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 길들이기
Stephanie James
1
세레나 골드웰은 시원한 백포도주를 음미하면서 갈색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술잔을 건네준 인물을 똑바로 쏘아봤다.
"이렇게 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요. 세레나는 단호했다.
"나한테 흥미를 쏟으시는 까닭은 알고 있지만 그다지 달갑지는 않군요."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손을 흔든 그녀의 눈에 순간 작은 금빛 불꽃이 타올랐다.
"그 멋진 붉은 머리 미인에게 돌아가시는 게 어때요? 오늘밤의 파트너잖아요. 내 일은 상관하지말아 주세요. 함께 어울려도 즐겁지도 않고, 넋을 잃을 만한 매력도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와인은 고마웠어요. 내 잔이 비었다는 걸 멀리서 알아보시다니, 눈이 매우 좋으신가 봐요!" 세레나의 입술이 빈정거리듯 움직이더니 곧 도전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요크 서덜랜드의 검은 테 안경 속에서 검고 진한 눈썹이 꿈틀거리며 올라가고 깐깐한 느낌을 주는 입 언저리가 뒤틀렸다. 그것이 그녀의 속마음을 민감하게 알아차린 웃음인지 아니면 비웃음인지 세레나로서는 분간할 수 없었다.
"리처드 앤더슨을 때려잡고 말겠소." 요크이 깊이 있는 목소리가 잔잔하게 경고했다.
그것은 밀림에 사는 재규어의 힘과 오만스런 위협을 생각나게 하는 목소리였다.
"당신처럼 지는 것을 싫어하는 여자가 왜 결과가 뻔한 그 녀석과 손을 끊지 않는 거요?" 세레나는 그의 결코 꺾일 것 같지 않는 힘에 대항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토록 노골적인 공격과 마주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리처드와 사업상 경쟁관계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서덜랜드 씨." 세레나는 딱 잘라서 대꾸했다. "그렇지만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가령 상관이 있다 하더라도 공평한 제삼자가 본다면 내가 이미 승자 편에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테지요. 어느 편에 있든 나한테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서덜랜드 주식회사가 지금 단계에서 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니까요.""우리 회사가 앤더슨사보다 작기 때문이오? 이봐요. 작기 때문에 우리 회사는 더욱 성장할 수 있소. 세레나. 보다 의욕적으로 일을 하고 더욱 허리띠를 졸라맬 수 있소. 앤더슨은 그의 아버지처럼 회사를 운영하지 못해. 팔도 머리도 재치도 없으니까 말이오. 나는---" 거기서 요크는 말을 자제하려는 듯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서덜랜드 씨, 그렇게 의욕이 넘치면 저쪽 테이블에서 카나페라도 잡수면 어때요? 난 이만 실례하겠어요......." 대답도 안 기다리고 세레나는 발끝을 빙글 돌려 우아하게 차려입은 칵테일 손님들이 떠들썩하게 몰려 있는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목적은 오직 하나, 담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리처드 앤더슨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레나는 자기를 뒤쫓아 오는 서덜랜드의 회록색 눈동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더구나 세레나는 그 눈동자 속에 있는 의지력도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다. 요크 서덜랜드라는 사람은 분명히 승부에 전력을 다 쏟는 인간이었다.
심리학적으로 재미있는 타입이야....
세레나는 심술궂은 마음으로 생각했다. 3주 동안에 요크와 만난 것은 두세 번이지만 세레나는 처음부터 그라는 사람의 본질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다. 요크 서덜랜드는 세상을 지극히 간단하고 단순한 개념 -승자와 패자- 으로 보고 있었고 자기가 어느 쪽 그룹에 속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도 갖고 있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승자가 갖는 날카로운 야성의 본능을 완벽하게 갖춘 사나이였다.
매력이 없는 것도 아니야. 처음 떠오른 것도 아닌 이 생각을 가슴에 안고 세레나는 방 끝으로 다가가서 벽을 가린 금단의 장막 곁에 섰다. 그러나 그것은 약탈자에게서 풍기는 위험한 죽음의 매력일 거야 - 세레나는 오싹했다.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을 뿌리쳐버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 사람은 재규어와 같은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세레나가 들은 바로는 요크는 37살.
그의 건축회사는 최근에 급속하게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 캘리포니아 주 파사디나에 본거지를 둔 서덜랜드 주식회사는 차곡차곡 기반을 다져 이제는 로스앤젤레스권 밖에까지 뻗어 나가고 있었다. 웨스트코스트 일대의 입찰 경쟁에서 우위를 지키고 있는 요크의 회사가 이대로 뻗어 간다면 당장이라도 전국적인 규모가 될 것이다.
요크 서덜랜드의 회사는 다국적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전진해 갈 것이라고 세레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자기가 휘두르는 힘의 앞길을 뭔가 저항할 수 없는 것이 가로막지 않는 한영토를 계속 넓혀 갈 게 틀림없어. 서덜랜드를 위해서 그 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 나타나기를 바랄 뿐이야. 세레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사람은 우아하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세련된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다.
도리를 아는 겸손함은 없으면서도 인생의 여러 문제를 대할 때는 충분히 어깨 힘을 빼고 느긋하게 몸을 사린다. 이런 것이 기본적인 힘과 어울려서 요크 서덜랜드라는 인간을 초연한 매력의 주인공 이상의 존재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거스르기 어려운 인물이다!
세레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뒤 화사하게 차려입은 남녀에게 눈길을 보냈다. 호화롭게 장식된 무도회장은 은은한 샹들리에 불빛에 감싸여 있고 그 밑에 모인 사치스런 옷차림의 손님들은 세상 걱정은 모두 잊은 듯 즐거워 보였다. 오늘 밤 파티는 예술 활동을 위해서 기금을 설립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는 파사디나의 예술단체가 주최하는 것이었다. 리처드가 세레나를 동반한 것은 당연했고 요크 서덜랜드가 뭔가의 줄을 이용해서 여기가지 쫓아온 것도 당연했다.
세레나는 무엇인가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동물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위험이 자신의 주위에서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요크와 만난 것은 겨우 두세 차례. 그것도 짧은 동안이었는데......
내가 필요한 사람은 리처드란 말야- 세레나는 자신을 타일렀으나 매끈한 자태의 서덜랜드 모습이 집요하게 마음 한끝을 잡고 있었다.
요크 서덜랜드에게는 이렇다 할 핸섬한 곳은 없었으나 그 점에 대해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외모에 대해서 그가 신경을 썼다면 지금 쓰고 있는 묵직한 안경 대신 콘택트렌즈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진한 검은 머리는 옛것을 고집하는 낡은 이발소가 아니라 현대적인 헤어스타일리스트의 손으로 손질을 하게 했을 것이다. 그의 매력은 온몸에서 풍기는 권력, 능력, 성공의 향취였다. 이 사람한테는 약한 곳은 아무데도 없다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렇다. 제아무리 어떤 일이 닥쳐온다 한들 살아남을 수 있는 사나이다. 거칠게 다듬어진 얼굴, 힘이 넘치는 턱, 독단적인 코의 선, 강인한 광대뼈, 어디를 보아도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긋나긋하고 강인한 몸놀림에는 우아함이 배어 있었다. 그것이 요크의 흠잡을 수 없는 스타일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있었다.
오늘밤의 요크는 몸에 잘 맞는 검은 양복, 그리고 멋있게 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순백의 포말셔츠 차림이었다. 완벽한 정장이었다.
모든 것이 누덕누덕하고 초현대적인 남캘리포니아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요크의 인상을 강하게 했다. 그는 공작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한 마리의 재규어였다.
이런 사람이 세레나를 선택할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요즘 한 달간 리처드 앤더슨과 사귀어 오면서 리처드와 요크 사이에 적대감과 라이벌 의식이 있다는 것을 세레나는 눈치 채고 있었다. 두 사람의 회사가 현재 경쟁을 벌이고 있는 토목공사의 계약은 이익이 큰 것이지만 두 사람이 상대방에게 품고 있는 증오감은 그러한 흔해빠진 사업상의 경쟁심보다는 훨씬 뿌리 깊다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세레나는 알 수 있었다. 좋건 싫건 간에 리처드와 데이트를 계속하는 한, 세레나는 요크 서덜랜드가 걸어오는 복잡한 싸움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요크에게 세레나는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의 하나인 것이다.
첫 대면 때부터 요크가 자기를 리처드 앤더슨한테서 뺏고 싶어 한다고 세레나는 느꼈다. 그것은 퍽 유치한 전법이었고, 장본인인 여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재미없는 일이었다. 요크는 세레나를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저 리처드를 골탕먹이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남자를 파탄시킬 만큼의 미모를 갖고 있기 때문에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레나도 그 점은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31살이나 된 처지에 어떤 남자도 저항하지 못할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환상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어.
세레나는 마음속으로 미소 지었다. 갈색 눈동자가 잠시 빛났다.
'그저 웬만큼 매력적'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까. 자신에 대해서 관대한 마음이 되었을 때 세레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 조심스런 형용사마저도 콘택트렌즈, 여고시절에 2년동안 끼고 있던 치열교정기. 다이어트. 고생 끝에 익힌 센스 따위의 덕분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세레나는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놀랄 만큼 잘 활용하고 있었다. 지성과 유머에 넘치는 생생한 표정이 그녀 자신이 깨닫고 있는 이상으로 생김새에서 모자란 점을 보완하고 있었다. 지성과 유머가 하나가 되어 단순한 아름다움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보다 미묘한 곳에서 사람을 끌었다. 또 약간 눈꼬리가 올라간 금빛으로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 따뜻하고 화사한 웃음을 보내는 입 언저리가 매력을 더해 주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밤색 머리는 심플한 커트스타일로 그녀가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렸다. 세레나는 짙고 선명한 빛깔이 이 밤색 머리와 어우러지는 효과를 한껏 살려서 그런 색상의 옷을 즐겨 입었다. 오늘밤의 이브닝드레스는 바로 그 좋은 본보기였다.
진한 노랑 드레스는 밤색 머리에 잘 어울렸다. 프릴을 달고 크게 파인 목선, 긴 팔소매에다 복사뼈까지 내려오는 날씬한 드레스였다.
화사한 금빛 샌들, 가슴께와 귀의 섬세한 금빛 액세서리가 선명한 황색 라인을 완벽하게 마무리해 주고 있고, 또 아무렇게나 걸친 실크 숄의 청보라와 금색이 한층 아름다움을 살려 주고 있었다. 자그마한 가슴, 가는 허리, 동그스름한 엉덩이 선을 따라서 드레스는 가볍게 흘러내려 있었다. 다행히 160센티라는 키는 몸의 선을 유지하는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세레나는 운동을 일과로 삼는 타입은 아니었다. 대체적으로 일과니 규율이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일에 머리 쓰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인생은 즐겁고 예기치 않은 일로 넘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런 성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사람들의 울타리가 잠시 갈라지고 리처드의 금발이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리처드는 세레나의 시선을 알아보고는 미소를 띠며 방안을 가로질러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좀처럼 가까이 오질 못했다. 이 사회의 저명인사인 그를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태 찾고 있었소." 리처드는 곁으로 와서 팔을 잡으며 말했다.
"자아, 여기서 빠져나갑시다." 리처드는 요크와는 거의 같은 또래, 아마도 한 살 정도 아래일 성싶었다. 둘 다 모두 젊은 나이에 건축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통점은 그것뿐이었다.
검은 머리의 요크 서덜랜드가 지나칠 만큼 공격적인데 비해서 금발의 리처드 앤더슨은 귀족적인 인물이었다. 파사디나에서도 이름난 유복한 가문 출신의 그에게는 곱게 자란 흔적과 교양이 나타나 있었다. 요크한테서 느껴지는 거친 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리처드는 2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앤더슨사를 물려받았다.
요크는 자수성가해서 회사를 일으켜 세운 사람이었다. 전혀 자라온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세레나는 요크 서덜랜드보다는 리처드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당신 친구가 매복하고 있던데요." 파티장을 빠져나와서 묵직하고 오래된 호텔의 옛스러운 장식을 한 로비로 들어가서 세레나는 스스럼없이 그에게 말했다.
샌 가브리엘 발레를 내려다보는 이 장중한 언덕 위의 건물은 파사다나의 상징적인 건물이었다.
"당신을 혼자 있도록 한 게 잘못이야. 뭔가 곤란하게 하지는 않았소?"
"아니요. 당신한테 뭔가 원한이라도 있어요. 그 사람? 아니면 경쟁 상대한테는 언제나 그런 식인가요?"
"경쟁하게 되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모양이야. 아무튼 이기고 싶어 하는 사내니까 말이오" 테라스로 나가면서 리처드는 감정 없이 말했다.
2
발밑의 어둠 속에는 기하학적 디자인으로 정연하게 짜여 전 정원이 누워 있었으나 그 저편에는 로스앤젤레스를 이루고 있는 무수한 거리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현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 겨울이었지만 이곳 캘리포니아는 벌써 봄이 완연했다. 밤바람이 살을 찔렀으나 세레나는 춥지 않았다.
"당신은 그 사람을.." 할 말을 찾느라 그녀는 말을 더듬었으나 결국 생각한 그대로의 단어를 썼다.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리처드는 웃으면서 세레나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조금도, 그가 뭘 할 수 있겠소? 요전에 우리가 따냈기 때문에 또 계약을 나한테 뺏길 거라고 생각하고 좀 흥분하고 있는 거지. 틀림없이.. 서덜랜드는 그 계약이 자기에게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었던 거요. 자기 회사의 규모는 작고, 앤더슨사가 줄곧 실적을 올리고 있는 것이 참을 수가 없는 거겠지. 그는 밑바닥을 헤매고 있는데 우리 회사는 번창일로니, 그래서 안달이 난 거라구."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밑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한테 보이는 냉담한 태도를 보이며 리처드는 자만에 차서 어깨를 움찔했다.
"그 사람, 뭔가 시끄러운 일을 꾸미려는 건 아닐까요, 리처드?" 세레나는 신중하게 어휘를 선택했다.
그 시끄러운 것이 리처드에게 벅찬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 싫었고 자기자신의 프라이드 때문에 요크 서덜랜드의 존재가 그녀 자신에게도 다루기 힘든 것이라고 말하기는 싫었다. 리처드가 옳아. 실제로 그 사람이 뭘 할수 있단 말야? 그런데도 마음속 깊이 감추어진 여자의 직감으로 요크는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요즘 몇 주 동안 그 사람이 그녀 안에 불러일으킨 위험신호는 지워지지 않았다.
냉정하게 되짚어 보면 지금까지 요크와 몇 차례 만난 것은 전혀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우연한 것이었고 그런 위험한 것이 있을 까닭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레나는 요크의 제법 애를 쓰는 점잖은 말투의 그늘에 숨어 있는 음모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밤 요크는 본성을 드러냈다. 그녀를 리처드 앤더슨한테서 뺏고 싶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가 뭘 할수 있단 말이오?" 리처드가 달랬다.
"그렇게 무리한 짓은 않을 거요. 무슨 일을 하든 평판은 중요한 거니까. 그리고 오늘밤 여기 있는 사람들과 계속해서 사귈 생각이라면 신중하게 행동할 거요.""그래서 생각났는데,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걸까요? 도무지 예술 활동의 후원자로는 안 보이던데요. 수집가라는 애기도, 이런 기금창립모임에서 기부했다는 애기도 들은 일이 없어요." 그리고 우리가 오리란 것도 계산하고 있었던 거야. 세레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요크 서덜랜드에게는 입신출세의 야망에 불타는 야심가라는 평을 달기는 어려웠다. 이 말에서는 거의 노골적인 자포자기와 빌붙어 아첨하는 태도가 상상되지만 요크한테는 그런 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세레나는 자기 직감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요크의 행동을 그런 간단한 말로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밤 여기 온 것은 요크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출세 같은 것과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입신출세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괴롭혀서 시간 낭비할 수가 있을까! 나는 요크와 마찬가지로 이 유복하고 사회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방인이나 다름없어. 그래 그와 마찬가지야.
"그 사내의 일은 걱정하지 마, 세레나." 리처드가 냉정하게 말했다. "귀찮게 굴면 내가 해치울 테니." 그의 말투가 오만에 가까운 확신에 차 있어서 세레나는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옆에 있는 핸섬한 청년한테 미소를 보냈다.
"그래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야 뻔할 테니까요." "아무것도 못해." 리처드는 유혹적인 표정으로 세레나를 껴안았다. "그 녀석이 당신한테 치근덕거렸다고 해도 나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을 거요."
"어머, 정말 고맙군요. 조금은 질투하는 것이 멋있는데!" 세레나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 녀석은 당신한테 안 어울려." 리처드는 단언하고 나서 세레나의 얼굴 위로 고개를 숙였다. "한번만 보면 금방 알 수 있어." 리처드의 품에 안겨 막힌 입술 사이로 세레나는 동의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래,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 요크 서덜랜드는 나하고 어울리는 타입이 아니야. 좀 색다른 매력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야! 리처드 앤더슨의 품은 항상 기분이 좋았다. 리처드는 로맨틱한 사랑의 술수에 재간이 있는 매력적인 남자였다. 세레나는 그의 포옹에 기쁨을 느끼고 있었으나 이 옛날이야기 같은 사랑을 진짜 연애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 들지 않았다.
리처드의 요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침실로의 초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리처드가 두 사람 사이의 주도권을 자기에게 맡긴 것에 세레나는 감사하고 있었다. 그런 자상함과 섬세함이야말로 리처드의 성격 가운데 세레나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돌아가는 게 좋겠소." 마지못해 그녀에게서 떨어져서 리처드는 한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당신이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바꾼다면 밤새도록이라도 여기 서 있을 수가 있겠는데, 세레나...."
"당신의 예술에 대한 경의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어요." 세레나는 놀리듯이 말했다. "차라리 찬물이라도 끼얹어 주면 좋겠소." 스스럼없는 불평을 털어놓으며 리처드는 세레나를 데리고 로비로 돌아갔다.
세레나는 그럴 듯한 말로 대꾸하려고 고개를 돌렸으나 테라스 저쪽 끝에서 가느다란 사람 그림자가 움직이는 걸 본 순간 말이 막히고 말았다. 관상식물 그늘 어둠 속에 누군가가 엿보고 있었다.
이미 그림자도 형태도 안 보였으나 세레나는 직감했다.
요크 서덜랜드였다.
3
요크 서덜랜드였다. 무슨 남자가 저럴까! 이런 식으로 몰래 뒤를 따라서 도대체 뭘 하겠다는 말인가? 나는 리처드 앤더슨의 약점이랄 것도 없는데, 나를 리처드한테서 뺏는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짓이 아닌가? 다음 순간 세레나는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심리적인 승리라는 것이로군. 리처드는 교제범위도 넓고 다른 여자를 금방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흡족할 만한 승리는 아니겠지만 한방은 한방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쓰여지는 도구 같은 건 아니야. 리처드를 흉내내서 요크 서덜랜드쯤은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겠어.
두 사람이 화려한 무도회장으로 들어선 순간 리처드는 다시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이번에는 오늘밤 파티의 주최자인 단체의 장로 격인 멤버가 상대였다.
"잠깐 괜찮겠소?" 뚱뚱한 부인한테 팔을 잡혀서 끌려가면서 리처드는 얼굴을 찌푸리고 미안한 듯 말했다.
"물론이죠." 세레나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오늘밤 파티는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한 사교적인 것이 아니라 비지니스라고 세레나는 생각했다. 그는 기부금을 모은다는 명목으로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엇다. 리처드한테는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다시 뷔페 테이블까지 갈까말까 생각하고 있는데 요크가 불쑥 옆에 나타났다.
"춤추지 않겠소, 세레나?" 요크는 잔잔한 말씨로 물었다.
당연히 좋은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표정이었다. 세레나는 요염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이런 무례한 태도에는 무뚝뚝한 대답이 제일이다.
"싫어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세레나는 따끔하게 대답했다. 요크의 험상궂은 입 언저리가 꿈틀했다.
"춤 한 번 춘다고 해서 별일이야 있겠소?"
"절대로 단념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물론." 이번에는 요크가 자기 차례인 양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세레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확대경으로 귀한 표본이라도 보듯 요크를 응시했다. 두 사람 사이에 도전적인 공기가 팽팽해지고, 세레나를 초조하게 하고 화가 나게 했다.
"당신하고 거래를 하고 싶군요." 세레나는 조용한 말투로 제안했다.
요크는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말해 봐요."
"왜 나한테 따라붙는지 사실대로 납득이 가도록 말해 준다면 당신과 한 곡 정도는 출 수 있어요." 세레나는 대담한 시선을 보내며 조용히 말했다.
"알았소." 요크는 그렇게 대답하고 팔을 뻗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노란 실크를 통해서 전해지는 남자 손의 따뜻함에 세레나는 숨을 삼켰다.
"먼저 춤을 춥시다." 요크는 태연하게 말했다.
"안돼요." 세레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설명이 먼저죠." 안경 속에서 길고 검은 속눈썹이 움직여 생각에 잠긴 그의 회록색 눈동자를 감췄다.
"아무래도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것 같군." 요크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쪽도 상대방이 거래 조건을 이행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따라서 어느 쪽도 행동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어머, 재미있는 거래가 될 뻔했는데." 세레나는 그렇게 대꾸하고 붙잡힌 팔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요크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아마 그럴 거요." 세레나의 팔을 꽉 거머쥔 채, 요크는 걷기 시작했다.
"당신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거지?"
"그럼요." 세레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팔이 아프군요, 서덜랜드 씨." 요크가 성큼 성큼 걸어가는 바람에 대들 수도 없었다.
그런 짓을 하면 큰 소동이 벌어질 것이고 리처드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거역하는 것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요. 그렇게 한다면 아프게는 하지 않을 테니까." 요크는 쌀쌀하게 충고하고 문을 나서서 로비로 향했다.
"당신한테 반항하지 않으면 밟혀죽고 말거예요!" 요크한테 힘없이 끌려나온 일에 벌컥 화가나서 세레나는 물어뜯듯 말했다.
요크는 어느덧 로비를 빠져서 테라스로 향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요크를 말려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그런 일은 없어." 세레나를 끌고 테라스로 나와서 겨우 발을 멈춘 요크는 대꾸했다. "잘못 생각했소." 세레나의 성난 얼굴을 보면서 요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을 짓밟아 죽이다니 천만의 말씀이야. 하고 싶은 일이 산처럼 있는데......당신을 위해서.....당신과 함께........."
초록빛이 서린 눈동자에 퍼진 위험한 반짝임에 세레나는 몸을 떨었다. 어둠이 깃든 테라스는 요크 서덜랜드가 갖는 위협적인 면을 터무니없는 크기로 부풀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지! "당신을 신용할 수 없어요. 서덜랜드 씨." 세레나는 사납게 상대방 눈을 쏘아보면서 거침없이 말했다. "나의 뛰어난 미모에 반했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의 표적이 된 이유는 오직 하나, 리처드를 공격할 도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구요.""그게 춤을 추는 교환조건으로 듣고 싶던 말이었소?" 요크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아니란 말인가요?" 세레나는 이가 근질근질해지는 마음으로 말했다.
"뭐랄까, 보다 근본적인 이유에서 당신이 필요하다고 하면 믿지 못하겠소?" 요크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역습해왔다.
"당연하잖아요! 나는 당신의 타입이 아니고 당신은 나의 타입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럼, 당신은 리처드 앤더슨의 타입이란 말인가?" 요크가 천천히 말했다.
"나와 리처드의 일은 당신한테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세레나는 딱 잘라 말했으나 그 뒤에 안 해도 될 말을 심술궂게 덧붙인 것이 그 분위기를 망치게 하고 말았다.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리처드와 나는 서로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사귀기 시작했고 둘 사이는 당연히 거기서부터 발전된 거예요. 내가 라이벌의 여자니까 뺏으면 통쾌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에요!" "서로 관심이란 뭐요?" 요크가 물었다.
이 바보 같은 대화에 어느 만큼 상대해야 좋을지 모른 채, 그리고 또 어떻게 이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 할지 모른 채 세레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요크를 노려보았다.
"말을 계속하라구." 팽팽한 침묵이 흐르고 요크가 재촉했다.
"리처드 앤더슨과 만나게 된 계기를 말해 봐요."
"예술이에요." 세레나는 간단히 대답했으나 상대방이 같은 취미를 갖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알고 고소했다.
"화가신가?" 요크는 귀찮게 물었다.
"아니요. 그림재료 전문점의 지배인이에요." 세레나는 신중해졌다.
"그래서 어느 날 앤더슨이 붓을 사러 가게에 찾아왔단 말인가?"그 빈정거리는 말투에 세레나는 버럭 화를 냈다.
"나를 놀리면서 즐기는 건가요, 서덜랜드 씨?"
"물론, 아주 즐겁소." 빙글거리며 그가 비아냥거렸다.
"그렇다면 난 갈 테니까 마음껏 즐기시죠!"
세레나는 발끝을 빙글 돌려서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요크의 손은 그녀를 놔주려 하지 않았다.
"기다려 줘, 한 가지만 대답해 주지 않겠소?"
"어째서죠?" 세레나는 되받았다.
"앤더슨의 일을 포함해서 당신의 모든 것에 대해서 관심이 있소.""그러니까 리처드 앤더슨의 모든 것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데 마침 내가 그와 사귀고 있다. 그래서 나한테도 관심이 있단 말이죠?" 노여움 때문에 세레나의 밤색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그래 그런 거였어. 이런 종류의 사람쯤 무섭지 않아, 화가날 뿐이야.
"대충 말한다면 당신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요크는 생각이 있는 듯 말했다.
"내가 말한 것을 부정할 생각인가요? 리처드를 쓰러뜨릴 방법을 찾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목적일 텐데요?" 세레나도 지지 않았다.
"남자란 언제나 여러 가지 목적을 갖는 법이오." 요크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일은 불가능해요.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거죠?"
"아직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소." 요크는 점잖은 말투로 강요했다.
"리처드와의 사이가 가깝게 된 계기 말인가요? 웃기지 말아요, 당신한테 말할 의무 같은 건 없다구요!" 요크는 어느새 그녀의 팔을 풀고 있었다.
"말 못할 이유라도 있는 거요?" 자유롭게 된 세레나의 얼굴에 가늘게 떠오른 승리의 웃음을 보면서 요크는 생각하듯 말했다.
"대답해 주지 않으면 당신을 어깨에 들러 매고 납치해서 이야기할 마음이 생길 때까지 어디엔가 가둬둘 수도 있소." 세레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요크가 내키는 대로 지껄이는 말에 넘어갈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당장은 여기서 도망칠 수도 있을 테지만 로비에서 잡히고 말 것이다.
"묘한 애기지만 그런 짓을 하는 당신 모양이 눈에 선하군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 둘 다 모두 좋은 웃음거리가 되는 건데." 요크는 어깨를 움찔했을 뿐 아무 말도 없었다.
"그렇게 내 대답이 중요한가요?" 세레나는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아아."
거기에 대답이라도 하듯 세레나는 실크로 감싸인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대로 말을 한들 안 될 일도 없잖아. 사실을 알게 되면 리처드 앤더슨과 연애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요크도 깨닫게 될 것이다.
"좋아요, 말해 줄게요." 순간 세레나의 입술에 미소가 스쳤다.
"이런 작은 싸움은 아주 흥미가 있죠."
"작은 싸움이 큰 전쟁이 되는 거요." 요크가 조용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당신 관점에선 그럴테죠. 모두가 승리와 패배라는 단순한 도식을 그리는 건 아니라구요." 세레나는 신랄하게 그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했다.
"당신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해요. 한 달쯤 전에 리처드는 사우스레이크 거리에 새로 세우는 앤더슨사의 빌딩에 장식할 작품을 제작해 달라고 지방의 어떤 화가를 설득하는 중이었어요. 내가 사업상 이 지방의 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누구에겐가 들은 거였죠. 나는 성격이 까다로운 화가와 논리적인 실업가의 말하자면 가교 역활을 한 셈이에요. 교섭을 하는 동안에 리처드와 나는 공통되는 부분이 매우 많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둘다 모두 예술의 세계에 깊이 관계하는 한편으로 비지니스 세계와도 관련이 있었던 거죠. 이뿐이에요."
단순한 질문에 대한 단순한 대답. "그 뒤로 우리는 정기적으로 데이트를 하고 있는 정도예요." 세레나는 흐르듯이 말을 이어갔다.
"알겠소......"
"잘됐군요. 이것으로 내 할 일은 다 했으니까 이만 실례하겠어요. 그럼."
"아직이오." 요크가 세레나를 다시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깨닫기도 전에 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나꿔챘다.
"아직 들을 애기가 많소......"
"적당히 해둬요." 세레나는 화를 냈다. "그리고 오늘밤에는 충분하고 남을 만큼 테라스에 나와 있었어요." "처음 것은 계산에 안 들어가지."
그녀의 화난 얼굴에 매료된 듯 요크는 세레나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잘못된 상대와 함께 있었으니까 말야."
그 말에 세레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노여움은 그녀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다른 감정으로 변해 있었다.
신경말단으로 가느다란 떨림이 퍼졌다. 아니면 또 다른 것. 흥분되어 있다? 끌리고 있다? 늦게나마 세레나는 두 손을 들어 손톱을 요크의 양 어깨에 세우고 반항했다.
남자의 기대감에 타오르는 회록색 눈동자가 세레나의 눈동자를 꼼짝 못하게 했다.
세레나는 순간 이런 사태에 말려든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으나 너무 늦었다.
요크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찾고 있었다.
4
찾는다는 것은 다시없을 정도로 절실한 표현이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세레나는 요크의 검은 이브닝 재킷에 손톱을 단단히 세우고 있었다.
요크의 팔이 단단히 그녀를 감싸 안고 거친 손이 실크 속의 가는 등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다.
등줄기를 미끄러져 내려온 손이 엉덩이에 이르자 다시 세레나의 내부에 떨림이 스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요크의 뜨거운 몸에 껴안겨 있었다.
세레나의 입술 위를 요크의 입술이 관능적으로 돌아다니고 마치 내 것이란 듯 구석구석을 더듬고 압도해갔다.
세레나의 감각은 마비되고 무의식중에 반응하고 있었다.
요크 서덜랜드의 포옹에는 리처드 같은 따뜻함도 없고 3년 전에 헤어진 남편과의 언제나 욕구불만이 남는 제멋대로의 육체관계를 생각나게 하는 것도 없었다.
헤어진 남편이 생각난 순간, 따귀라도 얻어맞은 듯 세레나는 마음이 흐트러졌다. 케일 마스더스와 결혼 생활은 1년 만에 이혼으로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때 생각이 난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모르는 새에 요크 서덜랜드한테서 받은 자극적인 공격을 자기의 끔찍했던 결혼 생활과 비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케일의 일도, 이혼 후에 몇 번인가 경험한 부질없는 연애도, 오늘밤의 이 타오르는 욕구 앞에서는 빛을 잃었다.
이 사람은 방어하는 손을 늦추게 하고 나를 사로잡으려하고 있다. 묶고 매어 두려고 하는 것이라구. 그것에 굴복하면 모든 것이 요크의 뜻대로 된다. 세레나는 몸을 풀려고 했다. 늦기 전에 요크의 구속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요크! 그만둬요! 이런 짓을 할 권리는 없을 텐데요!" 요크의 손이 세레나의 목덜미로 가더니 전류처럼 스치는 자극을 밀어내려고 몸부림치는 세레나의 머리를 눌렀다. 밤색 머리를 매만지는 설득력 있는 손끝이 야생동물을 길들이듯 상냥하게 살짝 세레나의 마음을 진정시켜 갔다.
"흥분하지 말아요, 세레나."
요크는 세레나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갖다 대면서 목이 잠긴 소리로 달랬다.
"그럴 필요가 없지 않소."
