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山)
가을 산행
가을엔 나도
간
갈대는 배후가 없다
강가에서
강 건너 등불
개나리
개평 같은 덤 같은
거미
거울
겨울나무
겨울 만다라
겨울 산행
고도(孤島)를 위하여
고등어
고백
과수원
과천 뻐꾹새
권태를 위하여
그네
그는 지금
그대에게 가는 길
그 섬에 가면
그 자리
꽃을 위하여
나도풍란
나무는 죽어서도 나무다
나의 다비(茶毘)는
나의 방
낙엽(落葉)
낙타 풀
난값이 파값보다
난을 보며
낮달
너는 나와 다르다
너무 멀리 와 있네
넥타이
녹차(綠茶)를 끓이며
눈
눈 오는 날에
느티나무 타불
늦가을 문답
달맞이꽃
대책 없는 봄
도꼬마리씨 하나
동백꽃 패설
동행가(同行歌)
따뜻한 등짐
리모콘
만년필
만파식적(萬波息笛)
매미 껍질
매미 소리
매미 소리고(考)
멀어서 아름다운 것
모과(木瓜)나무
목련
목수의 노래
무지개
문장대에 오르다
물
미로찾기
민들레
민들레 산조
민들레 연가
바다
반딧불
배롱나무 아래서
봄 산행
봄소식
봄에의 기원
불나비 사랑
비누
사랑법
사마귀
사막 – 타클라마칸
사신(私信)
산나리꽃
새해를 향하여
석류
석류 부처
선운사 동백꽃
섬
성가족(聖家族)
성냥
성선설
손금
시인
시인의 모자
쑥
아카시아꽃
안경알을 닦으며
안전선 밖에 서서
앞뜰의 살구나무
어떤 선문답
어머니의 땅
억새꽃
여름 산행
연을 날리며
염소를 찾아서
오이도
우담바라
운주사 와불
이삭의 노래
이소당 시편(耳笑堂 詩編)
익명의 스냅
자동판매기
자명고
자목련
자서전(自敍傳)
자화상(自畵像)
잡식동물
장마
장수하늘소
저녁놀
저승꽃
제목을 유보한 사신(私信)
조팝나무꽃
지상의 방 한 칸
지천명(知天命)
직소폭포
진달래
질마재 추신
참꽃
채송화
첼로를 켜는 여자
춘란(春蘭)
출항(出航)
치킨 센터
쾌락보다 고통이
토종 감 한 알
통화
틈
파도
풍경
풍뎅이
하일주제(夏日主題)
한란꽃
행복한 난청
허수아비의 춤
호박꽃
혼자 먹는 밥
화려한 오독(誤讀)
환절기
회전문
1월
2월
3월
4월에
6월
7월의 숲
8월의 산(山)
12월
50을 바라보며
가을 산(山)
임영조
장항서 열여섯에 시집와
팔년 만에 홀로되신 당숙모
두 남매를 청정하게 키워내
온 마을에 소문이 자자하더니
치마폭에 번지는 가을이 붉다
깃을 치던 새들이 둥지를 뜨듯
자식들은 모두 대처로 나가 살고
고향집에 혼자 사는 당숙모
자식들이 함께 가서 살재도
나는 예가 좋다며
무거운 산이 되어 요지부동이더니
하늘 높아 햇빛 부신 이 가을
가난한 낯술에 취해
웬지 기분이 좋아
온종일 벌개진 얼굴로 주정하듯
주정하듯 혼자 웃는 당숙모
아직도 정정하신 말년이 곱다.
가을 산행
임영조
청하늘 워낙 높고 고요하시니
우러러 보는 것도 누될까 싶다
마침내 자중(自重)하는 가을 산
그래도 난감한지 안색이 붉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구나
스스로 낯뜨거운 삶이 있을 것)
저 공평한 가을볕에 내 생을 널면
마지막 얼룩은 무슨 색일까?
욕계일까 색계일까 무색계일까?
궁금한 생각이 산문(山門)을 민다
정상이 빤히 뵈는 지척 같은데
길은 오를수록 숨 가쁘고 험하다
가파른 능선 먼저 오른 억새꽃
하얀 웃음소리 산을 흔든다
기척에 놀란 청설모 한 쌍
남은 해를 서둘러 꼬리로 잰다
덩달아 분주해진 마음 두리번
가을숲을 엿본다, 와! 말년에 모여
너나없이 거나한 동창회 같다
중년에 돌연 풍맞은 생처럼
열에 들떠 상기된 단풍나무숲
저런! 온몸에 신나 끼얹고
지금 분신중인 산이 뜨겁다
오, 장엄한 다비식(茶毘式)이여!
그 황홀한 화염 속에
내 정신 함께 던져 태우고
맨몸으로 가볍게 내려오는 길
잠시 올려다본 남녘 하늘 멀리
기러기 떼 끼륵끼륵 저녁놀 몰고 온다
제 이름 밑에 언더라인 치듯
일렬종대 점점점(點點點) 멀어져 간다.
가을엔 나도
임영조
저마다의 안색이
보다 투명해진 이 가을
나도 한 알의 과일로 익고 싶다
지난 여름 뜨락에서
악몽으로 시달려온 불면과
남은 피도 다 삭여
이제는 내용이 선명한 과일
벗겨도 부끄러울 것 없는
가장 진한 언어로 익어
안식하는 지상(地上)에 내리고 싶다
수척한 햇살은 문득
땅 짚고도 쓰러지는 이 가을
누구든 만나고 싶다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하는 이
눈이 맞아 설레는 사람이라면
마지막 이승을 하직하듯
온몸을 맡기고, 남은 피도 바치고
이 가을 적시는 향기로 남고 싶다
이 고요 깨우는 소리로 남고 싶다.
간
임영조
푸성귀는 간할수록 기죽고
생선은 간할수록 뻣뻣해진다
재앙을 만난 생의 몸부림
적멸의 행간은 왜 그리 먼가
여말에 요승이 임금 업고 까불 때
간 잘 맞춘 임박은 승지가 되고
간하던 내 선조 임향은 괘씸죄 쓰고
남포 앞 죽도로 귀양 가 소금이 됐다
세상에 간 맞추며 사는 일
세상에 스스로 간이 되는 일
한 입이 내는 奸과 諫 차이
한 몸속 肝과 幹 사이는 그렇게 먼가
꼴뚜기는 곰삭으면 무너지지만
멸치는 무너져도 뼈는 남는다
꽁치 하나 굽는 데도 필요한 소금
과하면 짜고 모자라면 싱거운
간이란 그 이름을 세워주는 毒이다
간이 맞아야 입맛이 도는
입맛이 돌아야 살맛 나는 세상에
그 어려운 소금 맛을 늬들이 알어?
갈대는 배후가 없다
임영조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들어 선문(禪門)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노후(老後)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반골(反骨)의 동지(同志)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강가에서
임영조
얼었다 풀리는 등이 가려운지
은비늘 허옇게 뒤척이는 강
흘러가는 강물을 보노라면
어디론가 떠나는 남부여대
지난한 행렬의 뒷모습이 보인다
울먹울먹 속울음 감춘 강심은
한 필의 서럽고 긴 고별사처럼
갈수록 절로 깊어 멍이 푸르다
누가 또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지
물살이 놔라놔라 재게 흐른다
- 가서 자리잡거든 소식 전해라!
- 글쎄, 염려 마세요
해놓고 여태껏 소식 없는 염려들
염려가 안절부절 세월만 끌고 간다
끌고 가던 산도 들도 다 놓고
온몸으로 제 길을 밀고 가는 강
오체투지로 길 없는 길을 가는
강물은 몸이 길이다
길이 몸이다
강 건너 등불
임영조
강 건너 등불을 보네, 아니
강 건너 등불이 나를 보네
그럼 나 역시 강 건너 등불일까
가까이할 수 없고 내 것일 수 없는
저 애틋한 그리움이 강을 넓히네
물위에 얼비치는 불빛은 왜
실체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것일까
희망이 없는 곳에 희망이 있듯
갈 수 없는 저쪽은 늘 피안이었네
다시는 안 올 생의 굽이를 돌아
흘러간 추억도 아득하면 등불이라고
나직이 일러주며 흐르는 강물
깊어지는 물살이 그리움을 키우네
혼자서는 사무치게 그리운 저녁
내 가슴속 거문고 꺼내
가장 서러운 현을 골라 퉁기면
터지네, 꽃씨처럼 꼭 다문 언약
저녁강 물비늘로 되살아나서
노을보다 더 진한 속울음 우네
저무는 강물 위에 물수제비 뜨듯
외기러기 잠방잠방 발을 적시는
쓸쓸한 강가에 나와 내 그리움 접네
슬픔도 함께 접은 거룻배를 띄우면
화답하네, 잘 익은 호박등처럼
따뜻한 불빛 시선을 뻗는
저 강 건너 등불.
개나리
임영조
대공원 산책길 옆
깎아지른 산허리 비탈길에는
얼굴이 노란 영세민들이
지천으로 피어서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동원했을까
누구를 응원 나온 것일까
단색으로 펼쳐든 카드섹션이
와! 와! 일제히 열광하듯
사방을 압도하고 있었다
저토록 순진한 백성들에게
대관절 나는
무엇을 약속할 수 있을까
- 친애하는 유권자 여러분,
나를 밀어준다던
나에게도 막강한 힘을 준다면
가장 충직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 천한 색깔을 바꿔주고
슬픔을 닦아주는 종이 되겠습니다
허리 꺾고 지지를 호소해도
이제 더는 안 속는다고
살래살래 흔드는 옐로카드
그래도 천지엔 봄날이 와서
공평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왠지 낯뜨거운 시선처럼.
개평 같은 덤 같은
임영조
내 나이 딱 오십이 되면
밥 빌던 직장을 그만두리라
속으로 다짐하고 또 했다, 헌데
막상 쉰이 다 돼가는 어느 날
본 나이로 할까, 호적 나이로 할까
호적 나이라면 아직 이태나 남았는데
치사한 잔머리를 굴리다 예라!
본 나이 오십에 밥숟갈을 던졌다
어느새 나도 이태 후면 환갑이다
호적 나이로 치면 네 해나 남았다
갑년이라면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눈과 귀가 순해져야 할 텐데
나는 아직 눈이 바빠 탈이다
귀가 여려 탈이다
본 나이와 호적 나이 사이에
라일락꽃 흐드러진 봄이 오가고
한여름 매미소리 귀를 찢는데
오동잎 살랑살랑 가을바람 쫓는데
나는 아직 바쁜데 이를 어쩌나?
본 나이로 칠까 호적 나이로 갈까
망설이는 사이에 갑년은 올 것이다
이를테면 개평 같은 덤 같은.
거미
임영조
그물을 짠다
투명한 유혹의 은실을 끌어
끈끈한 옥망의 신경을 늘여
그물을 친다
씨줄과 날줄을 걸어
사방팔방 짜 늘인 레이스
경계가 삼엄한 레이더망이다
지난 과오를 줄줄이 실토하듯
감히 공중에 내건 죄가
저토록 길고 아름다울 줄이야
속셈이 교활한 자의 언어는 늘
현란하고 멋지고 향기롭다지?
그러니까 머리만 큰 짐승이 뱉어낼
달변과 혀를 조심하도록
그건 대개 사람 잡는 덫이 아니면
어디서 슬쩍 해온 장물이므로
저런! 그새 또 걸려들었군
오죽잖은 날개로 겁 없이 설치더니
그물에 걸려 바둥대는 날벌레
거봐, 내가 뭐랬어?
거미는 죽은 건 먹지 않는다니까
그렇다, 詩想도 역시
산 걸로 낚아야 제 맛이 난다
잡는 즉시 단단히 포박한 채
고문하듯 비틀고 뒤집고 까봐야 안다
실컷 두들겨 혐의가 풀린 다음
꼭꼭 씹어 먹어야 좋은 실이 풀리듯
오늘도 나는 그물을 짠다
빈방에 홀로 웅크린 거미처럼
은빛 투명한 그리움 풀어
막막한 허공에 그물을 친다
온 하루 날파리를 기다리다 지치면
내가 친 그물에 매달려
대롱대롱 그네나 타고, 때로는
가장 팽팽한 현을 골라
차이꼬프스끼의 [비창]을 탄주한다.
거울
임영조
거울 앞에 서 본다
아무런 죄도 없이
불시에 당하는 검문
은폐된 자존심도 들킨다
(제발 나 좀 외면해 다오
괜히 허튼 수작 마,
너는 이미 체포된 용의자야!)
그가 들이대는 물증은
언제나 유효하고 너무 선명해
차마 내보이기 거북한
마지막 치부까지 자백한 이상
나는 무죄다
나는 무죄다
아무리 결백을 주장하고 버텨도
그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다
두 눈에 쌍심지를 밝히듯
좀더 자세히 보면
그의 면상(面像)에도 어느 새
뿌연 간섭(干涉)이 서려 있었다
(거 봐, 심증만 있고
물증 없는 판결은 무효라니까)
차라리 무기형을 선고해 다오
나는 지금
아무런 죄도 없이 유배된
한 마리 서러운 짐승
묵은 때를 벗기며 울고 싶구나
고분고분 휘어진 뼈도 가리고
겨울나무
임영조
이젠 더 벗을 것이 없어요.
바람이, 그 환장할 바람이
날마다 정신없이 흔드는 대로
모두 다 벗어 준 알몸인걸요.
날로 높아만 가는 하늘 우러러
선생님, 저요! 저요! 손을 들어도
대답조차 꽁꽁 얼어버린 마을
너무 춥고 긴 겨울이라
무서운 생각이 자주 들어요.
우리들 고향 사월(四月)은
정말 어디쯤 오고 있나요?
겨울 만다라
임영조
대한 지나 입춘날
오던 눈 멎고 바람 추운 날
빨간 장화 신은 비둘기 한 마리가
눈 위에 총총총 발자국을 찍는다
세상 온통 한 장의 수의에 덮여
이승이 흡사 저승 같은 날
압정 같은 부리로 키보드 치듯
언 땅을 쿡쿡 쪼아 햇볕을 파종한다
사방이 일순 다냥하게 부풀어
내 가슴속 빈터가 확 넓어지고
먼 마을 풍매화꽃 벙그는 소리
들린다, 참았던 슬픔 터지는 소리
하얀 운판을 쪼아 또박또박 시 쓰듯
한끼의 양식을 찾는 비둘기
하루를 헤집다 공친 발만 시리다
아니다, 잠시 소요하듯 지상에 내려
요기도 안 될 시 몇 줄만 남기면 되는
오, 눈물겨운 노역의 작은 평화여
저 정경 넘기면 과연 공일까?
혼신을 다해 사바를 노크하는
겨울 만다라!
겨울 산행
임영조
눈 오다 그친 일요일
흰 방석 깔고 좌선하는 산山
아무리 불러도 내려오지 않으니
몸소 찾아갈 수밖에 딴 도리(道理) 없다
가까이 오를수록,
산(山)은 그곳에 없다,
다만 소요하는 은자(隱者)의 처소로 남아
오랜 침묵으로 품(品)을 세울 뿐
어깨는 좁고 엉덩이만 큰 보살
도량이 워낙 넓고 깊으니
나무들은 제멋대로 뿌리를 박고
별의별 짐승까지 다 받아주는
이승의 마지막 대자대비여!
뽀드득
뽀뜨득 잔설을 밟고
숨가쁘게 비탈길을 오르면
귀가 맑게 트이는 법열(法悅)이여!
잡목들이 받쳐든 푸른 하늘에
간간 수묵(水墨)을 치는 구름
눈짐 진 노송(老松)이 문득
잘 마른 화두(話頭) 하나 던지듯
옜다! 솔방울을 떨군다
덤불 속에 멧새들이 화들짝 놀라
재잘재잘 산경(山經)을 잃는 소리
은유인지 풍자인지 아니면 해학인지
들어도 모를 난해시 같다
(좌우간 정상에 있을 때
몸조심하고,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더욱 조심하도록)
귀뺨을 때리는 눈보라여!
단지 헝클어진 마음이나 빗으러
겨울산을 오르는 나는
리얼리스트인가?
로맨티스트인가?
그것이 알고 싶어 산에 오른다.
고도(孤島)를 위하여
임영조
면벽 100일!
이제 알겠다, 내가 벽임을
들어올 문 없으니
나갈 문도 없는 벽
기대지 마라!
누구나 돌아서면 등이 벽이니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마음속 집도 절도 버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귀양 떠나듯
그 섬에 닿고 싶다
간 사람이 없으니
올 사람도 없는 섬
뜬구름 밀고 가는 바람이
혹시나 제 이름 부를까 싶어
가슴 늘 두근대는 절해고도(絶海孤島)여!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가서 동서남북 십리허에
해골 표지 그려진 금표비(禁標碑) 꽂고
한 십 년 나를 씻어 말리고 싶다
옷 벗고 마음 벗고
다시 한 십 년
볕으로 소금으로 절이고 나면
나도 사람 냄새 싹 가신 등신(等神)
눈으로 말하고
귀로 웃는 달마(達磨)가 될까?
그 뒤 어느 해일 높은 밤
슬쩍 체위(體位) 바꾸듯 그 섬 내쫓고
내가 대신 엎드려 용서를 빌고 나면
나도 세상과 먼 절벽 섬 될까?
한평생 모로 서서
웃음 참 묘하게 짓는 마애불(磨崖佛) 같은
고등어
임영조
등짝에 해조음 문신 알록달록한
간고등어 한 마리가 점잖게
가스 레인지 그릴 속에 누워 있다
불꽃이 온몸을 지글지글 구워도
오늘 같은 다비를 기다렸다는 듯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대로 누워 있다
평생을 무슨 공부로 수신했길래
시뻘건 연옥에서도 고등어는
열반에 들 듯 태연할 수 있을까
파란만장 난바다를 헤쳐온 생이 못내
서럽고 억울할 텐데, 육신을 어찌
저토록 마음 편히 보시할 수 있을까
뻣뻣한 몸이 똑 서슬 퍼런 칼 같다
이판사판! 너 아니면 나 죽기식
피비린내 파다한 복수를 꿈꾸는 칼?
죽어서도 몸가짐 의젓한 고등어가
설마 누구를 찌를 마음을 먹었으랴
그렇게 본 내 마음이 멋쩍다
다 익은 살을 곧 뜯어 먹을 나보다
등급이 몇 수쯤 위라는 생각
그래서 이름까지 고등어(高等魚)?
고백
임영조
저 지난가을 어느 날
야생의 너와 만나던 순간
나는 대뜸 첫눈에 반했다
휘는 듯 곧고 푸른 절개와
새침한 듯 서늘한 자태가 좋아
내 마음속 빈터에 너를 심었다
허나 너는 삼동 내내 언 가슴 닫고
말을 일절 삼가고 침묵하더니
연둣빛 유두 하나 내놓고 또다시 침묵
내 깊은 심처(心處)에 그리움만 키웠다
그리움도 터지면 꽃이 되는가?
별러 온 사랑 오늘사 고백하듯
혼신으로 피워내는 명명한 절창
청향 진한 몸내로 세상을 여는
오, 이름 없는 춘란꽃이여!
(나는 너무 쉽게 시를 써왔다)
그래 너는 얼마나 아프냐?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게
얼마나 쓸쓸하고 서러운 축복이냐?
나는 당장 네 꽃술 속에 들어가
남은 생을 수펄처럼 잉잉잉
내가 대신 아프고 싶다
네 슬픔 골라 읽는 애독자처럼.
과수원
임영조
유월 햇빛 뜨거운 과수원에는
상견례를 막 끝낸 풋내기들이
평화로운 집회를 열고 있다
이따금 푸른 잎 뒤로
은폐된 주먹을 불쑥불쑥 내밀며
풋내나는 구호를 외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돌팔매를 겨누고 있다
그래 던져라,던져!
보호색 깔고 안주하다가
너무 딱딱해진 고정관념은
가차없이 깨뜨려야 돼
간밤에는 비바람 심하게 불고
그때 타락한 녀석들은
머리통이 깨어진 체 버려져
부질없이 썩어가는 급진주의자
(익기전에 떨어진 건
과일이 아니다)
지나보면 알리라
앞날이 아직 창창한 자는
한여름 햇빛과 천둥 번개 속에서
얼마나 부대끼고 견뎌야
비로소 단물이 드는가를
지난해 이상난동 때문에
올농사는 병충해가 극심할 거라고
과수원 주인은 지레 걱정하면서
농약을 독하게 살포하고 있었다.
과천 뻐꾹새
임영조
뻐꾹 뻐꾹 뻑뻐꾹
원래 살던 주인들은 어디 갔나요.
맷새들 울음 따라 진달래 붉고
복숭아꽃 살구꽃 흐드러진 마을에
맑게 씻은 가난과 평화를 심던
노래의 임자는 어디 갔나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게
꼭꼭 숨어버린 술래들
이젠 경작할 땅도 없이
낯선 새만 날아와 둥지를 틀고.
서쪽 하늘 일각엔 대낮에도
그믐달이 비수처럼 꽂혀 있고
그 서술에 놀란 뻐꾹새만
청계산 숲속에서 자지러져요.
아, 나도 날아가고 싶어요.
먼동이 트기 전에
차고 시린 새벽 이슬을 털고
나도 멀리 날아가 숨고 싶어요.
뻐꾹 뻐꾹 뻑뻐국
원래 살던 주인들은 어디 갔나요.
권태를 위하여
임영조
살다 보면 문득
나를 잊고 싶을 때가 있다
급행열차 선반에 얹어놓고
꾸벅꾸벅 졸며 가다가
그만 깜박 잊고 내리듯
나를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떤 날은 또
나를 살살 유인해
어느 으슥한 술집으로 끌고가
진탕 술이나 먹이면서
주정하듯 함부로 지껄이는 불평과
입 밖에 낸 적 없던 저주까지도
곰곰 새겨듣고 싶을 때가 있다
말이 말을 구속하거나
재떨이 같은 세상에
꽃씨 부리듯 시를 쓰고 있음을
자각할 때는.
