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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주드(Jude the Obscure) 3

3부 멜체스터에서

 

, 신랑이여, 그녀와 같은 여자는 결코 없으리라. -사포(H. T. 워튼)

 

3-1

 

지적이고 경쟁적인 생활과는 전혀 다른, 신앙과 애타적 생활, 그것은 그에게는 새로운 발상이었다. 크리스트민스터의 학교에서는 두 과목씩이나 최우등의 성적을 올리지 않아도, 또는 보통의 지식만 있으면 그의 동료들에게 설교도 하고 선을 행할 수가 있었다. 끝내는 주교의 지위에까지 오르겠다는 이전의 공상은 윤리적 열의나 신학적 열의가 아닌 그저 법의를 입고 활보해 보고 싶은 세속적인 야심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의 원래 계획 전체가 더욱 고상한 본능에 기초를 두지 않고 단지 문명의 인위적인 산물에 불과한 일종의 사회적 불안에서 생겨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지금은 결국 그러한 종류의 불안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지금 이순간에도 그와 똑같은 사욕의 길을 걸어가는 젊은이들이 수천 명씩이나 있었다. 허영의 날들을 그의 아내와 함께 먹고 마시며 속 편하게 살아가는 육욕적인 시골뜨기들이 그보다 훨씬 호감이 가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배우지도 못한 상태에서 교회에 들어가 낮은 목사보 이상의 계급에 오르지 못하고 외진 마을이나 도시의 빈민가에서 초라한 목사복을 입고 허무하게 죽게 될 것이라는 것엔 일맥의 선함과 위대함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아마 참 종교일지도 모르며 참회하는 인간이 따라가야 할 속죄의 길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품어왔던 계획과는 전혀 다르게 변해 버린 이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을 때, 희망의 빛이 쓸쓸하고 외롭게 앉아 있는 그를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이 일은 그 후 며칠 동안, 12년간 계속되어 온 그의 지적 경력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 말았다.

그는 이 침체 기간 동안 새로운 희망을 추진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웃 마을들의 묘비를 세우면서 글자를 새기는 따위의 소소한 일들을 했고 그에게 일부러 가벼운 인사를 건네는 농장주와 그 밖의 시골 사람들로부터 사회의 낙오자로 인식 받고 반품된 물건처럼 대우받는 것을 감수했다.

이 새로운 계획에 대한 인간적 흥미는 - 그것은 가장 정신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람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지만 - 소인이 채 마르지도 않은, 수로부터 온 편지 한 통으로 인해 생기게 되었다.

그녀는 매우 격정적인 글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소식으로는 왕실의 장학생을 뽑는 시험에 합격하여 부분적으로는 주드의 영향으로 그녀가 선택한 천직을 다하기 위해 멜체스터의 교육대학에 입학할 예정이라는 내용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멜체스터에는 신학대학도 있었다. 이곳은 조용하고 차분한 장소로 종교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곳인데, 아직 세속적인 학문이나 지적인 영리함 같은 것들은 확고히 세워져 있지 않았다. 여기에서라면 그가 품고 잇는 애타적 검정이 그가 가지고 있지 않는 재기발랄함보다 더 높이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크리스트민스터에서 보통의 고전을 연마하기 위해 등한시했던 신학에 관한 책을 읽으며 당분간 그의 직업으로 계속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러니, 큰 도시로 나가 일자리를 구하고 공부에 대한 전망을 추진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낯선 고장에 대한 그의 지나친 인간적 흥미는 전적으로 수의 편지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수는 그런 흥미를 일으키기에는 이전보다 훨씬 어울리지 않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해야만 했기 때문에 거기에는 윤리상 한 가지 모순이 있었다.

그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했고 수를 단지 친구로, 나아가서는 여자 친척으로 사랑하게 되길 바랐다.

그는 30세의 나이에 성직을 시작하게 될 차후의 수년을 계획하고 설계해보았다. 이 나이는 그가 모범으로 섬겼던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처음으로 설교를 시작한 해였기 때문에 특별히 그의 관심을 끌었다. 이렇게 하면, 신중한 공부를 위해서도, 나중에 신학교에서 필수의 수업기한을 이수해 보겠다는 의도를 위해서도, 그리고 자신의 직업으로 학비를 벌어들이기 위해서도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왔다가 지나가 버렸다. 수는 공부하러 이미 멜체스터 교육대학에 가 있었다. 이때는 주드가 새 일자리를 얻기에는 1년 중 가장 좋지 않은 시기였다. 그래서 그는 해가 길어질 때까지 약 한 달 정도는 멜체스터로 가는 출발을 미루어야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수에게 보냈다.

그녀는 기꺼이 그 말에 따랐기 때문에 차라리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했다. 그날 밤 그가 수의 집에 찾아가 괴상한 행동을 하고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때, 그녀는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해 비난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주드에게 남달리 신경을 쓰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필로트슨 교장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한마디 말이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수한테서 제법 열정에 넘치는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몹시 외롭고 따분하다는 사연이었다. 그녀는 현재의 자리가 싫어졌으며 예전의 그 도안사 시절보다도 못하다고 했다. 이보다 더 나쁜 곳은 어디에도 없으며 자신은 친구도 하나 없는 아주 외로운 처지이므로 당장 와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하긴 그가 와준다고 해도 학교의 규칙이 꽤 엄격하여 그녀는 제한된 시간 동안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이 대학에 가라고 충고한 사람은 필로트슨 교장이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만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필로트슨의 구애는 분명하게 말하자면 잘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주드는 괜히 별 이유도 없이 그저 기뻤다. 그는 최근 몇 개월 동안 맛보지 못한 상쾌한 심정으로 짐을 꾸려 멜체스터로 떠났다.

이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느니 만큼 그는 일부러 술을 팔지 않는 호텔을 찾았다. 정거장을 걸어나오면서 그는 그런 종류의 작은 숙소를 발견했다. 식사를 하고 나서 희미한 불빛 속을 거닐며 시내의 다리를 건너 대성당의 경내 쪽으로 모퉁이를 돌았다.

안개가 짙게 깔린 날이었다. 그는 영국에서도 가장 우아하게 솟은 건축물의 담벽 아래에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주 높은 건물은 지붕 끝까지 다 보였고 그 위쪽으로 점점 멀리, 그리고 가늘게 첨탑이 솟아서 마침내 그 꼭대기는 자욱하게 낀 안개 속에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등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그는 서쪽의 입구 쪽으로 발길을 돌려 계속 돌아다녔다. 그는 주변에 많은 석재들이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 좋은 징조라고 생각하였다. 대성당이 상당한 규모의 복구공사나 보수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앙적 미신에 가득 차서 이것을 신의 뜻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성직에의 부름을 기다리는 동안 이곳에서 그의 기술을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이를 신의 깊은 사려가 내려준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는 온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널찍한 이마에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과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수와 자기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타오르는 듯한 눈매, 때로는 대담하고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는 눈빛의 수, 그녀는 스페인풍의 그림 판화에서 볼 수 있는 소녀와 흡사했다. 그녀는 바로 이 경내에, 서쪽의 정면과 마주하고 있는 이 건물 중의 한 곳에 있었다.

그는 넒은 자갈길을 따라 그 건물 쪽으로 향했다. 그것은 15세기의 오래된 건축물로 한때는 궁전이었지만 지금은 교육대학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창문엔 중간 문설주가 있고 창살이 끼어 있으며 정면의 안마당은 담벽에 의해 도로와 막혀 있었다.

주드는 대문을 열고 현관문 있는 데로 가서 사촌 여동생과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는 조심스레 대기실로 안내되었고 몇 분 후 그녀가 들어왔다.

수는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녀의 경쾌한 몸놀림은 완전히 사라졌고 동작의 곡선미도 그렇게 돋보이지 않았으며 인습의 장막이나 미묘함도 마찬가지로 사라지고 없었다.

수는 그를 오도록 편지를 쓴 여자가 전혀 아니었다. 그 편지도 일시적 충동으로 쉽게 휘갈겨 쓴 것이어서 다시 생각하면 약간은 후회하고 싶어지는 편지일 것이다. 바로 주드가 보인 추태를 연상하고 편지를 쓰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자괴감에 빠져 돌연 흥분했다.

"나를 타락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그런 꼴로 찾아갔다가, 이렇게 수치스런 꼴로 돌아와서......"

",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어요! 오빠는, 오빠가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는 걸 제가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히 얘기했잖아요. 전 오빠의 인격을 의심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요, 가엾은 주드! 정말 와주셔서 기뻐요!"

그녀는 조그마한 레이스 칼러가 달린 진한 보라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평범한 옷으로 호히호리한 몸매에 우아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전까지 당시 유행에 따라 길게 길렀던 머리는 지금은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엄격한 규율에 의해 다듬어진 여자라는 인생을 주고 있었지만 아직 그 규율이 미치지 못한 깊은 바닥에서는 일종의 숨겨진 빛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애교를 띠며 마중하러 나온 듯했지만 그의 키스를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사촌간에 흔히 하는 그런 식의 감정을 떠나 키스하고 싶은 열망에 불타 있었다.

그녀한테서는 그를 연인으로 본다든가 또는 그렇게 생각해 보려는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록 주드가 연인같이 행동할 권리가 있다더라도 그녀는 그의 나쁜 면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결혼에 얽힌 사연을 수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막상 말하고 난 뒤 그녀와의 교제로 인한 행복을 잃을까봐 두려워 고백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수는 그와 함께 시내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걸어가면서 그저 스쳐 가는 이야기만 나누었다. 주드는 물건을 사서 수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수줍어하면서 배가 몹시 고프다고 말했다. 학교의 식사가 부족했기때문에 정찬과 차와 야식을 합친 것 같은 음식이 지금은 이 세상에서 제일 먹고 싶다고 말했다.

주드는 수를 어느 작은 음식점으로 데리고 가 그 가게의 모든 메뉴를 주문했지만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그곳은 대단한 곳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만이 마주보며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즐거운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수는 당시의 학교상태를 있는 그대로 말했다. 그 안에서의 조잡한 생활이나, 같은 주교 관할구의 각 방면에서 모여든 동창생들의 잡다한 성격에 대해 말했고, 아침 일찍 일어나 가스등 아래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며 규칙에 얽매여 본 일이 없는 젊은이들의 쓰라림에 대해 말했다. 주드는 그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고 수와 필로트슨과의 관계였는데, 그녀는 그 이야기는 전혀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식사를 끝냈을 때 주드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손 위에 자기의 손을 얹었다. 그녀는 그를 보고 미소짓더니 작고 부드러운 손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보고 미소짓더니 작고 부드러운 손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쥐면서 마치 사려고 하는 장갑인 양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펴가며 그것들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손이 거칠어졌네요, 주드!"

"그래. 하루종일 망치와 끌을 쥐고 있으면 동생 손도 이렇게 될 거야."

"거칠어져도 난 싫지 않아요. 남자들이 일에 종사하고 있는 걸 보면 존경하고픈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전 이 교육대학에 온 게 기뻐요. 2년간의 교습이 끝나게 되면 어떻게든 독립을 하게 되겠지요! 전 시험도 꽤 좋은 성적으로 통과하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필로트슨 선생님도 저를 큰 학교에 보내주기 위해 애써 줄 거구요."

수는 마침내 그 문제를 꺼내고 말았다.

"나 조금 물어볼 것이 있는데 걱정이 돼서 그래."

주드가 말했다.

"선생님은 동생을 따뜻하게 돌봐주시는데, 혹시 동생과 결혼하길 원하고 있는 것 아냐?"

"어머, 그렇게 어리석은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그분이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었단 말인가?"

"설령 있었다 해도, 그게 어쨌다는 거지요? 그런 나이 많으신 분하고!"

", , 그분은 그렇게 늙지 않았어. 난 언젠가 선생님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설마, 나에게 키스하는 장면 같은 건 아니겠지요!"

"그런 건 아니었지만 너의 허리를 팔로 감싸안고 있었지."

