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아침의 노래(All I Need is You)
Johanna Lindsey
-1-
1892년, 텍사스
"네가 아무리 목장의 공동 소유자라 해도 그곳을 직접 경영할 수는 없어!"
"그런 처사는 부당해요! 타일러 오빠가 여기 있다면 아버지는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금방 목장을 맡기셨을 거예요."
"타일러는 다 자란 성인 남자야, 하지만 넌 이제 겨우 열일 곱 살이잖니, 케이시."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오빠가 다 자랐다면, 남편과 자식이 셋까지 딸린 여자들이 수두룩한 내 나이는요? 그게 아니라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지요? 아버지의 진심이 정말 그렇다면 죽는 날까지 아버지와 얘기하지 않겠어요."
두 사람의 말은 모두 진심이 아니었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오해받기 십상이었다. 코트니 스트래튼은 남편과 외동딸이 서로 노려보는 꼴을 보다 못해 그들의 관심을 끌 생각으로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시도는 허사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언쟁이 열띤 반박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지경으로 접어든 지금, 그런 은근한 중재가 먹혀들리 없었다. 코트니는 두 사람이 그녀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물론 이런 언쟁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과열된 적도 없었다. 작년에 플레처 스트래튼이 죽은 뒤로 바엠 목장의 운명은 의문에 붙여졌다. 그 목장의 후계자는 챈도스가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아들 챈도스를 너무 잘 아는 플레처가 아들이 상속을 거부할 경우를 대비하여, 그 목장을 3등분하여 세 명의 손자손녀에게 나눠주라는 조항을 유언장에 덧붙이는 바람에 오늘과 같은 언쟁이 끊이지 않았다.
챈도스는 홀로 자수성가했기 때문에 그 목장을 원치 않았다. 원래 자립심이 강한데다 아버지에게 뭔가 보여주겠다는 오기까지 가세한 탓에, 혼자 힘으로 수만 편에 이르는 땅과 수천 마리에 이르는 가축뿐 아니라 아버지 집보다 두 배나 큰 저택까지 장만했다.
바엠과 KC를 합한 목장은 텍사스에서 가장 넓은데다 두 목장의 소유자가 부자지간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두 곳을 하나의 목장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여기지 않은 사람은 당사자들인 그 부자뿐이었고,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신 마당에 챈도스 혼자 독불장군처럼 두 목장을 개별적으로 간주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귀한 딸자식에게 목장 경영을 맡기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 점에서는 케이시 또한 뒤지지 않았다. 케이시는 목장 경영에 관한 문제를 놓고 끈질기게 아버지를 물고 늘어졌다.
그야말로 그 아비에 그 딸이었다. 모친인 코트니를 닮은 두 아들, 열 여덟 살의 타일러와 열네 살의 딜런과 달리 케이시는 챈도스의 성격과 외모를 쏙 빼어 닮았다. 머리카락은 아버지처럼 석탄과 같이 검었고, 아버지처럼 키가 커서 약 177센티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가장 키가 큰 아기씨로 꼽혔다.
케이시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이라고는 그 아름다운 눈이 전부였다. 케이시의 눈동자는 은은하게 빛나는 호박석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같은 또래의 아가씨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결혼했을 정도로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되는 서부의 기준에 비춰볼 때, 케이시는 여러모로 늦었다.
케이시는 근육만 없다 뿐이지 아버지처럼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데다 강단이 있었다. 뭐, 생김새가 억세고 우락부락하다는 뜻은 아니다. 찬찬히 뜯어보면 꽤 예쁜 축에 속했다. 단, 다른 사람들이 얼굴을 자세히 관찰할 만큼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도무지 한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있는 법이 없었다. 항상 서성거리지 않으면 손짓을 하며 끊임없이 말을 해대거나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
하지만 정지된 순간의 모습을 포착한 이라면, 단박에 눈이 크고 맑으며, 햇볕에 그을린 피부는 상처 하나 없는데다, 콧날이 거만할 만큼 쭉뻗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사실 눈썹은 지나치리만큼 짙고 턱은 고집스러웠지만 귀족적인 광대뼈가 그런 단점을 잘 가려줬다. 하지만 감정을 감쪽같이 숨기는 능력처럼 다른 사람을 낭패스럽게 하는 점이 또 있을까. 아버지, 챈도스처럼 말이다. 케이시가 그런 능력을 발휘할 때면, 사람들은 아예 그녀의 기분이나 생각을 어림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그 유별난 능력이 발휘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케이시는 챈도스의 또 다른 능력을 물려받았으니, 그건 바로 전략과 전술을 짜내는 기지였다. 한 가지 술책이 잘 먹혀들지 않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방법을 고안해냈다. 고함쳐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케이시는 재빨리 차분하고 조리 정연하게 맞섰다. "하지만 바엠 목장에는 책임자가 필요해요.
"소투스가 그 일을 잘 해나가고 있어."
"소투스는 벌써 예순일곱이나 된 노인이에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무렵, 그분은 이미 은퇴해 작은 오두막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고 아버지가 적임자를 물색할 때까지만 목장을 책임지기로 했잖아요. 하지만 아버지가 점찍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윤의 반을 주지 않는 한, 목장을 떠맡지 않겠노라고 거절했어요. 그렇다고 아버지가 직접 그곳을 경영하실 생각도 없으시잖아요."
"이곳에도 신경 쓸 게 한들이 아닌데 그곳까지 책임질 시간이 없... "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도 그 점을 잘 알고 계시구요. 바엠 목장의 3분의 1이 몫인 만큼, 재가 경영해도 권리상 하등의 문제가 없어요."
"케이시, 너는 아직 열여덟 살도 되지 않았어."
"도대체 열여덟 살이 이 일과 무슨 관계가 있어요? 그리고 몇 달 내로 그 나이가 될 테니..."
"그 나이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야 할 나이야. 그런데 말을 타고 바엠 목장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어떻게 결혼할 수 있겠니?"
"결혼! 흥, 나는 타일러 오빠가 대학 졸업하고 돌아올 때까지, 그러니까 앞으로 2년 동안의 일을 말하는 중이라구요. 나는 목장 경영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요. 그 모든 걸 바로 아버지에게 배운 몸이잖아요? 거기에다 추적하는 법까지 익혔으니..."
"너에게 그딴 방법을 가르쳤던 건 가장 큰 실수였어" 챈도스가 투덜거렸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드디어 코트니가 말할 기회를 잡았다.
"당신은 우리가 주위에 없을 때를 대비해 딸아이에게 어떤 상황이라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고 싶어 했어요."
"그래, 바로 그거야. 나는 우리가 주위에 없을 때 저 아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구."
"아버지, 나는 배운 대로 하고 싶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납득할 만한 반대 이유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셨어요."
"그거야 내 말을 흘려들었기 때문이지." 챈도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첫째, 너는 너무 어린 아기씨이기 때문에 바엠 목장의 억센 목동들이 네 명령을 듣지 않을 거야. 둘째, 결혼 적령기에 이른 처녀가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면서 허드렛일이나 하고, 목장 회계 장부에 코를 파묻고 지내면서 적당한 신랑감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어."
케이시는 얼굴을 붉히고 노발대발하며 쏘아붙였다.
"말이 다시 결혼으로 돌아가는군요! 지난 2년 동안 내가 관심을 둘만한 남자가 이 주변에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요? 아니면, 아무나 잡아서 결혼하란 말씀이세요? 정말 아버지 의향이 그러시다면, 한심한 바지저고리들이야 지천으로 깔려 있어요. 좋아요, 내일 당장 밧줄을 들고 나가 닥치는 대로 잡아오겠어요."
"시건방진 소리 말아라."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요. 아버지는 내 남편에게 바엠 목장을 맡기실 생각이세요? 이제 알았어요, 아버지 눈에 꼭 찰 만한 신랑감을 조만간 데려올 테니..."
"넌 그러지 못할 게다. 회계 장부에 코를 처박게 될 텐데 결혼을 무슨 놈의 결혼이야."
"아버지, 나는 이미 지난 몇 달 동안 회계 장부에 코를 처박아왔어요. 소투스는 눈뜬 봉사나 다름없기 때문에 장부를 들여다볼 때마다 심한 두통으로 앓아 누웠단 말이에요." 그 말에 챈도스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했다.
"왜 그런 사정을 말하지 않았니?"
"그야 소투스가 이곳에 올 때마다 아버지가 목장에 나가고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아버지가 직접 바엠 목장을 시찰할 턱이 없으니까요. 바엠 목장에 전혀 관심이 없으시잖아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아버지는 그분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으시겠죠? 소원대로 그 목장이 몰락하는 꼴을 조만간 보시게 될 거예요"
"케이시!"
코트니가 질겁해서 소리쳤다.
케이시도 이미, 말이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아버지의 불벼락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방을 뛰쳐나갔다. 코트니는 남편을 달랬다.
"여보, 케이시가 감정이 너무 고조되어서 마음에 없는 말을 한 거예요."
챈도스는 입을 꾹 다물고 방을 나갔다. 하지만 그는 딸을 쫓아, 저택 앞쪽이 아니라 뒷문을 통해 마구간으로 갔다.
챈도스는 말싸움을 이렇게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쯤 케이시도 죄책감을 느끼겠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바꿔놓겠다는 결심까지 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좀 더 타당한 반대 이유를 댔어야 했다.
챈도스는 케이시가 목장 경영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해서 상처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진심을 털어놓았더라면...
바엠 목장의 목동들은 케이시가 플레처의 손녀딸임을 알고 있으므로 한동안은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목동의 등장은 필연적이고, 그들은 그녀와 플레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므로 심각한 불화가 일어나리라. 만일 케이시가 과부이거나 좀더 나이가 들었더라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이 여자,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처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리란 건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챈도스는 그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하루 이틀 뒤, 케이시의 마음이 진정된 다음에 아내를 시켜 딸을 구슬리도록 해야지. 일단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케이시는 예측을 불허하는 시한폭탄이었다.
-2-
방을 뛰쳐나온 케이시는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런 아침 시간에 현관 베란다는 대개 찾는 사람 없이 평화롭게 일쑤였고, 오늘도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다.
저택 전면을 차지한 베란다는 가로세로 3미터에 이를 만큼 넓었고, 흰색의 소형 탁자와 의자들이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 아버지가 설치한 2인용 그네가 양쪽 가장자리에 달려 있었고, 어머니가 애지중지 돌보는 무성한 화초들은 군데군데 놓인 목동용 타구(침이나 가래를 뱉는 그릇)를 교묘하게 가려주었다.
케이시는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드러날 때까지 힘주어 베란다 난간을 쥐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한 스트래튼 목장의 푸른 목초지는 간간이 솟은 언덕과, 무인도처럼 몇 그루의 나무로 둘러싸인 저수지, 그리고 텍사스 특유의 선인장과 동물들로 이루어졌다. 북쪽 경계의 숲은 저택에서 보이지 않았다. 작은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 따라 내려가면 농어의 서식처인 호수가 있었다. 척박하고 아름다운 땅에 찾아든 봄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아침이었건만, 케이시의 눈에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애당초 아버지의 비이성적인 태도가 화근이 아니었던가. 죄책감과 분노는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장난기 심한 두 형제와 함께 성장하면서 자주 화를 냈지만 죄책감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나 케이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밖에 어떻게 달리 생각한단 말인가? 아버지는 항상 바엠 목장에 관심이 없다는 인상을 풍겼고, 플레처 스트래튼의 소유물에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았다. 그 점이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할아버지를 사랑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 오랜 세월 동안 으르렁거렸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할아버지는 부자 관계를 원만히 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었다. "물론, 케이시도 지난 과거사를 다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남편의 부정을 이유로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고, 할아버지는 모자를 다시 데려오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아내와 자식의 행방을 모른 채 오랜 세월이 흘러, 챈도스가 홀연히 바엠 목장에 나타났다. 사실, 그가 목장에 발을 디딘 순간 총에 맞아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노르스름한 무스탕을 걸치고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데다 얼룩말을 탄 모습이 틀림없는 인디언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동자가 할머니와 똑같이 진한 푸른색이었던 탓에 플레처는 가까스로 아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플레처는 아들의 입을 통해 기가 막힌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홧김에 맨몸으로 아들을 데리고 떠났다가 카이오와족(북미 서부의 인디언)에게 잡혔고 후에 코만치족에게 팔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젊은 코만치 용사가 할머니를 아내로 삼고 챈도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들 부부 사이에서 챈도스의 이복 여동생이 태어났다.
인디언의 포로가 되었을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챈도스는 미처 10년이 지나기 전인 열여덟 살에, 당당한 성인으로 코만치 부족의 땅에서 자리잡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그를 친아버지의 곁으로 돌려보냈다. 할머니는 아들이 코만치의 삶을 선택하기 전에 백인 세계에 대한 경험을 쌓기를 원했던 것이다.
바로 그 결정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챈도스는 어머니의 청을 거절 못하고 순순히 부족을 떠났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뒤였다. 그는 코만치족의 손에 코만치족으로 성장한 인디언이었다.
하지만 그는 백인들로부터 배울 수 잇는 모든 지식을 받아들였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 는 신조가 백인이 전유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플레처였다. 그는 아들을 되찾은 사실에 큰 기쁨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챈도스의 적대감을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플레처의 호전적이고 고집스러우며 독선적인 태도는 오히려 아들의 적대감을 부추겼다.
플레처는 챈도스를 자신이 원하는 자식의 상에 끼워 맞추려고 갖은 노력을 했고, 그 때문에 그들 부자는 끊임없이 싸웠다. 챈도스는 고분고분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파국의 시간이 다가왔다. 플레처가 목동들에게 챈도스의 변발을 자르도록 시킨 사건을 계기로 큰 싸움이 벌어졌다. 챈도스는 세 명의 목동을 때려눕히고 훌훌 목장을 떠났다가 3년 후에야 다시 나타났다. 그 즈음 플레처는 이승에서 다시는 아들을 못 보리라고 체념한 상태였다.
훗날 플레처가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챈도스는 부족으로 돌아가서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백인들에게 학살당한 부족의 시체가 널려 있었던 것이다. 챈도스가 도착하기 바로 전날 자행된 대학살의 희생자 속에는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끼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강간당한 후에 살해되었다. 그로부터 4년 동안, 챈도스와 남은 부족 사람들은 살인범을 추적한 끝에 그들을 찾아내, 똑같이 무참하게 보복을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챈도스는 케이시의 어머니인 코트니 하트를 만났다.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챈도스는 코트니의 고향이자 플레처의 목장과 근접한 지역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와 경쟁하면서, 부친의 도움 없이 성공적으로 목장을 이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오래 전에 아버지에게 받았던 재산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은행에 고이 모셔놓은 채, 오로지 자신의 피와 땀으로 현재의 부를 쌓아올렸다.
플레처와 챈도스는 화해하지 않았다. 최소한 남들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플레처가 죽은 후에도 챈도스의 태도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훗날 자식을 통해 두 목장이 합쳐지리라는 미래상이 챈도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엠 목장은 적임자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몰락할 운명에 처했다. 하지만 케이시는 절대로 그런 말을 내뱉지 말았어야 했다. 생각이야 자유지만,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짓은 최악의 모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한 번도 아버지를 모욕해본 적이 없었다. 소리 소문 없이 한 사내가 뒤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처녀, 지금 울고 있는 거유?"
케이시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틀림없이 그녀와 아버지의 말싸움을 엿들었으리라. 플레처가 죽은 후, 케이시는 바엠 목장의 임시 책임자 소투스와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울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케이시는 팽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자를 어색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빼고는 별 소용이 없지. 이제 뭘 할 거유?"
"앞치마 끈을 묶어줄 남편 없이도, 남자들 세계에서 잘 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증명해 보이겠어요."
"처녀는 죽었다 깨어나도 앞치마를 걸치지 않을걸. 헌데, 무슨 수로 증명할 생각인데?"
"여자에게 걸맞지 않은 일을 하겠어요."
"그런 일이 어디 한둘인가?"
"여자들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거칠고, 위험하고, 불요불굴의 의지가 필요한 일을 하겠다는 뜻이에요. 애니 오클리(미국 서부 시대의 여자 명사수)라는 여자는 한동안 소몰이꾼도 하고 척후병 노릇도 했다면서요?"
"그 오클리는 생긴 것도 남자 뺨치게 생겼고, 옷도 그렇게 입었다고 들었수. 하지만 처녀 심중에 있는 생각이 뭐유? 설마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겠지?"
"바보 같은 짓이든 말든, 나는 뭔가를 해야 해요. 아버지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갑자가 마음을 바꾸는 기적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아버지의 황소고집이 누구의 유전인지 아시지요?"
소투스는 쿡 웃었다. 그는 플레처의 좋은 친구였지만 있는 그대로 사실을 인정했다.
"애써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
"정말 대단한 고집이에요. 그러니 허락을 구하지 않겠어요. 또, 내 자신을 증명할 필요도 없어요. 아버지는 이미 내 능력을 아시니까요. 다시 생각하셔야 할 거예요."
"어이구 맙소사, 처녀의 그 충동적인 행동에 내가 명대로 못 살지."
-3-
앞쪽에서 불빛이 어른거렸다. 모닥불이로구나. 데미안 루트리지는 그 불이 모닥불이기를 바랐다. 지난 이틀 동안 사람 구경을 못 했다. 이 순간, 그는 아무리 미개한 인간이라도 그에게 가까운 읍으로 통하는 길을 가르쳐준다면 식사 대접을 해줄 용의가 있었다.
그는 완전히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사전 지식에 의하면 서부는 문명화된 지역이었다. 그에게 문명이란 사람과 이웃과 건물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곳은 가도 가도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였다.
점점 인구가 희박해지는 마을을 지나치면서, 이 지역이 예전에 놀던 물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뉴욕으로부터 출발한 기차 여행은 꽤 쾌적했다.
불편하고 불쾌한 경험의 시발점은 캔자스였다. 그리고 첫 시작은 기차였다.
캔자스와 텍사스 사이를 오가는 기차가 열차 강도 소동으로 철로에서 이탈하여 엔진이 고장나는 바람에 그 주일에 운행하지 않았다. 그는 역마차를 타고 인접한 읍까지 가면 다른 기차를 탈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길을 우회해서라도 전진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마차 여행이 시대에 뒤떨어진 탓에 문제의 그 역마차가 지난 5년 동안 한 번도 이용되지 않았다는 정보는 듣지 못했다.
같은 방향으로 여행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기차가 수리되기를 기다렸지만, 데미안은 너무 초조했기 때문에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게 가장 큰 실수였다. 역마차의 승객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이 그런 교통편을 피할 만한 이유가 있음을 눈치 챘어야 옳았다.
캔자스에서는 기차가 들어가지 않는 읍 사이를 역마차가 오갔지만, 그 구간은 강도 떼의 출몰이 잦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비가 줄줄 새는 정거장에서 수다쟁이 마부를 만나는 순간까지 그럴 줄을 꿈에도 몰랐다. 얼마 후에야 그 사실을 아주 어렵게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마차를 뒤따르는 총격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다음에 벌어질 사태를 환히 짐작할 수 있었는데도, 마부는 말을 세우기는커녕 그 날고 허름한 마차로 노상강도들을 따돌리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했다. 게다가 데미안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유로 길에서 벗어나기까지 했다. 강도 떼와 함께 뽀얀 먼지 구름이 점점 가까워지고 총소리가 빗발치는 가운데 역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데미안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마차 안에서 휘청거리다가 금속 손잡이에 머리를 찧고 정신을 잃었다.
그를 다시 깨운 건 마차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였다. 이미 날을 저물어, 전복된 마차를 간신히 빠져 나와 보니 짙은 어둠으로 세상천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혼자였다. 말은 도둑을 맞았는지, 아니면 도망을 갔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부 역시 총을 맞고 노변에 쓰러졌는지, 강도떼에게 끌려갔는지, 아니면 목숨을 부지하고 도움을 청하러갔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관자놀이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를 뒤집어쓴 채, 세찬 빗방울과 싸우며 여기저기 흩어진 소지품을 주섬주섬 가방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 비를 피해 마차 안에서 끔찍한 밤을 보냈지만, 대낮에 다시 눈을 떴을 때에도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알 수 없었으니 딱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역마차의 자취마저 간밤에 내린 비로 깨끗하게 사라진 뒤였다.
시계는, 주머니와 가방 속에 넣어뒀던 현금과 함께 도둑을 맞았다. 그나마 재킷 속주머니의 비상금을 빼앗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는 좌석 밑에서 물병 하나와 무릎 덮개를 찾아냈다. 어두워질 때까지 그 허름한 천 쪼가리를 뒤집어쓴 모습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원래 목적지였던 다음 읍을 향하여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역마차가 제 길을 벗어났기 때문에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원래보다 훨씬 남쪽이나 동쪽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모르는 사이에 읍을 지나친 건 아닐까? 그는 막연하게 제 길로 돌아가길 바랐지만 그런 행운은 따르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뒤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음식을 먹게 될 날이 다시 올까? 요깃거리를 잡을 만한 무기도 없을뿐더러 그런 재주도 없었다.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그로서는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터였다.
작은 웅덩이에서 핏자국을 씻어낸 뒤, 비에 젖어 축축하지만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물로 배를 채운 후에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를 괴롭히던 두통은 둘째 날부터 약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련된 도시 풍의 신발과 가방 덕에 잡힌 손발의 물집 탓에 두통을 의식할 여유조차 없었다. 비를 맞은 탓에 옷에서 물까지 떨어졌다. 그래서 둘째 날 밤은 전날보다 훨씬 비참했다.
이런 지경에서, 우연히 발견한 모닥불은 하늘의 은총이었다. 데미안은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불빛은 아무리 가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헛것을 보았나? 그러나 노력에 대한 보답인지, 점에 불과하던 불빛이 점점 또렷해졌다. 모닥불이 틀림없었다. 커피 냄새와 고기 굽는 냄새까지..., 음식 냄새를 맡은 그의 위장이 요동을 쳤다.
모닥불까지 스무 발짝 정도 남았을까, 목에 차가운 금속이 닿더니 동시에 찰칵 방아쇠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 인기척을 듣지 못했던 데미안은 돌연한 상황에 얼어붙고 말았다.
"경고도 없이 남의 캠프에 침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모르나?"
"이틀 동안이나 길을 잃고 헤맸습니다."
데미안이 피곤에 절어 대답했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경고를 해야 한다는 관습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요."
신경이 바짝바짝 타는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데미안은 지친 머리를 굴려 덧붙일 말을 찾았다.
"나는 무기가 없습니다."
방아쇠를 푸는 소리와 함께 금속과 가죽의 마찰음이 정적을 갈랐다.
"미안하오. 하지만 이 근방에서는 아무리 조심해도 코 베이기 십상이오."
데미안은 빙그르르 돌아서서 그의 구세주를 보았다. 구세주, 아니, 최소한 문명으로 안내해줄 인도자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어린 티를 갓 벗은 소년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 크지 않은 깡마른 소년의 뺨은 갓난아이처럼 매끄러웠다. 열대여섯 정도 되었을까? 청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모카신을 신고, 암청색 셔츠 위에 검정과 갈색이 뒤섞인 우중충한 판초를 걸친 차림이었다.
저 판초 아래에 총집이 있으리라. 미주리 지역을 횡단하면서 무수하게 봐왔던 넓은 테의 모자 아래로, 소년의 검은 머리칼이 흘러내려 있었다. 하지만 데미안의 숨을 멈추게 한 부분은 그 밝은 갈색 눈동자였다. 그 눈은 소년이 아니라 예쁘장한 소녀에게나 어울림직한 고양이 눈이었다. 데미안은 소년의 판초와 모카신을 보며 허둥지둥 질문을 던졌다.
"이곳이 인디언 보호 지역은 아니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셨소?"
"혹시 인디언인가 싶어서."
소년의 얼굴에 언뜻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데미안은 정말 미소인지 확신이 안 섰다.
"내가 인디언처럼 보여요?"
"글세, 사실 인디언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르겠구나."
데미안은 마지못해 사실을 인정했다.
"나 역시 댁이 인디언을 봤으리라 생각지 않소, 신출내기 양반."
"내 물집이 그렇게 빤히 보였니?"
소년은 한동안 그를 응시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소년의 웃음치고는 관능적인 여운이 강했다. 데미안은 자신이 놀림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현재 모습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얼굴을 가려주는 모자가 없었던 탓에 발가벗은 기분이었다. 이번 여행길에 딱 하나 준비했던 중절모는 강도의 습격으로 손질이 불가능할 만큼 찌부러진 데다, 어제 갈아입은 옷은 이미 먼지와 모래투성이였다. 하지만 예의범절만은 온전했다. 그는 악수를 청하며 격식을 갖춰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데미안 루트리지 3세라고 해. 너를 알게 되어서 진심으로 기쁘다."
소년은 데미안의 손을 응시하다가 그냥 고개만 까딱 숙여 보였다.
"댁 같은 사람이 세 사람이나 있소?"
그 다음에 그는 어리석은 질문을 철회라도 하듯 황망하게 손을 저었다.
"지금 그 말을 괘념치 말아요. 오늘 밤 내 캠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따뜻한 음식도 나눠드리겠소. 소년은 약간 히죽거리며 덧붙였다.
"보아하니, 댁은 음식이 간절한 모양인데."
데미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음식 냄새를 맡은 이래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먹거리를 제의 받지 못했다 해도 화를 낼 입장이 아닌데다 하고 싶은 질문 몇 가지보다 음식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데미안은 서슴지 않고 불가로 다가갔다.
모닥불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큰 쪽은 주변을 따뜻하고 밝게 비춰주는 난방 및 조명용이오, 작은 쪽은 요리용이었다. 움푹 파인 구멍 주변에 놓인 네 개의 돌이 철제 석쇠를 지탱했고, 그 아래로 잔가지를 태운 깜부기불이 음식이 타지 않도록 은근한 열을 가했다. 석쇠 한쪽에는 커피 향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꺼먼 주석 주전자가, 또 다른 쪽 주석 상자 안에는 갓 구워낸 비스킷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다 강낭콩 통조림까지 있었으니, 데미안에게는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이게 무슨 고기니?"
데미안은 접시용 철판을 받으며 물었다.
"야생 암탉."
닭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통째로 데미안의 접시에 올랐다. 거기에다 강낭콩과 비스킷 세 개까지 덜어주었다. 그는 게눈 감추듯 밥을 먹어치운 후에야 접시용 철판이 하나밖에 없는 관계로 정작 주인인 소년은 석쇠에서 직접 음식을 떠먹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미안하다, 내가..."
그의 사과는 곧 가로막혔다.
"괜한 말하지 마쇼. 철판이라면 이 근방에 수두룩하게 널렸으니. 게다가 저 아래쪽에 몸을 씻을 수 있는 강까지 있소."
목욕이라? 데미안은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혹시 비누를 가지고 있니?"
"정히 목욕을 하고 싶거든 남들처럼 강바닥의 침적토로 몸을 닦아요. 웬만한 먼지는 씻겨나갈 겁니다."
정말 원시적이로군, 데미안은 생각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생필품만 가지고 야외에서 캠핑하는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전부 원시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 맛은 나무랄 데 없었다.
"음식을 나눠줘서 정말 고맙다. 나는 굶주림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했을 거야."
다시 소년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이게 전부 내 저녁거리라고 생각하쇼? 지금 댁이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던 음식은 내 아침거리였소. 아, 그렇다고 사과할 필요까진 없소. 시간을 버는 셈치고 아침에는 남은 것을 먹을 테니까. 그리고 아무리 바쁘기로서니 핫케이크 구울 시간도 없겠소?"
배를 적당히 채우고 나자, 데미안의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네 이름을 아직 모르는데."
그 독특한 갈색 눈동자가 데미안을 주시하다가 커피잔으로 돌아갔다.
"그거야 내가 당신 식대로 내 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네가 정 이름을 말하기 싫다면..."
"이름 따위는 없소. 최소한 나는 몰라요.
데미안은 그런 대답을 들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뭐든 이름이 있을 텐데?"
소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주로 ‘키드(꼬마)’ 라고 불렸소."
"아하."
데미안은 미소를 지었다. 그 이름은 서부의 수배범 명단에 자주 오르는 것으로, 그 별칭 뒤에 다른 이름이 따르는 게 관례였다.
" ‘빌리 더 키드’ 에서 딴 이름이니?"
소년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하는 일에 내가 너무 어리다는 뜻일 거요."
"어떤 일을 하는데?"
소년은 커피잔을 데미안에게 건넸다. 데미안은 다음에 이어진 소년의 말에 잔을 엎을 뻔했다.
"나는 범죄자들을 잡고 있소."
"저기...,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그러니까, 네 차림새가..."
"뭐 어떻다는 거요?"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 같지 않아."
"아, 보안관 같지 않다? 그야 물론이오. 누가 나처럼 어린 사람을 보안관으로 뽑겠소?"
"그렇다면 왜 범죄자를 잡니?" 그는 정중하게 물었다.
"그야 현상금을 노리니까."
"그게 돈벌이가 되니?"
데미안은 장황한 설명을 기대했기에 소년의 간결한 대답에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매우."
꽤 똑똑한 소년이로군, 데미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일을 시작한 이래 몇 번이나 건수를 올렸니?"
"다섯 번."
"현상 수배범 전단을 여럿 봤는데, 거기에는 수배범의 생사 여부에 따라 현상금을 준다는 부분이 없더구나."
"지금 그 말이 내가 죽인 수배범의 숫자를 묻는 거라면, 그 대답은 ‘아무도 없다’ 입니다. 지금가지 몇 군데 상처를 입힌 게 전부니까.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교수형을 언도받았으니, 올해가 가기 전에 주님을 만나게 될 거요."
"거친 범죄자들이 너를 무서워하긴 하니?"
소년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자는 거의 없소. 하지만 이것은 무서워하더군요."
눈 깜박할 사이에 소년의 손에 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래, 권총은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킬 거야."
데미안 역시 그랬다. 소년은 자칭 주장하는 수훈을 달성하기에 너무 어렸다. 설령 한두 살 더 먹었더라도 데미안의 의심은 사라지지 않을 판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란 워낙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허풍을 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어쨌든, 데미안은 권총이 다시 권총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무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키드는 권총을 넣은 다음에 커피를 다시 따랐다.
"이 주변에서 사니?" 데미안이 또 물었다.
"아닙니다."
"이 근방에 사는 ‘사람’이 있니?"
데미안이 특히 강조한 말은 소년의 웃음을 불러일으켰다. 그 관능적인 웃음소리는 조금 전의 모습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지 않았다면, 주변 어딘가에 여자가 숨어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한 그런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키드가 워낙 여자아이처럼 예쁘장한 용모였으므로 데미안은 그런 부조화를 흘려버렸다. 키드는 데미안의 묵상을 깨뜨렸다.
"루트리지 씨, 댁은 이곳을 죽도록 헤매고 다닌 모양이군요."
"웃을 일이 아니야."
데미안은 건조하게 말하고 약간 뜸을 들였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니?"
"코퍼빌에서 남쪽으로 한 이틀 정도 걸어야 하는 곳이오."