그네
임영조
어디서 명퇴한 중년일까
아파트단지 어린이 놀이터에서
반백의 사내가 아침을 민다
서너 살 손주 놈을 그네 위에 앉히고
줄을 꼭 잡아라! 놓치지 마라!
거듭 당부하면서 힘껏 밀어올린다
와아, 둥근 해가 솟는다 아이가 뜬다
허공 가득 퍼지는 해맑은 웃음소리
나뭇잎들 팔랑팔랑 손뼉을 친다
땅을 박차고 하늘 높이 올라라
올라가서 세상을 내려다보라
검버섯 핀 손등으로 그네를 미는
저 반백의 사내는 지금,
놓쳐버린 꿈 흘리고 온 세월을 미는 것일까
남은 생을 밀어내는 것일까
생이란 무릇 그네 타기 같은 것
아무리 밀어도 밀어 올려도 그네는
다시 제자리로 내려올 것이다
정상으로 밀어 올린 욕망은 곧
땅으로 굴러 내릴 바윗돌인데
계속 잔머리를 굴리는 시쉬포스들
날마다 제 한 몸 밀어 올리려
아찔한 그넷줄 잡고 용쓰던 퇴역
오늘은 등뼈가 흰 반맥으로 돌아와
어린이 놀이터 그네를 민다
밀 때마다 손주는 멀리 떠나고
허허로운 배경으로 남는다
그는 지금
임영조
그는 지금 죽어 가고 있었다. 그의 아내와 함께 자식들도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돈 되는 일이라면 악착같이 매달려 치부도 하고 내노라 명예도
얻어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던 사람, 그래서 낯 세울 일이라면
목숨보다 중하게 여겨온 사람.
요즘은 그가 변했다. 평생 남을 돕거나 남의 불행을 덜어 준 적 없이 오직 앞만 보고 걸어온 그가 요즘은 참 이상해졌다
얼굴에 거믓거믓 저승꽃 피고 주름살 날로 깊어지면서 거지를 만나면 적선도 하고, 죽은 친구 부인의 월부책도 사주고, 불우이웃돕기에 성금도 냈다.
타고난 건강이 곧 재산이라고 아직도 굳게 믿으며 날마다 바쁘게 뛰는 그는 분명 죽어 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아니 자신도 모르게 시시각각 시들고 있는 그의 죽음을 보노라면 참 딱하다는 생각뿐,
나 역시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두렵지도 않았다.
그대에게 가는 길
임영조
1
내 하던 말 마감하면
그대에게 가리라
영화 속을 빠져나온 주인공처럼
영욕과 슬픔과 대사(臺詞)도 버리고
그대 중심으로 들어가 쉬리
89년식 르망 몰고 소백산 넘어
부석사 들려 소조여래와 눈 잠깐 맞추고
풍기 봉화 영양 스쳐 길을 계속 당기면
나 홀로 세 들다 뜨고 싶은 곳
갯마을의 고요가 나를 당기네
침엽수들 냇물에 그림자 씻는
불영계곡 백여 리 길 돌고 돌아
그대 찾아가는 길 내내
뙤약볕에 목 타는 하루를 건너
저물녘 내가 당도한 곳은
그대 자궁 속같이 아늑하고 감감한
오, 아름다운 환멸이었네.
2
경부 고속도로 달리다 천안서 들어
저녁놀 쓰고 청양으로 들어가
속살 참 매끈하고 흰 하현과 동침
열에 들떠 흥분한 칠갑산 한 자락
슬그머니 끌어 덮다 화상을 입고
뭉그러진 시행(詩行)처럼 마음을 절며
그대에게 가던 길은 너무 멀었네
장곡사 뒤란 감나무 우듬지 끝에
환하게 내건 시( ) 하나
애틋한 화두처럼 호롱불처럼
농익은 시(詩)한 편 읽다 내려오는 길
문득 만져본 내 머리통은 참 딱딱하였네
설익은 땡감처럼 옹고집처럼.
3
성주산 물소리에 새벽잠 털고
여관을 빠져나와 혼자 걸었네
난생 처음인데 꼭 와본 것 같은 길
걷다가 너무 뜻밖에 만난
전생에 만났다가 헤어진 여자 같은
씨방을 막 날려버린 민들레와 걸었네
귀 시린 시냇물이 졸랑졸랑 따라나서고
나승개꽃 광대마물꽃 오이풀꽃들
자운영꽃 만개한 논두렁의 염소와
누렁개와 장닭과 푸른 숲이 예사로
나를 받아주는 곳, 내년쯤 수롬된다는
기막힌 사연에 왈칵, 목이 메는 길
이 다음 그대와 묵다 슬몃 눈 감고 싶은
걷다 보면 물소리에 젖은 길 헝클어져서
가던 길을 아주 잊고 싶은 곳
모처럼 찌든 귀 씻고 눈 씻고
온작 생각까지 헹구는 새벽 산책길
이 길 다 가고 나면 어디로?
그대에게 가는 길은 미로 같아서
가끔씩 몸은 두고 마음만 가네.
4
그대를 죽어라 사랑하고 싶은데
가장 절실한 말을 몰라 허둥대던 날
글 쓰고 책 읽기도 시큰둥한 날
무작정 차 몰고 서해로 갔네
해 뜨고 진눈깨비 내리는 진창길
그대 만날까 싶어 차를 몰았네
인륜도 아니고 불륜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고 치정도 아닌
내 마음이 발 뻗는 외로움의 끝
그 적막한 뒤란 어딘가에는 필경
그대에게 가는 길 열릴까 싶어
마음과 몸이 함께 달렸네
썰물 다음 드러난 대부도 뻘밭
그 허망한 치부 어딘가에서도 혹시
착한 새끼 게 몇쯤 만날까 싶은 날
난바다를 달려온 물너울들이
내게 무슨 말하려 달려들다가 저런!
방파제에 온몸을 찧고 물러서는
물러섰다 또 덤벼드는 눈 시린 투신
물 맑은 치정을 보네.
5
가다 보면 길들은 자구 끊기네
끊어진 길은 때로 아련한 기억 속
메꽃빛 등불로 사운대거나
벼랑 끝에 이르면 언어로 집을 짓네
먼 마을 스치는 구름의 기척에도
마음 벽 쩍쩍 금이 가는 집
온 채가 제 무게로 기우뚱거려도
모든 길은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네
가파른 삶은 때로 길을 비뚤게 하고
고행은 서역처럼 멀고도 쓸쓸하나
더러는 가슴 아린 열락을 덤으로 얻네
이녘은 조용한데 밤낮 치대는 파도
그 소리 좀 엿듣다가 오던 길 놓고
한결 순해진 귀로 그대에게 가는 길
아직도 위험한 불씨를 감춘
그대 뜨거운 언어의 중심으로 들어가
나 화려하게 자폭하리라, 그 후는
바다에 더 출렁이는 그리움 되리
오래된 시집처럼 헤어진, 그래서
눈길보다 추억이 먼저 닿는 섬
허나 제부도는 늘
물때를 알고 가야 길을 내주네.
6
그대에게 가는 길을 묻지 않는다
지금 내 생각 내 몸을 끌고
홀로 걷는 이 길이 나의 길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첫 눈길 같은
그 깨끗한 여백 위에 시 쓰듯
밤낮 온몸으로 긴 자국
이 세상 모든 길은 자기가 낸 업보다
내가 언제 어느 길을 택하든
내 그림자가 한평생을 동행하리라
외롬나무 한 주가 내 뒤를 따르고
내 발자국에 음각되는 불립문자가
구천까지 언제쯤 당도할까
스스로도 묻지 않고 나선 길인데
어느덧 앞길이 뉘엿뉘엿 저문다
물 위를 달리는 배도 정박하려면
진창에 닻을 박아야 한다, 허나
생의 닻은 때때로 제 발등도 찍는다
잠시 마음의 돛 내리고 방파제에 올라
저린 발 주무르며 쉬려니 멀리
줄포 앞바다가 허연 혓바닥을 낼름거린다
저 바다 한 페이지를 넘기면 과연
깊고 푸른 중심으로 드는 길이 보일까
해도, 나 함부로 따라가지 않는다.
7
섭씨 삼십사 도 팔 분
불쾌지수 팔십오 프로
누가 십오 프로만 건드리면
금세 펑! 요절낼 찜통더위다
이른 저녁 먹고 내복 몇 벌 챙겨 넣고
무작정 강남 고속터미널로 나간다
두 시간을 기다려 10시 10분발
광주행 우등 고속버스를 탄다
무념무상 비몽사몽 흔들거리며
어둠을 밀고 가는 꽃상여 한 패로 떠
캄캄한 바다를 고속으로 달린다
앞만 보고 달려온 내 생도 새삼
가파르고 아찔한 커브길이 많았다
새벽 두 시, 광주 공용터미널에 내리니
불시에 유배된 듯 도시 온통 낯설다
온천표지 네온등 붉게 색 쓰는 여관
낡은 에어컨 소리 퀴퀴한 방에
혼자 누워 잠을 청한다, 언뜻
잠결에 누가 와서 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 가는 길이냐?
내가 왔던 중심으로 돌아가는 길
아직은 밤이라 일러줘도 모를테니
내일 날 밝거든 답하마!
8 – 1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석탑을 머리에 인 네 마리 사자
앞에서 본 두 마리는 입 크게 벌려 웃고
뒤에서 본 두 마리는 이 악물고 낑낑거린다
너무 딱해 대신 거들어주고 싶은
저 상반된 노역이 내 마음을 붙든다
즐거운 자와 괴로운 자의 명암은
화엄의 세상에도 존재한다고 몸소
시범을 보여주는 불당 앞 네 사자
저 위치를 슬쩍 돌려놓으면
이 세상 음양도 일순 딴판으로 바뀔까?
내내 웃던 놈들은 울상이 되고
인상 쓰며 불평하던 놈들은 낄낄 웃을까?
8 – 2
어느 집 앞에서 본 명문(銘文)이었나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허나 나는 극우도 아니고 극좌도 아닌
남이 보면 우습고 내가 보면 엄숙한
사잇길을 혼자서 걸어왔을 뿐이다
남에게 손가락질 받는 자는 대개
우는 자 뒤에서 함부로 웃은 죄였다
사자 네 놈 중 한 놈이 더는 못하겟다고
반야봉 숲속으로 어슬렁 사라진다면
탑은 와르르 당도 절도 깨질 것
깨진 탑 뒤에서 웃는 자도 있을 것
염려 마시라! 저 모순의 천년 노역이
온 산의 자비를 더 넉넉케 하고
매미 소리 마냥 푸르게 하고
물소리도 제멋대로 흐르게 하니
8-3
생을 길게 보려는 욕망이 탑을 세운다
표정 각자 다르고 생각 달라도
너무 높아 무겁고 불안한 탑은
합동으로 온전히 해당하는 네 사자
절대로 내려놓거나 흔들지 않고
천년 넘게 떠받드는 저 합종(合從)
이 세상 중심을 본다
임제는 말한다
"사자가 한번 울부짖으면
여우의 머리통이 빠개지도다"
9
운주사행 첫 버스를 타고
한 개 속 길 없는 길 달린다
능주 지나 도곡 들녘 참깨 밭 머리
호박꽃 장관 환한 들긴 달리니
마음 온통 저절로 부유해진다
바람이 다림질한 푸른 도암 들
담배밭이 질펀하게 뒤따라온다
끊었던 담배 다시 피운 듯
생각이 자꾸만 메슥거리고
가는 길이 갑자기 구부러진다
나의 도착이 늦은 것일까
구름이 주인인 운주사
구름은 모두 어디로 외출하고
천불천탑이 천년 고요를 지키고 있다
이제 막 뱃머리를 하늘로 대고
닻을 올리려는 구름배 한 척
구름배에 무슨 임자 있을까 싶어
운주사(雲舟寺) 끌고 그만 하산하는데
이런! 바다를 저어갈 노가 없다니!
나 아직 세상에 그리운 사람 있어
가장 슬픈 사원 하나 짓고 싶은데
말을 종종 엎질러 갈 길을 지우다니!
운주사 처마 끝 풍경이 뒤통수친다
네가 곧 사원이다 뎅그렁!
네가 곧 주인이다 뎅그렁!
내려와도 연신 뒤통수 친다
10 – 조양강을 지나며
42번 국도 타고 평창 막 지나
정선읍 못 미쳐 우회전하면
조양강이 길 하나 느리게 끌고 가지
시멘트로 포장하다 말다 한, 흡사
낡은 댕기같이 끊어질 듯 이어진
길 가노라면 마음 절로 느슨해지지
강 건너 아찔한 절벽들 각각
겸제풍 산수화가 생생한 병풍바위들
밤꽃 냄새 질탕한 산허리 돌면
도라지꽃 천궁향에 다시 취해서
아무데나 털썩 몸 부려놓고
발 뻗고 마냥 쉬고 싶은 곳
곤고한 생의 허리띠 풀고
혼절하듯 깜박 졸다 뜨고 싶은 곳
보라 꽃등 환한 감자밭 머리 어느 숲속
뻐꾹새 피울음에 오다가 익는데
아무도 없다! 문득 적요하고 외로워
거기 누구 없어요? 속으로 외쳐본다
산그늘에 늘린 인가 몇 채가
시큰둥 바라보다 도로 엎드려 졸 뿐
가도 가도 인적조차 뜸한 길
강물은 가수리 지나 운치리쯤에서
내내 옆구리에 끼고 오던 길 놓고
저 혼자 영월로 흘러가고
나는 이제 어디로 가나?
나 혼자 슬몃 당겨보는 길
너무 멀다, 그대여!
11 – 힘에 대하여
가파르고 먼 길 저쪽은 왜
늘 궁금하고 애틋한 그리움일까
그리움도 굴리면 짐이 되는지
저단 기어로 길길길 추풍령 넘자
멀리 잔설 쓴 황악산이 우향우!
산그늘 길게 늘여 거수례한다
왠지 황송해 눈길 돌리니
볕 바른 포도밭이 모로 누워 맞는다
민숭한 포도나무들이 좌우로 정렬
전지당한 팔 뻗어 서로 당겨보려는
저 아픈 혈연의 팽팽한 조짐
힘이 보인다!
내 핏줄이 땡긴다!
절망은 때로 생을 완성하는가
벼락 맞고 쓰러진 고목의 가지에서
홀연 새 움이 돋고 마침내
꽃을 피워 올리는 생생한 말씀
그 부신 옹고집이 힘이다!
생각을 굴리면서, 하행선 타고
달린다, 김천 구미 지나 대구서 틀어
현풍 창녕 지나 봄으로 간다
나 아직 이승에 잔정이 많아
더 큰 외로움을 사러 가는 길
남녘 끝 바닷가에 따로 핀
동백꽃 보러 가는 길
마음이 지레 후근거린다
잔정도 키우면 짐이 될까?
아니면 힘이 될까?
12 – 남해 금산
길의 끝 남해 금산에 오른다
나사못 같은 숲길을 가쁘게 돌아
정상까지 오르면 땀에 전 시간이
몸에 척척 감기고 해는 벌써 반나절
봉수대에 올라 그만 오던 길을 놓는다
그대는 물론 나도 깜빡 잊는다
저 멀리 내색 감춘 난바다가
억겁의 파도 소리 거칠게 말아
아제아제 바라아제 추켜올린 산
온 산이 햇볕 받아 섬섬하고 푸르다
혼자 높고 별나서 심심했던지
볕바른 이마 위엔 보리암이 앉히고
앞바다엔 크고 작은 섬을 뿌렸다
그중 제일 쓸쓸해 뵈는 섬 하나
내게 오기를 은근히 기다리다 못해
내가 먼저 달려가 섬이 되어 떠돈다
비로소 세상과 멀어졌다는 안도감
이젠 보리암이 어디냐고 묻지 않는다
잠시 오던 길을 지우고 무위에 드니
그대에게 가는 길도 묻지 않는다
아득한 북녘 향해 안녕! 안녕!
마음속 봉화 들고 내려오는데
내 머리 위를 맴도는 까마귀 일가
검은 상장처럼 무겁게 난다, 혹여
오래전에 오염된 고향을 버리고 뜬
그 일가가 아니냐고 넌짓 묻는다
까흑! 까흑! 까흐흑......
갑자기 남해대교가 크게 출렁거린다.
13 - 고압선
오늘도 그대에게 가리라
가장 뜨겁고 위험한 욕정으로
팽팽하게 내뻗는 그리움으로
감쪽같이 단숨에 달려가리라
산 넘고 물 건너 인가를 피해
외진 숲 능선을 질러 바람소리 거슬러
고압적인 사랑으로 질주하리라
해 저문 거리에서 뉘엿뉘엿 돌아와
고단한 무게로 꺼져 가는 그대여
화끈한 통정을 꿈꾸듯 나는 노상
눈부신 반역을 도모해왔다
혁명은 늘 쓸쓸하고 두려운 암행
몸은 두고 안 보이는 파워만
발정 난 무소처럼 그대에게 가리니
아무도 막지 마라! 손대지 마라!
지금 그대에게 가는 이 길은
돌아올 수 없는 일방통행이니
어디쯤에 이르면 막힌다는 어림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생각도 하지 않겠다
속울음 감춘 마른 번개로
겁도 없이 내닫는 나의 사랑은
그대와 혼절하는 감전사
황홀한 꽃불로 소멸하는 것이다
어둠 속에 갇힌 그대 생을 온전히
천하에 드러내는 일이다
저무는 세상에 외등 하나 내걸 듯.
14 – 태안 마애삼존불
태안읍 병풍 백화산에 오르면
마애삼존 불상이 반갑게 맞아줘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진다
아담한 키에 두 손 얌전히 모은
볼우물 예쁜 보살을 가운데 두고
우람한 체구의 두 부처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떠억 버티고 서 있는
표정 참 알 듯 모를 듯 삼각관계다
보살은 아마 인근 고을에서 가장 심성이 착하고 얼굴 예쁜 처녀였겠지 두 부처는 용모가 걸출한 총각 동갑내기 절친한 친구 사이였겠지 한 총각은 핸섬하고 노래 잘하고 한 총각은 머리 좋고 투망 잘하는 둘 다 볼수록 매력적인 신랑감인데 두 총각은 내심 그녀를 사랑했는데 우정을 핑계로 기회만 엿보았겠지 그녀도 둘 다 좋아 번갈아 만나면서 누구를 고를까 고민고민하다가 어느 달 밝은 밤 가위 바위 보로 이기는 신랑감을 택하기로 하고 두 총각을 백화산 마루로 불러냈겠지 두 총각은 막상 무엇을 낼까 숙고를 거듭하다 그만 날 새고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세월이 흘러 두 총각은 손동작 야릇한 부처가 되고 처녀는 샌드위치 보살이 된 모양인데 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두 부처는 무엇을 낼까 골똘히 생각하고 보살은 행복하고 난처한 모양인데
연포 앞바다 노을 젖는 물소리에
두 부처 잠시 넋 놓고 깜빡 졸 때쯤
저 작고 눈웃음 착한 보살만
슬그머니 빼돌려 옆자리 태우고
부르릉! 줄행랑을 쳐버려?
삼각이 사각 관계로 안정된다면
나도 행여 부처가 될까?
15 – 즐거운 유배
15 - 1
시도 안 되고 책읽기도 따분해
어디론가 나 홀로 유배가고 싶은 날
생각의 실마리가 길 하나를 잡는다
오늘 운세는 동쪽이 길하다 하였으나
나의 길은 대개 가쁘고 험난했으니
좌우지간 서쪽 향해 시동을 건다
오래 전에 등을 돌린 첫사랑, 못내
뒷소식이 궁금해 수소문하듯
묻고 또 물어 안면도를 찾는다
15 - 2
비봉에서 진입한 서해안 고속도로
포크레인에 잘려나간 산허리마다
아직 덜 아문 상처로 날흙내 붉다
시멘트 포장길 내내 툴툴거리는
차창 밖 풍경이 쉰 나물처럼 으깨져
속이 자주 메슥거리는 길, 내처
뻗다 말고 남양만 포승에서 그만 끝
충청도 가는 길은 왜 공사조차 굼뜬가?
15 - 3
잠시 38번 국도 타다 안중서 틀어
다시 39번 국도를 타면 곧 대형 물거울
아산호를 까맣게 덮어씌운 철새떼, 흡사
광활한 자갈밭 갈아 생각이 자주 덜컹거린다
방조제 좌우로 단물과 짠물이 여야로 놀고
지금 막 놀던 물을 박차고 날아가는
저 알록달록한 철새 이름이 뭐더라?
15 - 4
밀레의 그림 속 풍경처럼 평온한
공세리 성당 끼고 우회전하면 잠시 후
삽교천 방조제가 팽팽한 줄자처럼 떠 있고
그 길 다 가고 나서 만나는 길이라야
서산식 발음처럼 느슨하고 정겹다
차창을 내린다 바람도 달다
15 - 5
여말에 공민왕을 업고 까불던
요승이 전횡을 간했다가 도리어
괘씸죄 쓰고 남포 앞 죽도로 귀양간
나의 이십대 선조 향(珦)이란 분도 혹
이 길을 장죽에 감발하고 걸어갔을까?
왕조가 바뀌어 다시 불러도 가지 않고
왜 산골로 숨어들어 농사짓고 글이나 읽는
고집 센 서생으로 궁하게 살았을까?
오늘은 내가 그 길을 간다
누가 불러도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듯
나 홀로 떠나는 즐거운 유배!
16 – 안면도 사랑
이별은 때로 사랑을 완성하는가
황해 먼 바다로 고기잡이 갔다가
풍랑에 배 뒤집혀 익사했다던
그 젊은 어부가 살아왔는가
두고 온 사람 하나 너무 그리워
억겁을 헤엄쳐 오다오다 지쳐서 그만
태안 발치에 머리 두고 잠들었는가
우화등선 꿈꾸는 봄누에처럼
참았던 속엣말을 모두 풀어서
갸름하게 고치 틀고 기다리는 섬
파도소리 자장자장 다독거려도
잠 깊이 못 들고 뒤척이는 섬
영목 선창에 고깃배들 찰찰찰
날마다 헤딩하며 밀어올려도 이젠
뭍으로 가지 않는 안면도
이별도 때로는 사랑을 완성한다.
