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사기꾼
Carol Helston
1
"캐리! 대체 무슨 일인가요? 당신처럼 젊고 매력적인 여성이 이런 구석에 숨어 있으면 안 돼. 이곳은 나 같은 백발의 노인에게나 어울리는 곳이라오."
"어머, 커티스 씨는 농담을 잘하시는군요."
놀리는 듯한 시선을 스탠 커티스로부터 받자, 캐리는 당혹스러웠다.
"커티스 씨는 그런 노인이…"
스탠의 눈동자가 차갑게 웃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의 뺨은 더욱 붉어졌다.
캐리가 당혹스러워한 것은 그녀가 특별히 부끄러움을 잘 타거나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스탠의 동료들― 캐리와 같이 밤의 프로그램 <The People Element> 제작을 담당하고 있는―의 험담 때문에 몸이 오싹해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캐리는 많은 사람들 틈에서 조심스럽게 소극적으로 행동해도 눈에 띄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하지만 현재 캐리가 갖추고 있는 모든 것은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물론 남성들의 눈에 그녀가 아주 매력적인 여성으로 비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검은 속눈썹으로 테를 두른 빌로드 같은 다갈색의 눈동자와 실크처럼 부드러운 금발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그녀는 가는 곳마다 남성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그녀의 늘씬한 몸매는 여성다운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스탠 커티스의 편안하고 허물없는 대접을 받고 캐리는 어리둥절했다. 그는 직장에서의 캐리에게는 저 멀리 구름 위에라도 있는 듯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이 6개월 동안 캐리는 스탠의 모습을 스튜디오 안이나 그의 사무실 문 너머로 보았을 뿐 직접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스튜디오의 많은 스탭들에 둘러싸여 있는 바쁜 사람이었다. 이제 겨우 신문방송학의 학위를 받은 신입사원과 말을 할 신분이 아닌 데다가 그에게는 그럴 틈도 없었다.
오늘밤 파티는 프랑스식 주택가의 스탠의 아파트에서 열리고 있었다. 손님들은 그가 제작 담당하고 있는 인기 로컬 프로그램의 스탭 전원과 뉴올리언즈 10채널의 명사들이었다.
자기가 이 파티에 참석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캐리는 몹시 흥분했었다. TV라는 불가사의한 세계에서 이미 성공하여 명성을 얻고 있는 사람들과 오늘밤, 얼마 안 있으면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가 얼굴을 파는 일은 품위 없고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그녀에게 생각되었다. 파티에서는 처음부터 뒷전에 물러나서 사람들의 이야기에 잠자코 귀를 기울이거나 단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려고 캐리는 마음먹고 있었다.
반 년 동안 그저 멀리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인 한 남성이 바람에 날리는 듯한 금발을 어깨 뒤로 늘어뜨린 캐리에게 매혹된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휘둥그레진 그녀의 눈동자는 당황과 불안을 희미하게 나타내었다. 그녀는 조금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을 헐떡이며 내뱉고 있었다.
"현관문 닫아요."
누군가가 홀 안에서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 간의 침묵이 끊어지고 스탠은 현관에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정중하게 사죄하며 캐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스탠은 캐리를 에스코트하여 손님들로 떠들썩한 거실로 데리고 갔다. 붙잡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손님들 사이를 뚫듯이 하여 캐리는 다음 방의 코너에 설치되어 있는 조그마한 바로 안내되었다. 이렇게 시끌벅적해서는 이야기를 할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 스테레오로부터 울려 나오는 모던재즈의 소리가 어우러져 귀청을 찢어 버릴 듯한 소음이었다.
스탠 커티스는 가까스로 캐리로부터 자기 소개를 받을 수 있었다. 오늘밤 파티 장소에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임을 알아내면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캐리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탠은 캐리의 곁을 떠나지 않고 차례차례 그녀를 손님들에게 소개했다.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있었고, 평판을 들은 일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던 중, 아주 짧은 틈을 발견하고 스탠으로부터 벗어나온 캐리의 귓전에 지독한 험담이 들려왔던 것이다. 캐리는 도망가듯이 방구석으로 갔다. 분노와 굴욕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스탠 커티스라는 사람이 왜 이처럼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것일까? 이미 예순을 지난 그에게 TV계의 명성을 위해 몸을 맡기는 여자들이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는다는 것을 캐리는 들었다.
겨우 그의 시선에서 도망친 캐리가 생각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는 다시 파티 손님의 한복판으로 끌려나오게 되었다.
밤도 꽤 깊어졌을 즈음 손님들은 썰물 빠지듯이 사라져 갔다. 캐리는 자신이 최후에 남은 손님 중의 하나가 된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녀가 서둘러 귀가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l0채널의 기상부장인 알프 로프트렌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카페 드 몽드>에 가서 커피에 파이라도 먹자고 제안했다.
<카페 드 몽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들은 곧 우유를 넣은 진한 커피를 컵에 부으면서 설탕 뿌린 파이를 덥석 베어 물었다.
루이지애나 주 출신인 캐리 린제이에게 있어선 오늘밤 사건의 모든 것이 마치 꿈같았다. 모두 둘러싸듯이 앉아서 이렇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게도 번잡스러웠던 파티 뒤였는데도 직업상의 중요한 화제가 나오자 바로 결정이 내려졌다. 이런 장소에서의 의논이 자주 있는 것일까?
스탠 커티스는 캐리의 왼쪽에 앉아서 자신이 제작하고 있는 쇼 프로의 등장인물에 관해서 여럿과 의논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중요한 부서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로 그들의 의견은 중요시되었다.
숀 탈보트, 그는 <The People Element>의 리포터로 때로는 아슬아슬한 추적 르포도 해내는 인터뷰의 프로였다.
"팜 비취의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희생도 감당해 내겠지만요, 지나친 모험인 것 같아요. 자, 스탠, 팜 비취의 대부호들을 보통 사람들과 격리시키는 그 높은 담장 안에 침입할 뛰어난 방법은 없을까요? 그들 엘리트의 내막을 파헤치는 것은 멋진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실행불가능이죠?"
랜디 플랜스코트가 뉴올리언즈의 TV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그 크게 울리는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보도 관계의 사람들은 그들에겐 이단자야. 하려면 어떤 미끼를 쓰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이런 일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고 그들의 실체를 잡아내는 데는 수 주, 아니 수개월쯤이 걸릴지도 몰라. 틀림없이 100년에 한 번뿐인 기회가 올 것인지 깨끗하게 패배하든지 둘 중의 하나겠지."
담뱃불을 비벼 끄면서 랜디는 모두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캐리는 최면술에 걸린 듯,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눈을 크게 뜨고, 다갈색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설탕이 자신의 검은 빌로드 슈트 위에 떨어진 것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스탠이 입을 열었다.
"유감스럽게도 두 분의 말씀대로예요. 그렇지만 이 아이디어를 단념하고 싶진 않군요. 한다고 하면 설령 일이 실패한다고 해도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 즉 이런 일에 있어서 아마추어를 쓰기로 해야 해요. 좌우간 현지에 뛰어들어서 어떻게든 더듬어서라도 일을 해낼 수밖에는 방법이 없어. 이런 입장에서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소?"
"제가 하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캐리의 상기된 얼굴로 집중되었다. 입 밖으로 말을 내놓고 나서 캐리는 충동적으로 테이블 밑에라도 기어들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캐리는 헤아릴 수 있었다.
'이 여자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하고 말하고 싶은 표정들.
스탠이 재치 있게 이 분위기를 깨뜨렸다.
"캐리를 아직 모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녀는 우리들 조사 스탭의 한 사람으로, 입사한 지 이제 6개월째요. LSU에서 신문방송학의 학위를 땄지요."
캐리의 경력을 뚜렷하게 나타내어도 그들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상사가 이 젊은 아가씨를 총애하고 있는 것에 대한 체면상으로 태도를 꾸며 보이는 정도의 매너는 갖추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이 임무를 떠맡는다고는 했지만,
'그처럼 크게 떠들지 말 것을…'
하고 캐리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 입 밖에 낸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타고난 자존심으로 의외롭게 빨리 냉정함을 찾아 그녀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좀 전 커티스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아무 잃을 것도 없고 아직 경험이 없는 사람을 원하고들 계시죠? 스탭 중에서는 아마도 제가 다른 누구보다도 그 조건에 적합하리라고 생각해요. 일의 결과가 좋지 않게 끝나더라도 내가 그곳에서 실직하는 정도일 뿐으로, 방송국에서 내게 책임을 느낄 일도 없을 테고요."
모두가 한결같이 생각에 잠긴 듯 묵묵히 있더니, 마침내 그녀에게 하나하나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캐리의 발언을 신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시간 후 캐리는 자기 아파트의 거실에 앉아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에 스스로가 아연해 있었다. 대부호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도 평판 높은 고급 주택가인 팜 비취 행을 스스로 원해서 그들의 사생활을 리포트하는 일이 결정되어 버린 것이다. 자신이? 미친 짓이야!
그러나 점차 흥분과 자신감이 생기며 불안이나 의문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이름을 날리기엔 두 번 다시없는 찬스가 아닌가. 이 일을 훌륭하게 해내면 TV 보도에서의 경력에 관록이 붙을 것은 틀림이 없다. 확실히 위험한 일이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성공시키고 싶다. 자신은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정한 목표는 지금까지 반드시 달성하지 않았던가. 이번이라고 해서 실패할 리가 없다.
그 후 2, 3일 동안 이번 일의 준비로 캐리는 녹초가 되어 버렸다. 우선 자신의 아파트를 재임대하기 위한 광고를 내야만 했다. 팜 비취로 출발할 때쯤이 되자, 겨우 아파트를 빌릴 사람이 나타났다. 아파트 건이 해결되자 스탠과 스탭 간부들과의 협의 그 틈틈이 캐리는 짐들을 꾸려 놓았다.
스탠이 팜 비취의 일로 자리를 비우는 동안의 봉급의 일부를 선불할까 하고 친절하게 물어왔지만 캐리는 거절했다. 자신의 역량도 모르면서 선금을 받아서 불필요한 압박감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팜 비취의 일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신을 걸어보자. 돌아올 직장이 있으니까.'
하는 각오를 하며 그녀는 뉴올리언즈를 떠났다.
팜 비취에서는 혼자 힘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야만 한다. 일이 잘되어서 리포트의 성과가 훌륭하다면 자신의 노력과 시간에 맞는 보수가 있을 것이리라. 만일의 경우 실패로 끝난다면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전의 직장으로 복귀하면 되리라고 캐리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미시시피 강을 따라 2차선인 98번 고속도로를 계속 달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주의 연락 고속도로 10호선을 달리고 있었지만 북 플로리다의 지루한 경치에 캐리는 몹시 싫증이 났다. 사고 없이 이대로 계속 달린다면 오늘 중에 전 노정의 반 정도는 달릴 수 있을 것이며 내일 중으로 팜 비취에 닿을 것이다.
현지에서 접촉할 유일한 인물은 필립 로슨이다. 그는 웨스트 팜 비취에서 발행되고 있는 일요신문의 편집장으로, 스탠이 신문기자를 하던 때의 동료이기도 했다. 현지에 도착하면 곧 로슨을 만나라고 스탠이 일러주었다.
그 날은 주의 연락 고속도로에서 조금 들어선 곳에 있는 호텔 <홀리데이 인>에 묵기로 했다. 그녀는 몹시 피곤해서 더 이상 운전할 수도 없었다.
호텔 커피숖에서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 자기의 방으로 돌아온 캐리는 필립 로슨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허스키한 음성의 소유자였다. 나이가 사십 초반 정도일 거라고 캐리는 상상했다.
다음 날 그녀는 웨스트 팜 비취의 조용하고 작은 레스토랑에서 로슨과 마주앉아 있었다. 그는 생각보다는 젊었고 언뜻 보기에 평범한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신장도 적당하고 체격도 극히 보통이었는데 갈색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매우 익살스런 말투와 역겹도록 지나친 자신감 정도였다.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결코 필립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일을 다 보아왔다는 듯한 자신감이 필립에게서 넘쳐났다. 그는 남쪽 보칼라톤에서 북쪽 쥬노 비취에 이르는 팜 비취의 비화를 이것저것 재미있게 들려주었으며 덕분에 캐리는 아주 편안하게 쉬면서 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시면서 필립은 처음으로 캐리의 이곳 여행 목적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일은 성공시키기 어렵다고 비관적인 답을 해주었다.
"실망시켜서 정말 미안하지만…"
캐리의 침울해진 모습에 그는 조금은 동정하는 빛을 보였다.
"단, 솔직히 말해 두자면요, 이곳의 거주자들은 매스컴에 협조적인 신흥계급의 벼락부자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거예요. 여러 세대 동안 계속해서 대부호였던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금세기 초반 때와는 다소간의 흐름으로 변화가 있긴 했지만, 오션 거리의 낡은 저택에는 문지기가 있고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는 저택도 있어요. 5, 60년 전과 다르다고 한다면 겨울철에만 이곳에 오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살고 있는 사람들이 꽤 늘었다고나 할까요? 에어콘 덕분이겠지요."
"저택 안에 잠입할 뭔가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보통이 아닌 결의를 보이면서 캐리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하녀 같은 일이라든가…"
필립은 차가운 시선으로 캐리의 창백하게 변하는 모습을 잠시 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과연 그렇겠군요."
필립은 은근히 기대하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중얼거렸다.
"물론, 아주 폄범한 아가씨로 변신할 생각이에요."
캐리는 망설이며 말했다.
로슨이 자신의 얼굴과 몸매를 칭찬하는 시선임을 깨닫고 조금은 자신이 생기는 듯한 캐리이기도 했다.
"문제는 고용인을 구하는 저택을 발견해서 어떻게 그 일에 응모하느냐 하는 것이에요. 그 사람들은 공공 직업소개소를 통하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그런 일은 거의 없을 거예요."
야유하는 듯한 태도로 필립이 맞장구쳤다.
"그 사람들은 주의 정부에 의뢰하지 않고 그들 나름의 독특한 조직을 갖고 있으니까요."
"어머,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어요."
처음의 기세가 점점 꺾여가는 것을 캐리는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에게 여행의 피로가 우르르 몰려왔다. 구름을 잡는 것 같은 이 허황된 이야기 때문에 그 멀리서 여기까지 온 것인가?
필립도 그런 그녀를 가련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실망하지는 마세요. 좌우간 오늘은 천천히 쉬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내일 아침 뭐 좀 알 만한 데를 찾아보겠소. 점심을 함께 합시다. 그럼 그때 뭔가 좋은 정보를 가르쳐 줄 테니까."
필립의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레스토랑을 나왔다. 완전히 의기가 꺾여 버린 캐리는 어깨를 있는 대로 늘어뜨리고 자신이 묵고 있는 방갈로 스타일의 작은 모텔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다시 여느 때와 같은 정력적인 자신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운 채, 어제 필립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 보았다. 필립이 솔직하게 대응해 준 것은 오히려 감사해야 했다. 그의 비판적인 의견에 직면한 것도 캐리에게는 하나의 시련이었다.
두 시간 후 그녀는 바보처럼 입을 반쯤 벌리고 필립 로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 금방 입수했다는 뉴스를 그에게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색다른 건축으로 유명한 건축가 에디슨 미즈너가 지은 고풍스러운 저택에 사는 대부호 레이디 제인 웨슨이 얼마 전에 비서를 해고했다는 소식이었다. 필립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그 해고된 비서는 매력적인 용모로 부인의 교우관계 및 사교에 적극적으로 끼어들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부인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비서라고 하면 양가출신으로 현재는 몰락한 가문의 아가씨라는 것이 전형적이었지만… 이 집에 들어갈 수 있다면 당신의 목적에 꼭 알맞을 것이라 생각돼요. 사교계 일류들의 한복판에 뛰어들게 될 테니까요. 즉 플로리다 지방의 사교계, 에버 그레이즈 클럽, 수영이나 테니스 클럽의 많은 고용인들 속에서 말이오."
필립의 눈에 의외라고 생각될 정도의 고통 같은 것이 지나가더니 곧 평상시의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레이디 제인의 고용인 문제를 책임지고 있는 스미드 보이드 대리점이라는 상류계급 전문의 직업소개소가 우선 적임자를 체에 거르듯이 골라내서는 마지막으로 부인이 직접 면접을 하기 때문에 통과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 같소."
필립이 자못 유감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캐리를 부적임자로 판단하고 있음은 캐리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절호의 찬스구나! 이것이야말로 더할나위없이 좋은 기회가 아닌가?
"좋습니까? 레이디 제인의 비서로서 이상형은 말이요, 얼굴이 못생기고 남자들이 슬쩍이라도 시선을 주지 않을 그런 타입의 여성이오. 그러면서도 타이프라든가 다른 비서적인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 분수를 깨닫고 있는 사람을 원하고 있어요."
"결국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부적합형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캐리의 예리한 감각에 감탄했는지 필립은 그녀를 또렷이 바라보았다.
"로슨 씨, 도와 주셔서 고마워요."
캐리의 목소리는 마치 흥분하고 있는 듯했지만 필립의 진절머리를 내는 것 같은 표정은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
"소용없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되어서 오히려 잘되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렇지만 설마, 당신…"
캐리는 손으로 그를 제지했다.
"네, 그 일을 하겠어요. 당신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레이디 제인의 새 비서입니다."
어느 사이엔가 캐리의 목소리는 억양도 없이 점잔빼는 듯한 태도로 변해 있었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에게 제각기 다른 역할을 내려 주셨죠. 내게 록펠러 역을 하라시면 그것은 할 수 없겠지만요, 비서 역이라면…"
"사물의 이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당신이라면 잘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유감스럽게도 캐리의 결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식으로 로슨은 계속했다.
"그 얼굴과 몸매를 잘 변장할 수 있다면 잘되어 갈지도 모르겠지만…"
생긋 웃는 캐리의 입술 사이로 예쁜 흰 이가 보였고, 다갈색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계획을 실행할 단계가 되자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캐리였다.
그녀는 그날 밤에 변장한 모습으로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로슨에게 제안했다.
"제가 저녁식사에 초대하겠어요."
캐리가 계속 우겨댔다.
"월급을 받게 될 테니까요."
"그다지 기대할 만한 것이 못될 텐데."
필립이 조금은 쌀쌀맞게 받아들이며 대답했다.
"그 일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부자들이 그렇게 선심을 보이리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마치 원한이라도 있는 듯한 그의 말을 캐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필립과 헤어지자, 캐리는 곧 웨스트 팜 비취에 있는 큰 쇼핑 센터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신중하게 골랐다. 실제로 취직이 결정될 때까지는 대리점과의 면접, 레이디 제인과의 면접이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위한 변장용품을 하나하나 사들였다.
로슨의 말에 따르면 레이디 제인 소유인 100에이커 부지에는 올림픽 사이즈의 풀 외에도 테니스 코트가 여러 곳 있고, 대서양에 면한 개인 소유의 해변도 있다고 한다. 일은 어쨌든 간에 그런 곳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생애에 두 번 다시없는 멋진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 기획은 자신의 방송국 구역만이 아니고 전 미국 네트워크를 타도 좋을 정도의 재료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의기양양한 기분과는 달리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지금 자기가 계획하고 있는 일을 부모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문제였다. 변장까지 해서 사람을 속인다면 분명히 반대하실 것이다. 사실 그대로를 부모님께 얘기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불필요한 걱정을 시켜드릴 뿐이니까… 사람을 속인다고 해도 언제까지고 속일 작정은 아니겠고, 이것은 일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실을 말할 작정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양심을 위로하며 캐리는 불안으로부터 눈을 감기로 했다. 다만 어떻게 해야 변장을 잘할 수 있을까에 그녀는 몰두했다.
캐리는 앞머리를 반 갈라서 목덜미 근처에서 하나로 묶어 심플한 머리핀을 꽂았다. 흰 피부에 회색으로 눈 화장을 하자 엷은 금발과 더불어 이상할 정도로 투박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다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검은 테 안경을 끼자 그것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눈동자를 어느 정도 감춰 주었다.
그녀는 또 회색과 베이지의 칙칙한 색조의 셔츠를 자기 사이즈보다 좀 큰 것으로 골랐다. 구두는 싸구려는 아니지만 정말이지 노처녀 선생이 아니면 도서관의 사서들이나 신을 것 같은, 오직 실용성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옥스포드 슈즈로 정했다. 갈색의 뒷굽이 땅딸막한 구두를 신는다면 캐리의 보기 좋은 다리도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자기에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촌스러운 여자가 나라니…'
필립과 만나기로 약속해 두었던 레스토랑에서 그와 만나보고 캐리는 변장의 성과에 대해서 자신을 갖게 되었다.
"정말 믿을 수 없군!"
필립은 놀라워하며 소리질렀다.
"이런 촌스러운 여성과 만나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군요. 용모 따지는 플레이보이로 소문난 내 이름이 땅에 떨어지겠소."
2
대리점은 곧 찾을 수 있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하얀 건물에 <스미스 보이드 대리점>이라는 검은 글자의 간판이 붙어 있었다. 캐리의 면접은 11시, 그때까지 팜 비취를 자동차로 한 바퀴 돌아볼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팜 비취는 가늘고 기다란 섬으로 19세기에 백인에게 적의를 품은 인디언들이 일으킨 난동을 진압한 웨스 장군의 이름을 딴 웨스 호가 섬을 본토와 격리시키고 있었다.
사전에 이야기는 충분히 듣고 있었지만 실제로 돌아보니 섬의 아름다움과 유복함은 캐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고 있었다. 로얄 팜 비취는 그 이름에 어울리게 하늘을 찌를 듯한 야자수들이 훌륭한 자태로 쭉 늘어서 있어 마치 제왕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작은 폭스바겐을 운전하면서 캐리는 자신이 몹시도 자그맣고 보잘것없이 생각되어 어떤 위압감조차 느꼈다. 아무리 보아도 일반 대중용의 도로는 아니었다.
웨스 거리 또한 독자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거리였다. 그녀는 로얄 팜 웨이의 몇 블록 남쪽에 있는 비지네스 가를 달리고 있었다. 거리 양쪽으로는 작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화려한 차양들이 깔끔한 포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상점도 뉴욕에서나 볼 수 있는 쟁쟁한 일류들― 삭스 5번가, 본비트 테일러, 슈바트르, 카트리에 등―이 오만하게 서 있는 것이었다.
해안 거리로 나온 캐리는 현기증을 일으킬 것 같았다. 높은 담에 둘러싸인 대저택을 가까이 눈앞에 하고 거기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린 것이다. 다른 세기의 세계에서 출현한 무어인(註:8세기에 스페인을 점령한 회교도)의 성 같은 저택도 있어 첨탑이나 작은 탑이 빨간 타일로 꾸며져 있었으며 정교한 철문의 쇠창살 사이로 보이는 손질 잘된 정원은 정신이 아뜩해질 만큼의 유복함을 남김없이 전해 주었다.
격식있는 전통적인 호텔 브리커즈와 짝이 되는 탑을 보았을 때, 캐리는 지금까지 없었던 강렬한 계급적 콤플렉스에 빠져 버렸다. 선발된 손님을 기다리는 노귀족처럼 이 호텔은 대서양의 제일 끝에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대부호의 자격을 가진 자들만이 구석구석 손질이 잘된 잔디로 둘러싸인 커브길을 돌아서 이 호텔의 현관에 다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점차 캐리는 다른 나라를 떠도는 이방인 같은 기분이 되어갔다. 조금 있으면 면접을 받아야 하므로 캐리는 대리점 쪽으로 차를 돌렸다. 모든 것에 주눅이 들어서 자신이 싫어도 비굴해질 것만 같았다. 캐리는 자조적인 웃음을 띤 표정으로 그다지 오들오들 떨 일도 아니라고 자신을 꾸짖었다.
섬을 한 번 돌아보긴 했지만 확실히 캐리의 자신감은 동요하고 있었다. 과연 끝까지 잘 속일 수 있을까? 아까 본 그 높은 벽의 안쪽을 조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녀는 다시 두려워졌다. 그러나 아무리 이것저것 마음쓰며 걱정해도 소용없으리라. 이런 배타적인 특수 세계에 사는, 모든 것이 풍부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과는 멀리 떨어진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얗게 칠해진 대리점의 문으로 통하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던 캐리는 작은 사건을 계기로 상실하고 있던 자신감을 되찾고 일을 충분히 해치울 수 있는 자신이라고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바로 조금 전, 등을 곧게 편 자세의 회색 양복을 맵시 있게 잘 입은 청년이 문에서 나와 계단을 급하게 내려왔던 것이다. 캐리의 옆을 지나쳐 갈 때 그는 인사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녀의 얼굴에 잠깐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자만심은 아니었지만 어떤 남자든 꼭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녀에게 한 번쯤 시선을 보내오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캐리에게는 의외의 사건이었다. 이렇게도 철저하게 무시될 수 있다니…
그때 캐리는 퍼뜩 깨달았다. 훌륭하게 변장해 내었다는 가장 멋진 증거가 아닌가! 언뜻 보기에 가치 있을 만큼 매력적인 것도 아니지만 보기 싫은 것도 아닌 것이다. 이렇게 새로이 자신감을 얻은 캐리는 어깨를 치켜 올리고 의기양양하게 대리점 문을 밀고서 로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그로부터 두 시간 가까이 지나서 캐리의 등 뒤로 정교하게 무늬를 새겨 넣은 철과 놋쇠로 만들어진 육중한 문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스트로베리>의 여주인 제인 웨슨을 만나기 위해 꼬불꼬불한 저택 내의 보도를 캐리는 차를 타고 달렸다.
불안감은 사라지고 그녀는 어느덧 차도 양쪽에 펼쳐진 광대한 정원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캐리가 궁궐의 정원을 실제로 본 경험이 있다면 손질이 구석구석까지 닿은 이 정원을 당장 그것에 비길 것이었다. 대리석 조각의 벤치, 멋있는 분수, 푸르고 무성한 열대 수목들… 모든 것에 그저 숨을 들이쉴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급한 커브를 다 돌자 어느 사이엔가 대저택이 불쑥 모습을 나타냈는데 도저히 60년 전의 건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지낸 건물인데도 거칠게 단장을 한 회 반죽으로 꾸며진 벽은 열대의 담쟁이 덩굴로 덮여서 거의 가려져 있었다. 건물 양쪽에는 탄탄한 탑이 있었는데 복잡한 저택의 지붕과 마찬가지로 적갈색 스페인 기와로 이어져 있었다. 창도 현관도 고딕건축의 대성당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훌쭉한 아취형이었다.
캐리는 정면의 당당한 현관을 향해서 걸어갔다. 그녀는 어느 새 무두질한 가죽의, 오직 실용성밖에 없는 가방을 다시 걸머지고 정면 현관에 서 있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마침내 현관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터리에 나오는 집사를 방불케 하는 얼굴이었다. 엉겹결에 나오려는 비명을 캐리는 겨우 참아내었다.
현관에 들어서니 아취형 천장 구조의 큰 홀에 은으로 만든 갑옷 한 벌이 장식되어 있고, 중세때의 촛대가 벽에 달려 있었다. 벽도 바닥도 거친 돌들로 구성되어 있고, 동양의 수직 양탄자와 타피스트리가 사치스럽게 배치되어 있었다. 캐리와 같은 풋내기의 눈에도 뛰어난 디자인과 색감의 풍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집사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겉으로는 정중하면서도 은근히 무례한 태도를 가진 남자였다. 돌연 캐리는 엉뚱한 행동이 나오려고 했다.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거나 해서 이 남자를 당황하게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될 면접에 신경이 흥분되어 있는 탓인가? 모든 것이 디즈니랜드 동화세계의 사건처럼 현실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중세 양식인 아까의 홀과 비교하면 훨씬 평범한 느낌의 방에 안내되자 캐리는 흥분이 좀 가라앉았다. 그녀는 딱딱하고 형식적인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는 방안을 한 번 훑어보았다. 저택 안에서는 규모가 작은 방으로 가구들의 느낌으로는 거실인 것 같았다. 가구들은 루이 15세 양식으로 수수한 빛을 발하는 정교한 나무 조각에 새틴 천을 깔아 놓았다. 구석 한쪽에는 금으로 된 용의 장식이 있었고, 검은 칠을 한 큰 서재용 책상도 놓여져 있었다.
방 안쪽 의자에 부인이 앉아 있었다. 쪽 곧은 의자 등받이가 조금도 불편하지 않은 모습으로 부인은 마치 의자에 딱 붙여진 듯 등을 곧게 펴고 앉아 있었는데 대리석같이 딱딱하고 차가운 파란 눈이 캐리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미스 린제이지요? 그쪽에 앉으세요."
그렇게 말하며 부인은 자신이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아하지만 앉음새가 불편한 듯한 의자를 가리켰다.
인품을 너무도 잘 나타내는 말투― 캐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좀 전의 거만스러운 남자도 영화에나 나올 듯한 집사였지만, 레이디 제인 웨슨도 또한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귀부인이었다. 외관상으로 60대 정도의 웨슨 부인은 여왕처럼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은발을 단정하게 묶어 올려 머리 위로 모았으며,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했고 정맥이 도드라진 손은 고가의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연륜을 쌓은 여성에게는 두 종류의 타입이 있다는 것이 이전부터 캐리의 지론이었다. 하나는 동화에 나오는 할머니같이 포동포동하게 살찐 타입과 또 하나는 피부 밑의 근육이 전부 녹아 버린 것 같이 빼빼 마른 타입이다. 그녀는 어느 쪽인가 하면 후자에 속한다. 엷은 청색의 마직 슈트를 가는 어깨로 겨우 지탱하는 것 같았다.
레이디 제인도 대리점에서 들은 것과 거의 똑같은 질문을 했으며, 캐리의 대답은 그녀를 만족시킨 것 같았다. 뉴올리언즈의 한 부인― 캐리는 엉터리 이름을 댔다―의 비서로서 그녀와 동행해서 여행을 했었다고 말하였다. 그것도 플로리다에 도착하고 나서 수 시간 전에 자기 쪽에서 일을 거절했다― 부인의 아들이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접근해 왔기 때문에―고 꾸며낸 이야기를 했다.
학력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작은 남자아이가 방에 들어왔다. 이야기가 끊어지기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에 캐리는 말을 중단했다.
"아니 제이미, 무슨 일이지?"
레이디 제인은 대화 도중에 방해받은 것이 조금 짜증스러운 것 같았다.
"용서하세요, 할머니. 제가 풀에서 수영해도 괜찮을까요? 충분히 조심할게요."
캐리는 이 소년을 찬찬히 관찰했다. 이 얼마나 예의바른 도련님인가, 어린 소년에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침착해 보이는 이 소년은 여섯 살이나 일곱 살 정도인 것 같았다. 캐리는 어느 사이엔가 이 소년과 같은 나이였을 때의 자기와 동생들을 비교하고 있었다.
"알고 있겠지, 제이미? 누군가 시중드는 사람이 없으면 수영해선 안 돼! 에로이즈는 지금 오후의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까 아동실에서 장난감을 갖고 놀든가 정원에서 놀아라. 바닷가에 다가가서는 안 된다. 자, 얼른 가거라."
고개 숙인 소년의 얼굴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으로 노부인은 다시 캐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소년은 완전히 무시되어 버렸다. 방안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나가는 소년의 눈이 캐리에게로 언뜻 향해졌을 때 그녀는 좀 놀랐다.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은 손톱만치도 없는 눈이었다. 그 새까만 눈동자는 그 나이에 이미 체념을 알고 있는 듯했다. 대화가 중단된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뜻밖의 해프닝은 캐리의 가슴에 묘한 여운을 남겼다.
"미스 린제이, 당신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즉, 만약 서로 입장이 바뀌어서 당신이 이 <스트로베리>의 여주인이고 내가 비서 일에 응모해 온 사람이라고 한다면…"
레이디 제인의 이 마지막 질문에 캐리의 뇌리에 조금 전의 무표정한 소년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촌스러운 안경 속으로 빌로드같이 아름다운 눈이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는 것을 부인은 알지 못했다.
"웨슨 부인, 입장이 바뀌어져 있으리라는 일은 전혀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캐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입장도 생각하지 못하고 엉겹결에 본심을 털어놓은 것이다.
"그렇겠지요."
노부인의 위엄 있는 파란 눈이 만족스러움으로 빛났다.
