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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이시영(1949~ )

가로등

가을

가을날

가을 산

가을에

가을의 소원

가을이 와도

개 두 마리

검은 운명

겨울 속의 봄 이야기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경찰은 물러가라

고개

고사운(古寺韻)

고요한 가을

고향

골짜기

공사장 끝에

관념을 벗고 세상의 나무를 보다

관촌수필

교감

구례 장에서

귀가

귀래사를 그리며

그네

그대의 시 앞에

그리움

그리움을 배우며

그해 겨울

기러기 떼

기억

기찻집 풍경

김사인의 흰 고무신

김수영조(調)로

김순례, 19세

김종삼조(調)로

나라 없는 나라

나무

나무에게

나무의 숨결

나비가 돌아왔다

나의 나

나의 노래

나의 우주

나의 패배

내가 언제

내관(內觀)

내소사(來蘇寺)

노래

노변정담

노숙(露宿)

누룩

누이들

눈(眼)

눈(雪)

눈이 내린다

눈이 부신 날에

늙은 이모전(傳)

늦가을

다람쥐들

당숙모

답일초선사혜음(答一超禪師惠音)

대기의 힘

덴찌(電池) 이야기

돌산

동계작전

동몽골에서

동안

두 사람

두 알

들길

땅 팔자

또 소 새끼 난 날

또 한 무늬

라일락 향

마을에 연기 나네

마을의 아침

마음에게

마음의 고향

만월(滿月)

맑은 날

매형

맺힘

머슴 고타관씨

모닥불

목숨

몽골 시편

무늬

무덤에 관하여

무지개

문학이라는 이름

문화이발관

물결 앞에서

물길

물맞이

미당이 구룡포 가서

미루나무

미인

밑줄을 긋다

바다의 시위

바람

바람아

바람이 불면

반짝이는 것은 무엇인가

반체제

발자국

밝은 날

밤마실

밤섬에

방학

벌판으로

법(法)

베스트셀러 시인들을 위하여

변함없는 일

복구

봄 논

봄 송신(送信)

봄 햇살

불꽃의 시절

불빛을 찾아

비밀

비룡(飛龍)

비상

빈 들

빗방울 하나가

사냥

사시(斜視)에 대하여

사이

삼우후(三虞後)

상봉

새벽

새벽까지

새벽 두 시

새우도(圖)

새해 달력을 보다

생(生)

생명

서시

서영분 양

서울역에서

석양

석양녘

석양빛 석양빛

성자(聖者)처럼

성장

소나기

솔숲에서

솔잎 향기

송사리들

수건 쓴 여자

수평선

숲에 가면

시골

시(詩)를 쓰려면

시(詩)를 찾아서

시월

시의 집

시인

시인 나귀

시인의 눈

신록

신새벽

십일월

십이월

싸락눈 내리는 저녁

아득한 산

아름다운 결정전

아름다운 분할

아수라(阿修羅)

아슬한 거처

아심찮다

아주 잠깐

아침

아침의 몽상

아침의 장관

아침이면

아, 4월

암소를 몰다

애련(哀憐)

애월(涯月) 지나며

야옹(夜翁)

어느 굽이

어느 삶

어느 석양

어느 쓸쓸한 중의 심사에 비친...

어느 아침

어느 저녁의 풍경

어느 토요일 오후 마포 생맥주집에서 나해철 시인과 함께 들은 이야기

어떤 개인 날

어떤 성화(聖畫)

어떤 이별

어린 동화

어머니

어머니 생각

엄연한 봄날

여덟 살 적

여름

여름밤

여름 속에서

여의도의 봄

영화 ‘희랍인 조르바’

예감

옛 거울 앞에서

옛 시

오늘 같은 날

오늘 밤

오탁번의 시

옥체

웅성거림

유정다방

유쾌한 날들

유쾌한 뉴스

은빛 물빛

은행나무 아래서

의왕사의 봄

의자

이름

이 세계

이순의 아침

이슬

이야기

이 책을 보라

인덕원

인동(忍冬)

인연

일요 삽화

임종

잎들

자매처럼

자연

자욱하시다

자유

자취

작별

작은 점 하나

잠들기 전에

장발 단속

저 50년대

저녁

저녁 빛 속

저녁 산길

저녁상

저녁에

저녁의 시간

저물녘

저세상

저 잎새 하나

전문가

젊은 동리

정님이

조국

조금 후

조조정진(早朝精進)

조춘(早春)

좋은 기쁜 날

죽음

즈가버지

지구별에서

지나면서

지리산

지상의 방 한 칸

지평선에서

직입(直入)

집을 잃은 영혼

차부(車部)에서

철거

춘천

침묵의 무늬

칭장고원에서

타작

타작 후

타협의 길로 들어서서

탄생

태양 빛

테렐지 숲에서 생긴 일

편지

평택 지나며

평행

평화롭게

푸른 제복

풀꾼

풀잎 이슬

풍경

하동

한로(寒露)

한 생각

한여름

한 줌

함양

행렬

행복

형제

형제들을 위하여

호랑나비

호명(呼名)

호수

호야네 말

홀로 지키는 외로움

홍조

화살

후꾸도

후포

흉년

흥대 이센

히말라야

2호선

5월 어머니회

14K

1956~88

1972년 겨울

1974

8. 15

 

 

 

가로등

이시영

 

밤늦은 시간 누가 홀로 공원을 가로지른다

어렵게 한 세계를 놓고 떠나는 자의 그림자가

뒤에서 한없이 자유롭다

 

 

 

가을

이시영

 

송아지가 볼이 미어져라 상큼한 햇짚을 넣고 씹는다

어미 소가 이윽히 보다가

저도 모르게 한번 헤벌쭉 웃는다

 

 

 

가을날

이시영

 

잠자리 한 마리가 감나무 가지 끝에 앉아

종일을 졸고 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차가운 소나기가 가지를 후려쳐도

옮겨 앉지 않는다

가만히 다가가 보니

거기 그대로 그만 아슬히 입적하시었다.

 

 

 

가을 산

이시영

 

가을 산이 옷을 벗고

눈을 뜬다.

갈대들도 마른 발짝 소리를 낸다.

지난여름 우리는 참으로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러나 이제 조용히 눈을 감고

스스로의 중심을 향해 돌아서야 할 때

가을 산이 갈색 눈을 뜨고

뿌리 깊이에서 다시 한번 불끈 솟는다

 

 

 

가을에

이시영

 

내 영혼은 낙엽

차고 또 차오르며

하늘 높이 날으고도 싶지만

그대 어깨를 스치며

발목 깊숙이 또한 내리고도 싶다

 

 

 

가을의 소원

이시영

 

내 나이 마흔일곱,

나 앞으로 무슨 큰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진즉 그것을 알았어야지!)

틈나면(실업자라면 더욱 좋고)

남원에서 곡성 거쳐 구례 가는 섬진강 길을

머리 위의 굵은 밀잠자리 떼 동무 삼아 터덜터덜 걷다가

거기 압록 지나 강변횟집에 들러 아직도 곰의 손발을 지닌

곰금주의 두툼한 어깨를 툭 치며

맑디맑은 공기 속에서 소처럼 한번 씨익 웃어 보는 일!

 

 

 

가을이 와도

이시영

 

가을이 와도 분명한 사람들은

손 들어야 할 곳에서 분명하게 손을 들고

너무도 분명한 곳을 가리키며 망설임도 없이

분명한 코로 길을 건너가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보는 것은 그들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번만 돌아다보라 분명한 자들이여

돌아온 가을은 그렇게 분명하지만은 않다

등 뒤로 빠져나간 어떤 가을은 벌판으로 가서

깨밭의 참새들을 털다가 쌍눈깔의 밭주인에게

뒷다리가 붙잡혀 몰매를 맞는다

 

가을이 와도 기교주의자들은

더욱 기교적으로 밥을 먹고 기교적인 파란 똥을 눈다

큰 입을 벌려

파란 똥은 이 시대의 최상의 아름다움이라고 떠들다

기교 최상의 잡지사에서 만나

밤이슬에 젖은 목을 잦혀

탄성을 지른다

그러나 기교주의자들이여 바라보아라

돌아온 가을은 그렇게 기교적이지만은 않다

그대들의 기교적인 웃음에 놀라

창밖으로 뛰쳐나간 어떤 가을은

거리의 술꾼들이 던진 소주병에 머리를 얻어맞고

통금이 지나도 일어서지 못하고 피를 흘린다

 

 

 

개 두 마리

이시영

 

보문사에서 놓아기르는 그 두 개는 덩치가 곰만 한데

스님의 말씀을 잘 들어선 지 눈매가 선하다

 

 

 

검은 운명

이시영

 

정돈을 끝낸 차들이 깨끗이 쉬고 있다

밤 열두 시 아파트 한마당 가득

쏘나타는 쏘나타의 꿈을 안은 채

크레도스는 크레도스의 희망을 품은 채

BMW는 BMW의 무적의 자랑을 안은 채

내일 아침 총알처럼 뛰쳐나갈 운명을 예감하며

날렵한 엉덩이를 슬쩍 들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게 잠들어 있다

 

 

 

겨울 속의 봄 이야기

이시영

 

용산구 산천동 산천아파트 재개발공사 현장

아침 햇살 아래 새끼 고양이 여섯 마리를 고스란히 낳아놓고

어미 고양이가 먼저 저세상으로 갔다

그의 찬란한 죽음에 영광 있어라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이시영 

 

경찰은 그들을 적으로 생각하였다. 20일 오전 5시 30분, 한강로 일대 5차선 도로의 교통이 전면 통제되었다.

경찰 병력 20개 중대 1,600명과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대테러 담당 경찰특공대 49명, 그리고 살수차 4대가 배치되었다.

 

경찰은 처음부터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강로 2가 재개발 지역의 철거 예정 5층 상가 건물 옥상에 컨테이너 박스 등으로 망루를 설치하고 농성중인 세입자 철거민 50여명도 경찰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최후의 자위책으로 화염병과 염산 병 그리고 시너 60여 통을 옥상에 확보했다.

6시 5분, 경찰이 건물 1층으로 진입을 시도하자 곧바로 화염병이 투척되었다.

6시 10분, 살수차가 건물 옥상을 향해 거센 물대포를 쏘았다.

경찰은 쥐처럼 물에 흠뻑 젖은 시민을 중요 범죄자나 테러범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6시 45분, 경찰특공대원 13명이 기중기로 끌어올려진 컨테이너를 타고 옥상에 투입되었다.

이때 컨테이너가 망루에 거세게 부딪쳤고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이 물대포를 갈랐다.

7시 10분, 망루에서 첫 화재가 발생했다.

7시 20분, 특공대원 10명이 추가로 옥상에 투입되었다.

7시 26분, 특공대원들이 망루 1단에 진입하자 농성자들이 위층으로 올라가 격렬히 저항했고 이때 내부에서 벌건 불길이 새어나오기 시작했으며 큰 폭발음과 함께 망루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물대포로 인해 옥상 바닥엔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물이 흥건했고 그 위를 가벼운 시너가 떠다니고 있었다.

이때 불길 속에서 뛰쳐나온 농성자 3, 4명이 연기를 피해 옥상 난간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외쳤으나 아무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매트리스도 없는 차가운 길바닥 위로 떨어졌다.

이날의 투입 작전은 경찰 한 명을 포함, 여섯 구의 숯처럼 까맣게 탄 시신을 망루 안에 남긴 채 끝났으나

애초에 경찰은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철거민 또한 그들을 전혀 자신의 경찰로 여기지 않았다

 

 

 

고개

이시영

 

앞산길 첩첩 뒷산길 첩첩

돌아보면 정든 봉 첩첩

아재야 아재야 정갭이 아재야

지게목 떨어진다 한 가락 뽑아라

네 소리 아니고는 못 넘어가겠다

기러기떼 돌아 넘는 천황재 아홉 굽이

내 오늘 너를 묶어 이 고개 넘는다만

언제나 벗어나리,

가도 가도 서러운 머슴살이 우리 신세

청포꽃 되어 너는 어덕 아래 살짝 필래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훨훨 날래

한 주인을 벗어나면 또 다른 주인

한세월 섬기고 나면 더 검은 세월

못 살아가겠다고 못 참겠다고 너도 울고 낫도 울고 쩌렁쩌렁 울었지만

오늘은 찬 바람에 봉두난발 날리며

말없이 너도 넘고 나도 넘는다

뭇새들 저러이 울어 예

차마 발 떨어지지 않는 느티목 고개,

묶인 너 부여안고 한 번 넘으면 그만인 아, 죽살잇 고개를

 

 

 

고사운(古寺韻)

이시영

 

산사는 졸고

노승은 방문을 활짝 열어둔 채

먼 토굴에 면벽하러 가고 없고

새까마니 그을은 툇마루에서 막 바랑을 풀던 객승 하나

낯선 인기척에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쏘내기 소리로 딱! 이마를 치며 다가서는 커다란 앞산 그리메를 본다

잠시후 소나무 버텅 사이를 더텨 내려가는 곰의 발바닥 같은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스님, 이놈 또 갑니다』

 

 

 

고요한 가을

이시영

 

가을 속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가까이서 멀리서 나 부르는 소리

부르다가 다가서면 귀 세우고 더듬이째 잦아드는 소리

 

가을 속에는 누가 오고 있을까

산 넘고 물 건너 긴 다리를 뻗어

쓰러져서도 발소리 죽여 야밤을 타는 소리

새벽을 딛는 소리

 

가을 속에는 누가 기다리고 있을까

풀섶에 스치는 타는 눈동자

등뒤에서도 갈참나무 뒤에서도 빛나는 눈동자

가을 속에는 누가 누가 숨어 오고 있을까

 

 

 

골짜기

이시영

 

"시응이 갸가 요지음 놀고 있는 갔습디다요......"

"어찌 그까 이......"

".........."

".........."

 

어느 초라한 무덤가에 빈 소주병 하나

그리고 빗물에 방금 씻긴 듯한 깨끗한 종이컵 하나

 

 

 

공사장 끝에 

이시영

 

"지금 부숴버릴까."

"안돼, 오늘밤은 자게 하고 내일 아침에……."

"안돼, 오늘밤은 오늘밤은이 벌써 며칠째야 ? 소장이 알면……."

"그래도 안돼……."

두런두런 인부들 목소리 꿈결처럼 섞이어 들려오는

루핑집 안 단칸 벽에 기대어 그 여자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 것들을

불빛인 듯 덮어주고는

가만히 일어나 앉아

칠흙처럼 깜깜한 밖을 내다본다.

 

 

 

관념을 벗고 세상의 나무를 보다

이시영

 

푸른 하늘 아래

잎들을 온전히 벗은 미루나무 하나가

찬바람에 잔잔히 흔들리며 미소 지으며

죽음도 잊은 채 그대로 푸른 하늘의

일부가 되고 있다

 

 

 

관촌수필

이시영

 

소년 문구 형이 아직 어린 영조 형을 업고 뜰팡에서

구슬치기하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곳은 어디인가?

 

 

 

교감(交感)

이시영

 

까치 한 마리가 어젯밤 제집에 돌아오지 않았나 보다

밤새도록 늙은 까치는 캄캄한 허공을 쪼면서 울부짖는다

저 멀리 인가에 하나둘 불이 밝는다

 

 

 

구례 장에서

이시영

 

흰옷은 정결하다

마지막 조선의 할머니가

외로 앉아서 파릇한 봄 냉이를 판다

 

 

 

귀가

이시영

누군가의 구둣발이 지렁이 한 마리를 밟고 지나갔다

그 발은 뚜벅뚜벅 걸어가

그들만의 단란한 식탁에서 환히 웃고 있으리라

지렁이 한 마리가 포도에서 으깨어진 머리들 들어

간신히 집 쪽을 바라보는 동안

 

 

 

귀래사를 그리며

이시영

 

귀래사라는 절이 어디 있더라? 하여간 이 지상 어딘가에 있긴 있겠지. 이제 그만 그곳에 닿고 싶다. 가서 나무를 해도 좋겠고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고 싸리비로 절 마당이나 쓸라고 하면 그 또한 좋겠지. 늙으신 보살이 차려준 공양을 정성껏 비운 뒤 뒷산 남새밭에 가서 하루 종일 잡풀들과 일하리라. 가끔 일어서서 허리를 곧추세워 독수리눈으로 하늘을 보리라. 청청히 텅 빈 하늘, 그리고 목화 송이처럼 흐르는 구름들. 저녁을 마치면 골방에 틀어박혀 잡서를 읽으리라. 그리고 세상과 등을 지고 나와 대면하리라.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겠지만 그 또한 잠깐의 인연. 훨훨 털고 텅 빈 벽에 바짝 붙어 단잠을 자다 소변을 눈 뒤 절 뒤꼍 해우소 근처에서 오래 서성이리라. 텅 텅 울리는 새벽 종소리가 아픈 무릎에 스밀 때까지.

 

 

 

그네

이시영

 

아파트의 낡은 계단과 계단 사이에 쳐진

거미줄 하나

외진 곳에서도 이어지는 누군가의

필생

 

 

 

그대의 시 앞에

이시영

 

고독을 모르는 문학이 있다면

그건 사기리

밤새도록 앞뜰에 폭풍우 쓸고 지나간 뒤

뿌리가 허옇게 드러난 잔바람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위태로이 위태로이 자신의 전존재를 다해 사운거리고 있다

 

 

 

그리움

이시영

 

두고 온 것들이 빛나는 때가 있다

빛나는 때를 위해 소금을 뿌리며

우리는 이 저녁을 떠돌고 있는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등불 하나 켜든 이 보이지 않고

등불 뒤에 속삭이며 밤을 지키는

발자국소리 들리지 않는다

잊혀진 목소리가 살아나는 때가 있다

잊혀진 한 목소리 잊혀진 다른 목소리의 끝을 찾아

목 메이게 부르짖다 잦아드는 때가 있다

잦아드는 외마디소리를 찾아 칼날 세우고

우리는 이 새벽길 숨가쁘게 넘고 있는가

하늘 올려보아도

함께 어둠 지새던 별 하나 눈뜨지 않는다

그래도 두고 온 것들은 빛나는가

빛을 뿜으면서 한 번은 되살아나는가

우리가 뿌린 소금들 반짝반짝 별빛이 되어

오던 길 환히 비춰주고 있으니

 

 

 

그리움을 배우며

이시영

 

언제나 그러했듯

그리움은

넋 나간 외로움은 아니어라

마디마디 엉겨 붙은

설운 살점 뜯어

낯설은 기억 속에 얽매놓으면

빛바랜 사진 뒤고

장대비만 일어서고

문둥이 가슴마저 허물어져

갯가 빈 껍질처럼 치이다가

달 없는 그믐에

거센 파도 따라 울며

깊은 물결 속으로 숨어들고 말아

언제나 그렇듯

둘의 외로움은

손끝까지 저린 그리움만은 아니어라..

 

 

 

그해 겨울

이시영

 

아버지 아파 누워 계셨을 때 고향 집 찾았다가 사랑채 마루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던 감나무. 너 이제 좀 더 자라 의젓한 나무 되었는지. 서울행 기적소리 들으며 작별인사차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다가서자 간신히 들려오던 목소리.

󰡒나, 약 좀 사다 달라!󰡓 나 그 약속 지키지 못하고 동구 앞 팽하니 지나 타바타박 걸었네. 그날 수레바퀴 자국 선명한 신작로까지 따라와 울던 갈가마귀. 너도 인제 다 자라 푸른 하늘 매서웁게 나는지.

 

 

 

기러기 떼

이시영

 

기러기들 날아오른다

얼어붙은 찬 하늘 속으로 소리도 없이

싸움의 땅에서

초연이 걷히지 않은 땅에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바람 속에서

오늘 눈 감은 나의 형제들처럼

 

 

 

기억

이시영

 

인사동 처마 끝에 낙숫물 듣는 소리

방금 비둘기가 앉았다 날아간 자리가 파르르 젖는다

"순간적인 생의 흔적 혹은 그 움직임을 묘파해 내는 미세함이 너무 좋으네요"

 

 

 

기찻집 풍경

이시영

 

무교동에 드럼통이 몇 개 놓인 기찻굴 같은 컴컴한 술집이 있었다. 대낮부터 그곳의 카바이트 막걸리에 취한 박용래 선생이 막 들어서던 송기원을 향해 죽은 김관식이 어떻게 살아왔냐며 마구 안고 볼을 부비는 통에 산 송기원은 물론 우리 모두가 깜짝 놀란 바 있다.

 

 

 

김사인의 흰 고무신

이시영

 

그날 밤은 모든 것이 예정된 것처럼 보였다. 폭우 속을 뚫고 김사인이 왔었고 흰 고무신을 신고 있었고 새로 막 시작된 술자리가 새벽으로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천둥소리 속에 밖에서 누가 희미하게 나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설연이가 귀를 쫑긋 세우고 달려가 문을 열었더니 송기원과 나의 처가 거센 빗줄기 속에서 기세등등 들이닥치고 있었다. "복희년 나오라고 그래!" 바로 그때였다. 나와 송 사이에서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있던 사인이가 갑자기 일어나 문밖으로 내빼는데 흰 고무신 신은 발이 비호처럼 빨랐다. 그리고 빗속을 번개처럼 가르며 사라졌다. 복희씨가 졸린 눈을 뜨기도 전에, 송과 나의 처가 시퍼렇게 걷어붙인 팔을 풀기도 전에 일어난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김수영조로

이시영

 

시를 읽자

부지런히 읽자

네 영혼에 때가 끼기 전에

시도 쓰자

부지런히 쓰자

마른 영혼이 바람에 불려가지 않게

묵직한 놈으로

시의 길은 처음 가는 길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가는 길

 

 

 

김순례, 19세

이시영

장춘(長春)에서 도문(圖們)으로 가는 열차는 씩씩하다

검표원인 조선족 처녀도 검푸르고 씩씩하다

고향인 도문에 가면 24시간 쉴 수 있다며

그곳엔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홉 형제도 두만강 가에 함께 산다며

 

 

 

김종삼조(金宗三調)로

이시영

1994년 5월, 음력 4월 16일

다리 저는 할머니 한분이

용현의원 3층 계단을 조심조심 오르고 있었다

자그맣고 아주 조용했다

평생을 노점에서 채소만 팔던 할머니였을까

햇살이 아예 그쪽 자리로만 몰리고 있어서

할머니 뒤꼭지에 이따금 커다란 圓光 자국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시영

 

호수에 빗방울 듣기니

수련 한 송이 반쯤 입을 열고

물속을 내려다보다

하늘 향해 갑자기 불같은 새하얀 고개를 들다

 

 

 

이시영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게 말했다

바다 건너 서양 나라에 가 부잣집 딸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그래서 공부 많이 한 학생이 되고 싶다고

 

칠 년이 지나도 그 말이 가슴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어머니는 30년대 이 땅의 가난한 방직 여공이셨다

 

 

 

'나라' 없는 나라

이시영

 

어디 남태평양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섬은 없을까.