17 – 바람아래 해수욕장*
아무도 없이 고요만 눈부시다
추근대던 파도소리 멀리 내쫓고
흐벅진 누드로 길게 누운 해안선
하얗게 쓸린 둔부가 에로틱하다
방금 뒷산을 빗질하던 솜씨로
슬슬 모래톱을 더듬는 솔바람소리
건건하고 눅눅한 페로몬 내 진하다
저 건너 마주 뜬 장고섬이 취한 듯
어깨를 들먹들먹 장고를 치자
갈매기 몇 점이 수평선 감고 간다
나는 지금 바람 아래 해변에
내 몫의 외로움을 엎질러놓고
익명의 그림자와 함께 걷는다
허파 속 탱탱하던 바람도 빼고
걷다 보면 나도 한낱 모래가 된다
덧없는 멀미로 마모된 모래알
이런, 길을 잘못 들었나?
갑자기 신발 속 모래알이 발바닥을 찌른다
무작정 가지 말고 잠시 쉬라고?
안식 뒤에 걷는 몸이 더 가볍다고?
모래꽃 법문 하나 새로 깨친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세상이 도대체 내 맘 같지 않은 날
무인지경 바람 아래 해변에 와서
바람 없이 넋 놓고 어슬렁거려 본다
또 무슨 몸짓으로 살아야 하나
어디서 날아온 바다오리 한 마리
여봐란 듯 갯물에 머리 처박고
열심히 발을 굴린다, 어느새 나도
마음속 물갈퀴를 흔들기 시작
그대에게 가는 길도 보이기 시작!
* 바람아래 해수욕장 : 안면도 고남면 장곡리 서쪽에 위치한 해변
그 섬에 가면
임영조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
사람들 더러 아는 척해도
실은 가는 길도 모르고
무엇이 있는지는 더욱 모르는
외딴섬 하나를 나는 안다
햇볕과 바람 유독 넉넉하고 정갈한
그 섬에 가면 홀로 된 여자가
몇 뙈기의 외롬꽃을 가꾸며 산다
온 하루 김을 매고 속된 꿈 솎고
저물면 밤하늘에 총총한 별이 되는 섬 여자
나는 몰래 그녀를 사랑한다
가을볕 붉게 타는 수수밭 지나
고운 소금 뿌린 듯 메밀꽃 하얀
고샅길 질러 바다로 가노라면
꽃게처럼 웅크린 인가 몇 채 졸 뿐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다, 무시로
참새 떼 소리 왁자한 탱자울 넘어
날아든 꿀벌들의 입맞춤이 진한지
참깨꽃 은방울이 섬 온 채를 흔든다.
그늘 깊은 뒷산 잡목숲에는
탁목조 한 마리가 산해경(山海經) 읽듯
괭나무 찍는 소리로 하루해가 저물고
노을 젖은 은박지로 구겨진 바다
물빛 풍금 소리 은은한 그 섬에 가면
나 혼자 엿듣는 방언이 있다
감쪽같이 나누는 사랑이 있다
아련하게 니스칠한 추억이 있다
세상과 먼 그 섬에 가면
그 자리
임영조
저 높은 산들을 올려다보며
그 자리가 좋기는 좋은가 보네
천만년 터억 버티고 좌정한 걸 보면
그 자리가 좋기는 좋은가 보네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불근 솟아서
이따금 아래를 내려다보며 여봐라!
발밑에 사는 자는 우러러보게 하고
슬하에는 별의별 중생 다 거느리고
마을 멀리 보시하듯 시냇물도 보내네
도무지 내려올 줄 모르고
스스로를 떠받드는 걸 보면
그 자리가 좋기는 좋은가 보네
서울의 남산과 마주 보는 관악산
인왕과 어깨 겨룬 북악산도
만년세세 요지부동 그대로 높고
그 아래 명당 청기와집까지도
그 자리가 좋기는 좋은가 보네
서로 들어가려고 시끄러운 걸 보면
내 자리가 왠지 불안하네
높은 산을 문득 올려다보면.
꽃을 위하여
임영조
꽃이여,
오늘 아침 비로소 터진
네 초경의 선홍빛 아픔을
내게 들킨 꽃이여,
오히려 내가 더 무색하구나.
아무리 숨겨도 숨길 수 없는
최초의 그 부끄러운 경험을
나 혼자 황홀히 기억하고 있음을
꽃이여, 부디 용서해다오.
나는 지금 불순하게도
너의 가장 솔직한 고백
속 깊은 내력의 은어까지도
감히 사랑하고 싶구나.
나도풍란
임영조
남녘 끝 섬마을서 시집와
육 년 남짓 애를 갖지 못하고
죄인처럼 살아온 우리 형수가
오늘은 <나도> 하고 말문을 텄다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
참았던 슬픔 모두 다 터져
하얀 분냄새로 웃는 형수여
그 웃음 깊은 속 누가 또 알리
대관절 가슴에 서린 한이
얼마나 크고 사무쳤길래
푸르고 질긴 잎에 예서체(隸書體)로 숨겼다가
오뉴월 눈시린 서릿발로 치는가
(참고 기다린 자 복이 있나니)
아픔도 터지면 꽃이 되는가
오랜 산고(産苦)를 비로소 풀듯
코끝 아려오는 향긋한 몸내로
세상과 눈인사를 트는 꽃이여,
나는 듣는다
우리가 밀쳐둔 기억 밖에서
절망처럼 죄어드는 세월을 감고
슬픈 씨를 수태한 여인의 개화(開花)
그 서럽고 빛 부신 이야기를 듣는다.
나무는 죽어서도 나무다
임영조
누가 저 논두렁에 박힌 말뚝을
죽은 나무라고 단정할 수 있으랴
누군가의 완력으로 처박힌 뿌리를
그 무슨 비유로 정의할 수 있으랴
잔가지 다 치고 군살도 빼고
꼿꼿한 근성만 땅에 박고 서 있는
저 나무의 생사(生死)를 왈가왈부
조서를 꾸미기엔 아직 이르다
산에서 징발된 나무로 보면
일개 이름 없는 볼모가 되지만
산에서 출가한 나무로 보면
으스러진 머리에 하늘을 이고
알몸으로 버티는 순교가 된다
--번뇌와 보리는 본시 하나라
미혹하면 번뇌요 깨달으면 보리다
말뚝 안의 네 협잡은 로맨스고
말뚝 밖의 내 이념은 치정이라고?
말뚝의 저쪽은 인민공화국이고
말뚝의 이쪽은 대한민국이라고?
날마다 말뚝에 매인 염소는
제 목줄로 잰 땅이 감옥이리라
저 말뚝도 한때는 이웃과 함께
눈부신 햇살로 나이테를 불리고
푸른 바람소리로 산을 키웠으리라
이젠 죄없이 유배된 땅에 박혀
앙상한 통뼈로 모진 세월 견디는
말뚝을 보면 갱유(坑儒)가 생각난다
육탈로 맞선 환한 옹고집
당당하게 벌받는 생이 보인다
나무는 죽어서도 나무다.
나의 다비(茶毘)는
임영조
이 다음 나 세상 뜨고 나면
깨끗이 태워 화장하려면
생나무 장작불론 타지 않으리
그 동안 나는 너무 오래
조마조마 속 태우고 살아서
잘 마른 장작불로 태워야 하리
옹기 굽는 화력으론 안되고
안면도 야산 송림 한 채 다 태울
소나무 장작불로 태워야 하리
원하건대, 나의 다비는
건성으로 부르는 찬송가 사절
목탁만 멍이 드는 독경도 사절
내 생의 옹이마저 온전히 태워
비로소 완성되는 존재의 가벼움
내 안의 기억까지 가루가 되는.
나의 방
임영조
나의 방에는 거울이 없소
고작 내 거죽이나 비춰볼 뿐인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 있는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
왼손잡이> 거울은 내게 필요없소
이상한 것을 보면 나도 이상해질까 싶어
이상의 시도 별로 읽지 않는 편이오
모처럼 <이 시 어떻소?>하면,건성으로
<좋네요>로 끝내는 거울도 두지 않소
아무리 딱딱하던 관념도 말랑말랑해지는
나의 방은 내가 나를 가장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명부전이오
남들이 못 보는 내 속까지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방주요
나는 날마다 이 남루한 배에
이승의 마지막 업(業)을 싣고
난바다 중심으로 항해중이오
누에가 제 명(命)을 줄여가며 집 짓듯
뼈를 깎고 뇌수를 짜서 언젠가
스스로 순장될 고치를 틀고 있소
지금 막 딱딱한 내 심방을 관통하는
1950년대산 기차 소리 뜨겁소.
낙엽(落葉)
임영조
네 이름은 정작
자리가 바뀌면서 비롯되었다.
드디어 술렁이는 가지 끝
하릴없이 밀려난 유형객(流刑客) 모양
이제 상좌(上座)도 잃고
몰골은 잔주름만 소슬하거니.
꿈결에 짐짓 엽서(葉書)를 받듯
바람 함께 날아온 너로 하여금
지난 계절 안부를 듣는다.
마지막 쥐어 본 어머님 손이
오늘 다시 믄득 그리워짐은
나 역시 고향을 떠나온 때문.
남은 해를 목판(木板)에 싣고 가는
엿장수 가위 속에서
가을은 쩔그렁 쩔그렁
한 닢씩 동강 나고 있었다.
낙타 풀
임영조
이 세상 어디를 가든
땡볕 피할 그늘 하나 없는 곳
가도 가도 목타는 곳이 사막이다
발 뼏고 쉴 곳 없는 사막에서
이따금 내가 만난 풀들은 왜
표정조차 뻣세고 가시 많은 것일까
무시로 경을 치는 모래바람 속
몸 둘 바를 몰라 쩔쩔매는 선인장
믿을 것은 그래도 자신밖에 없다고
온몸에 가시 바늘 세우고 산다
뿌리까지 흔들리는 멀미 속에서
중심 잡고 악착같이 살아야지
남에게 함부로 씹히지 말아야지
무게를 덜고 오기로만 버티는
낙타 풀은 몸이 온통 가시다
바람에 벼린 서슬 푸른 적의다
사막에서 내가 만난 풀들은 대개
뽀족하고 의심이 많다, 나도 가끔
가시 돋친 말을 뱉는 낙타 풀이다
내가 뱉은 가시에 내가 찔리는.
난값이 파값보다
임영조
난값이 파값보다
같은 풀이면서
난값이 파값보다
더 비싼 것은
남에게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난을 보며
임영조
난을 보면 나도
난처럼 살고 싶다
사시사철 푸르고 정직하게
난처럼 살고 싶다
가진 것은 본래 가난뿐
며칠 걸러 한 번씩
냉수만 먹고도 지조는 늘
서슬 푸른 양날로 꼿꼿이 선다
어쩌다 바람이 불면
휘어질 듯 꺾일 듯 금세 일어나
폭력 앞에 날을 세운 당당함이여,
한겨울 추위에도
곁불을 쬐지 않는 고고함이여,
순백의 관(冠)을 쓴 기쁨조차
큰소리로 웃지 않는 너를 보고 있으면
날마다 밥 세 끼를 먹고도
무한정 휘어지며 살아온 내가
진실로 부끄러워 할 말이 없다
낮달
임영조
한사리 때 만나서
조금 때 떠난 여자
오늘 낮 우연히 길 가다 본다
그토록 간절히 용서를 빌어도
단하하게 등지고 떠난 여자
아직도 사무치는 원한이
서슬 푸른 비수를 겨누고 있다
-여보 그만 돌아와줘
-아이들이 애타게 기다려
-제발 집으로 돌아와줘
아무리 애원을 거듭해도
곡해를 풀지 않고 떠도는
오, 슬픈 부메랑
어느새 날카로운 손톱이
서녘 하늘 한 자락
낭자한 선혈로 적시고 있다
궁지에 몰린 자의
냉혹한 복수
오늘 낮 우연히 길가다 본다.
너는 나와 다르다
임영조
분명히 말해두지만
너는 나와 다르다
탐욕의 수사학에 능한 거미여,
너는 어둡고 외진 곳에 그물을 치지만
나는 내 목구멍에 거미줄 치고 산다
너는 죽은 척 숨어서 먹이를 노리지만
나는 홀로 빈 방에 스스로 갇혀
사무치는 그리움만 파먹고 산다
달변의 항문으로 끈적끈적 갈겨 쓴
현란하고 음흉한 글줄, 다시 보면
틈 많고 내용 뻔한 밑씻개를 내걸고
너는 모기나 날파리를 유혹하지만
나는 외롭고 고된 여생을 풀어
순장될 허무의 집 한 칸 짓기 위해
필생의 무늬를 짜 허공에 건다
남이 보면 하찮고 내가 보면 지극한
그래서 거듭 말해두지만
나는 너와 다르다.
너무 멀리 와 있네
임영조
어딘가에 떨어뜨린 단추처럼
어딘가에 깜박 놓고 온 우산처럼
도무지 기억이 먼 유실물 하나
찾지 못해 몸보다 마음 바쁜 날
우연히 노들나루 지나다 보네
다잡아도 놓치는 게 세월이라고
절레절레 연둣빛 바람 터는 봄 버들
그 머리채 끌고 가는 강물을 보네
저 도도하게 흐르는 푸른 물살도
갈수록 느는 것 삶에 지친 겹주름
볕에 보면 물비늘로 반짝이는 책
낙장 없이 펼쳐지는 대장경(大藏經)이네
어느 한 대목만 읽어도 아하!
내 생의 유실물이 모두 보이고
어영부영 지나온 산과 들이 보이네
내 마음속 빈터에 몰래 심어둔
홀씨 하나 싹트는지 궁금한 봄날
거룻배 노 저어가 찾고 싶은 날
오던 길 새삼 뒤돌아보면 이런!
나는 너무 멀리 와 있네.
넥타이
임영조
이른 아침 거울을 보며
스스로 목을 맨 올가미가
온종일 나를 끌고 다닌다
서투른 근엄을 위장해 주고
더러는 나를 비굴하게 만들고
갖가지 자유를 결박하는 끈
도데체 누굴까?
이 견고한 줄로
내 목을 거뜬히 옭아 쥔 者는...
답답해라,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온 이후
나는 아무런 줄도 잡지 못하고
불안한 도시 안개 속을 헤매는 羊
제발 정신 좀 차려야지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하면서
뒤틀린 넥타이를 고쳐 매지만
나는 다시 고분고분 길들여진다
낯선 시간 속으로
바쁘게 끌려가는 서러운 노예처럼.
녹차(綠茶)를 끓이며
임영조
삼복 염천 열탕에
비쩍 마른 지체들이
훌렁 벗고 들어앉아 속끓이더니
마침내 스멀스멀 온몸을 푼다
바로 이땔까 싶게
淨한 마음 기울여
녹차를 따르면 금새
청화잔에 두둥실 만월이 뜬다
먼 산이 우러니듯
비릿한 웃음이 고여
잔 가득 달무리가 번진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런 날은 부디
가슴속 빗장을 풀고 오라
그늘을 지우듯 루즈도 지우고
뜨겁고 진한 그리움이 아니면
목마른 눈빛 하나로 오라.
눈
임영조
간밤에 눈이 내렸다
모드들 세상 잊고 잠이 든 사이
게엄을 선포하듯 눈이 내렸다
천황폐하 만세!
맹목의 가미가제식으로
하얀 복면의 인해전술로
겁없이 뛰어내린 자살특공대
그들은 온 마을을 덮치고
천지를 장악한 채 길을 막았다
함부로 날뛰지 마!
다시는 일으나지 마!
허공을 가르는 채찍소리로
사방을 난폭하게 매도하였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패자
그의 군림은 왜
저토록 위대하고 눈이 부실까?
늙은 제설차 한대가
절갈처럼 엉금엉금 기어와
눈덩이를 힘껏 밀어내지만
정작 밀어낸 것은
꽁꽁 얼어죽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모르고 있으리
저 추운 압제 밑에선 지금
새로운 부활을 꿈꾸는 자의
은밀한 역모가 감행되고 있음을.
눈 오는 날에
임영조
눈이 내린다
분분하게 떠도는 소문처럼
차고 흰 포고령이 내린다
이 겨울 어수선한 지상을 보며
하늘은 계속 미간을 찌푸린 채
마침내 결단을 내리듯
헐벗고 추은 산과 들을 덮는다
이미 잘 못 산 생애와
스스로 절망한 자는
과거를 표백하듯 망각하라고
그 다음 다시 시작하라고
이 세상 모든 흉허물을 지운다
날을 세운 바람은
무시로 눈사태를 몰고 와
키가 큰 것들만 사납게 난타한다
함부로 날뛰지 말고
침묵하라! 근신하라!
채찍 소리 날리며 몰아세운다
이제 완전한 백지 상태
하얀 고요가 장악한 나라
너무 넓어 눈 시린 여백 위에
맨 먼저 무슨 말을 써야 할까
도무지 엄두가 안 나거든
그 자리에 선 채로 백치나 되자
눈먼 사랑으로 뭉쳐진
눈사람처럼.
느티나무 타불
임영조
곡우 지나 입하로 가는 동구 밖
오백 년을 넘겨 산 느티나무가
아직도 풍채 참 우람하시다
새로 펴는 양산처럼 녹록(綠綠)하시다
이제 막 어디로 나설 참인지
하늘로 빗어 올린 푸른 머리칼
무쓰를 바른 듯 나붓나붓 윤나는
싱그러운 주책이 정정하시다
그런데 이런! 다시 보니
꺼뭇한 앙가슴이 동굴처럼 허하다
얼마나 오래 속태우며 살았는지
정말 마음 비운 노익장이다
배알까지 빼주고 지은 절 한 칸
스스로 空이 되는 적멸궁이다
적 늙은 느티나무는 아마
어느 날 느닷없이 날벼락 맞고
문득 깨쳤으리라 몸을 비웠으리라
중심을 잡기 위해 무게를 덜고
부질없는 노욕을 버렸으리라
속 비우고 여생을 지탱하는 힘
마지막 안간힘이 곧 나무아미타불
이승에서 이름을 완성하는 것이리
이제는 저승의 명부에도 빠졌을
저 늙은 느티나무는 이다음
죽어서도 느티나무 타불(陀佛)이 되리.
늦가을 문답
임영조
그동안 참 열심히들 살았다
나무들은 마지막 패를 던지듯
벌겋게 상기된 이파리를 떨군다
한평생 머리채를 휘둘리던 풀잎도
가을볕에 색 바랜 몸을 뉘고 편하다
억척스레 살아온 저마다의 무게를
땅 위에 반납하는 가벼움이다
가벼워진 자만이 업을 완성하리라
허나, 깨끗하게 늙기가 말처럼 쉬운가
아하! 무릎 칠 때는 이미 늦가을
억새꽃이 절레절레 제 생을 부정하듯
서릿발 쓴체머리로 돌아갈 때다
잎 다 진 청미래 덤불 가시에 찢긴
저녁 해가 선혈이 낭자하게 저문다
잡목숲 질러 식은 조각달 물고 가는
저 부리 길고 식은 조각달 물고 가는
저 부리 길고 뾰족한 홀아비 새는
거느리는 식솔이 몇이나 될까
내 빈 속이 문득 궤양처럼 쓰리다
어서 그만 내려가자, 더 늦기 전에
가랑잎같이 따뜻하게 잘 마른
어느 노시인의 손이라도 잡아볼까나
나는 아직 선뜻 내놓을 게 없어서
죄송죄송 서둘러 하산하는데 어!
싸리나무 회초리가 어깨를 후려친다
짐스런 생각마저 털고 가라고?
산에 와 깨치는 늦가을 문답.
달맞이꽃
임영조
어스럼 저녁 퇴근길
피곤처럼 땅거미가 내리고
그때 밤의 요정이 문득
내 옆으로 다가와 추근거렸다
___아저씨, 저랑 놀다 가요, 네?
스물 안팎치고는
자태가 너무 야한 꽃
그녀의 눈먼 욕정 앞에서
차라리 나는 성난 짐승이고 싶었다
____아니,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그만 마침점 찍고 돌아서자
멋쩍은 듯 노랗게 웃던
오면서도 못내 눈에 밟히던
비밀이 많은 여인
그 무슨 말 못할 사연(邪戀)으로
밤에만 피었다가 아침에 지는
오, 기구한 낭자(娘子)
달맞이꽃이여.
대책 없는 봄
임영조
무엇이나 오래 들면 무겁겠지요
앞뜰의 목련이 애써 켜든 연등을
간밤에 죄다 땅바닥에 던졌더군요
고작 사나흘 들고도 지루했던지
파업하듯 일제히 손을 털었더군요
막상 손 털고 나니 심심했던지
가늘고 긴 팔을 높이 뻗어서 저런!
하느님의 괴춤을 냅다 잡아챕니다
파랗게 질려 난처하신 하느님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지만
마을 온통 웃음소리 낭자합니다
들불 같은 소문까지 세상에 번져
바야흐로 낯뜨거운 시절입니다
누구 짓일까, 거명해서 무엇하지만
맨 처음 발설한 건 매화년이고
진달래 복숭아꽃 살구꽃이 덩달아
희희낙낙 나불댄 게 아니겠어요
싹수 노란 민들레가 망보는 뒤꼍
자꾸만 수상쩍어 가보니 이런!