"이렇게 빨리 다음 분을 찾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여느 때라면 아들과 상담한 후에 결정하지만 지금은 마침 부재중이군요. 월급이라든가 그 외의 조건에 이의가 없는 것 같으면 당신으로 결정하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캐리에게 급료액을 알려 주었다.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인색한 액수도 아니었다.
캐리는 부자들이 반드시 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말라고 했던 필립의 말을 생각해 냈다.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아요. 주로 공사에 관한 편지 일이지요. 그 외에 나 대신 심부름이나 쇼핑을 부탁하겠어요. 결국 내 명령대로만 하면 되는 겁니다. 무리한 것을 부탁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처음에는 너무 적극적으로 보이 것도 좋지 않을 것이므로 아무튼 급료나 일의 내용에는 만족하고 있다고 캐리는 레이디 제인에게 말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사적 용무가 있다고 미리 양해를 구하고 그녀는 다음 날부터 일을 하기로 했다. 식사와 방이 달렸다는 조건은 일에서 해방된 시간에는 저택을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캐리가 바라던 일이었다. 레이디 제인과 관련되어 있는 여러 군데 사교상의 교제도 캐리의 흥미를 자아내게 하였다.
유유히 한가롭게 지낼 시간은 없을 것이다. 캐리는 면접을 마친 날 오후와 다음 날 오전 시간을 필요한 옷들과 악세사리를 사는데다 허비하고 말았다. 쇼핑은 최소한으로 한정시켰다. 2, 3주 간이나 기껏해야 한 달 분의 옷만 있으면 아쉬운 대로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날 오후 <스트로베리>에 도착한 캐리를 레이디 제인이 직접 맞아주어 그녀를 놀라게 했다. 저택 안을 안내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안채 양쪽에 2층으로 통하는 나선형 계단이 탑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캐리는 다시 한번 놀랐다. 건축계의 귀재 에디슨 미즈너는 이 작은 열대 섬에 중세 건축양식을 꽃피우게 한 장본인이지만, 그는 넓은 방에 계단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넓은 방에 계단을 설치하면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것의 효과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 미즈너의 주장이었죠."
설명하는 레이디 제인의 위엄 있는 눈이 아연해 있는 캐리의 얼굴에 쏟아졌을 때 언뜻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차라리 엘리베이터라도 설치할까 하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나태해질 뿐이겠지요. 그리고 계단을 오르는 것은 건강에도 좋을 테고요. 내 스스가 계단을 오르내릴 수 없을 정도로 나이를 먹으면 그때는 싫어도 콘도미니엄이나 그런 곳으로 이사를 해야겠지요."
정말 진절머리난다는 듯 부인은 어깨를 움츠렸다.
빗장이 있는 아취형 문을 몇 갠가 지나서 부인은 어떤 문 앞에 멈춰 서더니 그 문을 밀었다.
"이곳이 당신 방이에요. 내 방도 손자 방도 같은 층이에요. 남쪽 방은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아요."
자신의 방이라고 소개받자 캐리는 선뜻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그 방에 대해 도저히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엄청나게 큰 방의 반은 거실로 꾸며져 있고, 나머지 반은 침실로 되어 있었는데, 가구는 전부 18세기의 프랑스 양식으로 슬쩍 보기만 해도 훌륭한 것임을 곧 알 수 있었다. 캐리의 시선은 끌리듯이 침대로 쏠리고 있었다.
침대 천장의 높은 커튼 위에는 정교한 나무 조각이 꾸며져 있고, 커버는 커튼 천과 마찬가지인 광택있는 공단으로 주름이 풍성하게 잡혀 있었다. 자신이 이런 우아한 침대에서 잘 수가 있다니!
그 외의 가구들도 눈이 휘둥그레질 것들뿐이었다. 빛깔과 무늬가 모두 같은 대형 옷장, 다리가 높은 서랍장, 그리고 금테를 두른 거울과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한 테이블과 서랍이 있는 화장대와 우아한 의자와 소파, 스탠드의 갓은 실크로 되어 있었다. 뉴올리언즈의 캐리 아파트에는 전부 들어갈 수도 없을 정도의 가구들이지만 이 방에는 결코 가득 차는 느낌이 들어 답답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수도원의 방 같은 것을 상상하고 계셨나요? 접어 개키는 침대에 세면대만 있는…"
레이디 제인의 유머가 있는 말이 캐리가 품고 있는 부인의 인상과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았다.
"훌륭한 방이에요, 웨슨 부인."
자신의 입장을 생각해 내고 이런 사치스러운 방은 자신의 신분에 걸맞지 않는다고 암시하는 듯한 목소리와 태도를 캐리는 자연스레 꾸몄다. 아취형 창문 중의 하나에 그녀는 유혹된 듯이 다가갔다. 주름을 잡은 새틴 커튼에는 까칠까칠한 레이스의 장식용 끈이 달려 있었다.
"어머!"
저택의 뒤뜰과 소유지인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경관에 캐리는 숨을 들이켰다.
"너무 멋있어요."
무심코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며 캐리는 중얼거렸다.
"그럼 욕실로 안내하지요. 당신 전용이에요. 그리고 나서 당신이 집안 지리를 알 수 있도록 나머지도 마저 보여드리지요."
레이디 제인은 다시 위엄있는 태도로 돌아갔다. 비서 같은 사람에게 언제까지나 그렇게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이 노부인이 친해지기 쉬운 사람으로 생각되었던 좀 전의 유모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부인의 뒤를 따라가면서 캐리는 자신의 방과 소년의 방 위치를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 두었다. 소년의 방은 유모인 에로이즈의 방과 잇대어 있었다. 아래층 방을 보러 다니던 중 집사인 스탠포드와 그의 아내 루시를 만났다.
루시는 요리 담당으로 음침한 느낌을 주는 여성이었는데, 작은 몸집에 체중은 40㎏도 채 되지 않을 듯싶었다. 더부살이하는 고용인은 캐리 외에 이 부부와 에로이즈뿐이고, 저택 안과 정원의 청소는 통근하는 사람을 쓰고 있다고 했다.
저택 안을 한 바퀴 다 돌았을 쯤에 캐리는 마치 박물관 순례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저택은 미술품의 보고 같았다. 현재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방들도 부인은 선뜻 안내해 주었다. 골동품이나 미술에 관한 지식을 어느 정도나마 갖추고 있었더라면 하고 캐리는 새삼 억울해 했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 마을에서는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값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카펫과 태피스트리가 하나하나 캐리의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는 분명히 대작의 일부분이었을 직물의 조각까지도 수집되어 있었다. 훌륭한 직물 컬렉션임을 전문가가 아닌 캐리의 눈으로도 알 수 있었지만, 레이디 제인의 설명이 이러한 감상을 뒷받침해 주었다. 동양 양탄자의 개인 수집으로서는 가치나 양의 면에 있어서 전 미국에서 최고라고 그녀가 태연스럽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이 직물 컬렉션을 조사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캐리는 재빨리 생각했다. 지금 눈앞에 보고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실마리에 지나지 않으리라.
"한가로울 때 여기저기 돌아보셔도 괜찮아요."
레이디 제인이 캐리의 반응을 살피듯이 말했다.
"풀도 비어 있을 때는 자유롭게 사용하셔도 되고요."
상당히 관용을 베풀고 있다는 태도였다.
"당분간 식사는 스탠포드 부부네와 함께 해주세요. 나는 만찬회 약속이 있어서 지금부터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당장 급한 질문이 없으면 내일 아침 9시부터 일을 시작해 주세요."
치밀어 오르는 불만을 삼키며 캐리는 가까스로 순종의 인사를 했다. 스탠포드와 루시, 두 사람과 함께 주방에서 식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그녀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고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지만 그들의 건방진 태도가 싫은 것이었다. 부인이 당분간이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하고 캐리는 우두커니 생각에 잠겼지만 식사 시간을 물으러 루시에게 갈 때쯤에는 이미 그것을 잊고 있었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안 일이지만 캐리의 식사는 대단히 호사스러운 것이었다. 주방에서 식사하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고 주방에 인접한 고용인용의 다이닝 테이블에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에로이즈는 그 소년과 함께 식사하고 있는 듯했고, 다이닝룸에는 캐리와 스탠포드 부부뿐이었다.
이 저택에서 캐리는 동료― 고용인들―에게 기분 좋게 환영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들은 신참자에게 그렇게 쉽사리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여주인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의 진의를 의심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식사 동안의 대화는 어딘지 어색했고, 캐리는 이 과묵한 부부의 입을 열게 해서 무언가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헛수고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체념하고 훌륭한 요리에 신경을 집중하기로 했다. 만약 이것이 고용인들의 평범한 식사라면 지나친 칼로리 섭취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시작된 날로부터 2, 3일 간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캐리의 일은 하루 중 두세 시간 할당하면 끝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레이디 제인― 고용인들은 모두 그녀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은 하나하나의 일을 가능한 한 길게 끄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 만났을 때의 인상으로는 일을 빠르게 해치워 버리는 것을 좋아할 듯했지만 그렇지가 않아 캐리는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알게 된 일이지만 다른 고용인들도 빈 시간이 없게끔 일을 질질끌며 하고 있었다.
캐리는 부인이 운전사가 있는 옛스런 리무진으로 이곳저곳의 초대와 사교 모임으로 매우 바쁠 것이라고 제멋대로 상상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실제로 초대에 응한 두세 군데의 교제도 별로 마음에 내켜 하지 않는 것이었다. 방금 에버 그레이즈 클럽에서 개최되는 패션쇼를 겸한 성대한 점심식사 모임에 대한 출석 여부를 캐리가 대신했는데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라는 캐리의 말을 듣고 나서야 승낙하였다.
"모금하는데 응하는 일로 어떻게든 체면을 유지하려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부인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며 레이디 제인은 힘없이 웃었다.
<스트로베리>에 들어온 지 일 주일이 되는 날 캐리는 처음으로 혼자서 저택 안을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레이디 제인은 오후 내내 외출해 있을 예정이었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캐리는 휴식시간을 기다렸다.
그녀는 여느 때의 변장용 복장을 벗어던지고 낡아빠진 청바지에 셔츠 스타일, 신발도 캔버스지의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머리도 느슨하게 하고 성가신 안경도 벗은 채로 있고 싶었지만, 원래대로의 자신을 속속들이 드러내고 집안을 돌아다니는 것은 역시 위험했다. 고용인들 중에 누구와 맞부딪칠지도 모르므로 촌스런 모습으로 온종일을 지내는 데는 이제 지긋지긋할 지경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검은테 안경을 쓰고 카메라를 어깨에 늘어뜨린 채 그녀는 저택 안의 탐험을 시작했다.
캐리는 우선 타일을 깐 커다란 테라스를 사진에 담았다. 꽃이 만발한 관목 식물과 스페인식의 안뜰용 등가구가 호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테라스 맞은편으로는 아베바형의 수영장이 보였는데, 풀의 파란 물이 빛을 반사해서 눈부시게 빛나고, 그 주위에 스트라이프 파라솔이 응달을 만들어 라운지 의자와 테이블을 그 속에 들여놓고 있었다.
풀 저쪽은 온통 잔디밭으로 여기저기 야자수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세속의 물결로부터 보호되어진 새하얀 모래사장이 해안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모래사장 끝으로는 새파랗게 무한히 펼쳐진 대서양― 오늘은 파도도 없는 고요한 바다였다.
테라스를 오른쪽으로 돌아서 최신 설비가 갖춰진 테니스 코트를 지나니 아젤리아와 협죽도 등 여러 가지 식물이 무성하게 자란 정원이 있었고, 밟아 다져진 듯한 작은 길이 미로처럼 얽혀져 있었다. 울창하게 자란 정원수 안쪽에는 차가운 물이 솟아나오는 분수와 인공으로 만든 강이 흘렀고, 그 옆에 대리석 벤치가 놓여져 있었다.
캐리가 작은 길을 더듬으며 걷고 있을 때 뜻밖에도 차도로 보이는 길이 앞에 나타났다. 캐리의 모험심은 한층 고조되어 갔다. 찻길을 걸어가는 캐리의 눈앞에 주위의 울창한 나무들에 융합되어 버린 듯한 연두색의 작은 별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모래사장에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희미할 뿐으로 깊은 정적에 싸여 있었는데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이 집 뒤쪽으로 나온 것을 깨달은 캐리는 벽돌 포석을 돌아서 해변과 닿은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자그마한 잔디밭이 뚝 끊기고 만조시에 바닷물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방부용 석탄산을 칠한 거목들의 방파제가 둘러쳐져 있었는데, 방파제 바로 아래가 모래사장으로 잘라낸 그대로의 나무들로 만든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계단 아래의 모래사장에는 파도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이 작은 집의 베란다에서 누군가가 이따금 눈앞에 펼쳐진 대서양의 파도가 계단 아래를 씻어 내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러한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캐리는 가슴이 설레었다.
어떤 강한 충동에 떠밀리듯 그녀는 베란다로 통하는 소박한 벽돌 계단을 올라가 주뼛주뼛하며 매끈한 녹색 문의 잘 닦여진 놋쇠 손잡이에 손을 뻗쳤다. 손잡이는 쉽게 돌아갔다. 집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유혹에 넘어간 캐리는 문에서 거실로 발을 들여놓고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거실은 초현대적인 실내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고급스런 갈색 가죽의 등 낮은 소파, 유리가 깔린 테이블, 크롬 다리가 붙은 공 모양의 스탠드, 바닥 중앙에는 검은색과 갈색과 흰색의 기하학적인 무늬가 아름다운 카펫이 깔려져 있었으며, 액자에 끼우지 않은 현대식 그림이 벽 한 면에 장식되어 있는데, 그림 속의 선명한 노랑과 오렌지색이 벽에서 튀어나와 당장이라도 캐리에게 덤벼들 것 같았다. 나무로 된 차양은 제일 꼭대기까지 말아올려져서 바깥의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방안은 생기로 가득차 있었다. 이 <스트로베리>와 이처럼 훌륭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방은 없을 것이었다. 호기심을 돋우며 캐리는 방에서 방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녔다. 다른 방도 센스 넘치는 실내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실내의 밝은 색채가 무미건조하기 쉬운 모던한 장식의 따분함을 덜어주는 것 같았다.
캐리는 방의 분위기에 완전히 빠져서 밖에서 차소리가 나는 것도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자기 이외의 사람이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침실 안에까지 발을 들여놓은 것이 발각되면 대체 어떻게 넘기려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리는 킹사이즈의 침대를 넋을 잃고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홍색과 짙은 물색의 대담한 줄무늬의 침대 커버가 젖혀진 상태로 되어 있었는데 시트와 베개 커버는 선명한 색채의 실크였다.
"경찰을 부를 때까지 좀 더 이것저것 관찰하고 싶어요, 아가씨?"
낮고 거만한 남자 목소리에 놀라서 캐리는 몸을 돌렸다. 그 여세에 어깨의 카메라 끈이 흘러내려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한 손으로 잡으며 캐리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키가 큰 남자가 문기둥에 기대어 분노가 이글거리는 파란 눈으로 차갑게 캐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 눈은 캐리의 검은 가죽 카메라 케이스에 고정되었다. 그 카메라는 부모님이 졸업 축하선물로 주신 것으로 그녀가 자랑할 만한 소유물 중의 하나였다.
"꼭 쥐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녀석을 바다에 처넣었으면 좋겠군요."
"그런 일 할 수 없어요. 이건 제 카메라예요. 당신에게 그럴 권리는 없어요!"
남자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캐리는 두 손으로 카메라를 끌어안듯이 하며 알맞게 햇빛에 그을은 남자의 얼굴을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남자의 고집스러운 듯한 입가가 일그러지며 조소하는 듯이 웃었다.
"이곳은 내 방이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과 마찬가지로 그을은 손으로 방을 한 번 빙 둘러 가리켰다.
"당신이 여기 있을 권리도 없소."
남자는 그녀를 덮칠 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캐리의 손에서 카메라를 빼앗아 자신이 말한 대로 던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된 바에는 자존심이고 뭐고 내팽개칠 수밖에 없었다.
"부탁이에요! 불법침입을 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었어요. 이곳도 레이디 제인의 저택 안이지요? 어디든 좋은 곳을 보러 다녀도 괜찮다고 부인이…"
캐리의 말은 한순간 그의 기를 꺾는 것 같더니 결과는 오히려 누르고 있던 남자의 분노에 기름을 쏟아 부은 것이 되어 버렸다.
"당신, 너무 뻔뻔스런 여자군! 당신들 사회에서는 이야깃거리를 만들거나 몇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목숨까지도 거는가요?"
이 남자는 캐리가 저택 안을 조사하는 정보수집 리포터라고 생각해서 호되게 꾸짖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누구지? 맞춤양복의 슬랙스와 셔츠의 호화스런 복장이랄까, 사람을 위압하는 태도랄까― 고용인은 아닌 것 같은데…
"내막을 폭로하는 리포터로 특종기사를 노리는 것이라면 좀 더 용의주도해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예리한 빈정거림이 쏟아지자, 캐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엇을 가장하고 있는지―를 말하지 않았음을 퍼뜩 깨달았다.
'이번 비서 일을 위해서 산 그 투박한 복장이었다면 퍽 도움이 되었을 텐데…'
하고 캐리는 새삼스러이 후회하고 있었다. 몸에 붙은 자존심을 가까스로 팽개치고 캐리는 자신의 코끝이 남자의 가슴에 닿지 않도록 그를 떠밀었다.
"제 소개를 해도 될까요?"
자신의 분수는 알고 있다는 식의 묘하게도 겸손한 체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저는 린제이라고 합니다. 레이디 제인의 비서예요. 괜찮다면 당신의 이름을 여쭙고 싶은데요."
키 큰 남자는 넓은 가슴 위로 팔짱을 끼고 캐리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엷은 붉은색의 슬랙스를 통해서 길고 다부진 그의 다리를 느낄 수 있었다. 남자의 차가운 시선에 붙잡히자 엉겁결에 몸부림치고 싶어지는 것을 캐리는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남자는 캐리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또 새로운 희생물이란 말인가요? 어머니는 이번에도 대실패를 하신 것 같군요."
깔보듯 내뱉는 남자의 말에 캐리는 어리둥절하며 자신이 레이디 제인의 아들 방에 들어와 버린 것을 깨달았다.
캐리의 면접 날 레이디 제인은 부재중인 그의 의견을 묻지 않고 캐리의 고용을 결정해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참혹한 만남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사명도 다 마치지 못했는데 발견되어 버렸다면…'
이런 생각에 캐리의 가슴은 마구 두근거렸다.
"무심코 당신의 사적인 장소에 들어와서… 제발 용서해 주세요."
캐리는 재빨리 예의바른 변명을 해야만 했다.
"레이디 제인은 오후에 계속 출타중이십니다. 허락을 받고 집 안 여러 곳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이 별채가 눈에 띄어서요. 그래서…"
"호기심 왕성한 중년 여성같이 어떻게든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나요?"
심술궂게 웃는 입가로부터 보이는 새하얀 이가 그을린 남자의 얼굴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불쾌감을 주는 남자, 그러나 상당히 매력적인 남자였다. 캐리는 그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모친이 전의 비서를 해고시키고, 대신 아무런 매력도 없는 여자를 고용하려고 마음먹은 것에 수긍이 갔다.
"이곳에도 전화가 있겠지요? 본관에 전화를 하셔서 스탠포드나 루시에게 확인해 보시면 납득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좋은 생각이 있소. 저어―"
그는 그녀의 성을 생각해 내려고 애쓰는 듯했다.
"린제이라고 합니다."
캐리는 빠르게 대답했다.
남자가 웃었다.
"아, 그래요. 미스 린제이, 어떨까요? 그 비싼 듯한 카메라를 일단 내게 넘겨 주지 않겠소? 당신이 말한 대로의 사람이라면 저녁 무렵에는 카메라를 돌려 주겠소. 그리고 레이디 제인을 만나면 내가 집에 돌아왔다고 아울러 전해 주시오."
이 소중한 카메라만은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상대방이 말하는 대로 하는 편이 현명할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중에 되돌려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알았어요. 저 웨슨 씨지요?"
확인하듯이 캐리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물었다.
"마티슨이오. 블레어 마티슨."
허리를 굽히며 딱딱한 인사를 건네왔지만 그의 눈은 음험하게 웃고 있었다.
카메라를 건네주려다가 캐리는 그의 이름에 어리둥절했다. 그가 레이디 제인의 아들이라면 왜 같은 성을 따르지 않는 것일까? 갑자기 불가해한 관계에 자신이 말려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캐리는 그의 손에 카메라를 던지듯이 주어 버렸다.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낡아빠진 청바지에 셔츠 스타일의 캐리는 뺄 수 있는 한 점잔을 빼며 방을 나왔다. 안경과 머리 스타일 덕분에 간신히 그의 방을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어깨를 치켜 올리고 턱을 위로 들고는 캐리는 벽돌길을 따라 차도를 돌아서 계속 걸어갔다. 별채 창에서 블레어가 자기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등에 그의 시선을 느끼자, 캐리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몸을 도사리며 걸었다. 울창한 입목 속의 작은 길에 당도하고 나서야 겨우 긴장에서 해방된 듯한 캐리였다.
오후의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지만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라 그녀는 지금은 누가 뭐래도 자기 방으로 빨리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변장이라는 당돌한 행위를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막 가지기 시작한 참에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단 말인가? 블레어 마티슨이 상당한 수완가임은 한눈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 쏘는 듯한 날카로운 눈이 두려웠다.
블레어의 방은 물론 레이디 제인의 본관 내부도 아직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다. 그녀의 행동에 대한 의혹감을 풀기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라고 말해 두어야겠다고 캐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레이디 제인이 친구를 접대하고 있는 장면과 고용인이 일하고 있는 곳, 결국은 이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될 제이미의 사진도 찍어 두고 싶었다.
그러나 만약 블레어 마티슨이 그녀의 정체를 간파했다고 한다면 카메라는 되돌려 주겠지만 오늘 찍은 필름은 뽑아 버렸을 것이다. 물론 이 일 주일 동안 꽤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넣기는 했다. 그러나 기사만이고 사진이 없다면 스탠 커티스도 써주지 않을 것이다.
'이 무슨 얼간이 같은 짓을!'
안타까운 심정의 캐리는 몸을 끌다시피 하여 자기 방의 계단을 올라갔다.
3
"블레어는 불같이 화가 나 있었지요. 사랑하는 우리의 <스트로베리 성>에 리포터가 잠입해 들어와 있다면서… 나조차도 양해없이 찾아가거나 할 수 없는걸요. 블레어는요, 정보 수집하는 리포터만큼 야비하고 질 낮은 인종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레이디 제인은 그날 오후 캐리가 실수한 이야기를 재미있어하며 그렇게 말했다. 물론 캐리는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은 생략해 버렸다. 몇 시간이나 걸려서 각본을 미리 머릿속에 짜 두었던 것이다. 나 자신도 어지간히 연극을 잘한다고 캐리는 혼자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별채를 보고 돌아다니다가 본 적이 없는 남자에게 발견되어 난폭하게 취급당했다는 이야기 끝에는 정말이지 화가 다시 치밀어 올랐는지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별채에는 자물쇠도 걸려 있지 않았었는데!
"걱정하지는 마세요. 블레어에게는 내가 잘 해명해 둘 테니까요. 발끈하고 성을 잘 내는 성질이라서… 장래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미리 말씀드리겠는데요, 외아들이란 정말 어쩔 수가 없다고요."
캐리는 부인의 상냥함과 친밀감이 감도는 말투에도 상당히 놀랐지만 마지막 충고의 말에 의표를 찔린 것 같았다.
레이디 제인은 이렇게 매력 없는 비서인 자기에게도 언젠가 결혼상대가 나타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블레어가 마티슨의 성을 따르고 있는 수수께끼도 레이디 제인이 곧 해명해 주었다. 부인은 세 번 결혼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하고 그녀는 일부러 말을 끊었다.
두 번째 남편이 블레어의 아버지로 자식은 그 사람 하나였다. <스트로베리 성>은 블레어의 할아버지가 겨울철 별장으로 지은 것으로 주로 친구들을 접대하는 데 이용했던 것 같았다. 교제가 넓고 친구 중에는 정부 요인도 많았다고 한다.
손자를 어떻게 부인이 양육하는 처지가 되었는가를 사려 깊은 캐리는 묻지 않았다. 제이미의 아버지를 만나고서부터 그 모친에 대한 호기심이 샘솟으며, 제이미는 모친을 닮았음이 분명하다고 캐리는 생각했다. 오늘 오후 우연히 만난 그 키 크고 거만한 남자와 작은 몸집에 검고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소년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캐리가 그 별채에 멍청히 들어가게 된 날로부터 꼭 일 주일이 지났다. 오늘은 아침부터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레이디 제인은 지금 집에 없고 디너파티를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고 집에 일단 돌아왔다가 곧 다시 나갈 것이다. 아들인 블레어도 어머니와 동행한다고 했다. 그녀는 풀에서 수영을 하든지 테라스를 산보하든지 원한다면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즐겨도 좋다는 레이디 제인의 허가를 이미 얻어 놓았다.
블레어와 마주친 이후 의기소침해 있는 캐리에게 노부인은 놀랄 정도로 상냥하게 대해 주었다. 캐리는 지금이라도 방심할 것 같은 자신에게 조심하도록 계속 타이르고 있었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고용주와의 사이에 감정적으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레이디 제인은 엷은 하늘색 마직 양복에 비싼 진주 브로치를 달고 외출했다. 그 후 바로 캐리는 저택의 인테리어 쇼트를 몇 장 찍고 루시와 스탠포드가 일하는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처음의 서먹서먹함은 이미 없었다.
스탠포드는 은식기를 닦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정교한 장식의 은쟁반, 스프용 접시, 그릇, 받침 달린 잔과 촛대가 테이블 위가 비좁은 듯이 쭉 놓여져 있었다. 스탠포드의 표정은 더할나위없이 좋았다. 그 따분하기가 짝이 없는 표정… 레이디 제인의 집사로서 이 은식기 닦는 일이 진절머리나는 일과임을 그는 잘 나타내고 있었다.
필름을 전부 다 써 버렸기 때문에 웨스트 팜 비취까지 나가서 현상을 의뢰하기로 캐리는 마음먹었다. 그러자 갑자기 필립 로슨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필립은 캐리의 연락에 크게 기뻐하며 점심식사라도 꼭 한 번 같이 하자고 했다. 오늘은 오후부터 출장으로 마을을 떠나 있지만 2, 3일 지나면 돌아온다며 만날 장소를 지정했다.
<스트로베리>에 돌아왔지만 레이디 제인이 돌아오기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해변을 산책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잠시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캐리는 심플한 초콜릿색 원피스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스커트 부분이 주름으로 되어 있는 시대의 유행 감각에 뒤떨어진 수영복이었지만 캐리의 늘씬한 몸매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레이디 제인이나 그 아들의 눈을 속일 수는 있으리라.
마직으로 된 큰 손가방을 되는 대로 움켜쥐고 캐리는 활짝 열린 옷장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안쪽에 붙어 있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는 아주 진부한 모습의 수영복 위에 같은 초콜릿색 비취 가운을 걸치고 밀짚으로 된 샌들을 신었다. 머리는 뒤에서 하나로 묶어 핀으로 고정시키고 검은 테 안경을 썼다. 2주일이 지난 지금도 이것이 자기 자신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모습에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원래의 자신과는 동떨어진 인물을 연출하는 것이 이다지도 고통스러우리라고는…
모래사장에 도착했을 때의 그녀는 신바람이 나서 몹시도 들떠 있었다. 캐리는 마직 손가방을 내던지듯이 내려놓으며 샌들을 벗어던지고 비취 가운을 집어 들었다. 바늘로 찌르면 자란 물이 쏟아져 내릴 듯한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밀려오는 파도를 맞이하듯이 두 손을 쭉 내밀었다.
캐리는 흥분해서 떨리는 손으로 거추장스런 안경을 벗어던지고 헤어핀을 잡아 뽑았다. 여기서라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었다. 저택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것이고, 레이디 제인이 돌아올 때에는 이미 돌아가 있을 테니까…
바닷바람이 캐리의 엷은 금발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맨발로 정신없이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던 그녀는 파도치는 곳 저쪽에 어린애의 모습이 보이는 것을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다. 놀랍게도 제이미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어머, 웬일이지?"
난처하게도 제이미는 캐리의 모습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작은 어깨를 반항적으로 치켜 올리고 있는 것이 제이미의 흥미를 끌었다. 에로이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의 명령을 거역하고 혼자서 해안까지 내려온 것일까?
소년은 서 있는 채로 캐리 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소년에게 다가감에 따라 검은 눈동자를 부라리며 가늘고 작은 몸이 긴장하고 있는 것을 캐리는 곧 알 수 있었다. 제이미는 겨우 일곱 살인데도 이미 귀족적인 매너를 갖춘 것 같았다.
"어머, 제이미, 산보하는 거니?"
캐리는 쾌활하게 말을 걸어보았다.
"고자질하실 거죠?"
인사도 하지 않고 소년은 도전하듯이 물어왔다. 캐리는 여동생과 남동생과의 경험이 있었던 덕택에 이런 경우에는 태도를 확실하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어린아이란 것은 본능적으로 위선을 간파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캐리는 소년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서 모래사장에 앉았다. 이렇게 하자 캐리의 시선이 소년의 눈높이와 같아졌다.
"아줌마와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까…"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캐리의 동생이 이 소년과 같은 나이였을 때는 열심히 용서를 빌며 무엇이든 말할 테니까 듣고 눈감아 달라고 부탁했었다.
"글쎄, 네가 말한 대로겠지."
캐리는 생각 깊게 맞장구를 쳤다.
"내가 이곳에 있는 한은 할머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어른과 함께 있는 것이 되겠지. 그래서 한 가지 너와 거래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신경질적인 소년의 입술이 곧 비웃음을 띠웠다. 그 표정에 캐리는 문득 소년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엇을 거래하자고 하는지 소년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짐짓 물어왔다.
"거래라니, 무엇을요?"
"오늘처럼 혼자서 바닷가로 나오지 않을 것을 약속했으면 해. 그렇게 한다면 할머님께 오늘 일은 비밀로 해줄게."
캐리는 타이르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소년의 눈이 턱 밑으로 무릎을 가볍게 껴안듯이 앉아 있는 캐리에게 향해졌을 때, 자그마한 얼굴에는 빈틈이 없는 표정이 가득차 있었다.
"전에 만났을 때와는 다른 사람 같네요."
이 말에 발끈해진 캐리는 자기 무릎 위에 소년을 엎어 놓고 엉덩이라도 때려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유를 부리며 웃어 보일 수밖에…
"그래, 오늘은 조금 달라 보일 거야. 누구든지 자기의 평상시의 고민도 잊고 이렇게 해변에서 마음껏 즐길 때에는 다르게 보이는 거 같다."
어둡고 까만 눈동자가 갑자기 수심에 잠긴 표정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때로는 나도 나 이외의 다른 인간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해요."
소년의 말에 캐리는 조금 전 제이미에게 났던 화가 날아가 버렸다. 불쌍한 제이미, 여기 이렇게 단지 외토리로 두려움에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니! 양복에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감시의 눈에서 도망쳐 왔으면서도 보통 아이들처럼 어떻게 해야 즐거워질 수 있는지를 모르는 것일까?
"그래, 좋은 생각이 있다."
캐리는 두세 걸음 뛰어가다 물구나무서기를 해보였다. 아주 훌륭한 회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녀는 뒤돌아서서 소년의 반응을 살폈다. 무슨 짓을 해서든 이 무표정한 소년에게 생기를 되찾아 주고 싶었다. 소년은 꼭 다문 입술을 조금 움직였을 뿐으로 변함없이 무표정했다.
"자, 도련님―"
캐리가 부추겼다.
"이번에는 네 차례야. 좀 더 굉장한 짓을 보여주겠니?"
소년은 마음속으로 무엇인가와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지나자 소년은 서서히 모래사장에 무릎을 꿇고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어머, 잘 안 되니?"
물구나무서기를 마치고 일어선 소년의 머리와 무릎 위의 모래를 캐리는 부드럽게 털어 주었다.