국경도 없고 경계도 없고 그리하여 군대나 경찰은

더욱 없는. 낮에는 바다에 뛰어들어 솟구치는 물고기를 잡고

야자수 아래 통통한 아랫배를 드러내고 낮잠을 자며

이웃 섬에서 닭이 울어도 개의치 않고 제국의 상선들이

다가와도 꿈쩍하지 않을 거야. 그 대신 밤이면 주먹만한

별들이 떠서 참치들이 흰 배를 뒤집으며 뛰는 고독한

수평선을 오래 비춰줄 거야. 아, 그런 '나라' 없는

나라가 있다면!

 

 

 

나무

이시영

 

강변에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한 그루는 스러질 듯 옆 나무를 부둥켜안았고

다른 한 그루는 허공을 향해 굳센 가지를 뻗었다

그 위에 까치집 두 채가 소슬히 얹혔다

강변에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나무에게

이시영

 

어느 날 내게 바람 불어와

잎새들이 끄떡끄떡 하는구나

내가 네 발 밑에 오줌을 누고 돌아설 때

수많은 정다운 얼굴로 알은체를 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돌아서자

수많은 오늘 같은 내일의 날이 지난 뒤

내가 불현듯 참다운 네가 되어 돌아오마

 

 

 

나무의 숨결

이시영

 

아침부터 부는 바람에

잎새가 흔들린다

흔들리는 잎새는 나의 혼이고

바람은 내 혼의 바깥에서 불어온다

불어라 바람,

내 혼의 여린 떨림이 멈출 때까지

흔들려라 나의 잎새,

가지에 부는 바람이 멎을 때까지

 

 

 

나비가 돌아왔다

이시영

 

강변에 나비가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저것은 세계가 변하는 일이다

 

 

 

나의 나

이시영

 

여기 앉아 있는 나를 나의 전부로 보지마

나는 저녁이면 돌아가 단란한 밥상머리에

앉을 수 있는 나일수도 있고,

여름이면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날아가

몇날 며칠을 광포한 모래바람과 싸울 수

있는 나일 수도 있고,

비 내리면 가야산 해인사 뒤쪽 납작

바위에 붙어 앉아

밤새도록 사랑을 나누다가 새벽녁

솔바람 소리속으로

나 아닌 내가되어 허청허청 돌아올 수도 있어

여기에 이렇듯

얌전히 앉아 있는 나를

나의 전부로 보지마.

 

 

 

나의 노래

이시영

 

마음으로 향한 눈을 갖고 싶구나

마음에 대고 듣는 귀,

마음을 열고 고이는 소리를 갖고 싶구나

 

그러나 마음은 자기에게로 걸어오는 눈을 용서하지 않는다

자기 팔에 돋은 귀를 용서하지 않는다

마음이 마음을 용서하지 않는다

 

용서받기 위하여 내 눈은 돌에 가 부딪치고

돌아오기 위하여 내 귀는 거리에 뛰었다

사람들이 내 귀를 밟고 서서 오래오래 태연한 척했다

발바닥 밑에서 소리치는 소리를 밟고 서서

오래오래 모르는 약속들을 했다

 

돌멩이에 스미는 눈을

스며서 크게 열리는 눈을

파도 위에도 돋는 귀를

 

돋아서 한 번은 크게 응답하는 귀를

한 바다를 건너는 소리를

건넜다 다시 와

마음을 안고 고이는 소리를 갖고 싶구나

 

 

 

나의 우주

이시영

 

우주란 원래

소리가 없을 때

우주이다

 

누가 자신을 퍼가는지도 모르게

색(色)도 미동도 없을 때

 

오늘 밤

지상에는 한 귀뚜리가

더듬이를 제 숨결에 착 붙인 채

마지막 몸부림으로 울고

 

그러나

가을이 이내 가고

겨울이 깊어가도

우주는 푸르다

 

 

 

나의 패배

이시영

 

어제 낮의 나의 패배,

어쩌면 오래전부터 예정되어왔던 그것을

이제는 아무 두려움 없이 솔직히 인정하자

뉘우침 속에서 이렇게 밤의 고독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오랜만의 나의 참모습 아니냐

 

그래, 나는 패배했다

그리고 이것은 건너뛸 수 없는 사실이다

밤이여, 커다란 밤이여

네가 나를 밟고서 가라

어둠은 나의 오랜 친구였다

그 속의 쓰라린 빛도!

 

 

 

내가 언제

이시영

 

시인이란,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우주의 사업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언제 나의 입김으로

더운 꽃 한 송이 피워낸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눈물로

이슬 한 방울 지상에 내린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손길로

광원曠原을 거쳐서 내게 달려온 고독한 바람의 잔등을

잠재운 적 있는가 쓰다듬은 적 있는가

 

 

 

내관(內觀)

이시영

 

나를 죽여

내 안의 나를 심화, 확장하는 일

나를 죽여

내 안의 내 마른 나뭇가지에 동백 두어 송이 후끈하게 피워올리는 일

나를 죽여

싸락눈 때리는 날

내 마음의 빈 대숲에 푸른 칼날 수천 개를 일렁이게 하는 일

낮은 바람에도 저를 향해 부드럽게 구부러지게 하는 일

 

 

 

내소사(來蘇寺)

이시영

 

내소사 가을 저녁 대웅전의 모습은

그것이 곧 두 발굽을 차고

하늘로 아슬한 벼랑으로 날아가 버릴 듯했다

그러나 뒷산 늠름한 적요 능선이

만면에 웃음을 참지 못한 채

그것의 두 어깨를 가만히 눌러

앞바다 줄포 앞바다의 쓰라린 석양 무렵에

어부들이 갈매기처럼 끼룩거리며 부산히

물 밀어 오는 소리를 들어라 한다

 

 

 

이시영

 

새들이 마지막 남은 가지에 앉아

위태로이 나무를 부르듯이

그렇게 나를 불러다오

부르는 곳을 찾아

모르는 너를 찾아

밤 벌판에 떨면서

날 밝기 전에

나는 무엇이 되어 서고 싶구나

나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

걷고 싶구나

처음으로 가는 길을

끝없는 길을

 

 

 

노래

이시영

 

사랑한다는 사랑한다는 그 말 한마디 전해드리기 위해

이 강에 섰건만

바람 이리 불고 강물 저리 붉어

못 건너가겠네 못 가겠네

 

잊어버리라 잊어버리라던 그 말 한마디 돌려드리기 위해

이 산마루에 섰건만

천둥 이리 우짖고 비바람 속 낭 저리 깊어

못 다가가겠네 못 가겠네

 

낭이라면 아득한 낭에 핀 한 떨기 꽃처럼,

강이라면 숨 막히는 바위 속,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은빛 찰나의 물고기처럼

 

 

 

노변정담

이시영

 

황석영씨 얘기 중에 좀 '쎈 구라' 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호랑이 발자국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신혼 시절 우이동 계곡에 살 때 밤새도록 단편을 쓰다 지쳐 새벽녘 머리를 식히려고 방 밖으로 나오면 거기 눈밭 위에 호랑이 발자국이 성큼성큼 찍혀 집 주위를 한 바퀴 돈 뒤 산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자 황씨는 주전자 끓고 있는 뜨거운 무쇠 난로를 장갑 낀 손으로 툭툭 치며 아니, 때맞춰 물 길러 나온 계곡 건너편의 나이 든 무당도 엎드려 함께 보았노라며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네 발 달린 것들 중 호랑이만이 유일하게 일직선으로 걷는다며 틀림없이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상서로운 호랑이일 거라고 우기는 것이었다. 그 말을 믿거나 말거나 밤새워 소설을 쓰고 있는 젊은 소설가 방 곁을 맴돌며 큰 코를 흠흠거렸을 호랑이를 생각하면 가난한 우리의 가슴들도 덩달아 따스해지는 것이었다.

 

 

 

노숙(露宿)

이시영

 

밤 열한 시가 넘으면 새알팥죽으로 야식을 돌리는 한 곁에서 라면박스와 조선일보로 잠자리를 펴는 모습들이 분주합니다. 그 옆에서 벗어놓은 신발도 내일을 향해 아주 단정합니다.

 

 

 

누룩

이시영

 

몰래몰래 누룩이 익었다

숨죽인 싸릿골을

너 짊어진 애비의 지게는 뜨고

사무친 피고름을 고이 안에 숨키는 사람들

삽질을 멈추고

심지 박힌 팔뚝끼리 껴안았다

누가 노예의 딸을 버리기 시작했는가

우두를 맞고

무섭게 무섭게 식민지가 앓는다

죽어서 네가 마마를 벗어나도

용서할 수 없는 나라

돌에 눌린 관이 들리고

능욕당한 네 다리가 삼베를 씹는다

아직 한줌의 흙은 흐느끼지 않는가

애비 가슴의 퍼어런 문신에서

쇠꼬챙이가 뽑힌다

탱자울타리에 묻은 용솟은

징마저 사른 왜놈의 부지깽이가

콸콸콸 가슴에서 석유를 쏟고

애비가 꺼꾸러진다

 

 

 

누이들

이시영

 

저녘 소나기 한즐금 마당을 훍고 지나간 뒤 푸른 이내 처럼 산 그림자가 와서 덮었다. 봄 마당을 종종 달려와 오랜만에 잿간 추녀 밑에서 비설거지한 이 댁의 중병아리 따님들이 무슨 무지갯빛 찬란한 꿈들을 꾸는지 고개를 자빠뜨리고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다.

 

 

 

눈(眼)

이시영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눈빛을 쏘아본다는 것이다

내 눈빛이 네 눈빛을 쏘아

아득한 밤하늘을 금긋고

불꽃처럼 멀리멀리로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눈(雪)

이시영

 

눈이 내린다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굳은 언약 위에

그 작은 실핏줄 위에

뛰는 숨결처럼 뽀오얀 눈이 내린다

이제 막 피 흘리며 쓰러진 희망과

가슴속에 남은 말과

거리에 깊이 패인

노여운 함성을 지우며

 

 

 

눈이 내린다

이시영

 

아무도 살지 않는 나라에

눈이 내린다.

알지 못할 한 마디 맹세가

시퍼렇게 떨다가 스러지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소리가

그 위에 몸 비비며 스러지고

그 소리를 지키지 못한 소리가

소리 뒤에 쌓인다.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라에

소리가 내린다.

소리 뒤에 주먹처럼 고요히 내린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나라에

누구의 멍든 눈이 눈을 찾는다.

그 눈을 보지 못한 눈이 반짝이고

눈 뒤에서 반짝이던 눈이

자기의 없는 눈을 찾아

캄캄한 곳으로 사라진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나라에

누구의 손이 묶여간다.

그 손을 잡는 손이 떨다가

자기 손을 잃어버린다.

잃어버린 자들의 가슴에 뭉클한

손이 내린다.

 

 

 

눈이 부신 날에

이시영

 

가로수 잎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읍니다

길을 걸으며 나는 문득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그 옛날 우리가 새로 태어났던 날의 초록 잎새처럼

아직은 푸르름이 채 가시지 않았을

당신의 맑은 얼굴을

 

 

 

늙은 이모전(傳)

이시영

 

강 건넛마을에 수절해 사는 이모는

살결 희기가 백옥 같았다

봄 여름 가을에는 홀로 농사를 짓고

겨울이면 우리 집에 와

수의도 짓고 침모도 살았다

눈이 자로 쌓인 어느 날 밤

나는 잠결에 이모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이런 좋은 분홍 눈 오시는 날

호랑이나 와서 날 덜컥 물어 갔으면!󰡓

가만히 일어나 보니

이모는 홍조로 밝게 물든 얼굴을

미닫이에 대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이모가 좋았다

뒷울 감나무에는 눈이 휘어지게 내리고

자고 일어나면 강물도 쾅쾅 얼어붙어

이모도 집에 갈 수 없었으면 했다

 

 

 

늦가을

이시영

 

헛간에 좀 늦게 들어온 호박이 쭈뻣거리다가

얼굴에 곧 환한 미소를 띄며

서로에게 등을 기대고 앉아 긴 얘기를 시작합니다

싹이 트던 봄날부터 무서리 내린 지난가을까지를.

 

 

 

다람쥐들

이시영

 

다람쥐들은 머리가 나빠서 작년에 땅굴을 파고 숨겨둔 식량창고를 간혹 잊어먹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년 후 그곳에서 봄바람에 솔솔 상수리나무의 노란 떡잎이 고개를 내밀고 올라오는 것을 다람쥐는 또 깜빡 잊고 지나친다 합니다. 그 선량한 수염 몇가닥을 산바람에 날리며.

 

 

 

답일초선사혜음(答一超禪師惠音)

이시영

 

동백꽃이 간간이 피었다는 선생님의 편지를 받았읍니다

 

소주 한 병에 회 한 접시 시켜놓고

봄이 오는 밀물 바다를 바라보고 계실

늙어서 오히려 청년인 당신을 생각합니다

옛날엔 저도 그랬었지요

사랑하는 이를 찾아 그곳까지 내려갔다가

사랑하는 이와 영 작별하고

초록 방파제 끝에 걸터앉아 소주 한 병을 시켜놓고

이월 바다 갓 낳은 파도 소리에 씻겨 끼룩거리며 피는

마음을 붉게 동여맨 동백꽃을 보았읍니다

 

 

 

당숙모

이시영

 

비 맞은 닭이 구시렁구시렁 되똥되똥 걸어와 후다닥 헛간 볏짚 위에 오른다

그리고 아주 잠깐 사이 눈부신 새하얀 뜨거운 알을 낳는다

비 맞은 닭이 구시렁구시렁 미주알께를 오물락거리며 다시 일 나간다

 

 

 

대기의 힘

이시영

 

밤새 내리던 비 그친 뒤

아침 땅이 내뿜는 저 하늘의 신성한 기운

그 땅에 엎드려 경배한 뒤

인간의 굵은 팔을 뻗어 심호흡한다

 

 

 

덴찌(電池) 이야기

이시영

 

손춘익 선생 얘기 중에 '덴찌 이야기'가 있었다. 그 옛날 초가지붕들이 즐비하던 시절, 저녁밥 먹고 하릴없는 농촌 소년들이 전지를 들고 집집의 처마밑을 들쑤시고 다닐 때였다. 일렁이는 불빛에 놀란 할아버지가 사랑방 문을 열고 소리쳤다. "얘들아, 불조심해라, 불조심!"

소년들이 일제히 참새처럼 입을 모아 대답했다. "할아버지, 이건 덴찌예요, 덴찌!" 할아버지가 이에 지지 않고 느릿하게 대꾸했다. "덴찌라도!"

 

 

 

돌산

이시영

 

돌산

꽃 하나 피지 않고

새 한 마리 날아와 울지 않고

세월의 검은 이끼들만이 붉게 탄 바위 너설을 안고

대낮 고요 속에 엎드린 산

돌산

내 마음의 유년 등성이에

단 한 번 솟구쳤다 아프게 가라앉은 산

지금은 없는 산

오늘은 젊은 탁발승 하나가

불꽃 같은 마음으로 그것에 올라

돌산 내 마음 깊이 가득 환한 산

 

 

 

동계작전

이시영

 

피융! 하고 쇳소리를 내며 날아온 총알이 방바닥의 사기그릇을 깨고 농짝에 가 박힌 것은 아주 순식간. 장롱 속에 상체를 밀어 넣고 솜옷을 찾던 산사람이 후다닥 뛰쳐나와 󰡒다 이 아새끼 때문󰡓이라며 세 살배기 나를 향해 짤깍 하고 방아쇠를 뒤로 당기자 어머니가 총부리를 가슴으로 막으며 우리 집 삼대독자니 제발 자신을 쏘라고 빌었다고 한다. 밖에서 경계를 서던 여성 빨치산과 몇 차례 눈짓을 주고받던 산사람은 이윽고 옷 보따리를 들고 급히 나가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저 장롱짝 솜털 동무들에게 감사하라󰡓고. 직선으로 날아온 총알을 솜들이 안에서 격하게 소용돌이치며 감싸 안아버려 나도 살고 산사람도 산 것이다. 그 후로 나는 탐스러운 목화송이를 볼 때마다 나도 몰래 빙그레 웃음이 나오곤 했다.

 

 

 

동몽골에서

이시영

 

나비야 너는 왜 여기서 훨훨 나니?

그러나 나비는 대답하지 않고 까만 눈만 더욱 까맣게 반짝이다 고운 눈을 한번 흘기고는 파란 하늘을 북 찢으며 하늘 길 속으로 사라졌다.

 

 

 

동안

이시영

 

면도기가 충전이 다 되었다고 녹색등을 깜빡이는 동안,

반딧불이가 난생처음 하늘을 차고 올라 수줍은 후미등을 켜고 구애하는 동안,

대학병원에서 죽어가는 환자가 원망인지 사랑인지 모를 눈빛을가족에게 지어 보이고 있는 동안,

오늘도 세계의 어딘가에선 장착된 토마호크 미사일이 날고

사소한 약속을 지키러 나온 맨해튼 42번가의 사내는

째깍거리는 시계를 자주 보며 공허한 두 손에 피로한

두 얼굴을 묻는다

 

 

 

두 사람

이시영

 

한 사람은 신이 그에게 하사한 성량(聲量)에다

자기 것을 보태어

이 세상에서 제일 높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냈다

날던 새도 그 소리를 듣고는 날개를 접었다

 

한 사람은 신이 그에게 하사한 언어에다

자기 영혼을 불어넣어

이 세상에서 사람이 지어 바칠 수 있는 가장 풍부한 지상의 노래를 지었다

치던 파도도 그 소리를 듣고는 하늘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두 알

이시영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짚신을 신고 읍내로 가는 소년이 있었다

그의 두 손에 갓 낳은 따스한 달걀 두 알이 숨 쉬고 있었다

 

 

 

들길

이시영

 

가을 들길이 아름다운 건

수많은 흰옷 입은 사람들이 굽이굽이 저 길을 걸어갔기 때문

 

 

 

땅 팔자

이시영

 

고(故) 명천(鳴川) 이문구 선생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땅에도 팔자가 있는 것이여. 이태원에 미군 부대가 들어서고 말죽거리에 경부고속도로 입구가 들어선 거 좀 봐!"

그에 의하면 조선시대 이태원은 지금의 이태원(梨泰院)이 아니라 '이타인(異他人)' 혹은 '이태원(異胎院)'으로도 불리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거기 있던 운종사(雲鐘寺)라는 비구니 절을 약탈하여 생긴 이름이고, 말죽거리는 경상 좌우도와 호남을 오가는 유생이나 장사꾼들이 하룻밤 유숙하며 말죽을 쑤어 배불리 먹인 곳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명천의 말이 맞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자리엔 미8군 사령부가, 그들이 머문 자리엔 또 밤이면 밤마다 수많은 이타인이 들락거리는 명소가 되었으며, 말죽거리 또한 3호선 전철과 신분당선이 드나드는 양재역은 물론 양재대로 일대가 차들이 잠시 들러 말죽 대신 자동차에 기름을 빵빵 넣는 곳으로 변했으니, 그의 말마따나 땅 또한 자기 팔자가 분명히 있긴 있는 모양이다.

 

 

 

또 소 새끼 난 날

이시영

 

다 저녁때 다리가 아픈 소가 꼬리를 추켜세우고 눈물을 흘리며 송아지를 낳았는데 수송아지였다. 눈감은 송아지가 어미 소 곁에서 자꾸 일어서려고 하는데 픽픽 쓰러지곤 하였다. 자세히 다가가 보니 어미 소를 닮아 앞발을 잘 쓰지 못했다.

 

 

 

또 한 무늬

이시영

 

장대비 내린 뒤

하늘에서 씻겨 내려온 세모래는 하도 고와서

참새들도 그 위에 제 예쁜 발자국을 찬란히 새겨놓고 가기도 한다

 

 

 

라일락 향

이시영

 

이 세상의 향기란 향기 중 라일락 향기가 그중 진하기로는

자정 지난밤 깊은 골목 끝에서

애인을 오래오래 끌어안아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

 

 

 

마을에 연기 나네

이시영

 

부탄의 한 산골 마을 외딴집에 아침 연기 오른다

밤새워 바람의 길을 따라 해발 7천 미터 히말라야 설산을 넘어 온 검은목두루미 한 쌍이 그 집 앞에 사뿐히 내린다

 

날개에 봄 햇살이 찬란하다

 

 

 

마을의 아침

이시영

    

경기초등학교 스쿨버스가 두더지처럼 겁 많은 두 눈을 두리번거리며 비탈길을 헤집고 내려가면 계성유치원 노오란 스쿨버스가 신나게 지저귀면서 비탈길을 구르며 올라오고 계성유치원 스쿨버스가 다람쥐처럼 조르르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면 한화 수영장 날렵한 미니버스가 머리에 물방울을 튀기며 비탈길을 솟구쳐 올라오고 한화 수영장 미니버스가 미끄러지듯 단숨에 햇살 속으로 사라지고 나면 이번엔 옆구리에 '독거노인 임시보호소'라 씌인, 입구가 구름처럼 컴컴한 승합차가 실은 치매 노인들을 실어 가기 위해 비탈길을 힘겨웁게 올라오느라 붕붕거리는 소리 요란타. 그리고 새소리 뒤에 마을은 잠시 조용하다

 

 

 

마음에게

이시영

 

신록이여,

죽은 마음에 움트는 강철의 새잎이여

나는 이제 어떤 이별도 껴안을 수 있다

저렇게 많은 사랑들이, 저렇게 많은 아픔들이

자기와의 투쟁을 통과하여 이제 막 연록 햇빛 속으로 걸어 나온 사람들이라니

 

 

 

마음의 고향 

이시영

 

1 - 백야

키가 훌러덩 크고 웃을 때면 양볼에 깊이 보조개가 패이는

작은집 형수가 나는 좋았다

시집온 지 며칠도 안 돼 웃냇가 밭에 나왔다가

하교길 수박서리하다 붙들린 우리 패거리 중에서 나를 찾아내

"데름, 그러믄 안 되는 것이라우" 할 때에도

수줍은 듯 불 밝힌 두 볼에 피어나던 보조개꽃 무늬

아, 웃냇가 웃냇가

방아다리 지나 쑥대풀 우거지고 미루나무숲 바람에 춤추는 곳

사래 긴 밭에 수많은 형수들이 엎드려

하루종일 밭고랑 너머로 남쪽나라 십자성 부르는 곳

저녁에 소몰이꾼 우리들이 멱감는 냇가로 호미 씻으러 내려와서는

"데름 너무 짚은 곳에는 들어가지 마씨요 이" 할 적에도

왈칵 풍기는 형수의 땀냄새가 나는 좋았다

홀시아버지 밑 형제 많은 집으로 시집와 남정네마저 전쟁터에 보내놓고

새벽논에 물대기 식전밭에 고추따기 아침볕에 보리널기

쏘내기 밭에서 소고삐 몰아쥐고 송아지 찾기로

여름 내내 등적삼에 벼이슬 걷힐 날 없으면서도

저녁이면 선선한 모깃불을 피워 놓고 콩국수 말아

와상 가득 흥겨운 집안 잔치를 벌일 줄도 알았던 형수,

모깃불 매캐하게 사위어가고 하나 둘 어린 형제들 잠들어갈 무렵이면

내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데름, 데름은 꼭 우리 집안의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쓰우."

