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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장미 향기(Second-Best Bride)

사랑은 장미 향기(Second-Best Bride)

Margaret Rome

 

1

"이해할 수 없는데!" 앤지는 회색 눈동자에 당혹한 빛을 띠며, 동생을 쳐다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체하고 있으나, 실러가 강하게 보이려고 일부러 그런다는 것쯤은 앤지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 말처럼, 그 휴가 동안에 서로 알게 된 그리스인 남자가 그렇게 무섭다면 어째서 결혼 약속 따위를 했니?"

실러가 발밑의 융단에다 시선을 떨구는 것을 보자 앤지는 눈이 동그래졌다.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히며 실패를 자인하는 동생의 모습은 요 몇 년 동안은 본 적이 없다. 앤지의 머릿속에 엄마 대신에 실러의 학교에 불려갔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실러에게는 규칙대로 벌을 받게 하겠습니다. 좋으시겠죠?"

앤지는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었지만, 무서운 여교장 선생님이 쏘아보는 바람에 잘못을 뉘우치고 주눅이 들어 있는 실러가 가엾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얌전하고 꼼꼼하긴!" 실러는 확실히 그녀답게 빈정대며 되받아 말했다. "설교는 인제 질렸어. 아빠의 입장을 생각해서 항상 착한 처녀로 있지 않으면 안 되다니, 인제 지긋지긋해. 아빠의 입장! , 하도 들어서 질려 버렸어." 그녀는 양손을 크게 펼쳐 들며 초라한 방을 가리켰다.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집을 잘 보라구!"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찌푸리고 대들 듯한 투로 말했다. "이 집과는 전혀 비교도 안 돼. 대저택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난 엄마가 어째서 출세의 희망도 없는 가난뱅이 부목사 따위인 아빠와 결혼했는지 의문이야. 그렇게도 미인이고 젊으셨었는데. 25년이 지난 지금도 역시 시골의 다 찌그러져 가는 목사 사택에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고작이잖아! 필립 로우즈 목사님 따위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댔자 별수 없잖아!"

실러의 흥분한 매섭고 사나운 태도에 압도되어 앤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돌아가신 엄마가 아빠에게 열중했던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아주 멋지고 다정한 남성이잖아."

잠시동안 두 사람은 다 같이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별안간 실러가 앤지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미안해"하고 말하는 실러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야. 아빠가 관대하시고 훌륭한 남성이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어째서 그런 말을 하고 말았는지 나도 모르겠어...."

"흥분한 탓이야." 앤지는 실러를 가볍게 부둥켜안으면서 가까이에 있는 소파에 앉히고는 자신도 옆에 앉았다. "울다니, 너 답지 않게."하고 다정하게 달래듯이 말했다. "2년 동안 웃으며 재미있게 살아왔기 때문에, 너는 벌써 그것을 다 잊어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단다. 하지만 어지간히 쇼크를 받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지, 그 그리스인 말이야.... 요점만으로는 잘 모르겠으니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지 않겠니?"

실러는 당장에 설명할 수 없었다. 앤지도 동생이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앤지는 침착한 태도를 취하고는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성을 잃은 실러의 태도에 몹시 놀라고 있었다. 실러는 아직 20세도 안 되었지만, 세련된 센스를 지니고 있으며 세상 물정에 익숙해져 있었다. 고등학교를 나오자마자, 교회 교구 내의 잡다한 일이 싫어서 부유한 친척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더니, 거기서 알게 된 청년들과 댄스를 하거나 식사를 하러 다니거나 하며 화려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앤지는 언제나 그러한 유혹을 거절해 왔었다. 동생에게 콤플렉스를 느껴서가 아니라 살림이 넉넉지 못해서, 부자집 아들들과 데이트를 하기 위한 드레스를 자기 것까지 두 벌씩 사는 것은 경제적으로 무리였기 때문이다.

앤지는 실러의 황홀할 정도의 아름다움에 흐뭇해하고 있었으나, 아랫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입술을 꽉 다물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눈에 띄게 불안으로 가슴이 죄어 왔다.

"이야기해 줘, 실러."하고 다정하게 다시 말을 던졌다. "여태까지는 무엇이든 다 털어놨잖니."

"화내지 않지...?" 실러는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말했다.

"되도록이면 화내지 않을게." 앤지는 딱딱한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미소 지었다. 실러는 어릴 적부터 광대나 배우 흉내를 잘 냈었지만 이번만은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참 동안을 생각하던 실러는 이윽고 띄엄띄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약혼한 사실을 비밀로 한 것은 정말로 나빴다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집에 돌아와 보니 약혼이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되었어.... 그리고 그리스에서의 일들은 모두가 꿈이었던 것만 같고 모든 것이 현실적으로 일어난 일로는 생각되지 않게 되고 말았어."

"그래," 실러가 또 꿈의 세계로 빠져들고 말 것 같아서 앤지가 입을 열었다. "사촌인 프레디의 요트를 타고 갔을 때의 일 말이지?"

실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게해를 크루징(요트 항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폭풍을 만나 아무 항구에든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 제일 가까운 육지가, 타잔 헤리오스가 소유하고 있는 작은 섬이었지. 그는 그리스인 실업가로, 잠시 쉬고 싶어지면 거기에 찾아온다나 봐."

"그렇게 부자라니 죄가 많겠구나." 섬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앤지는 얼굴을 찌푸렸다.

실러는 존경하는 눈으로 언니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래, 타잔은 죄가 많은 사람이야. 죄가 많을 정도로 부자이고 핸섬해서...." 실러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그는 위험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야."

앤지는 숨을 삼켰다. 그럼 악마 같겠군. 뿔이 돋고 살갗이 거무스름한 그리스인의 얼굴이 앤지의 뇌리를 스쳤다.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기 때문에 촉촉히 땀에 젖어 있었다. 그렇지만, 실러가 그 뒤를 계속했으므로,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모두 그렇듯이 그도 몹시 친절했어. 우리들 열 명을 저택에 묵게 해줬어.... 너무도 마음 편히 있도록 해줬기 때문에, 폭풍이 지난 뒤에도 한 달 동안이나 계속 묵고 말았지." 실러의 말에 앤지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프레디는 인심 좋은 그의 태도에 완전히 기분이 좋아져서.... 그래서 나를 부추겼던 것 같아...." 실러는 여기서 잠시 말을 끊고 약간 볼을 붉히더니 망설이듯이 계속했다. "누가 보아도, 타잔이 내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말이야."

앤지는 누구한테든-누구라도 좋으니 이 노여움을 모조리 털어놓고 싶은 욕구에 끌렸다.

"프레디 다운 행동이잖니! 어째서 그런 사람과 일부러 교제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잖아. 친척을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응석받이로 뭐든지 저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굴었기 때문에 타락할 대로 타락하고 만 거야."

"원래 언니와는 전혀 마음이 맞지 않았잖아." 실러의 얼굴에 웃음이 되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실러는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어."하고 실러는 긴장된 목소리로 지적했다. "카리오스 섬에 가서 내가 타잔과 결혼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그에게 설명해 줄 수 있겠어, 언니?"

현실로 되돌려지자, 앤지는 갑자기 온몸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난생 처음 괴로운 입장에 놓인 앤지는 어떻게 모면을 할 수 없을까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을 짜내었다.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내가 어떻게 설명하라는 말이지? 겨우 몇 주일을 함께 지냈을 뿐인데, 왜 그리스인과 평생을 함께 살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는지, 게다가 반년도 채 안 되어 왜 그 매력적인 사람이 공포의 대상으로 변했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구나.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되었지?" 앤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섬을 떠나온 뒤에는 그와 만나지 않았지? 그렇다면 어째서 그가 무서워졌지?"

"처음에는...." 실러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거의 매일 전화로 얘기를 나누었어.... 그러다가 6주쯤 연락이 끊어졌지. 그동안에 나는.... 내가 저지른 잘못을 깨달았고, 연락이 없는 날이 몇 주일이나 계속되자 이대로 끝나 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어. 그리고 그쪽에서도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냉정히 생각하여, 그때의 사건은 단지 형편이 그렇게 되어 이루어진 불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걸 깨달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지."

"알았어." 앤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제 조금은 동생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앤지 자신은 그런 경박한 사고방식에는 찬성할 수 없었지만, 실러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아주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얘기는 아니라는 것을 앤지도 알고 있었다. "그랬구나.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겠지, 그쪽에서는 단념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 실러는 걱정스러운 듯이 언니를 보았다. "결혼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전하자 매일같이 그에게서 편지가 오고 있어...."

"그는 그만큼 널 사랑하고 있는 거야." 앤지는 실러에게 걷어챈 그리스인을 가엾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약혼은 상대를 완전히 구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마음이 변했다면 하는 수 없는 일이야. 그가 빈틈없는 신사라면 여성 편에서의 약혼 취소를 사나이답게 받아들여 줄 거야."

"타잔은 신사가 아니란 말이야."하고 말하며 실러는 심하게 몸을 떨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다이아몬드와 같아. 돈은 많지만 마음은 차갑고, 보기에는 신사 같지만, 약속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쓸지도 모를 사람이란 말이야. 당장이라도 영국으로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 쪽에서 되도록 빨리 카리오스 섬으로 가겠다고 약속했어, 앤지 언니. 그를 섬에서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어."하고 말하는 실러의 입가에는 멋적은 웃음이 사라지고, 목소리는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아졌다. "나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어.... 이번에는 정말로...."

", 다른 사람을 ?" 앤지는 바싹 긴장해서 물었다. "대체 누군데?"

"데이비드 몽고메리야. 나의 육감에 착오가 없다면 그는 이제 곧 프로포즈해 줄 것 같아."

앤지의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근사하구나. 나도 기쁘다. 데이비드는 좋은 사람이잖아. 견실하고 믿음직스러워서, 네 친구들의 어중이 떠중이들 중에서는 최고의 인물이야."

"그렇지만 그의 아빠는 주 장관이잖아." 실러의 목소리가 불안과 공포로 높고 날카로워졌다. "만약에 나와 타잔과의 약혼이 그의 부모님의 귀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결혼에 반대하실 거야."

"글쎄, 곤란하겠는데...." 앤지는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 언제나 어려운 문제만 들고 나오더라...."

"앞으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어.... 절대로!" 실러는 애원하듯이 앤지에게 바싹 기대었다. "부탁이야, 앤지 언니. 내 대신 카리오스 섬에 가줘. 저 오만한 그리스인에게 직접 이걸 건네주고 내 마음이 완전히 멀어지고 말았다는 것을 알려주기 바래, 거절하지 말고, 앤지 언니. 그가 카리오스 섬을 떠나 이리로 온다면 나의 행복은 끝장이 나고 말잖아."

실러는 갑자기 일어서더니 손바닥에 놓인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고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 앤지를 남겨두고 날 듯이 방에서 뛰어나갔다.

앤지는 외경의 마음으로 천천히 손바닥을 얼굴에 접근시켰다. 햇살을 받아 다이아몬드가 기분 나쁘게 반짝이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떨리는 손으로 가까이의 테이블 위에 반지를 내려놓은 앤지는, 외관의 아름다움이나 가격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석고상같이 몸을 굳혔다. 그리고는 손발의 떨림을 멈추게 하고 혼란해진 머리를 정리하여 어떻게든 침착성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옛날부터 자주 이런 수법에 넘어갔지.' 앤지는 마음속으로 그 자리에는 없는 동생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곤란한 일을 늘 나에게 떠맡겨 놓고 자신은 멀리 달아나 버린다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너는 내가 도와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바다까지 헤엄쳐 가버렸잖아. 나 역시 너의 희생이 되어 에게 해에 빠져 허위적거리는 것은 거절하겠다.'

앤지와 아버지가 저녁식사의 테이블에 앉을 때까지도 실러는 돌아오지 않았다. 앤지는 아버지 옆에 앉아 수프를 그릇에 담으면서도, 여느때와는 달리 아버지의 얼굴이 험악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은 어땠어요?" 앤지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저 그런 정도지...."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수프에 조미료를 넣기 시작했다.

"후추예요, 그것은." 아버지는 아주 질색인 후추를 치고 있는 것을 보고 앤지가 주의시켰다.

"아이쿠, 이런"하고 이버지는 외쳤다. 평소에 상소리를 하는 데 익숙했더라면 틀림없이, '빌어먹을!' 이라든지 '제기랄!' 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는 접시를 옆으로 밀어내더니, 애가 타는 듯이 덧붙여 말했다. "오늘밤에는 별로 배고프지 않으니까, 너만 괜찮다면 수프는 그만두겠다."

앤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나절이나 걸려서 요리한 수프를 혼자서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여느때 같으면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짐이 가벼워지도록 고민거리를 캐어물었겠지만 오늘은 앤지 자신이 두통거리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한 달에 한번 노인의 손톱 발톱만을 깎아주기 위해 외딴 마을에 발 치료 의사를 파견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지, 보이스카우트의 패거리들 중에서 교회 문에 낙서로 이니셜을 새기고 가는 놈을 어떻게 하면 잡아낼 수 있겠느냐는 등의 문제를 함께 걱정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디저트를 들면서도 도무지 입을 열려 하지 않고 깊은 수심에 잠겨 있는 아버지를 보고, 앤지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단지 고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실러는 어디 갔지?"하고 묻는 아버지의 날카로운 말투에 앤지는 깜짝 놀랐다.

"잘 모르겠어요. 두 시간 전에 나갔지만.... 만약 뭣하면 짐작되는 곳에 전화를 걸어 볼까요?"

"아니, 괜찮아. 그애와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마음이 가라앉은 뒤가 좋을지도 모르니까."

아버지의 목소리 상태나 태도가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른 데 앤지는 놀랐다. 실러의 일이라면 눈꼬리가 처지며 흐리멍텅해지고 마는 아버지다. 만약 누군가에게, 실러를 편애하고 있다는 비난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아버지 자신은 당황하고 말겠지만, 어머니의 미모를 이어받은 실러는 실제로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였다. 그는 좀처럼 실러를 꾸짖는 일이 없었으며, 능력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실러의 희망을 들어주었다. 특히 아내를 잃고 나서는 더욱 그러했다.

"왜 그러시죠? 실러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나요?" 앤지는 걱정이 되어 물었다.

아버지는 또다시, 손도 대지 않은 요리가 담긴 접시를 옆으로 밀어내었다. 짙은 고뇌의 빛을 띠며, 평소라면 무엇이든 예사로 털어놓을 수 있는 앤지에게까지 얘기하기 거북해 하는 것 같았다.

"오후에 주목으로부터 전화로 호출 당했거든." 아버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주목도 상당히 주저주저하며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아무튼 그는 나와 예전부터의 친구이며, 너희들에 대해서는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지. 나의 교구 사람들로부터 실러의 행동에 대한 불평이 들어오고 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더라."

"어머, 아빠....!" 앤지는 분연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어느 교구에도 한두 사람은 본인이 없는 데서 험담을 해서, 젊은 애가 흥겨운 나머지 조금만 도에 지나치게 되면 대단한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일러바치는 사람이 있어요. 주목이나 되는 분이, 그 정도의 것도 모르실까요! 제가 그분을 잘못 보았군요. 남의 소문에 귀를 기울이거나 더구나 아빠를 호출하거나 하는 사람으로는 생각지 않았어요!"

"앉아라, 앤지. 끝까지 얌전하게 다 들어라."

여느 때와는 달리 엄한 말투로 명령했으므로, 앤지는 할 수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주목의 개인적인 의견이 어떻든 간에," 하고 아버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가져온 불평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다. 주목은, '하찮은 불평이라고 생각하지만,' 하고 분명히 말한 뒤에, 설사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가족들의 행동이 나의 일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 같은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시더라."

깊은 한숨을 내쉬며 괴로운 듯이 이마에 손을 얹는 아버지를 보고, 앤지는 동생의 뺨을 때려주고 싶을 정도의 분노가 가슴에 치밀어 올랐다.

"그렇지만 그 애만 나쁜 것은 아니다.... 나한테도 책임이 있다. 그 애를 응석받이로 키운 건 나니까."

"그렇지 않아요! 아빠의 잘못이 아니에요."

"아니야, 내 잘못이다."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게다가 그 동안 네게는 일만 떠맡게 아무 즐거움도 맛보지 못하게 했다. 불공평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이 좋은 걸요, 저는. 일하는 것이 즐거워요."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자 앤지의 눈에서는 눈물이 번졌다. "게다가 실러는 미인이고 아직 어려서 한창 놀고 싶을 나이잖아요."

"너와는 두 살밖에 차가 나지 않잖니. 너도 역시 동생을 닮아 아름답단다."

그전 같으면 '동생을 닮아 아름답다'라고 한 말에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르지만, 앤지는 실러의 미모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깨닫고 있었으므로 별로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 자매는 둘이 아주 비슷해서, 날씬한 스타일에 키도 비슷했고 살결도 곱고 반지르르했다. 머리카락은 실러가 햇살 같다고 한다면 앤지는 달빛 같고, 눈동자는 실러는 싱싱하고 맑디맑은 블루고 앤지는 차분한 그레이였다.

성격은 상당히 달랐는데, 실러가 특히 앤지를 조마조마하게 하는 것은, 모양이 변하거나 유행이 지난 드레스를 예사로 내다 버리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등을 쭉 펴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 애가 외가 쪽 친척 집에 드나드는 것을 금지시킬까 생각하고 있다. 그쪽엔 화려하고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나쁜 본보기가 우글거리고 있으나 말이야. 특히 프레디는 지독하지. 실러가 저렇게 된 것도 그놈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마세요, 아빠." 앤지는 깜짝 놀라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우리 실러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랬는데요?"

"소란스런 소리를 내며 시골길에서 스포츠카를 타고 돌아다녔다는 거야. 그리고 꼬, 마을의 펍(영국식 대중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야단법석을 떨어서, 어른들이 그것을 주의시키려 하자 뻔뻔스런 태도로 반항했다는 거야." 아버지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끝냈다.

앤지는 믿기지 않는 마음으로, 식당에서 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늦추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기도 하고 허무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젊음 때문에, 아버지나 아버지와 같은 시대의 어른들에게 비행 소녀같이 보여지고 있는 동생이 몹시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좀체로 화내지 않는 대신에 일단 폭발하면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실러의 장래의 행복을 위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그리스인의 일은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2

앤지는 눈이 번쩍 뜨일 것 같은 푸른 바다 위를 달려가는 모터보트의 선미에 앉아 코트의 깃을 세우고 몸을 떨고 있었다. 여행길에 입고 가기에는 너무 초라하니 입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하는 실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섬에 닿으면 1년 내내 꽃이 피어 있고 나무들에는 열매가 열리며, 봄다운 전면적인 녹색을 배경으로 선명한 여러 가지 빛깔이 가득 넘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일단 섬에 닿으면 코트를 입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바다의 날씨는 예상하기 어려워서, 그리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로서도 알기 힘들거든요." 앤지를 마중을 나온 니코스라는 하인이 그리스 사투리로 말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해님의 기분이 좋지 않은지, 구름 속에 숨어서 앵돌아져 있군요. 그래서 바다도 자주 거칠어진답니다."

모터보트는 여느 때와 같이 작은 섬들 사이를 누비듯이 하며 미끄러져 나갔으며, 섬들의 그림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뒤로 멀어지더니 마침내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니코스는, 수면에 모습을 드러내며 장난치고 있는 돌고래에도 진한 와인컬러의 바다 속을 헤엄쳐 가는 은빛 물고기의 무리에도 아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고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앤지를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바다가 거친 것에는 예사인 모양으로, 불평 한마디 하는 것도 아니고 농민들과 같이 필사적으로 신에게 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니코스는 알아차리지 못하였지만 앤지는 마치 수술 후에 마취에서 깨어나 아픔을 참고 있는 환자처럼 점점 심해지는 정신적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얼러지고 달래지며, 구슬리어 카리오스 섬에 오기로 하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몹시 성급한 짓인 것 같았다.

타잔 헤리오스한테로, 그가 기다리고 있는 피앙세인 동생 대신 언니인 자신인 뛰어든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냉정히 생각해 보거나 의문을 품어 보거나 할 틈도 없었다.

중재역 따위를 떠맡고 만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단 세 식구의 가족이 붕괴될지도 모를 정도로 대판 싸움을 벌였던 것이 정말로 이틀 전의 일이었을까?

"너는 제멋대로 굴러먹고 남의 마음을 짓밟고도 태연한, 지독한 인간이야!" 하고, 난생처음 들어보는 심한 말로 실러를 야단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아빠 교구의 사람들과 잘 지내든 말든 관계없잖아요! 나는 나 좋을 대로 하고 싶어요. 그게 안 된다고 하신다면 좋아요. 집을 나가겠어요!" 실러는 처음부터 정색을 하며 대들었다.

"좋아. 그렇다면 네 멋대로 해라. 다만 돈은 한 푼도 주지 않겠다. 너가 벌어서 자활하도록 해라!"

아버지가 갑자기 차갑게 대하자, 실러는 아무 특기도 없고 자활할 능력도 없는 자신을 깨닫고 순식간에 새파래지더니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아버지의 분부에 따르는 것도 앞으로 당분간만 참으면 된다. 데이비드 몽고메리가 프로포즈만 해준다면, 시골 목사의 사택에 이별을 고하고 활개를 치며 상류사회의 사치스런 생활에 뛰어들 수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파란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인 것을 보자, 가냘픈 몸을 떨고 있던 실러는 완전히 마음이 움직이고 말았다. 실러는 아버지의 품속에 몸을 내던지고 사과했다.

"앞으로는 마음을 고쳐 성실하게 살 것을 약속드리겠어요, 아빠. 모든 것을 아빠가 시키는 대로.... 그동안 제멋대로 굴어 앤지 언니나 아빠에게 폐를 끼쳐왔지만, 보답은 꼭 할 생각이에요." 아버지의 얼굴에 웃음이 되살아난 것을 보자, 실러의 마음에 순간적으로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동자를 반짝였다. "좋은 생각이 있어요. 아까 앤지 언니가 말이죠, 휴가를 얻어 어딘가에 놀러가고 싶다고 말했어요. 아빠, 가끔은 그렇게 하게 해주세요. 언니의 일은 대신 제가 전부 떠맡겠어요. 두 사람에 대한 은혜를 갚는 일도 되고, 열심히 교구 사람들을 거들어주면 오명을 씻을 수 있을지도...."

기쁨과 놀라움이 뒤섞인 아버지의 표정을 상기하니 앤지는 몸을 움츠러드는 느낌이었다. '거짓말이야! 그런 말 하지 않았어.'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것을 꾹 참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다음날 실러로부터 친구의 연줄로 그날 밤의 그리스 행 비행기 표가 손에 들어왔다고 들었을 때에도, 기쁜 체해야 하는 것이 괴로웠다.

아버지는 그런 앤지의 심중은 전혀 모르고 웃는 얼굴로 보내 주었던 것이다.

"아가씨, 기분이라도 언짢으십니까?"

니코스의 햇볕에 그을은 얼굴이 눈에 비치는 바람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배는 선창에 닿아 있었다. 둥근 돌을 흩뿌린 것 같은 벼랑에 에워싸여 로맨틱하게 후미져 있는 해안으로, 벼랑 위에는 사이프러스가 늘어서 있고, 용암이 바다로 흘러 들어간 것 같이 보이는 것은 새빨간 양귀비꽃이었다.

"괜찮아요." 앤지는 높다란 벼랑을 불안한 듯이 올려다보았다. "조금 피로해졌을 뿐이에요. 아직도 멀었나요?"

야무진 그리스인 남자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알게 된 지 아직 얼마 안 되지만, 앤지는 어딘지 그에게 호감이 갔다.

"산양처럼 기운을 내어 저 벼랑을 오르지 않으면 안 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하면서 그는 검은머리로 전방을 가리켰다. "걱정 마십시오, 5분도 안 되어 주인님한테로 모시고 갈 테니까요."

주인의 말을 입에 올릴 때마다 니코스의 목소리에는 자랑과 존경으로 가득 찬 여운이 담겨 있었다. 그에게 안내되어, 낭떠러지에 가설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에 앤지의 가슴속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불안한 심정이 솟아났다.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이런 섬에도 부의 힘을 증명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한걸음 나서자, 구름 사이에서 태양이 얼굴을 내밀 듯이, 그곳은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깔끔하게 손질된 싱그러운 초록의 잔디, 그 위에 천천히 물을 뿌리고 있는 스플링클러, 미모사, 허리 높이정도나 되는 제라늄, 데이지, 백합, 튤립, 납작한 바위의 돌담을 장식하고 있는 초롱꽃 따위이 갖가지의 화초들. 태양이 내리쬐는 오솔길 앞에는 빨간 지붕에 하얀 벽의 커다란 저택이 보였다.

"마음에 드십니까?" 니코스가 물었다. "저택 안은 중앙난방 장치가 되어 있고 수도도 가설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설비가 잘 갖추어진 욕실도 여러 개 있습니다요."

앤지는 생긋 미소를 지며 공항에서 니코스를 만났을 때부터 쭉 풀리지 않고 있던 의문을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주인님은 어째서 공항에 마중 나오지 않았죠, 피앙새가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니코스의 얼굴이 흐려졌다. 잠시 망설인 뒤에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요즘은 외출하실 기분이 안 나는 것 같으십니다...." 하고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일부러 마중 나간다는 것이 귀찮다는 뜻인가요?" 앤지는 화가 나서 또 물었다.

니코스의 얼굴에 노여움의 빛이 떠올랐으나, 그것은 순식간이었고,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나이에게는 버릴 수 없는 프라이드가 있는 거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니코스의 뒤를 따라 저택의 현관 쪽으로 걸어가니, 어딘가 멀리서 부기우기의 가락이 들려왔다. 그리스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정열적인 음악에 자기도 모르게 앤지의 다리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마음속에 깊이 사무치는 것 같은 멜로디가 귀에 새로웠으며, 긍지가 있고 정열적인 사람들이 사는 미국 땅에 와 있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하늘나라의 왕인 제우스, 생명을 주는 동시에 빼앗을 수도 있는 태양의 신 아폴로, 전쟁의 신 아레스, 욕망과 정열의 신 에로스 이러한 전설상의 신들의 피가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흐르고 있는 것이다.

저택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자, 하양, 핑크, 검정의 가지가지 줄무늬의 대리석이 내장에 사용되어져 있고, 어두컴컴하고 서늘한 현관에는 무덤과 같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앤지는 내부에서 치밀어 오르는 공포를 억누르듯이 웨이스트의 벨트를 꽉 죄고 니코스의 뒤를 따라갔다. 심장의 고동과 같을 정도의 속도로 뚜벅뚜벅 하는 구두의 소리가 울렸다. 검은 대리석 바닥을 가로질러, 역시 밀크 빛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층계를 올라갔다.

니코스의 방으로 안내되었을 때, 앤지는 그곳이 지금까지 본 이집의 다른 곳과 같은 답답하고 어두운 느낌이 아니어서 안심했다. 창에는 태양의 열을 차단하기 위해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지만, 연한 핑크의 베드커버나 커튼, 산뜻하고 기능의 가구류, 크림빛의 털이 긴 융단은 충분히 앤지의 시선을 끌고도 남았다.

"원하신다면, 주인님을 만나시기 전에 얼굴이나 손을 씻으시고 몸단장을 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하고 니코스는 웃는 얼굴을 보이며, 별로 들어 있는 것도 없는 여행 가방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가정부로 있는 아내인 크리스러가 짐의 정리를 위해 젊은애를 보낼 겁니다. 뭐든 필요한 일이 있으시거든, 그 애에게 분부해 주십시오. 저는 주인님에게, 아가씨가 도착하셨다는 것을 알리고 오겠습니다."

바의 도어가 닫힌 뒤에도 앤지는 좀처럼 마음이 침착해질 수가 없었다. 에어컨이 작동하여 방 전체가 기분좋게 따뜻한데도, 손끝이 시려서 단추를 제대로 끄를 수 없었다. 앤지는 간신히 벗은 코우트를 침대 위에 내던지고, 니코스가 가르쳐준 욕실로 갔다. 욕조는 연한 청록색으로, 돌고래의 모양을 한 금색 꼭지에서 물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선반에는 크림색이나 그린의 고급스러운 타월이 여러개 개켜져 있었고, 그 옆에는 오일이나 화장품 따위가 들어 있는 유리병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거울을 보고 앤지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한 순간 유령이라고 생각했으나, 비치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겁에 질린 앤지 자신의 얼굴이었다. 창백한 얼굴에서 시선을 떨구고 몸을 굽히고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자, 약간 미안한 기분으로 새 타월의 한끝으로 얼굴을 닦았다.

스커트의 주름을 열심히 펴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나더니, 앤지를 데리러 니코스가 돌아왔다.

"잠깐 기다려 주세요." 앤지는 당황하여 화장대로 달려가 머리를 빗으려 했으나 손이 떨려 머리가 잘 빗어지지 않았다.

'동생 실러의 전갈을 전하러 왔을 뿐이잖아.' 앤지는 거울 속의 자신을 꾸짖었다. '그야 별로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바보같이 주뼛주뼛할 필요는 없어. 그 그리스인이 제아무리 큰 소리로 욕을 퍼붓더라도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그가 아무리 냉혹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실러의 마음을 전하러 왔을 뿐인 나를 거칠게 대하지 않을 것이며, 내일이면 집에 돌아갈 테니 말이야.'

짙은 감색 모직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를 입자,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여교사 같은 옷차림이다. 앤지가 이제까지 해온 일들 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내키지 않는 역할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자세를 바로하고 복도로 나갔다. 니코스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인을 오래 기다리게 라고 싶지 않은 모양으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복도를 지나고 층계를 내려가서 검은 대리석 바닥을 가로 질러갔다. 그는 홀의 막다른 문 앞에서 발을 멈추고 노크를 하고는 안으로부터의 대답을 기다렸다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옆으로 피하더니, 앤지를 안으로 들어가도록 재촉했다.

앤지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방안 전체에 깔아 놓은 융단 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순간 답답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이 방도 어두컴컴했으며, 창에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다. 그리스인은 태양을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듣고 있었는데, 이건 어떻게 된 영문일까? 앤지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프리실러...?"

약간 사투리가 섞인 말소리에 앤지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어두컴컴한 속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이 나서, 앤지는 안락의자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검은 사람 그림자가 일어서는 것인 비쳤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허리는 알맞게 죄어진 역삼각형의 몸이다.

군살이 없는 넓적다리, 길게 뻗은 다리- 앤지의 머리에 학생 시절에 배운 셰익스피어의 인용문이 떠올랐다.

<이봐, 괜찮니, 놈은 세계가 좁다는 듯이 가로막고서 있는 거야. 저 로도스 섬의 항구에 양다리를 걸치고 우뚝 서 있는 거인상과 같이.>

"당신을 오해하고 있었군, 프리실러" 그는 약간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말했다. "난 인제 당신은 돌아와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앤지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 그의 검은 선글라스 뒤에 숨어 있는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짙고 더부룩한 머리, 윤곽이 뚜렷한 얼굴 생김새-햇볕에 알맞게 그을어 있으나, 니코스와는 달리 싱그러운 생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를 드러내면서 기분 나쁜 웃음을 띠고 있는 다정한 옆모습은, 앤지가 그리고 있던 이미지 바로 그대로였다. 뿔은 나 있지 않았지만....

"어째서 가만히 있지?" 그는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피앙세에게 재회의 키스라도 해야 되지 않겠어?"

앤지는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나를 실러로 착각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방이 어두워서 멀리서 보면 우리 자매는 아주 닮았으니까....

"실러.... 프리실러는 올 수 없었어요." 앤지는 약간 쉰 목소리로 말하고 주뼛주뼛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기 위해 제가 대신 왔습니다."

"댁은 누구지요?"

힘센 거인을 상기시키는 것 같은 노성에 앤지는 자지러질 것 같았다.

"앤지.... 앤젤리너예요. 프리실러의 언닙니다." 앤지는 자신의 무기력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열심히 몸의 떨림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검은 렌즈를 통해서 나오는 푹 찌를 것 같은 시선이나 분개한 모습은 예기하고 있었던 일이었으나, 실제로 직면하고 보니 태연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어쩜 그렇게도 꼭 닮았지?" 하고 그는 코웃음 쳤다. "처음부터 계획적인 일이었나, 아니면 정말 우연인가? 천사라는 이름의 언니를 시켜, 신의 나라의 사나이에게 전갈을 부탁하다니." 그는 몹시 쌀쌀 맞은 말투로 계속했다. "대개 어떤 내용인가 상상할 수는 있지만, 댁의 입을 통해서 여신 프리실러의 말씀을 들어볼까."

앤지는 이 역할의 예상 이상의 어려움이 몸에 사무쳐 머리가 아파왔다. 실러의 언니라는 말을 듣고부터는 그는, 몸을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 앤지에게 의자를 권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그녀를 손님으로서 대접할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앤지를 하인처럼 세워 둔 채 태연히 자기만 의자에 앉는 것이었다.

