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산호초(The Night of the Hurricane)
Andrea Brake
1
그날도 아침은 평소와 다름없이 시작되었다.
줄리는 일곱 시경에 눈을 떴다. 날씬한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켜고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19세인 그녀의 맑은 눈은 활기에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푸른색의 엷은 파자마 차림의 모습은 겨우 15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줄리는 갈색 머리를 힘주어 빗고 둘로 나누어 고무 밴드로 묶고는, 구겨진 파자마를 벗은 뒤 의자 위에 놓아두었던 수영복을 입었다.
장롱에는 꽃무늬 스커트가 걸려 있었다. 스커트는 이것 하나밖에 없었다. 이 밖에 옷이라고는 셔츠와 쇼트팬츠, 그리고 비키니가 몇 벌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고 수영을 하거나 일광욕을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줄리의 젊은 피부는 온몸이 한결같이 구릿빛으로 그을어 있었다.
18세가 되는 생일날 아버지가 세인트빈센트 섬에서 로즈레드의 입술연지를 사다 주었는데, 이것 말고는 어떤 화장품도 사용한 일이 없었다.
줄리의 코는 주근깨투성이고 턱은 남자처럼 각이 져 있었다. 바다에 오래 들어가 있곤 했으므로 눈동자가 붉은 빛으로 변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줄리는 용모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므로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없었다. 그런 일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도 평소처럼 베란다 테이블에 놓인 과일 그릇에서 바나나 두 개를 집어먹고 나서, 해안으로 통하는 언덕길을 내려갔다. 맑은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한 시간 가량 수영을 한 뒤, 흰 산호의 모래 위에서 몸을 말리고, 아침을 먹기 위해 방갈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테이블에는 이미 아보카도와 삶은 계란, 양젖이 담긴 컵이 놓여 있었다.
양젖을 거의 다 마셨을 무렵, 방에서 지젤라가 모습을 나타냈다. 검정 나일론 네글리제를 입고, 컬한 머리에 프릴이 달린 캡을 쓰고 있었다. 얼굴에는 크림을 더덕더덕 바르고 있었다. 지젤라는 남편이 있을 때에는 치장도 하고 머리 손질도 잘 했으나, 그 남편이 지금은 여행 중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줄리는 애써 친근감 있게 인사했다. 그러나 이 웃는 얼굴은 어색하기만 했다. 줄리는 처음부터 이 계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함께 살기 시작한 지 10개월이 지났으나 그 마음은 변함없었다.
지젤라는 의자에 깊숙이 앉아 아름다운 다리를 포갰다.
“커피를 빨리 가져오라고 루 아줌마한테 말해 주지 않겠니. 잠을 못 잤더니 머리가 아프구나.”
“어마, 어떡하죠. 아스피린은 잡수셨나요?”
“물론이지. 쓸데없는 말을 묻는구나.”
줄리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고러고는, “커피를 가져오겠어요.” 하며 주방으로 갔다.
솔리테일이라 불리는 이 작은 섬에는 집이 두 채밖에 없었다. 한 채는 조나단 템플이 지은 방 세 개짜리 방갈로였고, 또 한 채는 야자나무 잎으로 지붕을 덮은 통나무집으로서 루 아줌마와 그 가족이 살고 있었다.
루 아줌마는 서인도 제도 출신으로, 뚱뚱하고 쾌활한 중년 여성이었다. 아이를 열 한 명이나 낳았으며, 밑으로 다섯 아이는 아직 그녀와 동거하고 있었다. 그녀는 템플 일가의 가사를 돕고, 남편인 하큐르는 고기를 잡거나 감자, 토마토 등을 재배하고 있었다.
줄리는 루 아줌마를 따랐으나, 지젤라는 그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 사람에게 너무 친절히 대하면 못써.” 이 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젤라가 줄리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친절하게 대하지 말라니, 무슨 뜻인가요?” 줄 리가 의아해 하면서 반문했다.
“그녀는 하녀야. 신분을 구별할 줄 알아야지.”
“신분이요? 나는 아줌마가 좋아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아줌마는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거든요.”
지젤라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어마, 그렇다면 설명해도 소용없겠구나. 그 나이에 정말 바보로구나. 이 섬에 있는 동안은 그래도 좋겠지만, 도회지 사람과 사귀게 될 때가 온다면 어떻게 하겠니.”
‘때가 온다면……’ 이라는 한 마디에, 눈치가 빠른 줄리는 몸을 긴장시켰다.
줄리는 이 계모가 오기 전까지는 자신의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11세 때부터 이 섬이 그녀의 집이었다. 영국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은 별로 즐거운 것이 못 되었다. 줄리는 왜 그런지 모르게 솔리테일 섬에서 아버지하고 사는 생활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젤라는 면적 4만 평방미터인 이 섬의 생활에 만족할 타입이 아니었다. 더할 나위 없이 목가적인 환경도 구미에 맞지 않아했다. 수영도 못 할 뿐만 아니라, 눈처럼 흰 피부가 타는 것이 싫어 일광욕도 전혀 하지 않았다. 독서도 즐기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라고는 댄스와 음악뿐이었다. 지젤라는 평화와 고독에 싫증을 내고 있었다.
신혼 2,3개월 동안은 지젤라도 만족하고 있었다. 조나단이 여신을 숭배하듯 지젤라를 받들며 노예처럼 봉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추어올림을 받는 데서 생의 보람을 느끼는 타입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조나단은 지젤라를 그리고 싶어 했다. 오랜 시간 가만히 있어야 하기 때문에 불평도 많았으나, 자기 초상화가 세상에 발표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기뻐하기도 했다.
여기에 싫증이 난 지젤라가 남편을 구슬러 마르티니크나 트리니다드로 여행을 떠나자고 하자, 조나단은 사람들로 붐비는 관광지의 분위기를 싫어했지만 아무 말 없이 따라 나섰다. 줄리는 솔리테일에 남아 있었다. 지젤라가 줄리의 동행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줄리 자신도 아버지가 그녀의 포로가 되어 있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10개월이 지나자, 지젤라는 그러한 여행에도 싫증을 내고 말았다. 이리하여 그녀는 일가족이 솔리테일을 떠나자고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지젤라는 줄리를 구실로 은근히 이 이야기를 꺼냈다. 줄리에게는 비슷한 나이의 친구와 거기에 알맞은 즐거움이 필요한데 이 섬에는 그것이 없다고 하면서.
줄리는 진작부터, 이 섬이 자기에게 있어서 최고로 행복한 장소라는 말을 아버지한테 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나단은, 아내가 이 섬을 몹시 싫어한다는 것도 모르고 가볍게 받아 넘겼다.
“줄리는 아지 파티나 보이프렌드에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더군. 젊은 사내를 쳐다보기보다는 바다에 뛰어들어 새우라도 잡는 것이 더 좋은 모양이다.”
“줄리는 젊은 남자를 본 일도 없어요.” 지젤라의 가시 돋친 목소리가 줄리에게도 들렸다.
아버지는 웃으며 유유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애는 너무 어려. 아직 시간은 많아.”
줄리가 블랙커피의 포트를 가지고 베란다에 돌아오자, 지젤라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녀는 골초로서, 그저께 밤에도 그 일 때문에 부부싸움을 했었다. 조나단은 지금까지도 가끔 지젤라에게 담배가 심하다고 점잖게 타일러 왔으나, 그날 밤은 열심히 절연을 권하는 조나단에게 지젤라가 화를 내며 대들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베란다에 있고 줄리는 이미 잠자리에 들어가 있었으나, 격한 목소리가 줄리의 귀에도 들려왔다. 마침내 지젤라는 침실로 들어가 난폭하게 문을 잠가 버리고 말았다. 줄리는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긴장하여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는 마냥 사과하면서 문을 열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지젤라가 대답조차 하지 않자 아버지는 그만 신음소리 비슷한 소리를 남기고 해안으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 하큐르와 같이 이웃 섬으로 낚시를 떠나고 말았다. 며칠 동안은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커피를 따라 주겠니?” 줄 리가 테이블에 쟁반을 놓자 지젤라가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아아, 정말 지겨운 곳이군, 여기는! 텔레비전은 고사하고 라디오조차 없고……없는 것 투성이야! 울고 싶을 정도로 권태로와!”
“금요일에는 뉴욕에 가시잖아요.”
뉴욕의 화랑에서 아버지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지젤라가 모델이 도니 그림도 들어 있었다. 지젤라는 갖은 아양을 다 떨어 아버지를 설득해서 그 전람회에 같이 가기로 했던 것이다.
“겨우 일주일인걸. 그 뒤에는 다시 이 지겨운 섬으로 돌아와야 하잖니. 너는 용케도 참는구나. 하지만 세상과 떨어져 산다는 것은 정상적이 못 돼. 여기 있으면 올드미스가 될 뿐이야.”
줄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함부로 말을 꺼냈다가는, 그것을 어떻게 왜곡해서 아버지한테 이야기할지 모른다. 아버지가 지젤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줄리를 꾸짖은 일도 몇 번 있었다.
“상관없다면 오전 중에 남쪽 끝으로 가고 싶은데요.” 줄리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지젤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대로 하려무나. 너는 여기 있는 한 구제될 수 없어.”
줄리는 스노클(snorkel)과 잠수 마스크를 들고 섬의 정상을 넘어 반대쪽 끝으로 갔다.
정오가 지나 해안선을 따라 방갈로에 돌아오는 도중, 줄리는 선창에 호화스런 캐빈 크루즈(cabin cruise)가 정박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배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나, 바닷가에 돌출된 잔교(棧橋)에는 거룻배 한 척이 멎어 있었다.
솔리테일 섬은 카리브해와 대서양의 경계를 이루는 윈드워드 제도의 일부인 그레나딘 군도에 있는 작은 섬이다. 베기아, 마스틱, 캐리아크 등 그레나딘 군도에는 개발된 섬이 적지않이 있으나, 지도에서 보면 점에 지나지 않는다. 솔리테일 섬은 점으로도 나타나 있지 않아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 서인도 제도의 관광 붐으로 가끔 낚싯배가 가까이 오는 일은 있지만, 개인 소유지므로 타인이 상륙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나단이 이 섬을 빈 것도 사생활을 침범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줄리는, 도대체 누가 이 고도에 침입해 왔을까, 하고 궁금히 여겨 방갈로로 걸음을 재촉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 키가 작은 나무들의 숲을 지나려 했을 때 지젤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젤라의 친구가 찾아온 것일까? 독신 시절에 알던 사람일까?
지젤라는 이상하게도 자기 과거를 잘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조나단이 그림 일로 아이티에 갔을 때, 호텔의 이발소에서 매니큐어 일을 하는 지젤라와 만났던 것이다. 단기간의 체재 예정이 3중일로 늘어나고, 마침내 돌아온 아버지는 줄리보다 불과 아홉 살 연상인 금발 미인을 신부로 동반했던 것이다.
지젤라는 자메이카 태생으로, 양친은 이미 죽고,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 줄리아가 아는 것은 이 정도고 나머지는 모두 수수께끼에 싸여 있었다.
줄 리가 흰 하이비스커스 사이로 살펴보니, 지젤라는 베란다의 침대의자에 유유하게 누워 있었다. 푸른 실크 드레스로 갈아입고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도 아름답게 빗겨져 있었다. 매혹적인 녹색 눈은 선글라스로 가려져 있었으나, 산호빛으로 칠한 입술의 움직임으로 보아 지젤라가 상대방 남자에게 자기 매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도 옅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루 아줌마네 식구처럼 구릿빛 살갗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줄 리가 처음에 보았을 때는 서인도 제도의 남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사나이의 짧게 깎은 머리가 곱슬거리지 않아서 유럽인임을 깨달았다.
유색인종의 방문객이라면 지젤라가 그토록 애교있게 대할 리가 없다. 그녀는 루 아줌마네 아이들에게조차 언제나 고압적으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까.
줄리는 잠수 마스크를 목에 걸고 스노클을 왼손에 잡고 흔들면서 숲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방갈로 앞의 잔디밭을 가로질러 층계를 올라갔다.
낯선 사나이는 줄리를 보자 일어서서 선글라스를 벗었다. 키는 190 센티 정도 되어 보이고 나이는 지젤라와 비슷할 것 같았다. 눈은 매력적인 잿빛이었다.
“줄리, 이분은 티아난씨야.” 지젤라는 줄 리가 왔기 때문에 낭패한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낯빛을 고쳤다. “티아난씨, 제 남편의 딸이에요.”
“처음 뵙겠어요.” 줄리가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해요.” 빙그레 웃는 사나이의 입술 사이로 흰 이가 드러났다.
“줄리, 곧 한 시야.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별로 없어.” 지젤라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실례하겠어요.” 줄리는 쓴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마치 자매 같죠?’ 하는 듯한 태도가 아닌가. 지젤라는 솔리테일에 처음 왔을때도 그런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나단을 위해서였지, 진실로 줄리의 사랑을 받으려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처음으로 줄리와 단둘이 되었을 때 그 가면은 곧 벗겨졌다.
평소에 줄리는 수영복 차림으로 점심을 먹고 해가 진 다음에야 겨우 옷을 입었다. 그러나 오늘은 노란 셔츠와 흰 쇼트 팬츠를 입었다. 흐트러진 머리도 잘 매만져서 고무 밴드로 묶었다. 줄리는 스타일을 바꾼다거나 서랍에 넣어둔 입술연지를 사용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베란다로 돌아가자 지젤라가 티아난의 점심을 테이블에 옮기고 있었다. 줄 리가 온 다음에도 지젤라는 마르티니크 섬에서 개최되는 마르니글라 카니발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지젤라는, 이 손님이 누군지, 왜 솔리테일 섬에 왔는지 하는 줄리의 의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티아난이 먼저 줄리를 화제에 끌어넣으려고 했다.
“나는 아콸렁(수증 호흡기)을 배에 두고 왔기 때문에, 가능하면 오후부터 댁의 산호초를 구경하고 싶군요. 아가씨는 섬의 어느 쪽이 좋다고 생각하죠?”
줄리는 먹고 있던 수박을 내려놓고 말했다.
“남쪽이 좋아요. 하지만 산호초 밖으로 나가면 조류가 소용돌이치니까 조심해야 해요. 파도를 타면 별로 위험하지 않지만 거슬러 헤엄치려고 하면 매우 위험하지요.”
“나도 전에 경험한 일이 있죠. 그러고 보니 아가씨는 상당한 베테랑급 스킨다이버 같군.”
“어마, 줄리의 집은 바다 속이랍니다. 노상 해적의 보물을 찾아다니죠. 줄리, 그렇지?” 12,3세 된 말괄량이 소녀를 대하는 어머니 같은 투로 지젤라가 말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별로 심하지는 않지만 귀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당분간은 헤엄칠 수 없어요. 사실은 당신 배로 바다에 데려가 주었으면 좋겠어요, 티아난씨. 물론 당신이 다이빙을 하겠다면 문제가 다르지만.”
“아니, 기꺼이 모시죠, 부인. 아가씨도 갈 테죠?” 그는 줄리에게도 물었다.
지젤라가 테이블 밑에서 줄리의 발을 가볍게 밟았으나, 그런 신호를 보내지 않더라도 줄리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마는,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줄리와 나는 우리 요리사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어요. 오늘 오후는 줄 리가 가르칠 차례여서.”
“그래요? 훌륭한 일이군요.”
“네. 주구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글을 익히게 되면 그애들의 인생에도 훨씬 기회가 많아질 거예요.” 하고 지젤라는 매우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지젤라는 줄 리가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자 시간 낭비라고 했을 정도였다. 지젤라는 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이 사나이의 환심을 사려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는 어떤 남자에게도 이런 태도로 대하는 것일까? 줄리로서는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지젤라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줄리는 티아난을 관찰했다. 그는 지젤라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줄 리가 알고 있는 유럽 남성은 아버지밖에 없었으므로 이 방문자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 커다란 크루즈는 그의 소율까, 아니면 빈 것일까? 그것은 차터선으로서, 그는 관광객을 안내하며 생계를 꾸리는 선장이 아닐까도 생각되었다.
줄리는 어느새 티아난의 균형잡힌 갈색 얼굴에 매료되어 멍하니 공상에 잠겨 있었다. 그가 돌아보는 바람에 줄리는 깜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그의 눈이 유쾌한 듯이 번쩍 빛났다.
줄리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시선을 떨구고 싱싱한 새우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티아난은 식사를 끝내고 커피를 마신 다음 일어서서 지젤라에게 인사했다.
“부인은 잠시 쉬시고 싶을 테니 나는 배로 돌아가겠습니다. 준비가 되거든 오세요. 소리치면 거룻배로 모시러 갈 테니까요.”
티아난은 두 여자의 배웅을 받고 해변으로 통하는 사잇길을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그의 카키색 셔츠는 햇볕에 허옇게 바래 있었고, 네이비블루의 폴로셔츠가 떡 벌어진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그 차림에 흰 구두가 잘 어울렸다. 얼굴이 햇볕에 탔으나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사람은 누구예요? 무엇 하러 온 사람인가요?” 티아난이 멀어지기를 기다려 줄 리가 물었다.
“바베이도즈 사람이야. 신선한 야채를 좀 얻을 수 없겠느냐고 찾아왔기에 할 수 없이 점심을 대접했어.”
줄리는 지젤라의 목소리에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음을 느꼈으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저어, 배에 타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아빠는 늘 내게 말하곤 했어요. 아빠가 없을 때 모르는 사람이 찾아오면 절대로 그 배에 타면 안 된다고 말이에요.”
지젤라는 짓궂게 웃었다.
“그것은 네가 쉽게 속기 때문이야. 명찰을 달지 않으면 이리와 양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니까.”
“항상 양이라고만 할 수는 없어요. 일단 배에 오르게 되면 돌변할지도 몰라요. 나 같으면 바다에 뛰어들어 도망칠 수 있지만, 새엄마는 헤엄을 못 치니까 그럴 수도 없어요.”
지젤라는 담배연기로 고리를 만들면서 무언가 비밀스런 웃음을 띠었다.
“맞았어. 나도 티아난씨가 양의 타입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하지만 덤벼들 사람은 아니니 걱정할 것 없어. 도와달라는 소리를 지르게 되지는 않을 거야.” 지젤라가 짧게 웃었다. “나는 방에 가서 준비나 하겠어.”
지젤라가 방으로 들어간 뒤, 줄리는 걱정스러운 듯 이마를 찌푸리고 입술을 깨문 채 앉아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는 배의 갑판에서 움직이고 있는 티아난이 보였는데, 이윽고 그는 셔츠를 벗고 두 팔을 머리 밑에서 깍지끼고 햇볕 아래 누웠다.
잠시 바라보고 있던 줄리는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이 보고 시퍼 아버지의 아틀리에로 가서 망원경을 가지고 돌아왔다.
배율이 무척 높았기 때문에, 초점을 맞추자 마치 티아난이 1미터 앞에 누워 있는 것처럼 분명히 보였다. 그는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듯했다. 눈부신 태양을 받은 갈색 얼굴이 땀으로 금속처럼 빛났고 몸에는 군살이 전혀 없어서, 줄리는 마치 브론즈 조각상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자고 있는데도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있었다. 두껍고 풍부한 아랫입술을 엷은 윗입술이 가볍게 덮고 있었다. 단단하고 윤곽이 뚜렷한 턱이 우뚝한 코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검고 긴 속눈썹만이 날카로운 그의 용모를 부드럽게 해주고 있었다.
자세히 관찰을 마친 줄리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
막 망원경을 내리려 했을 때, 시야가 흐려지면서 그의 얼굴이 사라지고 갑판만이 남았다.
줄리는 어리석게도 망원경을 움직여 그의 얼굴을 찾았다. 겨우 시계를 포착했을 때, 그는 싸늘해 보이는 눈을 곧바로 줄리에게 돌리고 있었다. 못박혀 선 채로 응시하는 줄리에게 그는 장난스럽게 윙크를 보냈다.
줄리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망원경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는 얼른 자기 방으로 도망쳤다. 그 사이에도 갑판의 사나이는 손을 높이 들고 계속 흔들고 있었다.
벤자민, 투산, 리틀 루 세 사람에게 글을 가르친 뒤, 줄리는 간식 꾸러미를 들고 헤엄치러 갔다. 돌아올 무렵에는 이미 해가 지고 저녁 시간이 가까워 있었다.
티아난은 다섯 시경에 지젤라를 바래다주고 이미 출항했을 것이다 -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줄리는, 방갈로로 돌아오는 도중에 여전히 후미에 정박해 있는 크루즈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사나이는 여기서 하룻밤을 묵을 생각인 것이다.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줄리는 분개했다.
그녀는 수영을 하다가 산호 가지에 정강이를 크게 다쳤기 때문에, 몰래 자기 침실로 들어가 상처를 소독하고 셔츠와 쇼트 팬츠로 갈아입었다. 줄리는, 두통 때문에 일찍 자리에 눕겠다고 루 아줌마에게 말할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티아난이, 자기와 얼굴을 대하기 싫어서일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를 훔쳐보고 있는 것을 들켰으니까 바보 같은 처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더 이상 그를 재미있어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유유히 나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다는 태도를 보여야지.
이때 루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녁 준비가 끝났어요, 마님. 줄리 아가씨는 바다에서 돌아왔나요?”
“아니, 아직 안 왔어요. 정말 귀찮은 애예요. 먼저 식사하겠어요, 루.” 난폭한 말투였다.
티아난의 음성도 들렸다. “그녀는 평소에도 어둡기 전에는 안 돌아오나요?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니까 내가 보고 오죠.”
“아니, 괜찮아요……걱정하지 마세요, 사이몬. 흔히 식사에 늦어지곤 하는걸요. 곧 돌아올 거예요.”
‘벌써 사이몬이라 부르는 사이가 되었나.’ 하고 줄리는 씁쓸히 생각했다.
“혼자서 스킨다이빙 하는 것은 좋지 않죠, 그 나이의 아이에게는 위험하니까.”
줄리는 분개했다. 아이라니! 정말 아니꼬운 사나이다! 다이빙에 있어서만은 그를 깜짝 놀라게 해줄 수도 있는데.
줄리는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갔다.
“어마, 벌써 저녁이 되었나요?” 줄 리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루 아줌마는 방긋 웃고 지젤라는 당황한 표정이 되었으며 티아난은 눈은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그 방에 들어갔지? 우리가 돌아왔을 때 이미 방에 있었니? 도대체 두 시간 동안이나 무얼 했어?” 지젤라가 물었다.
줄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지젤라가 분해하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줄 리가 엿들었을지도 모른다고 겁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줄리가 들으면 곤란한 말을 했던 것이다.
줄 리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사이몬이 말했다.
“아가씨는 자신을 안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건, 아니면 창으로 들어간 모양이군.”
“그래요, 창으로 들어 왔어요……약 10분 전에.” 줄리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젤라는 안심하는 눈치였다.
“어째서 창문으로 드나들지?”
이번에도 사이몬이 입을 열었다.
“심한 찰과상이로군. 소독은 잘 했나?”
“네, 고마워요.” 줄리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지젤라는 푸른색의 엷은 시퐁 드레스로 몸을 감쌌고, 사이몬도 흰 긴소매 셔츠에 흰 즈봉, 그리고 검은 넥타이 차림이었다.
줄리는 자기도 꽃무늬 스커트와 푸른색 블라우스를 입을 것을 그랬다고 생각했다. 오늘 밤엔 사이몬이 의자를 당겨 지젤라를 앉게 하고는, 줄리에게도 똑같이 했다.
식사를 할 때도 줄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젤라가 사이몬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시가를 다 피우자 사이몬은 배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지젤라가 깜짝 놀라며 만류했다.
“아직 아홉 시예요. 우리는 언제나 열 한 시까지는 자지 않아요.”
“나는 당신네들보다 일찍 일어나야 해요. 그럼 주무세요, 부인. 그리고 줄리도 잘 자고.”
“그는 내가 몇 살인지나 아는지 모르겠어요.” 사이몬이 돌아간 뒤 줄리가 말했다. 줄리라 불린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19세라고는 생각지 않을 거야. 하지만 어리게 보이는 것은 네 잘못이야. 머리도 가꾸지 않고 화장기도 없는데다가 그런 옷을 입었으니까, 누구든지 나이보다 어리게 볼 것은 당연해.”
“티아난씨가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어요. 그런데 그는 언제 떠나나요? 내일 아침?”
“아니야. 잠시 머무르면서 조나단을 만나겠대.”
“아빠를 만난다고요? 왜요?”
“너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구나. 네 아버지는 매우 유명한 사람이야. 비록 귀신도 알지 못할 이런 작은 섬에 살고 있지만 말이지.” 빈정대는 투로 지젤라가 말했다. “사이몬은 틀림없이 부자일 거야……. 그 쿠르즈도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맨션 같아. 아마 그림을 사고 싶어서 그럴 테지.”
“그림을 이해하거나 좋아하는 타입일까요?”
“줄리, 그림이란 반드시 좋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야. 유명한 화가의 그림은 일종의 투기 대상이라고 할 수 있어, 부의 상징이기도 하고.”
“하지만 새엄마는 속았는지도 모르잖아요. 그 쿠르즈가 티아난씨의 것인지도 의심스러워요. 혹시 남을 등쳐먹고 사는 사람이 아닐까요?”
지젤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최소한 그와 같이 있으면 난 즐거워, 너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는 이제 자야겠어.”
줄리도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지젤라의 행동에는 뭔가 꺼림칙한 것이 있다. 그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왜 그런지 불안했다.
열 시 반이나 되었는데도 아직 눈이 말똥말똥했으므로 가만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베란다로 나가면 소리가 날 것이므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와 달빛 속을 해변으로 달려갔다.
크루즈의 불빛이 마치 반딧불같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선실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줄리는 타월을 바닷가에 내던지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밤에 수영하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물은 따뜻하고 비단처럼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애무했다. 물 위에 누워 별을 쳐다보았다. 에덴 종산도 아마 이랬을 것이다……평화로운 낮과 밤의 반복…….
줄리는 한 시간 가까이 물에 있다가 타월을 둔 장소로 천천히 돌아왔다. 브래지어의 고리를 벗기려 하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밤에 혼자 수영하는 것은 정말 위험해. 경련이라도 일면 어떻게 하지?”
순간 줄리는 공포로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이 가라앉자 벌컥 화가 났다.
“여기서 무얼 하세요?” 그녀가 덤벼들었다.
사이몬 티아난은 결코 잠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가롭게 야자나무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줄리는 달밤의 환상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시가 냄새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나 역시 잠이 오지 않아서 나왔는데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배가 고프겠지? 초콜릿이라도 먹겠나?” 사이몬이 다정하게 말했다.
줄리는 타월을 어깨에 걸쳤다.
“아니, 싫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녀가 그대로 방갈로로 돌아가려 하자, 사이몬이 말을 걸었다.
“아가씨는 아직 화를 내고 있나, 나를 탐색하던 일이 발각되어서?”
줄리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아뇨……왜 화를 내겠어요?” 그녀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저녁 식사 때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그것은 매력적인 어머니에게 참을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인가?”
느닷없는 말에 줄리는 또다시 깜짝 놀랐다.
“대단히 실례되는 말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진실이란 그런 것이지.” 사이몬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티아난씨, 아침이 되면 여기서 떠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요? 아버지는 내일 돌아오시는데, 외부 사람이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사람과의 접촉을 좋아했다면 세인트빈센트 섬에 살았을 거예요.”
사이몬이 웃었다.
“아가씨는 말을 마구 하는군. 어째서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 거지? 아가씨 어머니가 나를 싫어하지 않기 때문인가?”
“별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에요.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까요. 다만 솔리테일은 관광지가 아니라 개인의 소유지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에요. 당신 역시 남의 정원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을 테죠? 우리 섬의 끝에다 배를 정박시키는 것도 그와 같은 일이 아닐까요?”
“아가씨는 모르고 있어……나는 아가씨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 머물러 있을 것을 허락받았어.”
“그러나 만일 당신이 아버지의 작품에 정말 흥미를 가졌다 해도 뉴욕에서 그림을 사게 될 거예요. 아버지는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그림을 팔지 않아요.”
“그림을 원한다고 누가 그러던가?”
“지젤라가…….” 줄리는 말하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젤라는 ‘아마’ 그럴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대관절 어째서 아버지를 만나려 하죠?”
사이몬은 긴 다리를 구부리고 벌떡 일어났다. 그 가슴과 어깨를 보건대 그는 수영의 명수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더욱 적의가 끓어올랐다.
“어머니가 말하지 않던가? 나는 솔리테일 섬을 사려고 왔어.” 그가 선뜻 말했다.
줄리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타월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렸으나 집으려 하지도 않았다. 마치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시간 낭비일 뿐이에요. 이 섬은 팔지 않아요.”
“그래? 아가씨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던데. 값만 적당하면 아버지도 기꺼이 팔 것이라고 말하던데. 임대 계약은 99년 동안이라면서?”
“지젤라가 어떻게 말했건, 이곳은 팔지 않아요. 아마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겠지만 말이에요.”
“실은 그 말이 옳아. 다만 전부터 섬이 하나 필요했고, 이곳은 내 이상에 꼭 맞기에…….”
“어째서 이 섬이 마음에 들었죠? 그레나딘 군도에는 무인도가 얼마든지 있는데.”
“그렇게 많지 않아, 다른 섬은 너무 작거나 이미 남이 빌었거나 해서. 그리고 여기만큼 조건이 좋은 섬도 없어……방갈로가 이미 세워져 있고……집을 돌봐줄 사람도 있고. 물론 아가씨 아버지가 팔지 않겠다면 할 수 없지만, 좌우간 물어 보기는 해야겠어.”
그의 음성에는 줄리의 화를 가라앉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이 사나이에게 따져도 소용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얼굴 생김으로 사람의 성격을 판단할 수 있다면, 이 사나이는 결코 자기가 결심한 것을 간단히 단념할 타입이 아닌 것 같았다. 지젤라처럼 그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고 또 대개는 압수하는 그런 타입인 듯 싶었다. 달빛을 받은 사나이의 얼굴은 완고 바로 그것인 것처럼 보였다.
줄리는 자존심을 버렸다.
“제발……내 얘기를 들어주세요. 실례되는 말을 했다며 사과하겠어요. 하지만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실은…….”
“사정은 분명하지.” 그가 사정없이 말을 가로막았다. “아가씨는 이 섬에서 오래 살았고 또 이곳을 사랑하고 있어. 아가씨 아버지가 젊은 여자와 재혼했으나, 아가씨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한편 그녀는 솔리테일 섬의 생활이 지겨워졌어. 그러니까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이지. 반면에 아가씨는 여기에 있고 싶고. 그런데 아마 그 결정권은 아가씨 아버지가 쥐고 있을 거야. 문제의 요점은 아마 이상 말한 대로가 아닐까?”
“네, 대체로 그래요…….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아요. 당신은 알지 못해요, 지젤라는…….”
“아가씨가 지젤라를 싫어한다는 것은 사실에 있어서도 별로 큰 문제가 아니지. 아가씨한테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피치 못할 것에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 거야.” 사이몬은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게 말했다.
“피치 못할 것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이죠?”
“줄리, 지금 몇 살이지?”
“열 아홉 살이에요.” 줄 리가 대답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허어……벌써 그런 나이가 됐나? 나는 아직 열 일곱 살 정도로 보았는데.”
“내 나이가 크게 문제가 되나요?” 줄 리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의 입술 가장자리가 꿈틀 움직였다.
“아가씨 나이가 딜레마의 포인트지.”
“아, 당신이 하려는 말은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재혼했기 때문에 내가 쓸데없는 질투를 하는 줄 아는군요. 그것은 큰 오해예요. 나도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아버지한테는 아내가 필요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줄리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낯이 뜨거워졌다. 이 사나이는 완전한 남이다. 집안 이야기를 할 상대가 아니다. 지젤라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녀가 어버지의 아내인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지젤라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른다는 것을 남에게 이야기하면, 줄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신리를 배반하는 것이 된다. 줄리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피치 못할 것이라니?”
그가 허리를 굽혀 타월을 집어들었다.
“감기들겠어……이것을 걸치지 그래.”
“감사해요.” 줄리는 그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이것 봐, 열아홉이라면……인제 어른이지. 아버지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지금 아가씨가 한 말 그대로야. 그리고 아가씨도 자신의 결혼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깨끗한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틀림없이 했을 거야. 어쩌면 지금도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것은 당연한 본능이지. 아가씨도 예외는 아니야. 그러니 현실을 직시하고 거기에 따르는 것이 어떨까? 세인트빈센트나 그레나다에서도 아가씨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지젤라는 여기서 살 여자가 아니고, 아버지도 딸보다는 아내의 의견을 우선시킬 것이 당연해. 안 그런가?”
줄리의 머리에 피가 역류했다.
“아내는 남편이 행복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라도 행복한 거예요. 아버지는 이 솔리테일에서의 생활을 사랑하고 있어요. 화려한 곳은 성미에 맞지 않아요. 이곳에 온 후 아버지는 최고의 작품을 완성했어요. 아버지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다면, 당신도 아버지를 이해하게 될 거예요.”
사이몬 티아난은 잠시 입을 다물고 이썼다. 밝은 달빛 속에서도 그의 지적인 잿빛 눈에 깃들인 표정을 줄리는 읽을 수가 없었다.
“지젤라가 자기 초상화를 보여주더군. 나는 예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그 그림에는 아가씨 아버지가 지젤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분명히 나타나 있더군. 그 점은 아가씨도 잘 알겠지?”
줄리는 숨을 죽였다. 그 그림을 남에게 보이다니! 지젤라는 아무 느낌도 없는 것일까?
그것은 나체화로서,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아버지가 그린 것이었다. 그러나 줄 리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것이 누드화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림으로서는 그것이 조나단 템플의 최고 걸작이었다. 광선과 피부의 배색이 정말 놀라와서, 보기만 해도 열대에 있는 섬의 나른한 오후의 더위가 전해질 듯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 작품은 화랑에 전시된 일이 없었다. 지젤라를 모델로 한 그림을 공개하고 팔기도 했으나, 그 그림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 그림의 지젤라는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엷은 빛을 내는 머리는 흐트러지고 흰 피부가 블라인드에서 스며드는 햇빛에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두 팔을 벌리고 나른한 만족으로 한숨을 쉬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반즘 뜬 눈은 지젤라 템플의 눈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 감미롭고 우아하게 미소지을 수 있다고는 줄리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 모양과 빛의 아름다움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표정은 실물과 달랐다. 거기에는 화가 자신의 감정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보기를 원하고 보았다고 생각하는 미소였다. 그토록 아버지는 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 조나단 자신도 마음속으로는 그것이 이상화된 거짓 초상화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이 그림은 산더미처럼 쌓인 미완성 캔버스 뒤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 줄리는 캔버스에 곰팡이가 슬지 않았나 조사하다가 우연히 그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때 줄리는 절망감과 연민의 정으로 가슴이 가득 찼었다. 마치, 서로 끌어안고 있는 연인들의 방에 멋모르고 들어간 느낌과도 같았다. 줄리로서는 별로 이해가 되지 않는 그림이기는 했으나, 극히 비밀스럽고 개인적인 정열에 넘친 분위기를 갖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런 그림을 지젤라는 남에게 보였던 것이다.
줄리는 굳어진 목소리로 사이몬에게 말했다.
“아버지는……로트렉이나 모딜리아니처럼 난잡한 생활 속에서 성공하는 타입이 아니에요. 아버지한테는 평화가 필요해요. 티아난씨, 제발 떠나 주세요, 다른 데로 섬은 있으니까요. 우라간 섬은 어떠세요? 거기도 무인도고 집도 있어요.”
“물론 나도 우라간 섬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 그곳은 <불행의 섬>이지?” 무뚝뚝한 말투였다.
“당신은 하잘것없는 미신의 저주 따위는 믿지 않겠죠? 우라간 섬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나는 자주 가거든요.”
“나는 서인도 제도 태생이지. 저주를 하잘것없다는 말 한마디로 배격하기는 어려워. 분명히 쇼킹한 습관도 있기는 하지만 전혀 엉터리는 아니니까. 그런 섬을 살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나는 우라간에 몇 시간이나 있었던 일도 있지만 별일 없었어요.” 줄리는 비웃는 태도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럴 테지. 그러나 아가씨 역시 하룻밤을 거기서 지내라면 싫을걸.”