", 생각나요. 난 그분이 그렇게 할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 문제를 발뺌하려고 애쓰고 있군, . 그건 정말 좋지 못한데."

언제나 민감했던 수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고 눈도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비난에 뭔가 할말을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전부 얘길 털어 놓으면 화내실 거예요. 그래서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좋아, 됐어."

그는 위로하듯 말했다.

"사실 내겐 물을 만한 권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얘기하겠어요!"

수는 타고난 옹고집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된 거예요. 난 약속을 했었지요. 약속요. 2년 후에 교육대학을 나와 자격증을 따게 되면 그분과 결혼하기로 말예요. 그분의 계획은 결혼하고 나서 좋은 도시로 나가 큰 남녀공학 학교를 맡아보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분께선 남학생반을 맡고, 난 여학생반을 맡고 말에요. 부부 교사들은 종종 그렇게들 하는데, 수입도 꽤 좋대요."

", ...... 물론 당연한 일이지. 동생은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는데, 그때 마침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말과는 달리 눈짓엔 심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그는 수의 손에서 자기의 손을 떼고 창쪽으로 얼굴을 돌려버렸다. 수는 움직이지 않고 수동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화낼 줄 알았어요!"

그녀는 조금도 감정을 흐트리는 기색 없이 말했다.

"그래요, 내 잘못이었나 봐요! 이제는 절 만나러 오지 마세요. 만나지 않는 게 나을 뻔했군요! 용건이 있을 때만 편지를 하기로 해요!"

이것이 주드에게는 더 견딜 수 없는 일이라는 것쯤은 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그렇게 해요."

그는 재빨리 말했다.

"너의 약혼은 나에겐 아무 상관도 없단 말이야. 난 동생을 만나고 싶을 땐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어. 언젠가 또 만나겠지."

"이제 그런 얘긴 더이상 하지 않기로 해요. 오랜만에 함께 한 우리의 저녁을 나무 망치는 것 같군요. 앞으로 2년 후의 일 같은 건 상관하지 말아요."

수는 그에게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주드도 이 화제를 더 이상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저 대성당에 가서 앉아 볼까?"

그들의 식사가 끝났을 때, 그가 제의했다.

"대성당요? , 좋아요. 그렇지만 앉아서 쉬느니 차라리 정거장으로 가요."

어딘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괴로운 듯한 여운이 섞여 있었다.

"정거장이 요즘은 이 읍의 생활 중심지지요. 대성당 같은 건 이미 구식이에요."

"너는 정말 현대적이군 그래!"

"나처럼 오빠도 지난 몇 해 동안을 중세의 분위기 속에서 지냈더라면 틀림없이 현대적이 되었을 거예요! 4, 5세기 전만 같아도 대성당이 훌륭한 곳이었겠지만 이젠 볼장 다본 거지요...... 저 역시 현대적이진 않아요. 전 중세적이라기보단 오히려 고대적이거든요."

주드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 이젠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외쳤다.

"다만 오빠는 제가 얼마만큼 나쁜 여자인지 그걸 모르고 계세요. 그렇지 않다면 절 이렇게 생각해 주지 않았을 것이고 제 약혼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겠죠. 시간이 있으니 경내를 한바퀴 돌고 전 들어 가봐야겠어요. 안 그러면 오는 저녁에 쫓겨나게 될 거예요."

그는 수를 문까지 바래다주고 헤어졌다. 그의 지난번의 불행한 방문이 그녀의 약혼을 기정 사실화시켰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글펐다. 수가 드러내놓고 비치진 않았지만 그녀의 주드에 대한 비난이 필로트슨과의 약혼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음날 그는 일자리를 구하러 나갔지만 크리스트민스터에서처럼 쉽지는 않았다. 이 조용한 도시에서는 돌 깎는 일이 대체적으로 활발하지 않았고 기능공들도 거의 토박이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점차적으로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가 처음으로 맡은 일거리는 언덕 위의 묘지에서 조각하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그가 원했던 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대성당의 보수공사로 상당한 규모의 일거리였다. 내부의 석조물 전부를 조사해 새것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그 일을 전부 마치는 데는 자그마치 수년이 걸릴 것 같았다. 주드는 끌과 망치를 다루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지 때문에 이 고장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 것인가는 오로지 그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느꼈다.

주드가 경내의 대문 가까운 곳에 얻은 하숙집은 목사보의 주택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으나 그의 임금에 비해 집세가 높아, 여느 기능공들은 흔히 지불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였다.

침실과 거실을 겸한 방에는 이 집 여주인이 어릴 적에 가정부로 살았던 목사관과 부감독 저택의 사진이 액자화돼 걸려 있었다. 그리고 아래층 응접실 난로 선반 위에는 부인이 결혼할 당시 동료 하인들로부터 받았다는 취지의 글이 기입된 괘종시계가 놓여 있었다.

주드는 자기 손으로 만든 교회의 조각이나 기념비의 사진을 꺼내 자신의 방을 장식하고 만족한 기분이 들었다.

주드는 시내의 책방에 신학에 관한 서적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러한 책을 상대로 여태까지의 방침과는 다른 방향으로 연구를 재개했다.

교부문학과 페일리(1743-1805, 자연신학자로 삼위일체설을 배격하고 그리스도를 신으로 삼는 대신 유일의 신격을 주장했음)나 버틀러(1969-1752, 브리스틀의 감독을 지낸 신학자)와 같은 딱딱한 서적을 벗어나 뉴먼, 퓨지와 같은 근대의 석학들의 책을 수없이 읽었다.

그는 또 오르간을 임대해 하숙집에 들여놓고 여러 가지의 찬미가를 단음이나 복음으로 연습하기도 했다.

 

3-2

 

"내일은 휴일인데,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어?"

"3시부터 9시까지 휴가를 얻어 놓았어요. 그 동안에는 어디든 갔다올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주드, 폐허 같은데 가는 건 전 싫어요. 그런 곳은 별로예요."

"그럼 워더 성으로 가지. 그러고 나서 또 가고 싶다면 폰트힐 저택에도 갈 수 있고. 내일 오후 동안에 모두 가볼 수 있는 곳들이지."

"워더 성은 고딕풍의 폐허예요. 난 고딕은 싫은데!"

"아냐, 전혀 달라. 그건 고전적인 건축물이야. 코린트식이지. 그림도 많이 있구."

", 그럼 그렇게 해요. 코린트란 어감이 맘에 들어요. 우리 가요."

몇 주일이 지난 어느 날, 두 사람의 대화는 이와 같이 오고 갔고 다음 날 아침, 그들은 떠날 채비를 했다. 이번 소풍을 준비하면서 주드는 깎아놓은 보석처럼 빛이 났고 활달해졌다. 그는 이제부터 보내려고 하는 일관성 없는 생활에 관해서는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수의 태도는 주드에게 있어서 하나의 사랑스런 수수께끼였다. 그는 이 이상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데리러 교문을 찾아가야 하는 가슴 설레이는 날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녀는 스스로의 뜻이기보다는 다소 강압적이라고 할만한 분위기에 의해 수녀처럼 간소한 옷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두 사람은 정거장까지 길을 따라 나란히 걸었는데, 짐꾼이 실례한다고 외치던 일, 기차의 기적 소리,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의 아름다운 결정체를 형성했다.

수를 바라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매우 소박한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의상에 억제되어있는 매력을 자신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주드는 적잖이 위안이 되었다.

포목상에서 10파운드의 돈만 들이면 그녀의 실생활이나 진정한 자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멜체스터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녀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차장은 그들을 연인이라고 생각하고 두 사람만 들어가는 차 칸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쓸데없이 호의를 보이는군요!"

수가 말했다.

주드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불필요할 정도로 잔인한 짓이며, 또 부분적으로는 진실하지 못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두 사람은 큰 정원에 둘러싸인 워더 성에 도착해 화랑을 둘러보았다. 주드는 일부러 델사르트, 귀도 에니, 스파뇨레토, 사소페르라토, 카를로 돌치와 그 밖의 화가들이 그린 종교화 앞에 멈추었다. 수는 참을성 있게 주드의 옆에 멈추어 서서, 성모상이나, 성가족, 성도들의 그림을 바라보며 점차 마음이 경건해져 가는 그의 얼굴을 비판적으로 훔쳐보기도 했다. 이리하여 완전히 살펴보았다 싶으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렐리나 레이놀스의 그림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녀의 마음속에 사촌에 대한 깊은 관심이 생기고 있음은 명백했다. 그것은 자기가 먼저 빠져 나온 것과 같은 미로에서 타인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주 난처해하며 나오려고 하는 것을 보고 흥미를 느끼는 사람의 심리와 같은 것이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그들에게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식사를 하고 나자 주드는, 고지의 시골을 가로질러 북쪽 7마일쯤 되는 저쪽 정거장에서 멜체스터 방면으로 돌아가는 다른 철도의 기차를 잡아타자고 제안했다.

수는 오늘 하루의 자유분방함을 만끽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모험이라도 해보고 싶은 기분이 들어 흔쾌히 동의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정거장을 뒤로하고 떠났다.

시원하게 탁 트인 전원이 넓고도 높게 펼쳐져 있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뛰는 것처럼 걸어갔다. 주드는 작은 숲에서 수를 위해 그녀의 키 정도가 되는 길고 몹시 굽은 지팡이 한 개를 꺾어 왔는데, 그 지팡이를 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양치기 소녀처럼 보였다.

여행길의 절반쯤 되는 거리를 걸어왔을 무렵, 두 사람은 마침 동서로 나 있는 큰길을 건너게 되었다. 이 길은 런던과 랜스엔드 곶을 연결하는 오래된 도로였다. 두 사람은 멈추어 서서 잠시 여기저기를 바라보았으며 한때는 활발했던 이 통로에 불어닥친 현재의 황폐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때마침 바람이 휙 불어 닥쳐서, 짚과 건초줄기들을 땅 위에서 쓸어가버렸다.

두 사람은 이 도로를 건너 지나갔다. 그러나 반 마일도 채 가기 전에 수는 지친 듯이 보였다. 주드도 마음이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상당한 거리를 함께 걸어왔는데, 만일 그들이 목표한 역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정말 곤란해질 것이었다.

오랫동안 막막하게 펼쳐진 언덕과 순무밭 쪽에는 집 한 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스로 어떤 양의 우리에서 사립문을 세우고 있는 양치기를 만날 수 있었다. 양치기는 이 부근에는 자신과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이 단 한 채 있을 뿐이라며 전방의 작고 움푹 팬 곳을 가리켰는데 거기에선 푸른 연기가 희미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양치기는 그들에게 쉬어가라고 권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빨이 하나도 없는 한 노파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주인의 호의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이 집에서 쉴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손님으로서 이 노파에게 최대한 친절하려고 애썼다.

"작고 멋진 집이네요."

주드가 말했다.

", 멋진 것까진 잘 모르겠수. 짚으로 지붕을 이어야 하는데, 짚이란 게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나 비싼지 이럴 바엔 기와를 이는 편이 훨씬 쌀 것 같으우."

두 사람이 앉아 쉬고 있을 때 양치기가 들어왔다.

"나한테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양치기는 염려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댁들이 계시고 싶을 때까지 계십시오. 그런데, 오늘밤 기차로 멜체스터로 돌아가실 생각입니까? 댁들은 이 근방의 지세를 잘 모르고 계셔서 그렇습니다만, 돌아가시기 힘들 겁니다. 제가 잠깐 모셔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기차는 떠나고 없을 겁니다."

두 사람은 놀라 벌떡 일어섰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십시오. 안 그래요, 어머니?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잠자리야 별로 좋지 않습니다만, 세상엔 여기보다 못한 데도 많습니다."

그는 주드 쪽을 향해 몸을 돌리면서 물었다.

"부부신가요?"

", 아닙니다!"

주드가 말했다.