'정말로 무례한 사람이구나.' 앤지는 마음속으로 잔뜩 화를 내고 있었다. '예의도 없는 형편없는 사람이잖아. 실러가 약혼을 파기한 것도 무리는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용기가 솟아나, 감정을 죽인 목소리로 서슴지 않고 단언했다.

"동생은 마음이 달라졌어요. 다른 남성을 좋아하게 되어서 카리오스 섬에 올 생각은 전혀 없답니다. 그 사람과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여서, 곧 결혼하게 될 거예요." 앤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유들유들하게 말해 버렸다. "그러니까 제발 동생의 일을 단념하시고, 이 이상 동생을 애먹이는 것은 그만둬 주십시오. 그리고 이걸 돌려드리라고 하던데요."

앤지는 손바닥에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얹어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의외에도 그것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동생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앤지는 무의식적으로 저자세가 되어 갔다. "화가 난 건 당연하겠죠. 동생이 직접 왔어야 할 텐데.... 하지만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동생의 상냥함을 아시잖아요.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쇼크를 받는 것은 차마 볼수 없어 하는 동생의 심정도 이해해 주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이 반지는 선생님의 것이니 제발 받아주십시오."

그때 갑자기 그가 상체를 앞으로 쑥 내밀었으므로, 앤지의 손이 그의 가슴에 부딪쳐, 반지가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이보세요, 선생님이 하신 행동을 잘 아시겠죠." 앤지는 발끈했다. "자신이 줍도록 하세요. 나는 바닥을 기어다니며 찾을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냥 내버려둬요, 미스 로우즈." 하고 그는 잇새로 밀어내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댁의 소중한 동생은 나의 눈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을 잊은 모양이죠?"

 

3

"주인님은 사고로 실명하셨습니다."

타잔에게서 실러에의 경멸과 앤지에의 혐오를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말을 들은 쇼크가 상당히 커서, 앤지는 방으로 쫓겨난 뒤에도, 어리둥절한 허탈상태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하고 니코스에게 타잔의 눈에 대해 물어보게 된 것은 상당히 시간이 지나서였다.

"주인님은 카 레이를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니코스는 슬픈 듯한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대기업의 높은 분들이 모이는 이사회에 묶여 있던 주인님이 자유를 맛볼 수 있는 것은 자동차 안뿐이었습니다. 주인님의 솜씨는 프로급으로, 핸들을 잡고 직업선수들과 경주할 때가 기분이 재일 느긋하다고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카 레이스는 주인님에게 있어서는 잠시 긴장을 풀고 쉴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마음껏 차를 달림으로써 심한 일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었던 겁니다."

"사고는 어떻게 해서 일어났죠?" 앤지는 타잔의 충격적인 사고 이야기를 들으면서부터, 냉수를 뒤집어쓴 것같이 전신의 떨림이 멎지 않았다.

니코스는 분연히 일어섰다.

"위험한 스포츠에는 사고가 따르는 법입니다. 일류솜씨와 무쇠 같은 정신력, 그리고 최고급의 스포츠카를 손에 넣었다 해서,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주위에는 별의 별 드라이버가 다 있습니다. 사고의 원인은 기술부족이 결정적인 것으로, 완벽하게 정비되었다고 할 수 없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데 있습니다. 그 때도 그러했습니다. 경험 부족의 젊은 드라이버가 운전하는 차가 스핀하는 바람에 몇 중이나 되는 충돌 사고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주인님은 거기에는 말려들지 않아지만, 차 안에 갇힌 청년을 구조하려고 달려갔는데.... 수미터 앞까지 접근했을 때 그 차가 폭발했던 겁니다. 실명으로 끝나고 생명에 지장이 없었던 것만으로도 기적이었습니다. 만약 나의 충고를 들어 주셨던들...." 니코스는 녹초가 되어 의자에 앉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실명했다면 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이 왜 그런 꼴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입니까. 인명을 구조하시려다 그만.... 주인님과 같은 실력있는 분이 눈을 잃게 되다니, 이 세상의 큰 손실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앤지는 타잔이 가엽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해서 니코스와 함께 울고 싶을 정도였으나, 마음속을 스쳐가는 검은 의혹을 지워 없애기 위해서는 중요한 일을 한 가지 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 그 사고가 일어났습니까? 제 동생이 카리오스 섬에 오기 전이었습니까. 아니면 돌아간 뒤였습니까?"

"물론 돌아가신 뒵니다." 하고 말한 니코스는 얼굴을 번쩍 들고 의아스런 듯이 앤지를 보았다. "사고의 소식은 사람들의 동정을 유발시키는 기사로서, 전 세계의 신문에 실렸었습니다. 타인의 목숨을 구하려다 실명한 이 드라이버는, 최근에 약혼을 했다는 사실이 더욱 독자들을 감동시켰던 모양입니다."

쇼크는 얼어붙은 것 같은 공포로 변했다. 니코스가 나간 뒤에도 앤지는 의자에 웅크리고 앉은 채, 멍하니 창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제멋대로며 냉혹한 실러를 용서할 수 없었다. 피앙세가 눈에 상처를 입고, 어쩌면 정신적으로도 심하게 상처를 입어서 그녀를 제일 필요로 하고 있을 때 그처럼 태연히, 더구나 아무 것도 모르는 나를 중재역으로 이용하다니.... 해도 너무한다.

이따금 앤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매정스런 실러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동시에, 암흑의 세계에 가둬지고 만 전도 유망한 남성이 가엾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연태까지는 활개를 치며 당당히 걷고 있었으나, 인제 조심조심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고, 예사로 집어들던 것을 손으로 더듬어서 찾아야 하며, 남을 돕던 입장에서 거꾸로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되고, 세계를 무대로 돌아다녔으나 인제 이 저택에 갇히게 되고 만 것이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앤지를 현실의 세계로 되돌렸다.

"들어와요!" 하고,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커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문이 열리더니 젊은 아가씨가 들어와, 까딱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세요." 하고, 수줍은 듯이 인사를 했다. "릴라라고 해요. 짐을 정리하는 것을 거들어 드리러 왔습니다."

"고마워요, 릴라." 앤지는 어두운 기분인 채 미소 지었다. "하지만 거들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필요한 것은 나이트웨어와 칫솔뿐인데, 그것 모두 작은 여행 가방에 들어 있거든요."

"하지만...." 릴라는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얼굴이 빨개져서 머뭇머뭇하고 있었다.

"왜 그러지?" 앤지는 수줍어서 그녀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려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내게 무슨 말을...."

"주인님이 함께 식사를 하실 생각으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 그런지 상당히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시는 것 같던데요." 하고 단숨에 말하고 나서 릴라는 냉큼 입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릴라 이상으로 앤지 쪽이 놀랐다.

"주인님이? 나를?" 하고 릴라에게 물었다. 인제는 침착하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설마, 그런.... " 앤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무슨 얘기를 하며, 무엇을 입고 가야 할지.... 불시에 머리에 퍼뜩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무엇을 입고 있든 그가 알 턱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앤지와 동석해 준다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이 미리 꾸며 놓은 계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 왔다는가를 설명할 수 있으며, 만약 그 무서운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이런 인정머리 없는 방법으로 실러의 변심을 알리러 오거나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을 털어놓을 수가 있다.

앤지는 욕실로 뛰어가, 눈물 자국을 말끔히 씻었다. 옷을 갈아입는 것은 시간이 없어 단념하고, 브러시로 머리를 빗고 황급히 층계 쪽으로 달려갔다.

홀에 내려가니, 마침 크리슬러가 둥근 은빛 뚜껑을 덮은 요리를 운반해 가는 참이었다.

그녀는 영어를 할 줄 몰랐지만,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앤지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앤지는 층계를 뛰어내려왔기 때문에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니코스가 곁에서 시중 들어 주어 자리에 앉은 타잔 헤리오스는, 앤지가 있는 듯 한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날카로운 관찰력에 놀라 앤지의 심장이 세차게 파도쳤다.

"와주셔서 고맙소, 미스 로우즈. 실은 시력을 잃은 후로는, 남 앞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넥타이가 만약 수프 속에 빠져들더라도 용서해 주기 바라오."

니코스는 앤지의 접시에 요리를 수북이 담고 나서, 그녀의 상기해 있는 얼굴에 호의적인 시선을 던지며 주인의 의자를 뒤쪽으로 돌아갔다.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수프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보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는데도, 앤지의 눈은 자연히 맞은편의,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거무스름한 얼굴에 끌려들고 말았다. 그는 실패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가면서 신중히 요리를 입으로 가져가서, 눈앞의 접시는 대부분 비어 있었다.

타잔은 아무 탈 없이 다 먹어 치우자, 앤지는 실수가 없었던 것에 후유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박수를 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밝은 전등 바로 밑에서 그가 머리를 움직였을 때, 그의 이마에 흥건히 배어 있는 땀이 눈에 띄었다.

"댁은 좋은 시기에 와주셨습니다." 하고 말하는 그의 말투는, 이마의 땀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냉정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투였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앤지는 간신히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니까. 정말로 말입니다." 하며 타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이런 곳에 틀어박혀서 살 생각은 없기 때문에, 사회에 복귀하기 위해 여러 가지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선은 남 앞에서 단정하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요. 할 수 있으면 자신이 생기지만, 친구나 손님 앞에서 실패해서 창피를 당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누군가 연습 상대가 되어 줄 모델이랄까.... 그런 사람이 필요했던 겁니다."

앤지는 굴욕을 꾹 참았다. 무뚝뚝한 타잔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그가 독설을 퍼부으며 공격해 오는 것은 실러에게 짓밟힌 화풀이일 거라고 생각되었다.

그의 신랄한 말 뒤에 숨어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자 앤지도 마음이 편해져서, 크리슬러가 만든 전형적인 그리스인 요리인 스브라키(쇠꼬챙이에 꿰어서 구운 고기나 생선)를 먹을 여유도 생겼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식사만 할 수도 없어서, 앤지는 부끄러운 듯이 니코스에게 말했다.

"부인의 요리 솜씨는 아주 훌륭해요. 더구나 그리스 요리를 먹는 것은 난생 처음이어서 더욱 맛있게 먹었다고 전해 주세요."

니코스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으나, 불쾌하게 대답한 것은 타잔 쪽이었다.

"그리스인은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요리만은 예술로 인정하여 경의를 표하므로, 크리슬러 같은 유능한 요리사는 모든 사람의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인은 요리보다 분위기를 중요시해서 점잔을 빼며 공복을 참거나 합니다. 정말 그 나라의 습관이나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자그마하고 아담하며 차분한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니코스는 커피를 들고 와, 브랜디와 시가가 든 은제 케이스와 라이터를 담은 쟁반이, 주인의 손이 닿는 곳에 있는가를 확인하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앤지는 커피에 입을 대었지만, 타잔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컵을 든 손에 힘이 가해졌다.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케이스 뚜껑에 닿더니, 그 다음에는 시가를 찾기 시작했다. 손을 빌려주고 싶은 마음과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앤지의 마음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시가를 한 개비 입에 물고 그 끝에 라이터를 가까이 가져갔을 때, 앤지는 견딜 수가 없어서 일어났다.

"붙여 드리겠어요."

"아니, 괜찮습니다." 타잔은 냉정하게 말했다. "어떻게든 붙일 수가 있소."

"하지만...."

순간 라이터에서 불꽃이 확 일더니 시가 끝에 불이 붙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생활에도 상당히 익숙해져 있습니다. 미스 로우즈." 타잔은 의자의 등에 기대면서 담배연기를 뿜었다. "이것은 몇 주일이나 전에 아직 눈에 붕대를 감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무렵에 연습했습니다. 처음에는 손가락을 불에 데거나 베드커버에 불이 옮겨 붙어 간호원에게 야단맞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제대로 해낼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일이라도 될 수 있는 한 남의 손을 빌지 않고 자신이 혼자 힘으로 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앤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의자에 고쳐 앉았다.

"용기가 있군요...." 앤지는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아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타잔의 검은머리가, 그녀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려졌다. 그는 뭔가가 마음에 걸렸는지,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스 로우즈, 동정이라면 댁의 마음속에만 간직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일상적인 사소한 일을 할 수 있는 것 정도로 만족하고 있지도 않으며,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남은 인생을 단념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만일 오해하셨다면 곤란합니다. 먹기 쉬운 크기로 썬 고기를 먹거나, 접시 위의 요리의 위치를 시계바늘의 느낌으로 기억하고 있는 그런 굴욕적인 일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생각은 없습니다. 감자는 세 시의 위치, 야채는 여섯 시.... 이런 식으로. 내가, 스푼으로 떠 먹여 주는 것을 싫어했을 때 니코스가 생각해낸 방법이지만.... 용기가 있다, 따위의 말은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과찬의 말입니다. 확실히 내부로부터의 정열적인 힘은 느끼지만, 그것은 용기 따위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결점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완고하고 공격적이며,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는 독립 정신이란 말입니다."

타잔은 시가를 손끝으로 가볍게 떨어 아름다운 파스텔컬러의 융단에 재를 뿌리고 말았지만, 앤지는 필요없는 참견은 하지 않고, 숨을 죽이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언젠가는 사회에 다시 나아갈 생각이지만, 빛이 없는 세계에 완전히 익숙해질 때까지는 싫더라도 남의 손을 빌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려면 참을성이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이렇게도 괴로운 것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타잔은 앤지가 숨을 삼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므로, 그 잔혹한 말에 얼마나 그녀의 마음이 상했는가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타잔은 험상궂은 표정을 누그러뜨리려 하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내가 함께 있는 게 마음에 걸린다면 당장 물러가겠습니다."

"아니오," 달아나고 싶은 심정으로 앤지가 몸을 일으켰을 때, 타잔은 스커트 자락이 스치는 소리를 듣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앉아요. 혼자 있고 싶어지면, 그렇다고 말할 거요."

앤지는 그의 말대로 다시 앉아, 떨리는 무릎을 양손으로 껴안았다. 희미한 소리로써 그걸 느끼자 타잔도 안심이 되는 양 표정을 부드럽게 했다.

"뭘 좀 마시겠습니까?"

타잔이 불시에 이렇게 묻자, 앤지는 놀라고 말았다.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앤지는 매의 표적이 된 참새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선글라스의 눈이 이쪽으로 향해졌을 때, 앤지는 그가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느낌이 별로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십시오." 타잔은 매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로 미루어 보건대, 당신은 양질의 오래 된 브랜디를 맛보기에는 너무 젊은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눈물을 억제하는 역할쯤은 해줄지도 모릅니다."

그의 날카로운 육감에 깜짝 놀란 앤지는, 열심히 마음의 동요를 억누르고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 그는 글라스의 테두리에 손가락을 구부려 대고, 술병을 기울이는 정도를 조절해 가면서 넘치지 않도록 따랐다. 그러고는 만족스러운 듯이 글라스를 옆에 내려놓고, 또 한 개의 글라스를 들더니, 이번에는 손가락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먼저와 마찬가지의 양을 따랐다.

"두 개의 글라스에 같은 양을 따랐을까?" 하고, 그는 두 글라스를 앤지의 눈앞에 내밀었다.

앤지는 멍해진 채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당황하여 입을 열었다.

"...."

"잘 됐군." 하고 그가 히죽 웃자, 앤지는 덜컥 하고 심장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술병이나 글라스의 무게나 소리로 판단할 수 있거든요. 점차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앤지는 타잔을 알게 됨에 따라, 실러가 그를 두려워하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가 내미는 글라스를 받았을 때에는, 아무 두려움도 없이 암흑세계로 발을 내딛고 있는 타잔의 강한 정신력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프리실러의 새로운 애인의 일을 이야기해 줄 수 없겠습니까?"

느닷없이 말하는 바람에, 앤지는 브랜디를 무릎 위에 엎지르고 말았다.

"아마," 하고 타잔은 비웃듯이 말했다. "당연히 재산이 많고 가문도 좋으며, 눈은 물론 잘 보이는 남성이겠지요?"

앤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건.... 사실 그렇습니다만.... 동생은 그러한 생각으로 데이비드 몽고메리를 택한 것은 아니에요."

"아니,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하며 타잔이 몸을 앞으로 구부렸으므로, 볼의 근육이 욱죄어져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실러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 실러는...."

"여자는 모두 다 그렇습니다." 타잔은 내밀 듯이 말했다. "여자는 누구나 돈에는 눈이 멀죠. 필사적으로 손에 넣기만 하면 마지막입니다. 진주를 지닌 조개처럼 그것을 꽉 잡고 죽을 때까지 놓치지 않거든요."

"한때는 사랑했던 여성을, 그렇게 말하시다니요." 앤지는 실러를 통렬하게 빈정대는 타잔의 말에 몸이 떨렸다.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여성은," 타잔의 말은 또다시 앤지의 가슴을 찔렸다. "나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따르겠다고 맹세한 여성이, 내가 퇴원하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은 모든 것을 백지로 되돌릴 만큼의 힘이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왔거든요. 그래도 그녀에게 환멸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까? 나에게 그 편지를 읽어주던 간호사가 도중에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오히려 내가 위로해 주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습니다." 타잔은 마치 남의 말을 하듯 했다. "그녀가 너무도 이성을 잃을 정도였기 때문에, 나는 수간호사에게 그녀를 울렸다고 야단까지 맞았습니다."

"어마, 너무했군요...." 앤지는 수치스러움에 가슴이 저려 왔다. "전혀 몰랐어요. 그런 폐까지 끼치고 말았다니.... 정말이지 미안해서 뭐라고 말씀드려야 좋을지...."

"또 동정입니까, 미스 로우즈?" 타잔은 다시 빈정거리는 얼굴이 되었다. "화냈다 사과했다.... 당신도 정서가 불안합니까?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있을 뿐이지 애정 따위는 눈곱만큼도 갖고 있지 않았던 동생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난 달라요! 그렇지가 않아요!" 앤지는 굴욕으로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면서, 이를 악물고 반론했다.

"그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주십시오." 타잔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이 부자유스럽다는 것은 몹시 지루하고 따분한 것입니다. 경치도 보이지 않고 책도 읽을 수 없으며, 편지도 쓸 수 없습니다. 쓸쓸하다든지 그런 문제가 아니라, 몸을 옴짝달싹도 할 수 없습니다. 받는 편지는 대부분 영어로 씌어 있습니다. 얘기할 수는 있어도, 영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섬에 없기 때문에,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동생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한다면.... 그녀의 처사를 비굴하게 생각하고 보상할 생각이 있다면.... 카리오스 섬에 남아서, 나의 눈 대신 편지를 쓰는 손이 되어 주기 바랍니다."

타잔이 일어서서, 니코스를 부르려고 벨을 눌렀을 때 앤지는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의 동요가 너무도 커서 말을 할 수도 없게 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문 쪽으로 걸어갔다.

"생각해 보시오, 미스 로우즈. 내일 대답을 듣겠습니다. 만약 내가 말하고 있는 상황이, 목사의 따님인 당신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하고 타잔은 믿기지 않을 만큼 싹싹한 말투로 덧붙였다.

"결혼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4

"한 걸음 우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에 부딪치고 말아요, 릴라가 닫는 걸 잊고 갔어요." 침착한 목소리와의 반대로, 앤지는 걱정스런 눈으로 타잔 헤리오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입구에서 데스크까지는 몇 걸음, 데스크에서 책장까지는 몇 걸음.... 이런 식으로 타잔은 가구의 위치나 간격을 걸음 수로 익혀서, 서재 안을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날이 감에 따라 많이 숙달되어, 걸음 수는 확실히 익혔지만 가구가 평소의 위치보다 조금이라도 다른 곳에 놓여 있거나, 융단의 끝이 젖혀져 있거나, 오늘과 같이 문이 정확하게 닫혀 있지 않거나 한 사소한 일들이 타잔을 자극시켰다.

"에이, 빌어먹을....!" 하고, 눈앞에 없는 메이드에게 사납게 욕을 퍼부었다. "시키는 대로 지킬 수 없다면, 그녀를 이 방에 들여놓지 말라고 니코스에게 말해 주시오."

"알았습니다." 하고, 대답을 한 앤지는, 그럼으로써 욕구불만의 출구를 열어 주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순순히 따랐다. 그의 거칠어진 모양에 얼마만큼 내가 흠칫흠칫 놀라고 있는가를 그가 보고 있지 못한 것이 그런대로 다행이었다. 앤지는 무릎 위에 있는 편지지에 떨어진 눈물을 닦고, 떨리는 손으로 펜을 잡았다. "이 편지를 다 받아쓰고 나서 그렇게 전하고 오겠습니다."

"편지 따윈 필요 없소!" 타잔은 초조한 듯이 창가로 걸어갔다. "오늘은 일을 할 기분이 나지 않는군. 이리로 오시오. 그럭저럭 폭풍이 가라앉은 것 같은데, 나의 상상이 틀렸소?"

폭풍이 지나면 영국에 돌아갈 수 있다고 앤지의 마음은 기대에 부풀었으나, 그런 눈치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평선 저쪽 하늘이 밝아져 온 것 같아요." 이번 주에는 늘 답답한 구름이 낮게 깔리고 세찬 비가 계속 내려 바다가 거칠어져 있었으므로, 앤지는 잡혀 있는 것같이 이 섬에 갇혀 있었다. "라디오를 켜서, 날씨가 좋아질지 어떨지 일기예보를 들어볼까요?"

"날씨가 좋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나를 위해서요, 아니면 당신을 위해서요?" 타잔은 턱을 추켜들면서 물었다. "앤젤리너, 내가 곁에 있으면, 당신은 언제나 올가미에 걸린 참새처럼, 달아날 기회만 노리며 떨고 있군요. 나의 감옥의 쇠창살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무쇠보다 더 튼튼해요."

마음은 주어서는 안 된다. 동정하는 마음에 끌려가다가는 그가 바라는 대로 되고 말 것이다. 요 일주일동안 나를 이용해 보니 편리했으므로, 이대로 나를 카리오스 섬에서 내보내지 않고 그의 시중이나 들게 하려고 책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잔은 앤지가 속기나 타이프를 칠 수 있다는 것을 알자, 그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사고이래 봉투를 뜯지 않았던 편지의 산더미를 차례차례로 처리하는 일에 착수했다. 덕분에 앤지는 그가 매일 여덟 시간, 때로는 열 시간씩이나 계속 일을 시키는 바람에, 매일 밤 몸과 마음이 모두 녹초가 되어 겨우 침대에 기어들곤 했다.

"아버지에게는 제가 필요합니다." 하고 앤지는 잘라 말했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는 것이 나의 의무거든요."

"그래요?" 타잔은 이쪽으로 돌아서더니, 험상궂은 얼굴로 앤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의 아버님은 목사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죄인을 대신해서 속죄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아버님은 당신이 없는 부자유쯤은 참아 주셔야 하지 않겠소...."

"어째서 내가 실러를 대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죠?" 하는 앤지의 목소리도 거칠어졌다. "난 그 애의 보호자도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애가 저지른 잘못은 그 애 자신이 책임져야 해요."

"멋진 구실인데." 타잔은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비웃듯이 웃었다. "그리스인은 가족을 하나의 단위로 생각하고 있어요. 누군가가 넘어질 듯 비틀거리면 가족 모두가 넘어지게 되며, 한 사람이 사회도덕을 어기면 가족 모두가 죄의 무거운 짐을 나눠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신의 동생은, 자신의 장남인 남성과 평생을 살아가기에는 부적당하다는 것을 솔직히 시인하고, 대신 당신을 보낸 것이 아닙니까? 하긴 내가 또 버려질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만...."

"어머, 교활하시군요!" 앤지는 정색을 하고 항의했다.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요. 실러의 부탁을 받았을 때에는 사정을 하나도 몰랐어요. 정말 안됐다고는 생각하고 있어요, 사고당한 일을...." 하고 앤지는 목이 메었다.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합니다만, 언제까지나 여기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마음으로 의지하고 계시거든요."

"나는 아버님 이상으로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소." 자존심이 강해 뵈는 입술을 통해 나온 이 뜻밖의 말에 앤지는 섬뜩해졌다. "고작 일주일 만에 당신에게 의지하게 되고 말았소. 당신은 편지를 읽거나 타이프를 치거나 하는 일 외에도,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가를 금세 헤아려 주는 등 재치 있는 배려를 보여주었지. 지금의 나에게는 의지할 사람은 당신 밖에 없소. 물론 무료로 봉사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소." 그리고는 가시돋친 말투로 바뀌었다. "당신이 필요한 만큼의 금액을 말해 보세요, 어떤 액수라도 당신의 요구를 들어드릴 테니까."

앤지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쇼크를 받았다.

"돈 따위는 아무리 많이 받는대도, 선생에게 모욕당하면서 살 생각은 없어요!" 앤지는 목소리를 돋우며 계속했다. "돈이 있으면 사회적 지위는 얻을 수 있겠죠. 출세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적어도 예의범절만은 돈으로 갖출 수 없었던 모양이죠?"

폭언을 내뱉은 앤지에게 벌이라도 주듯이 타잔은 일로 되돌아가, 굉장한 스피드로 편지를 받아쓰게 했다.

비서로서 일한 일주일 동안에, 앤지는 타잔의 인생이나 생활에 대해 놀랄 만큼 많은 것을 얻었다. 그의 성장은 확실치 않으나, 이 섬에서 태어나서 자란 그는, 한푼 없이 섬을 떠나, 수년 후에 큰부자가 되어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가난한 고아였던 주인님이 돌아오셨을 때는 섬의 소유자가 되셨거든요." 니코스는 자랑스러운 듯이 이야기했다. "주인님에게는 돈벌이를 하는 재능이 있으셨나 봐요. 손에 닿는 것은 모두 황금으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그리스의 신화인 미다스의 피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근거 없는 자랑만은 아니라는 것은, 편지의 회사 이름만 보아도 분명했다. 헤리오스 선박, 헤리오스 농예화학, 헤리오스 화성, 헤리오스 방적, 또 약간 어수선한 것으로는 헤리오스 디스코 따위까지, 사업은 갖가지의 분야에까지 미치고 있다. 어느 회사든 그의 성이기도 한 그리스의 태양의 신 헤리오스의 얼굴이 트레이드마크로 되어 있었다.

계산서나 갖가지의 편지에서, 그 밖의 여러 가지 일들도 알았다. 타잔은 비행기와 헬리콥터의 양쪽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고, 자가용 제트기로 각국을 날아서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것, 스피드광인 그는 온 세계의 주된 레이스에는 거의 다 참가하고 있었다는 것, 프랑스에는 성관을, 아테네에는 맨션을 가지고 있고, 더욱이 스키 시즌을 지내기 위해 스위스의 클로스테르스에 별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또 최근에 값비싼 요트를 팔고, 대신에 모터보트를 구입했다는 것, 다시 유명한 보석상의 청구서에서는, 그가 여태까지 미녀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값비싼 예술품에서 작은 다이아몬드의 장식 핀에 이르기까지 얼마만큼 사치스런 선물을 사주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어, 앤지는 놀라는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앤지가 무의식적으로 내쉰 한숨 소리가 타잔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입술을 약간 일그러뜨리고, 그녀의 마음속을 그대로 읽어낸 것 같이 입을 열었다.

"나는 여성을 좋아하거든요. 값비싼 선물을 받았을 때 그녀들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면 기뻤소. 아니, 반가웠지." 하고 정정하는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앤지가 마지막 편지를 개봉한 것은 정오가 가까워서였다. 그 편지를 소리내어 다 읽자, 펜을 들고, 타잔이 부르는 대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이 끝나서 앤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을 때 마침 니코스가 나타나 점심 준비가 되었다고 알려 왔다.

"아직 괜찮아." 하고 타잔은 잘라 말했다. "바빠서 지금 점심이나 먹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필요하면 알릴 테니 가 있어."

니코스는 몹시 염려된다는 듯이 앤지의 창백한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사고 이래 더욱더 성미가 급해진 주인에게 말을 되받거나 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지만, 초췌해진 앤지를 보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가씨는 피로하셔서 연약한 꽃처럼 지치셨는데...."

타잔은 초조한 듯이 웃었다.

"로맨틱한 묘사에 트집을 잡아 미안하지만, 이 아가씨는 짓밟아도 걷어차도 끄덕도 없을 거라는 것은 잘 알고 있어. , 어서 둘이만 있게 해주지 않겠어. 그리고 다시는 방해하러 오지 말아."

니코스는 절망적이고도 슬픈 듯한 눈으로 앤지를 쳐다보며, 미련이 남아서 떠날 수 없는 듯한 태도로 방을 나가 살짝 문을 닫았다.

"나갔나?" 타잔은 엄한 말투로 물었다.

"." 하고, 잠깐 대답한 앤지는 공복인 것을 넌지시 얘기해 볼 생각으로 말했다. "쌓였던 편지의 정리는 모두 끝났으니까, 슬슬 식사를 해도...."

"그렇게는 안 되지." 실러의 죄를 속죄시킨다는 명분으로, 앤지를 실컷 부려먹으려고 작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업 관계의 편지가 끝났으면, 이번에는 개인적인 편지에 착수하고 싶소."

타잔은 서랍에서 파스텔컬러의 봉투 묶음을 꺼내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 앤지의 눈앞에 내밀었다. 겉봉에 씌어 있는 글씨는 분명히 여성의 필적이었다.

"개인적인 편지는 읽을 수 없어요." 하고 앤지는 이 일에서 손을 떼려 했다. "선생님의 사생활에 관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누군가 좀 더 친한 친구 분에게 부탁해 주세요."

"피앙세가 있다면, 그녀에게 부탁하면 되겠지만...." 그는 히죽 웃으며 앤지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것이 안 되니 그녀의 대역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잖소. , 읽어 주시오."

새까만 선글라스 너머로 그가 쏘아보는 것 같아 앤지는 말할 수 없는 공포로 몸을 떨었다. 그 이상 거역하지 않고, 타잔이 봉투를 찢고 꺼내 주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가엾은 타잔!" 하고 나서 잠시 망설였으나, 할 수 없이 읽기 시작했다. "당신의 사고 소식을 듣고 소름이 끼치는 무서움을 느꼈습니다. 나를 카리오스 섬에 가게 해주세요. 당신에게 행복한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 일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인생은 깊은 애정에 싸인.... 전원시와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읽고 있는 앤지의 볼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함께 살았던 일도 있으니, 당신의 간호사가 되어 손을 잡아 드리기도 하고 당신이 양복을 골라 갈아입는 것을 거들어 드리는 데는 내가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앤지는 읽는 것을 중단하고 흘끗 타잔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의 표정은 험상궂었으며 혐오의 빛을 띠고 있었다. 앤지는 편지를 낭독하는 일에만 신경을 집중시켰는데, 어느 편지든 소녀 같은 센티멘털한 것으로, 구체적인 내용이나, 타인에게 의지하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타잔의 성격을 이해하는 내용의 편지는 한 통도 없었다.

모두들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앤지는 표면적일 뿐인 친구만 많이 가지고 있는 타잔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타잔이, 자기본위로 욕심 많은 여성들의 본성을 간파하지 못하고 미모나 달콤한 분위기에만 현혹되고 있었다면, 그는 사고를 당하기 전부터도 눈이 보이지 않았던 거나 마찬가지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편지 다발을 읽어 나가는 동안, 앤지의 신경은 어지간히 마비되어서, 무감정한 단조로운 목소리가 되어 버렸다.

마지막 편지의 중간쯤을 읽었을 때 앤지는 쇠뭉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쇼크를 받았다.

"약혼 취소, 축하드립니다. 용케도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군요. 좀 더 빨리 알려 드리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의 전의 피앙세는 상류계급에 끼어 들려고 호시탐탐 찬스를 노리고 있었던 거예요. 되도록이면 재산이 많은 남성을 찾아내어 결혼하겠다고 예사로 공언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당신이라는...."

앤지는 가슴이 울렁거려 편지를 떨어뜨렸다.

"여기까지예요. 동생에 대한 욕설이 씌어져 있는 편지 따위를 인제 더 이상 읽을 수 없어요...."

꽉 쥔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비난의 말이 퍼부어질 것을 각오하고 있었으나 의외로 타잔은 흐린 얼굴에 얼빠진 목소리로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처음 얼마 동안은 프리실러의 일로 몹시 골치가 아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주위의 여성들 중에서 정직했던 것은 그녀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 같단 말이야."

앤지는 어떻게든 타잔을 위로하려 했다.

"실러는 흔히 남의 반감을 잘 삽니다. 하지만,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데가 있기 때문인지, 언제까지 마음속 깊이 원한을 간직하는 사람은 없어요."

타잔은 보이지 않는 눈을 앤지 쪽으로 돌렸다.

