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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미로(The Maze of Love)

사랑의 미로(The Maze of Love)

Elizabeth Oldfild

 

1

"소호 말이에요"

알렉시스는 나지막이 말했다. 교통순경은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어디로 숨어버리기라도 할 듯이 당황한 빛을 띤 것을 보고는 껄껄 웃었다.

"이봐요. 난 왠지 당신이 지금 찾아가려고 하는 그 도깨비 소굴 같은 곳에서 혹시 무슨 봉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염려스럽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알렉시스에게서 넘겨받은 신문쪽지를 다시 훑어보았다.

"-좋은 대우, 파트타임 제임. 카운터를 구함- 이라! 그래 당신은 거기가 스트립쇼나 벌이는 무허가 술집일 것 같지는 않소?"

"그렇진 않을 거예요. 내 생각엔 메어페어(런던의 상류층 주택가)의 은퇴한 장교들의 클럽이 아닌가 싶은데요. 나이 지긋한 예비역 장성들이 편한 의자에 걸터앉아 포도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타임지를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한 걸요."

"값싼 블론드가발의 여자들이나 간들거리며 왔다 갔다 하는 곳일 텐데?"

교통순경은 끝이 뾰족한 까만색의 모자를 이마 위로 치켜 올리며, 알렉시스의 용모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듯 흘러내려 미풍에 살랑거리는 그 부드러운 금발은 결코 염색약 덕분은 아니었다. 더욱이 머리결의 윤기와 웃을 때 옴폭 패이는 귀염성 있는 보조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으시대거나 경망스러운 타입이 아니었다.

알렉시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될까.. 6시면 면접이 끝나는데 20분밖에 시간이 남질 않았네.."

"가능할 거요. 세 번째 건널목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시오."

교통순경이 갈길을 일러 줄 때 그녀는 혀끝을 살짝 문채 주의 깊게 새겨들었다.

"몸조심하시오. 소호엔 별난 사람이 하도 많아서.."

"그러지요. 한데 소호에는 지역 정화 같은 게 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는 알렉시스가 마치 초등학교 학생과도 같은 말을 한다고 여겼는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늘 협의를 계속 한다지만 문도 안 여는 집에 노크만 해대는 격이지 뭐겠소. 한때는 새로운 법령 때문에 퇴폐업소들이 된서리를 맞은 적도 있기는 하지만 업주들이 어찌나 교활한지 어떻게든 당국을 속여 넘겨 계속 유지가 된다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선 오물을 마구 버려서 경고도 수차례 했으나 역시 소용이 없었소. 그런데 당신처럼 정숙해 보이는 아가씨가 그런 데를 찾아가다니! 모르긴 몰라도 금세 도로 나오고 싶어질 겁니다."

알렉시스가 실망하는 빛을 보이자 그는 자기가 너무 지나쳤나 싶었던지 곧 덧붙였다.

"하지만 거기에도 정직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들은 있다오."

"여러 가지로 고맙습니다."

알렉시스는 신문쪽지를 되돌려 받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걸음을 옮겼다. 무심결에 소호를 향하고 있었으나 마음 한켠으로는 그곳에 가지 않는 게 옳을 듯싶기도 했다.

'메이페어'같은 곳이라면 모를까 행실 나쁜 변태자나 유흥가 여성들 아니면 술주정꾼들이 우글거릴 거라고 생각하면 씁쓸했다. 솔직히 그런 곳에 직장을 갖고 싶지는 않았다. 광고만 믿고서 너무 즉흥적인 결심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늘 석간신문의 구직란을 들여다보면서 망설이기만 해왔다. 그러다가 오늘 광고를 본 순간 며칠 전부터 잔뜩 화가 나 계시는 어머니가 가게에서 돌아오시기 전에 나오려는 생각으로 빅토리아를 이모에게 맡기고는 부랴부랴 집을 나섰던 것이다.

그녀는 체크무늬셔츠에 이제는 유행이 지난 흰 바탕에 푸른 세로줄무늬의 투피스를 입고 굽높은 구두를 어울리게 신은 차림이었다.

한참을 걷자 발뒤꿈치가 몹시 아팠다. 거의 새 구두였기 때문에 살갗이 벗겨진 모양이었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이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볼 생각으로 알렉시스는 복작거리는 거리를 성큼성큼 걸어 빠져나갔다. 활동적인 움직임으로 도시 자체가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에 빠질 지경이었다.

상점사람들, 관광객, 퇴근하는 사무실의 직원들 모두 한결같이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군상이었다. 알렉시스는 마치 럭비선수가 터치라인을 따라가며 결사적으로 상대를 마크하듯이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런던의 한여름은 관광철이어서 시내는 관광객으로 들끓게 된다. 흰옷을 둘둘 말아 입은 아랍인이나 짐이 잔뜩 담긴 쇼핑백을 둘러멘 일본인들의 행렬... 알렉시스는 이 외국인들은 아마도 자기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으려니 생각하면서 그들을 급히 지나치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일 년 남짓 살고 있는 [세인트존스우드]는 이런 혼잡한 도시에서 좀 떨어진 시 외곽으로 아직 문명에 덜 찌들은 곳이었다. 그녀가 시내로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서 옷을 산다거나 어쩌다 닐이 그 지루하기 짝이 없는 콘서트에 데리고 갈 때뿐이었다.

!

갑자기 발뒤꿈치가 찢어질 듯 아팠다.

알렉시스가 친정에 와 있는 동안 닐은 줄곧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녀는 그러한 그가 매우 못마땅했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어 그냥 내버려 두었다.

거리의 간판으로 보아 호소에 도착했음을 금세 느낄 수 있었다. 그곳은 알렉시스가 늘 호기심을 가져왔던 외국인촌으로 미로처럼 꼬불꼬불한 좁은 길 양쪽에 낡아빠진 선술집이며 다양한 비디오테이프를 즐비하게 진열해 놓은 상점 고상한 레스토랑 싸구려 와인을 파는 바들이 빽빽이 서 있었다. 그밖에도 저질 포르노영화를 상영하는 소극장과 더러운 책방들과 정육점이 빵집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곳을 근거지로 하고 있는 쇼비지니스 계의 스타들 중에는 엄청나게 돈이 먹히는 브라스밴드의 뒤를 밀어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형편없는 지하식당에서 싸구려 음식을 나르는 축도 있었다.

소호는 정말 여러 가지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거리였다. 이미 일 세기 전부터 이 지역은 지방인들에게 매력적인 장소로 통해왔다. 각국의 사람들을 볼 수 있으며 언어 또한 다양했다. 노변에선 아시아인이 프랑스인과 부딪히고 또 그 프랑스인은 말타인과 그 말타인은 다시 스페인 사람과 맞부딪친다. 이러한 인종적 혼잡은 언제 위태로운 민족에 사로잡혀 깨끗해 보이는 하얀 이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관광객으로부터 돈을 뜯어내려고 진을 치고 있는 속되고 얄팍한 심리는 또 얼마나 딱하리만치 한심스러운지.....

레게뮤직이 레코드가게를 폭발시킬 듯한 굉음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이곳이 한때는 불확실성의 세태를 상징한다고 지칭되었으나 이제는 점차 보잘것없이 변해버려 값싼 기성복이 널려 있는 쇼윈도우 따위가 손님을 기다리는 곳이 되고 말았다. 다량으로 생산된 기념품들의 그 얄팍한 상혼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이를테면 [아이러브 런던]이라고 새겨진 티셔츠와 유니언 잭(영국 국기) 무늬로 도안된 앞치마, 그리고 난잡한 문구의 스티커가 부착된 종이그릇들이 그것이다.

알렉시스의 눈길은 고급 장난감가게로 쏠렸다. 그리고 한두 군데의 인스턴트 음식 판매소 거기엔 속임수까지는 없었다. 그녀는 좀 기분이 나아졌다. 이제는 지저분한 거리에서 조금은 벗어난 셈이다. '올라이트 카바레'라는 간판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좀 전보다 상당히 수준이 나은 거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즉 담배수입상이라든가 통조림가게 레코드점 번쩍거리는 그릇들을 늘어놓은 가게며 깨끗한 아이스크림 집들.. 이런 것엔 흠잡을 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누드와 만날 수 있는 곳'이란 속된 포스터엔 그래도 신사적인 것과 환각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재미있는 곳이었다.

만일 건축기사가 소호를 표현한다면 아마 한 마디로 난장판이라고 말해버릴 것이다. 바로크식 탑 위의 고풍스런 테라스가 있는가하면 그 옆에는 실용주의를 내세우는 현대식 건물과 거기에 붙어 쓰러져가는 조그만 가게, 그리고 그 길 건너에는 고딕식 건물이 한껏 치장을 하고 서 있었다.

갖가지 여름 꽃들은 진열장 안에서 그 현란함을 뽐내었고 천박하게 채색된 상점 주위로 황금빛 태양이 폭포처럼 부서져 내렸다. 이 모든 것이 삶의 아름다운 자취들인 것이다.

이토록 진한 여름의 정취를 맛보면서 알렉시스는 스스로 마음을 다졌다. '내 나이 스물여덟. 이렇게 바이올렛처럼 마냥 움츠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곳에서 자리 잡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 가도 결국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직하고 성실하면 되는 것이지 주변 환경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오로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터였으므로 다른 것은 더 이상 생각지 않기로 하였다.

라이브쇼가 열린다는 술집 앞을 지날 때 손님을 마구잡이로 끌어들이려는 바람잡이와 눈길이 마주치자 알렉시스는 나오던 딸국질마저 멈추어 버렸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당신을 천국으로 인도.." 심술 맞게 웃으며 외쳐대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점차 어두운 소호의 밑바닥을 실감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배어나오는 끈끈함에 몸서리를 쳤다. 어둡기 전에는 다른 냄새 다른 자유스러움이 넘친다고만 여겼는데 점차 그 마각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었다. 밤을 빛내 주는 저 네온사인들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암시해 주는 것 같았고 그런 생각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이곳을 제대로 지나갈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알렉시스는 스스로에게 어떤 확신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일은 단지 일일 뿐이다. 그동안 여기저기 파트타임제 일자리를 찾아다녀 보았으나 모두 헛수고였고, 특히 오후시간의 일에는 응모자가 더더욱 많아 뽑힐 확률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빅토리아가 내년에 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그 애를 돌보아 주어야 하고 어머니의 마음에까지 맞추다 보면 적당한 자리는 전무한 셈이었다.

 

문득 '카지노 베네치아'라는 금속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 뒤의 소 간판은 이곳이 은밀한 클럽과 레스토랑과 바아 그리고 여러 종류의 기계가 구비된 게임 룸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샘플로 진열된 메뉴들은 이태리어로 적혀 있었고 사업자명은 '지아콜팰리'로 되어 있었다.

알렉시스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는 정말 소호에서 일할 태세가 되어 있는 걸까? 건물은 꽤 괜찮아 보였다. 잘 자란 침엽수화분이 참나무문짝 옆에 줄지어 있었고, 금속판에 새겨진 간판은 광이 나도록 잘 닦여진 상태였다.

'카지노 베네치아'는 주변의 요란스런 이웃들과는 다소 떨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성격까지 달리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알렉시스는 용기를 내어 사자머리형으로 만들어진 손잡이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대답이 있기를 기다리며 자신의 금발을 뒤로 젖혔다. 구두는 여전히 발뒤꿈치와 발가락까지 못살게 굴고 있었다. 푸른 끈이 교차되는 지점은 유난히 아파서 얼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다려도 응답이 없자 다시 노크를 해 보았지만 바깥의 시끄러운 소음대문인지 그 육중한 문 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녀가 문을 살그머니 밀어 보았다. 삐걱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는 바람에 그녀는 몸을 욺찔했다. 그리고는 눈을 깜빡거리며 안쪽을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애를 썼다.

털이 긴 베이지색 카펫이 깔린 홀이 막바로 눈앞에 들어왔다. 옆쪽으로는 카운터 박스가 놓여있었으며 그에 딸린 탈의실 청소용구실과 몇 개의 잠겨진 문이 보였다. 베니스 카나레토 지방의 풍경을 담은 희끄므레한 벽은 매우 이색적인 장식이 아닐 수 없었다. 고급스레 다듬어진 고풍스런 테이블 주위에는 금박장식이 의자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세련된 실내장식을 보며 그녀는 일단 마음을 놓았다. 크리스탈로 세공된 샹들리에와 제라늄화분들이 로벨리아덩굴과 함께 천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천박한 바걸들이나 저질영화관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알렉시스는 문을 닫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실례합니다."조그만 소리밖에 나오지 ㅇ낳ㅇ자 그녀는 다시금 목청을 가다듬고 큰소리로 되풀이해 보았다. 그러나 공기정화기의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침묵을 깨고 들려올 뿐이었다. 알렉시스는 한참을 망설이고 서 있다가 홀 건너편에 카지노를 알리는 화살표가 층계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그 앞으로 다가갔으나 아래쪽이 너무 어두워서 잘 살펴볼 수가 없었다. 정말 자기가 제시간에 잘 대어온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여기서 뭘하는 거요?"

짜증스러운 듯한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알렉시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 자신의 코앞에 남자의 육중한 가슴팍이 들이 밀여진 순간, 그녀는 심장이 멈추어 버리는 것 같았다.

어둠속에서 마주친 남자의 형상은 무시무시한 도깨비를 연상케 했다. 그녀는 놀라움에 침을 꼴깍 삼켰다.

"여기에 아무도 없는 줄로 알았는데..."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조그만 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렇소?"

차가운 회색 눈동자가 뚫어지게 이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반사적으로 사과의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런 것조차 차근차근 들어 줄 타입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큰 키에 넓은 어깨의 소유자인 남자는 빛바랜 청바지차림에 독특한 가슴장식이 주렁주렁 붙은 까만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근육질이 한껏 드러나 있는 팔뚝이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해 보였으며 닳아빠진 운동화는 그의 생활이 어떠한지를 말해 주는 듯했다.

"당신은 무단 침입한 거요!" 그가 하는 말은 도전적이며 동시에 모욕적이었다. 알렉시스는 사과를 하든 항의를 하든 그 대답을 독촉하려는 모양이었다.

"난 카운터로 일할 사람을 구한단는 광고를 보고 왔어요." 알렉시스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문은 열려 있었어요. 그리고.."

"열려 있었소. 아니면 잠겨 있지 않은 거요?" 그는 시비를 걸 듯 턱을 쳐들고 따져 물었다. 그녀는 그의 이같은 태도에 문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렇게 불손한 남자가 이런 고상한 분위기에 어울려 있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그가 몸을 움직였을 때 알렉시스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작은 물체를 얼핏 발견하였다. 유행이 지난 스타일의 긴 갈색 머리가 그것을 반쯤 덮고 있었다. 귀걸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실소를 머금치 않을 수 없었다. 그따위 귀걸이는 빈민굴까지 안가더라도 불량배나 건달들 아니면 게이들이 달고 다니는 걸로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공격형의 남자가 게이조합의 일원이라는 증거는 아직 없었다.

"잠겨 있지 않았어요." 그녀는 거리낌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당신은 노크가 기본적인 예의라는 것도 모르오?"

"난 노크했어요."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야릇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요? 어쨌든 당신은 너무 늦게 왔소. 면접은 이미 끝났으니까."

"끝났다고요?" 알렉시스는 희미한 빛 아래서 시간을 확인하려고 애썼다.

"아직 6시가 안되었는데..."

회색 눈동자가 총잡이의 눈매같이 번뜩였다.

"끝났소!" 남자는 더 이상 얘기할 것 같다는 투로 잘라 말했다.

절대로 이 부랑자 같은 자가 주인 지아코펠리일 리는 없다. 그의 탁한 목소리엔 전혀 이태리적인 느낌이 없었고 더욱이 청동 빛으로 윤기 나는 머리가 그 증거를 더해 주고 있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현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가시오"

"이건 정말 부당해요!" 그녀는 지지 않고 맞섰다.

"나가요. 더 이상 잔말 말고!"

그가 자신 쪽으로 몸을 움직이자 알렉시스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그만 뾰족한 구두굽이 카펫의 복슬복슬한 털에 휘감겨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바로 뒤가 제단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구두를 이리저리 비틀어 빼려 애를 써보았지만 서두를수록 더욱 엉킬 뿐이었다. 급한 마음에 힘껏 잡아 빼는 순간 구두끈이 끊어져 발만 빠져나오는 통에 그녀는 중심을 잃고 뒤뚱거렸다. 계속 한 발로 뜀을 뛰며 맨 윗 계단으로 올라서려 안간힘을 썼으나, 다시금 중심이 흔들리자 그녀는 허공으로 손을 내밀어 허우적거렸다.

"조심해요!"

그가 달려와서 양팔을 붙잡아 세워주었다.

"취했소?"

뜻밖에도 알렉시스는 이 순간이 몹시 우습게 느껴졌다. 올려다보니 스핑크스같이 생긴 남자가 자신을 그대로 붙잡고 있었다.

"넘어지지 않아 다행이오." 그는 그녀를 계단 밑으로 부축해 내려 주었다.

"난 취하지 않았어요. 자세히 확인해 보세요." 그러나 자신의 구두를 내려다보는 순간 그녀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 가닥의 가는 줄이 모두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신고 걸어 보니 잘하면 조심스럽게 걸을 수는 있겠지만 몹시 불편하게 되어버렸다.

"어서 가시오." 다시 문 쪽을 가리키며 그가 명령했다. 순간 알렉시스는 화가 치밀어 그를 노려보았다. 이 남자는 동정심도 없는 걸까?

"광고에는 분명 면접시간이 5시에서 6시 사이로 되어 있었어요. 여기까지 일부러 먼 길을 왔는데.... 무엇보다 책임자 되는 사람을 만나보는 게 낫겠군요."

그녀는 운동용 조끼에 청바지차림인 이 남자가 면접장소로 안내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자기가 붙잡고 있는 여자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먼 곳에서 왔소?" 그가 물었다.

"세인트 존스우드요."

"원 저런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오셨군 그래!" 그가 빈정거렸다.

"신분증을 확인해 보겠어요?"

그의 야유에 맞서려는 듯 그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미안하오." 이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남자의 입술에 살짝 경련이 일었다.

"일단은 침입자니까 확인해 볼 필요는 있겠지."

"이젠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데요!" 그녀는 계단 쪽으로 몸을 돌리며 내뱉듯이 말했다.

"가려는 거요?" 그의 표정은 그녀가 떠난다는 것에 대한 만족스러움을 애써 감추려는 듯 보였다. 알렉시스는 잠깐 망설이다가 자기가 그를 즐겁게 해 줄 필요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책임자를 만나봐야겠어요!" 얼굴을 바짝 쳐들고 그녀가 말했다.

"책임자를 만나봐야겠다고? 이봐요 당신은 지금 바로 그 책임자와 만나고 있는 걸 모르오?"

"믿을 수 없어요." 알렉시스는 조소하는 표정으로 금 귀걸이를 노려보았다.

"난 당신의 상사와 만나 얘길 해야겠어요."

"내 상사?"

"내가 모르는 줄 아세요? 당신은 이곳의 책임자가 아니라고요."

남자는 팔짱을 끼고 여유 있게 말했다.

"광고에 난 이름을 보고 하는 소리 같은데 그건 당신 같은 여자들을 위해 적어놓은 거라오."

"나 같은 여자라니요?"

"여자가 약하지 않다는 걸 보이려 애쓰는 골치 아픈 존재들 말이오."

"오오라!"

"좀 더 자세히 설명해드릴까?"

흐릿한 불빛아래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뭔가 심한 소리라도 해댈 것처럼 강경해 보였다.

"다른 말 더 듣고 싶지 않아요. 내 말을 제대로 들어줄 사람과 얘기를 하겠어요. 당신하고는 안 해요."

"점심으로 뭘 들었소? 면도칼 같은 거라도 먹었소?" 그가 천천히 말했다. 억양으로 보아 웨일즈인임이 분명했다. 그때 열린 문으로 호리호리한 젊은이의 실루엣이 훌쩍 홀 안으로 들어섰다.

"어이 라이스! 웬일인가?"

그쪽에서 먼저 말을 건네었다. 이 무지막지한 웨일즈인의 이름이 라이스였구나.

"으응... 디노.."

알렉시스는 이 올리브 색 피부를 지닌 방금 도착한 사나이가 이태리계인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적어도 주인이 아니면 그와 연관이라도 있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깔끔하게 검정색 옷을 차려입은 젊은이는 웬만큼 교양도 있어 보였다.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는 귀 뒤로 단정하게 빗겨졌고 태도 역시 부드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단정하게 접힌 우산이며 고급가죽으로 된 서류가방 이런 것들이 모두 그의 신분이 꽤 높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디노에게 한껏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난 여기서 카운터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왔는데요."

"아 그러세요?" 디노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지아코펠리씨가 내 아버님이십니다. 불을 켜는 게 좋겠군요."

그가 두 걸음쯤 가서 스위치를 올리자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찬란한 빛을 발하였다.

"아주 근사하오." 디노는 남자가 여자를 음미하는 그런 부드러운 눈길로 알렉시스를 훑어보았다. 웨일즈인 라이스처럼 불손한 태도는 아니었다.

"결원은 이미 메꾸어졌소." 라이스가 디노의 어깨너머에서 말했다. 그녀가 항의를 할 듯 눈을 크게 뜨자 그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내가 알기로는 말이오." 아까보다는 좀 누그러진 투였지만 말의 내용은 여전히 같았다. 그녀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가 그토록 그녀를 내모는 게 혈안이 되어 있던 까닭이 결코 주인이나 그의 아들의 지시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제멋대로 한 것이다.

밝은 데서 본 웨일즈인은 생각보다 험상궂은 인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이도 한창 때는 좀 지나 보였다. 코의 중간쯤이 납작해져 있는 것을 보면 한 번 코뼈가 부러졌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알렉시스는 그러한 것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 상처는 주먹싸움 덕분일 테니까. 상식이하의 짓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하듯이 그 호전성에 대한 대가도 마찬가지로 지불했어야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귀 역시도 온전치가 못했다. 조금 전까지는 긴 머리카락에 가리워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보니 귀도 엉망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친 듯이 날뛰는 용무늬의 저속한 문신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만하면 보지 않고도 그의 생활이 어떨지 능히 짐작이 갔다.

디노는 자꾸만 비시시 미소를 흘렸다.

"내가 장담하지요. 아버님은 이렇게 멋진 여자 분이 우리가게에서 일하게 된다면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아버진 특히 다갈색 도는 금발의 아가씨에게 약하시거든요. 나 역시 그렇고요. 사람은 누구나 생긴 대로 값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알렉시스는 눈을 돌려 웨일즈인이 이러한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는지 살펴보았다. 그는 눈살을 약간 지푸리고 있었다. 그녀는 사의를 표하는 대신 디노의 말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정말 큰일 날 뻔했군요.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가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말입니다." 디노가 수선을 떨며 과장되게 떠들었다. 그때 라이스가 말을 가로챘다.

"세 사람의 응모자가 면접을 받았는데 아버님은 벌써 그 중의 한 여자를 생각해 놓으신 것 같더군. 이미 다 된 일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그러지?"

알렉시스는 또 다른 그의 훼방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게는 모종의 개인적인 목적이 있는 것같기도 했다. 아니면 누구와 시비를 붙고 싶어 하는 선천적인 기질을 타고난 것일까?

"난 카운터로 일해 본 경험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레스토랑이 대강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 곳인지 상황을 잘 알아요."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말을 급히 해버렸다. 소호에서 일할 수 있는 희망이 점차 엷어져가는 것을 느꼈기 깨문이었다. 라이스의 그러한 공격성은 특히 밤에 그와 유사한 자들이 활개 치는 이곳에 대한 그녀의 공포심을 한층 가중시켰다.

"게일도 경험이 많아." 그가 잘라 말했다.

"그리고.." 우물쭈물하더니 라이스는 말을 중단해버렸다. 그런 그를 알렉시스는 잔뜩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바라다보았다. 무언가 숨겨져 있던 저의가 조금씩 드러나는 것을 느끼면서.

디노가 손가락을 흔들면서 그를 대신하여 말을 이었다.

"아하, 그래서 자네가 이 일에 그토록 관심이 많았군? 그래 내 추측으로도 우리 아버지가 게일을 조금은 마음에 두고 계신 듯 했어."

"맞았어. 난 그 여자를 전부터 잘 알고 있지." 웨일즈인의 기회에 강한 차가운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자네 여자 친구인가?" 디노는 남의 약점을 찌르는 쾌감을 맛보듯이 씨익 웃었다.

"그런 셈이지. 그 여자는 능력도 있고 정직하다고."

그가 다른 여자에 대해 이렇게 어색한 칭찬을 늘어놓는 것을 보고 알렉시스는 더욱 약이 올랐다.

"나도 능력이 있다는 걸 당신한테 보여 줄 수 있다고요."

"정직함도?" 그가 지지 않고 반문했다. 그의 눈은 적의로 가득 차 그녀를 노려보았다.

"난 저 여자가 이곳을 염탐하려는 것을 발견했다네." 그는 디노에게 고자질하듯 말했다.

"난 염탐 같은 것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면접하러 온 것뿐이에요." 라이스의 공정치 못함에 항의하는 알렉시스의 갈색 눈동자가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걱정 말아요. 면접을 받을 수 있을 테니." 이번엔 이태리 젊은이가 마치 요정이 신데렐라에게 궁전에 갈 수 있다고 말해 줄 대처럼 관대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확신을 주어 .

"사과해야 되네 라이스! 안전이란 이런 숙녀까지 의심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야. 자기의 할 일을 잘 알고 해야지."

이제 면접을 받을 수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알렉시스는 이제야 웨일즈인이 이곳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알 것 같았다.

"당신은 경호원이었군요?" 그녀가 좀 여유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왜 그녀에게 모욕적인 행동을 함부로 했는가를 조금은 이해할 듯했다.

디노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정말 어렵군. 라이스는 당신이 암만 생각해 봐도 모를 사람일 겁니다." 그는 알렉시스가 모르고 있는 라이스의 단면을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했다. 하여간 라이스의 위치가 무엇이든 그녀가 이 클럽에서 일하게 된다면 두 사람은 서로 옹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와요. 면접하는 데로 갑시다." 디노가 말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특별실'이라는 팻말이 부착되어 있는 방 앞으로 데려갔다.

그 앞에는 웬 중년여자와 십대소녀가 함께 앉아 있다가 알렉시스와 디노를 흘끗 쳐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숙여버렸다. 알렉시스는 투명한 유리너머로 우람한 체격의 남자가 어두운 빛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뭔가 말하고 있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디노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그 문 안쪽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문 저쪽의 그들이 뭔가 귓속말로 속삭이는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보았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나왔다. 그는 의기양양해 보이는 표정으로 윙크를 해 보였다.

"아버지께서는 당신 같은 분을 면접하게 되어 기쁘시답니다. 우리에겐 행운이지요."

디노가 다시 자리를 뜨자 사방은 너무나 조용해졌다. 알렉시스는 바닥과 천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무료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자기가 이중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걸 문득 깨닫게 되었다. 특히 나이든 여자 쪽에서 자신의 구두를 바라다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챘다.

"이건 조금 전에 이렇게 되었답니다." 뭔가 해명이 필요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하였다. 그 여자는 가든파티에라도 갈 것처럼 틀어 올린 머리에 해군복을 연상케 하는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이런 30대 중반의 여자에게 라이스가 호감을 갖고 있지는 않을 듯했다. 또 다른 지원자 한 사람은 다갈색의 짧은 머리에 창백한 얼굴을 한 소녀였다. 그녀는 통통한 넓적다리 위로 흰 가죽의 미니스커트를 끌어내리며 새침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 아가씨도 아까 오르내렸던 게일 같지는 않았다. 알렉시스는 그들의 미심쩍어하는 눈초리를 느끼고는 자기가 연줄이라도 있어 온 사람처럼 보일까봐 얼른 말을 이었다.

"저기 왔던 남자는 누구지요? 나도 좀 전에 처음 보았거든요." 그들은 별 반응이 없었으나 소녀 쪽에서 좀 안심이 되었는지 입을 열었다.

"우린 둘 다 면접을 받았어요. 이 자리는 굉장해요. 보통 일반적인 근무시간과 달라 그런지 보수도 많고 집으로 갈 땐 차로 데려다 준다는군요." 그녀는 짙게 마스카라를 칠한 속눈썹을 치켜 올리며 유리문 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내 생각으론 지금 저 안에 있는 여자가 가장 유력한 후보인 것 같아요. 그 늙은 영감의 눈이 그녀를 보자 반짝 빛나더라니까요. 순진한 타입보다는 풍만한 쪽을 더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그녀가 비아냥거리고 있을 때 알렉시스는 자기의 푸른색 옷을 잘 여며 입을 생각도 잊고 있었다. 이 십대소녀가 자기마저 그 '풍만한 쪽에 밀어 넣으려는 것은 아닌지. 5년 전의 자신이라면 그럴 법도 했다. 그녀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흰색 밀짚모자와 더불어 제프와 신혼여행 갔을 때 입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아직은 풋내기 처녀였던 그 시절 사랑하는 한 남자를 처음으로 만났던 그때.. 이제 자신은 틴에이져보다는 중년과 더 가까와진 셈이다. 인생의 모든 즐거움이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는 때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희망이 하나 있었다. 누구나 좋아할 모범적인 아이. 알렉시스는 이 '모범적'이란 말을 싫어했다. 그 말은 자기의 어머니가 가장 큰 찬탄의 뜻을 나타내고 싶을 때 즐겨 쓰는 말이었다.

더구나 그 의미는 어머니가 아이를 자기의 뜻에 맞도록 제조된 틀에 끼워 넣으려는 속뜻을 포함시키고 있었다. 어떤 아이건 자기 마음에 맞게 행동했을 때에만 '모범적'인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닐을 들 수 있었다. 그는 친정집에 세들어 사는 인물로 알렉시스의 생활에 늘 방해만 되는 존재였지만 그녀의 어머니 입장에서 본다면 예의 모법적인 부류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늘 공손했으며 옷차림도 말끔했고 브리지게임도 세련된 솜씨로 해 내었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그와는 다르다. 그 꼬마아가씨는 귀여운 존재였다. 물론 어머니는 모범적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테지만 알렉시스가 생각할 땐 귀여움 그 자체였다. 일주일에 세 번 가는 보육원에서 얼마나 야무지게 맡은 바를 해 내는지 깜찍할 정도였다. 만일 그 꼬마아가씨가 성가대에라도 들어가는 날이면 할머니 허드슨부인으로부터 거듭 모범적이라는 찬사를 받을 것이다. 부인은 성가모임에 아주 열심이어서 언젠가는 딸도 손녀도 꼭 참석시키려는 작정이었으나 알렉시스는 아직까지 용케 버티어 내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알렉시스를 몹시 곤혹스럽게 하였다. 이번에 일자리를 얻게 되면 바쁘다는 핑계로 조금은 쉽게 그런 곤란한 지경을 면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알렉시스는 생각했다. 그녀는 이미 어머니가 생각하는 모범적인 아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마치 바람이 빠져가는 풍선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결국에는 이 카운터 자리에 정착하게 된 셈이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한 여자가 나왔다. 저 여자가 게일일까? 알렉시스는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을 한 미니스커트의 아가씨는 방금 나온 여자보다는 알렉시스 쪽이 자기와 더 비슷하다고 느꼈는지 알렉시스에게 살짝 미소를 던졌다.