코퍼빌이란 이름은 생소했다. 데미안이 아는 거라고는 그곳이 그의 목적지가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역마차가 뒤집히기 전에 생각보다 훨씬 남쪽으로 치달은데다, 그 역시 정처 없이 헤매다가 더 남쪽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곳이 가장 가까운 읍이니?"
"여기는 내 손바닥 안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소."
"그럼, 너는 여기서 뭘 하는 거니?"
"코퍼빌에 볼일이 있습니다."
키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데미안은 소년이 질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눈치 챘다. 하지만 데미안은 대화를 즐기는 타입이라, 네 일에나 신경 쓰라는 면박을 들을 때까지 꼬치꼬치 캐묻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내가 같은 자리를 빙빙 돈 것 같지는 않은데, 여기서 가까운 곳에 길이 있니?"
키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가능한 한 큰길을 피해 다닙니다. 원래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람의 왕래가 적은 이쪽으로 온 거요."
그 퉁명스런 대답에 데미안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방해를 해서 정말 미안하구나. 하지만 난 정말 길을 잃었어."
"어쩌다 그렇게 되었습니까?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거요?"
키드의 말에는, 데미안을 말 하나 제대로 못 타는 칠칠치 못한 인간으로 여기는 여운이 감돌았다. 데미안은 약간 팽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냐, 나는 역마차로 여행하고 있었어. 그리고 내가 중간에서 마차를 놓쳤다는 상상을 하기 전에 말해두겠는데..."
"이봐요, 괜히 간단한 질문에 마음 상해서 변명할 필요는 없소. 댁은 말을 타지 않고 걸어서 내 캠프에 도착했소. 그러니, 당신 말이 절름발이가 되었다거나, 혹은 낙마해서 말을 잃었다는 추측이 당연하잖소? 역마차 승객이 걸어 다닐 일은 만무하니까."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키드의 말이 하나에서 열까지 이치에 맞았고, 머리가 다시 깨어질 듯 아파왔다. 하지만 그는 말을 다 끝낼 때까지 사과를 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내가 탔던 역마차가 노상강도에게 추적을 받았단다. 마부는 놈들을 피해 도망가려다가 결국 마차를 부숴 버렸어. 나는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지. 그날 밤 정신을 차려보니, 마부와 말은 온데간데없고 내 지갑과 주머니는 텅 비어 있더구나."
"이 근방에서 노상강도가 출몰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저께."
소년은 실망에 찬 한숨을 내뱉었다.
"놈들은 지금쯤 멀리 도망갔겠군."
데미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럴 테지. 너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니?"
"역마차 강도의 목에는 후한 현상금이 걸려 있소. 그리고 일단 현상 수배범으로 전단이 뿌려진 놈들은 추적자를 피해 감쪽같이 몸을 숨기거든요. 데미안은 농을 걸었다.
"그래, 무명의 강도를 잡는 편이 훨씬 수월하겠구나."
"수월한 게 아니라 더 빠른 거요. 나는 그런 경우를 일종의 예상치 못한 상여금 생각하니까. 이제 당신이 대답할 차례요, 루트리지 씨. 무슨 일로 서부에 오셨소?"
"내가 동부 출신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니?"
소년은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로 데미안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봤다.
"육감이라고나 할까."
데미안이 있는 대로 얼굴을 구겼다. 키드는 킬킬거리다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댁도 서부 유람길에 오른 동부 치 중 한 사람이오?"
데미안은 약이 올라 툭 쏘아붙였다.
"아니, 나는 사람을 죽이려고 텍사스에 가는 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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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을 죽이려고 텍사스에 가는 길이야.’
그 말은 내뱉고 나자, 데미안의 마음속에 그의 삶이 산산이 부서졌던 6개월 전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바로 그날 밤, 모든 것이 사라졌다. 데미안은 위니프레드에게 꽃다발과 함께 그날 아침에 완성된 약혼 반지를 줬다. 그들은 뉴욕의 교통 체증을 뚫고 제사간에 레스토랑에 도착했고, 저녁식사는 훌륭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제 위니프레드의 집으로 가서 생애 가장 중요한 청을 할 분위기가 마침맞게 무르익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두 사람의 결합을 쾌히 승낙하신 뒤였다. 그들은 완벽한 한 쌍이었다. 그는 루트리지 상사의 후계자요. 그녀는 C.W. & L. 회사의 상속녀였으니, 그들의 결합은 단순한 결혼이 아니라 뉴욕에서 가장 큰 두 회사의 합병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디저트를 먹고 있을 때, 뉴욕 21번 가의 관할 경사 존슨이 나타나 데미안에게 면회를 청했다. 그들은 로비로 나갔다. 그리고 그 대화가 끝날 즈음, 데미안은 큰 충격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 바쁜 와중에도 경사에게 위니프레드의 배웅을 부탁하고 정신없이 루트리지 상사로 달려갔다. 회사 건물은 불야성을 이루었다.
사무실은 대개 오후 5시경에 문을 닫았지만, 가끔 한두 명의 직원이 늦게까지 남아 서류 작업을 했고 데미안의 부친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는 아니었다. 심지어 청소부마저 일을 끝내고 돌아갔을 시간이었다.
데미안이 도착했을 때, 사무실은 뉴욕 시청 소속의 경찰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시체는 사무실 깃대에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문 양쪽을 각각 장식한 깃대에는 매년 6월 한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국기가 게양되었다. 6월이 지나면 덩굴식물의 훌륭한 안식처였다. 허나 그날 밤에는 줄기와 이파리가 아무렇게나 짓이겨진 채, 시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사무실 벽이 벽돌로 만들어지지 않았던들, 그런 체구의 시체가 바닥에서 한 뼘이나 떨어진 채 깃대에 걸려 있지 못했으리라. 깃대가 모두 강철로 만들어 "진데다가 벽면에 단단히 보강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무거운 물체를 매달아도 결코 휘어지거나 구부러지지 않았다.
깃대 높이는 밑창이 두꺼운 신발을 신고 한쪽 발뒤꿈치를 들고 서야 겨우 잡힐 정도였다. 하지만 시체는 맨발이었다. "깃대 옆에 있던 의자도 멀리 차버리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시체를 내려놔요."
아무도 데미안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세 명의 경찰이 사무실 앞에서 그를 제지했고, 다른 이들은 증거를 찾느라 분주했다. 데미안은 악을 썼다.
"시체를 내려놓으라니까!"
그때서야 사람들의 관심을 보였다. 그 중 사복 차림의 한 경사가 호령을 했다.
"당신 누구야?"
데미안은 여전히 시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들이오."
경찰이 힘을 합해 데미안 루트리지 2세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동정의 말을 던졌지만, 데미안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 이 세상에서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 그에게는 친척이 없었다. 어머니는 어린 데미안을 놔두고 아버지와 이혼한 후에 연인과 재혼했다. 그 이래 어머니를 만난 적도 없었고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데미안의 마음속에서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위니프레드는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녀와 결혼할 계획이었지만,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저 잘 어울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결점이 없는 숙녀였다. 아름답고 세련된 아내이자, 좋은 어머니가 될 여자였지만 데미안에게는 타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의심할 여지없는 자살입니다. 여기 유서까지 있어요."
그리고 유서를 데미안의 얼굴에 들이댔다.
데미안은 가까스로 종이에 초점을 맞추고 내용을 읽었다.
-데미안, 나는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할 수 없구나. 나를 용서하거라.-
그는 경찰의 손에서 유서를 낚아채 다시 읽었다..., 그리고 또다시 읽었다. 필체는 아버지의 것처럼 보였고, 종이는 주머니 속에 있었는지 마구 구겨져 있었다.
"이걸 어디에서 찾아냈습니까?"
"이보라는 듯 책상 한가운데 놓여 있더군요."
"책상에는 새 편지지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유서가 죽기 전에 쓰여졌다면 왜 이렇게 구겨졌겠습니까?" 경찰은 어깨를 으쓱했다.
"부친은 여러 날 동안 유서를 갖고 다니다가 마음을 정하셨겠지요."
"저 밧줄도 손수 가져오셨단 말입니까? 우리 사무실에는 저런 게 없어요."
"그렇다면 사오신 모양이군요. 루트리지 씨, 부친께서 이런 식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현실을 어떡하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여기 이 유서에서 부친이 극복할 수 없었다는 일은 도대체 뭡니까?"
"모릅니다. 우리 아버님은 자살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부친 생각은 다르셨던 것 같군요."
데미안은 경찰의 싸늘한 회색 눈을 쏘아봤다.
"당신은 보이는 그대로 사건을 마무리할 겁니까? 심지어 우리 아버지가 살해당하셨을 가능성조차 염두에 두지 않습니까?"
"살해?"
경찰은 짐짓 겸손하게 말을 받았다.
"목을 매다는 것보다 훨씬 쉽고 빠른 방법이 많습니다. 저런 식으로 죽는데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리는지 아십니까? 목이 부러지지 않는 한, 오랫동안 고통을 당한 뒤에야 죽음을 맞는단 말씀입니다. 부친 목은 멀쩡합디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저보다 쉽고 빠른 살해 방법이 무궁무진해요."
"당신은 사인을 자살로 보려고 용을 쓰는군요.
"사람을 살해하려면 머리에 총 한 방 쏘는 것으로 끝났을 겁니다. 이보세요, 여기에 싸운 흔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 아버님이 반항을 했거나, 양손을 묶인 것도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목을 매달지 않은 이상, 이런 체구의 사내를 들어 올리려면 몇 사람이나 필요할까요? 한두 사람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세 사람 이상이라면 가능할까? 그리고 살해로 추정할 만한 동기라도 있습니까? 부친께서 이곳에 돈을 보관하셨어요? 고가품이 없어졌습니까? 아니면, 그를 죽일 만큼 원한을 품었던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그 대답은 모두 부정이었기에 데미안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경찰은 현장 증거를 바탕으로 당연한 결론을 도출했고, 그로서는 그런 그들을 욕할 수 없었다. 사건에 대한 서류 작업을 끝내고 다음 일로 넘어갈 수 있는 마당에 단지 데미안의 말 한마디로 뻔한 일을 파고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이 사건에 더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야말로 힘과 시간의 낭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두 시간이나 더 살해 가능성을 고집했지만, 결국 장의사가 나타났고 경찰은 하나둘 변명을 대며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더 조사를 해보겠노라고 약속했지만, 그는 그 말을 단 일 초도 믿지 않았다.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인들 못하랴.
자정이 넘어서야 데미안은 부친과 함께 생활해왔던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에게는 너무 크고 오래된 저택이었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나이가 차서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와 아버지는 서로의 생활방식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며 편안하게 살아왔다.
그날 밤, 갑자기 찾아든 집안의 적막함이 데미안을 괴롭혔다. 이제 다시는 아버지와 함께 아침을 먹고 출근하지 못하리라. 다시는 늦은 저녁에 서재로 찾아가 고전 작품에 대한 열띤 토론을 나누지 못하리라. 다시는 저녁을 함께 하며 사업 이야기를 하지 못하리라. 이제다시는...
지금까지 참아왔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데미안은 격한 감정에 겨워 침실로 올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워낙 늦은 시간이었기에 평상시의 반듯한 태도를 벗어 던진 그의 추태를 목격할 만한 하인이 아무도 없었다. 잠 못 이룰 경우에 대비해 보관해둔 브랜디를 잔에 따랐지만, 너무 구슬프게 오열하는 통에 미처 술을 삼키지 못했다.
마음속에는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리라는 생각뿐이었다.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건 현장에 반항이나 싸움의 흔적이 보이진 않았지만, 데미안은 본능적으로 아버지가 피살당했음을 알았다. 데미안은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았다. 그만큼 서로 가까운 사이였던 것이다.
루트리지 2세는 고난을 회피하거나 발뺌하는 남자가 아니라, 전심전력을 다해 노력하는 남자였다. 아무리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해도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 부자는 결혼 계획을 짜왔다. 데미안이 이곳에서 신접살림을 차릴 경우를 대비하여 저택 서쪽 부분을 다시 짓고 더 철저하게 사생활을 보장하자는 말까지 거론했다. 데미안의 부친은 귀염둥이 손자를 품에 안아보는 날만 학수고대한 터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루트리지 2세는 진정으로 현재의 삶에 만족했다. 그는 재혼하지 않고 정부를 두는 생활에 완벽하게 만족했다. 막대한 유산에 기대지 않고 자기 힘으로 큰 부를 쌓아올렸으며, 선친이 창업한 회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해왔다. 한마디로 그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데미안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나를 용서하거라? 아니, 그런 말은 아버지가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용서받을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앙심을 품은 사람이라면... 데미안은 추억을 옆으로 제쳐놓고 행동에 나섰다. 다행스럽게도 고용했던 탐정이 원했던 대답을 찾아냈다. 그렇다, 그는 아버지를 살해한 남자를 죽이기 위해 서부로 왔다. 하지만 데미안의 살인 선언은 옆에 앉은 소년에게 별다른 충격을 안겨준 것 같지 않았다. 키드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댁은 살인광이요, 아니면 사람을 죽일 만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요?"
"아주 좋은 이유가 있어."
"댁도 수배범 사냥꾼이오?"
"아니, 이건 개인적인 문제야."
데미안은 더한 질문에도 대답할 용의가 있었지만, 키드는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고 말았다. 확실히 별난 꼬마였다. 저 나이 또래의 소년들이 대개 귀찮을 정도로 호기심을 드러내는 데 반해, 그는 무관심하게 몇 마디 질문만 툭 던지고 그만이었다.
"목욕을 하고 오마."
데미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키드는 엄지손가락으로 어깨 뒤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면 강이 있소. 난 잠자리에 들 테니, 나중에 돌아와서 너무 바스락거리지 말아요."
데미안은 가방을 들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언덕을 따라 내려갔다. 뒤에서 키드가 소리쳤다.
"그리고 뱀 조심해요."
뒤를 이은 숨죽인 웃음소리에 데미안은 이빨을 갈았다. 망할 놈의 꼬마 같으니. 내가 저 녀석과 얼마 동안이나 함께 다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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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냄새가 잠을 깨웠지만, 데미안은 딱딱한 땅바닥의 불편한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겨우 한두 시간밖에 눈을 붙이지 못한 기분이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약간 떠보니, 막 동녘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한 태양이 보였다. 하지만 날이 밝으려면 아직 더 있어야 했다. 어젯밤 극도의 피곤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잠을 들지 못했으니, 오늘 아침 기분이 찌뿌드드한 것이야 너무 당연했다.
데미안이 아버지의 죽음과 그 뒤에 벌어진 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비단 어제가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6개월 동안 폭발 직전의 격렬한 분노가 그의 동반자였다. 분노와 좌절감과 불신을 비롯한 씁쓸한 감정을 자주 곱씹은 후에 정의를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앞 뒤 꽉 막힌 경찰에게 질린 그는 사설 탐정을 고용했는데, 그들의 조사는 빠르고 완벽했다. 루트리지 상사의 맞은편 카페가 사건 발생 시간에 영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사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웨이터가 루트리지 사무실에서 나오는 우락부락한 남자 둘을 목격하고 인상착의를 자세히 봐뒀다. 우연찮게도 그는 아마추어 화가였기 때문에 푼돈을 받고 그들의 생김새를 그려냈다. 웨이터의 그림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던지, 몽타주가 뒷골목에 뿌려진 후에 두 명의 용의자 중 한 사람이 자수해서 모든 범행을 고백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헨리 커루더스는 이미 의심을 받고 있었다.
헨리 커루더스는 데미안의 부친 밑에서 십 년이 넘도록 일해온, 사십대 중반의 소심한 경리 사원이었다. 나이 든 고모를 모시고 사는 그는 결근이 단 하루도 없을 만큼 성실했다. 항상 루트리지 사무실이나 창고, 두 군데 중 한 곳에서 재고 조사에 몰두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다른 직원들처럼 장례식에 참석하여 루트리지 2세의 죽음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설탐정이 허락을 얻어 회사 장부를 샅샅이 훑어본 결과 심각한 오류를 찾아냈다. 그는 헨리에게 질문했지만 개운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의혹을 결정적인 증거로 삼을 수 없는 상황에서 헨리는 뉴욕에서 증발했고, 그 즈음 두 용의자의 몽타주가 효력을 발휘했다.
두 남자는 고용주의 이름을 몰랐지만, 그들이 묘사한 인상착의는 헨리와 똑같았다. 두꺼운 안경 렌즈와 숱 적은 갈색 머리칼, 왼쪽 뺨의 사마귀와 올빼미 같은 푸른 눈동자 등 헨리 커루더스가 틀림없었다. 그는 회사 공금을 횡령한 사실을 들키기 전에 남자 둘을 50달러씩 주고 고용하여 사장을 죽였던 것이다.
단돈 50달러에 사람을 죽이다니. 데미안은 사람의 목숨이 그렇게 값어치 없다는 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데미안에게 사립 탐정은, 어떤 사람에겐 푼돈이 다른 이에겐 거금이 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살인을 자살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던 사람도 헨리였다. 심지어 유서까지 위조했다. 그는 데미안이 비탄에 빠져 회사 일을 등한시하는 동안 완벽하게 장부를 고쳐놓으리라 작정했던 모양이었다.
헨리 커루더스는 살인자요, 두 남자는 하수인이었다. 데미안이 내막을 파헤치지 않았더라면, 그는 활개 치며 살 수 있었으리라. 아니, 현재까지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몸을 숨겼다. 3개월이나 걸려, 포트워스에서 겨우 꼬리를 잡았지만, 다시 온데간데없이 증발했다.
그 즈음, 데미안은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고 뒤에서 기다리는 데에 신물이 났다. 커루더스가 서부 어느 곳에서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으리란 생각을 참을 수 없었다.
체리 커루더스는 텍사스 포트워스에서 발견되었다. 즉, 다른 범법자들처럼 광활한 야생 속에 몸을 숨기려고 서부로 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커루더스를 찾아낼 생각이었다. 사람을 추적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지했지만, 그래도 반드시 찾아낼 결심이었다. 법적으로 커루더스의 살해를 정당화시키는 살인 면허 배지까지 손에 넣었다.
그걸 따기 위해 집안의 힘있는 친구들이 총동원되었다. 데미안은 오로지 커루더스를 처치할 목적으로 모든 연줄을 다 움직여 미국의 법무부 장관과 면담까지 했다. 그리고 연방 보안관의 배지와 함께 텍사스를 비롯한 모두 서부에 퍼져 있는 범죄자 목록을 손에 넣었다.
"거기 계신 두 분, 이제 나와서 이 커피 좀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계속 땅바닥에 엎드려 있을 겁니까?
데미안의 눈이 번쩍 뜨였다. 키드의 말은 그를 향한 게 아니었다. 그의 생각을 확인이라도 하듯 멀리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데미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 스무 발짝쯤 떨어진 그늘 속에서 사내 둘이 몸을 일으켜 먼지를 터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다음에는 캠프 주인의 반응을 눈여겨봤다. 키드는 전날과 똑같은 옷을 걸쳤는데, 다른 점이라면 밤새 옷의 주름이 더 눌었다는 정도였다. 소년의 모자가 끈으로 고정되어 등에 매달린 탓에 까치집처럼 덥수룩하고 불결한 머리칼이 훤하게 드러났다. 몇 달 동안 빗질을 하지 않은 머리였다.
키드는 속 편한 사람처럼 막 지펴놓은 모닥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불가해한 표정으로는 그가 새로운 방문객들을 경계하는지, 환영하는지, 혹은 불편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데미안은 속으로 곰곰이 궁리했다. 대체 무슨 수로 키드가 저들의 존재를 알아차렸을까? 데미안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모닥불이 비추는 반경 열 발짝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완전한 어둠에 휩싸인 상태였고, 해가 뜨려면 족히 30분은 있어야 했다. 데미안이 두 눈을 부릅떠야 겨우 이방인들을 분간할 수 있는 반면, 키드의 저 황금과도 같은 고양이 눈은 어둠을 꿰뚫었다.
캠프에 가까워지기 전에 경고를 해야 한다던 키드의 말을 기준으로 할 때, 저 두 사람이 숨어 있었던 이유에 대해 데미안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만 관습을 무시하는 게 아니로구나...
두 사람은 불가로 다가왔다. 키가 큰 쪽은 우호적으로 미소를 지었고, 다른 쪽은 쭈그러진 모자로 다리의 먼지를 탁탁 털었다. 모자를 어찌 저렇게 험하게 다룰꼬?
모자를 쓰지 않은 쪽이 데미안을 보고 자리에 우뚝 섰다. 그는 유령을 본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친구에게 말했다.
"네가 저놈이 죽었다고 했잖아. 하지만 내 눈에는 죽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키가 큰 쪽이 요란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입 싼 바보 멍텅구리 같으니. 너와 한 조를 이뤘다는 게 내 일생일대의 불행이야, 빌리밥!"
그는 말하면서 권총을 꺼내 데미안을 겨냥했다. 빌리밥은 약간 허둥지둥 몸을 뒤진 다음에야 겨우 무기를 꺼내 키드를 겨냥했다. 키드는 두 손을 위로 치켜 올려 반항할 뜻이 없음을 보여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은 무표정했다. 공포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데미안은 약이 올랐다. 역마차를 습격한 놈들과 정면으로 부딪친 이 현실 앞에서, 키드는 완전히 무심하게 보였다. 빌리밥이 투덜거렸다.
"빈스, 네가 나를 욕할 이유가 없어. 내가 저놈 때문에 놀란 건 다 네 책임이잖아. 다음번에는 희생자의 생사 여부를 확인한 다음에 똑바로 말하라구."
"입. 닥쳐, 빌리밥. 넌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어."
빌리밥은 정말 딛고 있는 땅바닥을 내려다봤고, 빈스는 눈을 치켜뜨고 눈동자를 굴렸다. 빈스는 친구의 옆구리를 쳐서 본연의 임무를 일깨우고 능글맞게 히죽거리며 데미안을 응시했다.
"자, 빌리밥이 무덤에서 시체를 다시 살려냈으니, 우리의 사업을 마무리해볼까? 네 놈이 흥미를 끌 만한 건 하나도 지니지 못했다는 거야 다 아는 사실이고..., 넌 어떠냐, 키드?"
순간, 데미안은 이 2인조 노상강도가 소년을 이름으로 부를 만큼 친한 사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 호칭이 소년의 나이와 관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소년 말대로 너무 어렸기 때문에 "키드(꼬마) 라고 불린 것이다.
"흥미를 끌 만한 것?"
키드는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는 태도로 대답했다.
"여기 뜨거운 커피와 핫케이크 반죽이 있는데요."
빈스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정말 흥미가 솟는구나, 키드. 하지만 네 주머니에도 뭔가가 들어 있을 텐데?"
"이것을 말하는 거라면..."
키드는 전광석화처럼 권총을 뽑아들고 발사했다. 그의 의도가 빈스를 죽이는 것이었다면, 총알이 목표에서 빗나가도 훨씬 빗나갔다. 하지만 놈을 무장 해제시킬 목적이었다면 과녁에 명중한 셈이었다. 총알이 빈스의 권총에 핑 소리를 내며 튀어나가는 통에 그의 손에서 권총이 떨어졌다.
빈스는 얼얼한 손을 경망스레 흔들며 돼지 멱따는 비명을 질렀다. 빌리밥이 입을 헤벌리고 당황한 시선으로 친구를 바라본 덕분에 키드는 수월하게 곁으로 다가가 옆구리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빌리밥이 우둔한 녀석이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가 임무대로 키드에게 눈을 떼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 그 가운데 앉은 데미안은 꼼짝없이 총알받이 신세가 되었으리라.
데미안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키드가 빌리밥의 무기를 땅에 떨어뜨리는 광경을 보면서도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저 소년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아주 쉽게 두 명의 노상강도를 무장 해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드의 표정을 아까와 다름없이 덤덤했다. 권총을 든 역마차 강도에게 습격을 당한 것이 아니라 마치 덤불 속에서 볼일을 보고 나온 사람 같았다.
키드는 땅에 떨어진 권총 한 자루를 발로 차서 데미안에게 던지고, 다른 한 자루를 허리춤에 쑤셔 넣었다. 그는 여전히 강도들에게 권총을 겨눈 채 말했다.
"앉아서 양손을 머리 뒤로 올려. 허튼 수작은 부리지 마. 너희들을 산채로 끌고 가는 것보다 죽이는 편이 훨씬 빠르고 훨씬 쉬우니까. 내 짐이 이미 초과된 이 마당에 내 성질을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키드가 예의바르게 목소리를 낮춘 관계로 데미안은 짐이 초과되었다는 부분을 듣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눈앞의 광경에 고민 중이었다. 맨발에 맞닿은 이 권총을 주워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는 권총에 익숙지 않았다. 사실, 권총을 쥐어본 적도 없었다. 뉴욕에서 권총은 무용지물이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 사격 대회에 출전하고 아버지와 교외로 사냥도 다녔던 탓에 라이플(소총)에는 꽤 친숙했다.
하지만 저 강도 녀석들이 권총을 다시 집으려 할 만큼 운신이 자유로운 마당에 무기를 땅에 내버려둘 수야 없겠지. 그가 막 무기를 집으려는 순간, 키드가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고민을 해결해줬다.
"루트리지 씨, 가방에서 녀석들을 묶을 만한 걸 찾아봐요. 낡은 셔츠가 적당할 겁니다."
데미안은 하마터면 코웃음을 칠 뻔했다. 셔츠 중에 낡은 거라고는 한 벌도 없었다. 낡은 셔츠 운운하다니, 사람을 어떻게 봤기에. 그가 생각한 바를 입에 담으려 할 때, 키드가 다시 덧붙였다.
"댁은 어차피 가방을 가져가지 못할 거요. 말 한 마리에 그것까지 실을 공간이 없소."
데미안은 코웃음치지 않기를 잘했다 싶었다. 데미안이 읍까지 갈 방법을 생각조차 못한 반면, 키드는 강도 두 놈과 그의 짐까지 처리할 대안을 이미 결정한 모양이었다.
한참 가방을 뒤진 후에 데미안은 셔츠와 권총을 각각 한 손에 들고 다가갔다. 키드의 표정에 인내와 짜증이 뒤섞였지만, 데미안은 셔츠를 찢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한참 후에야 그 점을 눈치 챘다. 저 아이가 저러는 것도 당연하지, 그는 생각했다. 키드의 권총 다루는 솜씨는 마치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웠지만, 데미안은 빌리밥처럼 권총 다루는 솜씨가 서툴기 그지없었다.
빈스는 제 친구가 꽁꽁 묶이는 장면을 지켜보며 호전적으로 다그쳤다.
"우리를 어디로 끌과 갈 생각이냐, 키드?"
"코퍼빌의 보안관에게."
"그런 짓은 너와 우리 모두의 시간 낭비가 될 거야. 우리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어."
"그 의견에 반대표를 던질 목격자가 여기 있어."
"저놈은 정신을 잃었었어."
"너희도 자백했잖아."
"무슨 자백?"
빈스는 경고 어린 표정으로 친구를 노려봤다.
"너, 무슨 자백했냐?"
빌리밥은 얼굴을 붉히며 장단을 맞췄다.
"내가 그런 말을 하는 바보인 줄 아냐?"
키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보안관이 별 어려움 없이 너희들이 한 짓을 가려줄 테니까. 장담하건대, 보안과 사무실에는 네 놈들 수배 전단이 있을걸. 그렇지 않다면..., 이번 일을 이 달의 내 업적으로 생각하마."
데미안은 수배 전단이라는 말에 빈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음을 눈치 챘어야 옳았다. 또한, 빈스가 다른 녀석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점을 미리 알아차리고 그를 먼저 묶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의 문제를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빈스가 키드의 다리 쪽으로 와락 덮치는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두 사람은 땅바닥을 뒹굴었다. 땅바닥에 등을 대고 벌렁 누운 키드의 다리 위에서 빈스가 총을 잡으려고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들이 몸싸움을 벌이기 전에 데미안이 빈스의 뒷덜미를 잡고 일으켰다. 그가 강도의 상판때기에 주먹을 꽂으려는 순간, 뒤에서 찰칵, 방아쇠 당기는 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빈스가 먼저 목소리를 되찾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총을 겨누고 있는 키드를 응시했다.
"넌 나를 죽이지 못할걸."
"과연 그럴까?"
키드는 딱 한마디만 던졌다. 하지만 소년의 표정에 기가 죽은 빈스는 작게 투덜거리며 설설 기었다. 그 표정만 봐서는 키드의 생각이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또한 그가 냉혹한 살인자인지, 아니면 두려움을 잘 숨기는 소년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분을 삭일 수 없었다. 그와 그의 어린 구원자가 위협 당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오늘 아침에는 목숨이 열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놀랄 일이 연거푸 벌어졌다. 그는 빈스의 콧잔등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빈스는 멍하니 있다가 주먹 한 방에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졌다.
데미안은 즉시 뉘우쳤다. 육체적인 폭력을 행사하기는 열다섯 살 이후 처음이었다. 당시 코를 부러뜨린 사람의 수가 일곱 명에 이르자, 아버지는 주먹질을 한 아들을 불러다 앉혀놓고 눈물이 쏙 빠질 만큼 야단쳤다. 그 내용인즉, 그가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몸집이 크기 때문에 싸움이 공평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될 때까지 그의 몸집은 다른 이들과 호각을 이루지 못했다. 186센티의 그는 신장과 체중 면에서 대부분의 성인 남자를 능가했다.
하지만 키드가 그의 죄책감을 누그러뜨렸다.
"잘 했소, 루트리지 씨. 이제 댁이 놈들을 마저 묶는 동안, 나는 핫케이크를 준비하리다. 아침을 먹은 후에 길을 떠납시다."
그 목소리는 오늘 아침에 별다른 일이 하나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 차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도대체 저 소년의 심장은 강철로 된 거야, 아니면 아예 없는 거야?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순순히 키드의 말에 따랐다.
-6-
키드는 다시 불가에 쪼그리고 앉아 밀가루 반죽을 프라이팬에 얇게 펴고, 뒤집고, 하나뿐인 접시에 옮겨 담는 과정을 반복했다. 최소한 데미안의 눈에는 요리에 열중한 것처럼 보였다.
권총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유사시에 얼마나 빨리 무기를 꺼낼 수 있는지는 이미 증명된 바였다. 그리고 갈색보다 금색에 가까운 그 고양이 눈은 보통 사람들이 놓치는 것까지 다 꿰뚫어보았다. 혀를 내두를 만큼 비범한 소년이야, 데미안은 다섯 명의 범법자를 잡았다는 키드의 말이 믿어지기 시작했다.
데미안은 의식을 잃은 빈스의 손목을 등 뒤로 모아 필요 이상으로 꽁꽁 묶은 다음에 옆으로 눕혀 놨다. 흘러내리는 코피로 기도가 막혀 죽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빌리밥은 입을 꾹 다물고 경계 어린 눈초리로 데미안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
임무를 완수한 데미안이 전날 밤 깔끔하게 개켜놓은 코트를 입고 신발을 막 신으려는 찰나, 키드의 훔쳐보는 시선을 알아차렸다.
"신발을 신기전에 일단 털어 봐야 할 겁니다. 밤새 무엇이 그 안에 집을 삼았을지 누가 알겠소?"
키드가 소리쳤다.