"그렇다면 당신의 아버님은 남보다 두 배나 행운아군요. 귀여운 데가 있는 따님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잘 봉사하는 따님을 두고 계시니까요."

앤지는 식사를 하기위해 혼자 서재에서 나왔다. 식사는 오늘 아침에 니코스가 바위가 많은 바다에서 잡아온 오랜지색 섬게에 레몬을 둥글게 썰어 장식한 것과, 크리슬러가 갓 구운 흑 빵을 곁들인 것이다. 앤지는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며 유명한 국제적인 인물이면서도 진정한 친구가 없는 타잔의 일을 생각했다.

'쓸쓸하다든지 그러한 문제가 아니라,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지.' 하고 말하던 타잔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설사 그런 말을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가 고독감을 숨기려고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프라이드가 강하기 때문에 완전히 고독 속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자기 자신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타인에게 눈치 채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일까?

"운전을 할 줄 압니까, 미스 로우즈?"

갑작스런 질문에 앤지는 움찔했다. 그처럼 커다란 몸집을 가진 사람이 소리도 없이 다가오는 것은 곤란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썼으나, 좀처럼 진정되지를 않았다.

".... 영국에서밖에 운전해 본 일은 없습니다." 빵을 목에 걸릴 정도로 꿀떡 삼켜 버렸다.

"그렇다면 폭풍은 완전히 지나갔다고 니코스가 말하던데, 여성이 운전하는 차에 태워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마음내키지 않지만, 기분전환을 하려면 별도리가 없겠지요. , 섬이나 한바퀴 순회합시다."

"? 하지만...." 앤지는 당황한 나머지 반대했다. "좌측통행이 아니면 운전할 수 없어요."

"좌측이든 우측이든 한복판이든, 아무데나 상관없어요." 하며 타잔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 섬에는 자동차라고는 내 차 한 대뿐입니다. 그밖에는 당나귀가 끄는 마차와 자전거밖에 없어요."

니코스가 차고의 문을 열고 있는 동안 앤지는 커다란 리무진이 들어 있지나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으나, 소형 자동차가 눈에 띄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근사한 디자인으로 내장도 산뜻했으나, 그 외에는 앤지가 시골에서 타고 돌아다니던 고물차와 아주 비슷했다.

그렇지만, 기어를 넣고 흘끗 옆을 본 순간, 심한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조수석에 앉은 타잔은 입을 굳게 다물고 넓적다리 위에서 양손을 꽉 깍지 끼고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몇 달 전까지는 커브나 코너에서 타이어를 삐걱거리며 스피드를 내어 드릴을 맛봄으로 해서 사업에의 의욕을 키우던 프로급의 레이서였던 것이다.

"사도의 막다른 곳에 다다르거든 좌로 돌아줘요." 타잔은 냉랭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마을로 나갈 때까지 해안 도로로 갑시다."

일단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니 금세 육감이 되살아나 저절로 손발이 움직여져, 앤지는 바깥 경치에 눈을 돌릴 여유도 생겼다. 아름다운 평원은 신록으로 뒤덮여 있으며, 청록색의 바다는 따뜻한 햇살을 받아, 번쩍 눈이 뜨일 것 같은 블루로 반짝였다.

저택을 나오는 데만 몇 킬로나 되는 데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도의 양쪽으로 오렌지나 레몬이나 무화과의 과수원이 보였다.

"과수원이 굉장히 넓군요." 하고 말하는 앤지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옛날 어릴 적에 올리브를 거둬들일 때면, 올리브밭이 너무나 넓어서 얼마나 원망스웠던지...."

"선생님이 직접 섬에서 일한 적이 있었나요?" 앤지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타잔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올리브가 남아 있는 한은 부모님과 마리아 고모님과 난 뜨거운 태양 밑에서 계속 일했지요. 입에 들어가는 것이라곤 거의 빵과 치즈와 물뿐이었고, 운이 좋을 때는 쓴 포도주로 겨우 목을 축일 수 있었지만."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나요?" 하고 묻고서 복잡한 환경을 알 수 있는 힌트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앤지는 일부러 대답을 기다렸다.

"지금 생각하니, 그랬던 것 같소." 그는 신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시기의 추억이 아버지나 어머니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오."

"지금 부모님은 어디에?"

"두 분 모두 돌아가셨소."

그가 목을 움츠리는 것을 보고 앤지는 타잔이 아직 그때의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을 느꼈다.

"내가 열살 때, 두 분은 반년사이를 두고 이 세상을 떠나셨소. 그 뒤 나는 미망인이었던 고모님께 떠맡겨져, 10대 초반에 이 섬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소."

"그런데 어떻게 이런 큰 부자가?" 앤지의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타잔은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버리고 말았다.

"고대 그리스인은 올리브를 신성한 것, 평화와 다산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었소. 카리오스 섬의 주민들은 미신이아 전통을 소중히 지켜, 지금도 신부에게는 올리브 화관을 씌어주고 있지. 아이들을 많이 낳을 수 있도록 비는 주술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나의 아내는 올리브처럼 다산해서 테이블을 빙 둘러쌀 만큼 많은 자식을 낳을 것입니다.'" 하고 타잔은 시를 낭독하듯이 살며시 중얼거렸다.

"올리브는 소중한 나무여서 아무리 소량이어도 절대로 함부로 버리거나 하지 않소. 올리브의 기름을 짜낸 나머지는 바짝 졸여서 비누로 쓰며, 그 나머지는 비료로 쓰지. 나무를 베었을 때의 잎은, 양이나 산양의 사료나 깔개로 쓰고, 나무줄기는 가구용 재목이나 또는 건축 재료로서 쓰이고 있고, 마른 가지조차 난방이나 요리용 연료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소."

앤지는 인적이 없는 길을 달려감에 따라 상쾌한 기분이 되어 갔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과수원 기복이 심한 들판, 정상에 풍차가 보이는 언덕, 바위가 많은 해안에서 안으로 들어간 작은 모래사장의 후미에서 잔잔히 물결이 일고 있는 푸른 바다.... 기분이 밝아지는 것은 주변의 모든 것이 아름답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옆에 앉아 있는 장신의 그리스인의 얼굴에서도 찌푸렸던 그림자가 사라지고 입가에 미소가 떠올라, 앤지가 이 섬에 온 이래 처음 보는 릴랙스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마을에 다다르거든 차를 세워 줘요." 하얀 집짓기 놀이의 나무를 쌓아 놓은 것 같은 집들이 지평선 위에 보이기 시작한 것을 안 것일까. "암청색의 미늘창이 달린 집에 고모님이 살고 계신데, 당신에게 만나보게 하고 싶군."

그 집에 가까워짐에 따라 앤지는 실망했다. 바깥벽은 회반죽으로 칠해져 있으나, 창이나 문짝은 거의 칠이 벗겨져 있었다. 흔들흔들하는 나무 테이블이 벽에 세워져 있으며, 정면의 마당에는 포도 덩굴이 햇살을 가려주고 있었지만, 발밑에는 마른 풀이나 쓰레기가 잔뜩 흩어져 있으며, 그 중에서도 야단스런 푸른빛의 플라스틱 세제용기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인텔리며 국제적인 실업가가, 정말로 이런 초라한 환경에서 자라났을까? 앤지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노크도 하지 않았는데 문이 열리더니, 주름살투성이의 노파가 나타났다. 볼이 움푹 패어 오싹 소름이 끼칠 것 같은 얼굴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검정 일색이었다. 천박한 말투로 한두 마디 타잔에게 말을 건넨 뒤 손바닥을 벌려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앤지가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타잔은 불쾌한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포켓을 뒤져서 은화를 한줌 꺼내서 고모의 손바닥위에 얹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반가운 듯한 앙칼진 웃음소리를 내면서, 타잔의 눈앞에서 탕 하고 문을 닫았다.

앤지는 소름이 끼치는 것 같은 혐오감과 쇼크에 망연히 서 있었으나, 타잔이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고 있는 것을 깨닫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두 사람은 입을 다문 채, 오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고모의 집에서 얼마쯤 되는 곳까지 왔을 때, 타잔이 입을 열었다.

"이 부근에 도로를 넓힌 데가 있을 텐데.... 그곳에서의 경치가 제일 좋아서, 전에는 무슨 곤란한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오곤 했었소. 조금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으니까, 거기서 세워 주지 않겠소?"

얼마 후 앤지는 금색으로 반짝이는 벼랑위에서 차를 세웠다. 벼랑아래를 내려다보니, 암청색의 수면에 결혼반지와 같은 근사한 원이 비쳐지고 있었다. 옆에서는 타잔이, 녹초가 된 듯이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틀림없이 선글라스를 쓴 채로 눈을 감고 있을 것이다.

생각에 잠기고 있는 듯하여 방해를 하고 싶지 않아 앤지도 말없이 아래의 경치만 내려다보면서, 고모로 인해 굴욕을 맛보아야 했던 그의 심정을 동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답답한 침묵에 견딜 수가 없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왜 오셨죠? 고모님은 돈 밖에는 흥미가 없는 분이란 것은 잘 알고 계셨을 텐데요...."

"나 자신도 잘 모르겠소." 타잔은 진지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마 남자는 아무리 멀리 떠돌아다녀도,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 늘 마음이 끌리게 마련인가 보오. 당신에게는 애정에 가득 찬 따뜻한 가정이 있으니 이런 심정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말이오, 미스 로우즈. 당신은 아무리 멀리 여행하고 있어도, 오랫동안 가족과 헤어져있어도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겠지. 나의 경우에는 마리아 고모님이, 이 세상에서 핏줄이 통하고 있는 단 한 분의 친척이오. 아무리 지독한 결점이 있더라도 혈연을 끊을 수는 없소.

앤지는 마음이 아파 오는 것을 참으면서 그의 말을 음미했다. 동정하는 듯한 기색을 보인다면 타잔은 또 화낼 것이 틀림없다. 앤지는 한참동안 '정말로 그래도 좋을까? 옳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하는 양심의 속삭임과 싸우고 있었으나, 타잔의 고독한 모습을 보고 만 지금은 그에게 동정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만약.... 만약에 나에게 카리오스 섬에 남아 있기를 원하신다면, 나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의 아내로서 말이오?"

앤지의 몸에 전율이 달렸으나, 간신히 냉정을 유지하며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필요가 있다고 하신다면, 물론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침 그때 구름사이에서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를 무서워하게 했던 광경------- 타잔 헤리오스의 얼굴에 한 순간 충분히 만족한 듯한 웃음이 스쳐간 것같이 보인 것은 햇볕의 속임수였을 것이 틀림없다고 나중에 앤지는 생각했다.

바다는 잔잔하고 하늘에 뜬 구름은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앤지는 꿈꾸는 것 같은 황홀한 자연 속에서 먼 지평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5

카리오스 섬에는 교회가 많이 있었다. 양이나 산양이나, 가끔 목동의 모습이 보일 뿐인 쓸쓸한 언덕 위에, 각설탕 같은 하얀 네모진 집들의 취락이 몇 군데 있고, 그 곁에는 반드시 종탑이 있는 작은 교회가 있었다. 그렇지만 앤지와 타잔의 결혼식은 항구가 보이는 교회에서 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곳이 섬의 중앙 교회로, 도민 전부를 수용할 수 있는 곳은 그곳뿐이었기 때문이다. 도민들은 모두, 타잔이 신부를 맞는 일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약혼이 발표된 날부터 태양은 눈부시게 카리오스 섬에 쏟아져 눅눅하던 지면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라, 여기저기 괴어 있던 물은 며칠 사이에 사라졌다. 과수원이나 초원이나 생울타리의 화초가 일제히 숨쉬기 시작하더니, 섬 전체가 하룻밤 사이에 꽃이 만발한 느낌으로 변했다.

요 열흘 동안 앤지는 마음대로 지내왔다. 폭풍이 지나고 카리오스 섬과 가장 가까운 큰 섬인 로도스 섬 사이에 배가 오갈 수 있게 되자 우편물이 듬뿍 배달되었다. 그런데 의외에도 타잔은 앤지에게 일을 거들게 하려 하지 않고, 되도록 자유롭게 지내게 해주었다. 앤지는 혼자서 섬을 산책하며, 지나는 길에 섬사람들이 들러 달라고 몸짓 손짓으로 권해 오면 쾌히 이에 응하곤 했다.

그들은 리큐르를 권하는 일도 있었고, 아직 익지 않은 오렌지나 그 껍질, 포도 따위를 설탕에 졸여서 만든 음식을 대접하거나, 껍데기를 깐 호두나 아몬드에 투명하고 맛이 좋은 벌꿀을 쳐서 권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리스풍의 친하게 사귀고 싶다는 표시였다.

큰길 한복판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으려니, 우물이 하나 있었다. 앤지는 물병이나 주전자나 통에 물을 길러 오거나 빨래를 하러 와서, 우물가에서 잡담을 주고받으며 흥겨워하고 있는 아낙네들과도 친해졌다. 그녀들은 유능한 일꾼으로 매우 친절했다. 의사소통은 몸짓이나 얼굴 표정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리스 여성은 조심성이 많고 수줍음을 잘 타는 편으로, 남성에게 경의를 품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옷 갈아입는 것을 거들어 드릴까요?"

앤지는 그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침실의 창에서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앤지는 생기 없는 회색 눈동자를 보고 릴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저히 결혼식 당일의 신부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전혀 환한 표정이 없으며, 얼굴은 몹시 창백해서 사자난 유령 같았다. 일생에 한 번뿐인 기쁜 날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어머, 벌써?" 하는, 앤지의 눈에, 들떠 있는 릴라의 얼굴이 비쳤다. "아직 너무 빠르지 않아?"

가정부는 실망하여 어깨를 떨구었다.

"벌써 열 시예요. 결혼식은 열두 시부터 행해질 예정이기 때문에...."

"그래요, 알고 있어요.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빗는데 두 시간이나 걸리지는 않겠죠?"

릴라는 침대 위에 펼쳐져 있는 흰 면 블라우스에 눈을 돌렸다. '남자분이란 입는 옷에는 무관심한 법이에요. 쓸데없는데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타잔 앞에서는 절대로 웨딩드레스의 얘기는 하지 않도록 부탁해요.' 앤지에게서 몇 번이나 다짐을 받고 있었지만, 단순한 릴라로서는 아직도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결혼을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이 섬에 찾아온 일과, 프로포즈가 갑작스러웠던 일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무엇이 필요한가를 주인님께 귀띔만 하면, 로도스 섬의 뷔티크에서 얼마든지 근사한 고급품들을 가져오게 해주었을 것이다. 아무리 청결하다 하더라도, 세탁으로 꾸깃꾸깃해진 원피스를 결혼식 날에 입을 것까지는 없을 텐데.... 하고 릴라는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갑자기 그 의문이 풀리면서 릴라는 후련한 얼굴이 되었다. 어쩜 이렇게도 바보였을까, 신랑의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신부가 좋은 드레스를 입고 있어도 의미가 없지 않은가.

문에 노크 소리가 나더니, 니코스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저택의 고용인을 비롯하여, 섬주민들 모두가 흥분하여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는데도, 장본인인 신랑 신부만이 몹시 언짢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뭔가가 잘못되어 있다고 니코스는 느끼고 있었다.

주인님과 관계가 있었던 여성은 그야말로 부지기수였지만, 무조건 받아들여졌던 것은 오직 이 여성 한사람뿐이다. 호리호리한 몸매, 성실해 뵈는 눈동자, 침착한 분위기 그리고 상냥한 목소리. 다른 여성들처럼 화려한 데라고는 조금도 없어, 아내로 맞기에는 이상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신의 사자와 같이 카리오스 섬에 찾아와, 비극적인 운명으로 자포자기가 되어 성격이 거칠어진 한 남자의 마음에 따뜻한 정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런데도 왜 결혼식 날이 다가오자 주인님은 성미가 까다로워진 걸까. 식을 몇 시간 앞둔 지금 신부 쪽도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새끼 양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되도록이면 서둘러서 서재로 나와 달라고 주인님이 말씀하십니다." 하고 니코스는 답답하다는 듯이 알렸다.

"어머, 안 돼요. 식을 올리기 전에 신랑이 신부의 모습을 보다니, 불길하고 재수 없어요." 이렇게 외친 릴라는 타잔이 신부의 모습을 보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손으로 입을 누르며 방을 뛰어나갔다.

"고마워요, 니코스." 앤지의 침착한 말투에 니코스는 놀랐다. "곧 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얼마 후에 앤지가 서재에 들어가자, 방안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두웠다. 타잔은 회색의 양복을 입고, 일을 할 때의 엄한 표정으로 가느다란 손가락에 끼운 은색의 펜을 빙빙 돌리며 장난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앤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뭔가를 지시하려고 초조해하고 있을 때의 몸짓이다.

계약서를 쓰게 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틀림없이 이렇게 시작하겠지- 앤젤리너 메어리 로우즈는 오늘부터 재산의 일부로서 타잔 헤리오스의 지배하에 놓여지는 것으로 한다....

앤지는 조용히 들어왔다고 생각했으나, 타잔은 그것을 알아채고 일어서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앉아요."

앤지는 불안을 느낀 채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표정으로,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벌써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하고 타잔은 또다시 의자에 앉더니 엄숙한 투로 말을 꺼냈다. "오늘은 사순기의 마지막 주일인 수난 주일의 마지막 날이오. 이 기간은 그리스도가 황야에서 받은 고난을 기념하는 기간으로, 그리스인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앤지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상기하고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섬에서 지내고 있는 동안에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부활절의 의미가 대단히 커서 영국인에게 있어서의 크리스마스 이상이라고 느꼈어요."

"그래 부활절은 종교적인 축제일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날이오. 봄을 알리는 것이기도 한 이 기념 축제는 매우 엄숙한 행사로서, 한 달이나 걸리는 카니발에 시작되어, 그것이 사순절에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끝나고, 이번에는 엄숙한 자기 부정의 기간이 시작되지.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은 수난의 주간으로 불리어지는데, 이 주간에는 음악이나 노래 따위의 오락이 금지되고 있소. 해도 좋은 것은 청소, 도배나 페인트칠, 집의 손질과 같은 부활절 준비들이지. 부활절 이틀 전이 되면 섬사람들은 옛날 그대로의 롤빵을 굽고 색칠을 한 달걀을 준비하기 시작해요. 두 가지 다 부활절에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지. 전날부터 축제가 끝나기 시작하므로 우리는 이날을 결혼식으로 택한 거요."

그래서? 앤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세라도 부르란 말인가?

"거기까지 양보를 해주었기 때문에," 하고 타잔은 진지한 얼굴로 얘기를 계속했다. "축하연은 한밤중이 지난 뒤에 하도록 해달라는 섬사람들의 희망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돼요. 이날 밤 열두 시는 묵은해가 끝나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단 말이오."

"난 별로 상관없어요." 하고 앤지는 무관심한 말투로 대답했다. "도대체 축하해야 할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는데 축하연을 벌이다니 위선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우리의 결혼은 비즈니스가 목적으로서, 특별한 상황 때문에 할 수없이 이루어지는 것이잖아요. 당신은 비서가 필요하고 나는 그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 때문이죠. 결혼하면 일석이조거든요." 하고 통렬하게 비꼬았다. "결혼의 서약은 어떤 고용 계약서보다도 나를 구속하는 힘이 강하며, 결혼하지 않으며 남자로서의 구실을 못 한다는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섬사람들에게 떳떳하게 행세 할 수 있으니까요."

"마치 이 결혼이 나만을 위해서 행하는 결혼인 것 같은 말툰데?" 하고 타잔은 비난하는 투로 말했다. "그 결과 당신에게 돌아가는 잇점에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잖소. 지위나 신분의 보장, 게다가 막대한 재산까지 말이오."

앤지가 크게 숨을 들이쉬며 지존심이 용서치 않는다는 듯이 일어서는 소리를 타잔은 놓치지 않았다.

"재산 따위는 걱정거리가 될 뿐이에요.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지금 이대로 있고 싶어요. 가난해도 행복했었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여성이 있다니, 처음 알았는데. 내 주변의 여자들은 요전에 당신이 읽어 주었던 그 편지의 족속들처럼 돈에 눈이 어두운 여자들뿐이었거든. 당신도 그녀들과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나비가 되고 싶지 않은 애벌레도 있는 모양이군."

앤지가 화를 내고서 짐을 챙겨 섬에서 뛰쳐나가도 책망하지 못할 것이다. 타잔은 눈이 부자유한 것을 구실로, 보통 사람이라면 참고 인내해야 할 일들도 충동적으로 함부로 말하고 있다.

통렬하게 빈정거리거나 벌컥 화를 내거나 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무턱대고 분풀이를 하는 것은, 눈이 안 보이는 것에 의한 의학적인 증상 때문이 아니라, 그와 같이 버릇없이 제멋대로 구는 것이 허용되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침실에 돌아온 앤지는 얼마 안 되는 짐을 여행 가방에 챙겨 넣어 영국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이 이상 더 참을 수는 없다. 이런 굴욕을 당해가면서까지 실러의 뒤처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한참동안 몸을 떨며 흐느껴 울던 앤지의 뇌리에, 문득 벼랑 위에서 본, 쓸쓸한 듯한 타잔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일생동안 빛이 없는 세계를 손으로 더듬어서 살아가는 일에 비한다면 이 정도의 일을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쩐지 충동적으로 섬을 뛰쳐나가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마음을 고쳐먹고, 눈물이 엉망이 되고 만 화장을 간신히 고쳤을 무렵에 릴라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상당히 흥분하고 있는 모양으로,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크리슬러가 브라이들 스위트룸의 준비를 다 끝냈습니다. 오셔서 스펠베리를 구경해 주세요. 굉장히 근사해요." 하고 뜨겁게 양손을 꼭 잡고 꿈꾸는 것 같은 황홀한 얼굴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브라이들 스위트 룸....?" 하고 앤지는 앵무새처럼 릴라가 한 말을 그대로 흉내 내며 안을 둘러보고, 여느 때와 별로 다르지 않으므로 안심했다. "스펠벨리...? 그건 도대체 뭐지?"

릴라에게 끌려 앤지가 그 방에 한발 들여놓은 순간, 비단커튼에 둘러싸인 커다란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침대 바로 위의 천장에 원형의 레일이 부착되어 있는데, 거기에서부터 아름다운 자수를 놓은 얇은 비단 커튼이 드리워져, 침대에 있는 사람이 아련히 비치도록 되어 있었다.

"브라이들 커튼이에요." 하며 릴라는 앤지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스인의 신부는 모두 가지고 있어요. 보통은 대대로 그 집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습니다만, 아가씨는 외국인이며 주인님도 이렇다 할 가족이 없기 때문에 섬의 여자들이 다 같이 결혼 축하로 선물한 것입니다. 그래서, 약혼이 발표된 뒤에 밤낮없이 교대로 계속 꿰매어, 간신히 날짜에 맞출 수가 있었습니다. 보세요." 하고 크리슬러가 커튼을 젖혀 보였다. "베개 커버에도 자수와 레이스 테두리가 되어 있어요."

앤지는 완전히 할 말을 잃고 어리둥절해서 멍하니 서있었다. 상사인 남편과 한방에서 잠을 자다니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이번 결혼은 순전히 비즈니스일 텐데 타잔은 거기까지 요구할 생각일까? 공포와 기대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에 마음이 크게 흔들려, 온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앤지가 입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 두 여인들은, 근사한 선물에 감격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생긋 웃으며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시계에 눈이 간 크리슬러가 앙칼진 소리를 질렀다.

"! 엔사카....!" 하고, 양팔을 크게 펼쳐들었다.

"열한 시예요." 릴라가 빠른 말로 통역했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앤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빗는 것은 10분이면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크리슬러나 릴라가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재촉하듯이 앤지를 욕실로 끌고 가서, 그녀가 샤워를 하고 있는 동안에 새로운 속옷 따위의 필요한 것을 모두 준비해 놓았다.

앤지는 샤워의 물줄기를 맞으면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의 정리는 되었는데도 신부의상을 몸에 걸치는 것은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주위의 분위기가 들떠있는데도 좀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목욕물만 낭비할 뿐,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만도 없어서 할 수 없이 목욕 타월에 손을 뻗었다. 프릴도 아무런 장식도 없는 브래지어와 팬티와 슬립, 그리고 3년 동안이나 입었던 무명 원피스를 차례로 몸에 걸쳤다.

샌들만은 새것으로, 앤지는 가느다란 발목에 끈을 매면서 여느 때 신던 것과 같은 납작한 구두가 아니라, 화사한 하이힐의 샌들을 신는 것 자체를 기뻐하고 있었다.

함초롬히 반짝이는 연한 은발에 브러시를 대며 앤지는 어떻게든 좀 더 어른스러운 헤어스타일로 꾸미려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짧게 말린 머리가 말을 듣지 않아서 마침내 브러시를 내던지고 말았다.

5분쯤 지났을 무렵에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앤지가 긴장된 마음으로 문을 열자 니코스가 서 있었다. 평소에는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타입인 그가 아연실색하고 있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주인님이 잠깐 시간을 내 줄 수 없겠느냐는 전갈입니다마는...." 하고 미안한 듯이 숨을 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앤지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니코스는 주인의 명령에 화가 나는데도 입 밖에 내거나 하지 않고 꾹 참고 있는 것이다.

"알았어요." 하고 밝게 대답하면서 앤지는 타잔은 이번에는 어떤 엉뚱한 짓을 저질렀을까, 아니면 저지르려 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앤지가 타잔의 서재에 들어서자,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 자세로 데스크 앞에 앉아서, 초조하게 펜을 놀리고 있었다.

"와주었구만. 잘했소.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에 당신을 꼭 좀 불러 달라고 부탁했더니, 니코스가 뇌졸중이라도 일으킬 듯이 놀라지 않겠소, 그리 엉뚱한 얘기도 아닐 텐데. 당신은 아무 말 없이 와줄 것이라고 그에게 말해 주었소."

", 정말 아무렇지도 않군요." 스펠베리의 일이 머릿속에 어른거려 앤지는 아직도 흥분되어 있었다. "하지만 니코스의 입장도 생각해 줘야죠. 당신과는 달라서 니코스는 그리스인다운 로맨틱한 기분에 젖어 있을 텐데요. 섬사람들 모두가 그렇겠죠?" 하며 흘끗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앞으로 15분 후면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결혼식에 입회하게 되거든요." 쌀쌀맞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설마, 딕테이팅 머신과 타이프라이터가 함께하는 의식 따위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겠지요."

타잔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검은 안경을 통해 물끄러미 앤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자세로 있었다.

"지독하게 빈정거리는 말인데, 미스 로우즈."

"아니, 천만의 말씀이에요." 하고 말하는 앤지는, 거짓말을 하는 데 익숙지 않아 볼이 빨개졌다.

"그럼 시작할까. 조금 아까 일을 문의하는 전화가 있었는데, 지금 편지로 답장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되오. 로도스 섬까지 모터보트로 편지를 전하도록 대기시켜 놓았으니, 우리의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얼른 써서 건네주어 버려야 해요."

두 사람이 서재를 나왔을 때, 하인들 전원이 홀에 모여 있었다. 여자들은 선명한 빛깔의 롱스커트에 수를 놓은 에이프런을 입고 화려한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남자들은 헐렁한 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 화려한 셔츠 위에 자수가 놓인 베스트를 걸치고 목에는 스카프를 둘렀으며, 테두리가 없는 얇은 원형의 모자를 세련되고 매력적인 느낌을 주도록 비스듬히 쓰고 있었다.

일제히 환성이 터지고 축복의 말이 있었지만, 타잔은 입 속으로 투덜거리기만 했다. 그러나 만면에 웃음을 띤 니코스가, 와인이 담긴 글라스와 링 모양의 케이크와 은 포크를 담은 쟁반을 들고 다가오자 기분 좋게 와인을 받아 마시고 빈 글라스에 코인을 몇 개 넣더니 케이크를 이등분하여 한 쪽을 입에 넣었다.

그 뒤 크리슬러가 다가오더니, 자식 복이 많으라는 올리브관과 행운을 불러들이라는 자소나무의 작은 가지를 앤지에게 선물하며, 케이크의 나머지 절반을 그는 포크로 입에 넣으라고 손짓했다.

앤지는 행복과 자손의 번영을 소원하는 옛날대로의 결혼의식을 빈틈없이 해내었다. 그러나 기대에 찬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로 향해졌을 때, 앤지는 전신이 굳어졌다. 주위의 공기를 감지한 타잔은 할 수없이 앤지 쪽으로 돌아서서,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부둥켜안았다. 앤지의 불안은 절정에 달했다.

그의 검은머리가 다가오기도 전에, 무엇이 행해지려하고 있는가는 뻔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수줍음보다도, 눈이 보이지 않는 타잔을 망설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서서, 앤지는 자진해서 입을 맞추었다. 키스의 감촉은 눈 녹은 물맛같이 차가웠으나, 향기가 높고 맛이 좋은 와인과 같을 만큼 자극적이었다.

모두의 기대에 보답하려고 타잔은 한참 동안 입술을 포갠 채 키스를 계속했다. 그러자 앤지의 몸 속에서는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은 까닭 모를 감정이 치솟아 올라왔다.

그리고 그의 팔이 힘차게 앤지의 몸을 꼭 껴안은 순간, 이상하게 맥박이 빨라지더니 자신의 심장고동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연기는 아니었다. 아무리 독선적이고 독설가라 하더라도, 또 그가 자기를 싫어하고 있더라도 앤지는 이 카리오스 섬의 주인을 사랑하게 되고 만 것이다....

 

6

앤지는 꿈꾸는 것 같은 황홀한 분위기 속에서 결혼식이 행해졌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나중에 회상해 보려해도, 마음의 공간에 슬라이드가 비치는 것처럼 다만 단편적인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 위엄 있는 표정을 띤 그리스인과 함께 화려한 리본을 단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타고 마을을 나설 무렵에, 두 사람을 놀려대면서 졸졸 따라오던 고용인들, 교회 앞의 광장에 모여 환호성을 올리는 마을 사람들,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교회 등등....

교회의 안은 태양을 사랑하는 밝은 그리스인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게 어두컴컴했으며, 거무칙칙한 나무 벽에 부착된 촛대에 꽂힌 촛불이 가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축제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좌석이나 성화상에는 보라색의 천이 덮여 있었다.

검정 일색의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른, 키가 큰 주교의 모습은, 오랫동안 앤지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뜻도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두 사람에게 대답을 촉구한 뒤에 앤지의 손가락에 차가운 반지를 끼워 주었다.

타잔의 아내의 표시인 묵직한 황금 반지는 이제 그녀가 헤리오스 제국의 여왕이 된 것을 전 세계에 알리듯이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통로를 빠져나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교회 밖 광장으로 갈 수 있도록 인도라는 것이 아내로서의 첫 임무였다. 앤지는 손은 잡지 않고,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것만으로 방향을 지시했다.

타잔은 일견 아무런 고통도 없이, 흥분한 군중들을 헤치고 걸어갔다. 그러나 앤지만은 사고 이래 사용인 이외의 사람들과 얼굴 한번 마주치지 않고 지내온 그가 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구의 손인지 알 수 없는 무수한 손들이 타잔의 어깨나 팔을 두드리고, 수많은 입술들이 볼에 축복의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모두가 축제 기분으로 기뻐서 들떠있었다.

앤지는 외견상으로는 생글생글 미소를 계속 띠고 있으면서도, 어둠 속을 걷고 있는 타잔의 긴장을 감지하고, 조마조마해서 마음을 죄고 있었다. 타잔이 앤지의 어깨를 가볍게 안은 것 같은 모습으로 두 사람은 착 달라붙어서, 당나귀가 끄는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마차 곁에는 볼을 붉게 물들이고 만면에 웃음을 띤 니코스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요." 하고 앤지는 나직한 목소리로 타잔의 귓가에다 속삭였다. "앞으로 두 걸음이면 꼭 마차의 정면에 닿게 돼요."

마차 옆에 붙어 있는 계단 앞에서 타잔이 멈춰 서자 니코스가 손을 빌려주려는 것을 앤지는 가볍게 머리를 저어서 중지시키고, 다시 타잔에게 말했다. "한 발을 들면 바로 계단이 두 개 있어요. 두 계단을 올라가면 우측이 좌석이에요."

니코스는 앤지를 보다가 다시 타잔에게로 시선을 돌려, 그가 앤지의 말에 따라 무난히 계단을 올라 좌석에 앉는 것을 감탄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훌륭하십니다!" 니코스는 가슴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그는 계속했다. "제발 주인님을 도와주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기도해 오던 터였는데, 아가씨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 주신 분이라는 것을 방금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다정하신 하나님의 종입니까....!"