"훌륭한 사람이 워떤 사람인디라우?"

"장군 같은 것, 그 뭣이라더라 밥풀 여럿 단 쏘위 같은 것...."

그러면 마당 한구석에서 다가온 어둠이 빤한 눈으로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이 쏟아질 것만 같은 내 눈에

갑자기 별빛 한 무더기가 쏟아져 내렸다

환한 밤이었다

 

 

2 – 그 언덕

왜 그곳이 자꾸 안 잊히는지 몰라

가름젱이 사래 긴 우리 밭 그 건너의 논실 이센 밭

가장자리에 키 작은 탱자 울타리가 쳐진.

훗날 나 중학생이 되어

아침마다 콩밭 이슬을 무릎으로 적시며

그곳을 지나다녔지

수수알이 꽝꽝 여무는 가을이었을까

깨꽃이 하얗게 부서지는 햇빛 밝은 여름날이었을까

아랫냇가 굽이치던 물길이 옆구리를 들이받아

벌건 황토가 드러난 그 곳

허리 굵은 논실댁과 그의 딸 영자 영숙이 순임이가

밭 사이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커다란 웃음들을 웃고

나 그 아래 냇가에 소 고삐를 풀어놓고

어항을 놓고 있었던가 가재를 쫓고 있었던가

나를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솨르르 솨르르 무엇이 물살을 헤짓는 소리 같기도 하여

고개를 들면 아, 청청히 푸르던 하늘

갑자기 무섬증이 들어 언덕 위로 달려오르면

들꽃 싸아한 향기 속에 두런두런 논실댁의 목소리와

까르르 까르르 밭 가장자리로 울려 퍼지던

영자 영숙이 순임이의 청량한 웃음소리

나 그곳에 오래 앉아

푸른 하늘 아래 가을 들이 또랑또랑 익는 냄새며

잔돌에 호미 달그락거리는 소리 들었다

왜 그곳이 자꾸 안 잊히는지 몰라

소를 몰고 돌아오다가

혹은 객지로 나가다가 들어오다가

무엇이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아

나 오래 그곳에 서 있곤 했다

 

 

4 - 가지 않은 길

내 생애 그런 기쁜 길이 남아 있을까

중학 1학년,

새벽밥 일찍 먹고 한 손엔 책가방,

한 손엔 영어 단어장 들고

가름젱이 콩밭 사잇길로 사잇길로 시오리를 가로질러

읍내 중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에

함뿍 젖은 아랫도리가 모락모락 흰 김을 뿜으며 반짝이던,

간혹 거기까지 잘못 따라온 콩밭 이슬 머금은

작은 청개구리가 영롱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팔짝 튀어 달아나던,

내 생애 그런 기쁜 길을 다시 한번 걸을 수 있을까

 

 

6 - 초설(初雪)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새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란 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 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작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만월(滿月)

이시영

 

누룩 같은 만월이 토담 벽을 파고들면

붉은 얼굴의 할아버지는 칡뿌리를 한 발대

가득 지고 왔다

송기를 벗기는 손톱은 즐겁고

즐거워라 이마에 닿는 할아버지 허리에선

송진이 흐르고

바람처럼 푸르게 내 살 속을 흐른다

저녁 풀무에서 달아오른 별들,

노란 벌이 윙윙거리면

마을 밖 사죽골에 삿갓을 쓰고

숨어 사는 어매가

몰매 맞아 죽은 귀신보다 더 무서웠다

삼베치마로 얼굴을 싼 누나가

송기밥을 이고

봉당으로 내려서면

사립문 밖 새끼줄 밖에서는

끝내 잠들지 못한

맨대가리의 장정들이 컹컹 짖었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쭈그리고 앉은

산길에는 썩은 덕석에 내다버린 아이들과 선지피가 자욱했다

어둠 속에 숨 죽인 갈대 덤불을 헤치고

늙은 달이 하나 떠올랐다

 

 

 

맑은 날

이시영

 

하늘공원에서 톡톡히 여문 민들레 씨앗들이 바람 속을 날며 비행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머잖아 꽁무니에 붉은 로켓들을 달고 머나먼 고향으로 발사될 날을 기다리며.

 

 

 

매형

이시영

 

금융조합을 털리고

허리가 부러지도록 얻어맞은

남편은 무우 구덕에 돌아와 숨었다

반란군처럼 가을이 가고

손가락 끝까지 노랗게 물든 사람들이

조합 뒷터로 떨어져 굴렀다

부릅뜬 눈을 뜨고

남편은 두더지가 되어 구덕을 파내려 갔다

먼 데서 온 구두가 깔깔거리며

시아버지를 짓밟고

후래쉬 불빛에 끌려 포도송이 같은 진눈깨비 속으로

머슴이 뛰었다

찜질에 닳아

쑥물을 흘리며 구덕속으로 떨어지는 해

땅은 흐느끼고 피는 마르고

한밤중 떨리는 입술로 짚벼늘을 헤쳤을 때

이마에 서리를 인 채

남편은 시퍼런 백발이 되어 있었다

 

 

 

맺힘

이시영

 

겨울이 깊어지자 라일락 나무에 다시 꽃망울이 돋았다

거리엔 바람 불고 하늘은 푸른데

세상의 모든 아픈 것들은 저렇게 오는가

 

 

 

머슴 고타관씨

이시영

 

그는 왼손이었어 숫돌에 갈아

왼손으로 말하고 마늘내 나는

들판을 벗고 머슴들을 불러

미농지 위에 오른손을 잘랐어 갈대밭에서

돌아온 그의 낫은 일어서는

불꽃을 소리지르는 호박을 자르고

볏가리에 숨은 주인의 고요한 귀를 베었어

배추 같은 귀들이

소금 가마니를 뚫고 비쳤어

기름 새는 발동기가 끌려가고

정미소 창고에선 소문에 내리찍히는 송아지 뒷다리

몰래몰래 사발 같은 눈들이 열린 대밭에서

캐어낸 무릎

죽순들이 돋아 있었어 허옇게

뒤집힌 눈들이 뛰는 방죽 너머로

대창 높이 물에 빠진 여자 머리를 찔러

돌아오는 그

우렁눈에서 벌이 날고

밤이면 나팔보다 더 커진 귀로

청대 같은 바람을 쏟았어

석유빛 아침놀이 내리자 말뚝박힌 주인집 채마밭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 느그들!

하고 식식거리며 쳐든 왼손은

쇠시랑이었어 어느 쪽이여? 손을

들어 보랑깨로 얼른얼른!

대가리없는 무우처럼 섬뜩섬뜩 손들을 뽑아들자

질그릇 푸른 이를 깨어 그가 웃었어

하하하하하

갑자기 그는 왼손을 거두고

지게와 젊은 아내를 끌고 뒷산 쪽으로 내달았어

산맥을 껴안고 헬리콥터가 떠오르고

송진을 뚫고 나온 개들이 기슭을 짖었어

화염이 멎고 마을 사람들이 뒤쫓아 갔을 때

진달래 깎아지른 낭떠러지 끝에

쇠시랑손을 붙든 채 그의 아내가 기어오르고 있었어

벼랑 위에는 아내도 버린 채 지게만 동여메고

그가 불붙은 한쪽 다리로 달리는 것이 보였어

아직도 복사빛 환한 아내는

그의 녹슨 왼손과 함께 장터 마을에 사는데

그의 한쪽 다리를 사로잡은

그때 그 순사를 따라 사는데

 

 

 

모닥불

이시영

 

영하의 추위

검푸른 하늘을 향해 가지를 툭툭 뻗고 있는 고목을 보면

내 가슴은 이상하게 뜨거워 오니

저 강인한 자연 속에 순명을 다하고 있는 것들의 아름다운 침묵이

내 안에서도 무지개처럼 조금씩 조금씩 달아오르기 때문일까

 

 

 

목숨

이시영

 

사람의 목숨이란 것이 저 나무의 나뭇잎과 같아서

어느 날 바람결에 똑 떨어져

발밑에 사뿐히 가라앉을 수만 있다면

가라앉아 어디로 흘러갔으면

 

대저 사람의 일이란 그렇지를 못해

오늘도 한목숨 옆방에서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으니

 

 

 

몽골 시편

이시영

 

풀을 뜯던 말들이 간혹 그 선량한 얼굴을 들어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때는 바야흐로 석양 무렵이고, 말들에게도 일말의 애수가 있다는 것을 금방 느끼게 된다.

 

 

 

무늬

이시영

 

나뭇잎들이 포도 위에 다소곳이 내린다

저 잎새 그늘을 따라가겠다는 사람이 옛날에 있었다

 

 

 

무덤에 관하여

이시영

 

산기슭 양지녘에 무덤 한 쌍이 새롭다

그러나 저곳은 아직 네가 갈 곳 아니다

쉼 없이 자기 길을 걸어온 사람만이

세월이 그에게 부과해준 온갖 책무를

올곧고 성실히 수행한 사람만이

다가가 잠시 쉴 수 있는 곳

그리고 역사 속에 다시 태어나는 곳

아무나 그곳에 가려고 하지 마라

먼저 너의 길을 가라

 

 

 

무지개

이시영

그 옛날 제가 어렸을 적

웃냇가 노둣돌 틈서리에서 물장구치다

느닷없는 천둥 소나기에 놀라 벌거숭이로

들가웃뎃길을 향해 냅다 뛰었을 때

바로 옆 밭에서 김 매다 갑자기 없어진 나를 찾아

어머니는 가름젱이 온 들판을 호미 들고 다 헤매셨다면서요?

들판 가득 무지개 곱게 피어오르던 그 훈훈한 여름날 저녁

 

 

 

문학이라는 이름

이시영

 

물로 나도 문제가 많은 어른이다 거지 같은 것들을 사랑한 게 애초에 잘못이다 잡년 같은 하루가 간다

 

끝나고 또 계속되는 나 아아 계속되는 계속되는 시간 속에 묻어버린 시계가 글씨들이 치욕들이 활개를 치며 일어난다

 

만일 내가 안경을 쓰지 않고 가방을 들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고 학생들을 (학생들 가운덴 주부들도 있고 주부들 가운덴 착한 주부, 마음씨 고운 주부, 악한 주부, 헐뜯는 주부도 있다) 가르치지 않고 그들에게 욕을 먹지 않고 피곤하지 않고 기차처럼 누워 있었다면 욕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커피도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문제가 많다 그러나 피난은 안 간다 오 욕을 먹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나의 삶 나의 삶 오 우리들의 삶!

 

 

 

문화이발관

이시영

 

대방동 구불구불 옛 골목길 문화이발관이 아직 거기 있네

흰 수건을 탁탁 빨아 새하얗게 걸어놓은 집

아침이면 물 뿌린 거기로 제일 먼저 따스한 햇살이 모이고

저녁이면 금성 라디오가 잔잔히 흘러나오던 곳

동네 처녀들 알전구 환한 불빛을 피해 숨어 다녔지

공군회관에선 한때 춤으로 날렸다나

얽은 얼굴이지만 백구두에 씩씩한 맘보바지, 바지런한 손

말할 때마다 거울 속에서 쫑긋쫑긋 웃는 선량한 귀

밤꽃 향기 아래 굵은 팔뚝이 자랑이던 우리들의 영웅

그 짙은 포마드 향기는 다 어디로 갔나

이제는 하얀 중늙은이가 되어

옛 철봉대 아래 그윽이 웃고 있네

문화이발관

 

 

 

물결 앞에서

이시영

 

울지 마라

오늘은 오늘의 물결 다가와 출렁인다

갈매기 떼 사납게 난다

그리고 지금 지상의 한 곳에선

누군가의 발짝 소리 급하게 울린다

 

울지 마라

내일은 내일의 물결 더 거셀 것이다

갈매기 떼 더욱 미칠 것이다

그리고 끓어 넘치면서

세계는 조금씩 새로워질 것이다

 

 

 

물길

이시영

 

자 그러면 우리 놓읍시다 집착의 끈을

사랑은 네가 나를, 내가 너를

온 마음으로 타는 불길처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여름 산이 콸콸 더운 숨결을 쏟아

앞내로 바다로 흘려보내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의 막힌 가슴을 뚫어

서로를 남김없이 놓아주는 것

그러면 우리 가을 시린 들판에서 만날는지도 몰라

거기 풀꽃들이 서로의 찬 이마를 맞부비고 있는 곳

기러기 날아오른 논둑길 따라

갑자기 서늘해진 등을 뒤척이며 맑은 눈길로

 

 

 

물맞이

이시영

 

반내골로 물 맞으러 갔다가 보았다. 우리 어머니들의 육덕이 얼마나 좋은지를. 까마득한 벼랑에서 곧추선 성난 물줄기들이 쏟아져 내리는 데 그 아래 새하얀 젖가슴과 그리메 같은 엉덩이를 환히 드러낸 어머니들이 "어 씨언타! 어 씨언타!"를 연발하며 등줄기로 거대한 물좆같은 벼락을 맞는데 하늘 벼랑의 어딘가에선 정말로 "우히히! 우히히!" 하는 말 울음 소리 같기도 한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니들은 국솥 걸고 밥 끓이며 자연 속에서 아무런 부끄럼도 없이 하루를 잘 놀다가 왔는데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아프던 내 다리도 멀쩡해졌을 뿐만 아니라 밭일을 나가는 어머니들의 다리는 더욱 가뿐하여 대지를 핑핑 날아다녔다.

 

 

 

미당이 구룡포 가서

이시영

 

동해 쪽빛 바다에 봄 파도 밀려올 제 구룡포 바람받이 언덕에 쏴아쏴아 보리 물결 부서지는 것 일품이었다. 물회집 들창 너머로 이 광경을 이윽히 지며보던 서정주 영감 왈 󰡒내 이담에 필시 이곳에 와 집짓고 살 것인즉 땅 나면 꼭 알려주소.󰡓하였겄다. 몇 달 뒤 부지런히 들락거리며 땅 나기를 알아본 늙은 문학청년이 선생께 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구룡포 언덕에 좋은 땅이 났습니다요. 어찌 잡아둘까요?󰡓 그러나 스승은 영 딴전이었다. 󰡒아아 내가 언제 그런 말 한 적이 있었던가 이 사람아. 자네 바닷바람에 마신 소주가 좀 과하셨나보구먼그려!󰡓

 

 

 

미루나무

이시영

 

간밤 눈보라에 시달렸을 미루나무에

오늘은 새로운 까치네 동무들이 가득 찾아와

그 작은 발바닥으로 뱃바닥을 누르고 귓볼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온몸에 웃음을 참지 못한 나무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서녘 하늘을 향해 껑충한 키를 구부린 채

간들간들 간들간들 웃고 있었습니다

 

 

 

미인(美人)

이시영

 

너는 화사한 영혼,

어느 날 내게 앉았다가 날아간

내 자리에는 무게가 없다

너는 고뇌하지 않는 가벼운 정신

네 입술엔 꿀만 묻어 있을 뿐 피가 없었다

너만의 향기를 갖는 너의 숨결이 없었다

잠자리 날개 같은 투명한 옷자락을 끌고

너의 나라로 가라

가서 벼랑 아래로 추락하라

피를 흘렸을 때 너는 너 하나의 무게를 지닌

다른 영혼이 될 것이다 꽃이 될 것이다

 

 

 

밑줄을 긋다

이시영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읽어나가다가 나는 다음 구절에서 밑줄을 긋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즐겨 드는 예 가운데 하나를 말하자면, 홀로코스트를 구상한 장본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는 한가한 저녁시간에 친구들과 더불어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를 연주하기를 좋아했다."

 

군모를 벗어 벽에 걸어놓고 삼삼오오 혹은 서고 걸터앉아 " ubrigens......" 어쩌구 하면서 담소하는 정복 차림의 그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다음 털북숭이 두 손을 막 피아노 건반 위에 갖다 대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지극히 평온한 얼굴이 커튼 자락 사이로 얼핏 스친다.

 

 

 

바다의 시위

이시영

 

꼬막들이 반찬가게에 와서까지 입을 꼬옥 다물고

푸른 바다를 토해내고 있다

 

 

 

바람

이시영

 

저 나무에 바람 인다

잎새여 나부껴라

너 진 뒤 거센 바람 고요 뒤에 그 얼마 뒤에

우리 아기 연초록빛 발가락이 물든다

 

 

 

바람아

이시영

 

바람아!

너희 나라엔 누가 있는가

날 저무면

산에서 내려와 문고리 두드리는

커다란 산 그림자 있는가

뒷문 열고

기침하는 늙으신 어머니가 있는가

밤새도록 대밭에서 끄덕이다

땅 끝으로 사라지는 반딧불이 있는가

아버지가 있는가

 

바람아!

너희 나라엔 얼굴도 없는가

서서 멈출 발자욱도 없는가

풀섶을

헤쳐가는 소리죽인 눈도 없는가

멀리 가슴 닿을 다음 땅은 없는가

바람아 너희 나라엔 아무도 없는가?

 

 

 

바람이 불면

이시영

 

날이 저문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한잔해야지

붉은 얼굴로 나서고 싶다

슬픔은 아직 우리들의 것

바람을 피하면 또 바람

모래를 퍼내면 또 모래

앞이 막히면 또 한잔해야지

타는 눈으로 나아가고 싶다

목마른 가슴은 아직 우리들의 것

어둠이 내리면 어둠으로 맞서고

노여울 때는 하늘 보고 걸었다

 

 

 

반짝이는 것은 무엇인가

이시영

 

어떤 별들과 인간의 꿈은 깊이 상통한다.

밤이 오면 쓰라린 땅을 매 맞아 버림받은 사람들이 지키고

그 위의 하늘을 별이 지킨다.

인간의 눈이 되고 싶은 어떤 별들은 지상에 내려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사람들의 상처에 살아 뛰며

자기 피를 주고, 오래 말 없는 상처를

자기처럼 껴안고 자기 눈이 껌뻑일 때까지 반짝이다가

새벽이 동터오면 또 불 꺼진 영혼들을 찾아

아무도 없는 길로 내뺀다.

 

 

 

반체제

이시영

 

조태일 시인이 광주서중 1학년 때였으니 1956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광천동에서 새벽밥 먹고 부리나케 걸어서 등교하던 조태일 소년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식히며 막 그의 교실 복도로 들어설 때였다. 장학 검열 나온다고 일주일 전부터 온 학생이 엎드려 마른걸레로 닦고 문지르고 그 위에 양초까지 발라 반질반질 윤을 낸 마룻바닥에 그만 꽈당 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화가 머리꼭지까지 난 소년이 가방에서 잉크병을 꺼내 복도를 향해 내리꽂은 것은 아주 순식간의 일. 소식을 듣고 담임이 달려오고 두터운 안경을 쓴 교장이 오고 그때부터 조 소년의 다른 인생이 시작되고 말았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자기가 광을 낸 마룻바닥에 꽈당하고 이마를 짓찧으며 넘어졌을 그 곰 같은 소년의 어이없는 표정이 떠올라 배꼽을 잡고 웃을 뿐이었다.

 

 

 

발자국

이시영

 

밤새도록 파도는 밤섬머리를 들이받아

가장자리에 아름다운 세모래밭을 만듭니다

그러면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자욱한 철새들이

거기서 매서운 첫 획들을 찍는데

그중엔 아주 작은 아기 것도 섞여 있어

파도가 다시 와선 뺨 부비곤 했답니다

 

 

 

밝은 날

이시영

 

지구의 한끝에서 한끝으로

참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내려와 앉는다

 

작은 눈을 들어 사방을 불안스레 돌아보는 것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영혼이다

 

 

 

이시영

 

밤은 먼 들의 바람을 몰고 와

십오 층 빌딩의 옥상에 부려놓는다

거세게 부딪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

나는 빈 들로 나아가

한 마리 성난 사랑이 되고 싶다

그러나 밤은 가슴에 더욱 큰 바람을 안고 와

다시 한번 난간을 들이받고

피 흘리며 들판을 헤매다가

새벽녘 가장 강력한 폭풍이 되어

그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빛나는 눈동자를 태어나게 한다

 

 

 

밤마실

이시영

 

일머슴처럼 손 크고 덩치 큰 울어메 곡성댁, 마당에 어둑발 내리면 쌀자루 보릿자루 옆구리에 숨겨 몰래 사립을 나섰네. 그때마다 쪽진 머리 고운 해주오씨 우리 큰어머니 안방 문 쪽 거울에 대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네 "니 에미 또 쌀 퍼서 나간다"고. 저녁이 다 가도록 밥 짓는 연기 오르지 않는 동무 집이 많던 시절.

 

 

 

밤섬에

이시영

 

밤섬에 태어났더라면.

한평생 가슴 넓은 어부가 되어

황해 바다 먼바다로 나아가

맞바람과 싸우며 무거운 그물질이나 할 것을.