데미안은 뱀이라도 만진 듯 깜짝 놀라며 신발을 떨어뜨렸다. 빌리밥은 숨죽여 킬킬 웃다가 데미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소년은 데미안이 눈치 채기 전에 미소를 감추고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데미안은 신발을 다시 들고 힘차게 흔든 것으로도 모자라 불가로 다가와 신발 속을 들여다봤다.
"그만하면 신어도 될 겁니다."
키드가 말했다.
데미안은 의심 가득 찬 표정으로 소년을 내려다봤다.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을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소. 이 주변에도 전갈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곳에는..."
"됐어, 그만 해....
데미안은 얼굴을 찡그리고 득달같이 가방 쪽으로 달려가서 새 양말을 찾았다. 양말만 신고 돌아다닐 생각은 아니었는데..."새 양말을 신으려면 우선 더러운 양말부터 벗어야 했다. 양말을 벗는 과정에서 발바닥의 물집이 터져 피가 났기 때문에 새 양말을 신는 일이 곤혹스러웠다. 그는 어기적거리며 불가로 돌아갔다.
아, 키드의 예상보다 코퍼빌에 더 빨리 도착하면 좋으련만. 다른 캠프가 없는 것을 보아하니, 읍이 가깝다는 증거일 거야.
불가에 도착한 그는 산처럼 쌓인 핫케이크 접시와 꿀단지를 받았다.
"버터가 상했으니까 꿀을 곁들여 드시오. 이른 아침부터 총질을 한 통에 내 식욕은 싹 달아나버렸으니, 당신이나 많이 드십시오, 루트리지 씨. 나는 나중에 육포를 씹을 테니까."
데미안은 빈스와 빌리밥에게 시선을 던졌다.
"다른 손님들에겐 식사 대접을 하지 않을 거니?"
"당연하지요. 저 치들이 아침을 원했다면 권총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 옳았소."
키드의 얼굴과 목소리에 비친 혐오감은 그날 그가 비친 최초의 감정이었다. 최소한 저 소년도 뭔가를 느끼는 모양이로구나, 데미안은 처음으로 키드에게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질감을 느꼈다.
그때, 키드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손으로 엉덩이를 툭툭 털며 빌리밥에게 다가갔다.
"이 근처에 말을 숨겨뒀나?"
"저쪽 강가에 묶어뒀습니다."
키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강가로 향했다.
데미안은 아침을 먹는 내내 강도들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빈스가 의식을 잃은 마당에 빌리밥이 소란을 피울 성싶지 않았지만, 설령 소란을 피운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데미안이 여분의 말과 가방을 가져갈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때, 키드가 뼈만 앙상한 말 두 마리를 끌고 나타났다. 하지만 데미안이 눈을 동그랗게 뜬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키드가 주저하지 않고 정신을 잃은 빈스에게 가서 그의 엉덩이를 힘껏 찼던 것이다. 모카신을 신은 발로 찼기 때문에 그다지 아프지야 않겠지만...
"너희들처럼 동물을 학대하는 놈들은 용서 못해."
소년은 빌리밥을 노려보며 말했다. 빌리밥은 맞을까봐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앉았다.
"네 말이 어느 쪽이냐?"
"둘 다 아닙니다. 모두 빈스 것이에요."
빌리밥이 뻔한 거짓말을 했다.
"한 마리는 아예 탈 수조차 없고, 또 다른 말은 오래 달리지 못할 거야. 말굽에 박힌 돌을 빼주는 일이 급선무라구. 그리고 저 불쌍한 놈들을 좀 봐! 두 마리 모두 너희들의 박차 때문에 피가 날 정도로 상처가 났잖아."
빌리밥은 더욱더 뒤로 물러나 앉았다. 하지만 키드는 그 정도로 일장연설을 끝내고 불가로 다가와 데미안에게 말했다.
"출발할 시간이오. 오늘 우리는 걷는 거나 다름없을 겁니다. 말 한 필이 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절뚝거려서 저놈들을 같이 태워야 할 테니까. 젠장, 바보 같은 놈들을 보면 울화통이 터진다니까."
그 점은 겉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드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데미안을 가방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문명 세계로 돌아간 다음에 새 가방을 살 수 있으리라. 품질이 좋은 새 옷을 찾아내는 일이야 또 다른 문제이고...
그는 재빨리 캠프의 뒷정리를 돕고, 손수 강에서 설거지까지 했다. 다시 캠프로 돌아왔을 때, 모닥불은 완전히 꺼져 있었고, 키드의 말에 안장과 여행 도구가 실려 있었다.
데미안은 그때서야 밤색 거세마가 캠프 가장자리에 밤새도록 매여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아주 잘생기고 털에 윤기가 자르르 도는 데다 기운이 팔팔한 것이, 가끔 경마장에서 봤던 서러브레드(순혈종의 말)와 쌍벽을 이뤘다. 볼품없는 소년이 이런 명마를 가졌다는 사실에 약간 놀랐다.
소년은 빌리밥을 말 등에 태우는 중이었는데, 들리는 대화로 봐서 그다지 행운이 따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봐요, 저는 양손을 뒤로 묶인 채로 말을 탈 수 없어요. 그리고 말 등에 올라타도 잡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금방 떨어지고 말 겁니다."
빌리밥이 말했다.
"잘됐군. 그렇다면 하루 종일 다른 꿍꿍이는 품지 말고 낙마하지 않을 생각이나 하시지. 나로서는 네가 말을 타든 말든 아무 상관없으니까, 선택은 네가 알아서 해."
빌리밥 혼자 말을 타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데미안은 빌리밥 뒤로 가서 안장 위로 올려주었다. 빌리밥은 요란하게 고함을 치며 반대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장 위에서 용을 썼다.
키드는 데미안에게 진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완전 무용지물은 아니군요’하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빈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놈이 아직 살아 있다면, 녀석도 말안장 위로 올려놓을 수 있소?"
데미안은 센 주먹을 은근히 추켜세우는 소년의 말에 얼굴을 약간 붉히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빈스를 빌리밥 뒤쪽에 태우고 물을 들이부어 정신을 차리게 했다. 하지만 막상 그가 말에 타야 할 차례가 되자, 다른 이들처럼 그도 말 등으로 던져 올려줄 사람이 있었으면 싶었다. 하기야 그만큼 체구가 큰 사람도 없지만.
어쨌든, 평생을 대도시에서 살아왔던 데미안은 항상 마부나 일꾼을 부렸기 때문에 손수 말을 다뤄본 적이 없었다. 오늘이 사실상 말에 타는 첫날인 만큼 말의 덩치가 새삼 거대해 보였다. 특히 기운이 팔팔한 밤색 거세마는 더 그랬다.
이미 말 등에서 기다리던 소년이 보다못해 입을 열었다.
"루트리지 씨, 말을 등자에 걸고 힘껏 올라와요. 전에 말을 타본 경험이 없소?"
"난 항상 바퀴 달린 걸 탔어."
키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짐작했어야 했는데... 자, 내 손을 잡아요. 그리고 등자에 건 발에 힘을 주고 뛰어오르듯 안장에 올라타는 겁니다."
역시 말은 행동보다 쉬웠다. 세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말에 오를 수 있었다. 그의 승마 자세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불현듯 빈스에게 동정이 갔다. 빈스는 양손이 뒤로 묶인 채 친구 뒤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자칫 균형을 잃는 날에는 낙마를 면할 수 없었다.
그에 비해 데미안은 최소한 키드의 믿음직한 위안이라도 듣는 처지였다.
"정히 필요하면 나를 잡아도 좋소. 하지만 그리 빠른 속도로 말을 몰지 않을 테니, 말 등에 앉아 있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거요."
그들은 즉시 길을 떠났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빈스 녀석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녀석은 양손이 묶인 채 말을 타는 것이며, 콧잔등을 부러뜨린 데미안에 대해 낯부끄러운 욕설만 골라 입심 좋게 떠들어댔다. 결국 참다 못한 키드가 말을 멈추고 소리를 빽 질렀다.
"저녁밥을 먹고 싶으면 입다물고 가만히 있어."
그러자 빈스가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데미안은 빙그레 웃었다. 이 키드란 꼬마, 보기보다 제법인걸. 그는 소년에 대한 선입관을 수정했다. 키드는 나이에 비해 유능한데다 지도자적인 자질까지 갖췄다. 그밖에도 흥미를 끄는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데미안은 묘하게 이 소년이 마음에 걸렸지만, 뚜렷하게 이렇다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저 험악한 강도들을 누워서 떡 먹듯 싑게 잡아 법의 심판대로 끌고 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키드가 제 직업이나 수훈에 대해 한 말은 공연한 허풍이 아니었다. 수배범 사냥꾼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능수능란하게 무기를 다루는 솜씨에 걸맞은 직업이었다. 위험하지만 이상적인 직업.
하지만 소년의 개인적인 습관에는 개선의 여지가 절실했다. 그는 강가에 캠프를 치고도 목욕할 기회를 거부했다. 혹시 데미안이 나타나기 전에 목욕을 끝냈을까?"하지만 그런 티가 나지 않았다. 말 등에 진드기처럼 달라붙은 탓에 어쩔 수 없이 데미안은 소년에게서 풍기는 악취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다리를 뻗고 말을 쉬게 할 겸 잠시 쉬는 동안, 데미안은 뒤따라오던 말의 안장에 고정된 가방을 발견하고 하늘을 날듯 좋아했다. 그는 재빨리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키드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스리슬쩍 손수건을 코에 대봤지만, 악취를 피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데미안은 평소 개인적인 문제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늦은 오후가 되자, 하루 종일 맡았던 악취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속마음을 터뜨렸다.
"너는 얼마 동안이나 이 옷을 입고 살았니?"
"꽤 오랫동안. 짐승을 쫓는 데 효과가 뛰어나요."
데미안은 소년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언급한 그 ‘짐승’이 무엇이냐고 질문하고픈 마음도 없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이구, 읍에 도착할 때까지 이 악취를 참아야 하는 내 팔자야.
"오늘밤에 그 코퍼빌이란 동네에 도착하지 않을까?"
데미안이 희망적으로 물었다. 키드는 그냥 앞만 보고 대답했다.
"우리 발걸음을 잡아당기는 저 두 녀석만 없다 면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마당에? 그러기는 힘들 겁니다, 루트리지 씨."
데미안은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일시적이지만 가까워진 우리 관계를 고려해서 나를 데미안으로 부르려무나. ‘루트리지’씨 는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잖니?"그리고 너도 키드 라는 호칭 이외에 다른 이름을 가졌겠지?"
"서류에 서명을 해야 할 때마다 ‘K.C.’라는 이름을 썼소."
"뭐의 약자니?"
"약자?"그딴 것은 없소."맨 처음 현상금을 타기 위한 서류에 그냥 아무렇게나 쓱쓱 휘갈겼는데, 보안관이 그걸 ‘KC’라고 읽었소."
"KC?"발음상 그럴듯한 이름이구나. 그렇다면 케이시라고 불러도 될까?"
소년은 눈에 띄게 몸을 굳혔다가, 다시 긴장을 풀었다.
"마음대로 하시구려."
케이시는 더 이상 그 화제를 놓고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빙그레 웃었다.
여자 이름 같아서, 이 아이가 반감을 품은 모양이로구나. 이 나이 또래의 소년들은 사소한 일에도 하늘이 무너진 듯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일쑤라니까. 그 다음에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여행길은 길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데미안은 그 점을 다행스럽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지루하다는 것은 속살과 치부를 숨김없이 드러내야 하는, 생소하고 위험한 사건이 없다는 뜻이었다.
일몰을 한 시간 가량 앞두고 케이시는 강가에 여장을 풀고 캠프를 쳤다. 그는 몇 분내로 모닥불을 피우고 솜씨 좋게 빵 반죽을 만들었다. 하지만 빵을 굽는 대신 다시 말 등에 올랐다. 마침 데미안은 두 명의 불청객을 번쩍 들어 안장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순간, 데미안은 버려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을 졸였다.
"저녁거리를 잡는 동안 너무 큰 소리 내지 마쇼."
데미안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케이시는 아무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는 이미 저만큼 말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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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시는 데미안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내일 아침에 코퍼빌에 도착하리라는 사실이 반가웠다. 혼자 여행하는 편이 훨씬 좋았다. 예정에 없던 동행 때문에 한시도 쉴 틈 없이 방어 태세를 갖추느라 마음 놓고 쉴 수 없었다. 강을 옆에 두고 목욕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생리적인 욕구마저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다. 동반자들은 대로에서 무심하게 소변을 갈기는 반면에 그녀는 은밀한 곳을 찾아다녀야 했다. 게다가 다들 그녀를 남자로 여기는 마당에 그런 일로 쑥스러워하거나 짜증을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인데. 그렇다고 일부러 작정하고 남자 행세를 한 건 아니었다. 사실, 집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소년 행세를 하는 편이 여러모로 편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당시 케이시는 자기주장을 가능한 한 빨리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에 ‘편리함’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것을 열렬하게 갈망했다. 머리칼을 어깨 길이로 싹둑싹둑 잘랐던 이유는 전적으로, 범죄자 추적용 의상과 어울리지 않는 긴 머리가 원치 않는 관심을 불러일으키리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자 의상이 승마에 훨씬 더 적합했기에 지금까지 긴 여행길동안 애용해왔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몸매를 감추면서 사람들의 오해를 피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은 두툼한 모직 판초였다. 애초에 판초를 선택한 이유 또한 간단했다. 편리하니까. 재킷을 걸치면 앞자락을 옆으로 제치고 권총을 내야 하지만, 펑퍼짐한 판초는 무기를 집기에 훨씬 용이했다. 그런 단순한 차이가 생명을 좌우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키가 훌쩍한 케이시를 소년으로 여기기 일쑤였고, 그녀로선 그런 착각을 바로잡을 이유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공연한 분란을 일으킨단 말인가. 참 우습게도, 세상은 성인 여성보다 나이 어린 소년을 더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일부 남성들은 여성을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엄밀하게 따지자면 케이시는 정직한 셈이었다. 제 입으로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생각하도록 그냥 놔둔 것뿐이니까. 그녀를 가까이하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선입관이 바로잡힐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몸에서 풍기는 악취가 단단히 한몫을 했다. 거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사냥을 해서 끼니를 이어야 할 처지였는데, 동물들은 인간 냄새를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배운 냄새 은폐술 덕분에 먹이감의 바로 옆가지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읍에 하루 이상 머무르지 않는 한, 굳이 옷을 빨지 않았다. 그러나 기회가 날 때마다 목욕을 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몸에서 풍기는 악취는 순전히 판초 때문이었다. 항상 걸치고 다녔을 뿐 아니라 며칠 전에 쏟아진 폭우로 푹 젖었기 때문에 눅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행이 없었다면, 냄새가 나든 목욕을 하든 그 어떤 것도 상관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동행이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데미안 루트리지 3세가 캠프로 걸어 들어온 이후, 부끄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 동부인처럼 그녀의 관심을 끄는 남자는 생전 처음이었다. 그는 극히 이례적인 존재였다. 큰 체구에 세련되고 멋진 정장을 걸친 데다, 넋이 나갈 만큼 잘생기기까지 했다. 흑발처럼 짙은 암갈색 머리칼하며 사내답게 불거진 광대뼈는 그렇다고 쳐도, 오만한 턱선과 짙은 눈썹, 반듯한 콧날과 단정한 입매는 어디 한 군데 나무랄 데 없었다.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회색 눈은 케이시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그때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데미안은 그녀를 싱숭생숭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야릇한 감정까지 불러일으켰다. 멍하니 그를 향하는 시선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두어 차례 예쁘게 차려 입은 모습을 그에게 과시하고 싶다는 바보 같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에이, 코퍼빌에 도착하자마자 제 갈 길고 갈 거야. 케이시는 그 점이 반가웠다. 그처럼 정신 산란하게 하는 존재는 필요하지 않았다. 혼자 힘으로 지금까지 잘 해왔다.
한동안 아버지와 싸운 후에 화를 못 이기고 집을 뛰쳐나왔던 행동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작별인사도 없이, 야반도주를..."하지만 매주 어머니에게 전보를 쳐서 안부를 전했다. 부모님에게 공연한 걱정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결심이었다.
아버지 챈도스는 혼자 힘으로 모진 세파를 이겨냈다. 지금 케이시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남자의 도움 없이, 거친 일을 하면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야 말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추적을 당하는 범죄자 같은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두손놓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지금쯤 그녀를 찾아 나섰을 가능성이 높고 그 추적의 손길을 피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찾는 딸의 생김새와 지금의 모습에는 큰 차이가 있는 데다, 그녀가 사용하는 약자 이름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순전히 하늘이 도운 탓이었다. 사실 두어 명의 보안관만 그녀를 <KC>로 알고 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키드>라고 불렀다.
조만간 집에 돌아갈 날이 오리라. 최소한 그런 희망을 품고 코퍼빌까지 힘든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빌 둘린이 이번 주에 코퍼빌에서 두 곳의 은행을 털 계획이라고 큰소리치는 말을 엿들었던 것은 순전히 행운이었다. 둘린은 현상 수배된 돌튼 도적단과 한패거리였다. 케이시는 술 취한 그를 쉽게 잡는 대신에 기다렸다가 도적단을 한꺼번에 소탕하기고 결심했다.
케이시는 항상 그래왔듯이 목표물에 접근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탐문하고 옛날 신문 기사를 읽는 등 돌튼 도적단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돌튼 3형제인 로버트와 에메트, 그래튼은 예전에 아칸소 주의 연방 보안관이었다가 쫓겨난 몸이었다. 법을 집행하는 이들이 악당으로 변절했다는 사실을 말하기조차 남부끄럽지만, 돌튼 3형제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2년 전부터 그들은 오클라호마에서 말 도둑질을 하면서 강도짓을 시작했고, 일당의 우두머리인 로버트가 캘리포니아로 무대를 옮기면서 더 대담한 범죄에 착수했다. 작년 초에 그들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구간의 <서던 퍼시픽>열차를 털려고 시도했지만, 막판에 금고를 열지 못하는 통에 허탕만 치고 현상 수배범으로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들은 몸을 사리고 다시 오클라호마로 도망쳤다. 유일하게 체포된 그래튼은 열차 강도질 도중에 한 사람을 죽였다는 이유로 2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간신히 탈옥해서 형제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세를 불렸다. <시꺼먼 얼굴> 찰리 브라이언트와 찰리 피어스, <난폭한 크리크족> 조지 뉴콤브와 빌 둘린 등 네 명의 악당까지 새로 가세하여 작년 5월에 체로키 지구의 와톤에서 산타페 은행을 털었다. 그 당시 희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일당은 만 달러를 훔쳐서 달아났다. 하지만 <시꺼먼 얼굴> 찰리는 그 직후에 연방 보안관 마셜에드 쇼트의 총에 맞아 제 몫을 챙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같은 달 하반기, 일당은 도망가는 와중에서도 캔자스와 텍사스 구간의 미주리 열차를 세우고 만 구천 달러를 노략질했다. 하지만 그들은 훔친 돈을 탕진할 때까지 휴업하기로 했는지, 그 이후부터 잠잠하다가 지난 6월에 레드락에서 기차를 털었다. 그리고 마지막 범행이었던 7월 열차 강도에서 한 명을 죽이고 세명을 부상 입혔다.
하지만 그걸로도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코퍼빌에서 한 번에 두 곳씩이나 은행을 해치울 음모를 꾸몄으니 말이다. 그들의 대담무쌍한 전적을 돌이켜볼 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케이시는 현장에서 범행을 막고 보상금을 받을 생각이었다.
패거리의 한 녀석 당 매겨진 현상금과 그 동안 제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모아뒀던 돈과 합하면, 애초의 목표액을 초과했다. 그러면 원래 2주일로 잡았던 가출을 툭툭 털어버리고 금의환향하리라. 뭐, 2주일이 아니라 벌써 여섯 달이나 지났지만 말이다. 그 길고 긴 여섯 달 동안 흘린 눈물과 기막힌 사연을 누가 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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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하루가 더 소요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상대적으로 쾌적한 밤을 보냈다. 하지만 케이시는 캔자스처럼 북쪽으로 멀리 와보기가 처음이었던지라 일정이 늘어나리라 미처 예상치 못했다. 또, 코퍼빌에 도착하기 전에 음식이 바닥날 줄도 몰랐다. 하긴 먹여야 할 입이 셋이나 늘어난 터였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느지막하게 여행길에 올랐다. 밀가루와 통조림이 전날 저녁거리로 동났기 때문에 그녀는 아침감을 사냥해야 했다. 항상 다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에 충분한 식량을 마련했지만, 이번에는 길 잃은 동부인과 역마차 강도의 합세를 염두에 두지 못했다. 그래서 겨우 끼니를 때우고 길을 재촉한 끝에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코퍼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꽤 번창한 상업 지역이었다. 케이시는 은행이 두 곳이나 있다는 사전 지식으로, 번창한 지역이리라는 짐작을 미리 했던 터라, 일행을 이끌고 주도로를 따라 보안관 사무실로 가는 길에 <퍼스트 내셔널 은행과 맞은편의> 컨던 은행은 물론이고 주변의 지형을 눈여겨봤다.
인부들이 두 은행 앞을 바삐 움직이며, 말을 묶어두는 말뚝을 임시로 치웠다. 그 광경에 케이시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은행 강도들은 탈주를 염두에 두고 목표물의 정면이나 측면에 말을 세워두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므로 돌튼 일당이 이곳에 왔다가 말뚝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은행털이를 포기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편이 읍을 위해서는 좋겠지만, 수배범 사냥꾼에게는 영 아니었다. 그런 경우, 케이시로서는 돌튼 일당을 잡기 위해 사전에 입수한 인상착의에 의존하는 수밖에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케이시는 보안관에게 범행에 대한 정보를 귀띔할지의 여부에 대해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보안관이 모든 공로와 돈을 독차지할 욕심으로 정보만 가로채고 그녀를 쏙 빼놓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혹은 믿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돌튼 일당은 은행 강도가 아니라 열차 강도로 악명이 높으니까.
그렇다고 혼자만 알고 있으려니, 그렇게 많은 수의 범죄자를 한 번에 일망타진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좋아, 일단 보안관을 만나본 다음에 마음을 정하자. 그렇게 마음먹었을 즈음 일행은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말 한 마리에 두 명씩 탄 행색하며, 빌리밥과 빈스가 꽁꽁 묶여서 질질 끌려가는 꼴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했다. 보안관에게 확인해본 결과, 두 녀석은 현상 수배범이었고 역마차 습격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데미안이 시시콜콜하게 그들의 범행과 전복된 마차, 실종된 마부에 대해 진술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혼선이 빚어졌다. 그야말로 케이시의 짜증을 북돋는 이유 때문에 다들 데미안을 영웅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건 순전히 그의 체격이 듬직한 반면, 케이시가 너무 어리다는 사람들의 바보 같은 선입견 때문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상황을 바로잡자마자 보안관 사무실을 나갔다. 케이시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할 요량으로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남은 여행길에 행운을 빕니다."
케이시는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최소한 텍사스에 도착할 때까지는 별일 없을 거야."
"참, 댁은 사람을 쫓고 있다고 했죠. 그 일에도 행운이 따르기를 바랍니다.
데미안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도와줘서 고맙다, 케이시. 그날 밤, 네 모닥불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난 아직도 그 주변을 헤매고 있을 거야."
그거야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케이시는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손을 뒤로 빼내고 얼굴을 붉혔다. 그의 감촉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아무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는 이미 읍을 둘러보며 쾌적한 숙소를 찾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럼, 안녕히 가시오."
케이시는 마지막 인사를 던지고 재빨리 몸을 돌려 보안관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제 저 신출내기와 다시 만날 일은 없을 성싶었다. 그는 최고의 호텔에 머무를 공산이 컸고, 케이시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가장 싼 숙소에 들 테니까. 그녀는 선술집에서 밤을 보내며 정보 수집을 하고, 그는 극장에-이 지역에 그런 곳이 있다면-갈 것이다.
케이시가 보기에 그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서부는 외지인에게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그리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을까?"흥, 배우긴 뭘 배워. 동부인들은 전적으로 다른 종자들이야."사물을 다른 시각으로 보고, 생존 방법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젠장, 내가 또 생각조차 말아야 하는 남자를 걱정까지 하고 있네.
현안으로 돌아가서 보안관에게 일체의 정보를 털어놓느냐의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케이시는 입을 열 기회조차 없었다. 보안관과 그 부하들은 나이를 거론하며 진부하기 그지없는 훈계를 늘어놨고, 게다가 범죄자들이 잠들어 있거나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잡았으리라고 자기네들끼리 찧고 까불었다. 케이시는 그들의 착각을 바로잡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능력을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까.
족히 이십 분이 걸려, 보안관은 내일 와서 현상금 이백 달러를 찾아가라고 말했다. 역마차 강도 2인조의 몸값치고는 턱없이 낮은 금액이었지만 빈스와 빌리밥은 거의 초범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이 정보를 제공하느냐 마느냐의 선택권을 앗아갔다. 밖에서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 것이다. 보안관과 부하들은 그녀의 존재를 무시하고 일제히 사무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케이시는 온 마음을 다해 돌튼 일당이 들이닥치지 않았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도는 이미 물 건너갔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봐서는 돌튼 일당의 은행털이가 수포로 돌아갔음이 확실했으니까.
-9-
데미안은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서 있었다. 다시 강도를 만났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한 번 강탈당했던 돈을 또다시!"케이시의 경고가 토씨 하나 어긋나지 않고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빈스와 빌리밥이 훔친 당신 돈은 녀석들의 안장 가방이나 옷 속에 있을 겁니다. 그걸 지금 찾는 편이 좋을 거요, 데미안. 보안관이 그 돈을 되돌려주기야 하겠지만, 내 보상금도 최소한 이 주일 후에나 나올걸요."법적인 절차니 서류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난 돈 걱정 없어. 언제든지 전신환을 받을 수 있거든. 사실, 읍에 도착하자마자 은행으로 가서..."
"나라면 그러지 않을 거요."
"뭐?"
"그냥 내 말대로 은행을 멀리하도록 해요."
그리고 소년은 화제를 바꿨고, 데미안은 빈스의 안장 가방에서 돈을 되찾았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 돈을 고스란히 은행 강도의 손에 건네준 것이다. 컨던 은행에 들이닥친 세 명의 남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라이플과 권총으로 중무장을 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그들은 은행 고객과 직원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위협했다.
강도 두 명은 복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십대 초반의 젊은 티가 완연했다. 그리고 까무러칠 만큼 진지했다. 서툰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군, 데미안은 확신했다. 그들은 전적인 협조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 스스럼없이 살인을 불사할 기세였다.
하지만 데미안은 비협조적으로 나갈 만한 무기가 없었다. 소지하고 있던 여분의 권총마저 보안관에게 자진 반납했던 공정한 시민 의식을 땅을 치며 후회했다.
다시 강도를 만나다니!"한마디로 기가 찼다. 그것도 벌건 대낮에 사람들이 붐비는 읍 한가운데에서.
그 소년은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휜히 알고 데미안에게 경고까지 했다. 그런데도 데미안은 케이시가 보기보다 신경질적이고 과잉 방어적이라고 치부해버렸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그것도 사람들이 도처에 깔린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강도들은 금고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단 일초도 낭비하지 않고 은행 고객의 주머니를 싹싹 털었다. 그 짧은 시간에 컨던 은행에 출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창밖의 인기척을 알아차렸다. 누군가 안을 엿보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단박에 눈치 챈 모양이었다. 거리에서 경계령을 내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강도들은 쥐죽은 듯 얼어붙었다. 그 중 한 명이 욕설을 퍼부었고, 다른 놈들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만만하게 보이지 않았다. 돈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일제히 총을 쏘며 문으로 달려나갔다. 온 거리에 총성이 울려 처지면서 읍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은행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첫 총소리에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하지만 데미안은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가서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하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다. 마침, 맞은편 <퍼스트 내셔널> 은행에서 돈 자루를 걸머지고 뛰어나오던 두 명의 강도 앞을 한 남자가 가로막았다. 그는 놈들의 라이플을 정통으로 맞고 땅에 쓰러졌다. 뒤를 이어 두 명의 무고한 시민이 강도들의 탈주로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그때, 총알이 데미안의 귀를 간발의 차로 스치고 지나갔다. 콩 볶듯 튀기는 수많은 통탄 중에서 바로 그 한 발이 그의 성질을 건드렸다. 불행하게도, 솟구친 분노를 해소할 대상이 없어서 씩씩거리는 마당에, 케이시가 강도들의 뒤를 쫓아 그의 곁을 달려갔다!
학살극이 따로 없었다. 케이시가 돌튼 패거리의 말이 묶인, 은행에서 반블록 떨어진 골목에 막 도착했을 즈음, 소강 상태였던 침묵을 깨고 마지막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어느 쪽이 먼저 발포했는지 알아볼 시간도 없이 에메트 돌튼이 공중제비를 돌며 말에서 떨어졌다.
5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걸친 총격전은 네 명이나 되는 시민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 명단에는 그래튼 돌튼과 대치했던 보안관까지 포함되었다. 그래튼 돌튼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 동네는 죽음의 덫으로 변했다. 강도들은 거의 말까지 도착했지만 주의의 집중 공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로버트와 그래튼 돌튼에 이어 딕 브로드웰과 빌 파워스가 죽었다. 그리고 은행을 털 계획에 대해 허풍을 쳤던 둘린은 현장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사실, 그날 아침 말이 절름거리는 바람에 그는 뒤에 처졌다. 하지만 그는 죽은 친구들로부터 아무 교훈도 배우지 못하고 그 이후에도 패거리를 모아 불법적인 행각을 계속했다. 그날 유일무이하게 목숨을 구한 에메트 돌튼은 부상에서 완쾌된 다음에 무기형을 선고받고 캔자스 주립 감옥에 감금되었다. 피가 난무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케이시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들을 전부 살릴 수 있었다. 최소한 다리 부상을 입히는 정도로 사건을 끝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악당들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총격전에 휘말린 무고한 시민의 인명 피해는 속을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코퍼빌에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어야 마땅했다. 짐이 초과하지만 않았던들, 어제 저녁이나 오늘 새벽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데미안과 빌어먹을 역마차 강도들.
빈스와 빌리밥, 단 두 사람만으로는 그녀의 발걸음을 그토록 오래 묶어놓지 못했으리라. 목적지를 빤히 눈앞에 둔 시점에서, 귀찮은 존재에 불과한 녀석들에게 아침밥을 헤먹이려고 사냥까지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 두 녀석이 좀 굶는다고, 갈등이 벌어질 리 만무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달랐다. 그처럼 식욕이 왕성한 거구의 남자에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굶으라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동부인, 그 말은 케이시에게 무능한 관광객을 뜻했다. 그를 캠프에 받아들였을 때부터 그에 대한 책임을 진 셈이므로 당연히 배를 채워줘야 했다.
그 같은 대도시 출신은 애당초 서부에 발을 들여놓지 말았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는 등을 떠밀려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결단으로 이곳에 오지 않았던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케이시는 이 모든 재난을 데미안의 탓으로 돌렸다. 지금 그가 앞에 있다면 당장 쏘아버릴 텐데!