"니코스, 바보같은 소리는 그만 하세요!" 앤지도 몹시 감격하고 있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은 투로 말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눈물이 금세 쏟아질 것만 같아서였다. "결혼식이 막 끝났을 뿐인데 감상적이 되었군요, 니코스." 하고 생긋 웃어 보이고 나서 빠른 말로 덧붙였다. "서둘러 마차를 떠나게 해줘요, 주인님이 짜증을 내기 전에 말이에요."

마차를 눈 깜짝할 사이에 움직이기 시작하여, 모자이크식의 포도를 벗어나서, 저택으로 통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두 사람이 뭐라고 소곤거리고 있었지요?" 하고 말하는 타잔의 옆모습은 여전히 험상궂었다.

".... 빨리 마차를 떠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을 뿐이에요...." 앤지는 나쁜 장난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말이 막혀 우물거렸다.

"하긴.... 나에게는...." 하고 말했지만, 적당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신이 인내의 한계에 와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거든요."

"거짓말하지 마, 앤젤리너." 타잔이 호된 꾸지람 투로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앤지는 펄쩍 뛸 것같이 깜짝 놀랐다. "눈이 보이지 않지만, 귀까지 안 들릴 정도로 둔하지는 않아."

"거짓말이 아니에요.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아요." 그녀는 실제로 거짓말을 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믿어 주지 않는 것이 분했다. 그러나 흘끗 타잔의 동태를 엿보니, 마치 손으로 다정하게 쓰다듬은 것같이, 날카롭던 턱의 선이 누그러지고 이마의 주름도 사라져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다른 여자와는 달라서, 당신 말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지만.... 아까 한 말을 절대로 지키겠다고 약속해 주겠나?"

타잔은 밝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 만약 바란다면 서약서를 써도 좋아요." 하고 말했지만, 앤지는 다소 자존심이 상했다. "당신은 아무래도 몹시 나를 신용할 수 없는 모양 같은데, 법적으로 유효한 문서를 만들어 서명하면, 조금은 안심할 수 있잖겠어요."

또다시 타잔의 얼굴이 흐려지더니, 생기가 없는 검은 렌즈가 앤지의 얼굴에 덤벼들 듯이 초점을 맞추는 듯했다. 그의 굳어진 입가나, 나른한 것 같은 말투에서 그가 몹시 피로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을 믿는 수밖에 방법은 없소.... 인제 당신은 나의 아내가 된 셈이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존재임에는 변함이 없지. 이 눈 탓으로, 서로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며, 이해한다는 것도 우선은 무리요. 당신의 모습을 본 적이 없으며, 표정이나 몸짓을 알아낼 수도 없기 때문에, 말에만 의지하여 당신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 정도요. 무척 성실한 것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사고로 실명한 것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사고로 실명한 것을 의식하기 때문이겠지? 말 한 마디를 하는 데도 아주 신중하게 하고,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한 경우에도 참고 있으니 말이오. 불행한 나를 동정하여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것같이 느껴진단 말이오. 조금은, 자연스러워도 좋은데 말이오. 프리실러는 나의 태도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큰 야단이 났었지. 굉장히 노기등등한 얼굴로 대들어 나와 대등한 입장에서 다투곤 했어. 이렇게 되고 보니, 말다툼을 해도 상대의 반응을 볼 수 없는 게 몹시 유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군."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해도 몹시 경박하게 들릴 거라 생각하고 앤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앙세를 버린 지독한 여자라고 입으로는 욕하고 있어도, 역시 그는 아직 실러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어딘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잔이 지금 한 말은, 앤지의 걱정이 지나친 생각은 아니었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전에 그는 수많은 걸 프렌드 중에서 놀고 싶을 때에는 미녀를, 의논하고 싶을 때에는 지혜가 풍부하고 머리 좋은 여성을 골랐을 것이다. 그리고 실러는 그 양쪽을 겸비한 이상적인 연인이었을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시력뿐만 아니라 피앙세까지 빼앗기고 마음에도 없는 대역과 살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자 맥이 풀려 버렸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마차를 내리고부터, 비극은 클라이맥스를 맞았다. 현관으로 향하는 두 사람에게 저택 앞에 떼지어 있던 아이들이 캔디의 소나기를 퍼부어 댔다.

"크리슬러가 글라스를 담은 쟁반을 들고 입구에 서있어요." 앤지는 애써 냉정한 목소리로 타잔에게 주의를 주었다.

"꿀물이야." 타잔도 엄한 말투로 설명했다. "옛날부터 신부를 환영하는 뜻으로 해온 방법이지. 글라스를 비우거든 왼편 어깨 위쪽으로, 어떤 단단한 것을 목표로 냅다 던지는 거야. 한 번에 깨지지 않으면, 재수가 없는 불길한 징조니까 말이야."

갑자기 타잔은 자제심을 잃고 말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홱 앤지의 곁을 떠나더니,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크리슬러의 앞을 지나 곧장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집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구조를 알고 있으므로, 아무런 도움도 없이 서재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앤지는 마음이 동요하고 있어 사용인들의 관습에 체면상 동조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의리상 액체가 든 글라스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글라스가 돌에 부딪쳐 깨지는 소리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유리 파편 하나하나가 가슴속 깊은 곳을 푹푹 찌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있자 니코스가 석류를 들고 와서 슬픈 듯한 얼굴로 앤지에게 건네주었다. 행복의 표시로서 크리슬러가 현관에 놓아 둔 것인데, 타잔이 두 사람의 결혼에는 애정 따위는 조금도 없다는 듯이 발로 차고 갔던 것이다.

앤지는 혼자 있고 싶어서 천천히 정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사랑이 싹트고 있는지 어떤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깊이 탐지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아름다운 꽃들에 에워싸인 벤치에 앉아 물끄러미 꽃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앤지는 문득 고향집이 그리워졌다. 목사사택에도 계절의 꽃들이 어우러져 피어 있겠지.... 사랑하는 아버지와 동생 프리실러, 세 식구의 즐거웠던 나날들....

타잔이 이렇게 갑자기, 더구나 아버지나 실러도 부르지 않고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리자고 우겼던 일에 화가 울컥 치밀었지만, 한편 생각하니 그의 기분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편의사의 결혼을 위해 식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할 텐데, 식을 올리는 동안, 자신이 정말로 사랑했던 여성이 지켜보고 있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앤지는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으나 발소리의 주인이 니코스였으므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식을 막 올린 신부를 혼자 있게 한 것은 모두 자기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듯이 딱딱하고 위엄 있는 얼굴을 걱정스러운 듯 찌푸리고 있었다. 그가 거친 목제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았을 때, 앤지는 억지로 밝게 웃어 보였다. 니코스는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리고는 과장된 손놀림으로 알코올램프에 불을 켜더니, 설탕과 갓 빻은 커피를 손잡이가 긴 청동제 포트를 불에서 내려서 잘 휘저어 뒤섞은 다음 한 번 더 불 위에 올려놓고 끓이더니 작은 컵에 따라서, 찬 물이 든 글라스와 함께 앤지의 앞에다 놓았다.

"그리스인들은 커피는 여러 가지 병을 고치는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죠?" 하고 앤지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컵을 손에 들었다. "당신네 나라 사람들이 마시고 있는 것이데, 터어키 커피라니, 어떻게 된 일이죠?"

니코스는 고개를 움츠렸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맛이니까요. 커피를 끓이는 방법은 서른다섯 가지나 있습니다만, 정말로 맛있게 끓이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달콤한 글리코스로 끓였습니다만, 주인님은 설탕도 아무 것도 넣지 않은 스케토스를 좋아하신답니다. 맛이 어떴습니까?" 하고 앤지가 컵에 입을 대는 것을 불안스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네 맛있어요...." 하고 한숨을 내쉬며 앤지는 컵의 가장자리에 눈길을 떨구었다.

니코스는 앤지의 대답을 담담한 표정으로 받으며, "그렇지요." 하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저희들은 글리스코를 좋아하는 여성과 스케토스밖에 마시지 않는 남성을 천생연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달콤한 설탕 졸임을 만들기 위해서, 아직 익지 않은 쓴 오렌지를 벌꿀에 재어 두듯이 말입니다."

니코스의 가슴속은 용이하게 헤아릴 수가 있었다. 혼자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타잔을 염려하여, 그의 괴롭고 고독한 세계에, 한잔의 단맛을 더해 주라고 넌지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앤지의 표정에서, 마음이 움직여서 실행에 옮겨 줄 것 같은 것을 느끼자 니코스는 웃는 얼굴로 등을 쭉 폈다. 그러나 앤지에게는 그전에 분명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 될 문제가 있었다.

"이봐요, 니코스. 타잔의 고모님이 왜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모르세요?"

"저 욕심쟁이 할멈 말입니까?" 니코스는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주인님이 할멈을 피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어째서 식에 불러야 한단 말입니까? 아니, 그야 주인님이 굉장히 잘해 드리고 있습니다." 하고는, 깜짝 놀라고 있는 앤지를 달래듯이 당황하며 덧붙여 말했다.

"주인님이 아직 어렸을 때 늘 두들겨 맞고, 가혹한 처사를 당한 일을 생각한다면, 그럴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고모님이 떠맡아서 길러 주셨다는 것만으로도 보답을 해야 당연하지 않을까요?" 하고 말하며, 앤지는 햇볕 아래 있는데도 어쩐지 한기가 느껴졌다.

"당치도 않습니다. 그녀는 지독한 주정뱅이로, 주인님을 떠맡으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조카에 대한 애정 따위는 눈곱만치도 없었고, 단지 수입원으로만 생각했었습니다. 주인님이 올리브 농원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은,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술집에서 다 써버렸습니다. 만일 이웃 사람들의 친절이 없었다면, 주인님은 그때 틀림없이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니코스가 떠난 뒤에도 앤지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웅웅거리는 벌떼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빛깔이 고운 나비에도, 발밑에 어지럽게 피어있는 꽃들의 향기에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타잔은 내가 속기 쉬운 성격을 이용한 것이다. 나의 눈앞에서, 이 세상에 단 한 분의 핏줄인 고모님께 다정하게 대해 드리고 싶다고 마음 아파함으로써 고독한 사나이 행세를 해서 동정을 사려했으며,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해주자, 설사 애정이 없는 결혼이라도 상관없다.... 그런 마음이 되게 한 것이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계산되어 있었던 일로, 매사가 그대로 진행되었다....

앤지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참고 간신히 발을 옮겼다. 아까 그는 의논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었다. ‘프리실러와 서로 다투었던 일이 그립다고. 좋아요, 내가 상대가 되어 드리지요. 당신의 소망을 들어드리지요.’

노여움 때문에 앤지는 누가 몰아세우기라도 하듯이 재빨리 서재로 향했으나, 발을 들여놓는 순간,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블라인드가 내려진 어두컴컴한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데스크의 뒤쪽에 앉아 양손으로 눈을 가리고 푹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타잔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억누를 길 없었던 노여움이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린 앤지는, 털이 긴 융단 위를 살며시 걸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프세요?"

다정한 목소리에 타잔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앤지의 시선은 타잔의 눈에 못박혔다. 어둠 속의 고양이 눈처럼 호박색의 빛을 바하며 날카롭게 빛나는 저 눈이 시력이 없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허를 찔린 타잔은 당황하며, 언제나 타인의 호기심어린 눈을 피하기 위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손으로 더듬어 찾았다. 그러나 좀처럼 찾아내지 못하자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앤지는 선글라스가 그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는 상관하지 않고 천천히 그에게로 접근해 갔다.

그러고는, 동정 어린 눈으로, 최근에 치료한 눈가의 상처나 이마에 새겨진 주름, 그리고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짙고 검은 속눈썹을 쳐다보았다. 프리실러가 말한 바로 그대로다. 관능을 자극할 만큼 핸섬한 사람이 아닌가....

아직 상처의 아픔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니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다. 거만한 태도를 취하거나, 타인의 신세를 지는 것을 싫어하거나 했던 것은,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구나.... 앤지는 그간의 그이 심정을 깨닫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뭔가 마실 것을 가져올까요?" 앤지는 될 수 있는 대로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타잔에게로 다가갔다.

"뭔가 내가 거들어야 할 일이 있으면 말해주지 않겠어요?"

"니코스는 어디 있지?" 하며 그가 검은 머릿속에 손을 쑤셔 넣어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마치 개구쟁이 어린애처럼 보이자, 앤지는 가슴이 철렁했다.

"정말 그 녀석은 내가 시킬 일이 있을 때는 꼭 없거든. 선글라스를 찾아 달래려 했는데...."

"어째서 그 일을 니코스가 해야만 한다는 것이죠?" 선글라스 일은 무시하고, 똑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여기 있잖아요. 니코스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어요."

당신의 괴로움을 나에게도 나누어주세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 했을 때, 타잔은 양손으로 눈을 가리고 목 쉰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디 그 근처에 먹는 약과 안약이 있을 텐데...."

앤지는 어렵지 않게 타잔이 찾고 있던 것을 찾아 들었다. 먹는 약을 두 알 그의 손바닥에 얹어 주었다.

", 드세요. 물은 왼손 쪽에 있어요. 약을 들고 나거든 머리를 젖히고 위를 보세요, 안약을 넣어 드릴 테니까요."

타잔은 여느 때와는 달리, 시키는 대로 순순히 위를 향해 머리를 들었다. 호박색 눈빛에 끌려들 것 같은 충동이 일어, 안약을 넣으며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앤지의 온 신경은 짜릿짜릿해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유일한 구원이었다.

", 됐어요." 하고 앤지는 뒤로 물러나 앉았다. "약이 다 스며들 때까지 그대로 눈을 감고 계셔요."

"고마와, 간호사님." 차차 아픔이 가시는지, 타잔도 농담을 했다.

"우리는 여태까지 만난 적이 없는 남남끼리인 것이 다행이군, 사랑하는 여성에게 이런 일을 시켰다면 견딜 수 가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 한마디는 앤지의 마음을 무척 아프게 했다. 자기도 모르게 답답한 가슴을 털어놓을 뻔했으나, 입 밖에 낸 말은 좀 더 실제적인 것이었다.

"눈은 늘 그렇게 아픈가요, 아니면 가끔 그런가요?"

"사고 직후보다는 횟수는 줄었지." 그는 신중한 말투로 털어놓았다. "의사의 이야기로는 시간이 지나면 전혀 아픔을 느끼지 않게 된다더군. 하지만 그 이상은 가망이 없으니, 아픔이 사라진 단계에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어."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이죠? 말하자면 완전히 캄캄한 것인지, 아니면 회색인지, 그렇지 않으면 색이 없는 느낌인가요?" 뭔가 조리에 맞지 않는 얼빠진 질문이 되고 말았다.

타잔은 여태까지 누구도 입에 담은 적이 없는 질문에, 기분이 상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으나 약간 망설인 뒤에 입을 열었다.

"대개는 검은 무명천에 뒤덮여 있는 것 같지만, 아침에 눈을 쩎을 때 가끔은 뭐지 모를 빛깔이나 모양이 몽롱하게 아지랑이가 낀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

"어머나...." 하고 앤지가 희망에 가슴을 설레이고 있는 것을 감지한 타잔은 불쾌하게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시시한 말을 해서 위로하는 것은 그만두라구. 어둠의 세계에 익숙하지는 데에는 굉장히 시간이 걸렸으며 괴로웠지만, 가끔 영상을 느낀다는 것만으로 현실에서 도피할 생각은 없어. 나 자신은 앞으로의 목표를 정해 놓고 있어. 눈이 안 보인다는 것에 대한 체념이 빠르면 빠를수록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날도 빨리 온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게 되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나요?" 하고 앤지는 조용히 물었다.

앤지의 희망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다니,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양, 타잔은 깜짝 놀라고 있었다.

"물론 충분한 보수를 지불할 생각이야." 하고 무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간 세계에 천사(앤젤)를 놓아둘 여지가 없으며, 내가 되살아나서 카리오스 섬을 떠나 버리면 당신은 이용가치도 없어지게 될 테니까." 하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듯이 중얼거렸다. "되살아날 수가 있다면"

타잔의 잔혹한 말 때문에, 그에게 느꼈던 동정심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어쩜 이렇게도 지독한 사람이죠!" 앤지는 쇼크를 받아, 숨을 헐떡이며 뒤로 물러서면서 말했다. "예정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희생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계시죠? 잔혹해요!"

"그래, 잔혹한 인간이야, 나는." 하고 칭찬하는 말이라고 하듯이 소리쳤다. "그렇지 않다면, 올리브 농원의 노동자에서 소유자가 될 수는 없지 않았겠나. 게다가 난 당신과는 달라서 정직하기 때문에, 야심가라는 것도 시인하겠소, 당신은 나와의 결혼을 돈벌이에 이용한다고 해도 비난하지 않아. 나 역시 남이 부러워할 만큼의 재산과 권력을 획득할 때까지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니까. 모처럼 잘 되어 갈 것 같은데, 죄스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앤젤리너. 재산가의 아내의 특권쯤으로 생각하면 돼요."

"난 당신의 아내가 아니에요." 앤지는 서슴지 않고 잘라 말했다.

"속은 거예요, 모노폴리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짜놓은 상대편 올가미에 걸려든 것같이. 이제 더 이상 더 카리오스 섬에 있는 것은 질색이에요." 하고 말한 앤지는 눈에 가득 굴욕의 눈물이 괸 채, 도어로 달려 나갔다.

"내일 돌아가겠어요."

 

7

앤지는 그 뒤 쭉 방안에만 틀어박혀서, 독 안에 든 쥐처럼 떨고 있었다. 크리슬러와 릴라가 자기의 생활용품을 스위트룸에 바쁘게 운반해 가는 것을 보고 더욱더 마음이 무거워진 앤지는, 영국에서 가져온 얼마 안 되는 짐만은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했다.

식사 따위가 목구멍에 넘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크리슬러가 신혼부부를 위해 한층 솜씨를 부려 만들어 주는 음식을, 타잔의 얼굴을 보면서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는 눈이 안 보일 뿐만 아니라, 마음도 비뚤어져 있다. 이제까지의 쓰라린 경험에서, 여성은 누구나 돈에만 눈이 어두워 애정은 돈과 교환해서밖에 얻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 타인을 믿지 않고 무정하게 행동하는 일만이 성공에의 지름길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어느 사이엔가 부드러운 어둠이 방안으로 스며들어 앤지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새까만 벨벳 같은 바다 위에 수많은 작은 불빛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매일 저녁 항구를 나가는 어선의 뱃머리에 부착된 아세틸렌 등의 불빛이었다. 저렇게 해서 어둠 속에서 불빛을 밝히고 흔들거리며, 바다 밑의 모래나 바위 위에 있는 문어나 오징어를 비추어 물고기의 무리를 고기잡이 그물 속으로 꾀인다고 한다.

조용한 방에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자, 앤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몸이 굳어졌다.

"들어오지 말아요...." 차가운 말이 입술에서 반사적으로 나왔다. "누구와도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들어올 때 일일이 앤지의 허락을 받는 것은 하인들뿐이므로, 문을 자물쇠로 채울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방금 노크한 사람은 허락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았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밀어 열고, 커다란 그림자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온몸의 신경은 둔해져 있었지만, 앤지는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그것이 타잔이라는 것을 알았다.

"당신의 방은 구조를 잘 모르기 때문에, 가르쳐 주지 않으면 곤란해." 그 말은 명령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손을 빌려주지 않으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타잔이 완전히 자기에게 의지해 오는 것을 보자, 앤지는 거절하고 싶은 심정을 억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창가에 앉아 있어요. 거기서 여기까지는 2, 3m이고, 방해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타잔은 앤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꽃향기에 끌려드는 꿀벌 같군. 영국 정원의 장미는 다른 어떤 향기보다도 멋진 냄새야. 언제나 그 향수를 바르고 있어 줘." 하고 그는, 앤지가 서 있는 위치에서 겨우 수십 센티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자리를 바꾸거나 해서는 안 돼, 나에게는 당신이 있는 위치는 냄새로밖에 알 수 없으니까."

"향수는 이것밖에 갖고 있지 않아요." 타잔의 태도변화를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동생한테서 받은 값비싼 생일 선물이에요. 아깝기 때문에 특별한 때에만 발라요."

"그렇지, 결혼식 이상으로 특별한 때는 없을 테지." 그의 다정하게 미소 짓는 입매에 앤지는 눈을 빼앗겨버렸다.

"그런데‥‥ 무슨 볼일이에요." 하고 쉰 목소리로 물었다. 타잔은 다정한 성인(聖人)이 아니라, 무정한 악마라고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타일렀다.

"사과하러 온 거야." 그는 등줄기를 살며시 애무하는 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까는 매우 초조해져 있었고 눈이 아파서 심한 말을 하고 말았지만, 너그러이 봐줄 수 없겠나. 가끔 지독하게 낙심하면 불만을 쏟을 곳이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하거든. 물론 그런 심정을 떨어버리려고 자신과 열심히 싸우고 있어서 대개는 극복하지만, 오늘은 그만‥‥." 하며 그는 힘이 빠진 손을 이마에 갖다 댔다. "결혼식

에서 구경꾼들과 소음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모양이야. 입으로 말하고 있는 이상으로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앤젤리너 로즈. 당신한테 화풀이해서 나쁜 느낌을 주고 말았군‥‥."

앤지는 여태까지 한 번도 진심에서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 한해서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이 남자는 나의 약점을 찾아내서 이용하려 하고 있으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앤지가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않고 있으니 열려진 창으로, 바이올린이나 만돌린, 플루트의 소리에 안주 쾌활하게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깥에 무엇이 보이는가 가르쳐주지 않겠나?" 타잔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창가로 다가간 앤지는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별이, 언덕 위의 이 저택을 향해서 어두운 언덕길을 천천히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섬사람들 모두가 이리로 몰려오고 있는 것 같아요, 손에 횃불을 들고서."

"촛불이야." 하고 정정하며 타잔은 앤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심장 소리가 천둥소리같이 앤지의 귀에 울렸다. "교회 안의 부활제용 긴 초가 점점 작아져서 한밤중에는 아주 꺼져 버리는 거야. 이윽고 사람들의 흥분이 높아질 무렵에, 촛불을 손에 든 주교가 나타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 세계에 알리지. 그리고 그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초에 불을 옮겨 붙여 주는 것과 동시에, 교회의 종이 울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바로 옆의 사람들에게 불을 옮겨 붙여 주면서 의례적인 인사말을 서로 나누지.

'크리스토스 아네스티!'

아리소스 아네스티'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되살아나셨다!'

사람들은 바람에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가며, 우리를 축복해 주러 오는 중이야. 크리슬러가 성 화상 밑에 준비해 놓았을 작은 램프에 불을 붙임으로써, 이 집에 신의 은총이 있기를 기원해 주지. 새해의 시작이야, 앤젤리너. 시시한 일은 잊어버리고 화해하고, 새로이 시작하는 거야. 당신도 우리의 의식에 참가해 주겠지?" 하고 앤지의 귓전에 살짝 속삭였다. "나를 용서하고, 저 사람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함께 아래로 내려가 주겠지?"

행렬의 선두는 저택의 현관 가까이에까지 와 있었다. 앤지로서는 오늘밤이 자신이 이 섬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므로, 마음을 넓게 가지고 그의 희망을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좋아요‥‥ 카라오스 섬의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니까요."

두 사람은 아래로 내려가, 섬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앤지는 멍하니 서서, 잔디밭에 놓여질 트레슬(trestle) 테이블을 에워싸고 있는 불빛의 원을 쫓고 있었다. 테이블은 얼룩 한 점 없는 새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으며, 그 위에는 눈이 번쩍 뜨일 것 같은 빨강으로 착색된 삶은 달걀을 담은 바구니와, 접시더미, 나이프와 포크, , 글라스, 갓 구운 빵을 가득 담은 큰 쟁반들이 놓여 있었다.

앤지는 타잔의 옆에 서서, 볼에 섬사람들의 키스를 받고 있었다. 이처럼 그들의 따뜻한 호의와 흥분한 공기와 행복한 분위기에 싸인 앤지는 점점 명랑한 기분이 되어 갔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주변의 정경도 분위기 조성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키가 큰 사이프러스나 짙은 향기를 풍기고 있는 소나무의 위쪽에서 보름달이 은빛을 뿌려, 벤치의 표면에 보석 같은 무늬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저쪽에는 올리브 농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고, 언덕 아래에는 별빛을 반사하면서 부드럽게 잔물결이 일고 있는 바다가 있었다.

"얏소!" 하고, 섬사람들은 저마다 외쳐서, 타잔과 수줍어하는 신부를 축하하며 건배했다.

타잔도 입가에 웃음을 띠고, 앤지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느긋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도 답례를 해야지. 당신도 우조를 마시며 모두의 건강을 축복해 주겠지?"

앤지는 거절하면 실례가 될 것 같아서, 무색 투명한 액체가 조금 든 글라스를 발아 들고 상당량의 물을 타서 묽게 했다. 그리고는 시험삼아 조금 입을 대보니, 순식간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러자 마치 그것을 보고 있었기라도 한 듯이 타잔이 껄껄 웃기 시작했다.

"이 나라의 술을 마시려면 연습이 필요하겠는데." 하고 말하는 타잔의 거무스름한 얼굴에 흰 이가 눈에 띄었다. "뭐 때가 되면, 아니스의 풍미가 마음에 들어 점점 진한 것을 마실 수 있게 될 거야."

"그럴까요?" 긴장은 약간 풀리고 있었지만, 가시 돋친 듯한 말투는 변하지 않았다. "풍미에 속으면 뒤가 겁나요, 선물에 속아 아무 남자에게나 걸려들고 말 듯이."

"이런 식으로?" 하고 말하면서 타잔은 앤지의 팔을 손으로 더듬어 손가락을 찾았다. 그러자 차가운 감각이 앤지의 손끝에서 손가락 사이로 이동해 갔다.

달빛에 반짝 빛나는 것을 보고 금반지임을 알자 앤지는 반사적으로 몸을 떼려 했지만, 그의 뜻대로 반지는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졌다. 앤지는 결혼반지 외에 좀 더 값비싼 반지가 한 개 더 끼워진다는 굴욕을 참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그것이 동생 프리실러에게 선물했던 다이아몬드거나 그것과 비슷한 반지였더라면 도저히 참을 수 없었겠지만, 다행히도 타잔이 앤지에게 골라 준 것은 얼어붙은 눈물 같은 훌륭한 진주 반지였다.

"마음에 드나?" 앤지가 잠자코 있자, 타잔은 불안한 듯이 물었다. "당신에게 약혼반지를 끼워 주지 않았다니, 내가 너무나 당신에게 소홀했던 것 같군."

앤지는 아름다운 진주에 눈물이 날 것 같은 자신을 호되게 꾸짖었다. 이것은 타잔이 적당히 고른 것이지 마음이 담긴 선물은 아니다. 기뻐하기는커녕 불쾌하게 느끼고 있다고 알게 해야지‥‥.

틀림없이, 서재에 흐트러져 있는 여러 가지 보석 카탈로그 중에서, 니코스의 도움을 받아 적당히 정한 것이겠지. 타잔 같은 단골이라면, 전보나 전화 한 통화로 어떤 주문이든 받아 줄 것이 아닌가.

"아주 훌륭해요. 하지만, 내게 이런 것까지 선물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앤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름다운 공주님과 그 연인이 악의 신에 의해 사이가 갈라지자, 그것을 슬퍼한 나머지 밤의 여왕이 흘린 눈물이란 보석을 선물 받은 감상이 고작 그것뿐인가. 캄캄한 하늘에서 그녀가 흘린 눈물은, 달빛을 받으며 바다에 떨어져서 진주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지. 그런

그녀의 눈물은 헛된 것이었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앤젤리너 로즈?" 하며 타잔은 앤지의 손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앤지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 것도 아랑곳없이 핑크빛 손가락 하나하나에 살짝 키스했다. "이 반지는 아름다운 광택이 마음에 들어서 몇 해 전에 사두었던 것이지. 달빛의 차가움과, 새벽이나 해질 무렵의 태양의 따사로움을 아울러 지니고 있어. 다이아몬드같이 딱딱하게 반짝이는 것과는 다르고, 커트하거나 닦아서 윤을 낼 필요가 없는 자연석이기 때문에, 이것이 제일 잘 어울리는 여성을 만나면 주려고 소중히 간직해 두었던 것이지. 투명하게 비칠 것 같은 살결을 가지고 있으며, 순결하고 조심성이 많으며, 애정에 넘치는 여성에게 말이야."

앤지의 얼어붙은 혈관에 따뜻한 것이 흐르기 시작했다. 앤지가 몸을 굳히고 전혀 움직이지 않으므로 타잔은 그녀가 불안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검은 선글라스를 안 포켓에 살며시 넣더니, 다정하게 앤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당신은 나의 아내야." 하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밖에 들을 수가 없어. 좀 더 자세히 당신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다만 한 가지 방법은 있지만‥‥ 이 손으로 당신을 만져 보아도 괜찮을까?" 하면서 그의 손이 볼에 닿는 순간, 달콤한 전율이 앤지의 몸 속을 달렸다. "나는 당신이, 키가 어느 정돈지, 살이 쪘는지 야위었는지, 머리카락은 블론드인지 흑발인지, 살결은 크림빛인지, 아니면 피치(복숭아) 같은 핑크빛인지‥‥ 아무것도 몰라."

그의 한숨을 볼에 느끼면서 앤지는, 벌 받을 생각이지만, 그의 눈이 안 보여서 다행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만약 그의 눈이 보였다면, 그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호의 정도는‥‥ 하고 기대에 설레고 있는 가슴속을 들여다보고 말았을 테니까.

타잔은 당연히 오우케이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앤지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천천히 아래로 이동시켜 갔다. 볼의 윤곽을 더듬다가, 어깨에서 뻗어 있는 가느다란 허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앤지의 마음은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지만 몸은, 붙잡혀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작은 새처럼 굳어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타잔은 최근까지도 세련되고 경험이 풍부한 톱 레벨의 여성들과 사랑유희를 즐기고 있던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애무가 나의 몸이나 마음을 충분히 녹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는 내 마음의 동요를 벌써 꿰뚫어 보았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프리실러보다 날씬한 것 같은데, 키는 비슷한 모양이지? 얼굴도 닮았나?"

실러와 닮았다는 것이 이렇게도 괴롭고 비참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빛이 바랜 사진처럼 닮았어요."

반쯤 체념한 것 같은 앤지의 말을 듣고, 타잔은 갑자기 힘껏 그녀를 껴안았다. 늠름한 가슴에 꽉 껴안긴 앤지는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랄 뿐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자신을 비하시키지?" 타잔의 다정한 목소리에 앤지의 볼은 붉게 물들었다.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과 부드럽고 장미 향기가 나는 크림빛 살결을 가지고, 정열을 애써 감추어 가며 나의 가슴에서 떨고 있는 여성이, 빛이 바랬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군." 하고 말하는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져 갔다. ", 부탁이야, 당신의 달콤한 입술을‥‥"

타잔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꽃에 끌리는 벌처럼 정확하게 앤지의 입술을 덮쳐, 그녀가 정열의 물결에 휩쓸려 머리가 어찔어찔해질 때까지 키스를 계속했다. 앤지가 마음속으로 은근히 바라고 있던 일이 드디어 현실이 되었다--정서불안으로 성격이 격렬하고 완고하며 본심을 알 수 없는 그리스인이 정말로 나를 사랑해 주고 있는 것이다.

행복으로 황홀해진 상태는, 바이올린이나 플루트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동안도 죽 계속되었다. 그리스 특유의 현악기가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 있노라니, 가슴이 찡해지며 차츰 흥분되어 갔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던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고, 불이 붙기 시작한 마음은 뜨거운 사랑으로 변해 갔다. 정열적인 사랑의 노래에 앤지의 가슴은 열광적으로 들뜨고 있었다.

수난 주일의 단식 기간 이후 처음으로 식탁에 앉을 때까지, 두 사람은 전혀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기쁨에 들뜬 분위기 속에서, 삶은 빨간 달걀이 나누어지자, 어느 테이블에서도 달걀깨기의 경쟁이 벌어졌다. 다른 사람과 달걀을 서로 부딪쳐서 깨는데, 껍질이 째지지 않은 사람들은 다시 그들끼리 또 부딪쳐서 깼다. 이렇게 해서 끝까지 깨지지 않고 남은 사람이 이 게임의 승자가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수프와 꼬챙이에 꿰어 몇 시간이나 숯불에 구워진 새끼양의 고기가 나왔다. 어느 것이나 다 맛있었는데, 특히 양고기는 무척 맛있고 부드러웠다.

타잔이 주위 사람들의 조크에 대답하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앤지는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으나, 가슴이 철렁해지며 호박색의 눈동자에 시선이 못박히고 말았다. 그가 사냥개처럼 날카롭게, 앤지의 행복으로 가득 찬 얼굴에 불타는 것 같은 뜨거운 길을 보내오고 있었던 것이다.

