면, 이미 로건에게서 받았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샐리는 젬마가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고 덧붙였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로건은 당신을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좋을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어때요?"
"그럴 수는 없어요. 돈 문제는 깨끗이 해두고 싶어요. 그가 나를 위해서 사준 옷이나 구두의 대금은 어느 정도나 되나요?"
"아직 계산해 보지 않았어요. 내주쯤 로건에게 청구서를 보낼 생각이지만."
"그런 수고를 끼칠 필요는 없어요. 금액을 말해 준다면 내일 아침 은행으로 달려가, 당장에 지불하겠어요. 지금은 수중에 수표장이 없어서요."
"정말 상관없겠어요? 액수를 듣고 나면 기절초풍할 거예요."
"괜찮대도요."
"알았어요. 그럼 장부를 가져올 테니까, 천천히 쉬도록 하세요. 좋으시다면 주방에 커피가 있어요."
커피를 다 끓었을 즈음 샐리가 돌아왔다. 젬마는 커피를 거실로 가지고 가서 소파에 앉아 계산서를 받아 들었다.
길게 숫자가 나열된 끝의 총계를 본 젬마는 숨을 죽였다. 샐리는 재미있다는 듯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말했던 거예요. 우리 집 물건은 싸구려가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로건은 지불할 거예요. 그는 당신에게 좋은 옷을 입힐 생각이었던 거예요."
"괜찮아요. 지불하겠어요." 젬마는 청구서를 접어 지갑에 넣었다. "집세도 수표를 끊을 테니까, 로건에게 보내 주지 않겠어요?"
"거절하겠어요. 그것은 당신이 직접 해주세요." 샐리는 딱 잘라 말했다.
화제를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젬마는 생각했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서 살지 않나요? 가게와 붙어 있어서 무척 편리할 텐데요."
"비즈니스와 사생활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싶어서요. 지금, 친구들과 공동으로 한 태의 집을 빌어서 살고 있는데, 원단을 구매하기 위한 여행으로 집을 비울 경우에는, 그 친구들이 이모저모로 돌봐줘서 아주 편리한 걸요. 그럼, 저는 상점으로 돌아가겠어요. 추동복인 울이나 모헤어의 슈트에 정찰 표를 붙이고 있던 참이었어요. 구경하지 않겠어요? 멋진 옷들이 많아요."
그래서 값비싼 것들 뿐이로구만. 단순한 면 팬츠 하나에 45파운드나 지불하는 골빈 사람들만을 상대로 하는 모양이지.
짐을 풀면서 젬마는 옷 하나하나를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았다. 확실히 모두 바느질이 뛰어나다. 하긴 그렇지 않으면 곤란하지만. 앞으로 몇 년이나 입지 않으면 안 될 테니까.
가게 문을 닫는 시간인 다섯 시 반이 되어서, 샐리가 아래층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냉장고에 식료품이 조금 들어 있어요. 이틀쯤은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당신의 생각? 아니면 로건의?"
"내 생각이에요. 다음 사반기(四 半期)분의 집세에 추가하지요. 그럼 잘 자요!"
사반기라니? 로건은 3개월분의 집세를 선불한 것이다. 그 정도라면 나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겠다고 생각한 몫의 예금까지 인출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설령 뮤지컬이 얼마간은 롱런하다 해도, 젬마는 당분간 빚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젬마는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만들고는 텔레비전을 켰다. 요 2주간에 비하면, 거짓말처럼 조용한 밤이다. 젬마는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템스 강변의 아파트에 있을 때도, 로건이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긴 해도 하루 중 몇 시간인가는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다시 그렇게 하자고 말해 준다면 얼씨구나 하고 응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서 텔레비전을 켜 놓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초인종이 울린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파트에는 가게에서 올라오는 계단 외에도, 주방 뒤에 출입구가 있었다.
"누구세요?" 젬마가 소리쳤다.
"로건이오." 대답이 들여왔다.
젬마는 갑자기 굳어져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으로 체인을 벗겼다. 로건은, 본 기억이 있는 다크그레이의 슈트를 입고 있었다. 햇볕에 구릿빛으로 그을은 얼굴에 새하얀 셔츠가 눈부셨다. 젬마는 당장에라도 그의 가슴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자신이 침착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게 이상하기만 했다. "누군가가 찾아 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특히, 내가 오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을 테지."
로건은 안으로 들어와 손을 등 뒤로 돌려 문을 닫았다. "샐리에게서 전화를 받았지."