밤섬에 태어났더라면.

철마다 눈매 붉은 소년 갈매기가 되어 갈숲 사이로 스치며

찬 모래 바닥에 엎드려 뜨건 배 비비다가

불화살처럼 매서운 노릉 속을 날아오를걸.

밤섬에 태어났더라면

지금은 없는.

 

 

 

방학

이시영

 

매미들이 참 열심히도 운다

쉬지 않고 운다

새벽까지 운다

소나기 속에서도 운다

 

저러다가 여름의 책장이 다 찢어지고 말겠다

 

 

 

벌판으로

이시영

 

 

모두들 가고

이제는 더 남김없이 아득한 나라

숨어 사는 친구의 머리맡에 다가서면

마음 편해라

먼 곳에서 원수처럼 돌아와

주먹 같은 뜬눈으로 누워 사는 친구

마음 그 곁에 눕혀놓고 일어서고 싶어라

 

한 번 더 한 번만 더 망설이고 참았던 나날들

그 두려운 밤길 가까스로 넘어와

단 한 번 빛났던 고운 얼굴들 밟고 서서

가슴 조이며 기다렸던 밤

그 밤이 우리에게 돌려준 것은

벗도, 사자도, 그리운 쇠북도 아닌

찬 칼날을 품은 새벽

 

모두들 스러지고 뿔뿔이 흩어져

흘린 피마저 자취도 없을 때

배 가르고 고이 누운 친구 곁에

마음 눕혀두고 저 가느다란

울음 끊어질 듯 새어나는

벌판으로 가고 싶구나

가서 고요히 바치고 싶구나

 

 

 

법(法)

이시영

 

사람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부처란 무엇이냐

자기 안의 기쁨을 발견하는 자의 고통스런 미소 아닌가

 

초록아 눈을 떠라

내가 너희를 날선 칼로 버히겠다

천지가 흰 뜨물뿐인 눈부신 이 세상에

 

 

 

베스트셀러 시인들을 위하여

이시영

 

누구나 다 한때는 순결한 영혼들이었다. 독자들이 그 영혼에 입 맞추자 그들은 곧 배부른 돼지들이 되어 부끄러움도 잊고 제 분홍 머리들을 서점의 진열대 위에 올려놓은 채 호호 웃고 있으니 우리가 이제 싸워야 할 대상은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바로 저 상업의 노예들인지도 모른다.

 

* '호호 웃는 돼지 머리' 이미지는 이성복의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139쪽에서 빌려왔다.

 

 

 

변함없는 일

이시영

 

날 저물면 호남평야의 전봇대들은

큰 키를 수그리고 달려가

우묵한 마을부터 제일 먼저 불을 켜고 나옵니다.

한 곳에 너무 오래 서 있다보니

선량한 허리도 많이 굽었습니다만.

 

 

 

복구

이시영

 

화엄사 들머리 산채정식집에 사는 복구라는 개는 사천왕상 같은 험악한 얼굴에다 승냥이 같은 덩치로 마구 짖어대는 바람에 이 집의 유명한 비빔밥 소문을 듣고 마당에 들어서는 사람마다 깜짝 놀라게 해 입이 건 주인마님에게 늘 󰡒저 개 같은 새끼!󰡓라는 야단을 맞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단 한 사람, 연주암 사는 방장 스님의 사미승에게만은 미소년처럼 굴어 사립 밖에 거의 발짝소리만 들렸다 하면 불같이 달려나가 가슴까지 뛰어오르며 죽고 못살아 둘 사이가 이상한 관계라는 소문이 인근에 자자하다고들 하는데, 하여튼 화엄사 범종각의 범종소리가 산자락을 은은히 적시며 울려퍼지는 저녁 무렵이면 심부름 왔던 고운 사미승을 따라 연주암 가는 산기슭을 고개를 주억거리며 걷는 복구군의 공순한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이시영

 

오리들이 아주 연약한 연두빛 풀밭 위를 조심조심 걷고 있다. 작년 겨울 폭설 속에

무자비하게 파묻혔던 바로 그 따스했던 족속들이다.

 

 

 

봄 논

이시영

 

마른논에 우쭐우쭐 아직 찬 봇물 들어가는 소리

앗 뜨거라! 시린 논이 진저리처럼 제 은빛 등

타닥타닥 뒤집는 소리

 

 

 

봄 송신(送信)

이시영

 

잿빛 하늘에 칼바람 매섭게 부딪는 날

대치 3동 아람드리 고목나무는 그 우람한 둥치 끝의 연약한 우듬지로 하여금

사운사운거리며 하늘을 향해 무어라 무어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이 해의 큰 봄눈이

땅과 허공을 통째로 안았다가 풀어준 날

우듬지 있던 자리엔 우듬지 대신

인간의 마음을 닮기도 한 강렬한 새 잎이

하늘을 향해 새록새록 돋았습니다

 

 

 

봄 햇살

이시영

 

히말라야 산중 마을에 새봄이 왔다. 팔뚝만 한 물고기들이 뛰는 봇둑 너머에서 뿔싸움을 하던 흑염소 두 마리가 때마침 양떼들을 몰고 나가던 주인 여자를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다가 야단을 맞고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데, 한 소녀가 다가가 잔털을 쓰다듬어주고 있다. 염소들의 잔등 위로 올해의 가장 탐스런 봄햇살이 자르르 흐른다.

 

 

 

불꽃의 시절

이시영

 

기차는 가고

저마다의 꿈을 안고 아픈 추억을 안고

자기 생의 전속력으로 기차는 가고

철길은 뒤에 남아 단 한번 뜨거웠던 몸을 시리게 뒤척인다

누구에게나 불꽃처럼 타오르던 청춘의 시절이 있었다. 마음이 붉고 몸이 푸르던 시절. 오기와 배짱 하나로 세상과 겨루던 시절. 그러나 기차는 가고 이제는 회한만 남았다. 불꽃은 꺼지고 재만 남았다. 열정은 사라지고 반성하는 자아만 남았다. 당신은 당신 생의 전속력으로 달려봤는가? 무엇을 위해 달렸으며, 지금 당신한테는 무엇이 남았는가? 이 시는 80년대의 후일담적인 시로 읽을 수도 있다. 세상을 바꾸려던 몸짓들이 지금은 철길이 되었다. 그런데 철길이 시리게 뒤척이는 것은 다시 올 새로운 기차를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불빛을 찾아

이시영

 

아직은 잠들지 못한다

앞서간 형의 밤길 너무 오래고

한 다리 어둠에 빠져

외다리로 걷고 있을지라도

어디선가 타고 있을 형의 불빛을 찾아

아직은 더 함께 이 벌판에서

캄캄하게 술 마시고 노래 불러야 한다

우리가 함께 누운 벌판, 그대로 벼랑이 될지라도

이 세상의 끝이 되어

형의 발자국 이미 찾을 수 없을지라도

형과 같이 걷지 못했던 스스로의 발자욱들 되밟고

돌아갈 수는 없는 것

뉘우침은 서로의 뜨거운 발밑에 누워

밤의 늦은 고요 등성이에 누워

용서받기 위해 더 크게 노래 불러야 한다

땅끝까지 스미라고

땅끝의 새벽까지 스며

새벽 힘찬 발소리 들려오라고

벼랑더러 들으라고 하늘더러 대답하라고

찬 흙에 볼 비비며 노래 불러야 한다

우리들의 숨결에 더운 불빛이 일 때까지

 

 

 

비밀

이시영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대 내면이 아픔으로 꽉 차서

바람 불어오는 쪽을 향하여 선 사람이여.

 

 

 

비룡(飛龍)

이시영

LPG 가스통을 한 차 가득 싣고

강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더펄머리 사내의 늠름한 팔뚝 위에서

용자(龍字) 무늬가 깊숙이 꿈틀대고 있다

 

 

 

비상

이시영

 

녹음 속에서도 까치들은 힘차게 날아올랐다

작년에 헐벗은 겨울을 난 새들이다

 

 

 

빈 들

이시영

 

가래뜸 진솔밭에 외로운 무덤이 나란히 셋

나 죽으면 누가 와서 저 무덤 지켜줄까

걱정 마라,

저 아래 빈 들이 아재처럼 가만히 일어나 웃는다

 

 

 

빗방울 하나가

이시영

 

빗방울 하나가 가지 끝에 매달려 오전 내내 지지 않고 있다.

아, 바람이 불 때마다 온 나무숲이 신선하다.

 

 

 

이시영

 

내 마음의 초록 숲이 굽이치며 달려가는 곳

거기에 아슬히 바다는 있어라

뜀뛰는 가슴의 너는 있어라.

 

 

 

이시영

 

대성사 요사채 앞마당을 누가 깨끗이 쓸어놓았다

오랫동안 공중을 떠돌던 잎새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는다

 

따스하다

 

 

 

사냥

이시영

 

빙하가 둥둥 떠다니는 북극 노르웨이령 스발바르드제도의 한 섬, 굶주림을 참지 못한 북극곰이 동족의 새끼를 사냥하여 물고 가다가 뒤를 슬쩍 돌아다보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너무 일찍 녹아 먹잇감인 연어와 바다표범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란다. 인류의 공멸 이전에 자연의 붕괴가 먼저 시작되는 것인가? 눈밭에 점점이 흩어진 어린 곰의 피가 꽃처럼 붉다.

 

 

 

사시(斜視)에 대하여

이시영

 

중국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인대산인(人大山人)이란 분의 그림 중에 강물 위로 뻐쭘이 고개 내민 물고기 한 마리가 흰창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비웃고 있는 것이 있는데 거 참, 기발한 착상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오늘 얼음 풀린 한강 가에 나가 제 몸을 느릿느릿 찬물 속에 담갔다가 푸드득 날개 치며 순간을 비상하는 청둥오리 떼를 보고 와서는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엄혹한 세상을 만나도 시인은 자연물에 의탁하여 그것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당면한 어떤 싸움 앞에서도 그의 정신은 무한히 자유롭고 무한대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그 무심(無心) 속에 생동하는 사물이 푸드득 깃을 치며 자리 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 등등

 

 

 

사이

이시영

 

가로수들이 촉촉이 비에 젖는다

지우산을 쓰고 옛날처럼 길을 건너는 한 노인이 있었다

적막하다

 

 

 

이시영

 

봄이 온다고 나비 세 마리가 감히 앞배를 내어밀고

팽팽한 물살 바다로 나아가고 있다

 

 

 

삼우후(三虞後)

이시영

어머니를 묻고 돌아오는 길

구례구에서 남원, 오수역에서 임실까지

안개비 속에 온 산천이 잔잔한 싸락눈에 덮인다

산천도 또 한 주검을 새로 받아 안고 맑은 옷으로 갈아입는 중일까

공중의 새들 빠르게 벌판 이내 속을 날고

가까운 마을에선 식구들의 밥 짓는 연기 자욱타

 

 

 

상봉

이시영

 

아직 이른 봄 상여 한 채가 조용한 미소로 고향 산천을 찾아드니

어여 오게 어여 와 제일 먼저 반색을 하고 달려 나오는 외로운 무덤이 있다

 

 

 

이시영

 

1

새들은 날아오른다

겨울 추운 북풍 속으로

빠알간 부리를 빛내며

온몸으로 새들은 날아오른다

핏빛 연기 잠든 마을에 더 이상의

큰 슬픔이 없을 때까지

지상에 붙박힌 그들의 영혼을 차며

저 광막한 하늘 위로

노여움 속으로

 

 

2

아침 산길의 눈밭 위에는 머리가 상한 참새 두 마라기 서로의 날갯죽지에 핏빛 새근대는 부리를 묻은 채 잠들어 있었읍니다

 

이 도시에 새들의 영혼까지도 앗아가 버리는

무서운 계엄군이 진입하던 날

 

 

 

새벽

이시영

 

문경 봉암사 여름 숲을 태풍 루사가 강력히 훑고 지나간 뒤에 요사체 안마당으로 어린 떡두꺼비 한 마리가 엉금엉금 기어들고 있었습니다. 밥 짓다 말고 역시 나어린 공양주 스님이 나아가 맞이했더니 어미인 양 따뜻한 스님 팔에 척 안기는 것이었습니다

 

 

 

새벽까지

이시영

 

말 없는 사람들

때로는 말없음을 힘이라 껴안고

모르는 곳으로 고개 돌려 참는 거리

말없이 길을 열어 이 병신 보내는구나

더 멀리 돌아서 당도한 그곳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랑인가

밑도 끝도 없는 밑을 걸어 올라오는 발

목까지 걸어 올라오는 또 다른 나라

안 보이는 그 뒷사람이 나를 가르치는지

저 넓은 가슴 내가 거역하는지

일어서서 벽을 잡고 다시 굴러도

이 밤은 대답 없고

주먹만 내미는구나

새벽까지 고요히 내미는구나

 

 

 

새벽 두 시

이시영

 

오늘밤에도 나뭇잎들은 지상에서 오래 나부낀다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죽음은?

바람 속에서 저처럼 오래 나부끼다가

영원 속으로 짧게 스러지는 것?

 

 

 

새우도(圖)

이시영

 

어라!

세기(細技)에만 능하여 교졸을 벗지 못하는

어제까지의 봇을 내던져버리고

손가락으로 박박 문질러 그린 새우 한 마리가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턱수염을 빳빳이 세운 채

그림 밖으로 꿈틀꿈틀 기어 나올 것만 같으다

 

 

 

새해 달력을 보다

이시영

 

그는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출근했으며

어제 아침에도 어김없이 출근했으며

그제 아침에도 어김없이 출근했으며

죽지 않는다면 내일 아침에도 어김없이 출근할 것이며

아 그런데 창 밖에 함박눈이 내린다

쌓인 눈 속에 거위가 온몸을 묻고

목만 내민 채 조용히 좌선중이시다

좁쌀 같은 참새들이  다가와 아는 체를 해도

거구의 경비아저씨가 다가와 발을 굴러도

눈을 감으신 채 조용히 좌선 중이시다

 

 

 

생(生)

이시영

 

찬 여울목을 은빛 피라미떼 새끼들이 분주히

거슬러오르고 있다.

 

자세히 보니 등에 아픈 반점들이

찍혀 있다.

 

겨울처럼 짙푸른 오후.

 

 

 

생명

이시영

 

소머리가, 반쯤 평화로이 눈을 감은 소머리가 통째로 놓여 있던 정육점 앞마당에 오늘은 하늘에서 웬 참세 떼 몇 마리가 날아와 앞마당을 콕콕콕 쪼다가 이따금 핏빛 부리를 들어 소머리가 사라진 고깃간 안을 불안스런, 불안스런 눈길로 돌아보는 것이었어요.

 

 

 

서시(序詩)

이시영

 

어서 오라 그리운 얼굴

산 넘고 물 건너 발 디디러 간 사람아

댓잎만 살랑여도 너 기다리는 얼굴들

봉창 열고 슬픈 눈동자를 태우는데

이 밤이 새기 전에 땅을 울리며 오라

어서 어머님의 긴 이야기를 듣자 <1976년>

 

 

 

서영분 양

이시영

 

서영분이라고 한다. 고등공민학교 1학년 진반. 새벽 네 시에 철공소로 나간 아버지는 밤이 터져야 굽은 허리를 넘고 돌아와, 달아오른 팔다리로 토벽을 치고 떡판을 내동댕이 치다가 녹물을 쏟고 떨어진단다. 말없는 몽둥이들을 안고 잠들지 않는 산, 이마를 드는 언덕. 등성이까지 밀려온 밤을 깎는 남폿불. 컴컴한 얼굴을 뒤집어쓴 트랙터가 껄껄 웃는 소리에 놀라 떠오르는 노오란 쉐터의 담임선생님. 밤낮으로 드럼만 치러 나가는 오빠는 헤헤거리며 너희 담임 괜찮게 생겼더라고 놀리지만 2기분 수업료를 못 받쳤단다. 코가 달아난 운동화로 그리운 곳을 향해 아무리 뛰어도 못난 얼굴, 부끄러운 손, 오늘도 교실에 못 들어갔단다.

 

 

 

서울역에서

이시영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바닥이 다 닳은 작업화,

보풀이 인 바지,

깡충하게 허리가 드러난 짧은 상의,

그러나 수많은 날의 풍찬노숙에도 결코 웃음을 잃지 않은 선량한 농부 얼굴의 그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석양

이시영

 

길 하나가 산꼭대기를 향해 달리다가 꼬리를 슬쩍 들어본다

그 길을 다람쥐 한 쌍이 바지런희 걷고 있다

 

 

 

석양녘

이시영

 

가을이 깊어가자 수수는 잘 익어 고개를 푹 수그리고 산두밭 사잇길로 무거운 쟁기를 끌고 오던 소가 갑자기 뒷발질로 송아지 뱃구래를 지른다. 매애하고 수수밭 속으로 뛰어든 송아지가 와삭와삭 수숫대를 훔치다 말고 놀란 눈으로 미끈한 하늘에 불끈 솟는 피 비린 노을 기둥을 본다.

 

 

 

석양빛 석양빛

이시영

 

최명희씨, 이런 시는 어떤지요?

 

탱자나무 울타리 가를

자전거를 타고 지나고 싶다

내게 다시 한번 더 그 화사한 봄날의 석양빛이 머물러준다면

 

 

 

성자(聖者)처럼

이시영

아몬드에서 한잔하다가 지상의 계단을 천천히 올라 창비 화장실을 가다가 그 오른쪽으로 환하게 불 켜진 집, VIP 양복점의, 다리를 약간 저는 주인 겸 1급 재단사가 커다란 가위를 들고, 한쪽 귓등엔 하얀 백묵을 꽂은 채, 성자처럼 엎드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나 거기 서서 오래오래 바라보곤 하였다.

 

 

 

성장

이시영

 

바다가 가까워지자 어린 강물은 엄마 손을 더욱 꼭 그러쥔 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거대한 파도의 뱃속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다 엄마 손을 아득히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 잘 가거라 내 아들아. 이제부터는 크고 다른 삶을 살아야 된단다. 엄마 강물은 새벽 강에 시린 몸을 한번 뒤채고는 오리처럼 곧 순한 머리를 돌려 반짝이는 은어들의 길을 따라 산골로 조용히 돌아왔습니다.

 

 

 

소나기

이시영

 

여름비가 사납게 마당을 후려치고 있다

명아주 잎사귀에서 굴러떨어진 달팽이 한 마리가

전신에 서늘한 정신이 들 때까지

그것을 통뼈로 맞고 있다.

 

 

 

이시영

 

죽은 이의 손을 만져본 적이 있다

어릴 적 늘 나를 업고 동구 밖을 나가시던 큰어머니

 

자정이 넘었는데도 마당의 큰솥에선 돼지국물이 펄펄 끓고

상여꾼들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대는데

어머니 손은 조용히 따스했다

 

뒷문 밖 싸락눈이 싸락싸락 스치던 밤이었다

 

 

 

솔숲에서

이시영

 

노랗게 잘 익어 그 나무 밑에

곱게 떨어져 쌓인 솔잎을 헤치면

시커멓게 잘 익은 검은 흙이 나오고

검은 흙은 또 그 밑의 뿌리와 함께 큰 숨을 들이쉬며

내쉬며

이다음에 올 커다란 세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솔잎 향기

이시영

 

5호선 전철 서쪽 종점은 방화역입니다. 이 몸은 일주일에 한두 번 그곳엘 갑니다.

거기 국립국어원 옆의 한서자기원이라는 곳에서 자기치료를 받기 위해서이죠.

 

웬 치료냐구요? 젊은 날 마구 사용하고 버려서 너덜너덜해진 육신과 영혼에

우주 자연의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거기 가는 재미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바로 옆 개화산 자락에 잇대어 지은 방화근린공원 소나무 숲 때문입니다.

자기치료가 끝난 후 두어 시간을 저는 그 숲 아래 가만히 앉아 있다가 오곤 하는데,

푸른 하늘 아래 폭넓은 차양을 펼친 것 같은 조선소나무가 날것으로 내뿜는 솔잎 향기는

그대로 내 피부와 폐와 머리로 마구 쏟아져 들어와 일주일 내내 내 몸과 영혼에선

진한 솔잎 향기가 떠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내가 마치 한 그루 우주 자연의 소나무가 되어

하늘을 향해 찰나적으로 새파란 팔을 펼치기도 합니다.

 

 

 

송사리들

이시영

 

자운영꽃이 활짝 핀 1955년 봄이었다. 동그란 로이또 안경을 쓰고 빡빡머리인 교장 선생님이 아직 적령 미달인 생도들을 모아놓고 돌아가며 면접을 하다가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주소가 어디냐?” 모기처럼 기어드는 목소리로 간신히 “전라남도 구례군 ……”이라고 대답하자 대번에 큰 소리로 내년에 다시 오라고 했다.

머쓱해진 아버지가 두루마기 자락을 날리며 포플러처럼 성큼성큼 광평리 둑으로 올라서는데, 그 밑에선 송사리들이 햇볕에 맑은 등을 빛내며 놀았다.

 

 

 

수건 쓴 여자

이시영

 

대학교 일 학년 때였던가 사 학년 때였던가

두례 누나를 만난 것이.

봇물 잔잔히 굽어 흐르는 방아다리께 조금 지나서였다.

나는 내려가고 그녀는 올라가면서.

지금은 옛 고향 문수골에 눌러산다고 했다.

인공 때 우리 집서 부엌살이 시작한 누나.

대숲이 눈보라에 휘어지던 날 저녁

빨갛게 언 동생 순임이의 손목을 꼭 쥐고 들어서며

첫마디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고 싶다였지.

그날 애기를 업고 있었던가 빈손이었던가

논도랑 가에 비켜서서 귓불까지 환한 웃음을 웃다가

커다란 눈에 부신 듯 굵은 눈물 글썽이며 부리나케 돌아서던 여자.