그런데 바로 그때 데미안이 나타났다...
케이시는 데미안에게 밀려 가까운 벽에 꽝 내던져졌을 뿐 아니라 멱살을 잡혀 공중으로 번쩍 들어올려졌다. 다른 주먹이 뒤로 젖혀졌다가 얼굴을 향해 뻗어왔다. 조만간 머리가 산산조각 날 판이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도움을 요청하는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았다. 데미안이 그녀 또래의 소년에게 손을 대지 않으리라 굳게 믿었고, 그 믿음은 보답을 받았다. 그는 혐오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내려놓더니 그 꿰뚫는 듯한 눈망울로 노려봤다.
대관절 왜 이러는 걸까?"그 이유를 몰랐지만 한번 치솟은 분노는 잦아들지 않았다. 그리고 케이시는 성질이 났을 때 그와 달리 망설이는 타입이 아니었다. 단 일 초도 거리낌없이 주먹이 그의 턱에 꽂혔다. 그곳은 원래 노렸던 부위가 아니었지만, 데미안의 키가 원체 튼지라 팔이 닿지 않았다. 어쨌든, 한 대 맞은 그가 목이라도 졸라버리겠다는 듯이 다시 손을 뻗었다. 케이시는 권총을 뽑아들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상태로 동작을 멈췄다.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정말 이상하게도, 이제 그녀가 칼자루를 쥐게 되니 화가 씻은 듯 사라졌다. 아마 왼손으로 그를 한 대 친 게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황에서도 밥줄이나 다름없는 오른손을 아꼈다.
"이게 공평한 짓이냐?"
그가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
"댁의 체구를 고려하면, 그렇소."
케이시의 차분한 어조가 그의 화를 돋웠다.
"너는 저 강도들이 은행을 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그렇지?"
케이시는 말을 돌렸다.
"우선 여기에서 벗어납시다, 신출내기 양반.
그들은 동네 어귀에 모여든 주민 사이를 뚫고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그녀가 데미안의 등을 떠밀어서 들어간 근처 상점의 주인마저 다른 사람들처럼 총격전에 대한 호기심으로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가게 안은 한산했다. 케이시가 문을 닫자마자, 그는 질문을 되풀이했다.
"너는 다 알고 있었지?"
지금에 와서 사실을 부인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케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다그쳤다.
"어떻게 그걸 알았지?"
"2주일 전에 남쪽의 한 술집에서 돌튼 일당의 패거리를 봤소. 그를 잡으려다가 우연찮게 계획을 엿들었소."
"여기 은행을 털 계획을?"
"그래요."
"그 녀석이 남의 귀에 들어갈 만한 장소에서 그런 계획을 떠벌렸단 말이니?"
"그는 엿듣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소."난 작정하면 쉽게 인기척을 감출 수 있으니까. 게다가 그날 밤 덕이 될 정도로 술에 취했기 때문에 코에 파리가 붙어도 몰랐을 거요."
"너는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훤히 알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망할, 나는 저 은행에서 죽을 뻔했단 말이야."어젯밤에 미리 말해줄 수 없었냐?"
그는 기분이 상해서 따져 물었다.
"나는 그런 정보를 보안관에게만 전하오. 그리고 댁이 내 경고대로 은행에 가지 말았어야지, 거길 왜 갔던 거요?"
데미안이 경고를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나는 은행에 간단한 볼일을 보러 갔어."그저 여기에서 전신환을 받을 수 있을지 알고 싶었을 뿐이라구. 그리고 지금은 정말 그래야 할 판이야."저 강도 놈들이 내 돈을 다시 훔쳐갔단 말이야."
"그야 내 말을 듣지 않았으니까."
케이시는 눈곱만큼의 동정도 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다른 말도 하리다. 저 거리에는 죽지 않았어야 할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나뒹굴고 있소. 내가 어제 도착했더라면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이 말이오. 그런데 내가 왜 그러지 못했겠소? 순전히 댁 때문이지. 게다가 저 일당에게 걸린 현상금 천 달러까지 날아갔소."
"이봐, 저들의 죽음이나 현상금을 놓친 데에 대한 책임을 나에게 전가하지 마. 네가 총 한번 쏘지 않고 저놈들을 몽땅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니?"흥, 나로서는 심히 의심스런 일이로구나."
케이시가 한숨을 쉬었다.
"내 일이 그것이잖소, 데미안?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요리조리 도망가는 수배범의 뒤를 추격해서 그들을 잡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패거리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을수록 더 좋단 말이오."그리고 이미 총구가 겨눠진 상황에서 무기를 꺼낼 바보가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소?"그야말로 장의사와 단독 회견을 하려고 환장한 짓이지."
"사지에 몰리면 그렇게 해. 너야말로 망상에 사로잡혔구나. 사실, 난폭한 범죄자들을 줄줄이 사탕처럼 잡을 생각을 했단 것 자체가 폭탄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짓이야. 그러니, 오히려 내가 그런 시도를 원천 봉쇄하고 너를 살린 거나 다름없지.
케이시는 기가 막혀 눈동자를 굴렸다.
"해보지도 않은 일의 결과를 누가 알겠소? 확실한 사실은 내가 이 직업에서 손을 뗄 만큼 충분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거요."내가 마지막으로 충고하리다, 데미안. 집으로 돌아가슈. 댁은 여기에 속한 사람이 아니오."그리고 한 가지 더 있소."나에게서 뚝 떨어져요."
-10-
데미안은 다음 며칠 동안 말 그대로 열을 식혔다. 발바닥 물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신발마저 멀리했기 때문에 가만히 누워서 식사까지 배달시켜 먹었다. 또한 의사의 왕진을 청하여 머리 상처를 진찰한 결과, 그 부상이 실로 꿰매야 할 정도로 심각했지만 이미 아물고 있었으므로 굳이 손을 댈 필요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호텔에 죽치고 있는 것은 고된 일이 아니었다. 객실은 그의 높은 수준에 미치지 못했지만, 서부로 여행을 떠나온 이래 묵었던 다른 곳보다 좋은 편에 속했다. 그리고 이런 서부의 촌구석에 달리 구경할 곳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기 전에 중산모를 살 희망에 부풀었다. 그리고 라이플도. 다시는 무기 없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리라. 그러나 쇼핑이야 다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여행을 계속할 준비가 될 때까지 얼마든지 뒤로 미룰 수 있었다.
호텔 방을 지키면서, 미주리 이남 지역의 수배자 명단을 다시 훑어봤다. 돌튼 일당이 한 명도 빠짐없이 그 명단에 올라 있었다. 코퍼빌 읍의 은행 습격에 가담하지 않았던 그 패거리 중 일부가 언제 제삿날을 맞을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최소한 돌튼 3형제는 목록에서 영원히 삭제되었다.
데미안은 <추적 후유증>에서 회복되는 동안 많은 생각을 거듭했고, 케이시와의 험악한 이별을 못내 안타까워했다. 참 마음에 드는 소년이었는데. 케이시는 은행 강도가 출몰했던 그날 그에게 마지막 충고를 남기고 매몰차게 떠나버렸다. 그 이후로 통 보지 못했다. 과연 데미안이 그 충고를 가슴에 새기고 소년을 패해 다녔기 때문에 그를 다시 보지 못했을까?"그게 아니었다. 호텔에만 처박혀 있었기 때문에 케이시의 행방을 몰랐을 뿐이다.
이런저런 일을 고려한 데미안은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절망적인 지경에서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케이시는 큰 힘이 되어줬다. 하지만 은혜를 갚기는커녕 그 어린것을 반쯤 죽여놓으려고 주먹질을 할 뻔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할 도리가 아니었다. 마음속에서 케이시의 말 한마디가 떠나지 않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요리조리 도망가는 수배범의 뒤를 추격해서 그들을 잡는단 말입니다."
데미안은 이제 헨리 커루더스를 잡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는 것뿐이라고는 커루더스가 마지막으로 거쳤던 읍 이름이 전부였다. 하지만 케이시 같은 사람은 그런 사소한 단서에서 헨리를 찾아낼 것이다. 그런 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소년이니까.
소년을 고용하면 어떨까?"그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케이시가 똑 부러지게 거절할 것 같았다. 데미안 자신은 뭐든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데 익숙한 사람인데다, 여행을 나선 다음부터 온갖 풍파를 다 겪은 마당에 얼굴을 마주 보며 거절당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상식이 승리했다. 케이시는 시간 낭비를 막아줄 텐데, 일단 물어본들 손해 볼 일은 없잖은가?"거절당하면 다른 수배범 사냥꾼을 구해보자.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 케이시에게 마음이 쏠렸다. 일단 소년과 친해진데다 소년의 능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말 뼈다귀 같은 놈들보다 왠지 케이시에게 믿음이 갔다. 일단 마음을 정하자, 이미 기회를 잃었을까봐 두려웠다. 케이시가 읍을 떠났으면 어쩐다?"아무튼 소년을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했고 결국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행운의 장소는 읍 변두리에 위치한, 가장 허름하고 값싼 여인숙이었다. 단정치 못한 주인이 일층에서 데미안을 맞이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중에 계단이 너무 삐걱거려 도중에 무너져 내리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방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놀랍게도 방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서 소년을 기다렸다.
데미안이 케이시를 찾으리란 기대를 버릴 무렵, 그 문제의 소년은 벽장처럼 작은 욕실에서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나왔다. 척 보아하니 머리를 감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데미안의 노크소리를 듣지 못했을 수밖에. 어쨌든 데미안은 판초를 걸치지 않은 소년의 모습을 처음 봤다.
열대여섯 정도의 케이시는 생각보다 훨씬 말랐고 어깨는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펑퍼짐한 셔츠를 청바지에 구겨 넣은 허리는 어찌나 가는지 뭇 여인네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심지어 발조차 작고 섬세했다.
막 씻고 난 케이시는 거의 소녀에 가까웠고, 그에 필적할 만큼 예뻤다. 은행 강도가 출몰했던 그날, 데미안이 마음먹었던 대로 소년의 얼굴에 주먹을 한 대 먹였다면 그 예쁘장한 얼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흠이 남았으리라.
소년은 침대에 앉은 데미안을 알아보고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 멈춰 서서 그 금색이 도는 갈색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댁이 이곳에 어쩐 일이오? 문이 열려 있었어."
"그게 <안으로 곧장 들어오십시오>라는 표지라도 된답디까?"
케이시는 냉소적으로 대답하며 수건을 목에 걸고 그 양끝을 잡았다.
"아니면 댁은 워낙에 다른 사람의 방에 밀어닥치는 버릇이라도 있소, 데미안?"
데미안은 얼굴을 붉혔다.
"아래층 주인아줌마 말이, 네가 여기에 있다고 했어."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응답이 없기에 괜찮은지 보러 들어온 거야."
"난 괜찮소. 하지만 댁이 나가주면 더 좋아질 거요."
"썩 극진한 대접은 아니구나, 케이시.
"최소한 댁에게 총을 쏘지 않았으니 극진한 대접이고말고.
데미안은 어쩔 수없이 미소를 지었다. 케이시는 토라진 여인네보다 훨씬 더 신경질을 냈다.
"저번 내 행동에 대해서 사과하고 싶어."내가 성질을 부렸음을 인정하마."
"이미 알아차린 바요."
"그런 일은 다시없을 거야."
"댁이 성질을 부리건 말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오. 더 이상 댁 주변에 서성대며 그런 꼴을 보지 않을 테니까. 이제 댁의 사과가 끝났으니, 한마디만 더 하겠소. 문은 저쪽에 있수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케이시의 태도는 영 비협조적이었다. 감정을 효과적으로 숨기는 소년의 표정에 데미안은 슬슬 약이 올랐다. 현재 케이시의 권총과 권총집은 의자에 걸쳐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소년은 비무장 상태였다.
"떠나기 전에 너에게 하고 싶은 제안이 있어."
데미안이 말했다.
"흥미 없수."
"거절하기 전에 일단 들어볼 정도의 가치가 있는 제안이야."
"그래도 관심이 없다면?"
데미안은 그 대답을 무시했다.
"나는 너를 고용해서 살인자를 찾고 싶다."
케이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데미안, 내가 고용될 사람처럼 보이슈? 난 그런 재목이 아니오."나는 추적하고 싶은 놈들을 직접 골라잡아요.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고 닦달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고용주에게 얽매이지 않는 깨끗하고 단순한 일만 한다, 이겁니다."
"천 달러를 주마."
그 말에 소년의 무심한 표정이 흔들렸다. 케이시는 두 귀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데미안이 제시한 금액은, 케이시가 공중에 날려버렸다고 주장했던 현상금과 똑같은 액수였다.
"미쳤수?"
소년의 첫 번째 반응이었다.
"아니, 그저 부자일 뿐이야."
"돈을 주체할 수 없어서 펑펑 써버릴 만큼 부자인 게로군."
"그거야 네 관점에 달렸지. 케이시, 나는 우리 아버지를 죽인 놈이 정의의 심판을 피해 자유롭게 활개친다고 생각할 때마다 돌아버리겠어. 그리고 이미 사설탐정들에게 수천 달러나 쏟아 부었지만, 알아낸 거라고는 살인자가 텍사스의 포트워스에 있었다는 정도야. 그 뒤로 녀석의 흔적을 놓쳤기 때문에 내가 직접 찾아내려고 이렇게 나선 거야. 그러니 네가 나를 도와서 그놈을 빨리 찾아준다면 천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봐."
케이시는 침대에 앉아 잠자코 마룻바닥만 바라봤다. 데미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디 소년의 정의감이 발동하여 마지막 결단을 내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침내 케이시는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댁에게 정직하게 말하겠소."천 달러나 받지 않고도 그 일을 해줄 사람을 최소한 열댓 명쯤 알고 있소. 다들 뛰어난 추적자들이오."그 다음에 댁이 말만 하면 살인자를 처치해줄 직업 총잡이들도 열댓 명쯤 되오."
"지금 네가 지적한 그 논리 때문에 내가 너를 고용하려는 거야."내가 이 지역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노려 네가 나를 우려먹지 않으리라 믿고 있거든. 너 이외에 내가 알거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러니 지금 그 제의는 오로지 너에게만 해당되는 거야."
아까보다 더 사람의 애간장을 태우는 침묵이 흘렀다. 케이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더 이상 소년을 밀어붙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돈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렇지 않다면, 돌튼 패거리의 현상금이 날아갔을 때 그토록 노발대발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드디어 케이시가 입을 열었다.
"좋소, 나에게 그 살인자에 대해 아는 바를 다 털어놔요,"
데미안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가는 길에 말해줄게."
"지금 뭐라고 했소?"
"나는 너와 함께 갈 거야."
"염병할!"
"그게 거래 조건이야, 케이시. 나는 그곳에서 놈의 신분을 확인하고..."
"죽이겠다?"
케이시는 실눈을 뜨고 데미안의 말을 잘랐다.
"지금에야 댁의 의도를 알겠소, 하지만 내가 멀거니 서서 댁이 비정하게 그놈을 죽이는 꼴을 보리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하는 편이 좋을 거요."
"그게 네 직업의 불문율 아니었니?"현상 수배범 전단에 죽이거나 <산채로>라는 문구는 있어도, <죽음>에 대한 네 생각 여부는 적혀 있지 않던데.
"내 나름대로 규칙이 있소."그리고 죽음은 그 목록에서 제외되었소."
"그래, 네 사업 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알아차렸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놈이 특별한 도발을 하지 않는 한, 죽이지 않을 거야. 하기야 그 특별한 도발을 열렬히 바라지만 말이야."어쨌든 나는 녀석을 평생 감옥에서 썩게 만들 생각이야."누군가가 죽음보다 더 지독한 처벌을 원할 거야."
"지금 그 말을 각서로 쓰겠소?"
"꼭 그래야 한다면."
"좋소, 내일 아침에 출발합시다. 당신은 말 한 필을 구해서..."
데미안이 다음 말을 잘랐다.
"시간을 절약하는 의미에서 기차를 타고 갈 예정이야."내가 기차표 값을 비롯한 일체의 여행 경비를 대마."
"내 경험에 의하면 기차가 항상 빠른 건 아니더군요."하지만 댁 마음대로 하시구려."
-11-
케이시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유혹에 넘어간 자신을 꾸짖었다. 다시 데미안 루트리지에게 발목을 잡히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를 위해 살인자를 찾는 것과 그와 동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그가 주변에 있을 때 어떤 어려움이 발생하는지 속속들이 아는 몸이 아닌가.
그는 병아리처럼 모든 걸 대신 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를 볼 때마다 그런 기분은 씻은 듯 사라지고 지진이라도 만난 듯 뒤흔들렸다. 데미안은 그녀에게 익숙지 않은 감정이 들게 만들었다. 젠장, 그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생각한 이후에도 그에 대한 상념으로 머리가 빠개질 뻔했는데.
하지만 한 번에 천 달러라는 거액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보통 수배범을 잡을 때엔 위험이 뒤따랐지만, 이번 일은 거저먹기나 다름없다. 뭐니뭐니해도, 살인자는 동부인이 아닌가?"위험해봤자 얼마나 위험하겠는가?"그러므로 이 일은 보상에 비해 턱없이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데미안이 돈을 헛되이 내버리든 말든, 상관할 문제가 아니었다. 케이시로서는 이번 일에 따르는 부정적인 면만 처리하면 만사 오케이인데..., 아, 그 시련이 내일 당장 시작된다는 게 문제였다.
케이시는 데미안이 지시한 시각에 정확하게 기차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찾기 쉬웠다. 세련된 정장과 제대로 햇빛을 가려줄 것 같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걸친 채, 아픈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게다가 여행가방과 라이플까지 들고 있었다. 총이 장전되지 않았기를, 저 남자는 괜히 총을 만지작거리다가 제 발등만 쏘아 맞힐 위인이야.
"넌 늦었어."
그것이 데미안의 환영의 말이었다.
"지금은 정각이오."
그녀의 반박에, 데미안은 더 이상 헛된 말싸움을 하지 않고 기차 쪽으로 갔다. 케이시가 뒤따라오리라고 예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신 기차를 살펴보고 소리쳤다.
"이봐요, 이 기차에 가축 운반 차량이 없잖소!"
데미안이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눈썹을 치켜 올렸다.
"가축 운반 차량이라니?"
케이시는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내 말을 뒤에 남기고 떠나리라 생각하셨소, 신출내기 양반?"
데미안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너무 창피했다. 소년의 말에 대해선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며칠 전만 해도 승마를 해보지 못한 사람으로 당연한 이치였다. 그리고 말까지 운반할 수 있는 기차를 타려면 최소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곧 돌아오마." 그리고 몇 분 뒤에 돌아와서 케이시에게 입을 열었다.
"역무원들이 가축 운반 차량을 달 거야."
케이시는 박장대소를 하려다가 미소만 지었다.
"한 재산 들었겠네요."
데미안을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부끄러웠다. 기차는 여분의 차량을 잇느라고 출발 시간을 넘겼다. 열차 운행 시간 준수를 생명처럼 여기는 기관사들의 신조를 바꿔놓을 정도라면 케이시의 생각이상으로 데미안이 돈푼 꽤나 쓴 게 틀림없었다.
마침내 기차에 오르고 나서, 케이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호화스런 기차는 생전 처음이었다. 호화스러운 동부식 특별 차량으로 승객이라고는 데미안과 케이시, 단 두 사람뿐이었다. 데미안이 여분의 돈을 내고 북부에서 이 차량을 임대해 왔으리라.
얼마 안 있어, 데미안은 하루에 무려 50달러씩이나 내고 이 차량을 임대했음을 시인했다. 하지만 이미 일반 열차의 딱딱하고 불편한 좌석을 경험했던 그로서는, 오클라호마에서 텍사스 북부까지 길고 긴 여정동안 누릴 수 있는 편안함에 비해 그 정도의 경비야 새 발의 피였다.
케이시는 그런 논리에 불평할 수 없었다. 그녀 또한 지난 6개월 동안 타봤던 기차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데미안에게 동의했다. 목장에서 성장했기에 말을 타고 야외를 달리는 편이 훨씬 좋았지만, 별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는 풀먼식(침대 설비가 있는 호화 차량)특별 차량이 최고의 교통수단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뉴욕을 떠날 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어."
데미안이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이런 개인 차량을 소유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업상 뉴욕을 떠날 때마다 그걸 이용했단다. 거기에는 대형 침대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집이나 다름없이 쾌적했지. 그 기차로 서부 여행을 할 생각을 미처 못했던 점이 정말 유감스럽구나."
"여기에는 침대가 없소?"
케이시는 슬쩍 말은 꼬았다. 그는 그 말에 담긴 냉소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 하지만 기차가 밤에 정차하지 않고 달릴 때에도 여기에서 잠을 잘 수 있을 만큼 좌석이 편안하단다. 그에 비해 일반 차량의 그 딱딱한 죄석은 땅바닥이나 다름없다구."
"그거야 댁이 땅바닥에서 자는 걸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느냐에 달린 거 아니겠소?"
그 말에 데미안은 케이시를 째려봤다.
"너는 그 편이 좋은가보구나?"
케이시는 벨벳으로 덮인, 푹신푹신한 좌석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 씩 웃었다. 바짝 약이 오른 데미안이 혐오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데미안, 나는 목장에서 자랐소. 모닥불 옆에서 밤을 보낸 적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예요."
케이시의 가장 좋은 추억은,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야외에서 보내며 아버지에게 삶에 보탬이 되는 지식을 얻었던 그때였다. 하지만 데미안에게 고아라고 말해뒀으므로 그런 추억담을 삼갔다.
"그럼, 수배범 추적만큼이나 목장 일을 잘 알겠구나?"
데미안이 아무런 복선 없이 그녀에게 물었다.
"목장 일이라면 속속들이 알고 있수다."
"그 일을 꽤 즐겼던 모양인데, 왜 훨씬 위험한 현상범 추적으로 전업했니?"
"훨씬 위험하다?"그 의견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군요."
케이시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내 생각에는..."
"이봐요, 댁이 소 근처에나 가봤수? 총잡이에게야 총으로 맞서면 그만이지만, 소에게는 대책이 없단 말이오."수소가 덤벼들거나, 가축들이 우르르 이동하기 시작할 때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거든요."
"하지만 네가 그 편이 더 좋다면 왜...?"
케이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해야 할 일을 다 끝내는 즉시 목장으로 다시 돌아갈 거요."
"어떤 일인데?"
"데미안, 댁은 질문이 너무 많은 게 탈이오."
데미안은 싱긋 웃었다.
"이 정도야 약과지. 우리가 여러 날 동안 함께 있을 거라면 서로에 대해 더 잘 아는 편이 좋지 않겠니?"
"댁이 나에 대해 알아야 할 건 내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느냐의 여부입니다. 자, 이제 댁이 잡고 싶은 녀석에 대한 말이나 해봐요."
그다지 길게 설명할 거리가 없었지만, 데미안은 탐정들이 알아낸 모든 정보를 샅샅이 털어놓았다. 헨리 커루더스를 아는 모든 이들, 그의 늙은 고모와 동료와 이웃들은 그의 범행 사실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고사하고 회사에서 돈을 횡령했다는 사실조차 믿지 못했다. 하지만 상황이란 사람을 극적으로 바꿔놓는 힘을 지녔다. 케이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야말로 그 좋은 본보기가 아닌가. 그리고 하수인 두 명의 자백이나 커루더스가 아무 말도 없이 서부로 도망갔다는 점, 게다가 장부에 드러난 명백한 횡령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그 사람 같은 인상착의는 찾기 쉬워요."
데미안의 설명이 끝나자, 케이시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기 전에 그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소."
데미안이 얼굴을 찡그렸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지금에도 그가 무고하다는 생각은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그 같은 사람이 저지를 범행이 아닌 것 같아서. 더구나 내가 다뤄왔던 범인의 전형적인 타입도 아니오. 그런 놈들은 대개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범행 사실이 너무 자명하단 거요.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죽인다 쳐도, 워낙 그 죄가 확실하기 때문에 괜한 죄책감이나 찜찜한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소."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고 했잖니?"
"하지만 그런 가능성이 항상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오. 그런 경우, 놈들의 범행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목격자의 진술과 재판 기록들이 내 살인의 근거가 되어줬을 거요. 하지만 이런 경우가 있었소."한 증인이, 호러스 존슨이라는 녀석이 자신의 형제를 쏘아 죽였노라고 주장했소. 그 증인은 읍의 유지였고, 존슨은 그곳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방방곡곡에 수배 전단이 나붙었소. 하지만 녀석의 뒤를 쫓는 과정에서 그의 모친과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본 결과 아무래도 수배범보다 그 증인이 범인인 것 같은 감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 증인을 불러 사건을 캐물었더니, 결국 자신이 동생을 쏘아 죽였노라고 범행 일체를 자백하기에 이르렀소."
"와, 굉장한데. 네가 무고한 사람을 수배범 사냥꾼의 총탄에서 구해낸 셈이로구나, 네가 그렇게 철저한 줄은 미처 몰랐어."
케이시는 얼굴을 붉히는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경험담을 말한 이유는 그를 감동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주장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난 그저 커루더스의 항변을 먼저 듣고 싶은 이유를 설명한 거요."
"하지만 이번 범행에는 목격자가 있어."두 명의 하수인들이..."
"데미안, 돈을 받고 살인을 저지른 자들은 목격자가 아니라 공범자요. 그리고 이 세상에 양심적이고 정직한 살인자가 있을 성싶소? 가령 그 하수인들이 모종의 이유로 커루더스에게 앙심을 품고 살인의 배후 인물로 그를 지목했을 가능성도 있잖소. 커루더스가 바로 그런 이유에서 도망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하지만 횡령금은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야."
"그건 그래도 그를 발견한 다음에 일단 동기를 물어봐도 큰 해가 없잖소?"
"그래, 일단 그놈을 잡은 다음에 네 마음껏 요리하려무나.
-12-
포트위스까지는 당연히 무사 안일한 여행길이야 했다. 하지만 케이시와 데미안은 서로 다른 이유에서 단순하고 간단한 행운이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사건은 텍사스 국경을 몇 마일 앞둔 지점에서 터졌다. 하마터면 기차가 탈선할 뻔했지만 노련한 기관사는 없어진 철로 바로 앞에서 가까스로 기차를 세웠다. 그 갑작스런 정지로 앞 차량의 승객들이 좌석에서 튕겨 나갔다. 하지만 케이시는 특별 차량의 푹신푹신한 좌석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불상사를 면했다. 그녀는 데미안의 안전을 확인한 다음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빠진 철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저편의 우거진 나무 뒤에서 무기를 소지한 일당들이 기차를 향해 달려오는 광경은 놓치려야 놓칠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아 데미안에게 말했다.
"힘 빼요. 열차 강도에 불과하니까."
데미안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동그래졌다.
"또 강도 떼가 나타나? 지금 농담하는 거지? 제발 농담이라고 말해주렴. 이렇게 빨리 다시 강도를 만나다니 정말 드물고도..."
"이 지역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오."
"젠장,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이야?"
그가 노발대발했다.
"이 지역은 항상 무법자들을 꾀는 꿀단지였소, 데미안. 한 2년 전, 체로키족이 백인 정착민을 위해 땅을 팔았을 때야 이 지역의 절반이 하나의 주로 승격되었단 말이오. 그러니 나머지 반은 여전히 인디언 땅이오."
"인디언 지역? 왜 그 말은 이제야 하는 거야?"
"왜요? 그들은 온순한 인디언들이오. 정부에서 인디언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지만, 백인들이 건드리지 않는 이상, 그들을 아무 횡포도 부리지 않았소. 특히 텍사스와 맞붙은 이곳은 "임자 없는 땅으로 알려졌소."
"임자 없는 땅?"
"즉, 백인이나 인디언의 관할이 미치지 않는 무법자의 천국이란 뜻이오. 그래서 여전히 범죄자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은신처를 두는 거요. 최근 2년 사이, 정부가 이 지역의 안전을 보장하고 새로운 정착을 후원한다고 해서 무법자들이 두 손 들고 쫓겨날 턱이 없잖소."
"그런데 왜 그 말을 전에 하지 않았느냐는 말이야?"
케이시는 어깨를 들썩인 다음에 씩 웃었다.
"말할 필요가 없기를 바랐으니까. 댁의 생각과 달리 열차강도들이 매일 출몰하는 건 아니오."
"내가 이번 여행에서 산출한 통계는 지금 그 주장과 딴판이야."
데미안은 차량 한구석에 세워뒀던 라이플로 향했다. 케이시가 인상을 썼다.
"지금 뭘 하려는 거요?"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케이시를 바라봤다.
"이번엔 내 돈을 지키고야 말 거야."
"오히려 죽음을 부를 확률이 더 높아 보이는군요."
"내 의견도 그래."
하지만 그 말은 데미안의 말이 아니었다. 복면을 한 남자가 케이시의 말을 엿듣고 막 문으로 들어서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목숨은 구할 거요, 신사양반."
데미안은 우뚝 멈춰 섰지만 좌석으로 돌아가 앉지 않았다. 당연하겠지만, 분기탱천한 기색이었다. 지금 이 차량으로 들어온 노상강도가 대단히 신경질적이고 어려 보인다는 점을 감안할 때, 데미안의 꼴이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다. 그 청년은 초범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
"저 몸집 큰 친구가 너를 덮치지 않을 테니까,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
케이시가 말했다.
그녀는 강도를 보고 있었지만 그 말은 데미안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슨 말로도 강도의 불안을 달래주지 못했다. 그는 안쓰러울 정도로 권총 든 손을 바들바들 덜면서 데미안과 케이시를 신경질적으로 번갈아 봤다. 그는 겨우 용기를 불러 모아 명령했다.
"가진 돈을 전부 내놓으면, 순순히 물러가겠다."
"돈은 그냥 두고 물러가는 편이 좋을 거다."
케이시가 차분하게 제안했다.
"왜?"
"그 편이 피를 보지 않을 테니까."
케이시는 강도가 데미안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모습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몸집 큰 동부인이 더 위험인물로 보였으리라. 하지만 무시당했다는 점에 대해 화를 내지 않고 그 틈을 이용해 쥐도 새도 모르게 권총을 뽑았다.
이번이 벌써 며칠 사이에 강도를 맞는 두 번째 불상사였기 때문에, 케이시가 총을 쏜 이유는 적의 무장을 해제시키기 위한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녀석이 각고의 노력을 거쳐 왼손잡이가 되지 않는 한, 두 번 다시 무기를 들지 못하도록 놈의 오른손을 정통으로 쏘아 맞혔다. 놈의 무기가 부드럽게 툭 소리를 내며 카펫이 깔린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사방에 피가 튀었다. 처절한 단말마가 터져 나오더니 구슬픈 신음으로 이어졌다. 복면 위로 드러난 눈동자는 공포와 고통으로 물들었다. 놈은 다른 손으로 절단된 손목을 가슴팍에 꼭 잡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케이시의 권총은 흔들림 없이 계속 그를 겨눴다.
케이시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바보들이란 몸에 이로운 충고를 무시하기 마련이라니까.
그녀는 버럭 고함을 쳤다.
"당장 꺼져!"
그는 즉각 그 말에 따랐다. 하지만 케이시는 뒤통수에 대고 다시 소리 질렀다.