", 뭐 꼭 나쁜 이야길 하려고 한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자분은 어머님 방으로 가시면 되고, 선생과 나는 여자들이 가고 나면 바깥방에서 잡시다. 첫 기차 시간에 늦지 않도록 일찍 깨워드리지요. 오늘밤 기차는 벌써 늦어버렸으니까요."

두 사람은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양치기와 그의 모친이 끓여내 온 베이컨과 야채로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 이런 곳이 좋아요."

집주인이 접시를 치우고 있는 동안 수가 말했다.

"중력과 발아의 작용 외에는 어떤 법칙에도 속박되어 있지 않거든요."

"너는 좋아한다고 생각만 하는 거야.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너는 전적으로 문명의 산물이야."

주드가 말했다. 불현듯 그녀의 약혼 사실이 생각나 다시금 그의 마음이 괴로워졌다.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주드. 난 독서 같은 건 좋아하지만, 어린 시절의 생활이나 자유로 돌아가고 싶어요."

"수는 어렸을 적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어? 나의 눈엔 네가 세상의 인습과 관계없는 사람으론 보이질 않거든."

"어머, 난 그렇지 않아요! 오빠는 내 자신을 속속들이 모르고 계시나 봐요."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전 이스마엘족(아브라함과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 같이 버림받은 자를 가리킴)인 걸요."

"너는 도시에서 자란 엄연한 숙녀야."

그녀는 격렬한 불만의 기색을 보이고는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다음 날 아침 양치기는 약속대로 두 사람을 깨웠다. 맑고 청명한 날씨였으며, 기차가 있는 역까지의 4마일을 그들은 즐겁게 걸었다. 그들이 멜체스터에 도착한 뒤 경내까지 걸어가 다시 갇혀 지내게 될 오래 된 건물의 박공들이 수의 눈앞에 솟았을 때 그녀는 다소 겁에 질려 있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야단맞을 거예요!"

두 사람은 커다란 벨을 누르고는 기다렸다.

", 오빠에게 줄 물건을 가지고 있는데, 깜박 잊고 있었네요."

수는 재빠르게 말하고 나서 호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새로 찍은 작은 내 사진인데, 받아주시겠어요?"

"기꺼이 받겠어!"

그는 기쁘게 그것을 받았다. 곧이어 문지기가 다가왔다. 문을 열어주는 그의 얼굴에는 희미하게나마 불길한 징조가 깃들어 있는 듯이 보였다. 수는 고개를 돌려 주드를 쳐다보고는 손을 흔들며 안으로 들어갔다.

 

3-3

 

다소 나이든 사람도 있었지만, 주로 열아홉에서 스물한 살까지 70명의 여성들이 멜체스터의 교육대학으로 알려져 있는 일종의 수녀원 같은 곳을 꽉 채우고 있어서, 그곳은 매우 다양한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 속에는 직공이나 목사, 의사, 소상인, 농부, 우유상, 군인, 선원, 시골 사람들의 딸 등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앞서 말한 휴일날 밤에 그들은 학교의 커다란 교실에 앉아, 수 브라이드 헤드가 문을 닫을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었다.

"수는 젊은 남자와 함께 나갔대."

젊은 남자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어느 학생이 말했다.

"트레이슬리 선생님이 그녀가 젊은 남자와 함께 정거장에 있는 것을 보았대. 그녀는 돌아오면 따끔하게 야단맞을 거야."

"그 남자는 수의 사촌이라던데."

발랄한 신입생이 말했다.

"그런 변명은 우리 학교에선 너무 많이 쓰였기 때문에 처벌을 면하는 데는 별로 효과가 없을 거야."

2학년 반장이 냉담하게 말했다.

사실은 1년 전쯤에 유감스럽게도 어느 학생이 유혹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 학생도 연인과 만나기 위해 같은 말로 변명을 했었다. 이 사건이 추문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 후로 학교 당국에선 사촌이라는 말에 신경이 예민했다.

9시에 인원 점검이 있었다. 트레이슬리 선생님이 세 번이나 수의 이름을 낭랑하게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915분에 70명은 일제히 일어서서 '저녁찬가'를 부르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기도가 끝난 후 저녁식사를 했는데, 모든 소녀들의 생각은 수브라이드헤드가 대체 어디에 있을까 하는 데 쏠렸다.

주드가 창 너머로 들여다본 것을 목격한 몇 명의 학생은 그토록 마음이 상냥해 보이는 청년에게 키스 받는 기쁨을 맛볼 수만 있다면, 수가 받게 될 벌 같은 것은 문제가 안 된다고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학생들 중의 그 어느 누구도 사촌 간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30분 후에 그들 모두는 조그마한 침실에 누웠다. 그들의 귀엽고 여성다운 얼굴은 길게 뻗은 기숙사의 군데군데에서 반짝이고 있는 가스등 쪽으로 향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에는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형상 지어진 여성이라는 성의 벌로 '연약한 자'라는 명이 새겨져 있었다. 이 형벌을 받고 있는 이상은 제아무리 왕성한 의욕과 능력을 발휘해 보아도 냉혹한 자연의 법칙이 변하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강해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예쁘고, 암시적이며, 애처로운 시선을 보내면서도, 그 아름다움이나 연정을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고 발견해 내지도 못할 것이다.

앞으로 세상의 거센 폭풍이나 중압감에 시달리게 되고, 부정, 고독, 출산과 남편과의 사별 같은 고통을 겪고 난 후에 그들의 마음은 오늘의 이 경험을 어떻게 회상할 것인가.

여교사 한 사람이 등불을 끄려고 들어왔다. 끄기 전에 여전히 비어있는 수의 침대를 마지막으로 한번 쳐다보았다. 그녀의 발치쯤에 있는 작은 화장대에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소녀다운 장식물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눈길을 끄는 것은 액자에 든 사진이었다. 수의 화장대는 볼품 있는 전시장이었다. 벨벳 천에 금은의 바늘 세공을 한 거울 옆의 액자 안에는 두 사람의 사진이 세워져 있었다.

"이 사람들은 누군가요? 브라이드헤드가 말한 적이 있나요?"

여교사가 물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여러분도 알다시피 친척의 사진만을 책상 위에 놔둘 수 있어요."

"이쪽의 중년 남자는요."

옆 침대에 있던 학생이 말했다.

"브라이드헤드가 근무했던 학교의 선생님으로 필로트슨 선생이래요."

"또 한 사람, 이 각모를 쓰고 제복을 입은 대학생은 누구지요?"

"친구라나 봐요. 전에 친구였나본데, 이름을 말한 적은 없어요."

"그녀를 부르러 온 사람이 이중에 있나요?"

"아뇨."

"대학생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지요?"

"확실해요. 그 사람은 검은 수염이 나 있는 젊은 남자였어요."

이내 불이 꺼졌고 소녀들은 잠에 빠져들 때까지 수에 관한 여러 가지 억측을 제멋대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여기로 오기 전에, 런던이나 크리스트민스터에서 도대체 어떤 일을 했을까 하고 의아해했다.

그중에서도 조심성 없는 학생들 몇몇은 침대에서 빠져나와, 건너편 대성당의 웅장한 서편 입구 정면이나 그 뒤쪽에 솟아 있는 첨탑들을 세로 창살이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내다보기도 했다.

그들은 그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수가 자고 있어야 할 구석을 바라보았지만 침대의 주인은 없었다. 그들은 아침 화장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가스등 불빛을 비춰가며 아침 레슨을 마친 뒤, 비로소 옷을 갈아입고 아침 식사를 했다. 그러고 나자 입구문의 벨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사감이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와서는, 허가 없이 브라이드헤드에게 말을 건네서는 안 된다는 교장의 명령을 전했다.

수는 기숙사에 돌아와 서둘러 몸치장을 하고, 피로하면서도 상기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침실로 들어갔으나 누구 한 사람 그녀를 맞아주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학생들은 아침식사를 하러 아래층에 내려갔을 때 수가 따라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수가 엄하게 혼이 났으며, 1주일 동안의 독방생활을 명령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는 방 밖을 한 걸음도 못 나갔고 식사도 거기서 했으며, 독서만을 할 수 있었다.

너무 가혹한 벌이라고 70명의 학생들은 수군거렸다. 학생들은 단체 서명을 작성해 수의 처벌을 경감해 달라고 교장에게 제출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후 늦게 지리과목 여교사가 강의를 시작했을 때 학생들은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공부하지 않겠다. 이건가요?"

여선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브라이드헤드와 외박했던 남자가 사촌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됐음을 여러분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군요. 그런 친척이 수에겐 한 사람도 없어요. 우리는 크리스트민스터에 조회해서 확인도 했어요."

"저희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반장이 말했다.

"그 청년은 술집에서 술에 취해 불경스러운 행동을 하다 크리스트민스터의 일자리에서 쫓겨난 경력이 있어요. 그래서 이곳으로 옮겨와 사는 건데, 그건 전적으로 브라이드헤드와 가까이 있고 싶어서지."

그러나 그들이 완강히 버티며 미동도 하지 않자 여선생은 윗사람에게 상의해 보겠다며 교실을 나가버렸다. 곧 황혼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여전히 앉아 있었고, 옆 교실에서는 1학년 학생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와중에 한 학생이 뛰어들어와 수 브라이드헤드가 감금당해 있던 방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달아 나버렸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그녀가 어떻게 해서 교외로 빠져나가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래쪽 구내의 경계는 강물로 둘러싸여 있는데다가 옆문은 자물쇠로 잠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텅 빈 방으로 달려가 중앙의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등불을 들고 잔디밭과 관목 사이, 나무 그늘도 찾아보았지만 수는 그 어디에도 숨어 있지 않았다. 정문의 수위에게 물어보자 그는 잠시 생각 끝에 뒤쪽의 강물에서 첨벙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오리가 강물을 따라 상류에서 내려온 것이라 생각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강을 건너갔어."

여선생이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익사했을 거요!"

수위가 말했다.

사감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수가 익사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경악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신문에 이 사건이 5단 기사로 상세히 보도될 것이 두려워서였다. 그렇게 되면 1년 전의 추문과 더불어 장차 몇 달 동안, 학교 당국은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더 많은 등불을 확보해 강을 조사해 보았다. 마침내 그들은 들판을 향해 펼쳐져 있는 건너편 강가의 진흙 속에 작은 구두 발자국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곳은 모든 지리 교과서에서도 경의를 표할 정도로 주내 제일의 강이었다. 흥분한 수가 어깨까지 차는 이 깊은 물을 건너 달아났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수가 익사함으로써 학교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았다는 점을 알게 되자 사감은 거만하게 말하기 시작했고, 그런 학생이 사라졌다는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듯 만족감까지 표시했다.

그날 밤 주드는 경내의 산 어귀 옆에 위치한 하숙집에 있었다. 그는 해가 지고 난 이 시각쯤이면 종종 수가 기거하는 기숙사의 건너편 경내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오가는 여학생들의 머리와 창문의 해 가리개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사려분별이 없는 동숙자들이 경멸하는 서적이나 읽고, 온종일 독서만 하고 공부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밤의 그는 차를 마시고 몸단장을 끝내고는, 놀랍도록 싼값으로 중고 서적상에서 구입한 퓨지 편의 <교부문학총서> 한 질의 제29권을 탐독하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창문에서 뭔가 덜컥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이내 그 소리가 또 들려왔다. 분명히 누군가가 자갈을 던진 것 같았다. 그는 일어나서 조용히 창틀을 들어 올렸다.

"주드!"

아래에서 소리가 났다.

"!"

"그래요, 나예요!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고 올라갈 수 있겠어요?"

", 염려마."

"그럼, 내려오지 마세요. 그리고 창문을 닫아요."

주드는 기다렸다. 오래 된 시골 도시에서처럼 현관문은 누구나 손잡이를 돌려 열 수 있게 되어 있어서, 그녀도 어렵잖게 방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곤경에 빠졌을 때 수한테로 달려갔던 것처럼 그녀 역시 곤경에 빠져 자기한테로 도망쳐온 것이라는 생각에 그의 마음은 설레었다.