"피로해진 모양이지, 에리카(귀여운 사람)?" 하고, 눈이 보이는 사람이 하는 것같이 하는 말투에 앤지는 놀랐다. 에리카라니‥‥. 정말로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고 있는 것일까? "슬슬 빠져나갈까? 모두들 이해해 줄 테니까 문제없어."

앤지는 그 말에 숨은 의미를 깨닫고,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앤지가 반대할 사이도 없이 타잔은 몸을 일으켰다.

"카리스펠라!" 그는 히죽히죽 웃고 있는 손님들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벌써 한밤중도 지났으니 헬레티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까. 아내가 피로해진 모양이어서, 우리는 이만 실례하겠네. 여러분은 천천히 마음껏 즐기시도록."

"엔다크시! 엔다크시!"

두 사람은 환성 속에 전송받으며 걷기 시작했다. 타잔의 교묘한 애무나 귓전에서의 속삭임, 뜨거운 키스, 그리고 꿈과 같은 몇 시간의 감흥을 계속 유지시켜 주던 황금빛의 그리스 와인 탓으로, 앤지의 목은 바싹바싹 마르고 볼은 달아올랐으며, 머리가 혼란해져서 전신이 수줍음에 물결치고 있었다.

침묵의 양해 속에 두 사람이 스위트룸에 들어갔을 때, 앤지의 몸속에는 세찬 떨림이 달렸다. 스펠베리가 달빛을 받아 거미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앤지는 방의 한복판에 우뚝 선 채, 꼴사납게 비쳐지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타잔이 보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또 그의 눈이 부자유한 것에 감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죄스럽게 생각했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앤젤리너." 하고 말한 타잔은 앤지를 돌려세우고는, 호박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난폭한 짓은 하지 않겠어. 약속하겠어."

타잔의 손이 몸에 닿는 순간 앤지의 온몸에는 뜨거운 피가 뛰놀기 시작했다.

", 타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어린애같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알고 계시죠? 당신을 사랑하게 되고 말았어요. 당신을 잃게 될까 자꾸 두려워요! 니코스가, 당신은 미다스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제발 부탁이에요, 뜨는 앙금을 순금으로 바꾸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도대체 무슨 번역이 이렇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문구가 좋을지 몰라서리.... 그냥 책대로 올립니다>>

 

8

빠끔히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산들바람이, 비단 스펠베리를 흔들고 있다. 앤지는 수많은 나비들이 나는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의 기억이 머릿속에 아련히 떠오르자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긴 했었지만, 타잔이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흔적으로, 옆의 베개가 꺼져있고 침대 커버가 구겨져 있었다.

앤지는 완전히 감각을 잃은 채 몸을 움직이면서, "으음." 하고 슬픈 듯한 소리를 냈다.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부당하게 버려지고 말 운명임을 생각하니 마음이 산란해졌다.

타잔 해리오스의 성격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가 계산에 빠르고 교활하다는 것, 여성에 대한 불신감은 어린 시절부터 길러진 뿌리 깊은 것이라는 것, 그리고 사고가 눈뿐만 아니라 마음에까지 상처를 입혀 그를 냉혹한 인간으로 만들고 말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그가 비서나 맹도견 대신에 인간을 손에 넣고 싶었기 때문에 거짓 결혼을 했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무리를 해서라도 침대를 빠져나가 샤워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녹초가 되어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우 몇 시간 전에는 자기로서도 놀랄 만큼 격렬하게 타올랐었는데‥‥. 앤지는 불안하게 여길 것도 망설일 것도 없이 타잔에게 몸을 내맡겼었다. 어쩌면 그가,

여성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교묘하게 그렇게 하도록 유도했을지도 모른다. 그에 있어서 속기 쉬운 앤지를 상대로 다정한 신랑 역을 연기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어젯밤의 앤지는 그리스의 독한 술과 로맨틱한 분위기에 완전히 도취되어 있었다.

타잔은 앤지를 품속에 껴안은 채, 핑크빛 입술에 살며시 입술을 포갰었다.

"상냥하고 귀여운 앤젤리너, 당신과 함께 있으면, 어쩐지 내가 몹시 나쁜 인간으로 생각되곤 해. 여자는 제일 잔인한 짐승이라는 나의 생각이 흔들릴 것 같단 말이야." 하면서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앤지의 볼을 만졌었다. "하나님은 여성을 만든 나머지로 장미를 만들었겠지‥‥."

팔랑팔랑 바람에 나부끼는 스펠베리 밑에서, 앤지는 몸부림치며 흐느껴 울었다. 그토록 달콤한 말을 속삭인 입술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이 침대를 빠져나가 나가 나를 나락에 밀어 떨어뜨렸다.

"안녕, 앤젤리너."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어깨너머로 말했다. "카리오스의 꿈은 어땠어? 당신이 섬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어 --지금 당장은 말이야."

그리스인은 좀처럼 아침은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샤워를 하고 옷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왔을 때, 릴라가 식사를 들고 들어온 것을 보고 앤지는 깜짝 놀랐다. 쟁반에는 커피포트와 찻잔과 꿀 병, 그리고 빵이 몇 조각 담겨져 있었다.

"주인님께서 이걸 전부 드시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하면서 릴라는 경의에 찬 눈으로 앤지를 보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시거든, 서재로 오시랍니다."

앤지는 자기가 아비시니아 고양이처럼 특별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고마워, 릴라. 커피는 마시겠지만 나머지는 치워줘요."

"어머나, 하지만‥‥."

"배가 고프지 않아요." 하고 앤지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치워 달라는 거야." 고압적인 말투를 쓸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정신적인 고통에 앤지는 그만 가시 돋친 말투가 되고 말았다.

릴라는 처음으로 앤지의 위엄에 맞닥뜨리자, 어느 편도 들지 말고 중립의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알았습니다."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릴라는 새로운 여주인의 앞을 떠났다.

앤지는 젊은 가정부가 놓아두고 간 커피에 손도 델 수가 없을 정도로 신경이 초조해져 있었다.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고 잔을 밀어내면서, 전혀 희망이 없는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 나가면 좋을까 하고 여러모로 생각했다. 확실히 타잔이 말한 대로 이제 와서 여기를 떠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러라면 감정은 감정, 현실은 현실로써 딱 잘라 결론짓고 영국으로 돌아가 버리겠지만, 나로서는 그럴 수 없다‥‥. 깊은 관계에까지 이른 결혼을 아빠에게 비밀로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여기에 있고 싶은가, 에리카?" 하고 말하며, 고양이가 어둠 속이라도 걸을 수 있듯이, 타잔은 앤지가 뿌리고 있는 장미 향기에 끌려서, 청바지에 T셔츠 차림으로 유유히 나타났다. 검은 T셔츠는 마치 제2의 피부처럼 착 달라붙어 몸을 감싸고 있어서, 늠름한 가슴이나 어깨 근육의 선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앤지는, 시력이 없다는 것은 알면서도 호박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늘씬한 허리에 매고 있는 벨트의 버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 있겠어요." 하고 앤지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 마음대로 된 거예요, 당신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어 버리죠?"

"무엇이든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타잔은 앤지에게 접근하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서슴없이 단언했다. "때로는 제2의 희망으로 참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있으니까."

앤지는 이 통렬한 빈정거림에 깜짝 놀랐다. 실러가 손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대역인 나로써 참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되받아 쏘아붙이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무관심을 가장하는 데 신경을 집중시켰다.

"인생이란 타협이거든요." 차가워진 입술을 놀렸다. "사람은 모두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상황에 따라 두 가지를 비교해 보고, 어느 한쪽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타잔은 열매가 여물어 터져서 씨가 튀어나오듯이 검은머리를 쳐들었다. 이 결혼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것에 비로소 생각이 미친 것 같았다. 앤지 역시 마음속으로 이상적인 남성상을 그리고 있었을 텐데, 그것이 자신과 크게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타잔은 불쾌한 기분이 되었다.

"얌전한 여자니까, 아마 당신의 이상적인 남성상은 당신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겠지, 그렇지?" 하고, 바보취급을 하듯이 코웃음을 쳤다. "온후하고 관대하신 목사님! 틀림없이 돈에 애착이 없어서, 가족들을 부업으로 남의 집의 세탁 일까지 떠맡지 않으면 안 되지 않았을까‥‥."

"가난하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에요." 하고 앤지는 기분이 상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고 밟게 웃었다. "요란스럽게 차려 입고,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실컷 놀아나는 사교계의 일원이 되느냐, 아니면 가난하더라도 애정에 가득 찬 생활을 하느냐 중의 어느 한 쪽을 택하라고 한다면 물론 후자죠."

흥미가 있는 듯한 타잔의 얼굴을 언뜻 보니, 햇볕에 그을은 거무스름한 얼굴이 확 붉어졌다. 타잔 헤리오스도 남만큼 수치심을 가지고 있었던가 하고 생각했으나, 그 다음 말을 듣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서 앤지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당신은 자신이 미다스에게 닿는 쪽을 택했잖았나. 그러고 또, 뜨는 앙금을 순금으로 바꾸는 방법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댔잖아."

앤지가 침착을 되찾아서 얘기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렸으며, 그 뒤에도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감정적인 말이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았어요!" 하고, 목구멍에서 억지로 소리를 쥐어짜듯이 말하고서 그의 보이지 않는 눈을 쏘아보았다. "지금 생각하니, 다정함이나 동정심은 눈곱만큼도 없고, 전혀 애정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 그런 걸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내가 어리석었어요."

"그래도 정열은 가지고 있었잖아?" 하고, 욕망의 신 에로스 같은 장님인 그리스인은 상대를 힐책하고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고양이 같은 재빠른 동작으로 접근하여 앤지의 가냘픈 어깨를 난폭하게 움켜잡았다.

앤지는 저항하면 오히려 꼴불견일 것 같아서,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려고도 하지 않고, 어떤 처사를 당할지 모르면서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타잔은 검은 선글라스를 벗고 얼굴을 접근시켜 왔다.

호박색의 눈동자는 생기에 찬 빛을 발하고, 입술은 사냥감을 노리는 매와 같이 당장이라도, 무방비 상태인 앤지에게 덤벼들려 하고 있었다. 정말로 타잔의 눈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에겐, 창백한 앤지의 얼굴도, 핏기를 잃은 입술도, 공포에 떨고 있는 눈동자도 모두, 정말 검은 베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일까?

"시력은 잃었지만," 타잔은 분노를 터뜨리듯이 계속했다. "다른 모든 기능은 지극히 정상이야, 너무 완벽한 정도로 말이야. 어젯밤까지는, 내 육체가 여성의 위로를 이처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어." 앤지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가해졌다. "지금은, 배가 고픈 사람이, 파티에서 진수성찬을 앞에 놓고 있는 듯한 심정이야. 참을 기력도 없어."

마을 아이들이 카리오스 섬 위를 날아다니고 있는 회색의 야생 비둘기를 잡듯이 타잔은 간단하게 앤지를 붙들고, 떨고 있는 몸을 꼭 껴안은 채 침대 쪽으로 밀고 갔다. 스펠베리의 가장자리가 볼에 닿았으므로 타잔도 침대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평소에 촉각에 의지해온 때문인지, 앤지의 몸 위치를 이동하는 타잔의 손놀림에는 조금도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등줄기를 따라 손으로 더듬어, 면으로 된 심플한 선드레스의 지퍼를 웨이스트 언저리까지 내리고 끈을 풀었다. 그러고는 희미한 신음소리를 내며, 떨고 있는 앤지의 날씬한 몸을 꼭 껴안고 살짝 입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포도주를 시음하는 것 같은 조심스런 키스였으나, 마침내 앤지가 버거운 물결에 휩쓸려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만큼 격렬한 것으로 변해 갔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굳게 죄어진 타잔의 품안에서, 앤지의 몸에 불이 붙어 쾌감의 잔물결이 밀어닥치기 시작하자, 마치 마취된 것처럼 이성을 잃어 갔다. 앤지는 무의식 속에서 족히 자연스런 느낌으로, 심하게 맥박치고 있는 타잔의 가슴에 기대었다.

"글리카, 모우!" 하고 타진은 목쉰 소리로 중얼거리며 앤지의 드러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을 안고 있으니 머리가 이상해져 오는군. 많은 여자를 껴안아 봤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당신의 부드러운 손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데도,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몸은 비단 같은 촉감으로 내 손에서 용케 빠져나가 버린단 말이야. 어제는 환상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렇게 확인해 보니‥‥."

타잔의 품속에서 조금씩 경련을 일으키며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자, 앤지는 유혹에 지고 말게 되는 자신의 나약함이 한심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그 이상으로 강하여, 그에게서 몸을 뗄 수가 업었다.

앤지는 수줍어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그녀의 턱을 잡으려고 손을 댄 타잔은, 앤지의 어린애 같은 몸짓에 쉰 목소리로 웃었다.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니 앤지의 얼굴은 다시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앤지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올리면서 호박에 눈동자로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앤지, 당신의 알몸을 볼 수 없어서 유감인데. 하지만 만약 이 눈이 보인다 하더라도, 당신은 수줍어서 그 아름다운 몸을 감추어 버리고 좀처럼 보여줄 것 같지도 않지만, 그렇지? 그리스인은 예전부터 알몸을 숭배해 오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지 않아. 아담과 이브는 알몸으로 에덴동산을 뛰어다녔잖아. 어린아이들은 알몸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잖아. 옷으로 몸을 가리는 것이 에티켓이라는 의식은 후천적인 것이야. 정말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고 제일 아름다운 거야."

하지만, 당신은 깔끔하게 옷을 입고 있어도 충분히 지나칠 정도로 남성적인 매력이 넘치고 있어요. 육체적으로 서로 끌리는 남녀가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옷으로 몸을 감추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아침부터 밤까지 침대 속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욕구에 제동을 걸어 주는 것이 없어져요. 당신이나 나도, 될 수만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할 거예요‥‥.

앤지는 대담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에 놀라 퍼뜩 제정신으로 되돌아왔다. 이성적인 눈으로 보면 자신은, 아직 동생을 사랑하고 있다고 공언하면서도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내세우고 있는 경험이 아주 풍부한 플레이보이의 품속에서 기뻐하고 있는 경솔한 여자로 생각되었다.

심한 자기혐오에 빠진 앤지는 그의 품속에서 몸을 비틀어서 빠져나와, 미신적인 여성들로부터 결혼축하로 선물 받은 스펠베리에 가려진 침대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져 갔다. 타잔도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앤지의 뒤를 쫓았다.

"잡지 말아요!" 붙잡힐 것 같자 앤지는 뒤돌아보면서 외쳤다. "나는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에요‥‥." 하고,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이렇게 말하고는, 얼른 가운을 걸치고 단단히 벨트를 매면서, 인제 두 번 다시 이런 짓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자기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렇지만 타잔은 날카로운 육감으로 앤지가 있는 대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고 벽에 다 밀어 붙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당신을 안을 거라고 말했잖아?" 하면서 앤지의 몸을 흔들었다. "그렇지, 앤젤리너! 당신도 기꺼이 안기려 했잖아! 우리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서든 도덕에 매달리려 한다 해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우리는 법률적으로 분명히 인정받은 부부가 아닌가!"

"타이프라이터의 리본으로 이어지고 있는 거죠!" 하고 앤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되받아 말했다. "나는 사랑과 결혼은 서로 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당신에게 있어서의 결혼은 마음의 문제 따위와는 관계도 없고 사무적인 거래일뿐이잖아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우리는 로맨틱한 프로포즈나 교제 기간을 생략했다 하더라도 당신이 나의 아내임에는 변함이 없어. 그렇게까지 고지식하고 딱딱한 도덕의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어. 자기 남편이 여성을 즐겁게 해주는 일에 관해서는 전문가였다고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리스의 신들 중에도 이처럼 자만심이 강하고 거만한 신은 드물 것이다. 앤지는 격해지기 쉬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으므로 타잔에게 히스테릭하게 대들었다.

"여태까지 당신 주변에 있었던 여자들의 이상적인 남성상은, 핸섬하고 부자며 척척 리드해 나가는 타입의 사람이었겠지만, 나는 달라요. 자신의 일밖에 생각지 않는 사람 따위에겐 조금도 매력을 느낄 수 없어요. 차분하고 다정하며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 좋아요." 하고는 침착한 말투로 덧붙였다. "유감이지만, 당신한테는 결여되어 있는 것투성이에요."

타잔은 놀라서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렇게 얼어붙을 정도로 긴장된 상황만 아니라면 우스꽝스럽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카리오스 섬의 주인으로서 군림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남에게 이런 비판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는 용기와 뻔뻔스런 근성과 냉혹함으로

몸을 다지고, 단숨에 성공에의 단계를 밟아 실력 본위의 실업계에서 정상의 지위를 획득했었다. 그러나 앤지의 말이 아픈 데를 찔렀던 것이다.

"시끄러워!" 타잔은 양손으로 앤지의 어깨를 꽉 눌렀다. 그러고는 난폭하게 가운을 끌어내리더니 양손을 등으로 돌려서, 앤지가 숨이 답답해질 정도로 강하게 꼭 껴안았다. "나를 다시 교육시키겠다는 따위의 바보 같은 생각을 버리라구! 그리스에서는 남자가 가정을 지배하고, 아내는 복종하는 법이야!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그걸 바꿀 생각은 없어. 앤젤리너,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거역하는 것은 그만두라고." 하고, 명령조로 말한 뒤에, 떨고 있는 앤지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밀어붙였다. "당신을 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좀 더 즐겁게 해주려는 거야."

타잔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앤지는 용기를 내어 있는 힘을 다하여 저항했다. 그러나 타잔은 거뜬히 그녀의 몸을 들어 안더니, 입술을 꽉 막아 버렸다. 앤지의 눈물 맛이 느껴졌다.

"꼴도 보기 싫어요! 내 자신이 싫어진 것과 같이." 침대 위에 뉘어진 앤지는 흑흑 흐느꼈다.

"그럼 그대로 계속 싫어하는 게 좋아." 타잔은 빈정대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당신이 제일 싫어하는 방법으로 사랑해 주겠어‥‥."

 

9

햇살이 강하게 비치고 있으므로, 물이나 잎이나 모두 축 늘어져서 아래를 향하고 있었고, 빛깔이 선명한 물고기들도 수련의 잎들을 스치며 헤엄칠 기력도 없는 듯이, 연못 밑바닥에 꼼짝 않고 달라붙어 있었다.

앤지가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를 듣고 니코스는, 수줍음을 잘 타고 지나치게 착실한 젊은 안주인을 즐겁게 할 방법을 발견한 것에 빙긋 미소 지었다. 그는 앤지와 타잔에게, 웨건에 실린 가벼운 점심식사를 가져다 놓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부러 부인께서 어려운 그리스어를 익히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인은 자신의 마음을 전할 때, 말보다 몸짓이나 손짓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하고, 니코스는 아랫입술을 내밀고, 인지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스인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자는 없습니다. 즉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의미죠. 그리고 또 이렇게 하면," 하고 그는 머리를 가볍게 숙이고 가슴을 내밀고는 심장 부근에다 한 손을 얹는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앤지를 가리켰다. "당신은 나의 친굽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라는 뜻이죠."

앤지는 섬사람 모두로부터 사랑받고 있었지만, 특히 니코스의 목소리에서는 더욱, 젊은 안주인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타잔은 얼굴을 찌푸리고 기분 나쁜 듯이 어깨를 굳혀서, 부드러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배가 고프군." 타잔은 머리를 조금 앞으로 숙이며 꽉 쥔 손을 목 언저리로 가져가더니, 앤지 쪽을 향해 말했다.

"죄송합니다‥‥ 스테이크는 익힌 거니까, 간만 맞추면 됩니다." 니코스는 앤지에게 윙크해 보이면서 미안한 듯이 말했다.

"간을 맞추는 것은 좋지만, 건방진 말은 곁들이지 않아도 돼." 타잔은 유머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니코스를 꾸짖었다.

나와 니코스가 사이좋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라고 앤지는 생각했다.

니코스는 타잔을 돌봐주는 사람이 또 한 사람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뒷일을 모조리 앤지에게 맡기고는,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한 타잔의 앞에서 물러났다.

앤지는 불안을 애써 감추면서, 샐러드 볼을 들고 두 개의 접시에 나누어 담기 시작했다. 까다로운 그리스 식의 식사에도, 인제 완전히 익숙해졌다. 가정부 크리슬러가 만드는 요리는 모두 맛있지만, 그리스풍의 샐러드는 특히 앤지의 입에 잘 맞았다.

그리스에서는 영국과 같이 싱싱한 야채가 늘 식탁에 오르지는 않는다. 앤지는 깨끗한 레티스(서양 상치)나 호두 정도 크기의 토마토, 올리브, 미끈한 봄의 옥파 따위를 기호에 따라 따로따로 담아 놓고, 레몬즙과 올리브기름으로 만든 드레싱이나, 소금과 후춧가루를 쳐서 맛을 조절했다.

앤지는 샐러드를 담은 접시를 타잔 앞으로 밀어주고 그가 먹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쩜 저렇게도 능숙할까. 매일 몇 번씩 이렇게 보고 있으면서도, 그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마토나 올리브를 잘못 집는 법도 없으며, 커다란 레티스도 능숙하게 입으로 가져갔다. 내게, 눈을 가린 채 그와 같은 일을 하라고 한다면, 모조리 테이블 위에 흘리고 말 것이다.

바로 그때 눈앞에 아름다운 나비가 날아와 앤지는 자기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봐요, 타잔! 이렇게 예쁜 빛깔이 섞여 있는 나비를 본 적이 있나요?" 입 밖에 내고 만 뒤에 앤지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며 숨을 삼켰다.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말았군요‥‥ 당신의 눈이 부자유하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기 때문에‥‥."

날이 감에 따라 타잔의 빈정대는 버릇은 차츰 사라져 갔지만, 오늘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해도 참을 수밖에 없다고 각오를 했다. 앤지는 어깨를 떨구고 무릎 위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눈을 살며시 뜨고 언뜻 보니, 타잔은 의외일 정도로 온화한 표정을 띠고 당장이라도 입가에 미소를 지을 듯이 하고 있었다.

"사과하지 않아도 좋아. 나의 눈이 부자유스럽다는 것이 당신의 의식에서 멀어져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어 간다고 생각해도 좋지 않겠어? 언제까지나 동정을 얻거나 가엾게 여겨지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셈이야. 몹시 기다렸었어, 보통 사람과 똑같이 대해 줄 수 있게 될 때를. 고마워, 에리카." 생각지도 않았던 타잔의 말에 앤지의 가슴에 뭉클한 것이 치솟아 올라왔다. "그 한마디를 쭉 기다리며 바라 왔거든."

고마워요, 하고 앤지는 마음속으로 행복을 날라 온 나비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식사를 계속했으나, 가슴이 두근거려 도저히 요리의 맛을 알 수가 없었다.

오늘로서 결혼 3개월. 그 동안 앤지는 자신의 약한 마음을 지겹도록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이성으로 타일러도,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타잔의 욕구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몸이 서로 맞닿기만 하면 등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입술이 포개지기만 하면 앤지의 마음은 타잔의 것으로 되고 말았다.

다정한 애무를 받고 있을 때는 얄미운 생각도 수치도 잊고, 사랑하는 남편을 기쁘게 해주려는 일념으로 순진하고 귀여운 아내로 변신하고 마는 것이다. 설령 그가 침대를 떠날 때에는, 코트라도 벗듯이 감정을 깡그리 내팽개치고 가버린다 해도‥‥.

언제나 수치심에 더 이상 배겨낼 수 없는 마음으로 새벽을 맞는데도, 해가 질 때면 단 한 번의 키스만으로 화끈 달아오르는 매일이 되풀이되었다. 타잔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지금 앤지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사랑에 그가 부응해 주기를 신에게 빌 뿐이었다.

비정이라는 망토에 몸을 감싸고, 냉혹 바로 그것으로 보이는 타잔이지만, 어딘가에 인간다움이나 동정심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앤지는 믿고 있었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침대 속에서, 그것을 일깨워 줄 수 있는 힘을 주십사고 신에게 빌었다.

"말을 탈 줄 아나?"

생각에 잠겨 있던 앤지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 ‥‥ 어린 시절에는 실러와 함께 포니(작은 말)를 기르고 있었지만, 다 커서는, 아버지 교구의 사람으로부터 암말을 선물 받아, 거의 내가 혼자서 타곤 했어요. 실러는 그 암말이 느릿느릿한 짓이 마음에 안 든다고 사촌 집에서 좀 더 기운이 좋은 말을 얻어왔거든요. 그런데 당신은?"

"좀 탔었지." 하고 대답하면서 타잔은 일어섰다. "지금, 타고 싶은 생각이 드는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고 있으려니 몸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말이야. 하기야, 말을 타더라도 누군가에게 고삐를 잡아달라고 부탁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어때?" 타잔은 본의가 아님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나를 돌봐주지 않겠나?"

"될 수 있는 대로 거들어 드리겠어요. 당신이 온순한 말을 골라서, 절대로 무리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신다면 말예요." 앤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일부러 공손한 것처럼 말해서 앤지의 웃음을 유발했다. "달리 어쩔 수도 없으니까."

"글쎄요. 그럼 니코스를 찾아서, 우리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동안에 말을 두 필 준비해 두라고 말하고 오겠어요."

30분 동안 완전히 준비가 다 되었다. 저택 밖에 매어져 있는 두 필의 말에 다가가면서, 앤지는 두 사람의 복장을 비교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타잔은 시원스럽고 씩씩한 승마복에 몸을 굳히고, 번쩍번쩍 닦여진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그러나 앤지는 낡아빠진 슬랙스에 빛깔이 바랜 블라우스 차림에다 샌들을 신고 있었다.

"엔닥시!" 하면서, 니코스는 두 사람을 말에다 태우더니, 한 발 물러서서 빙긋이 미소 지었다. "주인님, 고삐를 잡아드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금세 아실 수 있을 걸로 생각합니다. 이 두 필은 사이가 좋기 때문에, 가만히 타고만 계시면 우선 마님과 헤어지실 걱정은 없습니다."

"글쎄다, 네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구나. 꽤 유능한 기수가 아닌 한, 고삐를 잡아 주는 것은 도리어 위험할지도 몰라. 아내의 저 가느다란 팔에 목숨을 맡길 생각은 없으니 말이야. 네가 말한 대로 자신이 직접 고삐를 잡는 편이 그래도 안심이 될 것 같아."

"어머, 나도 역시 그래요‥‥." 앤지는 분개해서 비꼬듯 한마디 더 거들었다.

"쉬이, 조용히!" 길을 따라 천천히 말을 타고 있던 타잔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만큼, 더욱 주위의 소리에 신경을 집중시키지 않으면 안 되거든."

앤지는 깜짝 놀라서 당황하며 말을 조심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니코스가 가르쳐 준 코스를 나아감에 따라 타잔도 곧 코스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눈이 안 보이는데 말을 타는 기분은 어떨까 하고 호기심에 끌린 앤지는 시험 삼아 눈을 감아 보았다. 운을 하늘에 맡기고 어둠 속을 말의 등에 흔들리며 달리니,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것만큼이나 무서웠다. 말발굽 소리와 안장이 삐걱거리는 소리, 그리고 희미하게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뭐라고 한마디라도 하라구! 모순된 얘기 같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당신의 목소리가 가장 중요한 거야. 당신이 어디쯤에 있는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말이야." 타잔은 좀 익숙해지자 이렇게 명령했다.

"얘기하라니요? ‥‥?" 갑자기 이야기를 하라고 하니 난처했다.

"내용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당신의 마음속에 감춰두고 있는 소녀 취향의 비밀이든 뭐든. 어차피 내용을 들으려는 것은 아니니까. 듣고 싶은 것은 목소리뿐이야. 말하자면 눈이 안 보이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침묵은 금이 아니란 말이야." 그는 초조한 듯이 빠르게 말했다.

"그럼 주변의 경치라도 얘기하겠어요." 타잔의 가시돋친 목소리에 불안을 느낀 앤지는,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지금 마침 꼬불꼬불한 험한 길 쪽으로 꺾어들려 하고 있는 참이에요. 왼쪽 훨씬 아래에는 바다가 보이고, 멀리에는 태양을 가득 받고 있는 하얀 짐들이 보여요. 과수원에 둘러싸인 언덕 사면에 세워져 있는 것 같은데요‥‥."

타잔은 머리를 끄덕였다.

"오렌지, 레몬, 무화과, 올리브, 포도 따위의 과수원이지. 저 마을에서는 농경용의 가죽 부츠를 만들고 있는데, 옛날부터 섬사람들은 뱀에 물리지 않도록, 그 부츠를 신고 일을 해왔던 거야."

"그거라면 본 적이 있어요." 앤지는 눈동자를 반짝였다. "무릎까지 올라오죠? 하지만 여자애들은 발목 근처에서 접어서 신는 것 같던데요."

"마을에 닿으면 잠시 쉬도록 할까?" 타잔은 하품을 참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리나 마당에서 예쁜 모자이크 무늬를 볼 수 있을 거야."

아주 지루해하는 것 같은 그의 말투에 앤지는 불안해서, 그 이상으로 울컥해지기 전에 서둘러서 지껄이기 시작했다.

"검정색과 하얀색 잔돌로 아로새긴 교회의 바닥은 벌써 여러 번 보았어요. 그 무늬는 에게 해 섬들의 독특한 것이라죠?"

"이런, 잘 알고 있는데." 타잔은, 약간 기분이 언짢은 것 같은 앤지의 목소리에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두 필의 말이 나란히 걸어도 넉넉한 만큼 넓은 거리로 들어서 있었으나, 타잔은 앤지의 말을 마을에서 쉬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대로 계속해서 갔다.

고원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앤지는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차양이 넓은 모자를 선글라스와 닿을 정도로 깊숙이 쓰고 있는 타잔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햇살은 정말 따가워, 이카로스의 날개를 녹인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됐다. 그러나 불평은 하지 않았다. 모자를 쓰지 않고 바깥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타잔의 분부를 지키지 않은 것이 몹시 후회되었다. 화끈화끈하게 머리를 울리는 두통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수가 있다면, 하고 눈을 가늘게 떠보았지만 역시 헛일이었다.

고원을 가로지르고 내리막길을 내려와, 울창한 푸른 숲에 뒤덮인 오솔길에 들어서자 앤지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서늘한 공기에 향긋한 송진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말을 나무에다 매어주고 좀 걸어 볼까?" 타잔은 송진 냄새와 물이 흐르는 소리로, 지금 있는 위치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숲의 오솔길은 몹시 꼬불꼬불하고 다리는 아주 좁으니까 말이야." 타잔은 안장에서 내려, 앤지가 말을 나무에 매는 것을 기다리며 소년처럼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을 해서 앤지를 놀라게 했다. ", 나를 꼭 붙잡으라구. 이 길의 사정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으니까, 내가 안내해 주겠어."

앤지는 반가워서 그와 손을 잡고 좁고 꼬불꼬불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양치류가 우거져 가끔 발밑이 미끄러웠으며, 나무뿌리에 찔리기도 했다. 그러나 타잔은 길 사정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듯이 장해물을 잘 피하며 자신있는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확 트인 장소까지 오더니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자랑스러운 듯이 가슴을 폈다.

"잠깐 쉬어도 될까요?" 앤지는 숨이 차서 중얼거리고는, 타잔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못하고 시냇가 바위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관자놀이께가 지끈지끈 아팠다.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말하는 타잔의 얼굴에 의아해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억지로 참으며 웃음을 띠고 일시적으로 어물어물 넘겼다. "다만 영국의 기후는 여기보다 시원해서 한여름에도 이렇게 덥지는 않아요. 아직 더위에 익숙해지지 못해서 그럴 뿐이에요. 여기 앉으세요." 앤지는 타잔에게 의심받지 않도록 애써 태연한 척 가장했다. "그런데 여기가 어째서 그렇게도 좋지요."

거인상같이 앞을 가로막고 우뚝 서 있던 타잔이 앤지의 옆에 앉았다.

"그것보다 우선 보여줄 것이 있어." 하는 타잔을, 앤지는 의도를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돌아보았다. "공기를 실컷 마셔 보라구. 송진 냄새가 나지? 나비들은 매년 이 향기에 이끌려서 이 골짜기로 찾아오는 거야. 나무나 바위 위에 앉아서 날개를 접으면, 갈색의 보호색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거야. 날 때는 아름다운 날개를 한껏 펼치고 날지만 말이야. 이제 보라구‥‥!"

짝 하고 손뼉을 치는 소리가 조용한 골짜기에 메아리쳐 울려 퍼졌다. 그러자 나직하게 날개치는 소리와 함께, 검정, 고동, 하양, 오렌지색이 뒤섞인 비단처럼 얇은 날개를 가진 무수한 나비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잠시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날며 춤추더니, 소리도 없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앤지는 나비의 큰 무리가 한꺼번에 날아가는 감격적인 장면에 가슴이 설레었다.