"신발도 양말도 벗고 하면 좀 더 잘할 수 있어. 그래 셔츠도 벗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망설임 없이 캐리의 충고를 따른 제이미는 반바지까지 벗어 던져 버렸다. 놀랍게도 속에는 빨간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이 나이에 이런 데까지 생각이 미치다니…
익살스런 몸짓으로 서로 흉내 내면서 해변을 뛰어다닐 때에 제이미는 완전이 허물없이 행동했다. 그러나 벌써 유감스럽게도 돌아갈 시간이었다.
"미안하다, 제이미. 이제 집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너도 함께 돌아가자. 네가 없어진 걸 알고 큰 소동이 일어나기 전에 말야."
소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원래대로의 고독하고 서먹서먹한 소년으로 돌아갔다.
"자, 빨리!"
캐리가 재촉했다.
"물가를 달려가기로 하자."
캐리는 소년의 작은 손을 꼭 잡고 밀려드는 파도를 발로 차며 물가를 달려갔다. 제이미는 금방 즐거운 듯이 까르륵 하고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자, 이제 끝이야. 가자!"
아직도 미련이 남아 아쉬운 듯이 손을 잡아 끄는 제이미를 캐리는 제지했다.
"옷 입는 것을 도와줄게."
소년은 순순히 가파르지 않은 모래언덕을 그녀를 따라 올라왔다.
돌연 작은 손이 캐리의 손을 잡아당겼다. 소년을 내려다본 캐리는 그 표정이 굳어 있음을 보고 놀랐다. 소년의 시선을 따라가다 캐리는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졌다.
블레어 마티슨이 몇 미터 앞 야자수 나무에 기대어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꽤 오래 전부터 어머니의 비서와 자기 아들이 흥겨운 나머지 도가 지나칠 정도로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블레어의 그 모습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캐리의 초콜릿색 수영복은 젖어서 몸에 붙어 있고, 머리핀을 뺀 금발은 젖은 채 흐트러져 있었다.
'어쩌면 좋을까?'
캐리는 몸이 떨렸다.
"안녕하세요, 마티슨 씨?"
딱딱하게 굳어서 인사를 한 캐리는 서둘러서 비취 가운을 걸치고 핀으로 머리를 묶었다. 간단한 헤어핀인데도 서두른 탓인지 좀처럼 생각대로 되지가 않았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안경을 찾았다.
"이건가요, 미스 린제이?"
두려움으로 가슴이 방망이질 하듯 쿵쿵 울렸다. 캐리가 눈을 들자 블레어가 그을은 손가락에 검은테 안경을 걸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그래요, 고맙습니다. 이게 없으면 나는 장님과도 같아요."
캐리의 거짓말은 곧 블레어의 반격에 부딪혔다.
"그렇습니까? 내가 보는 바로는 당신의 안경 도수는 아주 낮게 보이는데…"
야유하는 듯한 파란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블레어의 말을 무시하는 것처럼 캐리는 제이미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돕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전부 끝장이구나.'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러 왔다. 자신의 신상 문제도 걱정이지만 어린 제이미가 어린애로서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입을 꼭 다물고 잠자코만 있는 것이 캐리에게는 몹시 마음에 걸렸다. 제이미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한 캐리는 거북스러운 침묵을 깼다.
"오늘은 제이미가 해변까지 나와 동행해 주었어요.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요. 그렇지, 제이미?"
블레어 마티슨은 캐리의 말을 무시하고 조롱하듯이 가볍게 말했다.
"먼저 가세요, 미스 린제이."
캐리는 저택을 향해서 블레어 앞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제이미는 캐리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작은 손가락의 움직임이 그녀에 대한 신뢰감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어린아이에게 아이로서의 자연스럽고 행복한 생활을 허락하지 않는 어른들― 캐리는 화가 끓어올랐다. 경제적 혜택은 풍요롭지만 이렇게 가련한 아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돌아오는 길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앞쪽에 차고가 보이자 캐리는 겨우 구원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레이디 제인이 테라스에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 걸어오는 세 사람을 향해 그녀는 말을 걸어왔다.
"제이미를 찾았구나, 정말 다행이다."
부인의 얼굴이 걱정으로 핼쑥해져 있는 것을 보고 캐리는 변명할 여지를 찾을 수 없었다. 레이디 제인은 제이미의 얼굴을 보고 안심했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잔소리를 퍼부었다.
"제이미, 알고 있겠지? 모두 얼마나 너를 걱정하고 있었는지… 아니나 다를까―"
"미스 린제이가 바닷가를 산책하러 가는데 데려간 것 같아요."
블레어가 끼어들었다.
자못 의심스러운 듯이 퉁명스레 말하는 블레어의 말투에 캐리의 볼이 새빨개졌다. 뺨에는 바닷물이 묻었는지 소금이 달라붙어 있었다.
레이디 제인이 말하려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캐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제이미가 없어졌을 때 우선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유괴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블레어는 아들 앞에서 무엇 하나 감정적인 말을 입에 담지 않고 있지만, 캐리는 그의 마음속을 읽을 수가 있었다.
블레어는 캐리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해변에서 캐리와 즐거운 듯이 놀고 있던 제이미를 발견했을 때에도 기쁜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와 아들은 침묵 속에 양해하고 있었던 듯 레이디 제인이 다시 장황하게 모두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특히 에로이즈의 걱정이라고 하면 하늘이 무너진 듯했다고 제이미에게 설교하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미스 린제이."
냉정한 블레어의 목소리가 막 걸음을 뗀 캐리를 멈추게 했다. 최악의 사태를 생각하고 캐리는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일곱 살짜리 아이한테 일부러 시간을 할애해서까지 그애의 환심을 사려고 한 이유를 꼭 들어 두고 싶은데요."
말씨는 부드러웠지만 굉장한 트집을 잡고 있었다.
캐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분연히 몸을 뒤로 돌린 그녀의 입가가 분노로 떨고 있었다.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는 게 어떨까요? 마티슨 씨!"
불같이 화가 난 캐리는 자기방어고 뭐고 다 잊고 말았다.
"제이미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모두 유괴를 목적으로 한다는 그 생각에 난 속이 메슥메슥해요. 오늘 오후 당신 아들과 내가 함께 지낸 진짜 이유는요, 그 아이가 너무 가련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에요. 이 박물관 같은 저택에 가두어져서 이렇다 할 즐거운 일도 없이…"
말 도중에 너무 조심성이 없다고 느껴지자 캐리는 갑자기 입을 우물거리며 목소리를 줄였다.
"보통 아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애정에도 결핍되어 있더군요. 제이미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겠지만 너무 고독하고 불쌍한 소년이에요. 그 외에 또 묻고 싶은 것이 있나요, 마티슨 씨?"
캐리의 화는 점차로 가라앉았다. 지금은 그저 음험한 눈길로 꼼짝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블레어의 시선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비취 가운만으로는 캐리의 아름다운 몸매를 다 감출 수가 없었다. 노출된 긴 다리가 열대의 햇볕에 그을러 이미 가볍게 타 있는 것을 캐리는 알아차렸다.
"사실은 말이오, 당신에 관해서 두세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블레어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걸었다.
"별로 급한 일은 아니지만."
자기 방에 겨우 돌아왔을 때 캐리의 몸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블레어 마티슨에게 그런 말을 해댈 수 있었다니! 아마도 레이디 제인의 비서도 이것으로 끝나게 될 듯했다. 그러나 캐리는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사람의 가치는 금전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성격이나 자질에 있다고 믿어온 캐리였다.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자신의 가치관을 그대로 토로했을 뿐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중세풍의 홀을 지나서 레이디 제인의 방으로 향하는 캐리는 죄책감이 가득한 마음이었다.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서재용 검은 책상 앞에 섰다. 이 책상에서 레이디 제인은 매일 아침 우편물을 보거나 메모가 필요한 것, 답신이 필요한 것 등을 분류하여 캐리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시선을 주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뗀 레이디 제인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캐리? 커피 어때요?"
레이디 제인으로부터 성이 아닌 이름을 처음 불린 캐리는 어리둥절했다. 지금까지 '미스 린제이'라고밖에 부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당황함을 감추려고 쟁반이 있는 곳까지 가서 캐리는 자신의 커피를 따랐다.
레이디 제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제 테라스에서 아들에게 완강하게 탄핵 연설을 했다는 것 따위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여러 곳에서 사교 모임 초대장이 들어와 있었다. 레이디 제인은 이번에는 그녀 자신이 하와이풍의 가든파티를 성대하게 개최할 예정이라고 캐리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했다.
파티의 준비에 대해서 미리 의논하는 레이디 제인은 평상시보다 생기 있게 보였다.
그녀가 오전 중의 일에 대한 지시를 끝내자, 캐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당장 일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렇게 서둘러서 시작할 필요 없잖아요? 이곳에서 함께 커피나 한 잔 해요."
보통 때와 태도가 다르다― 캐리는 묘하게도 더 조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오늘 아침 이름을 부른 것도, 커피를 함께 하자고 권유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네, 물론 좋아요."
캐리는 당황함을 애써 감추려고 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그것 참 잘되었군요. 나도 당신의 일에 만족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부인은 우물거렸다. 왠지 침착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자, 이제 때가 왔구나, 해고다.'
캐리는 마음속으로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레이디 제인이 입 밖에 낸 말은 두려워하던 해고 통고가 아니라 놀랍게도 사죄의 말이었다.
"이곳에서의 당신에 대한 처우에 대해서 좀 변명을 하고 싶군요. 전의 비서인 베겐 씨는요, 그 여자에 대해서는 아들도 아주 혀를 내둘렀지요.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여자였기 때문이에요. 아들을 쫓아다녔거든요. 그런 이유로 이번에는 그런 사태를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어요. 당신도 분명히 이상하게 생각하셨겠지만 고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도록 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지요. 보통 때의 경우 비서 같은 지적인 일을 하시는 분과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과는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지만…"
캐리가 종종 딱딱한 대리석에 비유하는 부인의 파란 눈이 용서를 바란다기보다는 달래듯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캐리는 할 말이 없었다. 하나의 화면에 여러 개의 필름이 겹쳐진 듯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돌연 캐리에게 짚히는 바가 있었다. 스탠포드와 루시가 완고할 정도로 과묵한 것은 캐리에 대한 처우가 종래와는 달리 이례적인 것임을 알아차린 까닭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나하나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오늘부터는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세요."
"네, 그렇지만 고용인들과 함께 식사한다 해도 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요."
캐리는 힘껏 이의를 제기해 보았지만, 레이디 제인은 캐리의 심중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부인은 재차 파티에 화제를 돌려서 말했다.
"초대장도 월등히 멋있는 것을 준비하고 싶군요."
캐리는 좀 전의 부인의 제의에 동요하고 있었다. 레이디 제인이 인정있고 친해지기 쉬운 인물이어서는 곤란했다― 더구나 '저, 캐리!' 하고 친밀하게 불러 주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뉴올리언즈의 TV 시청자들을 향해 캐리가 묘사하고 싶어 하는 여왕처럼 위엄 있고 완고한 인물로 있었으면 하고 그녀는 바라고 있었다.
블레어 마티슨은 아침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점심식사 때에도 외출 중이어서 캐리는 안심했다. 저녁에는 블레어와 부인이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내일 저녁에는 필립 로슨과의 저녁식사 약속이 있다. 이것으로 그 거만한 남자와 같은 식탁에 앉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블레어와 동석할 기회가 늦어지는 것을 캐리는 기뻐했다.
'일찍이 그런 불유쾌한 남자와 만났던 적이 없어. 가족 테이블에 비서가 함께 자리하는 것을 그 사람은 분명히 싫어하겠지.'
해변에서 만난 이후 캐리와 제이미는 아주 사이좋은 관계가 되었다. 팜 비취의 후계자들이 다니는 상류계급의 사립학교에서 돌아오면 제이미는 곧 캐리의 모습을 찾아다녔다.
제이미의 아버지로부터 유괴범의 오명까지 덮어쓴 그녀는 소년과 너무 깊이 친해지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순진한 까만 눈망울이 호소하듯이 바라보면 그 결심이 곧 흔들리고 말았다. 제이미와 알게 되고 나서 그녀는 이 아이가 어린아이답지 않게 과묵하다고 생각했던 예전의 그 소년인가? 하고 내심 놀라고 있었다.
제이미는 차례차례로 여러 가지 화제를 제공하며 캐리의 어린 시절 이야기랑 가족 이야기, 그녀의 견해나 '만약 내가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등 많은 질문을 열화같이 퍼부었다.
제이미에게도 보통 아이들이 그러한 것처럼 하고 싶은 일이 산더미만큼 있다는 걸 캐리는 이제 알게 되었다. 특히 제이미는 영화를 보고 싶어 했다― 그것도 마을의 보통 영화관에서. 물론 제이미는 커다란 전용 컬러 TV도 갖고 있고, 팜 비취에는 저택 내에 영사실을 갖춘 집도 있어서 제이미는 이런 영사실에서 가끔 어린이용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을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것과는 어딘가 틀리다는 것을 제이미는 알고 있었다.
"그래? 극장에 간 적이 한 번도 없니?"
캐리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했다.
"데려다 줄래요?"
눈동자를 기대로 반짝이며 제이미가 물었다.
"그래, 알았어."
캐리가 미소짓자 소년의 작은 얼굴이 환히 빛났다. 아버지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기대하지 마."
캐리는 못박듯이 다짐해 두었다.
"할머님이 뭐라 하실지…"
"할머니가 아니고 아버지가 문제지요?"
제이미가 예리한 말투로 되받았다.
보통 아이들처럼 영화관에 가는 것조차 들어줄 수 없는 걸까. 제이미의 눈동자에 분노와 실망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캐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아이가 여느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캐리는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제이미는 대단히 많은 재산을 물려받을 후계자― 유괴의 위험이 항상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다음 날 오후, 제이미는 캐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할머니가 캐리와 영화 보러 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적당한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제이미는 미리 알아 두었던 듯, 웨스트 팜 비취의 큰 쇼핑센터 안에 있는 영화관에서 좋은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알았어요, 꼬마 도련님."
캐리는 소년의 아름다운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내일 나도 레이디 제인에게 물어보겠어. 허락하시면 밤에 함께 가자. 영화 본 뒤에 햄버거는 어때?"
마치 멋있는 선물을 받기라도 한 듯 소년은 기쁨과 흥분으로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 얼마나 불가사의한 아이인가? 고용인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아무리 비싼 장난감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아이가 햄버거 이야기에 흥분을 하다니!
캐리 자신도 오늘밤은 필립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어찌 되었든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고, 몇 시간이나마 <스트로베리>의 어깨 뻐근한 인간관계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으니까.
변장용의 비서 복장과 같은 투박한 옷차림으로 외출하는 것이 캐리는 이젠 진절머리가 났다. 대신 그녀는 남빛의 앙상블을 했다. 양복 스타일의 칼라는 수수해서 직장에서도 입을 수 있는 옷으로 레이스가 달린 커다란 네크라인과 같은 커프스 소매가 여성다움을 느끼게 했다. 여느 때의 매력을 잃게 하던 메이크업 대신에 캐리는 자신의 매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화장을 했다. 그녀는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던 화장을 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가슴 설렐 정도의 해방감과 홀가분함을 느낀 그녀는 머리핀과 혐오스러운 안경을 걸치기 전에 큰 거울에 전신을 비춰 보았다. 다행히 집을 나설 때에 아무에게도 불심검문을 당하지는 않았다. 집 밖에 나가면 안경도 핀도 모두 벗어던질 작정이었다.
어디든 조용한 곳이 좋겠다는 캐리의 요망으로 필립은 웨스트 팜 비취의 <지노>라는 작은 이태리식 레스토랑을 골랐다. 수수한 느낌의 체크무늬 테이블보가 씌워진 테이블에 소박한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나무 의자가 놓여져 있어 좀 허술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요리는 맛이 있다고 필립은 보증까지 선 화이트소스를 친 스파게티를 꼭 먹어보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그 부인 마님과 함께 식사를?"
필립은 흥미진진한 듯 물어왔다.
그때까지는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만 계속했던 것이다. 필립은 맨 처음 캐리의 얼굴을 보자마자 일은 어떠냐고 물었지만 캐리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그 이상 물어오지 않았었다. 그랬던 것이 지금 또 일 이야기로 돌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함께가 아니었어요."
캐리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부인은 사실 아주 좋은 분이신 것 같아요. 단지 나이가 드셔서 시간의 효율적인 사용법에 별로 능숙하지 못할 뿐이지요."
"심약해진 것 같군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요?"
필립이 캐고들 듯이 말하자 캐리는 얼굴이 붉어졌다.
"동정심은 삼가 하시오. 레이디 제인이 속한 계층은 미국 인구의 10%도 되지 않소.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가 있소. 그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면 안 돼요, 캐리. 자신들의 계층 외의 사람들에게 대하는 방법으로 당신을 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자신도 그들과 같은 신분이 될 수 있으리라고 조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오. 어차피 억지 이야길 테니까…"
필립은 빨간 드라이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굳세게 마음먹고 임무를 수행하셔야지요. 당신이 저널리스트로 인정될지 어떨 지가 되는 시금석이오. 그런 곳은 굉장한 시험장 같은 곳이지. 당신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정통을 찌르는 필립의 말에 캐리의 마음속이 온화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레이디 제인의 비서로 면접을 받은 이후 필립의 인상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는 캐리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지 필립은 이것저것 이야기를 걸어왔다. <스트로베리>의 내부 사정을 언급하고 싶지 않은 눈치를 보이는 캐리에게 필립이 초조해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기자 특유의 흥미뿐으로 여주인이나 그 가족에 관해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납득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스트로베리>의 주인들을 그녀가 잘 이해할 수 있었다면 필립에게 자기 나름대로의 감상을 말할 수 있었겠지만, 사실인즉 그녀 자신도 어떤 마음을 자기가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불필요한 정의감이나 동정심으로 일을 복잡하고 까다롭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일을 계획하고 시작한 시점에서는 모든 것이 다 보이는 것 같았지만…
질문을 피하느라고 피곤해진 캐리는 빨리 돌아가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차로 <스트로베리>까지 가는 데에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택 안에 온 캐리는 다시 우스운 작업을 하기 위해서 차에 계속 눌러앉았다. 레이디 제인 밑에서 일을 하는 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계속 연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서투른 솜씨로 머리를 얹어올리고 초라해 보이는 플라스틱 안경을 썼다. 마치 죄수가 속죄를 위해 감옥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스탠포드가 차고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에서 인터폰을 눌렀을 때, 응답한 스탠포드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퉁명스러웠다. 아마도 깊이 잠들었던 것을 깨웠기 때문이리라. 그의 방에도 본채와 같이 문의 개폐를 제어하는 자동장치를 설치하면 좋을 텐데.
스탠포드는 커다란 열쇠 꾸러미를 들고 캐리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본체의 뒷문을 열어서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저택 안에서 깊은 고독감을 느끼며 캐리는 탑 안의 계단을 올라갔다. 음산한 이곳은 홀로 떨어진 고성 안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했다.
좀 전까지도 일상적인 환경 속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이렇게 밤이 이슥한 때 탑 속의 나선형 계단을 밟고 있는 현실을 캐리는 다시금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색다른 무어인의 성 같은 대저택 안의 자기 방으로 발을 옮기고 있는 것이 정말로 캐리 린제이인가?
방은 어두웠다. 달빛만이 어렴풋이 가구를 비추고 있었다. 차라리 이것이 지금의 캐리 기분과 딱 맞았다. 스위치를 올리는 귀찮은 일은 그만두기로 하고 재킷을 내동이 치듯이 던져 버리고 하이힐도 벗어던졌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에게 방안에서 무언가가 희미하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캐리는 가슴이 덜컥했다. 그러자 곧 스위치 켜는 소리가 나며 소파 옆의 스탠드가 켜졌다. 캐리는 소파 옆에 기대어 선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블레어 마티슨이었다. 그녀의 심장은 터질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연한 표정으로 블레어를 쳐다보는 캐리를 그는 냉소띤 파란 눈으로 태연자약하게 되받아 보았다.
"한 가지 답례를 하고자 해서요."
놀려대듯 그가 말했다.
캐리는 그의 침실에 있다가 그에게 발견되었을 때의 놀라움을 기억해 내었다.
"뭘 바라시는 건가요?"
캐리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술은 떨렸고,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것은 그쪽에서 잘 아실 텐데요, 미스 린제이.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 알고 싶소. 그리고 왜 변장을 하고 있는가도 말이오."
그의 시선으로 캐리는 자기가 재킷을 벗고 드레스 차림으로 그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몸에 꼭 맞는 드레스가 균형 잡힌 캐리의 몸매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한쪽 구두는 여전히 신은 채 다른 한 발은 두꺼운 양탄자 안에 파묻혀 있었다. 그녀는 얼른 한쪽 하이힐을 찾아 신으며 그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블레어 마티슨에게는 허풍 같은 것은 통용될 것 같지도 않았다. 사실과 허위를 뒤섞어서 이야기하리라고 캐리는 곧 결심했다. 요는 설득력이 문제였다.
"저는 진짜 캐리 린제이에요. 당신이 말씀하시는 변장에 관해서는요, 어떻게든 이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캐리는 금발을 묶고 있던 헤어핀을 빼고, 검은 속눈썹으로 둘러싸인 다갈색 눈동자가 잘 보이게끔 안경도 벗었다. 이렇게 블레어 앞에 선 그녀는 늘씬하게 키가 크고 향기라도 날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것으로 이제 본래의 나로 돌아갔구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출 이유를 블레어가 납득해 주지 않는다면 내일이라도 이 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아직은 이곳에 더 있고 싶었다.
"나는 남자 상사들에게 고용되는 것은 이제 지긋지긋해요. 당신 어머님의 비서 일이 귀에 들어왔을 때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도리에 벗어난 야망 같은 것은 없고 그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활을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었어요."
교묘하게 발뺌할 수 있을 것인가? 마티슨이 뚫어져라 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응모하기 전 레이디 제인이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언뜻 들은 게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캐리는 의미심장하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검은테 안경을 집어 들었다.
블레어가 소파에서 몸을 바로하고 그녀의 눈앞에 섰을 때 캐리는 숨을 들이켰다. 얼굴을 마주 대하자 가는 회색줄의 셔츠 사이로 보이는 그의 목의 돌기가 캐리의 눈에 들어왔고, 그녀가 고개를 약간 들자 알맞게 그을은 얼굴에 빛나는 냉소를 띤 그의 푸른 눈과 마주쳤다. 가까이서 본 블레어는 남성적인 매력이 넘쳤다.
"레이디 제인이 평범한 여자를 고용할 생각이 있다고 한다면…"
블레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캐리의 머리와 얼굴에 시선을 주더니 다시 넓게 파인 드레스의 네크라인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굉장한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데… 그렇지요, 캐리 린제이 씨?"
블레어는 더욱 아래쪽으로 더듬어 내려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그 곡선미는 당신이 이곳에서 입고 있는 그 지독한 복장으로는 다 감출 수가 없소."
캐리는 젖먹던 힘까지 내서라도 어떻게든 그의 앞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다리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캐리는 몸이 마비된 듯이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블레어가 길쭉한 한쪽 손을 들어 새털같이 매끄러운 캐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다른 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갑자기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균형을 잃은 캐리는 블레어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블레어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입맞춤은 격렬해졌다.
캐리는 시간도 사리분별도 없어져 버린 이상한 감각 세계에 떠돌고 있었다. 자신감에 찬 다부진 손이 캐리의 늘씬한 몸매를 따라서 더듬으며 관능을 자극하려고 했다.
"그만두세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캐리가 소리질렀다. 어처구니없는 소동을 벌일 생각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런 항의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놀랍게도 이 한 마디로 블레어는 캐리의 몸을 재빨리 떼어 놓았다. 지금 막 계단을 뛰어올라오기라도 한 듯이 블레어의 넓은 가슴은 몹시도 울렁거리고 있었다. 그의 불타오르는 듯한 시선이 캐리의 금발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캐리는 그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있었다. 블레어의 단단한 입술에 억눌렸던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아직도 붉었다.
블레어가 단정한 입술 끝에 희미한 웃음을 띠웠다.
"우리들의 대화는 내일로 연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
그렇게 말하는 블레어의 눈이 큰 침대를 흘끗 쳐다보는 것을 놓치지 않은 캐리는 온몸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혼란스런 마음을 어떻게든 정리하고자 캐리는 모기같이 작은 소리로 물어보았다.
블레어는 묘하게 히쭉 웃고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고의로 캐리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캐리는 점점 더 얼굴이 빨개졌다.
"이대로 이 집에 계속 있을 수 있는지 그렇게 묻고 있는 거예요. 즉 레이디 제인의 비서로서 말이에요."
빌로드 같은 팬지 꽃잎을 연상시키는 캐리의 눈동자가 불안으로 떨고 있었다.
블레어의 유혹하는 듯한 시선에 응시되자, 캐리는 왠지 모르게 황홀해지는 것 같았다.
"뭔가 잘못된 일이라도?"
오히려 블레어가 물어왔다.
"레이디 제인은 당신에게 만족하고 있는 것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이미가 승낙하지 않을 텐데. 당신이 그애에게 약속한 영화관에 가는 것이 허사가 되어 버릴 테니까."
조롱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도전하듯 캐리는 몸을 쭉 펴고 턱을 약간 치켜 올렸다.
블레어의 파란 눈동자가 캐리의 갈색 눈동자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 깊숙이 있는 그 무엇을 찾으려는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발길을 돌려 방에서 나가 버렸다. 캐리를 홀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남겨 놓고서…
4
캐리는 그날 오후 진정시킬 수 없는 초조를 느끼고 있었다. 블레어 마티슨이 자기 방에 들어가 있었던 그 밤을 뜬 눈으로 새우며 이렇다 할 대책도 생각해 내지 못한 채 다음 날 아침을 맞이했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 할지 그렇지 않으면 레이디 제인에게 전부 이야기해야 할지 몹시 고민하던 끝에 처음의 생각에 따르기로 했다.
심플한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변장용이 아닌 자신의 평상복 중에서 골랐다. 머리도 지금끼지의 헤어스타일은 그만두고 목덜미 근처에서 느슨하게 잡아맸다. 단지 성가신 안경만이 지금까지 변장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어머나 캐리, 오늘은 아주 예쁘군요."
레이디 제인이 즐거운 듯이 환성을 올렸다. 아들과는 아직 얼굴을 마주친 것 같지 않았다.
스케줄은 그날도, 다음 날도 보통 때와 똑같았다. 캐리의 초조함은 점점 더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고함이라도 지를 것만 같았다. 언제 어느 때 블레어 마티슨에게 정체가 들통 나 죄에 대한 쓰라린 대가를 받을지 알 수 없었다. 그와 다시 얼굴을 대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기대감이 엇갈렸다.
그러나 그 초조함을 당분간은 잊을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레이디 제인이 국립교육연구 시설인 스미소니언 연구소로부터 동양 양탄자 컬렉션에 관한 그녀의 정보를 원한다는 편지를 받은 것이었다. 처음에 부인은 이 일에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캐리는 생각나는 대로 부인에게 컬렉션에 관한 질문을 하며 부인이 소유하고 있는 많은 종류의 양탄자에 관한 부인의 명확한 지식을 받아쓰고 있었다.
"부인이 직접 쓰시면 어떨까요? 이 테마에 관해서는 훌륭한 지식을 갖고 계시고… 그리고 책으로 출판될지도 모르니까요."
"네에, 그건 그렇겠군요. 그렇지만…"
부인이 조금 자신없어했다.
"사진을 찍지 않으면 안 되고…"
"사진이라면 제게 맡겨 두세요."
캐리는 책임지고 떠맡았다.
"카메라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으니까요."
따끔하게 가슴이 아파왔다. 레이디 제인의 허락도 얻지 않고 이미 여러 장의 양탄자 사진을 찍어 두었던 것이었다.
주저하는 듯한 말과는 달리 레이디 제인은 이미 결심을 굳히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었다. 부인의 파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며 화장한 두 뺨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날 중으로 일에 착수하기로 결정해서 캐리는 저녁 무렵에는 이미 블레어의 일 따위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익숙하지 못한 단어와 이름으로 그녀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낯선 분야라고는 해도 지금까지 동양 양탄자는 모두 페르시아 양탄자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흑해와 카스피해에 둘러싸인 코카사스 지방에서 짜여진 코카사스 융단도 있었고, 그 외에 터어키 양탄자, 털이 긴 투르코멘 융단, 이란과 인도, 동 투르키스탄이나 중국의 양탄자도 있었다. 지리적으로 보아 특정 지역의 유목민들에 의해 그런 것들이 생산되고 있음을 캐리는 알 수 있었다.
직물에 관한 첫 번째 강의가 끝났을 때 캐리는 부인에게 완전히 탄복하고 말았다. 컬렉션에 소비한 비용 이상의 것을 부인은 이미 얻은 상태였으며, 직물의 역사와 그 기술에 관한 깊은 지식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융단에 관한 서적은 이 방에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캐리가 초신자가 읽기에는 어느 책이 가장 적합하냐고 물으니 부인은 그녀를 껴안아 줄 정도로 기뻐했다.
이제는 레이디 제인도 캐리가 자신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에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식당 천장은 아취형으로 루이지애나 시골 출신의 아가씨는 기가 죽을 것 같은, 적어도 30명은 앉을 수 있는 대형 식탁이 놓여져 있었다.
우아한 프랑스제 샹델리아 밑의 레이스 크로스가 깔린 대형 테이블에 레이디 제인이 앉아 있었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위풍당당하지요? 이것이 유산을 계승해 가는 고생이에요. 이 저택이 내 친정이었다면 개조하는데 그다지 죄악감은 느끼지 않겠지만…"
"아드님이나 손자를 생각하고 계시는 거지요?"
캐리는 망설이며 물었다.
"그분들을 위해서 이대로 남겨 두고 싶은…"
레이디 제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품위없이 코를 킁킁거렸다.
"블레어라면 내가 죽고 난 뒤 곧 이 집을 부수고 말 거예요. 블레어는 이 집이 광신적이고 비현실적인 정신의 소산이라면서… 그 별채에서 그 애의 취향을 한 번 정도 보셨겠지요? 개축도 실내장식도 자기 스스로가 한 것이에요."
캐리도 그 점에선 어느 정도 블레어 마티슨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이 저택을 처음 보았을 때, 이 열대 환경에는 이상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런 방대한 저택에서 정말로 편안해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낮에 블레어와 장거리 전화로 이야기를 했어요."
레이디 제인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을 꺼냈다.
"제이미를 영화관에 데리고 가도 좋다고 허락해 주더군요. 그 아이도 참, 이야기할 것이 단지 그것뿐이더군요."
블레어와의 전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캐리는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변장한 것에 대해서도 뭔가 떠들었음에 틀림없을 거야. 대체 어떻게 할 셈이지? 언제 처벌받을까 하고 두려움에 떨게 해서 정신적으로 쓰러뜨리려는 것일까?'
"영화 이야기는 우선 부인에게 여쭙고 나서 하려고 했죠."
캐리는 재빨리 사과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위험성이 있다는 것도 고려하지 않았고요."
레이디 제인의 투명하게 파란 눈에 갑자기 어떤 그늘이 드리워졌다.
"아이도 항상 감시받아서는 마음이 편해질 수 없겠지요. 그때 이후…"
도중까지 말하고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은 듯 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걸까? 제이미는 항상 감시하에 놓여져 보호받고 있었다. 과거에 유괴의 위험에 처했던 일이 있었던 걸까? <스트로베리>에 온 이후 제이미의 모친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제이미의 입으로조차…
블레어 마티슨의 아내는 이제이 세상에 없는 것일까? 그리고 제이미는 엄마가 죽은 뒤에 홀로 남은 아이…?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녀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던 거지? 캐리는 점점 더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웨스트 팜 비취의 쇼핑센터 안에 있는 영화관에서 어린이용 특선 영화가 상영 중이라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제이미는 이 뉴스를 가지고 캐리에게로 뛰어왔다. 진짜로 영화관에 데리고 가겠다고 한 약속을 이번에야말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적어도 평범한 생활의 즐거움을 제이미에게 보여줄 좋은 기회가 될 것이었다.
조금 일찍 나가서 제이미와 함께 쇼핑센터를 돌아보고 싶다는 제안에 레이디 제인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찬성해 주었다.
'영화를 본 뒤에 제이미에게 햄버거를 대접해야지.'