“어마, 나는 괜찮아요.” 줄 리가 시치미를 뗐다.
“증명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면 그런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줄 리가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솔리테일 해협 너머 몇 킬로 되는 곳에 우라간의 검은 실루엣이 가로놓여 있었다. 줄리는 자포자기적인 마음이 들었다.
“좋아요, 증명해 보이겠어요. 내기를 할까요, 티아난씨? 배로 우라간 섬에 데려다 주면 오늘 밤엔 거기서 묵겠어요. 날이 새거든 마중와 주세요. 그 대신 당신 내일 정오까지 여기서 떠나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가 빙긋이 웃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천만에요. 내기를 하시겠어요? 바베이도즈의 나이트클럽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생각해 두기나 하세요.” 줄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웃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집에 있는 사람들은 알지 못해요. 루 아줌마는 잠이 들었고, 지젤라는 수면제를 먹었거든요.” 줄리는 발길을 돌리려 했다.
사이몬 티아난은 그녀의 팔을 잡아 방향을 돌렸다.
“바보 같은 말을 하면 안 돼! 나를 무엇으로 알고 있는 거야?”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 고집을 밀어붙이는 사람이죠!” 줄 리가 화를 내며 노려보았다.
사이몬의 손이 그녀의 두 팔을 아프도록 꼭 쥐었다. 마침내 그는 손을 놓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미 밤이 늦었어. 가서 자도록 해. 아가씨 어머니 말이 옳은 것 같아. 무절제하고 예의가 없어. 그 모난 데를 갈아서 둥글게 만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겠어. 이미 말괄량이로는 통할 수 없는 나이야. 올바른 여자의 예절을 익히도록 해야 하겠어.”
지금까지 한 번도 진실로 화난 일은 없는 줄리였으나, 이번에는 분노로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미친 듯이 두 주먹을 쥐고 머리 위로 쳐들었다.
그 손목을 사이몬이 공중에서 붙들고 주리를 조롱했다.
“저런? 여자는 주먹을 휘둘러서는 안 되는 법이지. 꼭 때리고 싶거든 내 뺨을 때려 봐 - 물론 내가 아가씨라면 그러지 않겠어. 어린아이가 신경질을 부릴 때는 한참 동안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아가씨가 꼭 그래야 하겠다면, 자아, 어서…….” 사이몬은 두 팔을 내리고 그대로 서 있었다.
줄 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미신의 저주를 믿고 있다면 어서 여기를 떠나는 것이 좋겠어요, 티아난씨. 누군가가 당신을 저주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의 검은 얼굴에서 흰 이가 빛났다.
“그건 위협인가, 아가씨?”
줄리는 허리를 굽혀 다시 떨어진 타월을 집었다.
“내가 왜 염려했는지 이상하군요, 절대로 확신이 있는데 말이에요, 티아난씨. 당신과 같은 사람에게 아버지가 솔리테일을 팔 리가 없어요.” 줄리의 음성은 이미 떨리지 않고, 싸늘한 경멸로 변해 있었다.
재빨리 걸어가는 줄리의 귀에 사이몬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증스런 남자야……. 아빠는 첫눈에 그것을 알아볼 것이다.’ 줄리는 자신을 갖고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30분 후, 그 자신을 가졌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침대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어둠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사이몬 티아난과 지젤라가 협력하여 솔리테일의 평화를 영원히 파괴해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이 치솟았다.
2
평소 같으면 아침을 먹기 전에 잠시 헤엄치는 줄리였으나, 이튿날 아침에는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방갈로 뒤쪽에 있는 경의실에서 샤워를 했다. 물로 제대로 된 샤워가 아니라, 있는 재료를 가지고 적당히 만든 것이었다. 줄리는 짠물용 비누로 거품을 내어 몸을 씻고는 줄을 잡아당겼다. 탱크가 기울어지며 물이 쏟아져 거품을 씻어내렸다. 원시적이기는 했으나 깨끗하게 사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지젤라가 바닷물로는 몸을 씻지 않겠다고 하여 아버지가 일부러 만든 것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머리에 빗질을 하고는 머리카락 끝을 고르기 시작했다. 얼굴 양쪽은 간단했으나 뒤쪽을 가지런히 자르기란 어려웠다. 줄리는 겨우 머리 손질을 끝내고 리닌의 플리츠스커트와 밝은 청색의 블라우스를 입고 정성들여 입술 지를 발랐다.
난생 처음 줄리는 침실 벽에 걸려 있는 거울 앞에 섰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손거울로 뒷모습을 비춰 보기도 하면서 자기 모습을 감상했다. ‘그렇다, 나는 지젤라만큼 미인은 아니다. 그러나 세인트빈센트에서 본 미국 여자 정도론 예뻐.’
줄리는 비키니로 갈아입고 머리를 고무 밴드로 묶은 다음 입술연지를 지웠다.
베란다로 가는 도중, 지젤라가 해변에서부터 언덕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줄리는 깜짝 놀랐다.
“사이몬에게 아침을 같이 먹자고 말하고 오는 길이야.” 베란다 층계를 오르면서 지젤라가 말했다. “그의 배에는 멋진 취사장이 있지만, 여기 있는 동안에는 우리와 함께 식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이제 곧 올 거야, 부르러 갔을 때 면도를 하고 있었으니까.” 지젤라가 흰 시퐁 스카프를 벗었다. 베란다 그늘에서 햇볕이 드는 곳으로 나갈 때는 언제나 이 스카프로 머리를 가리는 것이었다.
루 아줌마가 식사 준비를 시작하자, 지젤라는 손님이 있으니 충분히 준비하라고 일렀다. 그러고는 베란다의 난간 있는 쪽으로 가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산호초가 후미를 둘러싸서 물은 잔잔하고 투명해 보였다. 태양이 하루 종일 내리쬐고 있었으나, 상쾌한 미풍이 쉴 사이 없이 불고 있기 때문에 결코 거위가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늘 아빠가 돌아올까요?”
“그이도 이제는 화가 가라앉았을 거야. 지난번 우리가 부부싸움 하는 것을 너도 들었겠지? 내가 남의 지시를 받기 싫어한다는 것을 조니도 지금쯤은 알아야 하는데.”
줄리는 지젤라가 아버지를 조니라 부르는 것이 싫었다. 조니라니, 아버지한테는 어울리지 않는다. 조나단이라 부르는 편이 훨씬 좋은데.
“왜 아빠와 결혼했어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말에 줄리는 자신도 놀랐다.
“이상한 말을 묻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지젤라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어마, 사이몬이야.” 지젤라는 갑자기 웃는 낯을 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줄리는 또다시 지젤라의 뻔뻔스러움을 본 듯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줄리도 잘 잤나?” 사이몬은 긴 다리로 베란다 층계를 3단씩 뛰어올라왔다.
그의 눈이 빛났다. 어젯밤 해변에서 만났던 일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줄리도 갑자기 자신이 평정을 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녕하세요?” 줄리가 굳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만 실례하고 식사 준비를 거들겠어요.”
주방에서는 루 아줌마가 빵을 만들고 있었다.
“바베이도즈에서 왔다는 그 사람, 체격이 크고 건장해 보이는군요……음식도 많이 먹을 거예요. 무엇 때문에 왔는지 모르겠군요?”
“아빠를 만나기 위해서래요.” 줄리는 그 목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루 아줌마를 걱정하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사이몬은 빵을 네 개, 줄리는 세 개를 먹었다. 지젤라는 평소처럼 블랙커피 두 잔을 마셨을 뿐이었다.
“부인이 절식을 하다니 의외로군요.” 하면서 사이몬은 지젤라가 문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아무리 스타일이 좋다고 해도 절식은 계속해야 해요. 아이티에 있을 때는 온종일 움직였어요……테니스, 승마, 댄스 등으로. 안정된 생활에서 살만 찌우는 것은 절대로 반대예요. 남편이 싫증을 내지 않겠어요. 그런데 당신은 여성이 어떻게 생겼건 전혀 개의치 않는 타입인가요?” 지젤라가 도발적인 시선을 사이몬에게 보냈다.
사이몬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떠올렸다.
“여성에 따라서는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빨려들어가는 사람이 있죠.”
지젤라가 즐거운 듯이 웃었다. 그러나 줄리의 귀에는 사이몬이 빈정거리며 하는 말처럼 들렸다.
줄리는 솔리테일 섬 이외의 세계를 거의 모르기 때문에, 지젤라가 입은 복장의 센스에 대해 어떻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지나치게 사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었다. 분명히 멋진 스타일임에는 틀림없었으나, 이토록 블라우스도 슬랙스도 몸에 꼭 붙게 입은 것은 어째설까? 그리고 아침부터 짙은 아이섀도우와 마스카라. 그래도 괜찮은 모양이지……. 줄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 지젤라가 줄리에게 눈길을 돌렸다.
“너는 좀 더 살이 붙어야 하겠어. 이상하구나 - 잘 먹는데도. 아마 너무도 신경질적이기 때문일 거야.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고 좀 더 살이 찌도록 노력해야 해. 너처럼 빼빼 마른 여자는 남자들이 싫어하거든. 그렇죠, 사이몬?”
“대부분의 남성은 뼈만 남은 것보다는 약간 살이 붙은 여자를 좋아할 테죠. 하지만 줄 리가 너무 말랐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저 나이 또래의 처녀는 뚱뚱해서 고민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실례하겠어요……수영을 하러 가겠어요.” 줄리는 내뱉듯이 말하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빠른 걸음으로 사잇길을 내려가는데 지젤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렇다니까요, 내 말을 좀 들었으면 좋겠는데. 어쩔 도리가 없어요. 나를 따르기만 한다면 좀 더 예의바른 처녀로 만들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암, 그럴 테죠, 당신은 내게 깊은 애정을 쏟고 있으니까.” 하고 줄리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줄리는 수영을 하거나 루 아줌마의 두 아이들과 놀거나 하면서 오전을 지냈다. 줄 리가 솔리테일에 온 다음에 낳은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동생과 같았다. 코코아빛 피부에 갈색 눈을 한 귀여운 아이들인데, 어째서 지젤라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과 노는 동안에 줄리는 아침 식사 때 맛본 굴욕감을 잊었다. 점심시간 한 시간 전에 루 아줌마가 피리를 불어 아이들을 불러들였다. 줄리는 혼자 남게 되자 모래밭에 드러누웠다.
평소 같으면 결코 낮잠을 자지 않는 줄리였으나,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이상하게 졸음이 왔다. 그녀는 엎드려서 팔에 얼굴을 얹었다.
엎드린 채 졸고 있을 때 성냥 긋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돌리고 눈을 떠 보니, 2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이몬이 앉아 시가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순간 줄리는 그대로 자는 체하고 있을까도 생각했으나, 사이몬이 왜 지젤라를 두고 자기를 찾아 왔는지 알고 싶어 일어나 앉았다.
“아버지가 돌아올 것 같지는 않군.” 사이몬이 한 팔을 베고 누웠다.
“그렇군요.” 줄리는 마른 발에 묻어 있는 모래를 떨었다. “지젤라는 어디 있죠?”
“점심을 먹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있지.”
줄리는 그들이 오전중에 무엇을 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단순한 이야기들이었을 테지만. ‘지젤라는 사이몬과 같은 남자와 결혼했어야 했는데. 만일 그 배가 그의 것이고 섬을 살 수 있을 정도라면, 그는 분명히 바베이도즈의 부자일 거야. 하지만 그는 되도록 결혼을 뒤로 미루려는 타입인지도 몰라. 어쨌든 예부터 식민지에 살고 있던 사람은 무척 콧대가 높다고 아버지가 말했어. 호텔 이발소의 매니큐어 담당자와 결혼할 리는 없어. 그가 결혼한다면, 상대는 자기 친구인……어려서부터 친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에 잠겨 있던 줄리는 사이몬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어째서 아가씨는 그녀에게 잔소리를 들을 일을 하지? 아가씨가 반항하지 않으면 그녀 역시 싫어하지는 않을 텐데.”
사이몬이 다정한 체하는 지젤라의 행동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줄리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으나, 지젤라의 정체를 간파한 것은 사이몬도 역시 너구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의 가족 관계는 당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을 텐데요, 티아난씨. 어쨌거나 당신은 어젯밤, 지젤라의 말이 옳다고 하셨죠?”
사이몬이 조롱하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가씨의 아픈 데를 찔렀다……이 말인가?”
줄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잘못 보셨어요. 내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루 아줌마의 말뿐이에요.”
“루 아줌마하고는 방금 이야기를 했지. 그녀도 아가씨에 대해 매우 걱정하고 있더군.”
루 아줌마와 이야기를 하다니……줄리는 수상하게 생각했다.
“아줌마의 비위를 맞춰서, 당신이 이 섬을 양도받은 뒤에도 그녀를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군요? 당신의 매력은 인정하지만, 만일에 아빠가 이 섬을 내놓아도 아줌마와 하큐르는 우리와 같이 떠날 거예요.”
“내게서 매력을 인정하다니 의외로군. 수상쩍은 녀석이라고 눈의 가시처럼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겉보기만의 매력이란 뜻이에요.”
사이몬은 웃으면서 시가를 모래에 묻고 일어서더니 한 손을 내밀었다.
“수영이나 하러 가지. 그 머리를 좀 식혀야겠어. 점심 먹은 것도 소화를 시켜야 할 테니까.”
줄리는 사이몬의 손에 눈길도 보내지 않고 벌떡 일어섰다.
“지젤라가 나를 달래 보라고 하던가요?”
사이몬은 셔츠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문득 자기를 바라보는 그의 찌르는 듯한 눈길에 매료된 듯 그녀는 이상하게도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나한테는 절대로 무리라고 생각하나? 줄리 템플을 길들이면……대단한 공로겠지.”
줄리는 묘하게도 마음이 흐트러져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이때 앞바다에서 무언가가 번쩍 빛났다.
“아빠예요……돌아오셨어요! 바로 저기예요!” 줄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구조선이라 그 말이군.”
줄리는 혐오의 눈으로 그를 일별하고 선창 쪽으로 달려갔다.
지젤라도 배를 발견하고는 줄리와 거의 동시에 달려와, 마치 제일 달콤한 시기에 남편과 헤어져 있었다는 듯이 환영의 손을 흔들었다.
“여보!……쓸쓸했어요.” 지젤라는 주위 사람에게 구애받지 않고, 배에서 내린 남편을 끌어안았다.
조나단은 어색한 듯 가볍게 키스하고 지젤라의 손을 조용히 떼어놓았다.
“잘 있었나?” 그러고는 크루즈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손님이 왔나?”
“그래요……티아난이란 청년인데 아주 인상이 좋아요.” 사이몬이 아직 20세 안팎이라는 투로 말했다. “어제 왔는데, 하루이틀 묵어도 좋으냐고 묻기에 좋다고 했어요. 수상한 사람은 아니에요. 상관없겠죠? 줄리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에요. 그렇지, 줄리?”
“알았어……상관없어.” 줄 리가 말할 틈도 없이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가 사이몬을 만날 때까지 줄리는 아버지와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지젤라가 그렇게 되도록 꾸몄던 것이다.
사이몬이 지젤라에게 말했을 게 분명하다 - 그가 솔리테일 섬을 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줄 리가 알고 있다고. 그렇기에 지젤라는 줄리보다 먼저 그것을 아버지한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유쾌한 점심 식사였다. 사이몬과 지젤라가 주로 이야기했다. 줄리는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성으로 부른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도 사이몬을 정중히 대했다. 자기가 없는 동안 낯선 사나이가 들어왔다는 것은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줄리에게는, 아버지가 몹시 피곤하고 묘하게 초췌해진 것같이 생각되었다.
조나단 템플은 아직 40대였다. 아주 젊었을 때 결혼을 했으나, 줄리가 기억하고 있는 한 옛날의 젊었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잡히고 갈색 머리에는 흰 머리가 섞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든 얼굴에서도 근엄하고 금욕적인 인상이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흥이 나거나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그 푸른 눈이 밝게 빛났다.
이 점에서는 줄리도 아버지를 꼭 닮았다. 시무룩해 있을 때도 많았으나, 일단 웃기 시작하면 만면에 생의 희열이 넘친다.
조나단의 성격은 양면이 모두 작품에 나타나 있다. 카리브해의 화려한 원색과 눈부신 햇살, 자유분방한 정열을 쏟은 그림은 고갱의 타이티 그림과도 비견된다.
반대로 빈곤과 좌절, 격한 분노를 드러낸 작품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유복하고 풍족한 생활을 하는 관광객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핸디캡을 가지고 성장했으며 오랫동안 자신의 재능을 억압당했던 조나단은, 복종이란 이름이 붙을 만한 것은 모두 혐오하고 있었다.
점심 식사가 끝나자 지젤라가 말했다.
“줄리, 티아난씨를 남쪽 후미로 안내하겠다고 약속했잖니?” 그러고는 남편을 향해 설명했다. “배에 아콸렁이 있으니 산호초를 봤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당신은 몹시 피곤해 보이는군요. 오후에는 좀 주무시도록 하세요.”
“그래, 정말 피곤하군.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야.” 조나단은 우울한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그럼 두 사람은 저녁 식사 때 만나기로 하지.” 하고 그는 줄리와 사이몬에게 말했다.
“나도 쉬기로 하겠어요. 오늘은 워낙 더운데다 와인에 취해 버렸어요.” 지젤라는 하품을 억지로 참고 일어나 저쪽 테이블에서 잡지 몇 권을 가지고 왔다. “이것을 갖다 주어서 감사해요, 티아난씨. 솔리테일에는 잡지마저 없어 여간 적적하지 않아요. 이것만 있으면 몇 시간은 즐거울 거예요. 그럼 줄리, 바다에 가서 즐기고 오너라.” 지젤라는 마치 보이프렌드와 데이트하러 가는 딸을 배웅하는 어머니처럼 미소를 던진 뒤, 남편을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줄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사이몬에게는 시선도 보내지 않고 베란다의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그러고는, 동쪽 곶으로 커브진 길을 서둘러 갔다. 줄리는 늘어진 나뭇가지와 우거진 덤블을 헤치며 잠시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사이몬이 따라오는 기색은 없었다. 줄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줄리는 세상일에 어수룩한 면이 있는 반면, 인생을 느끼는 점에서는 같은 나이의 처녀들보다 민감했다. 방갈로에는 책으로 가득 찬 책장이 두 개나 있고, 아버지는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많은 책을 가지고 오곤 했다.
좋은 소설들은, 만일 읽지 않았으면 알았을 리가 없는 갖가지 인간상을 줄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소설에 나오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인간관계나 굴절된 감정 같은 것은 현실적으로는 좀처럼 없을 것이다 - 줄리는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젤라가 오면서부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난 24시간 동안에, 줄리는 자신이 지금까지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는 야릇한 감정을 맛보았다.
줄리는 섬의 동쪽 끝에 있는 바위 위에 앉아, 지젤라에 대한 혐오와 분노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 생각만 해도 구역이 났다. 지젤라는 사흘 전의 말다툼으로 굴욕감을 느낀 조나단을 얼마나 교묘히 달랠 것인가. 조나단이 지젤라의 명연기에 넘어간다면, 그녀는 현명하게 솔리테일 섬을 팔자는 말을 꺼낼 것이다.
사이몬이 오후를 어떻게 보내고 있을지 줄리로서는 알 수 없었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 혼자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티아난군은 좋은 배를 가지고 있더구나. 타보았니?” 줄 리가 옆에 앉자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절대로 배를 타면 안 된다고 아빠가 말씀하셨잖아요?”
아버지가 빙긋 웃었다.
“그랬었지. 어쨌거나 티아난군은 내가 처음에 느꼈던 그런 타입이 아니었어.”
“어떻게 아셨죠, 아빠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줄 리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버지가 손을 내밀어 딸의 머리를 가만히 잡아당겼다.
“나는 많은 사람을 보아 왔단다. 그런데 별일 없이 잘 지냈니?”
줄리는 아버지 손을 잡아 자기 뺨에 갖다 대었다.
“돌아오셔서 기뻐요, 아빠.”
“하지만 곧 다시 떠나야 해, 이번에는 뉴욕이야. 작품 전시를 위해서 때로는 직접 가야 할 필요가 있고, 또 지젤라도 기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줄리, 너는 가고 싶지 않겠지?”
“네. 뉴욕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서 루 아줌마와 같이 있는 것이 제일 좋아요.”
“언제까지나 솔리테일에만 있을 수는 없어.”
줄리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싫어요……부탁이에요! 팔 생각이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 여자의 말은 듣지 마세요. 지금까지 줄곧 여기서 행복하게 지내 왔잖아요.’
줄 리가 말했다.
“언제가지나 여기서 살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아버지가 화제를 바꾸어서 줄리는 안심했다. 그러나 단지 이야기하는 것이 미루어진 것뿐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밤이 되면 지젤라가, 아버지와 사이몬이 단둘이 만나도록 계획을 꾸밀 것이다. 그 자리에서 사이몬이 이야기를 꺼내고 아버지는 예스냐 노우냐를 결정할 것이다. 지젤라의 희망 앞에서, 아버지는 자기 자신이나 줄리의 생각을 얼마나 존중할 것인가?
줄 리가 예상했던 대로,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지젤라가 말했다.
“줄리, 방에 와서 내 푸른 드레스의 단을 올려 주지 않겠니?”
줄리가 그녀의 뒤를 따라 침실에 들어서자 지젤라는 등뒤로 문을 닫았다.
“사실은 옷단을 올리고 싶은 것이 아니란다. 두 사람이 은밀히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지젤라는 침대로 가서 편안히 앉아 담배를 집어들었다. “사이몬이 이 섬을 사고 싶어 한다는 말은 너한테도 했지? 그런데도 네가 전혀 반대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난 놀랐어. 하지만 너는 아까 아빠와 단둘이 만났을 때 물론 따지고 들었겠지?”
“별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요.”
“정말? 뜻밖이구나. 하지만 이미 아빠에게는 설득이 끝났어. 사이몬이 값만 제대로 부르면 이 일은 결정될 것이 뻔해.”
줄리가 문에 기대섰다.
“만일 아빠가 말을 듣는다면 어디로 이사하죠?”
“아직은 결정하지 않았어. 자메이카 정도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어.”
“뉴욕이나 런던이 아닌가요?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잖아요?” 가시 돋친 목소리로 줄 리가 물었다.
“나는 말이지, 추운 겨울이 싫어. 그리고 하녀도 비싸게 고용해야 하고……. 줄리, 그렇게 언짢은 얼굴을 하면 못써. 사이몬의 말처럼, 너같이 마구 자란 사람은 희소가치가 있지. 사교계에 나서면 곧 인기를 끌게 될 거야.” 지젤라는 벌써 이 섬에서 떠나기로 결정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줄리는 부아가 치밀었다. 의자에 앉아 사이몬의 잡지를 뒤적였으나, 눈물이 앞을 가려 글과 그림이 희미하게 보였다.
베란다에서는 두 사나이의 나직한 이야깃소리가 한시간 가까이 들리더니, 이윽고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나면서 사이몬의 음성이 들려왔다.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아침에 다시 뵙겠습니다.”
잠시 후 조나단이 침실로 들어왔다.
“그래 얼마라고요?” 지젤라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조나단은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낮은 가격은 아니야.” 무뚝뚝한 어조였다. “줄리에게 할말이 있어, 단둘이서. 괜찮겠나?”
“네, 좋아요.” 손톱을 깎고 있던 지젤라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었다.
줄리와 베란다로 나가자 조나단이 입을 열었다.
“티아난군이 이 섬을 사고 싶어 한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지?”
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승낙했나요, 아빠?”
“잘 생각해 보아야겠기에, 뉴욕에서 돌아와 대답하기로 했어.”
“그랬군요.” 줄리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조나단은 그녀의 보기 좋은 무릎에 한 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그렇게 슬픈 표정은 짓지 말아라, 네가 얼마나 솔리테일을 사랑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네가 아직 어린애라면 나도 분명히 거절했겠지만, 너는 인제 어른이야. 언제까지나 여기서 살 수반은 없어. 너는 아마 생각해 본 일도 없겠지만, 만일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너는 길잃은 미아처럼 될 거야.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의지할 만한 친척이나 친구도 없어.”
“하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그럴 나이가 아니에요, 아직 43세예요.”
“사고를 당할 수도 있어. 그 이야기는 그만두고라도, 지젤라 생각도 해야 하지 않겠니? 여기 있으면 그 사람은 행복을 맛보지 못해. 너하고는 별로 뜻이 맞지 않는 모양이지만, 지젤라는 내 아내기 때문에 내겐 의무가 있는 거야.”
“하지만, 아빠는 어떻게 되죠? 아빠가 주인이잖아요. 아빠는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시잖아요. 사람이 많은 관광지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겠어요?”
“구태여 거리의 한가운데로 이사할 것은 없어. 지젤라가 번화가에 나갈 수 있는 곳이면 돼. 그러면 이야기가 통하지 않겠니? 그 사람은 여기처럼 고립된 곳에는 어울리지 않아. 하기야 대부분의 사람이 다 그렇지. 너는 바깥세상을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다.”
줄리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사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에요. 지젤라는 파티를 열거나 매일같이 쏘다닐 것이고, 친구들을 잔뜩 집에 데리고 와서……아빠는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할 거예요. 그 여자가 신경 쓰는 것은 그림의 값뿐이에요. 돈만 벌 수 있다면 아빠에게 캘린더의 그림이라도 그리게 할 거예요.’
“루 아줌마와 하큐르는 어떻게 하죠? 그 사람들을 버릴 수는 없어요. 가족과 같은 사람들인데요.”
“만일 섬을 팔게 되는 경우, 그 사람들은 이 섬에 살아도 된다고 티아난군이 약속했어.”
줄리는 벌떡 일어나 난간으로 갔다. 목이 메고 눈물이 마구쏟아졌다.
“그러면 이미 결정이 났군요?” 그녀가 말했다.
“아니, 아직 결정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잖니……뉴욕에 가서 잘 생각해 보겠다고.” 그는 줄리에게 다가와 어깨에 팔을 둘렀다. “줄리, 울면 안 돼. 여기서 떠난다고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정말이야.”
‘아니에요, 제 세계는 끝나요. 이 섬이야말로 제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제 세계예요.’
줄리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미, 미안해요, 이성을 잃어서. 아빠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해요. 너무나 갑작스런 이야기여서 납득이 가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녀는 아버지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바보같은 말이지만, 여기를 떠난다는 생각만 해도 무서워요.”
아버지가 줄리를 꼭 껴안았다.
“너는 곰치나 상어도 무서워하지 않잖니? 그것들이 사람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란다.”
‘과연 그럴까?’ 하고 줄리는 생각했다.
이튿날 아침 식사 때 지젤라가 뉴욕에 가는 이야기를 꺼내자, 사이몬은 시페어알라 호로 바베이도즈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지젤라가 기쁜 나머지 소리쳤다.
“어마, 멋지군요. 우리의 낡은 배는 작고 흔들려서 질색이에요. 킹스턴에 도착할 무렵이면 언제나 옷이 흠뻑 젖거든요.”
“친절에 감사하네, 티아난군.” 조나단도 고맙다고 말했다.
“천만에요, 나도 어차피 집에 돌아가는 길이니까요. 줄리, 아가씨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뉴욕이란 놀라운 도시거든.”
“나는 가지 않아요.” 줄리가 굳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이몬은 이상하다는 듯 눈을 껌벅거리며 조나단에게 얼굴을 돌렸다.
“줄리를 혼자 두고 떠날 생각입니까?”
“이애는 하인들이 있으니까 아무 문제도 없어요. 그리고 가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불과 일주일……길어야 10일 정도 걸릴 테니까.” 지젤라가 대신 대답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 예컨대 병이라도 들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을까요?”
“나는 지금까지 앓아 본 일이 없어요.” 줄 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법이지. 골절이나 급성 맹장염에 걸릴 수도 있고.”
“그럴 경우에는 하큐르가 세인트빈센트에 데려다 줄 거예요.”
조나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들 부부는 믿을 만한 사람들이야. 과거에도 줄리는 몇 번이나 혼자 집을 지켰지만 나는 걱정한 일이 없어. 이곳은 수도원처럼 안전한 곳이야.”
“그래도 여기는 결코 사람들이 근접 못할 데도 아니고, 이 근처의 바다에는 항상 수상한 자들이 우글거리는걸요.”
줄리가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사실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처음이에요……사실 이 섬에 발을 들여놓은 외부인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지젤라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고 사이몬의 표정은 굳어졌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하큐르와 힘을 겨루기는 싫겠죠?” 하고 줄리는 덧붙였다.
“줄리…….” 지젤라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야 티아난씨도 무척……강하겠죠. 하지만 하큐르는 거인이에요. 그리고 깨진 병을 무기로 삼는다든지 하는 무서운 방법을 많이 알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고 줄리는 깜짝 놀랐다. “저어……이것은 진심으로 한 마리 아니에요. 내가 그만…….” 줄리는 허둥대며 입을 다물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말이 좀 지나쳤다는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으나, 지젤라는 줄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이몬도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사이몬과 단둘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줄리는 대담하게 말을 계속했다. “나를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걱정할 것은 없어요. 정직하게 말해서, 실은 당신이 여기 왔을 때 나 혼자였다면 당신을 절대로 상륙시키지 않았을 거예요. 위험은 처음부터 피하는 것이 좋잖아요? 외모만으로는 믿을 수가 없어요. 무서운 상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방패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나는 이만 실례하겠어요……꽃이나 꺾어 오겠어요.”
오전 내내 줄리는 사이몬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는 점심시간에도 오지 않았다. 시페어알라 호의 엔진을 수리하느라고 바쁘기 때문이라도 아버지가 알려 주었다.
저녁 식사 때는 사이몬이 모습을 나타냈지만, 줄리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그와 아버지의 태도로 미루어 사이몬의 가계(家系)가 줄리의 예상대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조상은 17세기에 바베이도즈로 이주했는데, 현재는 사탕수수 농장과 럼주 공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스스로 땀 흘려 일한 것이 아니라 가엾은 노예를 혹사하여 부(富)를 쌓았음에 틀림없었다.
식후에 지젤라는 내일의 여행 준비를 하러 가고, 조나단과 사이몬은 베란다로 갔다. 줄리는 설거지를 돕고 난 다음, 낡은 신문의 크로스워드 퍼즐을 풀려고 테이블에 앉았다.
때때로 두 사람 쪽으로 눈길을 보낸 줄리는 사이몬을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한 아버지의 태도를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잠시 자리를 떴을 때 사이몬이 줄리를 돌아다보았다.
“어쩐지 목 뒤가 뻣뻣하다 생각했더니, 줄 리가 내게 저주라도 퍼붓고 있었던 모양이군.” 조롱하는 투의 말이었다.
“미안하게도 내겐 그러한 능력이 없어요. 당신은 원하는 것은 손에 넣게 되었으니 만족스럽겠군요.”
“아직 어떤 결정도 보지 못했어, 아가씨 아버지가 결심을 하지 않고 있으니까.”
줄리가 씁쓸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결국 팔게 될 거예요. 사실은 팔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아무쪼록 이 섬의 생활을 즐기세요, 티아난씨. 나 같으면 그럴 수 없겠지만, 당신은 양심의 가책을 안 느낄 테니까요.”
사이몬이 일어서서 천천히 다가왔다.
“아가씨는 정말 귀찮기 짝이 없는 처녀로군. 마치 내가 사기라도 친 듯한 말투로군. 내가 제시한 값은 아주 고액이야. 억지로 사려고 하는 것도 아니야. 그런데 어째서 나를 그토록 싫어하지?”
“당신이 아버지의 약점을 간파하고 그 점을 이용하려하기 때문이에요.” 줄리는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태가 언제까지나 그대로 계속될 수는 없어. 만일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 해도 다른 형태로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사이몬이 점잖게 말했다.
이튿날 아침 지젤라는 생기에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줄리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죄수와도 같은 심정이었다. 여덟 시가 되자 하큐르가 작은 배로 짐을 날라다 시페어알라 호에 싣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이미 사이몬이 자기의 거룻배로 시페어알라 호에 데려다 놓고 있었다. 하큐르가 화려한 스튜케이스를 지젤라에게 건넸을 때 줄 리가 아버지한테 얼굴을 돌렸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빠.”
아버지는 잠시 줄리를 꼭 껴안아 주었다.
“다녀오마.” 그러고는 무어라 알아듣지 못할 말을 덧붙이고 나서 줄리를 놓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용서해 줘, 줄리.”
“다녀올게, 줄리.” 지젤라는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못 견디겠다는 듯이 무뚝뚝하게 말하며 줄리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푸른 판탈롱 슈트와 터번 차림에 큰 진주 귀걸이를 한 지젤라는 상당히 우아하게 보였다.
“다녀오세요.” 줄리는 발길을 돌려 갑판으로 걸어갔다. “안녕히 가세요, 티아난씨.”
“그럼 다시, 줄리.” 줄 리가 작은 배로 내려가는 것을 도우려고 기다리고 있던 사이몬은 손을 내밀었다. 일부러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줄리는 생각했다.
줄리는 의식적으로 사이몬의 손을 무시하고 말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예요.”
“아마 그럴 테지.” 사이몬은 동요하는 기색도 없이 손을 내렸다. “그러나 일년쯤 지나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면 재미있을 거야……모난 데가 깎여서 둥글게 되어 있을 테니까.”
수영복을 입고 있던 줄리는 배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하큐르의 배까지 헤엄쳐 갔다.
잠시 후 시페어알라 호는 흰 파도를 가르며 일로 북쪽으로 멀어져 갔다.
이튿날 아침, 하큐르가 고기잡이를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줄리는 우라간 섬에 혼자 다녀오기로 했다.
“그곳은 불길한 섬이에요, 아가씨. 그런 곳엘 간다니, 걱정이 되는군요.” 도시락을 꾸리고 있는 줄리에게 루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아줌마는 가보지 않아서 몰라요. 솔리테일과 전혀 다름이 없는 아주 멋진 섬이에요. 나는 언제나 무사히 돌아오곤 했잖아요.”
“그 섬에는 악마가 살아요. 나는 천 달러를 준다고 해도 그런 데는 가지 않겠어요. 하큐르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어요. 늦게까지 있으면 안 돼요, 아가씨. 해가 지면 유령이 나와서 아가씨를 유괴해 갈 거예요.”
줄리는 웃으며 루를 껴안았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날은 바람이 약간 강하게 불어서, 줄리는 열 시경에 이미 우라간 섬의 바닷가에 도착했다.
우라간이란, 태풍이란 의미의 프랑스어로서, 18세기에 무서운 폭풍우가 이 섬을 휩쓸어, 거기 살고 있던 프랑스인 일가와 그 노예들이 전멸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던 것이다.
줄리가 사이몬에게 이야기한 집이란 지붕이 없는 쓰러지기 직전의 폐가였다. 큰 산호 바위로 세운 덕분에 아직도 벽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줄리는 지하에 포도주 저장고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곳으로 통하는 층계는 낮은 나무들과 담쟁이 덩굴로 덮여 있었으나, 작은 배에 싣고 온 낫으로 후려치니, 나무로 된 문이 원형 그대로 모습을 나타냈다. 줄리는 용기를 내어 비틀어진 문을 힘껏 열었다. 그러나 안은 텅 비어 있고 빈병이 몇 개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집의 주인은 폭풍우를 만났을 때 왜 이 지하실로 피난하지 않았을까? 그럴 틈도 없을 만큼 갑자기 폭풍우가 밀어닥쳤던 것일까?
그러한 비참한 역사와는 달리 그날 아침의 우라간은 아주 좋은 날씨였다. 줄리는 두 시간 가량을 암초 사이를 잠수하며 보냈다. 점심 전에 야자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따서는 도시락과 함께 먹었다.
혼자 헤엄칠 때는 가벼운 경련만 일어도 목숨을 앗기는 수가 있기 때문에, 줄리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식후에는 한 시간 정도 자기로 했다.
이윽고 눈을 뜬 줄리는 하품을 하다가, 문득 한기를 느끼고 벌떡 일어났다.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푸른 하늘이 잿빛으로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앞바다에서 높은 파도가 일렁거리며 다가와 암초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졌다. 후미에는 흰 거품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줄리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세 시간 가까이나 잤던 거시다. 곧 출발하지 않으면 앞바다가더욱 사나와져서 작은 배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얼른 작은 배까지 헤엄쳐 갔으나, 암초를 빠져나가는 물줄기를 보고 줄리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미 그곳을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암초의 예리한 모서리에 부딪쳐 버릴 것은 뻔한 일이었다.