"어쩜 저렇게도‥‥ 너무 근사해요‥‥!" 앤지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런 감동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타잔, 여기에 데려다 주신 것 평생 잊지 않겠어요."

"당신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를 나는 잘 알 수 있어." 하는 타잔의 옆얼굴에 그늘이 스쳐갔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나도 자연의 경이로움에 무척 감동했었지. 그때는 물론‥‥." 그는 쉰 목소리로 계속했다. "그것이 이 눈으로 마지막 보는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지만 말이야. 인제 기억에 의지해서 이미지를 그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니,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어. 유감이지만‥‥." 불쾌한 여운에 앤지는 몸을 떨었다. "기억 따위는 여성과 마찬가지여서 기대할 수 없는 불성실한 거야."

"때로는,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것이 고맙게 여겨질 때도 있어요‥‥ 모든 기억이 확실하게 마음에 강렬하게 남는다면 괴로운 기억도 계속 갖고 않으면 안 되거든요."

앤지는 목이 메었다. 앤지는 타잔의 일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여성에 대해 왜 저렇게도 비판적일까? 그의 비뚤어진 성격은 모조리 여성 혐오와 여성 불신에 뿌리박고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타잔은 앤지가 방금 한 말을,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괴로운 추억의 원인은 타잔에게 있다고 앤지가 비꼬아서 넌지시 말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보고 있는 동안에 노여움으로 바뀌더니 기분 나쁜 듯이 난폭한 투로 말했다.

"어째서 불만인지 알 수가 없군. 가난뱅이였던 당신이 카리오스 섬에 와서, 나와 함께 잠깐 사는 것만으로도, 돈을 듬뿍 가지고 돌아갈 수 있게 됐잖아."

누그러진 분위기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잔혹한 이 말에, 앤지는 숨을 죽이고 빤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흥분해서 벌떡 일어서는 순간, 심한 두통을 느끼며 머리를 양손으로 감쌌다.

"어쩌면 그렇게도 잔혹할 수 있죠?" 고통을 참으면서 앤지는 입을 열었다. "붙임성있는 얼굴로 상대를 속여 놓고, 상대가 약점을 보이는 순간에 이번에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독수리처럼 갑자기 덤벼들어‥‥ 뼈까지 다 갉다니‥‥ 사업계에서 당신이 재산 도둑으로 불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군요!"

타잔은 벌떡 일어서더니, 앤지의 긴장된 얼굴을 내려보기라도 하듯이 몸을 쑥 내밀고 차갑게, 서슴지 않고 단언했다.

"내가 빼앗아서 즐거운 것은 당신뿐이란 말이야."

눈이 안 보이는 타잔으로서는, 분노에 찬 앤지의 볼이 불게 물든 것도,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도, 눈동자에 고뇌의 빛이 떠올라 있는 것도 알 수 없었다. 그의 귀에 들리는 것은, 시냇물 밑바닥의 작은 돌을 씻으면서 흘러내리는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근처를 날아다니고 있는 벌들의 날개 치는 소리, 그리고 앤지의 심장이 격하게 고동치는 소리뿐이었다.

타잔이 그처럼 심한 말을 내뱉는 것은, 눈이 보이지 않음으로 인한 욕구불만 탓이니 용서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참아야 한다고 앤지는 열심히 자기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렇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부드럽게 비난하는 것으로 그치는 데에도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나를 구박할 생각인 모양이죠, 타잔? 당신을 버린 피앙새나, 당신이 미워하고 있는 고모님이나, 눈이 안 보이게 된 기회를 노려 당신을 이용하려한 여성들 대신에‥‥ 하지만 잊지 말아 주세요." 앤지의 목소리는 차츰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실러의 대역이 아니라, 당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그래, 대역이 아니었던가? 미안하군. 난 프리실러가 자기 대신 당신을 보냈다고 착각하고 있었어. 그렇다면 난 그녀를 용서할 수 없어!" 그는 차갑게 빈정거리는 말들을 사정없이 앤지에게 퍼부어 댔다. 노여움 때문에 무뚝뚝한 말투가 되어 가는 타잔이 다시 말했다. "만약에 프리실러 자신이 직접 와주었더라면 나는 이런 불필요한 절망감은 맛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10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점심을 들기 위해 타베르나에 들렀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정원에 덩굴장미를 올리고, 그 밑에 통나무 의자와 테이블 몇 개를 놓았을 뿐인 가게였으나, 주인은 두 사람이 당도하자 과장된 제스처로 맞이했다. 요리도, 앤지의 기분이 좋았을 때라면, 틀림없이 식욕을 충분히 돋우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앤지는, 타잔이 전채 요리로 고른, 차가운 요구르트와 마늘과 오이와 기름과 식초를 섞어서 만든, 풍미가 강한 크림 상태의 음식을 뒤적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분좋은 산들바람이 뒤편 나무들의 잎사귀를 한들한들 흔들리게 하고 공기는 따뜻한데도, 앤지의 살갗은 싸늘하게 식어 몸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앤지는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구역질이 날 것 같아서였다. 감자와 고기를 갈아서 만든 무사카를 타잔은 맛있게 먹고 있었지만, 앤지는 한번 보기만 하고도 금세 거절했다.

"그러시다면, 이거라면 좋으시겠죠?" 가게 주인은 물기가 많은 복숭아와 갓 따온 포도를 담은 접시를 내놓았다.

"고마워요. 하지만‥‥." 하고 앤지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살짝 접시를 밀어냈다.

타잔은, 어떻게든 설득시켜 먹게 하려는 가게 주인에게도, 여느 때와는 달리 분명하게 거절하는 앤지에게도 침묵을 지키고는 있었지만, 절대로 무관심하지는 않았다.

"하나님, 뾰로통한 여성으로부터 나를 지켜 주십시오. 음울한 성격이 나이와 함께 나아지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으니, 죽을 때까지 당신과 함께 살아야 될 운명이 아닌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이군." 그는 사정없이 빈정거렸다.

"성격이 음울해서가 아니에요." 하고 앤지는 힘없이 저항했다. "여태까지 남이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다만 배고프지 않을 뿐이에요. 더위 탓으로 식욕이 없어진 것 같아요. 아직. 이 나라의 기후에 익숙해지지 못했거든요."

"내 말에 기분이 상했나?" 하면서 타잔은 번쩍 얼굴을 들었다.

"아니오, 그렇지 않아요. 어쩐지 몸이 나른할 뿐이에요." 그녀는 이를 악물면서 억지로 거짓말을 했다.

"그렇다면," 타잔이 삐걱하고 의자를 끄는 소리가 관자놀이를 나이프로 찌르는 것같이 머리에 올렸다. "빨리 집으로 돌아갑시다."

앤지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자신에게 타이르면서, 전면적으로 그녀를 의지하고 뒤에서 따라오는 타잔이 잘못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점점 빈번해져 오는 현기증과 구역질과 오한과 싸웠다.

"망망한 바다가 햇살을 받아 마치 공작의 날개처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어요‥‥."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에 띄는 것을 보이는 대로 설명해 갔다.

도중에 두 번 말을 세웠다. 한번은 올리브 농원으로 당나귀를 끌고 가는 마을 사람과 인사하기 위해서였고, 또 한번은 레몬 주스를 마시고 가라고 노파가 불러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햇살이 내리 비치는 포치에 앉아서, 손녀딸이 시집 갈 때 줄 레이스의 가장자리를 뜨개질하고 있던 중이었다.

언덕을 올라 저택까지 완만한 구보로 말을 달리게 했을 무렵에는, 앤지는 머리가 빙빙 돌고 있었다. 물체가 이중으로 보이고, 수평선의 저편에서 미끄러지듯 달려오는 요트도 희미하게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요트에 탄 사람들은 여행 가방을 몇 개씩이나 가지고 있었고, 방금 선창에서 막 내리는 금발의 슬림(slim)한 여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신경이 예민한 타잔은 매우 기뻤을지도 모르지만, 앤지는 저택 앞에 닿아 말에서 내릴 때까지, 그것이 누구의 목소린지 알지 못했었다.

"타잔, 당신은 아직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는 않았군요, 소원을 입에 담은 순간에 이루어졌으니까요, 이봐요, 실러가 왔어요."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 때문에, 사용인들은 객실 준비를 하랴 마실 것을 대접하랴 식사를 추가시키랴 손님의 짐을 나르랴, 갈피를 못 잡고 온통 법석을 떨며 야단들이었다.

앤지는 타잔의 곁에 서서 주뼛주뼛하면서, 실러가 현관에 뛰어 들어오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앤지 언니!" 하면서, 실러는 양팔을 크게 벌렸다. "두 분 모두 건강한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이쪽으로 와 봐, 언니." 하고 실러는 앤지 쪽으로 뺨을 내밀었으나, 반짝반짝하는 눈동자는 타잔의 무표정한 얼굴에 못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동생이 왔는데, 환영의 키스도 해주지 않는 거야?"

", 그렇지 않아‥‥." 앤지는 머뭇머뭇하며 앞으로 나가, 흐려진 눈의 촛점을 맞추려 열심히 했지만, 순간 실러의 발밑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어색하고 열기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싶지 않다는 잠재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탓인지, 충분한 휴양을 취하며 크리슬러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는데도, 앤지는 좀처럼 눈을 뜰 수 없었다. 이마에 얼음을 얹으면 보통이라면 24시간 내에 효력을 나타내는데, 앤지가 의식을 회복하여, 걱정스러운 듯이 들여다보고 있는 크리슬러의 얼굴을 알아볼 때까지는 이틀이나 걸렸다.

"시가‥‥ 시가‥‥." 하는 바람에, 한순간 크리슬러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으나,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앤지를 제지했다.

이윽고 크리슬러의 뒤쪽에서, 얼음을 띄운 보울을 들고 릴라가 나타났다.

"아르게타‥‥." 크리슬러가 필요 없다고 말하듯이 손을 흔들자, 릴라는 안심한 얼굴로 가까이의 테이블에 그것을 내려놓고 침대 가까이로 왔다.

"잘되었습니다요. 마님의 몸이 이처럼 좋아지셔서, 저희들도 간신히 이 무서운 상태에서 해방되겠군요. 주인님께서는 마님이 쓰러지신 뒤에 몹시 기분이 언짢아지셨답니다. 더위 때문에 병이 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주인님은 마님에게 모자를 쓰시라고 말하지 않았던 니코스에게로 노여움의 방향을 돌리셨습니다. 눈은 보여도, 그것을 써먹을 머리가 없는 멍텅구리 놈은 아무런 쓸모도 없다고 하시며 큰 소리로 고래고래 꾸중하셨답니다‥‥." 릴라는 멍하니 넋을 잃은 듯한 얼굴로 양손을 맞잡고 있었다. "‥‥ 주인어른 같은 멋진 남성에게 그처럼 사랑받고 계시다니, 마님은 아주 훌륭하십니다요‥‥." 하더니, 뭔가 문득 깨달은 것같이 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주인 어른에 빨리 알려드려야지. 마님이 누워 계시기 때문에 몹시 쓸쓸해하시는 모양이던데요, 아무리 동생 분이 상대해 드린다 해도‥‥."

타잔이 방에 온다고 생각하니, 실러와 얼굴을 마주칠 일에 대한 불안이 또다시 앤지의 마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베개에서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려 보았다. 전신의 나른함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두통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앤지는 크리슬러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살며시 침대를 빠져나와 욕실로 향했다. 이틀 동안이나 계속 잠만 자고 있던 흐트러진 모습으로, 두 사람을 만나는 것은 싫었다. 앤지는 침대에서 일어나 크리슬러의 손을 빌어 몸단장을 하고 황색 나이트가운으로 갈아입자, 젖어서 웨이브가 져있는 머리를 나이트 드레스와 잘 맞는 노랑 리본으로 묶었다.

그렇지만 타잔도 실러도 문병하러 오는 기척은 없었다. 토스트와 멜론의 가벼운 식사를 든 뒤에, 앤지는 베개에 기대어 두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모자를 쓰지 않고 나갔던 일에 대해 맨 먼저 야단맞을 것이다. 실러는 내가 그녀의 옛 약혼자와 결혼한 것을 알고 뭐라고 할까?

그건 그렇다 치고, 실러는 왜 일부러 이 섬에 왔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앤지를 괴롭혔다. 거들어 드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텐데 아빠는 괜찮으실까? 무엇보다도 타잔은, 실러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온 일로 해서 마음이 흔들리고 있지나 않을까?

결혼을 서둘러서 일을 그르쳤다고 후회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와의 결혼은 편의상의 것이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실러를 설득시키고 있을까?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자문자답의 되풀이에 지쳤을 무렵, 여느 때와는 달리 밝은 타잔의 웃음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와 앤지는 깜짝 놀랐다. 레이스로 테를 두른 베개에 기대어 단정하게 등줄기를 쭉 펴고 두 사람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앤지 언니!" 실러는 앤지를 보자마자 환성을 질렀다. "어쩐지 더 여학생같이 보여."

"순진하고 숫처녀같이 보인다는 뜻인가?" 타잔이 똑바로 침대가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세련되지 못하고 뒤떨어져 있다는 표현이 앤지 언니에게는 딱 어울리는 형용사예요." 실러는 거침없이 이렇게 말하면서, 앤지에게서 타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손을 뻗어서 앤지의 하얀 손을 살짝 감쌌다.

"아무래도 마찬가지잖아." 타잔은 고개를 움츠리고, 마치 앤지를 처음 만나는 것 같은 다정한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크리슬러한테서 대체로 좋아졌다고 듣기는 했지만. 정말 괜찮겠나?"

"." 하고 대답한 앤지는, 검은 렌즈가 점점 얼굴에 기울어져 오자 그 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호박색 불꽃을 상기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인제 완전히 좋아졌어요. 소란을 피워 미안해요. 모자도 쓰지 않고 몇 시간이나 맡을 타다니, 정말로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후회하고 있어요. 그 일로 니코스를 야단치셨다고 들었는데‥‥." 하고 애원하듯이 타잔을 올려다보았다. "나쁜 것은 나였어요. 용서해 주시겠어요?"

타잔은 한참 입을 다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앤지의 손가락의 떨림이 전해지자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멍텅구리 같은 니코스 놈을 용서해 주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마음씨 고운 당신이라면 당장 용서해줄 것 같은데."

타잔답지 않은 말에 앤지는 놀랐다. 눈동자를 크게 뜨고, 또 바로 뒤를 이어 빈정대는 말을 하지 않을까, 하고 그의 동태를 엿보았다.

실러도 또한 깜짝 놀란 모양으로, 일부러 싫어할 소리를 한마디라도 하고 싶은 것 같은 얼굴로 타잔에게 바싹 몸을 기대었다. 실러는 아직, 우리들이 결혼한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앤지는 동생의 태도에서 그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타잔, 당신은 태어나면서부터 레이다를 가지고 있나요, 아니면 전서구(서류나 편지 따위를 전하는 훈련된 비둘기)같은 본능이라도 갖추고 있나요? 거침없이 곧바로 침대가로 오잖았어요, 정말 놀랐어요. 만약 내가 앤지 언니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당신이 몇 번이나 이렇게 언니의 침대를 찾지 않았나 의심할 정도예요."

스펠베리가 젖혀져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앤지는 얼굴을 붉히며 창피스런 듯이, 그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타잔은 당분간, 우리들의 결혼을 실러에게는 비밀로 해둘 생각인 것 같았다. 몸이 쇠약해 있을 때, 그녀에게 신경을 쓰는 것도 괴롭기 때문에, 앤지로서도 그것이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실러는 얼굴이 빨개져 있는 앤지에게는 눈도 주지 않고, 타잔의 움직임만을 눈으로 쫓고 있있다. 앤지가 뺀 손을 또다시 타잔이 붙들고 핑크색의 손끝을 입가로 가져갔다. 앤지는 그가 그렇게 해서 사디스틱한 쾌감을 맛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무심코 있었어!" 하고 타잔은 냉정한 웃음을 띠며 고개를 들었다. "앤젤리너가 나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니‥‥ 우리는 3개월 전에 결혼했지."

앤지는 불이 붙은 것같이 붉어진 손가락을 그의 손에서 떼냈다. 그에게 닿기만 해도 금세 달아오르고 마는 자기 자신이 싫어졌다.

"결혼? 당신이 우리 언니 앤지와?" 하고 실러는 불신과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앤지를 쏘아보았다.

"잠깐만!" 실리는 눈초리를 치켜올리고 앤지를 쏘아보았다. "언니의 변명이라도 듣고 싶어, 이런 지독한 짓을 했으니까, 그에 상응한 설명은 해야 하지 않겠어? 배신자!"

"배신자라구?" 앤지는 멍청한 얼굴로 실러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모든 것은 너를 위해서 한 일인데, 어째서 배신자 소리를 들어야 하지?"

"뭐라구‥‥?" 하면서 실러는 눈동자를 번뜩였다. "그래, 그렇다면 피앙세를 도둑맞고 내가 어떤 이득을 보았는가를 가르쳐 줘. 나와 타잔이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가를 언니는 잘 알고 있었던 터에, 타잔을 멋지게 속여서 뻔뻔스럽고도 태연하게 아내의 자리를 가로채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어!"

"거짓말이 아니야!" 하고 말하는 앤지의 얼굴에는 핏기가 싹 가셔 있었다. "속이지는 않았어, 실러. 결혼하자고 말한 것은 타잔 쪽이었어."

"그야, 아무라도 옆에 있어 주었으면 싶으니 그랬겠지 뭐." 실러는 내뱉듯이 말했다. "그는 내게 채었다고 생각하고 절망에 빠져 있었던 거야."

"네가 걷어찬 것은 사실이잖아?" 앤지도 열심히 응전하여 최후의 무기를 손에 들었다. "데이비드 몽고메리는 어떻게 되었지? 곧 약혼한다고 확실히 말했었잖니?"

그 말에 실러는 갑자기 목을 움츠리며 얼굴을 딴 데로 돌렸다.

"최근에 와서 데이비드의 집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았어. 아무리 사회적인 지위가 있더라도, 돈이 없으면 안 되잖아."

"그래서 타잔 쪽이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단 말이지?" 금전적인 매력이 없어졌다고 해서 금세 연인과 헤어지고, 전에 자기가 버린 남자한테로 되돌아오다니, 앤지는 동생이 이처럼 제멋대로 구는 것이 무서워졌다.

"바로 맞았어." 실러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그리고 또 말해 주지만, 절대로 타잔을 되찾아 보이겠어. 타잔이 눈이 안 보이기 때문에, 멋이 없고 초라하게 되었다고 해서, 언니가 나와 대등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야. 남자의 마음을 매혹시키는 데는, 눈에 보이는 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나는 그 하나하나의 테크닉을 모두 지니고 있으니까. 알겠어?"

 

식사를 하는 동안에 앤지는, 실러가 자신의 말이 단순히 협박만은 아닌 것을 일부러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타잔은 감촉이 좋을 것 같은 벨벳의 디너 자켓 밑에 프릴이 달린 크림색의 셔츠를 입었는테, 커프스의 다이아몬드가 전등불 밑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실러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양을 떨거나 추파를 던지거나 하는 것을 보자, 앤지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아 갔다.

"거들어 드리겠어요, 타잔." 니코스가 수프를 들고 오자, 실러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앤지와 니코스는, 실러가 타잔의 손에 스푼을 쥐어주는 것을 숨을 죽이며 쳐다보았다. 실러는, 타잔이 귀찮은 듯이 얼굴을 찌푸리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다시 그의 프라이드를 상하게 했다.

"그이가 소금을 칠 수 있어, 언니?" 하고 앤지에게 묻는 것이었다.

마음이 좁은 사람이라면 라이벌의 실패를 기뻐했겠지만, 앤지는 그러기는커녕 도리어 불안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타잔은 눈이 부자유한 것을 몹시 신경 쓰고 있고, 특별 취급당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실러에 대해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할까 하고 상상하며, 앤지는 직접 자기가 그의 노여움을 사는 것도 아닌데, 공포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것도,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니까, 그러한 일은 직접 물어봐 주기 바래, 실러. 소금을 칠 수 있는지 어떤지는 확실히 대답할 수 있어. 게다가 남 앞에서 어김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쓸 수 없을 것 같으면, 음식을 한 그릇에 모아 담아서, 개밥처럼 함께 뒤섞어 달래서, 방안에 틀어박혀 혼자서 먹겠어."

실러의 천박한 행동이 초래한 당연한 결과였다. 실러로서는 성미가 까다로운 타잔의 보좌역은 해낼 수 없지 않을까 하고 앤지의 머릿속을 의문이 스쳐갔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 동생이 가엾었지만 뻔뻔스럽게 말대꾸하는 것을 듣는 순간, 그런 동정도 사라져 버렸다.

"타잔, 내가 당신을 염려한 나머지 만약 또 지금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하더라도, 용서해 주세요‥‥." 실러는 타잔의 마음에 호소하듯 일부러 아주 처량하게 말했다. "저의 당신에 대한 애정은 수도꼭지를 잠그듯이 간단하게 막을 수는 없거든요‥‥ 지금은 벌써 앤지 언니의 남편, 즉 나의 형부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든 형부에게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은 마음은 억누를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무엇을 어느 정도로 해야 도움이 될지도 전혀 모르지만‥‥."

잠잠해지자, 두 사람의 시선이 타잔의 험상궂은 얼굴 위로 모였다.

"나도 나빴어." 타잔은 빙긋 웃으며 표정을 부드럽게 했다. 궁지에 몰렸을 때마다 실러가 번번이 써 온 방법은 이번에도 성공했다. "남 앞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겠다는 데만 정신이 팔려, 주위 사람들의 입장은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니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눈이 안 보이는 인간의 행동이 신기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쪽은 매일 눈이 보이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생활하고 있으니 말이야. 아무래도 점점 제멋대로가 되어서 안 되겠어. 고마워, 프리실러." 타잔은 앤지의 예상을 보기 좋게 배반하고 다정한 투로 실러에게 말했다.

"나의 잘못을 지적해 준 것은 당신뿐이군."

앤지는 실러의 의기양양해하는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어서 맥이 풀리는 느낌으로 접시에 눈길을 떨구었다. 실러는 지금까지 자기가 원하는 것은 손에 넣고야 말았다. 타잔만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앤지는 이제, 실러와 다투어서 타잔의 관심을 끌려 하거나, 드빌에서 서로 알게 된 친구들의 화제에 끼어들거나 하는 것은 그만두고,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식사하는 동안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타잔도 앤지의 존재 따위는 죄다 잊은 모양이어서, 니코스가 거실에 커피 준비가 되었다고 알려 온 것을 기회로 앤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함께 가야 되나요? 피로해서, 상관없다면 내방에서 쉬고 싶은데요‥‥."

"어서 가서 쉬어." 하고 실러는 기쁨을 억누르면서 대답했다. "형부는 내게 맡겨."

"그럼, 안녕의 키스를 해주겠지?" 타잔은 앤지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앤지는 잠자코 다가가서 발돋움하고, 그의 빈정거리는 입가에 차가운 입술을 억지로 댔다.

"편히 쉬세요, 타잔."

타잔은 앤지의 허리에 팔을 돌려, 마치 소중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이 살며시 안아서 끌어당겼다.

"카리스페라, 에리카." 하고 말하고는 의미 있는 듯한 긴 키스를 돌려주었다. 앤지로서는 그 키스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얼어붙어 있던 혈관을 녹이기 시작하여, 기분 좋은 따스함이 전신에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실러의 눈동자가 질투로 번뜩였다.

"타잔, 형부가 만약 신심이 깊은 여승과 결혼했다는 것을 안다면, 친구들은 모두 어떤 얼굴을 탈까요? 모두들 형부의 세련된 여성 취향을 알고 있는 만큼, 신부가 3년 전에 버려야 당연한 누더기를 걸치고 결혼식을 올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깜짝 놀랄 거예요."

 

11

실러의 눈에는 바다가 눈부신 만큼 푸르게 비쳤다. 니코스가 조종하는 배는 카리오스 섬을 뒤로하고, 도시적인 커다란 섬인 로도스로 향하고 있었다. 앤지는 타잔의 동태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실러의 짓궂은 말에 자신이 왜 이렇게도 신경을 쓰는 것일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이래 타잔은 무뚝뚝하고도 기분 나쁜 듯한 표정을 바꾸지 않았으며, 오늘 아침에는 아직 어두컴컴한 가운데, "당신이 가지고 있는 옷을 전부 꺼내 봐." 하면서 앤지를 흔들어 깨웠다.

서랍이나 선반을 손으로 마구 뒤지고 있는 타잔을, 앤지는 무슨 일인지 영문도 모르는 채, 잠이 덜 깨서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뭘 모르는 것 같군." 하고, 앤지의 옷이 그것으로 전부임을 알고, 타잔은 내뱉듯이 말했다. "릴라만 해도 그것보다는 많이 가지고 있을 텐데. 내게 한마디만 하면 사준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에, 일부러 초라한 꼴을 보여서 나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인가?"

"아니에요, 필요 없었을 뿐이에요‥‥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의 결혼은, 드레스를 사달라고 할 가치도 없을 만큼 시시한 것이었다는 말인가?" 타잔은 앤지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러한 타산적인 사회에선, 아내가 초라한 옷을 입고 있으면 남편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킨다는 것쯤도 모른단 말인가?"

"비지니스의 세계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카리오스 섬에 있는 한은 관계가 없지 않을까요?"

타잔은 노여움에 떨리는 손으로 앤지의 어깨를 꽉 잡고, 무시무시한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는 커다란 관계가 있어. 당신이 바라든 말든, 당분간은 당신은 나의 아내며, 남자는 자신이 성공한 증거를 아내의 차림에 반영시킬 권리가 있는 거야."

실러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했을 텐데, 앤지는 멍해진 채, 가끔 진한 와인 컬러의 바다를 가르듯이 나아가고 있는 은빛의 지느러미에 눈을 돌렸다. 아빠한테로 돌아가고 싶다. 어떤 의무에도 속박되지 않고 평화롭게 한가로이 살 수 있는 고향으로.

"카리오스 섬에 오기 전에 잠깐 로도스 섬을 돌아보았는데, 아주 근사했어요." 하고, 몇 세기 전의 아주 옛날에 올림픽을 위한 경기 연습이 행해졌었다는 섬에 배가 다가가자, 실러는 눈동자를 반짝였다.

"로도스 섬이야말로 신들의 섬이라고 섬사람들은 자랑하고 있지." 하고 말하는 타잔은, 멀리 나오는 것을 싫어하는데도 오늘은 어쩐 일인지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태양신 헤리오스는 이 섬을 아내로 택하여 빛과 열과 푸르름을 선물로 주었다는 거야." 타잔의 거무스름한 옆모습이 이쪽으로 향해지자, 앤지는 가슴이 철렁하며, 그가 어떤 특별한 뜻이 있는 일을 이야기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신화에서는, 헤리오스는 로다라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사랑하여, 이 섬에 그녀의 이름에서 연유한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지고 있어. 로다라는 것은 로즈라는 뜻이지. 그래서 이 섬에는 아주 옛날부터 하이비스커스나 부겐빌리아, 재스민, 인동덩굴 따위의 많은 꽃들이 가득 넘치고 있지."

타잔의 이야기에 앤지는 확 얼굴을 붉혔다. 배가 항구에 닿자, 앤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항구 위에 바라다 보이는 높다란 벽은 중세에 쌓은 성벽으로서, 쓰레기나 먼지가 많은 지저분한 구시가지를 에워싸고 있었다.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가 멈추어 있는데도, 앤지는 구시가지 입구에 있는 마린 문에서 좀처럼 발길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문을 들어서면 구시가로, 골목에는 터키 풍의 노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커피의 향기와 부기우기의 가락이 엑조틱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여보, 우리는‥‥." 하고, 앤지는 숨을 헐떡이면서 타잔을 올려다보았다.

"안돼!" 하고, 실러가 호된 말투로 못을 박았다. "쇼핑하러 온 거야. 미운 오리새끼를 백조로 바꾸기 위해서 말이야. 시궁창 냄새가 나는 뒷골목을 돌아다니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잖아."

매력적인 구시가를 구경하고 싶어하는 앤지를 니코스는 진심으로 동정했다. 타잔이 가까이에서 귀를 종긋 세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니코스는 살짝 속삭였다.

"다른 분들 말씀에 실망하시지 마세요, 쇼핑이 끝나거든, 제가 그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옛날에는 항구 입구에, 오른편 앞바다에서도 잘 보이는, 횃불을 든 거인상이 서 있었으며, 배는 그 밑으로 출입했었습니다. 그리고 또, 터키에 점령당한 일도 있어서

회교사원이 여러 개 있으며, 당당한 군주의 성이나 오래 된 성관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어머, 니코스, 꼭 구경하고 싶어요!" 앤지는 설레는 기분을 숨기듯이 목소리를 낮추어서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줄 수 없겠어요? 되도록 서둘러서 날 듯이 돌아올 테니까." 하고 어깨너머로 흘끗 타잔을 보고는, 그가 실러와의 잡담에 열중하고 있는 데 안심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어떤 대단한 쇼핑을 할지 모르지만, 한 시간까지는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끝나면 내게는 볼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타잔은 동생이 잘 보살펴 줄 테니까요."

로도스 섬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뚜렷이 구분되어 있었다. 택시가 항구를 떠나자, 실러는 목을 길게 빼고, 호텔이나 레스토랑, 부티크나 액세서리 가게 따위의 모던한 건물들이 보이지 않나 하고 창밖만 열심히 내다보고 있었다.

"마치 로마나 파리에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실러는 완전히 흥분하고 있었다. "언니, 잠깐 저 핸드백과 구두를 좀 봐. 어마, 저런 멋진 모피를 본 적이 있어?"

택시는 타잔의 지시대로, <하우스 오브 헤리오스>라는 금빛 문자의 간판이 있는, 유리로 된 삼층 빌딩 앞에서 멈추었으나, 앤지는 타잔이 광범위하게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별로 놀라지 않았다.

1충의 부티크에는 유행되는 구두, 핸드백, 벨트, 실크 스카프, 시퐁의 스톨, 게다가 꽤 수준이 높은 손님의 욕망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만한 보석류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실러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예고도 없이 타잔이 찾아왔으므로 가게의 점원들은 크게 부산을 떨었으며, 위에서 아래까지 고급품으로 몸을 치장한 장신의 중년 여성이 푹신한 융단 위를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어마, 타잔!" 하고 그녀는 발돋움을 하며, 그동안 살이 빠진 그의 볼에 키스를 했다. "잘 와 주셨어요, 그것도 신혼의 앳된 부인과 함께요." 그녀는 어느 쪽이 타잔의 아내일까 하고, 파란빛을 띤 검은 눈동자를 앤지와 실러에게 번갈아가며 돌리더니, 지레짐작으로 실러에게 미소를 던지려 하다가, 타잔이 옆에 있는 앤지의 손을 잡은 것을 보자 당황하여 얼른 얼버무리려 했다.

"오래간만인데, 헬렌. 센스가 뛰어난 당신의 어드바이스를 받으려고, 아내인 앤젤리너를 데리고 왔소. 최신 유행에는 조금도 흥미를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애동데동한 <<하하하>> 싱그러움을 돋보이게 해줄 만한 워드로우브를 골라 주기 바라요. 그리고 또, 처제인 프리실러에게도." 타잔은 빙긋 웃으며 실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처제 쪽은 자신이 고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수고를 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요."

그러나 그 말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헬렌은, 사이즈를 재거나 살결의 색조를 확인하거나 하며 앤지에게 달라붙어서 실러의 존재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글쎄요‥‥ 영국 사이즈로 8이 딱 맞지 않을까요?" 하고 물어 보듯이 앤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맞아요." 하고 타잔이 옆에서 말참견을 했으므로, 앤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눈이 보일 때 여자들이 입고 있던 것 같은 슬림한 팬츠를 입고 있는 것을 한번 보고 싶어-아니, 상상해 보고 싶은데. 형편없는 여자도 있었지만, 내 아내라면 각선미가 예쁘게 드러날 거라고 생각하는데."

눈이 보이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아내의 체형을 알고 있는 듯한 자신에 찬 타잔의 말투에 실러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타잔은 다시 앤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아랫단이 퍼진 이브닝드레스는 허리가 굵은 중년 여성에게나 어울릴 테니, 아내에게 입혀 볼 때는 그 점도 고려해 주기 바라오. 나 자신은 보고 즐길 수 없다 하더라도, 잘록한 웨이스트나 깊이 푹 팬 가슴의 라인을 강조하여 다른 사내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일에는 반대하지 않겠소. 나는 그렇게 심술궂지는 않으니까 말이오."

앤지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타잔의 손을 꽉 잡고는 그만둬 달라는 신호를 했다. 가슴에 검정 사마귀가 있다는 것과, 등줄기의 감각이 예민하다는 것까지 지껄여 댈까봐 앤지는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었다.