하고 캐리는 생각했다.
'이렇게나? 하고 감탄할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 놓은 더할 나위 없이 시끄러운 패스트푸드 가게에 데리고 가야지.'
제이미와의 외출로 마음이 들뜬 캐리는 진한 감색의 슬랙스에 체크 무늬 블라우스를 맞춰 입었다. 여느 때의 변장을 풀고 감색 실크 스카프를 접은 헤어밴드로 금발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리고 금귀걸이를 한 캐리는 놀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정말이지 싫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지긋지긋한 검은테 안경을 썼다.
제이미는 캐리가 준비를 마쳤는지 두 번이나 재촉하러 왔다. 그녀는 웃으며 바깥의 차 안에서 기다리도록 그를 타일렀다. 스탠포드가 이미 차고에서 그녀의 차를 꺼내 놓았을 것이다. 레이디 제인은 스탠포드에게 운전을 부탁해서 가라고 권유했지만 캐리는 그것을 정중하게 거절했던 것이다.
저택의 뒷문으로 나온 캐리는 마음이 들떠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마도 제이미는 좀 더러워진 그녀의 폭스바겐에 앉아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를 맞이한 것은 예기치 못한 광경이었다. 폭스바겐은 어디에도 눈에 띄지 않고 대신 손질 잘된 어두운 녹색의 스포츠카가 눈에 들어왔다. 제이미는 조그마한 뒷좌석에 앉아 있었고, 블레어 마티슨이 운전석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분노의 표정을 나타내고 있는 캐리의 얼굴을 심술궂게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 당신은 안 돼요!"
무의식중에 소리를 지르고 캐리는 자신이 한 말에 얼굴을 붉혔다.
'블레어는 내가 제이미를 데리고 나가는데 일말의 불안을 갖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캐리의 화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대단한 환영 방법이군."
블레어가 야유 섞인 말로 응수하고는 열려 있는 좌석의 문 쪽으로 돌아서며 놀리듯이 가볍게 인사했다.
캐리는 갑자기 덮쳐 온 마음의 갈등에 순간적으로 움직이질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눈을 보자 그날 밤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이 남자는 어머니의 비서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애인이 되어 버리는 습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남자와 함께 차를 타고 싶지는 않았다.
"제이미를 위해서요. 늦지 않으려면…"
블레어는 캐리의 마음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계획이 변경된 것에 양보하지 않으면 제이미를 영화관에 데리고 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어.'
그의 어조는 분명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두 사람의 태도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는 제이미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TV 프로그램을 위해 팜 비취에서 정보를 수집하라는 본래의 임무가 있었다. 끝까지 블레어의 반감을 사서는 안 된다. 적어도 레이디 제인이 성대한 파티를 개최할 때까지는…
이러한 정신적 압박감을 떨쳐 버리듯이 캐리는 부자연스럽게 차에 다가가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위엄을 지키며 낮은 좌석에 올라탔다. 블레어가 싱긋 웃었다. 그을은 얼굴에 하얀 이가 눈부셨다. 어쩌면 저렇게 잘생겼을까.
가문있는 집 귀공자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며 캐리는 블레어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차에 키를 넣고 돌리자 엔진에 시동이 걸렸다.
"내 차를 차고에 넣은 것은 당신이 아니겠지요?"
엉겹결에 캐리의 입에서 빈정거리는 말이 튀어나왔다.
블레어가 캐리를 힐끗 보았다.
"상류계층의 사람은 대중 차인 딱정벌레 차의 취급방법을 알 수가 없겠지요."
캐리가 다시 넌지시 빈정거리는 것을 그는 곧 알아차렸다.
블레어는 캐리의 질문을 무시하고 가볍게 반성을 촉구하듯이 말했다.
"자, 미스 린제이, 나로서도 또 제이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로 비난받는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오히려 동정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오."
블레어가 놀리고 있음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캐리는 반론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제이미는 아직도 어린아이예요. 그렇지만 당신은 한 사람의 어른이지요. 사람은 모두 설령 부자로 태어났다고 해도 사회에 어느 정도 공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블레어가 낮은 소리로 킥킥 웃기 시작했다.
캐리는 괜히 초조해졌다. 차에서 뛰어내려 도망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블레어는 행선지도 묻지 않고 오션 거리를 향해서 달리고 있었다. 영화가 어디에서 상영되고 있는지 그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차체가 낮은 스포츠카를 타는 기분은 각별했다. 캐리는 마음과는 달리 기분이 들떠왔다. 부드러운 가죽 의자는 몸이 깊숙이 가라앉을 정도로 훌륭한 쿠션이었다. 바람이 캐리의 뺨을 어루만지며 금발을 말아 올렸다. 뒷좌석에서 제이미가 흥분한 듯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부지런히 말을 걸어왔다. 여느 때 어른들 앞에서 보이던 스스럼 같은 것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블레어가 아까부터 힐끗힐끗 훔쳐보는 것이 캐리는 몹시도 신경에 거슬렸다. 마침내 뜻을 굳힌 그녀는 호전적으로 블레어의 눈을 되받아 쏘아보았다. 블레어의 굳게 다물어졌던 입술이 벌어지며 그 매력적인 미소가 번졌다.
"안경을 벗어요!"
블레어가 명령조로 말했다.
캐리는 아무런 반론도 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는 자신에게 놀라면서 안경을 벗었다.
"그렇게 해야만 해요."
블레어가 상냥하게 말했다.
"이제 당신도 뼈빠지게 일하는 중산계급으로는 보이지 않는군."
캐리는 화가 울컥 치밀어서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진실한 이야기…"
조금도 진실하지 않는 태도로 블레어가 말을 계속했다.
"하찮은 일일지라도 살아가기 위해 악착같이 일하는 것보다는 여유 있게 즐기면서 살아가는 편이 훨씬 어렵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나는 당신 같은 분을 이해할 수 없어요."
캐리는 뒷좌석에 제이미가 있는 것을 생각하고 가시돋친 말은 되도록 피했다.
"너무도 총명하시면서… 교육도 충분히 받으셨지요. 게다가 여러 곳을 여행하기도 하셨겠고요. 그런 당신이 이렇다 하게 자신을 위해 할 일을 갖고 계시지 않다니! 어머, 용서하세요. 지나쳤군요."
말을 마친 캐리는 어찌할 수 없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블레어와 자신은 성장 과정도 인생 철학도 전혀 다르다. 두 사람 사이에 공유하는 것은 전혀 발견할 수가 없지 않은가!
마침내 블레어는 큰 쇼핑센터 앞에 차를 세웠다. 제이미와 자기를 이곳에 내리게 하고 나중에 데리러 올 건가 하고 캐리는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블레어는 쇼핑센터 입구까지 따라왔다. 여러 명의 여자들이 블레어를 돌아보았다.
블레어는 캐리의 상상을 거역하고 상점가를 걸어다니는 데도 아무 말없이 따라왔다. 제이미는 또렷또렷한 까만 눈망울을 빛내며 많은 인종과 여러 연령층으로 북적거리는 인파 속을 신이 나서 걸어 다녔다.
"이렇게 쇼핑센터에서 대중들과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내 아들이 인간으로서의 본질적인 경험이 모자란다. 당신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미스 린제이?"
블레어의 잔소리에는 야유하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쇼핑센터 주최로 열리고 있는 탁구대회를 관전하는 제이미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요, 마티슨 씨."
시원시원하고 또렷한 대답이 나왔다.
"현실감이 결여된 박물관 같은 곳에서 애들을 키워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요. 너무 부자연스럽고 불균형적인 환경이에요."
"당신이 말하는 그 '현실'과 접하는 일로 당신이 나보다 더 나은 인간으로 자랐다고 말하는 건가요?"
그 질문 자체가 의미하는 바― 아니, 어쩌면 캐리에게 쏟아지는 빤히 들여다보는 듯한 파란 눈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에 캐리는 <스트로베리>에서의 자기의 기만에 찬 생활을 생각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모든 것을 이미 알고 말하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보도 관계의 사람들을 혐오한다는 블레어다.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한다면 캐리의 존재를 용서할 리가 없었다.
마침 바로 그때 운좋게도 제이미가 두 사람 쪽으로 뛰어왔다. 이것으로 의미심장한 블레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었다. 영화 상영시간이 가까워졌다. 영화관으로 걸어가는 길에 제이미는 캐리와 아버지 사이에 끼어서 어린애답게 흥분하며 뛰어다녔다.
에스컬레이터에 환성을 지르는 제이미를 캐리의 큰 눈동자가 부드럽게 주시하고 있었다. 제이미가 이렇게도 생생하고 발랄하게 변하다니… 캐리는 이런 제이미의 변신에 자신도 즐거워서 지나치는 사람들이 웃음을 띠며 돌아보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멋있는 가족이군! 그런데 아이 엄마의 머리 색깔은 선천적인 것일까?"
캐리는 반사적으로 블레어를 보았다. 그도 또한 좀 전의 소리를 들은 듯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엷게 그을은 캐리의 뺨이 살짝 홍조를 띠었다.
"어때요? 그 머리 선천적인 건가요?"
블레어가 의미있게 말하며 부드럽게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와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캐리도 또한 다갈색 눈을 장난스럽게 빛내며 블레어를 바라보았다.
"여자란 누구든지 조그만 비밀을 갖고 있는 거예요."
블레어가 낮은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가 캐리의 마음을 달콤하고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영화관 입구에 도착하자 제이미가 캐리의 손을 끌고 대형 포스터 앞으로 끌고 갔다. 이제부터 관람할 영화의 포스터였다.
어두침침한 영화관 안에서 제이미 옆에 앉은 캐리는 좀 전의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임기응변에 블레어가 웃음소리를 내기 전 블레어가 한순간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는데, 왜 그랬을까? 곧 웃음소리로 지워지고 말았지만… 그녀의 변장에 대한 변명을 그는 그냥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 그녀는 다시금 불안한 심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만약 의심하고 있었다면 훨씬 전에 부인의 저택에서 쫓아냈을 것이었다. 그것이 보도 관계자들을 싫어하고 프라이버시 침해를 두려워하는 블레어의 방식이라고 부인이 언젠가 얘기해 주었었다.
'어리석군. 너무 마음 쓰지 말자.'
그렇게 자기를 무시하고 불안감을 얼버무리며 캐리는 지금까지 느끼며 이해하게 된 블레어 마티슨의 인물상을 떠올려 보았다. 거만이 온몸에 배어 있는 사람으로 자신같이 신분이 낮고 평범한 사람과 결혼한다고 하면 설령 장난삼아 말을 했다 해도 몹시 화를 낼 것임에 틀림없었다.
로비의 매점에서 팝콘을 사가지고 좌석에 돌아온 블레어를 보고 캐리는 몸이 굳어졌다.
'나에게도 프라이드가 있다! 무관심을 가장하는 것이 가장 좋아. 전임자같이 그에게 아첨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분명히 보여주겠어. 그러나 오늘의 외출은 제이미를 위해 계획한 것이다. 제이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캐리는 좌석이 바뀐 것을 무시하려는 듯 입에 넣은 팝콘을 일부러 큰소리를 내며 먹었다. 처음에 자리를 잡았을 때에는 제이미를 가운데 두고 앉았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캐리가 제이미와 블레어 사이에 앉게 된 것이다.
블레어는 매점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다른 통로를 통해서 캐리 옆에 자리를 차지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캐리는 자리 변동을 모르는 척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옆에 앉아 있는 것이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키가 큰 블레어는 좌석 공간에 완전히 자리잡을 수 없어서 긴 다리를 비스듬히 쭉 펴고 앉았기 때문에 그의 무릎이 캐리의 무릎에 와 닿았다. 오싹오싹한 느낌이 순식간에 그녀의 온몸에 느껴졌다.
블레어가 이러한 몸의 접촉을 재미있어하는 것을 느끼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캐리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려 하얀 이를 보이며 싱긋 웃는 블레어에게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렇게 웃음 띤 블레어를 가까이 보니 몸이 떨릴 만큼 그의 매력에 압도되어 그를 무시하려던 캐리의 굳은 결심은 금방 무너졌다.
제이미가 뭔가 말을 걸어왔다. 아까부터의 어리석은 자신의 행동이 몹시도 부끄럽게 생각되어져 고조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캐리는 천천히 제이미 쪽을 돌아보아 그의 기분을 살폈다.
옆좌석의 블레어가 알아차릴 수 없도록 그녀는 몸을 살짝 옆으로 비켜 앉았다. 이렇게 하니 그의 다리에 닿지도 않았고, 스크린에 주의를 집중할 수도 있었다.
영화는 한 소년과 애견의 이별 이야기로 그 동안 우여곡절을 겪다가 마지막에 다시 만난다는 흔히 있는 종류의 스토리였다. 영화 속의 귀여운 애완견은 캐리가 어렸을 때 키웠던 개와 놀랄 정도로 닮아 있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제이미와 똑같이 캐리도 어느 사이엔가 영화에 빠져들었다.
감동적인 장면에 이르자 캐리의 눈에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넘치며 스크린의 색채가 뿌옇게 흐려져 보였다. 그녀는 열심히 눈을 깜박이며 살짝 블레어를 훔쳐보았다. 이렇게 센티한 자신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화면에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그가 한 손을 캐리 쪽으로 뻗어서 그녀의 가늘고 부드러운 손을 꼭 잡았다.
영화는 이제 종말이 다가왔다. 캐리는 겨우 한숨 놓았다. 그 손의 온기에까지 마음이 들떠 영화는커녕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구원받는 듯한 기분으로 캐리는 클라이막스에서 피날레로 바뀌는 배경음악을 들었다. 천연덕스러움을 가장하며 꼭 잡고 있는 그의 손으로부터 자신의 손을 빼며 캐리는 자못 용건이 있는 듯이 제이미를 돌아보았다. 황홀해 하는 제이미의 표정에 캐리는 하찮은 말로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속이려던 것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제이미가 깊은 감동에 빠져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영화 중간 중간에 일희일비하면서 완전히 빠져 있었던 것이다.
"자, 갈까?"
상냥하게 말을 건 캐리는 자기도 모르게 제이미의 윤기있는 아름다운 머리를 어루만졌다.
제이미는 자그마한 얼굴에 불균형스러울 정도로 큰 눈으로 캐리를 올려다보면서 비로소 같이 온 일행을 알아차린 듯이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지난 뒤 황홀상태에서 깨어나자 어린아이다운 쾌활함으로 영화에 대해 흥분하여 떠들기 시작했다.
캐리는 통로에 나올 때까지 제이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몹시 붐비는 통로에 나오자 문득 다부진 손이 옆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보호하려는 듯이 그녀의 허리에 둘러졌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캐리는 몇 번이고 꼼지락거렸다.
그녀는 사향과도 같은 남자의 체취에 취해 정신이 아찔했다. 자신의 감정이 블레어에게 기대고 싶은 욕망으로 이어지자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캐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로비에 나오자 북적거리던 관객들은 거짓말같이 흩어져 갔다. 제이미는 캐리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즐거운 듯 차로 가는 아주 짧은 거리에서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블레어도 또한 캐리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였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너무나 다정하고 멋있는 가족이네요!'
하고 아까 들은 말이 기억이 나 캐리는 또 혼자 볼을 붉혔다.
어두운 녹색의 스포츠카를 보며 캐리는 이 오해가 허황된 것임을 새로이 느끼고 있었다. 이 차가 블레어 마티슨과 그녀와의 사이에 놓여진 큰 벽을 아주 잘 상징해 주고 있었다.
상이한 세계에서 온 두 사람… 블레어가 보이는 위험한 매력에 굴복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돈 많은 귀공자, 마음대로 여자를 농락하다가 싫증이 나면 다 낡은 장난감처럼 버릴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그러나 위험을 인정하는 캐리도 그녀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그의 매력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다음은 어디지?"
약간 익살맞은 말투의 저음이 캐리의 음울한 생각을 비껴서 지나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유머스럽게 눈썹을 치켜 올리고 추궁하는 듯한 파란 눈동자로 바라보자 캐리는 엉겹결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가 어떤 얼굴을 한 것인지 볼 만했다.
"제이미에게 약속했어요. 영화 본 뒤에는 햄버거를 먹자고. 그렇지, 제이미?"
캐리는 어깨너머로 제이미를 바라보며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게 분명한 그의 응원을 기대했다. 제이미는 생각대로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따라 주었다.
세 사람은 빨간 조명이 비치고 있는 큰 햄버거 체인에 들어서서 카운터 앞에 줄 선 손님들의 제일 뒤에 나란히 섰다. 제이미는 눈에 띄는 모든 것에 놀라워했다. 이 가게는 콘베어 시스템 형식을 취하고 있는 식당으로 주문을 하면 일 분 후에는 일 미터 앞에 있는 카운터에서 주문한 것을 받을 수가 있었다.
캐리는 처음에 블레어가 두 사람을 자리에 앉히고 자기가 줄을 서 주리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식당의 가격표를 보고 어느 것으로 할 것인지 상담하고 있는 모습을 캐리는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블레어 마티슨이 아들에게 따뜻한 태도로 대하는 것을 캐리는 처음 보았다. 대단찮은 광경이긴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가슴이 묘하게 울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슬며시 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여느 때 블레어의 아들에 대한 감정이 서먹서먹한 기분을 풍기는 것은 뭘까? 아내와의 이혼에 있어 뭔가가 관련된 것은 아닐까?'
캐리의 차례가 돌아왔다. 주문할 때 제이미는 부끄러운 듯 뒷걸음질쳤지만 아버지에게 격려를 받고 입을 열었다.
"햄버거와 프렌치 프라이… 그리고 초코셰이크."
'확실히 말했지요?' 하는 듯이 득의만만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이미의 모습이 캐리는 몹시도 귀여웠다.
"자, 뭘로 하겠소?"
블레어가 친숙하게 캐리의 어깨에 손을 놓고 그녀를 앞으로 밀어냈다.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식사하러 온 남편― 흔히 있는 풍경을 흉내내는 것처럼 보였다.
"치즈버거와 콜라로 하겠어요. 당신은?"
캐리도 자못 즐거운 듯 거림낌없이 말했다. '어때요, 이 사랑스러운 아내의 미소가?' 라고 하듯…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골라도 좋아요."
블레어는 이번엔 관대함을 과시하고 자신의 주문을 말하며 지갑을 꺼내었다.
블레어가 주문한 것이 담긴 접시를 들고 빈 좌석으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 캐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화려하게 장식된 가게 안은 빨간 조명이 빛났고, 주크박스 안에선 귀청을 찢을 듯한 록 뮤직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우리를 멋있는 장소에 데려와 주셨군요."
캐리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제이미는 걸신이 들린 것처럼 햄버거를 먹어댔다.
시끌벅적한 장소였지만 음식들은 아주 맛있었다. 세 사람의 대화는 오로지 영화에 관한 것뿐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혼자서 이야기하는 것은 제이미였다.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서 제일 훌륭했다, 앞으로도 셋이서 자주 영화관에 가고 싶다는 등, 제이미는 열심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보통 아이들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응석을 부리지는 않았다. 캐리는 애매한 대답을 했지만 아버지 블레어는 조금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돌아오는 차 안은 조용했다. 세 사람은 각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갈 때에 블레어와 같이 있으면서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캐리는 얄궂은 기분으로 자기의 변모를 생각하고 있었다.
저택 앞에 도착하자 블레어는 차의 계기판에 붙은 자질구레한 물건을 넣는 곳에서 작은 리모트콘트롤 기계를 집어 들고 보턴을 눌렀다. 그러자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그들 눈앞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밤공기에서 꽃내음과 바다 냄새가 났다. 저택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캐리는 얼마간이라도 <스트로베리> 안에 들어가는 것을 늦추고 싶었다. 이 두터운 벽 안에서 다시 예의 그 역할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 지금까지보다, 아니 그 이상으로 그것이 어렵게 생각되었다.
캐리의 변장은 서서히 바뀌었다. 그 지긋지긋한 안경만은 아직도 그대로지만, 스미소니언 연구소용의 리포트와 파티 준비 등으로 레이디 제인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게 된 이후 그 짐짓 점잔빼는 딱딱한 태도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미묘하게도 캐리가 본래의 자기 자신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임무 수행은 어렵게 느껴졌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캐리에게 블레어는 명령하듯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뒷좌석에서 반은 잠들어 있는 제이미를 안아들고서 집 안으로 사라져 갔다.
캐리는 자기 마음과는 달리 블레어의 말에 따르는 자신에 대해 불안과 자기혐오를 느꼈다. 블레어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그건 그렇다 치고 둘만이 되는 것을 자신은 또 왜 피하려고 하지 않는 것인가?
어느 사이엔가 활짝 열려져 있는 캐리 쪽의 문 옆에 블레어의 모습이 나타났다. 캐리는 한쪽 발은 차 안에, 또 한쪽 발은 바깥에 내려 놓고 못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자기에는 너무 이르지요?"
그가 말했다.
"괜찮다면 잠시 내 말상대가 되어 주지 않겠소?"
블레어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피곤했던 캐리의 신경에 기분 좋게 와 닿았다.
"멋있는 밤이로군요."
캐리가 얼버무렸다.
블레어의 다음 행동에 캐리는 가슴이 덜컥했다. 그는 허리를 구부리고 차 밖에 나와 있던 캐리의 다리를 살짝 차 안으로 넣고서는 문을 닫고 빠른 동작으로 운전석에 올라탔다.
"어디로 갈 생각이에요?"
묻지 않아도 캐리는 알 수 있었다.
"당신만 괜찮다면 내 방에서 차 한 잔 하지 않겠소?"
차의 시동은 이미 걸려 있었지만 캐리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는 아직 그대로 앉아 있었다.
"글쎄요, 장원의 영주 같은 특권을 내세우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신다면…"
캐리의 입에서 엉겁결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블레어는 캐리의 얼굴을 잠시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는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자신이 한 말이었지만 일리있게 말을 잘했다고 캐리는 내심 득의양양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말하자면 묘한 것이었다. 캐리는 블레어의 모친에게 고용된 일개 비서, 한쪽은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을 고귀하게 자란 명문 자제… 캐리는 두 사람의 신분 차이를 확실하게 하는 금을 그어 놓을 생각이었다.
"정말 부럽군요, 이런 별채를 갖고 계시다니."
솔직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캐리는 별채의 바깥 계단에 블레어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대서양이 있었으며, 별을 뿌려 놓은 하늘, 거대한 지붕 아래 그 바다는 신비와 매혹에 가득차 있었다. 모래사장에 밀려왔다 빠져 나가는 리드미컬한 파도 소리, 일렁이는 그 소리가 마치 캐리에게 주문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사람은 모두 자연의 힘, 시간의 흐름을 거스릴 수 없으리라고 캐리는 언제나 생각했었다. 인간의 어떠한 야망이나 노력도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는 하잘것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졌던 것이다.
블레어는 손에 든 잔을 입으로 옮기며 좀 전에 캐리가 한 말에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또한 눈앞에 펼쳐진 밤바다에 감동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의 세계에 몰입해 있는 듯했다.
"이곳은 각별하지요."
생각에 잠긴 채 그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은 넘겨주고 싶지 않은 곳이오."
"그렇다면…"
캐리는 큰소리를 냈다. 문득 레이디 제인이 아들이 이 저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준 것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선조 때부터 살아온 저택을 자신의 대가 되면 어떻게 할 셈인지 그의 입으로부터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이 스트로베리 성을 파실 생각은 없으신 거죠? 레이디 제인이 처… 즉, 말하자면…"
적절한 말을 생각해 내느라고 캐리는 우물거리고 말았다.
블레어는 한숨을 쉬더니 화난 목소리로 내뱉듯이 대답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겠죠? 당신이 적절하게 표현한 이 박물관 같은 집을 유지해 가는데 대체 어느 정도 경비가 들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부지만도 10에이커는 훨씬 더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지요."
쓰디쓴 어조로 블레어는 상속의 부담을 이야기했다.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잘 알고 있어요."
캐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때야 비로소 블레어가 놓여져 있는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전통과 감상을 실용성을 앞에 두고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것이군요. 만약 이 별채가 당신의 취향을 살려서 꾸민 것이라면― 레이디 제인이 당신 스스로가 실내장식을 하셨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아마도 본관과 같은 집에서는 살고 싶어 하지 않으시겠죠? 재혼하셔서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오."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블레어에게 캐리는 뺨을 붉혔다. 탐색할 기분은 없었지만 재혼 이야기까지 꺼내다니…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도 당연했다. 뭔가 말하지 않으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을 것 같아서 캐리는 좀 더 홀가분한 화제로 바꾸었다.
"이곳에 사신 지 오래 되셨나요? 이 별채에…"
캐리는 손에 든 다리가 긴 글라스를 장난치듯이 들어 올려서 뺨에 갖다 대고 나서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밤은 여느 때와 같지 않게 신경이 흥분되어 있었다.
"내가 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본관에서 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군요."
내뱉듯이 말한 블레어의 당돌한 말에 캐리는 놀라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용서하세요. 탐색할 기분은 없었어요."
마치 변명하듯 대답하며 그녀는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제이미와 당신의 관계는 보통 부자지간과는 전혀 달라 보여요."
말을 신중하게 고르면서 캐리는 계속했다. 자신의 말이 냉담한 부친에 대한 제이미의 대변임을 깨달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제이미는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머리도 좋고, 호감을 주는 매력적인 아이지요. 몸집이 작아 당신과는 닮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은 중도에서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옆의 블레어가 험한 기색을 띠고 캐리를 노려보았던 것이다. 그의 분노가 가차없이 전해 오는 것 같아서 캐리의 반항심은 더욱더 높아갔다.
"물론 당신 아들임에는 틀림없겠지만요…"
캐리는 씨근거리며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체 어떻게 하실 작정인가 하는 거예요. 정말 불쌍한 제이미!"
"대체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그런 말을…"
블레어에겐 분노가 사라지고 대신 피곤이 스며 있었다.
'그런 말이란 무슨 이야기지? 내가 알아차리면 난처한 비밀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 아내였던 데니즈는 흔히 말하는 '같은 레벨'의 사람이 아니었소. 어머니의 맹렬한 반대와 친구들의 충고도 거역하고 나는 그녀와 결혼했었지요."
블레어는 한 손으로 열심히 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스물네 살이었던 나는 인생이 무엇인가 알고 싶었고, 그때 어머니는 막 재혼했을 때였어요. 나는 아버지의 추억을 더럽힐 것인가 하고 불같이 화를 냈어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거요. 도움도 되지 않는 직함만이 유일한 자랑거리로 이렇다 할 재산도 없는 남자와 재혼하다니. 그러나 내가 해온 일을 생각하면 나는 아무도 책할 수가 없어요. 나는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서핑광이 되었소. 수염을 기르고 맨발에다 너덜거리는 옷을 걸치고 극단적인 모습으로 말이오. 데니즈는 카카오 비취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소."
블레어는 와인을 다 마셔 버리고 컵에 남은 얼음을 잔디밭에 던졌다.
"당신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요. 가족에게 반항할 목적만으로 결혼까지 하다니."
캐리가 끄덕이자 블레어는 자기 팔을 베고 긴 다리를 층계에 뻗었다.
"그리고 또한 이런 것도 생각할 것이오. 어머니가 상속권을 박탈하겠다며 옛날부터 흔히 있는 수단으로 나를 위협해서 왜 단념하게끔 하지 않았나 하고.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은 내가 쟁쟁한 사기꾼에게 걸려들었다는 것. 두 번째 답은 아버지의 친척들이 내가 의절당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오."
캐리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쟁쟁한 사기꾼이라니요?"
블레어가 갑자기 큰 웃음소리를 내어 캐리를 애타게 했다. 이런 남자에게 정열을 태우고 싶지는 않다. 이번에는 캐리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남자에게는 외모와는 정반대로 잔인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임신을 구실로 결혼을 강요하는 여자라고나 할까, 우리들은 'P'라고 부르고 있지만."
놀라서 숨을 들이켜는 캐리를 보고 블레어가 또 웃기 시작했다.
"그때 데니즈가 제이미를 임신한 것은 아니었소. 그것은 나중 이야기지. 어쨌든 결혼을 하자 곧 애당초 가지지도 않은 아이를 유산시켰다고 하더군요. 그 거짓말은 곧 탄로가 나고 말았지만… 왠지 나는 몇 번 그런 경험을 했지요. 내가 등을 돌리려고 했던 화려한 사람들의 생활의 모든 것을 그녀는 오히려 원하고 있었던 거요. 내가 노골적으로 그것을 거부하자 이번엔 자기 혼자서 하더군요. <스트로베리>에 단신으로 뛰어들어 레이디 제인과 의붓아버지를 교묘하게 설득해서 리비에라에서 뉴포트, 팜 비취까지 제트비행기로 돌아다니는 부자인 젊은 그룹들과 함께 놀며 돌아다녔어요."
"그 동안 당신은 어떻게 하셨어요?"
캐리는 왠지 계속 이야기하기가 두려워졌다.
"여기저기, 유럽, 아시아, 남아프리카에 있었지요. 그때는 별로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으니까. 그러다 나는 팜 비취에 돌아오기로 마음먹었소. 그런데 돌아오자 굉장한 사실에 직면했지요. 내가 곧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 말이오."
팔로 무릎을 감싸고서 윗몸을 앞으로 쑥 내밀고 앉아 듣고 있는 캐리의 긴장한 모습에 블레어는 비웃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이것으로 나와 제이미 사이의 거리를 조금은 이해했을 것 같은데…"
캐리는 말이 막혔다. 블레어가 제이미에게 그토록 냉담한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제이미는 자기 아들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공평한 것은 아니에요."
캐리는 발끈해서 말했다.
"제이미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어요. 그 아이한테 대체 어떤 해명을 하실 수 있단 말인가요? 그렇다면 왜…"
"어머니 쪽에서 떠맡고 싶지 않다고 하셨었지요."
블레어가 아무렇게나 말했다.
"그렇다면 왜 중절을 하지 않았을까요?"
블레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그녀가 제이미의 진짜 아버지와 결혼할 수 있으리라고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요. 이곳 녀석들의 일을 잘 알지 못했던 거요. 결국 이혼하자 팜 비취에서 그녀를 상대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가혹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으니까요."
블레어의 냉정한 말에 캐리는 질려 버렸다. 이 남자에게도 감정이 있는 것일까?
"그 뒤 그분은 제이미에게 아무 관심도 나타내지 않았나요?"
"글쎄요."
아주 빈정대는 투로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나서 2년 정도 지났을 때 염치없이 돈을 요구해 왔죠. 제이미의 양육권에 대해서 재판으로 싸우자고 위협하더군요. 해도 좋다고 내가 말했지. 그녀가 이기면 제이미를 좋을 대로 하라고요. 물론 단지 위협했을 뿐으로 진심은 아니었소. 다음에 그녀가 취한 수단은 정말 심한 것이었소."
"이제 그만 하세요!"
블레어가 놀리듯이 말했다.
"있을 수 있듯이 그 애 엄마는 보이프렌드와 손을 잡고 제이미를 유괴했어요. 물론 이쪽은 몸값을 지불했지요. 우리들이 필요 이상으로 감시하고 있는 이유를 이제는 아셨으리라 생각하오."
그의 이야기는 캐리에게 몹시 충격스러웠다. 어쩐지 파도 소리조차 구슬프게 들려왔다.
"가혹한 이야기지요, 미스 린제이?"
블레어는 누웠던 몸을 일으켜 캐리의 어깨에 팔을 감아왔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당혹스러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향하게 했다. 캐리는 거역하지 않았다. 그믐달이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누구든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자기에게 맞춰 운운할 순 없는 거요."
쌀쌀맞게 말하며 블레어는 얼굴을 천천히 캐리의 얼굴 가까이 가져왔다. 그의 따뜻한 숨결이 뺨에 닿자, 캐리는 숨을 죽였다. 블레어는 겹쳐진 입술을 살짝 떼더니 그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나를 원해?"
낮은 그의 목소리가 감정의 고조로 떨리고 있었다.
"네."
아주 작은 캐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그래요. 당신을 원해요. 미칠 정도로, 설령 후에 상처가 될지라도."
"당신과… 그래, 결혼할 마음은 없어. 알고 있겠지?"
"그런 일,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캐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고 자신의 입술을 블레어의 목덜미에 살짝 갖다댔다.
"이제 아무 말 하지 마세요!"