“아아, 큰일 났어! 바람이 그칠 때까지 움직일 수 없겠어. 바람이 어서 멎도록 기도를 드릴 수바께 없어. 저녁때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아줌마는 걱정한 나머지 정신을 잃게 될 거야.”
줄리는 배를 단단히 묶어 놓고 다시 바닷가로 헤엄쳐 돌아왔다. 타월도 옷도 없었기 때문에 온몸엔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바위 틈에 떨면서 웅크리고 앉아서도, 자신의 일보다는 루 아줌마네가 얼마나 걱정할지 그것이 더 염려되었다. 이 무렵, 트리니다드에서 볼티모어에 걸친 북태평양 연안 전역에 <허리케인 경보>가 내려져 있었으나 줄리가 그것을 알 리 없었다.
3
바다는 점점 더 거칠어져, 작은 배가 나뭇잎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15분가량 바라보고 있던 줄리는 그것이 보통 스콜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몇 시간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 지하창고로 피난해야만 할 것 같았다.
‘분하기 짝이 없다!’ 왜 피난대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그 작은 배의 로커에는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 필요한 물건을 넣어둔 주머니가 있는 것이다. 조심성이 없는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줄리는 할 수 없이 피난대를 가지러 다시 한번 배로 헤엄쳐 갔다. 이번에는 배에 기어오르는 일조차 어려웠다. 물속은 따뜻했으나, 주머니를 몸에 붙들어 매고 바닷가로 돌아와 보니 바람은 얼음처럼 차가와져 있었다. 급히 폐허로 달려가는 그녀의 피부는, 평소의 구릿빛이 아니라 푸르스름한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줄리는 지하실에 들어오자 꾸러미를 풀고 제일 먼저 초와 성냥을 찾았다. 촛불 빛에 비친 지하실이 무척 기분 나쁘게 여겨졌다. 그녀는 수영복을 벗어 쥐어짜서 입고 힘차게 체조를 해서 몸을 따뜻하게 했다.
꾸러미 속에는 신호를 보내기 위한 아주 큰 빨간 천도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몸을 닦고 나서 그것을 몸에 두르고 몸을 앞으로 굽혀 젖은 머리를 꼭 짰다.
밖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고, 암초에 부딪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야수의 울부짖음과도 같이 들렸다. 그런데도 줄리는 이 급격한 날씨 변화를 단순한 스콜의 일종으로 여기고, 곧 가라앉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줄리는, 도시락을 좀 남겨 두는 것이었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 것인가. 이미 다섯 시였다. 비록 스콜이 곧 가라앉는다 해도 어둡기 전에 솔리테일로 돌아가기란 이미 불가능했다. 루 아줌마와 하큐르는 미친 듯 걱정할 것이다. ‘잠이 들다니, 정말 어리석었어.’ 줄리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얼마후에는 무서운 악마의 이야기가 차례차례 머리에 떠올랐다.
지하실에는 비록 바람은 들어오지 않았으나, 마루를 비롯하여 모든 것이 싸늘했다. 때때로 몸을 움직여 추위를 쫓기는 했으나, 공포심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즐거운 일을 생각하려 했지만 기분 나쁜 미신 이야기만 머리에 떠올랐다.
바깥의 어딘가에서 우레 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줄리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그 소리는 강풍으로 나무가 뿌리째 뽑혀 쓰러지는 소리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줄리는 처음에는 바람 소리로 생각했다. 그러나 줄리는 또다시 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분명히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였다……이 세상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이상한 목소리가 지상에서 부르고 있었다.
줄리는 제일 구석진 곳으로 가서 몸을 도사렸다. 문에는 빗장도 없어 자신을 지킬 방법이 없었다. 공포에 떨면서 그녀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원했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바람으로 촛불이 꺼지기 직전, 줄리는 우뚝 서 있는 크고 우람한 사람의 그림자를 보았다. 불이 꺼진 어둠 속에서 그만 악 소리를 질렀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정신을 잃었다.
줄리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촛불이 밝게 빛나고 있었고, 마루에 누워 있는 줄리를 사이몬 티아난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 무서워할 것 없어. 자아, 이것을 마셔.” 줄리가 대답도 못 하고 있자 사이몬은 그녀를 안아 일으키더니 입술에 병을 갖다 대었다. 줄리는 브랜디를 한 모금 마셨으나, 스트레이트였기 때문에 목이 몹시 타 기침을 했다. 사이몬은 그녀를 앉히고 기침이 멎을 때까지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대로 앉아 있어.” 그는 일어나 스웨터와 바지를 벗고 셔츠와 트렁크스 바람이 되었다. 줄리는 어이가 없어 시선을 돌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사이몬은 벗은 옷을 줄리의 발밑에 던졌다.
“그 헝겊을 집어치우고 내 옷을 입어. 혼자 할 수 있겠나, 아니면 도와줄까?”
“내, 내가 하겠어요.”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좋아.” 사이몬이 줄리에게 등을 보이고 섰다.
줄리는 천천히 수영복을 벗고 사이몬의 옷을 입었다. 스웨터가 마치 한참 동안 햇볕을 쬦 캐시미어처럼 따뜻했다. 그러나 보통 셔츠였기 때문에 살에 닿자 따끔따끔했다. 그 따스함은 사이몬의 체온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사이몬의 바지는 줄리에게 너무 길었다. 위를 어떻게 잠가야 할지 몰라 허리춤을 붙들고 있는데, 사이몬이 돌아보더니 아무 말도 않고 아마로 짠 끈을 빼어 허리를 묶고는,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아 줄리의 발이 나오도록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려 주었다.
그러는 사이몬을 내려다보면서 줄리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여기에 왔죠? 바베이도즈에 가 있어야 할 텐데요. 그리고 아빠와 지젤라는?”
“지금쯤 뉴욕에 계시겠지, 어제 늦게 바베이도즈에서 출발했으니까, 내가 솔리테일에 돌아와서 다행이군. 루 아줌마와 하큐르는 아가씨 걱정으로 반쯤 미쳐 있어. 배가 고장이라도 났나? 어째서 날씨가 나빠지기 전에 곧 돌아가지 않았지?”
“내가……그만 잠이 들어 버렸었어요. 나는 바보예요……기절을 다 하다니. 아까는 귀신이 들어온 줄만 알았어요.”
“겁을 줘서 미안하군. 브랜디를 한잔 더 하겠나”
“아니……이제 괜찮아요. 어째서 돌아왔어요?”
“시계를 잃어버렸어, 고급 시곈데. 그래서 혹시 솔리테일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돌아왔지.”
“어마, 그랬군요. 나한테는 행운이었던 셈이군요. 하지만 어떻게 암초를 빠져나왔죠? 시페어알라 호로서는 무리였을 텐데요.”
“북쪽에 넓은 수로가 있더군. 좀 험하기는 했으나 용케 빠져나왔지.”
“아 참 그래요, 잊어버리고 있었군요. 하지만 어떻게 그런 위험한 일을! 잘못하면 가루가 돼요.”
“약속을 했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데려오겠다고.”
“다시 한번 모험을 하겠어요, 아니면 바람이 그칠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시끄러운 빗소리 때문에 두 사람은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날씨는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줄 리가 질문한 직후 또다시 거목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있나? 허리케인이 다가오고 있어. 언제 문이 날아갈지 모르니까 문에서 떨어져 있어.”
‘허리케인!’ 줄리는 루 아줌마네 일가를 생각하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줌마네는 어떻게 하죠? 어디로 피난하죠?”
“괜찮아, 하큐르에게 지시해 두었으니까. 자아, 앉아. 배가 고프지?”
그때까지는 배가 고팠던 줄리였으나, 루 아줌마네 일이 걱정되어 식욕이 전혀 없었다.
사이몬은 문 옆의 벽 쪽에 줄리를 앉혔다. 여길면 문이 부서져도 상처를 입지 않을 것이다. 사이몬은 그녀의 옆에 앉아 치즈를 손에 쥐여 주었다.
줄리는 그것을 먹었으나 맛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허리케인이 솔리테일을 직접 강타하지 않았으면 - 오직 생각은 이것뿐이었다. 지금 우라간 섬에 몰아치고 있는 폭풍우도 허리케인의 기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동차는 성냥갑처럼 공중에 날아오르고 배는 산산조각이 나며 집들이 모두 무너져 거리는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바다에는 거대한 풍랑이 일어 삽시간에 모든 것을 삼켜 버리고 마는 것이다.
줄리는 다시 떨기 시작했다. 몸이 추워진 탓도 있지만 반은 마음의 고통 때문이었다. 온몸이 떨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침 경련과도 같은 떨림이 사이몬에게 전해지자, 그는 억지로 그녀에게 브랜디를 마시게 했다. 그래도 멎지 않자 사이몬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저항할 것 없어, 단지 몸을 녹여 주려고 이러는 것 뿐이니까.”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러나 변명할 필요도 없었다. 줄리는 이미, 사이몬이 자기가 아주 싫어하는 타인이라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온기와 위안을 주는 단순한 타인에 지나지 않았다.
줄리는 마치 아버지나 하큐르를 대하듯 순순히 사이몬에게 안겨 속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그의 두 팔에 감싸여 그 억센 몸의 온기를 느끼고 있는 동안 줄리는 차차 침착과 생기를 되찾았다.
이윽고 허리케인이 이 섬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뒤는 주위가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했다. 순간 줄리는, 세상이 다 멸망하고 두 사람만이 남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몬?” 줄리는 사이몬이 옴쭉달싹하지 않고 말도 하지 않자 이상하게 여기고 얼굴을 들었다. 촛불이 다시 꺼져 가기 시작하여 칠흑 같은 어둠이 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이몬, 괜찮으세요?”
그는 약간 몸을 움직이면서, 줄리를 안고 있는 팔의 힘을 늦추었다.
“음, 괜찮아. 줄리는?”
“물론이에요 - 발이 저리기는 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30분 정도 지났겠지.”
“30분이라뇨! 몇 시간은 되었을 것 같아요.”
사이몬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회중전등이 보이지 않는군. 아아, 여기 있군 그래.” 흰 빛이 어둠에 구멍을 뚫고 저쪽 벽을 비췄다. 그는 일어섰다. “자아, 피해 상황을 알아 보아야겠군. 배가 무사한지 걱정이 되는데.” 사이몬이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잠깐, 발이 아직 말을 듣지 않아요.”
그는 되돌아와 줄리를 일으켜 세우고는 발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 그녀를 가만히 부축하고 있었다.
“문이 꼭 닫혀 있다니 놀랍군. 밖에는 어떤 참상이 벌어졌는지 신만이 알 거야.” 멀리가 볼 필요조차 없었다. 문 바로 바깥쪽에 이미 참상이 드러나 있었다. 물방울이 매달린 나뭇가지가 그물처럼 층계를 가로막고 있었다. 사이몬은 잠시 회중전등으로 여기저기를 비춰 보다가 결국 문을 다시 꼭 닫아 버렸다. “어차피 우리는 내일 아침까지 여기에 남아 있어야겠군.”
“왜요? 어째서요?”
“내가 보기에는 최소한 두 그루의 나무가 겹쳐 있는 것 같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가지의 각도로 보아 무언가에 걸려 넘어진 것 같아. 함부로 나가면 위험해, 나무에 깔릴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여기서 나가야……나가지 않으며 안 돼요!” 줄리가 크게 외쳤다. “솔리테일로 도아가야 해요. 루 아줌마네가 상처를 입었거나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그녀는 사이몬을 밀치고 문으로 향했다.
사이몬이 거칠게 줄리의 어깨를 붙들었다.
“밝을때까지 기다릴 도리밖에 없어. 배가 망가졌다면 헤엄쳐야 하는데, 그것도 어두울 때는 무리야.”
“배가 무사할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가겠어요. 말려도 소용없어요.”
사이몬이 줄리를 벽에 밀어붙였다.
“보낼 수 없어. 바보 같은 짓을 하면 못써. 지금까지 용케 참았는데 이제 와서 져서는 안 돼.”
“놓으세요! 돌아가겠어요.” 줄리는 몸부림쳤다.
“얌전히 있어, 그러지 않으면 혼내 주겠어, 줄리.” 사이몬이 소리쳤다.
이때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정적이 깨졌다. 사이몬은 줄리를 꼭 껴안고 재빨리 문에서 떨어졌다. 바로 그 순간 나뭇가지가 문을 꿰뚫어서, 하마터면 두 사람은 찔릴 뻔했다.
줄리는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져 버렸다.
“이제 알겠나?”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네……미안해요.”
“내일 날이 밝는 즉시 출발하기로 하지. 그때까지는 푹 쉬도록 해. 솔리테일 사람들은 아마 이곳보다는 나을 거야. 우리가 정면으로 허리케인을 만났으니까 그쪽에서는 최악의 상태만은 면했을 것 같아.” 사이몬은 초에 불을 댕기고 자신의 방수 코트를 안쪽을 위로 해서 마루에 펴며 말했다. “요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할 수 없지. 그리고 브랜디를 한 모금 더 마시도록 해. 내일 아침에는 멀리 헤엄쳐야 할지도 모르니까 실컷 자두어야 해.”
“자겠어요, 너무 피곤해요.” 줄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그가 건네 준 브랜디를 한 모금 마셨다.
코트는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잘 수 있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당신은 왼쪽과 오른쪽 중 어느 편으로 돌아누워 자는 것이 편해요?” 줄리가 누우려 하면서 물었다.
분명히 촛불의 장난일 테지만, 줄리에게는 사이몬이 웃음을 참느라고 입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무래도 좋아. 줄리는 어느 편이지?”
“나는 언제나 왼쪽으로 돌아누워서 자요.” 그녀는 되도록 끝 쪽에 누워 팔을 베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 줄리.”
사이몬은 잠시 동안 지하실을 걸어 다니면서 벽을 두드려 보는 등 그 구조를 살피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촛불이 꺼지고 그는 줄리 옆에 누웠다. 그러나 등을 마주 댄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줄리, 예의도 중요하지만 이럴 때는 상식을 따르는 것이 좋아. 추운 밤이고 담요도 없으니까 서로 몸을 대고 체온을 나누는 것이 좋겠어.”
사이몬은 오른팔을 뻗어 줄리를 코트 중앙으로 끌어당겼다. 줄리는 자기의 등에 그의 가슴이, 다리에는 그의 긴 다리가 닿는 것을 느꼈다.
그때까지 줄리는 추위와 공포와 걱정으로 인내의 한계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오직 사이몬에 대해 감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절박한 상태가 지나가 버린 지금에 와서는, 불과 5일 전에 만난 사나이의 품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분명히 껴안고 자는 것이 상식이겠으나, 오히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줄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긴장하지 않고 보통으로 숨을 쉬어 가슴의 고동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헛되이, 사이모의 조롱하는 듯한 마리 들렸다.
“제발 몸을 편히 해요. 나는 어젯밤에 네 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어. 그런데다가 오늘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폭풍우와 싸웠지. 제대로 음식을 먹은 것도 바베이도즈에서 서둘러 먹은 조반이 마지막이어서 배고파 죽을 지경이야. 더구나 잠자리도 딱딱해. 그러니 줄리도 다른 생각 말고 어서 자도록 해. 내게 있어서 줄리는 따뜻한 난로에 지나지 않아. 숫자라도 세면서 어서 잠을 이루도록 해.”
이튿날 아침 사이몬이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뜬 그녀는 잠결에 이상하다는 듯이 사이몬을 쳐다보았다. 마침내 어제의 일이 생각난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온 몸의 근육이 굳어져 있는데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홍차를 마시면 기분이 가라앉을 거야.” 그는 마루에 앉아, 어디서 가져왔는지 보온병의 뚜껑을 열었다.
줄리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고 눈을 비볐다. 왼쪽 허리가 챈 듯이 쑤시고 목이 아팠다.
사이몬이 플라스틱 컵에 뜨거운 홍차를 가득 따라 건네 주었다. 줄 리가 한 모금 마시고 가늘게 숨을 내쉬었을 때 사이몬이 입을 열었다.
“좋은 소식이야. 시페어알라 호는 거의 완전한 상태로 있어. 30분이면 솔리테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줄리의 눈이 빛났다.
“어마, 사이몬, 다행이군요!”
사이몬은 자신의 홍차를 따르고 시가에 불을 붙였다. 어느새 수염을 깎고 깨끗한 셔츠와 쇼트 팬츠로 갈아입고 있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줄리의 배는 산산조각이 나서 파편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야.”
“어머나……하지만 어쩔 수 없죠. 허리케인을 당해낼 수는 없었을 거예요, 더구나 낡은 배로서는. 그것이 시페어알라였다면 재산상 크게 손해를 봤을 거예요. 나 때문에 그 배가 부서졌다면 큰일날 뻔했어요. 어쨌든 믿을 수 없을 만큼 튼튼한 배로군요.”
“그 배도 위험할 뻔했지, 밧줄이 하나만 남고 모두 끊어졌으니까.”
“사이몬, 나는 당신이 와주신 데 대해 아직 인사도 못 했군요. 와주시지 않았다면 도저히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예요.”
“아니, 줄리라면 능히 해냈을 거야. 고생스러웠을 테지만 위기만은 모면했을 거야. 자아, 그럼 가볼까.”
줄리는 어쩐지 사이몬의 말에 가시가 돋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입구의 계단은 나뭇가지가 겹쳐 미로와도 비슷했다. 그곳을 기듯이 하며 위로 올라오자 눈앞에 태풍이 휩쓸고 간 참상이 드러났다. 마치 거대한 불도우저가 미친 듯이 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맑게 갠 하늘에는 태양이 떠오르고 호우가 남긴 웅덩이에서는 수증기가 오르고 있었다. 폐허의 벽은 산산이 부서져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이몬의 부축을 받아 겨우 북쪽 해안에 도착하여 조용한 후미에 정박해 있는 시페어알라 호를 보자, 줄리는 약간 원기가 났다. 후미의 해면도 어제는 사파이어빛 하늘을 비치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검게 흐려 있고 많은 나뭇잎이 떠 있었다.
줄 리가 크루즈에 오르자 사이몬은 헐렁한 그녀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밑에 내려가면 우현 침대 밑에 로커가 있는데, 그 속에 깨끗한 옷이 들어 있어.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갈아 입도록 해. 그러고 서둘러 먹을 것을 만들어 주지 않겠나. 나는 베이컨 샌드위치로 하겠어. 조리실에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어.”
선실에는 침대가 네 개 있고, 창의 커튼과 같은 산호 빛 커버가 씌워져 있었다. 각각의 침대에는 독서용 램프와 서랍식 재떨이가 있고, 책 등의 얹을 수 있는 유리 선반에 딸려 있었다.
줄리는 감색 스포츠 셔츠와 흰 무명 쇼트 팬츠를 입었는데, 팬츠는 너무 커서, 사이몬에게서 받은 아마 끈으로 허리를 꼭 묶었다.
뱃머리 쪽의 문을 여니 좁으면서도 사치스럽게 꾸민 욕실이 있었는데, 샤워와 세면대도 갖추어져 있었다. 고물 쪽은 거실이었고, 검은 테이블과 긴의자가 두 개 있었다. 조리실은 흔들림이 가장 적은 배의 중앙에 있는데 냉장고와 개수대, 조리대, 가스 테이블이 완비되어 잇고, 바다가 거칠 때도 식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꾸며져 있었다.
줄 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호화로운 배였다. 이런 배를 타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면 얼마나 즐거울까, 하고 줄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의 엔진이 시동될 무렵, 줄리는 샌드위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배는 무사히 암초를 통과하고 일로 솔리테일을 향해 달렸다.
줄리가 조타실로 식사 쟁반을 가져가자 사이몬이 “빗을 쓰겠나?” 하면서 주머니에서 빗을 꺼내 줄리에게 주었다.
“고마와요.” 그녀는 다시 욕실로 내려가 헝클어진 머리를 빗었다. 고무 배드는 없어진 지 오래였으므로 머리를 얼굴의 양쪽으로 늘어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줄리는 다시 돌아와 빗을 그에게 돌려주고 그 옆에 서서 맛있게 샌드위치를 먹었다.
“음……솔리테일도 심한 피해를 입은 모양이군. 하지만 방갈로는 아직 남아 있어.”
배는 섬에 가까워 가고 있었다.
시페어알라 호가 후미로 미끄러져 들어가자, 루 아줌마와 하큐르, 그리고 아이들이 모두 선창에 나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루 아줌마는 감격한 나머지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 거대한 가슴에 줄리를 꼭 끌어안았다.
“아아, 아가씨,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어요.” 루 아줌마가 목멘 소리로 말했다.
몸을 떼었을 때 줄리의 얼굴도 눈물에 젖어 있었다. 이번에는 곰과도 같은 하큐르의 포옹을 받고, 다음에는 다섯 아이로부터 각각 열렬한 키스와 포옹을 받았다.
“당신은 용감한 사나이요, 선장.” 하큐르가 사이몬과 굳은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폭풍이 이는 그 섬에서 아가씨를 구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요, 선장.” 하큐르가 <선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최대의 존칭인 것이다.
다음에는 루 아줌마가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사이몬의 용기를 칭찬하고, 조나단 템플 씨는 평생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일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우리는 주인님께 평생 머리를 들지 못할 뻔했어요.” 루 아줌마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사이몬은 이들 가족의 열렬한 환영에 당황한 듯 아줌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게 울면 못써요, 아주머니. 줄 리가 무사했으니 모든 것은 끝났어요. 자아, 이곳 피해 상황이나 살펴보기로 합시다.”
솔리테일 섬은 우라간처럼 치명적인 타격은 받지 않았으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바다에서는 무사한 듯해 보였던 방갈로도 지붕의 일부가 날아갔고 줄리의 침실은 천장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아틀리에에도 구멍이 났고 캔버스와 그림 도구들이 마루에 흩어져 있었다. 부부의 침실은 문짝과 블라인드가 없어졌고, 지젤라의 옷장이 쓰러져 있었다.
뒤쪽의 주방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루 아줌마네 오두막은 붕괴되어 있었다. 줄리는 그 참상에 입도 열지 못했다.
“염려할 것 없어요, 아가씨, 하큐르가 곧 새 집을 세울 테니까요. 그보다 먼저 아가씨네 방갈로를 고쳐야 하겠어요.”
두 사람 뒤에서 하큐르와 상의하고 있던 사이몬이 입을 열었다.
“제일 먼저 할 일은 뉴욕에 계신 아버지한테 전원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이지. 내 배에도 무선기가 있지만 지금 같아서는 제대로 연결되지 않을 테니 나중에 내가 세인트빈센트에 가서 전화하기로 하겠어.”
“그래요. 허리케인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여간 걱정하지 않으실 거예요. 하지만 급히 돌아오기 위해서 전람회를 중단하면 곤란해요. 어차피 아버지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걸요. 그럼 어서 정리를 시작하는 것이 좋겠어요. 사이몬, 당신은 바베이도즈로 돌아가는 도중에 세인트빈센트에 들러 주시겠죠? 신세를 져서 미안해요. 정말 감사해요.”
“그렇게 서두를 것은 없어. 이런 곳에 머무를 수는 없어. 살 수 있게 되려면 며칠 걸릴 거야. 그리고 작은 배까지도 없어졌으니까 완전히 고립되고 말아.”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줄리는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사이몬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줄리는 잊고 있는 모양인데, 아버지는 이 섬을 내게 팔지도 몰라.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돌로 집을 다시 짓겠어. 그러니 분명해질 때까지는 수리를 할 필요가 없어. 가장 좋은 방법은,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하큐르의 가족들을 베기아의 친척한테 맡기고, 줄리는 그래도 나와 같이 바베이도즈로 가는 거야. 이 생각을 하큐르에게 말했더니 그도 찬성하더군.” 줄리가 반대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사이몬은 이를 제지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버지도 줄 리가 이처럼 황폐한 곳에 홀로 있다는 것을 알면 크게 걱정하실 거야. 바베이도즈에 가서 우리 가족과 같이 있으면 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야. 또, 아버지가 급히 돌아오게 되는 경우에도 줄리는 공항까지 마중나갈 수도 있어. 그러니 그것이 아마 제일 현명한 방법일 거야.”
“하지만, 여기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아빠의 그림도 지젤라의 옷도……모든 것이 못쓰게 되고 말아요.”
“귀중품은 모두 가지고 가면 되지. 그 밖의 것은 도둑맞을 염려는 없어, 불과 며칠이면 끝나니까.”
줄리는 사이몬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하큐르가 이미 찬성했고 하니 거부할 수도 없었다.
잠시 생각한 후 줄리가 말했다.
“좋아요……그렇게 하겠어요. 그럼 빨리 아버지의 짐을 꾸리겠어요.”
열 시에 짐 꾸리기는 모두 끝났다. 루 아줌마는 재촉하는 아이들을 선실에 데려다 놓고 내렸다. 줄리는 갑판에 서서 솔리테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번 다시 솔리테일 섬을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줄리는 소름이 끼쳤다.
“줄리는 다시 돌아오게 될 거야.”
줄리가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사이몬이 뒤에 와 있었다. 그는 요트용 신발을 신었기 때문에 발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이몬은 두 손을 허리에 얹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줄리가 고개를 돌렸다. 사이몬이 눈물을 보지 못했으면 좋으련만…….
“아빠가 섬을 팔면 다시 올 수 없어요……. 나는밑에 내려가 루 아줌마를 돕겠어요.”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사이몬 앞을 지나가려 하자 그가 엄한 소리로 말했다.
“시간을 붙들어둘 수는 없어. 줄리도 이제 어른이 돼야 할 때야.” 줄리는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 사이몬과의 사이에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우라간 섬에서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지만, 근본적인 혐오감은 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페어알라 호가 세인트빈센트의 중심 도시인 킹스턴 앞바다에 정박했다. 허리케인은 북서쪽으로 우회했기 때문에 이 섬은 피해를 면했다.
사이몬은 혼자 상륙하여 뉴욕에 있는 템플 부부의 호텔에 무사함을 알리고 돌아오더니, 잠시 자겠다며 밑으로 내려갔다. 어두워지면 바베이도즈를 향해 출범할 예정이었다.
줄리는 계속 갑판에 앉아 있다가, 해가 질 무렵 사이몬이 샤워하는 소리를 듣고 식사 준비를 위해 조리실로 내려갔다.
사이몬이 조리실에 들어섰을 때는 소시지와 토마토, 계란이 큰 프라이팬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이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냉장고에서 캔 맥주와 주스를 꺼내 각각 컵에 따랐다.
“줄리는 가정적인 아가씨로군.” 사이몬이, 레인지에 올려놓은 프라이팬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계란 프라이 정도는 바보라도 만들 수 있어요. 루 아줌마가 가르쳐 주었어요. 자아, 이제 됐어요. 저기 가 계세요, 가지고 갈 테니까.”
식탁은 이미 준비되어 비스킷과 버터, 피클 등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선실에는 저녁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고, 창문이 모두 열려 시원한 바람에 커튼이 나부끼고 있었다. 밖에서는 희미하게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해변에서는 한 노동자가 부르는 흑인 영가가 흘러왔다. 하큐르가 그 멋진 바리톤으로 자주 부르던 노래였다.
지금 그 노래를 듣고 있으려니, 줄리는 솔리테일이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것 같아 가슴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줄리는 애써 무표정을 가장하며 소시지를 잘랐다.
느닷없이 사이몬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겠나? 어째서 카리브에 오게 되었지?”
줄리는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라도 하고 있으면 저 우아한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줄 리가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사이몬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분은 유명한 사람이야. 성공하게 된 이면에는 무척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네, 있어요……하지만 별로 행복스럽지는 못했어요. 아빠는 리버풀에서 태어났어요……빈민가에서.”
‘충격을 받았겠죠, 당신은? 당신은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명문 출신이니까요. 재산과 명예와 오만한 면까지 물려받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녀는 사이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사이몬은 전혀 안색을 바꾸지 않고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계속 저녁을 들고 있었다.
“30년대의 영국의 심한 불경기로 할아버지도 실업 상태여서 실업보험으로 일가족이 근근이 살아갈 정도였어요. 그때 전쟁이 일어나 일자리가 늘어나는 바람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생활이 어느 정도 편해졌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운좋게 장학금을 받아 미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어요. 원래부터 화가가 되려고 했었죠. 그리고 그때 어머니를 만났던 것 같아요.” 줄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커피 드시겠어요?”
“아니, 나중에 마시겠어. 이야기를 계속해 줘.” 이미 황혼이 깃들어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줄리는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의 친정은 유복한 중류 가정으로서, 딸이 가난한 화가 지망생과 결혼하는 것을 크게 반대했어요. 어머니 친정은 버밍검에서 백화점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 가업을 계승한다면 결혼에 찬성하겠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거절했어요. 아버지는 자기 재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결혼 후 1,2년 동안은 생활이 어렵겠지만 어머니가 참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어머니는 참을 수 없었던 거예요.”
사이몬이 이때 비로소 자기 의견을 말했다.
“줄리는 그 일로 어머니를 경멸하고 있나?”
“그럴 수밖에 없잖겠어요?” 줄리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무어라 말할 입장이 아니야. 다만,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자란 사람이 고달픈 생활을 시작하려면 상당히 강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고서는 어렵지. 아마 줄리의 어머니는 자신이 그처럼 강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이군.”
“네, 그래요, 그것은 잘 알아요. 하지만 아버지도 물론 평생 동안 어머니를 고생시킬 생각은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기한을 정했어요. 만일 5년이 지나도 성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어머니의 친정 회사에 들어가겠다고 말이에요. 어머니는 그것마저 거부했어요. 만일에 어머니가 진실로 아버지를 사랑했다면 그를 굳게 믿었을 것이 아니에요? 만일 내가…….” 줄리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을 후회했다.
“만일 줄 리가 사랑을 하게 된다면 남비 하나만 들고라도 따라가겠지?” 사이몬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줄리는 확 얼굴을 붉혔으나, 어둡기 때문에 사이몬이 눈치챌 염려가 없어 안심했다.
“글쎄요.” 하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으나, 이런 말이 나올 바에는 차라리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교통 사고로 그만 목숨을 잃었어요. 그래서 친할머니가 런던에서 와 가사를 돌보아주었어요. 그 할머니는 가난한 살림에 익숙해 있었죠. 그러나 내가 열 살 때 할머니도 돌아가셨어요. 그 무렵에는 아버지가 꽤 유명해졌는데, 원래 도시 생활을 몹시 싫어하던 아버지가 평화롭고 공기가 좋은 자기만의 장소를 찾아서 솔리테일로 이주하게 되었던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커피를 끓여 오겠어요.”
사이몬은 전등 스위치를 켜고, 평소의 버릇대로 손목을 흘끔 보았다. 원래 같으면 거기에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몇 시지?”
줄리는 시간을 말하고 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어마, 시계를 찾는다는 것을 잊었군요!” 그러나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솔리테일에는 있지 않아요. 당신이 아버지와 지젤라와 같이 출발할 때 손목에 차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사이몬은 남달리 오른손에 시계를 차고 있어서, 그때 헤어지면서 내민 그의 손목에 시계가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검장 문자반에 가죽 밴드가 카키색인 것까지 생각났다.
사이몬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집에 있는 모양이군. 줄리의 부모를 공항에서 전송한 뒤 바닷가의 파티에 갔었으니까, 혹시 거기에 풀어 놓았는지도 모르지.”
그 뒤 사이몬은 갑판에 올라가 출항 준비를 하고, 줄리는 조리실에서 커피를 끓였다. 퍼콜레이터의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도, 시계를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사이몬과 같이 돈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 아무리 고급 시계라 해도 그 정도를 가지고 160킬로 이상이나 떨어진 솔리테일에 다시 돌아오다니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솔리테일에 놓아두었다는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마 그 시계는 돈으로 살 수 없는 특별한 추억이 깃들어 있는 것이겠지. 그렇더라도 어째서 솔리테일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일까 - 줄리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솔리테일에서 잃어버렸다면 출발 후 곧 깨달았을 것이다. 시계란 항상 보는 것인데, 바베이도즈에 갈 때까지 몰랐다니…….
줄 리가 조타실로 커피를 가져갔을 무렵, 시페어알라호는 이미 바다를 달리고 있었다.
“바베이도즈에는 언제쯤 도착할까요?”
“새벽 무렵이지. 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지만, 모두 잠들어 있으면 소용이 없거든. 줄리, 그만 자지 그래, 몹시 피곤해 보이는군.”
친절한 말투였으나, 줄리는 그의 속셈을 읽을 수 있었다. 사이몬은 혼자 있고 싶은 것이다. 그가 솔리테일 섬에 올 때는 이토록 귀찮은 일에 말려들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섬을 살 목적만 아니었다면 나와 상대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속으로 지겹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제발 걱정하지 마세요. 꼭 필요한 일 이외에는 결코 폐를 끼치지 않겠어요.’ 줄 리가 가지고 온 금고에는 아버지가 넣어둔 돈이 상당히 들어 있었다. 바베이도즈에 도착하면 곧 호텔에 들어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네, 그러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 사이몬은 줄리에게 눈도 주지 않았다. 조타실의 노란 불빛에 비친 사이몬의 얼굴은, 줄 리가 망원경으로 관찰했을 때와 같이 엄숙하고 굳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 전에 욕실에서 양치를 하고 있던 줄리는, 위쪽에 있는 캐비닛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제일 밑의 선반에는 사이몬의 세면도구가 들어 있었으나, 위쪽 선반에는 유명 메이커의 향수 등 여성용 화장품이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이것들은 누구의 것일까?
그때 비로소 줄리는 문 뒤에 여성용 핑크빛 바드로브가 걸려 있는 걸 보았다.
사이몬의 걸프렌드가 놓고 간 것일까, 아니면 언제든지 여자를 태울 수 있게 준비해 둔 것일까? 줄리는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줄리는 선실의 침대에 들어가 불을 껐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바다에 비친 달이 바라다보였다.
불과 24시간 전에 허리케인의 굉음을 들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침대 머리가 선수 쪽으로 향해 있어서, 왼편으로 돌아 눕자 멀리 항구가 보이고 파도가 물보라의 베일을 만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침대는 바람 아래쪽에 있었기 때문에 줄리에게 바닷물이 튀겨오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적당한 파도가 줄리를 다정하게 흔들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줄리는 어젯밤의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는 딱딱한 바위가 침대였고 억센 사나이의 팔이 허리를 감고 있었으며 뜨거운 입김이 목덜미를 간질이고 있었다. 사이몬은 숫자를 세라더니 몇 분 후에 잠들었고, 그의 팔이 줄리의 피곤한 허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얼마 후 작은 벌레가 줄리의 다리로 기어올라 그녀가 약간 몸으 움직이자, 사이몬은 무어라고 잠꼬대를 하더니 무의식중에 줄리의 몸에 기대어 왔었다.
‘여자를 팔에 안고 자는 데 익숙해 있는 사람 같아.’ 그녀는 이상하게도 마음의 아픔을 느꼈던 것이다.
줄리는 일어나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다음 다시 드러누웠다.
줄 리가 눈을 떴을 때 크루즈는 조용히 멎어 있었다. 바로 가까이에서 귀에 익지 않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커튼을 열었더니 눈부신 햇살이 스며들어, 줄리는 이마에 손을 얹고 시계를 보았다. 이미 아홉 시가 지나 있었다. 그녀는 시트를 젖히고 머리를 만지면서 허리를 굽혀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로 눈앞이 선창이었기 때문에 오가는 많은 사람들의 발들이 보였다. 번화한 거리의 모습으로 미루어 이곳이 바베이도즈의 중심지인 브리지타운임에 틀림없었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줄리는 얼른 침대를 정리했다.
“네,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내가 잠을 깨게 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군요. 나는 샤로트 티아난이에요.”
미소를 띠고 들어온 사람은 빨강머리의 여성으로, 날씬한 몸을 화려한 옷으로 단장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대답한 줄리는 문득 느껴지는 게 있었다. 이 여자는 사이몬과 전혀 닮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멋진 에메랄드 약혼반지와 플라티나 결혼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있었다.
줄리는 생각했다.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사이몬은 결혼한 사람이고 그에게는 부인이 있다는 것을.’