알렉시스는 문에서 나온 여자를 보자 소녀의 말에 수긍이 갔다. 블라우스차림에 타이로식의 풍성한 스커트를 받쳐 입은 그녀는 퍽 요염해 보였다. 핑크빛으로 불든 뺨이며 나풀거리는 갈색의 머리카락 아마도 그 머리엔 날마나 수백 번쯤은 빗질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저런 타입이라면 라이스같이 경솔한 축들의 마음을 끌기에 족할 것이다.

때마침 그 문이 다시 열리며 안쪽에서 알렉시스를 들어오라는 신호가 있었다. 그녀는 잠시 하던 생각을 접어 두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사내가 심한 이태리 억양을 써가며 자신이 호세 지아코 펠리라고 소개하였다. 은발에 작달막해 보이는 그는 디노처럼 세련된 인상을 주지는 않았지만 옷차림새는 그와 마찬가지로 최상급이었다. 웃옷의 단추는 불룩하게 나온 배 때문에 가까스로 채워져 있었고, 두꺼운 선글라스 뒤로는 검은 눈이 두드러지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왠지 이 작달막한 아저비상에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는 매사에 여유 있고 무엇이든 받아들일 만큼의 포용력과 관대함이 있을 법해보였다. 아까 있었던 소동 이후에 처음으로 맛보는 너그럽고도 예의바른 대접이었다.

"제 이름은 알렉시스 램버트입니다. 얼마 전에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되었습니다. 어린 딸이 하나 있지요."

아이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벽에 붙은 자신의 가족사진으로 시선을 주었다.

"딸은 축복이오. 난 셋아니 두고 있는데 모두 사랑스런 애들이랍니다. 상냥하고 유순하지요. 좀 전에 들어왔던 애가 하나뿐인 아들 녀석이라오. 디노라고 하는데 그 앤 좀 신경 쓰이는 짓만 골라한다오."

지아코펠리는 안경을 빼어 흰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닦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하러 나오면 댁의 따님을 누가 돌보나요?"

"저의 어머님이나 이모님께서요. 두 분 다 저와 함께 살고 계시죠. 게다가 딸 아이는 보육원에 다니고 있으니 아침나절엔 돌볼 필요가 없지요."

면접은 간단했으며, 지아코펠리에겐 가시덤불처럼 걸리는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전 이 계통의 일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년 동안 켄트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 제 여자 친구가 주방 일을 보았고 저는 카운터를 맡아했었습니다."

옛날 생각이 떠오른 듯 알렉시스는 미소를 머금었다.

"바쁠 땐 음식 나르는 일까지 도와야 했어요. 힘은 들었지만 퍽 재미있게 지냈죠."

안경을 다시 끼면서 지아코펠리는 뒤로 기대러 편한 자세를 취했다.

"왜 그곳을 떠났나요?"

"남편과 사별한 직후에 어린아이와 저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어요. 그런데.."

"어머님이 친정으로 오라고 하셨군요?" 그녀가 머뭇거리자 지아코펠리가 말을 대신 이어 주었다.

그녀는 숄더백을 뒤져 봉투를 꺼내 놓으며 말했다.

"이것이 저의 이력서와 신원을 보증하는 서류들입니다."

그가 그것들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녀는 처음으로 방 주위를 살펴볼 기회가 생겼다. 사무실은 산뜻하고 밝았다. 베고니아화분이 작은 캐비넷 위에 얹혀 있었고 계산기가 놓여있는 탁자와 잘 정돈된 서류들을 볼 수 있었다. 세금문제에 관한 문헌들이 담긴 장서로 가득 차 있는 책장은 특히나 그녀로 하여금 정말 괜찮은 곳에 왔구나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었다.

"아주 적임자로군 그래." 지아코펠리아는 매우 흡족해 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하는지 말씀해 드리죠. 우린 아시다시피 레스토랑에서 일할 카운터를 구하는 중입니다. 근무시간은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저녁 7시 반부터 11시까지 금요일과 토요일은 12시까지 그리고 일요일과 월요일은 문을 닫습니다. 가끔 일요일에 내 개인적인 사업상의 회합을 갖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좀 도와주어야 해요. 바 뒤에서 접대 일을 거드는 정도면 될 겁니다."

"접대일이라니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런 곳에서 접대일이란 바걸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이런 예기치 못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걱정할 건 없어요. 내 손님들과도 잘 지내게 될 겁니다. 모두 신사적인 사람들이니까요."

알렉시스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대체로 조그만 일에도 곧잘 얼굴이 빨개지곤 하는데 그럴 때면 눈앞이 캄캄해져 무엇을 어찌해야 좋은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대하는 일은 전부가 합법적인 일들뿐입니다. 회합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클럽의 회원이거나 그들과 동행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는 알렉시스가 계속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보자 껄껄 웃었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내 경호원이 해결해줄 테니 염려 없어요."

그가 주먹으로 올려붙이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라이스 말인가요?"

"그 사람을 아시오?"

알렉시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라이스는 굉장한 인물이오. 그가 있는 한은 아무런 말썽도 있을 수 없을 거요."

그녀는 결코 그렇지가 않노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 그러면 복도에 나가서 기다려 주시겠소. 램버트부인?"

지아코펠리는 똑바른 자세로 책상 위에 있는 팬과 장부를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내 아들과 상의를 해본 연후에 결정여부를 알려드리지요."

그녀는 인사를 하고는 망가진 구두를 간신히 추스리며 밖으로 나왔다. 잠시 후 중년여자와 소녀가 방으로 불리어 들어갔다. 그들은 아마도 다른 사람으로 결정되었으니 돌아가 달라는 말과 와 주어서 고맙다는 정도의 말을 들은 모양인지 나오자 금세 사라져버렸다. 자 이제는 게일과의 결판만이 남아 있었다.

"디노! 나 좀 보겠니?"

지아코펠리가 큰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디노는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대기용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알렉시스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그녀는 홀로 남자 자기의 구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때 남자와 여자가 주고받는 말소리가 점점 가까와졌다. 복도 끝 쪽에서 라이스와 게일이 함께 오고 있었다. 그들은 미처 알렉시스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라이스의 표정은 몹시 화가 난 듯했고 무언가 투덜거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무엇 때문이겠는가? 자기의 여자 친구가 들어갈 자리를 알렉시스가 가로챘다는 생각 때문일 게 뻔했다. 알렉시스는 속으로 마음을 다져먹었다.

"두고 보자, 뚜껑은 열어 보아야 아는 것이니까!"

그녀는 당장에라도 벌떡 이러나서 게일에게 당신은 이 자리에 맞지 않다고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다. 두 마리의 매가 동시에 하나의 먹이를 두고 공격하듯 이젠 별 수 없이 게일과 라이스 이 두 사람과 대항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알렉시스는 갑자기 외로움을 느꼈다. 이런 착잡한 생각에 잠겨 그녀는 구두에 대한 생각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게이로가 라이스의 말소리가 갑자기 뚝 끊기더니 라이스가 알렉시스를 향해 말했다.

"당신 이 일이 그토록 하고 싶소?" 바지주머니에 한 손을 꽃은 채였다.

"집근처에 더 쓸 만한 일자리를 내가 주선해 준다면 어떻소?"

"우리 집 근처엔 그럴 만한 일자리가 없어요." 그녀가 단호히 대답했다.

그는 그녀 쪽으로 다가와서는 대기용 의자를 잡아당겨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코만 정상이었다면 과히 인상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굵고 가지런한 눈썹에 광대뼈가 다소 튀어나와 있었고 윗입술이 조금 얇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그는 긴 손가락을 양팔 사이로 집어넣어 팔짱을 끼었다. 이런 자세는 그의 남성다운 근육을 긴장시켜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확실하게 일자리를 찾아 주겠소."

"댁에서?"

그녀는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지만 그 속에는 비아냥거리는 의미가 충분히 담겨 있었다.

"내가 아는 데가 있소."

"사양하겠어요."

"합법적인 곳이오."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기라도 했다는 투였다.

"아니 정말 사양하겠어오." 그녀가 되풀이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장담하는데 게일이 당신보다 이 일엔 적격이오."

"나도 적임자예요." 그의 여자 친구를 쏘아보며 알렉시스가 말했다.

"저 여잔 돈이 필요하오."

"누군 아닌가요?"

그의 회색 눈동자가 게일이 더 낫다는 걸 확신시키고 싶어 안달하듯이 반짝였다.

"당신은 좋은 가정환경에서 자라온 사람 같은데 이런 곳에서 일하다 보면 필경 자신을 망치게 될 거요."

좋은 환경이라? 알렉시스는 자기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 아주 모범적인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당신이 나에 관해서 무얼 안다는 거죠. 미스터..."

"로버트요." 그가 대답해 주었다.

"나 역시 당신의 여자 친구와 같은 이유로 여길 찾아온 거니 결과나 기다려 보는 게 좋을 것같군요. 로버트씨." 알렉시스의 말이 끝나자 라이스의 눈에는 물에 젖은 청석의 빛깔처럼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당신을 지금 당장 집으로 돌려보내야겠소." 그가 기분 나쁘게 자기 팔의 근육에 힘을 주어 보이며 말했다. 알렉시스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으나 그의 태도가 그럴수록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왜 나를 마음대로.. 여긴 엄연히 자유민주주의국가예요. 로버트씨!"

"당신 남편이 소호같은 데서 일하는 걸 그냥 놓아둘 것같소?" 그녀의 결혼반지를 흘끔 바라보며 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 남편은 이미 3년 전에 죽었어요. 그리고 그가 설사 살아있다 하더라도 난 내가 옳다고 믿는 일에 있어서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아요."

사실 만약에 그녀가 카지노 베네치아에서 일하겠다고 한다면 남편 말고도 어머니가 더욱 극구 만류하려 들 것이다.

"소호는 험악한 곳이오. 특히 밤에는."

"그야 나한테나 당신 여자 친구한테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그녀가 지지 않고 응수했다.

웨일즈인의 목소리엔 위험이 깃들여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오빠가 동생을 다루듯 부드러운 면도 있었다.

"게일은 내가 지켜줄 테니 걱정없어요."

"나도 그렇게 해 주시면 되지 않겠어요?"

알렉시스는 자신이 비록 이곳에서 일하게 될지라도 오래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를 라이스가 되풀이해 주지시키려 드는 것을 눈치 챘다.

그가 어깨를 움찔해 보이며 말했다.

"당신 같은 타입이라면 이런 곳에서 말썽이나 일으키기밖에 더하겠소? 금발에다 커다란 그 눈을 남자들이 그냥 놓아두고 지나치진 않을 거요. 알기나 하오?"

알렉시스는 주춤했다. 그의 말이 다소 과장되어 있다하더라고 소심한 그녀의 마음에는 이곳에서의 미래가 걱정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라이스는 정말 집요하게 그녀를 단념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지아코펠리씨 말씀으론 당신이 내게 접근하는 치한까지 알아서 처리해줄 거라고 하시던데.."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우물거리자 그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지아코펠리씨의 말씀이지 내 말이 아니잖소? 여기서 일하고 싶거든 당신이 알아서 스스로를 지키든지 맘대로 하시오. 이것만은 명심해요! 절대로 내가 그런 일을 맡아해 주리라는 착각은 아예 말라는 거요. 알아들었소?" 라이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끝으로 그렇게 말했다.

 

2

알렉시스는 딸에게 굿나잇키스를 하고 불을 꺼 주었다. "잘자라!" 조그맣게 속삭이고는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 그녀는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줄곧 받았다. 빅토리아를 재우고 난 후 어머니와 직장문제에 대해 한바탕 논쟁이 있을 것이 뻔했다. 어머니는 또 보나마나 그런 동네는 어쩌고저쩌고 그러시면서 한참 열변을 토하실 게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의 입은 잔뜩 긴장되어 오무려져 있었다. 허드슨 부인 곧 알렉시스의 어머니는 키가 크고 대체로 이웃에게는 마음이 넓은 편이었으나 유달리 딸에게는 그 넓은 마음을 만끽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 있었다.

"제대로 자란 여자라면 소호 같은 데서 일할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어떤 경우든 행실이 엉망인 그런 부류들과 너는 절대로 같은 곳에서 지내선 안 돼. 그들과 너는 근본적으로 틀려."

"이 일은 제 스스로 택한 거예요. 전 이제 혼자 힘으로 무엇이든지 결정할 나이가 지나도 훨씬 지났지 않나요?"

알렉시스는 도무지 어머니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정상적인 일자리를 갖기 전엔 무엇이든 해야잖아요."

"!" 한심하고 상종 못할 부류라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로 가득 찬 불평을 늘어놓으며 허드슨부인은 다시 수를 놓기 시작했다.

"내일 저녁 첫 출근 땐 좀 색다른 옷을 입어야 하지 않겠니?"

포에베 이모가 흔들의자에 앉아 물었다. 소심한 50줄의 부인인 그녀는 뜨게질이 취미이자 소일거리며 유일한 낙이기도 했다. 지금 막 빅토리아의 가디건을 마무리하려는 중이었다.

"크림색의 실크블라우스에는 긴 스커트가 어울리겠죠?"

알렉시스가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내가 보건데 레스토랑엔 웨이터와 탈의실에서 시중드는 여자 한 사람 그리고는 나뿐이고 다른 여자들은 다 아래층에서 일하지요. 모두 같은 유니폼을 입어요. 그러니 무슨 옷을 입고 가든 그곳에 가면 도로 갈아입어야 돼요."

"넌 스스로를 낭비하는 거야 인생의 낭비!" 허드슨부인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마다 카지노 주변을 서성거린다고 생각해 보렴."

"카지노가 아니에요. 내가 근무하는 곳은 레스토랑이라고요!" 그녀는 자기가 벌써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기억하기도 싫었다.

"어머니는 제가 직장을 갖게 되면 비키를 돌봐 주시겠다고 하시고선."

그것은 사실 포에베 이모에게서 나온 말이긴 했다.

성가대에 입단하지 않는다고 알렉시스와 충돌이 있었던 이후로 오늘 일은 가장 큰 어머니와 딸의 대립이었다.

"빅토리아다. 그 애가 세례를 받은 직후 네 남편과 다투고부터 넌 왜 그 애를 비키라고 부르는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이모가 한 말을 두고 그러는 모양인데 그건 널더러 소호 같은 곳의 밤거리나 함부로 돌아다니라고 그런 것은 아니다!"

"전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아요. 집에 올 때는 택시로 집까지 데려다 준댔어요."

"그렇다면 큰 걱정은 없겠잖아. 언니!" 이모가 알렉시스를 거들어 주었다.

하지만 허드슨부인은 더욱 못마땅한 듯이 잿빛 머리를 쳐들고 도마뱀처럼 가늘게 눈을 뜨고는 동생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래 소호 같은 데서 야밤에 얻을 수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하니?"

알렉시스는 늘 상냥한 이모가 우물쭈물하면서 얼굴이 새빨개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포에베 이모는 뜨게질을 계속했다.

"굉장한 보수예요 엄마!" 알렉시스가 사정하듯 외쳤다. 그러나 어머니는 별 동요 없이 교회에 발판으로 깔아놓은 천의 치수를 꼽아보고 있었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란다 알렉시스! 넌 네 아버지의 유언도 잊었느냐?"

"영영 계속할 게 아니에요." 이렇게 말을 하면서 알렉시스는 문득 제프의 보험금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갑에서 보험증서를 꺼내었다. 남은돈은 천파운드 당분간 살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갑자기 처음 결혼할 당시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프에게 앞날을 위해 뭔가 대책을 마련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는 알렉시스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은행에 현금이 약간 남아 있기는 했지만 얼마 안가서 바닥이 나고 말았다.

어머니가 침묵을 깨고는 말을 이었다.

"너와 빅토리아는 이 집에 있는 한 먹고 자는 걱정은 없다."

알렉시스도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어머니에게 큰 경제적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도 비록 남편이 없을망정 독립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줄곧 해오고 있었다.

"어머니와 계속 같이 살 생각은 없어요." 그녀가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내뱉았다.

"내가 잘못해 준 거라도 있다는 거니?" 어머니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면서 경직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알렉시스가 독립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해하겠어. 그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어?" 포에베 이모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그래요."

이모의 표정은 금세 다시 굳어져버렸지만 이런 말이 나온 덕분에 조금은 이야기가 쉽게 풀릴 것도 같았다.

"이 집은 이모와 어머니의 것이지 제 것은 아녜요. 지금은 저와 빅토리아가 정착지를 마련할 동안 머물고 있는 것에 불과해요."

허드슨부인은 계속 묵묵부답이었다. 하던 일이 대강 마무리되자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넌 나랑 같이 있는 게 여러 모로 편해. 집은 너희가 와있어도 충분할 만큼 넓고 주위엔 좋은 이웃도 있고 말이야. 빅토리아의 보육원도 가깝고 또 꼬마친구들도 얼마든지 있지 않느냐?"

"물론 그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 나이라면 남자가 아니더라도 자립을 하는 것이 상식을 거예요. 무엇에 의지하려드는 습성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어머니께서도 말씀하신 적이 있지 않던가요?"

이모는 이 말이 어머니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되지나 않았을까 하고 염려하는 빛이 영력했다.

". 그런데 네가 일을 나가게 되면 우리 넷이 하던 브리지게임은 어떻게 하지?" 이모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알렉시스는 웃이 나왔다. 클럽에 나가면 브리지게임을 못하게 되리라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 못했지만 저녁마다 그 지루하고 의례적인 게임을 마지못해 해오던 고역에서 빠져나오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성가대 중 한 사람에게 부탁해 보면 어때요? 근처에 사는 샐리 아줌마라든가..."

이모는 자기가 얼떨결에 이런 하찮은 소리를 한 것이 쑥스러웠는지 뺨에 홍조를 띠며 살며시 웃었다.

", 넌 닐이 왜 매일 여기 와서 브리지게임에 열중하는지 알기나 한? 다 너한테 반해서 그러는 거라고."

"반했다고요? 그렇게 늘 미지근한 태도인 데도요?" 알렉시스는 코웃음을 쳤다.

"아마 그 사람은 고작 바이올린 연주회에나 날 데려다 놓고 젖 먹던 힘까지 다 발휘해서 용기를 낸대야 내 손목이나 한 번 잡아볼 거예요."

"닐 오트림은 신사중에 신사다." 허드슨부인이 끼어들었다.

"넌 정말 그의 진정한 용기를 볼 줄 모르는구나."

알렉시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농담은 제발 그만하세요. 닐은 마치 빨래 삶은 물처럼 흐릿한 사람이니까요!"

어머니의 얼굴이 무시당한다는 생각으로 일그러졌다.

! 그는 지방은행의 지점장으로 몇 년 전부터 성가대에 입단해서 재빨리 주위의 환심을 사고 있었다. 테너 톤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열성적인 출석으로 특히 나이 지긋한 분들에겐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청년으로 부상한 것이다. 방을 구하려 한다는 그의 말에 허드슨부인은 쾌히 방 두 개가 독채로 나 있는 이 집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알렉시스는 굳이 그에게 세를 내어 주지 않더라고 가계에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어머니에게는 따로 꿍꿍이가 있음을 대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알렉시스는 그가 혹시라도 제프가 잠시 썼던 방을 탐내는 넉살을 떨진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그런 눈치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독채로 떨어져 있다하더라도 그의 방과 알렉시스의 침실 사이는 얼마나 가까운가! 마음만 먹으면 그 경계를 뛰어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도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런 야비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 점은 알렉시스도 높이 사고 있었다.

"그래요, 닐은 훌륭한 사람이지요." 포에베 이모는 벌써 한 줄을 다 뜨고 다음 줄로 바늘을 옮겼다.

"참으로 멋진 갈색머리에다 다갈색의 눈동자 그리고 셔츠칼라는 항상 새것처럼 깨끗하고.. 내가 젊었다면 그와 매일 데이트하고 싶을 거야." 이모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듯 뜨개질까지 멈추고 있었다.

"아직도 다 못 짰니?" 허드슨부인이 책망하듯 묻자 포에베 이모는 얼굴을 핑크빛으로 물들이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닐이 함께 있게 된 건 잘된 일이야. 정원도 손수 돌보아주고, 한 가족이나 다름없지 뭐냐?" 허드슨부인이 단정 짓듯 말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아니에요!" 보험증서의 마지막장을 넘기면서 알렉시스가 항변했다.

"빅토리아도 그를 무척 따르더구나."

"그건 비키에게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예요. 이를테면 대용품을 찾는 심리라고요. 좋아하는 것하고는 달라요. 그냥 단순한 놀이상대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요. 그 앤 그 사람이 자기의 '아저씨'가 되는 것은 원치 않을 걸요?"

어느 날 빅토리아의 머리를 따주고 있을 때 알렉시스는 왜 이 꼬마아가씨가 같은 반의 사만다처럼 아저씨를 갖기를 원치 않는지 알게 되었다.

사만다의 어머니는 버드나무 같은 가냘픈 몸매의 이혼녀였다. 빅토리아는 사만다 엄마의 '아저씨'가 끊임없이 바뀌는 것을 목격해 왔었다. 건장한 부두노동자, 눈이 툭 튀어나온 건축가, 일거리가 없는 금발의 배우.. 그러나 모두 한결 같이 떠나고 말았다. 그들은 또 대개 사만나에게도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엉뚱하게도 이 순간 라이스를 떠올리고 있었다. 소호의 그 웨일즈인이라면 '아저씨'로서 적격이 아닐까?

허드슨부인은 알렉시스의 지적에 수긍은 갔지만 닐에게 너무 모욕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모양이었다.

"믿음직한 사람임은 확실하다. 브리지게임도 아주 능통하지." 이 끊임없는 찬탄에 알렉시스는 더 이상 닐에 관한 얘기는 그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다시 보험증서로 고개를 돌렸다.

제프! 제퍼리는 항상 알렉시스의 어머니처럼 그녀에게 명성 따위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역설해 왔었다. 그가 어머니의 마음에 드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브리지게임에 능하다는 것이었을 게다. 그는 카드를 자기 몸의 일부처럼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다. 지금은 차가운 땅 속에 묻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닐과 나는 서로 맞지가 않아요." 알렉시스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항상 어머니가 그가 은행의 지점장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게 그녀에겐 몹시 거슬렸다.

"참 카지노 베네치아의 주인 아들은 내 또래더군요. 퍽 남자다운 사람이에요. 어머니도 한 번 보시면 마음에 드실 거예요. 매너도 썩 좋은 편이고 용모도 어머니가 늘 말씀하시듯이 단정한 사람이에요." 어머니의 눈에서 호기심과 호의어린 빛을 읽을 수 있었다.

"소호의 그 이태리인 말이냐?" 어머니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아마 마피아의 한 사람일 거다!"

알렉시스는 이 말을 듣고는 소리 내어 웃었다.

"언닌 사이블의 탐정소설을 지나치게 읽은 모양이우." 뜨개질을 계속하며 이모가 한 마디 거들었다.

"난 디노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 알고 있어요. 잉글랜드의 공립학교에를 졸업하고 무역에 관계하고 있데요. 아주 정확한 영어발음을 구사할 줄 알아요. 그리고 신종 재규어를 몰고 다녀요."

"그래 고작 자동차얘기냐? 내가 면접에서 돌아왔을 때 말해 주었잖니. 너무 처음부터 그에게 빠져드는 것 같다고 말이다..."

"그는 내 구두가 망가진 걸 알고는 친절하게도 집까지 바래다주었어요."

"그 재규어라는 차는 신흥 벼락부자들이나 자기의 재세를 과시하려 타고 다니는 것 아니냐?" 어머니의 내뱉는 듯한 말투에 반감을 느낀 알렉시스는 엥도라진 투로 대꾸했다.

"어머니처럼 그런 근사한 차를 앞에 놓고 도도할 사람도 드물 거예요."

"넌 퍽이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지만 난 차 따위에는 관심 없다." 여전히 냉랭한 어투였다.

"그 젊은이의 태도가 예절바른 건 사실이야." 이모의 눈이 반짝였다. 포에베 이모는 금세 주방으로 들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 세 개를 쟁반에 받쳐 들고 나왔다.

"아 글쎄, 알렉시스가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그이가 먼저 돌아 나와서 차 문을 열어 주더라니까 요새같은 세상엔 보기 드문 일이지. 옷도 아주 근사하고 구두는 유리처럼 광이 나더라고."

"넌 쌍안경으로 그 작자를 관찰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구나. 그렇지?" 허드슨 부인이 정통으로 찌르자 포에베 이모는 움찔하더니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디노와 그의 아버지는 둘 다 아주 세련되었고 존경할 만한 분들이예요." 입으로는 이런 칭찬을 지껄이고 있었지만 알렉시스는 마음속으로 라이스 로버트의 그 냉정한 시선과 적의에 가득 찬 말들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아코펠리가 카운터 후임자로 그녀를 지적했을 때도 그 쌀쌀맞은 웨일즈인은 여전히 그녀에게 포기하라고 윽박질렀다. 엄청난 분노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던 그의 눈매가 되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클럽에서 또다른 남자가 하나 있었어요. 경호원인데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어요."

"이태리인이냐?" 허드슨부인이 완고한 어투로 물었다.

"웨일즈인이예요."

이 말을 듣자 허드슨부인은 금세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웨일즈인이라면 나쁠 것 없지. 웨일즈에서 온 성가대단원들을 몇 사람 아는데 한결같이 좋은 사람이더구나. 그런데 그의 이름은 뭐냐?"

"라이스, 라이스 로버트예요."

"보진 못했지만 디노보단 라이스가 나을 것같구나. 네 이태리인 호위병은 꼭 말하는 게 아이스크림 파는 소년 같던데." 허드슨부인이 비웃듯이 디노를 들먹였다.

"저런! 어머닌 참말 앞뒤 말씀이 다르시군요."

허드슨부인은 이 말을 듣자 자기의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거만한 눈초리로 알렉시스를 쏘아 보았다.

"그런 말을 함부로 어미한테 하다니! 내 집에선 그런 불손한 언사는 삼가하려무나. 빅토리아가 그런 것을 흉내 낼까 겁난다."

계속 맞서고 싶었지만 알렉시스는 이만치에서 오늘의 격전을 마무리 짓는 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을 고쳤다. 어머니와의 언쟁을 늘 이런 식으로 끝을 맺곤 했었다. 알렉시스의 양보로..

"죄송해요. 조심할게요." 사과의 뜻으로 그녀는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좀 쉬어야겠어요. 내일 일하러 나가려면 말이에요. 흐리멍텅한 모습으로 첫 출근을 하기는 싫거든요."

"그곳에 가면 넌 필경 멍이나 들어가지고 올 게다." 허드슨부인은 끝까지 강경한 자세를 잃지 않고 예언을 하였다.

 

다음날 저녁 집을 나선다는 것은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의 기분이 한결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집안공기는 여전히 냉랭하고 불편했다.

허드슨부인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알렉시스의 원대로 부드러워지기보다는 잔소리만 느는 쪽이였다. 단 한 가지 어머니의 인상을 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비고티라뿐이었다. 정말이지 빅토리아에게 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자애스러웠다. 그 어린소녀에게는 제아무리 허드슨부인일지라도 꼼짝 못하는 셈이었다.

그 귀여운 천사가 이곳에서 이사 와서 유괴를 당한 일이 생기고부터 알렉시스는 세인트존스우드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부쩍 늘어났다. 하지만 쉽사리 떠나기에는 여의치 않은 사정이 산재되어 있었다. 우선 그녀가 아프거나 빅토리아가 아플 경우가 가장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독립을 지탱해 줄 아무런 경제적 뒷받침도 지금으로선 전무한 상태였다. 하지만 당장은 몰라도 꼭 독립을 하려는 결심은 알렉시스는 예전부터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꿈꾸기만 해오던 그 일에 한 걸음 다가선 느낌이다. 일자리가 생겼고 당장 독립해 나갈 만한 보수는 못되었지만 그녀는 악착같이 모을 생각이었다.

만일 허드슨부인이 다른 어머니들 같았다면 딸이 하려는 일이 무엇이든 기꺼이 도왔을 것이다.

일 년 전 알렉시스가 하루 온종일 직장에 매달려 있었을 때 빅토리아는 포에베 이모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알렉시스는 심신이 지쳐서 주말에조차 빅토리아를 제대로 돌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허드슨부인은 딸에게 심리적인 일격을 가하여 왔다.

"넌 아이들의 성장기가 얼마나 미묘하고 조심스러운 시기인지 아니?"

그동안 포에베 이모가 잠시 집을 비우느라 아이의 목에 걸어 주었던 열쇠목걸이의 끈이 잘라버리며 허드슨부인이 격노한 표정으로 꾸짖었다.

"난 내 손녀가 고아처럼 길가에서 방황하는 것은 절대 눈뜨고 못 본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어머니가 너무 심하셔요. 포에베 이모는 저 다음으로 엄마 역활을 잘 하신다고요."

허드슨부인의 이 같은 질책은 알렉시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나올수록 자기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점점 더 요원해지고 마는 것이다. 하여튼 그녀는 이제 다시 일자리를 얻었고 어머니의 성화에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웨일즈인의 위협 역시 마찬가지로.

 

카지노 베네치아는 그녀의 도착과 동시에 문을 열었다. 탈의실에서 일을 거드는 바싹 마른 가정주부타입의 수키는 알렉시스가 어디에서 옷을 갈아입을지도 가르쳐 주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친구가 되어보려고 애를 썼다.

"어울리는데! 귀여워 보여."

알렉시스가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것을 보고는 수키가 한 마디 했다.

"넌 나보다 목이 긴 모양이구나."

알렉시스는 부드럽게 부풀어 오른 가슴이 약간 드러난 곳의 주름장식을 바로 잡으려고 손을 뻗쳤다.

그녀의 뒤에서 새침한 표정을 짓고 알렉시스를 빤히 보고 있는 이 아가씨는 아침마다 보육원 아이들에게 읽어 주는 <어부아저씨의 장난꾸러기>라는 이야기처럼 쉽게 싫증나는 존재였다.