목 쉰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 세레나는 상대방의 뻔뻔스러움에 숨을 삼켰다. 필요가 없다구! 상대하기 위험한 사람이야.... 그러나 다시 요크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빼앗았다. 이번에는 그의 따뜻한 혀가 집요하게 밀고 들어왔다. 일의 진전이 너무나도 빨랐다.
세레나의 본능은 지금이라도 굴복할 것 같았다. 다시 힘을 내서 저항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세레나는 요크의 팔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려 쌀쌀한 태도를 취했으나 입술을 빈틈없이 탐하는 그의 몸놀림은 그런 전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을 벌리게 하려고 요크의 혀가 아랫입술 위를 부지런히 움직여 다녔다. 아무래도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자 요크의 엄지손가락을 세레나의 턱을 따라 움직여서 입 언저리를 눌러댔다. 그와 동시에 세레나의 입술 부드러운 부분을 살짝 깨물었다. 상처 입는 일은 절대 없을거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그런 작은 공격의 구석구석에서 말없는 협박이 느껴졌다. 요크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키스에 반응하게 하고 싶어 했다.
방심하게 해놓고 도망치는 거다. 세레나는 결심했다. 마지못해 입을 벌렸을 때, 세레나는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해야만 했다.
"세레나!"
그는 만족과 강한 의지가 담긴 신음소리를 냈으나 그 목소리가 지워지자마자 요크의 혀는 세레나가 저항을 늦춘 틈에 입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의 혀가 이겼다는 듯 거침없이 움직이자 세레나는 몸을 떨며 그의 팔 안에서 부질없는 저항을 했다.
그것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싸움이었다. 세레나는 저항을 하면 할수록 자기 안에서 눈을 뜨는 욕망을 강하게 의식했다. 눈앞에 기다리고 있는 덫 때문에 세레나는 점차 공포에 빠져들고 있었다.
세레나는 다급하게 요크의 어깨에 걸친 양손을 그 단단한 목덜미에 대고 턱 밑의 피부에 힘껏 손톱을 세워 찔렀다. 효과는 적중했다.
"뭐야........?"
남자로서 요크가 모욕감을 느낀 것은 분명했다. 그는 세레나를 노려보았다.
먹이를 노려보듯 하는 그 눈은 번쩍거렸다. 그리고 가늘었다. 끌어안은 요크의 손에 다시 힘이 더해졌을 때, 세레나는 되도록 냉정한 얼굴을 하고 똑바로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제 제발이요, 서덜랜드 씨! 난 파티장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당신의 원시적인 설득은 나한테는 안 통한다구요!" "그래서 겁을 주려했다는 거요."
요크의 반격은 더 심했다. 테라스로 새어나오는 얼마 안 되는 불빛 속에서도 요크의 볼이 노여움 때문에 빨갛게 상기된 것이 보이는 것 같았고, 자제하려고 애는 쓰고 있으나 안경 속에 불꽃이 타오르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신경질 나게 하잖아요!"
세레나의 목에서 손을 치우려 하지 않고 요크는 노여움에 불타는 세레나의 눈동자를 지켜봤다.
"믿어주지 않더라도 상관없지만, 당신을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소." 겨우 입을 열었으나 그 목소리는 다소 부드러워져 있었다.
"다만 내게로 눈을 돌려주길 바랐을 뿐이오, 세레나......"
"그것은 훌륭하게 성공했어요. 비지니스 경쟁때도 언제나 이런 난폭한 전술을 쓰는 거예요?" 세레나는 경멸을 가득 담아서 대꾸했다.
"아까 그 키스와 앤더슨을 때려눕히는 일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밖에 당신이 나한테 달라붙는 이유가 있어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변명할 말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세레나는 생각했으나 이윽고 입을 연 요크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에 대한 관심과 앤더슨사에 대한 계획이 우연하게 들어맞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나쁜걸까?" 요크는 느긋하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세레나는 똑바로 요크를 쳐다보더니 그 다음엔 어이없다는듯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잘났어 정말! 당연히 나쁘지 않구요! 진절머리나. 최저라구요. 용서할 수 없어요. 어쩜 이렇게 무례해요? 당신 정신 있어요? 이용당해도 좋으냐고 나한테 묻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구요. 대답은 하나--싫다니까요." "그러다가 우리 두 사람이 맺어질 운명이란 걸 알게 되더라도?" 놀리듯이 요크가 말했다.
"불가능해요." 세레나는 화를 냈다. "맺어질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과 나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떨고 있나, 나한테 안겨서?" 요크는 속삭였다.
목에 머물렀던 그의 손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려와 실크드레스의 프릴이 달린 목깃에 닿았다.
"당신은 정열 때문에 몸을 떨지 모르지만 난 화가 나면 몸이 떨린다구요, 서덜랜드 씨."요크의 손이 민감한 쇄골에서 멎는 바람에 숨을 삼켰다.
세레나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과 겁을 줘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쌀쌀하게 턱을 쳐들고 그녀는 안경 속의 눈을 노려봤다.
"지금 당신의 태도는 노여움 때문이 아니라 정열 때문이란 것을 인정하려 하는 거라구.""바로 그래요." "나는 욕망을 느꼈다고 기꺼이 인정하겠는데." 상냥한 목소리로 요크는 말했다.
"그 정열을 일에다 돌려서 도움이 되는 능력을 키우는 게 좋겠군요!" 세레나는 화가 치밀었다.
"그렇지만 당신 같은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닐테죠." "나 같은 사람?" 요크는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승부사예요. 그래요. 요크 서덜랜드- 모든 일을 승패로만 생각하는 사람. 당신은 무슨 일이든 정상만을 생각하고 그 때문이라면 누구든 무엇이든 이용할 사람이에요. 당장의 목표는 앤더슨사에 이기는 것일 테죠?" 요크의 거친 얼굴의 선이 더욱 험악해졌으나 세레나의 비난을 부정하려 하지는 않았다.
"리처드 앤더슨을 물리치고 말거요.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것은 사절이에요!"
"이기는 것이 앤더슨 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이기는 편에 붙고 싶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게 아니라구요, 서덜랜드 씨. 하지만 당신보다는 리처드 쪽을 좋아하는 게 확실해요!" 세레나는 좀 뒤로 물러서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넓히려고 했다. 그 바람에 드레스의 프릴을 만지작거리던 요크의 손가락이 한쪽 가슴까지 내려왔다. 그 손의 뜨거운 열기가 드레스를 통해서 전해졌다. 젖꼭지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몸에 전류가 흘렀다.
이 몸의 반응을 요크가 알아차렸을 거라고 생각하니 세레나의 몸은 더욱 굳어졌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요크의 눈동자 안에 생생한 굶주림이 감춰져 있는 것을 세레나는 깨달았다. 더 이상 망설일 수는 없었다. 요크의 애무와 그 눈빛에서 벗어날 일념으로 세레나는 다짜고짜 테라스에서 비교적 안전한 로비로 뛰어들어 일시적이나마 어둠속에 숨어있는 야수로부터 도망쳤다. 뒤도 안 돌아보고 세레나는 그대로 파티장으로 향했다.
고맙게도 그날 밤 다시는 요크 서덜랜드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5
하룻밤 사이에 재규어라는 요크의 이미지는 세레나의 잠재의식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세레나는 언제나처럼 열심히 점원들을 지휘하고 고객을 안내하고 이 바쁜 세상에서 매일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많은 문제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환상은 파묻혀도 상식은 그렇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의 밝은 햇빛의 힘을 빌어 어젯밤은 다가오는 요크의 존재에 과잉 반응을 보인 거라고, 지신을 타이르기는 쉽다.
그러나.......
요크가 의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주문전표에 적어넣기 전에 아크릴 그림물감과 실크스크린 재료를 점검하면서 세레나는 생각했다.
요크는 리처드를 쳐부수려 하고 있다. 정작 당사자인 리처드는 요크의 위협을 바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데도, 세레나는 아무래도 웃어 넘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냥꾼을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야. 점검을 끝내고 세 사람의 점원이 바쁘게 손님을 맞고 있는 카운터로 향하면서 세레나는 결심했다. 리처드는 사업상의 문제는-그런 것이 혹시 있다면--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야.
내가 이러쿵저러쿵할 필요는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비지니스의 세계는 고작 이 화방을 경영한 경험뿐인 걸. 대규모의 화방을 돌아보며 그녀는 무의식중에 자랑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머지않아 이 가게의 주인이 될 수 있어, 주인인 플래처 부처가 한가한 여생을 위해 이 가게를 팔 생각을 자주 비쳤으니까.
카운터 저쪽에서 전화벨이 울리는가 했더니 점원이 세레나를 불렀다.
"플래처 씨예요."
"사무실로 돌려줘, 알리슨."
세레나는 화방 안쪽 작은 책상과 몇 개의 파일박스가 자리를 잡고 있는 좁은 방으로 서둘러갔다. 가게 소유권의 양도가 끝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의 하나가 이 허술한 사무실의 확장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존." 세레나는 힘차게 인사했다.
"유타에 가시려는 거죠?"
"유타는 취소하고 타히티로 변경했다는 걸 알려주려고 전화했어." 존 플래처가 점잔을 빼며 말했다. "어젯밤에 루이스의 마음이 변했거든. 내일 오후 4시에 떠날거요."
"타히티라구요!? 유타에 있는 스키장 맨션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전화를 한 거지." 존 플래처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세레나도 거기 따라서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세레나는 존과 루이스를 좋아했다. 각자 자기 재산이 있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인생을 철저히 즐기로 있는 중년부부였다. 세레나가 몸담고 있는 화방은 플래처 부처의 도락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2년 전, 두 사람이 이 가게에 싫증이 났을 무렵에 마침 새로운 지배인을 고용했다.
그 새 지배인 세레나는 이혼이라는 타격에서 겨우 벗어나 여자 특유의 억척스러운 열성으로 그 일에 파고들었다.
세레나가 화랑에서의 일과 다른 여자의 유혹에 빠져버린 남편을 뿌리쳐 버리고 샌디에이고에서 파사디나로 갓 왔을 무렵이었다.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일을 할 수 잇는 것이 고마워서 열심히 일한 세레나의 노력은 보람이 있었다. 6개월 만에 화방의 매상은 배 가까이로 늘어난 것이다.
넉넉한 가게 주인에게 매상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플래처 부부는 이 가게가 세레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어떤 약속이 이루어졌다. 세레나한테 이 가게를 사들일 능력이 생길 때까지 부처가 가게를 팔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운이 좋은데다가 후한 급료 덕분에 앞으로 몇 달만 지나면 이 가게는 세레나의 것이 될 터였다.
"네, 그런데......." 세레나는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왜 전화를 주신 거예요?"
"전화를 한 것은 당신이 유타에 있는 맨션을 2주 동안 써줄 수 없을까 해서."
"제가요!" 세레나는 깜짝 놀라서 숨을 삼켰다. "스키도 탈 줄 모른다구요, 존."
"롯지에서 핫투데이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버리면 아무도 당신이 하루종일 눈 덮인 언덕에서 굴러 떨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요."
"가게는 어떻게 하구요, 자리를 비울 수는 없어요."
"바보 같은 소리!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연습을 해두는 것도 필요해요. 가게가 자기 것이 된다면 도대체 어떻게 할 셈이야? 휴가도 안 갈 셈이요?" 존이 달래듯 말했다.
"그리고 2주 정도면 나머지 사람으로도 충분하지 않소. 세레나가 철저하게 교육시켰잖아!""신출내기 사업가가 한가롭게 휴가를 즐길 수 있겠어요?" 세레나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것은 무능한 인간뿐이지." 존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튼 여기는 캘리포니아라구. 빡빡한 뉴잉글랜드가 아니야. 뉴잉글랜드가 아니야. 노동에 대한 윤리관도 그곳과는 상당히 다르지."
"알고 있어요." 세레나는 시원스레 인정했다. "쉬는 것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중요하죠. 걱정해 주신 것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존. 그렇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얼떨떨한데요. 두세 시간 생각해 봐도 괜찮죠?"
"그거야 상관없지만 루이스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 된다고 하는구만."
"갈수록 태산인데요."
"아아, 루이스한테 당신을 설득하라고 하고 싶은데 지난주에 산 스키용품을 되돌려주고, 선드레스를 옷장 가득할 만큼 사겠다며 나가고 없어."
세레나는 웃었다.
"생각해 볼게요, 존. 오늘밤 안으로 연락드릴게요. 제가 가지 않으면 올해는 그 맨션이 허사가 되는 거죠?"
"바로 그렇지."
"알겠습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생각해 보겠어요. 부인께 오늘밤 전화 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기다리겠소." 힘 있는 목소리가 대화를 마무리 짓고 전화를 끊었다.
스키장이라! 스키는 타지도 못하는데! 그렇지만 좋은 경험이 될지도 몰라.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세레나는 생각했다. 2주 정도면 알리슨만으로도 괜찮을 거야. 그래. 2년 동안 휴가를 얻을 기회도 없었고......
그렇지만 휴가의 즐거움을 나눌 친구가 없이는 스키에 열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조금은 쓸쓸할 것이고, 리처드는 뭐라고 할까? 함께 가고 싶어 할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세레나는 얼굴을 붉혔다. 리처드를 초대하게 되면 맨션뿐만 아니라, 동침하자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리처드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세레나는 아직 거기까지 두 사람 사이를 밀고 갈 마음의 준비는 안 되어 있었다. 자기 마음이 어디가지 깊어지는지 좀더 시간을 두고 확인하고 싶었다. 리처드에게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낄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 불행한 결혼생활의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것이었다.
어젯밤 요크 서덜랜드한테 안겼을 때 느꼈던 것을 왜 리처드의 팔 안에서는 느낄 수가 없을까? 어젯밤 생각에서 깨어난 세레나는 원인 모를 초조함을 느끼면서 일어서서 흰색과 청색 줄무늬 스커트 주름을 펴고 마음을 정한 듯 가게로 돌아갔다.
번화한 사우스레이크 거리에 있는 3층의 햇볕이 잘 드는 맨션으로 돌아왔을 때도, 플래처 부처의 말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 세레나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세계적으로 이름난 헌팅턴 도서관과 미술관, 그리고 가까운 오크 노르지구의 아름다운 집들- 이런 것이 뒤섞여져서 재미있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런 멋대로 펼쳐진 듯하면서도 역동적인 로스앤젤레스에서 나는 쾌적한 오아시스를 찾아낸 거야, 세레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따뜻한 옷을 몇 벌 사야겠어. 날씬한 복사뼈까지 내려가는 티셔츠 드레스로 갈아입으며 세레나는 생각했다. 몸에 착 들어맞는 편한 니트는 진한 갈색 바탕에 진한 핑크깃이 대져 있었다. 샌들을 신고 세레나는 저녁식사를 준비하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팔팔 끓는 물에 퍼스터를 떨구려고 한 순간, 현관의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누구세요?"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사람에게는 저절로 몸에 밴 조심성을 드러내어 무의식중에 문의 조그만 구멍에 눈을 대며 세레나는 물었다.
"요크 서덜랜드요." 뜻하지 않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뜨거운 것에 대기라도 한 듯 세레나는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호흡을 두세 번 하고 나서 겨우 냉정을 되찾았다.
어젯밤의 공상은 이제 마음속에서 지워져 버린 것이라고 세레나는 억지로라도 생각하려고 했다.
문 밖에 있는 사람은 흔히 만날 수 있는 사업가일 뿐이야, 특별한 사람은 절대 아니야.
"무슨 일이죠?" 문을 열지 않은 채 세레나는 물었다.
"할 애기가 있소, 세레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예요."
"정중하신 대접에 말도 안 나오는구려." 요크가 스스럼없이 중얼댔다.
"점잖게 굴어 봐요. 점잖게 대접을 해드릴 테니까요."
"문 좀 열어요." 침착하고 참을 성있게 요크가 말했다.
"할 애기가 있소. 당신과 관계되는 일이오."
"그러실 테죠. 말씀하세요."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문을 사이에 두고 말을 하다니, 싫소. 내가 그렇게도 무섭다면 안전한 홀에서 만나도 돼요. 그것도 못 믿겠으면 풀까지 가서 이웃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애기할까!"
"당신을 무서워하는 줄 알아요!" 세레나는 버럭 화가 나는 바람에 문을 열고 성난 얼굴로 요크를 노려봤다.
요크는 그런 세레나의 얼굴은 모른 체하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섰다. 세레나는 한 대 얻어맞았다고 느꼈는지 소리를 지르고 문을 닫고는, 그대로 문손잡이를 뒤로 잡고 돌아서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요크에게 보냈다.
"뭐야, 이건!" 방안을 둘러보더니 요크가 소리쳤다. "도대체 누가 실내 장식한 거요?"
"나예요. 맘에 안 드셔서 미안하군요!"
"맘에 안 든다고는 하지 않았소." 세레나를 달래면서 요크는 사이드테이블 위의 브론즈와 나무로 만들어진 색다른 조각품에 다가갔다.
"익숙해지는 데 좀 시간이 걸릴 테지만...."
그녀는 놀랄 만큼 섬세한 그의 손이 조각품에 닿는 것을 보고 있었다. 오늘밤의 그는 진회색 수트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검은 머리 , 검은 계통의 옷차림, 그리고 요크에게서 풍기는 위험스러운 분위기는 거의 흰색으로 통일된 이 집안에서 사나우리 만큼 두드러져 보였다.
흰색 카펫, 하얀 벽, 흰 가죽을 댄 키가 낮은 가구, 유리 테이블- 이런 인테리어에는 그 나름의 까닭이 있었다.
이 맨션의 가는 곳마다 장식된 갖가지 훌륭한 예술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 되도록 연구된 것이다. 벽에는 커다란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고, 색깔 있는 비로 흠뻑 젖은 것처럼 보이는 캔버스가 여러 폭 걸려 있었다. 방안 네 구석 천장에서는 눈이 빙빙 돌 것 같은 기묘하게 생긴 모빌이 매달려 있었다. 바닥과 커다란 유리로 된 커피테이블 위에는 분방한 디자인의 조각이 여러개 놓여 있었다.
"이 미술관은 입장료를 받습니까?" 천천히 세레나 쪽으로 돌아서면서 요크가 비아냥을 담뿍 담아서 말했다.
저도 모르게 세레나의 밤색 눈동자가 재미있다는 듯 익살스럽게 반짝였다.
"안됐지만, 관람료를 지불하시고 구경하세요, 라고 여러분을 설득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애요."
"예술에 교양이 없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소? 나 이외의 손님도 이 예술을 모르나?" 요크는 방안의 예술작품을 둘러보고 한 손으로 빙글 원을 그렸다.
세레나는 문에서 떨어졌다.
"이것은 겨우 개인적인 수집품에 불과해요."
"당신 작품이오?" 깜짝 놀라서 요크가 말했다.
"아니요, 나는 예술가가 아니에요. 여기 있는 것은 모두." 세레나는 아쉬운 듯 털어놓았다. "선물 받은 거예요." "어떤 친구들이지?"
"모두가 진짜 예술가의 작품이에요, 서덜랜드 씨." 그를 한껏 무시해 주면서 세레나는 소파에 앉았다. "앉으시죠." 세레나는 예의 바르게 말했다.
"시대를 너무 앞질러간 예술가들인가?" 맞은편 의자에 앉은 요크는 웃으면서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이런 재능을 세상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되는 작품도 몇몇 있어요." 세레나는 맞은 편 벽에 걸린 보라와 초록으로 칠해진 캔버스를 사랑스런 듯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건 도대체 어떻게 모여든 것들이오?" 요크가 물었다.
"설명하기는 좀 어렵지만." 세레나는 천천히 말했다. "이 작품을 만든 작가의 대부분이 내가 지배인을 하고 있는 가게의 고객이에요. 그래서....."
"그래서 작품을 얻고 그 계산은 장부에서 꺼간 거로군?" 진짜 장사꾼답게 비난하는 말투로 요크가 말했다.
"농담 말아요." 세레나가 발끈했다. "그 따위 영업방침을 취했다면 벌써 오래 전에 도산하고 말았을 거예요."
"그럼?"
세레나는 상을 찌푸렸다. 이런 일이 요크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일부러 설명까지 해야 하다니, 내가 도대체 뭘하고 있는 것일까?
"가게에 오시는 손님들을 격려해 주는 것이 우리의 방침이에요." 세레나는 쌀쌀하게 말했다.
"알겠소." 요크가 곧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에 세레나는 놀랐다.
"그러니까 가게에 작품이 팔리지 않는 예술가가 올 때마다 격려하는 것이 당신의 방침이고, 그 정신적인 원조에 몹시 감격한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최고 걸작으로 당신한테 보은한단 말이지. 그리고 당신은 그들의 애쓴 결과를 쓰레기통에 버리기 아까워서, 마치 버려진 고양이를 주워오듯 집으로 가져와서는 여기저기 빈 구석을 채운거겠지." 세레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깜박거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목소리도 힘이 없었다.
"단편적인 사실을 하나하나 맞추다 보면 금방 밝혀지게 되어 있소." 요크는 빙긋 웃으면서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당신 속에 있는 다정다감한 마음을 생각한다면 그런 추리야 간단한 거 아니겠소."
"다정다감!" 세레나는 쌀쌀하게 되풀이했다. "서덜랜드씨. 그것이 어떤 의민지 물어 볼 마음조차 일지 않는군요." 이 자리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듯, 대꾸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세레나는 몸을 내밀었다. "빨리 용건을 말씀하시고 돌아가시죠. 식사도 아직 못했거든요."
"요크요." 요크가 조용히 말했다.
"뭐라구요?"
"요크라고 불러요. 우리 사이에 그 정도야 당연하잖소? 그리고 마침 나도 저녁식사는 아직인데." 요크는 상냥하게 웃었지만 그 미소는 세레나를 더욱 조심스럽게 했을 뿐이다.
"오늘은 하루종일 바빴기 때문에 말요, 애기 나누면서 함께 합시다." 요크는 어느새 주방 쪽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세레나는 요크가 주방으로 모습을 감추었다가, 카운터 건너편에 나타나는 것을 망연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중요하다는 용건인지 뭔지 빨리 애기하시고 돌아가 주시면 정말 고맙겠는데요!" 요크가 냉장고에 잘 보관된 포도주를 찾아냈기 때문에 그녀는 이를 갈았다.
"한 잔 마십시다." 요크는 딱 잘라 말하고 새하얀 주방에서 서랍을 여기저기 뒤져서 간신히 코르크 따개를 찾아냈다.
"아, 당신도 한 잔 하겠소?"
"가족의 누군가가 죽었다거나 주가가 폭락했다거나 그런 말을 하러 왔어요?" 세레나는 빈정거렸다.
"아니, 그러나 당신 장래를 바꾸는 애기인 것만은 틀림없소." 요크는 다리가 긴 술잔을 찾아내서 세레나의 맞은편 의자로 돌아왔다.
요크가 포도주를 따르는 것을 보면서 세레나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을 집안에 들이는 게 아니었어요." 세레나는 잔을 받아들며 단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시끄럽게 굴려고 온 거죠?" 순간 눈과 눈이 마주치고 두 사람은 말없이 눈치를 살폈다.
"아니 시끄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온 거요." 차분한 목소리였다.
"어젯밤의 일 때문에 믿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순간 요크는 입을 다물어 버렸으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잔을 집어 들고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어젯밤 일을 당하지 말았어야 할 재난이었다고 생각하는 거요?" 요크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쪽에서 질문하고 있는데 질문으로 되받다니, 예의가 없군요."세레나는 대꾸했다.
"내가 예의가 없다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닐 텐데, 전에부터 그런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었나?" 요크는 와인을 홀짝거렸다. 그의 관심사는 포도주의 향기에 쏠려 있는 것 같았다. 세레나는 직감이 번쩍했다.
"그래서 나한테 정체가 드러났으니까 내가 당신한테는 위험인물이다, 이거죠?" 세레나는 아는 체하는 표정으로 이죽거리며 말했다.
요크는 안경속의 검고 긴 속눈썹을 깜박이더니 세레나의 가늘게 뜬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수수께끼처럼 말했다.
"그러니까, 나와 리처드를 헤어지도록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심리적인 싸움만은 아니라 이거죠. 나를 떼어 놓으면 분명히 리처드에 대한 강한 일격이 될 것이고, 당분간은 그를 괴롭게 할 테지요. 그러나 나와 리처드가 함께 있는 것으로 정말 곤란한 것은, 내가 그에게 당신이 정말 위험인물이란 걸 말할지도 모른다는 거겠지요." 현실적으로 이 사람이 리처드한테 어떤 짓을 할 수 있을까..생각하는 동안에 세레나의 말은 중단되고 말았다.
"앤더슨과 손을 끊겠다면 당신한테 돈을 줄 수도 있소." 쌀쌀하고 오만한 목소리였다. 포도주 향기를 즐기고 난 요크는 이번에는 다시없이 소중한 것이기나 되는 것처럼 엷은 황금빛 포도주에 눈을 돌렸다. 세레나의 반응과 그에 이어지는 독설은 무시해 버리기로 작정한 듯했다.
"그 말은 몹시 모욕적인 것이지만." 세레나는 말했다.
"일부러 화난 체하거나 하지는 않겠어요, 그런 반응은 당신이 원했던 것이니까요.""아아, 그런 시늉 할 필요는 없지. 잘 안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소." 요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세레나는 버럭 화를 내고 말했다.
이 사람 옆에 있으면 이상하게 냉정을 잃어버려. 더구나 신경질을 내다보면 어느새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 것만 같아. 요크는 어떤 감정의 흐트러짐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것이다. 세레나의 직감은 경계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요크는 위험한 사람이야. 그리고 시시각각 그 강도가 높아가고 있다.
"모든 방법을 대충 확인하고 나서 제일 냉혹한 수단을 쓸셈이지." 차분한 얼굴을 하고 세레나를 보면서 요크는 말했다.
"당신은 어젯밤 문자 그대로 내 손안에서 도망쳐 버렸소. 그리고 오늘밤에는 뇌물을 거부했다, 이렇게 되면 그다지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게 아니겠소?"
"섹스도 돈도 안 먹혀들었으니 드디어 최후의 수단으로 나오겠다는 거예요?" 세레나는 비웃었으나 모든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런 걸 공갈이라는 거예요, 요크. 이제 수단 같은 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면서, 나는 당신의 볼썽사나운 매력이나 돈 때문에 리처드를 버릴 속물은 아니에요. 도대체 어떻게 내가 돈 따위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 거죠?" 어떤 작은 꼬투리라도 좋았다.
아무튼 유리한 입장에 서려고 세레나는 안간힘을 썼다.
"만약, 내가 일정한 수입을 보장해 줄 남자를 찾고 있었다면 맨 처음부터 그랬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우연이긴 하지만 생각해봐요, 물론 당신은 혼자서 잘 해가고 있고 오르막이에요. 그렇지만 리처드는 벌써 다 올라서 거죠."
"그래,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 의자에 편히 몸을 파묻고 생각에 잠기면서 요크가 말했다.
요크가 이처럼 차분한데, 왜 난 초조해 하는 거지?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아, 세레나는 생각했다.
여전히 상냥한 목소리로 요크는 말을 이었다.
"분명히 리처드는 다 올라섰는지 모르지만 그 정상에는 당신이 나란히 설 자리는 없소."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세레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요크의 입에서 느릿하게 흘러나온 말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녀를 아프게 찔렀다.
"그는 이미 결혼한 몸이오, 세레나. 더욱 분명한 것은 이혼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거지. 증명할 수도 있소."
6
다음날, 유타에 있는 리조트맨션의 열쇠를 돌리는 세레나의 장갑을 낀 손끝은 아직도 떨리고 있엇다. 추위 탓이야. 세레나는 자신을 위로했다. 밝은 햇빛이 내리비치는 파사디나를 뒤로 하고 솔트레이크시티에서 32킬로나 떨어진 교외의 눈 덮인 산에 와 있는 걸, 캘리포니아 도시에서 자란 삶이라면 누구라도 떠는 게 당연해.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 솔직한 신체 반응은 노여움 때문인 것을 인정하라고 양심이 속삭이고 있었다.
리처드 앤더슨을 상대로 한 한바탕 소동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세레나한테는 리처드에게 해명할 기회, 요크 서덜랜드가 말한 비난을 부정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의무가 있었다. 요크가 말한 것은 진실이었다. 요크는 거짓말을 수단으로 삼는 인간은 아니다, 하고 마음 어딘가에서 인정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런 기회를 리처드한테 주었던 것이다.
리처드도 요크도 내 반응이 이토록 심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거야, 하고 세레나는 생각했다.
아내가 있는 남자와의 관계 정도라면, 새로운 모럴의 선각자라고 자부하고 있는 이곳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핸섬하고 매력적이며 재기에 넘치는 케일 마스더스라는 화가와 세레나와의 결혼이 다른 여자-케일의 제멋대로인 성질을 이해해 주는 젊고 아름다운 미술학도-때문에 무너졌다는 것을 경멸하고 있던 다른 여자의 역할을 스스로 하게 되었다는 생각은 요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세레나를 격분하게 했다.
세레나는 아직 만난 일도 없는 앤더슨 부인한테 공감을 느꼈다.
요크가 현관을 나가자마자 문을 부서질 듯 닫고 나서 세레나는 당장 리처드한테 전화를 걸었다.
리처드는 침착을 잃고 마지못해 사실을 시인했고 세레나는 노기충천했다.
"이런 몹쓸 짓을 하다니, 날 뭘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절대 유부남의 애인 따위는 되지 않아요! 나를 이용하고 부인을 속이다니 용서하지 못해요!"
"세레나 부탁이오, 진정하라구!" 리처드는 달래다 못한 끝에 정말적인 투로 중얼거렸다. "이레느와는 벌써 1년 이상이나 별거하고 있소......"
"이혼했다는 건가요?" 세레나는 대들 듯 말을 막았다.
"아니 정확하게 그런 건....."
"한 거예요, 안 한 거예요?"
"세레나 들어 봐요." 리처드는 애원조였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마음은 있었지만 이혼은 할 수가 없었소."
"알겠어요, 나는 이혼해 달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구요. 나 때문에 부인을 버릴 결심을 했다니, 잔인하군요." 세레나는 맹렬하게 쏘아냈다.
"제발, 세레나. 당신이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이레느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우리한테는 아무래도 상관없기 때문이었소. 당신과 내가 함께 찾아낸 것에 비한다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비탄에 빠진 목소리였다.
"둘이서 발견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시는 내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말아요." 진저리를 치면서 세레나는 수화기를 난폭하게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한번 수화기를 집어 들고, 플래처 부처의 전화번호를 돌렸다.
두 사람 모두 세레나가 초대에 응한 것을 기뻐하고 곧 리조트맨션의 열쇠와 자잘한 주의사항을 건네주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가슴앓이로 밤을 꼬박 세운 세레나는 솔트레이크시티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지금 세레나는 날씨에 안 어울리는 옷차림으로 더구나 스키에는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망연한 심정으로 이곳 유타의 사치스러운 리조트맨션에 이방인처럼 쭈뼛거리며 발을 들여놓았다.
원룸형식의 맨션으로 다소 비좁기는 했지만 단순한 색조의 아담한 방이었다. 개성이 없는 방이로군, 세레나는 혹평을 내렸다. 주인이 몇 사람이나 되는 리조트맨션이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을 갈색 의자에 내던지고 창가로 다가가 보았다.
그러나 바깥경치는 비판의 여지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대한 설경. 방이 고층이어서 전망이 좋았다. 슬로프를 흐르듯 미끄러지는 현란한 옷차림의 스키어들, 왼편에는 리프트도 보였다. 저런 추위 속에서 모두가 정말로 즐기고 있는 것일까? 세레나는 난로를 생각해냈다. 저 얼음과 눈에 대항하는 것은 훨훨 타오르는 불밖에 없다. 장작은 작은 처마가 달린 발코니에 쌓여 있었다. 세레나는 커다란 유리문을 열고 굵은 장작을 들여오기 위해 냉기 속으로 나갔다. 아이 추워! 넉넉할 만큼의 장작을 모으기도 전에 세레나는 들어오고 말았다. 난로로 실내가 더워질 때까지 난방 스위치의 강도를 높였다.