겁 없이 멋대로 발랑 까진 십대들
냉이 꽃다지 제비꽃이 환하더군요
몰래 꼬나문 담배불처럼
참 발칙하고 앙증맞은 시절입니다
나로서는 대책 없는 봄날입니다
도꼬마리씨 하나
임영조
멀고 긴 산행길
어느덧 해도 저물어
이젠 그만 돌아와 하루를 턴다
아찔한 벼랑을 지나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
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억센 가시손 하나
나의 남루한 바지가랑이
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
도꼬마리씨 하나
왜 하필 내게 붙어왔을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예까지 따라온 여자 같은
어디에 그만 안녕 떼어놓지 못하고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아내여. 내친 김에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
할부금 갚듯 정 주고 사는 거지 뭐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동백꽃 패설
임영조
법당 앞 돌계단 사이에 두고
어린 동백 두 그루 마주 서 있다
새파란 잎들이 공양 받은 햇살을
키질하듯 살랑살랑 까분다, 금세
분분한 소문 같은 금빛 가루 부시다
그 무슨 법문을 주고받길래
온통 벌게진 낯으로 키들거릴까
얼마나 솔깃하고 귓맛이 나면
노란 목젖까지 다 보이도록
꽃술을 활짝 열고 자지러질까
용맹 정진하라, 땡그렁!
아니면 파계하라, 땡그렁!
부연 끝 풍경이 수시로 경을 쳐도
동백꽃은 한사코 입 다물 줄 모른다
참 농후하고 불경스러운 수작을
불당에서 내내 내려다보는
부처님도 손들고 조용하시다
저 철없이 고운 사미들 돌연
옷 벗고 정말 파계하면 어쩌나
절 버리고 혹 내게 오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고 가슴 설레는
볼수록 낯 뜨겁고 황홀한
동백꽃 패설.
동행가(同行歌)
임영조
하늘 아래 내려와
처음 만난 길동무
어디서 또 만나기 쉬운가.
아내여, 우리는 지금
이 세상 한 모서리에
우리의 꽃을 심고 돌아가는 길
그 길을 걷는 동안은
바람 속에 씻어낸 깊은 약속이
일제히 발아하는 동안은
햇빛은 좀 넉넉하면 좋겠지.
행복의 빛깔은 몰라도 되고
피차간 꿈 애기는 하지 않기로.
그저 그렇고 그런 일만 제하면
눈여겨볼 만한 것 또 없는 세상
아하, 사람들은 그래서
애초에 오던 길을 되짚어가고
다시는 아니 오는가
자고 새면 저승길은 대문 밖
아내여, 우리는 늘
소풍 가는 기분으로 떠날 일이다.
따뜻한 등짐
임영조
백담사 출발 수렴동 계곡 지나
대청봉 턱 밑 봉정암 못미처
가파른 암벽길 오르다 보니 아연
갈 길도 오던 길도 간 곳이 없다
금세 굴러 내릴 듯 바윗돌 총총
가로막혀 숨차고 몸이 후들거린다
가야 할 길보다 걸어온 길이 멀어
그만 돌아갈 수도 없는 외통길이다
이젠 한 마리 짐승처럼 네 발로
아찔한 암벽을 기어오른다, 문득
등에 진 배낭이 성가시고 무겁다
미련 없이 당장 버리고 싶다, 허나
오르막길 등짐은 정분이 난 악처다
돌부리에 걸려 몸이 휘청할 때도
찰싹 붙여 균형을 잡아주는 짐이다
오래 지면 누구나 짐이 된다고
자식들 몰래 집을 나간 노모처럼
짐은 때로 혹이 된다 배후가 된다
이 산등성이 하나 오르는데도
애물 같은 등짐이 내 중심을 잡다니
내 무게를 받아주는 악처 같은 빽
나도 짐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짐이면서 빽이 되는 따뜻한 등짐.
리모콘
임영조
저격을 꿈꾼다
가장 편한 자세로
앉거나 서서 또는 누워서
증오의 화상을 처치하는 꿈
귀신도 곡할 범죄를 꿈꾼다
잠시 숨을 멈추고
긴장을 풀고
일격필살을 노리는
복수의 버튼만 살짝 누르면
세상은 전혀 딴판으로 바뀌고
놈은 쥐도 새도 모르게
눈앞에서 썩 사라지겠지
외마디 비명은커녕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행적은 묘연한 채
별의병 소문만 분분 하겠지
물증은 없고 심증만 가는
이 시대의 테러리스트
언제나 깨어 있는 눈으로
완전무결한 단죄를 꿈꾼다.
만년필
임영조
우리들의 글쟁이 P씨는
눈도 없고 입도 없다
귀도 없고 코도 없이
오직 촉 하나로 버틴다
깨어 있는 혼과 함께
또박또박 심지(心志)를 박아가듯
하얀 벌판을 내닫는 고행(苦行)
그의 하혈(下血)은 푸르거나 검었다
글을 쓰는 자세는 늘
엄숙하고 삐딱해
더러는 좀 건방져 보이지만
지체는 본래 고매한 서생(書生)
교활한 자의 은폐된 혀를 보면
서슬 푸른 캉이 되어 빛난다
조심해! 우리는 요즘
이미 뱉어버린 말보다
혀끝에 숨은 말이 두렵다
화려한 번개 뒤에
내려치는 벼락처럼
절망을 희망과 바꾸기 위해
어둠을 파내다가 지친 밤
문득 수혈을 기다리는
이 시대의 고독한 서생(書生)
P씨의 혈액형은
O형일까? AB형일까?
아니면 Rh마이너스?
만파식적(萬波息笛)
임영조
단군 기원 4333 용의 해
동해 먼 바다 용 한 마리가
뜨겁게 붉은 여의주를 밀어올려
새 천년 새해가 밝아옵니다
온누리에 공평한 날빛이 터져
하늘과 땅이 제 자리를 잡습니다
두근대는 바다는 헌 책장을 넘기듯
온갖 시름 지우고 새로 시작하라고
수천 수만 공책을 희게 펼쳐줍니다
저마다 해묵은 입성을 벗고
남은 생의 여백엔 무슨 색을 칠할까
가슴 벅찬 기대로 설레는 아침
동해의 용왕이시여, 원하건대
새해에는 신령한 피리 하나 주시라
석가도 예수도 공자도 맹자도
어느 제왕 어느 권력 어느 우상도
한 세기를 못 넘기고 갔으나
두 세기나 살다 갈 덤 같은 목숨
이제는 하늘이 두려운 줄 알고
귀가 한결 순해지는 내게도 부디
천년을 숨겨둔 그 피리 하나 주시라
이 세상 악귀 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 지면 날이 개며
미친 바람 성난 파도 잠재운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나도 불게 하시라
내 어울한 음치로 혼신을 다해
필생의 한 곡만 불다 가게 하시라
해와 달이 화답하는 만만파파 피리 소리
그 소리에 나도 놀라 무릎을 치며
이승 떠도 전혀 섭섭지 않게.
매미 껍질
임영조
늦가을 탱자나무 가지에
해탈하듯 허물을 벗어 걸고
어디론가 잠적한 은자
그가 남긴 구각을 들여다보면
비로소 햇빛 본 유고집 같다
지난여름 내내
한 소절의 시를 위하여
쓰디쓴 동음어만 반복하다 간
음유시인의 애절한 영가
아직도 맴맴 귓바퀴를 돌린다
한평생 집 한칸 없이
세속을 멀리하고 숲 속에 숨어
바람과 이슬만 먹고 산 그는
필생의 마지막 절창을 뽑기 위해
온몸을 쥐어짜며 시를 읊었다
(치뤌 파뤌 치뤌 파뤌
배부르고 편하면 시가 안 된다?)
그리하여 이 가을 홀연
장정이 투명하고 광나는
시집 한 권 남기고 갔다
아무도 모르게 열반에 들 듯.
매미 소리
임영조
감나무 가지 매미가 악쓰면
벚나무 그늘 매미도 악쓴다.
그 무슨 열 받을 일이 많은지
낮에도 울고 밤에도 운다.
조용히들 내 소리나 들어라
매음매음… 씨이이… 십팔십팔
저 데뷔작 한 편이 대표작일까
경으로 읽자니 날라리로 읽히고
노래로 음역하면 상스럽게 들린다.
매미 소리고(考)
임영조
아그배나무 가지 매미가 우니
포플러나무 그늘 매미도 운다
저마다 덥다 덥다 외롭다 운다
감나무 가지 매미가 악쓰면
벚나무 그늘 매미도 악쓴다
그 무슨 열 받을 일이 많은지
낮에도 울고 밤에도 운다
조용히 내 소리나 들어라
매음매음...... 씨이이......십팔십팔 ......
저 데뷔작 한 편이 대표작일까
경으로 읽자니 날라리로 읽히고
노래로 음역하면 상스럽게 들린다
선생(蟬生), 단에서 그만 내려오시죠
듣거나 말거나 믿거나 말거나
저 혼자 심각해서 우는 곡비들
찜통 속 부아만 쩔쩔 끓인다
저토록 제 가슴 다 끓이고 나야
물엿처럼 졸아드는 말복 끝머리
허물 벗고 슬며시 잠적하는 것일까
오늘도 시집을 세 권이나 받았다
나도 짐짓 열 받은 매미가 되어
이열치열...... 한여름 난다.
멀어서 아름다운 것
임영조
어릴 적 우리 집 마루에서 멀리 마주 보이던 청룡산 정상에서 해질녘 부시게 되쏘던 광채를 본 나는 문득 그게 혹 보석이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석, 그것만 있으면 당장 부자가 될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누가 먼저 주워갈까 싶어서 이튿날 혼자 서둘러 산으로 올라갔다 허나 그곳엔 거친 바위와 돌멩이들뿐, 빛을 낼 만한 것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한나절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드디어 내가 찾아낸 것은 고작 볼품없이 깨어진 거울 조각이었다
중학교적 스승 신동엽 선생은 나에게 시의 길을 갈 것을 권하셨다 나는 시가 무엇인지 잘 몰랐으나 시인이란 참 멋진 직업이라 여겼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대단한 벼슬이라 여겼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부터 시를 읽고 습작하면서 시인이 되리라 다짐했다 대학에 가서도 시를 읽고 쓰면서 오늘까지 삼십 년 넘게 매달려보나 가까운 듯 멀고도 어려운 게 시였다 그리고 시인이란 벼슬이 아닌 한낱 머리만 짓누르는 닭볏임을 알았다
어렵고 먼 것이 더 아름다운 것일까? 어느덧 오십 년이 흐른 지금도 꺼지지 않고 내 기억을 부시게 되쏘는 광채, 그게 분명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었을 거라고 믿고 있듯, 내 눈이 여려 그것을 찾지 못한 거라고 못내 후회하고 아쉬워하듯, 나는 아직도 시인이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뿔, 무슨 큰 벼슬이라 여기고 있다 누가 보면 딱하고 멍청한 사랑, 허나 너무 어렵고 멀어 오히려 아름다운 짝사랑 같은.
모과(木瓜)나무
임영조
모과나무 곁에 서면
나 정말 환장하겠네.
지난봄 햇빛 풀려 좋은 날
감나무 밤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쥐똥나무 개똥나무 오리나무랑
너나없이 잠을 털며 분주하던 날
파릇파릇 다가와 말문을 트더니
어느새 담홍빛 함성으로 일어나
게으른 나의 죄를 성토하더니
그 무덥고 긴 여름날엔 또
내 꿈의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제법 근사한 이야기만 채우는가 싶더니
그리하여 높고 푸른 하늘 밑
우리가 함께 사는 순리를
새삼 깨닫고, 진실로 기뻐했더니
모두들 가꾼 대로 거두는 이 가을에
남세스런 몰골로 내게 오다니
나 정말 환장하겠네.
그래도 다시 모과나무 곁에 서면
세상 사는 법 새로 하나 배우네.
목련
임영조
슬픔이 터진다
헐벗고 추운 뜨락에서
내내 벌서던 침묵의 가지마다
하얀 옹알이가 터진다
아직도 얼음살 박힌
그 얼얼한 생인손이
찰칵찰칵 셔터를 누르면
순백의 플래시가 터지고, 이내
컬러로 인화되는 언어들
얼굴이 유독 희고 볼우물 예쁜
소학교 적 처녀 선생님같이
낭랑한 목소리로 출석을 부르면
네! 네! 손 들며 화답하는 아이들
개나리 진달래 복숭아꽃 살구꽃
민들레 씀바귀 제비꽃……
잊었던 망자를 일일이 호명하는
저 고고하고 빛 부신 초혼(招魂)이 있어
뜨거운 사랑의 입김이 있어
세상은 또 이렇듯 환해지고
눈 뜨고 사는 일이 아름다운가?
목수의 노래
임영조
다시 톱질을 한다.
언젠가 잘려나간 손마디
그 아픈 순간의 기억(記憶)을 잊고
나는 다시 톱질을 한다.
일상의 고단한 동작(動作)에서도
이빨을 번뜩이며, 나의 톱은 정확해.
허약한 시대의 급소(急所)를 찌르며
당당히 전진하고 살아오는 자(者).
햇살은 아직 구름깃에 갇혀 있고
차고 흰 소문(所聞)처럼 눈이 오는 날
나는 먼지 낀 창가에 서서
원목(原木)의 마른 내력(來歷)을 켜고
갖가지의 실책(失策)을 다듬고 있다.
자네는 아는가,
대낮에도 허물어진 목수(木手)들의 날림 탑(塔).
그때 우리들 피부 위를 적시던
뜨거운 모정의 긴긴 탄식을,
그러나 도처에 숨어 사는 기교(技巧)는
날마다 허기진 대팻날에 깎여서
설익은 요령(要領)들만 빤질빤질 하거든.
밖에는 지금
집집이 제 무게로 꺼져가는 밤,
한밤내 눈은 내리고
드디어 찬 방석에 물러 앉은 산(山)
내 꿈의 거대한 산(山)이
흰 무덤에 얼굴을 파묻고 운다.
죽은 목수(木手)의 기침소리 들리는
깊은 잠의 숲속을 지나,
나는 몇 개의 차디찬 예감(豫感),
새로 얻은 몸살로 새벽잠을 설치고
문득 고쳐 잡는 톱날에
동상(凍傷)의 하루는 잘려 나간다.
잘려 나간 시간의 아픈 빛살이
집합하는 주소(住所)에 내 목이 뜬다.
온갖 바람의 멀미 속에서
나의 뼈는 견고한 백철(白鐵)이고
머리카락 올올이 성에가 희다.
저마다 손발이 짧아
나누는 눈인사에 눈을 찔리며
바쁘게 드나드는 이 겨울,
또 어디에선가
목수(木手)들은 자르고 있다.
관절(關節) 마디마디 서걱이는 겨울을
모색(摸索)의 손끝에 쥐어지는
가장 신선한 꿈의 골격(骨格)을
나도 함께 자르고 있다.
언젠가 잘려 나간 손마디
그 아픈 순간의 기억(記憶)을 잊고
나는 다시 톱질을 한다.
무지개
임영조
1
소나기 떼 쓸고 간 동녘 하늘 끝
매봉산 형제가 줄넘기를 한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일골 빛 색실로 꼰 동아줄 잡고
내 마음도 들썩들썩 따라 넘는다
줄을 돌려 산 너머 산 너머 가면
그 옛날 몰래 가슴만 두근대다
놓쳐버린 절반의 첫사랑이 있을까
일곱 빛 레이스로 열린 하늘 문
저 두렵고 환한 돔으로 들어가면
에덴동산 마루엔 고해소가 보일까
푸른 망토 두른 사제라도 만나면
내 당장 무릎을 꿇으리라, 아직도
까닭 없이 설레는 무지갯빛 사랑을
신의 나라로 망명을 꿈꿔온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사면을 받으리라
하늘로만 솟다가 지친 그리움
땅에 박고 휘영청 활처럼 휘어
팽팽하게 당기는 칠현금 소리
빨 주 노 초 파 남 보
함부로 손타거나 넘보지 말라고
천지간에 쳐놓은 화사한 금(禁)줄이다
매봉산 형제가 친 쌍끌이 그물이다.
2
전생에 이루지 못한 사랑
이승에서 다시 만나 맺자고
서로 나눈 반쪽 가락지
오늘 홀연 서산 위에 떠 있네
사랑의 증표 아직 녹슬지 않고
일곱 빛깔 섬섬히 눈이 부신데
볼수록 내 가슴 마냥 뛰는데
그대는 어찌 안 보이는가?
그 동안 나는 한 점 뜬구름으로
마을에서 산으로 들고 강으로
그대 찾아 섬도 가고 절에도 갔네
오늘도 매봉에 혼자 올라 야호!
앞산이 무너져라 불러도 감감
그대는 지금 어디에 숨어 있나?
말 못할 그 무슨 속사정 있길래
둘이 나눈 무지개표 가락지
그 반쪽 사랑이 이제야 보여주나?
저무는 하늘가에 슬며시 내건
저 눈 아리게 빛 부신 파혼(破婚)
문장대에 오르다
임영조
1. 하산(下山)
정말 세상과 멀어 속리산(俗離山)일까?
내심 뇌까리던 미혹이 일주문 통과하며
뚝 끊어진다, 여기가 도량이요 땡그랑!
게송처럼 낭랑한 풍경소리가
머뭇대는 내 행색을 쥐고 흔든다
마음은 솔깃하여 경내로 드니
몸은 슬쩍 곁길로 빼 내처 걷는다
등산로 아래 눈 시린 호수 하나
길게 누워 하늘 받는 산색시 같아
나도 옷 벗고 첨벙! 범하고 싶다
속리(俗離)는 그래서 멀다는 걸까?
2. 산중(山中)
참나무며 장송들 우쭐우쭐 차일 친
오솔길 따라 동행하는 물소리
서늘한 귀엣말에 마음 온통 젖는다
세심정(洗心亭) 지나 탈골암(脫骨庵)에 이르니 아연,
짙푸른 성욕처럼 숲 그늘 깊어
사방이 어둑하여 가던 길을 놓친다
내 생은 노상 그 지경에서
저 칡넝쿨처럼 스스로 얽혀 맴돌다
온채가 무너지던 기억도 있지
한낯에도 두리뭉실 안개를 피워
본색을 숨기려는 말꼬리를 쫓다가
나도 그만 안개가 되어 눈을 삐기도 했지
3. 산정(山頂)
산정은 대관절 어디쯤일까?
비알진 능선은 오를수록 숨이 차
육신이 마냥 짐스럽고 무겁다
가파르지 않은 생이 어디 있으랴
멈추지 마라, 내내 박수 치며 따라온
물소리는 내려가고 나는 오른다
이윽고 세상과 먼 푸른 적막 속
나 이제 비로소 속리에 들어
말을 모두 버리니 몸이 가볍다
행여 사람을 만날까 봐 두려운
이 요요한 산길 울울한 숲속
어느 행간에 무슨 글월 감추어
문장대라 하는가? 나는 단 한줄의 시에도
내 전생을 걸만큼 치열했던가?
헐레벌떡 정상에 올라 내려다본
저 아래 세상 너무 까마득하여
두고 온 사람 하나 문득 그립다
야—호! 야--호!
물
임영조
무조건 섞이고 싶다
섞여서 흘러가고 싶다
가다가 거대한 산(山)이라도 만나면
감쪽같이 통정하듯 스미고 싶다
더 깊게
더 낮게 흐르고 흘러
그대 잠든 마을을 지나 간혹
맹물같은 여자(女子)라도 만나면
아무런 부담없이 맨살로 섞여
짜디짠 바다에 닿고 싶다
온갖 잡념을 풀고
맛도 색깔도 냄새도 풀고
참 밍밍하게 살아온 牲을 지우고
찝질한 양수 속에 生을 키우듯
외로운 섬하나 키우고 싶다
그후 헷빛 좋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증잘 했다가
문듟 그대 잠깬 마을에
비가 되어 만날까
눈이 되어 만날까
돌아온 탕자의 뒤늦은 속죄
그 쓰라린 참회의 눈물이 될까.
미로찾기
임영조
출구(出口)를 찾는다
한 가닥 희망과 만나기 위해
오늘도 낯선 길을 헤맨다
이 길일까?
저 길일까?
가도 가도 출구는 안 보이고
어느덧 하루해가 저문다
혹시나 이 길일까 싶어서
미궁 속을 조심조심 더듬어가면
눈앞을 가로막는 아찔한 절벽
그 까마득한 정상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먼저 와
흰 수염을 만지며 바둑을 두고 있다
- 인생의 지름길은 없나요?
- 그걸 알면 누구나 시(詩)를 쓰게!
민들레
임영조
혼자서 길을 가다 문득
작년 봄에 헤어진 여자를 본다.
너무 솔직해서 손해만 보는 여자
허우대는 멀쩡한데 속이 빈 여자
오고 가는 발길에 채이고도
늘 웃음이 헤픈 여자를 본다.
머리칼 하얗게 센 나이에도
소싯적 끼는 여전히 살아
실바람 살짝 몸에 감겨도
온몸이 헤롱헤롱 풀어지는 혼
참으로 함께 못 살 여자를 본다.
민들레 산조
임영조
봄 햇볕 부풀어 마냥 부신 날
난분분 뜬소문만 퍼뜨리는 씨방들
세상이 따분해서 못 살겠다고
삼삼오오 패거리로 몰려다니네
하얀 너울 쓰고 우아하게 두둥실
모처럼 촌티 벗고 신분이 뜨네
머리칼 허옇게 센 나이에
건듯 부는 바람에도 온몸이 달뜬
입 가벼운 여자처럼 나불거리네
혼자서는 쓸쓸해서 못 참겠다고
바람잡이 벌 나비와 더불어
해롱해롱 꼬리치며 야유회 가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친목을 도모하고 유대를 강화하자!)
암, 그래야 살지, 헌데 사람들은 왜
돌아오면 저마다 홀씨가 되지?
나는 진작 알고 있다네
저 꽃숭어리 떠난 뒤의 외로움
그 외로움이 사무쳐야 열매를 맺고
그 껍질을 벗겨야 씨가 보이고
그 씨마저 썩혀야 시가 된다고, 그래서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고!
지금 막 꽃턱을 차고 나와
거친 돌부리에 착지한 홀씨 하나
너무 외롭고 두려운지 진저리치네
오호라, 저 환한 몸부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니)
이왕 시작했으니 더 외로워보아라!