4
샤로트 티아난은 가지고 온 슈트케이스를 침대 옆에 놓았다.
“사이몬한테 들었는데, 허리케인으로 옷이 모두 못쓰게 되었다면서요? 이것은 내 것이지만, 클리닝이 될 때까지 입으라고 가져왔어요. 나와 비슷한 사이즈인 것 같으니 아마 맞을 거예요.”
줄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친절에 감사합니다, 티아난씨.”
“어마, 샬리라 불러 주지 않겠어요? 나는 딱딱한 것은 싫어요. 갈아입을 동안 아침 식사를 준비하겠어요. 하지만 서두를 것은 없으니 천천히 갈아입으세요.” 샤로트는 방에서 나갔다가 금방 돌아왔다. “사이몬의 부탁을 잊고 있었어요. 당신의 패스포트 등 서류는 당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 가지고 나갔다고 했어요. 통관 절차는 그가 밟겠다고 하더군요. 지금 그는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지만, 점심때는 우리를 데리러 올 예정이에요.”
줄 리가 욕실에서 몸단장을 끝냈을 무렵에는, 베이컨을 굽는 맛있는 냄새가 풍기고 샤로트의 콧노래도 들렸다.
‘오랜만에 사이몬을 만나서 아주 기쁜 모양이야.’ 하고 줄리는 멍하니 생각했다.
슈트케이스 속에는 원피스 두 벌과 슬립 외에 세 속옷이 포장한 채 들어 있었고, 굽이 낮은 샌들과 흰 핸드백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줄리는 금빛 벨트가 달린 흰 노우슬리브 원피스를 입었다.
줄리가 조리실에 들어서자 샤로트는 그녀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얼굴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마치 쌍둥이 같군요. 그 옷도 잘 맞고 샌들까지 어울리는군요. 그런데 피부가 곱게 탔군요.”
줄리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되도록 빨리 새것으로 돌려드리겠어요. 속옷은 일부러 사셨나요?”
“있던 물건이에요. 나는 한꺼번에 사놓고 쓰는 걸 좋아해서 많이 가지고 있죠. 결혼하기 전에는 유행에 뚝 떨어진 옷만 잔뜩 가지고 있었어요. 속옷은 남한테 보이는 것이 아니니, 새것을 사면 낭비가 아니겠어요. 사고를 당하면 곤란하지만 말이에요. 그러나 지금은 달라요. 황홀한 네글리제를 보면 있는 돈을 다 털어 넣거든요. 자기 나라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아마 사정이 달랐을 거예요. 잠자리에서 양말을 신으면 절말 꼴불견이잖아요? 일반적으로 영국인의 침실은 북극의 그것과 같으니까요.”
“자기 나라라고요? 바베이도즈 태생이 아닌가요?” 줄리가 물었다.
“네, 당신과 같은 영국인이에요.”
“결혼한 지 얼마나 됐나요, 티아난씨?”
“2년 됐어요……정말이지 샬리라 불러 주세요. 나도 당신을 템플씨로 부르지 않겠어요. 사이몬과 당신이 계속 같이 있었다니 남같이 생각되지 않거든요.”
거실용 선실로 아침 식사를 가지고 가는 샤로트의 뒤를 따르면서 줄리는 생각했다. ‘사이몬이 나를 팔에 안고 잤다는 것을 알며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내가 그녀라면 어떤 생각이 들까?’
테이블에 앉자 샤로트가 말했다.
“당신에 대해서는, 사이몬이 당신의 부모님을 이리 모시고 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허리케인 이야기만은 오늘 들었지만. 정말 놀랐을 거예요! 사이몬이 솔리테일 섬으로 간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었어요.” 줄 가 커피를 따랐다. “부모님은 비행기 시간이 촉박해서 식사도 같이 못하셨어요. 하지만 돌아오실 때는 하룻밤쯤 묵어가시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우리 시어머니는 그림에 조예가 깊어서, 당신 아버님을 만날 날을 고대하고 계세요. 그런데 당ㅎ신은 우리 집 별채를 사용하게 되겠지만, 놀랄 거예요, 엄청난 대가족이거든요. 당신이 압도당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고 사이몬이 염려하더군요. 가족이 열 한 명이나 되거든요. 대단하죠?”
“그렇군요. 하지만 굳이 신세를 지지는 않겠어요. 호텔이 들 생각이에요.”
“당치도 않아요. 안 돼요, 사이몬이 승낙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모든 준비를 다 했어요. 그 사람은 일단 결정한 일을 절대 바꾸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잖아요?” 샤로트는 진심으로 기쁜 듯이 말했다. “지독한 고집쟁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런 타입이 좋아요……우유부단한 것은 참을 수 없어요.”
줄리는 호텔에 들겠다고 고집했으나 결국은 양보하고 말았다. 아침 식사가 끝날 무렵 샤로트가 말했다.
“그런데, 당신이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지 나는 알고 있어요. 사실은, 절대로 확신이 있기 때문에 내 단골집에 예약을 해 두었어요. 그 아저씨는 제멋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부탁대로 해주는 사람이고 솜씨도 좋아요.”
줄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물어 볼 틈도 없이 배에서 내려 택시에 태워졌다.
샤로트가 말한 아저씨란, 키가 작고 뚱뚱한 프랑스인 미용사였다. 샤로트는 그에게 줄리를 부탁하고, 한 시간 정도 쇼핑을 하고 오겠다며 나가 버렸다.
줄리는, 처음엔 몹시 불안했으나 이윽고 변신의 의식에 녹아들었다. 겨우 그 의식에서 해방되었을 때, 사이몬이 결혼한 사실을 안 순간의 충격이 되살아났다. 더구나 사이몬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깨달았을 때, 주리는 더한층 심한 충격을 받았다.
샤로트가 돌아왔을 때 줄리는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평범한 느낌의 쇼트 커트였으나,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미용사의 끈질긴 권유로 네일 에나멜과 약간 짙은 입술연지도 바르고 있었다.
“어마, 놀라와요! 보석도 갈아야 빛이 난다는 말이 있지만, 그 사람들이 틀림없이 열을 올릴 거예요.”
“그 사람들이라뇨?”
“티아난네 아들들 말이에요. 점심때 만날 거예요. 자아, 코럴룸에 가서 사이몬을 기다리기로 해요.”
코럴룸이란 아늑한 칵테일 바였다.
“티아난네 일족을 만나기 전에 힘을 얻기 위해 한잔 마셔야 해요. 어마, 그렇게 걱정스런 표정은 짓지 마세요. 농담, 농담이에요. 모두 좋은 사람들이죠. 다만 사람이 많으니까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할 거예요.”
줄리는 샤로트가 가족들에 대해 설명하는 말을 들으면서, 사이몬이 그녀를 아내로 택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전혀 나무랄 데가 없는 미인이었다. 상냥스런 접대도 극히 자연스러워 꾸밈이 없고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바에 온 지 10분쯤 지났을 때 사이몬이 나타났다. 줄리는 그만 침을 삼켰다. 그는 엷은 슈트로 갈아입고 있었다. 연한 회색 슈트와 눈처럼 흰 와이셔츠에 짙은 올리브색 실크 넥타이 차림. 이러한 사이몬을 본 줄리는 너무나 멋지다고 생각했다. 멋지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사이몬이 샤로트의 남편이라는 것을 생각하고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떨구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샬리. 그리고 줄리를 돌봐줘서 고마워.”
“나도 즐거웠어요.” 사이몬이 샤로트 옆에 앉자, 그녀는 뺨을 내밀어 그의 키스를 받았다.
사이몬이 줄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외모가 변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는 거기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줄리 아버님께 전화를 걸었어. 세 시에 이쪽으로 전화하시기로 했으니까, 줄 리가 직접 받고 이야기하도록 해요. 빨리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지.” 사이몬은 음료수 석 잔을 새로 주문했다.
콤팩트를 들여다보고 있던 샤로트가 말했다.
“잠깐 실례하겠어요, 화장을 고치고 싶어요.”
사이몬은 일어서서 길을 비켜 준 다음 다시 앉으며 시가를 피워 물었다.
“샬리의 옷이 줄리에게도 잘 어울리는군.”
줄리는 테이블에 있는 올리브 접시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 부인이 옷을 빌려 주어서 정말 도움이 됐어요. 하지만 호텔에 묵게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폐를 끼치기는 싫어요.”
사이몬은 잠시 가만히 있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샬리는 줄리와 같이 있는 걸 기뻐할 거야. 서로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틀림없이 뜻이 맞을걸.”
빈틈없는 샤로트와 자기가 어느 면에서 비슷한지 줄리로서는 알 수 없었다. 줄리는 적당한 화제가 떠오르지 않아 묵묵히 앉아 있었다.
샤로트가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의외로 늦다고 생각되었다. 바에 손님이 계속해서 들어왔으며, 그 대부분이 사이몬에게 인사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호기심에 찬 시선을 줄리에게 보냈으나, 두 사람이 있는 좌석에 가까이 오는 손님은 없었다.
“바베이도즈는 작은 섬이어서 대개 서로 알고 지내지. 낯선 사람을 보면 모두 호기심을 느끼지만, 신경 쓸 것은 없어, 누구에게나 그러니까.”
“그래요? 짐작은 가요.” 줄 리가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윽고 샤로트가 자리로 돌아왔다.
“화장실에서 매기 브렌트를 만났어요. 그녀도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는군요. 같이 아기의 옷을 뜰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러고는 줄리에게 이야기했다. “나도 아기를 갖게 되었어요.”
“어마, 그러세요? 반가와요. 축하해요.” 줄리는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사이몬은 혼자 시페어알라 호를 탔던 것이다. 의사가 샤로트를 만류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아니야.” 하고 사이몬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줄리도 샤로트도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샬리는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줄리에게 이야기한 모양이지? 줄리는 우리를 부부로 알고 있어.” 사이몬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뭐라고요!” 샤로트는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지요?” 샤로트는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묻고, 그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사이몬이 독신이란 말을 안 하던가요? 정말 능청스럽군요! 사이몬보다 내 남편이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에요.” 샤로트가 사이몬을 조롱하듯 흘끗 바라보았다. “내 남편은 로브, 이 사람의 동생이죠. 이따가 점심때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로브는 가족 중에서 제일 핸섬해요, 머리가 영리한 건 사이몬이지만.”
안도……기쁨……희망……그 희망이 점점 부풀어 올라, 줄리의 마음은 큰 파도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 온몸의 힘이 빠지고 손이 떨려, 글라스의 얼음이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글라스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술을 남겨도 될까요? 럼주는 마셔 보지 않아서 곧 취할 것 같아요.” 줄리의 목소리는 다시 침착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갈 시간이야. 그러 나가 볼까?”
사이몬의 차는 은빛 쿠페였다. 그는 줄리를 조수석에, 샤로트를 뒷좌석에 앉혔다.
바베이도즈의 내륙은 완만한 기복을 이루어, 황량한 그레나딘 군도나 산지가 많은 세인트빈센트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사탕수수 농장 사이로 보이는, 생울타리로 둘러싸인 과수원과 밭, 작은 교회 등은, 줄리로 하여금 옛날에 휴가를 보냈던 영국의 전원 풍경을 연상케 했다.
커브진 해안 거리에 이르자 멋진 경치가 전개되었다. 거대한 단애와 절벽으로 감싸인 항마에는 거친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부딪치고 있었다.
사이몬은 스피드를 내어 교묘하게 운전했으나, 그래도 브리지타운에서 나와 45분이나 지난 뒤에야 겨우 아치형의 넓은 문으로 들어섰다. 거기서부터는 양쪽에 나무가 심어진 아름다운 차도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경치에 대한 설명을 샤로트에게 맡기고 있던 사이몬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점심시간에 늦으면 안 되니까, 줄 리가 묵을 곳은 나중에 안내하겠어. 우리 부지의 끝 쪽이지. 시끄러운 우리 가족들 때문에 방해받으면 안 될 듯싶어서 그리로 정했어.”
저택이 눈에 들어온 순간 줄리는 탄성을 울렸다.
“훌륭하죠?” 샤로트가 말했다.
훌륭한 정도가 아니라, 줄리로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저택은 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조지 왕조풍의 장려한 대저택으로, 앞으로 튀어나온 포치에는 멋진 백주석(白柱石)이 서 있었고, 주위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차가 현관에 가까이 가자 아이들과 개가 일제히 달려 나왔다.
“사이몬, 제 드릴이 망가졌어요, 보아 줄래요? 샘 아저씨는 고치지 못하겠대요.”
“샬리, 제가 부탁한 접착제는 사왔나요?”
아이들은 저마다 질문을 퍼붓고, 개는 꼬리를 흔들며 짖어대고 있었다.
사이몬은 아이들과 개를 진정시키고는, 차에서 내려 줄리 쪽의 문을 열어 주었다.
“이 꼬마들은 나중에 소개할 테니, 먼저 어머니를 만나 뵙도록 해요.” 그는 줄리의 팔을 잡고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넓은 홀을 내려다보는 커브진 층계에서, 날씬하고 흰머리가 약간 섞인, 50세쯤 되어 보이는 부인이 친근감이 깃들인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내려왔다.
사이몬이 소개하기도 전에 그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엇다.
“나는 앤 티아닌이에요. 줄리, 로즈홀에 와줘서 고마워요. 아가씨 이야기는 사이몬한테 자세히 들었죠. 여기에 와주어서 정말 반가와요.” 그녀는 줄리의 두 어깨에 손을 얹고 뺨에 키스했다. “곧 점심을 준비하도록 하겠어요. 무척 배가 고플 거예요.”
점심 식사는 바베이도즈인 집사가 마련한 것이었다. 식당은 통풍이 잘 되었고, 큰 창을 통해서 푸른 잔디밭이 내다보였다.
줄리는 티아난 부인 옆자리에 앉고, 사이몬은 기 테이블 건너편 끝에 자리 잡았다. 테이블 중앙의 꽃병이나 식기류는 모두 오래 된 것이었다. 아이들은 입었던 옷 그대로였으나 매너는 아주 좋았다.
티아난 부인은 끝까지 즐거운 듯이 이야기했다. 식사가 끝나자 사이몬이 곧, 별채를 안내하겠다며 줄리를 데리고 나갔다.
“우리 식구들을 어떻게 생각하지?” 숲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면서 사이몬이 물었다. 머리 위에는 멋진 마호가니 나무들이 아치를 이루고, 뒤에서는 레브라도종 강아지 두 마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대가족 생활은 즐거운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신에게 그토록 많은 동생들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러면 어떻게 생각했지?”
“별로 깊이 생각했던 것은 아니에요. 다만 대가족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뿐이에요.” 줄 리가 말끝을 흐렸다.
“줄리는 샬리가 내 아내인 줄 알고 적지않이 동요하던 모양인데.” 사이몬은 유쾌한 모양이었다.
“동요했다고요?”
“침착성을 잃고……허둥대고 있었어.”
“어째서 내가 동요해야 하죠? 분명히 놀랐던 것은 사실이에요, 당신이 독신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동요하진 않았으니,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나는 줄리를 잘 알고 있어.” 갈림길에 이르러 사이몬이 멈춰섰다. 줄리도, 별채로 가는 길을 모르므로 역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에 대해 알고 있다니……무슨 뜻이죠?” 줄리는 화단의 꽃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이몬이 침착한 어조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줄리는 이상주의자야. 바로 어제, 사랑을 위해서라면 남비 하나만 들고라도 따라가겠다고 했잖아. 그런 사고방식에 의하면, 기혼 남성은 아내 이외의 여성의 손을 잡을 권리는 없다는 것이 되지 않겠어……어떤 비상사태에서도 말이야. 그러므로 우라간 섬에서 방수 코트에 둘이 같이 누웠던 것만으로도 줄리는 양심의 가책을 민감하게 느낄 테지……그렇지?”
줄리는 얼굴이 붉어졌으므로 계속 외면하고 있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어요. 낡은 사고방식이라 생각할 테죠?”
“아니, 정직하게 말해서, 그런 결백성은 오히려 신선한 것이라고 생각해. 자아, 이쪽으로…….” 사이몬은 줄리의 팔을 잡고 왼쪽 사잇길로 걷기 시작했다. “샬리가 내 아내가 아니란 것을 알고 줄리의 마음이 가벼워진 것도 사실이겠지?”
줄리는 경계의 빛을 띤 눈으로 사이몬을 흘끗 쳐다보았다. 또 하나의 이유도 깨닫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사이몬은 조롱하는 눈길을 보내는 일 없이, 숲으로 모습을 감춘 강아지들을 휘파람으로 불렀다.
“저것이 별채지. 화장실과 세면실은 있지만, 욕실을 쓰려면 저택까지 내려가야 해.”
별채는 석조 건물로서 지붕은 야자나무 잎으로 아름답게 덮여 있었다. 안에는 침실, 거실, 세면장, 그리고 작은 광이 있었다. 카핏과 커튼이 아름답게 배색되오 거실에는 두 군데에 화분이 놓여 있었으며 책장에 책과 잡지도 많이 꽂혀 있었다.
사이몬이 찬장 문을 열고 소형 알콜 풍로를 보여 주었다. 그것만 가지면 아무 때나 차를 끓일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다 준비해 놓았겠지만, 그 밖에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줘.”
“감사합니다. 별채가 아담하고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줄리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줄리는 사이몬이 곧 나가리라 생각했으나, 그는 유유히 의자에 앉았다.
“줄리의 짐은 나중에 도착할 거야. 지젤라의 옷은 하녀가 손질해 줄 것이고. 그런데 돈은 가지고 있나? 없다면 줄리의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내가 빌려 줄 수 있어.”
“충분히 가지고 있어요. 정말 고마워요. 내일은 브리지타운에 가서 옷을 한두 벌 살 생각이에요.”
“샬리가 차로 좋은 가게를 안내할 거야. 그녀와 같이 가는 것이 좋을 거야,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으니까.”
‘나 혼자 가면 유치한 것을 사게 될 것이라는 말이로군.’ 줄리는 기분이 언짢았다.
“지금 몇 시지?”
“세 시 5분 전이에요.”
“침실에 내선 전화가 있으니까, 아버지 전화는 여기서 받아도 돼. 그런 뒤에 두어 시간 정도 자도록 하지. 무리를 하면 안 돼.”
그의 명령적인 말투에 줄리는 그만 발끈했다.
“나는 솔리테일에서는 아무 일도 않고 그저 누워 있어 본 적은 없어요.”
아무리 사이몬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고 해도 지시대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사이몬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그곳은 줄리의 집이야. 여기서는 모를 것들뿐이니까 처음에는 긴장하는 것이 당연하지. 그런 머리 모양과 복장을 하고 있으면 바베이도즈의 여자와 다름없지만 그것은 겉보기뿐이거든.”
줄리는 분개했다.
“그렇다면 내가 아주 변변치 못하다는 말이 아닌가요? 나는 솔리테일 태생이 아니에요. 자금까지 반 이상은 영국에서 살았어요. 보통 여자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요.”
“그럴까? 춤을 춘 일도 없고 데이트를 한 일도 없다……아버지를 빼고는 남자와 키스한 일도 없다, 그것이 19세기 여자로서 보통이라고 생각하나? 줄리를 변변치 못한 여자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보기 드문 타입인 것만은 확실해.”
줄리는 햇볕에 탄 얼굴을 붉혔다. 놀리듯이 바라보는 사이몬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이때 침실에서 전화의 벨이 울렸다. 줄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침실로 달려가려 했다.
사이몬의 곁을 지나가려 했을 때, 그는 줄리의 손목을 쥐고 일어서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줄리는 분명히 내 품속에서 하룻밤을 지냈지만, 그것으로 보통 여자처럼 된 것은 아니야, 아가씨. 줄리는 아직 철모르는 처녀야.”
줄리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침실로 뛰어갔다.
네 시가 되자, 막내인 12세의 도미니크가 별채에 와서, 차 마실 시간이라고 줄리에게 알렸다.
“멋지군, 무인도에 살고 있다니. 하지만 누나는 제인과 전혀 닮지 않았어. 에마나 샬리와 비슷해 보여.”
“제인이라니, 누구지?” 줄리가 물었다.
“그야……타잔의 부인이지. 타잔의 책을 읽어 보지 않았어?”
줄리가 고개를 가로젓자, 도미니크는 그 이야기의 줄거리를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방갈로에 살면서 여기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것을 먹고 있고, 서인도 제도 출신의 가족과 같이 살고 있어.”
도미니크는 실망한 듯한 표정이었다.
“상어나 곰치를 기르는 법도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사이몬이 돌아왔을 때, 누나는 아라와크족처럼 원시적이라고 했어.”
“정말 그런 말을 했니?” 줄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라와크족이란 서인도 제도의 원주민으로서, 카리브의 잔인한 식인종에게 대학살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1세기 남짓한 동안에 스페인의 정복자에 의해, 2백만이나 되던 아라와크족은 전멸되었던 것이다.
영국식인 오후의 차 시간은 그늘진 서쪽 테라스에서 갖게 되었다. 티아난 부인과 샤로트, 그리고 밑으로 세 동생이 동석했다.
“줄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타입이라고 말해 주고 왔어요.” 자리에 앉기가 바쁘게 도미니크가 어머니한테 말했다.
모두들 깜짝 놀라 표정이 흐려졌다. 부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래? 나는 생각하던 그대론데. 도미니크, 손이 새까맣구나, 어서 씻고 와. 이젠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나이가 아니냐.”
“깨끗한 흙밖에 묻지 않았어요, 엄마.” 도미니크는 말대꾸를 하고 줄리에게 얼굴을 돌렸다. “나는 누나를 말이지, 나이프나 포크도 쓸 줄 모르고 무슨 뜻인지도 모를 말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 도미니크는 마치 불만인 듯이 설명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그 더러운 손이나 씻고 와.” 형인 니니언이 명령하듯 말했다.
줄리는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으나 겨우 유머러스하게 대답했다.
“나에 대해서 사이몬이 그런 말을 했는데도, 그러한 나를 초대해 주신 여러분은 무척 마음이 너그러우신 분들이군요.”
“어마, 당치도 않아요.” 하고 부인이 말했다. “사이몬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요. 아이들이란 정말 꼬리를 달려 해서 곤란할 때가 많아요. 특히 도미니크는 기상천회한 말을 잘 한답니다. 사이몬은 다만, 아가씨가 아버님과 함께 8년이나 솔리테일에 살았고, 물고기처럼 헤엄을 잘 친다고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아버님께 여기서 하루쯤 지내시라고 말씀드릴 수 없을까요? 나는 꼭 뵙고 싶어요.”
“아버지도 틀림없이 기뻐하실 거예요.” 줄리는 웃는낯으로 대답했으나, 단지 부인이 표현을 부드럽게 했을 뿐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아무리 도미니크가 지나친 표현은 했다고 해도.
차를 마신 후, 샤로트가 저택 남쪽에 있는 자기 부부의 집으로 줄리를 안내했다.
“앤은 훌륭한 시어머니예요. 우리가 특별히 정하지 않는 한 이곳엔 결코 발을 들여놓지 않아요. 보통 점심은 같이 먹지만, 아침과 저녁은 내가 여기서 직접 짓죠. 그러니 부부가 완전히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어요. 목욕하겠어요? 천천히 몸을 풀고 화장을 고치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목욕중인 줄리에게 샤로트가 가족에 대해 설명을 했다. 그녀의 남편인 로브는 사이몬의 농장과 설탕공장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제임즈와 조는 26세 된 쌍둥이로서 형은 요트의 설계사, 동생은 건축회사의 평사원이라고 했다. 24세인 에마는 뉴욕에서 비서일을 하고 있는데, 현재는 휴가를 얻어서 고향에 돌아와 있는 중이라고 했다.
“깨끗한 물로 목욕을 하면 이렇게 기분좋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끈적끈적한 느낌이 전혀 없군요.” 줄 리가 욕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나도 목욕을 할 테니까 잠시 뜰에 나가 산책이라도 하고 오세요. 저녁 식사 시간은 아직 한 시간쯤 남았어요.”
줄리는 뜰을 산책하다가 낡은 풍차가 있는 곳까지 왔다. 샤로트의 설명에 따르면, 옛날에는 사탕수술ㄹ 빻는데 풍차를 사용했다고 한다. 줄 리가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다보니 쌍둥이 중의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여어, 뜰을 구경하고 있나요? 식사 전에 크리켓이라도 하지 않겠어요?”
“나는 할 줄 몰라요.” 부끄러운 듯 줄 리가 말했다.
“간단하죠, 공을 때려 위켓 안으로 넣기만 하면 되니까. 내가 가르쳐 주죠. 자아, 어서.”
그에게 팔을 붙들려 긴 사잇길을 빠져나가자 크리켓의 위켓을 세워 놓은 넓은 잔디밭이 나왔다.
“당신은 제임즌가요, 아니면 조인가요?”
“나는 제임즈죠……이것이 표적이에요.” 제임즈는 왼쪽 뺨의 작은 흉터를 가리켰으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작은 흉터였다. “어렸을 때 자전거를 타다 다쳤죠. 우리를 구별할 수 있는 건 이것 뿐이죠. 조도 좋은 녀석이지만 나보다 매력은 없어요."
줄리는 소리내어 웃었다. 제임즈가 크리켓 도구를 가지러 바삐 달려가는 것을 보면서 줄리의 마음은 이미 누그러져 있었다.
“정식으로 하자면 상당히 복잡하지만, 지금은 그저 공을 치는 것만으로 합시다.” 돌아온 제임즈가 말했다. “그런데 줄리란 무슨 애칭이죠? 줄리아나, 줄리아, 줄리엣……아니면 원래 줄린가요?”
“원래 줄리예요.”
줄리가 크리켓 배트를 잡으려고 손을 내밀자, 제임즈가 그 손목을 꼭 쥐었다.
“제임즈와 줄리……어울린다고 생각지 않아요? 마치 베이컨과 에그, 달님과 6월처럼…….”
줄리는 손목을 잡힌 채로 웃음을 띠고 눈을 빛냈다.
“내가 은둔생활을 했다는 말을 형님한테 못 들었나요? 어쩌면 이런 것은, 속된 말로 표현해서 불장난이 아닐까요?”
“싫지는 않죠?” 그가 윙크해 보였다.
줄 리가 손을 뿌리쳤다.
“크리켓을 가르쳐 준다고 하지 않았나요, 제임즈?”
“참, 그랬었군.” 제임즈는 줄리에게 배트를 하나 건네 주고, 스포츠 백에서 무거워 보이는 공을 몇 개 꺼냈다.
“자아, 저 위켓을 통과하도록 공을 쳐 봐요.”
줄리가 친 공은 위켓에서 30센티나 빗나가 굴러갔다. 그녀는 공을 주우러 달려갔다. 제임즈는 매력적인데다 농담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이몬처럼 줄리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지는 않았다.
“너무 강하게 쳐서 그래요. 자아, 이렇게 하는 거예요.” 제임즈가 친 공은 멋지게 위켓을 통과했다. 그는 배트를 내던지며 말했다. “자아, 가르쳐 주죠. 다리를 약간 벌리고 배트를 꼭 잡아요. 위켓에서 눈을 떼면 안 돼요. 이런 식으로…….”
그는 줄리의 뒤에 꼭 붙어 서서 안 듯이 하고 두 팔을 돌려 그녀의 손에 자기 손을 겹쳤다.
“머리 냄새가 참 좋군요.” 그가 속삭였다.
줄리가 킬킬 웃었다. 그러나 두 사람 등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그녀는 숨을 죽였다.
“무척 낡은 수법이로군, 제임즈.” 두 사람이 돌아보자 사이몬이 바라보고 있었다.
“여어, 형. 손님에게 크리켓을 가르쳐 주는 중이었어.” 제임즈는 갑작스런 형의 등장에도 당황하지 않고 명랑하게 말했다.
“당신을 찾아 나선 길이야, 줄리. 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고 어머니가 걱정하시기에 내가 나왔지. 곧 저녁 식사 시간이야.”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은, 셋이 걷기에는 너무 좁았다. 사이몬이 혼자 뒤로 쳐졌다. 줄리는 등뒤에 그의 시선을 아프도록 느꼈다. 제임즈의 손을 놓을 수도 있었으나, 줄리는 일부러 그대로 걸었다.
테라스에는 이미 가족 전원이 모여 각기 음료수를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이몬은 어머니 곁에 자리잡고, 줄리는 제임즈에게 이끌려 술병과 글라스를 가득 실은 왜건 쪽으로 갔다.
제임즈는 생그리어라는 칵테일을 만들어 얼음을 넣은 글라스에 따라 공손히 줄리에게 건네 주었다.
줄리는 제임즈와 조 사이에 앉았다.
“나는 내일 쉬는 날인데, 배를 타러 가지 않겠소, 줄리?” 하고 조가 청했다.
“그러고 싶지만, 내일은 브리지타운에 가서 쇼핑을 해야 해요.”
“하루 종일 걸리는 것은 아니잖아요? 쇼핑은 오전 중에 끝내고 오후에는 나하고 배를 타러 가요. 형한테서 들었는데, 줄리는 배를 타면 매우 발랄해진다고 하던데.” 조는 몸을 앞으로 약간 내밀고 말을 덧붙였다. “더욱 신선해 보인다고 말을 바꾸어야 할까?”
“사이몬이 뭐라고 했는데요?”
“꼬리 없는 인어라고……. 육지보다 바다에 더 익숙해 있다면서, 솔리테일 섬에 사는 바다의 요정이라고.”
“그가 나에 대해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어요.”
“글쎄, 그는 멋이 없는 사나이니까. 나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사나이가 못 되죠. 그리고 여자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여자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귀찮은 일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상당히 신경을 쓰죠. 그러니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여자를 더 좋아하는 편이에요. 사이몬으로선 줄리와 같은 여자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를 거요.”
“그렇다면 나 같은 여자가 그를 사랑하면 귀찮아할지도 모른다는 말인가요?”
조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 그야 상대에 따라 다르겠죠. 여자의 마음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럴 수야 없겠지. 형은 지난봄에 서른 살이 되었으니, 줄리의 나이에 비하면 아저씨 같지. 줄리에겐 26세인 내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줄 리가 소리내어 웃었다.
“26세인 사람은 당신만이 아니잖아요?”
저녁 식사 후 제임즈와 조는 줄리를 뜰로 데리고 나가더니, 벤치의 가운데에 그녀를 앉히고 그들은 그녀의 양쪽에 앉았다.
어제의 줄리였다면 이런 매력적인 두 젊은이 사이에 끼여 앉았기가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줄리는 변해 있었다.
이미 메울 수 없는 깊은 도랑이 이들 사이에 생겨 버린 것이다. 어제까지의 줄리는 여자아이였다……순진하고 철없는 여자아이였다. 그러나 오늘의 그녀는 여인인 것이다, 사랑에 빠진 여인 -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남자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달빛이 환한 정원에서 30분쯤 이야기하고 있으려니, 사이몬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왔다.
“줄리, 잘 시간이야.” 마치 도미니크 또래의 소녀에게 하는 말투였다. 아직 초저녁이라고 쌍둥이 형제가 말했으나 사이몬은 이렇게 말했다. “줄리는 피로해 있어. 내가 별채까지 바래다 주지, 잠시 할 말도 있고..”
줄리는 순순히 일어서서 두 사라에게 상냥한 얼굴로 저녁 인사를 했다.
“내일 오후의 데이트를 잊으면 안 돼요.” 조가 뒤에서 말했다.
“잊지 않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쌍둥이 형제에게 말이 들리지 않을 곳에 이르자 사이몬이 싸늘하게 물었다.
“데이트라니?”
“조가 배를 태워 주기로 했어요, 당신만 괜찮다고 한다면.” 줄 리가 달콤한 소리로 덧붙였다.
두 사람의 옆에는 아치볼드라는 이름의 큰 그레이트 데인이 소리도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제임즈나 조는 조금만 예쁜 여자가 나타나도 곧 가까이하려고 하지. 그것만 당신이 명심한다면 가도 좋아.”
“내가 예쁜 축에 든다니 기쁘군요. 당신은 나를 가리켜 ‘아라와크족처럼 원시적’이라고 했다죠?”
“내가 그랬던가……. 하지만 그렇게 언짢아하다니 이상하군. 아라와크족은 나로서는 아주 호감이 가는 종족인데.”
“언짢아하는 것은 아니에요.” 줄리가 명랑하게 말했다.
별채에 도착하자 사이몬이 말했다.
“혼자 자면 쓸쓸할 테니까 아치볼드를 두고 가겠어. 앉아……아치.” 그레이트 데인은 슬픈 듯한 표정으로 발 위에 얼굴을 올려놓았다. “잘 자. 그런데, 지금까지 하지 못한 것을 한꺼번에 하려고 하는 줄리의 기분은 알겠지만,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틀림없이 공격해 올 테니까. 만일 그것이 별로 좋은 경험이 아니라면, 두 사람 사이가 벌어지게 될 거야. 줄리도 말했듯이 위험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아.”
줄리가 말을 받기도 전에 그는 어두운 나무 그늘로 성큼성큼 사라져 갔다.
줄리는 이를 갈고 발을 구르고 싶은 심정을 억제하면서 침대에 들어가 잡지를 들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치볼드가 침실로 들어와 침대 옆 바닥에 누웠다.
“너 여기서 잘 생각이냐?”
아치볼드가 슬픈 듯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좋아. 어쨌든 내 명령 따위는 듣지 않을 테니까, 어서 자거라.” 줄리는 몸을 앞으로 내밀어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서 불을 끄고 누웠다.
산들바람이 황홀한 정원의 향기를 싣고 와 커튼을 흔들었다. 유칼리, 카네이션, 장미의 향기……이런 밤에는 비록 마음이 안정되어 있더라도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이성의 목소리가 엄하게 줄리를 꾸짖었다.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 안 돼.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니야. 열중해 있는 것뿐이야. 일주일 동안에 사랑을 하게 될 리는 없잖아. 오늘 아침 샤로트가 그의 아내라고 생각했을 때까지는, 너는 도대체 남자라는 것에 관심이 없었잖아. 그가 싫어서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지난 4일간을 기억하고 있겠지?’
이번에는 은근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렇지도 않았어……첫눈에 그를 사랑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다만 그가 겉보기처럼 내면적으로도 멋진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불안해 했을 뿐이야……. 하지만 그는 내면적으로도 멋진 사람……아아, 정말 그래! 인제 두 번 다시 솔리테일에 돌아가지 않아도 좋아. 나는 여기에 있고 싶어……내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야.’
이튿날 아침 줄리는 아치볼드가 팔을 핥는 바람에 눈을 뜨고 매무시를 가다듬으면서 개한테 아침 인사를 했다. 지금까지 줄곧 개가 갖고 싶었던 줄리였다. 그런데 별채에서 나가려 할 때 갑자기 아치볼드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가려 하자 개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으르렁거렸다.
주인과 꼭 닮은 것 같아 줄리는 언짢았다. 물어뜯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하기로 했다.
아치볼드 때문에 갇혀 있던 줄리는 여덟 시 반이 되어서야 겨우 도미니크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 개가 나를 물 생각이었을까?”
도미니크가 점잖게 대답했다.
“피가 날 만큼 물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이빨자국 정도는 생겼을 거예요. 이 개는 명령에 절대 복종하니까요. 사이몬 형이 ‘있어!’ 하고 말하면 굶어 죽더라도 움직이지 않아요. 하지만 겁낼 것은 없어요, 결코 함부로 물지는 않으니까요.”
마치 이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아치볼드가 줄리에게 머리를 가까이 대고 다시 팔을 핥기 시작했다.
“괜찮아, 성을 내는 것이 아니니까. 너는 네 임무를 다했을 뿐이니까.” 하고 줄리는 웃었다.
그로부터 며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오히려, 아버지가 늦게 돌아와서 여기서 더 체재했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것은 일주일 전의 줄리로서는 생각조차 못 했던 일이었으나 그것이 지금 현실화되어 있었다.
앞으로 남은 유일한 희망은, 아버지를 설득하여 브리지타운으로 이사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바베이도즈에서 되도록 멀어지는 것이 자기가 구원받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평생 사이몬을 사랑할 것이지만 사이몬은 결코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바라는 것은 그만큼 고통만 더 할 뿐이다.