냉장고를 열어 보았으나 텅 비어 있었고 시장을 찾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물건을 사는 것은 내일 아침으로 미루기도 하고 오늘밤에는 가까운 롯지에서 보낼 밖에.......
한 시간 뒤, 몸에 착 들어맞는 진바지와 소매가 긴 옥스퍼드 스타일의 셔츠, 눈 위에서는 도무지 실용적이라 할 수 없는 우아한 하이힐 부츠로 차려입은 세레나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재킷의 벨트를 조이고 롯지를 향해서 출발했다. 건물 현관을 나선 순간 세레나는 이를 딱딱 마주치며 재킷의 옷깃을 세웠다. 이게 휴가람?
가지고 온 옷 중에서 제일 따뜻한 옷으로 골라 입었건만 겨우 3초만에 유타의 엄청난 추위와 싸우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산 속에서 2주동안! 그럴 가치가 있는 곳일까? 조심스럽게 얼어붙은 길을 밟고 가면서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고 그녀는 억지로 마음을 다져 먹었다. 난 캘리포니아의 우울함에 이젠 진력이 나. 그곳에서 도망치는 거야. 모두 잊자구, 이곳에서! 리처드에 대한 노여움은 하룻밤이 지났건만 지워지지 않았고 그의 거짓말을 알아차리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 또한 지워지지 않았다. 조금만 침착했더라면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이번에는 왜 그러지 못한 걸까? 세레나는 리처드한테 이용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그녀 쪽에서 두 사람 사이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슴은 때때로 뜨거운 불길이 일면서 복수를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요크 서덜랜드에 대한 생각도 결코 관대할 수 없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뭐든지 하는 사람이야. 멍해진 머리로 세레나는 생각했다. 처음부터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으나 그의 행동이 모든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요크에 대한 노여움은 리처드에 대한 노여움보다도 훨씬 뿌리 깊고 복잡했다.
요크의 독특한 마력을 분석하는 사이에 멋진 롯지에 당도해서 세레나는 굵고 두꺼운 통나무로 만들어진 따뜻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 중앙의 커다란 원형 난로에 자석처럼 이끌려 간 세레나는 양손에 불을 쬐었다.
"추워 보이는군요." 가까운 데 있던 남자가 동정어린 미소를 보였다.
"발이 아직 붙어 있는지 어쩐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에요. 감각을 잃어버려서." 세레나는 홑겹의 얇은 장갑을 벗고, 서러운 듯 부츠를 보았다. 다시 얼굴을 든 세레나는 맞은편에 있던 그 쓴 웃음 짓고 있던 남자의 인상 좋은 얼굴이 맘에 들었다.
나이는 30대 전반, 곱슬곱슬한 금발머리, 눈빛에 그을린 얼굴, 따뜻한 갈색 눈동자, 그리고 꽤 이름 있는 상표의 스키 웨어가 아무래도 이런 곳에 익숙한 사람인 듯 보였다.
"화내지 말아요, 그렇지만 당신 옷은 아무래도 제격이 아닌 것 같군요." 세레나를 관찰하면서 그 사람이 상냥하게 말했다.
"그렇지, 나는 타이 로렌이오. 지금 도착했소?"
"네, 보시는 바와 같이." 세레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캘리포니아에서 오후에 도착했는데 너무 급했기 때문에....." 세레나는 말꼬리를 흐리고 어깨를 움찔했다. "전 세레나 골드웰이에요."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세레나. 내일이면 여기 상점에서 뭐든지 살 수 있으니까. 따끈한 거 한 잔, 어떻소? 바에서 한 잔 대접하고 싶은데?" 타이는 곧 몸을 일으킬 모양으로 세레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레나는 잠시 생각했다. 성질이 좀 급한 사람이군. 그렇지만 한 잔 정도 얻어 마신다고 해서 안 될 건 없어.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려면 부담 없는 상대가 있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그러나 매사에는 순서라는 게 있다.
"보이스카우트의 명예를 걸고, 당신이 현재 결혼도 하지 않았고, 별거중도 아니며, 물론 약혼중도 아니며 그밖에 어떤 형태로든 속박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다면요." 타이는 깜짝 놀라서 눈을 껌벅거리더니 빙그레 웃었다.
"퍽 신중한 편이로군. 염려 말아요, 나는 자유로운 몸이에요."
"물론이죠." 진심으로 세레나는 대답했다. "나도 자유로운 몸이에요." 흡족한 표정으로 타이는 그녀의 팔을 잡고 호화로운 바로 안내했다. 빨갛게 타오르는 난로가 따뜻했다. 작은 둥근 테이블을 둘러싼 묵직한 가죽의자에 자리를 잡고 나서야 겨우 얼었던 발에 감각이 돌아왔다.
"이곳에 오래 있을 거요?" 핫투데이를 주문하고 나서 타이가 말했다.
"2주 동안요, 얼어 죽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당신은?"
"이제 2,3일만 지나면 샌프란시스코의 지겨운 일터로 돌아가야 하죠. 법률사무소를 하고 있소." 타이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슬쩍 자기 신분을 밝혔다.
따뜻한 실내 공기와 핫투데이 덕분에 세레나는 안락감을 느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갈수록 친밀해지고 부담 없이 진행됐지만 세레나는 경계할 생각은 없었다. 함께 있으니까 잠시 쉴셈으로 오락영화를 보러 간 것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오락영화 취급을 받는 것을 알면 그가 어떻게 생각할까, 세레나는 입술에 웃음을 담고 다시 두툼한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세레나는 문득 라운지 입구로 눈길을 보냈다. 그 순간 깜짝 놀란 듯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키가 큰 사람의 낯익은 그림자를 입구에서 보았던 것이다.
유타까지 뒤쫓아 오다니! 어째서지? 이제 나한테 아무런 볼 일도 없을 텐데..이제 요크는 승리를 했잖은가?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손이 덜덜 떨렸다. 타이가 놀라서 세레나를 보았다.
"어디 아프오?" 타이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왔군요."
설명하고 있을 새도 없었다. 요크는 세레나를 찾아내서 두 사람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마주 오는 적에게 최면술이라도 걸린 동물처럼 꼼짝 못하고 세레나는 날씬한 재규어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7
요크의 복장도 그야말로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세레나보다 더 급하게 여기 온 게 틀림없었다.
허리가 짧은 진바지에 값싼 청동장식이 달린 벨트를 매고 있었다. 그리고 옷장 깊숙한 곳에서 간신히 찾아낸 것 같은 체크무늬의 플란넬 셔츠, 걸으면서 단추를 끌어내린 가죽 재킷을 뺀다면 그 셔츠만이 추위에 대한 유일한 방비였다.
밤의 어둠을 연상시키는 머리에는 아직 흰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늘 함께이던 안경은 없었다.
아마도 녹아내린 눈이 렌즈에 묻지 않게 하려는 것이리라. 세레나와 타이의 테이블까지 와서 멈춘 그가 재킷에서 안경을 꺼냈다.
안경을 기계적인 동작으로 쓰고 나서 세레나가 늘 보아왔던 그 값을 매기듯 하는 눈초리의 쌀쌀한 회록색 눈동자가 세레나를 내려다봤다.
그 강렬한 시선에 세레나는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눈은 다소 놀라서 곧 몸을 사리고 있는 타이 로렌한테 냉정하게 향해졌다.
"미안하지만." 프로급 살인자 같은 말투였다. "아내와 둘이서 애기하고 싶은데 말이오." 타이는 움찔했다.
"부인이라구?" 힘없이 세레나를 보았으나 세레나도 깜짝 놀라서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혼자라고....." 타이는 되풀이했다.
"이 사람은 스스로 혼자라고 하던데!"
"그러는 것이 좋을 때도 있는 법이지." 요크는 조용하게 말하고 회록색 눈동자를 번쩍이며 세레나를 보았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요. 나는 이 사람이 결혼한 것을 몰랐기 때문에." 타이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테이블 곁에 조용히 서 있는 재규어와 같은 사내한테 되풀이 변명을 하고 있었다.
"알겠소." 요크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타이는 휴우 하고 맘이 놓이는 듯,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갔다. 세레나는 쌀쌀하게 요크를 쳐다보며 일어섰다.
"덕분에 오늘밤은 예정보다 일찍 끝났으니까 실례하고 돌아가야겠군요." 억양 없는 말투였다. 믿을 수 있는 것은 배짱뿐이었다. 세레나는 무시하듯 요크의 앞을 스쳐지나가려 했다.
그러나 오늘밤 맨 처음 싸움에 쉽게 승자가 된 요크는 두번째 싸움에서도 양보할 기색은 없었다. 거침없이 손을 뻗어서 세레나의 손을 거머쥐었다.
"안되지!" 목소리가 약간 쉬어 있었다. "당신을 찾으려고 멀리서 왔는데. 할 애기가 있소, 세레나." 세레나는 어깨 너머로 뒤돌아보며 요크를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표정을 숨긴 시선을 붙잡힌 팔로 향했다. 남자 손의 열기와 힘이 마치 강철 쇠사슬처럼 세레나를 옥죄이고 있었다.
"할 애기가 있소." 요크는 되풀이했다. "아무튼 여기서 나갑시다." 거역할 도리가 없겠어. 세레나는 단념하는 한숨을 크게 쉬고 요크에게 끌려갔다. 밖은 찬 공기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옆에서 요크도 저주를 퍼부었다.
"제기랄! 이 무슨 추위람! 뭘하러 유타까지 왔단 말이오?"
"뭘 하러 유타까지 뒤쫓아 온 거죠?" 세레나도 대꾸했으나 얼어붙은 눈길이 유달리 미끄러웠기 때문에 팔을 붙잡고 있는 요크의 손이 갑자기 미더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 이상 설명을 듣는 것도 속이 상했기 때문에 세레나는 잠자코 2층 건물인 모던한 맨션을 향해서 걸었다.
"알겠소, 세레나. 둘이서 이렇게 밖에서 말다툼을 하면서 서로의 팔 안에서 죽을 것인지, 방 안에서 문명인답게 이야기를 할 것인지 빨리 결정하라구!" 겨우 그녀는 울컥했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무튼 여기는 추웠다.
"들어가요. 당신과 껴안고 죽다니 천만의 말씀이에요!" 신랄하게 내뱉고 세레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요크가 뒤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아까 말한 것은 취소하겠소. 그렇게 화를 내다가는 얼어 죽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소." 세레나는 말이 없었으나 그의 말투에 유머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말없이 복도를 걸어서 플래처 부부의 방 앞에 멈춘 세레나는 숄더백 속의 키를 찾았다.
"좋아요, 요크. 뭐든지 하고 싶은 말을 해봐요. 당신이 일부로 내 휴가를 엉망으로 만들 셈으로 갖고 온 애기를 들으려고, 이쪽은 벌벌 떨며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당신은 정말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에요. 리처드와의 사이를 깨뜨린 것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던 모양이군요. 모처럼 얻은 휴가도 엉망으로 하지 않고서는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니." 방으로 들어간 세레나는 따뜻한 온기에 마음도 풀려 있었다.
한쪽 발로 빙글 돌아서서 허리에 손을 갖다 대고 뒤따라 들어온 사람을 노려보았다.
요크는 문을 닫고 세레나와 마주섰다. 안경 속에서 근심에 찬 눈동자가 세레나의 가느다란 몸의 선을 더듬었다.
"그래서요?" 세레나는 긴장된 목소리를 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여기 있는 걸 알았죠?"
"당신보다 한 시간 반 뒤에 왔소. 화방 점원한테서 당신이 어디로 도망갈 셈인지를 알아냈지."
"도망친 게 아니라구요!" 세레나는 눈을 감고 참아, 참아라. 하고 자신을 타일렀다.
"그런 일은 이제 잊기로 해요. 애기해 봤자 쓸데없는 짓이니까요. 그보다도 당신이 여기 이렇게 있으니까 말인데요, 명확하고 이치에 맞는 설명을 기대하겠어요. 어째서 내가 당신의 게임에 끼어들어야 하는지 말해 봐요. 될 수만 있다면 난 빠지고 싶다구요." 세레나는 놀란 나머지 숨을 허덕였다. 요크의 손이 느닷없이 뻗어 와서 긴 말을 가로막듯 무서운 힘으로 껴안았기 때문이다.
"웬만큼 해두라구." 거친 목소리였다. "당신의 꽥꽥거리는 소릴 들으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온 줄 아나!" 팔을 잡고 있던 그의 팔이 움직이면서 아직도 차거운 손이 자기 것처럼 그녀의 목을 감쌌다. 세레나는 눈을 치켜뜨고 요크를 쳐다보았다.
온 신경을 요크의 존재가 누르고 들어서 지금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럼 뭘 하러 온 거죠?"
"당신을 갖고 싶어서 왔소." 요크는 놀랍도록 쉽게 말을했다.
"당신 것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나 요크는 너무나도 가까이 있었다. 롯지에서 난로의 따스함에 끌어당겨졌듯이 지금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열기에 끌어당겨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요." 혈관 속의 피가 들끓어 역류하는 것을 느끼고 세레나는 황급하게 덧붙였다.
"정말로 나를 원했던 게 아니에요. 리처드를 해치우려고 날 이용한 것뿐 아녜요!"
"세레나, 당신 덕분에 요즘 3주 동안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였소. 모르겠소? 앤더슨과 함께 있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라구." 요크는 초조한 빛을 보였다.
목에 갖다 댄 손가락에 힘이 주어지더니 세레나를 끌어당겼다.
세레나는 몸을 떨었다. 요크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있지만 대항할 수단을 찾지 못했다. 3주 동안 세레나의 마음속을 산란하게 했던 공포와 매력이 뒤섞인 그림자가 드디어 지금 위험한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세레나는 적극적으로 싸워야 했을지 모르지만 정작 머릿속의 생각은 달랐다.
이제 리처드와는 상관이 없다. 아무런 의무도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지금 정말로 자유인 것이다. 자유롭게 요크 서덜랜드의 관능적인 마력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요크의 굶주린 입술이 세레나의 입술을 훔쳤다. 세레나는 손을 들어서 요크의 재킷을 밀쳤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기 위를 뒤덮은 압도적인 남자의 욕망에 그녀의 마음은 혼란해지고 그 욕망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자신의 몸에 망연해졌다.
"당신을 원해." 입술을 포갠 채로 요크는 신음소리를 냈다.
"몇 주 동안 내내 그랬소! 겨우 앤더슨한테서 떼어 놨다고 생각했더니,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했지? 도망가 버렸지!"
"도망간 건......"
흐려진 항의의 목소리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재빨리 요크의 혀가 거칠게 침입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세레나는 신음소리를 내고 사내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세레나는 관능적인 침략에 항거하는 것을 그만두고 격렬하게 껴안고 덤비는 사내의 팔에 몸을 내맡겼다. 요크의 몸놀림은 세레나가 그에게 안기고 매달리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변화무쌍했다.
그렇지만 생각했던 그대로야. 갖가지 감각 속에서 세레나는 잠깐 생각했다. 저항하는 걸 멈추자 요크의 태도도 변했다. 요크의 가느다란 근육질의 몸에 욕망이 스쳐가는 것이 느껴지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흐린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이 들렸다.
세레나의 입안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던 혀가 갑자기 공격의 손을 늦추고 애를 태우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크는 약간 몸을 당기고 이번에는 혀끝으로 그녀의 떨리는 입술 선을 살짝 더듬었다. 그 애태우고, 찾아 더듬고, 탐색하는 혀 놀림에 세레나의 손끝은 떨면서 사내의 재킷에 깊게 파고들었다.
최초의 기습은 끝나고 유혹이 시작된 것이다.
요크는 세레나를 항복시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는 이런 방법밖에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
세레나는 마음속으로 화가 났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가 없었다. 요크의 손이 등으로 돌려지더니 뻔뻔스럽게도 엉덩이를 더듬는 바람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요크는 활처럼 휘어진 세레나의 몸에 넓적다리를 밀착시키면서 자기에게 일어난 반응을 숨기려고도 않고 세레나를 끌어당겼다.
남자의 단단하고 불끈 힘이 솟은 욕망에 몸이 닿자 세레나는 숨을 삼켰다.
요크는 고개를 들고 멍해진 세레나의 얼굴을 주린 눈으로 쳐다봤다. 렌즈 너머의 흐린 에메랄드빛 눈동자 속에 결심의 빛이 스쳤다.
세레나가 입고 있던 재킷의 벨트로 천천히 손을 뻗어 성문을 열려고 했다.
세레나는 도망치려고 했다.
"안 돼." 요크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안 돼." 다시 벨트를 풀면서 요크는 재차 다정스럽게 말했다. "다시는 나한테서 도망칠 수 없소. 당신을 위해서요. 녀석을 잊도록 해주겠소." 험악한 입 언저리에 달래려는 듯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은 예술에 집착하고 있지만 오늘밤은 내가 그림을 그려 주겠소."
"당신은 그림을 그릴 사람이 못 돼요." 세레나는 괴로운 듯 말했다. 벌어진 가슴께로 요크의 손이 미끄러져 들어와 허리선을 더듬기 시작했다.
"음흉하게 작전을 세우거나 모략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구요. 난 당신의 전쟁도구가 되는 것은 싫다니까요!" 세레나가 철저히 불신하자 요크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나에 대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알고 있다는 말투로군?" 요크는 목이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느닷없이 그녀를 안아들고 방 저쪽 끝에 있는 소파로 걸어가서 그대로 세레나를 넓적다리 위에 안은 채 소파에 몸을 묻었다.
"당신이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요." 세레나는 조용히 대꾸했다.
요크는 안경을 벗고 옆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 쿠션에 깊이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세레나는 요크가 피로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인간적인 취약점이 뜻하지 않게 세레나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숙련된 사령관도 피로할 때가 있는 것이다.
오늘은 두 사람 모두에게 긴 하루였다.
그러나 속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가고 회록색 눈동자가 빈틈없이 번쩍이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세레나의 마음은 또 다시 동요했다. 이 사람은 피로에 지쳐있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의 상황을 셈하고 있는 것뿐이야.
"내가 원하고 있는 거란 뭐지, 세레나?" 상냥한 목소리였다. 너무나도 상냥했다.
이 부드러운 목소리는 신용할 수가 없다.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세레나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나를 리처드한테서 떼어 놓겠다는 맨 처음 목적은 이루어졌어요.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것 같군요. 아마 나를 뺏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당신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리처드한테 보여주고 싶은 거겠죠." 요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세레나를 응시했다.
"나를 맘대로 할 수 있겠소?" 노골적인 질문에 그녀는 주춤했다.
"그런 질문에 내가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생각보다 머리가 나쁘군요!" 요크의 비정한 얼굴에 재미있다는 표정이 스쳤다.
"속임수라고 생각하는 거요?"
"당신을 맘대로 할 수 없다고 대답하면 나는 도전하는 것이 되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하면 당신은 그걸 이용할 테죠?"
"아마 그럴 테지." 요크는 손을 들어서 세레나의 밤색 머리칼을 매만졌다.
"세레나, 내 목적은 당신이 말한 그대로요."
진실을 인정하는 말을 듣는 충격을 견디려고 세레나는 몸이 굳어졌다. 마음속으로 그가 부정하기를 바란 걸까? "그러나 동기는 틀렸소." 요크는 딱 잘라서 말했다. "당신을 갖고 싶은 것은 확실하오. 그렇지만 앤더슨과의 싸움에 이용하려는 것은 아니야."
"나를 손에 넣으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요."
"앤더슨을 때려눕히려고 하지 않았다면 당신을 만나지도 못했을 거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소. 틀림없는 사실이야."
"그리고 나한테 품은 처음 관심은 당신의 작전에 이용할 수 있는 여자였기 때문이란 것도 부정하지 못할 거예요!" "부정할 수 있지. 그러나 부정하려 한들 당신이 믿을 성 싶지 않군 그래." 요크는 냉정했다.
"사실을 말해요, 요크." 세레나는 괴로운 듯 말했다. 요크는 망설였다.
"세레나, 중요한 것은 내가 당신을 원한다는 것뿐이오. 그리고 당신이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당신도 나를 원하고 있을거요." 대꾸하려고 세레나가 입을 여는 순간 요크의 손가락이 입술에 와 닿았다.
"우리가 서로 끌리고 있다는 걸 부정하진 맙시다. 그것만은 당신한테 인정하도록 할 수 있고 당신도 잘 알거요. 이 이상 애를 먹일 셈이라면 내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보여줄 수밖에 없소." 세레나는 반항적으로 턱을 들었다. 요크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을 인정하기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했다.
"서로가 좀더 정직해지자구요." 딱딱한 말투로 세레나는 말했다. "어째서 나한테 흥미를 갖게 되었는지 사실대로 말해줘요. 그렇지만 당신이 듣고 싶어 하는 대로 대답해 드리겠어요."
"당신은 우리 두 사람에게 상처주려 하고 있소." 요크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세레나는 대담하게 말했다.
"정말로 정직해진다면 그쯤은 상관없어요!"
"앤더슨한테선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그런 정직 말인가?" 요크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것이 정확한 지적이었기 때문에 세레나의 민감한 신경에 거슬렸다.
"바로 그래요!" 세레나는 화를 냈다. "어제 당신이 방을 나간 순간에 나와 리처드의 사이는 끝났어요. 이거면 됐잖아요? 당신의 작전은 완벽하게 효과를 보았어요. 이제 다시는 그와 만나지 않는다구요." 요크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오르고 세레나의 몸에 돌린 팔에 힘이 주어졌다. 마치 내 것이라는 몸짓으로 넓적다리를 요크의 손이 매만졌다.
"아무튼 그거 고마운 일이군."
"그렇지만." 간신히 격앙된 말투를 누르면서 세레나는 말을 이었다. "그 거짓말쟁이 대신에 다른 거짓말쟁이와 사귈 생각은 없습니다! 자아 사실대로 말을 해봐요."
"어째서 내가 당신을 손에 넣으려구 생각했는지 그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 거요? 결론적으로 마찬가지잖소. 바보 같으니라구. 함께 있는 사내를 내가 때려눕히려 하는 것을 몰랐다면 당신이 나를 이토록 무시하지는 않았을 거요. 자기 자신한테 정직했다면 나한테서 도망치지는 않았을 거야! 이제 그 녀석한테는 아무런 빚도 없는 셈이오, 세레나. 이젠 알겠소......"
"네, 알죠!" 세레나는 소리쳤다. "당신은 분명히 진실을 지적했어요. 그렇지만 그 일로 내가 감사한다고는 생각지 말아요!"
"아직도 앤더슨을 생각하고 있나, 세레나?" 거친 목소리였다.
"천만에요! 그런 거짓말쟁이 사기꾼을 누가 생각이나 할 것 같아요! 시간 낭비라구요. 내가 죽어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역할을 시키려고 했던 사내라구요. 용서할 수 없어요. 3년 전에 결혼한 사람과 똑같아요. 물론 당신도 마찬가지구요."
"마치 피에 주린 사람 같군?" 짐짓 놀라움을 가장하면서 꾸민 목소리로 요크는 속삭였다. 회록색 눈동자가 험악해졌다. "문제는 누구 피를 원하느냐는 거겠지, 나요. 당신이요? 내가 맨 처음 당신과 만났을 때, 당신을 앤더슨한테서 뺏으려고 한 것은 인정하란 말이지? 좋아, 인정하겠어. 그리고 당신을 뺏으려고 했던 것은 앤더슨에게 약간의 심리적인 손상을 주고, 최종적인 승리를 보다 달콤한 것으로 하려했다는 말을 듣고 싶단 말이지? 좋아, 바로 그대로요. 그러나 인정하는 것은 여기까지요. 그날 밤 호텔 테라스에서 키스한 것은 리처드 앤더슨과는 아무 상관없었소. 그저 당신을 원했기 때문이었소. 똑같은 이유로 유타까지 이렇게 뒤쫓아 와서 같은 이유로 오늘밤 당신을 원하는 거요! 자아 이만하면 만족할 수 있겠소?" 세레나는 목소리와 감정을 컨트롤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바랐던 대로 요크한테서 진실을 들었지만 요크가 말한 대로 마음속으로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요크는 자기에게 관심을 품게 된 것은 리처드 앤더슨과의 관계 때문이었다고 시인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걸 알고 상처를 받은 것일까? 알고 있는 일인데! 나는 이제 요크의 전쟁 놀음의 인질이 아니고 목표란 말인가? 몸 안에서 움찔거리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맙군요." 몸 안에서 맴도는 모순된 감정을 감추려고 밤색 눈을 감으며 세레나는 주저함이 없이 말했다.
"그렇지만 혹시 당신 말이 100퍼센트 옳다고 하면, 만약 나를 원해서 유타까지 왔다고 하면-" "바로 그대로요." 요크가 조용한 목소리로 가로막았다. 애태우듯 감미로운 손가락이 세레나의 가녀린 목선을 더듬고 있었다.
"그렇다면 실망스럽겠네요." 세레나는 차갑게 말했다.
"어떤 마음으로 여기 왔건 오늘밤 나를 안을 수는 없을 거예요, 요크 서덜랜드 씨." 요크가 입을 열기에 앞서서 그의 온기가 전해져왔다.
"당신을 안겠어, 세레나." 그 목소리는 낮고 침착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당신을 안지 않으면 안 돼. 그밖엔 도리가 없소."
"어떤 방법?" 세레나는 불안해졌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원하는지 증명하는 방법, 당신이 얼마나 나를 원하는지 증명하는 방법, 침대로 끌어넣을 때까지 당신은 나한테 반항하겠지. 그걸 깨닫지 못했으리라 생각하나?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면서 뭐라고 대꾸할 말을 생각해내고, 나한테 안기는 것을 늦출 이유를 짜내겠지. 당신은 나를 무서워하고 있소. 그리고 그 공포감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당신을 침대로 데려가서 이 진실을 당신한테 들이밀밖에 다른 도리가 없소."
"그런 짓을 용납할 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이에요!" 요크의 무릎 위라는 불리한 상황을 깨닫고 세레나는 비명을 질렀다. "힘에 꼼짝 못할 만큼 약한 여자가 아니니까요!"
"시간을 두고 설득 당하고 싶다, 이거요?"
"설령 우리가 오래 사귈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서로 상대방을 좀 더 안 뒤의 일이라구요, 그 가능성조차도 없을 테지만." 요크의 눈에 나타난 재미있어 하는 표정에 대항하려고 세레나는 비꼬아서 덧붙였다. "그렇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이것밖에 생각할 수가 없어요."
"알고 있소? 당신 생각이 오늘 하룻밤 사이에 많이 변했다는 걸." 요크는 속삭이면서 세레나의 목줄기의 맥박 치는 부분을 살짝 매만졌다.
"오늘 밤 나를 맨 처음에 보았을 때 당신은 화를 냈었지.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두 사람 사이의 가능성에 대해서 애기하고 있잖소."
"제아무리 자기가 이겼다고 우겨도 나한테는 효과가 없다구요!" 세레나는 쌀쌀하게 대꾸했으나 요크가 라운지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부터 자기 마음이 얼마나 변해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충고는 고맙게 받겠소." 요크는 낮은 소리로 말하고 셔츠의 가슴께까지 손가락을 밀어 보냈다.
"기억해두지."
"사람을 무시하는군요!"
"어느 정도는, 나를 완전하게 정신분석하고 내 목적을 모두 분류해서 이해한 걸로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그렇지 않아요?"
"틀리지." 요크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침대에 들어간 뒤라면 그렇게 될 거요."
"당신과 침대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요크." 그의 끈질김에 지지 않는 자신의 끈기를 속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세레나는 딱 잘라 말했다.
이렇게 해서 요크는 승리를 거둘 것인가? 목적을 이룰 때까지 쉬지 않고 밀고 나가는 투지로......
"어째서?" 요크는 머리를 숙이고 지금까지 손가락으로 갖고 놀던 젖꼭지에 입술을 눌러댔다.
"어째서라니? 당신이 그 일을 단순한....단순한 항복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세레나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젖꼭지를 가볍게 머금은 요크의 입술의 열기가 혈관 속으로 퍼져가자 세레나는 눈을 꼭 감았다.
"나한테 항복하는 것이 그렇게도 억울하오?" 목에 요크의 이빨이 살짝 닿는 것을 느끼고 세레나는 몸을 떨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승자가 될 테니까요." 세레나는 비참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생각은 버려요, 세레나." 요크는 달래듯 말하면서 셔츠 맨 윗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사실이 그런걸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구요!"
"세레나." 부드럽게 부푼 가슴에 키스하면서 요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청했다.
"나한테 가까이와요, 나한테 항복하는 거야. 결코 후회할 일은 없을 테니까. 나중에 시간은 넉넉하게 주겠소. 원하는 만큼 설명하겠소. 그렇지만 그 전에 당신이 내 것임을 확인하고 싶소, 당신이 나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당신의 인생에 나 말고 다른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도망치려는 것인지, 남자의 따뜻한 몸에 녹아들 셈인지 자신의 마음도 모르는 채 세레나는 불안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나는 지금 유혹을 받고 있다. 세레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자기 몸에 남자의 부풀어 오른 충격을 흡수하고픈 욕구와 욕망이 높아져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남자의 무엇이 이토록이나 감각을 매료하는 것일까? 이런 남자는 이제까지 만난일이 없었다.
"요크, 안돼요. 대답은 노우예요. 당연하잖아요."
"꿈속에서 그린 나의 그림을 보여줄게, 세레나." 요크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꿈꾸는 화가들을 격려해서 그들의 그림을 집에 장식해두는 것처럼 내 그림도 장식해줘. 부탁이야, 세레나."
형세가 불리해졌기 때문에 세레나는 요크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양손으로 매달렸다. 힘으로 정복하려고 든다면 어쩔 도리가 없으리라고 맨 처음부터 각오는 하고 있었으나 마음만은 저항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마음의 성벽만 튼튼하면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몸도 마음도 요크의 공격에 대해서 어느 쪽도 마찬가지로 반응하고 있었다.
더욱 단단히 힘을 주는 그의 팔에 안겨서 세레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대답은 노우예요, 요크. 오늘밤 당신과 같은 침대에 들어갈 생각은 없어요."
"알았어." 요크는 다정하게 말하고 세레나를 안은 채 일어섰다.
"눈을 감고 그 일은 생각하지 말아요. 아침까지 잊으라구." 세레나는 날씬하고 사나운 재규어에게 물려 밤의 깊은 곳으로 끌려가는 것만 같았다. 아침이 되면 모든 것이 이미 늦은 것이다.
8
"말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거죠, 요크?" 킹사이즈의 침대가 놓여있는 베이지와 갈색 침실로 안겨서 들어온 세레나는 대들 듯 말했다.
"당신이 항복한다는 것 말이오?" 요크는 눈치 빠르게 알아채고 세레나를 황갈색 침대위에 살짝 내려놓았다. 안경속의 눈동자가 세레나의 몸의 선을 더듬었다. "말이 있는게 좋다면 그렇게 하지." 재킷을 바닥에 벗어던지면서 생각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요크는 말했다.
입꼬리가 재미있다는 듯 뒤틀렸다.
"그러나 우리 굶주린 화가로서는 더운 밥 식은 밥 가릴 처지가 아니잖소? 지금은 손에 들어오는 것만 먹어야겠지. 말은 그 다음이구."
