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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사랑(The Reluctant Husband)

불멸의 사랑(The Reluctant Husband)

Lynne Graham

 

1

매트 핀레이는 경악한 프랭키의 얼굴을 보더니 위로의 미소를 지었다.

"사르데냐 여행이 당신에게 상당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옛 사랑과 부딪쳐서 그 사랑의 기억들을 모조리 흘려보낼 수."

"산티노와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어!" 프랭키가 이를 갈며 투덜거렸다. 몸 전체가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긴장했다.

매트는 얼굴을 찡그리며 정신을 집중하는 척했다.

"내 생각으론그 녀석을 만났을 때 넌 어린 가슴을 마차바퀴처럼 들썩거리면서 두 다리를 후들거렸던 것 같은데!"

프랭키는 회식에서 마신 술로 인해 느슨해진 혀가 원망스러웠다. 매트가 언젠가는 적당한 기회를 노려 이런 얘기를 하리란 걸 예측하고 있어야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5년을 사르데냐에서 보냈어.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해서 날 비난할 순 없어."

"48시간 이내에 그 섬에서 나와 이탈리아로 갈 수 있어. 네 휴가계획을 변경할 필요는 없어. 너 말고 누가 가냐? 댄은 아직 프랑스에 있고 마티의 아내는 산달이 임박했잖아."

프랭키는 한 번 더 애원하고 싶었지만 공평성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상당한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이 여행사는 외국여행을 주 업무로 삼고 있는데 지난 몇 달 동안 계속 부진했다.

경쟁사에게 고개들을 더 빼앗긴다면, 다가오는 휴가기간에 고전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키가 크고 날씬한 프랭키는 아름다운 몸매와 맑은 녹색 눈동자, 붉은 빛의 강렬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넌 그곳 출신이잖아."매트가 만족스럽게 말했다. "그게 바로 우리의 강점이지."

"난 영국인이야." 프랭키가 덤덤하게 말했다.

"코스타 스메랄다에 여섯 개의 빌라가 있어. 그곳을 점검한 뒤 주인과 계약하고 나서 이탈리아로 가면 돼. 누가 알겠어? 휴가에서 돌아올 즈음엔 네가 나와 함께 낭만적인 저녁을 먹을 준비가 돼 있을지."

매트가 느리고 유혹적인 미소를 던졌다.

그의 눈길에 불편해진 프랭키는 몸이 경직되며 얼굴을 붉혔다. 그들은 친구였다. 그러나 최근에 매트가 좀 더 은밀한 관계로 접근하면서 그들의 우정을 깨뜨리려고 하고 있다. 이미 그에게 관심 없다고 말했는데도 포기하지 않아서 점점 더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함께 일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기 때문에 그 거북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녀는 억지로 히죽 웃고 나서 문으로 걸어갔다.

"가끔은 네 오빠가 정말 미워."프랭키는 카운터에서 웃고 있는 금발머리에게 말했다.

리는 그저 웃었다.

"사르데냐 때문에?"

"알고 있었어?" 프랭키는 과잉반응인 줄 알고 있었지만 배신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섬에 다시 발을 내딛는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친구들은 아무도 모른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으니까.

"왜 내게 말해 주지 않았어?"

"매트에게서 직접 듣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넌 조만간 이탈리아에 갈 예정이었잖아."

리는 명랑하게 말하고 나서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프랭키는 긴 다리를 움직여 리가 결혼한 후부터 매트와 함께 쓰는 넓은 아파트로 올라갔다. 그녀는 핀레이 남매보다 3년 빨리 이사해 와서 살고 있었다. 이미 만기가 된 신탁의 이익금으로 그녀는 열여덟 살에 사업에 뛰어들었다. 여행사는 같은 건물 1층에 자리잡고 있다. 여행으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그녀에게 여행사의 위치는 매우 편리했다. 매트가 이런 식으로 나오기 전엔 그랬지. 프랭키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최근에는 빈정대고 추군거리는 그의 태도를 직원들도 눈치 채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수군거림이 프랭키를 화나게 했다. 이미 오래 전에 그녀는 부주의한 말이 인생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로 인해 그녀의 인생은 한 번 파괴된 적이 있었다.

프랭키는 몸을 떨며 그 기억을 떨쳐 버렸다. 매트는 날 일종의 도전으로 보는 걸까? 그녀는 그가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다. 남자들은 왜 화가 날 정도로 심술궂을까?

매트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인 아담한 금발머리를 다시 쫓아다닐 날이 언제 올까?

그날이 빠르면 빠를수록 그녀는 행복해질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집에 전화했다.

"엄마, 계획보다 일찍 떠나게 됐어요." 그녀는 사과하듯 말했다.

"프랭키엄마라고 부르기에 넌 너무 크다고 생각지 않니?"델라가 꾸짖듯이 내뱉었다.

"미안." 프랭키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나 친숙한 아픔이 그녀를 관통했다. 델라는 한동안 딸을 못 볼 거라는 소식을 귓전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먼저 들러야 할 데가 생겨서."

"한 시간 뒤에 미용사와 약속이 있어."델라가 참지 못하고 프랭키의 말을 가로막았다.

"다음 달쯤에 내가 전화하마."

프랭키는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항상 이런 식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오래된 핑계거리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는 사회활동으로 매우 바쁘셔. 그리고 별로 감정을 표현하시는 분도 아니잖아. 결정적으로 내가 사르데냐에 있었을 때 관계가 많이 소원해진 거야. 그러나 마음 한구석엔 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어도 어머니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프랭키는 한순간이나마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프랭키의 눈동자는 끓어오는 분노로 번들거렸다.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지금 이 시간이면 이탈리아 제노바로 가는 페리에 타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 뭘 하고 있단 말인가? 끔찍한 소리를 내는 작은 피아트 안에 구부정하게 앉아, 달팽이처럼 좁고, 가파른 사르데냐의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 빌라의 주인인 시뇨르 메그라스가 자신의 빌라가 있는 곳으로 그녀를 만나러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랭키는 호텔 주인과 협상하기 위해 산으로 둘러싸인 섬의 중앙부로 깊숙이 여행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드라이브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프랭키는 얼굴을 찌푸렸다. 사르데냐에 온 걸 환영해, 프랭키. 버림받은 어린 신부의 고향에 온 걸

언뜻 떠오르는 추억을 억누르며 그녀는 뭐가 잘못된 건지 알았다. 그래, 이 산들 때문이야.

잊을 수 없는 5년 동안 그녀를 가둬 놓았던 그 산과 똑같은 산들. 추억 때문인지 그녀의 피부가 차가워졌다. 이미 지나간 과거일 뿐이었다. 스물한 살 성인이 된 지금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책임감 있게 꾸려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추억은 끈질기게 그녀를 따라다녔다. 열한 살 때 겪은 문화적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런던에서 문화적인 생활을 하다가 다음 순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농촌에서 살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 가족은 그녀를 원하지도 않았다. 다시는 런던에 가거나 어머니를 볼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 공포감.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 외로움, 두려움, 끔찍한 소외감. 그 모든 감정들이 아직도 프랭키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고 결코 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마르코 카파렐리라는 잘생긴 사진작가의 아이를 임신한 건 열여덟 살 모델 시절이었다. 임신으로 인한 결혼은 폭풍과도 같았다. 부모님은 프랭키가 여덟살 때 결국 별거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계속 연락을 하긴 했지만 불규칙적이었다. 거의 잊어버릴 만하면 나타나곤 했다. 한두 번 다시 결혼의 굴레 속으로 돌아오겠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만나 마침내 이혼을 결심했을 때 프랭키는 몹시 분노했다.

델라의 이방인 같은 남편도 그녀의 계획에 불같이 화를 냈고 그들은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어느 날 마르코는 프랭키를 학교에서 데리고 나와 휴가를 갈 거라고 말했다. 집으로 짐을 챙기러 갈 필요가 없다면서 작은 가방을 보여 주며 아버지는 웃었다. 그 속에 필요한 모든 거이 들어 있으니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엄마도 알아요?"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버지는 더욱 근사한 비밀을 갖게 해주었다. 아빠와 엄마가 함께 살게 될 거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물론 그녀에겐 다소 놀랍겠지만, 그녀가 학교에 있는 동안 아빠와 엄마가 결정한 일이라면서.

<어쨌든 의붓아버지가 생기지 않게 돼서 기쁘지 않니? 주말에 엄마가 사르데냐로 와서 우리와 합류할 테니 멋진 휴가가 될 거야>라고.

씁쓸한 기억을 되씹으며 프랭키는 잠깐 차를 세우고 푯말을 보았다. <라 로카> 마을의 언덕으로 액셀레이터를 밟으면서 올라가다가 한 마리의 양과 뒤따르는 돼지 두 마리를 피하려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머리칼이 쭈뼛 섰다. 먼지를 뒤집어쓴 차에 놀라 한 무리의 닭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마을은 너무나 가난했고, 그 가난의 체험은 프랭키를 진저리치게 만들었다. 그녀는 문화적인 생활에서 더 멀리 떨어진 다른 마을을 생각했다. 특별히 헛간들이라고 불렀던 마을, 시엔타. 그녀의 친할아버지께서 태어나신 곳이다. 시엔타는 마치 다른 세상의 지도에 나오는 곳 같았다.

고요함이 그녀의 신경에 거슬렸다. 호텔이 어디지? 거기서 밤을 보내기로 한 것이 옳은 결정이기를 바랐다.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문이 열린 카페가 보였다. 어둑한 실내를 들여다 본 그녀는 코를 찡그렸다. 바 뒤에 있는 땅딸막한 남자가 그녀를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라 로카 호텔로 가는 길 좀 가르쳐 주세요." 그녀가 그 이탈리아인에게 물었다.

"프란체스카?"

그녀의 팔에 소름이 돋았고, 모든 신경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 이름은 결코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목소리부드럽고 꿀이 녹아내리는 듯한 매끄러운 억양. 그것은 아직도 프랭키에게 경찰차의 사이렌 같은 작용을 했다. 귀가 윙윙거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는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호리호리한 몸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그 목소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산티노 비탈레는 한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 뒤에서 유연하게 그의 길고 늘씬한 몸을 곧추세우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혀는 마른 입 천장에 달라붙었고 피부는 축축해져 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녀는 진지하게 자신의 정신 상태와 눈을 의심했다.

정교하게 재단된 은회색의 양복 위에 하얀 레인 코트를 무심히 걸친 산티노는 어두운 별과 초라한 벽지들 때문에 외계인처럼 보였다.

"같이 한 잔 하겠어?"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어붙은 모습을 휙 훑어보았다.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 끝으로 따스한 기운이 맴돌았다.

"이런, 손이 차군."

산티노는 한숨을 내쉬며 코트를 벗어 그녀의 굳은 어깨에 걸쳤다.

그의 출현이 놀란 프랭키는 뻣뻣하게 서서 아무런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에게서 눈을 뗄 수도 없었다. 190센티미터의 그는 마치 탑처럼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타락한 천사 같은 고전적인 외모에 활기차고 육감적인 카리스마가 섞여 있었다. 수치스런 기억이 밀려들어 그녀의 두 뺨을 붉게 물들였다. 그토록 잊으려고 했던 지난 5년 동안의 모든 기억이 다시 되살아났다.

"여기가 라 로카 호텔이지." 산티노가 중얼거렸다.

"여기가요?" 완전히 바보가 된 느낌에 프랭키는 어쩔 줄 몰랐다.

"시뇨르 메그라스를 만나러 온 건가?"

"그걸 어떻게 알죠?" 프랭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당신은 여기서 뭘 하는 거죠?"

"좀 앉는 게 어때?"

"앉으라고요?"그녀는 마치 그가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쳐다보며 따라 말했다.

"그래, 시뇨르 메그라스는 이곳에 없어."산티토는 의자를 내밀었다. 카페 주인이 얼른 달려와 재떨이를 비웠다.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이 뚫고 들어와 벽에 붙은 너덜너덜한 포스터와 낡은 대리석 바닥을 비추었다. 본능은 그녀에게 달아나라고 다그쳤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젠 내가 두려운 건가?"

프랭키는 죽은 듯이 멈춰 섰다. 긴장된 신경세포들이 비명을 질러대고 혼란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한순간 그녀는 산티노의 모든 말 한마디에 맹목적으로 순종했던 십대로 돌아간 듯했다. 그의 우정을 잃어버릴까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그가 말하는 거라면 뭐든지 다 했다. 단지 그녀는 그가 불러일으키는 강한 감정들을 두려워했다.

지금 그녀가 그를 싫어하는 것이 그의 잘못일까? 그녀는 자신이 공정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뒤돌아본 프랭키는 어둠 속에서 빛을 본 듯 열기와 에너지가 그녀를 녹여 주었다. 울컥 두려움이 솟아났지만 가까스로 누르며 참담함을 삭였다. 그녀는 여전히 몸이 굳은 채로 되돌아와서 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그녀가 노골적으로 물었다.

"시뇨르 메그라스는 오지 않을 거야. 그 빌라는 내 것이니까."

침묵이 흐른 후에, 프랭키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그를 응시했다.

"믿을 수 없어요."

산티노의 두툼하고 육감적인 입술이 비장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이야. 내가 당신을 이곳으로 오도록 만들었지. 다시 보고 싶었거든."

"왜죠?" 머리가 빙빙 돌았다.

"당신은 내 아내야. 그 사실을 깨우쳐 주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아직도 당신은 내 아내야."

산티노가 강조하며 덧붙였다.

떨리는 웃음이 그녀의 건조한 입가에 맺혔다. "우리 결혼은 내가 영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무효가 됐어요."

그녀는 턱을 기울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서류를 받지 못했나보죠?"

산티노는 다시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당신은 가지고 있나?"

그녀의 이마엔 깊은 주름이 잡혔고 입가는 팽팽해졌다.

"어머니가 가지고 있어요. 내가 미성년자였을 때부터 법률상의 절차는 모두 어머니가 맡고 있죠."

"어머니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던가?"

"이것 봐요, 그 결혼은 무효 처리가 됐어요!"

"그렇게 믿고 싶겠지."산티노가 재미있다는 듯 느릿하게 말했다.

화가 나서 그녀의 양 뺨이 확 붉어졌다. 그의 끈덕짐이 그녀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집에 돌아가면, 그 사실을 확인시켜 드리죠. 우린 더 이상 결혼한 상태가 아니라구요."

"하지만 그때 우린 한 번도성인으로서의 의식을 치르지 않았잖아." 산티노가 말했다.

갑자기 산티노의 마지막 모습이 천연색 영화를 보듯이 잔인하게 떠올라 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지고 배가 뒤틀렸다. 명백히 성인으로서의 정열을 불태우며 다른 여자와 함께 있던 산티노의 모습이. 아름다운 금발머리의 엷은 분홍빛 손톱이 그의 풍성한 검은 머리를 애무하고, 그의 유연하고 강한 몸에 녹아들 듯 요염한 여자의 몸이 그에게 찰싹 달라붙은 채 두 사람은 키스하고 있었다. 그런 산티노를 흘끗 본 것만으로도 프랭키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졌다. 그 이후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고, 그들에게 미래 따윈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섬을 떠남으로써 두 사람은 자유로워졌다.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헤어진 게 몹시 후회스러웠지. 당신이 많이 상심했잖아."

그녀의 마음을 그가 알고 있었다니. 프랭키는 당황스러워 몸이 굳어졌다. 자기 방어를 하듯 그녀는 탁자로 눈길을 떨구었다.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침착할 수 있게 잘 단련된 그녀인데도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복잡했다.

사실 산티노와 함께 있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프랭키는 단호하게 그 기억들을 몰아냈다.

"이렇게 빨리 이런 말을 꺼낸 게 실수일지 모르지만, 왠지 그 일이 우리 사이를 벽처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아서." 산티노가 아주 조용하게 말했다.

다시 자신감을 되찾은 프랭키는 단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당신이 뭔가 오해한 것 같군요. 그땐 이미 나의 성자가 진흙 발을 하고 있다는 걸 발견한 후였는걸요." 그녀는 어깨를 약간 들썩였다.

"성장하는 과정의 일부분이죠, .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부질없다는 걸 깨닫게 되죠. 그럼, 그 빌라들이 정말로 당신 소유라면, 사업 얘기를 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정말로 오랫동안 떠나 있었어."산티노가 카페 주인에게 손짓했다.

"여기선 사업을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아. 함께 술을 마시면서 얘기한 후, 당신을 우리 집으로 초대해서 가능하다면 저녁을 먹고 난 후에 사업 얘기를 하지."

프랭키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저녁 먹으러 당신 집으로 가다니, , 말도 안 되는."

"아직 초대하지 않았어." 산티노가 부드럽게 지적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이를 앙 다물었다. 그때 와인이 도착했다.

"이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에요!"

"내 기억으론, 당신은 예상치 못한 일을 무척 좋아했지." 산티노는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묻으며 그녀의 끓어오르는 분노와 좌절감을 모른 척했다.

"그땐 너무 어렸죠."

"그때 당신은 자신이 여자라고 고집을 피웠지." 산티노는 재미있다는 그녀에게 말했다.

프랭키는 목까지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화제를 바꾸려고 애썼다.

"지금은 여행 사업을 하는 건가요?"

"이것저것." 밤의 장막이 내려앉은 듯한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산티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표정이 풍부한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결혼까지 했던 남자가 무슨 사업을 하는지도 모르다니 우스운 일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거라곤 그의 숙부가 마을의 목사였다는 것과 그가 캐글리어리의 은행에서 일했다는 것, 그리고 그 건물의 아파트에서 살았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산티노가 지금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몰라도 그는 아주 부자인 것 같았다. 그의 양복은 값비싸 보였다. 그러나 그는 라틴계 남자다. 라틴 남자는 멋있게 보이는 것을 좋아하고 옷에다 많은 돈을 투자한다. 그런데도 프랭키는 산티노가 정장한 모습을 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주말에 집에 올 때도 청바지와 캐쥬얼한 셔츠 차림이었다. 지금은 아주 달라 보였다. 세련되고 유연한 대도시의 실업계 거물같아 보여서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산티노가 수수께끼 같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을 만날 필요가 있었어."

"만우절 휴가기간에요?" 프랭키가 잇새로 내뱉었다.

"당신은 휴가 중이니 우리 집으로 초대하겠어."산티노가 덤덤하게 말했다.

프랭키가 동그란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코웃음을 쳤다.

"지금 농담하는 거죠, 그렇죠?"

산티노가 그녀에게 와인 잔을 내밀었다.

"내가 왜 그러겠어?"

"난 곧바로 이탈리아로 떠날 거예요." 그가 초대를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 사업 얘길 못하면 시간이 없어요."

"그 빌라를 망치고 싶지 않아." 산티노가 아주 건조하게 말했다.

"그 빌라를 망치는 일이 바로 제 일이죠."

믿을 수 없는 감각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졌다. 산티노가 여기에그녀와 함께 있다.

현실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너무나 환상적인 기분이었다. 왜 산티노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그녀가 보고 싶어진 걸까? 단순한 호기심? 그건 분명히 그녀가 런던에서 일한다는 걸 알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빌라를 핀레이 여행사에 제공한다고 했을까? 그런데 그녀가 일하는 곳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바짝 마른 목도 축일 겸 잔을 기울이며 속눈썹 사이로 그를 훔쳐보았다. 그는 매우 멋지고 침착하다.

그녀는 척추가 욱신거렸고 알 수 없는 감각이 밀려왔다. 그녀는 기가 막히게 균형잡힌 그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넓은 이마, 가늘고 오만하게 솟은 코, 무디고 높은 광대뼈, 그리고 육감적인 곡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 그녀의 시선은 그의 굵고 검은 머리 위를 배회했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잘 다듬어졌고 윤기가 났다. 황금색 불꽃이 일렁거리는 검은 눈동자, 그리고 아직까지 그녀를 어지럽게 만드는 감각이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산티노가 마주 쳐다보았다. 그가 타인처럼 느껴졌다. 태어날 때부터 권위의 가면을 쓴 불안하고 위협적인 타인. 그는 예전에 그녀가 알던 산티노 비탈레가 아니었다. 아니면 지금은 맹목적으로 숭배하지 않고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어서 그런 걸까? 숭배? 그녀는 마음이 오그라들었지만 한때 그녀를 고무시켰던 산티노에 대한 감정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그 단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프란체스카."

"더 이상 아무도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아요."프랭키는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을 떨쳐 버리려는 듯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이 우연한 만남은 악몽이다. 열여설 살 때 그녀는 산티노를 괴로울 정도로 깊이 사랑했다.

산티노의 생각과 행동, 말하는 모든 것에 자신을 던졌다. 자신은 이미 성숙한 여자라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던 그때의 심정을 어느 누가 알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그녀가 그에게는 애처롭게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갈망했지만 그는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녀의 친밀한 접근을 피하기만 하는 그의 행동에 그녀는 절망했다. 밤에 방문을 잠근 건 프랭키가 아니라도리어 산티노였다. 그런 기억 때문에 그녀는 마음이 아주 불편했다.

"이봐." 잘 그을린 그의 집게손가락이 꽉 움켜진 그녀의 손가락 마디 사이를 짓궂게 쓰다듬었다.

"제발 프란체스카." 그가 부드럽게 재촉했다.

그것은 뜨거운 철사에 찔리는 느낌이었다. 그의 감각적인 손길에 살갗이 타오르는 듯 하자 그녀는 손을 홱 빼버렸다. 그녀의 모든 피부 세포가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자각으로 흔들렸다. 오 하느님, 안돼요.

육체가 제멋대로 응답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녀가 전율하며 속눈썹을 들어올린 순간 번쩍 빛을 발하는 그의 눈과 마주쳤다. 숨이 탁 막혔다. 심장이 그녀의 늑골을 맹렬하게 두드렸다.

"원하는 게 뭐죠?" 그녀가 굳어진 채 다그쳤다.

"3주 동안." 산티노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우리가 함께 지내기를 원해."

"난 당신과 한 순간도 함께 지내지 않을 거예요!" 프랭키가 벌떡 일어나며, 커다란 초록색 눈에 불신을 가득 담은 채 그를 노려보았다.

산티노는 표정이 풍부한 입술에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섰다.

길다란 손가락이 그녀를 자신 있게 일으켜 그의 팔 안에 가두었다. 너무 놀란 프랭키는 그대로 선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성적으로 다가서려는 그를 신뢰할 수 없었다.

"긴장을 풀어." 산티노가 느릿하게 말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주었다.

그의 손길에 그녀의 심장은 거칠게 쿵쾅거렸으며, 목이 조여 들었다. 갑자기 폐에서 산소를 달라고 아우성쳤다. 그가 검은 머리를 숙여 희미하게 번쩍이는 검은 눈과 마주치게 했다. 또 다른 생소한 흥분을 담은 전율이 그녀를 관통했다. 머리가 울렁거리고 무릎이 후들거렸다.

그녀가 숨을 돌리기도 전에 산티노의 입술이 정확하게 그녀에게 다가와, 입술을 능숙하게 벌리고 굶주린 그의 혀를 부드러운 입 속으로 밀어넣어 탐험을 시작했다.

그의 키스는 프랭키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충격적이고 에로틱한 느낌이었다. 두 다리가 뜨거워졌고, 뭔가 산산이 무서지는 듯한 느낌은 그녀를 떨며 신음하게 만들었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그의 단단하고 남성적인 몸에 자신의 몸을 밀어붙였고, 그는 강한 힘으로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잠시 후 그는 오만한 검은 머리를 들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연해진 그녀를 반짝이는 눈빛으로 훑어본 다음, 천천히 침착하게 떼어놓았다.

"그 동안 내내 궁금했지이젠 알겠어." 그가 만족감을 담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랭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겁에 질린 초록색 눈을 그에게 고정시키고 재빨리 뒷걸음질을 쳤다.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그녀가 헐떡거리면서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이 굴욕적인 상황에서 한시바삐 빠져나가기 위해 어스름이 깔린 밖으로 걸어나왔다. 주차장으로 가려는 순간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져 눈만 껌벅거렸다. 주차장이 비어 있었다. 그녀의 차가 없어졌다!

"당신 덕분에 차를 도둑맞았어요!" 격분한 프랭키는 바에서 느릿느릿 걸어나오는 산티노에게 날카롭게 외쳤다.

그가 몸을 유연하게 곧추세우고 그녀에게 여유롭게 다가왔다.

"내가 훔쳤지."

그녀는 점점 더 화가 났다.

"당신이 뭘 했다구요?" 프랭키가 극도의 참을성을 갖고 분명하게 물었다.

"내가 당신 차의 실종에 책임이 있다구."그의 차갑고 자신감에 찬 목소리는 불타는 그녀의 분노에 석유를 끼얹는 영향을 끼쳤다.

"어쨌든 내 차를 고스란히 돌려받은 후에 당신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주겠어요!"그녀가 쏘듯이 말하며, 양손을 꼭 쥐었다.

"무슨 게임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이걸 장난으로 생각하겠지만."

"조금도 장난으로 여기지 않아." 산티노가 부드럽게 말해다. 격노한 프랭키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난 지금 당장 내 차를 돌려받기를 원해요!"

"카파렐리의 저주!" 산티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내 생각에 그 소문은 과장된 것 같아. 당신 할아버지께서 당신을 결혼시키려고 그렇게 필사적이셨던 것이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군."

그랬다. 할아버지는 그녀를 억지로라도 산티노에게 시집보내려고 필사적이었다.

"당신은 돼지만도 못해!"그녀는 소리를 지르고 나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산티노의 동작이 그녀보다 빨랐다. 그가 옆으로 비켜섰을 때 프랭키는 잘못해서 어깨에 걸치고 있던 코트 자락을 밟았다. 그녀는 균형을 잃었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면서 머리를 부딪혔다. 고통그리고 어둠이 밀려왔고,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2

프랭키가 얼굴을 찌푸리며 정신을 차리자 두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다음이었다. 무거운 눈썹을 들어 올리자 익숙한 자신의 침실이 아닌 완전히 낯선 방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그녀 생애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돌벽돌벽이라구? 훌륭한 고딕 양식의 외양과 어울리는 육중하고 고풍스런 가구가 보였다. 궁전의 창문과 비슷한 좁은 여닫이 창문을 보고 그녀의 입은 떡 벌어졌다. 이 곳은 거대한 방이었고 웅장한 크기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단절된 기억의 파편들이 돌아왔다. 그녀는 수녀를 기억해 냈다. 수녀? 그녀는 무섭도록 아팠던 게 기억났고, 지금도 아팠다. 참을 수 없는 두통 때문에 잠들기만을 바랐지만 깨어나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기억도 났다. 모든 기억의 조각들은 혼란스러웠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에게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어렴풋한 기억이 있었다. 산티노!

그녀의 시선이 한 구석에서 움직임이 느껴져서 머리를 홱 돌렸다.

한 남자가 침대로 인해 생긴 그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것이 갑자기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두 손을 매트리스 위로 받치고 몸을 일으켜 앉으니 다양한 색깔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긴장된 얼굴을 감쌌다.

"당신!" 그녀가 비난하듯 소리쳤다.

"의사를 부를게." 산티노가 앞으로 다가와 침대 옆에 달린 태피스트리로 만들어진 벨 끈을 잡아당겼다.

"괜한 짓 하지 말아요!" 프랭키가 이를 악물고 소리치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어지러워 몸이 흔들거렸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어지러운 머리를 눌렀다. 강한 두 팔이 그녀를 감싸안고 베개 위로 다시 눕혀 주었다.

"내게서 손 떼요!" 프랭키는 연약함을 보이지 않으려고 내뱉었다.

"입 좀 다물어." 산티노가 몸을 숙이며 준엄하게 말했다.

"그렇게 성질을 부리니까 지금 침대에 있는 거잖아. 죽을 수도 있었어!"

감히 그런 식으로 말하는 그에게 분개한 프랭키는 녹색 눈을 번득이며 숨을 헐떡였다.

"당신의 말도 안 되는 장난이 날 이렇게 만든 거예요!"

"상처가 더 심각할 수도 있었다구." 산티노가 책망하듯 말했다.

"내가 넘어지는 당신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더 심한 두통과 뇌진탕으로 고통받고 있을 거야. 벌써 여러 시간이나 혼수상태였단 말야!"

"내가 다친 건 순전히 당신 탓이에요!"

"내 탓이라고?" 산티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따라했다.

"당신이 날 치려고 했잖아!"

"다음번에 잘못 치지 않을 거예요! 도대체 내가 어디에 있는 거죠?" 프랭키가 여전히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집에 가고 싶어요!"

"지금 집에 있는 거잖아. 나와 함께 있으니까." 산티노가 부드럽게 말했다.

"바보가 따로 없군요. 당신은 미친 게 틀림없어요!" 소리를 지르자 또다시 현기증이 몰려왔다.

"내 차를 어떻게 한 거죠?"

"당신에게 더 이상 필요 없어서 회사로 돌려보냈어."

문이 열리고 50대의 키 큰 남자가 들어왔다.

"난 올시니 의사요, 비탈레 부인." 의사는 진료가방을 침대 옆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좀 자고 나니 기분이 어떻습니까?"

"난 비탈레 부인이 아니에요." 프랭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연극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의사가 산티노를 쳐다보았다. 산티노는 빙그레 웃더니 눈썹을 들어 올리며 넓은 어깨를 한 번 들썩거렸다.

"왜 그런 식으로 그를 쳐다보는 거죠?" 프랭키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난 이 남자의 아내가 아니에요, 올시니 의사 선생님.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구요!"

그녀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의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살펴보았다. 프랭키는 의기양양하게 산티노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이미 거대한 옷장에서 뭔가를 꺼내 와서 늙은 의사에게 내밀었다.

"그게 뭐죠? 의사 선생님께 뭘 보여 주는 거예요?" 프랭키가 얼른 물었다.

"우리 결혼사진이야, 내 사랑." 산티노가 짙은 속눈썹 아래로 그녀를 흘끗 쳐다보더니 은으로 된 액자를 침대로 던졌다.

그녀는 사진을 집어 들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구겨진 이불자락을 폈다. 그러다가 흘끗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목이 콱 메었다. 구식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 속의 그녀는 누구라도 눈치챌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짓고 산티노를 숭배하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산티노는 그때 전혀 낭만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가 이를 앙 다문 채 미소 짓고 있는 걸 몰랐다니! 프랭키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더욱 화가 나게도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갑자기 산티노가 증오스러웠다! 굳이 결혼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의 상황이 아무리 어려웠어도, 그녀를 마을에서 데리고 나와 어머니가 있는 런던으로 보낼 순 없었을까? 그녀와 결혼하라는 할아버지의 격노한 요구에 무릎을 꿇지 않고 그 곤경에서 빠져나갈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산티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의사는 가방을 열었다. 산티노를 노려보며 프랭키는 목을 가다듬었다.

"한때 이 남자가 남편이었던 적이 있기 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사실은."

"여보." 산티노가 무섭도록 조용하게 불렀다.

"그가 내 차를 훔쳤어요!" 프랭키가 말을 끝맺었다.

그녀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올시니 의사가 낮게 산티노에게 뭐라고 말했다. 산티노는 고통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한 말 들었어요?" 프랭키의 목소리가 떨렸다.

늙은 의사는 안됐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산티노가 성큼성큼 걸어서 침대로 다가왔다. "프란체스카." 그가 중얼거렸다.

"지금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란 건 알고 있어. 그렇다고 그런 황당한 얘길 지어내다니."

처음으로 프랭키는 산티노의 사악한 유머 감각을 보았다. 그의 육감적인 입술이 용서한다는 뜻의 미소를 지었다.

"진정해, 여보."