며칠 동안 줄리는 사이몬의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는 수주일간 집을 떠나 잔무 정리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하루 종일 마음이 들떠 있게 마련인가 보다고 줄리는 생각했다. 일곱 시쯤 잠에서 깨면, ‘오늘 아침 식사 때는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미 공장에 나갔을까?’ 하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즐거운 일에 열중하고 있는 오전중에조차 시간이 한없이 긴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다가, 시계가 한 시를 가리킬 무렵에는 이런 생각을 했다. ‘점심에는 돌아올까, 아니면 브리지타운에서 이미 식사를 끝냈을까?’
저녁 식사 때는 만날 수 있겠지만, 과연 나한테 말을 걸어올까? 비록 그렇게 된다 해도, 그가 빈정대며 가시 돋친 말이나 해서,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밤을 지새우게 되지나 않을까?
‘사랑이란 이렇게도 괴로운 것인가?’ 줄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럴 때 뜻밖에도 그의 음성이 들리거나 그의 모습이 보이거나 하면, 그녀의 가슴은 세차게 뛰고 로즈홀이 천국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랑에 빠진 여자의 천국이었다.
조나단 템플은 돌아오기 전날 전보를 보내 왓다. 이튿날 오후 지젤라와 함께 푸에르토리코를 경유하여 시웰 공항에 도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사이몬이 마중을 위해 은빛 쿠페로 줄리를 공항에까지 데려갔는데, 공항은 섬의 남쪽 끝에 있었으므로 상당히 긴 드라이브였다. 줄리는 그를 독점하게 된 기쁨과, 로즈홀에서의 생활이 끝나게 되었다는 고통이 뒤얽혀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비행기가 도착하려면 아직 20분이나 남았으므로, 두 사라은 활주로가 바라다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차를 마셨다.
그때 갑자기 사이몬의 이름을 부르는 어나운스가 들려왔다.
“사이몬 티아난 씨, 공항 사무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사이몬 티아난 씨…….”
사이몬이 일어섰다.
“공장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군. 곧 돌아오겠어.
그는 몇 분 후에 다시 돌아왔다.
“같이 가지 않겠나, 줄리?”
줄리는 영문도 모르고 그를 따라 레스토랑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 VIP 용 대담실 같은 방으로 들어가서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았다.
“앉아.”
줄리는 가죽 소파에 걸터앉아 핸드백을 옆에 내려놓았다.
줄 리가 사이몬의 표정을 살폈다.
“왜 그러죠? 무슨 일이 생겼나요?”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사이몬은 그녀의 곁에 다가앉으며 큼직한 손으로 그녀의 두 손을 감쌌다.
“좋지 않은 소식이야.”
5
줄리는 지극히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비행기가 추락한 게로군요. 어디서죠? 장소는 알고 있나요? 바단가요?”
사이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비행기는 무사해. 이제 곧 도착하게 될 거야. 파일러트가 무전으로 알려 왔어. 줄리의 아버지는 푸에르토리코에서 내려졌어, 병환으로……. 갑작스런 심장 발작이었다는군.”
그런데도 줄리는 침착했다.
“푸에르토리코로 가는 다음 비행기는 몇 시죠? 아버지한테 가야겠어요.” 줄리가 소파에서 일어서자, 사이몬이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아직 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줄리. 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숨을 거두신 것 같아. 곧 병원으로 옮겼지만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는군.”
‘사이몬은 내가 통곡하리라 믿고 있어. 가엾게도 이런 소식을 내게 전해야 하다니, 무척 괴로울 거야.’ 줄리는 마치 남의 일이기라도 한 듯이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가야 해요. 할 일도 있고……장례식만 해도 그래요. 그리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 뵈야…….”
“그것은 무릴지도 몰라. 그곳에 가는 비행기는 내일 오후에나 있어. 줄리가 거기 도착할 무렵에는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거야. 열대지방에서는…….” 사이몬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토록 다정한 사이몬의 목소리와 행동을 30분 전에 대했다면 줄리는 행복의 절정으로 이끌렸을 텐데, 지금은 아무 효력도 없었다.
“네, 그렇군요, 잊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이른 아침에 매장될 거예요. 하지만 지젤라를……지젤라를 만나야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게 아니에요. 쇼크로…….”
“거기에는 내 친구가 있어. 지젤라를 돌보고, 장례가 끝나면 곧 바베이도즈행 비행기에 태워 주라고 연락하겠어. 지금 곧 전화할 생각이야. 별로 시간은 안 걸릴 거야. 그동안, 밖에 있는 사람이 줄리와 같이 있어 줄 거야.”
밖에서는 공항 제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성이 손에 브랜디 잔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사이몬이 나가자, “이걸 드세요, 템플씨. 마음이 좀 진정 될 거예요.” 하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에요.” 하고 말하는 줄리를 보고 그녀는 몹시 놀라는 기색이었다.
아마 이 여자는 이런 경우를 당한 일이 한 번도 없는 모양이다. 모두가 울며 실신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지.
혼자 내버려 둬 주었으면 차라리 좋겠는데. 가엾게도 이 여자는 몹시 당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의례적인 유감의 뜻마저도 표하지 못하고 있다. 줄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브랜디를 조금 마셨다.
이윽고 사이몬이 돌아왔다. 그는 공항 여직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줄리에게 말했다.
“모든 조치를 다 취했어. 자아, 집으로 돌아가지.”
주차장으로 향하는 도중에 팬아메리칸 항공기가 보였다. 오늘 아침 아버지는 뉴욕에서 저 비행기를 탔던 것이다.
“아버지 심장은 튼튼했어요. 아주 기운이 좋으셨거든요. 그리고 아직 젊고.”
사이몬은 말없이 줄리를 자동차에 태우고 다시 큰길을 달려 집으로 향했다.
로즈홀에 도착하자, 사이몬은 차를 저택까지 몰지 않고 별채 가까운 데서 세웠다.
“어머니를 오시라고 할까, 아니면 잠시 혼자 있겠나?” 사이몬이 물었다.
“상관없다면 혼자 있고 싶어요. 미안해요, 사이몬. 달갑지 않은 일을 당하게 해서.”
“달갑지 않다고?” 사이몬은 어이가 없었다.
“당신을 비롯하여 모든 가족에게도 우울한 일이니까요.”
“어째서 그런…….” 사이몬은 말을 끊고 입술을 깨물었다. “나중에 다시 오겠어.”
줄리는 성큼성큼 사라져 가는 사이몬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 소파에 몸을 내던졌다. 이상하게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이 꿈이고, 지금 그 악몽에서 깨난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 시간쯤 소파에 앉아 있는데 사이몬이 나타났다.
“줄리, 이것은 진정제야. 어서 먹고 자리에 눕도록 해.” 작은 병에 흰 알약 세 개가 들어 있었다.
“네, 알겠어요. 하지만 이상하군요. 전에 아버지가 여행갔을때는 비행기가 추락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곤 한 적이 몇 번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꿈에도 그런 일은 생각지 않았거든요.
“이것을 먹으면 곧 잠이 들 거야.” 하며 사이몬이 그녀의 손에 병을 쥐여 주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옷을 벗고 침대에 앉아 약을 먹자, 이불을 덮을 무렵에는 벌써 졸음이 왔다.
눈을 뜨니 침대 곁에 사이몬이 앉아 있었다.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그것은 어제 이야기야, 줄리. 줄리는 꼬박 하루 종안 잠을 잤어. 식사를 가져왔어. 30시간 가까이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저쪽 방에 놓아두었는데, 이리 가져올까?”
줄리는 눈을 비볐다. 무엇이 꽉 들어찬 듯이 머리가 무거웠다.
“아니에요, 옷을 갈아입고 그리 가겠어요.”
거실로 가자 사이몬이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담배 피워도 괜찮을까?”
“네, 좋아요. 나는 담배 냄새를 좋아해요.”
줄리는 공복감을 느끼지는 않았으나, 사이몬이 가져온 것을 모두 먹었다.
“당신 어머님이 무척 상심하시겠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요. 다시 슬픔이 찾아올 거예요. 정말 안 되었어요, 나한테 무척 따뜻하게 대해 주셨는데.”
“어머니는 줄리의 일로 침통해 하고 계셔. 이미 아버지 때문에 슬퍼할 시기는 지난 것 같아. 물론 언제나 적적하고 슬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당분간은……아직 4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사이몬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말을 계속했다.
“지젤라가 푸에르토리코에서 전보를 쳤더군. 내일 오후 비행기로 도착하겠다고 했어. 그래서 칼리프솔리프 호텔에 방을 하나 예약했지. 줄리와 사이가 좋다면 이곳으로 와도 좋겠지만, 여러 거지로 미루어 지젤라는 밖에서 묵는 것이 좋을 듯싶어서.”
사이몬이 돌아간 뒤, 이번에는 티아난 부인이 아름다운 꽃을 들고 찾아왔다.
꽃을 화병에 꽂으면서 부인이 말했다.
“이런 경우에는 애도의 말을 해도 별로 위안이 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나는 남편을 잃은 뒤 배운 것이 있어요. 그 말을 하면 아가씨 마음이 좀 가라앉을지도 모르겠군요. 우리는 말이죠, 신의 존재를 믿는 한 죽은 사람을 위해 슬퍼할 것은 없어요. 자신을 위해 슬퍼할 뿐이에요. 앤드루를 잃은 충격에서 약간 벗어났을 때, 나는 31년 동안 그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몇 달, 아니 며칠밖에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데 말이죠. 아마 아가씨도 솔리테일에서 아버님과 함께 지낸 행복했던 세월을 생각하면 마음의 위안이 될 거예요.”
줄리는 밤에 눈을 떴다. 진정제가 있기는 했으나 오늘 밤에는 그것을 먹지 않았다.
어둠 속에 누워 있으려니 갑자기 실감이 났다. 이것은 악몽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이젠 두 번 다시 아버지를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지젤라는 만날 수 있다. 비록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이젠 고독한 몸이 된 것이다.
줄리는 어깨를 들먹이며 울었다. 시꺼먼 아치볼드의 그리자가 마루에서 일어나더니 싸늘한 코를 줄리의 뺨에 댔다. 그녀는 개의 목을 껴안고 그 따뜻한 털을 고독하고 쓰라린 눈물로 적셨다.
이튿날 아침 줄리는 창백한 얼굴이었으나 태연히 아침 식탁에 앉았다. 걱정했던 것처럼 젊은이들은 분명히 줄리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줄리는 겉으로나마 명랑하게 처신했고, 도미니크가 죽은 개의 이야기를 했을 때에도 동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일동은 보통때처럼 화제를 끌고 나갈 수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사이몬도 식탁에 남아 있었다.
“줄리를 공항에 데려가지 않겠어. 칼리프솔리프 호텔에 도착할 무렵, 제임즈가 줄리를 호텔로 안내할 거야. 한 시간 정도 지젤라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내가 마중하러 가겠어.”
“고마와요.” 줄리는 다시는 공항에 나가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 심정을 이해해 주는 사이몬이 고마웠다. “내가 머무를 만한 호텔 방도 하나 잡아 주시지 않겠어요? 더 이상 호의를 받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그러자 곧바로 티아난 부인이 입을 열었다.
“어마, 당치도 않아요. 여기에 계속 있어 줘요. 우리는 매우 기뻐하고 있어요.”
“하지만 별채도 누군가가 사용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친절은 감사합니다마는, 저 역시 스스로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어머니는 줄리를 걱정하고 계셔. 호텔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해.” 사이몬의 어조는 평소와같이 돌아갔으나, 이윽고 다시 정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 못써. 나 역시 줄 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불편하리라 여겼으며 처음부터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야. 몇 주일 동안은 여기 있어야 해, 줄리가 장래의 계획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이미 한 가지 결정은 했어요. 솔리테일을 팔겠어요. 아직 사실 생각이 있으세요?”
“물론이지. 아버지한테 내가 부른 값을 들었나?”
사이몬이 ‘아버지’라 부른 것이 줄리로서는 기뻤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했으나, 우회적으로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네, 아주 좋은 값이라고 하더군요. 절차는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루 아줌마와 하큐르를 거기 살게 하겠다고 보증만 한다면 섬은 당신 것이에요.”
“좋아, 알았어. 나머지 일은 내가 하지.” 사이몬이 갑자기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런데 아버지가 유서를 남겼는지 어떤지 알고 있나?”
“아니, 전혀 몰라요. 있다면 금고 속에 있을 거예요. 별채로 돌아가면 찾아보겠어요. 그런데 왜죠?”
“만일 유서가 없다면, 법률적으로 보아 거의 모든 재산이 지젤라에게 돌아갈 것 같기에 하는 말이야.”
“그럴 리가!”
“하지만, 법률은 어쨌거나 그 사람 역시 도의적으로 줄리에게 양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
“지젤라에게 도의는 통하지 않을 거예요.” 줄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샤로트와 티아난 부인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계모와 저는 전혀 뜻이 맞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해서 그녀에게 전보다 더 공손히 대하는 그런 위선적인 행동은 할 수 없어요.”
“그래요. 나도 사이몬에게 이야기를 들으며, 아가씨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어요.” 부인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생계를 꾸려 나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무 기술도 익히지 못했거든요. 그러나 점원이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여기서는 백인을 고용하지 않나요?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을까요?”
“벌써 그 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을 거야. 우선 지젤라와 만나 그녀의 태도를 보도록 해야지. 그러나 신중하고 현명하게 처신해야 해, 줄리. 그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 그것을 나타내서는 안 돼. 개인적인 감정은 뒤로 미루고, 우선은 현실 문제를 처리해야만 해.” 사이몬이 말했다.
“네, 알았어요……요령껏 하겠어요.”
금고 속에는 유서가 없었다.
줄리는 금고문을 닫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빠는 유서 따위를 쓸 생각은 안 했을 거야. 아직 젊은 나이였으니까.”
그러고는 생계를 꾸려 나갈 일을 여러 가지로 생각했다. 스킨다이빙 교사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다나 산호초를 잘 안다는 것 외에는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일곱 시에 제임즈가 칼리프솔리프 호텔로 줄리를 데려다 주었다. 로비에는 사이몬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젤라가 방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어. 한 시간쯤 후에 마중오지.”
보이가 줄리를 1층 104호실로 안내했다.
줄리는 지젤라가, 실신할 것 같은 미국의 미망인처럼 연극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젤라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화장은 입술연지만 바르고, 머리는 뒤로 넘겨 하나로 묶고 있었다. 눈 밑에 기미가 끼어, 평소에는 나이보다 젊어 보였지만 지금은 30세 이상으로 보였다.
“커피를 부탁하겠는데, 너는 무얼 좀 먹겠니?” 줄 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무얼 좀 먹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지젤라는 전화로 커피와 치킨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뉴욕에서 푸에르토리코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생겼던 일을 설명했다.
“사이몬이 친구들에게 협력을 부탁해서 여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어. 처음에 나는 정신이 나가 무어가 무언지 몰랐어, 너 역시 마찬가지였겠지만.”
노크 소리가 나면서 보이가 들어왔다. 지젤라는 커피를 따라 줄리에게 건네 주고, 샌드위치는 쳐다보지도 않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잠시동안 지젤라는 아무 말도 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이윽고 약간 몸을 틀면서 녹색 눈을 줄리에게 돌렸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야.” 하면서 지젤라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노력해서 힘을 합쳐야 해. 정치에서는 무어라 하더라……평화 공존?” 지젤라는 일어서서 분주히 담배를 빨며 방안을 왔다갔다했다. “내가 조니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사랑했더라면 너 역시 날 싫어하지 않았을 거야. 조니의 재혼 상대자에게 질투를 할 너도 아니고. 나는 그를 유혹하여 결혼하려고 생각했었어. 그래, 사실이야. 나는 그를 사로잡으려고 계책을 꾸몄어. 그런데 너무나 간단했어. 그는 무척 순진한 사람이었으니까.” 지젤라는 담배를 비벼 끄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계속 서성거렸다. “지난주에 나한테 물었지, 왜 결혼했냐고? 그때 설명했더라도 너는 이해하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겠지. 안정된 생활이 목표였어. 흔히 있는 일이지. 이것이 연애결혼보다 더 많아. 내가 얼마나 안정을 바라고 있었는지는 하느님밖에 모를 거야.” 지젤라가 조용히 웃었다.
줄리는 말없이 앉아 지젤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젤라의 얼굴과 태도가 어쩌면 이렇게 변했는지, 마치 딴 사람 같았다.
지젤라가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너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봤는지 모르지만, 가까운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나는 16세 때부터 자활의 길에 나섰던 사람이야. 나에게는 계모도 없었고, 티아난네처럼 기댈 만한 곳도 없었어……누구 한 사람도. 영국이나 미국 같으면 그다지 힘들지 않았을 거야, 젊은 여자에게는 일자리가 많으니까. 하지만 카리브에서는 백인 여자가 자활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아,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미인이라도 마찬가지지……오히려 더 골치만 아프지.” 서성거리기가 힘드는지 지젤라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이야기만 해서 미안한데, 네 아버지는 내가 오랜만에 만난 정말 착한 사람이었어. 직감적으로 깨달았지, 그 썩어빠진 호텔의 일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사랑한다는 남자는 많았으나, 결혼 신청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 지젤라의 목소리는 약간 들떠 있었다.
“하지만 아빠하고 결혼한 뒤 솔리테일에서 나가고 싶어 했잖아요?” 줄리가 말했다.
지젤라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습관은 좀처럼 고칠 수가 없는 거야. 나는 아이티에서 10년 동안 화려한 생활을 했어. 좋아서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생활에 젖어 버렸던 거야. 솔리테일에서는……마치 수녀원에 갇힌 것과 같았어.” 지젤라는 말을 끊고 샌드위치를 한 조각 집었다가 다시 접시에 놓았다. “우스운 일이지만, 지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처음으로 지젤라의 눈에서 눈물이 빛났다.
줄리는 갑자기 지젤라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젤라?” 줄리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는 손으로 제지하며 말했다.
“나를 동정할 필요는 없어, 줄리. 동정을 받을 만한 자격도 없어. 너야말로 가엾은 여자야, 아버지가 네 삶의 전부였으니까.” 지젤라는 코를 풀고 다 식은 커피를 마시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슬픔에 잠겨 있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해. 줄리는 바베이도즈를 구경했겠지? 우리는 여기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당분간만이라도?”
“어마, 그래도 될까요?” 줄리는 가슴이 설레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훌륭한 곳이라고 생각해요. 브리지타운에는 멋진 상점도 많고. 나는 여기 있고 싶어요. 새엄마의 마음에도 들 거예요.”
“그럼 네 말대로 하기로 하자. 그러나 내일은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야 해. 유감이지만 재산이 바닥날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으니까.”
“재산이 바닥나요? 하지만 아빠는 많은 재산을 남겼을 텐데요?”
지젤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그리고 그림은 레코드나 책과는 달라……인세가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일단 팔아버리면 그것으로 끝이야. 아마 조니의 그림은 값이 올라가겠지,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더라도 우리가 득을 볼 수 있는 것은 남아 있는 그림에 대해서뿐이야. 몇 달이야 지탱할 수 있겠지만 한계가 있어.”
“사이몬은 아직 솔리테일을 사고 싶어 하고 있어요. 그러니 그 돈을 투자에 돌린다면?”
“투자로 돈을 벌려면 상당한 돈을 투입해야 해.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또, 당장 발등에 떨어진 일도 아니고. 그리고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옛날의 직업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 그런데, 사이몬의 가족은 어떻지?”
줄 리가 로즈홀과 가족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을 때 노크 소리가 나면서 보이가 들어오더니, 사이몬이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과 함께 지젤라에게 메모를 전했다.
“사이몬의 어머니가 초대를 했어, 내일 점심을 같이 하자고. 대신 고맙다는 인사를 해 줘, 줄리. 그럼 내일 그 시간에 만나기로 해.”
“안녕히 주무세요.” 줄리는 저도 모르게 지젤라에게 다가가 뺨에 키스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 되겠죠, 뭐.”
“어땠어?” 줄 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가 바쁘게 사이몬이 물었다.
“그 사람, 변했어요. 느끼지 못했나요? 공항에서나 차 안에서 얘기하지 않았어요?”
“아니, 필요한 말만 했을 뿐이야. 그 밖에는 아무말도 안 했지.”
차 안에서 줄리는 지젤라가 한 말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나는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어요. 자신의 생각에만 집착하여, 지젤라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지난날 지젤라가 호텔의 이발소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어요.”
사이몬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동정한다는 것은 편견을 갖는 것만큼이나 위험해, 줄리.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지젤라가 순진해진 것같이 보일지는 모르지만 - 그것이 변함없이 계속될지……. 그것이 그 여자의 수법인지도 몰라.”
“아니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을 하죠? 그렇다면 지젤라가 노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무슨 꿍꿍이셈이 있어서 줄리를 이용하려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을 거예요. 어쨌든 내겐 지젤라를 도와줄 의무가 있어요, 어머니니까요.”
“줄리는 오늘 아침에도 말했잖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그녀를 전보다 더 다정하게 대할 수는 없다고 말이야.”
“그것은 오늘 아침의 이야기예요. 만나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어요. 적어도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은 바꿀 생각이에요.
“무리하지 않은 것이 좋을 텐데.”
“무리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 저넉의 지젤라에게는 위선이 없었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왜 그렇게 사람을 의심하죠?”
“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단지, 나는 줄리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고 경험도 많아.”
“당신은 고생이 뭔지를 몰라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니까요. 지젤라는 16세 때부터 고생하며 자활해 왔어요.”
“그에 비해서는 별로 닳은 것 같지가 않더군.” 사이몬이 냉담하게 비꼬았다.
줄리는 안달이 났다.
“당신은 몰라요……가난한 사람의 생활에 대해서는 말이에요. 당신은 집도 재산도 부모의 혜택도 받고 있어요. 고독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당신은 몰라요. 이 섬에 2백 년이나 군림해 온 가문 아니에요, 아무 고통도 없이 말이에요.” 줄리는 단번에 말해 버리고는, 자신의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후회했다. “미, 미안해요. 내게는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없어요. 그처럼 친절히 대해 주셨는데.” 사이몬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의 옆얼굴에서는 아무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부탁이에요, 화내지 마세요.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네, 사이몬……정말이에요.”
“화난 것은 아니야.” 사이몬이 겨우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가 분노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차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줄리는 비참한 심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로즈홀에 도착한 것은 저녁 식사 무렵이었다. 로브와 샤로트, 에마, 쌍둥이 동생 들은 그날 밤 댄스하러 갈 예정이어서 들뜬 마음으로 모여 있었다. 이윽고 에마의 상대가 진홍빛 스포츠카로 도착하자, 모두들 각각의 차에 나누어 타고 출발했다.
“돈 많은 젊은이들이지.” 일행이 떠난 후 사이몬이 시니컬한 시선을 줄리에게 돌렸다.
줄리는 얼굴을 붉혔다. 일행을 배웅나왔던 티아난 부인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사이몬을 바라보았다.
알리스테아와 니니언도 외출했기 때문에 저녁 식탁에는 끝의 남매만이 남았다. 사이몬은 왜 댄스에 가지 않는 것일까 하고 줄리는 생각했다. 분명히 초대는 받았을 텐데.
집사인 샘이 커피를 날라 왔을 때, 티아난 부인이 갑자기 전화할 일이 생각났다면서 응접실 쪽으로 가자, 사이몬은 시가에 불을 붙여 물고 긴 다리를 포개고 앉아 정원의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커피를 다 마시자 줄리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이렇게 물었다.
“한잔 더 하겠어요?”
사이몬이 무표정하게 흘끗 시선을 돌렸다.
“아니, 괜찮아.”
“혹시……볼일이 있으면……상관 말고 나가세요.”
“서재로 와 주지 않겠나?” 사이몬은 일어서서 문을 열고 줄 리가 따라 나오기를 기다렸다.
줄리는 잔뜩 겁을 먹었다. 자동차 안에서 그런 실례되는 말을 했으므로, 로즈홀에서 지젤라가 있는 호텔로 쫓아버리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서재에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었다. 가족들조차 허락없이는 들어가지 못하는 사이몬만의 방이었다.
방은 넓지는 않으나 천장이 높고 창이 세 개나 있어 시원해 보였다. 한족 벽 전체가 책장으로 되어 있고 책이 가득 차 있었다. 또 하나의 벽에는 우리 선반이 있어 여러 가지 낚시 도구가 꽉 들어차 있었다. 나머지는 큰 책상과 간단한 의자가 몇 개, 그리고 서류용 로커가 있을 뿐이었다.
사이몬은 문을 닫은 뒤 책상 뒤에 걸려 있는 유화 쪽으로 걸어갔다. 그것은 사이몬과 아주 잚은, 아름다운 가발을 쓴 남자의 초상화였다.
“이 사람 이름도 사이몬 티아난이지. 1653년에 바베이도즈에 왔어 - 노예의 신분으로.”
“노예요?” 줄리는 어이가 없었다.
“왕정주의자로서 국왕의 신하였어. 찰즈 1세가 크롬웰에게 처형된 후 왕정파의 지도자가 다수 이 섬에 노예로 추방당했던 것이지. 이분도 1660년의 왕정 복고 때까지 노예 생활을 했어. 이쪽도 재미있어.” 사이몬은 초상화 가까이에 걸려 있는 액자를 가리켰다. “이것은 1831년 허리케인에 대한 총독의 보고서를 카피한 거야.”
줄리는 동판에 새겨진 글을 읽어 보았다.
<10일 저녁까지는 더없이 아름답고 기름진 영토가 석양에 알므답게 물들어 있었으나, 이튿날 아침에는 완전히 황폐된 풍경이 전개되어 있었다. 나무는 뿌리째 뽑히거나 가지가 부러진 것들뿐. 가옥은 모두 괴멸되는 타격을 받고 쓰러져 있었다. 막대한 피해와 엄청난 사상자에 대한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그 하룻밤 사이에 이 지방은 완전히 초토화되었어. 이튿날 루시 티아난이 출산 직후에 사망했어. 운좋게 그 아들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가 존재하게 된 것이지. 우리 조상이 역경을 딛고 살아왔다는 것을 이제 알겠나?” 사이몬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줄 리가 무슨 말을 하려 했을 때 티아난 부인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기 있었구나, 사이몬. 벤 체이스가 너에게 급히 할말이 있다고 전화를 했구나.”
“그럼 여기서 전화를 받겠어요. 미안해, 줄리.” 사이몬은 책상 앞에 앉아 수화기를 들었다.
줄리는 서재에서 가만히 나와 문을 닫고 티아난 부인을 따라 객실로 들어갔다.
“피곤해 보이는군, 아가씨. 어머니를 만나서 그런가?” 하고 부인이 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줄리는 이렇게 대답하고, 지젤라의 달라진 태도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사이몬은 그것이 다 연극일지 모른다고 하더군요……무슨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고요.”
“그래요, 사이몬은 남의 성격 판단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해요. 또 자신도 그 판단력에 상당한 자신을 갖고 있지요. 내일 만나 보면 무언가 알게 될 거야.”
이튿날 지젤라는 한 시 15분 전에 택시로 왔다. 흰 블라우스에 회색 스커트를 입고, 오늘도 은빛 머리를 뒤로 묶고 있었다.
지젤라는 티아난 부인과 악수하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
“줄리를 잘 돌보아주셔서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으로부터 감사드립니다, 티아난 부인.”
사이몬은 지젤라가 도착하기 조금 전에 전화를 걸어 와, 공장일이 바빠서 도저히 점심때는 돌아올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바베이도즈에서 손꼽는 특별 요리인 날치구이가 은쟁반에 담겨서 나올 무렵에 사이몬은 돌아왔다.
어젯저녁 서재에서 나온 이래 줄리는 사이몬을 만나지 못했었다. 식당에 들어와, 늦어져서 죄송하다고 말하는 사이몬을 보자, 줄리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사이몬은 식사 후 뜻밖에도 지젤라를 뜰로 데리고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간 뒤 샤로트가 줄리에게 물었다.
“그 멋진 머리는 본래의 것인가요?”
이 질문에 줄리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보이지 않으세요?” 줄리는 지젤라의 머리가 염색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품어 본 일조차 없었던 것이다.
샤로트가 생각에 잠기면서 말했다.
“그래요, 믿을 수 없을 만큼 피부가 흰 분이니까 있을 수 있는 일이겠죠. 보통은 어린이나 북구의 여성이 그런 머리를 갖고 있는데, 염색했다면 줄 리가 깨달았을 거예요. 뿌리 부분이 검어지기 시작하니까 3,4주마다 염색을 해야 하고, 또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으면 윤이 나지 않거든요.”
그러자 티아난 부인이 끼어들었다.
“머리에 대한 것은 모르겠지만, 그분의 태도가 위선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왜 사이몬이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지젤라가 사이몬과 같이 돌아왔다.
“우리는 더 이상 호의만 받고 있을 수는 없어요, 티아난씨. 다행히 호텔의 내 옆방이 비어 있으니까, 오늘밤부터라도 줄리더러 호텔로 옮기라고 하겠어요.”
뜻하지 않았던 이 말에 줄리는 완전히 머리가 혼란해지고 말았다.
티아난 부인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나, 하지만 우리는 아가씨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줄리의 생각에 달린 거지만…….” 부인은 입을 다물고 아들을 쳐다보았다.
사이몬은 식당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줄리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줄리는 지젤라와 같이 있는 편이 좋겠지. 나는 오후에 시간이 있으니까, 줄 리가 짐을 꾸리면 두 사람을 호텔로 데려다 주겠어.”
그날 밤 줄리는 칼리프솔리프 호텔의 105호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한 다음 곧 방으로 돌아왔으나, 마침 휴일이어서 다른 손님들은 바베이도즈의 밤을 실컷 즐기려는 듯 한밤중까지 호텔의 댄스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테라스에서 웃음소리와 떠들썩한 소리가 한참 동안 들려 온 뒤, 잘 자라고 인사하는 이야깃소리……문을 여닫는 소리……왜건으로 야식과 음료수를 운반하는 리드미컬한 소리가 복도에서 들렸다. 그런 뒤에 모든 것이 조용해진 것은 밤 두 시였다.
줄리는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서 빠져나와 가만히 유리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와 난간에 기대어, 뜰과 이어진 호텔 전용의 해변을 바라보았다.
어제 아침에 사이몬은 이렇게 말했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 못써. 나 역시 줄 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불편하리라 여겼으면 처음부터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야. 몇 주일 동안은 여기 있어야 해, 줄 리가 장래의 계획을 세울 수 있기까진 시간이 좀 걸ㄹㄹ 테니까.’라고.
그러나 지금 줄리는 자신의 경솔한 언동 때문에 호텔로 옮겨 오게 되었다. 사이몬은 줄리에게서 손을 뗀 것이리라. 이제는 두 번 다시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튿날 아침 식사 때 지젤라가 말했다.
“나는 브리지타운에 가서 솔리테일을 매각할 절차를 밟고 오겠어. 너는 따라와야 소용없을 테니까, 오전중에 바닷가에라도 나가지 않겠니? 참, 너도 수영복이 필요할 테니, 호텔의 부티크에 가보기로 하자. 낡은 수영복은 내버리면 그만이야. 앞으로는 예쁜 수영복만 입도록 해.”
사흘 후, 지젤라는 호텔의 미용실에 가 있었고 줄리는 혼자 바닷가로 나왔다. 이때, 화려한 수영복을 입은 미국 여성이 줄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텍사스의 휴스턴에서 온 블랙 클리지라고 해요. 갑자기 말을 걸어서 미안해요, 템플씨. 하지만 우린 댁의 불행한 기사를 읽고 무척 동정하고 있어요.”
“기사라고요?” 줄리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뉴욕타임즈와 지방지에서 읽었어요. 모르고 있었나요? 여기 갖고 왔어요.” 그녀는 백 속을 뒤져 신문 조각을 꺼냈다. “하지만, 이 기사를 읽으면 매우 놀랄 거예요.”
“아니, 괜찮아요. 보여주세요.”
뉴욕 타임즈의 것은 보통 사망 기사였으나, 바베이도즈 신문에는 우라간 섬에서의 사건이 실려 있었다. 줄리는 흥미를 느끼는 한편 깜짝 놀랐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보도보다, 그 악명 높은 섬에서 줄리와 사이몬이 어떻게 하룻밤을 보냈는지의 추측 기사를 더 크게 보도하고 있었다, 사이몬의 사진과 줄리의 사진도 나란히 함께. 그녀의 사진은 아버지가 여행할 때마다 지갑에 넣고 다니던 스냅이었다.
줄리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클리지 부인과 헤어져 곧 호텔로 돌아왔다. 지젤라는 자기 방의 경대 앞에 앉아, 새로 세트한 머리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줄 리가 소리쳤다.
“무슨 소리냐? 갑자기 들어와서 깜짝 놀랐어. 대관절 무슨 일이지?”
“신문에 난 그 엉터리 기사 말이에요! 사이몬이 알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했어요, 내 사진까지 주면서?”
“그런 식으로 각색될 줄은 몰랐어. 분명히 난처하게 되기는 했지만 결코 내 탓은 아니야. 신문 사회면에 크게 보도될 줄 알았다면 나도 절대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 내 이야기를 좀 들어 봐.”
“좋아요……듣겠어요.” 줄리가 싸늘하게 말했다.
“어제 오후 네가 바다에 나갔을 때였어. 기자가 이곳으로 찾아와서, 조니와 내가 뉴욕에 가 있는 동안 어떻게 네가 티아난네 집에 묵게 되었는지 묻지 않겠니. 그래서 사이몬이 섬을 사겠다고 교섭하러 왔었다는 말을 했지. 허리케인의 내습을 받아 건물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할 수없이 그가 너를 이곳에 데려왔다고 했어. 그런데 그 기자가 여간 아니어서,우라간 섬의 이야기를 교묘히 꺼내게 하고 네 사진까지 가져갔어. 하지만 설마 이처럼 센세이셔널한 기사가 날 줄은 몰랐어. 사실이야.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편집장에게 항의를 했지. 네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 것도 사실이야. 미안해, 줄리……정말 잘못했다.”
이때 옆방인 줄리의 방에서 전화 벨이 울렸다. 프런트에서 샤로트가 왔다는 전갈이었다.
“잠시 기다리라고 전해 주세요, 5분 이내로 갈 테니까요.”
줄리는 지젤라에게 말한 뒤 옷을 갈아입고 밑으로 내려갔다.
“줄리, 잘 있었어요? 나하고 잠시 드라이브라도 하지 않겠어요? 나는 무척 적적했어요. 좀 더 일찍 오고 싶었지만 손님이 자꾸 몰려와서 그만…….”
호텔에서 나와 바닷가의 도로를 접어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줄리는 가슴속의 것을 샤로트에게 털어놓았다.
“조금 전에 바베이도즈 신문의 기사를 읽었어요. 어머님과 사이몬이 무척 분개하셨을 거예요.” 줄리는 우울한 심정이었다.
샤로트가 곁눈으로 흘끗 바라보았다.
“그렇게 우울해 하지 마세요. 줄리의 탓이 아니란 것은 두 분 다 알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화가 나셨을 테죠?”
“사이몬은 처음에는 벌컥 화를 내며 지젤라를 원망했지만, 지금은 냉정해져 있어요. 그도 줄리를 만날 생각인 모양인데, 런던에서 거래처 손님이 와서 지금은 매우 바빠요. 인제 마음쓰지 마세요. 헛소문은 75일이라는 속담도 있듯이, 다음 주에는 또 다른 스캔들이 생길 거예요. 사이몬은 잠시 구설수가 들었던 것뿐이라며 태연해 있어요.” 샬로트는 애써 줄리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사이몬이 그런 말을 했다는 소리를 듣자 줄리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두 사람이 이웃 마을의 찻집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흘금흘금 자기를 바라본다는 것을 알고 줄리는 깨달았다. 신무네 난 사진은, 수영을 하고 나서 젖은 머리를 뒤로 늘어뜨리고 솔리테일의 바위에 앉아 있는 것이었으나, 사람들은 곧 줄리를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모두 나를 알아보는 모양이에요. 수군거리고들 있어요.” 줄 리가 쥐어짜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이를 어쩌지……미안해요.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당신을 데리고 나오지 않았을 텐데. 신경 쓰지 말고 무시해 버리세요.”