어쩌면 그들은 이렇게도 닮은 걸까! 그는 방문을 살짝 열고서 어둠 속의 계단을 소리 없이 올라오는 기척을 엿들었다. 이윽고 수가 램프의 불빛 속으로 나타났다. 그는 가까이 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수는 바다의 신처럼 함빡 젖어 있었고, 옷은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 장식대에 있는 여신처럼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 추워 죽겠어! 난로 가까이로 가야겠어요."

수는 어금니를 달달 떨면서 말했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런 몸을 불기도 약한 난로로 말린다는 것이 터무니없어 보였다.

"대체 웬일이지?"

그는 너무나 놀라 부드러운 애칭이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올 것을 조심하며 물었다.

"이곳에서 제일 큰 강을 걸어서 건넜어요. 그렇게 해서 온 거예요! 오빠와 같이 밤을 지샜다고 절 감금 처분했어요. 그런 부당한 처벌은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창문을 넘고 강을 건너 도망쳐온 거예요!"

수는 평소처럼, 특유의 마음 내키는 어조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분홍빛의 얇은 입술을 떨기 시작하더니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이걸 다 벗어야 해! , 그러려면 여주인의 옷이라도 빌려와야 하겠는걸. 내가 부탁해볼게."

"아니에요! 제발 여주인에겐 알리지 말아주세요! 학교 바로 옆이라 곧 쫓아오게 될 거예요."

"그럼 내 옷이라도 입도록 해. 괜찮을까?"

"괜찮아요."

"일요일 나들이옷이야. 여긴 방이 좀 좁아."

다른 방이 없었기 때문에, 주드의 방은 하나에서 열까지 협소했다. 여유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랍을 열고 가장 좋은 그의 나들이옷을 끄집어내 훌훌 털고 나서 말했다.

"옷 갈아입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10분 정도요."

주드는 방을 나와 거리로 내려가서 서성거렸다. 시계가 7시 반을 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돌아섰다. 그의 유일한 안락의자에 일요일의 주드로 변장한 채 앉아 있는 갸름하고 연약해 보이는 사람이 수였다. 그 무방비상태가 너무나 가여워 그의 가슴은 뭉클해졌다.

난로 앞에 놓인 나머지 두 개의 의자에는 그녀의 함빡 젖은 옷이 걸려있었다. 주드가 옆에 앉자 그녀는 벌겋게 달아올랐는데,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내 몸에 걸쳤던 옷을 모두 저기에 걸어놓고 이렇게 앉아 있는 날 보니 우습지요, 주드. 그렇지만, 아무 뜻도 없는 짓이지요! 여자는 옷을 몸에 걸친다 뿐이니까요. 남녀의 성별과는 관계없는 라사나 린넨에 불과하니까요. 몸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내 옷 좀 말려 주시겠어요? 부탁이에요, 주드. 마르거든 곧 하숙을 구할 거예요.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요."

"몸이 아프면 그러지 마, . 여기에 잠자코 있도록 해요. 귀여운, 귀여운 수! 뭐 좀 먹을 걸 갖다줄까?"

"나도 몰라요! 웬일인지 오한이 가라앉지를 않네요. 좀 따뜻했으면 좋겠는데."

주드는 그의 또 다른 외투를 수에게 걸쳐주고 나서 근처의 술집으로 뛰어갔다. 거기서 작은 병 한 개를 손에 구해 쥐고 돌아왔다.

"여기 최상품의 브랜디를 6펜스 주고 사왔어. 이걸 단숨에 마셔보도록 해요. 남기지 말고."

그는 말했다.

"이것을 어떻게 병째 마실 수 있겠어요."

주드가 화장대 위에서 잔을 가지고 와 브랜디에 물을 탔다. 수는 약간 한숨을 쉬고 나서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안락의자 뒤쪽으로 가 누워버렸다.

수는 어제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난 후부터의 일을 상세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얘기 도중 더듬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이었다. 그녀가 감기에라도 들까 봐 주드는 걱정했으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자 안심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살펴보았다. 장밋빛처럼 핏기운이 돌기 시작했고 축 늘어진 손도 이제는 차갑지 않았다. 주드는 자기의 등을 난롯불 쪽으로 돌리고 서서 수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한테서 거의 신성함을 느꼈다.

 

3-4

 

주드의 몽상은 계단을 올라오며 내는 삐거덕거리는 발소리에 의해 중단되었다.

의자에서 마르고 있던 수의 의복을 그는 황급히 집어 들어 침대 밑으로 쑤셔 넣고 나서 책상머리에 앉아 책 읽는 시늉을 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고 이내 문이 열렸다. 바로 이 하숙집의 여주인이었다.

"아니, 폴리 씨, 집에 있었는지 전혀 몰랐어요. 저넉 식사를 하실 건지 물어보러 왔어요. 젊은 신사분이 와 계시는가 보군요."

", 아주머니. 오늘 저녁엔 아래로 내려갈 수 없을 것 같으니, 쟁반에다 식사를 갖다 주시겠어요? 차도 한 잔 했으면 하는데요."

주드는 평소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인집 식구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공연히 수고를 끼치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하숙집 여주인이 저녁 식사를 2층으로 가지고 올라왔기 때문에 주드는 그것을 문 있는 데서 받아들었다.

여주인이 내려가고 나자, 그는 벽난로 뒤쪽의 선반 위에 찻주전자를 올려놓고 새삼 수의 옷을 꺼내 보았다. 아직 젖어 있었다. 두꺼운 모직 가운에는 물기가 많이 남아있었다. 그는 다시 옷을 걸쳐두고 벽난로의 불을 지펴 옷에서 일어나는 김이 굴뚝으로 빨려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가 돌연 말했다.

"주드!"

"그래, 기분이 좀 어때?"

"좋아졌어요. 아주 많이. 그런데 제가 잠에 골아 떨어졌었던 모양이지요? 지금 몇 시나 됐어요? 분명히 늦지는 않았겠지요?"

"10시가 지났는데."

"정말? 전 어떡하면 좋아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대로 있어요."

", 저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소문이 어떻게 날지 몰라서...... 그건 그렇고 오빠는 어떡하실 거예요?"

"난 여기 난로불 옆에서 밤새 책이나 읽을까 해.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밖에 나갈 필요는 없겠지. 너는 여기서 쉬고 나면 몸이 나아질 테니 걱정 말아. 난 괜찮으니까. 여기 저녁밥도 갖다 두었어."

수는 일어나 낮아 처량하게 숨을 쉬며 말했다.

"아직 어질어질해요, 좋아진 것 같더니만. 그런데 제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지 않아요?"

저녁식사는 그녀에게 얼마간의 원기를 돌려주었다. 그녀는 차를 마시고 다시 눕자 명랑해지고 쾌활해졌다.

차가 진한 녹차여서인지 아니면 너무 오래 우려서인지 그후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비록 차를 마시지 않은 주드의 눈은 거슴츠레해지기 시작했지만 곧 수의 이야기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오빠는 절 가리켜 근대문명의 산물이니 뭐니 하고 말씀하셨지요?"

그녀가 침묵을 깨뜨리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부르시면 이상하단 말이에요."

"왜지?"

"글세, 그건 아주 틀린 지적이니까요. , 문명을 부정하는 사람이잖아요."

"대단히 철학적이구나, 부정이란 말은 심오한 표현이지."

"그래요? 제가 학식 있는 것같이 보여요?"

그녀는 야유조로 말했다.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보통 아가씨들처럼 말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말하자면, 아무런 볼품도 없는 그런 여자들 말이야."

"전 볼품은 있다고 생각해요. 라틴어나 희랍어는 읽지 못하지만 그들의 문법만은 알고 있어요. 그러나 대개의 희랍어나 라틴어 고전은 번역된 댁으로 읽고 있어요. 다른 책도 마찬가지예요. 렘프리에르(영국의 고전학자), 카툴루스(87~54? B.C, 로마의 서정시인), 마르티알리스(40?~100?, 로마의 풍자시인), 주베날리스(60?~130?, 로마 전성기의 통렬한 풍자시인), 루키아누(120?~180?, 그리스의 풍자가), 보먼트(1584~1616. 영국 엘리자베스 왕조의 희곡작가)와 플레처(1579~1625.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작가), 보카치오(1313~1375, 이탈리아의 작가), 스카롱(1610~1660, 프랑스의 풍자적 희곡작가), 드 브랑통(1540~1614?, 프랑스의 역사가), 스턴(1713~1768, 영국의 작가), 과디포(1660~1731), 스몰렛(1721~1771, 스코틀랜드 태생의 영국작가), 필딩(1707~1754, 영국의 사실주의 소설의 시조), 셰익스피어나 성서까지도 읽었단 말이에요. 이러한 서적에는 불건전한 내용도 있지만, 대부분 여운을 남기고 신비롭게 끝난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나보단 훨씬 많이 읽었군."

주드는 탄식하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야릇한 책들을 읽게 되었지?"

"글쎄요."

수는 생각에 잠긴 듯이 말했다.

"우연히 그렇게 되었지요. 내 생애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 내 안의 특성이라는 것에 의해 형성되었어요. 난 세상의 남성들에 대해 전혀 두려움이 없어요. 남성들이 쓴 책 같은 건 두렵지도 않아요. 여러 남성들과 어울려본 적도 있고요. 그중 한두 사람과는 각별했죠. 이런 경우 대부분의 여자들은 어떤 종류의 기분을 갖게 되는데, 말하자면 정조를 뺏기지 말아야지 하는 식으로요. 내가 사귄 남자들에게서 전 그런 기분을 안 가져 봤어요. 미개에 가까운 육감적인 남자의 경우라면 별문제겠지만요. 여느 남성은 여자 쪽에서 먼저 유인하지 않으면 낮이든 밤이든 집 안이든 집 밖이든, 여자를 괴롭히지는 않지요. 여자가 눈치로 '어서요' 하기 전에 남자란 그렇게 하는 걸 항상 두려워하죠.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제가 열여덟 살 때 크리스트민스터에서 어느 대학생과 친밀하게 지냈는데 그가 나한테 많은 것을 가르쳐줬죠. 도저히 내 힘으론 구해 볼 수도 없는 책들을 빌려줬지요."

"지금은 헤어진 거요?"

"그래요! 죽었어요. 학위를 따고, 크리스트민스터를 떠나고 난 2, 3년 뒤에, 가엾게도."

"그 사람과는 자주 만났을 것 같은데?"

"그럼요. 우리는 함께 곧잘 산책했어요. 소풍이다 독서 여행이다 등등으로 마치 친구처럼 말이에요. 그 사람이 함께 살자고 하길래 난 편지로 승낙을 했어요. 그렇지만 런던에서 함께 동거할 때, 그는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실상 그는 날 정부로 삼고 싶었던 거죠. 그러나 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만일 내 계획에 동의 해주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말했더니, 그는 승낙을 해주더군요. 우리는 같은 방에서 15개월을 살았어요. 이럭저럭 그 사람은 런던의 그 사람은 런던의 큰 일간지에서 유력한 기자로 일했지만, 곧 병을 얻어 해외로 요양을 떠나야 했어요. 그 사람은 제게 곧잘 이런 말을 했어요. 그렇게 좁은 집에 같이 살면서 자기를 멀리 했기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고 말예요. 그런 여자가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대요. 그가 외국에서 돌아왔을 땐, 정말 죽기 위해 돌아온 듯했어요. 그 사람의 죽음은 나의 잔인함에 대해 소름 끼치는 후회를 맛보게 해주었어요. 하긴 폐병으로 죽었으니 제 탓은 아니었지요. 저는 그의 장례식 때 샌드본까지 갔었는데, 제가 그 사람에게 실연의 상처를 줬기 때문인 것 같았어요. 그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나은

점이지요!“

"맙소사! 그 후에 너는 어떻게 지내게 됐지?"

", 나한테 화를 내고 있군요!"