갑자기 블레어는 무릎 위의 캐리를 내팽개치듯이 내려 놓고 벌떡 일어나서 어두운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왜죠?"
캐리는 어리둥절하며 외치듯 물었다.
"나는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놈이야. 이제 아무 것도 묻지 말아 줘."
블레어가 절규하듯 말했다.
5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자포자기한 기분으로 운 적이 없었다. 가슴을 찢는 듯한 쓰라림과 실망으로 캐리의 눈에선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오랫동안 블레어 마티슨과 있었던 그 굴욕적인 장면이 자꾸만 되풀이되어 뇌리에 떠올랐다.
그 별채에서 방심한 채 블레어에게 발견된 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첫 대면에서 그에게서는 위험한 남자라는 냄새가 났었다.
'이 남자에게 언젠가 심한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밤 현실이 되었다. 파렴치하게도 그 사람 앞에 자신을 내던진 그녀를 그는 거절했다.
다음 날 아침 레이디 제인으로부터 블레어는 행선지도 말하지 않은 채 여행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본사를 뉴욕에 두는 편이 블레어에겐 편리하지만 여기서 살길 원하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길…"
후회하고 있는 듯한 부인의 어조였다.
어젯밤 이후 동요하는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제하고 있는 캐리는 부인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어 넘겼다. 그래도 궁금증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어째서 블레어는 뉴욕에 사는 편이 좋을까? 뉴욕에 있으면 그 향락의 매력을 마음껏 맛볼 수 있기 때문일까? 그런 곳은 뉴욕이 아니라도 세계 도처에 깔려 있다. 블레어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런 일은 결코 없겠지만…
블레어의 일 따위는 가능한 한 생각하지 말자고 캐리는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스트로베리>에 있어야 하는 본래의 목적을 생각해 내고, 이제부터 찍어 놓고 싶은 사진을 머릿속에 정리해 보았다. 스미소니언 연구소 앞으로 보내는 리포트 사진 담당을 직접 떠맡은 후 사진을 찍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카메라를 손에 든 캐리의 모습을 비난할 사람도 없어졌다.
어떻든 멍청히 울적해 할 틈은 없었다. 스미소니언 연구소를 위해 융단의 목록 작성을 부인에게 납득시키긴 했지만 정말로 부인을 위해 잘한 짓일까? 그러나 부인은 사는 보람을 찾은 듯 정력적으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자기 자신과 캐리를 몰아세웠다.
일은 캐리에게 있어서도 매력적인 것이긴 했다. 제이미와 영화를 보러 갔던 삼 일 뒤에 캐리와 레이디 제인은 중세성의 대접견실인 듯한 널찍한 석조의 홀에 하루종일 틀어박혀서 일을 했고, 저녁 무렵에는 기림 융단의 촬영에 몰두해 있었다. 그것은 17세기에 페르시아의 카샨에서 짜여진 대단히 귀중한 직물로써 짜기에 앞서 도안한 실을 먼저 염색하는 수법을 이용한 것이었다. 레이디 제인은 성급하게 메모를 하고 있었고, 캐리는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명이 조금 어두운 듯했다.
"가운데의 원형장식 무늬에 주목해 주세요. 용과 불사조와의 싸움을 묘사한 대단히 오래 된 중국의 작품이에요. 어쩐지 중국의 자기 무늬를 복사한 것 같지요?"
레이디 제인이 설명했다.
"이 원형 무늬를 클로즈업한 것도 한 장 찍어 두지요."
캐리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기엔 조명이 너무 어둡지 않나요?"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몹시 피곤한 캐리의 사고를 중단시켰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리였다. 어느 사이에 소리도 없이 블레어 마티슨이 등 뒤에 와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군요. 좀 더 조명을 밝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평정을 가장하며 그렇게 말하고는 캐리는 결심한 듯 블레어의 눈을 쳐다보았다. 청결한 흰색 바지에 감색 니트 셔츠가 좁은 어깨를 더욱더 두드러지게 하고 있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라도 돈 많은 플레이보이를 주제로 한 광고의 모델이 되기에조차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시력이 좋아진 것 같군."
블레어는 그렇게 말하며 야유 섞인 시선을 계속 퍼부었다. 캐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착잡한 기분으로 숨을 죽였다. 멸시에 찬 블레어의 가차없는 시선에 캐리의 손발은 떨리고 햇볕에 그을은 뺨이 창백하게 변했다.
레이디 제인은 이 긴박한 분위기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무시를 해버릴 작정인지 이 답답한 침묵을 깨뜨렸다.
"캐리는 이제야 겨우 깨달은 모양이다. 작은 글자를 볼 때 이외에는 고리타분한 안경이 필요없다는 것을 말이다. 똑똑히 보이지 않아서 안경을 썼던 거지요, 캐리?"
레이디 제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사진을 찍을 때는 안경이 거추장스러울 거야. 그런데 이 조명, 어떻게 안 될까?"
아들에게 묻는 레이디 제인의 파란 눈이 짜증스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작업 중에 방해받은 것이 탐탁치 않은 모양이었다.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블레어에게서 엄한 표정이 사라졌다. 조금의 빈 틈도 없는 위엄 가득한 얼굴로 레이디 제인은 자신의 요구가 틀림없이 충분히 만족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일에 정력을 다 쏟고 계시는군요, 어머니."
"물론이지."
부인의 재빠른 대답이었다.
"잘되면 책을 쓸 생각이란다. 아직까지는 이것을 주제로 한 총괄적인 책이 출간되지 않았거든."
캐리는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이제 그 문제는 손대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하자 조금 긴장이 풀어졌다. 그러나 캐리가 한숨을 놓은 것도 잠깐이었다.
"과연 그래서 미스 린제이도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이 야심적인 일을 도와 주고 있는 거군요?"
블레어의 야유하는 목소리에 캐리는 온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블레어에게 역습하고 싶어져서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저녁엔 이 <스트로베리>를 떠나게 될 것이다.
"쓸데없는 말참견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블레어. 캐리가 착실하게 자신을 지키는 여성으로 먼저 비서같이 너를 쫓아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그녀를 꾸짖는 것은 아니겠지?"
대화 도중 레이디 제인은 캐리에게 애정넘치는 시선을 주었다.
"언젠가 당신의 부모님을 만나고 싶군요, 캐리. 따님을 이렇게까지 훌륭하게 키우신 것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찬사를 보내고 싶어요. 자, 이제 조명을 어떻게 해봅시다."
본의 아니게 캐리의 시선이 블레어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의 눈이 어리둥절한 듯 캐리를 바라보았다. 캐리도 레이디 제인이 이다지도 완벽하게 자신을 감싸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되어 눈을 내리깔았다.
융단을 선명하게 나타내는 데는 어느 정도의 밝기가 필요한가 하고 블레어가 사무적인 질문을 하였다.
캐리도 그와 마찬가지로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자연광이 좀 더 들어오는 방에 하나씩 옮겨서 찍으면 조명 문제도 해결되겠지만요, 그렇게 되면 더 많은 노동량을 필요로 하게 되지요."
블레어가 햇볕에 그을은 손을 흔들며 캐리의 제안에 반대했다.
"그런 일을 할 필요는 없는 거야. 어떤 필름을 사용하고 있지?"
캐리는 블레어의 질문에 대답했다. 왜 그런 것을 묻고 있는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조금 지나서 알게 된 일이지만 블레어는 사진에 대한 캐리의 기술적인 지식이 단순한 카메라광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는가를 전문적인 견지에서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양은 이제 이것으로 충분해요, 캐리. 제이미가 풀에서 당신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나서 부인은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단다. 잘되었니, 그…"
캐리는 부인의 질문 끝과 블레어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절호의 기회를 잡은 듯이 얼른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바닷가에서 외톨이였던 제이미를 만났을 때 입었던 그 초콜릿색 수영복이었다.
그날 캐리가 제이미의 신뢰를 얻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 이후 일이 있을 때마다 제이미는 캐리에게 동행해 주기를 원했다. 요즈음은 저녁식사하기까지 30분 동안 제이미와 함께 풀에서 지내는 것이 그녀의 일과가 되었다. 캐리는 수영을 좋아했다. 긴장을 풀기에는 최적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제이미의 동행은 캐리에게도 마음이 즐거웠다. 두 사람은 놀라운 속도로 친해졌다. 가까운 장래에 다가올 제이미와의 이별은 캐리에게 괴로운 일이 되리라. 그 아이의 인생이 애정 가득한 것이 되도록 캐리는 기도하는 기분이었다.
다이빙대에 서서 캐리는 제이미에게 간단한 다이빙 폼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쉽게 다이빙을 해서 제이미가 눈을 반짝이며 보고 있는 풀 건너 쪽까지 헤엄쳐 갔다.
"응, 캐리, 나도 해보면 어떨까요?"
제이미는 응석부리듯 부탁을 해왔다.
"글쎄, 우선 할머님한테 허락을 받고 나서 하자꾸나."
캐리는 부드럽게 다짐해 주었다.
그때 사람을 깔보는 듯한 그 독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캐리는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블레어가 다이빙대 뒤에 서 있었다. 허리에 착 달라붙은 하얀 수영팬티가 구리빛으로 그을은 피부와 매치되어 잘 어울렸다. 수영팬티 하나만을 몸에 걸친 블레어는 매우 강렬한 매력을 풍겼다. 캐리는 분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테라스 쪽으로 돌아온 것일까? 자신이 다이빙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던 걸까?
캐리는 쌀쌀맞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것으로 아버님의 허락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구나."
"좋고말고. 내가 한번 다이빙 시범 쇼를 보일 테니까 그것을 보고 나서 해보렴."
블레어가 운동선수 같은 근육을 보이며 층계를 올라가서는 다이빙대의 끝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의 다이빙 솜씨는 완벽했다.
'잘난 척하는 남자로군!'
캐리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블레어가 힘찬 횡영으로 캐리에게 다가왔다. 그의 파란 눈이 이상할 정도로 쾌활하게 빛났다.
"좋아, 제이미, 해봐."
블레어는 다이빙대 아래의 층계에서 불안스럽게 서 있는 아들에게 소리질렀다.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캐리에게 말했다.
"남자아이에게는 남자의 본보기가 필요한 거야."
"너무 잘난 척하는군요."
화난 듯이 캐리가 대꾸했다.
"자, 보세요!"
다이빙대에서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미는 몇 번이고 다이빙을 즐긴 뒤에 풀 끝의 얕은 곳으로 갔다.
캐리와 블레어는 암묵 속에 경쟁을 시작했다. 몇 번이고 다이빙을 하는 동안에 마침내 캐리는 숨이 차서 그만두자고 그에게 말했다.
"꽤 잘하는군."
도전적인 말투였다.
"당신은 무엇을 하든 다른 사람에게 지지 않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캐리가 응수했다.
"대부분은요. 그렇다기보다는 말을 바꾸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스스로가 번 돈으로 한다면 취미도 숙달되는 거겠죠."
"혀도 꽤 숙달된 것 같군. 게다가 계급의식도 말이야."
블레어는 지체 없이 되받아 주었다.
상대가 여간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았다. 그러나 놀라워하며 느끼는 것은 이렇게 블레어와 말다툼을 하고 있으면 마음이 들뜨며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이었다. 둘 사이의 격심한 신분 차이를 잊게 되는 것이다.
캐리는 민첩하게 일어서서 풀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캐리의 이런 시도는 곧 바로 좌절되고 말았다. 레이디 제인이 음료수를 담은 쟁반을 든 스탠포드를 앞세우고 풀 사이드로 오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자, 앉아서 마실 것이라도 드세요. 당신은 이 정도의 서비스는 받을 권리가 있으니까요."
캐리에 대한 부인의 태도는 많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가족이나 손님이 풀을 사용하지 않을 때만 캐리에게 그곳을 사용해도 좋다고 했었다. 거의 강제적인 부인의 초대에 캐리는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깨에 타월을 걸치고 보드카 콜런즈 잔을 들고 맛을 음미하면서 세 사람의 가족이 이야기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나 대신 누군가 다른 사람을 찾든가, 너 혼자 가거라. 오늘은 이 나이에 하루종일 일했고, 게다가 내일까지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이 두세 가지 있단다."
그렇게 말하는 레이디 제인의 목소리에 캐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대신에 비서가 나가도록 하실 수는 있겠지요?"
블레어의 말에 캐리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안 돼요."
캐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블레어가 말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어느 곳이든 그와는 함께 가고 싶지 않았다. 제이미와 처음 영화를 보러 간 그 밤 오후… 풀에서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지만, 그것은 막간의 연극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밤 자신에게 모욕을 준 사실은 변함없는 것이었다.
"어머, 아주 좋은 생각이구나. 캐리도 기뻐할 거야."
블레어의 말에 응답하는 것이 레이디 제인은 캐리가 거절하는 것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팜 비취 사교계의 꽃이라고 할 사람들과 식사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지는 않겠지? 그 유명하고 유서 깊은 에버 그레이즈 클럽에서 열리는 건데."
블레어가 싸움을 걸듯이 목소리를 떨었다.
"물론이지요."
캐리는 선뜻 대답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일생에 두 번 다시없을 기회일 텐데요."
블레어는 아연해서 캐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기 방에 돌아온 캐리는 오늘밤의 일을 생각해 보니 몸이 떨려왔다. 블레어와 동반해서 두 사람이 외출하는 걸 왜 허락했을까? 스스로 자기를 파멸로 몰고갈 셈인가? 커다란 옷장 문 안쪽의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캐리는 오싹했다. 핼쑥한 얼굴색은 마치 이제부터 단두대로 향할 비극의 여주인공 같았다. 이런 때도 타고난 유머감각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캐리는 거울을 향해 자못 슬픈 듯한 얼굴을 만들어 보며 중얼거렸다.
'너 그곳에서 베스트 드레서는 무리겠지만 청소하는 아줌마로 착각하는 사람도 없을 거야.'
확실히 캐리의 아름다움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였다. 캐리는 어머니께서 심어주신 미의식에 언제나 진정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한 가지는 간소한 차림을 존중하는 정신, 또 한 가지는 빈약해도 검은 드레스를 능가할 복장은 없다는 뒤바꿀 수 없는 신념이었다. 10대 때의 캐리는 어머니의 복장을 꼭 중세의 여자 같다든가, 시대에 떨어진 감각이라고 비난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의 치장에 대한 지혜는 상당한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밤도 캐리는 요즘 유행하는 흔한 스타일의 검은 드레스에 의지하려고 마음먹었다. 어디에 나갈 때고 어느 새 저도 모르게 짐 속에 챙겨 넣는 심플 그 자체의 드레스로 이렇다 할 만큼 사람의 시선을 끌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엷은 금발의 캐리가 입으면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녀는 화려한 보석은 무엇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고, 또 에버 그레이즈 클럽에 모조품을 하고 갈 기분도 나지 않았다. 캐리는 자기 보석함에서 작은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고등학교 때의 친구가 졸업기념 선물로 준 것으로 순금 줄에 그녀의 이니셜인 'K' 펜던트가 달린 것으로 글자 한가운데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것이었다.
잠시 감상에 젖어 생기를 회복한 탓인지 아래층에서 블레어를 만났을 때에는 이미 여느 때의 평정을 되찾은 캐리였다. 블레어는 손질이 잘된 흰 디너 재킷에 검은 바지 차림으로, 생각했던 대로 훌륭했다. 빨려들 것 같은 파란 눈으로 블레어는 캐리를 힐끗 훑어보았다. 무엇 하나- 작은 금목걸이는 물론이고- 빠뜨리지 않고 보아 두려는 눈길, 그러나 블레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인사치레조차도.
그리고 나서 30분 정도 지나자 그까짓 에버 그레이즈 클럽 같은 것에 압도되는 것을 못 참아낼까 하고서 얕보았던 것을 캐리는 심히 후회하고 있었다. 그 장려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중의 하나는 에버 그레이즈 클럽의 역사가 빚어내는 것이리라. 블레어가 클럽의 내력을 이야기해 주었다.
캐리는 커다란 로비가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 블레어와 함께 서 있었다. 발코니의 나무로 된 난간은 복잡한 곡선을 그리며 검게 빛나고 있었으며 천장 가득히 둘러쳐진 거대한 대들보도 멋있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밝은 색채와 금의 대조는 비잔틴 문화의 찬란함을 연상하게 했다. 눈부신 샹델리아는 잘 닦여 윤이 나는 마룻바닥과 고대 장식품들을 비추었으며, 목제의 대형 화분에 심어진 초록색 식물이 열대 분위기를 나타내며 거대한 공간에 부드러움을 주고 있었다.
클럽 안을 한 바퀴 돌고 둘은 큰 식당으로 들어갔다. 클럽 멤버들의 디너댄스를 위해 준비된 방이었다. 캐리는 레이디 제인의 자리에 앉기로 되어 있었다. 실내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는데 그곳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캐리의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실내는 빛나는 보석과 유명 디자이너의 맞춤 이브닝드레스의 홍수였다.
'어쩌면 좋지, 대체?'
블레어는 이때를 기다렸음에 틀림없을 것이었다. 계급 콤플렉스에 빠진 캐리를 끝까지 즐길 수 있겠지. 그러나 의외로 블레어에게는 의기양양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클럽 지배인이 특별한 경의를 보이며 블레어에게 인사하고 두 사람을 4인용 좌석으로 안내했다. 블레어는 늘씬한 캐리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지배인 뒤를 따라갔다.
곧 훌륭한 요리가 날라져 왔다. 레모네이드로 시작되어 아티초크 스프, 등심 고기 롭스터, 맨 마지막은 브랜디를 뿌려서 설탕에 졸인 과일 디저트였다.
새로운 요리가 나올 때마다 와인도 바뀌었다. 캐리의 잔은 비기가 무섭게 찰랑찰랑 채워졌다. 알콜 덕분에 식사도 즐거웠고, 대화도 활기를 띠었다. 동석한 블레어 친구 부부는 캐리가 공감하지 못할 것 같은 이야기는 곧 다른 화제로 바꾸는 배려를 보여주었다. 블레어와 그의 친구는 얄미울 정도로 훌륭한 매너를 갖춘 사람들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디저트가 끝나고 커피와 술이 각자의 희망에 따라 나왔을 때쯤에는 실내악단의 연주하는 음악이 한층 더 높아졌다. 댄스를 즐기라는 신호였다. 건너편의 부부는 기다렸다는 듯 얼른 자리를 떴다.
블레어와 함께 남겨지게 된 캐리는 특별히 이야기할 화제도 없어 잠자코 주위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신사숙녀들이 대화를 즐기거나 큰소리로 웃으며 댄스에 흥겨워하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자신을 캐리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때, 압도될 것 같아?"
블레어의 말에는 도발하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캐리는 정면으로 블레어의 파란 눈을 응시했다. 두 사람만이 되자 다시 적대감이 되살아난 것 같았다. 일부러 거만스럽게 행동하여 캐리의 인격에 상처를 입히려는 발언을 하는 블레어에게 캐리는 점차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네, 크게 압도되었어요."
캐리의 어조도 시비조가 되었다.
"한 가지 여쭤 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이런 소중한 저녁 모임에 왜 나 같은 사람하고 동행하시려고 한 건가요?"
"다이빙과 마찬가지로 댄스도 능숙한지 알고 싶어서지."
기상천외의 대답과 동시에 블레어는 벌떡 일어섰다.
"어때 춤추지 않겠어?"
'건방진 넌센스라고 처리해 버리고 웃음을 띠워 줄까? 그렇지 않으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를 바보 취급해 버릴까?'
그러나 결국 천성인 예의바름에 양보하여 캐리는 댄스플로어로 나가기로 했다.
악단이 라틴 템포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블레어가 춤에 뛰어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캐리는 처음에 블레어의 복잡한 스탭을 쫓아가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고등학교, 대학교 때 춤에는 남보다 노력했기 때문에 곧 그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가 있었다. 곡의 연주가 끝났을 때는 조금은 아쉬운 기분이 들 만큼 흥겨워져 있었다.
곡이 느린 템포의 블루스로 바뀌어도 블레어는 댄스플로어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설마, 아더 마리의 스튜디오에 있었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캐리?"
캐리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며 블레어가 속삭였다.
부인의 대리로 이 디너파티에 출석하겠다고 승낙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그와 친하게 춤을 춘다고 약속한 기억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의 가슴에 안겨 함께 춤을 추자 캐리의 정신은 무력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춤을 추고 있다기보다 그의 안타까울 정도의 느린 동작에 따라 공중을 떠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되며 눈앞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춤이 끝나자마자 자리로 돌아가자고 말해야겠다고 그녀는 마음먹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음 곡도, 그 다음 곡도 계속해서 춤을 추었다. 캐리는 이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댄스플로어에서 그와 스치는 관능적인 기쁨에 그저 취해 있을 뿐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블레어의 옆에 앉은 캐리는 마취에서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블레어는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캐리는 첫 데이트 후 언제 이별의 인사를 꺼내야 할지 몰라하는 소녀와 같은 기분이 되어 아까부터 잠자코 있는 상대방에게 '아주 즐거웠어요'라고 엉겁결에 말해 버릴 것 같았다.
"이것을 준 사람과 약혼이라도?"
캐리에게 기대듯이 하면서 블레어는 작은 금목걸이의 이니셜인 'K' 펜던트를 손가락으로 만져보았다.
"그럴 리가요?"
손가락이 닿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뜨는 자신에게 당황해서 캐리의 목소리는 허스키했다.
"좀 더 큰 다이아몬드를 사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맡아준 것인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매혹적인 저음으로 블레어가 말을 끝냈을 때, 캐리는 화가 나서 눈앞이 다 캄캄해질 지경이었다.
불과 몇 센티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블레어의 눈을 꼼짝 않고 바라보다가 캐리는 곧 그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안 될까요? 현재 이곳에서 일을 하면서 좋은 상대를 찾은 것 같은데요. 레이디 제인이란 미망인의 아들이지요.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신 같은 비겁한 남자완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결혼할 마음 같은 것 갖지 않을 거예요."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나갈 사람을 잘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
소리지를 사이도 없이 블레어는 두 손으로 캐리의 얼굴을 감싸고는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입술을 갖다 대었다. 깜짝 놀란 캐리는 반항조차 잊고 있었다. 제정신이 돌아오자 그녀는 맹렬하게 그를 거부했다. 온몸으로 그를 밀어내다가 그래도 안 되자 이번에는 주먹으로 그의 등을 때렸다.
반항하면 할수록 블레어는 더욱 화를 내며 야수와도 같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돌연 블레어가 몸을 떼고 그의 목에 감겨져 있는 캐리의 팔을 뿌리쳤다. 할딱거리고 있는 캐리를 그는 어둠 속에서 꼼짝 않고 응시하고 있었다. 블레어의 가슴도 지금 막 마라톤 코스를 완주한 선수처럼 크게 울렁거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블레어가 불쾌한 웃음소리를 냈다.
"이것으로 내 경고의 의미를 알았으리라 생각하는데…"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블레어가 말하는 경고의 의미라는 것에 캐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차에서 내려 이 남자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단지 그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레이디 제인의 파티까지 수 주일간 오로지 블레어로부터 멀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파티가 끝나면 캐리는 이 <스트로베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뉴올리언즈의 방송국으로 돌아가서… 그래, 블레어 마티슨이라는 남자를 만난 것도 잊고…'
6
캐리는 그 다음 날 아침 평상시보다 30분쯤 늦게 일어났다. 그녀는 느긋하게 누워서 팔다리를 힘껏 뻗고 사치스런 기분에 빠져 있었다. 이 방에 처음으로 안내받았을 때는 그 화려한 분위기에 눈이 휘둥그레졌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자기 소유물처럼 편안했다.
'여왕이나 공작부인들이나 잘 것 같은 큰 침대에서 루이지애나의 아가씨가 잠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꽤 빨리도 사치에 익숙해지는구나!'
얄궂다는 생각에 캐리는 침대 커버를 옆으로 밀어제치고 맨발로 넓은 아취형 창으로 다가갔다. 그 창에서는 대서양 저쪽 수평선까지의 근사한 조망을 즐길 수 있었다. 지금 바다는 밝은 아침 햇살 속에서 생기있게 빛나고 있었다.
아침, 잠을 깨어 이렇게 창에서 조망을 즐기는 일도 불가능하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팜 비취를 떠나면 레이디 제인과의 일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본 <스트로베리>에서의 화려한 생활도 끝나게 된다. 또한 제이미와의 우정도…
'정말 우스운 이야기군. 교묘하게 속일 생각으로 이 저택에 잠입해 들어온 난데, 무엇을 위해 변장한 거지? 내 진짜 직업은 뭐지?'
캐리는 뭐가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이 저택에 온 진짜 임무도 이따금씩밖에 생각하지 못했고, 게다가 그다지 중요한 일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일의 경과에 대해 스탠 커티스와 한 번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고, 필립 로슨과도 <지노>에서 한 번 만났을 뿐이었다.
아침의 상쾌한 광경에 몰입해 있던 캐리의 뇌리에 블레어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무나도 이해하기 힘들고 엉뚱한 남자였다. 그의 이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캐리는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 사람에게는 사람을 사로잡는 뭔가가 있었다. 블레어를 만난 이후 지금까지의 남성들과의 교제는 몹시도 평범하게 여겨졌다. 눈이 빙빙 돌 정도로 바뀌어 가늠할 수 없는 블레어의 태도는 캐리에게 끊임없는 경계와 불안, 기대를 교차시켰다.
어젯밤도… 캐리는 자신의 몸을 끌어안으며 얼빠진 듯한 시선으로 허공의 한 점을 응시했다. 그것은 분명히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던 탓일 것이었다. 숙취는 아니었지만 몸이 좀 피곤했다. 지금까지의 블레어는 그렇게 심하게 자신을 모독한 적은 없었다.
'알콜 때문에 감정이 흥분되어 있었겠지.'
반짝이는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캐리는 어젯밤의 악몽을 떨쳐 버리려고 애썼다.
블레어는 타이프를 부탁하기 위해 원고 꾸러미를 안고 있었다.
"한낮 조금 지나서 돌아오겠소. 그때까지는 타이핑을 끝내 주시겠지요? 아참, 당신이 필요하다고 한 조명, 도착할 거요."
캐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말참견을 하지는 않았다. 레이디 제인도 블레어가 이런 배려를 해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 같았다. 아침 9시경에 배달용 소형 트럭이 저택 내에 들어왔다. 사진 전문가용의 훌륭한 조명기구 세트였다.
점심식사 후 캐리는 카메라에 필름을 넣었다. 오후부터 해야 할 일에 그녀의 가슴이 몹시도 두근거렸다. 우선 그 조명기구를 배치하고 테스트를 해보지 않으면…
"무슨 일이에요?"
거실에서 예기치 못한 광경을 본 캐리는 엉겁결에 소리를 질렀다. 키 큰 남자가 스위치를 넣거나 끄면서 램프를 체크하며 조절이 잘되는지 차양기를 여기저기로 구부려 보고 있었다.
블레어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차가운 웃음을 띠우고 캐리를 보았다. 자신보다 이 기구를 만질 권리를 더 많이 가진 남자에게 호전적인 말투로 소리 지른 것을 깨달은 캐리는 얼굴을 붉혔다. 청바지에 티셔츠만의 차림인 그를 캐리는 처음 보았다.
"저…"
레이디 제인이라도 나타나 주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대단한 미스 린제이도 말이 궁할 때가 있소?"
허리에 손을 얹고 블레어가 과장된 몸짓으로 놀란 듯이 물었다. 캐리는 가까스로 블레어의 파란 눈을 보았지만 아직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블레어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며 사무적인 말투로 캐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머니가 조금 늦는다고 전화했어. 한 가지 조건을 덧붙여서 어머니의 핀치히터를 떠맡았는데."
의아스러운 캐리의 표정에 상관없이 블레어가 계속 말했다.
"자, 시작할까?"
"조건이란?"
캐리가 불안한 듯 물어보았다.
별일 아니라는 듯 그는 햇볕에 그을은 손을 흔들었다.
"별채의 인테리어 일을 잠깐 도와주겠어? 곧 끝날 거야. 기껏해야 30분."
'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
캐리는 긴장하여 한일자로 입술을 꼭 다물고 아주 강한 경멸의 말은 없을까고 열심히 찾아보았다. 또 그의 못된 술수에 빠져 버린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는군, 당신."
캐리의 마음을 간파한 블레어가 쾌활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녀도 마지못해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승리예요. 그쪽에 일 점을 드리겠어요."
캐리는 얌전하게 물러났다.
"아니, 그 일 점은 악의에 찼던 어젯밤 당신의 발언에 되돌려 주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내 비겁함은 보충되지 않겠다는 그 발언에 말야."
블레어가 냉정하게 되받았다.
"조건이란 말이지, 실은 일이 끝나면 테니스라도 함께 하면 어떨까 해서. 이것은 당신의 인격에 상처입히는 일은 아니겠지?"
'또 교묘하게 시작해 오는군. 그렇지만 문 밖 테니스 코트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알려 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캐리가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쳐들자 엷은 금발이 뒤로 쏠렸다.
"이래 보아도 나는 프로 테니스 선수에게 직접 사사 받은 적이 있다고요. 꽤 잘하는 솜씨라고요."
캐리의 무모한 발언에 그다지 놀라지도 않은 것 같은 블레어였지만 목에서는 꿀꺽 하는 소리가 있었다. 효과는 없었던 것 같았다.
"당신 실력에는 조금의 의심도 갖고 있지 않아."
그렇게 응수하고 블레어는 휙 등을 돌렸다. 몸에 달라붙은 T셔츠가 폭넓은 어깨와 균형잡힌 그의 몸을 잘 나타내었다.
"자, 어느 것부터 시작할 예정이지?"
블레어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일은 순조롭게 진척되어 갔다. 오후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지만 레이디 제인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캐리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블레어의 존재에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저 이따금 램프를 조절하는 블레어를 기다리며 카메라에서 떨어져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당신한테 전화가 왔는데."
"저한테요?"
캐리는 전화를 받으러 서재로 나갔다.
"누군지 알겠어? 어떻게 잘되어 가오?"
필립 로슨이었다.
"이곳에 전화하시면 곤란해요."
캐리는 작게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에는 캐리밖에 없고 문에서 엿듣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당신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기에 걱정하고 있었소. 탑 안에 갇혀진 것인지, 아니면 뭔가 무서운 사건에라도 부딪힌 건 아닐까 해서 말이오."
자못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지만 그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는 듯했다. 캐리는 수화기를 들고 서재 책상 옆에 서서 대답에 궁색해 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때 필립과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바라지 않은 전화 덕분에 그 임무는 생각해 냈지만…
"너무 바빴었기 때문에…"
어처구니없게도 이 무슨 애매한 대답인가!
"상세한 것은, 지금은 괜찮은가요?"
'이 저택에서의 나의 동향을 이미 뭔가 알고 있구나.'
캐리는 필립의 말에서 직감적으로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기분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필립은 이 일대에 많은 연줄을 갖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사실은…"
필립이 계속했다.
"뉴올리언즈의 당신 친구로부터 긴급한 용건을 전달받았소. 오늘밤이라도 함께 식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소."
"알았어요, 로슨 씨. 나가도록 할게요. 어딘가에서, 8시경 어떨까요?"
필립은 만날 곳을 지정해 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어느 새 레이디 제인이 돌아와서 캐리를 찾아 막 서재로 들어왔다. 자신의 출타 중에 일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물으러 온 것이지만 아들은 아직 못 만난 것 같았다.
캐리가 오후에 한 일에 대해 설명을 막 끝냈을 때 레이디 제인이 활짝 열어 놓은 문을 스탠포드가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마티슨 씨가 테니스 코트에서 10분 후에 기다린다고 전해 달랍니다, 린제이 씨."
정말 눈앞이 아찔했다. 캐리는 이 세상이 어지러운 속도로 돌아가는 거대한 회전목마처럼 생각되었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할 틈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침착하세요, 캐리."
레이디 제인의 위엄있는 목소리 뒤에는 캐리의 기분을 북돋우려는 거짓없는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조금 몸을 움직이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자, 얼른 가세요. 블레어가 기다리지 않게끔 말예요."