알렉시스는 웃옷을 바르게 집어넣으려고 벨트를 느슨하게 했다.

"블라우스의 길이가 이것밖에 안되는 줄은 몰랐네."

갑자기 수키가 쿡쿡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난 네가 오기 바로 전에 카우터일을 하던 여자를 알고 있어. 아마 키가 150센티쯤 되었을거야. 그 여자는 항상 한 줄씩 슬쩍해 내곤 했지 아주 감쪽같이."

알렉시스는 이 엉뚱한 소리가 무엇을 암시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을까 의아해 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스커트허리가 좀 죄는 것같이 느껴지자 그녀는 엉덩이에 손을 얹어 보았다.

지아코펠리가 과연 카운터로서의 능력 때문에 자신을 고용한 것인지 아니면 매력적인 용모 때문인지 구분히 잘 안 갔다.

그녀는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쌍꺼풀진 눈이 더욱 돋보이도록 아이샤도우를 칠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화장은 마무리가 되어 있었지만 펄이 들어가 있는 아이샤도우로 더 한창 생동감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 꼭 영화배우 같다." 빅토리아가 알렉시스의 화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감탄어린 눈망울로 외쳐대었다. 그리고 보통 지나치는 남자들은 그녀에게 한 번 시선을 주면 뗄 줄을 몰랐었다.

알렉시스는 갑자기 여기가 소호라는 것을 상기하면서 실수가 없도록 스스로에게 반복하여 다짐을 주었다.

"카지노 베네치아에 험악한 일 같은 것 생긴 적이 없니?" 알렉시스가 수키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키는 눈썹이 더욱 짙어 보이도록 아이라인에 물을 축여 바르고 있었다.

"걱정 마 별일이야 있겠니. 전에 있던 여자가 있을 때도 무슨 말썽 같은 건 없었어." 수키가 톱니모양으로 된 옷깃을 힘껏 잡아당겼다.

"귀찮게 구는 녀석이 있으면 라이스가 혼내 줄 거야."

알렉시스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모르는 소리 마! 그런 작자가 나타난다 하더라고 난 내 힘으로 해결해야 할 판인걸."

만일 그 웨일즈인에게 도움이라도 청할 일이 생긴다면 그건 정말 곤란했다.

"그래? 라이스와 벌써 싸우기라도 한 거야?"

"묻지 마.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니까."

수키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그럼 라이스 말고 디노에게 부탁해 두지 그래."

"디노에게? 그도 여기서 일하니? 자기사업으로 바쁘다던데?" 알렉시스가 놀라운 듯 물었다.

"누구한테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썩 대단한 사업은 아닌가 보더라. 웨스트엔드 어딘가에 조그만 사무실을 갖고 있기는 한데 뭔가 분명 숨기는 게 있어.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사업을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거든." 수키가 확신에 찬 어조로 속삭이듯 말했다.

"지아코펠리씨는 아태리식으로 계획을 미리 장황하게 설명하는 걸 좋아하지만 디노는 정 반대야. 너도 두고 보면 알겠지만 심심하면 두 사람은 욕지거리까지 주고받으며 다툰단다. 라이스가 오고부터는 좀 나아진 편이지. 그가 두 사람 사이의 중개 역할을 잘 해 내니까."

"경호원 주제에?"

"글쎄 그렇다니까. 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그 친구는 지아코펠리씨의 다른 사업에도 관여하고 다닌다는 소문이야."

"그게 뭔데?"

"자세한건 나도 몰라. 단지 지아코펠리씨는 여기저기 많은 사업을 벌여놓았다는 것하고, 라이스는 그 옆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닌다는 것밖에는 신통하게 아는 게 없어. 혹시 뷰렛<카지노게임에 쓰이는 돌아가게 된 원판>을 제멋대로 멈추는 법을 아는 지도 모르지."

알렉시스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수키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농담이야."

그들이 막 홀로 들어서고 있을 때 알렉시스는 수키에게 지아코펠리가 관계하고 있는 사업에 관해 케어 묻고 있었다. 때마침 사무실을 나오던 지아코펠리가 얼핏 그 말을 듣고는 황급히 알렉시스를 불러 세웠다.

"오우 우리의 램버트 부인! 클럽을 못 믿어 그런 걸 묻는 건 아니겠지요? 날 따라와요. 내가 설명해 드리지."

수키는 잽싸게 탈의실로 도로 들어가버렸고 알렉시스는 그를 따라 유리로 된 카운터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지아코펠리는 예의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정작 알렉시스가 듣고 싶어 하는 핵심적인 얘기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불필요한 잡담을 삼가해 주도록 당부하길 잊지 않았다. 그녀의 카운터석은 테이블 한 개와 의자로 꽉 차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레스토랑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고 그녀가 특별히 따로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없었다.

그녀는 무역상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남자들은 신사적이어서 그녀에게 속물근성을 드러내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 번 검은 곱슬머리에 흰 구두를 신은 뚱뚱한 남자가 빤히 쳐다보다가는 윙크를 해 보여 알렉시스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대개 레스토랑에 오는 손님들은 젊은 연인들 아니면 가족단위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레스토랑과 아래층의 카지노 사이에는 알렉시스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큰 차이가 있음을 그녀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늘 비밀리에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직 실수는 없었소?"

카운터 출입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라이스의 눈과 알렉시스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어깨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실내를 꽉 메울 듯 넓어 보였다.

그녀는 그가 한적한 시간을 틈타 불의의 공격을 해오는 것은 자신에게 겁을 주려는 수작임을 눈치챘다. 왜 유리창쪽을 마다하고 문 쪽으로 와서 말을 걸겠는가?

"아뇨, 아직 실망시켜 미안하군요!" 그녀가 똑 끊기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알렉시스는 자기 책상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자신의 부드러운 머릿결에 그의 시선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도 돌아보는 일없이 영수증 챙기는 일에만 몰두해 있는 척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설레이는 걸까? 공포 때문에?

오늘 이 웨일즈인은 처음 보았을 대와는 영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달리 까만 바지에 흰 턱시도 그리고 잘 손질된 같은 색의 셔츠를 받쳐 입었고 게다가 썩 어울리는 보우타이를 갖추어 매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디노처럼 세련되어 보이진 않았다. 또한 긴 머리와 금귀걸이는 스마트한 옷차림으로 본다면 옥의 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약탈자 같은 체취를 아직도 지니고 잇음을 암시해 주고 잇는 것 같았다.

"내가 현금계산을 좀 도와드릴까?" 라이스는 그녀가 그에게서 나는 은근한 자작나무의 향내를 맡을 수 잇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서 간결하게 물었다.

"나가 주세요!"

그녀가 등 뒤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소리를 죽이고 웃는 소리와 함께 알렉시스의 회전의자가 그의 쪽으로 획 돌려졌다. 덕분에 그들 사이는 종이 한 장 들어갈 틈이 있을까 말까하게 가까워져 버리고 말았다. 정말 견디기 힘든 노릇이었다. 알렉시스는 자기의 무릎에 바짝 닿아 있는 그의 다리를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눈과 입이 한꺼번에 그녀 쪽으로 기울어졌다.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얼굴에 쏟아 부어졌다.

"! 하룻밤 새에 성격을 개조하셨군! 어제는 착하고 앳된 소녀같이 굴더니 오늘은 돌리 파튼(유명한 텔레비젼 텔런트)처럼 힘찬 여성으로 돌변하셨군 그래."

그의 눈길은 거만하면서도 뜨거워 보였다. 알렉시스는 곧 그의 눈길이 무엇을 바라보는지 알아내었다. 그녀는 당황하여 가슴부분을 꼭 여며 쥐었다. 그리고 이렇게 당황하게 만드는 것도 어쩌면 그의 전술 중의 하나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만일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그는 그 약점을 어떤 식으로 이용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알렉시스는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제발 이 남자가 빨리 사라져 주기를 마음속으로 거듭 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바뀐 게 조금도 없군요. 로버트 선생!" 금 귀걸이가 반짝하는 걸 보고 낯을 찡그리며 그녀가 말했다.

"어제도 내게 불손하더니만 오늘도 연전하시니.." 그녀는 몸을 옆으로 비틀어 빠져나와 보려고 했지만 수월치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두 다리에 힘을 주어 그녀가 몸을 돌릴 수 없도록 막고 있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바싹 움켜잡아 자기를 쳐다보게 만들었다. 이런 치한 같으니라고! 그녀가 몸부림칠수록 그것은 오히려 그의 손에 든 힘만 더 세어지게 할 뿐이었다 .이런 굴욕적인 자세로 바라보게 하다니!

"이봐요. 램버트부인! 당신은 말이야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내일도 또 모레도 역시 이 자리엔 어울리지가 않는다니까! 알겠소?" 그의 목소리는 작고 낮게 깔렸지만 강한 분노와 의지를 담고 있었다.

"내가 나가기를 바란다는 말을 또 반복하시는군요?" 알렉시스는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소!"

"내게 노리는 게 뭐예요?" 그에게서 간신히 턱을 비틀어 빼고는 그녀가 물었다. 잡혔던 턱이 쓰리고 아팠다.

"도대체 내게 이러는 까닭이 뭐죠?"

그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당신이 이렇게 멋지게 차리고 있는데도 고작 무릎으로나 당신에게 닿아보다니 유감이군!"

그녀는 엉뚱하게도 그가 느닷없이 키스라도 해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은 그의 냉정하고도 호전적인 태도때문에 그를 남자로서 살펴볼 겨를이 없었지만 지금 그의 그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남성다운 매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보인들 두 사람 사이가 어떻게 180도 바뀌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괜찮으시다면 로버트씨! 이젠 제 볼일을 좀 봐야겠군요." 그녀는 자기의 누그러지는 마음을 채찍질이라도 하듯 더욱 쌀쌀맞은 태도로 말했다.

"당신은 생각보다도 더 유치한 사람인 것 같아요."

"! 나의 말투가 늙은 여자의 등 뒤에서 목이나 조르는 치한인 것 같소?"

"그래요. 바로 맞추었어요!" 그녀가 지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한참 동안 라이스는 그녀를 바라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조용히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기고는...

"난 어떻게든 당신을 내보내고 말 거요."

11시가 가까워오자 손님들이 마지막으로 현찰을 바꾸느라 부산을 떨었다. 그들이 가버리고 난 후 알렉시스는 침착한 기분으로 장부의 계산을 맞추어 보고 또 맞추어 보고 다시 한 번 맞추어 보았다. 그리고 나서 영수증과 장부를 서랍 속에 집어넣고는 카운터실의 문을 잠그고 현금함과 열쇠를 지아코펠리 사무실로 가져갔다.

"집에 어떻게 갈 거야? 혼자 갈 수 있겠니?" 알렉시스가 탈의실로 들어서자 수키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택시를 잡아야지. 걱정하지 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실 알렉시스는 걱정스러웠다.

"오늘 밤엔 11시가 넘었는데도 클럽이 다 문을 닫지는 않는 모양이구나?"

", 내겐 잘된 일이지. 카지노가 새벽까지 할 모양이니까. 이런 날이라야 수입을 좀 늘리지."

알렉시스가 의아한 눈초리로 수키를 쳐다보자 그녀는 킬킬거리면서 말했다.

"잠깐 망좀 봐 줄래? 돈이 없어 죽겠던 판에 조금 생겼거든. 단골은 아닌데 누가 좀 주었지."

알렉시스는 대강 카운터 칸막이에 팔꿈치를 기대고 서서는 자기의 첫 출근을 곰곰이 평가해 보았다. 모든 게 잘된 성싶었다. 실은 내내 무슨 봉변이라도 당하게 되지 않을까 몸을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주말에 받을 주급봉투를 떠올리면서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건 임시 일자리 일뿐이야. 빅토리아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보다 확실한 자리로 옮겨야 할 텐데..

서늘한 밤기운이 바깥쪽에서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알렉시스는 열린 현관을 통해 괴상스런 자켓을 걸친 육중한 남자가 자기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시비를 걸려는 듯이 일 미터도 못 미치는 거리를 두고 우뚝 서버렸다. 칙칙하고 흐트러진 머리 매무새에 제대로 여미지도 않은 옷차림으로 보아 클럽회원 같지는 않았다.

그가 서서 멍청히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이 알렉시스에게는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당신이 지아코페리의 애인이야?" 그는 그녀 쪽으로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이런 건달쯤은 자기 손에서 잘 처리하리라고 생각했다.

"난 여기서 근무할 따름이에요."

그가 고개를 흐느적거리며 그녀의 말을 흉내 내었다.

"! 당신도 이태리계이지?"

"난 이태리인이 아니에요."

그러자 그는 난데없이 광포한 웃음을 터트렸다.

대구조차 않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고 후회하면서 알렉시스는 포에베 이모처럼 노련한 태도로 그를 좇아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지아코프린가 뭔가가 나를 쥐고 흔단다고.." 흐리멍텅하고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그가 넌더리난다는 듯이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그 틈에 알렉시스는 빠져나가려고 몸을 움직였지만 재빠르게 그가 가로막았다.

"그 자는 어디 있나?"

알렉시스는 수키가 나와 주기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그녀라면 이런 경우에 이따위 남자를 어떻게 쫓아내버릴지를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카지노 쪽에서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누구 하나 위층으로 올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라고 자신을 부추겨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끊임없이 떨려오기만 했다.

그 사나이는 한 걸음 더 다가와서는 계속 집요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계속 말을 거는 편이 더 안전하겠다고 확신하고는 입을 열었다.

"지아코펠리씨가 당신을 쥐고 흔든다니오?"

"그래 맞아." 그가 무감각해 보이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은 이태리인이 분명해. 몸매가 지나롤로... 그 뭔가 하고 같군.." 그리고는 제풀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죠는 바보가 아니야. 주변에 늘 이런 미인을 거느리고 산다니까!"

그는 넘어질 듯 그녀 쪽으로 비틀거리더니 간신히 몸을 바로 잡고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눈으로는 그녀를 쉴 새 없이 훑어 내리고 있었다.

"어디 있어? 그 얼빠진 녀석 말이야?" 그가 알렉시스의 앞가슴을 톡톡 건드리면서 물었다. 그녀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어버리는 것 같았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래서 침을 꼴깍 삼키고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급히 대답해주었다.

"지아.. 지아코펠리씨는 저쪽 자기 사무실 안.. 안에 있어요."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시 추근거리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바들바들 떨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애걸했다.

"제발 가 주세요."

"! 귀여운 이태리아가씨!" 그는 이미 알렉시스의 뺨에 끈끈하고 불결해 보이는 입을 갖다 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가슴팍에 달린 옷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완전히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 내게도 키스해 주시오, 깜찍한 이태리공주님! , , 어서.."

수키가 오지 않을까하고 알렉시스는 연신 눈을 좌우로 굴렸다.

", 난 이태리인이 아녜요! 영국인이라고요!"

"이태리인이야!" 그가 억지를 부리면서 취한 몸을 그녀에게 더욱 밀착시켰다.

그의 눈이 악마와도 같이 벌겋게 불타올랐다. 그는 알렉시스의 머리채를 한 웅큼 움켜쥐었다.

"지아.. 지아코펠리 그 녀석 어디 있어? 어디 있느냔 말이야?"

"저기.. 저기.." 알렉시스는 목구멍이 막혀버린 듯했다.

그가 무지막지해 보이는 손으로 그녀의 머릿결을 어루만졌다.

"..제발 가 주세요." 그녀가 쉰소리로 다시 애원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너털웃음만 웃을 뿐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그녀는 팔꿈치를 앙버티며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고 발버둥 쳤다. 그러한 행동 덕분에 그의 손은 더욱 그녀를 세게 움켜잡게 하고 말았다.

그때, 예기치 않던 손길이 그의 어깨를 잡아 알렉시스에게서 떼어놓았다.

"어이, 이봐! 장사는 다 끝났어." 굵직한 웨일즈인의 목소리였다.

라이스는 그의 옷깃을 낚아채서는 가볍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버렸다.

그 틈에 알렉시스는 재빨리 탈의실 쪽으로 내빼었다. 기운이 쭉 빠지고 머리는 모두 헝클어져 있었다. 라이스가 적시에 나타나 준 것이 여간 고맙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 사람은 지아코펠리씨를 만나러 왔대요." 알렉시스는 간신히 말을 꺼내었다. 그리고는 아직도 세차게 떨리고 있는 손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지아코펠리씨의 사무실을 가르쳐 주려고 하고 있었는데요."

"당신 저 사람에게 그밖에 또 무슨 말을 지껄였지?" 라이스가 알렉시스를 쏘아보며 말했다.

"다들 바보 멍청이들만 모여 있군, 여긴!"

알렉시스는 그의 말에 섭섭함을 느끼자 뜨거운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대체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지금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어떤 여자라도 그 이상의 행동을 취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이런 모욕을 받은 직후라면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마디쯤은 해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잠깐 동안 자신이 라이스를 백마 탄 기사로 착각하였던 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이리와, 이봐! 우리 나가서 한 판 붙어볼까?" 라이스가 나동그라져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정꾼을 향해 외쳤다.

그 남자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연신 사과와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리고는 기듯이 하여 문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내가 올 때까지 꼼짝 말고 여기서 기다리시오." 라이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정꾼을 쫓아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역시 라이스는 매몰차고 인정도 감정도 없는 사람이란 결론을 내렸다.

"너 굉장히 창백해 보이는구나. 무슨 일이 있었니?" 그제서야 나타나며 수키가 물었다.

"응 조금. 괜찮아 이제는 술주정꾼이 들어왔었어. 소란을 피우다가 이제 막 라이스에게 끌려 나갔어."

"그랬구나. 역시 라이스는 우리의 수호자이군!" 수키가 애매한 미소를 머금었다.

알렉시스는 머리를 매만지며 탈의실 쪽으로 걸어갔다.

"가서 옷 갈아입고 올께." 알렉시스는 탈의실에 들어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고 조금 전의 일은 사소한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시켜 보았지만 잘 되지가 않았다.

여자들에게 있어 주정꾼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둘이 맞부딪친다는 것은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며, 혹시라도 운이 나쁠 경우에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노릇이다.

아직도 맥이 빠지고 덜덜 떨리는 몸으로 그녀는 간신히 일어서서 옷을 갈아입으며 그래도 일이 이만치에서 끝나 준것을 하늘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 기분나쁜 입술을 생각하면 엊저녁에 먹은 것까지 다 올라올 지경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티슈를 꺼내어 그 남자가 입을 대었던 뺨을 박박 문질렀다. 화색이 다시 돌아오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라이스가 기다리라는 이유는 뭘까? 또 예의 설교를 늘어놓으려는 것은 설마 아니겠지. 그냥 가버릴까? 문득 그녀는 그편이 나을 듯하다고 생각했다. 알렉시스는 가방을 둘러메고 단골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수키를 불렀다.

"밤이 늦어서 얼른 가봐야겠어."

막 현관으로 나서려는 찰나 그녀는 들어오던 라이스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행동이 날쌔지 못하시군, 아가씨!" 그녀가 그냥 가려던 것을 알고 라이스는 빈정대었다.

"할 말이 있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그녀는 조용히 그를 따라 들어갔다. 아무런 표지판도 붙어 있지 않은 빈 방에 들어서자 그는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켰다. 그리고는 알렉시스에게 앉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카지노 베네치아 내부에 이런 훌륭한 방이 있었나 새삼 놀란 표정이었다.

라이스는 그녀를 흔들의자에 앉히고는 두 개가 한 조로 묶여진 포도주색의 긴 가죽의자에 발을 뻗고 앉았다.

푸른빛의 카페트는 팜파스평원을 연상시켰고, 지아코펠리씨가 싸구려 식당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듯 값비싼 골동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탁상용 스탠드는 비단처럼 은은한 광을 발했고, 인상적인 조각이 새겨져 있는 벽난로 위에는 자기로 만든 조각상들이 놓여 있었다.

라이스는 잠시 동안 그녀가 방의 장식에 넋을 팔고 있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알렉시스는 이 침묵을 자기가 먼저 깨어야겠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그 주정꾼을 어떻게 했나요?"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그는 편하게 윗도리 단추를 한 개 풀고는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덕분에 그의 근육질 몸이 도드라져 보였다.

"어떻게 했을 것 같소? 어린아이 다루듯이 얌전하게 훈계나 하라는 거요?" 그가 입을 삐죽이며 말을 계속했다.

"걱정 말아요. 난 피 보기를 즐기는 악마는 아니니까." 얼른 변명하듯 말하고 라이스는 고개를 고개를 한 바퀴 돌렸다.

"내 짐작으론 당신 주변에 있는 헐크 같은 사들을 손보아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걸로 아는데요?"

"허허,, 그러나 난 동물 같은 울음소리는 내지 않는다오. 더욱이 입술이 부어오르거나 셔츠가 갈기갈기 찢기는 일은 결코 없소." 그는 연신 웃음을 흘리다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 여긴 내 얘기나 하자고 들어온 게 아니오, 아가씨 당신에게 이 지역의 규범을 알려 주려는 거요."

"규범? 그게 뭐죠?"

"낯선 사람은 절대 카지노에 발을 들여놓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하고, 특히 매상을 점검하고 나서 치우기 전에는 카운터 안에 사람을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요. 혹시 도둑을 맞을 경우도 발생하니까 말이요. 알겠소?"

"미처 거기까진 생각을 못해 봤군요."

"이제 알아듣는 모양이군."

"어떤 경우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지요. 아깐 너무 놀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해명했다.

"내 생각으론 당신은 역시 이런 불안한 분위기속에서 지낼 게 아니라 세인트존스우드의 집에서 아이나 돌보는 게 어울릴 것 같은데 안 그렇소?"

알렉시스는 이런 이야기는 딱 질색이었다. 그녀자신이 여성해방운동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여자는 집에서 아이나 돌보아야 한다는 말은 너무도 구세대적인 사고방식이 아니고 무엇이랴!"

"난 그럴 처지가 못돼요."

"못된다고? 그럼 무얼 또 하시오?"

"돈 버는 일 외에도 보육원 아이들에게 잠깐씩 동화를 읽어주는 일, 그리고 가끔씩 오후에 자선단체에 나가 일을 돕고 있거든요."

순간 라이스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호탕하게 웃어댔다.

"저런! 그런 줄은 미처 몰랐소. 정말 맹렬여성이시군."

알렉시스는 그의 말에 갑자기 자기가 바보스러워진 느낌이었다.

그는 무릎 사이에 손을 끼워 넣고 조금 수그린 자세로 진지하게 말했다.

"미안하오. 놀리는 뜻은 없었소. 하지만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하는 분이 이런 직장에서 일한데서야 말이 되겠소?" 라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게일은 이런 곳에서나 일할 여자란 뜻인가요?"

"물론 그녀가 저급한 타입의 여자는 아니오만 적어도 자신을 방어하는 일엔 당신보다 백배 나을 거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말은 그랬지만 왠지 자신 없는 투였다.

"아니야, 당신은 못해. 아까도 당해보지 않았소? 얼어붙은 팽귄 마냥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으면서."

알렉시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건 인정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부터 당신이 그에게 어떻게 대응해 나가는지 다 보고 있었단 말이오."

얼떨결에 뱉어버린 듯한 라이스의 말을 듣고 그녀는 아연질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 보고 있었다니.. 정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경고하지 않았소? 여기서 일하려거든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라이스의 눈에는 다소 미안해하는 빛이 어려 있었다. 그는 자기의 입술을 한 번 핥았다. 그러나 라이스는 알렉시스가 얼마만큼 이 일에 충격을 받았는지는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당신 스스로가 내게 큰소리 쳐 보이지 않았소?"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깔리자 알렉시스는 참지 못하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니에요, 솔직히 말하면 난 못해요. 혼자 힘으로는.."

라이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녀의 들먹이는 어깨에 손을 얹고 그는 다정히 토닥여 주었다.

"소호는 당신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곳이라는 걸 이제는 인정하는 거요?"

알렉시스는 그의 가슴에 안기어 실컷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걷잡을 수 없이 북받치는 눈물을 애써 진정시키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만일 나가겠다고 하면 이번 주의 수당은 내가 지급해 주겠소." 그는 자켓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내일 와서 지아코펠리에게 나가겠다고 이야기하시오. 주정뱅이 이야기를 하면 그도 이해해 줄 거요. 내가 게일을 당신 후임으로 오도록 부탁해 놓겠소.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니겠소?"

그가 돈을 세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알렉시스의 약해졌던 마음은 일순간 돌변하고 말았다.

"나는 절대로 그 돈 받지 않아요!"

"날 믿어요. 아가씨! 해가 될 짓을 하려는 게 아니오."

그가 정말 그런 마음이었다면 돈부터 꺼내 보인 것은 큰 실수였다.

"아뇨. 필요 없어요." 그가 내미는 돈뭉치를 쳐다보지도 않고 알렉시스는 단호히 말했다.

"알렉시스! 내가 세인트존스우드 근처에서 좋은 일자리를 찾아주겠다고 약속하겠소."

자신의 이름을 불리우는 것을 듣자 알렉시스의 마음은 조금 가라앉았지만 왠지 그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그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바짝 쳐들고 말했다.

"로버트씨! 분명히 말해 두지만 돈 따윈 필요 없어요. 그리고 당신의 약속 따위에도 관심 없고요!" 그리고 나서 그 녀는 벌떡 일어나 바람을 일으키며 문 밖으로 나와 버렸다.

 

3

다음날, 알렉시스는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언짢은 기분으로 보육원에 나갔다. 순수한 박애정신은 어제 저녁 이후 모두 박살이 나버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고분고분하게 따를 만큼 그녀가 어린애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소호라는 곳이 그토록 엄청난 우범지대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 주정꾼사건, 그건 순전히 운이 나쁜 탓이었다고 알렉시스는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 웨일즈인이 누누이 강조했듯이 그녀 역시 스스로를 자기가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의 생각을 온통 뒤덮고 있는 것은 오로지 게일을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인 듯했다. ? 물론 보수가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살아가기에 흡족할 만큼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알렉시스는 아이들이 흩어놓은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렇다면 그는 단순히 게일을 옆에 가까이 두고 싶어 그러는 것일까? 알렉시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라이스가 누군가를 보살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이나 그저 명령하는 타입이었으니까. 그럼 게일이 그런 걸 원했기 때문일까? 이를테면 별 이유 없이 남을 짓밟는 일 따위를 즐기는 것은 아닐까? 게일은 자신에게 한 마디도 말을 건넨 적이 없다. 그 침묵 뒤에는 그런 무서운 계산이 숨어 있었을까? 만일 게일이 자신에게 사정을 찬찬히 설명하면서 설득시켰더라면 자신은 그 자리를 양보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아무 말이 없고, 라이스가 나서서 그것도 그런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를 써가며 덤벼들 때야 알렉시스 자신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단순히 라이스가 자신의 완력을 과시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취했을까?

알렉시스는 그가 맥주잔을 움켜쥐고 친구들에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 일을 어떻게 잘 해결할 수 있었는지 떠들어대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때 갑자기 또 다른 생각이 고개를 불쑥 치켜들었다. 혹시 라이스와 게일 사이에 어떤 묘한 계약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 예리하게 빛나던 회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알렉시스는 행여라도 그들이 한패가 되어 클럽에서 무슨 잇속을 차릴 음모를 꾸밀지도 모른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엄마! 내 말 안 들려?" 빅토리아가 점심을 먹으며 식탁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말을 붙일 때까지도 그녀는 여전히 갖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난 지금 새미의 새 아저씨 얘기를 하고 있단 말이야."

알렉시스도 계속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건성으로 대답했다.

", 그러니?"

허드슨부인은 의아한 눈초리로 알렉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저씨가 새미를 공원에 데리고 가서 미끄럼틀 꼭대기에도 올려 주었다고!" 빅토리아는 끊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아저씨는 자기 엄마 침대에서 잠옷도 안 입고 잔대."

"네 친구 이름을 정확히 부르렴. 새미가 뭐냐? 사만다야 사만다!" 허드슨부인이 주의를 주었다.

"딸기 줄까?" 허드슨부인의 말에 빅토리아의 주의가 딴 곳으로 쏠리자, 알렉시스는 다시금 하던 생각에 빠져 버렸다.

그래, 라이스는 해적놀음이나 일삼을 모험가타입은 못되지만 오히려 그보다 더욱 영악스럽게 머리를 돌릴 수도 있어! 만일 그가 무슨 횡령 같은 범죄라도 저지르려 하고 있다면? 그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무법지대에서 하루 종일 생활하다보면, 그런 환경에 물드는 것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그 주정꾼 녀석을 골목으로 끌고 나가 때려눕혔을 터인데 그것 역시 범죄라면 범죄이니 말이다. 알렉시스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그 주정꾼에게 오히려 동정이 갈 지경이었다.

그녀의 상상력은 점차 극적인 쪽으로 치달았다. 처음엔 허드슨부인이 지아코펠리란 사람은 혹시 마피아가 아니냐고 했지만 지금 알렉시스 생각으로는 오히려 그 경호원과 그의 여자 친구가 음흉한 계략 같은 것을 꾸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알렉시스는 고발이라도 해야 할 사태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하지만 아직 심증뿐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상상력을 더욱 가속시켜줄 자료가 더 이상은 없었으므로 알렉시스는 거기서 상상의 뚜껑을 덮어두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지금 상황으로서는 그 노른자위 일자리를 라이스가 그의 여자 친구 앞에 대령해 놓으려는 행위를 철저히 훼방놓는 것밖에는 달리할 만한 일이 없었다.

 

"너 옷을 딴 걸로 바꾸었구나?" 알렉시스가 유니폼으로 갈아입는 것을 보고 수키가 말을 걸었다. 수키의 눈길이 하이네크로 처리된 빅토리아식 블라우스에 와 멈췄다.

"굉장히 점잖아 보이는데?"

알렉시스는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제 그 일이 있은 뒤 지아코펠리씨더러 전에 입던 블라우스는 너무 꼭 낀다고 말했더니 이걸 입어도 좋다고 하더군."

"겁장이 같으니라고!"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겁이 많은가 봐." 알렉시스가 대꾸했다.

"나야 카운터에서 앉아만 있는데 옷에 그렇게 신 써야 할 이유가 없잖니?"

알렉시스가 이렇게 덧붙여 말하고 있을 때, 밖에서 남자들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두 여자는 재빨리 거울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어떤 손가락이 갑자기 어깨에 와 닿는 것을 느끼고 알렉시스는 놀라 돌아보았다.