"그래서요?"
"그래서, 우린 얘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 어디에 앉아서 말이오."
"어서." 젬마는 그를 방안으로 안내했다. "커피라도 드시겠어요? 술 종류는 아무 것도 없는 걸요."
"마실 것은 필요 없소."
로건은 소파에 앉자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우린 하나의 계약을 했었지. 샐리의 청구서는 별도로 치고, 나는 아직 당신에게 2백 파운드의 빚을 지고 있어요."
"그것은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요. 정말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처음에, 오디션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뿐이에요."
"그런데 어느새 옆길로 빠져들고 말았지. 그것은 알고 있소."
"그렇다면, 당신은 그것을 전면적으로 믿지 못하겠다는 말인가요?"
로건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경지에까지 우리가 깊숙이 빠져든 것은 믿고 있소.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리지.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나와의 일이 없었다면 살 리가 없는 옷의 대금을 당신이 지불하겠다고 우기더라는 말을 샐리한테서 들었기 때문이지."
"그녀가 무슨 권리로 그런 말을…"
"권리라면 크게 있지. 그녀는, 나에게 그것을 지불할 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저도 그래요."
"나는, 지불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말한 거요. 그저 지불한다는 것과는 달라요. 어쨌든 그것은 나의 부채야. 샐리가 주었다는 그 청구서를 내놓아요."
젬마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말했다. "어머니와 약속한 걸요, 깨끗이 결말을 짓기로요."
"돈의 출처가 자기라고 해서 그녀에게 그것을 고집할 권리는 없을 텐데." 로건은 갑자기 어조에 조바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부탁이니까, 이쯤에서 결말을 내줘요. 이 일로 옥신각신하는 것은 정말 싫으니까!"
나 역시 그렇다. 이미 진저리가 나버렸다. 젬마는 청구서를 꺼내 로건에게 건넸다.
"당신이 온 목적이 이것뿐이라면, 자아, 이것으로 목적은 달성한 셈이군요."
젬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전보는 고마웠어요. 폐를 끼치고 말았군요."
로건은 이내 대답하지 않고 젬마의 얼굴만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착각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녀로서는 그 표정을 뭐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만나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오감(五感)에 미치는 로건의 영향력은 조금도 약화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빤히 응시하고 있을 뿐인데도,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목적은 그것뿐이라고, 나는 내 자신에게 들려주었지. 그러나 지금 나는, 당신을 품에 안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거예요?" 젬마는 속삭였다.
로건은 상의를 벗고 넥타이를 끄르자 젬마 옆에 앉았다. 젬마는 그의 가슴에 기댔다.
"요트를 떠난 이후, 이런 순간을 생각지 않고 지낸 밤은 하루도 없었어." 나중에야 로건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원래가 절제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조금 남아 있던 것마저 당신이 몽땅 빼앗아가고 말았지. 그건 그렇고, 금요일에는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줘요."
"염려 말아요. 지금까지 그래 본 적이 없을 만큼 훌륭하게 추어 보일 테니까요."
"그래 주었으면 좋겠어." 로건은 몸을 움직거리더니, 팔을 들어올려 시계를 보았다. "이제 돌아가야겠는데."
젬마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벌써?"
"안됐지만, 여덟 시 반에 누구를 만날 약속을 했거든." 그는 젬마의 관자놀이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내일도 하루 종일 약속으로 꽉 차 있지만, 일곱 시경에는 여기에 올 수 있을 거야."
"고작 한 시간쯤 같이 있기 위해서 하루 종일 애타게 기다려야 하겠군요." 젬마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빚진 돈을 현찰로 지불해 버리는 게 낫겠어요."
로건은 얼굴이 굳어지며 일어서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젬마도 느릿느릿 일어나자 실내복을 입었다. 땀에 젖은 살갗에 실내복이 달라붙었다. 로건이 나가면 이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서 그에 대한 생각을 깡그리 씻어 버리는 거야. 나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그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할까보냐… 거실로 돌아가니, 로건은 상의를 입고 있는 참이었다. 젬마를 쳐다보는 그의 눈초리는 전혀 무감정한 것이었다.
"다시,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해 두겠어요. 집세는 제가 지불하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최소한 문은 닫아 걸 수 있다고요!" 젬마는 덤벼들 듯이 말했다.
"좋을 대로. 수표를 보내줘요."
"액수를 모르는 걸요."
"샐리에게 물어보면 알려줄 거요."