"엑스레이 결과는 아무 이상 없소." 올시니는 기분을 북돋아 주듯 그녀에게 말했다.

의사는 그녀를 믿지 않았다. 그녀가 한 말을 한마디도 믿고 있지 않았다!

"엑스레이무슨 엑스레이?"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어젯밤 당신이 정신을 잃고 있을 때 엑스레이를 찍었어." 산티노가 알려 주었다.

"어젯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산티노가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까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해서."

"엑스레이를 어디서 찍은 거예요?" 그녀가 급히 물었다.

"산타 마리아 수녀원의 진료소에서."

내가 지금 수녀원에 있는 건가? 프랭키는 어지럽게 생각했다. 충격과 분노로 몸이 아주 쇠약한 상태였다.

"남편이 이만저만 걱정한 게 아니오." 늙은 의사가 조용하게 말했다.

"좀 더 안정을 취하도록 하세요, 부인."

"난 정신이 온전해요. 아무 문제가 없다구요." 프랭키가 투덜거렸지만 소용없었다.

머리가 쑤시고 어지러웠다. 짧은 검사를 받는 동안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혼수상태인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상한 환경, 사람들의 이상한 행동, 이 모든 것들이 마치 꿈만 같았다. 의사는 방을 나가면서 산티노에게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가길 바란다고 했다.

그렇게 짧은 대화 정도는 그녀의 이탈리아 실력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산티노가 다시 돌아와 침대 옆에 서자 프랭키는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생각을 버렸다. 약간 어색한 손짓으로 그녀는 침대 옆에 놓인 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배가 고픈가?" 산티노가 조용히 물었다.

프랭키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배가 약간 울렁거렸다. 그녀는 깊고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줘요."

산티노는 빛나는 눈동자로 그녀를 관찰하더니 비웃듯 미소 지었다.

"당신에게 남편이 있다는 걸 상기시켜 줄 시간이라고 생각한 거야.."

프랭키는 얼어붙었다.

"마지막으로 말하지만당신은 내 남편이 아니에요!"

"우리의 결혼은 무효 처리가 되지 않았어. 물론 이혼으로 처리된 것도 아니고."산티노가 덤덤하게 내뱉었다.

"우린 아직도 부부야."

"말도 안 돼요!" 프랭키가 되받아쳤다.

"그 결혼은 무효예요!"

"정말 그렇게 믿고 있나?" 산티노의 말에 그녀는 창백해졌다.

"그렇게 믿고 있는 게 아니라." 프랭키가 반박했다.

"그게 사실이에요!"

"그 일을 하도록 고용된 법률회사가 스위트베리 앤 허친스였지?" 그가 물었다.

프랭키는 눈을 깜박거렸다. 딱 한 번 사무 변호사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5년 전에.

"그래요, 그런 이름이었어요. 그리고." 갑자기 그녀가 어조를 높였다.

"우리가 몇 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그런가?" 산티노가 창가로 걸어가더니 그녀 쪽으로 우아하게 돌아섰다.

"만약 우리 결혼이 그렇게 오래 전에 이미 무효가 되었다면, 당신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할 의무가 내겐 없다는데 동의하겠지?"

프랭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렇다면 당신이 사르데냐를 떠난 후부터, 내가 계속 생활비를 지급해 온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겠군."

산티노가 묻는 듯이 차갑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게생활비를 보냈다고요? "프랭키는 당황한 어조로 되물었다.

"당신이?"

"리무진이 라 로카 호텔에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는데 작은 피아트가 나타난 걸 보고 놀랐지, 운전사가 딸린 리무진이 더 적당했을 텐데."산티노가 매끄러운 어조로 말했다.

프랭키가 떨리는 웃음을 내뱉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난 지난 3년 동안 직장에 다녔어요. 내 생활비는 내가 벌고 있죠. 당신에게선 단 한푼도 받은 적이 없어요."

산티노가 햇볕에 그을린 두 손을 자연스럽게 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누군가가 사기를 쳤다는 얘긴데."

프랭키는 당황해서 떨리는 속눈썹 너머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다지 화가 난 것 같아 보이진 않는걸.

그녀는 어지럽게 생각했다.

"사기라고요?" 그녀가 움찔하며 되풀이해 말했다.

"하지만 누가? 그러니까, 돈이 어떻게 지불되었죠?"

"당신의 사무 변호사를 통해서."

"세상에, 완전히 사기꾼이로군요." 프랭키는 중얼거렸다.

갑자기 힘이 빠져서 침대에 몸을 기댔다. 산티노가 몇 년 동안 계속 돈을 보내 줬다고?

비록 한푼도 받진 못했지만, 그 소식이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설혹 그 돈이 전달되었다 하더라도 그의 돈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빚진 게 아무것도 없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가 그녀에게 어떤 의무를 이행했다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수치스러웠다.

"아마도그렇지만 성급한 결론은 내리지 말자구." 산티노가 중얼거렸다.

그는 누군가가 몇 년 동안이나 자신의 돈을 착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상할 정도록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프랭키는 스위트베리 씨의 지저분한 사무실에서 가졌던 만남이 생각났다. 그는 찰스 디킨슨의 소설에나 나올 만한 인물철검 생겼다. 그녀의 결혼이 외국에서 이뤄졌다는 걸 알고 그는 매우 혼란스러운 듯했다.

마치 영국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결혼할 수 있냐는 듯.

"사실." 산티노가 입을 열었다.

"이 사기극은 당신의 사무 변호사보다 더 가까운 누군가의 짓일 수도 있어."

사르데냐에 있는 누군가, 그의 편에 있는 누군가일 거야. 프랭키는 그의 말을 그런 식으로 해석했다. 거대한 안도감이 그녀를 휩쓸고 지나가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말할 수 없이 피곤했지만 이대로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그 돈이 내게 전해졌다 해도, 당신의 돈을 받지 않았을 거예요, 산티노."

산티노가 싱긋 웃자 그녀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당신을 믿어."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범인은 찾아야 할 것 아냐, 안 그래?"

"당연하죠." 프랭키가 열성적으로 동의했다. 그가 그녀의 말을 믿는 것이 내심 기쁘기도 했지만, 그가 말한 상황이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갑작스레 가슴이 무거워졌다. 산티노가 왜 그렇게 그녀를 보려고 했는지 이제 이해가 되었다. 분명히 이 돈에 관한 얘길 하려고 했던 것이다! 여러 해 동안 산티노가 그녀에게 돈을 보냈다고 생각하니 괜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 돈을 마련하는 게 어렵지 않았을까?

"그 탐욕스럽고 부정한 사기꾼을 당신은그 사람을 고소해야 한다고 생각해?"

프랭키가 신음 소리를 냈다.

"왜 그래요? 한 번도 당신이 겁쟁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사기꾼이 누구든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죠. 솔직히, 그가 벌을 받을 때까지 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요. 그 사기꾼이 내 이름을 이용해서 사기를 쳤으니까요. 정말 기분 나빠요!"

"이제 내게 반대하지 않는 건가?"

"글쎄요, 지금 당장은요." 프랭키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산티노가 가장자리가 레이스로 처리된 이불과 베개의 주름을 폈다.

"처음부터 그런 사실을 설명했더라면."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당신이 날 초대하는 이유를 알았을 거잖아요. 그 돈에 관한 얘길 할 필요가 있으니까."

"당신이 그 사기꾼들과 한 패였다고 생각한 게 정말 부끄러워."

"이해해요."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날 다른 방으로 옮기는 게 나을 거예요. 산티노."

"?"

"내 의료보험은 이렇게 사치스런 병실비는 내주지 않을 거예요."

"걱정 마. 당신이 지불하는 일은 없을 테니."

산티노가 놀랄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그녀도 부드럽게 대꾸했다.

"당신이 대신 지불해 주는 것도 맘에 안 들어요."

"잠을 좀 자도록 해, 프란체스카."

졸음이 밀려오는 가운데 그녀는 산티노가 어떻게 수도원 진료소 병실에서 결혼사진을 꺼내 왔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프랭키는 산티노가 아직 그들이 부부라고 믿는 이유를 이제 정확히 알게 되었다.

 

프랭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그녀는 침대를 빠져나왔다. 여전히 조금 어지럽긴 했지만 이제 괜찮았다. 감탄의 눈으로 방에 딸린 욕실을 살펴보면서 그곳이 수도원 병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텔의 제일 좋은 방에 묵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새 칫솔을 집어든 그녀는 또다시 경악했다. 이게 산티노의 방이란 말인가? 날 위해 이 방을 내주었단 말야? 그래서 그 사진이 여기 있었던 건가? 왜 산티노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사진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 가지 이유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입술을 너무나 꼭 깨문 나머지 입술이 얼얼했다. 유부남으로 남아 있음으로써 연인들에게 헛된 기대를 못 하게 한 거야. 그녀는 입맛이 씁쓸했다.

그녀의 가방이 침대 구석에 놓여 있었다. 옷을 입으면서 프랭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산티노의 집이 이 근처라면 왜 호텔에 머무르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이런 방을 빌릴 수 있는 걸까? 만약 여기가 호텔이 아니라면. 산티노의 집이라는 건데

프랭키는 상념을 떨쳐 버리고 녹색 면 바지와 반소매 셔츠를 입고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았다. 얼굴을 찌푸리며 거울을 보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제복을 입은 하녀가 아침식사를 들고 수줍게 방으로 들어섰다.

아침을 먹는 프랭키의 눈이 자꾸만 탁자 위에 놓인 사진 쪽으로 향했다. 마침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진을 엎어놓았다. 어제 산티노는 왜 키스했을까? 성인이 된 내게 호기심이 생겨서? 아니면 5년이나 늦게 날 갖고 놀 생각이 든 걸까? 나의 냉정하고 사무적인 태도가 그의 남성적인 자존심을 자극한 걸까? 아직도 내가 십대처럼 얼굴을 붉히고 매달리길 바라서?

프랭키는 침울한 기분으로 그저 산티노와 거리를 둘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또다시 십대 때와 같은 감정으로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 강렬해서 가눌 수 없었던 갈망 때문에 또다시 괴로워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젊은 산티노가 떠올랐다. 큰 키에 우아한 황금색 피부를 가진 젊은이로, 신화에 나오는 이교도의 신처럼 보였다. 그때 그는 스무 살로 아직 학생이었다.

그가 숙부의 집을 방문하는 동안, 바사리 신부가 그를 그녀의 할아버지 집으로 데려왔다. 마을에서 산티노 이외엔 누구도 영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몇 달 동안 영어라곤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그때 모국어를 듣자 울컥 눈물이 쏟아졌고, 평소보다 감정적인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버지를 찾아 달라고, 아버지가 언제 그녀를 영국으로 데려갈 건지 알아봐 달라고 산티노에게 애원했다.

그는 산책을 가자고 제안했다.

"널 어린애로 대하고 싶지 않아." 산티노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겠어. 바사리 신부님은 이제 여기가 네 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게 네가 더 행복할 거라고 믿고 계셔."

그녀의 충격 받은 얼굴을 살피며 그는 후회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생활이 네게 익숙지 않다는 건 신부님도 이해하셔. 그렇지만 너도 네 아버지가 널 데리러 오지 않으리란 걸 알아야 해."

"신부님을 증오해!" 프랭키가 헐떡거렸다.

"여기 사람들은 모두 다 싫어!"

"하지만 네겐 아버지의 피도 흐르고 있잖아. 그건 네 할아버지의 피도 흐르고 있다는 뜻이지."산티노는 그녀를 절망과 향수병에서 구해 주려고 애썼다.

"지노 할아버지도 그걸 알아본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널 자기 집에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야. 넌 그의 가족이야."

"그들은 내 가족이 아니야!"그녀가 흐느꼈다.

"네 고모가 그 소릴 들으면 몹시 상심하겠는걸. 널 상당히 아끼는 것 같던데."

날카로운 혀를 가진 언니와 성미 급한 오빠에게 맨날 휘둘리는 그녀의 수줍음 많은 고모 테레사가 유일하게 프랭키의 절망을 덜어 주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밤에 프랭키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한 번도 소리친 적이 없었다.

"아버지를 찾도록 노력할게. 그 대신 너도 약속해." 산티노가 준엄하게 말했다.

"무슨 약속?"

"이제 그만 달아나라는 거야. 그건 네 할아버지를 더욱 화나게 할 뿐만 아니라, 네가 가정교육을 잘못 받았다는 걸 확신시켜 줄 뿐이야. 그분은 엄격한 사람이야. 너의 그 불신감이 그분을 더욱 심술궂게 만드는 거라구."

"바사리 신부님이 할아버지를 심술궂다고 말했어?" 프랭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니, 그런게 아냐." 산티노가 약간 얼굴을 붉혔다.

"지노 카파렐리, 네 할아버지는 완고하고 양보하지 않는 사람으로 평판이 나 있어. 넌 그냥 할아버지 앞에선 입을 다물고 맘에 안 들더라도 맘에 드는 척 하는 거야."

"신부님이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라고 시키진 않았을 텐데!"

"정말 똑똑한 열두 살짜리군."산티노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숙부는 매우 독실하신 분이야. 너의 불행에 많은 신경을 쓰시지. 네게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그분에게 복종하라고 말하라고 하셨어."

"하지만 당신을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

"그건 네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난 그냥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어."눈물을 참으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엄마에게로내 친구들, 학교."

"하지만 지금은 사르데냐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해, 프랭키." 산티노가 우울하게 말했다.

힘겹고 긴 몇 달 동안 떼쟁이 아이로 취급받다가 산티노가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 주자 프랭키는 무척 감동을 받았다. 그건 그가 영리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하면 그녀의 호감을 사는지 알고 있었고, 그가 그녀의 편이라는 생각을 심어 주었다. 프랭키는 그가 아버지를 찾아 준다는 말을 믿었다.

아버지가 차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그녀는 깊이 절망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산티노는 그녀 인생의 중심이 되었고, 그는 두 달에 한 번씩 숙부를 방문하곤 했다. 나이 든 숙부의 건강이 악화되고 난 이후엔 더욱 자주 방문했고, 그럴 때마다 산티노는 프랭키를 만나는 시간도 따로 내곤 했다.

그녀는 친가 쪽 가족들과 공통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무런 부담 없이 얘기할 수 있는 산티노가 좋았다. 그는 그녀에게 영어로 쓰여진 책과 신문을 보냈고, 그녀는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짧은 편지들이 그가 없는 시간들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산티노를 사랑하게 되고 그에게 의지하게 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과거의 기억에서 빠져 나오면서 프랭키는 지노 할아버지, 마들레나 그리고 테레사 고모의 기억을 지우려 했다. 할아버지는 지난 5년 동안 그녀가 보내는 편지에 아무런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남편을 저버린 손녀를 이해하지도 용서하지도 않으셨으니까.

친가 어른들은 해가 산티노를 중심으로 뜨고 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셨다. 그들은 손녀의 행동에 화가 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할 것이다.

프랭키는 방을 나왔다. 복도는 아름다운 그림들과 고상한 카펫이 깔려 있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대리석으로 된 둥근 계단이 나타나자 그녀는 탐험해 보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 왜 안 돼? 코스타 스메랄다의 빌라들이 여행사를 위해 만들어진게 아니라면, 그녀는 지금 휴가 중인 거나 마찬가지다. 매트에게 전화를 해야겠어, 그녀는 멍하게 생각했다. 이틀 동안 왜 아무 연락도 안 하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계단을 올라가자 떡갈나무로 된 문이 나왔다. 프랭키는 지붕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커다란 사각형 탑들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밑으로는 절벽이 내려다보여 어지러웠다. 눈을 들자 눈 덮인 아름다운 산의 전경이 보였다.

"이제 완전히 회복한 것 같군."

프랭키는 깜짝 놀랐다. 헉 하고 숨을 들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산티노가 어슬렁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색바랜 청바지가 그의 날씬한 엉덩이와 길고 강한 갈색 목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는 마치 정글의 왕처럼 느릿하고 자신만만하게 걸어왔다.

섹시해, 그녀는 어지럽게 생각했다.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섹시했다. 그가 몇 발짝 앞에 멈춰 서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탑에서 당신을 봤어. 아직도 침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난 기운이 펄펄 넘쳐요." 프랭키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완전히 직업여성이 다 됐군."산티노가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눈으로 그녀의 평범하고 사무적인 옷차림을 훑어보면서 말했다. "옛날에 내 셔츠를 세탁하고 수선하던 당신이 말야."

프랭키는 자꾸만 얼굴이 붉어져서 당혹스러웠다. 산티노에게 반해 어쩔 줄 몰라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산티노는 신화에나 나오는 그리스 신처럼 보였다. 만약 그때 그를 그토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분명 내 호르몬에 어떤 이상이 있는 거였을 거야,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정말로 그랬나요?" 그녀는 덤덤하고 지루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그 셔츠들을 삶는 건 아닌지 항상 궁금했어."

"글쎄요, 그게 귀찮았다면 그렇다고 말하지 그랬어요."

"당신은 대단한 요리사였지."

"당신 부엌 바닥을 닦는 일이나 당신에게 요리해 주는 일이나 아주 지긋지긋했어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자신이 거짓말한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다.

그녀가 그 외에 뭘 배웠겠는가? 열한 살짜리에게 필요한 학교교육이라곤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현모양처가 되는 가정교육만 받았으니까. 끝날 것 같지 않은 집안 일과 남자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법을 배우다가 런던의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갔을 땐 사르데냐에서 배웠던 것들이 마치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인 듯했다.

그녀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의 부엌 바닥을 닦았다. 산티노와 결혼한 게 꿈만 같았고,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6개월의 결혼생활 동안, 그녀는 사르데냐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신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 그만 해요. 옛날 일을 들먹이는 건 이제 그만. 정말 구역질이 나요!"프랭키는 그에게서 눈을 떼며 내쏘았다.

그는 그녀가 피렌체에 있는 대학에서 더 많은 교육을 받길 원했다. 피렌체! 그의 말을 들은 할아버지와 고모들은 넋이 나갔다. 도대체 어떤 남편이 아내를 학교에 보내려는 건가? 아내가 읽을 수 있고, 쓸 줄 알고, 계산할 줄 알면 됐지, 그는 더 이상 뭘 원하는 건가? 하면서. 그리고 프랭키도 다시 낯선 도시로 보내진다는 게 싫었다. 다른 학생들이 그녀의 서툰 이탈리아어를 비웃을지도 모르고, 더 싫었던 건 산티노가 옆에 없다는 것이었다.

순진하게도 프랭키는 산티노에게 같이 피렌체로 갈 거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일 때문에 그곳에 살 수 없기 때문에 가끔 방문할 거라고 대답했다. 그건 물론 별거에 들어가기 위해, 산티노가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결혼의 틀을 조금씩 느슨하게 만들려는 자상한 배려였다.

그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그녀를 보고 싶어할 거라는 말까지 해주면서, 그녀가 교육을 마치고 완전히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면 기쁠 거라고도 말했다. 그녀를 부끄럽게 여기는 듯한 그의 말에 마음이 상한 프랭키는 토라졌다. 그녀는 그 주말 내내 식사도 거절한 채 그가 달래려고 할 때마다 흐느끼곤 했다. 산티노가 어린 신부의 침실에 든 건 그때뿐이었다.

사실, 다른 어떤 침대에서도 산티노는 그녀를 안지 않았다. 프랭키는 뺨이 불타는 듯 했다.

"우린 할 얘기가 많아."산티노가 덤덤하게 말했다.

공기 속에 긴장이 감돌았다. 처음으로 프랭키는 산티노의 차가운 목소리에 초조함이 배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그는 눈에 띌 정도로 차갑고 거리감이 있었다. 이런 분위기의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깨달음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화나게도 만들었다.

"개인적인 거라면 얘기할 게 아무것도 없지만, 그 사기에 관한 얘기라면 뭐, 해야죠!"프랭키는 밝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한번만 더 그 빌라 얘길 들먹인다면 화낼 거야. 그 빌라는 아무것도 아니야!"

산티노가 거부의 손짓을 했다.

"당신을 이곳으로 오게 하기 위한 미끼일 뿐이었어!"

"당신이 내게서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어서 두려워요." 프랭키는 창백한 눈으로 딱딱한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곧 알게 될 거야. 이제 당신의 날개는 잘렸어. 더 이상 자유롭게 날 수 없을 거야."산티노가 차갑게 말했다.

"우린 아직도 부부야."

"왜 자꾸 그렇게 말하는 거죠?" 프랭키가 발끈해서 물었다.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5년 전 당신은 은퇴한 사무 변호사에게 짤막한 편지만 보냈잖아. 어제 그의 아들과 통화했어. 그의 아버지는 당신에게 결혼 분야에 경험이 많은 다른 변호사에게 상담해보라고 충고했다더군. 더 이상의 조처는 취해지지 않았어."그가 건조하게 말을 끝맺었다.

프랭키는 몸을 떨었다. 그녀에 대한 산티노의 참을성에서 어떤 경악스러움이 느껴졌다.

"만약 내가 바보처럼 미처 처리하지 못한 게 있다면, 미안해요. 집에 돌아가는 즉시 시정하겠다고 약속할게요."프랭키는 아직도 그들이 부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몹시 충격을 받았다.

"5년 전엔 결혼 무효 선언에 동의했지." 산티노는 가늘게 뜬 차가운 눈으로 그녀의 긴장된 얼굴을 응시했다.

"그땐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는 게 내 의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게 의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프란체스카난 이미 값을 치른 아내를 지금 원해."

"당신이어떻게 했다고요?" 프랭키가 떨리는 목소리로 앵무새처럼 말했다.

"이제야 내가 지불한 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이란 말이야. 그건 내 권리야."

프랭키는 목 졸린 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의심스러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친 게 아니면 농담하는 거죠? 분명 농담일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산티노가 번득이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자구. 우선, 당신은 날 결혼이란 함정에 빠뜨렸지."

프랭키가 내쏘았다.

"난 그런."

산티노가 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감히 부정하려 하지 마. 당신 할아버지의 질문에 당신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는 걸 분명하게 기억하니까. 난 당신에게 손가락 하나 댄 적 없었는데도 당신의 침묵은 그런 의미였잖아!"

프랭키는 수치심에 목이 메어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를 시엔타로 다시 데려오는 그 끔찍했던 날 밤, 그녀는 산티노에게 무척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그의 차 뒷좌석에 몸을 숨긴 채 그를 이용해서 달아나는 중이었다. 충동적인 행동이긴 했지만, 순전히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산티노의 숙부인 바사리 신부님이 그 주에 돌아가시자, 프랭키는 산티노가 더 이상 마을에 올 이유가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산티노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할아버지를 화나게 하는 마을의 나쁜 소문을 떠벌렸다. 그녀에게 화가 난 할아버지는 더 이상 산티노에게 편지를 쓰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산티노는 연료를 넣으려고 주유소에 잠시 들렸을 때에야 차 안에 숨어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가 그녀에게 마구 화를 냈다. 그녀의 온갖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차 뒷좌석에 밀어넣고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지노 카파렐리의 눈에, 남자와 함께 밤을 지샌 그녀는 이미 용서받지 못할 정도로 평판이 망가진 존재였다. 할아버지는 즉시 산티노에게 그녀와 결혼하라고 요구했다.

"할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알고 계셨어요." 프랭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당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당신이 한 짓 때문에 앞으로 그 집에서의 생활이 지옥 같을 거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지! 그건 내 책임이라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어. 그 대가로 난 뭘 받았지?"

산티노가 비웃들 말했다.

"당신은 침대에서 곰 인형을 안고 자는 신부였어."

프랭키의 두 뺨이 불타는 듯 빨개졌다.

"체크 무늬 스카프를 두른 곰 인형이었지." 산티노가 놀리는 눈으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솔직히 그 인형이 중세의 어떤 정조대보다 효과가 있었어."

격심한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는 이를 앙 다물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은아내를 원한다고 말했어요."

"이미 아내를 갖고 있지. 그 곰 인형도 갖고 있고."산티노가 비웃듯이 말했다.

"내 요구엔 논란의 여지가 없어."

"당신은 내게 어떤 요구도 할 수 없어요!"

"짐은 다 꾸렸어?" 그녀의 놀라 듯한 눈동자를 보며 산티노가 다시 물었다.

", 하지만."

"당신이 더 이상의 휴식이 필요하다면, 우리도 시간을 낭비할 순 없지." 산티노는 떡갈나무 문을 열고 뒤로 물러서서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프랭키의 혀끝이 미끄러져 나와 아랫입술을 적셨다. 그녀는 어째해 볼 수도 없이 계속 그를 응시했다.

"왜 이러는 거죠? 뭐가 어떻게 되는 거예요?"

"프란체스카, 항상 이렇게 느린 거야?" 산티노가 짙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차갑게 비웃었다.

"내겐 거짓말을 할 필요 없어."

"거짓말?" 그가 그녀를 끌어당겨 계단으로 이끌자 프랭키는 말을 더듬었다.

"당신에게 어떤 거짓말도 한 적 없어요!"

"날 만났을 때 당신이 모두 다 털어놨더라면 지금보다 더 이해심을 발휘했을 거야. 하지만 거짓말은 날 더욱 화나게 할 뿐이야." 산티노가 작게 으르렁거렸다.

"오늘 아침에 진실을 알아냈을 때, 난 곧바로 당신을 침대에서 끌어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흔들어 주고 싶었어, 이 사악한 마녀!"

"무슨 얘길 하는 거예요?" 프랭키가 소리쳤다.

"48퍼센트에 달하는 당신의 핀레이 여행사 지분 얘기야."산티노가 얼음같이 차가운 눈으로 비난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치심도 모르는 악녀 같으니라구. 내 돈으로 당신 연인을 재정적인 위기에서 구해 줬더군!"

프랭키는 그의 잔인한 비난에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저 숨만 헐떡일 뿐이었다.

"이제 와서 순순한 처녀인 신부를 기대하진 않았어. 두팔 벌려 날 맞아 줄 거라고도 기대하지 않았고!"

산티노가 불을 토하듯 말했다.

"그런 내 기대가 아주 현실적이라고 믿었지.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탐욕과 거짓으로 똘똘 뭉친 암여우를 만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3

프랭키는 침을 삼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충격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산티노는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는 탐욕과 거짓으로 뭉친 암여우 델라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 세상에, 그는 그녀의 어머니를 모른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도대체 왜 그는 이렇게 심한 비난과 억측을 하는 걸까?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핀레이 여행사의 지분은 보험증권의 수익으로 산 것이다. 프랭키는 당황한 녹색 눈으로 강철같이 차가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당신은 델라보다 더 가증스런 사람이야!"그는 침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그녀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허리에 강한 팔을 두르고 커다란 복도를 돌아 대리석 층계를 향했다. "하느님 맙소사! 난 당신을 돌려보내기 위해 당신 어머니에게 돈을 지불했단 말이야!"

"돈을어머니에게 돈을 줬다고요?" 프랭키는 믿을 수가 없었다.

산티노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숨을 내쉬었다.

"내가 즉시 결혼 무효 소송을 내도록 강력하게 주장했어야 했는데, 당신에게 상처를 줄까 봐."

"내게 상처를 준다고요?" 프랭키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는 그녀를 복도에 내려놓았지만 프랭키는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에게 돈을 지불했다고? 왜 그래야 했지? 식은땀이 흘렀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산티노가 그녀를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넓은 홀로 이끌었다.

"내가 바보였어." 산티노가 이를 갈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당신의 교육과 편안한 생활을 위해서 그 많은 돈을 지불하다니. 그런데 내가 받은 건 뭐지? 여전히 관광객처럼 어설픈 이탈리아 말이나 지껄이는 아내라니! 당신은 정말 가증스러워! 내게 자유를 되돌려 주는 대신 연인과 즐기는 삶을 택하다니!"

" 산티노." 프랭키는 어지러웠다.

"조용히. 지금은 그 작은 입술에서 나오는 거짓말이 적을수록 나을 거야!"

산티노가 잔인하게 말을 잘랐다.

"어제 당신에게 속은 걸 생각하면. <지금은 여행 사업을 하는 건가요?> 하느님, 제게 힘을 주소서! 그때 생각했지. 이거 너무 좋군, 그녀는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있어. 하지만 그것도 의료보험료 운운한 것에 비하면 새 발에 피였어! 그때 이미 당신은 자신이 결혼한 남자가 더럽게 부자라는 걸 알고 있었어! 그 바보 같은 부자가 지난 5년간 해준 것처럼 해줄 거라고 믿었겠지!"

처절한 마지막 말을 끝으로 산티노는 뜰에 주차되어 있는 검은색 도요타 문을 열었다.

그는 말도 못 하고 멍해 있는 그녀를 강한 팔로 껴안아 차 안으로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프랭키는 공기 속의 산소가 증발한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었다. 멍한 눈으로 천천히 손을 들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지 마. 그리고 내가 지불한 것을 갖겠다고 한 건 농담이 아니야!"

산티노는 운전석에 앉으면서 계속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한 번만 더 당신 입에서 항의의 소리가 나오면 핀레이 여행사를, 아니 당신과 당신의 연인을 파멸시켜 버릴 거야! 그러고 나서 당신이 아직도 학생인 것처럼 꾸며서 내게서 울궈낸 그 모든 가짜 영수증을 증거로 당신 어머니를 법정에 세울 거야. 내가 당신과 끝낼 즈음엔, 내 사인이 있는 비탈레 은행 수표만 봐도 구역질이 나게 만들어 주겠어. 당신에게 혐오치료법이 어떤 건지 가르쳐 주지!"

프랭키는 싸우고 싶었지만,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되받아 싸우기가 힘들었다.

그녀에게 집을 만들어 주기 위해 그가 어머니에게 돈을 줬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당신엄마를 실제로 만났나요?" 그가 엔진을 작동시키는 바람에 깜짝 놀라며 그녀가 약하게 물었다.

"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야?" 산티노가 흘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당신 어머니를 만났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 둘이서 5년 동안 내게 신나게 바가지를 씌워 놓고 이제 와서 그 돈이 어디서 온 건지도 모른다고 말하지 마!"

"엄마는 두 번째 남편과 이혼하면서 위자료를 듬뿍 받았어요." 프랭키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정하려고 애쓰는데도 목이 자꾸만 메었다.

"돈은 거기서 생긴 거예요. 그리고 핀레이의 내 지분은."

"당신 어머니는 길 젠슨의 나이트클럽이 파산하자 그를 버렸어. 그는 위자료를 줄 형편이 아니었다구. 당신이 당신 어머니의 집으로 갔을 때 그녀는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어. 당신 어머니의 빚을 갚아 주고 당신에게 지붕을 제공한 건 바로 나였다구!"

"."

플라스틱 서류철이 그녀의 무릎 위로 던져졌다.

"당신 어머니 집이 소유주는 나야. 당신이 그녀와 편안한 생활을 하는 한 장모에게 돈을 보내 주는 데엔 아무 의의가 없었지. 하지만 이젠 정말 화가 나. 당신이 처음부터 이 모든 사기극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게 분명해졌으니까!"

서류철 안에는 두꺼운 법률서류가 들어 있었다. 서류에는 켄싱턴에 있는 어머니의 집 주소와 소유주 난에 산티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갑작스레 배가 뒤틀리며 구역질이 났다.

"최근 임대계약에 관한 문의가 없었더라면, 당신에게 보여 줄 이 서류도 갖고 있지 않았을 거야!"

산티노가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로마의 내 사무실엔 영수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가짜 영수증이! 말해 봐, 내가 지불한 그 비싼 기숙사에 한 번이라도 가보긴 했어?"