민들레 연가
임영조
볼장 다 본 사월도 막가는 하순
나무들 모두 꽃잎 진 상처마다
메롱메롱 푸른 혀를 내밀어
내 하초에도 용용 약 오르는 날
홀연 다시 만난 여자여
노란 파라솔 생글생글 돌리며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까지 찾아온
늦바람난 시골뜨기 꽃이여
아직도 너는 화사하고 젊구나
늘씬한 키에 눈웃음 삼삼하고
간드러진 사투리로 여전하구나
그게 언제였더라?
고향의 동구 밖 고샅길에서
남몰래 가슴 두근 마지막 본 게
나는 인제 네 출신을 묻지 않으마
이번 생만으로도 나는 지쳤다
그리하여 네 깊은 씨방 속
그 아늑한 어둠속에 들어가
간절하고 빛 부신 은유로 남고 싶다
내 가슴속 허허로운 뒤란에
똑 너 닮은 딸 하나 낳아놓고
마실 가듯 이승을 뜨고 싶다
육신을 허물어 중심에 들 듯
하얀 털모자 벗어 흔들며
너와 함께 두둥실 세상 밖으로.
바다
임영조
청비단 이불 위에
날마다 발가벗고 누워서
아득한 하늘만 유혹하다가
시퍼런 욕정을 숨길 수 없어
제풀에 몸이 달아 자지러지듯
이리저리 뒤척이는 그녀를 보면
나도 문득 그 옆에 가 눕고 싶어라.
반딧불
임영조
내 가슴속 어두운 방에
반딧불 하나 키웠으면 좋겠네
낮에는 풀잎 뒤 이슬로 숨었다가
밤이면 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깨우는
가장 절실하게 빛나는 언어가 되는
더러는 꽃이 되는 원죄가 되는
나 눈 뻔히 뜨고도 세상 어두워
지척을 분간하지 못할 때
아차! 발 삐끗 미망 속을 헤맬 때
반짝반짝 나만 아는 신호를 보내는
먼 그리움 같은 반딧불 하나
아무도 모르게 가졌으면 좋겠네
내 영혼의 배터리가 다 닳아
삶이 시큰둥 깜박거릴 때
온몸을 짜릿짜릿 충전해주는
그 은밀한 사랑, 그게 혹
황홀한 고통의 마약일지라도
나는 죄짓듯 기꺼이 음독하겠네
손만 대면 확! 뜨겁게 점등하는
알전구처럼 성감대가 민감한
반딧불 하나 환히 켜졌으면 좋겠다
쓸쓸하고 어두운 나의 빈방에
배롱나무 아래서
임영조
어제 피운 바람꽃 진다
팔월 염천 사르는 농염한 꽃불
밤사이 시들시들 검불게 져도
또 다른 망울에 불을 지핀다
언제쯤 철이 들까? 내내
자잘한 웃음소리 간드러지는
늙은 배롱나무의 선홍빛 음순
날아든 꿀벌을 깊이 품고 뜨겁다
조금 사리 지나고 막달이 차도
좀처럼 下血이 멎지 않는 꽃이다
호시절을 배롱배롱 보낸 멀미로
팔다리 휘도록 늦바람난 꽃이여
생피같이 더운 네 웃음 보시한들
보릿고개 맨발로 넘다가 지친
내 몸이 받은 한 끼 이밥만 하랴
해도, 오랜 기간을 견뎌온 나는
석달 열흘 피고 지는 현란한 수사(修辭)
네 새빨간 거짓말도 다 믿고 싶다
그 쓰린 기억 뒤로 가을이 오고
퍼렇게 침묵하던 벼 이삭은 패리라
처서 지나 한로쯤 찬 이슬 맞고
햇곡도 다 익어 제 무게로 숙일 때
나는 또 한 소식을 기다려보리라
보름 넘어 굶다가 밥상을 받듯
받기 전에 배부른 배롱나무 아래서.
봄 산행
임영조
사람이 그리운 날
사람을 멀리하고 산에 오른다
오르면 오를수록 상승하는 곳
색이 공일까? 공이 색일까?
이 세상 날고 기던 목숨들
종당에는 산으로 가기 마련
그러니까 등산은 사전답사 같은 것?
인파 넘치는 관악산 피해
매봉에 올라 야호! 고함 한번 지르고
다시 청계산 올라 천공(天空)을 받는다
그제서야 법어로 돌아오는 메아리
네가 산이다! 네가 부처다!
떨갈나무 차일 친 오솔길 가노라면
찔레꽃이 하얀 지등을 켜고
자, 여기를 보세요!
때죽나무 꽃초롱 조리개 열고
일제히 터뜨리는 플래시 세례
(우상은 늘 외눈박이 편견들이 세웠다!)
연초록물 번지는 잡목림 사이사이
버짐처럼 허옇게 핀 산벚꽃
색이 넘치면 보는 눈도 가렵다
밤나무가 되려다 만 너도밤나무
아직도 숙제를 못해 왔는지
손 들고 벌 서는 아이처럼 멋쩍다
자꾸만 키들대는 제비꽃 무리
(너희들도 신세대니?)
그러도 보니 어느새 나도
사람 벗은 한 마리 나비였구나
어느 경전 위에 앉아도 두렵지 않은……
뻐꾹새가 불현듯
내 마음 빈터로 날아들어
뻐꾹뻐꾹 뻑뻐꾹 방점을 찍는다
이제 그만 환속하라고?
봄소식
임영조
구름 자락 접히는 삼월
햇빛 속에 바람 속에
가려운 기억들이 새로 터지며
석별한 당신 또 오는가 싶게
낭랑한 목소리로 풀리는 강물,
강 건너 마을엔 시방
복사꽃 환히 웃고 있는지
산그늘 스며든 바위 틈새로
졸졸 겨울이 녹는 기척,
그 소리는 금세 내게로 와서
무어라고 속삭이다 가는지
남으로 낸 창문을 열면
파란 하늘을 이고 오는 산
산이 그린 그림은
노상 은유가 절반이다.
오늘은 또 누가 오는지
하얀 새 조끼를 입고 와 우는
까치의 맵시가 눈부신 아침
바라건대 천주여,
이런 날은
저승에 간 누님과
서러운 재회라도 갖게 하소서.
봄에의 기원
임영조
이 땅에서 비롯된
우리들 슬픔의 씨는 모두
어둠을 뚫고 촉 트게 하소서.
그 촉 트는 소리를
이 세상 누구나 듣게 하시오
아직 추위 속에 갇힌 이도
비로소 목놓아 울게 하소서.
노을녘 벼랑에서 진 해가
아침에 다시 뜨는 환희를,
목소리를 결코 바꾸지 않는
강물의 도도함을 알게 하소서.
한 그루의 나무, 한 올의 바람도
푼수대로 흔들리게 하시고
설혹 잘못 산 생애는
되짚어 고쳐 살게 하소서.
아, 기가 막혀 죽은 친구도
마침내 입을 여는 봄
가장 어두운 속셈까지 읽게 하시고
햇빛은 늘 넉넉하게 내려주소서.
불나비 사랑
임영조
해 저문 양수리 호반가든
저녁놀 쓴 나비부인 대여섯
평상에 앉아 소주잔을 돌린다
얇게 썬 시국과 갖가지의 소문을
석쇠 위에 뒤적뒤적 굽는다
숯불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취기로
색이 진한 입담이 무르익는다
막가는 정치 경제 문학을 씹고
우상을 씹고 치정을 씹다 도로 삼킨다
식욕과 성욕은 왜 아무리 씹어도
덜 익은 고기처럼 질긴 것일까
나도 넛즛 한 마리 나비가 되어
두 귀가 팔랑팔랑 그쪽으로 기운다
추녀 끝에 빛부신 살충등이 설마
나락인 줄 모르고 날아드는 불나비
눈먼 사랑도 더러는 열락이 될까
뉴욕 하늘 찌르던 쌍둥이 빌딩
현란한 불빛이 새 아침 열 때
난데없이 날아든 불나비 두 마리
급소를 향해 일침 놓고 재가 된
살떨리는 경악도 우기면 순교라고?
날마다 한 소절의 득음을 찾아
막막하고 하얀 사막 헤매는 나도
그 어림없이 짝사랑도 어쩌면
부싯돌 사랑 같은 것일까
가슴 속에 숨긴 불씨도 누가 보면
위험한 불나비 사랑일까?
비누
임영조
이 시대의 희한한 성자(聖資)
친수성(親水性) 체질인 그는
성품이 워낙 미끄럽고 쾌활해
누구와도 군말 없이 친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온몸을 풀어 우리 죄를 사하듯
더러운 손을 씻어주었다
밖에서 묻혀오는 온갖 불순을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주었다
그는 성직(聖職)을 잊고 거리로 나와
냄새 나는 주인을 성토하거나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들의 가장 부끄러운 곳
숨겨온 약점을 말없이 닦아줄 뿐
비밀은 결코 발설하지 않았다
살면 살수록 때가 타는 세상에
뒤끝이 깨끗한 소모(消耗)는
언제나 아름답고 아쉽듯
헌신적인 보혈로 生을 마치는
이 시대의 희안한 성자(聖者)
나는 오늘
그에게 안수(按手)를 받듯
손발을 씻고 세수를 하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몸을 씻었다.
사랑법
임영조
어느 여름 개심사 가는 길에 보았다
사랑한다며 죽도록 사랑 한다며
칡넝쿨이 온몸으로 참나무를 감고 도는
그 싱그러운 치정은 참 보기 좋았다
헌데, 동상이몽이라던가
다정도 지나치면 병이라던가
키 큰 나무마다 애무하듯 올라가
끝내줄께! 끝내줄께! 그러면서
서서히 목을 졸라 죽이는
칡넝쿨의 사랑법
친애하는 개미 여러분!
이 왕국은 여러분이 주인이라고
일한 대가는 곧 여러분의 몫이라고
생산을 독려하고 인화를 강조하는
왕개미의 역설은 늘 향기로웠다
개미들은 성은이 망극하다며
평생을 허리 휘게 일하고 세금 잘 냈다
그러나 겨울이면 고통분담하자고
왕국이 위태하니 애국하라고
친애하는 개미들의 목을 자른다
지하도 바닥에서 노숙하는 개미떼
미국에서 건너 왔다는 황소개구리
토종 개구리며 물고기 씨까지 말린다는
그 징그러운 거구의 등을 타고
사랑한다며 급소를 눌러 죽이는
토종 물두꺼비의 건투가 방영되던 날
나는 <향원복집>에서
시원한 복 국물에 쓴 소주를 마시며
아무에게나 한 잔 권하고 싶었다.
사마귀
임영조
햇볕 따가운 시선
머위잎 양산으로 가리고
목하 교미중인 사마귀 한 쌍
화끈한 외설이 눈길을 끈다
두 몸이 죽자사자 부둥켜안고
무아경을 헤매는 합궁(合宮), 아니
세상에 저런 ! 암컷이 수컷을
머리부터 아작아작 씹어먹다니!
얼마나 사랑했으면
온몸을 송두리째 먹고 싶을까?
얼마나 황홀했으면
목숨마저 기꺼이 주고 싶을까?
알다가 모를 엽기적 순애(殉愛)
나도 그런 사랑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열락에 빠져
사람 살려! 외칠 새 없이
마음 주고 몸 주는 마지막 보시(布施)
자살인지 타살인지 도무지
감 잡기 힘든 논픽션 같은 죽음
두 개의 반신(半身)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가 되는 사랑이라면
나도 하나 만났으면 좋겠다
머리에 사마귀 감춘 여자
팔 다리 온통 톱니 세운 여자
말끝마다 오싹 가시 돋친 여자
참 지독한 여자 하나 만나고 싶다
너 정말 임자 만났다는 듯.
사막
임영조
1 – 타클라마칸
태초에 쓴 시는 사막이었다
자잘한 글씨로만 쓴 대서사시
타클라마칸 그 불귀(不歸)의 백지 위에
신이 남긴 불후의 명작이었다
사람은 물론 풀도 나무도 없고
날고 기는 짐승도 지운 여백이었다
다만 빛 부신 태양과 목마른 시간
닮은 듯 서로 다른 상징이 모여
저마다 서걱서걱 빛을 뿜고 있었다
점자를 짚듯 낙타를 타고 가며
마음 자주 추슬러도 뒤똥거리고
눈에서는 모래가 흘러나와 쓰렸다
길이 끝나는 곳은 사막이었다
지평선 멀리 펼쳐진 푸른 호수를
가이드는 신기루라 하였으나
마음은 자꾸 호반으로 달렸다, 가서
모래경 읽는 주민이 되고 싶었다
가장 오랜 독자는 바람이었다
어느 대목엔 결 고운 밑줄을 치고
수 틀리면 뿌옇게 뒤집엎는 과격한
바람도 독자였다, 읽을수록 난해한
너무 방대해서 번역조차 겁나는
신이 마지막 쓴 불멸의 경전이었다
내가 읽은 타클라마칸 사막은.
3 – 낙타의 길
낙타가 가는 길은 늘 사막이었다
삶이란 대개 마른 모래벌판에
터벅터벅 발자국을 찍는 일
뛰어봤자 세상은 또 사막이었다
간혹 가다 얻는 한 무더기 가시풀
그 억세고 질긴 요행을 오래 씹었다
입안에 피가 터져 흥건하도록
반추하는 노역의 쓰라린 세월처럼
맨밥은 참 팍팍하고 지금거렸다
등짐이 무거워도 고개를 들고
평생을 앞만 보고 걸었다, 더러는
무릎이 까지도록 설설 기면서
비단길이 어디냐고 물으면
사막의 하루는 일교차가 심했다
모래바람 뿌옇게 미친 날이면
속눈썹 긴 눈을 자주 끔벅거렸다
봄이 다 가도 황사는 멎지 않고
수상한 풍문만 천지에 분분할 뿐
온다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길 없는 길을 가는 낙타는
등에 진 제 육봉이 무덤이 된다
가도가도 끝 모를 길은 사막길
그 길만이 도(道)라고 굳게 믿는
낙타는 제 무덤을 지고 다닌다
사신(私信)
임영조
밤이 내린다
보이는 것 다 지우고
들리는 것 다 막아서
저마다 홀로 되어 쓸쓸한
밤이 내린다, 애인이여
아직도 잠 못드는 애인이여
이 두려운 어둠 모두 휘저어
블랙커피 마시듯 나눠 마시고
오늘 밤 나와 함께 죽을래?
산나리꽃
임영조
지난 사월 초파일
산사(山寺)에 갔다가 해탈교를 건너며
나는 문득 해탈하고 싶어서
함께 간 여자를 버리고 왔다
그런데 왠지 자꾸만
그 여자가 가엾은 생각이 들어
잠시 돌아다보니 그 여자는 어느새
얼굴에 주근깨 핀 산나리가 되어
고개를 떨군 채 울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또
내가 사는 마을까지 따라와
가장 슬픈 한 마리 새가 되어
밤낮으로 소쩍소쩍
비워둔 내 가슴에 점을 찍었다
아무리 지워도 지울 수 없는
검붉은 문신(文身)처럼 서러운 점을.
새해를 향하여
임영조
다시 받는다
서설처럼 차고 빛부신
희망의 백지 한 장
누구나 공평하게 새로 받는다
이 순백의 반듯한 여백 위에
무엇이든 시작하면 잘 될 것 같아
가슴 설레는 시험지 한 장
절대로 여벌은 없다
나는 또 무엇부터 적을까?
소학교 운동회 날 억지로
스타트 라인에 선 아이처럼
도무지 난감하고 두렵다
이번만은 기필코……
인생에 대하여
행복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몇 번씩 고쳐 쓰는 답안지
그러나 정답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재수인가? 삼수인가?
아니면 영원한 미지수(未知修)인가?
문득 내 나이가 무겁다
창문 밖 늙은 감나무 위엔
새 조끼를 입고 온 까치 한 쌍
까작까작 안부를 묻는다, 내내
소식 없던 친구의 연하장처럼
근하신년! 해피 뉴 이어!
석류
임영조
그 무슨 치욕으로
이 악물고 침묵하던 복서가
이 가을 문득
금빛 주먹 한 방을 날려
천하를 재패하는 순간이다
그 가슴 벅찬 환희에 들떠
비로소 터뜨리는 홍소(哄笑)다
보라,
저 찬란한 파열음 사이
아프게 배어드는 피멍을
오, 상처뿐인 영광을.
석류 부처
임영조
가을 하늘 너무 높고 고요해
머리 숙여 내내 묵념하던 석류가
내심은 따분하고 심심했는지
입이 쩍 찢어지게 하품을 한다
엿보이는 입술 사이로
붉게 물든 치아가 가지런하다
이제 막 스케일링 끝낸 듯
얼얼한 통증이 가을볕에 부시다
아픔도 터지면 빛이 되는가
지난 시절 몰래 입은 상처들
영혼의 가마에 구워 빚은 사리다
비로소 천하에 내보이는 홍보석
최후에 발설하는 눈부신 말씀이다
자, 보라! 스스로 두개골 쪼개
주옥처럼 알알이 빛나는 언어
불씨처럼 잘 여문 시의 향기를
지상에 쏟아놓는 석류 부처여
온몸으로 쓴 시는 상처도 큰가
이 가을이 다 가도 나는
세상에 선뜻 내보일 게 없는데
계를 받듯 삼가 황홀한 불두
또 한 짐의 빚을 얻는다
선운사 동백꽃
임영조
오늘은 내내 소문만 듣던
해마다 벼르다가 미처 못 가본
선운사 동백꽃 보러 나섰습니다
(소문의 저쪽은 왜 늘 그리움인가?)
고속도로 좌우로 비탈진 산허리엔
한물 간 개나리 진달래 산벚꽃 들이
잠 덜 깬 얼굴로 배웅하지만, 대충
목례나 보내며 직행으로 달렸습니다
(환상은 왜 실제보다 더 화려한가?)
낯선 풍경을 차창으로 으깨며
김제 지나 태인 지나 정읍서 꺾어
한가롭게 내지른 국도로 접어드니
산과들과 마을이 제자리 잡고
무엇이나 움트는 게 보이더군요
시냇가에 밭둑에 논두렁길에
방금 핀 들꽃들의 자잘한 웃음소리
더 생생하고 가깝게 들리더군요
내심 연모해온 그대 만나러 가듯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가는 길
앞만 보고 내처 달리다보니
마음이 먼저 붉게 젖었더군요
복분자술 탓인가, 춘정 탓인가?
정작 선운사 동백꽃은 못 보고
붉게 터져 선혈이 낭자한 상처
노골적인 색정만 보았습니다
입술 색 너무 황홀하고 야하여
온몸이 후끈 달아 넋 놓고.
섬
임영조
언젠가 내 곁을 떠나
못내 아쉽던 그리움 한 점
이곳에 멈칫 떠 있었구나
바람이 온갖 구설로 희롱하고
파도는 밤낮없이 밀쳐내는데
요지부동 한눈도 팔지 않고
저 홀로 푸르게 수절했구나
두고 온 안부가 궁금한 날은
하얀 갈매기를 멀리 띄워 보내고
햇볕이 잘 드는 치마폭엔 늘
지란을 치고 새를 놓아 기르며
용케도 살았구나, 혼자 된 누님처럼
오도가도 못하는 무기징역이
끝장을 볼 날은 언제라더냐
날마다 기다리다 그만 지쳐서
제 무게로 가라앉은 넋이여.
영영 구조될 가망조차 없는 신세여,
네나 내나 혼자 왔다가
갈 때도 어차피 혼자 가는 세상에
난이나 치고 새나 기르듯
가볍게 비워둔 마음 한켠에
꽃씨 같은 그리움 하나 품고
참고 기다리며 살 것이로다.
성 가족(聖 家族)
임영조
어디서 쫓겨온 일가족일까
아파트 단지 높다란 굴뚝 꼭대기
피뢰침 바로 아래 짓다 버린 까치집
언제부턴가 올망졸망 새끼들 딸린
가난한 까치 부부가 세 들어 산다
비바람 치고 천둥소리 거친 날이면
보채는 새끼들을 품고 잠든 부부는
스스로 집이 된다 요람이 된다
남루도 때때로 행복이 되는
하늘 가장 가까운
성 가족(聖 家族)이 산다
성냥
임영조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출옥하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다
오랜 연금으로
흰 뼈만 앙상한 체구에
표정까지 굳어버린 돌대가리들
언제나 남의 손끝에 잡혀
머리부터 돌진하는 下手人이다
어둠 속에 갇히면
누구나 오히려 대범해지듯
저마다 뜨거운 적의(敵意)를 품고 있어
언제든 부딪치면 당장
분신(焚身)을 각오한 요시찰 인물들
(주목받고 싶은 자(者)의
가장 절실한 믿음은
최후의 만용일까?
의외의 죽음일까?)
그들은 지금 숨을 죽인 채
어두운 관(棺) 속에 누워 있지만
한순간 화려하게 데뷔할
절호의 찬스를 노리고 있다
빛 부신 출세(出世)를 꿈꾸고 있다.
성선설
임영조
장기 복역하다 칠순 넘겨 출옥한
피부가 청년처럼 잔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어느 기이한 노인에게 목사 시인*이 물었다
헌데 비결은 아주 간단한 '건포마찰'
대답은 짧지만 사연은 너무 긴 것이었다
감방에서 몇십 년을 하루도 안 거르고
자고 새면 손끝에서 발끝까지 전신을
마른 수건으로 문질러 닦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노인은 건강 비결을 설하려다가
개과천선을 들켜버린 셈이다
목사 시인은 장수비결을 설하려다가
성악설을 흘려버린 셈이다
노인의 유일한 방주는 수건이다
마른 수건 한 장에 여생을 걸고
인간의 탈을 벗고 싶었을 게다
생의 지우개로 과거를 지우고
새사람이 되고 싶었을 게다
마른 수건 한 장으로 사포질하듯
마음속 때도 오래 문질렀을 것이다
묵은 마늘이나 양파 껍질도
눈물깨나 흘리며 까고 벗겨야
참 매끄럽고 말간 속살이 드러난다
사람의 속내도 그와 같아서
마음 안팎 허물부터 벗겨야 한다
닦을수록 본성이 착하고 예쁜 축생은
사람이라고 설하다 간 사람 누구였더라?