"어이쿠! 놀라게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디노가 해명하듯 말했다. 알렉시스는 어젯밤 일 이후로는 간이 콩알만 하게 줄어들어 다시는 커지지가 않는 것 같았다. 디노인 것을 알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수키가 눈을 찡긋 거리며 디노에게 어젯밤 일을 들먹였다.

"알렉시스에게 직접 들어 보세요."

"지금 얘기해 줄 수 있나요, 알렉시스?"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으나, 알렉시스는 어제 일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고 더구나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어수선한 틈새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기는 싫었다. 그녀가 우물우물하는 사이에 수키가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

", 아래층에도 좀 내려와 봐, 여기선 아래층 카지노가 곧 돈을 뜻한단다."

"돈을 뜻한다니?" 알렉시스는 귀가 번쩍 뜨인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떤 노름꾼들은 특별한 친절을 베풀지 않아도 팁을 두둑이 준단다. 특히 자기들이 이겼을 때는 말이야 돈을 마구 뿌려대지."

디노의 얼굴은 수키의 말이 못마땅한 듯 굳어져 있었다.

"어머, 그런 줄은 몰랐는데?" 알렉시스는 그런 이야기에 저으기 놀랐다. 처음 취직되었을 때부터 왜 그런 가능성들에 대해 도전해 볼 생각조차 품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적성에 그런 일은 맞지 않았던 까닭이리라.

"수입이 짭잘해." 수키가 디노의 언짢은 기색을 무시하듯 킥킥 웃으며 말했다.

"아래층엔 여자들이 많으니?"

"수시로 그 수가 바뀌지요." 디노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못을 박아 두어야겠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어쨌든 당신은 아래층 여자들과는 만날 일이 없을 겁니다. 카지노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다른 출입구를 사용하니까요." 디노는 친절히 덧붙였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곳이니만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다 만나 볼 수가 있지요."

"너 오늘 많이 배우는구나!" 수키는 계속 킥킥 거렸다.

"정말 그렇구나." 알렉시스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디노가 불현듯 팔을 걷어 올리고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소리쳤다.

"깜짝 잊을 뻔했군! 아버지에게 가볼 시간이에요. 하지만 금세 돌아올 겁니다. 끝나는 시간에 댁까지 모셔다드려도 될까요?" 부드러운 얼굴로 그는 알렉시스에게 정중히 말했다.

"친절하시군요! 감사합니다."

그가 사라지자 수키는 지쳐보이는 눈동자를 굴리며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디노는 정말 영국신사답구나, 저렇게 정중히 데이트신청을 하나 말이야!"

"단지 집에 바래다주는 것일 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다." 알렉시스는 곧 수키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넌지시 말했다.

"어쨌든 저 친구는 조심해."

 

일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자 알렉시스는 오늘이 이틀째라는 것을 실감했다. 어제보다는 조금 자리가 잡힌 것 같아 일도 한결 수월해졌다. 원래 할 일이 많은 자리도 아니었지만 점차 한가로운 시간이 많아지자 그녀는 라이스가 이번엔 또 어떤 식으로 자기를 괴롭혀올까 하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계산하여 돈을 받고 영수증과 거스름돈을 주고... 그런 일의 반복이었다. 처음엔 어설프게만 비치던 손님들의 모습도 차차 낯이 익게 되고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났을 때는 이틀밖에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자리가 그렇게 꼭 차지하려고 안달해야 할 만큼 값어치 있는 일인가하는 의구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11시가 가까워오는 데도 웨일즈인은 왠지 아무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아래층에 있으면서도 한 번 올라와 시비조차 걸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어쩌면 지아코펠리씨하고 뭔가 상의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 웨이터에게 라이스의 근황을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에게 이토록 마음이 쓰이다니! 단순한 적대감 때문 만일까?

그녀가 현금함을 옆구리에 끼고 카운터실의 문을 잠그고 있을 때 라이스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풀현에 알렉시스의 가슴은 마구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 서늘한 회색 눈동자는 그녀를 요모조모로 살피고 있는 눈치였다.

"오늘 저녁은 착실한 소녀로 되돌아가신 모양이군!" 그가 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말을 꺼냈다. 알렉시스는 아무런 대꾸 없이 문을 잠그는 일에만 신경을 쓰는 척했지만 좀처럼 문은 걸리지가 않았다. 손에 힘이 점점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찌된 셈인지 열쇠는 움직이기조차 않았다.

"내가 도와드릴까?" 더 이상 거만할 수 없는 태도로 라이스가 물었다.

"필요 없어요. 내가 할 수 있어요!" 알렉시스는 그를 힐끔 쳐다보고 내뱉듯이 대꾸했다.

라이스는 어깨를 추스려 보이더니 그녀가 하는 대로 지켜보기만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가 않자 알렉시스는 현금함을 카페트 위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열쇠를 움직여 보았다.

"열쇠가 부러지고 말겠군. 그쯤 해 두고 내 도움을 받으시는 게 어떻소?"

그녀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 라이스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내가 제안한 것 생각해 보았소?" 라이스는 열쇠를 돌리면서 알렉시스를 향해 물었다.

"아니요, 전혀!"

"내 생각으론 이런 지루하고 따분한 자리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인 것 같은데. 금붕어처럼 이 유리장 속에 갇혀 있는 것보다 나은 일자리가 있소."

"날 떠보는 건가요?" 속으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억제하면서 냉랭한 어조로 그녀가 물었다. 이렇게 사람을 자기 손아귀에 넣어 가지고 놀려고 들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천천히 잘 생각해 봐요."

알렉시스는 현금함을 다시 접어들고 라이스에게 열쇠를 빼앗듯이 잡아챘다.

"이러다간 아예 나를 길 밖으로 끌어내 내동댕이쳐버리지 않을까 겁이 나는군요!" 그의 거만스럽고도 뻔뻔한 태도에 역겨움을 느끼면서 알렉시스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어쩌면 나보다 당신이 먼저 지아코펠리씨에게 쫓겨나게 될지도 몰라요!"

라이스는 그녀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무슨 뜻이오?"

"무슨 뜻이냐고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당신이 그 여자친구와 짜고 여기서 무슨 음모를 꾸미려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아세요? 난 그렇게 바보가 아니라고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당신,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요? 고작 머리를 굴려 본게 그것밖에 안된다니 정말 한심하군. 내가 만일 부자가 될 욕심을 갖고 있다면 그래 겨우 당신의 그 몇 푼 안 되는 현금함이나 노릴 것 같소? 카지노엔 더 큰 돈뭉치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는데..."

알렉시스가 한 방 맞은 셈이었다. 사실 그랬다. 카지노에는 이따위 현금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돈들이 얼마든지 널려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이런 어리석은 발상을 해 내다니..

"난 당신을 그 딱한 처지에서 구해 주려는 것뿐이오. 내 말 정말 모르겠소?"

그리고 그는 문득 뜻밖이라는 눈초리로 그녀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옷차림을 바꾸셨군? 어제 일이 마음에 걸렸나? 지아코펠리씨가 왜 당신에게 길게 파인 블라우스와 타이트스커트를 입게 했는지 이유를 아오? 여기 있는 여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일종의 전시품 같은 역할도 동시에 하도록 되어 있지. 당신, 기왕이면 도로 어제 스타일로 차려입고서 지아코펠리씨에게 아양이라도 떨어 나를 몰아내버리지 그러오?"

알렉시스는 정말이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도대체 나를 뭘로 아는 거죠?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지아코펠리씨를 마치 음흉한 작자인 양 모독하는 말을 늘어놓고 있는데 당신자신을 돌이켜 보는 게 어때요? 당신은 스스로를 지아코펠리씨보다 낫다고 생각하나요? 내가 보기에는 비교할 수도 없이 형편없는 사람으로 보이는데요!"

"그렇소? 그럼 어서 가서 당신의 주인님에게 충성심이나 발휘해 보시오."

라이스가 그녀의 허리를 뒤에서 붙잡고 사무실 쪽으로 밀어댔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디노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늦어서 미안하오, 알렉시스!" 헐레벌떡 들어선 그가 숨을 몰아쉬며 황급히 말했다.

"잠깐 기다려요. 차는 밖에 있어요." 그는 아래층 카지노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당신, 그와 함께 집으로 가오?" 라이스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알렉시스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런 건 뭐하러 묻죠?"

그는 누군가 엿듣지 않는지 확인해 보듯이 한 번 빙 둘러 보았다.

"디노는 늑대 같은 자요! 그의 관심은 오로지, 오로지.. 말 안 해도 알겠죠? 그는 여자들을 유혹해 놓고는 자기 욕심을 채우면 언제 보았냐는 듯이 돌아서 버리는 게 보통이오."

알렉시스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디노를 헐뜯다니! 그렇게 신사적이고 예의바른 사람을.. 그녀가 막 입을 열려고 하자 라이스가 급히 가로막았다.

"내가 장담하는데 바로 그 신사적인 우리의 디노씨가 순진한 젊은 미망인을 필경은 바보 명청이로 만들고 말 테니 두고 봐요! 난 당신이 상처받는 걸 원치 않소."

알렉시스는 디노를 모욕하지 말라고 한 마디 하려 했으나 왠지 생각과는 달리 라이스가 그런 경고를 해 주는 것이 하나의 조그만 호의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실 디노에 대해서는 아직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유야 어찌됐든 라이스가 자신을 염려해 주고 있다는 사실과 그의 횡포를 생각해 볼 때 알렉시스는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양립될 수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렇게까지 걱정 안 해줘도 돼요. 당신 여자친구 걱정이나 해 주지 그래요."

라이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등을 살짝 밀었다.

"가서 그 현금함이나 죠에게 주고 오시오. 그리고 명심해요. 디노를 조심하라는 말!"

 

'디노를 조심하라'-알렉시스는 잘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몸을 사리게 되었다. 그녀는 며칠 동안 조심스럽게 디노를 관찰해 보았다. 매번 디노가 그녀를 바래다주었지만 언제나 정중했고 찬사를 연발하며 그녀의 환심을 사려했다. 그 외에 별 특별한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고작해야 손등에 키스를 하는 정도였다. 데려다 주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알렉시스는 점차 마음을 놓았다. 굳이 경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일요일 밤에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을 때는 이미 라이스의 경고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주말이 되기 전가지 라이스는 별로 공격적인 말따위도 하지 않았고 서서히 그녀의 자리를 인정해 주는 눈치였다.

지아코펠리씨는 그녀가 일을 능숙하게 해 내는 것을 보고 매우 흡족해 했다. 모든 것은 잘 되어나갔소, 알렉시스자신 역시 점차 카지노 베네치아의 카운터에 정착해갔다. 드문 일이지만 그 웨일즈인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눌 때는 일의 단조로움에서 잠시 벗어나 보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알렉시스에게 나가달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라이스와의 대화는 알렉시스로 하여금 그에 대한 혐오스런 첫인상을 점차로 엷어지게 만들었다. 그는 이런 거친 지대를 누비는 여느 불량스런 무식장이들과는 달랐다. 가끔 유머스런 화제로 그녀를 웃기기도 했고 다방면에 걸친 해박한 지식으로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홀에 있는 베네치아의 판화는 흔해빠진 거지요? 그렇지 않나요?"

어느 날 저녁 클럽의 장식물들이 화젯거리로 올랐을 때 알렉시스가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런 게 아니라, 카나레토라는 화가가 이곳에 살았었기 때문에 똑같은 판화들이 많은 거라오."

"런던에 말이에요?" 알렉시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여기 소호에 11년간이나 살았었소. 예전엔 이곳이 부촌이었거든요. 최근엔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게 변해버렸고 대신에 오물처럼 사회를 더럽히는 유흥가가 번창한 지역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요. 죤 로지 배이트가 최초로 이곳에서 몇 가지 텔레비젼 실험을 했다던가 혹은 모먼드 공작이 대저택을 갖고 있었다던가 하는 역사적인 사실은 모든 사람들에게 잊혀진 지 오래요. 소호가 회색의 콘크리트 숲과 비좁은 골목길로 되기 전 그러니까 푸른 초원이었을 때는 아마도 사냥하는 소리나 들리곤 했었겠지요." 라이스가 옛모습을 상상해 보듯 지그시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맺었다.

"역사 공부를 시켜 줘서 고마워요."

"책에서 좀 읽은 것뿐이오." 그는 겸연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라이스란 인물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어! 알렉시스는 그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이렇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자 그에 대해서 뭔가 알아낼 수 있는 기회가 훨씬 용이해진 셈이었다.

디노의 일요일 식사초대에 응해 놓기는 했지만 알렉시스는 조금 망설여졌다. 어머니의 감정이 누그러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눈치를 살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한테 빅토리아를 맡기고 외출할 셈이냐?" 어머니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보자 포에베 이모가 재빨리 말했다.

"내가 돌볼게."

"내 말은 일요일 하루쯤은 빅토리아와 함께 지내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그런 알 카포네같은 인물하고 어울려 다니는 것보다 말이야."

"난 어울려 다니는 게 아니예요. 정식으로 데이트신청을 받은 거라고요. 어머니께서 늘 주장하시듯이 그 영국신사에게 말이에요. 비록 부모야 이태리인이지만..."

"그는 우리와 달라." 어머니가 계속 우겨댔다.

"너무 편견을 갖지 마세요, 엄마!"

"그렇게 자주 만나다가는 올바른 판단이 흐려지고 너도 모르는 새에 그에게 빠져들고 만다." 허드슨 부인은 단호한 어투로 경고했다.

하지만 알렉시스는 자기가 경망스럽게 데이트에 응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디노가 집으로 자신을 데리러 올 때가 정말 걱정되었다. 어머니는 그 알 카포네 후보자에겐 문도 안 열어 주실 것같았으나 설사 들어와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하더라고 허드슨부인이 찬송가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디노는 아마 자기는 듀란듀란이나 아하체질이라고 대답할 게 뻔했다. 그 다음이야 더 생각해 볼 여지도 없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의 카지노는 브리지게임을 포함해서 모든 게 악마소굴 같죠."

저런 하필이면 브리지게임을 들먹이는 게 뭐람! 어이없게도 디노는 허드슨 부인의 언짢아하는 기색을 눈 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인심 좋게 웃고만 있는 포에베 이모와 자기의 천사 알렉시스를 번갈아 쳐다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알렉시스는 속으로 디노가 여기서 그만 이야기를 끝내고 함께 외식하러 나가자고 말해 주기를 빌었다.

허드슨 부인은 가능한 한 스스로를 자제하려고 애쓰는 듯이 보였다. 아마도 그들이 나가고 나면 예의 근심어린 탄성을 연발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알렉시스와 디노는 웨스트엔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디노는 유명한 호텔의 맨 위층에 자리 잡고 있는 스카이라운지로 그녀를 안내했다. 좌석은 미리 예약되어 있었다. 스텐드바아에서 간단히 한 잔 한 후에 그들은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그는 늘상 늘어놓는 찬사를 오늘도 잊지 않았다. 거의 비슷한 말투와 비슷한 단어들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그 찬사가 더욱 흡족하게 들려왔다.

음식도 서비스도 매우 각별했다. 아까 마신 와인 탓인지 알렉시스는 어머니에 대한 거슬림도 거의 잊고 있었다.

"밤마다 아버지와 그 클럽일만 아니라면 정말 마음편히 지내겠어요." 디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공손하게 담배를 피워도 되겠냐고 물었다.

", 괜찮아요." 알렉시스는 목에 걸린 금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가 느끼는 압박감을 그녀는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특별히 오늘을 위해 알렉시스는 호박색의 실크드레스에 아름다운 목이 드러나 보이도록 머리를 한껏 틀어 올렸다. 옷과 머리결의 부드러운 색조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가끔씩 클럽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요." 디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진 보통 철저하신 분이 아니예요. 특히 게임테이블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심하시죠. 내가 보기엔 너무 그러실 것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말예요. 도박은 내가 주관하죠."

"그토록 싫어하면서 왜 빠져나올 생각은 않죠?"

"내가요? 빠져나와요?" 디노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무역사업은 아직까지는 별 소득도 없는데다가 아버지가 모든 경제권을 쥐고 계시니 지금이야 내게 무슨 힘이 있나요? 하지만 두고 봐요! 내년엔 모든 게 달라 질 테니!" 그가 자신만만히 말했다.

"언젠가는 아버지께서 당신이 클럽의 모든 일을 도맡아 주기를 바라지 않으실까요?"

"아마 그러실 테죠. 하지만 그야 아버지의 일방적인 생각이시죠. 난 만일 클럽이 내 손에 들어온다면 좋은 값에 처분해버리겠어요." 아버지 의사에 도전하겠다는 태도를 강조하듯 그는 가슴을 쭉 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하시는 일보다 내 쪽이 더 낫다는 걸 입증해 보이겠어요. 물론 아버지는 실패하고 말 거라고 으름장을 놓으시겠지만 말이오."

잠시 디노는 담맷불이 타들어가는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난 내일 아버지의 심복 중 한 사람과 로마에 갑니다. 라이스가 이태리어를 할 줄 안다면 그와 함께 갈 텐데... 그는 아버지와든 나와든 손발이 잘 맞지요." 디노는 알렉시스를 바라보았다.

"라이스가 클럽의 경영권을 쥐고 있나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그는 실권자가 아니에요. 여러 가지 일을 맡아서 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함께 일한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았어요."

"6개월요?" 알렉시스로선 뜻밖이었다. 그는 적어도 몇 년은 그곳에서 일한 사람 같은 느낌을 주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아버지가 그를 본 건 작년 말이었어요. 체육관을 방문하셨을 때였어요."

"아버님이 체육관을 이용하시나요?"

알렉시스는 지아코펠리가 허리에 벨트를 두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녀가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겨우겨우 참고 있을 때 디노가 먼저 키득키득 웃었다. 그 역시 그런 모습을 떠올렸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잠시 후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점점 더 주인행세를 잘 해 내시죠. 귀찮은 일은 라이스에게 다 맡겨버리거든요. 사람들은 라이스의 근육만 보고도 기가 죽죠. 아버진 이런 일에 적임자를 만났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그 글로브를 낀 듯한 주먹은 우리 클럽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죠."

디노는 알렉시스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래지는 것을 보고 웃었다.

"그는 우리 아버지의 오른팔이죠. 또 내게 생길 귀찮은 일까지도 미리 알아서 처리해 주는데 그건 참 다행이에요."

"아버지가 이 사업을 당신에게 물려 주면 그를 계속 경호원으로 둘 생각인가요?"

"아까 말했듯이 난 그렇게 되면 클럽을 팔아치울 거니까 경호원 따윈 필요가 없게 돼요."

그가 담배를 비벼 끄며 이어서 말했다.

"이제 나갈까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오자 디노는 알렉시스를 위해 차 문을 열어 주고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이렇게 훌륭한 저녁을 대접해 주셔서 정말 고마와요." 알렉시스가 인사말을 하자, 디노는 그녀의 왼쪽 무릎을 꼭 잡으며 말했다.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우선 클럽에 들러서 내일 떠날 여행에 필요한 서류들을 좀 챙겨야 하고.. 그리고 나서 분위기 좋은 곳으로 갑시다."

능숙한 그의 손길은 곧 알렉시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금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지 않나요?" 그녀는 뭔가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려는 생각으로 질문을 유도했다.

"아뇨. 하루종일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지는 않아요. 집에서까지.."

알렉시스는 그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나, 점점 열정을 더해가는 손길과 그의 말을 이해해 주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얇은 실크드레스사이로 그의 손마디 하나하나가 모두 느껴졌다. 불현듯 수키와 라이스의 말이 동시에 떠올랐다.

'디노를 조심해' '디노는 조심하시오!'

그의 손길이 서서히 끈끈하게 느껴지자 알렉시스는 위기를 모면할 방편으로 간지럽다는 듯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주차장 안이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가 않았다.

"더 분위기 좋은 곳에는 다음에 가요. 지금쯤 들어가겠다고 말해 놓았으니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기다리시게 내버려 줘요." 디노가 조용히 속삭이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매일 밤 얼마나 당신을 원했는지 당신은 상상할 수도 없을 거요. 당신은 마치 밀로의 비너스와 쌍동이 같단 말이오."

알렉시스는 한편 불안스러우면서도 이런 극찬의 말이 싫지만은 않았다.

"가지 않으실 거예요?"

그녀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하지만 디노도 쉽사리 물러서지만은 않았다.

"당신은 여자가 아니오? 남편이 죽은 이후론 연애도 안 해보았나요? 당신은 남자의 사랑을 받고 싶지 않소?"

"물론..." 알렉시스는 대답을 하려다가 그의 말속에 자신을 유인하려는 함정이 있음을 직감하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인생은 짧아요." 디노는 자기의 생각이 지극히 타당하고 바른 논리임을 강조하듯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다른 한 커플이 그들 앞에 차를 세우자 알렉시스는 다시 디노에게 양해를 구하였다.

"우리 너무 지체한 것 같아요. 어머니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실 거예요."

"! 모든 잔소리꾼인 부모들은 멀리 사라져버리면 좋겠군!" 디노는 잔뜩 성이 난 어조로 투덜거리더니 잠시 후 소호를 향해 차를 몰았다.

"로마엔 얼마나 머무르실 건가요?"

"일 주일가량 내가 다녀오는 동안 기다려 주겠소?"

", 그러죠."

알렉시스는 그가 운전하느라 자기에게 더 이상 관심을 쏟을 수 없게 된 것이 다행스러웠다.

하여간 지금으로서는 제프의 죽음 이래로 디노가 그녀의 관심을 가장 끌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렉시스는 정말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어머니와 함께 지내온 3년 동안 젊은 그녀는 다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였지만 빅토리아때문에 한층 더 조심스러웠다. 만일 디노가 그녀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다면 더더욱 열광적으로 프로포즈해 올는지도 모른다.

알렉시스는 문득 사만다의 어머니를 생각해 보았다. 자기도 어떻게 보면 닐과 디노 이렇게 두 명의 아저씨를 갖고 있는 셈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알렉시스로선 추호도 징정한 사랑이 없는 육체적 쾌락만으로 결혼을 감행할 생각은 없었다. 디노에 대해 그의 진심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보고 나서 서로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깨끗이 손을 털 결심이었다. 그러니 그가 이태리에서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안기다리고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길 양쪽으로 차들이 줄지어 있었다. 디노는 차르 ㄹ주차된 차들의 뒤에 세워놓고는 알렉시스와 함께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클럽 안은 조용했다.

그는 알렉시스를 라이스가 데리고 갔던 적이 있는 그 방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라이스와 함께 들어와 본 후로는 처음으로 이 방에 들어왔다. 아마 이곳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이태리친구들을 이리로 보내기로 했는데.. 아버지는 그들이 로마에서 여기저기에다 자신의 존재가 어떤 것인가를 널리 퍼뜨리고 다녀 주기를 내심 바라고 계시죠." 디노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가서 서류를 찾아올 동안 뭐라도 한 잔 들고 있는게 어떻겠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가 사라지자 알렉시스는 디노가 주고 간 마티니를 한 모금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난번에 보았던 자기로 된 조각상들이 여전히 벽난로 위에 진열되어 있는 쪽에 그녀의 시선이 머물었다. 그것들은 매우 고가품임이 분명했다. 알렉시스는 그 중의 한 개를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 집어 들었다.

"여자들이 점점 비싼 물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는 것은 위험신호지."

굵직한 웨일즈인의 목소리에 놀라 알렉시스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조각상을 떨어뜨릴 뻔했다.

라이스가 양팔을 벌려 문지방을 짚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신전의 기둥이 무너지지 않도록 떠받치고 있는 삼손을 연상시켰다. 물론 삼손이 그처럼 희뿌연 잿빛 스웨터를 입고 있지는 않겠지만 그녀는 라이스를 노려보았다.

"제발 이러지 않으면 좋겠군요."

"무얼 말이오?" 그가 다가오면서 물었다.

"날 귀찮게 구는 것 말이에요. 그런데 쉬는 날 여긴 뭐하러 오셨죠?"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인데?" 수류탄을 되받아넘기듯이 그가 그녀의 말을 받아넘겼다.

"디노와 함께 외식하고 그가 여기에서 찾아갈 서류가 있다고 해서 같이 온 거예요. 그리고.."

그녀가 말을 채 맺기도 전에 라이스가 소리쳤다.

"디노와 함께 외출했다고?"

"그래요. 식사를 함께 한 것뿐인걸요."

"내가 위험하다고 누차 경고하지 않았소? 이 딱한 아가씨야!"

알렉시스는 조각상을 도로 제자리에 갖다놓고는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방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

"난 어린애가 아녜요. 더구나 당신에게 그런 일을 간섭받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요. 얘기를 못 알아듣는 쪽은 내가 아니고 당신이에요. 내 생각으론 디노의 그 세련됨과 예의바른 태도를 당신이 좀 본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내가 우리 사이에 대해 일일이 당신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다고 보는데요."

알렉시스는 그의 귀걸이가 눈에 띄자 인상을 찡그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 사이라! 그거 근사하군. 난 당신들이 '우리 사이'란 말을 쓸 정도로 가까와진 줄은 미처 몰랐소."

그의 얼굴에 언뜻, 여느 때와는 다른 분노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 우리 사이라는 게 얼마나 진전되었소?"

알렉시스는 좀 더 여유 있는 태도롤 보이느라 마티니를 홀짝홀짝 들이켰다.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런 건 왜 캐묻는 거죠? 마치 사설탐정 같으시군요!"

이 말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미안하오. 방해하지 않으리다." 그리고는 누가 엿듣지는 않는지 흘낏 둘러보며 말했다.

"어쨌든 사람이란 외양만으로 알 수 없는 법이오."

"당신은 어떻죠?" 알렉시스가 지지 않고 되물었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더니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이 보기엔 내가 이중인격자 같소, 아니면 디노가 그런 것 같소?"

알렉시스가 보기에 라이스는 반은 표범이고 반은 양 같았다. 그녀는 라이스에게 언뜻 호기심을 느꼈다. 요즘 보아온 그의 여러 가지 새로운 면모를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그는 디노보다 훨씬 나은 인물인지도 모른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지금 상황은 디노에게 달린 게 아니라, 매사가 당신의 태도에 달렸소. 내 말은 당신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언제인지도 모르게 그에게 갇혀 옴싹달싹 못하게 될 거라는 뜻이오."

라이스는 있는 힘을 다해 그녀를 설득시켜보려는 듯이 사정했다. 뭔가 그녀가 느끼는 것보다 더욱 애틋한 마음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듯했다. 알렉시스는 그가 좀더 구체적인 것을 말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이건 고작 첫 번 데이트에 불과해요." 알렉시스의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이오?" 그가 또다시 성가시게 추궁해왔다.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는데요." 그녀가 차가운 눈초리로 응수했다.

"디노는 너무너무 매력적인걸요." 솔직히 이건 진심이 아니었다.

"매력적이라!"

갈색의 가슴팍이 드러나 보이는 스웨터 앞자락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기면서 그가 외쳤다. 한심스럽다는 눈빛을 하고 있는 라이스를 보자 알렉시스는 그만 웃어버렸다.

"라이스! 그는 키도 크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이태리인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이고."

"얘기를 딴 데로 돌리시는군요. 그래요 난 젊어요. 연애를 하는 게 뭐가 잘못되었나요?"

"그것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고 상대가 누구냐가 문제란 말이오."

알렉시스가 미소를 짓자 그녀의 뺨에는 살포시 보조개가 패었다. 그녀는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끼었다.

"그럼 내가 당신을 나의 파트너로 택해 주기라도 바라시나요?"

"안될 것도 없지!"

뜻밖의 대답이었다.

"알렉시스 당신은 좋은 여자요. 남자를 사귈 때 어떻게 처신해나가야 하는지 쯤은 잘 알고 있을 것 아니오?"

"물론 그래요. 난 함부로 아무렇게나 행동하진 않아요. 난 헤픈 여자가 아니라고요."

"그렇소. 바로 그거요. 하지만 누군가 당신에게 불을 당긴다면?"

불은 당긴다? 알렉시스는 불현듯 제프와의 행복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불이 당겨지는 그 아름다운 순간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그 소중한 감정들을....

"그게 나라면 어떻지?" 느닷없이 그가 스웨터를 벗어던지고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의 손은 실크띠를 두른 그녀의 허리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알렉시스는 숨을 멈추었다. 그는 지금 표범이었다. 양 같아 보이는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들의 눈은 서로를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그녀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라이스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돌연 그녀의 입술에다 키스를 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기미를 보였더라면 그녀는 저항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틈을 주지 않았다.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녀는 반항을 체념하고 기운이 빠져버린 듯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가슴은 더할 수 없이 두근거렸고 뺨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그때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하오."

알렉시스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그와 얼른 떨어졌다. 지아코펠리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로 다정한 사람들을 보는 게 나쁘지만은 않았겠지만 그가 만일 알렉시스와 디노 사이를 알고 있다면 결코 기분 좋은 일일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선 뾰족한 변명이 쉽사리 떠오르지가 않는 법이다. 알렉시스는 기껏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 , 실은 제 눈에 뭐가 들어가서요.."

알렉시스는 라이스가 뭔가 변명을 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는 넉살좋은 표정으로 딴전만 부리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을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해놓고 방관만 하다니! 알렉시스는 울화가 치밀었다.

"이봐, 시간 있는 대로 나 좀 잠깐 보고 가게나." 지아코펠리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라이스는 폭소를 터뜨렸다. 알렉시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카롭게 쏘아 붙었다.

"그렇게 웃어댈 만큼 재미있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라이스!"

"디노가 나와 당신이 이러고 있는 걸 보았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는 자기 이야기가 신이 난다는 듯이 계속 디노에 대해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알렉시스에겐 그런 이야기들이 재미있을 턱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가 라이스의 흉계에 말려든 것 같았다.

"당신! 누군가 들어와 우리를 보기를 바라고 그런 거죠? 그렇죠? 그래서 소문이 퍼지고 결국 디노와 나 사이를 이간질 시키려고?"

"내가 그런 유치한 자로 보이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쩐지 신빙성이 없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수세에 몰렸다고 느꼈는지 옷을 주워 입으며 쌀쌀맞게 "당신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4

디노의 태도에 별 변화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지아코펠리는 그가 목격한 장면을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혹시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것은 아닐까하고 유난히 살펴보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디노는 여전히 이런저런 찬사를 퍼부으며 유혹의 시선을 던졌다.