세레나는 요크를 원하고 있었다. 요크를 갖고 싶었다. 요크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그런 요크의 매력에 저항해왔고, 이런 모양으로 그에게 압도당하지만 않았더라면 지금부터도 저항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던 수단으로 공격해왔다. 요크 서덜랜드는 전술에 능한 사내였다.
요크가 옆에 앉자 세레나는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서 몸을 굽히고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몸을 사렸다. 그걸 보고 요크는 손을 뻗어서 살짝 세레나의 허리에 대고, 그녀를 눕혔다. 세레나의 밤색 머리가 침대 커버에 펼쳐졌다.
"내가 뒤쫓아 올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소?" 그는 목이 잠긴 소리로 말하고 세레나 위에 몸을 포개고 거친 손으로 세레나의 얼굴을 감쌌다.
"생각하지 않았어요." 요크의 몸무게에 반응해서 세레나의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생각할 까닭이 없잖아요."
"그리고 나를 완전하게 골탕 먹였다고 생각했겠지." 요크는 머리를 숙여 세레나의 입술을 훔쳤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 마취 같은 애무는 세레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입술이 막힌 채 신음소리를 내니까, 요크는 사내다운 정열로 그 절대적인 승리를 만끽했다. 그의 손이 회록색 셔츠 속으로 스며들어와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가슴을 더듬었다. 젖꼭지는 요크의 애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넓적다리 안쪽 깊숙한 곳이 흥분으로 단단하고 팽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그러나 빈틈없이 요크는 세레나의 옷을 벗기고 몸을 일으켜서 부츠와 진바지를 벗겨냈다. 앞이 벌어진 셔츠와 얇은 레이스팬티를 몸에 걸친 모양으로 누워 있는 세레나를 내려다보며 요크는 자기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세레나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한쪽 손바닥으로 끈질기게 세레나의 가슴이나 명치의 곡선을 어루만지며 플란넬 셔츠를 벗어 던지고 허리의 벨트를 풀었다.
이렇게 나를 만지고 있는 이 손은 사슬이야. 세레나는 깨달았다. 요크가 만들어내려고 하는 유대가 되는 사슬. 그리고 그의 육체를 소유하는 것으로 그 유대를 더욱 단단한 것으로 만들려 하고있다. 요크가 옷을 벗고 대담하게 그 자신을 눈앞에 드러내는 것을 세레나는 눈을 내리깔면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세레나의 심미안으로도 요크의 모습은 매력적으로 비쳤다. 그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다.
깨닫고 보니 세레나는 손을 뻗어서 요크의 어깨에서 가슴의 곱슬거리는 가슴털을 손끝으로 더듬고 있었다. 선이 가는 매끈한 몸인데 그 속에 감추어진 힘은 놀랄 만큼 격렬하게 세레나의 중심으로 호소해왔다. 위험한 매력이 세레나의 주위에서 꽃이 피고, 도망치려는 마음을 퇴색시키고 있었다.
"요즘 몇 주 동안 당신을 갖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소." 목쉰 소리로 말하고 요크는 세레나의 손을 잡아당겨 자기 넓적다리에 갖다댔다.
"앤더슨한테 미소를 보내는 당신을 볼 때마다, 나만 미소 지어주는 상대가 없다는 허전함에 당신을 납치할까 생각했을 정도였소. 당신의 미소는 최고야. 따뜻하고 상냥스럽고, 그런데 그 미소를 나한테는 보내주지 않았소!" 세레나는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요크의 마음을 그토록 사로잡은 미소가 입술에 떠올랐다.
"교정기 덕분이지요."
세레나의 단단하게 뾰족 내민 젖 봉오리에 키스하려고 몸을 굽힌 요크의 눈동자가 수상쩍게 빛났다.
"교정기?"
"2년 동안 달고 있었어요. 부모님은 많은 돈을 쓰셨지요. 그러나 그 덕분에 당신이 그 미소가 맘에 들었다는 걸 아신다면 두 분 모두 기뻐하실 거예요." 요크의 정열은 여전했지만 조심스런 장난기가 떠오른 세레나의 눈동자를 지켜보는 그의 모양이 다소 느긋해져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장난기 어린 웃음이 천천히 요크의 얼굴에 퍼졌다.
"그 빛나는 눈동자를 칭찬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요크가 농담에 응해줬기 때문에 세레나의 몸에 묘한 안도감이 퍼져갔다.
"어머, 그렇다면 콘택트렌즈에 대해서도 애기해야죠." 요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반짝이면서 세레나의 가슴에서 엉덩이로 시선을 보내면서 "그밖에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은?" 하고 의미 있게 물었다.
"천만에요. 그밖에는 틀림없는 진짜라구요!" 방안 가득히 차 있는 무거운 욕망 속에 섞어 든 여유에 휩쓸려서 세레나는 목이 잠긴 소리로 장담했다.
요크는 세레나의 미소를 좀처럼 보지 못했다고 말했으나, 그녀도 그의 웃는 얼굴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요크가 풍기는 내면의 위험성은 뚜렷하지만 언뜻언뜻 내비치는 다정한 면이 있는 한, 그 위험성을 잘 길들일 수 있다는 것을 세레나는 갑자기 알게 된 것이다.
잘 길들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요크에게 껴안기고 매끈한 다리에 남자의 단단하고 거친 다리가 얽혀드는 것을 느끼면서 세레나는 순간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밤의 이 맹공격을 이겨내지 못한다.
"진짜 당신을 찾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온거요. 요크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만을 위해서....." 세레나는 혀끝으로 계속 입술을 핥고 있었다. "그것만을 위해서 뒤쫓아 왔단 말인가요?" 세레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감춰진 의미를 찾아내려고 요크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것만을 위해서."
오늘 하룻밤을, 그리고 그의 마음을 받아들였다는 표시로 세레나는 한숨을 토해내고 양팔을 요크에게 돌렸다. 요크는 욕망의 신음소리를 내며 세레나의 목에 입을 맞췄다. 그것만을 위해서.
서로 끌리고 있는 것이라면 언제라도 희망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브론즈빛으로 물들인 손톱이 흥분하는 사내의 등에 파고들어 정열의 흔적을 남겼다.
남자가 지금 자기 몸이라는 캠버스 위에 그리고 있는 관능의 그림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으로 그런 철부지 같은 테크닉으로 화답한 것이다.
세레나는 허덕였다. 요크의 뜨겁게 젖은 입술이 어깨에서 감촉이 예민한 부푼 가슴을 더듬기 시작한 것이다. 세레나의 몸 속 깊은 곳에서 욕구가 솟아오르고 그 욕구를 채워주는 오직 한 사람의 남자가 누군가를 느끼게 되었다.
요크는 떨리는 세레나의 한손을 잡고 젖꼭지에서 그 아래로 손을 기어보냈다.
"당신의 애무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요크, 아아, 요크!" 요크가 시험하듯 하반신을 넓적다리에 눌러댔기 때문에 세레나는 목이 잠긴 소리를 질렀다.
틀림없는 힘이 전해지면서 그녀의 몸을 흥분이 뚫고 지나갔다. 세레나는 앞뒤의 일을 잊고 황홀경에 감싸였다. 이토록 원초적인 격렬한 힘으로 나를 원했던 것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헤어진 남편과의 사이에서도 없었다. 격렬하게 원하는 존재가 된다는 그것만으로도 처절하리 만큼의 유혹이라고 세레나는 떨면서 생각했다. 동기야 무엇이든 지금 나를 바라는 요크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다. 일부러 나 때문에 여기까지 뒤쫓아 오다니!
"당신을 이렇게 안고 있는 것이 꿈만 같소.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고 있어주겠지." 세레나의 배를 매만지고 있던 손이 엉덩이의 선을 따라서 움직이고 그대로 무릎으로 내려가, 이번에는 넓적다리 안쪽을 천천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아아!" 요크의 그 느릿느릿하고 도발적인 손가락의 움직임에 세레나는 신음소리를 냈다. 그의 손에 가까이가고 싶다는 욕망으로 세레나의 몸이 휘어졌다. 그러자 요크는 세레나 위에 묵직한 힘을 보냈다. 그것은 잠시 뒤에 찾아올 클라이막스의 서장이었다.
"나는 당신 위에다 내 빛깔을, 나의 사인을 그릴 거요. 다른 남자가 파고들 틈이 없도록 가득히 말이야. 당신은 100퍼센트 내 것이 되는 거요."
그 말의 성급하고 독단적인 울림이 관능의 자락을 누비고 배어들어 세레나에게 가느다란 경계심을 일으켰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에 새겨두고 있는 언제나의 경계심이었다. 언제나 이 사람이 자아내는 매력을 세레나는 이 경계심으로 희석시켜 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밤은 어쩔 수 없다. 이제 손 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세레나의 가느다란 자태는 남자의 색으로 칠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가장 민감한 부분에 요크의 레이스와 같은 애무를 받고 세레나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목구멍 안에서 신음소리를 냈다. 이제 참을 수가 없었다.
"요크!"
세레나는 엉덩이를 들어올리고 다시 요크를 원했으나 요크는 매끈한 그녀의 피부를 입술로 더듬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당신의 구석구석까지." 요크는 말했다. "당신의 구석구석까지 내 작품으로 메우고 싶소." 그 말대로 요크는 세레나의 가슴에서 복사뼈까지 키스를 퍼붓고, 그리고 이번에는 반대로 복사뼈에서 천천히 뜨거운 입술로 더듬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입을 맞출 때마다 남자의 뜨거운 입술 흔적이 세레나의 살갗에 찍히고 있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애무하고, 색칠을 하고, 붓을 부지런히 놀렸다.
요크의 재치 있는 애무가 작은 가슴에 와 닿을 무렵 세레나의 몸은 기쁨으로 떨기 시작했다. 요크는 어느 샌가 그녀의 양다리 사이에 몸을 파고들고 있었다.
"나를 갖고 싶다고 말해, 세레나." 몸부림치는 그녀에게 요크는 명령했다.
"오늘밤 내가 당신을 갖고 싶어 하는 것처럼 당신도 내가 갖고 싶다구." 세레나는 요크의 다리에 다리를 걸고 그 감촉을 즐기면서 그의 몸에 양팔을 힘껏 감았다.
"당신을 갖고파요, 요크. 이런 때 그런 말을 하게하고 싶어요? 캔버스는 화가에게 그려달라고 사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세레나!"
요크가 천천히 망설이면서 최후의 공격에 대한 세레나의 반응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짓눌렀다.
세레나의 몸은 요크를 열렬히 원했다. 그런데도 요크는 세레나가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부르고, 애원하고, 완전히 그에게 굴복할 때까지 애를 태우게 했다.
세레나의 손톱이 또 한 번 요크의 탄탄한 어깨를 할퀴었을 때, 겨우 만족한 듯 남자의 폭풍이 그녀의 몸을 덮쳤다.
"세레나!" 가슴 깊숙한 데서 쥐어짜낸 외침과 함께 요크는 세레나 속으로 밀고 들어와 그녀를 사로잡았다.
세레나는 자기 목소리조차도 들을 수 없었다. 폭력적인 행위와 예술의 한계라는 것은 얼마나 미묘한 것인가.
요크의 팔 안에서 세레나는 그의 힘에 몸을 내맡긴 채 선명한 색채로 채워지기까지 그에게 매달려 있었다. 정말 처음 느끼는 경험이었다.
요크가 자기 작품에 녹아들려 하는 데 따라서 리듬이 차츰 억세졌다. 캔버스에 달려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고 살짝살짝 그림붓을 갖다 대서 어루만지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행위에도 남자와 여자의 일체감은 서서히 깊어져 갔고 끝내는 시간관념조차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갑자기 번쩍 빛나는 선명한 빛깔이 세레나를 감쌌다. 이제 세레나의 몸은 한껏 팽팽해져 있었다. 그것을 풀어줄 수 있는 것은 그녀 위에서 힘을 가하고 있는 남자, 요크뿐인 것이다.
"요크, 아아, 요크! 이젠 안 돼! 나 이젠....."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반응을 설명할 길도 없이 세레나는 더욱 심하게 요크에게 매달렸다.
"좋아, 세레나." 세레나의 목 언저리에서 요크가 목이 잠긴 소리를 냈다.
세레나에게 휘감겨 있던 긴장감이 드디어 튕겨나가듯 폭발했다. 떨리는 몸을 누를 길이 없어 세레나는 입속에서 맴도는 소리를 질렀다.
"아아!" 요크는 주문 같은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그의 몸의 굳어지는가 했더니 활처럼 휘고 다음 순간 그도 또한 현란한 빛깔과 형태의 폭발 속에 휘말려들고 말았다.
꽉 껴안은 채 천천히, 살짝 조용히 요크와 세레나는 서로 뒤엉켜 축축한 시트에 가라앉았다. 충족감과 해방감이 가져다주는 나른함밖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둘은 오랜 시간 서로 매달려 있었다. 겨우 눈을 뜬 세레나는 요크가 아직 자기한테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요크는 양 팔꿈치를 세운 자세로 세레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도 거칠게 생긴 얼굴에도 남자의 만족감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화가는 무얼 생각하지?""가르쳐줘요." 요크는 천천히 웃음을 떠올렸다.
"만족감과 예감이야. 뜻한 것이 성취되었다는 만족감, 그리고 곧 같은 일을 되풀이할 거라는 예감." 뭔가가, 뭔지 알 수 없는 깊은 것이 회록색 눈동자 속에서 깜빡거리고 있었다. 요크는 머리를 숙이고 경건하고도 관능적이 몸짓으로 세레나의 부푼 가슴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진지한 얼굴로 세레나를 보았다.
"남자란 한 사람의 여자를 알기 위해서 평생을 바치는 수도 있지. 그리고 나는 당신이란 여자를 알기를 간절히 원했소." 행복의 물결이 세레나에게 밀려왔다. 요크는 진정이다. 세레나는 알고 있었다. 요크는 나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이 사람에 대해서 이제까지 잘못 생각해 왔는지도, 그렇지만 요크 서덜랜드가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랑.
마음속으로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그 말이 매력이란 말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지금 세레나가 느끼고 있는 것을 표현하기에는 가장 적절한 단어였다. 최근 3주 동안에 길러진 매력이 지금 그의 팔 안에서 사랑으로 꽃피운 것이다. 그것은 아직 수정과 불꽃으로 이루어진 깨지기 쉬운 것이지만, 마음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니까 이것이 당신이 오늘밤에 일어난 일을 승부니, 항복이니, 승리니 하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못 쓴다는 거예요?" 되도록 밝은 얼굴로 세레나가 물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을 유도했잖소."
엄지손가락으로 세레나의 입술을 가볍게 매만지면서 요크는 말했다.
"그럼, 정확한 말이 아니었나요?"
"그런 게 중요하오?"
"그럼요, 중요하죠."
뒤로 물러설까 보냐고 세레나는 요크의 눈을 쏘아봤다. 중요한 게 당연하잖아! 요크의 입 언저리가 굳어졌다.
"세레나, 당신은 오늘밤 나한테 모든것을 보여주었소. 두 사람한테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라구, 나는 당신을 몇 주 동안이나 원했고 이제 겨우 소원을 푼 셈이지. 다른 것은 모두 잊고 그것만을 생각합시다." 세레나의 속에서 요크가 서서히 움직이면서 빈 곳을 채워주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꺼진 불꽃에 다시 불을 당기려는 몸짓이리라. 요크의 정열적인 힘에 다소 두려움을 느끼면서 세레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몇 시간이 지난 뒤, 어렴풋이 산이 자태를 나타내면서 날이 밝을 무렵 세레나는 잠에서 깼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밤부터 다시 눈보라가 칠 모양이었다.
몸을 움직이니까 곁에 남자의 체온이 느껴졌다. 요크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젯밤의 일이 생각나서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그의 옆에 누워서 기분 좋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몸이 움찔거렸다.
세레나는 요크의 헝클어진 검은 머리에 손을 뻗어서 매만지고, 그 다음에 그 손끝을 등뼈를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엉덩이 위에서 손을 멈추고 기대하며 기다렸다. 요크는 꿈쩍도 안했다. 깊이 잠이 들어있는 탓일까, 정말 그렇다면 고소해. 나를 이렇게 녹초가 되게 해버렸는 걸! 요크의 잠든 모습은 자극적이었다. 세레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등뼈 뿌리의 감촉이 예민한 부분에 작은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응이 없다. 이번에는 넓적다리를 간지럽혀보았다. 요크는 여전히 크고 게으른 고양이처럼 잠에 빠져있었다. 끝내 몸을 일으키고 요크 옆에 앉은 세레나는 살짝 시트를 벗겼다. 발뒤꿈치를 건드린 순간, 갑자기 침대가 요동을 쳤다.
"요크!"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닷없이 벌떡 일어난 요크에게 그녀는 큰 소리를 질렀다. "기다려요! 그럴 셈이 아니었어요! 간지럼을 타는 줄은 몰랐다구요!"
"발바닥에 손을 가져가다니, 용서할 수 없어!" 요크는 몸을 벌떡 일으켜 도망칠 틈도 안주고 세레나의 머리에 시트를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시트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녀를 붙든 채 침대에서 내려왔다.
"뭘 하는 거예요?" 시트 속에서 세레나가 소리쳤다. 방안을 끌려 다닌다는 것을 알고 웃음을 터뜨릴까, 도망칠까 망설였다. "놔줘요, 요크! 나 장난친 것뿐이에요...."
"알고있어." 요크는 기분 좋은 듯 말했다.
"요크 뭘 하는 거예요? 이봐요...너무해요!"
샤워가 머리위에서 쏟아져 내려와서 세레나의 말문을 가로막았다. "요크! 시트가!" 요크는 세레나를 일으켜 흠뻑 젖은 시트를 벗겼다.
고개를 든 세레나는 요크가 웃으면서 함께 샤워아래 있는것을 깨달았다.
"곧 마를 거야." 그렇게 하고 둘둘 만 시트를 물이 흐르는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당신도야, 사과할 때까지는 안 돼."
"어째서 사과해야하죠?" 세레나는 기지개를 켜고 양팔을 요크의 목에 휘감았다.
"조금 건드렸을 뿐인데.."
"간지럽혔잖소."
"참 일방적인 말투로군요."
"그렇지만 나와 상대하려면 알아둬요, 세레나." 요크는 점잖은 체 말하고 세레나의 둥그스름한 엉덩이에 손을 뻗어서 매끈한 몸을 끌어당겼다.
"빌지 않을 거야?"
"무릎을 꿇려서 빌게 하고 싶어요?"
"응, 재미있을 것 같군."
"나,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에요." 세레나는 철부지처럼 말했다.
"당신 때문에 어제 저녁은 걸렀다구요. 아침식사까지 못 기다려요."
"화제를 돌리지마, 빌 때까지는 먹이지 않을 거요." 그렇게 말하고 요크는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아얏! 알았다구요. 먹기 위해서라면 사과하겠어요. 이제 다시는 발바닥을 간지럽혀서 깨우지 않겠어요!" 겨우 요크의 눈에 고양이 같은 만족스런 빛이 나타났다.
"그러나 말해두겠는데요. 도망칠 기회가 있었다면 빌지는 않았을걸요." 갑자기 말투를 바꾸고 요크가 말했다.
"나한테서 도망칠 수는 없소. 그런 생각은 버리도록 해요. 당신은 이제 내 것이니까." 세레나는 요크의 태도가 변한 것을 깨달았다.
거머쥔 손에도 힘이 들어있었다. 요크의 말에 담긴 무게를 이해할 수 있었다.
"요크?" 불안해져서 세레나는 물었다.
그러나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다시없이 분명히 하는 키스로 입술이 막혀지고 질문은 끊기고 말았다.
키스를 나누면서 세레나는 잠시, 이것은 항복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요크의 승리를 의미하고 있었다.
9
"이 산속에 얼마동안 숨어 있을 셈이었지?" 롯지의 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요크가 가볍게 물었다.
"숨어있는 것이 아니에요!" 세레나는 벌써 여러 차례의 노여움을 폭발시키며 악을 썼다. "여기 온 것은 틀림없는 휴가라구요, 머무는 기간은 2주동안. 그 계획을 바꿀 생각은 없어요. " 세레나는 새초롬해져서 말했으나, 여기 머물겠다는 요크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겨울 준비를 안 해왔잖소?"
"이제부터 겨울옷을 사면돼요."
"거기다가 당신은 스키도 못하잖아."
요크는 마음을 털어놓고 말하면서 감자를 입에 넣었다.
"그렇지만 난롯가에서 핫투데이를 마시면서 열중해 있는 스키어들을 바라보는 것도 괜찮던데요." 세레나는 방긋 웃어보였다.
요크를 상대하면 왜 일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는지 세레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함께 파사디나에 돌아 가줬으면 하는 요크의 기대를 깨달았을 때 세레나는 반항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온순한 반항이긴 했으나 의지가 견고한 것이었다.
요크를 설득해서 이대로 함께 유타에 있으라고 본능이 명령하고 있었다. 파사디나에서 기다리고 있는 비지니스에 시달릴 것 없이 여기서 2주 동안 함께 지내는 것이 두 사람에게는 필요했다.
어젯밤 이래로 세레나는 요크의 진정을 의심하지 않았으나 아침식사 자리에서 시작된 말싸움이 차츰 그녀를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남자란 하룻밤 사이에 성격이 변하지는 않아, 아무리 사랑을 하더라도....
세레나는 무의식중에 마지막 말을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만 요크의 마음이 어느 정도의 것인지 알 수 없어, 지금으로서는 사실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요크는 나를 열렬하게 원하고있다. 이것만은 확실했다. 사랑이란 말은 뒷날을 위해서 남겨두는 것이다.
"여기 오기로 한 것은 갑작스런 것이었을 테지?" 커피에 크림을 넣으면서 요크가 슬쩍 물었다.
"파사디나의 일은 괜찮은 거요? 당신 가게는 어때?"
"2주쯤 내가 없어도 끄덕없어요." 돌아가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요크는 어떻게든 세레나를 설득해서 그를 따르게 하려 했다 "이곳에서 정확히 2주 동안 머물 거예요, 요크." 세레나의 낮은 목소리에 나타난 결심에 요크는 한쪽 눈썹을 신경질적으로 올리고 생각에 잠긴 채 커피를 훌쩍거렸다. 세레나는 쾌활한 얼굴 뒤에 불안을 감추고 있었으나 그것도 차츰 어렵게 되어갔다. 요크가 최후통첩을 들이댔을 때, 그를 혼자서 정말로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 선택의 기로에 서서 그녀의 마음은 아팠다.
2주 동안 둘이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본능이 시키고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둘이서 지낼 필요가 있다고 뭔가가 명령하고 있다구.
"여기 함께 머물자고 날 초대하는 거요?"
드디어 입을 연 요크의 조용한 말투에 세레나는 멍해졌다. 세레나는 테이블 너머로 그의 눈을 지켜보았다. 행복감이 마음속에서 배어 나왔다.
"물론이죠, 요크. 초대하겠어요. 정말 그래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요크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당신의 그 눈빛에는 거역할 도리가 없소." 그리고 따뜻한 웃음소리를 냈다.
"초대에 기꺼이 응하겠소."
"콘택트렌즈 때문이죠." 세레나는 겸손해서 말했다. "그래서 반짝이는 거예요."
"눈동자가 빛나는 것은 어젯밤을 생각하는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군." 요크는 대담한 웃음을 떠올렸다. "잘난 체한다고 생각하진 말아요, 남자란 그렇게 해서, 그래...."
"만족하세요?" 세레나는 철부지스럽게 말을 곁들였다. 요크의 눈에 떠오른 웃음은 무시했다.
"어젯밤에 바랐던 것은 손에 넣었잖아요? 원하는 건 언제나 그렇게 손에 넣나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소." 요크는 미소 지으며 의젓하게 말하고 웨이트리스가 두고 간 보온식 커피포트에 손을 뻗었다. "자, 커피 한 잔 더 합시다. 이 눈 속에 머물 생각이라면 몸을 따듯하게 해야지!" 요크는 어젯밤에 원하고 쫓던 것을 손에 넣고 나는 오늘아침 그가 양보하도록 한 거야. 롯지를 나와서 겨울옷 파는 데를 찾으면서 세레나는 몇 번인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요크는 처음엔 머물 생각도 없었는데, 지금은 그럴 셈으로 있으니까.
그러나 아무래도 이 거래하듯 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힘이 결론적으로 이룬 모양은 균형을 유지한 것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불안해지는 것이다. 이게 뭐람! 진실한 사랑이 무력외교의 게임이 되다니! 침착해야 돼, 세레나는 자신을 타이르면서 안에 털이 대진 부츠와 밝은 노란색 재킷을 샀다. 너무 몸을 사리는 거 아냐, 세레나.
"자아, 그럼?" 쇼핑백을 들고 맨션으로 돌아가는 길에 요크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사람이라도 만들 작정이오? 완벽하게 준비했으니 이 옷을 입지 않을 수는 없을 거구."
"좋은 생각이 있어요. 우리 썰매 사지 않을래요? 남캘리포니아의 인간이라도 둘이서라면 어떻게 다룰 수 있지 않을까요?"
두 사람은 썰매를 사고, 점심을 먹고 난 뒤에 적당한 슬로프를 찾아 나섰다. 몇 번이고 실패한 끝에 역시 썰매를 타며 놀고 있던 아이들 도움을 받아서 요크와 세레나는 겨우 슬로프 아래까지 썰매를 지치고 내려올 수가 있었다.
"눈 위에서 노는 즐거움에 대해서 한 말씀 있음직한데." 다시 썰매에 올라타면서 요크가 놀리듯 말했다. 요크는 양팔을 세레나의 몸에 휘감고 양다리 사이에 바짝 끌어안았다.
"방향을 잡을 수가 없잖아요." 작은 썰매위에서 그의 앞에 앉아있던 세레나는 이 포옹에 만족하면서도 항의했다.
"떨어지지 않게 붙잡고 있으면 돼." 그렇게 말하고 요크는 더욱 억세게 세레나를 껴안고, 귀 뒤의 모자로 가려지지 않은 부분에 애를 태우듯 키스를 했다.
"요크! 아이들이 보고 있다구요!"
"어른이 되고 싶어질 테지."
세레나는 그날 오후만큼 즐거운 때를 보낸 일은 없었다. 웃음소리와 더욱 깊어지는 친밀감이, 몸이 움찔거릴만큼 달콤한 만족감을 세레나에게 선사했다.
어두컴컴해질 무렵, 요크는 한 손에 썰매를 들고 한손으로 세레나의 손을 잡고 더운 포도주와 맛있는 저녁식사를 기대하며 롯지로 돌아갔다.
일기예보 그대로 눈보라가 몰아쳤다. 요크와 세레나는 롯지의 빨갛게 타오르는 난로 옆에 앉아서 식후의 꼬냑을 홀짝거리며 커다란 창문 너머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경치를 맨션 창문으로 바라본다면 더 멋있을 거 같지 않소?" 요크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거의 비어있는 브랜디 잔을 내려놓고 세레나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의 눈동자에 갑자기 깃든 멋쩍어하는 빛을 알아차린 세레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렇지만 같은 눈이잖아요..."
"느낌은 전혀 다르지."
"이봐요, 요크. 뭔가 너무....너무 갑자기 진전된 거라고 생각지 않아요?" 요크한테 다정스레 이끌려서 문으로 향하면서 세레나는 다소 진지하게 말했다.
"날 믿어주길 바랄 뿐이지." 밖으로 나오자 심한 눈보라가 두 사람에게 몰아쳤다. 둘은 길을 재촉했다.
"잠깐만 기다려 봐요." 현관에 이르렀을 때 요크가 말했다.
"곧 돌아올게."
"어디 가는 거예요?" 세레나는 놀라서 뒤돌아봤다.
"차에서 갖고 올 게 있어."요크가 성큼성큼 건물 그늘로 사라졌다.
몇 분 뒤, 검은 가죽으로 된 서류가방을 손에 든 요크가 돌아왔다.
"이렇게 갑자기 2주 동안이나 일에서 떠나 있을 여유는 없소." 세레나한테 요크가 설명했다. "좋건 싫건 오전 중에는 몇 시간만이라도 서류를 들여다봐야 하니까." 세레나는 실망스러워서 숨을 죽였다.
요크가 2주 동안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보낼 거라고, 까닭도 없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사디나를 떠나기 전에 하던 일을 정리할만한 시간의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오전 중에?" 세레나는 되물었다. "오늘밤이 아니구요?" 요크는 세레나를 데리고 현관에 들어섰다.
"야아, 오늘밤은 아니오." 요크는 목이 잠긴 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오늘밤에는 난로 앞에서 보는 눈이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 당신한테 가르쳐줄게." 몇 분 뒤, 세레나는 소파 구석에 몸을 쪼그리고 요크가 불을 피우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꽃이 튈 때마다 요크의 검은 머리가 밝게 빛났다. 꺾은 무릎에 한 팔을 올려놓고 난로 정면에 앉아서 불이 충분이 일어난 것을 확인하고는 남자다운 날렵한 몸놀림으로 일어서서 기다리고 있는 세레나 쪽으로 걸어왔다.
"경험이 모자라는 남캘리포니아 사람치고는 잘 하시는군요." 세레나는 칭찬을 했다.
뭔가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세레나도 알고 있었다.
맨션의 자그마한 공간은 세레나의 흥분과 요크에 대한 의식을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만들었다.
애기를 계속하는 것은 편한 태도를 유지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이었다.
요크는 세레나의 옆에 앉아서 기분 좋은 듯, 난로에 발을 뻗으면서 세레나를 끌어당겼다.
"내가 바베큐의 불을 피우는 걸 볼 때까지는 그 말을 보류해두라구. 거기에 비하면 이런 거야 식은 죽 먹기지." 세레나는 마음 약한 미소를 떠올리면서 요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 재주를 칭찬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요크는 과장되게 장담을 하고 세레나 목의 민감한 부분에 코를 비벼댔다.
세레나가 몸을 떨며 요크에게 다시 다가가니까 그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흘리고 안경을 벗었다.
세레나는 요크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천천히 그의 셔츠단추를 풀자 곱슬거리는 가슴털이 드러났다.
요크는 어둠속에서 세레나에게 말없이 정열을 담아서 다시 그녀를 자기 것으로 하려하고 있었다.
"세레나?" 세레나의 손길을 머리칼에 느끼면서 요크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이제 내 것이오, 알고 있지?" 세레나는 좀 불안해져서 요크에게 기댔다.
"당신은 내 것이에요?" 겨우 이렇게 대꾸했다.
요크는 그녀를 안아 올려서 발밑의 카펫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흰 셔츠 단추를 열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 것이지, 물론. 자아, 이번에는 그쪽에서 고백할 차례야!" 요크의 손이 드러난 셔츠의 가슴으로 파고들어와, 내 것이란 듯 가슴을 덮었다. 난로의 불꽃보다도 뜨거운 입맞춤에 세레나는 신음소리를 냈다. 요크의 손으로 옷이 벗겨질 때마다 불꽃에 몸을 태우는 것 같아서 세레나는 몸부림쳤다. 요크는 애가 타는 듯 자기도 옷을 벗고 그녀 곁에 무릎을 꿇었다. 천천히 신중하게 정열적으로 요크의 손이 세레나의 몸을 더듬었다.
세레나는 아프도록 느껴지는 욕망에 미칠 것만 같았다.
"말해, 세레나." 세레나가 열심히 손을 뻗어서 요크를 끌어당기려고 하니까 요크는 쉰 목소리로 명령했다.
"당신은 내 것이라고 말해!" 요크가 기뻐한다면 어떤 말이라도 할 셈이었던 세레나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속삭였다.
"그래요, 요크. 나는 당신 거예요. 부탁이에요....부탁해요....." 애원하는 말은 놀랄 만큼 느닷없이 넓적다리를 짓누르면서 거친 욕망으로 다가온 요크 때문에 중단되었다.