"그리고 다른 직업을 찾아봐, 카우보이. 너에게 이 직업은 죽음과 직통선이 될 거다."
워낙 놀란 토끼처럼 빨리 달아났으므로, 그는 그 말은 미처 듣지 못했을 것이다. 케이시는 창문으로 가서 녀석이 패거리와 함께 앙갚음에 나서는 대신 말을 집어타고 달아나는 광경을 확인했다. 녀석은 이미 말꼬리를 휘날리며 수풀 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다른 강도들도 열차에서 튀어나와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그들이 겁에 질린 동료의 비명을 듣고 도망가는 건지, 아니면 노략질을 끝내고 후퇴하는지의 여부는 오로지 다른 승객들만이 알 것이다.
바로 그때, 귓전을 때리는 총소리에 케이시는 없는 애까지 떨어질 뻔했다.
"도망가게 내버려둬요."
데미안은 그녀에게 살기등등한 시선을 던졌다.
"개똥같은 소리..."
"그들은 일자리를 잃은 젊은 목동들에 불과해요."
"저놈들은 열차 강도들이야."
그는 다시 총을 쏘며 반박했다.
"그리고 한마디해두겠어. 너는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는 스물일곱 살이나 먹은 성인이야. 그런 내가 쥐방울만한 어린아이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라구! 그런 일은 다시없을 거야."
"지금 뭐라고 했소?"
케이시가 긴장된 어조로 따졌다.
"내 말을 들었을 텐데. 나는 얼마든지 내 한 몸을 지킬 수 있어. 지금부터는 이런 불유쾌한 상황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내가 결정을 내리마.
케이시는 어깨를 들썩이고 자리에 앉았다. 그가 제 한 몸을 지키는 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라이플을 쏘아댄들 뭐든 맞힐 성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탄약을 낭비하는 게 아닌 이상 알 바 아니었다. 케이시는 그가 라이플을 제대로 잡는다는 사실조차 신기했다. 최소한 개머리판을 어깨에 고정시키지 못해, 자신의 발등이나 그녀를 쏠 염려는 없었다.
네 발을 연거푸 발사한 후에 그는 한풀이를 마친 듯 케이시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불평불만을 여전했다.
"넌 녀석들 중 한 명을 잡았다가 그냥 놔줬어. 도대체 언제부터 네가 범법자 해방을 주창하게 된 거냐?"
"딱 한 명의 살인자를 추적하는 일에 고용된 다음부터요. 댁은 저 녀석들을 쫓아가는 일이 시간 낭비라는 생각도 들지 않소이까?"
"죽어 마땅한 놈들을 처치하는 데 일 분이면 족해."
케이시는 동부인다운 언사에 놀라는 대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댁의 총알이 빗나간 걸 다행으로 여기슈. 지금이야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하지만, 진짜 살인을 하면 괴로워하며 땅을 치고 후회할 테니."
그 말에 데미안은 고개를 다시 창문으로 돌리고 만족에 찬 웃음을 지었다. 케이시는 벌떡 일어서서 창밖을 확인했다. 그가 정말 강도를 쏘아 맞혔을까? 하지만 그 즈음 열차 강도들은 수평선상에 아른거리는 하나의 점에 불과했고, 땅에 널브러진 시체는 하나도 없었다. 케이시는 그의 수에 넘어갔음을 깨닫고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해서 그를 만족시켜줄 생각은 꿈에도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다른 말을 했다.
"나는 철로의 손실이 어는 정도인지 보러 가겠소."
케이시는 문 쪽으로 향하다, 데미안의 다음 질문에 발길을 멈췄다.
"무슨 근거로 녀석들을 카우보이라고 생각했지?"
"녀석의 손에는 굳은살이 잔뜩 잡혀 있었소. 목장 일을 꽤 오랫동안 한 목동들은 다 그런 법이오. 그리고 그놈은 잔뜩 얼어 있었소. 아마 경험이 없거나.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서 술김에 일을 저질렀을 거요."
"대단한 추측이구나, 케이시."
데미안이 비꼬았다.
"내가 항상 옳다고는 할 수 없소. 하지만 틀린 적도 드물지요."
케이시는 열차에서 내렸다. 뒤를 따라 내려온 데미안은, 그녀의 넓은 보폭에 맞추느라 평소보다 발을 재게 놀려야 했다.
"너는 항상 이렇게 서두르니?"
한참 후에 데미안이 물었다. 케이시는 그를 힐끔 보고 일단 생각한 다음에 대답했다.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그런 것 같소, 아마 내가 서둘러서 성장했기 때문인 듯하오."
"흥, 다 자라면 말해주렴."
"오늘은 댁의 밸이 꼬일 이유가 없잖소? 참, 나에게 댁을 강도로부터 보호하지 말라고 했던가? 아마 놈들은 그 말에 좋아라고 박수를 칠 거요."
이제 데미안이 쏘아붙일 차례였지만, 케이시는 더 이상 그녀의 성질을 돋울 기회를 주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기차 앞쪽에 이르자, 승객들이 한자리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마침 기관사가, 이미 지나왔던 읍으로 돌아가서 선로가 수리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그 말에 데미안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케이시는 그의 화를 진정시킬 요량으로 입을 열었다.
"이 기차를 타고 움직이겠소, 아니면 다음 읍으로 가서 다른 기차를 타겠소? 아무래도 후자가 두 배는 더 고생스러울 거요."
하지만 데미안이 가슴을 쓱 내밀고 콧방귀를 뀌며 하는 대답에 그의 엉덩이를 찰 뻔했다.
"어서 말을 타고 가자."
-13-
다음 읍은 몇 년 후라면 몰라도 지금은 읍이라고 하기에 어려웠다. 열차 역을 중심으로 몇 군데의 가게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식당을 겸한 술집과 잡화상, 빵집과 전신국, 그리고 객실 두 개짜리 호텔이 전부였다.
워낙 늦은 시간에 도착했던 터라 케이시는 데미안에게 호텔 방을 잡도록 하고, 자신은 역사로 가서 선로 고장과 열차 강도의 출몰을 신고했다. 케이시는 호텔 앞에서 만난 데미안에게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 처지였다.
"다음 열차는 일주일 후에나 있답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전했다.
"역무원들이 선로를 수리하고 남행 열차를 운행시키는 데 어림잡은 시간이 그 정도요."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이곳을 통과하지 않는 다른 기차 편은 없겠지?"
"전혀. 설상가상으로, 여기에는 마구간도 없다더군요. 그러므로 댁의 말을 사려면 족히 하루가 걸리는 근처 목장까지 가야 한다는 거요. 하지만 그곳에도 여분의 말이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괜히 움직여봤자 시간 낭비를 하기에 십상입니다."
데미안은 구슬픈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럼, 다음 주까지 여기에 죽치고 있어야겠구나?"
"댁이 나와 함께 올드샘 을 타지 않는 한 그렇지요. 나야 상관없지만, 올드샘은 예상치 못했던 짐에 대해 조만간 불평을 늘어놓을걸요."
데미안은 미소를 감추고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역시 나쁜 소식이 있어."호텔에 방이 딱 하나밖에 없어서, 너와 내가 같이 묶어야 할 판이야."
케이시는 기가 막혔다. 일주일 내내 그와 한방을 쓴다? 하룻밤이라면 어찌해보겠지만, 일주일은 안 될 말이었다.
"말을 찾아봅시다."
케이시는 단호하게 말하고 술집 앞에 묶어둔 여러 필의 말을 훑어봤다. 데미안의 눈길의 그녀의 시선을 따랐다.
"말 도둑질은 절대로 안 돼."
케이시는 콧방귀를 뀌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길을 건넜다. 데미안은 죽지 못해 어쩔 수 없다는 몸짓으로 소년의 뒤를 따랐다. 이 작은 동네에는 은행도 없기 때문에 말을 구입할 자금을 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수중의 돈으로 이럭저럭 타산을 맞출 수 있다면이야 다행이지만 이런 동네에서 유일한 교통 수단인 말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게다가 데미안은 말안장에 올라타 여행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케이시의 등 뒤에 앉아 있기도 고역인데, 혼자 말을 부리는 일은 상상만으로 식은땀이 났다. 게다가 이 지옥 같은 여행에서 승마를 익힐 성싶지도 않았다.
여기 선술집은 데미안이 처음 발을 디딘 서부의 주막으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크거나 사람이 붐비지 않았지만, 술과 담배 냄새에 찌든 공기는 구토가 날 만큼 역겨웠다.
바닥에는 먼지가 소복이 쌓였고, 흠집투성이 탁자 세 개가 가구의 전부였다. 그나마 한 탁자는 이미 사람들로 차 있었고, 알림판에는 "최상은 아니지만 이 부근에서 최고의 음식 제공 이라고 적혀 있었다.
케이시는 긴 바에 몸을 기대고 제집처럼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이런 곳에 익숙한 몸짓이었다. 데미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이들에겐 술집 출입을 막는 법률이 시행되어야 마땅해.
케이시는, 이미 주문한 술잔을 손에 들고 탁자에 둘러앉은 치들을 살폈다.
세 사람이 옹기종기 앉아 카드 게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팔꿈치에 쌓인 동전은 그 게임이 도박임을 시사했다. 그들은 소년을 힐끔 보고 재빨리 무시했지만 데미안에게는 좀더 시선을 오래 줬다. 케이시가 그 세 사람을 향해 물었다.
"저 밖에 묶인 얼룩배기 말의 임자가 누구입니까?"
덥수룩한 수염을 한 청년이 대답했다.
"여기에 그런 말은 한 필밖에 없으니, 내 말인 모양이구나.코방귀
"벌이가 괜찮습니까?"
"행운이 따를 때만 그래. 하지만 지금은 운이 바닥을 맴돌고 있구나.
그는 손에 든 카드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나야말로 운이 필요한 사람인데, 내 말과 당신 말을 걸고 작은 판을 벌여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데미안이 옆에서 케이시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니?"
"말을 갖고 싶으면 잠자코 있어요."
케이시가 속삭였다. 청년이 물었다.
"네 말은 어디에 있는데?"
"길 건너편 호텔 앞에. 한번 보시구려. 그보다 더 좋은 말은 보지 못했을걸요."
카드놀이를 하던 패거리들이 우르르 회전문으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우우, 괜찮은데."
청년은 케이시를 돌아봤다. 구미가 당긴 기색이었다.
"무슨 내기를 걸 테냐?"
"여기 신출내기가 동전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면, 내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쏘아 맞히겠소."물론 이 사람 물건을 훼손하지 않고 말이오."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진동하는 가운데, 데미안은 익은 새우처럼 혼자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 이유가 분노인지, 수치심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청년이 반박했다.
"그런 술수를 전에 봤어."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라구."
"총을 들고 있는 게 아니라 총을 뽑아서 쏘는데도?"
청년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총을 뽑아서 쏜다고?"그래도 저 신출내기는 워낙 다리가 기니까 여유만만일걸. 네가 놓치면, 말을 내놔야 하겠지만."
"그야 해봐야 아는 일이잖소?"
"차라리 손에 든 동전을 맞히는 편이 어떠냐?"
데미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케이시가 그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길을 갈 수 있는 대가치고 얼얼한 손가락은 약과예요."
"손가락이 절단되지 않고 얼얼한 정도에서 끝난다면이야 그렇겠지."
소년은 빙그레 웃었다.
"권총을 집지 않는 손으로 잡아요. 그리고 댁이야 총으로 밥 먹고사는 사람도 아닌데 왼손 오른손이 무슨 차이가 있겠소?"
데미안은 케이시의 유머가 영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소년의 총 솜씨를 익히 잘 아는지라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기를 건 털북숭이 청년이 정말 케이시에게 동전을 던지자. 슬슬 걱정이 됐다.
케이시가 동전을 앞뒤로 빈틈없이 살펴보는 모습에 술집은 더 요란한 웃음소리로 진동했다.
하지만 케이시는 동전을 데미안에게 던지며 호언장담을 했다.
"마음을 놔요, 신출내기 양반. 난 이 짓을 골백번도 더 해봤소."
데미안은 바의 끝 쪽으로 걸어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기는 공간도 좁으니 열 발짝이면 되겠지요?"
"열 발짝이라, 좋아, 이제 시작하라구."
청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새 말을 타고 싶어서 내 엉덩이가 근질근질하구나."
케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판초 앞자락을 옆으로 제치며 데미안이 동전을 들어올리기만 기다렸다. 데미안은 자신이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일이 잘못되면 어쩌지? 하지만 케이시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걱정을 덜어줬다. 그가 아는 소년은 과녁을 놓칠 리 없었다.
케이시의 총이 불을 뿜었다. 하지만 빗나갔다. 동전은 여전히 데미안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있었다. 그리고 케이시는..., 데미안은 그렇게 망연자실한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케이시는 도박을 해서 말을 잃으리란 예상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털북숭이 청년이 동료들에게 축하를 받는 동안 수치심을 못 이기고 술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데미안은 확신할 수 없지만, 그 황금빛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본 듯했다.
"이봐, 저 녀석이 내게 넘길 말을 타고 달아나지는 않겠지?"
승리자가 다그쳤다.
"그렇지 않을 거요."
데미안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문을 보며 대답했다.
"저 아인 명예를 존중해요. 뭐, 제 생각만큼 뛰어난 저격수는 못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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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곧장 어린 친구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추측대로 소년이 울고 있다면 그 꼴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데미안은 술집에서 독한 술을 몇 잔 마신 다음에야 호텔로 향했다.
케이시는 평소처럼 데미안을 동료로 보는 대신 자기 혼자 일을 해결하려다가 조금 전과 같은 낭패를 당한 셈이었다. 기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케이시는 데미안이 기차에서 창밖으로 헛방만 쏜 줄 알지만, 사실 데미안은 도망가던 열차 강도들 중 한 명을 명중시켰다. 놈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을까 봐, 부상 입은 동료를 읍으로 데려가 의사에게 보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보안관에게 잡힐 수도 있고.
케이시는 좁은 호텔 방의 창가에 서서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보나마나 거리에 있는 올드샘을 보면서 침통해하는 중이리라. 데미안은 지나치게 잘난 척하다 제 발등을 찍었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냥 참았다. 그렇지 않아도 심사가 뒤틀린 소년에게 그런 말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될 테니까.
케이시가 인기척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데미안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소년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만 낙심하려무나. 내가 애를 써서..."
데미안은 미처 말을 끝내지 못했다. 소년이 몸을 돌리고 그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왜 내가 그런 짓을 하도록 그냥 놔뒀어요? 왜? 올드샘은 내가 열두 살 때부터 함께 지내왔어요. 나는 녀석이 망아지일 때부터 키웠어요. 녀석은 한가족이라구요!"
데미안은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한순간 말문을 잃었다. 평상시 모든 감정을 철저하게 자제하던 소년이 일순간에 그 격한 감정을 분출시켰다. 데미안의 방어본능이 재빨리 되살아났다.
"잠깐 기다려. 너는 내 탓을 할 수 없어..."
"내가 못한다구?"
"그래. 케이시, 말을 걸고 도박을 벌이자고 제안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었어. 솔직히 말해서 나야말로 네가 그 술집에서 한 말이며 행동으로 무지하게 기분이 나쁘단 말이야."
데미안은 솟구치는 분노를 참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당에 그런 시도는 너무 벅찼다. 올드샘이 저 소년에게 단순한 교통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녔음을 눈치 챘는데, 육감이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케이시가 저렇게 불같이 화를 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분노를 자제하는 데미안의 태도가 케이시의 성질을 더 자극했는지, 소년은 데미안의 조리 있는 항변을 무시하고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애초부터 난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오지 않았더라면..."
데미안이 기억을 상기시켰다.
"네가 이 일을 꼭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어."
"좋아, 그렇다면 관두겠소!"
데미안은 이런 전개를 예상하지 못했다. 소년이 한두 번의 고초에 의기소침해하기보다 훨씬 명예를 존중하는 줄 알았는데.
데미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넌덜머리가 난다는 식으로 말했다.
"오늘 짜증나는 일이 꽤 여러 가지였지만, 너는 그 중 최악이로구나.
"감히 그딴 말을!"
"입 다물어, 케이시. 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네가 내 목을 조르려고 달려들지만 않았어도, 나는 애를 써서 네 말을 되찾았다는 말을 했을 거야."
케이시가 깜짝 놀라는 표정은 그야말로 코미디였다.
"댁이?"
하지만 소년의 얼굴은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는 뒷걸음질 쳐서 열린 창가로 가까이 갔다. 당장이라도 창밖으로 뛰어내릴 기세였다.
"맙소사, 미안해요."
"너무 늦었어..."
"안 돼요, 정말 미안해요, 데미안. 제발 내 설명을 좀 들어보세요. 나는 당신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화를 낸 겁니다. 나는 좀처럼 바보 같은 짓을 참지 못하는데, 오늘 내가 선술집에서 한 짓은 너무 바보 같았어요."
데미안은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사실이야. 너는 그런 내기를 걸지 말았어야 했어..."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내기 자체는 좋았어요."
데미안이 얼굴을 찡그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내가 동전의 가장자리를 노린 짓이 바보 같았다는 말이에요. 너무 작은 과녁을 조준한 거죠. 나는 만에 하나라도 당신 손가락에 해를 입히고 싶지 않았거든요."
데미안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니까, 고의로 동전을 맞히지 않았다는 말이니?"
"아니요." 케이시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저 내가 마땅히 동전의 중앙 부분을 표적으로 삼아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내가 과녁으로 삼은 동전의 4분의 1은 지나칠 정도로 작은 부분이었어요."
데미안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지금 이 말을 사과라고 하는 걸까? 다시 말해, 제대로 쏘았더라면 제 말을 잃지 않았을 테니 사지가 말짱한 데미안이 모든 죄의 근원이라는 셈이었다.
"그리고 내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던 말도 진심이 아니었어요."
케이시는 얼굴을 붉히고 수줍어하며 덧붙였다.
"그 말을 해놓고... 다시 제정신이 들기 시작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이 뒤집혔어요. 저기, 당신이 아직 나를 원한다면, 나는 무슨 짓을 해서든 그 일을 완수하겠어요."
데미안은 일부러 뜸을 들인 다음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이 사소한 언쟁을 잊는 편이 좋겠다.
케이시는 안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 나쁜 생각이 아니군요. 그런데, 어떻게 올드샘을 되찾았어요?"
"그야 돈으로 했지. 가끔 돈이란 말할 수 없이 유용한 법이거든. 그리고 이번에는 네 말에 얼룩배기 말까지 포함할 정도로 유용했어."
"정말 그 말도 손에 넣었어요?"
케이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와, 데미안! 댁은 상당히 수완 있는 장사꾼이로군요?"
"그 정도까지는 아냐. 그 말 주인 되는 총각이 조만간 다른 곳에 갈 생각이 없어 보이더라. 빵집 딸내미를 노리고 있더라구. 하지만 도박을 좋아하는데 반해 운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판돈이 바닥났대. 사정이 다급했던지, 말 두 필에 합당한 금액보다 적게 부르더라. 내가 지닌 돈을 전부 긁어냈어도 될 만한 상황이었는데 말이야."
"얼마였는데요?"
데미안은 씩 웃었다.
"하여튼 내 돈 전부는 아니었어. 내 주머니에 들었던 돈만 3백 달러쯤 되었는데, 그게 내 총재산인 줄 알았나봐.
케이시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정말 더럽게 싸군요."
"정말 말 값이 여기보다 더 비싸니?"
"그렇지 않아요. 내 올드샘 같은 명마만 더 값이 나가요. 하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이 근방에서는 부르는 게 값이라구요. 서부에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공급이 달려요."특히 옛날에 인디언들이 보급 열차를 습격했을 때나, 새로운 탄광촌이 형성될 때는 그런 현상이 더 심했어요. 지금도 열차 선로가 들어서지 않은 작은 마을이나 이런 소읍은 여전해요."
뼛속까지 장사꾼인 데미안의 귀에 그 말은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렸다. 수출과 수입, 그리고 공급과 수요라, 그의 아버지라면 이 근방으로 사업 확장을 고려하셨을까? 한번 수지타산을 맞춰볼 가치가 있는 생각이었다. 단, 그 일에 즉각적인 결단이 요구되지 않는 한. 이번 여행을 마친 후에 다시 서부로 오는 일은 그의 계획에서 가장 밑바닥을 차지했다.
"자, 내일 여행 준비를 끝마쳤으니까 이제 저녁이나 먹을까?"
데미안이 제안했다.
"나는 저녁을 건너뛰겠어요. 호텔에서는 식사가 제공되지 않는데다, 나는 체면을 완전히 구기는 일에 익숙지 않기 때문에 그 선술집을 멀리하고 싶어요. 게다가 내일 아침에 떠나려면 상점이 닫기 전에 생필품을 구입해야 해요. 난 상점에나 다녀올게요."
소년이 다시 창피해하는 기색이 완연했기 때문에 데미안은 더 이상 실랑이를 하지 않았다.
"너 좋을 대로하렴. 하지만 내가 함께 상점에 가서 물건 값을 낼게."
"내 돈으로도 충분해요, 데미안..."
"내가 모든 여행 경비를 대겠노라고 하지 않았니? 그리고 네가 생각한 여행 필수품의 품목을 내가 우선적으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케이시는 평소와 달리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데, 그 얼룩말에는 안장이 달려 있어요?"
이번에는 데미안이 얼굴을 붉혔다. 말안장은 고려 대상에서 전적으로 제외된 품목이었다. 하마터면 내일 아침에 상점이 문을 열 때까지 팔짱끼고 기다릴 뻔했다.
"실은 그 총각이 안장을 가져갔어."
"음, 그건 당연한 거예요. 새로 구입한 안장이 몸에 익으려면 새 말을 길들이는 것보다 훨씬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요. 하지만 여기는 팔려고 내놓은 말도 없으니 안장을 가져가도 별 소용이 없을 텐데. 하여튼, 대부분의 잡화점은 별별 것을 다 갖춘 만물상이니까 안장도 있을 거예요."
케이시는 그 점에 대해 별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데미안은 한줄기 의심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만약 없으면 어떻게 하지?"
케이시가 미소를 지었다.
"데미안, 앞날을 걱정하지 말아요."일단 발등의 불부터 끈 다음에도 걱정할 시간은 충분하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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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침대를 나눠 쓰는 문제에 대해 별다른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케이시는 부득부득 바닥을 고집했고, 그 방법은 썩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한 사람이 누워도 모자랄 침대가 갖춰진 공간에 단둘만 있는 상황은 그녀의 처리 능력 밖이었다. 케이시는 겨우 참고 누워 있다가 데미안이 잠들자마자 침실을 빠져 나와 호텔 전용 마구간으로 갔다. 그리고 올드샘의 우리 한구석에 쪼그리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그 상황을 곰곰이 되새겨보니 약이 올랐다. 남자 옆에서 잠들었던 경험이야 어제가 처음이 아니잖은가? 하지만 여행 중에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잔뜩 긴장한 채로 자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호텔 방의 안전 상태는 데미안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백주대낮에 떠올리기조차 남부끄러웠다.
케이시는 데미안에게 키스를 받는 기분이 어떨까 여러 번 상상했다. 머리칼이 보기만큼 부드러울지, 넓은 어깨를 어루만지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했다. 심지어 그의 강인한 품에 꼭 안기는 상상까지 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제정신을 차렸다.
그날 아침 케이시는, 데미안을 보고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는 동시에 평소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 즉, 그가 그 강렬한 회색 눈으로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했다.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다면 기겁을 하고 나자빠질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호텔 뒤쪽에서 만났을 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케이시가 고안해낸 변명, 즉 말들이 적절한 우리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마구간에서 밤을 보냈다는 식의 사족은 필요 없었다. 데미안은 그녀가 어디에서 잤는지조차 모르고, 그저 일찍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거니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무튼 그들은 케이시의 희망만큼 일찍 출발하지 못했다. 그녀는 조금만 가르치면 데미안이 말에 오르는 법을 터득하리라 예상했지, 그 교습이 진 빠질 만큼 어려우리라고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데미안은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고 안달복달하며 말을 다루려고 했다. 얼룩말은 그 점을 민감하게 눈치 채고 반항했다. 자고로 말이란, 사람을 등에 태울 만큼 인간과 친밀한 동물인데도, 얼룩말은 그 반대로 데미안을 떨어뜨리려고 갖은 짓을 다했다.
게다가 이 상점에 안장이 없었기 때문에 우선 그녀의 것을 빌려줘야 했다. 데미안이 안장도 없이 말을 탄다는 생각 자체는 논의할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새것을 마련할 때까지 케이시 자신은 꼼짝없이 말의 맨 등에 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얼룩말이 뒷걸음치고 반항하는 이유가 전적으로 데미안의 서툰 솜씨 때문이라면 케이시가 어떻게 해서든 달래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얼룩말은 케이시의 말에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문제는 데미안의 체중이었다. 그 때문에 야생마처럼 날뛰고 뒷발질까지 했다.
하지만 데미안의 의지는 높이 살만했다. 네 번씩이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도 끝까지 시도했다. 공들여 겨우 말 등에 올라탔다가, 그 다음 순간 땅바닥에 패대기쳐지고... 그때마다 케이시의 입에서는, 흙먼지를 뒤집어쓰느니 차라리 그냥 주워 먹으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꾹 참고 이를 갈았다.
우선 이 남자의 옷차림부터 여행에 걸맞지 않았다. 털끝만큼의 먼지도 허용치 않을 차림이었다. 하지만 이런 여행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는 일 정도는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케이시는 이미 어제, 여행에 적당한 옷과 큼지막한 승마모자를 사라고 설득했지만, 그는 세련된 뉴욕 정장을 고수했다. 거기에는 저 멋진 모직 신사복이 햇볕에 바래고 흠집이 나고 올이 풀려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전제가 뒤따라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데미안이 그 점을 상관하리라는, 그것도 굉장히 상관하리라는 감이 들었다. 저 양복이 땀에 푹 절 경우는 아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볼 만한 사태가 벌어지리라.
마침내 얼룩말은 데미안이 죽어도 포기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아차리고 양순해졌다. 하지만 그들이 길을 떠날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아니, 케이시가 전날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더 늦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데미안의 편의를 위해 천천히 말을 몰아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안장 없이 승마를 무수히 해봤던지라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그것도 단거리에나 통했다. 지금 같은 장거리에서는 온몸의 근육이 뻐근하게 당겼다.
그들은 오로지 데미안을 위해서 일찌감치 캠프를 쳤다. 읍에서 구입한 빵을 먹어가며 계속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데미안에게는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았다. 사실, 그는 다시 출발하자는 케이시의 말에 요란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간의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캠프를 치자마자, 데미안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할 제의를 했다.
"오늘밤에는 내가 저녁거리를 잡아올게. 뭐, 맞힌다는 보장은 못하지만 말이야."
케이시는 맞힌다는 보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그가 사냥에 나가면 아무 것도 잡지 못하리라는 걸 너무 잘 알았다. 고기가 먹고 싶었지만, 꽤 힘든 날을 보낸 그에게 차마, 사냥은 할 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뒤로 빠지라는 속내를 드러낼 수 없었다.
대신 콩을 익히고 비스킷 만드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진짜 놀랄 일이 벌어졌다. 30분쯤 후에 데미안이 며칠 동안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큼지막한 야생 칠면조를 잡아온 것이다. 케이시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쳇, 억세게 운도 좋은 남자로군. 총소리는 딱 한 번밖에 듣지 못했는데 말이야."그녀는 칠면조를 손질하며 말했다.
"행운의 총 한 방이네요."
"운과는 아무 상관없어."
데미안은 케이시의 비꼬는 말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케이시는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 올려.
"그럼, 칠면조가 <나 잡아 잡수쇼> 하고 당신 앞으로 걸어온 모양이군요."
"아니야."긴가민가할 정도로 멀리 있었어."
케이시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목동들의 허풍을 들어온 터라 그 말을 싹 무시했다.
"어련하겠어요."
데미안은 그녀의 냉소를 흘려버리기 어려웠기 때문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가 직접 보여주마. 자, 아무 목표나 가리켜봐."
케이시는 이제 그가 창피를 당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좋아요."
그리고 약 12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과녁을 가리켰다.
데미안은 과녁을 보기 좋게 명중시켰다. 케이시는 눈을 깜박인 다음에 다른 과녁을 가리켰다. 그는 또 한 방에 명중시켰다. 세 번이나 연거푸 시험한 끝에 그녀는 포기했다.
"좋아요, 난 감명 받았어요."
이번에는 데미안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냥 감명만 받았어?"
"빌어먹을 만큼 감명을 받았어요."
그는 킬킬거리며 모닥불 옆으로 왔다.
"케이시, 네 표정은 천금을 줘도 바꾸기 어렵구나. 하지만 나는 대학시절 라이플 대회에 나가서 일등을 먹은 몸이라구.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사냥도 다녔어."
"어디로? 뒤뜰에서? 당신은 전에 말을 타보지 못했잖아요."
"우리는 기차를 타고 북쪽 사냥 허가 구역으로 가서 걸어 다니면서 사냥을 했어."
케이시는 기분이 팍 상한 터라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선입관이 너무 돌연하고 극적으로 바뀌었다.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도 제 한 몸을 돌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판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녀를 도와 열차 강도떼를 물리쳤다.
이제 케이시는 새로운 의문에 시달렸다. 그 열차 강도 패거리 중에서 몇 명이나 부상을 입었을까? 그 정도로 정확한 총 솜씨라면 놈들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죽어 마땅한 놈들>이라는 데미안의 말은 진심이 아니라 홧김에 나온 말이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그는 이곳에 속하기에는 너무 도시적이었다. 그 점은 변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여전히 속이 쓰린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걱정을 끊어버리리라 작정했다. 말한 필과 라이플 한 자루만 있으면 혼자 힘으로 거뜬하게 살아나갈 수 있는 사내였다. 케이시는 그를 무시하려고 애쓰며 식사 준비를 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곁에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흥, 내 입에서 총 솜씨에 대한 칭찬을 더 듣기를 기다리는 거라면 한평생 걸릴걸.
하지만 데미안이 생각하던 바는 그게 아니었다.
"케이시, 이런 말을 하기는 싫지만 네가 여자처럼 생겼다는 사실을 아니? 혹시 턱수염이나 콧수염을 길러본 적 있어?"
케이시는 속으로 한바탕 신음한 다음에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은 힘들 거예요."
"왜?"
"나는 여자니까."
케이시는 데미안의 경악한 표정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서 고개를 박았다. 굳이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정말 모를 일이었다.
충격에 찬 침묵이 흐르자,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케이시는 결국 참다못해 고개를 들었다. 데미안은 판초로 감싼 가슴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있기는 있어요."
케이시는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한 다음에 꼼꼼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나에게 증거를 보여 달라는 말은 아예 마세요. 그냥 내 말을 믿으라구요."
데미안의 눈동자가 천천히 그녀의 얼굴로 돌아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보듯 이목구비를 구석구석 뜯어봤다. 마침내 충격을 극복한 그의 강렬한 표정이 일순간에 싹 바뀌었다. 그 변화에 케이시는 움찔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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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떻게 감히 여자일 수 있어?"