"샐리에게 물어보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겠네요. 그녀와는 며칠 정도나 지속했나요?"
"그만 집어치워! 금요일에 극장에서 만나기로 하지. 열시 정각이야. 당신 어머니도 온다고 했어. 그러는 편이 당신도 마음 든든할 테지."
로건이 가버리고 만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젬마는, 그가 좀 더 여기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랐다. 한 시간, 아니30분만이라도….
하지만 젬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원한다는 것은 프리이드가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로건이 나가고 난 뒤, 젬마는 자물쇠를 잠그고 체인을 걸고는 벽에 얼굴을 밀어붙이며 눈물을 참았다. 그 따위를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는 없어! 그에겐 그럴만한 가치가 없어. 젬마는 안간힘을 다해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들려주고 있었다.
일기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영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긴 하지만-금요일은 날씨가 화창했다. 분장실 입구의 수위가 젬마의 이름을 체크하고 3번 분장실을 사용하라고 일러주었다.
젬마는 레오타드(leotard)로 갈아입고 댄스 화를 신고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유연체조를 했다. 열시까지는 앞으로 10분이 남았다. 이런 곳에서 차분하게 기다린다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무대 끝으로 나가보면 시험관이 어떤 사람들인지 확신할 수 있겠지.
제이슨이 먼저 와 있었다. 그도 젬마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가 오고 있군요. 모두 네 사람이에요."
로건도 오는 것일까?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다. 나와 제이슨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도, 로건이 다른 사람들에게 압력을 넣은 결과니까.
정면 좌석의 라이트가 켜졌다. 여섯째 열과 일곱째 열에 두 사람씩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로건은 어머니와 함께 일곱 째 열에 앉아 있었다. 앞줄의 두 사람은 연출가와 안무가일 테지. 로건은 아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연신 웃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긴장의 빛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젬마는 내심으로 결의가 한층 더 굳어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에게 실력을 인정받는 거야!
"정각 열시야. 나가지" 제이슨이 말했다.
두 사람이 무대로 나가자, 안무가인 진 스코트가 다가왔다. 키가 늘씬하고 깡마른 여자로 얼굴에 화장기라곤 없으며, 머리는 목덜미에서 아무렇게나 맨 채였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과연 나긋나긋하고 날렵했다.
"처음엔 한 사람씩 독무를, 그런 다음 두 사람이 함께 추는 것을 보았으면 해요. 저기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제리에게 좋아하는 곡을 말해줘요. 자아, 시작합시다."
길고도 괴로운 20분간이었다. 아무 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독무도 그런대로 잘 되었지만, 정말 신바람이 나게 된 것은, 두 사람이 추는 춤이 반쯤 진행되고 난 무렵이었다. 제이슨과 추고 있으려니까, 마치 자신의 그림자와 추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두 사람은 호흡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었다. 끝났을 때는 두 사람 다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이 있었다.
피아노 소리가 멈춘 뒤의 정적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객석의 네 사람은 두 사람 쪽은 아예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뭔가 의논하고 있었다. 이윽고 진 스코트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나의 주문대로 추도록 해요. 내가 시범을 보일 테니까, 그대로 따라 하면 되는 거예요. 음악은 없이"
젬마는 전신을 집중해서 안무가의 복잡한 동작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제이슨도 그녀의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다시 한번" 안무가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도합 3의, 두 사람은 안무가의 지시에 따라 춤을 추었다. 3회째에는 그녀 자신이 두 사람에 가세해서 추었고, 최후에 딱 맞는 포즈가 결정되었을 때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생긋 웃었다.
"오케이." 진은 객석의 세 사람을 향해, "나는 이것으로 좋지만, 이의가 있는 분은?"하고 물었으나, 그것은 분명히 형식적인 질문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기색 같은 건 없이, 그녀는 두 사람을 향해서 말했다. "연습은 일주일 후 월요일부터예요. 개막 날까지 7주간의 연습기간이 있는데, 그 정도는 걸려야 해요." 그녀는 입을 다물고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없나요?"
"우린 말을 잊고 말았는걸요." 제이슨이 그렇게 대답하고는 웃으면서 젬마를 포옹했다. "해냈어, 젬마! 합격이야!"
"해냈군요!" 젬마도 소리쳤다. 로건은 이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정말로 원하고 있던 것을 손에 넣은 것이다.
분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어왔다.
"드디어 로버트의 생각대로 되었구나. 축하한다. 너는 훌륭한 댄서야."