호텔로 돌아오자, 줄리는 찻집에서 당한 창피를 지젤라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당분간 방에서 식사하겠어요. 힐끗힐끗 쳐다보며 수군대는 것은 참을 수 없어요.” 줄리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이상하구나, 줄리. 사람들이 너를 바라보는 것은 우라간의 사건과는 전혀 관계없이, 조나단 템플의 딸이기 때문이야. 나 역시 그런걸. 사람들을 멀리하면 그들은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게 돼.”
“그래도 할 수 없어요. 사람들의 시선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걸요.”
고집을 부리는 줄리에게 지젤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럼 나도 여기서 같이 먹는 것이 좋겠군.”
발코니에서 저녁을 끝낸 뒤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는 줄리를 지젤라가 불러 세웠다.
“잠깐 상의할 일이 있어. 장래에 관한 일인데, 솔리테일을 판 돈으로 집을 마련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아. 우선 우리가 살 집이 있어야 하니까. 그랬다가 돈이 바닥나기 시작하면 그 집에 하숙이라도 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지?”
몇 시간 전이었다면 줄리도 멋진 아이디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문 기사 때문에, 옛날에 품었던 지젤라에 대한 불신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줄리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힘들 거예요.”
“늙은이의 손톱 손질을 하는 것보다는 속 편하지. 어쨌든 내일 부동산 소개소에 가서 알아보겠어.”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줄리는 이튿날은 늦잠을 자고 말았다. 지젤라의 방 문을 노크했으나 아무 대답도 없고 화장대 위에 메모가 놓여 있었다.
<집을 보러 가는데, 늦게 돌아올 것 같아.>
줄리는 전화로 아침 식사를 부탁하고,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는, 섬의 대서양 쪽으로 가서 한가하게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택시를 부탁하고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마침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열 시가 가까웠으므로 객실 담당 메이드가 방을 청소하러 왔을 것이라고 줄리는 생각했다.
“네.” 버터롤을 입에 물고 있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문이 열리면서 사이몬이 들어왔다.
“잘 잤나, 줄리. 우리 공장을 구경하지 않겠나?” 사이몬이 기세좋게 빠른 말로 말했다.
“안, 안녕하세요?” 줄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른 계획이라도 있나?”
“아, 아니에요……구경하고 싶어요. 옷을 갈아입을 테니 밑에서 기다리시겠어요?” 줄리는 아직 잠옷에 가운을 걸친 채였다.
“그러지.”
사이몬이 나간 다음, 평소에는 5분이면 갈아입는 줄리였으나, 갑자기 사이몬이 나타나는 바람에 손이 떨려서, 밑으로 내려가기까지는 15분이나 걸렸다.
로비에는 여느때보다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불길한 섬에서 화가의 딸을 구출한 그 농장주 본인이 로비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사이몬은 자신이 뭇사람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했는지, 매점에 진열된 문고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꺼질 듯한 목소리였다.
“서두를 것은 없어.” 사이몬은 줄리의 팔을 잡고 정면의 현관으로 향했다.
차가 달리기 시작한 뒤에도 사이몬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기사 때문에 줄리가 분개하고 있다는 말을 샬리한테 들었지.” 그 어투에서는 지금의 그의 심경을 읽을 수가 없었다.
줄리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조용히 말했다.
“당연한 일이죠. 틀림없이 당신도……매우 불쾌할 거예요.”
“처음 그 기사를 읽었을 때는 불쾌했지만, 그것 때문에 잠을 못 잘 정도는 아니었어.”
차가 사탕수수밭 사이로 들어갔다.
더 이상 사이몬이 아무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사이몬이 줄리를 만나러 온 것은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티아난의 설탕공장은 비행기 격납고와도 비슷한 큰 목조 건물이었다.
사이몬은 사탕수수를 베어 콘베이어로 공장에 보내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공장에서는 우선 사탕수수를 롤러로 짜서 즙을 추출하고, 남은 섬유는 연료로 쓴다고 했다. 즙은 불순물을 제거한 다음 졸여서 시럽 상태로 만들어, 그것을 진공 솥에 다시 졸인 뒤 기계로 당밀을 분리시키면 설탕만이 남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줄리는, 이렇게까지 기계화된 공장인 줄은 몰랐기 때문에 의외였다고 그에게 이야기했다.
“우리 공장은 서인도 제도의 설탕공장 가운데서도 가장 근대화된 굴지의 공장이지.” 사이몬이 말했다.
그 다음은 럼주의 제조 과정을 돌아보았다. 당밀에 물을 붓고 큰 통에서 발효시킨 뒤, 증류기에 넣어 약간의 착색만 하면 된다.
사이몬은 줄리를 사무실로 에려가더니, 공장에서 만든 럼주를 글라스에 따라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그는 데스크의 회전의자에 앉아 시가에 불을 붙여 물고 말했다.
“그 후 지젤라의 태도는 어떻지? 그런 엉터리 기사가 그녀 때문이란 것은 줄리도 물론 알고 있겠지?”
“지젤라가 기자에게 말한 것은 분명해요. 하지만 그녀가 꼬리를 단 것은 아닌 것 같아요……그런 기사가 나올 줄은 그녀도 몰랐다고 하더군요.” 사이몬이 입을 일그러뜨렸기 때문에 줄리는 얼른 덧붙였다. “지젤라는 장래의 계획도 세웠어요, 아버지 유산에는 한도가 있고 내게 특별한 기술도 없으니까 하숙을 치면 어떨까 하고요.”
“지젤라는 우아한 여주인이고 줄리는 충실한 하녀가 되는 셈인가?” 통렬한 빈정거림이었다.
“그런 것이아니에요.”
“어쨌든 좋아,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둬.” 사이몬이 일어나 줄리의 의자 가까이로 왔다. “그보다도 좋은 생각이 있어.”
“어마……어떤?”
사이몬은 줄리의 손에서 글라스를 빼앗아 데스크에 놓더니 그녀의 두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잿빛 눈이 이상한 광채를 띠고 빛났다.
“줄리의 장래를 위해서 제일 좋은 일은 결혼하는 것이야……나하고 말이야.” 사이몬이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6
줄리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사이몬을 쳐다보고 있었다. 10초쯤 지났을 때 전화 벨이 울렸다.
“귀찮아 못 견디겠군!” 사이몬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그녀의 손을 놓고 데스크로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줄리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갑자기 머리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전화는 3,4분이나 계속되었다.
“나는 지금 시간이 없어. 알아서 처리해 줘. 그 정도의 일은 혼자 생각할 수 있잖아.” 사이몬은 신경질적으로 말하고 수화기를 탕 놓았다. 줄리에게 그런 투의 말로 했다면 줄리는 틀림없이 깜짝 놀랐을 것이다.
“미안해.” 이번에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내가 결혼을 신청해서 몹시 충격을 받은 모양인데, 이제 좀 마음이 진정되었나?‘
줄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힘없이 물었다.
“어째서죠, 왜요?”
사이몬은 의자 등에 기대고 서더니, 재떨이에서 아직도 타고 있는 시가에 손을 뻗었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줄리는 믿지 못하겠나?” 사이몬의 눈이 유쾌한 듯 번쩍 빛났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니, 진심일 리가 없어요.” 줄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이몬이 머리를 들었다.
“어째서?” 조롱하는 듯한 사이몬의 웃는 얼굴에 줄리의 가슴이 마구 뛰었다. “줄리는 자신의 장점을 모르고 있어. 교제 범위가 넓어지면 줄리를 연모하는 사나이가 5만 명도 넘게 될 거야. 줄 리가 환영받을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해 볼까?” 줄 리가 대답하지 않자 사이몬이 말을 이었다. “우선 줄리는 미인이야. 결코 금발만이 미인은 아니니까. 그리고 줄리는 지적인 여자야. 요리에도 솜씨가 있고, 또 매우 성실해. 나는 성실성을 대단히 중요시하는 사람이야……비록 그것이 엉뚱한 방향으로 향해져 있다 해도. 줄리의 장점은 또 있어요. 이것은 나 개인에게 있어서도 좋은 일이지. 줄리는 바다를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어. 나는 항해를 좋아하니까, 뱃멀리를 하거나 배에서 지내기를 싫어하는 여자와의 결혼은 의미가 없어. 줄리라면 시페어알라 호를 타고 항해하는 것을 나만큼 좋아하리라 생각해. 그런데도 아직 내가 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만난 지 2주일밖에 안 됐거든요.” 줄리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긴급사태기 때문에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하겠어.” 사이몬이 어깨를 으쓱했다. “줄리의 사정이 이렇지만 않다면 나 역시 이처럼 서두르지는 않을 거야. 뭐가 뭔지 모른다고 했지만, 자기가 어떻게 느끼고 있다는 것은 알테지? 만일 줄 리가 나를 생리적으로 싫어한다면 문제가 다르지만.”
줄리는 뺨을 붉게 물들이고, 당황하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당신에게 혐오감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아요……당치도 않아요.”
“그러나 때때로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었겠지?”
줄리는 핸드백의 장식을 만지작거리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 탓이에요. 당신이 가끔 이상한 말을 하니까 기분이 언짢아져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거예요.”
“알았어, 줄 리가 결혼 승낙만 한다면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안 하기로 약속하지. 그러면 됐지?” 조롱하는 듯한 어조였다.
줄리는 사이몬의 눈을 쳐다보았다.
“농담이죠? 네, 모두 농담이겠죠?”
“농담으로 프러포우즈한다면, 장본인이 웃음거리가 되겠지. 대관절 어떻게 하면 내가 진지하다는 것을 믿겠나? 이 데스크를 뛰어넘어 줄리를 꼭 껴안고, 나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면 되겠나?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지 모르지만, 그렇게 정열적으로 다그치는 것보다 지금같이 이성적으로 말하는 것이 오히려 줄리를 위축시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단순히 내가 줄리를 아직 육체적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면 그 문제는 곧 해소시킬 수 있어.”
사이몬이 의자에서 반쯤 일어서자 줄리는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에요……나도 이성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아요. 다만 잘 모르겠는 것뿐이에요……어째서 당신이 내게 결혼 신청을 하는지.”
“그럼, 결론을 내리기까지 생각할 시간을 두는 것이 좋을 것 같군. 벌써 열 두 시가 가까웠으니, 우리 집에 가서 식사나 하기로 하지.”
차 안에서 줄리가 물었다.
“이 문제를 벌써 어머님하고 상의했나요?”
“10년 전이라면 상의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내 문제는 내가 결정해.” 사이몬이 조용하게 웃었다.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심한 충격을 받으시지 않을까요?”
“만일 줄 리가 거절한다면 굳이 어머니한테 알릴 것도 없지. 그리고 승낙한다면 어머니는 기뻐하실 거야. 지난 5년 동안 필사적으로 나를 결혼시키려 했으니까.”
“그러실 거예요. 하지만 나 같은 게 상대라면…….”
“줄리라면 더 바랄 것도 없지.” 사이몬은 핸들에서 손을 떼고 줄리의 손을 잡았다. “쓸데없는 열등감은 버리도록 해. 허영심이 강한 여자여서는 절대 안 되지만, 어느 정도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어. 언제나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싫어.”
로즈홀의 문 가까이 와서 기어를 바꿀 때까지 사이몬은 줄리의 손을 놓지 않았다.
현관에 차가 멎자 아치볼드가 달려나오 열렬하게 환영하는 바람에 줄리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것 봐, 이 개도 찬성하고 있잖아.” 사이몬은 싱글거리며 개를 줄리에게서 떼어놓았다.
티아난 부인은 거실에서 아이들의 옷과 속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줄리, 반가와요. 그동안 잘 있었어요?” 부인은 재봉용 안경을 아름다운 잿빛 머리 위로 올리고 줄리에게 키스했다. “해마다 이 일 때문에 바빠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달 명찰을 만들고 있어요. 금년엔 도미니크의 몫까지 있어서 일이 더 많군요.”
다른 사람은 모두 외출하고 없었다. 아이들은 바다, 샤로트와 에마는 쇼핑, 그리고 로브와 쌍둥이 형제는 직장에 나가 있었다.
점심은 양파를 곁들인 섬게 소테였는데, 줄리는 껍데기 속에서 먹음직한 오렌지빛 살을 꺼내며 말했다.
“솔리테일에 처음 갔을 때 섬게를 밟은 일이 있어요. 얼마나 아팠는지 몰라요. 바닷가에 쓰러져 소리쳤더니 하큐르가 와서 가시를 빼주었어요.”
“나도 한두 번 경험한 적이 있지. 모두 마찬가지야.”
“당신도 영국에서 학교를 다녔나요?” 줄리가 물었다.
티아난 부인이 대신 대답했다.
“남자들은 모두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지. 내 남편이, 아이들을 바베이도즈에서만 교육을 받게 하면 시야가 넓어지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은 사실이지만, 아이들이 집에서 떠날 때마다 나는 얼마나 섭섭했는지 몰라요. 사이몬의 경우는 더욱 그랬지. 이애는 12세까지 무척 수줍어하는 성격이었거든, 키도 작았고. 나중에 키가 불쑥 컸지만.”
“내가 얼마나 향수에 젖어 있었는지 어머니가 아셨다며 더욱 걱정했을 거야. 영국의 겨울은 엄청나게 추운데다 기숙사에는 난방도 되어 있지 않았어. 밤에는 이불을 몇 개나 덮었지. 비참한 생각에 울고 지낸 적도 많았어.”
“사이몬, 나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부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너는 무척 가고 싶어 했고, 크리스마스 때 돌아와서도 아주 즐겁다고 했잖니?”
“남자는 고통을 밖으로 드러내면 안 되죠.” 사이몬이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하기는 그런 고된 생활에도 곧 익숙해졌죠. 정말 고통스러웠던 것은 처음 1학기 동안이었어요.”
점심 후 사이몬이 일 때문에 나간 뒤, 줄리는 명찰의 리본 자르는 일을 도왔다.
“사이몬이 그토록 고생을 했다니. 그애는 어려서부터 냉정하고 독립심이 강한 아이였지. 아홉 살 때 나무에서 떨어져 어깨를 다쳤는데, 무척 아팠겠지만 울지 않았지. 그렇다고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야. 어린이들은 남 앞에서 어머니의 키스를 받는 것을 싫어하는 시기가 있잖아요? 사이몬은 그런 일이 한번도 없었지. 휴가 중에 친구를 데려와서도, 여럿이 있는 앞에서 내게 당당히 키스했어요.” 부인은 눈을 들어 줄리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너무 수다를 떨어서 미안해요. 늙은 여자가 자식 자랑을 하니 정말 꼴불견이지?”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요. 대가족이란 참 좋군요. 솔리테일에서는 루 아줌마네 아이들이 있어서 적적하지 않았지만요. 저도 앞으로 결코 한 아이만 갖지는 않겠어요.”
사이몬이 집에 돌아온 것은 오후의 차 마실 시간이 되어서였다. 그 후 사이몬은 줄리를 호텔로 데려다 주는 차 안에서 바베이도즈에서의 소년시절에 관해 이야기 해 주었다.
호텔에 닿아 차를 세우고서야 비로소 사이몬은 줄리에게 얼굴을 돌렸다.
“이젠 충격이 가라앉았나? 로즈홀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인지 결정을 내렸나?”
‘네……물론이에요. 당신과 같이 있다면 어디서든지 행복해요.’ 하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왜 그런지 줄리는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사이몬……하룻밤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겠어요?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요.”
“좋아, 내일 정오까지 기다리겠어. 그때까지 결심을 하지 못한다면 희망이 없는 것이겠지. 나도 오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나이가 아니야. 열 두 시에 공장에서 전화를 기다리겠어.”
“네, 알았어요. 내일 정오에 전화하겠어요.”
줄 리가 문을 열고 내리려 하자 사이몬이 그녀의 팔을 붙들고 내리지 못하게 했다.
“정말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될 경우에는 말이지, 지성보다도 감성에 의존하는 편이 틀림없어, 줄리.” 그는 귀에 선 어조로 말했다.
사이몬은 줄리의 손에서 목덜미로 손을 옮기더니, 부드러운 살갗을 조심스럽게 애무한 뒤 머리 속으로 손을 넣어 줄리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리게 했다.
줄리는 깜짝 놀랐다.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몸에서 힘이 빠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금이라도 쉽게 허락을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 줄리. 하지만 생각할 시간을 주겠어. 그러면 나중에.” 사이몬은 문을 열어 주고, 주리가 차에서 내리자 곧 맹속력으로 달려갔다.
줄리는 호텔의 복잡한 로비를 지나면서도, 이미 남의 시선에는 신경을 쓸 여유도 없이 자기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방 앞에 이르러서야 프런트에서 열쇠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깨닫고 다시 층계를 내려갔다.
방안에 들어선 줄리는 백을 던지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눈을 감자 사이몬의 부드러운 손길이 목덜미를 애무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줄리는 몸이 떨렸고,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지젤라가 옆방에서 들어왔다.
“돌아왔군. 어디 갔었지?”
줄리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옷장을 열고 옷을 정리하는 체하고 머리를 들이밀어 얼굴이 보이지 않게 했다.
“티아난의 집에 갔었어요. 그래 집을 구했나요?”
“아직. 하지만 시간은 충분하니까.” 지젤라는 발코니에 나가 긴의자에 우아하게 앉았다. 그러고는 30분 정도 이야기를 하고 나서 욕실로 갔다.
줄리는 지젤라의 발코니에서 저녁을 먹은 뒤, 머리가 아파 일찍 자겠다고 했다.
“그래. 나도 하루 종일 집을 보러 다녔더니 피곤해서 일찍 자야겠어. 그전에 잠시 산책이나 하고.” 지젤라가 말했다.
열 시쯤, 줄리는 커피와 비스킷을 주문하려다가, 지젤라도 무엇이 필요할 것 같아 문을 노크했으나, 불은 켜져 있는데 방은 비어 있었다. 두 시간 전에 산책에서 돌아오는 발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줄리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시간에 도대체 어디 간 것일까?
줄리는 재촉을 받기라도 한 듯 옷을 걸치고 지젤라를 찾으러 나섰다. 만일 이때 그녀가 방에 있었다면 줄리의 앞날은 크게 변했을 것이다.
호텔의 넓은 계단을 내려와 바로 앞에 있는 칵테일 바를 들여다본 줄리는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카운터 곁의 스툴에 걸터앉은, 짙은 화장에 어깨를 드러낸 흰 드레스 차림의 여자는 바로 지젤라였고, 더구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힌 턱시도우 차림의 중년 남자가 지젤라의 귀에 입을 대고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줄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나, 카운터 뒤의 거울에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사나이가 큰 소리로 웃자, 지젤라도 따라 웃으며 긴 속눈썹을 깜박이고 있었다.
그때 지젤라가 거울 속의 줄리를 보고 홱 고개를 돌렸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줄리는 충격과 분노가 뒤얽힌 표정이었고 지젤라는 낭패와 당황함이 뒤얽힌 복잡한 표정이었다.
줄리는 몸을 돌려 층계를 달려 올라와서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등을 문에 기대었다. 뜨거운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지젤라를 믿다니. 사이몬의 말이 옳다! 그것은 무슨 꿍꿍이셈이 있는 연극이었던 것이다. 아빠를 속였듯이 나도 속이려 했던 것이다.’
지젤라가 사잇문으로 들어왔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도망을 치고!”
“나가 주세요.” 줄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을 들어 봐, 줄리.”
“아니에요, 내 말부터 들으세요.” 줄리는 지젤라의 말을 가로막으며 노려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아직 9일밖에 되지 않았어요. 새엄마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존중하는 마음이 티끌만큼은 있어야 하는게 아니에요? 잠시 동안만이라도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수는 없나요?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나요?”
“나는 결코 나쁜 짓은 하지 않았어. 다만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야. 어째서 매일 밤 혼자서 여기에 있어야만 하지? 사람을 사귀는 것이 나쁠 것은 없잖아? 조니도 내가 다른 사람과 술 마시는 것을 나무라지는 않았어.” 지젤라가 화를 내며 말했다.
줄리의 분노는 갑자기 시들고 말았다. 체력도 정신력도 쇠퇴해서 끝없는 환멸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줄 리가 힘없이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다행이에요. 살아 계신 동안에 솔리테일에서 나왔더라면, 아버지는 당신이……얼마나 문란한 여잔지 알게 되었을 테니까요. 적어도 그것만은 모르고 돌아가신 게 다행이에요. 어서 나가 주세요. 나 혼자 있고 싶어요. 내일 아침 나는 여기서 떠나겠어요. 두 번 다시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 나가겠다는 것이지, 돈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지금은 모두 내가 갖고 있어. 너같이 건방진 계집애한테는 한푼도 주지 않겠어.”
“어떻게든 되겠죠.” 줄리는 욕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이튿날 아침 여덟 시에 줄리는 로즈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샘이 사이몬을 부르러 갔다.
몇 분 뒤, 홀 바닥의 대리석 위를 힘있게 걸어오는 사이몬의 발소리가 들렸다. 순간 줄리는 갑자기 목이 타는 것을 깨닫고 테이블 위의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줄린가?” 전화를 통해 들리는 사이몬의 음성은 평소보다 굵은 것 같았다.
“안, 안녕하세요? 저어……결심을 했기 때문에 알려드리려고요. 나, 당신과 결혼할 수 있다면 기쁘겠어요, 사이몬.”
아주 긴 침묵이 있었기 때문에 줄리는 전화가 끊기지 않았나 생각했다.
“여보세요, 듣고 있나요?”
“듣고 있어. 정말……잘 생각했어. 고마워, 줄리.”
사이몬의 어조에서 이상한 것을 느낀 줄 리가 물었다.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겠죠? 저어, 결혼 신청이 아직 유효한가요?”
가만히 웃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유효하다마다. 아침은 벌써 먹었나?”
“아직이에요, 지금 막 일어났으니까요.”
“그렇다면 어서 무언가 먹도록 해. 내가 45분 후쯤 갈 테니까, 같이 브리지타운으로 반지를 사러 가지.”
줄리는 아침 식사를 주문하고 지젤라의 방에 가서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30분 후에 나는 떠나겠어요. 만일 내게 연락할 일이 있으며 로즈홀로 하세요.”
지젤라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어마, 그래? 티아난 일가에게 의지할 생각이구나. 하지만 언제까지 계속되겠니? 길지 못할 거야.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작정이지?”
“나는 계속 거기서 살 거예요……사이몬의 아내로서.” 줄리는 침착하게 말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줄 리가 옷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지젤라가 들어왔다. 뜻밖에도 줄리의 말에 놀라거나 의아해 하는 기색도 없이, 문의 기두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축하해. 언제 결정지었지? 어젯밤인가? 왜 그때 나한테 말하지 않았지?”
“잠시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에.”
보이가 아침 식사를 날라 왔다.
보이가 나간 뒤 지젤라가 입을 열었다.
“그럼 너는 사이몬에 대해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버렸구나. 대단한 변화인 셈이군. 그가 처음 솔리테일에 왔을 때, 너는 그에게 참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은 그를 사랑하고 있어요……. 이상하게도 그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조용한 어조였다.
신랄한 조롱이 되돌아오리라 여겼으나 지젤라는 다만, “결혼식은 언제지?” 하고 물을 뿐이었다.
“모르겠어요. 자세한 것은 상의하지 않았으니까요.”
“너는 정말 운이 좋아. 사이몬과 같은 재산가는 대개 나이가 많은데 말이야. 앞으로 화려하게 살겠구나.”
“사이모니 한푼 없는 사람이라 해도 나는 결혼할 거예요.” 줄 리가 딱 잘라 말했다.
“그래……너는 로맨티스트니까. 하지만 호려한 생활도 즐거운 것이야. 결혼식에는 초대해 주겠지? 그러지 않는다면 남들이 이상하게 볼 거야. 또 매스컴에서 냄새를 맡고 귀찮게 굴지도 모르고. 그럼, 안녕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 다시 만날 테니까.” 지젤라는 웃으며 방을 나가 문을 닫았다.
줄 리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사이몬이 쿠페를 운전하고 왔다. 포터가 사이몬한테서 키를 받아 줄리의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짐을 갖고 나와서 이상하게 생각했겠죠? 다시 그 별채에 갖다 두어도 괜찮을지 모르겠군요. 당신 어머님께 폐가 되지 않을까요?”
“천만에, 나도 그러라고 말하려던 참이었어. 어머니께 우리 이야기를 했더니, 줄리에게 이것을 주라고 하시더군.” 사이몬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줄리가 봉투를 뜯으니 고급 편지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줄리양, 사이몬에게 빅 뉴스를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제발 안심하고, 오늘 저녁때 미래의 시어머니한테 오도록 해요. 같이 멋진 밤을 지내기로 해요. 샴페인을 준비하고 기다리겠어요. 앤>
“줄리, 어머니는 매우 기뻐하고 계셔. 그런데, 무슨 말을 썼지? 줄리를 울게 하다니.”
줄리의 눈에는 눈물이 괴어 있었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저 기뻐서.” 그녀는 목멘 소리로 대답했다.
사이몬이 웃으면서 줄리를 꼭 끌어안고 자기 손수건을 건네 주었다.
“역시 줄리도 여자로군.” 하면서 사이몬은 빙그레 웃었다.
사이몬이 미리 연락해 두었기 때문에 보석상에서는 약혼 반지를 여러 개 준비해 놓고 있었다. 줄리는 호화로운 반지를 하나 끼어 보았다.
“천천히 고르도록 해, 앞으로 평생 낄 반지니까.” 사이몬이 말했다.
줄리는 얼굴을 붉히고 행복에 빛나는 얼굴을 사이몬에게 돌렸다. 이제는 자기 마음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
“사파이어가 아주 잘 어울리는군요, 템플씨. 눈 빛깔과 같아서.” 보석상 주인이 공손하게 말했다.
줄리는 얼굴을 붉히며 웃었으나, 곧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나한테는 어느것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손이 까맣고 손톱도 길지 않으니까요. 저어, 저것을 끼어 보아도 될까요, 사이몬?”
줄 리가 가르킨 것은 앤티크한 브로우치나 로케트와 같은 접시에 들어 있는 반지였다. 금빛 하트 모양의 보석을 밝은 청색 터키석으로 둘러싼 것이었다.
상점 주인이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것은 예쁜 반지기는 하지만, 약혼 반지로서는 아무래도 좀…….” 빠른 말로 말하고 나서 사이몬에게 도움을 청하듯 억지로 웃어 보였다. “저것은 불과 48달러 짜리로서, 미국 여성들이 선물용으로 사는 것이죠.”
줄리는 이미 그 반지를 끼고 있었다.
“꼭 맞아요. 이것 보세요, 사이몬. 내 손에 어울리잖아요. 다른 것은 나한테 너무 커요. 이것이 예쁘고 좋아요. 이것으로 해도 좋을까요?”
사이몬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그것이 마음에 드나?”
“당신은요?” 줄 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다른 반지를 고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하지만 아까 그 반지는 비쌀 것 같고, 내 눈엔 별로 예뻐 보이지도 않아요. 그리고 이것은 아주 특이해요. 나는 이런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이것으로 하죠.” 사이몬이 상점 주인에게 말했다.
차에 오르기가 바쁘게 사이몬은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우스워요?” 줄 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이몬은 어깨를 들먹이며 계속 소리를 죽여 웃었다. “사이몬, 말해 주세요! 왜 그러세요?”
그는 줄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줄리는 정말 귀여운 아가씨야. 그 상점에 혼자 가면 못써. 상점 주인이 줄리의 목을 비틀지도 모르니까.”
“왜요? 무슨 뜻이에요?”
“그가 보여준 반지는 모두 수천 달러짜리야. 그런데도 줄리는 모두 싫다면서 싸구려를 샀으니까 주인으로서는 큰 충격이었겠지.”
“수천 달러! 그런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보지 않았을 거예요. 만일 그 큰 다이아몬드 반지를 샀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하죠? 당신은 아마 평생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비싸다고 좋은 것은 아니잖아요? 약혼 반지 역시 마찬가지예요.”
사이몬이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물론이지. 줄리의 말이 옳아.” 그는 줄리를 끌어안았다. “아직 줄리에게 키스한 적이 없지?”
줄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기서는 안 돼요……길에서 하다니.”
사이몬의 싸늘한 시선을 보고, 줄리는 강제로 키스를 당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사이몬은 줄리를 놓아주었다. “그렇군.” 하는 한 마디 말을 남기고.
사이몬은 항구의 선박 수리장으로 줄리를 데려갔다. 도크는 최근에 만든것으로서 수심도 깊고, 큰 순항선이 몇 척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수리장의 부두에는 여러 가지 모향의 매와 요트가 정박해 있었다. 브리지타운의 중심가에서 흘러내리는 자연적인 수로에는 다리가 둘 있으며, 그 위로 많은 차가 왕래하고 있었다.
“어마, 시페어알라 호가 있네요.” 줄 리가 외쳤다.
시페어알라 호에 타면 단둘이 있게 되어 키스할 수 있을 테니까, 사이몬이 타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의 품에 안기는 모습을 상상하자 줄리의 마음에는 기쁨과 불안이 교차했다. 일단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면 이 약혼을 실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현재로서는 이 약혼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장미꽃잎 위의 물방울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시페어알라 호에서 단둘이 있겠다는 생각을 사이몬은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다츠 상점에서 무얼 좀 마시기로 하지. 상의할 일도 여러 가지 있고.”
고다츠는 큰 식료품 상점으로서, 이층에는 레스토랑과 끽다점과 이발소가 있었다. 두 사람은 한길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서 목을 축였다.
“줄리는 당장 결혼하는 것이 좋겠나, 아니면 마음이 변치 않을 테니 약혼 기간이 긴 것이 좋겠나?”
“마음은 변치 않아요.” 줄 리가 부끄러운 듯이 대답했다.
“그러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얼마 되지 않고 하니 성대한 결혼식은 원치 않을 테니까, 다음주에 조촐하게 식을 올리면 어떨까? 그 후의 휴가에는 베가이에가서 루 아줌마와 하큐르를 만나고, 또 집을 다시 지으면 어떨까 생각해. 혹시 줄리는 당분간 솔리테일을 잊고 싶은 것은 아닌가?”
줄리는, 사이몬이 왜 허니문이라 하지 않고 휴가라 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솔리테일에서 돌아가신 것이라면 그런 생각도 하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니까 괜찮아요. 아버지는 내가 꼭 상복을 입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상복을 입고 거창하게 장례를 치르거나 성묘를 가서 꽃을 바치는 일 따위는 반대했어요. 그것은 그리스도교를 부인하는 것이라면서요. ‘꽃을 바치는 것은 산 사람을 위해서지.’ 라고 말했어요.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문장을 자주 인용했어요 - 기억하고 슬퍼하는 것보다 잊고 기뻐하는 것이 낫다, 고 말이에요. 나는 아버지를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그러나 기왕이면 즐겁게 추억하고 싶어요.”
점심 후 사이몬은 약혼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섬의 신문사에 갔기 때문에, 줄리는 30분 가량 상점을 구경했다. 문득 별갑(자라의 껍데기)을 장식한 작은 함이 눈이 띄었다. 값은 단 10달러에 불과했으며, 줄 리가 솔리테일에서 가져온 돈도 마침 10달러가 남아 있었다.
줄리는 그것을 사서, 사이몬이 돌아오자 건네 주었다.
“이것이 내 약혼 선물이에요. 이미 갖고 계신다면 다른 것으로 교환하겠어요.”
“아니, 내것은 이미 망가졌어. 정말 고마워, 줄리.” 사이몬이 빙긋 웃었다.
오후에는 둘이서 영화를 보았다. 줄리는 지금까지 한번도 영화를 본 일이 없었으므로, 극장 앞을 지날 때 사이몬에게 같이 보자고 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사이몬이 드디어 지젤라의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일에 대해 그녀가 어떤 태도를 보였지? 하숙집 경영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아주 태연했어요. 귀찮은 내가 스스로 물러나니 마음이 후련한 모양인지, 전혀 반대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이 말했듯이 그녀와 나는 절대로 사이가 좋아지지 못해요. 제가 그녀를 버린 셈이 되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일년 정도 살아갈 돈은 갖고 있을 거예요. 아마 그때까지는 재혼하리라 믿어요.”
“관광객하고라도 재혼하여 우리 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사이몬의 어조는 신랄했다.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줄리가 뜻을 잘 이해할 수 없어 반문하려 했을 때 차가 로즈홀에 도착했다.
티아난의 가족은 한결같이 사이몬의 약혼을 기뻐하고 있었다.
결혼식이 다음 주이기 때문에 웨딩드레스의 스타일을 급히 결정해야 한다는 티아난 부인과 샤로트와 에마의 말에 따라, 밤이 되자 네 사람은 산더미처럼 쌓인 패션 잡지를 들추었다. 줄리에게 있어서는 머리가 빙빙 돌 정도로 행복스런 시간이었다.
마침내 사이몬이 줄리를 별채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것은 또한 줄리가 그동안 은근히 기다리고 있던 시간이기도 했다.
저택에서 나와 아치볼드의 뒤를 따라 별채로 가면서 사이몬이 물었다.
“무척 피곤하지?”
“아니에요, 아직 끄떡없어요. 밤하늘이 정말 아름답군요.” 줄리는 빛나는 오리온좌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다이아몬드 한 개에 몇천 달러씩 지불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탄소 알갱이보다는 훨씬 더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별들이 저토록 많이 하늘에 뿌려져 있는데.
“어쨌든 잘 시간이 지났어. 어머니와 누이들의 성격으로 보아 내일 아침에는 새벽같이 줄리를 깨울 거야. 양장점에 드레스를 맞추러 왔다갔다하려면 앞으로 며칠은 무척 바쁠 거야.”
줄리는 사이몬의 손에 넌지시 자기 손을 미끄러뜨렸다.
“아직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아요.”
사이몬은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조롱하듯 웃으면서 말했다.
“줄리는 샴페인을 몇 잔이나 마셨지?”
줄리는 약간 실망했다. 좀 더 연인답게 로맨틱한 말을 해주었으면 하고 기대했던 것이다.
별채 입구에서 사이몬이 말했다.
“결혼식 의상을 생각하느라 밤을 새우면 안 돼. 내 신부가 충혈된 눈으로 식장에서 비틀거리며 걸어나와서는 꼴불견이니까. 자아, 그럼 잘 자.”
사이몬은 손을 놓고 줄리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한 뒤 돌아갔다.
줄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제대로 키스해 주지 않는 것일까?
이튿날 아침, 지젤라가 보낸 봉투가 배달되었다. 그속에는 4백 달러짜리 수표와 함께 쪽지가 들어 있었다.
<줄리, 웨딩드레스도 사야 하니 돈이 필요하겠지. 사이몬에게 부탁해서 현금으로 바꾸어 쓰도록 해. G>
줄리는 처음에는 그 수표를 반환할까 생각했다. 지젤라에게서 돈을 받을 바엔 차라리 빈손으로 결혼하는 편이 낫다. 그러나 이것이라도 받지 않으면 모든 비용을 사이몬이 지불하게 될 것을 생각하자, 줄리의 자존심이 꺾이고 말았다. 어차피 이것도 아버지의 유산이 아닌가. 더구나 극히 적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돈을 받는다 해도 지젤라에게 신세를 지는 것은 아니다.
사이몬도 줄 리가 처음 느낀 것과 같은 말을 했다.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어. 지젤라는 돈을 헤프게 쓰니까 단 1센트라도 아쉬울 거야.”
그러나 줄리는 그를 설득했다. 결국 사이몬도 줄리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현금으로 바꿔 주지……줄리의 생각이 그렇다면. 하지만 줄리의 생각은 찬성할 만한 것이 못 돼. 결혼한 뒤에는 내 말에 따르겠지?”
“이것만은 별도예요. 이렇게라도 하면 아버지가 결혼식에 참석한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아서 그래요.”
줄리는 지젤라와 결별하게 된 진상을 사이몬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혐오스런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끝난 일이다. 잊는 것이 상책이다.
사이모늬 말처럼, 결혼식을 앞둔 며칠 동안은 숨을 쉴 사이도 없을 만큼 바빴다.
티아난 부인은, 사이몬과 줄리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 안채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줄리는, 부인이 결혼 이후 계속 살아오면서 정이 든 방을 자기가 차지할 수는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여기가 두 사람의 집이야. 아이들이 모두 자라면 나는 별채로 옮길 생각이었는데, 이 기회에 블루룸으로 가겠어. 거기가 더 아늑하고 좋을 것 같아. 사실 지금의 방은, 남편이 죽은 뒤부터는 너무 넓고 쓸쓸하게 느껴졌거든.”