 

 

 

수평선

이시영

 

밤새도록 파도는 몸부림치면서 일어서면서

신음하면서

아침이 오면

거기 달랑

젊은 섬 하나를 낳는다

뜨거운 은빛 등을 보이며 떠올랐다 난

바다에 떨어지는

아침 수평선의 서늘함이여

 

 

 

숲에 가면

이시영

 

숲에 가면 좋은 일이 있을 듯하다

덤불 속에 아직 온기 남은 작은 멧새알 하나,

바위 모서리를 뚫고 샘솟는 뜨거운 석간수(石間水) 한 모금,

숲에 가면 오래 잊은 좋은 일이 있을 듯하다

 

 

 

이시영

 

화살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과녁에 박혀

전신을 떨듯이

나는 나의 언어가

바람 속을 뚫고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마구 떨리면서 깊어졌으면 좋겠다

불씨처럼

아니 온몸의 사랑의 첫 발성처럼

 

 

 

시골

이시영

 

원두막엔 아무도 없소

바람이 들어와 놀다가 가고

제비가 들어와 물똥을 싸고 가고

잠자리가 들어와 하늘하늘 짝짓기하다 가고

원두막엔 아무도 아무도 없소

 

 

 

시를 쓰려면

이시영

 

시를 쓰려면

온몸에 저를 실어

산 같은 무게로 바위 같은 몸짓으로 활활 타오르는

넋의 푸른 숨결이 있어야 할 터인데

어느 날 만년필 끝에서 쉽게 풀어지고 씌어지는 나의 시여

너에게는 피의 냄새가 없다

말의 탐욕만이 있을 뿐

관념의 허상만이 있을 뿐

살아있는 사람의 노여움 긴 긴 입맞춤이 없다

그 몰아치는 폭풍 속의 서늘한 눈빛이 없다

 

 

 

시(詩)를 찾아서

이시영

 

벼랑에서 한발 더 성큼 내딛다가

하늘 허공에 아스라이 걸린 심허사(心虛寺) 한 채,

내 오늘은 반드시 그 절을 찾아

저 짙푸른 태산준령을 넘어야겠다.

 

 

 

시월

이시영

 

나비가 지나간 하늘 한복판이 북처럼 길게 찢겨졌다. 그곳으로 구름송이들이 송사리처럼 모여들어 엉덩방아들을 찧느라고 가을 한 자락이 오후 내내 눈부시다.

 

 

 

시의 집

이시영

 

박정만 시인이 세상을 뜬 지 여러 해가 지나서였다. 누가 구룡산 약수터 야트막한 단풍나무 가지에 그의 시집을 열심히 걸어 놓았다. 모르는 척 지나칠 때마다 생전의 모습처럼 외로움을 많이 타던 파란 표지의 [잠자는 돌]. 바람이 오르내리면서 읽어주었고 따뜻한 눈보라가 와서 이따금 덮어주었다.

 

 

 

시인

이시영

 

김종삼은 살아가노라면 어디선가 굴욕 따위를 맛볼 때가 있는데, 그런 날이면 되건 안되건 무엇인가 그적거리고 싶었으며 그게 바로 시도 못 되는 자신의 시라고 했다. 마치 이 세상에 잘못 놀러 나온 사람처럼 부재(不在)로서 자신의 고독과 대면하며 살아온 사람, 그런 사람을 나는 비로소 시인이라고 부른다.

 

 

 

시인 나귀

이시영

 

그의 생은 자기보다 무거운 역사의 짐을 지고 노을 진 산 비탈길을 올라야 하는 남루한 등짐장수와 같은 것

그러나 그의 시는 저 깊은 생의 밑바닥을 치며 올라오는 고요론 저녁 놋종 소리와 푸른 밀물 같은 것

 

 

 

시인의 눈

이시영

 

좋은 시인들은 항상

자기로부터 나은 눈을 갖고 있다

그 눈은 다람쥐의 두 눈처럼 한없이 맑고 투명하여

이슬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급류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그것처럼

우리의 등짝에도 붙어 있어

세계의 심연을 예감하고

그 아가리를 향해 전속력으로 자신을 던질 줄도 아는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

 

어찌 우리 감응치 않으리오

 

 

 

시인이라는 직업

이시영

 

금강산에 시인대회 하러 가는 날, 고성 북측 입국심사대의 귀때기가 새파란 젊은 군관 동무가 서정춘 형을 세워놓고 물었다. "시인 말고 직업이 뭐요?" "놀고 있습니다." "여보시오. 놀고 있다니 말이 됩네까? 목수도 하고 노동도 하면서 시를 써야지……" 키 작은 서정춘 형이 심사대 밑에서 바지를 몇 번 추슬러 올리다가 슬그머니 그만두는 것을 바다가 옆에서 지켜보았다.

 

 

 

신록

이시영

 

고목 나무에 꽃 피었네

지상에선 검은 흙을 뚫고 나온 애벌레 한 마리가 물 묻은 머리를 털고

이제 막 그것을 치어다 보네

 

 

 

신새벽

이시영

 

한밤중에 깨어 일어나

내가 갑자기 착한 소가 될 때가 있다

 

이때가 가장 정다운 때!

넓은 귀를 늘어뜨리고

내가 더 깊숙한 나로 태어날 때!

 

우주의 저 까마득한 밑바닥에서

쨍그랑 하고 돌멩이 하나 깨어지는 소리 들린다

 

향기로운 땅 새벽이 가차이 열리는 것은 이때부터

그리운 그리운 파도가 먼 해안선을 초록 띠로 물들이는 것도 이때부터

 

 

 

십일월

이시영

 

갈대밭에 갈대들이 하이얗게 피어

갈바람에 시원히 나부낍니다

 

그 너머 하늘은 쪽빛 하늘

참새들도 새파랗게 얼어서 돌아옵니다

 

 

 

십이월

이시영

 

비바람 속에서 까치집 하나가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안에는 따스한 생명들이 가득하다

 

 

 

싸락눈 내리는 저녁

이시영

 

싸락눈 내리는 저녁, 길을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니 부르는 사람은 없고 그때 막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있지. 누군가 내 생을 다 살아버렸다는 느낌! 그런데 그 누군가는 누구이며, 과연 나에게 생 같은 것이 있기는 있었을까? 잘 구르지 않는 수레에 시커먼 연탄 같은 것을 싣고 가파른 언덕길을 죽어라 밀고 왔다는 느낌뿐. 그런데 코밑에 연탄가루 잔뜩 묻은 그것을 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싸락눈 그친 저녁, 길을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니 아무도 없고 그때 막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있지.

누군가 내 생을 다 살고 간 것 같은 느낌! 그런데 그 누군가는 도대체 누구이며, 과연 내가 이 생에 있기는 있었을까? 시간은 때로 뱀처럼 미끄럽게 손아귀를 빠져 달아났고 운명은 늘 제 얼굴을 가린 채 차갑게 나를 스치고 갔을 뿐 한번도 제 모습을 똑바로 보여준 적이 없지.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듯 이렇게 싸락눈 내리는 , 그친 길 위에 문득 나를 멈춰세워 날카로운 질문만 던질 뿐. 과연 내가 살기는 살았을까? 아니, 생을 제대로 살고 있기는 있을까?

 

 

 

아득한 산

이시영

 

우리가 오늘 오르기에는

아득한 산

가파른 산

우리는 지금 그 밑에 서서

안개와 비에 젖은

너의 얼굴을 안타까이 안타까이 바라다볼 뿐

아, 아득한 산

가파른 산

우리 모두 다시 태어나지 않고선

영원히 오르지 못할 산

 

 

 

아름다운 결정전

이시영

  

브라질과 독일의 월드컵 결승전이 있기 두시간 전 히말라야 산기슭의 팀푸 축구경기장에서는 네덜란드의 한 필름업체의 주관으로 세계 랭킹 202위인 부탄과 203위로 최하위인 몬세라트와의 진짜 꼴찌 결정전이 열렸는데 4:0 홈팀의 압승으로 끝난 이날의 경기 내용보다는 언덕 위 철조망 주변에 모여들어 팔짱을 끼고 응원하던 젊은 승려들의 가지런한 미소와 한쪽 뺨에 발그레한 부탄 국기를 페인팅한 채 수줍어하던 소녀들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경기 내내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부탄 진영을 마음껏 뛰어다니며 즐거워하던 순한 개의 모습도.

 

 

 

아름다운 분할(分割)

이시영

 

파도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달려와

단 한 차례 방파제를 들이받곤

거대한 물보라를 남기며 스러져간다

 

수평선 쪽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문득 머리를 들고

잔잔하게 하늘을 가른다

 

 

 

아수라(阿修羅)

이시영 

 

주여, 지난 겨울은 참으로 잔인했습니다

우리는 2백만 마리의 돼지를 산 채로 땅에 묻어야 했으며

(그 중에 어떤 돼지는 비닐을 뚫고 나와 하늘을 향해 다리를 뻗대고 죽었습니다)

6백만 마리의 오리와 닭을 살처분했고

새끼 밴 암소의 슬픈 눈동자를 외면하며 독극물 주사를 마구 놓았습니다

그리고 핏빛 침출수가 가득 흐르는 봄이 와

땅밑에선 아직 그들의 죽음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아슬한 거처

이시영

 

저 보잘것없는 가지 위로 참새 몇 마리가 내려앉자

나무가 휘청하면서 세계의 중심을 새로 잡는다

아람드리 바람이 불어왔다가 불어간다 가지가 흔들린다

참새들의 작은 눈이 바쁘게 움직인고

그 위로 곧 어두운 저녁이 내린다

 

 

 

아심찮다

이시영

 

저 위의 함경도 여자들은 머리의 임을 내려주거나 우물가에서 무거운 물동이를 이어주면 "아심찮슷꾸마" 하고 마치 화가 난 듯 강한 악센트로 말하고 총총히 사라진다고 하는데, 저 밑의 내 고향 전라도 여인들은 그런 일을 당하면 보리밭에 종다리 나는 목소리로 "아따 아심찮구만이요이……" 하면서 비음(鼻音)을 길게 빼면서 봄 훈김 어지럽게 어른거리는 밭둑 너머로 천천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주 잠깐

이시영

 

가자 지구를 향해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있는

스물한 살 이스라엘 청년의 가지런한 이빨이

햇살 속에서 아주 잠깐 빛났다

 

 

 

아침

이시영

 

너는 왜 여기까지 날아와 새가 되었니?

동몽골 고원의 푸른 草地에 내려앉아

아침 부리를 닦고 있는 작은 참새여

 

 

 

아침의 몽상

이시영

 

아침에 일어나면 여기가 어디지 하고 아주 잠깐 놀랄 때가 있다. 서울이고 마포고 십칠년째 살아온 그 방 여전한 침대건만 나는 이 낯선 영혼의 시간, 이 세상이 아닌 듯한 처음인 곳이 좋다. 그것은 밤사이 내 정신이 육체를 떠나 아주 먼 곳을 서성이다(어쩌면 열사의 후끈한 바람 부는 안드로메다 성좌까지!) 이제 막 제 거소를 찾아 문밖에 도착했다는 신호! 그분이 돌아오면 내 늙은 몸은 일어나 모자를 벗고 정중히 인사해야지. "안녕하십니까, 따르꼬프스끼 씨! 도구들을 챙기다가 햇빛을 역광으로 받아서인지 이마를 약간 찡그리며 대답하겠지. "당신 배역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빨리빨리 세수하고 이빨 닦으시오!" 그럼 나는 공손하게 일어나 다시 한번 인사해야지. "그런데, 지금 , 여기가, 어디지요?" 그때 저만치서 어디에서 수탉의 울음소리가 째지듯 들려왔다.

 

 

 

아침의 장관

이시영

 

벵골만에 아침이 오면 수천의 벵골인들이 반월형의 바다를 향해 엉덩이를 까고 실례하고 있는 모습을 기차 여행중인 어느 외국인 카메라가 잡고 말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인도양에서 밀려온 시원한 파도가 막 일을 끝낸 그들의 아랫도리를 깨끗이 닦아주고 있는 모습은 바다에서 갓 솟구쳐오르는 아침해와 더불어 장관이었다.

 

 

 

아침이면

이시영

 

귀뚜라미는 밤새도록 방 밖에서 울며

아침이면 가장 눈부신 소리의 보석을 낳는다

이슬이다

 

 

 

아, 4월

이시영

 

감자 대를 뜯다가도 나는 너를 기다렸다

오늘도 동냥 나가 나는 너를 기다렸다.

강 건너 버들잎 날리면

보리밭 둑을 타고 너는 오리라

뒷산에 진달래 붉게 울면

목발을 짚고 너는 오리라

땀에 젖은 얼굴 빛나는 함성

그날의 총탄 속을 뚫고

너는 다시 오리라

거친 땅이 낳은 아들 문둥이 아들

누더기 속에 간 오히려 깨끗한 사랑

두 팔에 덥석 안을 날은 오리라

아아 몇몇 해던가

먹구름을 몰아내면 또 같은 먹구름

소나기를 피하면 더 거센 소나기

너는 오지 않고 쉽사리 오지 않고

종살이에 지친 누이들

칡꽃이 희게 울 때 또 다른 주인 찾아 몸 팔러 갔네

종달이 빈 밭에 날 때

힘깨나 쓰는 동생들 서울 가 떠돌이가 되었네

애비 같은 비렁뱅이 되었네

아아 몇몇 해던가 기다림의 나날

한번은 박차고 나아가 맞이해야 할 날

가난하지만 자랑스럽게 우리가 우리 차지해야 할 날

크나큰 슬픔의 날 별빛 해방의 날 오리라

바로 너는 오리라 꽃수레 타고

가랑잎만 굴러도 나는 너를 기다렸다.

다리 밑 움막 열고 나와 나는 너를 기다렸다.

 

 

 

암소를 몰다

이시영

 

꿈에 내가 소년이 되어 암소를 몰고 고향으로 가는데, 암소는 산맥같이 우람하고 온 몸이 흰빛이었다. 꿈속에서도 어린 내가 이런 암소를 몰아보다니 하며 감격해 마지않았는데 그 암소가 마을 입구인 외기내 다리를 건너다가 그만 고삐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다가가 발에 걸린 고삐를 풀어주자 거대한 산맥은 일어서서 나를 향해 선하고 큰 눈망울을 굴리는데 그 눈빛이 어디선가 꼭 한번 본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전화벨이 울리고 󰡒시영인감? 나 인터넷에서 방금 자네 시 낭송하는 것 봤구만. 「만월」이었던가 「서시」였던가. 하여간 뭉클해서 지금 바로 전화 넣는구만.󰡓 목소리가 영락없는 용택씨였다. 그 와중에도 이 창포잎 같은 꿈을 계속 이어가고자 하였으나 차안(此岸)의 시간은 오전 9시 40분, 나는 암소가 간 곳을 이미 모른다.

 

 

 

애련(哀憐)

이시영

 

이 밤 깊은 산 어느 골짜구니에선

어둑한 곰이 앞발을 공순히 모두고 앉아

제 새끼의 어리고 부산스런 등을

이윽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겠다

 

 

 

애월(涯月) 지나며

이시영

 

애월, 하면 떠오르는 이가 있다. 선량한 키에 그 누구도 속일 수 없을 것 같은 서늘한 눈매, "이 군, 그렇게 쓰면 안 됀데이" 하시며 염소처럼 앞에서 또각또각 걷던 성실한 걸음. 그에게도 애타는 사랑의 시절이 있었던가. 바다가 포구를 초승달처럼 안고 있는 이곳에서 어린 제자뻘과 소꿉살림을 차렸다지. 매서운 바닷바람이 돌담을 쓰는 계절, 물어 물어 찾아온 부인이 정성 들여 수놓은 누비이불과 솜옷을 말없이 내려놓자 밖으로 달려나가 벼랑 위에 걸린 달을 오래오래 바라보았을 그

나, 오늘 강정마을 투쟁길에 제주시 애월읍을 지나며 젊은 애인을 배에 실어 보내고 돌아오며 지었다는 그의 슬픈<이별의 노래>를 속으로 불러본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써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 김성태 곡 <이별의 노래> 1~2절.

 

 

 

야옹(夜翁)

이시영

 

한여름 양철 지붕 위의 뜨거운 고양이 한 마리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가 건너편 화장실의 내 눈과 딱 마주치자 발끝까지 환한 웃음을 한 번 웃고는 재빨리 짐승의 꼬리를 내리고 한낮의 컴컴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시다

 

 

 

어느 굽이

이시영

 

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아내는 병원으로,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버티다가

그녀는 마루에서, 나는 건넌방에서 그만 잠이 들었다

새벽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출가한 딸네들에게선 전화 한통 없었다

다만 할머니의 외로운 방의 머리맡은 국민학교 3년 짜리 딸이 차지하고 앉아

이따금 커다란 머루 같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1917년생, 늘 가슴 졸이며 살아온 한 生이 어느 굽이에서 조용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느 삶

이시영

 

영하 18도의 아침, 동태장수 아저씨가 좁다란 홍천식당 앞에 타이탄을 바짝 붙어놓고 눈알이 꽝꽝 얼어붙은 동해産(산) 동태를 내리치는데 아저씨의 팔뚝에서 도마에서 쉿쉿 뜨거운 파란 불꽃이 인다.

 

 

 

어느 석양

​이시영

 

동백꽃 꽃숲에 참새들이 떼 지어 앉아

무어라 무어라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동백꽃 송이들이 알았다 알았다 알았다고 하면서

무더기로 져내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쓸쓸한 중의 심사에 비친...

이시영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뒷 교정의 가지 잘린 목련나무는

딱 한 송이 목련꽃을 매달고 서 있네

 

 

아, 차라리 봄이 오지나 말 것을

 

 

 

어느 아침

이시영

 

대흥사 아기 스님 둘이서 키를 쓰고 아랫마을로 소금 얻으러 갔다가 어느 호랑이 할매에게 붙잡혀 "네 이놈들 다시 한번 이불에 오줌을 쌌다가는 가위로 고추를 잘라버리겠다."는 위협에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TV 카메라에 잡히고 말았는데 얼마나 혼쭐이 났는지 새 새끼처럼 한껏 벌린 그들의 목젖이 아침 햇살에 발그레하게 빛났습니다.

 

 

 

어느 저녁의 풍경

이시영

 

경의선 철길공원 이면도로, 그러니까 용문시장 가는 길에서 저보다 많은 짐을 실은 소형 트럭과 배달 오토바이가 부딪쳤다. 짐차는 옆으로 고꾸라져 한쪽 바퀴가 들려 있고, 오토바이 헬멧은 날아가고 비닐 랩 속의 음식들이 거리에 왈칵 쏟아졌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어둑한 길 위에서 청년은 코피가 흐르는 얼굴을 다리 사이에 묻고 울고, 트럭의 사내는 절뚝이며 다가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때마침 삼성래미안아파트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년 여인이 다가와 󰡒다친 데는 없느냐? 병원 먼저 가봐야지 않느냐?󰡓며 달래도 두 사내는 이번 생을 여기서 아예 접어버리겠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는데, 아까부터 청년의 바지 뒷주머니에선 핸드폰 벨이 다급하게 울린다.

 

 

 

어느 토요일 오후 마포 생맥주집에서 나해철 시인과 함께 들은 이야기

이시영

 

서중 복도 사건 이후 공부를 놓아버린 조태일 소년의 성적은 고3 졸업 무렵에는 급기야 반에서 58등까지 내려가 있었다는데요. 그 성적엔 어느 곳도 원서를 써줄 수 없다고 완강히 버티던 담임 선생님을 사흘을 찾아가 설득한 끝에 "59등에겐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뒤 가까스로 K대 국문과 원서를 쓸 수 있었답니다. 그러나 조태일이 원서를 써갔다는 소문이 학교 안팎에 안 날 리가 없는 법. 이번에는 59등이 담임을 찾아가 강짜를 부렸다고 합니다. "아니 58등은 써주고 59등은 안 써준다니 말이 됩니까?" 결국 59등도 J대 철학과 원서를 써가 그 해 입시에서 나란히 합격했으니 어찌 좋은 일 아니었겠느냐며 조태일 시인은 마치 아미타불처럼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어요.

 

 

 

어떤 개인 날

이시영

 

지난여름 장마비에 찢긴 가지에

새봄 들어 간신히 잎을 피워놨더니

올여름 장대비는 그걸 모르고

그 아픈 자릴 또 사정없이 꺾어버리네

 

 

 

어떤 성화(聖畵)

이시영

 

아기 예수가 오셨다는 영하 17도의 성탄 전야, 우성아파트 가는 언덕길 초입에서 군고구마장수 부부가 장작불이 이글거리는 화덕의 연통을 양쪽에서 꼭 끌어안은 채 칼바람을 맞고 있었는데, 나무뿌리처럼 강인하게 얽힌 그들의 두 팔을 지상의 그 누구도 다시는 떼어놓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어떤 이별

이시영

 

여름 한낮의 햇빛 속을

맨손의 한 여자가 울면서 길을 가고 있다

저 적요의 뒷모습에 쏟아져 내리는

한낮 여름의 강렬한 함성!

 

여름 한낮의 햇빛의 그늘 속에서

가방을 든 한 남자가 비스듬히 서서

그 여자를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다

 

아, 사라지고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는

흰 길 위의 두 점의 가없는 펄럭임

 

 

 

어린 동화

이시영

아랫도리를 홀랑 벗은 아이가

젊은 엄마의 손을 이끌고 대낮의 쭈쭈바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하느님이 뒤에서 방긋 웃다가 그 아이의 고추를 탱탱히 곧추세우자

젊은 엄마의 얼굴이 채양 사이로 빨갛게 달아오른다

 

 

 

어머니

이시영

 

어머니

이 높고 높은 아파트 꼭대기에서

조심조심 살아가시는 당신을 보면

슬픈 생각이 듭니다

죽어도 이곳으론 이사 오지 않겠다고

봉천동 산마루에서 버티시던 게 벌써 삼년 전인가요?

 

덜컥거리며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엘리베이터에

아직도 더럭 겁이 나지만

안경 쓴 아들 내외가 다급히 출근하고 나면

아침마다 손주년 유치원 길을 손목 잡고 바래다주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하루 일거리

파출부가 와서 청소하고 빨래해주고 가고

요구르트 아줌마가 외치고 가고

계단 청소하는 아줌마가 탁탁 쓸고 가버리면

무덤처럼 고요한 14층 7호

 

당신은 창을 열고 숨을 쉬어보지만

저 낯선 하늘 구름 조각 말고는

아무도 당신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허리 펴고 일을 해보려 해도

먹던 밥 치우는 것 말고는 없어

어디 나가 걸어보려 해도

깨끗한 낭하 아래론 까마득한 낭떠러지

말 붙일 사람도 걸어볼 사람도 아예 없는

격절의 숨 막힌 공간

 

철컥거리다간 꽝 하고 닫히는 철문 소리

어머니 차라리 창문을 닫으세요

그리고 눈을 감고 당신이 지나쳐온 수많은 자죽

그 갈림길마다 흘린 피눈물들을 기억하세요

없는 집 농사꾼의 맏딸로 태어나

광주 종방의 방직 여공이 되었던 게

추운 열여덟 살 겨울이었지요?