비서가 자기 아들과 테니스를 치는 데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레이디 제인은 아마도 아들이 하는 일에는 아무 참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기분전환일지라도…'
옷을 갈아입기 위해 서둘러 자기 방으로 돌아오면서 캐리는 멍한 머리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을 입을까? 하고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팜 비취서 테니스를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기 때문에 캐리는 짐 속의 여러 개 쇼트팬츠 중에 하나를 골라서 소매 없는 블라우스를 안에 넣어 입고 위에다 벨트를 했다. 캔버스의 운동화는 테니스용은 아니지만 이것으로 어떻게든 될 것이다.
블레어가 테니스 코트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코트 주위에는 높은 울타리가 둘러져 있었다.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간 캐리는 숏팬츠 차림의 블레어에게 넋을 잃고 멍청해졌다. 테니스 볼 깡통을 열고 있던 그가 얼굴을 들어 캐리의 늘씬하게 긴 다리를 힐끗 보았다.
"지금 막 알게 된 건데요."
그녀는 완전히 낭패스러웠다.
"저는 라켓을 가지고 오지 않았어요."
블레어의 시선이 울타리에 걸려 있는 대여섯 개의 라켓을 가리켰다. '한 판 승부를 피할 작정인 것 같지만 그렇게는 안 될걸.' 하는 듯한 심술궂은 표정이 블레어의 얼굴에 떠올랐다.
캐리는 자신에게 꼭 맞는 손잡이와 무게를 가진 라켓을 고를 수 있었다.
그녀는 잠자코 코트의 한쪽 끝으로 걸어갔다. 오랜만에 가슴 설레이는 긴장감이 꿈틀거렸다. 시합에 임한 프로 테니스 선수들처럼 포핸드와 백핸드, 스매싱까지 대강 한 번 공을 치며 워밍업을 해보았다. 라켓을 돌려서 블레어가 이기자 먼저 서브를 하게 되었다. 좀 전의 워밍업으로 블레어가 벅찬 상대라는 것을 캐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철저하게 패배할 것은 뻔했다. 그렇지만 캐리는 체념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쥬니어 토너멘트에서 습득한 모든 전략을 구사해서 상당한 솜씨로도 놓칠 것 같은 코스를 벗어난 공도 쫓아가서 캐리는 몇 점을 얻어냈다. 그녀의 기량을 넘었다고 판단한 공도 되받아 친 것에 블레어는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두 세트의 시합 중 캐리는 처음 세트에서 두 게임 얻었지만 두 번째는 한 게임밖에 못 얻었다. 블레어의 프로급 실력을 고려한다면 그것도 아주 잘한 것이었다.
두 세트째의 게임을 끝내고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네트에 다가가 라켓을 세워 두고 땀을 닦았다. 블레어의 얼굴에 구슬 같은 땀이 흐르고 젖은 셔츠가 상반신에 달라붙어 있었다. 캐리는 만족했다.
"정말 훌륭하시군요."
캐리가 아낌없이 칭찬을 보냈다.
"당신도 굉장하군."
그렇게 말하는 블레어의 어조에는 여느 때와 같은 거만스러움은 없었다.
"루이지애나 호마 출신 여자가 이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다니 정말 놀랐어."
캐리는 놀라서 블레어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어떻게 내가 호마 출신이란 걸 알고 있지? 이곳에서는 아무에게도 심지어 레이디 제인이나 직업소개소에도 말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내가 무심코 말해 버린 것일까?'
"열두 살 때쯤 빌리진 킹에게 몹시도 동경심을 갖고 있었죠. 고향 컨트리클럽에 소속되어 있는 분에게 뻔뻔스러울 정도로 졸라서 프로선수에게 레슨받을 기회를 얻어냈지요. 그분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가르쳐 주셨고 하나하나 실제로 해보면서…"
당황해서 부산을 떨고 있는 심정을 어떻게든 감추려고 캐리는 이야기를 질질 끌었다.
"지금은 그때처럼 테니스는…"
도중까지 말을 하다가 캐리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멍청하게 뉴올리언즈의 방송국에 근무하고 있음을 말할 뻔했던 것이다.
얼굴에 홍조를 띤 캐리를 블레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탐색하듯이 바라보았다. 하얀 이로 꼭 깨물고 있는 부드러운 캐리의 아랫입술에 그의 시선은 꽂히듯 멈추었다. 다행히도 블레어는 이야기를 무시하고 전혀 예기치 못했던 비평으로 캐리를 당혹하게 했다.
"좀 더 연습을 하면 프로선수들에게 호되게 배운 팜 비취 테니스 클럽의 여자도 당신을 당할 수가 없을 거야."
블레어는 그렇게 말하며 문자가 쓰인 가죽 커버를 집어 들고 라켓을 난폭하게 집어 넣었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게다가 화난 듯한 난폭한 동작, 캐리는 돌연 좀 전의 블레어의 발언이 의미하는 것을 알아차리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블레어는 틀림없이 서민에다 일개 비서에 지나지 않는 캐리가 특권계급인 자신들과 백중백세의 실력으로 싸울 수 있는 것을 알자 불쾌해진 것이리라. 다이빙 때도, 춤을 출 때도 그랬다. 블레어가 마지못해 캐리의 재능을 인정한 것을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런 속물근성을 블레어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댄스 이후부터였다.
캐리는 입구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서는 내서 문을 열었다.
"바쁘신 스케줄에 시간을 내주신 친절에 큰 감사드리고 있어요."
캐리는 빈정거리는 투의 말을 내뱉았다.
캐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온 블레어가 난폭하게 그녀의 두 팔을 잡고는 자기 쪽으로 향하게 했다. 블레어의 파란 눈이 증오하는 듯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어느 때고 당신의 사기를 드러내겠어!"
블레어는 무서운 기세로 캐리의 몸을 흔들었다.
캐리의 온몸이 흔들렸다. 그녀는 두려움 가득한 눈을 크게 뜨며 화가 나서 굳어진 블레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정도의 가시돋친 말에 이처럼 격노하다니! 상대방을 애태울 마음으로 말했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까지는…
"이제 됐나요?"
캐리는 침착하게 묻고는 신경질적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블레어는 잡고 있던 팔을 놓고 표정을 싹 바꾸었다. 그의 시선이 젖은 캐리의 입술에 쏠려 있었다.
"그렇게 서두를 일은 아무 것도 없겠지?"
허스키한 목소리로 블레어가 물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밤에 아는 사람과 식사하기로 되어 있어서요."
생각하다 못해 캐리가 말했다.
캐리의 말에 블레어는 아무런 놀라움도 표시하지 않았지만 언뜻 당혹스러운 표정이 스쳐갔다.
"남자?"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가까이 한 블레어가 캐리의 뺨에 미친 듯이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블레어의 입술이 캐리의 입가를 약 올리듯이 떠돌았다.
"아―"
분명치 않은 소리를 내고 캐리는 머리를 흔들며 애타게 블레어의 입술을 원했다. 캐리에게 유혹받은 듯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찾아왔다.
블레어가 캐리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에 캐리는 몸 속까지 파고드는 쾌감을 느꼈다.
"그 친구와의 약속은 잊고 오늘밤은 나와 함께 지내지 않겠어?"
떠진 캐리의 눈에서 얼빠진 표정이 점차로 사라져 갔다. 만약 오늘밤 이대로 이곳에 있게 된다면 결국은 그의 별채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그건 안 될 말이었다.
필립과 데이트를 하는 편이 훨씬 안전할 것이다.
자기 품 안에서 갑자기 멍청하게 생각에 잠긴 캐리를 블레어는 살피듯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떼어 놓더니 등을 돌려서 걸어갔다.
레이디 제인은 캐리가 저녁에 외출하는 것에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고, 팜 비취에 아는 사람이 있는가에 대해서 역시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즐겁게 지내세요, 캐리. 이곳의 일이 당신에게나 내게나 만족한 것이 되기를 언제나 바라고 있어요. 그렇지만 젊은 사람은 때로는 같은 세대의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 필요해요."
솔직한 부인의 말도 가라앉은 캐리의 기분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레이디 제인은 진심으로 캐리가 <스트로베리>의 일에 만족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캐리에 대한 신뢰감을 부인은 나타냈다.
<스트로베리>에서의 경험이 캐리가 생각했던 대로였다면 일은 간단한 것이지만… 레이디 제인이 급한 성질에 까다로운 사람이었다면 캐리의 마음은 훨씬 홀가분했을 것이다. 게다가 캐리 자신이 항상 열등감을 강요받는 환경이었다라면. 불행하게도 이런 것은 무엇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가족 일원으로서의 취급은 아니었지만 캐리는 귀한 존재로서 쾌적한 생활을 즐길 권한을 받고 있다.
"네, 뭐라고요? 참으로 장미빛 가득한 비현실적인 이야기군요, 캐리. 알고 있겠지만 스탠 커티스도 나 못지않은 현실주의자요. 그런 동화를 그가 자진해서 떠맡을 것 같소?"
필립은 자신이 뿜어낸 담배연기에 눈을 가늘게 뜨고 바보 취급하듯이 말했다. 예상했던 필립의 태도였지만 캐리는 공연히 화가 났다.
"그렇지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걸요. 어디부터 어디까지…"
캐리가 화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레이디 제인도 인간이란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결점도 물론 있을 수 있어요.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당신이 기대하는 것같이 잔인한 분은 아니에요. 고용인들도 충분히 보수를 받고 있고, 일반 노동자 이상의 배려를 받고 있지요. 지금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에요!"
캐리의 다갈색 눈동자가 노기를 띠고 빛났다. 필립의 태도는 캐리가 싫어하는 저널리스트의 전형 그 자체였다. 그들은 뉴스를 사실 그대로 보도하는 한편으로 그것의 조작도 해내는 것이다.
"뭐, 그렇게 흥분하지 마시오!"
필립은 용서해 달라는 식으로 두 손을 들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신을 화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소. 하지만 나도 팜 비취에 온 지 꽤 오래 되었지 않소?"
필립은 캐리의 기분을 달래며 말을 걸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미묘하게 바꾸었다.
"당신의 칭찬해야 할 그 충성심은 혹시 레이디 제인의 아들과 관련있는 것은 아닌가요? 어젯밤은 에버 그레이즈 클럽의 파티에 당신과 동반했었고…"
캐리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그것을?"
필립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담배를 물고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어떻게 알았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오. 내게는 내 나름의 정보망이 있다는 것만 말해 두지요. 문제는 당신이오, 캐리. 기억하겠지만 이 일을 시작할 때 내가 경고했을 텐데요. 레이디 제인이나 블레어 마티슨에게 있어서 당신은 그저 단순하고 편리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오."
두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 필립은 뒷맛이 좋지 않은 음식을 먹은 뒤처럼 입을 일그러뜨렸다.
'이 적개심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하고 캐리는 흥미를 가졌지만 그는 그런 말은 하나도 입에 담지 않았다.
"스탠이 전화로 말하더군요. 당신은 이제 뉴올리언즈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말이오. 성과가 오르지 않으면… 스탠은 당신에게 책임을 느끼고 있소. 이런 힘든 일에 당신 같은 미경험자를 보내서 변명할 여지가 없다고요."
"레이디 제인이 주최하는 파티가 끝날 때까지는 방송국에 돌아갈 수 없어요."
단호하게 대답한 캐리는 필립이 살피듯이 자기를 보는 것을 언뜻 느꼈다.
놀랍게도 필립에게는 파티에 대해서 이것저것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당신이 말하는 그 파티 말인데, 하와이안 스타일로 한다고요?"
놀라서 고개를 끄덕이는 캐리에게 필립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했다.
"뭐 그렇게 경계할 일은 없을 거요.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도 아니고 연중행사 같은 것이오."
그렇게 말하며 필립은 파티 내용에 관해서 상세한 것을 물어왔다.
'하찮은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캐리도 필립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나 필립은 캐리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망령의 모습을 본 듯이 꼼짝 않고 방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흥미 깊은 눈길로 필립의 시선을 따라간 캐리는 레스토랑의 문 앞에 검은 갈색 머리에 작은 몸집의 여성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멀리서도 그 여성이 흥분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핸드백을 꼭 잡고 실내를 두리번거리더니 마침내 캐리가 앉아 있는 좌석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잠깐 실례하오."
필립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의자에서 일어나 입구 쪽으로 갔다. 남의 일이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장면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가고 말았다. 필립과 그 여자는 말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치 캐리가 관련이 있는 듯이 그녀 쪽을 힐끗힐끗 보고 있었다.
전혀 본 적이 없는 여성이었지만 캐리는 처음 만난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마르고 까칠한 얼굴에는 너무 큰 검은 눈동자, 누군가와 닮은 것 같았지만 확실히 누군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무엇에 흥분해서 말다툼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필립의 승리로 끝난 것 같았다. 그 여성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져 갔다. 그는 자리에 돌아왔지만 우울한 얼굴이었다.
"질투가 강한 여자 친군가요?"
캐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았다.
"뭐, 그렇지는 않아요."
필립은 그 화제를 어떻게든 피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어딘지 어색한 태도에 그가 조금 전의 사건에 구애받고 있다는 것을 캐리는 느끼고 있었다.
아무튼 즐거운 밤은 아니었다. 매스컴 관계에 관한 일에는 풋내기였지만 사람을 보는 직감력이 뛰어난 캐리에게도 필립 로슨은 도저히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팜 비취에 온 본래의 목적을 잊지 않도록 한 필립의 권고도 캐리에게는 그저 교제상의 도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으며, 게다가 레이디 제인의 파티에 대한 집요하기까지 한 관심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캐리에게 막연하게 불안을 품게 한 것은 필립이 캐리가 <스트로메리>에서 일하고 있는 것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블레어 마티슨의 이름을 말할 때 그의 얼굴과 갈색 눈이 심술로 가득했다. 거기다가 그 정체불명의 부인과 언쟁을 할 때에도 몸이 굳어져서 격한 감정을 억누른 험악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스트로베리>의 묵직한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을 때에야 캐리는 겨우 안심했다. 동시에 필립에게 품었던 불안이 어리석게 생각되어졌다. 다음에 전화가 오더라도 좋은 구실을 대서 거절하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왠지 주는 것도 없이 싫은 남자였다.
차고 안에 차를 댔을 때, 캐리는 이미 그의 일은 잊고 있었다. 그러나 스탠포드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스탠포드가 그녀를 위해 뒷문을 잠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캐리는 벽돌로 된 보도를 더듬어 뒤쪽으로 돌아갔다. 설마했지만 뒷문은 잠겨 있었다.
이렇게 되면 스탠포드를 깨우는 일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다시 베란다를 내려와서 보도를 걸어 차고 쪽으로 돌려는 찰나, 암흑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캐리는 자신도 영문 모를 정도로 분명치 않은 공포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차 안까지 도망쳐 들어가서 문을 닫아야지. 그리고 나서 경적을 울려 누군진 알 수 없지만 침입자를 놀라게 해줘야지!'
캐리는 필사적이었다.
사람 그림자임은 분명했다. 그녀 뒤를 쫓아오는 발소리가 점점 더 스피드를 내고 있었다. 좀 더 편한 신발을 신었다면… 하이힐 한쪽이 벽돌 모서리에 걸려서 캐리는 넘어질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바보같은 짓을!"
두툼한 손이 공중을 허위적거리고 있는 캐리의 팔을 잡고 넘어질 듯한 몸을 받쳐 주었다.
"대체 무엇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한 거야?"
"당신이었군요…"
쫓아온 사람이 블레어라는 것은 안 캐리는 '후유!'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모기소리같이 작게 말했다. 격심하게 고동치는 가슴을 떨리는 손으로 누르며 캐리는 심호흡을 했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어요."
그녀는 조금 어리석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어깨를 잡은 블레어는 자기 쪽으로 그녀를 돌려세웠다. 캐리는 또 넘어질 것 같았다. 허리를 감아오는 블레어의 팔을 안간힘을 쓰며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에게 꼭 안기고 말았다.
"두려움에 떠는 어린 양 같은 흉내는 이제 그만두지 않겠어?"
비웃듯이 블레어가 그렇게 말하자, 캐리는 새로이 화가 끓어올랐다. 블레어는 곧 캐리의 몸을 떼어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스탠포드에게 문을 닫아 두도록 지시한 것을 부정하실 셈인가요?"
캐리는 힐난했다.
"부정이든 뭐든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잖아."
블레어가 빈정거렸다. 잠자코 있는 캐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가 계속했다.
"당신이 무사히 집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스탠포드에게 말했어.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
블레어의 마지막 말에 캐리는 숙녀답지 못하게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내가 착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언젠가는 분명히 알게 되겠지요."
블레어를 애태울 생각으로 캐리는 시치미를 떼고 말을 했다.
그러나 블레어는 그녀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잠깐 사적인 일로 이야기할 게 있어."
심각한 얼굴에는 이제 빈정거리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전에도 이런 모습에 속은 적이 있었다.
"내일까지 기다려 주지 않겠어요?"
"괜찮지만 어머니에겐 이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아."
좀 어둠침침한 곳에서 보는 블레어의 얼굴은 신중함 그 자체로 아무 말없이 캐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았어요."
하는 수 없이 캐리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좋아, 자, 이쪽으로…"
테라스 쪽으로 향하는 블레어를 캐리는 잠자코 따라갔다. 블레어는 타일 깔린 드넓은 정원으로 통하는 좁은 계단을 오르지 않고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캐리는 걸음을 늦추었다.
"어디로 가실 생각이에요?"
블레어가 어깨너머로 힐끗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내 별채. 그곳이라면 아무에게도 방해되지 않을 테니까. 싫어?"
"제가 싫다고 해도 들어주시지 않겠죠?"
캐리는 갑자기 화가 났다. 그에 대해서라기보다는 본채에서 떨어진 그의 방에서 두 사람만이 되리라고 생각하자 가슴의 고동이 고조되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이었다.
"이렇게 넓은 집인데요, 사적인 비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몇 미터의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은 암흑 속에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지? 나는 별채로 당신을 데려가려는 게 아니야."
블레어는 바닷가를 보았다.
"좋아."
부드럽고 푹신한 잔디밭이 끝나고 잘라낸 그대로 만든 나무 계단을 내려가 모래사장에서도 블레어는 아무 말 없는 채로 서 있었다. 이곳에는 사람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무한한 공간이 있었다. 새하얀 모래사장이 눈에 들어오는 데까지 계속 이어져 있었다.
"오늘밤은 즐거웠어?"
블레어가 무뚝뚝하게 물어왔다.
"별로요."
솔직하게 대답했지만 마치 막 돌아가는 영화 장면처럼 그녀의 뇌리에 이상하게도 불안을 안겨 준 그 일정의 사건이 떠올랐다.
이렇게 바닷가를 걷고 있으니 묘하게도 마음이 솔직해지는 것을 캐리는 느끼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옆에 있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것이었다.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란 뭔가요?"
화제가 갑자기 바뀌었지만 블레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곧 개최할 예의 그 파티 일이야. 놀라게 할 일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지만, 최악의 사태를 생각하면 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캐리는 미간에 주름을 모았다.
"미안해요, 말씀하시는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블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상적인 신경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게다가 냉정하지 않으면 안 돼. 별로 자랑삼아 말할 것은 아니지만 말야."
표정을 감추어 주는 이 어둠이 캐리에게는 고마웠다.
"분명히 정식 초대장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문을 들어올 수 없지만… 그리고 이 해변에도 경비원을 배치할 생각이고…"
"파티를 망칠 사람이 잠입해 올까 봐 두려워하시는 거군요?"
캐리는 놀라서 숨을 삼켰다.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확실히 파티를 망칠까 봐 두려워하고 있기는 해."
블레어가 우울한 듯한 소리로 말했다.
"특히 스타킹으로 복면을 하고 권총을 가진 무리를 말야."
블레어가 그렇게 말을 마친 순간 캐리는 암흑 속에서 그의 얼굴을 살피듯 눈을 크게 떴다. 오싹할 정도의 무서운 이야기에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넘길 수는 없겠지만… 파티에 출석할 사람들의 보석만으로도 우발적인 충동을 자아내기는 충분하지. 게다가 집 안에는 미술품이 수집되어 있으니까 말야. 어머니는 미술품을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두고 싶다고 하셔…"
양해 없이 조사한 것이지만 동양 융단이나 태피스트리만으로도 한 재산은 되리라고 캐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고대 미술품인 시계나 자기, 작은 입상이나 그 외 여리 가지 골동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으리라.
"정말 마음대로 골라잡아도 모르겠군요."
캐리는 솔직하게 응수했다.
두 사람은 별채를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말다툼한 뒤이기는 하지만 이제 와서 싫다고는 할 수 없었다.
큰 목재로 만들어진 계단으로 향하는 블레어를 캐리는 떨떠름해 하면서 따라갔다. 그러나 블레어는 계단을 오르지 않고 그 맨 밑에 걸터앉아 팔꿈치를 대고 계단에 기대어 긴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그래서 제 역할은요?"
어떻게 해야 그런 위험을 피할 수 있을지 캐리는 아무런 묘안도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첫 번째로 파티가 열리는 동안 눈과 귀에 신경을 집중해 줘. 뭔가 발견하면 곧 내게 알려 주었으면 좋겠어. 실수하거나 바보 취급당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당신이 직관적으로 웨이터나 뮤지션 그리고 훌라 댄서… 아니, 손님일지라도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껴지면 연락해 줘. 물론 파티에 고용할 사람들은 충분히 신원을 조사하기는 하겠지만 말이야.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파티에 관해서는 외부 사람에게 될 수 있는 한 새나가지 않도록 해주었으면 좋겠어."
열대의 밤의 훌륭함을 맛볼 기분 따위는 금세 없어졌다. 좀 전에 필립과 나눈 대화를 생각해 내고 캐리는 잠자코 있을 도리밖에 없었다.
'초대 손님의 명단 이외에는 전부 필립에게 이야기하고 말았는데! 멍청하게도 누설하고 말았다고 블레어에게 털어놓아야만 하는 건가?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해. 필립과의 관계까지 몽땅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참, 그리고 또 한 가지…"
블레어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풀이 죽어 있는 캐리의 신경을 건드렸다.
"보도 관계자들에게는 주의해 줘. 그 중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철면피여서 다른 사람의 프라이버시 따위는 문제삼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말야."
이렇게까지도 캐리와 같은 직업의 사람을 증오하는 블레어다. 캐리가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보기 흉한 변장까지 하고 있었으니…
팜 비취에 온 당초 목적은 상류사회의 내막을 파헤칠 센세이셔널한 정보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캐리는 이런 식으로 마음의 갈등에 고민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레이디 제인에게는 모순 가득한 충성심을 품고 있고, 고독한 제이미를 동정하며 그리고 사랑에…
'대체 뭘 생각하고 있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내가 블레어 마티슨을 사랑하다니!'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안타까운 듯 작고 맑은 목소리가 반문해 왔다.
'그래, 너는 사랑에 빠지지 않았어?'
캐리는 충격적으로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그것이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블레어에게는 처음부터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을 불러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위협받던 그 최초의 만남에서조차도…
블레어는 캐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염려하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악몽을 꾸게 할 생각으로 말하는 건 아니야. 단지, 전부터 당신에게 경고해 두고 싶었어. 당신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블레어는 한 손을 뻗어 빛나는 캐리의 머리를 살짝 뒤로 쓸어 올렸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외면한 캐리는 가볍게 닿은 것만으로 손발이 떨려오는 자신의 나약함에 다시 놀랐다.
"본체로 가기 전에 한 잔 어때? 기분이 가라앉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캐리는 딱 잘라서 거절했지만 마음은 블레어의 권유에 이끌리고 있었다.
"분명히 말해서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지, 캐리? 나? 그렇지 않으면 당신 자신?"
블레어는 훌쭉한 캐리의 턱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이 암흑 속에서 그녀의 표정을 간파하기라도 하려는 듯 고개 숙인 캐리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캐리는 눈을 꼭 감고 뺨을 어루만지는 블레어의 부드러운 손의 온기와 손가락의 감촉에 지금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자신의 여린 마음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별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단지 오늘밤은 마시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그녀는 속삭이듯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마음은 블레어가 자기를 설복시켜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은 사기꾼이야."
블레어가 냉혹하고도 낮은 음성으로 내뱉듯이 말했다.
'절망적이구나!'
공포의 절벽에 홀로 서게 된 캐리는 쓰러질 것 같은 자신을 필사적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7
"이것으로 끝이군."
레이디 제인의 들뜬 목소리가 울렸다. 융단의 마지막 사진 촬영을 캐리가 막 끝낸 참이었다.
<스트로베리>에 들어가지 못해 블레어와 해안을 거닐었던 그날 밤으로부터 벌써 일 주일이 지났다. 캐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분주하게 지내려 애썼다.
'당신은 사기꾼이야!'
라는 소름끼치는 그 말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자나 깨나 그 말이 귀에 들리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때때로 왜 그때 그 말을 따져 묻지 않았던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따져 묻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애매모호하게,
'여기서 당신에게 모욕당할 이유 따위는 없어요!'
라고 화만 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쇼크와 절망을 얼버무리기 위해 화난 체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그때 캐리는 본관에 겨우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긴장한 나머지 정신이 혼비백산한 기분이었다. 블레어가 뒷문을 열어주었을 때 잘 자라는 인사도 변변히 하지 못했다. 이제 이것으로 모두가 끝인 것 같은 암담한 기분마저 들었다.
마음속으로 스탠 커티스와 텔레비전 방송국의 동료들에게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없을 것 같아 그것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팜 비취에서의 임무를 캐리가 훌륭히 해내고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확실히 이미 많은 넣은 정보를 손에 넣었고 <스트로베리>의 아름다운 슬라이드 촬영도 끝냈다. 이 성의 주인도, 풍경도 이것으로 한 가지 특집 프로그램은 충분히 짤 수 있을 것이라고 캐리는 확신하였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을 속이면서 생활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이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혼란스러웠다.
불안한 캐리의 마음을 더욱 괴롭힌 것은 그날 이후 블레어가 식사 시간뿐만 아니라 촬영할 때도 빈번히 캐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는 캐리가 하는 일의 스케줄도 훤히 알고 있어서 기꺼이 조명기구의 조정을 맡아 주기도 했다. 블레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사진 촬영을 끝내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거라고 생각하며 캐리는 그의 도움을 인정했다.
블레어가 레이디 제인에게 캐리에 대한 의심을 말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자 캐리의 마음은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갔다.
레이디 제인과의 업무가 끝나기 전에 자신의 정체를 폭로할 생각은 캐리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블레어의 냉정한 행동 뒤에 있는 위선에 대해 그녀는 조금씩 분노하고 있었다. 한 개인의 감정을 무시하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고 블레어는 뻔뻔스럽게도 그녀를 관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매일같이 블레어는 옆에 있었다. 캐리는 괴로움을 숨기기에는 이제 참을 수 없을 만큼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자신의 약점을 블레어 앞에서 속속들이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고, 그의 의혹에 찬 푸른 눈도 정면으로 볼 수가 없었다.
스미소니언 연구소의 리포트가 다 완성된다면 여기를 나가야겠다고 지난밤에 캐리는 결심하였다. 파티는 불과 일 주일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디 제인은 지금까지 캐리의 도움 없이도 수많은 파티를 이끌어 온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비서가 갑작스럽게 없어진 불편을 돈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고민할 일은 아닐 거라고 캐리는 스스로 자신의 양심을 위로하였다.
마지막 사진도 완성된 지금, 이제부터는 해설문을 타이핑하는 데 전념하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불의의 사태가 생기지 않는 한 이틀만 지나면 끝날 것이다.
"캐리, 내가 말하는 것을 하나도 듣고 있지 않군요."
멍청하게 생각에 몰두하고 있던 캐리는 부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캐리는 어느 사이엔가 네 개의 파란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
"조금 쉬면 어때? 기분전환이 필요한 것 같은데."
캐리의 눈에 눈물이 반짝 빛났다.
"오후에 해설문을 조금 타이핑해 두려고 했는데요."
캐리는 변명하듯 말했다.
"게다가 조금도 피곤하지 않아요."
"안 돼요, 내가 허락하지 않겠어요."
레이디 제인이 완강한 어조로 말했다.
"계속 일을 했잖아요. 파티가 끝나면 리포트를 마무리할 시간은 충분히 있을 테니까요."
여기서 캐리는 일단 손을 떼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과의 투쟁은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남은 필름을 사용하고 나서 현상하러 나가도 될까요?"
그렇게 하면 다시 촬영을 할 수도 있었다. 이 제안에 레이디 제인은 이마에 주름을 잡고 생각에 잠겼다.
"좋아요. 그래요, 딱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레이디 제인은 자못 기쁜 듯한 얼굴을 하였다.
"나의 파티에 어울릴 만한 옷을 찾아봐요. 사주고 싶으니까."
레이디 제인은 자신이 추천한 와스에 있는 상점 이름을 되뇌었다.
"그렇게까지 마음쓰시지 않아도…"
지금 느닷없이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파티에 참석하지 않으므로 파티용 드레스는 필요 없다고…
"내가 무엇을 입든 신경쓸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요."
레이디 제인은 그 이상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캐리는 안심했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부인이 양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캐리는 금방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필름을 현상하기 위해 저택을 나온 캐리는 스포츠카의 핸들을 잡고 대기하고 있는 블레어를 발견한 것이다.
"자, 타!"
블레어가 재촉했다.
"나는 내 차로 갈 거예요."
캐리는 완고하게 말하고 자기의 폭스바겐을 찾았지만, 그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엷은 다갈색 어깨와 팔을 드러낸 시원스러워 보이는 녹색의 여름 드레스를 입은 캐리를 블레어는 의혹에 찬 눈동자로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지 마. 나는 어머니, 즉 당신의 고용주 명령으로 이러는 거니까."
이제는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캐리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도리질하면서 블레어 옆에 앉았다.
"이러지 않아도…"
고맙지만 오히려 난처하다고 말하지 않았을 뿐, 그에 아랑곳없이 차는 이미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몸에 딱 달라붙은 연푸른색의 바지가 블레어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캐리는 그에게 닿아보고 싶은 자신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조금 느긋해지면 어때? 아무 것도 집어삼키지 않을 테니까."
블레어는 조금 빈정거렸다.
캐리는 심통난 아이처럼 블레어를 쏘아보았다.
"처음부터 그런 것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블레어는 새빨개진 캐리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자못 만족스러운 듯이 파란 눈을 빛냈다.
"나를 바보로 알고 있군. 나의 침실에서 넋을 잃고 있던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당신같이 자부심 강하고 무뚝뚝한 남성은 처음이에요."
한 대 후려갈길 듯이 주먹을 파르르 떨며 캐리는 소리를 질렀다.
"그거 안 됐군."
블레어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옆의 캐리가 화가 난 것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 <스트로베리>에서 나의 다른 면을 보게 되리라고 생각해."
"아니, 그럴 생각은 이제 없어요."
엉겹결에 캐리는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아 버렸다.
블레어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긴장된 공기가 흘렀다. 블레어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캐리는 힐끗 훔쳐보았다.
자신이 말한 의미를 알아차린 것이리라. <스트로베리>에 그렇게 오래 있지 않을 것이라고… 갑자기 캐리는 그의 옆에 이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팜 비취의 작은 상점가에 있는 사진관은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마치 자동차가 멈추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캐리는 블레어보다 먼저 길에 내려섰다. 언제까지 화를 내는 것보다는 될 수 있는 대로 일을 빨리 끝내야 할 것이었다.
블레어는 상점에 들어가는 그녀를 따라와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거친 자세로 산란해질 정도로 캐리 옆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캐리의 간단한 주문을 받아 적고 있던 어린 소녀는 블레어에게 정신이 팔려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캐리의 목소리가 점점 쌀쌀맞아졌다.
"상점의 소녀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해줘도 되지 않아?"
상점을 나온 후 블레어의 반 놀림 같은 말에 캐리는 걸음을 딱 멈추었다. 지금 막 그에 대한 것은 모두 무시하자고 마음속으로 맹세했었는데 말이다.
"당신이란 사람은…"
"자부심이 강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블레어가 뒤를 받았다.
"내 결점을 떠들어 대는 것을 아까는 내버려 두었지만…"
사기꾼이라고 비웃은 그날 밤부터 블레어가 보였던 냉담함도 왜 그런지 오늘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소녀가 멍청하게 쳐다본 것만으로도 오늘 밖에 나온 보람이 있겠지요. 저는 이제 돌아가겠어요."