그 욕망에 세레나도 지지 않을 뜨거움으로 응했다. 세레나는 두 사람 이외의 우주를 몰아내버린 요크의 포옹에 감싸였다.
몇 시간이 지난 뒤, 세레나는 침대 위에서 혼자 잠에서 깼다. 어둠속에서 눈을 깜빡이고 손을 뻗어서 요크의 자리를 더듬었다. 꽤 오래전에 요크에게 안겨 침대로 와서, 피로에 지친 둘은 껴안은 채 잠이 들었던 것이다.
침대가 텅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세레나는 부스럭부스럭 몸을 일으키고 무의식중에 시트를 턱밑까지 끌어올렸으나 벌거벗은 모양을 볼 사람은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욕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나 해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하품을 하면서 그녀는 구겨진 침대 끝으로 몸을 내밀었다.
연보라와 금빛 가운을 입고 세레나는 침실에서 짧은 복도로 나갔다. 복도 저편에 불이 켜져 있었다. 졸음 때문에 다시 눈을 껌벅거리며 세레나는 불빛이 있는 곳으로 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식당 테이블에 서류를 펼쳐놓고 앉아있는 요크의 모습을 보고 세레나는 멈춰 섰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될 텐데...." 세레나의 목소리에 요크는 뒤돌아보고 잔잔하게 말했다.
맨발인 채로 진바지를 입고, 벌어진 셔츠 사이로 햇볕에 탄 가슴이 드러나 보였다. 검은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으나 안경속의 눈동자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있었다.
"언제나 이래요? 이렇게 일찍 일어나요?" 세레나는 묻고 그의 곁에 섰다.
요크는 세레나의 허리에 팔을 휘감고 매끄러운 가운속의 둥근 가슴에 키스했다.
"걱정하지 마, 평소에는 남들처럼 같은 시간에 일어나니까. 당신이 내 위에서 잠들어버리고 나서 좀 생각하고 있다가....문득 그 일을 해치워야겠다고 생각했지."
"어떤 일인데요?" 세레나는 테이블의 서류를 들여다보며 흥미진진해서 물었다.
"비지니스지." 요크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숫자가 적혀있는 서류를 긁어모았다. 그것을 한데 모아서 겨우 세레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밀어놓았다.
순간 세레나는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유타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해서, 생활의 리듬을 깨뜨렸나요?"
"여기서 당신과 함께인 덕분에 생활은 정말 즐겁소." 요크는 늑대 같은 웃음을 떠올리고 나머지 한쪽 손도 세레나의 허리에 돌려서 무릎으로 끌어당겼다.
"비지니스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 혼자서 해치울 수 있으니까." 요크는 고개를 숙이고 혀끝으로 세레나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이런 일 때문에 한밤중에 일어날 건 없잖아요. 나는 그런 요구를 한 적은 없다구요! 낮에 일을 할 수 있도록 썰매놀이에서 해방시켜 줬는데!" 요크는 킥킥대며 웃고, 손을 뻗어서 가운 속으로 집어넣어 그녀의 가슴을 감쌌다.
"그뿐만이 아니고, 당신은 매우 요구하는 것이 많은 여자야, 하지만 그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고 내가 바라고 있던 것이니까." 세레나는 얼굴을 붉히고 요크에게 더욱 다가섰다.
"요구하는 것이 많은 여자라니, 무슨 뜻이에요?" 그녀는 토라진 듯 보였다.
"여기에 당신이 오기까지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거의 몰랐잖아요."
"그렇지 않다는 걸 당신도 잘 알면서 그래." 요크가 말을 끊었다.
"우리는 맨 처음부터 상대방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이해하고 있었소. 당신이 앤더슨에게 그런 잘못된 충성심을 품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나한테서 꽁무니를 빼지도 않았을 테지."
"그렇지 않아요." 세레나는 자신 없이 말했다. "당신을, 당신을 만나면 신경이 과민해져서 조심스러워졌어요."
"아직도 내가 무섭소?"
"무섭다고 생각한 일은 없다구요!" 세레나는 딱 잘라서 말했다.
"증명해 보라구." 요크는 천천히 말하고 세레나를 안은 채 일어서서 침실로 발을 옮겼다. 세레나는 양팔을 요크의 목에 감고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좋아요, 그렇지만 내가 어째서 도전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죠?"
"말했잖아, 나는 당신에 대해서 뭐든지 알고 있다구." 요크는 태연하게 말했다.
얼마 뒤에 세레나가 몽롱하게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벌써 아침 해가 빛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발끝으로 더듬어보지 않아도 요크가 옆에서 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자고 있을 때도 묶어두려는 듯 요크의 한쪽발이 세레나의 몸에 걸쳐있었다.
세레나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흘렸다. 천천히 조심해서 요크의 밑에 깔린 발을 뽑아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침식사를 준비해서 요크를 놀라게 해줄 작정이었다. 어제 이것저것 식료품을 사다놓았고, 메밀로 만든 케이크와 진한 커피 정도라면 자신이 있었다.
탄탄하고 날렵한 몸을 편한 모양으로 뻗고 잠들어 있는 요크를 그대로 두고 렌즈를 끼우려고 욕실에 들렀다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갖추어져 있었다. 리조트맨션에 비치된 커피코트의 플러그를 꽃았다.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세레나의 복사뼈 있는데서 연보라와 금빛 옷자락이 우아하게 흔들렸다.
기분 좋게 하품을 한 세레나는 욕실로 가려고 했다. 우선 샤워를 하고나서 그 다음에 케이크가루를 반죽할 셈이었다. 세레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은 식당 테이블 한쪽에 가지런하게 쌓여있는 요크의 서류였다.
그때 어째서 테이블로 다가갔는지는 그녀 자신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단순한 호기심이라든가 탐색하는 취미에서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전혀 다른 동기에서 오는 아마도 본능적인 육감에 따른 행동이었을 것이다.
세레나의 손은 어느새 숫자가 적혀있는 서류에 뻗어있었다. 얼른 봐서는 숫자나 임차대조표는 전혀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세레나는 집어든 서류를 내려놓으려고 했다. 이런 것은 내가 알 바 아니라구.
그때 다음 페이지의 서두에 있는 앤더슨사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세레나를 테이블까지 끌어들인 본능적인 육감이 하나의 예감이 되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세레나는 그 페이지를 펼쳐들고 천천히 의자에 앉아 꼼꼼하게 읽어 내렸다. 아무튼 비지니스의 세계에 흥미가 있던 탓으로, 지금 자기가 읽고 있는 것의 내용을 대충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세레나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주방의 모던한 시계가 조용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커피포트는 커피를 끓여내고 보온으로 바뀌어있었다. 세레나는 양쪽 모두를 무시하고 서류에 열중해있었다. 세레나는 눈앞의 복잡한 재무데이터에 몰두해있었다. 산더미 같은 서류를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긴장감이 높아갔다. 긴장된 나머지 팽팽해진 전 신경이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 온 요크의 비꼬는 목소리에 산산조각이 났다.
"당신이 애인의 일에 이토록 개인적인 흥미를 갖는 여자라니. 영광이군." 세레나는 섬뜩해서 고개를 들고 뒤돌아봤다. 요크가 거실입구에 서 있었다. 진바지만을 입은 요크의 가는 몸에서 발산하는 힘이 방 저쪽에서도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정말 위험한 사람이다.
어째서 그런 사람인 것을 한 순간이라도 잊고 있었을까? 입구에 버티고 선 요크의 모습은 야수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위험한 힘 때문에 터질 것만 같았다. 의자의 팔걸이를 거머쥔 세레나의 주먹이 하얗게 변했다. 그녀의 밤색 눈동자는 크게 열리고 이제부터 하려는 비난의 빛으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비난의 뒷면에는 괴로움이 있었으나 세레나는 그 괴로움을 나타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한테 이런 만족을 주다니 될 말인가!
"그럴 셈이었군요?" 세레나는 목이 잠긴 소리로 말을 꺼냈다.
요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딱딱한 표정 속에서 한쪽 눈썹만이 움직였다.
"앤더슨사를 망하게 할 셈이군요. 지금 입찰경쟁을 하고 있는 계약을 얻어내는 것으로 마음이 차지 않아서....."
"언젠가 리셉션이 있던 밤에 그렇게 말했잖소." 요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어깨를 움찔하고 말했다.
"그때는....그때는 거짓말이거나 허풍을 떠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세레나는 중얼거렸다.
"당신은 정말 위험한 사람이에요."
"당신을 만났다는 그 이유만으로 내가 앤더슨사에 대한 계획을 변경할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오?" 신경을 거스르는 냉정한 태도로 요크가 말했다.
"아니요." 현기증이 나는지 세레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얼마동안 전혀 생각을 못했어요.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다면 이런 상황이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해도 씁쓸한 감정이 배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빈틈없는 회록색 눈동자가 값이라도 매기듯 작아졌다.
"당신과 나 사이에 일어난 일은 외부 사정이야 어찌 됐든 진행될 일이었소." 요크는 난폭하게 말했다. "앤더슨사와의 싸움은 우리 둘 사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알겠소. 세레나? 우리의 관계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구."
"싸움?" 세레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풀이했다. "이것이 그건가요?" 그리고 경멸하는 투로 서류를 테이블에 집어던졌다. "이 데이터나 숫자, 채무분석에 수지보고, 토목공사를 하나 낙찰시키는데 이런 데이터가 필요할 까닭이 없어요. 이것은 남의 회사를 집어삼키려고 할 때 모으는 정보라구요. 그리고 당신은 그렇게 할 거구요. 그렇죠?"
"당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오, 세레나." 요크는 냉정하게 말했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뻔뻔스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거죠? 당신과 나한테 당연히 상관이 있는 게 아녜요! 신경전에 편리한, 금융공작처럼 비겁한 점거전술에서는 신경전술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나도 알 수 있어요. <월스트리트 저널> 을 읽고 있으니까요!"
"세레나!"
"이틀동안 나는 당신을 오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둘 모두가 비지니스보다도 중요한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이토록까지 리처드를 파멸시키려 하고 있다는 걸 알고 당신의 머릿속에는 지금 하고 있는 싸움의 작전 말고는 아무것도 들어갈 여지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어요. 당신은 심리적인 승산을 생각하고 나를 리처드한테서 뺏으려고 했어요. 이것은 게릴라 전법인 셈이죠? 파사디나에 돌아가면 어떻게 할 건가요? 앤더슨의 여자와 잤다고 소문 낼 건가요?"
"그만둬, 세레나!" 험한 질책소리와 함께 요크는 세레나 쪽으로 다가왔다.
폭력에 대항하려는 듯 세레나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요즘 이틀 동안 내가 정신이 이상해져 있었군요. 나 자신한테 최면술을 걸었는지도 모르죠. 도대체 어떻게 당신을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맨 처음에 만났을 때와 꼭 같다구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요. 당신한테는 이기는 것만이 모든 거예요. 그리고 당신에게 있어서 이긴다는 것은 적을 철저히 때려눕히는 것, 신사의 룰 따위는 통용되지 않는 거로군요. 당신한테는 2,3개월 전에 계약 하나를 앤더슨사에 뺏긴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 이번에는 리처드를 파멸시키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건가요?" 요크가 당장이라도 덤벼들 자세여서 세레나는 손을 뒤로해서 테이블 끝을 붙잡고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도전적으로 턱을 내밀고 되도록 경멸하는 표정을 담은 얼굴로 요크와 마주섰다. 요크의 작전으로 자기가 얼마나 짓밝혔는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뜻밖에 요크는 두세 발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험상궂고 공격적인 시선을 보냈다.
"다시 한번 말하지, 나와 앤더슨사의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은 당신과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한 가지 가르쳐주지. 그 친구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어왔소."
"그의 회사가 재빠르게 요전의 계약을 입찰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녀석은 속임수를 쓴 거야."
"그만둬요, 요크...."
"정말이오, 그렇지만 변명할 생각은 없어." 지금까지 노여움을 누르고 있던 냉정하고 오만한 억제력이 무너지고 요크는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한번만 애기해주지. 앤더슨사의 내부사정은 어렵소. 불행하게도 그 친구한테는 아버지만큼의 재능이 없었지.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난번 계약을 따내야했소. 그렇지 않으면 올해는 거액의 적자를 볼 판이었지. 앤더슨사의 사장 자리가 왔다 갔다 하는 적자가 말이오. 중역회의는 주주들을 달래기 위해서 손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소. 자기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당신이 헤어진 그 사람은 최대의 라이벌인 서덜랜드 주식회사에 대해서 약간의 스파이 활동을 했소. 내가 사태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소. 앤더슨사에 낙찰이 됐소. 그러나 그 친구는 보복을 받게 될 거요. 세레나. 그 맹세는 꼭 지키고 말거요! 그 녀석을 엉망진창으로 밟아 주고 말겠어!"
"그런 짓은 할 수 없어요!" 요크의 복수심에 불타는 말에 세레나는 숨을 삼켰다.
"어째서?"
"당신은 잘 몰라요. 리처드의 회사와 그의 지위를 망치는 것은 리처드라는 한 사람을 망치게 하는 거예요. 그뿐만이 아니죠. 가족이나 사회적 지위나...."
"재미있는 것은, 나는 그 친구 마누라를 말려들게 할 생각은 없다구." 요크가 냉혹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녀는 상처받지 않을 거요, 세레나. 돈을 갖고 있으니까 말야. 최근 5년동안 앤더슨의 경기가 상향세에 있는 것은 마누라 돈 덕분이오. 돈 때문에 그 친구는 결혼을 했지. 그리고 돈 때문에 이혼을 못한다, 이 말이오. 고전적인 정략결혼이라구. 남자의 지위 때문에 여자의 돈을 쏟아 넣는다. 그리고 여자는 명문의 이름을 얻는다. 그녀는 남편의 바람기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소. 그러나 남편이 지위를 잃는다면 가만 보고 있지는 않을 거요. 두말없이 돈을 갖고 가버릴거라구."
"리처드의 결혼 문제로 나한테 무슨 소릴 하려고 해도 안통해요! 리처드 일을 생각나게 해서 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구요?"
"그 친구한테 속았다고 노발대발했잖소, 부정할거요?"
"그럼요. 노발대발한 것은 사실이죠. 그렇지만 더 이상 화를 내지는 않겠어요. 그에게 내 마음을 애기하고 미련 없이 손을 끊었으니까요."
"그래도 괜찮소?" 요크의 말은 세레나를 부추기고 있었다.
"얼마쯤은 그 친구한테 복수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당신도 인간인 이상."
"리처드에 대한 복수는 벌써 끝났는지도 몰라요." 세레나는 대꾸했다.
"당신 유혹에 따른 것은 복수하기 위한 것이었죠. 남자한테 복수하는 데 그의 불구대천의 원수와 자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으니까요."
"아니야!" 요크는 소리를 지르고 성큼 두 사람의 거리를 좁혔다. 세레나는 팔을 붙잡혔다. 팔소매 위로 요크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요크의 얼굴은 자제심이 무너져 버린 듯 거칠게 변했다.
"나한테 몸을 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소! 거짓말하지 마!" 세레나는 화가 치밀어서 메마른 입술을 빨았다. 자기가 몸을 맡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서 요크를 화나게 한 것은 순간적인 말대꾸였고, 자기변명이었는데 뜻밖의 요크의 반응에 세레나는 깜짝 놀라고 있었다.
"내가 유혹에 말려든 까닭에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죠? 당신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잖아요, 리처드를 쓰러뜨릴 무기를, 그랬으면서 어째서 내 복수하는 까닭은 부정하려는 거죠? 내가 복수를 바라고 있던 게 틀림없다고 당신도 아까 말했잖아요!"
"시끄럽소....!"
"거친 말투를 삼가 해요!"
"그렇군, 거친 말투는 안 되지. 당신한테서 진실을 끌어내지 않으면 안 돼.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거요. 세레나 골드웰. 우리 둘 사이는 당신이 내 서류를 몰래 보기 전의 어젯밤과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
"아니요, 요크. 틀려요." 세레나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당신은 조금도 안 변했어요. 그렇지만 나는 판단을 잘못했다고 후회하고 있어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이용할 만큼 이기는 일에만 집착하는 사람과 관계를 갖는 것은 싫어요."
"나는 당신을 이용하지 않았소!"
"설령 그 말을 믿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복수 때문에 한 가족을 파멸시키려 하고 있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 리처드를 동정하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이 말한 대로, 그가 더러운 짓을 했다면 당신한테는 이번 입찰에서 그를 따돌릴 권리가 있어요. 그렇지만 거기서 끝나야 하는 거잖아요. 당신 말처럼 리처드한테 비지니스 재능이 없다면 내버려둬도 스스로 망할게 아닌가요. 그것을 일부러 파멸로 몰고 가다니, 당신도 그와 마찬가지예요!"
"도통 아무것도 모르는군." 요크는 이를 갈았다. "나를 속여 놓고 그냥 끝나는 놈은 없지. 모든 것을 잃어 마땅해. 나는 그 어느 누구한테도 짓밟히지 않는다구. 사내대장부가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거요." 팔을 거머쥐고 있는 요크의 손에 주어진 억센 힘과 그의 목소리에 감추어진 결심을 깨닫고 세레나는 찬찬히 그를 지켜보았다.
이틀 동안 서로 웃고 사랑을 나눈 이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말인가? 그것은 그저 환상이었단 말인가? 요크의 매력에 항복한 변명으로 내 마음이 만들어낸 산물? 어째서 그런 바보짓을 했을까? "당신을 말리지는 못할 것 같군요, 요크." 가라앉은 목소리로 세레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어드리지 못할 거예요. 당신은 싸움으로 돌아 가줘요. 나를 혼자 놔두구요."
"아직은 안 돼, 세레나." 요크는 세레나의 팔을 놓아두지 않았다. "더 애기하고 나서야."
"애기할 것 없어요. 당신이 바라는 것이 뭔지 확실하게 안 이상 나는 이제 말려드는 건 싫어요. 가게 해줘요, 요크. 아시겠어요, 잘 들어봐요."
세레나는 떨쳐버리듯 말했다. "이것은 당신한테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구요. 나를 여기다 감금해 둘 수 없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아실 테죠.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어때요? 나는 이제 당신한테 필요 없는 여자다, 그러니까 이런 부질없는 일로 나를 이기려고 할 수는 없다구요. 나는 당신과 리처드 양쪽에 이용당한 거예요. 싸움에서 빠져나갈 권리는 있다고 생각해요." 순간 세레나는 자승자박인 꼴이 되어, 요크가 정말로 자기를 감금하는 방법을 생각해내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그때, 요크가 낙담과 노여움을 다시 누른 듯 회록색 눈동자에 다시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가 붙잡고 있던 팔을 놓고 한 발 물러났기 때문에 세레나는 동요했다.
"언제 떠날 거요?" 딱딱한 말투로 요크가 물었다. "파사디나로 돌아갈 거요?"
"다른데 갈 곳이 있나요?" 세레나는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조심스럽게 요크 곁을 지나서 침실로 향했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세레나는 안전한 옆방까지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요크의 모습이 안 보이게 되자 세레나는 공포감 때문에 손을 뒤로해서 문을 잠가버렸다.
그리고 목 안에서 솟아오르는 흐느낌을 참으려고 몇 번인가 심호흡을 하면서 욕실로 뛰어들어 거칠게 샤워를 틀었다.
4,5분 뒤에 짐을 채운 작은 가방을 왼손에 들고 다시 거실로 돌아오는데, 세레나는 생각했던 이상으로 용기를 내야했다. 기다리고 있던 남자의 눈은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요크는 여전히 바지밖에는 몸에 걸친 것이 없이 헝클어진 검은 머리에 빗질도 하지 않고 있었다. 곁에 있는 식탁에 커피잔이 있었고 아까까지 세레나가 앉아있던 의자에 사나이답게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그 볼썽사나운 서류는 아직 세레나가 놔둔 그대로였다.
입술을 꼬옥 다문 채 등 뒤로 따라오는 시선을 느끼면서 세레나는 문으로 향했다. 가는 길을 막으려고 요크의 의지의 힘이 손을 뻗어오는 것이 아프도록 느껴졌으나 세레나는 자기의 모든 존재로 거기에 맞섰다. 그에게 져서는 안 된다.
지금 이런 때 지면 안 돼! 이 사람은 이기고 지는 일밖에는 머리에 없어. 다시는 이런 사람한테 지면 안 된다.
고맙게도 겨우 손잡이에 손이 닿았다. 둥 뒤의 의자에 앉아있는 재규어가 마지막 순간에 뛰어올라 그의 둥지로 끌고 들어가는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세레나는 손잡이를 비틀어 앞으로 당겼다.
방 저쪽에서 발산되는 위험한 느낌은 분명한 힘이었다. 항거하지 못할 힘. 세레나는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의지 없는 물체가 아니었단 말이야. 복도를 나오기까지 숨 막히는 정적이 계속되고 있었으나 드디어 요크가 입을 열었다. 그의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를 들으니 세레나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오, 세레나. 당신도 잘 알거요. 도망가도 상관없지만 나는 당신 바로 뒤에 있으니까 말이오. 도망칠 수는 절대 없소."
10
도로를 30킬로쯤 달려서 솔트레이크시티로 들어가고 나서도 요크가 롯지까지 타고 온 렌트카가 보일까 해서 세레나는 자꾸만 백미러에 시선을 보냈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를 때도 생각이 날 때마다 뒤돌아보고 있었다.
요크 서덜랜드는 아무렇게나 협박의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이 아니다. 말한 것만큼의 일은 하고 마는 사람이란 것을 명심해야 돼! 반드시 뒤를 쫓아올 것이다. 737편이 활주하기 시작할 때까지 세레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겨우 순간적인 안도감이었다. 요크는 다음 비행기를 타고 올지도 모르고, 집안에 와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마음의 상처와 노여움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아직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 자신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전혀 달라. 마실 것을 손에 들고 세레나는 슬픈 마음으로 생각했다. 리처드의 배신을 알았을 때, 화를 내기는 했지만 이토록 비참한 마음은 아니었다. 자존심이 상했고 화를 낼만한 이유는 있었으나 마음까지 어떻게 돼 버렸다고 생각한 일은 한 순간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상한 이상으로 마음이 아팠다. 결혼이 실패였다고 끝내 인정하고 만 그날보다도 큰 괴로움이었다.
이렇게까지 영향을 끼치다니, 요크 서덜랜드는 두 사람이 알게 된 짧은 동안에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그가 자기와는 안 어울린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위험한 사람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롯지까지 뒤쫓아 와서 애원했을 때 전과는 다른 사람이란 환영에 나는 매달리고 만 것이다....
전과는 다른 사람...... 세레나는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파사디나의 맨션 키를 돌리고 방 안에 들어섰을 때도 여전히 그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토록 항거하기 어려운 힘에 참된 변화를 가져다주는 건 무얼까? 세레나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이런 나이가 되면 요크 서덜랜드와 같은 사람에게 초연해질 법도 한데, 그러나 항거할 수 없는 힘에 거스를 수가 있을까? 느릿느릿 짐을 풀고, 휴가의 피로를 풀면서 세레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요크 서덜랜드를 충동질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패배만이 그의 인생관을 더 원만하고 적대감이 적게 할지도 모른다. 세레나는 섬뜩해졌다. 그가 믿고 있는 가치관을 바꾸기에 족한 결정적인 패배, 이기고만 있는 한 요크가 변할 수 없는 것은 틀림없다. 세레나는 술잔의 황금빛 액체를 천천히 흔들면서 그처럼 심한 변화를 요크 서덜랜드에게 가져다줄 만큼의 힘이 자기한테는 없다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렸다. 아마도 그런 힘을 가진 여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나를 원하고 있어. 세레나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되는 여자라는 것도 확실하지만 그것이 그저 우연한 일치라니 있을 수 있는 일일까? 나를 원하는 마음이 앤더슨사에 대한 계획과는 상관이 없다던 그 말은 진실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어리석음을 벌주듯 입술을 깨물면서 세레나는 이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은 옛날이야기 같은 소릴 하고 있을때가 아니야! 그러나 자기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요크가 다시 여기로 찾아오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괴로운 나머지 세레나는 술잔의 다리를 꽉 거머쥐었다. 그 순간이 찾아왔을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좋을까? 옷을 벗고 침대로 파고들 때까지도 아직 해결이 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세레나는 멍해진 머리로 단편적인 잠에서 깨났다.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오늘은 일하러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일하러 나간다면 이것저것 질문공세를 받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도끼가 머리위에 내려쳐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하루종일 집에서 꾸물대고 있는 것도 싫었다. 세레나에게 필요한 것은 요 며칠간의 일에서 오는 과로를 풀어줄 해독제였다. 모닝커피를 마시면서 이것저것 생각한 끝에 세레나는 파사디나 노튼 사이몽 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의 훌륭한 작품에 몰입하면서 세레나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조각품을 전시한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 동안에 어느 샌가 그녀는 제일 좋아하는 장소, 프랑스 인상파의 작품이 장식되어 있는 곳에 와 있었다. 마음이 들떠서 모네의 그림을 보고 있자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세레나! 뭘 하고 있어? 오늘은 쉬는 거야?"
이쪽으로 향해오는 파란 눈동자에 수염을 기른 30대 중반의 남자는 세레나를 만나서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양이었다. 그림물감이 배어있는 청바지에 청색 워크셔츠 차림으로, 한 팔에 스케치북을 끼고 있었다.
"어머나, 크리스. 테크닉 공부야?"
세레나는 청바지 호주머니에서 두 손을 빼고 미소 지었다.
"뭐라 해도 상관없어." 크리스는 사람 좋은 얼굴로 킥킥대며 웃었다.
"나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지는 않으니까, 선인들로부터 훔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훔친다구."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내가 아는 얼마 안 되는 성공한 화가의 한 사람이죠." 세레나는 말했다.
"오늘은 인상파 연구인가요?"
"응, 당신은?"
"그저 놀러왔어요. 2,3일 휴가를 얻었어요. 잠시 일에서 떠나 있고 싶어서."
"세레나, 이따금 멋있는 터치의 그림을 그리던데." 크리스는 오랜 친구답게 뭣이든 이해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파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후회하지는 않나?" 세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아니, 이따금 장난삼아서 그리기도 하지만 취미 이상의 것은 될 수 없어요. 비지니스의 재미에 빠져버린 거죠. 비지니스에는 굉장한 매력이 있거든요."
"재밌다니, 다행이야." 크리스는 입 언저리를 뒤틀고 말했다. "내 적성에는 사업이란 것이 영 안 맞는 거 같으니."
"그렇지만 그런 것이 없다면 당신은 일에 필요한 것을 손에 넣을 수가 없을 테죠!" 세레나는 넌지시 되받았다. "틀림없이 아직도 그림물감을 맷돌로 빻아 손수 만들면서 이것으로 2,3개월 정도는 그릴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을 거라구요! 질 좋고 믿을 수 있는 재료를 당신한테 제공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같은 비지니스맨들임을 잊지 말아요." 크리스는 웃으면서 한손을 치켜들었다.
"손들었다구! 이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는데 감사하고 있지, 정말이야. 다만 당신이 어떻게 해서 양쪽세계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지 짐작을 할 수 없어서 말이야. 당신이 예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구...."
"그리고 일도 사랑하고 있어요." 세레나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누구나가 당신처럼 한곳에만 전념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 동시에 두 가지 세계에 살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몰라." 크리스는 다정하게 말했다.
"양쪽세계에서 완전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과감한 의지력이 있어야 해요." 세레나는 냉담한 말투로 내키지 않는 대화를 마무리했다.
"어떤 의미지?" 크리스는 낯을 찌푸렸다.
세레나는 애기를 끝내려고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설명하기 어려워요, 크리스. 다만 당신이 자기 예술에 굶주려 있다는 것, 그것과 비지니스 제국을 쌓아 올리는 데 집착하고 있는 사람을 내가 알고 있다는데 상관이 있어요. 둘다 모두 목적을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만두라구!" 크리스는 항의하는 뜻으로 소리를 질렀다.
"비지니스 세계의 거물과 비교되다니 싫단 말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뭔가 공통점이 있어요. 틀림없이." 세레나는 심각하게 말했다.
마음속으로 요크 서덜랜드와의 파멸적인 만남 뒤에 남겨진 여러 개의 단편을 주워 모아서 새로운 각도에서 검토하고 있었다. 세레나는 친구를 외계인이라도 되는 듯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말해 봐요. 그림에서 마음이 떠난다고 한다면 무엇이 원인일까요?" 이 기묘한 질문에 감추어진 진지한 의미를 깨닫고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명하기 어렵군, 세레나. 손을 대기 시작한 작품이상으로 갑자기 눈앞에 닥친 다른 그림에 대한 영감이라고나 할까.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 될 것 같지 않다고 생각되면 거기서 그만둬 버릴지도 모르지. 억지로 그려서 시간을 낭비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크리스는 천천히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세레나?"
"나도 모른다구요, 크리스. 뭔가에 내몰리는 인간 내면의 움직임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가능하다면 확실하게." 세레나는 억지로 웃음을 떠올려 보였다. "자아, 아래로 가서 도자기를 보기로 해요." 고맙게도 다정한 크리스가 화제를 바꾼 덕분에 두 사람은 바로 눈앞에 있는 작품에 대해서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크리스와 만나길 잘했다고 세레나는 생각했다. 그는 순진하고 성의가 넘치는 친구야. 두 사람이 지금 이상으로 일체감을 느꼈던 것은 훨씬 전의 일이었고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토록까지 서로 어울리는 상대가 되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고, 둘 다 모두 마음속으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라도 친구는 필요한 것이다.
하루는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세레나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그날 본 그림도 아니었고 친구와의 즐거운 대화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림에서 마음이 떠났을 때 무엇이 원인이냐고 물었을 때의 크리스의 대답이었다.
"......생각했던 모양이 될 것 같지 않다고 생각되면....." 요크는 크리스의 그것과 똑같은 것인지도 모를 정열에 내몰리는 현실적인 비지니스맨이다. 만약 그가 앤더슨사를 때려 부수겠다는 목적이 생각했던 것처럼 쉽사리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안다면 마음이 변할까? 인생에는 그밖에도 중요한 일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될까? "이봐, 세레나." 지하 주차장에 빨간 포니를 세우면서 세레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말리려고 했다간 요크한테 갈기갈기 찢겨 죽고말거야." 모든 것은 요크가 얼마만큼 열렬하게 나를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겁을 주느냐에 달려있는 거야.
요크 서덜랜드한테 겁을 준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세레나는 눈을 감았다.
시간이 없다. 곧 그 사람과 얼굴을 마주치게 될 거야. 뭔가 전술을 세우고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요크의 새로운 공격에 맞설 수가 없다. 이번에는 욕망을 채우는 것만으론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화도 내겠지. 욕망과 노여움, 완전히 치명적인 관계였다. 요크가 언제 내 앞에 나타날지만 확실하다면 일은 훨씬 간단해질 테지만,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방안을 둘러보며 세레나는 절망의 한숨을 쉬었다.
언제 모습을 나타낼 것인가, 갑자기 나타나 나를 곤혹스럽게 하고, 초조하게 만들 셈인 것이다. 그럴듯한 전술이군, 세레나는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밤이 깊어 오늘밤은 야수를 상대하지 않아도 될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벨이 울렸다. 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소리에 세레나의 직감은 당장 결론을 내렸다.
문을 여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문 저편에 서 있는 것이 누군지 세레나는 알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보잘것 없는 전법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면서 문을 연 세레나는 안경 속에서 살피듯 바라보는 요크의 시선과 부딪쳤다.
"이제 신경질은 가라앉았소?" 요크는 조용히 물었다.
입구에 딱 버티어 서서, 다리를 약간 벌리고 당당하게 선 모양은 싸움이라도 붙여올 기세였다.