“그러면 저희가 마음이 편치 못해요. 저희야말로 별채에 사는 것이 마땅해요.”
“거기서 살면 사이몬이 비어져 나올걸.” 하며 부인은 방긋 웃었다.
결혼식 전날 밤, 아홉 시가 되자 사이몬이 줄리에게 일찍 자라고 하며 별채로 데려다 주려고 했을 때 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조, 줄리를 바래다 주지 않겠니? 그럼 줄리, 내일 아침 열 한 시야. 5분 이상 지각하면 안 돼. 잘 자.” 사이몬은 줄리의 손을 잡고 손목 안쪽에 키스했다.
달빛을 받은 뜰을 걸으면서 조가 농담처럼 물었다.
“벌써부터 가슴이 뛰는 모양이군요.”
줄리는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왠지 마음이 무거웠다. 어째서 사이몬은 전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마치 단둘이 있을 기회를 피할 수 있어서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지나친 생각을 한 것일까?
별채에 이르자 조가 말했다.
“줄리는 멋진 여성이에요. 사이몬은 억세게도 운이 좋군요.” 그는 두 손을 줄리의 어깨에 올려놓고 콧등에 키스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형수님.”
방에 들어가자 줄리는 생각에 잠겼다.
‘내일 이맘때면 나는 사이몬 티아난 부인이 된다. 그를 안 지 1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에게 내 일생을 맡기게 되다니, 이렇게 서둘러 결혼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 아닐까? 결혼 전야의 신부란 모두 이런 것일까……자신이 없고……불안하고……의심이 깊어지고……. 아마 사이몬도 긴장하고 있겠지. 그렇기에 잘 자라는 말만 하고 어물어물 넘긴 거겠지. 그는 언제나 자신에 차 있기 때문에 긴장한 것같이 보이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
침대 속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동안 줄리는 자신의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짧은 약혼 기간이었지만, 사이몬은 한번도 줄리와 단둘만의 시간을 가지며 사랑을 나누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사려가 깊고 매력적이었으나, 정열적인 면은 전혀 없었다. 줄리의 뺨에 키스를 하고 손목을 잡거나 허리나 어깨에 팔을 돌리는 일은 있었지만, 입술에 키스하거나 사랑의 말은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분명히 약혼 기간은 8일에 지나지 않았고, 줄리는 결혼식 준비에, 사이몬은 공장 일에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그렇더라도 대부분의 남자는 어떻게 해서라도 약혼자를 한두 번쯤은 자기만의 것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이상할 만큼 신중한 사이몬의 태도를, 줄리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약혼에서 결혼까지의 기간이 너무 짧기 때문에, 아낌없이 정열을 쏟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철저하게 내성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티아난 부인도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이몬은, 일단 줄리를 함락시키고 나면 더 이상 감정에 브레이크를 걸지 못할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리라. 줄 리가 아직 어리고 순진하기 때문에 깜짝 놀라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줄리는 홀아비의 손에 자라서 아무것도 모를 것이므로 특별히 참을성 있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열 시 반이 되자 신랑은 이미 그 들러리인 로브와 식장으로 출발했고, 줄리도 샤로트의 방에서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줄리는 온몸이 비치는 채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설탕공장에서 사이몬이 결혼 신청을 하면서 하던 말을 생각했다.
‘우선 줄리는 미인이야. 결코 금발만이 미인은 아니니까.’
지금 엷은 실크 베일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줄리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이야……나는 정말 아름다워. 이 드레스에 흰 꽃까지 장식하고……오늘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아……아주 예뻐. 아아 사이몬, 그리운 사이몬, 정성을 다해 당신을 행복하게 해드리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2킬로 반쯤 떨어진 교회를 향해 출발한 뒤, 줄리는 제임즈와 단둘이 남았다. 제임즈가 샴페인 한 잔을 줄리에게 건네 주었다.
“긴장을 풀어요.” 그러고는, 열 한 시 5분 전에 줄리를 차에 태우고 일로 교회를 향해 달렸다.
도중에, 노새가 끄는 짐차에 탄 갈색 피부의 사나이들이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자 줄리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시원해지고 기쁨이 솟아올랐다.
줄리가 외쳤다.
“아아, 제임즈, 나는 무척 행복해요.”
제임즈도 웃으며 줄리의 무릎을 탁 쳤다.
“매우 아름다워요. 자신도 알고 있나요? 사이몬이 보면 기절하겠는데.”
줄 리가 웃으며 말했다.
“어마, 그러면 곤란해요! 식도 올리기 전에 신랑한테 진정제를 주게 되면 어쩌죠?”
조가 식장에서 줄리를 에스코트하자, 그녀는 순간 아버지 생각이 났다. 갑자기 슬픔이 솟구쳐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줄리는 깜짝 놀라 눈을 깜박이며 머리를 들었다. 그녀는 조의 팔에 손을 올려놓고, 사이모니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나갔다.
인생에서 가장 기념할 만한 시간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지금은 다시 집에 돌아와 있다. 사람들은 테라스에서 줄리를 둘러싸고, 정말 아름다운 신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집을 나서기 전 제임즈로부터 샴페인 글라스를 받았을 대부터 지금이 글라스를 들기까지가 마치 순간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화장을 지울 시간이에요.” 샤로트가 즐거운 듯이 말하고 줄리를 이층으로 데려갔다.
테라스에서 떨어져 있는 침실은 조용하기만 했다. 결혼식과 피로연에 초대한 사람은 불과 18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티아난 일가와 고용인들을 합이면 모두 40명이 파티에 모인 것이다.
“신부가 새로 갈아입은 옷이 셔츠와 핑크빛 진즈, 그리고 즈크화라니.” 하고 웃으면서 샤로트는 줄리의 머리 장식을 가만히 떼었다. “사이몬은 10분 전에 몰래 빠져나갔어요. 네, 들어오세요.” 누군가가 문을 노크하고 있었다.
지젤라였다.
“잠시 줄리와 단둘이 있고 싶은데요.” 그녀가 애교있게 말했다.
샤로트가 약간 표정을 굳혔다.
“시간이 별로 없어요, 곧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잠깐이면 돼요.” 지젤라는 의자에 앉으며 날씬한 다리를 포갰다.
“혼자 갈아입을 수 있겠어요?” 샤로트가 어쩌면 좋겠냐는 듯이 줄리를 보며 말했다.
“네……파스너만 내려 주겠어요?”
샤로트는 줄리의 드레스의 파스너를 내리고는, 예리한 시선을 지젤라에게 던진 뒤 나갔다.
“네 동서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나.” 역겨운 듯이 말하고 지젤라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름다운 신부야. 허니문은 어디로 가지?”
“베기아로요, 루 아줌마를 만나기 위해서.”
지젤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 그래? 잘됐구나. 그런데 내가 왜 왔는지 궁금하겠지?‘
“축하하러 온 것이겠죠.” 줄리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드레스를 벗어 행거에 걸었다.
“물론이지. 하지만 또 한 가지, 네가 새생활을 스타트하기 전에 해둘 이야기가 있어.”
“무슨 말인데요?” 줄리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아버지의 유산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내 도움이 없었다면 네가 이런 호강을 하지 못했을 것이란 말이야.”
“무슨 뜻이죠?”
“나는 남의 가면을 벗기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실만은 직시해야 해. 사이몬은 너한테 티끌만큼도 프러포즈할 생각이 없었지만, 내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던 거야. 그렇게 해야 네가 평생 안락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찬스를 만들어 준 거야.”
기뻐해야 할 날이었는데도 줄리는 갑자기 오한을 느꼈다.
“저어, 내 결혼을 엉망으로 만들 생각이라면…….”
“정 반대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지. 불행해질 까닭이 없어……네가 현명하게 처신하기만 한다면 말이지. 사이몬은 절박한 상황에서 프러포즈했을 텐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모양이군. 결혼을 방편으로 삼는 사람도 흔히 있는 법이지. 타산적으로 결혼한 부부라도 차차 진정한 애정이 싹트기도 하는 법이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 결혼을 어째서 방편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네가 분개했던 그 신문기사를 기억하고 있겠지? 우라간에서 사이몬과 네가 함께 하룻밤을 지냈다는 그 의미심장한 기사 말이야.”
“의미심장하다구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미소 짓는 지젤라의 눈은, 먹이에 덤벼들려는 고양이처럼 이상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해의 여지라도 남겨 두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무슨 일이건 나쁘게 해석하려고 들거든. 그리고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사이몬은 많은 여자 관계로 소문이 나 있었어. 앞으로는 물론 모범적인 남편이 되겠지만, 과거에는 젊음으로 인한 잘못이 많았어. 하지만 그를 나무라면 안 돼. 아주 매력적인 남성이어서 스스로 몸을 던져오는 여성이 많았기 때문일 테니까.”
줄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사이몬의 과거는 나하고 아무 관계도 없어요.”
“하지만 간접적으로는 관계가 있어. 남자는 어떤 일이 있었건 상관없지만, 여자 이름에는 곧 상처가 남지. 네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우라간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없어.”
줄리는 한참 동안 그 뜻을 몰랐으나, 마침내 의미를 깨닫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중상 모략을 하다니!” 줄리는 격분했다.
“그렇겠지. 사이몬이 기사도 정신을 발휘했겠지. 하지만 그 어머니는 정반대의 일을 상상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내가 사이몬에게 전화를 걸어 이 결혼을 강요하다시피 한 거야. 그는 순순히 승낙하더군. 네 소문이 언짢게 나리라는 것을 그는 금방 깨달은 모양이었어. 변명은 통하지 않을 테니까, 나머지 방법은 결혼밖에 없었던 거지.”
줄리는 새파랗게 질려서 온몸을 떨었다.
“서, 설마 그럴 리가……. 믿을 수 없어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렇게까지 비겁하지는 못할 거예요. 마치 사이몬을 협박한 것 같군요. 그렇게 엄청난 일을 나는 믿지 못하겠어요!”
“네가 충격을 받을지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었어. 하지만 너 자신도 말하지 않았니, 그가 너를 사랑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이야. 네가 호텔에서 나가던 날 아침이었어. 기억하고 있니?”
‘아아, 이를 어쩐담! 그게 사실이야. 그렇기에 그는 한 번도 키스해 주지 않았던 거야. 지젤라의 강요로 결혼한 것일 뿐, 나를 사랑하지는 않는 것이다. 왜 나와 결혼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는 대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가 지극히 평범한 감정을 품는 것이 그렇게 이상하냐고 그는 되물었던 것이다. 아아 사이몬, 어째서 지젤라의 농간에 넘어갔나요?’
줄 리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했어요? 나 때문이라는 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너를 위해서기도 했어.” 지젤라는 발을 흔들면서 자신의 아름다운 각선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한테도 이익이 돌아올 것 같아서였지. 내가 돈을 헤프게 쓴다는 것은 너도 알잖니. 그래서, 혹시 돈이 부족해지기라도 하면 너한테 도움을 청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잖니, 줄리. 사이몬은 노랑이가 아니고 너도 사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불쌍한 과부 계모에게 줄 돈쯤은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 거야.” 지젤라가 방울을 흔드는 듯한 소리로 웃었다.
이때 문이 열리면서 사이몬이 들어왔다.
“준비는 됐나?” 지젤라를 본 사이몬은 혐오의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지젤라의 저주스러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제 곧 끝나요.” 지젤라가 명랑하게 말했다. “자, 그럼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요.” 지젤라가 천천히 나가고 방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7
줄리는 맨발에 흰 레이스의 브래지어와 팬티만을 입고, 새틴 리본을 꼭 쥔 채 햇빛이 잘 드는 샤로트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멋진 장래에 대한 꿈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미안하군. 아직 준비가 덜 된 줄은 몰랐어.” 사이몬은 문을 닫고 줄리에게 얼굴을 돌렸다. “하지만 줄리는 이미 내 아내요. 어때, 결혼한 심정이?” 사이몬은 줄리의 날씬한 금갈색 몸에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솔리테일의 줄리 그대로로군. 잠깐 이리 와 주겠나, 응, 줄리?”
‘얼마나 멋진 연긴가. 그러니까 내가 알 리가 없었지. 그러고 보니 나도 어젯밤에는 진실을 좀 깨달았었는데……그러나 눈을 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믿는 것만을 확신하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줄리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침착하게 말했다.
“5분만 기다려 주세요, 사이몬.”
줄리는 시페어알라 호에 타기 위해 입을 옷을 가지고 옆의 욕실로 들어갔다.
“지젤라는 무엇 때문에 여기 왔었지?” 사이몬이 문 저쪽에서 물었다.
“내 웨딩드레스가 아름답다는 말을 하러 왔었어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지……단 몇 분만이라도. 침착을 되찾기까지 그와 얼굴을 대하지 말아야지.’ 줄리는 필사적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줄리는 문에 기대어 가만히 열쇠를 잠갔다.
“사이몬, 시계를 별채에 두고 왔는데 갖다 주시겠어요? 아마 침대 옆의 테이블에 있을 거예요.”
“응, 알았어.”
사이몬이 방에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줄리는 속이 메스꺼워졌다. 정말 구토가 날 것만 같았다. 구토증이 멎은 뒤 그녀는 세면대에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몇 시간 전에 샤로트가 정성껏 칠해준 마스카라가 깨끗이 씻겨져 내렸다.
줄리는 정성들여 신부 화장을 말끔히 씻고 옷을 입은 뒤 머리를 풀었다. 그러고 욕조에 걸터앉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사이몬은 도중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20분 후에야 현관에 나타났다.
줄리는 저택의 정면에 세워 둔 차에 타고, 배웅나온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가져왔어.” 사이몬은 줄리의 무릎에 시계를 던져 주고 뒤로 돌아서서 어머니에게 작별의 키스를 했다.
차는 색종이 세례를 받으며 출발했다. 자동차 꽁무니에서는 관습에 따라 매달아 놓은 깡통과 남비가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미니크의 짓이야, 분명히.” 빙긋 웃은 사이몬은 문 밖에 나오자 차를 세우고 그것들을 떼어 버렸다.
시페어알라 호는 사이몬이 미리, 로즈홀과 가까운 선창으로 옮겨 두었었다.
배에 오르자 사이몬이 말했다.
“줄 리가 깜짝 놀랄 일이 있어. 날이 저물 때까지 베기아에 도착할 수는 없고, 이 배의 침실에서 둘이 잘 수도 없을 거야. 그래서 데이비드 벤슨에게 비치 하우스를 빌려 달라고 부탁해 놓았어. 사람이 별로 없는 서쪽의 작은 만에 있지. 벤슨의 가족은 주말에만 사용하니까 아무도 없어. 오늘 밤은 우리 단둘이 쓸 수 있어.”
“어마, 멋지군요.” 줄리는 기쁜 듯이 말했으나, 내심으로는 울적해 있었다. 샤로트의 방 욕실로 도망쳤던 그 잠시 동안에, 줄리는 마음속으로 결심했었다. 자신의 자유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줄리를 스캔들의 오명에서 지켜 주기 위해 연기를 하는 사이몬에게 그녀도 박자를 맞출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그에게 진실을 알고 있다는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더욱 고통스러운 입장에 몰릴 뿐이다. 줄 리가 모르고 있다고 여기는 한, 아마 그도 그리 심하게 자존심을 상하지 않고 연기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을 사이몬이 눈치챈다면, 그땐 사이몬이라도 거짓 사랑을 계속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굴욕감에 사로잡힐 것이 분명하다.
두 사람은 분명히 결혼했으니 이젠 취소할 수도 없다. 어떻게든 파멸시키려는 지젤라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줄리 자신도 사이몬처럼 자신의 역할을 멋지게 연기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아아, 정말 쉬운 일이 아니야.’ 줄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배는 선창을 떠났다.
두 사람은 다섯 시가 되자 비치 하우스에 도착했다. 줄 리가 차를 끓이고 두 사람은 베란다에 나가 같이 마셨다.
사이몬이 잠시 수영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어서 두 사람은 30분쯤 물에서 지냈다. 사이몬이 바닷가로 헤엄쳐 왔기 때문에 줄리도 할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모래밭에 누워 몸을 말렸다. 사이몬은 위를 보고 누웠으나 줄리는 엎드려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사이몬이 조용히 불렀다.
“줄리?”
“네……?” 줄리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대답했다.
하늘은 온통 유리빛으로 물들고 잔잔한 파도는 암초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모래의 촉감도 좋았다.
“자는 줄 알았어.”
“아니에요……잠들지 않았어요.”
“아까 줄 리가 샤로트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내가 들어갔더니 겁먹은 토끼처럼 도망치던데, 혹시 내가 무서운 것은 아니겠지?”
“당신이 무서워요? 당치도 않아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당신은 내 남편인걸요.”
“물론이지.”
줄리는 순간 눈을 감고 용기를 내서 두 팔꿈치를 짚고 사이몬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섭지 않아요, 사이몬.”
그는 바로 옆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햇볕에 탄 줄리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았다.
“부끄러운가? 그렇지?”
“네……약간. 하지만 이제 괜찮아요.” 줄리는 자신의 웃는 얼굴이 어색해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사이몬이 다정하게 말했다.
“당분간 줄리에게는 바쁜 나날이 계속될 것이고, 지겹게 여겨질 거야. 그러고 나서 한가해질 테지……마음 편히 휴양하게 될 거야.”
‘마음 편히! 그 무슨 빈정거림일까!’
“여기는 참 좋은 곳이군요……솔리테일 같아요. 저어, 배가 고프지 않으세요? 저녁을 지을까요?”
“냉장고에 모두 들어 있어. 내가 어제 넣어두었지. 다시 손댈 필요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야. 나는 아직 배가 고프지 않은데, 줄리는?”
“아뇨, 전혀 고프지 않아요. 피로연 때 많이 먹었으니까요.”
어깨에 놓인 사이몬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키스해 줘, 줄리.”
드디어 때가 왔다. 이것이 최초의 시련인 것이다. 그녀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앞으로의 일이 크게 좌우될 것이다. 줄리는 눈을 감고 사이몬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의 입술은 따뜻하고 치약 냄새가 약간 났다. 여기까지는 원만히 진행되었다. 사이몬은 아무 반응도 나타내지 않고, 다만 입술과 갈색 뺨에 가벼운 키스를 받으며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사이몬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키스하려 했을 때, 줄리는 갑자기 자신을 억제할 수 없게 되어 몸을 비틀고 벌떡 일어났다.
“여기서는 안 돼요. 남이 봐요.” 줄리는 애써 웃는 낯을 지었다.
사이몬도 천천히 일어났다.
“누가 본다는 것이지? 아무도 없는데.” 사이몬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배는 고프지 않지만 시원한 것이 마시고 싶군. 자아, 이리 와, 부끄러워하지 말고.”
사이몬이 음료수를 만들고 있는 동안, 줄리는 침실에 들어가 핑크빛 선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더블베드가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모른체할 수만 있다면……지젤라의 냉소를 기억에서 말살할 수만 있다면…….
줄 리가 거실로 돌아오자 사이몬은 레코드를 한 장 골라 플레이어에 올려놓았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라는 뮤지컬 중의 한 곡이지.” 하고 사이몬이 설명했다.
두 사람은 다시 베란다에 나가 글라스를 기울이면서 파도를 바라보았다. 레코드 중의 한 곡은 줄리로서도 그 곡명이 「투나이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투나이트……투나이트……. 같은 말이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사이몬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줄리는 얼굴을 붉혔다.
“저어, 나도 춤을 배워야 하겠지요?” 맑은 목소리였으나 상기되어 있었다.
“간단하지. 내가 가르쳐 주겠어.” 그가 다가와 줄리의 두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보통은 플로어가 혼잡하기 때문에 춤추며 돌 수가 없어서 그저 껴안고 발을 움직일 뿐이지, 이런 식으로.” 사이몬은 줄리를 꼭 껴안고 춤을 추었다.
“내 키가 너무 작죠?” 줄리는 대화를 중단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이힐을 신으면 꼭 알맞겠는데.”
갑자기 사이몬이 줄리를 남겨 놓고 주방으로 갔다.
“자아, 식사해야지.” 하고 그가 불렀다.
치킨과 샐러드, 딸기, 그리고 크림이 놓여 있고 샴페인도 한 병 놓여 있었다.
‘몇 잔을 마시면 참을 수 있게 될 것인가.’ 하고 줄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마시려 해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아 결국 한 잔을 마셨을 뿐이었다.
식사하는 동안 사이몬은 제당산업의 역사와 서인도 제도에서 생산되는 럼의 종류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부끄러운 나머지 굳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내 기분을 풀어 주려고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이토록 자상한 사이몬을 줄리는 마음으로부터 연모하고 있었다. 덕택에 그녀도 다소나마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사이몬과 같이라면 틀림없이 원만히 살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실제로 그가 살을 대거나 키스를 한다면 마음이 위축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와 달리 사랑이 없어도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책에서 읽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마음과 머리를 몸에서 뗄 수 없는 것이 보통이어서 어중간한 관계란 있을 수가 없다. 온몸과 마음을 바칠 뿐이다. 사이몬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에게 몸을 맡기는 것을 원하면 원할수록 줄리는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이 두려웠다.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만큼, 고뇌와 기쁨 사이에서 흔들리는 자신이 무서웠다.
식사가 끝나자 줄 리가 접시를 씻고 사이몬은 그것을 닦았다. 그 뒤 그는 시가에 불을 붙이고 다른 레코드를 틀고는 천천히 베란다로 걸어갔다. 줄리는 주방에서 나머지를 정리했다.
줄 리가 베란다에 나가 보니 사이몬은 등의자에 앉아 있었다. 줄리는 다른 의자에 앉을 수도 있었으나 애써 그 옆에 앉았다. 주위는 이미 어두워졌고 바다는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야자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사이몬이 시가를 다 피우는 데는 15분 정도가 걸렸다. 그동안 줄리는 타고 있는 담뱃불 끝을, 마치 천천히 타들어가는 도화선인 양 바라보고 있었다.
“피곤한가?” 사이몬이 물었다.
긴 침묵 끝이었기 때문에 줄리는 사이몬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어마, 깜짝 놀랐어요. 나는……나는 마치 먼 곳에 가 있었던 기분이에요.”
사이몬은 꽁초를 재떨이에 버렸다.
“어디에 가 있었지?”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말을 잘못 했어요. 그런데 이 곡은 뭐죠?”
사이몬이 줄리의 어깨에 왼팔을 돌렸다.
“차이코프스키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지. 발레 음악이야. 마음에 드나?” 그는 다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줄리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네, 하지만 나는 발레를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은 보셨겠죠?”
“런던의 코벨트 가든에서 보았어. 언젠가 같이 보러 가지. 머리 냄새가 좋군.”
아까 수영하러 갔을 때, 난생 처음으로 수영모를 썼던 탓에 머리의 세트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머님이 주신 프랑스제 향수예요……방베르라는.”
“음……이 냄새, 마음에 드는군.” 그는 줄리의 왼손을 잡아 자기 뺨으로 가져갔다. “수염을 깎아야겠군.”
줄 리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어마, 밤에 깎나요? 아침에 깎는 줄 알았어요.”
“독신 남자는 아침에 수염을 깎지만 남편족은 밤에 깎아.” 사이몬이 웃으며 말했다.
줄리는 마치 학질에라도 걸린 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었고 참으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심해질 뿐이었다.
사이몬이 그녀의 턱을 쳐들어 억지로 자기를 마주 보게 하고 말했다.
“바보로군, 줄리는 지금 겁을 먹고 제정신을 잃어 가고 있어. 무서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줄리.”
“알고 있어요. 잘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는걸요.” 줄리는 당장에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사이몬이 일어나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줄리, 지금은 너무나 피곤한 모양이군. 그것뿐이야. 지난 몇 주일 동안 줄리는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어서 그 반동으로……. 걱정할 것은 없어. 침대에 가서 자도록 해. 아침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깨끗해질 테니까. 나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것 없어. 좀 더 수영을 한 다음 아이들 방에 가서 자겠어. 그러면 내가 일어나더라도 줄리를 깨우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고 말하고는 줄리의 이마에 키스했다. “내일엔 내일의 바람이 부는 법이야. 그러니 담요를 덮고 푹 자도록 해, 줄리는 착한 아가씨니까.”
이튿날 아침 줄 리가 눈을 뜬 것은 아홉 시였다. 그러나 사이몬이 일어난 기색은 없었다. 해변에도 바다에도 그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줄리는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베란다를 발 뒤꿈치를 들고 걸어 또 하나의 침실을 가만히 열었다.
사이몬이 자고 있었다. 한 팔은 베개 위에 있고, 다른 한 팔은 침대 아래로 늘어져 손끝이 카펫에 닿아 있었다. 짙은 회색 파자마는 바지만 입었고 상의는 이불과 함께 어디로 갔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사이몬이 일어난 것은 한 시간 뒤의 일이었다. 그 무렵 줄리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어젯밤의 줄리는 흥분한 나머지 히스테릭해져 있었으나, 오늘 아침에는 냉정을 되찾고 머리도 맑아져 앞으로의 일을 충분히 생각할 수가 있었다.
사이몬이 거실에 들어왔을 때는 삶은 달걀이 테이블에 준비되어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줄리가 말했다.
“잘 잤나? 일어난 지 얼마나 됐지?”
“한 시간 반쯤 되었어요.”
“깨워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어. 베기아로 출발할 시간이 늦으면 곤란한데.”
“들여다보았더니 너무나 곤하게 주무시고 있어서 깨울 수가 없었어요.”
“줄리는 잘 잤나?”
“네, 깊이. 고마워요.”
식사하는 동안 둘은 남남처럼 잡담만 나누었다……호텔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동석하게 된 사람들처럼.
마침내 줄리는 사이몬에게 두 잔째의 차를 따르면서 입을 열었다.
“사이몬, 어젯저녁 이야기말인데요…….” 미리 생각했던 말을 할 작정이었으나 사이몬이 가로막았다.
“줄리, 결코 변명하거나 사과할 필요는 없어. 이것봐, 만일 내가 75세까지 산다면 우리는 꼬박 1만 5천 일을 같이 살게 되는 거야. 시간은 충분히 있어. 어제의 일은 잊어버리도록 해. 줄리는 극도로 피곤하고 긴장되어 있었어. 나는 다 알아.”
“아니, 알지 못해요, 사이몬.” 줄 리가,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순한 피로였으면 좋았겠지만……그보다 훨씬 더 나쁜 일이었어요. 나는 무서운 일을 저지르고 말았어요. 당신에게 이야기해야 하겠어요……부탁이에요, 들어 주세요.”
“무서운 일? 줄리가 할 수 있는 무서운 일이 무엇일까?” 사이몬이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머리가 혼란한 상태로 당신과 결혼했어요. 지젤라와 같이 살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자활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어요. 그럴 무렵 당신이, 로즈홀에서 어머님이나 샤로트와 같이 살자는 말을 했기 때문에 나는 승낙했던 거예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어떤 상황인지. 모든 것이 아찔하여 생각할 틈도 없었어요. 그리고, 어제 결혼식을 올린 다음에야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어요……얼마나 무서운 일을 저질렀는지 몰라요.” 줄리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알잖아요? 나는 당신의 살이 닿기만 해도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그런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알지 못했어요. 하지만……몸이 자지러지는 것 같아요.”
줄리는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 거짓된 연극의 막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줄리는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다. 진상을 알고 있다고 말해도 사이몬은 부인할 것이다. 그가 희생을 무릅쓰고 한 결혼인데, 어떻게 뒤에서 재를 뿌린단 말인가? ‘스스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왜 나하고 결혼했죠?’ 하는 말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을 것인가?
역시 줄리는 자기가 비난을 받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사이몬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살이 맞닿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한다면 분명히 그의 자존심이 상처받을 것이다. 더구나, 로즈홀과 그의 가족에 매료되어 결혼할 생각이 들었다고 사이몬이 생각하게 된다면, 그가 기꺼이 줄리로부터 손을 떼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알았어.” 오랜 침묵 끝에 사이몬이 말했다. 그의 표정을 불가사의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줄리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줄리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로군. 그렇게 하면 말이 통하리라고 생각했었나? 여자란 가끔 이상한 생각을 하는 법이지만, 지금 그 말을 줄리의 아버지가 들었다면 사실로 믿었을까? 무서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줄리. 나를 믿지 못하겠나?” 조용한 어조였다. 줄 리가 곧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몬이 말을 계속했다. “이것 봐, 바다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많아. 상어가 있고 독초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위험이 크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그것은 바다를 모르기 때문이야. 용기를 내어 바다에 뛰어들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지.”
“아아 사이몬, 그런 것이 아니에요.” 비통한 목소리로 줄리가 가로막았다. “나는 가공적인 것에 겁을 먹고 있지는 않아요. 결혼이 멋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 하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들의 경우예요. 우리는 달라요.”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거야? 결혼은 모자를 사는 것과는 달라. 나중에 싫어져도 반품을 하지는 못해.” 사이몬이 싸늘하게 말했다.
줄리는 비참한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현재와 같은 심정으로 그대로 계속할 수는 없어요. 내가 떠나야 하겠어요, 사이몬. 진지하게 생각한 끝에 하는 말이에요. 영국에 갈 여비만 주신다면 간호원 훈련을 받을까 해요. 샬리의 사촌이 간호원이라더군요. 영국에는 간호원이 부족하다면서요? 기숙사 생활을 하니까 안전하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사이몬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간호원은 천직이지 겁먹은 신부가 도망쳐 들어가는 수녀원이 아니야. 줄리는 내 아내야……앞으로도 계속. 다음 주쯤 되면, 내가 그때 왜 그처럼 어리석었었나, 하고 웃게 될 거야, 틀림없어. 자, 뒷정리나 하지. 그러지 않으면 오늘 밤 안으로 베기아에 가지 못해.” 사이몬은 쟁반을 가지러 주방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말했다. “오늘 밤의 일로 해가 질 때까지 겁만 먹고 있을 필요는 없어. 당분간 나는 거실용 선실에서 자겠어. 어젯밤에도 말했지만, 줄리는 계속 고통스러운 생각만 해왔으니 신경이 날카로와진 것도 당연해. 그러니 줄리가 안정을 되찾기까지 우리는 휴가를 같이 즐기는 친구처럼 지내기로 해, 단순한 친구처럼 말이야. 좋겠지?”
시페어알라 호는 베기아 앞바다에 8일 동안 정박해 있었다. 그 사이에 사이몬은 솔리테일의 집을 다시 지을 준비를 갖추고, 하큐르를 위해서 새로 작은 배를 하나 샀다.
줄리는 사이몬의 지시로 루 아줌마와 아이들과 함께 계속 베기아에 머물고, 사이몬과 하큐르 두 사람은 이곳저곳의 섬으로 뛰어다녔다.
루 아줌마는 조나단의 죽음에 정신을 잃을 듯했으나, 줄리의 결혼이라는 희소식을 접하고 슬픔을 어느 정도 잊은 듯했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사이몬을 솔리테일 섬으로 보내준 것을 신께 감사를 드렸다.
베기아에서 떠나는 날 아침, 줄리는 배의 침대를 정리하다가 작은 성냥갑만한 헝겊 주머니를 이불 미에서 발견했다. 그것을 누가 무슨 목적으로 거기 두었는지 알 수 있었다. 갑판에 올라가 버릴 생각으로 그것을 쇼트 팬츠의 포켓에 넣었으나, 아침을 짓느라고 그만 잊고 말았다.
식사 후, 마루에 떨어져 있는 그 주머니를 사이몬이 발견했다.
“도대체 이게 뭐지?” 그는 주머니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줄 리가 그것을 빼앗아 도로 포켓에 넣었다. 손수건을 꺼낼 때 떨어진 모양이었다.
“부적 같은 것인가? 줄리는 물론 마법을 믿지 않을 테지?”
“몰론이죠. 이것은 루 아줌마 것이에요.” 줄리는 몹시 당황해 하며 말했다.
“어째서 그것이 배에 있지?”
“정 알고 싶으면 말하겠어요. 이불 속에 들어 있었어요. 아줌마가 시켜 투산이나 벤자민이 헤엄쳐 와서 넣어두었을 거예요. 이것은 행운의 마스코트예요. 아마 바베이도즈까지 무사하기를 비는 부적일 테죠.” 줄리는 빨리 그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우리에게 아들이 생기도록 바라는 부적이 아닐까?” 사이몬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사이몬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줄리는 목까지 빨개졌다.
자포자기적인 심정으로 줄 리가 말했다.
“사이몬, 이런 상태를 더 계속할 수는 없어요. 내가 아직 흥분 상태에 있기 때문에 좀 더 휴양할 필요가 있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나는 그런 신경질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이토록 관대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어도 소용없어요. 나는 점점 더 비참해질 뿐이에요. 부탁이에요, 보내 주세요. 당신과 같이 바베이도즈에 돌아갈 수는 없어요.”
“어디로 보내 달라는 말이지? 줄리가 갈 곳은 아무데도 없어. 줄리에겐 내가 필요해.” 점잖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어요. 앞으로도 계속……” 줄리는 입을 다물고 등을 돌렸다.
사이몬이 그녀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았다. 결혼식날 이후, 필요할 때 외에 그가 줄리에게 손을 댄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내 말을 들어, 줄리.” 사이몬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거기에는 단호한 결의가 깃들여 있었다. “나는 결심했어. 줄 리가 무슨 말을 하건 내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 앞으로 6개월 동안 현재의 상태를 계속 하는 거야. 그때에도 줄 리가 내게서 떠나겠다면, 절차를 밟아 결혼을 무효화시키면 돼. 줄리는 그때 새출발하면 될 거야. 그 무렵이면 자활할 능력도 생기겠지.”
“결혼을 무효화하다니, 무슨 뜻이죠?”
사이몬이 줄리의 얼굴을 똑바로 들게 했다.
“만일 우리의 관계가 현상태대로 유지된다면, 결혼 무효를 신고하는 경우 모든 구속력이 없어지게 되지. 그리고 줄리에게 한 가지 분명히 약속해 두겠어. 남 앞에서는 우리가 보통 부부인 것 같이 행동하겠어. 그러나 단둘이 있을 때는 현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겠어. 줄리의 마음이 변했다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한 절대로 접근하지 않겠어.” 사이몬은 두 손을 힘없이 떨구고 그대로 갑판으로 올라갔다. <여기까지>
결혼한 지 6주일이 지났을 무렵의 티아난 가는, 소년들은 모두 학교에 갔고 에마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으며, 샤로트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 있었다.
조는 자진해서 줄리에게 자동차 운전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운동신경이 발달했기 때문에, 몇 번 배우지 않아서 곧 운전기술을 터득했다. 조도 그 정도면 면허시험을 치러도 문제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시험에 합격한 이튿날, 사이몬은 진홍빛 소형 차를 사주었다.
어느 날 아침 줄 리가 브로드 거리의 고다츠 상점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며 패션 잡지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어 왔다.
“잘 있었어, 티아난 여사?”
줄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머나, 누군가 했어요.” 줄리가 싸늘하게 말했다. 바로 지젤라였다.
“여기 앉아도 좋을까?” 지젤라는 많은 짐을 빈 의자에 놓고 다른 의자에 걸터앉으며 애교 있게 말했다. “참 오랜만이야. 그사이 많이 변해서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군. 무척 세련되었지 뭐야.”
줄리도 자신이 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바베이도즈에 돌아온 첫날부터 변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완전히 변모되어 있었다. 적어도 외형으로는 솔리테일 시절의 줄리와는 전혀 달라, 마치 번데기에서 나온 나비와 같았다. 손도 손톱도, 머리 모양과 복장도 모두 손질이 잘되고 세련되어 있었다.
그 6주일 동안에 줄리는 샤로트와 같을 정도로 때가 벗어져 있었다. 그러나 샤로트와 같은 명랑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무감정한 정도를 지나 싸늘해져 있었다. 미소를 짓기는 했으나 마음에서 우러나 크게 웃는 일은 결코 없었다.
줄리는 잡지를 옆에 놓으며 말했다.
“나는 이제 가봐야 해요. 그런데 요즘은 어떠세요? 아직 칼리프솔리프 호텔에 있나요?”
“응, 아직까지는. 지금부터 신랑을 만나러 가는 길이냐?”
“아니요, 그는 지금 뉴욕에 가 있어요.”