디노는 이태리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녀를 두 번째로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알렉시스는 대뜸 수락하고 말았다. 그녀는 내심으로 심술궂은 재미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스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기를 궁지에 몰아넣을 속셈으로 둘의 포옹장면을 남에게 노출시키려들었던 생각해 보면 그렇게 분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가 또다른 식으로 함정에 빠뜨리려 든다며? 이번엔 그리 수월치 않을 것이다. 같은 괴에 두 번식 넘어갈 알렉시스는 아니었으니까. 그의 팔에 안겨 있을 때 알렉시스는 까닭모를 불안과 불편한 감정을 느꼈던 게 사실이다. 결국 라이스란 인물은 자기타입의 남자가 아닌 걸까? 그리고 그 볼상 사나운 귀걸이만 아니라면 악마제왕의 허세와도 같은 위풍당당함은 무언가 그를 신비롭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이 비록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기는 했을지언정 그것도 하나의 매력 포인트라는 것은 그녀 역시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디노처럼 지극히 세련된 매너를 갖고 있거나 표지모델처럼 근사한 타입은 못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엄청난 도도함과 자기 세계에 대한-알렉시스가 아직 잘은 알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확고부동한 신념이 이 모든 것을 덮어 누를 만큼 강렬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밀랍인형이 아닌 살아 있는 남자였던 것이다. 만일 그가 그 귀걸이를 없애버리고 긴 머리를 짧게 깍는다면 그리고 평범한 직업에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알렉시스는 그에게 어떠한 감정을 느꼈을까? 사랑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이런 의문은 모두 가정일 뿐이다. 그는 알렉시스가 생각 해온 이 현실세계와 대비시켜 본다면 이단자에 지나지 않는다.

일주일 내내 알렉시스는 라이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결심으로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는 그림자조차 비추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얼마나 비겁자인지 똑똑히 알도록 마구 퍼부어 주려고 작정했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나타나 주질 않자 그 모든 계획이 다 시들해져버리고 말았다. 화는 가라앉았으나 그에 대한 생각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몰아내보려는 시도는 어이없이 무산되어 버리고 말았다.

주말이 되어 그가 카운터 앞에 나타났을 때 알렉시스는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문을 삐끔 열고 종이 한 장을 그녀 앞에 들이밀었다.

"이건 세인트존스우드에 있는 호텔이름과 전화번호요. 주이니 바의 스태프를 추가로 모집하고 있소. 5일 근무제요." 그가 알렉시스 쪽으로 다가오며 낮게 깔린 소리로 계속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 일자리를 주선해 보겠소."

이렇게 끈질긴 그녀에 대한 압력은 알렉시스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였다. 이 친구는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모양이었다.

"아직도 나를 몰아내실 생각이신가요? 이젠 그만두신 줄 알았는데..."

"....."

"날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은가요?"

"이봐요, 이건 사사로운 감정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제발 날 믿어요! 진정코 당신에게 해가 끼치려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러세요? 그럼 당신은 동시에 두 여자 걱정을 해 주는 건가요?" 알렉시스의 갈색 눈동자에 희미한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내대신 게일에게 그 일자리를 줄 수도 있잖아요! 그건 왜 안 되는 거죠?"

"왜냐하면 여기보다는 그곳이 당신에게 더 안전하기 때문이오."

"안전? 당신이 나를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난 이곳이 더 편해요."

"그 호텔은 당신 집에서 겨우 5분 거리요. 게다가 마담 터소우의 납 인형관(런던에 있는 터소우라는 전시관)의 인형처럼 하루종일 유리창 안에 갇혀 있지 않아도 되오. 일도 어렵지 않고 보수도 여기와 같소. 그리고 거기 오는 손님들은 소호같은 부류가 아니라 한층 고상한 사람들이오."

알렉시스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운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거기에 사는 줄은 어떻게 알았죠?" 알렉시스는 라이스가 자신의 사생활까지 손바닥 보듯 훤히 아는 것이 기가 막혀 힘없는 소리로 물었다.

라이스는 이마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멋적은 듯이 씨익 웃었다.

"내 숙제를 해결하려다 보니까."

"그밖에는 또 나에 관해서 뭘 하고 있죠?"

"그게 전부요. 일이 끝난 후에 내가 집까지 바래다주어도 되겠소? 재규어로."

"그건 디노 차잖아요?"

"디노의 차는 아버지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산 거요. 그리고 그 차는 클럽의 소유지 개인소유가 아니오."

"고맙지만 사양하고 택시로 가겠어요."

"정숙한 숙녀가 야밤에 택시를 기다리고 섰는 것보다는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혹시 톰일지 딕일지, 또 해리일지 모르는 녀석이 당신에게 지난번처럼 수작이라도 걸어오면 어쩌겠소?" 그러면서 그는 웃었다.

알렉시스는 이런 친절과 배려도 모두 다 조작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사람에게 좀 더 냉담하고 독살스럽게 굴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를 피하기보다는 일주일 내내 그와 대결하려고 결심했던 것처럼 잘 대처해 나가는 게 현명하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라이스가 제안한 일자리를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자기는 계속 적어도 당분간은 카지노 베네치아에서 일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었다.

라이스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몰았다. 별로 화가 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말이 없으면 없을 수록 는 어색한 감을 느꼈다. 그가 또다시 일자리 이야기를 꺼내면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한 마디 해 주려 했으나 정작 그는 그녀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라이스는 신호등이 바뀌자 차를 세우고는 무엇을 생각하는 지 넋이 나간 모양으로 핸들을 잡고 있었다. 파란신호로 바뀌자 뒤에 있던 차들이 일제히 클랙슨을 누르기 시작했다. 라이스는 황급히 차를 앞으로 몰았다. 다음 구역에서 또 다시 신호에 걸렸을 때, 차들은 좀 전보다 더 많이 몰려 있었다. 기어가 말을 잘 듣지 않는지 라이스는 투덜거리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 통에 그야말로 생지옥 같은 장면이 전개되었다. 욕설이 오가고 뒤에 있는 차들이 빵빵거리며 안달을 하였다. 이런 사거리에서 그것도 혼잡한 시간에 기어가 말을 안 들어 먹다니!

하지만 알렉시스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라이스가 쩔쩔매는 것은 처음 보았으니까.

결국 그들은 그 지옥 속에서 탈출하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원 세상에, 이런 일은 처음이군!" 라이스가 툴툴거렸다.

"내 몰건은 이런 일이 없지. 다 디노 덕택이오. 이런 수난을 당하게 만들다니! 평소에 차를 제데로 돌보지 않아서 그래요. 팔이 빠질 지경이군."

"몰건 자동차를 갖고 있어요?" 알렉시스가 놀라운 듯 물었다. 제프가 생전에 얼마나 그 차를 갖고 싶어 했던가! 그 멋진 스포츠카를.. 그러나 그 차는 한 번 구입하려면 일시불로 하지 않는 이상 7년은 기다려야 했다. 그렇다고 단번에 사들일 수 있는 현찰이 그들 수중에는 없었다.

"8기통엔진이지. 이 차와는 비교도 안되요." 라이스가 자랑스러운 듯 떠벌였다.

"그 차를 웨일즈에 잠시 두고 이리로 왔을 땐 정말 참을 수 없었다오."

차이야기 후로 그들은 다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알렉시스가 불현듯 질문을 던졌다.

"지아코펠리씨의 주변인물들과는 무슨 교류가 있는 거죠?"

그러자 그가 그녀 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당신은 뭐 들은 게 있소?"

"아뇨. 아는 건 없어요. 수키가 그러더군요. 당신이 지아코펠리씨의 다른 사업에도 관계되어 있을 거라고."

"그 여자,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이고 다니는군."

"혹시 방탄조끼 같은 거라도 입고 다니는 거 아니에요?"

그녀가 빈정거리듯 농담을 했다.

"매일 텔레비젼 앞에서 바보가 되어버리신 모양이군." 차가 또 다른 교통 혼잡 속에 놓여있을 때 그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남자와 여자의 사고방식에는 참으로 차이가 많은 모양이에요. 내 남편한테서 그런 걸 느꼈었죠. 인간으로서의 근본적인 차이랄까. 뭐 그런 거 말이에요. 내 남편도 방탄조끼를 입은 걸 본 일이 있어요."

"남편 직업이 뭐였는데요?"

"경찰관이었어요."

차가 갑자기 급정거하는 바람에 알렉시스는 하마터면 앞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빨간 신호등이었다. 금세 신호가 바뀌자 차들은 저마다 다투어 쏜살같이 앞으로 밀려나갔다.

"지아코펠리씨가 그 사실을 알고 있소?"

"."

그의 표정은 놀라움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두 가지 다이거나 그 중 아무것도 아닌지 종잡을 수 없는 묘한 모습으로 일순간 그녀에게 읽혔다.

", 얘기를 했는지 안했는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질 않네요."

"당신이 말했는지 아닌지도 기억이 나질 않소?" 주눅 들린 표정으로 그는 조그맣게 물었다.

"파란 불이에요."

엔진이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차는 복잡한 도심을 빠져나와 조용한 가로수 사이를 질주하고 있었다.

"당신 남편은 매트로폴리탄 경찰서에 근무했소?"

"아니요. 켄트에서 일했어요. 그는 죽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사법경찰이 되려고 애썼지요. 승진하려다 결국 그 모양이 되고 말았어요." 알렉시스는 먼 하늘을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켄트?" 잠시 멈칫하더니 라이스는 계속해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일하다가 어떻게 죽었소?"

그녀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이켜 생각해 본다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지난 일들을 한 가지씩 떠올려 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이는 일이 서툴렀어요. 갱영화에서나 나오는 보안관처럼 그렇게 무엇이든 일이 다 잘 풀릴 줄 알았던 거죠. 경찰에 들어간 이유가 위험과 그에 따르는 흥분을 경험하고 싶었던 거였어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죠. 위험이 수반되면 될수록 생명은 위협을 받게 되는 거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충실한 의무감 없이는 해나가기 힘든 일이라는 점이었어요. 남편은 그걸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거예요. 그는 결국 자기 일에 조금씩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어요. 지명수배자가 마을에 나타난 거예요. 그이는 그를 추격하게 되었죠. 사냥개가 사냥감을 쫓아가듯이 말이에요. 그는 런던까지 범인을 체포할 것을 명령받았죠. 그때 그이는 너무나도 꿈에 부풀어 있었어요. 자신의 허탈감을 만회할 좋은 기회라 여긴 거죠. 그런데 정작 범인은 잡았지만 끝내 증거물은 찾아내지 못하고 말았어요. 그래서 그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고 말았지요. 그이에겐 모든 게 무너지는 소리로 들렸을 거예요. 그는 넌더리를 냈죠. 그러다가 결국 뛰어든 일이 카레이서였어요. 전문적으로 다년간 훈련받아온 선수들과 겨루자니 그 결과 또한 뻔한 것 아니겠어요? 내가 누차에 걸쳐 제발 그만 두라고 사정해보았지만 허사였어요. 결구.. 결국, 죽고 말았죠. 26살의 막 피어나는 나이에..."

무슨 말을 더 이상 할 수 있을까! 라이스도 알렉시스도, 그녀의 그 쓰라린 옛 기억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다.

"미안하오, 내가 쓸데없는 얘기를 꺼낸 것 같소."

"아니에요. 다 지나간 일인걸요." 알렉시스의 속눈썹에서 눈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카레이스에서 죽지 않았더라도 결국 어디에선가 죽고 말았을 거예요. 모든 일을 칼날 위에 선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몰아붙이는 성격이었으니까요."

가로등 불빛이 차창 앞으로 쓸쓸히 부서져 내렸다. 맞은편에서 뜸하게 차가 한대씩 스치고 지나갈 뿐, 길은 한적한 편이었다.

"그이는 자기가 기혼자이며 자식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사람 같았어요. 우리가 결혼한 이유도.."

알렉시스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싶었는지 뚝 그쳐버리고 말았다.

"당신은 아직 미혼이시죠?" 알렉시스가 물으며 돌아보았다.

"? ...그렇소. 처음에 왼쪽으로 돌고 다시 우회전, 그리고 다시 네 번째 집 맞소?"

"맞아요." 알렉시스는 기운 없이 대답했다. 어쩌다 자기의 과거를 라이스에게 모조리 털어놓게 되었는지 그녀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차는 점점 집 앞에 가까와졌다. 그가 시동을 끄자 정적이 흘렀다. 알렉시스가 손잡이를 돌리려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아직 가지 말아요."

라이스는 앞쪽으로 몸을 굽혔다가는 다시 뒤로 기대어 앉으며 자기의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정말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그동안 나 때문에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았군요."

"그렇게 이해해 주시니 오히려 감사하군요."

그의 표정은 몹시 굳어 보였다.

"물론 게일에게 내 자리를 내 주지 못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나도 나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예요. 내년이면 딸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요. 그러니 그전에 좀 더 바쁘게 뛰어야 되지 않겠어요?"

"절대로 내가 소개하는 일자리엔 가지 않을 작정이오?"

", 내 힘으로 해결이 되는 한 남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아요. 더구나 지금 일에 만족하고 있고요. 그러니 더 이상 애쓰지 마세요."

"당신은 잘 몰라, 렉시!" 라이스가 팔을 그녀의 의자 위로 돌려 두르며 중얼거렸다.

렉시! 전에도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애칭을 불러 주었던 사람이 있었지.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 소리에 알렉시스의 마음은 몹시 산만해졌다.

"나도 당신을 계속 괴롭히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내 입장에선 어쩔 수가 없소."

"왜죠?"

"우리의 이야기는 언제나 다람쥐쳇바퀴 돌 듯하는군. 좋소, 그렇다면 내가 이만 단념하지. 당신을 설득시킬 수 없으니 말이오."

"그럼 더 이상 클럽을 나가란 소리 안할 건가요?"

"안하지."

"그리고 다른 일자리를 주겠다는 말도?"

"그렇소."

"더 이상 소호에서 아웅다웅하지 않기로 하는 거란 말이죠?"

"그렇다니까. 내 말 못 믿겠소? 내가 당신 발밑에 엎드려서 사죄라도 해야겠소?"

그가 양보하는 자세로 나오자 알렉시스는 점점 더 기가 살아 그에게 지난날 자기가 받았던 억울함을 보상받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그럼요! 그렇게라도 해야 마땅할 거예요."

"원 세상에! 금세 기고만장해지셨군. 이 지구상 어딜 가도 당신같이 끈질긴 여자는 또 없을 거요." 그는 두 팔을 벌려보였으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알렉시스의 대꾸에 두 사람은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야 겨우 화해하게 된 셈이다. 알렉시스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서 보는 그의 모습은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속삭였다.

"카리아드!"

알렉시스는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이 신기한 단어가 자신에게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순간 그의 키스는 여느 때의 그것과 확연히 달랐다. 뒤에 숨겨진 무엇이 있는 계산된 키스이거나 공격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순수한 입맞춤 그저 사랑의 뜻으로 충만한 그런 것이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걸 알아차렸다. 경직과 위협감이 아니라 부드럽고 촉촉한 달콤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입술이 온통 그녀를 뒤덮고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갑자기 통증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곧 그의 입술을 더욱더 찾는 마음이 점차로 피어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난 이러면 안 되는데..."

알렉시스는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깊은 입맞춤! 그러나 입술과 입술 사이를 오가는 사람의 불길은 아랑곳없이 라이스는 무언가와 홀로 싸우고 있는 듯했다.

그들의 호흡이 서로 뒤섞여질수록 점점 더 서로를 가까이 하고픈 마음은 커져만 갔다.

"이러면 안 돼."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라이스의 입술은 이미 그녀의 부드러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 그 향긋하고 부드러운 내음을 만끽하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그의 목에 감았다.

"안 돼!"

그는 갑자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나지막이 부르짖었다.

"안 돼, 렉시! 우린 이러면 안 돼."

그러나 서로가 너무도 강렬하게 원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듯 그들의 마음은 또다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한 말을 금세 다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다시 입술을 살포시 포개었다.

그들 사이에 뜨겁게 치솟는 열정은 무모한 도전화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의 셔츠에 달린 지퍼를 내리고는 셔츠 속으로 깊숙이 손을 집어넣어 따스한 체온이 감도는 살갗을 더듬거렸다. 그녀는 그것을 느끼는 순간 몸을 바르르 떨었다.

"!" 라이스는 그녀의 목덜미에 기대어 일순 격렬하게 외쳐댔다.

"당신과 함께 이대로 영원히 있고 싶어." 엄청나게 굵어진 목소리로 라이스가 속삭였다. 그의 손은 그녀의 등을 더듬어 올라갔다.

"나를 안아 줘, 카리아드!"

그녀의 손길을 애타게 그리는 듯 그가 중얼거렸다.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격렬하게 입을 맞추었다.

알렉시스는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는 이 짜릿한 쾌감에서 비롯되는 주체 못할 신음을 내뱉었다.

"라이스.. ..." 그녀는 자기의 감정을 그에게 전하고 싶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지금은!"

라이스가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가만히 대었다. 그리고는 마치 누군가 억지로 그의 손을 잡아끌어내리듯 손을 내리고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깊고도 고통스러운 한숨과 함께...

"미안하오, 카리아드!"

모든 열정은 서서히 사그라들고 엷은 여운만 남아 있었다.

"우린 이러면 안돼 렉시!"

그가 왜 자기를 원하면서도 거부하는지 알렉시스는 궁금했다.

"왜 안 되는 거죠?"

"말할 수 없소, 아니 무어라 표현해야 될지를 모르겠소." 그의 눈은 멀리 어둠 저편을 조용히 응시했다.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인가요?" 알렉시스는 옷매무새를 고치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소. 나 혼자 해결해야 될.. 그러나 지금.."

뭔가 얘기를 하려다 말고 라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난 단지 당신을 개입시키고 싶지 않을 뿐이오." 그리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가 보오."

머리를 뒤로 젖힌 채 차의 천장을 올려다보는 라이스를 그녀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당신이 소호에서 경호원노릇을 하고 있는 거나 내가 일하고 있는 거나 다를 바가 없어요."

알렉시스는 혹시라도 라이스가 콤플렉스 같은 것을 갖고 있지나 않은가 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었다.

라이스는 갑자기 껄껄 웃으면서 자신의 귀걸이를 톡톡 건드렸다.

"당신, 이것 싫어하지?"

"귀걸이 따위를 한 남자는 사실 내 취향에 안 맞아요."

그러나 라이스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그래, 내가 당신의 취향에 안 맞나?" 그는 어두운 눈동자를 굴리며 다그쳤다.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요. ." 알렉시스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디노는 당신 취향에 맞으시나?"

"디노는 신사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기어들어갔다.

"당신은 당신 일에나 충실하고 디노와의 관계는 제발 청산해요. 부탁이오."

"질투하는 건가요?"

"질투? 아무튼 그는 위험한 인물이오."

이토록 강경한 단언에 알렉시스는 기분이 상했다. 라이스와 자기의 사이가 아직은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서 이런 간섭을 받는다는 것이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다음 일요일, 그와 저녁약속이 있어요."

"갈수록 태산이군! 당신은 왜 나를 원하면서도 디노의 데이트신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거지?"

"내가 당신을 원한다니, 누가 그러던가요?"

그녀는 곧 그의 손길을 용납해 주었던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만일 지금이라도 그가 이 도도한 태도를 철회하고 아까와 같이 그녀에게 접근해 온다면 이처럼 껄끄러운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 그렇다 칩시다. 날 원하지 않든 원하든 간에 디노와의 사이는 얼마나 진전된 거요?"

알렉시스는 그가 마치 자기를 천하게 굴러먹는 여자로 취급하려 드는 것 같아 몹시 불쾌해졌다.

그는 어느 사이엔가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마치 자기의 손아귀에 들어온 양 큰소리치는 듯했다.

"우리 사이는 별것 아니예요. 당신은 정말 추잡한 상상이나 일삼는 모양이군요!"

그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들었으나 라이스는 반응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빛이 짙게 깔렸다.

"잘 자요, 알렉시스." 그는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시동을 걸고는 그녀를 세워 둔 채 떠나가버렸다.

 

5

'당신과 함께 이대로 영원히 있고 싶어!' 이 말은 끝없이 그녀의 귓전을 맴돌고 또 맴돌며 하나의 멜로디처럼 남아 있었다. 그녀는 라이스와 차 안에 있던 밤에 자기들이 찾고자 하던 이야기의 실마리조차 잊고 있었다. 전엔 자신이 이토록 라이스를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제프와 함께 했던 시절처럼 라이스의 행동은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가 태도를 냉담하게 바꾸어버린 순간 그녀의 심정은 급속도로 질주하던 차에 급브레이크를 밟는 것과도 같았었다. 아무튼 비록 냉정하고 쌀쌀맞은 모습으로 라이스가 돌아서 갔을지라도 그들 사이의 벽이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알렉시스는 제프와의 일을 기억해 보았다. 그는 늘 자기에게 얼마나 다정했으며 따스하게 해 주었는지를.... 그녀는 그것으로써 남편의 다른 단점을 용납해 줄 수 있었다.

그들이 함께 한 세월은 비록 짧았지만 박진감 넘치는 시간들이었다. 알렉시스가 레스토랑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 사건은 진행되었다. 알렉시스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녀의 오랜 학교 친구는 수년간 이미 이 동네에서 살아온 터였다. 아버지가 남기신 얼마 안 되는 유산으로 근근이 버티어오며 알렉시스를 뒷바라지해 주던 어머니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그녀 나름의 새로운 장을 펼쳐 보일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그녀 나이의 인생에는 흥미로 가득 찬 것뿐이었으니까! 경제적인 독립은 다른 모든 면에서의 독립도 가능케 했다.

그녀가 일하던 레스토랑은 소규모였기 때문에 바쁜 시간에는 그녀 역시 음식 만드는 일에서부터 장보기와 마루닦기, 웨이트리스노릇까지 다 해야만 했다.

그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곳에 경찰서가 있었다. 알렉시스나 그녀의 친구나 이제 혼기가 다 찬 처녀들이었다. 하지만 젊은 순경들이 그녀들의 주변을 맴도는 일이 생기고부터는 처녀시절도 오래가지 않았다. 처녀들에게야 결혼이 최종의 목표일 테니까.

알렉시스는 제프 아닌 다른 남자가 그 목표의 상대가 되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제프는 재빨리 자기의 사랑을 고백했고 알렉시스가 찬찬히 자기 생각을 정리해 볼 기회를 갖기도 전에 결혼식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결혼 후에도 알렉시스는 계속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곧 빅토리아가 태어났지만 제프에게 있어 아이의 의미는 오후의 티타임 정도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일에만 열심이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자동차경주에 개입하게 되었고 그것이 결말이었다.

알렉시스는 빅토리아가 창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자기 무릎에 안아 올렸다. 금요일 오후면 그들은 런던시내로 가끔씩 나들이를 나서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요새 사만다와 함께 무용반에 들었기 때문에 발레슈즈와 스커트가 잠자리 날개처럼 얇게 퍼진 예쁜 발레복을 갖고 싶어 했다.

"선생님이 전부다 엷은 분홍색으로 하랬어." 네 살짜리 꼬마아가씨는 점잖게 말했다.

"그리고 머리에 달 리본도 있어야 돼."

알렉시스는 계속 차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당신과 함께 이대로 영원히 있고 싶어!'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날 밤 라이스의 뜨거운 손길과 달콤한 입맞춤을 떠올려 보았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점점 달아오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가 돌변해버린 것은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가 야속하고도 미웠다. 그 밤이 지난 다음날 저녁 그들 사이에는 또다시 어떤 거리감이 새롭게 생겨나 있었다. 그의 태도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차라리 그들 사이에 어젯밤이 없었던 것만도 못했다. 하지만 예전의 그 거만하고 도도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는 침착을 잃지 않으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언가 조심스럽고 불안해하는 구석이 있었다.

"넘어지겠다!"

빅토리아가 발레 옷을 살 생각에 부풀어 인도를 깡충깡충 뛰자 알렉시스가 주의를 주었다.

그녀는 자기가 그토록 쉽게 뜨거운 반응을 나타내었던 것이 스스로도 의아했다. 아마도 혼자 지낸 3년 동안 그녀 자신이 느끼지 못한 사이에 보호받고 또 사랑받고 싶다는 본능이 어딘가에 내재되어 있다가 갑자기 드러난 것 같았다.

라이스는 이교도의 동물적인 최면으로 그녀를 그 잠에서 깨워냈다. 그녀가 처녀시절 검은 가죽시트에 올라탄 오토바이족들에 매료되었던 것처럼 그녀를 끌어당기는 힘이 라이스에게는 있었다.

알렉시스는 간혹 자기 주변에 있는 남자라고는 유일하게 닐뿐이었으므로 싫든 좋든 결국 그에게 빠져들게 되지나 않을까하고 염려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닐은 '다정한 이웃'에 불과했다.

"우리가 가는 데가 이 근처야 엄마?" 뜀뒤기를 멈추고 실눈으로 반짝이는 태양을 바라보며 빅토리아가 물었다.

정말 찌는 듯한 오후였다. 햇빛은 도심의 열기를 거의 폭발지경으로 만들고 있었다. 소녀들은 짧고 귀여운 여름옷차림이었고 남자들도 대부분 반소매 셔츠차림이었다. 사람들은 지친 듯이 공원의 잔디에 눕거나 벤치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대부분 선글라스를 끼었거나 차양으로 얼굴을 가려 덮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 사만다 엄마 말로는 발레옷가게가 옥스퍼드 서커스장 근처라고 했어.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그 엄마도 모른대."

"엄마, 우리 길 잃어버린 거 아니지? 찾을 수 있는 거지?"

"물론이지."

걱정스러워하는 딸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알렉시스가 안심시켰다.

"내가 약속할게, 오늘 오후에 꼭 너의 발레복을 사 준다고 그리고 우린 절대로 길을 잃어버리지 않아. 엄마가 저녁때 일하는 클럽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거든."

그들은 천천히 목적지를 찾아 걷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알렉시스는 옥스퍼드 서커스장으로 가는 길을 잘못 들어선 게 아닌가하고 염려되기 시작했다. 사거리로 다가갈수록 더욱더 혼잡하여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야 했다. 행인들과 차들로 거리는 몹시 붐볐다. 건너편을 바라보다가 알렉시스는 사람들 사이로 힐끗 보이는 옷가게를 발견해 냈다. 그런데 바로 그 앞에 세일러복스타일의 티셔츠 청바지차림의 사나이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커다란 키와 벌어진 어깨 그것은 분명 라이스였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는데 마치 범죄자의 하수인처럼 거울면처리가 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고상한 카페트 위로 흰 자켓을 걸치고 다니던 라이스와 지금의 그를 비교해 보았다. 잘 아는 사람이면서도 그는 전혀 딴 인물 같아 보였다.

그녀는 빅토리아의 손을 곡 쥔 채로 그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자 사람들이 정신없이 몰려오고 몰려갔다. 그때 경관 한 사람이 라이스의 어깨를 붙잡더니 서로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 왜 빨리 안가?"

알렉시스는 상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고개를 길게 빼었다.

경찰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걸까?

"엄마, 뭐해?"

"조금만, 빅토리아."

알렉시스가 한눈을 판 사이에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이 서 있던 앞의 건물은 분명 메트로폴리탄경찰서였다. 그리고 들어갔을까?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알렉시스는 경찰과 함께 서 있던 라이스를 생각하자 가슴이 섬뜩했다. 그들은 당순한 친구 사이였을까? 아니면 다른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이를테면 라이스에게 범죄기록같은 것이라도 있다면? 알렉시스는 잠깐 아찔했다. 그녀의 남편이 경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라이스가 묘한 표정을 짓던 것도 떠올렸다. 대체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가게 점원이 빅토리아에게 축소판 폰테인(영국의 여류 무용가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음)같다고 칭찬해 주자 그 꼬마소녀는 으시대며 가게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아이, 귀여워라!"

허드슨부인은 회색이 만연한 얼굴로 손녀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어머니의 기분이 매우 좋아진 것을 보고 알렉시스는 디노와의 두 번째 데이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기회는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특별히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동안 알렉시스는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지만 라이스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디노는 자기가 이태리에서 고급향수를 사다가 그녀에게 선물한 일을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니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는 오늘도 아버지에게서 예의 꾸지람을 듣더니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알렉시스는 여전히 카운터에 앉아 라이스에 관해 이모저모 공상을 해 보았다. 그가 건물 앞에서 사라졌던 것을 여러 가지로 분석해 보았지만 신통한 해답이 나오질 않았다. 지아코펠리는 자기의 오른팔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알렉시스는 의아했다. 그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는 게 도리일까?

일요일저녁 식사를 함께 나누면서 알렉시스는 디노에게 라이스에 대해 넌지시 물어보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밤색과 흰색의 체크무늬 테이블로 덮여 있는 식탁이며 엷은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는 청동제의 말 그리고 벽에는 그날그날의 메뉴가 적힌 작은 나무패가 붙어 있는 그런 평범한 곳이었다. 음식은 깔끔하고 맛있었다. 디노는 그녀가 이야기를 꺼낼 틈도 주지 않고 계속 지껄여댔다. 영국식자수가 놓인 어깨가 노출된 그녀의 드레스가 얼마나 그녀와 잘 어울리는지 그리고 그녀의 부드러운 우유 빛 피부가 얼마만큼 자기를 감동시키는지에 대해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꽃과 같소, 목련화라고나 해야 할까요?"

그녀는 그의 아첨에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그보다는 빨리 라이스에 대해서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찬사는 점점 도를 더해갔고, 디저트로 커피를 들고 있을 때에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끄집어 낼 기회를 기다리며 리큐르를 조금씩 마셨다.

그녀는 디노가 잠시 말을 멈춘 틈을 타서 클럽이 경찰과 무슨 관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디노는 자신의 턱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우리가 뭔가 불법적인 일이라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오?"

알렉시스는 그가 찬사를 아끼지 않던 이제까지의 태도와는 달리 정색하는 걸 보고는 뭔가를 캐어내기는 힘들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게 더 현명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 난 혹시 경찰에서 게임 룸의 면허나 점검하러 나오지 않을까 해서 물었던 거예요. 혹시 그들이 고용자의 행적에 대해서도 알아보려 든다면 그런 일은 귀찮으니까 말이에요."

"무얼 알고 싶은 건지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않겠소?" 디노가 담배연기로 동그라미를 멋지게 만들며 물었다. 그녀는 그가 자기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소스라치게 놀라 알렉시스는 다시 리큐르 잔을 집어 들고는 홀짝홀짝 마셨다.

"특별히 알고 싶은 에 있는 건 아녜요. 그렇지만 그 말썽꾼 라이스 같은 사람 말이에요, 도대체 어떤 작자인지 정말 모르겠더군요. 안 그래요?"

그녀는 어깨를 움찔해 보이면서 과연 디노가 자기의 유도심문에 넘어갈 것인지를 속으로 점쳐보고 있었다.

"그가 이전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난 개의치 않아요. 현재가 중요한 것 아니겠소? 그는 지금 우리에게 충실하고 또한 우리로선 매우 필요한 사람이오."