자기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한 녹색의 눈을 응시하고 있으려니 동정심이 끓어올랐다. 22세의 딸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일 것이다. 더구나 그 딸이 같은 무대에 나란히 서게 됐으니….
"아델 베리스포드와 같은 배우는 다시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해요. 우린 제각기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걸요."
"하지만, 너도 노래를 부를 수 있겠지?"
"무대에 설 만한 가창력은 못 돼요. 그렇기 때문에 테스트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나 자신도 그다지 흥미가 없는 걸요. 아무도-물론 나도-어머니한테는 미칠 수가 없어요."
어머니는 희미하게 웃었다.
"고맙구나. 그것만이-톱의 자리를 지키는 것만이-내가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거야. 어떠한 남자도, 그것에 필적할 만한 만족감을 주지는 못했지."
잠시 침묵에 빠져 있다가, 젬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었다.
"로건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나요?"
"아니, 나는 다른 약속이 있는걸. 로건도 그런 모양이더라. 그런데, 예의 돈 문제는 깨끗이 청산했니?"
"흠…, 일간 청산할 거예요."
젬마는 그렇게 말해서 얼버무렸다. 그녀는 솔직한 기분이 되어 어머니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일부러 와주셔서 고마워요. 앞으로 엄마를 뭐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요? 마마라고 부르는 걸 좋아하는 타이프도 아니고, 미스 베리스포드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 형식적이고…"
"아델이라고 불러 주려무나." 어머니는 문득 먼데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되었다. "알겠니? 너, 이따금 아버지를 빼쏜 듯 보일 적이 있지."
그러고는 이내 평소의 시원시원한 태도로 돌아간 어머니는 계속 말했다. "이젠 가봐야겠다. 몸조심해라. 뭐든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려무나."
어머니는 돌아갔다. 앞으로 얼마 동안은 어머니가 송금해 준 돈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거처할 곳도 조만간 찾아야 한다. 3개월에 6백 파운드라면 런던의 시세로서는 적당한 것이겠지. 그렇지만 거기엔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로건에게 수표를 보냈다. 3개월 전에라도 다른 곳에 좋은 거처를 찾게 된다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이사할 심산이었다.
로건에 대해서 생각만 해도 괴로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에 대한 생각은 그만 하기로 하지. 어머니를 본받아 오로지 연기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제이슨이 분장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젬마는 그의 갈색 눈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미소했다.
"다시 무대에 돌아온 감상은?"
"당신이 느끼고 있는 것과 똑같지.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기뻐!" 그는 젬마의 팔을 잡자 걷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뭘 할 거지?"
"아무 것도. 당신은?"
제이슨이 대답하기 전에, 뒤에서 메르세데스가 다가와 두 사람 옆에 멈췄다. 로건이 차창을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 그가 말했다.
"우리 두 사람에게요?"
제이슨이 묻자, 싸늘한 미소가 돌아왔다.
"안됐지만 먼저 가주지 않겠나? 젬마, 타요"
그 말투에 그녀는 결심을 굳혔다.
"아니요. 전 걷는 편이 좋아요."
로건은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리자, 두 사람 앞을 가로막고 섰다.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지 않아도 될 텐데" 로건은 제이슨에게 야유하듯이 말했다. "피할 수 없는 것을 뒤로 미룰 수는 없으니까. 자네가 좋아하든 않든 간에 나는 그녀를 데려가야겠어."
"문제는, 제가 좋아하고 않고 에 있는 게 아니겠지요. 결정하는 것은 젬마니까요."
눈을 그녀의 얼굴에 못 박은 채 로건은 손을 뻗어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젬마는 잠시 동안 발버둥 치며 저항했지만, 이내 단념했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면서 조수석에 올라탔다. 사죄와 이해를 구하는 마음을 담아 제이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주에 만나요, 제이슨."
제이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버렸다. 운전석으로 돌아온 로건은 곧 차를 발진시켰고, 모퉁이를 돌자, 간선도로의 혼잡한 차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젬마는 잠자코 있었다.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템스 강을 건너서야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의 집으로 가는 건가요?"
"우린 앞으로 거기서 살게 될 테니까 익혀 두는 게 좋지."
가슴속으로 따스함이 번져갔다.
"아주 당연하다는 투군요."
"글세." 그는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요 36시간 동안,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데 이만저만 애를 먹은 게 아니야."
"어떤 결론이 나왔나요?"