“신부를 혼자 두고? 무척 쌀쌀한 사람이구나.”
“짧은 여행인데다, 나 역시 따라가고 싶지 않아서요.” 줄리는 보이를 불러 커피값을 지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기억하고 계시겠죠, 주머니가 가벼워지면 나한테 도움을 청하겠다고 한 말을. 그런 꼴을 당하기 전에 미리 말해 두겠는데, 나를 의지하려 해도 소용없어요. 한푼도 줄 수가 없으니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줄리는 볼일을 끝내자 차로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그녀가 사이몬과 기거하고 있는 가장용 주거는, 욕실과 화장실이 딸린 큰 침실과 전망이 좋은 거실이 이어져 있었다.
화장실에는 앤 티아난 부인 시절부터 환자를 위해 마련한 침대가 있었는데, 사이몬은 거기서 자고 있었다. 매일 밤 사이몬과 따로 잔다는 사실을 시어머니가 알고 있는지 어떤지 줄리로서는 알 수 없었다. 시어머니는 줄리에 대해 결혼 전과 다름없이 관대했고 또한 사랑해 주었다.
사이몬은 베기아에서 돌아온 이후 계속 약속을 지켰다. 아래층에 있을 때의 사이몬은 매우 다정했으며, 남에게는 보통 남편처럼 친절한 면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층에 올라와 거실의 문을 닫기가 무섭게, “잘 자, 줄리.” 하고는 얼른 화장실로 모습을 감추는 것이었다. 화장실에서 침실에 올 때는 반드시 사잇문을 노크했으며, 느닷없이 들어와 줄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아침에는 대개 사이몬이 먼저 일어나기 때문에, 그는 줄 리가 자고 있는 사이에 침실을 통해 방을 나간다. 줄리도 솔리테일에 있을 때는 일찍 일어났었다. 그러나 지금은 숙면을 하지 못하고 이상한 꿈을 꾸다 깜짝 놀라 깨는 일이 많아서 자연히 늦잠을 자곤 하는 것이다.
가족이 저녁 식사를 끝냈을 무렵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사이몬일 거야.” 부인이 말했다. 그가 뉴욕에서 돌아온 것이다.
“잠깐 실례하겠어요.” 줄 리가 냅킨을 놓고 홀라 나가자 사이몬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사이몬. 출장갔던 일은 모두 잘 되었나요?”
집사인 샘도 자동차 소리를 듣고 주방의 문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사이몬은 줄리의 어깨에 팔을 감고 관자놀이에 가볍게 키스했다.
“잘 됐어, 줄리. 쓸쓸했지?”
“물론이에요.” 줄리가 방긋 웃어 보였다. ‘서로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의 재회처럼 정말 둘 다 연기를 잘하는군.’ 그녀는 시니컬하게 생각했다.
“어서 오세요, 서방님. 식사를 하셔야죠?” 슈트케이스를 받아들면서 샘이 물었다.
“아니, 필요없네, 비행기안에서 먹었으니까.” 사이몬은 줄리의 허리를 안고 식당으로 들어가 선물을 꺼냈다. 어머니한테는 잿빛 핸드백, 샤로트에게는 녹색 실내 장식품이었다.
“쓸쓸하게 기다린 신부에게는 선물이 없나요?” 샤로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사이몬이 호주머니에서 자그마한 꾸러미를 꺼냈다.
“내일의 댄스 파티가 생각나서 샀지. 줄리의 드레스에 어울렸으면 좋겠는데.” 무뚝뚝한 말투였다.
줄리는 꾸러미를 풀고 가죽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어마, 멋져라!” 뒤에서 넘겨다보고 있던 샤로트가 환성을 올렸다. 거기에는 사파이어 귀걸이가 푸른빛을 발하며 빛나고 있었다.
“훌륭하구나, 사이몬. 줄리, 어서 달아 보지 않겠니?” 티아난 부인이 말했다.
“내가 달아 주지, 줄리.” 사이몬의 손이 줄리의 뺨에 닿았을 때, 그녀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귀걸이를 양쪽 귀에 달아 준 사이몬은 벽에 걸린 거울 앞으로 줄리를 데리고 가서 물었다. “마음에 드나?” 사이몬이 줄리의 등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거울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음에 안 들 리가 없잖아요. 아주 예뻐요. 고마워요, 사이몬.” 줄리는 몸을 돌려 발끝으로 서서 사이몬의 뺨에 키스했다. 일부러 남한테 보이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 그렇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줄리에게 어울리리라 생각했어.”
그 후 사이몬은 로브와 사업 이야기를 시작하고, 여자들은 내일 있을 파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시어머니의 친구 딸의 21세 생일 축하 파티였다. 줄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파티에 참석한 적이 없었으나, 사이몬이 잘 아는 아가씨의 생일 축하파티기도 하고, 또 그 혼자 참석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 같이 가기로 한 것이다.
이윽고 사이몬이 말했다.
“일찍 자야겠군, 바쁜 출장으로 피곤해. 가지 않겠나, 줄리?”
“네……여러분, 안녕히 주무세요.” 줄리는 일동에게 미소를 보내고 사이몬의 뒤를 따랐다.
이층에 올라온 사이몬은 평소 같은 무뚝뚝한 인사마저 없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문을 닫지 않아서 줄 리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사이몬이 침실로 돌아왔다.
“뉴욕에서 산 것이 또 하나 있어. 뜻밖의 것이지.” 그는 등을 돌리고 작은 그림을 꺼냈다.
줄리는 잠시 그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12세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일까? 어느 무더운 여름날 아침, 아버지가 그녀의 모습을 그려 주던 때의 일이 생각났다.
“어디서 구했어요?”
“화랑에서지. 마침 전시를 하고 있더군. 줄리의 아버지 그림은 아주 잘 팔리고 있었어.”
“어째서 샀죠?”
“줄리에게 주고 싶은 생각에서.” 사이몬은 경대 위에 그림을 세워 놓고, “그럼 잘 자.” 하며 나가려 했다.
“사이몬?”
“왜 그러지?” 그가 멈춰 서며 물었다.
“저어, 나 때문에 이렇게 많은 돈을 써서 어떡하죠. 저 귀걸이도 이 그림도 무척 값이 비싸겠죠?”
“줄리는 내 아내야. 남편이 아내를 위해 가끔 프레젠트하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야.”
“하지만, 싼 물건도 많은데.”
사이몬의 눈이 갑자기 빛났기 때문에 줄리는 섬뜩했다.
“내가 줄리를 매수라도 하려고 그러는 줄 아나?” 엄한 말투였다.
“그럴 리가. 당치도 않아요. 나는 다만…….”
“나는 지금 피곤해. 샤워를 할 생각인데,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거실에서 기다리겠다면 끝나고 나서 얘기하겠어, 줄리.”
10분쯤 지나서 치실과 거실 사이의 중간 문을 사이몬이 노크했다. 줄리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침실로 갔다. 오래 전에 그려진 자기 초상화 앞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즐겁기만 했던 그 소녀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 줄리는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이튿날 저녁때 줄 리가 파티 준비를 위해 화장실에서 몸치장을 하고 있을 때, 사이몬이 공장에서 돌아와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다 됐어요.” 줄 리가 문 너머에서 말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좋아. 나는 동생들의 샤워를 쓸 테니까.”
줄리가 침실에서 화장하고 있을 때, 샤워를 끝낸 사이몬이 들어와서 줄리를 쳐다보았으나, 사이몬은 그녀에게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줄리는 자기 드레스를 아직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고 비밀로 해두었었다. 은빛 실로 짠 흰 레이스는, 사이몬이 그녀를 바베이도즈로 데려갔던 날 밤 달빛을 받아 빛나던 파도를 생각나게 했다.
디자인은 줄리 자신이 고안한 것으로, 히프까지는 몸에 꼭 달라붙고 그 밑은 흘러내리듯 퍼지고 있으며, 등은 V자형으로 깊게 패어 있었다.
줄리는 그 드레스를 입고 등의 파스너를 올리려고 했으나 허리 바로 위에서 걸려, 억지로 잡아당기면 망가질 것 같았다. 허리가 꼭 죄어져 있기 때문에 벗어서 살펴볼 수도 없었다.
줄리는 잠시 주저하다가 화장실 문을 노크했다.
“사이몬, 파스너가 움직이지 않아서 그러는데 좀 고쳐 주시겠어요?”
그러자 사이몬이 얼른 문을 열고 나왔는데, 그는 디너 자켓만 입으면 다 되게 되어 있었다.
“왜 그러지?”
“모르겠어요. 전혀 움직이지 않아요. 내가 하면 망가질 것 같아요.” 줄리가 사이몬에게 등을 돌렸다.
“천이 끼었군. 잠깐 그래도 있어. 자, 이제 됐어.” 그는 파스너를 위로 올리고 훅을 잠가 주었다.
“고마와요. 수고를 끼쳐서 미안해요.” 줄리는 홱 돌아섰다.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사이몬은, 눈이 휘둥그레져도 좋을 텐데도, “아주 좋군. 잘 어울리는데.” 하고 말했을 뿐, 그대로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줄리가 완만하게 커브진 층계를 천천히 내려가 거실로 가니 이미 모두 모여 있었다. 줄리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유난히 아름답게 빛났다.
“야아!” 조는 단 한 마디 이렇게 말했다.
“굉장하군. 모두 눈이 휘둥그레지겠는걸. 솔리테일의 바다의 요정, 바로 그것이군!” 제임즈가 빙긋 웃으며 그녀에게 윙크했다.
시어머니는 검정 시퐁 드레스를 입었고, 샤로트는 헐렁한 크레이프 드레스를 입어 튀어나온 배를 감추고 있었다. 모두 각각의 차에 나누어 탔는데, 시어머니는 사이몬의 쿠페 뒷좌석에 자리잡았다.
별이 빛나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줄리는 차에 흔들리면서, 일찌기 맛보지 못한 야릇한 기분에 젖어 잇는 자신을 깨달았다. 만일 사이몬이 결혼생활을 원만히 이끌어 나가기를 원한다면 어째서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일까? 줄리는 고깝게 생각되었다. 이처럼 혼자 고고한 체 행동하는 것도 좋을지 모르나, 한편 사이몬이 혹시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관심조차 없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들었다.
베기아에서의 마지막 날 밤, 사이몬은 줄리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현상유지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 밤 사이몬에게 드레스가 마음에 드느냐고 했을 때 그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은 걸 보면, 아무리 줄리가 접근하려 해도 일축해 버릴 것이 아닌가. 도대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이몬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나이다. 여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줄리가 이런 드레스를 입는 것은 결코 자기 만족이나 다른 여자와 멋을 겨루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을 사이몬은 알지 못하는 것일까? 이 드레스의 디자인도 몇 주일이나 고심해서 고안한 것이고, 이마큼 변신한 것도 모두 사이몬 한 사람을 위해서였다.
정말 그에게 결혼을 계속할 마음이 있다면, 왜 단 한번이라도 줄리를 자기에게 복종시키려 하지 않는 것일까? 다른 일에 대해서는 지극히 고집스러운 근데, 어째서 줄리에게만은……?
유스티스 저택에 도착하니 차도는 이미 자동차로 가득 찼고, 화사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이 저택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댄스를 가르쳤으니까 줄리와 처음 춤출 권리는 내게 있다고 생각하는데.” 댄스 회장으로 되어 있는 객실에 들어서자 제임즈가 사이몬에게 말했다.
“좋아.” 사이몬이 순순히 승낙했다.
“줄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어요. 정말이지 오늘 밤의 줄리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름다워요. 이렇게 멋진 푸른 눈의 여성은 처음이에요.” 제임즈는 플로어에서 춤추면서 줄리에게 말했다.
줄리는 웃으며 고맙다고 답했다. 그녀는 제임즈의 어깨 너머로 사이몬이 어머니와 춤추는 것을 보면서, 결혼식날 밤 비치 하우스의 베린다에서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일을 상기하고 있었다.
한 시간 이상 춤을 추고 나서야 겨우 사이몬이 줄리에게 댄스를 신청했다.
“즐거운가?” 하면서 사이몬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네, 무척이나요.” 명랑하게 대답하기는 했으나, 사이몬이 좀처럼 자기한테 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기분이 상해 있었다. 그가 아내는 제쳐 놓고 일곱 명이나 되는 다른 여자와 춤춘 것을 줄리는 알고 있었다. 그가 일부러 자기를 피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줄리는 사이몬에 맞추어 미끄러지듯 왈츠를 추었다.
“제임즈가 제법 잘 가르친 모양이군.” 사이몬이 말했다.
“네, 잘 가르쳐 주었어요.” 줄리의 대답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사이몬은 그녀를 꼭 끌어안고 주위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말했다.
“내가 상대해서 모처럼의 흥이 깨진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즐거운 체라도 해줘야 하지 않겠어?” 싸늘한 어조였다.
줄리는 몸이 굳어져, 하마터면 스텝이 헝클어질 뻔했다. 이젠 될 대로 되라는생각에 줄리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는 사이몬의 목에 팔을 감고 몸을 그에게 바싹 붙이고 얼굴을 들어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지젤라의 그것과 같은 도전적인 미소를 띠고.
“이러면 될까요?” 줄 리가 유혹하듯 눈을 깜빡였다.
“바보 같은 짓을 하면 못써, 줄리. 사람들이 보고 있어.” 굳어진 낮은 음성으로 사이몬이 말했다.
“이상적인 커플로 보일 거예요.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지 마세요, 사이몬. 아무것이라도 좋으니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것이 어때요……네, 여보.” 줄리는 마지막 말만은 크게 했다.
사이몬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으나, 그 대신 줄리의 손을 힘있게 쥐었다
“제임즈는 말이에요, 나처럼 멋진 푸른 눈의 여자는 처음이라고 했어요. 그는 당신보다 훨씬 더 다정해요. 사이몬, 내가 정말 그토록 미인으로 보이세요? 아니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보지도 않았나요?”
“얌전히 굴지 않으면 플로어에서 쫓아내겠어.”
목소리와 표정은 즐거운 듯했으나, 그의 눈이 이상하게 빛났기 때문에 줄리는 한순간 숨을 죽였다.
댄스가 끝나 가고 있었다. 가까이에 로브와 샤로트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줄리는 음악이 끝나면 곧 샤로트와 화장실로 도망치려고 생각했다.
“나는 얌전해요, 행복에 도취된 새색시니까요……. 제법 의젓하게 행동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음악이 끝나자 사이몬은 줄리의 허리에서 손을 뗐지만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아플 만큼 꼭 쥐고 있었다.
“줄리는 아직 정원을 못 보았겠지. 여기에는 진기한 작은 나무들이 많아. 한번 봐두는 것이 좋을 거야.” 사이몬은 억지로 줄리를 뜰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저택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서야 겨우 그녀의 손을 놓았다.
“한번만 더 그런 짓을 해봐. 틀림없이 후회하게 될 거야.” 얼음같이 차가운 목소리였다.
줄리는 빨개진 손을 비볐다.
“나는 다만 당신이 하라는 연기를 했을 뿐이에요.”
“나는 바보가 아니야. 줄리는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실험했을 뿐이야. 나는 그런 불장난에 끼여들 수는 없어. 마지막까지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다면 문제는 다르지만.
줄리는 사이몬의 곁에서 떨어져, 연못가에 둘려진 돌에 가서 앉았다.
“마지막까지 받아들이다니, 그건 무슨 뜻이죠?” 줄 리가 당돌하게 물었다.
“잘 알고 있을 텐데. 내게도 인내의 한도라는 게 있어.” 사이몬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엄했다.
“나 역시 한도가 있어요, 사이몬. 이런 연극은 이제 진력이 났어요. 어떻게 앞으로 4개월이나 더 계속해야 하죠? 지겨워요, 이런 이중생활은. 당신은 온종일 공장에 있으니까 괜찮을지 모르지만, 나는 계속 어머님이나 샤로트를 속여아만 해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어요, 나를 억지로…….”
줄리는 마지막까지 말할 수 없었다. 사이몬이 성큼성큼 다가와 줄리를 난폭하게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다.
“권리 따위의 말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게 해줘! 그렇지 않으면 그 권리를 행사하고 싶어지니까.” 쉰 목소리로 사이몬이 말했다.
“놓아주세요!” 줄리가 버둥거렸다.
사이몬은 그녀를 억지로 끌어안고 무리하게 얼굴을 쳐들게 했다.
“어째서? 줄리는 행복에 도취되어 있는 새색시가 아닌가.” 그는 짧고 거칠게 웃었다. “결혼한 지 6주가 지났는데 나는 아직 줄리에게 키스도 하지 못했어. 좋아, 지금 하기로 하지.”
“싫어요……부탁이에요……이런 짓은 싫어요…….” 줄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 목소리를 사이몬의 입술이 막았다. 그것은 길고 격렬한, 사정없는 키스했다. 사이몬이 줄리를 놓아주자 그녀는 비틀거리며 쓰러지려 했으므로 그가 디시 팔을 잡아 부축해 주었다.
줄리는 겨우 눈을 떴으나 정신이 몽롱해서,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사이몬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불장난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알았겠지. 저택에 돌아가기 전에 화장이나 고치도록 해.”
사이몬은 방향을 홱 돌려 사라져 버렸다.
8
줄리는 오랫동안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피티용의 작은 백도, 사이몬이 거칠게 끌어안는 바람에 땅에 떨어진 채 그대로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줄리는 백을 주워 들고 저택으로 통하는 듯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혀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으나, 결국은 차들이 있는 곳으로 나올 수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가 이쪽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것은 로브와 샤로트였다. 로브가 샤로트를 두 팔로 안고 있었다.
“왜 그래요? 도와드릴게요.” 줄 리가 달려가자 샤로트가 남편의 어깨에서 머리를 들었다.
“어마, 줄리군요.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그래요, 인제 괜찮은 것 같은데, 로브가 지브로 데려다 주겠다고 하기에.”
“졸도할 뻔했어. 의사에게 왕진을 청해야겠어.”
걱정하는 로브에게 샤로트가 말했다.
“너무 소란을 피우지 마세요, 대수롭지 않아요. 이런 밤중에 연로한 그레이 선생을 불러오긴 너무 미안해요. 누워 있으면 좋아질 거예요.”
로브가 샤로트를 자동차 뒷좌석에 뉘었다.
“어머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신 건가요?” 줄리가 물었다.
“아니에요. 절대로 말하지 마세요, 모처럼의 파티니까. 정말이에요.”
“그럼 내가 함께 돌아가서 간호하겠어요.” 줄 리가 말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큰 도움이 될 거야. 정말 고마워, 줄리.”
“그렇게 되면 파티가 재미없게 돼요. 간호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아요, 병이 아니니까요. 잠시 어지러웠을 뿐인걸요.”
줄리는 샤로트의 반대를 무시했다.
“로브, 당신은 저택에 돌아가 사이몬이나 누구한테 사정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 좋겠어요. 그러면 우리가 없다는 것을 어머님이 아셔도 누군가가 설명해 드릴 테니 안심하실 거예요.”
“참, 그래야겠군. 미처 그 생각을 못 했어. 빨리 다녀오지.”
로브는 5분도 채 못 되어 돌아왔다.
“조에게 말해 주고 왔지. 사이몬을 찾아서 전하겠다고 하더군.”
30분 후 샤로트는 침대에 누워 따뜻한 밀크를 마셨다. 의사를 부를 필요까지는 없을 듯싶었다.
“그런데 줄리, 거기서 혼자 무얼 하고 있었어요? 뜰을 산책하다가 파트너를 놓쳐 버린 것은 아니겠지요?” 샤로트가 말했다.
“어마, 그런 것은 아니에요.”서둘러 부인했으나, 줄리의 얼굴을 빨개져 있었다.
“역시 그랬군!” 샤로트가 큰 소리로 말하고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예요? 사이몬에게 말하면 안 돼요, 그가 화낼 테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춤을 추었더니 더워서 혼자 밖에 나갔다가 길을 잃었어요. 정말이에요, 샬리.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어째서 엉뚱하죠? 모든 남자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던데. 그렇잖아요, 로브? 탐, 나는 인제 완전히 나았으니, 당신이 줄리를 유스티스씨 댁까지 바래도 주고 오세요. 파티는 이제부털 테고, 사이몬도 몹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아니, 괜찮아요. 나도 자려던 참이었어요. 그럼 로브, 샬리의 컨디션이 나빠지거든 불러 주세요. 안녕히 주무세요.” 줄리가 빠른 말로 말했다.
층계를 올라갔을 때 전화 벨이 울렸다.
“네, 줄리 템……티아난입니다.”
“줄리? 앤이야. 방금 이야기를 들었는데, 샬리의 몸은 어떻지? 그레이 선생은 불렀겠지?”
걱정스러워하는 시어머니에게 줄리는 사정을 설명하고 별일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정말? 그래도 아침이 되면 의사를 불러야겠어. 참, 네가 돌아간 뒤에 말이야, 사이몬의 거래처가 화재로 모두 탔다는 연락이 왔어. 사이몬은 지금 그곳으로 갔어. 오늘 밤엔 먼저 자라고 전하더군. 왜 이렇게 사건이 자주 생길까!”
전화가 끝나자 줄리는 자기 방으로 가서 천천히 옷을 벗었다. 심신이 몹시 피곤했다. 지난 6주일 동안을 그녀는 끊임없이 긴장 속에서 살아왔으며 지금 그것이 끝난 것이다. 의혹과 공포는 모두 사라졌다. 행복스럽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했고, 오늘 저녁에 한꺼번에 나이를 몇 살 더 먹고 현명해진 것처럼 생각되었다.
유스티스씨 집 뜰에서 사이몬이 벌을 주기라도 하듯 거친 키스를 했을 때 줄리는, 지금까지 타개할 수 없는 미로처럼 생각되었던 상태는, 사실은 아주 간단하게 탈출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토록 힘든 수술을 받고 나서야 겨우 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스러웠다. 사라에 자존심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을 진작 깨달았어야 하는 것이었음을 그녀는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사이몬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으로서는 그와 헤어질 수가 없다. 빵은 반쪽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아니, 빵 부스러기라도 좋다. 앞으로는 사이몬이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달게 받아야지.
이튿날 아침에 눈을 뜬 줄리는 시계가 멎었는가 생각했다. 시계 바늘이 아홉 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문득 화장실 문이 반쯤 열려 있는 것을 깨달았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들여다보니 사이몬의 침대에는 사람이 잔 흔적이 없었다. 그러나 양복장은 열려 있고, 어젯밤의 디너 자켓이 걸려 있었다.
줄리는 얼른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테라스에서 시어머니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늦잠을 자서 죄송해요. 사이몬은요?”
“공장에 갔어. 아제는 새벽 세 시쯤에 돌아온 모양인데, 아침을 먹으면서, 네가 곤히 자고 있으니 깨우지 말라고 하더군. 점심때 화재 이야기를 해주겠지. 차가 온 것 같은데, 그레이 선생이 샤로트를 진찰하러 왔을 거야.” 시어머니는 바느질감을 옆으로 치우고 얼른 일어났다.
열 시 30분이 되자 줄리는 사이몬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보고 싶어졌다. 그가 돌아오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다. 그때까지 그냥 집에 있는다는 것은 견딜 수 없을 듯싶었다. 줄리는 수영 준비를 하고는, 바스시바 해안에 다녀오겠다고 시어머니에게 말했다.
“가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이렇게 바람이 심하고 기온도 떨어졌는데. 스콜이 올 것 같으니 바다도 사나울지 몰라.”
“바다가 거칠면 헤엄은 치지 않고 잠시 바닷가를 산책이나 하겠어요. 요즘에는 별로 수영을 하지 않아 손발이 무뎌진 것 같아요.”
바스시바는 바베이도즈 섬의 대서양 쪽에 있었다. 해안이 아름답게 굴곡을 이루고 파도가 높기 때문에 서핑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가까이 있는 텐트 베이에는 저녁마다 날치떼가 몰려오기 때문에, 겨울에도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이다.
줄 리가 바스시바에 도착했을 때는 바람은 더욱 강해지고 구름도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양은 아직 비치고 있었고, 큰 파도 저쪽의 바다는 그리 거칠지는 않았다. 수영에 서투른 사람이라면 결코 바다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지만, 줄리는 이 정도의 파도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바다에는 그녀 외에는 아무도 없어서, 줄리는 이 멋진 해안선이 모두 자기 것처럼 생각되었다.
줄리는 수영모를 쓰기도 귀찮아 그대로 머리를 나부끼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거친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이 처음에는 정말 상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바베이도즈에 처음 왔을 때보다는 동작이 둔해져 있었다. 두 달 전의 줄리였다면 두어 시간 정도 헤엄쳐도 괜찮았을 것이었으나, 오늘은 30분쯤 지나가 더 이상 할 수 없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무렵엔 큰 파도의 간격이 차차 좁아지며 밀어닥치고 있었다. 물가에 가까워지자 심한 파도에 휩쓸려 다시 밀려나고 말았다. 거친 파도를 타려면 바위를 피한 코스를 택해야 했던 것이다.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줄리는, 해변에 있는 사이몬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반쯤 미친 사람같이 서둘러 옷을 벗기 시작하고 있었다.
줄리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을 때, 위에서 큰 파도가 덮쳐 머리 위에서 폭포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줄리는 물을 마시며 몸부림쳤다.
전에도 이런 일은 흔히 당했기 때문에 그다지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매우 고통스러웠다.
있는 힘을 다해 수면으로 떠오르니 몸은 앞바다 쪽으로 향해 있었고 다음 파도가 엄습해 오는 것이 보였다. 파도가 머리 위에 들이닥칠 무렵에는 애써 물속으로 잠겨, 파도에 강타당하는 것은 겨우 면할 수 있었다.
이때 밀려나가는 파도에 등의 근육이 비틀렸으므로, 갑작스런 통증에 줄리는 이를 악물었다. 통증은 불과 몇 초 동안이었으나, 그사이에 격류는 그녀를 더욱 먼 바다로 끌고 나갔다. 숨을 충분히 들이마시지 않아 수면으로 나오려 해도 가슴이 답답했다. 겨우 수면에 떠올라 입을 크게 벌렸을 때는 다시 거대한 파도가 바로 위에서 덮치려 하고 있었다. 파도는 그녀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가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혔다. 인제 빠져 죽는다고 생각하니 줄리는 온몸이 오싹했다.
바로 이때 억센 팔이 날쌔게 그녀를 낚아챘다. 사이몬이었다.
5분 후 사이몬은 그녀를 두 팔에 안고 바닷가로 달려가 바람이 불지 않는 바위 밑으로 갔다.
줄리는 좀처럼 충격이 가라앉지 않아 풀이 죽어 누워 있었다. 한참 만에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를 힘없이 손으로 쓸어 올리고 겨우 눈을 떴다.
사이몬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라간 섬에서 줄 리가 의식을 회복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말고 있어, 옷을 가져올 테니까.”
사이몬이 돌아왔을 때 줄리는 일어서 있었다. 온몸이 모래투성이여서 무척 비참한 모습으로 보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이몬은 이미 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기서 말리는 것은 무리야. 뜨거운 목욕탕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돼.” 그는 혼자 옷을 입지 못하는 유아를 다루듯이 줄리에게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혀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그녀를 두 팔로 안아 올렸다.
“괜찮아요, 걸을 수 있어요.” 하고 말은 했으나 아직 다리가 후들거렸다.
사이몬은 말없이 그녀를 자기 차로 데려가 뒷좌석에 뉘었다.
“줄리의 차는 잠시 여기 두기로 하지.”
그가 운전석에 앉았을 때 줄리가 입을 열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어머니한테 주의를 받았지만 괜찮으리라 생각했어요. 당신이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사이몬은 타는 듯한 눈으로 흘끗 그녀를 보았으나 곧 차의 시동을 걸었다.
로즈홀에 도착하자 시어머니가 급히 마중을 나왔다.
“어마 줄리, 괜찮아? 사이몬에게 전화를 걸어 뒤따르게 했어. 정말 다행이야. 그래 아무 일 없었니?”
“나중에 이야기하죠, 어머니. 곧 뜨거운 물로 목욕해야 해요.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사이몬은 줄리를 재촉하여 이층으로 올라가 얼른 목욕물을 틀었다.
20분쯤 있다가 줄 리가 머리에 타월을 감고 흰 바드로브를 걸친 모습으로 욕실에서 나오자, 사이몬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창가에 서 있었다.
“기분이 어때?” 굳어진 얼굴로 그가 물었다.
“네, 괜찮아요.”
그는 커피를 따라 줄리에게 건네고 창가의 팔걸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줄리는 한 모금 마시고 커피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사이몬에게 할 말을 하고, 해야 할 일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점심 후로 미루려던 줄리였으나,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사이몬이 줄리의 어리석은 행동에 화를 내든, 그녀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오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이다……지금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영원히 기회를 놓칠 것이다.
“사이몬, 어젯저녁 당신이 말했죠? 마지막가지 받아들일 각오가 없으면 불장난을 하지 말라고요.”
그는 눈을 가늘게 떴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줄리는 그에게로 가서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나, 각오가 되었어요.” 그녀는 정답게 말하고 허리를 굽혀 사이몬에게 키스했다.
잠시 동안 그는 그대로 있더니, 마침내 줄리를 무릎 위로 옮겨 끌어안고 어젯밤같이 격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줄리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몸을 내맡겼다.
갑자기 사이몬이 키스를 멈추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정말인가? 정말이지? 하지만 왜 지금 와서?”
줄리가 미소 지으며 가만히 속삭였다.
“그것은…….”
사이몬은 그녀의 머리에서 타월을 벗기고, 젖어서 윤이 나는 머리를 자기 어깨에 기대게 했다.
“단순히……감사하는 마음에서가 아닐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사이몬. 나는…….” 줄리는 입을 다물었으나 저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당신을 사랑해요……. 어젯밤에 모든 것이 변했어요……당신이 키스했을 때. 좀 더 일찍 키스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사이몬의 전신에 전율 같은 것이 일었다. 그는 묘하게 쉰 목소리로 말했다.
“줄 리가 바다에서……가라앉는 것을 보았을 때……나는 줄 리가 고민한 나머지……일부러 그러는 것으로 생각했어.”
줄리는 그 말의 뜻을 깨닫고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 그를 응시했다.
“내가 바다에서 자살하는 줄 알았나요? 어째서 그런……?”
“내가 약속을 어겼으니, 줄리가 나를 무서워해서 그런 행동을 한다고 믿었던 거지.” 그는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줄리는 손을 내밀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당신도 나를 사랑하는군요? 사랑하는 거죠?” 이렇게 속삭이며 그녀는 사이몬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행복감이 가슴 가득히 퍼져 와 줄리는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이윽고 격정이 사라지자 사이몬이 말했다.
“나는 줄리에게 한눈에 반했었어. 솔리테일 섬에서 줄리가 숲속에서 나왔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어. 그처럼 아름다운 야성적인 여자를 본 일이 없기 때문이지. 틀림없는 이브였어……빨간 비키니를 입고 스노클을 손에 든 이브.”
“하지만 왜 그 말을 하지 않았죠? 어째서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약혼 기간 동안 당신은 마치……마치 오빠 같았어요.”
“그 무렵에는 줄리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 사랑한다면 결혼을 결심하는 데 만 하루가 걸리지는 않았을 거야. 아니, 즉석에서 승낙했을 거야. 그래서 나는 줄리가 겁을 먹지 않게 하려고 되도록 점잖게 대하려고 했던 거야.”
줄리가 얼굴을 들어 사이몬을 바라보았다.
“사이몬, 나는 말이죠. 당신이 샤로트와 결혼한 것이라 생각한 그날 아침에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프러포즈를 받고 내가 곧 승낙하지 않은 것은, 당신처럼 훌륭한 사람이 나하고 결혼하기를 원하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줄리는 내가 손대는 것을 참지 못하겠다고 말했잖아? 결혼식 이튿날 아침, 줄리는…….”
“알고 있어요……하지만 진심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어, 사이몬, 당신은 지젤라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죠?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랬었나? 기억에 없는걸.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줄리?”
“상관이 있어요. 말해 주세요.”
“꼭 알고 싶다면 말하겠는데, 지젤라는 엄청난 돈을 요구해 왔어. 내가 솔리테일 섬을 사겠다고 했더니, 아버지하고 결정했던 가격의 배나 요구하는 것이었어.”
“그때 화를 내며 내쫓았으면 좋을 뻔했어요.”
“나는 줄리를 위해 그 섬을 사려 했지……우리 자식들을 위해서도.”
줄리는 사이몬의 무릎에서 내려와 창가로 갔다. 그러고는 바드로브의 끈을 두 손으로 꼭 쥐고, 결혼식 직후 지젤라와 단둘이 이야기한 내용을 나직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설명했다.
“뭐라고? 정말 악질적인 여자로군!” 사이몬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 무서운 기세에 줄리는 겁을 먹고 사이몬의 팔을 꽉 붙들었다.
“그래요, 지젤라는 악마예요. 하지만 성급한 일은 하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사이몬. 이미 지난 일이에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냉혹한 그의 눈빛에 줄리는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는 사이몬에게 매달렸다. “부탁이에요, 사이몬……가지 마세요. 나를 혼자 두고 가지 말아 주세요.”
사이몬은 줄리의 손을 뿌리쳤으나, 마침내 분노를 진정시키고 냉정을 되찾았다.
“왜 그런 엉터리 말을 믿었지?”
“사실처럼 그럴듯하게 말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제게 연인답지 않게 대하는 이유도 지젤라의 말로 설명되는 것 같았어요.”
사이몬이 웃었다.
“연인 사이란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책에서 읽었어요.”
“내가 먼저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째서 줄 리가 리드해 주지 않았지?” 조롱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리고 아직 모를 것이 있어. 나를 사랑했다면 어째서 보기도 싫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지?”
“당신은 건성으로 나를 사랑하는 체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돼서 나는 그것이 참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어젯밤에 나는 비로소 사랑에는 자존심은 필요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아, 사이몬, 벤슨씨의 비치 하우스에서 했던 잔인 보복을 용서해 주시겠어요?”
“그때는 좀 심했지.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관대한 남자야.” 사이몬은 줄리를 껴안고 키스했다.
아래층에서 점심 식사를 알리는 종이 울렸으나 사이몬은 무시했다. 잠시 후 줄리가 입술을 떼었다.
“아래층에 내려가야 하겠어요. 종소리를 못 들은 줄 알고 누가 올라오겠어요.”
그가 아쉬운 듯 줄리를 놓아주었다.
“줄 리가 잠들었다고 하고 식사를 가져오도록 해야지. 곧 돌아오겠어.”
사이몬이 나간 뒤 줄리는 새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바르만의 방베르 향수를 뿌렸다. 그리고 입술연지도 바르고 머리도 약간 손질했다.
사이몬이 가져온 쟁반에는 샴페인도 한 병 놓여 있었다. 그는 쟁반을 테이블에 놓고 줄리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오후에는 공장에 가지 않겠다고 로브에게 말하고 왔지.” 하면서 사이몬은 샴페인을 땄다.
줄리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을 거야. 나는 어제 거의 자지 못했으니까. 좌우간 이것이 신혼 첫날의 아침 식사라는 것은 아무도 모를 거야.” 사이몬이 샴페인을 따라 줄리에게 주었다.
“우리의 일……정말 아무도 모를까요? 하녀는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동안 당신이 계속 화장실에서 잤으니까.”
“6주일이나 말이지! 마치 6개월이나 된 것 같군. 줄리는 점점 더 예뻐지는데 나는 그 저주스런 화장실에서 옆방에 있는 줄리를 잊고자 매일 밤 전전긍긍했어. 자, 건배하지! 이미 비밀도 오해도 없어져 버린 우리를 위해서……사잇문을 닫지 않아도 되게 된 사실을 위해서도.”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건배!” 그녀의 눈도 빛나고 있었다.
밖에는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태양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사이몬이 쟁반에 눈길을 돌렸다.
“배가 고픈가?” 진지한 어조였으나 순간적으로 눈에 웃음이 떠올랐다.
줄리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이몬이 글라스를 쟁반에 놓고 방문을 걸려고 일어섰다. 다시 돌아온 그의 품에 안겼을 때, 줄리는 지금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행복의 형태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줄리가 이미 경험한 것도 있고, 앞으로 경험할 것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행복의 절정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함께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려는 순간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