은방울 소리 같은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에 갑자기 콘트랄토(여성의 최저 음역) 같은 비극적인 음조가 깃들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런 얘기 오빠한테 하지 말 걸 그랬지요!"

"아냐, 화나지 않았어. 전부 얘기해 봐."

"그러고 나서 난 그의 유산을 정말 가엾게도 물거품 같은 계획에다 투자해 몽땅 날리고 말았어요. 난 한동안 런던 여기저기서 혼자 생활을 하다가 곧 크리스트민스터로 돌아오고 말았어요. 역시 런던에 계시던 부친께서 롱에이커 거리 근처에서 미술조금공 일을 시작하셨지만, 날 받아주시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그럭저럭 미술 장식점에 근무하게 됐던 거지요. 그리고 거기서 오빠가 날 찾아낸 거예요. ...... 내가 얼마나 몹쓸 여자인지 전에 오빠는 모를 거라고 말했었지요!"

주드는, 마치 자기가 감싸주려는 사람의 마음속을 더욱 주의 깊게 읽어내려는 듯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네가 어떤 생활을 해왔든 이 세상의 인습을 타파해 낼 수 있을 만큼 순수하다고 믿고 있어!"

"전 오빠가 생각하는 것만큼 순수하지 않아요. 아시다시피 지금 난, '그대의 공상이 입혀 놓은 허망한 모형에서부터 그 옷을 확 잡아당기고 있는'거예요."

그녀는 짐짓 냉소를 띠며 말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전 어떤 연인에게도 몸을 맡겨본 적이 없어요. 혹시 오빠가 그런 것에 대해 불안해 한다면요! 전 태어날 때의 몸 그대로예요."

"난 수를 전적으로 믿고 있어. 그렇지만 지키지 못하는 여자들도 있지."

"아마 못 지키겠지요. 나보다 나은 사람도 못 지킬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나더러 냉정한 여자라고 하더군요. 섹스가 없는 여자라나요. 그렇지만 그런 말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가장 정열적이고 에로틱한 시인들 중 어떤 이들은 일상생활을 자신을 억제하며 해나가는 사람도 있거든요."

"필로트슨 선생에게도 그 대학 출신의 박학한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어?"

"그럼요, 오래 전에. 누구에게도 이 문제를 비밀로 하진 않아요."

"선생님은 뭐라 그랬는데?"

"비판하는 말은 한마디도 안하셨어요. 내가 뭘 했던지, 그분에게는 내가 전부라는 등 그런 말만 했어요."

주드는 굉장히 의기소침해졌다. 수가 그녀 나름의 이상한 행동과 성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로 자신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주드, 정말 나 때문에 화나신 거 아니에요?"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두드러지게 상냥한 목소리여서 여태까지 그토록 경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던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빠만은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화가 났는지 안 났는지 그건 나도 모르겠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건 동생을 무척 걱정하고 있다는 것뿐이야."

"나도 오빠에게 무척 마음을 쓰고 있어요. 여태까지 내가 만났던 어느 누구보다도......"

"너는 내게 관심이 있는 게 아냐.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군. 이제 이런 소리에 대답하지 마."

또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그는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수가 자기를 심하게 대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지할 데가 없는 그녀의 처지가 그녀를 자기보다도 더 강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 말했다.

"난 공부를 꽤 했지만, 일상적인 일에 관해선 상당히 무지하지. 알다시피 신학에 몰두해 있었으니까. 만일 네가 여기에 있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쯤 뭘 하고 있었을 것 같아? 저녁 지도를 올리고 있었겠지. 너는 그런 일엔 마음 내켜하지 않겠지만."

"그래요, 그럴 거예요. 언짢아하지 말아요. 난 안 좋아해요. 기도 같은 걸 하고 있으면 난 왠지 위선자 같은 생각이 들어요."

"아무래도 기도를 같이 해주진 않을 것 같으니 나도 그런 제안을 하진 않겠어. 기억하고 있겠지만, 언젠가 목사가 돼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성직에 오르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래."

"그렇다면 아직도 그 희망을 버리진 않았나 보지요? 난 또 지금쯤은 벌써 버린 걸로 알고 있었지요."

"물론 안 버렸어. 동생이 크리스트민스터 식의 영국 국교회주의에 휩쓸려 다닐 때 기도하는 것만은 나와 같으리라고 쉽게 생각했었는데. 그건 그렇고 필로트슨 선생님은......"

"전 크리스트민스터에 대해서는 조금도 경의를 표하고 싶지 않아요. 단지 지적인 면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요."

수 브라이드헤드는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아까 말했던 그 친구가 나한테서 그런 걸 앗아가 버렸지요. 그 친구만큼 신앙심이 없으면서도 그 친구만큼 도덕적인 사람을 전 알지 못해요. 크리스트민스터의 지성은 낡은 병에 억지로 넣은 새술과 같은 거지요. 크리스트민스터의 중세주의는 반드시 버려졌어야 해요. 그렇지 않다간 크리스트민스터 그 자체가 못 쓰게 돼버릴 테니까요. 하긴 사람이란 때때로 낡은 신앙의 전통에 남몰래 애착을 갖게 마련이지요. 아무렴 뚜렷한 어느 파의 사상가들에 의해 감동적이며 소박한 열성으로 보전되어 온 전통이니까요. 그러나 제가 제일 슬프거나 좋을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아세요? 이런 시구와 같은 느낌이 들었지요.

 

, 소름 끼치게 창백해진

성자들의 영광이여,

교수형 당한 신들의

죽은 수족들이여!

- 스원번의 시에서 인용

 

", 그런 수릴 하다니, 결코 좋은 친구라고 할 수 없겠는걸!"

"알았어요. 안 그럴게요, 주드!"

그녀는 목이 메인 듯 격앙된 어조로 말하고 나서 얼굴을 돌렸다.

"네가 거기에 가지 못해 분하긴 하지만, 크리스트민스터는 영광스런 많은 것들을 가졌다고 생각해."

그는 수로 하여금 더욱 울고 싶도록 비난해주고 싶다는 충동을 자제하면서 온건하게 말했다.

"거긴 무지한 곳이에요. 시내에 있는 사람들이나 직공들이나 취객들이나 빈민들을 제외하고는요."

수는 여전히 주드와는 다른 생각을 고수하면서 심술궂게 말했다.

"그들만이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제대로 보고 있어요. 오빠는 몸소 그것을 증명했지요. 수많은 대학들이 설립될 당시만 해도 크리스트민스터에서는 오빠와 같은 사람을 받아들였답니다. 돈도, 기회도, 연고도 없이 오직 학문에 대한 열정만을 지니 사람들을 말이에요. 그러나 오빠는 네 팔을 흔들면서 활보하는 백만장자의 자식들에 의해 보도 밖으로 밀려나고 만 거죠."

"어쨌든 대학이 수여하는 증서 같은 건 상관없어. 난 좀 더 높은 것을 바라고 있으니까."

"그럼, 난 더욱 넓고 보다 진실된 것을 바라고 있어요."

그녀가 주장했다.

"현재 크리스트민스터의 지성은 한 방향만을 쫓고 있어요. 그러니까 각축을 벌이고 있는 두 마리의 숫사슴처럼 대학과 종교가 가만히 서서 보고 있는 중이지요."

"필로트슨 선생님은......"

"그곳은 물영숭배자와 유령을 보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지요!"

그가 필로트슨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려 할 때마다 수는 말끝을 돌려버렸다. 그는 필로트슨의 비호를 받는 사람으로서, 나아가서는 그의 약혼자로서의 수의 생활에 관해 병적일 만큼 궁금했으나 그녀는 그 점에 관해 밝히려 들지 않았다.

"과연 그렇군. 그런 말을 듣고 보니, 나도 역시 같은 패로군. 난 언제나 망령을 보게 될까봐 두려워."

"그렇지만, 오빠는 좋은 분이에요!"

그녀가 중얼댔다.

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

"오빠는 현재, '시사논설책자파'의 단계에 와 계시군요, 그렇지요?"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경박하게 말하곤 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상투수단이었다.

", 제가 거기에 머물렀던 것은 언제쯤이었을까요? 그 해는 천 팔백......"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군, . 비꼬는 소리같이 들려. 그런데 한가지 네가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는데, 해주겠어? 난 지금부터 성서를 좀 읽고 기도를 할 거야. 그러니까 너는 여기에 있는 책 중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도록 해. 내게 등을 돌리고 앉아서 말이야. 아무래도 너는 나와 함께 기도하긴 싫을 테니까?"

"오빠를 보고 있을게요."

"안돼. 놀려대지 말아요, ."

", . 오빠가 하라는 대로 할게요.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주드."

마치 어린아이가 앞으로는 아주 얌전하게 굴겠다고 말하는 듯한 어조로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그가 하라는 대로 등을 돌리고 앉았다. 주드가 사용하고 있는 성서와는 다른 작은 책 한 권이 수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 주드가 묵상을 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그것을 집어들어서 페이지를 들추었다.

수는 기도를 마치고 자기에게 다가온 주드에게 명랑하게 말했다.

"주드, 아주 새로운 신약성서를 만들어 드릴까요? 크리스트민스터에 있을 때, 제가 제 자신을 위해 만들어본 것 같은 것을 말이에요."

"그래, 만들어줘. 그런 건 어떻게 만들었지?"

"낡은 성서를 고쳐서 만들었죠. 모든 <사도서한>이나 <복음서>를 각각의 팜플렛으로 나누어 그것이 씌어진 연대순으로 재조정하고 <데살로니가서>를 책 맨 머리에 내놓고, 그리고 다른 서들을 순서대로 두고 네 개의 <복음서>를 맨 끝으로 돌려버렸지요. 그러고 나서 장정을 하고 고치게 한 거예요. 내 대학 친구인 아무개는,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건 참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어요. 나중에 읽어보니까, 전에 신약을 읽었을 때보다 두 배나 더 재미있고, 두 배나 이해하기 쉬웠다는 거예요."

"!"

주드는 신성모독을 느낀 기분이었다.

수가 <솔로몬의 아가>의 페이지를 응시한면서 말했다.

"이건 얼마나 엄청난 문학상의 범죄겠어요! 각 장의 처음에 붙어 있는 개요 말이에요. 그런 놀란 표정 짓지 마세요. 누구도 장의 첫머리에서 영감을 구하려 들지 않아요. 실제로 많은 신학자들은 첫머리를 경멸적으로 다루고 있지요. 장로나 주교 24인도, 몇 사람이 모이든 숫자는 아무 상관 없겠지만 심각해진 얼굴을 서로 맞대고서 이런 부질없는 것을 쓰고 있었다니, 생각만 해도 아주 우스꽝스럽지요."

주드는 곤혹스러운 빛을 띠면서 중얼거렸다.

"너는 참으로 볼테르(1694~1778, 종교적 회의론자인 프랑스의 작가)적인 것 같아!"

"그래요? 그렇다면 난 아무말도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성서를 꾸며댈 권리는 없다는 사실은 말해야겠어요.! 그 위대하고 정열적인 노래에 담긴 황홀하고도 자연적이며 인간적인 사랑을 교회식의 추상 관념으로 호도하려 드는 사기를 난 싫어하거든요!"

그녀의 말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아니 그에게 비난받은 데 대해 짜증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진정으로 날 두둔해 주는 친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랬지요. 그러나 어느 누구 한 사람 나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귀여운 수. 난 너의 생각을 반대하고 있는 건 아니야."

그는 수의 손을 잡으며 그녀가 개인적인 감정을 단순한 토론에 끌어들인 데 대해서 깜짝 놀랐다.

"아니에요, 반대하고 있어요. 오빠는 반대하고 있어요!"

그녀는 울먹이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렸다.