"내가 한 사람의 여자를 계속 사랑할 수 있다는 결론이지. 단, 그 여자가 당신일 경우에 말이오." 그는 흘끗 젬마를 쳐다보았다. "당신도 나를 마찬가지로 생각해 줄 텐가?"
"물론이에요!" 젬마는 손을 그의 무릎 위에 놓았다. 그가 긴장하는 것을 알고 젬마는 마음이 설렜다.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어서, 가슴이 아플 정도예요!"
로건은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도 그 느낌이 전해져 오는걸. 그런데 다음에 손을 내 무릎에 놓을 때는 미리 말해줘요. 하마터면 차와 함께 강물 쪽으로 다이빙할 뻔했다고."
젬마는 웃으면서, 눈으로 그의 입술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것이 자기 입술에 포개졌을 때의 일을 떠올리자, 불현듯 웃음이 사라지고 불안감이 되살아났다.
"로건,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에요? 당신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나요?"
"증명해 주기를 바라나?"그는 빨간 신호 앞에서 차를 세우고는 말했다.
"할 수 있어요?" 젬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최선의 방법은 증거품을 보여주는 거지. 둥근 상자를 열어 봐요."
젬마는 그리 오래 된 일도 아닌, 지금과 똑같았던 장면을 기억에 떠올리면서 가슴을 두근거렸다. 같은 크림 빛의 케이스가 들어있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열어 보니,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
"같은 게 아니군요." 너무 기뻐, 젬마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고 싶었으니까. 나는 무릎을 꿇거나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연극의 소도구로 사용했던 반지를 줄 정도로 무신경한 사나이는 아니야."
그는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것도 지나친 생각일까?"
"아니, 그렇지 않아요!" 젬마는 반짝이는 녹색의 눈을 치떴다. "당신은 결혼 따윈 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잖아요."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그랬지. 만난 뒤에도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데 시간이 걸린 거요."
"무엇이 결심하게 만들었나요?"
"당신이지. 나는 여태까지는 결혼 따윈 사람을 구속할 뿐인 쓸데없는 제도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지. 하지만 그것은 경우 나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당신이라면 함께 살아갈 수 있어. 당신이라면 사소한 일상다반사로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고, 여성특유의 수다로 나를 숨막히게 하지도 않을 거요."
글쎄, 그게 어떨는지? 젬마는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로건은 어디까지나 단조로운 것을 싫어하는 자유인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로건이 나는 좋은 것이다.
"어머니는 뭐라고 하실까요?"
"나는 당신의 어머니와 결혼하는 게 아니야." 그가 지적했다. "그건 그렇고, 그녀는 보기 드문 타이프의 장모가 될 것 같은데."
색다른 할머니가 될 거야. 로건은 그 점에 관해서도 결국 마음을 바꾸게 될 테지. 설명할 수는 없어도, 그런 느낌이 든다.
젬마는 빨리 집에 도착해서, 그의 팔에 안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의 눈앞에는 전혀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여름이 찾아왔다. 작년보다 훨씬 비도 적고, 무더운 여름이었다. 템스 강물은, 저 건너에 보이는 타워 브리지까지, 아침햇살에 반짝이면서 흘러가고 있었다.
젬마는 테라스에 나와, 벽을 뒤덮고 있는 핑크 빛깔의 클레마티스(clematis)의 가지를 하나 꺾어, 물을 담은 얕은 볼에 띄워 아침식사의 테이블 위에 놓았다. 밖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니, 런던 시민으로선 엄청난 사치다. 이 아파트에는 여러 가지 결점이 있지만, 그 점만은 행운이라고 생각되었다.
로건이 조간을 손에 들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실크의 실내복을 입은 채로. 집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을 때는 즐겨 그런 차림을 하고 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거지. 물론 가치 있는 생활은 아니지만, 주말을 보내는 데는 최고의 방법이지. 특히 이런 덤이 떨려 있다면 말이야." 로건은 젬마의 몸에 시선을 치달렸다.
"덤이 아니에요, 그 중의 한 부분이지." 젬마는 명랑한 목소리로 정정했다. "지금, 아침식사를 가져 오겠어요…, 아아! 로건. 그만!"
로건은 옆으로 지나가려는 젬마를 끌어안아 그 목덜미에 살짝 입술을 댔다.
"여인이요, 그대가 있을 곳을 아느뇨!"