 

이 틀 저 틀로 옮겨 다니며

먼지 구덕에서 전쟁 물자를 짜다

해방이 되어 돌아와 보니

시집이라 보내준 것이 마름집 병신 아들

그 길로 타향을 떠돌다

손 귀한 어는 양반집 후살이로 들어가

다 잃고 서른이 되어서야 저를 낳았다지요

 

인공 때는 밤짐을 이고 끌려갔다

하마터면 영 돌아오지 못했을 어머니

죽창으로 당하고 양총으로 당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요

국군이 들어오면 국군에게 밥해주고

밤 사람이 들어오면 밤 사람에게 밥해주고

이리 뺏기고 저리 뺏기고

쑥국새 울음 들으며 송피를 벗겨

저를 키우셨다지요

 

모진 세월도 가고

들판에 벼 이삭이 자라 오르면

처녀적 공장 노래 흥얼거리며

이 논 저 논에 파묻혀 초벌 만벌 상일꾼처럼 일하다

끙달을 이고 돌아오셨지요

비가 오면 덕석걷이, 타작 때면 홀태앗이

누에 철엔 뽕걷이, 풀짐 철엔 먼 산 가기

여름 내내 삼삼기, 겨우 내내 무명 잣기

씨 뿌릴 땐 망태 메기, 땅 고를 땐 가래 잡기

억세고 거칠다고 아버지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머슴들 속에 서면 머슴

밭고랑에 엎드리면 여름 흙내음 물씬 나던

아 좋았던 어머니

 

그 너른 들 다 팔고 고향을 아주 떠나올 땐

몇 번씩이나 뒤돌아보며 눈물 훔치시며

나 죽으면 저 일하던 진새미밭 가에 묻어 달라고

다짐 다짐하시더니

오늘은 이 도시 고층아파트의 꼭대기가

당신을 새처럼 가둘 줄이야 어찌 아셨겠습니까

엘리베이터가 무겁게 열리고 닫히고

어두운 복도 끝에 아들의 구둣발 소리가 들리면

오늘도 구석방 조그만 창을 닫고

조심조심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는

흰 머리 파뿌리 같은 늙으신 어머니.

 

 

 

어머니 생각

이시영

 

어머니 앓아누워 도로 아기 되셨을 때

우리 부부 외출할 때나 출근할 때

문간방 안쪽 문고리에 어머니 손목 묶어두고 나갔네

우리 어머니 빈집에 갇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돌아와 문 앞에서 쓸어내렸던 수많은 가슴들이여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자장자장 우리 아가

나 자장가 불러드리며 손목에 묶인 매듭 풀어드리면

장난감처럼 엎질러진 밥그릇이며 국그릇 앞에서

풀린 손 내미시며 방싯방싯 좋아하시던 어머니

하루 종일 이 세상을 혼자 견딘 손목이 빨갛게 부어있었네

 

 

 

엄연한 봄날

이시영

 

긴 겨울 지나고 나자 마을 밖 외진 애장터에도

미소처럼 연한 풀잎이 돋았다

여기도 하나의 무덤이란 듯이, 생명이란 듯이

 

 

 

여덟 살 적

이시영

 

어느 별에서 헤매이다

너는 왜 내게로 왔니?

딸아이가 땀내 나는 내 손을 꼬옥 잡고

대모산을 오른다

한때는 신들의 영험한 산이었던

 

 

 

여름

이시영

 

1

은어가 익는 철이었을 것이다. 아니다 수박이 익는 철이었다. 통통하게 알을 밴 섬진강 은어들이 더운 몸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찬물을 찾아 상류로 상류로 은빛 등을 파닥이며 거슬러 오를 때였다. 그러면 거기 간전면 동방천 아이들이나 마산면 냉천리 아이들은 메기 입을 한 채 바께쓰를 들고 여울에 걸터앉아 한나절이면 수백 마리 알 밴 은어들을 생으로 훑어가곤 하였으니, 그런 밤이면 더운 우리 온몸에서도 마구 수박내가 나고 우리도 하늘의 어딘가를 향해 은하수처럼 끝없이 하얗게 거슬러 오르는 꿈을 꾸었다

 

 

2

동몽골 고원의 얕은 여울 속을 꼬리를 툭툭 치며 거슬러 오르는 경쾌한 송사리들

그러나 그 위의 협곡에는 거대한 망각의 해가 바짝 마른 혀를 적시며 기다리고 있다

 

 

 

여름밤

이시영

 

바가놀에서 늦은 저녁밥 먹고 테렐지 숲 가는 길,

밤새도록 날벌레들이 날아와 창유리에 머리를 부딪고 죽었다.

달빛이 명주처럼 푸른 밤.

 

 

 

여름 속에서

이시영

 

귀가 트였으면

이 여름에는 두 귀가 트여

곧은 소리 들을 수 있었으면

밤하늘 변방에 뜬

의로운 소리 놓치지 말았으면

소리개 높이 날아

소리란 소리 다 파먹어도

벼랑에 가 우뢰처럼 부서지는 소리 떼

한 마디도 놓치지 말았으면

묵은 귀 잘라버리고

햇볕에 잘 울리고

빗속에서 싱싱한

귀가 돋았으면

 

눈이 트였으면

두 눈 맑게 트여

십리(十里)를 볼 수 있었으면

십리(十里) 앞을 걷다가 참수(斬首)된 사람들

풀밭에 떨어진 번개 같은 눈들 지나치지 말았으면

별 하나이 흘리는 눈물

아득한 땅에서 이는 연기

칼빛 속에서 소리치는 크나큰 손들

덥석 잡을 수 있었으면

썩은 눈 빼어버리고

나뭇잎에 닿으면 고요히 오므리고

쇠를 보면 한 자는 뛰쳐나올

커다란 눈을 가졌으면

 

 

 

여의도의 봄

이시영

 

강변 주차장의 늙은 고양이가 게으른 앞발을 들고

지는 벚꽃을 보는데 벚꽃의 얼굴이 낮술 먹은 듯

해반주그레하다.

 

 

 

영화 ‘희랍인 조르바’

이시영

 

`선량한 짐승' 조르바가 크레타섬 바닷가에서 죽음을 얼마 앞둔 여관 주인 부블리나의 간청으로, 그녀가 가장 잘나갔을 때 영국 해군 제독에게서 받은 금화 두 닢을 녹여 만든 반지를 나눠 끼고 쓸쓸한 결혼식을 올릴 때 말했다.

"주여, 나 알렉시스는 오르탕스를 아내로 맞아 영원히 사랑할 것이며......"

그러나 바다는 말이 없고, 슬쩍 올려다본 하늘 또한 잠잠하였다.

 

 

 

예감

이시영

 

잎새들이 바람에 온몸이 뒤집힐 듯 흔들리는 건

신의 뜨거운 숨결이 거기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대지(大地)의 한끝에 서서

나 아닌 나를 뚫고 지나갈 그 어떤 강력한 폭풍을 기다린다

 

 

 

옛 거울 앞에서

이시영

 

사람이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끝내는 갈 곳 없이 돌아온

 

자기 자신과의 외로운 맞부딪침이어니

너 홀로 깊고 깊어라

 

 

 

옛 시

이시영

 

옛 시에 집착치 말라

옛 시에는 옛 삶뿐,

부정해야 할 어제의 네가 있을 뿐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가 없다

수많은 다른 삶을 잉태한 채 아직 처음인 세계를 꽝꽝 여는

오늘의 설레이는 몸짓 발짓이 없다

 

 

 

오늘 같은 날

이시영

일요일 낮 신촌역 앞 마을버스 1번 안

등산복 차림의 화사한 할머니 두 분이

젊은 운전기사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여보시우 젊은 양반! 오늘같이 젊은 날은 마음껏 사랑하시구려.

그래야 산천도 다 환해진다우"

 

 

 

오늘 밤

이시영

 

어느 해 봄, 원효로에서였던가

복국집의 복어국을 마시다가 어느 중이 불쑥 말했다

"봄 보지 가을 좆,

봄 보지 가을 좆"이라고

 

아 오늘 밤 시퍼런 봄바다에 싸락눈 치겠다

물고기들 솟구치겠다

 

 

 

오탁번의 시

이시영

 

방학리 사는 초등학교 동창 김종명이네 집에 놀러 갔다가 안방에서 나오는 머리 하얀 노친네를 보고 그의 어머닌 줄 알고 깜빡 큰 절을 올릴 뻔했다고 한 오탁번의 시는 일품이었다. 아니, 거실에서 자정 너머까지 티브이를 보다 안방에 들어가보니 이런! 뜻밖에도 몇해 전에 돌아가신 장모님이 침대 위에서 안경을 끼고 책을 읽고 계시더라는 그의 시는 더욱 일품이었다. 아니, 병원에서 어느 정도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나서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놔준다고 팔뚝을 만지자 자기도 몰래 그것이 불뚝 솟더라는, 그래서 다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깨끗이 하고 환자복 바지 하나 새로 달라는 말을  그만 "바다 하나 주세요" 했다는 그의 시는더더욱 일품이었다.

 

 

 

옥체

이시영

 

연애를 걸었단다 박하 묻은

달 뜨는 미자네 미장원도 쫓겨나고

구장터, 숯불 같은 봄눈 속을 헤맸단다

식은 해를 삼키고 돌아온 아버지는

손가락을 자르고 작두를 안고 길길이 뛰고

선 누룩처럼 툇마루에 쓰러져

쑥물 뜬 노을을 쏟았다 장날이 와

노름빚에 끌려가는 할아버지 청보리 눈을 닮은 암소,

고삐를 잡고 할머니가 여물청에 나뒹그라지면

읍내로 가는 길 위에 암소는

푸른 울음을 쌌다

심장같이 더운 팥을 확독에 갈아놓고

헉헉 노오란 헛구역질을 참느라면

철물점 만식이도 살구 같은 풋달도

풀물 든 내 이마도 보이지 않았다

별을 지고 언덕을 내려서는 아버지

저승보다 더 밝고 밝은 공산길로 내려서는 아버지

귀신같이 흰 실밥을 늘어뜨린 대추나무

위에서 분내 나는 까마귀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웅성거림

이시영

 

온다던 비가 드디어 두 시부터 오신다

꽃잎 바르르 떨고

잎새 함초롬히 입을 벌리고

그 밑의 자벌레 비로소 편편히 눕자

지구가 한순간 안온한 꿈에 잠긴다

 

 

 

유정다방

이시영

 

송기원이 '월간 바둑'에 근무할 때였다. 천상병 시인이 그의 부인을 모시고 와 아래층 다방에서 그를 불러냈다. 그러곤 그동안 자기를 많이 도와준 분이라며 부인에게 인사시킨 후 따끈한 커피를 대접하였다.

 

 

 

유쾌한 날들

이시영

이제는 그런 날 다시 없으리

톱밥 난로 잘 타던 미아리 옛 밀리언 다방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커피잔만 커피잔만 들여다보고 있던 긴 머리의 윤복이라는 공예과 여학생과

그 옆자리 미니스커트 곧잘 입던, 함박꽃웃음의 천진스런 단짝 친구랑

 

 

 

유쾌한 뉴스

이시영

 

가슴에 흰 줄무늬가 있는 지리산 반달가슴곰 두 마리가 어느새 자라 내 고향 뒷마을인 문수리까지 내려와 벌통 사십 개를 작살내고 사라졌다고 한다. 먼 남쪽에서 아카시아꽃을 따라왔다가 하루아침에 벌 농사를 망친 양봉업자 최씨가 곰들의 배설물을 증거로 들고 니와 내 이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TV 속에서 마구 핏대를 올리는데 글쎄 절도죄가 성립될지 모르겠다며 '뉴스 24'의 여자 앵커가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고 시청자들이 웃고 무엇보다 발밑을 묵묵히 흘러가던 지리산 개울물이 큭큭 웃는다.

 

 

 

은빛 물빛

이시영

 

가을 물이 우쭐우쭐 슬렁슬렁

머언 산모롱이를 돌아간다

해님이 혼자 빙긋이 웃다가 뜨건 빛을 내쏘아

그것의 흰 뱃바닥을 깔깔거리며 뒤집어 보여주기도 한다

 

 

 

은행나무 아래서

이시영

 

낙엽 저 순명을 다한 것들의 사뿐한 낙하!

나는 지구의 중심을 새로이 걷는다

 

 

 

의왕시의 봄

이시영

 

봄이 오면 청계산의 산토끼들도 새 풀을 찾아

서울 구치소까지 내려와

그 작은 앞발로 높은 시멘트 담벽을

마구 파헤치는 것이었다.

 

 

 

의자

이시영

 

의자에 앉으면 흔들리는 것이 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흔들리는 누가 있다

 

흔들리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흔들리는 것은 그대가 아니라고

다짐하고 맹세하며 흔들리는 누가 있다

 

 

 

이름

이시영

 

밤이 깊어갈수록

우리는 누군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때

잠시라도 잊었을 때

채찍 아래서 우리를 부르는 뜨거운 소리를 듣는다

 

이 밤이 길어갈수록

우리는 누구에게로 가야 한다

우리가 가기를 멈췄을 때

혹은 가기를 포기했을 때

칼자욱을 딛고서 오는 그이의

아픈 발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누구인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로 가야 한다

대낮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

형제의 찬 손일지라도

언젠가는 피가 돌아

고향의 논둑을 더듬는 다순 낫이 될지라도

오늘 조인 목을 뽑아

우리는 그에게로 가야만 한다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부르다가 쓰러져 그의 돌이 되기 위해

가다가 멈춰 서서 그의 장승이 되기 위해

 

 

 

이 세계

이시영

 

주 예수 크라이스트가 이 세상에 오신 날

한 사내가 진도빌딩 17층 꼭대기에 매달려

물걸레로 유리창을 북북 닦고 있는데

지상에 그를 팽팽히 묶고 있는 밧줄을

행인들이 무심히 툭툭 치며 지난다

 

 

 

이순의 아침

이시영

 

어렸을 적 소 몰고 섬진강에 멱감다가 급류에 휩쓸려 그 무섭다는 용소에 빠진 적 있지.

시퍼런 물살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끌고 캄캄한 심연까지 내려갔다간 다시 올라오기를 수십 번,

바닥에 닿으려 발을 굴러봐도 팔을 뻗어 헤엄쳐 나오려 해도 소용돌이는 빙글빙글 내 몸을 안고 어지러히 제자리를 맴돌 뿐

아, 이젠 죽었구나라고 단념했을 때 어디서 야차 같이 아귀 센 힘이 나를 나꿔채 물 밖으로 내달아가는 것이었다.

 

모래밭에 거꾸러진 채 잠시 혼절했다가 먹은 물을 다 토하고 나서 올려다보았을 때

거기 농업학교 다니는 무쇠 팔뚝의 육촌형이 씨익 웃고 서 있었다. 새삼 그 형의 건장한 미소가 그리워지는 이순의 아침이다.

 

 

 

이슬

이시영

 

나의 시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지상의 어느 불안한 영혼 곁에 있어야 하겠지만

나의 시는 때로 공중을 차고 날아

머나먼 별의 별자리에 가 박혀 한 오십억 광년

숨소리도 불빛도 없이 엎드려 있어라

그러면 이슬이 내리기는 내릴 것이다

 

 

 

이야기

이시영

 

“밤사이 시영이가 왔다 간 모양이시. 고연놈, 밝은 날 올 것이지 해필이면……” “아직 초저녁이던디 뭘 그러요. 서울이 여그서 얼매나 머요. 나는 여그 앉아 갸가 들 가운데로 휭하니 택시를 타고 와서 꾸뻑 절허고 후적후적 걸어나가는 걸 다 봤소.” “……”

“나 앞에는 술을 두 잔씩이나 따라놓았습디다.”

“그건, 자네가 여그 온 지 얼매 안 되었으니께 그렇지.”

아직 이슬도 마르기 전, 간간이 햇빛에 몸을 뒤척이며, 밭둑 뒤로, 어느 외롭던 세 무덤이 도란도란……

 

 

 

이 책을 보라

이시영

 

당신의 글에선 창조적 소수의 백랍 같은 얼굴이 보인다

당신의 논리는 치차(齒車)처럼 정확하고 빈틈없고

무엇보다 이론적 정합성이 빛나지만

그리고 행간마다에선 억압의 세계를 깨뜨리고

새 세상을 열려는 전략의 푸른 불꽃이 튀지만

당신의 언어는 대중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우리의 언어가 아니다

그리고 당신의 역사 운행에는

오늘의 전선 속에 흩어진 동지들에 대한 배려가 없다

그리하여 당신의 첨예한 논리는 이론의 철옹성 속에서 견고하지만

실천의 영역에서는 인간적 뿌리가 없는

너무나 허약한 자족의 다리,

역사는 당신과 같은 소수 정예가 콤파스로 밀고 나가는

싸늘한 죽은 무덤이 아니다

당신들이 전위에서 처참히 패배했을 때

대중들은 그 시체를 딛고 서서

역사의 산 무덤을 와락 젖히리라

거기 살아있는 뜨거운 가슴들이

벌 떼같이 싱싱한 꽃을 피워내고 있는

 

 

 

인덕원

이시영

 

재판받으러 다니던 인덕원 사거리에서 역시 재판받으러 오가던 호송버스에서 만난 임규찬이가 쌍용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다. 정년 후 군포에서 독서와 산책으로 보내는 Y 교수를 모시고 백운호수로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다. 늦은 벚꽃은 바람에 흩날리고 '미체포'로 잠수 타던 김사인이 뒤늦게 도착했는데 등산모에 가려진 그의 머리도 희끗하다. 세월은 흘렀고 그만큼 나이가 들었는데도 인덕원만 지나면 '아, 이제 집에 다 왔다'던 생각이 들곤 하던 근처의 서울 구치소, 땜빵이 넣어주던 담배 한 가치를 뺑끼통에서 맛있게 피면 도둑놈들이 모인 옆방에서 󰡒오, 어머니!󰡓를 외치던 곳. 나 오늘 전통 백반 먹으러 그곳을 게눈처럼 흘깃거리며 간다.

 

 

 

인동(忍冬)

이시영

 

몸을 구부려

아이를 가슴에 꼭 품어 안고 잠든 어미의 얼굴에서

산짐승들의 강한 겨울을 읽는다

 

 

 

인연

이시영

 

한 번 맺은 인연을 끊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하는가를 문구 형님을 통해서 배웠다. 가령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1979년 여름 데모하다 잡혀 성동서 유치장에서 구류 살 때 그곳 정보과장으로 이성춘이란 분이 있었다. 하루에 한 차례씩 우리를 자기 방으로 불러 커피를 대접해주고 담배를 나눠주던 각별히 깨끗한 신사였는데 그곳을 나오자마자 나는 즉각 그를 잊어버렸다. 그런데 문구 형님은 그후로 그가 강동서, 구로서, 은평서를 거쳐 마지막에 종로서로 옮길 때까지 그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지켜왔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편에서도 마찬가지였던 모양. 머리가 하얗게 센 그가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있었던 문구 형님의 영결식에 조용히 참석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일요 삽화

이시영

일요 등산길에 풀여치 한 마리가 나를 잘못 따라와

방바닥 위로 풀쩍 뛰어내린다

생글생글하고 자그마한 눈이 책이 읽고 싶은가보다

책장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다가 뒷다리를 모두고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아서라, 인간의 방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나는 녀석의 파르라한 이마를 잡아

푸른 하늘 높이높이로 날려주었다

 

 

 

임종

이시영

어머니가 하도 안 돌아가시길래

마누라하고 유덕희씨하고 인천 송도에 가서

이경림씨까지 불러내어 회를 실컷 먹고 돌아와 보니 여전하시기에

근처 이진행네 집에 가 잠시 눈 좀 붙이고 오겠다고 돌아선 사이,

간병부가 나를 뒤쫓아 황급히 아래층 계단을 향해 뛰던 바로 그 시간에

어머니는 그만 운명하시고 말았습니다

항상 먼곳을 응시하던 두 눈은 단정히 감으시고

따뜻한 입은 새벽을 향해 약간 벌리신 채.

 

 

 

잎들

이시영

 

갈색 가을 나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제 발등을 수북이 덮고 있는 가을 잎들을 본다. 한때는 천상(天上)을 향해 푸르게 치솟았던 젊음들, 또 한때는 뜨거운 태양빛을 향해 시리게 몸 뒤척였을 영혼, 그러나 이제는 너른 생각의 잎사귀가 되어 제 어미의 발등을 조용히 덮다.

 

 

 

자매처럼

이시영

 

일요 미사가 끝난 용산성당 원효로 쪽, 영하의 추위 속에 온몸을 털목도리로 감싼 자그마한 체수의 할머니 두 분이 자매처럼 손을 잡고 가파른 빙판길을 조심조심 내려가고 있는데, 그들의 꼭 잡은 두 손이 얼마나 정겹고 따스해 보였던지 성모께서도 고개를 길게 빼어 한참을 내려다보시었다

 

 

 

자연

이시영

 

곰은 사냥을 하기 전에 꼭 한번 씨익 웃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뭉툭한 앞발로 파드락거리는 송어를 낚아채선

단숨에 그것의 멱통을 끊어놓는다.