"오빠는 교육대학의 그 패들을 두둔하고 있는 거예요. 적어도 그렇게 보여요! 내가 주장하는 것은, ', 여자 중 가장 어여쁜 자여, 그대의 사랑하는 저는 어디로 갔는가' (<구약성서>, 아가, 61)와 같은 시구를, '여기는 교회가 그 신앙을 고백케 하는 곳'이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주 바보스럽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대로 생각하지! 동생은 아무거나 그런 식으로 해서 개인적인 문제로 삼아버리는 게 탈이야! 그렇다면 나도, 건방지지만, 아까 그 말을 응용해 보고 싶은 생각이 얼마든지 들게 된단 말이오. 나에겐 오직 너만이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말할 수 있어!"

"그러나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해도 아무 소용 없어요!"

수의 목소리는 엄격했지만 부드러운 어조로 변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마치 술집에서의 허물없는 옛 친구나 되는 것처럼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주드는 이러한 가설적인 주제로 설전을 벌이는 것이 쑥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는 성서와 같은 고서 속에 씌어져 있는 일로 소리를 높이는 우둔함을 알게 되었다.

"오빠의 믿음을 방해하지 않겠어요. 정말로!"

그녀가 달래듯 말을 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주드 쪽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 누군가를 고상한 목적을 가진 사람으로 이끌고 싶었어요. 그리고 오빠를 만났고 오빠가 내 친구가 되고 싶다는 것을 알았을 때, ...... 죄다 털어놓을까요? 오빠야말로 그런 남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빠가 너무 전통을 따르니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던 거예요."

"그래, 사람은 무엇인가를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모든 문제를 기하학에서처럼 증명한 뒤에 믿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지. 난 그리스도교를 신봉하고 있어."

"그렇지만 세상엔 그리스도교보다도 더 나쁜 것을 믿는 경우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겠지. 아마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을지 모르니까!"

그는 아라벨라가 생각났다.

"그게 무어냐고 묻지는 않겠어요. 서로에게 곤란해져서 서로를 괴롭히진 말아야지요."

그녀는 신뢰한다는 듯 그를 올려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주드의 가슴을 파고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난 늘 동생을 사랑해!"

주드가 말했다.

"저도요, 오빠를 사랑해요! 오빠는 헌신적인 분이니까요, 그리고 결점투성이이고 귀찮게 굴고 보잘것없는 이 수를 용서해 주실 테니까!"

수가 보여준 남녀 양성적인 그 부드러움은 너무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데가 있어서 주드는 시선을 돌렸다. 그 가엾은 청년에게 실연의 상처를 안겨준 것도 바로 이것이 아니었던가? 자기도 그 두 가지 양성이 춤을 추는 경우에 해당하는 두 번째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누가 뭐래도, 수는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그토록 쉽사리 상대 남성을 무시할 수가 있는 것처럼 만일 수가 여성이라는 의식만을 주드가 극복해낼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돈독한 동지가 되어 줄 것인가. 상상의 문제에 대해서 의견의 차이를 보이는 두 사람은 일상적인 인간의 경험이란 점에서는 오히려 그들을 더 가깝게 끌고 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주드가 만났던 그 어떤 여자보다도 그에게는 가까웠다. 세월이나, 신조나 그리고 부재도 그를 그녀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갖고 있는 그녀의 불신은 그를 다시금 슬프게 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앉아 있었지만 곧 수는 잠에 빠져들었다. 그도 의자에 기댄 채로 선잠을 잤으나, 깜빡 잠이 깰 적마다 난롯가에 걸쳐놓은 수의 옷을 뒤집어 놓고 불을 지폈다. 6시경에 그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고 촛불을 켜서 살펴보니, 옷은 벌써 말라 있었다. 수가 앉아 있는 의자는 그의 의자보다 훨씬 아늑했기 때문에 그녀는 주드의 외투를 두른 채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금방 구운 빵처럼 따뜻해 보였고, 그리고 가니메데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술시중을 든 트로이의 미소년) 같은 미소년의 얼굴이었다. 그는 옷을 그녀의 옆에 갖다놓고 어깨를 흔들어 깨운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3-9

 

다음 날 아침 9시와 9시 반 사이에 두 사람은 크리스트민스터로의 귀로에 올랐는데, 그들이 탄 3등 칸의 칸막이에는 승객이 한 사람도 없었다. 기차 시간에 맞추려고 서둘러 몸치장을 했던 탓인지 아라벨라는 그 얼굴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두 사람이 크리스트민스터의 정거장을 나왔을 때, 그녀는 술집에서 일해야 할 시간까지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시내 가장자리까지 걸어 나왔다. 이곳은 알프레드스턴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주드는 멀리까지 이어져 나간 간선도로를 바라보았다.

"...... 내가 생각해도 너무 의지박약해, 나는!"

그가 드디어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아라벨라가 물었다.

"바로 이 길이 옛날 굉장한 꿈을 풀고서 크리스트민스터로 들어왔던 길이오."

"이 도로에 무슨 사연이 있건간에, 이젠 시간이 없어요. 2시까진 술집에 가 있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아까도 말한 것처럼 당신과 함께 대고모의 병문안을 가기 위해 하루의 휴가를 얻는 일은 하지 않겠어요. 그럼 여기에서 헤어지는 편이 낫겠어요. 중앙로를 당신하고 같이 걷는 건 난 싫어요. 아직 어떠한 결정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좋아요. 그러나 오늘 일어났을 때, 나하고 헤어지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잖았소?"

"그래요. 두 가진데, 특히 한 가지는 얘기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이것을 비밀로 해두지 않을 거예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털어놓겠지만요. 당신이 날 정직한 여자로 알아줬으면 해요. 내가 간밤에 운을 띄웠던 건데. 저어, 시드니 호텔 지배인에 관한 말이에요."

아라벨라는 다소 서둘러 말했다.

"비밀을 지켜주시겠어요?"

"좋아, 약속하오!"

주드는 참을성 없이 말했다.

"당신의 비밀 같은 건 폭로하고 싶지 않소."

"내가 그 사람과 만나 산보할 때마다, 그 사람은 나의 용모가 맘에 든다면서 결혼해 달라고 조르더군요. 난 잉글랜드엔 두 번 다신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더욱이 아버지 집을 뛰쳐나온 후로는 집도 없이 오스트레일리아에 홀로 남겨진 상태였고 해서, 마침내 승낙했죠. 그리고 결혼했던 거예요."

"...... 그와 결혼했다구?"

"그래요."

"정식으로, 법적 수속을 밟고...... 교회에서 말이요?"

"그래요. 내가 이리로 오기 직전까지 그와 함께 생활했었지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리석은 짓이었어요. 그렇지만 그랬었어요. , 이걸로 얘긴 끈이에요. 날 비난하지 말아요! 그는 영국으로 날 찾아올 거라고 말했죠. 가엾은 노인! 그렇지만 그 양반이 돌아와 보았댔자, 날 좀처럼 찾을 것 같진 않군요."

주드는 새파랗게 질려서 옴짝달싹 못 한 채로 서 있었다.

"도대체, 왜 간밤엔 털어놓질 않았지?"

그가 말했다.

"사실은 말하려고 했어요...... 이제 나하고 화해 안 할 생각인가요?"

"오라, 술집 단골들에게 한 남편 얘기는 그 사람을 말했던 거군!"

"물론이죠...... 이봐요, 그런 일로 해서 소란 피우지 말아요!"

"이젠 더 할 말이 없소!"

주드는 대꾸했다.

"당신이 고백한 그 범죄에 대해 난 아무 할 말이 없소!"

"범죄라뇨? 웃기시네요! 그런 건 당신 쪽에서 보면 흔히 있는 일이지요. 누구나 다들 하는 짓 아닌가요! 좋아요, 당신이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난 그 사람한테로 돌아가겠어요. 날 죽고 못살도록 좋아했고, 우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여느 부부 못지 않게 고상하게 살았어요! 당신이 어디에 사는지, 그런 건 아랑곳도 하지 않았어요."

"난 지금 당신을 비난하려고 하는 게 아니오. 할 말은 많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대체 날 보고 어떻게 해달라는 거요?"

"아무것도 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또 한 가지 얘기할 것이 있는데, 현재로서는 서로가 얼굴을 맞대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해요! 당신한테서 들은 당신의 사정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이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아라벨라가 술집이 있는 호텔 쪽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주드는 곧 근처의 역으로 들어갔다. 알프레드스턴으로 돌아가는 기차가 출발하기까지에는 아직도 45분의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주드는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내디뎠고, 그러다 보니 도심의 십자로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전에도 여러 차례 그랬던 것처럼, 이 십자로에 서서 중심가를 바라보았다. 이 중심가에는 대학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오직 제노바의 궁전가와 같이 유럽 대륙식의 길게 내다보이는 경치를 제외한다면 비견될 만한 것이라고는 없는 경관이었다. 연속되는 빌딩의 선들은 건축설계도처럼 아침의 대기속에서 뚜렷이 부각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드는 결코 이러한 조망을 감상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았다. 간밤 내내 아라벨라의 접근에 대해서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웠던 의식, 그녀와 다시 맺어진 경험에 대한 타락된 감상, 새벽녘에 그녀가 잠들었을 때의 자태 같은 것 등이 되살아남으로써 거리의 조망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는 동침한 남녀로서 가질 수 있는 저주받은 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만약 그가 아라벨라에 대해 원한을 느낄 수만 있었어도 이만큼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주드는 방향을 바꾸어 왔던 길로 발길을 돌렸다. 다시 역 쪽으로 가까이 가고 있을 때 주드는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움찔했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놀란 것이었다. 그의 눈앞에 환영처럼 서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수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대경실색했다. 그녀의 얼굴엔 꿈이라도 꾸듯 불길함과 수심이 역력했고, 작은 입가는 신경질적으로 떨리고 있었으며, 긴장한 눈초리는 힐난하는 듯했다.

", 주드, 반가워요. 이렇게 만나게 돼서요!"

그녀는 흐느끼듯 급하고 고르지 못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고 나서 결혼한 뒤 처음으로 마주쳤다는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두 사람은 격앙된 감정을 감추려고 서로 시선을 피한 채 말없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나란히 걸었고, 이윽고 수가 걱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오빠의 편지대로 전 어젯밤 알프레드스턴 역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아무도 마중을 나와 있지 않더군요! 혼자서 메리그린으로 갔지요. 대고모님께선 조금 나아졌어요. 저는 대고모님과 자지 않고 기다렸었는데, 오빠는 밤새 오지 않았어요. 전 몹시 불안했어요. 아마도 옛날의 그리운 도시로 오랜만에 나가셔서, 나도 마음이 산만해져서, 그래서 언젠가 대학에 들어가려다가 못 들어가 실망했단 때처럼 침통한 기분을 털어버릴 양으로 딴짓을 하고 있지나 않을까 하구요. 그리고 두 번 다시는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고 나한테 했던 언약도 잊지나 않았는지, 그런 생각을 했지요. 꼭 그렇게 되신 줄로만 알았어요. 그러니까 절 마중나오지 않은 거라구요!"

"그래서, 여기까지 나왔군. 나를 찾아서 구해 주려고, 마치 천사처럼 말이지!"

"아침 기차로 와서 오빠를 찾아내려고 애쓴 거예요, 행여나...... 행여나 해가면서요."

"난 너와의 약속을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어! 어제와 같은 잘못은 두 번 다신 안 할 거야. 정말! 더 나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난 그런 짓을 하고 있진 않았어. 그 생각만 해도 신물이 날 지경이야."

"오빠의 외박이 그러한 일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걸 알게 되니 기쁘군요. 그렇지만."

수는 사뭇 뾰로통한 어조로 말했다.

"간밤엔 돌아오지 않았고, 그리고 마중을 나오지도 않았어요. 편지 쓰신 대로 말에요!"

"못 가서 미안해. 9시에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어. 그런데 너무 늦어져 타야 할 기차도 못 탔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어."