보기 좋게 들어맞는 청바지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입고 있던 것과 같은 것인 듯했다. 그 위에 걸치고 있는 오픈네크의 흰색 캐주얼 셔츠도 재킷도 유타에서 입고 있던 것과 같았다. 아무래도 회사에 들른 모양새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화나게 할 셈이로군요." 세레나는 겨우 냉정한 태도를 찾았으나 요크가 들어서는 것을 말리려 하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였다. "나를 수세에 몰 수 있는 잘 계산된 질문이군요. 예스하면 신경질 낸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노우라고 대답해도 역시 신경질을 내고 있다는 것이 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이 문제를 피해가고 싶은거요?" 요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질문을 무시하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나는 신경질 따윈 내지 않았어요." 세레나가 작은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뒤돌아보니, 요크는 재킷을 벗고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또 나를 내팽개칠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좋은 징조라 생각해도 되겠소?"
"나가라면 나갈 거예요?"
"아아니" 세레나는 문에서 떨어졌다.
"당신이 자진해서 나갈 마음이 없다면 내가 아무리 내몰려고 해도 소용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당신이 덩치가 훨씬 더 크니까요."
"체격으로 이긴다면 내몰겠소?" 요크는 찬찬히 세레나를 보았다.
"그렇게 할지도 모르죠." 세레나는 잔뜩 비꼬아서 대꾸했다. "정말 당신은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오늘밤 나한테 와서 뭘 할 셈인지 왜 말을 안 하는 거예요? 리처드에게 복수할 준비 때문에 늦도록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거죠?" 세레나는 쌀쌀맞게 말을 하고 요크한테서 떨어져 소파에 몸을 기댔다.
"오늘은 한 번도 회사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소. 유타에서 막 돌아왔기 때문에." 요크는 조용히 말했다.
"유타! 왜 거기 남아 있었어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자기 바로 뒤에 솔트레이크시티를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소."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오. 어제 유타에서 돌아왔더라면 저녁때는 여기 오지 않을 수 없었겠지. 그러기 전에 서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리라 판단했소."
"그거 친절도 하시군요." 세레나는 쌀쌀하게 중얼거렸다.
"돌아오는 것을 늦춰서 나를 초조하게 만들 속셈은 아니었나요?"
"초조했었소?" 요크는 조용히 되물었으나 순간 두 눈이 번쩍 빛났다.
사냥꾼이야. 세레나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무엇으로도 감출 수가 없어.
"사실은, 당신 계산대로 그렇게 지냈어요. 생각하고 있었죠." 세레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되도록이면 편안해 보이는 자세로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취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태연을 가장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레나는 그녀 자신과의 싸움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던 대담한 계획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구체화 되어가는 데 따라서 무모함과 공포심에서 생겨난 전율이 세레나의 신경 구석구석가지 미쳤다.
닥쳐오는 불길을 깨달았는지 의자 위에 쪼그리고 앉은 세레나의 가냘픈 몸을 지켜보고 있던 요크의 표정이 갑자기 빈틈없이 바뀌었다.
"그래서 뭔가 결론에 도달했다는 말이오?"
"그래요."
"또 도망칠 생각이오. 세레나?"
"아아뇨, 요크. 이젠 도망치거나 하진 않아요." 세레나는 냉랭하게 말했다. 공포감으로 맥박이 빨라졌다.
"분별력을 되찾았다. 이건가? 앤더슨사에 대한 내 계획이 우리 둘에 대한 계획과는 전혀 상관없단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해도 되겠소?"
"아니요, 틀려요. 요크." 세레나는 되도록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가지 계획은 서로 얽혀 있어요. 당신은 어느 쪽이든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돼요. 아마 당신으로서는 처음 하는 경험일 테지만 과자는 먹으면 없어진다는 단순한 진리를 알 때가 온 거예요." 요크는 작은 소리로 한마디 뭐라고 중얼거렸다. 세레나에게 고정된 눈은 움직일 줄 몰랐으나 눈동자 속에서 오고가는 수많은 생각을 그녀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결국." 요크는 쌀쌀하게 말했다. "당신과 복수, 두 가지를 손에 넣을 수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게로군? 시간낭비를 줄이기 위해서 또 당신한테 이것저것 번거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도 지금 선언해두지. 그렇게는 안 될 거요. 나는 당신을 손에 넣을 수가 있고 당신도 그건 알고 있지 않나, 그밖에 어떤 일이 얽혀들더라도 이것만은 확실해, 나는 당신한테 끌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나한테 끌리고 있소, 어느 누구도 이것만은 바꾸지 못해." 세레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은 채로 남자의 오만스러움을 받아넘겼다.
요크는 다시 깊게 소파에 몸을 가라앉히고 한 발을 커피 테이블에 올려놨다.
"겁을 주었다면 미안하오.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런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될 거요. 믿어줘. 우리 사이에 앤더슨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왜 모르나, 세레나. 난 당신을 이용하지 않았고 당신도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 믿소." 세레나는 반쯤 최면에 걸린 듯한 시선을 요크에게서 떼어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뭔지 알아요, 요크?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있을것 같기도 해요." 요크가 안심했다는 듯 휴우 하는 것이 느껴졌다.
"여유를 갖고 침착하게 생각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그 이틀 동안 적어도 침대 속에서 나눈 것은 믿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확신했소. 아니 간절히 원하고 있었소, 세레나. 그 일로 후회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요. 당신을 이용하다니 말도 안돼." 요크의 말에는 싸움을 앞두고 긴장은 했을망정, 한 번도 싸우지 않고 항복한 적에 대한 남자의 감사하는 마음이 배어 있었다.
"그건 기뻐요, 요크. 그러나 진실이야 어떻든 나의...그래요. 나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세레나는 뒤돌아보고 끌어낼 수 있는 의지력은 몽땅 긁어모아서 요크가 내뿜는 노여움의 불꽃과 마주 대했다. 무릎위의 손은 단단히 쥐어져있었다.
"앤더슨과의 일을 잊겠다고 다짐하지 않는 한 침대에서 몰아낼 생각이란 말은 하지 말아!" 요크는 이를 갈며 경고했다. "아까도 말했지, 세레나. 그렇게는 절대 안 돼. 증거가 필요하다면, 자아 그 생각이란 걸 말해보라구, 입을 열기 전에 침실로 끌고 가서 그런 짓을 못한다는 걸 증명해 주겠어!"
남자의 잔인한 말에 전율을 느끼면서 세레나는 안절부절 못하고 일어나서 요크에게서 떨어져 창가로 다가갔다.
"당신은 결론을 너무 서둘러요, 요크." 세레나는 용감하게 말했다. "두 번 다시 당신한테 유혹 당하지 않는 체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리처드를 망하게 하는 계획을 버리지 않는 한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는다는 낡아빠진 수법으로 당신을 협박할 생각도 물론 없어요."
"도대체 당신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 거요?" 요크는 안절부절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매우 사무적인 협박이지요." 당당히 턱을 치켜들고 요크와 마주 보면서 세레나는 중얼거렸다.
"좋아, 좋아, 들어나 봅시다." 요크는 순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 말을 뒤엎겠다는 거죠.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걸요, 요크. 나도 비지니스 세계의 일은 조금은 알고 있고 당신과 같은 충동에 쫓기는 인간의 성격에 대한 얼마간의 지식도 있으니까요."
"심리분석은 사양하겠어!"
"알고 있어요. 이제부터가 중요한 점이에요. 나는 당신이 이번 입찰에서 적어 넣을 가격을 알고 있어요. 그날 아침 테이블에 있던 서류에서 보았죠."
"그래서?" 요크는 위협적인 태도로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 기업은 항상 도산 위협에 대비해서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어요. 당신의 준비가 갖추어지기 전에 앤더슨사가 당신 계획을 안다면 그들은 궁지에 빠지기 전에 대책을 세울 수가 있겠죠."
"바로 그거야. <월스트리트 저널>을 읽었나, 그래서 되는대로 입에 담아보고 싶은 건가, 세레나?" 요크는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거래를 하고 싶어요." 세레나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앤더슨사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면 입찰가격도, 계획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겠어요."
심장을 두근거리며, 축축해진 손을 뒤로 깍지 끼우며 세레나는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렸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이 먹이를 노리는 짐승과 싸우다니, 도대체 내가 뭐란 말인가? 어째서 하필 요크 서덜랜드를 협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건 거래라고 할 수 없어, 세레나." 겨우 요크가 감정이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것을 보통 공갈이라고 하는 거요." 요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레나는 요크의 위협을 느꼈다. 그리고 숨을 삼키고는 할 말을 찾았다.
"그래요.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지요."
덤벼들 듯이 요크가 소파에서 일어서는 바람에 세레나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요크는 그녀에게 다가서려 하지 않았다. 요크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으나 좋지 않은 징조인 것은 분명했다. 세레나가 재규어를 가두려고 했던 우리는 매우 허술한 것이었다.
"앤더슨이 아직도 그렇게 소중한가?" 절망적인 요크의 목소리.
"리처드는 이제 나한테 아무런 상관도 없다구요!"
"그럼 왜 그런 녀석을 감싸는 거요? 그럴 가치가 없는 인간 아냐, 세레나!"
"내가 감싸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라구요!" 세레나는 악을 썼다. 긴장 때문에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나라구!" 요크는 소리치고 빙글 방향을 돌려서 부엌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를 감싸고 있는 거라구?" 놀랐다는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도대체 무슨 뜻이지?"
"당신 계획은 잘못된 거예요, 요크. 어쩌면 리처드가 모든 걸 잃는 것이 당연할지 모르지만 나는 모르겠어요. 알고 있는 것은 지난번 입찰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파멸시킨다면 그뿐만 아니라 당신도 똑같은 타격을 받는다는 거예요."
"이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오!" 부엌에서 요크가 악을 썼다.
노여움을 삭이지 못하고 그가 찬장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겨우 찾고 있던 것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천천히 돌아온 요크의 손에는 스카치 병과 잔이 들려있었다. 요크는 난폭하게 소파에 앉아 스카치를 따랐다.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라구." 한 모금 꿀꺽 마시고는 아까보다 좀 부드럽게 되풀이했다. "앤더슨의 일이 끝나더라도 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소. 지금까지와 마찬가지지." 요크는 대들듯이 세레나의 시선을 붙들었다.
"알고 있어요." 세레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당신은 조금도 안 변할 테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지만, 요크.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은 좀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을 바꾸고 싶다구요."
"믿을 수가 없어." 요크는 중얼거렸다.
"당신한테 계획을 포기하라고 해서, 그냥 쉽게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할 만큼 난 바보가 아니라구요." 세레나는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설령 당신이 그런 마음이 되더라도, 또 당신의 유혹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바보도 아니에요. 당신한테 계획을 단념하게 하는 데는 여자의 애원 같은 것보다 더 강한 것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계획 그 자체가 실행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해줘야 해요. 당신 계획대론 안 될 거에요. 나는 당신의 계획 전부를 때려 부술 생각이에요, 요크."
11
"그런 짓은 하지 못해, 세레나. 이건 내 문제야. 당신은 그런 대담한 짓은 하지 못할 거요." 요크는 스카치를 홀짝거리고 회록색 눈동자로 자신 있다는 듯 세레나를 쏘아보았다. 요크의 공세에지지 않으려는 듯 세레나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입장을 가능한 한 마지막까지 고수해야 한다는 것을 세레나는 요크와 맞서면서 깨달았다. 항거하기 어려운 힘을 막으려면 움직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필요한 것이다. 두 사람 관계에 뭔가 희망이 있다면 내가 그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세레나, 농담이 아니라구." 요크는 신경질적으로 말하고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놨다. "당신은 내가 하고 있는 비지니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테지만, 목을 사리는 분별력은 있으리라 믿소, 나를 바꿀 수는 없소." 요크는 부드럽게 말을 덧붙였다. "나는 언제까지나 이대로요."
"사람은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는 거라구요, 요크." 세레나는 단호한 투로 말했다.
"이봐, 제발 그만! 도대체 날 뭘로 바꾸고 싶은 거요?" 요크는 목이 잠긴 소리로 악을 썼다. "겁쟁이로 말인가? 잔인한 세상에서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하는 사내로 말야? 나는 서덜랜드 주식회사를 건축업계에서 이름만으로도 통하는 그런 기업으로 만들 거요. 그러기 위해선 경쟁상대 모두에게 나를 아무도 짓밟을 수 없다는 걸 알릴 필요가 있어. 그러기 위해서는 앤더슨을 굴복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라구."
"고작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그런 잔인한 짓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요크!" 세레나는 애원하듯 말했다. "그리고 목적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래서 뭐가 되는 거죠? 좀 더 권력욕이 세지는 거예요? 좀 더 잔인해지는 거예요?"
"당신이 자기 자신한테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될 질문은." 요크는 쌀쌀하게 말했다. "내가 그런짓을 한 여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거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세레나의 볼에 붉은 기가 돌았다. 이제는 요크의 일을 방해하려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인 것이다. 그는 나를 어떻게 할까? 세레나는 다급하게 공포감을 몰아내려고 했다. 공포야말로 요크가 바라고 있는 반응인 것이다. 그를 만족하게 할 수는 없다.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화방을 망쳐 버릴 셈인가요?" 그에게 위축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매우 효과적인 작전일 테죠. 그 가게를 잃는 것은 곧 나의 파멸이니까요."
"그만두지 못해." 요크가 악의에 찬 눈초리를 보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바보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야 되는 거요? 내가 당신한테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잖소." 세레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남자의 자존심을 짓밟혔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내 콧대를 꺾는데 절대적으로 확실한 방법을 찾을 테지요..."
"당신을 길들이는 데는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지!" 스카치를 또 한 모금 홀짝거리는 요크의 표정에 말없는 협박이 담겨 있었다. "이봐요, 세레나. 그런 식으로 괴롭히지 말아요. 제발. 할 생각도 없는 말을 하게 되잖소!"
"나한테는 하려던 말을 하는 것으로 들리는 걸요." 세레나는 빙긋했다.
"조금도 무서워하는 것 같지 않군, 그래."
"당신을 상대할 때는 그런 건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세레나는 조용히 말했다. 요크는 잠자코 그 말을 되씹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공포감을 주는 괴물처럼 느껴진다, 그거군."
"그렇게 생각했더라면 당신과 잠자리를 함께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 실토와 함께 떠오른 미소는 전에 요크가 칭찬했던 그 미소였다. 좀 떨떠름하기는 했으나, 따뜻하게 진심이 담긴 미소.
요크는 미소의 주문에 말려들어 올빼미처럼 눈을 껌벅하고 물었다. "정말이오? 나는 또 당신이 <미녀와 야수>의 각본이라도 쓰는가 생각했지."
"내 기억으로는 미녀는 야수를 길들일 수 있었어요."
"그녀의 무기는 사랑이었소. 공갈이 아니고 말이오." 이렇게 말한 그의 눈에는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 대한 마음의 깊이를 눈치 채게 한 것이 아닌가 해서 세레나는 숨을 삼켰다. 약해진 마음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지금 입장을 지켜낼 수가 있을 것인가? "나는 잘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믿고 싶어요."
"그래, 공갈이 잘 먹혀 들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요크가 비웃듯 말했다.
"그렇게 되길 원해요."
"어째서 나를 바꾸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거요?" 요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드디어 왔다. 피해서 지나지 못할 질문이로군. 자아 뭐라고 대답하나? "그 대답은 당신도 대충 짐작하고 있을 거에요." 요크의 시선을 피하면서 세레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를 원하는 거지?" 자신에 넘치는 말투였다.
"네." 세레나는 창밖의 거리로 필사적으로 눈길을 보냈다.
"다만 주도권은 당신이 쥔다는 거겠지?"
"네." 이번 대답은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가는 소리였다.
왠지 세레나는 불안해져서 몸을 사리듯 요크 쪽을 뒤돌아봤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요크가 독수리처럼 덮쳐 와서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난폭하게 거머쥐고 의지의 힘과 완력으로 세레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반반이라고 말하는 거야." 요크는 굵은 목소리로 명령하고, 탐색하듯 하는 뜨거운 시선을 세레나의 얼굴에 퍼부었다.
"내 비지니스에 대해서는 잊어버려.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고, 앞으로도 절대 상관 없을 테니까."
"그렇지 않아요, 요크. 우리한테 크게 관계되는 일이라구요. 당신 인생관이 거기에 좌우되는걸요.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리를 거두는 이외에, 인생의 의의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구요!"
"당신이 바라는 것은 바로 나라구! 아까 그렇게 말했잖아."
"부인하지는 않겠어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요크는 절망 섞인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정말로 이런 공갈이 먹혀들 거라고 생각한단 말이지, 응? 까닭을 모르겠어, 세레나. 당신답지 않아....."
"나를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세레나는 쌀쌀하게 잘라 말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아는 게 별로 없군. 자기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세레나 골드웰? 남자 안에 숨어있는 악마에게 대들었을 때의 위험이 어떤 것일 줄 알고나 있는 거요?" 어깨의 곡선에 걸린 요크의 손에 경고하듯 힘이 들어갔다. "나중에 큰코다친다는 걸 왜 몰라!"
"얼마든지 겁을 주어 보라구요, 요크. 나는 지지 않을 테니까요!" 팽팽한 분위기에 반응해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서지 않을 거야!
"그만둬, 세레나...." 노여움을 참는 듯 차가운 기운이 요크의 눈동자에 깃들었다. 갑자기 손가락이 어깨에 파고 드는가 했더니 그녀는 끌어당겨졌다. "그만두라구." 요크는 험악한 말투로 되풀이했다. "이대로 계속한다면 당신은 이 거래의 뒤처리를 생각해 두어야 할 거요."
"이건 거래가 아니에요, 요크...." 세레나는 항의하려 했다.
"무슨 소리든 하라구. 그 만큼의 보상은 받아내고 말 테니까, 각오하라구!" 그렇게 말하자마자 요크는 느닷없이 양팔로 세레나를 안아 올렸다. 도망칠 사이도 없었다.
"요크, 그만둬요! 이러지 말라니까요!" 세레나는 갑작스런 공포에 몸부림쳤다.
"내 사업에 간섭을 할 양이면 일의 룰을 알아두라구." 요크는 으르릉 대듯 말하고 그대로 침실로 걸어갔다. "협박이란 꽤 거친 게임이잖소!"
"요크, 부탁이에요....!" 세레나는 애원했다.
"오늘밤엔 당신 부탁을 들어줄 기분이 아니야. 당신을 손에 넣고 싶다는 생각뿐이오, 그리고 당신은 분명히 내 것이란 말야, 세레나." 요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이 사실만은 명백해, 나를 강제적으로 당신 좋아하는 대로 바꿀 때까지 침대에서 몰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요크는 비웃었다.
"내려줘요! 이렇게 다루는 건 싫다구요."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세레나는 필사적으로 손발을 버둥거렸다.
"어떻게 다룬다는 거요? 자기 힘으로 되지도 않을 짓을 한, 서툰 공갈꾼 같이 다뤄진단 말인가?"
"당신은 몰라요! 아니 일부러 틀린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라구요. 겁나게 하지 말아요, 요크."
"겁 준다구?" 침실로 들어가면서 요크는 짐짓 놀라는 소리를 냈다. "이거 놀랍군. 당신처럼 게임을 즐기는 여자들이란 그리 쉽게 겁을 내지 않던데."
"겁을 내거나 하진 않아요!" 세레나는 버럭 화가 났다. "그렇지만 당신이 무슨 권리로......" 세레나의 노여운 반격은 지워지고 말았다. 요크가 무정하게도 그녀를 침대위에 내던지고 만 것이다. 세레나는 몸부림치고 겨우 일어서 눈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걷어냈다. 셔츠와 구두를 재빨리 벗어 버리고 안경을 벗고 있는 요크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어떤 말보다도 세레나의 공포감을 더해 주는 데 효과적인 동작이었다. 그는 그럴 셈이었어. 세레나는 멍해졌다. 나한테 난폭하게 굴 셈이라구.
요크 성격의 공격적인 면은 충분히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요크, 이건 옳지 못해요." 세레나는 간신히 냉정하게 말했다.
"공갈이라고 하는 훌륭한 죄를 저지른 여자에게는 잘 어울리잖아." 잔혹한 비웃음이었다. 무슨 소리를 해도 먹혀들지 않아. 세레나는 믿을 수 없었다. 최면술에라도 걸린 듯 꼼짝도 못한 채 세레나는 그가 구두를 벗어던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가죽 벨트의 버클에 닿았다.
"그만둬요....."
자기를 침대에 못박아 두고 있는 거친 바다와 같은 녹색시선의 강도가 세레나를 움직였다. 공포에 짓눌린 세레나는 침대 저쪽 끝으로 도망가서 비틀거리는 발로 카펫을 밟고 도망치려고 했다.
침대가 으시시하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요크가 침대 한복판에 한쪽 발을 딛고 껑충 뛰어 이쪽으로 내려선 것이다. 세레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문으로 향했다.
복도로 나가려던 바로 그때, 가죽벨트가 세레나의 손목에 감겼다. 작은 동물을 줄을 던져 붙잡듯이 요크가 그녀를 사로잡은 것이다.
갑자기 결박당한 세레나는 얼떨결에 요크 쪽으로 돌아섰다. 발끈한 세레나는 그 반동을 이용해서 한손으로 요크의 볼을 세차게 갈겼다. "무례하군요, 요크 서덜랜드. 이런 짓을 하다니!" 요크는 세레나의 노여움에는 끄덕도 하지 않고 벨트를 써서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의 한쪽 볼이 새빨개지는 것을 보고 세레나는 숨을 삼켰다.
"왜 나한테서 도망치려는 거요, 세레나?" 요크는 이를 악물면서 으르렁댔다. "우린 거래를 했잖소, 어째서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는 거지?" 갈고리 같은 요크의 손이 세레나의 두 손목을 거머쥐고 그녀는 요크 앞에 끌어당겨졌다.
"용서하지 않겠어, 이런 짓은." 세레나는 작은 목소리로 독을 뿜었다.
"나를 원한다고 말했잖소."
"이런 모양으론 싫다구요."
"어째서 나를 원하지? 당신의 그 계획을 듣고 나서도 유순하고 매력적인 사내로 있으란 말야?" 좌절감과 공포감 때문에 세레나는 이를 갈았다. 그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랐던가? 결국 나는 여기까지 내다보지 못했던 거야, 무슨 바보짓이람. 정말 한심한 실수야. 확실한 것은 오직 하나,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당신이 폭력을 쓰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당신을 위한 건데요, 요크. 우리 둘을 위해서." 세레나는 애원하듯 말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요크는 내뱉듯 말했다. "그리고 나도 어떻게 됐지, 당신 뜻대로 협박당하고 있으니." 요크는 벌거숭이 가슴에 세레나를 끌어안고, 갑자기 남자의 초조감과 욕구불만, 그리고 지배욕이 뒤엉킨 입맞춤으로 그녀의 입술을 빼앗았다.
그러나 폭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세레나는 오랫동안 그가 하는 대로 꼼짝 하지 않고 남자의 입술과 손의 감촉이 깊은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대로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요크가 결코 자기에게 상처 주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작은 안도의 한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것을 요크는 목구멍으로 받아들여서, 약간 벌린 이 사이로 주린 듯이 혀를 밀어 넣었다.
"세레나, 바보 같으니라구. 지금 당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아나?" 요크는 목쉰 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도 있단 말이오, 그걸 모르겠소?" 요크의 따뜻한 가슴에 얼굴을 파묻자 아련하게 사향 냄새가 섞인 남자의 자극적인 체취가 피어올랐다.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은." 세레나는 속삭였다. "당신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구요, 요크."
"나에게 도전할 용기를 어디서 얻은 거요?" 절반쯤 감탄한 목소리로 물으면서 요크는 세레나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에게 원하는 게 있지?"
"그럼요."
"바라는 것은 뭐든지 줄 텐데." 요크는 중얼거렸다. "바라는 것을 해줄 수 있을 만큼의 돈은 있다고 전에도 말했잖소."
"당신 돈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전에 나를 매수하려고 했을 때의 일을 잊었어요?" 골려 주기 위해서 세레나는 와인빛 손톱을 요크의 갈색 살갗에 세웠다. 요크는 신음소리를 내고 세레나의 등에서 엉덩이로 손을 보내어 다시 끌어당겼다.
"내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소. 아무리 압력이 거세더라도 방법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지. 진짜 사나이라면 말이야."
"나는 남자라면, 진짜 사나이라면 그 압력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가치관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바란다구요." 세레나는 중얼거렸다.
남자의 초조감이 잔물결처럼 요크의 몸에서 전해왔다. 그는 그녀를 꽉 껴안고 그녀의 귓볼을 애무라고 하기에는 다소 난폭한 방법으로 깨물었다.
"또 한 번 나를 바란다고 말해줘." 낮은 목소리로 그가 명령했다.
"당신을....원하구말구요, 요크. 그렇기 때문에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거예요."
"혼쭐이 날 걸 무릅쓰고?"
"당신이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얼굴을 든 세레나는 겨우 평정을 되찾은 요크의 눈과 마주쳤다. 요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당신 쪽이 이런 때의 내 성격을 나 이상으로 신뢰하고 있단 말이오!"
"요크........."
"얘기는 더 이상 필요 없소." 요크는 다시 세레나를 안아 올렸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확신뿐이야." 요크가 다시 침대로 향했으나 세레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바라고 있다는 확신?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요크, 그것은 틀림없어요." 세레나는 요크는 향해서 상냥한 미소를 보냈으나 그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세레나를 침대에 내려놓은 요크는 그녀를 진지하게 관찰하는 모양이었다.
"믿어줘요, 요크. 이번에는 틀림없이 모든 게 잘 될 거예요....."
"쉿, 세레나. 이제 당신의 바보같은 말은 싫어, 행운을 차버리는 건 바보짓이야." 요크는 청바지를 벗고, 높아진 욕망을 감추기에는 너무 빈약한 찰싹 들어맞는 속옷을 벗어 던졌다.
그의 매끈한 근육질의 몸을 보고 있는 동안에 세레나의 몸은 마음과는 달리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요크가 침대로 들어왔을 때, 세레나는 다시 한번 희망을 갖고 미소 지어 보였다.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요크는 빈틈없는 솜씨로 세레나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요크...." 요크의 마음을 파악하지 못한 채 세레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동작에는 어딘지 계산된 신중성이 있었다. 나를 위협할 생각은 없는 것 같지만, 뭔지.......
"아무 말 말아, 세레나." 조용한 목소리로 요크가 명령했다. "말은 필요 없어. 서로 느끼면 그것으로 된 거야." 마지막 단추를 풀고, 요크는 벌려진 가슴께로 따뜻한 손을 밀어 넣었다.
세레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다문 채 눈을 들었다.
요크의 단호하고 상기된 표정을 보았을 때, 세레나는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의 실체를 보는 듯했다. 이 사람은 비지니스에서 항복한 앙갚음으로 나를 침대에서 항복시키려하고 있어. 다른 문제로 세레나가 그를 지배하는 보복으로 침대에서 그녀를 지배하겠다는 것이다.
요크가 몸을 덮쳐 세레나의 부드러운 가슴의 곡선을 짓눌렀다. 뜨겁고 공격적인 입술이 세레나의 입술을 막고 청바지 지퍼를 내렸다.
세레나는 신음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반응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빨랐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녀는 양쪽 무릎을 굽혀서 엉덩이를 치켜들고 요크가 바지를 벗기기 쉬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거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세레나의 단추가 풀어진 셔츠뿐이었다. 세레나는 요크의 배에서 넓적다리에 걸쳐서 그 탄탄한 살결을 살짝 매만지면서 그의 몸의 재빠른 반응에 흡족해했다.
"이런, 기쁘게 해주려고 매우 열심이군, 세레나." 요크는 목쉰 소리로 빈정거리고 나서 혀와 입술로 세레나의 유방을 건드렸다. "나를 침대 속에서 달래면 내가 좀 더 자신의 운명에 충실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럴 생각은.....별로......" 요크의 말에 담겨진 의미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세레나는 말로 더듬었다.
"몸으로 매수하려는 건 아니다?" 요크가 대신 말했다.
"그만둬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요크?"
"괜찮소." 요크는 세레나의 엉덩이 선을 정열적으로 어루만졌다. "당신과는 달리 나는 매수공작에 아주 약하지."
"내 화를 돋우려는 거예요?" 갑자기 깨달은 세레나는 눈을 크게 떴다.
"둘 다 모두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을 것 같군." 요크는 그녀의 입술을 키스로 틀어막았다. 아마도 요크가 말하는 그대로일 거야.
요크의 마법에 걸려드는 것을 느끼면서 세레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지금은 애기를 할 때가 아니다. 오늘밤은 충분하고 남을 만큼 모험을 했어.
쫓기듯이 세레나가 손가락을 요크의 머리에 찌르고 흩뜨리자 요크는 그녀의 입술 속을 달콤한 꿀인 양 더듬었다.
처음에는 애를 태우듯, 그리고 차츰 공격적으로 요크의 혀가 세레나의 섬세한 입을 침략했다.
그의 대담한 입맞춤에 세레나가 감춤 없이 호응했다. 요크는 그 찬스를 재빨리 포착해서 싸움을 걸어왔다. 그저 남자의 혀에 따르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던 세레나는 깨닫고 보니까 요크의 단호한 힘에 꽁꽁 묶여 있었다.
요크가 자아내는 흥분은 남녀 사이에 흔히 있는 것이지만 세레나는 능욕 당하고 육체적으로 정복당하는 기분이었다.
아, 이대로 두면 안 돼. 세레나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만두게 해야 할지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세레나의 몸은 어느새 그녀를 배신하고 있었다. 세레나의 작은 허덕임은 끝내 뚜렷한 신음소리로 변해있었다.
요크는 신음소리에 아랑곳없이 입술을 떼고 볼에서 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혀끝이 볼 위에서 살짝 원을 그리고 이가 귓볼에 와 닿았다.
세레나는 몸을 떨었다. 머리를 요크의 팔에 내맡긴 채 뒤로 젖히고 높아가는 욕망에 그녀는 눈을 꼬옥 감았다.
"당신은 불꽃이야." 요크는 속삭였다. "불꽃에서 어떤 그림이 생기는지 기다리질 못하겠어." 요크의 교묘한 애무에 세레나의 단단해진 가슴이 욕망으로 물결치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깃털처럼 넓적다리 안쪽을 돌아다니고 세레나는 몸을 떨며 애원하는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 동등한 입장에서 싸움에 응할 생각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요크, 요크, 부탁해요." 세레나는 속삭이면서 요크의 억세고 팽팽해진 것을 살짝 더듬어 찾아냈다. 세레나의 손 안에서 요크는 허우적댔다.
"부탁해요, 사랑해줘요! 당신을 갖고 싶어." 세레나는 숨이 차서 소리쳤다.
"그럼 보여줘." 요크는 으르릉대듯 말했다. "겁 없는 공갈꾼 같으니라구. 얼마나 나를 갖고 싶은지 보여줘." 이 말이 자극제가 되었는지 세레나는 보통 신경이라면 스스로 뒤로 나자빠질 만큼 격렬한 열정을 폭발시켰다. 목에 걸린 것 같은 욕망의 외침과 함께 세레나는 요크에게 달려들었다. 세레나는 그 위에 부드러운 몸을 눕혔다.
"아아........!" 요크의 가슴 깊은 곳에서 낮고 긴 한숨이 새어 나오는가 했더니 그는 세레나의 밤색 머리에 손가락을 뻗었다.