* 고진하 시인 ; 여러 해 전, 강릉 해변 문학 행사에 갔다가 고시인을 처음 만나 담소를 나누던 중에 얻어들은 이야기를 소재로 재구성해 본 것이다
손금
임영조
손바닥을 펴본다
보면 볼수록 난해한 미로
길흉화복이 미세하게 음각된
내 생의 판도가 드러난다
지난날 무심히 지나쳐 온
산과 들이 보이고
구겨진 세월처럼 흐르는 강물
내가 걸어온 길도 보이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저문다
신은 맨 처음
인간을 이 세상에 보내며
두 장의 지도를 쥐어 보냈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그래서 함부로 보여주기 거북한
운명의 기호를 새겨 보냈다
해답은 일러주지 않았다, 다만
저 홀로 분별할 혜안을 주고
저 홀로 걸어갈 수족을 주었을 뿐
아, 이 많은 길 중에
나는 여태 어느 길로 왔을까?
다시 손바닥을 펴본다
좀처럼 판독하기 어려운
이 무용(無用)의 지도를 쥐고
나는 아직 오리무중
영원한 미궁 속을 헤매는 걸까?
시인
임영조
연잎 위에 내려앉은 이슬은 연꽃과 밤새 어울려 놀다가도
날이 새면 자취 없이 증발할 뿐
한사코 스며들지 않는다
치마폭에 이슬받은 연꽃은
애면글면 아끼고 사랑해도
해 뜨면 미련없이 놓아줄뿐
함부로 몸을 섞지 않는다
만남과 이별 사이
사랑과 증오 사이
정토와 진창 사이
하늘과 땅 사이에 시인이 산다
시인의 모자
임영조
나의 새해 소망은
진짜 '시인'이 되는 것이다
해마다 별러도 쓰기 어려운
모자 하나 선물 받는 일이다
'시인'이란 대저,
한평생 제 영혼을 행구는 사람
그 노래 멀리서 누군가 읽고
너무 반가워 가슴 벅찬 올실로
손수 짜서 씌워주는 모자 같은 것
돈 주고도 못 사고 공짜도 없는
그 무슨 백을 써도 구할 수 없는
얼핏 보면 값싼 듯 화사한 모자
쓰고 나면 왠지 궁상맞고 멋쩍은
그러면서 따뜻한 모자 같은 것
어디서나 팔지 않는 귀한 수제품
아무나 주지 않는 꽃다발 같은
'시인'이란 작위를 받아보고 싶다
어쩌면 사후에도 쓸똥말똥한
시인의 모자 하나 써보고 싶다
나의 새해 소망은.
쑥
임영조
그게 아닌데
정말 그게 아닌데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 때 안다는데
철석같이 믿어온 내가 어리석었지
햇빛 부신 지난봄
화단가에 돋아난 새싹을 보며
틀림없이 국화싹일 거라고
가을에는 꽃 몇 송이 피워줄
국화 싹일 거라고 믿어왔더니
키만 멀쑥 자라서
배신의 등을 보인 쑥이라니
예끼,
이 후레자식!
나는 오늘 속죄하듯
겉 다르고 속 다른 쑥대를 위해
내 탓이요, 내 탓이요, 가슴을 치며
빈속이 뒤집히는 꿈을 지웠다.
아카시아꽃
임영조
눈부시다, 5월의 하얀 너스레
천상으로 길을 내는 하모니카 소리여
치열이 너무 곱고 안쓰러운 꽃
춘궁에 형수한테 밥주걱으로 얻어터진
흥부의 볼에 덕지덕지 나붙은 흰 밥풀때기
바라보면 볼수록 허기지는 꽃
고수레 때 내던지는 흰 쌀밥같이
허공에 흩어지는 뭉클한 향기여
하얀 꽃상여 하늘로 밀고 가는
상두꾼 소리 땡그렁 땡그렁
이승을 향해 흔드는 후렴처럼 환하다
벌 나비 날아들어 귀엣말을 지르면
귀가 금새 엷어지고 입 헤픈 게 탈이다
뜬구름 잡듯 이제 막 가는 봄 잡고
왁자지껄 떼거리로 늦바람난 꽃
제 가시에 제 살 찔린 듯
억지로 눈물 참고 웃는 꽃이여.
안경알을 닦으며
임영조
이젠 잃어버린 나를 찾아야겠다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잘 모르지만 실은 그런 걸 따질 여유도 없지만 아무튼 나는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일이 더 급해 해 질 녘 용산 어느 소주집을 배회하다 돌아와 걸레처럼 팽개쳐진 나를 보았지 하루의 고달픈 매듭을 풀고 욕먹듯 소주를 마시면 온갖 치욕과 분노와 쓸쓸함과 흐뭇함 한 달 만에 채워지는 내 밥그릇의 그 섭섭한 무게와 쉽게쉽게 야합하는 나를 자주 만났지 더러는 모가 난 돌이 되다가 귓불이 간지러운 봄바람에 감기면 무작정 휘어지는 풀잎이다가 어쩌면 영영 꽃 한 송이 못 피우고 시들 듯한 쑥잎이었지
나는 요즘 시간과 싸우고 있어 시간은 단 하나밖에 없는 내 목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거든 이 절박한 사실을 나에게 또는 너에게도 꼭 알려줄 필요가 있어 나도 좀 철저히 알려주며 살아야 할 권리가 있어
그렇다 이젠 나도 안경을 좀 고쳐 써야지 안경알에 묻은 갖가지 속박을 닦고 오자로 가득 찬 이력서를 고쳐 써야지 그리고 하느님이 내게 또 한 번의 기회를 베풀 수만 있다면 나는 하느님의 소중한 비밀을 훔쳐 나의 허약해진 등뼈를 다시 세우고 한 그루의 정정한 나무 가장 솔직한 꽃나무로 서 있고 싶다.
안전선 밖에 서서
임영조
티켓 한 장 사들고
지하로 간다
저승의 계단을 내려가듯
지하로 가면, 잠시 후
개선하듯 어둠을 뚫고
설레는 약속처럼 열차는 온다
벌건 대낮에도 두 눈에 불을 켠 채
좌회전 우회전도 모르고
고지식하게 앞만 보고 달리는 버릇
표정은 너무 굳고 무뚝뚝해서
매력 없고 힘만 센 독선주의자
(웬, 저렇게 융통성이 없어서야)
―승객 여러분께선
안전선 밖으로 물러서 주십시오
글쎄, 이 땅의 어디가
안전한 곳인지 잘 모르지만
나는 계속 안전하였다
4·19 때도 5·16 때도
70년대도 80년대도
아무튼 나는 안전하였다
순수냐?
참여냐?
양극이 불꽃 튀며 상충할 때도
나는 그냥 한 그루 나무로 서서
지구가 도는 것을 보았다
이젠 방향이 분명해진
노란 티켓 한 장 사들고
하행선 열차를 기다리는 사십 대
이 다음 나 죽을 때도
안전선 밖으로 물러서라고
밀쳐내며 말릴 사람 없을까?
앞뜰의 살구나무
임영조
아침잠을 노크하는 까치소리가
오늘따라 별나서 동향 창 연다
앞뜰에서 내내 빈 손 들고 서 있던
살구나무 한 그루 간 곳이 없고, 홀연
꽃상여 한 채가 기다리고 있었다
환등을 켜놓은 듯 사방 온통 환해서
나비도 어릿어릿 앉다가 이내 뜬다
다시 보면 연분홍꽃 새 이불
알몸으로 푸욱 묻히고 싶은
꿈도 없이 한 시절쯤 잠들고 싶은
꽃구름 한 채 둥두럿이 떠 있다
간밤 꿈에 어머니가 뵈더니
살구꽃 가마 한 채 보내신 걸까
가난도 약으로 살다 가신 어머니
이제는 형편이 좀 피셨나 보다
후광처럼 너무 곱고 화사해
저 가마 타고 저승까지 가보고 싶다
사람 벗은 한 그루 살구나무로
하르르 작별하는 꽃잎 한 장 무게로.
어떤 선문답
임영조
짐 벗는 어깨가 옹이처럼 얼얼한
남자 나이 쉰이면
고물일까?
퇴물일까?
꽃잎 진 자리가 상흔처럼 허전한
여자 나이 쉰이면
막장일까?
파장일까?
팔월 염천 쓰르라미 한 마리가
늙은 느티나무 가지에 붙어
쓰을 쓰을 쓰읍쓸 쓰읍쓸
온 하루 입맛쓴 선문답 한다
어머니의 땅
임영조
한식날 산소에 갔다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사드린 땅
파주군 광탄면 신산리
성당묘원 남향받이 여섯 평
그 한적한 유택(遊宅)에는
바람과 햇살이 자주 놀러와
까만 빗돌 위에 하얀 그리움
가물가물 새겨 넣고 있었다
한평생 어머니의 믿음은
높은 하늘과 정직한 흙뿐
그래서 작은 유택 뜰에도
햇살을 가득 풀어놓고 사실까
바람도 몇 타래 불러들여
창(唱)을 듣고 한시름 잊듯
내내 주무시는 것일까
분향하고 읍하고 잔을 올리면
문득 귀에 쟁쟁 울리는 말씀
(너희들도 별탈 없이 사느냐?)
저승에서 이승으로 타전한
푸른 잔디가 어머니의 안부처럼
자상한 궁서체(宮書體)로 돋아나
새록새록 반갑고 눈이 부셨다.
억새꽃
임영조
가을바람 소슬한 날
산언덕에 오르니 문득
하얀 웃음소리 들렸다
어느듯 한청춘 가고
이제는 하릴없어 심심한 노인들이
야위고 시린 등을 서로 기댄 채
저마다 서걱서걱 살아온 생애
색 바랜 來歷을 자술하고 있었다
____자식도 품 안에 자식이지
____늙마에 남는 건 빈손뿐이야
____말년(末年)이 깨끗하려면
두 손 훌훌 털고 가벼워야 돼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순은빛 백발만 머리에 이고
그래도 마음만은 홀가분한지
하하하하하하..............
온몸으로 하얗게 웃고 있었다
여름 산행
임영조
더위 먹은 수캐처럼 헐떡거리며
내가 여름 산에 당도하니
산은 이미 막달 찬 임부였다
간밤에 내린 비로 뒷물 막 끝낸
서늘하고 향긋한 냄새
홀리듯 계곡으로 몸 들이민다
(그럼 이내 섹시한 허리 꿈틀
아무나 받아줄 줄 알았지?)
그러나 여름 산은 내색이 없다
까닭 없이 변심한 애인처럼
표정 참 냉랭하고 무겁다
(이 머쓱한 화상을 어디 감추지?)
에라, 웃통을 홀랑 벗고 내가 눕는다
누워서 산을 받는 이 쾌감!
왜 몰랐을꼬? 이 손쉬운 열락을!
이 아음 나 세상 뜰 때도
옳거니, 무릎 치듯 문득 떠나리
내내 기척 없던 매미들
쑤왈쑤왈 범어로 염불하는
저 아래 으슥한 숲 속
조루증의 사내들 대여섯이
시근땀 뻘뻘 개고기를 뜯는다
나무아미타불? 비호같이 내려가
모조리 산 채로 어흥! 관세음보살!
여름 한낮 꿈이 비리다.
연을 날리며
임영조
연을 날린다
눈오는 설날 아침
바람이 잘 드는 언덕에 올라
맑은 꿈을 배접한 연을 띄운다
내 가슴 속 얼레에 감긴
오랜 연모의 질긴 실꾸리
하얀 그리움 스르르 풀어
그대 사는 하늘로 연을 날린다
당기면 당길수록 달아나는 새
끊길 듯 이어지는 정처럼
가늘한 인연의 실 끝을 물고
하늘 멀리 가물가물 치솟는 새여
내 몸속 핏줄까지 물고 가다오
서설이 내려도 추운 이를 위하여
진정 외롭고 슬픈 이를 위하여
시린 손 호호 불며 얼레를 풀면
한 마리의 상서로운 학같이
튼실한 현을 차고 뜨는 내 사랑
아직도 소식 없는 그대여
내가 띄운 연을 보거든
먼 그대 안부를 묻는 줄 알라
내 사무치는 그리움 모조리 풀어
그대 사는 하늘로 띄운 줄 알라.
염소를 찾아서
임영조
1
사시장철 검은 망토
하관은 빨아 박복한 턱에
재래식 수염 기르고, 종종
풍월을 읊는 소문난 음치
그 한심한 건달을 아시는지요
남이야 바쁘든 말든
고새면 들녘이나 냇가로 나가
유유자적 하루를 축내는 행자
해 지면 제 그림자 밟고 돌아와
절망절망 고독을 씹는
그 하릴없는 축생을 아시는지요
참으로 딱한 한량이, 실은
먼 옛날 대국에서 흘러들어온
글줄이나 했다는 귀족의 후예
여말에 남포현(藍浦縣) 외딴섬
죽도로 귀양 갔다 풀려나, 그 길로
양각산(羊角山) 기슭 박토에 말뚝 박고
대대로 농사짓고 달빛 받아 글 읽던
청빈한 백면서생의 후예
그를 아시는지요
뿔은 세우되 관(冠)으로 쓸 뿐
수염은 기르되 뽐내지 않고
식사 때는 으레 어깨부터 낮추는
누추한 처소도 탓하지 않는 샌님
억지로 목줄을 당기면
오히려 완강히 저항하는 외고집
개같이 아부할 줄 모르고
돼지같이 과욕할 줄 모르고
고양이같이 교활할 줄 모르는
그래서 늘 외롭고 검소한 축생
그를 이젠 아셨는지요?
2
그만 탈출하고 싶다
검은 절망이 외투를 벗고
구닥다리 수명도 깎고
이 외진 마을을 떠나고 싶다
한평생을 옭아맨
밧줄을 풀고, 인연도 끊고
출가하듯 일상을 박차고 나가
고산준령 햇볕 바른 산림대
그 푸른 산록으로 내닫고 싶다
오늘도 어제처럼 끌려 나와
온 하루 들판에서 서성거리다
강물에 비춰보는 슬픈 자화상
해지면 돌아와 건초나 씹는
따분하고 헛배 부른 일과가 싫다
더러는 죽고, 더러는
헤어져 소식 없는 이웃들
이 적막한 유형의 땅에
말뚝 박고 사는 것이 괴롭듯
일용할 양식을 뜯기 위해 날마다
목매고 사는 일은 거북하고 아프다
난세를 치받기엔 미력한 뿔로
허공만 쿵쿵 들이받다가
눈망울에 그렁그렁 슬픔이 공
까슬한 혀를 빼물고 우는
염소는 이제 텅 빈 시골이 싫다
3
고2 때 기말시험 보던 날
납부금 안 냈다고 쫓겨난 나는
고향 집에 내려가 식구들 몰래
새끼 밴 염소를 내다 팔았다
간재재 넘어 삼십여 리 길
팔려 가는 낌새를 알아차린 듯
거품 물고 버디며 울부짖던 염소를
판교장에 끌고 가 헐값 받고 팔았다
삼십 년 지난 오늘
이제야 비로소 깨닫느니
내가 염소를 내다 판 게 아니라
염소가 나를
대처에 내다 판 걸 알았다
이 고달픈 생을
어디에 안녕히 부려놓지 못하고
세월의 볼모처럼 덜미 잡힌 채
날마다 헐레벌떡 끌려온 내가
굴레 쓴 노역의 염소임을 알았다.
오이도
임영조
마음속 성지는 변방에 있다
오늘같이 싸락눈 내리는 날은
싸락싸락 걸어서 유배 가고 싶은 곳
외투 깃 세우고 주머니에 손 넣고
건달처럼 어슬렁 잠입하고 싶은 곳
이미 낡아 색 바랜 시집 같은 섬
―오이도행 열차가 도착합니다
나는 아직도 그 섬에 가본 적 없다
이마에 '오이도'라고 쓴 전철을
날마다 도중에 타고 내릴 뿐이다
끝내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묻어둔 여자 같은 오이도
문득 가보고 싶다, 그 섬에 가면
아직도 귀 밝은 까마귀 일가가 살고
내내 기다려준 임자를 만날 것 같다
배밭 지나 선창 가 포장마차엔
곱게 늙은 주모가 간데라 불빛 쓰고
푸지게 썰어주는 파도 소리 한 접시
소주 몇 잔 곁들여 취하고 싶다
삼십여 년 전 서너 번 뵙고 타계한
지금은 기억도 먼 나의 처조부
오이도(吳利道) 옹도 만날 것 같은 오이도
내 마음 자주 뻗는 외진 성지를
오늘도 나는 가지 않는다, 다만
갯벌에는 나문재 갈대꽃 피고 지고
토박이 까치 무당새 누렁이 염소랑
나와 한 하늘 아래 안녕하기를.
우담바라
임영조
청계사 극락보전 삼신불 앞에
낯선 새떼들 왁자지껄 붐빈다
네가 곧 부처다
네 마음이 절이다
아무리 일어줘도 못 알아들으니
답답하신 부처는 문뜩 우담봐라!
스스로 이마 찢고 꽃을 피웠다
앞뜰 냉이 꽃다지도 덩달아 피고
저 아래 마을에선 입이 싼
풀잠자리 웃음소리 자지러지고
오늘도 무사히 봄날은 간다
운주사 와불
임영조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에 키 크고 마음 착한 미남 석공과 키 작지만 요염한 공주가 한가윗날 밤 우연히 서로 눈이 맞아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행복한 유부남 유부녀라 아무도 모르게 사랑을 나누게 되었고 사랑이 날로 깊어질수록 한편 괴로워했다 허나 그들은 마침내 야반도주를 모의하고 배 한 척을 마련하려 백방으로 뛰었다 하늘도 그 애틋한 순애에 감복하여 이 세상 아닌 딴 세상에 가서 행복하게 살라고 구름 배 한 척을 내려 주었다
그들은 사랑에 부푼 돛을 올리고 세상 밖으로 밤낮없이 노를 저었다 그러다 비바람 몰아치던 칠석날 저녁 그들의 배는 북두칠성 모서리에 화순군 도암 들녘에 추락하고 말았다 그들의 육신과 배의 잔해는 땅에 떨어지면서 크고 작은 바위로 굳어 도처에 널려졌다 하늘은 덫으로 놓아둔 북두칠성에 좌초된 것을 못내 가엾게 여겨 칠석날 저녁이면 일곱 별을 내려 곡하게 하고 비를 뿌렸다 그리고 천상의 석공들을 내려보내 백일 동안 밤 도와 그들의 석상을 세우게 하고 배의 잔해로 천불천탑을 완성하라 명했다
드디어 완성된 석상을 막 세우려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새벽닭이 울었다 그 소리에 놀란 석공들은 그만 서둘러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운주사 영구산 마루 양지녘에는 그 석공과 공주가 금실 좋은 와불로 누워 세상 밖으로 갈 구름배 한 척 기다리고 있다 곧 나란히 일어날 듯 하체 약간 비스듬히 쳐든 채
치정도 지극하면 성불하는가?
이삭의 노래
임영조
이젠 고개를 들지 않겠습니다.
전생(前生)에 지은 죄(罪)까지 익어
저절로 숙여지는 이 가을
하늘은 참 맑고 멀군요.
진작 익은 자(者)는 떨어져 숨고
아직 덜 익은 것들만
빳빳이 고개 들어 시끄러운 때
나는 또 무슨 말을 할까요.
그저 이름도 없이
하얀 겨울 속에 파묻혀
가장 서러운 가락 아니면
지당한 말씀으로 썩겠습니다.
이소당 시편(耳笑堂 詩編)
임영조
1
서울에도 섬이 있네
마음 닫고 채색(彩色) 감춘 섬
세상 살며 세상을 그리워하는
섬과 섬 사이에 바다가 있네
멀리보면 같은 듯 그러나
꿈색깔 알록달록 서로 다른 섬
말과 말 사이에 그물이 있네
리아스식 해안 같은 그리움으로
상처 주고 상처 받는 섬들이 있네
희망의 저쪽은 왜 두려움일까?
인적 없는 숲속에 들면
시시비비 멧새소리 자지러지네
오호라, 이곳까지 지역패권주의가......
나는 오늘 다친 섬이네
돈만 먹고 불통인
공중전화기
부르르 몸을 떠는 무인도
궁금하면 네가 오라! 나는 지금
쓸쓸한 내 무게로 가라앉은 섬이니.
* 耳笑 - 사당동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에는 이소당이라고 쓰여진 현판이 하나 있는데, '이소'란 미당 선생이 학생 시절 귀가 어둡다며 작가에게 붙여준 별명
7
'시인이긴 한데
진실되지 못한 사람'
그 대목에 이르러 그만
'책장을 덮는다'는 시인과
'가슴 뜨금했다'는 시인이
아직 이 세상에 있다니
천만 다행이다 고맙다
나 이제 배고파도 되겠다
좀 더 순진해도 되겠다
익명의 스냅
임영조
봄 소풍 나온
할머니들 대여섯이
오순도순 화투를 친다
손주 같은 햇살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는 잔디밭에서
노년을 말리듯 화투를 친다
이미 색 바랜 광과 남은 소망을
한 장씩 탁탁 던지고 나면
왠지 허전하고 저린 손이여
못내 아쉽고 덧없는 세월이여
송학이 앉았다 날아간 자리에
매화가 피고 지고
객혈하듯 벚꽃이 흥건한 방석
때 아닌 국화, 철 이른 모란 난초
덩달아 피고 지는 화무십일홍
하느님도 구경하기 심심하신지
싸리순 몇 끗 짐짓 내미는 봄날
이런 날은 더 이상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단순한 기쁨이 좋다
익명의 스냅이 좋다
자동판매기
임영조
동전을 넣고
버튼만 누르면 즉시
척척 알아서 작동하는 수전노
돈만 주면 언제든
제 몸속 피까지 파는 사내
그러나 받은만큼 내줄뿐
덤도 없고 에누리도 모른다
저 낯두꺼운 배금주의자
그가 폐수를 쏟듯 매양
우리들의 빈 컵을 채워준 것은
한 잔의 달콤한 선심
어딘지 좀 꺼림칙한 어둠이었다
알고 보면 네나 내나
자존심이 금가고 혼나간 기계
도시의 한켠에 방치된 채
아무나 눌러도 되는
그래서 얼굴이 닳아 윤나는
한 대의 뻔뻔스런 자동판매기
누굴까?
