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수첩
Sandra Field
1
사나이는 수면을 스치며 날아가는 갈매기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햇살에 갈매기의 날개가 황금빛으로 빛난다. 저 갈매기들과 함께 모래밭과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고 싶었는데, 또 혼자 신세가 돼 버렸다.
사나이는 모래밭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혼자 있는 것도 이젠 익숙해졌다. 어렸을 때는 다만 정신적으로 고독했을 뿐이지 정말로 혼자였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부유했던 덕분으로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들 틈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 결과 차츰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몇 달 동안 봄베이의 빈민굴과 네팔의 산 속에서 살아 본 그는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고독감이 마음을 괴롭힌다. 문득 사랑하는 누군가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싶다. 그저 같이 얘기를 나누고, 웃고, 파도를 희롱하며, 공허한 밤과 쓸쓸한 마음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갑(甲)끝까지 갔다가, 사나이는 다시 속력을 올리면서 돌아왔다. 벌거벗은 상반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과연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다가올 여자가 있을까? 마치 그의 처량한 신세를 비웃기라도 하듯 햇살을 듬뿍 받은 모래밭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고 공허함만이 가득하다.
제인이 주방으로 들어서자 로라가 테이블에 엎드린 채 울고 있는 게 보였다.
"로라! 왜 그래?"
로라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었다.
"제... 제인, 어, 언제 왔어요? 난 모르고 있었는데...."
"노크를 했지만 아무 대답도 없기에 그냥 들어왔다구. 로라, 어떻게 된 거야?"
"바트가... 바트가 청혼을 했어요."
제인은 둥근 테이블 옆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서쪽으로 지는 해가 따뜻한 황금빛을 던지고 있다. 수놓인 테이블 보에도. 로라의 짧고 검은 머리에도, 그리고 그녀의 빨개진 눈과 핑크 색 콧등에도...
"청혼을 받았다면 기쁜 일이잖아? 로라는 몇 년 전부터 바트를 좋아하지 않았어?"
"지금에 와서야 청혼하는 게 싫단 말예요. 왜 좀 더 일찍 못했담!"
"응, 알겠어. 로라가 부자가 되기 전엔 그럴 생각을 전혀 않다가 지금에 와서야 태도가 변한 게 싫다 그 말이로군."
제인은 부드러운 파란 눈 가득 애정을 담아 일그러진 로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네, 그래요."
로라는 호주머니 속에서 화장지를 꺼내어 초조하다는 듯 제인을 바라보더니 눈물을 닦았다.
"지금에 와서야 청혼을 하다니... 정말로 날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1백만 달러라는 거금이 생겨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잖아요...."
짙은 갈색 눈에는 또다시 눈물이 괴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들릴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돈 안 받는 건데 잘못했나 봐요. 그 돈 때문에 귀찮아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구요."
"대런이 또 못되게 군 모양이군?"
"네, 낮이나 밤이나 만나기만 하면 그러는 거예요. 오늘은 교육위원회에 장학금을 내라나요? 어저께는 병원 원장님이... 목사님까지도 교회 탑에 칠을 새로 해야겠다는 거예요. 노골적으로 말하는 건 아니지만 틀림없이 다들 어떻게 하면 내 돈을 가져다 쓸까 궁리하고 있는 거라구요. 오늘 오후에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두 번이나 걸려왔어요. 돈 좀 빌려 달라는 편지는 벌써 다섯 통이나 왔구요."
로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귀찮아서 못 견디겠어요. 개중엔 협박 편지도 끼어 있다구요."
제인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흰머리가 듬성듬성한 머리와 마음씨 좋아 보이는 얼굴에 저녁놀이 스며든다.
40살인 제인과 로라가 알게 된 것은 4년 전의 일이다. 로라가 오빠의 애들인 대런, 키스. 그리고 수앤을 돌봐주기 위해 이 옛집에 온 이후 친해지게 된 것이다.
"얼마 동안 어디 좀 다녀오는 게 어떻겠어?"
"어디엘요? 어차피 다시 돌아와야 할 텐데요."
"좀 더 시야를 넓혀 보라구.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을 게 아냐? 애들 교육비랑 로라의 학비도 내야 할 거고, 내년쯤에는 토론토에 집도 사야 하구 말야."
"교회 탑의 칠도 새로 할 수 있을 거구요?"
제인은 웃었다.
"그렇지, 이것도 저것도 다 할 수 있지. 그러나 중요한 건 아까 하던 얘기야. 그래, 바트에게는 뭐라고 대답했지? 예스? 아니면 노?"
"예스도 아니고 노도 아니에요."
로라는 창가로 다가가서 호주머니 속에 손을 쑤셔넣는다.
"그냥 애매모호하게 넘겼죠, 뭐.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 돼서... 운운했어요. 흥! 3년 동안이나 사귀어 오고서... 바트가 뭐랬는 줄 아세요? <기다릴 만큼 기다렸잖아. 사랑하고 있어. 가급적 빨리 결혼하고 싶어> 도대체 그 말이 믿어지세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왜 한 달 전에 청혼하지 않았을까요?"
"로라가 복권에 당첨됐기 때문에 청혼했다고 생각하는 거군?"
로라는 리놀륨이 깔려 있는 바닥에 눈길을 주면서 대답했다.
"그래요."
제인은 결코 바트 편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딴에는 공평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틀림없이 몬트리올에서 한 달 남짓 법률 공부를 하는 동안에 로라에 대한 마음을 결정했을 거라구. 헤어져 있을 때야 비로소 정을 느끼게 된다는 말도 있잖아?"
"글쎄요...."
로라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 사람, 결혼한 후에도 로라가 의학 공부 계속해도 괜찮다고 그래?"
"네, 자기는 핼리팩스에서 개업을 할 거니까 댈하우지 대학에 다녀도 좋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어찌됐든 내년에 수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의 일이죠, 뭐."
"그 사람을 이해해 줘야겠어. 바트는 이 도시에서 단 한 명뿐인 변호사인데,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것은 상당한 결심이 필요할 거라구."
"그것도 모두 1백만 달러의 마력일 테죠!"
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쨌든 아무 데라도 좀 갔다오는 게 어떻겠어? 다음 주에는 학교도 쉬게 될 테고 3, 4 주일쯤은 집을 비워도 상관없을 테니 말야. 토론토 호텔에 묵으면서 쇼핑도 하고...."
"싫어요!"
"토론토에 가기가 두려운 게로군. 갖가지 추억이 있을 테니까... 그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럼, 케이프 브레턴 섬은 어때?"
"그만두세요. 아무 데도 가기 싫어요."
"가야 된다니까. 이대로 여기 있다가는 벗겨진 교회 탑을 볼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될 걸? 로라는 책임감이 지나치게 강해요. 요 4년 동안 고생 많았지? 자, 차라도 한 잔 끓이도록 해요. 케이프 브레턴에 왜 가야 하는지 설명해 줄게."
로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널찍한 주방에는 묵직한 떡갈나무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고. 과실과 야채 모양이 새겨진 벽지가 밝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창문 밖으로는 8만 평에 이르는 사과밭이 펼쳐져 있고, 현관은 그랜섬의 대로에 면해 있다. 그랜섬은 노바스로샤의 아나폴리스 계곡에 있으며, 남쪽과 북쪽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다.
이 집은 세상을 떠난 오빠의 집이다. 조용하고 한적한 이 생활은 그런 대로 견딜 만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도 그랜섬에 눌러앉고 싶은 생각은 없다.
로라는 우선 세수를 하고 주전자에 물을 부었다.
"난 울본가 봐요. 내가 왜 이러죠?"
"인간인 이상 이따금 울 때도 있지, 아까 하던 얘긴데, 바트가 소중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지?"
"그래요. 날 이 그랜섬에서 다른 곳으로 데리고 나가 공부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이 바로 그예요. 게다가 아주 핸섬하고...."
"그 점이 위험하다니까, 좋아하는 남자가 옆에 있지 않으면 안돼요. 뭐니뭐니해도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이상적인 남자라면 바트밖에 없다구."
"바트를 의심하고 싶진 않지만, 역시 의심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러면서도 바트와 행복하게 생활하는 제 모습을 상상한다니까요."
"그랜섬에서?"
"글쎄, 그렇게까지 구체적인 건 아니지만...."
로라의 눈에 처음으로 웃음이 떠올랐다. 제인은 화제를 바꿨다.
"우리 언니가 미라 강가에 별장을 가지고 있다우. 바로 앞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는 아주 조용한 곳이지. 오늘 편지가 왔는데 7월 중에는 별장이 비게 된다는구먼, 좋은 기회잖아? 한 달쯤 그곳에 가서 앞으로 그 돈을 어디다 쓸 것인지, 그리고 바트에겐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천천히 생각해 봐요."
"한동안 애들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을 테고요."
"시끄러운 음악도 들려오지 않고, 식사준비와 세탁 그리고 다리미질까지도 전혀 할 필요가 없지. 병원 일은 물론이고...."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만... 그 일, 하기가 싫어요."
"그럴 거야. 로라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니까. 생각해봐요. 모래밭의 밝은 태양, 그리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의학 참고서를 가지고 가서 시험공부를 하면 어떨까요?"
"그러지 말고 그저 한가롭게 지내라구. 그곳에는 또 한 채의 별장이 있긴 하지만 남한테 방해받을 염려는 전혀 없어요. 여기 일은 나에게 맡겨 두고...."
마침 물이 끓었기 때문에 로라는 차를 타면서 인적이 없는 바닷가를 상상해 보았다. 사실 로라도 어디론가 가고 싶다. 지난달부터 너무 많은 변화들이 밀어닥쳤다.
"돈이란 게 참 묘하더군요. 복권이 당첨되니까 모든 사람들이 꼭 돈과 결부시켜서 말을 한답니다. 물론 제인과 데이브는 예외지만... 오해하지는 마세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요구하며 찾아온답니다. 그 점이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1백만 달러라면 적은 돈이 아니지. 그런 꿈을 꾸어 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어?"
"생전 처음 산 복권이었어요. 그것도 그저 심심풀이로 샀을 뿐인데...."
"잘됐잖아,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는 곳에 가서 머리를 식히다 보면 틀림없이 마음도 가라앉을 거라구. 그러다 다시 돌아오면 바트와의 문제도 잘 풀려 나가게 될 테고."
"알겠어요, 잠시 이름을 숨기고 살고 싶어요. 바트로부터 청혼을 받은 후로 마음이 몹시 산란했어요. 날 좋아해서 그러는 건지 돈이 좋아서 그러는 건지...."
"별장에 가 있으면 연애 따위로 고민할 염려는 없어진다니까. 아마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거야."
"아무래도 그 방법이 가장 좋을 듯하군요. 무슨 일이 생길 염려도 없구요. 어차피 난 바트가 좋거든요."
"그게 사실이야? 바트 말고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러는 건 아냐?"
"어머, 안 그래요.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할 리가 있겠어요?"
"그건 그렇겠군. 하지만 로라처럼 예쁘고 똑똑한 아가씨가 이 그랜섬 같은 곳에서 썩는다는 건 너무 아까와.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진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결혼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난 데이브와 처음 만났을 때. 이 남자 외에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제인의 남편인 데이브는 작은 키에 뚱뚱하고 대머리인 약사다. 20년 전이라 해도 로맨스의 주인공으로는 시원치 않았을 것임이 분명한데 이 두 남녀는 굳고 굳은 사랑으로 맺어져 있다. 로라는 분명하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바트완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 않으니까요."
"그렇담 안심이 되는군. 자, 어서 차나 따라요. 난 너무 진하지 않은 게 좋으니까."
비스킷 깡통을 열어 보니 두 개가 모두 비어 있다.
"다이어트하는 셈치고 참아야겠네요. 키스는 기분 나쁠 때는 더 먹는다니까...."
키스는 대런의 동생으로 10살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성적은 시원치 못한 편이다. 제인은 차를 저으면서 물었다.
"두 과목이나 과락을 했다면서... 그래 아직 학점을 따지 못했나?"
"자퇴하고 음악계로 나서 보겠다나요."
"어머, 180도 전환이네! 성악?"
로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인이 말을 잇는다.
"어쩐지 찬성할 수 없다는 표정이군."
"하지만... 그 애 아버지는 상대에 가라고 했었답니다. 은행가를 만들고 싶어했거든요."
"하지만 그 애 아버지는 4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잖우. 그런 지금에 와서까지 키스를 제 의사완 관계없이 속박한다면 너무한 처사야. 제임스는 키스가 수학을 잘해서 기대를 걸었던 거야. 대런과 수앤은 머리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었거든. 대런은 학교 성적이 좋지 못했고 수앤은 여자였으니까...."
로라는 놀랐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모든 걸 자세히도 알고 계시네요."
"글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을 놓고 험담을 하는 건 좋지 않지만, 어쨌든 사실은 사실이니까. 제임스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아이들 다루는 데는 그다지 현명치가 못했어."
"그건 그래요. 하지만 저 역시 키스가 성악을 하겠다는 건 반대예요. 제임스의 유지를 받들어 주고 싶어요."
"키스는 로라를 닮아서 머리도 좋고 의욕도 있다구. 제임스 자신은 은행가라는 자신의 직업에 만족했었나 보지만 키스도 그러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어요. 그가 하고 싶다는 걸 시켜 보는 게 어때? 이제 음악공부를 시킬 만한 돈도 생겼잖아?"
"그래요."
로라는 짤막하게 말을 끊고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올렸다.
"미안해요 제인. 오늘은 영 기분이 좋지가 않네요."
"휴양이 필요하다니까. 정말 병원 일을 그만두지 않을 거야?"
"글쎄요... 돈이 없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양보해 주는 게 어떻겠냐는 압력도 받았어요. 시설비를 기부해 달라는 말도 들었구요."
"그럼 이번 기회에 아예 그만두지 그래? 원래부터 좋아했던 일은 아니었잖아?"
제인은 로라의 손목을 잡았다.
"내년에는 수앤도 졸업할 테니까 이제 로라도 자유롭게 될 거야. 토론토로 가서 다시 시작해 보는 거야. 어때?"
아이들로 인해 로라가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는 제인이 제일 잘 알고 있다. 토론토 대학에서 생화학과를 수료한 21살의 로라는 국내 최고의 의료 연구기관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때 오빠인 제임스가 세 아이를 남겨 둔 채 급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병명은 심부전증이었다.
올케는 이미 그보다 3년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친척들은 아무도 캐나다 남서부에 살고 있는 이 세 아이들을 돌보려 하지 않았다. 로라의 부모는 고령으로 아이들을 돌본다는 게 무리였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로라가 이 그랜섬으로 왔던 것이다.
뒷문 쪽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수앤이 주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고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맞혀봐!"
"스티븐이 댄스파티에 가자고 하던?"
로라가 물었다. 수앤은 약 1주일쯤 전부터 스티븐이 없으면 한시도 견디지 못할 만큼 열을 올리고 있다.
"맞았어, 고모! 그걸 어떻게 알았지?"
수앤의 예쁘장한 달걀 모양의 얼굴에는 밝은 웃음이 번졌고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스티븐은 아주 좋은 애야. 여자 애들이 모두 열을 올리는데 그가 날 택했다구요! 저어... 그런데 새 드레스 사면 안 될까?"
"좋아, 주말에 핼리팩스에 가서 사도록 하자."
"와, 신난다!"
다행스럽게도 수앤은 생각하는 바가 가난했던 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신바람이 나서 손을 휘저으며 나가는 그녀를 보면서 제인이 입을 열었다.
"수앤에 대해선 아무 걱정 없지?"
"네. 다만 이상한 녀석에게 한눈파는 일이 없도록 잘 감시만 하면 되겠어요."
"자아, 그럼 난 이만 실례할게. 가게에 나가봐야 하거든. 별장에 대해서는 언니에게 연락해 둘게. 그리고 열쇠는 우리 집에 있으니까 금방이라도 건네줄 수 있다구."
"가겠다고 결정한 건 아니잖아요?"
"내가 결정했어."
제인은 가볍게 코트 깃을 여미며 로라의 볼에 키스했다.
"대런이 싫어하더라도 상관하지 말아요."
제인을 배웅한 뒤 로라는 다시 식탁 앞에 앉아 두 손으로 도자기 찻잔을 감싸쥐었다. 거실에서는 수앤이 레코드를 틀고 있다. 비교적 얌전한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시끄러운 음악이다. 그녀는 5살 때부터 간호사가 되겠다고 말해 왔고, 병원에 가서 자원봉사도 여러 번 했으며 학교에서는 우등생이다.
어차피 의료계통으로 나갈 바에는 간호사보다 의사 쪽이 낫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로라에 대해"간호사도 아주 중요한 일이라구요, 고모. 환자가 기분 좋게 요양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간호사에게 달렸어요. 난 꼭 간호사가 될 거야."라고 분명하게 말하곤 했다.
새삼 주방을 둘러보니 4년 전의 여름이 생각난다. 제임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학년말 시험 중이었기 때문에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었다. 일주일 후에 이 집으로 와보니 아이들은 주방 벽에 등을 대고 일렬로 서 있었다. 당시 16살이었던 대런은 뿌루퉁한 얼굴이었고, 그보다 1살 아래인 키스는 어쩐지 수상쩍다는 표정이었으며, 세 번밖에 본 적이 없는 수앤은 고모를 보고도 낯이 설다는 듯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우리를 토론토로 데려가려 하진 말아요! 모두 이 그랜섬에서 살고 싶단 말예요!"
결국 전원이 그랜섬에서 살게 됐다. 대런은 처음부터 무뚝뚝하게 대했지만 수앤은 금방 그녀를 따르게 됐고 키스도 차츰 그녀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로라는 차 한 잔을 더 따르고는 편지지를 꺼내들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매주 한 번씩은 부모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던 것이다. 한 시간 후에 키스가 빨강머리를 온통 흐트러뜨린 채 밝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내가 토론토에 테이프 보낸 거 고모도 기억하고 있지? 두 군데서 오디션을 받게 됐다구요. 두 군데요! 한 군데는 베시카글리아인데 캐나다에서 으뜸가는 선생님이에요. 고모, 돈 좀 빌려주지 않을래요? 이 달 안으로 꼭 갚을 게요. 월말이 되면 수당이 나오거든."
"저쪽에서 승낙하면 대학은 그만둘 셈이니?"
키스는 의자를 끌어다 놓고 로라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만둘 거예요. 아빠는 고모와 마찬가지로 제가 은행가가 되길 바라셨지만, 난 그런 곳에 앉아서 일할 생각만 하면 미칠 것 같다구요. 노래를 하는 거야, 노래를! 캐나다 제일의 테너 가수가 되고 싶다구요. 베시카글리아에게 인정만 받으면 길은 트이게 돼요. 그 다음에는 끈기를 가지고 10년 동안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된다구요."
음악을 그만두라고 하면 키스는 얼마나 비참해할까? 자기가 토론토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제인의 말대로 아버지의 유지를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다.
"돈은 줄게. 그런데 토론토에는 언제 갈 거지?"
키스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3주일 후에...."
"난 피서를 갈 생각이야."
로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럼 결과가 나오는 대로 알려주렴."
키스는 싱긋 웃었다.
"바트와 같이 가나요?"
"아니, 제인 아줌마의 언니네 별장으로 갈 거야, 혼자서 말야."
"어쩐지 좀 쓸쓸하게 들리네요. 돈이 생기자 시끄럽게 구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도망치는 거로군요?"
키스는 역시 날카롭다. 자기 일만 하더라도 머릿속이 복잡할 텐데 거기까지 읽고 있는 것이다.
"정곡을 찔렀구나."
"그럼, 느긋하게 쉬고 오세요. 그 동안 우리는 수앤의 요리 솜씨에 적응하도록 노력해야겠군요."
"수고해 줄 사람을 부탁해 놓고 갈게. 그러면 별문제 없을 거야. 그래야 나도 마음 편하게 갔다올 수 있잖겠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기특한 녀석! 키스는 틀림없이 좋은 남편이 될 거야.
"대런 형이 무슨 말을 하든 상관 마세요."
"알고 있어. 뭐 좀 먹을래?"
"물론이죠, 먹구말구요! 잔뜩 허기가 졌거든요. 베시카글리아... 우와, 고모! 베시카글리아야, 베시카글리아라구! 거짓말 같아요."
로라는 방긋 웃었다.
"도넛을 몇 개 감춰 둔 게 있는데 축하하는 의미로 먹어도 좋아. 하지만 대런의 몫으로 두어 개는 남겨 둬야 해."
대런은 그로부터 한 시간 빈쯤 후에 돌아왔다. 신장 186cm, 철사처럼 빳빳한 검은 머리칼, 미식축구 선수를 연상케 하는 넓은 어깨, 동생인 키스나 제임스와는 전연 닮은 데가 없다. 대런의 입에서 말이 나오는 경우란 극히 드물어서 이번에도 역시 로라가 얼른 말을 걸었다.
"어서 와라. 일은 어때?"
3월부터 그는 포도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수확기까지 해고당했어요."
구두끈을 푼 뒤 대런은 차가운 시선으로 힐끗 로라를 바라본다.
"그것 참 안 됐구나."
로라는 슬쩍 받아넘겼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잘됐는지도 모르지, 난 2, 3주일 동안 집을 비우게 됐거든."
"호화여객선으로 세계일주라도 하는 건가요? 돈이 있으니까 역시 좋군요...."
"예상이 빗나가서 안 됐구나. 실은 케이프 브레턴에 가는 거야. 제인 아줌마의 언니 별장에...."
"흥! 그 많은 돈이 들어왔는데도 여전히 째째하군요. 너무한데요?"
대런을 보면 조카지만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려진다. 저렇게 듬직한 남자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로라는 대런을 노려보았다.
"너무한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그 돈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가는 거니까...."
"키스는 성악을 하고 싶다며 안달을 하고, 수앤은 스티븐 카슨에게 열을 올리고 있어요. 이런 때 후견인이 집을 비워도 되는 겁니까?"
"대런, 넌 내가 집에 없는 편이 나을 텐데?"
대런은 눈을 깜박였다. 이런 말을 노골적으로 들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어머! 처음부터 나라는 존재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으면서...."
사실 대런은 자기가 키스와 수앤의 뒷바라지를 하겠다며 이따금 로라를 내쫓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로라는 나가지 않았다. 대런도 어머니가 그리울 것임에 틀림없다.
나이 차이는 겨우 5살밖에 안 되지만 어떻게든 노력을 하면 그의 외로움을 메워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고모를 따르지 않았다.
"뭐, 먹을 것 좀 없나요?"
대런은 안으로 들어갔다.
"왼쪽 찬장 속에 도넛이 있어. 아, 그리고 대런, 아무래도 7월 한 달 동안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으니까 키스와 수앤을 부탁해. 임시로 가정부를 고용하겠지만 아무래도 너만이야 하겠니?"
"그럴 테죠. 그런 것까지 알면서 집을 비우겠다는 건가요? 어쨌든 차편은 자동차로 갈 겁니까?"
"물론."
"그럼, 난 어떻게 하라구요?"
대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정수리까지 화가 치민 것이다.
"자동차를 하나 사면 될 게 아닙니까? 돈도 있으면서... 우리 일은 조금도 생각해 주질 않는군요?"
"그건 잘못 생각하는 거야. 돈을 어디에다 쓸 건지 생각하러 가는 거라고 말했잖아. 돈이 내 손에 들어온 지 아직 2주일도 채 안 됐단 말야.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생각해봐야겠어. 자동차를 살 건지 말 건지도...."
"키스가 토론토에 간다던데 그 애 여비는 주는 건가요?"
"비행기 요금을 빌려주기로 했어."
"그럼, 키스에게 자동차 살 돈도 빌려 줘요."
"비행기 요금하고 자동차는 달라요. 자동차에 대해선 생각을 좀 해볼 테니 기다리라구. 시간이 필요하다니까, 그냥 만나는 사람마다 돈, 돈... 나도 머릿속 정리 좀 해야겠다구."
홱 돌아선 대런은 도넛 상자의 뚜껑을 열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 저렇게 조심성이 없는 것도 제 아버지와는 정반대다.
"알겠어요, 다녀오시라구요. 하지만 내게 키스나 수앤을 돌봐줘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로라는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참았다.
"여름 동안에 뭐 다른 일거리라도 생길 것 같니?"
"어떻게 되겠죠, 뭐."
그는 도넛과 주스를 꺼내들고 주방에서 나갔다. 로라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뾰로통해 있었다. 그리고 남은 도넛을 집으면서 생각해 보았다. 당장 자동차부터 사버릴까? 자동차 한 때쯤이야 푼돈에 불과하다. 하지만 오래도록 절약하는 생활에 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는 거금이 생겼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떠나겠다고 결정하자 대런은 점점 더 반감을 산 것 같다.
제인은 과연 현실을 직시하는 눈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말한 대로, 돈 문제뿐 아니라 모든 문제를 멀리서 바라보며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바트의 청혼도 그 중의 하나다.
다음날 아침, 로라는 사표를 호주머니 속에 넣고 병원으로 향했다. 파트타임으로 연구실 조수로 일해 왔었기 때문에 사표를 낸 다음 일주일만 지나면 그만둘 수가 있다. 칠이 벗겨진 교회의 탑을 애써 무시하며 걸어가는데 저쪽에서 바트의 어머니가 다가왔다.
"어머, 로라! 결혼 날짜는 잡았어? 바트가 로라에게 결혼신청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여간 기쁘지 않았어. 우리 바트와 로라는 틀림없이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야. 결혼한 다음에는 로라도 핼리팩스에 가는 걸 포기할 테지? 아기가 생기게 되면 의학 공부 따위가 문젠가?"
로라는 머릿속으로 하나에서 시작해서 열까지를 세면서 가까스로 분노를 참았다.
"저, 2, 3주일 내로 결정해야 할 문제들이 많답니다. 바트의 청혼을 받아들일 건지의 여부도 그 중의 한 가지구요."
매닝 부인은 파란 눈을 깜박였다. 핸섬한 자기 아들의 결혼신청을 거부하는 여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해 본 모양이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니... 그럴 수가...."
"물론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저도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매닝 부인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 다소 수다스럽기는 하지만 그녀는 마음씨가 아주 좋은 사람이다. 잘못이 있다면 결혼하기로 결정한 것처럼 보고한 바트 쪽이다. 로라는 부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전 지금 몹시 바쁘답니다. 일하러 가는 길이거든요. 차차 확실한 걸 아시게 될 거예요."
느릅나무 가로수 밑을 걸어가면서 로라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모든 걸 잊기로 하고 다음주엔 출발하는 거야. 그랜섬, 조카들, 바트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저 교회... 당분간 모두모두 안녕이야. 햇볕을 실컷 쬐면서 고독을 즐기는 거야...
2
아담하고 밝은 레스토랑 앞에 장거리 수송 트럭 두 대가 주차해 있다. 트럭 운전사들은 음식을 먹으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중이다. 음식 맛이 괜찮은 모양이군.
문에는 <애니의 수제 요리>라고 씌어 있다. 로라는 숄더백을 메고 차에서 내린 다음 자동차 문을 잠갔다. 조용한 저녁 무렵, 시커멓게 쭉쭉 뻗은 나무들 위로 하늘이 펼쳐지고, 어딘가의 정원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인근에 있는 집에서는 노란 불빛이 따스하게 새어나오고 나무들 사이로는 바다가 보인다.
로라는 다리를 쭉 뻗어 보았다. 오는 길에 자동차에 고장이 생겨 근처 주유소에서 수리를 하고 오느라 생각보다 늦어지고 말았다. 별장까지는 앞으로 10km 정도 남았는데 해가 있을 동안 도착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대런 말처럼 자동차를 새로 샀더라면 좋았을 걸... 하지만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람.
철망이 쳐져 있는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밝은 불빛이 눈을 부시게 했다. 한 무리의 남자들 시선이 한꺼번에 그녀에게로 쏠린다. 손님들은 대부분이 남자들인데, 몇몇 사람은 한 번 힐끗 보았을 뿐 금세 눈길을 돌렸다. 키스가 늘 하던 말처럼 로라는 교통마비를 일으킬 만큼 예쁜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중엔 눈길을 다시 주는 사람도 있다. 면바지에 군복 비슷한 웃도리에 싸인 날씬한 몸,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로라다.
안에까지 들어가기가 싫어서 로라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뭐니뭐니해도 식사란 같이 먹는 사람이 있어야 제맛이 나는 법인데... 혼자서 식사할 때는 늘 책을 읽어 버릇해 읽을 거리가 없는 지금은 더욱 허전했다. 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공서적과 그밖에 다른 읽을 거리도 가지고 왔지만 모두 차 안에 두고 왔기 때문이다.
메뉴를 보고 있는 사이에 웨이트리스가 왔다. 손님이 들어온 걸 보고는 전속력으로 달려왔는지 숨을 할딱이고 있다.
"어서 오십시오. 뭘 드릴까요?"
레스토랑의 바닥 하며 물이 들어 있는 컵이 그렇게 깔끔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봐 요리 맛도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토마토 주스와 구운 칠면조 정식, 그리고 애플파이와 커피를 줘요."
웨이트리스는 얼른 주문서에 메모를 하더니 카운터 쪽으로 돌아갔다. 나무문이 소리를 내며 흔들리더니 뭐라고 목청 높이 지껄여대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 집주인인 애니가 아닐까?
가만히 앉아 있기가 지루해서 로라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건너편 쪽에는 트럭 운전사들, 그 앞에는 세 쌍의 틴에이저 무리, 카운터 끝에는 체중이 왜 나가 보이는 여자가 둘 앉아 있다. 그중 몸에 꽉 끼는 바지를 입고 있는 여자는 커피와 대형 크림파이를 앞에 놓고 낮은 목소리로 지껄이고 있는데 아무래도 남편 욕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밖에 또 한 사람, 카운터 옆에 앉아 있는 남자가 있을 뿐이다. 무의식중에도 자꾸만 그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이처럼 허술한 레스토랑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손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데 어딘지 모르게 대런을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왜 그런지 그 이유는 분명치가 않다. 몸에 걸치고 있는 거라고는 헌 데님 재킷과 색깔이 바랜 진 바지뿐이다. 다만 탐스러운 금발이 얼른 보기에도 청결하고 아름다왔고, 단정한 옆얼굴은 개성적이고 힘차 보인다.
로라의 시선을 느꼈던지 그 사내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눈은 회색, 황혼녘의 바다와 비슷한 어두운 회색이다. 그의 눈은 서먹서먹하게 로라의 얼굴을 한 차례 훑어보고는 다시 카운터 위쪽으로 돌려졌다.
로라는 괜시리 얼굴이 빨개져서 얼른 눈길을 돌렸다. 25살이나 먹어서 이 무슨 어린애 같은 짓이람? 마치 인기 가수를 본 10대 소녀처럼...
다행히도 그때 웨이트리스가 토마토 주스와 롤빵을 가지고 왔다. 주스는 차고 신선했으며 톡 쏘는 맛이 있었고 빵은 알맞게 구워져서 맛이 있었다. 역시 운전기사들이 모여들만 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칠면조는 부드럽고 고기 수프 맛도 좋았으며 야채는 싱싱했다. 애플파이의 껍질도 부드럽고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그러나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결코 그녀의 구미에 맞지 않았다. 그녀는 대충 식사를 끝낸 후 커피를 마시고 계산서를 집어들었다.
로라가 카운터로 다가갔을 때 데님 재킷을 입은 사내는 커피에 설탕을 넣는 중이었다. 하나, 둘... 셋! 세 봉지씩이나! 엄격해 보이는 그의 옆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짓이지만, 또 어떤 의미로는 그만큼 인간적인 일면을 본 듯한 느낌이다.
로라는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고 얼른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널찍한 어깨와 억세 보이는 목덜미, 그리고 굽슬굽슬한 금발은 강렬한 영상으로 그녀의 뇌리에 박혔다.
웨이트리스가 계산을 하러 오기를 기다리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풍만한 가슴에 곱슬거리는 빨강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휘젓는 걸음걸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떠들어대는 손님들을 향해 짜증스럽게 손을 한 번 내젓고는 로라를 향해 돌아섰다.
"우리 집 요리 맛이 어땠나요?"
"맛있었어요! 애플파이는 최고더군요."
로라는 상냥하게 대답하고 백을 열었다. 백 속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이 들어 있다. 메모 용지, 수표장, 연필, 펜, 브러시... 그런데, 지갑이 없다!
열심히 찾아봤지만 그밖에 찾아낸 건이라곤 열쇠 꾸러미와 잃어버린 줄 알았던 립스틱과 아직 미지급한 청구서들뿐이다. 로라는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내며 종알거렸다.
"어, 어쩌죠... 지갑을 잃어버렸으니...."
애니는 옆구리에 손을 얹고는 의심에 찬 눈초리로 로라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로라의 귀에는 애니의 말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상습적으로 무전취식을 하는 여자로군! 흥, 내가 당할 줄 알아?"
로라는 금발의 사내 뒤쪽으로 돌아가서 두 개의 테이블을 지나 빈 테이블에 앉은 다음 백을 뒤집어엎었다. 이것저것 소지품들이 테이블 위에 소리를 내며 쏟아졌으나 역시 지갑은 없었다.
"역시 없어요.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잠깐 주유소에 들렀었는데 그때 잃어버렸나봐요. 수표로 끊어 드리죠...."
로라 앞에 와 섰던 애니는 통통한 팔을 걷어붙이면서 벽에 써붙인 것을 가리켰다.