지금이야말로 요크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거라고 세레나는 의식하고 있었으나 도대체 이기고 싶은 건지 지고 싶은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요크가 자기가 만든 덫에 걸려드는 것을 보고 세레나는 공격의 손을 늦추지 않고 힘을 쥐어짰다.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세레나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상황은 미묘하게 역전되고 있었다. 허덕이는 흥분 속에서 세레나는 생각했다. 요크는 나한테 자기를 사랑하라고, 얼마나 그를 원하는지를 보이라고 명령하고서 그 도중에 오히려 자기가 희생물이 되었다. 정열의 폭풍 속에서--- 이겼다는 자신을 얻은 여자의 힘이 세레나의 피에 불을 당긴 모양이다. 이제는 지배권을 쥐고 있는 것은 세레나 쪽이었다. 이 사람을 욕망으로 몸부림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세레나는 양팔로 안겨들면서 다리를 그의 다리에 감았다.
찰싹 들어붙은 몸에 조금씩 조금씩 키스를 퍼부으며 움직여갔다. 이제 곧....이제 곧 이 사람은 완전히 내 사람이 된다. 세레나는 입안이 타들어가는 흥분을 느꼈다. 내 힘의 모든 것을 알게 해줄 거야! "돌풍이라도 만난 거요." 요크는 놀라운 듯 중얼거리고 가슴에 품은 세레나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럼요." 자기의 대담스러움에 가슴을 두근대며 세레나는 말했다. 잠시동안이나마 이 사람을 무서워했다는 것을 생각하니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가 내 뜻에 따르는 거라구.
세레나는 문득 얼굴을 들고 자신의 힘에 대한 확신과 정열로 번쩍거리는 눈으로 요크를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를 보았을 때 요크의 얼굴에 뭔가 비쳤다. 세레나가 생각하는 도전을 알아차린 듯 회록색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이봐. 그렇게는 안 될 거요, 마녀님." 요크는 낮게 중얼댔다. "당신한테 모든 것을 다 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소."
"안돼요! 기다려요!" 세레나는 항의했으나 허사였다. 요크는 몸을 한 번 비틀어서 입장을 역전시켜 버렸다. 세레나의 가는 몸 위에 요크의 몸이 밀착되어 왔다. 숨이 막힐듯했다. 그러나 세레나가 허덕인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요크가 천성적인 정복자가 갖는 공격성을 드러내서 그녀를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순간에 세레나는 자기가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크." 세레나는 요크에게 힘껏 팔을 휘감고 주린 듯이 그를 받아들였다.
영원일 것 같은 고요함 속에서, 요크는 세레나의 속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다만 세레나가 그에 익숙해지길, 그리고 또 그녀의 비밀스런 맥박의 따뜻함이 되살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레나의 입술에 자기 이름이 맴돌고, 애원하듯 그녀의 몸이 휘는 것을 느끼고 요크는 다시 인간이 연출할 수 있는 기쁨의 극한에 이르는 리듬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요크가 쳐서 울리고 새겨가는 리듬이었다. 세레나가 아무리 몸을 뒤틀고 매달리고 애원을 해도 이 관능의 리듬을 바꾸지는 못했다. 지금은 요크만이 지배자인 것이다. 몇 차례고 요크는 세레나를 본능의 깊은 물가까지 데려가고 그리고 또 몇 번이고 그녀가 그 연못을 뛰어넘으려고 하면 되돌아와 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세레나는 이제 참을 수가 없었다. 물가에 다가갈 때마다 요크만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극치로의 욕망은 높아질 뿐이었다.
"요크, 부탁이에요. 이젠 더 못 참겠어요!" 세레나가 신음소리를 내며 손톱으로 그를 충동질했다. "빨리 해줘요! 미칠 것 같아요!"
등에 파고드는 손톱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크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가 세레나의 몸 안에 풀어버린 정열은 강철의 의지를 갖는 그의 자제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요크의 목적은 세레나를 성적으로 지배하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 자신이 자기가 뿜어낸 힘에 대항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신음소리를 내며 요크는 세레나에게 밀고 들어왔다. 요크의 지배력이 사라져 가는 것이 느껴지고 이제 둘은 함께 마지막 노도와 같은 리듬을 타고, 작렬할 순간을 찾았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두 사람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세레나는 천천히 정사의 여운에서 깨어나 몸을 움직였다. 무거운 속눈썹이 걷히자 옆에서 한쪽 팔꿈치를 짚고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요크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 말 없이 강함과 사랑이 담긴 눈길로 그를 응시하자 요크의 입 언저리가 풀렸다.
"왜 그래? 멍해가지고." 그렇게 말하고 요크는 가볍게 세레나한테 키스했다. "매우 섬세하고 안스럽게 보이는군." 만족스런 무력감에 젖어 있는 세레나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요크가 이윽고 애정이 넘치는 기쁜 웃음을 떠올렸다.
"우리는 서로를 증명한 건지도 모르오."
"그럴까요?" 세레나는 곁눈질로 요크를 보았다.
"둘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을 말이지. 서로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무시할 수는 없어, 세레나."
"시험해 보자는 건 싫다구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세레나는 안겨들었다.
"그걸 알고 있다면, 우리 둘이서 나눠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요크가 살짝 기댔다.
"내 일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망칠 필요는 없잖소, 그렇지? 서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어줍잖은 공갈 따윈 이제 그만둬요, 세레나. 그런 짓은 필요 없으니까." 세레나는 얼어붙었다. 요크와의 사랑의 행위에서 오는 행복감도 순식간에 가셨다. 베개 위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요크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세레나는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사랑의 행위로 리처드에 대한 계획을 잊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대답은 노우예요, 요크.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그 협박은 취소할 수 없어요. 인생에서 적을 쳐부수는 일 말고도 중요한 일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 당신을 우리에서 풀어줄 수는 없어요." 순간 요크의 얼굴에서 관대함이 넘치는 즐거운 표정이 지워지고 입가에 비정하리만큼 날카로운 선이 드러났다.
"진정으로 말하는 거요? 그 따위 협박으로 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야? 당신은 나에게 굴복했소. 몸도 마음도 내게 바쳤단 말이오. 그걸 모른단 말이야? 불쌍한 여자로군!" 요크는 세레나가 헛된 희망을 품지 않도록 사정없이 말했다. "당신은 상냥했고 그리고 격렬했어. 놀랄 만큼 말이지.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은 바로 나란 말이야!" 그의 목소리에 진하게 묻어나는 노여움을 깨달았으나 세레나는 지금까지처럼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우리속의 재규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다. 세레나는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특히 지금은. 혹시 폭력을 휘두를 생각이라면 훨씬 전에 그렇게 했을 거야. 그녀는 빈틈없는 표정을 짓고 두려움 없이 요크를 쏘아봤다.
"당신 맘대로 할 수 있는 여자라 이 말인가요? 침대 속에서 테크닉을 보여줬다고 해서 잠자리 밖에서까지도 여자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천만에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요크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배짱 한번 좋으시구만." 청바지와 셔츠를 몸에 걸치며 요크가 빈정거렸다. "당신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이대로는 안 될 거요." 요크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낮에는 공갈하고 밤에는 내게 안기다니, 오래 갈 리가 없지. 그런 신경을 갖고 있지 못하잖아, 당신은. 나하고 위험한 게임을 하겠다는 거야? 좋아 해보자구. 게임이 끝났을 때 당신 몰골이 어떨 것 같소. 내가 이겼다는 것을 시인하는 당신 목소리를 듣는 기분도 괜찮을걸!" 문으로 향하면서 요크는 단언했다. "당신과 헤어진 애인을 해치우는 것보다도 훨씬 기분이 좋을 거라구!" 세레나는 꼼짝 하지않고 침대에 누워 있었으나 요란하게 닫히는 문소리에 몸을 도사렸다. 우리 안의 야수를 성나게 해버린 것이다. 이 싸움에서 진다 하더라도 잘못은 나에게 있는 거야............
12
카페의 작은 테이블에서 커피를 곁들여 아침식사를 하면서 세레나는 노라 에덴의 그림교실을 생각해냈다. 오늘 아침에는 노라가 화방에서 개최하는 강습의 담당이었다.
이 어수선한 마음에서 빠져나갈 돌파구가 필요해. 화방의 직원들한테는 스키는 일찍 끝내고 왔지만 아직 나갈 생각은 없다고 전해야지.
오전을 멋지게 보낼 방법을 찾아냈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세레나는 도구를 가지러 맨션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45분 뒤, 세레나는 그림에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한 교사의 지시에 따라서 오렌지와 보랏빛 물감을 캔버스 가득히 칠하고 있었다.
"티포트의 모양 같은 건 잊어버려요." 노라 에덴은 드라마틱하게 소리치면서 화방 매장 안쪽의 햇빛이 잘 드는 방에서 학생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노라는 가르치는 일에 정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미술 수업을 받으면 어떤 얼간이라도 티포트를 그릴 수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사진작가가 아닙니다! 누구나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전혀 독자적인 티포트의 특징적인 단면을 캔버스에 새겨 넣는 것입니다.!" 눈앞의 정물(靜物)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기 위해서 마음을 자유롭게 하려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세레나는 얌전하게 캔버스를 향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요크는 뭘 하고 있을까? 어제 저녁에는 내 침대에서 나가 곧장 집으로 돌아갔을까? "아아, 싫어 싫어!"
자신을 노리고 있는 재규어를 머리에서 떨쳐 버리지 못하는 일에 짜증스러워진 세레나는 캔버스에 당초 생각했던 신중한 선 대신에 감정을 그대로 노출시킨 선을 그어가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그림은 색채와 모양이 그저 혼돈되어 있을 뿐이었다. 내 욕구불만의 배설구 같다니까! "에너지가 넘쳐 있군요." 어느새 뒤에 와 있던 노라가 말했다. "하지만 뭔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군요, 세레나. 그림만을 생각해요."
"오늘은 집중이 잘 안 되어서." 세레나는 시인했다.
노라는 세레나를 찬찬히 응시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뿐만 아니죠, 세레나?" 노라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의견을 말했다.
"그것이 언제나 문제라구요, 노라. 정말 왜 이러는 건지 나도...."
"당신한테 예술은 언제나 취미일 테죠, 세레나?"
"그런 셈이죠, 노라. 당신은 어땠어요? 늘 당신은 예술가가 되겠다고 생각했었나요?"
"처음 손에 크레용을 잡았을 때부터예요." 연상의 노라는 옛날 일을 생각하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지워버리듯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만 당신은 직업상 예술과는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관계이겠군요. 언제나 중요한 일일 테지만...."
"그래요, 중요하죠.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노라." 그림에 눈을 보낸 채 세레나는 조용히 말했다. 노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신한테 재능이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요. 혹시 그 재능을 키울 생각은..."
"아니요,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취미로서의 예술이고 그것에 불만은 없어요, 노라. 인생에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있잖아요. 예술과 견줄 만큼 흥미 있는 것이 너무나 많아요."
"인간? 비지니스로서의 예술?"
"그것과.....또 그밖에도."
"아아 남자로군." 세레나는 마음을 들킨 소녀처럼 놀라운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
"어떻게 알았죠?" 노라는 한쪽 어깨를 프랑스 사람처럼 익살스럽게 치켜 올렸으나 세레나의 질문에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만약...." 세레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할 말을 곱씹었다. "만약 예술가가 될 작정이라면 내 모든 감정과 열정을 작품에 쏟을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는 보시는 바와 같이 작품에 집중은커녕 흥미조차 일지 않아요."
"그러니까 예술보다는 그 사람이 중요하다, 이 말이군요."
"네, 난 너무 욕심이 많은 여잔가 봐요, 노라. 그에게 있어서 일보다도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으니 말이에요."
"그건 잘못된 게 아녜요. 누구나 다 마찬가지예요. 필요한 거라구요." 노라는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다는 듯 말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바꾸도록 하는 게 잘못일까요, 노라?" 노라를 바라보는 세레나의 시선이 불안했다.
"그 질문은 번지수가 틀렸어요." 노라는 딱 잘라 말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에요, 세레나." 그러나 세레나의 눈동자에 괴로운 빛이 떠오르자 노라는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사람을 새로운 길로 인도할 수는 있어요, 그 새로운 길이 본래의 길보다 더 정의롭고 가치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말이에요."
"만약에 본래의 길이 결국은 파멸의 길이라면...?" 세레나는 열기를 담아서 말했다.
"장본인이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겠죠, 세레나.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길을 가르쳐주는 것뿐."
"그렇지만 그 다른 길을 전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죠?"
"그것은 그 사람을 움직이고 있는 강박관념에 따른 것이 아닐까." 노라는 온화하게 웃었다. 요크 서덜랜드를 움직이고 있는 원초적인 힘은 뭘까? 세레나는 생각했다. 노라와 예술을 떼어 놓을 수 없듯이 이기겠다는 욕망이 요크라는 인격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면 그를 다른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요크의 인생관이 세상에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그것이 지금까지는 도움이 되었더라도 이제는 필요 없는 것이라면 조금쯤은 가능성이.... 노라가 다른 학생 쪽으로 발길을 돌렸을 때 갑자기 따끔하게 세레나의 의식을 찌르는 것이 있었다. 끌리듯 고개를 돌리자 마침 요크가 조용히 교실에 들어서는 길이었다. 한손에 연필을 쥔 채로 일어선 세레나는 사냥꾼의 긴장감을 몸에 담고 다가오는 요크의 모습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학생들의 캐주얼하고 색깔이 뚜렷한 옷차림 속에 요크의 진회색 옷차림은 검은 물체처럼 보였다.
"또 숨바꼭질의 시작인가, 세레나?" 멈춰 서서 세레나의 어깨 너머로 그녀가 그린 그림을 바라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중얼댔다. "한 가지만 충고할까? 몸을 숨기고 싶으면 평소에 잘 가는 곳은 피하도록 해요." 세레나의 시선은 요크의 시선을 따라서 캔버스 위로 옮겨갔다. 요크가 교실에 들어섰을 때부터 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어젯밤의 기억이 자꾸만 마음을 짓눌렀다. 요크 서덜랜드가 항복을 받아내러 찾아왔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요크는 그밖에 달리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쉽게 찾아냈지." 요크는 천천히 입을 열고 세레나 쪽을 향해서 오싹해지는 웃음을 떠올렸다.
"난 몸을 숨긴 게 아니니까요. 어째서 당신은 언제나 매사를 쫓는 자와 쫓기는 자라는 사냥하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세레나는 발끈했다. "나는 다만 친구가 하고 있는 그림교실에 나와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내가 오늘 아침에 전화를 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오? 7시 반부터 집에 없었잖소."
"나는 아직 휴가 중이라구요! 그리고 어째서 당신한테서 전화가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저녁에 당신은 화가 나셔서 정말 남자답게 겁나는 말을 이것저것 늘어놓고 돌아가셨지만 전화한다는 말은 없었어요. 그건 그렇고 어떻게 여기란 걸 알았죠?"
"당신 출근을 전화로 확인했더니 이 교실을 가르쳐주더군. 여기서 뭘 하는 거요, 세레나?" 안경 너머로 방안을 휘둘러보면서 요크는 호기심을 드러내고 물었다. "이건 뭐야?" 요크가 미심쩍게 물었다. "저 티포트라고 말하진 않겠지. 설마."
"저 티포트의 한 면을 그리고 있어요." 세레나는 목소리를 낮추려고 애쓰면서 이를 갈고 말했다.
"그저 사진 찍듯이 그리면 안 되죠. 그런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천만에, 난 못하오." 요크가 거침없이 말하는 바람에 세레나는 깜짝 놀랐다.
"스케치를 조금만 공부하면 당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생각해봐요. 당신은 기술자죠, 틀림없이 뭔가 그림을 그리는 훈련을 했을 거예요. 자아 뭔가 그려봐요."
"세레나, 나는 티포트를 그리려고 온 게 아니오...."요크는 갑자기 어정쩡해졌다.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한 번 그려보는 것도 괜찮지 않아요?" 스스로 생각해도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여겼는지 세레나는 킥킥거리고 웃었다. 허둥지둥 이젤에다 값싼 캔버스를 올려놓았다.
"자아 그려요. 하얀 캔버스에 마음대로 그려보라구요." 밤색 눈동자를 빛내며 세레나는 재촉했다. 요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세레나를 본 뒤에, 절망스러운 눈으로 캔버스를 보았다.
"우선 먼저 할 일은." 뜻밖에 노라 에덴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티포트의 자잘한 부분을 완전히 잊어버릴 것. 그리고 당신이 표현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티포트의 일면을 찾아내는 거예요." 요크는 뒤돌아보고, 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 특유의 값을 매기듯 하는 시선을 보냈다. 세레나는 다급하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
"노라, 이쪽은 요크 서덜랜드. 요크, 이쪽은 오늘 우리의 선생님이고 훌륭한 화가인 노라 에덴. 그녀의 말은 틀림없어요, 요크. 노라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훌륭한 선생님이기도 하죠,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노라는 격려하듯 미소 지어 보였다.
"저 티포트의 어떤 곳이 제일 당신 흥미를 끌었는지 말해보세요, 서덜랜드 씨." 순간적으로 두 사람의 뜻이 맞부딪쳤으나 요크가 캔버스로 돌아앉아서 붓을 팔레트에 노란 그림물감에 적셨기 때문에 세레나는 놀랐다. 요크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흰 캔버스에 곡선을 그었다.
노라와 세레나가 잠자코 지켜보는 앞에서 요크는 다시 두툼한 선을 그려넣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극적인 빨간 선.
캔버스에 드러난 모양은 티포트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한 줄 한 줄의 선에 풍부한 둥근 맛을 띤 느낌이 넘쳐있었다. 세레나는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으나 서서히 캔버스의 곡선이 뿜어내는 관능미를 감지하고 차츰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를 상상한 게 분명해. 이 사람 곁에 있으면 감정의 미묘한 흔들림마저 격정적으로 변하고 만다. 캔버스 주위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요크는 붓을 내려놓고 세레나를 보았다.
"이것으로 만족하시나?"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말문이 막힌 채 세레나는 불안하게 아랫입술을 빨았다. 그녀를 구해 주기라도 하듯 노라는 도무지 티포트로는 볼 수 없는 노랑과 빨간 선을 음미하듯 바라보고 천천히 느낌을 말했다.
"정식으로 공부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군요, 서덜랜드 씨."
"유치원에서도 안 했어요."
"그러나 붓을 다루는 데는 놀랄만한 에너지와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군요, 당신은 문자 그대로 캔버스를 습격한 셈이지만 여기 나타난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어두운 것이나 노여움은 아니에요. 오히려 관능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노라는 얼굴을 들고 다른 학생들을 손짓으로 불렀다. "와서 이 그림을 좀 보세요, 어떻게 생각하죠?" 전혀 자리에 안 어울리는 인물에게 벌써부터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던 학생들은 곧 요크가 그린 티포트 주위로 몰려왔다.
"티포트 밑바닥의 곡선을 명확하게 잡아냈군요." 붓을 헝겊으로 닦으면서 빼빼마른 한 젊은이가 의견을 말했다.
"나는 이 색깔의 뚜렷한 점이 좋군요. 눈이 부실만큼 아녜요?" 교실의 단골손님인 젊은 주부가 말했다.
"손잡이의 처리가 재미있는데요." 다른 학생이 아는 체하고 말했다. "저 노란 물체를 실제로 손에 잡을 수 있을 것 같잖아. 퍽 실감이 나는 기법이에요."
"선 하나하나에 말로 설명하기에는 까다로운 섬세함이 느껴지고 있어요. 매우 흥미로운 티포트예요, 서덜랜드 씨." 노라가 결론지었다.
요크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자기 작품에 다시 한번 눈길을 보냈다.
"이것이 티포트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더욱 흥미가 있을 겁니다." 요크가 조용히 말했다. "미즈 에덴, 이것은 내가 어제 저녁에 함께 잔 여자의 그림이라구요, 아니 그보다는." 세레나의 핏기가 가신 얼굴을 보고 요크는 설명을 곁들였다. "팔에 안은 그녀의 인상이죠, 현대예술이란 것은 정말 휼륭한 거로군요. 당신들 모두 그녀를 티포트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어떻게 도구를 챙겨서 클래스메이트들의 빙글거리는 시선을 피해 나왔는지 세레나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세레나는 요크에게 팔을 잡혀서 끌리듯 그의 벤츠까지 왔지만 저항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죠?" 겨우 세레나는 강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노란 티셔츠에 그림물감이 묻은 청바지 차림으로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은 고급스러운 차와는 퍽 대조적이었다. 그림교실의 예술적인 분위기 속에서는 마음 편하게 굴 수 있었는데 이 호화스러운 벤츠에 요크와 나란히 앉아 있자니 야릇한 기분이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예요, 요크?" 요크가 한낮 차들의 흐름 속으로 스며드는 동안 세레나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실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신이 뭔가 그림을 그리라고 해서 그렸을 뿐이오." 요크가 조용히 대답했다.
"티포트를 그리라고 말했어요!"
"어째서 그따위 그림 때문에 시간을 낭비해야 하지? 티포트 같은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잖소. 당신이 붓을 내게 주었을 때 내 마음속에는 당신밖에 없었으니까 말야." 세레나는 찬바람이 일도록 고개를 돌려 요크를 노려봤다.
"날 골려 주기로 작정을 했군요?" 세레나는 비난했다. "내가 억지로 그림을 그리게 한 앙갚음으로 여럿이 보는 앞에서 그것이 나라고 말한 거죠!"
"아아, 사실대로 말한 것뿐이오. 당신을 골려줄 생각은 없었소. 아무튼 매우 재미있는 체험이었어."
"그럴 테죠!"
"나한테 뭘 가르쳐주려고 했지, 세레나?" 갑자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묻고는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 세레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모르겠어요." 한숨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다분히 충동적이었어요. 이기고 지는 개념이 필요 없는 것을 당신한테 시켜 보겠다고 바보 같은 생각을 했을 뿐이에요, 그렇지만 당신은 그것조차도 공격적으로 이용을 했죠? 내가 지고 만 거예요."
"그렇진 않소." 유행의 첨단을 걷는 큰 저택이 늘어선 거리로 차를 몰면서 요크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승부라든가 당신을 골릴 생각은 없었소. 당신이 그런 상황에 나를 몰아넣었을 때 머리에 떠오른 것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긴 것뿐이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대로 당신의 승리였다는 거죠, 이봐요. 화제를 바꾸기로 해요." 세레나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어디죠?"
"우리 집, 당신을 점심식사에 초대하겠소."
"요크! 어떻게 이런....나, 그런....." 요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세레나가 항의할 말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잽싸게 문을 열었다.
세레나는 조심스럽게 좌석에서 내려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기는 파사디나에서도 최근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 곳으로 세레나가 살고 있는 곳보다 훨씬 더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리처드 앤더슨이 살고 있는 오래된 저택가의 분위기도 아니다. 여기 주민들은 재주 있고 활동적인 성공자들인 모양이다. 요크한테는 잘 어울렸다.
초조하고 마음이 상하는 한편으로 세레나는 요크가 살고 있는 아담하고 모던한 환경에 흥미를 느꼈다. 분위기 있는 가죽 가구류나 잘 닦여진 마룻바닥에 눈길을 보내면서 이 집의 현대적인 감각은 흠잡을 데가 없다고 세레나는 생각했다. 세레나의 맨션이 색다르고 재미있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비해서, 요크의 집은 오리려 격식이 갖춰져 있었다. 매우 남성적이지만 어딘지 서먹서먹했다. 이 집에서 마음을 놓을 수 있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요크와 같은 사람한테는 이런 고급 호텔의 로비 같은 집이 아니고 좀 더 긴장을 풀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할 텐데.
"바베큐 솜씨를 보여줄 생각이었소." 진회색 윗저고리를 벗으면서 요크가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요, 요크."
"고픈 척이라도 해요. 고기를 오늘 아침부터 소스에 재어놓았다구. 잠깐 갈아입고 올게." 그렇게 말하고 요크는 2층으로 올라갔다.
"당신이 아침부터 나를 대접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놀랍군요." 모습이 사라진 요크를 향해서 세레나는 저도 모르게 비꼬아 말을 했다.
"내 나름대로 공갈꾼을 길들이는 방법이오." 요크는 침실에서 대꾸했다.
"섹스가 안 된다면 식사는 어떤지 말이야."
"만약 그것도 안 된다면?" 계단 위에 모습을 나타낸 요크는 탄탄해 보이는 양팔로 난간을 붙들고 빙긋 웃어보였다. 눈동자 속에 악마가 비웃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되겠지."
"더 거친 수법?" 세레나는 요크의 청바지와 벌어진 셔츠에 눈길을 보냈다.
아무래도 오늘은 다시 회사로 돌아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요크한테서 세레나는 눈을 떼지 않았다.
"심심할 때는 좀 맘에 걸리는 일을 말이야." 내려온 요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세레나를 주방으로 안내했다.
"심리작전이란 거로군요." 천천히 뒤따라가면서 세레나는 중얼댔다.
"그렇지만 잘 안 될걸요, 요크. 이 일에 한해서 당신한테 승산은 없어요. 복수를 단념하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로 내가 말한 대로 할 거예요." 냉장고에서 먹음직한 스테이크 고기가 든 유리접시를 꺼내던 요크는 가느다란 눈으로 세레나를 보았다.
"어째서 그토록 나를 바꾸고 싶어 하는 거요, 세레나?" 조용하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내가 내 인생에 맞서가는 방법이 도대체 어디가 잘못됐소? 만약에 이기는 법을 몰랐더라면 지금의 지위를 쌓아올릴 수 있었을 것 같소?"
"아아뇨." 세레나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렇지만 언제나 당신 방법이 현명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요. 어느 정도까지 올라오는 데는 냉혹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필요하오." 그렇게 말하고 요크는 세레나를 주위가 울타리로 둘러싸인 마당으로 데리고 갔다.
바비큐 그릴과 옥외용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우거진 수목이 몇 그루 서 있었다. 철문 저쪽에는 햇살에 반짝이는 물이 가득한 풀이 보였다. 마을 공용 풀인 듯했다.
"나는 맨손으로 시작했소, 세레나." 그릴의 불을 피우면서 요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16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지만 무엇 하나 남겨 주신 게 없었지." 세레나는 의자에 앉아서 시원한 백포도주를 잔에 따르고 동정심과 우스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요크의 말을 신뢰하기 때문에 우러나는 동정이었고 그가 뭘 하려는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우스운 것이었다.
"사람은 자신을 위한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안 돼. 그리고 어느 누구도 방해하도록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어렸을 때 깨달았소. 밤에 일을 하면서 낮엔 학교에 다녔소. 대학을 나왔을 때, 나는 내가 나갈 길을 확실히 정하고 어떤 기회라도 이용을 했소...."
"그리고 계획한 대로 기회가 오지 않을 때는 스스로 만들어냈나요?" 세레나가 냉담한 추측을 입에 담았다.
"법에 저촉되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소." 요크는 말하면서 스테이크 고기를 길다란 포크로 꿰었다. 얼굴을 든 요크의 눈이 세레나의 눈과 마주쳤다.
"언제나 점잖은 체하고 있던 건 아니지만 부정한 짓은 안했어. 아무튼 내가 어떤 거리에서 자랐는지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어떤 곳이죠, 요크?"
"형편없는 거리였지." 요크는 자그마한 칼을 손에 들고 그것을 가볍게 집어던졌다. 그 칼날이 공중에서 번쩍 빛나고 회전하는가 했더니 세레나 옆의 나무 테이블에 손잡이를 떨면서 꽃혔다.
"대단하군요." 세레나는 겨우 말했다. "형편없다는 거리에서 배운 기술인가요?"
"그럴 거요." 요크는 대답하고 다시 스테이크 요리에 열중했다.
"어째서 당신이 공갈을 받고 꿈쩍도 안 하는지 이제 알겠어요."
"이봐, 그만둬. 세레나, 당신을 폭력으로 겁 준 일은 없잖소."
"그럴까요?" 요크가 그런 짓을 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레나는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조금 마음을 끌려고 했다는 말인가요?"
요크는 포도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천성적인 거친 면은 절대로 바꿔지지 않을 거라고 알려주려 한 것뿐이오.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내게는 꽤 큰 도움이 된 게 사실이오. 이 점을 당신이 받아들였으면 좋겠소. 그리고 잊어줬으면 해. 우리 두 사람한테는 상관없는 일이잖소." 세레나는 마지막 말을 무시했다. 벌써 몇 차례고 같은 논쟁을 되풀이해 왔기 때문이다.
"요크! 이제 이런 칼 던지는 기술은 필요 없는 거예요. 문자 그대로 상징적인 의미라 할지라도 말이죠. 당신은 이제 형편없는 곳에서 빠져나왔잖아요. 정글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냉혹성과 복수심이 필요한지 모르지만 문명사회에서의 그것은 파멸을 초래할 뿐이라구요. 어떤 때는 악인이지만 또 어떤 때는 세련되고 다정스런 사람이라니, 그건 불가능한 거예요, 모든 일이 서로 연관되어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이건 당신의 예술적 측면을 애기하는 거로군." 요크는 관대하게 말했다.
"아아! 어째서 내가 이런 말을 꺼냈을까." 세레나는 씁쓸하게 말했으나 대답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불가능한 일을 시도한다는 것은 사랑에 빠진 여자의 본성인 모양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요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겁나기 때문일 거요. 나의 비정한 면이 불안하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때문이겠지."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세레나는 포도주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물론, 그렇겠지. 당신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른다구, 세레나." 요크는 점잖게 대꾸했다.
"내기를 해도 좋소,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자신의 승리를 얼마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 재주가 없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구." 섬뜩한 표정을 짓는 세레나의 시선을 붙들고 요크는 빙글거렸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소. 어려운 길을 걸어오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지- 손에 넣은 것은 모두 감사히 받아들인다. 나는 내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사내라구, 세레나. 당신도 소중하게 생각할 거요. 당신에게 싫증내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다구. 당신은 아무 쓸모없는 장난감과는 다르오, 보통 장난감을 이처럼 고생고생하며 쫓아다닐 것 같소? 믿어줘!" 그의 말은 열정적이었다.
요크의 말 뒤에 이어진 침묵 속에서 세레나는 거기에 걸맞은 대답을 찾지 못해 초조했다. 세레나는 요크가 휘두르는 마력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입을 열기 전에 요크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레나, 당신을 원해. 그건 벌써 알고 있잖소."
"그렇지만 나의 무엇을 원하는 건가요, 요크?" 세레나는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어요, 나는 숨을 삼킬 만큼 미인도 아니고 상류사회 출신도 아니에요, 내 안에 뭐가 보이는 거죠?"
"같은 말은 나도 당신한테 물었지." 요크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두 사람이 함께 되었든 상관없이 우리는 서로 상대방을 무시하지 못해. 그건 당신도 알 거요?" 갑자기 빈정거리듯 요크의 입술이 뒤틀렸다.
"왜 자기가 남의 성격까지 교정하려는 어줍지 않은 일에 열중하고 있는지 자기 가슴에 물어보라구."
"그렇다면 당신 쪽은 왜 자기가 공갈을 받고도 잠자코 있는지 물어보겠어요?"
"더 이상 그 애긴 하지 맙시다." 숨 막힐 것 같은 공기를 부드럽게 하려는 세레나의 노력에 요크도 따라오고 있었다.
"접시를 갖다 주겠소? 보통 스테이크를 어떻게 예술적으로까지 품위를 높였는지 맛을 보시라구, 세레나." 그러나 국물이 흥건하고 맛있어 보이는 고기를 세레나의 접시에 담던 손을 멈추고 요크는 그녀의 눈을 쏘아봤다.
"당신 질문에 완벽하게 대답할 수도 있소." 숨이 막힐 듯한 심정으로 세레나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마도 내가 자란 환경과 살아 온 방법 탓으로 나한테는 당신이 갖는 따뜻한 정열이 필요하고, 당신이 돌봐주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오. 당신의 지성과 따뜻한 마음이 필요해. 당신의 웃음소리와 동정과 성실성이 필요해. 알겠소, 세레나?" 그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힘 있게 퍼부어지는 회록색 눈동자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끈이 되고 말았다. 굴복당하기를 거부하는 세레나는 필사적으로 기력을 쥐어짰다.