그 이치에 맞지 않는 멍청한 질문이 데미안의 심한 충격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케이시는 그가 놀랄 거라 예상했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떨 만큼 화를 낼 줄은 미처 몰랐다.
"나야 그 문제에 대해 선택권이 많지 않았어요."
케이시는 명백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지적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잖아!"너는 의도적으로 나를 속였어."
데미안은 살기등등하게 비난을 퍼부었다.
"아니, 나는 속이지 않았어요."난 그저 당신이 내린 결론을 수정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잖아요."하지만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신과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구요."
"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아니라 너와 함께 여행하고 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이렇게 온당치 못한 일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겠다. 우리는 같은 침실에서 잠까지 잤다구!"
"나는 나중에 빠져 나와서 마구간에서 잤는데요."
케이시는 그 사실을 아침나절에 밝힐 걸 하고 후회했다. 그가 냉소적으로 반박했기 때문이야."
"흥, 잘도 그랬겠다."
케이시는 얼굴을 찡그리고 그가 펄펄 뛰며 화를 내는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가만있어라, 온당치 못한 일 이라고 했지? 그게 문제일까? 그들이 딱 한 번 같은 침실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일가친척이 총을 들고 달려와 그를 제단까지 끌고 갈까봐 걱정하는 걸까?"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설마 우리가 결혼처럼 우스꽝스런 짓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기를 바래요. 머지않아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마당에 그런 결말은..."
"여전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너도 잘 알잖니!"
귀청이 떨어질 듯한 고함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이 동네에서는 안 그래요. 최소한 두 사람만 아는 일에 대해서는요. 당신이 잠깐 화를 접어두고 생각한다면 지금까지 여성과 여행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
"여성? 흥, 너를 그렇게 부르기는 대단히 어렵구나, 꼬마야."
데미안은 거침없이 비웃었다.
그야말로 케이시의 신경을 긁는 발언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스스로를 여성으로 생각해온 터였다. 그리고 지금 이 말싸움은 아버지와 벌이던 토론을 상기시켰기 때문에 성질이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벌컥 화를 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성에 호소하려고 했다.
"데미안, 지금까지 별 탈이 없었으니까 당신이 심하게 화를 낼 필요가 없잖아요? 그저 내가 여자라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 우리의 공적인 관계가 변하지 않아요."
"절대 그렇지 않아!"
"저런? 내 능력이나, 당신이 나를 고용한 이유가 어떻게, 언제 바뀐다는 거지요? 나는 여전히 우리 아버지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수받은 최고 추적꾼이라구요."
"아버지? 오호라, 이제 기적적으로 부모님의 존재를 기억해냈구나? 그래, 다음은 네 진짜 이름이 나올 차례겠지?"
이 문제를 들고 나올 줄 알았어, 케이시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겉으로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내 이름에 대해 거짓말을 했던 건 당신을 속인 것과 아무 상관도 없어요."
"뭐라고 했지?"지금까지 정황을 봐서 내 의견은 딴판이야..."
"데미안, 나는 아무에게도 진짜 이름을 말하지 않았어요. 우리 아버지가 나를 찾아다닐 텐데, 나는 아직 발견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그 이유일랑 묻지 말아요. 아주 개인적인 일이거든요. 아무튼 내 존재를 알리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람들에게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가명을 쓰느니 그냥 모른다고 주장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소년인 척했지."
"난 그러지 않았어요. 내 짧은 머리와 큰 키와 수척한 몸이 사람들에게 그런 인상을 줬다고 해서 내 잘못은 아니지요."
"어이구, 그 옷차림에 대한 부분은 쏙 빼놓는구나."
"내 옷가지는 전부 추적 여행에 필요한 것들이에요. 하지만 나는 내 입으로 소년이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정말 그랬다면, 굳이 지금 와서 성별을 밝히지 않았을걸요."
"그런데 왜 밝혔니?"
"난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케이시, 넌 거짓말을 했어야 했어."
"왜죠?"앞으로 내가 당신을 대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을 텐데? 그리고 당신의 태도도 변해서는 안 돼요. 그러니까, 당신이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유나 압시다."
"네가 여자니까 그렇지!"
"그래서요?"
데미안은 좌절감을 못 이기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네가 그 엄청난 차이를 모른다면, 너는 여성으로서 자각이 부족한 거야."
"지금 그 말이 들리는 그대로의 뜻이 아니기를 바래요. 하지만 나를 욕보이려던 치들이 큰코다쳤다는 경고는 일단 해두겠어요."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트집을 잡는 거예요? 당신은 나에게 그런 식으로 관심을 둘 수 없어요."
"내가 왜 둘 수 없어?"
케이시는 벌떡 일어서서 총을 빼들고 그의 가슴을 겨냥했다.
"그럼, 관심을 두지 말아요, 데미안."
"넌 나를 쏘지 못할 거야."
"정말 그런지 확인하고 싶어요?"
케이시를 응시하는 데미안의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케이시 역시 눈꺼풀을 깜박거리며, 조준한 권총을 움직이지 않고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마침내 그가 권총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무기를 치워. 난 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마..., 지금은."
그 말은 케이시를 안심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권총을 넣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와 눈싸움을 했다.
고통스러울 만큼 긴 침묵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서로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칠면조가 타고 있어."
"그럼, 타지 않도록 해봐요. 내가 꼭 요리를 해야 한다고 쓰인 책이라도 있답니까?"
"내가 요리법을 모른다고 쓰인 책은 있을 거다."
케이시는 눈을 깜박인 후에 긴장을 풀었다. 데미안이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들은 싸움으로 끝장을 볼 가능성이 높았다. 뭐, 지금도 싸우는 중이었지만.
케이시는 최후의 일침을 놓는 식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 나는 곧바로 잠을 잘 거예요. 당신도 그래야 해요. 내일 해가 떨어지기 전에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일찍 출발해야 할 뿐 아니라 여정도 힘들 테니까. 내일은 속도를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해야 할 일을 할거야. 항상 그래왔다구."
내용은 긍정적이었지만, 그 어조는 여전히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케이시는 행운을 믿고 대화를 계속할 마음을 일찌감치 버렸다. 그저 숙면이 데미안의 생각을 호전시켜주기만을 기대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같은 효과를 보게 될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과연 숙면이 그녀에게 관심이 있다는 데미안의 말을 잊게 해줄까?
케이시는 그런 생각을 하느라고 또 잠을 설쳤다.
-17-
데미안은 그날 밤잠을 청할 노력마저 포기했다. 그는 나뭇가지를 몇 개 찾아내 꺼져 가는 모닥불을 살리고 그 옆에 앉아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케이시를 지켜봤다. 그 일은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깨어있을 때와 달리 잠든 모습에서는 연연한 부드러움이 풍겼고, 그 때문에 성별이 더 확실하게 드러났다.
전에는 잠든 모습을 보지 못했던 터라 이번은 일종의 행운에 속했다. 소년인 줄 알았을 때에도, 남자 아이치고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섬세한 부드러움과 은근한 관능미를 본 지금에 와서는 정신없이 매료되었다.
이런 젠장, 데미안은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 현실을 극복할 자신이 없었다. 아, 그녀의 입을 통해 말을 듣기 전에 미리 눈치를 했어야 했어."항상 야릇한 감정이 들지 않았던가. 하지만 총 솜씨와 수훈에만 현혹되었던 게 화근이었다. 치마를 두른 여자치고 케이시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시는 어젯밤에 그 모든 논리와 이유를 철저하게 부숴놓았다.
여성이라..., 아니, 소녀야."그 점을 명심하려고 애썼지만, 그런 마음이 오래갈 것 같지 않았다. 우선 저기 누워 있는 여자는 소녀 같지 않았다. 어디를 보나 성숙한 처녀, 친밀한 관계를 맺기에 충분히 나이가 찬 젊은 여성처럼 보였다.
피부가 흠집 하나 없는 도자기처럼 매끄럽다는 사실을, 저 아랫입술이 꽉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도톰하다는 사실을, 이전에는 몰랐다. 쥐 파먹은 것처럼 들쭉날쭉한 모양이 아니라 양어깨에 부드럽게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지금 뒤로 넘긴 머리형은 그녀의 섬세한 얼굴형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탐나는 존재였다.
소년으로서 케이시는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소녀로서 케이시는 매혹적이었다. 하고 싶은 질문이 수백 가지가 넘었지만. 단 한 가지에도 대답을 듣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케이시는 비밀과 감정을 혼자만 간직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비밀을 공개했다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지옥과도 같은 충격을 안겨준 후에도, 케이시는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불가해한 표정을 써먹었다. 그 특유의 버릇은 속을 타게 만들고 화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정말 그를 초조하게 만드는 여성...
하지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신경을 긁는 요물은 아니었으므로, 마음을 충분히 가라앉히면, 그런 버릇쯤이야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강하게 끌린다는 사실은 극복할 수 없었다.
함께 여행을 계속하면서 그녀에게 관심을 끊을 방법이 없다는 점은 명명백백했다. 사실, 그녀가 남자를 모두 늑대 취급하는 전통적인 여성의 특권에 집착하지 않는 이 마당에 왜 그런 노력을 해야 하는지조차 의아스러웠다. 지금 이렇게 단둘이 있다는 현실 자체가 그가 배워왔던 모든 규칙을 깨는 셈이었다.
맑은 소리로 지저귀는 새소리와 붉게 타오르는 태양과 함께 케이시가 깨어날 즈음, 데미안의 마음속에서는 아버지를 위해 정의를 실현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솟아, 새로 불붙은 욕망을 겨우 진정시켰다. 케이시와 복잡하게 얽히는 짓이야말로 현명하지 못하므로 가능한 거리를 두는 편이 최선책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녀는 계약한 일을 하면 그뿐이었다.
여하튼 그것이 데미안의 결심이었다. 제발 그 마음이 끝까지 갔으면 좋으련만.
큰 뜻을 이루기 위해 거짓말로 케이시의 마음을 풀어주고 다시 데미안 자신을 무시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그도 그녀를 무시하기가 한결 편해질 테니까. 데미안은 케이시가 일어나자마자 행동을 개시했다.
"내가 사과하마.
케이시는 힐끔 보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여러 차례 눈을 깜박인 다음에야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미안, 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어요."내가 기억하고 싶은 말을 하려거든, 우선 커피부터 마시게 해줘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눈치를 채지 못한 채 모닥불을 들쑤시고 마음껏 기지개를 켰다.
젠장, 저런 고양이 같은 몸짓 좀 하지 말았으면... 그러고 나서 케이시는 덤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야 데미안은 이전에 케이시의 저런 습관을 눈치 채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데미안의 얼굴을 달궈놓은 홍조는 케이시가 돌아올 무렵에 거의 가라앉았다. 수치심을 들키지 않을 만큼 주위가 밝지 않다는 점이 천만 다행이었다. 케이시는 그를 똑바로 보지 않고 아침 일과를 다 끝낸 후에야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잔을 손에 들고 모닥불 옆에 앉아 특유의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사과> 어쩌고 했던가요?"
데미안의 시선은 그녀의 다리로 떨어졌다. 케이시는 두 무릎을 활짝 벌리고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다. 그는 좀처럼 그 긴 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젯밤 홧김에 한 말은 사실이 아니었어."
"가령 예를 들면?"
"그러니까..., 저기, 내가 너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다는 식의 암시 말이야."
케이시의 몸이 바짝 긴장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이 진심이 아니었어요?"
"그럼, 당연히 진심이 아니었지."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너무 울화통이 터진 나머지 내가 네 깜짝 폭로에 충격을 받은 만큼 너도 놀라게 해줄 심산으로 그런 말을 한 거야."
케이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고 시선을 돌려 무르익은 일출을 응시했다. 하늘을 물들인 황금빛이 그녀의 얼굴에 매혹적인 후광을 그려놓았고 데미안은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도 성질이 나면 진심이 아닌 말을 내뱉곤 했어요."
케이시는 그런 경우를 떠올리려는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나 역시 당신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군요."
"그럴 필요까지야..."
"하지만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남은 앙금을 말끔하게 씻어버리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어요. 어젯밤에 나는 내 마음대로 당신이 억지 결혼을 걱정한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당신이 유부남일 수도 있는데... 내 생각이 짧고 어리석었어요."
유부남이라니? 데미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느닷없는 결혼에 대한 언급은 위니프레드의 부친과의 마지막 만남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그 미래의 장인은 다른 곳도 아닌 장례식장에서 데미안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말을 하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지만, 설마 결혼식을 미루지는 않겠지?"
적절한 때? 데미안은 미래 장인의 이기심에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그리고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불멸의 진리에 따라 그 이후로 위니프레드나 그녀의 아버지를 상종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아내가 없어."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언제 물어봤어요? 난 그저 내 마음대로 결론을 내린 점에 대해 사과하려는 것뿐이라구요. 나야 당신이 결혼을 했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데미안은 케이시가 그 점을 누누이 강조하는 태도에 절로 흥이 났다. 말은 안했지만, 데미안의 결혼에 관심 있다는 식으로 비칠까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심지어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재빨리 케이시를 안심시켰다.
"맞아, 나도 네가 상관하리라고 생각지 않아."
케이시는 그 화제가 끝났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숙면은 항상 사물에 대한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더군요.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데미안이야 그 말이 사실인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아직까지는 뜬눈으로 밤을 새운 후유증을 느끼지 못했지만, 오후에도 똑같을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오후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피곤에 절어 있었다. 물릴 정도로 잘 테니까 다음날 보이지 않더라도 찾지 말라고 케이시에게 무뚝뚝하게 통보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했다.
-18-
케이시는 데미안이 하루 종일 자겠다는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그가 나타나지 않자, 짜증이 났다. 그날 여섯 번씩이나 방으로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방해하지 마시오 라는 알림판이 방문에 걸려 있었고 안에서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오후늦게야 참다못해, 문짝을 부숴버릴 듯 힘차게 노크했다. 다음날 계속 여행을 할 생각이라면, 오늘밤 상점이 문을 닫기 전에 안장을 사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잡화상은 다양한 물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대시 구입할 수도 있었지만, 안장이란 개인적일 취향에 달린 문제였다. 사실 데미안은 어떤 안장이든 좋아할 성싶지 않았지만, 아무튼 선택은 그의 몫이었다.
데미안이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에야, 케이시는 깜짝 뉴스를 터뜨렸던 날 밤에 그가 잠을 푹 자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그녀의 성별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더 많이 고민했나?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도통 감을 잡지 못했다.
데미안이 그녀에게 관심 있다는 식으로 암시했을 때, 신경 쓰이고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 줄은 꿈에도 상상 못하다가, 그 말이 거짓이라고 했을 때는 훨씬 기분이 나빠졌다. 마음이 놓여야 할 말에 오히려 풀이 죽었던 것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여기까지 오면서, 케이시의 성별을 무시하려고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니 그녀도 똑같은 태도를 취하는 게 도리였다.
마침내 데미안을 호텔 밖으로 끌어내서 은행에 들렀다가 두 군데의 안장 가게 중 한 곳으로 간 케이시는, 그가 가장 비싼 안장과 번지르르한 은제 마구를 사는 모습에 놀라지 않았다. 이제 평범한 얼룩말은 햇빛 속에서 번쩍거리며 1마일 밖에서도 눈에 띌 것이다.
케이시는 그의 선택에 대한 논평을 거부했다. 쓸데없이 돈을 낭비하는 짓이지만, 어쨌든 안장은 안장이었다. 케이시는 다시 적당한 승마복을 사라고 권했다.
데미안도 그 말이 옳다는 사실을 아는 만큼 반대하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제 옷이 좋다며 고집을 부렸다. 게다가 다음 읍에서 기차를 잡아탈 수 있으므로 승마복이 필요 없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기차와 상관없이 정장 차림은 가는 곳마다 그가 명백한 신출내기라는 인상을 심어줄 것이다. 아, 그 여행용 가방을 진작에 내버리고 오는 건데, 후회가 막심했다. 그렇다고 케이시는 자신의 견해가 그렇게 빠르고 극적인 방법으로 증명되기를 바라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다.
안장을 마구간으로 가져가는 길목에 선술집이 하나 있었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봐서, 꽤 붐비는 모양이었다.
케이시가 잰걸음으로 앞장서는 동안, 데미안은 낑낑거리며 무거운 안장을 어깨에 지고 뒤따라왔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간격이 꽤 벌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동행처럼 보이지 않았다. 술 취한 현지인 넷이 비틀거리며 술집에서 나와 그쪽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데미안이었다.
케이시는 심지어 그의 진로가 차단되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때, 총성이 연발로 터졌다. 케이시가 재빨리 몸을 돌려보니, 네 남자가 데미안의 발 아래로 총을 쏘고 있었다. 전에도 다른 읍에서 숱하게 목격한 광경이었다. 양처럼 순한 시민들이 악질 건달패로 돌변하여 신출내기를 이런 식으로 맞이하곤 했다.
일종의 힘 과시랄까, 아니면 이런 식으로 밖에 다른 이와 친해지지 못하는 남자들이 무장하지 않은 신출내기와 안면을 트는 의식이었다. 거기에 얼큰하게 술까지 취해, 허세와 만용을 조장함으로써 상상을 악화시켰다. 어떤 동부인은 빗발치는 총탄을 피해 이리저리 춤추기를 거부하다 정말 발을 다치는 경우도 봤다.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데미안은 총탄을 피해 케이시에게 뛰어오는 대신 안장을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약이 오른 현지인들이 데미안의 장단에 놀아나지 않았다. 그가 뛰어난 라이플 사수라는 점은 이미 증명된 바였다. 하지만 항상 라이플을 가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잖은가?"특히 쇼핑에는 무기도 없는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네 놈들에게 놀아날 줄 알아!"
그러고 나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는 패거리 한 명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그 녀석은 데미안의 발이 아니라 가슴에 총을 겨눴다. 그때 케이시가 권총을 뽑아 경고 사격을 했다. 데미안이 괜한 호기를 부리다 죽을까봐 두려웠다.
총탄이 한 놈의 모자에 구멍을 내자, 패거리들은 일제히 데미안으로부터 관심을 거뒀다. 하지만 더 이상 총을 쏠 필요는 없었다. 데미안이 두 놈의 멱살을 잡고 박치기를 시켰기 때문이다. <뻑> 소리와 함께 그들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세 번째 놈은 데미안의 주먹 한 방에 대자로 뻗었고, 복부를 맞은 다른 녀석은 숨이 막히는지 캑캑거리며 배를 감싸 안았다.
데미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양손을 탁탁 털고 옷을 바로잡은 다음에 안장을 다시 짊어지고 케이시 쪽으로 왔다. 케이시는 그 패거리들이 허튼 짓을 할 경우를 대비해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의식이 있는 놈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은 아무 짓도 못했다. 그는 계속 가쁜 숨을 내쉬더니, 비틀거리며 도로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케이시는 총을 넣고 데미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찮아요?"
"아주 좋아. 퍽이나 우호적인 읍이로군.
케이시는 그의 냉소에 반박했다.
"내가 입에 쓴 말을 한마디만 하겠어요."당신이 동부에서 출발한 기차에서 방금 내린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았어요. 당신이 관광객처럼 보이는 한, 현지인들의 짓궂은 장난을 피할 수 없어요."관광객이란 유람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는 족속들이니까요."
"그렇다면 가르쳐줘.
케이시는 눈을 끔벅거렸다.
"뭘요?"
"여기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달라구."
케이시는 그 말뜻을 나름대로 해석하려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다음에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좋아요, 우선 잡화점으로 다시 가요."이제 당신은 그냥 지나는 객이 아니라 여기에 속한 사람처럼 보일 때가 되었어요."
데미안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케이시는 또 다른 거절을 예상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멋진 양복에 어떤 마법이 있기에, 저토록 다른 옷차림을 거부하는 걸까? 그저 평범하게 보이기 싫어서일까? 오직 그 이유뿐일까?"
하지만 놀랍게도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서."
케이시는 그 말에 따랐다. 그리고 나중에 그런 제안을 했던 자신을 땅을 치며 원망했다. 세련된 양복 차림의 데미안은 핸섬했지만, 몸에 꽉 달라붙는 청바지와 청색 캠브리지 셔츠와 조끼, 넓은 챙이 달린 모자 차림의 데미안은 다른 이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근사했다. 타고난 서부인, 그 모습은 케이시에게 다른 관점을 불어넣었다. 뜬구름이 아니라..., 손에 닿을 남자.
-19-
물웅덩이를 발견한 케이시는 다음날 일찌감치 캠프를 쳤다. 그리고 데미안이 다시 사냥을 나간 틈을 타, 재빨리 목욕을 하고 머리까지 감았다. 사실, 머리를 감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목욕이 필요 불가결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생각지 않으려다가 궁여지책으로 더 이상 꾀죄죄한 외관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만들어냈다.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루엘라 밀러가 나타났다. 다른 여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케이시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근방에서 다른 사람을 봤다는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이렇게 뛰어난 미녀는 생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최신 유행의 보닛(턱밑에서 끈을 매는 모자) 아래로 흰색에 가까운 금발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큼지막한 푸른 눈동자는 짙은 눈썹으로 감싸였고, 피부는 속이 비칠 만큼 투명한 아이보리색이었다. 거기에다 풍만한 가슴과 가는 허리, 아담한 키, 양산 아래로 나풀거리는 레이스투성이 부츠마저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저 풍만한 가슴! 아, 거기에 대해서는 이미 지적했던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렇게 작을 여성치고는 엄청나게 큰 가슴이었다. 그녀가 무거운 상체를 이기지 못하고 뒷걸음질 친다 해도 놀라지 않을 정도였다.
"어휴, 살았다."
그 세기의 미녀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하지만 그 벅찬 내용과 달리 어조는 여유만만이었다.
"당신을 봐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어요."여기에서 혼자 잠을 자야하는 상황에 처할까봐 안절부절못했답니다.
케이시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밤 내 캠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따뜻한 음식도 나눠드리지요."
"정말 친절하시네요."
그녀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루엘라 밀러라고 해요."시카고에서 왔답니다. 당신은요?"
케이시는 그 섬세한 손과 잘 다듬어진 손톱을 말끄러미 응시한 후에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혹시 루엘라가 간단한 악수 이상을 예상하는 건 아닐까?"하지만 케이시는 다른 여자의 손등에 키스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케이시."
딱 한마디만 하고 일부러 루엘라의 손을 무시했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루엘라는 미소를 지으며 모닥불 옆에 놓인 올드샘 안장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녀는 케이시가 허락하기도 전에 이미 안장에 새침한 태도로 걸터앉았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번 여행은 대단히 끔찍했어요."나는 텍사스의 포트워스까지 가는 일을 매우 간단하게 생각했답니다."
루엘라가 케이시를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케이시는 정중하게 되물었다.
"목적지가 그곳입니까?"
"네, 우리 종조부 장례식에 가는 길이에요. 하지만 하녀가 세인트루이스에서 줄행랑을 쳤답니다. 상상이 가세요? 그 다음에는 기차가 선로를 복구해야 한다는 이유로 연착했어요. 장례식이 거행되기 전에 포트워스에 도착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되자, 유언장이 낭독되기 전에는 꼭 가야겠다 싶더라구요. 유언장에 내 이름이 거론될 것 같거든요. 그 일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얌전하게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당신은 포트워스까지..., 걸어갈 결심을 했습니까?"
루엘라는 눈을 몇 번 깜박거리더니 호호 하고 웃었다.
"정말 농담도 잘 하시네요. 그게 아니에요. 나는 마침 마차로 여행 중이던 목사 부부를 만났어요. 친절하게도 그 분들이 나를 데려다주겠다고 했어요."최소한 버림을 받기 전까지는 아주 친절한 분들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케이시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려.
"어떻게 버림을 받았습니까?"
"그분들이 나를 남겨두고 떠났어요.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오늘 점심식사를 하려고 마차가 멈췄을 때, 내가 저기..., 볼일이 있어서 몇 분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까 마차가 정신없이 달려가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그들이 다시 돌아오리라 생각하면서, 아니 희망하면서 여러 시간 동안 기다렸어요.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계속 남쪽으로 갔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길이 자취도 없이 끊기잖아요. 아, 이번 여행이 특별히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마차는 편한 축에 속했어요. 달리는 중에는요. 아무튼 나는 길을 잃을까봐 두려웠답니다."
하루 종일 길을 잃고 헤맨 사람치고 깔끔해 보였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먼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바로 그 이유에서 루엘라 밀러는 바닥에 앉는 대신 올드샘 안장을 택했으리라.
"그 목사 부부가 당신 소지품도 가져갔겠지요?"
케이시가 한마디 했다.
"어머, 당신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 내 여행가방 안에 꽤 비싼 보석 몇 점과 돈이 들어 있었어요."
루엘라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그들이 돈을 훔칠 작정으로 나를 마차에 태웠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보이는군요."
"하지만 나에게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없어요."
케이시는 가까스로 코웃음을 참았다. 이 숙녀는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협조를 제의한다고 생각하는구나.
"대부분의 도둑들은 대상을 정해놓지 않습니다, 밀러 양."
"그 목사가 그런 사람이라면 난 눈뜬 소경이 틀림없어요."
루엘라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그가 당신의 신임을 얻기 위해 목사를 사칭했을 가능성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당국에 신고하기 전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루엘라는 또 예쁘게 한숨을 쉬었다.
"예, 알고 있어요. 그래도 나는 이번 주 안에 포스워드에 가야 한답니다. 당신이 남쪽으로 여행하시는 중은 아니겠지요?"
케이시는 아니오 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포스워드가 목적지라는 말을 생략하는 것 이외에 진실을 왜곡할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 읍을 경유할 겁니다."
"우리? 나를 데리고 가겠다는 말인가요?"
"내가 말한 <우리>는 나와 내 친구를 뜻합니다. 그는 지금 이 근처에서 사냥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당연히 우리가 당신을 다음 읍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대화는 계속되었다. 최소한 루엘라는 쉬지 않고 말했고, 화제는 대부분 그녀의 화려한 시카고 생활에 대한 것이었다. 케이시가 들은 바로, 루엘라는 상류 사회의 22세 처녀로 관대한 오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 무려 여덟 번씩이나 결혼할 뻔했지만, 매번 결혼식을 앞둔 달에 파혼을 당했다. 그녀는 하늘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내 약혼자들이 나와 결혼하고 싶어 한 이유가 내가 아름답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를 정말 사랑했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어요."
케이시가 보기에 여덟 번의 파혼 경력은 좀 많다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데미안이 돌아왔다. 케이시는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그가 멍청하게 서서 아름다운 손님한테 넋을 잃고 있는 꼴을 지켜봐야 했다. 그의 귀에는 루엘라에 대한 케이시의 설명이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에서 내려올 생각도 못하고 계속 말 등에 앉아 그 숙녀에게 추파를 던졌다.
루엘라 또한 데미안의 잘생긴 용모에 홀딱 반했다. 케이시는 루엘라처럼 뭇 남정네에게 눈웃음을 살살 치며 꼬리를 흔드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정말 역겨운 광경이었지만, 데미안의 생각은 달라 보였다.
"내가 루엘라에게 다음 읍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어요."
케이시는 그 말로 상황 설명을 마쳤다.
"그럼, 그래야 하고말고. 루엘라는 나와 같은 말을 타면 돼."
데미안은 숨넘어가는 사람처럼 재빨리 말했다. 그리고 정말 태울 기세였다. 하지만 그 제안에 케이시는 약이 올랐다.
"더 이상 여분의 체중을 실었다가는 얼룩말이 다시 반항할 거예요. 차라리 루엘라는 내 말을 함께 타는 편이 좋겠어요."
데미안은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루엘라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데미안은 마침내 말에서 내려 사냥감을 케이시의 무릎에 내동댕이쳤다. 심지어 케이시 쪽은 보지도 않고, 정중하게 루엘라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황송하다는 듯 루엘라의 손등에 키스하는 장면에 케이시는 기가 찼다. 남은 밤 동안 두 사람은 케이시를 쏙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 모두 상류 사회 출신인 만큼 공통점이 많았고 할 말도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딱 한 번 예의바르게도 루엘라가 케이시를 대화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우리의 대화가 지루하지 않기를 바래요, 케이시 군."
흥, 저것도 예의라고 차리나!
하지만 데미안이 생각 없이 끼어 들었다.
"케이시는 남자가 아닙니다."
그 말에 케이시의 성질이 폭발했다. 데미안이 사실을 폭로했다는 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루엘라가 옆에 앉아 호호거리며 던진 말도 케이시의 성질을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농담 마세요, 나는 한눈에 남자 여자를 알아본답니다."
하지만 아무도 웃지 않자,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케이시를 찬찬히 살피더니 조금 전의 호언장담을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케이시는 루엘라에게 신경을 끈 상태였다. 살기등등한 시선으로 데미안을 노려보며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당신과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단둘이서만."
케이시는 씩씩하게 어둠 속으로 향했다. 데미안은 잔말 않고 뒤를 따랐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의 하소연이 터져 나왔다.
"잠깐 기다려. 내 눈은 너처럼 어둠 속에서 제구실을 못한다구."
케이시는 멈춰 섰다. 그만하면 캠프의 가청거리에서 벗어난 셈이었다.
"내 눈이 당신보다 어둠 속에서 특별히 잘 뵈지는 않아요. 나는 해가 지기 전에 주변 지형을 살펴봤을 뿐이라구요. 그리고 댁도 그렇게 했어야 옳아요."
"그래, 너 잘났다."
케이시는 그 비꼬는 말투를 무시하고 데미안의 가슴팍을 꾹꾹 찌르며 삿대질했다.
"대체 왜 루엘라에게 내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누구인지는 그녀와 아무 상관도 없다구요. 알리고 싶었으면 진작에 내 입으로 말했어요!"
"지금 나에게 화났니, 케이시?"
케이시는 그의 어조에 담긴 웃음기를 감지했다. 화를 낼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바닥에 눌러 붙은 이성의 찌꺼기마저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 낮게 신음하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도대체 데미안이 어떻게 알고 날아드는 주먹을 피했을까?"하지만 눈 깜박할 사이에 케이시는 데미안의 품에 안겨 더 이상 주먹을 휘두를 수 없었다.
그래, 데미안이 원하는 건 주먹을 피하는 거야."하지만 케이시는 온몸을 짓누르는 단단한 체구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케이시의 양순함이 다른 생각을 품게 했는지, 데미안은 그녀의 고개를 뒤로 젖히고 세찬 키스를 퍼부었다.
-20-
사고!
데미안이 키스를 정의한 말에 케이시는 뼛속까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입술을 맛보고, 속을 휘저어놓고, 맥박을 세차게 뛰게 만들었다. 그리고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입술을 뗐다.
"이건... 이건 사고야. 이런 일은 다시없을 거야."
데미안은 그렇게 말하고 가버렸다. 뒤에 남은 케이시는 어리둥절했다. 심지어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데미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캠프로 돌아가서 모닥불 옆에 앉더니 루엘라와 다시 대화를 주고받았다.