<수표는 사절합니다.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백만 달러 짜리 복권에 당첨됐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보았자 이 여자가 믿어 줄 리 만무하다. 로라는 공손한 말투로 다시 한번 입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정말로 지갑을 잃어버린 거예요. 주유소의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만...."
잘 생각해 보니 주유소 앞에 안내간판이 서 있던 기억이 난다.
"영업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 정기휴일은 매주 일요일이라고 씌어 있었는데...."
시계를 보니 벌써 9시 반이 가까와지고 있었다.
"아, 너무 늦었군요. 하지만...."
이때 뒤쪽에서 술취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내줄 거야, 애니. 내일 모레 연금을 탄다구. 귀여운 아가씨를 도와 줄 수 있다니 실로 오랜만인 걸. 음냐음냐...."
"가만 좀 있어요. 당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구. 하루 지나면 모두 잊어버리는 주제에...."
로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저어... 앞으로 한 달 동안 여기서 멀지 않은 별장에서 지낼 겁니다. 그 별장 주인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려 드리고 갈 테니, 내일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아침이 되면 주유소에 곧바로 달려가서 지갑을 찾아오겠습니다."
바로 그때 금발의 사내가 처음으로 얼굴을 들어 경멸의 눈초리로 로라를 훑어보았다.
"주유소 문을 닫은 게 잘된 일이지."
생전 처음 이렇게 멋진 사람을 보았노라고 생각했었는데 사람을 비웃다니! 로라는 불쾌하다는 말투로 쏘아붙였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럴 수는 없소. 애니와 난 친구간이니까. 속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속이는 게 아니라니까요!"
"엉터리 같은 소리 그만 하시오! 그런 건 흔히들 하는 수작이라구. 그 고급스러운 옷과 샌들도 <난 정직한 사람>이라고 속임수를 쓰기 위해 산 거겠지?"
애니가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체쿠스, 그만 해요. 이제 됐다구요."
되다니!
"여보세요, 체쿠스 씨! 당신이 뭘하는 사람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사실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내 이름은 찰스요."
"그건 나랑 상관없어요. 지금 이분이 체쿠스라고 불렀잖아요."
"체쿠스라고 불리는 건 싫소."
애니가 끼어 들었다.
"당신은 찰스란 이름보다 체쿠스라는 이름이 훨씬 잘 어울린다구."
"아녜요, 천성이 찰스가 더 어울릴 것 같네요."
로라는 가시돋친 말로 콕 쏘아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체쿠스건 찰스건 상관없잖아요? 문제는 내 지갑이라구요."
뜻밖에도 애니는 깔깔대며 크게 웃었다.
"여봐요, 체쿠스! 당신과 싸울 상대로는 기대할 만하잖아요?"
그녀의 눈은 밝게 빛났고 빨간 머리칼이 흔들리고 있다.
"아까 어디에 묵을 거라고 말했던가요?"
"커닝햄 씨의 별장이에요. 이곳에서 l0km쯤...."
로라는 다시 백을 뒤졌다.
"수첩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어요... ."
찰스가 엷은 웃음을 입가에 떠올렸다.
"맞아, 그 전화번호를 꼭 좀 알아 둬야겠는 걸."
"웃기는 소리 말아요. 그곳은 친구 언니의 별장이라구요. 당신에게 그곳 전화번호가 무슨 소용이죠?"
"유감스럽게도 관계가 있소. 각자 소개나 합시다. 난 찰스, 찰스 리차드. 체쿠스가 아니오. 커닝햄 씨 별장 이웃에 살고 있소."
"서, 설마! 별장 가까이 또 한 채의 별장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게 당신 거라구요?"
"그렇소이다. 별장으로 들어가는 길도 함께 쓰고, 해변 모래밭도 공유하게 될 거요."
"나 혼자서 조용히 지내기 위해 온 건데 당신 같은 사람이 이웃에 살고 있다니 끔찍하군요."
찰스는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는 애니를 올려다보았다.
"꽤나 귀염성이 없는 아가씨로군. 그렇게 생각지 않소, 애니?"
"체쿠스,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말라구요. 이 가엾은 아가씨가 놀라겠어요."
로라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안 됐군요, 체쿠스 씨. 모두에게 경원당하고 있으니."
찰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바지 호주머니 속에서 가죽 지갑을 꺼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애니, 계산이나 해줘요. 저 아가씨 것도 함께 하라구. 이웃집에 산다니 떼먹힐 염려는 없을 테지."
회색 눈이 로라의 빨개진 뺨과 약간 벌어져 있는 입술을 힐끗 바라본다.
"그건 그렇고, 당신도 자기소개를 해주지 않겠소? 인칭대명사로만 부르자니 실례가 되는 것 같아서...."
"보기보다는 예절을 갖출 줄은 아는 것 같군요."
찰스의 눈에 웃음이 떠오르는 것을 본 순간 로라는 필사적으로 바트를 생각해내려고 했다.
"난 로라, 로라 워커예요."
찰스는 일어서면서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소, 어쨌든. 이제 모래밭에 나가는 게 즐거워질 것 같군."
하는 수 없이 로라도 일어서서 악수를 나누었다. 찰스는 키가 대런 정도 돼보이고 얼굴은 정면에서 봐도 개성적이다. 마음 한구석엔 괘씸한 감이 없지 않지만 마주잡은 손의 감촉과 억센 힘은 왠지 기분 좋기만 하다.
"이제 내가 도망쳐도 숨을 곳이 밝혀진 이상 당신이 대신 돈을 내줄 필요는 없어요. 안 그래요, 애니?"
"딴은 그렇군요.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찰스는 몇 장의 지폐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같이 계산하도록 해요."
애니는 낡아빠진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거스름돈을 건네주었다.
"어쨌든 고마워요, 체쿠스."
애니는 그렇게 말한 다음 뾰로통해진 로라의 얼굴을 한 번 흘끗 보더니 안으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이제 문 닫을 시간 됐어요, 술주정뱅이!"
"내가 데려다 주지, 아치."
찰스는 술 취한 남자에게 말하고 로라 쪽을 돌아보았다.
"신세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워커 양."
"미안하지만 감사하다는 생각 따윈 전혀 들지를 않는군요. 당신한테 돈을 내달라고 부탁한 적 없으니까요. 이왕이면 제 몫의 팁까지 얹어 주시죠? 그럼 이만 실례, 미스터 리차드. 그리고 애니, 내일은 꼭 지갑을 갖고 오겠어요. 오늘 정말 미안했어요."
홧김에 문을 확 밀어젖히고 나가자 불빛을 찾아서 모여 들었던 나방들이 일제히 날아오른다. 점포옆쪽에 검정색과 회색이 섞인 지프가 한 대 서 있다. 찰스 리차드의 것인 모양이다. 먼지가 묻고 진흙도 묻어 있지만 새 차인 것 같다.
자신의 차 쪽으로 걸어가면서 로라는 자꾸만 찰스란 남자의 존재가 마음에 걸리는 걸 느꼈다. 교양이 배어 있는 듯한 말솜씨, 단아한 손, 어딘지 모르게 자신만만해 보이는 태도, 우뚝 솟은 콧날, 의지가 강해 보이는 턱... 하지만 옷은 세탁을 하지 않은 듯 후줄그레하고 주정뱅이 아치하고는 친한 것 같은데 그 점이 마음에 안 든다.
마침 그때 아치가 갈짓자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나오더니 해괴망칙한 소리들을 지껄여댔다. 로라가 급히 차 키를 찾아 문을 열려고 하는데 찰스가 불렀다.
"로라, 여기서 그냥 기다리고 있어요. 어두워진데다가 당신은 길을 모르잖소? 내가 금방 아치를 데려다 주고 올 테니, 기다렸다 내 뒤를 따라오는 게 좋을 거요."
고마운 말이기는 하지만 화가 풀리지 않은 지금으로선 그 말에 따르기는 싫다.
"걱정 마세요. 위치는 자세하게 들었으니까 문제없다구요."
찰스는 잠시 조소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아치를 지프에 밀어 넣고는 사라졌다. 로라는 자기 차에 올라타고 찰스와는 반대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제인이 그려 준 약도에 의하면 별장은 애니의 레스토랑에서 왼쪽으로 10km즘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한다. 때마침 작은 집들과 캠핑카에서 불빛이 흘러나왔으나, 별들이 수놓고 있는 하늘만 보일 뿐 큰 나무들이 줄을 잇는다. 그 나무도 낮이라면 자작나무라든가 전나무 정도의 구분은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저 기분 나쁜 검정 무리로만 보일 뿐이다. 제인의 말에 의하면 별장 앞에는 큰 떡갈나무가 있고 그 앞으로 바다로 이어지는 자갈길이 있다고 했다.
그랜섬에서 살았던 덕택으로 사과나무와 배나무, 그리고 느릅나무 정도는 구별할 수가 있지만 떡갈나무는 본 적이 없다. 본래 학창시절부터 식물학은 지루하기만 했었다.
8km쯤 갔을 때 좁은 진흙길 위로 나뭇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커다란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찾긴 찾은 모양이다. 로라는 핸들을 꽉 잡고 서서히 커브를 틀었다.
도로의 폭은 의외로 좁았고, 나뭇가지들이 자동차에 스치며 부러져 나갔다. 두 채의 별장으로 접어드는 길은 이쯤에서 갈라질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도 갈림길은 나타나지 않고 길은 점점 더 좁아지기만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앞에 노란 불빛 두 개가 나타났다. 깜짝 놀라서 급브레이크를 밟자 잿빛 고양이 한 마리가 덤불 속으로 재빠르게 도망쳤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 깜짝 놀랐잖아! 바보 같은 고양이 녀석! 하지만 고양이가 있다는 것은 가까이에 인가가 있다는 얘긴데....
로라는 다시 액셀러레이터 위에 발을 올려놓고 차를 전진시켰다. 웬만한 어린애의 키만큼이나 되는 양치류 식물자동차의 창문을 스치고, 머리 위로는 나뭇가지가 우거져 있어 이젠 별조차 보이지 않는다. 기분 나쁜 예감이 등골을 스친다. 혹시 길을 잘못 든 건 아닐까?
잠시 후 그 예감이 적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큰 나무가 쓰러져서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태풍으로 나무줄기가 부러진 것 같은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최근에 쓰러진 나무는 아닌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로라는 후진 기어를 넣고 끙끙거리며 차를 뒤로 빼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넓은 길로 접어들려는 순간 검정색과 회색이 섞인 지프가 눈에 들어왔다. 지프 옆에는 데님 재킷을 걸친 사나이가 서 있다.
부아가 나고 아니꼽기는 했지만 적이 안심이 되었다. 로라는 지프 뒤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열었다.
"걱정해 준 대로 길을 잘못 들었어요.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뒤따라 갈 테니 부탁해요."
"별장 가는 길의 표적으로 삼아야 할 건 떡갈나무야. 저건 단풍나무라구."
"그걸 어떻게 구분하나요?"
"단풍잎도 모르나? 캐나다 국기에 그려져 있는 게 단풍나무 잎이오. 정말 답답한 숙녀로군."
로라는 자존심이 상해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치켜뜨며 종알거렸다.
"왠지 국가주의의 상징 같아서 난 국기들엔 관심 없어요."
"나이에 비해 나름대로 확고한 소신이 있는 것 같군."
"네, 물론이죠. 그리고 지금 당장 내가 갖고 있는 확고한 소신은 일초라도 빨리 별장으로 가는 거예요."
"그럼 국가주의에 관한 토론의 기회는 다음으로 미뤄야겠군. 모래밭에서 럼이나 오렌지 주스라도 마시면서 말야."
"난 진을 더 선호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날 만나고 싶으면 정식으로 초대를 하는 게 어떻겠어요?"
"오호! 귀찮다 그 말씀이로군. 그렇지만 2, 3일 동안 혼자서 지내다 보면 내 얼굴이 보고 싶어질 걸?"
"이곳이 그렇게까지 외로운 곳인가요?"
찰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모습이 무척 핸섬해 보인다. 고르고 새하얀 치열, 청결한 머리칼과 조각처럼 정교한 손이 청량감을 물씬 풍긴다.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말하고... 아가씨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말하나?"
"4년 동안이나 틴에이저들의 뒤를 돌봐 주었으니 그러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어요?"
앗차, 실언! 이런 개인적인 얘기는 입밖에 내지 않는 건데... 그러나 찰스는 눈만 깜박였을 뿐 건성으로 받아넘겼다.
"그 얘기도 다음으로 미룹시다. 오늘은 빨리 별장으로 가서 짐 정리부터 하는 게 급선무요. 이상한 얼굴로 보지 말아요. 로라. 난 보기보단 신사 축에 속하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냥, 그저... 뭐랄까, 당신은 인생을 느긋하게 살아가는 사람 같았어요. 애니 네 레스토랑에서 보여 준 태도처럼... 그 이상은 설명할 수가 없군요."
찰스는 얼굴을 갑자기 긴장시키면서 무엇인가 물어 보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생각을 바꾼 듯 한마디 불쑥 내뱉었다.
"갈림길은 바로 저곳이오. 천천히 갈 테니까 놓치지 말고 따라와요."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자신도 모르게 신경이 쓰이는 걸 느끼며 로라는 지프에 을라타는 찰스를 지켜보았다. 꼭 끼는 진 바지에 싸인 긴 다리... 어느 사이엔가 그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로라는 깜짝 놀랐다.
지난 한 주일 동안은 바트 때문에 눈물을 질금질금 짜고 있었는데, 어쩌면 이렇게도 한순간에 난생 처음 보는 남자를 좋아하게 된 걸까? 더구나 그로부터는 망신까지 당했다. 단풍잎을 놓고는 바보 취급까지 당하고.
좋아! 내일은 눈뜨자마자 떡갈나무가 어떻게 생겼나부터 볼 거야. 하여간 그 지긋지긋한 식물학은 끈질기게도 따라다니는군.
문제의 그 떡갈나무는 검고 굵직한 줄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별장으로 향하는 길은 아까 갔었던 그 좁은 길보다 넓었고 또 울퉁불퉁하지도 않았다. 두 곳으로 갈라지는 곳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니, 얼마 안 가서 자동차 헤드라이트 속으로 별장 같은 것이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얀 지붕, 진초록의 차양, 돌로 만든 굴뚝, 예스럽게 장미 덩굴이 기어올라간 격자 무늬의 울타리. 맘에 드는 집이다.
로라는 지프 옆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는 바람 소리는 마치 누군가가 낮게 속삭이는 소리 같았고, 운치를 흠씬 풍기는 파도 소리는 율동적으로 들려왔다. 대기는 바다 내음을 한껏 머금고 있고 위를 올려다보니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정말 조용하군요."
잠시 후 로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건 사실이었소?"
이 환멸! 로맨틱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화가 난다기보다 오히려 슬퍼진다.
"의심이 굉장히 많군요. 언제나 그런 식인가요?"
"여러 번 당해 봤기 때문에...."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신용할 생각은 아예 처음부터 없는 거죠?"
"할말 있으면 말해 봐요."
"당신, 참 이상한 분이네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화제를 바꾸지 말고 하던 얘기나 계속해요."
로라는 눈을 치켜뜨면서 늘상 대런에게 그럴 때처럼 위엄을 갖추고 말했다.
"애니에게 한 얘기는 모두가 사실이에요. 주유소에 들렀을 때까지만 해도 틀림없이 지갑이 있었다구요.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먹은 밥값을 떼먹은 적은 없단 말예요!"
"그렇다면 내가 실수를 했군. 사과하겠소."
"내일까지 기다렸다가 사과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혹시 내가 야반도주할는지도 모르니까요."
"그럴 것 같지는 않소. 아까는 내가 잘못했어요, 로라, 함부로 지레짐작을 하는 게 아닌데...."
그의 솔직한 태도가 가슴을 울린다. 볼수록 그의 좋은 점들만 눈에 띈다. 하지만 로라는 그런 기색을 감추고 쌀쌀맞게 말했다.
"그렇담 좋아요. 댁의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하죠."
"고맙소, 로라."
그는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말했다.
"피곤하지 않소?"
부드러운 파도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아까는 피곤했었지만 여기 오니까 도로 기운이 나는데요."
로라는 흡사 보석을 흩뿌려 놓은 것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이 마음에 들 것만 같아요."
"모래밭에 나가 보지 않겠소?"
"지금?"
"물론이오."
로라는 한층 기분이 좋아져서 대답했다.
"좋아요. 초대하신다면 기꺼이 응해 드리죠."
"좋아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악수합시다."
이걸 어쩐담? 밝은 레스토랑 안에서 악수를 하는 것쯤이야 상관없지만 어두컴컴한 바닷가에서 손을 잡다니. 이렇게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하지만 우물쭈물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로라가 손을 내밀자 그는 그녀의 가녀린 손을 꽉 잡았다.
찰스는 나무들 사이를 빠져나가서 낙엽이 깔린 길을 걸어갔다. 파도 노리는 차츰 더 크게 들려오고, 썰물이 빠져나가는 소리와 포말이 꺼져 가는 소리까지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이윽고 눈앞에 초지가 펼쳐졌다. 초지의 앞쪽은 모래밭이다. 모래밭까지 나왔을 때 로라는 슬며시 찰스에게 잡힌 손을 빼내어 샌들을 벗은 다음, 바지를 걷어올리고 발을 모래 속에 묻었다.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는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만 같다. 그녀는 파도를 향해 걸어갔다. 파도가 밀려가는 곳으로 눈길을 돌리니 바다는 밤하늘 밑에서 검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이때 갑자기 차가운 물이 발을 뒤덮자 로라는 째지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아이, 차가와!"
"9월이 되면 미지근해질 거요."
"그렇게 오래 있을 순 없어요. 난 한 달 기한으로 왔거든요."
"차가와도 별문제는 없을 거요. 조금 있으면 차가운 감을 느낄 수 없게 될 테니까."
"당신은 설마 여기서 해수욕을 하는 건 아니겠죠?"
"못할 건 또 뭐 있소? 매일 아침 눈만 뜨면...."
"팔다리가 얼거나 심장마비라도 걸릴 것 같네요."
찰스는 팔을 굽혀 알통을 만들어 보였다.
"난 이렇게 억세거든."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려 로라는 부자연스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난 이곳에 도착한 첫날 키다리에 핸섬한 남자의 힘자랑을 감상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찰스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핸섬하다는 소릴 들으니 기분이 좋군."
그랜섬에 있는 동안 어느 정도 분별력을 길렀건만 오늘은 어찌하여 생각 없이 자꾸 종알거리게 된담? 수앤의 나이 또래로 되돌아간 것만 같다. 로라는 안절부절못하며 뒷걸음질쳤다.
"이제 늦었으니 돌아가서 짐을 들여놓아야겠어요."
"걱정 말아요, 로라. 당신에게 덤벼들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짐은 내가 날라 줄 거구."
"괜찮아요, 나도 할 수 있어요."
짐을 옮기다가 혹시라도 내 정체가 밝혀지면 곤란하다. 1백만 달러가 이렇게도 골치를 썩일 줄이야...
"꽤나 자립심이 강한 여자로군."
찰스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바닷가의 야경을 등에 지고 선 그는 로라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술도 그의 손만큼 따뜻할까? 안돼! 망칙해라, 그런 생각을 하다니. 몇 해를 두고 바트 이외의 남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었는데 이 무슨 일이람? 로라는 억지로 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지금 날 칭찬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면 비웃고 있는 거예요?"
"물론 칭찬하고 있는 거요. 요즘 여자치고는... 로라, 어디가 불편하오? 왜 그렇게 꼼지락거리지?"
"아녜요. 아무렇지도 않단 말예요. 당신은 신사라고 당신 입으로 말했었잖아요?"
"정직하게 말한다면 지금은 신사가 되고 싶은 기분이 아니오. 지금 난 키스를 하고 싶은 기분이라구.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키스한다면 당신은 날 치겠지?"
"뛰어난 통찰력이로군요."
하지만 그녀는 그와는 정반대의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아야 했다.
"글쎄, 뛰어난 건지 모자란 건지...."
괘씸하게도 그는 손도 잡지 않은 채 앞장서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설레고 온몸이 아파 오는 느낌이다. 오늘 하루는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다. 별장에 도착하자 찰스는 회중전등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로라가 열쇠로 문을 여는 동안 불을 비춰 주었다.
"지난주에 애니의 친구가 청소를 하러 왔었으니까 별장 안은 깨끗할 거요."
도어를 열고 전기불을 켠 로라는 거실 안을 휘둘러보았다.
"멋지네요."
"그럼, 잘 쉬시오, 로라."
"네,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하면서 돌아보니 찰스는 이미 등을 돌리고 지프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를 배웅하는 것은 이것으로 두 번째다. 차 소리와 함께 두 개의 불빛은 나무숲 사이로 사라져 갔다. 이웃이라고는 하지만 그다지 가까운 것 같지는 않다.
로라는 짐을 모두 옮긴 다음 집안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그리고 슈트케이스에서 잠옷을 꺼냈다. 침대에 누워 그녀가 생각한 것은 바트도, 그랜섬에 있는 조카들도, 그리고 애니도 아니었다. 핸섬하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던 찰스 리차드... 오직 그만이 온통 그녀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다.
3
로라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침대는 딱딱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집이 삐걱거렸다. 그 소리가 마치 사람의 발소리처럼 들렸고 나뭇가지가 집에 스치면 노크 소린 것만 같았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지만 두 시간쯤만에 다시 눈이 떠졌다. 평소에 조카들을 거두느라 늘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밴 그녀다.
실눈을 뜬 그녀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를 생각해내곤 다시 베개 밑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햇빛이 스며들자 더 잘 수가 없었다. 새소리가 관현악의 선율처럼 울려 퍼지고 파도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뭐니뭐니해도 지갑을 찾기 전에는 한가롭게 잠을 자고 있을 수만은 없다.
가운을 걸치고 욕실로 가서 수도꼭지를 틀어 보니 고맙게도 더운물이 나왔다. 침실은 두 개인데 더블베드가 놓여 있고 마룻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다. 거실 한 모퉁이에는 벽난로가 있고 창문을 통해서는 초지와 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창가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고, 그밖에 화려한 색감의 천으로 덮여 있는 소파와 팔걸이의자가 있다.
주방은 간소하게 꾸며져 있지만 필요한 기구는 모두 갖춰져 있다. 다만 찬장과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다. 지갑을 찾을 때까지 꼼짝 못하고 굶을 수밖에 없겠다. 주유소에 전화부터 해야겠다. 전화번호부는 거실의 티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초등학교 학생이 공작시간에 만든 것 같은 테이블이다.
주유소가 있었던 거리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주유소의 전화번호를 찾는 데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화는 주방 벽에 붙어 있었다.
그녀는 쪽지에 주유소의 전화번호를 옮겨 적고 전화기 있는 쪽으로 갔다. 그런데 수화기를 들고 보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전화 요금을 제때 지불하지 않아 전화국에서 끊어 버린 모양이다.
어떻게 하면 좋다지? 주유소까지 갔다가 지갑을 찾지 못하면 괜히 헛걸음만 하게 될 테고... 그렇다. 공중전화를 걸도록 하자. 로라는 침실로 돌아가서 백과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다 털어 봤자 동전은 모두 7센트밖에 안 된다. 어쩐담, 10센트가 돼야 전화를 걸지... 할 수 없군, 또 한 번 찰스의 신세를 지는 수밖에.
15분쯤 후, 로라는 꽃무늬 면 스커트에 티셔츠를 걸치고 이웃 별장의 현관 계단을 올라갔다. 이 별장은 차양이 빨간색이고 장미덩굴은 없지만 두 별장의 구조는 아주 똑같았다. 철망이 쳐져 있는 문을 통해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아침 8시부터 바그너라? 별취미도 다 있으시군.
그녀는 낭랑하면서도 슬픔에 찬 노랫소리보다 더 세게 노크를 하고는 대답을 기다렸다. 음악을 틀어 놓은 것으로 봐 찰스는 이미 일어나 있는 게 틀림없다. 장시 후 문 저쪽에서 반라의 사내가 나타났다. 로라는 눈을 깜박이며 손잡이를 잡고 서서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찰스."
"여어, 로라! 어서 들어와요."
찰스는 문을 열었다. 그는 단지 파란색 수영복 하나만을 걸치고 있을 따름이다. 로라는 공연스레 맥박이 빨라지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집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커피를 끓이는지 향긋한 냄새가 방안 가득하다. 구수한 베이컨 냄새 역시 그녀의 식욕을 자극했다.
"전화 좀 빌려 쓸 수 있을까요?"
로라는 찰스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요, 로라?"
"주유소에 전화를 걸어야겠는데 우리 별장 전화는 불통이에요. 동전은 7센트밖에 없고...."
"그런 걸 묻고 있는 게 아니오. 날 똑바로 봐요, 로라."
그는 로라의 팔에 손을 얹었다.
"이른 아침부터 방해를 해서 죄송해요."
로라는 흘끗 그를 올려다본 다음 눈길을 아래로 깔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털이 수북한 가슴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당황해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마치 수영복 입은 남자는 처음 본 사람 같군."
"천만에요! 전에도 본 적 있어요. 다만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좀 놀랐을 뿐이라구요."
찰스는 나머지 한쪽 손을 로라의 팔꿈치에 댔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자만에 빠지고 말 것 같은데?"
"자만심이 강하기로는 보통 사람 이상인 것 같군요."
하기야 다른 점도 보통 사람 이상이지만... 그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소? 파산한 플레이보인지, 빈둥빈둥 놀고먹는 인간 쓰레기인지도 모를 일이잖소."
로라는 그의 매력적인 금발과 햇볕에 멋지게 그을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럴 사람 같지가 않아요."
"일자리가 없어서 실업보험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수도 있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로라는 그에게서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전화를 빌려주기 싫으신 모양인데 그럼 전 애니에게 가서 잔돈을 빌리는 게 낫겠군요."
"그곳은 한낮이 돼야 문을 열어요... 앗! 베이컨!"
찰스는 레인지 쪽으로 달려가서 프라이팬을 들고는 새카맣게 탄 베이컨을 포크로 찍어냈다.
"쳇! 이걸 먹느니 아예 숯을 씹는 편이 낫겠군."
"나라면 먹겠어요."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 아침식사를 안했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게 없는데다 사러 가려고 해도 지갑이 없는 걸요."
"그렇겠군. 깜박 잊었소. 잠깐 기다려요, 베이컨을 구울 테니. 그 동안 당신은 커피나 마시고 있어요. 컵은 찬장 속에 있소."
커피를 마시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좁은 곳으로 들어가서 컵을 꺼내려고 하다가는 그의 몸에 닿게 될 것 같아 두렵다.
"전화부터 걸어도 괜찮겠어요? 지갑이 그곳에 있는지 확인해야 안심이 되겠는데."
"좋아요, 전화는 침실에 있소."
로라가 발길을 돌리려는데 찰스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기다려요. 뭐라도 좀 걸칠까? 그편이 낫겠지?"
"그, 글쎄요... 그렇겠네요...."
로라는 자기 볼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로라는 정말로 순진한 것 같군. 결혼이라든가 약혼이라든가, 소위 동거생활 같은 경험은?"
또 엉뚱한 질문을 해온다.
"없어요. 얼마 전에 청혼을 받은 일은 있지만... 그것도 이곳에 오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예요. 저 혼자 생각을 좀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죠."
"생각을 해봐야 할 정도라면 결혼하지 않는 편이 낫지."
"네? ...하긴 그렇겠군요."
찰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뒤로 물러서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그 사람이 당신더러 예쁘다고 하던가?"
복권이 당첨된 후에는... 이런 말이 튀어나을 뻔했으나 로라는 키스의 말을 인용해서 적당히 얼버무렸다.
"내 조카의 말에 의하면 나는 교통혼잡을 일으킬 만큼 예쁘지가 않대요."
"그것 참 재미있는 말이로군. 나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소. 그러나 이렇게 곁에서 보고 있노라면 당신 눈은 금빛으로 반짝이는 게 여간 예쁘지 않아요. 눈꼬리가 약간 올라간 것도 매력적이고. 입모습은 더 말할 나위도 없지. 그리고 볼이 빨갛게 상기됐을 때는 아주 귀엽게 보인다구."
그의 눈에서 위험한 빛이 춤을 춘다.
"엊저녁에 보류해 두었던 일을 해도 괜찮겠소?"
불안한 기대감에 가슴이 마구 뛴다.
"나로서는 결정할 수가 없네요."
"그럼 내 결정에 따르겠다는 뜻인가?"
로라는 차라리 눈을 감고 말았다. 찰스의 손이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고 따뜻한 입술이 와 닿았다. 처음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차츰 뜨거운 불꽃이 치솟는 듯했다.
몇 초가 지났을까? 아니면 몇 분...? 그가 얼굴을 들었을 때 로라는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어딘가 먼 곳에서 한참 동안 방황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렇게 꼭 껴안겼던 것도 아니건만 몸의 중심까지 떨리고 있다.
찰스의 눈에서 위험한 빛은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로라...."
로라는 그의 가슴에 눈길을 주었다. 말을 하려고 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웃으려고 해도 입술이 얼어붙어서 움직여지지를 않는다. 잠시 후 찰스가 입을 열었다.
"결코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요?"
"그저... 살짝 키스만 하고 말 생각이었다구. 그런 기분이 들 줄은 꿈에도 몰랐소."
음악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음악 때문이었을까?"
"아까 그 기분과 바그너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는 로라의 턱에 손가락을 대더니 그녀의 얼굴을 위로 향하게 했다.
"예의 그 사내와 키스할 때도 역시 같은 느낌이었나?"
로라는 깜짝 놀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녜요, 전연 달랐어요...."
"그렇다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남자와는 결혼하지 않는 게 좋겠소."
찰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는 손을 내렸다.
"전화는 잠시만 기다려요. 먼저 옷부터 좀 갈아입읍시다."
로라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널찍한 어깨. 탄탄해 보이는 허리와 기다란 두 다리... 모두가 아름답게 보인다. 눈을 감으면 정열적인 음악이 온몸을 감싼다. 어쩐지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만 같다.
"무얼 생각하고 있는 거요?"
깜짝 놀라서 눈을 떠보니 색이 바랜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찰스가 소매를 걷어 올리며 서 있다.
"별로... 별 생각 안했어요. 그리고 제발 놀래키지 좀 말아요."
로라는 거실을 지나서 침실로 향했다. 거실은 자기가 묵고 있는 별장의 거실 구조와 같았는데 여러 가지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다. 책, 잡지, 티셔츠, 접시, 타월 등등... 찰스는 깔끔한 성격은 아닌 모양이다. 침실도 마찬가지였다. 어젯밤에 입었던 옷은 방바닥에 팽개쳐져 있고 침대도 헝클어진 채다.
전화는 침대 곁의 나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로라는 교환원에게 주유소의 번호와 이 집 번호를 대주고 요금은 이 집으로 청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찰칵찰칵 소리가 나더니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벤틀리 주유소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갑은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참 다행이에요. 거기에도 없을까봐 무척 걱정했답니다. 고맙습니다. 오전 중으로 찾으러 가겠어요."
로라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흐트러진 침대를 한 번 힐끗 본 다음 침실에서 나왔다. 주방에서는 찰스가 베이컨을 새로 굽고 있다.
"지갑이 주유소에 있대요! 세상에는 나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로군요."
"당신도 그 범주에 속하지. 어쨌든 어젠 정말 미안했소."
"괜찮아요."
당신이 키스도 해주었고, 지갑도 무사하고. 베이컨의 맛있는 냄새도 솔솔 풍기고... 오오, 멋져라! 로라는 밝게 미소지었다.
찰스는 포크를 내려놓고 한 걸음 다가서더니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그녀 앞에 우뚝 섰다.
"다시 한번 키스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막힘없이 말하는 그의 말에 이끌려 로라도 서슴없이 물었다.
"나의 어디가 그렇게 매력이 있나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해야 할 말을 당당하게 할 줄 아는 여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천적으로 조용한 아름다움이 있어설까? 예를 들면 온실에서 핀 난초가 아니라 들에서 자라나는 들꽃 같은...."
"찰스, 베이컨이 또 타네요!"
그는 허겁지겁 프라이팬 쪽으로 돌아섰다.
"믿어지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난 상당히 우수한 요리사요. 달걀은 한 개? 아니면 두 개?"
"한 개면 돼요. 오믈렛으로 만들어 주겠어요?"
"토스트는 어떻소? 냉장고 안에 빵이 들어 있을 거요."
그녀는 찰스 옆을 지나쳐서 냉장고 문을 열고 빵 봉지를 꺼냈다. 냉장고 속에는 버터, 잼, 마말레이드 등 먹다 남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고 약간 상해 보이는 것도 있었다.
"당신 음식들이 빨리 먹어치워 달라고 하는군요."
찰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알고 있소. 버리긴 아깝고 해서 냉장고 속에 넣어 둔 거요. 그런데 저녁때만 되면 애니의 레스토랑으로 달려가는 바람에... 그렇잖아도 주방 대청소를 한 번 하려던 참이었소. 자아, 어서 먹자구. 커피 좀 따라 주지 않겠소?"
거실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자 찰스는 곧 소금과 후추를 로라 앞에 갖다 놓으며 물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 대한 얘기 좀 해주지 않겠소?"
스푼을 입으로 가져가던 로라의 손길이 도중에서 멈췄다.