그는 그리운 마음으로 연인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가장 상냥스럽고 사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동지, 그의 선명한 공상 속에서 살고 있는 동지, 그리하여 혼의 떨림이 손발에까지 꿰뚫어 보일 만큼 신선한 환상 속에 살고 있는 동지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그는 아라벨라와 동행하며 시간을 보냈던 속된 자신의 근성이 마음속 깊이 부끄러워졌다. 그의 인생에서 최근에 일어났던 일들을 여느 남성의 아내에게 억지로 강요한다는 것은 너무나 조잡하고 부도덕한 일이었다. 그리고 수는 이미 필로트슨의 사람이었다.

"나와 함께 돌아가겠어?"

그가 말했다.

"마침 기차가 있어. 대고모님 상태는 어떤 건지...... 그럼, . 전적으로 나 때문에 와준 거로군. 어지간히 일찍 일어났어야 했을 텐데, 가엾게도!"

"그래요. 혼자서 간호하면서 앉아 있다 보니 오빠의 일이 걱정이 돼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먼동이 틀 무렵 출발해 여기로 온 거예요. 제발, 이런 식의 쓸데없는 도덕심으로 두 번 다시 날 놀라게 하지 마세요."

수가 그의 쓸데없는 도덕심 때문에 놀랬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가차에 오르고 나서야 겨우 그는 수의 손을 놓았다. 이 기차는 조금 전에 아라벨라와 나란히 내렸던 객차인 듯했다. 이제 그 기차에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있었고 주드는 수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섬세한 윤곽과, 조그맣고 단단하며 사과처럼 부푼 육체의 선을 그는 바라보았다. 아라벨라의 풍만한 육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수는 주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전방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과 마주치면 무엇인가 귀찮은 토론이라도 시작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 너는 이미 결혼을 했어, 나처럼. 그 일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을 만큼 우린 급히 서둘렀던 것 같아!"

"뭐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요."

그녀가 서둘러 받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주드, 저에 관한 말은 하지 마세요. 그러지 않았으면 해요!"

그녀는 간청하듯 말했다.

"곤란하니까요. 이렇게 말해서 미안해요........ 간밤엔 어디에 계셨어요?"

그녀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서 자못 순진하게 질문을 했다. 그도 그것을 알아채고, 그저 '여관에서'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뜻밖의 인물과 만나게 된 것을 그녀에게 털어놓으면 얼마나 마음에 안도감이 들까하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아라벨라가 결혼을 했었다는 사실 때문에 주드의 마음은 흔들렸고, 그런 부질없는 이야기를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남의 부인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이야기를 지속했고 그러는 동안에 알프레드스턴에 도착했다. 수가 이젠 옛날의 그녀가 아니라 '필로트슨'으로 호칭된다는 사실은 개인으로서 그녀와 친숙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그의 욕구를 무디게 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수란 사람 그 자체는 변하지 않은 것만 같았다.

메리그린 마을로 가자면, 기차에서 내려 5마일 정도의 여정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 길은 거의 오르막길로 되어 있어서, 걸어가든 마차를 타고 가든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주드는 이 길을 아라벨라와 걸어본 적은 있었지만 수와 나란히 걸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지금 수를 길동무로 삼고 걸어가는 것은 밝은 등불을 가지고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불은 전날 밤의 어두운 연상을 일시적으로나마 꺼주는 것 같기도 했다.

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녀에 관해 얘기하지 않으려고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주드는 깨달았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남편은 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 그래요."

수는 말했다.

"온종일 학교에 박혀 있지 않으면 안돼요. 그렇지 않으면 함께 왔을 텐데요. 친절한 분이시구, 자신의 원칙에 어긋나면서까지 나를 위해서라면 하루쯤 학교도 쉴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예요. 원래 학생들에게 임시 휴가를 주는 것도 강력하게 반대하던 분이신데. 다만 내가 그렇게 못하게 했어요. 나 혼자서 오는 게 좋을 것 같았고, 더욱이 드루실라 대고모님은 너무 변덕이 많으셔서 초면에 남이나 다름없는 그분이 오게 되면 서로 어색하게 될 것만 같아서요. 대고모님은 또 문병객을 거의 못 알아보실 정도니까, 그분과 함께 가자고 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생각해요."

필로트슨에 대한 칭찬의 말을 들으면서 주드는 시무룩하게 걸어갔다.

"동생은 아무 일에나 필로트슨 선생님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하겠지만."

그는 말했다.

"물론이지요."

"행복한 아내가 돼야 해."

"물론 전 행복해요."

"아직은 새색시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은데, 내가 동생을 그 사람에게 인도한 지 며칠도 안됐으니까 말이야!"

", 알아요! 알고 있어요!"

<주부행동 지침서>라는 책에서 그대로 따온 것같이 생각되는 판에 박은 듯한, 엄격하고 적절하며 생기없는 말을 단정적으로 부정하는 듯한 표정이 수의 얼굴에 나타났다. 주드는 수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모든 떨림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고, 그녀의 정신상태의 징후를 모두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결혼한 지 한 달도 채 안 되는데도 그녀가 벌써 행복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러나 수가 신혼생활에서 빠져나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대고모의 임종을 보러 왔다는 사실만으로 이와 같이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본래 수는 그러한 짓을 할 수 있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하여튼 난 늘 네가 행복하길 바래, 필로트슨 부인."

그녀는 비난하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냐, 너는 필로트슨 사모님이 아니야."

주드가 중얼거렸다.

"너는 친애하는, 자유로운 수 브라이드헤드지. 그걸 자기 자신이 모르고 있을 뿐이야. 주부라는 신분이 아직 너를 망가뜨리진 않았어. 그 큰 위장도 동생을 개성 없는 미립자로 소화시키진 못한 거야."

수는 감정이 상한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보기엔 남편이라는 신분도 아직 오빠를 부숴놓진 못했어요!"

"아냐, 난 완전히 부숴져버렸지!"

그는 자못 슬프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두 사람은 '갈색의 집'과 메리그린 마을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 있는 전나무 밑의 쓸쓸한 오두막집에까지 이르렀다. 그곳은 주드가 아라벨라와의 결혼생활을 했고 또 싸워서 헤어진 곳이기도 했다. 그는 그 집을 뒤돌아보았다. 이제는 초라한 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는 수에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내하고 내가 살았던 곳이 저기 저 집이지. 난 저 집에서 아내를 맞아들였었지."

수도 그 오두막집을 보았다.

"저 집과 오빠와의 관계는 마치 셰스톤의 학교와 나와의 관계와 다르지 않군요."

"그래. 그러나 난 저기서 동생처럼 행복하지 못했어."

수는 무언으로 항변하듯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잠시 걸었는데 이윽고 수는 주드의 반응을 알기 위해서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주드는 온화하게 말했다.

"물론 내가 동생의 행복에 관해 지나치게 말했는지도 모르겠어.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

"주드, 잠깐만이라도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아무리 날 골탕먹이려고 해도, 아직 그분은 남편으로서 친절하게 저를 대해 주고 있어요. 저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고 있죠. 대개의 나이 많은 남편들은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그분의 나이가 너무 많다고 해서 제가 불행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빠가 잘못 생각하는 거예요."

"난 그분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야. 동생을 생각해 그러는 거지."

"그럼 제게 괴로운 말은 하지 마셔야죠."

"그래, 그렇게 하지."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필로트슨을 남편으로 삼고 있으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가 해서는 안될 일을 수가 했음을 그는 알아챘다.

두 사람은 분지의 들판으로 들어섰다. 옛날 주드가 농장주에게 매를 맞았던 바로 그 장소였다. 언덕길을 올라 대고모님의 집이 가까웠을 때 그들은 문간에 서 있는 에들린 미망인을 보았다. 두 사람의 자태를 보자 그녀는 원망스러운 듯 양손을 들어올리면서 외쳤다.

"대고모님께선 아래층에 계셔요. 거짓말 같은 말이지만, 벌떡 일어나 앉으시더니 아무리 뭐라 해도 안 돌아오셔요.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어요!"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노파는 과연 담요에 휘감긴 채로 난로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세바스찬의 '나사로'(예수가 죽음에서 살린 남자) 같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대고모가 공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너희들이 날 놀라게 하는구나! 난 이제 남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그런 2층에 틀어박혀 있진 않겠다! 너희들 반쪽만큼도 못한 자들이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데는 더 이상 못 참겠구나! , 너도 결혼한 것을 후회하게 될 거구, 주드도 후회하고 있다만."

그녀는 수 쪽을 향해 덧붙여 말했다.

"폴리 집안 사람들은 모두 다 그렇단다. 폴리 집안이 아니더라도 대개가 그렇겠지만, 나같이 독신으로 있었으면 좋을 뻔했는데, 바보 같으니! 남자들도 많을 텐데 하필이면 필로트슨 교장 선생이라니! 어째서 그 사람하고 결혼한 거지?"

"대고모님, 대체 무엇이 여자들을 결혼하게 하는 거죠?"

"! 넌 그 사람을 사랑했단 말이지."

"그렇게 확실히는 말하지 않겠어요."

"지금도 좋으냐?"

"그런 거 묻지 말아주세요, 대고모님."

"난 그 사람을 잘 기억하고 있단다. 꽤 교양 있고 훌륭한 인물이지. 그러나, 맙소사! 네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다만...... 감정이 섬세한 여자는 도저히 견뎌내지 못하는 남자들이 여기저기에 많이 있는 법이란다. 말을 하자면 그 사람도 네게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하긴 네가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내 생각은 그랬었다!"

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주드가 뒤를 따라 나가보았더니 그녀가 헛간에서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봐, 울지 마!"

주드는 당황하며 말했다.

"악의가 있는 분은 아니야. 지금은 워낙 까다로워지고 이상해지신 건 사실이지만."

", 아니에요.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수는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대고모님께서 무뚝뚝하셔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뭐요?"

"대고모님 말씀은 사실이에요. 그건 사실이라니까요."

", 뭐야?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말이야?"

주드가 물었다.

"꼭 그런 건 아니고요."

수는 황급히 말했다.

"전 역시, 결혼하지 말았어야만 했어요!"

수가 과연 진심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그는 처음에 의아하게 생각했다. 두 사람은 방으로 돌아왔고, 그리고 화제도 부드러워졌다. 대고모는 자신과 같은 주름투성이의 병든 노인을 일부러 찾아준 신혼의 젊은 여성은 그리 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수를 상냥하게 달래주었다.

그날 오후 수는 떠날 준비를 했고 주드는 이웃 사람을 사서 알프레드스턴까지 마차로 데려다 주도록 했다.

"너만 괜찮다면 역까지 함께 가고 싶은데."

그가 말했다.

수는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웃 남자가 이륜마차를 몰고 왔다. 그리고 수가 거부하는 듯한 눈짓을 보였기 때문에 주드는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도와 태워주었다.

"내가 멜체스터로 돌아가게 되면....... 언제든 동생을 찾아가 봐도 되겠지?"

그는 다소 심기가 상해 물었다.

수는 몸을 구부려 온건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직은 찾아오면 곤란해요. 오빠의 기분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으니까요."

"그럼, 좋아. 안녕!"

주드가 말했다.

"안녕!"

수는 손을 흔들고 떠나버렸다.

"너의 말이 옳아! 가지 않겠어."

주드는 중얼거렸다.

그는 그날밤과 그다음 날도, 그녀를 만나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써가며 보냈다. 그는 수를 사랑하고 싶은 열정을 식히느라 거의 굶고 지내다시피 했다. 그는 수양을 쌓기 위해 여러 가지 설교서를 읽었고, 2세기의 금욕주의자들을 다룬 교회사 중의 장귀도 찾아보았다.

그가 메리그린에서 멜체스터로 돌아오기 전에, 아라벨라한테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봉투를 보자, 아라벨라와 하룻밤의 정을 맺었던 쪽이 수에 대한 애착보다도 훨씬 강한 자기 저주의 감정이 되어 되살아났다. 편지에는 크리스트민스터국의 소인이 아니라 런던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아라벨라는 편지에 쓰길, 그날 아침 크리스트민스터에서 그들이 헤어진 뒤 2, 3일쯤 지나 오스트레일리아의 그 남자에게서 애정어린 편지가 와 그녀는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는 그녀를 찾으러 멀리 영국까지 와 람베스에서 주점 하나를 인수하게 되었는데, 이곳에 살면서 함께 장사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그곳은 인구도 많고 부자 동네인데다가 애주가들도 많아서 사업이 번창할 거라고 했다. 벌써 매월 2백 파운드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데 수입은 앞으로도 두 배는 더 늘어날 것 같다고 했다.