"한동안 단과대학에 다니면서 강좌를 좀 듣긴 했어요." 프랭키는 마비된 사람처럼 멍하니 대꾸했다. 그가 말하는 내용에 대한 분노와 경악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승마나 음악, 스키 강좌도 듣지 않았어? 이탈리아어 개인교습도? 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나? 연수여행이나 해외여행도? 종합대학을 한 학기도 다니지 않았다는 건가?"

프랭키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산티노의 말에 의하면 델라가 사기꾼이었다.

그의 쪽 사람이 돈을 가로챈 게 아니었다. 그녀가 딱 한 번 만난 그 사무 변호사보다 더 프랭키와 가까운 사람, 그녀의 어머니였다. 프랭키는 구토가 느껴졌다. 쇼핑하기를 좋아하는 어머니는 사교계를 누비며 쾌락적인 삶을 즐겼다. 결코 일하는 법이 없었다. 이국적인 가구들로 꾸며진 집에서 화려한 디자이너 옷을 입었고, 해외여행도 자주 다녔다. 산티노의 돈으로 그런 생활을 했다니, 프랭키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난 몰랐어요믿어 줘요!" 그녀가 소리쳤다.

"좋아, 그렇다면 당신은 긴장을 풀고 앉아 있어. 내가 당신 어머니를 기금 오용으로 고소할 동안."

프랭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핀레이 여행사에 쏟아부은 돈에 대한 당신 해명도 들어야겠지."

"그건 분명히 당신 돈이 아니에요!" 그녀가 열띠게 항의했다. " 그건 아빠가 엄마와 내 앞으로 든 보험 증권에서 나온 돈이라구요. 내가 아기였을 때."

"못 말리는 노름꾼인 마르코가 보험을 들었다고?" 산티노가 건조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 그에겐 돈이라곤 없었어. 만약 당신 아버지가 보험 같은 것이 있는 줄 알았다면, 당장 현금으로 바꿔서 노름이나 계속했을걸."

프랭키는 정신을 집중시키기가 어려웠다. 그 돈이 보험에서 나온 거라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그때 그녀는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 어머니의 말에 의심을 품을 이유도 없었고,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뜻밖의 횡재에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델라는 그저 그 말만하고 그녀의 예금구좌에 돈을 보냈다. 어떻게 어머니가 딸을 이용해서 돈을 얻어 쓸 수 있을까? 프랭키는 속이 뒤틀렸다.

"나도 처음엔 당신이 사실을 말한다고 믿었어. 당신의 핀레이 지분에 대해 알기 전까지는 당신이 내 배경에 대해 모르고 있다고 믿었지. 내가 지불한 돈으로 교육의 혜택을 즐긴 것 같아 보이지 않아서 내심 화가 났지만, 그래도 그런 것 정도는 참을 수 있었어.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당신 어머니만큼이나 교활한 사기꾼인 당신 때문이야!"

"차를 세워요토할 것 같아요!" 갑작스레 프랭키가 절망적으로 외쳤다.

그녀는 거의 넘어질 듯 급히 차에서 내렸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기운을 차린 그녀는 차로 돌아갔다.

"당신 정말 지쳐 보이는군." 산티노가 으르렁거리며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

"난 또 속임수인 줄 알았지."

프랭키는 그를 쳐다볼 수도 없었다. 뒤틀린 배는 진정되기 시작했지만, 지난 5년간 델라가 얼마나 많은 돈을 빼냈을까 생각하니 속이 메슥거렸다. 조금의 여유만 보여도 밑바닥까지 훑어 낼 어머니인데. 델라의 요구가 자꾸만 엄청나지니까 산티노도 마침내 의심을 하게 된 게 아닐까?

"앉아."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손길로 그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조수석에 앉혔다.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우면 머리를 숙여." 뿌리치는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은 채 그가 준엄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의 이탈리아제 수제화에 초점을 맞추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좀 괜찮아?" 산티노가 덤덤하게 물으며 그녀의 손을 놔주었다.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빛나는 검은 눈을 불안한 듯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연약하게 느끼게 했다. 무의식적으로 홀린 토끼처럼 그를 응시했다. 어머니의 일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내가 어떻게 된 걸까? 도대체 왜 이러지?

산티노는 델라의 집 소유주다. 그녀는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그의 나머지 말도 사실이리라.

그렇다면 핀레이 여행사 지분에 대한 그녀의 권리도 산티노의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은 모두 그녀에게 있다.

만약 결혼 무효 선언을 했다는 어머니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결혼에 대해 생각하거나 얘기하는 것을 그토록 피하지만 않았더라면, 델라는 그렇게 쉽게 프랭키를 속일 수 없었으리라.

이미 5년 전에 결혼이 무효가 되어서 산티노는 자유를 얻고 어머니에게 돈을 보낼 필요가 없었는데.

하지만 뭐, 내가 그에게 도와 달라고 말했나? 모든게 너무 후회스러웠다. 산티노에게선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는데!

"마치 날 소유한 것처럼 말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요." 산티노가 운전하는 동안 그녀가 짧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사람을 돈으로 살 순."

"아니,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사랑이지. 사람을 사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운 일이야."

산티노가 조용히 말했다.

" 그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알기만 하면 쉽지."

프랭키는 몸을 떨며 그의 어두운 옆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래서 내가 뭘 원하는데요?"

"주로 원하는 거?" 산티노가 생각에 잠긴 듯 작은 소리로 물었다.

"사랑받는 거지. 당신은 절망적으로 사랑받길 원했어. 하지만 너무 고집이 세서 자신이 그렇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지."

프랭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그녀의 비꼬는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어제 천사를 만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거야. 당신 주위의 사람들이 당신을 실망시켰을 테니, 나에 대한 신뢰감 역시 잃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도 혹시나 예전에 내가 알던 정직한 소녀였던 당신을 기대했는데. 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걸 미리 생각했어야 했는데."

"어머니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프랭키가 공격적으로 내뱉었다.

"핀레이와 함께 살기 시작한 게 겨우열여덟 살 때부터더군?"

" 그런 정보는 어디서 얻었죠?"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렵지 않았어. 핀레이."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 그의 사업에 그 돈을 쏟아부은 건 그의 애정을 사기 위해서였나?"

프랭키가 얼어붙었다. "어떻게 그런?"

"있을 법한 일이잖아. 거액을 가진 대부분의 십대들은 하고 싶은 일이 백 가지도 더 되지. 하지만 그 백 가지 재미있는 일 중에 투자는 들어 있지 않거든."

프랭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횡재한 돈을 뭔가 안전하게 해두고 싶었다. 산티노와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가 의지한 모든 사람들은 재정적으로 불안정했다. 부모님은 돈 때문에 격렬한 말다툼을 종종하셨고, 어느 날 갑자기 가게 된 할아버지네는 정말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 그래서 그를 샀던 건가."

"아뇨, 그렇지 않아요!" 프랭키가 내쏘았다.

"투자하기 전에 조언까지 받았다구요."

"핀레이의 조언? 다른 곳도 많았을 텐데 하필이면 재정적으로 과도한 확장을 한 여행사에 투자하기로 했다고?"

"내가 받은 배당금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

"그의 침대가 당신만의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지? 당신이 그에게 단 하나뿐인 여자가 아니란 건 알고 있어."

프랭키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화가 났다.

"하긴 그도 내게 단 하나뿐인 남자가 아닐지도 모르죠."

"당신 나이 또래의 여자들은 거의 개방된 관계를 원하던데. 그토록 그를 사랑하는 건가?"

프랭키는 갑자기 두 손을 펴들고 화난 몸짓을 해보였다.

"매트를 사랑하지 않아요. 우린 친구라구요. 그리고 동업자로서."

"그렇다면 왜 함께 살고 있는 거지?"

"매트만큼이나 나도 그 아파트에 살 권리가 있어요. 아니, 당신의 스파이가 그런 얘기도 안 해주던가요? 그 빌딩은 핀레이 여행사 소유라구요!"

"제대로 말해야지그 빌딩은 은행 소유야."

"그래요, 은행이 소유한 지분만큼 당신 거죠!"

"머리가 좋군, 프란체스카. 당신 연인이 왜 갑자기 플라토닉한 친구가 되었는지 이해가 되는군. 하지만 내가 당신 애인 회사에 자금을 보충해 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바보야." 산티노가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돕지 않아도 가라앉을 배니까!"

"좋을 대로 해요. 어차피 당신 돈이니까, 이젠 당신의 회사니까! 하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일로 매트를 괴롭히지 말아요." 프랭키가 말했다.

"여행사는 그 빌라가 필요해요. 시즌 동안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거예요. 우린 지금 정말로 자금이 필요하거든요."

산티노가 차갑게 웃었다.

"정말 놀라운 사람이군, 당신. 내게 바가지를 씌워 놓고 이젠 도와주길 원하다니?"

" 그렇지 않아요. 난 솔직히 돈에 관해선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리고 그게 내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그녀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내 뒤에서 당신이 델라와 바보 같은 거래를 한 거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잘못됐다고 어떻게 날 비난할 수 있는 거죠?"

"하느님 맙소사! 배가 가라앉으면 생쥐가 먼저 도망간다더니." 산티노가 비웃듯 중얼거렸다.

"여자들보고 한 소리 같군. 걱정 마, 나도 꽤 공정한 사람이거든. 델라도 오늘 자신의 탐욕에 대한 보상을 받을 테니까."

프랭키는 긴장했다.

"무슨 뜻이죠?"

"오늘 그 집에서 나가라는 통고를 받을 거야."

프랭키는 경악한 눈으로 그를 살펴보았다. 산티노는 느긋하게 차를 세우더니 차에서 내렸다.

"엄마에게 그럴 순 없어요!"

"그러면 안 되는 이유를 하나라도 말해 봐."

프랭키는 먼지 나는 도로를 바라보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충격 때문인지 또다시 어지러웠다.

산티노가 수수께끼 같은 눈빛으로 우울하게 그녀를 흘끗 쳐다보더니, 뒷좌석에서 바구니와 깔개를 꺼냈다.

"당연히 말 못 하지."

"그런 게 아니에요. 어떻게 당신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는지믿을 수가 없어요!" 프랭키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다면 전에 나의 이런 면을 못 봤다는 거지. 당신과 있을 때 난 언제나 명랑했어. 하지만 그것도 이젠 옛날 일이야." 산티노의 눈동자가 햇빛 아래서 얼음처럼 차갑게 번득였다.

"사업에 있어서 난 용서가 없어. 프란체스카. 당신과 당신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사업의 범주 안에 들어서 안됐군, 그래."

그녀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이 사람이 정말 산티노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덩치 큰 남자의 무자비하고 무감정한 눈에서 그녀가 기억하는 따스하고 재미있고 인내심이 많은 산티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그가 든 바구니로 눈을 돌렸다.

"그걸로 뭘 하려고요?"

"소풍." 산티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가 그대로 닫혔다. 그가 차를 세우고 바깥으로 나간 이유를 생각지도 않았다.

"?" 그녀가 불안하게 물었다.

"잠깐만요우리 엄마에게 퇴거 명령을 내린 주제에, 내가 당신과 소풍을 즐길 거라고 생각해요?"

"그 퇴거 명령이 내 식욕을 자극하는걸." 산티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나서 총총히 걸어가 버렸다.

너무 놀란 프랭키는 그저 멍하니 잔디 위로 걸어 내려가는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길은 빽빽이 들어선 나무숲으로 이어졌다. 순식간에 그의 검은 머리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프랭키는 이를 갈며 자존심을 버리고 그를 따라갔다. 작은 벽돌집이 무너져 내린 곳을 지나 숲으로 들어가자 오래된 나무 그늘 아래 펼쳐진 깔개와 바구니가 보였다.

산티노는 햇빛이 내리쬐는 언덕 정상에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가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산티노." 그녀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

"저 아래가 라 로카야." 그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우리 할머니는 어제 우리가 만났던 술집에서 태어나셨지. 그 시대에도 호텔이라고 불렀어. 증조할아버지니 결코 채워지지 않는 야망을 가지신 분이셨지."

프랭키는 얼굴을 찌푸렸다.

"."

"조용히 하고 내 말을 들어."번득이는 눈동자가 그녀를 쳐다보았고, 그의 육감적인 입술이 딱딱해졌다.

"여기서 다른 뭐가 보이지?"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고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저 폐가에서 태어나셨어." 그가 말했다.

"열한 명의 형제 중 여섯 명만이 살아남았지. 할아버진 내가 여덟 살 때 이곳에 데려와서 비탈레 가족의 뿌리가 시작된 곳이라고 말했어. 보잘 것 없는 시작이지만, 난 아주 자랑스러워."

"대충 알겠어요." 프랭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니, 당신은 몰라!" 산티노가 으르렁거리며 내뱉더니 성큼 걸어가 버렸다.

프랭키는 정말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짧은 순간에 너무 많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긴장해서 그런지 관자놀이가 쑤셨다. 그러나 고통 받는 사람은 그녀 혼자일 뿐, 산티노는 깔개에 앉아 한가롭게 와인을 따고 있었다.

"지금쯤 그녀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겠죠엄마 말이에요." 제대로 생각할 수 없는 프랭키는 아무렇게나 말했다. "지난 일을 변명하자는 게 아니라, 엄마는 쉽게."

"지금까지는 쉬웠지."

프랭키는 얼굴을 붉혔다. "날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엄만 최고의 모델이 되었을 거예요. 아빠가 날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 버렸고, 결국 길과 결혼한 거예요. 길은."

"그녀의 사치 때문에 파산했지."

프랭키의 몸이 뻣뻣해졌다. " 그런 게 아니에요."

"물론 당신에게 사실을 말할 리 없지. 헛수고 하지 마, 프랭키."건조한 어조로 말한 산티노가 벌떡 일어섰다.

"당신 어머니는 사악한 영혼의 소유자야. 그녀를 엄격한 법으로 꽁꽁 묶어서 혼내 줄 거야. 아무리 그녀의 불행했던 상황을 말해 봤자 내겐 소용없어."

"우리 둘 다를 고소할 작정인가요?"

"정말로 내가 아내를 법정에 세울 것 같아? 하지만 당신 어머니는." 산티노는 동그래진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난 그녀를 벌하기에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있어."

"하지만 나도 그 일에 똑같이 잘못이 있다면, 그건 공평치 않잖아요!" 프랭키가 항의했다. 어머니가 법정에 서서 죄인 취급을 받을 걸 생각하니 기분이 몹시 착잡했다.

"당신도 연루되었다고 말하는 건가, 처음부터?" 산티노가 조용히 물었다.

"내가 받은 인상으론 당신 어머니는 당신에게 아주 적은 돈을 준 것 같은데."

프랭키는 가슴이 두근거려 숨쉬기가 힘들었다.

"처음부터 엄마가 뭘 하는 건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어요."엄마를 향한 산티노의 분노가 자신에게로 향해진다면 조금이나마 엄마의 잘못을 덜어 줄 수 있으리란 생각에 프랭키는 또박또박 말했다.

산티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눈가의 표정이 사라졌다.

"지금 말을 번복하는 건가?"

"당신 돈을 쓴다는 게 나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캐글리어리에서 여자와 함께 있는 당신을 본 후에 당신을 증오하게 되었어요!" 프랭키는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내가 믿고 있던 게내가 이렇게 맘이 약해졌나?" 산티노가 가늘게 뜬 눈으로 우울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그의 입술이 자조하듯 뒤틀렸다.

"이렇게 낭만적이 되다니지난 5년간 성장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 당신만은 아니었던 것 같군."

프랭키는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제발 엄마에게 그러지 말아요." 그녀가 애원하듯 속삭였다.

"품위 있게 다른 집으로 이사갈 시간을 줘요."

"그 대가로 내가 받는 건 뭐지?"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오후의 열기가 거미줄처럼 그들을 휘감았다. 옷 아래로 땀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녹색 눈으로 그를 도전적으로 쳐다보았다.

"당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산티노의 육감적인 입술이 뒤틀렸다.

"내 침대에 있는 당신을 원해."

"그럴 수가." 프랭키가 불안정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진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당신이 원하는 게 그것이라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모든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에게서 바라는 게 그거 아닌가?"

"난 아름답지 않아요."

산티노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강렬한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차가운 손을 들어 그녀의 땋은 머리를 풀었다.

"당신은 머리를 푼 게 더 좋아."

그는 참을성 있게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풀었고, 프랭키는 몸을 떨며 거의 숨도 쉬지 않고 서 있었다. 그의 갈색 손가락이 그녀의 뺨과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그녀의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아주 아름답고 섹시해." 산티노가 그녀를 끌어당기며 허스키하게 말했다.

순간적으로 긴장한 그녀의 코에 익숙한 그의 향취가 느껴졌다. 가슴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부풀어올랐고, 젖꼭지가 부드러운 면 셔츠를 밀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은 텅 비고 그녀는 그저 강렬하게 불타오르는 그의 눈동자에 사로잡혔다.

"게다가 갑자기 놀라울 정도로 유순해지고자신에겐 델라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솔직해져, 프란체스카. 당신에겐 열정이 있어. 항상 그랬지." 산티노가 놀리는 어조로 말하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지금 당신은 마지못해 꾸민 게 아니라 정말로 흥분해 있잖아!"

충격을 받은 프랭키는 그에게서 멀어지며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나약한 육체가 그녀를 배반했다. 한순간이나마 자제할 수 없는 열망으로 그를 원했다. 그건 과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한때 그녀가 느꼈던 감정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저 본능적인 갈망일 뿐이다.

산티노는 몸을 숙여 바구니에서 유리잔 두 개를 꺼내 그녀에게 하나를 건네주었다.

"불평하는 게 아냐, 알겠지만." 그가 매끄럽게 중얼거렸다.

"난 희생양에겐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않아. 변한 당신에게도 계속 매력을 느낄 것 같지 않지만."

그녀는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달아올랐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분노가 몰려왔다. 프랭키는 벌떡 일어섰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죠?"

"3주면 괜찮을 거라고 믿어." 검은 속눈썹에 싸인 눈으로 산티노가 차갑게 따라 주는 와인을 받는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기간 동안 함께 지내자고 말하는 거예요?"

"이번엔 곰인형이 혼자 자야겠군." 산티노가 느긋하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프랭키는 내뱉듯이 말했지만 그의 눈을 쳐다볼 순 없었다.

"3주 후, 우린 별거에 들어가고 이혼하는 거야. 델라도 3주 후에 그 집에서 나오는 거지. 아주 너그러운 제안이잖아."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프랭키에겐 너그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끔찍할 정도로 수치스럽고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카페에서 다시 만난 산티노는 거의 낯선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런 인상도 언뜻 보이는 산티노의 옛모습 때문에 금방 사라졌다. 그런데 지금, 바로 지금 그는 또다시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선택은 당신이 해."

"선택할 거나 있나요?"

만약 그녀가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는 어머니를 고소할 것이다.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든, 어머니를 사기꾼으로 법정에 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동의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녀가 긴장된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비극적으로 말하지 마."

산티노는 건조한 어조로 말하고 나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너무 빠른 이탈리아어로 말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통화를 끝낸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퇴거 명령은 보류될 거야."

떨리는 손으로 와인을 마시며 프랭키는 안도감을 느꼈다.

 

4

단호한 손이 프랭키의 어깨를 흔들었고 그녀는 눈을 떴다. 태양이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떠날 시간이야." 산티노가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어느새 오후가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건 빈 와인 잔을 내려놓던 기억이었다. 두 시간 동안이나 자다니. 바지 주름을 어색하게 편 후 프랭키는 헝클어진 머리를 빗었다.

"왜 깨우지 않았어요?" 그녀가 졸린 눈으로 물었다.

"아직도 몸이 안 좋으니까,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서."

산티노가 깔개를 집어 들고 접었다. 소풍 바구니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었다.

"왜 날 이곳에 데려온 거죠?" 프랭키가 호기심이 발동해서 물었다.

"그건 아마도, 당신이 이 섬에 버리고 간 가족을 기억해 낼지도 모른다는 바조 같은 생각을 해서지."

그의 말에 프랭키는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뭐라고요?"

"지노, 마들레나, 그리고 테레사." 산티노가 신랄하게 말했다.

"당신이 묻지 않았지만, 당신 할아버지와 고모들은 아직도 살아 계셔. 건강하시지."

산티노는 몸을 돌려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의 신랄한 말에 화가 나 얼굴이 붉어진 프랭키는 그를 뒤쫓아 갔다.

"여러 번 편지를 썼지만 할아버진 한 번도 답장해 주시지 않으셨어요!"

"더 이상이 거짓말은 하지 마." 산티노가 얼음처럼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편지하지 않았어. 편지했다는 말은 당신에게서 처음 듣는 말이야."

"편지했어요했다구요!" 프랭키가 방어적으로 항의했다.

항상 어머니가 편지를 부쳐 주겠다고 했다. 순간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무거워졌다. 그토록 힘겹게 썼던 편지들이 전혀 부쳐지지도 않았던 걸까? 프랭키와 지노 카파렐리 사이에 편지가 오고가면 산티노의 돈을 갈취하는 델라의 계획이 들통 나니까?

"엄마가 편지를 부치지 않은 게 틀림없어요!" 그녀가 소리쳤다.

산티노가 경멸의 눈으로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프랭키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믿지 않았다. 그녀의 귀에도 변명은 형편없이 들렸다. 그래도 그녀가 할아버지에게 여러 번 편지를 쓴 건 사실이었다. 런던으로 돌아온 그 첫달 동안, 프랭키는 런던 생활에 다시 적응하느라 혼란스러웠다.

갑작스레 돌아가게 된 런던에서 그녀는 상처 입은 동물처럼 어머니의 아파트에 서 있었다.

좌절감과 연민에 둘러싸여서. 캐글리어리에서 여자와 함께 있는 산티노를 발견한 것이 그녀를 매우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 시절 그녀에겐 산티노가 전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랑과 신뢰의 표상일 뿐 아니라, 혼란스런 시절의 지지자였고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그들의 결혼이 텅 빈 깡통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 산티노가 그녀를 얼마나 나쁘게 생각하든, 그를 떠난 후 그녀가 얼마나 상심했는지, 상심한 마음을 다스리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는 결코 말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녀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더럽게 부자> 그는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비탈레캐글리어리에 있는 은행. 2년전 잡지에서 본 기억이 났다. 오로지 한때 그녀가 가졌던 이름이랑 똑같아서 눈길이 갔었다.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은행가 가족 얘기였다. 사생활을 극도로 소중히 여겨 그들의 사진은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쓰여 있었다. 30년 전 가족 중 누군가가 유괴 당했기 때문에 그토록 조심한다고.

산티노를 만난 지 두 달 정도 지난 후, 그는 할아버지에게 프랭키의 아버지, 마르토가 차 사고로 스페인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러 왔었다.

<네 아버지는 어머니와 다시 만날 거라는 거짓말을 하고 널 이곳으로 데려와서 낯선 삶이나 마찬가지인 가족에게 맡기리로 결정했어. 그래, 그건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행동이야> 산티노가 격렬하게 말했다.

<하지만 네가 유괴 당했다고는 말하지 마, 프란체스카. 우리 숙부는 여러 해 전에 유괴당해서 아직도 흉터가 있어. 유괴범들은 아주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들이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은 나쁜 사람들이지!>

다시 현재로 돌아온 프랭키는 산티노의 굳은 옆얼굴을 흘끗거렸다.

"왜 캐글리어리에 있는 은행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곳에서 지점장으로 일하고 있었어. 아버진 내가 은행장을 맡기 전에 그곳에서 필요한 경험을 쌓을 거라고 믿으셨나 봐. 하지만 아버진 모르셨어. 내가 다른 이유 때문에 지방을 택했다는 걸. 꼬마 신부를 그곳에 감춰 놓았다는 것도 물론 모르셨지."

은행장. 프랭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섬의 다른 편에 있는 성도 쭉 당신 소유였군요!"

"작년에 내 소유가 되었어." 산티노가 정확하게 말했다.

"그 전엔 아버지 소유였지. 아버지가 20년 넘게 호텔로 빌려주고 계셨어."

"당신은 내게 자신에 관한 얘기를 전혀 해주지 않았군요."

"거짓말한 적은 없어. 단지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만 알려 주었지. 어린 당신에겐 그 정도로도 충분했잖아. 나이가 들면서 내 직업이 뭔지 관심을 가졌지."

산티노가 메마르게 말했다.

"그 관심 역시 일 때문에 주중에 당신 곁에 있을 수 없으니까 물어 본 거잖아!"

프랭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내가 당신에게 뭘 물을 수 있었겠어요? 한 번도 은행에 가본 적이 없었는걸요. 그저 내 무지가 들통 나는 게 싫었어요. 이봐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녀가 불쑥 물었다.

"이건 우리가 온 길이 아니잖아요?"

"오랫동안 기다린 카파렐리 가족 모임을 위해 시엔타로 가는 거야." 산티노가 덤덤하게 말했다.

할아버지의 집으로 간다는 말을 듣자 프랭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시엔타?" 그녀가 거친 숨을 들이쉬었다.

"사르데냐에 와서 가족도 안 만나고 떠날 순 없잖아."

"나쁜 사람내게 이런 짓을 하다니!" 프랭키가 화를 뿜어냈다.

"내가 그 마을에서 얼마나 비참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잖아요.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편지만 한 통 썼더라도 엄마가 날 집으로 데려갔을 거예요. 하지만 엄만 그럴 수 없었죠. 내가 어디 있는지 몰랐으니까."

산티노가 다시 차를 세웠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그녀의 분노엔 찬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꽉 조여져 있었다.

"앞으론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더 이상 거짓말이나 반쪽 사실만 얘기하지 않겠어. 당신도 이젠 현실을 직면할 만큼 나이를 먹었으니까. 당신 어머니는 당신을 찾기 위해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어."

"어떤 시도를 할 수 있겠어요.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는데? 아버진 한 곳에 머무르는 분이 아니셨어요. 당연히 엄만 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여겼겠죠!"

산티노가 고통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이 죽었다는 걸 알고 나서, 당신 할아버지는 내게 당신 어머니와 연락해도 좋다고 허락하셨어."

"당신 말은 믿지 않아요!" 프랭키가 소리쳤다.

"당신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하셨지. <며느리가 이곳에 와서 우리와 대화를 나눈다면 그 아이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알게 될 거야> 다음번에 런던에 갔을 때 난 당신 어머니를 찾아가 당신 할아버지의 초대와 당신의 불행을 알렸어. 하지만 당신 어머니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어."

"그럴 리가 없어요그건 사실이 아니라구요!"

"미안하지만, 사실이야." 산티노의 수수께끼 같은 눈이 그녀의 경악한 눈을 쳐다보더니 다시 차갑게 불타올랐다.

"당신 어머니는 이미 당신이 있는 곳을 알고 있었어. 당신 아버지가 당신을 데려간 그날 전화해서 말해 줬다더군. 당신 어머니는 모성애라곤 없는 여자야. 내가 찾아갔을 때만 해도 그녀는 매일 밤 두 번째 남편과 파티에 나가느라고 정신이 없었어. 심지어 마르코가 죽었다는 말을 했을 때도, 당신이 시엔타에 있으면 안되는 이유가 있느냐는 식으로 말하더군."

프랭키는 얼른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속눈썹 아래로 흘러내렸다. 남성적인 손이 그녀의 손을 쥐었지만, 그녀는 뿌리쳤다.

산티노가 침묵을 가르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 당시, 당신 할아버지는 사실을 말해서 당신을 상처 입히고 싶어 하지 않았어. 그 대가로 그가 받은 건 당신의 증오였지. 마르코가 죽은 후, 당신은 사르데냐에서 당신을 가둬 두는 할아버지를 비난했잖아."

"말해 줘서 고마워요." 프랭키는 숨을 들이쉬며 단호하게 자존심을 버렸다. " 그 당시에 해줬으면 더 좋았을 거예요."

산티노가 차를 몰았다. " 그건 내 결정이 아니었어."

흐느낌이 프랭키의 목을 꽉 메웠다. 감정이 격해지는 게 두렵고 경멸스러웠다. 꽉 다문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작은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울어, 프란체스카울고 나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졌잖아." 산티노가 제안했다.

"당신을 증오해요, 산티노."

"하지만 당신은 아직도 사탕 가게에 굶주린 아이처럼 날 쳐다보잖아. 그건 변하지 않았더군."격렬한 분노가 프랭키를 덮쳤다.

"변한 건." 산티노가 부드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당신의 순수함을 내가 불공평하게 취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 순수함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어떻게 생각해요? 그 겉만 번지르르한 금발머리와 당신이 키스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내가 영원히 섹스와 무관한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프랭키가 내쏘았다.

산티노가 얼어붙었다.

프랭키는 잔뜩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어깨를 폈다. 눈물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리라 예상했어요. 게다가 내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날 원하는 남자를 찾는데 단 일분도 낭비하지 않았으니까."

"당신의 처녀성을 없앤 자세한 얘긴 생략하지." 산티노가 얼음같이 차갑게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프랭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말이 부끄러웠다. 그 모든 게 거짓말이기에 더욱 부끄러웠다. 사실, 산티노의 거절로 인해 그녀는 다시는 어떤 남자도 믿을 수 없었다. 남자친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짧았던 관계에서 육체적인 친밀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산티노만큼 끌리는 남자를 만난 적도 없었다.

"당신 가족은 당신이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믿고 있어."

프랭키는 깜짝 놀랐다.

"그들과 계속 연락하며 살았어요?"

"당연하지. 그들에게 있어서, 난 아직도 당신의 남편인 걸. 나도 가족이라구." 산티노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의 남편, 그가 강요한 선택이 떠오르자 프랭키의 몸이 긴장했다. 사르데냐에서 산티노와 3주를, 그녀는 어렵게 침을 삼켰다. 산티노와 함께 침대에 드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산티노가 그녀와 함께 잠자리에 들길 원한다는 사실도 상상할 수 없었다. 6개월 동안 남편과 아내로서 같은 지붕 아래 살명서도 어린 여동생처럼 그녀를 다루던 산티노가 아닌가!

실제로 육체적인 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결혼이 법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프랭키는 괴로웠다. 산티노는 처음부터 옆 침실에서 잠을 잤다. 테레사 고모의 말로는 모든 남자들은 주어진 기회를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했는데, 그의 이상한 거절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그들 부부가 떨어져 잔다는 수치스런 비밀을 말할 수도 없었다.

순진한 그녀는 산티노가 다른 곳에서 성욕을 만족시키리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그날 캐글리어리로 그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그의 인생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건 결코 몰랐으리라.

이웃 사람이 그녀를 기차역까지 태워 주었고, 캐글리어리까지 기차를 탔다.

그러나 은행에 들어가기가 왠지 머뭇거려져서 프랭키는 바깥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때는 점심시간이었다. 그녀가 막 은행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산티노가 나타났다. 아름다운 금발머리 여자와 웃으면서 얘기하고 있었다. 그는 여자와 얘기하느라고 프랭키를 보지 못했고, 프랭키는 그들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우아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가 그녀를 잡았고 프랭키는 절망적인 눈으로 산티노와 여자가 승강기에 타는 것을 보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충격적으로 몸이 얼어붙었다. 두 사람이 정열적인 연인처럼 키스하기 시작했다.

승강기 문이 닫히기 몇 초 전, 산티노는 머리를 들고 프랭키를 보았다.

분노와 죄의식이 스쳐가던 그의 잘생긴 얼굴을 결코 잊을 수 없으라라.

맙소사, 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서 어쩌자는 거야? 그 승강기에서 산티노를 보기 전까지 그녀는 그들의 결혼이 진짜라고 믿었다. 산티노가 진짜 맹세를 했다고. 그러나 산티노는 처음부터 결혼을 무효화시킬 계획이었다.