케이시는 멀찌감치 떨어진 둥근 돌에 앉아 좌절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제 불을 보듯 뻔한 진실을 회피할 도리가 없었다. 데미안에게 끌리는 마음은 어찌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키스를 원했다. 사실, 그 이상을 원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미래는 그려볼 수 없으니까. 데미안은 원래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관광객이었다. 그는 케이시의 세계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케이시 역시 데미안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자각도 데미안이 불러일으킨 <욕망>을 잠재울 수 없다는 점이 비극이 씨앗이었다.
케이시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었다.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이 새로운 감정을 더 깊이 탐구할 것인가, 아니면 조만간 제 갈 길을 찾아가기를 바라면서 각고의 노력을 다해 저 남자를 멀리할 것인가?"데미안은 그녀에게 진짜 관심이 없었지만 이보다 더한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특히 데미안이 흥미를 둔 루엘라 밀러와 헤어지면...
이런 맥락에서 루엘라의 출현을 기뻐해야 마땅했다. 왜냐하면 루엘라는 데미안의 눈과 마음을 꼭 사로잡아 케이시의 존재를 의식할 틈조차 주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다른 한편, 데미안이 그 숙녀에게 침을 질질 흘리며 객쩍은 소리를 해대는 꼴은 케이시의 약을 올렸다.
어쨌든 케이시는 기대했던 것처럼 빨리 루엘라를 떼어버리지 못했다. 다음날 남행 열차에 오르게 됐는데, 그 기차는 전에 탔던 것으로, 데미안의 멋진 특별 차량이 여전히 달려 있었다. 목적지가 모두 같았던 관계로 데미안은 루엘라를 그의 차량으로 초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케이시가 새침데기 숙녀에 대한 질투심을 인정하는 것 이외에 달리 반대할 도리가 있을까?
그로부터 이틀 후 포스워드에 도착할 즈음, 시카고에서 온 사랑스런 숙녀는 아홉 번째 희생양을 낚기 일보 직전처럼 보였다.
함께 여행했던 여러 날 동안, 데미안은 루엘라에게 딱 한 번 짜증을 부린 적이 있었다. 그녀가 그의 어머니에 대한 말을 꺼냈을 때였다. 그의 모친은 루엘라처럼 시카고 사교계를 누비며 떵떵거리고 사는 눈치였다. 데미안은 어머니에 대한 말은 일체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엘라는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입을 놀렸다. 데미안 모친의 첫 남편에 대해 알게 된 경위하며, 그분이 몇 해 전에 두 번째 남편과 사별하고 미망인이 되어 지금은 커다란 저택에서 외롭게 홀로 사신다는 등, 데미안이 그런 어머니를 찾아봬야 한다는 둥 지껄여댔다. 루엘라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데미안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던 케이시는 혼자 구시렁거렸다.
"어떤 사람들은 입을 닥쳐야 할 때를 모른다니까."
하지만 루엘라는 평소처럼 케이시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이가 왜 저럴까요?"
케이시는 어깨를 으쓱하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 여기가 답답한 모양이에요."
루엘라는 입을 삐죽거리며 부채질을 했다.
"정말 그래요. 하지만 여기보다 밖이 더 덥겠지요? 하지만 나를 화끈 달아오르게 만든 사람은 바로 그이랍니다. 당신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요?"
케이시는 그 뜻을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루엘라는 케이시의 찌푸린 얼굴을 무시하고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나 역시 그에게 같은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참 잘된 일이에요. 우리는 그림 같은 커플이잖아요?"
저 여자가 정말 대답을 듣고 싶은 건가? 하지만 루엘라가 새롱거리며 데미안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기 때문에 케이시는 물어볼 기회를 놓쳤다.
케이시는 입맛이 싹 달아난 상태였다.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가 따로 없어! 케이시는 루엘라의 외모가 반반하다는, 아니 꽤 아름답다는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남자들이 어떻게 루엘라처럼 머리가 텅 빈 존재를 참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수수께끼였다. 데미안이 좀더 지각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개인 취향을 누가 말리겠어.
그리고 루엘라는 겉보기와 또 달랐다. 데미안에게는 그런 면을 보일까봐 극도로 조심하는 반면, 케이시에게는 대놓고 그 비열한 근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마지막 경유지에서 기차가 점심시간에 맞춰 정차하자, 루엘라는 케이시를 한쪽으로 데려가서 말했다.
"나는 당신의 질투를 살까봐 굉장히 걱정했답니다. 하지만 데미안이 단언하기를, 당신은 그에게 관심이 없다고 했어요.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잖아요? 당신이 그에게 어울리는 아내감이 아니라는 점이야 당신도 잘 알지요? 게다가 나는 원하는 걸 절대로 놓치지 않아요. 부디 그 점을 명심해주세요, 아가씨."
케이시는 루엘라가 이런 경고를 해야 할 강박관념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기 위치에 불안을 느꼈기 때문일까? 어쨌든 케이시는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 즉시 쏘아붙이지 못했고, 그 다음에는 루엘라가 데미안을 찾으러 가는 바람에 말할 기회를 놓쳤다.
그것이 어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군항에 기원을 두고 번창한 읍 포스워드에 도착하자, 케이시는 여우같은 루엘라 밀러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문제의 그 숙녀는 데미안에게 종조부 집까지 배웅해달라고 했지만, 케이시는 역사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먼저 말을 돌보러 갔다. 그리고 가장 싼 여인숙에 방을 잡았다. 이만한 크기의 읍에서 헨리 커루더스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되도록 여비를 아낄 필요가 있었다.
그날 밤 데미안이 그 여인숙 식당에서 밥을 먹는 케이시를 찾아냈을 즈음, 그녀는 이미 쓸 만한 정보를 알아낸 후였다. 케이시는 오늘밤 데미안이 어화둥둥 내 사랑과 함께 있으리라 추측했기 때문에 다음날에야 그 말을 할 생각이었다.
"왜 여기 있는 거지?"
데미안은 식탁 옆으로 오자마자 물었다.
"싸니까요."
데미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모든 경비를 내겠다고 했잖니?"
"여기나 저기나 침대 수준은 다 엇비슷해요. 여기도 괜찮아요."
"길 맞은편에 있는 가장 좋은 호텔에 네 방을 잡아뒀어."
"그럼 환불을 받으세요."
케이시는 계속 밥을 먹으면서 재빨리 대답했다.
"그런데, 당신이야말로 여기 웬일이에요? 루엘라가 저녁식사에 초대하지 않던가요?"
데미안은 한숨을 쉬며 옆자리에 앉았다.
"제의는 받았지만 거절했어. 솔직히 털어놓으마.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쉴 새 없는 수다를 들으며 밤을 보낼 수 없어."
씹고 있던 스테이크 조각에 목구멍이 막힐 뻔했다. 데미안이 캑캑거리는 케이시의 등을 두드렸다. 삶은 가재처럼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윽박질렀다.
"지금 내 뼈를 부러뜨릴 심산인가요?"
"미안해."
데미안은 도움을 고마워하지 않는 케이시가 원망스러웠다.
"여기 음식이 먹을 만하니?"
"아니오."하지만 값이 싸요."
그는 한참 동안 케이시를 바라보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넌 도대체 어떻게 된 게 싼 건만 쫓아다니니?"보수가 꽤 넉넉할 텐데? 그렇게 위험한 일이니만큼, 당연히 돈을 많이 받아야지.
"그렇기는 해요."하지만 가는 곳마다 돈을 펑펑 뿌리고 다닌다면, 훗날 은퇴한 다음에 내 꼴이 어떻게 되겠어요?"
데미안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만간 은퇴할 생각인 것처럼 들리는구나."
"그래요."
"그리고 뭘 할 건데?"
"집에 갈 거예요
"결혼해서 미래의 카우보이를 키우시겠다?"
케이시는 그의 비비틀린 말을 무시했다.
"아니오, 나는 물려받은 목장을 경영할 생각이에요."
데미안은 깜짝 놀랐다.
"그 목장이 어디에 있니?"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데미안."
"그래도 말해봐."
"싫어요."
데미안의 찡그린 상은 많은 뜻을 담고 있었다. 그는 면전에서 거절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그 화제를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의 그 커루더스가 여기에서 남쪽으로 향했어요."
케이시는 무심하게 중요 사안을 입에 올렸다.
"그는 샌안토니오를 거론했지만, 그곳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에요."
데미안은 의심쩍은 듯 물었다.
"어떻게 그런 정보를 벌써 알아냈지?"
"읍의 마구간이란 마구간은 이 잡든 샅샅이 뒤졌거든요."
"왜?"
"당신 탐정의 말에 의하면 커루터스는 기차를 타고 이 읍을 떠났다고 하지 않았어요. 기차가 아니라면 말을 구입했겠지요? 그리고 인상착의가 특징이 있는 만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조사해본 결과 정말 그랬어요."
"탐정들의 머리도 그 정도는 돌아갔을 거야."
"그래서 운이 따라야 한다는 거죠. 커루더스에게 말을 팔았던 친구는 그 다음날 뉴멕시코로 어머니를 뵈러 갔고, 거의 한 달가량이나 그곳에 머물렀다더군요. 그러니 당신 탐정들이 허탕을 칠 수밖에요."
데미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최소한 일 주일은 머물러야 할 줄 알았어."
케이시가 어깨를 으쓱했다.
"동감이에요."그나저나 참 안됐군요."이제 당신은 체류 기간을 줄이든지, 아니면 나에게 이 일을 맡기고 뒤로 물러나시겠죠?"
"어림도 없어."
데미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꽃 같은 루엘라를 남겨두고 떠나는 일에 단 일초도 주저하지 않았다.
"너에게 다시 말해두겠는데, 나는 네가 그놈을 찾는 현장에 있어야만해. 그놈과 일대일로 맞붙고 싶단 말이야. 자, 그 외에 다른 정보는 없니?"
"그는 자기처럼 눈에 띄는 얼룩말을 샀다더군요."
"말이 튄다는 뜻이겠지?"
"그래요. 그리고 막 형성되기 시작한 읍에 대해 묻더래요. 말 거래꾼인 멜튼 씨가 그 이유를 묻자, 웃으면서 자기 소유의 읍을 갖고 싶다고 했다더군요. 멜튼 씨는 그런 땅딸보에게 걸맞지 않는 거창한 야심이라고 생각했지만, 서던 퍼시픽 기차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작은 읍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노라고 말해줬대요."
"그래서 너는 이제 뭘 할 거니?"
"일단 샌안토니오에 가서 그를 찾아볼까 해요. 샌안토니오의 동쪽 지역은 정착민이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그가 정말 신흥 읍을 찾는 중이라면 서쪽으로 갔을 공산이 커요. 하지만 우선은 샌안토니오에 가서 그런 추측을 확인해줄 사람을 찾을 생각이에요."
"샌안토니오까지 기차가 들어가니?"
"예..., 불행하게도.
데미안은 케이시의 씁쓸한 어조에 싱긋 웃었다.
"내 특별 차량이 편안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그러니, 케이시?"
입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리라.
"기차가 시간표대로 운행한다면이야 시간 낭비를 막을 수 있지요. 아무튼 샌안토니오 행 기차가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니까 당신에게는 작별인사를 할 시간이 많지 않은 셈이에요."
"우와, 배가 고픈걸."
데미안은 식당 종업원을 불렀다.
"나에게 스테이크, 아니, 얘가 먹고 있는 걸 가져다주시오."
케이시는 여전히 경고하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당신이 루엘라에게 작별인사를 할 시간이 많지 않다니까요."
데미안은 짐짓 생색을 내며 그녀의 팔을 토닥거렸다.
"케이시, 너에게는 중매쟁이 노릇이 어울리지 않아. 네 연애에나 신경 쓰려무나."
중매쟁이? 물고 있던 음식물을 튀겨가며 한바탕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대신 당장이라도 그를 전기의자에 앉히고픈 시선으로 데미안을 노려봤다.
-21-
다음날 아침 역사로 가는 길에 케이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길 한복판을 따라 내려오는, 저 먼지를 뒤집어쓴 털북숭이는 아버지!"그는 광활한 평원을 내내 달려온 사람처럼 보였다.
케이시는 옆에서 말고삐를 쥐고 걷고 있던 데미안에게 한마디 설명도 하지 않고 재빨리 가까운 골목으로 달려가 벽에 달라붙었다. 제발 아버지가 나를 발견하지 못했기를..., 그리고 올드샘도. 아버지는 한눈에 케이시의 말을 알아볼 것이다.
데미안이 뒤를 따라왔다. 눈썹만 봐도 잔뜩 긴장했음을 알 수 있었지만, 그는 점잖게 물었다.
"지금 뭘 하는 거니?"
"내가 뭘 하는 것처럼 보여요?"
케이시가 낮게 투덜거렸다.
"이유는 모르겠다만 숨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아버지가 거리를 따라 말을 모는 중이었다. 아직 케이시가 숨은 골목을 지나지 않았다. 가능한 한 몸을 숙이는 한편, 올드샘의 대가리도 아래쪽으로 끌어당겼다.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던 데미안이 한숨을 쉬었다.
"이러다 기차 놓치겠다."
"정시에 도착할 테니 걱정일랑 붙들어 매요."
데미안은 아래위로 거리를 훑어봤다. 하지만 수상쩍은 낌새나, 현상범 전단에 나붙은 얼굴은 전혀 없었다.
"빨리 설명해봐."
"우리 아버지가 지금 막 이 읍에 도착하셨어요. 아, 다시 두리번거리지 말아요. 그러다 눈치 채시겠어요."
하지만 그 어떤 말로도 다시 두리번거리는 데미안을 막지 못했다. 거리에 있는 서너 명의 사내가 데미안의 눈에 들어왔다. 한 명은 사업가처럼, 또 한 명은 불량기 가득한 무법자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목동처럼 두 마리의 수소를 몰고 있었다. 케이시의 아버지뻘로 보이는 대상은 두 명으로 압축되었고, 데미안은 사업가에게 표를 던졌다.
"네 부친은 그리 온화해 보이지 않지만 너를 도망가게 만들 정도는 아닌데."
데미안의 논평에 케이시의 코웃음이 뒤따랐다. 데미안은 재빨리 다른 질문을 던졌다.
"왜 아버지를 피해서 도망 다니니, 케이시?"
"아버지가 당장 내 머리채를 잡고 집으로 끌고 갈 테니까요. 우리 아버지는 보통 분이 아니시거든요. 당신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분이라구요."
데미안은 그 사업가를 다시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시선이 불량배 쪽으로 돌아갔을 때야 사내의 칠흑 같은 흑발과 당당한 광대뼈 등 케이시와 닮은 점이 눈에 들어왔다. 데미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맙소사, 저 사람이 너희 아버지야? 저 무법자처럼 생긴 남자가?"
"아버지가 항상 저런 건 아니에요."
케이시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맞아요, 저분이 우리 아버지예요."제발 그만 좀 봐요! 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알아챌 수 있다구요."
"어떻게?"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너희 아버지는 네가 여기에 온 걸 알고 계실까?"
"아실 리 없어요."내가 기차로 여기까지 왔다고 짐작하지 않은 한. 하지만 당신이 기차표를 샀으니까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게다가 호텔방도 당신이 잡았으니까, 내 흔적은 하나도 없어요."
"이런 말은 할 땐 아니지만, 어젯밤 네 방은 네 이름으로 잡았어."
"뭐요?"
데미안은 움찔했다.
"뭐, 네 진짜 이름은 아니야."그저 약자를 썼을 뿐이라구."
"아무 이름이나 지어낼 수 없었어요?"
"왜? 네가 네 입을 그 약자를 쓴다고 했잖아."
"어휴, 그거야 현상범을 보안관에게 넘겨야 하는 불가피한 경우에만 그랬지요. 우리 아버지가 들르는 곳마다 보안관을 찾아가서 일일이 확인할 성싶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호텔과 여인숙은 샅샅이 뒤졌을 거예요."
"그럼, 그게 네 본명의 약자였니?""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금방 알아볼 약자예요."
"아하, 아버지의 약자를 도용했구나."
"아니에요."
"그렇다면 누구의 약자인데?"
"이미 입이 닳도록 말했지만, 댁은 정말 질문이 많군요."아, 이제 우리 아버지가 지나가셨어요. 빨리 기차역으로 가요. 당신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고 올드샘을 가축운반 차량으로 데려갈 수 있겠어요?"
"아버지가 네 말도 알아보셔?"
"두말하면 잔소리죠.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말이니까."
케이시는 그 어느 때보다 빨리 역사로 향했다. 아버지 눈에 띄지 않고 포트워스를 빠져나가리란 기대를 품지 않았지만, 행운의 여신은 케이시 편이었다. 챈도스가 특별 차량으로 뛰어드는 불상사 없이 기차는 정각에 출발했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가 따로 없었다. 최소한 샌안토니오로 가는 길 내내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런 가슴 조이는 일의 재발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쳤다.
협조 요망.
추적자를 불러들이기 바람. 조만간 귀향하겠음.
하지만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샌안토니오에 헨리 커루더스의 단서가 없었다. 아니, 아예 흔적조차 없었다. 역사 철도원은 여기에서 커루더스와 같은 인상착의의 승객이 기차를 타지 않았노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케이시는 그가 신흥 읍을 찾는다는 전제하에서 서던 퍼시픽을 따라 서쪽으로 향했으리라 추정했다. 케이시와 데미안으로서는 커루더스와 동일한 여정을 따라가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데미안은 특별 차량을 새 기차에 연결시켰다. 솔직히 케이시는 그 차량의 편안함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일반 원칙에 대해서만 불평을 늘어놨다. 그들은 여러 날에 걸쳐 차량에서 같이 잠을 자야 했다. 케이시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잤다. 어느 날 밤, 자신을 굽어보는 데미안을 보기 전까지는.
-22-
케이시는 특별 차량의 한쪽에서 단잠을 자고 있었다. 좌석은 좁았지만, 최근에 사용했던 침대보다 훨씬 푹신푹신했다. 게다가 데미안의 꿈까지 꾸고 있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얼른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참으로 단꿈이었다. KC 목장에서 파티가 열렸고, 그녀와 데미안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데미안이 왜 그녀의 집에 있는지조차 의아해하지 않았다. 꿈속에서는 그가 거기 있다는 사실이 너무 당연해 보였다. 심지어 부모님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때 갑자기 데미안이 키스를 퍼부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주변에서 함께 춤을 추던 사람들은 그들의 키스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키스는 전과 똑같았다. 단,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고.
이전에 그가 불러일으킨 감정이 다시 솟았지만, 이번에는 케이시가 긴장을 푼 상태였기 때문에 전보다 훨씬 강렬했다. 그 키스는 더 이상 깊어질 수 없는 그런 종류였다. 노련하게 혀를 사용하여 입안을 구석구석 탐험했고, 아랫입술을 삼켜버리려는 듯 강하게 빨았다. 케이시는 몸을 더듬는 데미안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어, 이상하다. 춤을 추고 있으니, 그는 내 등만 어루만질 수 있을 텐데...
그녀로서는 열렬한 키스에서 깨어나 그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이유를 정확하게 가리지 못했다. 데미안의 손이 앞가슴을 부드럽게 주무르는 충격 때문이었을까?"그 감촉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불러일으켰다.
다음 순간, 데미안이 실제로 좌석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키스하고 있음을 깨닫고, 케이시는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럴싸한 말을 생각하려 했지만,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케이시가 생각해낸 말은 오직 한마디.
"데미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케이시가 똑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반복한 다음에야 마침내 데미안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데미안의 다음 질문에 케이시 또한 그 이상으로 어리둥절해졌다.
"넌 내 침대에서 뭘 하는 거지?"
"웬 침대? 여기에는 침대가 하나도 없어요. 한 사람이 간신히 누울만한 크기의 좌석이 전부라구요."
케이시는 똑똑 부러지게 강조해서 말했다.
"그리고 내 좌석 쪽에 와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에요, 데미안."
그때서야 데미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케이시의 말이 하나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젠장할, 대단한 꿈이로군."
데미안의 말에 케이시는 눈을 끔벅거렸다. 사실 데미안의 꿈 상대는 루엘라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시는 여전히 실눈을 뜨고 그를 노려봤다.
"몽유병이라도 있어요?"
"전에 없던 일이야..., 지금까지는. 저기, 내가 사과해야 할까?"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줘서 미안하다?"데미안은 자신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 모르는 걸까?"어떻게 그럴 수 있지?"혹시 내가 키스나 애무를 좋아하는 몸짓이나 소리를 내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감정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좋아하는 내색을 했다고 해도, 그는 잠들어 있는 상태였으므로 반응을 깨닫지 못했으리라.
"데미안, 당신이 저쪽 자리에만 붙어 있어준다면 자면서 활개를 치건, 체조를 하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니에요."
"그럴 테지."
데미안은 오랫동안 뜸을 들인 다음에 다시 덧붙였다.
"하지만 정말 근사한 기분이었어."
케이시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하지만 워낙 어두운지라 데미안은 그녀의 부끄러움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말은 그가 여전히 근사 한 기분으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하게 증명했다.
"내 말뜻을 알고 싶지 않니?"
케이시는 이미 그 말뜻을 정확히 알았다. 지금 그는 키스를 계속하자는 제안을 하고 그 결정권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빌어먹을, 정말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이번에 그가 꿈꾸는 키스 상대는 루엘라가 아니었다. 데미안은 키스에 녹아든 상대의 입술을 분명하게 기억했다.
묻지 않고 다시 키스했더라면 거부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 질문은 곧 키스를 원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꼴이었다. 케이시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진실을. 그녀는 데미안에게 관심 없는 태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망할 놈의 남자, 묻긴 왜 물어?
하지만 순리에 맞는 행동이었다. 그들이 헤어져서 각자의 길을 갈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는 이 마당에 친밀한 관계를 맺는 짓은 예정된 이별을 어렵게 만들 테니까.
케이시는 마음이 바뀌기 전에 냉큼 말했다.
"데미안, 나는 다시 자고 싶어요. 당신도 얌전히 잠이나 자는 게 어때요?"
지금 들은 소리는 한숨일까?"아냐, 아닐 거야.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녀를 내려다보고 서서 꾸물거렸고 케이시는 묘한 기대감으로 점점 긴장했다. 그러다 마침내 등을 돌리고 제 좌석으로 돌아가더니 그 좁은 공간에서 하염없이 뒤척거렸다. 그리고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케이시는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아, 내가 다시 잠을 잘 수 있을까.
-23-
케이시는 기차역마다 내려서 주변을 돌아다니며 커루더스의 인상착의를 물었다. 하지만 번번이 허탕만 치자, 데미안은 더 이상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가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즈음에 그녀가 긍정적인 정보를 캐냈다.
기차가 두 시간이나 정차한 덕분에 데미안은 케이스를 따라 조사에 나갔다. 하지만 그녀가 읍의 이발소로 향하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인 모양이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이발사는 헨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 기적 같은 상황을 계기로 기억을 더듬은 결과, 데미안은 헨리가 항상 깔끔한 성품이었음을 떠올렸다. 평소 단정한 사람이 도망을 다닌다고 해서 갑자기 집시가 되진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발은 헨리 커루더스에게 고려해야 할 행동 양식이었다.
아무튼 그 이발사는 고객의 머리를 자르면서 계속 대화를 하는 타입이었던 관계로 헨리에게도 말을 붙였다. 그는 헨리가 이 읍의 읍장 선거는 언제이고, 읍의 사람들이 현재 읍장에 만족하느냐의 여부를 물었음을 기억해냈다.
그 질문만 따로 떼어 생각한다면, 헨리가 대화를 잇기 위해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가 소유 할 읍을 찾고 있다는 기존의 정보와 연결시키자 전혀 다른 결론이 도출되었다.
읍장의 권위를 지닌 사람은 읍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읍을 소유하는 이상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헨리가 권력을 장악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정치에 뜻을 뒀을까?
하지만 이미 읍장이 있는 읍은 잘 정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의 조사 지역은 더욱 확대된 것처럼 보였다. 케이시는 그 결론에 속상해했다.
"그가 이렇게 멀리까지 왔다는 점은 확인되었지만, 이제 여기부터 철로 주변의 읍을 이 잡듯 샅샅이 뒤져야 할 판이에요."
즉, 커루더스를 찾는 데 더 오랜 시간이 소요되리라는 뜻이었다. 그 말은 곧 케이시와 함께 있는 기간의 연장을 의미했으므로 데미안은 그다지 실망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루빨리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을 잡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없이 혼자 루트리지 상사를 경영해야 할 생각에 마음이 심란했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리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아버지의 신발을 꿰어 신어야 할 줄 미처 몰랐다.
그리고 케이시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케이시를 멀리하는 일이 더 어려워지리라 짐작했지만, 매시간 그녀를 원하게 될 줄은 몰랐다. 루엘라 밀러가 한동안 관심을 분산시켰지만 그도 잠시에 불과했다. 그 시카고 사교계 처녀의 미모는 눈에 부실 정도였다. 그 점은 부인할 수 없었지만 그 알맹이 없는 공허한 수다에 진저리가 나서 "입 닥쳐"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에 비해 케이시는 너무 과묵한 나머지 그녀의 비밀과 신분에 대해 입을 열게 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호기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왜 위험한 직업에 투신했을까?"왜 아버지를 피해 다닐까?"그 험악한 아버지 이외에 다른 식구들이 또 있을까?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케이시와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문제였다. 마침내 그날 밤 기차에서 더 이상 거리를 지키지 못하고 그 욕망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날 밤, 데미안은 잠을 이룰 수도, 잠든 그녀에게 눈을 뗄 수도 없었다. 곤히 잠든 케이시의 부드럽고 관능적인 모습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었기에 그녀를 탐했다. 그때 케이시가 잠에서 깨어났다. 데미안은 좀처럼 내숭을 떠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녀가 일어나서 비난을 퍼붓는 데에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몽유병이 생긴 것처럼 행동했다. 가당치도 않은 변명이었지만 욕망이 한껏 고조되어 있던 터라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고, 케이시는 그 변명을 믿었다. 아, 계속 잠들어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케이시의 반응은 뭇 남성들이 꿈에 그리는 그런 종류였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까지는...
다음날 저녁, 기차는 랭트리에 정차했고 승객들은 작은 읍의 호텔에서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데미안은 방을 잡고 일찌감치 물러났다. 하지만 케이시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나기 전에 조사를 하겠노라고 말했다. 데미안은 즉시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케이시는 제 방에 없었다. 역사에도, 가축 수송 차량에도 없었다. 데미안은 어디에서도 케이시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러던 중에 어떤 사람이 감옥으로 가보라고 귀띔했다. 케이시는 정말 감옥의 튼튼한 쇠창살 뒤에 있었다. 표정은 평소처럼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 황금빛 눈동자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심각한 상황이니?"
데미안이 감방 쪽으로 다가갔다.
"오히려 우스꽝스럽다는 편이 옳아요."
케이시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총을 쏴서는 안 될 사람에게 총을 쏘지는 않았겠지?"
"내 총은 가죽집에 얌전히 있었어요."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거야?"
"나도 그걸 알면 좋겠군요."
그녀가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어젯밤 ‘저지 릴리’ 술집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내 볼 일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싸움판이 벌어지더라구요. 그래도 나는 끼어 들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어요. 결국 싸움이 막을 내리자, 바닥에는 널브러진 사람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코피로 강물을 이룰 정도였어요."
"네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면..."
"내 말을 끝까지 들어봐요. 그때 술이 억수로 취한 빈 판사가 자기 법정이 파손되었다고 노발대발하잖아요."
"여기 술집은 법정을 겸한다는 말이야?"
"그리 보기 드문 일도 아니에요. 대부분의 작은 소읍들은 주재 판사는커녕 법정도 없기 때문에 순회 판사가 올 때마다 술집을 이용해요. 그곳이 읍에서 가장 큰 공간이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판사들이 재판회기와 상관없이 밤낮으로 법정을 지키는 건 아니에요."
"왜 네가 그 빈 판사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는 감이 들까?"
"난 빈 판사와 개인적인 친분이 없어요. 하지만 어젯밤 여러 시간 동안 이 감방에 함께 감금되었던 동지에게 귀동냥을 했지요. 뭐, 나중에 그 동지는 부인에게 끌려서 집으로 갔지만요. 그 판사 양반은 건수가 생길 때마다 텍사스 법을 제 마음대로 해석해서 우려낸 벌금으로 술판을 벌이는 모양이에요. 하지만 말 도둑과 살인자는 교수형으로 엄히 다스린다더군요. 단, 그들이 자기 술친구가 아닐 경우에만 말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니?"
"즉, 그가 법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고 적용한다는 뜻이에요, 가령 술친구 중 한 명이 사람을 쏘았다고 쳐요. 그러면 판사가 발 벗고 나서서 가해자를 무죄 방면할 방법을 찾아낸다는 거죠. 그가 내린 가장 악명 높은 판결 중 하나가 뭔 줄 아세요? 글쎄, 죽은 희생자는 자기 친구가 발사한 총알 앞에 서 있지 말았어야 했다고 판결을 내리더래요."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네 감방 동지가 농담을 했을 거야, 케이시."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영 의심쩍어요."
"왜?"
"전에 한 목동에게 빈 판사에 대해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거든요. 여러 해 전 그가 이 읍에 들어섰을 때, 어떤 멀쩡한 사내가 갑자기 술집 앞 길바닥에 쓰러져서 죽었대요. 당시 판사는 술집 포치에 진을 치고 있었다더군요. 빈 판사는 즉시 뒤뚱거리며 계단을 내려와서..."
"뒤뚱거리다니?"
"걸음도 제대로 못 걸을 정도로 취해 있었대요. 하여튼, 뒤뚱거리며 계단을 내려와서 우선 검시관 노릇을 했다더군요. 죽은 남자의 주머니를 샅샅이 뒤져 돈 몇 푼과 권총을 찾아낸 다음, 사법적인 재량권을 발휘해서 불법 무기를 소지했다는 죄목으로 죽은 사람에게 사후 벌금을 부가하더라나요. 물론 그 벌금은 죽은 사람 주머니에서 찾아낸 금액과 맞먹었지요."
"그 돈을 쓱싹했다?"
"이 근방에서 유일무이한 판사인데, 왜 안 그랬겠어요? 다시 어젯밤 일로 돌아가서, 판사는 법정이 모두 파손된 만큼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을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렸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모든 사람이 다 수감될 만큼 감방이 넓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더군요. 그러자 판사는 공식적인 체포를 나에게만 국한시키지 뭐예요."
데미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왜?"
"나도 같은 질문을 했어요. 그랬더니, 그 사건 관련자와 벌금을 징수하러 갈 그들의 거주지를 모두 알고 있다나요. 젠장, 그들 중 과반수가 술친구들이니 그들에게 벌금을 징수할 리 없죠. 하지만 나는 이방인이니만큼 도주의 위험을 고려하여 감방에 처넣은 다음 아침에 재판을 하겠다더군요."
데미안이 한숨을 내뱉었다.
"즉, 너는 의자 하나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그 기물 손상의 피해액을 전부 낸 다음에야 석방될 수 있다?"
"내 말이 그 말이에요."
"너는 네 일은 스스로 알아서하는 사람이니, 네가 그 사건과 무관하다는 점을 지적했겠지?"
케이시는 데미안을 똑바로 노려봤다.
"내가 감방에서 밤을 보내고 싶어 혈안이 된 사람처럼 보여요? 당연히 그 말을 했지요. 그러자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기물 수리에 참가하라는 공식적인 판결을 내렸어요."