"덕분에 두 사람 사이는 매우 복잡하게 됐군요, 요크. 당신이 지금 말한 것이 내가 당신한테 바라고 있는 거니까요."
13
요크의 얼굴에 떠오른 노여움이 마력을 깨뜨렸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용기를 쥐어짜서 세레나는 테이블로 돌아와서 준비되어 있던 샐러드를 나누기 시작했다. 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의 다감한 성격을 높이 사주다니, 감사히 생각해요. 당신이 지난 반생을 애기해 준 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어요. 인생의 거친 파도에 정면으로 부딪쳐 가지 않으면 안됐던 강하고 억센 남자의 고달픔을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인거죠. 그렇지만 나는 남자가 갖는 강인하고 날카로운 칼날 같은 면을 모르는 귀엽고 헌신적인 애인 역을 맡을 생각은 없어요."
"그래서 그 칼날을 무디게 만들고 싶다는 거야?" 접시를 내려놓은 세레나를 빙글 자기 쪽으로 돌려세우고 요크는 따끔하게 말했다. 푸른 눈동자가 세레나에게 대들고 싶어 초조해 하는 마음의 흔들림을 반영해서 번쩍이고 있었다.
"그럼요!" 세레나는 신경질적으로 악을 썼다. "그런 생각이구말구요! 당신은 아까 나의 미덕의 일람표를 늘어놓았지만 나는 결코 귀엽고 쾌활하기만 한 복슬강아지는 아니에요. 분명히 나는 중산층 출신인지 몰라요. 당신 같은 야심이 모자라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다정하기만 한 여자가 아니에요! 내 인생에 무얼 바라고 있는지, 뭘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단 말이에요...." 자신의 막말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생각하니 오싹해서 그녀는 도중에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그 때문에는 공갈도 불사하겠다?" 요크가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눈에는 가늘지만 만족스러운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기뻐해야 옳겠지? 전에는 관심조차 보여주지 않던 당신이 내 인생을 철저하게 갱생시켜 주려하고 있으니까."
"비웃어 주겠다, 이거군요. 요크 서덜랜드!"
"비웃다니.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나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만족감과 당신한테 바보 같은 속임수를 멋대로 시키고 있는 욕구불만이 뒤섞여 있을 뿐이오." 요크는 세레나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두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양보해야 되겠지?"
"어제 저녁에는 내가 질 거라고 말했잖아요." 세레나는 대꾸했다.
어젯밤 일이 생각나서 눈동자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아, 언젠가 그대로 하게 될 거요." 요크는 시원스레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당신이 이겼어."
이 말에 깜짝 놀란 세레나는 테이블에 앉아서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먹기 시작한 요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요크는 눈을 들었으나, 다시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들렸잖소." 세레나는 떨면서 의자에 앉았다. 식사가 문제가 아니었다.
"앤더슨사에 대한 계획을 중지하겠다는 건가요?"
"응, 약간의 조건부로." 요크는 생각하면서 말했다.
"어떤?" 세레나는 물고 늘어졌다.
"당신이 내 집으로 옮겨올 것, 나와 같은 침대에서 자고, 아침에는 똑같은 콘플레이크를 먹고, 신문대금과 전기료도 함께 물 것." 변화 없는 표정으로 세레나를 응시하면서 요크는 딱 잘라 말했다. "여기서 함께 살고 싶소, 세레나." 호흡을 진정시키고 생각을 모으려고 애쓰면서 세레나는 요크의 진지하면서도 성난 표정을 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말이 잘 안 나왔다. "도대체 언제 결심했어요?"
"줄곧 당신과 함께 지낼 생각이었소."
"내말은 도대체 언제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냐는 거라구요."
"아아, 그거 말이오." 요크는 어깨를 움찔했다. "노라 에덴의 교실에서 당신의 그림을 그리다가 결심했소."
"요크, 무리한 소리 말아요!" 세레나는 요크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올 마음이 없다는 거요?" 침착하게 또 한 조각의 고기를 자르면서 요크가 말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그건....너무 빨라요. 그 전에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도 많고... 또..." 요크가 내던지 폭탄의 위력에 눌려 허우적거리던 세레나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가라앉히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내가 터무니없는 위험을 걸머지게 되리란 것은 당신도 알 거예요. 함께 지내게 되면 그런 친한 관계를 이용해서 나의 방비를 늦추게 할 셈이죠!"
"아마 그럴 테지." 요크는 뉘우치는 빛도 없이 시인하고 잔에 손을 뻗었다.
"세상에! 그럴 거라구요?"
"어떤 남자도 자기 여자가 그런 걸 바라지 않을 거요, 모든 면에서 완벽한 내 여자임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구."
다시 공포상태에 빠져든 세레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만 당신은 확실한 목적이 있었던 거죠?"
요크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정말 우리 사이에 세력균형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요? 당신은 우리 사이를 적대적으로 만드려 하고 있어. 당신은 협박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내 무기라면 당신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뿐이오. 당신 무기로 공격을 받고나서 내가 나의 무기를 쓰려고 했다 해서 날 비난할 수 있겠소?"
세레나는 생각 없이 요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밖에는 어떻게 당신을 바꿀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어요, 당신을 협박하는 일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요."
"좋아, 바보 같지만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건 인정하겠소. 당신의 승리야. 앤더슨은 내가 생각한 그 밖의 운명에 맡기도록 하겠소. 앤더슨에 대한 계획을 포기한 보답을 받고 싶군. 여기 와서 함께 살아 줘야겠소." 갑자기 발밑에 크게 입을 벌린 늪에 기겁을 해서 세레나는 숨을 삼켰다.
"요크, 그건 무리라구요!" 그 말에 요크는 야릇한 미소를 띠었다.
"그 소리는 이제 싫증날 만큼 들었소."
"나는 진지하게 애기하고 있는 거예요! 진정이에요."
"아, 물론 알고 있소."
"당신이 제안하는 것은 끝없이 계속되는 작은 싸움이에요. 당신이 내 협박을 받아들인 것은 공격하는 방법을 바꿔서 그 대가를 요구하기 위한 것뿐이잖아요. 만약 내가 승낙하면 나를 맘대로 할 수 있는 걸 이용해서 나를 당신의 비지니스 문제에서 밀어낼 셈이죠. 그렇게 되면 나는 당신에 대항해서 또 다른 수단을 생각해야 할 거라구요. 이렇게 해서 서로 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싸우게 되겠죠."
"당신이 시작한 일이야." 요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이 얼마나 절망적인 것인지 나에게 알도록 해서 끝장내려고 하겠죠." 세레나는 펄쩍 뛰면서 딱 잘라 말했다.
"그렇지만 뜻대로 안 될 거예요! 당신 말에 따를 생각이 없어요. 당신이 말하는 협박을 계속할 거라구요." 차가운 눈으로 세레나를 보면서 요크는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위협적인 태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당신은 절대 이기지 못해, 세레나. 이제 이런 피곤한 싸움은 여기서 끝냅시다. 언젠가는 당신과 나는 함께 살게 될 거요. 그렇지만 지금 그렇게 하는 거야. 그것이 신사적인 거래잖소. 나는 앤더슨에게 손대지 않는다고 맹세한다. 당신은 내게로 온다고 맹세한다."
"잠깐, 기다려요." 다시 의자에 앉은 세레나는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신사적인 거래가 아니에요. 당신과 함께가 되면 나도 도저히....도저히....."
"도저히 협박을 계속할 수는 없다? 이런 일에 집착하기 전에 그만두게 하고 싶다는 거겠지." 요크는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살게 된다면 그런 전술은 필요 없는 것이라고 납득시키는 것도 분명해. 당신은 이런 싸움에 어울리지 않아. 세레나." 매혹적인 말이야, 세레나는 생각했다. 말하는 대로 싸움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다.
이 사람, 날 어쩌려는 것일까? 이제까지 뭘 한 것일까? 세레나는 지금까지의 일을 되짚어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모든 일이 단순하고 간단했을 텐데. 눈에는 눈. 그러나 이 낡은 격언은 이미 빛을 잃었다는 것을 세레나는 곧 알아차렸다. 요크가 지적했던 결점이었다.
서로가 끊임없이 상대방에 대한 공격수단을 강구하고 있는 관계를 언제까지 계속할 수가 있을까? 리처드에 대한 보복을 단념하겠다고 요크는 말했다. 그러니까 외면적으로 한 가지만이라도 요크의 목표를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이것은 하나의 승리임에는 틀림없다. 요크 서덜랜드는 두 가지 목표 가운데 어느 쪽인가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나를 선택했다.....
그러나 일이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항거하지 못할 힘이 그리 쉽게 멎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이제까지로 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요크는 정말로 나와 살고 싶은 것일까?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결혼생활 속에는 내가 더 버티지 못할 것이란 것을 요크는 잘 알고 있다.
빛 좋은 개살구, 결혼--- 이 말에 숨이 막힐 듯해서 세레나는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고 해서 나는 요크가 말한 대로 함께 살 생각인가? 순간적으로 세레나는 자기가 요크에게 바라고 있는 것은 결혼, 진짜 결혼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게 짝이 없는데 또 하나 까다로운 문제가 더해진 거야. 세레나는 서러워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감당하기 힘든 역학관계가 계속되어야 한단 말인가? 요크는 숙련된 노병이다. 오늘 오후의 솜씨는 훌륭했다. 오늘밤은 함께 자자고 부르지 않았다.
점심때의 큰 소동 뒤에 집까지 데려다주고 예의 바르게 현관에서 헤어진 것이다. 그의 훤칠한 체구에서 남성적인 힘과 자신감이 빛나고 있었다. 나를 다루는 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 태도고 알 수가 있다.
어떻게 그에게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요크는 나를 원하고 있다. 언젠가는 자기 뜻대로 나를 손에 넣을 것이다.
세레나는 불안해졌다. 그 사람이 위험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나 이 지경까지 올 줄 누가 짐작했단 말인가? 갖가지 무서운 생각에 고통스러워하며 잠 못 이루는 하룻밤을 보내 세레나는 동틀 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으나 10시에 전화 벨 소리에 잠을 깨고 말았다.
"내가 이겼소." 라는 것이 요크의 첫 마디였다.
어렴풋이 안개 긴 머릿속에서도 그 목소리가 기쁨을 누르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혹스러워서 낯을 찌푸리며 세레나는 침대 위에서 고쳐 앉았다.
"도대체 뭐가요?"
"계약 말이야." 천하를 얻은 것 같은 목소리로 그는 설명했다. "서덜랜드 주식회사와 앤더슨사와의 입찰경쟁 말이오. 서덜랜드 주식회사의 낙승이라구." 수화기 저쪽에서 밀려오는 기쁨과 안도감과 조용한 축제 기분에 세레나는 저도 모르게 말려들고 있었다.
"요크, 훌륭해요! 축하해요! 축하잔치를 해야겠군요." 순간 침묵이 흘렀다.
"아아, 그래. 나의 두개의 전리품을 위해 축하를 해야겠지." 자랑스러운 듯 요크가 말했다. "새로 따낸 계약과 우리 집 새 여주인을 위해서, 오후에 샴페인을 갖고 그곳으로 가겠소."
"요크, 내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구요." 세레나는 딱 잘라서 가로막았다. "당신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걸 잊진 않으셨겠죠. 나한테는 시간이 필요해요- 신중하게 생각해 볼 시간이. 그리고 당신이 없는 편이 더 좋겠구요. 축하주 마시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는 게 어떨까요?" 요크의 목소리는 분명히 초조감을 누르고 있었다.
"앞으로 24시간 여유를 주겠소." 마지못해서 요크는 말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거요." 전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요크의 자신에 넘치는 확신에 불안해진 세레나는 손에 든 수화기를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요크가 아침부터 전화를 건 속셈을 깨달은 것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였다.
계약의 입찰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은 세레나의 활에 이젠 화살이 한 개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낙찰가격을 미끼로 그를 협박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회사를 망칠 계획을 리처드한테 알리겠다는 또 하나의 협박도 얼마나 자신 없는 일인가. 세레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요크가 내가 모르게 어떤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협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그의 대답밖엔 나한테는 돌아올 게 없어.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세레나는 샤워를 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니 요크는 정정당당하게 싸울 거야. 그는 그렇게 비열한 인간이 아니야. 내 약점을 이용해서 승리를 거두고 그것을 자랑할 사람은 절대아냐. 요크가 바라고 있는 승리는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격렬하게 원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왼쪽 콘택트렌즈를 넣으면서 세레나는 갑자기 생각했다. 그 생각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요크는 앤더슨사를 차지하고 싶어 한다. 그와 동시에 그에 지지 않을 만큼의 정열로 나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나 모르게 리처드 회사에 대한 계획을 진행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수단을 취하진 않을 것이다. 당당히 싸움을 택할 사람이야. 재규어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정당한 싸움의 승리는 명예로운 것이다. 요크는 앤더슨과의 싸움에서 먼저 내가 손을 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존경해야 할 적이라 할 수 있다. 상황을 로맨틱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세레나는 자신을 타일렀다. 로맨틱하기는커녕 몹시 위험한 상황인 것이다. 찌푸린 얼굴을 하고 거울에서 떠나 세레나는 옷을 입었다. 앞으로 24시간, 생각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다. 24시간 동안에 바른 답을 찾아낼 수 있기를 빌 뿐이다.
14
다음날 아침 6시 반에 일어난 세레나는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겼다. 위대한 예술가나 위대한 실업가에 어울리는 뭔가에 열중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맨발로 방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이 이상 괴로운 투쟁을 오래 끈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한 가지 결심이 천천히 모양을 갖추어 가는 데 따라서 졸음은 서서히 달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마음을 정하고 나니 그것밖에는 대답이 없다는 확신이 마음에 뿌듯하게 차올랐다.
옳거나 그르거나 간에. 괴롭거나 위험하거나 세레나는 요크에게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만큼 주저했으니까 요크도 자기가 결심한 일에 대해서 생각을 다시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세레나의 밤색 눈동자가 험악해졌다. 나는 이제 활시위를 떠났어.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요크 쪽이란 말이야. 내가 요크의 도전을 받고 일어선 그 뒤로 상황은 변한 게 아무것도 없어. 요크는 첨을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사나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를 잘 알고 있잖아. 세레나는 자신을 위로했다. 요크는 그 나름대로 고결하고 상냥하며 놀랄 만큼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다. 세레나는 손에 넣은 것은 소중히 한다는 요크의 말이 본심이기를 빌고 있었다.
7시 반, 미술품의 포장이 대충 끝난 뒤의 하얀 방은 어딘지 쓸쓸하고 헐렁하게 보였다. 세레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도대체 언제 어떤 방법으로 요크에게 결심을 전할까 곰곰히 생각했다.
그의 집 문 앞에 앉아서,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제일 좋을 거야. 세레나는 한숨을 쉬면서 생각했다.
8시 반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중요한 것만을 챙겼는데도 요크의 집까지 몇 번 왕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세레나는 시계를 보았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미술품이 채워진 작은 상자를 몇개나 쌓아올린 덕분에 시야를 차단당한 세레나는 간신히 문 있는 데까지 가서 겨우 문을 열었다.
"도대체 뭘 하는 거야...." 놀란 요크의 큰소리가 들렸는가 했더니 세레나는 그와 부딪치고 말았다.
"요크! 여기서 뭘 하는 거예요!" 깜짝 놀란 시선을 요크에게 보내니까, 판단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또 도망칠 셈이오, 세레나?" 피곤한 목소리로 요크가 말하면서 바닥에 널려있는 상자를 발로 밀어내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도 내가 무섭소?" 요크가 거실로 들어왔기 때문에 세레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요크는 아무것도 장식되지 않은 벽과 짐을 가득 채운 상자의 산더미를 바라보고 세레나에게 눈을 돌렸다. 그의 눈에 나타난 것은 뭔지 세레나는 알 수 있었다. 괴로움이었다. 아까보다 더욱 생생하게 드러나 있었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구요, 요크."
요크의 눈동자에 깃든 저 괴로움을 풀어 주는 것이 먼저 할 일이야. 이 사람의 괴로움을 풀어주는 것은 내 인생에서 언제나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하고 세레나는 직감적으로 생각했다.
"24시간이 지났소." 요크는 턱을 당기고, 양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고 좀 발을 벌린 공격적인 포즈를 취하고 말했다.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감쪽같이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요?" 이 도전적인 태도에 세레나는 버럭 화가 났다.
"불쌍한 요크,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싸우는 것뿐이로군요." 놀라운 것은 검은 속눈썹이 실망스럽다는 듯한 순간 감기더니 다시 속눈썹이 올라갔을 때 회록색 눈동자에 무언가가 번쩍였다.
눈물이 틀림없었다. 세레나는 갑자기 마음이 괴로웠다.
"아아, 세레나." 요크는 굳어진 목소리로 중얼댔다. "부탁이오, 날 떠나지 말아요. 제발 도망가지 말라구. 나는 이제...."
"요크 그만해요!" 요크의 말에 담긴 절망적인 고통스러움과 눈에 가득한 눈물에 세레나는 금방 반응했다. 세레나는 요크의 가슴에 뛰어들어서 자기도 넘쳐흐르는 눈물로 볼을 적시며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말하지 말아요. 다시는 말하지 말아요. 당신한테서 도망치지 않아요. 당신한테 가려던 참이었어요. 정말 바보로군요. 당신이 이겼다는 걸 몰라요? 나 항복했어요. 그러니까 울거나 가지 말라거나 부탁하는 소린 말아요. 그런 짓을 하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마는 걸요!" 요크에게 억세게 껴안겨서 세레나는 숨이 막힐 듯했다.
"세레나." 세레나의 머리에 얼굴을 파묻으며 요크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정말 와 주는 거야? 내게로 온다는 거야?"
"그럼요, 요크. 그렇다니까요. 받아 주신다면....."
"안 돼."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이런 조건으론 안 돼. 당신이 항복하는 편에 서다니 참을 수가 없어. 모르겠어? 그래서 지금 이렇게 찾아온 거라구. 이제 줄다리기는 더 이상 하지 말자고 왔단 말이오.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뿐이야. 앤더슨 회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당신 때문이라면 그 계획도 단념하겠다고 유타에서 돌아왔을 때부터 결심했었소. 비지니스 문제를 결정하는 데 나 말고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머리를 쓴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라구. 그걸 알기나 해, 세레나."
"그런 식으로 결정하는 건 원하지 않아요." 세레나는 강경한 말투로 애기했다. "당신을 협박하는 게 아니었어요. 당신한테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하려고 필사적인 나머지 그랬던 거예요. 리처드에 대한 복수란 자기를 망칠 뿐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걸 알아주기 바랬는데, 나는 자칫 잘못했으면 둘 다 모두 망하게 할 뻔한 거라구요."
"언제나 당신은 무엇보다도 소중했었소." 세레나의 머리를 살짝 어루만지며 요크는 그녀의 얼굴을 어깨에 끌어당겼다. "다만 어떻게 당신과 복수를 다 손에 넣을 수 있을지 몰랐던 거요. 복수를 단념시키기 위해 협박이란 수단으로 나오겠다는 당신 말을 들었을 때 이미 복수는 단념했어. 내게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내 머리 속은 온통 당신 일로 가득 차 버렸소. 당신만 내 사람이 된다면 애더슨에 대한 복수 같은 건 이미 오래 전부터 흥미가 없었소."
"그렇다면 내 승리를 쉽사리 인정하기 싫어서 아무 소리도 안 한 거예요?" 훌쩍이면서도 입술에는 행복한 웃음을 떠올리고 세레나는 말했다.
"나를 조종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려고 한 거지.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사이란 싫으니까 말야. 그리고 지금까지 스스로 책임자가 되어서 무엇이든 맘대로 해왔기 때문에 쉽사리 포기한다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솔직히 말해서 잘 몰랐던 거요." 요크는 감정을 담아서 덧붙였다. "몇 분 전까지, 당신이 또 도망치려 한다고 생각할 때까지 몰랐었소." 세레나는 고개를 들어 아직 눈물이 반짝거리는 속눈썹 너머로 요크를 응시했다.
"난 당신한테로 가려고 짐을 싸고 있었어요...." 진정이 담긴 눈으로 세레나는 속삭였다.
"그리고 나는 아침 일찍부터 당신한테로 왔지. 서덜랜드 주식회사도 포함해서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알려주려고 말이지. 나와 결혼해 준다면 그렇게 되는 거요." 요크는 부드럽게 대꾸했다. "사랑하고 있어, 세레나. 나와 결혼해 주겠소?"
"결혼이라구요! 아아 요크, 기뻐요. 무엇보다도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 걸요!" 사랑의 고백의 나머지 말은 요크가 세레나를 와락 잡아당겨서 입술을 막아 버리는 바람에 끊기고 말았다. 키스야말로 두 사람을 묶어 주는 확실한 끈이었다- 힘과 다정함, 활기찬 격렬함,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조화 속에서 모든 것이 일체가 되었다.
"세레나, 세레나." 요크는 속삭이고 세레나의 붉게 물든 얼굴을 바라보다가 엄지손가락으로 세레나의 입가를 만졌다.
"무엇 때문에 서로 시간낭비를 했을까?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그리고 지는 것과 상관없는 일도 있어요." 세레나는 상냥하게 말했다.
"그래, 서로 승부에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 편한 결론을 함께 얻을 수 있었는데 말이지." 세레나의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얼굴에 담긴 동의하는 표정을 알아보고 요크는 세레나를 끌어안았다. "지금이 바로 그런 마음이오. 아무튼 밤새도록 당신한테 주려 있었으니까." 그에게 안겨 침실로 가면서 세레나는 요크의 얼굴을 살짝 매만졌다. "당신도 어젯밤에 잠을 못 잤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한숨도." 요크는 아직 정돈되지 않은 침대로 향했다. "당신이 나를 바꾸려는 계획을 단념하고 나가 죽어버리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어떻게 대결을 그만둘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자신을 타이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소."
"어떤 방법으로도 한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고 들었어요." 침대 곁에서 세레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다른 가치관을 깨닫게 할 수는 있지." 세레나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요크는 말했다. "내가 얼마나 재빨리 가장 소중한 것을 깨달았는지 몰랐었소? 확실한 증거가 있었는데 말이야!" 머리에 와 닿는 요크의 손길에 기쁨을 느끼면서 세레나는 얼굴을 들었다.
"어떤 거죠?"
"언제나 도망쳐서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여자를 쫓아다닐 인간으로 보였소, 내가?"
"도망친 게 아니에요! 그때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갔을 뿐이에요, 당신 자존심을 건드릴 생각 같은 건 없었다구요."
"그리고 여자한테 헙박을 받고 잠자코 있는 사내로 보이나?" 요크의 입가에는 애정과 천진한 유머가 나타나 있었다.
"아니, 그렇게는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그런 때 당신이 취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잖아요? 나는 유타에서 그 숫자를 보았기 때문에 유리한 고지에 있었구요." 세레나의 천진스러움에 요크는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내가 하는 일의 계획을 이해하는 것은 당신에겐 어려운 일이었지. 당신한테 내색하지 않고 몰래 앤더슨사를 방해하고 때려 부술 수도 있었으니까."
"어머, 당신은 그런 짓 할 사람이 아니에요." 이번에는 세레나가 요크의 천진난만함에 미소 지을 차례였다.
"당신은 냉혹할 때도 있지만 정정당당함을 잃을 사람은 아니에요." 요크는 익살을 부리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 단념하듯 한숨을 쉬고 안경을 벗었다.
세레나는 요크의 빳빳한 와이셔츠 맨 윗단추를 풀면서 반짝이는 눈동자로 요크를 지켜보고 있었다. 요크는 몸을 굽히고 세레나의 엉덩이에서 풀오버 밑으로 손을 밀어 넣어 애무하기 시작했으나 문득 그 손을 멈췄다.
"당신이 그린 그림." 좀 심술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이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실마리가 되었다구, 붓을 주면서 억지로 그림을 그리라고 시켰을 때, 나를 어디까지 정복했는지 깨닫지 못했었소?"
"그 일이 당신한테 어떤 의미가 있었죠?" 세레나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림을 다 그렸을 때, 이건 어쩐 셈인지 정말로 당신을 안았을 때의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소. 나도 깜짝 놀랐지. 그 시점에서 두 사람을 전투상태에서 구해내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소. 그때 무조건 항복을 하고 과감하게 물러서야 했던 거요." 요크는 중얼거리고 세레나의 목에 입술을 눌러대면서 세레나의 가슴께로 손을 움직였다. "여러 가지를 깨달았소, 세레나. 기회를 줘. 변할 거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어!" 그 목소리에 담겨진 확신을 알아차린 세레나는 요크에게 안겨 매달렸다.
"당신을 바꾸고 싶지 않아요, 요크. 당신이 내 것이란 걸 알고 싶을 뿐이에요. 당신이 나한테 소중하듯 내가 당신에게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당신이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앞으로의 인생을 보낼 생각이오." 쉰 목소리로 속삭이고 요크는 세레나의 어깨에 머물렀던 입술을 떼고 풀오버를 벗겼다. "내 항복을 받아 줘, 세레나."
"내 항복을 받아들여 준다면." 세레나는 요크의 목을 양팔로 휘감았다.
요크의 양손이 관능적으로 세레나의 가냘픈 등으로 미끄러지면서 셔츠의 옷감이 가슴을 문질렀다. 유혹하듯 벌어진 입술에서 자그마한 가슴까지 뜨거운 눈길을 보내고 요크는 높아져 가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이오." 한손으로 세레나의 등을 애무하면서 요크는 셔츠 단추를 풀었다.
천천히 끌어당겨졌을 때, 요크가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으나 다음 순간 세레나의 가슴은 남자의 가슴에 짓눌려져 있었다.
세레나의 신음소리가 요크에게 불을 당겼다. 놀랍도록 재빠르게 요크는 세레나의 청바지를 벗겼다. 요크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주려 있던 키스를 퍼붓고, 가슴을 애무했다. 그리고 열정적인 뜨거운 숨을 내쉬며 세레나를 끌어안았다.
요크의 이빨이 에로틱한 공격을 해왔을 때는 넋이 나갈듯했다. 그에게서 불붙여진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요크는 세레나를 침대에 앉히고 엎드려서 살짝 손목을 잡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흔들리는 불꽃은 누를 길 없는 지옥의 불길과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을 갖고 싶었소." 목이 잠긴 목소리였다. "확실히 처음에는 당신에 대한 욕망은 당신을 앤더슨한테서 뺏는다는 것과 함께였지. 그러나 이것만은 믿어줘, 세레나. 나는 곧 동기가 바뀐 것을 깨달았소. 당신을 앤더슨한테서 빼앗아야겠다, 그러나 당신을 이용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어. 녀석의 팔에 안겨 있는 당신을 상상만 해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소! 생각만 해도 미칠 것만 같았지. 녀석이 당신을 안고, 당신한테 키스하고...." 세레나는 요크한테 쥐어져 있는 양손을 들어서 남자의 탄탄한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모든 것을 잘 알았다는 애정이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요크."
세레나의 매끈한 손목을 쥐고 있던 요크의 손에 힘이 주어지고 그 회록색 눈동자가 옛일을 회상하듯 가늘어졌다.
"당신은 나를 무서워하고 있었어..." 위로하듯 웃음을 떠올리고 세레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히 조심은 했어요. 그러나 무서워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어요. 나도 당신한테 끌리고 있었는 걸요. 당신이 이처럼 위험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금방 좋아할 수 있다고 나 자신에게 말했어요. 그러나 결국은 당신이 생각한 대로 위험한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사랑해 버렸어요. 내 마음속에서는. 당신을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그런 마음을 컨트롤하고 싶었던 거요?" 요크는 슬픈 듯이 말했다.
"조금요." 세레나는 인정했다. "조금이라구요. 당신을 협박하려고 말을 꺼냈을 때, 화났어요?" 요크의 입 언저리가 뒤틀렸다.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 그러나 나한테 관심이 없다면 이런 수단으로 나오지 않았을 거라고 자신을 위로했소. 당신의 동기 가운데 나에 대한 관심이라는 요소가 없다면 나를 협박할 까닭이 없거든." 요크는 볼에 갖다 댄 손바닥에 입술을 눌렀다. 그 섬세한 키스에 세레나는 숨을 삼키고 손톱을 살짝 그의 볼에 갖다 댔다. 요크는 천천히 양 손목 안쪽에 입술을 옮겨 그 예민한 부분에 긴 키스를 보냈다. 세레나가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 요크." 세레나는 신음했다.
욕망의 신음소리를 내고 요크는 세레나를 침대에 눕히고 그 위에 몸을 포갰으나 아직 하나가 되려고는 하지 않았다. 재촉을 하듯 세레나는 안고 매달려서 몸을 젖히고 목덜미에 입술을 눌러댔다.
세레나는 요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요크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자각이 세레나의 세계를 완전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요크에게는 무엇이든 줄 수 있었다. 요크도 기쁜 마음으로 뭐든지 바치려고 하고 있으니까.
견딜 수 없도록 다정하게 요크는 세레나의 몸 구석구석까지 애무했다. 치솟는 정열에 세레나는 몸을 뒤틀었다. 낮은 신음소리가 차례로 새어나왔다.
"당신은 생생하게 살아있어, 이 느낌이 좋아." 요크는 목이 잠긴 소리로 말했다.
"나를 사랑해줘. 나만을 영원히 사랑해 줘!"
"영원히." 세레나도 메마른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모든 감각이 빙글빙글 소용돌이쳐서 자제할 수가 없다. "아아, 요크...!" 세레나의 격렬한 욕망에 호응하듯 요크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애무가 정열적이고 공격적인 것으로 변했다. 그것은 세레나가 기대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세레나는 몸부림치며 요크에게 호응했다.
이 이상의 습격에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을 대 요크는 갑자기 그녀의 따뜻한 중심으로 파고들어왔다.
"세레나, 당신은 날 떠날 수 없어!" 요크가 몸을 밀착시켰다. 천천히 심장이 멎어버릴 만큼 천천히 요크는 그녀의 안으로 들어왔다.
일체감과 사랑이 맥박 치는 생명력을 실감하면서 두 사람은 오래도록 껴안고 있었다.
"요크, 좋아해요. 사랑하고 있어요..."
그 말과, 힘과, 자기를 감싼 열정이 못 이겨 요크는 움직이기 시작하고 모든 것을 멎게 하는 원시적인 힘으로 두 사람은 사랑의 선율을 타기 시작했다.
세레나는 요크의 팔 안에서 기쁜 마음으로 자진해서 몸을 내맡겼다.
요크는 세레나의 속에서 분방하게 몸을 풀었다. 그가 사나이의 승리를 얻었을 때 세레나도 또한 여자로서의 흥분을 맛보았다. 이 세계에 오직 두 사람만 존재하듯 서로 껴안으면서 세레나와 요크는 두 사람의 사랑의 기쁨을 분출시켰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세레나는 요크의 따뜻한 품에서 행복감을 맛보고 있었다.
몸을 끌어안고 있는 요크의 손에 힘이 주어졌으나 눈을 뜨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태어난 거요."
"당신이 그렇게 로맨틱한지는 몰랐군요." 세레나는 사랑이 넘친 미소를 떠올렸다.
"로맨스의 문제가 아니라구, 실험물리학의 문제라구." 요크는 정색을 하고 강의하기 시작했다. "항거하기 힘든 힘이 부동의 물체와 마주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폭발하나요?"
"그것은 세상 일반에 퍼져 있는 잘못된 상식중의 하나야." 요크는 얼버무렸다.
"사실은 양자의 힘이 결합되어 완전히 무적의 것이 되는 거라구." 요크는 양손을 벌렸다.
"침대로 들어와, 세레나. 증명해 보여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