"당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요?"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적을 안다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 바로 그 문제에서 도망치기 위해 여기 온 거라구요."
"좋소, 그럼 딴 얘기를 하도록 하지. 키스 얘기가 어떻겠소?"
키스 얘기보다는 차라리 바트 얘기를 하는 편이 안전하겠다.
"상대는 바트 매닝이라고 하는데 나이는 28살, 변호사예요."
"어떤 타입이오?"
찰스가 눈앞에 있는 동안엔 바트에 대해서는 도무지 생각나는 게 없다. 그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키는 180cm 정도고, 머리는 짙은 갈색에 수염을 기르고 있어요. 눈은 파랗고, 그리고 핸섬하구요. 일도 척척 잘해내고 스포츠를 좋아하는데 가족은 어머니 한 분이 계실 뿐이죠."
"같은 동네에 사나?"
"같은 집 이층에 있어요. 바트가 태어난 집이죠."
"그래, 알게 된 지는 얼마나 됐소?"
"3년쯤."
"3년이나 사귄 다음에야 겨우 청혼을 했단 말야?"
뭐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까? 로라는 오믈렛을 반으로 잘랐다.
"글쎄."
"로라는 그런 남자에겐 과분한 여자요. 그를 사랑하고 있소?"
이제 그만! 3년 동안이나 사랑하고 있었다구. 하지만 청혼한 시기가 나빴다니까.
"그 이상은 묻지 말아 줘요, 찰스."
"당신에 대해선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들뿐이로군."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만난 지 얼마 안 되니까...."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이 화제가 싫으면 날씨 얘기나 할까? 오늘은 금년 여름 들어서 제일 무더울 것 같군."
로라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이번엔 당신이 얘기할 차례예요. 결혼? 이혼? 약혼? 경험이 있는 건 어느 쪽이죠?"
"4년 전에 약혼을 했었지만 파혼하고 말았소. 그 이후로 결혼하고 싶은 상대는 아직 없소."
"어디서 왔죠?"
"토론토."
로라는 두 눈을 반짝였다.
"어머! 나도 토론토에서 자랐어요. 아주 멋진 곳이죠. 그런데 그곳에선 뭘했죠?"
"대규모 다국적기업에서 일하고 있지. 광업관계의 회사요. 휴가를 얻어 가지고 왔는데 9월에는 돌아가야 하오."
그는 뭔가를 숨기고 있다. 수앤이 언젠가 품행이 좋지 못한 남자친구와 춤추러 가도 좋으냐고 물어 왔을 때도 이런 느낌이 들었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흉내 내며 말했다.
"당신에 대해선 정말로 알 수 없는 일뿐이로군요."
그의 회색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당신 앞에선 얼떨떨해지기만 하는군... 역시 날씨 얘기나 하는 편이 좋겠어."
"맞아요. 자아, 가시죠. 아침을 얻어먹었으니 설거지를 돕겠어요."
30분 후, 로라는 찰스의 별장을 뒤로 하고 나왔다.
일기예보 그대로 맑게 갠 아름다운 아침이다. 주유소까지 가는 두 시간 내내 로라는 자기자신에게 투덜거렸다.
로라 워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4년 동안 시골구석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상대한 남자라고는 바트 한 사람뿐. 그러다가 특별히 매력적인 남성을 만났으니 가슴 설레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정직하게 말해 봐, 로라. 너 그 사람에게 안기고 싶은 거지? 하지만 그건 안돼요. 너답지가 않다구. 첫째 넌 바트를 사랑하고 있잖니?
그럴까? 마지막으로 바트와 만났던 때의 일을 더듬어 본다. 케이프 브레턴으로 떠나오기 전날 밤이었다. 자동차 안에서 그는 로라의 뺨에 가벼운 키스를 한 다음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었다.
"어머니께 결혼을 할지 안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며? 어머니는 몹시 당황하고 계시더군 나한테는 우리의 결혼은 시간문제라고 했잖아?"
"아녜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겠다고 했었어요."
"어머니는 로라가 마음에 쏙 드신다는 거야. 우리가 결혼을 하면 무척 기뻐하실 거라구."
"결혼한 후에도 그랜섬에 살 건가요?"
"물론이지. 어머니가 그러길 원하시니까."
"바트, 난 의학을 공부하고 싶단 말예요. 핼리팩스까지 매일 통학하는 건 무리라구요."
"당신의 학구열엔 그저 머리가 숙여지는군. 하지만 지금부터 학교에 다닌다면 졸업은 30살이 지나서 하게 될 거야. 그런 다음에 직장생활을 한다는 건 좀 늦은 감이 있잖아?"
"사정이 허락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거니까 하는 수 없죠, 뭐. 그리고 30살이 뭐 그리 많은 나인가요?"
"로라는 직장보다는 결혼 쪽에 더 관심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자신의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화가 났다는 표시다.
"어느 한쪽만을 택하겠다는 건 아녜요. 난 두 가지를 양립시키고 싶어요."
"난 아기를 갖고 싶어. 로라가 학교를 졸업하고 30살이 넘을 때까지 기다리란 말야?"
"세상에는 30대 중반까지도 아기를 갖지 않는 부부들이 많이 있다구요."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 그리고 돈도 있으니 꼭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
"돈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난 의사가 되고 싶단 말예요. 이해 못하겠어요?"
"우리 어머니가 여자는 가정을 최우선으로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
기가 막히군!
"난 당신 어머니하고 결혼하는 게 아녜요. 난 당신하고 결혼하는 거라구요."
바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고 기가 꺾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 의사가 되고 싶다면 생각을 달리 해보자구. 로라가 졸업한 다음에 그랜섬으로 돌아오든가, 어머니를 핼리팩스로 모셔가든가 하면 될 테니까. 난 당신이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두 사람은 사과밭에 이르러서 차를 세웠다. 그들은 나란히 서 있는 사과나무 사이를 들뜬 마음으로 거닐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곳을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마주잡고 걸어가는데 어째서 행복하다는 기분이 안 드는 걸까? 행복하기는커녕 공연히 초조해지고 어디론가 전속력으로 도망을 쳐버리고만 싶다.
힐끗 올려다보니 바트의 단정한 얼굴이 눈에 띈다. 그는 아주 멋진데다 스키와 수영, 그리고 연극을 좋아한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결코 탓할 게 못된다. 오히려 장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혼 얘기를 꺼내기 이전의 얘기다. 그때는 매닝 부인이 두 사람의 생활을 간섭한다든가, 바트가 아내를 가정 속에 속박하려 든다든가, 아기를 일찍 낳기를 원한다든가 하는 것 따위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난 학교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그게 장애가 된다면 결혼은 무리라고 생각해요, 바트."
"그러니까 어떤 방법이든 좋은 방법을 강구해 보자고 했잖아!"
"당신이 진짜로 찬성해 준다면 몰라도 하는 수 없어서 허락하는 거라면 난 싫어요."
그날 바트는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긴 키스였다. 꿩이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머리에 와 닿는 나뭇가지, 얼굴을 간질이는 그의 수염... 그때 가슴속에서 울컥 치미는 것은 낭패와 공포감, 그리고 왜 이렇게 조금도 흥분이 되지 않느냐는 질문뿐이었다.
바트는 로라의 마음은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열기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로라, 나는 지금까지 로라와 깊이 사귀지는 않았어. 그건 변호사라고 하는 직업상 이상한 소문이 나게 되면 곤란해지고, 또 어머니의 체면도 염두에 둬야 했었기 때문이지. 로라 역시 조카들을 돌보고 있으니 무책임한 짓은 할 수 없었을 게 아니겠어? 그러나 로라는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난 내 감정에 지고 말 뻔했던 적이 몇 차례인가 있었다구. 그런 의미에서도 이쯤에서 결혼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당신도 물론 동감이겠지?"
천만에! 당신의 그 얄팍한 속셈을 모를 줄 알아요?
"저어, 나 생각해 봐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녜요. 케이프 브레턴에서 돌아온 후에 확실한 대답을 해드릴게요."
"기다리겠어. 틀림없이 내가 기대했던 대답이 돌아올 걸로 믿고 있겠어."
주유소가 가까워질 무렵 로라는 찰스와 나누었던 키스-그 달콤했던 키스 장면을 머리에 떠올렸다. 찰스는 1백만 달러 사건을 모르고 있다구. 게다가 나보고 예쁘다면서 키스도 해주었고! 그리고 틀림없이 나처럼 그도 감동을 받았을 거야.
주유소 소장은 다시 한번 몇 가지 질문을 한 다음 로라가 지갑 주인임을 확인하고는 지갑을 돌려주었다. 사례를 하려고 했지만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대신 기름을 넣고 주유소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이제 일단은 안심이 된다. 빨리 별장의 찰스 곁으로 돌아가자. 찰스를 만난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묘해진다.
그러나 먼저 마을로 가서 쇼핑도 하고 그 밖의 생필품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별장에서 제일 가까운 곳은 스콧 만에 있는 광산촌이다. 그 근방은 불황으로 말미암아 실업자가 득시글거리고 있어서 마을 전체엔 무거운 공기가 덮여 있다.
로라는 서둘러서 은행과 전화국엘 들른 다음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끝마쳤다. 자동차 트렁크에 짐을 넣으려다가 낯익은 사람의 모습에 눈길이 멎었다. 찰스!
그는 여러 명의 남자 아이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수앤 또래의 아이, 그보다도 나이가 더 어려 보이는 아이, 모두 합쳐서 약 10명 정도다. 농구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모습이라니...
그들 일행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로라는 트렁크의 문을 닫았다. 생각했던 대로 찰스에게는 숨겨진 부분이 많다. 무더운 7월의 한낮에 광산촌에서 장난꾸러기들을 데리고 한가하게 걸어가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람?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모든 게 뜻대로 됐기에 마음이 푹 놓였다. 식료품을 정돈한 다음 로라는 비키니로 갈아입고 타월과 유기화학 책을 챙겨들고 바닷가로 나갔다. 어젯밤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었는데 초지의 나무 위에 해먹(나무 사이에 매다는 그물 침대)이 매여 있다.
안성맞춤이로군. 우선 바닷가 주변을 탐험하도록 하자. 찰스는 광산촌에 있을 테고 지금이야말로 이 모래밭을 독점할 수 있을 것 같다.
눈앞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길게 곡선을 그리며 펼쳐져 있는데 곳곳에 조개껍질과 해조류가 널려 있다. 파도는 눈만큼이나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지만 눈만큼 차갑지는 않았다. 모래밭을 따라 걷다가 로라는 다시 초지로 돌아와 해먹에 타월을 깐 다음 그 위에 누웠다. 이번 여름에는 아직 한 번도 옥외에서 일광욕을 한 적이 없다. 그랜섬에 있었더라면 지금쯤은 비스킷을 굽고 잼을 만들든지 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다소 꺼림칙한 기분으로 책을 펼쳤지만 금방 가슴 위에 놓고 말았다. 모처럼 얻게 된 휴가지 않은가. 맘껏 한가롭게 지내기로 하자. 요리를 하지 않아도 되고, 셔츠에 다리미질을 하지 않아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다. 사르르 졸리기 시작하지만 기분은 아주 상쾌하다. 눈을 감으니 파도 소리가 부드러운 자장가처럼 들려온다.
한 시간쯤 후, 찰스가 조깅을 하며 달려와 해먹 옆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로라는 한쪽 팔을 해먹에 걸치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의 가슴에 얹혀진 책 제목을 훑어보았다. 유기화학? 표지에 그려져 있는 것은 끔찍할 만큼 복잡한 분자식이다.
즐거운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로라의 입술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볼에는 기다란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아름다운 몸매가 눈길을 빼앗는다. 볼록한 가슴, 가느다란 허리, 길고 늘씬하게 뻗은 다리,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발목... 너무 샅샅이 살피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찰스는 얼른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의 눈길은 다시 그녀를 향했다. 잠자는 공주? 동화 속의 왕자님이 된 기분으로 키스를 할까? 지금까지 자신 앞에 나타나 주길 애타게 기다려 왔던, 그리고 오랫동안의 고독에 종지부를 찍어 줄 상대방이 바로 이 여자일까?
찰스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듣기라도 한 듯 로라는 눈을 떴다. 태양빛을 받으며 웬 사나이가 내려다보고 있다.
"앗!"
당황해하며 일어서자 해먹이 마구 흔들린다. 책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자신도 밑으로 떨어지려는 순간 찰스의 팔이 그녀를 꼭 껴안는다.
"어머나, 깜짝이야!"
"미안, 미안. 놀래 줄 생각은 아니었다구."
찰스는 미련이 남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손을 놓았다.
"당신이 너무도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잠을 자고 있기에... 잠시 옛날얘기 속의 왕자가 된 기분이었어."
로라는 목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순간적인 일이기는 했지만 찰스의 팔이 피부에 닿는 순간 머릿속까지 전기가 흐르는 듯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 그런 해괴망칙한 동물을 본 듯한 표정은 그만두라구. 헤엄을 치러 나왔었나?"
"물이 차가와요. 그저 일광욕이나 하는 편이 낫겠어요."
"그럼, 이리 따라와요. 어차피 오랫동안 헤엄칠 수는 없을 테니까...."
찰스는 책을 주워들었다.
"물론 독서도 할 수 있지."
로라는 변명하듯 말했다.
"의학부 석사과정 시험을 볼 생각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오! 그렇소? 그것 참 잘됐군. 난 당신을 잘은 모르지만 아주 훌륭한 의사가 될 것 같군. 그렇다면 학사학위는 벌써 땄다는 얘기 아니오?"
"네, 토론토 대학에서요."
"미모에 두뇌까지 명석하다는 얘기로군. 이번 가을엔 학교로 갈 건가?"
"금년이 아니라 내년에요."
데이지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초지를 걷는 동안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뜨려 놓는다.
"오빠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4년 동안 조카들을 돌봐줘야 했거든요. 내년엔 막내 조카 수앤이 고등학교를 졸업해요. 비로소 맡은 일이 끝나는 셈이죠."
"4년이 연기됐단 말이로군... 괴로웠겠는 걸?"
"그랬어요. 하지만 하는 수 없는 일이었죠."
바람 따라 밀려오던 파도가 어린애처럼 모래 위에 눕는다.
"이곳은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결혼을 해도 학교엔 계속 나갈 테지?"
로라가 잠자코 있자 찰스가 다그쳤다.
"그가 반대하나?"
"바트는 핼리팩스로 이사를 가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댈하우지 대학으로 갈 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로라를 자기 맘대로 하고 싶어 할 테지? 그렇지? 그렇게 되면 앞으로 일은 잘 풀려 나가지 못할 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로라는 솔직하게 물어 보았다.
"아내가 될 사람이 앞으로 5년 동안 공부를 하고 싶어 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함께 있을 시간도 줄어들 거고 아기도 여러 해 후에야 낳게 될 거예요. 더군다나 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직장을 갖고 싶어 한다면?"
"나라면 가급적 협력해 줄 거요.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 여자는 행복할 테니까. 난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오. 다른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된다구. 만약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거라면, 그런 결혼은 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낫지.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건 실로 비참한 일이거든."
"마치 경험이 있는 사람 같군요?"
"맞아, 다만 내 경우엔 그게 여자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때문이었어. 아버지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 맘대로 하려고 했었지. 나도 어렸을 때는 뭐든지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했었소. 그러나 성인이 된 다음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됐지. 나의 개성과 취향에 맞는 것을 발견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한 난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고,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도 될 수 없는 법이야. 그래서 말인데, 만약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내게서 떨어져 있으면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 난 적극 협력해 줄 생각이오. 자신의 의사대로 하도록 말이지. 자신의 이상과 욕구를 억누른 채 남편 옆에 있는다면 그것처럼 무의미한 게 또 어디 있을까? 그건 그렇고 우리 수영이나 하러 가는 게 어떻겠소?"
바다는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만 같다.
"좋아요, 헤엄쳐요 우리."
찰스는 로라의 손을 잡았다.
"달려가서 곧장 뛰어들어야 한다구. 천천히 들어가면 더 춥게 느껴질 테니까."
로라는 웃으며 말했다.
"결국은 헤엄치지 않을 수 없게 됐네요."
"내 말을 거역할 순 없을 거요."
찰스는 로라를 꼭 껴안았다.
"안 그렇소, 로라?"
그의 입술이 뜨겁게 와 닿는다. 로라도 모든 걸 잊은 채 그의 키스에 뜨겁게 응했다. 가슴이 격렬하게 두방망이질하고 파도 소리도 갈매기 소리도 사라져 간다. 잠시 후 찰스가 얼굴을 들었을 때는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그에게 매달려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찰스였다.
"24시간 전에는 당신이란 여자를 알지도 못했었는데... 자, 가서 헤엄이나 칩시다. 머리를 좀 식혀야겠소."
"난 그냥 가라앉을 것만 같아요."
"가라앉도록 내버려두진 않을 거요."
손에 손을 잡고 두 사람은 파도치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물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왔다.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지?"
"얼어붙을 것만 같아요."
그러나 헤엄을 치고 물속으로 잠수를 하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차가운 감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10분쯤 지나서 두 사람은 모래밭으로 올라왔다. 로라는 햇볕에 따뜻해진 타월로 몸을 닦았다. 소름이 돋아나고 머리는 함빡 바닷물에 젖었지만 기분은 상쾌하기만 하다.
"아까 광산촌에서 당신을 봤어요. 소년들과 함께 있었죠?"
찰스는 쓴웃음을 짓는다.
"보기에 이상하던가?"
"이상하다기보다 생동감이 넘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난 아이들이라면 생각만 해도 피곤해요."
"언제나 애를 먹이는 녀석이 한둘쯤은 있게 마련이지. 그러나 이번 여름 동안 그 애들에게 농구를 가르쳐 주기로 했거든. 내일 밤에는 시드니 팀과 시합이 있소. 학교 체육관에서 말이오. 구경 오겠소?"
"재미있을 것 같군요. 가고 싶어요."
"좋아, 그럼 7시쯤에 데리러 가지."
찰스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띄웠다.
"오늘은 이쯤 해서 당신을 해방시켜 주겠소. 고독을 즐기고 싶다고 했지?"
로라는 한방 얻어맞은 기분으로 대답했다.
"네, 그랬었죠."
"나보다도 고독 쪽이 더 좋은가?"
로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이것만 있으면 당신은 필요가 없어요."
순간 찰스의 표정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잠시 후 이상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중에 전화 빌려 쓰러 갈게요. 우리 별장 전화는 이틀 동안 불통일 거거든요."
그들은 타월과 책을 집어들고 별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초지를 가로질러 가다가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로라는 발길을 멈췄다.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찰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그렇담 다행이오. 혼자서 적적하거든 아무 때고 우리 집으로 와요. 걱정할 건 하나도 없어요, 완전한 신사의 이미지를 깨뜨리진 않을 테니...."
왠지 직감적으로 그의 말에는 추호의 거짓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결코 상대방이 싫어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요, 찰스."
로라는 발뒤꿈치를 들고 서서 그의 볼에 키스했다.
"그럼 내일...."
찰스의 눈을 보는 순간 또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남자가 날 저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야... 그의 품에 안겨 모든 걸 잊고 싶어. 이 순간...
로라는 책을 힘껏 끌어안고 잰걸음으로 별장으로 향했다. 그가 계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왠지 두려워서 돌아다볼 수가 없다.
4
여섯 시가 조금 지났을 때, 로라는 두 채의 별장을 잇는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이 길은 아침 산책을 할 때 봐두었던 길이다. 저녁때가 다 됐건만 새들은 여전히 쉬지 않고 지저귄다. 자기 세력
권을 선언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세력 다툼이란 어울리지 않는다. 틀림없이 환희의 합창이다. 그렇게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흠뻑 도취돼 있는데 갑자기 찰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지프 뒤에 운동기구를 잔뜩 싣고 있었다. 로라는 미소를 띄우며 그에게로 다가가서 수줍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찰스."
그는 백을 땅 위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평범한 진바지와 티셔츠라도 찰스가 입으면 더없이 근사해 보인다. 그는 로라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갔다댔다.
"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지? 이게 다 당신 때문이오."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나... 때문이라뇨? 왜죠?"
"그 해답은 당신 스스로 얻어내도록. 나와 함께 있는 동안은 어떻게 하면 좀 더 즐겁게 보낼 수 있는가 만을 생각하라구. 우리의 만남과 앞으로 한 달 동안 이웃에서 지내게 된 것을 축하하면서 말이지."
한 달이란 단어에 로라는 왠지 가슴이 공허해짐을 느꼈다.
"한 달 정도는 바람처럼 지나갈 거예요."
"하루가 한평생과 똑같은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경우도 있소! 로라."
갑자기 로라는 두려워졌다. 이 사람은 누굴까? 도대체 누구길래 날 이토록 끌어당기는 걸까? 빨아들일 듯한 저 눈과 입, 조각 같은 손과 가슴, 설레게 만드는 저 목소리, 그리고 모든 것을 맡기고 싶게 만드는 이 푸근함. 하지만 그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로라는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전화 좀 써도 괜찮겠어요?"
그런 다음 그녀는 그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은 채 집안으로 들어갔다. 찰스의 침실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흐트러져 있었는데 침대만은 제대로 정돈돼 있다. 그랜섬의 집으로 통화를 신청한 뒤 로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 위에는 경제잡지가 놓여 있는데, 주식 시세가 나타나 있는 페이지가 열려 있다. 아마도 찰스는 주식에 손을 대고 있는 모양이다. 탁자 위에는 단행본 한 권이 읽다 만 채로 엎어져 있다.
대강 제목을 훑어보니 어느 미국 기업의 성공담이 담겨 있는 책인 것 같다. 그 옆에 고급 가죽 케이스 속에 들어 있는 면도기 세트가 눈에 띈다. 뚜껑 위에 C.R.T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C.R.T? T란 어떤 단어의 머리글자일까?
그때 전화의 호출음이 들려왔고 수앤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수앤? 나야, 고모. 어떻게 지내고 있니?"
"잘 지내요. 어젯밤 스티브와 데이트했어요. 드라이브를 한 다음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했구요. 스티브는 아주 좋은 애예요. 그런데 키스 오빠는 내가 돌아오자마자 설교를 해대더라니까요! 그런 훌륭한 감시역이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괜찮다구요, 고모."
로라는 피식 웃었다. 수앤에 대해서는 본래부터 걱정을 안 하는 편이다. 수앤은 몇 분 동안 계속 지껄였는데, 뒤이어 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모? 감시는 철저히 하고 있어요, 대신. 아시죠? 헤헤...."
"아예 월말에 청구서를 내지 그러니? 그런데 토론토에 갈 날은 정했니?"
"글쎄요, 내주 화요일에서 목요일 사이에 갔다올까 해요. 그 동안은 가정부에게 부탁해서 아예 우리 집에서 묵도록 했어요."
"대런은 항상 집을 비우니?"
"목장 일을 시작했는데 언제 집을 비우는지 예측할 순 없어요. 목장이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나 봐요."
"일자리가 생겨서 다행이로구나. 지금 있니?"
"오늘 첫 출근을 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고모는 어때요? 재미있어요?"
"무척 재미있단다!"
자신도 모른 사이에 말소리가 힘차진다.
"지금은 이웃 별장에 와서 전화를 빌려쓰고 있는 거야. 이 별장엔 남자 혼자 산단다."
키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키가 크고 머리는 검고 핸섬한가요?"
"머리는 금발이야, 하지만 그 밖의 것은 다 맞는단다."
"멋지군요! 이 기회에 바트 따위완 헤어지라구요. 앗! 실언을 했군요. 이런 얘기 하는 게 아닌데... 하지만 바트는 왠지 싫단 말예요."
"나, 아마 그 사람하곤 결혼하지 않을 거야."
"잘했어요. 복권이 당첨되자마자 청혼해 오다니, 신용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생각했던 건 나 한 사람만이 아니었구나.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건 좋지가 않아."
"좋고 나쁘고 할 것도 없어요. 참, 그 금발의 남자는 이름이 뭐예요?"
"찰스 리차드."
C.R.T의 T가 계속 마음에 걸린다.
"때로는 원칙을 깨는 것도 좋은 거라구요."
이럴 때의 키스는 조카라기보다는 삼촌 같다.
"오디션 결과가 나오는 대로 즉시 연락할게요."
"네가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전화할게. 내가 묵고 있는 별장의 전화는 내일쯤 연결될 거야, 아무튼 베시카글리아를 목표삼아 열심히 해봐!"
"고맙습니다. 고모."
로라는 웃는 얼굴로 수화기를 놓았다. 집안은 아주 조용했다. 찰스는 아직도 밖에 있는 모양이다. 가죽 케이스에 새겨진 글씨를 살며시 만져 보았다. 낡은 거라면 아버지나 형이 쓰던 걸 물려받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새것이다. 그렇다면 찰스는 나에게 자기 이름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단 말인가? 왜? 얼른 책 표지를 넘겨보았지만 이름이 씌어 있지는 않았다. 그때 바깥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그녀는 얼른 거실로 나왔다.
찰스가 태평스레 물었다.
"집에는 별일 없소?"
그 순간 수수께끼 같은 머리글자에 대해서 물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아무래도 침실을 뒤졌다는 인상을 받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로라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네, 수앤은 남자친구에게 열을 올리고 있는 것 같고, 키스는 내주에나 오디션을 받게 되나봐요. 대런은 집에 없고요...."
찰스는 손목시계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슬슬 출발할까? 난 좀 일찍 도착해야 하오. 다른 얘기는 가는 도중에 듣기로 하지. 어디에 살고 있다고 했지?"
"아나폴리스 계곡의 작은 고장이죠. 과수원과 담배 밭과 목장이 있어요. 토론토에서 옮겨왔을 때는 정말로 충격이 컸어요. 한데 스웨터는 안 가지고 가도 될지 모르겠어요?"
"스웨터는 필요 없소. 체육관은 땀이 흐를 정도니까."
지프 안에서 로라는 수앤, 키스, 대런에 대한 얘기를 했지만 그랜섬의 이름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래도 알려 주고 싶지가 않았다. 만약의 경우 찰스가 그랜섬에 오기라도 하는 날엔 1백만 달러 사건을 알게 될 것이다.
돈 생각을 하자 애니의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로라는 지갑을 찾아 돈을 꺼냈다.
"이거 전에 대신 내주었던 식사 대금이에요. 늦어서 미안해요."
찰스는 그 돈에 힐끗 시선을 던지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괜찮소, 그런 건 잊어버려요."
"그럴 순 없어요. 남에게 신세지는 덴 별로 소질이 없다구요."
"아니오, 그땐 내가 정말 무례한 짓을 했소. 그때 일을 자꾸 기억나게 하지 말아요."
"그 일에 대해선 벌써 사과를 했잖아요. 돈을 갚는 건 전혀 얘기가 달라요. 당신이 받을 때까지 나는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찰스는 슬쩍 곁눈으로 그녀를 보며 농담을 섞어 대답했다.
"워커 선생의 환자는 모두가 필히 말을 잘 들어야겠군. 화를 내면 무서우니까."
"당신, 무서우세요? 전혀 그런 얼굴이 아닌데요?"
"무섭진 않소. 하지만 돈은 받아 두기로 하지. 당신이 꼭 그렇게 하라면...."
"내가 왜 난처해하는지 아세요?"
찰스는 신호등의 빨간 불이 들어오자 차를 세우고 돈을 바지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알고 있소. 남에게 신세를 지고는 제대로 잠이 오질 않겠지. 좀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이지만 나도 비교적 그렇게 생각하는 축이오."
로라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참, 잘됐네요. 여자가 남자에게 돈을 꾸는 건 금물이에요. 소유물로 전락할 위험이 있으니까요."
찰스는 빙그레 웃었다.
"그거야말로 얘기가 다르지 않소? 로라는 워낙 자립심이 강하니까 별문제가 없을 거 아니오, 꾼 돈이 있건 없건 간에."
그는 길가에 차를 세웠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해요."
체육관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찰스는 소년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갔고 로라는 혼자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구경 온 사람들은 대개가 틴에이저들로 남자 아이들은 가죽 재킷을 걸쳤고, 여자 아이들은 화장을 짙게 하고 있었다. 제멋대로 지껄여대는 말투에 배어 있는 반항적인 태도가 느껴진다. 그들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내일의 세계를 담당할 젊은이들이라는 생각을 하니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윽고 선수들이 코트에 나타났다. 그것을 보고 있는 동안 로라는 마음이 어두워졌다. 밝은 녹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시드니 팀의 선수들은 모두들 체격이 당당하게 보인다. 한편 찰스의 팀은 허름한 티셔츠에 하얀 양말을 신고 있는데 마치 한겨울의 참새마냥 초라하기 짝이 없다. 찰스도 아까 이곳에 오는 도중 말했었다.
"이길 걸 기대하진 않소. 겨우 한 달 반밖에 연습하지 못했거든. 그러나 틀림없이 최선을 다할 거야."
역시 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모두들 하느라고 열심히 움직이고들은 있지만 아무래도 수비가 약했다. 하프 타임까지 8점을 리드 당했으나 다시 동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결국은 82대 74로 지고 말았다.
로라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찰스는 소년들을 모아 놓고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들리지가 않았지만 틀림없이 격려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윽고 커다란 웃음소리가 있었고 시무룩해 있던 소년들은 다시 기운을 차린 듯 탈의실을 향해 달려갔다.
혼자 남은 찰스가 로라를 향해 손을 흔든다. 로라는 찰스를 향해 달려 내려갔다.
"아주 멋진 시합이었어요. 단 6주일 만에 그 정도로 해내다니 대단하군요."
"고맙소."
찰스는 빙긋이 웃었다. 소년처럼 웃는 그의 얼굴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다.
"잠깐 기다리라구. 정리할 게 좀 남아 있어서...."
"좋아요, 밖에서 기다리겠어요."
찰스는 매끈매끈한 코트 위를 달려갔고 로라는 출입구로 향했다. 찰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된 지금, 예의 그 머리글자는 몰라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시합을 하는 동안의 그는 정말로 진지했었다. 그와 같은 그의 열의가 있었기에 팀은 모든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년들은 하나같이 그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16, 7살의 아이들을 그처럼 길들여 놓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밖의 날씨는 어느 정도 선선해져 있었다. 단풍들은 이곳저곳으로 금방 흩어져 버렸고 로라는 천천히 지프 옆으로 다가갔다. 지프가 저 있는 곳에서 도로를 건너면 두 개의 빌딩이 나란히 서 있는데, 그 사이로 좁은 골목이 나 있다. 그 앞은 이미 어둠에 가려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몇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고 딱 하고 손가락 튕기는 소리에 이어서 비명 소리도 들려왔다. 골목길 안이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세 사람이 어울려 싸움이 벌어진 것 같다. 한 사람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고 두 사람이 덮쳐누르고 있는 듯했다.
또다시 어딘가를 때리는 둔탁한 소리! 어렸을 때 강도를 목격한 이후 폭력이라는 것을 유난히도 무서워한 로라다. 그녀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채 반사적으로"사람 살려요! 누가 좀 와 봐요!"라고 소리치며 골목을 향해서 달려갔다. 그 옆으로 가보니 역시 두 명이 달려들어 한 명을 때리고 있었다.
"그만! 그만 해요!"
혼신의 힘을 다해서 백으로 앞에 있는 사람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랬더니 귀에 담지 못할 욕설이 날아왔다. 로라는 정신없이 백을 휘둘러댔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다른 한 사람의 몸에 백이 맞았다. 손에 오는 느낌으로 보아 어지간히 세게 맞은 모양이다. 그 틈을 타서 밑에 깔려 있던 젊은이가 발길질을 가했다.
그때 한줄기 빛이 골목길을 비추더니 사내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덤벼들던 두 젊은이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로라는 그중 한 사람에게 떠밀려서 돌담에 세게 팔꿈치를 부딪쳤다.
"로라, 괜찮소?"
"찰스!"
그 옆에는 경찰관도 서 있다. 로라는 팔꿈치를 한 손으로 감싸면서 말했다.
"저 사람 좀 보세요.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회중전등 빛이 골목길에 쓰러져 있는 15살가량의 소년을 비춘다. 바지는 흙투성이였고 체크 무늬의 셔츠는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 경찰관이 그 옆으로 다가갔다.
"이제 괜찮아, 조니. 금방 낫게 될 거다. 한데 아가씨는 다치지 않았소?"
"네,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로라는 찰스에게 다가가며 팔꿈치를 문질렀다.
"팔꿈치에 약간 상처를 입은 것 같기는 한데...."
"다른 곳은 괜찮소?"
"네, 그런데 저 애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발길로 조금 채었을 뿐이오. 당신 많이 놀란 모양이로군."
찰스는 로라의 팔을 잡고 있다가 그녀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잡았던 팔에 힘을 주었다.
"저 애들은 나이는 어려도 모두 당신보다 훨씬 힘이 세단 말이오. 어쩌려고 싸움에 뛰어들었소?"
"나보다 힘이 센지 어쩐지는 저 애들이 일어설 때까진 알지 못했다구요."
로라는 몸이 점점 더 떨려 왔다. 그녀는 찰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쓸데없는 짓은 왜 했냐고 말하고 싶은 거죠?"
"그럼, 안 그래? 이 정도로 끝난 게 천만다행이오."
어느 사이엔가 골목 안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더 이상 도움을 줄 일은 없을 것 같다.