"자신을 포함해서?"
케이시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벌금을 징수해서 수리비로 내놓으라는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과하더군요."
"이 일 때문에 기차를 놓치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걸요."사람들이 벌써 판사를 깨우러 갔어요."내가 듣기로는 재판이 오래 걸리지 않는데요."
"네가 아무리 용을 쓴다 해도 돈지갑을 열어야 그곳에서 나올 수 있겠구나."
"그렇겠죠.
케이시는 씁쓰름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에 대한 벌금은 내지 않겠어요."
"걱정하지 마. 내가 낼게."
"이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
데미안이 싱긋 웃었다.
"그래, 돈 문제가 아니지. 하지만 돈이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해줄 거야."
돌아가는 판국이 이 모양이었으므로 데미안은 케이시와 함께 그 술집 겸 법정으로 출두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로이 빈 판사의 기분이 오늘 아침에 최악이었음을 알 리 없었다.
-24-
로이 빈 판사가 재판의 유무를 떠나서 진을 치고 있다던, 그 문제의 술집 겸 법정 저지 릴리는 전형적인 선술집이었다. 그러나 딱 한 군데 예외가 있었다. 그건 바로 한가운데 놓인 간이 판사석이었다.
빈은 전형적인 판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배불뚝이라 양복 조끼의 맨 윗단추만 간신히 채우고 나머지는 다 풀어놓았다.
나이는 일흔 정도로, 핏발선 눈은 술에 대한 정열을 과시했다. 목 주변의 밧줄 흔적은 과거 어느 시점에 교수대에 섰다는 전력을 암암리에 말해줬다. 아무래도 왕년에 비열하기 짝이 없는 총잡이였고 다른 패거리들은 모두 송장이 되었다는 소문이 사실 같았다. 그것도 다 그가 평화의 사도로 임명되기 전의 과거지사였다.
케이시는 전날 밤 체포되었다는 점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술집의 파손 정도가 빈의 폭언과 헛소리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임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벌금을 징수할 기회를 잡기 위해 일부러 노발대발하며 연극을 했다손 치더라도 놀라지 않았으리라.
넓은 술집에서 파괴의 흔적이라고는 다리 하나가 부러진 탁자 하나와 누군가의 등에 내리쳐져 부서진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그 외에 술병 파편들이 즐비했다. 케이시 생애에서 가장 격렬한 축에 해당하는 어젯밤 난동을 청소하는 일에 대단한 수고와 노력이 요구될 것 같았지만, 그런 뒤처리 흔적을 아직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 이른 시간에도 판사의 술벗들이 바에 옹기종기 모여 해장술을 마시며 친구가 일을 마치고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케이시는 재판 중에도 술판이 벌어진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한 터였다.
빈 판사 자신도 의사봉 옆에 술병을 나란히 놓고 앉아 거침없이 재판을 진행했다. 특별한 연단도 없었다. 술집을 법정으로 삼으면서 재판석 하나로 만족하고 그 외의 것을 돈 낭비로 생각하는 위인이었다. 법정은 격식과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마땅히 일어서서 법정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집행관마저 판사석 한쪽 귀퉁이에 앉아 커피를 훌쩍거리는 정도였다.
케이시는 법정 대리인의 호위를 받으며 이 희극 무대와 같은 법정으로 들어갔다. 데미안이 오른쪽에 서서 따라 들어가 판사석 앞에 섰던 탓에 판사의 즉각적인 관심을 끌었다.
"자리에 앉게, 젊은이. 내가 이 작은 숙녀를 처리한 다음에 자네의 재판을 하겠네."
케이시는 움찔했다. 저 늙은 얼간이가 무슨 수로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녀의 성별을 정확하게 알아맞혔을까? 빈 판사는 케이시의 반응을 알아차리고 가래 끓는 웃음소리를 냈다.
"내 눈썰미는 귀신도 못 속여, 아가씨."
빈 판사가 허풍을 떨었다.
"포대 자루를 걸친들 예쁜 아가씨를 알아차리지 못할까?"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재주를 발휘할 기회가 극히 드물었지."
그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찡그리는 통에 케이시의 얼굴이 붉어졌다.
판사는 성성한 회색 눈썹을 데미안 쪽으로 치켜 올려.
"왜 아직도 거기 서 있는 건가, 젊은이? 귀가 멀었나?"
"저는..., 이 숙녀의 동행인입니다. 벌금을 내고 갈 길을 가려고 왔습니다."
데미안이 설명했다.
"그래, 그래야지."
판사는 탐욕스런 눈빛을 하고 대답했다.
"평화를 교란하고 개인 재산의 파괴 행위에 동참한 죄목으로 벌금 백 달러 형을 선고하겠다. 집행관에게 벌금을 내도록 하게."
"백 달러씩이나!"
케이시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내 판결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소, 아가씨?"
로이 빈이 경고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데미안이 옆구리를 꾹꾹 찌르는 통에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데미안이 돈다발을 꺼내 백 달러에 추가로 60달러를 더 보태지 않았다면 빈 판사는 즉석에서 더한 죄목을 고안해냈을 것이다. 아무튼 데미안이 건넨 벌금은 집행관의 손을 거쳐 판사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빈 판사는 부끄러워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이제 가도 됩니까?"
"좋아, 좋아."
빈은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자 정의의 사도 역할을 빨리 벗어버리려고 초조하게 말했다.
"하지만 왜 자네가 벌금을 내지? 남편이라도 되는가?"
"아닙니다."
"그럼 변호사?"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지?"
데미안이 그 개인적인 질문에 걱정하는 기색을 보였으므로 케이시가 대신 나섰다.
"우리는 동부에서 살인을 저지른 남자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기 위해 찾고 있습니다."
"참으로 기특하구먼."
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언제든 그 살인자를 나에게 데려와도 좋네. 내가 기꺼이 그 녀석을 적절하고도 빠르게 목매달아 주지.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소위 함께 여행하고 있지?"
케이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소위 어떻다는 거죠? 지금 무슨 암시를 하시는 겁니까, 재판관님?"
"청춘남녀가 함께 돌아다니면서 육욕적이고 방탕한 죄악에 흠뻑 빠져 있는 꼴을 좌시할 수 없네. 그럼, 안 될 말이지.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돼. 하지만 내 기꺼이 그 잘못을 쉽게 교정해주지. 내가 부여된 권한에 의거하여 두 사람을 남편과 아내로 선언하노라. 신의 축복이 두 사람의 영혼에 있기를."
빈 판사는 의사봉을 땅땅 두드린 다음에 덧붙였다.
"결혼 비용으로 5달러를 내게. 집행관에게 지불하도록."
케이시가 말을 잃은 순간, 데미안이 소리를 쳤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하지만 채 항변이 끝나기도 전에 로이 빈이 핏발선 눈으로 데미안을 노려봤다.
"합당한 절차와 도덕적인 의무에 대하여 나에게 항변할 생각은 아니겠지, 젊은이?"
판사는 준엄하게 다그쳤다.
케이시는 주머니를 뒤져 찾아낸 5달러를 집행관에게 건네고 데미안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금 당장 여기에서 데려가지 않으면 두 사람이 나란히 감방으로 돌아가게 될 참이었다.
술집 밖으로 나오자, 케이시는 팔을 놨다. 데미안이 길을 재촉하지 않는데다, 그녀 자신도 너무 황당한 일을 당한 나머지 서두르지 않으면 기차를 놓칠 판이었다.
"지금 그 선언이 진짜는 아니지?"
데미안이 물었다.
"안타깝게도, 빈 판사가 우리 두 사람을 한 몸으로 엮어준 선언은 진짜가 틀림없어요."
"좋아, 하지만 합법적인 건 아니겠지?"
"나도 그렇기를 바래요. 하지만 정말 유감스럽게도 그는 합법적으로 임명된 판사예요."
"케이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데미안이 좌절감에 어린 어조로 말했다.
"보통은 신랑과 신부가 몇 마디 말을 해야 한다구. 결혼에 동의한다는 뜻을 밝혀야 해!"
케이시는 그의 냉소적인 태도를 나무랄 수 없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에요."그리고 빈이 마음먹고 멋대로 권력을 휘두를 때는 더더욱 아니지요."저 야비한 늙은 멍청이가 비열해지기로 결심한 마당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여기에서는."
"너는 왜 이렇게 침착한 거야?"
"우리가 화를 낼 일이 없으니까요."
"억지 결혼을 당했는데도 화를 낼 일이 없다? 너, 참 대단하구나.
"물론 그렇지는 않아요."하지만 우리는 결혼한 만큼 쉽게 결혼 무효선언을 받을 수 있어요. 다른 판사에게 사정을 설명하기만 하면 된다구요. 판사를 찾는 일은 커루더스를 찾는 쪽보다 훨씬 쉬워요. 그러니까 다른 일이 터지기 전에 이 랭트리를 벗어나는 게 급선무예요, 알았어요?"
데미안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케이시 의견에 동의했다. 그들은 말을 집어타고 출발 경적을 알리는 기차에 가까스로 올랐다. 하지만 빈 판사의 집행관은 별 어려움 없이 사람의 뒤를 따라와 기차를 세우더니, 케이시의 총을 되돌려줬다. 그녀는 무기도 없이 반쯤 벌거벗은 몸으로 다녔으면서도 그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집행관은 또한 결혼 서류를 포함한 판결문을 가져와서 서명을 요구했다.
케이시는 고집을 피웠다.
"우리가 서명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런 경우에는 두 사람을 감방으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케이시는 권총을 총집에 넣었다. 이제 남은 선택은 딱 두 가지였다. 순순히 서류에 서명하거나, 아니면 집행관을 기차 밖으로 걷어차거나!
케이시의 마음이 후자 쪽으로 기울었을 때,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케이시, 이 사태를 바로잡을 방법이 있으니까 그냥 서명을 하자."
데미안 말이 옳았다. 그녀는 서류에 ‘케이시 스미스’라고 서명했고 그 뒤를 이어 데미안이 ‘데미안 존스’라고 서명했다.
기차가 지옥을 빠져 나갈 즈음, 두 사람은 최소한 웃을 거리를 찾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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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적이라 해도 데미안과의 결혼은 케이시의 마음을 야금야금 좀먹었다. 케이시 생각에는 좋은 면도 있었다. 그러나 데미안은 결혼이 싫기만 한지, 기차가 서는 곳마다 내려서 판사가 있는지의 여부를 제일 먼저 물었다.
케이시라고 해서, 특별하고 신성해야 할 의식이 교회도 아닌 법원에서 강제로 몇 초만에 이루어진데다, 식을 마치고 합방도 치르지 않았다는 현실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런데 몇 가지 어리석은 이유에서 생각은 그 ‘합방’ 부분을 맴돌았다. 직면한 현실은 엄연히 존재했다. 즉, 두 사람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
케이시가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했던가?"아니다. 술에 찌든 판사가 일을 그렇게 만들어놨다. 하지만 그건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 사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생생하게 부각되었다. 소위 ‘법적인 허락’을 받았다는 면죄부는 전보다 더 강렬하게 데미안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샌더슨이라는 읍에서 케이시의 간이 떨어질 뻔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 일은 마음속에서 한동안 결혼 생각을 지워줄 만큼 충격적이었다. 또다시 아버지를 본 것이다!"사실 아버지의 얼굴이 아니라 여인숙으로 들어서는 남자의 뒷모습만 목격했다. 그러므로 그는 챈도스가 좋아하는 옷차림을 한 다른 사내일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말을 타고 포트워스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그렇게 빨리 뒤따라왔을 가능성도 희박했다. 혹시 같은 기차를 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가축 수송칸에는 말이 여러 마리 실렸지만, 챈도스의 말은 없었다. 만일 있었더라면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오후에 그들은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일 년 전, 서든 퍼시픽 선로에서 북쪽으로 이틀 거리에 있는, 옛날 무역로 근방에 새로운 읍이 들어섰다는 내용이었다. 그 "컬더스"라는 읍은 발전 속도가 매우 빠른 관계로 조만간 철로가 들어설 예정이고, 이미 자체 학교와 세 개의 교회당, 그리고 의회와 읍장까지 갖춘 곳이었다.
"읍장"이라는 말에 케이시와 데미안은 기차 여행을 포기하고 그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또한 읍 이름 자체가 커루더스와 비슷하다는 유사성이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한 케이시는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데미안의 방으로 몰래 들어가서 그를 침대 밖으로 끌어냈다. 데미안은 불평불만을 늘어놨다.
"케이시, 나는 너와 달리 우리의 <결혼>에서 혜택을 하나도 보지 못했어." 케이시는 그 말을 무시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고 느린 걸음을 유지했기 때문에 데미안의 또 다른 불평이 잡음 없이 깨끗하게 귀에 드려왔다.
"우리의 이 일시적인 <결혼>은 나에게 아무 혜택도 없어."
데미안이 너무 씁쓰름하게 말했으므로 케이시는 당장 반박했다.
"그럼 난 무슨 혜택을 입었다는 거죠?"
"너는 유부녀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구나. 너희 아버지는 어떤 경우에도 내 허락 없이 너를 끌고 갈 수 없어."그걸 모르겠니?"남편의 권리는 부모의 권리보다 우선한다구."
케이시는 싱긋 웃었다.
"참으로 훌륭한 지적이군요. 하지만 우리 결혼이 진짜가 아닌 마당에 그 우선권 운운하는 말은 우리 아버지에게 씨도 먹히지 않을 거예요. 아, 하지만 아버지는 가짜 결혼이라는 걸 모르시겠지요?"
"네가 말하지 않는 이상은 당연히 모르시지."
"맞아요. 하지만 난 그런 허튼 실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그러니까 몇 시간 잠을 덜 잤다고 투덜거리는 짓 좀 그만 할래요?"대신 오늘 저녁에 일찌감치 캠프를 치면 되잖아요."
하지만 데미안은 불평을 멈추지 않았고, 케이시도 그가 입을 다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 저기압이로구나, 하고 내버려두었다.
그들은 정말 일찌감치 물 맑은 냇가에 캠프를 쳤다.
케이시는 안전을 생각해 모닥불을 피우지 말자고 할 참이었다. 간단하게 요기할 음식도 충분한데다 날씨마저 따뜻했다. 하지만 데미안이 너무 비협조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아예 그런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냇물에 물고기가 있었다. 생선구이라, 생각만 해도 침이 고였다.
데미안이 말을 돌보러간 동안 케이시는 나뭇가지를 깎아 작살을 만들었다. 무릎 깊이의 시냇물로 들어가 작살을 던진 결과 한 마리를 잡았다. 그때, 데미안이 나타났다.
"그보다 훨씬 빠르고 쉬운 방법이 있어."
데미안이 강둑에서 소리쳤다.
케이시는 물고기에 정신을 집중한 터라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 근방에 그물을 만들 만한 재료가 없던걸요."뭐, 당신이 그 멋진 셔츠 한 장을 기부한다면 모르지만요."
"나는 먼지를 씻어내는 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야. 넌 보고도 모르겠니?"
케이시가 눈을 깜빡거렸다.
"봐요? 뭘?" 시선이 데미안에게 향했다. 겉옷을 벗는 중이었다.
"기다려요."내가 저녁감으로 물고기를 다 잡을 때까지 기다리란 말이에요."
"몸이 너무 더러워서 기다릴 수 없어."
"당신 때문에 물고기들이 놀라서 다 도망간다구요!"
케이시가 소리를 질렀다.
"물결 일으키지 않을게."
그가 셔츠를 벗으면서 대답했다.
"당신은 미쳤어!"
"난 몸이 더러운 거야."
그렇게 야비하고 고집스런 말은 듣다듣다 처음이었다. 하지만 케이시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집을 피울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 마음대로 해요."하지만 오늘밤에 생선구이를 못 먹는 쪽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 될걸요."
데미안이 옷을 벗는 마당에 물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케이시는 그냥 등을 돌리고 서서 물고기를 잡는 데 열중했다.
몇 초 후에 데미안이 물 속으로 들어왔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그가 맨몸으로 있다는 사실은 케이시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뒤에서 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렸다. 물 한 방울 튀기지 않고. 하지만 물결을 일으키느냐의 여부는 더 이상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눈은 물고기를 향하고 있었지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형체는 물고기가 아니었다.
케이시는 살그머니 더 깊은 쪽으로 향했다. 물은 훨씬 차가웠지만 몸이 점점 뜨거워졌기 때문에 그 냉기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 바로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지금 도망가는 거니, 케이시?"
데미안이 소리 없이 케이시 뒤까지 접근했다. 그는 물속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가슴과 양팔에서 또르르 흘러내린 물방울이 햇살에 반사되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렸다. 이제 그의 상체가 드러났다. 케이시는 데미안의 남성미에 넋이 나갔다. 상상보다 훨씬 근육질이었고 팔은 굵었으며, 체모로 뒤덮인 가슴은 탄탄했고 가는 허리와 대조적으로 우람하기 그지없었다.
케이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니 데미안의 질문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아니면 너도 목욕을 하기로 결심하고 더 깊은 곳으로 온 거야?"
여전히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케이시의 시각은 별 이상 없이 데미안을 또렷하게 봤고, 감각은 너무 멀쩡하게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가락을 느꼈다. 심지어 데미안 손에서 목덜미로 흘러내린 차가운 물방울의 감촉까지 느끼고 진저리를 쳤다. 그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아직 조리 있게 말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너는 도움이 필요하겠구나."
판초가 몸에서 벗겨졌다. 케이시는 어렴풋이 그 옷이 공중을 붕 날아가 강둑에 떨어지는 광경을 봤다. 총이 뒤를 따라 판초 위에 툭 떨어졌다. 무기가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자, 케이시는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지금 무슨 짓을...?"
그 말이 케이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사실 나머지 말도 했지만, 물 속에 자맥질한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데미안이 그녀를 물속으로 끌어들였다. 아니, 물속으로 잡아 처넣었다.
케이시는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삼킨 물을 내뱉으며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데미안을 노려봤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착 달라붙어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데미안은 통쾌하다는 듯 껄껄 웃는 게 아닌가! 케이시는 손바닥으로 물 표면을 쳐서 그에게 물벼락을 입혔다. 데미안은 가슴에 닿는 차가움에 숨을 들이키더니, 다시 케이시 쪽으로 다가왔다.
케이시는 "으악" 소리를 치며 허둥지둥 강둑 쪽으로 도망쳤지만, 데미안이 텀벙거리고 물속에서 쓱 나와 온몸으로 덮쳤다. 케이시가 다시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눈을 비빌 즈음, 데미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리가 물속으로 쓱 딸려 들어갔다.
남자 형제들과 물놀이를 했던 적도 오래 전이라 물싸움을 어떻게 하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배운 재주는 평생 간다고 했던가? 한 20여 분 후에 데미안이 휴전을 요청했다. 케이시는 웃느라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동부의 속물과 <재미>를 보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케이시가 엉금엉금 기어 강둑으로 올라간 반면, 데미안은 여전히 물속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케이시는 웃느라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몇 초가 흐른 다음에야 그녀는 데미안이 왜 웃는지 이유를 알아차렸다.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온몸이 비쳤던 것이다. 데미안처럼 나체나 다름없었다.
얼굴을 물들인 홍조는 오래 가지 못했다. 데미안의 눈빛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파리할 만큼 부드러운 회색 눈동자가 지금은 격렬한 감정을 알리듯 훨씬 짙고 난폭한 색으로 변했다. 그는 휘적휘적 걸어서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설마 물 밖으로 나오지는 않겠지? 설마 그럴 리야, 설마... 하지만 데미안은 정말 물 밖으로 나왔고 케이시는 너무 늦게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렸다.
데미안의 나체는 케이시가 무덤까지 지니고 가도 될 만큼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오만한 조각가가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고 완벽하게 빚어낸 작품 같았다. 케이시는 몸 둘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데미안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케이시는 벅찬 기대감으로 숨을 멈췄지만 차마 눈을 들 수 없었다. 이성은 어서 일어나서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명령했지만 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데미안의 두 손이 얼굴을 감싸 쥐더니, 그를 향하게 했다.
통제를 벗어난 불길이 데미안의 눈 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석양이 던지는 황금빛 광채 속에서 케이시는 흘린 듯 그의 강렬한 시선을 응시했다.
"더 이상은 안 돼, 케이시."
데미안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안 돼요?"
"나에게 우리 결혼이 가짜라고 말하는 거.
"하지만 진짜가 아니에요."
"지금 당장은 진짜야, 진짜라구."
데미안은 다른 대답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입술이 더 이상의 말을 막았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불길? 가당치도 않았다. 차라리 그 키스에는 화산 폭발이란 표현이 적절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케이시의 정열도 데미안 못지않게 달아올랐다.
바로 이것이 그 비열한 판사가 두 사람을 묶어줬던 이래로 케이시가 생각해왔던 바였기에 온 마음을 다해 데미안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 당장, 바로 이 순간, 그들의 결혼을 진짜였다. 케이시는 남편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감정을 무시하고 싸우는 데 진절머리가 났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무시하고 싶지도, 무시할 수 도 없었다.
사나운 태풍에 휘말린 케이시는 무릎걸음으로 데미안에게 다가가 목을 껴안고 열렬한 키스를 되돌렸다. 데미안은 두 팔로 그녀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으며, 흥분에 사로잡혀 그녀의 입술을 더욱 세게 빨았다. 정열적인 세계로 초대, 얼마나 기다리던 세계인가.
케이시는 키스에 완전히 몰입했던지라 셔츠를 벗기는 손길을 의식하지 못했다. 데미안은 다음 장애물로 등장한 케이시의 실크 캐미솔에 약간 놀랐다. 여성스러운 실크와 레이스투성이의 속옷을 예상치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옷들이 겉옷과 현저한 대조를 이뤘기 때문이다.
케이시는 그가 판초를 바닥에 깔고 자신을 그 위에 눕히는 데도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옆에 누워 온몸을 탐색하는 감촉마저 모를 리는 없었다. 데미안의 애무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목을 거쳐 민감한 가슴에 한참 머문 후에야, 데미안의 거친 손길은 예상치 못한 소유욕과 대담함을 드러내면서 복부 쪽으로 내려갔다.
이어진 움직임은 케이시의 제한된 경험이 처리할 수 없는 정열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고개를 숙여 꼿꼿이 고개를 쳐든 케이시의 한쪽 젖가슴으로 입을 가져갔다. 그녀의 입에서 어쩔 수 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를 더 가까이 껴안으려고 노력했지만 데미안이 응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케이시의 애타는 몸짓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미칠 정도로 몰아간 감각에 기름을 붓듯 그녀의 가슴을 마음껏 고문했다. 마침내 데미안의 뜨거운 입술이 다른 쪽 가슴으로 옮겨갔다. 케이시는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복부에 머무르던 손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아래로 여행을 계속했다. 양다리 사이의 촉촉한 곳으로..., 케이시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기쁨과 환희가 온몸에서 분출하고 눈앞에 불꽃이 튀겼다. 하복부에서 시작된 감각이 회오리바람이 되어 온 신경 끝까지 휩쓰는 가운데, 환희가 고동치고 노곤한 나른함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그녀를 짓누르는 데미안의 체중이 케이시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케이시는 눈을 뜨고 그의 다정한 미소를 봤다. 그녀도 미소를 되돌리는 수밖에. 케이시는 육체적인 접촉과 상관없는 친밀감을 느꼈다. 근사하고 생생한 이 감정!"그래, 지금은 아무 걱정도 하지 않을 테야.
데미안은 다시 키스하며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훨씬 크고 뜨거운 침입자가 영토를 침범하는 순간, 케이시는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무언가가 몸 안에서 휩쓸려 나감을 느꼈다. 짧은 아픔, 케이시는 깜짝 놀라 다시 눈을 떴다. 그 강렬함이 데미안의 몸으로 다시 전달되었다.
케이시는 이 경이로운 감각에 숨을 잊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데미안이 동참을 부르는 율동이 다시 반복되었을 때, 케이시는 그의 일부를 꽉 죄고 숨을 헐떡이며 기쁨의 포로가 되어 만족을 추구했다.
나중에 데미안은 그녀를 가슴에 안고 이마에 입술을 댄 채 한 손으로 케이시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천상의 만족감에 젖어들었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었지만 데미안의 배가 꼬르륵 하고 아우성을 쳤다. 케이시는 미소를 지었다. 결국 그 한 마리의 물고기는 두 사람 입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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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데미안은 재미있었다. 케이시의 전설적인 무심함이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다음날, 데미안을 볼 때마다 그녀의 뺨이 확연하게 붉어졌다. 하지만 슬슬 걱정이 됐다.
케이시는 그들이 나눈 사랑에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후회하지 않기를 바랐다. 사실 데미안 자신도 후회해야 마땅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의 성적인 습관은 대단히 단순했다. 여자와 한두 시간 보낸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서 혼자 잠자리에 들었다. 상대를 다시 만나느냐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케이시는 하룻밤을 통째로 나누고 아침 커피까지 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경험에 당면한 데미안으로서는 케이시의 부끄러워하는 태도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느끼는 성적인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오늘 아침에 사랑을 나눴어야 했는데. 사실, 그것이 그가 바라던 바였다. 하지만 케이시가 그 효율적인 방안, "길을 떠납시다" 식의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아무시도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케이시는 처녀였다. 처녀들이란 첫 경험의 후유증으로 약간의 육체적인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여러 날 후에야 다음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다행히 케이시가 어젯밤 그리 아픔을 경험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고통을 줄 만한 짓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시로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참는 고통이야말로 엄청난 시련이었다. 그가 가능한 한 빨리 판사를 찾으려 했던 이유는 꼭 결혼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임시 결혼이 케이시와 사랑을 나눌 권리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혜택을 외면하고 고상한 행동을 하려 노력해야 하다니, 그 짓이야말로 정말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젯밤 그는 고상함 따위는 집어치우고 그와 정반대 되는 짓을 저질렀다. 충동을 참아야 하는 이성적인 이유를 끊임없이 만들어낸 끝에 결국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건 변명에 불과 했다. 그는 케이시에게 손을 대지 말았어야 했다. 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케이시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기쁨을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너무 정열적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신비로울 만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의 또 다른 면모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들은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은 채, 그날 오후에 목적지인 컬더스 에 도착했다. 이미 들었던 대로, 그 읍은 작지만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 공동체였다. 겨우 두 개에 불과한 주요한 블록은 잘 정비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사업이 활성화되어 이주민의 정착을 도모했다. 다른 읍에 비교해서 훨씬 평화롭게 보였다. 거리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과 애완동물들은 평화를 교란하는 총싸움이 드물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게다가 선술집과 교회도 몇 군데 눈에 띄었다.
도착하자마자, 케이시는 여인숙의 위치를 물었다. 데미안이 최고 시설의 호텔에만 묵는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여인숙을 찾았다는 건, 그의 따귀를 대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따로 묶자는 암시를 주고 있구나. 즉, 케이시는 더 이상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리라.
그 어떤 웅변도 그보다 더 확실하게 케이시의 의도를 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데미안은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령 케이시가 의향을 물었더라면, 망설이지 않고 그녀와 같은 방에 드는 쪽을 선택했으리라. 하지만 케이시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했다. 아, 그녀는 어젯밤 일을 후회하고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하는구나.
둘은 말을 마구간에 맡긴 뒤 일단 헤어졌지만, 점찍어뒀던 식당에서 나중에 함께 식사를 하며 헨리가 이곳에 머물 경우를 대비하여 작전을 짜기로 했다. 데미안은 호텔에 들어서다가 우연찮게도 카운터에 놓인 신문을 봤다. 그런데, 그 일면에 헨리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커루더스가 몇 주일 후로 예정된 읍장 선거에 출마했다는 내용이었다.
재빨리 기사를 읽은 데미안은 다른 후보가 중상모략을 당했고 그 혐의가 헨리에게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기사의 논조는 정치적인 측면에 맞춰졌기 때문에 커루더스가 이 읍에 얼마나 거주했고, 어디 출신인가 등등의 개인사에 대한 부분이 쏙 빠져 있었다. 심지어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하긴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이렇게 작은 지역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데미안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당장 헨리를 찾아내서 요절을 낼까, 아니면 우선 케이시를 찾아가서 오랫동안 고대해온 대결에 그녀를 동석시킬까?"당장 이 일을 끝장내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케이시의 헌신적인 노력을 생각해, 그녀에게 관람석 특별석을 배정하고 싶었다.
케이시가 투숙한 여인숙을 찾기란 대단히 쉬웠다. 학교 여선생이 경영하는, 깔끔하고 가정적인 분위기의 여인숙이었다. 그 젊은 요조숙녀는 케이시가 여자라는 사실을 사전에 알았더라면 절대로 데미안을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미처 몰랐던 까닭에 그를 이층 외쪽 방으로 안내했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데미안은 초조하게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여기 있어, 케이시?"
"웬일이세요?"
안에서 즉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문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옷을 걸치고 있어?"
"아니오. 막 목욕을 하려던 참이에요."
뜨거운 욕조 안에 몸을 담근 케이시의 영상은 당연히 데미안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화장실 문이 잠겨 있을까? 그 점을 확인하려는 찰나, 안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직 거기에 있어요?"
"그래.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아, 내가 왜 이럴까?
"여기에 온 이유를 아직 말하지 않았잖아요?"
"헨리가 이곳에 있어."
"알아요."
데미안은 그 대답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 대답이 무슨 뜻이지?"
"나도 신문 봤어요. 일면에 헨리의 사진이 실린 그 신문 말이에요."
데미안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그런데 나에게 달려오지 않고 한가하게 목욕을 하고 있단 말이야?"
"데미안, 그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내가 목욕을 마칠 때까지 그는 여전히 이곳에 있을 거예요."
"그래도 난 기다릴 수 없어."
짜증이 섞인 낮은 신음과 함께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실망스럽게도 케이시는 판초와 권총집 벨트를 제외한 모든 옷을 다 걸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서두르죠?"
"내가 헨리를 찾기 위해 바친 그 오랜 시간을 잘 아는 네가..., 아니 이제 우린 부부니까 당신이라고 해야겠군. 어쨌든 그런 사정을 잘 아는 당신이 그런 질문을 꼭 해야겠어?"
케이시의 호전적인 분위기가 사그라졌다. 그녀는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오, 질문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녀는 권총집 벨트를 허리에 차며 덧붙였다.
"지금 이 시간에 커루더스가 있을 법한 장소를 사람들에게 물어봤어요?"
"그렇게 질색하지 마세요. 술집은 합법적인 사업에 적당한 장소예요."꼭 술 마시고 도박이나 하고..., 아무튼, 그런 곳만은 아니라구요."
케이시가 뜸을 들이며 헛기침을 했다.
"당신도 그곳에서 벌어지는 그 외의 것을 다 알잖아요."
데미안은 다 알았지만 괜히 지분거렸다.
"그 외의 뭘?"
케이시는 고집스럽게, 술집의 성적인 측면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 외에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데미안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을 살짝 훔쳤다. 그리고 너무 놀라 말문이 막힌 그녀에게 말했다.
"이런 종류의 좋은 시간?"
케이시는 코웃음을 치고 판초를 낚아챘지만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자, 일을 마무리하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