 

그들이 마을에 도착할 무렵,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해가 저물고 있었다. 프랭키는 잔뜩 긴장한 채 낯익은 풍경을 응시했다. 사과나무와 밤나무, 떡갈나무가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작은 테라스가 있는 집들의 벽은 넝쿨로 덮여져 있었다. 그리고 꼬불꼬불하고 완만한, 마을의 유일한 길이 보였다.

산티노는 마을 중앙에 있는 지노 카파렐리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기대에 찬 눈길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 뭘 기다리는 거야?"

프랭키는 천천히 마지못해 차에서 내렸다. 마들레나 고모가 걱정스러운 듯 문가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얼어붙었지만 곧이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작은 고모의 팔에 안겼고, 울음 섞인 이탈리아어를 들었다. 잊혀졌다고 믿었던 언어가 자신도 모르게 막 흘러나왔다.

"들어와어서 들어와."테레사가 뒤에서 그들을 밀었다.

"동네 사람들이 다 구경 오겠다."

그때 할아버지가 나타났고, 지노가 그녀를 안고 뒤를 흘끗 보더니 말했다.

"남편과 함께가 아니면 집 안으로 들이지 않으려고 했다."지노 카파렐리는 그녀의 오랜 부재 뒤에 숨겨진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네가 속한 곳으로 돌아왔구나, 남편 곁으로."

그렇게 치열했던 할아버지와의 논쟁은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프랭키는 얼굴을 붉히며, 5년간의 침묵 후에도 이토록 따스한 환영에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는 약간 주저하는 테레사 고모를 껴안았다.

"산티노에게 와인 한 잔 갖다 줘."테레사가 마들레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프란체스카에게 집을 구경시켜 줄게."

프랭키는 산티노와 할아버지가 작은 뒤뜰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문가로 걸어가 바깥을 내다본 그녀는 깜짝 놀랐다. 한때 지노의 사나운 개가 자리잡고 있던 곳이 이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페스트리니스가 옆집을 팔려고 내놓았을 때, 할아버지가 그들의 집을 사서 집을 늘렸단다."

테레사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이제 우린 침실이 네 개야."

"할아버지는 그 돈이 어디서 나셨대요?" 프랭키가 놀라서 물었다.,

"할아버지는 마을에 있는 산티노의 땅을 관리하고 있단다. 우린 네 집도 돌보고 있어."마들레나가 명랑하게 끼어들었다.

"우린 이제 아주 편하게 살고 있어."

프랭키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새 가스레인지가 있는 넓어진 부엌을 구경했고, 다음엔 단순하고 작은 가구가 놓여진 침실들은 둘러보았다.

"이곳이 오늘 밤 너와 산티노가 함께 잘 방이야."마들레나가 수줍어하며 침대가 방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침실 문을 열었다.

창가에 놓인 신선한 꽃병과 하얀 구식 면 이불이 덮인 침대는 순전히 첫날밤을 위한 것이었다. 산티노와 저 침대를 같이 쓴다고 생각하자 목에 뭔가가 걸린 것 같았다.

"새 신부처럼 얼굴을 붉히는구나." 테레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그렇겠지. 이젠 남편에게 아들을 선사할 때가 되지 않았니?"

"산티노는 프란체스카가 학업을 마치길 원했잖아." 마들레나가 테레사에게 말했다.

"아버지도 산티노 가족은 모두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이라고 했어."

3주 후면 런던으로 돌아가 다시는 산티노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왜 갑자기 그런 사실이 고통으로 와 닿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산티노의 도움으로 그녀의 가족들은 예전과 비교할 수도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다.

그 사실이 왠지 프랭키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산티노는 그들이 6개월간 함께 살았던 그 농장도 팔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재정적인 도움을 줘서 가족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대신에, 그녀의 가난한 가족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줬던 것이다.

문가에서 그녀는 산티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머리가 햇볕에 반짝이고, 아름다운 옆얼굴은 강인했다. 눈부시고, 섹시하며, 강인한 남자, 나의 남편?

그가 거만한 얼굴을 돌려 번득이는 눈으로 그녀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충격이 프랭키를 뚫고 지나갔다. 깜짝 놀란 그녀는 숨이 목에 걸렸다. 어쩔 수 없이 그녀도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먼저 고개를 돌린 사람은 산티노였다. 할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하고 나서 그는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차에서 가방을 가져다줄게." 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프랭키는 손가락을 꼬았다.

"밤에 농장으로 돌아가면 안 되겠어요?" 그녀가 급히 속삭였다.

"당신 가족들의 호의를 무시하고?"

산티노가 그녀의 뜨거운 얼굴과 회피하는 눈을 살폈다. 그가 작게 웃었다. 마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아는 것처럼.

"안 된다는 걸 잘 알 텐데."

"산티노, 제발."

그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섬세한 턱을 만졌다. 그의 손길에 그녀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당신 가방을 가져올게." 그는 작게 속삭인 후 걸어가 버렸다.

테레사가 프랭키에게 식탁보와 식기를 들려주면서 뒤뜰로 밀어냈다.

"넌 강한 남자를 가졌어." 지노 카파렐 리가 프랭키의 붉어진 얼굴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강한 여자에겐 강한 남자가 제격이지. 그래야 좋은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단다."

프랭키의 크고 풍부한 입술이 가늘어졌다.

" 그렇겠죠."

일단 마음을 먹으면 산티노는 양보라곤 모른다. 그들이 결혼한 첫 달에 그녀는 주중엔 캐글리어리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녀가 가족들 곁인 시엔타에 있는 게 더 좋다고 말했다. 눈물도, 논쟁도, 토라짐도, 심지어 애원도 산티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너희들은 5년이 넘게 부부처럼 행동하지 않았지."놀랍게도 지노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제 너와 남편이 함께 있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는구나. 아주 만족스러워."

깜짝 놀란 프랭키는 식탁보를 펴던 손을 멈추고 할아버지를 흘끗 쳐다보았다.

"."

"넌 이제 산티노의 책임이야. 그가 널 언제나 잘 돌봐줄 거다. , 그렇고 말고."지노는 만족감과 자부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얼마나 완벽한 짝을 만들어 줬냐, 프란체스카. 그 자신도 모르는 남편으로서의 잠재성을 내가 미리 간파한 거지!"

프랭키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5년 전 산티노는 그에게 의지하는 그녀와 지노의 기대 때문에 덫에 걸렸다. 똑같은 이유로 인해 그는 시엔타에 있는 가족뿐만 아니라 그녀의 안전을 위해 많은 돈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난 프랭키는 그에게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기분이었다.

"당연히 저도 도울 거예요." 프랭키는 거칠어지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두 번째로 항의했다.

접시를 신속하게 쌓아올리면서 테레사가 화난 듯 손을 흔들었다.

"왜 그러니? 요리하는 건 좋아했어도 설거지는 질색이었잖아? 남편에게 와인이나 더 갖다 주렴."

바깥 식탁의 테이블에 놓인 촛불이 낮게 흔들리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들이 춤을 추었다.

프랭키는 입술을 꼭 깨물며 와인 병을 집어 들었다. 산티노는 느긋하게 앉아 지노의 얘기를 들으면서, 뜨겁지만 잔인한 눈으로 프랭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잔으로 손을 뻗자 그가 와인 잔을 들었다.

"피곤해 보이는군, 가서 자도록 해, 여보. 나도 곧 따라갈 테니." 산티노가 놀라울 정도로 매끄럽게 중얼거렸다.

프랭키는 와인 병을 내려놓고 땀이 난 손바닥을 엉덩이에 문질렀다. 산티노의 끈질긴 눈길에 마지못해 그녀는 침실로 올라갔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며 위험하고도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간 그녀는 가슴이 철렁하며 두 손을 꼭 쥐었다.

5분 후 2층 침실에 서서 프랭키는 두 사람이 자기엔 너무나 작은 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침대 위에서 산티노를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가방 안엔 야한 잠옷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속옷은 그녀의 유일한 사치였다.

테레사의 침실로 가는 좁은 복도를 내려가서 프랭키는 구석 옷장에서 목까지 올라오는 펑퍼짐한 잠옷을 꺼냈다. 색마 같은 남자만이 볼품없는 잠옷을 입고 있는 여자를 옆방에 처가 식구들이 자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을 수 있으리라. 프랭키는 그런 확신으로 자신을 안심시키며 마침내 침대 위로 올라갔다.

30분 후 문이 열리고 침대 옆의 램프가 켜졌다.

그녀는 산티노가 가방을 여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눈을 뜨고 산티노가 셔츠를 벗는 모습을 보았다. 활시위처럼 팽팽한 그의 등이 보였다. 그가 기지개를 켜자 단단한 근육들이 춤을 추었다. 문을 반쯤 열어 놓은 그는 맨발로 복도로 나가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물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고, 매 순간 그녀의 신경은 날카로워졌다. 드디어 욕실문이 다시 열리고 산티노가 침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프랭키는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호랑이를 고양이가 털을 잔뜩 세우고 바라보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산티노는 바지만 입은 채 세상 어느 것에도 상관하지 않는 듯 걸어다녔다.

그녀의 입술이 건조해졌다.

 

5

"이런, 이런, 아직도 자는 척하고 있군." 산티노가 부드럽게 말했다.

"결혼한 지 5년이 넘었는데도 갓 결혼한 신부 같은 기분인가?"

"사실, 그렇잖아요." 아주 어렵게 프랭키는 그의 아름답고 남성스러운 가슴에서 눈을 뗐다.

"새벽 즈음엔 당신이 내 여자라는 의심을 더 이상 품지 않도록 해주지."

프랭키가 화를 냈다.

"난 당신 여자가 아니에요!"

산티노가 그녀에게 뜨거운 눈길을 보내며 차갑게 말했다.

"앞으로 3주 동안, 당신은 내 여자야."

프랭키의 마음속에 그의 차가움이 스며드는 듯했다.

"날 그런 식으로 쳐다보지 말아요. 무서워요." 그녀가 투덜거렸다.

"당신은 아름다운 여자야.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 그건 감정이나 분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지." 산티노는 차갑게 말하고 나서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프랭키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산티노."

산티노는 바지를 벗고 검은 속옷만 입은 채 서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다른 신체구조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뺨을 빨갛게 물들인 프랭키가 서둘러 눈을 돌렸다.

"산티노안 돼요!" 그녀가 미친 듯이 속삭였다.

"왜 속삭이는 거야?" 그가 물었다. 프랭키는 불편한 심정으로 그의 속옷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제발, 소리 좀 줄여요." 그녀가 애원했다. 다른 가족들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에게서 분노가 느껴졌다.

"얘기보다 더한 걸 하려는 게 아냐." 산티노가 침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면서 말했다.

"여기선 안 돼요오늘은 안 된다구요, 제발." 프랭키가 침대 끝에서 애원했다.

산티노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자신의 몸 위로 올렸다. 남성적인 그의 단단한 몸과 맞닿자 그녀가 목졸린 신음 소리를 냈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가 우울하게 물었다.

"비탈레와 약속한 일을 이행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당신이 실수하는 거야. 내가 말한 건 모두 진심이었어. 내가 지불한 것을 맘껏 즐길 생각이라고. 아무리 짧은 기간이라 해도."

"당신은 지금 화가 나서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거예요." 프랭키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의 벗은 몸에서 발산되는 열기가 그녀의 두꺼운 잠옷을 뚫고 전해졌다.

"아직도 내게 화가 많이 나 있잖아요. 나중에 후회하게 될 일은 하지 말아요."

"난 아내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거야, 프란체스카. 무슨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구!"

산티노가 빈정거렸다.

"내일 밤까지 기다린다면,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하겠어요!" 프랭키는 급한 나머지 충동적인 약속을 했다.

산티노가 얼굴을 찌푸리며 베일에 싸인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녁 먹으면서 와인을 몇 잔이나 마신 거야?"

"!" 프랭키가 숨을 헐떡였다. 그는 그녀의 몸을 굴려 침대 위로 쓰러뜨리고 다리 하나를 그녀의 떨고 있는 몸 위로 걸쳤다.

"세상에도대체 뭘 입고 있는 거야?" 산티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옷을 눈여겨보며 물었다.

프랭키가 눈에 띄게 몸을 움츠렸다.

산티노가 킥하고 웃더니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비웃듯이 중얼거렸다.

"대부분의 남자가 감춰진 것에 더욱 애달아한다고 말해 준 남자가 누군지 궁금한데?"

프랭키가 이를 갈았다. 그녀의 녹색 눈이 분노로 번득였다.

"좋아요, 돈을 지불한 대가를 원하신다고요? 계속해요, 그냥 가지란 말이에요!" 그녀가 신랄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동참할 거라곤 기대하지 말아요. 아니, 좋아하는 척도 하지 않겠어요!"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더니 만족감으로 서서히 불타올랐다.

"난 도전을 좋아하지."

그에게서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그녀의 입이 딱 벌어졌다.

"사랑해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지." 산티노가 약속했다.

"아니안 돼요." 프랭키는 아주 작고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언제나 날 원했어." 산티노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 두 손이 내 등을 애무하도록 유혹해 주지."

"안 돼요."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녀가 두려운 건 산티노도, 섹스 그 자체도 아니었다. 자제력을 잃게 될 그녀 자신의 육체가 두려웠다.

"나뭇잎처럼 떨고 있군." 산티노가 속삭였다. 순간 프랭키는 그에게 소리치라고 말하고 싶었다. 속삭임이 너무나 달콤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

"예상한 일이야." 산티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었지."

"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 방 안의 모든 산소를 태워 버릴 것처럼 날 쳐다봤을 때부터. 그런 류의 동물적인 끌림은 채워지지 않으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 법이지."

"이미 극복했어요!"

산티노가 짙은 눈썹을 모으며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내가 그 금발머리와 키스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 동안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

"정말 잘난 척하는 건 못 봐주겠군요!" 프랭키가 발끈해서 내뱉었다.

" 그럼 당신이 아직 처녀일 수도 있다는 희박한 가능성은 없겠지?" 산티노가 딱딱하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프랭키가 되물었다.

"설마 아직도 산타클로스나 요정을 믿는 건 아니겠죠?"

그녀의 통렬한 비꼼에 산티노의 꽉 다문 입술 언저리가 움찔했다.

"하긴요즘 세상에, 게다가 당신 나이에 그럴 리가 있겠어."

눈이 따끔거렸지만 프랭키는 고개를 돌리고 얼른 눈을 깜박였다. 남자들은 종종 여자가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른다고 전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녀는 그것이 사실이길 기도했다. 그녀가 아직도 처녀라는 걸 산티노가 알게 되는 건 견딜 수가 없었다!

산티노가 머리를 숙였고 그의 입김이 느껴졌다. 그의 상큼한 향기가 그녀를 둘러쌌다. 프랭키는 짧은 숨을 내뱉었다.

"너무 긴장하고 있군."

"뭘 기대했죠?" 프랭키가 비난하듯 내쏘았다.

"이건 마치 공격당하길 기다리는 거나 마찮가지잖아요!"순간 산티노의 몸이 굳어지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그래? 내가그 멋질 말이 뭐였더라? 맞아, <그냥 가지란 말이에요>였던가?"

"그게 뭐가 그리 우스워요?"

산티노가 늑대처럼 킬킬거리며 그녀를 끌어안고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뜨거운 열기에 이끌려 프랭키가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그가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아니라, 거칠게 뛰고 있는 목의 작은 맥박에 입술을 갖다 댔다. 프랭키는 너무 놀라 몸을 움찔하며 숨을 헐떡였다.

"내 팔 안에서 당신은 즐거움만 경험할 거야. 그건 약속하지."혀끝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목을 간질이며 산티노가 중얼거렸다.

"입을 벌려." 불타는 눈으로 그녀를 뜨겁게 바라보며 그가 충동질했다.

프랭키는 몸을 떨며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산티노가 천천히 깊고 은밀한 키스를 시작했다. 그녀는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를 압도하는 즐거움 그 자체였다.

"티노." 그녀가 중얼거렸다.

"즐거움밖에 없지." 산티노가 으르렁거리며 약속했다.

뜨거운 감각이 프랭키의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미친 듯이 키스를 되돌리고 있었다.

"당신 정말 정열적이군." 산티노가 만족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녀의 부풀어 오른 가슴을 애무했다.

프랭키의 등이 활처럼 휘어졌고, 소리 없는 헐떡임이 그녀에게서 새어나왔다. 그의 마술 같은 손길에 프랭키의 온몸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열기의 화살이 그녀의 몸을 관통하자 프랭키의 목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 조용." 산티노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그러나 그가 시작했든 안 했든 프랭키의 감각은 이미 그녀의 통제력 밖이었다.

"내일 밤까지 기다린다면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한다고 말했지." 산티노가 말했다.

"도발적인 제안이야. 내겐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고. 그렇다면 오늘 밤은 인내와 자제력을 연습하면 되겠군."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프랭키는 그의 뜻밖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말이야."

"그럼요, 변하지 않았어요." 프랭키가 중얼거렸다.

산티노처럼 경험 많은 남자에게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잠시 정신이 나간 게 아니었을까. 그는 정확히 그녀가 뭘 하길 원할까? 프랭키는 얼른 그런 무기력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자신을 가다듬었다. 내일 밤이 아주 멀리 느껴졌다.

 

프랭키는 화장대의 작은 거울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만졌을 때 극도로 불쾌하게 반응했더라면, 산티노는 고집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엔 그가 어떻게 했을까? 델라를 사기죄로 고소한다는 원래 계획으로 돌아갔을까? 프랭키는 몸을 떨었다. 아무리 델라가 나쁜 짓을 했더라도, 프랭키는 어머니가 그런 모욕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머리를 땋던 프랭키가 움찔했다. 검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산티노가 문가에 서 있었다.

"아침 준비가 다 됐어."

마지못해 눈을 돌린 그녀는 얼굴이 타는 듯이 빨개졌다.

빈정거리는 듯한 그의 눈을 보며 그녀는 몇 시간 전 그의 팔 안에서 신음했던 일이 떨올랐다. 다시 거울로 얼굴을 돌리며 그녀가 차갑게 대꾸했다. "잠시 후에 내려갈게요."

"치마는 없어?" 산티노가 건조하게 물었다.

프랭키가 신경질적인 손으로 감색 바지를 쓸어내렸다.

"치마를 좋아하지 않아요."

"난 좋아하는데그리고 앞으로 3주 동안은 내가 좋아하는 걸 당신도 좋아해야 돼."

"나더러 성의 노예뿐만 아니라 당신 취향에 맞춰 옷 갈아입는 인형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프랭키가 입가에 잔뜩 힘을 준 채 말했다.

" 그렇다면 사람을 잘못 골랐어요."

"아니." 산티노가 거울 속에 나타나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가 단호한 손길로 그녀의 땋은 머리를 풀었다.

"당신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감출 수 없듯이 당신의 정열도 억제할 수 없을걸. 내가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프랭키가 분노로 치를 떨었다.

"내가 뭘 할 수 없다는 따위의 말은 하지 말아요."

" 그렇다면 배신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구. 알려면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군."

산티노가 표정 없이 말했다.

"당신이 달아나려고 했던 가족들이 사실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처럼."

목이 멘 프랭키가 간신히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인생에서 사라진 다음에도 당신은 계속 연락하면서 살아."

산티노가 우울하게 말했다.

"우리의 결혼이 깨진 걸 내탓으로 돌리고 이혼으로 그 농장을 갖게 됐다고 말씀드려."

"하지만 그들은 당신을 무척 좋아해요." 프랭키가 떨리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난 돌아오지 않을 거야." 산티노가 거칠게 말했다.

"당신이 없는 동안엔 내게 기대하는 모든 일을 했지만, 이곳에서의 내 책임도 이제 끝이 보이는 것 같아."

"하긴 당신 같은 거물은 이런 오지에 오고 싶지 않겠죠!" 프랭키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꼈다.

산티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짚더니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감정을 자제해." 그가 거칠게 충고했다.

"내가 관심 있는 건 당신의 아름다운 육체 뿐이야. 이 작은 사건이 끝나면 오로지 떠나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일 거야."

프랭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나 역시 원하는 바예요."

"난 두 번 다시 돈을 지불하고 싶지 않아. 이건 단지 지불 기한이 넘은 빚을 받는 거야, 프란체스카. 명심하라구."

프랭키는 산티노가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거울을 응시하고 있었다.

 

6

점심 식사 후, 산티노는 프랭키를 농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아침 내내 고모들과 함께 보내면서 이웃들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일을 찾아 떠나는 젊은이가 많기 때문인지 다들 그동안 그녀가 없었던 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않고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다.

짧게나마 한때 그들의 집이었던 곳에 산티노가 차를 세우자 두 사람 사이에 긴장된 침묵이 감돌았다. 눈 가는 곳마다 추억이 서려 있어서 프랭키는 가슴이 아팠다. 풍화에 씻긴 돌벽과 빨간 지붕을 흘끗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목이 메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얼굴 근육을 굳힌 채 차에서 내렸다.

"내 닭들은 어떻게 됐죠?" 그녀가 딱딱하게 물었다.

"누군가의 입 속으로 들어갔겠지."

그를 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프랭키는 긴장된 숨을 들이쉬었다.

"안젤라는?"

"염소 천국으로 갔지."

"밀리와 그 새끼들은?" 프랭키가 더욱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팔았어."

이제 프랭키는 딱딱하게 굳었다. "탑시하고 퍼딩은?"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죽었군요. 그렇죠?"

"글세."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진 프랭키는 산티노를 비난했다.

"내 고양일 어떻게 한 거죠?" 그녀가 거칠게 물었다.

"당신이 먹었나요, 팔았나요, 아니면 묻었나요?"

번득이는 두 눈이 그녀의 비난에 찬 얼굴에 머물렀다.

"고양이는 로마에 있는 내 집으로 데려갔어."

"." 당혹감과 놀라움에 얼굴이 붉어진 프랭키는 팔짱을 끼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프랭키는 떨리는 가슴으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곧바로 편안한 쌍둥이 소파가 있는, 낮은 천장의 아늑한 응접실로 들어섰다. 응접실 뒤쪽 창문으로 5년 전 그녀가 가꾼 정원을 불편한 심정으로 내다보았다.

정원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래서 뭐? 그녀가 자신에게 물었다. 이건 더 이상 내 집이 아니야. 아니, 한 번도 진짜 내 집이었던 적이 없었더. 그러나 고통스런 후회와 상실감이 프랭키를 뒤흔들었다.

그녀는 산티노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이 집을 좋아했다. 할아버지의 좁고 낡은 집에 비하면 이 넓은 집은 궁전 같았다. 어떤 열여섯 살 신부도 그녀보다 더 행복하진 못했으리라. 그 밝고 순수한 희망과 철석같은 믿음. 지금에 와선 무척 바보스럽게 느껴지긴 하지만.

5년 전 사르데냐의 전통에 따라 그는 결혼 전에 집을 사서 가구를 채워 넣었다. 그녀에게 색깔 카드를 가져다주고 좋아하는 색깔을 고르라고 했다. 프랭키는 시엔타에서 최초로 집을 꾸미는 데 돈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지노 카파렐 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로 사치스럽게. 그러나 어떻게 보면 산티노는 사르데냐에서 신랑에게 기대하는 것들을 정확하게 해냈던 것뿐이었다.

"당신을 증오해요, 산티노." 프랭키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만약 내가 집 꾸미는 놀이를 했다면, 그건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에요!"

"그럼 내가 당신과 뭘 할 수 있었겠어?" 산티노가 특유의 표정 없는 비난조로 대답했다.

"그 당시의 당신으로선 내 가족을 다룰 수 없었어. 그리고 우리 가족 역시 당신을 다룰 수 없었을 거야."

프랭키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 가족을 만나고 싶냐고 물은 적도 없었잖아요." 그녀 역시 비난조로 말했다.

산티노가 짙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젠 중요하지 않잖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프랭키는 비틀거리며 응접실에서 나와 좁은 층계를 올라갔다.

"런던으로 날 만나러 올 수도 있었잖아요. 날 이곳으로 끌어들이지 말고 말이에요!"

그녀는 부부침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혼자 잠을 잤다. 침대 발치에는 여전히 결혼식 날 고모들이 선물로 준 작은 서랍이 놓여 있었다. 테레사와 마들레나는 아주 자랑스럽고 흔쾌히 그 서랍을 주었다. 둘 다 결혼 한 적이 없었고, 고모들 세대의 사르데냐 여자들은 여자가 미혼으로 사는 걸 결코 좋게 보지 않았다.

그녀는 낮은 창가에 서서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았다. 산티노는 그녀의 마음속에 증오와 격렬한 갈망을 뒤섞어 놓았다. 그를 더욱 증오하고 싶었지만, 격렬한 갈망만이 그녀를 채울 뿐이었다.

"프란체스카." 산티토가 문가에서 작은 소리로 불렀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틀어쥐었다.

"난 여기서 무척 행복했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러고는 곧 자신의 인정을 후회하며 신랄하게 덧붙였다.

"애초부터 우리 결혼의 진실을 내게 말해 줬어야 했어요."

"당신이 감당할 만큼 강하다고 생각지 않았어." 산티노가 솔직하게 말했다.

"당신은 우리 관계에 너무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잖아."

프랭키는 주먹을 더욱 꼭 쥐었다.

"아니에요!" 그녀가 그를 향해 휙 돌아섰다.

"할아버지에게서 해방되어 즐거울 뿐이었어요!"

산티노가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마치 캐글리어리에서의 그날이 그녀의 마음을 갈가리 찢고 거의 그녀를 파괴할 뻔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당신은 완전히 내게 의지했어. 아주 연약했지. 감정과 몸은 어른이었지만 아무런 경험도 없고, 아직 성숙하지도 않았어." 산티노가 머뭇거리며 거칠게 깊은 숨을 내쉬었다.

"세상과 격리된 이런 오지에서 5년 동안 살았으니 생각이 이 마을을 벗어나기 힘들었겠지."

프랭키는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했다. 다시 런던으로 돌아갔을 때 적응하는 무척 힘들었던 게 기억났다.

"그날 캐글리어리로 오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피렌체에서 계속 공부하는 데 동의했을 거야." 산티노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랬다면 내가 당신을 지켜볼 수 있었겠지. 당신은 시간이 지나면서 날 극복하게 됐을 거고, 자연스럽게 같은 또래의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거야."

프랭키가 빈정거리듯 내뱉었다.

"만약 내가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그럼 당신은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요?"

산티노는 강인한 어깨를 들썩이며 눈을 번득였다.

"그 상황에 맞게 대처해 나갔겠지. 당신을 무척이나 좋아했으니까."

좋아했다. 혐오감과 굴욕감이 그녀를 강타했다. 얼마나 미지근하고 별 뜻 없는 말인가.

"어쨌든 우린 계속 그렇게 살 수 없었을 거야. 당신과 함께 침대에 들고 나서 끝낼 순 없었거든."

", 그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프란체스카는 잊을 수 없는 고통 때문에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산티노는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어두운 눈동자가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다.

"당신은 집시처럼 야성적이었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섹시했지.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얼만 섹시한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더군. 이 집에서 당신과 보낸 그 모든 밤들 동안 난 잠을 이루지 못했어." 산티노가 거칠게 말했다.

"당신은 매일 날 고문하는 유혹, 그 자체였어."

그의 놀라운 고백에 완전히 정신이 나간 프랭키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숨쉬는 것조차 멈춘 채.

"당신과 있으면 팽팽한 줄 위를 걷는 것 같았지." 산티노가 얼굴을 붉히며 우울하게 말했다. "내가 굴복하면 우린 둘 다 불가능한 관계로 빠져들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부부침대에 들지 않은 걸로 난 충분히 상을 받을 만해. 특히 당신이 내 아내라는 걸 상기시키기 시작했을 때부터!"

프랭키는 충격으로 어렵게 숨을 들이쉬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지 갑작스레 분노가 솟아올랐다. 그녀는 거칠게 팔을 빼며 층계로 달려 내려가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

그때도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니. 어이없는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녀는 너무나 그를 사랑했다. 산티노는 두려움 없이 격렬하게 사랑했다. 그가 없는 미래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그녀였다.

더운 날씨인데도 그녀의 피부는 차가웠다. <당신은 우리 관계에 너무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잖아> 산티노는 그녀의 육체와 영혼이 모두 그에게 속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육체적으로 그녀에게 이끌렸던 것이다. 그녀가 기꺼이 주고 싶어 했던 육체에 유혹당했던 것이다. 그건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야. 그녀가 고통스럽게 생각했다.

이성과 감성의 싸움에서 이성이 이긴 것이다. 만약 그녀와 자면 그녀와의 관계를 끊는 일이 무척 어려우리란 걸 알고 있었을 테니까. 강하고 교활한 자기보호 본능이 산티노로 하여금 부부침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만든 것이다.

강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산티노는 그녀를 돌려 세우고 번득이는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긴장하고 있군." 그가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아직도 과거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고. 하긴 뭐, 놀랄 것도 없지. 당신 몸 속에 흐르는 사르데냐인의 피가 복수로 들끓고 있을 테니까. 난 당신에게 상처를 입혔어. 그리고 당신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내게 복수했지. 내게 거짓말을 하고 돈을 훔치는 걸로."

놀란 프랭키는 말을 더듬거렸다.

"."

산티노의 강인한 얼굴이 가차없이 굳어졌다.

"그 당시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미 설명했는데도, 당신은 여전히 부끄러워하지 않는군. 하긴 설명도 필요 없지. 점잖은 남자는 결코 열 올라 있는 십대와 지지 않으니까!"

프랭키의 분노가 불꽃을 튀었다.

"점잖은 남자는 자신의 결혼맹세도 깨뜨리지 않아요! 당신은 성실하지 못했어요. 당신은 왜 부끄러워하지 않는 거죠, 산티노?" 도저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서 그녀는 그에게 내쏘았다.

생각지도 못한 반박에 산티노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내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난 당신의 아내였어요, 나이와 상관없이. 당신은 나와 결혼했죠. 내게 약속을 했어요. 그 약속을 당신이 깨뜨렸죠." 프랭키가 약간 거칠게 말했다.

"당신이 나와 결혼해 줬기 때문에 내가 고맙게 여겨야 했나요? 아니, 전혀 고맙지 않았어요. 솔직히 당신을 비난했어요. 결코 되돌려 받지 못할 기대감만 심어주고, 아무런 권리도 없는데 내가 권리를 가진 것처럼 믿게 했잖아요! 그건 정말 잔인하고 불공평한 짓이었어요. 당신을 남편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내가 당신에게 열중해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겠어요?"

그녀의 신랄한 말에 산티노의 딱딱한 얼굴이 붉어졌다. 만족감이 프랭키를 채웠다.

그는 자신의 결정에 잘못된 부분을 보지 못한 거만한 돼지였다. 그녀와 결혼한 건 친절이나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사랑을 부추기고 결혼반지로 그녀를 묶어 놓으려는 미친 짓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똑바로 들고 말했다.

"난 산책 좀 하겠어요."

산티노는 아무 말도 없었다.

한참 후, 그녀는 바위 위에 앉아 농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사랑스런 얼굴이 완고한 결심으로 굳어져 있었다. 마침내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히던 어두운 십대의 그림자에서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산티노와 싸울 배짱이 되살아났다. 이제 다시는 그로 인해 상처 입지 않을 것이다.

매트, 참 그에게 전화해야지. 그녀는 겨우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이 여행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었지. 놀랍게도 그의 말이 옳았다. 이젠 옮겨야 할 시간이다. 산티노를 그녀의 인생 밖으로 옮겨야 할 시간. 어린 시절, 산티노에게 미친 듯이 끌렸다는 사실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가?