"독한 술이라도 좀 마시고 싶군요."
"어서 돌아갑시다. 마침 진을 사다 놓은 게 있지. 결국 당신을 위해서 한 일이 되고 말았군.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안했었지만...."
경찰관이 거드름을 피우며 기침을 했다.
"잠시 경찰서까지 가주셨으면 합니다. 진상을 조사해야 하기 때문에...."
"좋소, 함께 갑시다."
찰스가 대답했다. 조니라는 소년은 벌써 일어나 있었는데 큰소리로 외쳤다.
"누가 때렸는지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말했다가는 보복을 당한단 말예요!"
경찰관은 로라에게 물었다.
"도망친 두 사람의 특징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저... 그저 희미하게... 너무 어두웠던 데다가 뜯어말리는 데 열중하다보니... 한 사람은 검은 머리였고 또 한 사람은 갈색머리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확실치는 않아요. 다만 두 사람 모두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어요."
"그것만 가지곤 단서가 될 수 없겠군요. 여기 구경 왔던 사람들의 반쯤은 그런 차림이었으니까요. 혹시 얼굴을 보면 알 수 있겠습니까?"
"모르겠어요. 뒤쪽에서 봤기 때문에...."
경찰관은 수첩에 로라의 이름과 별장의 주소를 적었다.
"그렇다면 일부러 경찰서까지 갈 필요도 없겠습니다. 이걸로 됐습니다."
경찰관은 말을 마치고 조니 쪽을 돌아보았다.
"좋아, 돌아가라구. 어머니는 집에 계신가?"
"모르겠어요."
기운을 차렸는지 조니는 로라에게 미소를 던졌다.
"고맙습니다. 다음엔 제가 도와드릴게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길 빌겠어."
조니는 한 번 히죽 웃더니 경찰관 뒤를 따라 사라졌다.
"도망친 두 녀석의 특징을 알고 있지?"
찰스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알고 있어요, 특히 나랑 부딪쳤던 아이는... 경찰관도 일부러 붙잡지 않았던 것 같아요. 조니에게 보복할까봐 그런 거겠죠. 조그만 마을에선 다 그렇다니까."
"그렇소. 아무튼 밤엔 나돌아 다니지 않는 편이 좋을 거요. 로라가 그 녀석을 얼굴을 알 정도면 그 녀석들도 로라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구.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로라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더 이상 볼일이 없으면 이제 그만 돌아가죠."
"진 생각이 간절한 모양이로군?"
실은 몸이 솜처럼 늘어진데다 다친 팔꿈치가 욱신욱신 쑤셔 와서였지만 찰스를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네, 그래요. 그런데 당신 팔 좀 빌려준다면 고맙겠군요."
"로라에게 무엇인가 해주고 싶군. 무엇이 좋을까?"
"집에 돌아가는 것."
"그런 의미가 아니오. 당신은 굉장히 용기가 있는 행동을 했소. 함께 있는 나까지 으쓱해지던 걸?"
로라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걸 느꼈다.
"고마워요, 이제 됐으니 어서 데리고 가주세요. 우물쭈물하고 있다가는 감격해서 어린애처럼 울어 버리고 말겠어요."
찰스는 정중하게 팔을 내밀었고 로라는 그 팔을 잡은 다음 지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손가락을 통해 그의 피부의 온기가 전해 온다. 이윽고 지프에 올라타자 겨우 긴장이 풀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시트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지프가 자갈길 커브를 돌아가고 있었다.
"얼른 돌아가서 자고 싶어요."
찰스는 아무 말 없이 차를 왼쪽으로 꺾어서 별장 앞에다 세웠다. 그가 문을 열어 주기에 내리려고 하는데 왼쪽 발에 통증이 온다.
"앗!"
"어떻게 된 거요?"
찰스가 큰소리로 외쳤다.
"정강이를 챈 것 같아요.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찰스. 죽을 병은 아니니까요."
"안에까지 같이 들어갑시다. 열쇠는?"
"화났어요, 당신?"
찰스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로라에 대해서 화난 게 아니오. 나 자신에 대해 화가 나는 거라구. 당신 혼자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어요. 안 그래요?"
"아냐, 역시 내가 바보였어."
"죄책감 느낄 필요는 전혀 없어요, 찰스. 당신은 신이 아니라구요."
그의 입 가장자리에 엷은 웃음이 떠오른다.
"신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소."
"그렇다면 전지전능하지 않으니까 죄책감 느낄 필요도 없는 일이죠, 뭐."
"로라,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오. 나를...."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당신을? 당신을 어떻게 한다는 건가요?"
"보통 사람으로 취급해 준다구."
"어머, 그럼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닌가요?"
"글쎄, 그걸 분명하게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우리 아버지 얘기를 한 적이 있었지? 내가 자라났던 환경은 보통과는 좀 달랐어."
그러다 찰스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안색이 좋지 않군, 로라."
"다리가 아파요. 열쇠는 백 속에 들어 있어요."
찰스는 얼른 열쇠를 찾아낸 다음 "여기서 기다려요."하고 명령하고는 문을 열러 갔다. 다시 돌아온 그는 로라를 번쩍 안아들고 걷기 시작했다.
"정말 힘도 좋군요."
로라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어깨에 볼을 기댔다. 키스가 장난삼아 안아 주었던 적은 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강인한 팔에 안겨 본 경험은 없다. 이 흐뭇한 기분! 너무너무 행복한 기분이다.
"당신 방은 어디오?"
"제 일 안쪽이에요."
찰스는 발로 문을 열고 로라를 침대에 눕혔다.
"자, 아무 생각 말고 푹 쉬도록 해요."
"이제 다 나은 것 같아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구요."
"자자, 잔소리는 그만두고 내 말을 듣도록. 그러잖으면 혼내 주겠어."
"설마 폭력을 휘두를 생각은 아니겠죠? 당신은 신사니까...."
로라는 속눈썹을 깜박였다. 그러나 찰스는 그 말은 들은 척도 않는다.
"바지를 벗어봐요."
"안돼요, 아파서."
"아파도 좀 참고 살살 벗어 봐요. 아무리 신사라 하더라도 상처는 살펴봐야 할 게 아닌가?"
"아버지 같은 소리 말라구요. 멍만 들었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어. 자, 시키는 대로나 해요, 얼른."
"말 안 들으면 종아릴 때릴 건가요?"
"고집도 보통 센 게 아니로군."
"당신은 뭐든 시키는 대로 하는 여자가 좋은가요? 그렇다면 난 불합격이군요."
"난 이 방을 나간 다음 정확히 5분 후에 다시 돌아올 거요. 그때까지 다리를 내놓고 기다리도록. 난 당신 다리의 상처만 확인하고는 금방 돌아갈 거요. 알겠소?"
"어쨌든 하라는 대로는 하겠지만 그건 결코 당신 말에 복종하는 뜻에서 그러는 건 아니라구요. 그 점 오해 말라구요."
그는 빙긋이 웃고는 말했다.
"어쨌든 당신은 불합격이 아니오."
그는 방에서 나가 조용히 문을 닫아 주었다. 로라는 베개 밑에서 잠옷을 꺼내들고 발을 질질 끌면서 옷장 앞으로 가서 가운을 꺼냈다. 모두 면에다 꽃무늬 수가 놓인 것으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것들이다. 레이스와 리본이 달려 있어서 보기에도 귀엽다. 좀 더 세련된 생활이 몸에 뱄더라면 좋았을 걸. 프랑스제의 비단 잠옷을 입고 신사로 자칭하는 찰스를 어리등절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
정신차려, 로라 워커! 로라는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를 난폭하게 의자 위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잠옷을 머리로부터 뒤집어썼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다리에 눈길을 주니 무릎에서 발목까지 사이에 서너 군데나 빨갛게 부어올라 있고 더러는 벗겨진 곳도 있다. 걷어챈 것은 분명 한 번만이 아닌 게 확실하다. 빨개진 부위는 내일쯤이면 퍼렇게 변할 것이다.
노크 소리에 얼른 가운을 잡는 순간 찰스가 들어왔다. 무명 잠옷은 조금도 섹시하지 않지만 어깨와 팔이 드러나 있고 천은 얇다. 스탠드 불빛을 등지고 있는 지금 얇은 천을 통해 몸의 곡선이 모두 비쳐 보일 게 틀림없다.
"정말 신사라면 들어오라고 할 때까진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앗차! 이렇게 심한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내가 신경이 좀 날카로워졌나 봐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야 성적 욕구불만 때문일 수도 있지. 아닌가?"
로라는 어이없다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는 더듬더듬 말했다.
"무, 무슨 말을... 그, 그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게 잘못된 건 아니오, 로라. 인간에겐 누구나 그런 심리가 있으니까."
로라는 가운을 잡은 채로 멍하니 서 있다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난 바트하고는 정신적인 교제밖에 하지 않았어요."
"그럼 다시 한번 더 말해 두겠는데, 결혼은 하지 말도록."
찰스는 스스럼없이 말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는 아녜요. 대학시절에 경험이 있었어요. 그 이후론 한 번도 없지만...."
찰스는 아직도 문 앞에 선 채로 어색하게 물어 왔다.
"경험이 있다구...? 그래, 기분이 좋았었나?"
"글쎄요... 물론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지만 책에서 읽은 것처럼 그렇게 멋진 경험은 아니었어요."
"그랬었군. 그러니까 그 밖의 다른 남성과는 깊은 교제를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하루종일 3명의 틴에이저를 돌보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당신이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얘기를 했으니 나도 정직하게 말하지. 난 로라와 함께 침대로 들어가고 싶어. 그러나 참기로 하겠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로라가 안아달라고 해도 난 거절할 생각이야. 그 이유는 묻지 말라구. 지금은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요... ."
로라는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어디 상처 좀 봅시다."
찰스는 로라 곁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목에 손을 댔다.
"이런! 상처가 심하잖아!"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는 찰스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그의 품안에 안겨 버리고만 싶다. 속마음이 얼굴에까지 나타났을까? 그는 약간 흠칫하더니 얼른 손을 떼고 일어섰다.
"이제 돌아가는 편이 낫겠어. 멍든 데는 냉찜질을 하는 게 좋을 거요. 내일 아침 상태를 보러 오겠소. 그럼 안녕?"
"안녕, 찰스...."
그는 방에서 나가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전화가 통하면 좋을 텐데... 당신 혼자 이곳에 있을 걸 생각하니 몹시 걱정이 되는군."
로라 역시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그녀는 짐짓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없어요. 좀 지친 것뿐이에요. 아침까지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어쨌든 난 당신 가까이에 있소."
그는 로라의 눈을 응시했다.
"한 달이 될 때까지 우리의 관계를 분명히 해두는 게 좋을 것 같군."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좋아요."
로라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까지는 나 역시 개인적인 얘기는 삼가야지, 1백만 달러도 물론이고...
"그럼 내일...."
그는 손을 들어 몇 번 흔들고는 사라졌다.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거실을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리고 현관문이 갑자기 집안이 텅 빈 듯하다. 온몸에서 기운이 쑥 빠져나가며 그녀는 침대에 주저앉고 말았다.
5
수평선 저쪽에서 해가 떠오르고 새가 지저귄다. 평소 수앤을 학교에 보내던 시간이 지났건만 로라는 아직 자고 있다. 그뿐 아니라 바깥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발소리가 다가와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찰스는 12시간 전과 마찬가지로 침실 입구에 서서 로라를 지켜보았다. 베개에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 가냘픈 팔, 가볍게 오므린 손가락, 조용한 숨소리...
그때 갑자기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깜짝 놀라서 눈을 뜬 로라의 귀에 두 번째 벨 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무슨 소리지? 저기 서 있는 사람은 찰스가 아닌가? 몸을 움직이자 여기저기가 마구 쑤신다. 통증을 간신히 참으며 침대에서 내려섰을 때 다시 벨이 울렸다. 찰스는 당황한 얼굴로 입구에 서 있다. 로라는 잰걸음으로 그의 옆을 지나 전화기 있는 데로 달려갔다.
"여기는 전화국입니다."
여자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댁의 전화는 지금부터 통화할 수 있습니다. 요금은 오늘 분부터 계산되구요. 잘 부탁합니다."
전화가 끊겼다. 로라는 여전히 잠이 덜 깬 상태로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리를 내려다보니 멍든 데가 보라색으로 변해 있고, 벽에 부딪쳤던 팔꿈치도 몹시 아프다.
"찰스, 미안하지만 물을 끓여서 커피를 좀 진하게 타다 주지 않겠어요?"
"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찰스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단, 아침인사로 키스를 먼저 해야 한다구."
그는 맨발이었고 몸에 꼭 끼는 셔츠와 짧은 쇼트 팬티만 걸치고 있다. 로라 역시 잠옷만 입고 있다. 도발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결코 엄격한 차림도 아니다.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두운 골목에는 겁없이 뛰어든 아가씨가 키스하는 건 무서운가?"
"어두운 골목에 뛰어드는 것보다 당신 옆에 있는 게 더 위험한 걸요?"
"거, 반가운 소리로군. 위험을 느낀다는 건 날 남자로 생각한다는 증거지, 하지만 키스 한 번 못하다니 그건 너무한데?"
로라는 갑자기 대답이 궁해졌다.
"키스하기 전에 커피가 마시고 싶어요."
"안돼! 내 요구부터 들어주지 않으면 난 여기서 꼼짝도 안할 거요."
"할 수 없군요. 내가 졌어요."
로라는 얼굴을 들고 눈을 감았다. 1초, 2초... 그때 갑자기 찰스의 손이 자신의 손목을 잡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찰스가 가까이 다가서는 듯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잠시 후 그의 손이 천천히 어깨 위로 올라갔다.
"키스한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되면 약속이 달라져요."
"진짜는 지금부터야. 몸을 긴장시키지 말라구."
찰스의 손이 등을 쓰다듬으며 허리를 껴안는다. 로라의 가슴에 그의 실팍한 가슴의 감촉이 전해진다. 찰스 역시 냉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입술이 닿자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로라를 포옹했다. 보드라운 몸을 구석구석까지 기억해 두려는 듯 그의 손은 온몸을 더듬어 나갔다. 한편 뜨거운 입술에선 정열이 전해져 오고...
몸속에서 격렬한 욕구가 용솟음치자 로라는 자신을 잊고 찰스에게 안겼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지만 로라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다시 한번 벨이 울렸을 때 찰스가 고개를 쳐들며 손을 놓았다. 로라는 비틀거리며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전화국입니다. 아까 잊었습니다만 전화번호부를 보낼까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집에 있으니까요."
"그러십니까? 실례했습니다."
수화기를 놓고 로라는 벽에 기대 서서 찰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회색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한 가지는 분명해졌소, 로라. 우리는 지금 똑같은 걸 느끼고 있소. 로라를 안고 싶어. 지금 당장...."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난 다른 사람과의 결혼문제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이곳에 온 거라구요."
"난 당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곤 생각지 않소. 서둘러서 결혼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구."
로라는 오싹 몸을 떨었다.
"옷을 갈아입고 오겠어요. 커피는 어떻게 됐나요?"
"로라, 내가 너무했다고 생각하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 있는 로라의 얼굴을 살폈다.
"내가 나빴소. 다시는 강요하지 않겠어. 무리하지 않고 기다리지. 언젠가는 당신을 안을 수 있을 때가 오겠지."
로라는 뭐라도 집어들고 벽에다 힘껏 내팽개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울고만 싶었다.
"샤워하고 올게요. 나올 때까지 커피를 끓여 주세요."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들었어요. 그러나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걸요."
로라는 힘껏 가슴을 펴고 방에서 나갔다. 샤워를 하니 어느 정도 기분이 가라앉는다. 진 바지와 긴 소매 블라우스를 입은 로라는 젖은 머리를 위로 젖히면서 욕실에서 나왔다. 주방에는 커피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마워요, 찰스."
"토스트를 만들까 했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저기 찬장에 있는데...."
로라가 찬장 문을 열고 비닐봉지에 손을 뻗는 순간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조그마한 회색 동물이 귀퉁이로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온다.
"엄마!"
당황해서 물러서는 순간 로라는 찬장에 머리를 부딪치고는 주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로라!"
"쥐! 쥐가 있어요. 난 쥐를 제일 싫어한단 말예요. 어떻게 좀 해봐요, 찰스!"
찰스는 새파랗게 질려 있는 그녀는 아랑곳없이 크게 웃어댔다.
"찰스! 뭐가 우스워요!"
그러나 그는 점점 더 크게 웃기만 했다. 로라는 커피를 들고 주방 귀퉁이로 물러섰다.
"꽤 재미있기도 하겠네?"
찰스는 연신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고 참으면서 말했다.
"난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조그만 동물을 보고 기겁을 하다니! 당신도 여잔 여자인 모양이군."
"그럼 빨리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서 쥐나 잡아 주시죠. 웃을 일이 아니예요."
찰스가 찬장 속을 살펴보았지만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없는데? 아무것도 없어."
"어딘가 숨어 있을 거예요."
"그럼 쥐덫을 놓을까?"
"싫어요, 그건 너무 잔인하다구요. 쥐덫에 걸린 쥐를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우리 집에 가면 사냥총이 있는데...."
"놀리지 마세요. 제일 좋은 방법은 쥐꼬리를 잡고 밖으로 집어던지는 거예요."
"그럼 금방 다시 돌아올 걸?"
"참, 그렇겠군요."
로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다이어트를 하게 됐군요. 뭐가 먹고 싶어도 무서워서 찬장을 열 수 없을 테니까. 쥐가 빵에 입을 대지는 않았을까요?"
찰스는 빵 봉지를 끄집어냈다.
"무사한 것 같군. 토스트 만들까?"
토스트와 잼을 가지고 두 사람은 창가에 있는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서 한 무리의 나무들과 숲이 마치 작은 세계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때마침 갈매기가 시계 속으로 날아왔다가 사라졌고 사방은 다시 조용해졌다. 은은한 파도 소리만이 귓가를 적신다.
커피를 다 마셨을 때 찰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군. 난 이런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 오늘밤에 같이 식사하지 않겠소? 직접 우리 손으로 만든 요리로 말이오."
"당신 집에서? 아니면 여기서?"
"우리 집에서 하는 거요. 쥐도 없으니까 안심하라구. 잠시 후에 난 광산촌으로 편지를 부치러 나갈 거요. 그때 고기도 좀 사가지고 오겠소. 그 동안 당신은 좀 쉬고 있으라구. 공부를 너무 많이 하지는 말구."
그는 일어서서 로라의 볼에 키스를 하고 돌아갔다. 잠시 후 로라는 무심히 안개에 젖은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유기화학 책을 집어 들었다. 억지로 찰스의 영상을 지워 버리려 애쓰며 유기화학의 공식에 열중하려 했다.
집중력에 관한 한 옛날부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3시간 동안 무려 4장이나 끝냈다. 그러고 보니 시장기가 든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창가에 선 채로 먹고 있자니 밖에 나가고 싶어졌다. 부드러운 회색빛 색조 속에 떠 있는 경치가 묘하게 마음을 끈다.
고무장화와 잠바를 걸치고 집을 나서자마자 평소와는 달리 나무의 싱그러운 냄새와 바다 향기가 코를 찔렀다. 틀림없이 안개 때문이리라. 한참을 걷다 보니 이윽고 별장은 시계에서 사라지고 눈앞에는 모래밭이 펼쳐진다. 그러나 수평선은 보이질 않는다.
로라는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넣고 파도치는 바닷가를 천천히 걸었다. 마침 썰물 때라 그녀가 걷는 뒤로 발자국이 남는다. 몇 발짝 걷다가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또 하나의 다른 발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사슴이다! 사슴의 발자국은 그녀가 걷고 있는 방향과 똑같은 쪽으로 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귀를 곤두세워 봐도 파도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하지 않는다.
발자국을 따라가면 사슴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안고 로라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자국은 바위가 있는 데서 끊겼다가 그 앞의 초지를 지나 늪으로 이어졌다가 다시 없어졌다. 역시 사슴과 만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왔던 길을 자신의 발자국을 더듬으며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로라는 집에 돌아가기 전에 찰스의 집에 들러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이 즐거웠던 경험을 얘기하고 싶다.
별장에 도착하여 문을 노크했을 때 찰스는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에는 철망밖에 없었으므로 그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들려왔다. 누군가와 전화로 통화를 하고 있는 듯했고, 노크 소리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이대로 서서 엿듣기는 싫다. 그녀는 잠시 후에 다시 오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찰스의 말투가 보통 때와는 현저하게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는 몹시 흥분해 있는 듯하고 상대방에게 얘기할 틈도 주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패트슨이 뭐라고 하든 들을 필요가 없어! 매드슨의 주를 25O만 달러에 사다니, 미쳤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온다.
"패트슨은 해고야! 안 되겠다구! 당장 해고야! 재고할 여지도 없어! 우리는 거기서 손해 본 만큼 전력을 기울여야 해, 애트코의 주식을 일부 사더라도... 4백만 달러라면...."
한쪽 손엔 수화기를 들고 또 한쪽 손엔 전화기를 든 찰스가 침실에서 나타나더니 금방 로라를 알아보고 말을 끊었다. 5m 이상이나 떨어져 있건만 로라는 그의 격노한 표정에 기가 찔려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의 손은 벌써 송화기를 막고 있다.
"거기서 뭘하고 있는 거요?"
로라는 모기 소리만 하게 대답했다.
"노크를 했었지만... 못 들었어요?"
"언제 왔소?"
"지금 막 왔어요 나...."
"남의 말을 엿듣다니, 당신답지 않군."
"어머, 미안해요. 일부러 엿듣고 있었던 건 아녜요."
"돌아가요! 지금은 얘기할 새가 없어. 용건이 있거든 나중에 다시 오도록."
찰스는 딱딱한 말투로 한 마디 내뱉고는 등을 홱 돌려 버렸다. 로라는 휘청거리며 현관 앞의 계단을 내려갔다. 가급적 찰스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다. 어쩌면 그렇게까지 심한 말을...!
정신없이 달음박질해서 간 바닷가에는 아직도 사슴의 발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사슴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야성인 사슴은 인간과는 공존할 수가 없다. 인간의 세계에 왔다가는 금방 사냥꾼의 총에 맞거나 자동차에 치거나 할 테니까. 인간은 이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가! 눈에 피고 손에 잡히는 것은 모조리 파괴하고 마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는 동안 어느 사이엔가 갑(甲)끝까지 왔다. 바위가 바다로 돌출해 일고 파도가 철썩철썩 소리를 내며 바위 아래서 소용돌이를 친다. 바위 위에 앉아서 내려다보니 물속에서 흔들리는 해조류가 마치 여자의 머리채처럼 보였다.
한참 동안 무릎을 감싸 안고 앉아 있으려니 겨우 마음의 동요가 가라앉는다. 로라는 차근히 생각을 정리해 보려 했다. 찰스는 남이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약간은 알아낸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무엇 한가지 제대로 알아낸 게 없다. 아까는 왜 그토록 화를 냈었는지 그 이유조차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투성이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들은 게 있지만 어머니나 형제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다.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뭘까? 그가 자라난 곳은? 이처럼 장기간의 휴가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은 대체 무엇일까? 직업에 대해서 물으면 화를 내는 이유는? 굉장한 금액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는데 화를 낸 것은 그 때문이었나? 어쩌면 뭔가 나쁜 짓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도 몰라. 주식의 불법매매라든가 탈세라든가... 아냐, 찰스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야.
머리도 옷도 안개에 젖어서 한기가 든다. 집으로 돌아가자. 오늘은 더 이상 찰스를 만나고 싶지가 않다. 저녁식사 약속도 취소해야겠다. 스테이크는 자기 혼자서나 먹으라지 뭐. 두 사람분의 고기를 다 먹고 목이 메든 말든 내가 알게 뭐람!
별장에 가까워질수록 찰스가 먼저 와서 기다리는 건 아닐까 불안해졌지만 집 근처에 그의 모습은 없었다. 대강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로라는 백과 소설책을 챙긴 다음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차를 타고 고속도로로 나와서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안개에 싸인 길을 따라 작은 어촌이 있었는데 부두에는 새우잡이 그물이 쌓여 있다. 이 지방의 자연은 험하기 그지없고, 이곳 주민들은 300년 전과 마찬가지로 힘든 노동에 의해 들과 바다에서 그날그날의 먹을 것을 구하고 있다. 4, 5km 앞에는 프랑스 군의 요새였던 루이스부르가 있다. 그곳에 가볼까 했지만 왠지 선뜻 내키지가 않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캐털론 수로로 나온 로라는 바위 위를 나는 도요새와 안개 속에서 소리도 없이 모습을 나타낸 청해오라기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황혼이 깔리기 시작한다. 회색 안개 대신 회색 어둠이 사방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온화한 자연의 모습들은 찰스에게 상처입은 마음을 어느 정도 치유해 주는 것 같다.
자동차가 있는 데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해도 이미 지고 말았다. 시장기는 들지만 별장으로 돌아가서 음식을 만들 생각은 없다. 애니의 레스토랑으로 가자. 오늘밤은 명랑한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게 기분전환엔 제일 좋을 것 같다.
레스토랑에 도착해서는 혹시 찰스의 차가 있을까 해서 휘둘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찰스의 지프는 눈에 띄지 않는다. 가게 안에는 10명 정도의 손님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앉아 있었다. 로라는 한쪽 구석 테이블에 앉아서 전에 보았던 웨이트리스에게 스파게티와 샐러드를 주문하고는 책을 펼쳤다.
스파게티는 새콤하면서도 콕 쏘는 맛이 있어 아주 훌륭했다. 전과 마찬가지로 따뜻한 롤빵도 함께 나왔는데 두 개 모두 먹어치웠다. 로라는 열심히 포크를 입으로 가져가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신없이 책에 열중해 있는데 누군가가 건너편에서 의자를 빼내며 앉는다. 하는 수 없이 눈을 드는 순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앉지 말아요!"
찰스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3시간 동안이나 당신을 돌아다녔어. 함께 식사하기로 약속했었잖아."
"난 소리 지르며 화를 내는 사람과는 같이 식사하기 싫어요. 우연히 통화할 때 간 걸 가지고 엿들었다니요? 실례지만 나가줘요! 혼자 조용히 식사하고 싶으니까 방해하지 말아줘요!"
"나도 이 가게에 들어올 권리는 있다구. 그리고 실은 사과하러 온 거야."
"당신이 그곳에 꼭 앉겠다면 내가 다른 테이블로 옮기겠어요."
"맘대로 하라지. 몇 번을 옮겨도 난 끝까지 따라갈 거야. 누가 먼저 지치나 보자구."
로라는 백을 집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죠."
찰스의 손이 로라의 손목을 잡았다.
"백을 거기에 놔. 얘기가 끝날 때까진 여기서...."
그때 마침 아치가 비틀거리며 오더니 그 옆에 앉는다.
"어이, 어때?"
오늘은 럼주 냄새가 난다. 로라는 찰스에게 잡혀 있는 손을 빼고 포크로 스파게티를 찍어서 얼른 입속에 넣었다. 아치의 상대는 찰스에게 맡기도록 하자. 찰스는 아치에게 얘기를 걸었다.
"아치, 나중에 데려다 줄 테니 저기 가서 기다리라구. 지금은 이 사람과 잠시 할 얘기가 있어."
"우린 지금 한창 싸움을 하는 중이라구요. 아치, 이곳에 있어도 좋아요. 커피를 시켜드릴게요."
찰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로라,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당신을 유괴하는 한이 있어도 얘기는 나눠야겠어."
로라는 표정을 굳히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요, 마침내 당신다운 짓을 하려는 거군요?"
웨이트리스가 다가왔다.
"디저트를 가져올까요?"
"네, 뭐가 있죠?"
"애플파이, 체리파이, 레몬파이, 초콜릿, 푸딩, 그리고 특제 아이스크림도 있습니다."
"그럼 레몬파이와 커피를 줘요. 그리고."
로라는 아치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도 커피 한 잔 부탁해요. 나머지 한 사람은 곧 돌아간다니까 안 가져와도 상관없구요."
"아냐, 나도 커피를 달라구. 애플파이와 아이스크림도."
"그렇다면 다른 테이블로 가 드시도록...."
웨이트리스가 주문서를 집어들려고 했다. 찰스는 공손하게 말을 건넸다.
"커피 석 잔. 레몬파이 하나, 애플파이와 아이스크림 하나씩, 전부 이 테이블로 가져와요."
잰걸음으로 돌아가는 웨이트리스를 보면서 찰스는 입을 열었다.
"사과가 좀 늦었지만 어쩔 수 없었어. 3시간씩이나 기다렸으니까."
"그 얘기라면 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안돼. 싫어도 들어야 한다구."
"어머 또 싸움을 하는 거예요?"
저음의 여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체쿠스, 귀여운 아가씨를 너무 놀리지 말아요."
"놀리다니? 난 지금 사과하는 거야, 애니."
"사과를 하려면 좀 공손하게 굴 수 없어요? 당신 말투로 봐선 지금 당장에라도 덤벼들 듯하군요."
"설교는 이제 그만. 그리고 체쿠스라고 부르는 건 싫다니까."
애니는 찰스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치를 돌아보았다.
"저어 아치, 당신 테이블로 돌아가요. 이 사람들은 아주 조용히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니까."
마침 웨이트리스가 디저트를 가지고 왔고, 애니는 커피를 한 잔 집어 들고는 구석 쪽 테이블로 아치를 쫓았다.
"이제 됐어요. 나중에 아치를 데려다 줘요, 체쿠스."
"좋소."
아치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 뭐라고 투덜댄다.
"사랑에는 괴로움도 따르는 법이지. 만사가 그렇게 쉽게만 되는 건 아니야."
"꼭 그렇지만은 않죠."
애니는 로라에게 윙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럼 편히 쉬었다 가요."
찰스는 이상한 것을 보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애플파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로라는 레몬파이를 한입 베어 물었다.
"맛있네요? 당신 건 어때요?"
"로라, 진지하게 들어줘요. 아까는 정말 내가 나빴소."
진지한 그의 말투에 로라는 눈물이 글썽해진다.
"난 엿듣고 싶은 생각은 전연 없었어요. 우연히 당신이 전화하는 도중에 갔을 뿐이라구요. 당신이 그처럼 화를 내다니 정말 뜻밖이었어요."
찰스는 접시를 옆으로 밀어 놓으며 로라의 손을 잡았다.
"알고 있소. 모두 내가 나빴다구. 당신이 그러는 것도 당연해. 물론 내가 화를 낸 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는 해. 그러나 지금은 자세한 얘기를 할 수가 없소. 하지만 가까운 장래에 얘기해 주겠어. 그때까지는 날 신용해 주길 바라오. 아까의 무례도 용서해 줘요."
"법을 위반한 건 아니겠죠?"
찰스는 어리둥절해하며 반문했다.
"법을 위반하다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날 보자마자 나쁜 짓 하다 들킨 사람처럼 화를 내니, 범법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더라구요!"
"아니, 법을 위반하지는 않았소. 그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구."
숨기는 이유가 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은 신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아까 당신은 마치 딴사람 같았다구요."
"당신이 이곳을 떠나기 전까진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을 거요.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처럼 들릴는지 모르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찰스는 멍청한 표정으로 커피에 설탕을 넣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다른 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지금은 그저 용서해 달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군."
"그렇게 설탕을 많이 넣으면 달아서 못 먹어요."
"괜찮아. 설탕처럼 나도 달콤한 인간이 될 수 있다면 좋겠군."
로라는 눈을 내리깔고 다시 파이를 먹기 시작했다. 신용해 달라고 그는 말했다. 용서해 달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간단히 될 일은 아니다.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난 때로 지나치게 심술궂은 때가 있지. 로라가 아직도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녜요. 충격을 받았을 뿐이라구요."
"그럼 잘됐군!"
찰스는 허리를 굽혀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는 로라에게 키스를 했다. 한쪽 구석에 있던 아치가 손뼉을 친다. 로라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남아 있는 파이를 옆으로 치우고 커피를 마셨다. 뭔가 이 일과는 관계없는 화제를 끄집어내야 할 것 같다.
"오늘은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래? 그런데 아까는 뭣하러 왔었소? 커피라도 마시러 왔었던가? 아니면 다른 용건이 있었나?"
로라는 환상의 사슴 얘기를 했다. 모래밭에 남겨져 있던 발자국, 가까이에 어떤 다른 동물이 있으리라는 기대와 설렘... 얘기를 하는 동안 자연히 기분이 풀어졌다.
"사슴을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 얘기를 하러 왔었군?"
"그래요,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다구요."
"그런데 난 말도 꺼내기 전에 당신을 내쫓았단 말이로군?"
찰스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로라, 얼른 아치를 데려다 주고 오겠소. 집으로 가는 길에 당신 별장에 잠시 들러도 괜찮을까?"
잠시 들른다구? 거짓말! 오게 되면 잠시가 아니라 오래 눌러붙어 있을 게 틀림없어. 그리고 키스를 할 테지. 키스를 한 다음에는 둘이서 침대에 들어가자고 할 거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오늘밤에는 그러고 싶지 않아! 아직도 아까 화를 냈던 찰스의 모습이 생생하다.
"오늘은 오지 말아요. 몹시 피곤하거든요."
"나 때문에 놀라서 그러는 거 아니오? 정말 미안해,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구."
"맞아요, 몹시 놀랐었다구요."