담배를 천천히 비벼 끄며 그가 알렉시스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는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지요. 자기의 맡은 바 소임을 늘 성실하게 수행해 내고요."

알렉시스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짝거렸다.

"그가요?"

"그렇소, 당신은 이태리인들이 얼마나 다혈질인지 압니까? 아버지는 하찮은 도전도 용서하질 않아요. 라이스 이전에 고용했던 고릴라 같은 녀석은 싸움하는 것도 서툴렀죠. 자꾸 쓸데없는 짓만 만들뿐이었어요. 하지만 라이스는 힘도 있고 머리도 영리한 친구죠. 그는 아버지의 비위도 적당히 맞출 줄 알고 모든 일을 소리없이 잘 해결해 내죠. 라이스는 민감한 사람이오. 그는 아버지의 말을 속뜻까지도 잘 파악하거든요. 바보같이 상대에게 손을 대어 병원비를 물게 하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소. 대개는 설득해서 해결하는데 그게 보통이 아니오. 그래서 아버지의 신임을 톡톡히 얻었지요."

알렉시스는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이토록 라이스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줄은 미처 몰랐었다.

디노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그녀의 손목을 꼭 쥐며 말했다.

"우리, 클럽에 대한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지 맙시다. 내 생각엔 어머니한테 또 싫은 소리를 듣기 전에 일찍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나하고 분위기 좋은 곳에 꼭 한 번 가보기로 한 건, 잊지 말아요!"

그의 손은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가볍게 꺾고 있었고 그윽한 표정으로 검은 눈동자를 연신 굴리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그 모습에서 디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술과 저녁을 사고 이제는 응당한 보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난 약속드린 적은 없어요. 그리고 요샌 딸애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늘 돌봐야 해요. 기침이 심하거든요."

그녀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덧붙였다.

"이제 그만 데려다 주시면 고맙겠는데..."

"지금? 겨우 11시밖에 안 되었는데? 아직 초저녁이오. 서로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도록 편안하게 이야기나 나누는 게 어때요?"

"집에 가야 돼요. 비키가, 나올 때부터 칭얼거리고 있었거든요."

그녀는 자기 손가락을 그에게서 빼어냈다.

"아픈 아이를 두고 늦게 다니면 어머니가 몹시 싫어하실 거예요."

"처음엔 어머니 핑계를 대더니 이젠 어린 딸이오?"

디노는 수표책을 꺼내며 화난 듯이 말했다.

"내겐 가족 간의 화목이 최우선이에요."

디노가 말을 마구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낀 알렉시스가 쏘아붙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디노와 관계를 이제 정리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집 앞에 그녀를 내려 준 디노는 창밖으로 인사만 건네고는 또 다른 데이트 신청도 없이 훌쩍 가버렸다. 그녀는 그의 태도가 섭섭하다기보다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스스로를 육감적인 사랑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음날 오후 자선봉사회에 들렀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알렉시스는 무척 상쾌한 기분이었다.

"어머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재규어가 자기 집 앞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디노일까? 그가 더 이상 치근거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만일 그럴 경우 퉁명스럽게 굴어서 그를 쫓아 보내리라고 그녀는 마음먹었다. 어쩌면 지아코펠리는 자기 아들을 거절해버린 여자를 더 이상 근무시키지 않을지도 모른다.

"손님이 찾아오셨다."

거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드슨부인의 목소리는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경쾌했다.

디노가 와서 어떤 식으로 어머니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을 떨었기에 어머니가 저렇게 명랑해진 것일까? 아마도 정중하게 예의 모범생마냥 굴었을 게 분명했다.

알렉시스는 재빨리 머리를 한 번 매만진 뒤, 커피색과 크림색으로 조화를 이룬 블라우스를 내려다보고 하얀 바지의 허리를 다시 죄고는 거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순간, 알렉시스는 얼음조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라이스 로버트가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녀의 놀란 눈을 쳐다보고는 그가 피식 웃었다. 허드슨부인은 그에게 이것저것 말을 시켰지만 알렉시스는 한 마디도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의 넓은 어깨는 씩씩하고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차 한 잔 더 하실래요, 로버트씨?" 허드슨부인이 부드럽게 물었다.

"감사합니다. 그러지요. 그냥 저를 라이스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래요, 라이스."

알렉시스는 자기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빅토리아를 비키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핀잔을 주던 어머니가 초면인 사람의 이름을 부르다니! 닐이 일 년 넘게 한 집에 살았어도 그 모범생의 이름을 부른 적은 없었다.

"저도 한 잔 더 마시겠어요."

알렉시스가 어머니와 이모의 주의를 환기시켜보느라고 딱딱한 어조로 말을 꺼내 보았지만 두 사람 다 바보처럼 웃기만 하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어이가 없었다 .빅토리아는 발레하듯이 발끝으로 빙그르 한 바퀴 돌더니만 라이스의 무릎 앞에 바짝 다가섰다. 빅토리아까지! 알렉시스는 정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도 라이스라고 불러도 되나요?"

"넌 아직 어린이니까 라이스아저씨라고 해야지." 허드슨 부인이 꼬마숙녀를 나무랐다.

"아저씨!"

네 살짜리 꼬마아가씬 자기에게 아저씨가 생긴다는 사실이 몹시 즐거운 모양이었다. 꼬마는 다갈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신기한 눈초리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시스는 목이 메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고 자라지 못한 빅토리아가 불쌍한 생각이 든 것이다.

"내 생각엔 로버트씨가 부르는 게 나을 것 같구나."

아저씨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빅토리아에게는 안 되었지만 그를 아저씨로 부르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알렉시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고는 라이스의 무릎에 매달려 방실방실 웃고만 있었다.

"내일 낮에 보육원에 오셔서 날 집에 바래다주시면 안 되나요?" 꼬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 그런데. .. 엄마가.."

선뜻 대답을 해놓고는 라이스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알렉시스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곧 찻잔을 내려놓고 빅토리아를 자기 무릎에 올려 앉혔다.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못되는구나. 로버트씨는 바쁜 뿐이야. 비키!"

"차를 갖고 계시니까 괜찮아. 날 금세 집에 데려올 수 있잖아. 응 엄마?"

빅토리아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행복한 표정으로 자신의 엄마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그리고.. 아저씨 차는 새미네 것보다 훨씬 크단 말이야."

"난 바깥에 있는 괴물 같은 차로 너를 데려오고 싶진 않은데! 그것 말고 이 아저씨에겐 더 멋진 스포츠카가 있단다. 물론 새미네 것보다 클 거야."

"무슨 색인데요?"

"밝은 노랑."

빅토리아의 눈망울은 그 차를 그려보고 있는 듯했다.

"그럼 내일 12시 반에 엄마랑 같이 나를 기다려 주실래요?"

"너도 튕기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요 꼬마아가씨야! 네 엄마처럼 말야."

이 말에 온 식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알렉시스만 빼고는...

그녀가 참견할 새도 없이 두 사람 사이에는 약속이 오갔소, 빅토리아는 몇 번씩 다짐받아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온 남자! 그리고 자신이 여자임을 다시금 느끼게 해 준 사람. 지난 시간에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미래에도 역시 그럴지도 모르는 사람..

알렉시스는 심경이 복잡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보이지 않으려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건 뭐하는 구멍이에요?" 빅토리아가 그를 유심히 관찰하다 말고 물어보았다.

"귀걸이를 하기 위한 거란다." 그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왜 오늘은 안 했죠?"

라이스는 허드슨부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망설였다. 지금껏은 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해 왔는지 모르지만 이제부터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금 귀걸이인데 클럽에서 일하다 보면 그런 것을 안 할 수가 없게 되는 경우도 생긴답니다."

늙은 부인의 심기를 가라앉혀 보려는 듯 그가 변명을 하였다.

포에베 이모는 라이스와 자기 언니를 번갈아 힐끔힐끔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당신 어머니께선 귀걸이를 보고도 아무 말씀 안 하시던가요?" 이번엔 알렉시스가 물었다.

"처음엔 깜짝 놀라셨지. 계속 달고 다닌다면 집에 발도 못 들여놓게 하실 생각이었겠지만 내 일의 필요상 어쩔 수 없다는 걸 아시고는 이해해 주셨소."

그러면서 그는 그들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귀울이고 있는 빅토리아를 내려다보았다.

허드슨부인이 아직도 무언가 개운치 않은 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라이스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이젠 가봐야겠군요. 차 잘 마셨습니다."

"잘 됐군요." 허드슨부인이 함께 일어서며 말했다.

"빅토리아! 이리 오너라. 포에베도, 어서! 우린 가서 저녁거리로 야채를 좀 사와야겠다."

알렉시스는 어머니가 자기들만 남겨 놓고 모두 식당으로 데리고 들어가 문을 닫아버리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라이스는 분명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온 모양이었다.

그가 다시 소파에 앉더니 입을 열었다.

"이봐요, 알렉시스. 부탁이 있어서 왔소. 아니 애원하러 왔다고 해 둡시다. 제발 디노와 다시는 외출하지 말아요."

"또 그 얘긴가요?"

"이건 중요한 문제요. 여기까지 찾아와서 말하는 이유는 클럽에선 누군가가 엿들을까 봐 그렇소. 내 말대로 해 주겠소?"

이미 디노와는 손을 끊은 것이나 다름없었는데도 그녀는 라이스를 좀 더 골려주고 싶었다.

"디노와 또 데이트약속을 했소?"

"후훗..." 알렉시스는 그의 안타까운 표정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가 신비롭게 느껴지는 모야인데 그와 가까와지면 꼭 후회하고 말 거요!"

라이스는 갑자기 그녀 옆으로 다가와서는 두 팔로 꼼짝 못하도록 감까안았다.

"그에게 다시는 가지 못하도록 꼭 잡아 두겠소."

"그와는 끝났어요. 그러니 더 이상 참견마세요."

"그랬군! 렉시 역시 그랬었군."

라이스의 얼굴이 밝아지더니 그녀의 손을 들어 손가락 하나하나에 가벼운 입맞춤을 해 주었다.

"카리아드! 지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날 믿어요."

"당신을 믿어요?"

말은 그렇게 반항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알렉시스는 그를 정말 믿고 싶었다. 그때 문득 옥스퍼드 서커스장 앞에서 그를 본 생각이 떠올랐다.

"난 알아요. 당신 불량배지요? 범죄 전과기록 같은 걸 갖고 있지요?"

알렉시스는 자기가 지나치게 넘겨짚는지도 모른다는 걸 느끼면서도 그렇게 물었다.

"불량배? 범죄전과기록?" 라이스는 커다랗게 소리 내어 웃었다.

"렉시! 화를 낼 때의 당신은 더욱 눈부시게 아름답군."

"쓸데없는 소리.."

그의 입술이 뒷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의 무언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호흡이 흐느끼듯 몰아쳤다. 마음이 착잡해지기 시작한 알렉시스는 서서히 모든 것을 잊고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의 손길이 다리로 뻗어 내리자 그녀의 가슴은 높이뛰기 시작하였다. 마치 거센 파도를 타는 기분이었다.

"아직은.. 아직은 이러면 안 돼.. 그러나 언젠가는..."

그는 다시 손을 올려 그녀의 허리에 감고 꼬옥 끌어안았다.

알렉시스가 눈을 감고 있는 사이 어느 새 그의 손은 풀어져 있었다.

"내일 봅시다."

그렇게 말하고 라이스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알렉시스는 그가 나가는 것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나중에야 그녀는 자기가 내일 보육원에 함께 갈 약속을 취소시키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6

", 라이스아저씨한테 예쁘게 보여야 해!"

다음날 아침 새로 산 복숭아빛 티셔츠와 인도산의 올이 굵은 무명옷을 서랍에서 꺼내며 빅토리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엄마는 새미 엄마처럼 그 은색 핫팬티를 안 입어?"

알렉시스는 평소에 즐겨 입던 캐주얼한 셔츠와 진바지를 꺼내다 말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딸을 내려다보았다.

"엄마 옷에 물감이나 칠해놓는 맹꽁이꼬마가 있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엄마한테 팔주머니 따위는 제발 던지지 말아라, 알겠니?"

빅토리아는 대답도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꼬마아가씨는 아침식사로 콘프레이크를 먹으면서도 줄곧 라이스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엄마, 라이스아저씨는 아침으로 무엇을 먹을 것 같아?"

"날고기!" 알렉시스가 대뜸 외쳤다.

"어마나! 정말?"

"아니야, 빨리 서둘러야겠다. 아저씨 생각하다가 한눈팔면 안 돼요. 그리고 아저씨를 만나면 인사하는 것 잊지 말아라!"

포에베 이모가 미소를 띠우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빅토리아에게는 오늘이 최고의 날인 것 같구나!"

알렉시스는 라이스라는 존재가 이토록 자기의 가족들을 끌어당길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라이스에게는 분명 뭔가 강력한 자석과도 같은 힘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오늘 그가 여느 때처럼 귀걸이라도 달고 보육원에 온다면 곤란한 일이었다. 하지만 더한 사람들도 많으니까.. 새미네 아저씨들은 그따위는 예사였다. 금팔찌나 조개목걸이 아니면 나무로 만든 구슬같은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옷차림 역시 그에 못지않게 요란스러웠다.

골리앗같이 생긴 사람은 술이 달린 사슴가죽 윗도리에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나타나서는 자기가 진짜 사만다의 양부라고 떠들어댔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아마 라이스의 귀걸이 정도는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다.

빅토리아는 시계를 수백 번도 더 들여다보면서 열두 시 반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이리와 봐. 빨리 가서 라이스아저씨를 마중해야지." 꼬마는 엄마의 옷소매에 매달려 졸라대기 시작했다.

"걱정 마, 아저씨가 오시면 알려 줄께."

알렉시스에겐 아직도 라이스의 석연치 않은 태도에 대한 감정의 찌꺼기가 앙금이 되어 가라앉아 있었지만 빅토리아의 청을 받아들여 준 것이 고마운 생각도 들었다. 라이스는 디노가 표현했듯이 말썽을 피하는 쪽이고 과묵한 편에 속했다. 알렉시스의 생각으론 자기만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나 그런 것 같았다.

"이리와 봐요, 엄마! 빨리!"

어린 숙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는지 알렉시스의 손을 잡아 끌고는 창가로 가서 발돋움을 했다.

차들이 건너편 길가에 가로수를 따라 줄줄이 주차해 있었다.

빅토리아의 눈망울이 커다래지더니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저기 오셨다!" 꼬마가 소리쳤다.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목이 파인 티셔츠에 진 바지차림으로 타이어를 새로 끼운 노란색 차를 50야드쯤 길 아래쪽으로 세우고 있었다.

"라이스아저씨! 라이스아저씨!" 있는 힘을 다해 외쳐대면서 빅토리아는 질풍처럼 달려 나갔다. 라이스가 꼬마를 보더니 활짝 웃는 얼굴로 번쩍 안아 주었다. 알렉시스는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잠깐 망설이다가 사나이의 눈가에 맺힌 때 아닌 이슬을 못 본 척 외면하였다. 딸이 누군가를 저토록 반기는 것도 큰 덩치의 사나이가 눈물을 보이는 것도 알렉시스에게는 생소했다. 이것이 닐 같은 사람과 라이스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이랄까?

"이런 환영은 정말 처음인데!"

"저것은 무슨 뜻이에요?" 빅토리아가 차 뒤의 범퍼에 붙여진 스티카로 눈을 돌리며 물었다.

"나는 하느님과 조국과 몰건을 사랑한다는 뜻이야." 라이스는 꼬마아가씨에게 뒷자석의 문을 열어 주며 대답했다.

알렉시스는 날씬하게 빠진 차의 생김새하며 진짜 까만 가죽으로 된 시트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멋진 차로군요."

"내가 아끼는 것이지." 그가 차를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귀걸이는 오늘도 안 하셨군요?"

앞자리에 앉자마자 그녀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잃어버렸나요?"

질문에는 대꾸도 없이 라이스는 알렉시스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순간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보고 싶었소?"

알렉시스는 어느 새 농익은 탱자처럼 말랑말랑하게 누그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어쩜 이렇게 한 순간에 마음이 약해져버리는 것인지.. 뒤쪽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엄마한테 뽀뽀해 줄 거예요? 새미네 아저씨는 그애 엄마에게 늘 그러는데! 그리고 주말에는 새미가 자러 가면 엄마와 아저씨도 함께 자러간대요. 아저씨도 그러실 거예요?"

"빅토리아!" 알렉시스는 얼굴을 붉히며 딸에게 소리쳤다.

"네 할머니께서 아저씨가 엄마 침대에서 자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을 거야."

라이스가 뒤를 돌아보더니 쿡쿡 웃었다.

"하지만 뽀뽀야 할 수도 있겠지." 그러더니 몸을 구부려 알렉시스의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해 주었다.

"이번엔 내 차례에요." 빅토리아가 그들 사이로 얼굴을 삐죽 내밀고는 깜찍하게 주장했다. 라이스는 웃으면서 그 귀여운 아가씨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한 번 더!"

"요 꼬마아가씨! 욕심꾸러기군." 라이스가 놀려대자 빅토리아는 제자리에 반듯이 앉았다.

"여기 좀 봐, 엄마! <자네트와 존의 이야기>란 동화책이 있어."

차 문에 달린 주머니에서 발견한 책을 끄집어 올리며 빅토리아는 놀라운 듯 말했다.

"도로 집어넣으렴, 어서! 그건 네 것이 아니잖니?"

"아니다, 비키. 가져도 좋아." 라이스가 끼어들었다.

"내 조카애가 거기 두고 간 모양이구나. 그 애는 이제 그런 책을 읽을 나이가 지났으니 네가 가져가도 상관없단다."

"조카가 있나요?" 알렉시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이스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렇소. 몇 명 되오. 잘은 모르지만 곧 두 명이 더 늘 거요. 형수님이 두 분 다 임신 중이거든."

"당신에게 형제분이 계신 줄은 미처 몰랐군요."

"그야말로 놀랄 소리군." 라이스는 길을 살피며 차를 몰았다.

"내겐 형이 셋이오. 그리고 양친도 다 생존해 계시고. 내가 어디 하늘에서라도 뚝 떨어져 내린 줄 알았소?"

"너무 뜻밖이라서요."

"내가 두꺼비왕자님이라도 되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군."

뒤쪽에서는 빅토리아가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가 다정하게 웃었다.

"데려다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알렉시스는 뒤에 앉은 딸을 흘끔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우리 꼬마숙녀를 정말 즐겁게 해 주셨군요." 그녀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라이스가 물었다.

"꼬마 숙녀만?"

이 말에 알렉시스는 그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볼에 있는 귀여운 보조개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트와 존의 이야기>를 춤에 꼭 껴안은 빅토리아는 마냥 기쁜 표정이었다.

"잠깐만 빅토리아." 그가, 막 집을 향해 돌아서는 빅토리아를 불러 세우고는 쭈그린 자세로 앉아 꼬마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내 생각에는 엄마에게 뭔가 선물을 하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빅토리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아! 그럼 네가 집에 들어가서 할머니랑 이모할머니랑 얘기를 하고 있을 동안 얼른 다녀오도록 할께. 15분쯤 후면 돌아올 거야."

", 엄마는 <자네트와 존의 이야기> 같은 것은 원치 않을 거예요."

"알았어요, 꼬마아가씨! 충고 잊지 않을께." 라이스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웃었다.

꼬마숙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집 안으로 사라졌다.

"내게 뭘 사줄 필요는 없는데..."

라이스가 시동을 걸자 그녀가 중얼거렸다. 처음엔 입맞춤 그리고 뜨거운 손길, 이번엔 선물까지.. 알렉시스는 한편으론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론 부담스러웠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 오빠나 남동생은 있소?" 그가 재빨리 화제를 딴 곳으로 돌렸다.

"무남독녀에요."

"어머님 치마폭에 감싸여 자라셨겠군!"

"가능한 한 빨리 그 치마폭을 벗어나야지요. 아직 완전히 벗어났다고 볼 수가 없거든요. 여기 세인트존스우드에 사는 이유는 내 자율적인 선택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필요성 때문이죠."

"필요성? 어째서?"

"빅토리아에게는 보다 나은 환경을 마련해 주고 싶기 때문이에요. 내가 벌이를 한다 해도 우리 둘만 따로 독립해서는 이렇게 크고 편한 그리고 주위환경이 좋은 집에서는 살 엄두도 못내요. 내가 혼자였다면 벌써 어머니 곁을 떠나 독립했을 거예요. 하지만 아이가 딸려 있는 이상 아이 생각을 먼저 해야죠."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게 못마땅한 모양이군?"

그의 말에는 빈정거리거나 비난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것을 느낀 알렉시스는 그에게 좀 더 많은 것을 털어놓고 싶어졌다.

"그래요. 어머니가 나와 비키를 먹여 주고 재워 주시기는 하지만 자유롭게 해 주시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게 다 그분의 방식대로지요."

"당신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소." 라이스가 넌지시 그녀를 유도하였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쓰라린 과거가 하나하나 되살아오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알렉시스는 이런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것이다. 누군가 따뜻한 시선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는 순간을,,, 그녀는 깊이 숨을 몰아쉬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모든 것이 갑자기 바뀌었어요. 일하시던 도중에 추락사로.. 겨우 서른여덟밖에 안 되셨었는데. 그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어요."

"그때 당신은 몇 살이었소?"

"열두 살.." 그녀는 손톱으로 차 앞에 붙은 서랍을 살짝 긁어내리며 조그만 소리로 답했다.

"아버지는 강인한 분이셨어요. 그리고 늘 어머니를 사랑하셨죠. 가끔 어머니를 사나운 여자라고 놀리곤 하셨지만 어머니도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셨어요. 모든 것이 다 좋았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완전히 경직되어버린 듯했어요. 모든 것에 오직 당신의 주장이 옳다는 거였어요. 내 인생까지 마음대로 휘두르셨죠."

"당신을 너무 깊이 염려한 나머지 그러셨다고는 생각지 않소?"

"물론 그러실 테지요. 하지만 도가 너무 지나치셨던 것은 사실이에요. 내가 하는 일에는 무엇이건 다 참견하셨어요. 심지어 친구를 사귀는 일까지도. 조그만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도 어렵게 어머니를 이겨야만 했어요. 커가면서 조금씩 반항하기 시작했지요. 아버지께서 남기신 유산 때문에 서로 다툰 적도 있어요."

"? 어머니에게 다른 계획이라도 있으셨나?"

라이스는 신호등을 보고는 차를 멈추려 하고 있었다.

"아니요. 그 반대예요. 내가 내 친구와 함께 조그만 사업을 벌여보려고 했지요. 어머니는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마구 화만 내셨어요."

라이스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그러다가 제프를 만났어요. 제프와 난 비키때문에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어요.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아시고는 불결하다며 마구 비난을 퍼부으셨어요. 어머닌 제프가 나의 유산을 염두에 두고 임신시킨 것이라고 여기셨지요. 하지만 제프는 그런 위인은 못되었어요. 비키가 생겼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지요. 하나는 제프가 실수했다는 것과 또 하나는 나의 실수라는 것.."

"내가 돌을 던지지는 않겠소."

라이스의 정색한 얼굴을 들여다보는 순간 알렉시스의 마음속에는 감사의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고마워요."

"그래 어머님은 끝내 제프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소?"

"나의 남편으로서 인정해 주시지 않았어요. 게다가 우리 결혼식에조차 오시지 않겠다고 했을 때는 충격이 컸어요. 그 후 몇 달동안 우리와는 말도 않고 지내셨지요. 하지만 비키가 태어나자 조금씩 태도가 바뀌어가셨어요. 비키가 자라며 귀엽게 굴기 시작하니까 어머니는 완전히 그 애에게 홀딱 빠지셨죠." 그렇게 말하고 알렉시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프가 죽고 나자 어머니는 지체 없이 집으로 들어오도록 명하셨어요."

"당신은 시키는 대로 했소?"

"처음엔 버틸려고 했는데 빅토리아때문에 포기하고 말았어요. 제프가 죽은 후로 나와 비키가 이사한 곳은 너무 형편없었어요. 아마 누구라도 두 번 다시 그런 곳에서 살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비키가 병치레를 하자 나는 버티던 힘을 차차 잃고 말았어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비키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가지 들었어요. 마음이 약해진 거지요. 어머니는 어머니의 명을 거절한 채 버티고 있는 나를 무척 못마땅해 하셨죠. 포에베 이모님이 내게 도와줄 테니 이사하라고 하셨지만 어머니는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셨어요."

"상상이 가오." 라이스가 메마른 목소리로 한 마다 거들었다.

"어머니께서 내가 숙이고 들어오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절대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비키의 기관지염이 날로 심해져가자 나는 나의 자존심때문에 아이를 죽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지고 말았어요."

라이스의 손이 어느 새 그녀의 어깨를 꼭 감싸고 있었다.

"카리아드! 이제 끝난 일이오."

그녀의 눈에 아롱져있는 눈물방울을 발견한 하이스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안타까운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알렉시스가 조용히 수긍했다.

"이 분 후면 돌아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요."

라이스는 그녀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길모퉁이로 사라졌다. 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게 된 것을 감사하며 그녀는 핸드백 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기분도 한결 상쾌해지는 느낌이었다.

발자국소리에 옆을 돌아본 순간 알렉시스는 흑장미 숲에 갇힌 듯했다. 라이스가 주체하기도 힘들 만큼의 많은 장미를 한아름 안고 돌아온 것이다.

"너무 아름답군요!" 이 놀라운 선물에 알렉시스는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망설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라이스는 다른 꾸러미 하나를 차 뒤에 실었다.

"이 초콜릿은 어머니와 이모님 몫이오. 이렇게 점수를 좀 따두어야지?" 그가 눈을 찡긋해 보이자 알렉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줄도 알다니 놀라운 데요?"

"그럼 애인을 만들려면.."

그가 시동을 거는 사이 그녀는 뒷좌석에 놓아둔 장미꽃 향기를 흠씬 들이마셨다.

", 꼭 해둘 말을 잊을 뻔했군. 혹시 지아코펠리씨가 당신에게 아래층 카지노 일을 보아달라고 하거든 분명하게 거절해야 하오."

"왜죠?"

"위험하기 때문이오." 그는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했다.

"수키 말에 의하면 그곳에서 일하면 부수입이 좋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내 생각으로도 어차피 소호에서 일하는 바엔 내가 벌 수 있는 한은 다 벌어들이고 싶어요."

그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이봐요. 렉시! 수입이 좋은 이유는 따로 있다고."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히 말을 계속했다.

"아래층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수입이 좋은 이유는 일이 끝난 후 손님의 색다른 요청에도 응하기 때문이란 말이오."

알렉시스는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이 갈색 눈동자를 커다랗게 떴다.

"그것이 소호의 현실이오."

"경찰이 그런 것을 그냥 놓아두나요?"

"아직 증거를 잡지 못했기 때문일 거요. 카지노 베네치아는 워낙 자리를 잘 잡고 있으니까. 잘 발각되지 않는 그런 곳에 말이오.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더 이상한 여자들과 그리고 내 짐작으로는 누드사진 스튜디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

"설마! 지아코펠리씨가 그런 짓을 할 줄은..." 알렉시스는 놀라움으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마터면 그런 구렁텅이에 빠질 뻔했다니!

"그런데 당신은 왜 그곳에서 계속 일하고 있는 거죠?"

"지금은.. 아직은 말하기 힘드오. 하지만 날 믿어 주오, 렉시!"

알렉시스는 자기의 의아스러운 마음을 풀 길은 없었지만 이제 이 웨일즈인을 믿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금 장미꽃다발에 얼굴을 파묻어 보았다. 그래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알게 되겠지. 그녀는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 이제 가봐야겠군. 어머니도 기다리실 테고.. 지아코펠리가 비명을 지르고 있을 거요."

알렉시스의 의아해 하는 눈초리와 마주치자 라이스가 덧붙여 설명했다.

"카지노의 배선을 좀 바꾸어야 하는데 내가 전기를 만질줄 아니까 가봐야 하오."

이유야 어떻든 그가 가버리려는 것이 알렉시스는 아쉬웠다.

물건을 어느새 그녀의 집 앞에 당도했다.

"안됐지만 집 안에 들어가 볼 수가 없겠군. 비키에게 미안하다고 말해 줘요. 어머니께도."

초콜릿상자를 내어 주며 그가 시동을 걸었다.

"시간 내 주셔서 고마워요. 선물도. 또 봐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라이스는 손을 한 번 들어보이고는 이내 사라져버렸다.

 

7

그날 저녁 알렉시스는 카지노 베네치아와 인연을 끊을 결심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어리석게도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흔들리기만 했다. 결국 자기 본분만 충실히 지킨다면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에 도달해 자신의 처음 결심을 철회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그토록 인간적이고 자상해 보이는 지아코펠리가 그런 사업에 손을 대고 있다는 사실은 몹시 실망스러

웠다.

그녀는 화장대 가까이로 다가가서 서랍을 열어 이제까지 모은 돈을 세어 보았다. 전부 정직하게 일해서 번 돈이다. 이 돈으로 어떻게 어떤 식으로 독립을 해 나갈 것인가 요리조리 궁리해 보고 있을 때 갑자기 구급차의 사이렌과도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아래층에서 발작적으로 들려왔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잠시 후 기가 죽은 포에베 이모가 뭐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알렉시스는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려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길이 없게 되었다. 어머니의 네 번째 브리지게임 상대자가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닐에게 직접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허드슨부인은 늘 그래왔듯이 대신 이모 쪽으로 모든 분풀이를 해대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어머니의 기분이 풀어질 때까지는 내려가지 않는 쪽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는 아까 하던 상상의 나래나 계속 펼쳐보길 마음먹었다. 그리고 역시 자기가 하루빨리 독립해 나가기 위해서는 지금 상황에서 일을 그만 둔다는 것은 여러 모로 적합치 않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지아코펠리가 설령 그런 좋지 못한 사람이더라도 현재까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짓은 시키지 않았으니 그녀로서는 그를 나무랄 일도 없는 셈이다. 레스토랑의 손님들은 대체로 평범한 사람들같아 보였고 거의가 늘 단골손님들이었다.

 

카지노에 전기공사가 시작되어 벽에 붙었던 판넬들이 옮겨지고 구멍 뚫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지만 지아코펠리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자기 사무실에서 일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라잇는 그에게서 지시를 받거나 일을 설명해 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지아코펠리는 막 클럽에 도착한 알렉시스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자기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조용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램버트 부인. 그동안 당신이 일을 잘해주어 뭐라고 감사를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일을 하는 동안 조금의 실수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것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소."