앤지의 마음속을 읽어낸 타잔은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헬렌뿐만 아니라 다른 점원들까지 모여들었고, 온 가게 안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자 앤지는 더욱더 수줍어져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실러는 혼자 가게 앞에서 얼음 같은 차가운 눈동자를 번쩍이면서 아름다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남자란 대개 아내의 옷을 사는 데 동반하기를 싫어하는 법이라고 앤지는 알고 있었지만 타잔은 달랐다.

"안에 들어가 음악을 듣고 커피라도 마시면서 기다리는 게 어떠세요?" 하고 헬렌이 권했으나 그는 즉시 거절하고, 하우스 오브 헤리오스 콜렉션의 최고급품 의상을 입은 모델들이 기다리는 이층의 쇼룸까지 따라왔다.

그때까지는 헬렌에게 맡기겠다고 하던 타잔이었으나, 막상 쇼가 시작되자 하나하나의 드레스에 대해 빛깔, 디자인, 천의 감촉 따위에 대한 헬렌의 설명을 진지하게 듣거나,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나 불명한 점에 대해서는 질문했다.

"블루라고 말했지? 색조는 어떻지?"

"글쎄요, 약간 보랏빛을 띠고 있어서, 사모님의 회색 눈동자에 깊이를 더해 준다고 생각해요."

"어리고 숫된 새댁에게는 새하얀 레이스가 좋다고 생각지 않아요? 태피터(얇은 견직물)가 스치는 소리는 좋아하지만, 아내는 조심성이 많기 때문에, 어깨끈이 없으면 안 입으려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데."

한 시간 이상이 걸렸을 무렵에 앤지는 이렇게 말을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타잔, 이 이상 낭비할 필요는 없어요. 여태 사들인 드레스를 모두 입어서 떨어지는 데만도 몇 년이 걸릴‥‥."

"드레스는 낡아서 해지도록 입어서는 안 돼, 앤지 언니." 실러는 언니를 부러워하면서도, 자기 것도 많이 사주었으므로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큰 부잣집의 사모님들은 유행이 바뀌면 입던 드레스는 모두 버리고 새 것으로 바꾸는 거야."

"그런 아까운 짓을‥‥." 앤지는 강한 쇼크를 받음과 동시에, 타잔의 아내로서의 자신의 입장도 패션의 유행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것이므로, 다음번의 패션쇼에는 데려오는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한편 안심이 되었다.

아내를 베스트 드레서로 만들고 싶다는 타잔과, 아직도 드레스를 더 사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는 실러의 증간에 끼여서 앤지의 마음은 우울해져 갔다. 금빛 실로 수놓인 튜닉 코트와 팬츠, 등이 깊게 팬 화려한 라메(금빛 실로 수를 놓은 천)의 드레스, 자수가 있는

(얇은 망 모양의 비단)에 새틴의 리본과 오건디의 장미가 달린 드레스, 진주로 수놓은 드레스, 실크의 외출복이나 캐주얼 스커트 등이 아빠한테로 돌아갈 텐데 이런 옷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란제리도 빠짐없이 모두 갖추어서 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앤지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빛깔이나 모양, 프릴의 상태 따위를 타잔이 일일이 지적해서 요구하고 있는 동안에, 니코스와 약속한 시간은 자꾸자꾸 지나갔다.

니코스는 참을성 있는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약속시간이 지나가도 틀림없이 기다려 줄 것이다. 하지만 빨리 여기를 빠져 나가야지‥‥.

"타잔, 밖에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요. 여기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샀다고 생각하고 말을 꺼냈지만, 재수 없게도 헬렌이 엿들은 바람에 앤지의 계획은 틀어지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헬렌은 미안하다는 태도로 사과했다. "모든 면에 빈틈이 없어야 하는데 그만‥‥ 모델들도 습도가 높으면 옷을 갈아입기 힘든다고 불평하니, 에어컨을 켜게 하고 오겠습니다."

"아니, 그런 뜻은‥‥." 헬렌의 뒷모습이 빨간 벨벳의 커튼 저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앤지는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그것도 좋지 않은가, 거짓말쟁이 새댁." 뜨겁게 달아오른 앤지의 귓전에 타잔의 조롱하는 소리가 울렸다. "다음엔 모피를 고르러 가지, 에어컨의 찬바람으로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까 말이야."

"모피는 싫어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당신 멋대로 하게 하지는 않겠어." 이미 실러의 성격을 계산에 넣은 타잔은 쌀쌀맞은 말투로 계속했다. "당신에 의해 돌아올지도 모를 찬스를 놓쳐 버리게 되면 프리실러가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그래도 여전히 앤지는 고집을 부렸다.

"당신이 실러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 하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은 나보다 실러와 함께 있는 편이 더 좋을 테니까요‥‥." 하고 말했으나, 타잔이 번쩍 고개를 드는 바람에 앤지는 당황하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타잔은 날카롭게 명령하는 투로 말했다.

"당신은 언제나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돼, 알고 있겠지. 당신의 목소리는 내 눈 대신으로서, 나는 그것에 의지하고 움직이고 있는 거야. 혼자서는 걸을 수도 없는 나를 놓아두고, 달아나려는 생각을 하다니 안 될 말이야."

앤지는 잠자코 말을 잘 들은 탓인지, 모피의 쇼우룸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타잔의 노여움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소파에 은빛 여우의 모피가, 마치 잠든 듯이 걸려 있었다. 앤지는 그것을 보는 순간, 그만 냉정을 잃고 말았다.

야생 동물에, 인간은 어쩌면 이렇게도 잔혹한 짓을 하는 것일까. 앤지는 목숨을 빼앗아 가면서까지 욕망을 채우려 하는 여성의 에고이즘의 증거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몸을 떨며 얼굴을 딴 데로 돌렸다.

실러는 환성을 지르며, 길이가 긴 야생 고양이의 털 코트에 팔을 꿰고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갖고 싶다고 형부에게 한마디만 하면 금세 사 입을 수 있는 앤지가 부러워졌다.

"이거, 정말 멋지군!"

"모피 때문에 동물들이 죽게 된 거야!" 앤지의 심한 말투에 타잔이 어깨를 꿈틀하고 치켜 올렸다.

"그건 당선은 모피가 싫다는 뜻인가?" 그는 본 적도 없는 특별한 동물이라도 만난 사냥꾼처형 놀라고 있었다.

"싫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 간단해요." 부자고 욕심 많은 스테이터스 심벌(신분의 상징)을 위해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이 마구 죽게 되다니‥‥." 불쌍한 동물들의 모피가 즐비하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며, 앤지는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실러는, 지금 화가 끓어올라 빠른 말로 위세 좋게 잇달아 지껄여대고 있는 저 여성과, 똑똑히 자기 의견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평소의 차분한 언니가 동일 인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바보같이!" 하고 실러는, 언니에게 이대로 계속 말하게 내버려둔다면, 지금 자기의 몸을 감싸고 있는 멋진 모피 코트를 얻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불안해져서, 노기를 띤 목소리로 반박했다. "모피를 채취하기 위한 동물이에요. 특히 밍크는‥‥."

"죽기 위해 태어났단 말이니?" 인간에게 편리하도록 맞추어진 논리에는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쇼트 자켓을 팔에 걸고 급히 다가온 헬렌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앤지가 감수성이 강하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벨벳처럼 소프트하고 낭창낭창한 새끼사슴 가죽으로 만든 자켓을 눈앞에 불쑥 내밀었다.

"모피는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 이것이라면 마음에 드시지 않을까요? 손님의 주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만, 만약 사모님이 희망하신다면, 당장 사이즈에 맞춰 만들게 하겠어요." 하고, 앤지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낭창낭창한 가죽을 만져 보게 했다. "이것 보세요, 무척 고급인 새끼사슴의 가죽이잖아요. 사슴의 무리 속에서 건강하고 상처가 없는 것을 고른 것이랍니다. 뱀을 퇴치하기 위해 이 섬에 수입된 사슴입니다만, 급격히 증가해서 곤란하기 때문이죠."

앤지가 안색을 바꾸고 크게 숨을 들이쉬는 것을 듣고, 타잔은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그러나 따뜻하게 위로해. 주기는커녕 빈정거리는 말을 내뱉었다.

"사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아내는 자기의 아름다운 살갗을 포기하겠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는걸.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헬렌." 하고 타잔은 앤지의 손을 확 잡아당기더니, 귓전에다 대고 살며시 속삭였다. "만약 내가 당신과 니코스의 데이트 약속을 언뜻 듣지 못했더라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구실이나 예상외로 지나친 동물 애호론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을지도 모르겠는걸." 하더니, 불시에 속삭임은 비난으로 변했다. "나보다, 다른 인간과 함께 있는 편이 좋은 모양이지, 설사 그것이 사용인이더라도?" 하며, 타잔은 경멸하는 것같이 앤지의 손을 뿌리치고, 실러 쪽으로 돌아섰다.

"프리실러, 무엇이든 좋아하는 코트를 사주겠어. 당신은 남자에게 물건을 사달라고 하는 것만이 여자의 행복은 아니다, 따위의 건방진 소리는 하지 않는 정직한 여성이니까 말이야. 바라는 것을 사달라고 하거나, 추어주면 프라이드가 상한다는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을 테니까."

 

12

세 사람은 점심 테이블을 예약해 놓은 고급 호텔의 로비로 들어갔다. 값비싼 야생 고양이의 털 코트를 팔에 건 실러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미안한데." 타잔은 미간을 찌푸리며, 앤지의 팔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언제나 사업상 협의로 이 호텔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집안끼리 비밀히 식사를 하는 데도 좋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좀 더 조촐하고 아담한 장소를 물색하도록 니코스에게 주의를 시켰어야 했는데. 만약 뭣하다면 근처에 고급 타베르나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쪽으로 할까?"

"형부!" 실러는 널따란 대리석의 바닥, 젖빛 유리의 벽, 폭신폭신한 가죽 소파나 안락의자, 미래 지향성 디자인의 커다란 샹들리에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최고잖아요. 다른 가게 따위는 천만의 말씀이에요."

앤지는, 타잔이 그녀가 의견을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열대식물의 미니 정글에 압도되어 말이 나오기를 않았다. 사람의 손목만한 줄기의 줄기가 천장 가까이까지 뻗었고, 잎은 앤지의 몸을 완전히 감쌀 정도로 컸다.

"어때, 앤젤리너‥‥?" 성미가 급한 타잔은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어서 물었다. "식사는 여기서도 좋겠나, 아니면 다른 데로 할까?"

"아무래도 좋아요." 하고 대답한 그녀는, 타잔은 잘 아는 장소를 좋아한다는 것을 상기하고 덧붙였다. "예약했는데 그대로 가면 미안하잖아요."

레스토랑 안은 우아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차, 한창 나이프와 포크를 놀리는 소리나 조용한 이야기소리가 나고 있었으나, 타잔이 모습을 나타내자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와 동시에 앤지의 팔에 타잔의 손이 파고들었다.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아챈 것이다. 프라이드가 강한 타잔이 어둠의 세게에서 굴욕감과 싸우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앤지는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붙임성 있는 웃음을 띤 지배인이 재빨리 다가왔다. "또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연락을 받고 나서, 좀 어렵긴 했습니다만, 여느 때의 자리를 잡아둘 수가 있었습니다‥‥."

<예약석>이란 표찰이 놓여 있는 안쪽 테이블을 보고 앤지는 깜짝 놀랐다. 타잔은 미로 같은 테이블 사이를 무난히 잘 빠져나가 자리를 찾아 않은 다음, 호기심에 가득 찬 시선을 받으면서 식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상관없다면 저 끝의 칸막이 되어 있는 자리로 바꾸어 주었으면 하는데‥‥ 그자리가 더 마음에 들어서 그래요." 앤지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능숙하다고는 할 수 없는 변명을 했다. "나는‥‥ 이런 커다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데는 익숙지 못해요.

그러니 주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저 테이블이 좋겠어요."

"언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실러가 눈을 치뜨고 쏘아붙였다.

"그렇게 주선해 주게나, 안드레아스." 타잔이 재빨리 앤지의 말을 거들었다. 앤지가 왜 그런 말을 했는가를 알아채고 그녀의 다정한 마음씨에 감사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손가락을 통해서 전해져 왔다.

험한 분위기가 누그러지고, 타잔과 앤지의 마음에 따뜻한 정이 서로 통하고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실러는 식사하는 동안 계속 우쭐대며 혼자 지껄이고 있었다.

앤지는 약간 고개를 숙이고 식사만 하고 있었으나, 가끔 타잔과 손이 서로 스치면 말할 수 없는 흥분을 느끼고 얼굴은 붉혔다. 식사가 끝나 갈 무렵, 실러는 사색에 잠겨 있는 타잔에게, 오후에는 어디라도 좋으니 데려가 달라고 졸라대고 있었다.

"프리실러, 미안하지만‥‥" 타잔은 한순간 미간을 찌푸렸으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거절했다. "최근 로도스에는 좀처럼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온 김에 급한 일을 처리해야 할 게 있거든. 두세 시간 우리가 따로 행동을 해도 괜찮을까?"

"언니와 함께 말이에요‥‥?" 실러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잠시 동안 타잔의 표정이 험악해졌지만, 변함없이 태도는 부드러웠다.

"받아쓰게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앤젤리너도 함께 있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 그렇게 하세요." 하고 실러는 어깨를 추슬렀다. "제 걱정은 말고 어서 볼일이나 보세요." 말을 끝내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래요. 로비를 지나올 때 보니 미용실이 있었어요. 요즘 손질을 하지 않았으니 그동안 거기나 다녀오겠어요."

"그러는 게 좋겠군. 당장 예약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실러를 외톨이도 만드는 보상을 할 생각인지 타잔은 적극적으로 권하며, 앤지를 데리고 일어섰다.

실러는, 미용료는 얼마가 들든 형부가 대줄 거라고 생각하고, 기쁜 듯이 웃었다.

"형부, 굉장히 친절하시군요. 하지만‥‥." 실러는 짓궂은 시선을 앤지에게로 돌렸다. "형부의 친절에는 충분히 보답할 생각이에요. 형부가 만족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말이에요."

타잔은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빠른 걸음걸이로, 앤지를 호텔에서 데리고 나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택시에 탔다.

"구시가지로 가지."

"볼 일이 구시가지에서 있나요?" 차가, 빌딩가인 중심지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으므로, 앤지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무척 중요한 사업이야." 타잔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신이 그처럼 보고 싶어 하는 관광지를 안내하지 않을 채 카리오스 섬으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 꼭 구경시켜 줘야겠다는 의무감 때문에 말이야."

"그럼 실러에게는 거짓말을 했나요?" 앤지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물었다.

"그렇다니까. 당신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기분이 나빠졌다든지 모피는 싫다든지‥‥."

"그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타잔." 앤지가 나직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변명하는 것을 듣고, 타잔은 얼굴을 찌푸렸다. "어릴 때부터,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쁘다고 배워 왔으며, 특별한 사정으로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어요."

"부득이한 경우만 이를테면 어떤 경우지?"

"사실대로 말한다면 상대의 자존심이 상할 경우죠."

택시가 견고한 회색 성벽에 접근하고, 그 저쪽에 푸르름에 둘러싸인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가 보이기 시작하자, 앤지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도시의 요새는 이집트의 회교도나 해적을 격퇴하기 위해 14세기초에 만들어진 거야." 하고 타잔이 말했다. 두 사람은 견고해 보이는 석조 건물의 중앙으로 들어갔다. "나의 기억력을 시험해 보지 않겠나. 납작한 돌이 깔린 길을 앞으로 나아가면 아치형의 문이 있고, 그 문을 나가면 광장이 있는데, 거기에는 컬러풀한 타일이 깔린 분수대가 있을 거야.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노점이 즐비해 있을 거야."

"바로 맞았어요." 앤지는 그를 격려하고 싶은 심정으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짧은 시간에 구시가를 구석구석까지 구경하기란 무리이므로, 두 사람은 암묵의 양해 속에, 오래 된 건물이 늘어서 있는, 납작한 돌이 갈린 길을, 손에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건물이 꽉 들어차 있어서 길에는 전혀 햇볕이 들지 않았다.

건물이나 길이 중세 때의 것 그대로여서, 당시 빨간 망토를 입은 기사들이 쥐죽은 듯 고요한 거리를 희미한 각등(손에 들고 다니는 네모진 등)의 불빛을 의지하고 패트롤하고 있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윽고 아치형의 문을 빠져나가자 광장이 있었다. 광장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으며, 방사상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노점에서는 손님을 끄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집 모양으로 지붕을 달고 이동할 수 있게 만든 가게에는, 손으로 뜬 레이스, 올리브나무의 조각품, 터키제의 놋쇠 제품, 청동제의 남비, 도자기, 가죽제품, 은 식기, 게다가 신심 깊은 그리스인에게는 일상생활의 필수품이기도 한 염주 따위가 자리가 비좁도록 늘어 놓여져 있었다.

"사모님은 커피를 좋아하십니까? 과자는 어떻습니까? 조리장에 오셔서 좋아하시는 걸 골라 보세요." 진열되어 있는 맛있어 뵈는 과자에 눈을 빼앗기고 앤지가 걸음을 멈추고 있자, 가게 주인이 치근치근하게 권했다.

"그렇게 해주면 틀림없이 기뻐할 거야. " 타잔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손님이 조리장에 들어가서, 요리 기구를 구경하거나, 때로는 냉장고 속까지 들여다보기도 하는데, 그게 그리스의 풍습이거든."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앤지는 영국과는 전혀 다른 풍습에 당황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크림이나 아몬드, 벌꿀에 절인 호두 따위가 듬뿍 얹힌 과자를 보고 있노라니 군침이 돌았다.

"파라칼로‥‥!" 하고, 가게 주인은 뜻도 모를 말을 하고 미소 지으면서, 강아지라도 쓰다듬듯이 손바닥을 아래로 내리며 손을 내밀었다. 참으라는 뜻이군. 앤지는 언젠가 니코스에게 배운 몸짓이 실제로 쓰여지는 것을 보자 반가웠다.

"타잔, 괜찮아요?" 하고 망설이듯이 물었다. "그다지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겠군요."

두 사람은 남자한 돌이 깔린 위에 늘어놓은 의자에 않아, 적당히 차가워진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전신에 햇살을 받으며, 시장 어디서나 들려오는 정열적이고 로맨틱한 부기우기의 가락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에, 두 사람 다 시간이 가는 것도 잊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다같이 잠자코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으나, 마침내 타잔은 띄엄띄엄 지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앤지는, 오만하고 독립심이 강한 외견 뒤에 숨겨진, 여태까지와는 다른 타잔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추억담에 빨려 들어갔다.

"예전에도 가끔, 이렇게 하고 멍하니 앉아 있곤 했었지. 젊었을 때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그게 유일한 낙이었지. 하루의 일을 마치고 저력을 먹고 나면, 신문을 사가지고 거리에 면한 카페에 들어가 창가의 안쪽 자리에 앉거든.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그게 끝나면 가까이의 손님과 지껄이거나, 때로는 거리를 지나가는 아가씨들을 구경했었지. 얘기는 걸지 않고 아가씨의 엉덩이를 따라가는 사내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어. 전혀 지루하지 않았지."

"하지만 그 무렵 당신을 외톨이라 쓸쓸하지 않았나요?" 하고, 탐색하는 것 같은 눈을 돌리면서 말했다. "함께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죠?"

"가끔은 그랬었지. 보는 입장이 아니라 보여지는 입장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지. 당신도 알다시피 그리스인은 사교적인 민족으로, 모두 다같이 왁자지껄 떠들어대기를 좋아하거든. 사회에 등을 돌리는 사람은 이상한 눈으로 보여지게 되지." 자기 자신을 비웃듯이 웃는 그의 입에서 하얀 이가 반짝였다.

"그런데도 당신이, 일부러 지금까지 독신으로 있었다는 것은 믿기지가 않아요. 상대하던 여성이 싫지는 않았을 텐데요."

"글쎄. 하지만 그 무렵에는 가난했으며, 장래에의 꿈에만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야. 여자하고 교제하려면 돈이 많이 들거든. 번 돈은 모조리 장래를 위해 투자하고 싶었던 거야."

"세상에는 돈을 목적으로 하는 여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앤지는 정말 의외라고 생각했다. "서로가 사랑하고 있으며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한 여성도 있어요."

"그러나 미녀의 경우라면 문제가 다르지. 제일 손에 넣기 힘드는 것을 손에 넣어서 모두에게 과시하고 싶은 것이 남자의 기분이야."

"당신에게 있어서는, 결혼이란 그 정도의 의미밖에 없나요. 아내가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 될 만큼 아름답다면 그것으로 만족한가요? 그밖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나요?"

타잔이 고개를 움츠리며 내뱉듯이 말했다.

"결승점의 테이프가 보이지 않는 자에게는 경쟁했댔자 의미도 없으며, 게다가 점자의 러브레터밖에 읽지 못한다면 미녀에게 도전해 보겠다는 의욕도 생기지 않는 법이야. 하지만 이 손으로 만져본 바로는 당신도 카메오(장신구의 하나)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이상 할 말이 없지만. 설사 당신이 보기 흉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전통 있는 사립학교에서 익힌 지성과 교양, 그리고 아무리 돈을 많이 주고도 살 수 없는 좋은 성격, 또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우아하고 침착한 태도가, 그 용모를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을 거야. 당신은 뭔가를 해줘도 그것이 당연하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머리로 사물을 판단할 수 있으며, 크레딧 카드가 가득 들어 있는 지갑을 행복에의 패스포트로는 생각지 않아. 이제까지 만난 적이 없는 특별한 타입이거든. 그래서, 당신이 갖고 싶다고 생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알 수 없는 거야. 값비싼 물건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떤 선물을 사주면 기뻐해 줄지 가르쳐 주지 않겠나?"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고, 앤지는 실망한 나머지 톡 쏘듯이 말해 버렸다. 타잔에게 있어서의 나는, 목소리며, 냄새며,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육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마음이 내킬 때 아무리 정열적으로 요구 당한다 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역시 점자의 하나의 점보다도 의미가 없는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느끼고 있던 기쁨이 사라지는 동시에,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헤리오스와 로다가 만난 섬에서 사랑해 주지도 않는 남성과 함께 있느니 아버지한테로 돌아가고 싶다.

앤지의 가라앉은 마음을 감지했던지, 타잔은 점자 손목시계에 손끝을 가져갔다. 돌 위에서 의자다리가 삐걱 하고 소리내는 것을 듣고, 앤지는 재빠르게 세심한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어두워지기 전에 카리오스 섬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 니코스가 마음 졸이고 있지 않을까요?"

"다행히도 니코스는 나보다 배의 조종에 능숙하거든. 게다가 어둠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시간 따위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 이 손목시계는 편리하지만 말이야." 하고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래도 한계는 있어. 열 두 시라 해도 그것이 정오인지 한밤중인지 구별이 되지 않으니까."

구시가의 변두리까지 왔을 때, 타잔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더니 코를 벌름거렸다. 그러고는, "크리스토스‥‥!" 하고 활짝 웃으며 외쳤다. "하마터면 그놈의 일을 잊을 뻔했어." 하더니, 날카로운 후각에 의지하여 방금 온 길을 되돌아가 어느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까지 오자 간신히 앤지에게도, 입구 쪽에서 여러 가지 향수 냄새가 풍겨오는 것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 가게로 들어가자, 일손을 놓고 이쪽을 올려다보는 남자와 얼굴에 활짝 웃음이 퍼졌다.

"타잔, 정말 잘 와주었네." 하고 그는 카운터를 짚고 뛰어넘었다. "반갑네. 한동안 자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쓸쓸했었지. ‥‥." 남자의 눈이, 커다란 타잔의 그늘에 나비처럼 착 달라붙어 있는 앤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빨리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군. , 자네의 팔에 매달려 있는 귀여운 아가씨를 소개시켜 주게나."

타잔은 앤지를 앞으로 끌어당기며 미소 지었다.

"앤젤리너, 이 친구는 크리스토스 코니아리스라고 하는, 향수를 만들어 팔고 있는 사나이야. 섞는 방법 하나로 황홀해질 만큼 매력적인 향기가 만들어지는 거야. 크리스토스," 하고, 친구에게는 다소 진지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이쪽은 앤젤리너, 수줍음을 잘 타는 새댁이지. 어째서 여기로 데리고 왔는지, 그것까지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마치 품평하는 것 같은 크리스토스의 눈길에 앤지는 얼굴이 빨개졌다. "야생 비둘기의 날개처럼 천진난만한 회색 눈동자, 아픔을 모르는 핑크빛의 입술, 훌륭한 솜씨로 그린 것 같은 섬세한 얼굴 생김새, 이제 몇 년만 지나면 완전히 성숙할

몸매--그러한 요소를 모두 포함한 향수를 만들라는 거지?"

앤지는 난처해져서 그의 눈길로부터 눈을 돌리고 말았다. 아직 자기 자신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비밀까지 알아채고 말 것 같았다.

"당신을 곤란하게 만든 저 친구를 그냥 용서해서는 안 돼, 앤젤리너. 그가 만드는 향수에는 마력이 있어서, 그다지 마음이 없는 사내를 열렬한 연인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고 믿고 있는 여성들이 많이 있어. 그래서 그는 자신도 독심술을 터득한 마술사나 점장이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나를 몹시 깔보고 있군, 타잔." 하고 크리스토스는 큰 소리로 껄껄 웃었으나, 앤지 쪽을 돌아보았을 때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성실성이 느껴졌다. "그야,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약간 과장된 거지만, 여성이 자신을 표현하는 데는 향수 이상의 것은 없다는 것은 사실이야. 여성의 혼 그 자체나 독특한 무드는 그 여성의 향기 속에서 우러나오는 거야.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 여성의 생각은 향수로써 표현할 수 있어. 최초의 향기를 만든다는 뜻에서는 나도 예술가일지도 모르지만, 작품인 향수에 색상이나 색조를 섞어 그가운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쓰는 여성뿐이야."

"물론 그럴 테지." 타잔이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내 아내의 향수에는 꼭 장미 향기를 주로 사용해주기 바라네."

"나도 그게 제일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 크리스토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미 향기 이상으로 남자의 감정을 흔드는 데 효과적인 것은 없단 말이야. <장미의 향기는 마음을 달래고, 쑤시는 아픔을 진정시킨다.> 이거겠지, 타잔? 내가 새로 만드는 향수의 이름은," 하더니, 그는 슬쩍 앤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앤젤리너라고 하겠네."

한참이 지난 후에도 앤지는 흥분된 마음을 누르지 못한 채, 잠자코 구시가 주변의 길을 걷고 있었다. 향수는 되도록 빨리 카리오스 섬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해 준 크리스토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었다. 너무나 그 일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타잔이 갑자기 발을 멈추고 앤지의 팔을 꽉 잡을 때까지, 그가 언짢아하는 모습도 알아채지 못했다. 타잔은 난폭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된 거야, 앤젤리너? 옷이나 보석류는 마지못해 받았지만, 모피는 단호하게 거절했어. 하지만 향수의 선물은 당신의 사고방식에 어긋나지 않았던 모양이지? 옛날, 프로포즈도 엄한 부모의 감시하에 행해졌던 시대에도, 향수를 선물하는 것은 예의에 합당한 일이었으니까." 그는 갑자기 손가락에 강하게 힘을 주며, 악물었던 잇새로 밀어내듯이 말했다. "비지니스의 세계에서 나는 냉엄한 인간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제일 싫어하는 적에게조차도 빚을 즉시 갚는다는 점에 관해서는 인정받고 있어. 당신은 나를 아주 잘 돌보아 주었지. 내겐 아주 많은 빚이 생기고 말았어. 그런데 어째서 그 빚을 갚게 해주지 않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돌봐드리다니‥‥?" 앤지는 발밑의 땅이 꺼져들어 가는 것 같은 느낌과 싸우면서 앵무새처럼 중얼거렸다. "당신을 돌봐드리고 있었던 것뿐이라면 저 향수는 과분해요‥‥"

", 앤젤리너‥‥!" 타잔은 괴로운 듯이 신음하며, 그녀와 얼굴이 맞부딪치게 될 때까지 고개를 숙였다. "또 당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만 모양이지? 아니면 정말로 그 목소리처럼 마음도 차가워지고만 것인가? ! 당신을 볼 수 있다면!"

얼어붙는 것같이 전신이 굳어지고 있는 앤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볼을 적셨다. 그녀는 타잔의 눈이 안 보이는 것에 안도하고 있는 자신을 조금도 죄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13

이틀 뒤에 암청색 병에 든 향수가 카리오스 섬의 저택으로 보내져 왔으나, 실러는 조금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니코스가 침실의 도어를 노크하고, 앤지 앞으로 온 소포를 들고 들어오자, 실러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바라보고 있던 잡지가, 시시하다는 듯이 눈을 들었다.

"뭐죠, 그게?" 하고 묻다가, 병의 측면에 씌어있는 <앤젤리너>라는 금색 글자가 눈에 띄자, 실러의 파란 눈동자는 번쩍하고 빛났다. 아름다운 실로 봉해진 뚜껑이나 상자의 디자인만 보아도, 유명한 가게의 물건임에 틀립없다고 생각한 실러는, 재미없다는 듯이 입을 꽉 다물었다.

"타잔의 친구분이 나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 준 향수야." 앤지는 이렇게 대답했으나, 이 향수를 선물한 동기가 빚을 갚는 의미에서인 것을 상기하자 기쁨도 시들해지고 한숨이 나왔다. "타잔은 나에게 다른 사람이 쓰지 않는 나만의 향수를 쓰게 하고 싶다나, 어디에 있어도 냄새로 금세 알 수 있도록."

그렇지만, 뚜껑을 열고 한방울을 손목에 발라 보니 아련하고 달콤하게 코에 와 닿는, 콕콕 찌르는 향기에 마음까지 매혹되고 말았다.

"어마, 어쩜 이렇게도 근사하지‥‥." 하고 냄새를 맡아보고는, 실러의 코앞에 손목을 내밀었다. "크리스토스는 정말 마술사야."

"여성을 꿰뚫어보는 천재라고 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실러는 살살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완전히 언니의 개성을 파악하고 있겠지? 크리놀린(언더 스커트)으로 부풀린 레이스의 테두리가 있는 후프 스커트를 입고, 턱밑에서 리본으로 매는 보닛을 쓰고, 벙어리장갑을 낀 손에 부채를 들고, 장미 향유의 냄새를 푹푹 풍기고 있는 증조모의 이미지 같거든."

실러의 빈정거리는 말에 앤지의 얼굴에서는 그나마의 기쁜 빛이 싹 가시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도 사이가 좋았으며, 기쁨도 슬픔도, 희망도 절망도 서로 나누며 살아왔는데, 어쩌다 이렇게 변해 버렸을까. 이제 와서는 말하는 태도나 행동도 마치 타인 같다. 하지만 다시 한번 실러에게 비밀을 털어놓을까 생각했다.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것을 계기로, 굳게 맺어져 있던 자매간의 유대를 되찾을 수가 있을 것이 틀림없다.

"실러‥‥!" 하고, 망설이듯이 부른 앤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 뭔데?" 실러는 초조한 모습으로, 보던 잡지를 옆으로 내던졌다. 이제 단조로운 이 카리오스 섬에서의 생활에 싫증이 나버린 실러는, 기분전환을 할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고 생각하고, 언니와의 잡담에라도 달려드는 것이다.

확 붉어 졌다가 금세 하얘지곤 하고 있는 볼, 미소 지으려 하고 있는 것인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인지 실룩거리고 있는 입술, 내면에서부터 반짝이고 있는 눈동자, 옷이 몸에 꼭 맞아 날씬했을 뿐이었으나 여자다운 곡선으로 변해 온 몸매-그 모든 것이, 언제나 수심에 잠겨 있는 그녀의 얼굴에 눈부신 빛과 성숙한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실러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번지를 쳐다보고 있었으나, 심한 질투를 느끼고 잘라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약올리지 말고 빨리 말해 줘요."

"미안해." 앤지는 깜짝 놀라며 얼른 손등으로 눈길을 떨구었다. "약을 올리다니‥‥ 다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실은 말이야, 어쩐지‥‥ 아니야." 하고, 고개를 저어서 정정했다. "아직은 확실치가 않지만‥‥ 아기가 생긴 것 같아‥‥."

침묵이 뒤를 이어, 홀의 벽시계 소리가 똑똑히 귀에 와 닿았다. 앤지는 몸을 굳히고 실러의 반응을 살폈다. 상당히 쇼크였겠지만 기꺼이 축복해 주지나 않을까‥‥ 나의 몸을 걱정해 주지 않을까‥‥? 게다가, 아빠가, 될 테니까 타잔의 일도 단념해 주지 않을까?