내 입에 푼돈을 넣고
날마다 제멋대로 조작한 자는
내게서 무엇을 뽑아갔을까?
양심일까? 피일까?
자명고
임영조
5
애초부터 못난 개는
초저녁에 짖더라.
이웃집 개 짖는 서슬에 놀라
싱겁게 따라 짖는 놈,
그놈 또한 못난 개더라.
강자를 만나면 뺑소니치고
약자를 만나면 마구 짖는 놈,
그뿐인가 왜, 동구 밖
족보도 없는 놈과 어울려
노상 오입이나 즐기고
때 되면 어슬렁 돌아오는 놈
이 멍청한 놈아,
도둑은 벌써 튀고 없는데
왜 달보고 짖어.
심지어 제 늙은 어미한테도
엉큼한 눈꼬리로 웃는 놈,
그래서 네놈은 결국
전생에 속죄 못할 개가 된 것을
나는 오늘 너를 보고 알았다.
자목련
임영조
화창한 봄날
고궁 뜰을 혼자서 거닐다가
우연히 마주친 여인
방긋이 웃으며 아는 체한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얼핏 생각 안 나는
저 지체 높고 우아한 자태
어느 명문가 홀로된 마님 같다
진자줏빛 비로드 저고리에
이루 다 말로 못할 슬픔이 서려
앞섶에 살짝 꽂은 금빛 브로치
햇빛 받아 더욱 눈부셔
함부로 범접하기 황송한지고
세상에 아직 잔정이 많아
서둘러 치장하고 봄 마중 나온 마님
안부를 묻듯 실바람만 건듯 스쳐도
금세 눈물이 앞을 가려
하르르 꽃잎부터 떨구는 작별
그 후로 세상은 또 한 차례
화사한 소문이 나돌 듯
별의별 꽃말이 분분하였다.
자서전(自敍傳)
임영조
1943년 10월 19일 밤
하나의 물음표(?)로 시작된
나의 인생(人生)은
몇 개의 느낌표(!)와
몇 개의 말줄임표(......)와
찍을까 말까 망설이다 그만둔
몇 개의 쉼표(,)와
아직도 제자리를 못 찾아 보류된
하나의 종지부(.)로 요약된다.
자화상(自畵像)
임영조
어느덧 사십 년 지나
골동품 다 되어가는 자물통 하나
묵비권을 행사하듯 늘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하지만
뜻맞는 상대와 내통하면
언제든 찰칵!
꼭꼭 잠가둔 마음을 푼다
천성이 너무 솔직하고 순진해
안 보여도 좋을 속까지
모조리 내보이는 자물통 하나
가슴속에 싸늘한 뇌관을 품고
보수(保守)냐? 개혁(改革)이냐?
목하 고민 중인 자물통 하나
남의 집 문고리에 매달려
알게 모르게 녹슬고 있다.
잡식동물
임영조
상을 받는다
별로 내세울 일도 없는
오늘 하루 끝
다시 세상을 받는다
과연 받아도 될까
살기 위해 먹는가
먹기 위해 사는가
자문해 볼 겨를도 없이
탐욕의 손이 먼저 숟갈을 든다
하얀 쌀밥에 콩나물국과
배추김치와 깍두기와
멸치볶음과 조기매운탕
장조림과 닭도리탕 등등을
골고루 맛있게 씹어 먹는다
아무런 가책 없이 상습적으로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늘 먹어 치운 식단은
누군가의 손에 살해된 주검
온갖 시체로 조리된 성찬이었다
아니 세상에 이럴수가......
내가 잡식성 동물이라니!
남의 시체로 식욕을 채워온
타살을 방조해 온 공범이라니.....
같은 땅에 살면서
누에는 뽕잎만
송충이는 솔잎만
메뚜기는 풀잎만 먹고 사는데
사람인 내가 잡식이라니....
이제야 알겠구나
내 먹성이 잡식이니
생각도 잡스럽고 복잡하듯이
사람의 성격은 왜
때때로 교활하고 포악한가를.
장마
임영조
하늘나라에는 요즘
달포째 기중(忌中)이다
검은 베일로 만면을 가린 채
억장이 무너지는 천재(天宰)의 슬픔
그 주체못할 눈물이
온나라에 주룩주룩 빗금을 친다
날개가 촉촉히 젖은 꿈들이
지루한 후렴으로 다시 젖는다
폐하, 그만 고정 하소서
억조창생이 조아려 애도하고
읍소를 거듭한들
저 통한의 곡성은 막을 수 없다
이따끔 역정을 내듯
뇌성벽력으로 천하를 일갈해도
혼자 잘난 자들은
아직도 그 까닭을 모르고
내 이제 금족령(禁足令)을 선포하노니
너희는 모두 독 안에 든 쥐
괜히 허튼 수작 마!
함부로 날뛰면 무차별 난사
누가 어디를 가든
조준한 총구는 백발백중이므로
아예 사선(射線)을 넘을 생각 마!
이미 교통은 두절되고
전화도 불통 연애도 불통
오늘도 시계(視界)는 제로라니까
해는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간다고 믿어도 좋다
다만 고성방가나 외출을 삼가고
일체의 짐회도 자제하도록
잠시 관뚜껑에 못질소리 그치고
서풍에 쓸리는 검은 베일 사이로
문득 상주(喪主)가 보인다
한여름 더위에 뜨고
오랜 탈수증에 시달린 천재(天宰)
수척해진 얼굴이 더 눈부시고 반갑다
그리운 것은 왜
저렇게 서럽고 멀까?
장수하늘소
임영조
나?
그만 쏜뗐어
유서쓰듯 사표를 써 던지고
굴욕의 밥숟갈 뺏어
백주에 목줄을 푼 탈옥수처럼
그 집을 냉큼 빠져나왔어
더 이상 심문하지마!
나는 결코 공범이 아니니까
이제 어디로? 걱정마!
어디나 원래는 길이 없었다
가고 오니 길이 났을 뿐
길을 두고 뫼로 가는 장수하늘소
어눌하게 땅을 기던 갑충이
언제 저런 날개가 있었던고?
카이저 수염 같이 멋진 더듬이
빳빳이 치켜 세운 채
벌써 청계산 숲속을 소요한다
마른 가슴과 배를 맞비벼
꾸르륵 찌르륵 선율을 켜며 난다
보라, 저 겹눈 가득히
우주의 신비를 담았다 덜고
덜었다 담는 조화를
그러나 눈이 작은 좀벌레는
좀처럼 볼 수 없다는
장수하늘소는 켤고
썩은 고목에 입을 박지 않는다
굶주린 무위로 하늘을 날 뿐.
저녁놀
임영조
드디어 한 생이 저문다
이승에서 풀다 남은
한자락 고뇌가 탄다
제 허물을 거두듯
청빈한 그림자를 지우며
말없이 빈손으로 떠나는 사람
마지막 뒷모습은 언제나
아름답고 서럽다
그래, 잘 가라
슬픈 기억마다 불을 지르고
산그늘 무너지는 들녘 끝에서
맨살로 혼자 타는 그리움이여
그 뒤를 뉘엿뉘엿 따라가면
어느덧 밤인가 죽음인가
가야 할 때를 알고
젊은 날 빛부신 아픔을
더러는 죽음을 예비하고 산 사람은
유언도 저렇듯 선명한 빛깔일까?
저승꽃
임영조
핸들 잡고 차 몰다 본다
가을볕에 선명히 드러난 내 손
드문드문 손등에 핀 꽃들을 본다
이젠 탐욕도 열도 식는 나이에
어느 날 문득 크고 작게
혹은 흐리거나 진하게 핀 꽃
저절로 피어나 짙어지는 꽃이다
난생 처음 보고도 서로 친한 듯
그래도 왠지 마주보기 어색해
모르는 척 짐짓 외면하고 싶은 꽃
내 살이 그만 흙과 친하려는지
꽃 색깔도 흡사 흙빛 닮았다
마음에 보푸라기 일어나듯
손등부터 넌지시 번지는 무늬
내 생의 말미에 댄 끝동 같은 꽃
하! 나는 여태 이 꽃을 보러
앞만 보고 바쁘게 달려왔구나!
내 몸의 허허로운 양달에
이승에서 마지막 피워보는 꽃
허나 왠지 섭섭하고 쓸쓸한
그래서 내보이기 싫은 꽃
누가 파종했을까?
제목을 유보한 사신(私信)
임영조
---너의 소속과 兵科를 다 알았으니 보리밥
많이 먹고 훈련이나 열심히 받아둬라/
66년 가을/申東曄
당신 가신 뒤
침묵의 바다에 그물을 던져
내가 건져올린 건
몇 마리의 서러운 절망이었습니다
그 절망은 때로 밤하늘로 날아가
뒤늧게 빛을내는 별도 되었습니다
높고 먼 당신의 별이
지상의 어둠을 사르는 밤엔
낯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탄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습니다
개중에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머리가 돌아 입원도 하고
또 어떤 친구는
그 별똥을 낚다가 발을 헛디뎌
익사했다는 소문도 들렸습니다
요즘도 나는
침묵의 바다로 나가
여전히 투망질을 하지만
기껏 건져 올린건
판독이 어려운 불랙박스뿐
간절한 句節은 다 놓칩니다
더러는 내가 던진 그물에 걸려
죽지 빠진 새처럼
정말 외롭고 힘이 듭니다.
조팝나무꽃
임영조
매봉산 초입 오르막길에
갓 핀 한 무리 조팝나무꽃
앙증한 웃음 소리 눈이 부시다
너무 귀엽고 예뻐 넋놓고 보다
어느새 손이 가서 쓰다듬는다
아직 비리고 여린 잇바디 세듯
조심조심 어루만지자, 덥석
하얀 젖니가 손가락을 깨문다
이 얼얼하고 황홀한 촉감!
간지럽고 환한 통증이 좋다
때 탄 손은 꽃들이 먼저 아는지
고개를 살래살래 젓다가 울컥
흰 젖을 토해 놓는 조팝나무꽃
너무 고와 눈 시린 갓난아기다
어서 손 치우세요!
이 멋쩍고 부끄러운 내 손은
어디에 감출까 쩔쩔매는 나이다
그래도 너를 보면 내 피도 잘 돌아
온 하루 둥둥 얼러 주고 싶구나
늙마에 어디 가서 몰래 본
돌잡이 딸 안고 눈웃음을 맞추듯.
지상의 방 한 칸
임영조
밤하늘의 별처럼 총총한 구멍 속을
방게들이 어슬렁 기어 나온다
맨손체조하듯 집게발 치켜 들고
땡볕에 젖은 몸을 말린다
이미 다 마른 놈들은 어디 가는지
두 눈은 분명히 앞을 보는데
다리는 슬슬 옆으로 기어간다
남의 말 할 것 없다
한때는 나도 앞으로 가야지
똑바로 걸어야지 하면서도
곁길로 게걸음질친 적이 몇 번이던가
그 두렵고 낯선 길을 가고 나면 늘
얼굴 감출 방 한 칸을 소망해 왔다
흰 거품을 하늘 높이 날리며
낯선 자가 나타날까 망보던 게들이
내가 오는 기척에 놀라 일제히
컴컴한 구멍 속에 몸을 숨긴다
하, 내 거동이 그토록 수상쩍은가
졸지에 혼자가 된 외로움
나는 오늘 또 당했구나!
게처럼 잽싸게 제 한 몸 숨길
지상의 방 한 칸이 나는 부럽다
저 평등한 땅에 숭숭 뚫린 게구멍
어느 한 칸 세 얻어 술래로 숨어
이 힘겨운 시절 한 장 넘기고 싶다.
지천명
임영조
배터리가 다된 시계 초침이
정오의 낭떠러지 아래서
더 못 오르고 마냥 노닥거린다
너도 퇴행성 관절염을 앓거나
노인성 발기부전증은 아닌지
그래도 우리 멈추지 말자
저 언덕만 넘어가면 정동진
미명의 바다 찢고 해는 다시 뜨리라
최선을 다한 뒤에 오는 절망도
병신같이 숙이고 사는 것도 다
하늘의 뜻이려니 생각하면 편하다
벼락 맞은 옹이에도 또 날벼락 맞은
고목도 봄이 되면 세상에
신작을 발표하듯 새잎을 낸다
오, 서럽고 환한 몸부림
그걸 알고 사는 게 지천명이다
기력이 쇠한 시계여
그래도 우리 멈추지 말자.
직소폭포
임영조
가시려면 부디 몰래 가시라
훔쳐보는 현장이 더 생생하니
추측은 버리고 혼자 가시라
한식경쯤 당도하는 재백이고개
잠시 땀 닦고 심호흡 한 다음
무위에 들 듯 어슬렁 숲길로 들면
풋풋한 처녀림이 몸 받아준다
몸 젖은 흙살의 뭉클한 쿠션
갈수록 마음 온통 음란해져서
누가 볼까 두려워 빨리 걷는다
냇물에 얼비치는 은피라미 떼
고사리 새순이 조막손 펴니
지레 놀란 햇살이 부서져 튄다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내외하던
관음봉과 옥녀봉이 아뿔싸!
왜 하필 예서 붙어 길을 지울까?
막상 벼랑 위에 서서 보니 알겠다
은밀하고 속 깊은 사랑이란
저 아찔한 절벽도 서슴지 않는
숨길 수 없는 본능의 그리움인가
화음인가 아니면 가벼움인가
팽팽한 물기둥이 쏴 그 아래 누운
용소의 중심을 정확히 내리꽂자
온산이 신음하듯 몸을 뒤튼다
오, 사방을 제압하는 물 맑은 잠언
서늘한 일갈을 들어보니 알겠다
물은 속으로만 스미는 게 아님을
때로는 타협을 거부하고 일사천리로
세상의 귀를 뚫는 직언도 있음을.
진달래
임영조
4월이 오면
나는 또 상사불망(相思不忘)
그녀에게 편지를 쓰리
내 무딘 심(心) 끝에 침을 바르며
이젠 좀 노골적으로, 혹은
어딘지 좀 어눌한 구어체(口語體)로
꼭꼭 눌러 편지를 쓰리
만나면 대뜸 얼굴부터 붉어져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지만
알고 보면 속내는 끼 많은 여자
언제나 산처럼 무겁고
바위처럼 말없는 사내가 좋아
이 봄날을 태우는 황홀한 痴情
필경에는 온 산에 불을 지르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지는
뒤끝이 깨끗한 여자
그래서 늘 그립고 예쁜
그녀에게 나는 또 편지를 쓰리
내내 말로 못한 사랑을
비로소 고백하듯 편지를 쓰리
진달래꽃 지고
4월이 가기 전에
질마재 추신
임영조
1
미당 선생 추모 일주기 날
질마재 미당문학관 식당에서
참가상 타듯 점심을 받는다
모락모락 더운 김 하얀 고봉밥
한술 막 뜨는데 어라! 창밖에
함박눈이 내린다, 거짓말처럼
멀쩡하던 하늘에서 퍼붓는 눈발
-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마음 놓고 많이 많이 드시게 -
푸짐하게 퍼주는 뭉쿨한 서설
쌀밥처럼 뜨듯하다 맛있다
2
한 노스님께 물었다
"노스님 보시기에 요새 후학 중
누가 싹수가 보입니까?
"원숭이와 잔나비다."
"그들은 남의 흉내 잘 내는
이따금 스님 머리 잘 긁는
같은 속 축생이 아닙니까?"
"험담하지 마라!"
3
한 행자가 물었다
"큰스님은 생전에 친일시 쓰고
군부독재가 손을 들어줬다고
열반에 드신 후도 지탄받는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린애처럼 천진해서 그렇다"
"스님의 과거 거수기 부역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아무튼 다른데 기억에 없다"
"사방에서 산이 죄어올 때는 어찌합니까?"
"빠져나간 자취가 없다."
4
오던 눈 잠시 그치고
앞동산 유택으로 올라가 본다
멀리 곰소만 건너 오견봉 우뚝
줄포 왕포 남포 격포 다 주목한다
물 빠져 널널하게 드러난 갯벌
왜가리 몇 마리 깝죽대다 날아간
저 넓고 깊은 바다도 흠집이 많군
허나 상처는 곧 밀물에 씻기리라
씻겨도 자취야 쓰리겠지만,
참꽃
임영조
약수터 가는 매봉산 입구
(산불예방 입산금지) 현수막 뒤로
저런! 산불이 나다니? 아니다
화냥년 개짐 풀듯 참꽃이 핀다
꽃술에 붉은 반점 요염한
따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꽃
암소 끌고 보릿고개 넘다가
수로한데 얼빠져 암소도 놓고
나이도 잊고 꺾어다 바쳤다는 꽃
흰구름 덩실 그 노인이 또 온다
아무리 남의 꽃 예쁘기로
천년을 새로 피는 참꽃만 하랴
숨겨온 귀엣말을 차마 못하고
온 산에 불지르고 달아나는 꽃이여
너와 내가 한 시절 몸을 섞다 간다면
그 자리엔 무슨 꽃이 불타오를까?
눈물꽃? 아니면 꿈꽃?
―꽃방망이 줄게 이리 온!
망설이는 사이에 참꽃이 진다
실없이 또 봄날만 간다.
채송화
임영조
한여름 뙤약빛 아래
하반신이 불구된 아이들이
눈부신 부채춤을 펼친다
하양 노랑 빨강 파랑
싱글벙글 어울려 손에 손잡고
안쓰럽게 돌아가는 화련한 圓舞
나는 지금 넔나간 사람
너희들의 황홀한 律動을 보며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내 멀쩡한 四肢가 부끄럽구나
오냐,오냐.장하다
사무치는 슬픔까지 꽃이 된다면
노래쯤은 한 박자 느려도 좋고
동작이야 이따금 틀려도 좋다
저 죄없는 어린것들을
세상에 보내 天炯을 내린 것은
神의 마지막 실수였을까? 아니면
스스로 아픈 곳을 채우게 하는
눈물겨운 驚異를 시험하는 것일까?
첼로를 켜는 여자
임영조
배경은 막 먼동 틀 무렵이다
까만 드레스에 얼굴 흰 여자가
밝고 둥근 보름달을 밟고 나온다
의자에 앉자 오랜 산고를 풀듯
가랑이를 넌짓 벌려 첼로를 낳고
첼로가 부슬부슬 빗소리를 낳는다
해빙의 태반처럼 숨죽인 장내가
검은 융단 덮어쓴 듯 가라앉는다
박명에 이슬 털며 새벽길 걸어
풀물 드는 들녘으로 내닫는 여자
이젠 몸 벗어놓고 신들린 활 하나로
제 영혼 문질러 모든 벽을 허문다
다산형 야생마 젖가슴이 부풀고
긴 갈기 치렁치렁 목덜미가 부시다
단비 맞고 촉촉하게 젖은 첼로가
아랫배에 은근히 힘주는 소리
설레던 만삭의 뱃살 트는 소리가
연초록 갈채 속에 봄을 낳는다
온통 물 오른 귀를 세운 장내는
저마다 흠뻑 젖은 손으로
신생의 봄을 받아내고 있다.
춘란(春蘭)
임영조
지난 겨울 내내
아무런 소식조차 없다가
홀연히 내 앞에 나타난 여자(女子)
너무 희어 눈 시린 화관(花冠)을 쓰고
꿈인 듯 우아하게 다가와
다소곳이 꽃술을 여는 여자(女子)
이를 어쩌면 좋아?
청향(淸香) 진한 살냄새에 취해서
사랑한다는 말도 못 하고
바보같이 코부터 갖다 대자
꺾인 난잎이
내 목에 칼을 댄다
그래도 좋다!
시방 나는 혼신을 다해
뜨거운 죄라도 짓고 싶어
너 같은 여자(女子)라면 기꺼이.
출항(出航)
임영조
드디어 닻을 올렸다
두근대는 바다는 다시
수평선에 갈매기를 날리고
새로 터진 날빛이
머언 산을 데리고 온다.
지난겨울 난파한 목조 선박은
어두운 갯벌 가에 쓰러져 있고
우리들 최후의 새 아침 출항.
눈물로 띄워 보낸 어머니의 얼굴엔
뜨거운 저기압이 북상하지만
이미 활짝 올린 욕망의 돛은
무한한 획득의 꿈에 부풀고
철썩이는 시대의 한복판으로
피곤한 경험의 노를 젖는다.
가장 질긴 신경의 올실을 짜서
파고 깊이 내어던진 그물 속
팔팔한 주어들이 걸려들어 튄다.
우리는 잠시 바쁜 손의
그 아픈 매듭을 풀고
두고 온 기억들을 하나씩 피워 문다.
아, 어지러운 향수에 취하여
젊은 수부들은 잠 속에 앓아눕고
골격 빠진 세계의 사지는 지금
위험한 순간의 목발을 짚고
극동으로 서서히 이동한다.
보라, 우리가 찾는 꿈의 바다는
물 맑은 함성으로 일어나
뒤늦은 사내들의 가슴에 충돌한다.
모두들 방향 읽고 서성대는 때,
갖가지 불길한 예감을 뚫고
새로운 노동의 길을 열며 떠난다.
지나온 포구마다 부신 램프의
넉넉한 안부를 전해 들으며
우리는 시리고 저린 팔뚝의
그 끈끈한 시련을 걷어 올린다.