그 남자는 아라벨라를 아직도 몹시 사랑하고 있으니, 어디서 살고 있는지 거처를 알려달라고 부탁해 왔다는 것이다. 원래 그들이 헤어진 것은 사소한 말다툼 때문인 데다, 크리스트민스터에서의 거처도 일시적인 것이고 해서 그녀는 그 남자와 다시 합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아라벨라는 곧 그 남자와 정식으로 결혼할 것이고, 첫 번째 남편인 주드보다도 오히려 그 남자가 자신의 남편이라고 스스로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작별을 고하면서, 그에게 아무런 악의도 품고 있지 않다고 썼다. 아울러 주드가 약한 여자인 자신을 공격하거나 불리한 밀고를 해서 파멸 속으로 빠뜨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고 했다. 이제 겨우 처지를 개선하고, 품위 있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가 자신에게 찾아왔다고 그녀는 적고 있었다.

 

3-10

 

주드는 멜체스터로 돌아왔다. 이곳은 수가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불과 12마일 반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이런 연유로 더 남쪽으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그러나 크리스트민스터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슬픈 곳이 되어 버렸다면, 셰스톤에서 가까운 멜체스터는 백병전의 접전에서 연적을 쓰러뜨릴 영광을 그에게 부여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계의 성직자나 처녀 교단의 단원들은 유혹으로부터의 비열한 도피를 경멸해 일부러 그러한 접전을 감수했으며, 한 방에 기거하면서도 서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 주드는 그러나 여기에서, '모욕받은 본능이 때로는 자신의 권능을 주장할 때도 있다'는 역사가(에드워드 기본을 가리킴)의 촌철살인의 경구를 상기해 보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열에 들뜬 절망적인 태도로 승직을 얻기 위한 면학으로 되돌아왔다.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너무 게을렀고 가르침의 대의에 대한 충절도 최근 더욱 희박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수에 대한 열정은 그의 영혼을 괴롭혔다. 그러나 아라벨라를 법적으로 포기한다는 것도 본능적으로 수에 대한 열정 못지않게 나쁜 것 같이 생각되었다. 하기야 그때의 아라벨라는 시드니에서 결혼했던 남편에 관한 일을 말하지 않은 상태였으나 말을 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술로써 현실도피를 하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사실 그는 술이 좋아서 마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지 심적으로 견디기 힘든 비통한 사태에서 벗어나 보기 위해 마셨다. 그는 자신이 볼 때 훌륭한 목사가 되기에는 너무 다정다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낙심해 버렸다. 그가 바랄 수 있는 최상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신과 육체의 끊임없는 투쟁 가운데 언제나 육체가 승리하지 않는 것이었다.

신학 공부에 도움이 될까 해서 그는 취미 삼아 교회 음악과 화성학을 몸에 붙이게 된 결과, 상당히 정확하게 음보를 따라 3부나 4부의 합창에 참가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멜체스터에서 1, 2마일쯤 떨어진 곳에 복원된 마을 교회가 있었다. 여기에 주드는 새로운 기둥과 기둥머리를 세워주러 간 일이 있었다. 그런 연유로 오르간 연주자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결국 그는 베이스를 맡아 성가대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이 교구로 그는 일요일마다 두 번씩 걸어갔다. 어떤 때는 주일에도 가는 일이 있었다. 부활절이 가까워진 무렵의 어느날 밤 연습차 성가대가 소집됐을 때, 웨섹스 태생의 작곡가가 작곡했다는 새로운 찬미가가 나오게 되어 성가대는 다음 주일의 합창을 위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 곡은 이상하리만큼 감상적인 데가 있는 작품이었다. 되풀이해 가면서 모두 부르고 났을 때, 그 하모니가 주드의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와 그는 너무나 감동스러웠다.

곡의 연습이 끝나자 그는 오르간 연주자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악보는 원본으로서 '십자가 밑에서'라는 찬미가의 제목과 함께 작곡가의 이름이 씌어져 있었다.

"그래요."

오르간 연주자가 말했다.

"이 지방 사람이지요. 이곳과 크리스트민스터의 중간쯤에 있는 케넷브리지에 사는 전문 음악가지요. 목사님이 아시는 분인데, 크리스트민스터의 전통 속에서 훈련받고 교육받은 사람으로 그것이 이 곡에도 잘 나타나 있지요. 케넷브리지의 큰 교회에서 연주도 하고 흰 옷을 입은 성가대도 지휘하고 계신대요. 멜체스터에도 가끔 온답니다. 이곳의 대성당 오르간 연주자의 자리가 비어 있었을 때, 후임자가 되려고 연습하신 적도 있었지요. 이번 부활절에는 이 찬미가가 도처에서 유행하고 있다고들 해요."

그는 귀로에 이 곡을 콧노래로 불러보았고 작곡가와 그가 왜 이런 노래를 만들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걸었다. 그 얼마나 동정심이 많은 인물인가 싶었다. 그는 수나 아라벨라의 일로 인해 고뇌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이 음악가를 알고 싶어졌다.

"그러면 나의 이 곤경도 이해해 줄 수 있을 거야."

주드는 감상에 사로잡혀 말했다. 만일 이 세상에서 시원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벗을 고를 수 있다면, 이 작곡가가 그일 것이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괴로움도 겪고 동경도 해보았을 것이다.

음악가를 만나러 갈 만한 여유는 시간상으로나 금전상으로나 없었지만, 주드 폴리는 원래 어린아이 같은 데가 있어서 다음 일요일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케넷브리지로 가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당일이 되자, 그는 아침 일찍 출발했다. 그 도시로 가자면 구불구불한 철도로 가는 길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꼭 점심때쯤해서 그곳에 가 닿았으며 닿자마자 그는 다리를 건너 이상하게 생긴 오래된 도시로 들어서서 작곡가의 집을 물어보았다. 조금 더 가면 빨간 벽돌집이 있는데 바로 그곳이 그 작곡가의 집이라고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가르쳐 주었다. 더욱이 그 작곡가가 이 거리를 따라 걸어간 지는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으로요?"

주드는 지체없이 물었다.

"교회 있는 데서 똑바른 방향으로요."

주드는 허겁지겁 그의 뒤를 쫓았다. 이윽고 검고 긴 상의에 테가 늘어진 검은 펠트 모자를 쓴 사람이 멀지 않은 전방에서 걸어가는 게 보였다. 그래서 그는 더욱 넓게 보폭을 떼어 놓으면서 뒤를 쫓아갔다.

"굶주린 영혼이 한 충만한 영혼을 좇는구나! 어떻게 해서든 저분에게 말을 건네야겠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주드가 따라잡기 전에 음악가는 집안으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지금이 방문하기엔 적절한 시간인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예의에 맞건 않건 지금 방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게다가 그의 방문을 더 늦추기에는 돌아갈 길이 너무 멀었다. 아마도 이분은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조언자가 되어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상의 정도가 못 되는 정열이 종교를 위해 제공된 입구를 통해 그의 가슴에 교활하게 파고들고 있는 이런 경우에는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주드는 벨을 눌렀다. 그는 안으로 안내되었다.

음악가는 곧 나왔다. 그는 고상한 복장을 하고 친절한 표정과 솔직한 태도로 상냥스럽게 주드를 맞아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드는 자기의 용무를 설명하기가 어쩐지 어색하게 여겨졌다.

"저는 멜체스터 근처에 있는 작은 교회의 성가대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드가 말했다.

"금주에 '십자가 밑에서'를 연습했는데, 실례지만 선생님께서 작곡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내가 했소. 1년 전쯤에."

"저는 이 곡이 좋아서요. 이런 아름다운 곡은 처음 듣습니다!"

", 그래요. 다른 사람들도 그런 말들을 하더군요. 그런데, 이걸 출판만 할 수 있다면 돈벌이가 좋을 텐데요. 함께 묶어서 내고 싶은 곡들도 있어요. 아직 어느 한 곡도 5파운드 이상을 벌어 보지 못했어요. 요즘의 출판업자들은....... 나같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한테서 악보 원고의 청서대도 채 못 되는 돈으로 판권을 빼앗아가곤 하니까요. 지금 말한 곡은 이 근방의 여러 친구들과 멜체스터의 친지에게 빌려준 것입니다. 그래서 노래로 불려지게 됐죠. 그러나 음악이란 별로 의지할 게 못되는 가엾은 단장 같은 것이어서, 난 깨끗이 그만 둘까 하지요. 선생 같은 양반도 돈을 벌고 싶거들랑 장사꾼이 되는 게 상책일 거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포도주상인이지요. 이것은 아직 배달은 안했지만, 지금부터 내보내려는 상품 목록이오. 한 장 받아보시지요."

그는 빨간 선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해서 꾸민 소책자 모양의 상품광고 목록을 주드에게 넘겨주었다. 펼쳐보니 여러 가지 클라레 포도주, 샴페인, 포트 와인, 셰리 포도주 등과 기타 여러 종류의 포도주가 열거되어 있었다. 이 사람은 이런 상품으로 새사업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영혼의 음악을 전달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인물이었다니 하는 생각이 들자 주드는 어안이벙벙해졌다. 신뢰감을 갖고 자신의 고뇌를 고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조금 더 계속되었다. 그러나 부자연스럽기 그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음악가는 주드가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주드의 풍채나 언어 사용에 현혹되어 신분이나 직업을 과대평가한 것 같았다. 주드는 그 음악가에게 이토록 숭고한 작곡을 한 것에 대해 축하한다는 말을 더듬거리며 하고 나서는 서둘러 작별인사를 했다.

으스스한 봄날씨에 불기운조차 없어 더욱 썰렁한 객실에 몸을 싣고 느린 기치로 돌아오는 도중 내내, 그는 자신이 이러한 바보스런 여행을 한 데 대해서 낙심했다. 그러나 멜체스터의 하숙집에 도착하니 한 통의 편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에 집을 나간 직후 온 편지였다. 그것은 수가 보내온, 회한이 담긴 짤막한 편지였다. 그녀는 자신을 만나러 오지 말라고 말한 것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있으며 그러한 자신의 인습적 행동에 대해 경멸하고 있다고 썼다. 아울러 꼭 오늘인 일요일의 1145분 기차를 타고 와 1시 반에 그들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해주었으면 한다는 편지였다.

주드는 편지를 미리 읽지 못한 데 대해 머리카락을 거의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분통을 터뜨렸다. 때가 너무 늦어서 편지의 주문대로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의 그는 자기를 상당히 단련시켰고, 마침내 그 황당무계한 케넷브리지로의 원정도 그를 유혹에서 멀리하기 위한 또하나의 ''의 특별한 간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수와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너무나 화가 났다. 그래서 그는 당장 펜을 들어, 오늘의 경위를 설명하고 다음 일요일까지 기다리고 있을 만큼 참을성이 없으므로 이번 주의 아무 날이고 좋으니 날짜만 정해 준다면 그날 만나러 가겠노라고 수 앞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의 편지는 너무 열렬하게 씌어져서 수는 회답을 성부활절 전 금요일의 앞인 목요일까지 늦추었다. 상대방이 외곬으로 나올 때는 일부러 냉정해지는 것이 수의 평소 태도였다. 만일 그가 오고 싶으면 그날 오후에 와 주었으면 한다고 그녀는 답장에 썼다. 자기는 현재 남편의 학교에서 조교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날보다 더 일찍 그를 초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드는 얼마 되지 않지만 하루치의 급료를 포기하고 휴가를 내어 수가 있는 곳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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