"내가 있을 것은 당신 곁이에요, 나의 태양, 나의 생명, 나의 주인님!" 젬마는 웃으면서 로건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놓고는, 이마에 키스했다. "뭐가 먹고 싶으세요?"
"지금은 아무 것도…, 이따가 먹기로 하지." 그는 젬마의 홈드레스의 단추에 손을 댔다.
일광욕 때 쓰는 낡은 매트리스가 안성맞춤의 침대가 되었다. 두 사람의 정열은 결코 약화되지 않았다. 어떤 때든, 어떤 장소에서든, 그것은 언제나 그지없이 멋지기만 했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따스한 햇살을 담뿍 받으며 누워 있었다. 먼저 몸을 움직거린 것은 젬마였다.
"낮 공연이 없다고 해서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당신, 오늘 오후엔 볼일이 있다고 말했잖아요?"
"우리 둘의 볼일이지." 그는 젬마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서 말했다. "오늘은 집을 보러 가기엔 아주 좋은 날씨군."
"집이라고요? 우리의?"
"달리 누구의 집이겠어?" 로건은 기분이 좋은 듯 눈을 지그시 감아 보였다. "이 아파트는 독신자에겐 아주 편리하지만, 너무나도 임시 거처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하지만 여기는 그냥 둘 생각이야. 가능한 한 강가에 면해 있는 집을 사고 싶어. 점심식사 후에 집을 보러 갈 약속이 되어 있지"
젬마는 한쪽 팔꿈치를 짚으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당신도 참, 나에겐 일언반구도 없이 그런 계획을 세운 거예요?"
"깜짝 놀래주고 싶었던 거야."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젬마의 얼굴을 쳐다본다. 미소가 서서히 번져갔다. "당신은 화나면 더욱더 매력적이 되지. 알고 있어?"
어쩔 수 없는 사람! 젬마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는 구제불능이야! 그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한데, 나는 그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그대로의 그를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로건은 손을 올려, 서서히 젬마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 손의 부드러움이 그녀의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장래의 일을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지." 그는 조용히 말했다. "<케이트>는 금년 내내 공연이 계속될 전망이고, 다음무대의 계획도 슬슬 시작하고 있지만, 인생에는 일 이상의 것이 있게 마련이지. <케이트>의 공연이 끝나면 약간의 휴가를 얻어서, 다른 종류의 생산에 착수할 생각은 없어?"
생각한 그대로였다. 젬마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환희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싶어요. 반드시 그러고 싶어요."
"그럴 줄 알았어." 잿빛 눈에 어떤 종류의 망설이는 듯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젬마, 당신은 아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을 그런 타이프의 여자는 못 되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하고 싶어도, 당신이 못하게 하지 않겠어요!" 젬마는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래." 로건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 "어느 날 노상에서, 하마터면 당신을 그냥 지나칠 뻔했던 일이 생각나는군! 어리석은 아가씨가 한 사람 있구나, 하는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지."
"우리가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해 보라고요!" 젬마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어조를 바꾸어 계속했다.
"이봐요, 로건. 당신은 그날 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직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렇군. 그것을 듣는데 10개월이나 걸리다니, 그것을 인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르겠나?"
"예의라고 불러줘요. 물어 볼 시가가 오기를 줄곧 기다렸는걸요."
"지금이 그 시기라는 건가?"
"아니에요. 하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됐는걸요." 젬마는 얼굴을 들어, 그의 미소가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말해요, 로건."
"별로 이야기할 만한 것은 없어. 캐더린이 전화를 걸어와서, 시내에 나올 테니까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 나는 취소된 입장권 두 장을 손에 넣었어. 극장을 나와 4분 후에는 그녀를 택시에 태워 집에 보냈지. 그녀는 무척 불만스러워했지만 말이오."
"당신의 의지가 강한 편이어서 다행이었군요."
"의지력 같은 건 필요도 없었지. 그녀와의 관계는, 그녀가 로버트를 만나기 전에 끝장났으니까."
젬마의 얼굴이 흐려졌다.
"로버트가 안됐군요. 진심으로 캐더린을 사랑하고 있는데."
"하지만 이제 와선 로버트도, 그녀가 없는 편이 훨씬 훌륭한 인생을 보낼 수 있다고 인정하게 됐다고 생각해." 로건의 어조가 바뀌면서,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당신이 없는 인생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고, 내가 인정하게 됐듯이 말이오.
"나를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말해줘요, 젬마. 안심하고 싶으니까." 젬마는 그러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말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말은 결코 마음을 완전히 전할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