찰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난 매일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돼. 도저히 하루라도 연기할 수는 없는 일이오. 시간이 나면 농구도 가르쳐야 하고... 그러나 모레쯤엔 시간이 날 것 같소. 어디 먼 데로 놀러가지 않겠소? 저 북쪽에라도.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하일랜드 공원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는 거요. 어떻소?"
로라는 어색한 웃음을 띠웠다.
"네, 좋아요. 하지만...."
"좋아, 결정했어. 아침 일찍 데리러 가겠소. 저녁때 입을 드레스나 준비하라구. 그럼 난 아치를 데려다 줘야겠군."
찰스는 의자를 밀어내며 일어섰다. 애니는 어디서 엿보고 있었던 듯, 두 사람이 카운터 쪽으로 향하자 바람처럼 조리실 문 쪽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계산기를 누르며 의미 있는 시선으로 말을 걸어왔다.
"아직도 싸움 중인가요? 아니면 화해를 한 건가?"
"애니, 싸움은 끝났어."
찰스가 대답했다.
"괜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구."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라구요. 당연한 걱정이지. 당신은 우리 집 최고의 단골손님 아녜요, 체쿠스."
애니는 유쾌하게 웃으며 로라에게 거스름돈을 내주었다. 그리고 야릇한 윙크를 했다.
"너무 쉽게 함락당하지 말아요."
로라는 얼굴을 붉히며 밖으로 나왔다. 찰스와 아치가 뒤따라서 나온다. 로라는 자기 차가 서 있는 곳으로 또박또박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모레예요, 찰스! 안녕, 아치."
6
다음날 로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찰스를 바라보며 서먹서먹해진 분위기를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찰스는 간단하게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 머리만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책을 펼쳐 놓는 로라는 화학공부에 몰두했다. 자신의 엉망진창이 된 머릿속에 비하여 화학공식은 너무나도 질서정연하다.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조카들은 모두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바닷가를 걸으면서, 흘러가는 구름과 새하얀 파도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찰스가 머리에 떠오른다. 화를 내고 있는 찰스, 웃고 있는 찰스... 늘씬한 몸매, 달콤하게 녹아드는 키스.
도저히 그의 존재를 자신의 머릿속에서 밀어낼래야 밀어낼 수가 없다. 밤에 잠을 청할 때는 태풍이 몰려와서 피크닉 가기로 한 건 취소해야 될 것 같았지만 아침에 눈을 떠보니 새들이 지저귀고 밝은 햇살이 방안에 스며들고 있다. 어쩜 이것도 운명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는 수 없다. 가급적 그와 부딪치지 않는 하루를 보낼 수밖에.
다리에 멍들었던 곳은 이제 노랑과 보라와 핑크색의 모자이크가 형성돼 버렸기 때문에 하얀 면양말을 신어 가릴 수밖에 없었다. 위에는 밝은 핑크 색 블라우스를 입고, 옷자락을 가슴 아래서 붙잡아맸다. 데리러 온 찰스는 휘파람을 불었다.
기분이 아주 좋다. 좀 거드름을 피고 싶어진다.
"쇼트 팬티를 입으려다가 그만두었어요. 당신이 폭행범으로 오인 받아 체포당하게 되면 불쌍할 테니까요."
찰스는 바지에 시선을 던졌다.
"그 모습으로는 당신이 풍기문란 죄로 체포당하게 되지나 않을까?"
"어머, 그처럼 야하진 않아요."
"하지만 내 혈압은 올라가는 걸?"
그는 빙그레 웃었다.
"안녕, 로라. 키스를 하면... 그대로 침실로 직행하고 싶어지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키스를 했다. 가슴이 금방 콩콩 뛰며 터질 것만 같다. 찰스는 로라를 안고 한바퀴 빙그르 돌았다.
"날씨도 좋고, 매력적인 아가씨와 아름다운 곳으로 간다...! 근사하군! 기분 만점이야."
기분 좋아하는 그를 보니 로라도 마음이 밝아졌다. 오늘 일은 언제까지나 추억에 남을 좋은 날이 될 것이다. 시드니를 지나서 브래더 호수의 긴 다리를 지나 켈리 간 건너 쪽으로 드라이브를 했다. 그곳에서는 페리 호를 타고 세인트엔 만을 건넜다. 산들은 해면에서 수직으로 솟아 있고 머리 위에서는 이따금씩 제비갈매기가 울어댄다.
페리 호에서 내린 다음 북쪽으로 한 시간쯤 달려 하일랜드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습지와 관목지대의 경관, 호수에서는 송어 낚시를 즐길 수 있다.
찰스가 음식물을 가지고 왔으므로 두 사람은 폭포 옆에 있는 바위에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물보라가 살갗을 촉촉하게 적셔 주고 잠자리가 무지개 색깔의 날개를 반짝이며 양치 식물 잎 사이를 날아다닌다.
가족 동반으로 온 팀이 두 팀 있었는데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빈 깡통을 물속에 던지면서 놀고 있다. 깡통이 물속에서 불쑥 떠오를 때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찰스는 먹다 남은 것들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만 다른 데로 갈까?"
"찬성이에요. 이곳은 주위가 너무 산만하군요. 어디 조용한 데로 가요, 우리."
찰스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야. 자아, 바다로 가지."
오후에는 햇볕을 쬐면서 헤엄도 치고 둘이서 공던지기도 했다.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지만 찰스가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행동이 부자연스럽게 되고 만다. 그의 등에 선탠로션을 발라 주기도 하고, 손을 잡고 파도를 향해 뛰어들기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가버렸으면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찰스와 단둘이 돼 여름의 달콤한 공기 속에서 사랑을 나누고 싶다.
찰스는 이곳에 별장을 가지고 있는 친구에게 미리 연락을 취해 두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곳에서 샤워도 하고 옷도 갈아입을 수 있었다. 그의 친구인 피터와 다니엘은 소탈하고 붙임성이 있어서 금방 친하게 되었다.
더운물로 샤워를 하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로라는 정성을 들여서 화장을 하고, 꽃무늬 선드레스를 입은 다음, 하얀 레이스의 숄을 걸쳤다. 구두는 굽이 높은 샌들을 골랐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갈색 눈이 행복한 듯 반짝이고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거실로 들어가 보니 찰스는 아직도 아래층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샴페인을 마시면서 피터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로라는 은근슬쩍 물어 보았다.
"찰스와는 사귄 지 오래 됐나요?"
"17, 8년쯤 되죠. 고등학교와 대학교도 같이 다녔으니까... 졸업 후 찰스는 아버지 밑에서 일을 하기도 했고 외국엘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었죠. 2개월 전에 여름이 되면 이곳에 오겠다고 연락이 왔기에 기다리고 있던 중이랍니다."
더 물어 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너무 그러는 것도 속 들여다보이는 짓인 것 같아 그만두었다. 유감스럽지만 이쯤 해두기로 하자.
멋지고 가벼운 슈트로 몸을 감싼 찰스를 보니 침이 꼴깍 넘어갈 만큼 매력적이다. 맨 처음 그를 보았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환경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그의 재주는 마치 카멜레온 같다. 애니의 레스토랑이든,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장소든 그는 그 장소의 분위기에 어울리며 조금도 이질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식사를 하러 간 켈틱라지 호텔은 반도에 위치해 있었는데 건물 양쪽으로 바다가 보였다. 진토닉을 손에 든 로라는 술잔을 가볍게 입에 대보았다.
"당신에 대해선 아직 아무것도 물어 본 게 없어요. 아까 피터와 얘기하다가 생각이 난 건데...."
찰스는 럼주 뚜껑을 닫으며 가볍게 대답했다.
"그다지 얘기할 거리도 없소. 아버지는 원래 권력 휘두르기를 좋아하셨지. 난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아버지가 희망하는 대로 아버지 회사에서 3년 동안 근무했었어. 그런데 아무래도 맘이 맞지가 않는 거야.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혼자서 외국으로 떠났지. 자립을 위한 몸부림이었다고나 할까... 오는 가을부터는 다시 아버지를 도우러 갈까 생각하고 있소."
"형제는 없어요?"
"없소. 독자기 때문에 어깨가 무겁지."
"어머니는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는 분이지."
"어떤 집에서 자라났나요?"
조그마한 집이었을까? 아니면 대궐 같은 저택이었을까? 하지만 그것까지는 물을 수가 없었다.
"보통 집이었어."
찰스는 침착할 수가 없다는 듯 몸을 흔들어댔다.
"당신도 부모에 대한 얘기와 어렸을 때의 얘기를 들려주지 않았다구."
"어렸을 때는 행복했어요. 나 역시 혼자나 마찬가지였어요. 오빠 제임스하고는 19살 차이가 있었으니까요. 아버지는 조그마한 자동차 수리공장을 경영하셨죠. 아버지는 훌륭한 수리공이었기 때문에 단골손님이 많았어요. 내가 여의사가 되려고 했던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많았어요. 엔진을 수리하는 아버지를 지켜봐 오는 동안 난 인간의 질병을 고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는 지금도 공장을 가지고 계신가?"
"네, 하지만 이제 머지않아 은퇴하실 생각인 것 같아요. 벌써 70살이 가까우시거든요."
"어머니는 어떤 분이오?"
"생활력이 강하고. 그리고 유머와 감각도 상당하신 분이에요. 하지만 난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요."
"어디서 살고 계신데?"
"토론토."
찰스의 얼굴에는 한순간 불안한 그림자가 스쳐갔다. 그러나 로라는 술잔에 눈길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학도 집에서 다녔어요. 남자 친구들과 사귄 경험이 적었던 것도 그게 첫째 이유였죠.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완고하시거든요."
"하지만 대학시절에 남자 경험이 있었다고 했잖소?"
"법대생이었어요. 그는 아파트에 혼자서 살았죠. 아주 좋아했었는데 언제나 부모님께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서먹서먹했었어요. 그와 맺어지지 못한 건 아마 그 때문이었을 거예요."
웨이트리스가 생선요리를 가지고 왔다. 그녀가 남비를 내려놓자 찰스가 조용히 물었다.
"나와 그런 사이가 돼도 역시 부모에게 알리지 못하고 숨길 건가?"
로라는 깜짝 놀라며 뜨거운 수프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하필이면 왜 지금 그런 얘기를 묻는 거예요?"
"미안, 미안...."
찰스는 다시 한번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어때? 부모님께 얘기 안할 거야?"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야 생각해 볼 일 아니겠어요? 그런 걸 왜 자꾸 묻는 거죠?"
"아냐, 별로 다른 생각은 없어, 대답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로라는 화학을 공부했으니 자연계의 변화에는 민감하리라 생각하는데,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함께 있으면 우리 사이엔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지. 남녀관계가 생기는 것은 다 그러한 논리적 결과라구."
"논리적?"
"적절한 표현이 아니었던 것 같군. 내가 로라에 대해서 느끼는 것은 조금도 논리적이 아니니까."
"나에 대해서 어떤 것을 느끼는데요?"
"당신을 침대로 데리고 가고 싶어져. 마음이 들떠서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라구."
로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순수하게 정신적인 면에서만도 당신이 좋아. 아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구 알겠소, 로라? 로라가 망설이게 되는 그 기분은 나도 이해해요."
찰스는 약간 얼빠진 듯이 물었다.
"당신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난 참을 거야. 억지로 로라를 안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구."
찰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바트에게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그녀는 찰스에게도 해야 했다.
"저어... 난 당신에 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고 ...실은 그 이상한 변화에 대해선 나도 알아요. 그런 기분이 드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에요."
"나도 처음이라구."
"네? 약혼녀가 있었잖아요?"
"단지 돈 때문에 서로 맺어졌었을 뿐이야. 이상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구. 로라는 약혼자에 대해 어떤 기분이었지?"
"약혼자가 아니었다니까요. 그저 그냥 사귀던 친구였는데, 그것도 내가 외로왔기 때문에.. 조금도 이상한 감정 따위는 없었어요."
"좋아, 잠시 이성을 고수하기로 하자구. 그럼 일단 연인의 키스는 보류해야겠군."
찰스는 테이블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되겠소?"
"그렇게 하죠."
악수를 하자 언제나처럼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다.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지킬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수프가 식겠어."
로라는 스푼을 들어 수프를 저었다. 찰스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좋은 친구가 될 거라고도 했다. 또 침대에 데리고 가고 싶다고도 했다. 그런데도 아주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난 당신이 몇 살인지도 몰라요."
"응, 앞으로 얼마 안 있으면 31살이 될 거요."
"그럼 곧 생일이 돌아온다는 말예요? 언제죠?"
"다음 주 수요일."
"어머! 그럼 꼭 저녁식사를 하러 오세요."
찰스는 잠시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보다 같이 밖에 나가서 외식을 하지?"
"안돼요. 내가 요리를 할게요. 우리 집에선 키스와 수앤의 생일이면 언제나 파티를 한다구요. 대런은 파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잘 먹는 걸 만들어 주기만 하죠.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은 뭐죠?"
"생선요리. 생선이라면 뭐든지 좋아하지. 부모님 밑에 있을 때부터 생일잔치를 했었나?"
"그럼요."
로라는 잠시 얼굴이 흐려졌다.
"최근 4년 동안은 부모님을 찾아뵙지도 못했어요. 돈이 없었기 때문이죠. 시간도 없었지만...."
"돈이란 있으면 귀찮고 없으면 곤란하고...."
"맞아요. 제임스 오빠는 옛날부터 심장이 나빴기 때문에 보험에 들 수가 없었어요. 약간의 집과 주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꾸려 나갈 수 있었던 거예요."
1백만 달러의 복권이 당첨됐어도 함부로 쓰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찌들은 생활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수앤을 대학에 진학시키고, 키스는 음악공부를 시키고 당신 자신도 의학공부를 계속한다고 했는데, 그래 학비는 조달할 수 있나?"
로라는 잠시 주저했다.
"모르겠어요, 대부를 받을 수 없을 것 같기도 한데...."
당신에게 거짓말하는 건 미안하지만, 아직 돈에 대해서는 털어놓고 싶지가 않아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해 주었으면 하니까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 후의 대화는 책과 영화 따위의 화제가 대부분이었고,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따위의 화제는 없었다. 찰스가 아시아를 여행했을 때의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즐거운 한때였다.
밖으로 나오자 찰스는 두 사람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주변은 장미 향기가 가득했고 바다는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로맨스와 더불어 추억을 더듬기에 안성맞춤인 밤이다.
별장으로 돌아오자 찰스는 문 앞까지 데려다 주고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고마워, 로라, 즐거웠소. 그럼 내일 또...."
로라는 홀로 거실로 들어서서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다음날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마음부터 정했다. 오늘은 무엇보다도 우선 돈에 대한 일을 생각하도록 하자. 그래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한 뒤 재빨리 수첩과 연필을 들고 창가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제일 위에 1백만 달러라고 쓰고 그 밑으로 몇 개의 선을 그었다. 그리고는 잠시 종이를 응시한 채 생각에 잠겼다.
바트하고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찰스를 알게 된 후로 이런 생각은 더욱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토론토에서 의학을 공부하게 될 것이다. 단, 앞으로는 부모님 집에서 통학할 수는 없다. 4년 동안이나 자립하여 생활해 온 지금, 매사에 순종만 해야 하는 부모의 딸로 되돌아가기란 무리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토론토에 집을 마련해야 한다.
흰 종이의 제일 첫 번째 난은 아파트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비중이 큰 건 학비. 수앤과 키스를 위한 학비가 그 다음... 대런에게도 같은 금액을 주기로 하자. 그렇게 소원하던 자동차를 살 수 있도록 말이다. 그 다음은 기부금-교회 탑을 다시 칠하는 비용. 그리고 그밖엔...? 그렇다. 또 있다. 부모님께 여행하실 수 있도록 돈을 좀 드리자. 어머니는 전부터 겨울에 남쪽으로 여행을 하고 싶다고 하셨잖은가.
그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큰 돈을 쥔 이상 남을 위해서. 그리고 사회를 위해서도 도움이 돼야 한다. 일단 대략적인 안은 섰기 때문에 로라는 커피를 마시고 잠시 쉬었다. 어제와는 딴판으로 오늘은 아침부터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다. 이런 날에는 공부하는 것이 제일 좋다. 초콜렛칩 쿠키를 굽는 것도 좋을 것이고... 그녀는 곧 행동으로 들어갔다.
찰스가 문을 노크했을 때는 온 주방 안에 초콜릿과 쿠키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들어가도 괜찮소?"
주방으로 들어온 찰스는 쿠키를 보고는"맛있겠는 걸." 하고 한 마디 던졌다.
"혹시 냄새에 홀려서 온 거 아녜요? 어서 사양 말고 드세요."
그는 한 개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로라가 옆에 있으면 편리해서 좋단 말야."
"얌체! 여성의 영역은 주방에만 한한 게 아니라구요."
"그럼 또 어디지? 침실?"
"커피를 마시고 싶거든 직접 물을 끓이시도록, 여성을 멸시한 데 대한 벌이에요."
찰스는 주전자를 들고 천천히 창가로 갔다.
"광산촌에 볼일이 있는데 나가는 길에 뭐 사올 건 없소?"
"우유를 부탁해도 될까요? 우유가 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비오는 날엔 쇼핑하러 가는 것도 귀찮아요."
"그럴 테지. 어저께 외출하길 잘했어."
로라는 찬장 속에서 찻잔을 꺼내고 인스턴트커피를 넣은 다음 설탕을 티스푼으로 세 개를 한다. 찰스가 건너편에서 말을 던졌다.
"복권을 샀어? 맞기도 전에 어디에 쓸 건지부터 계산해 본 건가? 당신, 생각보다는 비현실적인 데가 있군."
로라는 하마터면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찰스는 1백만 달러라고 기입해 놓은 수첩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를 어쩐담?
"누구든 1백만 달러가 있으면 뭘할 것인지 꿈꿔 볼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하지만 로라는 꿈꾸는 공주라기보다는 행동파였어. 여기 써놓은 것을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1백만 달러를 어디에 쓰고 싶지?"
"학비와 집을 사는 데 쓰고 싶어요. 그리고 부모님께 세계 일주를 시켜 드리는 게 꿈이라구요."
"그 돈을 투자한다면 의사가 되지 않고도 먹고 살아갈 수 있을 거라구."
"돈 문제가 아녜요.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고 말고. 쿠키를 두어 개 더 먹어도 괜찮겠소?"
"어머, 마치 내 조카애 같네요. 좋아요, 실컷 드세요."
로라는 오븐 뚜껑을 열었다. 쿠키는 알맞게 구워졌다.
"비오는 날에는 쿠키를 굽는 게 아주 즐거워요. 겨울에는 빵도 잘 굽는다구요."
다행히 1백만 달러의 얘기는 이것으로 끝이 났고, 찰스는 키스도 해주지 않은 채 돌아갔다.
혼자 남게 되자 2시간 동안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한 로라는 점심식사를 한 다음, 다시 책을 집어들었다. 다행스럽게도 4년간의 공백이 있었지만 걱정한 것만큼 잊어먹지는 않았다. 시험과목은 생물학, 물리학, 화학, 수학, 그리고 영어인데, 물리학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려웠지만 다른 과목은 자신이 생겼다.
5시 반, 자갈길을 굴러오는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고, 우유를 든 찰스가 들어섰다.
"줄곧 공부만 하고 있었나?"
"네,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갔다구요."
"좀 쉬는 게 좋겠소. 비는 오지만 잠깐 걷지 않겠소?"
"그렇군요, 걷는 것도 좋겠어요...."
로라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로라, 그런 얼굴로 보지 말아요. 애써 결심한 것이 어디론지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구."
찰스는 로라의 어깨를 끌어안고 입술을 힘껏 포개왔다. 키스만 해도 왜 이렇게 멍청해진담? 로라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산책하자고 하지 않았어요?"
"참, 그랬었지. 빗속을 산책하자고 했었어."
찰스는 떨어지기가 싫다는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레인코트를 입고 장화를 신고 올게요."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이지 않으려고 로라는 얼른 침실로 도망쳤다. 두 사람은 노란색 우비를 뒤집어쓰고 바닷가로 나갔다. 사슴 발자국은 지워졌고 물방울 떨어진 자리만이 모래밭 위에 드문드문 패어 있을 뿐이다. 하늘도 바다도 모두 회색빛이고 수평선도 보이질 않는다.
차가운 빗방울이 시원하게 볼에 와 닿는다. 아무 부담 없는 얘기를 이렇게 나누며 걷자니 실로 기분이 좋다.
"나오기를 잘했어요. 상쾌한데요."
찰스는 로라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 화장기라곤 전혀 없는 소녀 같은 청순한 얼굴, 사람의 마음을 끄는 순진한 미소.
"로라와 만나게 돼 정말 다행이야. 지금까지 당신 같은 사람과는 만난 일이 없어."
"어머, 그래요?"
"로라는 정직하고 솔직한데다. 똑똑한 데가 있으며 용기도 있어. 그리고 책임감도 강하고...."
"어쩐지 어른이 된 것 같네요."
진지한 표정을 띠고 있던 찰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것뿐만은 아니야. 약간 토라지기를 잘하고 고집도 세지.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가슴이 설렐 만큼 예쁘고...."
"찰스, 난 평범한 인간이에요. 아버지는 자동차 수리공이고 오빠는 조그만 도시에서 일하던 은행가...."
"그런 것은 관계 없어.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로라와 만난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라. 그런데 로라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군. 이렇게 흘러가는 세월이 빠르니 7월 한 달이 금방 갈 것만 같아."
걷고 있는 속도와는 관계없이 가슴이 두근거린다. 농담이라도 해서 적당히 이 자리를 모면해야지...
"끝나는 것은 내 휴가뿐이잖아요? 당신은 더 쉴 수 있잖아요."
찰스는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모두 의식할 수 있을 만큼 로라의 어깨를 꽉 잡았다.
"난 진심을 털어놓고 있는 거야. 좀 더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을까?"
"안돼요, 1개월도 너무 길다구요."
"그럼 8월에 내가 당신 집으로 가도 괜찮겠어?"
로라는 무의식중에 몸을 뺀다.
"그 먼 곳까지? 무려 7시간이나 걸린다구요."
"핼리팩스까지 비행기로 갈 테니 그곳에서 만나면 어떨까?"
"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네요."
"날 집에 데리고 가고 싶진 않다는 말이로군."
바로 정곡을 찔렀다. 그가 그랜섬에 와서 1백만 달러의 사건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이다. 바트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청혼을 해온다면 환멸을 느끼게 될 게 아닌가.
"그, 그렇진 않지만 틴에이저들을 데리고 있기 때문에 난처해진단 말예요. 시끄러운 음악 소리는 물론이고 바쁘다 보니 어중간한 시간에 밥을 먹어야 하구... 사생활 따위는 생각도 못한다니까요."
"상관없소. 난 지금 당장에라도 조카들 모두와 만나고 싶단 말야."
"그렇다면 제가 핼리팩스로 데리고 가죠, 뭐."
"정직하다고 칭찬했었는데, 지금의 로라는 정직하지가 못하군. 뭔가를 숨기고 있소. 당신은. 내가 가는 것이 그렇게 난처한가? 당신은 지금까지 자기가 살고 있는 곳도 말하지 않았다구."
"그런 얘긴 하고 싶지 않아요. 걸으면서 다른 얘기해요, 우리. 옷이 젖어요."
"대답해 줄 때까지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을 거요. 숨기고 있는 비밀이 도대체 뭐요? 예의 그 변호사와 동거라도 하고 있나?"
"천만에! 손바닥만한 마을에서 그런 짓을 어떻게 해요? 더군다나 상대방에겐 어머니도 계신데...."
"그럼 왜 그러는 거요?"
그는 로라를 다그쳤다.
"내게 무슨 문제점이라도 있단 말이오?"
"천만에요! 당신에겐 아무 문제도 없어요."
"그럼 다락 속에 미치광이 아줌마가 숨어 있다든가, 찬장을 열면 해골이 나온다는가, 당신 맘대로 꾸며서라도 말해! 안하면 이곳에서 움직일 수 없을 테니...."
로라는 그에게 기대섰다.
"이러다간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고 말겠어요."
"쳇! 고집불통이로군."
찰스는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당신이야말로 고집이 세군요. 난 평소엔 고집도 안 부리고 화도 안 낸다구요."
"좋았어! 적어도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야."
"물론이에요. 관심 정도가 아녜요."
"만약 관심이 있다면 어디에 살고 있는지쯤은 가르쳐 줘야지 않겠어?"
"그렇겠죠. 찰스, 당신이 언젠가 지금은 사정을 말할 수 없으니 무조건 믿어 달라고 말했죠?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8월에 핼리팩스에서 만나 준다면 기꺼이 달려가겠어요. 하지만 그밖의 것은 무조건 날 신용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말아 줘요. 난 법을 어기지도 않았고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만한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군. 역시 로라는 영리해."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다만 내가 당신을 믿고 있는 만큼 당신도 날 믿어 달라는 것뿐이에요. 그게 뭐 나쁜가요?"
찰스는 손을 떼고 심술궂게 모래를 걷어찼다. 로라는 그것을 보고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마치 어린애가 장난감을 팽개치는 것 같군요. 지금까지 사귄 여자들은 당신에게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나요?"
"왜, 많이들 했었지. 그러나 로라처럼 그런 요구는 하지 않았어. 로라는 역시 다른 여자와 다른 점이 있어."
로라는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몸속까지 비가 스며드네요. 돌아가죠."
찰스는 돌아섰다. 두 사람은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초지를 지나는 도중에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찰스...."
"로라...."
"당신이 먼저 말해요."
"오늘밤, 우리 집에 안 가겠소? 뭣 좀 만들어 먹자구."
찰스는 나무 옆에서 발길을 멈췄다
"좋아요."
"당신이 하려던 말은 뭐요?"
"용서해 줄 거냐고 물어 보려던 참이었어요. 하지만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었으니까 용서해 준 거나 다름없잖아요?"
"그렇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별도리 없군."
찰스는 로라를 살며시 껴안고 입을 맞췄다. 모자에 괴어 있던 빗물이 목으로 흘러내렸지만 로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달콤한 키스에 어느덧 분노는 사라지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기쁨이 용솟음쳐 오른다.
"우리 달음박질쳐서 돌아가요. 얼어붙을 것만 같아요."
로라는 손을 내밀었다. 별장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은 좁아서 한 사람밖에 지나갈 수가 없다. 앞장서서 별장 앞 공지까지 온 로라는 숨을 크게 토해냈다. 뒤따라온 찰스는 로라에게 부딪치며 그녀의 몸에 팔을 둘렀다.
그때 웬 낯선 차가 눈에 띄었다. 얼른 보기에도 값비싼 자동차다. 차에서 내린 사내는 캐시미어 스웨터와 회색 바지를 입고 있는데 꽤 고급품이다. 로라는 큰소리를 질렀다.
"바트!"
7
찰스는 천천히 로라의 몸에서 손을 뗐다. 로라는 안색이 창백해져 두어 걸음쯤 자동차 쪽으로 다가섰다.
"바트, 웬일이죠? 우리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아냐, 모두들 건강하게 잘 있어."
바트의 목소리가 퉁명스럽다.
"그 애들에 대한 걱정은 여전하군?"
"하지만 아무 일도 없는데 당신이 여기까지 왔다는 건 좀 이상하잖아요?"
"약혼녀를 만나러 온 게 뭐가 그리 이상하다는 거야?"
"당신과는 약혼한 사이가 아녜요. 그 문제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여기에 온 거라구요."
"아, 그래서 저 남자와 상담을 하고 있는 건가?"
"말 함부로 하지 말아요. 찰스는 이웃에 살고 있는 분이에요. 다만 같이 바닷가를 산책했을 뿐예요."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지 않겠어?"
바트의 얼굴엔 초조한 빛이 떠올랐다. 들어가기가 싫다. 무슨 이유를 대서든지 거절하고 싶다.
"찰스가 저녁식사에 초대했어요."
"이분도 이해해 줄 것으로 생각해. 난 일부러 먼 길을 로라를 만나기 위해 왔다구."
찰스는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초대는 연기하기로 하지, 로라. 그편이 좋겠소."
그의 태도에서는 질투의 그림자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다. 바트에게 어서 꺼지라고 소리쳐 주었으면 좋으련만... 로라는 뾰로통해져서 대답했다.
"그럼 내일로 하죠."
"좋아!"
찰스는 로라의 볼에 오빠가 누이동생에게 하듯 키스를 해주고 바트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다음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바트와 단둘이 남게 된 로라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 저 사람과 사귀게 됐지?"
바트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이곳에 오던 날에요. 자, 들어가요. 비에 함빡 젖고 말았네."
안으로 들어가서 돌아다보니 바트가 자동차 트렁크에서 슈트케이스를 꺼내들고 온다.
"그게 뭐죠?"
"슈트케이스야. 입을 옷가지와 기타 다른 것들이 들어 있어."
"뭐하러 그런 걸 가지고 왔죠?"
"설마 나보고 오늘밤에 곧바로 그랜섬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아니겠지?"
"하지만 여기선 묵을 수 없어요. 모텔로 가든지 하세요. 시드시로 가는 길에 많이 있으니까."
"난 로라를 만나기 위해서 몇백 킬로를 차로 달려왔어. 또다시 그 먼 길을 혼자서 돌아가라는 건가? 침실은 두 개나 있다며?"
"두 개가 아니라 쉰 개가 있어도 대답은 마찬가지예요."
바트는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두 달 전이었다면 가슴이 설레었을 것이다. 바트는 그런 표정을 지을 때가 가장 매력적이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지도 모른다.
"로라,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당신을 만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이처럼 달려온 거야."
그는 다시 소년마냥 티없이 싱긋 웃는다.
"미리 전화를 걸지 않고 온 것은 내가 나빴지만 하루도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구. 화내지 말아요."
"당신이 왔다고 해서 화내는 게 아녜요. 여기서 묵겠다고 하니까 화가 나는 거죠."
"그런 얘기를 하기 전에 어서 젖은 코트와 모자를 벗는 게 어떻겠어? 그런 상태로는 키스를 할 수도 없잖아."
찰스는 이런 상태에서도 키스만 멋지게 하던데... 어쨌든 바트는 싫어. 로라는 천천히 코트를 벗어서 문 옆에 있는 옷걸이에 걸고는 모자를 벗으며 분명하게 말했다.
"바트, 말하기가 좀 거북하지만 당신과는 결혼할 수 없어요. 난 이미 결심했어요."
거절당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던 건지 바트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로라의 손에서 모자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로라의 기분은 이해하겠어. 그 돈 때문에 생활이 180도로 바뀌어 버렸지? 처음엔 나도 그 점을 깨닫지 못했었다구. 좀 더 로라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어야 했다고 반성하고 있어. 다만 이 말만은 믿어줘. 난 그 돈 때문에 결혼하자고 한 건 아냐. 몬트리올에 있는 동안 로라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됐어.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청혼을 했던 거지. 그런데 로라는 바로 그때 복권이 당첨됐던 거야. 괴상한 우연이라구."
본심에서인지, 아니면 거절당할 것을 예측하고 미리 준비해 둔 각본인지 그 진실을 알 길이 없다.
"그 때문이 아니에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미안해요. 사랑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착각이었어요."
그 순간 바트의 얼굴에는 증오의 그림자가 스쳤다. 그러나 그는 곧 냉정을 되찾고 검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로라는 3년 동안이나 날 사랑하고 있었어. 어때, 우선 커피라도 마시지 않겠어? 얘기는 그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하지."
고맙게도 그는 키스를 하자고는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적적한데다 향수병에 걸려 있었어요.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했죠. 내 모습이 청혼을 해올 정도로 당신에게 비쳤다면 정말로 미안해요."
"술 좀 할까? 혹시 보드카가 있소? 토마토 주스는?"
"냉장고에 들어 있어요. 칠리(멕시코 요리의 일종. 매운 맛이 남)도 있으니까 마시면서 들도록 해요. 하지만 그전에 모텔을 예약해 둬야 하지 않을까요?"
"시간은 충분해. 식사 후에 전화하자구."
뭘 꾸물거린담? 지금 곧 전화하지 않고... 그러나 자꾸만 재촉을 하면 바트가 화를 낼지도 모르니 참기로 하자. 그리고 어서 샐러드라도 준비하자. 그가 만든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셔 보니 몹시 쓰다.
"윽! 왜 이렇게 쓰죠?"
"그래? 미안해, 마시지 말라구. 다시 만들어 줄게."
로라는 화가 난 김에 빠른 속도로 칵테일을 마셨다. 바트는 갓 끝난 소송사건에 대한 얘기와 최근에 읽은 베스트셀러에 대해서 재미있게 얘기해 주었다. 그럴 때의 그는 부드럽고 사귈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칵테일을 마시면서 과일을 잘라 술잔에 띄우려고 했는데 두 번씩이나 나이프가 손에서 미끄러지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오렌지를 주머니 속에서 꺼내려고 했지만 손이 말을 들지 않는다.
"보드카를 더블로 넣었어요?"
"응, 아직도 맛이 쓴가?"
아무래도 취기가 돈다. 그러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요리들은 맛이 있다. 반쯤 비어 있는 글라스에 바트가 칵테일을 또 채운다. 칠리가 매워서 로라는 이번에도 칵테일을 전부 마셔 버렸다. 지루하고 짜증이 나 바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기조차 싫어졌다. 핼리팩스에서 구경한 영화 얘기, 그리고 도시에서 사는 것이 편리하다는 얘기... 그러다 대학 옆에 팔려고 내놓은 집이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때서야 로라는 바싹 긴장했다.