곰의 전신은 이제 먹잇감 앞에서 한없이 공순한 자연이다

 

 

 

자욱하시다

이시영

 

동면(冬眠) 정진(精進) 중이던 지리산 반달가슴곰님께옵서 어젯밤에 새끼 두마리를 순산하시었다. 비칠비칠하고 고물고물한 것들이 어미 등을 찾아 기어오르려다 떨어지곤 떨어지곤 하는 것을 어미가 고개를 돌려 이윽히 바라보는데 그 눈가에 이슬이 자욱하시다

 

 

 

자유

이시영

 

비둘기들이 날다가 종종거리다가 날다가 종종거리다가

하루종일 유엔사 공동경비구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자취 

​이시영

 

간밤 누가 내 어깨를 고쳐 누이셨나

신이었는가

바람이었는가

아니면 창문 열고 먼 길 오신 나의 어머님이시었나

뜨락에 굵은 빗소리

 

 

 

작별

이시영

 

민들레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가장 아끼던 씨앗을

바람에게 건네주며

아주 멀리 데려가 단단한 땅에 심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작은 점 하나

이시영

 

가장 적게 먹고

적게 일하며

느티나무 가지에 깃을 묻고 잠든 새는

하늘을 차고 오를 때 하얀 새똥을

지상에 남긴다

거대한 구두 발자국이 막 닿기 전

아침 햇살에 잠깐 보석처럼 반짝이며 응결하는

보도블록 위의 작은 눈부신 점 하나

 

 

 

잠들기 전에

이시영

 

내 영혼은 오늘도 꽁무니에 반딧불이를 켜고 시골집으로 갔다가 밤새워 맑은 이슬이 되어 토란잎 위를 구르다가 햇볕 쨍쨍한 날 깜장 고무신을 타고 신나게 봇도랑을 따라 흐르다가 이제는 의젓한 중학생이 되어 기나긴 목화밭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출근했다가 아몬드에서 한잔하다가 밤늦은 시간 가로수 긴 그림자를 넘어 언덕길을 오르다가 다시 출근했다가 이번에는 본 적 없는 어느 광막한 호숫가에 이르러 꽁무니의 반딧불도 끄고 다소간의 눈물 흘리다.

 

 

 

장발 단속

이시영

 

왕십리 청구상업 교사 시절이었다. 학교 신문반 여학생과 함께 인쇄소 가는 길이었으니 퇴계로 5가쯤이었을 것이다. 한낮의 파출소 앞을 지나다 장발 단속에 걸려 긴 의자에서 두어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머리를 자르는 것도 아니고 조서를 쓰는 것도 아니고 그냥 거기에 앉아 있으라고만 했다. 하얀 칼라의 교복 입은 신영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아저씨, 우리 선생님 좀 보내주세요!" 애원하는데도 젊은 경찰관은 실실 웃으며 "니네 선생님이 국가 시책을 위반하고도 반성하는 빛이 전혀 없어서 안 되겠다. 안 그래요? 선생님!" 하는데, 국가고 반성이고 뭐고 우선은 울상이 되어버린 제자 앞에서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 없었다.

 

 

 

저녁

이시영 

 

해 저물면 도종환은 날밤 다섯 개를 창문턱에 내놓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습니다. 다람쥐가 그 바지런한 앞발로 와서 날밤 다섯 개를 품에 안고 숲으로 가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고 평화롭기 때문입니다.

 

 

 

저녁 빛 속

이시영

 

사람들이 싫다 사람들이 그립다

아니, 안성천변 솔밭 사이 자잘한 무덤들이

이룩하는 저녁 평화가 아름답다

 

 

 

저녁 산길

이시영

 

길 하나가 산꼭대기를 향해 쭉 뻗어 있다

저 길을 누가 부랴부랴 갔을 것 같다

 

 

 

저녁상

이시영

 

우리 모두 춥고 배고프던 시절, 군에서 갓 제대한 임영조 시인은 선배인 박건한 시인을 따라가 공덕동 그의 신혼 단칸방에서 저녁을 자주 얻어먹었다고 하는데요. 박 시인이 야근을 하는 날은 그가 대신 홀로 퇴근해 박 시인의 수집운 신부가 차려준 뜨거운 저녁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녁에

이시영

 

노을 지는 강변, 하루의 원정을 끝낸 물새네 가족들이 밤섬을 향해 그린 듯이 조용히 다가가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맨 꼬래비에는 아기 물새도 끼어 있어 저 순연한 식구들의 운항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저 홀로 필사적으로 몸부침치고 있다.

 

 

 

저녁의 시간

이시영

 

한때는 내가 어느 분야에서 세계를 모두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랬었다. 자고 나면 싸움이었고 자고 나면 연대 투쟁이었으며 성난 이마엔 상처가 늘어났다. 미안하지만 내 청춘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러나 나는 이제 매미들이 자지러지게 우는 공원을 가로질러 점심도 혼자 먹고 저녁도 혼자 먹는 그늘의 시간 속에 서 있다. 아무도 이제 아름다운 연대를 이야기하지 않으며 이 복잡한 세계를 책임지겠다는 사람들도 없다.

저녁의 시간은 내게 그렇게 조용히 온다.

 

 

 

저물녘

이시영

 

저물녘 먼 하늘에 띠를 두르고 선

남빛 산의 완강한 부드러움이여

가서 그 어깨 뒤로 서고 싶다

 

 

 

저세상

이시영

 

평생을 저 앞들에 엎드려 일하시다

죽어 북망이라 찾아든 곳이 겨우 동네 뒷산 야트막한 가래뜸

흥대댁 논실댁 곡성댁 새터댁 냇가물댁 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이좋게 누워 때론 더운 김도 내뿜으며

저세상을 새로 살고 계시구나

 

 

 

저 잎새 하나

이시영

 

나뭇잎 하나에도 신의 강렬한 입김은 스며

바람 불지 않아도 저 잎새 밤새도록 찬란히

은빛 등을 뒤집고 있으니

 

 

 

저 50년대!

이시영

 

전라남도 순천시 순천역 앞 광장. 기차에서 부린 석탄 가루를 져 나르던 새까맣고 불쌍한 조랑말이 생각난다. 서정춘형 말에 따르면 정춘형은 어느 해 겨울밤 그 자그마한 조랑말과 함께 더운 김을 뿜으며 무슨 일인가로 학재 너머 구례장터에까지 왔었다고 한다.

 

 

 

전문가

이시영

 

유흥준 교수가 북한에 갔을 때라고 한다. 단군릉 앞에 선 그의 뒷모습이 TV카메라에 비치자 강남구 학동 목욕탕 내 얼금뱅이 이발소 주인이 손님들 앞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아 저거 내가 깎은 머리인데!󰡓 사람들이 일단 동작을 멈추고 서서 그의 벌린 입을 한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한다

 

 

 

이시영

 

서초중앙하이츠빌라의 머리가 하얗게 센 경비 아저씨는

저녁이면 강아지와 함께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

세상엔 이렇게 겸손한 분도 있다

 

 

 

젊은 동리

이시영

 

술이 거나해지자 젊은 동리가 젊은 미당 앞에서 어젯밤에 잠 아니 와서 지었다는 자작시 한 수를 낭송했다.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우는 것을.󰡓 미당이 들고 있던 술잔을 탁 내려놓고 무릎을 치며 탄복해 마지않았다.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우는 것을…… 이라. 내 이제야말로 자네를 시인으로 인정컸네.󰡓 그러자 동리가 그 대춧빛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대꾸 했다. 󰡒아이다 이 사람아. 벙어리도 꼬집히면 우는 것을……이다󰡓 미당이 나머지 한 손으로 술상을 꽝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됐네. 이 사람아!󰡓

 

 

 

정님이

이시영

 

용산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더니

왜 가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당잘그당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

한 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역전 밤 열한 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조국

이시영

 

작년 이맘때였다. 용변 보러 금강산려관에 들어갔다가 만난 겹으로 접은 마분지 휴지 다섯 장. 잠새도록 누이가 무릎 꿇고 접었을 것이다. 아, 가난한 나의 조국!

 

 

 

조금 후

이시영

 

까우까우

강 건너 저쪽에서 누가 알은 체한다

꺼우꺼우

강 건너 이쪽에서 내가 알은 체한다

 

까우까우 꺼우꺼우…

까우까우 끄우끄우…

문득, 하늘엔 물빛 깃 치는 소리

그대와 나 사이에 서광 있으라

 

 

 

조조정진(早朝精進)

이시영

 

붉은 감 한알에도 부처가 들어 계시는지

가을 아침 절 뒷마당에서 까치 제자가

꾸뻑 절하고 맹렬히 쪼으신다

 

 

 

조춘(早春)

이시영

 

이 세상이 그렇게 빨리 망하진 않을 것 같다

언 땅속에서 개나리 한 뿌리가 저렇게 찬란한 봄을 머금고 있었다니

 

 

 

좋은 기쁜 날

이시영

 

아침부터 까치 한쌍이 머리 위의 온 하늘을 가르며 찧고 까불고,

생각느니 내게도 저리 기쁜 날이 있었던가

 

 

 

죽음

이시영

 

죽은 명식이형이랑 후식이형이랑 명자누나랑 그리고 아주 어렸을 적 죽어 이름도 없는 동생이랑 아기 두루마기짜리들이 마구 몰려와 엄마 이제는 고생 그만하고 눈비 없는 자기들 나라로 가자고 뽀얀 볼로 칭얼대며 보채는 것을 간신히 달래다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며,

 

 

병실의 햇볕 잘 드는 창가에서 어머니는

마치 남의 얘기 하듯 조용조용히 말하는 것이었어요

 

 

 

즈가버지

이시영

 

전라도 여인들은 남편을 부를 때 꼭 즈가버지라고 했다. 즈그(that) 아버지라는, 자식을 매개로 한 일종의 간접호칭인 셈인데 수많은 즈가버지들은 또 즈거매들의 목소리를 용케도 알아들어 회관 같은 데 한구네 모여 있다가도 " 즈가버지 여기 잠 보씨요 이"하면 "왜 그려?" 하면서 그중의 한 사내가 진짜 고개를 쏘옥 내밀고 나오는 것이었다.

 

 

 

지구별에서

이시영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아파트 베란다에 일자로 엎드려

늙어가는 지구의 시절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낙엽 밟는 바스락 소리에 놀라

벌레들은 땅밑에서 또 깜빡, 뜨거운 알을 낳다 죽어가겠지요

 

 

 

지나면서

이시영

 

밤 열 시가 넘은 소나무 숲 벤치에서 누가 울고 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간간이 달래는 여자의 목소리가 섞이어 들려왔다

 

 

 

지리산(智異山)

이시영

 

나는 아직 그 더벅머리 이름을 모른다

밤이 깊으면 여우처럼 몰래

누나 방으로 숨어들던 산사내

봉창으로 다가와 노루발과 다래를 건네주며

씽긋 웃던 큰 발 만질라치면

어느새 뒷담을 타고 사라지던 사내

벙뎀이 감시초에서 총알이 날고

뒷산에 수색대의 관솔불이 일렁여도

검은 손은 어김없이 찾아와 칡뿌리를 내밀었다

기슭을 타고 온 놀란 짐승을 안고

끓는 밤 숨죽이던 누나가

보따리를 싸 산으로 도망간 건 그날밤

노린내 나는 피를 흘리며 사내는

대창에 찔려 뒷담에 걸려 있었다

지서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대밭에 숨고

집이 불타도 누나는 오지 않았다

이웃 동네에 내려온 만삭의 처녀가

밤을 도와 싱싱한 사내애를 낳고 갔다는 소문이 퍼졌을 뿐

 

 

 

지상의 방 한 칸

이시영

 

신림 7동, 난곡 아랫마을에 산 적이 있지. 대림동에서 내려 트럭을 타고 갔던가, 변전소 같은 버스를 타고 갔던가. 먼지 자욱한 길가에 루핑을 이고 엎드린 한 칸 방. 누나와 조카 둘과 나의 보금자리였지. 여름밤이면 집 앞 실개천으로 웃마을 돈사의 돼지똥들이 향기롭게 떠가는 것을 보며 수제비를 먹었지. 찌는 듯한 더위에 못 이겨 야산에 오르면 시골처럼 캄캄한 동네. 개천 건너 그 동물병원 같은 보건소는 잘 있는지 몰라. 눈이 크다란 간호원에게 매일 아침 붉은 엉덩이를 내리고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대씩 맞고 다녔지. 학교가 너무 멀어 오전 수업을 늘 빼먹어야 했던 집. 아니 결핵을 앓던 나를 따스히 보살펴주던 집. 겨울이면 루핑이 심하게 울어 조카의 어린 몸을 난로처럼 안고 자던 방. 아니 봄을 기다리던 누님과 나의 지상의 좁은 방 한 칸.

 

 

 

지평선에서

이시영

 

오늘 밤도 봄보리밭에 함박눈 닿는다

신의 입김이 있다면 저렇게 따스할 것인가

 

 

 

직입(直入)

이시영

 

민물 매운탕집 수족관의 아기장어 한 마리가 고개를 빳빳이 내밀고 지나가는 행인을 바라보고 있다. 아, 저 아기 장어의 흰 목을 스치고 내리는 눈 시리게 아름다웠던 날들의 짧은 적요여!

 

 

 

이시영

 

그곳도 집이라고 호송버스가 인덕원 사거리에 이르면 마음이 턱 놓이고 가슴은 뛰는 불빛들로 따스해지는 것이었다.

 

 

 

집을 잃은 영혼

이시영

 

육신은 죽자마자 흰 천에 덮여 급하게 냉동창고로 갑니다. 그러면 처음으로 집을 잃은 영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하 냉동창고 곁을 서성거리는데 바로 이때 그들을 위해 불러주는 노래가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 입니다. 육신에서 분리된 영혼은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무려 사십구일 동안이나 옛 거처 곁을 헤맨다고 합니다.

 

 

 

차부(車部)에서

이시영

 

중학교 일학년 때였다. 차부(車部)에서였다. 책상 위의 잉크병을 엎질러 머리를 짧게 올려친 젊은 매표원한테 거친 큰소리로 야단을 맞고 있었는데 누가 곰 같은 큰손으로 다가와 가만히 어깨를 짚었다. 아버지였다.

 

 

 

창(窓)

이시영

 

사람이 그리운 날, 나는 강변에 나가 새들의 산책길을 걸었습니다. 강변에는 갈숲이 무더기로 우거져 있어 그들의 즐거운 서식처였습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눈 여겨둔 그중의 한 보금자리를 향해 가만가만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내 발길이 닿기도 전에 참새들은 일제히 갈숲을 차고 달아나며 그 바르르 떨리는 작은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갈숲 그늘 자리엔 다행히 그들의 온기가 조금 남아 있어 나는 그곳에 짐승인 내 어두운 두 발을 깊숙이 묻었습니다.

 

 

 

철거

이시영

 

오늘 아침 또 한식구가 집을 비우고 떠났는데

마당을 깨끗이 쓸어놓고 갔다

대빗자루 자국 선명한 그 위로

오늘은 어떤 햇살도 내리지 말아라

 

 

 

춘천

이시영

 

소설가 오정희 씨가 서울 나들이를 위해 춘천 역사에 들어서면 어떻게 알았는지 금테 모자를 눌러쓴 귀밑머리 희끗한 역장이 다가와 이렇게 인사한다고 합니다.

󰡒오 선생님, 춘천을 너무 오래 비워두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측백나무 울타리 사이에서 서울행 열차의 꽁무니가 안 보일 때까지 배웅한다고 합니다.

아, 나도 그런 춘천에 가 한번 살아봤으면!

 

 

 

침묵의 무늬

이시영

 

조개처럼 비밀을 꼭 닫고 산 여자가 있었습니다

죽어서 그 속에서 아름다운 줄무늬의 진주가 나왔습니다

일생 동안 그녀의 혀가 필사적으로 밀어낸

 

 

 

칭장고원에서

이시영

 

염소야 너는 왜 하루종일 풀만 뜯고 있느냐

간혹 고개를 들어 착한 하늘도 보거라

 

 

 

타작

이시영

 

아버지는 왜 오지 않는가

논바닥을 덭는

노란 서숙모가지가 돋은 새 떼들

우여우여 새여,

부황든 달은 파는 손톱, 滿朔의 

누나는 한숨으로 쑥고개를 넘는데 대낮처럼

붉은 얼굴로 中天을 걸어내려오는 더벅머리를

타곳으로 한번 간 바람은

왜 오지 않는가

수수 그름자를 내리찍는 괭이

빈들을 껴안고

어머니는 밭고랑에 쓰러지는데

칵, 칵, 칵, 칵, 노을 속에서 떨어지는 들쥐들

돈 벌러 간 아버지는

왜 오지 않는가

쭉정이를 한 짐 부려놓고

부리나체 성필이놈은 서릿발 장땡이

타는 홀렛집으로 내뺀다

애비처럼, 망할 놈의 뜬눈의 새벽처럼.

 

 

 

타작 후

이시영

 

함지박의 콩들이 샛노란 눈들을 뜨고

어서 빨리 다른 세상을 구경하고 싶다고

함지박 안에서 콩콩 뛰는 소리 들리고,

주인은 낮잠 자고 도리깨는 서서 자고,

기러기는 기럭기럭 서(西)으로 날고,

함지박의 콩들이 어서 빨리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싶다고

노란 이마로 함지박을 마구 들이받는 소리 들리고,

 

 

 

타협의 길로 들어서서

이시영

 

내 앞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이 없는 껍데기를

가쁜히 어둠 속에 던져둔 채

희열의 잔을 기울인

외소한 패배의 순간

손을 뻗히면

모세혈관 사이로

체열을 다 빨리면서도

냉소의 가면을 벗진 못했다

 

부끄러웠다

적당히 세상을 비웃어주기만 하면

어둠은 곧

열등한 승자를 위해

사랑에 대한 무수한 갈증을

일순간

소유의 기쁨으로 터지게 했다

 

그 외곡된 승리 앞에

패배한 나와

적당히 타협을 하며.

 

 

 

탄생

이시영

 

알집을 열고 나오자마자 가시고기는 제 애비의 시신을 파먹고 바다로 나아간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저 가시고기 떼의 늠름한 입이여!

 

 

 

태양 빛

이시영

 

대추나무에 올해도 대추물 들겠다

찌는 듯한 삼복더위에 빳빳이 고개 내밀고 푸른 하늘과 맞서고 있으니

대추 열매에 올해도 서늘한 태양빛 들겠다

 

 

 

테렐지 숲에서 생긴 일

이시영

 

다리가 묶여 온 짐승은 말간 눈을 뜬 채 숲속의 우리를 보고 매애거렸다

그러나 익숙한 솜씨의 칼잡이가 망치를 들고 다가가자

온 힘을 다해 버둥거리며 마지막 애처로운 비명을 질렀다.

정수리에 일격을 가하자 염소는 묶인 다리를 심하게 떨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칼잡이가 재빨리 내장을 열어 염소의 숨통을 끊어주었다.

그리고 그 동안의 수고였던 가죽옷을 벗겨내고 풀냄새가 자욱한 腸들을 꺼내고

조금 전까지 우리를 보고 있던 말간 눈을 감겨주었다.

그리고 숲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분주해졌다.

 

 

 

편지

이시영

 

낙엽의 계절입니다

부리 긴 새들의 철도 끝났습니다

지난여름 우리는 너무 오래 싸웠습니다

남녘의 들판은 아우가 흘린 피로 검붉었으며

핵탄두가 겨눈 북녘 하늘은

또 매섭게 푸르렀습니다

형제여 그러나 이 계절의 끝에

더욱 큰 시련의 계절이 닥쳐옵니다

눈보라 칼바람 속에서 남쪽의 어미가 아비를 떠나보내고

얼어붙은 국경의 강을 건너

북의 아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기나긴 사상의 전쟁이 끝나고

우리 모두가 죽고

두꺼웠던 얼음이 녹는 강언덕 위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쩌렁쩌렁한 새봄이 밝아 올 것입니다

 

 

 

평택 지나며

이시영

 

병점 지나 서정리 지나 평택 들판에 우뚝 솟은 느티나

무 한 그루,

그 아래 방금 보습 대어 갈아붙인 찰흙 위로 쏜살같이

내리꽂히는 제비 새끼들의 강철 입이여!

 

 

 

평행

이시영

꿈 없는 꿈을 꾸고 난 날 아침에

눈이 푹 내렸다

그 위를 아침 까치 두 마리가 벌써 왔다 간 모양이다

명주처럼 파르라한 발자국 두 줄이 그 어딘가로 끝없이 이어져 있다

 

 

 

평화롭게

이시영

 

동양파라곤아파트 동쪽 정원 측백나무 옆

고양이 세 마리가 나와 자울자울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데

그중 두 놈은 흰 배에 검은색 등이고

나머지 한 놈은 완전 호랑이 색깔이다

그런데 저렇게 평화로울 수 있다니!

 

 

 

푸른 제복

이시영

 

양지다방에서 내려다보면 구례읍 로터리의 교통순경은 늘 그 사람이었다. 푸른색 상의에 남색 바지, 가슴과 등에 X자로 흘러내리는 흰색 벨트를 메고 챙이 짧은 경찰모에 어깨에 잎사귀 견장을 붙인 그가 원통형의 교통 지휘대에 올라서서 멋진 수신호와 함께 다람쥐처럼 은빛 호각을 붙어제끼면 구례읍으로 들어오는 모든 차들은 일단 멈춤을 했다가 그의 손길이 머무는 곳으로 움직였다.

하루에 대여섯 차례씩 들락거리는 광주발 부산행 시외버스나 순천발 남원행 완행버스가 전부이긴 했으나 아침 햇살을 등에 받으며 로터리를 지나 읍내 중학교로 등교할 때마다 우리는 고동색 경찰서 정문을 배경으로 들려오는 그의 간단없는 호각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며 걸음을 빨리 하곤 하였으니, 키가 작달막하고 박정희처럼 뒤꼭지가 툭 튀어나온 그가 거기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장날의 우마차꾼들이나 지게꾼들에겐 큰 위협이었을 것이다.

하루는 어느 나무꾼이 마른 장작짐을 지고 북문 쪽으로 길을 걷다가 호각 소리에 혼비백산하는 것을 보았고 송아지를 달고 나온 농부의 착한 소가 놀라서 아스팔트 위에 푸른 똥을 싸는 것을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모든 질주하는 것들의 안내자이자 길의 활달한 통제자. 로터리의 한쪽은 군청과 병원이고 다른 쪽은 학교였는데 어쩌다 하교길에 교통 지휘대에 선 그가 안 보이면 읍내 거리가 일시에 통제기능을 잃고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20년 뒤 정년퇴직할 때까지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구례읍의 푸른 근대의 상징이자 뒤꼭지가 툭 튀어나온 권력의 작은 집행자. 그의 호각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지 않는 날이면 사나운 개들도 무척 심심해하였다.