그들은 정열적인 정사를 가질 테고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헤어질 것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를 극복하리란 것이다. 산티노의 무관심은 한때 그녀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그래서 그를 결코 잊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도 그에게 이토록 강하게 끌리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가? 호기심이 충족되면, 분명 그녀는 과거의 악몽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으리라.

 

"내가 먼저 시작했어요. 당신도 뭔가 마시고 싶어할 것 같아서." 프랭키는 산들바람처럼 말하면 산티노가 언제나 사무실로 쓰던 방으로 들어갔다.

산티노는 깜짝 놀라 컴퓨터에서 몸을 홱 돌렸다. 햇살이 반사된 그의 눈 때문에 잠시나마 그녀는 긴장했다. 프랭키는 밝게 웃으며 와인 잔을 책상 위에 놓았다. 5년 전 그녀가 놓아두었던 결혼사진이 그대로 있었다.

"세상에, 버린 게 하나도 없나 봐요?" 그녀가 투덜거렸다. 사진을 집어 들고 흘끗 쳐다본 후 쓰레기통에 버렸다.

"미안해요. 하지만 이런 물건이 있다니 소름이 끼쳐서."

산티노의 짙은 눈썹이 약간 찌푸려지는 걸 보며 기분이 좋아진 프랭키는 등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행동이 그를 당황하게 하자 내심 우쭐했다.

"저녁 준비가 되려면 34일은 걸릴 것 같아요. 오늘은 좀 특별하잖아요." 그녀가 달콤하게 중얼거리며 그에게 미소 지었다.

"샴페인이 없어서 얼마나 안타까운지 몰라요."

10분 후 그녀는 욕실 샤워기 아래 서 있었다. 저녁 식사에 가능한 한 겨우 몸만 가리는 옷을 입을 작정이었다. 산티노가 치마를 입은 그녀를 보길 원한다고? 그녀는 너그러워졌다. 산티노가 복수를 원한다고? 프랭키는 앞으로 남은 밤을 차근차근 잘 계획해 놓았다. 그를 잔득 달아오르게 해놓고 똑바로 걸어 나가 버릴 작정이다. 그에겐 새로운 경험이겠지.

우습게도 산티노는 열여섯 살의 그녀에게 견딜 수 없는 유혹을 느꼈다는 놀라운 고백을 하여 프랭키의 자신감을 되살려 주었다.

산티노는 그녀의 유혹에 약할 것이다. 아무리 그녀가 경험이 없다 해도 본능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영국 잡지에서 읽은 성 탐험에 관한 기사가 그녀를 도와주리라. 그런데 지식이 침대에서 힘을 발휘할까?

아래층에서 그녀는 매트에게 전화했지만, 그는 나가고 없었다. 아파트 응답전화기에 짧은 메시지만 남겨두고, 빌라를 빌리지 못한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기로 했다.

부엌의 냉장고는 신선한 음식으로 채워져 있고 찬장도 가득 차 있었다. 고모들이 완벽하게 준비해 두었다. 프랭키는 카르타 다 무지카 빵을 구우면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안티파스타 전채요리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맑은 수프도 점검하고, 주요리로 낼 뇨체티 알라 사르다에 알맞은 샐러드를 만들었다. 후식으로 사르데냐 꿀과 함께 낼 치즈 케이크도 준비했다.

미식가인 산티노는 그녀의 요리 솜씨에 반할 것이다. 프랭키는 마음을 강하게 먹기 위해 와인을 한 잔 더 마셨다. 오늘 밤은 어젯밤과 다르리라. 오늘 밤 그녀는 자제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식탁이 준비되자 그녀는 그를 불렀다.

식당으로 들어선 산티노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번득이는 눈으로 촛불이 일렁거리는 아름다운 식탁을 둘러보더니 눈길이 프랭키에게 머물렀다. 아름다운 다리를 온통 드러내 놓고 날씬한 허리에 매듭을 묶은 붉은색 치마를 입은 그녀에게. 그의 강렬한 눈이 그녀를 훑어보았다. 특히 풍만한 가슴이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블라우스를 보며 작은 신음 소리를 냈다.

프랭키는 숨을 들이쉬며 귓가에 울리는 고동 소리를 없애려고 애썼다. 신경이 온통 그에게 쏠려 있었다. 검은 디너 정장과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그는 무척 이국적으로 보였다. 짜릿함이 그녀의 등을 훑고 지나갔다.

"설마 날 독살하려는 건 아니겠지?" 산티노가 거칠게 물었다.

프랭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얼어붙었다. "농담이죠?"

"당신이 변덕스러운 건 알고 있지만, 이건 정말 믿을 수가 없군."

바보가 된 기분으로 프랭키는 도전하듯 턱을 내밀었다.

"요리를 잘하는 것도 해가 되나요?"

산티노의 잘생긴 입술이 재미있다는 듯, 그러나 불안하게 미소 지었다. "몇 시간 만에 이렇게 돌변하다니, 당연히 의심스럽지."

"그냥 앉아서 먹기나 해요!" 프랭키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화난 손길로 와인을 한 잔 더 따랐다. 그래, 산티노는 감동받지 않았다, 이거지. 나쁜 사람. 그녀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는 돌처럼 차가울지도 모른다.

" 모습으로는 성자도 유혹할 수 있을 거야." 산티노가 문가에서 빈정거렸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너무 멋지군. 이제 행복한가? 아까는 당신이 내게 칭찬을 기대하는 눈치여서

왠지 당신이 원하는 말을 해주기가 싫더군."

프랭키가 원망스러운 듯 그를 쳐다보았다. " 그건 당신이 솔직하지 못하고 완고하기 때문이에요, 산티노. 항상 그랬죠. 옛날엔 그런 줄 몰랐지만, 이젠 알겠어요." 그녀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서 경고했지." 산티노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난 게임 따윈 좋아하지 않아, 프란체스카."

그녀는 식탁에 앉아 눈을 내리깔았다. 입맛이 없어졌다. 그녀가 다시 눈을 들었을 때 산티노는 먼지 쌓인 샴페인 병을 열고 있었다.

"그건 어디서 난 거죠?"

"지하실에 있더군." 그가 대꾸했다.

"이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나 봐."

프랭키는 음식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그가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를 쳐다볼 때마다 그녀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마음속으로 위층 침대에 누워 있는 그들을 상상해 보았다. 자신이 낸 도전에 대한 걱정과 부정할 수 없는 열기가 그녀 속에서 전쟁을 벌였다. 부엌으로 으식을 가지러 갈 때마다 그녀는 와인을 조금씩 더 마셨다.

후식을 다 먹고 나서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갑자기 뭔가 발견한 듯 말했다.

"당신, 마음속으로 내가 처녀이길 바랐죠, 그렇죠?"

산티노의 잘생긴 얼굴이 긴장하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프랭키는 한 손으로 턱을 받쳤다. 그 갑작스런 질문에 그녀 자신이 놀란 것만큼이나 그도 놀랐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육감적인 입술이 마녀 같은 미소를 지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 말이 사실이란 건 알아요. 당신은 분명히 아주 실망했을 거예요."

"별로." 그의 입술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미소 지었다.

"긴장한 초보보단 낫지."

침묵이 깔리고 프랭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젯밤엔 그저 수줍어서 그랬어요." 그녀가 발끈해서 말했다.

"보통은 침대에서 아주 능숙한 편이에요."

"잘됐군오늘은 내가 좀 수줍어지는걸." 산티노가 농담조로 말했다.

프랭키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그의 아름다운 눈 속에 빠진 듯 무겁고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커피?" 그녀가 불쑥 물었다.

산티노는 마른 아랫입술을 적시는 그녀의 분홍색 혀를 바라보았다. 그가 갑자기 긴장하더니 벌떡 일어서서 식탁을 돌아 그녀에게 다가왔다. 산티노는 그녀에게서 잔을 빼앗고 그녀를 일으켜 안았다.

"난 안 마셔." 그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문하는 듯한 흥분이 프랭키를 관통했다. 긴 손가락이 그녀의 등을 감싸고 가깝게 끌어당겼다. 헐떡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프랭키의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침대로 가자구." 산티노가 숨을 들이쉬며 전율했다.

프랭키는 그에게 매달려 눈을 꼭 감고 자신을 압도하는 감각에 저항했다. 이건 그녀가 계획한 게 아니었다.

그가 주도권을 잡고 있다니.

"아니당신이 먼저 올라가요. 오늘 밤은 당신이 날 기다려요." 그녀는 그를 부추기면서 왜 자신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지 궁금했다.

"좋아." 그가 살짝 얼굴을 찌푸리더니 층계를 향해 성큼 성큼 걸어갔다.

그녀는 약간 비틀거리면서 의자 등받이를 잡고 몸을 가누었다. 불안감이 그녀를 덮쳤다. 술을 마시느라 별로 많이 먹지 않아서 그런가? 그녀는 어리석은 짓을 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커피를 한 잔 따라 마시고 신선한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머리가 약간 맑아졌다. 곧바로 그녀는 층계를 올라갔다. 난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구. 그녀가 계획한 그대로 산티노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옷을 벗기는 어설픈 시도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부부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얀 침대보와 대조적인 산티노의 남성적인 매력은 거의 압도적이었다. 황금빛으로 그을린 그의 몸은 숨을 앗아갈 정도로 섹시했다. 그녀는 갑자기 심한 구토를 느꼈다. 방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왜 그래?" 산티노가 물었다.

"세상에아래층에서 있었던 일이 내 상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

프랭키는 볼썽 사납게 욕실로 넘어지듯 뛰어들어갔다. 최악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잠시 후 그녀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비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먹고 나면 기분이 좀 좋아질 거야." 산티노가 건조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미심쩍은 눈으로 프랭키는 아침식사 쟁반에 담긴 약간 탄 토스트를 내려다보았다. 산티노를 보는 것보다

그게 더 안전했다. 어젯밤의 그 끔찍했던 순간들이 떠오르자 거북함이 몰려왔다. 산티노는 그녀의 상태를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더니, 곧 참을성 있고 친절하게 그녀를 돌봐 주었다. 그는 왜 그토록 친절할까?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친절한 건 산티노의 천성이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꽉 다문 잇새로 내뱉으며 입고 있는 잠옷을 내려다보았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건 여자로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당신이 왜 그렇게 취했는지 분명 이유가 있겠지."

"난 취하지 않았어요. 그저 약간 기분 좋은 정도였는데." 그녀가 투덜거리며 맛도 없는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매트 핀레이를 사랑하나?"

하마터면 토스트가 그녀의 목에 걸릴 뻔했다.

"물론 아니에요. 그는 그냥 친구일 뿐이라구요!"

산티노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럼, 그렇게 취한 건 초조해서였군."

"말도 안 돼요! 순전히 우연일 뿐인데 왜 그렇게 이유를 갖다붙이는 거죠?"

산티노의 아름다운 입술이 딱딱하게 다물어졌다.

", 과연 그게 우연일까?" 그는 문가에서 다시 한 번 그녀를 쳐다보았다. 프랭키는 붉어진 뺨을 감추려고 머리를 숙였다.

그가 방을 나갔다고 생각한 그녀는 쟁반이 들리자 깜짝 놀랐다. 산티노가 침대 끝에 앉았다.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고 애쓰는 프랭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그가 놀랍게도 빙그레 웃었다.

갑작스런 그의 눈부신 미소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녀는 그의 향취를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남성적이고 익숙한 향취를. 숨쉬기가 힘들어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넓은 어깨를 만졌다. 그녀의 눈은 황금 불꽃으로 타오르는 그의 눈에 갇혀 버렸다.

그가 아주 부드럽게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의 부드러움이 그녀의 쑤시는 듯한 감각을 달래 주었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그를 더욱 더 원하게 만들었다. 아니, 매달리고 싶게 만들었다. 그는 약간 굶주린 듯 그녀의 입술을 탐하였고, 그녀는 두 팔로 그를 껴안고 더욱 끌어당겼다. 그녀는 몸이 붕붕 뜨는 기분이었다. 갈망이 그녀의 내부에서 폭발했고, 그의 혀가 깊숙이 들어오자 흥분의 파도가 그녀를 덮쳤다.

산티노는 머리를 들고 그녀의 어지러운 표정에 몰두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눈만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난 아직 아침을 안 먹었어." 그는 중얼거리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방을 나갔다.

갑작스런 거절에 놀란 프랭키는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놀라울 정도로 뜨겁게 타올랐다가 곧 식어 버리다니. 그는 아직도 그녀의 방어벽을 아이가 장난감 탑을 쓰러뜨리듯 간단하게 뚫었다.

더 나쁜 건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육체적인 갈망일 뿐이야.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는데 현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산티노의 목욕가운을 낚아채며 그녀는 얼른 바깥으로 나갔다.

"프란체스카?" 산티노가 부드럽게 불렀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다 복도에 서 있는 매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매트도 그런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란 듯했다.

"매트?" 그녀가 더듬거렸다.

"그래나야." 그녀의 동업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더니 점잖지 못한 눈으로 남자 목욕가운을 입은 그녀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진행 중인지 말해 줄래?"

 

7

복도에 흐르는 무거운 긴장 때문에 계단을 내려가는 프랭키의 등이 뻣뻣해졌다. 붉어진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는 매트의 눈이 분노와 비난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꼼짝 않고 험악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산티노가 무척 신경 쓰였다.

"도대체 여기서 뭐하는 거야, 매트?" 프랭키가 불안하게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이곳이 마지막으로 남은 곳이었어."매트가 대답했다.

"이 마을 이름과 네 가족이 여기 산다는 게 기억났어. 그런데 왜 아무에게도 어디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

"어제 아파트 자동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겼어."

프랭키는 여전히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매트가 회사를 떠나 사르데냐로 날 찾아 달려올 이유가 있나?

"연락이 좀 늦은 건 알지만, 그렇다고 날 찾아 이곳까지 올 필요가 있어?"

"네 어머니가."

"우리엄마?" 프랭키는 믿을 수 없어서 그의 말을 잘랐다.

매트가 작게 욕설을 지껄였다.

"네 어머니가 전화를 하셔서 너와 연락이 되냐고 물을 때까지 네 걱정은 손톱만큼도 안 했어. 네가 사르데냐에 있을 거라고, 아직 연락이 없었다는 내 말에 네 어머니는 히스테리를 일으켰어."

"히스테리?" 프랭키가 멍한 목소리로 반복했다. 그런 감정적인 상태의 델라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 그래서 나도 당연히 걱정이 되더군. 게다가 네가 렌터카를 돌려줬다는 걸 확인하자 뭔가 아주 의심스럽더라구. 아무도 휴가기간에 교통수단도 없이 돌아다니진 않잖아. 마치 네가 지구상에서 사라진 것 같더라니까!"

프랭키는 자신의 경솔함에 몹시 당황했다.

"솔직히 누가 날 걱정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그 전엔 아무도."

"그 전엔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잖아. 네 어머니는 경찰에 전화해서."

"경찰?" 프랭키는 너무 놀라 눈을 깜박였다. "

미안해이해가 안 되는구나. 사람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그래.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매트는 경찰이라는 말에 흠칫 놀라는 산티노를 불편한 눈길로 흘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어젯밤 텔레비전 뉴스에 네가 나왔다구. 영국인 여행자 실종."

", 세상에." 프랭키가 작게 중얼거렸다.

"네 어머니는 부자 후원자 때문에 네가 납치당했다고 생각해. 아니면."

"납치?" 산티노의 성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아니면 그 부자 후원자가 네게 복수하려고 꾸민 일이거나."매트는 통렬하게 비꼬는 투로 말하며 혐오스러운 눈으로 산티노를 바라보았다.

"내 생각에 그 두 가지 가능성이 들어맞는 것 같군. 낯선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남편과 아늑하고 은밀한 시간을 보내는 걸 보니."

", 이런. 엄마에게 전화해야겠어. 매트, 정말 미안해. 델라가 일을 이렇게 크게 벌릴 줄은 몰랐어."

"죄의식 때문이지." 산티노가 이를 갈 듯 쏘아붙였다.

"아직도 결혼한 상태라고 말을 했어야지, 프랭키. 다른 얘기는 모두 했잖아."매트가 비난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동거했는지 그도 알아?"

"동거?" 프랭키는 매트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래도대체 무슨 부부관계가 그렇게 이상해?"매트가 산티노에게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 그녀에게 남자가 많다는 건 알겠지. 물론? 오늘은 여기 있지만, 내일은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도 잊어버릴걸. 그게 나의 프랭키거든!"

매트의 말에 분개한 산티노는 잔혹한 호랑이처럼 벽에서 몸을 날렸다.

"당신!"

"제발!" 프랭키가 공포에 차 소리를 질렀고, 매트의 팔을 잡고 서둘러 응접실로 들어갔다.

"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거야, 매트? 도대체 뭘 잘못 먹었어?"

매트가 화를 냈다. "난 널 안다고 생각했는데! 우린 상당히 성공적인 팀이라고 생각했어. 심지어 너랑 결혼하려고도 생각했어. 사업에도 좋을 것 같고 해서."

프랭키는 그의 고백에 몸이 굳어졌다. 매트의 눈엔 그녀의 여행사 지분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리가 아파트를 떠나기 전까지 한 번도 내게 개인적인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잖아. 우린 그냥 아파트를 함께 쓰는 사람일 뿐이야. 일하는 시간 이외엔 서로 별개의 생활을 해왔잖아."

매트는 듣고 있지 않았다. " 그래, 그 산티노델라의 말에 의하면, 열여섯 살 때부터 네 남편이었던 그가 무슨 조건을 들어주는데 이런 더러운 주말을 보내는 거야?"매트가 빈정거렸다.

"넌 산티노에게 우리가 연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어.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매트는 얼굴을 찌푸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보통 남자가 바보처럼 느끼는 게 어떤 기분인지 모르지? 제길, 이젠 지겹다! 빨리 경찰에 연락해. 그리고 빌라는 어떻게 됐어?"

아직도 자신이 일으킨 소동에 대한 죄의식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 그 일은 아직도 진행 중이야."

"이러고 있는 게 일이라구?"매트가 응접실 문을 열고 그녀를 씁쓸하게 쏘아보았다.

"네게 아무 일이 없어서 기뻐. 하지만 지금 심정 같아선 네 엄마의 목을 비틀어 주고 싶어."

산티노는 복도에 없었다. 그리고 30초 안에 매트는 떠났다.

프랭키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나서 복잡한 심정으로 응접실로 달려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낯선 여자가 전화를 받더니 그녀의 신분을 물었다. 경찰에게 말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프랭키의 목소리가 떨렸다.

 

델라가 숨을 헐떡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너 괜찮니? 정말로 괜찮은 거야. 프랭키?"

"산티노와 함께 있어요, 엄마." 프랭키의 목소리도 떨렸다. "경찰을 부를 것까진 없었잖아요. 세상에."

"산티노와 함께 있다면, 이제 다 알겠네."델라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하더니, 개인적으로 통화할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열심히 애원했다.

"프랭키?" 그녀가 다시 전화에 대고 말했다.

"산티노와 내가 아직도 합법적으로 부부라니 정말 놀랐어요. 하지만 더 놀란 건 그가 우리에게 생활비를 보내 줬다는 사실이에요." 프랭키가 딱딱하게 말했다.

"엄마,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가만히 앉아서 네 결혼이 무효가 되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그건 금광 아래로 금을 던져 버리는 것과 같은 거였어! 다 널 위해서 한 일이었어."

"엄마, 제발." 프랭키는 고통스럽게 말했다.

"솔직해지세요."

"내가 얼마나 더 솔직해지겠냐? 산티노는 네 마음을 산산조각 내 놓고 나서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는 십대를 내게 맡겼는데! 널 그렇게 상처 입혔으니 그깟 돈 좀 낼 수도 있지."

"엄마, ."

하지만 델라는 멈추지 않았다. "내가 널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니, 프랭키? 그의 돈으로 네게 아름다운 옷과 화려하게 살 수 있게 해줬잖아? 상류층 사람들과 만날 수 있도록 널 파티에도 데리고 갔잖아? 그런 삶을 마다하고 성인이 되자마자 넌 이사가 버렸어. 그게 모두 내 잘못이냐?"

"아뇨, 하지만." 프랭키는 어머니의 말을 자르려고 했지만 화가 난 어머니는 끊임없이 말을 쏟아냈다.

"산티노와 함께 자지 않았다는 그런 거짓말을내가 손톱만큼이라도 믿었을 거 같아?"

델라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가 널 이용하고 버렸다는 사실을 덮어 버리려고 그런 거지. 그리고 산티노도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내게 약간의 돈을 집어 주고 그의 평판을 유지하는 거지. 비탈레가 싫증난 꼬마 신부를 버렸다는 소문이 나길 원하지 않았을 테니까!"

자신의 행동에 대한 델라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프랭키는 경악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에요."

"넌 거의 자살할 것 같았어, 프랭키. 그는 벌을 받아 마땅해. 그리고 지금은 산티노와 그의 더럽게도 돈이 많고 속물인 가족들이 앞으로 휘말리게 될 언론에 굽실거리는 꼴이 보고 싶어!"

"무슨 어언론?" 프랭키가 말을 더듬었다. 속이 메슥거렸다. 그때 누군가 수화기를 드는 것처럼 딸깍 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프랭키, 네가 사라져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다구!"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네 아버지가 사르데냐인의 복수에 대해 무서운 얘길 많이 해줬거든. 산티노가 그의 돈이 정말로 어떻게 쓰였는지 알아내면 널 없애려 할 거야. 사람들이 모르는 아내 때문에 치르게 될 비싼 이혼 비용과 언론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엄마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미친 생각이에요." 프랭키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넌 너무 착해, 프랭키. 비탈레 가는 권력 있고 무자비한 가족이야. 넌 그들에게 성가신 혹일 뿐이라구. 그래서 내가 산티노의 계획을 선수쳐서 망쳐 놓은 거야. 네 안전을 핑계로 그 모든 이야길 꾸민 거지. 지금 이집엔 기자들이 버글거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탈리아인이지. 그들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까?"

프랭키는 땀을 흘리며 크게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의 목소리를 흥분으로 착각한 델라가 물었다.

"산티노랑은 어때, 아가야? 5년 전 너희 둘을 갈라 놓은 건 그의 가족이라고 말할까아니면 뻔뻔스럽게도 십대를 유혹한 사람이라고 그를 나쁘게 말해 줄까? 네 위자료에 많은 차이가 날지도 몰라."

프랭키는 믿을 수가 없어서 머리를 휘저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 위자료에 관한 걱정은 내게 맡겨 두세요."

"델라."다른 목소리가 전화선을 통해 차갑게 울렸다. 프랭키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산티노요. 만약 기자에게 한마디라도 한다면, 오늘 당장 당신을 그 집에서 끌어낼 거요. 그러고 나서 당신을 사기죄로 법정에 세울 거요."

경악한 침묵이 전화선을 통해 전해졌다. 두 여자는 그제야 산티노가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넌 내 사위야!"델라가 가증스럽게 말했다.

"이런 경우가 바로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경우지. 경고했소." 산티노가 얼음처럼 차갑게 말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프랭키의 어머니도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프랭키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산티노가 응접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녀의 땀이 밴 손에서 수화기를 뺏어 내려놓고, 그것도 모자라는 듯 전화 코드를 빼고 나서 몸을 홱 돌려 그녀를 마주 보았다. 분노로 얼굴이 하얘진 산티노는 격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주 교훈적인 전화였어." 산티노가 한껏 빈정거렸다.

"당신과 당신 어머니는 보니와 클라이드 이후 가장 멋진 콤비야. 당신 어머니는 당신을 위해 언론사에 연락했더군. 당신은 행복한 마음으로 위자료만 기다리면 되고. 이 교활한 마녀 같으니라구. 당신이 실제적인 이익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우유처럼 창백해진 프랭키가 뒷걸음질 쳤다.

"산티노그건 정말 오해예요. 엄마는 지나치게 과잉반응을 한 거라구요.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날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곤 생각지 않으세요?"

"누구로부터 보호한다는 거야? 내게서? 왜 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내게서 보호할 필요가 있는 거지?"

산티노가 거칠게 물었다.

"엄마가 5년 전 내 말을 믿지 않는지 몰랐어요. 우리에 관한 얘기." 프랭키가 멍하게 말했다.

"엄마는 남자를 믿지 않아요. 내게 일어난 일이 엄마의 불신만 가중시킬 거라고 예상했어야 했는데. 엄만 언제나 아버지와의 일이 엄마의 인생을 망쳤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엄만 당신도 내게 같은 짓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물론 그게."

"나랑은 전혀 연락도 없이 구주처럼 사는 게당신의 인생을 망치는 거라고?"

산티노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의 어두운 얼굴이 분노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프랭키는 초조한 심정으로 분노에 찬 그의 거친 숨소리를 들었다. 그는 불타오르는 눈을 그녀의 혼란스런 얼굴에 고정시켰다.

"그래, 아마도 지금 당장은 내가 원하는 사실을 알아낼 수 없겠지. 난 당신의 인생을 망쳤고, 이제 당신은 꼬일 대로 꼬인 여자가 되었군."

"난 그런."

산티노가 코웃음 쳤다. "내가 당신에게 제공한 게 당신을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여자로 만들었군. 그래도 난 당신이 약간의 도덕심은 있는 줄 알았어!"

"난 그런 여자가 아니예요!" 프랭키는 턱을 들면서 뺨이 붉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당신의 연인도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던걸."

프랭키가 흠칫하며 화를 냈다.

"매트는 연인이 아니에요. 내 연인이었던 적도 없어요."

산티노의 입술이 뒤틀렸다.

"그는 분명히 신사는 아니더군. 당신과 함께 자고 나서 내게 당신이 얼마나 난잡한지 말해 주는 걸 보면."

프랭키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젠 다른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에도 신물이 났다.

"그래요, 내게 셀 수 없을 정도로 남자가 많았다면 어쩔 거예요?" 프랭키가 화가 나서 내뱉었다.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안 그래요?"

산티노의 얼굴이 천천히 붉어졌다. 아주 오랫동안 그는 얼음처럼 차갑고 위험스런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랭키는 코웃음으로 칼날 같은 침묵을 깼다.

"그래요. 난 창녀예요그게 뭐 대수인가!"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산티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유치하게도 그에게 충격을 주려던 그녀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쓸데없는 얘기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경찰에 전화해서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해야 하잖아요?"

"내가 이미 했어. 지방 경찰이 당신의 신분을 확인하려 오는 중일 거야. 그 바로 뒤엔 파파라치가 따라오겠지." 산티노가 음울하게 숨을 내쉬며 방을 나갔다.

"어서 여길 떠나야 해!"

프랭키는 그를 따라가면서 그가 핸드폰으로 무슨 지시를 내리는 것을 들었다.

"이 모든 우스꽝스런 소란은 모두 당신 탓이에요." 그가 전화 통화를 끝내자 그녀가 비난했다.

"날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고 그 빌라를 임대해 줬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예요. 집에 가서 사람들에게 당신과 이 모든 일들을 어떻게 설명해요? 매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봤잖아요. 그도 우리가 이상한 관계라고 생각하잖아요."

"섹스가 없는 이상한 관계지, 지겹게 얘기만 하는." 산티노가 난폭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젠 내가 이곳에서 하려고 했던 일을 할 시간이야."

그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와 강인한 팔로 그녀를 들어올렸다.

"산티노도대체 무슨?" 프랭키가 숨을 헐떡였다.

"부부침대에서 당신이 이국적인 육체를 즐기려고 이곳으로 데려온 거야." 산티노가 단호하게 층계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니 우리가 떠나기 전에 그 업적을 달성해야지."

"하지만 경찰이 지금 오고 있다구요!" 프랭키가 사실을 주지시켰다.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아니면 우릴 기다려야겠지."

"기다린다고우리가하는 동안?" 프랭키가 말을 더듬거렸다.

"왜 안 돼?" 산티노가 투덜거리며 방문을 발로 차서 닫고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어젯밤 그녀 혼자 잔 침대 위에.

프랭키는 얼굴을 덮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치우며 일어나 앉았다.

"<왜 안 돼> 라구요?"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따라 말했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아니지. 전형적인 사르데냐 남자에게 내 아름다운 신부를 육체적으로 소유하는 데 5년이 걸렸다고 말한다면, 나더러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할 거야." 산티노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지저분한 가십난에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세세하게 폭로하려면 필수적으로 섹스도 해야잖아!"

"날 완전히 잘못 판단한 거예요. 당신을 언론에 알릴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내게서 돈을 빼앗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것처럼?"

산티노가 이를 갈 듯 말하며 셔츠를 벗어 바닥에 던졌다.

"자신이 순수함에 대해 계속 거짓말을 하는데. 전혀 몰랐다는 당신의 말을 믿을 만하면, 돌연 태도를 바꿨지. 처음부터 당신도 이 사기극에 참여했다고 내게 말했잖아? 기억 안 나?"

프랭키는 놀란 눈으로 자석에 이끌리듯 산티노의 근사한 벗은 가슴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붉히며 눈을 돌리고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산티노는 그녀의 말을 하나도 믿지 않았다.

하긴 그날 여러 번 말을 번복한 걸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리고 지금 갑자기 그에게 사실을 말한다고 해서 그가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델라와 그녀의 통화를 엿듣고 난 후이니까 더욱 그러리라. 델라는 이상적인 엄마는 아닐지 몰라도, 5년 전 절망에 잠긴 딸에게 강한 동정심을 느낀 건 분명했다. 프랭키는 목이 메었다. 만약 델라가 그런 심정을 조금이라도 내보였더라면, 지금 두 사람의 관계가 이토록 멀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프랭키가 다시 그를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더 많은 얘길 해주고 싶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에 들어맞게 아무 말이나 하겠지."

숨을 헉 들이쉬며 프랭키는 그가 옷을 벗고 벌거벗은 채 서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수줍음과 충격이 뒤섞여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침을 삼켰다. 언제나 궁금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모든 여자들의 호기심을 채울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산티노."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만 해, 당신이 부끄러워한다곤 믿지 않을 거니까."

산티노는 격렬하게 말하고 나서 침대로 올라와 강한 두 팔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아무리 많은 남자가 있었던 여자라도 내 침대에선 나만 생각하게 만들어 주겠어."

"당신만?" 프랭키는 불타오르는 그의 눈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 멍하니 되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산티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당신이 내게 한두 가지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난 지금 그런 기분이 아니에요."

"당신이 그런 기분이 들도록 해주지. 어젯밤처럼 그렇게 취하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었는데! 당신은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동정심을 빨아들이지. 언제나 그랬어. 하지만 당신은 내 관심과 배려를 받을 자격이 없어."

그녀의 팔을 놓으며 산티노는 그녀가 입은 목욕가운을 벗겼다.

가운이 벗겨지고 프랭키는 얼어붙은 채 빠른 숨을 헐떡였다. 심장이 경주를 하듯 빠르게 두근거렸다.

산티노는 뜨겁고 굶주린 눈으로 그녀의 모든 여성스런 곡선을 더듬었다. 그가 확신에 찬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천천히, 관능적으로 그녀를 베개 위에 눕혔다. 그녀는 억눌린 숨을 내뱉으며 그가 손으로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쓰다듬는 것을 바라보았다. 뜨겁고 거친 그의 남성적인 몸이 그녀의 차갑고 여린 몸에 와닿자 그녀의 하얀 피부와 볕에 그을린 그의 피부가 대조를 이루었다.

낮은 단발성의 한숨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왔고, 달콤한 짜릿함이 몰려와서 머릿속이 온통 하얘졌다. 그가 머리를 숙여 이와 혀로 섬세하게 애무하자 그녀는 큰 소리로 신음했다.