"난 가급적이면 토론토 대학으로 가고 싶어요."
"토론토는 안돼. 어머니가 승낙하지 않으신다구."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분명히 거절했잖아요? 당신과는 결혼할 수 없다고... 그래서 토론토 대학에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곳은 내 고향인 걸요."
바트는 과일 샐러드에 손을 내밀었다.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은데, 돈이 생기니까 시골 변호사는 눈에 안 찬다는 얘긴가?"
로라의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을 보고 그는 다그치듯 말했다.
"좀 더 나은 사람을 고르고 싶은 거지?"
"그런... ."
"난 열심히 일을 해서 번만큼의 돈을 가지고는 있지만 1백만 달러까지는 안 돼. 로라의 입장에선 좀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싶겠지, 그러나 그런 것 때문에 3년씩이나 간직해 왔던 사랑을 버리다니, 그건 좀 심하잖아!"
"그게 아녜요! 진짜로 사랑했더라면 당신이 5백만 달러를 가지고 있든 단돈 5센트만을 가지고 있든 간에 결혼할 거예요.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아요. 돈 문제가 아니라구요."
"돈이 생긴 후로 로라는 변했어."
바트는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위험신호인 것이다. 그는 대체 보드카를 얼마나 넣었단 말인가?
"나도 솔직한 대답을 요구하겠는데 그 1백만 달러를 전부 기부했다면 당신은 어쩔 셈이죠? 그래도 결혼을 하자고 하겠어요?"
"굉장히 실례되는 질문을 하는군...."
"실례가 됐든 어쨌든 간에 어서 대답해 봐요."
"그건 어차피 얘기로 끝나는 일이잖아. 실제로는...."
로라는 웃었다.
"실제로 기부했을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이 그런 바보짓을 할 리가 없어!"
"했어요, 유감스럽게도...."
바트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설마...."
그러나 그는 결코 무능한 변호사가 아니다. 즉석에서 냉정하게 반론을 펴왔다.
"아냐, 키스와 수앤, 그리고 대런을 위해서도 로라는 그 돈을 전액 기부하진 않았을 거라구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어때? 내 말이 맞지?"
"그래요, 기부했다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의 대답은 알겠어요."
"어떤 의미지?"
"요컨대 돈을 노렸다는 점 말예요. 그게 뭐 나쁘다는 건 아녜요. 그럴 수도 있죠. 내게 돈이 없었더라면 당신은 나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죠?"
탕! 바트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 프렌치 드레싱 병이 흔들흔들한다.
"좋아! 분명히 난 돈에 무관심하진 않아! 1백만 달러가 있는 것과 없는 것과는 다르다구. 전연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어딘가 잘못된 사람일 거야."
당신이 이제 와서 날 사랑한다고 말해도 그걸 곧이 들을 내가 아니라구요. 로라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다분히 당신은 현실적이고 난 이상주의자예요. 다시 한번 말해 두지만 당신과는 결혼할 수가 없으니 단념하세요."
바트는 주방으로 가서 술병을 들고 나오더니 꿀꺽꿀꺽 다 마셔버렸다.
"안돼! 단념할 수 없어."
"하지만 단념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제 더 이상 할 얘기도 없으니 전화를 걸어서 모텔을 예약하시죠. 일부러 먼 길을 왔는데 기대에 어긋나게 해서 미안하지만 내가 오라고 한 건 아니니까 원망하진 마세요."
바트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의 비어 가는 보드카 병과 토마토 주스를 가지고 나와서 글라스에 따랐다.
"이 정도로 술을 마셨으니 돌아갈 수가 없잖아? 사고를 내면 어떡해? 사람을 치게 될지도 모른다구. 날 내쫓아서 그런 결과가 오게 한다면 로라의 꿈자리도 뒤숭숭할 걸?"
로라는 보드카 병을 노려보았다. 관자놀이가 지끈지끈 쑤신다.
"내 잔에도 더블로 따랐었죠?"
"그 이상이었어. 술을 마시게 되면 로라도 조금쯤은 융통성이 생기게 될 줄 알았지."
그의 웃음에는 이제 더 이상 아까의 그 매력 같은 것은 없었다.
"그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좋아, 어쨌든 오늘밤엔 내게서 도망치지 못하게 할 거라구."
로라는 테이블 끝을 꼭 쥐었다.
"그럼 어떻게 할 셈이에요? 날 습격할 셈인가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구. 그러나 이웃집 남자에겐 내가 이곳에서 묵고 갔다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지."
"대런이라면 욕설이 튀어나왔을 거예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부모님에게서 배우기를 그렇게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저속한 말은 하지 않겠어요. 그럼 저곳에 침대를 정돈해 놓을 테니 가서 자고 아침이 되면 곧바로 떠나도록 하세요."
바트는 글라스를 높이 들고 손을 휘젓는다.
"좋아, 부탁해!"
폭발할 것만 같은 분노를 억제하면서 로라는 대강 설거지를 끝내고 비어 있는 방의 침대를 정돈했다. 이불을 발치에 놓고 문득 돌아다보니 바트가 입구에 기대서 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지만 애써 진정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문 쪽으로 향했다.
"춥거든 장 속에 모포가 들어 있으니 꺼내서 덮어요. 타월은 의자 위에 있구요. 그럼 어서 쉬세요."
바트는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눈만 그럴 뿐 그밖에는 취한 조짐이 보이질 않는다.
"키스해 줘, 로라."
"거절하겠어요. 비켜줘요."
바트는 잽싸게 로라의 어깨를 잡고 보드카 냄새가 나는 입술을 갖다 댔다. 로라는 정수리까지 화가 치밀어서 그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빼내어 자기 방으로 도망했다. 그러나 문에는 자물쇠가 붙어 있지 않다. 움직일 수 있는 가구라고는 가느다란 다리가 붙어 있는 의자가 고작이다. 그 의자를 믿을 수는 없지만 로라는 의자를 가져다가 문 손잡이에 밀어 놓고서야 겨우 침대에 가서 앉았다.
두통이 일고 입이 마른다. 속이 느글느글거린다. 더구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밀려든다. 바트와는 지금까지 깊은 관계를 맺은 적은 없었지만, 이처럼 취하거나 화를 내본 적도 없었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창밖으로 펼쳐지는 어둠을 응시했다. 별장 주변에 집이 한 채도 없다는 사실이 유난히 마음에 걸린다.
잠시 후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바트의 발소리다. 거실을 돌아서 이쪽을 향해 온다. 잠시 후 방문 손잡이가 찰칵찰칵 소리를 내다가 멎는다.
"로라, 열어 줘!"
어떻게 한담? 저 의자쯤으로는 문을 열지 못하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아직 얘기를 해보지도 않았잖아!"
아까보다도 더 세게 손잡이가 돌아간다.
"로라, 안에 있나?"
"있어요, 하지만 할 얘기는 없어요. 어서 방으로 돌아가요!"
"문을 열어 주는 것쯤이야 상관없잖아?"
"난 막 잠이 들려던 참이에요. 당신도 어서 자라구요."
로라는 일부러 침대를 삐걱거리며 불을 껐다.
"어서 자라니까요."
방문 밑 틈새로 스며드는 불빛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것으로 미루어 봐, 바트가 문 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잠시 후 발소리는 멀어졌고 주변은 조용해졌다.
로라는 꼼짝 않고 잠시 침대에 앉아 있었다. 바트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잠을 자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그는 그 정도로 깨끗하게 물러설 사람이 아니다.
한밤중이 됐다. 시간이 아주 느릿느릿 흘러간다. 로라는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몹시 지루하고 기분이 언짢다. 바트는 틀림없이 잠이 들었을 것이다. 로라는 다소 안심이 돼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이때 갑자기 문손잡이가 찰칵찰칵 소리를 냈고 로라는 눈을 번쩍 떴다.
"어서 가요! 당신 같은 사람 보기도 싫단 말예요!"
"뭘 그렇게 신경질을 부리지?"
바트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온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위협을 받는다면 누구든지 신경질을 내게 마련이라구요."
"폭력은 휘두르지 않을 거야. 그저 얘기만 할 거라구."
"그럼 거기서 얘기해요."
"얼굴을 봐야 할 게 아닌가."
머리가 아픈데다가 위장의 상태도 좋지가 않다. 로라는 짜증이 났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방으로 돌아가요! 아니, 그랜섬이든 지옥이든, 어디라도 좋으니 어서 꺼져요!"
손잡이가 돌아가고 문이 삐걱거렸다. 바깥쪽에서 문을 밀고 있는 모양이다. 두렵다! 고함을 치게 될 것 같다.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멎더니 사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평온의 정적이 아니라 공포감을 품고 있는 정적이다. 이제 더 이상 이런 두려움 속에선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
로라는 살그머니 일어서서 뒤꿈치를 들고 한 걸음 두 걸음 떼어놓기 시작했다. 양말만을 신은 상태였기 때문에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침대를 막 돌아서자 삐걱, 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얼어붙은 것처럼 제자리에 멈춰서 귀를 곤두세웠다. 심장은 정신없이 쿵쾅거리는데 방문 밖은 조용하다. 다시 발소리를 죽이며 창가로 향했다.
창문은 안쪽은 여닫이식이고 바깥쪽은 철문으로 돼 있는 이중창이었다. 다행히도 창문 고리는 쉽게 벗길 수 있었다. 문제는 이곳에서 뛰어내릴 수 있느냐 없느냐다.
우선 창가에 있는 모포 상자 위로 올라가서 창틀을 잡고 자세를 눕혀 발부터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멀리 점프했다. 지면의 충격이 돌연 발바닥에 느껴지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착지했다.
티셔츠에 청바지 바람이었기 때문에 비가 차갑게 느껴진다. 어두운데다가 보드카에 취한 상태여서 처음에는 얼떨떨할 뿐이었다. 어쨌든 얼른 일어나서 옆집으로 가보자. 어차피 하룻밤을 지새려면 바트보다는 찰스와 새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비틀거리며 오솔길을 걷자니 자신의 처지가 비참했다. 나무뿌리에 발이 걸리고 나뭇가지가 뺨을 스치며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 비가 점점 옷에 스며들자 한기가 느껴진다. 그래도 찰스와 함께 있으면 안전할 것이다.
나무들 사이로 공지가 나왔고 겨우 찰스의 별장 앞까지 왔다. 아아! 살았다. 그런데 별장은 캄캄했고 지프도 눈에 띄지 않는다. 찰스는 집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때 그가 집에 없다니...!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다. 안에 들어가서 찰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자. 문이 잠겨 있으면 창문으로 들어가면 될 게 아닌가. 용기를 내어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첫 계단에서 발이 접질렸고 그만 정강이를 계단에 부딪고 말았다. 찰스!
다리의 통증을 참아 가면서 겨우 계단을 올라가고 자기도 모르게 기도를 하며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제발, 열리게 해주소서! 천만다행으로 문이 열렸다. 믿기지 않는 기분으로 안으로 들어가서 살며시 문을 닫았다. 전기 스위치가 보이면 문을 잠가야지. 바트가 따라 들어오면 큰일이다.
집의 내부는 바깥보다 더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가구의 위치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냉장고의 웅웅거리는 소리뿐. 스위치는 어느 쪽에 있는 것일까? 저쪽 집과 같은 배선구조라면 왼쪽에 있을 것이다.
걸음을 서서히 왼쪽으로 옮기려는데 갑자기 완강한 팔이 그녀를 뒤에서 껴안는다. 로라는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커다란 손이 입을 막는 바람에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효과가 없고 상대방의 억센 팔은 더욱 가슴을 짓눌러 온다.
그러는 사이에 억센 팔의 힘이 느슨해지면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라... 로라 아냐?"
이어서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더니 전깃불을 켠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찰스다! 그는 멍청하게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어찌나 억세게 가슴을 눌렀던지 늑골까지 욱신욱신 쑤셨지만 로라는 정신을 차리고 당당하게 말했다.
"오해하지 말아요. 댁의 가보(家寶)를 훔치러 들어온 건 아니니까요."
찰스는 몸을 숙이며 코를 벌름거리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술에 취했잖아?"
공포와 추위로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취하진 않았어요. 겨우 석 잔...."
여기까지 말한 로라는 입을 다물고 욕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5분쯤 후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제 보드카도, 고기도, 샐러드도 위 속에 남아 있지 않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선반에 있던 치약으로 양치질을 했다. 그제서야 겨우 문밖에서 걱정스럽다는 듯 말을 걸어오는 찰스에게 대답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곧 나갈게요."
거울 속에 비치는 얼굴은 새파랗고 긴장된 얼굴이다. 밖으로 나가 보니 찰스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로라는 쭈뼛쭈뼛하며 말했다.
"미안해요."
"목욕물 준비랑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놓고 올게. 얘기는 그 다음에 하자구."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난 뒤 찰스의 파자마와 가운을 걸치니 그제서야 겨우 마음이 가라앉는다. 찰스는 난로에 불을 지피고 그 앞에 베개와 이불을 갖다 놓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로라는 이불을 둘러쓰고 의자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불꽃이 피부를 따뜻하게 해준다. 기분이 아주 상쾌해졌다.
"고마워요, 이제 기분이 좋아졌어요."
찰스는 로라의 앞에 마주 앉아서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자아, 얘기해 봐."
로라는 눈을 뜨고 오렌지 빛으로 흔들리는 불꽃으로부터 찰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검정 바지에 진곤색 스웨터를 입고 있는데 듬직하고 푸근해 보인다.
"웃지 못 할 바보스러운 얘기예요."
"괜찮아, 어서 얘기해 보라니까."
로라는 바트가 별장에 묵게 된 경위를 더듬더듬 설명했다.
"...보드카를 전부 비워서 그런 상태론 운전을 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 다음에는 키스를 한 번 하고... 꼭 한 번뿐이었지만... 난 내 방으로 들어가서 방문 앞에 의자를 기대 놓았어요. 갱 영화 같다고 하겠지만 어쨌든 난 무서웠어요. 왜 그렇게까지 무서웠는지 몰라요."
"침착하게 생각해 보라구."
"그래요, 바트는 술에 취해 있었고 내가 결혼승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나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뿐이었어요. 폭력을 휘두르진 않을 거라고 말했고, 나도 그렇게 믿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바트는 여자를 억지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진 않을 사람이거든요."
"그럼 왜 신발도 신지 않고 이곳으로 도망쳐온 거지? 마치 도둑처럼."
"당신이 집에 없는 줄 알았거든요. 차가 없기에...."
"비가 올 때는 집 뒤꼍에 세워 둔다구. 비오는 날엔 소나무 진이 떨어져서 묻거든."
"그랬군요. 그런데 정말로 도둑이 든 줄 알았어요?"
"응, 침대에 누워 있는데 영 잠이 와야지.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겠어? 바깥 계단에서 말야. 그래서 얼른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었지. 침대에서 죽음을 당하기 전에 손을 써야 할 것 같더라구."
"어머, 진짜 드라마틱하네요."
"아냐, 실제로 긴장했었다구. 내가 좀 심하게 다뤘지? 아픈 데는 없나?"
"별로... 모험하긴 나도 좋아해요."
"상대가 당신인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달콤하게 공격하는 건데."
"몰랐던 게 다행이로군요. 비에 흠뻑 젖고 취한 여자가 달콤한 공격을 받는다고 해서 열기가 오를 것 같아요?"
"당신이라면 그럴 걸...."
"머리가 아파서 그럴 정신 없었다구요."
"이제 안심해, 당신은 안전하니까. 그건 그렇고 왜 그 집에서 뛰쳐나온 거지?"
로라는 무릎을 세우며 불꽃을 바라보았다.
"바트가 내 방 앞에 와서 자꾸 방안으로 들어오겠다는 거예요. 할 얘기가 있다나요. 아마 사실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문손잡이가 찰칵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문이 덜거덕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그만 겁이 나지 뭐예요. 바트는 얘기만 하겠다고 했지만 역시 무섭더라구요. 어쩐지 불길한 예감도 들고... 그래서 창문을 열고 도망쳐왔죠. 바트는 나보고 신경질을 낸다고 했어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난 지금 매우 신경질적인 상태거든요."
"아니야, 꼭 그렇진 않아. 유비무환이라고 했잖아? 바트는 취했어. 그러니 감정적으로 나오게 돼 있어. 도망쳐 온 건 아주 현명한 행동이었다구."
로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요. 당신에게까지 신경질적인 여자라는 인상을 받고 싶지는 않아요. 당신에겐 얌전하고 차분한 아가씨란 말을 듣고 싶다구요."
찰스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로라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로라. 로라는 차분하고 얌전해."
그의 말은 로맨틱한 사랑의 속삭임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로라는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사랑을 속삭여 주는 것처럼 가슴속이 뜨거워진다. 찰스는 빙그레 웃으면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가겠는데, 아무리 남녀평등이라 하더라도 여자가 완력으로 남자를 당해낼 순 없지. 바트는 그럴 생각만 있으면 로라를 범할 수도 있어. 로라가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결코 신경과민인 건 아니라구."
"혹시 바트가 날 찾아 예까지 오는 건 아닌지 몰라요."
"이곳에? 지금까지 안 온 걸 보면 예까지 올 것 같지는 않군. 그렇게 교양 없는 사람 같진 않더라구. 그리고 왔다가는 나한테 혼이 날 거야."
웃음이 터져나옴과 동시에 편안한 마음이 들어서 로라는 의자 팔걸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피곤하지? 침대가 준비돼 있어."
"그곳까지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졸음이 쏟아지고 나른하다.
"유혹할 셈인가?"
로라는 억지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만에!"
"좋아, 그럼 이 정도로 해두자구."
찰스는 로라를 번쩍 안아 올렸다. 로라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러다 버릇 들겠어요."
"버릇치고는 좋은 버릇이지. 단, 이 다음 번엔 내 침대로 데리고 갈 거야."
"멋지군요."
로라는 찰스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찰스는 그녀를 침대에 눕힌 다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방안은 캄캄했고 비는 변함없이 세게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찰스가 있으면 걱정할 게 없다.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로라는 잠에 빠져들었다.
8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맑은 날도 있었고 안개 낀 날고, 그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로라에게는 그 어떤 날도 모두 행복이었다. 물론 행복의 원천은 찰스였다.
바트가 왔던 다음날 아침 로라는 숙취로 골치가 욱신거렸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별장으로 가보았다. 침대는 엉망으로 헝클러진 채였고 테이블 위에 편지가 놓여 있다. 침대 정돈 좀 하면 안 되나? 로라는 불쾌한 기분이 들어 방안을 둘러보았다.
편지도 불유쾌하기 짝이 없다. 예를 들자면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든가. <양식이 있는 행동을 바란다>든가, <로라의 귀가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겠다> 등등...
하지만 나로서는 분명하게 거절했었다. 그에게는 이제 아무런 미련도 없고 의무도 없다. 바트에 대한 기분은 아주 엷은 것이다. 3년간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와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던 게 여간 다행스럽지가 않다.
바트와의 문제는 이것으로 해결된 셈이다. 돈의 사용처도 대충 정해졌다. 돈의 배분을 기록한 용지는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깊숙이 넣어 두었고 유기화학 책은 3분의 2나 독파했다. 그밖에 생각해 봐야 할 일이 있다면 그건 찰스와의...
찰스와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 때로는 두세 번씩 만난다. 수영, 산책, 낚시, 일광욕 등등... 비가 내리는 날에는 난로 옆에서 독서도 하고, 밤에는 바비큐를 만들어 먹거나 애니의 레스토랑에 가거나 한다. 애니는 두 사람 사이에 로맨스가 진행되는 것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다. 농구시합에도 따라갔었고 그의 팀이 이겼을 때는 마치 자신이 이긴 것처럼 기뻐했었다.
이러한 중에서도 시종일관 피하고 있는 일이 두 가지 있다. 한 가지는 찰스의 가족과 그가 하는 일에 관한 얘기고, 또 한 가지는 사랑의 행위다.
찰스는 얘기를 슬쩍 돌려버리는 솜씨가 아주 훌륭하다. 화제는 전쟁에서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아주 폭이 넓은데 말하기 싫은 대목에서는 교묘하게 말꼬리를 돌린다.
물론 찰스는 이따금 키스를 해준다. 격렬하게 포옹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의 눈은 뜨겁게 열기를 내뿜으며 사랑한다고 말해 오는 것 같다. 그는 기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게 됐고 좋은 친구 사이가 됐다. 친구... 그래, 우린 친구지 결코 연인 사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이 수수께끼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기 싫다.
찰스의 생일날에는 그에게 미지의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었다. 오전중 헤엄을 치다가 로라는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면서 말했다.
"생일 축하해요. 오늘밤엔 우리 집에 오세요."
"그래, 기억하고 있었군."
찰스는 타월로 몸을 닦았다.
"물론이에요. 철석같이 약속했잖아요. 잊을 리가 있겠어요?"
"당신은 정말로 좋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
"응, 정직하고 성실하고, 또 야무지고, ,."
그는 달콤하게 입맞춤을 하였다.
"귀엽고 멋지고...."
두 번째 키스에 로라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이런 키스를 해준 것은 실로 며칠만이다.
"그리고 정열적이고...."
"그래서 좋은 사람인가요?"
"또 있어. 동정심이 강하고 도량이 넓고. 좋은 사람이라는 걸로는 표현이 충분치가 않지."
찰스는 시치미를 떼고 말을 이었다.
"로라를 안고 싶어."
"지금?"
그는 빙긋이 웃었다.
"아냐, 여기선 안돼. 모래밭이 낭만적이라는 건 소설에나 나오는 거지. 이 며칠 동안 나는 로라로부터 거리를 좀 두려고 했었어. 그러나 그것은 로라에게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었어. 오히려 그 반대였어."
로라는 타월로 몸을 감쌌다. 춥기도 했지만 갑자기 비키니만 걸친 몸을 감추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할 말을 찾는 사이에 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에게 안기고 싶은 생각 안 들어?"
"당신은 이상한 분이에요."
로라는 짐짓 명랑하게 대답했다.
"보통 사람은 와인이나 장미꽃이나 달빛 아래서 분위기를 잡는다고 하던데 당신은 밝은 태양 밑에서, 더구나 내가 이런 차림으로 있을 때 그런 말을 묻다니!"
"분위기에 취했을 때의 대답은 믿을 수가 없거든. 이런 때의 대답이야말로 진짜지."
로라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으로 대답하라는 의미?"
"양쪽 모두의 대답을 듣고 싶어."
난처하게 됐다. 어쩌지? 그러나 정직하고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
"대답은 예스예요. 당신의 것이 되고 싶단 말예요."
찰스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골똘히 생각하며 말했다.
"로라... 고맙소."
지금까지 남자의 눈에서 이처럼 부드러운 빛을 본 적도 없었을 뿐더러 자신의 가슴에 이토록 행복감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 넘친 적도 없다. 찰스가 나를 사랑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1백만 달러에 대한 사건을 모르고 있다. 사랑하고 있다면 그건 오로지 나라는 인간 자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찰스는 로라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입술을 갖다댔다. 그의 입술은 차가왔지만 그의 따뜻한 마음은 짜릿짜릿하게 전해 온다. 로라는 살며시 속삭였다.
"우리에겐 장미도 그리고 달빛도 소용없어요."
"맞아, 있으면 좋기는 하겠지만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구."
로라는 불시에 어떤 생각이 들었다.
"저어, 오늘밤엔 정장을 하고 축하하지 않겠어요? 슈트를 입고... 어때요, 찰스?"
"좋아. 로라가 드레스를 입는다면...."
"어머! 멋있겠네요."
갑자기 마음이 달뜬다.
"틀림없이 즐거운 밤이 될 거예요."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해도 좋다구. 당신이 수고하는 건 싫으니까."
"괜찮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요."
찰스는 당혹한 듯한 빛을 띠었다.
"그렇게 응석을 받아줘도 괜찮은 건가?"
"어머, 당신 어머닌 생일 케이크를 구워 주지 않으셨나요?"
"어머니는 늘 제과점에다 특별주문해 고급 케이크를 준비해 주셨지."
이것이 찰스의 사생활에 대한 일단을 처음으로 들은 것이다.
"초콜렛 케이크와 바닐라 케이크 중 어느 쪽이 더 좋아요?"
"초콜렛 케이크."
그는 익살맞은 표정을 짓는다.
"초콜렛이 듬뿍 든 걸로...."
"알겠습니다!"
찰스는 또 한 차례 키스를 했다.
"저녁은 몇 시?"
"7시예요."
"그럼 그때 봅시다. 즐겁게 기다리고 있겠어."
저녁식사에 초대받았을 뿐인데도 저렇게 좋아하다니, 로라는 그가 그렇게까지 기뻐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녀는 상냥스레 말했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찰스에게 한 말이 점점 마음에 걸린다. 그의 것이 되고 싶다니... 그것은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지만 그런 소리를 감히 어떻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 사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2주일간의 짧은 사랑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오래도록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는 사랑이 될 것인가? 만약 이런 질문을 한다면 찰스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반대로 내게 묻는다면? 그 대답은 생각만 해도 두렵다.
그의 어머니는 비싼 케이크를 주문한다고 찰스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부잣집 아들? 그는 왜 집안 얘기를 회피하는 것일까? 어쩌면 파산을 했거나 스캔들 때문에 유명해진 가정일지도 모르지...
찰스가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전화 걸 때 화를 냈던 일 하며, 세 개의 머리글자하며 그에게는 수수께끼가 너무너무 많다. 숨기지 말고 탁 털어놓고 얘기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로부터 신용을 받지 못하는 것은 실로 안타깝다.
오늘밤 찰스와 특별한 사이가 된다면...? 그런 막연한 불안을 안고 로라는 광산촌으로 나갔다. 은행, 술 가게, 생선 가게, 식료품 가게 등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문방구에서는 카드를 고르는 데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감상적인 것도 좋지가 않고 너무 점잖은 것도 좋지가 않다. 결국 남녀 한 쌍이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걷고 있는 카드로 결정했다.
오후는 오로지 저녁식사 준비로 바빴다. 왕새우 수프, 가자미 구이, 2단으로 쌓아올린 초콜렛 케이크를 만들어 놓았고, 테이블에는 새 테이블 보를 깔았다. 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피우고 실내를 둘러보았다. 준비는 대강 끝난 것 같다. 남은 것은 자신의 몸치장이다.
목욕을 끝마치고 켈틱라지에 입고 갔던 선드레스를 입은 다음 화장을 시작했다.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두렵기까지 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른쪽 눈의 아이새도가 너무 진하게 칠해졌다. 그것을 지운 다음 다시 한번 칠했는데 손이 자꾸만 떨려 온다. 내가 왜 이러지? 난 철부지 어린 나이도 아닌데...
7시, 가벼운 노크 소리... 왔구나! 앞치마를 끄르고 머리를 매만지고는 웃음을 머금고 현관으로 나갔다. 따뜻하고 침착한 태도로 찰스를 맞고 싶다. 그러나 문을 여는 순간 웃음은 사라지고 말았다. 가벼운 슈트로 몸을 싼 스마트한 모습의 찰스가 새빨간 장미 꽃다발을 안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당신에게 주려고 가져왔소."
"하... 하지만 오늘은 당신 생일이잖아요?"
"누구의 생일이라도 상관없잖아."
"하지만 난 선물로 카드밖에 준비한 게 없는데... ."
찰스는 안에 있는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맛있는 수프 냄새를 이미 맡은 모양이다.
"카드만이 아닌 것 같은데? 그밖에도 멋진 선물이 많은 것 같군. 들어가도 괜찮겠지, 로라?"
"물론이에요."
로라는 내려가서 그를 맞아들였다. 찰스는 문을 닫고 꽃다발을 로라의 팔에 건네주었다.
"보름달을 따다 바칠 순 없지만 꽃다발쯤은 가지고 올 수 있다구."
"너무너무 아름다운 장미예요. 그것도 20송이가 넘게 이렇게 낭비를 해도 괜찮겠어요?"
"일주일 동안 햄버거로 견디는 한이 있더라도 그만한 가치는 있다구."
"고마워요, 찰스."
마음의 동요는 다시 일기 시작했고, 로라는 방긋 웃으며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아무거나 좀 마셔요. 난 꽃병을 찾아 갖고 올게요."
식사는 순조롭게 진행됐고 디저트를 들려고 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로라는 케이크의 초에 불을 켜고 정성껏 찰스 앞에 갖다 놓았다.
"촛불을 끄기 전에 소원을 말해야죠."
찰스는 물끄러미 케이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콜릿 위에 씌어진 하얀 글자를 읽는 것이리라. <생일을 축하합니다. 찰스> 목소리는 다소 떨렸지만 읽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찰스, 촛농이 케이크에 떨어져요. 어서 불을 꺼야죠."
"응? 응, 그렇군."
그는 묘하게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촛불을 껐다.
"소원한 것은 남에게 말하면 안 된대요. 남이 알면 실현되지 않는다나요?"
"그러지, 말하지 않겠소. 로라, 이쪽으로 와요."
찰스는 주춤주춤 다가오는 로라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고마워, 생일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 준 사람은 로라가 처음이야."
아무래도 그는 자기 가정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왜 직접 만들어 주지 않았나요?"
"사는 편이 간단하니까."
기대에 어긋난다. 그런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찰스, 집안 얘기는 하기가 싫어요?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뭐 별로 어두운 면이 있는 건 아니야. 좀 더 기다려 줘요. 그럼 머지 않아서 전부 얘기해 줄게."
"날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요?"
"믿고 안 믿고는 아무 상관이 없소. 자아, 어서 칼을 달라구. 케이크를 잘라야지."
로라는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잠자코 나이프를 가지고 와서 찰스에게 건네주었다. 식사가 끝나자 찰스는 설거지를 돕겠다며 주방으로 따라왔다. 다행스럽게도 함께 설거지를 하고 있는 사이에 화제에 올랐던 두 사람 사이의 서먹한 얘기는 스르르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나쁜 소식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밤늦게 전화가 걸려오면 기분 나쁘더라구요."
로라는 손을 씻으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고모? 나 합격했어. 베시카글리아에 입문하게 됐다구요. 방금 그곳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어요."
"키스! 축하해! 멋져, 잘해냈어! 아직도 토론토에 있는 거니?"
"네, 내일 돌아가요. 레슨은 다음 달부터 시작되구요. 좀 바쁘긴 하지만 여간 기쁘지 않아요.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니까요."
키스는 신바람이 나서 계속 떠들어댄다. 이번 겨울엔 이제 그의 농담을 들을 수 없겠다 생각하니 좀 섭섭하긴 하지만 기쁜 소식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돈이 좀 필요한데...."
"좋아, 수표로 끊거라. 그럼 내일 전화로 내 구좌에다 네게 송금해 놓을게."
키스는 염치없다는 말투로 계속했다.
"한참 동안은... 돈이 좀 계속 들어갈 것 같아요. 겨울 동안엔 일자리도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상관없어. 그 얘긴 집에 가서 천천히 하자구. 토론토에는 언제 이사 갈 셈이니?"
"8월 중순쯤에요. 돈은 언젠가 꼭 갚을게요."
키스는 변함없이 그 왕성한 자립심을 자랑한다.
"알고 있어. 어쨌든 잘됐구나. 나도 아주 기쁘다."
"기뻐해 주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바로 전화를 건 거라구요. 이제 그만 끊어야겠어요. 동전이 떨어졌거든요. 그곳은 여전히 즐거우세요? 이웃집 사람은?"
"멋져. 즐겁게 지내고 있다구. 2, 3일 안에 집으로 전화할 테니 그럼 그때 또 얘기 나누자꾸나."
집의 구조로 보아서 지금 한 대화는 한 마디도 빠짐없이 찰스가 들었을 것이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로라는 또박또박 걸어서 주방으로 갔다.
"키스의 전화예요. 베시카글리아에 입문하게 됐다는군요."
"굉장한 소식인데? 그곳에 들어갔다면 대단한 실력이라구. 그런데 로라, 탁 털어놓고 묻겠는데 학비는 조달할 수 있는 거요? 베시카글리아에게 배우려면 상당한 돈이 들 텐데."
"키스는 예금해 놓은 돈이 좀 있어요."
"그 정도로는 안돼. 난 토론토에서는 발이 넓은 편이야. 키스의 스폰서가 될 사람을 구해 볼까?"
돈은 많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말을 할 계제가 못된다. 찰스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내가 찰스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냐, 그만두자. 그런 생각은 그만 하기로 하자.
"그만두세요. 동정 받는 것 같아서 싫다구요."
"몇백 년 전부터 예술가에겐 스폰서가 있어 왔다구.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야."
"키스는 그런 돈을 받지 않을 거예요."
"돈이 없으면 도중에서 그만둘 수밖에 없잖아?"
로라는 마음이 점점 답답해지기만 했다.
"나보고 동냥질 하라고 말하려는 건가요?"
"현실적으로 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야!"
"우리가 지난 4년 동안을 어떻게 살아왔으리라 생각했나요? 남들에게 동정이나 받으면서 살아온 것으로 생각하나요? 스스로들 열심히 일해서 살아왔다구요. 대런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자리를 찾아서 열심히 일했고, 키스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충당했고, 난 병원에서 일해왔어요. 일해서 번 돈이야말로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귀한 거라구요. 나보고 고루하다고 말하고 싶을 테죠?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 4년 동안에 배운 것을 내 조카들의 마음속에도 심어 주었다구요. 돈이 필요하면 자신이 노력해서 벌어야 하고, 자신의 일에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지만 1백만 달러를 손에 쥐게 된 때부터 그 돈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게 되지나 않을까 하여 얼마나 걱정을 해왔던가!