번들거리는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동안 알렉시스는 자기의 고용주가 겉보기와는 달리 야비해 보이는 구석은 없는지 찬찬히 훑어보았다. 아마 이런 입에 발린 찬사 뒤로는 음흉스런 계산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일상적인 사무는 단순한 것입니다. 너무 과찬을 해 주시는 군요."

그녀는 잔잔히 미소를 머금고 답례를 했다.

"내 생각으로는 아무나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보지는 않소. 유능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지요." 그는 그녀의 결백성과 능력을 필히 인정하고 있다는 듯이 살찐 손가락을 들어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좀더 이야기를 해 볼까요? 정직과 부정직에 관해서 말이오. 당신은 내 피고용자들이 얼마나 나 모르게 뒤로 빼돌리는 따위의 짓을 일삼고 있는지 상상도 못할 거요." 그는 유감천만이라는 듯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들 생각으로야 모든 것이 비밀로 무사히 넘어갈 거라고 여기겠지만 결코 그렇게 될 수는 없지. 믿음직한 카운터를 찾아냈다는 것은 네잎클로버를 발견해 낸 것만큼이나 가치 있는 일이오. 라이스는 게일을 택하라고 적극 권유했지만 나는 당신의 그 진실해 보이는 눈을 보고 이 사람이 적격이라고 직감했소."

알렉시스는 칭찬보다도 그 다음에 올 말이 무엇인지가 더 궁금했다.

"감사합니다."

"내가 조그만 보답으로 주당 십 파운드를 인상해드릴까 하오마는..."

그녀가 그를 꽤나 인심 좋은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리만치 그는 호기 있게 자기 팔을 쓸어내리며 덧붙여 말했다.

"감사합니다. 매우 관대하시군요."

"그리고 6개월에 한 번씩 봉급책정을 재고할까 하오."

"정말 여러 모로 고맙습니다."

알렉시스가 그를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그는 후하게 그녀를 대접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알렉시스는 잠시 화장대서랍을 들어 있는 돈뭉치가 생각보다 빨리 불어나게 되는 즐거움을 미리 만끽해 보았다.

지아코펠리는 계속 여유 있고 너그러운 표정으로 벽에 있는 가족사진을 바라보았다.

"기억하고 있겠지요. 램버트 부인? 몇 가지 내 개인적인 일이 생겼을 때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것 말이오."

알렉시스는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면서도 일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조그만 소리로 되물었다.

"사업관계로 오는 일요일 여기서 회합이 열릴 예정이오. 그래서 카지노에 일손이 좀 필요하게 되었소."

"카지노에서요?" 그녀는 뜻밖의 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는 그녀의 놀라는 모습이 조금 못마땅한 모양이었는지 눈살을 약간 찌푸려 보였다.

"아래층에 관해 무슨 소문이라도 들었는지 모르지만 당신에게 엉뚱한 일은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지요. 램버트부인."

알렉시스는 자기가 너무 방정맞게 굴었던 것이 겸연쩍어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보통은 여자들이 끼지 않아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업의 일부니까." 그는 그녀의 얼굴에 아직도 의심의 빛이 서려 있음을 읽어낸 듯 재빨리 설명해 주었다.

"난 당신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결코 위험스러운 일은 시키지 않을 거요. 내 가족처럼 신경을 쓰지요. 사실 내 두 딸 역시 도우러 올 겁니다."

알렉시스는 그 말에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손님들은 8시경에 도착할 겁니다. 칵테일을 대접한 후에 정식회의를 들어가고 끝나면 레스토랑에서 날라온 식사를 하게 될 거요. 모든 것이 정확히 11시면 끝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내가 집까지 바래다 드리도록 하지요."

그의 딸들 믿을만한 웨이터, 그리고 아마 라이스도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알렉시스는 마음이 놓였다.

"아참! 보수는 두 배로 주겠소." 지아코펠리가 가장 중요한 것을 잊었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두 배의 보수란 독립해 나가는 일에 한 걸음 더 다가간다는 기분 좋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언제쯤 알려 주실 생각이신가요?" 알렉시스의 마음속에는 이미 주저나 의문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815분경에. 그런데.." 조금 주저하는 빛이 지아코펠리의 얼굴에 역력히 스쳐갔다.

"보통 때 입던 옷 말고 다른 것을 입어 주면 좋겠소. 내 딸들과 같은 옷으로 말이오. 모두들 같은 옷을 입은 것이 보기에도 좋을 거요."

알렉시스는 이미 그가 사소한 일에도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 된다고 그녀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일이 끝나고 탈의실에 들어갔을 때 전에 그녀가 입던 가슴이 파인 블라우스가 걸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 옷을 끄집어내어 몸에 대고는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깊게 패인 목의 주름장식을 잘 하면 올려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2인치쯤만 올려 달면 얌전해 보일 테지. 2인치 차이로 사람이 그토록 달라 보이다니! 알렉시스는 블라우스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내일 고치기로 작정했다. 수키에게 간단히 인사를 끝낸 그녀는 급히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뜻밖에도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그녀가 밖으로 한 걸음 내디디려는 찰나 비는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서 윗도리의 지퍼를 목까지 잡아 올리고 뒤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썼다. 이 비를 어떻게 하나! 나올 때는 날씨가 맑아있었으므로 우산을 가져올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피해 택시를 기다리려고 길가에 벽에 붙은 차양 아래로 들어섰으나 길에는 개미 한 마리 나타나지 않았다. 네온사인만이 붉은빛과 흰빛 그리고 푸른색으로 검고 축축해진 보도와 비에 젖은 지붕들을 비추고 있었다. 택시가 보인다 싶으면 미친 듯이 달려가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와이퍼때문에 보이지 않는 듯 매번 그냥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알렉시스는 맥이 빠져 벽에 등을 기대었다. 얇은 옷 사이로 차차 빗물이 스며들었다. 디노는 먼젓번 그녀와의 데이트 이래 집으로 바래다주는 일까지 걷어 치워버렸다. 하지만 그를 나무란들 무슨 소용이랴! 지금처럼 자가운전자가 부러워 보인 적이 없었다. 이럴 때 라이스가 나타나 준다면! 디노 대신 요즈음은 라이스가 집에 태워다 주곤 했지만 그 바보 같은 남자는 정작 필요할 때는 얼굴도 비치지를 않으니..

몇 분이 흘렀지만 빈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점차 추워지기 시작했다. 젖은 머리카락이 빗줄기에 자꾸 흘러내려 눈앞을 가로막았다. 이 세상의 택시란 택시는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보통 때는 나오자마자 잡을 수 있었는데... 여름이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이렇게 버티고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찡그린 얼굴로 길바닥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폭우가 쏟아지는 소호에 어둠이 내리니 영락없는 악마의 소굴이었다. 빈민가와 쓰레기차, 그리고 그 앞에 쌓인 쓰레기더미와 먹을 것을 뒤적이는 도둑고양이 몇 마리,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문구의 지저분한 간판들, 이런 것들은 모두 소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그것이 눈에 보이건 보이지 않건 간에 더러운 이 세상의 맨 밑바닥을 연상케 해 주고 있었다.

"택시! 택시!"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외치자 다행히도 저만치에서 차가 멈추어 주었다. 알렉시스는 반가운 마음에 그곳으로 달려가느라고 자기의 뒤에서 누군가 황급히 다가오고 있는 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가 차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족히 그녀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손이 그 손잡이를 낚아채었다.

"내가 먼저 왔어요!" 알렉시스는 분한 마음으로 상대를 쏘아보며 주장했다.

"비키쇼!" 뚱뚱한 남자는 그녀를 팔꿈치로 밀어젖혔다. 알렉시스는 직감적으로 그와 싸워서는 아무 이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에게 양해를 구해보기로 했다. 킹콩에게도 심장은 있는 법이니까.

"난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그리고 빨리 집에 가지 않으면 안돼요." 그렇게 말한 다음 그녀는 호소하는 눈빛으로 그가 양보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음흉한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좋소, 그럼 우리 같이 타고 갑시다."

"합승하자고요?" 알렉시스의 생각에는 여기 혼자 있는 것보다 같은 방향이라면 함께 타고 가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어쨌든,,," 심술궂은 눈초리로 그가 쳐다보며 말했다.

"내 목적지로든 당신 목적지로든 갑시다!" 그러더니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알렉시스는 자기가 사정해 보려고 취했던 태도를 금세 후회했다. 얼핏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혼자 타고 가세요!" 그녀가 강경하게 말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러지 말고 아가씨! 차에 타시지!" 혀 꼬부라진 음성으로 그녀를 택시 안에 밀어 넣으며 그가 말했다. 알렉시스는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있는 힘을 다해 보았지만 그의 허사였다.

"보내 줘요!" 애절한 목소리였다. 알렉시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위기를 어떻게 모면할 수 있는지를 라이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일러 준대로 그 남자의 급소를 걷어찰 만큼 그녀는 용기 있는 편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자기의 조그마한 주먹이 얼얼하도록 그의 어깨를 쳐볼 뿐이었다. 그때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다가오는 것을 본 알렉시스는 또 이 고릴라 같은 부류의 인물이 나타난다면 정말 사면초가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심장이 공포에 질려 쉴 새 없이 쿵쾅거렸다. 혼자 힘으로 하나도 아니고 둘씩 상대할 수는 도저히 없는 노릇이었다.

"어이, 모하메드 알리! 끝장 보고 싶나?"

귀에 익은 목소리에 놀라 알렉시스는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라이스!"

그녀의 용기 없는 행동을 대신해 줄 흑기사가 나타난 것이다.

"어서 꺼져!" 그가 악마 같은 작자를 향해 명령했다.

"그리고 여기는 다시 나타나지 말아. 다음에는 경찰을 부를 테니까."

그 남자는 알렉시스를 기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택시를 타고 떠나버렸다.

"저 차는 내가 잡았는데.."

"!" 그의 목소리는 경직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리와요. 내가 바래다 줄 테니."

그들 사이에는 줄곧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렉시! 내가 일 분만 늦었더라도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아오?" 차에 앉자마자 꺼낸 그의 첫마디였다.

". 그것은 내 실수였어요." 그녀는 추위로 인해 이가 딱딱 맞부딪칠 정도로 떨면서 대답했다.

"좋게 이야기해서 택시를 양보하게 하려던 것이 그만.."

라이스가 뒷자리에서 모직으로 된 담요를 찾아내었다.

", 웃옷을 벗고 이걸 둘러요. 예쁜 아가씨가 소호에서 밤늦게 돌아다니면 이런 일이 생긴다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가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어 보이고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집 앞에 당도하기 전까지 그는 그녀에게 춥지 않느냐고 두어 번 물어본 것 외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알렉시스는 기분이 울적해졌다. 물론 라이스에게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무례하게 굴었던 것, 그리고 지금도 자신에게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할수록 기분 나빴다.

"열쇠를 줘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대뜸 그렇게 말하며 그는 능청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화가 치밀어 열쇠를 그의 면전에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생각과는 달리 순순히 그에게 열쇠를 건네는 자기 모습을 보고 있었다.

"고마와요. 잘 가세요." 기껏 그녀는 자신의 불쾌감을 이 정도밖에는 표시하지 못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문지방에 버티고 서서 되물었다.

"잘 가라고? 당신을 구원해 준 구세주를 이런 식으로 대접하면 못쓰지!"

알렉시스는 그의 능청에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담요를 어깨에서 확 잡아 끌어 내리고는 던지듯이 그에게 안겨주었다.

"난 당신이란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비키를 데려다 주고 장미를 사주고 입맞춤까지.." 그녀는 갑자기 왈칵 목이 메이는 것을 느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어요." 알렉시스는 비통한 표정으로 말을 맺었다.

"카리아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에겐 지금 그 말조차 달콤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듣고 싶지 않아요."

"연인이라는 뜻이오!" 라이스는 갑자기 생각난 듯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렉시!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아야만 하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그녀의 뺨을 적시고 있었다.

"그래요. 하지만 난 뭐가 뭔지 통 알 수가 없어요."

라이스는 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애처롭게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귀여운 아가씨의 이마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해 주었다.

", 들어가서 빨리 몸을 녹여야겠군."

둘은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어머니가 깨어서 내려오시지 않도록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거실 문을 열었다. 알렉시스는 그에게 자신의 불쾌감을 마구 터뜨리며 항의하고 다지고 아니 그 모든 것조차 다 집어치우고 소리쳐 쫓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음에도 겉으로는 말없이 그의 지시대로 따르고 있었다.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

가스불을 켜고 나니 몸의 온기가 조금씩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황갈색의 얇은 스웨터는 몸에 찰싹 감겨붙어 있었다. 하지만 라이스 앞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가 없어 그녀는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는 옷을 불에 말리기만 하였다.

"브랜디 좀 마시는 게 어떻소?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요." 자기의 흰 자켓을 벗어 의자에 걸쳐놓으며 그가 한 제안에 알렉시스는 말없이 브랜디 병을 꺼내어 두 개의 잔에 조금씩 따르고 있었다. 그는 보우타이를 풀어 호주머니에 넣고는 목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셔츠는 타이때문에 구겨져 있었다. 옷차림을 편히 하고 그는 브랜디잔을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알렉시스는 그의 행동을 하나하나 눈여겨 보았다. 목덜미까지 구불구불 내려와 있는 머릿결이며 하얀 목 면티 아래 숨 쉬고 있는 그의 넓은 가슴과 어깨...

"! 이제 무언가 말 좀 해 보시는 게 어때요?" 알렉시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될 수 있는 한 그에게 냉정하고 예리하게 보이고 싶었다.

라이스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곧 내뱉으면서 그녀의 건너편 흔들의자에 앉았다.

"클럽에서 당신에게 사무적으로 구는 것은 지아코펠리나 디노가 우리 사이를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거요."

"왜 그래야 하나요?" 그녀는 그에게 조금의 기회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다그쳤다.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요. 하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지. 그들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당신이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것!"

"정말 이해가 안가는 말만 골라서 하는군요." 그녀가 진한 브랜디를 꼴깍 삼키면서 말했다.

"좋아요, 그럼 이것은 대답해 줄 수 있겠지요? 당신은 범죄전과기록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요?"

"내가 이 자리에서 결단코 맹세하오마는 그런 일은 없소!" 엄중하고도 진지한 목소리였다.

"하기는.. 주차위반에 걸린 적은 한 번 있소."

알렉시스는 안심이 되었다. 가장 걱정스러웠던 문제가 해결된 샘이었다. 어느 새 그녀는 그에게 미소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당신은 카지노 베네치아의 내막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가요?"

"세부적인 것까지는 나도 모르오. 그것은 오로지 지아코펠리만이 알고 있지. 좌우간 그는 외모에서 풍기듯이 선량한 산타클로스같은 이태리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브랜디잔을 내려놓고는 그녀의 곁에 와 어깨에 팔을 두르고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는 곧 다시 말을 계속했다. 알렉시스는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사실 지아코펠리의 행적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청각보다 촉각 쪽이 신경이 더 쏠렸다. 그의 묵직한 팔의 중량감 그리고 까칠까칠하게 와 닿는 뺨과 브랜디향이 풍겨 나오는 입술.. 그런 것들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열심히 고용주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그녀는 도저히 거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단지 브랜디 잔을 홀짝거리며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듣고 있소?"

"."

"아니오. 당신은 듣고 있지를 않는군." 그는 그녀를 자기 무릎에 끌어 앉혔다.

"카리아드! 당신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 하오."

브랜디 따스한 온기 늦은 시간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두르고 있는 근육질의 팔... 이런 것들은 그녀가 주의를 집중하는 것을 계속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위기가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요.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가 모두 사라지겠지."

그는 나머지 브랜디를 다 마시고는 그녀를 무릎에서 내려놓으려고 했다.

"가지 마세요!" 그녀는 몽롱한 기분이 되어 감상어린 말투로 그를 붙잡았다.

", 렉시! 정말 나를 힘들게 하는군." 버릇처럼 자기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조용히 그가 말했다.

"제발!" 알렉시스는 질식할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가 가버리고 나면 자신을 주체하기 힘들 것 같았다.

퍽이나 길게 느껴지는 잠시 동안 그들은 서로를 깊이 응시하고 있었다.

"렉시! 나도 이대로 떠나긴 싫소. 하지만... 하지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거요."

"라이스!" 알렉시스는 구원이라도 청하듯 그의 목에 매달렸다.

"아니야!" 신음하듯 부정했으나 그의 팔은 이미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그리고는 마치 다시는 놓아주지 않기라도 할 듯이 꽉 끌어안았다. 잠시 후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괴로운 듯이 웅얼거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손이 그의 셔츠 속으로 조금씩 기어들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뜨거웠고 그의 몸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카리아드!" 그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의 손은 이미 그녀의 맨 살갗에 닿았다.

갑자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저게 무슨 소리지?"

위층마루가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런! 우리가 어머님을 깨운 모양이로군. 찬물세례를 받을지도 모르겠는데." 라이스는 넉살좋게 웃으며 그녀를 다시 한 번 껴안아 주었다.

그의 가슴의 따사로움이 그녀의 뺨에 느껴졌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 잔소리 듣기 전에 난 이만 물러가야겠소."

둘은 이내 떨어졌다.

알렉시스는 급히 셔츠를 꿰며 물었다.

"어머니가 혹시라도 들어오시면 뭐라고 할 작정이에요?"

"'나가 주십시오.' 그러지." 라이스가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라이스는 타이를 꺼내어 매었다. 그의 얼굴은 좀 전과 달리 근엄해 보였다.

"이만 가보겠소. 클럽에서 서로 조심하는 것 잊지 마시오!"

고개를 끄덕여 보이기는 했으나 그의 침착성과 자제력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알렉시스는 어느새 이방인으로 변해버린 라이스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에 관해서 알고 싶군요. 아이들을 좋아하는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미래의 계획은 무엇인지 등등..."

"다음에 얘기합시다."

그는 당황하는 눈빛으로 천장을 한 번 힐끗 올려다보더니 발걸음소리를 죽이고는 현관 쪽으로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사라져버렸다. 알렉시스는 허전한 마음으로 문을 잠그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제프와 자기 사이보다 라이스 쪽과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일시에 동작을 멈추었다. 남편! 왜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래 라이스는 누군가의 남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 불시에 치밀어 오른 생각에 마음을 태우며 고통스러워했다. 이제 빗물은 그녀의 마음에 눈물이 되어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8

처음으로 사랑한 것은 미혼남이였으나, 두 번째는 기혼남자? 알렉시스는 카운터에 앉아서 더 이상 결코 피할 수 없는 그리고 피해서도 안 되는 결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혹 자신과의 사이가 부도덕한 일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던가? 그녀는 턱에 괸 손의 손톱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잘강잘강 씹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그가 남편이라는 위치에 놓여진 사람인지 아닌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석연치 않은 태도로 미루어 그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것외에 또 무슨 이유가 둘 사이를 가로막을 수 있단 말인가? 라이스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위기라는 것은 아내와의 이혼문제를 두고 하는 소리일까?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쳤다. 알렉시스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이 남의 가정을 파괴시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손님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돈을 꺼내면서 뭐라고 농담을 했지만 그녀는 알아듣지 못해 그냥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손님이 가버리자 마자 그녀는 금세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자기라는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라이스의 결혼생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자기가 나타남으로써 그와 그의 아내 사이에 위기가 닥치게 된 걸 것이다.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지고 괴로운 심정이 되어갔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양심적인 것일까? 라이스에게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딱 잘라 말해야 할까? 하지만 그녀는 그럴 용기도 없었고 또 라이스를 잃는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 그가 아내와 헤어지는 것을 옆에서 종용이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못할 노릇이다. 역시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방법 외에는 별달리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아코펠리에 관해 그녀가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듯이 라이스에 대해서도 별반 아는 것이 없었다. 그의 아내는 누구일까? 게일? 그리고 애들은 있을까? 아마 <자네트와 존의 이야기>는 그의 아이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없다는 일이 얼마나 아타까운 일인지 알렉시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라이스의 아이들을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아이가 있기는 한 것일까?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어찌되었든 그것이 비록 크나큰 충격이 되더라도 모든 사실은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요 며칠 사이 알렉시스는 라이스와 이야기해 볼 기회가 통 없었다. 그는 전기 공사 때문에 늘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였고 그녀 역시 지아코펠리가 일요일 회합으로 많은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지는 잡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힘을 내게 해다오!" 디노가 거칠게 나오면 지아코펠리는 늘상 그런 식으로 말했다. 토요일 저녁 그들 부자는 흥분하여 주먹으로 책상을 쳐가며 열렬히 각자의 의견을 주장해대고 있었다.

그때 라이스가 손으로 이마를 탁 치며 알렉시스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정말 시끄러워 죽겠군. 아버지와 아들이 저렇게 화합을 못해서야! 그건 그렇고 우리 내일 오후에 비키를 데리고 동물원에 가는 게 어떻겠소?"

알렉시스는 이 제안에 어찌해야 좋을지 당황했다. 만일 그가 다른 아이의 아버지라면 제안을 수락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키는 당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따라오겠다고 할 거요."

라이스는 남의 속마음도 모르고 그녀의 주저하는 표정을 제멋대로 해석해버렸다.

"2시에 데리러 가겠소." 그렇게 덧붙인 라이스는 금세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엄마, 오늘 오후에는 새미의 생일파티가 있는걸! 엄마도 알잖아?"

다음날 아침 빅토리아는 아침을 먹으며 투덜대었다.

"저런!" 알렉시스는 딸의 중요한 일정을 잊고 있었던 것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엄마, 새미네 집에서 라이스아저씨에게 태워다 달라고 하면 안될까? , 엄마!" 빅토리아는 사뭇 졸라댔다.

"그래 볼께." 알렉시스는 이번 기회에 라이스에게 궁금했던 것을 모두 물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꼬마소녀는 두 시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푸른색과 흰색의 리본이 달린 파티복을 입고는 기쁜 듯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들 앞에서 빙그르르 돌아보였다. 그러나 차의 클랙슨 소리를 듣자마자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재빨리 달려 나갔다.

"라이스아저씨다!"

알렉시스는 딸의 뒤를 쫓아 밖으로 나갔다.

"사만다의 선물을 떨어뜨리면 안 돼. 그리고 꼭 감사의 인사를 잊지 마라."

보통 있는 변덕이기는 하지만 날시가 갑자기 흐려지기 시작했다. 검은 구름이 해를 가려버리고 푸른 하늘을 시기라도 하듯 덮어갔다.

라이스도 날씨 걱정을 했다. 그는 적갈색의 가죽 자켓에 은회색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그가 뺨에 입맞춤을 해 주려는 것을 알고 꼬마숙녀는 고개를 쭉 빼었다.

"정말 근사한데!" 그의 찬사에 빅토리아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난 생일파티에 가야 하기 때문에 아저씨랑 엄마랑 동물원에 갈 수가 없어요." 빅토리아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설명했다.

"다른 날 동물원에 데리고 가 주시면 안 되나요?"

라이스가 몸을 구부려 빅토리아의 옷에 달린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왜 안 되겠니?"

"오늘 계획을 취소하게 되어 정말 죄송해요." 알렉시스가 사과의 말을 하고 있을 때 재빨리 빅토리아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다음 일요일에는 동물원에 가는 거지요? ? 제발 라이스아저씨!"

"물론이지, 걱정 말고 즐겁게 지내도록 해요."

빅토리아는 희색이 만면해서 차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파티가 끝난 다음에 데리러 와 주시면 안 될까요?" 빅토리아는 다시 라이스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갈 거야." 알렉시스가 돌아보며 먼저 대꾸했다.

"그 집에 가서 말썽피우면 안된다. 알겠니? 참 손수건은 가졌어?"

빅토리아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손수건을 흔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 엄마."

라이스는 그 꼬마소녀가 시끄러운 장난꾸러기의 무리에 섞여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알렉시스에게 기회가 온 셈이었다.

"결혼하셨어요?"

차가 조용한 길로 접어들자 알렉시스가 다짜고짜 침묵을 깼다.

"아니면 그와 비슷한 상황인가요?"

라이스가 그녀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손위에 살며시 포개어졌다.

"그렇소."

맙소사! 결국 예감이 적중한 것이다. 그녀는 전신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금세 눈물이라도 뚝뚝 떨구고 말 것같았다. 짐작으로 여겨온 일이지만 사실을 알고 나니 전신의 기운이란 기운은 모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런 순간이 오지 않기를 사실이 아니기를 얼마나 빌었던가!

"아이들도 있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아니오. 나의 결혼생활은 불과 2년간이었소. 처음부터 아이를 갖기 곤란한 입장이라 피했소. 그리고 결국 이혼하고 말았지."

이혼? 그녀는 조금 희망이 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혼이 자기 때문만 아니라면 말이다.

"무슨 문제로 이혼했나요?"

"우리는 둘 다 너무 어렸소. 나는 정규시간 외에도 가끔 밤새워 일을 해야 했는데 아내는 혼자 남아 있는 것을 몹시 싫어했소. 그래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지. 나는 그런 이해심 없는 태도가 불만스러워서 자청해서 더 많은 일을 맡아하게 되었소. 어리석은 일이었지. 아내는 또 그 앙갚음으로 저녁 때마다 혼자 외출해 버리고.." 그의 표정이 몹시 착잡해 보였다.

"내가 조금만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던들 일을 그 지경으로 만들진 않았을지도 모르오. 결국 그녀는 다른 남자와..."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때도 소호에서 일했나요?"

라이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카르디프에서."

"그때부터 계속 혼자 지냈나요?"

"그렇소. 내게는 이혼이 큰 상처였소."

알렉시스는 그가 정직하게 과거를 이야기해 준 것이 고맙게 느껴졌다.

"앞으로도 계속 경호원생활에 만족할 건가요?"

".. 그것은 아직 생각해 보지를 못했소. 내 생활은 현재로서는 안정이 되어 있으니 말이오."

안정이라고? 무법천지의 경호원생활이? 알렉시스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는 라이스의 일을 너무 사회통념에 입각해서만 평가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저주해왔던 모든것, 이를테면 어머니의 고리타분한 가치관이나 선입견 따위와 하등 다를 바가 없음을 새삼 의식했다. 그녀는 라이스가 자기 일에 신념을 갖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마음먹었다.

"코는 어떻게 해서 다쳤어요?"

"럭비경기를 하다가." 그가 얼굴을 한쪽으로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너무 엉망이 되어 외과수술을 받았소. 처음에는 속상했지만 뭐, 이 정도면 그런대로 봐줄만 하지 않소?"

"그런 것 같군요." 이번엔 알렉시스가 웃어 보였다.

그들이 템즈 강변 옆의 자갈 깔린 좁은 길로 들어섰을 때 갑자기 돌이 굴러내렸다. 몰건은 급브레이크로 정차했다. 해는 눈부시게 빛나고 버드나무의 가지들이 하늘하늘 흔들리는 사이로 흰 요트들이 드문드문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금 차는 고가의 아름다운 벽돌로 탄탄하게 지어진 집 앞에 정차했다. 이런 건축양식에는 내부시설도 각별하게 꾸며져 있어야 할 것같았다.

"여기가 어디에요?" 그녀는 놀라서 물었다.

"내 집이오." 라이스는 미소 지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알렉시스는 그가 이런 멋진 집의 주인인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얇은 레이스커튼이며 창밖으로 보이는 강의 경치, 그리고 방 안의 메우고 있는 흰색과 노랑 파란 빛깔의 장식들은 그녀를 흠씬 매료시켰다.

"찢어진 바닥에 더러운 우유병이 널려 있을 줄 알았겠지?"

"지아코펠리씨도 당신이 여기에 사는 것을 아시나요?"

"아니오. 그들에게는 절대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부탁이 한 가지 더 있소. 오늘 밤 열리는 회합에 나가지 않겠다고 나와 약속해 주오."

그녀는 소파에 걸터앉으며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런 약속을 해야 하나요?"

"그것은.. 당신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위험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요? 그리고 보수를 두 배나 받는 걸요!"

라이스는 그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돈이 원수로군! 당신이 그 일을 거들지 않아도 될 만큼 내가 돈을 주겠소."

"돈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리고 그런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아요. 그곳의 일을 돕는 것은 내가 거기서 일하는 한 나의 의무이기도 해요."

라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충실할 필요는 없소."

"당신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나와 당신은 입장이 다르오." 라이스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당신이 내 말을 따라 주기 바라오. 그래야 모든 일이 잘 될 거요. 그리고 만일 그렇지 못하면 내 마음이 몹시 상할 거요." 그가 알렉시스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라이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머리를 잡고는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들 사이의 벽이 다시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알렉시스의 온몸을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듯이 격렬하게 끌어안으며 라이스가 꿈결처럼 중얼대었다.

"카리아드!" 그녀의 목덜미에 뜨거운 입김을 뿜어내며 그의 속삭임은 감미롭게 그녀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 입맞춤 후에 그는 갑자기 그녀를 떼어내어 번쩍 안아 올리고는 거실을 가로질러갔다.

하얀 레이스 시트가 덮인 침대가 보이는 방의 문을 열어젖히고 라이스는 다가가 그녀를 내려놓았다.

"당신을 사랑해." 가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을 때 그들의 몸은 세차게 서로를 갈구했다. 그녀의 거친 호흡에 동조하며 그는 알렉시스의 전신을 더욱더 끌어당겼다. 그녀는 화산의 폭발과도 같은 엄청난 열기의 불꽃과 허공의 무지개를 손에 쥔 듯한 느낌으로 숨을 멈추었다.

 

5분 늦게 빅토리아를 데리러 갔지만 별일은 없었다. 알렉시스는 계속 멍한 기분이었다. 사만다의 어머니는 그들을 이상한 눈초리로 번갈아 쳐다보았다. 마치 무엇인가를 들킨 듯 당황스러웠으나 알렉시스는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가 야채샐러드 접시를 식탁 위에 놓고 있을 때도 알렉시스는 다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오늘 밤에도 가야 하니?" 허드슨부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5일 근무가 부족해서 또 나오라고 하더냐?"

라이스의 경고가 떠오르자 그녀는 가야 할 것인지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샐러드 먹어라." 허드슨부인은 알렉시스 앞으로 접시를 밀어 주었다. 빅토이라는 연신 생일파티에 대해 조잘거렸다.

 

알렉시스는 슬그머니 문을 밀고 들어가 재빨리 탈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수키가 왔을 때는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갈아입은 뒤였다.

 

"라이스 봤어?" 알렉시스는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아래층으로 쏜살같이 내려가던걸."

알렉시스는 수키가 화장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서는 함께 카운터로 나갔다.

"잠시 동안만 나랑 같이 있어 줄래?" 알렉시스는 겨우 결심을 바꾸어 이곳에 오기는 했지만 자기가 할 일에 대해서도 그렇고 라이스와 맞부딪칠 것이 염려스러웠다.