 

 

 

풀꾼

이시영

 

어렸을 적 방아다리에 꼴 베러 나갔다가 꼴은 못 베고 손가락만 베어 선혈이 뚝뚝 듣는 왼손 검지손가락을 콩잎으로 감싸쥐고 뛰어오는데 아버지처럼 젊은 들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다가서며 말했다. "괜찮다 아가 우지 마라! 괜찮다 아가 우지 마라!" 그 뒤로 나는 들에서 제일 훌륭한 풀꾼이 되었다.

 

 

 

풀잎 이슬

이시영

 

사람들이 걷기 시작하자 그는 스스로 길이 되었다

그러나 길은 늘 다른 길을 걷고 싶었다

새벽이면 풀잎 이슬이 그 끝에 맺혀 있는 건 그것 때문이다

 

 

 

풍경

이시영

 

아카시아들이 다투어 포도 위에 샛노란 방석을 깔았다

아가씨들보다 아가씨들 품에 안긴 개들이 먼저 사뿐히 뛰어내린다

이런 날 아스팔트도 단 한 번 인간의 얼굴을 한다

 

 

 

하동

이시영

 

하동쯤이면 딱 좋을 것 같아. 화개장터 너머 악양면 평사리나 아, 거기 우리 착한 남준이가 살지. 어쩌다 전화 걸면 주인은 없고 흘러나오던 목소리. "살구꽃이 환한 봄날입니다. 물결에 한 잎 두 잎……" 어릴 적 돌아보았던 악양들이 참 포근했어.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 배틀재 토지 동방천 화개…… 빨리빨리 타이소!" 하며 엉덩이로 마구 승객들을 들이밀던 차장 아가씨도 생각나네. 아니면 인호 자네가 사는 금성면도 괜찮아. 화력발전소가 있지만 설마 터지겠어? 이웃에 살며 서로 오갈 수만 있다면! 아니 읍내리도 좋고 할리데이비슨 중고품 몰고 다니는 원규네 좀 높은 산중턱 중기마을이면 또 어떠리. 구례에는 가고 싶지 않아. 지아는 지가 태어난 간전면으로 가고, 두규도 거기 어디에 아담한 벽돌집을 지었다더군. 설익은 풍수 송기원이 허리를 턱하니 젖혀 지세를 살피더니 "니가 살 데가 아니다"라고 했다며?

하여간 그쯤이면 되겠네. 섬진강이 흐르다가 바다를 만나기 전 숨을 고르는 곳. 수량이 많은 철에는 재첩도 많이 잡히고 가녘에 반짝이는 은빛 모래 사구들. 김용택이 사는 장산리를 스쳐온 거지. 용택이는 그 마을 앞 도랑을 강이라고 우겨댔지만 섬진강은 평사리에서 바라볼 때가 제일 좋더라. 그래 , 코 앞의 바다 앞에서 솔바람 소리도 듣고 복사꽃 매화꽃도 싣고 이젠 죽릉으러 가는 일만 남은 물의 고요 숙연한 흐름. 하동으로 갈 거야. 죽은 어머니 손목을 꼬옥 붙잡고 천천히, 되도록 천천히. 대숲에서 후다닥 날아 오른 참새들이 두 눈 글썽이며 내려앉은 작은 마당으로.

 

 

 

한로(寒露)

이시영

 

가을은 내 영혼을 가볍게 한다

마음에도 잔물결 일게 한다

땅바닥에 그림자 곧게 떨어뜨리고 달밤 속을 나는

작은 새여, 쏜살 같은 큰기러기여

이 밤 나도 네 초롱초롱한 영혼처럼

지각(地殼) 곁을 스치는 얼음장 같은 날개를 갖고 싶다

 

 

 

한 생각

이시영

 

급한 걸음으로 산길을 달려 내려오던 바위는

무슨 생각이 나서 거기에 딱 멈춰

두 귀를 쫑긋 세우고 한 손에 턱을 괸 채

무연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일까

 

 

 

한여름

이시영

 

좋은 시인들은 소리를 갖고 있다

아니 소리의 그늘을 만들 줄 안다

그리하여 그 그늘에 초록 새끼개미들을

불러 모아 쉬게 하고 저녁이면 그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연기 오르는 마을을 향해

허리 잘록이며 서로의 먹이들을

조금씩 나누어 지고 가게 한다

 

 

 

한 줌

이시영

 

문구 형님 친구 중에 조태현이라는 큰 깡패가 있었다.

형님의 유골을 고향 뒷숲에 뿌려주기로 했다고 말하자

그가 돌아서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일단 내가 한 줌 먹고!"

사람들이 순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함양

이시영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함양은 전라남도 구례의 북쪽이다 구례에서 함양을 가려면 오륙백 미터가 넘는 험준한 팔량치 고개나 육십치 고개를 넘어야 한다. 철도나 자동차 길이 없던 아득한 시절, 그러나 이곳에 지리산 곰들이 닦아놓은 혼도(婚道)가 있었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구례 쪽 곰이 함양으로 넘어가 함양 곰이 되듯 내 어릴 적 함양에서 시집온 바지런한 함양댁들이 구례들엔 넘쳐났다 그리고 60년대 초반까지 구례중학교 운동장에선 구례-함양간 축구 정기전이 열렸다. 코스모스가 피고 오색기가 휘날리는 운동장을 달리는 곰의 아들들은 눈부셨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이 혼도는 끊기고 더 이상 정기전도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함양은 함양, 구례는 구례. 두 곳을 이어주는 젊은 함양댁들도 들녘엔 없다. 다만 가을 어스름녘 구례 쪽에서 어슬렁어슬렁 산마루턱에 오른 늙은 곰이 볕들의 고향인 함양 쪽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외로 꼬고 앉아 그 옛날을 모두 잊었다는 듯 무연한 명상에 잠길 뿐.

 

 

 

행렬

이시영

 

벌레들이 밤새도록 울면서

거대한 시멘트 담의 몇만 분의 일쯤을 기어이 뚫어놓는다

어디서 모여 왔는지

아침이면 연두빛 코끝의 새끼벌레들이

그 구멍 속을 열심히 들락거리며

새 먹이를 물어 나르고 있다

햇빛 아래 시멘트 담을 뒤덮는

키 작은 잔디들의 행렬이 파랗다

 

 

 

행복

이시영

 

새벽녘

그대의 꿈을 꾼 뒤

알 수 없는 흐뭇함으로

아침 햇살을 안았습니다.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그만큼의 자리에 서 있는

하늘 하나

나무 하나

돌 하나

내 속에 새로이 움튼

기쁨의 싹이

행복의 거울로 비춘 듯

무거운 세상의 먼지를 털며

나로부터의

그대로부터의

아름다운 창을 열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 창에 투영되는 아침

난 그대의 얼굴 하나

하얀 백지 위에 그리며

알 수 없는 따스함으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형제

이시영

 

1

도리깨를 사정없이 맞고 나온 콩꼬투리 속의 작은 콩알들이

해 질 녁 울타리 가에 어둑하니 모여서는

울상인 서로의 얼굴들을 본다

 

 

2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누님은 살았을 적 키가 껀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빼닮았다 말하고 그런 누님을 가리켜 나는 젊었을 적 우물가에서 볼우물이 환한 웃음을 웃던 어머니의 옆얼굴을 그대로 닮았다고 했더니 수줍은 듯 호호 입을 가리고 웃었다. 찌는 듯한 여름 해가 좀체로 지지 않는 전주시 중노송동 노송탕 옆 반지하 셋방. 오랜만에 우리 둘이는 서로의 시큰한 뼈들을 안고.

 

 

 

형제들을 위하여

이시영

 

1897년생인 우리 아버지가 이 세상에 와서

뻑적지근하게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식을 열이나 낳았다는 것이다

한 배에서가 아니고 두 배에서지만

그리고 다 살리진 못하고 그 중에 여섯이나

당신 손으로 뒷산 애장터에 묻어야 했지만

오늘밤 아파트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일생 농군 학생부군(學生府君)께 술 한잔 올리니

어려서 죽은 우리 형제들이 천릿길을 달려와 애기두루마기 차림으로

이 방 저 방에 TV 앞에 시집간 누이들 틈서리에 듬성듬성 앉아 있는 것 같으이다

삼식(三植)이 형님 기식(寄植)이 형님 일 학년짜리 명식(明植)이 형 해방동이 명자(明子) 누나

나보다 두 살 위 후식(厚植)이 형 이름도 없이 가물거리는 내 아랫동생

초헌 아헌 종헌이 끝나고 다 함께 음복하고 검은 재와 함께 새벽 별 스러질 때까지

내 핏속에 애기들의 여린 숨결 속에 살아

어서 가자고 칭얼대는 어린 동생을 달래가며

밤새도록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으이다

 

 

 

호랑나비

이시영

 

검은 점 호랑나비 한 마리가 산나리꽃 위에 앉아

자울자울 조을고 계시다

자세히 보니 바람에 날개가 많이 찢기었다

 

 

 

호명(呼名)

이시영

 

한 번 불려간 것들은 다시는 오지 않는 것인가

내 등 두드리며 여기 서서 기다려라 하고 간 바람은

산 넘고 물 건너가 다시는 오지 않는다

대수풀에 머문 구름에게 물어도

구름 위에 날개 접은 솔개에게 물어도

바람이 한 번 간 곳 알지 못한다

 

한 번 불려진 별들은 다시는 빛나지 못하는가

간밤에 불려진 한 별

큰 눈으로 지상을 굽어보며 빛나다가

새벽 하늘가로 스러져서는

다시 빛나지 않는다

 

한 번 흔들린 풀들은 다시는 멈추지 못하는가

제 선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

한 번 고개 돌린 풀들

다시는 고개 돌리지 못하고 서서 흔들리다가

누군가의 찬 낫에

이슬을 흘리며 쓰러진다

 

한 번 눈 부릅뜬 것들은 다시는 눈뜨지 못하는가

여름 잎사귀에 눈 부릅뜬 햇살 하나

잎사귀를 녹이며 구르다가

돌 위에 떨어져 돌을 태우고

다시 눈뜨지 못한다

 

한 번 불려진 것들은 다시는 불려질 수 없고

한 번 대답하고 돌아선 것들은

다시는 이전의 것이 될 수 없는가

 

 

 

호수

이시영

 

갈매기들이 한강까지 날아와 쉰 적이 있다.

여기가 바다인 줄, 바다의 큰 호수인 줄 알고.

 

 

 

호야네 말

이시영

 

이렇게 비 내리는 밤이면 호롱불 켜진 호야네 말집이 생각난다. 다가가 반지르르한 등을 쓰다듬으면 그 선량한 눈을 내리 깔고 이따금씩 고개를 주억거리던 검은 말과 "얘들아 우리 호야네 말 좀 그만 만져라!" 하며 흙벽으로 난 방문을 열고 막써래기 담뱃대를 댓돌 위에 탁탁 털던 턱수염이 좋던 호야네 아버지도 생각난다. 날이 밝으면 호야네 말은 그 아버지와 함께 장작짐을 가득 싣고 시내로 가야 한다. 아스팔트 위에 바지런한 발굽 소리를 따각따각 찍으며

 

 

 

홀로 지키는 외로움

이시영

 

죽도록 사랑한다 말해놓고

차마 죽지 못해

그리움에 우는 건

무슨 이유일까?

네까짓 것 하며

터진 입술로 내뱉으면서도

네가 아닌 타인 앞에

목석처럼 굳은 마음은

어떤 이유일까?

버림받으면 받는 대로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살거라

말해놓고서 

어쩌다 불면의 밤을 엄습한

외로움에 

체념을 버리는 건 왜일까?

용서치 않으리라

하지만 그리움만큼 용서하고

미음만큼 사랑해 버리는

난 

정년 바보일까?

 

 

 

홍조

이시영

 

내산 형수의 욕은 온 동네가 알아주는 욕이었다. 아침부터 새 샘가에서 쌀을 일다 말고 "저 자라처럼 목이 잘쑥한 위인이 밤새도록 작은마누래 밑구녕을 게 새끼 구럭 드나들듯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해쌓더니만 새복에 글씨 부엌이서 코피를 한 사발이나 쏟고는 지금 비틀배틀 배틀재로 넘어가는구만' 하고는 돌아서서 코를 팽 풀다가 어린 나를 발견하고는 "아따 데름 오래간만이요 잉" 하며 잔주름이 접히는 상큼한 눈웃음을 웃으면 내 얼굴은 그만 홍조로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화살

이시영

 

새끼 새 한 마리가 우듬지 끝에서 재주를 넘다가

그만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먼 길을 가던 엄마 새가 온 하늘을 가르며

쏜살같이 급강하한다

 

세계가 적요하다

 

 

 

후꾸도

이시영

 

장사나 잘 되는지 몰라

흑석동 종점 주택은행 담을 낀 좌판에는 싯푸른 사과들

어린애를 업고 넋나간 사람처럼 물끄러미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내

어릴 적 우리 집서 글 배우며 꼴머슴 살던

후꾸도가 아닐는지 몰라

천자문을 더듬거린다고

아버지에게 야단 맞은 날은

내 손목을 가만히 쥐고 쇠죽솥 가로 가

천자보다 좋은 숯불에 참새를 구워 주며

멀뚱멀뚱 착한 눈을 들어

소처럼 손등으로 웃던 소년

못줄을 잘못 잡았다고

보리밭에 송아지를 떼어놓고 왔다고

남의 집 제삿밤에 단자를 갔다고

사랑이 시끄럽게 꾸중을 들은 식전아침에도

말없이 낫을 갈고 풀숲을 헤쳐

꼴망태 위에 가득 이슬 젖은 게들을 걷어와

슬그머니 정지문에 들이밀며 웃던 손

만벌매기가 끝나면

동네 일꾼들이 올린 새들이를 타고 앉아

상머슴 뒤에서 함박 웃던 큰 입

새경을 타면 고무신을 사 신고

읍내 장터로 서커스를 한 판 보러 가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서울서 온 형이

사 년 동안 모아둔 새경을 다 팔아갔다고 하며

그믐날 확독에서 떡을 치는 어깨엔

힘이 빠져 있었다

그날 밤 어머니가 꾸려준 옷보따리를 들고

주춤주춤 뒤돌아보며 보름을 쇠고

꼭 오겠다고 집을 떠난 후꾸도는

정이월이 가고 삼짇날이 가도

장사나 잘되는지 몰라

천자문은 다 외었는지 몰라

 

 

 

후포

이시영

 

이제는 없는 듯이 있는 조용한 바닷가 좋더라. 거센 파도가 밀려왔다가 거품처럼 슬며시 숨죽이는 곳. 월송정 지나 손등이 거뭇한 할머니가 제철 방어회를 떠 주는 횟집이 있는 곳. 여기에서 독도가 제일 가깝다고 하더라. 그러나 오늘은 돛배도 없고 그곳으로 부는 바람도 없어라.

젊은 시인들끼리 어울려 사진을 찍게 하고 우리는 그냥 볕살 좋은 모래밭이나 거닐며 보릿고개 넘던 서러운 시절을 이야기하고 싶더라. 땅 한 평 없어 식구들끼리 나와 바닷고기를 후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후포. 이제는 겨우 발밑이나 적시다가 고개 숙이며 물러날 줄 아는 겨울 바다가 나는 좋더라.

 

 

 

흉년

이시영

 

보리밭 속에 일렁이는 피

누나는 깜둥이에게 깔려 있었다

쪼코렛과 소총이

다붙은 입술을 열고

오디처럼 오래오래 마을에 터졌다

가을 밭갈이 때

쟁깃날에 머리가 으깨어진

깜둥이 한 쌍을

구호물자와 함께 늙발이 황소는

삼켰다 긴긴 해 황토밭엔 깜부기만 익고

땅을 벌리고 황소가 낳은

네 발의 흑송아지

누나는 건초 밑에서 목을 매었다

 

 

 

흥대 이센

이시영

 

도장방 마루엔 고봉으로 차려진 밥상 하나에 짠지

그리고 어쩌다 장날 후면 비린 갈치 한 토막

쓰다 달다 통 말이 없었다

아침이면 바지게 지고 나가 풀짐을 가득 해와 거름자리에 붓고

저녁이면 종일 논갈이한 소를 끌고와 쇠죽을 쑤었다

그리고 자신은 거북발로 또 마루에 올라 고봉밥을 먹었다

쓰다 달다 통 말이 없었다

 

 

 

히말라야

이시영

 

라다크에서 어느 할아버지는 다람쥐처럼 조르르 지붕에 올라가 비 새는 곳을 수선하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집 앞 흔들의자에 앉아 소년처럼 잠시 붉은 얼굴로 타는 노을을 바라보다 그만 저세상으로 가시었다.

사람의삶이 아직 광활한 자연의 일부였을 때.

 

 

 

2호선

이시영

 

가난한 사람들이 머리에 가득 쌓인 눈발을 털며 오르는

지하철 2호선은 젖은 어깨들로 늘 붐비다

사당 낙성대 봉천 신림 신대방 대림 신도림 문래

다시 한 바퀴 내선순환을 돌아

사당 낙성대 봉천 신림

가난한 사람들이 식식거리며 콧김을 뿜으며 내리는

지하철 2호선은 더운 발자국들로 늘 붐비다

 

 

 

5월 어머니회

이시영

 

아르헨티나의 '5월 어머니회'는 지금도 세 가지의 금도를 지킨다고 한다.

첫째로 실종된 자식들의 주검을 발굴하지 않으며,

둘째로 기념비를 세우지 않으며,

셋째로 금전 보상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아직 그들의 가슴속에서 결코 죽은 것이 아니며,

그들의 고귀한 정신을 절대로 차가운 돌 속에 가둘 수 없으며,

불의에 항거하다 죽거나 실종된 자식들의 영혼을 돈으로 모독할 수 없기 때문이다.

 

 

 

14K

이시영

 

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보니 내가 끼워드린 14K 가락지를 가슴 위에 꼬옥 품고 누워 계셨습니다.

그 반지는 1972년 2월 바람 부는 졸업식장에서 내가 상으로 받은,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어머님의 다 닳은 손가락에 끼워드린 것으로, 여동생 말에 의하면 어머님은 그 후로 그것을 단 하루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1956년~88

이시영

 

엄니 엄니 울 엄니

쳉이나 장수 울 엄니

미나리밭에 푸르른 웅덩이에 해 떨어진다

밀꽃이 이울어도 오지 않는 울 엄니

치자꽃이 날려도 오지 않는 울 엄니

별이 가고 달이 가도 오지 않는 울 엄니

오늘 석양엔 또 어느 주막집 거리에 서서

길을 묻고 있을까

산여우가 숨어 울면 가만가만 가오

돌장승이 우뚝서면 쉬었다 가오

고개 고개 넘어 마을을 찾아

호롱불빛 깜빡 새는

남의네 처마를 찾아

풀비린내 역한 삼베치마 허리에 졸라매고

별빛 아래 가고 있을 울 엄니

 

 

 

1972년 겨울

이시영

 

아버지 돌아가신 날은 동짓달 스무엿샛날. 발인 날은 바람 매섭고 눈발 날렸다, 구례 곡성 순천 인근에서 온 유생들이 차일 친 마당의 상청에 모여 '어이 석천(石泉)!' 하며 곡을 한 뒤 두루마기 자락에서 조사(弔辭)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는데 향촌의 어른들답게 예의범절이 깍듯하여 상주인 나를 당황케 했다. 멍석 깔린 마당에는 상이 차려지고 펄펄 끓는 국밥과 술을 나르느라 동네 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했는데, 갓방 솥에서 더운 김을 내뿜는 돼지머리 국밥을 한 투가리 뚝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과방 일을 하는 도동 아재는 빨간 코로 손님들 상에만 눈길을 줄 뿐 상주 따위엔 관심 없었다.

붉고 흰 바탕의 만장을 앞세우고 꽃상여는 드디어 마당을 나섰지만 요령을 든 선소리꾼의 선창으로 '어허 노 어허 노' 다섯 걸음 가면 세 걸음 뒤로 돌아왔다. 삼베 굴건제복에 대지팡이를 짚은 손이 시려왔지만 나는 상여 뒤에 바짝 붙은 채 오가기만을 반복했다. 상여가 마을회관에 도착하여 노제를 지낸 시각은 이미 오후 네 시경. 이장이 나와 재배를 하고 마을 일에 얽힌 故事(고사)를 얘기하자 이번엔 또 거기가 상청이었다.

해가 한 뼘쯤 남아서야 상두꾼들의 재촉으로 선산을 향해 상여는 떠났는데 여기서도 '어허 노 어허 노.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하며 다섯 걸음 가면 세 걸음 뒤로였다. 날이 완전히 저물어서야 비탈을 오르고 계곡을 건너 장지에 도착했다. 만장을 줄느런히 세우고 마지막 고별 의식이 치러진 뒤 아버지 관은 아래로 내려가 비로소 자신의 거처에 닿았다. 무엇이 딸깍하고 닫히는 소리가 저 밑에서 들리는 듯했다. 지상엔 바람 불고 눈발 날렸다.

 

 

 

1974

이시영

 

항구 남쪽에서도 귀신이 나왔다고 한다

해안통 쪽에서 나타나 시내 복판으로 들어가는

더벅머리 셋을 보았다고 한다

사람들을 향하여 무슨 말을 중얼거리다가

볼일이 있다고 재빨리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도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없다

 

광주(光州)에서도 대낮에 여우가 나왔다고 한다

온몸에 불을 켜고 충장로를 달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여우는 사람들 다리 사이로 빠져 달아나면서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고 한다

아무도 그 말을 소리 낸 사람은 없다

 

영등포(永登浦)에서도 여자 둘이 나왔다고 한다

야근을 하고 돌아가는 새벽 철둑길에서

여자 둘을 본 여자들은 집에 와

문을 걸어 닫고 사흘 낮밤을 숨어 있었다고 한다

아무도 그들을 본 사람은 없다

 

용산(龍山)우체국 옆길에서도

붕대를 감은 대머리들이 나왔다고 한다

어깨들을 끼고 돌아가는 삼각지를 불러제끼며 돌아갔는데

아무도 그들을 기다린 사람은 없다

삼각지를 따라 부른 용산 술꾼들은

땅을 치며 하룻밤을 새우고 왔는데

이튿날부터 술을 끊었다고

술꾼 중의 1인이 쉬쉬하며 내게 전해왔다

 

 

 

8.15

이시영

 

기념식에서 돌아온 독립유공자 유족이 올해도 어김없이 비밀 천막 문을열고 들어간다

조국의 하늘은 저리 푸르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