"당신 정말 유혹적이군, 프란체스카." 산티노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완전히 쾌락에 열중하다니!"

안개 속에 싸인 머릿속으로 갑작스런 수치심이 뚫고 들어왔다. 그녀가 눈을 뜨자 산티노가 그녀의 등을 손으로 받치고 가운을 완전히 벗기더니 옆으로 던졌다. 사각거리는 하얀 면 이불에서 희미한 로즈마리 향기가 났다.

산티노가 그녀를 격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의 강인한 얼굴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로즈마리당신과 어울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프랭키는 눈빛이 멍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조금 전 그녀를 사로잡았던 감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느끼게 해준 그 격렬한 감각을. 이게 그녀도 원하는 것인가? 이렇게 육체가 원하는 대로 갈망을 채워 주고 나면 그녀도 자유로워질까? 그 기나긴 5년의 세월에서, 산티노에게서? 어제 그녀가 강한 마음을 먹을 수 있게 해주었던 주문을 마음속으로 외웠다. 산티노와의 섹스가 그녀 인생의 한 장을 접고 다른 장으로 옮겨 갈 수 있게 해줄 거라는 주문을.

"그리고 당신은 아직도 얼굴을 붉히는군. 그 영국인 특유의 장밋빛 피부가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이야."

산티노가 쉴새없이 그녀를 애무하며 속삭였다.

프랭키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에게 사슬로 묶인 듯 사로잡힌 채. 그의 칭찬에 그녀는 너무나 기분 좋았다. 너무 행복했다.

"당신은 너무 매력적이야, 프란체스카." 산티노가 격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다른 남자가 있었다 해도 지금은 상관하지 않겠어."

"아무도 없었어요." 프랭키가 속삭였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넓은 어깨를 어루만졌다.

단단한 근육과 부드러운 살결을. 이 침대에 있는 것이, 이 집에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세상과 문을 닫고 바로 5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당연히 이래i 했어,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결코 그에게 열중해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산티노를 볼 때마다 그렇게 녹아드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당신이 날 그런 눈으로 볼 때면." 산티노가 거칠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전희는 다 집어치우고 섹스에 굶주린 십대처럼 당신에게 덤벼들고 싶어."

"정말?"만족감이 프랭키의 도톰한 입술을 미소 짓게 했다.

산티노는 머리를 숙여 굶주린 듯 그녀에게 키스했다. 단호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잡고 입술을 짓누르며 입 안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프랭키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전율하는 흥분 속으로 가라앉았다.

부드러운 그녀의 피부를 더듬는 그의 손길이 사뭇 거칠었다. 그의 조그만 움직임과 애무에도 그녀는 튀는 공처럼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의 검은 머리를 헤집으며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가 몸을 일으키며 만족스런 표정으로 그녀의 혼란스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주 위험스러워 보였다.

"난 아무데도 가지 않아, 프란체스카. 당신이 거짓으로 꾸밀 수도 자제할 수도 없는 단 한 가지, 당신의 열정은 내겐 진정한 선물이야. 완전한 당신의 굴복이야말로 나의 승리지."

그녀는 뱃속이 뒤틀렸다. 그녀를 지배하는 열정의 물결을 멈출 수 없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가 웃으면서 다시 키스하자, 그녀는 또다시 흐물흐물해졌다. 온몸이 불타올라 더 이상 견딜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욕구, 그보다 더한 절망적인 갈망에 사로잡혔다.

그의 입술이 부풀어오른 그녀의 가슴을 애무했고, 두 손은 여성스런 곡선을 샅샅이 헤집고 다녔다. 프랭키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쾌락에 사로잡힌 그녀는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신음 소리를 냈다.

"당신은 벌써 날 받아들일 준비가 됐어." 산티노가 으르렁거렸다.

그의 강인하고 단호한 얼굴도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몸을 들어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뜨겁고 급한 남성이 느껴지자 프랭키는 숨을 헐떡이며 긴장했다.

그러곤 그가 움직였다. 쾌락은 충격적인 고통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가 깊숙이 들어오자 그녀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한순간 산티노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찌를 듯한 눈으로 붉어진 그녀의 놀란 얼굴을 살펴보았다.

"거짓말을 하면 마땅한 벌을 받는다지만."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사실을 알았더라면 천천히 부드럽게 했을 거야."

프랭키는 고통 때문에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통이 사라지기 전까지 움직이기가 두려웠다. 그녀는 잠시 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느낌이 아주 이상해요." 그녀가 속삭였다.

"기분이 좋아질 거야." 산티노는 마지못해 웃으며 약속했다.

그런 건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곧 그의 말대로 되었다. 그녀의 세계가 그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다.

드디어 산티노가 그녀를 놔주었다.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산타 클로스와 요정님." 그가 작게 속삭였다.

"가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지."

침묵이 팽팽하게 흘렀다. 산티노는 그녀의 화난 얼굴을 발견하고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를 기다렸다.

"당신을 더욱 증오해요!"마침내 프랭키가 그에게 내쏘았다. 몸과 마음이 다 발가벗겨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침대에서 나가려고 하자 강한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

"나의 신부, 귀여운 거짓말쟁이. 어젯밤 당신이 그렇게 취한 것도 당연하군. 나랑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니 용기가 필요했겠지." 산티노가 재미있다는 듯 놀려대더니 그녀의 화난 얼굴을 할퀴듯 쳐다보았다.

프랭키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대로 침대 위에 눌러졌다.

"안 돼." 산티노가 거칠게 말했다.

"혀로 때리는 건 몰라도 손으론 안 돼. 당신이 내게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만 알아 둬."

프랭키는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몸을 비틀었다.

"놔줘요!" 그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내 들고양이 아내." 산티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만지기만 해도 당신은 열정으로 빠져들어. 열정은 언제나 당신을 배신할 거야."

"당신을 저주해요, 산티노. 입 다물어요!" 그녀가 소리쳤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캐글리어리에서 그날 당신이 외친 걸 결코 잊지 못할 거야. <당신은 내 거였어> 당신은 비명을 질렀지. <이젠 당신이 죽어 버렸음 좋겠어!> 라고. 당신은 진심으로 그렇게 소리친 거야."

산티노가 회상하듯 말했다.

"만약 그때 총이라도 있었으면 날 쐈을걸. 당신이 날 갖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하도록. 가슴속에선 사라이 격렬한 증오로 변했지."

그날의 기억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프랭키는 눈을 감고 고르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서 짐을 꾸리고 싶어요, 지금."

"좋은 생각이야."

산티노는 무심한 손길로 그녀를 놓아주었다. 마치 왜 지금껏 그녀를 가까이 잡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헬리콥터가 곧 도착할 거야."

"헬리콥터?" 그녀가 물었다. 그러곤 그가 아래층에서 한 통화를 기억해 내고 투덜거렸다.

"당연히 그렇겠죠."

헬리콥터가 그들을 공항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가면 된다. 델라 덕분에 언론이 그들의 뒤를 쫓고 있으니, 당연히 산티노는 그녀와 함께 있으며 언론의 관심을 부추기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욕실로 달려갔다. 이제 끝났다. 완전히, 영원히 끝났다. 앞으로 다시는 산티노를 만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프랭키는 멍하니 오랫동안 허공을 응시했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수건을 잡아채며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잃어버린 처녀성을 애도하는 건가?"

깜짝 놀란 프랭키는 수건을 떨어뜨렸다.

"여기서 뭐해요?" 그녀가 딱딱하게 물었다.

"나두 샤워하려고욕실이 하나뿐이거든." 산티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가족들에게 직접 작별인사를 하고 싶으면,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로마에서 전화하든가."

"로마?" 프랭키가 젖은 수건으로 가슴을 가리는 동작을 멈추며 물었다.

"난 로마로 가지 않을 거예요."

"아니, 당신은 로마로 갈 거야." 산티노가 확신했다.

"어느 곳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어?"

"내 생각엔난 우리가 공항으로 가서 각자의 길을 갈 거라고그래서 난 집으로 갈 생각이었어요."

"당신의 생각이 틀렸어. 아직 3주가 지나지 않았잖아. 우리가 침대에 뛰어든 한 시간 전부터 겨우 시계가 째깍 째깍 가기 시작했는걸." 산티노가 샤워기를 틀었다.

"날 데리고 다니면 언론이 계속 따라다닐 거예요!"

산티노는 거리낌 없이 목욕가운을 벗었다.

"프란체스카,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텐트를 쳐야 한다 해도 상관없어. 당신은 3주 동안 나와 함께 있는 거야." 그가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당신이 더 이상 내게 볼일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뭐라고요?" 프랭키가 속삭였다.

"조심성 없이 섹스를 하다니 내 잘못이야." 산티노가 냉정하게 말했다.

"난 당연히 당신이 피임을 한다고 생각했어. 경험이 많다고 생각했으니까."

프랭키가 숨을 헐떡였다.

"그러니까안 했어요? 그럼."

그녀는 자신을 경멸하는 남자의 아기를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산티노도 굳어 있었다.

"임신했더라도 당신과 이혼할 거야." 산티노가 잔혹하게 말하고 나서 물줄기 속을 들어갔다.

"3주 후, 당신은 떠나는 거야!"

 

8

"하지만 당신 여권은 카파렐리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요, 부인." 키 작은 지방경찰이 놀라움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게다가 미혼으라고 기재되어 있군요."

"프란체스카는 영국 여권을 발급받을 때 처녀 때 성을 쓴 거요." 산티노의 말에 프랭키는 그를 바라보았다. 잘 재단된 근사한 회색 양복이 그의 넓은 어깨와 마른 엉덩이, 긴 다리를 효과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었다.

"카파렐리 성을 계속 쓰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해서입니까?" 나이 든 남자가 불안하게 물었다. 그는 비탈레 가족에게 일어난 납치 사건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어깨를 한 번 들썩이며 프랭키에게 여권을 돌려주었다.

"당신의 얼굴이 온갖 신문과 텔레비전에 나왔어요. 좀 우습군요, 비탈레씨. 당신 가족은 사생활을 열성적으로 지키는 걸로 유명한데, 당신 아내는 오늘 이탈리아에서 몰라보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산티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프랭키는 그가 경찰의 말에 경악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신중함, 그래, 그는 라 로카에서 처음 만났던 날에도 신중함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땐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산티노가 유럽에서 가장 부자이자 뉴스거리가 되는 가족의 일원인 줄 몰랐으니까.

"날 데리고 로마로 가는 건 미친 짓이에요." 프랭키는 경찰이 차에 타고 떠나는 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프란체스카, 청룡열차를 타고 있다가,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아 겁이 난다고 해서 그 청룡열차에서 내릴 수 있는 건 아냐."

프랭키는 정곡을 찌르는 그의 말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뱃속이 뒤틀렸다. 그들 사이의 긴장은 치통처럼 그녀의 신경 끝을 건드렸다. 계곡으로 낮게 비행해 오는 헬리콥터 소리가 그들 사이의 침묵을 깼다.

 

비행하는 동안 프랭키는 잠이 들었다. 산티노가 그녀를 깨웠고, 그녀는 옆에 있는 창문으로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로마의 피우미시노 공항은 아니었다. 헬리콥터는 끝없는 푸른 잔디로 둘러싸인 것처럼 보였다.

"하루 종일 해변에서 놀다 온 아이마냥 헝클어진 모습이군." 산티노가 그녀를 들어 단단한 땅 위에 내려 주면서 말했다. 그는 평소 같지 않게 긴장한 듯 보였다. 그녀의 졸린 듯한 멍한 얼굴을 살펴보는 그의 아름다운 입술이 더욱 긴장했다. 그는 멈춰 서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고 구겨질 대로 구겨진 면 드레스 주름을 펴주었다.

프랭키는 하품을 참으며 잔디밭으로 한 발 내딛었다. 그건 진짜 잔디였다. 50미터쯤 앞에 웅장한 건물이 늦은 오후의 햇살 아래에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숨을 헐떡였다.

"내 집이야." 산티노가 단호한 손으로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이끌었다.

"당신 집? 도대체 우리가 어디에 있는 거죠?" 그녀가 어지럼증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로마에서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야. 여긴 파파라치들이 귀찮게 못 할 거야. 엄격한 경비체제가 24시간 지속되고 첨단 감시체제를 운영하고 있으니까. 빌라 폰타나에선 나뭇잎이 하나 떨어지는 것도 알 수 있지."

프랭키는 바로 앞에 서 있는 구식의 웅장한 건물에 압도당했다.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운 외관을 가진 2층짜리 건물 중앙은 양쪽으로 곡선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고, 정면에 햇살이 가득 내리비치는 광장이 있었다. 그 너머로 커다란 돔과 아치로 된 입구에 프랭키가 이제껏 본 중에서 가장 긴 리무진이 있었다.

"우리 부모님을 만날 거야." 산티노는 무표정하게 말했지만, 그의 강인한 옆얼굴은 굳어있었다.

"영광스럽게 여겨야 할 거야. 스위스에서 이곳까지 오신 거니까."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프랭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당신의부모님?"

"한때 당신이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어 했던 분들이시지." 산티노가 거칠게 말했다.

"우리 어머니에게 요리법과 뜨개질법을 배우는 상상을 했잖아. 우리 부모님에게 날 아주 잘 돌보고 있다고 안심시키는 편지를 써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내게 물어 보기도 했지. 그리고 너무 멀어서 아들의 결혼식에도 오지 못한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그만 해요!" 프랭키가 소리쳤다.

출입구 아치를 지나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사랑스런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열린 문을 지나 그들은 대리석으로 꾸며진 웅장하고 긴 복도로 들어섰다. 웅장함에 기가 눌린 프랭키는 목소리를 죽여 작게 속삭였다.

"좋아요, 화성인에 관한 것만큼이나 당신의 배경에 대해 아는 게 없었던 건 인정해요.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부모님을 만날 수 없어요. 날 좀 봐요!" 그녀는 잔뜩 구겨진 드레스를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프란체스카당신이 지금 모델처럼 입고 있다 해도 아무 상관없어. 어쨌든 당신은 그들의 취향에 맞는 사람은 아니니까." 산티노가 빈정거리듯 입술을 뒤틀었다.

"왜 부모님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안 했어요?"

"부모님은 내 집에 거의 오시지 않아. 그런데 그 망할 놈의 언론에 우리 가족 이름이 오르내리니까 나타나신 거지."

"그럼, 당신 혼자 부모님을 만나요." 프랭키가 투덜거렸다. "나까지 만날 필요가 없잖아요."

"그렇게는 안 되지." 산티노가 거칠게 말하고 나서 한 팔로 그녀의 등을 감싸안았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걱정스런 표정의 작은 여자가 복도 끝 왼쪽 문 바깥에 서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미친 듯이 이탈리아 어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산티노가 달래듯 반응했다.

"내 가정부 리나야. 당신에겐 나중에 소개해 줄게. 아무래도 어머니가 그녀를 달달 볶은 모양이야."

산티노는 큰 응접실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입이 바싹바삭 타는 프랭키는 우아하게 옷을 차려입은 나이 든 여자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차가운 파란색 정장이 그녀의 눈과 잘 어울렸고, 산티노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키가 크고 근사한 남자가 창문가에서 몸을 돌렸다. 그 역시 아내와 똑같이 우아함과 정중함을 갖추고 있었다.

"프란체스카." 산티노가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우리 부모님소냐와 알바로야, 인사해."

"인사 따위는 안 받겠다."소냐 비탈레가 차갑게 말했다.

"설명해 보거라, 산티노! 어떻게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이런 여자와 관계하게 되었는지?"

"그 여자와는 벌써 몇 년 전에 끝난 걸로 아는데." 알바로 비탈레가 말했다.

"그런 약속은 한 적 없습니다." 산티노가 덤덤하게 말했다. "프란체스카는 제 아내입니다. 예의를 가지고 그녀를 대해 주십시오."

소냐 비탈레가 분노에 찬 눈으로 프랭키를 쏘아보았다. 비웃는 미소를 띤 채 소냐가 거만한 얼굴을 홱 돌렸다.

"저런 여자를 내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저 역시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산티노가 거칠게 대꾸했다.

"하긴 일년에 한 번 정도 볼까 말까 하니 그다지 큰 희생은 아니군요."

프랭키는 놀란 눈으로 산티노를 쳐다보고 난 후 그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들의 적의에 놀란 소냐는 그 충격을 숨기지 않은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너도 이 결혼이 적당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해." 알바로 비탈레가 끼어들었다.

"네 아내에게 무례하게 굴려는게 아니다. 하지만 네 어머니의 솔직한 말을 사과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아. 프랭키의 배경은 사실 우리 가족의 위치로 보자면."

"우린 왕족이 아니에요, 아버지." 산티노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와 얘기하는 건 시간 낭비 같구나, 산티노. 정말 이일보다 더 우릴 실망시킬 수 없을 게다."

그의 어머니가 잔인하게 선언했다.

"넌 이 모욕적인 결혼으로 네 형의 기억을 배신한 거야."

프랭키는 옆에 선 산티노가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고양이처럼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어머니의 공격에 맞서 그를 위해 싸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소냐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넌 언제나 리코의 그늘에 있었어, 산티노. 한때 그의 것이었던 모든 것이 네게 왔잖아. 네 형을 생각해서라도 명예롭게 행동해야지. 리코는 결코 이런 식으로 비탈레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게다. 그는 우리 가족의 자랑이었어."

"전 형이 아니고 결코 형일 수도 없어요, 어머니." 산티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프랭키의 날씬한 허리에 놓인 그의 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그녀의 살갗을 아프게 조였다.

소냐 비탈레가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냐!" 그녀가 신랄하게 말했다.

"네가 멜리나와 결혼하는 게 우리의 소원이란 걸 알잖아. 그런데 우릴 웃음거리로 만들다니. 네가 멜리나를 신부로 데려오면, 그때 다시 보자. 그 전엔 안 된다."

알바로 비탈레도 움직였다.

"산티노, 너와 둘이서만 얘기할 수 있을까?" 그가 물었다.

"실례하겠소, 프란체스카."

"난 차에서 기다릴게요, 알바로."소냐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들을 지나갔다.

프랭키는 자신이 뭘 할 건지 생각지도 않고 산티노의 느슨해진 팔에서 빠져나와 소냐를 따라 응접실을 나왔다.

"왜 그를 사랑하지 않는 거죠?" 프랭키가 복도에서 격렬한 어조로 소냐에게 물었다.

소냐 비탈레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더니 어깨 너머로 프랭키를 돌아보았다.

"뭐라고?"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을 더듬거리던 소냐가 다시 말했다.

"산티노는 내 아들이야. 물론 그를 사랑하지."

"아니, 그렇지 않아요!" 프랭키가 비난을 가득 담은 눈으로 소냐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를 증오하듯, 원망하듯 쳐다보잖아요. 조금 전에도 그에게 상처를 주려고 했잖아요. 내가 알고 싶은 건 그 이유에요. 왜죠? 산티노는 여러 방면에서 뛰어나요. 영리하고 사려 깊고 솔직해요. 모든 엄마들이 그런 아들을 가진 걸 자랑스러워할 거예요."

아직도 아름다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나이 든 여자가 프랭키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놀람과 경악이 소냐의 눈 속에 피어올랐다.

"어떻게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순간 그제야 자신의 행동에 놀란 프랭키는 얼어붙은 채 혼란스러움으로 얼굴을 붉혔다.

도대체 무엇에 씌워서 자신이 그렇게 말했는지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군, 내 아들은 그를 위해 싸워 줄 입이 사나운 여자와 결혼했군.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는 여우처럼 말이야. 하지만 산티노가 날 모욕한 걸 감사해하진 않을 거야."

소냐는 장갑을 끼면서 계속 말했다. 그러나 다시는 프랭키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아마 널 산 채로 잡아먹으려고 할 게다. 그만큼 산티노가 날 사랑하기 때문이지. , 그래, 네 엄마가 언론에 천박하게 떠들지 않아도, 네가 내 아들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건 알겠구나. 하지만 넌 산티노의 인생에 있어 먼지일 뿐이야. 곧 사라질."

프랭키는 소냐가 날카로운 칼로 갈비뼈 사이를 찌른 것처럼 몸을 움찔했다. 소냐는 다시 등을 돌렸다.

"네가 그의 정부가 될지는 몰라도 아내는 아냐. 멜리나가 그의 아내가 되겠지. 그땐 우리 모두 흔쾌히 받아들일 거야."소냐가 신랄하게 말했다.

"산티노가 네가 지겨워지면 분명히 그렇게 될 게다. 멜리나에게로 돌아가겠지. 그때가 되면 내 말이 옳았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그를 잃었다는 것도."

소냐는 말을 마치고 휙 걸어가 버렸다. 프랭키는 비틀거리며 걸어가 뜨겁고 축축한 이마를 차가운 대리석에 갖다 댔다. 권투 챔피언과 10라운드나 싸운 것처럼 몸이 흐물거렸다. 아니, 난 산티노를 사랑하지 않아. 아냐, 아냐, 사랑하지 않아! 그녀는 10대 때보다 훨씬 더 현명해졌다.

그래, 그렇지도. 하지만 열여섯 살 때 느끼던 본능을 지금도 느끼고 있잖아. 마음속의 또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맙소사, 난 아직도 산티노를 사랑해. 프랭키는 경악했다. 그를 내게서 떨쳐내 버릴 수가 없었어. 그는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거야. 내 마음속 깊이내 머릿속 깊이마치 내 피부의 일부인 양.

혼란에 빠져 있는데, 알바로 비탈레가 응접실에서 나와 성큼성큼 지나갔다. 잔인하게도 그녀를 아는 체도 하지 않고.

프랭키는 창백한 얼굴로 응접실로 들어갔다. 산티노는 그녀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독해 보이는 술을 한 잔 따르고 있었다. 그는 손에 술잔을 들고 창가로 어슬렁거리며 가더니,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넓은 어깨가 상당히 굳어 있었다.

프랭키는 대답하고 강인한 그의 옆얼굴을 어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녀의 몸만 원하는 남자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 젠장. 그녀는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이것이 산티노의 완벽한 성격 이면에 있는 어두운 면인가. 그녀는 그에게 이런 면이 있으리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는 결코 그녀를 벌하지 않고는 보내 주지 않을 것이고, 탐욕이나 속임수를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다. 강한 남자는 강한 원칙을 가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원칙이 없다면 산티노가 덜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녀는 까슬까슬한 목을 가다듬고 마음속에 떠오른 첫 번째 질문을 했다. "멜리나가 누구죠?"

산티노가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친구우리 어머니에겐 딸이나 마찬가지지."

프랭키의 몸에서 긴장이 증기처럼 사라졌다. 질투로 가슴을 태우던 그녀에게 강한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그럼 리코는당신의 형인가요?"

그녀는 산티노가 흠칫 놀라는 것을 보고 긴장했다.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깊은 슬픔과 씁쓸함이 가득 고였다.

"한 번도 형이 있다는 얘긴 안 했잖아요." 프랭키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형은 내가 당신을 만나기 전, 그 해에 죽었어. 나보다 열 살이 더 많았지." 산티노가 작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산티노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얼마간 팽팽한 긴장의 순간이 흘렀다. 그러더니 어깨를 들썩였다.

"형이 날 데리고 알프스로 등산을 갔어. 둘째날 등산을 포기했어야 했지. 조건도 열악했고 날씨도 바뀌고 있었거든. 그러나 형은."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형은 악 조건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완고하게 버텼어. 눈사태가 우릴 덮쳤고 형은 목숨을 걸고 날 구했어."

", 세상에." 프랭키가 숨을 헐떡였다. 방을 가로질러 가 그를 편안하게 안아 주고 싶었지만, 그의 거부가 두려웠다.

"당신 가족들에게 너무 엄청난 재난이었겠어요."

"그래엉뚱한 아들이 산을 내려왔으니."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프랭키가 몸을 떨며 애원했다.

"부모님이 당신에게 그런 인상을 주는 건 잃어버린 아들이 그리워서 그런 거지, 결코 당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산티노는 그녀에게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어머니가 형과 날 비교해서 내 가치에 대해 말할 때 함께 있었잖아!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프랭키는 그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그저 겁쟁이처럼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형은 대단한 남자였어. 어머니는 형이 걸어다닌 땅조차 숭배할 정도였지. 제길, 나도 그랬고!"

산티노가 이를 갈았다.

"형은 다른 어떤 사람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성공적인 사람이었어. 형은 죽었지만 우리 가족들의 삶에 사라지지 않는 커다란 구멍을 남겨 놓았어. 난 살아 있는 시체처럼 취급당했지. 우리 어머니는 형 대신 살아온 날 용서할 수 없었던 거야."

산티노의 눈동자가 죄의식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사르데냐에 따로 떨어져 사는 숙부의 집에 그토록 자주 왔던 이유였다. 바사리 신부님은 친절하고 실제적인 사람이었다.

산티노는 십대 때 부모님들에게 부랑자처럼 취급당했다. 리코의 죽음이 결코 산티노의 잘못이 아니라는 신부님의 확신과 계속적인 애정에 그는 마음의 평안을 찾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런 생각에 마음이 따스해졌다가 곧 상처받고 괴로웠다. 한때 산티노와 모든 걱정과 공포를 함께 나누었다고 자부했는데.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형 얘길 한 적이 없었다. 얼마나 불공평한 관계였는가. 그는 그녀의 욕구와 근심을 들어주었지만,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베풀고, 그녀는 가졌다.

"갑자기 무척 조용해졌군." 산티노가 작게 말했다.

당황한 프랭키는 머리를 들었다. 산티노가 이미 방을 가로질러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의 갑작스런 친밀감에 불안해졌다. 그를 사랑한다는 깨달음은 어떤 것보다도 더 위협적이었다. 그녀는 격렬한 눈빛으로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고백은 영혼에 좋은 법이지." 산티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뻗어 그녀를 만졌다.

"당신의 아름다운 녹색 눈으로 내게서 더한 고백까지 받아 내고 싶은 거야? 어쨌든맙소사, 지금 당장 당신을 가져야겠어!"

 

9

"산티노." 프랭키는 숨을 헐떡이며 그의 눈이 성적인 굶주림으로 번득이는 것을 보고 뒤로 물러났다.

"당신도 날 원해."

산티노가 신음하며 그녀를 문에 밀어붙인 채 머리를 숙여 그녀의 목에 입술을 갖다 댔다. 짜릿함이 그녀의 목에서 발끝까지 관통했다.

"그렇지?" 그가 확신을 가지고 물었다.

"." 그년 불안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산티노는 그녀의 떨리는 허벅지를 손으로 벌리고 드레스를 끌어올렸다.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녀를 애무하며 만족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프랭키는 흥분으로 전율하며 목 깊숙이에서 떨리는 신음을 토해 냈다. 그때 탁자에 놓인 차가운 푸른색의 핸드백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당신 어머니가 핸드백을 놓고 가셨어요!" 그녀가 속삭임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산티노는 마지못해 아주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그의 눈은 밤하늘처럼 멍했다.

"저기핸드백!" 프랭키가 떨리는 손으로 가리켰다.

"금방이라도 이곳으로 들어오실 거예요!"

산티노가 눈을 깜박거리더니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곧 천천히 손에 힘을 빼고 그녀의 드레스를 내려 주었다. 떨리는 숨을 내쉬는 그의 아름다운 광대뼈가 붉게 물들었다.

프랭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게 낫겠어요."

산티노는 마지못해 뒤로 물러섰다.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용기를 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굶주림으로 빛나고 숨은 거칠었다. 하마터면 그를 다시 껴안을 뻔했다.

그녀는 복도를 가로질러 웅장한 층계를 올라갔다. 남성적인 손이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그녀는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움찔하며 그녀에게서 물러서더니 곧 좌절감어린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오늘 아침 당신은 처녀였어. 그걸 짐작했어야 했는데못 했지."

그녀는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자신이 그의 노예가 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을 너무나 원한 나머지 제정신이 아니었어." 산티노가 이를 갈 듯 말했다.

할 말을 잃은 그녀는 인형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침묵 속에서 그는 강인한 팔로 그녀를 안고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가 침대 위에 그녀를 앉혔지만 프랭키는 처음 보는 침실을 감상할 시간도 없었다. 산티노는 그녀의 드레스를 허리까지 내리고 브래지어를 풀었다. 다른 옷들은 벗길 생각도 하지 않고 그는 굶주린 듯 성급하게 두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감싸쥐었다.

그들의 모습이 말처럼 생긴 커다란 거울에 비쳤다. 그가 그녀를 자극적으로 애무하면서 분홍빛 유둘르 갖고 놀았다. 프랭키는 쾌락으로 몸을 비틀며 그를 쳐다보았다. 정열에 휩싸인 그의 격렬한 얼굴을 보며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가진 힘을 실감했다. 마약처럼 산티노가 그녀를 갈망하게 만드는 힘그로 하여금 그녀를 원하게 만드는 힘.

그런 깨달음에 자극받은 그녀는 그의 팔 안에서 몸을 비틀며 그의 육감적인 입술에 키스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무릎이 흐물거려 그에게 매달리자, 산티노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자신도 그녀의 옆에 누웠다.

"맙소사당신은 마녀야.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산티노는 아직도 그녀의 허리에 감겨 있는 드레스를 벗겨냈다.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쳣다. 그가 격렬하게 다시 키스하자 그녀는 욕망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정복자처럼 그녀를 굽어보며 성급한 굶주림으로 그녀 안으로 들어왔다. 프랭키는 소리를 지르며 흥분으로 몸을 활처럼 휘었다. 그는 아주 거칠었고 그녀는 통제가 되지 않았다. 강렬한 쾌락의 시간이 고문처럼 흐르고 나서 그는 그녀를 거친 만족감으로 이끌었다.

산티노는 얼른 그녀에게서 몸을 뗐다. 갑작스런 한기가 그녀의 축축한 피부를 차갑게 만들었고, 그녀는 버려진 듯한 실망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가 강한 팔로 꽉 껴안아 주길 바랐다. 그녀는 거의 두려움에 가까운 눈으로 벽을 더듬어 산티노를 발견했다. 거북하게도 그는 아직도 옷을 입은 상태였다.

그는 침대에서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그의 원초적인 소유욕에 유린당하고 충격받은 채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산티노의 얼굴이 충격을 받은 듯 창백했다.

그 끔찍한 침묵 속에서 그는 어떻게 그녀가 침대 위에 있게 되었는지, 아니 누가 그녀를 그런 상태로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후회와 연민으로 가득 찼다.

그는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까운 의자 위에 걸쳐진 실크 이불을 잡아채서 그녀의 몸을 덮어 주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산티노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당신을 위해 목욕물을 틀어 놓을게."

욕실로 향하는 그의 등 뒤에 대고 프랭키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그 물에 빠져 죽기나 해요!"

그녀는 몸을 옆으로 굴려서 공처럼 구부렸다. 갑자기 자신이, 그가 주웠다가 지금은 버리고 싶어 하는 창녀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 또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녀의 몸을 원하는 그의 육체적인 욕망이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생각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내 성격이 두 개로 갈라진 것 같아." 산티노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이렇게 탐욕스러운 야수처럼 여자에게 빠져 본 적이 없어. 물론 당신이 그걸 즐겼다는 건 알고 있지만."

프랭키는 분노에 차 소리쳤다.

"여기서 나가요!"

산티노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손을 펴보였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나도 기분이 안 좋아."