그렇지만 앤지의 기대를 배반하고, 실러의 얼어붙은 것 같은 불신의 표정은 분노가 되어 폭발했다.

"교활하고 지독한 사람!" 실러는 벌떡 일어서더니,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음침한 눈으로 앤지를 쏘아보며,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새빨갛게 매니큐어를 한 긴 손톱이 당장이라도 목을 향해 뻗어올 것 같은 느낌에, 앤지는 뒤로 물러서면서 숨을 죽이고 동생을 쳐다보았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야. 타잔도 역시 그럴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하지만 틀림없이 알아줄 것으로 생각해. 하긴, 우리는 태어날 아기의 행복을 첫째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

"그럼 아직 형부에게는 알리지 않았군." 실러는 아직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절대로 말해서는 안 돼." 하고 단호하게 앤지를 몰아붙였다.

"어째서‥‥?"

"그걸 내 입으로 말하라는 거야? 형부는 나한테 채었다는 쇼크로 충동적으로 언니와 결혼했을 뿐이야.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 일시적으로 함께 살고 있는 여자가 귀찮은 문제를 가져와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쯤은 언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게다가 지금 형부는 이혼을 생각하고 있을 텐테, 그를 협박해서 그의 나머지 인생을 재미도 없는 아내와 바라지도 않던 자식에게 묶어 두겠다는 말이야?"

"타잔이 이혼을‥‥? 그런 얘기를 했니!" 하고 앤지는 파르르 입술을 떨면서, 두려움으로 몸이 굳어진 채 움직이지도 못했다.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당연한 거잖아?" 실러는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의 화제는 우리들의 장래에 대한 것뿐이었거든."

", 타잔은‥‥ 낯선 곳에는 가려 하지 않는 사람이야." 실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열심히 자기 자신에게 타일렀다. "신뢰하고 자신의 눈의 역할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했어."

실러의 차갑고도 의기양양한 웃음이 온 방안에 울려 퍼졌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군. 형부는 당분간 카리오스 섬을 떠나려고, 요즘 그 준비를 하고 있는 참이야. 그런데 그렇게 믿고 있는 언니한테 왜 알리지도 않았을까?"

"믿기지 않아‥‥." 하는, 핏기가 가신 앤지의 얼굴은 실러의 눈에도 매우 애처롭게 비쳤지만, 틀림없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다짐하는 것을 실러는 잊지 않았다.

"그렇게 믿어지지 않는다면, 언니 자신이 확인해 보면 어때? 이층에 가서 니코스에게, 왜 형부의 짐을 챙기고 있는가를 물어보면 되잖아. 뭣하면 나의 짐을 챙기고 있는 릴라한테도 물어보라구."

얼마 후, 실러가 시키는 대로 니코스에게 물어본 앤지는, 배신당한 마음으로 풀이 푹 죽어 침대끝에 주저앉았다. 니코스로서도 앤지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슬픈 듯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알고 있는 것은 장기체재에 충분하도록 준비를 해두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과, 릴라에게 실러의 짐을 챙기라고 명령했다는 것뿐이었다.

"언제 떠난대요?" 이런 질문을, 아무리 친하다 해도 사용인에게 한다는 것은 수치스럽고 괴로운 일이었다.

"아침 첫 번 편입니다." 하고, 검은 눈동자에 동정의 빛을 띠며 그는 대답했다. "주인님과 동생의 두 분이. 그리고 이번에는 제가 오실 필요도 없다고 말씀하시던데요."

앤지는 더욱 풀이 죽어 어깨를 떨구고 눈을 감았다. 앤지의 뱃속에 어린 생명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경험이 있는 여자의 육감으로 크리슬러만은 눈치 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앤지는 타잔에게 배신당한 쇼크로, 아기의 일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수치스러움에 가슴아파하면서, 결혼한 이래 매일 밤 펼쳐졌던 정경을 상기했다. 앤지는 불나비가 불빛에 끌리듯이 그의 매력에 이끌려 갔었다. 그의 정열적인 애무는 앤지에게 마지막 남아 있던 이성마저도 빼앗아 버렸으며, 밤에 산야를 돌아다니는 동물 같은 호박색 눈의 번쩍임에 홀리면 헤어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사랑도 기쁨의 한때도, 앤지 혼자의 것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같이 나누었다는 것을 실감한 만큼, 앤지는 실러의 말에 참을 수가 없었다. 타잔이 실러를 데리고 이 섬을 떠나려 하고 있는 일에 의문의 여지는 없지만,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타잔의 입으로 직접 설명해 주기를 바랬다. 악의와 편견에 가득 찬 제삼자가 증거를 들이대기 전에 그가 직접 말해 주었다면‥‥.

두 사람은, 우편물이 도착한 직후에 두세 시간 함께 서재에서 일하는 것이 일과로 되어 있었다. 앤지는, 우편물이 든 자루를 어깨에 메고 선창 쪽에서 걸어오는 니코스의 모습이 창너머로 보이자, 긴장된 마음으로 천천히 일어서서 서재로 향했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갑자기 소리를 내어 신경을 건드리면 타잔의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되도록 조용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육체의 만남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친밀해졌다고는 해도, 정신적으로까지 서로 융화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타진은 고립된 상태여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을 경우에 정상적인 인간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과 항상 싸우고 있었다. 몇 주일 전의 어떤 사건에서, 타잔은 갑작스런 소란에 대해 몹시 예민하다는 것을 앤지는 알았던 것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해변을 거닐고 있을 때, 제트기의 폭음이 불시에 정적을 깼다. 제트기는 소리보다 빨리 공중에서 내려오더니, 귀를 찢을 듯한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머리 위를 통과했다. 순간 타잔은, 정상적인 인간이 쥐죽은 듯 고요한 한밤중에 폭음이라도 들은 것같이 전신이 굳어지더니 얼굴의 핏기가 가시고 이마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타잔은 데스크 앞에 앉아서 앤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앤지의 조용한 발소리가 들리자 그는, 톡톡하고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던 것을 중지하고 고개를 들었다.

"고맙군, 빨리 와주어서." 그는 안도와 초조가 뒤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편지가 산더미처럼 많아서 말이야. 하지만 그것만 끝나면 긴 휴가를 주도록 하지."

당신이 이 섬을 떠나기 때문이죠! 앤지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종이와 연필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타잔은 일 이외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여행에 안 데려가고 혼자 따돌림을 당하는 일이나 이혼 문제는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 두고, 그가 빠른 말로 부르는 것을 받아쓰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렇지만, 앤지가 마지막 편지를 읽고 그에 대한 답장의 구술을 끝냈을 때, 타잔은 이상하게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상하게 여기고 얼굴을 들자 어두운 표정의 타잔이 눈에 비쳐, 앤지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타잔은 할 맡을 찾다 지친 듯 좀처럼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어떤 부드러운 표정을 해준다 해도 조금도 위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앤젤리너,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할 얘기가 있어." 드디어 타잔이 말했다. 앤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움쭉달싹도 할 수 없었다. "매일 같은 일의 되풀이와 귀에 익은 목소리에만 의지하는 생활을 슬슬 청산하고 인제 보통의 생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물론 카리오스 섬이라는 살기 좋은 곳을 떠나기는 아쉽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무사안일한 생활만 해서는 진보가 없지 않겠어. 그래서 내일 떠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알고 있어요‥‥."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자, 무관심을 가장해서 쇼크를 숨기는 것은 상상했던 것보다는 쉬웠다. "실러한테서 들었어요."

"프리실러가 말했다구?" 타잔은 큰 소리로 되물었다.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해두었는데‥‥." 하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걱정스런 듯한 말투로 뒤를 계속했다. 당신한테 불필요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얘기를 듣고 알았다면, 당신 생각은 어떤가를 말해 주지 않겠나. 평생 이 섬에서 당신과만 살도록 운명지어졌다면 몰라도, 인간다운 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찬스가 아직 있다면 지금 섬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떨까? 잘못된 생각일까?"

앤지는 자신과 뱃속의 아기의 불행과,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할 타잔의 권리와를 비교해서 객관적으로 결론을 내리려 했다. 타잔은 실러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다면, 그동안 나는 실러의 대용품일 뿐이었다. 그가 나와 결혼한 것은, 여비서로서, 또 그의 보이지 않는 눈의 대용품으로서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였으며, 육체적으로 맺어진 것도 역시 애정에서가 아니라 법률적으로 부부라는 상황을 이용했을 뿐인 것이다.

그 점에 관해서는 숫처녀로서 속기 쉬웠던 나 자신에게 잘못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타잔을 비난한다 하더라도, 그는 절대로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방패삼아, 만약 내가 저항했다면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방에서 나갈 생각이었다고 우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타잔에게 잘못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애정이 없는 나와 이혼하고 사랑하는 실러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 제일 합당한 결론인 것 같다고 앤지는 생각했다.

그녀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며, 무릎 위에서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타잔, 당신의 생각이 옳아요."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다리로 겨우 버티고 서서 간신히 덧붙였다. "다만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정식의 절차도 되도록이면 서둘러 달라는 것뿐이에요."

타잔은 그 말에 상당히 자극을 받은 모양으로, 햇볕에 그을은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턱의 윤곽이 뚜렷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앤지 쪽이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당신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싫어서 꾀병을 앓았다는 것, 자진해서 몸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는 것,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비밀을 쭉 지키고 있었다는 것들을 죄다 알고 있었어. 그랬기 때문에, 당신이 자진해서 나를 요구하지 않아도 불평을 하지 않았으며 억지로 강요하지도 않았던 거야. 그렇지만 이렇게도 둔감하고 마음이 차가운 여자였다니‥‥ 이제 처음으로 알았어."

자신도 느끼지 못한 사실에 비난을 받자 앤지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타잔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그런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른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아내와 이혼하려는 것이니까, 어떤 남자든 다소의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책임을 전적으로 나에게 미루다니, 해도 정말 너무했다.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싫은 모양이죠?" 앤지는 문 쪽으로 물러서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제까지, 모든 일에 당신에게 양보해 왔다고 생각합니다만, 전적으로 내가 나쁘다는 것만은 인정할 수 없어요."

앤지는 방으로 되돌아가는 도중에, 향수를 가지러 거실에 들렀다. 아까 놓아둔 그대로 테이블 위에 있는 상자를 여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연한 그린색의 새틴이 젖어 얼룩져 있었다. 당황하며 꺼내어 뚜껑을 얼어 보니, 아까는 확실히 있던 병의 속뚜껑이 열어져 향수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조심성이 없을까 하고 자신을 책망하면서 손수건으로 살짝 병 주위를 닦는데, 향수의 달콤한 향기에 코가 자극되어 가금이 두근거리는 바람에 손을 멈추었다. 타잔과 함께 구시가를 구경했을 때의 즐거운 추억이 되살아났다. 값싼 선물을 찾아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는 나를, 그는 반가운 듯이 지켜봐 주고 있었다. 처음으로 빵 값을 깎고 의기양양해 하고 있었는데, 그 집 건너의 가게에서는 같은 것을 반값에 팔고 있어, 그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타잔은 그때도 이미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나에게 괴로운 눈물을 흘리게 할 생각이었을까? 그렇다면 어째서 내 향수만 만들게 했을까?

소파며 바닥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마개는 없었으므로, 실러한테서 받은 향수의 빈병 뚜껑을 임시로 쓸 수 있는가 어떤가 보려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서랍을 열고 손으로 더듬어 찾고 있는데, 뭔가 화장지에 싸인 것이 손끝에 닿았다. 타잔에게 선물할 생각으로 사두었는데 건네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조심스레 화장지를 펴서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엷은 그린의 오니 키스의 나비들. 크게 펼친 날개의 곡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여 갔다. 이것이 닿으면 타잔은, 너무너무 좋아했던 저 골짜기의 나비의 무리를 상기할까? 역시 이것을 기념으로 주고 가자. 나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그에게서 받지 않았나. 뱃속의 아기는 타잔과 헤어진 뒤에도 살아남아, 일생 동안 나의 보물이 되어 줄 것이다‥‥. 사랑하는 타잔의 아기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상상하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창가로 다가가, 나무 그늘의 벤치 위에 기분 좋게 드러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는 타잔을 내려다보았을 때에, 앤지의 미소는 얼어붙고 말았다. 그녀를 절망으로 몰아넣듯이, 그 평화롭고 회화적인 정경에 실러가 나타나 타잔에게 살며시 다가가더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몸을 구부리고 그의 볼에다 키스를 했다. 꿈틀하며 몸을 일으킨 타잔이 실러의 몸을 끌어당겨 뜨겁게 입술을 밀어붙이는 것을 보고, 앤지는 괴로움으로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하루종일, 마음의 상처를 달래려고 혼자 해안을 산책했다. 가끔 정원의 나무 그늘에 앉아 쉬었다가는, 다시 일어나서 해변으로 향하곤 했다. 그러나 푸른 바다도 하얀 모래도 상처 입은 마음에 위안을 주지는 못했다. 도저히 음식이 목으로 넘어갈 것 같지도 않아서 점심도 걸렀지만, 저녁식사도 빵이나 가져오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부터의 행복에 도취해 있는 타잔과 실러의 모습을 눈앞에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을 띠며 식사를 같이 할 수는 도저히 없다. 그렇지만 앤지는, 릴라에게 방에까지 가져오게 한 식사에도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뱃속의 아기의 영양을 위해서라도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쟁반 위의 삶은 달걀을 보자 속이 메슥메슥해져 왔다.

"그냥 가져가도록 해, 릴라." 바다에서 올려져 땅바닥에 내던져진 다갈색의 기분 나쁜 문어가, 바위 위에서 꿈틀거리다가 비누거품 같은 것을 토해 내면서 번쩍번쩍하는 잿빛으로 변해 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대신 빵과 치즈, 그리고 밀크를 부탁해."

릴라가 알았다는 얼굴로 살짝 웃는 것을 보고, 앤지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포동포동해진 앞가슴과 좀 불룩해진 것 같은 배에 크리슬러가 특별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알아채고 있었지만, 릴라한테까지 임신한 것을 알려서는 안 된다. 마지막 순간에 와서, 사용인들의 입에 의해 타잔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다.

"‥‥‥최근에 조금 살이 찐 것 같아." 앤지는 릴라를 바라보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오늘부터, 불어난 만큼의 체중이 줄 때까지 다이어트 하려고 결심했거든."

릴라가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실망한 얼굴로 주방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 앤지는 안심했다. 틀림없이 크리슬러에게 착각이었다고 알릴 테지.

이것으로 수평선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해와 함께 찾아들 타잔의 장래의 행복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걱정은 없어졌다. 앤지는 안심하면서 침대를 정돈하고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 밤이 꽤 깊어질 때까지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잔이 없는 앞으로의 생활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아기의 일에 관해서 밝은 기분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기는 낳기로 결심했으며, 정식으로 이혼 절차가 끝나면 즉시 영국으로 돌아가, 목사 사택에서 아기를 키우기로 했다.

어두운 방안에서 희미한 소리가 났는데도, 잘못 들었거나 마당을 돌아다니는 고양이의 발소리겠지 생각하고,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앤젤리너‥‥." 어깨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상상의 세계에서 되돌려진 앤지는 전신이 얼어붙는 듯했다. "크리슬러한테서, 당신은 식당에 내려올 수도 없을 만큼 기분이 나쁘다고 들었는테‥‥ 내일 아침엔 아마 당신이 일어나기 전에 섬을 떠나게 될 것 같아서, 이번의 병은 진짠지 꾀병인지를 확인하러 왔어."

엔지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의자에서 일어나 그를 쳐다보았다. 조소를 띠고 있는 입매, 가늘게 뜬 눈, 무엇을 물어보고 싶은 듯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는 호박색의 눈동자, 검은 실크 가운 밑에서 파도치고 있는 근육은, 가운 밑에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목에는 골드 체인이 번쩍이고, 깃 사이로는 짙은 가슴털이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그 빈틈없는 모습은 영양이 충분한 털빛이 좋은 고양이를 연상케 했다-식탁은 충분히 채워지고 있는데도, 매끼의 먹이를 간신히 언어 먹으며 근근이 살던 시절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고양이.

"병이 나지는 않았지만 피로해요." 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앤지는, 늠름한 그에게서 조금 물러섰다.

"당분간 만날 수 없게 되는 마지막 밤을 남편과 함께 지낼 수도 없을 만큼 피로한가?" 밝은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그는 가운의 포켓에 깊이 찔러넣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실러가 있기 때문에 나는 없어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해서‥‥." 여기서 앤지는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빠른 말로 덧붙었다. "하지만 당신에게 선물이 있어요. 이 카리오스 섬을 상기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뜻밖의 말에 놀란, 타잔은 손바닥에 작은 나비가 얹어졌는데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난생 처음 선물을 받은 아이가, 금세 빼앗길까봐 불안해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듯이.

"이것은 나를 위해 산 거야?" 그 나비 날개의 라인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여 갔다.

"어째서 그렇게 깜짝 놀라시죠?" 앤지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시장에서 산 싸구려예요, 당신이 감동하시던 저 아름다운 나비들을 본떠서 만든 것이에요. 번거로워지면 간단하게 부숴 버려도 되고, 근사한 진짜 나비들이 날아오거든 내버려도 괜찮아요."

태연을 유지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마지막의 한마디에는 그만 비꼬는 투가 담겨서 자칫 비난하는 말로 들렸을 수도 있음을 생각하고 앤지는 아찔했다.

"앤젤리너‥‥?" 하고 부르며 타잔이 다가오자 얼른 몸을 피한 앤지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가 없어서 얼굴을 딴데로 돌렸다.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처음인데. 눈이 안 보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속고 있는지 어떤지를 판단하기란 어려운 거야. 말해 주지 않겠나, 에리카?" 그는 볼의 근육만 실룩실룩 움직일 뿐이지, 머리도 몸도 다 정지한 채였다. "만약 생각했던 대로 일이 처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지? 만약 메스가 의사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런 바보 같은‥‥ 타잔이 고용하고 있는 변호사가, 간단한 이혼 소송 따위를 실수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앤지는 거기까지 염려하고 있는 타잔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어, 당황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손해 보는 것이 걱정된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우수한 분에게 부탁하면 되잖아요." 하고 앤지는 그의 곁올 떠났으나, 비단 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향수의 향기로 그녀가 어디에 있는가는 금세 탄로나고 말았다. 타장은 갑자기 달려들어 앤지의 어깨를 꽉 잡았다.

"나의 눈이 부자유하기 때문에 싫어서 피하고 있는 거야. 앤젤리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하고는 있었지만. 사실대로 말해 봐요. 동정해서 호의를 베풀고 있었던 것뿐이었나? 어서 대답하라구." 하며 타잔은 앤지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싫으면 싫다고 솔직하게 말해."

난폭하게 흔드는 바람에, 앤지는 여태까지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냉정을 잃고 말았다. 그의 가슴에 뛰어들어 슬픔을 모조리 쏟아 버리고 싶은 욕구에 끌렸지만, 타잔과 실러의 키스신과, 두 사람이 한께 섬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의 괴로움이, 그런 심정에 겨우 브레이크를 걸었다.

앤지는 그가 던진, 본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수단에 매달려 흐느껴 울면서 말했다.

"그래요, 맞아요. 당신의 눈이 안 보이기 때문에 싫어졌어요." 앤지는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히스테릭하게 두들기면서, 거짓말이라고 자백해 버리고 싶은 마음과 싸웠다. "손으로 더듬어서 나를 만지는 것이 싫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14

한여름이어서, 저택 주변의 정원은 싱그러운 푸르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낮게 깔리고, 나뭇잎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연못의 수면에는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수면에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앤지는 뜨개질을 시작한 숄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의자에 기대어 멍하니 공상에 잠기고 있었다. 타잔이 떠나고부터 앤지는 늘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편지도 갈겨 쓴 정도의 엽서도 오지 않은 채, 타잔이 섬을 떠난 지 3개월 가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뱃속의 아기를 위해서라도 울적해 하지 말고 느긋한 마음으로 있으려고, 바삐 손을 놀려서 아기의 것을 뜨거나, 구식 미싱으로 간단한 선드레스를 만들거나 했다.

날짜가 지남에 따라 젊은 안주인이 아기 엄마가 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되자, 크리슬러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앤지는 눈을 간은 채, 고뇌를 감추고 온화한 얼굴로 태양을 항해 쳐들었다. 낙낙하게 만든 스모크를 입고 앉아 있으면, 그다지 배가 눈에 띄지 않아서, 임신한 몸같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어서면 벌써 꽤 배가 부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앤지는 매일 충분히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영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는, 아빠가 태어나고 자란 조국 그리스의 신선한 공기와 따뜻한 햇살을 듬뿍 흡수시키고 싶어, 정원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자갈을 밟는 발소리가 들려와, 앤지는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앤지의 임신한 소식이 모두에게 전해졌을 때부터, 타잔이 집을 비운 동안 그녀를 위험에서 지키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라도 된다는 듯이, 니코스는 이제까지 해왔던 것 이상으로 자상하게 염려해 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마실 것을 가져올까, 하고 생각하며 앤지가 무거운 눈을 뜨자, 밀크가 든 글라스와 나무열매에 벌꿀을 듬뿍 쳐서 만든 과자가 담긴 쟁반이 눈에 띄었다.

"어서 많이 드십시오." 하고 니코스는 미소 지으며, 앤지의 손이 닿는 곳에 놓인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내 앞으로의 편지, 아직 오지 않았나요?"

니코스에개 있어서는 이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날이 갈수록 더 괴로워지고 있었다.

"아직입니다요." 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나서, 앤지의 눈동자의 그늘을 조금이라도 밝게 해주려고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수평선 부근에, 이 섬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은 배가 보이니, 어쩌면‥‥." 하고, 희망을 갖도록 말하고는, 다만 너무 기대해서도 안 된다는 듯 어깨를 추슬렀다. 앤지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눈에 눈물이 번지고 있는 것을 알아채자, 니코스는 타잔을 원망하면서, 어떻게든 그럴싸한 이유로 그녀를 위로하려 했다.

"주인님이 입원하고 계시는 사이에, 일이 잔뜩 쌓인 것이 틀림없습니다요. 그것을 하나하나 처리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제 곧 돌아오실 거라 생각합니다요. 그렇게 오래 섬을 비우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요."

"얼마간 영원하고 있었죠, 니코스?" 앤지는 불안한 손으로 글라스를 집어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몇 주일이나 입원하고 계셨습니다." 니코스는 괴로운 추억이 되살아났는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주일이나 치료받고 계신 동안 의사선생님은,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는 격려해 주셨지만, 볼 수 있게 된다는 보장은 한 번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치료를 받는 동안 주인님은 아픔도 참고 아프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마는, 그것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언제나 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처럼 괴로웠던 각막 이식이 실패로 끝나자, 희망을 완전히 버리시고 맹인으로서 인생을 보내시기를 결심하셨습니다."

"의사선생님은 확실히 희망이 없다고 말씀하셨나요?" 하고 앤지는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의사선생님은 아직 행해지지 않았던 새로운 방법으로 재수술을 해보고 싶다고 하셨지만‥‥ 주인님은 거절하셨습니다. " 니코스는 슬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이식 수술에는 마음이 없으신 것 같았습니다. 타인의 눈을 얻는 일에는 저항을 느끼시는 모양이었습니다."

"타잔은 자신이 선택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군요." 하고, 앤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바로 그래요." 앤지의 말을 듣고, 니코스도 맞장구를 쳤다. "자신의 생활방식을 혼자서 결정하시고 고립된 세계에 틀어박히고 만 겁니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을 아시게 된다면 주인님도 틀림없이 생각이 달라지실 것입니다."

앤지는 인제 곧, 자기는 안주인 마님이 아니라는 것을 어차피 니코스에게도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지금은 그런 마음이 내키지 않아, 피로하다는 듯이 의자 등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니코스는 재치 있고 생각이 세심한 데까지 미쳤다.

"편히 쉬도록 하세요. 아까 그 배가 지금쯤 선창에 닿았을 테니까, 만약 편지라도 와 있으면 즉시 가져오겠습니다."

꾸벅꾸벅 졸며 30분 가까이 지났을까, 또 밖의 자갈길을 걷는 소리가 들려와서, 니코스가 편지라도 가져오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앤지는 기대에 가슴을 부풀리며 눈을 떴다. 그러나 태양을 등지고 서 있는 사람은 무척 장신이어서, 땅딸막한 니코스를 잘못 본 것 같지도 않았다.

"타잔‥‥!" 하고, 앤지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나비가 입술을 스치고 가듯이 살짝 중얼거렸다. 선글라스를 쓴 그의 얼굴은 섬을 떠나던 때보다 훨씬 혈색이 나빴으며,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타잔은 앤지의 곁으로 가까이 왔으나, 좀처럼 입을 열려 하지 않았고, 긴장된 험한 표정으로 검은 렌즈의 저쪽에서, 앤지의 얼굴을 살피듯이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앤젤리너." 그는 상당히 시간을 두었다가, 간신히 쉰 목소리로 불렀다. "이제 돌아왔어. 여행의 결과를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어떻게 되었는지도 흥미가 없는 건가?"

타잔의 날카로운 목소리의 여운은 앤지를 괴로운 현실로 되돌아오게 했다. 앤지는 동상처럼 몸을 굳히고 고개를 숙인 채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물어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언제든지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하시는 분이잖아요. 이혼의 절차를 밟으셨다는 것은 물어 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에요."

"이혼‥‥?" 하고, 타잔은 갑자기 앤지 옆에 무릎을 꿇고 선글라스를 벗더니, 호박색의 눈동자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이야, 앤젤리너?"

"실러한테서 다 들었어요. 정식으로 나와 헤어지고 실러와 결혼할 수 있도록 그 절차를 밟기 위해 떠나신다는 말을 들었어요." 하고 말한 앤지는, 그의 무서운 형상에 깜짝 놀랐다.

"빌어먹을, 형편없잖아!" 하면서 꽉 쥔 그의 주먹이 노여움으로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장난을 치는 게 아닌가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설마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일 줄이야."

앤지는 멍하니, 이건 꿈이니까 때가 되면 니코스가 달려와서 흔들어 깨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타잔에게 어깨를 세게 잡혔을 때, 그 힘은 현실이었으며, 몸 속 깊숙이에서 치솟아 올라온 전율은 미칠 만큼 그리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섬을 떠났었죠?" 앤지는 목멘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가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무엇이었죠?"

타잔의 눈동자에서 번뜩임이 사라지더니, 잠시 망설인 뒤에 그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의사의 메스 이야기를 한 것을 기억하고 있겠지, 앤젤리너‥‥?" 하고 앤지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그녀가 입을 다문 채 있자, 침착한 목소리로 계속 이야기했다. "다시 한번 눈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들어가려고 결심했던 거야. 물론 프리실러에게는 얘기해 두었지. 의사는 시력 회복을 위한 최후의 도박이라고 말했었어. 그때까지 몇 번이나 수술을 받아 왔었지만, 계속 실패해서 단념하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만약 눈이 보이게 된다면 당신이 나를 피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다시 한번 수술을 받아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붕대를 감고 4일 동안은, 수술은 또 실패하고 말았구나 하고 생각했었지. 의사가, 눈의 수술은 금세 결과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격려해 주었지만 말이야. 그러나 정말 차차로 희미한 상이 보이게 되었어. 제일 먼저 눈에 비친 것은, 작은 오너키스의 나비들이었어. 수술 받을 때도 부적으로써 한시도 몸에서 떼지 않고 지니고 있었단 말이야."

앤지는 보이지 않는 줄로만 생각하고 그의 눈을 예사로 쳐다보고 있었으나, 사정을 알게 되자 금세 볼이 빨개졌다.

"그럼 인제 보이는군요!" 앤지는 수줍음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똑똑히 보여." 꼼짝 않고 긴장하고 있는 앤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나서 그는 다정하게 물었다. "무엇이 보이는지 말해 볼까? 상냥하고 귀여운 목소리에 꼭 알맞은 얼굴이 보여. 비둘기 같은 잿빛의 멋진 눈동자, 그리고 또 입술도‥‥." 하고 말하더니, 타잔은 갑자기 평정을 잃었다.

", 그 입술. 앤젤리너!" 하더니, 힘차게 앤지의 몸을 꼭 껴안았다. "몇 번이나 이 달콤한 키스를 꿈꾸었을까‥‥ 눈이 뜨일 때마다 얼마나 괴로운 느낌이었던가‥‥." 타잔은 열에 들떠서 앤지를 껴안고, 그 동안의 몫을 한꺼번에 되찾으려는 듯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앤지의 몸에도 뜨거운 것이 뛰어 놀기 시작하여, 그대로 욕망의 물결에 휩쓸릴 것같이 되었을 때, 타잔은 갑자기 팔의 힘을 풀고 앤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사랑하고 있어, 에리카." 하고 숨을 헐떡이면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타잔." 앤지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의 사랑을 믿기 위해서는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얼마 전까지는 당신은 실러를 사랑하고 있었잖아요? 섬을 떠나기 전날, 두 사람이 키스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말았거든요."

타잔은 앤지의 작은 턱을 양손으로 감쌌다.

"당신으로 착각했던 거야." 그는 슬픈 듯한 눈을 하고 말했다. "당신과 말다툼을 한 직후였지? 그 향수 냄새하며, 볼에 키스를 받았을 때, 당신이 화해하러 온 줄로 생각했었지." 하고, 잠깐 중단하더니 딱딱한 말투로 변했다. "한 번도 프리실러를 사랑한 적은 없었어. 바보 같은 족속들이, 그녀는 그리스 신화의 세이렌처럼 어떤 남자라도 사로잡고 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거기에 장단을 맞춰 주거나, 재미로 그녀를 우쭐하게 만든 적은 있었지만."

"그렇지만 몇 통이나 편지를 쓰셨잖아요." 앤지는 아직도 의문이 남아 있었다. "실러가 당신과의 약혼을 파기했을 때, 협박했다고 했잖아요?"

"조금 따끔한 맛을 보여 주었지." 하고, 그는 그리스인다운 위엄을 보였다. "그렇게도 매정하게 거절하는 걸 보니, 만약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다면 얼마나 쇼크를 받았을까, 하고 생각하니 오싹해 지더군. 그래서 미스 로즈가 공항에 왔다는 소식을 받았을 때는, 내 쪽에서 당황하고 말았다니까."

앤지는 표정을 부드럽게 하고, 용서를 빌듯이 발돋움을 하고 서서 그에게 키스를 했다. 타잔의 손이 그녀의 허리로 뻗어 오더니, 갑자기 얼어붙은 것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전과는 느낌이 다른데." 그는 미간을 모으며 눈을 감고 앤지의 몸을 손으로 더듬었다. 마침내 번쩍 눈을 뜨고 수줍어하고 있는 앤지의 얼굴을 파고들 듯이 내려다보았다. <나의 아내는 올리브처럼 다산해서, 테이블을 에워쌀 만큼 많은 아기를 낳을 거야.> 하고 타잔은 언젠가의 말을 중얼거리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앤지를 팔 안에 껴안았다. 그러고는 "! 사랑하는 앤젤리너." 하며 앤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괴로운 마음을 갖게 한 나를 용서해 줘. 용서해 준다면, 평생을 두고 보답할 것을 맹세하겠어."

"그러지 않아도 좋아요, 타잔." 앤지는 감정이 북받쳐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토록 능숙하게 여성을 사랑할 수 있는 당신이, 내게 보답하기 위해 평생을 허비하다니, 그건 시간 낭비잖아요."

한순간 타잔의 몸이 긴장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으로 더듬어도 인제는 걱정 없다는 뜻인가?"

애정 어린 목소리였으나 그의 괴로움은 똑똑히 전해져 왔다. 그 한마디가 그 동안 타잔을 그렇게도 괴롭히고 있었다는 것을 알자, 앤지는 견딜 수 없어 그의 몸을 힘껏 껴안았다.

"거짓말이었어요, 타잔. 그런 말은, 거짓말‥‥."

"그럼 당신은 두 가지나 거짓말을 한 셈이야." 하고 타잔이 말하자, 앤지는 확 얼굴을 들었지만, 그의 눈은 다정했다. "이렇게도 아름다운 얼굴인데, 보기 흉한 듯한 말을 해서‥‥ 언젠가 니코스가 당신을, 장래의 아름다움을 약속받은 장미의 꽃봉오리에다 비유한 적이 있었거든. 그때 나는 달콤한 향기로밖에 당신을 알 수는 없었지만, 하지만 이제는‥‥." 하고 말하는, 당장에라도 이글이글 타오를 것 같은 타잔의 불꽃에 비추어 밝혀져서, 앤지의 볼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름답게 피어난 앤젤리너 로즈의 모든 것에 열중하고 있다니까." 하며, 타잔은 자신의 행복감에 도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