"그러나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은 아직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자존심 상하고 당혹스런 표정으로 캐리는 블레어의 파란 눈을 올려다보았다.
"당신 쪽에서 생각해 내기를 바란다면 이쪽은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 어머니께서 무언가 사오라고 했었는데, 파티용으로 어울리는 옷을…"
"다음 기회로 미루겠어요.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까."
"파티까지는 일 주일밖에 남지 않았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바쁠 거야."
용기 있게 쳐다본 캐리의 눈이 완강하게 들어주지 않으려는 블레어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나, 옷 고르는 데 시간이 대단히 많이 드는 편이에요. 당신을 몇 시간이나 차 속에서 땀투성이로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요."
"차 속에서 기다릴 마음은 없어."
블레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면 일단 돌아가 있다가 다시 마중하러 와줄 거예요? 그래도 폐를 끼치는 거죠? 스탠포드를 부르거나 택시를 타고 갈게요."
"그런 것은 내키지 않아. 더구나 폐라니? 당치도 않아. 투덜거리지 말고, 자, 얼른 가!"
블레어는 캐리의 팔을 잡아끌듯이 한 블럭 앞의 와스 거리를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캐리는 꽉 붙잡힌 팔을 빼내려고 발버둥쳤다. 마치 부모에게 끌려가면서 걷고 있는 말 안 듣는 아이같이 보였다.
"제발 천천히 걸을 수 없어요?"
캐리는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블레어는 걸음을 늦추고 캐리를 잡고 있던 손을 조금 느슨히 했다. 조금만 레스토랑을 지나치려고 했을 때 쇼핑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는 방법이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
"목 말라 참을 수가 없어요. 여기서 무슨 음료수라도 마시지 않겠어요?"
캐리는 생긋 웃으며 의아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뜬 블레어를 보았다.
"남자로서 거절하지 못하겠는걸."
조그맣게 말한 블레어는 레스토랑 문을 열고 냉방 중인 상점 안으로 캐리를 들어가게 했다.
고상하고 아담한 레스토랑이었다. 윤기 흐르는 하얗고 작은 테이블에 팔걸이 없는 의자를 배치해 놓았는데 관엽 식물과 생화가 여기저기 치장되어 있었다.
캐리가 레모네이드가 좋겠다고 하자, 블레어는 두 잔을 주문했다. 캐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차가운 레모네이드를 다 마셔 버렸다.
"그 어리석은 여자의 지혜로 이번에는 어떤 방법으로 도망가려 할까?"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블레어의 눈은 신중했다.
"나에게도 프라이드가 있다는 걸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나요? 당신은 이렇게 말하고 싶겠죠. 첫째는 내가 갖고 있는 옷 중에 파티에서 입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두 번째는 일에 맞는 충분한 급료를 지불해 주고 있는 주인이 비싼 옷을 선물하니까 기쁘게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녀의 다갈색 눈이 커다란 적의를 담고 있었다.
"당신 없이 혼자서 적절한 것을 고를 수 없다고…"
세 번째의 말을 끝내자 캐리는 감정이 고조되어 목이 메었다. 혼자서 쇼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레이디 제인도 그의 아들도 캐리의 취향을 못미더워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당신은 한 번이라도 이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
블레어가 신랄하게 되받았다.
"즉, 어머니의 관대한 기분을 업신여기는 것은 대단한 옹고집이고 지나치게 이기적이지 않을까 하고. 어머니는 일을 해준 데 대해 당신에게 사례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번 일을 자청한 것이야. 단정히 받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내가 함께 온 이유는 당신이 사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야. 아까와 같이 말야."
캐리는 도리가 없었다. 블레어의 단순명쾌한 이야기에 반론하면 은혜 모르는 인간이 될 판이었다. 지금 여기에서 가장 간단한 것은 어딘가에 들어가 드레스를 사는 것이다. 그녀가 저택을 떠난 뒤 상자에 그대로 들어 있는 드레스가 남겨지게 되겠지만… 이제는 정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용기를 내자! 캐리는 심호흡을 했다.
"레이디 제인이 드레스를 사주신다는 관용을 받아들일 수 없는 진짜 이유는… 나, 파티가 시작될 때는 이곳에 없을 거예요."
블레어의 파란 눈이 지금까지 본 일이 없는 얼어붙은 듯한 차가운 빛을 띠고 찌를 듯이 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곳에 없어? 왜?"
캐리가 말한 것을 되풀이하는 블레어의 얼굴은 이제 분노를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두 명의 웨이트리스의 눈을 의식하여 캐리는 낯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이곳을 떠나는 이유는 이미 당신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사기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름 아닌 당신이에요. 기억하고 계시겠죠?"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캐리는 말을 끊었지만, 블레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난 비서로서의 훈련을 받은 일도 없고 나에게 적합한 일이라고 생각한 일도 없어요. 스미소니언 연구소의 리포트가 끝나는 대로 그만둘 생각입니다."
"어머니를 내버려 둔 채?"
캐리를 따라 블레어도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는 격정이 그 말소리와 표정에 역력히 나타났다.
"그래서 리포트가 끝난 후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캐리도 발끈해서 블레어에게 정면으로 대들었다.
"그러면 파티는 어떻게 되지? 불과 며칠 후의 일인데, 어머니의 실망은 말할 것도 없고 의지한 사람이 떠나버려 생긴 불편은 어떻게 하지? 그것도 아무런 예고조차 없이 돌연히… 일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어? 월급이 충분하지 못하다든가…"
블레어의 반격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캐리는 단지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돈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이지? 어머니에게 권한 융단에 대한 일에 전과 같은 정열을 느끼지 않게 되기라도? 그렇지 않으면 나의 아들과 강아지가 당신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데 진절머리가 나기라도 했소?"
"그만. 이제 더 듣고 싶지 않아요!"
캐리는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지금 말한 어느 것도 진정한 이유는 아니에요."
"자, 그럼 진정한 이유는 뭐지?"
블레어는 인정사정없이 물어왔다.
"당신이란 사람은…"
말을 도중에서 끊고 뭐라고 계속해야 할지 몰라 캐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당신이 불평하는 원인은 간단히 이해가 가오."
블레어가 차가운 눈을 하고 계속 말하였다.
"내가 좋지 않아서, 나라는 존재가 당신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지. 어머니에게서 유능한 비서를 빼앗고, 아들로부터는 마음에 드는 놀이 상대를 빼앗기는 싫어. 나도 이제부터는 귀찮게 따라다니지 않겠어."
'그의 빗나간 짐작을 아니라고 반박하려다 무심코 사실을 말할지도 모른다.'
캐리는 잠자코 있었다. 그가 잘못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캐리에게 있어서는 홀가분했다. 만일 그가 자신을 피해 준다면 적어도 파티가 끝날 때까지 일을 계속해도 되지 않을까. 그 뒤에 레이디 제인에게 일을 끝내는 것을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때까지 그럴 듯한 이유를 준비해서는…
"레모네이드 이제 다 마셨지?"
블레어의 친절한 목소리에 감정적인 말다툼도 그것으로 끝나 버렸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캐리는 자연스럽게 자동차 쪽으로 발을 돌렸다.
"그쪽이 아니야!"
블레어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레스토랑에서 그만큼 말다툼을 했는데도 블레어에겐 쫓아온 목적을 바꿀 마음이 없다는 것을 캐리는 잘 알았다. 누가 뭐래도 파티용 드레스를 고르게 할 심사였다.
와스 거리는 팜 비취에 도착한 날 본 바와 같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거리였다. 캐리는 그 이후 몇 번인가 이 거리를 지나갔지만 차를 세우고 상점에 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보다 훨씬 대중적인 서부 팜 비취의 대형 쇼핑센터 쪽이 캐리에게는 마음 편해서 좋았다.
블레어는 캐리의 쇼핑 상대로서 그냥 같이 온 것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레이디 제인이 추천한 곳에서 발을 멈추고는 문을 열었다. 언뜻 보기에도 비쌀 것 같은 상점이었다. 조금 망설이고 있는 캐리를 재빨리 앞질러 블레어가 주도권을 쥐었다.
<스트로베리>에 사는 사람으로 레이디 제인이 얘기해서 왔다고 하자 점원의 태도가 싹 바뀌었다. 블레어가 다시 캐리는 어머니의 비서라고 말하자 점원인 여자의 아첨하는 태도에 호기심이 엿보였다. 고급스러운 곳에서 귀빈 대우를 받은 것은 캐리에게 있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점원은 캐리보다도 블레어의 의견을 존중하고 몇 벌 골라내었다.
블레어는 빨간 토마토색의 이브닝드레스로, 어깨도 등도 훤히 드러나는 홀더네크의 드레스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얄팍한 실크로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얄미울 정도로 몸에 딱 맞아 캐리의 가슴의 풍만함과 날씬하고 매끈한 다리를 돋보이게 했다.
블레어도 점원도 이 드레스는 마치 캐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고 칭찬했다. 그들은 캐리의 의향은 거의 묻지 않고 둘이서 이 드레스로 정해 버렸다.
"그래도 이 드레스는 너무나도, 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캐리는 미약하게나마 반발해 보았다.
"그래, 정말로 근사하지?"
블레어는 유쾌하게 동의하고 캐리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너머로 삼면경 속에 비친 세 사람의 캐리를 보았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어."
"멋있는 분이시군요. 대단히 좋은 취향을 갖고 계시네요."
점원은 황홀한 듯이 숨을 들이쉬었지만 캐리의 흥미를 얻지 못한 것을 알고는 조금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옷을 입어볼 때 가격표를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붙어 있지 않았다. 현금은 지불하지 않고 블레어가 매상표에 사인을 할 뿐이었다. 드레스는 얇은 고급 종이로 정중히 싸여 긴 상자에 넣어졌다. 자동차에 돌아올 때까지 블레어가 그것을 들어주었다.
"가격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블레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에게는 하찮은 가격이니까."
캐리는 사실 어안이 벙벙했다. 아마도 캐리가 내심 침착하지 못한 이유를 간파하고 있었는지 캐리를 위안하는 듯한 블레어의 말에 그녀는 작게 감동하였다.
<스트로베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갈 때의 말다툼이 이상스러울 만치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캐리는 평상시의 블레어 마티슨과는 다른 면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저택에 도착하자 제이미가 수영복 차림으로 집 주위를 뛰어다니며 캐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캐리, 지금 수영할 수 있지요?"
조수석의 문을 끌어당기면서 제이미가 졸라대었다.
"제이미를 이길 수는 없구나."
쾌활하게 대답한 캐리는 옆자리의 블레어가 신경 쓰여 조금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제이미가 쫓아다녀 진절머리가 날 것이라고 한 블레어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제이미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자꾸 졸라댔다.
"아빠, 아빠도 같이 가요!"
별로 말이 없는 제이미가 아빠에게 머뭇머뭇 같이 가자고 하는 것을 캐리는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블레어는 차에서 내려서서 캐리의 얼굴을 보았다. 그 눈은 레스토랑에서 캐리와 약속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아들이 바라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것이다.
캐리에게 다가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아빠는 아마 더 중요한 일이…"
말을 중간에서 끊었지만 이것은 너무나도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블레어가 변명할 여지도 없이 캐리는 당황하여 덧붙였다.
"그래도 함께 수영할 수 있도록 부탁해 볼까?"
그녀는 아빠와의 친밀감을 더욱 갖고 싶어 하는 제이미의 기분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미스 린제이, 이쪽에 계셨군요!"
스탠포드는 서둘러 뛰어온 것같이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전화가 왔어요. 뉴올리언즈에서 온 장거리 전화입니다."
캐리는 전신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어찔어찔했다. 세 사람의 눈이 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캐리는 간신히 그 침묵을 깼다.
"풀에서 만나자, 제이미."
전화를 받으려고 서두르면서 캐리는 어깨너머로 제이미에게 소리 질렀다. 그 소리가 캐리의 귀에도 어딘가 먼 곳에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듯했다.
스탠 커티스였다. 그는 인사말도 없이 처음부터 본론이었다.
"잘되어 가고 있나, 캐리? 필립한테 내가 한 말은 들었겠지."
캐리와 뉴올리언즈― 지금은 이미 먼 세계와 같이 생각되어지는 곳이지만―를 잇는 전화선에 희미하게 잡음이 끼어들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갈증이 나서 캐리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로슨 씨에게도 이야기했지만 여기 일을 몇 가지 끝낸 다음에…"
캐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래 업무는 어느 쪽이야?"
스탠이 완강하게 캐리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가 초조해 하는 것이 눈앞에서 보이는 듯했다. 긴장한 나머지 캐리는 위장에 딱딱한 응어리가 생긴 것 같았다.
"스탠 씨, 모든 게 상상했던 것과는 아주 달랐어요. 저는 결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캐리, 될 수 있는 한 빨리 뉴올리언즈로 돌아와 주길 바라는데, 이것은 명령이야. 캐리를 그런 위험한 일에 뛰어들게 하고서 난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몰라. 모두 없었던 일로 하고 돌아와요."
스탠의 낮지만 위엄있는 목소리가 예리한 칼날과도 같이 들려왔다.
'그 임무가 나에게는 너무 무거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어.'
캐리는 자신도 잘 알지 못한 채 스탠의 착각을 필사적으로 정정하였다.
"그래도 특집 프로그램을 꾸밀 만큼은 기사거리를 갖춰 놨어요. 사진이든 무엇이든 다. 단, 나의 고용주인 레이디 제인에 대한 나의 의무로써 조금 더 여기에 머물고 싶을 뿐이에요."
캐리는 열심히 설명했다.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아주 바쁜 남자, 스탠 커티스의 인내는 이미 한계를 넘은 것 같았다. 캐리의 마지막 말이 절조 없이 들린 것인지 스탠은 드디어 화를 내고 말았다.
"당신에게 다짐해 두겠지만 당신의 진짜 고용주는 뉴올리언즈의 채널 10이 아닌가? 직장을 잃고 싶지 않으면 적어도 월요일 오후까지 방송국에 오도록 해요. 3일이나 여유가 있으니까 돌아올 수 있겠지?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캐리."
"안녕, 커티스 씨."
캐리는 따돌리듯이 말을 했다. 그녀는 스탠이 전화를 끊은 뒤에도 수화기를 망연히 쥐고 있었다.
캐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파티 때문에 <스트로베리>에 남는다면― 블레어가 벌써 그렇게 넌지시 비추고 있지만― 스탠이 말한 날짜보다 일 주일이나 늦게 뉴올리언즈에 돌아가게 된다. 그때는 직장을 잃게 될 것이다. 협박뿐인지도 모르지만, 캐리는 진퇴양난에 빠져 버렸다. 어쨌든 캐리는 의리없는 행동을 해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좌절감으로 그녀는 눈물이 쏟아졌다. 방송국의 업무를 단념할 수 있을까? 방송국에 취직이 되었을 때 친구들은 몹시 부러워했었다. 자신이 남보다 더 열심히 힘써 온 결과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캐리는 탑의 계단을 올라 자신의 방으로 갔다.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이젠 그럴 여유가 없었다. 빨리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넓은 방 가운데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얼마나 서 있었는지 캐리 자신도 몰랐다. 그때 자그마하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캐리! 약속한 대로 수영하러 올 거지요?"
기대에 찬 제이미의 목소리였다.
캐리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고 아름다운 얼굴에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약속한 대로라는 제이미의 말이 칼과도 같이 캐리의 가슴을 찔렀다.
"지금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있는 중이야."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캐리는 여행용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난 참 바보야!"
8
오후의 쇼핑에 동행한 그날부터 캐리는 블레어를 전혀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떠나야 할 날이 다가옴에 따라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블레어의 말대로 파티가 가까워지자 매일 정신없이 바쁜 상황이었지만 블레어의 생각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캐리 자신이 궁지에 몰려 있다는 사실에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블레어가 이야기한 그의 결혼생활 따위에나 온통 정신이 팔려 있고, 자존심이 상처받던 지난 밤의 굴욕 또한 생생하게 기억되었다. 이상한 시간들이었다.
파티가 가까워짐에 따라 해변에서 블레어가 경고했던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너무 바쁜 탓에 신경이 곤두선 것 같기도 해서 캐리는 불안감을 없애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때 이후 파티 준비에 대하여 외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블레어의 말을 캐리는 계속 지켜왔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파티 일을 들어 알고 있었고, 경박한 호기심을 나타내는 것에 캐리는 놀라 버렸다.
그렇다 해도 그녀가 무심코 필립 로슨에게 파티 건을 이야기해 버린 것이 마음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다. 파티 전날 아침, 꽃집에서 나오던 길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필립의 모습을 보고 인사 정도는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황급히 앞 가게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확실히 필립은 자기를 보았다. 그런데 왜 급히 피하는 것일까?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 분명히 스탠 커티스가 자신을 방송국에서 해고시킨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자신이 전염병 환자라도 되는 것처럼 대하는 것은 왜일까? 혹시 다른 일자리라도 부탁할까 봐 귀찮아진 모양인가?
그의 염려는 쓸데없는 것이리라. 캐리는 필립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언뜻 본 필립의 모습과 몸집이 작은 여성과 캐리의 면전에서 말다툼하던 모습이 겹쳐져 떠올랐다. 그때 그 부인은 캐리가 아는 누군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그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소용없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캐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피크닉이라니! 놀리고 계신 것은 아니겠죠?"
캐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레이디 제인을 바라보았다.
"파티는 내일 밤인데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레이디 제인은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해 있는 캐리에게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내일까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거예요. 당신도 나도 그렇게 매일 일에만 빠져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어요? 에로이즈의 정식 휴일은 내일이지만 파티를 위해 오늘로 앞당겨 주었지요."
그래서 곤란에 처해 있는 것인지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제이미 학교에서도 교직원 회의가 있는지 수업을 하지 않고 굉장히 바쁘다더군요."
'교원 데모라도 하려는 것은 아닐까?'
라고 캐리는 불쾌한 얼굴로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들이 이전부터 해온 방식인가 보군요."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는 캐리에게 부인은 아무런 생각 없이 웃었다. 부인의 태도에서 너무 엄숙하고 압도적인 점이 보이지 않으면 캐리도 내키는 대로 행동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제이미와의 피크닉 이야기는 대충 해두고 캐리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오후부터 내리쬐는 태양 아래 제이미와 해변을 뛰어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가슴이 울렁거랐다. 캐리는 초콜릿색 수영복을 내팽개치고 대신에 밝고 엷은 녹색의 비키니를 입었다. 변장용으로 사둔 초콜릿색 수영복은 이제 쓸데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비키니 위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으니 캐리는 마치 비취파티에 나가는 10대 소녀처럼 보였다. 바닥이 두꺼운 고무 샌들을 신고 캔버스지의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제이미도 틀림없이 들떠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캐리는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른들은 준비하는 데 왜 그렇게 시간이 걸리지요?"
제이미가 곧잘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제이미의 얼굴을 생각하며 미소를 띠고 내려가던 캐리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널찍널찍한 타일을 깐 테라스로 나오던 순간 등걸이 의자에 기대어 누워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블레어구나!'
고급스러운 양복을 입은 블레어는 어딘가 다른 사람같이 보였다. 그의 푸른 눈이 캐리 쪽을 향하는 순간 그녀의 심장은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헐렁한 티셔츠가 마치 속에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듯이 그녀를 도발적으로 보이게 했다.
'지난 주는 대체 어디에 갔다온 것일까? 어째서 이런 차림을 하고 있는 거지? 왜 저런 눈초리로 나를 보는 걸까?'
의문점들이 캐리의 머릿속에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제이미는 어디에 있죠?"
캐리는 앞질러 말을 꺼냈다. 어떻게든 태연해지려고 하는 캐리에게 블레어가 느릿느릿 말을 받았다.
"아, 고마워. 팜 비취에 돌아오니 기쁜데. 응, 여행의 성과는 있었지만 그렇게 즐겁지는 않았어. 피곤하게만 느껴지는군. 신경써 줘서 정말 고마워."
한 마디 인사도 하지 않았던 캐리의 예의 없음을 비난이라도 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그녀는 얼굴을 붉혔지만 블레어의 말에 어딘가 마음에 걸리는 곳이 있었다. 캐리는 제일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편하게 앉았지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어디에 갔다 오셨어요?"
캐리는 아무 생각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부호들의 플레이보이 짓 아니면, 여가로 스키나 선박여행을 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여행의 성과가 있었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블레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있는 것을 보고 캐리는 당황했다.
"지금 그 질문 잊어버리지…"
그는 자못 관심 없다는 듯 말했다.
"이곳은 2, 3일 정말 바빴어요. 어딘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은 잘한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게 말하는 캐리를 블레어는 돌연 그녀의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고 있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역시, 여기에 있어 주었군."
블레어가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블레어의 말에는 무언가 깊은 의미가 숨어 있는 것 같아 캐리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여기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 그가 그런 것을…'
블레어는 조금 전과는 달리 매력적인 미소를 캐리에게 보내왔다. 마침 그때 제이미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피크닉용의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루시에게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여유 있게 넣어 달라고 했어."
제이미가 자못 중대한 말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아버지도 우리와 함께 피크닉 가신대요."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제이미는 캐리에게 알려 주었다. 제이미가 이야기를 꺼내자, 캐리는 블레어의 표정을 보았는데 그 순간 일의 사태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너의 데이트 상대가 좋다고 했겠지?"
블레어가 아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제이미가 낄낄대며 웃었다.
"아빠, 캐리는 나의 데이트 상대이기에는 나이가 너무나 많아요. 단지 친구일 뿐이죠."
그리고는 덧붙여 진지하게 말했다.
"그밖에 누군가 우리와 같이 갈 사람이라도 있나요?"
"내가 새로운 친구를 데리고 갈 거야. 당신들 둘한테 소개시키려고 생각해."
캐리는 몸 속의 피가 온통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얼마나 무자비한 남자인가!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 우리들의 피크닉에 끌어넣다니!'
캐리는 화가 난 나머지 말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블레어는 이상하다는 듯 캐리의 빨개진 얼굴과 새침하게 쳐든 턱을 보았다.
"그런데라니, 뭐지요?"
캐리는 싸울 듯이 말했다.
"나와 나의 친구가 당신과 제이미의 비취파티에 끼어도 상관없겠지?"
"당신의 해변이잖아요."
캐리가 대강 얼버무렸다.
"가자, 제이미."
블레어의 웃음소리에 뺨이 불꽃같이 뜨거워져 캐리는 종종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바구니만은 잊지 말아요."
캐리는 어깨너머로 블레어에게 간단히 명했다.
마음속은 분노가 불같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민감한 제이미에게 그것을 알게 하지 않으려고 캐리는 무진 노력을 했다. 제이미는 아까부터 뭔가 묻고 싶다는 듯이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해변에 도착하면 기분이 가라앉겠지. 이 즐거운 오후 시간, 아마도 제이미와 마지막의 외출이 될지도 모르는 이 중요한 시간을 누구에게라도 방해받지는 않을 거야.'
캐리는 그렇게 결심하고 있었다.
해변은 태양 아래에서 매혹적으로 빛났으며 하늘의 파랗게 끝없이 펼쳐진 곳곳에 새털 같은 구름이 떠다녔다.
오랜만에 보는 스탠포드가 땀을 흘리며 두 사람이 있는 해변 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는 비취타월을 접어 올려 놓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블레어는 결국 오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캐리는 갑자기 맥이 풀려 버렸다.
캐리는 스탠포드와 서서 얘기할 기운도 없고 해서 바구니를 날라다 주어 고맙다고만 인사했다. 제이미는 벌써 모래집 짓기에 정신이 팔려 그것 이외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캐리는 비취타월을 모래 위에 휙 던져 깔고는 티셔츠도 샌들도 다 벗어던지고서 그 위에 엎드렸다.
'바보야! 만약 블레어가 친구와 함께 오지 않았다 해도 그가 네 사람이 될까…?'
캐리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힐책하고 있었다.
내리비치는 태양이 피부를 파고들어 점점 몸 속의 근육이 노글노글해져 가는 것 같아 캐리는 기분이 좋아졌다.
"제이미, 바다에 들어갈 때는 나와 같이 들어가야 해요."
캐리는 나른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제이미는 그녀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해변 저쪽에서 부친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자그마한 것이 블레어의 발밑을 돌며 뛰어오고 있었다. 제이미는 숨을 죽이고 그쪽을 응시했다.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드디어 제이미가 그 작은 것의 정체를 알아본 듯, 그는 환성을 지르면서 모래집도 다 팽개치고 고무공같이 뛰어오르고 있는 물체를 향해 뛰어갔다.
"강아지다! 아빠가 내게 사주신 거야!"
제이미는 무릎을 꿇고 혀를 내밀고 이리저리 뛰고 있는 강아지를 가슴에 껴안았다.
캐리는 깜박 졸다가 제이미가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었다. 혹시 그의 신변에 무언가 위험이라도 일어났나 해서 벌떡 일어난 그녀의 눈앞에 블레어가 우뚝 서 있었다. 그녀와 제이미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한 친구는 강아지였던 것이다.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제이미가 그녀 앞으로 강아지를 데리고 왔지만, 캐리는 그쪽으로 신경이 가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남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블레어에게 쏠려져 있었으며, 그 역시도 캐리의 수영복 차림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가 이 강아지를 나에게 주셨어요. 내가 돌보게 되었단 말이에요."
제이미는 그렇게 말하며 책임의 무거움을 오히려 기뻐하는 듯했다.
"크면 집 지키기에 좋은 개가 될 거야."
강아지는 독일산 세퍼드였다.
"꽤 보는 눈이 있군."
블레어의 허스키한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난 것에 캐리는 놀랐다. 그는 어느 사이엔가 비취타월 위의 캐리 옆에 앉아 있었다.
"그 수영복을 입으니 정말 멋있어 보이는데…"
"당신도 정말 멋있어요."
캐리도 솔직히 말하고 둘은 함께 웃었다.
제이미가 그들로부터 떨어져 수십 미터 앞의 해변에서 강아지와 놀고 있는 것도 캐리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은 오직 블레어에게로의 뜨거운 정열에 마음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캐리는 상체를 세워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댔다.
블레어가 그녀의 입술을 뜨겁게 받아들였다.
"여기서 그만두고 싶진 않지만…"
캐리에게서 입술을 떼며 블레어가 허스키한 소리로 속삭였다.
"한 사람, 또 동행자가 있으니 말이야."
캐리는 제이미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자신에게 다시 놀랐다. 제이미는 둘이 있는 것을 보더니 눈치 있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서서는 캐리와 아버지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들 있는 곳으로 가까이 왔다.
"나, 배가 고파졌어. 그리고 로키도 그렇대."
제이미는 응석을 부리며 말했다. 여기에 블레어까지 '나도!' 하며 한몫 거들었다.
캐리는 급히 서둘러 바구니를 뒤졌다.
세 사람은 재미있게 웃고 떠들고 강아지는 타월 위에 엎드려 태양빛의 애무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캐리는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행복감을 느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바구니를 손에 든 블레어와 나란히 캐리는 자신의 가방과 접어 갠 비취타월을 들고 천천히 걸었다. 제이미는 강아지와 앞서서 달려가고 있었다. 블레어는 들뜬 캐리와는 달리 왠지 진지한 표정을 짓고 걷는 중이었다.
"블레어, 무엇을 생각하고 있어요?"
밝고 쾌활한 목소리의 캐리를 보는 블레어의 눈에서 이미 좀 전과 같은 따뜻함은 찾을 수 없었다.
"언제 이곳을 떠나지? 이미 결정된 것인가?"
"파티가 끝나는 대로…"
캐리는 냉정히 대답했다. 그녀는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께는 아직 말하지 않았겠지?"
질문이라기보다 강한 다짐이었다.
"네."
그렇게 대답하면서 레이디 제인에게 얘기할 용기가 없는 자신을 캐리는 잘 알고 있었다.
레이디 제인은 저택의 테라스에 앉아 있었고, 제이미는 벌써 그곳에 도착해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부터는 단 몇 분일지라도 블레어와 얘기할 수 없다.'
아까부터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그를 보고 캐리는 당황하여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밤은 어머니와 함께 식사하시겠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도 그의 옆에 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서글픈 느낌을 가지는 캐리였다.
"상관 말아요. 내가 있으면 불편할 거야. 그것보다 오늘밤, 나의 거처로 와서 우리 둘이 하다 만 일을 해치우자고 한다면 혹시 구미가 당길지 모르지만…"
무방비상태의 그녀 마음에 독화살을 쏘는 것 같은 블레어의 말이었다. 캐리의 눈에 금방 눈물이 고였다. 아까는 그처럼 멋있는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
캐리는 울면서 그렇게 말했다.
"비겁해요."
상처입은 짐승같이 외치며 캐리는 영문을 몰라 놀라는 세 사람을 뒤에 두고 테라스를 빠져 나왔다. 블레어가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었다. 해변에서 정열적으로 키스를 한 것도, 그것에 불을 당긴 것도 사실은 그녀였기에.
다음 날 밤, 파티가 끝나면 캐리는 그 동안 그녀를 번민하게 한 블레어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캐리는 이 <스트로베리>를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에로이즈는 10시가 되어도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옆에서 보기 딱할 정도로 레이디 제인은 에로이즈의 신변을 걱정하고 있었다. 짐작이 가는 여러 곳에 전화를 해보았지만 제이미의 어렸을 적부터의 유모인 에로이즈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다.
"블레어에게는 이야기하셨습니까?"
캐리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니요, 오늘밤은 약속이 있어서 늦게 오거나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대단한 일이 아닌 이상 블레어까지 걱정을 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어요."
블레어의 부재 이유는 확실했지만, 캐리는 왠지 기분이 축 처졌다. 블레어 마티슨이 저녁식사에 동석하지 않은 것도 캐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었지만, 은연중에 자신과 연결시켜 보는 바보스러움에 캐리는 화가 났다.
'분명히 매혹적인 여성과 데이트를 하고 있을 거야. 나 같은 중산층의 일꾼이 아닌 그런 여성과…'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겠지요. 제이미는 이제 혼자서도 잘 수 있는 나이니까요."
캐리는 레이디 제인이 말한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제이미가 에로이즈와 함께 쓰고 있던 이어진 방에서 오늘밤 혼자서 잘 것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걱정이 되었다.
나쁜 꿈이라도 꾸고 소리치거나 울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아 달래주러 올 사람도 없는 것이었다. 제이미는 이 커다란 저택과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을 대부호의 상속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캐리에게 있어 제이미는 공포와 본능적인 욕망에 쉬이 지배되는 돌봐 주어야만 하는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캐리가 제이미 곁에서 자고 싶다고 이야기하자 레이디 제인은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안심이 된다는 눈치였다.
"도와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캐리."
캐리는 엷은 청색의 잠옷 위에다 나이트가운을 걸쳤다. 낮에 일광욕으로 갈색이 된 피부가 온화한 빛에 반사되는 은색의 그녀의 머리와 잘 어울렸다. 플로리다에 온 후 한 번도 자르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는 길게 늘어져 있었다.
제이미의 자는 얼굴은 측은할 정도로 어리게 보였다.
그의 옆에서 짐승의 털을 발견한 캐리는 어이없어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엄격하게 예의범절을 가르치는데도 몰래 아래층에 가서 로키를 데리고 올라온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침대 속까지.
어쨌든 '너무 너그러운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하면서도 캐리는 강아지를 아래층 큰 창고로 돌아가게 하지는 않았다. 에로이즈는 내일쯤은 돌아올 것이다. 언제나 점잔을 빼는 에로이즈가 곤란해지는 것도 사실 한 가지의 재미일 것이었다.
제이미는 곤히 자고 있었다. 법적 상속인인 이 소년이 블레어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도대체 몇 사람이나 알고 있는 것일까? 캐리의 입에서 그것이 새어나갈 리는 결코 없겠지만 소년도 언젠가는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지 않겠는가. 친자 관계는 핏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양자들이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증명해 준다.
제이미는 모친의 일을 어떻게 듣고 알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호기심 왕성한 나이이고 게다가 총명한 소년이다. 모친의 이야기를 여러 가지로 듣고 싶어 할 것이 틀림없다.