"잘됐군요!" 프랭키가 내쏘았다. 어느새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

산티노가 옆에 앉아 두 손으로 그녀의 혼란스런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당신을 벌하고 싶었어정말로 당신에게 벌을 주고 싶었다구. 하지만 조금 전 난 당신에게서 한때 날 사랑했던 십대의 당신을 보았어. 그리고 지금 당신은 정말로 나이를 먹지 않은 것처럼 보여. 당신이 무슨 짓을 했든 간에, 그건 그냥 돈일뿐이고 난 더럽게도 돈이 많은 부자지." 그가 음울하게 말했다.

"라 로카의 그 카페에 있던 날로 되돌아가서 시간을 정지시키고 싶어."

"그래요." 프랭키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녀와 똑같은 생각을 하다니 놀라웠다.

산티노의 우아한 입술이 뒤틀렸다.

"솔직히 그게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어. 무엇보다 날 화나게 했던 건 당신의 거짓말이었으니까. 난 더러운 성질을 가졌어. 용서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지.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분노가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없어. 그래서 당신에게 실망하고 있어. 아주 많이 실망했어."

그는 아직도 더 강조하고 싶었지만 그저 넓은 어깨만 한 번 들썩였다.

"만약 내가 그 돈을 가지는 데 아무런 죄책감도 없다고 한다면 어떡할래요?" 프랭키가 충동적으로 물었다. 지금 그녀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고 있다. 그녀가 거짓말쟁이에, 사기꾼, 도둑이란 생각이 그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면 말이에요?"

산티노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또다시 먹구름처럼 위협적으로 어두워졌다.

"유치하게 굴지 마, 프란체스카. 거짓말을 자꾸 해서 당신의 이미지를 마법처럼 다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구." 그가 거칠게 경고했다.

"알아요. 하지만 난."

"잘 들어." 산티노가 경고하듯 그녀의 말을 잘랐다.

"당신이 그 사기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난 틀림없이 당신의 그 소중한 어머니를 사기죄로 고소했을 거야! 하지만 당신이 그녀와 같이 법정에 서는 건 원치 않아. 당신에게 그럴 수도 없고."

그녀의 거짓말이 어머니를 감옥에 보내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니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프랭키는 눈을 내리깔고 입을 꼭 다물었다. 그녀에게 죄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일으킬 만큼 말을 많이 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현명한 결정이야." 산티노가 그녀의 침묵을 칭찬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야 해. 그렇다고 당신이 변할 거라곤 생각지 않아."

그녀가 부풀어오른 눈을 비비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당신은 아직도 내 아내고 난 당신에게 책임이 있지."

산티노가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그렇다고 당신을 내 침대에서 함부로 해도 된다는 건 아니야. 당신에 대한 욕망을 자제해야 했어."

"그래요내 말은, 아니에요." 산티노의 맑고 지성적인 눈동자가 너무 많은 것을 내보일까 봐 두려웠다.

"당신이 좀 아플 거라고 생각되는데." 산티노가 후회스럽게 중얼거렸다.

"섹스는 항상 두 사람이 공평하게 즐거워야지.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이제 그만 해요." 프랭키가 당황해서 말했다.

"나도 내가 하는 일쯤은 알고 있다구요."

"아니, 당신은 몰라. 그게 문제지, 그게 문제라구." 산티노가 격렬한 어조로 그녀의 말에 반박했다.

"당신은 그저 매 순간 하고 싶은 대로 하잖아. 지금껏 당신은 30초 앞도 내다보지 않고 살아왔을 거야. 맹세할 수 있어! 그런 무모함이 전염병처럼 내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어. 하지만 내가 그걸 막을 거야, 여기서 바로 지금!"

그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단호하게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목욕물 틀어 놓고 저녁을 올려다 줄게. 배고플 거야. 알아, 나도 배고프니까."

프랭키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서둘러 욕실로 들어가다가 화려한 욕실에 넋을 빼앗긴 채 문가에 섰다. 산티노가 커다란 타원형 욕조 위에 달린 금빛 수도꼭지를 틀고 있었다. 그의 우아하고 절제된 동작 하나하나가 그녀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저 검은 머리는 언제나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걸까? 다른 남자들도 저렇게 육감적인 손을 가졌을까? 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산티노는 그녀를 필요로 한다. 그러 걸 보면, 그도 열정의 노예일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그런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그 거친 사랑이 그에겐 일종의 가타르시스로 작용했을 것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분노와 소외감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는 산티노를 되찾았다. 그리고 맙소사, 그는 너무나 완벽해서 프랭키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주 부드러울 수도, 아주 사려 깊을 수도 있다. 지금 그는 그녀를 위해 목욕물을 준비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기도 했다. 많은 남자들은 그런 인정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열여섯 살 때 정말로 사람을 잘 골랐다. 만약 이번에 그에게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만 할 수 있다면3주 안에 그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면 더 이상은 하느님의 은총을 바라지 않을게요.

산티노는 몸을 펴고 멍한 눈을 한 그녀를 발견했다. 그의 양볼이 약간 붉어졌다.

"그런 식으로 날 쳐다보지 마." 그가 아주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어떤 식으로요?" 프랭키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물었다. 산티노는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며 숨을 내쉬었다. "침대에서 좋은 시간을 가졌다고 해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거나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야."

아무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해도 말뜻은 화살처럼 연약한 목표물을 관통했다. 프랭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욕조에 차오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알아요." 그녀는 가볍게 말하려고 했지만, 목에 뭔가가 걸린 듯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지금 당신은 자신이 느끼는 게 뭔지 몰라." 산티노가 거만하게 말했다.

"오래 전에 당신은 내게 열중했고지금은 내가 당신의 첫 번째 남자가 됐으니."

"그러라고 부추긴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프랭키가 소리쳤다.

"당신이 처녀인 줄 알았더라면, 당신이 내게 솔직했다는 걸 알았더라면, 프란체스카절대 당신을 건드리지 않았을 거야." 산티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신에게 경험이 있다고 믿었을 땐,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결혼 첫날밤을 요구하는 게 그리 큰일은 아닌 것 같았거든."

프랭키는 팔짱을 꼈다.

"큰일은 아니라구요?" 그녀의 귀에도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들렸다.

그가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죽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건 별로 적정한 단어 선택이 아닌 것 같군." 산티노가 말했다. 그의 단단한 턱선이 조여들었다.

"하지만 당신은 다른 남자들이 있었다고 확신하게 만들었잖아. 프란체스카, 이건 지금 내가 당신과 하고 싶은 대화가 아니야. 아무래도 둘 다 숨쉴 공간이 필요한 것 같군."

그의 말이 그녀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래요좋아요, 알겠어요. 성적으로 세련되진 못했어도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어요. 당신은 하룻밤 즐기고 나서 새벽이 되기도 전에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그런 사람이야!"

"당신이 어떻게 알아? 세상에나랑 비교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서!" 산티노가 거칠게 소리쳤다.

프랭키는 벽에 등을 꼭 붙인 채 빳빳이 서 있었다. 산티노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그녀에게 눈을 고정시켰다.

"그렇다고 미안하다는 건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젠 정신이 돌아오나 보군요. 당신은 원하는 걸 가졌어요. 그래서 정신을 잃었죠?" 프랭키가 고통과 염증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 이젠 내가 당신 대신 말했으니 당신이 말해야 하는 괴로움에서 구해 준 거예요!"

산티노의 얼굴 근육이 격렬한 분노로 굳어졌다. 그가 팔을 번쩍 들더니 곧 다시 내렸다. 번득이는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정말 어쩔 수 없는 바보야!" 그가 이를 갈았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말을 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거야? 당신은 내 아이를 임신했을 수도 있다고!"

", 그럴 순 없어요." 프랭키는 자신의 분홍빛 발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말해 줘, 프란체스카. 난 옷을 벗을 때까지도 기다릴 수 없었어. 그런데도 내가 당신을 보호할 정신이 있었다고 생각해?" 산티노가 거칠게 물었다.

"목욕할래요." 프랭키는 마치 그곳이 다른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라도 되는 듯 욕조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말했다. " 그러고 나서 런던으로 돌아가 되도록 빨리 이혼 수속을 밟겠어요."

산티노가 또다시 얼굴을 붉히면서 그녀를 죽일 듯이 쳐다보았다.

"당신은 아무 데도 못 가. 이틀 동안 난 도심지에 있는 아파트를 쓸 거야. 그러니 당신은 이곳에서 조용히 지금의 상황을 생각해 보란 말야."

프랭키는 이미 돌아서 있었다.

"그럼, 그냥 가요!" 그녀가 거칠게 내뱉었다.

"날 쳐다봐."

"싫어요.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

산티노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단단한 손으로 감싸쥐었다.

"당신을 이런 상태로 두고 갈 순 없어, 프란체스카."

프랭키는 어깨를 들썩여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날 몸만 자란 어린애처럼 취급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보다 더 감정적일지는 몰라도 나도 어른이라구요!"

"어른처럼 행동하지 않잖아."

프랭키는 분노에 차 몸을 홱 돌렸다. 산티노는 여전히 불편할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그녀는 그의 넓은 가슴에 손을 얹고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의 다리고 욕조에 낮은 가장자리에 걸리면서 그는 놀란 신음 소리를 냈고 균형을 잃었다. 산티노는 사방에 물을 튀기면서 물속으로 넘어졌다.

깜짝 놀란 프랭키는 그저 쳐다보고만 있다가 곧 킥킥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산티노는 분노로 검게 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두 손으로 욕조 가장자리를 붙잡고 일어섰다.

"당신이 남자였다면, 벌로 한 대 쳤을 거야!" 그가 이를 갈 듯 말했다.

프랭키는 자꾸만 나오는 웃음을 감추었다. 양복이 그의 몸에 착 달라붙어 있고 바닥에는 물이 줄줄 흘렀다. 욕조에 담긴 물의 반은 그가 끌고 나온 듯했다.

"그건 사고였어요." 그녀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에요. 당신을 넘어뜨릴 생각은 정말 없었어요."

"난 나가겠어!" 산티노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당신이 어른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전까진 돌아오지 않겠어!"

유머 감각 없는 어른은 욕실을 걸어 나가 문을 닫았다. 곧 침실 문이 탁 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프랭키는 수건으로 물을 닦으면서 산티노도 결국 완벽한 사람은 아니라는 데 안도했다. 조크를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바닥에 외로이 앉아 프랭키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10

프랭키는 36시간 동안 여러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는 산티노의 넓은 침실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거나 울거나 아니면 잠을 잤다.

그녀는 식사를 가져오거나 규칙적으로 간식과 음료를 가져다주는 가정부에게 끊임없이 방해를 받았다.

생각 좀 하려면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정말 짜증이 났다. 분명히 산티노가 그런 지시를 내렸으리라. 시간에 맞춰 먹이고 물을 주라고.

그녀는 어릴 적에 갖고 놀던 곰 인형을 산티노의 옷장 선반에서 찾았다. 인형은 슬플 정도로 낡았지만 아직도 타르탄 스카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난 양 인형을 껴안았다.

산티노는 가버렸다. 그녀는 상실감과 외로움으로 괴로웠다. 그녀 인생의 빛이 사라진 듯했다. 그런 식으로 느끼는 게 좀 과장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감정적이 된 그녀는 바보 같은 추측까지 하게 되었다. 산티노가 그녀에게 3주를 제안했지만, 하루 같이 지낸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게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추측.

그녀를 지금 이탈리아에 묶어 두는 이유는 그녀가 아이를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관련된 것 같았다. 임신하지 않았다는 것만 확신시켜 준다면, 아마도 그는 흔쾌히 그녀를 떠나 보낼 것이다. 프랭키는 그에게 그런 확신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도 남편이고 싶어 하지 않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상상만 해도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그래, 산티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만약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그녀를 사랑했으리라. 분명 그는 그녀를 탐욕스럽고 무절제한 사람으로 보지만, 그녀에게 있어 그는 반대였다. 지성적이고, 자제력이 강하고, 냉정하고, 논리적이고, 도전적이고, 감정적일 줄도 알고특히 사랑할 때.

산티노가 다시 결혼한다면, 분명히 5년 전 캐글리어리에서 그와 함께 있던 금발머리 여자 같은 사람일 것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 그의 나이 또래에 어른처럼 행동하는 여자.

그가 홀릴 정도로 달콤하게 미소 짓는 여자일 것이다. 말다툼하다가 그가 욕조에 빠졌을 때 결코 웃지 않을 그런 여자. 비탈레 가족에 걸맞는 배경을 가진 여자. 산티노는 그의 아버지에게 비탈레는 왕족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는 어느 면에서 보나 왕처럼 살고 있었다.

첫 번째 소포는 다음날 그녀의 아침식사와 함께 도착했다. 그녀는 포장지를 뜯고 어떤 남자가 욕조에 넘어지는 만화를 발견했다. 그리고 맨 밑에 산티노의 멋진 글씨가 씌여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한순간 프랭키는 숨을 쉬지 않았다. 산티노가 자신의 미술적인 재능으로 그녀를 즐겁게 한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곧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고, 침대에서 나와 샤워를 했다.

두 번째 소포는 늦은 오후에 도착했다. 또 다른 욕조 그림이었는데 이번엔 그녀가 주인공이었다. 프랭키는 그 그림을 보고 웃을 수 없었다. 역할이 바뀌었다면 그녀 또한 산티노만큼 화가 났을 테니까.

정말 산티노다웠다. 한 손으로는 도와주고 다른 한 손으로는 넘어뜨린다.

특별한 경우에만 입는 연두색 드레스를 입고 나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프랭키는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할 작정이었다.

산티노가 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올 때 그녀는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밝은 베이지 양복에 새하얀 셔츠, 포도주색 실크 넥타이를 맨 산티노가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잘생긴 모습을 말없이 응시하며 멈출 수 없는 사랑의 물결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보고 싶었어." 산티노가 인정했다. 그늘진 어두운 눈으로 그녀의 뻣뻣하고 방어적인 얼굴을 훑어보았다.

"정말 보고 싶었어."

산티노가 먼저 말을 해버려서 그녀가 계획했던 인사말을 하긴 조금 늦었다. 하지만 프랭키의 마음은 아직도 그의 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남편의 귀가를 학수고대하는 아내처럼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날 봤으면 가슴이 두근거렸을걸요."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런 상황에서 그건 좀 웃기는."

"웃긴다고?" 산티노 특유의 미소가 약간 굳어졌다.

"블랙 조크처럼 웃긴다고요." 프랭키가 밝게 말했다.

"당신에 대해 잘 모르지만, 우리가 다시 친구로 돌아가서 안심이 돼요. 당신도 우리가 같은 수준의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인정해요. 우리에겐 공통점이 하나도 없잖아요. 침대에서의 일만 제외하면."

산티노가 그녀의 뒤로 걸어갔다. 그녀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보려고 몸을 돌렸다.

"뭐하는?"

"당신 등뒤에 스위치가 있는지 살펴보는 중이야." 산티노가 건조하게 말했다.

"불을 끌 수 있는지 보려고."

프랭키는 경련을 일으키듯 침을 삼켰다.

"내게 뭘 원하는 거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원해."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녀가 투덜거렸다.

산티노는 그녀의 굳은 어깨에 팔을 두르고 천천히 이중문을 지나 빌라 뒤편으로 이어지는 주랑(기둥으로 연결된 복도)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 그건 중요하지 않아, 프란체스카. 잘못은 모두 내게 있어. 그렇게 오랫동안 당신을 혼자 내버려 두는 게 아닌데."

가르릉거리는 고양이처럼 그에게 바싹 달라붙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솔직히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았어요. 그리고 당신의 만화가 날 웃게 만들었어요. 하지만 난 정말로 내 자신의 인생으로 되돌아가고 싶어요. 괜찮죠?"

"아니, 그건 안 돼." 산티노가 즉시 대답했다.

"도대체 왜 이래야 하죠?"

프랭키는 그의 팔 안에서 급히 빠져나오며 그를 흘긋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강하고 조용한 얼굴에서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정원이 내다보이는 주랑에 편안한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작은 물소리를 내는 분수 앞에 멈춰 섰다.

"당신은 임신에 대해 걱정하고 있죠?" 그녀가 마침내 퉁명스럽게 말했다.

산티노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침대에서의 일에 대립해서?"

"좀 진지해져요." 프랭키는 그의 가벼운 미소에조차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우리가 운이 나쁠 것 같진 않아요."

"운에 대한 당신의 해석이 어떤 거냐에 따라 다르지. 언제 알게 되지?" 산티노가 느릿하게 물었다.

그녀는 긴장한 채 어깨를 들썩였다. "조만간. 하지만 그 조만간이 얼마나 빠른 건지는 묻지 말아요. 그건 나도 모르니까."

생리가 프랭키의 생활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매달 표시해 두는 귀찮은 짓을 하지 않았다. 그저 2,3주쯤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것으로 희미하게 기억할 뿐이었다.

"시간이 없는 건 아니잖아." 산티노가 차갑게 대꾸했다.

"게다가 정확하지도 않은 일 가지고 걱정하는 것도 시간 낭비야."

"확실히 마음을 바꿨군요."

"아버지가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따스해진 걸지도 모르지. 만약 당신이 임신하지 않았다면 실망할지도 모르겠어." 산티노가 약간 딱딱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놀라운 말에 프랭키의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몸을 홱 도리며 그가 무슨 이유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생각했다.

"낙태를 원하는 건 아니죠?"

순간 산티노가 얼어붙었다.

"당신 설마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안도감을 숨기지 못하는 그에게 매혹당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가 왜 이렇게 진실하고 기분 좋은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사실을 알아내기 전에 그들의 관계를 발전시킬 생각인 것이다.

아주 실용적이고 예민하군. 그의 통찰력을 혐오하며 그녀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든 간에 그들은 이혼할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확실하게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만약 전부인과 사이가 나쁘다면 아이를 얻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산티노가 미소 지었을 때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아무래도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의 새로운 이해를 굳혀야겠군."

15분 후 그들은 정확히 그대로 했다. 가볍고 맛있는 식사가 주랑의 그늘에 차려져 있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꼬리를 높이 든 오렌지색 고양이가 다가왔다.

"탑시." 프랭키가 속삭였다. 얼른 의자를 밀어내고 무릎을 꿇고 안자 그녀의 애완동물을 맞이했다.

"세상에, 좋아 보이는구나!"

"퍼딩은 내 서재 창가에서 자고 있을 거야. 지금은 사냥도 별로 안 해. 너무 늙어서 그런가 봐."

산티노가 부드럽게 말하면서 기뻐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애완동물을 집 안에 들여놓는 걸 싫어했잖아요."

"일하는 사람들이 고양이를 귀여워해서 버릇을 망쳐 놓았지.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산티노가 겸손하게 말했다. 탑시가 그의 발목을 몸으로 감싸며 확실하게 애정을 내보이고는 엔진처럼 부르르 떨었다.

프랭키는 웃으면서 식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당신 여행사에 그 빌라들을 빌려 주기로 했어." 산티노가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렇지만 당신이 매트 핀레이와 다시 일하게 되긴 어려울 것 같아."

"왜요?"

"그는 실패자야. 당신이 들어주니까 그가 더욱 당신을 물고 늘어지잖아."

"매트와 난 좋은 친구에요."

"좋은 친구란 상대방에 대해 그토록 잔인한 거짓말을 하지 않아." 산티노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프랭키의 얼굴이 붉어졌다.

"두 달 전부터 그가 우리의 관계를 바꾸려고 애쓰기 시작했어요." 그녀가 우울하게 말했다. "갑자기 내게 끌린 것처럼 행동했어요. 그 전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리고 그 농장에서 그는 우리의 결혼이 사업상 괜찮을 것 같았다고 말하더군요."

"부자 아내는 야심 있는 남자들에게 매력적인 존재지. 특히 여행사의 수입이 떨어지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땐 더 그렇지."

그녀는 자신에게 더 이상 돈이 없다는 것을 매트도 알고 있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매트가 어머니의 부유한 생활에 관해 몇 번이나 말한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델라의 딸과 결혼하면 그도 델라의 덕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매트가 어떻게 그런 계산을 할 수 있죠?" 프랭키는 역겨움을 느끼며 속삭였다.

산티노는 그녀의 혼란스럽고 상처받은 얼굴에 스치는 작은 표정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빤히 살펴보았다.

"좋아하고 믿었던 사람이 날 무슨 돼지저금통처럼 생각하고 있었다니 정말 화가 나요. 게다가 마치 날 원하는 것처럼 행동한 두 얼굴의 매트를 생각하면, 끔찍해요. 그의 감정이 상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프랭키는 얼굴을 찌푸리며 산티노를 쳐다보았다. 그가 왜 그렇게 평소와 다르게 조용해졌는지 궁금했다.

검은 속눈썹이 그의 눈을 가리고 그의 입술이 갑자기 늑대 같은 미소를 지었다.

"끔찍한 두 얼굴이지." 산티노가 동의했다.

프랭키는 자신이 지난 5년간 산티노의 돈을 갈취했다고 고백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의 창백한 피부가 붉게 타올랐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산티노는 식탁 위로 손을 뻗어 그녀의 꼭 쥔 손을 잡았다.

"다른 얘기하자, 좀 더 재미있는 걸로." 그가 가볍게 제안했다.

"남은 기간 동안 어떻게 보내고 싶어?"

그녀는 화제가 바뀐 게 무척 안심이 됐다. 이상하게도 산티노는 매트의 부정직함과 그녀를 똑같이 생각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어떻게요?"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나타났다.

"로마를 구경하고 싶어요. 고대의 도시 로마포럼, 콜로세움, 바실리카, 판테온모두 어릴 때 세계사 수업시간에 들은 장소들이에요." 그녀는 말하다 말고 얼굴을 찌푸렸다. 언론에서 그들의 결혼에 대해 떠들어댄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나요, 우리?"

"파파라치는 우리가 아직도 사르데냐에 있다고 생각할거야. 그리고 그들을 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

산티노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우리가 함께 사진에 찍히는 거야. 그게 바로 그들이 원하는 거지. 그렇게 한 번 찍히고 나면, 그들도 지금처럼 열심히 우릴 쫓아다니지 않을 거야."

그날 오후 산티노는 그녀에게 소유지를 둘러보게 해주었다. 놀라울 정도로 열심히 그는 모든 직원들을 그녀에게 소개시켜 주었고, 저택 구석구석까지 다 보여 주었다. 그러느라고 그들은 저녁식사 시간까지 빌라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저녁을 먹은 후 그는 그녀에게 집을 구경시켜 주었다.

현재부터 시작해서 과거까지, 그는 선조들의 생활과 사랑에 대한 매혹저인 이야기들로 그녀를 매혹시켰다.

빌라 폰타나는 15-16세기경 프랑스에서 유행한 불꽃 모양의 플랑부아양 양식으로 지어진 저택이었다.

 

"그들은 7명의 아이를 낳았어. 천사 같은 아이들의 얼굴까지 제대로 새겨져 있지." 산티노는 벽에 걸린 아름다운 프레스코를 가리켰다.

"그는 첫 아이가 태어나고 난 후에 그녀와 결혼했어. 그는 귀족이었고 그녀는 평민의 딸이었거든."

"흔한 얘기처럼 들려요." 프랭키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산티노의 검은 눈동자가 예상치 못한 힘으로 그녀를 찌르듯 쳐다보았다.

"아무런 공통점도 없어 보이는 그들이었지만 두 사람은 30년 이상 행복하게 살았어."

"저 도발적인 금발머리가 성실한 숙녀였다면, 그녀의 연인이 뭐에 홀려 살았는지 당신도 잘 알잖아요. 그녀는 대단히 섹시한 미인인데요." 프랭키가 작게 말했다. 금발머리 얘긴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대가를 치렀어요. 여자가 아이를 낳다가 종종 죽기도 하는 그런 시대에 일곱 명이나 되는 아이를 낳았다니그는 이기적인 돼지야!"

"그들의 삶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어." 산티노는 갑자기 흥미가 생긴 듯 말했다.

"물론 그렇겠죠, 당신도 남자니까. 그녀는 안전과 섹스를 맞바꾼 거예요. 그 당시 가난한 여자는 별달리 거래할만한 게 없었을 테니까. 분명히 그녀의 가족들이 그에게 그녀를 팔았을 거예요. 그래도 그는 못생기진 않았군요." 프랭키가 남자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물었다.

" 그런데 조금 나이가 든 것 같아요. 그렇죠?"

"열 살 정도 많을 거야." 산티노가 재미있다는 듯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세대 차이도 견뎌야 했겠군요."

산티노가 긴장했다.

"당신도 내게 그렇게 느끼는 건가?"

그녀의 허튼소리에 대한 그의 반응에 놀란 프랭키는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당신은 스물아홉 살밖에 안됐잖아요, 산티노."

"사실대로 말해 봐." 산티노가 이를 갈 듯 말했다. 갑자기 그가 성마른 성질을 내보여서 그녀를 놀라게 만들었다.

"내게 세대 차이 느끼냐구?"

혼란스러운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산티노내게 당신은 그냥 당신이에요."

놀랍게도 공감하는 미소가 그의 긴장한 얼굴에 피어올랐다.

"다른 사람 같지 않다고?"

급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해요." 그의 강렬한 눈동자를 보며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지자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 정말로 피곤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제 자야 할 것 같아요."

잠깐 침묵이 흐르고 나서 산티노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당연히 이제 더 이상 그들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그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녀는 그이 방에서 짐을 가져오고 싶었다. 그들의 짧았던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수록 그는 더욱 그녀와 편하게 지낼 것이다. 그녀는 그가 편해졌으면 했다. 정말로 앞으로 2주일 반 동안 그들이 함께 지낼 거라면, 그녀는 무엇보다도 편하게 지내고 싶었다.

프랭키가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산티노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깜짝 놀라 그녀는 일어나 앉았다. 산티노는 엉덩이에 수건만 두른 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내 그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뭘 하는 거예요?"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이제 우린 다시 친구가 되었으니 함께 잘 수 없어요!"

"친구는 더 없어도 돼. 난 친구 많아. 당신은 내 침대에 있어야 해, 당신이 속한 곳." 산티노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는 두르고 있던 수건을 벗어던지고 그녀 옆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지금은 그것으로 족할 거야, 프란체스카."

충격을 받은 프랭키는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우린 이혼하기 직전이잖아요."

"당신이 정말로 운이 좋다면 내 늙은 뼈들이 먼저 부서질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당신은 즐겁게도 엄청난 부자 미망인이 되겠지." 산티노가 침대 한쪽 끝에서 비꼬듯 투덜거렸다.

"맙소사당신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 주는 게 현명한 짓일까?"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정말 경악하고도 남을 비난이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죽을 거예요!"

프랭키의 입에서 그 말이 나가자마자 그녀는 너무 놀라 벌린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 말이 더 극적으로 들리는걸." 산티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빈정거렸다. 프랭키는 그의 말에 가슴이 아팠다.

"지난 5년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거짓말로 날 속이고 돈을 갈취한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군."

"난 그러지그건."

"델라, 빌어먹을 장모님."깊게 들이쉬는 산티노의 숨결에 자기만족이 배어 있었다.

그는 일어나 앉아서 침대 옆에 있는 램프를 켜고 재미있다는 듯 그녀를 응시했다.

"이제 털어놓는 게 낫지 않겠어? 내가 속 좁게 군거 미안해, 아주 위협적이었지. 하지만 당신이 진실을 털어놓게 하려면 어쩔 수 없었어. 죽음과 불충실이라, 정말 어울리지 않잖아."

", 안 돼." 프랭키는 자신이 흘린 말에 경악하며 신음했다.

"당신 오늘 점심 먹으면서 자신에 관한 얘길 했지." 산티노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핀레이의 부정직한 의도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동안, 당신이 그런 식으로 행동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언제까지 비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거짓말할 때 당신은 몹시 혼란스럽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어. 아이라도 알아챘을 거야. 만약 내가 그날 그렇게 화가 나 있지만 않았어도 알아챘을 거야."

"엄마는요?" 프랭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바보, 내가 델라를 고소할 리가 없다는 걸 눈치 챘어야지. 델라 같은 스타를 법정에 세우면 언론이 가만있을 것 같아?" 산티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단지 그녀를 벌하기 위해 당신이나 내 가족에게 그런 경험을 시킬 것 같아?"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프랭키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결코 그럴 작정이 아니었."

"전혀."

"하지만 난 당신 말을 믿었어요. 정말 당신 때문에 너무 놀랐단 말이에요!"

산티노가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나?"

프랭키는 전기뱀장어처럼 커다란 침대 끝에서 그를 쏘아보았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죠?"

"언제든 기꺼이." 산티노가 인정했다.

"당신을 보호하느라 애썼지만 당신은 한 번도 내 생각은 해주지 않았어."

"당신?" 프랭키가 멍하니 되물었다.

산티노는 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았다.

"잘 생각해 봐."

그가 눈을 빛내며 그녀의 사랑스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불쌍한 산티노, 운도 없지. 부끄럼도 모르는 범죄자 아내를 책임지고 있으니게다가 임신했을지도 모르는 아내를, 악몽이나 다름없지."

"하지만 난 부끄러움도 모르는 범죄자가 아니에요." 그녀의 가슴이 그의 단단한 가슴에 짓눌리도록 꽉 끌어안자 그녀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산티노는 거친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성급한 욕망을 알렸다.

"안 돼요, 산티노이혼을 생각해요." 프랭키가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상기시켰다.

산티노는 검은 머리를 베개 위에 놓으며 졸린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혼에 대한 강한 집착이 날 걱정시키기 시작하는군. 3주일 중에서 겨우 3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친구 사이에재미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달래듯 물었다.

"안 돼요."몸이 뜨거워진 건 부끄러웠지만 프랭키는 그에게 애원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다시 한 번 더말하지만." 산티노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산티노제발." 프랭키가 신음했다.

"안 돼, 난 아주 공평한 사람이야." 산티노가 완고하게 말했다. 그의 손바닥이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고 가장 흥분되는 방식으로 그녀를 애무하다가 손길을 딱 멈췄다.

"친구라면 당신이 초대해야겠지. 난 내 영역 밖으로 발을 내디딜 생각은 없어. 남편은 명백한 초대가 없어도 파티에 참여할 수 있지."

"산티노당신은 내 남편이잖아요!" 프랭키가 욕구불만으로 흐느꼈다.

즉시 산티노가 몸을 굴려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키스했다.

"정말 빨리 배우는군, 프란체스카. 내 숨을 앗아가 버릴 정도로."

 

"생각해 봐요." 2주 후, 프랭키가 숨을 헉헉거리며 말했다.

"이건A.D 14년에 만든 묘예요."

"생각해 보라구?" 산티노는 잡초가 약간 자란 아우구스투스의 대영묘를 살펴보았다. 평범한 첫인상보다 더한 뭔가를 느끼려고 애쓰는 눈빛이었다.

"상상력 좀 발휘해 봐요." 프랭키가 야단쳤다.

"당신이 우리 두 사람분의 상상력을 가졌잖아, 프란체스카." 산티노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이 내게 이 도시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법을 가르쳤잖아."

프랭키는 그에게서 눈을 돌렸다. 가슴이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그러나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안내책자에 몰두한 척하며 걸음을 옮겼다. 낮에는 교묘히 피하면서 그녀는 자신을 보호했다. 밤의 침대에서는 모든 것이 그녀를 다른 세상으로 이끌었다. 낮엔 재미있게 즐기고, 밤엔 자극적인 사랑을 즐겼다. 이건거의 신혼여행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산티노가 약속대로 행동하는 것뿐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뭐겠는가? 그는 그녀가 임신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시는 그 얘기를 꺼낸 적이 없지만 만약 그녀가 그의 아이를 가진다면 이혼은 없을 거라는 걸 그는 행동으로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지금 그는 그녀가 그에게서 돈을 갈취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만약 그녀가 임신한 게 증명된다면, 산티노는 최고의 선물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만약 그녀가 임신하지 않았다면? 우습게도 한때 그토록 두려워했던 일을 지금 그녀는 너무나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산티노의 친한 친구인 톱 사진사가 빌라 폰타나로 와서 그들의 사진을 찍어 갔다. 사진은 아무런 인터뷰도 없이 그럴듯한 국제 잡지에 아주 감상적으로 실렸다. 그 일에 앞서 프랭키는 새 결혼반지와 근사한 에메랄드 약혼반지를 받았다.