"나에겐 그런 생각이 안 통할 것으로 생각하나?"
찰스가 날카로운 말투로 공격해 오자 로라도 질세라 대들었다.
"그렇게 생각진 않아요.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잖아요? 당신이 어떤 환경 속에서 자라났는지, 부잣집에서 자라났는지 가난한 집에서 자라났는지 난 전연 모르고 있는 걸요."
찰스는 벗어 놓았던 웃옷을 걸쳤다.
"이 이상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가는 큰 싸움이 벌어지겠군. 빨리 가는 편이 낫겠어."
로라는 당황해 허둥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싸우지 않고 얘기를 나눌 순 없을까요?"
"가능성이 없을 것 같군. 우리는 정직하면서도 서로가 속이고 있나봐. 그리고 오늘밤에는 달콤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는 다 틀렸어. 서로 어떤 일이 일어나길 기대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당신 생일날 싸움을 하고 헤어져야 하다니 정말 싫어요."
"로라가 축하해 준 일, 그리고 당신이 만든 저 케이크는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거야."
찰스는 진심이 어린 말투로 말하면서 로라의 볼에 키스했다.
"고마워, 로라, 내일 아침에 올게. 수영이나 하러 가자구. 그럼 잘 자요."
현관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웬만해선 우는 일이 없는 로라지만 울음을 터뜨리며 쓰러졌다. 찰스의 생일 파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 점 후회 없는 멋진 밤이 되길 빌었는데... 찰스에게도 언제까지나 기억에 남게 해주고 싶었고... 그는 기억해 줄 거야. 다만 내가 기대했던 바대로는 아닐지 모르지만.,..
울다니 꼴도 보기 싫어! 로라는 욕실로 가서 얼굴을 씻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향해 말을 건넸다. 너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거야. 솔직하게 시인하라구, 로라. 사랑하고 있지, 찰스 리차드 아무개를...
정직하게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하지만 고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앞으로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찰스에게 날 사랑하고 있느냐고 물어 볼까? 그 대답이 예스라면 복권당첨 사건을 털어놓는 거야. 하지만 대답이 노라면 어쩐다? 여름 휴가 동안의 단순한 놀이 상대에 불과했을 뿐인 거라면 난 어떻게 해야 되지?
또다시 눈물이 복받쳐 오르고 속눈썹을 적신다. 가을이 되면 찰스는 토론토로 돌아가고 난 그랜섬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생활로 돌아가고 나면 그는 금방 나 같은 것은 잊고 말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귀찮은 존재가 사라졌다며 기뻐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거실로 돌아와서 난로 불을 점검한 뒤 로라는 새빨간 장미꽃에서 눈길을 돌리고 불을 껐다. 침실은 평소보다 훨씬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오늘밤은 찰스가 이 침대에서 잘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화장대에 나란히 늘어놓은 화장품들 하며, 새 침대 시트 따위가 더욱 쓸쓸해 보인다. 그가 말하길 오늘밤에는 달콤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너 같은 건 안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화가 치민 로라는 샌들을 방 한구석으로 걷어차 버리고 드레스와 레이스가 달린 잠옷을 의자에 팽개쳤다. 이 잠옷도 찰스를 마음속에 그리며 입었던 것이다.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기가 싫다. 잠이나 자자.
그러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건만 적적함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찰스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팔에 안겨서 모든 것을 잊고 활활 타오르고 싶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천부터 거꾸로 수를 세보기도 했지만 찰스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는다.
머리맡에 있는 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시간을 좀먹고 있다. 밀려왔다가 밀려나가는 파도가 자장가를 불러주고, 밤은 깊었건만 눈은 말똥말똥할 뿐 영 잠이 오지 않는다. 2시 45분이 돼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유기화학 책이 침대 밑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떨어졌다.
9
다섯 시 반쯤 찰스는 수영복을 입고 타월을 어깨에 걸친 모습으로 로라의 침실 입구에 서 있었다. 바깥문을 노크해도, 안에 들어와서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기 때문에 끝내는 이곳까지 오고 만 것이다.
로라가 어떤 상태에서 잠이 들었는지는 방안을 한 번만 둘러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의자 위에 놓여 있는 옷가지는 꾸깃꾸깃하고 방바닥에는 책이 떨어져 있다. 그리고 스탠드는 켜놓은 채다. 침대 커버 속에 사람이 들어 있다는 것은 알 수가 있는데, 베개와 커버 사이로 머리카락이 조금 보일 뿐 사람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여느 때라면 이런 때 이런 곳에서 얘기를 걸려고 하지 않는 찰스지만, 문득 보니 침대 옆에 떨어져 있는 화장지가 눈길을 끈다. 로라는 울고 있었던 것이다!
찰스는 문손잡이에 타월을 걸어 놓고 침대 곁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커버 위로 손을 얹어 로라의 몸을 흔들어 보았다.
"로라."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 봤지만 새근새근 하는 숨소리와 함께 아래위로 움직이는 가슴의 움직임만이 전해져 올 뿐 로라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로라, 일어나라구."
로라는 꿈을 꾸고 있었다. 농구시합이 끝난 직후다. 찰스와 만나기로 했는데 자동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트럭을 타고 가는데 운전기사가 애니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자고 권유해 온다. 장면은 바뀌어서 애니의 레스토랑. 운전기사와 먹고 있는 식사는 가자미 요리와 생일 케이크. 다시 장면은 바뀌어서 아치가 운전을 하고 학교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달리는 쪽은 반대쪽 차선이다. 학교에 도착해 보니 찰스는 이미 없다. 언젠가 어두운 골목길에서 만났던 남자 아이가 다가와서 손을 잡으며 일어나라고 다그친다.
"기다려 주지 않았군요?"
무뚝뚝하게 중얼거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손! 이것은 꿈이 아니다.
로라는 일어나서 침대 커버를 끌어안으며 가슴을 감추었다.
"뭘하고 있는 거예요?"
"로라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어."
그 순간 그도 나체가 아닌가 해서 주춤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는 수영복을 입고 있었고 문 손잡이에는 타월이 걸려 있다.
"나, 헤엄치고 싶지 않아요."
찰스는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를 끄고 난 뒤 그녀의 눈 밑에 생긴 기미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진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군."
"네, 그래요...."
아무래도 마음이 달뜬다. 자신은 잠옷도 걸치지 않고 있는데다 찰스까지도 나체나 마찬가지인 것이 신경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나도 잘 못 잤어. 이곳에 오고 싶어서...."
찰스는 따뜻한 웃음을 띠우며 로라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이 부드럽고 달콤한 키스...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찰스의 손이 얼굴에서 어깨로 미끄러져 내려온다. 두 사람 모두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입술을 벌려 답하자 태양빛은 그대로 행복의 빛으로 바뀌고 마음은 새들의 노래소리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커버를 가슴에 대고 있던 손은 저절로 찰스의 가슴을 더듬었고, 침대 커버는 무릎까지 흘러내렸다. 그의 손이 부드러운 가슴을 싸안자 환희의 전율이 전신에 퍼진다.
"로라... 싫어?"
싫다고 대답하면 그는 금방 중단할 게 틀림없다. 중단하지 말아요!
"찰스... ."
대답은 그 한 마디로 충분했다. 찰스는 그녀를 감싸 안으며 격렬하게 입술을 탐했다. 이윽고 침대 커버를 벗긴 그는 그녀와 나란히 몸을 눕히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을 손으로 더듬었다. 로라는 기쁨에 부끄러움도 잊고,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은 생각뿐 두려움을 느끼진 않았다.
로라는 찰스의 몸을 느끼고는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그가 가슴에 얼굴을 파묻어 오자 둘은 하나가 돼 관능의 거센 물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는 순백의 모래사장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 부서지는 하얀 포말이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난다.
"로라...."
이윽고 찰스가 고개를 들었다.
"찰스..,."
나른함이 전신을 감싼다. 로라는 만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밖에서는 여전히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고 있다. 파도가 은빛 모래밭에 밀려와서 하얗게 부서진다. 나는 완전히 변했는데 어찌해 바깥세상은 변한 게 하나도 없을까? 로라는 찰스의 목에 입술을 대고 눈을 감으며 손으로 그의 어깨와 목줄기를 더듬었다.
"아주 멋졌어요."
"멋졌던 정도가 아니야, 최고였다구. 정직하게 말해서 최근엔 로라를 안고 싶은 생각뿐이었어. 얼마나 당신을 안고 싶었는지 모를 거야."
찰스는 고개를 들며 로라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런데 이번엔 너무나 열을 올리는 바람에 자신을 억제하지 못했어."
"그건 당신뿐이 아녜요. 나도 마찬가지였다구요. 하지만 최고였어요... 당신도 최고였을 거예요."
찰스의 얼굴이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일그러진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당신 같을 순 없어...."
"찰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찰스는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고 살며시 애무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감싸자 로라는 일부러 명랑하게 말했다.
"헤엄치러 갈 참이었잖아요?"
"헤엄은 아무 때나 쳐도 돼. 그러나 이건 기다릴 수가 없어."
찰스의 입술이 그가 더듬는 손길을 따라서 그녀의 몸을 더듬어 나갔다. 로라는 그의 가슴에 파고들면서 또다시 그를 요구했다. 그녀의 몸은 다시 한번 활활 타올랐다.
시간이 어느 정도나 흘렀을까? 로라는 그의 팔 안에서 눈을 떴다. 찰스는 그녀를 껴안은 채 아직도 지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새 소리도 멎었고 햇빛도 스며들지 않는다. 벌써 한낮이 지났나 보다.
이제 분명해진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우선 그 한 가지 사실은 태어난 이후 이처럼 행복했었던 적은 없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사실은 극히 현실적인 일이지만 배가 몹시 고프다는 것이다.
찰스의 등을 몇 번인가 가볍게 두드리자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로라?"
"찰스, 벌써 오후가 됐어요."
"응, 그래... 하지만 난 꼼짝도 할 수가 없어."
"하지만 전 배가 고파요. 배에서 야단이라구요."
"사랑보다는 먹는 게 더 중요하단 얘기로군. 실은 나도 몹시 배가 고파."
그는 일어나서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그녀의 몸을 응시했다. 불타오를 듯한 저 눈초리... 사랑하고 있다고 호소해오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는 사랑이란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니 나도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수밖에.
로라는 침대 커버 속으로 숨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 전에 샤워를 하는 게 어떻겠어요? 타월은 선반 위에 있어요."
"그거 좋겠군."
찰스는 로라의 볼에 키스했다.
"고마워. 로라는... 참 멋있었어."
그에게 그 이상의 말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객관적으로 봐서 찰스의 마음에 사랑이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감수성이 풍부한 연인이며 믿음직한 친구이기도 하다. 얼마 안 남은 7월의 나날을 두 사람은 크게 웃고, 뜨겁게 불태우며 보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사랑을 고백하진 않았고 장래에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집으로 전화를 걸어 보니 귀향한 키스는 일자리를 두 군데나 얻어 가지고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으며 여전히 들떠 있는 상태인 듯했다. 스티브에 대한 수앤의 열기는 아직도 식지 않은 것 같다.
"대런 오빠는 목장 일이 마음에 드나봐요."
수앤이 말했다.
"인간보다 동물을 더 좋아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번 일자리를 구한 이후로는 사람도 온순해졌다니까요."
"내가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닐까?"
"아녜요, 고모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몹시 궁금해해요. 그리고 전화가 걸려오면 잘 말해 달라고 부탁하던 걸요? 고모가 직접 와보면 잘 아실 거예요."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저어, 수앤, 그런데 너 기운이 없는 것 같구나."
"응, 오늘... 감기가 들었나봐. 요즘 여기는 감기가 유행이라 병원엔 환자가 철철 넘치고 있어요."
"조심해야지. 가정부는 어때?"
"잘해 주고 있어요. 하지만 고모, 빨리 돌아와요."
그런 말을 들으니 참으로 기쁘다.
"그래, 곧 갈게. 그 동안 잘 지내고 있어. 또 전화하겠지만 대런에게 안부 전하고...."
로라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찰스가 없다면 당장 날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를 남겨 두고 떠날 생각을 하니 어쩐지 가슴이 메지는 것 같다. 찰스와 바트의 존재는 태양과 달과 같은 것이다. 달인 바트는 태양인 찰스의 빛을 받아서 희미하게 빛날 뿐이다. 찰스도 틀림없이 이 황홀한 기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래 틀림없을 거야...
하지만 그게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면? 바트에 관해서는 그 동안 잘못 짚었었던 점이 많지 않았던가! 마음 한구석에서 심술궂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람이란 실패를 한 후에야 영리하게 되는 거라구. 그리고 찰스는 바트와는 전혀 달라...
그랜섬으로 돌아가기 일주일 전 로라는 또 의혹으로 고민해야 하는 사건에 부딪쳤다. 찰스의 별장에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의 일이다. 그가 욕실로 들어간 사이에 로라는 찰스의 가운을 걸치고 침실 창가에서 안개가 자욱한 경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가운의 소매자락에 걸려서 테이블 위에 있던 서너 권의 잡지가 방바닥에 떨어졌다.
핼리팩스에서 발행되는 잡지였다. 무심코 그것을 집어들어 몇 장 넘기다 보니 이게 웬일인가! 자신의 얼굴이 잡지 속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사진은 흑백으로 복권 당첨자라는 타이틀과 함께 페이지 오른쪽 아래에 실려 있다. 상태가 그다지 좋은 사진은 아니고 머리도 지금보다 길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다. 사진 밑에는 성명과 주소도 적혀 있다.
찰스가 이 사진을 봤을까? 어쩌면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서 접근했는지도 모른다. 주소를 묻는다든가 키스의 학비에 대한 얘기를 했던 것은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그가 파산한 명문 집안의 도련님이라면 백만장자의 출현은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격이 되리라.
샤워 소리가 끝났다. 찰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로라는 얼른 잡지를 다른 책 밑에 쑤셔 넣은 다음 침대를 정돈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찰스가 허리에 타월을 두르고 나온 것은 커피를 끓이고 있을 때였다.
그는 로라 뒤에 서서 목덜미에 키스했다.
"안녕. 침대를 정돈해 주고 커피도 끓여 주고... 로라는 실로 현모양처감이야."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래도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마음이 동요되고 목소리가 떨린다.
"그 대신 팬케이크는 당신이 만드세요."
로라는 그를 돌아다보지도 않고 찻잔을 들었다.
"빨리 돌아가야 해요. 유기화학이 끝나면 생물학을 공부해야 하거든요."
"공부, 또 공부야?"
찰스는 뒤에서 로라의 몸을 감싸 안았다.
"찻잔을 놓고 키스해 줘. 30분 동안이나 키스를 못했다구."
"미안하지만 지금은 안돼요."
허리를 애무하고 있던 찰스의 손이 딱 멎는다.
"왜 그러는 거지?"
"왜라뇨?"
"이쪽으로 돌아서봐."
찰스는 그녀의 몸을 반쯤 돌려세웠다. 얼굴은 굳어져 있다.
"뭔가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지, 로라?"
1백만 달러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없는 이상 찰스를 속이는 수밖에 없는데 거짓말은 또 거짓말을 낳게 마련이다. 로라는 그와 눈을 마주치기가 싫어서 그의 목 부분을 바라보았다.
"지쳐 있을 뿐예요. 잠을 충분히 못 잤잖아요, 잘 알고 있으면서...."
"그게 아닌 것 같애.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다구."
"커피를 마시면 괜찮아질 거예요."
"이따금 우리 둘 사이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찰스는 진지하게 말했다.
"둘다 뭔가를 숨기고 있다구. 더구나 유감스럽게도 두 사람 모두 상대방 쪽에서 먼저 털어놓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애."
맞아, 바로 그거야.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 봐요, 찰스. 그리고 저 잡지는 본 일이 없다고 말하세요. 로라는 그의 팔에서 몸을 빼내고 커피를 따랐다.
"어차피 전부 알게 될 거예요."
"그럴 테지."
찰스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평소와 같이 설탕을 듬뿍 탔다. 로라가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 찰스는 팬케이크를 구워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요리는 독창적이기는 하지만 맛있다고는 할 수 없는 편이다. 단 팬케이크 솜씨만은 예외로 맛이 괜찮았다.
로라는 팬케이크에 버터를 바르고 시럽을 떨어뜨린 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커피를 다시 한 잔 마셨다. 마음은 불안한데 비교적 식욕은 떨어지지 않았다. 아까 그 화제는 더 이상 내고 싶지 않아 얼른 키스와 수앤의 얘기를 하며 얼버무렸는데, 식사가 끝난 다음 일어서자 찰스가 말했다.
"용케도 연막을 치는군, 로라."
"어머, 지루했었나요?"
"아니, 당신과 함께 있으면 지루하지 않아. 언제 어디서라도."
"놀리지 말아요. 자, 어서 가야지, 난 공부를 해야 된다구요."
"공부도 좋지만 나중에 루이스부르에 함께 가지 않겠소? 그곳 요새는 안개 낀 날에 특히 운치가 있지. 2시에 데리러 갈게. 아직 3시간이나 남아 있다구."
찰스가 싱글벙글 웃어대면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다
"좋아요, 2시에."
원생동물의 구조는 조금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고, 찰스가 데리러 왔을 때는 여간 기쁜 게 아니었다. 잡지 사진도 마음속에서 해결이 나고 말았다. 그 잡지는 언뜻 보기에 깨끗한 채였다. 틀림없이 그는 아직 그 잡지를 읽지 않았을 것이다. 첫째, 그 사진을 보았다면 분명 뭐라 한 마디쯤 했을 게 아닌가?
루이스부르 거리는 때마침 안개에 싸여 있었다. 어디선가 생선 비린내가 풍겨 온다.
"변한 게 없군."
찰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여기선 18세기부터 대구를 잡아서 말리고 있지. 당시 대구는 가톨릭 국가에서의 생활필수품이었거든. 필수품 얘기를 하니 가솔린을 넣어야겠군."
찰스는 주유소로 들어가서 차를 세우고 급유와 오일 점검을 부탁한 후 로라에게 지갑을 건네주었다. 지폐 두 장이 얼굴을 내민다.
"이거면 충분할 것 같으니까 당신이 지불하라구. 난 급한 볼일이 있어서... 그럼 다녀올게."
세면장으로 향하는 찰스를 로라는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허름한 청색 바지와 노랑 재킷을 걸친 그는 극히 평범하게 보인다.
그의 어떤 점에 매력이 있어서 이렇게 내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일까?
"모두 26달러입니다."
로라는 지갑 속에서 30달러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그때 지갑 속에서 면허증이 비어져나왔다. 검정 글씨로 분명히 이름이 기록돼 있다. 찰스 리차드 손다이크. C.R.T.
언젠가 보았던 가죽 케이스의 머리글자와 일치된다. 찰스의 풀네임은 찰스 리차드가 아니라 찰스 리차드 손다이크인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로라에게 점원이 2달러 짜리 지폐 두 장을 내밀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아무것도 아녜요."
마침 그때 찰스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로라는 거스름돈을 지갑에 챙겨넣고 뜨거운 것이라도 쥐었던 것처럼 지갑을 팽개쳤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찰스는 처음부터 이름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손다이크... 손다이크... 무엇으로 화제가 됐던 이름일까? 그러나 라디오 또는 신문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것 같다. 어쨌든 살인강도 같은 건 아닐 테지...
찰스가 점원과 지프 뒤로 돌아가서 뭔가를 지껄이고 있다. 심호흡을 한 다음 굳어진 얼굴을 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그가 웃는 얼굴로 들어온다. 그녀가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는 걸 눈치 채진 못한 것 같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갑을 주머니 속에 넣고 안전벨트를 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저 사람이 이런 지프를 사고 싶다고 해서 얘기가 길어졌다구."
자동차는 다시 하이웨이로 들어서다. 길은 해안선을 따라 왼쪽으로 구부러진다. 인가는 드문드문 있고 바다에서 밀려온 안개가 관목들을 에워싸고 있다. 곳곳에 하얀 꽃을 만개한 키 큰 식물이 있는데 똑바로 솟은 그 모습은 풀밭 속에 서 있는 병사처럼 보인다.
"안젤리카야. 원래는 프랑스 인이 약초밭에 심었던 것인데 지금은 요새지 일대에 자생하고 있지."
찰스는 진흙길로 차를 몰았다.
"자동차는 이곳에 세워 두도록 하지. 지금부터는 버스를 타야 해. 관광객이 있더라도 인간은 보지 말고 옛날 그대로인 경치만 보라구."
안내소에서 받은 팸플릿에 의하면 이 요새는 40년 동안 적에게 두 번씩이나 포위당했었고, 두 차례 함락됐었다고 한다. 전성기에는 상업과 어업의 중심지였으며, 직공, 귀족, 창녀, 수녀 등 약 5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1760년 영국군에 의해 파괴된 이후 200년 이상이나 폐허 상태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역사에 흥미도 있으려니와, 팸플릿을 보고 있노라면 찰스와 얘기를 안해도 되는 까닭에 무척 다행스러웠다. 이윽고 문제의 그 요새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요새는 기대했던 대로 멋졌다. 찰스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원추형의 빙실(氷室)이 있었고, 이곳에서 제일 호화판인 저택에는 가늘고 긴 탑이 우아하게 서 있다. 또 직공의 집과 빵 가게, 뱃사람과 어부들이 모여서 노래 부르던 숙소, 평화로운 정원과 약초밭 등... 어부의 집 주변에는 닭이 꼬꼬댁 소리를 내고 있고, 병사들의 숙소 뒤쪽에서는 소가 음매 울고 있다.
건물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밖에서 회색 집과 회색 안개와 회색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편이 더 즐겁다. 기다란 양털 스커트를 입은 여성과 나막신을 신은 어린이가 나란히 걷고 있고, 안개 속에 프랑스 군함이 정박하고 있다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 풀밭으로 나와서 뒤를 돌아보니 경사진 지붕과 건물의 성벽이 2백 년 전 그대로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로라는 잠자코 찰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북아메리카 최초의 병원 터와 성벽의 폐허를 둘러보았다. 지금은 그 일대가 습지로 변해 사람은 살지 않고 그저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만이 적막한 공기를 흔들고 있을 뿐이다.
다시 한번 돌아보았을 때는 성벽은 이미 안개 저쪽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아까 보았던 것은 모두 환상이었을까? 차가운 안개 때문만은 아닌 듯, 무엇인가가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준다.
"이상한 감동을 느끼게 되지?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런 걸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
로라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금발 남자의 몸을 나는 내 몸처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회색눈은 지금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안개처럼 도저히 간파할 수가 없다.
다시 찰스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덧없다고나 할까... 이곳에 오면 언제나 그런 걸 느끼게 돼. 이 세상 것은 그 무엇이고 무로 귀착하는 거지. 옛날 그 당시의 전쟁은 지금의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당시 이곳에서 요리를 하고, 술을 마시고, 누군가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지금 모두가 흙 속에 잠들어 있어, 잊혀져 있지."
찰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다. 이름조차도 숨기고 있는 사람과 이토록 마음이 통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성벽 옆을 조금만 더 걷지 않겠소? 총탄의 흔적이든 아니면 어떤 재미있는 것이 발견될는지도 몰라."
이러한 폐허는 찰스의 가슴에 소년과 같은 모험심을 불러일으켜 줄 것임에 틀림없다. 갑자기 달콤한 고통이 몸에서 사라져 간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난 바다 쪽으로 가보고 싶어요. 30분 후에 돌아올 테니 이곳에서 만나자구요."
로라는 찰스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풀밭을 가로질러 바닷가로 나갔다. 주변은 안개와 파도로 시야가 흐려진다. 파도가 밀려오는 곳까지 가서 뒤를 돌아보니 찰스는 성벽 쪽을 향하고 있다. 회색과 초록색이 어우러진 경치 속에서 노란색 재킷이 더욱 선명하게 눈을 자극한다.
로라도 윈드 재킷의 모자를 눈이 가려질 만큼 뒤집어쓰고 모래밭을 걸었다. 머리글자에 대해서 찰스에게 물어보자. 물어보면 무슨 대답이 나오겠지. 그것으로 모든 것은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결코 겁쟁이는 아닌데도 이번 일만큼은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를 못하겠다.
한 가지 그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랜섬에 돌아가면 대학 도서관에 가서 신문을 샅샅이 훑어보는 거야. 손다이크라는 이름이 나올지도 모르지. 그 이름이 어떤 의미를 갖는 이름인지를 알게 되면 찰스에 관한 수수께끼도 풀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랜섬에 돌아가려면 앞으로 며칠 더 있어야 한다. 그때까지는 그 사람 앞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다를 떨거나 웃거나 그의 품에 안겨 있을 때 도...
숨을 죽여 가며 미끄러운 바위를 오르내리고 있는 중에 상쾌한 바다 냄새와 파도의 굉음에 마음은 평안을 되찾았다. 왼쪽에는 소용돌이치는 바다와 회색 안개, 그리고 오른쪽에는 이탄(泥炭)의 언덕이 펼쳐져 있다.
최초로 이곳을 포위한 뉴잉글랜드 군은 대포를 끌고 저 언덕으로 올라왔었을 것이다. 그들이 성벽을 파괴하고 거리를 점령했을 때는 승리의 환성과 백파이프 소리가 언덕 저편에까지 울려 퍼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새에서는 기어코 복수를 했단다. 초겨울 9백 명 이상에 이르는 뉴잉글랜드 인이 목숨을 잃었고 차가운 병사(兵舍)에 쓰러졌던 것이다.
죽음과 파괴는 이제 그만! 로라는 몸을 떨며 시계를 보았다. 찰스와 약속한 시간이 벌써 5분이나 지나 있었다. 과거가 살아 있는 장소에서는 시간개념을 망각시키나 보다. 가까운 길인 습지대로 빠져나갈까? 그러나 혼자서 그 질퍽질퍽한 길을 걷기는 싫다. 좀 늦더라도 서둘러 모래밭으로 돌아가자.
아까 그 장소에 돌아오기까지는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 찰스의 모습이 보이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라, 로라?"
그의 목소리는 망령의 그것처럼 안개 저편에서 기분 나쁘게 울려 퍼진다. 로라는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찰스! 여기예요!"
몇 초 동안 귀를 곤두세우고 대답을 기다렸다. 데굴데굴 돌이 부딪치며 구르는 소리, 주변에 밀려드는 파도 소리... 찰스는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나를 발견하지 못한 채 지나치고 만 걸 거야! 안개가 이렇게도 짙을 게 뭐람! 로라는 갑자기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찰스! 찰스! 어디 있어요?"
"로라...?"
아까 부르던 소리보다 더 멀리서 들려온다. 앞쪽일까? 왼쪽일까?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가 없어서 로라는 가만히 서 있었다. 모래밭을 따라서 가면 요새에 도착할 테니 길을 잃게 될 염려는 없다. 그러나 찰스가 점점 반대쪽으로 걸어가면 어떻게 한다? 도중에 미끄러져 부상을 입는다든가 습지대로 들어가 버리면 어떡한다지?
로라는 두 손바닥을 모아 입에 갖다 대고 있는 힘껏 찰스의 이름을 불렀다. 바위를 밟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뚜벅뚜벅... 군복을 입은 옛날 군인이라도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안개 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노란색 윈드 재킷과 파란 바지를 걸친 현대인이었다. 찰스는 호주머니 속에 손을 쑤셔 넣은 채 화를 내고 있다.
"대체 어디에 갔다온 거야?"
"바닷가를 걷고 있었어요.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태평한 아가씨군. 30분이 되기 전에 돌아오겠다구 했잖아."
"미안해요, 어쩐지 시간관념이 없어졌었다구요."
"틀림없이 미아가 된 줄 알았다구. 위험한 곳이란 건 알고 있었겠지? 습지대로 들어갔다가는 여간해서 길을 찾아낼 수가 없어."
"해안가를 따라서 돌아올 줄 아는 지혜쯤은 있다구요. 사람을 좀 믿을 줄 알아봐요."
사실은 습지대를 가로질러서 올까도 생각했었지만 그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바위 위에서 미끄러지면 발을 삘 염려도 있어."
"그거야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이제 그만 해두자구요. 미안하다고 말했잖아요. 몇 번이나 사과를 해야 되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사람을 걱정하게 만들어 놓구선 말야."
찰스는 한 걸음 다가섰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로라가 서 있는 곳보다 10cm쯤 높다. 로라는 얼굴을 들어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나보다 키가 크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걸 분명하게 증명해 보이지."
로라는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 그런데 바위틈으로 발이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크고 널찍한 바위 위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파도에 씻긴 바위 위이기는 했지만 넘어진 꼴이라니... 로라는 팬시리 울화통이 치밀었다.
"지금은 당신의 힘자랑을 구경할 기분이 아니라구요. 추우니까 어서 돌아가기나 해요."
찰스는 불쑥 로라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찬성이오. 나도 10분 전부터 돌아가고 싶었으니까. 옆길로 새지 말고 이번엔 똑바로 가자구."
그의 손가락이 손목을 너무 세게 잡아서 통증이 온다.
"당신을 바다에 밀어 넣는다면 정당방위로 인정될까요?"
처음으로 찰스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정신이상에 의한 발작적 범행으로 단정지어 지겠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성공할 리 없는 그따위 살인을 범하진 않을 걸?"
"당신은 무엇이든지 모르는 게 없어서 좋겠군요. 이 손은 놓으세요. 난 어린애가 아니니까요. 당신은 가끔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던데, 난 25년이나 살아온 어엿한 성인이라구요."
"몇 년을 살아왔든 반쪽 인간도 있게 마련이지."
"좋아요! 어서 걸어요!"
찰스는 몸을 숙이면서 힘껏 입술을 포개 왔다. 그리고 화를 내는 로라의 얼굴을 미소 지으며 내려다보았다.
"화를 낼 때의 로라 얼굴은 여간 예쁘지 않아. 사랑을 하고 난 직후의 얼굴과 꼭 같다니까."
그는 손을 놓고 앞장서서 걸었다. 슬그머니 또 화가 난다. 어쩐지 반대쪽으로 걷고 싶다.
그러나 참자! 신경질이 나는 것은 마음의 상처 때문이다. 찰스가 이름을 숨기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마음의 상처는 받지 않았을 텐데... 가급적이면 그의 비밀에 대해서 모른 체하고 싶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그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풀밭을 지나고 진흙길을 지나니 다시 성벽 안쪽으로 나오게 되었다. 안개 속에 건물과 병사(兵舍)가 나타나고 카메라를 목에 건 관광객의 모습도 이곳저곳에 보인다. 실로 이런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버스에 올라탄 두 사람은 고개를 넘어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지프에 올라탄 로라는 안전벨트를 매고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피곤하기도 하고 찰스와 얘기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루이스부르를 지날 때는 잠이 들어 버렸고, 이상한 꿈까지 꾸고 있었다.
잿빛 일색인 군대가 대포의 포탄 같은 딱딱한 빵을 던져대고 있다. 한편 가발을 쓴 귀족이 시계탑에 올라가서 시계 바늘을 돌린다. 그렇게 빨리 돌리지 말아요! 지각하면 어쩌려구요!
눈을 번쩍 떠보니 자동차는 별장 앞에 서 있었다. 주변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재의 세계였다. 과거의 환상도 망령을 본 것 같은 기분도 이내 사라졌다.
"벌써 도착했네."
"좀 들어갔다가 가도 괜찮을까?"
"지금은 안돼요. 나...."
"지난번에 레인코트를 두고 갔었어. 그것만 찾아 가지고 금방 돌아갈게. 혼자 있고 싶겠지? 물론 알고 있다구."
불쾌해하는 찰스의 눈을 피해 로라는 잰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고 자물쇠를 열었다. 그 순간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아마 훨씬 전부터 울리고 있었던 것 같다. 로라는 거실을 지나서 얼른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고모? 키스예요. 아까 낮부터 계속 전화를 걸었었다구요."
"왜? 무슨 일이 있어?"
"아뇨, 뭐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수앤이 감기로 누웠고. 대런 형이 오늘 입원했어요. 맹장염이라나요. 곧 수술을 받게 돼요. 크게 걱정할 일은 못되지만 일단 알려 드리기는 해야겠기에...."
"물론이지. 고마워, 키스. 수앤의 상태는?"
"흔한 감기니까 뭐... 그런데 가엾게도 유령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난 병원에 가야 하기 때문에 제인 아줌마보고 와서 수앤을 좀 돌봐 달라고 부탁했어요. 가정부는 이틀 전에 보스턴엘 갔거든요."
"내가 곧 갈게."
"괜찮아요, 문제없어요."
"아니야, 대런을 간호해 줘야 해. 대런은 전부터 그런 기미가 있었니?"
"형은 말이 없는 사람이잖아요? 2, 3일 전부터 기운이 좀 없는 것 같았을 뿐이에요. 난 형이 피곤해서 그러나 보다 했었죠, 뭐. 새벽 5시 반부터 일을 했었으니까요."
"키스, 나 금방 출발해서 병원으로 직행할게. 대런이 말할 수 있는 상태거든 그렇게 전해 줘. 그리고 수앤에게도."