욕망으로 얼룩진 해도(海圖)의 아침
내 불면의 시력이 일으키는 바람은
아직도 색신(色神) 젊은 기를 흔들고
두고 온 세상 밖에서
배후를 기다리는 시민에겐
가장 아름다운 목례를 보내며
우리는 드디어 닻을 올렸다.
치킨 센터
임영조
불빛 흐린 취조실
몇 마리 절망이
굵은 철사줄에 꿰인 채
몇 마리 절망이
굵은 철사줄에 꿰인 체
빙글빙글 구워지고 있었다
벌거벗긴 알몸으로
가혹하게 당하는 전기고문
이미 마비된 사지가 오그라들고
전신에 누런 진땀이 난다
- 어서 솔직하게 다 불어!
누가 사주했지
- 바른 대로 안 대면 아예
새까만 숯덩이로 만들 테니까!
한때는 날개를 달고
눈부신 비상을 꿈꾸던 자들
남 다 자는 새벽에
무어라고 외치다 잡혀 왔을까?
동이 튼다 꼬끼오
일어나라 꼬끼오
홰치며 우는 것도 죄가 됐을까?
이 비정한 도시
사람들은 저마다 잠 속에 빠져
닭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저 밀폐된 방에서
죽어가는 비명도 듣지 못한다
치킨 센터 유리벽 넘어
노릇노릇 구워지는 통닭을 보며
왕성한 식욕이나 느낄 뿐
입맛을 다시며 찢어 먹을 뿐
날마다 추락한 자의 아픔은 모른다
쾌락보다 고통이
임영조
위에서 누르는 자의 쾌락보다
밑에서 당하는 자의 고통이
오히려 눈부시고 강하다
눈사태 속 짓눌렸던 보리가
마침내 반역을 결행하듯
파릇파릇 내미는 서슬을 보면.
토종 감 한 알
임영조
내 고향 후미진 당산마루에
늙은 감나무 한 그루
아직도 정정하게 우뚝 서 있다
허물 벗듯 마을 떠난 사람들
아무런 소식도 없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데
빈 까치집 한 채 품고 서 있다
추억처럼 먼 가지 끝에는
옜다, 이리 온! 하고 내밀 듯
빨갛게 농익은 토종감 한 알
모처럼 고향에 와서 보니
용서받는 아이처럼 마음 편하다
아, 그는 알고 있으리
감꽃 향내 자자한 보리누름에
내 할아버지 할머니 또는 증조부가
이마를 맞대고 근심하던 가난을
여름날 이웃들이 그늘을 깔고 앉아
도란도란 나누던 눈물어린 사연을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서릿발 빛나는 늦가을 문득
아스라이 먼 가지 끝에 켜놓은
저 빛부신 백열등 한 알
오늘 새삼 우러러보니
볼수록 따뜻하고 환하다
세상 다 살다 가며 남긴 건
이거요! 하고 번쩍 들어 보이는
마지막 등불 같은 시 같은
토종감 한 알!
통화
임영조
다이얼을 돌린다
눈뜨고도 안 보이는 어둠과
조용히 내통하고 싶어서
잠든 눈을 툭툭 눌러 깨운다
내 가슴속 더운 피가
찌르릉 찌르릉 색쓰듯 빠져나가
깊고 먼 침묵을 관통하는 소리
그녀는 들었을까
그리고 받아줄까
내 고백보다 앞서가는 전희를
벨소리가 끊기자,
수화기 저쪽에선 뜬소문처럼
내용도 별로 없는 비가 내리고
그 소리는 못이 되어 귀를 막는다
막아도 기밀은 또 누설되고
……여보세요,
거기가 어둠의 나라지요?
……아닙니다.
당신은 참 감이 멀군요?
(찰칵)
열린 것만 닫으면 어둠이 되듯
우리들의 별리(別離)는 너무 쉬웠다
눈 뜨고도 못 본 척
돌아서서 귀만 털면 되므로.
틈
임영조
그가 넌짓 말을 던진다
나도 조심조심 말을 섞는다
절대로 틈을 보이지 말자!
해도, 어느새 벌어지는 틈
그 틈을 비집고 그가 쳐들어온다
간질간질 눙치듯 쉬 슬어 놓고
내 손을 갉아먹고 어디론가 날아가
역한 소문만 퍼뜨리는 쉬파리!
그를 보려는 내 눈과
그를 들으려는 내 귀와
그를 맡으려는 내 코와
그를 삼키려는 내 입이 곧
그가 비집고 쳐들어올 구멍이라니!
그가 바로 내 생(生)의 틈이었다니!
진도 앞 큰 바다도 절로 갈라져
틈을 보일 때가 있다지? 감취 둔
속내를 드러내고 사람들을 끈다지?
금간 보도블럭 사이로 촉을 내민
풀씨가 더 눈물겹고 환하듯
틈으로 엿본 생(生)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말의 틈은 흠이라지만
사람의 흠은 그의 생을 정독할
자상한 각주(脚註) 같은 것이니
더러는 틈을 보이며 살 일이다
밖으로 나가려면 문을 열듯이
안으로 들이려면 틈을 내줄 일이다
파도
임영조
또 시작이다
멀리서 무언가 모의하던
야성의 사내들이
알몸으로 퍼렇게 발기(勃起)한다
수 천 수 만 횡대로
스크럼을 짜고 허옇게 달려든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물 맑은 함성으로 격돌하다가
이내 부서져 수포(水泡)로 돌아간다
다시 모여 시작한다
절벽은 여전히 끄떡없는데
사무치는 그리움 하나로
온몸을 내던지는 사생결단
어쩌저고 그들은 늘
하릴없는 절망과 대결하고 사는가
스스로 소멸하는 눈먼 사랑은
오히려 깨끗해서 좋구나
그렇다,
아무튼 부딪치고 볼 일이다
우리네 사는 일도 그와 같다면
당당히 대결하고 끝장을 보듯
슬픔은 모두 깨놓고 살 일이다
뇌관처럼 뜨거운 가슴이라면
풍경
임영조
마을이 타고 있었다
산과 나무와 들녘과 집이
벌겋게 상기된 채
한 켜씩 지워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풍물 잡는 소리로
산탄 같은 참새 떼가 일시에 날고
땅거미가 점령한 수수밭에는
웃자란 녀석들이 포로가 되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장에 갔다 술 취해
뉘엿뉘엿 돌아오는 할아버지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나의 희망이 무엇이냐?)
그 거나한 주정처럼
남모를 노여움이 비틀거렸다
갈 길만 바빠 서러운 노년이
논두렁길 따라 쓸쓸히 나부끼는
하얀 두루마기 자락에
문득 객혈하듯 날인된
저녁놀 한 점
어둑어둑 지워지고 있었다.
풍뎅이
임영조
전생에 지은 죄 중에
또 무슨 업보(業報)가 남아
무서운 능지를 당해야 하나
한물간 이 나이에
빼앗길 무엇이 남아
남루한 생에 종지부를 못 찍고
무조건 용서빌 듯 살아야 하나
한때는 나도
제법 튼튼한 갑옷에
가볍고 멋진 날개를 달고
하늘을 훨훨 날기도 했는데
세상을 내려다보며
혁명(革命)을 꿈꾸기도 했는데
아, 이제 나는
손발이 달아나고
목이 비틀린 채
잔등으로 춤을 추는 피에로
사람이 무섭다
제발 살려달라며
정말 살고 싶다며
치욕스런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밥줄을 끊고
내내 잠들고 싶다
말세(末世)로 초토화된 땅
그 절망의 아침에
환생하듯 조용히 눈뜨고 싶다.
하일주제(夏日主題)
임영조
바쁜 생성으로 눈부신
아침 한 나절
남향 창 올리는 손마디에서
뜨겁게 흔들리는 여름을 본다.
냉수를 비운 그대 유리컵 속에
내 시선 가득 부으면, 금세
떠밀려 부서지는 남국의 파도 소리
그 은은한 발치에서 아기가 잔다.
고요가 자리한 꽃밭
한 자락을 딛고 일어선 과목(果木).
아내는 지금
청과가 영그는 소리 곁에서
주물주물 계절을 빨아 넌다.
후미진 동구 밖
엿보이는 돌배 밭에선
바람을 몰아오는 검은 아이들
돌배를 씹으며 히쭉이는
그 하얀 치아가
푸르게도 물드는 여름을 본다.
한란꽃
임영조
봄 여름 가을이 가고
눈이 와서 조용한 겨울
참 고고하던 여류(女流)의 시를 읽는다
세월의 한켠에 비켜서서
칼끝이 푸른 절개를 지켜
오랜 침묵 끝에 발표한
그녀의 눈부신 개화(開花)
누구의 사족이나 발문도 필요 없는
저 청정한 변신을 보며
옳거니! 옳거니!
나는 다만 무릎을 칠 뿐
허튼 말은 일체 삼가고 싶다
그리고 허락한다면
가장 후한 값으로
그녀의 속 깊은 슬픔
온갖 불행까지 사주고 싶다.
행복한 난청
임영조
매봉산 정상 늘 푸른 노송잎
빗질하고 내려오는 솔바람 소리
창법이 서늘한 선골풍이네
멀거니 홀로 듣는 동편제
끊길 듯 이어지는 진양조 다음
눙치는 그 대목에 귀를 세우나
은유가 심해 자주 놓치네
송진 향내 물씬한 가야금 산조
햇살을 튕겨올려 물소리로 바꾸네
듣다보면 한 소절쯤 알 듯도 한데
저 아득하고 먼 득음
오며오며 남들이 다 들어버려
내 몫은 너무 작아 알아듣지 못하고
다만 산 아래 마을
목련꽃 터지는 소리만 보네
이야기는 버리고 음색만 읽는
이 행복한 난청!
허수아비의 춤
임영조
지금도 고향에 가면
이승에서 끊어진 세월을 잇는
어머니의 베틀 소리 들린다
풍천 임씨 가문과
광산 김씨 가문이
한 필의 인연으로 짜이는
어머니의 고단한 베틀 소리 들린다
내 가난한 유년의 꿈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직조되는
그 질긴 모정의 베틀 곁에서
나는 늘 허기진 불씨로 눈떠
구구단을 외우고 일기를 썼다
이일은 이, 이이는 사, 이삼은 육......
구단까지 외우고 다시 외워도
눈물에 젖은 어머니의 실꾸리는
어두운 북 속에서 더디 풀리고
나의 일기장을 적시던
뜨거운 모음(母音)과 슬픈 자음(子音)은
한 소절씩 밤하늘로 날아가
가장 추운 별이 되어 떨다가
더러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울었다
이 다음 내가 다 크면
나의 남루를 모두 기워서
어둠을 적시는 달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끝내 아무것도 못 되고
어릴 적 아픈 가락 다시 뽑는
빈 가슴 구멍난 피리로 흐느낀다
내 나이 벌써 사십줄
누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을까
이젠 너무 멀리 떠나와
되돌아갈 길조차 막막한 나이
그래도 고향에 가면
이승에서 끊어진 세월을 잇는
어머니의 은은한 베틀 소리 듣는다.
호박꽃
임영조
쩔쩔 끓는 삼복염천
성남 변두리 척박한 땅에
뿌리를 박듯 좌판을 벌여놓고
아무튼 열심히 사는
내 고향 점례를 보았습니다
남이야 뭐라거나 말거나
전혀 개의치 않고
질펀한 맨땅에 퍼질러 앉아
호호호호 샛노란 웃음도 파는
억척스런 점례를 보았습니다
더러는 상스러운 이웃과 함께
객쩍은 농담도 좀 주고받으며
아등바등 온몸으로 기어가
아픈 삶을 움켜쥐는 덩굴손
내 고향 점례를 보았습니다
헤어진 지 스물여섯 해 만에.
혼자 먹는 밥
임영조
외딴 섬에 홀로 앉아 밥을 먹는다
동태찌개 백반 일 인분에 삼천 오백 원
호박나물 도라지무침 김치 몇 조각
깻잎 장아찌 몇 장을 곁들인 오찬이다
먹기 위해 사는가 묻지 마라
누구나 때가 되면 먹는다
살기 위해 먹는가, 어쨌거나
밥은 산 자의 몫이므로 먹는다
빈둥빈둥 한나절을 보내도
나는 또 욕 먹듯 밥을 먹는다
은행에서 명퇴한 동창생은 말한다
(위로인지 조롱인지 부럽다는 듯)
시 쓰는 너는 밥값한다고
생산적인 일을 해서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아직 이 세상 누구를 위해
뜨끈한 밥이 돼 본 적 없다
누구의 가슴을 덥혀줄 숟갈은 커녕
밥도 안되고 돈도 안되는
시 한 줄도 못 쓰고 밥을 먹다니!
유일한 친구 보세란(報歲蘭) 한 분이
유심히 지켜보는 가운데
혼자서 먹는 밥은 왜
거저먹는 잿밥처럼 목이 매는가
먹어도 우울하고 배가 고픈가
반추하며 혼자 먹는 밥
화려한 오독(誤讀)
임영조
장마 걷힌 칠월 땡볕에
지렁이가 슬슬 세상을 잰다
시멘트 길을 온몸으로 긴 자국
행서도 아니고 예서도 아닌
초서체로 갈겨쓴 일대기 같다
한평생 초야에 숨어 굴린 화두를
최후로 남긴 한 행 절명시 같다
그 판독이 어려운 일필휘지를
촉새 몇 마리 따라가며 읽는다
혀 짧은 부리로 쿡쿡 쪼아 맛본다
제멋대로 재잘대는 화려한 오독
각설이 지렁이의 몸보다 길다
오죽 답답하고 지루했으면
은자(隱者)가 몸소 나와 배밀이 하랴
쉬파리 떼 성가신 무더위에
벌겋게 달아오른 육두문자(肉頭文字)로
환절기
임영조
밖에는 지금
건조한 바람이 불고
젖은 빨래가 소문 없이 말랐다
생나무가 마르고 산이 마르고
도시의 관절이 삐걱거렸다
사람들은 늘 갈증이 심해
내뱉는 말끝마다 먼지가 났다
가슴이 마르니까 눈만 커진 체
안부를 물어도 딴전이나 부리며
저마다 귀를 빨리 닫았다
저 멀리 좌정한 산이
어께를 들썩이며 기침을 하자
온 마을엔 별의별 풍문이 돌고
긴장한 나무들은 손을 들고 떨었다
세상은 이제
누군가 불만 댕기면
활활 타버릴 인화성 물질
건조주의보가 내려진 날은
단 한 방울 눈물도 보이지 말고
자나 깨나 조심
오나가나 입조심
어쨌거나 요즘은 환절기니까.
회전문
임영조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거대한 공룡의齒車
그 견고한 아가리에
전신을 구워놓고 천천히
지문을 날인하듯 힘을 가하면
비로소 접수된다, 나의 하루는
바쁘게 분해 도니다,가시만 남고
(망측하게 거덜난 해체시처럼)
워낙 질겨서 터진 적 없는
이 시대의 伏魔殿
속 검어 어두운 내장 속에서
날마다 반추된 나의 육신은
몇 그램의 자양으로 흡수 됐을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르는 문은 크고 넓으니.....>
그래서 大道道門 앞에는 늘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 않는가?
닫혔다 하면 열리고
열렸나 하면 닫혀 있는 입
그 미심쩍은 입구로 들어가
온종일 머리를 회전하는 사람들
저녁때면 납작한 오징어로 나온다
단물 빨고 뱉어낸 수박씨처럼
까맣게 흩어져 어둠이 된다.
1월
임영조
다시 받는다
서설(瑞雪)처럼 차고 빛 부신
희망의 백지(白紙) 한 장
(시작이 반이다?)
이 문(門)만 열고 가면
무엇이든 잘될 것 같아
턱없이 가슴 설레며
저마다 받아던 시험지 한 장
절대로 여벌은 없다
(이번만은 꼭......)
건강에 대하여
행복에 대하여
장래에 대하여
몇 번씩 고쳐쓰는 답안지
(인생에 정답은 없다!)
나는 지금
재수(再修)인가? 삼수(三修)인가?
아니면 미지수(未知數)인가?
2월
임영조
온몸이 쑤신다.
신열이 돌고 갈증이 나고
잔기침 터질듯 목이 가렵다.
춥고 긴 엄동(嚴冬)을 지나
햇빛 반가운 봄으로 가는
해빙의 관절마다 나른한 통증
그 지독한 몸살처럼
2월은 온다, 이제
무거운 내복은 벗어도 될까
곤한 잠을 노크하는 빗소리
창문을 열까 말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2월은 왔다 간다.
늘 키 작고 조용해서
간혹 잊기 쉬운 여자(女子)처럼....
3월
임영조
밖에는 지금
누가 오고 있느냐
흙먼지 자욱한 꽃샘바람
먼 산이 꿈틀거린다
나른한 햇볕 아래
선잠 깬 나무들이 기지개 켜듯
하늘을 힘껏 밀어 올리자
조르르 구르는 푸른 물소리
문득 귀가 맑게 트인다
누가 또 내 말 하는지
떠도는 소문처럼 바람이 불고
턱없이 가슴 뛰는 기대로
입술이 트듯 꽃망울이 부푼다
오늘은 무슨 기별 없을까
온종일 궁금한 삼월
그 미완의 화폭 위에
그리운 이름들을 써놓고
찬연한 부활을 기다려본다.
4월에
임영조
사월은 천상
입덧 끝난 아내의 표정이다.
부신 햇빛 속에서
색깔이 번지는 화복이다.
어느새 산그늘은 무너져
내 깊은 눈썹 끝을 적시고
하늘엔 온통 푸른 물소리
그 소리는 금세 바람이 되어
복사나무 가지에 핀 웃음이 되어
와아! 와아!
일제히 터지는 분홍빛 탄생,
나도 거기 한몫 끼어서
잊었던 나를 불러볼까나.
문득 새옷 입고 날아온
까치의 목청이 청아한 오늘
온갖 소식도 다시 풀려서
내게는 궁금한 것 더는 없거니.
친구여, 이런 날은
전생에 깜박 잊은 여자의
서러운 안부라도 듣고 싶어라.
6월
임영조
언제쯤 철이 들까
언제쯤 눈에 찰까
하는 짓이 내내 여리고 순한
열댓살적 철부지 아들만 같다
계절은 어느새 저렇게 자라
검푸른 어께를 으스대는가
제법 무성해진 體毛를 일렁거리며
더러는 과격한 몸짓으로
지상을 푸르게 제압하는
6월의 들녘에 서면
나는 그저 반갑고 고마울 따름
가슴속 기우(紀憂)를 이제 지운다
뜨거운 생성의 피가 들끓어
목소리도 싱그러운 병성기
저 당당한 6월 하늘 아래 서면
나도 문득 퍼렇게 질려
살아서 숨 쉬는 것조차
자꾸만 면구스런 생각이 든다
죄지은 일도 없이
무조건 용서를 빌고 싶은
6월엔
7월의 숲
임영조
칠월의 숲에 가면
시퍼런 함성이 들린다
이제 한참 겁없고 혈기왕성한
재야(在野)의 사내들이
신선한 주장의 피켓을 들고
세상을 향해 사자후를 토한다
저마다 푸른 띠를 두르고
온 산을 점거한 채
물오른 팔을 뻗어 일제히 성토한다
동참하라!
동참하라!
산 자여, 따르라!
오리나무 참나무 때죽나무 밤나무
떡갈나무 엄나무 물푸레나무.....
전후 혹은 좌우로도 기울지 않고
내내 말없던 다수(多數)가, 아니
신분이 미심쩍은 한해살이 풀까지
기세좋게 일으나 가담하다니
그들은 왜 앉거나 눕는 법 없이
부작정 위로만 뻗는가?
그들은 왜 초지일관
녹색혁명만 고집하다가
결국엔 단풍(丹楓)으로 지고 마는가?
저 격렬한 구호(口號) 앞에서
나는 선뜻 동조하지 못한다
그저 몸둘 바를 모르고 가슴만 뛸 뿐
보호색은 탄색(炭色)이 무난한 시대
한 마리의 소심한 자벌레처럼.
8월의 산(山)
임영조
그녀는 늘
태양의 피를 받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늘을 향해 정좌하고 빌었다
어느덧 임신 팔 개월인 그녀는
날마다 태교(胎敎)에 열중하듯
허튼 말을 삼가고
세속(世俗)도 가급적 멀리하였다
그녀는 또
서서히 불러오는 배와
난처하게 돌기한 성애(性愛)의 구릉을
무성한 숲으로 모두 가리고
쓸데없는 욕정은 자제하였다
드디어 태동이 격렬해지자
더욱 민감해진 그녀는
밤마다 심한 갈증으로 시달려
창백한 달빛에도 살을 데었다
그녀는 요즘
더의를 식히는 아침이슬로
온몸을 자주 씻고 화장기를 지웠다
한때의 방종한 추억을 잊고
이제야 비로소 철드는 여자처럼
모성(母性)에 눈을 뜨고 있었다.
12월
임영조
올 데까지 왔구나
막다른 골목
피곤한 사나이가 홀로 서 있다
훤칠한 키에 창백한 얼굴
이따금 무엇엔가 쫓기듯
시계를 자주 보는 사나이
외투깃을 세우며 서성거린다
꽁꽁 얼어붙은 천지엔
하얀 자막처럼 눈이 내리고
허둥지둥 막을 내린 드라마
올해도 나는 단역이었지
뼈빠지게 일하고 세금 잘 내는
뒤돌아보지 말자
더러는 잊고
더러는 여기까지 함께 온
사랑이며 증오는
이쯤에서 매듭을 짖자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입김을 불며 얼룩을 닦듯
온갖 애증을 지우고 가자
이 춥고 긴 여백 위에
이만 총총 마침표 찍고.
50을 바라보며
임영조
향방이 더욱 분명한 나이
더 이상 머뭇거릴 겨를이 없다
전에는 안 보이던 뒷모습도 보이니
무엇을 주고도 멋쩍은 나이
더러는 햇빛 받는 것조차 송구스럽다
눈높이를 낮추고
귀를 닫고 걸어도
저절로 가속이 붙는 나이
자꾸만 침묵이 두렵고
문득 말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