"이게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어. 안 그러면 우리가 그럴듯해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산티노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내 아내니까 이걸 주겠어." 산티노가 덤덤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며 프랭키는 산티노의 눈길을 깊이 의식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안내책자를 들여다보며 미친 듯이 다음 방문할 유적지를 찾았다.

"이제 볼 만한 곳은 다 본 것 같은데." 산티노는 전혀 비웃는 기색 없이 말했다. 왠지 모르게 아쉬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설마 로마를 이러고 다닐 줄은 몰랐어. 하긴 여행자처럼 새벽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이러고 다니지 않으면 우리가 뭘 하겠어?"

"지겨우면 그렇다고 말해요."

"당신과 함께라면 절대 지겹지 않아."

"당신, 요즘 아첨이 늘었어요."

"당신은 귀담아듣지도 않잖아." 산티노가 약간 날카롭게 말하면서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프랭키는 긴장하고 있었다. 아랫배가 조금씩 쿡쿡 쑤셨다. 순간 그 감각이 뭘 의미하는 지 깨달았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에 고뇌에 찬 눈으로 산티노를 쳐다보았다. 이제 그녀는 대답을 얻었다. 임신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그에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임신을 했더라도, 아이 때문에 결혼을 지속한다는 건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녀 부모님의 결혼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육체적인 끌림이 그녀의 부모님을 함께 있게 했지만, 평생을 같이하게 만들지 못했다.

차에서 내리는 그녀의 입에서 목메인 기침이 새어나왔다.

"왜 그래?" 산티노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소리치고 나서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서둘러 침실로 향한 그녀는 욕실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프란체스카!" 산티노가 성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곧 나갈게요!" 그녀가 말했다.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용기가 필요했다.

생리인지 정확하진 않았지만, 곧 하게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 작은 통증을 지나치게 신경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분이 안 좋아? 임신 테스트를 받아 봐야 할 것 같아?"문을 열자 산티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잔인한 빈정거림처럼 들리는 그의 질문에 프랭키는 울음을 터트렸다.

"당신을 증오해요저리 가요!"

그녀를 위한 게 뭔지 항상 알고 있는 사람처럼 산티노는 그녀를 안아올려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몸을 굴려 눈을 감고 엎드렸다.

"혼자 있게 해줘요!" 그녀는 간간이 흐느끼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산티노는 그녀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계속 달래 주었다. 그런 그의 행동이 그녀를 더욱 죄의식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프랭키는 지금보다 더 자신이 수치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그와 눈을 마주칠 수도 없었다.

아기를 이용해서 산티노를 잡아 두려고 했다는 게 그녀를 이기적이고 나쁜 여자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데 그에겐 너무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없애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말로진지하게진짜로혼자 있고 싶은 거야?" 산티노가 놀라울 정도로 끈질기게 물었다. 눈물로 부은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애쓰면서 침대 한쪽 끝에 몸을 구부리고서 "당신, 보통은 진심으로 그런 말하지 않잖아. 내가 정말 가버리면 난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 될 거야. 아주 오래 전에 당신이 내게 그걸 가르쳐 줬지."

그에게 말해, 그녀의 양심이 부추겼다. 말이 혀끝까지 나왔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숨 쉴 공간이 필요해요."

산티노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문까지 걸어가는 시간이 끔찍하게도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프랭키는 그가 나가고 문이 살짝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얼굴을 들지 않았다.

그들의 결혼을 끝맺는 얘기를 하기 전에 그녀는 자신을 추슬러야 했다. 그녀가 그렇게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그를 대하고 난 후 산티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리 전의 긴장 때문이라는 그녀의 말을 믿어 줄까? 맙소사,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그는 곧 그녀 기분의 진짜 원인을 알아낼 것이다. 밝고 가볍게 행동하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건만. 프랭키는 마치 그들이 짧은 정사를 약속한 것처럼 행동했다. 이번에 산티노를 떠날 땐 자존심 때문에라도 턱을 높이 들고 당당하게 떠나고 싶었다.

그가 왜 계속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임신했는지 안 했는지 알게 되는 동안 서로 즐겁게 생활하자고 제안했다. 최근 그의 부드럽고 사려 깊은 행동들은 단순히 꾸민 것이었다. 마치 그들이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것처럼. 그는 그녀가 속으리라고 생각했겠지만천만의 말씀

감정에 지친 그녀는 저녁을 먹지 않기로 했다.

 

얕은 잠에 빠졌다가 침대 옆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반쯤 잠에 취한 채 그녀는 수화기를 낚아챘다.

"여기 밀라노야." 산티노의 어두운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거기서 뭐해요?" 프랭키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그에게 숨 쉴 공간을 요청했다. 그가 아래층에 내려가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나라 한쪽 끝으로 날아갈 줄을 몰랐다!

"그 질문에서 확실한 반대가 느껴지는 군. 당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어떻게 날 떠날 수 있죠, 이건가?" 산티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난 그냥 의아해서." 프랭키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곧 앞으로 남은 일생 동안 매일 그를 그리워할 텐데 벌써부터 그리워한다고 해서 뭐 다를 게 있담.

"유럽공동은행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어."

"재미있겠네요."

"이곳에 이틀 동안 있을 거야." 산티노가 말했다.

"이틀?" 프랭키는 입술을 깨물고 힘들게 침을 삼켰다.

"오 잘됐군요." 그녀가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 참, 신호가 여러 가지라 막 섞이는군. 당신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말할 참."

"좋은 시간 보내요."

프랭키는 그가 초대의 말을 하기 전에, 그리고 그녀가 그 유혹에 빠지기 전에 얼른 그의 말을 잘랐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산티노는 그녀가 그의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권리가 있다.

", 그런데." 그녀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나 임신하지 않았어요."

수화기엔 침묵이 흐르고 그녀의 귀엔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근사한 소식이죠?" 프랭키의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당신도 나만큼이나 안심이 될 거예요. 산티노, 당신이 돌아오면 그때 얘기해요."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제 그녀는 기분이 좀 나아졌다. 산티노에게 전화로 얘기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둘 다 각자의 반응을 숨길 수 있으니까 편리했다. 산티노가 안도하는 모습을 보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자신을 추스릴 시간이 이틀이나 남아 있다. 그러나 부어오른 얼굴을 추스르는 데도 이틀이 꼬박 걸린 지경이었다. 그가 돌아오면 공항으로 나가서 그를 만날 것이다.

명랑하고 편안하고 차분하게 행동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그들의 이혼에 대해 얘기하고 다음날 그녀가 런던으로 돌아갈 때까지 눈물도 극정인 장면도 없을 것이다.

다음날 새벽까지 프랭키는 자신의 혼란스런 몸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생리는 시작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더 이상의 통증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 같지 않게 가슴이 아주 조금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만약? 만약 그녀가 지레짐작으로 산티노에게 그렇게 말한 거라면?

그날 정오에도 여전히 몸의 변화는 없었다. 프랭키는 고민스러웠다. 산티노의 운전수 마리오가 그녀를 안길라라는 아름다운 중세풍의 도시에 데려다 주었다. 아름다운 주위 환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프랭키는 임신 테스트 시약을 샀다. 테스트가 양성으로 나오자 프랭키는 충격에 휩싸였다. 기쁨과 불안이 동시에 그녀를 덮쳤다. 확인해 보지도 않고 산티노에게 임신하지 않았다고 말하다니. 그에게 잘못 알았다고 어떻게 말하지?

산티노가 돌아오는 다음날 아침, 프랭키는 그 작은 통증이 유산의 기미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벌써부터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에 대한 강한 보호본능이 느껴져서 그녀는 서둘러 브리시아노에 있는 병원에 갔다. 짧은 검사를 거친 후 결과가 나왔다.

그러고 나서 여의사가 가르쳐 주는 기본 상식을 들었다. 의사는 그녀의 통증이 그다지 특별한 게 아니며, 걱정할 게 전혀 없다고 부드럽게 설명해 주었다. 임신 초기엔 많은 여자들이 생리와 임신 증상을 오해한다고 한다. 병원을 나오면서 프랭키는 아주 비싼 가게로 물건을 사러 갔다. 우아한 노란색 드레스와 신발을 샀다. 그녀의 사랑을 위해서.

오후 3l에 프랭키는 개인 전용기에서 내리는 산티노를 만나기 위해 리무진을 타고 푸미시노 공항에 도착했다. 물론 그가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그를 만나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아기를 위해서 그들의 계속 부부로 있는다면 그건 공평치 못했다. 두 사람 다에게 공평치 못한 일이었다.

프랭키가 귀빈석 대기실에서 내다보니 전용기가 착륙하고 계단이 내려졌다.

분홍색 옷을 입은 날씬한 금발머리 여자가 맨 처음에 나타났다. 여승무원인가? 아니, 여승무원은 문가에 서 있잖아.

다음에 산티노가 나타났다. 검은 머리가 산들바람에 휘날리고 있었고, 멀어서인지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강한 팔 아래 뭔가 크고 우습게 생긴 모양의 것을 들고 있었다.

금발머리 여자는 층계에서 그를 기다렸다. 은행의 중역? 그의 비서? 그러나 산티노와 여자가 가까이 붙어서 고개를 숙인 채 즐거운 대화를 나누자 프랭키는 얼어붙은 듯 서서 멍하니 그들을 응시했다. 순간 그녀의 기억 속에 위험스런 신호가 전해졌다. 배가 뒤틀리고 이마에 땀이 흘렀다.

"저 여자가 누구죠?" 그녀는 몇 미터 떨어져 서 있는 운전수에게 물었다.

나이 든 남자는 그녀의 질문에 깜짝 놀란 듯 했다.

"멜리나 부셀리입니다, 부인."

프랭키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세 사람의 남자가 불쑥 나타나 산티노를 겨냥하고 카메라를 터트렸다. 산티노의 보디가드들이 행동에 나섰다. 소리를 치며 파파라치들을 저지시켰다. 산티노와 여자가 얼굴을 숙였다.

순간 프랭키는 그 금발머리 여자가 누군지 알아보았고, 산티노는 창문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프랭키를 보았다. 밝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미소가 경악의 표정으로 변하더니 들고 있던 서류가방과 털이 부숭부숭한 우스꽝스러운 것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전력질주를 했다. 보디가드들이 깜짝 놀라 그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산티노는 이미 늦었다. 멍한 상태에서 풀려난 프랭키는 귀빈석 대기실을 달려나가 사람들이 붐비는 공항건물로 향했다.

 

11

프랭키는 마시지 않은 카푸치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공항에서 빠져나온 후 그녀는 택시를 타고 도심지로 가자고 말했다. 다리가 떨려서 도저히 더 걸을 수 없을 때까지 몇 킬로미터나 될 것 같은 길을 걷다가 노천 카페에 앉았다.

낯익은 거리를 보며 프랭키는 자신이 나보나 광장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난 주 산티노와 함께 이곳에 왔었다. 순식간에 그날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밀려왔다.

매일 고대 유적만 둘러보는 게 식상하다면서 어느 날 산티노가 그들의 여정을 선택한 적이 있었다.

산타 마리아 데라 페이스 교회에서 그는 그녀에게 라파엘로가 그린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를 보여주면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들은 연인처럼 손을 맞잡고 고베르노 베치오 거리를 따라 걸으면서 르네상스식 건물들을 구경하고, 세 개의 바로크식 분수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곳에서 산티노는 그녀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키스하며 그녀의 방어막을 걷어 버렸다. 그가 뜨거운 눈동자로 바라보아 그녀의 가슴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프랭키는 눈을 깜박거렸다. 마음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더 이상 추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깊은 충격 속에 있었다. 5년 전 캐글리어리에서 산티노에게 키스하던 금발머리 여자를 다시 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 금발머리가 소냐 비탈레가 딸처럼 예뻐하는 멜리나 부셀리라니.

프랭키는 산티노에게 그 금발머리 여자에 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당시 그들의 결혼은 겉치레일 뿐이었다. 그 일은 과거로 묻어 두었고, 산티노가 그 여자와 계속적인 관계를 맺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근사한 금발머리는 그냥 가벼운 만남이라고, 지나치는 바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산티노가 그런 유의 여자와 관계를 맺을 거라곤 상상할 수도 없었다.

고상한 그의 어머니의 말마따나 멜리나 부셀리는 그에게 어울리는 특권층의 배경을 가졌다.

그런 멜리나가 그토록 이국적인 미인일 줄은. 그러나 무엇보다 프랭키에게 충격적인 것은 산티노가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5년 전 산티노는 멜리나의 연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프랭키와의 결혼을 무효화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프랭키는 아직 그에게 물어 보지 않았다. 작게나마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걸까? 산티노는 그들의 결혼을 왜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게 내버려뒀을까? 프랭키는 왜 산티노가 유부남으로 남아 있어야 했는지 그 설명이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프랭키는 멍하니 자문했다. 그녀는 그의 고리를 풀어 주었고, 그는 책임감의 고리에서 풀려나 축하를 한 것이다. 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프랭키에 대한 모든 의무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야 자유롭게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는 멜리나를 밀라노로 초대했을 것이다. 당연히 프랭키가 공항으로 마중 나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녀는 왜 그렇게 아내다운 짓을 했을까?

지갑에 얼마 남지 않은 현금을 가지고 로마를 돌아다녔던 프랭키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어떻게 빌라 폰타나로 돌아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마음을 정했다. 기분이 어떻든 간에 빌라로 돌아가서 짐도 꾸려야 하고 산티노도 만나야 한다. 신문 가판대에서 전화카드를 산 후 공중전화를 걸려고 줄을 섰다.

산티노가 전화를 받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의 망설이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가 폭발하듯 이탈리아어를 쏟아냈다. 너무 빨라서 그녀는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산티노였지만 그의 목소리 같지 않았다. 미친 듯이 도저히 통제 불가능한 목소리였다.

"내게 차를 보내 줬으면 해요. 하지만 당신이 그 차 안에 있는 건 싫어요." 프랭키가 지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어디에 있는 거야?" 산티노가 거칠게 물었다.

", 세상에걱정으로 머리가 도는 줄 알았어!"

"어른답지 않게 왜 이러는 거예요? 산티노, 우리가 이혼하고 나면 당신의 인생은 더욱 편안해질 거예요."

프랭키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제발 어디 있는지 말해." 산티노가 격렬하게 말했다.

그에게 장소를 말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만약 당신이 차 안에 있으면 타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갇힌 공간에서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리무진이 그녀 앞에 섰다. 산티노의 우두머리 보디가드인 나르도가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내리더니 그녀를 뒷좌석에 앉혔다. 그러고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부인을 찾아 공항을 얼마나 뒤졌다구요."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비탈레 씨가 몹시 상심하셨습니다. 겨우 한 시간 전에야 그를 설득해서 빌라로 돌려보낼 수 있었죠."

좌석에 몸을 묻으며 프랭키는 옆에 있는 커다란 곰인형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프릴이 잔뜩 달린 체크 무늬 옷을 입고, 더욱 놀랍게도 팔에 작은 곰인형을 안고 있었다. 그 곰인형도 그녀처럼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다. 밀라노에서 사온 작별 선물인 듯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엄마와 아기 곰인형을 사왔을까?

산티노는 이것으로 그녀를 웃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분명 그녀는 남자에 관한 한 바보였다. 바로 3일 전 그녀를 그토록 열렬히 사랑해 놓고 곧 멜리나에게 돌아설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숨쉴 틈도 없이 곧장. 이제 와서 그에게 그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나 머릿속은 깨어 있는 것처럼 기억의 파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산티노의 팔에 안겨 빌라 폰타나 안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내려놔요."

"당신을 잃어버리는 줄 알았어. 지금까지 이토록 두려웠던 적은 없었어." 산티노가 신음하며 강한 팔로 그녀를 꼭 안았다.

"다시는, 다시는 내게 이러지 마."

"여기 있지도 않을 건데요, ." 그녀가 멍하니 말했다.

산티노는 그들의 침실에 있는 편안한 의자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프랭키는 그를 살펴보았다. 그는 절망에 빠진 사람 같아 보였다. 사람이 몇 시간 만에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넥타이는 반쯤 풀려 있고, 반쯤 열린 실크 셔츠 사이로 갈색 가슴이 보였다. 또한 면도를 해야 할 정도로 수염이 자라 있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에 그의 눈은 홀린 듯 멍하고 어두웠다.

"당신은 내게 거짓말을 했어요. 당신이 그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프랭키가 발작적인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산티노가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언제 거짓말했어?"

"멜리나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잖아요."

산티노는 긴 손가락으로 이미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날은 리코 형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멜리나가 5년 전 당신이 캐글리어리에서 본 그 여자란 걸 깜박했어."

"깜박했다고요?" 프랭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당신이 그녀를 기억할 줄 몰랐어. 좋아, 그 얘길 꺼내서 너무 빨리 내 목을 자르고 싶지 않았어. 우린 서로의 실수를 상기시키는 데에 아주 열심이었잖아." 산티노가 호소하듯 말했다.

"그날 당신이 본 멜리나와 난 그저 순간적인 충동의 결과였어. 약해진 순간이었지. 그리고 당신이 우릴 놀라게 했고, 그걸로 끝이었어. 우리 사이엔 더 이상의 일은 없었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해요?" 프랭키가 절망적으로 속삭였다.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군. 열여덟 살 때 멜리나는 형의 여자 친구였어. 아니, 형의 대외용 여자 친구였어." 산티노가 우울하게 말했다.

"왜냐하면 형은 게이였거든."

"게이?"충격을 받은 프랭키가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 부모님은 그런 형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 형이 결혼하길 학수고대하셨어. 부모님은 멜리나를 예뻐하셨고 그녀도 형을 좋아했어. 하지만 형은 결코 멜리나와 결혼할 생각 따윈 없었어. 형이 죽자 멜리나는 어머니와 함께 형의 기억을 미화시키기 시작했어." 산티노가 씁쓸하게 설명했다.

"얼마 후 어머니는 멜리나가 내게 완벽한 아내가 될 거라고 생각하셨지만, 난 관심 없었어. 그녀는아마 내가 죽은 형과 똑같이 생겨서."

"그리고 내가 그날 캐글리어리에 있는 두 사람을 본 거예요?"

산티노가 긴장했다.

"멜리나가 사르데냐로 날아왔어, 친구들을 만나러 왔다면서. 그녀가 은행으로 날 보러 왔고 난 그녀와 아파트에서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지. 그녀가 승강기에서 내게 몸을 던지기 전까지 우린 상당히 순수한 관계였어. 하지만 나도 그녀의 행동에 책임이 없는 건 아니야."

그가 거칠게 말하며 격렬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프랭키를 보았다.

"당신이 우릴 방해하지 않았다면, 그녀와 함께 침대로 갔을 거야. 결혼한 지 6개월, 당신에 대한 채울 수 없는 욕망으로 괴로워하던 난 그 갈망을 없애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어!"

프랭키는 그의 고백에 넋이 나갔다. 실속 없는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한 번도 그가 얼마나 힘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난 멜리나를 이용할 뻔했어. 그녀는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여잔데도. 그날 아무런 설명도 없이 멜리나를 로비에 놔두고 당신을 쫓아갔어. 멜리나가 그 일로 날 용서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 요즘 우린 거리감 있고 아주 예의바른 친구처럼 서로를 대해."

"친구정말 융통성 있는 말이군요."

"멜리나와 난 세미나에서 만났어." 산티노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에 어떤 은행가와 약혼했대. 가족들에게 약혼을 알리고 파티를 준비하려고 내 전용기를 타고 로마로 온 거야."

프랭키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의 설명은 다른 무엇보다 앞뒤가 맞았다. 의심이 사라지고 약간 바보 같고 불편한 심정만 남았다.

"당신 어머니가 가슴 아파하실 거예요."생각나는 말이라곤 그게 다였다.

"어머니가 골라 준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는 그리 많지 않아, 프란체스카." 산티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오늘 아침 약간 놀라운 전화를 받았어."

"그래요?" 프랭키는 긴장했다.

"놀랍게도 어머니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하고 싶다고 하셨어." 산티노가 날카로운 눈으로 프랭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10년 동안 그 애정을 보여 주지 않았지만,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말하지 않으셨대."

"그래요?" 프랭키는 멍하니 되물었다.

"형의 죽음에 관한 말은 한 번도 하신 적 없는데, 오늘은 갑자기 살아 돌아온 아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으로 생각하고 고마워하는지 모른다고 말씀하셨어."

"와우!" 그녀가 개입했다는 걸 알리기 싫어서 프랭키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또 멜리나의 약혼 소식도 그냥 한숨만 한 번 내쉴뿐 담담하게 받아들이셨어. 게다가 당신을 결코 며느리로 맞이할 수 없다는 말은 좀 성급한 말이었다고도 하셨어. 놀라운 화해였지."

침묵이 흘렀다. 프랭키의 눈은 그의 맑은 눈동자와 강하게 얽혀 있었다. 멜리나는 그의 연인이 아니었다.

그랬던 적도 없고, 그의 미래의 아내도, 어떤 심각한 사이도 아니었다.

"5년 전에 멜리나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죠? 왜 계속 당신이 불성실하다고 믿게 놔뒀어요?"

"우린 헤어져야만 했어. 당신은 성인이 되어야 했지만 나와 함께는 그렇게 될 수 없었지. 나로선 당신과 우리의 결혼을 마음속에 묻어 두고 살 수밖에 없었어."

"우리의 결혼을 무효화시키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잖아요."

"결혼하고 싶은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했어. 그리고 당신은 달콤한 추억이었지. 내가 알고 있던 당신은 이상형처럼 마음속에 자리잡았어."

프랭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을 들었다.

"이상형?"

산티노가 미소 지었다. " 그러면 꼭 놀란 토끼 같아 보여, 프란체스카. 내가 얼마나, 왜 당신을 사랑하는 지는 묻지 마. 그냥 사랑하니까."

프랭키는 그가 한 말을 믿으려고 애쓰며 더욱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숨이 목에 걸렸다.

산티노가 앞으로 걸어와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번득이는 검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우린 아주 오랜 전부터 서로에게 속한 사람이었어. 당신은 용기 있고, 놀라울 정도로 따스하고 성실해. 어떤 여자도 들어온 적이 없는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지."

프랭키는 그의 크고 강한 몸에 기댔다. 이마를 그의 어깨에 기대면서 너무나 행복해 눈물이 나왔다.

"당신이 필요했어요. 당신 팔 안에 있으면 아직도 집에 돌아온 것 같아요."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오늘 당신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어." 산티노가 고르지 못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두 팔이 그녀를 천천히 감싸 안았다. 아직도 나쁜 일은 끝나고 행복만 남아 있다는 걸 믿기가 두려운 듯.

"5년 전 당신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날 떠났잖아. 그땐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오늘, 또다시 그런 일이 되풀이될까 봐 너무 두려웠어."

"매일 당신을 더욱 사랑하게 된걸요." 프랭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당신에 대한 사랑을 없애기가 정말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은 5년 전에 나와 완전히 연락을 끊었잖아. 날 만나러 집으로 가지도 않고 그대로 비행기를 타버렸지. 편지도 쓰지 않았어. 몇 번이나 당신을 만나러 가고 싶었는지 몰라. 하지만 그건 공평하지 않다는 걸 알았어. 당신은 성인이 될 때까지 자유로워야 했으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내버려두는 일이 가장 힘들었어."

"당신이 그런 식으로 느낀다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한 번의 기회도 더 가지지 않고 우리의 결혼을 끝낼 수 없었어. 그렇게 높은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라 로카에서 당신을 본 순간, 5년 전과 똑같이 격렬한 끌림을 느꼈지."

"그러고 나서 엄마의 거짓말을 알게 된 거고요."

"그런데도 당신을 가게 놔둘 수 없었어." 산티노가 고백했다.

"3주 후면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고 나 자신에게 약속했지."

"사실, 나도 그랬어요." 프랭키가 그의 넥타이를 조심스럽게 풀어서 내던졌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죠."

" 그래, 난 점점 더 깊이더 깊이당신에게 빠져들었어. 점점 더."

"당신이 그랬잖아요, 침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산티노가 그의 가슴을 더듬는 그녀의 손가락을 쥐었다. 뜨거운 눈동자가 그녀의 녹색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랬지. 그렇지만 당신과 섹스를 하지 못해도, 여전히 난 당신을 사랑할 거야."

"그래도 당신의 그 말이 얼마나 내 마음을 상하게 했다고요."

"나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오해하지 않길 바랐어. 시간을 갖고 당신의 사랑이 진실되고 영원한 것이라는 걸 확신하길 바랐지. 어느 날 갑자기 잠에서 깨어 당신이 한 남자에게 묶여 있기엔 너무 젊다고, 첫남자와 결혼해서 사는 게 실수였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어."

프랭키는 산티노에게 깊이 감동했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내가 원하는 유일한 남자예요."

산티노가 얼굴을 붉혔다.

"그 말이 좋아."

"알아요. 당신은 소유욕이 강하죠. 나도 그래요."

"밀라노에 가기 전에." 산티노가 걱정스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사뭇 긴장했다.

"당신이 왜 화가 났는지 몰랐어. 임신해서 화가 났는지, 아니면 안 해서 화가 났는지."

"이혼하길 원하지 않았다면 내게 바로 말을 했어야죠." 프랭키가 투덜거렸다.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결정을 내리길 바랐어. 하지만 온갖 방법으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보여 주려고 애썼지."

"내가 임신했을 수도 있으니까 당신이 그러는 줄 알았어요."

"이젠 아니란 걸 알잖아."

산티노는 그녀에게 깊고도 긴 키스를 했다. 그녀가 갈망으로 몸을 떨 때까지.

"하지만 아버지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조금 실망스럽긴 해. 그래도 그게 더 좋을지도 몰라. 당신은 아직 스물한 살이니까. 시간은 얼마든지 있잖아."

"크리스마스 즈음에 당신은 아버지가 될 거예요." 프랭키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산티노가 눈을 번쩍 떴다.

"다시 말해봐."

프랭키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잘못을 설명했다. 산티노의 잘생긴 얼굴에 기쁨에 찬 미소가 느릿하게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내 분신이 적의 영토에서 이겼단 말이지? 사실 그렇게 적대적인 적은 아니었지만."

프랭키가 얼굴을 붉히자 그가 뜨거운 표정으로 그녀를 침대로 이끌었다.

"리무진 안에서 곰인형을 봤어요."

"그 녀석을 <플로라> 라고 부르자. 그 녀석으로 당신의 기분을 바꾸고 당신이 정말로 아기를 원한다면, 다시 노력해 보자고 말할 작정이었어."

"만약 내가 그 많은 돈을 갈취했다면 당신은 어쩔 작정이었어요?" 프랭키가 생각에 잠겨 물었다.

"당신이 새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다했겠지. 3주 후에도 당신을 놔줄 순 없었어.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니까, 프란체스카."아직도 약간 긴장한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산티노가 덧붙였다.

"그 전처럼 당신 어머니에게 돈을 보낼 수 있어. 하지만 이번엔 적당한 선에서 돈을 보내기로 하지."

"안 돼요, 당신이 엄마를 부양하는 건 옳지 않아요." 프랭키가 반대했다. 델라는 아직 젊으니까 자신의 노력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이번 한 번만 뭐가 옳은지 내가 알아서 하게 해줘." 프랭키의 날카로운 눈길을 재미있어하며 산티노가 말했다.

"우리가 당신 어머니를 할머니로 만들기 직전이라는 소식을 전해 주면서 그녀에게 복수해야지!"

다음 순간 그가 성급하고 굶주린 키스를 퍼붓자 항의하려는 프랭키의 생각은 바람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녀는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그들은 원초적인 갈망으로 사랑을 가득 채웠다.

 

에필로그

"할은 아이들을 무척 좋아해."델라가 약간 불평하듯이 말했다. 중년의 텍사스 농장주인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은 델라의 손자를 안고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그는 우리의 아이를 하나쯤 가졌으면 해."

예상치도 못한 얘기에 프랭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매력적인 어머니가 얼굴을 붉히면서 프랭키를 쳐다보았다.

"네겐 가망 없는 엄마였다는 건 알아. 하지만 할은 이제 내가 잘해 낼 거라고 생각해. 그도 도와줄 테고 나도 많이 성숙해졌으니까."

요즘 델라의 입엔 <할의 생각은> 이란 말이 붙었다. 입이 거칠고 보스 기질이 있는 할 빌링스는 델라를 백화점 화장품 판매원의 일에서 구해 주었다. 그녀가 그에게 향기를 팔려고 하는 동안 할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다시는 사랑에 빠질 생각이 없던 델라도 결국 넘어가도 말았다.

산티노가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러 오더니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이제 마르코가 잘 시간인 것 같은데당신 생각은 어때?"

프랭키는 손을 뻗어 아기를 돌려받으며 졸린 듯한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에게 물려받은 녹색 눈이 검은 속눈썹에 반쯤 가려져 있다.

" 그래요, 아무래도 재워야겠어요."

그러나 마르코는 편안하게 잠이 들기까지 30분이 더 걸렸다. 여러 친척들의 손을 거쳐야 했으므로, 지노 카파렐리와 알바로 비탈레는 한쪽 구석에서 대화를 나누고, 프랭키의 고모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하더니 이젠 산티노 쪽 친척들과 즐겁게 얘기하고 있었다.

"정말 예쁜 아기야귀엽기도 하지."소냐 비탈레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는 손자의 검은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넘기는 소냐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프랭키도 미소 지었다. 마르코를 예뻐하는 시어머니의 숨김없는 태도가 두 여자 사이의 벽을 허물었다. 잃어버린 아들을 추도하며 10년 넘게 거의 은둔 생활을 해왔던 소냐는 요즘 사업계로 복귀했다.

산티노는 델라가 할에게 차가운 음료를 떠다 주는 것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당신 어머니는 많이 변했어. 처음엔 당신 어머니가 당신의 고집을 결코 용서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은 다른 사람이 됐지."

"다시 엄마가 될 생각까지 하고 있어요." 프랭키가 말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더니 산티노가 웃음을 터트렸다.

"장모님다운 발상이야." 산티노와 프랭키는 아들을 아기 침대에 눕혔다.

프랭키는 너무나 행복했던 지난 일 년간의 결혼생활을 뒤돌아보았다. 매트는 다른 동업자를 만났고, 그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마르코를 낳았다.

부모가 된 기쁨이 산티노와 그녀를 더욱 가깝게 해주었다. 산티노는 아들을 무척 사랑했다. 그들은 사르데냐에서 많은 주말을 보냈다. 언젠가 마르코는 보잘 것 없었던 가족의 뿌리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될 것이다. 산티노가 그의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그대로.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었어?"계단을 내려오면서 산티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

프랭키는 어둡고 섹시한 그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무릎이 흐물거리는 것을 느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행복해요. 열여섯 살에 당신을 찍었을 때, 난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었어요."

"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어." 산티노가 검은 머리를 약간 갸웃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날 찍어줘서 너무 기뻐."

그의 고백과 함께 그들의 입술이 굶주린 듯 서로를 찾았다. 그들이 다시 가족들의 축하 파티에 모습을 나타내기까지 수상할 정도로 긴 시간이 걸렸다.