", 떨리는 모양이구나?" 수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 조금은. 카지노에서 일해 본 적은 없거든. 그리고 술을 날라보는 것도 처음이야."

수키가 그녀의 마음을 달래 주려는 듯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걱정마! 조금 있으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그리고 지아코펠리씨의 딸들이 너를 도와줄 테니까, 염려 없어."

만일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라이스를 만나게 되면 그는 필경 그녀를 집으로 쫓아 보내려고 할 것이다. 마구 화를 내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그러나 손님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손님들 앞에서 라이스가 야단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인상이 험악했다. 볼이 움푹 꺼지거나 턱이 튀어나와 있거나 망치처럼 커다란 주먹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알렉시스는 그만 기가 질렸다.

"잠깐 이리로 따라오시오, 램버트 부인! 일손이 필요하니까. 손님들을 목마르게 할 수는 없잖소?" 그렇게 말한 지아코펠리는 아래층으로 후다닥 내려가 버렸다. 그녀는 스커트 속으로 블라우스를 더욱 바짝 당겨 넣고는 어깨와 소매를 매만지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카지노로 내려갔다.

사실 그녀는 예전부터 아래층에 내려가 보고 싶었다. 물론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녀는 들어서기 직전, 호흡을 가다듬었다.

카지노 내부는 화려했다. 값비싼 붉은 카펫에 참나무로 만든 판넬들이 걸려 있고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샹들리에가 눈부셨다. 게임테이블이 보이지 않는 것은 회합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긴 모양이었다. 그녀는 뿌연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는, 3~4명쯤 되는 남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나이 지긋한 남자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로 툭툭 쳐가며 웃고 떠드는 소리 심각하게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 과장된 몸짓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방안은 성시를 이루었다. 건너편 바에서는 두 여자가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그 여자들을 자세히 보려고 발꿈치를 세우자 실크블라우스가 몸을 따라 스르르 빠지면서 그녀의 가슴에 곡선을 만들었다. 알렉시스는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곳에 이중문이 열리고 그 문 뒤로 또 다른 멋지게 꾸며진 방이 있는 것을 보았다. 기둥 옆으로 의자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정식회합은 그곳에서 열리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수라장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요?" 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녀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으로 뒤돌아보았을 때 잔뜩 분노를 머금은 눈동자와 마주쳐버렸다. 강철과도 같은 손가락이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내가 오지 말라고 일렀잖소?"

라이스의 음성은 격노로 인해 떨렸지만 군중의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지금 당장 위층으로 올라가 있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그는 그녀는 이끌고 두 계단씩 마구 오르기 시작했다. 두려움으로 알렉시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당신이 마음상할 거라고 한 말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황갈색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있을 때 라이스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이봐요, 알렉시스! 난 당신을 사랑하오. 만일 당신도 나를 사랑하거든 카지노에서 제발 멀리 떨어져 있어요!" 그의 눈이 불타오르듯 이글거려. 아까는 그다지도 부드럽고 상냥했던 그가 이토록 거칠게 굴다니!

"하지만 라이스!" 그가 계속 현관 쪽으로 밀고 가자 그녀는 외쳤다. 그녀는 그를 멈추게 하느라고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밀어내었다. 그 순간 알렉시스의 손에 무언가 차갑고 딱딱한 물체가 느껴졌다. 라이스 역시도 당황한 빛으로 굳어진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알렉시스는 경악으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세상에!"

그것은 총이었다. 라이스는 총을 몸에 지니고 다녔던 것이다. 알렉시스는 이런 일이 텔레비젼의 드라마에서나 벌어지는 것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일을 자기가 보게 되다니.. 그녀는 총을 실제로 만져본 적도 본 적조차도 없었다. 악몽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그녀는 다음에 생길 일을 상상하며 떨리는 손을 자기 뺨에 대었다.

"나를 믿어요." 알렉시스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아주며 그가 굵고 나직한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난 이제 어떻게 하죠?"

알렉시스는 더 이상 무엇을 물어볼 기력조차 없었다.

"우선은 탈의실에 가서 꼭 붙어 앉아 있어요. 내가 좀 있다가 당신이 가는 것을 확인해 보러 오겠소. 만일 지아코펠리가 당신을 찾으면 몸이 불편한 모양이더라고 말해 둘 테니 염려하지 말아요."

갑자기 아래층이 조용해진 것을 느낀 라이스의 표정에 일순간 긴장이 스쳐지나갔다.

"난 지금 내려가 봐야겠소. 회합이 시작된 모양이오. 내말 절대 잊지 말아요!"

"조심하세요."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알렉시스가 말했다.

"그래요, 카리아드. 그럴게."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곳에 앉아 계속 떨고 있어야 할까? 그녀는 휘황한 벨벳으로 장식된 탈의실에 죽치고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거울을 본 순간 거기에 비친 자기 모습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의미 없이 신문뭉치를 집어 거울을 향해 던지고는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잠시 후 꽤 오래된 것으로 생각되어 시계를 들여다보았지만 실은 몇 분도 지나지 않았다.

반시간쯤 지나서 수키가 들어왔다.

"여기 있는 줄은 몰랐어." 그녀는 놀란 얼굴로 알렉시스를 힐끗 쳐다보고는 자기가 가져온 종이가방을 끌어당겨 뒤적이기 시작했다.

"괜찮니?"

"조금 안 좋아." 이것은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그래, 창백해 보이는 것 같구나." 수키가 가방을 제자리에 놓으며 안 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나가버렸다. 알렉시스는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으나 감히 밖으로 나가볼 엄두는 나지가 않았다.

40분쯤 후에 수키가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무서워. 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를 거야!" 그녀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경찰 몇 사람이 아래층 계단에 버티고 있어. 내 생각으로는 그들이 급습을 하려는 것 같아. 굉장한 일이잖니? ! 카지노 베네치아도 막을 내릴지 모르겠군!"

알렉시스도 수키처럼 흥분되기는 하였으나 그녀의 마음은 흥미로움보다는 걱정스러운 쪽이었다. 라이스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사실을 알기나 하는 것일까?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은 라이스가 경찰인 것 같더라고!"

수키의 이 한 마디에 알렉시스는 기절할 듯 놀랐다.

"경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 조용히 해. 밖에 사람들이 있다고! 그래, 아직 잘 모르지만.."

디노와 그의 아버지가 라이스가 경찰인 것을 안다면 어떻게 나올까? 그들도 혹시 총을 소지하고 있다면.. 알렉시스는 김장이 멈추어 버릴 것만 같았다. , 하느님! 제발 총격전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기를!

"처음부터 지아코펠리씨에게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접근하더라니.. 하지만 만일 그 늙은이가 무슨 범죄라도 저질렀다면 왜 여태 그냥 내버려 두었을까?" 수키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오늘 회합이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겠지." 알렉시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 라이스와 네 사이가 가깝다고 하지 않았니? 그렇다면 잘 되었구나. 경호원보다야 경찰이 더 낫지. 안 그래?"

"아니야!" 알렉시스가 소리쳤다.

"오라! 네 죽은 남편도 경찰이었었기 때문에?" 수키의 말에 알렉시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라이스는 너와 만나면서도 자기가 경찰이란 말을 한 적이 없니?"

"." 알렉시스는 악몽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그럼 어디에 근무하는지 모르겠구나?"

"."

"저런!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 너에게까지 숨기다니. 혹시 경찰들에게 물어보면 알지도 몰라."

알렉시스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둘은 문을 빼꼼이 열고 바깥을 살폈다. 밖은 시끄러웠다. 벌써 경찰관 몇 사람이 아래층으로부터 머리에 손을 얹은 지아코펠리의 손님들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말다툼을 하거나 일그러진 표정들이었다.

"이봐! 당신들이 목조 문 뒤에서 기어 나온 아가씨들이오?"

비상구 쪽으로 가는 알렉시스와 수키를 보고 경관 한 사람이 물었다.

"아니에요. 나와 내 친구는 이곳 위층에서 일하고 있어요. 우린 수상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수키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는 알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좌우간 따라오시오. 서까지 함께 가주셔야겠소. 이 안에 있던 사람은 모두 가야 하오."

"좋아요." 수키가 불쾌한 듯 대꾸했다. 알렉시스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저어, 실례지만 혹시 로버트라는 분이 같이 근무하고 계신가요? 라이스 로버트라고.."

경사는 턱을 긁적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근무하는 사람 중에는 없고 악당 녀석들 중에 프랭크 로버트라는 자가 있기는 하오만."

"아니에요. 라이스 로버트에요."

"그야 가명을 썼을 수도 있지요. 키가 큰 웨일즈인 아니오? 얼굴에 다친 흔적이 있는?"

"그는 아주 멋지게 생겼어요." 수키가 끼어들었다.

"멋지게? 글쎄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

알렉시스의 심경은 절망적이고 착잡했다. 만일 라이스가 프랭크 로버트라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무언가 잘못된 걸 거야.

"그 친구 지금 경찰서에 가면 볼 수 있을 거요. 잘 되었군. 서에 가서 당신의 영웅도 만나보고." 경관이 말을 하고는 씨익 웃었다. 알렉시스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그를 따라 경찰서까지 갔다.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르시나요?"

경관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지금쯤 심리실에 있겠지. 마르크스당원같이 지독한 자만 아니라면 심문은 금세 끝날 거요."

알렉시스는 차가운 날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몸이 점점 떨려왔다. 그녀는 경찰서 복도에 설치된 대기용 의자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는 울적한 기분으로 금이 간 천장을 바라보다가는 다시 우중충하게 색이 바랜 벽으로 눈길을 돌렸다.

"지하실에서 잡혀온 게 틀림없어." 수키가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리며 복도 저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디노가 양팔을 경관에게 붙들린 채 무어라 계속 떠들어대면서 끌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라이스는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할 때가 왔다. 아무리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가 만일 범죄자라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경관 한 사람이 사무실에서 나와 수키와 알렉시스가 있는 쪽을 향해 물었다.

"램버트 부인이 누구시죠? 베네트 경감님이 부르십니다."

", 전데요." 알렉시스가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수키가 그녀의 소매를 잡아 끌며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경감이 너를 왜 부르지? 너만 특별히?"

알렉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이렇게 특별한 취급을 받는 이유는 라이스와의 관계 때문일 것이었다. 뭐라고 말하지? 우리가 애인 사이였다는 것을 밝혀야 하나?

문이 열렸다.

그런데 정작 경감이라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라이스가 혼자 서 있는 게 아닌가!

"라이스! 무얼 하고 있는 거예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알렉시스가 입을 열었다.

"경감은 어디 있죠? 왜 우리만 두고 나가버린 거예요?"

그녀는 자기가 당하게 된 이 엄청난 일을 생각하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 방에 도청장치라도 있나요? 함정이 아닌가요?"

라이스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달래듯이 말했다.

"우리만 여기 있게 된 까닭은 내가 5분만 우리 둘이 있고 싶으니 모두 나가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오. 그리고 도청장치 같은 것은 없으니 안심해요."

"당신이 명령을 했다고요?"

그가 씨익 웃었다.

"베네트 경감은 내 직속부하니까."

알렉시스는 또다시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코웃음을 피면서 소리 질렀다.

"당신은 그럴 수 없어요! 내가 클럽에서 한 경찰관에게 당신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당신의 이름조차 모르던걸요. 하지만 인상착의는 알더군요. 프랭크 로버트, 범죄자의 일당이라고.."

"! 그 자 말이오? 그는 나와 생김새가 비슷하지. 하지만 나는 프랭크도 라이스 로버트도 아닌 로버트 라이스 베네트요. 그리고 신분을 감추느라 이름을 조금 바꾼 것뿐이오."

그는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 이것으로 눈물을 닦아요."

"그런데 왜 그 경관이 당신의 가명조차 모르는 거죠?"

"그 경관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위층에만 있던 사람이라면 카지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을 거요. 그리고 내가 있는 줄은 몰랐을 테고. 내가 지아코펠리와 함께 밖으로 나왔으니 한패거리인 줄로 착각했겠지. 내가 이 경찰서에 와본 것은 겨우 두 번 뿐이오. 난 웨일즈에서 파견 나왔소. 그러니 대부분의 경관들에게는 내가 생소할 테지."

그녀는 그의 말을 이해할 듯했다.

"내 정체가 카지노에서 드러나게 될 때까지는 경찰국장만 이 일을 알고 있었소. 안전을 위해서지. 만일 법적인 일로 충돌을 빚게 되더라도 밑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범인과 한패인 줄 알았을 거요."

알렉시스는 다시금 울먹이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위험했었군요. 하지만 별일 없어서 다행이에요."

"사랑해." 라이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나도 그래요."

"난 당신을 내 철창에 가두어버리겠소. 아무데도 못 가도록."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다 지나버렸군. 렉시!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합시다. 앞으로 시간이야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난 이제부터 진술서를 써야 해요. 오늘은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을 시켜 당신을 바래다 주도록 하겠소." 그가 사죄의 뜻으로 이마에 다시 한 번 가벼운 키스를 해 주었다.

"내일은 만날 수 있겠지만 그 후 이틀 동안은 여기 없게 될 것 같소."

"지아코펠리씨와 디노도 체포되었나요?"

"그들과 다른 열 명도 함께."

"그럼 카지노 베네치아도 문을 닫겠군요."

"그럴 테지."

"난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인가요?"

"그렇소."

알렉시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요, 당신이 처음에 나를 카운터에 있지 못하도록 한 것이 옳았어요."

"카리아드! 당신의 일자리를 빼앗을 마음은 없었소. 대신 당신에게 다른 일자리를 하나 소개하지."

"세인트존스우드의 그 호텔 말인가요?"

"아니오. 내 마음, 내 인생에 말이오. 보수는 썩 좋지 않을 테지만 이것만은 약속하지.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한 직장이라는 것!"

 

9

라이스는 창가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노을이 핑크빛과 금색 그리고 장밋빛으로 물들이는 템즈강을 경이로운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사흘 후 땅거미가 내릴 즈음에 그는 벌써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아홉 달 동안 <카지노 베니치아>문제로 시달려온 모든 피로를 풀고 느긋한 기분이 되어 여유를 즐기고 있는 참이었다. 그는 만일 지아코펠리가 자기를 의심하면 어떻게 할가 마음 졸이던 위기일발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턱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타오르는 듯한 저녁 하늘을 향해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지금 자기와 같은 기분에 취해 있는 또 한사람! 주방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그는 활짝 웃었다. 그가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해 낸 그 지옥 속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역시 알렉시스를 만난 일이었다. 이제부터의 인생은 그녀와 함께라고 생각하니 불현듯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알렉시스가 막 오븐의 문을 열고 있을 때 그는 식욕이 나는 듯 코를 킁킁거렸다.

", 맛있는 냄새군!"

그의 눈길은 흰 팬츠와 짧은 셔츠를 입고 있는 그녀의 미끈한 몸매에 머물렀다. 그는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알렉시스는 따스한 입김을 목덜미에 느끼다가 슬그머니 그 팔을 풀었다.

"내가 당신을 위해 요리를 하다니! 우습지 뭐예요."

그녀는 다시 오븐 문을 닫고, 백포도주가 곁들여진 저녁상의 치킨을 바라보고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요리냄비는 한 40분쯤 더 있어야 꺼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휴! 40분씩이나?"

"오븐이 새 것 같은데 손수 요리를 만든 적이 없나요?"

", 아직"

",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보실까요? 당신이 말했었지요?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그 동안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해 주겠다고 말예요."

"좋아요, 베네트 부인! 그것이 정 소원이라면 자, 그럼 무엇부터 얘기해 줄까?"

알렉시스는 위스키소다 두 잔을 만들어 내왔다.

"지아코펠레리는 처음 몇 해 동안은 풋내기 경영주에 불과했었어. 그러다가 점차 엄청난 흑심을 품기 시작했지. 이태리에 있던 자기 동료들을 불러 모아 소호 지구에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꿈을 꾼 거야."

"마이파처럼요?" 알렉시스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마피아? 그래. 새끼마피아쯤으로 해 두지. 그런데 그가 범죄조직을 확산해나간다는 아무런 증거도 범법행위도 적발되지 않았어. 그래서 생각 끝에 우리는 스파이작전을 쓰기로 한 거야. 그 스파이가 바로 나인 셈이고."

라이스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위스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가 처음 하던 짓은 사람들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조직이 광범위하게 뻗어나간 후였지."

"어쩌면 그토록 점잖고 자애로워 보이는 사람이!" 알렉시스는 자기의 귀가 의심스러운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대개 협박당하는 사람은 주변의 상가 주인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약점을 교묘히 캐내어 협박을 했어. 돈을 내놓지 않을 경우에는 보복을 당해야했지. 대부분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돈을 내어준 거야."

그녀는 언짢은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지난번 나 때문에 주정꾼과 싸우게 되었을 때는 그에게 얼마나 상처를 입혔나요?"

"난 건드리지도 않았어."

그녀의 눈이 쟁반처럼 휘둥그레졌다.

"건드리지도 않았다고요?"

"그 불쌍한 건달은 겨우겨우 버티고 서 있었는걸. 그래서 지갑을 털어 있는 대로 주고는 택시를 태워 보내버렸지. 다음날이면 자기가 밤새 무슨 짓을 했었는지도 기억조차 못할 녀석인데 뭘." 그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어보이다가 그는 자기가 지아코펠리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던 일이며 가끔씩 아슬아슬한 위험의 고비가 닥쳤던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알렉시스는 그의 잔이 비워진 것을 보고는 다시 채워 주며 자신이 궁금히 여겼던 일들을 하나씩 묻기 시작했다.

"귀걸이는 왜 달고 다녔지요?"

"대부분 불량기 있는 녀석들이 그런 것을 하고 다니더군. 그래서 나도 그들 중 하나인 것처럼 보이느라고 그랬던 거요. 아마 당신은 내가 늑대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겠지?" 그가 놀리듯이 말하고는 그녀의 코끝을 톡 쳤다. 그녀의 장난기어린 눈에서 웃음을 참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왜 하필 당신이 이번 임무를 맡게 된 거죠?"

라이스는 위스키를 꿀꺽 삼키고는 사라사천으로 씌워진 소파에 비스듬히 누웠다. 물론 베개대신으로 알렉시스의 무릎이 그를 받치고 있었다.

"비밀이 지켜지려면 런던의 거주자가 아닌 사람이어야 했거든. 마침 경찰국장과 나는 잘 아는 사이였지. 그를 만난 것은 럭비시합 때였어. 각 지방 경찰대항전이었는데 그는 열렬한 럭비 팬이지. 게다가 내겐 딸린 식구도 없었으니 아주 적격이라고 여긴 모양이야."

"그래서 할 수 없이 맡았나요?"

"아니, 내가 자청했어. 스파이란 건 강제로 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더구나 그는 나의 직속상관이 아니었으므로 꼭 그의 명령을 따라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내가 해보고 싶어 했지. 더구나 난 지아코펠리가 관계하던 체육관을 잘 알고 싶었기 때문에 더욱 흥미가 있었어."

"그것이 얼마나 위험스런 일인지 알고나 한 거예요." 알렉시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본래 나는 안정적인 타입은 못돼. 뭔가 새로운 것을 접해볼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는 그 일에 뛰어든 거야."

그녀의 표정엔 여전히 근심의 빛이 서려 있었다. 전 남편과 라이스를 비교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비슷할까 모험을 즐기는 타입이라는 점은 둘이 너무도 똑같았다. 하지만 라이스에게서는 많은 안정감과 믿음직스러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전 남편 때와 다른 점이었다.

", 렉시! 그런 표정은 짓지 말아요. 이제 당신이 있으니 나의 모험을 즐기는 생활도 끝이 난 셈이오. 앞으로는 당신이 원치 않는 일이라면 결코 하지 않겠소."

알렉시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다 믿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기 의지대로만 할 수 없는 경우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이제 그도 그녀도 철없던 시절에 저질렀던 과오를 또다시 반복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을 것이다.

"렉시! 우리에겐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중요한 일?"

"그래 인생에서 사랑보다 더 중요한 일이 또 있겠소?"

", 당신도! 시간은 많아요. 그런데 지아코펠리의 사업이라는 것은 뭐였지요?"

"으응, 아까 말한 대로 협박, 게다가 매춘 행위, 그리고 가장 악랄한 것은 마약밀매였지. 그것도 청소년을 상대로."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군요."

"그리고 이 사실을 알면 당신은 기절하려고 들 거요."

"뭔데요?"

"지아코펠리가 당신을 기용한 실질적인 까닭이 무엇인지 아오? 당신 생각으로는 정직해 보였기 때문인 줄 알겠지만 그게 아니야. 당신의 미모를 탐냈던 것이라오. 그런데 정작 자기 아들이 당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당신에게 손을 대지 못했던 거요. 그리고 나와 당신이 함께 있다가 발각된 일도, 아들이 상처를 입을까봐 차마 말해 주지 못했지."

"설마.. 정말 끔찍하군요." 그녀는 다시 얼어나 앉은 그의 품안으로 살며시 다가들었다. 생각할수록 몸서리쳐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늑대 굴에서 겁도 없이 서성이고 있었다니!

"처음에 게일을 택한 게 잘못이었어. 그녀는 지아코펠리가 좋아할 타입이 아니었거든, 당신처럼 말이야."

"몰라요!" 그녀는 장난기어린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라이스는 히죽거리며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언제부터 나를 사랑한 거지요. 당신?"

"후후! 언제인 것 같소?"

"글쎄, 처음으로 카운터 박스에 앉았을 때?"

"틀렸어.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당신이 내게 지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그 모습은 아주 매력적이었다고!"

"정말요?"

"그럼."

", 게일은 여순경인가요?"

",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지. 그녀는 내 애인역할을 한다는 것이 쑥스러웠던 모양이야. 경험이 전혀 없었으니까. 지아코펠리가 날더러 금요일에 광고를 내라고 했었지. 나는 만일 다른 지원자가 뽑힐 경우를 생각해서 들어오는 입구 쪽에 몰래 숨어 있다가 괜찮은 여자다 싶으면 핑계를 대고 쫓아버렸지. 그리고 실격될 것같은 여자들은 조용히 지아코펠리 사무실로 가도록 내버려 두었어. 그런데 당신이 온 거야. 게다가 당신이 버티는 바람에 결국 디노가 우리를 보게 된 거고. 디노덕에 당신은 면접을 할 수가 있었던 거지."

"난 운이 좋은 셈이었군요."

"그리고 게일로 하여금 디노와 가까와지도록 해서 뭔가 캐내어 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 거요. 당신 때문에." 그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디노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아직도 그에게 관심이 있으신 모양이군? 그는 다시없는 바람둥이었소. 늘 그것이 말썽이 되어 아버지와 다투곤 했지."

"됐어요. 디노에 대해서는 그만 이야기해요. 클럽이 급습 당했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나요?"

라이스는 조금 취한 기색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 회합은 지아코펠리의 실패작이었어. 그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그의 동료들에게 과시하고 싶어 했지. 그리고 그들이 새로이 확대해나갈 영역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 위한 모임이었어. 그들의 회합이 끝나갈 때에야 비로소 덮친 것은 막판에 마약이 그곳을 운송된다는 정보를 내가 이미 입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오. 가장 굵직한 증거였으니까. 운송방법도 기발했지. 하마터면 찾기 못할 뻔했소. 양조장으로부터 실어오는 오크통 속에 비닐주머니에 넣어 밀봉한 마약을 매달아 놓았지 뭐겠소!"

"어머나! 정말 굉장하군요."

"그리고 나는 작은 마이크로기기를 이용해 그들의 밀담 중 중요한 부분을 녹음해 두었지." 그가 싱겁게 웃어 보였다. 알렉시스는 마치 자기가 007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그동안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어요. 전에 옥스퍼드 서커스장 근처에서 당신을 본 적이 있었어요.."

"그랬소?"

"비키를 시내에 데리고 나갔을 때였죠."

"그때 만난 경관이 이 지역세서는 비교적 나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었지. 그에게 내가 이곳에 살게 된 사실을 숨기느라 애를 먹었소. 게다가 그가 베네트 경감! 하고 나를 불렀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지. 런던에는 눈이 많거든. 혹시 운 나쁘게 지아코펠리의 친구나 아는 사람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끝장 아니겠소?"

그가 서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마주 잡고 다정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알렉시스 역시 그를 응시했다.

"우리 이제 내가 말했던 중요한 일을 시작해 볼까?"

알렉시스의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그는 그녀를 덥석 안고 그들이 밀애를 나누었던 방으로 들어갔다.

"이젠 가봐야 돼요." 알렉시스는 누운 채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벌써?" 그의 아쉬운 듯 그녀는 다시 꼬옥 껴안아 주었다.

"어머니가 당신을 사윗감으로 인정하고는 계시지만 종일 붙어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을 거예요."

"알겠소. 어머님의 눈 밖에 날 수야 없는 일이지."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보내 줄 수는 없는 걸." 그는 다시 알렉시스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가 뜨거운 환희의 숨을 토해낼 때까지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이 흘렀다.

그녀가 가려고 일어섰을 때, 그가 중얼거렸다.

"내 연인!" 그리고는 다시 한번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데려다 주는 차 안에서 라이슨는 결혼식 전까지의 주말엔 비키와 함께 오도록 하라고 일렀다.

 

빅토리아는 졸린 모양이였다. 상쾌하게 목욕을 끝낸 후 몰려오는 졸음에 몸을 가눌 수 없는 듯이 노란 병아리무늬가 들어 있는 하얀색 잠옷을 걸친 채로 라이스의 어깨에 기대어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빅토리아의 눈에 졸음이 잔뜩 든 것을 본 알렉시스는 재빨리 꼬마를 재우러 방으로 데려갔다. 꼬마아가씨는 지금가지 들어 본 적이 없는 재미있는 해적이야기를 라이스에게서 듣느라 늦은 시간까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빅토리아를 재우고 나온 알렉시스에게 라이스가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꼬마공주님은 동물원에서 원숭이가 제일 좋다고 그러던걸. 당신은 어때?" 그들은 낮에 둘러보았던 동물원에서의 시간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난 팬더곰. 당신은요?"

"그야 물론 하루종일 등에 업고 다닐 꼬마요정을 데려다 주신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우리 집 강아지겠지."

빅토리아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하품을 하며 끼어들었다.

"우리 엄마 말인가요?"

"그래. 맞았어. 하지만 강아지치고는 무시무시하지 뭐냐." 라이스가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그를 주먹으로 마구 때려 주었다.

", 제발 그만! 살려줘!"

", 이제 잘 시간이에요. 꼬마숙녀님!"

라이스가 빅토리아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직 괜찮아요. 좀 더 있다 자면 안돼요, 라이스아저씨?"

라이스는 알렉시스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빅토리아, 이제 나를 라이스아저씨라고 부르지 않는 게 어때?"

뜻밖으로 빅토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을 통통 구르며 소리쳤다.

"아니야, 아저씨야!"

알렉시스는 조용히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해 주었다.

"비키! 이제부터 라이스아저씨가 너의 아버지가 될 거야. 그러니 아빠라고 불러야지."

꼬마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난 아빠는 필요 없어. 그냥 아저씨가 좋아."

알렉시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꼬마를 품에 끌어안았다.

"비키! 아저씨보다는 아빠가 더 좋잖니? 넌 아빠가 계시는 아이들을 부러워했었잖아?" 아이는 엄마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건 그렇지만.."

"아빠들은 아기를 재워 주기도 하고 발레 공연할 때 구경도 가주고, 결정 못하고 망설일 때는 격려도 해 주고 또 멋진 스포츠카를 태워 주기도 하잖아." 라이스가 조용히 말하자 빅토리아의 눈빛이 조금씩 생기를 띠어 보이기 시작했다. 라이스는 꼬마를 끌어당겨 안아 주었다.

"좋아요!" 꼬마가 명랑해진 목소리로 눈물을 그치고는 대답했다.

"그리고 난 새미처럼 여러 아저씨를 안 가져도 된다는 말이죠?"

"아니야! 넌 경찰관인 아저씨와 너의 아빠인 아저씨 그리고 귀걸이를 단 악당아저씨 이렇게 세 사람이나 갖게 되는 거야."

이 말에 알렉시스와 빅토리아는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그리고 웨일즈에 우리 셋이서 살 새 집도 살 거란다. 아마도 바닷가 근처가 좋겠지? 그래야 여름이면 헤엄도 치고 놀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리고 한 2년 쯤 후면 여자 아이일지 남자아이일지는 모르지만 네게 꼬마동생도 생길 거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아니?"

빅토리아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그러니까 새미네 죤스 죠나단처럼 내게도 동생이 생긴다는 말인가요?"

"그래, 맞았어."

", 이제 잘 시간이 넘었다. 너랑 엄마랑 나를 재워 줄래?"

그러자 알렉시스는 커다란 아가의 어리광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 거인 아가님! 아버지노릇하시기는 틀린 것 같군요!"

빅토리아가 고개를 바짝 쳐들고는 깜찍하리만치 거만스럽게 말했다.

"내 생각인데 아빠가 꼬마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 주는 게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 주무십시오. 공주님!" 라이스는 신하들이 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팔로 침실 쪽을 가리켰다.

"아저씨는 엄마랑 함께 잘 거예요?"

침실로 가다 말고 돌아서서 꼬마공주가 물었을 때 라이스는 알렉시스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그러면 안 되니?"

네 살된 아가씨가 당돌하게도 또 질문을 하였다.

"옷도 안 입고요?"

두 사람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나고 있었다.

"라이스아저씨는 파자마를 입으실 거고 난 잠옷을 입을 거야." 알렉시스가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이제 그만 가서 자거라."

빅토리아는 밤 인사를 종알거리며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경찰관의 아내가 되려면 정직해야 된다는 것도 몰라?"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놀리듯이 라이스가 말했다.

"만일 내일 아침에 비키가 우리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당신이 한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소?"

"그럴 수 없을 거예요. 문을 잠그고 잘 거니까요."

"정말 내 한 벌뿐인 그 파자마를 입으니 벗고 자는 게 낫겠어. 실크 종류인데 빨간 줄과 흰줄이 쳐진 옷이지. 어머니도 세상에! 그런 옷을 입으라고 사오셨지 뭐야."

알렉시스가 입을 가리며 킥킥거렸다.

"그럼 당신 혼자 모델인 패션쇼를 어서 해 봐요."

"그래. 좋지."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파자마에 액세서리는 무얼로 달겠어요?"

"글쎄! 내 귀걸이가 어때? 만일 당신이 좋다면 말이야."

"하지만 경감님께서 어떻게 그런 것을 할 수 있겠어요?"

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경감님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예쁘게 보이고 싶은 법이 아니겠어? 카리아드! 난 언제나 당신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