"알겠어요. 운전 조심해요, 시간이 늦었으니까요."
"걱정 마. 그럼 나중에 보자."
로라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멍청히 벽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로라?"
아, 찰스가 있었구나!
"대런이 맹장염으로 입원을 했고, 수앤은 감기로 앓아누웠대요. 빨리 집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당장?"
"네, 대런을 혼자 내버려 둘 순 없잖아요. 짐을... 아아, 무엇부터 챙겨야 좋을지 모르겠네."
"내가 도와주지. 슈트케이스는 어디 있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짐을 싼 덕분인지 놀랄 만큼 빨리 짐을 쌌다. 남은 일은 침대와 음식물 정돈이다.
"큰일 났네, 시트와 타월을 어떡하지? 더럽혀진 채로 팽개쳐 둘 수도 없고... 또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다녀온 다음에 내가 정리할 테니 걱정 마. 시트도 세탁소에 맡기고...."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정말 고마워요, 찰스."
그러고 보니 그는 이상한 말을 했다.
"다녀온 다음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로라를 데려다 주고 오겠다는 의미야. 이런 시간에 설마 당신 혼자 보낼 내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당신 차로 갔다가 올 때는 비행기 편을 이용하면 돼."
"괜찮아요, 혼자 갈 거예요."
그랜섬에 같이 가면 그는 1백만 달러 사건을 알게 되고 말 것이다. 그 잡지를 보았다면 이미 알고 있는 일이겠지만...
"로라, 고집 부리지 말라구."
"안 돼요! 따라오지 않는 게 좋아요!"
찰스는 화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투는 부드럽다.
"왜 그렇게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는 거야? 당신 집에 가서, 한 침대 안에 들자고 할까 봐 그러나? 나도 그 정도의 분별력은 있다구."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녜요. 제발 부탁이니 혼자 가게 내버려 두세요. 정신 바싹 차리고 운전하겠어요. 그리고 내일 아침에 전화 걸께요."
"나 같은 사내를 데리고 가는 게 부끄러운가? 나하고 이런 관계가 된 게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야? 요는 날 가족들과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아녜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자기도 이름을 숨기고 있는 주제에...! 그렇게 생각하니 불덩어리 같은 것이 가슴에 치밀어 올랐지만 로라는 그저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왜 부끄럽다는 거예요?"
"묻고 있는 쪽은 나야."
"찰스, 모두가 쓸데없는 생각이에요. 난 600km쯤 운전을 해도 끄덕없다구요. 그리고 공항은 집에서 200km나 떨어져 있어요. 비행기를 탄다는 것도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구요."
"도대체 집이 어디에 있길래? 아직도 집이 어디라고 말한 적이 없잖아! 왜 숨기려는 거지?"
로라의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뭉클하고 치솟았다.
"사는 곳을 숨기긴 했어도 난 이름까지 숨기진 않았어요."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지?"
"본명을 제대로 대란 말예요! 당신이야말로 이름까지도 숨겼으면서... 찰스 리차드 손다이크 씨!"
찰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더니 그는 별안간 로라의 팔을 움켜쥐었다.
"언제 알았지?"
"역시 그랬었군요."
섭섭했다. 마음 한 모퉁이에서는 자신의 착각이기를 바랐는데...
"언제 알았냐구?"
로라는 발딱 고개를 치켜들었다. 찰스가 아무리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봐도 물러설 내가 아니다.
"언제 알았느냐가 문젠가요? 당신은 처음부터 날 속이고 있었죠? 왜 그랬어요? 찰스, 왜?"
그는 엷은 웃음을 띠웠다.
"당신이 왜 날 집에 데리고 가지 않으려는지 그 이유를 말해 준다면 이름을 대주지 않았던 이유를 말해 주겠소."
"말이 막히는 모양이로군요."
로라는 억지로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내 이름 들은 기억이 없나?"
"없어요. 그렇게 유명한 이름인가요?"
그 말이 불쾌한지 찰스의 말투에는 분노를 참는 빛이 역력했다.
"유명하진 않아. 그건 그렇고 어쩔 거요? 키스를 하고, 한 여름을 즐긴 상태로 그냥 안녕 하는 건가?"
"내일 전화를 걸겠다고 했잖아요."
찰스는 손을 뗐다.
"그래? 로라에겐 우리 사이가 단지 장난이고 놀이에 지나지 않았었나?"
뭐라고 대답해야 한담?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몸도 영혼도 모두 말예요.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구요. 당신을 잊으려고 애써도 잊을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러나 로라는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지금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는지 모르겠어요. 반 년 후에 물어 보세요."
"난 9월이면 토론토로 돌아간다구."
이것으로 끝장인가? 개운치 않은 뒷말을 남겨 놓은 채 헤어질 수밖에 없단 말인가?
"찰스, 나 마음이 급해서 그만 가겠어요. 뒷일을 부탁해요. 그리고 수고해 주는 김에 짐 좀 들어다 주지 않을래요?"
로라는 말없이 슈트케이스를 들고 걸어가는 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집안을 한 번 휘둘러보았다. 하지만 침실은 쳐다보기도 싫다. 찰스와 나누던 달콤한 기쁨을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다. 찰스, 당신에겐 그 일이 그저 장난과 놀이에 지나지 않았었나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역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짐을 모두 싣고 난 뒤 찰스는 트렁크를 잠그고 열쇠를 내밀었다. 로라는 그의 손에 자기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열쇠를 받아 가지고 운전석 쪽으로 돌아왔다.
"내일 전화할게요."
문을 열려고 했을 때 찰스가 어깨를 잡는다. 마음을 그대로 녹여 버릴 것만 같은 눈길...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돌리자 그는 그녀를 힘껏 껴안고 키스했다. 정열, 분노, 사랑의 기쁨, 이별의 슬픔 등 모든 것을 느끼게 하는 키스였다.
로라는 떨면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고 시동을 걸었다. 자동차가 출발할 때는 뒷머리채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으나, 그녀는 끝내 한 번도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다.
10
그랜섬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인 12시가 지나서였다. 커피와 긴장감 때문에 졸립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피곤하다. 집으로 곧장 들어가고 싶다. 벙원에는 전화나 걸어 놓고 아침이 된 다음에 가면 될 게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하자니 양심이 찔린다. 결국 로라는 집앞을 지나쳤다. 벌써 면회시간이 지난 지 한참 됐겠지만 직원들과는 익히 아는 사이니 문제는 없다. 곧바로 외과병동의 간호사과 만났다.
"대런은 경과가 좋아. 체력도 있고 하니 걱정할 것 없어요. 만나보고 가야겠지? 그럼 혈압을 재러 가는 길이니 같이 가자구."
병실은 3인용인데 다른 두 사람은 대런보다 연장자였다. 대런이 이렇게 어려 보이긴 처음이다. 검은 속눈썹을 감고 잠자는 그의 모습은 마치 귀여운 소년처럼 보인다. 간호사가 혈압을 재기 시작하자 대런은 몇 번인가 눈을 떴다가 감곤 했다. 아직도 마취가 덜 깬 것 같다.
"면회예요, 대런."
간호사는 노트에 혈압을 기입하고 로라를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빨리 끝내도록 해요. 이 시간에 면회를 시킨 걸 알면 간호과장에게 혼나니까...."
"걱정 말아요, 곧 돌아갈게."
로라는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대런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올려다보았다. 4년 동안 반항만 해왔던 대런인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가 가엾어 보인다. 이렇게 무사한 것만도 천만다행이지! 마음이 약해져서인지 눈에 눈물이 괸다.
"경과는 좋대. 잘됐어."
자기도 모르게 로라는 대런의 볼에 키스를 했다. 대런은 아직도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다.
"케이프 브레턴에서 오는 길이에요?"
"응, 키스에게서 전화를 받고 곧바로 출발했지."
"아직도 휴가가 남았을 텐데?"
대런은 기쁜 것인지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그의 표정으로는 짐작할 수가 없다.
"휴가가 문제겠어? 대런이 걱정되는데...."
대런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수앤이나 키스를 위해서라면 몰라도, 나 때문에 고모가 와줄 줄은 몰랐어요."
"오고말고. 당연한 일이잖아. 난 대런을 좋아해. 더구나 입원을 했다는데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잖겠어?"
손을 잡자 대런은 갓 태어난 동물처럼 가까스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리고 약 때문인지 또 의식이 몽롱해진 것 같다.
"일자리... 그만두라고 하면.. 어쩌지. 목장에.. 가봐줄래요?"
"그래, 좋아 내일 아침 제일 먼저 가볼게."
"고마워요."
속눈썹이 다시 그의 볼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입가에는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고마워요, 고모. 와줘서... 기쁘구요."
대런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눈물이 흘러 볼을 적신다. 불쌍한 대런... 제임스는 장래성 있는 키스만을 소중히 여겼고, 장남인 대런은 언제나 소홀히 대했었다. 대런이 반항적이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오늘밤의 그는 솔직하게 남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이번 기회로 그는 틀림없이 변할 것이다.
로라는 살며시 대런의 손을 놓고 병실을 나왔다. 새벽 공기는 눅눅했다. 불이 꺼진 집들은 적막함 바로 그 자체였다. 집으로 돌아오자 키스는 주방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진한 차를 마시면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녀가 돌아온 것을 안 그는 신문을 팽개치고 달려 나왔다.
"고모! 어서 와요!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요."
로라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대런이 아주 기뻐하더라. 역시 내가 오기를 잘했어! 그렇지, 키스? 너희들과 함께 살았던 것이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의학 교과서에 씌어 있지 않은 것을 많이 배웠거든."
키스는 로라를 포옹했다.
"우리들 3남매도 참 좋았었다고 생각해요. 대런 형은 항상 투덜거렸었지만 실은 응석을 부린 거라구요. 난 잘 알아요. 수앤은 고모를 무척 따랐었구요. 고모가 없었던 3주일 동안은 괜시리 축 늘어져 있었지만...."
"키스, 넌 어때?"
적당히 얼버무리는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진실을 알고 싶은 것이다.
"물론 고모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이처럼 열심으로 우리 뒤를 돌봐 주는 사람이 어디 또 있겠어요? 고모가 와주지 않았더라면 우리 집은 가정이 아니라 다만 집이란 거에 불과했을 거예요. 내가 오디션을 받게 된 건도 마음 편한 가정을 만들어 준 고모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괴어 로라는 눈을 비볐다.
"하지만 키스에겐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여기 있어 준 건만으로도 충분해요. 이제 그만 자도록 하죠. 짐은 내가 날라 올 게요. 자동차 키를 주시겠어요? 아 참, 수앤은 많이 좋아졌어요. 아직 기운이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로라는 키스의 스웨터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역시 집이 좋구나. 내일 아침에 일하러 나가기 전에 나 좀 깨워줘. 목장엘 가야겠어. 대런이 일자리를 잃게 될까봐 무척 걱정하더라."
"대런 형은 그곳이 마음에 드나 봐요. 내일 일은 오후일이니까, 9시쯤 해서 깨울게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좋아, 부탁해. 그럼 잘 자거라. 키스."
로라는 계단을 올라가서 수앤의 방을 기웃거렸다. 방안은 온통 산만하게 흐트러져 있고 수앤은 깊이 잠들어 있다. 침대 발치에는 낡아빠진 곰 인형이 놓여 있다. 대런에게 늘상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저 곰 인형을 버리지 못한다. 또 다시 뜨거운 것이 가슴에서 끓어오른다.
조용히 문을 닫고 로라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자리에 누웠다. 찰스의 팔 안에서 잠들었던 일이 아득한 옛날 일만 같다.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이제 그 생각은 하지 말기로 하자. 생각하면 할수록 괴롭기만 할뿐이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찰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중얼거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이곳은 그랜섬인 것이다. 다시 큰 목소리로 물었다.
"키스?"
찰스의 이름을 부른 걸 혹시 들은 건 아닐까?
"8시 반이에요. 커피도 준비됐구요."
"곧 나갈게, 고마워."
커튼을 열어 젖히니 눈앞에는 눈에 익은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자신이 없는 동안 사과 열매가 꽤 커졌다. 베어 놓은 풀 냄새가 나고, 집에 돌아왔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하지만 진짜로 돌아가야 할 곳은 찰스 곁이 아니겠는가?
찰스... 그에게 전화를 걸어야지! 그러나 무슨 얘기를 해야 좋을는지 알 수가 없다. 우선 필요한 것만 슈트케이스에서 꺼내고 샤워를 한 다음 데님 스커트를 입었다. 이것을 입은 것은 찰스의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이 옷을 입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래층에서는 키스가 커피를 따라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쓴 커피에 설탕과 크림을 듬뿍 넣으면서 찰스 생각을 했다. 그는 언제나 설탕을 세 스푼씩이나 넣었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키스, 토스트를 더 먹을래?"
"됐어요, 살이 찌면 곤란해요. 수앤은 아직도 자나요?"
"응, 잘 자더군. 그대로 자도록 내버려두자꾸나. 난 곧 목장과 병원엘 다녀와야겠어."
로라는 토스트에 버터와 딸기잼을 발랐다.
"목장에 가는 길 좀 가르쳐 주지 않을래?"
목장은 사우드 마운틴 기슭에 있었고 젖소들이 파란 풀을 뜯고 있었다. 목장 주인은 피터 밴주스트라는 이름의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키가 큰 그는 차고에서 트랙터를 수리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밴주스트 씨인가요?"
"네, 그렇습니다만...."
"저어, 대런의 고모인 로라 워커라고 합니다. 대런이 신세를 많이 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고모님?"
그는 상냥하게 웃었다.
"아무리 보아도 누나라고밖엔 안 보이는군요."
"대런이 일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고 있더군요. 얼마 동안은 힘든 일을 할 수가 없을 텐데, 그 동안 댁에서 다른 사람을 고용하면 어쩌나 해서...."
피터 밴주스트는 또 한 번 웃어 보였다. 수앤의 방에 있는 곰 인형과 어딘지 닮은 데가 있다.
"학교가 방학일 동안엔 우리 두 아들놈이 도와주고, 또 이웃집 아이들도 도와주죠. 9월이 되면 대런도 회복돼 일할 수 있지 않겠어요?"
"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대런을 다시 고용해 주시겠습니까?"
"그러구말구요. 그 사람은 동물을 아주 잘 다루더군요. 일도 시원시원하게 해치우구요.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대런이 이 얘기를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요. 대런은 이곳에서 일하는 게 아주 기쁘다고 하더군요."
"그것 참 잘됐군요. 퇴원하면 언제라도 오라고 하십시오."
로라는 작별인사를 하고 차고 사이의 오솔길로 빠져나왔다. 건물은 모두 깨끗이 손질돼 있었고 문외한이 보더라도 소들은 털에 윤기가 흐른다. 틀림없이 세세한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병원에 가니 대런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침대는 머리 쪽이 위로 들려 있었다.
"안녕. 대런."
로라는 가볍게 인사를 했다.
"통증이 오니?"
"네, 아픈 것도 싫지만 마취도 싫군요. 얼떨떨해요. 목장엔 가봤어요?"
"응, 밴주스트 씨를 만났어. 네가 빨리 완치되기를 기다리겠다고 했고, 또 네가 동물들을 잘 다룬다며 칭찬이 대단하던 걸?"
대런은 전에 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래요? 잘됐네요?"
"암소도 대런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어차피 동물인 걸요, 뭐."
대런은 뿌루퉁했지만 결코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저어, 대런, 나 별장에서 돈을 어디다 쓸까 생각해 봤어. 수앤과 키스에겐 학비를 대줄 것이고, 네겐 그 액수에 상당하는 돈을 줄게. 그러니 땅을 사가지고 목장을 경영하는 게 어떻겠어?"
"할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겠군요. 밴주스트 씨 농장 부근에 팔려고 내놓은 땅이 있어요."
"그럼, 목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은 벌써부터 갖고 있었군?"
"하지만 그전에 농과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느 쪽이 좋을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구요. 학교에 가는 것과, 실습하는 것과... 아무리 노력해도 난 주눅이 들어 학교에 다니기가 싫었거든요."
"누군가가 격려해 준다면 학교가 좋아질 것 같애?"
대런이 학교 다니기를 싫어했던 것은 오빠인 제임스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장래성이 없다고 낙인을 찍어 버렸었으니 말이다.
"글쎄요, 그럴는지도 모르죠."
"대런도 잘해낼 수 있을 거야. 어쨌든 대런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둬."
"고맙습니다. 고모. 돈 문제로 불평을 하곤 해서 미안해요. 내가 나빴어요."
"나도 나빴었어. 이런 거금을 가져 본 경험이 없었거든. 그래서 주저했었던 거야...."
하기야 지금도 주저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직도 찰스에게 털어놓는다는 게 두렵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까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있더라구. 나도 학교에 갈 수가 있고... 대런, 피곤하지 않아? 침대를 눕혀 줄까?"
대답이 없는 것은 그렇게 해달라는 얘기다. 로라는 침대를 눕히고 대런의 볼에 키스를 했다.
"이따가 또 올게."
대런에게는 키스와 같은 날카로운 감수성도, 수앤과 같은 애교도 없지만 오늘 한나절만에 그는 아주 밝고 솔직한 사람이 되었다. 내성적인 그가 이 정도까지 마음의 문을 열어 준 것은 실로 만족할 만한 진전이다.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늘 봐온 우체국. 제인의 남편이 경영하는 약국, 교회 등이 눈에 들어왔다. 교회 탑은 아직도 칠이 벗겨진 채였다. 길가에서 매닝 부인이 두 명의 여자 친구와 더불어 수다를 떨고 있다.
바트와 있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 봐도 부끄럽기만 하다. 그를 사랑했었다니, 큰 착각이었지. 눈을 제대로 뜨게 해 준 사람은 찰스다. 난 찰스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사랑을 고백할 시기가 있을지는 몰라도...
로라는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잰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엔 예쁜 꽃무늬가 수놓인 잠옷을 걸친 수앤이 테이블에 앉아 있고 빨간 앞치마를 두른 키스가 조리대 앞에 서 있었다. 수앤은 로라를 보자마자 해쓱한 얼굴 가득 웃음을 띠우며 달려왔다.
"어서 와요, 고모. 아이 좋아라!"
"내 요리는 좋지 않단 말이지?"
키스는 프라이팬의 달걀에 소금을 뿌리며 말했다. 수앤은 피식피식 웃는다.
"차 한 잔 얻어먹으려면 30분이나 걸린다구요, 글쎄."
"저렇다니까! 고모, 아시죠? 차에 계피를 넣어 줄까?"
수앤은 일부러 몸을 떨어 보였다.
"점점 한다는 말이... 아예 고추를 넣지 그래?"
로라는 웃었다.
"그만 해요. 차는 내가 만들어 줄게. 참, 그 연애사건은 어떻게 됐니, 수앤?"
얘기를 대충 들어보니 수앤 쪽에서 짝사랑하고 있는 듯했다.
"스티브라는 아이, 아주 남자답고 멋져요. 이번만큼은 나도 진지하다니까요."
로라는 그저 미소만 짓고는 아무 말 없이 순하게 탄 차를 수앤 앞에 내밀었다.
"토스트는? 뭐든 좀 먹어야지?"
"네, 한 조각쯤은 먹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어저께는 진저엘조차도 보기조차 싫더라구요."
"난 하루종일 노래 한 마디도 부르지 않았었다구. 어때, 내 이 고운 마음씨가?"
키스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이때 누군가가 뒷문을 두드렸다. 빵 봉지를 꺼내던 로라는 문득 손길을 멈췄다. 바트가 왔나? 바트라면 만나기도 싫은데,...
"내가 나가보죠."
키스가 일어서서 문을 열고 나갔다.
"실례합니다만 여기가 로라 워커 양의 집인가요?"
바트의 목소리는 아니다. 로라의 손에서 빵 봉지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정신이 아찔해진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넌 빅토리아 시대의 여자가 아니잖아? 이런 일로 졸도한다면 우스갯거리가 될 거야. 키스가 소리친다.
"고모? 손님이 오셨어요!"
로라는 문 앞으로 나갔다.
"어서 오세요, 찰스."
그는 티셔츠를 걸치고 있는데 바지는 주름투성이고 수염도 깎지 않은 채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나? 어쨌든 환영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무슨 용건이죠?"
"조카들을 소개해 주지 않겠소? 그리고 차를 한 잔만...."
키스와 수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찰스를 쳐다보고 있다. 로라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조카인 수앤과 키스예요. 이쪽은 찰스 리차드 손다이크 씨."
이름을 분명하게 강조한 것은 그 의미를 찰스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키스가 빨간 앞치마를 두른 채 위엄을 갖추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러나 수앤은 순진하게 묻는다.
"이웃 별장에 사신다는 분이신가요?"
로라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시치미를 뗄 수도 없다.
"그렇단다. 무슨 용건으로 왔는진 몰라도...."
수앤은 얼른 입을 열었다.
"빵이 쏟아지고 있어요, 고모. 내가 차 준비를 할 테니 그걸로 토스트를 구워 주세요. 우리는 주방에서 먹자구, 키스 오빠."
"그전에 우선 중대한 용건이 있어."
찰스는 무서운 얼굴로 뚜벅뚜벅 로라 앞으로 다가서더니 거칠게 키스했다. 로라는 그의 발을 걷어찼지만 그 바람에 빵만 짓이겨 놓고 말았다. 뒤에서 키스가 갑자기 아이다를 불러댄다. 찰스는 깜짝 놀라며 얼굴을 들었다.
"그만 해, 키스!"
화가 난 로라의 얼굴을 보자 수앤은 프라이팬을 든 키스의 팔을 잡아끌며 주방에서 나갔다. 로라는 쭈그러진 빵 봉지를 주워서 편 다음 싱크대 위에 놓았다.
"무슨 일로 이곳에 왔어요?"
"로라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왔다구. 내연의 남편이 있는지 혹은 미치광이라도 숨겨 두고 있는지...."
찰스는 햇빛이 스며드는 주방을 둘러보았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지붕 밑을 수색해 볼까?"
웃기지 말아요.
"내가 초대할 때까진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마냥 기다리고 있다가는 그게 언제 이뤄질는지 알 수 없겠더라구."
그는 자기 집에서처럼 발로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는다.
"차 한 잔도 안 주긴가? 줄곧 운전을 하고 왔기 때문에 지쳤다구. 그런데 참, 수앤도 그리고 키스도 모두 좋은 아이들이로군. 키스의 목소리는 굉장해! 틀림없이 베시카글리아의 훌륭한 제자가 되겠어."
로라는 차를 따라서 찰스 앞에 놓았다.
"토스트, 들래요?"
"물론이오, 고마워요."
"남에게 하듯 예의바른 척하지 좀 말아요."
로라는 토스터의 스위치를 넣었다.
"내 주소를 어떻게 알아냈어요?"
"핼리팩스 도서관에 가서 애나폴리스 계곡의 전화번호부를 조사해 봤지. 로라 워커... 그랜섬 메인스트리트. 간단하더군."
"하지만 집을 용케 찾았네요."
"주유소, 요 앞의 주유소에서 물어 봤지."
"주유소 사람이 뭐라던가요?"
"킹 거리를 건너서 다섯 번째 집이라고 하더군."
"그 말밖에 안 하던가요?"
"응, 뭘 그렇게 겁먹고 있는 거야? 내가 들어서 안 될 일이라도 있나?"
토스트가 다 구워졌다. 로라는 버터를 칠해서 접시에 담고, 잼과 냅킨과 함께 그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컵에 차를 따랐다.
찰스는 토스트에 잼을 발랐다.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라가 나쁜 짓을 하고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아요.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정직하지 못했었던 것은 나도 마찬가지지. 난 로라를 신용해요. 그것을 차츰 깨닫게 됐어. 로라는 마음이 넓고 마음씨가 따뜻한 사람이야, 숨기는 게 있을 그런 타입이 아니라구."
갑자기 눈물이 글썽거린다. 찰스는 자신을 신용해 주겠노라고 말했다. 이 말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찰스, 당신이 그런 말을 하면 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당신에게 이름을 속일만 한 사정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손다이크란 성을 들어 본 적이 없나?"
"없어요."
"내가 너무 자만했었나?"
찰스는 창가로 걸어가서 과수원의 평화로운 정경을 바라본다.
"로라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그것뿐만은 아니었어."
그의 긴장감이 가슴 아프게 전해져 온다. 쇼크 받을 만한 얘기가 나올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로라는 긴장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난 어떤 사실을 말하려고 온 거야. 나는 그전부터 조금씩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데, 어제 저녁 로라가 떠나자 비로소 확실하게 느끼게 됐어, 로라,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구. 결혼해 줘."
이층에서 또다시 키스의 아이다가 들려온다.
"사랑한다구요?"
로라는 눈을 깜박이며 반문했다.
"응, 사랑해."
"그저 평범한 나를?"
"두뇌 명석하고 의욕 강하고 다소 화도 낼 줄 알고, 책임감이 있고, 정열적이나 사귀면 사귈수록 즐겁고... 로라는 그저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구."
"그런 것 말고 나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하고 있느냐고 물은 거예요."
"그럼, 로라 외에 뭐가 또 있다는 거야?"
로라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일어섰다.
"벌써부터 털어놔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저어, 난 1백만 달러를 가지고 있어요."
찰스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의 고백에 대해 이런 대답을 듣게 되리라곤 예상치 못했으리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두 달쯤 전에 1백만 달러 짜리 복권이 당첨된 거예요. 당신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이곳 그랜섬에 오지 못하도록 했던 거예요. 온 마을에 그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거든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군. 1백만 달러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리기가 싫었다구? 그건 왜?"
"바트가 청혼해 온 건 그 1백만 달러 때문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당신도 그러지 않을까 생각했었어요... 돈이 탐나서 청혼하는 건 정말로 싫거든요. 순수하게 로라 워커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로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청혼한다면 어떡할 거야? 돈이 탐나서가 아니라, 로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고 싶다면 뭐라고 대답할래?"
로라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물론 <예스>라고 대답할 거예요. 당신과 결혼할 수 있다니, 꿈만 같아요."
"내 청혼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죠. 찰스 리차드 손다이크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건 상관없어요."
"땡전 한 푼 없는 사람이라도?"
"l백만 달러가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해요. 교회 탑을 새로 칠하고도 돈은 얼마든지 많이 남아요."
"그럼, 그 반대로 우리 아버지가 캐나다에서 20위 이내에 드는 자산가라면?"
거짓말쟁이! 라고 말하려던 로라는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말을 바꾸었다.
"정말이에요?"
"물론이오. 데이비드 리차드 손다이크, 10개의 회사를 소유하고 있고 그것 이외에도 10개 이상의 기업경영에 관계하고 있는 억만장자지. 인간적으로는 고집불통의 기업인인데 그분이 바로 내 아버지라구."
"즉, 당신에겐 1백만 달러쯤은 우습게 보이는 돈이란 말이로군요?"
"응, 난 독자거든. 아버지의 재산을 전부 상속받게 돼.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 로라. 로라의 1백만 달러를 탐낼 내가 아니니까...."
"이제서야 사정을 짐작할 수 있겠네요.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내가 재산을 탐내서 접근해 오지 않을까 경계한 거로군요?"
"사귀는 동안에 로라는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 난 당신에게만은 나라는 인간 자체로 사랑받고 싶었지. 온타리오에 있을 때 난 친구들에게서조차 이상한 눈초리를 받았었고, 여자들은 모두 돈 때문에 열을 올리는 걸 보았지. 그 별장에서의 우리는 그저 찰스 리차드와 로라 워커를 서로 좋아했었던 거야."
"바보처럼.. 우리들.. 양쪽 모두 쓸데없는 걱정만 하다니...."
"걱정 정도가 아니었어. 나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구. 로라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그리고 로라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점점 불안을 느끼게 됐고."
로라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찰스, 키스해 줘요."
눈을 감고 얼굴을 들자 찰스는 기쁨의 미소로 얼굴이 환해졌다.
"기꺼이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두 사람은 키스를 하고 웃으면서 달콤한 사랑의 말을 나누고는 다시 뜨겁게 키스했다. 로라로서는 처음으로 나누는 사랑의 밀어... 그 한 마디 한 마디는 영원히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키스의 노래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주방으로 오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 노래소리가 갑자기 그쳤다.
"고모... 아직도 거기 있어요?"
로라는 얼굴을 붉히며 찰스의 셔츠 속에 넣었던 손을 빼냈다. 찰스도 로라의 가슴을 더듬다가 얼른 손을 빼며 말했다.
"들어와도 좋아요, 키스."
키스가 빈 프라이팬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가까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보자 고개를 돌리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수앤! 네가 이겼다!"
그리고 로라와 찰스를 보고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수앤은 두 분이 열을 올리고 있을 거라며 내기를 하자고 했어요."
"용케도 맞혔군."
찰스가 말했다.
"고모는 나와 결혼하기로 했어."
입구에서 엿듣고 있던 수앤이 뛰어들면서 두 사람에게 안겼다.
"축하해요, 고모! 내가 들러리를 서게 해줘요, 네? 바트가 고모부가 안 된 게 참 다행이네요."
그리고 눈을 반짝이면서 찰스를 올려다보았다.
"멋진 고모부!"
키스는 찰스에게 손을 내밀며 어른스럽게 말했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로라의 볼에 입맞췄다.
"결혼식은 언제 할 건가요?"
수앤의 물음에 찰스는 로라를 바라보며 웃더니 대답한다.
"글쎄, 아직 거기까진 얘기가 안 됐지만... 9월에 내가 토론토로 떠나기 전에는 해야 하지 않을까? 매주 주말마다 이곳에 오면 세상 사람들 소문이 귀찮을 테니까."
"어머, 사람들 시선 때문에 결혼하나요?"
"이유는 벌써 말했잖아. 로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다구...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애."
찰스는 넋을 놓고 바라보는 수앤을 의식하고는 크게 웃어댔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들러리가 있고, 안 그래?"
"참, 그렇군요."
로라도 웃으며 말했다.
"9월이 좋겠어요. 키스는 축가를 불러 줄 거고. 그렇지, 신부를 식장에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대런에게 부탁해야겠군."
"대런 형이 들어줄까요?"
키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해줄 거야, 틀림없이. 찰스, 오후엔 우리 함께 병원에 가서 대런을 만나 보도록 해요."
"나 샴페인을 사가지고 올게요."
키스가 신바람이 나서 나갔다.
"점심 식사는 참치 샌드위치와 샴페인으로 하죠?"
"난 이층에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어야지, 3Q분 동안은 아무도 두 분을 방해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수앤은 말을 마치자 웃으면서 뛰어나갔다. 주방에는 찰스와 로라 두 사람만 남았다.
"홈드라마에 나오는 가족 같군."
"그런 가족 싫으세요?"
"무슨 소리야? 아주 좋아한다구. 난 형제가 없이 자랐고 또 손으로 만든 생일 케이크도 못 먹고 자랐다니까. 언젠가 로라가 별장에 왔을 때 전화 통화하다가 화낸 일이 있었지? 그때 아버지와 전화하는 중이었어. 처음부터 로라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로라는 내 이름을 알아냈을 거라구. 난 로라가 내가 누군지 확인한 줄 알고 그렇게 화를 냈었던 거야. 난 어디까지나 손다이크의 아들이 아닌 찰스 리차드로서 교제하고 싶었어."
"그래서 그렇게 화를 냈었군요?"
"그때는 정말로 미안했어. 정직하게 말한다면 난 아버지와 자주 만나지 않는 편이지. 서로 호흡이 안 맞는다구. 대학을 나온 다음 3년 동안 아버지 밑에서 일한 적도 있지만 결국 난 독립해서 2년간 세계여행을 했지. 단돈 5백달러를 가지고 말야. 돌아왔을 때 남은 돈은 2백 36달러 15센트. 아버지 유산이 없더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든 증명해 보이고 싶었거든. 케이프 브레턴의 별장은 외가 쪽 친척의 것인데, 여름 동안 빌어 가지고 경험했던 것들을 정리해 보던 중이었지. 9월이 되면 토론토로 돌아가서 내가 생각했던 바를 추진해 나갈 생각이라구."
"그 생각이 뭔데요?"
"예의 그 농구 팀을 기억하고 있지? 체육관이 있고 훌륭한 코치만 있으면 아주 멋진 팀으로 육성할 수가 있어. 나는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사원들의 레저 활동을 장려하려고 해. 시간이 좀 걸릴지 몰라도 언젠가는 결실을 맺게 될 거라구. 아버지께서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해."
"당신이 세운 기획은 반드시 성공할 거예요."
소년 농구팀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찰스는 사람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난데다가 추진력도 강하다.
"하지만 내가 토론토에 있는 학교에 진학한다 해도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그다지 많지 못하겠네요. 당신은 업무상 항상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할 게 아녜요? 독수공방만 하게 될까 무섭네요."
"문제없어."
찰스는 분명히 말했다.
"우선 학교 가까이에 집을 사는 거야. 보통 부부보다 함께 있는 시간이 적을는지는 몰라도 노력해서 시간을 만들면 돼. 그 대신 함께 사는 동안엔 헤어져 있을 때의 몫까지 열심히 해줄게."
그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지금도 단둘이 있을 시간은 얼마 안 남았어. 곧 수앤이 들어와서 들러리 설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좋겠느냐고 물어 올 거라구 키스도 샴페인을 들고 들어올 거구. 그러니까 이 짧은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찰스는 보기 좋게 그 말을 증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