갑작스런 호기심에 캐리는 제이미의 책상에 다가갔다. 큰 서랍 속엔 캐리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만한 것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공단으로 장정한 앨범으로 표지에 <갓난아기 시절>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제일 첫 페이지에 손으로 쓴 글자는 캐리가 본 바로는 레이디 제인의 필적이 아니었다. 꼼꼼한 사각문자로 쓰여져 있는 그것은 원래는 사랑하는 엄마의 손에 의해 쓰여져야 하겠지만 에로이즈의 손으로 쓰여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키와 체중 등 어린이의 성장 기록이 걷기 시작한 것과 처음 말한 단어 등의 기록과 함께 조목조목 적혀져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것이지만 소년의 부모와 조부모의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캐리는 앨범을 스탠드 옆으로 가지고 가서 가족사진을 믿기 어려운 것을 보듯이 자세히 바라보았다. 사진 속의 부인은 틀림없이 그날 밤 레스토랑에서 필립과 이야기하던 그 여자였다. 제이미는 그녀를 꼭 닮아 있었다.
뜻밖의 사실을 발견한 쇼크로 캐리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앨범을 에로이즈 방으로 가지고 가서 의자에 앉은 캐리의 머릿속에 여러 얼굴이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이 앨범을 보고 있으니 레이디 제인이 자주 말하던 에로이즈의 성실한 인품과 제이미에 대한 깊은 사랑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에로이즈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필립과 제이미의 엄마, 즉 블레어의 이혼한 부인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내일 밤 열리는 파티에 대해서도 이상하리만치 관심을 갖고 있었고… 게다가 오늘 아침 자기와 마주치기를 피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무 의미도 없다면 그것으로 좋지만 여하튼 누군가에게 말해야겠다고 캐리는 생각했다. 이런 밤늦은 시간에 성실하게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레이디 제인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파티할 동안 예상되어지는 이상한 기미에 대해서 어머니에게는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블레어가 부탁하던 것이 생각났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직접 그에게 이야기해 달라고 블레어가 간곡히 부탁했는데…
캐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에로이즈의 침대 옆에 있는 전화로 다가갔다.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려던 캐리는 퍼뜩 생각했다. 별채 전화번호를 모르는 것이다. 당황하여 손목시계를 보니 아직 l1시였다. 그는 아직 돌아와 있지 않을 것이었다.
제이미를 혼자 두고 블레어의 별채에 가서 그를 기다려도 좋을까? 확실히 어린이는 자고만 있으면 위험은 없다. <스트로베리>는 요새와도 같다. 밤이 되면 모든 문에 자물쇠가 걸리는 것은 캐리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마음이 조급해서 캐리는 양복으로 갈아입는 것도 슬리퍼를 바꾸어 신는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핏 전화 뒤에 있는 회중전등이 눈에 띄어 그것만을 가지고 나갔다.
어둠 속을 본관에서 블레어의 별채까지 걸어가는 것은 아무래도 으시시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캐리의 현재 심정으로는 꽃나무가 가득한 것도 바삭바삭 나뭇잎이 소리를 내는 것도 그 속에 뭔가 숨어 있는 것 같아 두려웠다. 도중에서 한 번 넘어져서 떨어뜨렸던 회중전등을 필사적으로 찾아내어 캐리는 옷에 묻은 나뭇잎과 진흙을 털어내는 것도 잊은 채 길을 재촉했다.
블레어의 침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베란다 위를 살짝살짝 걸었지만 캐리의 체중으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당황하여 입구로 뛰어 들어가려던 캐리는 주먹을 문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아픈 주먹을 쓰다듬으면서 문을 열었다.
"도대체 뭘 하는 거지?"
흐트러진 나이트가운의 캐리를 블레어가 얼굴을 찡그리고 힐끗 보았다. 그가 집에 돌아와 있는 것에 안심한 캐리였지만 급한 용건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진 바지만 입은 채 상반신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블레어를 본 순간 그만 생각이 멈춰 버리고 말았다.
"레이디 제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할딱거리면서 한 말은 거기서 중단되어 버렸다. 블레어가 돌연 손을 뻗쳐 그녀의 어깨를 잡아 난폭하게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는 안 해도 돼."
블레어가 무시하듯 말했다.
"오해하고 계시군요."
캐리는 화가 나서 말했다. 그런 캐리를 블레어가 미간에 주름을 모으고 보고 있었다.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아아, 드디어 행운의 여신이 날아 들어왔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군."
블레어는 캐리가 왜 화가 나 있는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부탁이에요, 블레어. 내 이야기를 들어봐요!"
캐리가 애원했다.
블레어는 냉소적인 눈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매끈매끈한 캐리의 얼굴을 보았다.
"듣고 있어."
블레어가 내뱉듯이 말했다.
"그럼 부탁이에요, 앉아서 들어줘요."
그렇게 말하고 캐리는 넌지시 커다란 침대에 눈짓을 하였다.
"그렇게 내 앞에 가로막고 서 있으니까 왠지 협박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아 얘기하자고 하자, 블레어가 불쾌한 듯 억지웃음을 지었다.
"정말 이야기하기 위해서 왔다면 떨어져 앉는 쪽이 좋을 것 같군."
블레어는 뒷걸음쳐서 크림색 가죽 커버를 씌운 의자에 앉았다.
캐리는 심호흡을 했다. 그것에 따라 가슴이 아래위로 움직이는 것을 블레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캐리는 얼굴을 붉히면서 에로이즈가 오늘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블레어는 금방 캐리의 이야기에 몰두했다. 이야기 도중에 때때로 말을 참견할 뿐, 그는 계속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녀가 이야기를 끝낼 무렵에는 블레어의 얼굴에 피가 솟구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 말 않고 눈썹을 모은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블레어를 보고, 캐리는 위로가 될 만한 말을 했다.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닌지도…"
"아니, 그럴 리는 없어."
블레어가 난폭하게 말을 가로채었다.
"일찍 나에게 알려 줘서 고맙군."
역시 난폭한 말투였지만 감정을 상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 결혼에 대해서는 전에 당신에게 말했던 적이 있지만, 그때 말하지 않은 것은 데니스의 결혼 전 성(性)이 로슨이라는 거야."
"설마!"
캐리는 앉은 채로 오싹한 채 생각 밖의 사건 전개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필립 로슨과 어떻게 알았는지 캐리는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고, 블레어도 그것을 묻지 않았다.
"로슨은 마음속 깊이 나를 증오하고 있지. 자기 누이동생이 나와 결혼한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이익을 얻었는데도 말이야."
"협박 사기꾼!"
캐리는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필립은 제이미가 블레어의 친아들이 아닌 것을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돈에 대한 문제가 아니지.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데는 굉장히 약삭빠른 놈이야. 데니스와 짜고 오늘날의 그의 지위를 구축했어. 제이미에 대한 비밀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여 나도 이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자기 누이동생의 좋지 못한 행동을 그로서도 공정하게 판단을 할 수 없었겠죠?"
그렇게 말하고 나자 웬일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캐리의 불안을 추격하듯 블레어가 경멸에 찬 대답을 하였다.
"로슨은 무엇을 해도 간단히 끝내는 인간이 아니야. 근본부터 비열한 인간성을 타고났어. 아주 집요해."
눈앞의 여자가 필립과 같은 부류라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캐리의 가슴은 납덩이같이 무거워졌다.
블레어는 캐리의 침울한 모습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어. 로슨이 아무리 비열한 수단을 쓴다 해도 내가 꼭 막아낼 거야. 일이 매듭지어지면 운이 나쁜 녀석은 형무소행이 되겠지."
블레어의 목소리에도, 표정에도 굳은 결의가 보였다.
블레어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옆에 와서 캐리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에 부드럽게 끌어안고는 머리를 쓰다듬다가 머리카락에 붙은 나무 잎사귀를 떼어 주었다. 캐리는 한숨을 쉬며 그의 가슴에 자신의 뺨을 가볍게 비벼 보았다. 블레어의 심장 박동은 몹시 빨랐다.
"일부러 여기에 와주었고 분위기도 정말 좋으니 이대로 당신을 돌려보낼 수야 없지."
블레어가 놀리며 협박해 왔다.
캐리는 당황하여 블레어를 힘껏 밀어냈다.
"제이미를 혼자 있게 할 수는 없어요.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블레어는 그녀를 데려다 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훤칠한 몸매를 한 그의 에스코트를 받자 캐리는 안심했다.
조금 전 뭔가 숨어 있을 것 같아 무서움에 떨면서 지나온 장소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블레어는 제이미의 방까지 따라왔다. 아들이 무사한지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나 보았다. 보송보송한 털을 가진 새로운 친구와 같이 자고 있는 제이미의 잠자는 얼굴을 캐리는 블레어의 옆에 서서 사랑스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슬쩍 블레어의 모습을 훔쳐본 캐리는 그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알겠지?"
블레어가 웃으며 속삭였다. 캐리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흔들자 제이미가 깨지 않도록 하라는 듯이 블레어가 그녀의 귓전에 입술을 갖다댔다.
"나의 아들이 자랑스럽다고는 지금까지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오늘밤은 정말 자랑스럽군."
따뜻한 그의 입김을 목덜미에 느끼자 캐리는 제이미도 강아지도 필립과 그의 누이동생에 관한 일도 모두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블레어는 미칠 듯이 그녀의 입술을 요구해 왔다.
블레어의 키스에 취했던 캐리는 당황했다. 이런 때 이런 장소에서 서로를 탐할 수 없다고 겨우 잠자고 있던 이성이 되살아났다.
블레어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빠른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그 우아하고 빠른 걸음도 또한 캐리를 그의 포로로 만들어 버리는 매력 중의 하나였다.
9
아주 바쁜 하루였다. 어쨌든 준비는 모두 끝난 것 같았다. 색 조명등을 테라스와 해변으로 내려가는 넓은 잔디에 켜 놓고, 4인용 테이블을 스물다섯 개 배치하고, 주름잡은 테이블보를 씌운 위에 생화를 장식하고서 은쟁반과 크리스탈 글라스를 준비해 두었다.
테라스 건너편에는 커다란 원추형 지붕을 꾸며 댄스플로어도 만들어 놓았다. 오케스트라가 그곳에서 악기를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첫 손님이 도착하자마자 음악이 울려 퍼질 것이다. 요리사들도 바쁘게 움직이면서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중심으로 훌륭한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웨이터도 웨이트리스도 하와이 원주민의 민속의상을 입고 식사 대접뿐 아니라 댄스 상대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캐리는 이렇게 눈이 번쩍 뜨일 만한 파티에 참가하고 있는 자신이 믿겨지질 않았다. 자제하려고 노력해도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게다가 블레어도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하루종일 우두커니 있을 이유는 없었지만 본관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캐리는 조금 실망하고 있었다.
빨간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캐리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서 일을 도우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자신의 이브닝드레스가 마치 자기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같이 생각되었다. 뿐만 아니라 레이디 제인이 그녀에게 팔찌까지 선물해 주었다. 빌로드 상자 안에 넣어진 팔찌가 그녀의 화장대 위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진짜 다이아몬드는 아니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캐리에게는 진짜 다이아몬드처럼 여겨졌다. 이렇게 좋은 모조품은 그 나름대로 비쌀 것임에 틀림없어 캐리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파티는 캐리가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여자 손님들은 프랑스제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캐리로선 상점에서조차 본 일이 없는 아주 훌륭한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남자 손님들은 세련된 디너 재킷을 입고 매력 있고 우아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캐리는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블레어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마치 타인과 같이 행동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그는 자리에 있을 때가 없고, 캐리가 그의 모습을 볼 때는 귀여운 만찬의 상대 여성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어젯밤의 태도와는 달리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블레어의 태도에 캐리는 처음으로 당혹감과 절망을 느꼈으며 마음이 아팠다. 캐리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중에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블레어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그녀를 사랑해 주지만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친밀감조차 나타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캐리의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딱 한 번, 파티가 무르익었을 무렵에 블레어가 그녀에게 다가와 댄스를 신청했지만 화가 난 캐리는 차갑게 거절했다. 블레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녀의 팔찌에 힐끔 시선을 보내고 지나가 버렸다.
이와 같은 파티는 경험한 적도 없지만, 파티는 대성공이라고 캐리는 판단했다. 마지막 손님이 돌아간 후 레이디 제인과 캐리, 블레어 셋만이 남았다.
"파티에서 가장 멋있는 부분은 파티가 끝난 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지."
레이디 제인의 만족스러운 말이었다. 그녀도 또한 파티가 대성공이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자, 두 사람 다 함께 앉아서 포도주라도 듭시다."
캐리는 할 수 없이 레이디 제인을 따라 그녀 방으로 향하였지만 뒤에서 블레어가 따라오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레이디 제인은 젊은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기미가 있는 것을 모르는 듯 파티에 대해 안도의 숨을 쉬고는 딱딱한 등걸이 의자에 앉았다.
"오늘밤은 정말 멋있었어, 캐리. 이브닝드레스도 아주 훌륭해요. 다이아몬드 팔찌를 끼고 있어서인지 아주 근사했어요. 이브닝드레스에 꼭 어울려요."
마침 그때, 블레어가 그의 어머니에게 포도주를 건네주어서 레이디 제인은 캐리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레이디 제인이 준 것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더구나 팔찌가 진짜 다이아몬드라니!'
"팔찌는 내가 선물한 거예요, 어머니."
블레어가 조용하게 고백했지만, 캐리는 입을 열지 못했다.
"캐리 덕분에 제이미가 유괴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번에는 레이디 제인이 창백해졌다. 블레어가 캐리가 의혹을 가졌던 덕택에 로슨 남매가 파티의 혼잡을 이용해서 제이미를 유괴하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하자, 레이디 제인도 겨우 납득하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 블레어가 경찰의 협력을 얻어 필립과 그 동생을 현행범으로 체포하려고 한 것을 캐리는 몰랐었다. 두 사람 모두 팜 비취에서 체포되어 이 지방을 떠났다고 한다. 그 일들은 파티 중에 일어났던 것이다. 캐리는 그런 사실을 전혀 예상치도 못했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질문에 블레어가 대답해 주었다. 에로이즈는 데니스에게 유인당하여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감금당해서 움직이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충실한 유모는 자기 자식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내려고 하는 생모를 동정하여 여러 가지 정보를 누설해 버렸다고 한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지금은 정신을 차리고 이층에 있다고 블레어가 안심시켰다.
그 뒤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생각에 빠져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문득 얼굴을 들은 캐리는 블레어가 묘한 눈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시선을 떼지 않고 그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캐리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하는군요."
'아, 이제 드디어 일이 일어나겠구나!'
이런 예감에 휩싸이면서 캐리는 블레어를 응시하였다. 드디어 몇 주일 동안 그녀가 망설이던 것을 고백할 때가 오고야 만 것이다.
"자, 캐리!"
블레어는 재촉했다. 그는 난로를 등지고 서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거지?"
불안한 듯 레이디 제인이 말했다.
바싹 마른 입술을 한 번 핥고 난 캐리는 마음을 다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이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블레어. 당신이 이야기해 주겠어요?"
쉰 목소리가 체념과 괴로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블레어의 눈이 순간적으로 당황의 빛을 띠었다.
"당신만 좋다면…"
갑작스러운 캐리의 말에 어두운 얼굴을 하고 블레어는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 캐리는 내일 <스트로베리>를 나간다고 합니다. 일 주일 전, 비서가 본직이 아니기 때문에 이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그녀의 업적을 봐서 그녀의 희망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블레어는 마지막에 그녀의 희망이라고 말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비로소 캐리는 레이디 제인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험한 표정을 한 아들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캐리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블레어가 말한 것은 사실이에요. 저의 본직은 비서가 아닙니다. 그래도 당신의 친절에는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고,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어요."
형식적인 말을 하는 것이 이때처럼 그녀에게 괴로웠던 적은 없었다.
"허락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흐느끼면서 겨우 말을 마친 캐리는 얼굴을 숙인 채 방을 나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 캐리는 제일 먼저 팔찌를 풀었다. 그리고 이브닝드레스를 벗어서 침대 위에 가만히 펼쳐 놓았다. 그 다음엔 여행에 편한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미 그녀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자신의 옷과 물건들을 두 개의 트렁크와 화장품 케이스에 챙겨 넣었다.
준비를 끝내고 가방을 아래층에 내려다 놓은 캐리는 스탠포드를 찾았다. 그는 루시와 함께 주방에 있었다. 지금 당장 여기를 나갈 거니까 차가 필요하다고 대충 얘기해도 스탠포드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았다.
캐리의 과민한 신경 탓인지도 모르지만 '안녕, 린제이 양'이라고 말한 루시의 작은 눈과 '찻길에서 주의해요'라고 한 스탠포드의 말에 동정의 빛이 어려 있는 것 같았다.
열려진 문을 나와 등 뒤에서 문이 '찰칵' 하고 닫히는 소리를 들었을 때, 캐리는 참지 못할 정도의 고통을 맛보았다. 이것으로 <스트로베리>의 사람들과는 인연이 끊어져 버린 것이었다. 핸들을 꽉 잡은 채 차의 앞 유리창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캐리는 이윽고 시동을 걸고 오션 거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쯤 되어야 마음의 상처에서 해방되어 평온한 일상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될까? 그로부터 1개월이 흘렀는데도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딸을 캐리의 부모는 조심스럽게 주시하고 있었다.
영화관에 이렇게 앉아는 있어도 지나간 <스트로베리>에서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서 캐리를 괴롭혔다. 제이미와 그의 아버지인 블레어를 잊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책망했다. 그러나 캐리의 생각과는 달리 블레어 마티슨이 처음으로 쾌활한 그의 인간성을 보여준 그 파티 날 밤의 한순간 한순간이 영화와도 같이 머릿속에 떠올라왔다.
영화가 끝난 뒤, 텔이 함께 무엇인가 먹자고 했다.
"피자를 먹자!"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한 캐리를 텔은 이상한 듯 보았다. 햄버거는 두 번 다시 먹고 싶지 않았다.
주문한 것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캐리는 영화에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고 그에게 고백했다.
"당분간 내가 권한 일을 하면 어떨까?"
텔은 일어나면서 말했다. 텔의 집은 <호마 매일 뉴스> 사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호마뿐만이 아니라 가까운 이웃 마을과 그 주변의 시골까지 점유하여 꽤 많은 발행 부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지금 가장 괜찮은 방법이 이것이 아닐까, 캐리의 마음이 동요되기 시작했다. 마음의 상처가 낫는 데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지만… 지금까지의 캐리의 인생에 있어 이렇게까지 비참한 기분이 되었던 적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떠봐도 어떠한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 어떠한 기대감도 없었다. 그러나 계속 부모님에게 얹혀서 살 수만은 없었고, 더구나 이대로 지루하게 생활을 하다가 혹시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강박관념에도 쫓기고 있었다.
"내일이나 모레까지 확실한 대답을 할게."
캐리는 약속했다. 그가 제안한 업무를 받아들인다 해도 임시의 업무로 생각할 작정이었다. 고향에 이대로 정착할 마음은 없었다.
"비록 2, 3개월이라도 우리 회사에 근무하면 조금이라도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될 거야. 신문을 위해서도 잘된 일이지. 그리고 캐리…"
그의 갈색 눈이 캐리의 우울한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너무 심각하게 의리를 지킬 필요는 없어."
일부러 그런 것까지 말해 주는 텔이 캐리는 무척이나 고마웠다.
'고교시절의 우정이 아직까지 변하지 않았구나.'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주문 번호가 호명되자 텔은 카운터에 가서 피자와 맥주를 쟁반에 담아 가지고 왔다.
캐리는 멍하니 오늘 아침에 받은 전화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떠한 경로를 거쳐 전 미국 네트워크의 텔레비전 방송국이 자신이 팜 비취의 사교계 정보를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짚히는 사람이라곤 스탠 커티스와 필립 로슨이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원래 뉴올리언즈의 지방 TV의 특집 프로를 위한 취재였지만 정보를 제공할 마음은 전혀 없다고 캐리는 그 전화에 굳게 잘라 말했다. 사진은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때까지 전화 속의 남자는 끈질기게 부탁했다.
사실 사진은 한 장도 갖고 있지 않았다. 긴 편지와 함께 사진을 모두 레이디 제인에게 보내 버렸던 것이다. 편지에 캐리는 자신의 기만에 찬 행동과 뒤에 자신의 태도가 어떻게 변했는가의 경과, 그리고 끝에는 죄악감과 후회스런 마음으로 고통받았다는 것 등을 모두 적어 놓았다. 또 레이디 제인의 호의와 다른 인생을 내면으로 본 것으로 캐리의 인생을 풍족하게 해준 것에도 감사를 덧붙였다. 또한 레이디 제인이 자신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지 말았으면 하는 한 가지 소망을 갖고 있으며, <스트로베리>에서의 경험을 공개할 마음은 전혀 없다고 편지를 마쳤다.
텔과 취직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일 주일 후, 캐리는 <호마 매일 뉴스> 빌딩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하루종일 일하여 피곤에 지쳤지만 옛날의 자신을 되찾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하여튼 가능한 한 바쁘게 보내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언제까지 끙끙 앓고 있을 수만도 없는 것이었다.
2, 3분 후, 캐리가 집 앞 차도에 차를 세우려 했을 때 렌터카가 한 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고 손님이 온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므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들어가자 안쪽 방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캐리? 캐리 왔니?"
2층 자기 방으로 조용히 올라가려고 한 캐리에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정란 담당 기자, 지금 막 귀환…"
이라고 익살을 섞어 말을 하던 캐리는 그대로 멈춰 서 버리고 말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마티슨이 소파에 앉아 부모님과 뭔가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캐리는 움직이지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단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앉아요, 캐리."
어머니가 말했다.
"이분 어머니의 리포트가 스미소니언 연구소에서 칭찬을 받았다는 얘기를 지금 막 하고 있는 참이란다."
"사진을 특히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어요."
블레어가 덧붙이며 캐리의 얼굴을 보았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을 느낀 캐리는 그제서야 겨우 입을 열어 평상시와는 어딘가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리포트 일을 알려 줘서 기뻐요. 레이디 제인도, 제이미도 잘 지내는지?"
말과는 달리 그녀의 눈은 다른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어째서 당신은 이곳에 온 것인가? 대체 부모님께 무엇을 얘기했는가?'
캐리는 이미 부모님께 팜 비취에서 일어난 일 모두를 얘기했었다. 물론 죄책감에 지쳐서 돌아온 진짜 이유는 여기에 이렇게 마치 호마의 주인인 양 잠시 들른 것같이 유유자적하고 있는 이 남자 때문인데…
5분 정도 이야기한 후, 아버지 봅 린제이는 밭에 물을 주어야만 한다고, 어머니는 내일 아침까지 완성해야 할 원고가 있다는 이유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이제서야 캐리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여기 오셨어요?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어떻게 아셨지요? 부모님 앞에선 이런 말 할 수 없지만, 레이디 제인이나 제이미에게 혹시 나쁜 일이라도?"
다그치듯이 질문하는 캐리를 블레어의 파란 눈이 그리움을 담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캐리의 가슴의 고동이 높아져 갔다.
"한 가지씩 물어주면 좋겠는데. 우선 이쪽으로 와서."
블레어는 그의 옆자리의 쿠션을 가볍게 두드렸다.
캐리는 그의 말에 따랐다. 그의 옆에 가면 자신이 어떻게 되는가는 알고 있지만 그의 곁으로 가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소파 등에 팔을 올리고 옆을 향한 채 앉아 있었다.
캐리는 그의 옆에 앉아 정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그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에 지고 말았다. 블레어를 바라보는 캐리의 다갈색의 눈은 그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블레어의 눈도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바라보았다.
"블레어, 왜 여기에 왔죠?"
흥분한 탓으로 허스키한 캐리의 목소리였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 우리들 서로의 오해를 풀고 싶은 것이 가장 큰 목적이고… 참, 우선 질문에 대답하지. 당신을 찾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어. 내가 캐리의 주소를 모른다 해도 뉴올리언즈 TV 방송국 상사에게 물어보면 끝나는 일이니까."
그의 마지막 말에 캐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내가 한 일의 전부는 모르세요."
절망적인 기분으로 캐리는 주먹으로 무릎을 쳤다.
"부모님을 만나서 그것을 알았지."
블레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하는 딸에게 사람을 속이는 것을 가르칠 분들이 아닌 것 같았어."
"처음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어요."
가엾으리만큼 떨리는 목소리였다.
"스탠 커티스와 필립 로슨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 다른 나라에라도 가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몇 세대나 걸쳐 흥청망청하고 살아온 레이디 제인과 같은 부자를 이번에는 이쪽에서 이용한다고 자신에게 합리화시키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고…"
그 위엄에 찬 노부인과 사랑에 굶주린 소년을 차츰 좋아하게 된 자신을 생각해 내고 캐리의 목소리는 점점 꺼져 들어갔다. 속이려고 한 상대방이 부와 명성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 그녀와 접하려 했을 때부터 그녀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왜 마음이 변했지?"
블레어가 아픈 곳을 찔러왔다.
순간적으로 캐리는 블레어와 떨어져 앉는 편이 좋을 거라고 판단하여 소파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마치 그녀 마음속을 알아챈 듯 블레어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왜 특집 프로 방송을 만들지 않았지? 정보도 충분히 수집되어 있고, 게다가 사진도 있을 텐데."
캐리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에게 모두 이야기를 하여 자신의 프라이드를 지킬 수밖에 없다고 캐리는 생각했다.
"그것만은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서로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나서부터 레이디 제인은 정말 친절한 태도로 나를 대해 주셨습니다. 그런 그녀의 사생활을 폭로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었어요. 배반자가 되어 버리는 기분이 들었어요. 레이디 제인에게 이 말을 꼭 전해 주세요."
호소하는 눈으로 블레어를 보던 캐리는 그의 손가락이 캐리의 손을 세게 쥐는 바람에 움찔했다.
"직접 이야기하면 어떨까? 어머니는 캐리가 <스트로베리>에 돌아오길 바라고 계시는걸."
"저런! 그렇게는 할 수 없어요."
캐리는 되도록이면 그의 곁에서 멀어지려고 했지만 손목을 꽉 붙잡혀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 안 되지? 캐리, 당신이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 쓴 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어머니와의 일도 <스트로베리>에서의 생활도 즐거웠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왜 돌아갈 수 없지? 당신 부모님도 신문사의 일은 임시라고 그렇게 내게 말씀하시던데."
고개를 숙인 채로 캐리는 블레어의 시선을 느꼈다.
'팜 비취에 돌아가면 당신이 내 곁에 있고, 또 나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 돼요. 사실은 당신과 영원히 계속되는 사랑을 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것은 무리한 일…'
"왜 돌아갈 수 없지, 캐리?"
매달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 무엇이든 다 알고 있는 듯한…
"나, 당신을 사랑해요."
캐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토라진 듯한 그녀의 다갈색 눈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블레어는 머리를 젖혀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돌연 그녀를 꽉 껴안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그는 계속 웃고 있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귀여운 사기꾼. 이제 당신이 없는 인생은 생각조차 할 수 없어."
블레어의 낮고 굵은 사랑의 고백에 캐리는 행복의 정점에 도달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겨우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캐리는 아직도 블레어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저, 블레어, 그날 밤 헤어지고… 제이미를 영화관에 데리고 갔던 밤 일인데, 왜…"
블레어는 소파에 앉았지만 그녀를 껴안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쭉 사랑하고 있었지. 하지만…"
블레어는 그렇게 말하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당신이 사기꾼이라는 것, 리포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상처입힐 수는 없었어."
"처음부터 나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요?"
블레어는 웃음도 없이 수긍했다.
"내 별채에서 처음 당신을 발견했을 때, 무언가를 알아차렸지. 내 육감이 아니더라도 당신에 대해 조사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었어. 우리 같은 입장의 사람은 주의력이 깊기 때문이야. 그런데 또 이번에는 당신이 제이미에게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어. 그것이 조금…"
캐리의 상냥한 눈이 빛났다.
"어린이 유괴의 한 패가 아닌가 해서?"
"당신도 아다시피 그런 위험은 항상 있지. 그래서 특별히 우리가 고용하고 있는 탐정도 있는걸. 당신의 자동차 면허증으로 당신이 왜 팜 비취에 왔는지 금방 알 수 있었어. 처음에는 아주 크게 분노를 느꼈고 꽤 당황했었지만, 당신은 어떻게 봐도 그런 일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어. 그리고 제이미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진지하게 대해 주었어. 당신이 권해 준 일을 하고 나서부터 어머니는 확실히 달라지셨어."
"왜 어머니에게 나에 대한 것을 말하지 않았죠?"
블레어는 웃으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고 내 손으로 처리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지. 자기미화 의식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지만, 또한 당신에게 일생 동안 잊을 수 없는 비참함을 만들어 주려고 결심했었고. 그러나 계획은 예상 밖의 결과로 되어 버렸어. 한 여자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민하고 흥분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어느 사이엔가 내가 당신에게 반해 버리게 되었단 말야."
캐리는 <스트로베리>의 마지막 밤을 생각해 냈다.
"파티가 있던 날 밤, 왜 나를 무시했지요? 그리고 그 뒤 레이디 제인의 면전에서도…"
그는 잡고 있던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나의 당신에 대한 기분은 확실하지만 당신의 생각을 확실히 파악할 수가 없었어. 파티하는 동안은 다른 일에 마음이 쏠려서, 제이미의 유괴를 미연에 방지하려고. 그때 비로소 제이미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알았어."
그의 말을 듣고 캐리는 제이미를 위해 정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블레어의 다음 말이 흐려졌다.
"내가 당신에게서 잠시 멀어졌던 것은 당신이 솔직하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는 게 어려우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야. 내가 옆에 있으면 당신을 강제로 고백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나와 나의 어머니에게도 당신이 스스로 고백해 주길 바라고 있었지."
캐리가 지금에야 비로소 듣게 되는 그의 마음을 블레어는 찬찬히 말해 나갔다.
"파티가 끝난 뒤, 레이디 제인에게 내가 뭔가 할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당신이 말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용기가 없었어요. 아, 블레어…"
캐리는 후회가 가득찬 눈으로 블레어를 올려다보았다. 애정이 넘치는 블레어의 눈을 보았을 때, 또 그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사실 캐리에게는 다른 의문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왜 저에게 팔찌를 주셨죠? 그것이 진짜 다이아몬드인지는 몰랐었어요."
"당신에게 어머니가 파티용 드레스를 사준 것과 같은 이유지."
뭔가 반론하려는 캐리의 입술을 보고 블레어는 애정이 어린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완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어머니의 선물인 줄 아는 것이 당신에게 부담이 덜 된다고 생각했었고."
"그래도 왜?"
캐리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파티에서 당신의 기분이 언짢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물론 당신에게 멋진 선물을 하고 싶기도 했고. 이렇게 아름다운, 내가 사랑하는 당신에게!"
블레어의 눈이 정열과 사랑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캐리는 깊은 감동에 싸였다.
"그래도 위험한 내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 비싼 드레스와 팔찌도 내가 뉴올리언즈에 가지고 돌아오려고 했다면 그럴 수도 있었어요. 그리고 전에 다니던 직장에 복귀하는 것도…"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 캐리, 이것으로 모든 사실을 알겠지?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고 재산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어. 그래서 당신이 팜 비취에서 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었어. 그런데 왜…"
끝까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전 미국 네트워크의 TV 방송국에서의 교섭이 누구의 지시인지, 캐리는 그제야 납득이 갔다. 집요하게 그녀의 마음을 시험했던 것은 그의 비참했던 결혼 탓일 거라고 캐리는 이해했다.
"어젯밤 팜 비취에 돌아가 당신의 편지와 사진, 슬라이드를 전부 보았지. 그때 내 기분을 당신은 알 수 없을 거야. 그 순간부터 당신이 나의 기대에 응해 준 기쁨 속에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듯이 당신도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지."
"블레어,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블레어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당신의 부모는 실망하지 않을까… 내가 성대한 식을 올려 당신과 금방 결혼하는 것을 아신다면… 그래, 내일이라도…"
"아빠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셔서 나를 놀리곤 했어요. 얘, 네가 결혼하면 너의 침실 밖으로 비상계단을 만들어 놓을 거야. 그렇게 하면 식의 비용도 적어질 테니."
아버지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캐리를 블레어는 사랑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즐거운 대화가 끝나고 블레어는 그의 손으로 캐리의 얼굴을 사랑스러운 듯이 쓰다듬었다.
애정을 담고 살짝 웃는 블레어에게 캐리는 정다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어떻든 이제 나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